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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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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는 문화재로 처리해야... 댓글:  조회:3669  추천:0  2019-07-17
박지혜 기자 페이스북 트위터 메일 프린트 스크랩 url복사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지난 2008년 처음 공개된 뒤 소유권 논란이 이어진 훈민정음 해례분 상주본이 대법원 판결로 국가 소유라고 확정됐지만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 씨는 넘겨줄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것으로,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같은 책이다. 11년 전 존재가 드러났으나 지금까지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다. 배 씨가 문화재청의 회수 시도를 소송으로 막는 등 상주본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그는 상주본을 훔쳤다는 형사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5일 대법원은 절도 혐의가 무죄라고 하더라도 소유권이 배 씨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고등법원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배익기 씨가 지난 2017년 공개한 상주본 일부 모습(사진=배익기 씨 제공).   2008년 골동품 거래상인 조 모 씨는 배 씨가 상주본을 훔쳤다며 소유권 이전 민사소송을 제기해 인정받았고,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그러나 형사 소송의 판단과 엇갈리면서 상주본의 주인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이번 대법원 판결로 문화재청의 소유권이 확인됐다. 상주본이 국가 소유로 종지부를 찍었으나 배 씨는 그 가치가 1조 원에 이르는 만큼 최소 1000억 원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 씨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주운 돈도 5분의 1은 주니까 나한테 10분의 1은 내놔라 그거다. 멀쩡한 내 것을 소유권을 뺏긴 것만 해도 억울한데… 민간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 자기들이 돈을 대보겠다는 곳이 있다”라고 말했다. 배 씨는 상주본 일부를 공개했을 뿐 소장처를 밝히지 않고 있어 10년 넘게 행방이 묘연하다. 이 때문에 상주본의 훼손 및 분실 우려도 크다.    특히 상주본은 2015년 3월 배씨의 집에서 불이 났을 당시 일부 탄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배 씨는 집안에서 상주본을 꺼내 자신만 아는 곳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계속해서 배 씨를 설득하고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회수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676    [나들이] - 지금 백두산 천지 모습 댓글:  조회:3495  추천:0  2019-07-11
백두산 천지...       2019년 7월 10일, 장백산 북파 천지풍경구...
2675    [그것이 알고싶다] - 국경선 려행 댓글:  조회:3555  추천:0  2019-07-11
​ ​ 각 나라와 나라사이엔 경계를 정하는 국경선이 있어요.   슬픈 일이지만 남한과 북한이 3.8선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처럼 세계 여러나라들도 국경을 다양한 방법으로 나누고 있는데요.   철조망,자연,설치물 등을 통해서 나누기도 하고 아예 아무것도 조치하지 않고 그냥 표시만 해두는 나라도 있네요.             다양한 세계각국의 신기한 국경선들  보실까요?           [출처] 세계 각 국의 이상하고 신기한 국경선들.jpg  
2674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의 국경선... 댓글:  조회:4309  추천:0  2019-07-11
          세계의 국경선 Top10            10. 스페인-모로코 국경  3~4층 높이의 거대한 철조망으로 막아놓은 국경선.  스페인과 모로코간의 영토분쟁은 계속되서 시위를 막기위함이라고... 9. 벨기에-네덜란드 국경     네덜란드와 벨기에 국경에 있는 카페. 8. 이집트-수단 국경     비르 타윌(Bir Tawil)이라는 곳으로  이 국경지대는 어느 국가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18세기 양국을 보호하던 영국이 국경경계에서 빼고나서 양국이 영유권을 주장했다가 사막이라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서 결국 무주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7. 티베트-네팔 국경     에베레스트산이 자연적으로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6. 워싱턴 DC     법률상의 정식 이름은 콜롬비아 특별구라고...  워싱턴 콜럼비아 특별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줄여서 워싱턴 DC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50개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 구역. 5. 캐나다-미국 국경     미국 버몬트 주의 더비 라인(Derby Line)이라는 마을의 캐나다-미국의 국경선. 4.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인도 서벵갈 주에 속한 도로. 3. 한국-북한 군사분계선(38선)   이 곳은 국경이라기보다 남한과 북한의 실효 지배 지역을  나누기 위한 군사분계선(38선)입니다. 북위 38 도선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38선으로 잘 알려져 있죠. 2. 중국-북한 국경   두만강은 국경하천으로서의 길이 547㎞(총 610㎞)로 한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하여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2번째로 긴 강이도 하죠. 압록강도 국경하천으로서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이룸... 1. 미국-러시아 국경   다이오미드 제도는 미국령과 러시아영토에서 가장 근접한 곳으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베링 해협 중간에 있습니다.  서쪽에 있는 대 다이오미드 섬은 러시아에 속하며  동쪽에 있는 소 다이오미드 섬은 미국에 속합니다.  다이오미드 섬을 나누는 국경선은 지구상에서 날짜를 변경하려고  편의상 설정한 국제 날짜 변경선과 일치합니다.  지구는 자전하기 때문에 경도 15도마다 1시간씩 동쪽으로  갈수록 빨라지게 되는데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각 지역에서의 시간 계산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도록 날짜변경선을 정한 것입니다.  이 선은 복잡함을 피하고자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태평양의  중앙부인 경도 180도를 기준으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나라나 지역일 경우는 같은 날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경도 180도 선을 벗어나 있어  날짜변경선은 반듯한 직선 모양이 아닙니다. 이 선을 경계로 서쪽이 동쪽보다 하루 빨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여행할 때는 같은 날짜를 반복하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 할때는 하루를 더해야 합니다. 결국 날짜 변경선에 의해 러시아의 대다미오미드 섬과 미국의 소다이오미드섬은  불과 4km의간격이지만 러시아 쪽이 하루 더 빠릅니다.   . [출처] 세계의 특이한 국경선 Top10  
2673    [그것이 알고싶다] - 아프리카 이집트 : 수단 분쟁 댓글:  조회:4744  추천:0  2019-07-11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이집트-수단 분쟁     목차 개요 분석 일지 아프리카 내 이집트-수단 분쟁 위치 이집트-수단 분쟁 지도     개요 이집트와 수단 간의 분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98년 수단이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통치하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잉태되었다. 수단은 그 이전 1820년에는 오스만제국과 이집트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영국이 1870년대에 이집트를 식민지화함에 따라 수단도 1877년 이집트와 함께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수단에는 1881년 이슬람의 구세주를 자처하는 무하매드 아흐매드(Muhammad Ahmad)이 반란을 일으켜 한 때 독립국이 건설되었으나, 그 국가는 1898년 영국에게 멸망되었고, 영국과 이집트가 수단을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영국과 이집트는 수단의 지배를 둘러싸고 대립하였으며, 수단인들에게도 민족주의 운동이 성숙되기 시작하였다. 수단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집트와의 합병이냐 아니면 독립이냐를 놓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이집트는 1953년 수단이 스스로의 장래를 자주적으로 결정하도록 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고, 그에 따라 수단은 1954년 자치정부 조직 및 행정기관 설치, 1955년 총선거에서 독립 선택 등을 거쳐 1956년 1월 1일 독립을 대내외에 선언하였다. 수단은 독립 직후 과거 식민통치시대에 이집트 영토로 편입되어 있던 할라이브(Hala'ib) 지역에 대해 그 곳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민족이라는 이유에서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집트와 수단 간에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줄곧 대립과 분쟁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었다. 양국 간에 잠재되어 왔던 이러한 분쟁 소지는 1991년 12월 수단이 홍해 연안의 석유 탐사권을 일방적으로 캐나다에 양도함으로써 표면화되었다. 수단의 이와 같은 조치에 이집트가 강하게 반발하였고, 양국은 1992년 3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이집트는 국경 초소를 증설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결국 1992년 4월 국경지역에서 총격전이 발발하였으며(수단 경찰 4명 피살), 수단은 유엔안보리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양국 모두 상대방을 비방하면서 이 지역에 군대를 증강시켰고, 그로 인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단은 1993년 6월 자국 주재 이집트 영사관의 철수를 요청하면서 이집트 주재 자국의 영사관을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93년 7월 양국의 외무장관이 관계개선 문제를 협의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집트는 수단이 자국 내의 이슬람 과격 세력을 은밀하게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어 양국 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갔다. 이집트는 수단에서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화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1995년 6월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는 도중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29일 자신의 암살 미수 사건에 수단 정부가 개입되었다고 비난하면서 보복을 다짐하였다. 그는 카이로의 한 스타디움에서 1만여 군중에게 수단 통치자들은 자신의 국경을 교란하는 갱단이라고 비난하면서 보복 조치를 취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의 국경지역에서 총격전이 발생하는 등 전면적인 무력 충돌의 조짐이 일기도 하였다. 수단의 하산 알 바시르(Omar Hassan Ahmad al-Bashir) 대통령은 이집트군이 1995년 5월 27일 밤 홍해 연안 할라이브 국경지역의 작은 도시인 아부라마드(Aburamad)에 있는 한 경찰초소 등을 공격하여 수단 경찰 2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당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무바라크가 수단 정부 전복을 외치는 수단인 망명자들을 만나 도발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5월 30일 국민들에게 이집트 측의 정부 전복 음모에 맞서 무장을 하고 국가방위에 나설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무라바크 이집트 대통령이 수단에 무력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양국의 군사, 외교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집트와 수단의 분쟁이 가속화되자 아랍연맹과 리비아 등 주변국들은 양국의 분쟁을 조기 진화시키기 위해 중재를 자임하였고, 무라바크 대통령도 장기적인 양국의 긴장 상황이 이로울 것이 없다는 인식하에, 제나위(Zenawi) 에티오피아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며 중재를 요청하면서 갈등 상황은 진정 국면을 맞게 되었다. 2011년 현재, 진정된 갈등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분석 [의미 및 영향] 이집트와 수단 간의 분쟁은 근본적으로는 과거의 식민통치가 남긴 영유권 문제로 빚어졌다. 이집트는 과거의 기득권을 주장하여 왔고 수단은 자신의 주민이 실제 거주하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을 내세우면서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영유권 분쟁은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에 중요한 전략자원인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분쟁은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넘어 자원을 둘러싼 분쟁으로 확대될 소지가 있다. 이집트와 수단은 국경지역에 한정되어 아주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충돌하고 있으나, 그러한 충돌은 언제든지 우발적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국제사회에 대한 파급 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 지역은 지리‐전략적으로 홍해의 요충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량의 석유자원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석유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분쟁의 귀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와 수단 간의 이 분쟁에는 현재 제3자 세력의 개입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경우의 분쟁보다 덜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쟁의 해결은 쉽지가 않다. 국가이익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영토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적극적 중재를 통한 분쟁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추후 전망] 이집트와 수단간 분쟁의 장래는 문제가 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양국 중 한 쪽의 양보에 달려 있다. 현재는 양국이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국경지역에서 초보적 수준의 소규모 충돌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수단 정부가 전 국민의 방위태세 강화를 촉구하는 것은 강경한 대응 의지를 외형적으로 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 전면전의 전개로 연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국력 면에서 수단보다 강하고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치적 차원의 갈등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집트 정부는 수단이 자국 내의 이슬람 과격 세력을 지원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양국 간의 국경분쟁은 격화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이 분쟁은 여태까지는 제3자 세력의 개입 없이 당사자 간에만 진행되어 왔다. 2010년 현 상황을 보면, 수단 현 정부가 다르푸르(Darfur) 사태의 해결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편,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부는 그 동안 수단의 카르툼(Kartoum) 정부와 북부 야당 지도와의 평화 협정 체결 주선 등 수단문제에 적극 관여하고, 수단 다르푸르 사태 해결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 정부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인접국들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고 있으며, 나일강 수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나일강 유역 국가들에 대한 농업 및 댐 건설 지원 등 유대 강화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와 수단 간의 영토 분쟁은 당분간 소강상태에 머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수단의 내부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진입하면, 석유 자원의 개발을 둘러싸고 양국 간의 영유권 갈등은 언젠가 재발할 것으로 본다. 일지   일자 주요내용 1898년 영국―이집트, 수단 공동 통치 1953년 영국―이집트, 수단이 장래를 자주적으로 결정토록 한다는 협정 체결 1954년 수단, 자치정부 조직 및 행정기관 설치 1955년 수단, 총선거에서 독립 선택 1956년 1월 수단 독립 및 할라이브(Hala'ib) 지역 영유권 주장 1991년 12월 수단, 홍해연안 석유 탐사권을 일방적으로 캐나다에 부여 1992년 3월 이집트―수단, 영유권 협상 시도/실패, 이집트는 국경초소 증설 1992년 4월 국경지역에서 총격전 발생, 수단은 유엔안보리에 중재 요청 1993년 5월 양국, 국경지역에 군대를 증파 1993년 6월 수단, 자국 주재 이집트 영사관 철수 요청 및 이집트 주재 자국 영사관 폐쇄 1993년 7월 양국 외무장관, 관계개선문제 협의 1995년 6월 25일 이집트 대통령 에티오피아 방문 중 암살 미수 사건 발생, 수단 개입 의혹으로 보복 다짐, 수단도 방위태세 확립 결의 1995년 6월 29일 할라이브 국경지대에서 이집트군 보병, 기계화 부대, 공수부대, 국경수비대의 이동 탐지. 양국 군사적 긴장 고조 1995년 6월 30일 바시르 수단 대통령, 이집트와 수단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수단 국민들에게 이집트의 정부 전복 음모에 맞서 무장하라고 촉구 1995년 7월 2일 무라바크(Mubarak) 이집트 대통령, 수단에 무력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선언. 수단 아타바니(Ghazi Salahuddin Atabani, Ghazi Salah Eldine Atanabi) 외무장관, 이집트가 할라이브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비난 1995년 7월 3일 무라바크 이집트 대통령 암살기도 사건과 관련해 이집트가 수단에 무력사용 위협을 하고 있음에 수십만 수단인들 수도 하르툼에서 항의 무력시위 1995년 7월 4일 수단, 이집트와 영토분쟁 지역인 홍해 연안 할라이브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중재 요청 1995년 7월 5일 수단 정부, 이집트가 할라이브 지역에 공군력을 증강시키고 있으며 수단군에게 위협 사격을 가했다고 비난 성명 1995년 7월 6일 무라바크 이집트 대통령, 수단과의 불화를 조기 진화시키기 위해 제나위 에티오피아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며 중재 요청. 아랍연맹과 리비아 등 이집트‐수단 분쟁 중재 노력 가속화 2010년 * 현재, 수단 정부가 다르푸르 사태의 해결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편,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부도 그 동안 수단의 카르툼(Kartoum) 정부와 북부 야당 지도와의 평화 협정 체결 주선 등 수단문제에도 적극 관여하는가 하면 수단 다르푸르 사태 해결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음 * 특히 이집트 정부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인접국들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고 있으며, 나일강 수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나일강 유역 국가들에 대한 농업 및 댐 건설 지원 등 유대 강화도 견지하고 있음 2012년 후기 분쟁 상황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안정기)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수단 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세계 특이한 국경선...     바로 수단과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 비르타윌(بيرطويل)이라는 곳.  제주도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인데, 자원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라 그 누구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임...  
