명문 대학 교수가 “야한 여자가 좋다”고 떠들고 다녀서, 또는 “장미여관으로 가자”고 뭇 여성을 꼬여서 마광수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고지식하고 점잖은(혹은 그러한 척만 하는) 사회와 혼자만의 방식으로 맞장을 뜬 혈혈단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응답하라’로 시작하는 TV 드라마가 동화처럼 어여쁘게 그려낸 그 시절, 마광수는 문화 게릴라였고 민주화 투사였다. 마광수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그의 황망한 부고는 씁쓸하다. 하필이면 페미니즘 열기가 뜨거운 즈음이어서 얄궂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또 한 시절이 모퉁이를 돌아갔다.
마광수 전 연대 교수 집에서 숨진 채 발견, 경찰 자살 추정
92년 『즐거운 사라』로 필화사건 겪은 뒤 우울증 시달려
문화 민주화 열기 뜨거웠던 90년대 초반 시대의 아이콘
‘야한 여자론’으로 고지식하고 점잖은 척 사회 비아냥
◇유언장 남겨=5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이 낡은 아파트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경찰은 “목을 멘 것 같다. 오후 1시51분쯤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전했다.
마 전 교수의 방에서 지난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유언장이 발견됐다. 유언에는 재산을 이복누나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그는 오랜 세월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다. 어머니는 지난해 돌아갔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지난해 8월 정년 퇴임한 뒤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발표했지만, 마 교수의 병력은 오래됐다. 2000년에도 그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도 그는 심하게 낯을 가렸고 손을 떨었다.
퇴임한 뒤에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연금을 받고 있지만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댔다”고 한다. 출판사도 더 이상 원고 청탁을 하지 않아 그는 틈틈이 그렸던 그림을 팔려고 내놨다. 그러나 화랑에서도 마광수는 외면당한 이름이었다.
그는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중간에 8년을 놀아(교수직에서 해임됐던 기간) 연금도 얼마 안 된다”며 “외로운 독거노인”이라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예순여섯 살이었다.
◇야한 여자 사라=지금은 뜨악해 할지 모르겠다. 마광수가 ‘야한 여자론’을 들고 나온 80년대 끄트머리 여성운동가 상당수는 여성운동의 하나로 길거리에서 담배를 물었다. 민주화 열기가 문화 영역으로 확장되던 시절이었다. 마광수는 바로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89년 1월 발표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그는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대가도 혹독했다. ‘프리섹스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프리페팅을 즐기자’는 식의 주장은 여성을 성의 도구로 인식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는 전공과목 강의에서 배제됐다.
98년 그는 사면 복권됐다. 대학에도 돌아갔고 『즐거운 사라』도 재출간됐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광수가 죄인이었던 시절 『즐거운 사라』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됐다. 일본에서 『즐거운 사라』는 8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나 “표현 수위에 실망했다”는 독후감이 대부분이었다.
마광수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은 사회였다. 젊은 여성의 반짝이는 긴 손톱에서 성적 상징을 읽어냈던 90년대 초입 마광수는 ‘변태’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네일아트는 젊은이들의 지배적인 문화 코드가 된 지 오래다. 아무도 섹스를 말하지 않던(또는 못하던) 시절이어서 마광수는 야했다. 2007년 그는 제자들의 시를 거의 그대로 제 시집 『야하디 알라숑』에 실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올해는 시인 마광수가 등단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77년 청록파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마광수는 국내 윤동주 박사 1호이기도 하다. 83년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다. 마광수는 올 1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나와 윤동주 모두 솔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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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는 한국 문학 최초로 여성에 성 주체성을 부여한 작가였다. 90년대 여성단체 대부분이 마광수를 비난했지만 검찰은 사라가 끝내 도덕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며 유죄를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거대 담론에서 허우적거릴 때 개인의 가장 내밀한 욕망에 관하여 발언했다.
마광수를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마광수는 죽기 전까지도 야한 여자를 찾았다. 그는 다만 획일적이고 답답한 세상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의 넥타이 맨 모습이 기억에 없다. 그의 가는 목을 감싼 건 늘 스카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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