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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황혼이 바다가 되여
2018년 11월 20일 00시 56분  조회:3488  추천:0  작성자: 죽림



황혼이 바다가 되어
                    /윤동주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요



========================///
 

 

이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ㅡ
검푸른 물결, 검은 고기떼, 해초,

풍경화, 수많은 배 등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데 ,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면
황혼이 물들고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때의
풍경은 바다로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낙엽은 검은 고기떼와 해초로 표현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침몰된 배처럼 어둠에 
잠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 시가 한결 재미있게  읽혀질 것이
다.
그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아와 같이 쓸쓸한 설움에 잠기게 된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이 구절을 듣는다면 우린 한명의 아름다운 이를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바로 시인 윤동주이다.어릴적 우연히 읽었던 윤동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시인 서시는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아름답고 처연한 하지만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젊은이의 진취적인 느낌이 나는 시는 서정적이고도 아름다웠다그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한참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부끄럽지만 생생하다동아리 방에서 시집을 받고서 너무나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났다.

처음 보는 시도 그러나 익숙한 시들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말 감명을 받았던 두 시에 대해서 감상을 남기고 싶다.

윤동주의 시는 대부분 유명하지만 편수가 많기에 그에 비해 유명하지 못한 작품 또한 적지않다.

그 중 하나인 황혼이 바다가 되어’ 라는 시는 윤동주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서시를 쓰기전 쓰여진 시로서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연희전문의 입학을 준비하던 당시 쓰여졌다.

잔잔하지만 어딘가는 외롭고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이다이 시는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을 걱정 하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를 황혼과 연결시키기는 힘들지만황혼이 바다가 되어 밀려와 잠기듯 나또한 깊은 밤이 바다가 되어 밀려오는 듯 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바다가 짓눌러 오듯 숨이 막히는 막막함과 무력함을 느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 밤이 지나면 혹은 황혼이 끝나 밤이 가라앉는다면 내일이 다가 올 것이고 그렇다면 또다시 앞으로 나를 스쳐지나갈 시간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가끔씩 그것은 무료하기도 혹은 두렵기도 하다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대학,진로 혹은 개인적인 걱정거리들은 밤이 되면 바다에 가라앉아 물을 먹고 부풀어 나를 무겁게만 짓눌러 오는 것만 같다.

당장에 해결가능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심해와 같은 공포를 주고 그것은 때로는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이 시를 읽으며 나는 윤동주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생각도 했다.

또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시가 있다 바로 무서운 시간’ 이다.

이 시는 일제치하라는 배경을 쉽게 알 수 있었던 시이기도 하다무서운 시간이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이 보낼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이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은 순전히 공포를 느끼기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일까?

나는 시를 읽으며 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기에 하는 말 같았다떳떳하게 서지 못하기에 나를 부르지 말라달라는 애원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시를 읽으며 슬픈 감정과 동질감을 느꼈다.

소심하고 항상 위축되어 다니던 중학교때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나는 항상 나에게 자신이 없었다내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모자라기에 떳떳이 다니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듯이 이 시에서 슬픈 감정만을 느끼지는 않았다아까와는 다르게

그와 반대로 나를 알아달라고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숨이 남은 곳을 알려주며 사실은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는 듯 말이다.

나 역시 사실은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하고 곁에 누가 있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면서도 사실은 누군가의 시선과 온기를 갈구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중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많은 느낌과 생각을 주는 시이며 그와 별개로 하지만 동시에 윤동주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모든 마음들이 담긴 아름다운 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가히 최고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크게 자부한다. ///김예지

 

 

 

 

 


 

 
 
=======================///

“젊음은 거기 남아 있거라” 詩句처럼…
ㅡ‘불멸의 靑春’으로 승화
   
 
▲  일본 교토 우지시 우지강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지난 10월 새로 만들어진 이 시비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라고 새겨져 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ㅡ생애의 마지막 동선을 찾아… 

1942년 도쿄로 유학 떠나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에 응해  
입학뒤 ‘참회록’에 심경 담아  

도시샤大·하숙집 터 詩碑 외에  
동주가 소풍오던 우지 강변에  
‘새로운 길 · 화해의 碑’ 세워져  

1943년에 체포돼 2년형 언도  
2년뒤 후쿠오카 형무소서 별세  
비극적 삶을 산 청년의 이상이  
대체불가능한 ‘섬광의 사건’ 돼
 

◇ 삶의 최후 동선을 따라 = 윤동주의 말년은 일본 체류 기간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3월에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성공회 계열의 릿쿄(立敎)대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원치 않았던 창씨(創氏)였지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명서 발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주)’로 고쳤다. ‘평소’라는 새로운 성씨는 파평(坡平) 윤 씨에서 ‘평(平)’을 가져왔고, 그네들의 비조(鼻祖)가 못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소(沼)’를 가져와 만들었다. 창씨에 응하면서도 고스란히 ‘윤 씨’의 맥락적 전통을 지킨 그 나름으로 고육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도 ‘송 씨’의 성을 그런대로 지킨 ‘소오무라(宋村)’로 창씨하였다. 입학이 결정되고 난 직후에 윤동주가 쓴 ‘참회록’은, 이러한 과정에 따르는 부끄럼 자체를 부끄럼의 대상으로 삼은 고백 시편이었다. 