2672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의 신기한 장소 5곳... 댓글:  조회:3412  추천:0  2019-07-11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세계의 신기한 장소 5곳   꿀팁 연구소   2019.06.21.      요즘은 해외여행이 매우 보편화 되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정보도 인터넷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이 쏟아진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장소들도 존재한다.   우리가 쉽게 가볼 수는 없지만, 사진만 봐도 신기해 보이는 장소들이 있다.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세계의 신기한 장소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1. 남극 도달불능점 도달불능점은 해안선으로부터 가장 먼 지점을 의미하는데, 물리적으로 매우 접근이 어려운 지역을 말한다. 남극 도달불능점은 남극에 있는 도달불능점으로 도달불능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도달불능점이다.   이 곳은 소련 탐사대가 1958년 처음 도달했으며, 이후 1967년에 한 번 더 탐사하면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블라디미르 레닌 동상을 세웠다. 참고로 이 곳의 평균 온도는 영하 89도라고 한다. 2. 비르타윌 비르타윌은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이집트와 수단의 국경에 자리한 지역이다. 이 곳은 두 나라의 영토 분쟁 지역인데, 보통 영토 분쟁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소유권을 주장하기 마련이지만, 이 지역은 특이하게도 서로 소유권을 미루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비르타윌 옆에는 할라이브라는 또 다른 영토 분쟁 지역이 존재하는데 두 나라 모두 비르타윌보다 10배 넓은 할라이브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비르타윌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3. 부베섬 부베섬은 대서양에 위치한 화산섬으로 각 대륙으로부터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섬이다.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2,600km, 남극 대륙으로부터 1,700km나 떨어져 있는 섬으로 가장 가까운 대륙이 남극이지만, 남극의 부속 섬이 아닌 아프리카의 부속 섬으로 분류된다.   게다가 가장 특이한 점은 이 섬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가 남반구가 아닌 북반구에 위치한 노르웨이라는 점이다. 거주자는 없으며, 종종 노르웨이 기지를 방문하는 외부자만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해 황량한 풍경을 가진 이 곳은 영화 ‘에어리언VS프레데터’의 배경이기도 했다. 4. 미르 광산 미르 광산은 러시아 연방 중 사하 공화국에 위치한 미르니에서 자리 잡은 광산으로, 다이아몬드 산지로 매우 유명하다. 이 광산은 2011년에 폐쇄되긴 했지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활발했던 광산으로 넓이만 무려 1,200m에 달한다고 한다.   미르니 상공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구멍처럼 보이는 이 광산은 깊이가 매우 깊어 바람의 흐름이 이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이 곳 상공에서는 비행이 금지되어 있다. 5. 지옥의 문 일명 지옥의 문이라고 불리는 싱크홀이 있다. 이 싱크홀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나라의 다르바자라는 곳을 방문하면 찾아볼 수가 있다. 1971년에 이 곳의 지반이 낙하하여 싱크홀이 생겼는데, 이와 함께 가스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후 분출되는 가스로 인해 환경 파괴를 우려하여 인위적으로 불을 붙였는데, 가스 매장량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도 불 타고 있는 싱크홀이라고 한다.  
267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협약",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50  추천:0  2019-07-09
파리기후협약 지켜도 여름철 북극빙하 사라질 수 있다 2019.07.09.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기온 2도 상승시 북극빙하 사라질 확률 28% 예측[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파리기후협약이 지켜져도 여름철 북극빙하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빠르면 2040년부터 여름에는 북극에 얼음이 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물리 연구단(단장 악셀 팀머만)은 안순일 연세대 교수 및 국제공동연구진과 함께 수십 개 기후모형들을 바탕으로 확률을 예측하는 새로운 통계 기법을 개발하고 이를 북극빙하에 적용한 결과 산업혁명 이전 대비 기온이 2도 상승했을 때 여름철(9월) 북극빙하가 완전히 녹을 가능성이 28%로 예측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특정 지구온난화 온도 상승 수준에 도달할 시 9월 북극해빙이 완전히 유실될 확률. [Elke Zeller and Roman Olson 제공] 2015년 파리에서 190여 개 국가가 맺은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각국은 전지구평균 지표기온 상승을 산업혁명 이전 대비 섭씨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며 적어도 섭씨 2도 미만으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온실가스 감축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1.5도에서 기온 상승을 저지했을 때 9월 북극해빙 완전 유실 확률은 6%, 2도에서 기온상승이 저지된다면 완전 유실 확률은 28%에 달하는 것으로 계산됐다. 평균적으로 북극해빙이 완전히 유실될 수 있는 온도는 2.4도로 추정됐다. 파리기후협약을 지킨다고 해서 북극빙하 유실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미래 기후 변화는 과거 기후에 대한 물리적 이해를 토대로 예측하는데 이 때 쓰이는 전(全)지구 기후 모형은 대기, 해양, 빙하 등 주요 요소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대한 양의 수식으로 구성돼 있다. 전 세계적으로 40여 개 이상의 기후 모형들이 있고, 이들은 서로 다르게 미래 기후를 전망한다. 일반적으로 기후 관련 정책을 수립할 때 수십 개 기후 모형의 단순한 평균값이나 확률분포를 사용한다. 연구팀은 수십 개 기후 모형들을 고려해 확률 예측이 가능한 새로운 통계 기법을 개발했다. 수학자, 통계학자, 기후과학자들이 모여 2년에 걸친 연구 끝에 기후 모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통계 기법을 개발, 북극빙하가 사라질 가능성을 수치로 제시했다. 기존의 통계 기법들은 각 기후 모형들이 서로 관련이 없다고 가정하지만 실제 기후 모형들은 서로 일부 수식을 공유하거나 같은 계산 기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호 의존성을 보인다. 연구진은 모형들의 의존성을 배제하는 엄밀한 통계적 방법을 개발했다. 연구단의 로만 올슨 연구위원은 “모형들의 의존성을 고려해 확률 값을 산정할 수 있는 수학적 프레임워크는 지금까지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며 “이번 통계 기법은 의존성에 대한 고려 뿐 아니라 현재 기후를 실제 관측과 유사하게 모의하는 모형에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안순일 연세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모형 간의 상호 의존성을 최소화하는 수학적, 통계적 이론을 제시하고, 이를 미래 기후 변화 확률 전망에 적용하여 불확실성을 줄인 획기적인 연구”라며 “수학자, 통계학자, 기후과학자가 모인 보기 드문 융합연구”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준이 연구위원은“이미 전지구 지표기온이 산업혁명 이전 대비 1도 이상 상승했고, 지금 추세라면 2040년에는 1.5도 상승에 이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이번 연구는 북극빙하 유실 가능성을 수치로 제시해, 지금보다 더 엄격한 기후 정책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온라인에 9일 게재됐다.(논문명: A novel method to test non-exclusive hypotheses applied to Artic ice projectionsfrom dependent models) 최상국기자
2670    [그것이 알고싶다] - "서울"의 본 뜻과 수도의 "서울"... 댓글:  조회:3416  추천:0  2019-07-07
서울     이미지 크게보기 〈도성대지도〉, 18세기, 채색필사본, 188.0×213.0c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7호, 서울역사박물관. 현전하는 서울 지도 중 가장 큰 지도로, 1753년에서 176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산과 산줄기는 진경산수화의 기법으로 그렸으며, 관청과 행정단위, 도로, 하천 등의 정보를 다양한 기호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 유형 개념용어 성격 고지명 목차 정의 서울의 어원과 의미 서울의 위치와 기능 근대 이전의 서울 단군조선의 서울 부족국가의 서울 고구려의 서울 백제의 서울 신라의 서울 발해의 서울 후삼국의 서울 고려의 서울 조선의 서울 근대 이후의 서울 근대의 서울 민족항일기의 서울 광복 후의 서울 정의 한국의 각 시대별 수도의 총칭. 서울의 어원과 의미 서울이라는 말은 원래 수도(首都)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즉 서울특별시를 약칭할 때 서울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고유 명사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수도로서의 의미에 관해서이다.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야벌 등으로 불려진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 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서는 수리·솔·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서 높다·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고, 울은 벌·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서울이라는 말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자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며, 도는 거느린다·번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울을 가리키는 한자로는 경성을 비롯해 황성(皇城)·제경(帝京)·경사(京師)·경조(京兆)·도읍(都邑)·왕경·경도·황도(皇都)·왕도(王都)·도성(都城)·수도·국도(國都)·수선지지(首善之地) 등이 있다. 서울의 위치와 기능 서울이란 옛날에는 왕이 살고 있는 도시, 왕의 궁궐과 중앙 통치기관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왕조가 바뀌면 서울이 바뀌는 것이 통례였다. 새로운 국가의 인식을 심어주고 인심을 전환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서울에는 궁궐을 둘러쌓은 내성과 관아, 주민들의 거주지를 둘러싼 외성이 쌓여졌다. 서울의 출입은 성문을 통과해야만 가능했고, 밤에는 도성문을 닫았다가 새벽에 열었다. 서울은 왕이 거처하고 정사를 보는 궁궐이 설치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으로서 조상의 사당과 묘소가 있었고 국가 체제가 발전하면서 이는 종묘와 농업신을 제사지내는 사직단으로 변했다. 서울은 국가의 중심이었음으로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갖춘 곳에 설치되었다. 뒤에는 산이 둘러 쌓여 있고 한쪽으로는 강이 흘러야 방어에 유리했다. 이는 옛날에는 풍수지리설로 길지를 택해야 그 지덕이 왕성하여 국운이 오래간다고 설명되었다. 그러면서도 교통이 또한 편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 서울로 정해지는 좋은 입지 조건이기도 했다. 서울 주위에는 외적이 침입해 수도의 방어가 곤란한 경우 피해 싸울 수 있는 산성이 반드시 주위에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방어는 국가 유지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서울을 중심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 시설이 갖추어지고, 또한 국민의 조세가 서울로 들어옴으로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가 반드시 지어졌다. 그리고 서울을 지키는 군사가 국가 군대 중 최정예병이었고 지방의 군사들이 번갈아 와서 지키곤 했다. 서울을 옮기는 일은 국가가 발전해 웅비를 계획하거나 외적의 침입을 받아 옮기는 경우 등이었다. 근대 이전의 서울 단군조선의 서울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울은 단군조선의 왕검성으로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도읍을 정했는데, ‘신이 만든 신령스런 도시’라는 뜻에서 신시(神市)라 칭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태백산은 묘향산으로 비정되었고,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으로 오랜동안 이해되어왔다. 평양이 단군 선인(仙人)이 도읍한 곳이라고 쓰인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그 뒤 단군왕검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겼다고 하는 바, 이는 한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천도라 할 것이다. 부족국가의 서울 기원전 수 세기경에 성립된 부족국가에서도 도읍을 정하는 것이 국가 건설의 가장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다. 북부여에서 수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하늘에서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곳에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희는 동해의 가섭원(迦葉原)으로 피하라. 그곳은 오곡이 잘 된다.”고 계시함으로써 아란불이 해부루(解夫婁)에게 권해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그리고 옛 도읍처에는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이미 정착한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 도읍 터를 놓고 다투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 건설에 있어서 서울을 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음을 보여주는 실 예라 할 것이다. 이러한 부족국가를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칭하고 있는데, 당시 읍을 둘러싼 성은 주로 토성이었다. 토성은 흙을 다른 곳에서 옮겨와서 쌓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로 이용해 흙을 깎아내림으로써 경사를 좀더 급하게 만든 것이다. 성 안에는 지배 계층이 살았으며, 반면 성 밖에는 피지배 계층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는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로서 땅을 파는 데는 석기가 이용되었다. 고구려의 서울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졸본천(卒本川)변이었다. 이곳을 도읍으로 택한 이유는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내의 지세가 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식생활을 해결해줄 수 있는 농경지가 고려되었고,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택했다. 그런데 이렇게 택한 도읍지는 그대로 존속되지 못하고 인근 다른 부족국가와 투쟁해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상황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즉, 서기 3년(유리왕 22) 졸본 근처인 압록강 중류에 있는 국내성으로 옮겼다. 지형적으로 대단히 험하면서도 농사가 잘되고, 짐승과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자연적인 입지 조건이 매우 좋았다. 이곳으로 천도한 뒤 위나암성(尉那巖城)을 돌로 쌓았는데, 이는 유사시에 피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중국 세력과도 투쟁했던 점으로 보아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석성을 쌓을 수 있는 문화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석성은 자연적인 험준한 지세를 더욱 보강해주었다. 그러나 도읍을 옮기기는 했으나 옛 도읍지인 졸본성에 태자 해명(解明)을 남겨둔 점에서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처로 삼았다고 이해된다. 서기 20년(대무신왕 3) 국내성 안에 시조의 사당을 새로이 세워 제사지냈고, 옛 수도에도 시조의 사당이 있어서 후대 왕들은 봄·가을로 졸본성에 행차해 시조에게 제사를 올렸다. 고구려는 점차 부근의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해 군현으로 삼고, 요동의 서안평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중국 세력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198년(산상왕 2) 서울 서쪽에 환도성을 쌓고, 209년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환도성으로의 천도는 비좁고 험한 곳에서 교통이 편리한 곳을 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46년(동천왕 20)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고 왕은 동해 가까지 피난했다. 이 결과 환도성을 복구하지도 못한 채 평양성을 쌓아서 이를 임시 도읍으로 삼았다. 342년(고국원왕 12)에 이르러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수리하고 다시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이해 연(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다시 침입했고, 이들의 주력 부대를 중도에서 격파하기는 했으나 남쪽으로 기습한 적군에 의해 환도성이 또다시 함락당했다. 