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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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아지와 참새 댓글:  조회:656  추천:14  2010-05-24
  강아지와 참새 강아지가 씩―씩―씩― 열심히 냄새를 맡다가 한쪽 뒤다리를 하늘에 겨누고 오줌을 싸지른다, 령역을 표시한다 참새 한마리 두마리 겁도 없이 포 로 롱  강아지의 안방에 내려와 오줌벼락을 맞은 벌레를 쪼아먹는다 오줌을 싸다말고 콩콩콩 참새 쫓는 강아지 참새 내린 자리를 고누고 또다시  뒤다리를 쳐든 강아지 또 로 록  떨어지는 오줌 몇방울 하늘에서 참새가 입을 막고 웃는다
10    전주한옥마을 댓글:  조회:874  추천:16  2010-05-21
수필  전주한옥마을    제10회 해외동포문학상 시상식의 일정으로 전주한옥마을 체험이 배정되었다. 당초 한옥마을체험에 대해서 나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한옥이라면 연변에서 흔히 말하는 조선집이 아닌가. 태어나서부터 16세에 집을 떠나기까지 줄곧 한옥에서 살았고 또 연변에서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한옥이 아닌가.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오후 5시쯤에 우리가 하루 묵을 전주한옥마을 은행나무 길의 아세헌(雅世軒)에 도착하였다.     아세헌은 고풍스런 목조건물로 전주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은행로 내의 도심 실개천가에 자리 잡았다. 도심 실개천은 태조로를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곡선 형태로 조성되었다. 실개천의 수원은 지하 150미터의 암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는데 거울처럼 맑아 조약돌이 알른알른 거렸다.     실개천에서 맘껏 물장난을 즐기는 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고풍스런 한옥과 실개천을 마주하니 어릴 적 추억이 실개천을 따라 흐른다.     아세헌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집 혹은 우아한 세상의 집이라는 뜻의 테마 한옥민박이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채와 행랑채 한가운데 있는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마당에는 크고 작은 화훼들이 줄느런히 놓여있다. 흰 꽃이 무리를 지어 피는 안개꽃 같은 이름 모를 꽃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솟을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대청마루에 앉으니 초가을 바람이 거침이 없이 불어와 여로에 지친 나그네의 고달픔을 말끔히 씻어준다. 댓돌 위 툇마루 한편에 앉으니 먼 길을 에돌아 고향집 문턱에 앉은 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저쪽 툇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손님이 내게로 다가와 어디에서 왔는가 물었다. 내가 중국 연변에서 왔다고 하자 그 손님은 자기는 서울에서 왔는데 중국 연변에 다녀왔다면서 반가와 하였다. 성이 이 씨인 손님은 중국을 포함한 세계 100여 개국에 다녀왔고 지금은 발 가는 대로 동으로 서로 국내여행을 다닌다고 하였다. 그가 부러웠다. 나그네 같은 여행가, 그게 나의 꿈이었는데 언제 실현될지 묘연하기만 하다.     행랑채는 모두 두 칸으로 된 민박시설이고 안채는 ㄱ자형으로 되었는데 바깥쪽은 주인내외가 기거하고 있었고 안쪽은 역시 민박시설이지만 별도로 손님들이 한복을 입고 소리와 민요, 가야금을 배울 수 있는 전통 한국음악체험교육관으로 활용된다고 했다.     아세헌은 한국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 부문에서 2차례 최우수상을 받은 국악인 박윤희(32) 씨가 전주시로부터 임대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행장을 풀고 샤워를 끝내고나니 저녁시간이 된지라 우리는 곧바로 전주한옥마을의 명물인 전일슈퍼로 향했다.     전일슈퍼는 한옥마을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른 저녁부터 맥주꾼들로 빈틈이 없었고 얼굴들마다 불긋불긋해있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연변 맥주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모두들 취기가 도도했지만 조곤조곤 담소하고 있었다. 반시간 넘게 기다려 안쪽에 있는 작은 테이블이 차례졌다.     전일슈퍼는 낮에는 슈퍼지만 저녁에는 맥주집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가게맥주라고 부르는 전일슈퍼는 뒤에 공간을 터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술을 마시는 곳이다. 전일슈퍼의 단골메뉴는 갑오징어와 황태이다. 황태란 우리가 말하는 명태를 말린 것인데 연변의 황태와는 맛이 사뭇 달랐다. 연변의 황태는 약간 딴딴하고 질겨 씹기 힘들지만 전일슈퍼의 황태는 폭신폭신하여 씹기 쉽다. 또 연변의 황태는 인공조미료로 짭짜름한 맛을 내는 게 특점이지만 천일슈퍼의 황태는 매실 등 천연조미료를 가미해 달큼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것이 특점이었다. 청양고추와 들깨 등 16가지 재료가 들어간 비법 양념장에 바삭하게 잘 말려진 황태포와 갑오징어를 찍어 먹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연변에 이런 맥주집이 나타난다면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아세헌에 돌아왔다. 밤공기가 으슬으슬 하던 차 뜨스한 구들에 등을 붙이고 나니 고향의 등대 목처럼 편안하다. 맥주를 적잖게 마신데다 귀맛 좋은 귀뚜라미소리마저 들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은은한 가야금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덧 날이 희붐히 밝았다. 안개를 헤치는 듯 은근한 가야금소리가 계속 들린다. 툇마루에 놓인 녹음기에서 울리는 가야금반주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면을 마치고 툇마루에 나서니 저쪽 툇마루에서 우아한 한복차림의 박윤희 씨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것이 아닌가. 요란한 나팔소리만을 기상(起床)소리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그러한 기상(奇想)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식탁에 오른 반찬이 무려 20여 종류가 넘었다. 고등어조림, 콩자반, 어리굴젓, 조개젓, 파김치, 오이선, 배추김치 등 맛깔스런 음식이 한상 가득하다. 나는 이전에 전주라면 콩나물국밥과 콩나물비빔밥이 전주전통음식을 대표하는 음식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세헌에서 진정한 전주음식의 정통성은 “전주 가정식 백반”인줄을 알게 되었다. “전주 가정식 백반”이란 전주지방의 여인들이 집안에서 세세대대 전승해오는 품격을 갖춘 음식으로서 하나하나 여인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요리들이다. 백반상은 반찬 가지 수가 많아 무려 1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전주 가정식 백반”은 특별히 짜거나 맵거나 하는 음식은 없으면서 모두가 싱거운듯하면서 깊은 맛이 우러나오며 입에 짝짝 붙는 게 일품이다.     아세헌의 “가정식 백반”은 박윤희 씨의 시어머니가 직접 조리한 것이라고 했다. 박윤희 씨는 아세헌의 “가정식 백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세헌에서는 한번 조리한 음식을 다시 냉장고에 넣는 법이 결코 없다고 한다. 먹을 만치 올리지만 모자라면 언제든지 더 청할 수 있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마을 언덕 위 오목대(梧木臺)에 올랐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때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가다 친지들을 불러 승전을 자축했던 곳이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 한옥 800여 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입지이다. 1911년 전주성 동쪽 성곽이 헐리면서 한 채 한 채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규모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오목대에서 내려와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太祖路)를 따라 걸으면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풍남문과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로 불리는 전동성당,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전통술 제조과정을 관람하고 주례도 배울 수 있는 전통술박물관, 전통한지 제조기법을 체험할 수 있는 전주전통한지원, 전주공예품전시관,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문학관 등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최명희문학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최명희 선생은 소설 《혼불》로 유명한 작가이다. 소설 《혼불》은 “한국 풍속의 보고, 모국어의 보고”란 평가를 받는 대작이다. 최명희 선생은 생전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키를 넘는 선생의 달필 육필원고는 지운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다. 마치 선생의 맑은 심성을 원고지에 옮겨 놓은 듯 하다. 최명희문학관 출구에는 시인들이 최명희 선생을 기리여 적은 육필 시원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 백남준의 시가 가슴에 와 닿았다.                       이름 부르는 일                             백남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미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서울에 돌아와 최명희 선생의 소설 《혼불》을 사러 교보문고에 들렀지만 절품이라 구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전주 한옥마을은 숙식은 물론 다도, 전통공연, 민속놀이, 음식체험 등 각가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적소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뿌리 깊은 문화의 마을, 이는 한민족의 문화적정서이면서도 삶의 뿌리인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넘어지지 않듯이 깊은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세세대대 융성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9    조선족과 진달래 댓글:  조회:688  추천:20  2010-05-21
