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과 2007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북한군 의장대 사열
2000년 남북 제1차 정상회담 당시 북한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2007년 남북 제2차 정상회담 당시 북한군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 [국방부 제공]
2018년 남북 제3차 정상회담 주제는 "평화, 새로운 시작"...
판문점 내 남북 경계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에서 열린 환송 공연이 끝난 뒤 떠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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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7일 오후 4시30분 2018 남북정상회담의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첫번째 행사로 공동식수를 끝낸 두 정상은 오후 4시36분쯤 군사분계선(MDL)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까지 함께 걸으며 담소를 나눴다. 별도의 수행원 없는 단독 회담이었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도보다리를
다리 끝에는 의자와 탁자가 마련돼 있다. 두 정상은 오후 4시42분쯤 벤치에 앉아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 초기에는 남북의 취재진이 근접해 두 정상의 모습을 촬영했지만, 문 대통령이 먼저 이 부분을 지적해 취재진을 물러나게 했다.
카메라를 정면으
두 정상은 30여분간의 단독 회담을 마치고 오후 5시11분쯤 벤치에서 일어났다. 평화의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두 정상의 대화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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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포토]
'평화 기원' ... 한반도기 펄럭...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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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경남 창원시 분수광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성공 기원 문화제'에 한반도기가 달려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25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당섬선착장에 정박한 어선에 '서해5도 한반도기'가 펄럭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이틀 앞둔 25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거리에 한반도기가 내걸려 있다.
25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남북정상회담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한반도기를 걸고 있다.
(SBS 뉴미디어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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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신웅수 기자 = 26일 밤,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 '함께가자! 우리'의 표어가 연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계사는 이번 표어에 남과 북,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이 차별 없이 동반자가 되어 미래를 열어가는 의미를 담았다. 2018.4.26/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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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연합뉴스) 26일 경북 포항 영일대해수욕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김지영(파란색 한복 입은 사람) 한국서예 퍼포먼스협회장과 김동욱 독도사랑 예술인연합회장이 이순신 장군이 지은 한산가를 쓰는 서예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 2018.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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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군 판문점(板門店)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어룡리에 있는 판문점은 그 장소가 당시 널문리 가게 앞에 있는 콩밭이었다. 가게라야 주막을 겸한 조그마한 구멍가게였는데 휴전회담에 참여하는 중공군 때문에 3개 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자, 중국어로 표기할 글자가 마땅치 않아 널문리가게를 판문점으로 표기하면서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역사적 장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판문점의 본래 이름인 널문리는 옛날 어느 임금이 이곳을 지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함을 보고 마을 백성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뜯어다가 임시로 다리를 놓아 임금이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판자(널)문으로 다리를 놓았던 곳이라 하여 널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판문점의 다리
판문점 인근에는 3개의 다리가 있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새롭게 알려진 다리가 ‘도보다리’. 오전 회담을 마치고 양 정상이 산책하면서 이곳을 지나게 된다.
‘도보다리’는 정전협정 직후 중립국 감독위가 판문점을 드나들 때 동선을 단축하기 위해 판문점 습지 위에 만든 것으로 유엔사가 ‘Foot Bridge’로 부르던 것을 그대로 번역해 ‘도보다리’로 부르게 됐다.
우리 측은 이번 회담을 위해 좁은 다리를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확장했다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알리는 표지판.
출처 : 국방일보 DB
사실 판문점의 원조 다리는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다. 원래 ‘널문다리’였지만,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포로 교환이 이뤄지면서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에서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 이후 폐쇄됐다.
