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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6일. 6개월만 지나면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을 훌훌 털어내고 광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민족을 삼켜 버린 나라의 음침한 형무소에서 스물 일곱살 청년 시인 윤동주는 차디찬 마루바닥에 누운 채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오늘, 그를 다시 알아보자...
위 사진은 일본 도쿄 릿쿄대에 다니던 윤동주(뒷줄 오른쪽)가 1942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서 고종사촌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 친지들과 찍은 사진이다. 누가 표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진 속 윤동주의 얼굴 옆에는 ◯를, 송몽규의 얼굴 옆에는 △를 그려놓고 사진 오른쪽에 "◯2월 16일 △3월 10일 1945년 후쿠오카에서 영면"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보인다. 사진 아래쪽에는 42년 8월 4일(aug. 4th. 42.)이라는 서명이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 둘은 석 달 차이로 태어났고, 한 달 차이로 죽었고, 나란히 묻혀 있다. 눈매가 또렷했던 송몽규, 윤동주의 또 다른 꿈이자 영혼의 친구라 할 그도 시를 썼다.
밤 -송몽규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위 사진은 윤동주의 생전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사진으로 1943년 초여름, 윤동주의 귀국을 앞두고 열린 송별회에서 찍은 것이다. 교토(京都) 우지(宇治)강의 아마가세(天ケ瀨) 구름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도우시샤(同志社)대학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 태평양전쟁 중이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하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여학생 옆에서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남학생이 바로 윤동주다. 귀국하기로 결정한 윤동주를 위해 평소에 교류가 별로 없던 여학생들을 포함, 영문학 전공 일학년 전원이 모여 송별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윤동주가 주인공이라 가운데 선 모양이다. 이 사진은 윤동주 옆에서 사진을 찍은 여학생 키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의 자택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해방 50주년을 앞둔 지난 1994년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윤동주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 때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우리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미쓰이케이지(三津井慶二)군이 제안했죠.
“히라누마(平沼)군, 노래 한곡 불러주지 않겠어?”라고. "너와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라고 그가 덧붙였을 때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곧 바로, 그 노래를 불렀죠.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흘렀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죠. 좀 의외였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했던 그가 그렇게 용감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 키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의 증언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위 사진은 윤동주의 고향 만주 용정에서 거행된 장례식 사진이다. 영정 속 학사모를 쓴 윤동주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다. 사진 위쪽 메모를 보면 왼편에 두 줄로, 윤동주군 장례식(尹東柱君 葬禮式) 강덕 12년 3월 6일(康德十二年三月六日), 그리고 오른편에 두 줄로, "강덕 12년 2월 16일 오전 2시 36분(康德十二年二月十六日午前二時三十六分) 후쿠오카시에서 별세, 이 때 나이 29세(在福岡市別世時年二十九歲)" 라고 적혀있다. '강덕(康德)'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서 당시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가 썼던 연호로 '강덕 12년'은 1945년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 2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년 뒤인 1945년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 달이 채 가기 전 송몽규도 같은 곳에서 친구의 뒤를 따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시는 1942년 6월 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詩」이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또다른 나는, 오늘, 윤동주의 마음을, 그리워한다.
- 2017.2.16. 황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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