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란 흑돌과 백돌을 바둑판 위에 번갈아 두며 ‘집’을 많이 짓도록 경쟁하는 게임이다. 집은 [그림 1]과 같이 돌들로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
그림 1
흑돌로 둘러싸인 A는 흑집이며, 백돌로 에워싸인 B는 백집이다. 참고로 ‘집’을 한자어로는 가(家), 호(戶), 목(目)(일본식), 자(子)(중국식) 등으로 표현하며, 서양에서는 territory(영토), point(점)라 부른다. 흑백이 서로 많은 집을 지으려다 보면 경계선을 둘러싼 분규가 일기 마련이며, 그것은 치열한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돌들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돌의 삶과 죽음이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수많은 격언과 교훈이 파생되고, 그래서 바둑은 흔히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바둑
역사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발생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요순창시설
바둑의 유래는 대부분 고대의 전설에 의존하는 형편이며, 사실(史實)이 기록된 문헌도 드물다. 그러한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중국의 요(堯)·순(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다. 중국의 고전 『박물지(博物誌)』에 실린 ‘요조위기 단주선지(堯造圍棋 丹朱善之)‘라는 문구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전 요왕이 아들을 위해 바둑을 발명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설문(說文)』에는 기원전 2200년경 순왕이 우매한 아들에게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중흥서(中興書)』에도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내용 자체가 다분히 전설적인데다 구체적이지 못해서 이 ‘요순창시설’의 사실적 근거가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어리석은 아들’이라면 바둑을 배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체관측설
농경(農耕)사회였던 고대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도구로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하여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설이 과학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칭위엔설
현대바둑의 틀과 수준을 진일보시켜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불리는 중국 출신의 우칭위엔(吳淸源) 九단은 바둑의 유래에 관해 “요왕이 아들 단주에게 놀이 도구로써가 아니라 천문을 연구하는 도구로써 바둑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며 위의 두 가지 설을 연결시킨 추론을 편 바 있다. 즉, 역학(易學)이나 제례(祭禮)에 관한 교양을 터득하라는 뜻에서 바둑을 가르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삼국유사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도림(道林)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백제 문화가 일본에 전파될 때 바둑도 함께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일각에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시대 때부터 바둑이 두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는 불확실하다.
가장 오래된 기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실전 기보는 200년경 오(吳)나라의 장수 손책(孫策)과 여범(呂範)이 두었다는 기보로 송나라 때의 바둑고전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 실려 있다. 당·송 시대에는 바둑이 상당히 융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이 이일민의 위작(僞作)이라는 설도 있다. 국내 기보로 가장 오래된 것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망명 시절인 1886년 일본의 본인방 슈에이(秀榮)와 두었던 6점 접바둑이다. 이 기보는 지난 92년 바둑서지학자 안영이씨에 의해 일본에서 발견된 바 있다.
사실 한국 바둑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문서화시키는 일에 소홀했던 탓에 더 오래된 기보가 남아 있지 못한 점은 중세 때부터의 바둑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할 때 아쉬운 일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보
근대 바둑의 성립과 발전
고대 중국에서 발명된 이래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일부 상류층 사이에서만 행해지던 바둑이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게임의 토대를 갖추게 된 것은 중세 일본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막부(幕府)시대에 바둑은 국기(國技)로 적극 지원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바둑을 업(業)으로 삼는 기사(棋士)제도와 본인방(本因坊) 등의 바둑가문이 생기고, 이들에 의해 룰이 정비되며 각종 이론, 정석이 정립되는 등 비로소 근대경기로서의 틀과 체계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가문세습제도 대신 협회(일본기원)와 프로 제도가 탄생하고, 신문사들이 기전의 스폰서로 나서면서 오늘날 현대바둑의 틀을 갖추게 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현재의 바둑과는 달리 돌들을 미리 배치하고 두는 고유의 순장(巡將)바둑이 20세기 초반까지 성행했는데, 현대바둑이 도입된 것은 해방 후 일본에 바둑 유학을 다녀온 조남철 九단(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에 의해서이다.