수필 조선족과 진달래       조선족은 진달래에 대해 각별한 정감과 애정을 지니고있다. 중국에서 진달래는 조선족을 상징하는 꽃이며 조선족의 대명사이며 조선족은 “진달래민족”으로도 통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화(州花)로 진달래가 지정된것도 물이 곬을 따라 흐르듯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조선족에게 중국의 국화(國花)가 무어냐 물으면 매화라고 답하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매화가 도대체 무슨 과에 속하고 어떤 모양과 습성을 지닌 꽃인지 또 어느 지방에 피는 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국화가 무어냐 물으면 무궁화라고 대답할 사람이 적을것은 물론 무궁화에 대해 정확히 꼬집어 말할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을것이다. 같은 핏줄이면서 처한 정치, 경제, 문화, 지역적 환경이 다른 것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조선족의 진달래에 대한 애정은 화끈하다기보다는 우리의 정감 속에, 생활 속에 스며들어 무소불재, 무처불유(無所不在, 無處不有)의 경지에 이르렀다. 연변의 거리에서 “진달래상점”이나 “진달래 냉면”과 같은 상가의 간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너무나 익숙한“장백의 진달래”와 같이 진달래를 노래한 가요도 적지 않다. 올해 중앙TV방송국에서 촬영제작한 조선족의 생활과 풍속을 반영한 15회 텔레비전 연속드라마의 제목도 “풍설속의 진달래”이다. “진달래문예상”은 자치주정부에서 설립한 최고 문예상이다. 근래 연길시에 “진달래광장”까지 생겨나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됨은 물론 시민들이 가까이에서 진달래를 접할 수 있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요즘 들어 조선족민족의 전통과 문화, 역사, 민속풍정을 체험할 수 있는 부지면적이 179만 평방미터이고 계획 투자가 13억 원을 웃도는 대형 “진달래문화원”을 연길시에 건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와 우리들 흥분시킨다.     진달래는 장백산과 함께 연변의 명물이다. 진달래 피는 계절이면 연변의 산촌마다 앞문을 열어도 진달래요, 뒷문을 열어도 진달래라, 연변은 진달래의 고향이 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 산이 있어 진달래가 자생하겠지만 진달래가 피어있는 장백산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조선족여성에게 치마저고리가 가장 잘 어울리듯이 진달래는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낸 장백산의 가장 기려한 복식이다. 산봉우리에 오롯하게 피어나면 수집은 처녀의 얼굴이요, 봉우리 가장자리에 피면 운치가 돋보이는 기운이요, 산의 가슴에 피면 봄바람에 부푸는 소녀의 산뜻 저고리이며, 산기슭에 피면 꽃을 수놓은 화려한 치맛자락이다.    진달래는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으면 토질에 타발없이 절벽에도 날파람 있게 피어나는 이악스런 꽃이다. 나의 고향은 두만강변 작은 마을이다. 4월 중순이면 두만강을 굽이돌아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들은 옅은 갈색으로부터 점점 진한 갈색으로 옮아가다 5월초면 층층기암은 진 붉은 진달래로 꽃대궐을 차린다. 멀리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동산을 바라보면 빨간 단풍든 산처럼 눈부시다. 이 계절이면 물동이 이고 오락가락하는 처녀들의 얼굴도 연분홍으로 우련히 물드는데 전설속의 선경이 예 아닌가싶다. 주체할 수 없어 부글부글 토해내는 진달래의 꽃 냄새는 내처 바쁜 두만강을 희롱하기도 하고 산들산들 봄바람에 진동하는 무더기 향기를 싣고 바위라도 무너뜨릴 듯이 실랭이질하다가 멋쩍은 듯 돌아서 제멋대로 고개고개 골과 골 사이를 흥청거리며 누비다가 어느새 농갓집 울바자사이로 기어들어 잠자는 강아지를 코끝을 간지럽히기도 한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향기에 잠자던 모든 것이 깨여나 팔다리와 앙가슴에 벌떡벌떡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닐까.     고중할 바는 없지만 우리네 선조들이 쪽박 차고 남부여대하여 두만강을 건넌 때도 진달래 피는 계절이었으리라. 그네들이 기름이 자르르 도는 이 땅에 개간의 첫 보습을 박고 씨앗을 뿌릴 제 폐부깊이 감돌아치는 진달래 향기와 억- 막혀오는 환희로움에 전율했으리. 진달래 피는 샘물터에서 목을 축이며 분홍빛 내일을 설계했으리. “첫 농사를 잘 지어서 조선에 계시는 부모님과 형제들도 모셔와야지. 쌀뒤주도 여러 개 갖추고 술독 부러지게 흰 쌀밥 먹고 뜨스한 구들에서 사랑의 새끼 꼬면서 한 백년 살가부다.”     진달래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넉넉히 담은 정감의 꽃이다. 장미의 랑만도, 튤립의 화려함도, 올리브의 깊은 사색도 지니지 않은 수수한 꽃이다.     진달래는 랑만을 외면한 꽃이다. 연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할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없다. 진달래는 덜먹총각의 나무지게에 얹혀왔다가 처녀의 손에 쥐여지지 못한 채 총각에 집 창턱에 속절없이 피였다가 고스란히 지고 마는 못난 꽃이다. 진달래는 너무 흔하다보니 사고파는 가치를 지니지 않으며 고대광실보다는 봄 햇빛이 조으는 초가집의 창턱이 훨씬 어울린다.     진달래는 화려함도 갖추지 못한 꽃이다. 가지가 많아 지저분한 느낌이 들고 가지는 연한 갈색으로 우아하지 못하며 덕지덕지한 바늘조각으로 고귀하지 못하다. 또 꽃은 수효가 너무 많고 꽃잎은 작아서 조촐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진달래는 사색적인 꽃도 아니다. 겉볼안 같은 우리 민족의 성격과 흡사한 꽃이다. 진달래는 기나긴 동북의 겨울을 용케 이겨내고 새봄을 맞아 흥에 겨워 멋에 겨워 한껏 피어나는 꽃이다. 우리 민족은 진달래 꽃철이면 모여앉아 “진달래 꽃전” 놀이를 하였다.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씻어서 곱게 빻은 찹쌀가루를 버무려 한입에 먹을 수 있게 둥글납작하게 만들어 먹는 것이 “진달래꽃전”이다. 화전놀이의 참뜻은 부지깽이도 심으면 살아난다는 봄이 되었으니 모두 일손 맞춰 어거리 대풍을 약속하자는 화합의 잔치라 하겠다. 어수선했던 겨울의 삭 거름을 진달래 꽃불에 활활 불사르고 논밭 둑을 손질하는 가래질을 품앗이로 시작한다. 들쥐대신 나타나는 종달새의 우짖음에 취해 흥겨운 밭전놀이도 잊지 않았다.     진달래는 자기의 키를 훨씬 넘는 오기와 굴강함을 지녔으며 독립과 자유를 위해 서슴없이 자신을 불사르는 불사조의 신념을 갖춘 꽃이다. 진달래는 시간을 거슬러 지난세기 초, 안동 김씨인 할아버지가 안동 김씨인 김좌진장군을 따라 진달래 피는“아리랑 산”언덕길로 멀어져가던 진한 감동이며 그 자국마다 장한 뜻이 어려 새봄에 유난히 붉게 피어나는 꽃이다. 진달래 피는 동산에 올라 오늘도 하루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 보람 없이 하산할 적 할머니의 이마에 어렸던 실망의 석양이 그늘로 바낀 꽃이며 풀뿌리로 보릿고개를 달래면서도 쌀을 구하러온 독립군지사에게 마지막 쌀 한 자루를 넘겨주던 할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꽃이다.     어디 그뿐이랴. 소왕청의 고요한 밀영 앞, 진달래 비낀 계곡의 물에 서슬 푸르게 총칼을 갈던 젊은 독립군의 굳은 의지이며 허술한 밀영에서도 스스로 나슬나슬 피어나는 여전사의 아름다운 청춘이며 안중근의사가 내쏜 총에서 번쩍이는 정신의 불꽃이며 코신을 거꾸로 신고 적을 유인했다는 여전사의 지혜로움이 서린 꽃이다.     진달래는 독립투쟁에 남편을 바치고 중국의 항일전쟁에 자식을 보낸 우리 민족 여성들의 생생불식(生生不息)의 꽃이다. 14년(1931-1945) 중국항전시기 10만 조선족 열혈남아들      이 침략자를 몰아내는 성전에 떨쳐나섰다. 연안에서 태항산까지 장강이북에서 해남도까지 불사조마냥 광활한 중국대지를 주름잡으면서 침략자를 무찔렀다. 또 10만 조선족청년들이 민주와 자유를 위해 중국해방전쟁에 뛰어들었다. 진달래는 쓰러진 열사를 가리는 꽃이며 적탄에 구멍 난 용사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로 물든 꽃이다. 하기에 중국의 저명한 시인 하경지는 이렇게 읊조리지 않았던가. “산기슭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어있고 마을마다 열사비가 솟아있네.”     진달래는 당대에 이르러 끈기와 인내로 갖은 시련을 이겨낸 엄마의 꽃이며 비명에 돌아간 누님의 한이 돋친 꽃이다. 전례 없던 동란시기, 제전(梯田)을 쌓을 돌을 캐던 누님이 날려 오는 남포 돌에 맞아 비명에 돌아갔다. 엄마는 누나의 이름을 목 터지게 부르며 두 손으로 누나의 무덤을 허비였다. 엄마의 분질러진 손톱과 두드러진 손끝에서 피가 질박히 흘러 누나의 무덤을 허비였다. 엄마의 분질러진 손톱과 두드러진 손끝에서 피가 질박히 흘러 누나의 무덤가를 흥건히 적셨다. 진달래는 엄마의 그 피눈물이 스며 피어난 꽃이며 청춘의 꽃망울을 채 터치우지도 못한 채 찬 땅에 누운 누나의 한(恨)이 송골송골 배여나 핀 꽃이다. 이제 남은 다섯자식을 남 부럼 없이 당신 손으로 키우려고 부엉새의 하소연과 동무하여 새벽가지 싸리광주리를 곁을 적 어머니의 이마에 구슬처럼 맺힌 새벽이슬이 피어난 꽃이며 삶의 목도채에 눌리어 덩굴처럼 휘어진 아버지의 안쓰런 허리에 내 돋힌 땀방울과 고달품의 뒤안길에서 허무하게 토해낸 아버지의 한숨이 점철된 꽃이다.     진달래는 겸양의 미덕을 갖춘 꽃이다. 가난한 집 살림에 한꺼번에 둘 다 고중에 보낼 수 없어 탄식하던 어머니를 위로하며 엄마의 손에 쥐여진 땀 절은 돈을 남동생에게 쥐어주며 환하게 웃던 작은 누나가 있었다. 당연한 듯 그 돈을 받아 쥐고 공부하여 대학 간 남동생이 있었다. 못난 그 동생은 지천의 나이에야 그 제날 누나의 웃음 속에 맺힌 이슬을 읽었으니 이제야 가슴 치며 통탄한들 뭣하랴.     우리 민족은 얼마나 많은 고난의 령(嶺)과 설음과 한(恨)의 고개를 넘어왔는지 진달래의 뿌리를 캐보면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험난한 세상의 고달품을 감내하여 가슴속깊이 감추느라 설음이 한 되어 뿌리마다 얼키고 설키였으리. 그래서 화사하게 피어난 진달래는 더욱 값진 것이요, 더더욱 눈물겨운 것이리라. 진달래 꽃 웃음 속에는 민족의 수난사가 깃들어 있고 희로애락의 절창이 담겨져 있고 미래에 대한 지향이 깔려있다.     진달래는 미래 지향의 꽃임에 틀림없다. 진달래는 짧은 한생 일월을 다투어 잎 먼저 꽃을 피우는 강한 개성과 저력을 지닌 꽃이다. 세상에 수없이 겪었으니 이제 닥쳐 올 역경쯤은 무슨 대수이랴. 단 하나의 씨앗으로 절벽에 뿌리내리고 군락을 이루었으니 이제 닥쳐올 고독이야 무슨 대수이랴. 진달래는 태어날 때부터 화려함과 고귀함과는 담을 쌓았으니 이제 주어질 무대가 허술한들 어떠랴. 진달래는 타향에 동떨어져 피어있어도 더더욱 세인의 주목을 끄는 신기로운 꽃이다.     이제 진달래는 단순한 꽃의 의미를 벗어나 민족정신의 늪에 앙금 된 색 바래지 않는 얼이며 떠도는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아늑한 고향집 뜰이며 세새대대 지키고 가꾸어가야 할 민족문화의 가치이다.
