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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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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7    [문단소식] - 김응준 시백 "희비 쌍곡선" 그리다... 댓글:  조회:3585  추천:0  2018-11-15
김응준의 시집 《희비 쌍곡선》 출간   2018-11-07    열두번째 연변작가협회 계렬총서로 선정된 김응준의 시집 《희비 쌍곡선》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시집은 제1장 불우한 어린시절, 제2장 방금 꽃 피던 시절, 제3장 곡절 많은 청춘, 제4장 시련의 년대, 제5장 다시 각성한 세월, 제6장 신대륙의 탐방길, 제7장 우리의 시를 위하여, 제8장 신기한 서역 순례, 종장 최근의 행보 등으로 나뉘여졌다. 시인 김응준은 시집의 서문에 “실오리처럼 아주 가녀린 한 지맥의 력사와 현실을 통해 편협한 측면이긴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의 백년사를 보여주려 했다. 그 파란만장한 대륙의 력사 속에 우리는 애환이 얼룩지고 희비 엇갈린 쌍곡선의 길을 걸어왔다. 시집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절대대부분이 력사 진실 그대로의 사실에서 온 것이고 그저 일부분 세부에서만 상상과 허구에 의한 가공을 거쳤을 뿐임을 밝혀둔다.”고 적었다. 연변대학 교수 우상렬은 시평 '인생희비 교향곡'을 통해 “장편서사시답게 전반적인 흐름은 담시적인 이야기형식의 서사시로 흘렀으나 시의 본령인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시인은 이 장편서사시를 통해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총화하면서 대상화시킨다. 너나 우리 모두가 한번쯤 음미하면서 감상해볼 만하다. 그러면 시인으로서의 인간 김응준옹이 오롯이 안겨올 것이다.”라고 적었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2516    표절현상은 원작자, 독자, 팬들까지 큰 상처를 준다... 댓글:  조회:3932  추천:0  2018-11-15
표절로 멍든 인터넷문학 개혁 필요   2018-11-07    제2회 중국 ‘인터넷문학+’대회가 최근 북경에서 막을 내렸다. 대회기간 있은 ‘IP거래정상회담’에서는 《대국중공》, 《경항의 사랑》 등 10편의 우수작품을 위주로 하는 추천행사와 IP거래계약을 체결했다. 열문집단은 또 한국의 첫 창작브랜드인 ‘MUNPIA’와 손잡고 ‘성창계획’을 추진, 힘을 모아 작가를 양성하고 잠재력이 있는 창작문학작품을 발굴하며 권위성을 지닌 창작작품 리스트를 발표하는 데 취지를 뒀다. 최근년간 중국인터넷문학산업의 발전추세는 새로운 돌파구를 가져왔다. 신흥업종으로 떠오른 인터넷문학산업은 빠른 발전을 가져온 동시에 인터넷문학 작가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가 미흡한 등 문제가 수면 우로 떠올랐다. 인터넷문학은 늘 표절 론난에 휩싸여있었다. 사이트 계약작가들이 발표하는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회색산업사슬을 형성했고 이는 정품 사이트와 작가들의 직접적인 리익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동시에 표절정도도 점점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데 초반의 구절표절로부터 전반 내용에 대한 표절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부 저작권 침해자들이 표절행위에 대해 죄책감마저 상실하면서 인터넷문학 시장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인터넷문학의 류행에 따라 문예창작 령역의 표절론난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최근년간 인터넷작품을 각색해 영화, 드라마로 제작된 인기작품들치고 표절론난에 휘말리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다. 표절행위는 인터넷문학의 성장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면서 더이상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로 떠올랐다. 동명인터넷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초교전》이 네티즌에 의해 표절의혹 제보가 들어오는 등 인터넷소설 표절 의혹들이 빈번하게 드러나면서 건강한 문화발전을 저애하고 있다. 해적판과 표절은 인터넷문학 발전을 저애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표절은 상대적으로 처리 난이도가 더욱 높다. 창작규범이 부족하고 창작압력이 커가지만 그 시장은 매우 크다. 《중국인터넷문학저작권보호백서》에 따르면 인터넷기술의 발전에 따라 해적판, 저작권침해 모식은 점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의 주요한 저작권침해 모식은 인터넷사이트 저작권침해와 자료공유플랫폼 저작권침해, 앱저작권침해 모식 등으로 다양하게 퍼져있다. 인터넷문학은 전통문학과 달리 흔히 독특한 특색을 가진 새로운 형태로 분류된다. 가장 큰 특색은 사이트를 통한 류동량이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작가의 빠른 업데이트를 통해 네티즌들에게 많이 로출되여야 한다. 또한 작품은 대부분 타임슬립, 사랑, 판타지 등 내용으로 채워져있고 다양한 현대적인 수법으로 창작되였기에  줄거리가 참신하기까지 하다. 2017년말까지 우리 나라 인터넷문학 사용자 규모는 3.33억명에 달했고 인터넷문학시장규모는 90억원을 돌파, 산업규모는 2012년을 시작으로 년간 20%의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문학은 빠르게 궐기하고 있다. 현대문화판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인터넷문학은 방대한 량과 자본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문제점들도 존재하고 있다. 인터넷문학이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데이터베이스습작’과 ‘표절근절확대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간과해버리지 말아야 한다. 또 인터넷문학 창작 과정에서의 표절현상은 독자는 물론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 이는 작가의 합법적인 권익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더우기 인터넷창작 생태와 선순환 구조를 위협하게 된다. 류동량과 인기는 물론 중요하지만 법적으로 창작자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 사법경로는 결국 작가가 자신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최종무기이다.하지만 ‘슈퍼IP’가 성행하는 현실에서 표절자의 작품은 일단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 제작이 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가령 표절이 확정되였다 하더라도 완벽한 법적 규제가 형성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약간의 배상금으로 표절사건은 일단락을 맺게 되고 결국 원작자에게만 상처로 남게 된다. 우리 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인 범위에서도 문학작품 보호는 비교적 어려운 분야이다. 현존하고 있는 법률법규조례로는 문단의 표절을 근절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저작권소송은 모호한 분계선에 놓여있기 때문에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현시점의 법률법규로는 어렵다. 문단의 표절행위는 명확하고 건전한 법률의 제재가 있어야 한다. 표절자에 대한 징벌강도를 높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인터넷문학 저작권수익에 합리한 조절을 진행해야 하며 표절로 판정이 난 드라마, 영화 작품에 대해서는 수익자가 원작자에게 합리한 방식으로 보상을 해줘야 한다. 반드시 작가들의 저작권 보호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표절자의 수익을 어느 정도 낮춤으로써 인터넷문학 생태업계의 선순환을 끌어내야 한다. ///중화독서보
2515    [세상만사] -일년간 주워 모은 동전과 각자 주머니 돈=쌀 기부 댓글:  조회:3460  추천:0  2018-11-15
(2015년 2월) 환경미화원들로 구성된 서울시청 노동조합, 관악구에 쌀 2,900kg 기부...독거노인, 장애인가정, 한부모 가정 등 저소득 주민들에게 전달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아무도 줍지 않고 관심도 없는 거리에 떨어진 10원, 50원이 모아져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으로 확산됐다.   거리의 환경미화원들이 관악구(구청장 유종필)에 소외된 계층을 위해 써 달라며 쌀을 기부해 감동을 주고 있다.  지역의 환경미화원들을 포함한 3000여 명의 서울시청 노동조합원들이 거리 환경을 청소하며 길에 떨어진 동전을 모은 금액으로 쌀 145포, 총 2900kg을 관악구에 기부한 것.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환경미화원으로 구성된 서울시청 노동조합원은 청소 중 주은 동전을 모아 좋은 일에 쓰기로 결정하고 1여 년 동안 모은 돈과 각자 주머니 돈을 합쳐 1000여 만원을 만들었다.   주민에게 쌀을 전달하는 환경미화원   그리고 쌀을 구입해 추운 겨울 혼자 사는 노인, 한부모 가정 등을 위해 써달라며 최근 관악구를 찾아왔다.   구는 기증받은 쌀을 독거노인, 한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장 등에게 전달했으며, 저소득 계층이 많이 사는 삼성동 등에는 조합원들이 직접 나서 집까지 배달하는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정근문 복지정책과장은 “작은 동전하나가 모여 추운 겨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큰 도움이 됐다”며 “평소에도 성금뿐 아니라 소외계층을 찾아가 재능기부를 하는 등 많은 봉사를 하고 있는 서울시청 노동조합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박종일 기자
2514    [세상만사]-환경미화원 134명 2년간 모은 락전 260만원=기부 댓글:  조회:3625  추천:0  2018-11-15
중구 청소행정과 소속 환경미화원 134명 낙전 모아 260만원 이웃돕기 성금 기부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추운 겨울날씨를 녹이는 환경미화원들의 훈훈한 미담사례가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3일(2015년 12월), 중구(중구청장 최창식)는 구청장실에서 환경미화원 서울시청노동조합 중구지부(지부장 조흥래)로부터 260만원의 성금을 전달받았다.  이 성금은 134명의 중구소속 환경미화원들이 거리청소를 하면서 길거리에 떨어진 동전을 2년여 동안 모은 값진 정성이다.  도심의 어둠을 깨고 모두들 자고 있는 새벽 5시30분부터 거리청소를 책임지고 있는 중구 환경미화원들은 출근길 주민들에게 깨끗한 거리를 선사하기 위해 보이지 않은 곳에서 노력하는 숨은 공신들이다.  중구 소속 환경미화원들   이들이 거리청소를 하면서 주은 동전 하나하나는 값어치 없는 푼돈이지만 작은 관심과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260만원이라는 제법 큰 돈이 모일 수 있었다. 환경미화원 김경태씨(49)는“올 겨울 불우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 위해 중구 희망나눔 모금에 동참하게 됐다”고 밝은 표정으로 전한다.   최창식 구청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고생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다"며 "작은 사랑이 큰 행복으로 이어져 추운 겨울 모든 주민이 행복하고 안전하게 지내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종일 기자
2513    [세상만사] - 환경미화원 청소하다 주은 현금 주인을 기다리다 댓글:  조회:4335  추천:0  2018-11-15
최신기사 여수시 환경미화원 1천여만원 주워 경찰 신고 2018/11/08        (여수=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전남 여수에서 환경미화원이 청소를 하다 주은 현금 1천여만원을 경찰에 신고해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8일 여수시도시관리공단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 20분께 여수시 쌍봉동 거북상가 인근 거리를 청소하던 도시미화팀 소속 환경미화원 최유용(48)씨가 현금 1천60만원이 든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최씨는 현금을 들고 곧바로 인근에 있는 쌍봉지구대에 신고했다. 최씨는 "밤에 내린 비로 물기가 많아 쓰레기들이 잘 쓸리지 않아 버려진 봉투를 들었는데 찢어진 틈 사이로 5만원권 다발이 보였다"며 "너무 큰 돈이어서 놀랐고 당장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이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나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경찰서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13년째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최씨는 평소에도 성실한 근무 태도로 평판이 좋다. 여수시도시관리공단 관계자는 "항상 성실하고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가진 분이신데, 좋은 일까지 해서 뿌듯하다"며 "돈을 잃어버린 분이 꼭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최씨로부터 받은 현금을 온라인 분실물 습득센터에 등록하고 주인을 찾아주기로 했다.
2512    [세상만사] - 1년동안 주어 모은 동전 저금통 8개 10만 = 기부 댓글:  조회:3981  추천:0  2018-11-15
[ 기자 ] 동대문구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경운 씨. 김 씨는 길거리에서 청소를 하다 주운 동전을 꼬박꼬박 저금통에 모아왔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모은 동전은 저금통 8개, 10만 원 남짓한 돈입니다. 지난해 겨울 김 씨는, 이렇게 모은 동전들을 주저 없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했습니다.   [ 인터뷰 : 김경운 동대문구 환경미화원 ] "동전 100원 짜리가 있어야 카트를 사용할 수 있고 택시를 타도 100원 짜리가 모자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꼭 필요한 건데 사람들이 잘 줍질 않아요. 그런 게 어려운 분들한테 가서 좋은 일에 쓰였으면 합니다." [ 인터뷰 : 김경운 동대문구 환경미화원 ] "아 그 상금이요? 뭐 그 돈은 어차피 봉사를 하다가 얻게 된 돈이기 때문에 그 상금도 마저 봉사를 위해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티브로드 /임세혁 기자  ========================   인성교실| |2012.05.20.    아이에게 읽게 할 이야기 -  "남의 돈에 관심없어" 환경미화원 방원일씨    ::1000만원 주워 주인 찾아준 방씨 인터뷰   “내 돈이 아닌데 당연히 주인을 찾아줘야죠. 더군다나 1300만원이면 큰돈 아닙니까.  힘들게 번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이런 돈 쓰면 평생 마음에 짐입니다.”   서울 광진구청 청소행정과 일용직 환경미화원 방원일(40. 광진구 중곡동)씨. 며칠 전 저녁 자양2동 골목길을 청소하다 1300여만원이 든 서류 가방을 발견해 주인을 찾아준 주인공이다.  경찰에 따르면 방씨가 주은 ‘돈 가방’은 이 마을에 사는 강아무개(37)씨가 날치기당한 것으로 강씨가 범인들의 뒤를 쫓자 다급한 범인들이 쓰레기더미에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추정된다. 방씨는 “당연히 할 일을 했는데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냐”며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했다.  결국 작심하고 방씨가 일하는 곳을 직접 찾아 나서, 24일 밤 10시30분 자양2동 빗물펌프장 옆 환경미화원 휴게소에서 1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를 만났다.  방씨는 종일 인터뷰에 시달려 몹시 피곤하다고 했지만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배운 게 변변치 못해서..." 13년째로 접어든 환경미화원의 길  방씨가 환경미화원의 길로 접어든 것은 지난 1989년.  전북 남원이 고향인 방씨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고, 배운 것이 변변치 못해 형의 권유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됐다. “큰형님이 중곡동에서 20년째 환경미화원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일은 힘들어도 먹고 살 정도의 벌이는 된다’며 권유하셨는데 그게 벌써 13년전이네요.” 방씨는 그때부터 중곡동, 자양2동 등으로 근무지를 옮겨가며 매일 밤 12시부터 이튿날 7시까지 음식물 쓰레기와 가구, 냉장고 등 대형폐기물을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방씨는 “남들은 하잘 것 없는 청소부로 볼 수도 있고 미화원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기도 하지만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떳떳하게 돈 벌어 처자식 먹여 살리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 아닌 다른 환경미화원이라도 주워 돌려줬을 것"! 방씨에게 돈 주운 얘기를 꺼내며 “아무도 보지 않았는데 슬쩍 챙길 생각은 없었느냐” 고 물었다. “사람들은 환경미화원이 살림도 어려울 텐데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주워 돌려줬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더 이상해요. 아마 제가 아니고도 같이 일하는 미화원 식구들 누구라도 주인 찾아줬을 거예요.” 돈을 주운 뒤 갈등이 없었느냐고 다시 물었다. “처음엔 학생들 책가방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방을 열었더니 수표더미랑, 현금이 가득하더라고. 너무 떨렸어요. 평생 이렇게 큰돈을 만져 본적이 없었으니까(웃음).  하지만 미련 없이 팀장한테 보여주고 경찰서에 신고했어요.” 방씨는 책가방을 주워서 돌려준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한탕주의'와 과시적 소비문화 속 돋보이는 방씨  방씨는 교사를 꿈꾸는 여고생 딸과 경찰공무원이 되고픈 아들을 두었다. 가족을 묻자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하다보니 아이들 하고 제대로 한번 놀아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며  "박봉 때문에 아직도 미싱공장 일을 놓지 못하고 고생하는 아내에게도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그래도 방씨는 10여년 월세와 전세를 전전한 끝에 최근에 중곡4동에 21평짜리 연립주택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아이들도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식대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란다.  "환경미화원을 천직으로 알고 정년퇴직 때까지 지금보다 부지런히 땀 흘리며 살겠다" 는 방씨가 최근 우리 사회의 '한탕주의'와 '과시적 소비문화' 속에서 더 돋보인다. “돈 때문에 주먹질하고, 협박하고, 납치하고, 카드 빚 때문에 부모까지 죽이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그런 게 다 불로소득 아닙니까. 그렇게 돈 벌어서 뭐 하겠어요. 힘들더라도 땀 흘리며 번 돈이 최고로 값진 거죠.” 가방 주인이 사례금을 주었는지 물었다. “너무 너무 고마워하며 20만원을 주데요. 받지 않으려 했는데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 돈으로 팀원들 맥주 한잔 돌리고 아이들하고 갈빗집에서 외식 한번 근사하게 했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 노릇 한번 제대로 했어요. 하하하”  
2511    [세상만사] - 7년간 주은 동전 15kg 20만 = 기부, 기탁, 지원... 댓글:  조회:3421  추천:0  2018-11-15
 2013-11-26   【김해=뉴시스】김상우 기자 = 26일 경남 김해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금동건(53)씨가 7년간 청소를 하면서 주은 동전 15kg 19만9680원을 성금으로 생명나눔재단에 기탁했다. 2013.11.26 (사진=금동건씨 제공)     【김해=뉴시스】김상우 기자 = 환경미화원이 26일(2013년 11월), 7년간 청소를 하면서 주은 동전 15kg 19만9680원을 성금으로 기탁해 화제다.    경남 김해에서 17년간 환경미화원으로 근무 중인 금동건(53)씨다.    금씨는 2006년부터 새벽에 청소하면서 길에 떨어진 동전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해 15kg에 달했다. 동전은 10원짜리가 가장 많고 1원, 100원, 외국동전, 토큰 등 다양하다.    금동건씨는 "청소를 하다보면 길가에 동전이 많이 버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며 "동전이 보이는대로 아까워 갤로퍼 차에 모으다 보니 많아졌다"고 말했다.    금씨는 "주인을 잃은 돈을 내가 주웠다고해도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곳에 사용됐으면 하는 생각에 지역 언론사를 거쳐 생명나눔재단에 기탁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아암·소아난치병 빈곤아동 등을 지원하는 생명나눔재단은 연말 이웃돕기에 사용하기로 했다.  
