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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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평론]김철호 현대동시에 대한 연구(김만석) 댓글:  조회:1881  추천:36  2008-09-03
김철호 현대동시에 대한 연구 김만석 ㅡ동시집《꽃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최근에 중국조선족 제3대 동시인 김철호는 자기의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동시집《꽃씨의 이야기》에는 화적동시 12수, 회화적동시 9수, 동화적인 상상동시 3수, 감각동시 6수, 상징동시 5수, 사색적인 동시 18수, 산문동시 1수 등 도합 55수가 수록되였다. 그 가운데서 감각동시, 상징동시, 사색적인 동시가 30수로 전반 동시집에서 60%를 차지한다. 이것은 김철호가 현대동시창작에 정진하고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필자는 김철호의 현대동시의 수준과 그 성과 및 그 문제점들을 밝히면서 김철호의 현대동시의 가치와 의의, 그리고 김철호동시인의 우리 동시단에서의 위치를 타진해보려 한다. 1 감각동시는 시의 뜻전달과 정서전달에 만족하는데 염오감을 느끼고 시어에서의 자극적인 감각작용을 유발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동시를 말한다. 이런 동시에는 시각적이미지동시, 청각적이미지동시, 후각적이미지동시, 미각적이지미동시, 촉각적이미지동시 등이 있다.김철호의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에는《산골물》,《눈.2》,《방울꽃》,《해님》, 《샘》,《가을하늘》,등 6수의 감각동시가 있다. 그가운데서 《산골물》과 《눈.2》, 《방울꽃》은 성과작이라고 본다. 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파랗게 진달래산 지날 때면 빨갛게 빨갛게 마을 앞 지날 때면 하얗게 하얗게 ㅡ《산골물》전문 이 동시에서 시적인 대상인 《산골물》에 대한 시각적형상화는 작자의 예술적상상에 의한 오묘한 처리로 이루어졌다.《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되고 《진달래산을 지날 때면》 빨갛게 되고 《마을 앞 지날 때면》 하얗게 된다는 여기에 작자의 개성적인 감각체험이 뒤따르고있다. 왜서 마을앞을 지날 때 《하얗게》 될가? 여기서 작자의 기발한 착상을 보아낼수가 있다. 그것은 백의동포라고 일컫는 우리 민족을 념두에 두고 력점 찍으며 고안해낸 시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바람 불면 달랑달랑 신나게 달랑달랑 달랑달랑 흔들릴뿐 방울소리 안 들린다 ㅡ《방울꽃》전문 여기서 작자는 청각적이미지를 창조하려 들었다.작자는 《방울꽃》이라는 이 꽃이름에 착안점을 두고 그것을 청각화하여 상상의 세계에서는 유성적으로 《달랑달랑》 흔들리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방울소리는 안들린다》는 무성적인 결과지간의 교착으로 《방울꽃》의 존재를 청각화하는 묘한 효과를 거두고있다. 쥐여보면 포슬 간지럽다 웃고 밟으면 뾰드득 아프다고 운다 ㅡ《눈.2》전문 여기서 시적대상《눈》을 촉각화하여 생동한 시적형상을 창조하였다. 눈을 쥐여 볼 때 거기서 눈이 《간지러움》을 느낀다는 오묘한 착상, 그리고 그에 따른 청각화한 웃음소리, 눈을 밟으면 그 눈이《아프다》고 하는 촉각적인 느낌과 그에 따른 청각화한 울음소리, 실로 절묘한 발견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간지럽다》와 《아프다》의 대조와《웃다》와 《운다》의 대조는 정적인 《눈》을 동적인 《눈》으로 만들어 풍만한 시적형상으로 승화시켰다. 김철호는 이처럼 시적대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오묘하게 표현하여 남다른 시적개성을 보여주고있다.감각동시를 창작할 때 감각체험에서 개성이 없고 그 표현에서 남다른 개성이 없으면 일반화에 그치게 되여 결국은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장난에 머무르게 된다. 동시 《해님》에서 보면 해가 아침에 뜰 때에 《부끄럽다》, 저녁에 질 때에 《미안하다》는 느낌은 까닭없는 느낌이며 또 그 표현이 일반적이고도 추상화되여 작자를 뒤따라 독자들이 그런 감각체험을 하기는 어렵게 되였다. 동시 《가을하늘》에서 보면 가을하늘이 《맑고/깊고(높고—필자의 생각)/푸르게》떠있다는 느낌은 시적대상에 대한 재현에 그쳤을뿐 여기에 그 어떤 개성적인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도의 느낌은 시인이 아니라도 다 느낄수가 있지 않겠는가! 동시 《샘》에서 보면《샘》에 대한 이른바 감각체험과정을 묘사하면서 지루하게 끌고 나왔다. 《간지러운 샘줄기가/손바닥을 올리 민다》, 《샘구멍이 알리지 않지만 / 손가락사이로 그냥/ 송골송골송송골…》이런 묘사에는 그 어떤 새로운 발견이 안받침되지 못하고있다. 때문에 감각동시 창작에서는 개성적인 감각체험과 그에 따르는 오묘한 시적표현, 그리고 거기에 개성적인 시적발견이 안받침되여야 성공할수 있다는것을 김철호는 자기의 동시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있다.                                                  2 상징동시는 시적주장의 적라라한 표출을 막기 위하여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은유시켜 국부적인 상징을 하거나 시 전반에 걸쳐 전반적인 상징을 하는 동시를 말한다. 김철호의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에는 《나비》,《공작새》, 《나팔꽃》, 《도라지꽃》, 《고추》등 5수의 상징동시가 있다.그 가운데서 《나비》, 《도라지꽃》은 성과작이라고 본다.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핀다 이것은 동시《나비》의 전문이다. 작자는 《나비》라는 시적대상을 《꽃》이라는 상관물로써 은유시켜 경제적인 시어로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나비는 가지 없이도, 뿌리 없이도 피는《노란꽃》, 《하얀꽃》이라고 한 여기서 김철호의 개성이 나타나며 동시의 오묘성이 표현된다. 특히 《꽃》이라는 말은 한마디 없이 동적인 나비의 형상을 노랗고 하얗게 핀다고 하여 독자들 눈앞에 나비를 꽃으로 떠올려준 여기서 김철호의 시적 재질이 엿보인다. 빵— 터지면 보라빛 오각별 산에 먼 산에 보라빛 오각별 이것은 동시《도라지꽃》 전문이다. 여기서 작자는《도라지꽃》이라는 이 시적대상을《보라빛 오각별》이라는 상관물을 찾아 은유처리를 함으로써 동시를 깔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빵ㅡ/ 터지면 / 보라빛 오각별》이라는데서 그 형상을 력동적으로 그려내여 동시의 생신성을 기하였다. 또《산ㅡ / 먼 산》으로 승화시켜 동시의 도약을 시도하면서 의도적으로 요원한 거리감을 펼쳐보였다. 상징동시 창작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처리하여야 한다. 우리는 흔히 《누나 입은 빨간 앵두》, 《순이 볼은 빨간 사과》에서처럼 보조관념은 언제나 원관념보다 더 구체화되고 더 형상화되며 더 아름답게 된다는것을 알고있다. 그리하여 상징동사를 쓸 때에는 보다 추상화된 원관념을 보다 구체화된 가시적인 형상으로 바꾸어놓는데 주의를 돌려야 한다. 야—아 오빠야! 저—기 큰 부채! 이것은 동시 《공작새》의 전문이다. 얼핏 보아도 새로운 추구가 엿보이는 동시이다. 시인은 시적대상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들과 함께 시적대상을 바라보려 한 여기에 남다른 의도가 있다. 그런데 《부채》와 《공작새》를 비겨 볼 때 《부채》의 아름다움이 《공작새》의 아름다움보다 어떠한가? 하여 이 동시는 처음 읽어볼 때는 《야, 거참 묘한데!》하다가 다시 읽어보면 상징에서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의 관계처리에서 예술성에 문제가 생겨 머리를 가로 젓게 된다.《나팔꽃》이라는 동시에서 보면 《나팔꽃》을 《집》으로 은유시킨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제기된다. 《나팔꽃》을 《큰집》으로 상상한 이것은 아이들의 흥취에 맞는 엉뚱한 상상이라고 할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의 관계처리에서의 예술성에 비추어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수가 없는것이다. 마지막 련에 가서 《이제 멀 붙잡고 더 오르나/ 아직도 새로 더 지어야겠는데》라고 한것은 진짜 군더더기를 덧붙인것으로 된다. 《울바자 따라서 올라와 보니/ 파란 하늘 빵끗》하고 그 앞 련에서 끝나도 이 시는 여운을 남기면서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거둘수가 있었다. 이것은 작자가 로파심을 가지고 자기가 할말을 다 하지 못한것 같아서 덧붙여놓은것이다. 우리는 독자들의 심미수준과 감상수준을 대담히 밀어주어야 한다. 이처럼 김철호는 자기의 창작실천을 통하여 상징동시창작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예술적관계처리와 상징동시에서의 함축적표현에서 주의할점을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해답해주었다.                                             3 사색적인 철리동시는 시적대상을 보고 사색을 굴리면서 거기에서 그 어떤 철리적인 시적발견을 하여 노래하는 동시를 말한다. 김철호의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에는 《참새》, 《이슬.1》, 《발자국》, 《아기는 예뻐》, 《엄마와 매》, 《친구》, 《집》, 《별찌》, 《작은 꿈》, 《천지물》, 《시내물》, 《봄바람》, 《채소의 성미》, 《모두다 절로》, 《바람소리》, 《하늘과 바다》, 《메아리》, 《눈.1》 등 18수로 그 수가 제일 많다. 그 가운데서 《이슬.1》, 《발자국》, 《아기는 예뻐》, 《친구》, 《작은 꿈》, 《천지물》, 《시내물》, 《하늘과 바다》 등 8수는 성과작이라고 본다. 사색적인 동시창작에서는 말그대로 소년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 대상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서 제아무리 철리적인 시적발견을 한다해도 독자대상의 실제를 떠나면 그것은 난해시로 전락되지 않을수가 없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하기에 사색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동시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것이 급선무로 제기된다. 그리고 이른바의 철리성도 아이들에게 걸맞는것으로 되여야 하지 아이들의 수준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송아지는 소의 아기 망아지는 말의 아기 강아지는 개의 아기 병아리는 닭의 아기 꽃순이는 아지미의 아기 아기는 다—아 예뻐             ㅡ《아기는 예뻐》전문 작자는 《아기》라는 이 시적대상을 놓고 동심적인 사유방식으로 사색하여 《아기는 다 예쁘다》는 결론을 내리고있는데 이것은 어른들로 놓고 보면 아주 평범하지만 아이들로 놓고 보면 아주 신기한 발견으로 된다. 그런데 점층적으로 내려오는 그 순서를 보면 《송아지ㅡ망아지ㅡ강아지ㅡ병아리》로 되여 큰것으로부터 작은것으로 내려왔다. 필자는 작은것으로부터 큰것의 순서로 내려오는것이 아이들의 인식습관에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병아리ㅡ강아지ㅡ망아지ㅡ송아지》로 내려오다가 만물의 령장인 인간 꽃순이에 치달아 오르면 더 좋을것 같다. 엄마 없어도 병아리는 무섭지 않다 강아지가 동무해주기에 엄마 없어도 강아지는 심심하지 않다 송아지가 동무해주기에 엄마 없어도 송아지는 외롭지 않다 태식이가 동무해주기에 ㅡ《친구》전문 여기서 작자는 《친구》의 중요성을 병아리와 강아지, 강아지와 송아지, 송아지와 태식의 관계로써 련쇄적이면서도 점층적으로 된 형상으로써 설득력있게 설명하면서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철리적인 도리를 도출해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 그대로 찍혀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가 뒤돌아 따라가보면 쬐꼬만 아기발자국 예쁘게 찍혀있을거야 인간세강에서 몇년간 살아온 아이가 자기의 지나온 나날을 추억해 보다가 《쬐꼬만 아기발자국/예쁘게 찍혀있겠지》라는 훌륭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실로 동심적인 시적인 발견으로 된다. 이것은 아이로 말하면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 아닐수가 없다. 바로 김철호는 이런 아이들을 대변하면서 그들 정도의 사색으로 그들 정도의 《놀라운》발견을 하고있는것이다 . 건너 골짜기에서 흘러온 이야기와 이웃 골짜기에서 흘러온 이야기가 다리목에서 만나 더 큰 이야기 주고 받으면서 더 큰 이야기 만들러 간다  ㅡ《시내물》전문 이 동시는 시내물을 《이야기》로 변형시킨 상징수법을 쓰면서 《더 큰 이야기 주고 받으며/ 더 큰 이야기 만들러 간다》는 시적발견에 치달아 올랐다. 작자는 아이들의 상상수준에 토대하여 구체적인 시내물을 추상적인 《이야기》로 둔갑시켜 남다른 시적경지에 껑충 뛰여올랐다. 이것은 김철호의 상상수준과 시적기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색적인 동시를 쓸 때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본다.가)   아이들을 너무 나지리 보면서 아이들 일반이 너나없이 다 아는 그런 정도의 사색과 발견은 삼가해야 한다. 김철호의 동시 《참새》에서의 《작아도/ 조놈이/ 엄마새란다》, 《집》에서의 《엄마 아빠 없어서/ 서먹서먹(썰렁---필자의 생각)해지는 나의 집》, 《달》에서의 《밤이 무서워/ 잔뜩 겁 먹고/ 나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 다닌다》와 같은것은 시적발견에서의 가치문제가 제기된다. 이런데 주의하지 않으면 동시를 아이들의 시로 취급하고 그저 아이들에게 영합하면서 아이들의 자아표현에로 나아가기 쉽게 된다. 사실 동시는 아이들의 시인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시라는데 주의하여야 한다. 나)  사색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집요한 사색을 한곬으로 몰고 가면서 그에 걸맞는 시적인 결론에 치달아올라 아이들의 찬탄을 자아내게 하여야 한다. 동시 《별찌》에서 《왜 별찌는 별똥이라지?》하고 물음을 제기하며 내려오다가 《별찌는 예쁜 꽃이야/ 향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예쁜 꽃이다》고 했는데 이것은 너무나 중뿔나고 탈선된 결론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다) 사색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독자들을 대담히 믿고 작자의 《로파심》을 철저히 떨어버려야 한다. 동시 《채소의 성미》는 작자가 자기가 노린 점을 다 말하지 않은것 같아서 자기의 주장을 재다시 강조한 례로 된다. 《하얀 마을은 맵고》, 《파란 오이는 시원하고》, 《빨간 도마도는 달콤하다》고 다 말해놓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또다시 《마늘은/성깔이/사납구나//오이는 맘씨가 순하구나// 도마도는 속이 예쁘구나》하고 쓸데없는 결론을 내리고있다.이 결론이 독자들의 상상밖으로 기묘하다면 몰라도 독자들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있다. 특히 , , 는 결론은 진일보 검토해보아야 할것들이다. 라) 사색적인 동시에서 론리를 전개할수는 있지만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인과관계를 따지면 동시로서의 함축성이 파괴된다는것을 알아야 하겠다. 동시 《하늘과 바다》는 괜찮은 동시이다. 하늘과 바다의 관계를 펼쳐가면서 《바다에선 고기가 살고》《하늘에선 별이 살고》해놓고 하늘과 바다가 맞붙은 곳에서는 《별과 고기/재밌게/ 정답게 / 함께 살고있을거야》라고 한것은 무척이나 기발한 생각이다. 하지만 같은 수법으로 쓴 《꽃씨의 이야기》는 하늘에 사는별, 땅에 사는 꽃과 아이의 관계를 론리적으로 복잡한 인과관계를 따지면서 너무나도 지루하게 피루었기에 동시의 함축성이 파괴되고 어딘가 언어장난을 한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최근에 김철호는 이런 동시에 흥취를 가지고 벌써 몇수 써낸걸로 필자는 알고있다. 이것은 김철호의 동시풍격과 배치되는것이라고 필자는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다. 이처럼 김철호는 사색적인 동시를 기중 많이 쓰면서 좋은 작품도 창작했지만 시인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사색적인 동시를 창작할 때에 삼가해야 할 문제들도 적잖게 제공해주고있다. 결론 이상의 분석에서 보면 김철호의 현대동시 30수가운데서 감각동시에서 3수, 상징동시에서 2수, 사색적인 동시에서 8수, 도합 13수가 성과작으로 되는바, 43%가 성공한것으로 된다. 