이 결과 왕모와 왕비는 포로로 잡혀갔으며, 고국원왕은 평양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 도읍인 평양성마저도 남쪽에 있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왕까지 전사하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392년(광개토왕 2) 서울에 국사(國社)를 세웠다. 그 뒤 408년(광개토왕 18)에 이르러 서울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으며,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 지금의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평양은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250여 년간 서울이 되었다. 586년(평원왕 28) 일시 평양 인근의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나 궁궐만을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중국 세력에 대한 대비책이 고려된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성이나 환도성은 강북에 있는 관계로 적의 대공격에 쉽게 함락되었던 경험에 비추어, 압록강과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려는 의도가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601년(영양왕 23) 수(隋)의 200만에 가까운 대군을 압록강과 청천강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등 수나라의 네 차례의 침입을 막아냈다. 평양의 북쪽에는 한반도의 최고 영산(靈山)인 백두산에서 뻗어온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이 있고, 또 압록강과 청천강이 서쪽으로 흘러 중국 측의 침략에 대한 방어선으로서 좁은 이점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언진산맥이 가로질러 남방으로부터 침략에 대한 방어의 유리한 조건이 되었고, 대동강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지세가 아름답고 평양 평야의 곡창 지대는 풍부한 식량을 공급해준다는 점에서 수도로서 좋은 자연적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고구려 서울의 행정구역은 오부(五部)로 나누어졌고, 독특한 행사로는 매년 10월이 되면 국중 행사인 제천대회가 열렸다. 이때는 지방사람들까지 이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이 대회 때에는 시조를 보내준 하늘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제사를 올려 국가의 평안과 백성 생활의 안녕을 빌었다. 이와 함께, 활쏘기·말타기·씨름·그네타기 대회 등이 열렸다. 또, 2월과 9월 졸본성에 왕이 행차해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백제의 서울 북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는 온조(溫祚) 세력이 내려와 한강가의 하남 위례성(慰禮城)을 도읍으로 정해 백제를 건국했다. 하남 위례성의 위치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한강 남쪽의 풍납리 토성, 몽촌토성 등으로 추측된다. 백제가 이곳을 서울로 택한 이유는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 비상시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남쪽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서 경제적 여건이 좋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온조왕은 서울에 아버지의 사당인 동명왕 묘(廟)와 국모 사당을 세워 제사지냄으로써 자신이 천제자의 후손이라는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 온조왕 때는 낙랑과 말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책(木柵)을 세우기도 했는데, 병산책(甁山柵)·독산책(禿山柵)·구천책(狗川柵)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목책의 설치는 주로 북방으로부터 기마병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도성 안에 남단(南壇)을 쌓고 천지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15세 이상의 장정을 동원해 도성을 높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근초고왕 때는 이미 남쪽으로 마한 세력을 격파하고 신라와 국경 전쟁이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도읍을 한강 이북으로 옮겼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 뒤 고구려의 보복 전쟁으로 여러 차례 침입을 받아 공방전을 치르다가 광개토왕에게 북쪽 관방인 여러 요새를 빼앗겼으며, 장수왕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개로왕을 이은 문주왕은 공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동쪽과 북쪽·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고, 남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갖춘 곳이다. 이후 60여 년 동안 공주는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 한편, 성왕은 도읍을 부여로 다시 옮겨 국가 체제를 재정비했다. 부여는 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고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져 방어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일 뿐만 아니라 해상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부여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부여에는 나성(羅城)이 있고 그 안에 또 궁성을 두른 내성이 쌓여져 있었다. 공주와 부여에는 궁궐이 있어서 백제의 정치·행정·군사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사찰이 건립되어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구실도 했다. 백제의 수도는 동·서·남·북·중의 오방으로 나누어져 다스려졌고, 또한 수도의 풍속으로는 고구려와 같이 제천대회가 열렸으며, 농사가 끝나는 오월 단오날에는 농악을 울리면서 흥겹게 노는 국중 대회가 열렸다. 신라의 서울 신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수도를 건국 초부터 멸망될 때까지 1,000여년 간 경주 한 곳으로 운영했다. 경주는 형산강(兄山江)의 상류 지류인 북천·남천·서천의 세 시내가 흘러 북쪽에서 합쳐지고, 동쪽에는 낭산·토함산이 우뚝 솟아 있고, 남쪽에는 남산이, 북쪽에는 금강산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단석산이 둘러져 있어 외적 방어에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었다. 경주는 한반도 동편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내지로부터의 공격 위험성은 적었지만, 일본의 침략 위험이 있었다. 신라는 영토를 서북쪽과 남쪽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서울의 편재성을 해결하고, 또 새로이 정복한 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피정복민의 귀족 세력을 이주시켜 소경(小京)을 설치했다. 가야 지방에 금관경(金官京), 고구려 부흥 세력인 보덕국의 안승(安勝) 등을 옮겨 설치한 남원경(南原京), 대가야 귀족을 옮겨 살게 설치한 충주의 중원경(中原京), 백제 귀족을 옮겨 살게 하여 설치한 청주의 서원경(西原京), 원주의 북원경(北原京) 등 오소경이 그것이다. 경주에 사는 사람은 왕경인(王京人)이라 해 지방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고, 4두품 이상의 귀족은 17관등급의 경위(京位)를 받았으며, 지방 족장 세력의 후예인 지방 세력가는 경위와 구별되는 외위의 위계를 받게 했다. 경주에는 모든 중앙 관서가 있어서 정치·행정의 중심지였고, 군사·경제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였다. 궁궐 앞에는 호국 사찰 황룡사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태민안을 빌고 외적의 정복을 상징하는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이 우뚝하게 세워졌다. 또한, 주위로는 선대 왕들의 묘가 있었으며, 선도성모의 신앙이 깃들인 선도산, 시조와 시조비의 출생지인 양산(楊山)과 나정(蘿井) 등은 신라인들의 성지(聖地)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영토와 인구가 3배 정도로 확대되고 이에 따른 많은 조세 수입도 경주에 집중됨에 따라 경주인들은 자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즉, 동시·서시·남시 등 시장이 열렸으며, 경주 시내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모든 시민이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를 볼 수 없었으며, 귀족의 거대한 저택이 35채나 되었다. 경주의 독특한 풍속으로는 가배(嘉俳)라는 것이 있었다. 즉, 경주의 육부(六部) 여자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왕의 두 딸을 대장으로 삼아 7월 16일부터 매일 이른 아침 큰 부의 뜰에 모이게 해 밤늦게까지 길쌈시합을 하는 것이었다. 8월 15일에 길쌈한 양을 심사해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해 승리한 편을 축하했는데, 춤을 추며 노래를 하면서 온갖 유희가 행해졌다. 이때 한 가난한 집 여자가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까닭에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라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해 후대 사람들이 이 소리를 따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했다. 그 뒤 가배놀이 때는 마냥 이 회소곡을 합창하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월보름 날에는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고, 문밖 출입을 금했는데, 이를 ‘달도(怛忉)’라고 불렀다. 이는 슬퍼하고 근심한다는 뜻으로 이 날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했다. 한편, 경주에서는 20대의 청소년 500∼600인이 무리를 이루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것이 화랑도이다. 화랑도의 교육 목표는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친구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살생이 불가피한 경우는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것이었다. 이 도덕률은 유고·불교·전통 사상이 종합된 것이었다. 경주 사람들은 염불사 등 인근 사찰에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염불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었고,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가에 은은히 울려퍼졌다. 발해의 서울 고구려가 멸망한 뒤 30년이 지나 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일어난 발해가 당나라의 세력을 만주에서 축출하고 오히려 당의 본토까지 침공했다. 발해가 처음 도읍지를 정한 곳은 동모산에 있는 중경이었다. 그 뒤 지금의 동경성 지방에 있는 상경으로 천도했다가 혼춘(琿春) 지방에 있는 동경으로 천도한 뒤 다시 상경으로 환도했다. 발해는 오경(五京)을 설치해 지방 15부와 62주의 지방 행정을 통할했는데, 오경은 숙신의 옛 땅을 관장하는 상경(上京), 그 남쪽을 관장하는 중경(中京), 예맥의 옛 땅을 관장하는 남경, 고구려 발흥 지역을 관장하는 서경, 혼춘 지방을 관장하는 동경이 그것이다. 상경은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같은 큰 가로가 있었음이 발굴 결과 밝혀졌다. 후삼국의 서울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은 백제 부흥의식이 강했으며, 전주를 수도로 정해 40여년 간 유지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는 철원에 처음 도읍했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성으로 옮겼으나 여의치 않아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철원으로 다시 옮겼다. 고려의 서울 개성의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 왕건(王建)은 궁예를 몰아낸 뒤 왕이 되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무렵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 세력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왕건의 가문은 이 중의 하나였다. 개성은 백두산에서 낭림산맥·마식령산맥으로 뻗어 나와 동북쪽으로 크게 봉우리진 오관산, 다시 이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마지막 봉우리로 솟은 송악(松嶽)을 주산(主山)으로 해 동서로 좌청룡·우백호의 형상을 이루었다. 또한, 남쪽의 용수산(龍岫山)·진봉산·덕적산은 주산에 조회하는 듯하는 형세를 갖추었고, 서쪽으로는 마탄강(馬灘江), 동쪽과 남쪽은 임진강이 둘러 흘러 풍수지리설로 보아 명당의 지세였다. 송악은 신라 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道詵)이 이미 왕도로 점지(點知)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해가 가까워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대내적으로도 해상 교통과 육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덕이 왕성해 국운이 번창할 것이라는 점과 이곳을 기반으로 왕건의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신라시대의 경주가 국가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폐단을 시정, 국토의 중앙으로 수도를 옮겨 전국토를 재개발한다는 의미 등을 담고 있었다. 개경은 몽고 침략기 28년 간 강화도로 천도한 이외는 고려 멸망까지 400여 년 동안 정치·경제·문화·교육·군사·교통·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궁성(宮城) 내성과 외곽 성곽인 나성이 수축되고, 종묘와 사직단이 세워졌으며 삼성육부·중추원 등 모든 정부 관서가 설치되었다. 또, 전국의 조세가 조운과 육운으로 이곳에 들어왔으며, 국가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이 설치되고, 사학(私學) 12도(徒)가 있었으며, 과거를 보기 위해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모든 중앙 관료도 이곳에 거주함을 의무화함으로써 고려 귀족의 생활 근거지가 되고, 4만 8000인에 달하는 중앙군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한편, 2,800칸에 이르는 거대한 왕흥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성내에 세워졌다. 개경에서 행해졌던 연례 행사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 연등회는 석가 탄신을 경축하는 행사로 궁성으로부터 가로수에 비단으로 줄을 매고 연등을 걸었으며, 팔관회는 원래 신라에서 전몰 장병에 대한 위령제로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개경에서는 11월, 서경에서는 10월에 천지·산악·해독(海瀆)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였다. 이때는 외국 사신도 참여했으며, 국내의 지방 장관들이 선물과 축하의 글을 바치기도 하였다. 팔관회 때는 화랑이라는 희극이 행해졌다. 고려 태조는 폐허된 고구려의 옛 서울 평양을 왕식렴 등으로 새로이 개척케해 서경으로 삼고 개성 주변의 군현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이곳에 학교와 사찰을 세워 교육 문화의 환경을 갖추고, 개경에 있는 중앙 관서의 분사(分司)를 신설했다. 그리고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풍수지리설로 보아 길지이므로 왕들이 자주 순행해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또한, 서경은 북진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서 정변이 일어날 경우와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고 왕실의 후원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개척이 추진되었다. 이에 서경은 지덕이 왕성한 곳으로 그 지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역대 왕들의 믿음에서 중시되었으며 준수도적인 성격을 띠었다. 광종 때는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로 호칭한 바도 있다. 국왕은 가끔 서경에 행차해 머무르다가 돌아오고 했다. 서경에 대한 관심은 고려 태조 이후 역대 왕 모두 크게 가졌다. 특히, 인종 때는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소실되어 궁궐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서경천도론이 일어났고, 이곳에서 실제로 궁궐이 축조되는 과정 중 개경파 관료들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난이 일어난 뒤 서경에 대한 국왕들의 관심은 줄어들게 되었고, 국왕의 순행(巡幸)과 팔관회 개최, 분사 제도 등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려시대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국운을 왕성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삼경제도를 운영했다. 삼경은 성종 때에 경주를 동경으로 승격시킴으로써 개경·서경과 함께 갖추어졌다. 그러나 동경은 너무 멀기 때문에 군주가 직접 순주(巡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 때는 동경을 폐하고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시켜 국왕이 순주했다. 1232년(고종 19) 몽고족이 대거 침입하자 이들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용해 당시 집권 무인이던 최우(崔瑀)는 강화도로 천도해 몽고에 대항했고, 1270년(원종 11)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우왕·공양왕 때는 국내외적인 정세가 혼란하던 때라 왕조 멸망의 도참설이 유행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의 서울 1392년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하면서 민심을 일신할 목적으로 천도를 단행하고자 했다. 