2510    [세상만사] - 주웠던 물건 삼키려 해도 법노름 하다... 댓글:  조회:4249  추천:0  2018-11-15
'당신이 5천만원 주웠다면?'... 6일간 고심하던 50대 결국 '입건' 2018.11.15.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돈 [연합뉴스TV 제공]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수천만원의 현금다발이 든 손가방을 주워서 챙긴 50대 자영업자가 형사처분을 받게 됐다. 15일 광주 광산경찰서는 임모(51)씨를 점유이탈물횡령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임씨는 이달 2일 오후 4시께 광산구 수완동 대로에서 승용차를 몰다가 도로 위에 떨어져 있던 이모(32)씨의 손가방을 주워 경찰에 신고하거나 주인을 찾아 돌려주지 않고 가로챈 혐의다. 손가방 안에는 이씨가 자동차를 사려고 은행에서 찾은 현금 5천800여만원이 들어있었다. 이씨는 은행에서 일을 보고 나와 자동차 지붕 위에 돈이 든 손가방을 올려둔 채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경찰은 거액이 든 손가방을 분실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6일간 추적에 나서 임씨를 붙잡았다. 경찰에 붙잡혔을 때 임씨는 돈을 집에 보관하면서 어떻게 처분할지 고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평범한 시민인 임씨가 우연히 주운 큰돈을 보고 유혹에 빠진 것 같다"며 "피해품을 모두 회수했어도 형사처분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2509    [동네방네] - 훈민정음 상주본 살리는것 세계적 문화재 보호... 댓글:  조회:3579  추천:0  2018-11-14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1천억 이야기로 초점 흐려져"  2018.11.14.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토론회서 소회 밝혀.."책 보관하느라 상상 못할 스트레스" 발언하는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서울=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훈민정음 상주본 이대론 안된다' 토론회에서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 씨가 발언하고 있다. chc@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55) 씨가 "1천억원을 이야기한 뒤 사건의 초점이 흐려졌고, 무리한 액수를 요구하는 것처럼 매도당했다"고 14일 말했다. 배씨는 사단법인 한국바른말연구원과 대한민국훈민정음보존회가 이날 오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훈민정음 상주본 이대론 안 된다' 토론회에 나타나 "진상 규명이 아니면 상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달 15일 훈민정음 세계화 포럼과 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억울함과 정신적 고통을 토로했던 배씨는 토론회에서도 자신은 상주본을 훔치지 않았으며, 정부가 무고해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했다. 발언하는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서울=연합뉴스) 정하종 기자 =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훈민정음 상주본 이대론 안된다' 토론회에서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씨가 발언하고 있다. chc@yna.co.kr 배씨는 "문화재청이 촌사람 뒤통수를 치고 (상주본을) 뺏어가려고 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물론 검찰과 법원도 모두 한통속"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적은 돈도 몰래 숨겨놓으면 신경 쓰이는데, 상주본을 보관하느라 상상 못 할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며 "화재로 책이 훼손돼 좌절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제 말이 사실이라면 묵과해서는 안 된다"며 "국민께 동조를 얻어서 문제를 극복하고 소중한 유산을 공개한 뒤 양지로 나와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연구원은 상주본의 법적 소유자인 문화재청에 토론회 참석을 요청했으나, 문화재청 직원은 토론자로 나오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만약 자진해서 상주본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시면 최초의 문화재 발견자로서 명예회복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간송본과 상주본 훈민정음 간송본(왼쪽)과 훈민정음 상주본. 위쪽과 아래쪽 여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간송본은 여백이 훨씬 좁다. [문화재청 제공·배익기씨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창제 목적과 제자 원리를 담은 책으로,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안동 진성이씨 가문으로부터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샀다는 간송미술관 소장본(국보 제70호)이 유명하다. 훈민정음 상주본은 경북 상주에 거주하는 배씨가 2008년 7월 또 다른 해례본을 찾아냈다고 공개해 존재가 알려졌으나, 배씨가 소장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10년째 행방이 묘연하다. 배씨는 상주 골동품업자 조용훈(2012년 사망) 씨 가게에서 고서적을 구매할 때 상주본을 함께 입수했다고 알려졌는데, 조씨가 배씨를 상대로 물품인도 청구 소송을 내면서 송사에 휘말렸다. 대법원은 훈민정음 상주본 소유자는 조씨라고 판결했고, 조씨는 사망하기 전 문화재청에 기증해 소유권은 배씨가 아닌 국가에 있는 상태다. 그러나 배씨는 도난 혐의에 대해서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확정받아 1년간 옥살이한 끝에 석방됐다. 이후에도 법적으로 상주본을 소유했으나 실물을 보지 못한 문화재청과 상주본 재산가치 추정액 1조원의 10%인 1천억원을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배씨 사이에는 지루한 법정 공방이 지속했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상주본 강제집행을 검토하자 배씨는 집행을 막기 위해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했고, 1심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항소해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CG) [연합뉴스TV 제공]
2508    [동네방네] - 117년만에 고향 돌아오는 종(鐘) 댓글:  조회:3575  추천:0  2018-11-14
미국, '필리핀 학살' 상징하는 성당 鐘 117년 만에 반환  2018.11.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필리핀 학살' 상징하는 발랑기가의 종 [AP=연합뉴스 자료 사진] (하노이=연합뉴스) 민영규 특파원 = 미국이 117년 전 필리핀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상징하는 성당 종(鐘)을 오는 14일 반환한다고 GMA 뉴스가 13일 호세 마누엘 로무알데스 주미 필리핀 대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무알데스 대사는 "14일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군 행사가 열린 뒤 발랑기가의 종들을 필리핀에 반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종들이 필리핀에 도착하는 정확한 날짜와 다른 상세한 내용은 14일 공식 행사 후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반환할 종들은 필리핀 사마르 섬 남부 발랑기가의 성당 종탑에 있던 것으로, 1899∼1902년 미국-필리핀 전쟁 중 미군이 가져갔다. 종 3개 가운데 1개는 1901년 9월 원주민 에밀리오 아키날도 사령관이 이끄는 반군이 현지에 주둔하던 미군 9연대 예하부대를 공격하는 신호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필리핀 반군 300여 명은 여성으로 변장해 무기가 들어 있던 목관을 성당으로 가져갔으며, 이튿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미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미군 59명이 숨지고 23명이 부상했다. 미군 9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한 뒤 시신을 불태웠고 마을에도 불을 질렀다. 이후 종들이 모두 사라졌고, 미군은 반군을 제압한 뒤 발랑기가를 떠날 때 원주민들로부터 종들을 선물로 받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영국인 작가 봅 쿠티는 발랑기가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의 진상과 문제의 종들을 미국이 소유하게 된 과정을 조사한 뒤 이 종들을 전리품으로 묘사했다. 필리핀 정부는 그동안 지속해서 미국에 종 반환을 요구했고,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이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왔다. 이에 따라 매티스 장관은 지난 8월 미 의회에 종 반환계획을 보고했다. 미군은 종 3개 가운데 2개를 와이오밍 주에 있는 공군기지에 설치했고, 나머지 한 개는 이동박물관 형태로 한국에 주둔한 부대에 보관해왔다. 살바도르 파넬로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은 "필리핀 정부는 발랑기가의 종 반환을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환영한다"면서도 "마지막 종이 필리핀에 도착할 때까지 더는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2507    [고향자랑] - 사과배엿... 된장술... 그리고 연길... 댓글:  조회:3175  추천:0  2018-11-14
연변 세계한상대회서 눈길 2018년 11월 05일    글쓴이:문려     “이건 뭐로 만들었나요? 사과와 배를 함께 갈아 넣어서 사과배엿인가요?” “된장술? 된장으로 술도 만들 수 있다고요?” 연변에서는 익히 들어 낯설지 않은 과 이 한국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눈길을 끌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던 제17차 세계한상대회가 한국 인천광역시 송도에서 23일부터 25일까지 화려하게 펼쳐졌다. 한상대회 여러 행사중 한 일환으로 전시회도 함께 개막되면서 전시장 1층에는 464개에 달하는 전시부스가 상설되여 24일과 25일 이틀동안 제품전시를 진행했다. 한국 인천시의 지역 제품이 주를 이루고 한국 각 지방 기업관들과 상품관들이 전시 부스를 설치하고 홍보 행사에 열을 올렸다. 수백개의 부스 가운데 유독 기자의 눈을 끈 두개의 부스가 있었는데 바로 중국 연변에서 달려온 과 부스였다. “사과배엿? 사과와 배가 함께 들어갔나요?” 24일 전시부스를 돌다가 우연히 익숙한 단어 ‘사과배’에 이끌려 다가간 전시부스에는 낯선 단어 에 이끌려 온 한국손님들의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과와 배를 넣은 엿이 아니구요, 연변의 사과와 배를 접목시킨 새로운 품종인 ‘사과배’라는 배를 아무런 첨가물 없이 몇시간 동안 달여서 만든 천연 엿입니다. 천식, 기관지, 인후염에 좋구요, 특히 기침에 효과가 뛰여납니다.” 전시회를 찾은 한국 손님들을 상대로 시식코너를 만들어 제품 홍보에 여념이 없던 ‘홍보자’는 다름 아닌 연변에서 온 연길시 조향천진 감리원배엿가공공장 사장 려명자씨였다. 한국손님들에게 을 맛보이고있는 려명자(왼쪽)씨 2016년 제주도애서 열렸던 한상대회에 이어 이번에 2번째로 참가하는 세계한상대회. 올해 룡정시 명동단오축제와 피서절, 두만강상담회에도 모두 참가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열리는 각종 박람회에도 꾸준히 참가한다는 려명자씨는 이번에도 15킬로그람이 넘는 사과배엿을 들고 행사장을 찾았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요즘 너무 행복하다는 려명자씨는 지난 9월 22일 심양에서 펼쳐진 조선족민속문화절에서 사과배엿을 구매했던 북경손님이 제품의 질을 인정해 4000상자에 달하는 재구매 계약을 보내왔다면서 기뻐했다. “저는 사과배엿을 가지고 가서 첨가물 유무에 관해 측험을 해봐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을 보장합니다.” 사과배엿 달이기에 성공하기까지 꼬박 42일이 걸렸다는 려명자씨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2017년 2월 16일에 정식으로 감리원 사과배엿을 출시하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사과배농장에서 직접 재배하고 직접 가공하여 사과배엿으로 이어지는 작업에는 려명자씨의 피타는 정성이 들어 있었다. “지금 막 시작하는 단계거든요. 발품을 팔아서라도 우리 제품과 브랜드를 널리 알려야죠.” 그리고 바라보이는 미래가 있어 나아갈 힘이 생긴다는 려명자씨, “사과배엿 한번 시식해보세요.” 한국에서 만난 연변조선족기업가협회라고 적힌 부스에서는 려명자씨의 꿈도 달디단 처험 달콤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된장으로 술도 만드네요.” 된장으로 된장국은 만들어도 술을 만든다고 하니 모두들 신기했던 모양이다. 25일 찾은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전시부스에는 오다가다 된장술을 보고 궁금함에 시식하는 사람들과 된장으로 술을 만들었다니 호기심에 질문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눈에 띄였다. 한국총판 홍보부장 김태한(오른쪽)씨가 손님에게 된장술을 맛보이고 있다 “전시회가 오늘까지죠? 된장술 인기가 어떤가요?” “2017년에 우리 회사에서 한국에 총판매회사를 입점시켰습니다. 연변에서는 된장술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한국에서는 갓 걸음마를 뗀 상태죠. 이번 전시회도 홍보와 시식을 위주로 하여 된장술이라는 브랜드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들 된장으로 술을 만들었다고 하니 너무 신기해하더라구요.” 된장술 홍보에 열을 올리던 한국총판 홍보부장 김태한씨의 말이다.  “저도 중국에서 왔어요. 된장술 많이 마셔봤어요. 괜찮던데요, 파이팅하세요.” 때마침 인터뷰중 지나가던 한 연변분이 된장술 부스를 보고 응원인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아직 한국에 입점한지 얼마 안되고 된장술이라는 제품에도 적응하는 단계가 필요하지만 그래도 다들 시식 후 반응이 좋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다는 김태한씨였다. 김태한 홍보부장은 중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된장술 뿐 아니라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한국의 소주와 가격도 같고 알콜도수도 같은 된장술을 따로 출시하기도 하였다고 소개했다. 연변에서의 지명도만큼 한국에서도 된장술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계한상대회에서 전시된 400여개에 달하는 부스에서 만난 고향 연변브랜드 상품덕에 한상대회 인상은 괜히 ‘뿌듯함’이였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항상 사람을 설레게 하는 것 같다. /길림신문  =================/// 연길을 력사가 흐르는 도시로 2018년 10월 17일   작성자: 김인섭 얼마전 인터넷에서 년대순으로 정렬한 연길의 옛사진을 보면서 파란만장한 조선족의 력사를 눈앞에서 본다는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그것은 민족의 희비애환이 헷갈린 삶의 현장이였고 영욕성쇠가 점철한 발자취 그 자체였다. 그러나 형극에 찬 세월을 지나며 명멸한 이 유형문화재들을 만난 기억이 별로 없고 간혹 뜻하지 않는 곳에서 숨박꼭질하는 듯한 몇 개를 겨우  보았다는 상실의 아쉬움이 남았다. 다소간 현존하는 그 미래에 대한 우려도 떨칠 수도 없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발전에 따라 신구 건물의 교체와 도시의 개조는 불가피하다.그러나 개발, 건설과 유적 보호는 상생 관계일 뿐 상극 관계로 되여서는 안되고 도리여 문화재 보호가 우선시 되여야 한다. 그러나 눈앞의 목표와 리익에 편중하며 문화재들을 분별없이 깔아버리는 현상이 비일비재하여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력사가 담긴 고건축을 불도젤로 마구 뭉개고 개성을 잃은 고층 건물들을 즐비하게 세우며 발전을 과시하는 건설의지는 문화정신을 팽개치고 력사를 외면하는 전근대적 의식일 뿐이다. 그런 도시는 외형이 거창해도 사회정신이 일천하고 자랑감과 매력이 없는 도시로 각인된다. 연길은 조선족의 최대 집거지이고 민족 사회의 근거지이다. 그렇다면 민족 력사를 상징하는 귀중한 유물들이 더욱 보존되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 땅의 조선족 력사는 짧디짧은 한 순간이였다는 시점에서 보면 보호와 전승이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그 문화는 전체 인류의 재산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조선족 문화재 상실은 민족 자체만이 아닌 세계적 손실이다. 추론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적 력사 유물을 보호하는 사업은 우리 나라와 세계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가 된다. 오늘의 조선족 사회는 인구 격감,공동체 해체,교육 위축 등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으며 전통과 력사를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과업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연길의 문화재에 대한 보호는 더욱 절박하고 심원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연길의 문화재 존재는 민족과 그 문화를 자랑하고 조선족의 인문 정신을 고양하는 가장 선명한 고정표적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연길에서 문화유적을 보호하는 사업은 자민족을 지킨다는 의미를 초월하여 중국과 세계의 문화 다양성을 발전시키는 민족중흥의 성업이 된다. 력사와 문화는 사회, 경제, 문화 발전 과정에서 년대가 오랠 수록 그 에너지 작용이 커지게 된다. 일정한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재는 그 시대의 민족 정신과 지혜를 응축한 귀중품으로서 부동한 력사시기의 민족면모를 생동하게 현시하게 된다. 이런 문화 자원은 지역의 투자, 관광, 상품, 류통, 교육과 문화 등등 전반 사업에서 특유한 추진력이 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연길은 반드시 조선족 전통 유물이 집결된 민족 력사의 담체(担体)로 되어야 한다. 현재 문화재의 보호는 여전히 사회 경제의 목표와 혼선을 빚으며 응분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력사와 전통을 보호하는 사업에 대하여 재 점검을 실행하고 지도자의 교체에 따라 탈선이 발생하지 않도록 엄격한 법제보호를 실시해야 하고 지도자실적을 평가하는 우선 요건으로 상정시켜야 한다. 이리하여 경제 증장, 도시건설, 문화건설, 사회건설이 민족문화 보호와 조화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담보해야 한다. 유적을 보호하는 사업에서 개인이 보존하고 전승하려는 희망을 적극 수용하고 고무해야 한다. 이리하여 국가, 조직, 단체, 개인이 동시에 노력하는 선순환을 이루고 선배의 유물이 전승되는 인륜적 체인(链条)을 형성시키는 대안이 있어야 한다. 이리하여 부동한 시대의 옛건물과 문화재들이 세대가 바뀌고 세태가 변해도 최대한으로 보존되는 사회관행을 불변칙으로 고착시켜야 한다. 개인의 력사 전승이 민족문화 보호에서 일으키는 막중한 작용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민족의 력사, 특색, 풍격, 기백이 흐르는 연길을  건설하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대한 사업이고 력사적 수요이다. 현재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와 전승을 강화한다는 전략은 이미 연변의 발전 방침의 하나로 정착되였다. 그렇다면 력사의 원모습을 보호하고 재생시키는 사업을 락실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것은 연길이 중국특색 조선족 자치의 국제 도시로 발돋움하는 데서 필수 요건이다. 이리하여 연길이 조선족과 중국의 여러 민족이 단결하여 력사를 창조하는 생동한 력사 현장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야 한다. 력사 의식의 심천(深浅)은 그 민족의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규준이다. 문화 빈곤자 락인이 찍혀진 민족은 발전 기회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조선족에게는 민족 공동체의 재건, 중국과 세계 조선민족의 우호교류를 추진하는 교두보 역할, 동북아세아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나라의 개혁개방 사업에 기여해야 할 성스러운 과업 등이 부과되여 있다. 전체 민족 구성원들은 내 세대에 잘 살면 그만이라는 무뇌충(无脑虫)식 도피관념을 버리고 풍요로운 력사를 소유한 문화부자의 반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말한다. 우리는 온고이지신(温故而知新) 정신으로 과거를 성찰하며 연길을 력사가 흐르는 조선족 도성으로 건설해야 한다. ///연변일보 /10월 10일자   
2506    [민속유산] - 연길에서 장훈아,- 멍훈아,- ... 댓글:  조회:3414  추천:0  2018-11-14
연변조선족장기협회 현판식 및 신임회장단 설립 (ZOGLO) 2018년11월9일  11월8일,연변조선족장기(象棋)협회 현판식 및 새로운 회장단 설립모임이 연길시 신흥가두 안민사회구역에서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연변조선족장기협회 산하의 연변삼부락장기협회를 비롯해 주내 8개 현시의 기층 장기협회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연변조선족장기는 길림성비물질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족의 고유한 민족전통이고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연변조선족장기협회 회장 정건화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장기협회는 지난 80년대 초반에 설립되여 근년래 정부와 사회각계의 끊임없는 지지와 노력에 힘입어 발전템포가 매우 빠르다고 한다. 협회는 해마다 1~2차의 전국성적인 대형경기를 조직하고 있고 한국,조선 등 나라 장기협회들과의 교류로 조선족장기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협회는 사무실과 활동장소가 없다보니 대내외활동에서 무척 애로를 겪고 있는 상황이였다고 한다. 연변화린무역유한회사 리덕봉대표(왼쪽)에게 명예회장 증서를 발급하고 있는 정건화회장. 연변조선족장기협회 신임회장단 성원들. 이러한 사정을 료해한 연변장기협회 명예회장이며 연변화린무역유한회사 대표인 리덕봉은 주동적으로 회사의 사무실을 장기협회 사무실과 활동장소로 내놓아 이날 현판식이 열리게 되였다. 연변조선족장기협회 산하 연변삼부락장기협회는 로인장기대회를 포함해 매년마다 15차의 장기시합을 조직하고 있고 한두차례의 전국성적인 장기경기를 조직하면서 조선족장기의 보급발전에 일조하고 있다. 연변장기협회 부회장이며 연변삼부락장기협회 회장 김호철은 “연변화린무역회사 리덕봉대표의 아낌없는 지지와 방조로 장기협회 사무실이 마련됨으로서 평소 장기협회 일련의 사무를 해결할 공간이 있어 매우 고무된다”며 “앞으로 새로운 회장단은 힘을 합쳐 조선족장기문화의 발전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룡정시장기협회는 룡정시장애자협회와의 합작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면서 장애인들에게 장기를 보급하고 있다. 연변장기협회 부회장이며 룡정시장기협회 회장 김철산은 “향후 사회에서 일반군중 및 장애인 장기애호가들이 장기를 두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속적으로 힘쓸것이다”며 연변조선족장기협회 신임 회장단의 설립은 연변조선족장기의 발전을 한층 추동할것이다고 말했다. 연변조선족장기협회 명예회장이며 연변화린무역유한회사 대표 리덕봉은 지난 3년간 연변장기의 발전을 위해 매우 많은 심혈을 기울려왔다. 장기협회에서 조직하는 전국성적인 경기에 경비가 모자라자 그는 유관부문을 찾아다니며 경기자금을 해결해주었고 협회회원들이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 도와주었다. 명예회장 리덕봉은 “조선족장기라는 민족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전승하는 것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응당 해나가야 할 책임감이다”며 “한 기업인으로서 앞으로도 조선족장기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연변조선족장기협회의 향후 활동계획에 의하면 매년 3~4차의 각 현시 장기대회를 조직하고 9.3맞이 조선족장기대회와 전국장기대회를 조직하고 사회에 유익한 애심기부활동을 조직하며 매년 년말에 선진집체,선진개인을 표창하면서 정규적인 사회단체로 활동할것이라고 한다. 연변조선족장기협회 새로운 회장단 인사들로는 고문 홍승국,명예회장 리덕봉,회장 정건화,상무부회장 김호철,부회장 리현철,김광명,김철산,최영호,리철수,전길수,박승남,총심판 리주석,비서실장 김창남이다. ///길림신문 /강동춘 특파기자   
고 한춘시인 시비 제막식 상지시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려 (ZOGLO) 2018년11월5일  3일, 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이였던 고 한춘시인의 시비제막식이 그의 모교인 상지시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다.      한춘시인(본명 림국웅)은 1943년 3월 11일 흑룡강성 연수현 가신향 유민촌에서 출생, 원적은 한국 경기도 영천이다. 1961년 상지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북농학원 토지규획전공에 입학,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해림현 수리과에 배치받아 근무, 1979년말 사업의 수요로 흑룡강신문사로 전근하여 2003년 정년퇴직할때까지 근무했으며 2013년 7월17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흑룡강신문사 재직기간 문화예술, 문학작품면의 편집을 20여년간 담당하였으며 문예부 부장, 한국특파원을 력임, 조선족문학인의 양성과 발굴, 조선족문학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흑룡강성 우수편집, 흑룡강성 신문우수론문 1등상등 다수의 영예를 취득하였으며 고급편집직함을 수여받았다. 한춘시인은 장기간 문학리론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선후로 30여만자에 달하는 문학평론을 발표해 중국조선족시가창작현황에 대해 전방위적인 분석을 진행했으며 또한 리론과 실천을 결부해 '주소없는편지', '서러운 별','현대시의 불안과 선택' 등 다수의 시집, 수필집, 평론집을펴냈다. 한춘시인은 이와 같은 조선족문학의 발전과 문학신인양성에서 거둔 탁월한 공로로 제1회 중국조선족 진흥컵 배달문예상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외 문학상을 여려차례 수상한바 있다.            한춘시비는 상지조중 정문의 오른쪽 화단에 위치, 높이 2.5미터, 너비 2미터, 두께 0.5미터의 칠채석으로 되였으며 정면에는 한춘시인의 시 '은방울꽃'이 새겨져 있고 뒤면에는 한춘시인의 초상과 생애 및 후원단체와 개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날 행사에서 한춘시비설립을 추진한 '송화강'잡지사 리호원주필은 시비설립경위를 설명하며 림종유언으로 자신의 3000여권의 장서를 모교에 기증하는 등 한춘시인의 모교사랑과 치렬한 문학정신이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해 이번 시비를 설립하게 되였다고 밝혔다.그리고 이번 행사를 위해 물심량면으로 많은 지원을 해준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연변동북아예술연구회, 도라지잡지사, 장백산잡지사, 상지시소수민족사업촉진회, 상지조중 33-28기동창회 등 8개의 단체와 90여명의 개인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표했다.       연변작가협회 김영건부주석은 축사에서 한춘시인을 북방문단의 거목일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조선족 시문학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자라고 평가,그의 탐구적인 문학정신을 력사와 우리시문학이 기록해야 한다며 이번 행사는 한춘시인 한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며 오늘날 다매체시대 위축된 우리 시문학을 다시 일궈세우고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더 큰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길림시조선민족예술관 전경업관장은 한춘시비설립은 북방조선족문단의 대사라며 한춘시인 개인숭배가 아닌 선생의 문학과 그의 문학정신을 고양하는 것이며 선생의 문학적인격에 대한 그리움을 후생들에게 전하고 문학적지향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 한춘시인의 부인인 리영자녀사는 답사에서 기자와 문학인으로서의 한춘시인의 삶을 회고하면서 이번 행사를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향후 조선족문학인들이 더욱 대접받는 시대가 오기를 희망했다.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안영규교장은 이번 행사에 동참할수 있게 되여서 기쁘다며 향후 한춘시비가 상지조중사생 뿐만아니라 광범한 조선족들의 민족문학 사랑기지로 널리 활용될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김정렬회장, 할빈시교육국 민족교육처 리성일처장, 길림시조선민족예술관 전경업관장, 연변작가협회 김영건부주석 등 관계자들과 최룡관, 강효삼, 김룡운, 리태복, 김창희, 김춘산, 한영남, 리길룡, 남병화, 림종원, 김상봉, 차호걸, 김승종, 방순애 등 한춘시인의 문우, 지인, 가족대표 및 제자들, 상지조중 사생들을 포함한 근 200명이 참석했다.    ///흑룡강신문 /진종호 기자      [흑룡강신문]문화/생활 >고 한춘시인 별세 1주년 기념좌담회 열려 [흑룡강신문] | 2014.07.18 14:46 (흑룡강신문=하얼빈)고 한춘시인 별세 1주년 기념좌담회가 16일 저녁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3층 회의실에서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의 주최로 열렸다. 흑룡강신문사 홍만호 전임 사장,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리홍규회장, 송화강잡지사 구용기총편 등 할빈시 조선족 문인들과 흑룡강신문사 관계자가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는 리호원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이 사회를 보았다. 좌담회 참석 인원들은 유가족 대표들과 함께 고 한춘시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시했다.   리홍규회장은 이번 좌담회는 고 한춘시인이 북방조선족문단을 위해 이루어놓은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명시하고, 고 한춘시인의 문학적 성과와 인간성 수양을 높이 재평가했다. 좌담회 참석자들은 ‘내가 알고있는 한춘’이란 주제로 발언했는바, 인간 한춘의 진면모를 발굴하고 연구하는데 보귀한 자료로 될수 있다.   좌담회 결속후, 참석자들은 고 한춘시인의 자택으로 가 유가족과 함께 추모제를 지냈다. /채복숙 기자 ㅡㅡㅡ     ====================/// 보 연변작가협회, 흑룡강신문사, 《연변문학》잡지사, 《도라지》잡지사, 《장백산》잡지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장백문화추진회에서 주최한 한춘시인 타계 3주년 문학세미나 “북방문학의 거목-한춘을 말하다”가 7월 17일 오후 연변작가협회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창작위원회 주임인 “문화시대”잡지 주필 김영건은 개막사에서 “한춘선생 타계 때에는 ‘문화시대’잡지에 ‘북방문학의 거목-한춘’으로 전문 특집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보다 깊은 학술적 접근이 필요했고 그의 타계3주년을 맞아 오늘 이자리를 만드는것은 참으로 뜻깊은 자리”라고 하면서 “한춘선생은 시창작뿐 아니라 튼튼한 실천리론체계를 구축하여 많은 후배시인들에게 새로운 시창작을 할수있도록 좋은 영양소를 공급해 주었으며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젊고 씩씩한 시창작역군를 형성한, 우리 조선족문단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한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세미나에서 최룡관시인의 “하이퍼와 언어의 자유와 상”, 김룡운평론가의 “한춘이 우리에게 남긴 발자국”, 길림시조선족문화관 전경업관장의 “한춘의 문학인생”, 한영남시인의 “하늘을 울리는 솔파도소리”등 론문이 교류되였다. 흑룡강창작위원회 대표 김성우, 《장백산》잡지사 대표 안미영, 흑룡강신문사 사장 한광천 등이 축사를 하고 김응룡, 김창희, 김경희 등 시인들이 자유발언을 하였다. 이번 세미나는 작가협회와 언론사, 문학잡지사가 공동으로 주최했다는 점에 의의가 각별히 크며 세미나를 통해 한춘선생은 북방문단을 떠나 제반 중국조선족문단을 대표할수 있는 거목이였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세미나에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조선족문인 40여명이 참가하였다. ///길림신문 /기자 김태국  ===========================[자료]... 작고·원로·중견·신예 시인 116명 작품 182편 수록 조선족 대표시 집대성한 '중국조선시화선집' 출판조선족 대표시 집대성한 '중국조선시화선집' 출판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조룡남, 리상각 등 원로에서부터 중견, 신진급 문인 등 조선족을 대표하는 시인 116 명의 작품을 집대성한 '중국조선시화선집'이 최근 출간됐다.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아 자치주 당(黨)위원회 선전부가 기획, 옌볜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이 시화집에는 조선족을 대표하는 시인 116 명의 시작품 182 편과 관련 사진 및 그림이 수록됐다. 2013.1.24 >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조룡남과 리상각 등 원로에서부터 중견·신예 문인까지 조선족을 대표하는 시인 116명의 작품을 집대성한 '중국조선시화선집'이 출간됐다. 24일 재중 동포매체 조글로미디어에 따르면 지난해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아 당(黨)위원회 선전부가 기획한 '조선족 최초의 시화집'이 옌볜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됐다. 옌볜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를 주축으로 문학·사진·미술 등 분과별 편집위원회는 조선족을 대표하는 시인 116명의 시작품 가운데 182편을 선정하고 각 시의 내용에 부합하는 사진이나 그림을 채택해 품격이 있는 책자로 꾸며냈다.   시화집에는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조선족을 대표하는 시인들인 리욱, 설인, 김철, 김성휘, 리상각, 조룡남, 김응룡 등 원로 시인과 남영전, 한춘, 최룡관, 김파 등 제2세대 시인 등의 작품이 수록됐다.   리삼월, 박화, 문창남, 송정환, 현규동 등 작고 문인과 문단에서 왕성하게 활약하는 중견·청년·신세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편집을 맡은 김영건 옌볜작가협회 시가창작위 주임(시인)은 "우리의 얼, 자연, 풍토, 서정이 한 권의 책으로 역사 앞에 펼쳐지게 됐다"며 "이 시화집이 오늘의 우리 문화를 살펴보고 미래를 약속해주는 아름다운 장이자 60년 조선족 문화의 한줄기 기념비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23일 오후 주정부 청사에서 열린 출판 기념식에는 안국현 자치주 당 선전부 부부장 겸 옌볜작가협회 서기, 원로시인 김철 등 작가 40여 명, 사진작가, 미술가, 문학잡지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      
2504    [이런저런] - 불상과 벌집 댓글:  조회:2979  추천:0  2018-11-13
20m 높이 석가모니상 미간에 웬 벌집? [ 2018년 11월 07일 ]     높이 20m 석가모니상의 미간에서 대형 벌집이 포착됐다. 봉황망(凤凰网)은 지난 4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쑹청 관광지구(宋城景区) 부처산에 있는 20m 석가모니상 미간에 대형 벌집이 자리잡은 모습을 공개했다. 네티즌들은 "벌집이 생긴 위치가 특이하다”, "황금색 점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봉황코리아          
2503    [민족자랑] - 조선말로 경극 부른 60대 연길 할머니... 댓글:  조회:3539  추천:0  2018-11-13