8    화려한 탈출 댓글:  조회:841  추천:11  2010-05-21
수필 화려한 탈출      사촌동생이 출국하면서 한 달간 기르던 애완견 금돌이를 무작정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복슬복슬한 하얀색 털을 가진 마르티즈견종이었다.     강아지를 기르자니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똥오줌을 여기저기에 배설하여 좀만 주의하지 않으면 “지뢰”를 밟기가 일쑤다.     강아지에게 똥오줌을 가리게 하려고 아침저녁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그날도 나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강아지를 데리고 부르하통하 강변에 나갔다.     앞에서 달려가던 금돌이가 백설같이 흰 강아지를 만나 옆에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위세를 부리느라 뒤발로 풀밭을 긁어댔다. 이어서 나무주위를 뱅뱅 돌다가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느라 뒷다리를 쳐들고 오줌을 갈기는 알량한 짓거리를 한다. 다른 강아지를 만날 때마다 똑같이 반복하는 염습이다.     강아지의 주인은 30대중반의 아련한 여성이었다.     “비싼 강아지인 것 같습니다.”     “네, 미국에서 천 달러를 주고 산 강아지입니다.”     자신의 분신인 듯 애정 어린 눈길로 강아지를 바라보던 그 여성이 나를 찬찬히 뜯어본다.     “김 선생이 아니세요?”     “영실이가 아니오?”     “네, 옳습니다. 모스크바 부다이스끼 여관에 있던 영실입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영실이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먼 이역만리에서 도탑게 지내던 영실이를 10년 후에 이렇게 우연하게 해후할 줄이야!     모스크바 체르끼시장에서 장사하는 조선족들은 부다이스끼여관에 모여 살면서 무랍 없이 지냈다. 영실이는 중국에서 철호와 약혼식을 올리고 우리 먼저 모스크바에 와있었다. 우리 두 집 식구 네 사람은 모두 고향이 화룡이라 인차 가까워졌다. 우리는 택시를 정해놓고 아침 다섯 시면 함께 시장에 다녔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식사도 같이 하였다.     영실이는 월광을 받은 듯한 뽀얀 살색에 얼굴이 갸름하고 선이 고운 미인이었다. 노래 솜씨가 일품이고 성격 또한 활달해서 남정네들은 철호가 여자 복을 타고났다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죽옷장사를 시작할 요량으로 5만 달러에 원래 매장을 팔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철호가 영실이 몰래 매장을 판 돈으로 카지노(도박장)에 다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미로 작은 도박에 손을 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아니었다. 봉창할 일념에 달이 오른 철호는 점점 큰 도박에 손을 댔다. 한번은 5천 달러를 호주머니에 넣고 카지노에 가다가 경찰에게 잡혀 몽땅 털리고 말았다. 새로 시작한다던 가죽옷장사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그즈음에 모스크바에서 중국청년 3명이 카지노에서 6만 달러를 따고 귀가한 뒤 집에서 한꺼번에 참혹하게 피살된 사건이 생겼다. 모스크바에서는 도박장에서 딴 돈은 자기 돈이 아니었다.     영실이가 철호에게 카지노에서 손을 떼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심장이 이미 돌이 돼버린 철호를 돌려세우지 못했다. 철호는 집에 두었던 5만 달러를 깡그리 도박장에 밀어 넣고도 모자라 고리대금업자에게서 5푼리자로 돈 만 달러를 꾸었다. 이젠 카지노에 미립이 터 얼마 안 되면 본금까지 찾게 될 것이라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그 돈마저 공손히 도박장에 받치고 말았다. 어느 날, 철호는 빚이 무서워 영실이만 모스크바에 남겨놓고 비겁하게 혼자 잠적해버렸다. 고리대금업자는 철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영실이의 자색에 반해 영실이를 납치하려 하였다. 영실이가 11층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자살소동을 벌이고 경찰이 출동하자 고리대금업자는 혀를 홰홰 내두르며 물러서고 말았다. 이튿날 영실이도 우리 여관에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렸고 나는 여태껏 영실이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부다이스끼여관에서 나온 뒤 전 모스크바에 있는 한식집에서 3년간 일했습니다. 3년 뒤 한식집주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6년 동안 몸을 혹사하며 미국에서 악착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참혹한 현실에서 용케 탈출하고 재기에 성공한 영실이가 돋보였고 내일처럼 기뻤다.      영실이는 개혁개방이후 조선족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개방초기 조선족 여성들은 시대의 급류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여성들에 비해 또 조선족남성들보다 한발 앞서 시장조류에 몸을 담그고 좌초를 겪으면서 희망의 대안을 향해 사투를 벌였다. 조선족 여성들은 더는 남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고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질서는 물을 먹은 모래 담처럼 맥없이 허물어졌다.     조선족 여성들은 불과 3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구한 삶을 살았다. 비록 새 중국이 건립되었다 할지라도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지위는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남녀칠세부동석, 칠거지악 등 유교특유의 문화가치는 크게 위축되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자식을 따르는 삼종지도는 먼 조선시대의 이야기만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만 봐도 그렇다.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섬기며 삼종지도의 역할은 물론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바깥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정에 종속된 반절의 인간으로 인정되었고 동네에서도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고 버들골 댁으로만 통했다.     어머니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쌀을 씻어 밥을 짓는 것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식사준비가 다되면 좋은 음식은 집식구들에게 먼저 먹인 후 남은 것이나 부엌에서 바가지에 담은 것을 가마 목에 돌아앉아 간소한 식사를 하시였다. 식사를 끝내고는 닭, 개, 돼지 등 가축을 돌보고 밭으로 나갔다. 밭에서 돌아올 때면 돼지풀을 뜯느라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 쉼도 쉴 틈이 없었다. 밥 짓기, 돼지죽 끓이기, 설거지, 빨래, 바느질, 뜨개질 등 태산 같은 일감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가 밤낮으로 팽이처럼 돌아쳤지만 할머니는 뭐가 불만인지 어머니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아니 종과 상전은 한솥밥이나 먹지 종보다 못하였다.     어머니는 동지섣달에 누나를 낳으셨다. 누나를 낳은 이튿날, 할머니는 어머니더러 동네에 나가 맷돌을 빌려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허약한 몸인데다 홑옷차림에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맷돌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고드름으로 맺혔다.     다섯 자식을 낳으면서도 왠지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박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촌간부로 일한 아버지는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많았고 그런 날이면 갖은 행패를 부렸다. 가장집물이 왱강댕강 여기저기 날아가는 것은 약과요, 온 집 식구가 추운겨울에도 맨발바람에 집에서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어머니가 허리가 휘고 뼈 빠지도록 일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가난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1990년대 초, 우리 이웃집에 타지에서 시집온 옥자아주머니가 살았다. 옥자의 남편 철남이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술고래였다. 그때 농촌에서 도급제를 실시한지 이미 칠팔년이 되어 사람마다 잘 살려고 뼈를 아끼지 않고 일할 때였지만 옥자의 남편만은 자기 집 일은 뒷전이고 온 동네의 경조사엔 빠짐없이 들려가 일감을 거들어주고는 품값으로 술을 마셨다. 상농은 밭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풀을 가꾼다 했지만 철남이는 풀마저 가꾸지 않았다. 다른 집의 논밭에서는 풀 한포기도 찾아보기 힘들고 곡식이 혀를 빼물고 자랐지만 철남이네 논밭에는 범이 새끼를 칠 정도로 잡풀이 성해 아예 곡식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철남이는 벌써 젊은 나이에 간이 술에 절어 간경화복수라는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다. 더는 남편과 살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 친정집에 놀러갔던 옥자는 친정마을 아낙네의 소개로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천진시 보계현으로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옥자가 병이 깊은 남편과 3살 난 딸을 두고 가출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사람들은 옥자를 나쁜 년, 독한 년이라고 타매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나도 이렇게 좋은 개혁개방시대를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여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하지만 옥자아주머니의 가출은 승냥이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호랑이굴에 뛰어든 격이 되었다. 