북측 통일각 뒤편의 ‘72시간 다리’는 지난해 발생한 ‘오청성 귀순 사건’으로 존재가 주목받았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되자 북측이 사흘(72시간) 만에 새 다리를 세웠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72시간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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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끝
한 미군 병사가 다리 중간에 서있다. 대한민국 군인 2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보면서 지키고 있다. (2003년)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계인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공동 경비 구역 서쪽에 흐르는 사천에 위치한다. 1953년 한국휴전협정 체결 후에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다리의 이름은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본래의 다리 이름은 널문다리였으며, 1953년 7월 휴전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포로 송환용으로 쓰인 적은 1968년 푸에블로 호 선원들이 석방되어 다리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건너간 때가 마지막이다.[1][2] 이 다리는 1976년 8월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용도로 자주 쓰였다.[3] 사건 발생 이후 국제 연합 사령부는 공동 경비 구역 내에서도 군사 분계선을 구분 짓도록 하였고,[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72시간만에 판문점 서쪽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4]
한반도 군사 분계선이 다리 가운데 부분을 지나가며, 다리의 양쪽 끝부분에는 각 국가의 초소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소는 KPA#4으로 불리며, 1980년대 중반 폐쇄된 국제 연합 사령부(UNC) 검문소는 CP#3으로 불렸다. CP#3는 나무가 둘러싸여 있어서, 동계 기간에는 UNC OP#5(오늘날 CP#3로 개명) 초소에서만 관측할 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KPA)은 옛 CP#3 초소에서 UNC 병사를 납치하여 다리를 지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로 데리고 가려는 시도를 수없이 많이 하였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와의 근접성, 모든 접근 경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소로 에워싸여 있다는 점, 근무하는 UNC 병사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반복된다는 점 때문에 CP#3를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전초 기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2003년에 다리를 보수할 필요가 있게 되자 미국 정부가 다리를 보수하거나 교체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5]
주요 사건[편집]
1953년 4월 리틀 스위치 작전
2년 동안 진행된 협상의 네 가지 주제 중 하나인 포로 송환의 시험 케이스가 된 작전이다. UN 포로 중 605명의 병자, 부상자와 공산 진영 포로 중 6,030명의 병자, 부상자를 교환하였다.[6][7]
★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전경
판문점 인근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공동경비구역 우리측 지역 평화의 집 뒤쪽 사천강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다리 중간에는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있는데 1953년 휴전협정 조인 후 포로교환이 이루어졌을 때 양측 포로들이 이 다리를 통해 남쪽과 북쪽으로 송환되면서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데서 유래한 다리입니다. 원래 다리는 널문다리였으며 북한에서는 사천교로 알려져 있으며 1953년 7월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인근에 있는 군사분계선 표지판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포로 송환용으로 쓰였던 적은 1968년 푸에블로 호 선원들이 석방되어 다리를 통해 건너간 때가 마지막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다리는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용도와 남북한 적십자회담대표의 왕래 용도로 쓰였습니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 위치한 남한 측 초소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UN에서는 공동경비구역 내에서도 군사분계선을 구분짓도록 하였고 이 다리의 통행을 금하였습니다. 이에 북한이 72시간만에 판문점 서쪽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였고 그 이후 이 다리는 쓰여지지 않게 됩니다.
★ 1983년 당시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 처진 철조망- 북한은 이 곳으로의 출입을 막기 위해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는 북한군 감시초소가 있고 중무장한 병력이 주둔해 있는 반면에 남쪽에 위치한 남한 측 초소에는 무인 감시장비만 가동하고 병력은 배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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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남북 정상회담장인 판문점에서 신뢰를 다질 친교산책을 할 때 갈 ‘도보 다리’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시설이다. 이에 따라 도보다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도보 다리는 JSA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MDL) 위에 지어진 회담장과 그 동쪽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사무실 사이에 놓인 길이 50?쯤 되는 작은 다리다.
사진은 지난 6일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위원들이 판문점 현장 점검에 나서 도보 다리를 걷는 모습. 2018.4.26 [연합뉴스 자료사진]">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는 27일 남북 정상회담장인 공동경비구역(JSA) 판문점에서 친교 산책을 할 때 마주칠 ‘도보 다리’는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시설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26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 차려진 남북 정상회담 메인프레스센터(MPC) 브리핑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 식수를 마치고 나면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 다리까지 양 정상이 친교 산책을 하면서 담소를 나눌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보 다리는 JSA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MDL) 위에 지어진 회담장과 그 동쪽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사무실 사이에 놓인 길이 50?쯤 되는 작은 다리다.