CCTV도 놀랐다! 조선말로 경극 부른 60대 연길할머니 (ZOGLO) 2018년11월9일  CCTV무대에서 조선말로 경극을 부르고 있는 리은화 중국의 3대 전통연극으로 불리우는 경극은 연극, 노래, 무용, 음악 등 모든 예술적인 요소가 총 집합된 종합예술로 중국의 오페라라고도 불리운다. “중국문화의 꽃”으로 명성이 높은 경극은 중국의 전통과 력사가 고스란히 배인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10월 28일 저녁 4시 20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희곡채널인 11채널 쾌락희원연창회(快乐戏院演唱会) 프로그램에서 아름다운 조선족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조선말로 경극(京剧)을 부르는 조선족할머니가 나타나 주목받았다. 이날 그는 경극 《대당귀비》(大唐贵妃) 편단(片段)의 “리화송”(梨花颂)을 불렀는데 매파(梅派)에 부합되는 특징 있는 목소리와 예술적인 정서는 물론, 한족이 아닌 타민족이 타민족언어로 경극의 그 어렵다는 각가지 표현기법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데서 더욱 큰 인정과 박수갈채를 받아안았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굴가? 거듭되는 수소문 끝에 찾은 그는 바로 연길시 진학가 문회사회구역에 살고 있는 리은화(65세) 로인이였다. 평범한 연길시 조선족 주민인 그가 어찌하여 높은 수준의 경극표현을 할 수 있게 되였고 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화려한 무대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된 것일가? 길림성"로년인 좋은 목소리" 평선활동에서 열창중인 리은화 11월 6일 오후, 기자가 만나본 리은화 로인은 전형적인 조선족 현모량처형의 자애로운 느낌을 주는 60대 로인이였다. 비록 환갑나이를 훨씬 넘겼지만 젊은 시절부터 노래부르기를 유독 좋아했고 또 가수가 꿈이였던 까닭에 지금껏 그 꿈을 내려놓지 못하고 노래로 즐거운 여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은방울 굴리는듯” 했다는 리은화 로인은 지식청년으로 하향했던 연길현 석정공사 용신대대에서 홍등기, 룡강송 등 혁명적 본보기극을 통해 처음으로 경극을 접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소리가 좋은 데다가 노래도 잘해 현문공단의 학습반에도 참가했고 그 기회에 문공단에 남을 번했던 기회까지 있었지만 결국 남에게 밀려 가수의 꿈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예술학교에 가려던 꿈도 이런저런 원인으로 성사되지 못하다 보니 자연히 전업가수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전업가수가 되는 꿈과 길은 모두 깨여졌지만 민간가수로 장끼를 보여줄 무대는 남아있었다. 개산툰종이공장에서 사업하는 기간 그는 단위의 노래경연은 물론 진과 현에서 조직하는 각종 노래경연에서 항상 등수에 들군 했다. 그동안 자식들을 키우랴, 살림을 하랴 제대로 된 노래공부도 못했고 바쁜 일상에 경황이 없었지만 노래에 대한 열망의 끈만은 그냥 놓치지 않았다. 2003년도에 아들의 공부뒤바라지 때문에 개산툰에서 연길에 이사온 후에도 리은화 로인은 노래에 대한 열망으로 연변음악가협회에서 조직한 “백일홍”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경극복장을 입고 경극을 공연하는 리은화 그러던 2008년 3.8절날 텔레비죤에서 연변주경극협회의 공연종목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 경극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진하게 받았다. 1970년대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을 때 경극으로 된 본보기극을 연출했던 옛 추억이 살아났다. 리은화 로인은 경극이 본인의 목소리에 맞고 곡이 고급적이며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 높은 차원의 노래기법이 필요하며 또 사람의 자신감을 높여주기에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그 길로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연변경극협회를 찾아갔고 연변의 경극예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허심하게 경극을 배웠다. 리은화 로인은 경극은 많은 노래를 모두 배운다기 보다는 어느 한가지 노래라도 표현기법을 모두 정확하게 장악하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경극 귀비취주(贵妃醉酒)만 4년 넘게 배웠다.결국 그는 지금까지 4년 넘게 경극을 배웠지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배우고 장악한 경극은 겨우 4개 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끊임없이 련습을 반복했고 어려운 한 부분을 넘어야 다른 부분을 계속해서 련습하기를 거듭했다. 어느 한번 리은화 로인은 영어로 된 경극을 본 적이 있었다. 영어로 되는데 조선말로는 왜 안되겠는가? 그 때 그는 한어로 된 경극을 조선어로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수한 경극표현예술 문화를 조선어와 결부시킨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러나 말이 쉽지 경극은 부를 때 음조를 다 맞추기가 매우 힘든 표현방식인데 거기에 번역가사 내용까지 틀리지 않게 담아야 하니 세심한 연구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전국경극표우만리행 표창회연에서 리은화 2014년 3월 1일과 4일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일명경인(一鸣惊人) 주간, 월간 시합에서 리은화 로인이 조선족민족복장을 떨쳐입고 무대에 등장하자 장내는 삽시에 들끓기 시작했다. 장내의 평심원과 배우들은 물론, 허다한 관중들까지도 지금까지 경극을 부르는 조선족가수는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 무대에서 리은화는 고전경극 소삼기해(苏三起解)를 조선말로 불러 많은 사람들을 놀래웠고 1등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경극을 조선어로 노래하는 데 대해 리은화 로인은 조선족으로서 누구에 못지 않게 노래를 잘할 수 있다는 신심, 특히 조선족 민족복장을 입고 나서면 항상 조선족으로서 중국무대에 서서 경극을 부르는 일이 무한한 긍지와 자호감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명한 무대예술 평심가인 하운유는 전국경극표우만리행 표창회연에서 리은화가 조선말로 부른 경극을 보고난 후 매우 놀라와하면서 “자기 민족언어로 교묘하게 번역하여 어색하지 않게 경극을 잘 표현한 점이 대단하고 매우 놀랍다”면서 높이 평가했다. 리은화 로인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기 민족 언어로 경극을 번역하여 부른 첫 사람으로 중국조선족민간문화예술인의 멋진 풍채를 전국에 널리 자랑한 사람으로 된다. 연변인민방송국 요청가수로 진행한 방송음악회 장면 그동안 리은화로인은 중앙텔레비죤방송에만 3번 출연해 모습을 보였고 길림성로년인 좋은 목소리 최우수인기상도 받아안았다. 소재지인 진학가 문화사회구역에서 경극 독창음악회도 가졌고 연변인민방송 석양홍 종목의 요청가수로 1시간 분량의 방송음악회도 펼쳐 노래가 전파를 탔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마음만은 늙을 수 없다”고 말하는 리은화 로인은 “노래로 살아가는 황혼의 삶이 항상 즐겁다”고 말한다. 이제 남은 여생에 좀 제대로 된 개인음악회를 열어보고 싶은 것이 리은화 로인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늙었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리은화 할머니의 진심을 담은 솔직한 고백이였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2502    [회음벽 회초리] - 조선어, 말보다 "말행동"이 더 앞장서야... 댓글:  조회:3632  추천:0  2018-11-13
조선어, 어떤 진통 겪고 있으며 나갈 길은 어디에? (ZOGLO) 2018년11월12일 “일대일로” 배경아래 중국조선어학회의 조선어에 대한 연구와 전망 “일대일로”배경아래 중국조선어 연구와 전망을 주제로 한 중국조선어학회 제9차 회원대회 및 제20차 학술대회가 11월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연길시에서 소집되였다.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에서 주관하고 중국조선어학회에서 주최한 이번 대회는 중국의 사회 대환경속에서 소수민족언어로서의 조선어라는 이 존재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고 어떻게 교육하고 있으며 어떤 진통을 겪고 있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하는 화두로 펼쳐졌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어문사업자들과 학자들이 회의에 참석해 열띤 론문발표와 학술토론의 시간을 가지였다. 개막사를 하고있는 중국조선어학회 제8기리사회 리사장 김영수 중국조선어학회 제8기리사회 리사장인 김영수는 개막사에서 “이번 대회는 ‘일대일로’의 수요에 따라 중국조선어의 현황을 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주제를 내걸고 개최되였다”면서 이번 회의가 중국에서의 조선어문 교육, 조선어 규범화, 표준화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학술문제들을 심도깊게 론의하고 당의 민족어문정책을 정확히 시달하며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바른 사용과 건전한 발전 및 연구를 추진하는 중요한 회의, 조선어의 정확한 사용, 발전, 교육 등에 방향과 방법들을 모색하는 의의가 있는 학술교류의 장이 될 것을 기대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연변대학 림철호부교장 연변대학 림철호부교장은 축사에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의 우리의 조선어는 그 위상이 이전보다 떨어졌고 교육, 보급, 사용 등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지적, 일례로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본 민족 언어문자를 경시하고 규범을 지키지 않는 문제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림철호부교장은 이번 학술회의를 통하여 언어사용과 교육, 연구 등에서의 연구성과들을 교류하고 문제점들을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앞으로의 우리의 언어문자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본 학술대회에서 우수한 론문과 성과들이 교류되고 중국조선어의 발전에 리로운 좋은 건의들이 많이 나올 것을 희망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회장 강보유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회장인 강보유는 축사에서 2001년도에 설립된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는 중국조선어학회에서 많은 리론과 방법들을 배웠다면서 두 학회는 매우 친밀한 형제학회라고 강조, 두 학회사이 상호교류와 정보공유를 통해 중국조선어/한국어교육연구의 발전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조선어학회 제9차 회원대회에서는 중국조선어학회의 사명과 의무를 조직적으로 보장하는 중대한 과제로 제8기리사회 사업을 총화하고 제9기리사회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새로 구성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의 리사장은 연변대학의 김광수교수가 당선되여 중임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임원들 이어 진행된 중국조선어학회 제20차학술대회는 상해복단대학 강보유교수, 길림성조선어학회 리대동 회장, 중국조선어문잡지사 김계화사장의 기조연설로부터 시작해 사회 및 고등교육분과, 기초교육분과 등 3개 분과로 나누어 도합 58편의 가치있는 학술론문들이 교류되였다. 11일 오전에 있은 중국조선어학회제9차회원대회 및 제20차학술대회 페막식 총화보고에서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김광수리사장은 “학술대회는 주로 조선어규범화의 필요성, 조선족교육이 직면한 문제를 필두로 시작되여 조선어 사용환경과 조선어교육환경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였다”고 총화했다. 총화보고를 하고있는 중국조선어학회 제9기 리사회 김광수리사장 김광수리사장은 “이번 대회에서 교류된 학술론문들을 종합해보면 조선어교육에서 정상적인 교사충원의 어려움과 교사수준의 하락, 도시화에 따른 학생확보의 어려움, 로무송출에 따른 가정교육의 빈약, 교수용어의 한어화 새로운 학교운영방밥의 모색 등으로 인한 고충을 진달할수 있었다”고 지적, “당면 조선족학교 학생수가 대폭 줄어드는 상황이지만 미래지향적으로 조선족학교 교육을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하여 앞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조선어학회제9차회원대회 및 제20차학술대회 참가자 일동 한편 1981년도에 설립된 중국조선족어학회는 설립초기부터 동북3성 조선어문사업협의지도소조의 지도와 배려하에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조선어보급 및 교육에 뜻을 둔 회원들을 조직하여 지금까지 9기의 리사회를 무어가지고 중국에서의 조선어문 교육과 조선어의 바른 사용 및 발전을 위해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진행해왔다. 또한 조선어교육과 연구, 전산화, 표준화, 규범화를 위하여 적지 않은 성과들을 이룩함으로써 국내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글 안상근 기자 /사진 김성걸 기자
2501    [민족자랑] -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 영화에 미치다... 댓글:  조회:4226  추천:0  2018-11-13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감독 장률을 만나다 (ZOGLO) 2018년11월13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감독 장률을 만나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감독 장률은 일상에서 영화를 길어 올린다.   장률이라는 이름이 마치 현악기 같다고 생각했다. ‘장’이라는 음절의 팽팽함과 ‘률’이라는 음절의 울림이 공존하는, 손으로 튕기거나 활로 켜서 소리낸 듯한 느낌의 이름. 그리고 는 장률이라는 이름 안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불협화음과 장률이라는 이름 안에서 익숙한 협화음의 앙상블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유연한 변주와 신명한 반전 속에서 생경한 인상과 평안한 흐름이 느껴진다. 확실한 건 가 장률의 지난 세계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작품이면서도 여전히 그 세계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라는 사실일 것이다. 베이징에서 촬영한 장편 데뷔작 이후로 장률 감독은 연변과 중국 대륙에서 영화를 찍어왔다. 은 중국의 변방 도시에서, 는 몽골에서, 은 중국의 충칭에서 그리고 의 이란성쌍둥이 같은 작품인 는 한국의 익산에서 촬영했지만 다시 연변으로 나아가 을 찍었다. 그 뒤로 4년간의 공백 끝에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 주목한 다큐멘터리 을 발표한 뒤 , , 을 차례로 발표해왔다. 대륙에서 시작된 영화적 여정이 한국으로 이어졌다. 퍼석하게 부서질 것만 같았던 영화의 질감 또한 보다 유려하고 선명하게 변모했다. 는 장률이라는 감독의 세계관의 변화를 대변하는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면서도 세상의 이면과 구석에 주목하는 창작자의 중력을 체감하게 만드는 최신작이다. 유연한 웃음을 내보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일상성과 영화적 세계관의 관계성을 되짚는 장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영화가 그와 닮았다고 느꼈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하 )는 원래 군산이 아니라 목포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다고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제목부터 다른 영화가 됐을 거 같은데, 주요 촬영지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목포의 민박집을 촬영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목포 촬영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군산을 선택하게 됐다. 처음 목포 촬영을 구상했을 때, 많은 준비가 된 상황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민박집이 목포에 있었던 것 정도라 장소를 옮기는 것 자체에 어려움은 없었다. 딱히 고집해야 할 조건도 없었고, 알다시피 워낙 규모가 작은 영화이기도 하니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됐는데 결과적으론 잘된 거 같다. 목포보다도 군산에 일제시대 건물들이 더 많이 남아있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와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아마 목포에서 찍었다면 과는 질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이 잔존한 도시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목포에서 봐 둔 민박집에서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촬영지를 옮겨야 할 정도였다면 민박집의 구조나 형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군산에서도 원하는 집을 찾지 못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물론이다. 세트를 만들어서 찍을 수 있는 영화도 아니니까 결국 그런 장소를 못 찾았다면 이 영화 자체를 찍을 수 없었을 거다. 다행히도 결국 군산에서 찾아냈는데 목포에 비해 군산이라는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느꼈다. 그래서 남녀 감정을 그리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 졌고. 실제로 요즘 연애하는 친구들이 군산을 많이 찾는 도시라고도 하더라. 서울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은 장률 감독이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 가운데 가장 세속적인 남녀 관계를 그리는 작품 같다. “남자들이 왜 이 세상에 온 줄 아세요? 여자들에게 상처 주러 온 거 같아요”라는 대사는 이전의 작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사였다. 심지어 치정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도 등장하고. 동시에 남녀의 이야기로만 국한시키기엔 그 주변부의 인물들과 풍경의 의미를 읽고 싶게 만드는 점에서는 장률 감독의 인장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남녀 관계를 그린 영화라는 것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영화를 찍으면 관객들이 그 관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실제 일상에서는 그 관계에만 집중하며 살지 않는다. 물론 어떤 연령대까지는 일상에서 남녀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클 거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부분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거기에만 집중하며 살 수는 없지. 그래서 영화에서는 그런 일상의 풍경들 속에서 자리한 남녀관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들에 더 눈길이 가기도 했고. 송현(문소리)과 윤영(박해일)이 군산에 도착해 표지판의 지도를 보는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대략 1시간 10여분 가량의 러닝타임이 흐른 뒤 그것이 이 영화의 서사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제야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르기도 하고. 서사를 분절해 재구성한 의도가 궁금하다. < 군산>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윤영이 선배의 아내였던 송현을 조금 좋아하는 감정도 있는 거 같고, 결국 그렇게 만나서 군산까지 가게 된 셈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라는 게 중간쯤 가봐야 알게 되는 거 같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다들 시작과 결말을 중시하지만 시작과 결말은 중간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꼭 시작이 어디여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이런 정서라면 이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따른 결과 같다.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군산에 가게 되는 과정이 극의 후반부에 등장하고 영화의 시작점에서 영화가 끝나게 되니까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우리 삶이라 비유한다면 영화의 순서란 결국 기억의 순서인 거 같다. 개개인마다 기억의 순서는 다르지 않나. 저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의 기억은 달라질 수 있는 거고. 영화가 군산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다시 군산으로 오는데 주인공 두 사람이 그 순간을 추억할 때에는 그 순서가 맞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사귀고 있든, 사귀고 있지 않든. 물론 내가 보기엔 갈라섰을 거 같지만.(웃음) 의 윤영이 처음 보는 인물이나 지역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 또한 불명확한 기억의 착시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기억의 순서라는 게 저마다 다르다고 했는데 영화 속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기시감 또한 기억의 불명확함에 대한 관념이 투영된 것일까? 젊은 시절에는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 그런데 어느 연령대부터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송현과 윤영은 대략 40대 전후의 나이 대에 있는 인물인데 그 나이부터는 그런 감이 오는 것 같다. 어디서 본 거 같다는 느낌. 그게 어느 연령대부터 오는 거 같다. 그런데 정말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정말 그 이후에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묘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다고 할까? 물론 특별한 종교가 있는 건 아니다, (웃음) 어쨌든 모든 게 다 내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거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향이 점점 심해진다. 지금이야 30대가 젊은 축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30대도 중년이라고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런 변화도 다 일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들이다. 평소에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기시감을 자주 느끼는 편인가? 점점 더해진다. 자꾸 어디서 본 것 같다. 물론 윤영처럼 여자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만.(웃음)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려갔다가 숙소 옆 카페에서 앉아있는데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이 분명 아는 사람 같더라. 그런데 누군지 도통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웃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카페에 앉아있는 나한테 오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물어보는 거다. 혹시 아는 사람 닮았냐고, 그런데 아마 아닐 거라고.(웃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현실이 더 영화 같다. 사실 영화에서 아름답게 그리는 사랑도 진짜 현실의 일상처럼 찍어보면 되게 낯설어 보일 거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영화가 일상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런 쪽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 일상에서 찾은 느낌을 영화에 확실히 반영하는 쪽이고.   에서 전투기 비행소음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군산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걸 촬영지로 선택하기 전에 알고 있었나? 몰랐다. 5~6분에 비행기가 한 대씩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컷’했다가 찍고, 그래서 영화 찍는 내내 너무 짜증이 났다.(웃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과거에 참혹한 역사가 있던 땅이라지만 지금은 연애하는 남녀가 찾는 도시가 됐고,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미군 전투기의 소음이 내려온다. 그래서 저 소리도 이 공간의 일상이구나, 피할 수가 없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길을 거닐면서도 전투기 소음이 지나가는 게 군산에서는 일상인 거다.(웃음) 을 찍으면서 발견하게 된 군산의 일상성인 셈인데. 피할 수 없었지.(웃음) 적산가옥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시절을 환기시키는 풍경 위로는 미군 전투기가 날아다닌다. 그리고 연변 출신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하고. 은 여러 면에서 한반도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지층처럼 공존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일상을 반영한다고 만들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북아 역사와 밀접한 현실이 있더라. 생각해보면 요즘은 한국 어디를 가도 조선족 출신 사람들이 있다. 말투도 잘 못 알아듣고, 생활방식도 다르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일상이 있을 거다. 윤영이 이미자의 ‘님 떠난 군산항’을 부른다. 아무래도 군산과 관련된 노래를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군산과 관련된 노래 중 그 노래가 제일 유명하다.(웃음) 게다가 이미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고 군산이라는 도시가 윤영이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니까 옛날 노래를 부르면 자연스럽게 옛날을 생각하게 될 거라 생각해서 선택했다. 만약 목포에서 촬영했다면 ‘목포의 눈물’을 불렀을까? 그랬겠지.(웃음) 전작에서도 노래하거나 누군가에게 노래를 시키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심지어 에서는 할아버지끼리 술 마시다가 노래를 시키는 장면도 나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옛날 노래들이 등장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어떤 감정을 갖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남다른 느낌을 받는다. 감동이 온다고 할까. 만 놓고 보면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어머니의 고향을 찾은 윤영이가 노래를 한다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하는 노래를 한다면 영화와 어울리지 않은 거니까 당연한 거지. 그리고 내가 말하는 노래는 스태프들이 다들 모른다. 이젠 나나 아는 노래들인 거지. 반대로 내 주변에는 요즘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 모를 수밖에 없고. ‘님 떠난 군산항’은 영화 속에서 들려지는 노래라기 보단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기 위해 초대한 생경한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쁘든, 슬프든, 노래하는 순간 어떤 감정이 작동된다고 느껴지는 건 좋다. 사실 유일하게 에서만 썼지, 내 영화에는 음악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음악이란 것이 어떤 공간을 찾았을 때 들려지는 것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카페에서는 카페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고, 노래방에서는 노래방이니까 부르고, 듣고. 극의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게 되는 영화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결국 내 영화에서 등장하는 노래란 일상의 리듬을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결국 내 취향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노래의 유명함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관객들에게 ‘님 떠난 군산항’은 생경하게 들릴 거 같다. 낯설어서 그만큼 신선하게 들릴 수도 있고. 그렇다면 너무 좋겠다. 옛날 노래라고 다 없어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아름다운 게 왜 없어져야 하나 싶고. 너무 빨리 변하고 사라지는 게 너무 싫다. 정신없이 시대 흐름을 좇아가는 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감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남기고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는 지금껏 연출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긴 제목이다. 제목이 떠오르는 타이틀 시퀀스에서 ‘영아(咏鹅)’라는 한자어가 함께 등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낙빈왕이 쓴 시의 제목이라고 알려져 있고, 부제인 ‘거위를 노래하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군산’보다는 ‘영아’가 이라는 영화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궁금했다. 보통은 촬영을 다 마치고 나서 제목을 생각하는 편인데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제목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영화는 극장에 걸려야 하는 거니까 관객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져야 하고, 투자사나 배급사에서도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데 군산을 제목에 넣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군산이라는 공간을 잘 담아내기도 했고, 지명을 제목에 넣은 전작들도 많으니까. 그리고 ‘군산’이라 제목을 붙이는 게 딱히 사기 치는 일도 아닌 거 같고.(웃음) 그래서 수락하고 대신 ‘거위를 노래하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첫 장편 데뷔작인 에서는 제목처럼 당나라 시가 여럿 등장하기도 하는데, ‘거위를 노래하다’를 의미하는 ‘영아’라는 당시 제목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윤영이 중국집에서 춤을 추면서 낙빈왕의 ‘영아’를 읊기도 하고. 당나라 시를 좋아한다.(웃음) 간결하기도 하고, 암송하기도 좋다. 몇 번만 외우면 기억이 난다. ‘영아’는 낙빈왕이 일곱 살에 쓴 시인데 중국에서는 서너 살만 돼도 알게 되는 시다. 에서 윤영의 집이 연희동이라 화교가 많고, 화교 학교도 있고, 심지어 윤영은 2년 동안 화교 학교를 다녔다고도 하니 이 시를 무조건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시는 한번 외우면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다. 시라는 건 운율이고, 리듬이라 그걸 기억하는 사람의 감정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내가 술을 자주 먹는 편인데 술 먹고 저 시를 춤추면서 외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결국 이라는 영화를 구체화시키기 전부터 그 장면을 생각했던 셈이다. 군산은 윤영의 어머니 고향이다. 윤영은 태어나서 처음 어머니의 고향에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군산의 민박집주인(정진영)도 사별한 아내의 고향인 군산에서 사는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민박집주인의 딸 주은(박소담)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한 셈이고. 결국 군산이 직접적인 고향인 사람은 없지만 결국 누군가의 고향인 셈이다. 그리고 다들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곳으로 오게 된 셈이고.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가게 되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는 재미있게 보였다. 어쩌면 내가 하도 떠돌아다니는 인생을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민박집주인의 아내가 끔찍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윤영도 자신의 어머니가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했음을 암시하는 행동과 말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산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들의 고향인 셈인데.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 찍어 놓고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군산이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소환된 이들이 찾게 된 망자의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덕분에 고향이 모든 이들에게 생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환기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 지난 작품들 속에서도 죽음은 늘 중요한 모티프가 되거나 끊임없이 등장해 환기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 어떤 나이가 되면 나와 깊은 관계에 놓여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걸을 경험 한다.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다. 그게 일상이 된다. 죽음이 계속 내 삶과 같이 가는 거다.   에서는 과거의 만행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이 등장한다. 역시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감독 장률의 연출 경력 안에서 일본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 두 번째 영화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모든 작품에서 조선족이나 중국과 연관된 인물이나 어떤 요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일본과 연결되는 흐름은 동북아시아의 근대 역사와 무관한 일이 아닌 거 같다. 1995년에 처음으로 경주를 찾았을 때 그때에도 경주를 찾는 일본 사람이 있었다. 군산에는 여전히 일제시대 건물이 많아서 거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후손이 지금도 많이 찾아온다고 하더라. 할아버지 집을 찾아오는 거지. 결국 일상에서 과거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공간인 거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딜 가나 중국인이나 조선족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자리하는데도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게다가 내가 그쪽 출신이다 보니 내 눈에는 그런 게 더 잘 들어온다. 에서 송현이 “여기 너무 좋다. 진짜 일본 같아. 나 일본 진짜 좋아하는데”라고 말하니까 윤영이 “윤동주 시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윤동주 시인이 일본 형무소에서 죽었잖아”라고 대꾸한다. 일본을 향한 경외심과 적개심이 공존하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느낌이랄까. 어쩌면 한국에 들어와 제3자로서 관찰하게 된 관념들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원래 촬영지로 생각했던 목포부터 시작해서 군산에 가서도 계속 일본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일지도 모르고, 그 지역에 가면 결국 그 시대의 정서가 여전하고. 그 지역의 노인들은 여전히 그 시절의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일제시대 때 만든 수도꼭지나 하수도나 여전히 쓸 만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감탄하기도 하고. 그런 개념이 서로 충돌하니까 따로 가둬 두고 말한다. 