그 성공비률이 퍼그나 높다고 할수가 있다. 김철호는 동시의 대상을 동년시기의 아이들을 중점으로 설정한 동시인이다. 하여 그의 동시에서는 소년을 대상으로 한 동시는 거의 찾아볼수가 없고 유년을 대상으로 한 동시도 얼마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하여 김철호는 진짜 동심을 대변한 동시인이라고 할수 있다. 동심이란 쉬운 말로 아이들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의 일반을 대표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천진하고 명랑하며 깨끗하고 구김살없는 마음을 말한다. 동시는 바로 이런 동심을 노래하게 되는데 그것도 아이들을 위하여 성인들이 쓰는 문학의 한 형태로 된다.김철호는 동심적인 시각으로 시적대상을 보면서 동심적인 상상으로 사색을 굴려 동심적인 리해와 인식을 가져오면서 동심적인 정서를 차분히 담은 동시를 썼다. 지난날 우리는 회화적인 동시, 화적인 동시, 동화적인 상상동시를 위주로 쓰면서 시적내용을 운률에 맞추고 감탄사 《아》, 《오》를 련발하면서 이른바 동시를 시적대상을 노래하는 시로 리해했었다. 하여 동시의 예술성을 정형적인 운률조성으로 리해하는 페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김철호는 외재률에 의한 정형률을 철저히 타파하고 순수 내재률에 의한 자유동시를 추구하였기에 그의 동시에서는 정형률로 된 동시를 한수도 찾아볼수가 없다. 김철호는 시적형상화에서 현대동시의 표현기법을 동심에 려과시켜 대담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면서 현대동시창작에 뛰여들었다. 김철호는 시어구사에서 감각적인 추구, 형상창조에서의 상징적인 은유처리, 시적인 주제에서의 동심적인 철리추구 등 수단으로 자기의 동시를 사색적인 동시로 떠올릴수가 있었다. 하여 김철호의 동시는 깜찍하고 깔끔하며 오묘하고 재미나는 자기의 풍격을 과시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의 동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점은 마땅히 지적해야 하겠다. 첫째, 동시에는 동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만 있는것이 아니라 유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와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가 있다는것을 알아야 하겠다. 물론 김철호는 동년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서 자기의 장끼를 보여주고 또 자기의 풍격을 보여주고있지만 동시에 대한 리해를 좀 넓혀야 하겠다. 둘째, 동시창작도 창조적인 사업인것만큼 새로운 창조를 선행시켜야 한다.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시적발견에서 비롯된다.하여 어디까지나 새로운 시적발견을 해야 하지 남들이 이미 발견한것을 들고 나오거나 또 독자대상을 너무 어리궂게 보면서 일반적인것에 동심을 가미하는것으로써 시적발견을 대체하려 한다거나 《유치한》동심을 그대로 재현하는것으로써 시적발견에서 득점하려 해서는 아니될줄로 안다. 셋째, 동심에 대한 리해를 좀더 깊이 할 필요가 있다. 동심에는 시대적인 락인이 찍히게 되는만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동심을 추구해야 한다. 한국의 리재철교수는 《동심을 세상을 모르는 유치한 어린이들의 마음일수는 없다. 진짜 동심은 인간과 력사의 현실을 깊이 인식한 다음에 비로소 찾아진 가장 착하고 참된 삶의 길을 가지려는 사람만이 가질수 있는 마음의 상태》(“아동문학평론”제79호 26~27페지)라고 말했다. 동심에 대한 리해를 제대로 못하면 동시를 언어장난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독자대상의 동심을 나지리 보면서 그에 영합하려고 필요 이상의 설명이거나 론리를 따지면서 말장난을 하는것은 마땅히 삼가하여야 할바이다. 모두어 보면 김철호는 중국조선족 동시단의 제3대 동시인으로 동년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동시를 전문 창작하는 동시인이다. 김철호는 현대동시표현기법을 동심에 려과시켜 대담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동시창작에 효과적으로 받아들여 일정한 성과를 올린 재간있는 동시인이다. 김철호는 자기의 동시에서 깜찍하고 깔끔하며 오묘하고 재미나는 동시풍격을 이미 보이기 시작한 동시인으로 돋보이고있다. 끝으로 김철호동시인은 자기의 동시풍격을 확고히 수립하면서 우리 동시혁신에서 보다 큰 공헌을 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바이다. 2002.5. 《중국조선족 아동문학작가작품론》(연변인민출판사)에서  
49    [동시]빈자리(김철호) 댓글:  조회:1803  추천:40  2008-09-02
빈자리 김철호 영이 책상 비여있다 자꾸 눈길이 간다 선생님 눈길도 가끔 영이 책상에 가 멎는다 애들 눈길도 영이 책상으로 날아간다 책상 하나 빈것이 이렇게 대단한줄 몰랐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애가 없는것이 앞니 하나 빠진것처럼 밉다 《아동세계》2005년 제8기
48    [동시]락수물(김철호) 댓글:  조회:1974  추천:30  2008-09-02
락수물 김철호 똑똑똑... 하나, 둘, 셋... 처마우에서 누군가 구슬을 떨궈준다 ㅡ이젠 많이 모아졌겠지? ㅡ몰라, 다 어데 갔는지 하나도 안보여! 똑똑똑... 하나, 둘, 셋... 그래도 처마우에서 그냥 구슬이 떨어진다 《아동세계》2005년 제8기
47    [동시]아기 손수건(김철호) 댓글:  조회:1674  추천:41  2008-09-02
아기 손수건 김철호 손도 닦고 코도 닦고 아빠 얼굴도 닦고 할배 발도 닦고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6    [동시]꽈리(김철호) 댓글:  조회:1482  추천:27  2008-09-02
꽈 리 김철호 하얀 씨앗 다 도적맞히고 꽈르르 꽈르르 슬프게 운다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5    [동시]바람사절(김철호) 댓글:  조회:1675  추천:25  2008-09-02
바람사절 김철호 남쪽에는 봄나라가 있나봐 봄나라 봄바람사절은 언제나 남쪽에서 불어오니까 북쪽에는 가을나라가 있나봐 가을나라 갈바람사절은 언제나 북쪽에서 불어오니까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4    [동시]해살의 모습(김철호) 댓글:  조회:1813  추천:26  2008-09-02
해살의 모습 김철호 숲에 가야 해살의 모습 볼수 있다 나무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금빛 비단천 줄줄이 줄줄이 걸려있는 예쁜 비단천 와! 해살의 모습은 이런것이였구나!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3    [동시]순(김철호) 댓글:  조회:1725  추천:30  2008-09-02
순 김철호 봄바람 간지르고 봄볕이 만져주고 강변길 아이들 목청 높이 부르고 하니 새순은 참지 못하고 끝내 파란 아기손 쏘옥 내밀었다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2    [동시]살구나무(김철호) 댓글:  조회:1544  추천:35  2008-09-02
살구나무 김철호 필가말가 필가말가 강아지야 짖지 말아 필가말가 필가말가 꼬꼬댁아 깝치 말아 아침에 깨여보니 대궐하나 지었구나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41    [평론]착각이 낳은 아름다운 동시(최룡관) 댓글:  조회:1928  추천:70  2008-09-01
  착각이 낳은 아름다운 동시     ㅡ김철호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 단상 최룡관 요즘 한국의 아동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김철호 시인의 동시집 《꽃씨의 이야기》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읽어보노라니 《엄마 기차가 기여가는데 저렇게 빠른데 서서 달려가면 비행기보다 더 빠르겠지요》라고 종알대는 어린 아이의 천진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기여가는 기차, 서서 가는 기차, 비행기보다 더 빠른 기차...이러한 어린이 언어들은 틀리는 것 같으면서도 웃음보를 터뜨리는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는 아이의 총명하고 영특한 기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언어들은 어른들이 듣기에는 착각인 것 같지만 아이들의 사유체계나 언어세계에서는 매우 당당한 언어들로 된다. 김철호 시인는 《꽃씨의 이야기》에서 이런 동심의 세계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측면으로 착각을 리용하여 아름다운 동시를 직조해 내고 있다. 시각적 착각 사람에게는 다섯가지 감각기관이 있는데 제일 다채롭고 풍부하게 감수하는 기관이 아마 눈일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채롭고 아름답고 혈육 같고 형제 같은 동화의 세계이다. 천진란만한 저학년 애들의 심미세계에 침잠한 김철호 시인은 아이들의 눈길로 사물을 관찰하면서 착각으로 동시를 창작하고 있다. 가지 없이도 노랗게 피고 뿌리 없이도 하얗게 핀다 -《나비》 전문 한굽이 돌 때마다 집 한 채 짓는다 노란 나비 이사와 살라고 하얀 집 한 채 꿀벌이도 이사와 살라고 또 한 채 하얗게 이번에 잠자리네 새집을 하얗게 도-옹-글 울바자 따라 올라와 보니 파란 하늘 빵긋 이제 뭘 붙잡고 더 오르나 아직도 새집 더 지어야겠는데 -《나팔꽃》전문 《나비》와 《나팔꽃》두 동시를 옮겨보았다. 두편의 동시의 매력은 시각적 착각에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나비를 꽃으로 설정하였는데 노란 나비는 노란 꽃, 하얀 나비는 하얀 꽃이다. 꽃은 꽃인데 가지도 뿌리도 없는 곳에 피여난 꽃이다. 실은 시각적 착각에 의하여 노란 나비는 노란 꽃으로 다시 태여나고 하얀 나비는 하얀 꽃으로 다시 태여난다. 《나팔꽃》에서는 나팔꽃이 《집》으로 둔갑한다. 하얗고 동그란 집으로 . 그 집은 나비네 집이고 꿀벌이네 집이고 잠자리네 집이다. 울바자끝까지 다 올라온 나팔꽃은 《아직도 새집을 지어야겠는데》하고 근심한다. 그렇다. 아직도 등에네 집이 없고 파리네 집이 없고 모기네 집이 없다. 또 메뚜기며 새들이며 반디불들이 집을 찾을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나비를 꽃이라 하고 나팔꽃을 집이라 하면 통하지 않지만 동시에서는 스스럼 없이 통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의 특권이며 매력인 것이다. 이러한 특권과 매력은 시각적인 착각으로 이룩된것이라고 하리라. 청각적 착각 시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하는것이라고 시인과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동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할 때만이 그 동시를 발견이 있다하고 생동하고 감화력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김완기씨는《시를 쓰려면 귀는 청진기가 되어야 하고 눈은 현미경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시를 쓰는 김철호 시인의 귀는 청진기가 되고 눈은 현미경이 되어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사물을 보아내고 있다. 급한 사연이 있어서 급히 떠난 개울물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산굽이를 에-돌며 개울 개울 개울 개울 빨간 단풍잎 편지 하나 급히 나르느라 남 다 자는 밤에도 그냥 개울 개울 개울이네 동네를 잊을가봐 개울 개울 주소를 외우며 쉴새 없이 가고 간다 개울 개울 개울... -《개울물》전문 미워 미워 하니 미워 미워 한다 나빠 나빠 하니 나빠 나빠 한다 한마디도 지려하지 않고 콕콕 쏘아대는 심술꾸러기 내 동생 같구나 -《메아리》전문 일상적인 경우에 우리들은 개울물을 도란도란, 돌돌 혹은 졸졸 소리내며 흐른다고 한다. 그런데 김철호 시인은 개울개울 흐른다고 한다.참 재미 있는 새로운 발상이다. 의성어를 새롭게 다듬어 본 자세가 멋지다. 개울물이 개울개울 급하게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은 《단풍잎 편지》를 나르는 개울물이 개울이네 동네로 보내는 편지주소를 잊을가봐개울개울 외우며 가는 중얼거림이란다. 어찌 보면 엉터리 같지만 아이들의 생각으로 말하면 그럴법도 하다. 이런 아이들의 착각을 구사하여 낸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수 없다. 김철호 시인은 동심에 발을 튼튼히 붙이고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깊은 우물에서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어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물을 드레박으로 길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메아리》도 그렇다.사람의 소리를 받아외우는 메아리에서 심술이 많은 동생을 떠올리고 있다. 과시 동심에 푸욱 젖은 시인의 발상이라겠다. 김철호 시인은 청각적 착각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노리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능란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겠다. 동적 착각 세상의 사물의 움직임을 새로운 눈길로 고찰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동시를 재미있게 쓰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김철호 시인은 사물의 움직임을 틀리게 보면서 아름다운 동시를 쓰고 있다. 시인의 이런 시각적 착각이 어떻게 아름다운 동시가 되고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는 것은 김철호 시인의 동시를 흠상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받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물 움직임의 다양성은 늘 김시인의 눈길을 끌어가고 있으며 시인의 흥분점을 마련하고 있다. 김시인은 흥미진진하게 사물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꿀벌이 꽃에서 꿀을 캐듯이 움직임에서 시를 캐내고 있다. 시인이 동적 착각으로 쓴 시는 꿀벌이 꽃속에 들어갔다가 묻혀내온 향기인 것이 아니라 빚어내온 달콤한 꿀이다. 봄바람은 하늘물 길어다 산에 산에 푸른 물 들인다 봄바람은 하늘 물 길어다 들에 들에 푸른 물 들인다 -《봄바람》전문 함박눈은 솜처럼 펑펑 하늘나라 목화밭 풍년들었나 싸락눈은 쌀처럼 솔솔 하늘 나라 정미소 구멍 뚫렸나 -《눈.3》전문 상기한 두편 동시에는 공동성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봄바람과 눈의 움직임에 대한 착각이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산과 들이 푸르러지게 마련인데 김시인은 그 원인을 봄바람이 하늘물을 길어다 산마다에 푸른 물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들마다에 푸른 물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함박눈이 내리는 것은 하늘나라에 목화풍년이 들었는데 목화송이들이 땅에 떨어진다고 착각하고 싸락눈이 내리는 것은 하늘의 정미소에서 찧은 쌀이 정미소 구멍을 통하여 솔솔 새여나온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은 미운 착각으로 안겨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고운 것으로 안겨온다는 것이다. 환상적이고 유희같은 이런 착각에 의하여 씌여진 동시의 매력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한국의 저명한 시인 김춘수는 《시의 리해와 작법》이라는 저서에서 《상상은 리상적인 짝을 찾아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철호 시인은 《꽃씨의 이야기》에서 착각을 리용하여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이동시키면서 깜찍하게 리상적인 짝을 찾아서 동시를 쓰고 있다. 이외에도 미각적인 착각을 리용하여 쓴 동시가 있는데 《채소의 성미》 한편뿐이여서 분석하지 않는다.《꽃씨의 이야기》의 주선률은 《작은 꿈》인 것 같다. 《지붕》도 《벽》도 《문》도 없는 집을 짓고 모든 사물이 단란하게 살아가고저 한다. 이 주선률이 동시의 편편마다에서 숨쉬고 있어 시인의 착각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승화되였는지도 모른다.  
