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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극영의 '반달'
<반달>이 나온 192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근대 음악의 싹이 트는 시기로 창가, 예술가곡, 동요, 유행가가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서양음계와 박자로 된 노래는 어떤 종류든 함께 애창되었다. 어른들도 <반달>을 즐겨 불렀고 <봉선화>와 같은 예술가곡과 함께 <두만강 뱃사공>, <황성 옛터>같은 유행가도 인기를 모았다.
1923년은 이 땅의 어린이들에겐 기념비적인 해였다. 이 해 소파 방정환에 의해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낱말이 지어졌고 그 해 5월 1일에 기해 '어린이 날'이 마련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이 출판되었고 뒤이어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동요 <반달>이 나왔던 것이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우리 동화를 읽고 우리 동화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요 <반달>이 나오기까지 우리 어린이들은 우리 동요를 부를래야 부를 노래가 없었다. 있었다면 고작 방정환이 외국 곡조에 맞추어 지은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가 어린이들을 위한 유일한 노래였다. <반달>은 작곡된 직후 나이의 구별없이 온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반달>을 작사, 작곡한 윤극영은 당시를 회상하며 "전혀 뜻밖이었어요.
그렇듯 짧은 세월에 그렇게 까지 널리 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1923년 9월 9일, 21살의 청년이던 윤극영은 서울 삼청공원에 이웃한 소격동에 살고 있었다. 그에겐 누님 한 분이 있었다. 그 누님은 그보다 10년이나 위인데 다가 일찍 경기도 가평으로 출가하여 얼굴조차 잊어 버릴 정도였다 한다.
"그 누님의 시집은 가운이 기울어 가는 양반집이었지요. 가난 속에서 무척 고생스러운 시집살이를 하고 있어 평소 저의 양친께서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지요. " 79살의 주름진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 누님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밤을 지샌 그에게도 새벽이 왔다. 윤극영은 삼청공원으로 가 남몰래 실컷 울었다. <반달>의 악상이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때였다 한다. 울음이 끊어져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 너머로 반달이 걸려 있고, 그 멀리로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태어난 <반달>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당시의 온 겨레의 마음 속에 파고 들었다. 돛대도 삿대도 없이 정처없이 흘러가는하얀 쪽배는 곧 조국의 슬픈 모습이요, 간도, 중국으로 유랑하는 겨레의 외로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반달>로써 빼앗긴 나라의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이 노래가 불길처럼 퍼지게 된 데에는 당시 윤씨가 주재했던 소녀 합창단인 '다리아회'의 힘이 컸다. 이 노래엔 일화가 많다. 윤씨가 만주에 있을 때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한 가수가 <반달>을 부르고는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요."라고 설명을 했다.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과 그의 동료들이 항의를 했다.
그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의 집으로 찾아와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며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윤극영은 <반달>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담보물은 없소. "<반달>의 후광으로 살고 있는 거죠."하며 윤극영은 쓸쓸히 웃는다.
자료 출처: 명곡해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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