그런데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탄탄한 삶의 기반을 만들려면 일상을 잊어서도 안될 거 같고, 결국 지금의 일본인들과의 소통도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내가 워낙 비주류로 살아온 인생이라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의 윤영은 10년 전에 시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아’라는 시를 쓴 낙빈왕은 이 시를 일곱 살 때 쓴 천재였다고 하고, 윤영이 흠모하는 시인 윤동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떠난 시인이었다. 이 영화가 직간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시인들의 비범함과 윤영의 범상함의 대비가 느껴진다. 시인에 대해 좀 더 폭넓게 말하고 싶었다. 시를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 아니고, 시의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도 시인이라고. 사실 시 쓰는 사람 중에서도 정서는 다 잊고 시만 쓰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다는 낙빈왕에게 서울의 한 중국집에서 자기 시를 읊는 미친놈이 있다고 알려주면 제일 기뻐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인 입장에서는 저 사람과 소통이 됐구나,라고 느낄 거 같아서. 그런 면에서 윤영은 아직 시의 리듬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10년 전에 시를 썼다고 하지만 아직 윤영에게 시인의 삶은 진행 중인 거다. 그러니 어느 날 유명한 시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누구나 살면서 백수의 시기를 살 때가 있는 법이니까. 에서 윤영이 집에서 일하는 조선족 가정부가 윤동주의 집안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굉장히 감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서 주인공인 최현(박해일)이 찻집의 주인인 공윤희(신민아)가 공자의 78대 후손임을 알고 감격하는 장면과 유사한 인상이다. 두 작품에서 감격하는 인물을 박해일이 연기했다는 공통점도 있고. 공윤희는 원래 지인의 이름이다. 인사동에서 종종 술 먹는 사이인데 실제로 공자의 78대 후손이다. 그런데 어감이 여자 이름 같아서 한번 빌리자고 부탁했다. 그리고 윤동주의 고향이 내 고향과 멀지 않다. 지금도 거기 가면 윤동주 시인의 친척들이 많다. 대부분 농부로 사는데 요즘은 한국에서 버는 돈이 더 쏠쏠하니까 이리 와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친척들이 와서 일하고 있는 셈인데 그걸 알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그저 연변에서 온 조선족일 뿐이지. 윤동주도 후쿠오카에 가지 않고 계속 연변에서 살았다면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지금처럼 위대한 시인처럼 여겨질지. 그저 연변의 조선족에 불과할 수도 있고. 실제로 에서 “윤동주가 연변 출신이잖아. 근데 그쪽에서 계속 살았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송현이 물으니까 윤영이 담담하게 “어, 뭐, 조선족이지, 뭐”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조선족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한데, 지금까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조선족 출신 인물들이 거듭 등장하는 것도 그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존재들의 일상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저 일상에서 보이는 파편적인 풍경을 굳이 치울 필요가 없으니까 일정한 영화적 리듬을 생각하며 반영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주류 계층의 사람들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들 불쌍하다, 저 사람들 중에 범죄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디서든 비주류는 다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게 아니다. 특정한 관념이나 사건을 통해 개개인을 판단해버리는 거지. 그런 게 좀 안타깝다. 연변 태생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그런 선입견의 대상이 된다고 느낀 적도 있을 거 같다. 자주 당한다.(웃음) 출신지역을 얘기하면 대부분 나를 가르치려고 하더라. 그래서 예전에는 짜증 날 때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냥 귀여워 보인다. 에서 백현진이 연기하는 교수도 처음에는 짜증 나게 굴지만 나중에는 좀 불쌍해 보이지 않나. 노래방에서 쪼그려 자기도 하고. 다들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존심이 있고, 그래서 서로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사람만의 외로움이 있다. 많이 당해보니까 그런 게 보여서 귀엽더라.(웃음) 물론 개중에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와 이라는 영화가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이용해 반복적인 농담을 던진다고 생각했다. 박해일의 캐릭터는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변태’라는 단어로 규정되기도 하고, ‘잘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감독이 배우와의 사적인 관계로부터 얻은 인상을 캐릭터에 짓궂게 반영한 결과처럼 보인다. 스타에게는 스타만의 생활이 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입장이니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까. 그런데 이 친구는 스타의 생활과 정말 무관한 일상을 사는 것 같다. 동네 아저씨 같다고 하면 팬들이 싫어할지 모르겠는데 정서적으로 그렇다. 모자를 눌러쓰고 버스를 타고 다니고, 비싼 데를 찾아다니는 편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진지하다. 그런데 사람이 진지하면 변태처럼 보일 수 있거든.(웃음) 하지만 결국 오해는 풀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잘 생겼다는 말을 늘 듣는다. 허름한 식당에 앉아있어도 다들 박해일을 알아보고는 그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런 모습을 보며 느낀 질투가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웃음) 송현의 지인인 치과의사 지영(이미숙)이 박해일의 충치를 치료하면서 눈에 선과 악이 같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와 아무리 친해도 배우는 배우다. 그런데 가끔 혼동이 될 때가 있다. 그 친구가 선악을 다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는, 묘한 특징이 있지 않나. 그만큼 신비롭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그런 면에서 윤영이라는 사람도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작들에서 순희나 창호라는 이름을 자주 써왔다. 에서도 조선족 가정부 이름이 순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배우의 본명을 캐릭터 이름으로 자주 쓰곤 한다. 에서는 윤진서와 엄태웅의 이름을 그대로 캐릭터의 이름으로 썼고, 에서도 한예리와 세 감독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이 그랬다. 그런데 박해일은 와 에서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다음에 한 번 써야겠다.(웃음) 사실 너무 게을러서 그렇다. 이름을 지을 줄 모르니까 쓰던 이름이나 익숙한 이름을 쓴다. 아니면 그냥 배우나 스태프들 이름을 갖다 붙이거나. 윤영은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을 영아라고 불렀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윤영이라는 이름이 ‘영아’라는 단어를 활용하기 위해 마련된 이름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영화과 교수의 이름이 윤영인데 항상 그 교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여자 교수인 줄 알고 온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생각나는 이름도 없어서 그 이름 좀 빌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영아’라는 해석도 가능한 이름이었다. 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와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와 비교하면 은 전혀 다른 감독의 영화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까지는 황량하고 황폐한 정서의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은데 부터는 영화에 여유가 생긴 인상이다. 위트와 리듬감을 비롯해 사색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내 삶이 변해서 그런 거 같다. 삶이 변하니까 정서도 변하고, 그런 변화를 따라온 거 같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를 어떤 공간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한다. 카메라를 추운 겨울의 두만강에 두고 있으면 처럼 황량하고 추운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초기작들은 그런 공간이 주는 질감에 충실한 작품들이었다. 같은 경우에도 과거 폭발사고가 있었던 역 주변 동네는 황폐한 느낌이 있다. 에서도 황량한 폐가가 등장하는 건 그런 공간에 주목하는 내 습성 때문일 거다. 다만 예전보다는 시선이 좀 더 따뜻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인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 같고. 아무래도 세월이 작용한 결과일 거다. 점점 늙어가니까, 날카로움도 무뎌지는 거 같다. 영화적 공간성과 감독의 일상성이 변화하면서 창작적 세계관 또한 변화한 셈이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월을 보낸 공간에 쌓이는 정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서 부드러운 품성을 지니게 된 할아버지도 젊은 시절에는 지랄 같은 성격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결국 세월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서 윤영이 꿈을 꾸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일종의 예지몽 같기도 한데, 전작인 은 제목부터 꿈이라는 단어와 연관성을 지닌 작품이고, 에서도 최현이 찻집에 앉아서 꿈을 꾸는 듯한 경험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언제부턴가 영화 속에서 꿈이라는 요소가 특별한 장치 노릇을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에는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한 것 같다. 어젯밤에 꾼 꿈과 오늘 아침의 행동이 잘 구분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잘 구분이 안 되는 것 같다. 내 현실이 꿈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 생각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은데. 에서 언급되는 죽음은 모두 다 과거형이다. 지금까지의 연출작 가운데 현재 시제에서의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첫 작품인 것 같다. 대신 주인공들이 한 번씩 살아있는 사람을 마음으로 죽이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송현은 전남편을 마음속으로 죽였다고 하고, 윤영 역시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덕분에 위트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전작들과의 차이가 느껴지는 작품 같다. 사실 그런 생각까지 해보진 않았는데 살다 보면 누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고. 그냥 일상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들어와서 만든 와 그리고 까지, 그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좀 더 부드러운 꿈 혹은 초현실적인 상상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보이는 것 같다. 이미지적으로도 보다 유려해진 느낌이고. 감독으로서 예전과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걸 보고 싶기보단 삶이 여기까지 흘러온 덕분인 거 같다. 서울에서 6년을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공간의 질감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을 가게 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관성 같다. 그게 더 잘 보이는 입장이니까. 2001년에 발표한 단편영화 가 첫 연출작이다. 이 작품이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고, 그 이후로 영화감독의 삶이 이어져 여기까지 왔다. 원래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을 썼다고 들었는데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적성에 맞았던 걸까? 내 감정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호기심이 생기니까 영화를 계속 찍게 되더라. 사실 처음에 찍고 싶었던 영화가 이었다. 를 찍기 전부터. 그러다가 결국 을 찍게 됐고, 만들고 싶었던 걸 만들었으니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감독이 꿈이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연세대에서 영화과 교수를 맡아 달라고 제안하길래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해보자 싶었다. 언제나 한국이 궁금하기도 했고. 내게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나라니까. 그런데 영화과에 있다 보니 학생들이 항상 묻는다. 영화는 언제 찍냐고.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찾아와서 영화 연출을 제안하길래 결국 을 찍게 된 거다. 그러다가 를 찍고,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이후로 4년 만에 발표한 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삼인삼색’의 일환으로 연출을 제안하길래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사실 내가 다큐를 꽤 좋아한다. 하지만 직접 찍겠다는 생각까진 못했다. 다큐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찍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람과 직접 부딪혀야 하니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궁금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번 찍어볼까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아니었고.(웃음) 실제로 촬영을 하려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의 사장에게도 허락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어려웠다. 허락을 받고 찍었음에도 나중에 노동자가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래서 원칙적으로 제대로 허락을 받지 못하면 찍지 않았다. 그런 동의를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연변과 중국 일대에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한국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차기작은 일본에서 촬영했다. 연변이라는 출신지로부터 점점 남하하고 있는 셈인데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을 날이 올까? 예측하긴 어렵다. 워낙 계획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처럼 찍었으니까. 그냥 느끼는 대로 찍고, 안되면 말아야지. 연변이라는 출신지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느끼고 있진 않은가? 태어나고 성장한 지역에 대한 경험과 정서가 내 몸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정도다. 끊임없이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사는 거 같진 않다.   이미 라는 차기작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다. 후쿠오카는 에서 재일교포인 민박집주인이 군산으로 넘어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윤동주가 사망한 형무소가 있는 곳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 군산> 촬영을 마친 뒤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갑작스럽게 진행했다. 10회 차 정도의 작은 규모로 찍은 영화고,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이다. 후쿠오카를 처음 간 게 한 10년 전이고 그 뒤로도 종종 갔는데 한 10년 정도 다녀보니까 이젠 그 지역의 공간들이 눈에 제법 들어온다. 내 동네 같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고 찍은 건 아니다. 일본에서 나한테 가장 익숙하게 느껴지는 도시이고, 재일교포들도 많이 살고, 한국과 가깝기도 하고. 의 민박집주인이 후쿠오카에서 온 사람이라고 설정한 것도 그래서고. 어떤 지역이나 공간에서 세월을 보내며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면 거기서 영화를 찍게 되는 것 같다. 에서 윤동주 문학관이 등장하는데 처음 을 구상할 때부터 계획된 촬영지였을까? 맞다. 실은 내가 자주 다니는 공간이다. 윤동주를 생각해서 가기보단 공간이 너무 좋아서. 그쪽에 있는 언덕이 실제로 윤동주 시인이 산책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한눈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데 이런 풍경을 보니까 큰 시인이 된 걸까 싶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처럼 영화 역시 감독의 일상적인 시선이 반영된 결과물일 수밖에 없을 거다. 장률이라는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끝내 반영하고자 하는 풍경이란 게 있을까? 관객의 입장에서 보는 건 역시 관객의 몫인 것처럼 나는 그저 창작자로서 그저 공간의 질감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 같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는 것 같다. 워낙 계획 없이 떠돌아다니듯이 영화를 찍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냥 느끼는 대로 찍는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다가 안되면 말아야지. 결국 그 역시 내 일상일 테니까. /에디터 민 용준   /사진 장성용   /허스트중앙 ==========================/// '윤동주도 그저 조선족'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한 마디 (ZOGLO) 2018년11월12일  ▲영화 의 한 장면ⓒ 필앤플랜   장률 감독의 앞선 영화 에 호감이 있는 관객이거나, 대사를 통한 스토리 위주로 끌고 가는 영화에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를 추천한다. 가 경주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두 남녀의 이야기였다면, 는 군산의 네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군산에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내려간 두 남녀 윤영(박해일 분)과 송현(문소리 분)이 민박집에 묵게 되고, 그 곳의 주인장(정진영 분)과 자폐를 가진 딸(박소담 분)이 이들과 교감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서로의 아픔 혹은 치부가 드러나고, 다들 우연하게, 낯설게, 친절하지 않게 상대를 토닥인다. 아픔, 고통이란 본디 대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인이 건네는 당장의 위로는 언제나 적절하지 못할 수 있다. 어느 날 애정이나 배려의 발로였음이 우연히 깨달아질지언정 말이다.   윤영이 자신의 집 조선족 도우미와 '윤동주'와의 관계적 우연성에 감격하는 장면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일까?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 역시 용정 출신 조선족이었을 뿐이라는"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말은, 우리가 조선족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주민(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입장의 동일함'을 전제한 관계로서가 아닌, 거시적 '인권' 담론에 머물러 있다는 장 감독의 뼈아픈 지적이고, 이를 송현의 이중적인 행태로 드러낸다.   시공간이 교차하는 영화 '군산'   ▲영화 의 한 장면ⓒ 필앤플랜   '장소'를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생각한다는 장 감독의 '군산'은 현재, 과거, 미래가 교차하는 곳일까? 의 네 인물들도 군산을 기점으로 일본, 중국(만주), 한국을 시대적, 공간적으로 공유하고, 현재와 과거, 그리고 오늘이 될 미래를 넘나드는 듯하다. 주인장과 딸이 일본에서의 아픔을 안고 군산에 머물고,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던 윤영이 군산을 찾게 되고, 오고서야 군산을 발견하는 송현의 시공간의 교차가 '우연'을 통해 펼쳐진다.   엔 빛나는 미덕이 있다. 쿡 하며 터지는 의외의 유머를 배치해 자칫 지루할 수 있을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리고 깜짝 놀랄 배우들의 카메오 출연이 있다. 이 정도 배우가 등장하면 영화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될 거라 생각하겠지만, 조용히 조연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부수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은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에서 내 소득은 뭐니뭐니해도 배우 문숙(군산 음식점 사장)의 발견이다. 문숙은 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대낮에, 술을 오랜 친구 보듯 대할 줄 아는 이는,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이다. 이 여인은 아린 상처를 목울음으로 토해내는 송현에게 고독과 고통을 다루는 태도를 전수한다. "허리를 펴.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이렇게 말이다.   군산은 시부모님이 한동안 거주하셨던 도시여서, 내겐 '시댁'의 다른 이름이었다. 시부모님 생전에는 명절 때마다 교통체증으로 고생하며 오갔던 터라,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 '군산'은 영화가 찾아 보여준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조선의 곡물을 수탈해 빼돌린 큰 항구였고, 그런 이유로 일본식 가옥이 많았고, 미군 기지촌과 위안부 집창촌이 큰 규모로 있었던 슬픈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가 군산을 낭만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아픈 역사 또한 공존하는 장소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제 시댁이 아닌 거위를 찾아, 군산을 다시 가봐야 할까 보다. ///윤일희/오마이뉴스  
2500    [민족자랑] - "길림신문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취재 보도하다 댓글:  조회:3237  추천:0  2018-11-13
김룡 기자, 잊을 수 없는 남아공 취재길 (ZOGLO) 2018년11월7일    잊을 수 없는 남아공 취재길 김룡 길림신문사 스포츠 수석기자 다년간 길림신문사의 스포츠 수석기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해온 것 같다. 중국축구 슈퍼리그, 갑급리그, 을급리그 등 국내 프로축구와 같은 대형 체육행사 취재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박지성자선축구대회, 전국동계올림픽, 길림성소수민족전통체육경기대회 등 굵직굵직한 국내외 스포츠대회 취재도 겁없이 도전하고 뛰여다니면서 생생한 스포츠뉴스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고 애써왔다. 일년중 거의 서너달은 밖에서 보내기가 일쑤였고 객지에서의 외로움 같은 건 밥 먹듯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는 것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취재길이다. 스포츠 기자로서 특히는 축구팬으로서 가장 큰 행복이 월드컵 현장을 가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은 그래서 기억에 남은 건 절대로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취재에 우리 나라에 할당된 공식기자 인원수는 60명, 나는 유일한 소수민족신문기자로 취재권을 따냈다. 전세계 우리 글 독자 축구팬들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생생한 뉴스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났다. 2010년 6월 7일 아침에 연길을 떠난 나는 북경에서 8일 오후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발했다. 내가 탄 비행기는 9일 오후 1시(현지시간으로 아침 7시) 좌우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했다. 언어는 물론 음식습관이 전혀 다르고 6시간의 시차에다가 남북 위도차로 오는 피곤함은 그런대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혼자라는 점이였다. 당지의 불안한 치안상황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주재 중국대사관에서는 홀로 다니지 말고 택시를 함부로 타지 말라고 귀띔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우선 언어소통 때문에 진땀을 빼야 했다. 월드컵 같은 큰 행사에 외국인들을 도와주는 지원자가 많아야 하는데 중국어나 조선말 통역을 하는 지원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각국 문자로 된 상세한 안내게시판도 없어 벙어리처럼 손시늉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같은 항공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한 중국의 기타 큰 매체의 기자들은 팀을 무었고 또 그곳의 화교들이 마중을 나왔기에 인차 공항을 빠져나갔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홀로 공항에 남게 되였다. 그곳 치안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을 사전에 많이 들었던 관계로 감히 공항 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또 FIFA(국제축구련맹)에 호텔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라 부득불 중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3시간가량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드디여 중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대사관 직원이 알선해준 호텔에 짐을 풀었다. 나를 안내해준 대사관 직원은 이곳 치안상황이 말이 아니니 절대 홀로 다니지 말고 될수록 택시를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날 오후 나는 FIFA에 기자증을 발급받으러 갔다가 남방에서 온 중국기자들을 만났다. 기자증 하나에 4명이 취재팀을 무어 왔지만 그들의 사정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하루 전에 도착한 그들은 거리에 나갔다가 벌써 사진기를 빼앗기고 돈지갑을 털린 상황이였다. 정상적인 취재를 할 것 같지 못하다면서 거친 말로 FIFA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준비위원회를 비난했다. 치안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런 치안환경에서 나 역시 10일 저녁 대형 공연을 취재하려고 호텔을 나섰다가 어이없이 봉변을 당했다. 앞에서 걸어오던 흑인괴한 2명이 우호적인 손짓을 하며 웃음띤 얼굴로 다가서는 것이였다. 멈칫하는 사이 뒤에 세 사람이 나타나 두 팔을 꽉 붙잡는데 뭉툭하고 딱딱한 것이 허리에 들어오는 것이였다. 돌아보니 흑인괴한 3명이 내 몸에 붙어 서있었고 검은 총부리가 오른쪽 허리께로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꼼짝 못하고 돈지갑에 있던 1500딸라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때 나는 돈을 잃었다는 아쉬움보다는 렬악한 치안상황으로 취재를 제대로 완수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에 더 괴로웠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만 박혀있을 수도 없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온 나의 신분은 기자이고 목적은 취재인데 두렵다고 집구석에 박혀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취재에 대한 의지가 분명해지자 나쁜 치안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지혜와 배짱도 생겼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적은 곳이거나 혼자서 다니는 것을 삼가하고 몸에는 귀중품이나 많은 돈을 지니지 않았으며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인신안전이 수시로 위협받는 등 수많은 압력과 도전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취재를 위한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기간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조별리그 14껨과 16강전 2껨 도합 16껨의 경기를 취재했다. 취재한 기사와 수백장의 사진들은 길림신문 사상 처음으로 기자가 월드컵 현장에서 직접 보내온 생생한 보도기사들로 길림신문의 높은 보도경쟁력을 보여주었다. 그때의 그 어렵고 힘들었던 취재길이 어언 8년 전의 일이 되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기억에 오래 남아있게 되는 법인 것 같다. 내 기자생애에서 인신위협을 느낄 만큼 두렵고 힘들었던 취재길이였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경기 취재였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제공:지부생활  
2499    "통일의 풍산개", "통일의 송이", "통일의 귤",통일아 어서 오라 댓글:  조회:3582  추천:0  2018-11-13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초 청와대 관저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청와대 제공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관계의 일이 이와 같기만 바랍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가 9일 새끼 6마리를 낳았다는 소식을 직접 트위터로 전하며 이같이 적었다.  김 위원장은 9월 27일 문 대통령에게 풍산개 암수 한 쌍을 선물로 보냈다. 풍산개 두 마리는 검역 절차를 마치고 청와대 관저에서 문 대통령이 키우던 풍산개인 ‘마루’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중 암컷 곰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 문 대통령은 “(새끼는) 암수 3마리씩. 모두 흰색. 다 건강해 보인다”며 “개는 임신기간이 두 달 정도이기 때문에 ‘곰이’는 새끼를 밴 채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하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청와대도 ‘곰이’에 대한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등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청와대 관계자는 “강아지들이 너무 어리고 어미개도 초산이라, 강아지와 어미개의 건강을 염려해 (문 대통령이) 지금은 사진을 찍지 말자고 하셨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풍산개 ‘곰이’의 출산을 직접 트위터에 올리며 댓글에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을 두고 연내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우회적으로 요청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청와대는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선물로 보낸 자연산 송이에 대한 답례로 11일 제주산 귤 200t을 평양에 보냈다.   문병기 기자  =======================///           안티 트럼프 대표 방송사답게 트럼프를 놀리듯이 "네가 김정은이랑 알콩달콩 한다는데 선물은 아직 못받았지롱" 하면서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우정의 상징으로  귀한 한국산 사냥개 풍산개를 보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동물 애호가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유기견인 토리를 "퍼스트 독"으로 입양한 사연을 사진까지 넣어서 보도합니다.               내친 김에 마루와 찡찡이까지 소개             네티즌이 그려준 문프와 쑤기 여사님이 키우는 애완동물 그림까지 기사에 넣으면서 문프의 동물 사랑을 강조 또 강조. ==========================               모처럼 양산집을 찾은 정숙씨 제일 보고 싶어했던 외손주가 할머니를 맞는다. 이제 막 두돌 지난 외손주.   동네 이웃이 손주 친구하라면 준 강아지 쯔쯔는 한달 된 스피츠다.   외손주와 쯔쯔의 재롱에 정숙씨, 한참 웃었다.     ***고양이 찡찡이     안겨있으면서도 한손으로는 밀어내는 찡찡이 ㅋㅋ      삐진 찡찡이      -문재인 후보님이 유일하게 인터넷 쇼핑으로 사는 물건이 고양이 사료라고 함 ㅋㅋㅋ 충실한 집사인듯ㅋㅋㅋ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문재인 고양이 찡찡이, 쥐 사냥에 능해"   5년전의 일입니다. 참여정부가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고향 양산 시골집에 내려와 있을 때였습니다.  저와 문후보는 내외간에 잘 아는 사이인지라 집사람과 함께 양산 집에 놀러갔지요. 그 집은 자그마한 단독주택입니다. 마당도 좀 있지요.근데 집 마루에 죽은 쥐가 있는 겁니다. 요즘 아무리 농촌이라 해도 마루에 죽은 쥐가 있는 건 참 보기 드문 일입니다. 사실 좀 놀랬습니다. 이 집에 쥐가 그렇게 많은가 싶기도 하고, 왜 이걸 안 치웠나 싶기도 하고 희한한 일이다 했습니다. 근데 부인 김정숙 여사가 나오더니 황급히 쥐를 치웁디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집에 쥐가 많습니까, 쥐약이라도 놓은 겁니까"그랬더니 김여사 말씀이 그 집 고양이가 문후보 보여주려고 매일 쥐를 잡아와서는 마루에 놓아둔다는 겁니다. 문후보 집 고양이 이름이 찡찡이입니다. 그 녀석은 유기묘, 그러니까 유기견처럼 버려진 고양이에요. 찡찡이는 문후보가 데려와서 키우고 있었는데, 얼마나 녀석을 사랑해줬으면 주인님에게 칭찬받으려고 열심히 쥐를 잡아오는 거였습니다. 김여사님은 그런 찡찡이 마음을 아니까, 문후보가 집에 와서 죽은 쥐를 보고 찡찡이를 불러 칭찬을 해줄 때까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습니다. 부창부수, 그 지아비에 그 아내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풍산개 마루              **마루와 찡찡이는 유기견, 유기묘 라고함 ㅠㅠ      
2498    [동네방네] - 땔감으로 쓰던 나무가 억대 나무라니... 댓글:  조회:4005  추천:0  2018-11-13