40    [소설]봄비속의 얼굴(김철호) 댓글:  조회:1822  추천:46  2008-09-01
《모병위속래(母病危速來)》 급전을 받은 나는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마냥 마구 떨었다. 차창밖에서는 솜털같은 촘촘한 비발이 끝없이 내리기만 하였다. 나는 그때처럼 어머니가 그리워본적은 없었다. 어서 어머니곁으로 가고싶었다. 희백색 하늘, 고요히 내리는 봄비, 문발처럼 드리운 그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자애로운 웃음, 순한 눈길이 눈앞에 환히 안겨오는 것 같았다. 어느 모로 보나 어머니는 수수한 살림집 부녀 그대로였다. 흰 무명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입고 머리엔 흰 수건을 치고 젖은 손이 마를새 없는 그런 녀인이였다. 광복전 절골에 가서 금광일을 하던 아버지는 마을의 한 부농의 딸과 눈이 맞았는데 그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선후로 우리 다섯남매를 낳았다. 나의 우로 녀자애를 하나 낳았는데 조산으로 잃고 나도 팔삭둥이로 태여났다. 형제들가운데서 내가 제일 약골이였다. 희초리같은 아래다리며 아롱아롱한 가슴팍엔 살점이라곤 없었다.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동생들 몰래 나의 손에 쥐여주군 하였다. 마디가 굵직하고 키도 큰 동생 준도는 동네애들과 싸울 때면 늘 나의 역성을 들어주었다. 어느땐가 강에 나가 썰매를 타다가 준도와 나는 얼음구멍에 빠져 덜덜 이를 쪼으며 집에 들어섰다. 어머니는 준도를 욕질해서 옷을 갈아입게 하고는 나의 언손을 자신의 젖가슴에 품어주었다. 《이새끼 준철아, 넌 엄마 아들이고 난 아니야! 난 다리밑에서 주어온 애래!》 준도는 퍽 컸을 때까지도 이렇게 나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한번은 준도가 지나가는 자전거에 치여 무릎과 허리를 상했다. 내가 울면서 준도를 업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낯이 파랗게 질리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만 휭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얼마후 어머니는 자적거쟁이를 집에 끌고 와서 준도앞에서 잘못을 빌게 했다. 그 일이 있은후부터 어머니에 대한 준도의 생각은 퍽 달라졌다. 하루는 길가에서 대정금을 주은 나는 기뻐서 깡충깡충 뛰여서 집으로 돌아 왔다. 나는 동생들앞에서 대정금줄을 탱탱 치면서 시뚝해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대정금이 어디에서 났는가고 물었다. 내가 곧이곧대로 대자 어머니는 종래로 있어본적 없는 눈길로 나를 쏘아보는것이였다. 《넌 어느때부터 이런 나쁜 애가 됐니? 동생들앞에서 그런 본을 보여, 엉! 다른 사람이 떨군걸 주어오는 것은 훔친거나 같아!》 내가 머리를 푹 떨구고 아무 말도 없자 어머니는 불호령을 내렸다. 《냉큼 제자리에 갔다놓고 못올가! 맞아죽기전에!》 나는 아수운대로 대정금을 원래의 지리에 가져다놓았다. 준도는 뻐드렁이를 드러내고 처음으로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형, 엄만 공평해!》 소학교 4학년때였을 것이다. 준도아래로 녀동생 하나가 있었는데도 어머니 배는 또 남산만했다. 어머니는 그런 몸으로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의 림시공으로 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을 하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저녁밥까지 다해놓고 일하러 갔다. 점심밥을 가마안에 넣고 저녁밥은 높은 덕대우에 얹어놓았다. 우리는 하학한후 가마안의 밥을 나누어먹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 밥은 우리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금방 밥을 먹었는데도 돌아앉으면 꼬르륵 하고 배속에서 개구리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우리 집은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집에서는 솔껍질을 벗겨다 떡을 해먹거나 풀뿌리를 파서 삶아먹고있었다. 해거름때만 되면 우리 형제는 배가 고파서 맥없이 방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이제나 저제나 하고 어머니가 퇴근하여 올것만 기다리였다. 그러다가도 정지문이 삐익 열리고 육중한 어머니의 배가 들어오면 환성을 질렀다. 그날도 연기만 지꿎게 기여 다니는 골목길을 목빠지게 바라보다 못해 준도가 나에게 밥을 먹자고 하면서 턱으로 높은 덕대우를 가리켰다. 내가 머리를 살래살래 젓자 준도는 흥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바깥에 나가 큼직한 목데기를 주어들고 왔다. 그것을 벽밑에 놓고 덕대의 밥그릇을 내리우려고 하였다. 준도는 발끝을 들고 밥그릇에 손을 댔다. 순간 밥그릇이 준도의 머리를 치면서 땅에 떨어졌다. 새빨간 수수밥이 한구들 널렸다. 덩지가 큰 밥덩이는 구들우에서 데굴데굴 굴러대기까지 하였다. 혼비백산한 우리 형제는 구둘에 널린 밥을 주어서 그릇에 담았다. 준도는 애물이였다. 밥그릇에 맞아 이마에 닭알이 생겼는데도 대수로와 하지 않고 히죽거리며 구둘에 널린 밥을 연신 입으로 주어넣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우리 책망하지 않았다. 밥이 눈자리나게 축갔는데도 모르는체하면서 우리들 그릇에 골고루 퍼주고는 살며시 바깥으로 나가는것이였다. 이슥해도 어머니가 들어오지 않으니 준도와 나는 슬그머니 나가보았다. 헛간에서 인기척소리가 나기에 살며시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쪼크리고 앉아 뭔가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우리들 몰래 무얼 먹는다고 생각하자 나는 불만스러운 생각에 앞서 일종 야릇한 감정이 가슴에서 굼실거렸다. 무엇이길래 우리 몰래 저렇게 먹을가? 우리는 슬그머니 어머니의 등뒤에 가 섰다. 비술나무껍질! 순간 준도와 나의 눈을 허공에서 부딪쳤다. 몸을 돌린 어머니는 우리를 발견하고 일어섰다. 어머니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옷자락을 툭툭 털고는 정겹게 우리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엄마, 다신 밥을 훔쳐먹지 알겠어!》 준도는 어머니의 무릎을 끌어앉았다. 나도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머니는 우리가 기특한 듯 웃음을 머금고 한품에 안아주었다. 《남들이 다 먹으니 나도 좀 입질해본것이지 배고파서가 아니야.》 그후부터 우리는 다시는 밥을 훔쳐먹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몰래 어머니가 계속하여 대식품을 먹고있는줄을 누구도 몰랐다. 한번은 기름타는 냄새에 자다 깨여나보니 부엌아궁이에서 비쳐나오는 불빛에 어머니의 흐트러진 머리그림자가 벽에 비치여 언뜰거렸다. 나는 힐끔 부엌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불을 끄집어내여 아궁이앞에 모아놓고 남비로 한창 밀가루떡을 굽고있었다. 종시 잠이 오지 않았다. 떡도 먹고싶었거니와 어머니의 소행도 불만스러웠다. 밤대거리를 마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상을 챙겨주었다. 아버지는 군소리없이 구운 떡을 먹었다. (흥, 아버지에게는 구운 떡! 우린 매일 뻘건 밥!) 《준철아, 안자니? 안자면 입질해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인차 자그만치 떡을 떼여 나에게 주었다. 그래도 좋았다. 준도랑 복순이랑 저렇게 세상 모르고 잘 때 한입이라도 먹으니 여북 좋은가! 그런데 꼼지락거리다 뒤이어 복순이도 일어나 앉았다. 아버지는 준도와 복순이에게도 주라면서 떡을 밀어냈다. 《이 철없는것들이 언제면 셈이 들가?》 떡을 얻어먹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불만은 우리들 가슴에 맺혀있었다. 하루는 밤중이 되도록 아버지가 퇴근하지 않자 어머니는 금방 태여난 준태를 업고 도시락을 챙겨갖고 나와 준도를 앞세우고 아버지의 직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용수직장에서 두만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일을 보고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강가에 나가서 일하고있었다. 두만강으로부터 곧추 물탕크 있는데까지 기다란 물도랑이 나있었다. 물도랑옆에 화토불을 피워놓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우리가 낯익은 아저씨에게 알은체를 하자 그 아저씨는 물도랑을 향해 《어이-》 하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한창 가슴치는 물도랑에 들어가서 성에장을 몰아내고있었다. 힐끔 이쪽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조금후 기슭으로 나왔다. 고무옷을 입은 어버지는 이발을 맞쪼았는데 입술은 새파랗게 색이 죽어있었다. 누군가 술고뿌를 주자 아버지는 반나마 담겨져있는 술을 단꺼번에 쑥 마셔버렸다.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물도랑의 성에장을 밀어내는 용도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성에장을 밀어내지 안는다면 물도랑이 얼어붙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공장에서 수요하는 물을 공급못한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숭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해 아버지는 영광스럽게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어머니의 눈가엔 자랑과 행복감이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어머니는 다정한 이웃 녀인들이 마실을 오면 부끄럼을 타는 소녀마냥 짐짓 낯을 붉히면서 살그머니 자랑하군 했다. 《우리 집에선 당원이 됐다우. 그러니 우린 당원가속인거유.》 아버지는 애당초 집일을 할줄 몰랐다. 그러나 우린 어머니가 그것으로 하여 불만의 소릴 하는걸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톱질, 대패질, 망치질을 곧잘 했다. 지어는 벽을 바르로 구둘도 뜯어고치였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의견을 보일라치면 어머니는 우리를 타일렀다. 《아버진 당원이니 공장일에 힘다해야 한다. 집일은 그저 잔손질뿐이니 내가 해도 되는거다. 너희들도 이렇게 방조해주니 얼마나 헐하니!》 그렇게 금슬이 좋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만 다투었다. 그것은 내가 열서너살 먹었을 때 일일 것이다. 외지에서 살던 할머니가 갑자기 찾아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반겨맞았지만 아버지의 눈길은 심술스러웠다. 어느날 저녁 나는 어버지와 어머니가 강변뚝밑에 마주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누가 효자랄 것 같소? 누가? 어느때는 뿌리치고 가던 것이 죽게 되니 기여든단말이요. 어머니가 언제 한번 나를 아들로 생각한적 있었소? 우리가 금방 살림을 꾸렸을 때에도 늦지 않았댔지. 그러나 어머닌 못들은체했단말이요.》 《글세 아무리 어머니가 잘못했어도 우린 다 어머니의 자식이 아닌가요? 이번에 우리 집에 온 것은 마지막 길을 가자고 온것인데 이렇게 대하면 어떻게 해요?》 《어떻긴 뭐가 어떻다고?》 《남들이 웃어요. 당원가속에서 그런다고 남들이 웃는단말이예요. 그리고 어머니도 고생이야 막심하셨지 않아요? 이 자리 저 자리 옮기면서 숱한...》 어머니가 흐느껴 울었다. 어버지는 쭈크리고 앉더니 성냥을 드윽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성냥불빛에 비치는 아버지의 얼굴은 참으로 무서웠다. 눈살이 잔뜩 찌프러지고 얼굴의 근육은 모두 지렁이처럼 일어나서 꿈틀거리고있었다. 며칠이고 깎지 않은 수염은 꺼칠했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툰 원인을 알았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첫돌이 되던 해에 쏘련으로 돈벌러떠나간 할아버지를 8년동안이나 기다리다 못해 아버지를 버리고 재가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밥을 빌어먹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후 할머니를 각박하게 대하진 않았다. 할머니가 세상뜨던 해에 어머니는 림시공일을 잠시 그만 두었다. 어머니는 매일 할머니의 속옷을 빨아입혔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밥도 한술두술 떠서 대접했다. 그때 할머니의 몸에는 무슨 이가 그렇게도 많았는지 모를 일이였다. 어머니는 매일 이를 잡아주었다. 화로불을 웃방에 들여다놓고 어머니는 할머니의 머리털을 번지면서 보리알같은 이를 주어 화로에 넣으면 툭툭 하고 이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어머니가 한번이라도 낯을 찡그리거나 심술스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제 식솔만 해도 한구둘인데 나까지 애를 먹이니 손부리 터질거야. 일찌감치 죽어버려야지. 왜 죽자 해도 죽어지지 않누.》 할머니가 목메인 소리로 이렇게 말할라치면 어머니는 인자스럽게 웃으시며 할머니를 위로하시는것이였다. 《어머니 근심말아요. 맘놓고 오래오래 사시기만 하면 돼요.》 아, 어머니! 그렇게도 맘좋은 어머니가 무슨 급병이기에 전보를 다... 나는 전보지의 글자가 혹시 잘못 찍히지 않았나고 의심스레 다시다시 펼쳐보기도 하고 정신이 돌지 않았는가고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다. 기차마저 나를 놀려주는지 아주 느릿느릿 달리는 것 같았다. 《차가 연착된건 아집니까?》 《연착되다니요? 아주 정시인데요.》 《그런데 왜 이제야?》 《호호호 급하신 모양이군요.》 렬차원처녀는 곱게 눈을 할겼다. 나는 머리를 싸쥐였다. 상해복단대학의 입학통지서를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셨다. 그러나 그때 어머니의 눈엔 물기가 고여있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도 못오겠구나. 공부가 바쁘겠는데 급하다고 널 부르겠니. 이 에미가 죽었다는 기별이 가도 와선 안돼. 그저 공부만 잘해야 돼. 알겠니?》 아, 어머닌 그때 모든걸 알고계신것이였구나. 시골에서 상해라고 하니 오금을 쓰지 못하고 히히닥거렸지만 어머닌 언녕 짐작하고계셨구나. 어머니는 우릴 얼마나 진속으로 사랑해왔는가! 그러나 자식은 어시의 속을 다는 몰랐다. 지금도 어머니에게 욕을 주던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몸서리난다. 《문화대혁명》때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받은 그런 재난이 우리 집에도 들이닥쳤다. 처음에는 어머니 성분으로 하여 말썽을 들었다. 우리들은 이렇게 자라면서도 어머니가 착취계급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을 감감 모르고있었댔다. 홍위병조직에 들려고 신청서를 쓰면서 어머니의 출신과 사회관계를 밝혀야 했다. 준도와 나는 다 중학교 1학년생이였다. 나는 학교에 한해 늦게 붙어 준도와 같이 다니였던 것이다. 우리는 둘 다 홍위병조직에 들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말이 무겁던 어머니는 아예 벙어리가 된 듯 종일 가도록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가사만 보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어떻게나 괘씸했던지 배에 태워 두만강물에 띄워보냈으면 하는 심정이였다. 준도가 더했다. 그는 어머니앞에서까지도 착취계급이라고 욕했다. 자신의 몸에도 착치계급의 피가 섞였으니 두만강물에 뛰여들어 씻고씻는대도 그 더러운 것을 씻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외가집 조상들을 물귀신이 될 두상들이라고 쌍욕을 했다. 참 이상했다. 그렇게도 맘좋고 착하신 어머니가 부농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되지만 어머닌 평생 한가지 노래밖에 부를줄 몰랐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아침 밝아왔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오막살이가 아니라 팔간기와집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자란 기생충이라니. 《엄만 빈하중농 피를 얼마나 빨아먹었어?》 어느날 준도가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는 낯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썩 후에야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난 그때 죽고만싶었다. 자식의 앞길을 망쳐먹고싶은 어시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 너의 외할아버는 구두쇠라 해도 유명한 구두쇠였다. 돈이라 하면 눈에 불을 켰지. 