사진은 지난 6일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위원들이 판문점 현장 점검에 나서 도보 다리를 걷는 모습. 2018.4.26 [연합뉴스 자료사진]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26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 차려진 남북정상회담 메인프레스센터(MPC) 브리핑에서 “(남북 정상이) 공동 식수를 마치고 나면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도보 다리까지 친교산책을 하면서 담소를 나눌 예정”이라고 밝혔다. 산책하는 동안 수행원들이 따라붙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두 정상이 속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도보 다리는 판문점 우리쪽에서 봐서는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공동경비구역(JSA)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MDL) 위에 지어진 T1∼T3 건물과 그 동쪽에 떨어져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캠프(사무실) 사이에 놓인 길이 50m쯤 되는 작은 다리다. 보통 중감위 요원들이 판문점 회담장으로 이동할 때 도보 다리를 지나간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당시 다리가 만들어질 때는 실개천이 흘렀지만, 지금은 다리 아래로 물은 흐르지는 않고 습지가 형성돼 있다.
▲ 남북 정상회담 주요 일정
JSA 남쪽 구역을 관할하는 유엔군사령부에서 ‘풋 브리지’(Foot Bridge)로 부르던 것을 우리 말로 그대로 옮기면서 ‘도보 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도보 다리는 파란색 페인트칠을 했다. 유엔군사령부가 관리하는 시설은 모두 파란색으로 칠했기 때문이다. 유엔사 관계자들이 도보 다리를 ‘블루 브리지’(Blue Bridge)라고도 부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반면 중립국감독위는 파란 색이 유엔색이기도 하지만 한반도기색이라고도 한다.
도보 다리가 놓인 곳은 1998년 2월 판문점 경비를 담당하던 북한군 부대 소속 장교인 변용관 상위(당시 계급·우리 군 중위~대위)가 귀순한 루트이기도 하다. 과거 북한군 탈북통로가 이제 남북 평화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로 변모하게 됐다.
임 실장은 브리핑에서 “이제부터 도보 다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슬로건인 ‘평화, 새로운 시작’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보 다리는 폭이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가기도 어려웠으나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확장공사를 해 성인 세 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충분할 정도가 됐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 해인 1953년생 소나무 공동 식수를 하는 장소는 1998년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 루트인 ‘소 떼 길’로, 이 또한 T1∼T3 건물 동쪽에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소 떼 길에서 공동 식수를 하고 도보 다리까지 자연스럽게 걷게 될 것으로 보인다.
▲ 1998년 6월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임진각에 도착한 정주영명예회장.서울신문 DB
도보 다리 인근에는 다리에서 맨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 MDL 표식물이 있다. 높이 1m 크기의 나무 말뚝인 이 표식물은 겉면에 노란색이 칠해졌다. 남쪽에서는 ‘군사분계선’이란 한글과 ‘MDL’이란 영어 글씨가 보인다. 북한 쪽에서는 한자와 한글로 쓴 군사분계선이란 글씨가 보인다. 155마일 MDL에는 이런 말뚝 1292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도보 다리까지 친교산책을 한 다음, 평화의 집으로 돌아가 오후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이와는 달리 JSA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72시간 다리’는 제법 많이 알려졌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정전협정 직후 포로 교환을 했던 곳으로, 분단의 상징으로 통한다. JSA 북쪽 구역에 있는 72시간 다리는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되자 북한이 72시간 만에 건설한 다리를 말한다.