특히 현대바둑 보급에 일생을 바친 조남철 九단의 선구적 노력에 힘입어 당시까지만 해도 한량들의 잡기 취급을 받던 바둑이 오늘날 본격적인 정신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용구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먼저 경기장과 도구 구실을 하는 바둑판과 바둑돌이 필요하다. 바둑판은 모두 가로×세로 19줄씩 361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이 점들이 바둑돌을 놓는 착점의 대상이자 집의 단위가 된다. 바둑돌은 흑과 백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국 방법과 예절
대국 방법
• 바둑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하는 경기다(단, 여러 사람이 두 편을 갈라 팀을 이루어 하는 연기(連棋)도 경우에 따라 가능하다).
• 두 사람이 흑백을 나누어 갖고 쌍방이 한 번씩 교대로 두어나간다. 첫 점은 흑이 먼저 둔다(접바둑에서는 백이 먼저 둔다).
• 바둑의 승패는 종료 후 흑백의 집을 비교해 가린다. 즉, 많은 집을 확보한 쪽이 승리한다.
• 쌍방의 집수를 비교하기 위해 종료 후 서로의 집을 세기 쉽게 직사각형으로 구획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계가(計家)라고 한다. 이때 대국 중간에 잡은 상대의 사석(死石 ; 포로)들은 모두 들어내 상대의 집을 메우는 데 쓴다. 따라서 상대의 돌을 많이 잡은 쪽은 그만큼 유리하다(단, 이것은 한국과 일본식 룰에 따른 것이며, 중국과 대만 등에서 쓰이는 룰에서는 집을 세는 방법이 다르다).
기본 규칙
국내에서 치러지는 바둑시합은 (재)한국기원이 제정한 ‘한국기원 바둑규칙’의 적용을 받는다. 여기서는 간단한 기본 규칙을 10가지로 나누어 소개한다.
• 1회1수의 규칙 : 두 사람이 한 수씩 교대로 둔다. 즉,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수 이상을 둘 수 없다.
• 착점 위치 : 돌을 놓는 위치는 선과 선이 교차되는 점 위다. 선 위나 선 사이의 공간에는 둘 수 없다.
• 착점의 자유 : 반상 위 361개의 점 위라면 어디든지 착점할 수 있다. (※ 단, 이미 돌들이 놓여 있는 기착점과 착수금지점은 제외) 기물마다 행마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장기나 체스와는 크게 구별되는 점이다.
• 일수불퇴(一手不退)의 규칙 : 일단 놓인 수는 절대로 무르거나 움직일 수 없다. (※ 단, 통신바둑에서 키보드나 마우스 조작 미스로 인한 오착(誤着)은 예외)
• 불계의 규칙 : 형세가 크게 불리하거나 역전의 승부처가 없을 때는 끝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기권을 표할 수 있다. 이것을 ‘불계패(不計敗)’라고 하는데, 예의 차원에서 높이 평가되는 관행이다.
• 들어냄의 규칙 : [그림 2-A]처럼 흑돌 4개가 백돌의 활로를 완전히 막으며 포위했을 때는 백돌을 반상에 들어낸다. 즉, [그림 2-B]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따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따낸 백돌은 흑의 포로가 되어 계가시 백집을 메우는 데 쓰인다([그림 2-C]는 잘못된 둘러쌈이다).
그림 2
• 착수금지점의 규칙 : 바둑에서는 기본적으로 반상 어디에나 착점할 수 있지만 예외적으로 둘 수 없는 곳이 있다. [그림 3-A]처럼 이미 상대로부터 사방이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곳에는 착점할 수 없다. (※ 예외 : [그림 3-B]처럼 한 점에 놓아 상대의 돌 전체를 곧바로 따낼 수 있을 때는 백의 입장에서 착수금지점이 아니며, 오히려 흑의 착수금지점이 된다.)
그림 3
• 동형반복금지의 규칙 : [그림 4]처럼 흑백이 맞물려 서로 맞따내는 형태를 하고 있을 때 적용되는 규칙. A의 흑1로 백 한 점을 따낸 뒤 곧바로 B의 백2로 흑 한점을 되따내는 것을 허용한다면 C와 D처럼 다시 흑3, 백4로 되따내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A의 흑1 직후 백은 곧바로 B의 백2로 따낼 수 없으며, 다른 곳에 한 수 이상을 둔 다음 기회가 오면 비로소 백2로 되따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패(覇)’라고 일컬으며, 이 패를 놓고 벌이는 절충의 과정을 ‘패싸움’이라고 한다.