땅도 사고 소도 장만하고 소작도 주었다. 그래도 우린 이밥 한번 배를 두드리면서 먹어보지 못했단다. 믿어지지 않을거다. 난 발가락이 삐죽이 나오는 신을 신고 다녔단다. 너의 외할아버지가 여간 미웠으면 집을 뛰쳐나와 너의 아버지께 왔겠니. 불쌍한 언니가 너의 외할아버지의 핍박에 못이겨 맘에 없는 사내한테 시집을 갔었지. 나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아우성치며 울던 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구나. 지금은 어느곳에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이모가 남조선 어디에서 잘살고있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퍼졌다. 어머니는 가두에 끌려나가 비판까지 받았다. 1967년 유명한《k.8.2무단적사건》때 아버지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도 없었다. 목석처럼 시체를 마주보던 그 암담한 눈길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아버지를 입관하여 수레에 싣고 떠나는데도 어머니는 우두커니 앉아서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러던 것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후부터 어머니는 쩍하면 실신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진 것이 세월이고 빠른 것 역시 세월이다. 세월속에서 아이들은 몰라보게 커가고 어머니는 무섭게 늙어갔다. 어머니의 성분과 사회관계로 하여 남들이 다 가는 공장, 학교를 가지 못하고 우리 형제는 농촌으로 내려갔다. 신체가 남달리 좋은 준도는 해마다 군대모집때면 미칠 지경이였다. 다행히 아버지문데가 풀려서 우리 형제중 한사람이 아버지대신으로 공장에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체질이 약한 나를 데려가려 하였으나 나는 준도를 떠밀어보냈다. 해마다 민공판으로 떠돌면서 잔등에 묻은 모래가 떨어질 새 없고 코등이 늘 딩딩 부어다니는 꼬락서니가 꼭 일을 칠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시험제도가 회복되자 나는 생산대 비준을 얻고 집에 가 복습하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가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이마의 잔주름을 활짝 펴면서 대견스레 웃는 것이 나의 눈에는 함박꽃보다도 더 예뻐보였다. 《대학에 가거들랑 꼭 1등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마치 내가 대학시험에 합격이라도 된 듯이 이렇게 부탁하는것이였다. 공장에 들어가서 나무껍질 벗기는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일이 매우 고되였으나 언제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있었다. 밤대거리때에도 낮에 쉬지 않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술병을 사들였다. 어머니는 술공장과 계약을 맺고 날마다 술병을 주민들 손에서 사들여서는 술공장에 넘겨주어 웃돈을 벌었던 것이다. 얼마 더 벌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는 그 일을 아주 열성스레 했다. 우리가 말리면 어머니는 《이제 준철이가 대학에 가고 또 복순이도 인차 대학시험을 치겠는데 돈이 있어야 뒤를 대줄게 아니냐?》라고 하였다. 평시에 푼돈도 쪼개쓰던 어머니가 통이 커져서 매일 닭알과 고기를 사다간 공부를 하는 나한테 입에 맞는 반찬을 해주었다. 어머니의 장부책은 아주 볼만했다. 성냥 한갑 값으로부터 동네집 아무개 딸이 설에 와서 세배를 올렸을 때 세배값을 주었다는 50전 돈도 장부에 올라있었다. 그런데 요사이것은 하나도 장부에 오르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요사이처럼 손이 크게 돈을 써보신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름찬 돈수자를 장부에 올리지 못하고있는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의 사망비가 나와서 저축한 돈도 있다고 어머니가 쩍하면 외우지만 그 돈을 바라고 통이 크게 돈을 쓸 어머니가 아닌 것이다. 어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장부책을 보다가 웃었다. 《아이, 별거 다 끄집어내가지구 그랜다. 가져오너라. 인젠 아궁이에 넣어야지.》 《건 왜요?》 《세월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낡은 문서를 해서 어따 쓰겠니?》 《그래도 이건 없애지 말아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장부책 하나를 대충 펼쳐보다가 한곳에 눈길을 멈췄다. 11월 3일 사탕 한봉지. 준철. 《엄마, 이건 뭐예요?》 《그건... 오, 그날 네가 공량 바치러 오지 않았댔나?》 나는 멍하니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농촌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소수레를 몰고 시내로 공량바치러 왔다가 집에 잠간 들렸을 때였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은 솜외투에 새끼줄을 질끈 동인 내가 가없어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새 낯이 까맣게 타고 수염도 꺼실꺼실 돋은 것이 장해보여 그랬는지 나의 터부룩한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은 떨렸다. 길에다 소수레를 세워놓고 들어왔기에 인차 떠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옷섶을 헤치고 이리저리 뭔가 찾다가 조금 기다리라면서 옆집으로 나가는것이였다. 나도 바깥으로 나왔다. 《돈 한 1원 없소?》 《50전밖에 없는데요.》 《그거라도 주오. 인차 갚아줄게.》 옆집에서 이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참, 엄마두.) 어머니가 나오자 나는 아니꼽게 어머니를 쏘아보다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전 가겠어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쥉쥉 걸어갔다. 시내를 거의 벗어나갈가 했을 때 어머니가 뒤따라 왔다. 어머니는 뭘가 종이에 싼 것을 나의 호주머니에 밀어넣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둘렀던 털수건을 나의 목에 돌려주는것이였다. 거기엔 둬냥되는 사탕알이 들어있었다. 나는 한알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때는 그 감정을 미처 다 몰랐는데 지금 장부책을 보니 어쩐지 가슴이 찢어지는것만 같았다. 나는 희망대로 대학에 붙었고 이듬해 복순이도 중등사범학교로 갔다. 후에 막내동생 준태는 중학교에서 직접 군대에 나갔다. 준도도 자기의 뜻대로 자동차를 몰고 있다. 열손가락에 어느 손가락인들 깨물면 아프지 않으랴만 부모들이란 다같이 자식을 귀여워하나 다같이 믿는건 아닌 것 같다. 어머니는 언제나 준도로 하여 머리가 세여진다고 나에게 말했다. 준도는 폭주가였다. 독한 배갈을 컵들이를 했다. 담배를 피워도 고급담배밖에 피울줄 몰랐다. 준도는 공가의 일을 해주면서도 담배나 술을 주머니속에 쑤셔넣어주지 않으면 심술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의 공구함속에는 언제나 술과 담배가 빌 새 없었다. 한가지 좋은 습관이라면 공자만은 봉투채로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와 늘 다퉜다. 돈을 헤프게 쓴다고 닦아세우군 했다. 네가 한때 먹어치우는 돈이면 준철이는 한달 생활소비를 하겠다고 핀찬을 했다. 그럴 때면 준도는 사내라면 좀 통이 커야지 형처럼 속이 비좁고서야 대학을 나와도 큰일 못할거라고 비웃군 한다는것이였다. 준도의 친구는 거개가 도박을 놀기 좋아했다. 그러나 준도만은 도박을 놀지 않는다고들 했다. 우연히 한번 도박판에 끼여들었다가 한달 로임을 몽땅 잃고말았다고 한다. 그것을 안 어머니는 어찌도 성을 내셨는지 범같은 준도마저도 혼쌀을 먹었다. 어머니는 나와 복순이에게 달마다 소비돈을 부쳐보냈다. 나에겐 30원, 복순에겐 15원씩 부쳤다. 복순이는 사범학교이기에 국가에서 식비를 대주었던 것이다. 나는 송금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귀전에서 나무껍질 벗기는 도끼질소리며 병사리가 부딪치는 장그랑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가슴이 쩌릿해났다. 어머니가 고생하는걸 생각하니 돈 한푼이라도 헤프게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달마다 5원씩 모았다가 방학때면 꼭 어머니의 옷감을 떼가군 했다. 그런데 지난 겨울방학이였다. 어느날 복순이는 고방구석에 엎디여 쿨쩍쿨쩍 울고있었다. 나는 급기야 복순이를 잡아일으키면서 웬 일인가고 따졌다. 복순인 말없이 보꾸레미를 내앞에 밀어놓는것이였다. 헤쳐보니 거기엔 어머니의 속옷들이 들어있었다. 깨끗이 빤 옷들이였다. 찬찬히 보니 깁고 깁지 않은것이란 없었다. 지어는 빤쯔마저 여얿곳이나 기운 자리가 있었다. 《오빠, 녀자들에겐 빤쯔가... 오빤 몰라요. 지금 이렇게 빤wM마저 기워입은 녀자가 어디에 있어요? 우린 거미새끼들이예요. 어머니가 이러는줄도 모르고... 오빠고 나고 다 못났어요! 못났어요!》 복순이는 목이 메여 말도 잘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물리개옷을 입으면 입었지 자기절로 새옷을 사는 습관이 없었다. 그날 우리 오누이는 백화점에 나가서 어머니의 속벌을 몽땅 사왔다. 어머니는 우리를 몹시 나무람했다. 그럴게면 책 한권이라도 더 사서 읽거나 학용품이라도 더 사서 쓸것이자 왜 이렇게 못나게 노는가고 푸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주는 사랑을 모르는체하면서 외면했으나 그 눈속에 담겨져있는 물방울을 우린 언녕 보아냈다. 개학하여 돌아갈 때 어머니는 역에까지 나와 바랬다. 별수럽게 나의 얼굴을 애잔한 빛을 담은 눈길로 바라보는것이였다. 어머니의 눈동자엔 뭔가 하많은 것이 담겨져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뭔가 나에게 말하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끝내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떻게 편치 않기에... 그렇게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차에서 내린 나는 허둥지둥 집마당에 들어섰다. 집은 조용했다. 필경 사람들이 있을텐데 왜 이리도 조용할가? 나는 벌컥 문을 떼고 들어섰다. 집식구들이 다 모여있었다. 복순이도 군대에 간 준태도 이미 와있었다. 나의 출현에 저마다 놀람을 금치 못했다. 복순이의 입술은 세워놓은 닭알처럼 고정되여버렸고 준도의 눈섭은 제비날개마냥 파닥거렸다. 《어머닌?》 나는 제 목소리 같지 않게 부르짖었다. 《오빠!》 《형님!》 복순이와 준태는 나의 품에 와락 안기면서 엉엉 울어댔다. 《형님!》 준도는 무릎을 꿇고 앉더니 머리를 땅바닥에다 맞쪼으면서 엉엉 울었다. 《대체 어머닌 어디 갔어? 엉?》 그제야 옆집에서 내가 온줄 알고 우르르 달려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형제들에게 부축되여 어머니 묘앞까지 왔으나 난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덤을 치며 목놓아울었다. 《어머니 이게 웬 일이세요? 말 한마디 없이 자식을 저버리다니요... 어머닌 뭔가 저하고 말씀하려 하셨는데... 깨여나세요. 아들이 왔어요. 준철이 왔어요. 준철이 왔어요!》 어머니는 영영 돌아가셨다. 3일분의 공자를 받으려고 《5.1》절에 일을 나가셨다가 와이야줄이 끊어지며 굴러떨어지는 통나무에 치여 잘못되였던것이다. 병원에 가서 6시간만에 숨졌는데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우리 형제는 련 며칠 울음으로 보냈다. 동네에서와 친척되는분들이 련이어 와서 동무해주면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우리를 달랬으나 우린 앞이 막막하여 살것 같지 못했다. 어머니의 존재가 이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우린 비로소 느꼈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농궤를 열었다. 복순이가 궤속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여놓았다. 우리가 방학이면 사오군 한 옷감들이 그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지난 방학때 복순이와 함께 사왔던 속벌도 다치지 않은대로 있었다. 맨밑에 보자기 네 개가 있었는데 보자기마다에 꼭같은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우리 네 오누이들의 첫날옷감들이였다. 그리고 옷감속에는 500원짜리 저금통장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모두 우리 네 오누이의 이름으로 저금한것이였다. 우리 네 오누이는 또다시 목놓아 울었다. 현금 2천원과 첫날옷감, 이것은 어머니의 피땀이였다. 어머니는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고스란히 우리에게 바쳤다. 우리의 미래에 바쳤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5년철이 지났다. 고향산기슭에 자그마한 봉분 하나를 남겨놓고 그저 소리없이 가셨다. 눈녹은 언덕에 파란 풀잎이 봄꿈에 녹아있다. 그속에 어머니께서 잠드시고 있다. 영원히, 영원히... 연변대학문학반졸업작품집《그녀의 세계》1987년 연변인민출판사
39    [기행문]상경룡천부(김철호) 댓글:  조회:2108  추천:47  2008-09-01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38    [기행문]두만강에 단풍물결 너넘실(김철호) 댓글:  조회:2051  추천:43  2008-09-01
ㅡ두만강상류 가을산책 단풍의 선경대 9월 28일 오후, 화룡시 선경대에 도착한 취재팀은 바위와 단풍 그리고 푸른 솔이 어루러져 한결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있는 기이한 경관을 바라보면서 환성을 터쳤다. 칠색단저고리를 받쳐입은 고려봉과 금계봉은 다정한 자매마냥 마주서서 예쁨을 비기고있는데 해발 921메터의 독수봉은 누런 갑옷을 떨쳐입은 장수마냥 기세등등하다.가래나무, 버드나무, 개암나무의 단풍은 이미 걷히고 참나무가 한창 불타고있었다. 그속에 섞여있는 고로쇠나무는 새빨갛게 익어 만산의 일점홍으로 유포하다. 칠성암 오른쪽비탈을 꺾어도니 산으로 오르는 통로가 나진다. 독야청청한 고솔과 단풍물이 팍 오른 잡목사이로 한오리의 오솔길이 열리는데 울긋불긋한 단풍속에 섞인 푸른 빛은 더욱 푸르러보였다. 반룡송이며 궁룡송이며가 오늘따라 유달리 의젓해보였는데 그것은 단풍옷을 입은 잡목들에 둘러싸였기때문인것 같았다. 아츠랗게 쳐다보이는 천자암(千姿岩)은 이름 그대로 천가지 자태로 보이는데 역시 단풍물이 올라 더욱 이색적이였다. 고려봉정상에서 바라보는 선경대와 그 주변의 가을경관은 감탄없이는 볼수 없는 단풍의 바다로 술렁이고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있는지라 산발들의 음달은 거뭇한 그림자로 보이는데 해빛을 안고있는 릉선은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있어 륜곽이 선명한 한폭의 수채화였다. 단풍의 두만강 아직 해가 많을 때 두만강가의 단풍을 취재해야겠기에 일행은 부랴부랴 고려봉에서 내려 남평을 향해 차를 달렸다. 금방 개통한 화룡ㅡ남평 콩크리트길을 벗어나니 절벽중터에 닦은 신작로가 옛모습 그대로 맞아준다. 아츠랗게 내려다보이는 절벽밑으로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량안의 단풍이 비끼여 칠색의 물이 흐르는듯 해보였다. 류신, 길지를 지나 호암령까지 오는 동안 대부분이 절벽사이에 뺀 길이여서 아자아짜할 때가 많았다.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호암령길에 차를 세운후 일행은 좁은 오솔길을 톺아올랐다. 《리욱시비》라고 새겨져있는 번듯한 비석이 눈앞에 안겨왔다. 시비에는 1957년에 지은 리욱선생의 시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겨져있었다. 두만강 건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석생산지이 조선의 무산시다. 기울어가는 저녁 어둠속에 묻혀있는 무산시는 오래전 영화에서 본 옛도시같았다. 집집마다 굴뚝을 하나씩 차고있는것이 진풍경이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연기가 피여오르는 굴뚝이 몇개 없었다. 갑자기 어둠이 들이닥쳐 오색령롱하던 단풍산은 거무칙칙한 산으로만 보인다. 숭선에서 밤을 지낸 취재팀은 이튿날 해뜨기 바쁘게 군함산에 올랐다. 군함산은 언녕 단풍으로 젖어있었는데 자칫하면 단풍철을 놓칠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함산은 숭선의 일경이다. 그러나 군함산에 올라본 사람들 대부분은 그 백미를 보지 못했을것이다. 두만강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자꾸 내려가면 그 백미가 나타나는데 보지 않고는 감동을 느끼지 못할것이다. 다듬어 세웠을가? 어디에서 옮겨왔을가?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각양각색의 모양을 뽐내는 바위! 