온라인뉴스부
[출처: 서울신문]
26일 오후 경기도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한 모습이다.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여기서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눌 예정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같은 해 10월 19일 설정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군사분계선(MDL) 상에 놓여 있었지만 공동경비구역(JSA)의 취지에 따라 남과 북을 가르는 물리적 경계를 설치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 경비병과 회담 관계자들은 공동경비구역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함께 근무했다. 1958년 중공군이 철수하면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관리를 맡게 됐지만 자유 왕래 원칙은 한동안 유지됐다. 양측은 각각 장교 5명·병사 30명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비병력을 운용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공동경비구역에 경계 시설물이 들어선 것은 1976년 8월18일에 일어난 도끼만행사건 이후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 제3초소 앞에서 미군 장교 2명과 병사 4명, 한국군 장교 1명, 병사 4명이 한국인 노무자들의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호위하던 도중 북한군이 도끼와 쇠망치를 휘두르며 공격해 미군 장교 2명이 숨졌다. 한국과 미국의 강경 대응에 직면한 북한이 유감을 표명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던 공동경비구역에도 같은 해 9월부터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 시설물이 들어섰다. 공동경비구역 외곽과 건물이 없는 지역에는 1m 높이의 흰 말뚝이 10m 간격으로 126개가 설치됐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건물 사이에는 높이 5㎝, 폭 50㎝의 콘크리트 라인이 만들어져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다. 건물 안에 놓인 테이블도 마이크 연결선으로 표시된 군사분계선에 의해 나뉘었다.
JSA 내에도 군사분계선이 설정되면서 공동경비구역 경비를 담당하는 유엔군과 북한군은 월경하지 않은 채 각자의 책임 구역만 관리하는 쌍방 분할경비 체제로 전환했다. 유엔군은 남측 지역에 3개, 북한군은 북측 지역에 5개의 경비초소를 설치해 운용 중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는 남북 경비병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근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는 군사분계선상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할 때는 남북 경비병이 10m 정도 떨어진 채 근무한다.
///박수찬 기자
한반도 분단의 비극 고스란히 간직한 ‘판문점’
판문점(板門店)을 한자 그대로 풀면 ‘판자문이 달린 가게’다. 남북 경계선에 걸터앉은 실제 판문점은 ‘문’이자 ‘벽’이다. 남과 북이 각각 문을 열고 들어와 마주 앉지만, 상대편 문은 닫힌 벽과 다름없다. 본래 뜻과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이곳은 지난 65년간 한반도의 비극을 압축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숱한 충돌과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그만큼 27일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뤄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1년 만에 열리는 남북 정상의 대화가 반대편 문을 마저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판문점 주소는 2개다. 남측 행정구역으로는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측 것으로는 개성특급시 판문군이다. 주소는 있지만 남북 모두 행정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특수지역이다. 원래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던 이곳의 이름은 널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가 강물에 막히자, 농부들이 널문(대문)으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한 뒤부터 널문리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근 사천강에 널판 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전쟁은 마을 이름을 바꿨다. 판문점이라는 한자식 지명 자체가 비극의 산물이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10월25일부터 널문리 주막 앞 콩밭에서 휴전협상을 했다. 첫 휴전협상이 열린 개성 내봉장에서 장소를 옮긴 것이다. ‘널문리 주막’을 중국 측이 찾기 쉽게 한자로 표기한 게 판문점이다. 이때부터 초가집 몇 채와 주막을 겸한 작은 가게가 있던 농촌 마을에 임시 천막들이 세워졌다. 휴전협상이 765차례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를 보면, 총을 멘 군인들이 지키는 회담장 옆 밭에서 농부들은 보리와 감자를 수확했다.
현재의 판문점은 1953년 7월27일 최종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은 아니다. 확정된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가로지르는 곳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을 두기 위해, 그해 10월 원래보다 남쪽으로 더 내려온 현 위치로 옮겨왔다. 위치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판문점으로 불렀다. 판문점은 이미 단순한 지명이 아닌, 상징적 기호가 돼 있었다.