옥자아주머니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 도착한곳은 천진시 보계현의 나이 먹은 한 홀아비네 집이었다.     그때 상황을 1991년 3월 30일자 《연변일보》는 “중시를 돌려야 할 엄중한 사회문제”라는 제목과 “조선족녀인들이 내지로 팔려가는 현상 놀라울 정도”(기자 허룡석)라는 부제아래 다음과 같이 기사화하였다.     “지난해 3월 화룡시검찰원에서는 화룡현의 한 여성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천진시 보계현의 한 홀아비한테 팔려가 감금당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검찰원, 현부련회, 현공안일군들로 련합구원대를 뭇고 갈급하게 천진시 보계현으로 들어갔다. 구원대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6백 명되는 마을사람들이 구원대를 겹겹이 둘러쌌다. 감금당한 여인의 집에 가보니 펀펀한 여인은 기지사경이 되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중략) 경이롭게도 그곳의 멍청이, 불구자, 나먹은 홀아비들과 붙어사는 연변의 조선족 여인들이 과다했다. 보계현 경내에만 해도 화룡, 훈춘, 안도, 연길 등지에서 왔다는 여인들이 100여명이 된다니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초롱’속에 갇혀 사는 그녀들은 성에 굶주릴 대로 굶주린 홀아비들의 봇둑 터진 성을 만족시켜주는 도구로 어린애를 ‘생산’하는 도구로 충당되고 있으며 ‘남편’의 사인재산으로 취급되며 육체와 심령을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다른 한 문장에서 조선족 여인들이 내지의 한족홀아비들한테 팔려가는 현상에 대해 메스를 들이댔다.     “내지에서 유괴되는 여인들 70% 이상은 ‘천진한’ 처녀들이지만 연변에서 유괴되는 조선족 여인 90% 이상은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노련한’ 가정부녀들이다. (중략) 외계와는 거의 담을 쌓고 오랫동안 농촌구석에만 맴돌면서 여태껏 고생을 달갑게 씹어 삼키며 모든 것을 남편과 웃어들게 순종하며 사심 없는 희생 속에서 자기존재를 망각하던 조선족가정부녀들이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많은 것을 보고 듣게 되었다. (중략) 남편이라는 사모를 쓰고 거드름만 피우며 일하기 싫어하고 하루건너 술에 퍼져 노세노세를 부르며 안해만 부려먹는 일부 조선족남성들의 열근성도 여인들이 집을 뛰쳐나가게 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현대사회에 어찌 중세기에 발생할법한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17세기 병자호란으로 전쟁에서 참담하게 패한 조선은 수많은 조선여성들을 청나라에 내주었다.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간 여성들은 우여곡절 끝에 귀향하고서도 환향녀(還鄕女, 화냥년)라는 오욕을 얻고 평생 “죄인”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얼음 위에서 가슴을 달치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흘러간 역사 속에서 두시대의 여성들이 “성노예”로 전락한 원인을 가리기란 진드기와 아주까리가 맞부딪힌 것처럼 구분하기 힘든 것이 아니다. 17세기에는 전쟁에 패해 어쩔 수 없이 조선여성들이 타향에 팔려갔지만 현대사회에서 조선족남성들은 저절로 자기의 아내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족 여성들의 운명은 “화냥년”들의 운명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홀아비에게 팔려간 현대 조선족 여성들은 아픈 과거로 가슴을 집어 뜯으면서 반절의 인간으로 살지 않았다.     이웃에 살던 옥자아주머니는 보계현에서 풀려난 뒤 중국 전역을 전전하면서 짠지장사로 창업자금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연길 지하상가에 갖춘 매장 세 개를 딸에게 물려주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장사익은 “화냥년”들의 타국에서의 슬픔을 “찔레꽃”이라는 노래에 담아 불러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슬픈 이 노래를 부르면서 조선족남성들을 원망하는 그런 비극은 다시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은 삼종지도를 운명으로 목석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억눌려 고갈된 무기력한 건초(乾草)가 아니라 억눌려 고갈되어 고사 직전에 메가톤급의 에너지를 생성하고 있었다.     우리의 조선족 여성들은 유교사상에 의해 형성된 고식성과 보수성을 뒤집고 왜곡되었거나 자조(自嘲)하던 상(像)을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리고 화려한 탈출에 성공하였다. 남은 것은 삼종지도의 고삐를 쥐고 연연해있는 남자들의 과감한 의식패턴에로의 탈출뿐이다.     자, 이제 우리의 농촌총각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껏 일해 부자가 되여 조선족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알콩달콩 깨알이 쏟아지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7    페교 댓글:  조회:686  추천:11  2010-05-21
수필 페 교     나는 국경절휴가를 이틀 앞두고 고향에 있는 외사촌동생네 아들 첫돌생일잔치 기별을 받았다. 나는 넉넉한 시간과 여유로운 마음을 지니고 고향행을 가지게 되였다. 아기가 첫돌생일상을 받는 날 이른 아침, 마을 사람들은 누구라 없이 잔치집에 모여왔다. 왜 그렇지 않으랴? 8년나마 고향마을에 아기첫돌생일잔치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고향마을을 둘러보았다. 나의 고향은 화룡시 덕화진 룡연촌이다. 두만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두만강따라 마을의 입구와 출구가 열려있다. 봄이면 눈덩이같은 오얏꽃이나 진붉은 찔레꽃이 피여나는 언덕을 배경으로 뉘엿한 뒤산자락에 자리한 오붓한 마을이다. 가을이면 뜨락의 노랗고 빨간 열매와 주택의 빨간 기와지붕이 어울려 운치가 돋보이고 마을앞 무연한 황금들판을 감싸고 두만강이 흐르는 성경속의 고장이다. 그런데 그 고향이 그 어느때보다 멀어져보이는 느낌을 주는것은 왜일가? 나는 궁리끝에 마을에서 애들의 모습을 볼수 없고 티없이 맑은 웃음소리를 들을수 없는것에서 답을 찾았다. 나는 이미 여러해전에 폐교된 마을학교를 찾아갔다.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 페인트칠이 싹 벗겨져나가 볼성사나운 학교지붕, 얼기설기 틈이 나 갈라지고 쪼그라든 학교정문의 학교간판, 어렴풋이 보이는 《룡연학교》란 활달한 글씨에서 지난날의 영화를 얼추 읽을수 있을뿐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여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때 20세기를 마무리하는 1999년 세밑에 룡연학교는 소리없이 페교되였다. 학생이 모두 4명밖에 남지 않은 학교는 뾰족한 해결책도 없이 바람앞의 초불처럼 힘없이 간들거리다 드디여 스러지고말았다. 내가 소햑교에 입학하던 1970년대초만 하여도 룡연학교는 학급마다 학생이 40명을 웃돌고 소학교 5년제와 초중 2년제를 갖춘 농촌학교치고는 규모 큰 학교였다. 나는 1학년때 공부하던 북쪽켠의 끝칸으로 발길을 향했다. 첫 수업시간이 한춘실선생님은 우리 나라의 위대한 수령 모주석에 대해 말씀하면서 그이의 어깨는 교실만큼도 넓다고 하였다. 범인(凡人)들의 어깨만 보아오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나는 첫 공부시간에 이 세상은 더없이 넓다는걸 어렴풋이 알게 되였다. 나는 4학년때 공부하던 교실에 들어가 내가 앉던 맨 앞줄의 걸상에 앉았다. 4학년교실은 학교건물의 제일 남쪽에 위치했는데 바깥전망이 가장 좋은 위치이다. 단조로운 시골생활에 시들해진 아이들에게 있어서 외계에 대한 지대한 갈망과 호기심은 신작로에 대한 남다른 주목에서 발로되였다. 일년에 몇번 정도로 영사기를 실은 달구지가 마을길에 나타나면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영화다》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이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강의시간을 망쳐먹어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며 얼굴에 잠시 엷은 미소까지 지으신다. 선생님이 똑같이 기쁜 날이 되기때문이다. 나는 교실을 떠나 운동장에 앉았다. 넓은 운동장이 좁다하게 사슴처럼 뛰놀던 어린시절이 그립다. 때로는 산에서 내려온 노루가 운동장에 뛰여들 때가 있었다. 그때면 노루를 붙잡느라 벅적이는 아이들로 운동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부룩송아지같은 시절이였다. 학교앞의 화단도 엉망이 된지 오래다. 백일홍, 다리야, 봉숭아, 코스모스가 여름내내 가을까지 서로 다투어 피여나고 바위틈에서 떠다 옮긴 네그루의 다복솔이 이채를 더해주던 앙증스러운 화단이였다. 내가 소햑교 4학년때 우리는 강기슭 백양나무를 베여서 여른 어깨로 하나하나 메여다 운동장 주위에 심었다. 뿌리도 없는 백양나무가 어찌 자라나싶었는데 우리가 늘 왼심을 쓰고 보살펴준 보람으로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 칠칠하게 자라 학교의 풍경에 이채를 더해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빈 그루터기만 남았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중기에만도 우리 마을은 삽상한 활력으로 넘치였다. 그 시기 학교주변에 병원, 상점, 구락부 등 덩치 큰 건물들이 일떠섰다. 학교에서는 재물공장도 꾸리였다. 아이들이 부뚜막의 재가루를 끌어다 학교에 바치는데 그 재가루를 물에 여러날 담그면 물은 적색으로 우러나온다. 우러난 물을 큰 가마에 붓고 센 불에 끓이면 물은 증발하고 적갈색 고체의 재물가루가 생산된다. 그때 어문교원으로 계시던 허봉남선생님이 재무공장을 노래하는 노래를 지으셨다. 《재물가마 끓는다. 벌렁벌렁 끓는다. 우리 학교 재물가마 벌렁벌렁 끓는다...》 재물가마 끓듯이 번창했던 마을이 경상도 세월의 긴 흐름속에서 한순간에 왔다가 사라져버린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1990년대 개혁개방의 소용돌이는 청승궂게도 마을의 젊은 처녀들을 싹쓸이해가고 덜먹총각들만 덩그라니 남겼으니 장가는 꿈에나 들 노릇이다. 