그림 4
• 권리인정의 규칙 : 이 규칙은 다소 어려우면서도 바둑에서 가장 시비 거리가 되곤 하는 상황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림 5]의 귀곡사(曲四) 형태. 여기서 갇혀있는 흑돌들은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흑의 입장에서는 A나 B에 둘 수 없는 반면, 백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A에 두어 [그림 6], [그림 7]처럼 패를 만들 수 있는 일방적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흑돌을 둘러싼 백돌의 삶이 완벽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즉, [그림 8]처럼 흑돌을 둘러싼 백돌도 미생일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럴 때는 [그림 6], [그림 7]의 수순을 거쳐 패싸움으로 쌍방의 삶이 결정된다.
그림 5
그림 6
그림 7
그림 8
• 공배와 가일수의 규칙 : 종국 후 공배를 메울 때는 흑백이 교대로 메워야 한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공배를 메워나가다 발생할 수 있는 가일수(加一手)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단, 쌍방이 합의한 상황이라면 자유로이 메울 수 있다.
중국 룰, 대만 룰, 응씨 룰의 주요 차이점
바둑의 기본 룰과 체계는 세계 어디서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세계적으로 통일된 룰 없이 국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른 룰을 채택하고 있으므로 때로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현재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바둑 룰은 일본 룰(한국 룰과 거의 동일)이다. 그런데, 중국과 대만에서는 다른 룰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문제다. 더욱이 대만 출신 부호로 응씨배 세계대회를 창설하는 등 세계바둑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고 잉 창치(應昌期)가 고안한 ‘응씨 룰’의 경우는 그것들과도 차이점이 있다.
집 단위의 차이
중국·대만 룰이 한국·일본 룰과 가장 많이 다른 점은 집의 단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일본 룰에서는 하나의 점을 1집으로 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그것이 1/2자(子)가 된다. 또한 계점제를 쓰고 있는 대만에서는 1점(點)이라고 한다.
계가방식의 차이
한국·일본 룰에서는 집과 관계된 유효착수가 끝난 상태(‘대국종료’)에서 집과 관계없는 공배(空排)들를 교대로 메운 뒤 상대의 집을 서로 헤아려주는 계가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때 자신의 영토 속에서 잡혀 있은 사석들과 이미 따내어져 있는 사석들은 상대의 집을 메우는 데 쓰인다. 그런데, 중국·대만 룰에서는 ‘공배’의 개념이 따로 없다. 한국·일본 룰에서는 사석으로 상대의 집에 메우는 마이너스 계가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중국은 반상의 살아있는 돌에서 죽은 돌을 빼는 계가방식을 택하고 있다. 반상의 모든 점 하나하나가 집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착수금지점의 차이
한국·일본 룰에서는 위에서 밝힌 대로 분명한 착수금지점이 있다. [그림 9]에서 a와 b는 모두 백의 착수금지점이다. 그런데 중국 룰에서는 백을 이곳에 둘 수 있다. 만약 a에 백을 둔다면 그 착수는 무효가 되며, 착수권이 흑에게로 넘어간다. 즉, 백은 착수포기(pass)를 한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림 9
덤과 제한 시간의 차이
현재 한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덤은 6집반이다. 일본과 중국은 대부분 5집반의 덤을 적용하고 있다. 최근 중국 천원 전에서 7집반의 덤을 적용하고 있지만, 아직 시험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응씨 룰에서는 이미 89년 응씨배 세계대회 때부터 8점(한국식으로 7집반)의 덤을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응씨 룰은 제한시간·초읽기에서도 한국·일본 룰과는 다른 제도를 쓰고 있다. 일반적인 룰이 일정의 제한시간을 모두 쓰고 나면 초읽기를 하고 있는데 비해, 응씨 룰에서는 기본 시간을 모두 쓰고 나면 3회에 걸쳐 추가 시간을 각 회 초과 때마다 2집씩 공제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3회 모두 초과 시에는 시간패).
==============================덤으로 더...