비극과 희망을 품은 건물들이 차례차례 들어섰다. 군사분계선상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푸른색 건물 3개 동이 놓였다. ‘임시(Temporary)’의 영문 첫 글자를 따 T1, T2, T3로 불렀다. 임시 건물은 65년째 그곳에 서 있다. 경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대칭으로 자유의집(남측)과 판문각(북측)이 세워졌다. 이번 정상회담 개최 장소인 남측 평화의집과 북측 통일각은 각각 1989년과 1985년 남북회담장 용도로 준공됐다.
원래 JSA는 남북 공동경비구역으로, 이 안에선 양측 경비병들이 선을 넘어 오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76년 8월18일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 이후 판문점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그날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 도끼 등으로 살해당했다. 이틀 뒤, 미 제2보병사단 공병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이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미루나무를 아예 잘라냈다. 당시 국군 제1공수특전단이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후방에서 폴 버니언 작전에 참여했다. 전면전까지 비화할 분위기였지만 2차 충돌은 없었다.
그해 9월 군사분계선상에 높이 5㎝, 폭 50㎝의 야트막한 돌들이 놓였다. 돌을 넘는 것은 금지됐다. 포로 교환에 이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된 것도 이때다. 포로들이 이 길을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군사분계선 남측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북한은 3일 만에 ‘72시간 다리’를 놓았다. 지난해 말 판문점을 넘어 귀순한 북한군 오모씨가 차량을 타고 질주한 곳이 72시간 다리다. 1976년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은 이어졌다. 1984년 구소련 학생인 마투조크가 판문점을 통해 귀순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한국군 1명과 북한군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충돌의 최전선이었지만, 대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철조망 없이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이라는 특수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군사정전위원회뿐 아니라 남북 간 회담의 무대로 본격 활용됐다. 1971년 8월 남북 적십자 접촉을 시작으로 남북 연락사무소가 설치되고 그해 9월 자유의집과 판문각 사이 직통전화 회선이 열렸다. 이른바 ‘판문점 핫라인’이다. 이런 접촉은 1972년 남북 당국 간 최초 조약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는 밑거름이 됐다. 남북 간 당국회담·적십자회담·군사회담 등 다양한 회담들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총 655번의 남북회담 중 360번은 판문점이 무대였다.
남북 인사들이 오갈 때도 판문점을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다. 1989년엔 방북했던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1차 북핵 사태가 절정에 이르던 1994년 6월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가 돌아오며 전환점을 만들었고, 4년 뒤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이 길을 거쳐갔다.
눈물과 기쁨의 순간들이 판문점을 통로로 교차했다. 1985년엔 남북 이산가족들이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으로 상봉했다. 이산가족들의 애달픈 편지도 판문점을 통해 오갔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현정화, 이분희 등) 우승 직후 북측이 먼저 1년 보관했던 우승컵이 남측에 넘겨진 장소도 이곳이다. 1993년엔 전향을 거부하고 장기수로 복역해온 이인모씨가 이곳을 통해 북으로 송환되며 42년 만에 가족과 해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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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역사적 첫 만남을 가졌다. 남북 정상 부부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역대 처음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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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설주 판문점 도착…문재인-김정숙 내외 환영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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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판문점 선언’ 직후인 이날 오후 6시17분 리 여사는 군사분계선(MDL)을 검은색 벤츠 리무진을 타고 넘어왔다.
한반도기와 같은 색인 하늘색 코트 차림의 김 여사가 평화의집 현관에서 화사한 분홍색 치마 정장 차림의 리 여사를 미소로 맞았다. 리 여사의 패션은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김 여사는 리 여사의 허리에 손을 가볍게 얹어 친근감을 표시하며 자연스럽게 평화의집 안으로 안내했다.
만찬장인 평화의집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환한 미소로 이들을 맞이한 뒤 각각 서로의 배우자와 악수를 했다.
두 정상 부부의 첫 만남은 시작부터 화기애애했다.
문 대통령 내외는 귀한 손님을 맞아 따스한 배려를 시종 표시했고, 김 위원장 내외 역시 편안한 농담으로 화답했다.