그것은 커다란 돌볏이였다. 앞뒤로 다 층암절벽이여서 발붙일곳마저 없는 절벽이 갑자기 나타난다. 너비가 2ㅡ3메터밖에 되여보이지 않는 절벽이 저 아래로 뻗어있는데 오른쪽 산굽이를 휘돌아 흐르는 두만강과 왼쪽 산굽이에 고여있는 호수가 앞뒤로 군함산을 감싸고있다. 두만강과 호수사이에 갇힌 군함산은 단풍철이라 울굿불굿한 빛갈을 물에 던지고있어 더욱 가관이였다. 두만강발원지 숭선에서 18킬로메터 남짓이 달리면 광평령이다. 《저기, 백두산이 보입니다!》 이날 가이드를 맡아준 숭선진문화소 소장 김철호씨가 차창밖으로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광평령에 차를 세우고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있는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일행은 다시한번 감탄하였다. 눈덮힌 백두봉, 그 아래는 황금의 파도가 설레이고있다. 백두봉은 마치 황금의 바다에 둥실 뜬 한척의 하얀 군함같았다. 광평령에서 내리자 백두봉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화려한 가을의 찬란한 단풍이 우리 눈길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하얀 봇나무숲이다. 일매지게 곧추 뻗어오른 봇나무 사람들은 봇나무를 녀인에 비하기를 즐긴다. 곱고 미칠한 몸매때문일것이다. 그러나 몸매보다도 노란색이 오른 이파리때문에 이 가을 더욱 녀인상으로 보인다. 끝없이 뻗은 봇나무숲은 수천의 녀인들이 군무를 추기 위해 대기하고있는듯해 보이는데 나무숲우로 열린 푸른 가을 하늘은 어제 펼쳐질 광활한 춤무대같다. 숭선에서 48필로메터쯤 올라가면 《김일성낚시터》다. 《김일성낚시터》는 두만강일경이다. 모래알까지 들여다보이는 두만강가에 앉아서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낚시질했다는 곳이다. 네대메터 폭으 두만강이 정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데 두만강기슭의 단풍든 나무들이 꺼꾸로 비껴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기만했다. 강가에 내려가서 손바가지로 두만강물 마셔보았다. 그렇게 달콤하고 시원할수가 없었다. 《김일성낚시터》에서 13킬로메터쯤 더 달리면 두만강발원지이다. 억새풀들이 어느새 가을바람에 하얗게 말라있고 버드나무도 색이 죽어있었다. 저으기 호젓하고 고독해보였다. 가로타고 물을 마실만큼한 작은 개울물이 두만강발원지였다. 두만강발원지라는 개울물에 닿기 조금전에 21호경계비가 세워져있었는데 이쪽엔 한어로 《중국》이라고 새겨져있고 반대쪽에는 조선글로 《조선》이라고 쓰여져있어 엄연히 국경임을 시사해준다. 개울물을 따라 좀 더 올라가보니 물이 땅속에서 스며나온다. 《이렇게 땅속에서 솟았다 없어졌다 하다가 아예 자취를 감춥니다. 그래서 옛말엔 , 즉 도망쳐 흘러오는 강이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우로는 무연한 밀림지대지요.》 숭선진문화소 소장 김철호씨의 설명이였다. 황금의 바다 하얀 백두봉 3킬로메터쯤 더 올라가니 소담한 호수가 나타났다. 옥녀늪이였다. 직경이 180메터의 작은 호수다. 늪가엔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라는 콩크리트표말이 세워져있다. 늪은 그다지 깊지 않아 허리를 넘을가말가 한다고 한다. 늪가를 빙둘러 온통 이깔나무뿐인데 노란 단풍이 들어 호수를 병풍치고있었다. 내친 김에 쌍목봉에까지 가본다고 차를 달렸다. 장백림해는 온통 노란 물결뿐이였다. 길가와 숲은 모두 이깔나무뿐이였던것이다. 앞에서 노란 바람이 물결쳐오고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불어쳐오는 노란 바람은 고비사막의 황사바람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래바람인것이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는 노란 이깔나무이파리들의 군무였다. 소나무 한 그루 없는 이깔의 숲, 그 숲에 아득히 뻗은 가리마같은 황토길, 그 길 끝에는 항상 백두봉이 얼른얼른 눈에 안겨온다. 백두산은 점점 시야에 가까이 느껴지기만 했다. 쌍목봉에는 백두산으로부터 두망강출구의 천리병경선우에 있는 유일한 륙로해관이 있었다. 그다지 번창해보이지 않았지만 짐을 실은 차량들이 자주 들락거렸고 꽤 큰 군영도 자리잡고있었다. 쌍목봉에서 백두산은 지척이였다. 10킬로메터쯤 가면 백두봉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백두산 코밑에 와 있는것이다. 황금의 물결을 타고 백두봉에까지 올라온것이다. 백두봉은 설레이는 황금의 바다속에 떠있는 대형함선마냥 거연히 솟아있다. (2003년 10월 6일 연변일보 4면)
37    [기행문]도끼봉(김철호) 댓글:  조회:1915  추천:40  2008-09-01
해님 품는 아름다운 산 하늘 날으려는듯한 바위들의 군체 아름다운 일몰 해발 680메터의 도끼봉은 이름 그대로 멀리서 바라보면 시퍼런 도끼가 땅에 콱 박힌 형국이다. 맑은 날이면 모아산같은 높은 산이거나 건축물에서 도끼봉을 지척으로 볼수 있다. 연길의 서쪽에 있는 도끼봉은 한계절 아름다운 일몰을 출연하기도 한다. 진붉은 태양이 도끼봉에 가라앉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이다. 도끼봉이 한입두입 태양을 베여먹는것 같기도 하고 태양이 도끼봉속으로 스밀스밀 기여들어가는것 같기도해 멋스럽다. 거기에다 천태만상의 진홍빛 구름떼들이 들러리서는 장면은 더욱 황홀하고 매혹적이여서 눈뗄수가 없다. 그건 참으로 장쾌하고도 비장한 장면이 아닐수 없다. 도끼봉은 등산객들을 유혹하기엔 너무도 충분한 산이다. 뭇산우에 우뚝 솟은 층암절벽은 몇십리 밖에서도 한눈에 유표하니 왜 가보고싶지가 않으랴. 한번쯤은 저 산에 가보아야 하겠는데 하는것이 연길등산객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물론 도끼봉에 가려면 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그러나 맘먹고 가려면 얼마든지 쉽게 갈수도 있다. 팔도에서 도끼봉턱밑까지 잘 닦아진 길이 있다. 도끼봉뒤산에 새롭게 금광이 개발되였는데 금광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팔도에서 한창 건설중에 있는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켠 골짜기로 접어들면 금광가는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20리쯤 들가면 도끼봉에 금방 닿을수 있다. 또 다른 길은 조양천으로 해서 길성, 고성저수지를 지나 석산에 도착한후 산을 톺는것이다. 이 길 역시 길성까지는 콩크리트도로로 잘 닦아져 가기가 퍽 편리하다. 고성저수지부터 흙길이긴 하지만 차를 갖고 간다면 도끼봉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갈수 있다. 이 두 길을 다 버리고 《금불5대》로 도끼봉에 갈수도 있다.《금불5대》는 하늘아래 첫동네같은 자그마한 촌락이다. 마을을 빠진후 달구지길을 따라 한창 가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 밭길을 택해야 한다. 가파롭긴 하지만 농민들이 농쟁기를 끌고 오르내리는 길인지라 걷기는 퍽 좋다. 《김일성동굴》도 있다는데 작년 여름 도끼봉등산을 시도했다가 실패한적 있다. 비가 질금질금 오는 날이였는데 짙은 안개가 산허리에 감겨있어 지척을 분간할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산에서 만난 한 한족농부가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일행은 그만 도끼봉 등뒤를 스쳐 10여리를 내려가버렸던것이다. 그날 우리는 안개속에 솟아있는 도끼봉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저 한탄하고 말았다. 그때 그 한족농부의 손에는 송이버섯 한송이가 쥐여져 있었는데 도끼봉 근처 산에서 딴것이라고 했다. 《도끼봉은 무서운 산이지유. 이런 날엔 찾기가 힘들텐데유. 산밑에 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여태 보지는 못했지유.》 김일성장군이 항일할 때 리용하던 동굴이 도끼봉밑에 있다는 얘기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지만 그날엔 그저 도끼봉자락을 스쳤을뿐이였다. 그후 석산으로 하여 도끼봉에 오른적있는데 그때 전씨성을 가진 산장주인도《김일성동굴》얘기를 해주었다. 《굉장한 동굴입지요. 사냥개를 앞세우고 몇번 가보았는데 들어가기가 무시무시하데요. 개들도 컹컹 짖어댈뿐 동굴에 접근 못하더군요. 그 안에 이 있을같아서 돌아서고 말았쥬.》 산세를 보니 확실히 항일유격대들이 활동하기가 좋은 곳이였다. 가파로운 비탈길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독교봉이 지척으로 시야에 잡혀온다. 여기서 보는 독교봉은 참으로 웅위롭고 거연했다. 특히 소뿔바위의 힘찬 모습에 다들 경탄을 금치못했다. 밭길을 지나 산길에 들어선후 다시 30분가량 더 오르니 늘찬 릉선이 시작되였다. 바위로 형성된 멋진 릉선이였다. 도끼봉을 룡대가리라고 하면 이 릉선을 룡의 몸통이라고 묘사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룡꼬리에 오른것이다. 량옆이 몇길씩되는 절벽이여서 조심해 걷지 않으면 위험했다. 일행은 룡의 꼬리를 밟으면서 허리를 타야 했다. 고구려성벽처럼 뻗어있는 바위릉선은 여러 가지 모양을 보여주었다. 바위새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 있어서 누군가 저쪽에 건너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는《바위창문》이였다. 곰처럼 늘어져있는《곰바위》, 캉가루처럼 잔뜩 키를 살구고있는 《칼바위》...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군체를 지나 어떤 절벽우에 닫아 앞을 바라보니 높은 바위산이 앞을 콱 막고있었다. 도끼봉이였던 것이다. 도끼봉전설 바늘가는데 실이라고 연변의 괜찮은 산에는 다 전설이 있다. 도끼봉도 례외일수 없었다. 먼 옛날 이곳은 삼림이 울창하고 골이 깊어 인가라곤 없었다고 한다. 산짐승들이 많아 사냥하기 좋았으련만 사람들은 감히 산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까닭은 산에 100년 묵은 구렝이가 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만나면 한입에 삼켜버린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황소같다 하여 둥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총각만은 그런 소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산림속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나무를 찍어 숯을 구웠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어느날 나무찍으러 나갔던 총각은 더디선가 들려오는 가냘픈 비명소리를 듣고 산꼭대기로 치달아올랐다. 열두발 되는 구렝이가 아릿다운 처녀를 앞에 놓고 혀를 날름거리고있었다. 총각은 잽싸게 도끼를 휘둘러 구렝이대가리를 끊어놓았다. 총각은 정신잃은 처녀를 업고 샘물터로 내려가 샘물을 입에 떠넣어주어 정신차리게 한후 어찌되여 이 깊은 산속에 오게 되었는가고 물었다. 《몸져누우신 어머님 병환에 쓸 약초 캐러 왔어요.》 갑자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다시 붙은 구렝이가 나타난 것이다. 총각은 몸을 날려 솟구쳤다가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구렝이목은 뚝 끊어져나가고 바위에 박힌 도끼는 뺄수 없게 되었다. 구렝이를 죽인후 총각은 약초를 캐여가지고 쳐녀가 사는 마을로 왔다. 처녀의 어머니는 그 약초를 달여드시고 병이 나았다. 이에 처녀의 어머니는 그 은헤를 잊을수 없어 총각을 사위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총각은 숯구이를 그만두고 처녀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총각이 구렝이 목을 찍을 때 깊이 내리박힌 도끼는 세월이 흘러 커다란 바위로 굳어졌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도끼봉이라는 것이다. 49메터 절벽산 하늘로 날아오르려는듯 몸체를 앞으로 솟구친 도끼봉은 삼면이 깎아지른듯한 절벽이였다. 그 절벽으로는 발을 근본 붙칠수 없었다. 정상으로 오르려면 등뒤를 리용해야 했다. 바람벽같은 절벽가에 외통길이 실오리처럼 나있어 기다싶이 산을 톺아야 했다. 45도의 가파른 비탈은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뒤등을 때리는 바람소리마저 아우성처럼 귀를 자극하는지라 다들 얼굴에 긴장을 담고있었다. 밀고 잡아당기면서 간신히 오르고 또 오르노라니 그래도 정상에 닿을수가 있었다. 앞이 확 틔였다. 생각보다는 높은 절벽이 아니였지만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낄수는 있었다. 멀리 기양저수지며, 고성저수지가 한눈에 안겨온다. 또 개발중이라는 금광도 금방 등뒤에 있었다. 모아산도 알렸고 연길시가지도 어렴풋이 륜곽을 보였다. 팔도며 조양천도 한눈에 바라볼수 있었다. 골골마다에 자리잡고있는 촌락들도 오손도손 재미있게 보였다. 도끼봉은 겹으로 솟아있는 여러 절벽산 가운데서 가장 우뚝 솟은 봉오리인데 맨 절벽높이가 49메터라고 한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많은 절벽산이 둘레를 서고있었다. 정상에서 내린후 절벽사이의 오솔길을 타고 곧바로 절벽밑에 도착했다. 혹여 《김일성동굴》이 있나하여 눈이 화등잔이 되어 두리번거렸으나 절벽 금방 밑에는 동굴그림자도 없었다. 아마 어딘가 다른 절벽밑에 있나보다 하면서 다들 아쉬워했다. 절벽밑에서 바라보는 도끼봉은 가관이였다. 닭볕처럼 쭈볏이 솟은 바위, 초대처럼 하늘 찌르는 바위, 커다란 귀방울같은 바위... 바위들의 군체는 지상을 떠나 하늘로 날으려는 뭇짐승떼같았다. 하산하면서 보는 도끼봉은 더욱 멋스럽다. 굽이 돌때마다 여러 가지 자태를 보여준다. 석산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모양과 팔도로 내려가면서 보는 모양 또한 같지가 않다. 팔도로 내려가면서 보면 도끼봉은 원시사회의 끝이 뾰족한 초가지붕처럼 보이는데 숲에 가리여 때론 나타났다 때론 사라지는 모습 참으로 유혹적이다. 그러나 석산으로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는 도끼봉은 수려하기가 그지없다.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미가 발견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하는 말 같다. 나무들의 웃수리에 우뚝 솟은 도끼봉은 그 장엄함으로 특유의 매력을 풍겨주고있다. 햇볕받은 절벽산은 이상한 기운까지 발하여 성경에 들어선듯한 기분이기도 하다. 아직 인간의 때가 덜 묻어있는 도끼봉은 도끼라는 투박한 이미지보다는 수집음을 타는 녀인의 맑은 얼굴같기도 하다. 도끼봉은 볼수록 아름다운 산이였다.  2006년 4월 14일
36    [기행문]독교봉(김철호) 댓글:  조회:2074  추천:33  2008-09-01