[여기는 중국] 땔감으로 쓰던 나무, 알고보니 억대 최고급 목재 2018.11.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서울신문 나우뉴스] 중국의 한 공원에서 죽은 나무 2그루가 우리 돈으로 23억3300만 원에 팔려 관심이 쏠리고 있다. 11일 중국 파즈완바오 등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6월 하이난성 하이커우시 인민공원에서 벌채된 죽은 나무 2그루가 1428만2000위안(23억3300만 원)에 낙찰됐다. 이는 현지에서 고급 가구나 악기, 조각품 제작에 쓰이는 최고급 목재였기 때문. 하이난 황화리(黃花梨)로 불리는 이들 나무의 희소성을 몰랐던 인근 주민들 중 한 여성은 “벌채하기 전에도 땅에 떨어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종종 땔감으로 써 버렸다”고 밝히며 큰돈을 놓쳐 아쉬움을 드러냈다. 공원 측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두 나무를 지난해 6월 벌채한 뒤 총 91개의 통나무로 분리해 창고에 보관해 왔고 1년이 지난 11월 2일 온라인 경매를 통해 일괄 판매하기 시작했다. 입찰 개시 가격은 515만2000위안(약 8억4100만 원)이었지만, 나무의 희소성을 아는 사람들이 몰려 그 가격은 3배에 달하는 1428만2000위안에 최종 낙찰된 것이었다. 하이난 황화리는 하이난성이 원산지이긴 하지만, 그 대안으로 광둥성 일대에도 심어지기 시작했다.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워싱턴조약에 따라 국제적 상거래는 금지돼 있다. 중국에서도 국가 2급 중점보호야생식물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향단(학명 Dalbergia odorifera T. Chen.)으로 불리며 주로 약재로 쓰인다. 하이난 황화리의 가격 급등은 비교적 최근 일로, 한 여성은 “예전에 남편이 가구 만드는 일을 했는데 하이난 황화리도 자주 사용했다. 뿌리 부분이나 끝부분은 사용하지 않았고 이웃 주민이 땔감으로 쓴다고 해서 그냥 준 적도 있다”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비싸질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라고 회상했다. 현재 하이커우시 인민공원에는 하이난 황화리가 12그루 남아 있는데 공원 측은 불법으로 이들 나무를 베어가는 행위를 막기 위해 이들 나무 주위에 철제 구조물이 세우고 24시간 체제로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희 기자
2497    [민족의 자랑] - "아리랑고개 넘어가고, 넘어오고..." 댓글:  조회:4412  추천:0  2018-11-13
35년전 이탈리아 '홍 자매' 아리랑 발굴, 문경아리랑제 성과 이재훈 2018.11.13.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경, 홍이진(오른쪽) 자매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문경시 기증식에 앞서 인사말 하고 있다. 홍이경 이진 자매는 각각 6살, 4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자매가 문경시에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35년 만에 연락을 주셔서 깜짝 놀랐죠." 홍이경(42)·이진(39) 자매는 1983년 이탈리아 제26회 '제키노 도로 동요제'에 참가해 '아리랑'을 불렀다. '순금의 금화'라는 뜻의 이 동요제는 현지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어린이 음악경연대회다. 1959년 1회를 열었다. 이탈리아 자국민뿐 아니라 다른나라에서도 참가신청을 받는 국제대회다. 국내에서 번안곡 '검은 고양이 네로'로 유명한 '검은 고양이를 갖고 싶었어'(Volevo Un Gatto Nero)가 1968년 이 대회 참가곡이기도 했다. 이런 대회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한 편곡으로 부른 홍 자매의 아리랑은 2등상을 받았다. 홍이진씨는 "국제어린이가요제로 전통이 깊다"면서 "전문성이 있는 대회로 '검은 고양이 네로' 외에도 유명한 노래들이 많다"고 전했다.  홍 자매, 제26회 제키노 도로 동요제 수상 당시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홍 자매의 '아리랑'이 이탈리아 음악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아리랑'의 최초 국제경연대회 수상"이라면서 "우리가 몰랐던 세계 속의 아리랑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각 지역 아리랑의 세계화 작업에 참고할 만한 사례"라고 특기했다. 홍 자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터전을 꾸렸다. 현지에서 태어난 홍 자매가 대회에 참가했을 때 나이는 각각 일곱 살과 네 살이다. 홍이진씨는 "관객들이 많았고 상당히 즐거웠던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고 했다. "재미있게 노래를 했고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언니 홍이경씨의 기억은 조금 더 또렷하다. "노래를 한다는 자체는 즐거웠지만 관객들이 많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가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을 문경시에 기증하는 서명을 한 뒤 기증서와 음반을 들고 기념촬영 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홍 자매는 2006년 귀국, 한국에서 살고 있다. 홍이경씨는 한국 국적, 홍이진씨는 이탈리아 국적이다. 홍이경씨는 이탈리아 정부기관인 무역소에서 근무 중이다. 홍이진씨는 이탈리아 대표로 정부초청 장학금을 받아 한국에서 공부를 했고, 연세대 복지국가연구센터의 연구교수다. 홍 자매가 부른 '아리랑'이 실린 제26회 제키노도로동요제 기념음반은 문경문화원과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1986년 KBS 라디오 특집방송 '아리랑 아리리요' 준비 당시 KBS 사장이 이탈리아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 방송했는데 이후 분실됐다. 연합회 측이 이번 아리랑제를 준비하면서 이 음반의 존재를 확인했고, '아리랑'을 부른 홍 자매에게 연락이 닿았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기증식이 열린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이 자매에게 기증서와 음반을 전달받은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이탈리아에 있는 홍 자매의 부모에게 LP 등을 전달 받아 12월 10, 11일 경북 문경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지는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한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은 현재 아리랑 전승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뜻깊게 활용하겠다. 35년 전 이탈리아 어린이들에게 아리랑의 아름다움을 전한 자매의 공로에 시민들을 대신해 감사한다"고 밝혔다. 홍이진씨는 "'아리랑'은 남북 간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노래이다 보니, 여전히 크게 와닿는다"면서 "이번 전시가 역사를 공유하고 기억하는 의미가 돼 뜻 깊다"고 했다. 홍이경씨는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같은 좋은 일을 하는 단체가 있는 것 알게 돼 기쁘다"면서 "한국 전통을 세계에 잘 알리고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홍이진(오른쪽), 홍이경(왼쪽) 자매 최초 아리랑 국제경연 수상 'COREA- ARIRANG' 수록 음반 기증식이 열린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에스타워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에 기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홍이진 이경 자매는 각각 4살, 6살이던 1983년 제26회 이탈리아 제끼노 도로(Zecchino doro) 어린이가요제에서 'COREA- ARIRANG'-본조아리랑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날 기증한 음반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특별 전시된다. 2018.11.13.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는 "홍 자매의 아리랑은 1980년대 초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 아리랑을 알렸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서 "지금 들어도 작품성이 뛰어난 음원"이라고 평했다. 한편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세계 속 아리랑의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리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1세대가 넘어간 아리랑고개, 3세대가 넘어 온다'를 주제로 해외 동포들이 부른 다양한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2496    력사와 세월과 력사과 시간과 그리고 세월이 약,ㅡ 그리고 ... 댓글:  조회:4154  추천:0  2018-11-13
/독립운동 현장 中 만주를 가다 / 내년 3·1운동, 임정수립 100년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중국 정부가 복원한 윤동주 시인 생가.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해 급습했다. 봉오동에 매복한 독립군 900명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1200명과 싸웠고 157명을 사살했다. 아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청산리 대첩`과 함께 독립군 최대 전과로 기록되는 `봉오동 전투`다.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전투다. 한민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이지만 흔적은 현재 중국에 남아 있다. 봉오동 전투 전적지는 중국 투먼(圖們)시에 있다. 함경북도 온성이 보이는 곳으로 천혜의 매복지지만 현재는 저수지로 이용되고 있다. 저수지 이름은 `봉오저수지’. 봉오골이 물 아래로 잠기는 동안 `봉오`라는 문구는 저수지 이름으로만 남았다. 중국은 1982년 농업 용수를 확보하려고 펑우(風梧)댐을 건설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과 함께 최근 찾은 봉오동 전투의 흔적은 전적비가 유일했다. 이 전적비는 중국 정부가 조성했다. 2013년 투먼시는 전적지 입구 왼편에 비석을 세웠는데, `봉오골(동)전투기념비`라는 한글 문구와 한자를 병기했다. 또한 중국은 전적비 가운데 윗부분에 혁명 열사를 상징하는 붉은 별을 함께 새겼다. 기념비 문구 또한 봉오동 전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중국이 봉오동 전투를 비문에서 소개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봉오골(동) 전투는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로서 력사적으로 봉오골(동) 대첩이라고 부른다.`  중국 지린성 투먼시의 봉오동 전투 전적지에 기념비 두 개가 서 있다. 1993년 세운 기념비 뒤로 중국 정부가 2013년 새로 건립한 기념비가 위치한다. 중국은 전적지 곳곳에 전사자를 추념해 세운 비석에 어김없이 붉은 별을 새겨 기념했다. 새로운 전적비를 세우기 전 봉오동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은 1993년 세운 작은 기념비뿐이었다. 현재 이 비석은 새롭게 세운 전적비 왼쪽 100m 지점에 있다. 흙에 파묻혀 글씨조차 또렷하지 않은 이 비석은 중국이 그동안 봉오동 전투를 어떻게 봤는지 알린다. 뒤늦게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 2013년 새롭게 기념비를 세운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반면 한국은 물론 북한이 봉오동 전투를 기념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간간이 봉오동 전투 전적지를 찾는 관광객이 태극기를 흔들 때만 한민족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을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의 독립 투쟁이 경계선에 놓인 까닭이 크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공산당원이었고 카자흐스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은 이념 때문에 오래도록 홍범도 장군을 기억하지 않았고, 북한은 그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지 않았다. 남북한이 모두 외면하고 방치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중국의 혁명 열사로 둔갑하고 있다.  중국의 집요한 역사 편입 시도는 비단 항일 무장 투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 시인이지만, 그조차도 중국은 조선족 민족 시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延吉)에서 자동차를 타고 30분을 이동하면 윤동주 고향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이 나온다. 전체 가구 수가 20~30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이곳은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윤동주가 언급하는 고향 간도는 바로 이 지역을 말한다. 중국은 한동안 방치되던 명동촌에 윤동주 생가를 복원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동학교 또한 복원했다. 송길연 전 명동촌장(63)은 "명동학교는 일본군이 세 차례 불을 질러 사라졌던 곳"이라며 "옛날 사진을 토대로 네 번째로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동학교는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뿐만 아니라 김창걸, 라운규와 같은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학교다. 철저히 민족 정신을 교육했고 1929년 폐교할 때까지 졸업생 610명을 배출했다. 송 전 촌장은 "명동학교 졸업생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면서 "역사는 흘러가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찾은 명동학교는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다만 다소 위화감이 느껴졌다. 명동학교 마당에 펄럭이는 중국 국기 오성홍기는 명동촌이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명동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을 중국은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동학교 왼편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또한 마찬가지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표기돼 있었다. 윤동주 생가 곳곳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시비를 배치했는데, 마치 한글조차도 중국 문자 가운데 하나로 보는 듯했다. 중국 정부가 투자해 명동촌 옛모습을 복원했지만, 한민족 역사로 복원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한글 설명을 곳곳에 세운 것은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안내판 같았다.중국이 한국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는 과정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면서 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북3성 역사와 연구를 편입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발해 역사 또한 중국사 일부로 규정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유적지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홍범도 장군과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보다 더 큰 시련이 목전에 닥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먼·룽징 = 김규식 기자]ⓒ 매일경제 //////////////////////////////////////////////////////////////////=== 내년 3·1운동 100주년…항일투쟁 자취를 찾아서... '간도대통령' 김약연 선생 유학자였으나 기독교 수용해 교육·독립운동의 토대 삼아 학교 옛터엔 기념관·기념비 뿐 중국으로 포장된 '윤동주 생가' 평생 한글로만 詩를 썼는데  '중국 조선족 시인' 표지석 관광테마공원처럼 꾸며 씁쓸 중국 룽징의 명동학교 옛터 기념관에서 전 명동촌 서기 송길연 씨가 책상 앞에 앉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의 불길은 시차를 두고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로도 번졌다. 두만강 건너 북간도 룽징(龍井·중국 지린성)의 드넓은 들판인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건 1919년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서 발표 축하회’에 모여든 3만여 명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행사가 끝난 후 룽징의 일본영사관으로 향하던 만세 시위대 중 17명이 일본 무장경찰 발포로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동포들은 그해 5월 말까지 만주 전역에서 50차례 이상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무장 투쟁론이 확산하면서 이듬해 봉오동 및 청산리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명동촌과 명동학교였다. 옌지(延吉)에서 룽징을 지나 북·중 접경 지역인 두만강변 싼허(三合) 방향으로 20㎞쯤 가다 보면 명동촌이 있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크게 새긴 표지석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다 맨 처음 만나는 게 윤동주 시인의 생가다. 높다란 담장을 두르고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모양이 왠지 낯설다. 평생 한글로만 시를 쓴 윤동주가 ‘중국 시인’이라니…. 김약연 선생 흉상 오랜 세월 허름한 시골에 불과했던 명동촌은 깔끔하게 단장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윤동주 생가 구역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시비들이 즐비하다. 윤동주의 반신상을 부조하고 ‘서시(序詩)’를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시비는 사람 키보다 크다. 조경도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시비를 지나 생가로 가는 길목 오른편에 허름한 비각(碑閣)이 눈에 띈다. 비석에 한자로 새겨진 글자는 ‘김약연 목사 기념비’. 비석 윗부분이 깨져 ‘金’자는 온전치 않다. 비석 가장자리도 상처 투성이다. 1944년 세워진 기념비는 중국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사용되고, 밭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복원됐다고 한다. 특이한 건 비석을 받치고 있는 책 모양의 조형물. 성경이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선생(1868~1942)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회령에서 김하규, 문병규, 남종구 등 다른 유학자 네 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와 명동촌을 일궜다. 이듬해엔 윤하현이 가솔을 이끌고 합류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조부, 윤하현은 윤동주의 조부다. 다섯 집안의 일가 160여 명은 불과 5~6년 만에 약 20㎢의 토지를 개간했고 10여 개 마을이 잇따라 형성됐다. 서울시, '3·1운동 무대' 삼일대로 역사 거리로 조성   이상설이 북간도에 세운 첫 학교인 서전서숙이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문을 닫자 김약연은 1908년 명동학교를 열었다. 특히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을 통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명동촌과 명동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과 삶, 교육, 독립운동이 한몸으로 움직였던 것.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1929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이동휘도 전도사로 활약했다.   1929년 인민학교로 넘어가기 전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와 송몽규, 나운규와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 씨(63)는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만세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윤동주 생가는 찾는 이가 별로 없이 고즈넉하다. 10칸짜리 기와집인데 부엌과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구조다. 어린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이 여기서 크고 어울렸겠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송몽규의 옛집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하지만 커다란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명동학교의 역사와 김약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사진, 친필 원고, 주요 사건과 관련 사진, 당시 공부했던 교과서 등을 전시해 놓았다. 교실 하나에는 한복 차림으로 공부하고 있는 윤동주 모습을 재현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명동촌은 말끔하게 단장돼 있지만 느낌이 씁쓸하다. ‘중국조선족 교육 제1촌(村)’이라는 명동학교 입구의 현판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중국’이라는 외피로 덮여 있어서다. 기념관 바로 옆에 김약연 흉상이 서 있다. 짧은 머리에 팔(八)자 수염을 기른 선생의 꼿꼿한 모습을 대하니 그의 유언이 떠오른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룽징=서화동 문화선임기자 =======================/// [연해주·동북 3성 항일 유적지 한민족순례] 지워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 ▲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봉오동전투 전적지의 흙바닥에 1993년 제작한 낡은 기념비가 방치된 채 놓여 있다. 오른편 너머로 2013년 새로 세운 기념비(원 안)가 보인다. 새 기념비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과 함께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승리를 거뒀다’는 내용의 문구가 포함됐다. 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 ▲ 김성호 명예교수 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 ▲ 룽징시 명동학교에 있는 윤동주 생가. ▲ 명동학교 교실 내에 윤동주 실물 인형을 두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됐던 룽징시 비암산 일송정 역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서울신문
2495    [동네방네] - "훈민정음 상주본"은 어디에?... 또 어디로?... 댓글:  조회:4265  추천:0  2018-10-29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1천억 받아도 주고싶은 생각없다"  2018.10.29.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답변하는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 씨가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안민석 위원장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한지훈 기자 =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55) 씨가 29일 1천억원을 받아도 국가에 귀속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배 씨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체부와 소속 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국가 귀속 의사를 묻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민석 문체위원장으로부터 질문에 이같이 밝혔다. 안 위원장이 "국민에 공개돼서 민족 자산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점 공감하느냐"는 하자 배 씨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국가 귀속 문제는 저도 생각해봤는데 저 같은 국민이 잘 갖고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도 생각한다"고 했다. "1조원을 요구한 적이 있느냐"는 안 위원장의 질문에는 "그런 적은 없고 문화재청에서 최소 1조원 가치가 나간다고 감정을 했다"고 말했다. 사례금으로는 감정가의 "10분의 1 정도"인 1천억원을 제시한 적이 있다"면서도, "1천억원 받아도 주고 싶은 생각이 사실 없다"고 덧붙였다. 상주본의 보관 상태에 대해선 "염려스럽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어서 제가 일일이 살펴보기 어려운 상태라 잘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진공개…화재로 일부 소실(CG) [연합뉴스TV 제공] 훈민정음 상주본은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 사는 고서적 수집판매상인 배 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국보 70호인 해례본(간송미술관본)과 같은 판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상주본은 일부가 공개됐을 뿐 배 씨가 소장처를 밝히지 않아 10년째 행방이 묘연하다. 앞서 배 씨는 상주 골동품업자 조용훈(2012년 사망) 씨 가게에서 고서적을 구매할 때 상주본을 함께 입수했다고 알려졌는데, 조씨가 배 씨를 상대로 물품인도 청구 소송을 내면서 송사에 휘말렸다. 대법원은 훈민정음 상주본 소유자는 조 씨라고 판결했고, 조 씨는 사망하기 전 문화재청에 기증해 소유권은 국가에 있는 상태다. 그러나 배 씨는 도난 혐의에 대해서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확정받아 1년간 옥살이한 끝에 석방됐다. 이후에도 법적으로 상주본을 소유했으나 실물을 보지 못한 문화재청과 상주본 재산가치 추정액 1조원의 10%인 1천억원을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배 씨 사이에는 지루한 법정 공방이 지속했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상주본 강제집행을 검토하자 배 씨는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했고, 1심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항소해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   '훈민정음 상주본' 배익기 "1000억원 받아도 국가에 안 줘" 노우리 인턴 기자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상주본 '주인 논란' 고서적 판매상 배익기씨 국정감사 증인 출석 "1000억원 받아도 국가에 귀속할 생각 없다" 문화재청 "소유권 있지만 안전 우선이라 기다린 것… 자진 반납시 명예회복 검토" "1000억원을 받는다 해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55)씨가 29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상주본을 국가에 되돌려줄 뜻이 없다고 말했다. 배씨는 이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민에 공개돼 민족 자산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느냐"고 묻자 "당연하다"면서도 "저 같은 국민이 잘 갖고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도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어 "(훈민정음 상주본을 국가에 내놓는 조건으로) 1조원을 요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엔 "그런 적은 없지만 문화재청에서 (상주본은) 최소 1조원 가치를 가진다고 감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씨는 "귀속 사례금으로 (감정가의) 10분의 1 정도인 1000억원을 제시한 적은 있다"면서도 "하지만 1000억원을 받아도 주고 싶은 생각이 사실 없다"고 말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국정감사에 출석, "원주인인 조모씨가 문화재청에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안전이 우선이라 참고 기다린 것"이라면서도 "배씨가 자진 반납할 경우 문화재 최초 발견자로서의 명예회복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년째 '주인 논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어디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의미, 사용법 등을 상세히 밝혀놓은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창제된 지 3년이 지난 세종 28년(1446년) 발행됐다. 당초 여러 부가 제작됐으나 일제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됐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돼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됐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 입수해 보존한 ‘간송본’(간송미술관 소장)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경북 상주에 거주하는 고서적 수집판매상인 배씨가 2008년 7월 자신의 집을 수리하던 중 같은 판본을 발견했다며 공개한 후 새로운 해례본의 존재가 알려졌다.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판본은 간송본과 내용이 일치하며, 보관 상태가 더 좋은 것으로 확인됐다. 배씨는 "상주본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했지만 골동품 판매업자 조모(2012년 사망)씨가 "배씨가 가게에서 고서적 두 상자를 30만원에 사가면서 (상주본을) 몰래 훔쳐갔다"며 배씨를 상대로 물품인도 청구 소송을 내 '주인 논란'이 일었다. 대법원까지 간 민사소송에선 조씨가 상주본 소유자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형사소송에선 배씨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4년 5월 대법원은 "상주본을 배씨가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배씨의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상주본의 소유권은 조씨에게 있지만, 현재 상주본을 점유하고 있는 배씨가 상주본을 훔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1년 복역을 했던 배씨는 풀려난 뒤엔 "문화재청이 가치 추정액(1조원)의 10%인 1000억원만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상주본 보관 장소를 함구하고 있다. 현재 훈민정음 상주본의 적법한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있다. 조씨가 숨지기 전인 2012년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배씨를 상대로 상주본의 인도 강제 집행을 시도했지만 배씨는 청구이의의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배씨의 소를 기각했고, 배씨가 항소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재선거 출마한 배씨, 상주본 '1조원' 재산 등록하려다 퇴짜 맞고 사진 공개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4월 배씨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빛을 보게 하겠다"며 4·12 국회의원 재선거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배씨는 훈민정음 상주본의 재산가치를 1조원으로 환산해 재산등록을 하려했다. 하지만 상주시 선관위가 "실물 소유를 확인할 수 없어서 불가하다"며 이의를 제기해 재산 등록은 무산됐다. 배씨가 지난해 4·12 국회의원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공개한 훈민정음 상주본의 모습. 지난 2015년 3월 배씨의 집에서 불이 나 하단이 불에 그을려 있다./뉴시스 이에 배씨는 "선관위에 재산을 등록할 때 ‘실물 확인이 되느냐’, ‘(상주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등의 말을 들었다"며 훈민정음 상주본의 일부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 상주본은 앞과 중간 사이에 해당하는 부분이었고, 아래쪽이 불에 그을려 훼손된 상태였다. 배씨는 이에 대해 "2015년 3월 집에서 불이 났을 때 1장은 소실됐고, 나머지 일부도 탔지만 내용은 알아볼 수 있다. 산속 깊이 숨겨 두었다"며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완전히 공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배씨는 득표율 0.48%로 낙선하며 상주본의 상태는 다시 미궁 속에 빠졌다. 배씨는 국정감사장에서 상주본의 보관 상태에 대한 질문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다"며 "제가 일일이 살펴보기 어려운 상태라 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답변하는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 씨가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안민석 위원장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494    [사색의 여울] - 돕는다는것은 마음이며 행동이다... 댓글:  조회:3494  추천:0  2018-10-26
우리는 왜 문학인들을 도와야 하는가? 2018년 10월 25일   작성자: 황유복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색 우리가 희망하는 미래는 경제발전, 환경보전, 사회통합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 발전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고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 대로 그동안 경제발전에 짐이 된다고 간주되였던 환경문제와 사회문제가 뼈아픈 실천적 경험을 거쳐 이제는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과제로 부상되고 있다. 지속가능 발전을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성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많은 철학가들이 말했듯이 문화예술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다. 따라서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미래를 실현하는 첫 단추는 이처럼 문화와 발전의 련결로 채워진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유네스코(联合国科教文组织)의 지원으로 2013년 항주에서 ‘문화와 발전 세계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코넬대학 존슨경영대학원에서는 앞으로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될 덕목중 하나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꼽았다. 공감능력을 갖춘 리더가 각광받고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공감과 소통 능력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으로 되고 있다. 창의성이나 사회적 공감능력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학습할 수 있다. 카나다 인지심리학자 키스 오틀리는 문학작품이란 인간 마음의 소프트웨어에서 작동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모의실험이라는 독특한 리론을 제시했다. 즉 문학작품에서 이야기는 사회생활을 위한 ‘비행 시뮬레이션 장치’이고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모의실험을 통해 비행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창의능력과 사회적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문학작품을 더 많이 읽는 대학생일수록 사회적 능력이 더 뛰여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늘의 조선족은 중국의 넓은 지역과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고 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로 계속 살아남으려면 조선족문화의 공유가 우선조건으로 된다. 우리 세대는 문제없지만 청소년들에 의한 민족 언어의 상실은 문화공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서 우리는 조선족작가들의 작품활동이 민족문학발전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 발전에 핵심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대신 조선족문학은 문학의 보편적인 가치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발전에 키워드로 작용해야 한다. 즉 우리 문학에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흥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사회를 향해 전달하고 알려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경향과 표현의 방법을 선택했던 문학작품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희망과 꿈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함께 민족문화를 수호하는 구심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오늘날 돈을 향한 온갖 욕망이 란무하는 시대에 조선족문학인들은 여전히 전혀 돈이 되지 않는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문학은 처음부터 가난과 이미 동의어였다. 하물며 문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여있는 지금, 그들이 문학을 계속 고집하는 리유는 무엇일가? 민족문화의 진흥이라는 간절한 꿈, 그러한 꿈을 차마 접어버릴 수 없어 그들은 오늘도 아무런 경제적 수입도 되지 않는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문화예술인들은 오늘의 ‘가장 사랑스런’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수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 경제인들은 그들의 작품활동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도움은 어느 문화예술인 개인에 대한 도움이라기보다 우리 민족문화발전을 돕는 일이라고 평가된다.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산하의 조선민족발전위원회는 성립 당시 해마다 연변작가협회가 추천하는 작가들의 작품집 두권씩 출판해주기로 했다. 지난해까지 조선민족발전위원회 문학총서가 10권이 출판되였다. 21세기 지식경제시대의 인류사회가 갖고 있는 핵심적 성격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에너지, 철강, 자본 등 물질적 자원으로부터 지식, 교육, 연구개발 등 문화적 자원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제 문화는 세계 각국, 각 민족의 ‘상대적인 경쟁력’을 결정한다. 다시 말한다면 문화가 강한 자가 이기게 된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인류력사는 인간이 지닌 창의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의 변화에 의해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이 바뀌였고 정신문화의 풍요로 인류는 보람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인류의 부단한 창의적 노력이 깔려있다.                                                                                 길림신문/ 황유복(중앙민족대학 교수)    