리 여사는 먼저 “아침에 남편께서 회담 갖다오셔서 문 대통령과 좋은 얘기 많이 나누고 회담도 다 잘됐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면서 문 대통령에게 회담 성공을 축하했다.
김 여사는 “다리를 건너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평화롭던지”라며 “무슨 말씀을 하는지 가슴이 막 뛰었다”며 김 위원장에게 역사적 회담에 대한 벅찬 감격을 상기된 표정으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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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27일 오후 판문점">
▲ [남북정상회담] 기념촬영 후 이동하는 남북정상 부부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27일 오후 판문점
김 위원장은 “벌써 보셨냐. 그게 다 나왔구만요”라며 빠른 전파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에 김 여사는 “굉장히 좋았습니다”라며 “그래서 미래는 번영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도 심고 하는 게”라며 덕담을 건넸다.
리 여사는 또 김 여사를 향해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고 들었다. 여사께서 작은 것까지”라며 “그래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이렇게 왔는데, 아무 준비를…”이라며 밝은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문 대통령은 곧바로 “가구 배치 뿐 아니라 참견을 했는데”라며 “(김 여사와 리 여사의) 전공이 비슷하기 때문에, 남북간 문화예술 교류, 그런 것들에 많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며 두 정상 부인 차원의 교류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리 여사는 “앞으로 하시는 일이 더 잘되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라며 화답했다.
두 정상 부부는 양측 수행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 뒤 민정기 작가의 북한산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진행한 뒤 3층 만찬장을 향했다.
/온라인뉴스부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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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중의 꽃 작약은 북한 상징, 유채는 남한 상징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화동으로 부터 꽃다발을 받은뒤 판문점 자유의 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 04. 27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꽃다발을 준 화동아이들은 경기도 파주시 대성동초등학교 5학년 남녀 학생이었다.
대성동초등학교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민통선 안에 있는 공립초등학교다. 교원 10명에 학생 30명의 작은 공립학교다.
대성동은 비무장지대 남측에 있는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전입이 자유롭지 않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뿐만 아니라 민통선을 지나 남방한계선보다도 북쪽에 있기 때문에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남방한계선 위쪽에 있는 학교는 이 학교가 유일하다.
1968 문을 연 대성동초교는 30여 년 전에 전교생 숫자가 최대 23명에 이른 뒤로 학생 수가 점차 감소해 2007년 전교생이 9명으로 줄어들며 인근 군내초교와 통폐합하는 방안까지 거론됐지만 2006년 공동 학구로 지정돼 다른 지역 학생의 입학이 허용되면서 전교생이 30명까지 늘었다.
이 학교는 올해 2월 49회 졸업식까지 총 19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편 두 화동이 건넨 꽃의 의미도 각별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작약과 데이지류 들국화, 유채꽃으로 구성했는데 작약은 꽃 중의 꽃으로 꽃의 왕이자 북쪽을 상징한다. 데이지는 평화의 상징, 유채꽃은 남쪽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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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재치있는 '어록'을 남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날도 북한 '최고존엄'의 면모를 여실히 내비쳤다.
이날 오전 11시55분쯤 100분간의 '1차 2018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김 위원장은 오전 11시56분쯤 평화의 집 로비를 빠져나와 임종석 비서실장, 권혁기 춘추관장 등과 악수를 나눈 뒤 대기하고 있던 전용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을 태운 전용차 앞뒤에 '번호판'이 달리지 않은 모습이 포착되면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도 공수해 갔던 '애마' 벤츠 S600 전용차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 관용차 번호판에도 한때 서열이 있었다. 대통령은 1001번, 국회의장은 1002번, 대법원장에게는 1003번의 관용차 번호판이 부여됐다.