요약 바둑판은 네모꼴로 가로·세로 19줄 361점이다. 흑백으로 편을 나누어 361점 위 적당한 지점을 중심으로 서로 한 점씩 번갈아 진을 치며 싸워 그 차지한 점(집)이 많고 적음으로 승부를 가린다.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만은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각각 어리석은 아들의 머리를 깨우치려고 바둑을 창안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이 있으나 믿기는 어렵다. 한편 고누와 같은 단순한 놀이가 오랜 역사발전과 더불어 개량·보완·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점을 치기 위한 도구 또는 천문관측과 초기 음양오행설의 소박한 도표가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변질·발전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우리말인 '바둑'을 지방에서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배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배자의 '자'(子)는 돌, 독으로 배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한 것이 아니겠냐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신라시대부터 써내려와 순수한 우리말이 되었다고 한다.
목차
접기
순장바둑
전래
입단제도
바둑
바둑판은 네모꼴로 가로·세로 19줄 361점이다. 흑백으로 편을 나누어 361점 위 적당한 지점을 중심으로 서로 한 점씩 번갈아 진을 치며 싸워 그 차지한 점(집)이 많고 적음으로 승부를 가린다.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만은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설문 說文〉·〈박물지 博物誌〉·〈태평어람 太平御覽〉 등에 따르면 4,000여 년 전 요(堯)나라 임금과 순(舜)나라 임금이 각각 어리석은 아들 단주와 상균의 머리를 깨우치려고 바둑을 창안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이 있으나, 오묘 무궁한 바둑 원리를 단순사회인 상고시대에 창작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 고누와 같은 단순한 놀이가 오랜 역사발전과 더불어 개량·보완·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점을 치기 위한 도구 또는 천문관측과 자연연구에 따른 초기 음양오행설의 소박한 도표가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변질·발전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바둑을 뜻하는 고대의 중국 개념은 '혁'(奕)이었고, '기'(棋)는 두는 용구를 뜻했고 다시 혁이 기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위기'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일본용어인 '고'[碁]나 '이고'[圍碁]는 중국명칭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말인 '바둑'을 지방에서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순장 포석을 '배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화점 위에 놓인 '기자' 곧 바둑울 뜻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배자의 '자'(子)는 돌, 독으로 배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한 것이 아니겠냐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신라시대부터 써내려와 순수한 우리말이 되었다고 한다.
순장바둑
조선시대의 바둑은 기본원리에서 현대와 다름이 없으나 포진을 미리 해놓고 직접 전투로 들어가는 형식상의 특징이 있었다. 이런 형식을 순장이라고 하는데 순장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이 순장바둑은 한일합병 뒤인 1912년을 전후해 첫점부터 포석을 하는 이른바 일본바둑에 밀려났다. 순장바둑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둑판의 화점표시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꽃술 무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래
중국에서 발생한 바둑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대개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중 도림이 백제에 숨어들어가 개로왕을 바둑으로 현혹시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수도를 광주에서 공주로 옮기게 했다는 전설은 사기(史記)에 근거를 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34대 효성왕이 바둑을 매우 애호하여 당나라에서는 외교사절을 신라에 보낼 때는 반드시 이름 높은 문인과 바둑의 명수를 수행케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경상남도 가야산 바위 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 신라시대 때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로 넘어와서는 귀족계층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의 대문호인 이규보의 시문에는 바둑을 소재로 한 것이 많고, 당시의 묘지 비석에 바둑 이야기가 쓰인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둑으로 도박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중국의 무역상에게 아내를 잃고 슬퍼한 고려가사 〈예성강곡 禮成江曲〉은 가사는 전해지지않으나 〈고려악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바둑의 쇠퇴기로 볼 수 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유교였고 혁명주체 세력들은 고려 말엽의 부패와 혼돈에 바둑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부터 궁정과 귀족사회에 다시 퍼져 차츰 일반인에게 까지 보급되었다. 임진왜란의 명장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대국했을 정도로 명수였고 이충무공도 싸움터에서 짬짬이 바둑을 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한말에는 김만수라는 명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는 백남규·노사초가 국수의 명맥을 유지했고, 해방 후에는 일본기원에서 수업한 조남철 초단이 현대 한국바둑의 초석을 닦으면서 1955년 사단법인 대한기원(지금의 한국기원)이 발족되어 본격적인 부흥작업에 들어갔다. 1962년에는 바둑전문잡지 〈기원〉이 개인의 손으로 창간되었고 1967년 한국기원에서도 〈월간바둑〉을 창간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입단제도
1954년에 전문기사를 배출하기 위한 입단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다. 제1회 입단대회에서는 김태현만이 참가해 부전승으로 입단했다. 그로부터 65회에 걸친 입단대회를 거쳐오는 동안 112명으로 불어났다. 1992년 10월 현재 9단 7명, 8단 5명, 7단 15명, 6단 15명, 4단 18명, 3단 11명, 2단 13명, 초단 17명, 객원기사 2명, 이밖에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사가 5명 있고 이중 여류기사(전원 초단)가 6명이다. 해방 이후 한국 바둑계의 흐름을 크게 나누어보면 조남철·김인·조훈현·서봉수를 거쳐 이창호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바둑인구는 약 8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날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덤으로 더 더...