이듬해 계룡산을 수도로 정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계룡산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河崙)의 반대로 논의 단계에서 그치고, 정도전(鄭道傳)과 승려 무학(無學)을 보내 한양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제2대 정종 때는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태종에 의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뒤 조선 500년의 도읍이 되었다. 한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으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정기가 봉우리로 뭉친 북한산을 주산(主山)으로 해 좌청룡으로 낙산(駱山: 駝駱山이라고도 함.)이 동쪽으로 뻗었고,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이 서쪽으로 뻗쳐 있다(일설에는 무악, 즉 길마재로 보는 설도 있다.).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남산이라고도 함.)이 안산(案山)으로 솟아 있으며, 한강이 남쪽과 서쪽을 둘러 흐르며, 관악산이 북한산에 조회하는 듯해 고려 초부터 도선에 의해 풍수지리학상 왕도가 될만한 명당으로 지목되어온 곳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풍수지리설을 부연해 한양은 삼각산이 후 주산(主山)이고, 강원도 금강산은 외청룡, 황해도 구월산은 외백호, 제주도 한라산은 외안산(外案山)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설에서 한양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찾을 수 있다. 한양은 이처럼 풍수지리설로 보아 명당일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또한 서해가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자연적 이점을 가졌고 실제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북악 아래에 경복궁을 정남으로 향하게 짓고 그 앞에 남으로 대로를 내어 길 양쪽에는 의정부·육조 등 중요 중앙 관청이 세워졌다. 그리고 산줄기를 따라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두루는 도성을 쌓고, 도성의 출입을 위해 큰 문 4개와 작은 문 4개를 동서남북에 내었다. 한양을 한성이라고도 했던 바 한성은 성 안과 성 밖 10리까지가 포함되었다. 성안은 가로계획(街路計劃)이 세워졌고, 길은 대로·중로·소로가 있었는데, 대로는 너비 17m나 되어 반듯하게 그어졌다. 광화문거리, 광화문에서 동대문, 남대문에서 광교까지가 대로로 만들어졌다. 중로·소로는 길을 직선으로 내지 않았다. 소로는 특히 자연의 길로서 굽은 상태가 많았다. 한편, 종로 북쪽의 주거지를 북촌이라 했는데, 이곳에는 권세있는 귀족들이 살았고, 남산 밑의 남촌에는 지체가 좀 떨어진 가난한 양반들이 거주했다. 또, 청계천 양쪽에는 서리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서울의 중앙에 산다는 뜻에서 중인(中人)이라고 칭해졌다. 한성은 행정 구역이 동·서·남·북·중 오부로 나누어지고 그 아래 52방(坊)이 있었다. 한성의 인구는 15세기 말 1만 8000호(戶)로서 10만 명 내외가 거주했고, 종로의 대로 곁에는 쌀·베·종이·생선 등을 파는 3,000칸에 달하는 상점이 즐비했다. 한편, 한성에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좌측인 동쪽에 열성조(列聖祖)의 제사를 받들기 위한 종묘가 세워졌고, 우측인 서쪽에는 토지신과 곡신(穀神)을 제사지내는 사직단이 세워졌다. 이 종묘와 사직단은 왕조와 국가의 상징으로서 종교적·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교육을 위해 국립대학으로 생원·진사가 된 자들을 입학시켜 교육시키는 성균관이 설치되었다. 이곳에는 명륜당과 문묘가 세워졌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가 있었다. 오부에는 초급 교육기관으로 학당(學堂)이 세워졌으나 북학은 곧 폐지되어 4부학당만이 운영되었다. 한편, 서울의 도성은 음양오행설로 볼 때 소우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북쪽은 양, 남쪽은 음을 상징했다. 양을 받아들이기 위해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열어놓았다가 양기가 너무 세면 북촌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 해 이를 닫아두기도 했다. 또, 도성민의 상여를 동쪽은 광희문(光熙門: 水口門이라고도 함.)과 서쪽은 서소문(西小門: 昭義門)으로만 통과하도록 했다. 도성문은 밤 열시가 되면 종루에서 28번의 종이 울림과 동시에 닫혔는데, 이를 인정(人定 또는 인경)이라 하며 사람과 우마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새벽 4시에 종소리 33번의 울림과 동시에 통행 금지가 해제되었으니 이를 파루(罷漏)라 한다. 통행 금지 시간에는 순라군(巡羅軍)이 순찰을 돌았는데, 이때 걸리면 치도곤을 당했다. 시골에서 올라왔다가 통행금지에 한 번 걸려본 사람들은 서울에 가면 순라군이 가장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한성에는 고관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마를 타고 거리를 갈 때는 호위병들의 벽제(辟除: 길을 비키라는 소리)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들은 당황했다. 또 문·무과의 최종 시험이 실시될 때이면 시골 선비와 무사들이 망태기를 짊어지고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이를 비유해 ‘낙양의 종이값을 올린다.’는 속담이 생겼고, 시골에서 서울에 가려면 과거보러 한양간다고 떠벌이는 일화가 많았다. 양반이나 일반인들이 삶을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경우 이 외에 양인(良人)들이 상경하는 기회는 군역을 치르는 과정에서 주어졌다. 즉, 서울에는 오위(五衛)의 중앙군이 편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군인들은 시골에서 번갈아 올라와 근무하는 장정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2, 3개월의 근무를 하기 위해 의식(衣食)을 준비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경복궁도 불에 탔다. 왕은 의주로 파천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과 명나라 군대의 후원으로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으나 경복궁은 복구되지 못했다. 이에 임금은 별궁인 창경원을 재건해 궁궐로 사용했으며, 경복궁이 다시 지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1867년(고종 4)이었다. 17세기에는 한성의 인구가 15세기의 두 배나 되는 20만 명으로 증가되는데, 이는 자연적인 증가보다는 농촌 인구의 이입 때문이었다. 서울의 인구가 이렇게 증가되자 관청을 상대로 물품을 파는 육의전 이외에 시민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시장이 생겨서 번창하게 되었다. 오늘날 동대문 시장의 전신인 이현(梨峴)과 남대문 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의 발달은 바로 시민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시장의 발달 배경은 전국이 교환경제 체제로 된 향시(鄕市)의 발달과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공물 제도가 돈이나 쌀, 또는 포로 내도록 한 대동법으로 전환되고, 상평통보라는 주전(鑄錢)의 화폐가 통용된 점 등에 연유한 것이다. 육의전과 시전 상인들은 상세(商稅)를 국가에 바치는 대가로 상품 판매권을 독점해 많은 이득을 취함으로써 규모가 큰 상업자본가로 발전했다. 이들을 도고(都賈)라고 한다. 이들은 일반인의 상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청에 물품을 납부하는 청부업으로 경제권을 독점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인구가 더욱 증가되자 소매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소매상들은 점점 금난전권을 위협하는 규모로 성장했고, 점차 시전 상인들의 상품 판매 독점권의 부당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1791년(정조 15) 전매상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서울의 인구도 늘게 되고 경제 규모도 커져서 시가지는 마포까지 확대되었다. 이곳 포(浦)에서 조운업을 하던 강상(江商)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쌀을 통제해 값을 조작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취해 대상업자본가로 발전했다. 이처럼 서울의 인구가 증가되고 시장 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서울 근교의 농민들은 채소 농사를 지어 서울에 내다 팔았다. 한성의 풍속 중 고유한 것으로는 다리밟기를 들 수 있다. 정월 보름날이면 저녁을 먹고 부녀자들이 청계천 가로 나와 12개의 다리를 건너야 일년 열두 달 건강하다는 믿음에서 다리밟기의 풍속이 있었다. 이 풍속은 서울뿐 아니라 시골에도 있었는데, 시골에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한 다리를 열 두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은 풍기를 문란시킨다는 명목으로 양반들이 금지시키기에 이르러, 조선 후기에는 다리밟기를 할 수 없었다. 근대 이후의 서울 근대의 서울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개화의 물결이 맨 처음 일기 시작한 곳 역시 서울이었다. 부산의 왜관 근처에 있었던 종래의 일본 대표부가 없어지고 이제는 서울의 용산 근처에 공사관을 설치했으며, 개화의 새로운 이기가 점차 들어와 전통적인 서울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1885년 배재학당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치되어 신식 교육이 행해졌고, 1886년 이화학당이 설치되어 여인들이 가마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녔고, 1883년 조폐창이 설치되어 지폐를 발행했으며, 1884년 우정국이 설치되어 근대적인 우편 업무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1894년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종로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차가 놓였다. 1896년 국왕이 나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고종은 명동에 원구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1897∼1898년 광화문과 종로에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대신들을 불러내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만민공동회라는 최초의 대시민 운동이 세 차례나 열렸다. 1897년 파고다 공원이 설치되었고, 정동에 최초의 호텔인 손탁 호텔이 개업되었으며, 근대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설치되었다. 1896년 경인선이 부설되어 한강 철교가 놓였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에 의해 의주와 서울을 잇는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부산과 서울 사이에 전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이 간행되어 시민에게 배포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는 국문이 국가의 공용 문자로 채택되어 순한문투에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유길준(兪吉濬)·주시경(周時經)·지석영(池錫永)에 의한 국어문법 연구에서 서울말이 표준말로 채택되었다. 서울은 1876년부터 30여 년 사이에 급변해갔다. 즉, 각 곳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수용되었다. 이때 서울 시민을 위시한 전국의 지도자들은 국민 운동으로서 교육부흥 운동·언론 운동 등을 일으켜 개화와 자주라는 구호 아래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40년 간은 한국인의 의식과 사상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고, 이러한 변화는 수도인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정치·군사·경제·교육·문화·종교의 중심지로 의식되었는데, 이러한 민중의식은 당시의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거나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만 가면 그만이다.” 라는 속담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쓰던 말이다. 이러한 속담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진출의 목표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은 교육을 받고 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지체가 높은 곳이고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평안도나 함경도에서조차도 서울 갈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고 한 표현에서 지체 높은 곳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울은 낭떠러지라 과천에서부터 기어간다.”라든가 “서울이 무섭다니까 새재부터 기어간다.”라는 속담은 지방 사람이 서울 나들이에 공포증을 가지는 것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순라군에게 붙잡히면 억울하게 당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방학중과 순라군』이라는 소설에서 “순라군에게 잡히면 두들겨 맞기만 한다.”는 표현은 순라군의 횡포를 묘사한 것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자, 이를 비유해 “서울에서 매맞고, 송도에 가서 주먹질 한다.”라든가, “종루에서 뺨맞고 한강가서 눈흘긴다.”는 속담이 유포되었다. 서울은 상업이 발달해 지방 사람은 서울에 오면 많이 속았다. 이에서 연유해 “시골깍쟁이 서울 곰만 못하다.”, “서울은 눈뜨고 코베가는 곳”이라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지방처럼 인심이 후하지 않고 각박하다는 뜻에서 “서울 인심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약삭빠른 서울 사람을 일컬어 ‘서울 까투리’라 부르고, “서울 까투리가 시골 의뭉이에게 속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조선시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서울에 가려면 한 달 이상이나 걸어야 했다. 이러한 장거리에 신고 갈 짚신도 준비해야 하고, 의복과 식량도 짊어지고 와야 했음으로 서울에 한번 가려면 짐꾸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라도 불필요한 것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던 까닭에 “서울 가는 놈이 눈썹빼고 간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서울은 시골 사람이 가서 살고 싶은 곳이었다. 이는 “사는 곳이 서울이다.”, “내 집이 서울이다.”, “살아 정들면 서울이다.”라는 속담에서 서울 지향적인 의식을 살필 수 있다. 또, 서울에 나들이를 한 번 한 사람은 시골에 가서 허풍을 대단히 떠는 사람을 비유해 “서울 가본 놈하고 안 가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인구가 많았던 관계로 여러 면에서 복잡했다. “서울 가서 김서방 찾기.”라든가, “광주(廣州)생원 첫 서울이다.”라는 속담은 서울의 복잡함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복잡한 서울에 살다 보니 서울 사람은 시골 물정에 대단히 어두웠다.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는 속담은 이를 비유한 말이다. 서울은 시골에 대비되어 도시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었는데, 서울과 시골은 서로 이해가 상반되는 의식을 보통 사람들이 가졌으면서도 시골 사람들에게 서울은 선망의 도시로 동경됐다. 민족항일기의 서울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한국인의 서울에 대한 의식 중 일부는 원한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빼앗기게 한 장본인이 거처한 경복궁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조선 왕조를 원망했을 것이고, 한국 민족을 착취하고 무단으로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를 쳐다보고는 독립 의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이를 폭파해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의식이 있는 사람은 민족항일기에 교육을 받으면 일본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 하여 교육을 기피했다. 이 시기 서울의 거리와 동 이름은 일본식으로 명명되어 정(町)·정목(丁目) 등으로 붙여졌고, 일본식 가옥도 많이 지어졌다. 서울을 빼앗긴 한국인은 1919년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 운동을 총지휘했다. 광복 후의 서울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서울은 국제적인 관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8월 15일 서울헌장이 공포되고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나 지방의 각 도와 마찬가지로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다가 1962년 수도 서울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수도를 잠시 부산으로 옮겼다가 몇 개월 만에 다시 환도했으나, 이때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1870년대 이후 40여 년의 변화가 문화적·정신적인 면에서 극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1950년대 이후 최근 40여 년의 변화는 물질적·외형적인 면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엄청난 변화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말처럼 40년 간에 서울 인구는 10 배 이상 증가했다. 제주도 면적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면적을 가진 서울에 인구는 1000여 만 명 이상으로 전국민의 4분의 1이 살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전철도 만원이고 병원·예식장도 만원이고 공동묘지도 만원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가난하면 서울에 가라.’