2493    [고향자랑] - 북경에 "아리랑" 울러퍼진다... 댓글:  조회:3605  추천:0  2018-10-26
베이징에 '아리랑'이 울러퍼진다 (ZOGLO) 2018년10월25일          안승필 작곡가,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의 코드 풀기 위해 애썼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채복숙 기자 = 아리랑은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민요로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시대와 지역, 그리고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문화의 상징 중 하나로 되었다. 기쁨과 슬픔, 고난과 희망, 미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가락이다.   바로 이러한 '아리랑'이 중국국가교향악단(중국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안승필 작곡가의 손을 거쳐 첼로협주곡으로 변신했다.   2014년 1월 17일 프랑스 로렌 국립 교향악단 (Orchestre National de Lorraine)의 연주회에서.     헤이룽장성 옌서우(延寿) 현 출신의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안승필(49)의 첼로 협주곡 '아리랑'이 오는 11월 13일 베이징콘서트홀에서 초연될 예정이다.   안승필 작곡가는 파리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상하이음악대학 및 프랑스라디오방송국에 재직 중이다. 상하이음대 전자음악센터 예술감독, 독일 학술교류센터(DAAD) 상임작곡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프랑스 국영 방송 INA- GRM 소리 연구원에서 작업 중.     "지난해 국가교향악단의 위촉을 받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민요로서의 아리랑의 지속적인 노출과 광범위한 사용에 의한 익숙함은 작곡가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탐구를 좋아하는 작곡가에게는 속박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창작의 시작이 될 수도 있었다.   현대 작곡가이지만 아리랑이 변형되거나 왜곡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안 작곡가인 만큼 딜레마는 더 컸다. 작곡가로서 그동안 연마했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안승필'의 색깔이 전면에 두드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내 삶의 경험들을 회상하며 그동안의 작곡가로서의 노력을 동원하여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의 코드를 풀기 위해 애썼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아리랑은 현대에서 고전으로 가는 시도이기도 했고,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는 다리이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내 창작세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고 이전의 나를 지우고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모험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7년 5월 1일 서울 더하우스 페스티발 '안승필의 초상'연주회에서.     안승필 작곡가는 동양인으로서 현대음악 특히 전자음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선두주자로 인정받고 있는데,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음향을 찾아내 조탁한 뒤 여기에 깊은 사색과 성찰을 담아내는 능력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안승필 작곡가는 어려서 아코디언(手风琴)을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1984년 수백 명의 경쟁자들 속에서 차석으로 상하이음대에 입학, 유명한 작곡가 양리칭(杨立青)과 자오샤오성(赵晓生)을 스승으로 모셨다. 상하이음대 재학 기간 그의 천부적 재능은 충분히 발굴되었으며 작품이 '제14회 상하이의 봄' 신작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2014년 3월 '제 1회 안익태 국제 음악제'에서 던우 더블협주곡 연주전 리허설에서 피아니스트 프로드로모스(Prodromos)와 예술의 전당에서.     1991년 안승필 작곡가는 상하이음대를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 교직을 맡는 한편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작품 '명오(瞑悟)'가 아테네국제올림피아작곡콩쿨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점차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6년, 프랑스어도 구사할 줄 모르던 그는 역시 차석으로 당시 세계 각지 명문대에서 온 음악엘리트들을 물리치고 프랑스국립음악대학에 입학해 세계적인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1998년에는 작곡 부문 수석으로 졸업해 세계 음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게 됐다.   2017년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페스티발의 감독 Michel Lethiec 와 함께.     졸업 후 안승필 작곡가는 프랑스라디오방송국에서 음악편집으로 일했으며,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조직위원회의 요청으로 개막식 주제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안승필 작곡가는 1993년 아테네국제올림피아콩쿠르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다수의 교향곡, 실내악 및 전자음악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유네스코의 국제음악포럼에서 세계 6대 청년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20여개 나라와 지역에서 공연 혹은 발표됐다. 그의 교향음악 "결(树之脉)"은 2010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상하이 엑스포 개막 연주회에 초연되기도 했다.   2017년 필하모닉 라디오 프랑스 관현악단(Philharmonic Orchestra Radio France) 단장과 함께.     2012년에는 베릴린에서 독일정부 DAAD의 주최로 '안승필 초상' 연주회가 열리면서 이 시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초상'이란 현존하는 음악계의 거장에게 헌정하는 특별 연주회를 말한다. 해당 거장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과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첼로협주곡 '아리랑'의 작곡에 관하여 안승필 작곡가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작곡가로서 "나의 아리랑"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자신이 추구하던 음악세계와는 전혀 다른 장르이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큰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작품에 임하였고 창작하는 내내 무척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면서 작품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이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곡가로서 '아리랑'의 무한한 가능성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492    [동네방네] - 기부는 쉽지 않다... 오로지 기부는 행동이다... 댓글:  조회:3304  추천:0  2018-10-26
손수레 몰아 400억 쾌척 노부부, 30년 넘은 셔츠차림(종합) 윤다정 기자  2018.10.25.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실향민 남편·식모살이 아내, 안쓰고 불려서 고대 기부 개인 기부 역대 최고.."인재 발굴해 나라에 기여하길" 김영석씨(91)와 양영애씨(83·여) 내외가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기부식에서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기부한 뒤 김재호 학교법인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염재호 총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0.25/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기부도 내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에요. 좋은 인재를 발굴해서 나라에 기여할 수 있게 하면 그게 좋은 일이지요." 희게 센 머리를 곱게 빗어넘기고 지팡이를 짚은 양영애씨(83·여)의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양씨가 차려입은 붉은 체크무늬 셔츠는 3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해진 데 없이 단정하고 깨끗했다.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을 찾은 양씨와 김영석씨(91) 부부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기부한 부동산은 시가 200억원 규모 서울 청량리 소재 토지 5필지와 건물 4동. 현재 시가로 따지면 200억원 규모에 이른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씨 부부는 이후 시가 200억원 상당의 토지 6필지와 건물 4동을 추가로 기부할 예정이다.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인재 발굴에 써 달라"며 고려대학교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기부 금액은 지난 2007년 익명을 요구한 60대 여성이 시가 4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한 이후 고려대학교 기부금 가운데 역대 최고 액수다. ◇"'청량리~서대문' 전차 비용도 아까웠죠" 양씨는 경북 상주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 중 가장 머리가 좋았지만 초등학교 문턱도 제대로 밟아 보지 못했다. 대신 "쟤는 공부 안 해도 얘들(형제들)보다 잘 살 것"이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돕는 등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양씨는 23살에 김씨와 중매를 통해 만나 결혼했다. 김씨는 강원 평강군 남면에서 태어나 15살에 부모를 여의고 17살에 월남한 실향민이다. "돈을 벌어 오겠다"며 고향에 2명의 형제를 두고 떠나 왔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양씨는 식모살이, 식당 일 등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다 1960년대 초 종로5가에서 김씨와 함께 손수레로 과일을 떼어다 팔기 시작했다. 매일 자정쯤 종로 5가 시장통에 도착해 납품 트럭으로부터 과일을 샀다. 좋은 과일을 고르기 위해 같은 트럭에서 과일을 사들이는 다른 상인들보다 4시간은 일찍 움직였다. 청량리부터 서대문까지 다니는 전차 요금을 아끼기 위해 1시간 거리를 매일 걷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파출소 순경에게 붙잡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 과일 장사가 끝나면 늦은 밤까지 식당 일을 하는 대신 밥을 얻어먹고, 번 돈은 모두 은행에 저금하고, 옷이나 신발도 얻어쓰는 등 검소하게 생활했다. 양씨는 "산꼭대기에서 월세 생활을 15년 했다 그런데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허세를 떨면 안 되지 않나"라며 "이것도 30년 된 옷"이라고 자신이 입은 셔츠를 가리켜 보였다. 이같은 성실한 노력이 빛을 발해, 이들이 파는 과일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는 시장 상인들의 도움을 얻어 가게도 낼 수 있었다. 개점 후 3~4시간만 지나면 과일이 전부 팔려 나갈 정도로 장사도 잘 됐다. 이렇게 모은 돈을 종잣돈으로 대출을 얻은 부부는 1976년 처음으로 청량리에 상가 건물을 매입했고, 과일장사를 계속해 빚을 갚아 나가며 주변 건물들을 하나 둘씩 사들였다. 그러면서도 입주 업체들이 오랫동안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임대료는 가급적 올리지 않고 저렴하게 유지했다. 김영석씨(91)와 양영애씨(83·여) 내외가 25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기부식에서 평생 과일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기부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0.25/뉴스1 © News1 허경 기자 ◇"인재 발굴해 나라 이끌 수 있기를" 노부부의 당부 알뜰하고 소중하게 모은 전 재산을 통 크게 기부하게 된 배경에 대해 부부는 "오래전 두 아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기 때문에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좋은 곳에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부처를 고민하던 양씨는 가깝게 지내던 부동산 주인의 "어머니, 우리 동네가 잘 살아야지. 고려대 가서 (기부)하세요"라는 권유로 고려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양씨는 "기부를 하기 전에는 이렇게 기부가 좋은 것인지 몰랐다. 무식해서 남들이 기부하면 그런가보다 했다"며 "열심히 벌어서 형편이 되면 내가 쓰고 남은 돈은 절대로 자식에게 주면 안 된다. 막 쓰고 인생을 망친다"고 강조했다. "국민학교를 졸업 안 했어도, 썩은 과일장사라도 사람이 머리를 써야 한다"며 배움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한 양씨는 "우리 나라의 인재를 많이 발굴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인촌챔버에서 열린 기부식에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김재호 이사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유병현 고려대 대외협력처장 등이 참석해 양씨 부부에게 기부증서와 감사패를 전달했다.
2491    [동네방네] - 조선족 민속 무형문화재 얼쑤ㅡ 절쑤ㅡ... 댓글:  조회:3466  추천:0  2018-10-24
조선족민속결, 한 귀향농민이 이루어낸 무형문화재 (ZOGLO) 2018년9월18일       2011년 통계를 보면 중국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재 1,219건 성급 무형문화재 7,109건이 선정되여 무려 8,328건에 달하는 무형문화재가 전해지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중국의 전통 매듭공예인 중국결(中国结)은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장시기 전해져 온 민간공예이다. 그런데 실을 주요 재료로하는 이 수공예가 요즘 연변조선족민속과 접목되면서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 민속결”을 탄생시키는 “기적”을 창조하여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이 새로운 무형문화재인 “조선족민속결”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가난한 귀향 농민 박경훈(朴京勋)씨이다.   룡정시 민속박물관에서 민속결을 창작하는 박경훈씨   1, “백락”과 “천리마”   진달래광장의 야시장 난전에서 귀엽고 깜찍한 민속 소품들을 팔고있던 박경훈씨를 발견한 사람은 룡정시 로간부국의 라송화(罗松花) 국장이였다.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처럼 그는 박경훈씨의 재능을 “부활” 시키는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연길 진달래광장 야시장에 나갔던 라국장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화 소품들에 매료되였다.   조선족이 좋아하는 빨간 “고추”요, “옥수수”가 있었고 조선족 로동도구인 “소보치”가 있었으며 조선족의 “북”이나 “새장구”도 있었다. 귀엽고 깜찍하게 만들어진 알록달록 크고작은 모형은 그처럼 정답고 사랑스러웠던것이다.         중국결의 기술로 새로 짠 조선족 민속공예품들   “이거 얼마합니까? 한국거 맞지요?”   “아,아임다. 내손으로 직접 만든검다!”   “정말임까?! 곱기두 해라~”   라국장은 거친 사나이의 투박한 손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런 남자의 큰 손에서 어찌 이 같이 정교한 물건이 만들어질수있단 말인가?!    [음향: “15년도 8월 연길에 집이 있으니 진달래광장 예스에 나왔다가 내가 파는 물건을 보고 저 ‘소보치’ 샀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룡정에 와서 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워줄수없는가?’했습니다. 저도 그가 연길 사람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아보니 룡정 로간부국 국장이였습니다.”]   한달뒤, 연길 시내에서 자연공예품에 수요되는 재료를 구할수없자 박경훈씨는 고향인 룡정시 신화촌으로 돌아왔다. 옥수수 껍질도 얻고 버들도 얻어 특색있는 자연공예품을 만들어 볼 생각에서였다.   박경훈씨는 룡정에 왔던김에 “기회가 되면 로간부국으로 찾아오라”던 라국장이 생각나서 찾아가 보았다.   다시 만난 둘은 모두 룡정사람인것을 알고 더 반가워했다.    [음향: “찾아가니 ‘원래 룡정사람이였는가?’해서 룡정사람이라고했습니다. 그러니 ‘더 가까워졌네’라고 합데다......”]   이듬해인 2016년 라송화 국장은 룡정시문화보도출판국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국장은 곧 박경훈씨를 불러 그를 문체국에 받아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음향 “승진하여 나를 찾아 나의 정황을 물어보던게 ‘크게 해결하지 못하겠지만 일상 생활을 할수있게 하겠다’고했습니다.”]   라국장은 문체국의 항목으로 박경훈씨의 재능을 잘 발휘시키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박경훈씨를 공익 일터인 문체국에 배치하기로 마음먹고 인사국에 전화를 했다.    [음향 “내 앞에서 련계하면서 ‘안된다’고하자 ‘이 사람은 기술항목인데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기술을 잃어버린다. 정책도 적당히 써야한다’고 했습니다. 그후 시위에 저의 자료를 올려보내구 비준을 받아 16년 7월부터 여기 문체국 민속박물관에 출근하게 되였습니다.”]   박경훈씨가 나이 조건이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사국 국장이 답복하지 않으니 라송화 국장은 이는 룡정시의 중요한 기술항목이고 또 박경훈씨도 더 없는 기술인재이기에 꼭 유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그리고 관련 자료와 보고를 시당위원회에 올려보내 비준을 받고 드디어 그에게 일자리를 해결해주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박경훈씨는 일반 농민으로부터 로임을 받는 공직 일군이 되였다. 농민으로부터 그것도 가난한 시골 농민으로부터 도시 문체국의 일군으로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모든 정력을 몰부어 열심히 신제품 개발에 힘쓸 각오를 다지며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니!” 부득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가 입에 풀칠이나 할 각오로 덤벼들었던 중국 전통매듭 강습! 중국결 강습반에 다니던 그 어려웠던 나날들을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울컥해났다.   2, 타향살이   2005년 오랜 병으로 고생하던 박경훈씨는 허리까지 다쳐 집에서 그냥 몸조리를 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글쎄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반금시에서 차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는것이였다. 그리고 “다친” 다리는 괜찮은데 와서 기타 관련문제들을 처리해 달라는것이다.   누님은 자기는 녀자니 어찌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웃집에 가서 겨우 돈 6백원을 꾸어 동생의 손에 쥐여주면서 어찌하나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설마 차 사고일까?”하면서도 누님이 하도 당황해하면서 부탁하니 박경훈씨는 그냥 대답하고말았다.    [음향 “누님의 아들이 료녕성 판금에서 곤경을 치렀는데 다 알겠지만 다단계 판매에 걸려 들었던것입니다. 갈때도 다단계라는걸 예산하면서 갔습니다. 조카를 만나 자초지종 들어보니 다단계 맞았습니다. ‘다 걷어치우고 가자, 네만 만원 미쪗으면 됐다, 우린 가자’했지만 조카는 안 오겠다고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욕하고 때려서 될 일도 아니였습니다.”]   산설고 물선 타향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집스러운 조카를 버려두고 혼자 돌아올수도 없는 일이였다. 박경훈씨는 그냥 기다리고있었다. 굶어죽을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였다.   낯선 타향에서 돈도 힘도 없는 그로서는 다른 별 방법이 없었던것이였다. 남은것은 악뿐이였다!   얼마후 다단계업자들이 회원수가 많은 사평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조카도 따라 가야한다고 알리자 박경훈씨도 할수없이 사평으로 따라 가게 되였다. 그는 사평에서 가장 싼 세집 하나를 맡고 언제면 조카를 설득해 고향에 갈것인가만 궁리하고있었다.    [음향 “세를 맡고 사는데 석탄을 사고, 감자 사고하니 돈이 떨어지니까 일거리를 찾느라 광고를 보게 되였는데 거기에 학습반한다는 광고가있었습니다. 기술을 배울뿐만 아니라 기술을 배우는 동안 만든 물건들도 다 구매한다고했습니다. 그래 ‘남자도 할수있는가?’ 해서 할수있다는 답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경훈씨는 일자리라도 하나 찾아볼 생각으로 우연히 중국결 학습반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였다. 기술을 배워줄뿐만 아니라 학습반에서 만든 제품을 통일적으로 모두 구매한다고했다.   기술도 배우고 물건도 만들어 팔고하면 생계는 유지할것 같았다.   박경훈씨는 사평의 6선 뻐스를 타고 광고를 따라 가보았다.   작은 방 벽에는 온통 중국의 전통매듭이 가득 걸려있었다. 너무 아름차서 그는 도저히 배울 엄두를 못내고 돌아섰다.   돌아와서 세집에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갈마들었다.   ‘연변의 수공예는 다 한족들의 공예인데 이 기술을 배워 우리 조선족의 민속과 결부시켜 보면 어떨까?’하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였다.   닷새후 박경훈씨는 다시 그곳을 찾아가 중국매듭 공예를 배우자고했다.   학비 5백원을 냈다.   한족 공예선생은 류복거(刘福巨)라는 50대 사내였다. 그는 반색을 하면서 자기에게서 재간을 배우고있는 사람은 일년에 2백명도 넘다고했다. 그런데 박경훈씨처럼 신중하게 결정 내린 사람은 없다면서 꼭 성공할거라 믿는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학습반의 사람들은 하루이틀 견지하다 그만 두는 사람이 허다했다. 하지만 박경훈씨만은 이를 악물고 견지하였다. 그는 사평의 영웅광장을 지나 왕복 13킬로메터 거리를 두달반이나 매일 다녔다.   학비를 내고나니 남은 돈은 몇십원밖에 안되였다.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심지어 뻐스비도 아껴 그 먼 거리를 도보로 다닐때도 있었다. 그래도 얼마 안가서 돈이 바닥이 났다.   돈이 뚝 떨어지고나니 쌀도 살수없었다. 그냥 겨울나이로 사두었던 감자 한자루뿐이였다! 옷도 올때 입었던 춘추내복뿐이고 솜옷은 하나도 없었다!   박경훈씨는 감자로 끼니를 떼우면서 그냥 쓰러지지 않을정도로 하루하루 비텨 나갔다.   매듭공예를 배워주던 류복거 선생은 자기 보다도 몇살 우인 박경훈씨가 솜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것을 보고 안쓰러워 자기의 적삼을 내 주기도했다.   두달반후 양력설이 되자 박경훈씨는 고향에 년로한 어머니도 계시니 가야한다면서 돈 50원을 꾸어가지고 설쇠러 연변에 왔다.    [음향 “설을 쇠구 다른집에서도 기술을 배워보려고 2006년 다른집에서 더 배웠습니다. 두번째 집에서 배울때는 농업 대출을 받아가지고 학비를 해결했습니다.”]   연변에서 설을 쇠고나니 기술을 더 배울 생각이 굴뚝 같았다. 자기의 기술이 어느 정도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박경훈씨였다. 그는 기술을 조금만 더 익힌다면 조선족 민속과 결부시키려던 자신의 꿈을 실현할수있다고 믿었던것이다. 그래 한번 제대로 해 볼 생각으로 농업대출까지 맡아서 다시 사평으로 떠났다.   다시 사평에 온 박경훈씨는 기차역부근의 최하층 려관에 들면서 만두 몇개씩 사서 때마다 만두 하나씩 먹으며 지냈다. 드디어 그는 견본만 있으면 모든걸 다 만들어낼수있는 훌륭한 재능을 익혀냈다. 그리고 모든 중국결 작품들을 사진찍어서 간직해 두었다. 머리속에 훌륭한 견본이 많아야 좋은 작품을 만들수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독특한 물건을 만들어내고싶었던것이다.   이 정도면 될거라고 생각한 박경훈씨는 강습 과정을 수료하고나서 곧 귀향하기로 했다. 그는 오는 길에 심양에 들려 재료로 쓸 색실도 도매로 가득 사가지고왔다.   3. 끝나지 않은 타향살이   재간을 익혔으나 그의 재간을 알아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는 먼저 몇가지 소품을 만들어 가지고 집 근처에서 팔아보려고했으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음향 “룡정 3중 부근에서 물건을 팔았는데 룡정에서 근본 팔지 못하게 하여 연길에 갔습니다.”]   할수없이 그는 중심도시인 연길로 가 보기로했다. 거기에는 전국 각지 관광객들이 많으니 알아줄 사람이 혹시 있으랴 싶어서였다.   그의 타향살이는 계속 되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하남의 옥수국수를 눌러 한국에 수출하는 집에서 한달간 일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1월부터는 연길시 하남에서 내몽골의 림지를 대리 판매하는 마음씨 좋은 녀성 신경리에게서 2년 동안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냈다.    [음향 “물건을 팔때도 그렇고 그분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공공뻐스 비용 다 그 녀자가 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일은 쉽게 하면서 그래도 지낼수있었습니다.”]   그냥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쉽게 지낼수는 없었다. 그는 자립해야했고 고생스럽게 익혀두었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있어야했다.    [음향 “나는 신경리에게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하는데 신경리가 이렇게 도와주는건 고맙지만 장구지책이 아닙니다. 저도 나가서 뻐덕이겠습니다!”라고했습니다]   박경훈씨는 다시 연길시 철남에 세를 맡고 조금씩 시간을 내서 중국결을 기초로 머리속에 계속 생각해두었던 조선족 특색의 “옥수수”며 “고추”를 만들어 조금씩 내다 팔면서 지냈다.   여름에는 그래도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지낼수있었는데 겨울이 문제였다. 필수품인 쌀을 사고 전기세를 내고나면 석탄 살 돈이 없었다. 고민고민하다가 석탄을 사지 않기로했다. 그런 환경속에서 박경훈씨는 물건을 들고 다니며 팔며 지냈다.   4. 다시 귀인을 만나다   어느날 박경훈씨는 모아산에 가서 물건을 팔아 볼 생각으로 모아산 유원지를 찾아 갔다.   연길시 시민들이 많이 선호하는 모아산 유원지는 늘 등산객들로 붐볐다. 박경훈씨는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물건을 팔아야했다. 그러던중 거기서 연변건설국에서 일하는 김진우(金振宇) 주임을 만나게 되였다.   모아산 공원 관리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관광객들에게 소품을 팔고있는 박경훈씨를 본 김진우 주임은 우선 그의 뛰여난 손재간이 마음에 들었고 또 그의 가긍한 처지가 마음이 아팠다.   김진우 주임은 호주머니를 털어 돈 4백원을 내놓으면서 소품들을 자기가 다 사겠다고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을 가져다 자기 방식대로 선전해 보겠다고했다.   남달리 조선족 민속에 관심을 보인 김주임은 조선족 민속과 관련해 이야기를 꺼냈는데 민속과 관련해 둘의 견해가 비슷하였다. 박경훈씨도 2004년부터 조선족민속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중국결에 조선족 특색을 부여한다는 생각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오랫만에 지기를 만난 기분이였다. 둘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진우 주임은 평범한 농민인 박경훈씨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데 탄복했던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신세를 질수없다고 거부하던 박경훈씨는 드디어 김진우 주임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김주임은 그의 물건을 모두 사 가지고갔다.   그해 9월의 어느 비오는 날이였다. 박경훈씨는 자기가 정성들여 만든 물건 32개를 들고 뻐스를 탔다. 하남에 가지고 가 팔려했는데 글쎄 그날따라 뻐스에서 두개가 팔렸다.    [음향 “’물고기’가 두개 팔렸다. 10원씩했는데 공공뻐스에서 팔렸다. 재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박경훈씨가 하남에서 물건을 진렬해놓고 한쪽에서 열심히 실로 매듭을 짜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김진우 주임이였다. 그는 다른 인사는 한마디도 없이 그냥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련락해 보라고했다. 전화번호를 적을수없어 억지로 기억했다가 련락을 하자 한 녀성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자치주 관광국이라면서 견본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했다.   박경훈씨는 대뜸 자치주 관광국으로 달려갔다.   3층 비서실에 가서 전선옥(全先花)라는 녀성 사업일군을 만났다. 그는 견본을 보더니 물건이 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치하하면서 곧바로 4층의 국장실에 올라가 보고하였다.   자치주 관광국 주성문(朱成文) 국장은 김진우 주임에게서 소개를 다 들었다면서 견본으로 가져 온 깜찍한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족 가운데도 중국매듭을 한족 못찌 않게 짜는 사람이 나타나 정말 반갑다”고 말했다. 특히 소품 “소보치”를 만지작 거리며 조선족 특색이 물씬 풍겨난다고 치하하였다.   주성문 국장은, 유감스럽지만 이 소품들은 어디까지나 반성품이라면서 대량 생산이 따라 가야하고 포장이 따라가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연변에서는 아무래도 민족특색을 살려야한다면서 자연공예쪽으로 생각해는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음향 “돈을 안들이고 머리를 쓰면 재료를 가지고 만들수있지 않는가했습니다. 그래서 소보치를 만들어 보고 쪽지게를 만들고 또 조선족 “항아리”라든지 “물동이” 같은걸 만들어보았습니다. 민속 공예쪽으로 생각하니 다른 길이 열리는듯했습니다. 물론 물건들은 이전것보다 잘 팔리지 않았지만 물건 그 자체가 예술이고 문화재로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잘 팔리지는 않지만 민속과 접목하기에 더 힘썼습니다.”]   자치주 관광국 비서실의 전선화는 박경훈씨의 소상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음향 “민족특색이 있는 기념품이라면 연변에서 한국 상품도 찾아볼수있고 또 조선상품도 볼수있습니다.다만 아쉽게도 연변것은 없었습니다. 박선생님은 바로 이 공백을 메워준것입니다. 중국매듭은 표지적인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우리 연변특색이 있는걸 만들수있는가 생각했던것입니다. ‘옥수수’도 만들고 ‘조롱박’도 만들고 ‘항아리’도 만들고 조선족 똬리도 만들고 우리 민속이 살아나게 되였습니다.박선생님은 우리 무형문화재를 탄생시킨것입니다.”   전선화는, 2009년부터 새 지도자가 오면서 관광국에서는 관광상품 개발에 힘을 기울렸다고 소개했다.   관광상품이라고하면 한국의 것도 있고 조선의 것도 있지만 연변의 것은 없었다. 연변의 민족특색이 있는 관광상품을 개발해야하는데 이것이 공백이라는것이였다. 바로 이 시기에 박경훈씨의 작품이 자치주 관광국의 눈에 들었던것이다.   경제개발의 선봉격인 관광개발이 본격화되자 연변에도 여러가지 축제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축제가 있으면 박경훈씨는 관광상품 매장을 차리고 알록달록한 민속제품들을 전시하는 한편 또 직접 현장에서 수공으로 물건을 짜면서 많은 관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손재간에 놀랐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물건들에 매료되군 하였다.   현장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기 위해 관광국에서는 수공예 표현을 할수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박경훈씨는 현장에서 자신의 손재주를 한껏 발휘하면서 “새장구”요, “바게쯔”요, “북”이요, “소보치”, “고추”, “옥수수”, “락화생” 등 정교한 소품들을 만들어냈다. 관광객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그의 재능을 관람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마음에 드는 소품들을 선정해 기념으로 사가군 하였다.   중국 전통매듭과 조선족 특색이 잘 결부된 박경훈씨의 수공예품은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민간 수공예 무형문화재로 자리를 굳혀가게 되였다.   박경훈씨는 그동안 선후하여 2009년에 두만강아리랑 “빙설축제”행사에서 “최우수 매듭 수공예인” 칭호를 수여받았고 2013년 중국관광상품대회에서 그의 조선족 로동도구중 하나인 “소보치(簸箕)”가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했다. 그리고 2017년 길림성관광상품전시, 제1회 연변조선족문화관광축제 관광상품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했다.  
