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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나(라)운규와 영화 "아리랑"
2019년 11월 01일 21시 37분  조회:3108  추천:0  작성자: 죽림

해설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줄거리

 

서울에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영진(나운규)은 3·1 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정신이상자가 되기 전까지는 친구인 현구(남궁운)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던 건강한 청년이었다. 영진의 동생 영희(신일선)는 오빠의 친구인 현구를 사랑하고 있다. 한편 악덕 지주의 머슴 오기호(주인규)는 영진네 빚을 빌미로 영희에게 흑심을 품는다. 그해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농악제가 열리던 날, 오기호는 혼자서 집을 보는 영희를 범하려 든다. 마침 영진을 찾아 왔던 현구가 영희를 구하기 위해 오기호에게 달려들고 정신이상자인 영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남자의 격투를 구경할 뿐이다.

그러다가 영진은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다. 상인이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으려 하자 영진은 순간적으로 낫을 들어 상대방을 후려친다.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고약한 오기호였다. 영진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악덕지주, 일본 순사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진의 손에 포승이 묶여지자 사람들은 영진을 에워싸고 오열한다.

그때 영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부디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

일본 순사에게 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의 뒤로 청년회 깃발을 든 청년들이 말없이 따른다.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관련영화

 

 
 

관련이미지

출처: EBS 어린이 지식e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랑 [Arirang]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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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사전

나운규의 아리랑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 무성영화이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인공 영진 역은 나운규가 맡았고 영진의 동생 영희 역은 신일선, 영진의 친구이자 영희의 연인인 현구 역은 남궁운, 악덕 지주의 청지기인 오기호 역은 주인규가 각각 연기했다.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 였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 <아리랑>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어 온 겨레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것이다.


■ 아리랑의 줄거리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이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가 그 낫에 찔려 죽고 그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의 아리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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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이미지 1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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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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