든가, ‘서울에 가야 출세할 수 있다.’는 일화에서처럼 지방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서울 지향적인 사고 방식은 서울이 비대화된 중요한 심리적인 이유이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사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심리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요인이 보다 중요한 것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40여 년 간 대통령 중심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유지되어왔으며 한국 자본의 60%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고, 굴지의 금융 기관, 대재벌의 본사가 모두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명문 대학이 서울에 있으며 자식을 명문 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의 욕구가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서울은 모든 생활면에서 한국의 중심이 되었고 교통·통신망은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뻗어졌다. 서울이 만원이라는 것은 지방에서 업무로 일시 올라오는 사람과 서울 근교와 직접 닿은 인천광역시·과천시·성남시·광명시·부천시·안양시·의정부시·고양시·하남시·구리시 등의 사람들이 서울에 자주 내왕함으로써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둘째, 서울의 시가지가 크게 변모했다. 광복 직후는 5층의 화신건물이 제일 높은 빌딩이었으나 이제는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세워져 빌딩 숲을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도로망이 바둑판 모양이었으나 서울이 강남·강동·강서 쪽으로 확장되면서 크게 볼 때 방사선 형태로 변했다. 광복 직후 좁았던 도로가 크게 확장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서울의 도로는 차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교통난은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도로 가운데를 달리던 느린 전차와 선로가 철거되고, 이제는 지하철이 시민들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옛날의 서울에 처음 온 시골 사람이 어리둥절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셋째, 옛날 서울이 가졌던 자연지형적 의미가 상실되었다.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너려면 한강교가 유일한 다리였고, 뚝섬·노들(노량)·용산·삼개(마포)·양화진에 나룻배가 있어 배를 타고 건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강이 가지는 방어선으로서의 구실은 대단했다. 1950년 6·2전쟁 때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을 건너는 교량이 13개나 되어 나룻배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고 한강은 이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서울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또한, 중앙으로 흘렀던 청계천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완전히 복개되고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생겼다. 따라서 그 위를 지나면서도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 맑은 물이 흘렀던 청계천은 이제 하수구로서의 구실을 할뿐이다. 또한, 인왕산과 낙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설명했던 풍수지리설도 이제 적용될 수 없게 되었다. 낙산 위에 주택이 가득 들어섰으며 인왕산에는 터널을 뚫어 지맥이 끊어졌다. 서울의 안산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남산은 이제 세 개의 터널이 뚫려 더 이상 안산이 아니라 중앙에 있는 언덕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예전에 성문 안만을 서울이라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광복 이전만 해도 섬으로서 존재했던 여의도와 밤섬도 이제는 섬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확대된 서울의 방어 전략을 서울의 지형에서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넷째, 서울의 전통적인 생활 풍습과 풍속이 점차 쇠퇴되고 서양화되었다. 8·15광복 직후만 해도 혼인식에서 신랑은 사모관대하고, 신부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혼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예식장에서 30분 내외에 끝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고, 음식과 주거 생활에서도 서양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식생활에서는 아직도 쌀밥과 김치·된장찌개 등의 전통 음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어린이들은 이보다 양식을 즐겨먹는 성향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주거 생활은 아파트가 크게 늘어나면서 부부 중심의 생활로 핵가족화하고 있다. 자식이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 생활 기반을 가진 경우 노부모들이 서울에 오면 갑갑하고 답답해 곧바로 내려가는 경향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식 둘 낳기 운동을 벌인 가족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가족 성원도 축소되어 핵가족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결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 여성은 집에서 밥 짓고 아기 기르는 일을 하던 옛날의 여성과는 크게 달라졌다. 여성도 직업 사회에 뛰어들어 사회 활동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 습속의 서양화를 급속히 촉진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를 들 수 있다. 도시에는 교회 건물이 모든 구역마다 있고, 교직자와 신도의 수적인 면에서도 한국 제일의 종교가 되었다. 비록, 통계 수치에 있어서는 기독교세가 불교와 대등한 비율을 보이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기독교가 우세한 편임은 상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은 제사와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함으로써 전통적인 생활 습속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오직 남아 있는 습속이라면 음력 정월과 8월 보름 한가위 명절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절에도 전통적인 유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다섯째, 서울은 이제 한국의 도시로만 아니라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1947년 서윤복(徐崙福)이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 미국 시민들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서울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1949년까지만 해도 서울에 두·세 개밖에 없었던 댄스홀에는 한국인 단독 입장이 금지되었고 미국 군인이나 외국인과 동행해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1950년 6·25로 한국과 서울이 외국에 알려졌으나 이때의 서울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로 빈곤한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1970년 이후의 급성장한 경제력은 해외에 한국 상품을 수출하고 해외 건설에 나섬으로써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한국과 서울이 알려졌고, 1986년에 치른 아시아경기 대회는 서울의 명성이 아시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질서정연한 입장, 공평한 응원 태도, 거기에 중국과 금메달 수에서 1위를 다툰 좋은 성적 등은 한국 민족의 저력이 왕성함을 우리 자신들에게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예견하게 했다. 더구나, 굳게 닫혀 있던 중국에 경기 실황이 중계됨으로써 인구 10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발전상을 새로이 인식시켰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대회 개최는 서울의 국제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훌륭한 호텔이 지어졌고, 우수한 경기장, 훌륭한 경기 운영과 경기 결과는 한국과 서울을 세계에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섯째, 서울은 교육의 도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서울 인구의 4분의 1이 학생이므로 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인구를 살핀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사회 교육까지 합친다면 교육 인구는 서울 총인구의 절반 가량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의 교육 수준이 전국적으로 제일 높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문 대학이 서울에 몰려 있어 매 년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입학과 동시에 서울의 시민이 되는 것이 예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취업을 주로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나라가 여러 부문에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다. 교육받은 우수한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저력이다. 한국 교육이 이처럼 왕성한 것은 부모들이 교육을 출세의 기초라고 믿어온 데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적 전통이며, 오늘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모든 희생을 바친다. 따라서, 교육에 쏟는 한국인의 정열은 불길과 같다. 이러한 교육의 힘은 서울, 나아가서는 한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값진 원천이며, 현대 한국의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다.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근본도 교육에 있다고 한국인은 믿는다. 교육은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중심인 서울은 한국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한국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서울을 깨끗하고 명랑하며, 아름답게 전진하는 희망에 찬 도시로 키워나가는 것은 곧바로 한국을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비대화는 상대적으로 지방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앞으로는 서울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시책이 강구되어 전국의 어느 곳이나 균등한 발전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자연 환경은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매일 쏟아내는 자동차의 매연은 여름에 오존 경보가 울리며, 서울의 상수도인 한강은 이미 폐수가 흘러 들어와 오염되었고, 식수로 이용하기 어려운 정도이며, 서울의 공원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자동차의 급증으로 소방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화재를 당하면 소방차가 출동할 수 없도록 길이 차로 막혀 있으며, 생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그리고 서울에는 재개발 구역이라고 하는 낙후된 집들이 꽉 차 있는 곳이 많다. 이제 서울은 도시 계획을 하기에는 너무나 비대해졌다. 1997년 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체제로 들어가 경제와 산업의 구조 조정이 일어나고 1998년 6월 현재 150만에 달하는 실업 인구가 생겨 가정을 잃은 노숙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경기의 침체는 처음으로 서울인구의 감소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자연 환경을 복구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는 없다. 또한 서울이 축소되지 않고는 엄청난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도도 없다. 서울의 도시 계획은 장기적인 전망 하에 종합적으로 세워져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아일보』(1994년, 1월∼12월, 매주 월요일 기사) 『조선시대 한성부연구』(원영환, 강원대학교출판부, 1990) 『한양오백년가사』(신영길, 범우사, 1985) 『서울시통계연보』1∼9(서울특별시기획관리실, 1977∼1985) 『서울육백년사』1∼5(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71∼1981) 『한국통계연감』1∼10(한국기획원, 1953∼1982)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조동일,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1979) 『제주도민요연구』상(김영돈, 일조각, 1977) 「서울문화의 종교적 의미」(김종서, 정신문화연구, 1986 겨울호.) 관련이미지 5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특별시 [네이버 지식백과]서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서울, 높고 신령스러운 큰 마을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한 줄기가 남쪽으로 500~600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이르러 자잘한 산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우뚝이 솟아올라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을 향해 가면서 잠시 끊어지는 듯하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현재의 북한산) 백운대가 되었다. 삼각산1)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되었다. 여기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 백악산이 되었다. 백악산을 보고 형가(刑家)는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의 형국으로 궁성(宮城)의 주산(主山)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ㆍ남ㆍ북쪽으로 모두 큰 강이 둘렸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의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얽혀 있어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알려져 있다. 옛날 신라 때의 승려 도선의 『유기(留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왕씨를 이어 임금 될 사람은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 그런 연유 때문에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터를 잡아 오얏나무(李)를 심어놓고 무성하게 자라면 잘라서 왕성한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날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 무학(無學)을 시켜 도읍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 세 곳 맥이 합쳐져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터로 정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고려 때 오얏을 심던 곳이었다. 용출봉과 의상 © 이승태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서울에 대한 기록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45.6킬로미터, 신의주까지는 496.5킬로미터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약 500킬로미터 거리 안에 있다. 동쪽은 구리시와 하남시, 서쪽은 부천시와 인천광역시와 김포시, 남쪽은 광명시와 안양시, 과천시, 성남시, 북쪽은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 남양주시에 인접해 있다. 서울이라는 말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 등으로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 백제 말기에는 수도인 부여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통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으며, ‘울’은 벌, 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서울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고 도는 거느린다, 번성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나라의 수도로서 점진적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어 주변에 수많은 위성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인구 또한 고도로 밀집하여 세계에서도 몇째 안 가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높고 신령스러운 큰 마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   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도읍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다. ‘서울’의 본래 뜻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서(徐), 서나(徐那), 서라(徐羅)는 높고〔高〕 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 ‘솔’, ‘솟’의 음사(音寫)이고, 벌(伐)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벌’의 음사이다. 따라서 ‘서울’, 즉 서벌, 서나벌, 서라벌은 상읍(上邑) 혹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이라는 말은 약 1,900살이 된다. ​ 그러나 오늘날의 서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일제가 쫓겨가고, 경성을 ‘서울’이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었다