2490    [이런저런] - 싸구려, 싸구려... "슈퍼 돼지" 싸구려... 댓글:  조회:3398  추천:0  2018-10-24
단동에 무게 450kg 길이 2.2m ‘슈퍼 돼지’ 등장 [ 2018년 10월 22일 ]     몸무게가 450kg에 달하는 슈퍼 돼지가 왕훙으로 떠올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일 봉황망(凤凰网)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丹东市 단동)에 체중 450kg, 몸길이 2m 25, 허리둘레 1m 75에 달하는 슈퍼 돼지가 등장했다. 83세 고령의 한 마을 주민은 "평생 동안 이렇게 큰 돼지는 본 적이 없다”며 "연말이 되면 몸무게가 500kg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슈퍼 돼지를 키우는 장(张)씨는 본래 큰 돈을 받고 돼지를 팔려고 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어 고민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봉황코리아         
2489    [이런저건] - 운남 송이버섯왕 댓글:  조회:3355  추천:0  2018-10-24
운남 송이버섯왕... 무게가 무려 900그람 [ 2018년 10월 23일 ]     일전 운남성 목수화야생균교역시장에 900그람에 달하는 송이버섯이 나와 화제가 됐다. 이 송이버섯은 운남성 대리 위산에서 채집되였는데 일반송이버섯보다 3~4배이상 크며 야생송이버섯판매상인 주재림이 5000여원을 주고 구입한것이다./중신넷 /길림신문 번역                        
2488    [쉼터] - 자작(봇나무)나무숲에 묻히고지고... 댓글:  조회:3839  추천:0  2018-10-24
강원도 인제 원대리 방태산에서ㅡ 가을 단풍 옷을 입은 원대리 자작나무 숲. 최근 산림청에서 10월 추천 국유림 명품 숲으로 선정된 숲이다 이 자작나무 숲엔 5500여 본의 나무가 심겨 있으며 이들 나무의 평균 가슴높이지름(사람의 가슴높이에서 측정한 입목의 지름)은 14㎝, 평균 나무 높이는 10m다.©News1 자작나무 숲길을 거니는 여행객들© News1 하얀 나무 위로 노랗게 물드는 잎들이 인상적이다© News1  
2487    [작문써클선생님께] - "곳간"이냐... "곡간"이냐... 댓글:  조회:4443  추천:0  2018-10-18
바람과나무|조회 1551|추천 0|2015.09.20. 09:11                                                   “쌀 포대는 모두 {곳간/곡간}에 보관해 둔다.”     ‘곳간’은 ‘물건을 간직하여 두는 곳’을 뜻하며 “쌀가마를 곳간에 쟁이다.”처럼 씁니다. ‘곡간’은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을 뜻하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곡간 열쇠를 내주었다.”와 같이 씁니다. ‘곡간’은 ‘곳간’의 한 종류이므로 ‘곡간’ 대신 ‘곳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쌀 포대는 ‘곳간’과 ‘곡간’에 모두 보관할 수 있지만, ‘곡식을 보관해 둔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을 때에는 ‘곡간’을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2486    {자료} - 사투리는 사투리이고, 방언은 방언이다... 댓글:  조회:4411  추천:0  2018-10-15
한국어의 방언       방언별로 나타낸 ‘잠자리’를 뜻하는 낱말.   //   [편집] 일반적인 구획 한국어 방언은 음운, 문법, 어휘의 측면에서 몇 개 구획으로 나뉜다. 방언 구획은 연구자 사이에서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어 꼭 일치되지 않지만 많은 경우 아래 여섯 개 방언을 구분한다. 각 방언의 명칭은 방언연구회(2001)에 의거한다. 서북 방언 … 구 평안도(현재의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방언. 평안도 방언이라고도 한다. 황해도 지역 북부 또는 전역을 이 방언 구역에 포함시키는 연구자도 있다. 동북 방언 … 구 함경도(현재의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방언. 함경도 방언이라고도 한다. 구 평안북도 동북부(현재의 자강도, 량강도 경계 지역)을 포함시킬 경우가 많다. 보통은 함경남도 남부를 제외하지만 구 함경남도 남부(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이라 함) 강원도 북부) 부근의 취급은 연구자마다 다를 수 있다. 함경북도 최북부인 회령시(會寧市), 온성군(穩城郡), 종성군(鐘城郡, 현재의 온성군의 일부), 경원군(慶源郡, 현재의 새별군) 등지의 방언은 ‘육진(六鎭) 방언’이라 하며 동북 방언과 구별하는 연구자가 있다. 중부 방언 … 경기도(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포함),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대전광역시 포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방언. 구 영흥군(현재의 금야군) 이남의 함경남도 지역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황해도 북부 또는 전역을 서북 방언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또 강원도 영동 지방의 방언을 중부 방언으로부터 구분할 경우가 있다(‘영동 방언’, ‘충청 방언’ 참조). 서남 방언 … 전라도 지역(광주광역시 포함)을 중심으로 한 방언. 전라도 방언, 호남 방언이라고도 한다. 하위 방언은 북부 서남 방언(전북 방언), 남부 서남 방언(전남 방언)이라 불린다. 동남 방언 … 경상도 지역(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을 중심으로 한 방언. 경상도 방언, 영남 방언이라고도 한다. 하위 방언은 북부 동남 방언(경북 방언), 남부 동남 방언(경남 방언)이라 불린다. 제주 방언 … 제주도와 주변 섬들의 방언. [편집] 방언 구획에 관한 견해들 【그림1】오구라 신페이 방언 구획 Ogura(1940)에 의거함 1.평안도 방언 2.함경도 방언 3.경기도 방언 4.전라도 방언 5.경상도 방언 6.제주도(濟州島) 방언 【그림2】이숭녕 방언 구획 李崇寧(1967)에 의거함 1.평안도 방언 2.함경도 방언 3.중부 방언 4.전라도 방언 5.경상도 방언 6.제주도(濟州道) 방언 한국어 방언 구획은 이극로 ‘조선말의 사투리’(1932년)에 시작된다고 한다.[1] 이극로는 한국어 방언을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누었다고 한다.[2] 여기서는 제주 방언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반도 지역의 방언을 중부, 서북부, 동북부, 서남부, 동남부의 다섯 개로 나누는 방법은 이미 이 시기부터 이뤄지고 있다. 제주도 방언을 포함해 한국어 방언 전체의 체계적인 구분법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 의해 이루어졌다(Ogura 1940). 오구라는 한국어 방언을 ‘평안도 방언’(구 후창군을 제외한 구 평안남북도 지역), ‘함경도 방언’(구 영흥군 이남을 제외한 구 함경남북도 지역, 구 평북 후창군 포함), ‘경기도 방언’(구 황해도, 경기도, 구 울진군을 제외한 구 강원도, 충청남북도, 구 영흥 이남의 구 함경남도, 전북 무주군), ‘전라도 방언’(무주군을 제외한 전라남북도 지역), ‘경상도 방언’(경상남북도 지역, 구 강원도 울진군 포함), ‘제주도 방언’의 여섯 개 방언을 구분했다(【그림1】 참조). 또 고노 로쿠로(河野六郞)는 오구라의 구분법을 기본적으로 답습하면서 ‘서선(西鮮) 방언’(“河野六郞著作集1” 수록판에서는 ‘서북 방언’), ‘북선(北鮮) 방언’(동 ‘동북 방언’), ‘중선(中鮮) 방언’(동 ‘중부 방언’), ‘남선(南鮮) 방언’(동 ‘남부 방언’, Ogura(1940)의‘전라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을 통합한 구역), ‘제주도 방언’의 다섯 개 방언을 구분했다(河野 1945). 대한민국에서의 구분법을 살펴보자. 이숭녕은 ‘평안도 방언’, ‘함경도 방언’, ‘전라도 방언’, ‘경상도 방언’, ‘제주도 방언’, ‘중부 방언’의 여섯 개 방언을 구분했다(李崇寧 1967). 구획은 오구라의 구분법과 동일하지만 각 구획의 범위는 오구라와 꼭 일치되지는 않는다(【그림2】 참조).[3] “方言學 事典”의 구분은 오구라, 이숭녕의 구분을 답습한다. 서북 방언에 관해서는 구 후창군을 포함시키면서도 구 후창군과 구 양덕군은 ‘동북 방언의 영향이 현저하다’고 한다. 중부 방언에 관해서는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이남으로 하며 황해(북)도 북부를 소속시키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충청북도 단양군과 영동군은 동남 방언의 심한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한다(방언연구회 2001). 오구라와 다른 체계로 구분한 것으로 최학근의 구분법이 있다. 최학근은 충청도 북부와 강원도 강릉 이남의 영동 지역을 연결하는 선을 경계로 하여 북부 방언군과 남부 방언군으로 크게 나누며, 전자에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북부, 강릉 이남의 영동 지역을 제외한 강원도의 방언들을 소속시키고 후자에는 충청도 남부, 강원도 강릉 이남의 영동 지역,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의 방언들을 소속시켰다. 다음으로 북조선에서의 구분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병제의 구분법은 방언을 동부 방언과 서부 방언으로 나눈 다음에 동부 방언을 다시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의 두 가지로 나누며, 서부 방언을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제주 방언의 네 가지로 다시 나눈다. 여섯 가지로 나누는 방법은 오구라의 구분법과 동일하지만 황해도 방언은 평안도 방언과 합쳐 ‘서북 방언’으로 삼고 있다. 김성근의 구분법에서는 서북, 동북, 중부, 서남, 동남, 제주, 륙진의 일곱 개 구획을 인정한다(김성근 2005) 육진 방언을 동북 방언으로부터 적극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 황해도 지역의 방언 전체를 중부 방언으로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창하며 황해북도 지역을 서북 방언으로 보는 것에 타당성을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현재 남북한 방언학에서는 몇 가지 방언 구획이 제창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오구라가 제시한 여섯 가지 구분법에서 크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대략 오구라의 구분법이 기초가 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485    {자료} - 여러 지방의 방언들을 알아보기 댓글:  조회:3783  추천:0  2018-10-15
[참고자료1] 강원도 방언 예문     강원도 방언예문 강원도 방언의 특징 1. 음 운 (1) 음운체계 1) 자음체계 전국적으로 자음체계는 그리 큰 방언적 차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강원도방언의 자음체계도 다른 방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학자에 따라서는 후두파열음 ‘ᅙ’이 있다고 보아 ‘ᅙ’을 영동방언의 한 音素로 설정하기도 한다. 2) 모음체계 단모음 체계는 10모음 체계로 되어 있다. 다만 ‘ㅚ’와 ‘ㅟ’가 각각 單母音 ‘φ’와 ‘y’로 실현되기도 하고 二重母音 ‘we’와 ‘wi’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重母音으로는 ㅑ(ja), ㅕ(jӘ), ㅛ(jo), ㅠ(ju), ㅒ(jɛ), ㅖ(je), ㅘ(wa), ㅝ(wə), ㅟ(wi), ㅞ(we), ㅙ(wɛ) 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방언에서는 ‘영감(令監)⋅연(軟)하다⋅여부(與否)’ 등의 ‘ㅕ’가 일반적으로 ‘j+ɨ’의 결합음인 ‘jɨ’로 실현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 ‘jɨ’를 ‘ㅕ(jǝ)’와 구별되는 별개의 중모음으로 처리하여 강원도방언에 특이한 중모음 ‘=(jɨ)’가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이익섭, 전성탁), ‘jǝ’의 變異音으로 처리하기도 한다(李秉根) 3) 고조와 장단 강릉방언은 고조와 장음을 가진다.       고조 저조 가래(農具) 금(金) 허물(過) 침(針) 가래(楸子) 금(線) 허물(껍질) 침(唾)     장음 단음 눈(雪) 못(not) 밤(栗) 간다(磨) 눈(目) 못(釘) 밤(夜) 간다(行)     (2) 음운현상 음운현상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통시음운론과 공시음운론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시음운론과 통시음운론의 차이는 단어 내부에서 변화양상이 보이느냐와 활용 및 곡용에서 변화양상을 보이느냐에 따라 나누어진다고 할 수가 있는데 전자를 통시음운론, 후자를 공시음운론이라 한다. 1) 공시음운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공시음운론은 단어에 어미나 접사 혹은 조사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통 통시음운론보다 수도 적고 조사가 적어 여기에서는 간략히 소개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강원도에서 보이는 공시음운론은 ㅣ逆行同化(움라우트, Umlaut)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지역에서는 ‘먹이다’가 ‘멕이다’로 ‘언덕이야’ 가 ‘언덱이야’로 종종 나타난다. 그리고 구개음화와 관련해서도 지역에 따라 ‘밭이’가 ‘바티’로 발음이 되고 있다. 2) 통시음운론 강원도 방언의 두드러진 音韻現象들로는 語頭의 硬音化, 口蓋音化, ㅣ逆行同化(움라우트, Umlaut), 單母音化 현상 등이 있다. 어두의 경음화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국어에서 활발하게 확대되고 있는 음운현상 중의 하나인데, 강원도방언에서도 ‘개구리→깨구리, 가위→까새, 갓난아이→깐난애기’에서 보듯 어두의 경음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두의 경음화 현상 보다 약하기는 하나 ‘갈치→칼치, 구리다→쿠리다; 달팽이→탈팽이’ 처럼 有氣音化(激音化) 현상도 나타난다. 강원도방언에서는 구개음화 현상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ㄷ→ㅈ, ㅌ→ㅊ’의 구개음화 외에 ‘ㄱ→ㅈ, ㄲ→ㅉ, ㅋ→ㅊ, ㅎ→ㅅ’의 구개음화도 실현된다. 그 예는 ‘겨드랑→저드랑, 기지개→지지개, 김(海苔)→짐 ; 끼다→찌다 ; 키(箕)→치 ; 형→성, 효자→소자, 혀→세’ 등이다. 이 현상은 어두 음절 외의 자리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근대국어 이후에 발생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ㅣ역행동화 현상 역시 강원도방언에서 매우 활발하다. ‘두루마기→두루매기, 잠방이→잠뱅이 ; 누더기→누데기, 꾸러미→꾸레미, 지렁이→지렝이, 먹이다→멕이다’ 등. 그런가 하면 강원도방언에는 ㅣ역행동화에 의한 것이 아닌 ‘ㅏ→ㅐ’의 현상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가마→가매, 가르마→가르매, 처마→초매, 얼마→얼매, 씨아→씨애, 감자→감재, 사다리→새다리’에서 보듯 주로 단어의 마지막 音節이 ‘ㅏ’로 끝나는 경우에 일어나며, 지역적으로는 대개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東部 지역에서 나타난다. 단모음화도 강원도방언에서 활발하게 실현되고 있다. ‘목화→모카, 환갑→한갑 ; 사위→사우, 사마귀→사마구 ; 꾸겨지다→꾸게지다, 누벼라→뉘베라 ’등. 그런데 용언의 活用形에서의 단모음화 현상은 지역에 따른 심한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이 예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이 외에 母音調和, 語幹末 子音群 단순화, 일부 모음교체 현상 등에도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다른 방언들에서도 그러하지만 강원도방언도 용언의 활용형에서 모음조화가 잘 지켜지지 않아 어간이 자음으로 끝나면 비록 어간의 끝모음이 陽性母音이어도 대부분 ‘잡어라, 잡었다, 좁어서’ 처럼 陰性母音 語尾 ‘-어라, -었-, -어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어간말의 자음군(겹받침) 가운데 하나가 자음 앞에서 탈락하는 어간말 자음군 단순화 현상은 어느 방언에나 있는 현상이나, 어느 자음이 탈락하는가는 방언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닮다, 앉다, 몫, 값’의 ‘ㄻ,ㄵ, ㄳ, ㅄ’은 다른 방언에서도 그러하듯이 강원도방언에서도 ‘담-, 안-, 목, 갑’ 처럼 각각 ‘ㄹ’, ‘ㅈ’, ‘ㅅ’이 탈락한다. 그러나 ‘늙다, 밟다’의 ‘ㄺ, ㄼ’의 경우에는 영동방언에서 뒷자음 ‘ㄱ’과 ‘ㅂ’이 탈락하고 앞자음 ‘ㄹ’이 남는다. 그리고 강원도방언에서는 지역에 따라 ‘ㅗ’가 양순음 아래에서 ‘ㅓ’로 실현되는데 ‘볼→벌, 보리→버리, 볼거리→벌거리, 포대기→퍼대기, 모루→머루’등이 그 예이다. 강원도방언에는 語中子音 ‘ㄱ, ㅂ, ㅅ’이 약화, 탈락한 방언형과 이들을 유지하고 있는 방언형이 공존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어중자음 ‘ㄱ, ㅂ, ㅅ’이 개재(介在)되어 있는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노른자위→노란자구, 개암→개금, 머루→멀구, 모래→몰개, 어레미→얼게미, 달래다→달개다, 절이다→절구다, / 지붕→지붕ㄱ, 개울→개욹, 입술→입쑭, 가을→가읅, 겨울→겨욹 ; 다리(月子)→달비, 벙어리→버버리, 확(臼)→호박, 다리미→다래비, 똬리→또바리, 졸리다→졸립다 ; 마을→마실, 구융→귀숭, 모이→모시, 냉이→나생이, 과일→과실, 가위→가새, 그을다→끄실다 그런데 ‘ㄱ’이 개재되어 있는 형태들 가운데 ‘지붕ㄱ, 개욹, 입쑭’ 등은 그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助詞가 올 때 ‘ㄱ’이 나타나는 것들로 그 외의 것들과 성격을 달리한다. 그리고 ‘ㄱ, ㅂ, ㅅ’을 유지하고 있는 방언형들 중 ‘ㄱ, ㅂ’ 개재형은 영동방언에서, ‘ㅅ’ 개재형은 영서방언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강릉과 삼척에서는 ‘ㄹ’이 자음 ‘ㄴ, ㄹ, ㅅ, ㅂ’ 앞 외에 어미 ‘-우’ 앞과 ‘ㄷ, ㅈ’ 앞에서도 탈락하는 ㄹ변칙활용이 나타난다.    그러 머:지두 않지 머. /  더 노:더(놀다) 가지.  / 쇠꽂이 가:지요(갈지요)   2. 문 법 (1) 조 사 1) 주격조사 : 일반적으로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 아래에서는 ‘-이’,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 아래에서는 ‘-가’가 쓰인다. 영동방언에서는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 아래에서 ‘-거’가 쓰이기도하는데 특히 강릉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니: 거 그랬나?(네가 그랬나?) / 비거 온다(비가 온다).   모음 아래에서 ‘-가’나 ‘-거’가 아닌 ‘-이’가 실현되기도 한다.    머이 그래나?(무엇이 그러니?) / 파이 크다(파가 크다).   삼척지역에서는 ‘-이’와 ‘-가’가 겹쳐 쓰이기도 하는데 항상 겹쳐 쓰이는 것은 아니며, 중복형과 단독형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    건물이가 있습니다. / 돈이가 2) 목적격조사 : ‘-을/를’의 음절말 ‘ㄹ’을 탈락시킨 형태인 ‘-으/르’가 쓰이기도 하는데, 강릉과 삼척지역에서 그 빈도가 높고 그 외 다른 영동지역에서는 빈도가 낮다.    팔으 볶아서는 / 재르 넘어 산꼴이지요.   ‘-으’는 ‘ㅇ'으로 끝나는 명사 아래에서 선행명사의 끝음절 모음을 닮아 그 모음과 같은 형태로 실현되기도 한다.    장아(市場을) 보구 / 정어(情을) 주문 3) 관형격조사 : 영동방언에서는 ‘-으, -어’가 쓰인다. 다만 명사가 ‘-앙’으로 끝나면 ‘-어’가     ‘-아’로 동화된다.    남으 땅 / 일:꾼어 상(일꾼의 상)    신랑아 집에 가문(신랑의 집에 가면) 4) 부사격조사 : 장소와 시간을 나타내는 조사로는 강릉에서 주로 ‘-애’가 쓰이고 양양과 삼척에서는 ‘-에’가 쓰인다.    밤:애 어대 가나? / 집에 모이지.   ‘-애’나 ‘-에’에 다시 ‘-다/다가’를 결합시킨 형태도 널리 쓰이는데, 강릉은 ‘-다/다가’ 대신 ‘-더.더거’가 결합되는 특징을 보인다.    잿물에더거 그그 쌂어 가지고(잿물에다가 그것을 삶아 가지고)   시간을 나타내는 조사로 ‘-로/으로’, ‘-루/으루’가 널리 쓰인다.    제사는 새복으루 지내지요(제사는 새벽에 지내지요).   영동지방과 영서남부에서는 ‘-한테’가 ‘-인테, -인데’로 실현되는 일이 있다.    너인테 / 사람인테 / 사람인데   강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처럼’과 비슷한 뜻을 가지는 ‘-매름, -매루’가 쓰이고, 영서 일부 지역에서는 ‘-하고’가 ‘-하과, -허과’로 실현되기도 한다.    니: 매름(매루) / 소매루    나하과 / 나허과 5) 호격조사 : ‘-아/야’ 외에 ‘-아이/야이, -요’도 쓰이는데, ‘-아이’는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 아래에, ‘-야이’는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 아래에 쓰인다. ‘-요’는 높임을 나타낸다.    영식아이 /종수야이/ 선생님요 6) 보조조사 : ‘-마다’가 ‘-마둥/마당’으로, ‘-부터’가 ‘-부텀/버텀’으로, ‘-까지’가 ‘-꺼정/꺼짐’으로, ‘-마저’가 ‘-마주’로, ‘-보다’가 ‘-보담/보덤)으로 쓰이기도 한다. 삼척과 그 인접지역에서는 주격조사의 중복형 ’-이/가‘처럼 ’-은/는‘이 반복되어 쓰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경상도 방언의 영향으로 보이며 항상 겹쳐 쓰이는 것은 아니다.   (2) 어 미 1) 종결어미   ① 평서형: 특징적인 것으로는 ‘-래요, -과, -다오, -ㅂ닌다’ 등이 있다. 영동방언과 영서남부의 일부 지역방언에서는 체언 아래에서 ‘-어요’가 아닌 ‘-래요’가 쓰이고, 강릉방언에서는 하게체의 어미로 ‘-과’가 여자들 사이에서 많이 쓰인다. 삼척방언에서는 하오체 어미로 ‘-다오’가, 강릉과 삼척 방언에서는 합쇼체의 어미로 ‘-ㅂ닌다’가 쓰이기도 한다.    이기 즈: 집이래요. / 삼년째래요.    돈으 애껴 써야 하겠과. / 창 고맙과.    등 끍는 기 이러 있다오.            저 사람입닌다. / 그렇게 했습닌다. 또한 반말체 終結語尾는 지역에 따라 이와 반대 현상을 보이는 일이 있다. 곧 강릉과 삼척지역에서는 어간이 자음으로 끝나면 어간의 끝모음이 음성모음일 때에도 ‘그만 먹아’ 처럼 반말체 종결어미가 ‘-아’로 실현되는 특이한 현상을 보인다.   ② 의문형 : 특징적인 것으로는 ‘-나, -재, -ㅂ닝꺄’가 있다. ‘-나’는 해라체의 어미 ‘-니’에 대응되는 것으로 영동방언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나’는 때로 ‘-ㄴ’으로 축약되어 실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재’는 ‘-지’에 대응되는 것으로 양양이남 지역에서, ‘-ㅂ닝꺄’는 합쇼체의 어미로 강릉지역에서 주로 쓰인다.    누거 가나? / 머:르 사먹나? ; 그래니 머 나:진(←나아지나)? / 어대 인(←있나)?    이그 다 보선 (←보시었나)? / 그러두 안 떨어지갠(←떨어지갰나)? 오늘 덥재? / 감이 많재? / 머:르 드시갰습닝꺄? 이들 의문형어미 외에 양양지역에서는 하게체의 의문형어미로 ‘왜 그래너?’ 처럼 ‘-너’가 쓰이며, 삼척지역에서는 ‘마이 춥당가?’에서 처럼 ‘-던가’가 ‘-당가’로 실현되고, 또 ‘가와?’의 ‘-와’ 같은 특이한 어미가 쓰이기도 한다.   2) 연결어미   ① -구(고) : 대등한 접속이나 계기적인 접속의 기능을 하는, 표준어 ‘-고’에 해당하는 어미로서 ‘-구’ 또는 ‘-고’가 사용된다. 이 둘은 뚜렷한 차이가 없이 쓰이는 때가 많다.    너머 대:두 못쓰구 질어두 못쓰구   ② -문/으문 : 가정의 ‘-면’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방언은 ‘-문’으로 많이 쓰이고, 축약되어 ‘-ㅁ/음’이 되기도 한다.    슥:달 후이문 먹지요(3개월 후면 먹지요).   ③ -만 : 뒤에 어떤 반전의 문장을 이끄는 어미로서 대체로 표준어 ‘-마는’에 짝이 되는 어미이나 ‘-마는’이 아닌 그 축약형 ‘-만’으로 실현된다. 회상의 선어말어미 ‘-더(드)-’에 직접 결합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딴깬 다 절루 된다드만(다른 사람은 다 저절로 된다더만)   ④ -던(든)지, -단지 : 택일을 나타내는 어미로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던지/든지’가 일반적으로 쓰이는데 반해 삼척에서는 택일을 나타내는 어미로 ‘-단지’가 많이 쓰인다. (3) 사동/피동 강원도방언의 사동사, 피동사 형성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접미사 ‘-키-’가 매우 활발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곧
2484    [고향문단소식]- 동시인 김득만과 "고드름" 동시비 댓글:  조회:3272  추천:0  2018-10-15
김득만시비 제막식 연길공원 동시동네서 (ZOGLO) 2018년10월13일      김득만선생이 창작한 동요를 부르고 있는 소학생들 처녀작을 발표하여서부터 지금까지 58년 세월을 줄곧 아동문학창작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로시인 김득만선생의 시비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기획, 칠전팔기동아리의 후원으로 연길시인민공원 동시동네에서 제막되였다. 이로서 동시동네는 채택룡, 김례삼, 윤동주, 윤정석, 최문섭, 한석윤, 김득만 등 해방전후의 중국조선족아동문단을 이끌어온 7명 시인들의 시비로 동시동네를 찾는 시민들을 맞게 되였다. 정봉숙, 림원춘, 한석윤 등이 시비를 제막하였다.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최상철 회장은 에서 김득만선생은 동요집 《떡방아》, 동시집 《고드름》 등 26여부의 동요, 동시집을 출판하고 , , 등 33수의 노래와 동시를 음악교과서와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한 우수한 아동문학작가로 중앙선전부상을 포함한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중국조선족아동문학발전에 큰 성과를 올린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연변주당위 선전부, 연변주문화텔레비죤방송신문출판국, 연길시정부의 비준으로 시비를 건립하게 되였다고 소개하였다. 연변주당위 선전부 전임 부부장 채영춘은 축사에서 40년전 연변인민출판사 미술편집으로 근무하던 시절 동요동시집《맑은 샘》의 표지디자인을 맡으면서 김득만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였다고 하면서 “아동문학은 어른들이 외면하는 글이 아니라 어른이 되여서도 기억에 담을 수 있는 부호”라고 하면서 시비에 새겨진 과 같은 금싸락같은 동요동시들은 오늘의 아이들과 래일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는 글로 자손만대 남아있을 것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는 또 7개의 동시비가 경립된 동시동네가 소음과 오염으로 혼탁한 오늘날 순수함과 결백함의 샘터로,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우리 민족 어린이들의 동산으로 그리고 어른들이 동년의 순결을 되찾고 마음의 정화를 이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성지로 되기를 희망하였다. 답사를 하고 있는 김득만선생 동시동네의 첫시비인 채택룡선생의 시비를 14년전에 건립하면서부터 줄곧 이러한 사업을 이끌어온 연변청소년진흥회 명예회장 한석윤은 “동시동네를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 한사람을 칭송하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예쁜 동시를 읽으면서 고운 꿈과 민족의 얼을 키우고 지키도록 하는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정봉숙, 원로작가 림원춘, 연변주당위 선전부 전임 부부장 채영춘, 연변조선언어문화진흥회 회장 김정일 등과 아동문학학회, 아동문학연구회 등 관련분야 문인 50여명이 참석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2483    [세상만사] - "별을 헤는 시인"의 얼굴을 먹칠하는 눔들... 댓글:  조회:3792  추천:0  2018-10-14