아이들이 줄어드니 페교를 불러올수밖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덕화진내에서 몇년을 사이두고 간헐적으로 길지학교, 류동학교, 류신학교, 룡연학교가 페교되였다. 듣건대 구라파에서도 1960년대를 전후하여 농촌마을들에서 페교가 온역처럼 번져져나갔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마을교회가 문 닫으면 마을이 망하는줄 알았는데 1960년에 농촌학교가 련이어 페교되면서 비로소 농촌마을의 급속한 황페를 절감하였다. 1960년대 영국농촌에서 발생한 일이다. 도시 변두리에서 허드레일을 하면서 아이 여섯을 힘들게 키우던 위그든씨는 아이들을 거느리고 가까운 농촌마을을 찾아 려행을 떠났다. 마을의 고요를 깨뜨려버린 불청객들의 출현은 마을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해거름이 될무렵, 촌장이라는 어른이 위그든씨의 가족을 마을에서 가지는 성대한 파티에 초대하였다. 파티에 참가한 위그든씨는 기쁜 소식의 날벼락에 맞아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촌장이 위그든씨를 마을의 영예촌민으로 초대하여 좋은 일자리와 로후까지 보장해준다는 선포하였다. 조건은 단 하나, 위그든씨의 아이들이 무료로 마을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사연인즉 마을학교에 4명의 학생만 남게 되여 폐교의 운명을 맞게 되였는데 고마운 하느님이 한꺼번에 아이 여섯이나 보내왔으니 촌장과 마을사람들은 페교를 막기 위한 마지막 대책으로 위그든씨에게 희망을 걸었던것이다. 나도 그런 기적을 잠간 기대해보지만 부질없는 허황한 꿈이란걸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덕화진내에서 유일한 한족마을인 자그마한 차창촌이 우리와 같이 똑같은 사회변혁을 겪으면서 오히려 번창일로를 거듭한것이다. 소학교마저 없던 마을이 소학교, 초중까지 갖춘 큰 마을로 탈바꿈했다는것이다. 그들의 비결은 땅처럼 드팀없는 성격과 착실한 삶의 자세에 있다고 본다. 물론 더 좋은 삶을 위해 리향한 마을사람들을 탓할수만은 없는것이다. 내전국가인 소말리아에 돈벌이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조선족녀성이 있다. 《남들 모두 가보는 축국 한번 해보고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말리아란 국가가 내전으로 대낮에도 총소리가 콩볶듯할줄 몰랐지요. 브로커들의 감언리설에 깜빡 속히웠지요.》 사촌동생은 지금 농촌에서도 자기만 부지런하면 도시 월급족 못지않게 얼마든지 잘살수 잇는데 아이때문에 어쩔수 없이 고향을 뜨게 될것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아무런 대책없이 리향한 고향사람들이 또 다른 리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드디여 가정이 깨지는 비극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에 앞날이 근심스러울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른 민족과 다르다. 우리가 리향하면 우리는 선조들이 일구어놓은 삶의 터전을 잃고만다. 두말할것 없이 조선족의 삶의 터전은 150년이라는 개척의 력사를 갖고있는 농촌이다. 다행스럽거나 할가. 조선족은 긴 세월의 풍상에도 끄떡없이 지켜온 건실한 전통문화의 씨앗을 갖고잇다는 점이다. 한세기전 우리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늘제 한톨의 씨앗이 전부의 희망이였다면 지금 우리에겐 문화라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의 씨앗이 있다. 그 씨앗은 렬악한 환경에서도 높은 발아률과 왕성한 생명력을 가졌다. 이제 우리는 세계란 광활한 무대에 흩어져살면서 새롭게 민족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남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6    우리네 정서의 꽃 댓글:  조회:659  추천:12  2010-05-21
수필  우리네 정서의 꽃  장백산기슭에 자리잡은 연변은 8할이 산악으로서 수많은 종류의 꽃이 봄부터 여름까지 산과 들에 만발하여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장이다.     나는 산행을 하면서 꽃과 대화하기를 즐긴다. 광막한 하늘에서 미소한 존재로 보이는 별만큼이나 작고 이름 없는 꽃일지라도 꽃과 조용히 마주하고있노라면 조곤조곤한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무변광대한 우주의 신비처럼 다가와 생명의 유열을 느낀다.     연변을 꽃동네로 단장하는 그 많은 종류의 꽃중에서 우리네 정서를 가장 닮은 꽃은 무엇일가? 물론 연변의 주화(州花)가 진달래이고 진달래하면 조선족을 떠올리는것은 이미 중국에서 정석으로 굳어진지 오래 되였으니 진달래가 우리의 정서를 가장 닮은 꽃임에 틀림없을것이다. 하지만 과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은 시루떡처럼 복합적인 중층성격구조를 지녔음을 감안하면  우리네 정서를 닮은 꽃이 하나만 아닐것이라는 개연성을 떨쳐버릴수 없다.  하여 나는 민들레꽃, 사과배꽃을 진달래꽃과 더불어 우리네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꽃중의 삼총사가 아닐가는 생각을 가져본다.     민들레꽃은 노비신세가 되고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한(恨)을 품고 그리움이라는 사치품을 보따리에 싸들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와 노랗게 피여난 할머니 할아버지의 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팔뚝 같은 강냉이 이삭 달리고 미운 놈 기장밥 해준다는 간도의 “락토”에 터를 잡고 손이 갈퀴가 되여 갈뿌리 나무뿌리를 걷어내고 노란 민들레 부락을 일구었다.     민들레꽃은 수레바퀴에 짓뭉기고 과객에 짓밟혀도 체념으로 끝나는 무력에 빠지지 않고 억제로 인한 불안의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 민들레꽃은 한겨울, 시들어버린 잎은 땅우에 착 붙이고 뿌리는 칠흑 같은 땅밑에서 실타래로 엮여있다가 봄을 맞아 잎을 들어올리고 작은 꽃을 모락모락 피운다. 꽃이 이울면 산과 들, 돌너덜까지 햐얀 민들레씨를 곤곤히 퍼뜨리며 왕성한 생명력을 세상에 과시한다. 이처럼 민들레꽃은 백성에 비견되는 민초(民草)이다.     바람 세찬 광야에 피여나 삭막했던 겨울의 메마른 정서를 달래주고 싱그러운 새봄의 정취를 한껏 불러일으켜주는 진달래꽃은 또 어떠한가!     진달래꽃은 일명 두견으로 목구멍에서 피가 날 때까지 밤낮으로 운다는 진달래꽃의 전설을 보아도 분명 통한과 비원을 한몸에 지닌 꽃임에 틀림없다.     진달래꽃은 당신이 가진것 전부를 남김없이 자식에게 주고서도 더 주지 못해 로심초사한 부모님의 한(恨)이 침점하여 핀 꽃이며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분홍빛 희망이 서린 꽃이다. 꽃돗자리 차린 진달래꽃의 호연지기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고 드팀이 없다.     진달래꽃에서 낮에는 요염한 자색을 뽐내다가 저녁무렵이 되면 꽃잎이 반쯤 자지러지는 데이지의 약한 모습도, 청색으로 피였다가 연한 분홍색으로 변하는 수국의 변덕도 찾아볼수 없다. 겨울추위도 강건하게 이겼으니 이른봄 꽃샘추위야 무슨 대수랴! 응달쪽 소나무숲사이로 흰 백설을 떠이고 등불을 밝히듯 피여난 진달래에 마주하면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다.     진달래꽃의 향기는 목이 꺽 메도록 진동하는 라이라크향기처럼 부담스럽지 않다. 진달래꽃은 성정이 내밀하고 은근한 꽃으로 그 향기는 닿일듯 말듯, 있는듯 없는듯 오래동안 같이 하여도 질리지 않는다.     진달래꽃은 완만하고 둥근 형태의 산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가는 강물과 썩 잘 어울리는 꽃이다. 진달래가 피여나는 연변의 산과 들 어디에 가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돌아간듯 정다운것은 진달래꽃의 푸근함때문이리라.     봄이 벌써 허리가 잘려나가 가슴 한구석 못내 아쉬울 무렵이면 뒤동산에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려앉은듯 사과배꽃이 만개한다.     완만한 구릉으로 끝간데없이 펼쳐진 과수원 사과배꽃길, 아지랑이꽃이 하얗게 색을 맞춰 더욱 로맨틱한 사과배과수원길을 걷노라면 별유천지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은은하고 깨끗한 사과배꽃향기를 찾아 벌나비떼가 날아드는 봄잔치에 나그네의 가슴마저 설레인다.     봄에 꽃이 만개하는것은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한점의 미련도 없이 바람에 눈송이처럼 쏟아지는 사과배꽃의 향연을 본적 있는가. 하루밤새 조락하면서도 하늘하늘 춤추는 신명의 거동을 보았는가! 사과배꽃의 향연은 내 몸을 불살라 신명을 일으키는 조선족의 역동성이다.     봄의 희생과 여름의 가꿈이 있었으니 가을의 결실이 어찌 풍성하지 않겠는가! 사과배나무는 돌배나무에서 왔지만 사과배는 크기에서 돌배를 훨씬 초과한다. 사과배나무는 사과나무에서 왔지만 사과배는 맛의 여운이 사과보다 길고 아삭아삭한 맛이 일품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잡기에 족하다. 사과배는 조선족의 브랜드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지표이다. 사과배는 바로 대륙적 기질의 웅혼성과 반도의 온순하고 인후한 성질을 골고루 갖춘 조선족의 자화상이다. 조선족은 단순히 발생하는것과 되여지는것에 만족한것이 아니라 살겠다는 의욕과 창의성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다.     민들레꽃, 진달래꽃, 사과배꽃은 울금향의 화려함도, 장미꽃의 우아함도, 수국의 청초함도 지니지 않았다. 민들레꽃, 진달래꽃, 사과배꽃은 꽃집의 꽃바구니보다 고향의 뒤산이나 려염집 창턱의 수수한 병(甁)에 더 잘 어울리는 내밀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며 각개의 아름다움보다 뭉침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그들은 빛갈과 생김새와 향기가 구색을 맞추고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순리의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무심한 아름다움을 한몸에 지녀 항상 정겨울뿐이다.     나는 조선족의 심성을 꼭 빼닮은 민들레꽃, 진달래꽃, 사과배꽃을 사랑한다.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올올하고 모든 색의 근원으로 되는 민들레꽃의 노란색은 끈끈한 우리의 전통이요, 색갈의 사생아로 태여나 이 색과 저 색의 경계를 거침없이 허무는 진달래꽃의 연분홍색은 우리의 역동이요, 사과배꽃의 흰색은 희망을 배태하는 우리의 미래이다.     전통은 근간이고 미래는 좌표이며 역동은 가능성이다. 우리네 정서적뜰에 민들레꽃, 진달래꽃, 사과배꽃이 사시절 만개하고있으니 우리 조선족은 복 받은 민족임이 틀림없다!
