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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냅다 뛰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옷속에 스며든다.이럴 땐 괜히 자꾸 힘이 난다. 달리기도 싶고 평생 해보지도 못했던 무술동작도 해보군 한다. 허리도 앞뒤, 좌우로 돌려보고 다리도 굽혔다 폈다 한다. 당장 무슨 어디 세계경기장에 나가는 선수 같이 말이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왼손에 들고 오른팔을 힘있게 활개치며 신토미쬬역전으로 향했다. 심양에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온지 벌써 두주째다. 심양에서 산동을 거쳐 일을 보고 다음 상해경유로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던것이 9월중순이다. 집까지 가려면 JR엑스프레스를 타고 요꼬하마에서 다시 요꼬하마선을 갈아타면 되는데 요꼬하마에서 갈아타는데는 홈을 바꿔야 한다. 층계를 오르내리기 싫어서 나는 아예 마치다로 가는 뻐스로 가기로 했다. 시간적으론 조금 늦어질수 있으나 마치다까지 직접 가는게 좋았다. 마치다에서 택시를 타도 1600엔이면 족하다.
밤경치를 구경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멋도 좋다. 이렇게 뻐스를 탔는데 여기저기에 보이는건 간판뿐이였다. 아니, 자동차의 라이트랑, 고속도로의 가로수랑 보이는건 많았지만 그런건 상해에도 있다. 다만 나의 눈에 인상적으로 보이는것이 바로 일본어로 된 간판들이였던것이다. 서먹서먹하게 그때 나는 일본엔 참으로 일본어로 된 간판이 많구나 하고 크게 놀랐었다. 어디 가나 일본어로 된 간판이였다. 중국에서 한달가량 체류하다가 오래간만에 일본에 와보니 이렇게 당연한 일에도 크게 놀라움을 금치 못함은 대체 무엇때문일가?
인간은 정으로 산다. 그 정때문에 인간은 울고 웃고 하는데 그 정은 인간들을 묶어놓은, 끊을래야 끊을수도 없는 실과도 같은것이다. 아마 고향에 대한 정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그래서 고향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을것이다. 그러기에 노래도 고향노래요, 시도 고향시다. 옛날부터 이 고향을 부르고 불러도 그냥 사람들은 이 고향만을 부르고있다. 그렇게도 싫지가 않은지.
고향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어디로 가나, 또 얼마나 오래 떠나있거나 관계없이 고향에 돌아만 오면 대뜸 자기 고향임을 알게 되고 거기에 익숙해진다. 자기가 태여난 땅은 태여날 때 이미 몸에 어머니의 기(氣)와 함께 슴배여있다고 론문을 써도 누구 하나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을것이다. 그것이 대체 얼마만큼의 과학적근거가 있든지.
먼지가 구름처럼 자욱하던 고향의 길거리라도 좋다. 자갈과 모래로 깐 그 길을 걸으면서 발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해본적이 없었고 질적거리는 그 거리를 걸으면서 내리는 비를 원망한적 한번도 없었다.
쑥떡 먹고 민들레 캐먹던 고향이였는데, 메돼지의 입자리가 난 감자 한알이라도 버리지 못하고 구워먹어야 했던 고향이였는데도, 그렇게 째지게 가난했어도 누구 하나 그것을 고향탓이라 일컫는 일 없더라.
가난한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 그리고 타향에서 부자로 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고향을_ 떠나면 천하다고_ 하는 리유를 그 누구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타관타다セ란 말도 함께 있어도 누구 하나 그것을 반박하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향이다.
그래서 나는 십여년 일본에서 살았어도 중국에 가면 서먹서먹하지 않고 오히려 한달만 일본을 떠나있다가 도로 와보면 다시 서먹서먹해진다. 십여년간 매일 보아오던 거리마저 이렇게 서먹서먹해질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더욱 놀란것은 그 서먹속에서 나는 내가 고향을 잊지 못하는 리유를 늦게나마 알게 된것이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리유는 나도 우에서 말한 그런 사람들 부류에 속하는 인간의 한 존재이기때문이다. 고향을 어머니와도 같이 여기는, 그리고 종래로 고향을 나무람 한적 없이 사랑하는 그런 정에 얽매운 인간이기때문인것이다.
2005년 10월 2일 밤
일본 힝아시후치노베의 해빛 찬란한 리바티코부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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