사진설명 1) 독교봉 원경 2) 소뿔바위 하늘가에서 날아예던 산비둘기 발밑에서 선회 금불사 동불사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서쪽으로 약 10키로메터쯤 들어가면 나즈막한 산자락밑에 금불사(金佛寺)라고 하는 오붓한 마을이 있다. 마을 맨 뒤쪽에 페교된 학교가 있는데 자그마한 운동장까지 갖고있어 참으로 아담해 보였다. 지금은 텅빈 운동장에 텅빈 교실이지만 한때는 아이들을 부르는 정다웠을 종소리도 있었을것을 생각하니 애수가 가슴을 치기도 했다. 마을길에서 만난 한 농민과 마을이름의 유래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는것이였다. 《옛날 이곳에 황금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절당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해방후 사람들은 미신이라면서 절당을 마사버렸지요. 그때 황금부처도 종적을 감췄다고 합데다.》 그러니 동불사(銅佛寺)는 동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사찰로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금불사는 황금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사찰로 하여 지어진 이름인것이다. 농민에 따르면 이 마을에 절당이 지어진데는 마을 남쪽에 우뚝 솟은 산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농민이 가리키는 그 산은 다른 산과는 달리 산중에 우뚝 솟은 건축물같은 절벽산이였다. 해볕에 절벽이 흰빛을 반사하기도해 신비한 기운에 감돌기도 했다. 절당을 예로부터 명산과 짝을 지어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 저만한 산밑에 당연 절당이 세워질만도 했다. 그런데 산 이름 또한 기이했다. 《독교봉(獨轎峰)》이였다. 홀로 가마(轎子)라는 뜻이다. 옛날 나으리들이거나 귀부인들이 타고 다니던 그런 가마라는 뜻이다. 《독교봉 그 아래로 세로 뻗은 산이 보입지요. 녀자가 누워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보니 그 산이 과연 녀자가 누워있는 것 같아 보였다. 머리를 풀어혜친 한 녀인이 팔과 다리를 뻗고 누워있는데 가슴이 유달리 봉긋했다. 《저 산은 잠자는 녀자이지요.》 《그러니 저 산에 아름다운 전설이 있겠군요.》 생각밖에도 농민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르겠다고 했다. 아름다운 산에 전설이 없을리 있겠는가. 그후 연변구전설화집에서 독교봉전설을 찾게 되었다. 낭자의 이야기 멀고먼 옛날 이곳은 동해바다와 이어진 아주 아름다운 바다가였다고 한다. 바다를 몹시 동경하고있던 백두산기슭의 한 부자집 낭자는 오매불망 바다를 그리다가 드디여 부모님 허락을 받고 가마를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험한 산길에 강도와 사나운 짐승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인지라 낭자의 부모님들은 도끼를 든 두 사졸(私卒)을 딸려보냈다. 편안한 독교(獨轎)에 앉아 온 낭자는 하늘땅이 맞붙은 것 같은 망망한 바다를 만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구슬처럼 부서지는 은빛 파도며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날아예는 흰갈매기... 잔솔이 다복다복 깔린 바다가에 앉은 낭자는 해가 어느새 진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밤바다 역시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했다. 낮에 보던 흰파도가 밤에는 거뭇한 산발이 겹치면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았다. 낭자는 별들이 내려앉는 검푸른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온밤 바다에서 헤매이던 낭자는 드디여 일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거밋하던 바다는 차츰 담청색으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발로 황금색의 세상을 만들고있었다. 장엄하고 신비로운 바다였다. 바다가 이처럼 아름다운줄 몰랐던 낭자는 잠자는것마저 다 잊고 밤에 낮을 이어 바다가에서 헤매였다. 두 사졸은 낭자를 보위해 그 옆을 떠날 념을 않았으나 언녕 피곤이 몰려 높이 치켜들었던 도끼를 축 늘어뜨리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낭자는 바다가 산기슭에 고요히 누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어찌도 혼곤히 자는지 사졸들은 감히 낭자를 깨울념을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깨여나지 않는 낭자, 몇날 며칠 자고 또 자기만 하는 낭자. 사졸들도 도끼를 땅에 처박은채 그만 깊은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자버린 낭자가 저《미인봉》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낭자가 타고왔던 가마는 독교봉이 되고 두 사졸이 땅에 처박은 도끼는《큰도끼봉》,《작은 도끼봉》이 되였다고 한다. 깎아지른듯한 백길 벼랑 독교봉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로두구에서 로두구강철공장 뒤길이거나 로두구만인갱마을 앞길로 하여 작은 도끼봉밑을 지나 독교봉으로 올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오붓한 산골길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수 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며 냇가의 버드나무숲속의 온갖 새들의 지저귐은 참으로 귀맛을 당긴다. 또 낭자의 사졸이 들고 있던 도끼가 절벽산으로 변했다는 작은 도끼봉밑을 지날 수 있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리득을 볼수도 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작은 도끼봉을 오를수 있다. 한족농민들은 작은 도끼봉을 《쑈꾸이즈뻥(小龜子峰)》, 즉 작은 거북산이라고 하고 조선족농민들은《뒤뒤(뒤통수)없는 산》이라고 한다.작은 도끼봉은 과연 앞이마만 툭 튀여있는《뒤통수없는 산》이였다. 그런데 오르고 보면 그 《앞이마》가 아름찬 절벽산이다. 오르는 길은 뉘엿한 《뒤통수》뿐인데 오른후 관찰해 보면 삼면이 빙 둘러 절벽이다. 작은도끼봉에서 내려 이름 모를 한 한족부락을 지나 곧바로 산을 톺을수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면 독교봉의 가장 기이한 바위인 《소뿔바위》가 왼쪽에 붙어보인다. 그러나 금불사에서 바라보면 그 《소뿔바위》가 오른쪽에 붙어있어 보인다. 금불마을에서 작은 시내물을 건너면 산으로 통하는 수레길이 다. 너무 가파롭지 않지만 한창 오르면 숨이 턱에 닿는다. 예쁜 이깔나무숲이며 착한 떡갈나무숲을 지난후 꽤 넓은 밭을 꿰질러가야 독교봉기슭에 닿을수 있다. 바라보면서 오르던 독교봉은 차츰 수림에 가리워진다. 이따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숲길을 재우쳐 걷노라면 갑자기 앞을 콱 막아서는 절벽에 부딪칠수도 있다. 독교봉 턱밑에 닿았기때문이다. 독교봉은 콩크리트바람벽같은데 산비둘기가 절벽을 선회하면서 날아예는것이 아득히 보인다. 만약 이렇게 절벽을 만난다면 절벽밑으로 해서 옆으로 빠져야 한다. 좋기는 왼쪽 옆으로 빠지면 오르기 좀 편한 기슭이 될수 있겠으나 오른쪽으로 빠지면 아짜아짜한 절벽을 톺아야 한다. 바람벽같은 절벽을 지나면 밀고 잡아당기면서 오를수 있는 가파로운 비탈이다. 여기로 오르면《소뿔바위》를 볼수 있는데 정작 가까이에서 보이는《소뿔바위》는 멀리서 보이는것처럼 미끈하지는 않다. 발을 잘못 디디면 가파로운 피탈에 구을수도 있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왼쪽 산기슭길은 느슨한 숲길이다. 푹푹 빠지는 가랑잎은 무릅을 친다. 사계절 가랑잎이 이렇게 쌓여있는 숲이다. 정상에 올라보면 앞이 탁 틔이는것 같은 기분이다. 절벽 바로 꼭대기이기 때문이다. 발볌발볌 절벽가까지 기여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너무 짜릿짜릿하다.《오금이 저리다》는 말의 함의를 독교봉에서 실감할수 있다. 절벽아래를 내려다보노라면 정말 종아리가 저려나고 다소 떨리는감이다. 《100메터는 좋이 됨직 하다.》 누군가 명동촌의 선바위가 88메터인데 비해보면 독교봉벼랑은 100메터는 능히 될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산정상에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 절벽을 보기가 가관이였다. 줄을 치고 칼로 벤듯한 절벽, 토막나무를 도끼로 찍은 듯 갈라져있는 절벽, 구을기만하면 뼈도 추릴것 같아 보이지 않는 절벽과 절벽사이의 골짜기... 아까 밑에서 볼 때에는 하늘가에서 빙빙 날아예는것 같던 산비둘기들이 여기서 보니 발밑에서 선회하고있었다. 돌을 던져보았더니 한창 있다가《퉁》하고 밑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실컷 절벽을 구경하고 나서야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큰도끼봉이 마주하고있는데 지척처럼 보였다. 커다란 도끼날 앞끝이 땅속에 깊숙히 박힌 모습이다. 우리가 독교를 맘껏 타고있는데 낭자의 두 사졸들은 어데가서 코골고있는지 모르겠다. 금불마을을 에돌아 흐르는 작은 시내물을 따라 올라가면서 바라보니 거울같은 파란 저수지가 안겨왔다. 연변지도에도 표시되여 있는 기양저수지였다. 《연길이 보인다!》 오른쪽 절벽끝에까지 나가면서 멀리 살펴보니 연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연길의 주요한 고층건물을 알아볼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연길은 사실상 지척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35    [기행문]황성옛터 성자산산성(김철호) 댓글:  조회:2696  추천:40  2008-09-01
사진설명 1) 성자산산성원경 2) 서쪽 해발 390메터 봉우리의 성자산 성벽앞에서의 필자. 3) 산성리촌 김흥룡로인이 밭에서 주었다는 옛날 동전을 구경하고있는 답사팀. 3) 깅흥룡로인이 산성안에서 파왔다는 방아확이 바자굽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 있다. -2천년 문명 묻힌 력사의 현장 연길에서 동으로 10킬로메터쯤 가면 연길시기름창고(油庫)가 있는데 그 뒤산이 유명한 성자산(城子山)이다. 맞은켠의 하룡촌 높은 산정에서 바라보면 성자산을 둘러싸고있는 성터자리가 한눈에 뚜렷이 안겨온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성자산은 말발굽처럼 생긴 하나의 커다란 옹성(瓮城)이다. 어찌보면 예쁜 연꽃같기도 하다. 아무튼 중간이 움푹 패이고 주위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이 산은 그 옛날 천연적인 군사요새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둘레의 길이가 4454메터나 되는 높직한 성벽까지 쌓아겠으니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들쑹날쑹한 산등성이를 타고 뻗어간 성터자리를 따라 한바퀴 돌자면 좋이 반나절은 걸릴것이다. 동쪽과 북쪽에는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에는 개울이 있다. 두 줄기의 개울은 산성을 3개의 덕땅으로 갈라놓았다. 산성의 동쪽, 북쪽, 서쪽, 동남쪽에는 각기 성문자리가 하나씩 있고 동쪽, 북쪽, 서쪽의 성문자리에는 옹성(瓮城)이 수축되였으며 동쪽과 북쪽의 성문은 골짜기어구에 나있어 주요한 통로였을것이다. 북문내 근처에는 망대가 있는데 성밖을 살피는 군사시설이였을것이다. 선조들의 체온 담긴 성벽 서쪽의 해발 390메터의 봉우리가 성자산의 주봉이다. 여기에서 서쪽을 바라고 보면 연길분지를 가르면서 유유히 굽이쳐흐르는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온다. 남쪽으로는 하룡촌이 굽어보이는데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부르하통하와 손자고 곧바로 성자산을 감돌아흐른다. 모아산, 마반산도 한눈에 안겨든다. 모아산이나 마반산에에는 발해시기 봉화대유적지가 있다. 빤히 내려다보이는 남쪽에는 연성고성, 하룡고성이 있고 서쪽에는 소영고성, 북대고성 같은 발해시기의 옛성터들이 성자산을 에워싸고있다. 얼마전 성자산 맞은켠의 하룡산을 탑사한적 있다. 봉우리마다에 봉화대가 구축되여 있었으며 봉화대와 봉화대사이에 군사도로가 뻗어있었다. 성자산북쪽에 홀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는데 산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20평방메터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늪은 왕이 목욕하던곳이라 한다. 늪 한쪽을 막은 둔덕같은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늪으로 보였다. 성자산산성 서문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곳에 비교적 완벽히 남아있는 성벽유적이 있다. 수공으로 다듬은 네모반듯한 장방형석재로 쌓은 성벽은 아직도 견고하게 다져져있는데 어떤 곳은 손을 뻗쳐도 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다. 성벽을 만지노라면 선조들의 체온이 금방 느껴지는것 같아 저도모르게 감개무량해 진다. 기원 3세기때의 중국의 학자 진수가 지은 에 따르면 두만강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북옥저라는 민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일찍부터 고구려세족의 통치하에 있었고 기원 98년에는 고구려 태조왕이 성자산성을 시찰, 성자산성은 고구려의 책성부(柵城部, 지금의 성급이상 행정소재지)였다고 한다. 기원 224년에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에 쫓겨 북옥저로 도망쳐왔고 285년에는 부여왕실까지 옮겨왔다고 한다. 성자산산성은 668년 고구려멸망까지 고구려동북부의 중요한 진(鎭)이였다. 고구려멸망후 30년이 지난 기원 698년 발해가 고구려 동북쪽의 고토를 회복하면서 성자산산성은 자연스럽게 발해의 판도에 들게 되었다.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에도 계속하여 책성으로 불리웠는데 는 중원에까지 알려졌다. 밭엔 아직도 기와쪼각들이 발해가 926년 거란족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의 중요한 진이였을것이다. 거란인이 세운 료를 앞지르고 녀진인들의 금나라가 동북과 중원을 석권하던 말기에 금나라의 료동선무사로 있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1214년 금나라를 배반하고 동하국(東夏國)을 세웠다. 포선만노는 1916년 수도를 성자산산성에 옳기고 16년간 동하국을 영위하다가 1233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되였다. 그러니 성자산은 명실공히 황성옛터임이 틀림없다. 성안에 있는 거주지의 유적은 이미 넓다란 밭으로 변해버렸으나 여기저기에 기초돌들이 널려있다. 무시로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있는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기와며 질그릇쪼각들이 발길에 채여 손쉽게 그런것들을 주을수도 있다. 성내의 중부 덕땅우에는 궁전자리가 있는데 궁전의 기초는 계단식으로 되었고 모두 9개 계단가운데서 6개 계단이 비교적 잘 알리며 그곳에는 초석이 줄지어있다. 토기쪼각들도 더 많이 널려있다. 밭이며 숲에 널려있는 토기파편만 보아도 당년의 위용과 호화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성내 주변의 언덕과 3개의 덕땅우에도 기와쪼각과 질그릇쪼각이 널려있는데 주로 고구려, 발해, 료, 금 시기에 속하는 유물이다.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량으로 보면 료, 금 시기의 것이 비교적 많다고 한다. 발해시기 기와들의 안쪽에는 거의 모두 삼베무늬가 나있는데 이긴 흙을 기와모형에 쳐넣기전에 모형밑바닥에 삼베를 한겹씩 폈기때문이란다. 이러한 삼베무늬를 통해서도 당시 발해의 수공업의 일단을 가늠할수 있을것 같았다. 토기파편외에도 산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중국화페사에서 제일 일찍한 돈의 하나인 당나라 개원통보를 비롯한 송나라, 금나라, 조선의 숙종대왕때의 송편통보 등 10여종의 동전과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고려솥, 활촉, 말등자 그리고 , , 같은 동하국시기의 귀중한 구리도장도 발견되였다. 이런것들은 지금 연변력사박물관에 보관되여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 작은 실개천이 돌돌 흐르는 동남쪽골짜기의 두 산사이의 트인곳이 옹성(瓮城)자리였고 그 어구에 성자산산성석패가 세워져있는데 정면에 이렇게 새겨져있다. 길림성문화유물단위 성자산산성 길림성인민정부 1961년 4월 13일 공포 도문시인민정부세움 기념석패가 세워진 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의 산성리(山城里)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유달리 고풍스럽게 보이는 기와집 한채가 있다. 몇십년전 리봉학이라는 로인이 산성안의 궁전터에서 밭을 일구다가 기와무지를 발견하였다. 일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번에 열댓장씩 3년동안 부지런히 지게로 지어날랐더니 륙간기와집에 얹을 기와가 모여졌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지은 기와집이 이 고풍스러운 기와집이였다. 나무토막을 놓고 기와 한 장을 뽑아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기와장 안쪽에 찍혀져있는 삼베무늬가 똑똑히 알렸다. 틀림없이 발해시기 기와였다. 지금부터 천년가까운 발해국시절의 기와를 몇천장씩이나 이고 서있는 기와집은 귀중한 문화재가 아닐수 없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아는것 같지가 않았다. 김흥룡이라고 부르는 농민의 집에 산성안에서 파온 방아확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니 과연 바자굽에 방아확이 놓여있었다. 이런 방아확은 마을에 여러개 있다고 한다. 모두다 옛날 유물들인데 아무렇게 방치되여 있었다. 김로인은 옛것에 흥미를 느끼는 우리들을 보고 옛동전 몇잎을 내놓았다. 모두가 산성안의 밭에서 일하다 주은것들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이런 동전을 달라고 하면 공으로 주거나 5, 6원 주면 몇잎 살수 있었다고 하는데 김로인은 한잎에 50원 아니면 안판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아무개는 작년에 금귀걸이 한짝을 주은 것을 팔았고 또 누구는 금비녀, 금가락지를 주었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것이였다. 우리가 걸터앉아있는 주춧돌이 산성돌같아보여서 물었더니 바로 그렇다고 떳떳이 대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이 마을의 적잖은 집들의 집기초는 산성의 성벽을 허물어다 다진거라고 로인은 슴슴히 말하는것이였다. 과연 가까운 몇집을 돌아보니 산성돌이 틀림없어보였다. 집기초뿐만아니라 토성이거나 돼지우리, 변소기초까지 산성돌로 쌓은것이 있었다. 잘 개발하기만 하면 연변의 관광명소로 될수도 있을 력사가 숨쉬는 옛성터가 이렇게 방치되여 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2천년되는 문명을 쌓고 지키고 하면서 력사의 사연을 품은채 침묵하고있는 성자산유적지를 떠나는 발걸음은 하냥 무겁기만 했다.