2669    [별의별] - 치마 입고 돈 벌자... 댓글:  조회:3521  추천:0  2019-05-31
치마 입고 출근하면 추가 수당…어느 나라?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2019-05-31            타타르스탄 위치도 - 네이버 갈무리 러시아의 알루미늄 생산업체인 타트프로프가 한 달 간 여성스러움 촉진 운동을 펼친다며 치마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으로 출근하는 여직원들에게 하루 100루블(1835원)을 추가 수당으로 지불한다고 밝혀 인터넷상에서 거센 비난을 사고 있다고 AFP 통신이 30일 보도했다. 회사가 내건 이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회사에 제시하면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의 누리꾼들은 이에 대해 "중세 암흑기에나 있을 법한 일" "타트프로프의 남성 경영진에게 화장을 해주겠다"고 조롱하는 글을 올리며 회사의 조치를 맹비난하고 있다. 러시아연방 내 자치공화국인 타타르스탄공화국에 있는 타트프로프사는 누리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직장 내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타트프로프는 “6월 말까지 한 달 동안 이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회사 홍보 부서의 아나스타시아 키릴로바는 "전 직원의 70%가 남성인 회사에서 이번 조치는 여직원들이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직장 분위기를 밝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2668    [이런저런] - 245g = 엄지공주 댓글:  조회:3158  추천:0  2019-05-31
사과만큼 작은 아기…245g 엄지공주 무사히 퇴원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2019-05-31          갓 태어났을 때의 아이 - BBC 화면 갈무리 5개월 후 아이 - BBC 화면 갈무리 태어날 때 사과무게에 해당하는 245g으로 태어난 아이가 생존에 성공,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아이로 태어난 기록을 경신했다고 영국의 BBC가 31일 보도했다. 지난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샤프 메리 버치 병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임신 23주에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245g에 불과했다.   생후 그는 이 병원의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적정한 체중이 될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이후 5개월이 지나자 그는 몸무게가 2.5kg까지 불어 최근 퇴원할 수 있게 됐다.    병원 의료진은 가장 작게 태어난 인류로 기네스북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이름은 세이비로 여아라고 BBC는 전했다.  ========================/// 체중 245g의 세계 최소 미숙아, 다섯달만에 2㎏으로...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몸무게 245g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미숙아로 추정되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었다고 샌디에이고의 샤프 메리 버치 산부인과 병원이 29일(현지시간) 밝혔다. 245g은 사과 1개의 무게 정도이다. 이 아이는 임신 23주3일만에 지난해 12월 태어났다. 당시 출산을 도운 의사는 아기 아버지에게 아기가 살지 못하고 1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아기는 의사의 얘기와 달리 살아남았다. 5개월이 넘게 집중치료실의 인큐베이터에서 지낸 그녀는 지금 몸무게 2㎏의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병원은 여아의 가족들이 이 같은 사실을 공포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익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여아는 간호사들이 불렀던 ‘세이비’라는 별명으로 공개됐다. 아이오와 대학의 에드워드 벨 박사는 세이비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작은 미숙아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더 작은 미숙아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AP 통신에 보낸 이메일에서 덧붙였다. 세이비 이전에 가장 작은 미숙아로 기록된 아이는 지난 2015년 독일에서 태어난 252g의 아이로 불과 7g 더 무거웠을 뿐이다.   세이비의 어머니는 당시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고 혈압이 급속히 치솟는 자간전증(임신중독의 일종) 진단을 받고 서둘러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또 의사로부터 아기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아기는 살아남았다고 덧붙였다. 임신 28주가 못 돼 태어나는 초극소미숙아는 대부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살아남더라도 시력이나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산모와 신생아 건강을 지원하는 비영리기구 ‘마치 오브 다임’의 미셸 클링은 말했다. 세이비는 그러나 지금까지는 시력이나 청력 모두 정상적이다. 샤프 메리 버치 산부인과 병원의 간호사 킴 노비는 “세이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샌디에이고(미 캘리포니아주)=AP/뉴시스】
266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두산연구",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84  추천:0  2019-05-31
백두산 화산은 지금 ‘폭풍전야’ 신문2019.05.3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영국서 한·영 리서치 컨퍼런스 북한 과학자 “지진 감소, 심상찮다” 백두산 천지는 화산 꼭대기에 물이 들어차 만들어진 전형적인 칼데라 호수다. [중앙포토] “2016~2018년까지 백두산 주변에서 총 10회의 지진이 발생했다. (백두산 주변) 지하의 민감도가 증가하고 있다”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한 북한 지진 당국자의 말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영국 왕립학회는 29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밀턴케인즈에서 제4회 한·영 리서치 컨퍼런스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북한과 영국의 지질학자들은 백두산의 이상 동향에 대해 일제히 큰 우려를 나타냈다.  ㆍ한·영 리서치 콘퍼런스서 지질학자들, 이상 동향 우려 29일(현지시간) 영국 밀턴케인스에서 개최된 한·영 리서치 콘퍼런스에서 백두산 지진 관련 회의가 열리고 있다. 밀턴케인스(영국) | 공동취재단특히 이번 행사에는 이례적으로 북한의 과학자가 직접 백두산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김혁 북한 지진청 분과장은 이 자리에서 최근 2년간 백두산 인근에서 총 10회의 지진이 발생한 사실을 언급하며, 백두산 주변 지질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분과장은 이에 따라 “땅속의 밀도·중력·자기장 변화 등을 면밀히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마지막으로 백두산이 대규모 분출을 일으킨 946년에는 화산재가 일본 북부 홋카이도까지 날아가 5㎝ 두께로 쌓인 것을 거론하며 백두산 화산 폭발의 심각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대규모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해당 분야에 관해 영국 과학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과 협력 연구를 진행한 영국 측 관계자는 2015년 북한이 백두산 관련 관측 자료를 다수 제공한 사실을 언급하며 “북한이 수십 년간 쌓아 놓은 자료를 얻었다”고 밝혔다.  영국 과학계 또한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전했다. 제임스 해먼드 버벡대 지구·행성과학부 교수는 영국 과학계 측 발표자로 나서 “2006년부터 (백두산 인근에서 발생한) 지진 횟수가 갑자기 줄었다”면서 “그 원인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2002~2005년까지 백두산 주변에서는 총 3000회 이상 지진이 일어났지만, 그 빈도가 돌연 급감해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두산 화산 전문가인 윤성효 부산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화산이 폭발하기 전 징조 중 하나가 맥박이 뛰듯 지진이 잦았다가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라며 “백두산은 지금 폭풍전야나 마찬가지”라고 분석했다.  백두산 정상의 천지가 일으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영국 과학계는 경고했다. 백두산이 분화하면 뜨거운 화산재나 마그마가 천지의 물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때 수증기가 급격히 발생해 대규모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미 도너번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는 “1995년 뉴질랜드, 2010년 아이슬란드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백두산 화산 분출 시 천지의 물이 일으킬 수 있는 홍수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영국 연구진은 천지의 물이 분화에 의한 충격으로 산기슭을 덮칠 경우 큰 홍수가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밀턴케인즈(영국)=공동취재단, 허정원 기자 
266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관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35  추천:0  2019-05-30
PICK 안내 벽지 뜯으니 보물이··· 25년 전 도둑맞은 '만국전도' 찾았다 신2019.05.30.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함양 박씨 소장했던 서양식 지도 컬러로 채색, 북아미리가 표시도 절도 시효 지나 판매하려다 덜미 양녕대군 ‘숭례문’ 목판도 되찾아 양녕대군의 글씨가 담긴 숭례문 목판을 되찾은 소감을 말하는 양녕대군 20대손 이종빈씨. 2008년 화재 후 숭례문을 복구할 때는 탁본(오른쪽)이 사용됐다. 이번에 찾아낸 건 해당 탁본과 똑같이 제작해 보관하던 목판 2점(가운데).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는 조선 현종 때(1661년)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서양식 세계지도다. 현대 지도와 똑같은 배치로 5대양 6대주를 표현하고 남북회귀선 등 서양식 지도표기법을 대부분 따랐다.  이 전도는 1994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함양 박씨 문중에서 도난당한 뒤 25년간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만국전도가 시장에 매물로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난해 하반기 관련 첩보를 입수한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은 경찰과 함께 수사에 착수했다.  양녕대군이 쓴 ‘후적벽부’ 목판 마지막엔 ‘숭례문 목판과 함께 지덕사에 보관 중인 후적벽부를 중각해 몽한각에 보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붉은 네모 부분은 ‘숭례문’ ‘새기다’ ‘지덕사’ ‘몽한각’ 단어들. [김정연 기자] 경찰과 문화재청 단속반은 지난해 11월 만국전도를 팔려고 시도했던 A씨(50)의 경북 안동시 주거지 압수수색에 나섰다. 경찰과 문화재청 담당자가 “그 지도가 얼마나 귀한 건지 알지 않느냐”며 4시간 넘게 설득한 끝에 A씨는 벽지 속에 숨긴 만국전도를 내줬다. 두 번 접혀 보관돼 있던 전도는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고 모서리가 닳는 등 훼손된 상태였다. 문화재청은 만국전도를 가져와 2주에 걸쳐 임시 보수작업을 했다.  도둑맞았던 만국전도와 양녕대군(1394~1462)의 ‘숭례문’ 현판 글씨가 담긴 목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이 벽지 뒤에서 찾은 만국전도. 두 번 접어 보관해 손상이 있었으나 문화재청이 회수 후 복원했다.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와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은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A씨와 B씨(70)를 각각 입건하고 만국전도와 숭례문 목판, 양녕대군 초서(흘림체로 된 한자체) 목판 4점 등 문화재 총 123점을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거래 불가능한 도난 문화재임을 알고 ‘절도’의 공소시효인 10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린 것으로 보이지만 문화재보호법 위반(문화재 은닉)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만국전도는 서양 선교사 알레니가 들여온 소형 세계지도를 본떠 확대해 그린 것으로, 국내 민간에서 필사된 세계지도 계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아미리가’ ‘홍해’ ‘대서양’ 등의 명칭을 한자로 표기하고 땅은 붉은색 계열로 대륙별로 다르게 칠했다. 바다는 푸른색으로 칠하고 물결을 그려 넣기도 했다. 김 위원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숭례문’ 목판과 양녕대군의 초서체 글씨가 담긴 ‘후적벽부’ 목판은 2008년 전남 담양에 있는 양녕대군 후손의 재실인 ‘몽한각’에서 도난당했다. 경찰과 문화재청은 2017년 10월 ‘숭례문 목판과 양녕대군 초서 목판이 경매에 나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해 2017년 11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B씨의 비닐하우스에 쌓여 있는 목판을 발견했다. 숭례문 목판 2점,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가’ 목판 4점은 다행히 크게 훼손된 곳이 없었다.  숭례문 목판은 2008년 불에 탄 숭례문 복원 때 쓰인 현판 글씨가 담긴 목판이다. 복원 당시에 사용된 건 서울 동작구 양녕대군 묘인 지덕사에 보관돼 있던 탁본이다.  정제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이 목판은 숭례문 서체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양녕대군 16대손인 이승봉(40)씨는 “몇 년 동안 올해는 돌아올까 애태웠고 해외로 유출됐을까 걱정도 했는데 이를 찾아준 문화재청과 경찰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266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아예 "국제자연문화공원" 만들기 댓글:  조회:4078  추천:0  2019-05-19
