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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소성 계동앞바다에서 혹등고래 사체가 해안으로 들어올려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 혹등고래는 사흘 동안 세 번이나 해안에 좌초되었다. / 2017년 11월 15일, 중국 계동에서
은유와 환유
김재성
'산불 조심' 이라고 고딕체로 쓰여 있다. 괸심이 끌리는 기표를 한참 동안 의식한다. 우리는 나무, 잎, 골짜기, 숲, 바위, 짐승, 흙 등을 동시에 연상하거나 기억하게 된다. 또한 '산불' 하면 산에 불이 나서 불꽃이 휘여져 올라오는 모습이나 헬리곱터가 산불을 진화하는 모습,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진화하거나, 산짐승들이 불을 피하기 위해 몰려다니는 아프리카의 장면과 활활 타며 번지고 있는 불길에서 타고 있는 나무를 촬영하는 카메라 등을 연상한다. 그리고 '조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삶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와 기계 혹은 대상관계에 있어서도 다 양하게 생각하게 한다.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가야 하고 위험물건도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하며
자기 자신과 또는 타인과의 대화와 행위에 있어서도 항상 배려와 거리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의 언어구성법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심각한 실어증에 걸린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 혔다. 부언하면 사실주의, 자연주의, 큐비즘에서는 환유가 은유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반면에 낭만주 의 초사실주의, 다다이즘에서는 은유가 더 많이 기용되고 있음을 문학 텍스트를 통해 증명했다.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은유와 환유의 두 축 중 어느 한
가지가 빠지면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삼박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야콥슨과 비트겐슈타인같은 사람들도 시어와 보통어 은유와 환유와의 차 이를 논하는 지점에서는 뒤걸음질을 칠 만큼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신비평가들도 모두 시어와 보통어와의 구별에 궁구했지만, 뒤돌아보면 허사였다. 모법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은유와 환유와의 차이성을 온갖 현란한 말로 가르고 분류하려 하지만, 눈 감고 가슴의 소리를 듣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헛된 작업인가를 알 수 있 을 것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지시켰듯이, 시어(은유)란 보통어(환유)없이는 불가능하다.
환유는 예전에는 모두 은유였고 오래 사용되어 닳으면 환유가 되는 것이다. 이라고 경고 했다. 기의와 기표는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환유에서 만들어지는 은유와 라랑그를 우선시 함으로써, 기표가 기의를 가진다는 것을 유도한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이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야콥슨이 해명했듯이 은유는 무의식의 언어,
환유는 의식의 언어로 생각한다. 영국 참나무, 플라타너스, 구약이 제시하고 있는 상징적인 나무, 황페해진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의 그림자, 나뭇가지의 분열된 것을 보고 분열 그 자체, 농신(Saturn)의 나무,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나무, 벼락에 맞아 죽은 나무에 걸려 있는 수정 등등 … 우리의 연상은 끝임없이 펼쳐지는데, 이는 마치 불에 태운 거북 등이 예측불허한 우리의 운명을 밝혀주었듯이, 기표는 불현 듯 환유의 차원에서 서서히 느리게 진행하는 존재의 축으로부터 명명할 수 없는 암흙을 '언어의 빛'으로 솟아오르게 한다. 기표의 흐름과 이것이 일으키는 연상의 포물선은 거의 광적이지만, '영원성의 한 순간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광택의 소나기'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의가 없던 기표가 기의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명히 웃음, 익살, 농담, 재치를 시사한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우리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순간 이것
이 쥬이상스이다. 글을 쓴다. 이것은 마치 여성 몸 전체를 애무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요즈음 글쓰기는 여성적이라며
위의 라캉 주장에 반격한다. 이다. 또한 최초의 기표는 무의식을 뜻하고 이원적 기표는 언어로 대표적 표상화를 뜻한다. 첫 번째 단일한 기표는 영상을 뜻하며, 대기표는 무의식의 주체를, 보편적인 기표는 상징적 논리를, 비환원적인 기표는 무의미를, 그러나 동시에 기표는 무의식의 폐쇄를 뜻한다. 그러나 좀더 집요하게
라캉 어휘의 미끄러짐을 추적하노라면, 우리는 결국 이 타자는 이성임을 알게된다. 이 아니다. 만약 현자가 바로 거기에서 머무를 집을 찾았다면, 이는 끝임없이 터널을 뚫고 있는 가장 훌륭한 대리인, 그가 충성을 다해 섬기는 이성, 바로 로고스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자들이 섬기는 이것은 '이성이 전개하는 사업' 즉 '변증법'으로 '광기의 드라마'이지만, 진리를 접근하고 있다. 이 타자의 말은 주체를 통해 언어 밖 혹은 언어를 초월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초월해서 말로부터 온다. 이는 '완전한 말' 바로 기독교 하나님 말씀에 버금가는 말이다. 차단시키거나 아니면 벙어리나 죽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은 타자의 소리이기에, 분석자 그리고 피분석자 둘의 이야기도 타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개의 타자의 목소리(의식의 언어)가 서로 합쳐져 동의를 하게 되면, 피분석자의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이중으로 소외 분열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기표 즉 환유와 은유가 꾸미는 알리바이이며, 단순히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 혹은 타자의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더욱이 주체는 언어에 의해 진행되는 의미화의 구성 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시인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그가 쓴 시(詩)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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