34    [기행문]륙도하(김철호) 댓글:  조회:2245  추천:29  2008-09-01
주덕해 김약연 윤동주 안중근... 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을 낳아 키운 력사의 강반 오랑캐령 오랑캐령을 째면서 건너간 국도옆의 자그마한 골짜기로 맑은 물줄기가 돌돌 산아래로 흘러간다. 손바가지로 물을 뜨기조차 힘겨울 정도의 작을 내물, 그래도 그 물로 목을 추기니 가슴이 거뿐하다. 개울의 청맑은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간단한 도시락을 펼쳤다. 동행한 향토문학수집가인 김재권(원 룡정시문련 주석)씨와 황장석(시인)씨, 윤대일(지신록장 전임공회주석)씨 등은 력사의 산정이며 륙도하의 발원지의 하나인 오랑캐령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멋이 좋다면서 흥겨워 한다. 윤대일씨는 새 국도가 건설되면서 오랑케령이 12메터 낮아졌노라고 말한다. 오랑캐령을 해관령(1915년 이 령에 해관이 설치되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일 높은 봉오리가 해발 830메터, 서쪽의 오봉산이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해발 1055메터라고 김재권씨가 설명해주었다. 김재권씨는 륙도하는 오봉산, 오랑캐령, 허망채골에서 흘러내려온 시내물이 합류되여 이루어진 해란강의 한지류라고 한술 더 떠주었다. 황장석씨는 하는 최서해 소설속의 묘사는 당시의 우리 민족들이 살길 찾아 이 령을 넘던 장면에 대한 묘사였다고 하면서 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징어며 쯥쯥한 명태무침에 맥주잔을 부딛히면서 오랑캐령보다 더 험악했던 민족수난의 현장에 앉아있는 기분은 각별했다. 햇볕에 반사되여 반짝거리면서 풀속에 몸을 숨겼다 나타났다 아래로 흐르는 내물은 작은 생명의 번창을 위해 쉴새없이 조잘거린다. 100여년전에도 우리의 수난민족들은 한줄기의 희망을 안고 저 내물처럼 중얼거리면서 이 령을 넘었을 것이다. 오늘엔 중화민족대가정속의 떳떳한 주인공으로 살고있지만 그때엔 고개마다에 수난과 치욕, 절망과 굴욕만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념비가 많은 륙도하량안 륙도하는 나라의 지도에 표시되여 있지 않는 작은 강이다. 총길이가 45.5킬로메터의 너무나 작은 강이다. 상류는 개구리도 뛰여건널만큼의 작은 시내이고 하류도 기껏해야 다리를 걷고 몇발작이면 건널 수 있는 강이다. (소설가 류연산)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버들이 우거진 속으로 키넘는 물이 흘러 해마다 익사하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빠질만큼 물이 고인곳을 찾을수가 없다. 물론 장마철 홍수 터지면 자갈로 뒤덮인 개천은 표호하는 흙탕물이 범람하여 큰 재해도 불러오지만 그것도 몇 년에 어쩌다 한번씩 있는 일이다. 그러나 륙도하엔 사연이 많다. 깊고 높은 력사의 파도가 흘러지나갔다. 주덕해, 김약연, 윤동주, 안중근, 송몽규, 김창걸... 우리 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이 륙도하반에서 태여났으며 자랐고 활동했다. 15만원 탈취사건유적지, 폭동지휘부기념비, 반일의사릉, 안중근의사 사격훈련유적지... 새날을 맞기 위해 흘린 렬사들의 피는 그 얼마인지 모른다. 명동촌 기독교회당옆에 김약연선생의 비석이 있고 장재촌에 묘소가 있다. 비석은 몹시 파괴된 모습, 문화대혁명때의 흔적이라 한다. 김약연선생은 1868년에 조선 회령에서 태여났으며 1899년 2월 18일, 22세대주 142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명동과 장재촌에 정착, 명동학교를 창립하고 국민회 회장 등 직을 력임하면서 반일인재양성과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 받친 교육가이며 반일독립운동가이다.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오다가 보니 강 왼족 기슭에 하얀 비석이 보였다. 작가 김창걸 문학비라고 김재권씨가 귀띔해주어 모두뜀을 하여 강을 건너 기념사진을 남겼다. 작가 김창걸 문학비는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 연변대학조선언어학학부, 한국한민족문화연구소에서 세운것이였다. 문학비에는 김창걸선생의 대표작 의 한 글귀가 새겨져있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춰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김창걸선생은 1936년 1943년사이에 단편소설 20여편을 발표, 를 통해 청년농민 명손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한 우리 민족의 저명한 소설가이다. 일행을 실은 취재차가 우중충 솟은 선바위밑을 지날 때 김재권씨는 고 하여 바라보니 바위산 옆에 깊숙히 패인 골짜기가 있었다. 선바위는 원래 세 개의 큰 바위산이였는데 돌을 까서 길을 닦느라고 두 개의 바위산이 날아났다면서 김재권씨는 아쉬운 한숨을 톺는다. 선바위를 지나 명동촌에서 7-8리 내려오면 강 남쪽에 유표하게 안겨오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 두 개가 보인다. 그 유명한 15만원 탈취사건유적지기념비와 폭동 지휘부기념비이다. 강 북쪽 아담한 마을-승지촌에는 주덕해생가옛터기념비가 있다. 철채에 둘려있는 주덕해생가옛터는 깨끗이 정리되여 있었다. 잔디가 곱게 깔려있는 마당에는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옛집은 없고 기와를 얹은 막 아래 정갈한 우물이 한틀 있었다.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마셔보니 시원하고 맛있었다. 탑식으로 건축한 기념비는 중공룡정시위원회, 룡정시인대상무위원회, 룡정시인민정부에서 2001년 7월 1일에 세운것이였다. 기념비에는 주덕해동지의 략력이 새겨져 있었다. 륙도하기슭 룡정시시교 합성리동산묘지에는 조선의 반일봉기를 지지성원한 반일시위대회-시위에서 수난당한 14명 렬사가 잠들어있는 (일명라고도 함)이 있다. 그리고 그 산 언덕에는 저명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륙도하가 낳은 시성-윤동주 명동촌의 국도옆에 세워져있는 라고 유표하게 새겨져있는 석비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각별히 끈다. 석비옆의 내리막 수레길을 따라 조금 가면 윤동주생가가 있다. 기와를 얹은 10간과 고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의 집이다. 1900년경에 윤동주의 조부 윤하연선생이 지은집인데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는 바로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집은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정부에서 윤동주생가를 관광점으로 지정, 1994년 8월 력사유물로서의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첫눈에 허물어진 우물이 안겨왔다. 몇 년전에 왔을때에도 시원한 물을 길어 마셨댔는데 우물은 푹 꺼지면서 완전히 메워졌다. 면서 김재권씨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생가를 찾을때마다 읊조려지는 윤동주시인의 저명한 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둔 윤동주는 17세에 시 , , 를 썼다. , 등 동시를 잡지에 발표했으며 1938년부터는 학생란에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일본 교도에서 체포, 2년형을 언도받는다. 1945년 생체실험대상으로 비명에 횡사한다. 생전에 시집 한권 내놓지 못한 시인이였으나 후세에 그의 시가 볕을 보면서 그 찬란한 빛발을 발하게 되는데 일본의 한 학자는 윤동주를 세계적인 시인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의 시집 는 한국청소년들이 가장 즐겨하는 시집이며 그의 시는 해마다 최고의 시로 뽑히고 있다. 맺는 말 맑게 흐르던 륙도하는 룡정에 들어서면서 종이공장의 페수에 금방 흐려진다. 그 맑던 물이 역한 약물로 오염되면서 공농다리를 지나 피혁공장의 오염된 해란강물과 합류한다. 그로서 짧지만 비장한 흐름은 끝나는 것이다. 백리의 하루 길을 급히 달려 해질녘에 그 로정을 마치고 고느적한 저녁 노을을 맞는다. 이 땅에는 백리되는 강이 기수부지이다. 아예 이름도 없는 강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륙도하-이 작고 옅은 강에는 너무도 크고 깊은 사연이 실려 흐르고 있다. 그러한 사연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흘러흘러 백년후에도 천년후에도 이 기슭의 보석같은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륙도하여 영원히 흘러라! 2003년 6월
33    [기행문]해란강(김철호) 댓글:  조회:2296  추천:26  2008-09-01
4-5리 넓은 로령산정 새밭물이 한곬으로 모이면서 시작되는 해란강발원지 해란강 상류 《걸어가자면 4시간 좋이 가야 해란강 발원지에 닿을수 있습니다.》 화룡시문련 상무부주석 류재학씨는 은실을 드리운 듯 뽀얗게 내리는 비속으로 멀리 산정을 기리켰다. 증봉령에서 제일높은 산인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해발 1670메터이니까 해란강이 발원한다는 로령은 해발 1000메터이상은 될터란다. 류재학씨는 금년 4월에 화룡시정부의 해당인원들과 함께 해란강발원지 개발을 위한 답사로 로령에 오른적있다 한다. 산정은 4-5리 넓은 새밭으로 펼쳐져 있었는데 새밭주위는 아름드리나무로 둘레를 치고 있더라면서 산우에 그렇게 넓은 평원지대가 있을줄을 몰랐던지라 다들 아연해지고 말았다 한다. 새밭은 습지였다. 그 습지의 물이 한곬으로 모이면서 작은 시내를 이루는데 바로 해란강발원지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긴 시내가 곧추 산아래로 내리 흐르면서 이골저골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하여 지금 눈앞에서 소리치며 흐르는 강줄기가 되었다. 정강이를 넘을 것 같아보이는 물결은 말그대로 벽계수였다. 산곡간을 울리며 갈기치는 물결은 숲이 꽉 우거진 골짜기를 뚫으면서 아래아래로 힘차게 내달린다. 《아마 저쯤이 직소택일겁니다.》 류재학씨가 가리키는곳에 차를 세운 우리는 가파로운 비탈을 내려 집채같은 바위들이 엇갈려 물려있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하얀 물갈기가 바위를 때리면서 흐르것이 하나의 경관을 이루었다. 2메터 남짓되는 작은 폭포가 눈앞에 안겨온다. 커다란 바위를 타고 갈기치며 내리꼰지는 밑에 자그마한 소가 생겼다. 유명한 직소택인 것이다. 1920년 10월 21일 야스까와가 이끄는 일본군 선두부대가 바로 이 직소택에서 호된 타격을 받았는데 김좌진, 리범석의 지휘하에 매복진을 펼치고 있는 북로군정서군에게 삽시간에 90여명의 목숨을 내주여야 했다. 이 전투를 신호로 독립군은 홍범도 등의 지휘하에 이도구 완류구전투, 천수동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을 벌려 수많은 일본군을 살상하는 대일전역가운데서 가장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청산리 마을의 작은 산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석비가 세워져있어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 앞면에는 《청신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항일련군들이 일제와 전투하는 군상이 새겨져있었다. 청산리마을에서 얼마간 내려오면 옥소반같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송월저수지다. 아담지고 화려했다. 송월저수지아래에 자리잡고있는 마을이 송월촌, 마을어구로 하여 서남쪽으로 1킬로메터쯤 올라가면 유명한 송월산성이 있다. 산성둘레의 길이는 2480메터, 눈여겨보면 성터자리가 아직도 알린다. 화룡시가지를 꿰둟고 흐르는 해란강은 묘령툰에 와 잠시 쉬려는듯 급한 흐름을 멈추면서 유유히 흐른다. 바로 이 마을이 김좌진 등이 대일전쟁의 중요한 회의를 가진 곳이다. 일제와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타격하자는 《피전정책》을 결정, 청산리전투같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해란강을 건너면 청호마을, 대종교본부가 있던곳이다. 청호마을에서 국도를 건너면 작은 언덕이 있는데 대종교 제1세 교주 라철, 제2세 교주 김교헌, 대종교 동도본사 주관인 서일의 묘비가 있다. 1911년 서일은 반일의벙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했으며 후에는 대한군정서로 개편했다.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군정서산하에는 김좌진(사령관)을 비롯한 유명한 인물들이 있었다. 해란강중류 그 유명한 백리장성은 해란강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토산자 동산촌 이도구의 산언덕에서 시작된다. 장성은 서성, 룡문, 세린하, 도원, 동불사, 조양, 팔도, 연집, 흥안 등 향과 진을 경유하여 계림북산에 이른다. 력사학교수 방학봉선생에 따르면 백리장성은 실제 거리가 300리도 넘는다. 70리 평강벌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팔가자진남산위에 위치해있는 팔가자산성은 둘레길이 1500메터이다. 평강벌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는 동고성은 그 유적지가 지금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금나라시기에 쌓은것이며 선종정우2년 년호가 있는 구리관인이 출토되기도 했다. 평강벌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그래도 서고성이다. 외성은 장방현인데 둘레의 길이가 2720메터이다. 해란강은 비암산에서 조여든 평강벌을 빠져나와 좁은 협곡을 지나 해란강반의 명주-룡정을 감돌며 흐른다. 비암산에는 그 유명한 일송정이 있고 룡정시내에는 룡정지명기원지우물터, 일본간도총령사관 옛청사, 영국더기 등 많은 유적들이 있다. 룡정은 리상설, 윤동주, 송몽규, 양림, 구춘선, 심련수, 강경애, 한락연, 김시룡, 김성휘 등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유명한 《3.13》반일시위, 《5.30》폭동 등이 일어났고 서전서숙,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연신학교 등 반일인재양성학교가 있었다. 룡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세전벌은 석정으로 들어가는 산골어구까지 일망무제한 논벌을 펼쳐주는데 그 논벌은 해란강물을 먹고 살진다. 멀리 모아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만무과원이 눈시리게 펼쳐진다. 연변의 5개의 만무과원이 있는데 룡정에 3개가 있다고 한다. 그중 연변룡정과수농장(화룡집단)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과수원이다. 룡정시의 과수면적은 8600헥타르, 사과배면적은 6800헥타르에 달한다. 동성용을 감돌아흐르는 해란강반에는 유명한 새벽농민대학이 있다. 1958년 5월 l일, 전국로력모범 김시룡이 창시하였고 제1임교장을 맡았었다. 지금 1만2300평방메터되는 교사에 6개의 실험실과 2개의 표본실, 컴퓨터실, 도서관, 열람실이 있으며 100헥타르에 달하는 실험지와 생산기지가 있다. 이 학교에서는 졸업생 2000여명, 연수졸업생 3000여명을 양성했다. 해란강하류 4킬로메터의 무인지경 골짜기를 경유한 해란강은 화전자(석정)에 다달은다. 첫 동네가 석정 《1, 2대》, 길 하나를 사이두고 두 마을이 있는데 이상한 것은 길 오른쪽 마을은 대부분 낡은 초가집인데 반해 길 왼쪽마을의 집들은 모두가 벽돌기와집들이였다. 마침 소를 몰고 지나가는 농부가 있어서 사정을 물어보았다. 김광명(57세)이라고 부르는 농민은 허허 웃으면서 《부자동네와 가난뱅이 동네지유.》했다. 1대 사람들은 한사람당 1쌍(10무) 이상씩 땅을 다루고있는데 2대 사람들은 한사람당 4무정도의 밭을 다루고있는 것이다. 《농사를 잘 지으면 잘 살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잖구요. 화전자담배가 얼마나 유명한지 아시지유.》 《어르신은 몇대에서 사십니까?》 농민은 어줍게 웃으면서 2대에서 사는데 소도 없어서 이렇게 1대사람한테서 소를 빌려가고있는 형편이라 한다. 구장리라는 패쪽이 세워진 마을을 지나니 산중턱을 남포질해 허물어서는 그 버럭을 차에 싣고가는 사람들이 있어 물었더니 새롭게 금광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구룡마을은 고즈넉했다. 마을길에 사람그림자가 별반 보이지 않고있었다. 지나가는 한 나그네를 잡고 정황을 물으니 그럭저럭 산다는것이였다. 《하룡저수지물이 저 아래까지 올라옵니다. 1, 2대는 에 들어 이사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일명 해란호라고 부르는 하룡저수지공사는 마지막단계에 진입한 것 같다. 아직 물이 저장되지 않고있지만 저장된후의 정경을 상상만해도 가관이 아닐수 없다. 이제 민속촌이 들어선다고 한다. 어린이놀이터, 유람선선박장, 문화교육구 등 시설을 앉히는데 부지면저 56만3천평방메터, 사용면적 20만평방메터의 민속촌이 선다는 것이다. 더욱 흐뭇하게 하는 것은 계림에다 세우는 해란강골프장이다. 총 1480만딸라가 투자되는 골프장은 7월 15일 개장하게 된다고 한다. 36홀로 되어있는 골프장은 이제 300내지 400여명 일군을 고용하면서 아세아의 최고의 골프장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1년에 년인수로 10만명 손님을 접대, 연변에다 부리워놓을 리익이 상당하지 않을수 없다. 건설총무부 정길준리사는 골프장앞날에 아주 락관적이였다. 《골프장중앙정상에 건설된 클럽하우스와 콘도, 부대시설은 세계 어느 골프장에서도 볼수 없는 초현대식 이딸리아대리석건물로서 아릅답고 웅장하게 건축되였습니다. 이제 수영장과 겨울을 즐길수 있는 스키장까지 건설합니다.》 해란강은 하룡촌에서 부르하통하와 합류하면서 두만강을 향한 달음박질을 다그친다. 《연변인민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유명한 노래에 《해란강반에 붉은기 나붓기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로 하여 해란강은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해란강은 겨우 132킬로메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강, 평강벌과 세전벌이 있어 유명하고 력사의 발자취가 력력해 유명하며 영웅들의 그림자가 비끼여 유명하다. 지금 계림에다 건설하는 골프장으로 세계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해란강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 작은 강이 세계적인 강으로 둔갑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2003년 6월 23일 연변일보 제3면  
32    [기행문]모아산(김철호) 댓글:  조회:2400  추천:33  2008-09-01