5    아름다운 “락서” 1 댓글:  조회:624  추천:9  2010-05-21
수필아름다운 락서  1  락서란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데나 함부로 쓰는것 혹은 그 글자나 그림이라고 사전은 해석한다. 바꾸어말해서 락서는 “장난글씨”인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락서와의 전쟁을 치르고있다. 자고 깨나면 날마다 늘어나는 건물벽의 증건위조광고는 그야말로 몸에 돋은 소버짐처럼 두통거리이다. 좀처럼 지줘지지 않는 물감으로 씌여져서 그것을 지우려면 오히려 덧칠을 해야 하므로 도시의 악성종양은 점점 퍼져나간다.     이렇듯 락서는 아름다울수가 없는것이 통념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락서라면 공중화장실의 지저분한 3행시쯤으로 알고있다.     재작년말에 모아산등산로가 목책을 두른 나무계단으로 바뀌면서 안전을 위해 설치한 가드레일 즉 목책에 락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찍 새긴 락서들은 비바람에 바래지고 그 위에 또 새로운 락서들이 어김없이 새겨지고있으니 락서의 생명력은 끈질긴것 같다.     글이라면 광고지의 구석구석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 습관이 있는 나는 매번 모아산에 등산할 때면 가드레일에 새겨진 락서를 빼놓지 않고 읽는다. 물론 보는이의 눈을 찌프리게 하고 마음까지 구겨지게 하는 락서가 적지 않다. 곳곳에 씌여진 “○○○만세!” 혹은 “×년 ×월 일에 ○○○가 왔다갔음.”라는 따위의 락서들은 일푼의 가치조차 없는, 락서를 한자의 오만함과 방자함까지 엿보여 기분이 씁쓸해난다.     하지만 다닥다닥 나붙은 그런 락서중에는 북데기속의 낟알처럼 “알맹이”가 없는것은 아니다. 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는 락서가 그러하다. 이러한 락서들은 90년대초의 화장실락서와 큰 차이점을 보인다. 나는 그런 “알맹이”를 접할 때면 “락서문화”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락서에 웬 “문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분들도 많을것이다.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문화라는 단어는 품위 있는 학문이나 우아한 예술 정도로 각인되여있기때문이다. 짚고넘어갈것은 이런 락서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하나의 문화현상인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목책에 씌여진 락서의 내용을 미루어보아 락서를 한 임자들 대부분이 20대 좌우의 젊은이들이다. 락서는 남모르게 몰래하는 은밀한 행위이다. 자기과시욕이 강한 젊은이들은 락서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는것으로 보아 락서를 자신의 감정을 적라라하게 분출하는 공간으로 여기면서 락서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같은것을 느끼지 않는것 같다. 나는 그러한 락서들이 그들만의 정서와 생각을 표현한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락서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읽는다.      모아산 등산길의 목책에 써놓은 락서들중에서 락서에 그친 락서는 차치하고 “알맹이” 락서가운데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들은 어떤것일가? 달라진 삶의 세태에 걸맞게 지금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화두는 사랑이고 행복이다.    제스처가 돋보이게 하트모양을 이름사이에 넣은 “○○○♡○○○”나 “나 하루 빨리 내 반쪽 만나고싶어… ㅠㅠ 나 벌써 21살인데…”, “멋있는 남자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라는 락서를 보고는 허파에 바람이 찬것처럼 크드득크드득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방금 21살인데 벌써 21살이라니! 갓 20살을 넘기고서도 지천명의 나이를 산듯한 표현이 우스꽝스럽다. 소박한 문구에 담긴 아름다운 소망에는 유머까지 묻어나 모처럼 중년나그네의 마음까지 흥그럽게 한다. 자유롭게 련애할수 있고 사랑도 기침처럼 거침없이 뱉어내는 세태에 뭘 하느라 자기 반쪽을 찾지 못했을가? 홀연 그들의 신상이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학업에 열중하느라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한 젊은이라면 앞날이 촉망된다. 신체조건이나 가정형편으로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했다면 젊은이의 처지가 안쓰러워진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잊히랴. 나 또한 젊은 시절, 짝사랑하는 처녀의 환심을 사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보내던 불면의 밤은 얼마였던가.     세월이 흘러 세속이 많이 변한탓일가? “련애”라는 “련”자도 입에 뻥긋하지 못하던 지난 세기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락서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1970년대 말, 내가 초중2학년을 다니던 시절에 생긴 일이다. 내가 공부하던 시골학교에 초특급뉴스가 생겼다. 누군가 학교담벽에 만철이와 영숙이가 과수원에서 “뽀뽀”하는것을 보았다고 락서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만철이와 영숙이는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눈총에 서리 맞은 배추잎이 되여 목이 꺾였다. 그들은 결국 초중도 졸업하지 못한채 학교문을 나서야만 했다. “련애”는 벌겋게 달아오른 교실의 난로처럼 근접하기 어려웠거니와 길가에 나뒹구는 분변처럼 불결한것으로 알고있던 시절이였다.     작년 초여름의 어느날, 나는 모아산 등산길에 올랐다가 계단밑에 “지영아, 사랑해, 결혼해줘!”라는 문구가 적힌 색종이 포스터가 3백여장 나붙은것을 발견했다. 장엄한 행사 같은 젊은 남자의 프러포즈에 마음까지 숙연해지는 느낌이였다. 인적이 뜸한 밤에 허리를 한껏 굽히고 그 많은 포스터를 한장한장 계단밑에 붙여가며 행복의 밑그림을 그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해돋이가 시작될 무렵, 사랑하는 처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 포스터가 붙은 계단을 밟으며 깜짝 프러포즈를 할 때 처녀의 느낌은 어떠했을가! 그 장면을 외간나그네가 상상해보아도 프러포즈를 받은 처녀는 발뒤꿈치에서부터 찡한 감각이 솟구치며 당장 하늘에 날아갈듯한 기분이였으리라. 젊은이의 용기가 부럽고 랑만적인 무드를 연출한 젊은이의 아이디어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내 젊은 시절의 무드는 지나가는 동네강아지가 핥아먹었는지 싱겁기 그지없었다. 대학시절, 컴컴한 밤, 짝사랑하는 처녀를 숙소옆 담벽에 불러내다 시작과 끝이 한데 맞붙은 번개같은 프러포즈. “우리 련애하자.” “난 네가 마음에 안든다.” 짝사랑하던 녀자의 퇴박을 맞고 돌아서던 내 젊은 날의 초라한 초상이 지금도 선연하다.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초라한 모습을 감춰준 컴컴한 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꿈과 행복은 마음가짐에서 싹트고 열매를 맺는다. 꿈을 꿀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한 젊은 시절, 젊음은 넘쳐나는 꿈의 번열을 작은 가슴에 다 담을수 없어, 또는 더는 주체할수 없어 꿈과 행복에 대한 열망을 목책의 이리저리에 락서하게 되는가부다.     “시험지 다 잘 맞게 해주세요.”     얼마나 기특한 소원인가! 이 세상에 믿을것은 자기밖에 없는줄 잘 알면서도 평소에 갈고 닦은 학업에서 좋은 성적이 있기를 기원하는 젊은 학도의 바람에는 어찌 자기욕심만 얽혔다고 하랴. 가족과 고마운 주위사람들에 보답하고싶은 갸륵한 마음의 향기가 솔솔 풍겨오지 않는가.     “날 사랑하는 사람 모두 사랑합니다.”     “한 사람의 쾌락은 쾌락에 그치지만 두사람의 쾌락은 행복이다.”     이 세상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지심의 샘물을 길어올리는 펌프이며 청량한 산소를 뿜어내는 엽록소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아침산소처럼 싱그럽고 가을산소처럼 청신한 존재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재산을 툭툭 털어 바닥에 웅크려있는자를 보살펴주는 위인도 우러러보이지만 자기힘으로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범부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형님, 오빠 있으면 참 좋겠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재산가운데서 가장 값진 재산이 형제라는 속설이 있다. 핵가족화시대에 가장 모자라는것이 형제인듯싶다. 머나먼 인생의 뒤안길에 뒤처진 생각을 추스러주는 가위가 되고 미끄러지는 내리막길에 붙잡을수 있는 가지가 되여주는 형제가 있다면 인생은 결코 고독만은 아닐것이다.     등산로목책에는 젊은이들의 고뇌, 좌절을 담은 락서들도 적지 않다.     “난 뭐이래!”     지팽이라고 짚은 나무가 중하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리여 끊어질 때의 허무함, 하는 일마다 고배를 마셔온 젊은이의 고뇌가 엿보인다. 젊은 시절은 여린 심성만큼 실패에 민감한 시절이다. 고뇌는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듯 보이고 앞길은 맑은 물에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하여 망막에는 그늘이 비끼기가 일쑤다. 하지만 청춘의 가슴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요동치며 흘러오고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실패앞에서 세월이 약이라고 하기엔 우리의 청춘은 너무나 값진것이다.     “내가 받은 그 마음의 상처 그대로 돌려줄거야! 사람 넘 쉽게 보지마!”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이 젊은이는 글을 쓸 때 마음의 분노를 문자에 담았는지 획이 비뚤비뚤하고 거칠다. 복수의 진원지인 마음속에서 찬바람이 쌩― 불고있으니 손인들 떨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배반당하면서 입은 깊은 상처를 자기가 직접 조제한 마음의 용서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추한 상처에서는 계속하여 진물이 흐를것이다. 용서라는 비타민으로 행복을 가꾸는것만큼 아름다운 보복은 없을것이다.     조선어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한 락서도 간과하지 못할 현상이다. 인터넷시대가 도래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문자표기법에 준하지 않는것을 류행처럼 따르고있다.     “미서니랑 엄마랑 오끅미 마다매랑 오끄미 마다바이랑 와따가씀.”     이 락서에서는 “엄마”란 단어와 “랑”이란 토를 빼고는 전부 다 틀린 문자표기로 되여있다. 젊은 세대들의 조선어문자사용이 점점 황페화되여가고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요즘 시대는 아이디어 하나에 의해 승부의 세계가 엇갈린다. 락서문화는 락서만으로의 가치에 한정되지 않으면서 락서에 대한 시각도 바뀌고있다. 락서문화는 주류문화가 아닌 하위문화로서 변화, 창조 등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는데 사람들이 열광하고있는것이다. 아무렇게나 갈겨쓴 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락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굴하고있는것이다.     락서그림이나 락서문자의 다양한 이미지를 평범한 청바지와 셔츠, 운동화에 넣어 더 의미 있고 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있는가 하면 류동인구가 많은 곳의 카페나 음식점에서 “락서문화의 장”을 직접 조성해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있다.     포털사이트 구글에서는 사내 벽면을 모두 화이트보드로 꾸며놓아 직원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락서할수 있도록 했다. “락서속에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가 있다.”는 구글 창업자의 말대로 포털사이트 미국 본사에서는 10년째 락서경영을 하고있다.     최근에는 락서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여 관광명소로 발전시킨 곳도 있다. 한국 경북 포항시의 “락서 등대”라 불리우는 포항항동방파제 등대는 3년전까지 락서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였지만 “산발적인 락서를 한곳에 몰아넣어 보자”는 취지로 최근 2m짜리 락서판을 설치해 년평균 35만명이 들르는 관광명소로 거듭났으며 욕설이 란무했던 락서들이 락서판을 만든 후부터 소원, 사랑고백 등의 내용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디지털시대, 락서는 무궁한 창의력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으며 새로운 문화 코드로 떠오르고있다. 따라서 락서문화를 무작정 반대하고 밀어내기보다는 옳바른 락서문화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나가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것이다.