[인물 프로필] 윤형주, 온누리교회 장로 고신대 명예박사 … 독립투사 시인 윤동주 6촌 동생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가수 윤형주가 뉴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윤형주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기고와 연세대를 거쳤다.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 웨딩 케익, 슬픈 운명 등으로 유명하다.  1970년 솔로로 전향하여 비와 나 라라라 조개껍질 묶어,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사랑스런 그대 그리고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다.  별을 헤는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다. 시인 아버지와 성악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신대학교에서 명예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신대측은 윤형주 씨가 평소 대중문화계, 방송계, 교계 전반에 걸쳐 건전한 문화 창조와 사회봉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박사학위를 주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 온누리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윤형주씨는 최근 부동산 개발 시행사를 운영하면서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유용한 의혹으로 수사를 받은 끝에 검찰에 넘겨졌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윤 씨를 수사한 뒤 지난 13일(7월),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윤 씨가 운영하는 시행사의 관계자들로부터 고소장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윤 씨는 2009년 한 시행사를 인수해 경기 안성의 한 농지를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100억원 대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했으나 10년 가까이 개발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윤 씨는 경찰 수사에서 회사에 빌려준 돈이 있어 회삿돈을 썼을 뿐 횡령이나 배임이 아니라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씨는 현재 필리핀 체류 중이다.  ///김대호 소장/ 경제학 박사  ==================/// 회삿돈 11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가수 윤형주가 화두에 올랐다. 윤형주는는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중퇴,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후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 등을 발표하며 스타덤에 올랐고,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등을 발매했다. 특히 시인 윤동주, 시인 겸 건축학자 윤일주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한편, 서울 수서경찰서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윤현주를 수사한 뒤 지난 13일(7월),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형주는 자신이 운영하는 시행사의 돈 31억원을 자신의 개인 계좌로 인출해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   대작 그림을 판매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수 조영남(왼쪽)과 배임·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윤형주.[사진=OSEN]   [헤럴드경제=이슈섹션] 쎄시봉 멤버인 조영남이 대작 그림을 판매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가수 윤형주가 횡령 및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쎄시봉은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에 이어 뒤 늦게 김세환이 합류해 만들어진 음악 그룹이다.   가수 윤형주는 부동산 개발 시행사를 운영하면서 40억 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유용한 의혹을 받아 검찰에 넘겨져 조사를 받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으로 알려진 윤형주는 의대를 중퇴하고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해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후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등과 함께 음악감상실 ‘쎄시봉’의 인기를 이끈 핵심 멤버다.   1970년 솔로로 전향해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바도’ 등 숱한 히트곡을 내기도 했다. 라디오 DJ와 CM송 작곡가로도 활약하며 1970년대를 풍미했다. 2011년 MBC ‘놀러와’에 쎄시봉 친구들 특집 편에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등 멤버들과 함께 출연해 ‘쎄시봉 열풍’을 다시 일으키기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 70년대 포크문화를 이끈 ‘세시봉’ 스타들이 잇달아 구설수에 휘말렸다. 30일 서울 수서경찰서는 가수 윤형주(71)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지난 13일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윤형주는 부동산 개발 시행사를 운영하면서 41억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유용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윤씨는 경기도 안성의 한 농가에 물류단지를 조성하겠다며 지난 2009년 시행사를 인수해 100억원대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했지만 해당 사업은 10년 가까이 착수되지 못했다. 아울러 경찰은 윤씨가 법인 자금을 빼돌려 회삿돈으로 고급 빌라를 구매해 인테리어를 하고 지인을 회사 직원으로 등록해 급여를 지급한 혐의도 포착했다.  한국 해비타트 이사장인 윤형주는 현재 봉사활동 차 필리핀에 머물고 있으며 주말 내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형주는 일부 언론을 통해 “횡령의혹은 검찰에서 적극적으로 소명하겠다”고 해명했다.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는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등과 함께 70년대 포크문화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동 세시봉 음악감상실 멤버다. 1968년 송창식과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로 데뷔, 이후 1970년 솔로로 전향해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등을 발표했다.  세시봉 멤버들은 2010년 MBC 예능 프로그램 ‘놀러와’의 추석특집을 통해 재조명되며 지금까지 매년 콘서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2016년 가수 조영남이 ‘그림 대작’ 논란으로 소송 중이고 윤형주까지 구설수에 시달리면서 당분간 세시봉 공연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됐다.  /조은별 기자  =======================/// 가수 윤형주(71)가 부동산 개발 시행사를 운영하면서 40억원에 달하는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유용한 의혹으로 검찰에 넘겨져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윤형주는 1947년생으로 의대를 중퇴하고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이후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등과 함께 음악감상실 '세시봉'의 인기를 이끈 원년멤버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축제의 노래', '슬픈 운명' 등을 발표하며 인기를 모은 그는 1970년 솔로로 전향해 '조개껍질 묶어',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고백', 비와 나', '라라라' 등 히트곡을 냈다. 라디오 DJ와 CM송 작곡가로도 활약하며 1970년대를 풍미했다. 그는 시인 윤동주와 시인 겸 건축학자 윤일주의 6촌 동생으로도 잘 알려졌다. 2011년 MBC 예능 프로그램 '놀러와'의 '세시봉 친구들' 특집에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등과 함께 출연해 '세시봉 열풍'을 다시 불지피기도 했다.  한편 뉴스1에 따르면 서울 수서경찰서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윤형주를 수사하고, 지난 13일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지난 3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형주는 자신이 운영하는 시행사의 돈 30억원 가량을 자신의 개인 계좌로 찾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회삿돈으로 서울 서초구 소재 빌라를 구매해 실내 장식 등으로 지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윤형주의 배임액이 총 1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윤형주가 운영하는 시행사의 관계자들로부터 고소장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윤형주는 2009년 한 시행사를 인수하고 100억원대 투자금을 유치해 경기 안성의 한 농지를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10년 가까이 개발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윤형주 측은 경찰 수사에서 회사에 자신의 돈을 빌려줘 회삿돈을 썼을 뿐 횡령이나 배임이 아니라는 취지로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24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해양쓰레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50  추천:0  2018-10-13
밀려드는 해양쓰레기에 건축폐기물로 제주해안 '몸살' 좌승훈 2018.10.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 13일 제주시 애월 큰물도 해안정화활동   [제주=좌승훈 기자] (사)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회장 한광수)는 13일 제주신용보증재단(이사장 오인택)과 한효심휘트니스센터 봉사단,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 임직원 등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애월읍 ‘큰물도’ 바닷가에서 ‘청정 제주바다 지키기’ 해안정화 활동을 펼쳤다. 이날 회원들은 해양쓰레기·생활쓰레기 뿐만 아니라 판넬조각·스티로폼단열재·목재건축자재 등 해안가에 버려진 건축폐기물까지 수거했다.     (사)제주도바다환경협의회는 오는 20일~21일에도 추자도를 방문해 해안정화활동에 나선다. 한편 올해로 창립 18주년을 맞은 제주도바다환경보전협의회는 매주 토요일 제주 해안과 수중 정화활동을 정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좌승훈 기자
2481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걸어온 길도 벅찼지만 가야 할 길도 멀다 댓글:  조회:3374  추천:0  2018-10-13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 열려 (ZOGLO) 2018년10월4일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 열려   9월 27일 룡정.윤동주연구회 성립 5주년 기념좌담회가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에서 펼쳐졌다.   조선족문단의 작가, 대학가의 교수와 연구회 맴버 20여명이 좌담회에 참가했다.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진 유서깊은 윤동주의 룡정자택 앞뜰에 위치한 연구회 사무실에서 펼쳐진 좌담회에서는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걸어 온 5년을 회고하면서 다음 5년의 미래상을 그려보았고, 역경을 헤쳐가며 조선족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의 파수꾼으로 거듭 날 것을 서약했다.   총화발언에서 김혁 회장은 "이 5년은 무에서 유에로 이르는 과정이였다. 몰리해와 보수와 기시와 비타협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지역사회의 우수단체로 꿋꿋이 성장해온 5년이였다"고 회고하면서 금후 민족 시인 윤동주를 기림과 더불어 한락연, 주덕해,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심련수 등 룡정지역에서 활동해 온 민족의 인걸들을 기리는 사업을 더불어 펼쳐가겠다고 그 폭넓은 구상을 밝혔다. 총화발언을 하고 있는 김혁 회장   좌담회에서 연변대학 교수 김호웅, 연변일보 전임 주필 장정일, 저명한 녀류작가 리혜선 등은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척박한 불모지에 문화와 정신의 집을 짓고 있다"고 격찬하면서 그 성과에 대해 충분한 긍정과 찬사를 보냈다.    김병민 연변대학 전임총장은 타지에서 보내온 축사에서 "5년동안 윤동주 연구회는 실로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력사는 기억할 것입니다.   윤동주선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민족문인들이 자기를 확인,승화는 도경으로 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리기영, 조기천, 김소월, 한룡운, 정지용도 잘 알아야 하지만 윤동주같이 순수한 삶을 위해 시혼을 불사른 디아스포라 시인도 잘알아야 합니다.   별은 많고 많아도 나에게 속한 별은 아닐수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소중한 별이 될수가 있지않을가요?   긴긴밤 별을 지켜 온 룡문회 동인들에게 경의를 드리고 축하를 드림니다."라고 축하와 격려의 메세지를 전했다.    한편 2014년 9월 27일,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민족의 문화와 력사의 의미를 환기하고 고양하는데 몸바칠 취지로 조선족의 작가, 학자, 매체일군, 교직원들로 무어져 윤동주 시인의 고향 룡정에서 발족된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회장 김혁)는 짧은 시간내에 윤동주등 조선족 인걸들을 기리고 조선족의 력사를 조명하는 묵직한 기념행사들을 련이어 펼쳐 사회와 문단의 주목과 충분한 긍정을 받는 단체로 부상하고 있다.   /조글로미디어 김성림 기자
2480    아버지 김철호 "하얀 심장" 쓰다, 아들 김휘 "빨간 심장" 그리다 댓글:  조회:3509  추천:0  2018-10-13
김철호의 시집 《하얀 심장》 출간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11일  시인 김철호의 동시집 《하얀 심장》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민족문자출판물특별보조프로젝트에 선정된 이 동시집은 제1부 나이테, 제2부 술래잡기, 제3부 왜 어른들을 더는 크지 못하게 하는 줄 아니?, 제4부 돌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도합 50여수의 동시를 실었다. 중국조선족가 창작그림책 시리즈 동시편으로 출간된 이 동시집은 어린이들의 감성을 더 풍요롭게 해 줄 한편의 시마다에 저자 김철호의 아들인 김휘가 직접 그린 그림이 담겨져있어 시를 더욱 사실감 있게 표현한 게 특징이다. 새 책을 선물받은 아이가 책을 펼쳤더니 핑크색 요정들이 뛰쳐나왔다는 아이들의 상상을 그린 ‘진달래’, 눈 우에 하트를 그려놓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여서 하늘까지 뛰여오를 것 같은 마음을 그린 ‘하얀 심장’ 등 이 동시집은 자연스레 미소를 불러일으키는 시들로 가득하다. 저자 김철호는 이 시집에 대해 “어른이든 어린이든 누가 읽어도 공감할 보편적인 정서를 익살스러우면서도 형상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자연의 생태와 변화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소중함을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24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산인해"란 말 인제야 실감한다... 댓글:  조회:3736  추천:0  2018-10-13
인산인해 [ 2018년 10월 07일 ]     10월 1일~7일은 중국의 국경절 연휴다. 5월 첫 주부터 일주일 간 이어지는 노동절과 함께 중국 최대 황금 연휴 기간으로 꼽힌다. 매년 이 기간 중국의 관광 명소는 수 천만 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출처: 웨이보] 주요 고속도로의 교통 마비는 물론 기차역, 공항 등도 온통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푸저우 기차역 [출처: 중신망] “자국 관광 수입은 내국인 손에 달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경절 연휴는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수익을 가져온다.  중국여유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의 국경절 첫 날, 전국 유명 관광지의 방문객 수는 1억 명을 돌파했다. 발생한 수익만 1030억 위안, 한국 돈으로 16조원이 넘는다. [출처: 이매진 차이나] “관광은 커녕 사람 구경만 실컷 한다”는 반응이 자연스러울 만큼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이다. 민족 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이 시기, 중국 곳곳의 연휴 풍경을 살펴봤다.   충칭(重慶)  충칭 [출처: 이매진 차이나] 매년 이 기간 30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충칭을 찾는다. 시내 관광 명소는 물론 지우거리(九街) 등 도심지 핫 플레이스에는 하루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밤낮없이 몰린다.   항저우(杭州) 시후 [출처: 이매진 차이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호수 시후(西湖)가 자리한 항저우에는 매년 이 기간에 2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중 시후는 하루 최대 80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찾아 인해(人海)를 이룬다.    시후 [출처: 이매진 차이나] 시후 주변은 유료와 무료 입장 지역이 나뉘어져 있다. 무료 구역은 평소 시민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휴 기간 만큼은 유료던 무료던 도처가 사람이다. 아름다운 호수는 커녕 공원에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이난(海南) 하이난 [출처: 이매진 차이나] 중국의 하와이라 불리는 하이난도 예외는 아니다. 매년 18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연휴를 이 곳에서 보낸다. 2일 하이난시 통계에 따르면 하이난의 주요 A급 여행지의 방문객 수는 26만 명을 돌파했다.   청두(成都) 지우자이거우 [출처: 쓰촨일보] 매년 100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청두 곳곳을 찾는다. 시내에도 볼거리가 많지만 지우자이거우(九寨溝), 황룽(黃龍), 두장옌(都江堰), 칭청산(青城山) 등 유명 관광지와의 거리가 가깝고, 가는데 편하다는 이유도 크다.   베이징(北京) 톈안먼 광장 [출처: 이매진 차이나] 수도 베이징엔 80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다. 특히 구궁(故宮 자금성)은 연휴 기간 평균 방문객 수가 140만 명에 달한다. 수많은 인파로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2015년부터 8만 명으로 입장 인원 수 제한을 실시하고 있다. 이 기간 왕푸징(王府井), 시단(西單) 등 인근 쇼핑 센터 및 176여 곳의 공원 및 관광 명소에는 하루에도 수십 만 명의 관광객들로 북세통을 이룬다.  창청 [출처: 이매진 차이나] 같은 기간, 인근의 창청(長成)을 찾는 관광객도 수십만 명은 기본이다. “창청 오르지 못한 자는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长城非好汉)”는 말을 실천하겠다며 하루에도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창청 등정에 나선다. 한걸음 한걸음 서다시피 움직이는 건 기본. 이 기간 만큼은 체력보다 강한 끈기가 필요하다.     상하이(上海) 와이탄 [출처: 이매진 차이나] 중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상하이는 방문객은 베이징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중에서도 와이탄(外灘)은 최고 인기 지역이다. 올해도 연휴 첫날 하루 25만 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가득 매웠다. 상하이 쇼핑 메인 스트리트 난징루(南京路), 랜드마크인 동방밍주(東方明珠) 등을 포함한 135여 곳의 명소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황산(黃山)     10월 2일 황산에는 5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언론에 화제가 됐다. [출처: 웨이보] 올해 여느 관광지 보다 황산은 ‘핫’ 하다. 신징바오(新京報)는 2일 하루에만 5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황산에 몰렸다는 소식과 함께 “300m 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는관광객의 인터뷰를 보도해 화제가 됐다.   이 외에도 전국의 주요 관광지는 매년 국경절 기간 수많은 인파로 가득 메워진 풍경을 연출한다. 구이저우 황궈슈(黃果樹) 폭포 [출처: 신화망] 장쑤 대운하 [출처: 신화망] 난징 중산링(南京 中山陵) [출처: 중신망] 샤오린스(少林寺) [출처: 중신망] ///차이나랩 
247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영원히 산이 된 "산사람"들... 댓글:  조회:4020  추천:0  2018-10-13
산이 된 사람들.. 히말라야 역대 사망자만 90여명 김민우 기자 2018.10.13.  자동요약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2009년 고미영·2011년 박영석..역대 히말라야 산악사고 히말라야 김창호 대장 등 한국인 5명이 히말라야 원정 등반에 나섰다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했다 사망한 한국인 산악인은 90여명에 이른다. 1971년 5월 김기섭 대원은 마나슬루 7600m 지점에서 제5캠프를 설치하던 도중 돌풍을 만나 40m 절벽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이 사고는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사망 사고로 알려져있다. 1998년 9월28일에는 최승철, 김형진, 신상만 대원이 히말라야 탈레이사가르를 등반하던 중 눈보라를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 우리나라 대표 여성산악인인 고미영 대장은 2009년 7월11일 낭가파르바트(8126m) 정상에서 내려오던 중 눈보라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박영석 대장도 2011년 히말라야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박 대장이 이끈 원정대는 67일 일정으로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길에 올랐다. 등정을 시작한 지 한달 후인 10월18일 원정대는 "좌우로 눈사태가 심해 전진 캠프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마지막 무전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이번에 숨진 김창호 대장이 당시 실종된 박 대장, 신동민, 강기석 대원 수색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2년엔 히말라야 동부 산맥 촐라체에서 고 김형일, 장지명 대원이 등반 중 추락해 숨졌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9명으로 구성된 등반대는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산을 등반하던 중 베이스캠프에서 강풍에 휩쓸려 급경사면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이번 등반에 포함된 산악인은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소속의 김창호 대장, 유영직씨, 이재훈씨, 임일진씨 등 이다. 이들은 지난달 28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총 45일간 원정을 계획했었다. 원정대는 네팔 다울라기리 산의 구르자히말(7193m) 남벽 직등에서 신루트 등정에 나섰다. 그래서 이번 원정의 슬로건도 '코리안 웨이 프로젝트'로 정했다. 김창호 대장은 구르자히말의 새로운 등정 루트를 개척할 계획이었지만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숨진채 돌아오지 못했다. /김민우 기자 ================///   [앵커] 이번 사고가 난 지역은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산인 네팔 다울라기리 산에 있는 구르자히말입니다. 희생자들은 한국 원정대만의 새로운 등반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등정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어서 이지윤 기자입니다. [리포트] 원정대가 사고를 당한 장소는 네팔 서부 히말라야 산맥 중 다울라기리 산군에 속한 '구르자히말'이라는 산입니다. 높이는 7,193m로, 산 남쪽에는 3000m가 넘는 거대한 빙벽이 있습니다. 구르자히말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산악인들에게도 특히 험한 곳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동경의 대상입니다. 이번 원정대는 이 구르자히말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등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네팔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포카라에서 출발해 절반 쯤인 해발 3500m 고도까지 올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수직으로 남쪽 암벽 3700m를 등반해 정상에 오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정대 이름도 '코리안 웨이'로 지었습니다.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한국인만의 루트를 개척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원정대는 해발 3500m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강한 눈폭풍과 산사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원정대는 결국 코리안 웨이의 꿈을 마지막까지 펼치지 못했습니다. 구르자히말은 앞서 1969년 일본 원정대가 처음 등정했고, 1972년 프랑스 원정대가 새로운 루트로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프랑스 원정대가 개척한 루트로 1988년 한 차례 등정한 적이 있지만, 이후 30년 동안 아무도 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KBS 뉴스 이지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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