성격
민속놀이, 경기
유형
놀이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두 사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여러 가지 규약에 따라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한 점씩 서로 번갈아 놓고 경기의 끝 판에 이르러 각자가 차지한 ‘집’의 수효를 계산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내용
바둑이라는 말은 한자 ‘위기(圍碁)’와 순수한 우리말인 ‘바돌’·‘바독’·‘바둑’ 등으로 불리는데, 광복 후부터 ‘바둑’으로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둑은 학술적이면서도 예술적이며, 나아가서 심적인 3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바둑은 각자의 성품과 도량을 표현하며, 바둑 한 판에서 발생하는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은 마치 인생의 여정과 흡사하여 인격수양에도 도움을 준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각기 19줄의 등격평행선(等隔平行線)을 그린 평면(平面)판으로서 보통 세로 45.5㎝, 가로 42.5㎝ 정도의 나무판을 표준으로 한다.
그러나 이 표준크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경기하는 데는 상관이 없다. 바둑판의 재료는 일반적으로 나무를 사용한다. 나무의 종류는 비자(榧子)가 최고이지만 구하기가 어려워 요즈음 주로 수입목을 사용한다. 그러나 헝겊이나 종이에 19×19선을 그려 사용하여도 경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바둑돌은 흑색과 백색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아무 색이나 두 가지 다른 색깔만 사용하여도 상관이 없다. 바둑돌의 재료는 보통 흑색인 돌과 백색인 조개껍질을 이용한다. 요즘은 보통 유리제품이 많다.
경기방법은 여러 가지 규약(規約)에 따라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한점씩 서로 번갈아 놓아서 승부를 겨룬다. 승부는 경기의 끝 판에 규칙이 정하는 데에 따라, 각자가 차지한 집의 수효를 계산하여 그 수효가 더 많은 쪽이 이긴 것으로 판정한다.
‘집’의 수효를 계산하는 일을 계가(計家)라고 한다. 계가를 한 뒤에 승부판정을 내릴 때는 ‘갑이 1집 이겼다.’, ‘을이 5집 이겼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계가에 이르기 전에 어느 한쪽이 스스로 졌음을 인정하고 물러날 경우 당연히 그 상대방이 이기게 되며, 이러한 경우를 불계승(不計勝: 계가하지 않고 이김)이라고 한다.
바둑의 단위(段位)는 마치 공무원이나 군인의 계급과 비슷하다. 다만, 전문기사에게 붙는 단위는 경력이나 연공 따위는 고려되지 않고 오직 승단시합 규정에 따라서 승단(昇段)된다.
단위는 초단(初段)부터 시작하며 구단(九段)이 최고 높은 단위이다. 이 단위제도는 약 300여년 전부터 있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광복 후에 제정되었다. 또, 일반 아마추어의 단위도 있다. 아마추어 단위에도 어느 정도의 규정은 있으나 대체로 실력 정도에 맞추어 인허해주고 있다.