4    아름다운 “락서” 2 댓글:  조회:732  추천:22  2010-05-21
수필 아름다운 락서  2 락서란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데나 함부로 쓰는것 혹은 그 글자나 그림이라고 사전은 해석한다. 바꾸어말해서 락서는 “장난글씨”인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락서와의 전쟁을 치르고있다. 자고 깨나면 날마다 늘어나는 건물벽의 증건위조광고는 그야말로 몸에 돋은 소버짐처럼 두통거리이다. 좀처럼 지줘지지 않는 물감으로 씌여져서 그것을 지우려면 오히려 덧칠을 해야 하므로 도시의 악성종양은 점점 퍼져나간다.     이렇듯 락서는 아름다울수가 없는것이 통념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락서라면 공중화장실의 지저분한 3행시쯤으로 알고있다.     재작년말에 모아산등산로가 목책을 두른 나무계단으로 바뀌면서 안전을 위해 설치한 가드레일 즉 목책에 락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찍 새긴 락서들은 비바람에 바래지고 그 위에 또 새로운 락서들이 어김없이 새겨지고있으니 락서의 생명력은 끈질긴것 같다.     글이라면 광고지의 구석구석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 습관이 있는 나는 매번 모아산에 등산할 때면 가드레일에 새겨진 락서를 빼놓지 않고 읽는다. 물론 보는이의 눈을 찌프리게 하고 마음까지 구겨지게 하는 락서가 적지 않다. 곳곳에 씌여진 “○○○만세!” 혹은 “×년 ×월 일에 ○○○가 왔다갔음.”라는 따위의 락서들은 일푼의 가치조차 없는, 락서를 한자의 오만함과 방자함까지 엿보여 기분이 씁쓸해난다.     하지만 다닥다닥 나붙은 그런 락서중에는 북데기속의 낟알처럼 “알맹이”가 없는것은 아니다. 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는 락서가 그러하다. 이러한 락서들은 90년대초의 화장실락서와 큰 차이점을 보인다. 나는 그런 “알맹이”를 접할 때면 “락서문화”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락서에 웬 “문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분들도 많을것이다.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문화라는 단어는 품위 있는 학문이나 우아한 예술 정도로 각인되여있기때문이다. 짚고넘어갈것은 이런 락서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하나의 문화현상인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목책에 씌여진 락서의 내용을 미루어보아 락서를 한 임자들 대부분이 20대 좌우의 젊은이들이다. 락서는 남모르게 몰래하는 은밀한 행위이다. 자기과시욕이 강한 젊은이들은 락서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는것으로 보아 락서를 자신의 감정을 적라라하게 분출하는 공간으로 여기면서 락서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같은것을 느끼지 않는것 같다. 나는 그러한 락서들이 그들만의 정서와 생각을 표현한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락서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읽는다.      모아산 등산길의 목책에 써놓은 락서들중에서 락서에 그친 락서는 차치하고 “알맹이” 락서가운데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들은 어떤것일가? 달라진 삶의 세태에 걸맞게 지금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화두는 사랑이고 행복이다.    제스처가 돋보이게 하트모양을 이름사이에 넣은 “○○○♡○○○”나 “나 하루 빨리 내 반쪽 만나고싶어… ㅠㅠ 나 벌써 21살인데…”, “멋있는 남자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라는 락서를 보고는 허파에 바람이 찬것처럼 크드득크드득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방금 21살인데 벌써 21살이라니! 갓 20살을 넘기고서도 지천명의 나이를 산듯한 표현이 우스꽝스럽다. 소박한 문구에 담긴 아름다운 소망에는 유머까지 묻어나 모처럼 중년나그네의 마음까지 흥그럽게 한다. 자유롭게 련애할수 있고 사랑도 기침처럼 거침없이 뱉어내는 세태에 뭘 하느라 자기 반쪽을 찾지 못했을가? 홀연 그들의 신상이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학업에 열중하느라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한 젊은이라면 앞날이 촉망된다. 신체조건이나 가정형편으로 자기의 반쪽을 찾지 못했다면 젊은이의 처지가 안쓰러워진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잊히랴. 나 또한 젊은 시절, 짝사랑하는 처녀의 환심을 사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보내던 불면의 밤은 얼마였던가.     세월이 흘러 세속이 많이 변한탓일가? “련애”라는 “련”자도 입에 뻥긋하지 못하던 지난 세기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락서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1970년대 말, 내가 초중2학년을 다니던 시절에 생긴 일이다. 내가 공부하던 시골학교에 초특급뉴스가 생겼다. 누군가 학교담벽에 만철이와 영숙이가 과수원에서 “뽀뽀”하는것을 보았다고 락서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만철이와 영숙이는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눈총에 서리 맞은 배추잎이 되여 목이 꺾였다. 그들은 결국 초중도 졸업하지 못한채 학교문을 나서야만 했다. “련애”는 벌겋게 달아오른 교실의 난로처럼 근접하기 어려웠거니와 길가에 나뒹구는 분변처럼 불결한것으로 알고있던 시절이였다.     작년 초여름의 어느날, 나는 모아산 등산길에 올랐다가 계단밑에 “지영아, 사랑해, 결혼해줘!”라는 문구가 적힌 색종이 포스터가 3백여장 나붙은것을 발견했다. 장엄한 행사 같은 젊은 남자의 프러포즈에 마음까지 숙연해지는 느낌이였다. 인적이 뜸한 밤에 허리를 한껏 굽히고 그 많은 포스터를 한장한장 계단밑에 붙여가며 행복의 밑그림을 그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 해돋이가 시작될 무렵, 사랑하는 처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 포스터가 붙은 계단을 밟으며 깜짝 프러포즈를 할 때 처녀의 느낌은 어떠했을가! 그 장면을 외간나그네가 상상해보아도 프러포즈를 받은 처녀는 발뒤꿈치에서부터 찡한 감각이 솟구치며 당장 하늘에 날아갈듯한 기분이였으리라. 젊은이의 용기가 부럽고 랑만적인 무드를 연출한 젊은이의 아이디어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내 젊은 시절의 무드는 지나가는 동네강아지가 핥아먹었는지 싱겁기 그지없었다. 대학시절, 컴컴한 밤, 짝사랑하는 처녀를 숙소옆 담벽에 불러내다 시작과 끝이 한데 맞붙은 번개같은 프러포즈. “우리 련애하자.” “난 네가 마음에 안든다.” 짝사랑하던 녀자의 퇴박을 맞고 돌아서던 내 젊은 날의 초라한 초상이 지금도 선연하다.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초라한 모습을 감춰준 컴컴한 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꿈과 행복은 마음가짐에서 싹트고 열매를 맺는다. 꿈을 꿀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한 젊은 시절, 젊음은 넘쳐나는 꿈의 번열을 작은 가슴에 다 담을수 없어, 또는 더는 주체할수 없어 꿈과 행복에 대한 열망을 목책의 이리저리에 락서하게 되는가부다.     “시험지 다 잘 맞게 해주세요.”     얼마나 기특한 소원인가! 이 세상에 믿을것은 자기밖에 없는줄 잘 알면서도 평소에 갈고 닦은 학업에서 좋은 성적이 있기를 기원하는 젊은 학도의 바람에는 어찌 자기욕심만 얽혔다고 하랴. 가족과 고마운 주위사람들에 보답하고싶은 갸륵한 마음의 향기가 솔솔 풍겨오지 않는가.     “날 사랑하는 사람 모두 사랑합니다.”     “한 사람의 쾌락은 쾌락에 그치지만 두사람의 쾌락은 행복이다.”     이 세상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지심의 샘물을 길어올리는 펌프이며 청량한 산소를 뿜어내는 엽록소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아침산소처럼 싱그럽고 가을산소처럼 청신한 존재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재산을 툭툭 털어 바닥에 웅크려있는자를 보살펴주는 위인도 우러러보이지만 자기힘으로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범부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형님, 오빠 있으면 참 좋겠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재산가운데서 가장 값진 재산이 형제라는 속설이 있다. 핵가족화시대에 가장 모자라는것이 형제인듯싶다. 머나먼 인생의 뒤안길에 뒤처진 생각을 추스러주는 가위가 되고 미끄러지는 내리막길에 붙잡을수 있는 가지가 되여주는 형제가 있다면 인생은 결코 고독만은 아닐것이다.     등산로목책에는 젊은이들의 고뇌, 좌절을 담은 락서들도 적지 않다.     “난 뭐이래!”     지팽이라고 짚은 나무가 중하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리여 끊어질 때의 허무함, 하는 일마다 고배를 마셔온 젊은이의 고뇌가 엿보인다. 젊은 시절은 여린 심성만큼 실패에 민감한 시절이다. 고뇌는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운듯 보이고 앞길은 맑은 물에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하여 망막에는 그늘이 비끼기가 일쑤다. 하지만 청춘의 가슴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요동치며 흘러오고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실패앞에서 세월이 약이라고 하기엔 우리의 청춘은 너무나 값진것이다.     “내가 받은 그 마음의 상처 그대로 돌려줄거야! 사람 넘 쉽게 보지마!”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이 젊은이는 글을 쓸 때 마음의 분노를 문자에 담았는지 획이 비뚤비뚤하고 거칠다. 복수의 진원지인 마음속에서 찬바람이 쌩― 불고있으니 손인들 떨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배반당하면서 입은 깊은 상처를 자기가 직접 조제한 마음의 용서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추한 상처에서는 계속하여 진물이 흐를것이다. 용서라는 비타민으로 행복을 가꾸는것만큼 아름다운 보복은 없을것이다.     조선어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한 락서도 간과하지 못할 현상이다. 인터넷시대가 도래하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문자표기법에 준하지 않는것을 류행처럼 따르고있다.     “미서니랑 엄마랑 오끅미 마다매랑 오끄미 마다바이랑 와따가씀.”     이 락서에서는 “엄마”란 단어와 “랑”이란 토를 빼고는 전부 다 틀린 문자표기로 되여있다. 젊은 세대들의 조선어문자사용이 점점 황페화되여가고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요즘 시대는 아이디어 하나에 의해 승부의 세계가 엇갈린다. 락서문화는 락서만으로의 가치에 한정되지 않으면서 락서에 대한 시각도 바뀌고있다. 락서문화는 주류문화가 아닌 하위문화로서 변화, 창조 등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는데 사람들이 열광하고있는것이다. 아무렇게나 갈겨쓴 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락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굴하고있는것이다.     락서그림이나 락서문자의 다양한 이미지를 평범한 청바지와 셔츠, 운동화에 넣어 더 의미 있고 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있는가 하면 류동인구가 많은 곳의 카페나 음식점에서 “락서문화의 장”을 직접 조성해 고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있다.     포털사이트 구글에서는 사내 벽면을 모두 화이트보드로 꾸며놓아 직원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락서할수 있도록 했다. “락서속에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가 있다.”는 구글 창업자의 말대로 포털사이트 미국 본사에서는 10년째 락서경영을 하고있다.     최근에는 락서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여 관광명소로 발전시킨 곳도 있다. 한국 경북 포항시의 “락서 등대”라 불리우는 포항항동방파제 등대는 3년전까지 락서로 골머리를 앓던 곳이였지만 “산발적인 락서를 한곳에 몰아넣어 보자”는 취지로 최근 2m짜리 락서판을 설치해 년평균 35만명이 들르는 관광명소로 거듭났으며 욕설이 란무했던 락서들이 락서판을 만든 후부터 소원, 사랑고백 등의 내용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디지털시대, 락서는 무궁한 창의력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으며 새로운 문화 코드로 떠오르고있다. 따라서 락서문화를 무작정 반대하고 밀어내기보다는 옳바른 락서문화를 정착시키고 발전시켜나가는것이 바람직한 자세일것이다.