그가 도쿄에 머무른 시간은 릿쿄대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은 7월 하순까지의 5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 윤동주는 ‘흰 그림자’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다.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부친 편지에 동봉했던 이 시편들은, 윤동주 최후의 작품들이자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남(指南)과도 같다. 1942년 4월 14일 창작된 ‘흰 그림자’는 윤동주의 유고를 지상에 남기는 데 큰 공헌을 한 정병욱이 자신의 아호인 ‘백영(白影)’을 취한 작품이기도 하다. ‘흰 그림자’는 황혼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황혼은 ‘낮과 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시간으로서 불안한 운명과 함께 행복했던 과거와 부정적 현실 사이에 놓인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작일이 밝혀진 최후의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는 ‘남의 나라’라는 중의법이 타국과 객지라는 이중의 울림을 동반하면서 시인으로서 느끼는 생성과 소멸의 동시적 가능성을 잘 담아낸 명편이다. 모두 도쿄에서의 윤동주가 가졌을 불안과 성찰의 양면적 시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년 가까이 교토에 살면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했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다녀오려고 차표까지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떠나오려던 때,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체된다. 송몽규와 함께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이다. 송몽규와 윤동주 그리고 교토3고 학생 고희욱은 서로 어울리면서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체포 사유였다. 이어 윤동주는 1944년 6월 사상불온, 독립운동, 비일본 신민, 온건하지만 서구 사상이 농후한 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윤동주 삶의 최후 동선이었던 셈이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 인근 윤동주 하숙집 터에 자리 잡은 시비.

◇ 교토의 가을, 우지(宇治)강에 새로 세워진 시비 = 지지난 주에 교토를 찾았다. 교토 여행은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윤동주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교토의 가을은 단연 고즈넉하고 잔잔했다. 먼저 도시샤대를 찾았다. 도시샤대 역시 연희전문학교처럼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시샤대가 그가 그토록 흠모해 마지 않았던 정지용의 모교였다는 사실이다.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오던 날, 윤동주는 아마도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수없이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시비 앞에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가 원문과 일본어 번역문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라고 말했던 그 무서운 ‘고독’이 이곳에서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윤동주를 사랑하고 흠모하던 일본인들의 정성으로 가능했다. 그에 비해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된 충북 옥천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살아서는 정지용이 윤동주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죽어서는 윤동주가 정지용 시비를 이곳에 파생시켰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윤동주는 이미 정지용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도시샤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윤동주의 하숙집 터였다. 거기에는 교토조형예술대 다카하라 교사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교토조형예술대의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단아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 앞에는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서시가 양국어로 새겨진 시비가 함께 서 있었다. 거기서 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송몽규의 하숙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일 하숙집에서 각각 교토대와 도시샤대를 걸어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우지에 위치한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찾았다. 윤동주는 도시샤대 재학 시절 급우들과 함께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특별히 기억할 일은, 지난 10월 28일 시쓰카와(志津川)의 우지강변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시비에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 쓴 ‘새로운 길’과 함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걸어갔던 “새로운 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나한테 주어진 길”로 이어지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이 거기 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교토의 가을이, 막 상류 댐을 열어 급류로 흘러내리던 우지강을, 그날 소풍을 나왔던 도시샤대 학생들의 평화처럼 감싸고 있었다.



◇ 윤동주의 죽음과 후쿠오카 = 후쿠오카는 ‘아시아로 열린 창’이라는 별명답게 항구 도시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 터는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사와라(早良)구에 있다. 후지사키(藤崎) 지하철역에서 퍽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96년에 새로 지은 형무소 건물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형무소 터만 남아 공원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후쿠오카 구치소는 형무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어서, 이곳에서 추모 묵념을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막 일본 프로야구 저팬시리즈에서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한 소프트뱅크가 우승하여 후쿠오카 각 백화점이 세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명예교수는 후쿠오카 현립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분으로서, 연세대에서 춘향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문학 연구자이다. 그분은 형무소 터와 함께 그가 1994년부터 만들어 운영 중인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대체 혈액 실험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쓰였다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은 생리식염수를 개발 연구하고 있었는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을 한 죄로 윤동주 등이 그 실험 대상이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밝힌 것이다. 그때 후쿠오카 앞바다 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에서도, 일본 패전 후 전범 재판 문서에서도, 규슈(九州)제국대에서 대체 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는 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남겨진 731부대의 악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 마지막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가 죽자 명동촌 집으로 그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윤영석이 시신을 넘겨받으러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27년 1개월 남짓 되는 짧은 생이었다. 한 줌 재가 되어 부친의 품에 안겨 돌아와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용정 땅에 묻혔다. 유족들은 그의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표현을 적어 넣었는데, 이 기념비적 순간은 ‘청년 윤동주’를 ‘시인 윤동주’로 태어나게끔 해주었다. 

도쿄에서 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사랑스런 추억’에서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고 씀으로써, 그 말을 예언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젊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다.  

이러한 윤동주만의 특권은, 삶의 비극성을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한 장면을 선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시에 나타난 부끄럼과 성찰의 의지는 후천적으로 노력해 얻은 성정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나한테 주어진 길’과 ‘허락된다면’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 감각 역시 그의 천성이 능동적이지 않고 자성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오래도록 쌓은 원숙함과는 전혀 다른 청년기의 과정적 속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청년의 이상과 실존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대체 불가능한 섬광의 사건이 된 셈이다. 그래서 그의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은 물론,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실존의 어둑함을 따라 우리의 기억이 환해지는 가을 여정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문화일보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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