DMZ 문화유산, ‘토지 소유권 분쟁’ 없을 때 문화재 지정 서둘러야 신 2019.05.1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궁예 궁궐 ‘태봉국 철원성’ 일부 흔적 남아 남북 공동조사 1순위 ㆍ군마 조련 ‘중어성’·조선군 집단무덤 ‘전골총’ 등도 주목받아 ㆍ비무장지대 땅 78% 소유자 불명, 언제든지 ‘다툼’ 불거질 우려 강원도 철원 남방한계선에서 바라본 태봉국 도성 동벽의 흔적. 휴전선과 경원선 철로가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태봉국 철원성, 중어성, 전골총, 매두분, 승양산성. 지난해 4월27일 남북한 정상의 ‘판문점 선언’ 이후 문화유산계가 소망하는 남북공동조사사업 ‘버킷리스트’는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문화유산 공동조사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 이후 남북교류 전반에 제동이 걸렸지만 남북한 발굴팀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공동 조사하는 모습만큼 확실한 평화의 메시지는 없다. 비무장지대의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도 1순위는 태봉국 도성이다. 외곽성 12.5㎞, 내곽성 7.7㎞에 이르는 태봉국 철원성은 궁예(재위 901~918)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를 꿈꾸며 조성한 궁궐이다.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에서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 진다’는 뜻이고, ‘봉(封)’은 ‘봉토’를 일컫는다. 훗날 폭군으로 전락했지만 궁예의 초심은 ‘천지와 상하가 하나가 되는 나라의 건국’이었다. 70여년간 냉전·분단·전쟁이라는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되풀이한 남북한이 ‘크고 하나된 나라’를 꿈꾼 궁예의 초심을 기억해내는 데 태봉국 철원성의 공동발굴사업은 제격이 아닐 수 없다. 통일부와 국방부, 문화재청 등 정부 관계부처들 모두 태봉국 철원성 조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철원성 중에서도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군인통행로에서 관측할 수 있는 동남쪽의 회절부(꺾이는 구간)를 주목하고 있다. 철원성을 수차례 답사한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은 “그것이 성벽의 흔적이며, 동남쪽 부분에 문의 흔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짙다”고 설명했다. 성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외성 동벽도 조사 대상이다.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하단의 폭은 4~7m, 높이는 1.2m 정도 남아 있다. 이재 원장은 “철원국 궁예성의 성벽 중 동벽 구간이 가장 잘 남아 있으며 육안으로도 약 15m 정도 확인됐다”고 전했다. 발굴조사의 효용성 측면에서는 으뜸 지역으로 꼽힌다. 궁예가 군마를 키우던 ‘마성’으로 추정되는 철원 중어성. 태봉국 철원성에서 서쪽으로 12㎞ 떨어져 있다. 이재 국방문화재연구원장 제공 궁예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문화재청이 지난 2008년에 이어 최근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한 철원 중어성이 있다. 중어성은 유해발굴 지역인 철원의 비무장지대 화살머리고지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뢰 때문에 먼발치에서 육안으로 재차 확인한 결과 성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석렬(정렬된 돌무더기)이 관측됐다. 이 지역에 연고를 둔 1세대 주민들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와 관계가 있는 성”이라고 말한다. 궁예가 군마들을 조련하려고 축조한 마성(馬城)이라는 것이다. 중어성은 철원성에서 서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있다. 역시 비무장지대 이북인 경기 연천 신서면의 성산(해발 290m)에 쌓은 승양산성 역시 궁예 이야기가 구전되는 곳이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할 때 축조했다는 것이다. 강원도 철원 김화 성재산 기슭에 있는 ‘전(傳) 전골총’. 병자호란 때 전사한 조선군 1000여명의 유골을 합장한 집단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강원 철원 김화의 성재산(해발 463m)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전(傳) 전골총’도 조사가 필요하다. 전골총은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2대 승첩지로 꼽히는 김화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 1000여구를 모아 조성한 집단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1645년(인조 23년) 격전장 부근 6~7곳에 가매장했던 전사자 유해를 김화현령 안응창(1603~1680)이 한곳에 모아 묻은 뒤 해마다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다만 이곳이 진짜 전골총인지는 더 확인해야 한다. ‘전(傳)’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는 이유다. 또한 예부터 함경도와 강원도를 이어준 강원 김화읍 소이산 봉수대(해발 597m)와, 황해도와 경기도를 이은 파주 도라산 봉수대도 비무장지대 내부의 문화유산이다. 1910~1914년 만들어진 총연장 223㎞ 경원선 철도는 비무장지대 일대에서 끊어졌다. 현재 경원선의 흔적만이 태봉국 철원성을 횡단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정상화하면 제일 먼저 복원되어야 할 철도다.  1926년 철원을 시발점으로 해서 종착역인 내금강까지 부설한 총연장 116.6㎞의 금강산 철도 역시 끊겨 있다. 원래는 강원 창도에서 생산되는 유화철을 흥남제련소를 거쳐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1차로 부설했다. 나중에는 철원~김화 학생들의 통학과 금강산 수학여행에 이용된 전기철도였다. 비무장지대 내부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조사해야 빛이 날 문화유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다만 언제, 어느 곳에 묻어놨는지 모를 지뢰가 조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지뢰제거를 하다 자칫 땅속 유구를 파괴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문화교류만큼은 변수 없이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한다는 남북한 간 신뢰다. 비무장지대 일원 토지에 향후 분쟁의 소지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과제다. 2004년 법제처 자료에 따르면 파주·연천 지역 비무장지대 내부 토지의 경우 국유지는 단 6%에 불과하고 사유지는 16%에 이른다. 나머지 78%는 아예 소유자 불명이다. 여건이 좋아지면 언제든지 소유권 분쟁이 불거질 수 있다.  재산권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비무장지대 일대의 문화유산과 관련해서 국보와 보물, 사적과 명승, 천연기념물, 그린벨트 등으로 지정할 것은 지정하고, 정비해야 할 것은 정비해야 한다. 지금은 ‘호미’로 막을 수 있지만, 자칫하면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비무장지대 일원을 유네스코 복합(문화+자연) 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갖고 있는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을 활용해서 조사하고 보존할 곳을 빨리 가려내야 한다. /이기환 선임기자 
266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반달곰"아, 잘 자라거라... 댓글:  조회:4221  추천:0  2019-05-19
반달가슴곰 인공수정 연속 성공… 야생에서도 새끼 태어나  2019.05.19.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지난해 이어 새끼 3마리 출산 야생 새끼도 4마리 태어나… 지리산 등에 64마리 서식 추정 인공수정 반달가슴곰 임신진단. (사진=환경부) [이데일리 박일경 기자]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공단은 지난해 2월 인공수정으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반달가슴곰 새끼 2마리를 출산한 데 이어 올해 1월에도 인공수정으로 새끼 3마리가 태어났다고 19일 밝혔다. 국립공원공단은 지리산 반달가슴곰 개체군의 유전적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인공수정 연구를 진행했으며 올해 태어난 새끼들은 지난해 6월과 7월에 전남 구례군 종복원기술원 증식장에 있는 5마리의 암컷 곰을 대상으로 인공수정을 시행한 결과다. 인공수정 이후 올해 1월 어미 2마리가 각각 새끼 1마리(암컷)와 2마리(수컷 1, 암컷 1)를 출산했다. 국립공원공단은 그동안 쌓아온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2년 연속 인공수정에 성공해 앞으로 반달가슴곰의 유전적 다양성을 증진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동면 중 인공수정 새끼 출산. (사진=환경부) 아울러 지리산 야생에서는 3마리 어미곰이 각각 새끼 1마리(수컷), 2마리(수컷), 1마리(성별 미확인)등 총 4마리를 낳은 것이 지난달 확인됐다. 이로써 현재까지 지리산 및 수도산 일대에 살고 있는 야생 반달가슴곰의 총 개체 수는 올해 태어난 개체 4마리를 더하고 올해 자연사로 보이는 2마리를 빼면 64마리로 추정된다. 죽은 2마리는 모두 수컷 곰이며 국립공원공단 연구진이 올해 4월 중순과 5월 중순경 지리산 일대에서 이들 곰의 폐사체를 확인했다. 죽은 수컷곰 1마리는 러시아에서 들여와 지난해 11월 지리산에 방사한 개체이며 나머지 수컷 곰 1마리는 지난해 2월 암컷이 인공수정을 통해 낳은 개체로 그해 10월에 방사했다. 연구진이 죽은 수컷 곰 2마리의 발견 장소 주변과 활동 지역을 조사한 결과 올무 등 불법행위로 인한 폐사 흔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들 곰이 동면에서 깨어난 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동면 후 인공수정 새끼 건강검진. (사진=환경부) 강재구 국립공원공단 종복원기술원장은 “이번 인공수정으로 출생한 새끼 곰들은 야생 적응훈련을 거친 후 올해 가을께 방사 예정”이라며 “인공수정을 통한 개체 보충으로 유전적으로 다양한 야생개체군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경 
2663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대의 담수어= 피라루쿠 댓글:  조회:5046  추천:0  2019-05-18
두산백과 피라루쿠   [ pirarucu음성듣기 ] 요약 경골어류 오스테오글로숨목 오스테오글로시과의 담수어. 이미지 크게보기 피라루쿠(Arapaima gigas) 학명 Arapaima gigas 계 동물 문 척삭동물 강 경골어류 목 오스테오글로숨목 과 오스테오글로시과 멸종위기등급 정보부족(DD : Data Deficient, 출처 : IUCN) 크기 최대 5m 몸의 빛깔 붉은색 생식 난생 산란시기 1~5월 서식장소 라틴아메리카 아마존강 유역 분포지역 아마존강·오리노코강 세계 최대의 담수어로, 몸길이는 3~5m, 몸무게는 200㎏에 달한다. 그러나 아마존강에서 잡히는 피라루쿠의 몸길이는 보통 큰 것이 1.25(40㎏)~2.5m(100㎏)로, 5m짜리는 거의 보기 힘들다. 피라루쿠의 피라는 현지어로 물고기를 뜻하고, 아루쿠(arucu)는 붉은 열매를 맺는 식물 이름으로, 이 둘을 합성한 것이 피라루쿠이다. 즉 붉은 물고기라는 뜻이다. 기아나에서는 아라파이마라고 한다. 몸통은 전체적으로 약간 둥근 원통꼴이지만, 뒤로 갈수록 세로로 넓적해지면서 높이도 낮아진다. 머리는 가로로 넓적하며 낮다. 입은 크고, 아래턱이 조금 튀어나와 있다. 빛깔은 머리쪽이 옅은 녹색을 띠는 것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붉다. 특히 꼬리 쪽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져, 꼬리지느러미에 이르면 붉은색으로 반짝인다. 비늘에는 붉은 얼룩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공기를 들이마신 뒤, 목뒤에 붙어 있는 큰 부레에 공기를 모아 공기호흡을 한다. 산란기는 1~5월이며, 특히 4~5월에 집중적으로 알을 낳는다. 번식기가 되면 암컷은 어두운 갈색을 띠고, 수컷은 머리가 검어지면서 꼬리가 아주 짙은 붉은색으로 변한다. 우기에 얕은 물가로 나와 지름 50㎝, 깊이 20㎝ 정도의 큰 구멍을 파고 18만여 개에 달하는 알을 여러 번에 걸쳐 낳는다. 5일이면 부화하고, 치어는 암수가 함께 보호한다. 산지에서는 중요한 식용자원이지만, 남획으로 인해 많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1973년 3월 채택된 워싱턴협약부속서 규정에 따라 지금은 국제거래가 규제되고 있다. 크기가 아주 크고, 생김새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도 인기가 있지만, 값이 너무 비싸 대형 수족관에서나 볼 수 있다. 아마존강·오리노코강과 기아나 등 라틴아메리카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라루쿠 [pirarucu] (두산백과)  
266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사라져가던 물고기가 돌아오다... 댓글:  조회:3402  추천:0  2019-05-18
길이 5m·무게 200㎏, 거대 물고기가 돌아왔다 (ZOGLO) 2019년5월16일  멸종 위기에 처했던 담수어 피라루쿠가 브라질 아마존 강에 다시 돌아왔다고 14일(현지시간) AFP 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브라질 마미라우아 지속가능발전 연구소의 복원 작업의 성과로 아마존 강과 호수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던 피라루쿠의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아마존의 대구'로 불리는 피라루쿠는 최대 3~5m까지 자라고 이때 몸무게는 200kg에 이른다.  이처럼 큰 몸집 때문에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의 한 때 이 물고기를 식량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무분별한 남획으로 개최 수가 현격히 줄어 지금은 국제거래 규제 어종이 됐다. 현지 사람들은 이 물고기의 몸에 난 붉은 색이 있어' 붉은 물고기'라고도 부른다.  공기주머니 역할을 하는 부레를 가지고 있는 피라루쿠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20분마다 호흡을 한다. 이런 습성 때문에 어부들에게 쉽게 포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2661    "연변말은 곧 조선족에게는 표준어이다"... 하지만... 댓글:  조회:3507  추천:0  2019-05-17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는 연변말을 보며 /김부용 2019년 05월 17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인천대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조교수 김부용 인간이 살아가면서 빠질 수 없는 것중 하나가 바로 언어일 것이다. 언어는 사유와 소통의 도구이자 내용이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치밀한 사유가 가능하고 타인과 세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언어가 없는 삶을 상상해보라.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와 기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도 불가능상태가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넬 수 없고, 배고프다는 의사표현도 정확히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는 특정 지역,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며 인간은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얼마전 우연히 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조선말이 금지되여 점점 사라져가던 1940년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의 말을 모으는 ‘말모이’사전을 만드는 내용이였다. 독립이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감명 깊은 영화였다. 이렇듯 언어는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데, 오늘날의 연변말을 돌아보면 정체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하다싶이 연변말이라 함은 중국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언어로, 함경도의 방언이 가장 밑바탕이 되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시대에 걸쳐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함경도 출신들은 두만강 건너편인 길림성으로, 평안도 출신들은 압록강 건너편인 료녕성으로, 그리고 경상도 출신들은 흑룡강성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길림성 연변지역에서는 함경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있다. 여기에 조선의 표준어인 평양어 그리고 중국어가 적절히 융합되면서 연변지역만의 고유한 언어가 탄생하게 되였다. 대표적인 연변말로 ‘일없슴다’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괜찮다(没事儿)’라는 의미의 중국어표현을 그대로 직역한 것에 함경도 종결어미인 ‘습구마’ 대신 연변식 개신형 어미인 ‘슴다’가 붙여진 것이다.  연변말은 누군가에게는 촌스러운 사투리로 들릴지도 모르나 조선족에게는 곧 표준어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조선족중심지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조선족을 말하면 제일 먼저 연변이란 지역과 연변말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연변말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가면서 TV에서도, 라지오에서도 서울말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글도 서울식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세는 서울말로 바뀌는 와중에 일부에서는 “서울말은 영어표현을 많이 쓰므로 우리말로 바꿔쓰는 조선식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례를 들면 ‘코너킥’을 조선처럼 ‘각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볼(ball)이 영어발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각볼도 순수 우리말은 아니다. 한마디로 연변말은 현재 연변말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지 서울말로 바꿔야 할지, 아니면 조선식 표현(특히 신조어)을 사용해야 할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단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 우리 조선족이 나는 중국인 및 조선족이냐 아니면 한국인 혹은 조선민족이냐의 사이에서 정체성의 방황을 겪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변말을 부정하고 타의 언어를 표준어로 표방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조선족이라고 불릴 명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도 연변말을 쓰자는 의미는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한국사회에 잘 융합되려면 한국어를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조선족의 집거지이자 뿌리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연변말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리해해야 할 것인가?! /인민넷 조문판
2660    [고향문단] - "씨실과 날실" 닐리리... "알나리 깔나리" 동동... 댓글:  조회:3718  추천:0  2019-05-13
방순애, 강려 윤동주문학상 수상시집 출간 (ZOGLO) 2019년5월9일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주최로 진행되였던 제5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서 시부문과 동시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방순애시인의 시집 《씨실과 날실의 대화》와 강려시인의 동시집 《알나리 깔나리》가 일전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여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1958년에 출생한 방순애시인은 연변작가협회 회원이며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장이다. 이미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 《황금률하이퍼시》를 펴낸 바 있는 그의 이번 시집에 대해 최흔 평론가는 “새로운 언어들의 대행진이다. 감동과 자극의 도가니속으로 독자를 몰아붙이는 새 언어들의 그림이며 교항악이다”고 극찬하였다. 1975년생인 강려시인은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 제5기, 제6기 문학강습반을 수료하였으며 연변작가협회 회원이다. 백두아동문학상, 웰빙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강려시인은 첫 동시집 《또르르 뱅뱅》을 2013년에 출간한 바 있다. 윤동주문학상 심사위원장인 엄창섭 평론가는 “시각적 요소들을 회화적으로 처리하여 이미지의 형사(形似)에 주의 집중하는 강려시인은 령혼이 맑은 예감의 시인”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2659    [작문써클선생님께] - "서법"으로 우리 글 전수하기, 받기... 댓글:  조회:3431  추천:0  2019-05-13