바둑의 유래는 매우 오래이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인 4,300여년 전에 발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옛날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석주(舃胄)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 하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아들의 지혜를 계발해주기 위하여 바둑의 오묘한 술수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바둑판의 구조가 『주역(周易)』의 이치와 상통하므로 바둑의 기원이 『주역』의 발생과 때를 같이 하였으리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바둑이 여러 가지 무궁무진한 묘수가 있으므로 잘 배우기만 하면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여 전해져 내려오는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고대 중국에서는 17×17=289로(路) 바둑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19×19=361로 변하였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바둑책으로 가장 오래된 『현현기경(玄玄棋經)』에 의하면 107년경에는 19로이었음을 밝히고 있으니, 17로의 바둑판은 근 2,000년 이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론될 뿐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요순시대에 바둑이 창안되었다면 단군과 요순은 그 연대가 비슷하므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바둑사는 삼국시대부터 더듬어 볼 수 있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는 바둑·투호의 유희를 좋아한다”고 하였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백제의 풍속은 말타고 활쏘는 것을 중히 여기며, 역사서적도 사랑한다. 토호·저포와 여러 유희가 있는데 더욱 바둑두는 것을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 개로왕(蓋鹵王)과 고구려 첩자 도림(道琳)과 연관된 설화에는 바둑을 즐긴 개로왕 때문에 백제의 내정이 어지러워진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에 와서도 바둑이 상당히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제34대 효성왕 2년(738) 봄에 당나라에서 선왕인 성덕왕의 부음을 듣고 조문사절단을 보낼 때 당나라 현종은 문장가인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숙(邢璹) 사절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서 글을 잘 아는 것이 중국과 유사하다. 경이 큰 선비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절로 보내는 것이니, 가서 경서의 뜻을 잘 설명하여, 대국의 유교가 왕성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 그리고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하니 특별히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병조참군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대동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양계응이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둔 전적에 대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중에는 다만 “우리나라 바둑 고수자들이 모두 그이보다 하수였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무렵 우리나라 기사(棋士)로서 당조(唐朝)에 들어가서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있었다. 헌강왕 때 박구(朴球)라는 사람이 중국 희종(僖宗)의 기대조(棋待詔: 황제의 바둑비서)를 지내다가 귀국할 때 중국의 유명한 시인 장교(張喬)는 다음과 같은 전별시를 지어 박구의 고수를 찬양하고 있다(삼국사기).
“바다 건너 저 나라에 그대 적수 뉘 있으리, 본국이라 기쁘지만 바둑수는 외로우리, 궁중 임 뫼신 자리엔 새로운 형세 전할 것이, 뱃전에서 판을 대하여도 옛날 기보 엎어 놓으리(海東誰敵手 歸去道應孤 闕下傳新勢 船中覆舊圖).” 당시 양국간의 바둑교류의 성황을 알 수 있는 말들이다. 이 바둑은 통일신라를 거쳐 그대로 고려·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호협한 왕자들이 유희를 좋아하는 풍조가 있어서 바둑도 역시 많이 유행되었을 것이다.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장기·바둑 등 유희물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세력을 쥐고 있던 시절에 바둑을 즐기면서 한가로운 때를 보냈다고 한다. 전국에서 명수들을 초청하여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바둑의 명수들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광복 전까지 순장(順丈)바둑이라는 재래식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순장바둑은 어느 때부터 두기 시작하였는지 문헌으로 기록된 것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이 순장바둑은 대국하기에 앞서 각기 8점씩 모두 16점을 일정한 곳에 두어 초석(草石)을 끝낸 상태에서 두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순장바둑은 초석으로 말미암아 창의성을 제한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어 광복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광복 바로 뒤 바둑인구는 남북 합쳐서 약 3,000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1989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약 500만 명에 육박된다. 따라서 신문에 바둑연재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중앙지·지방지·월간지·TV에 모두 타이틀전이 연중무휴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바둑계의 총본산인 재단법인 한국기원(韓國棋院)은 94명의 전문기사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500만 아마추어 바둑애호가를 위한 각종대회를 주관하고, 동시에 국제교류도 주관하고 있다. 아마추어의 전국 규모의 대회는 여섯 종목이 있다.
또, 어린이 바둑대회와 중·고·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바둑대회가 4종이 있고, 프로기사의 세계대회도 4종이 있다. 전문기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년 2회 전문기사 입단시합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