반면 김정은에게는 의전서열을 뛰어넘은 북한 '최고존엄'으로서의 의미로 번호판을 붙이지 않은 전용차를 이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이날 재치있는 농담을 잇달아 선보이며 인간다운 면모를 보였지만, 북한의 제1 권력자의 실력도 은근히 행사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태운 차량이 27일 오후 오전 판문점 정상회의 후 오찬을 하기위해 북측 판문각으로 돌아가고 있다.2018.4.27 © News1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이날 오전 문 대통령과 회담장에 마주 앉은 김 위원장은 취재진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오늘 저녁 만찬 음식 갖고 (언론들이) 많이 이야기를 하던데 어렵사리 평양에서 평양냉면을 가져왔다"면서 "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 청와대에서 52km 떨어진 이곳까지 오는 데 약 1시간이 걸렸다고 말한 문 대통령에게 "우리 때문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하시느라 새벽잠을 많이 설쳤다는데,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셨겠다"고 뼈있는 농담을 던진 그는 "문 대통령이 새벽잠을 설치지 않도록 내가 확인하겠다"고 돌려 말하는 재치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찬과 휴식을 위해 평화의 집에 오른 김 위원장은 '최고 존엄'을 뜻하는 전용차에 올랐고, 경호원 12명의 철통 경호를 받으며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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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집 1층에서 방명록을 남기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27일 판문점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전 판문점 평화의집 1층에서 자필로 방명록을 남겼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특한 서체로 "새로운 력사(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는 글을 남겼다.
김 위원장의 서체를 본 필적 분석가 구본진 변호사는 "경사 각도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올라가는 걸 보아 조부 김일성, 부 김정일의 필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매우 가파른 기울기를 봤을 때 김 위원장은 도전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서 "이 점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글씨체와도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구 변호사는 또 "단어마다 'ㅇ'을 다르게 쓰는 것처럼 일관되지 않은 글씨가 있지만 규칙성이 심하게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이는 다소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나 대체로 예측 가능한 성격이라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방명록에 남긴 '2018' 글씨체를 보면, 각각의 글씨가 서로를 침범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개의치 않아 하는 성격을 뜻한다. 구 변호사는 "행간이 좁은 글씨를 봤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위협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빠른 속도로 방명록을 써내려갔다. 이에 대해 구 변호사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성격이 급하다는 걸 의미한다"면서 "글씨 쓰는 속도가 빠른 사람들은 일을 대충대충 끝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남긴 방명록. /사진 제공=청와대
한편 지난달 방남했던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방명록에 남긴 글씨체가 화제가 된 바 있다. 구 변호사는 "김여정의 글씨는 가로선의 기울기가 가파르게 올라간다. 이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김영남의 부드러운 글씨체는 공손하고 관대한 성격을 뜻한다. 다만 글자의 가로선이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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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포토]
'급하다 급해' 평양냉면
긴급 수송 대작전
권우성 201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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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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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남북정상회담 환영만찬이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가운데 북측 판문각에서 만든 평양냉면(옥류관) 사리를 4번에 걸쳐 평화의 집으로 옮기고 있다.
2018 남북정상회담 환영만찬이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가운데 북측 판문각에서 만든 평양냉면(옥류관) 사리를 4번에 걸쳐 평화의 집으로 가져 왔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2018 남북정상회담 환영만찬이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가운데 북측 판문각에서 만든 평양냉면(옥류관) 사리를 4번에 걸쳐 평화의 집으로 가져 왔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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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7일 오후 4시30분 2018 남북정상회담의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첫번째 행사로 공동식수를 끝낸 두 정상은 오후 4시36분쯤 군사분계선(MDL) 표식물이 있는 도보다리까지 함께 걸으며 담소를 나눴다. 별도의 수행원 없는 단독 회담이었다.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도보다리를
다리 끝에는 의자와 탁자가 마련돼 있다. 두 정상은 오후 4시42분쯤 벤치에 앉아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 초기에는 남북의 취재진이 근접해 두 정상의 모습을 촬영했지만, 문 대통령이 먼저 이 부분을 지적해 취재진을 물러나게 했다.
카메라를 정면으
두 정상은 30여분간의 단독 회담을 마치고 오후 5시11분쯤 벤치에서 일어났다. 평화의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두 정상의 대화는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