3    추천사 (2010.2.14~21) 댓글:  조회:727  추천:23  2010-02-17
문학닷컴 <금주의 문인> 추천사(2010.2.14~2010.2.21)   금주문인으로 최근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을 수상한 김인덕 수필가를 모셨다.   김인덕 수필가는 일찍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편집으로 사업하면서 다년간 방송드라마를 창작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예술세계>> 편집으로 사업하고 있다.   순수문학 작품보다는 예술인들을 취재하면서 논픽션창작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번에 해란강문학상을 수상한 수필 <<가을려행>>은 섬세한 필체로 우리 인생의 한 모퉁이를 조명하면서 우리의 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준 좋은 수필이라고 평심위원들은 평했다.   논픽션작가의 수필, 더 많은 독자들이 김인덕작가의 수필세계를 돌아볼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려고 금주문인으로 초대한다.     <문학닷컴> 편집국 2010.2.14
2    [수상소감] 해란강문학상을 받고서 (김인덕) 댓글:  조회:693  추천:24  2010-02-17
수상소감해란강문학상 시상식에서 행한 수상소감김인덕음력설전야에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여 감회가 깊습니다. 시, 논픽션 등 문학장르에서 여러번 수상하였지만 수필로 문학상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문학의 깊이도 모른채 종사한 직업상 겁도 없이 이런저런 문학장르의 글을 써왔습니다. 문화관에 근무하면서 무대작품을 위주로 가사나 소품을 썼고 방송국 문학부에 근무하면서 업무상 또 라지오방송드라마를 썼습니다. 몇년전부터는 주문련 《예술세계》에 근무하면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예술인들을 취재하면서 논픽션쓰기에 달라붙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시와, 수필을 주로 책임지고 편집하다보니 수필을 쓰게 된것입니다. 어떠한 문학작품을 쓰든지 모두 고역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이것저것 쓰던 와중에 이제는 한두가지 문학장르에 초점을 맞추고 문학창작에 정진하리라는 주위의 권고가 있던차 이번 수상의 의미는 클수밖에 없습니다. 수필을 찾아 떠난 려정에 뜻하지 않게 안겨준 해란강문학상이 앞으로 제 문학의 길에 든든한 리정표역할을 해주는 심상(心像)이 될것입니다.2010년 1월 22일시상식 사진보기
1    [수필] 가을려행 (김인덕) 댓글:  조회:921  추천:21  2010-02-17
수필가을려행김인덕      가을의 문턱이라는 립추(立秋)가 되였어도 한낮이면 선풍기를 돌려 더위를 식혀야 하니 가을이 아직 실감나지 않았다.     처서가 지나서도 밤에 창문을 열고 이불을 덥지 않고 잤더니 두번이나 몸살을 앓았다. 한낮의 혹서는 어느새 물러가고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고있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가을창문을 마주하고 커피 한잔 마시며 수필을 읽는것도 별멋이겠지만 나는 가을만 되면 공연히 옆구리가 허전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가을을 더 타는듯싶다. 송나라시인 구양수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는 양기가 상승하기때문에 녀자들이 봄을 타고 가을에는 음기가 상승하기때문에 남자들이 외롭고 쓸쓸해지며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된다고 한다. 봄은 잔잔한 보슬비를 머금은 서정시의 세계라면 가을은 인생의 묘리를 달관한 수필의 세계일것이다.     마침 휴일이라 혼자 가을산행을 떠나기로 했다. 슈퍼에 들러 등산배낭에 이것저것 챙겨 넣고 밖에 나오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하늘은 장인이 염색해놓은 비단천처럼 티끌 한점없이 파랗고 보석처럼 눈부시다. 바람이라는 화백이 푸른 비단천에 경쾌한 구름의 시를 쓴듯 얄포름한 구름이 천태만상이다. 여물대로 여물어 물기 한점 없이 호듯호듯 내리쬐는 해볕은 옥구슬처럼 부서져 온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거리에 나서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각양각색이다. 긴소매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름옷 차림 그대로 반소매에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다. 긴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안온한 성정의 사람들이고 짧은 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것과 과정같은것을 생략하는 도담하고 랑만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네거리에서 파란신호들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 여기저기에 눈길이 간다. 생계를 걱정해 경운기를 몰고 새벽시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듯한 솜옷차림의 농부는 갈 길이 급한지 몸을 앞으로 내밀고 파란신호등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옆 차도에 나란히 서있는 고급외제차 주인은 분홍와이셔츠 반소매옷차림으로 온몸을 푹신한 의자에 맡기고 음악을 듣는듯 느긋하게 핸들을 잡고 손가락으로 살랑살랑 박자를 친다.     한시간을 걸어 모아산숲에 들어서니 시원한 가을바람이 숲의 주인인듯 살갑게 반긴다. 여름내내 게으른 울음을 울던 매미소리가 맑고 야무지다. 언제나 바쁜이는 아무래도 다람쥐이다. 누가 눈길을 주건말건 여기저기 숲을 샅샅이 뒤지면서 한시도 쉴 틈이 없다. 온여름을 여름꽃과 살고나서 가을꽃을 찾아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이 홀가분하다. 다람쥐나 나비는 한생을 살면서 사는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하지만 서로를 부러워하거나 시비의 눈총을 보내지는 않는다. 하는 일은 서로 완연 다르지만 가을에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때문이다.     등을 맞대고 지천에 널려 있던 여름꽃들은 어느새 가뭇없이 사라지고 가을꽃이 적요한 숲에서 저만치 물러서 소리없이 피였다. 거리를 두고 피였으니 얼굴을 붉힐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여름꽃은 지쳐보이고 가을꽃은 유유자적해 보인다.     모아산정상으로 향하는 북쪽입구에서 두 년로한 할머니가 좌판을 벌리고 집에서 수확한 자두며 포도를 팔고있었다. 터밭채소를 뜯어다 시장구석에서 파는 촌부의 속셈만큼이나 큰욕심도 없는 두 할머니는 인심도 넉넉하다.     자두는 색갈, 크기, 맛도 서로 다르지만 농익지 않은것이 없다. 포도 역시 청포도와 검은 포도 두가지 색갈이지만 똑같이 달다. 같은 종류의 과일은 봄에는 똑같은 색갈의 꽃으로 피지만 가을에는 서로 다른 색갈과 사상(思想)의 열매로 거듭난다. 천자만홍의 과일은 나란히 과일난전에 올라 자신들의 사상을 고객에게 전한다. 청포도나 파란 자두처럼 덜익었다는 편견으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적도 없다.     두 할머니는 자기의 과일이 더 맛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소. 이제 더 사는것도 고생이오. 생긴것만큼 먹고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오.”     싸리나무를 배경으로 인생을 재단하는 두 할머니의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자잘한 분홍색, 자주색 싸리꽃이 눈에 띄였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여태 싸리나무꽃은 한가지 색갈로 여름에만 피는줄로 알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어릴 때 낯익도록 보고 자랐는데 너무 관심을 두지 않은탓이리라. 시골서 싸리나무는 참 많이 쓰였다. 칠칠한것들을 골라 쇠줄로 단단히 묶어 비자루를 만들어 마당을 쓸었고 광주리나 소쿠리를 결어 물건을 담는데 썼고 사시사철 아버지 지게살에도 싸리나무가 쓰였다. 또 싸리나무는 가정집 울바자가 되여 동네 강아지나 닭, 돼지가 드나들지 못하게 터밭을 지켜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울바자 싸리나무는 쉽게 마련할수 있는 아버지의 회초리가 되여 나를 지켜주었다.     인생을 살면서 나무를 보면 거목만 보았고 용도가 많은 나무임에도 싸리나무 같은 잡목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오만과 편견이 이런저런 착각을 가져왔고 착각속에서 나보다 다른것에 대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은 삶을 여태껏 살아온것 같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락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누구나 1년을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와 미래에 현실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40―50대 남성의 경우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클수밖에 없다.     천(千)의 얼굴 가을모습에서 서로 다른것에 대해 겸양하는 법을 배운다.  가을을 탄다는것은 상실의 아픔과 이루지 못한것에 대한 미련의 자기최면에 불과하다는것을 알것 같다. 이루지 못했다는것은 결국은 워낙 이룰수 없었던것에 대한 욕심이 아니겠는가.     이제 가을을 한해의 마감으로 생각하고 남은 시간을 덤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명년 가을이면 커피 한잔 마시며 차분한 마음으로 독서의 계절을 맞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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