그 옛날 봉화대 오늘은 시민들의 공원 새해 해돋이를 즐기는 연길의 명소로 언제나 고향의 산 해발 517메터의 모아산은 그닥 높은 산은 아니지만 연길분지와 룡정의 세전이벌, 동불사벌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어디서나 한눈에 바라보이는 고향의 산이다. 모아산에는 스릴을 느끼게 하는 층암절벽도 없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드리 로송도 없다. 모아산은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운치가 있다. 유별나게 둥그렇게 우뚝 솟은 모습은 농부가 벗으놓은 초모자같기도 하고 굉장한 왕릉같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모아산은 민둥산이였다고 한다. 원래는 아름드리 고목으로 우거졌댔는데 일제침략자들이 란벌해 가는통에 민둥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연길을 찾은 주은래총리께서 모아산에 식수하여 삼림공원을 꾸미라고 지시하여 연변의 아들딸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모아산에 올라 소나무며 이깔나무를 한그루 두그루 심었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 민둥산이였던 모아산은 나무가 꽉 우거진 청산으로 되었다. 하여 새들이 날아들고 짐승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연길사람들에게 있어서 모아산은 없어서는 안될 삶의 공간이다. 10여년전만 하여도 모아산에는 산길이 별로 없었고 있다해도 잔풀에 덮힌 가느다란 오솔길뿐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로세로 많이도 뻗었으며 길도 걷기 편한 오솔길로 되었다. 모아산에 가면 좋은것이 너무도 많다. 불현듯 나타나 나무가지사이를 헤염치는 청설모 한 마리! 사람들의 눈길은 청설모의 뒤를 쫓으며 환성을 터친다. 지난 가을에는 모아산에 잣풍년이 들었댔다. 그래서인지 청설모가 특별이 많았다. 깜찍한 청설모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즐거운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모아산에는 청고운 새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한여름 해종일 하고 지저귀는 뻐꾹새의 노래소리는 정답기만하다. 요즘같은 겨울에는 꿩들이 많이 날아다닌다. 하는 꿔울음소리와 더불에 커다란 꿩들이 숲속을 가로지르며 저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우숩광스러우면서도 귀엽다. 모아산에다 민속촌까지 꾸려놓아 여름이면 모아산민속촌은 연변사람들의 광광지로 되고있다. 민속적으로 꾸며놓은 놀이터며 음식점은 객들을 즐겁게 맞아주고있으며 멋진 수석관까지 있어서 볼거리가 점점 많아지고있다. 수석관에 가면 저절로 환성이 터지게 하는 별의별 수석이 다 있다. 호랑이같은 수석, 자라같은 수석, 동해바다에서 아침해가 솟아오르는것 같은 문형석... 겨울에는 썰매장까지 건설해놓아 모아산은 사시장철 관광객들은 맞고있다. 연길공공선로뻐스는 모아산 호랑이석상있는데까지 간다. 때문에 모아산산행은 더욱 쉬워졌다.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만든 석호(石虎)는 모아산의 문지기가 되어 위엄있게 산객들을 바라본다. 그밑으로 뻗은 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면 모아산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모아산정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러갈래이지만 정면길로 오르기가 가장 쉽고 편하다. 날랜 사람이면 15분 좌우면 정상에까지 오를수 있다. 정상부분은 대부분 떡갈나무들이다. 여름이면 떡갈나무를 타고오르는 머루넌출이 멋있고 가을이면 오솔길가에 굴러 다니는 도토리를 줏기가 즐겁다. 모아산은 아주 중요한 발해유적지이기도 하다. 모아산을 학명으로 모아산돈대(帽兒山墩臺)라고 하는데 돈대란 봉화대라는 뜻이다. 봉화란 병란이 나타났을 때 연기, 혹은 불빛으로 하는 신호불을 말하는데 봉화대란 그런 신호를 보내기 위해 전문 설치해놓은 고지(高地)를 말한다. 모아산외에도 연길시에는 대돈대, 소돈대가 있다. 대돈대는 연길시 흥안향에 있고 소돈대는 연길공원안에 있다.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산 모아산은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있는 산이기도 하다. 모아산전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곤룡포를 입은 사사이와 싸워 악을 물리친 목동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멀고먼 옛날 모아산은 오늘의 모아산과 그 모양이 전혀 같지 않았고 이름도 달랐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다고 하여 버섯산이라고 불렀다. 곁에 다가가 보면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요 꼭대기는 가름발로 된 넙적한 청석으로 층층이 덮여있어 마치 양산을 씌운 듯 했다. 사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났는데 큰것은 수레가 둬대 드나들만큼 크고 작은 것은 주먹이 나들만큼 했다. 이런 구멍이 어찌나 많은지 벌집같았다. 오뉴월 삼복지간에도 그 돌속에서 뿜겨나오는 랭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때때로 산우에서 구들장같은 돌이 떨어지며 산산쪼각이 나는 바람에 아무도 감히 그 산기슭으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버섯산은 그저 버섯산이 아니라 독을 품은 버섯산이였다. 하여 사람들은 버섯산을 따로 독심산(毒 山)이라고도 불렀다. 독심산은 무시로 세전이벌에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안개가 푹 낀 날이면 독심산에서는 무시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곤룡포를 입은 사니이의 무리들이 칼을 갈고 풍악을 하는 소리였다. 곤룡포를 입은 사나이는 때론 독교에 앉아 산을 내려오는데 들판을 휘둘러보면서 너털웃음을 치는날이면 영낙없이 광풍이 휘몰아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그러면 세전이벌은 큰 재해를 입었다. 하여 사람들은 사월초파일 석가여래님 생일날이면 독심산에서 굉장한 산신제를 지내군 했다. 그러나 해해년년 산신제를 성심성의로 지냈지만 그 효험이 그리 크지 못했다. 독심산 령밑 마을에 늘 낡은 삿갓을 쓰고 다니며 소를 모는 목동이 있었다. 그도 독심산의 피해를 많이 받아 소떼를 반나마 죽이고말았다. 마음씨 착한 목동은 힘이 장사였지만 언제 한번 남들과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목동은 진작부터 독심산의 곤룡포사나이를 미워했다. 목동은 화근의 뿌리를 빼리라 작심하고 도끼를 메고 독심산으로 올라갔다. 곤룡포사나이는 보잘 것 없는 목동이 죽음을 청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앙천대소하며 졸개들을 이끌고 달려나왔다. 어느새 싸움이 벌어졌다. 목동은 도끼를 꼬나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곤룡포사나이도 장검을 비껴들고 번개처럼 지쳐왔다. 도끼와 장검이 부딪치는 순간 장검이 두동강이 나고말았다. 곤룡포사나이는 놀라부르짖으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목동이 몸을 한번 뒤채이면서 벌떡 뛰넘기를 하니 신기하게도 목동이 둘이 되었다. 목동이 몇번 이렇게 뛰넘기를 하는 동안 목동이 순식간에 백여명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목동은 싸울수록 많아져 천여명으로 되었다. 곤룡포사나이는 목동을 당해낼수 없게되자 황급히 굴속으로 도망쳐들어갔다. 목동도 도끼를 들고 뒤쫓아 들어갔다. 굴속에서 계속하여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싸움은 해종일 벌어졌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독심산이 하고 터졌다. 먼지가 하늘 높이 치솟고 바위와 돌들이 산지사방으로 휘날려갔다. 독심산이 터져버리자 함성소리, 비명소리도 사라지고 사위는 잠잠해졌다. 얼마간 지나 먼지가 사라진 다음 보니 독버섯처럼 생겼던 독심산은 묘처럼 둥그런 모양의 산으로 변해버리고있었다.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하여 달려가 목동을 찾았으나 목동은 간곳없고 늘 쓰고 다니던 삿갓만이 나무가지에 걸려있었다. 이때로부터 독심산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세전이벌에는 재화도 덮쳐들지 않았다. 그후 사람들은 이 산이 멀리서 보면 목동의 삿갓과 비슷하다고 하여 모아산(帽兒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아산에서 보는 해돋이 모아산은 연길사람들이 새해의 일출을 즐기는 명소로 부상하고있다. 필자도 련속 몇 년을 설날아침이면 모아산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했다. 작년 모아산정상에서 첫 해돋이를 함께 구경한 친구의 딸은 해돋이를 보면서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던것이 끝내 중점대학에 붙었다. 많은 사람들은 첫 해돋이를 바라보면서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데 그 친구의 딸은 소원성취한것이다. 2005년 1월 1일, 모아산정산에는 어느새 몇백명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오늘따라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여서 사람들 마음은 한결 부풀어있었다. 푸른 하늘 마지막 별마저 사라지자 날씨는 환히 밝아왔다. 연길시, 룡정시, 조양천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저 멀리 개산툰쪽에 우뚝 솟아있는 형제봉마저도 지척처럼 보였다. 해는 바로 그 산으로 솟아오를것이다. 푸르스름하던 동녘이 붉게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쭉 뻗은 산마루에 붉은 띠가 걸린듯 선명한 색조가 산릉선을 물들였다. 정각 6시 58분 형제봉마루에서 반짝하고 빨간 불빛이 터져나왔다. 불덩이같은 태양이 빠끔 나타난것이다. 주먹만큼하던 불덩이가 쑥쑥 솟더니 한아름 두둥그런 불덩이로 변했다. 첫 태양을 기다리고있던 수백명 사람들은 환성을 울리면서 소소리 높이 웨쳤다.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발을 구루면서 환성을 올렸다. 365개의 태양 낳아올릴 피물든 동방의 메부리! 2005년의 태양 1호가 솟아오른다 2005년의 첫 아기가 태여난다 저 태양 이제 집집의 문 열고 복덩이 되어 안기리니 높이 받들자, 태양의 첫 날을! 꽈악 꺼안자, 첫날의 희망을! 올해의 해돋이는 왕년의 해돋이에 비해 훨씬 장엄하고 예뻤다. 작년에는 동산마루에 구름이 한층 끼여서 해가 구름을 뚫고 솟느라고 둥글고 큰 모습을 다 보이지 못했는데 금년의 해돋이는 완전한 모습을 다 보여줘 사람들을 더 흥분시키고있었다. 해가 산마루로 완전히 솟아오르자 찬란한 해살이 온 누리에 물처럼 뿌려져왔다. 눈덮힌 세전이벌은 해살을 받아 흰눈이 붉으스레 물들었고 아침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마을들도 붉은 물이 올라 동화속의 마을처럼 보였다. 환호하는 사람들 얼굴에도 태양은 붉은 물감을 뿌려 홍조가 어리게 했다. 새해 새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들 얼굴은 새해의 첫 해돋이처럼 흥분되여 있었다.    2005년 1월 10일
31    [기행문]뾰족산(김철호) 댓글:  조회:2061  추천:34  2008-09-01
항일전설 깃들어있는 유서깊은 산, 산 정상에 우뚝 솟은 기이한 바위산 뻐스를 타고 연길시가지를 벗어나 연집향소재지에 접어들 때 주의해 보면 뭇산중 그 정상에 바위봉오리가 유독 뾰족하게 솟아있는 괴이한 산을 발견할수 있다. 향소재지 뒤로 좀 멀리 보이는 그 산을 지도에서는 《얜퉁라즈(烟筒砬子)》라고 밝히고있고지만 한족촌민들은 《얜퉁산(烟筒山)》이라고 하고 조선족촌민들은 《뽀족산》이라고 부른다. 어찌보면 굴뚝같아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모양새가 하늘을 겨냥한 창끝과 더 흡사해 보인다. 뾰족산은 해발 649.6메터이다. 뾰족산을 뾰족산이라고 하는데는 이런 항일전설이 전해지고있다고 한다. 뾰족산에 깃든 항일전설 뾰족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팔도구항일유격근거지,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들이 운집해있었다. 뽀족산아래 마을의 조선족농민들도 항일투쟁에 궐기해 나서고있었다. 1934년이 막 가는 어느 날, 항일전사 태항룡이 마을에서 17명 무장대원들과 함께 비밀회의를 하고있었다. 이 소식을 렴탐한 주구놈이 미꾸라지처럼 마을을 빠져나가 일본놈에게 고자질해바쳤다. 삽시에 왜놈과 자위단 2개 중대가 마을을 포위해왔다. 《맞다들어 싸우면 다 죽습니다. 내가 적들을 유인할테니 모두들 마을 뒤로하여 포위를 뚫고 나가시오! 안전지대에서 다시 집합합시다! 빨리 철퇴하시오!》 이렇게 말한 태항룡은 뒤창문을 박차고 후닥닥 뛰쳐나갔다. 어느새 놈들은 마을길에 들어서고있었다. 태항룡은 바자굽에 몸을 감추면서 싸창을 휘둘러 몇놈을 쓰러눕힌후 동지들이 피신한 반대방향으로 냅다 뛰였다. 《잡아라! 저놈이 두목이다! 산채로 잡아라!》 놈들은 벌떼마냥 태항룡의 뒤를 쫓아왔다. 태항룡은 번개처럼 바자를 뛰여넘고 터밭을 빠져나갔다. 놈들의 주의력이 태항룡에게 몽땅 집중되고있는새에 17명 무장대원들은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철퇴했다. 마을을 벗어난 태항룡은 눈깜박할새에 산중턱에까지 톺아 올라갔다. 산밑에까지 쫓아온 놈들은 태항룡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태항룡은 그만 오른쪽 발을 총에 맞고 쓰러졌다. 뒤쫓아온 놈들은 태항룡을 꽁꽁 결박하여 산아래로 끌어내렸다. 《네 놈은 이미 잡힌 몸이다! 그래 우리 따라 내려가겠느냐? 아니면 산으로 계속 오르겠느냐?》 왜놈두목이 태항룡을 노려보면 으르렁거렸다. 《흥, 나는 원래부터 산사람이다! 계속 산으로 오르련다!》 《뭐, 계속 산으로 오르겠다고?! 그래 산에 오르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단말이냐?》 《산에 올라야 잃어버린 나라를 찾을수 있거늘 내 어찌 비굴하게 네놈들을 따라 산을 내린단 말이냐! 뽀족한 수는 산에 올라야 있는거다! 하하하...》 태항룡의 야멸찬 웃음에 놈들은 전율했다. 《좋아! 저놈을 풀어놓아라! 어떤 뾰족한 수로 산에 오르나 한번 보자!》 결박이 풀리자 태항룡은 꿋꿋이 일어섰다. 부상당한 다리가 모질게 아팠지만 한발자국 두발자국 힘있게 옮겨 디디면서 절벽을 톺았다. 한발자국도 내디디려니 생각지 못했던 놈들은 항일전사가 피를 흘리면서 씨엉씨엉 절벽을 톺는것을 보고 아연해지고말았다. 악에 바친 놈들은 태항룡을 향해 미친듯이 총질했다. 용감한 항일전사 태항룡은 동지들 있는쪽을 향해 손을 젖고는 영용히 쓰러졌다. 그때로부터 이 산을 뽀족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짜아짜한 절벽길 뾰족산으로 가는 길은 대략 두갈래이다. 하나는 연집하옆에 난 향도(鄕道)를 따라 한창 가다가 항일전사 태항룡이 희생되였다고 하는 절벽길을 톺아오르거나 좀 더 올라가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한갈래는 연길-도문 국도를 따라 조금 가다가 리민촌 밭길에 들어서서 산을 빙 에돌아 오르는길이다. 절벽으로 오른다는것은 초보등산자들을 놓고보면 결코 쉽지가 않다. 사람들이 다닌 자리가 보이기는 하지만 길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분한 누런 부석바위우에 난 《길》을 톺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에는 나무들도 별반 없어서 바위돌을 짚으면서 기다싶이 올라야 한다. 잘못 디디면 부석바위가 와그르르 허물어져 아래로 굴러내리기에 자칫 사고를 빚을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타고 한창 올라야 잘 다져진 오솔길이 나타난다. 나무도 점점 많아져서 가지를 잡으면서 오를수도 있다. 그러나 량켠이 다 절벽이여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바위우에 솟은 소나무를 감상할수 있다. 항상 그러하듯 소나무와 바위는 어디에서나 잘 어울린다. 푸른 깃을 편 소나무는 검누런 절벽가에 멋스럽게 뿌리내려 그 기상이 더욱 름름하기만 하다. 절벽오솔길에 활등처럼 휘여진 소나무 한그루가 앞을 막고 있었다. 한아름 되는 원 가지는 끊기고 다른 한 가지가 절벽가에 쓰러질듯 누워있는데 반길쯤 되는 절벽을 오르면 그대로 나무 등허리를 탈수 있었다. 쫙 펴져있는 소나무는 커다란 일산같은데 그 밑을 들여다보니 여람은 능히 들어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절벽을 다 오른후부터는 창끝처럼 보이는 바위산까지 늘찬 릉선이 시작된다. 산우에 솟은 바위산 안전하고도 쉽게 뽀족산을 오르려면 리민촌의 밭길을 택하는 것이 상책일것이다. 밭길을 따라 한창 가면 뉘연한 초원이 펼쳐진다. 뛰염뛰염 자그마한 락엽송숲거나 소나무숲이 우거져있는 초원은 산우의 커다란 들판이였다. 여름이면 초록빛 초원, 가을이면 황금빛 초원을 펼쳐주는 산언덕 들판은 소와 양떼들과 어울려 아주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있다. 초원엔 한갈래의 수레길이 꾸불꾸불 뻗어있다. 그 길을 따라 한창 가야 초원을 벗어날 수 있는데 이번엔 신비한 바위들의 군체를 만날 수 있다. 여기저기 집채같은 바위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솟아있는데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특히 재미있었다. 이 바위는 멀리서뿐만아니라 가까이에서 보아도 틀림없는 《거북》이다. 머리를 쳐들고 힘차게 기여가는 모습이 산 거북같아 보여 《왁!》소리쳐 놀려보고싶다. 이번엔 너럭바위가 길가에 쓰러져있다. 몇십명은 능히 오를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이런 바위군체들을 뚫고 한창 가면 깊은 골짝 너머로 뾰족산이 보이는데 뾰족산은 커다란 솥뚜껑의 손잡이같다. 그 손잡이를 잡아들면 뾰족산 전체가 거뜩 들릴것 같기도 하다.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어 산릉선을 타고 빙빙 돌아가야 뾰족산에 닿을수 있다. 늘찬 산길을 따라 한창 가면 솥뚜껑 손잡이같던 뽀족산이 머리를 창끝처럼 쳐든 모습으로 반겨준다. 뽀족산은 산우에 솟은 신비한 바위산이다. 네면이 다 절벽으로 된 바위산에는 별반 초목이 자라지 않고있다. 주위를 빙빙 돌면서 살펴보아도 바위산을 톺을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깎아놓은듯, 얹어놓은듯, 쪼개놓은듯, 세워놓은듯... 아무리 기웃거려도 예리하고 날카롭게 뭉친 바위산을 톺아오를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몇길되는 바위벽에 사람이 오른 흔적이 있어서 살펴보니 디딜만한 자리가 몇곳 있었다. 마침 바위틈에 뿌리박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어 그것을 리용하면 될것 같았다. 바위벽을 마주하고 톺기보다 등을 바위벽에 붙이고 뒤걸음질로 오르기가 더 쉬울것 같아 그대로 해보았더니 과연 한발자국 두발자국 오를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바위벽을 타야 했기에 여간 아짜아짜하고 위험스럽지가 않았다. 오르며 보니 장방형, 정방형의 바위들을 묶어서 세워놓은듯해 발을 놓기가 한결 쉬웠다. 정상에 오른후에는 말을 탄것처럼 절벽을 가로타고 앉아있어야 했다. 이쪽도 저쪽도 다 깎아지른듯 아츨한 절벽이기 때문이다. 앞에 5평방메터쯤 되는 평평한 곳이 있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반메터도 안되는 좁고 울퉁불퉁한 절벽우를 벌벌 기여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평평한 곳에 이르러 보니 대여섯이 빙둘러 앉을수 있는 오붓하고 깜찍한 공간이였다. 허리를 쭉 펴니 멀리 연길시가 한눈에 안겨오고 옹기종기 촌락들도 지척이였다. 흰명주천을 드리운듯한 연집하가 깊은 골짜기에 뿌리 박고있는데 뭇산은 장쾌한 릉선을 긋으면서 아득히 뻗어있었다. 휙휘 불어오는 바람결에 몸이 휘우뚱거렸지만 마음만은 날듯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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