네모의 힘 /심명주 2019년 05월 07일 작성자: netizin-1 [두만강칼럼] 요즘 좋은 공지 하나를 접했다. 서법이 공식적으로 중학교 과외 학과로 지정되였다는 것이다. 온라인과 더불어 산잡한 말과 글들이 람발하는 이 시점에 문자에 대한 정확하고 경외스러운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겨보게 되는 시점이다. 《말모이》(국어사전)라는 영화도 보았다. 언어말살정책으로 창궐하던 일제강점시기 우리말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사전으로 편찬한 4인의 력사실화를 모티프로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그러면 평화시대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우리글을 전승해가고 있는가? 한마디로 잘 지키지 못한다. 요즘 같으면 우리말의 네모가 다슬어버린 느낌이다. 그런 표현에 적절한 곳이 온라인이다. 우선 위챗대화에서 표준어와 띄여쓰기 같은 개념을 무시해버린 경향이다. 게다가 우리말에 한어, 영어, 일어가 뒤섞여 표현되는 것도 다반사이고 외래어도 사투리도 아닌 언어들도 람발한다. 종이로 된 글을 읽던 지난날에는 비록 새로운 글과 소식을 접하는 시간이 느리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인내와 끈기로 배웠고 더우기 표준언어거나 문자의 정확한 사용을 철칙처럼 고수하고 지켜나갔다. 지금은 그런 것이 삭제된 채 고증이 없는 언어들이 만연돼간다. 아무리 글로벌이라지만 우리만의 독특함이 바탕이 되여야 변형이 가능하다. 더우기 심장박동수보다 더 빠른 터치로 순식간에 세계 수많은 소식을 접하는 시대, 개인의 사생활이든 타인에 대한 뒤담화든 손가락 하나로 찰나에 퍼뜨리고, 대화글도 정제할 사이가 없이 즉석 스피드로 의사전달만 하면 그만이다. 발 빠르게 달리는 온라인으로 사고할 뇌를 잃어가는 시대이다. 위챗대화중에 요즘은 표준어를 구사하기가 난감할 정도이다. 개념 있는 누가 한소리라도 하면 당장 ‘꼰대취급’을 받는다. 언어가 정체성을 잃어가니 세대가 막돼먹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디서부터 이런 혼란을 가져왔는가. 온라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우선 이미 부모세대에서부터 자신들의 근거지를 협소한 울타리로 오식하고 자녀를 위해 뿌리와 문화터밭인 자기말 자기글의 학교 교육을 거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받은 옳바른 문화교육은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다. 압축되여 귀속에 감춘 듯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무한대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사람의 ‘대’고 한 군체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갑자기 불거진 경제붐으로 많은 부모들이 한창 부모 사랑과 부모 교육이 절실한 자녀들을 뒤로 하고 외국, 타향으로 떠났다. 우리 사회에는 이 때문에 한동안 조손가족이 성행하여 그에 유발되는 문제까지 다루던 상황이다. 그런 부모세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녀들은 이미 장성하였다. 되려 분투와 자립이 필요한 시점에 부모들은 자식에게 그동안의 보상으로 집과 차, 결혼비용까지 도맡아 해결해주었다. 이들은 자수성가하면서도 끄떡없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던 우리 세대와 다르다. 흔들리는 뿌리는 깊은 그늘의 가지를 키우지 못하며 나무잎도 쉽게 떨어진다. 쉽게 얻고 보상심리가 다분한 이 세대가 기성세대요 ‘나무잎세대’이다. 이 와중에 온라인이 만연되였다. 위챗, 틱톡… 얼굴을 맞대고 눈길을 마주치면서 나누는 얘기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공손하고 례절스러워지지만, 온라인은 얼굴까지 가리울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근본이 약소하면 이런 곳일수록 언어구사가 란잡하다. 그것은 늘어나는 요즘의 언어장난과 ‘댓글부대’와도 직결된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된 우리 언어가 힘을 발휘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에 사는 2천여개의 민족중에 언어와 문자를 겸비하고 백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은 140개 밖에 안된다는 통계이다.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180만명을 웃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조선족언어는 그중의 하나이다. 틈없이 네모난 우리 문자처럼 합심되여 바르게 지켜가야 되는 때가 지금이다. 그런 의미로 십세되는 아들에게 서법을 시켰다. 검은 먹을 찍어 한획한획 힘 있게 새겨지는 문자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미약하나 강한 힘을 확인하고 더불어 희망을 바라보다가 나도 어느덧 동참하게 되였다. 더우기 요즘 부쩍 많아진 문화행사에 그래서 ‘훈민정음’이 새겨진 한복을 일부러 착복하고 나선다. /길림신문  
2658    [그것이 알고싶다] - "몸무게 + 수화물무게 = 비행기표값" 댓글:  조회:3998  추천:0  2019-05-13
안내 [과학을읽다] 항공기 탑승객 모두 몸무게 잰다? 2019.05.1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핀란드의 핀에어는 일부 승객에 한해 몸무게를 측정합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 항공기를 운영하는데 가장 큰 부담은 연료비입니다. 최근 항공업계의 화두는 '고효율·저비용'입니다. 고효율·저비용의 실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연료비 절감이지요. 특히 연료 소모량을 결정하는 것은 속도와 거리 그리고 무게입니다. 얼마나 빨리, 멀리, 그리고 무겁게 비행하느냐에 따라 소모되는 연료량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지요. 항공기 승객들이 '유류할증료'를 부담할 수밖에 없고, 항공기 제조사들이 항공기 소재를 경량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모두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가벼워야 같은 연료량으로 더 빠르게, 더 멀리 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연료비가 얼마나 들기에 항공사마다 무게 줄이기에 목을 매다는 것일까요? 서울-로스앤젤레스(LA)를 운항할 경우 11시간 정도를 비행하는데는 항공유 16만9300ℓ가 소모된다고 합니다. 4만4724갤런, 드럼 갯수로는 무려 894드럼이나 소모되는데 국제 항공유가를 갤런당 1달러50센트로 해서 환산할 경우 연료비는 원화로 7850만원(달러당 1170원 기준)이 드는 셈입니다. 왕복에는 연료비만 1억5700만원이 투입되는 것이지요. B747-400 기종으로 김포-제주 노선을 운항할 경우에는 항공유 3119갤런이 소모되는데 이를 드럼으로는 62드럼(1드럼 50갤런)이나 됩니다. 50분 정도 비행하는데 연료비만 548만원이 드는 것입니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위에 60개가 넘는 드럼통이 실렸다고 상상해보면 어떤가요? 가는 동안 그 드럼통에 든 연료를 다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항공기는 '기름먹는 하마'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다보니 실제 항공기 조종사들의 연료 소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운항 때 뒷바람 타기는 기본이고, 맞바람 피하기, 경제적 운항고도와 속도 유지하기, 지체없이 활주해서 이륙하고 착륙하기, 관제사에게 가장 짧은 경로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최근의 항공기술로도 더 이상 기체의 무게를 줄이기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 승객의 무게입니다. 수하물이나 각종 화물과 기체와 연료의 무게는 정확하게 측정이 되지만 승객의 무게 만큼은 추산치를 적용해 연료를 싣습니다. 성인 남자의 경우 항공사와 노선, 계절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88㎏(휴대가방 포함)으로 설정해 항공기 무게에 반영해 연료를 탑재합니다. 유럽항공안전청(EASA)의 경우 성인 남자 승객의 표준 체중은 84.6㎏, 수하물 무게는 6.7㎏, 여성 승객의 경우 각각 66.6㎏, 5.9㎏이 기준으로 하고, 일부 항공사는 성인 남성의 몸무게를 76㎏ 정도로 자동 계산하기도 합니다. 이를 지나치게 초과할 경우 계산상 항공기 무게와 실제 무게에 차이가 생겨 연료 계산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더 무겁게 계산해 탑재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승객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운 점은 없다고 합니다. 탑승구 등에 측정기를 설치해 승객의 몸무게 등을 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승객이 느낄 수 있는 불쾌함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체중에 따라 항공기 추가요금을 내야 할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그림=오성수 화백] 그러나 항공업계는 승객의 중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업계는 여객기들은 실제 필요한 연료량보다 1% 정도 더 많이 연료를 싣고, 이 때문에 실제 소모량도 0.3~0.5% 더 많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업계는 승객의 정확한 무게를 측정할 수만 있어도 연간 10억 달러 정도의 연료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호언합니다. 이미 일부 항공사는 탑승객의 무게를 측정해 비행 무게에 반영하고, 몸무게에 따라 좌석을 배정하기도 합니다. 미국 하와이언항공이 대표적입니다. 하와이언항공은 하와이-사모아 구간을 운항하는 노선에서 승객들의 몸무게에 따라 좌석을 지정합니다. 핀에어도 2017년부터 자원하는 일부 승객의 짐 무게와 체중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계절에 따른 나름 적정한 기체 무게를 추산하기 위해서입니다. 항공사가 승객의 체중을 재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요? 유가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비만이 그 만큼 심각하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항공기를 타는 성인 남자 가운데 체중 76㎏ 이하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항공기로 여행 가시려면 이제 체중부터 관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종화 기자
265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자연살리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00  추천:0  2019-05-11
한국 최초로 곶자왈 지대에 조성된 제주 교래자연휴양림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최은경] ▲  교래자연휴양림내 곶자왈 숲. ⓒ 김종성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보면 바다만큼이나 좋은 곳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숲이다. 제주의 숲을 오롯이 즐기기 좋은 곳 가운데 하나가 절물자연휴양림, 서귀포자연휴양림 등 자연휴양림이다. 저마다 다른 생태 숲을 갖추고 있고, 숙박 시설이 있으며 숲속에서 캠핑도 할 수 있다 보니 하나하나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다.   제주시 조천읍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 교래자연휴양림은 소개말 가운데 이런 문구가 나온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제주형 자연휴양림'. 제주형이라는 말에 어떤 자연휴양림일까 궁금해 찾아갔다가 '제주형'의 실체를 체감하며 거닐었다. 이 휴양림은 우리나라 최초로 곶자왈 지대에 조성된 곳이다. 입장료 1천 원을 내고 매표소를 지나면 곶자왈 생태체험관과 제주도민 해설사가 맨 먼저 여행자를 맞는다. 해설사가 전해주는 숲 이야기를 들으며 숲길을 돌아볼 수 있다.    ▲  휴양림의 전망대가 있는 큰지그리 오름가는 '오름 산책로' ⓒ 김종성   ▲  옛 초가집 모양의 정다운 휴양림 숙박시설. ⓒ 교래자연휴양림 누리집 이 휴양림의 시설은 단순해서 숲길과 숙박시설이 전부다. 이름 그대로 숲속에서 편안히 쉬면서 심신을 보양하는 곳이다. 휴양림의 대표 숲길은 '오름 산책로'로 4km에 이르는 곶자왈 숲길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휴양림의 전망대이기도 한 큰지그리 오름이 나타난다. 왕복하면 8km를 걷게 되니 곶자왈 숲을 실컷 보고 느끼게 된다. 숲속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옛 초가집 모양의 숙박시설도 이채롭다.   육지에서 온 여행자의 눈에 곶자왈은 새롭고 괴이하며 경이로운 숲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고 보아온 숲은 단정하고 잘 정돈된 나무들이 사는 숲이어서다. 짐승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풀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숲속을 걷다보면 풍성함과 혼돈이 공존하는 밀림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  으름덩굴을 뱀처럼 휘감고 서있는 나무. ⓒ 김종성 ▲  말을 건네듯 우짖던 숲속 까마귀. ⓒ 김종성 주말임에도 인적이 드물어 한참을 혼자 걸어야 했는데, 곶자왈의 또 다른 주인공 까마귀들이 마치 말을 건네듯 소리를 내며 출몰해 덜 적적했다. 곶자왈엔 반듯한 나무가 없다. 모두 이리저리 휘고 굽었다. 오랜 세월을 살다가 고사한 나무들이 미이라처럼 서있거나 누워있고, 굵직한 나무마다 으름덩굴을 뱀처럼 몸에 휘감고 있었다. 흡사 내버려둔 자연 같았지만 숲은 울창하고 빽빽하며 작은 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끈질긴 생명력의 나무들, 허리 숙여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고 예쁜 들꽃, 화려하고 고운 외모와 달리 거친 울음소리로 숲의 적막을 깨는 꿩과 노루에 놀라고 쳐다보느라 반나절이 넘게 걸려 큰지그리 오름에 겨우 다다랐다.    ▲  숲속 산책을 더욱 즐겁게 해준 길섶의 야생화. ⓒ 김종성 곶자왈 숲길을 걷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여러 야생화 가운데 제비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잠시 쉬어가려고 발길을 멈추면 "안녕!" 반가운 인사를 하는 것처럼 숲길 가에서 반짝거리며 존재를 드러낸다. 흔히 봤던 자줏빛 제비꽃 외에 흰색, 노란색과 털이 난 제비꽃 등을 만났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 사는 제비꽃은 무려 수십 종이 넘는다. 제비꽃 중 가장 작은 콩제비꽃 단풍제비꽃 고깔제비꽃 등 분류가 분명한 제비꽃만 32종으로 한국의 야생화 중 종류가 제일 많은 꽃이라고 한다.     ▲  돌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 ⓒ 김종성 오름에서 내려와 곶자왈 생태체험관 해설사에게 주워들은 곶자왈 이야기는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곶자왈은 돌 나무 넝쿨들이 어우러진 숲이란 뜻으로, 숲을 뜻하는 '곶'과 수풀이 우거진 '자왈'을 결합한 제주 고유어다. 화산섬 제주도의 형성 과정에서 생긴 독특하고 울창한 숲이다. 먼 옛날 화산이 분출할 때 나온 용암이 흐르다 굳어가면서 돌무더기 땅을 만든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이 돌무더기 땅에 나무와 꽃과 숲이 생성한다.    이렇게 탄생한 곶자왈을 어떤 이들은 용암숲이라고 부른단다. 곶자왈은 북쪽 한계 지점에 자라는 열대 북방계 식물과 남쪽 한계 지점에 자라는 한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라고 한다. 한겨울에도 푸른 숲을 유지하는 곶자왈은 그래서 '제주의 허파'라고 불린다.    ▲  제주도만의 독특하고 울창한 숲 '곶자왈' ⓒ 김종성 ▲  옛 가마터와 움막터가 남아있는 숲속. ⓒ 김종성 곶자왈은 제주의 자연생태를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곶자왈 지대는 흙이 별로 없고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들이 두껍게 쌓여 있다. 아무리 많은 비가 오더라도 빗물이 그대로 지하로 스며들어 '삼다수'로 불리는 맑고 깨끗한 제주의 지하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한겨울에도 푸른 숲이 있어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어주기도 한다.    곶자왈이 얼마나 깊고 짙은 숲인지는 무덤이 없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바닷가 숲 오름 등 제주 섬 어디에서나 산담을 두른 무덤이 있는데 이곳 곶자왈엔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1970년대까지 이곳에서 숯을 만들었다는 숯가마터와 사람들이 먹고살던 움막터가 눈길을 끌었다. 밀림 속에서 발견된 유적처럼 보이는 가마와 움막터는 모두 돌로 지었다. 가축처럼 키우는 말들이 숲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 교래자연휴양림  ///오마이뉴스(시민기자)
265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의 날"... 댓글:  조회:3882  추천:0  2019-04-21
지식리스트 공유 수정문의 인쇄 글꼴글꼴 작게글꼴 크게 두산백과 환경의 날   [ 環境─ ] 요약 국민의 환경보전 의식 함양과 실천의 생활화를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 l968년 5월, 제44회 국제연합경제사회이사회에서 스웨덴의 유엔 대사인 아스트 롭이 국제환경회의를 제의한 뒤 4년 만인 1972년 6월 5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를 주제로 인류 최초의 세계적인 환경회의가 열렸다. 총 113개 나라와 3개 국제기구, 257개 민간단체가 참여한 이 회의(스톡홀름회의)에서 각국이 '유엔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한 뒤, 제27차 국제연합총회에서 인간환경회의 개막일인 6월 5일을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 국제연합환경계획(UNEP) 창설과 국제연합환경기금 설치를 합의함으로써 환경 관련 국제기구가 처음으로 탄생하였는데, 이후 국제연합환경계획에서는 매년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 세계 각국 정부와 기구들이 환경보전 행사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국도 199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6월 5일을 법정기념일로 정하고, 국민의 환경보전 의식 함양과 실천의 생활화를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행사는 크게 기념식과 테마행사로 나뉘는데, 중앙기념식은 환경부와 민간단체·경제5단체가 공동주최하고, 지방은 환경관리청이 환경보전협회·지방자치단체 등과 협의하여 자체 계획에 따라 개최한다. 테마행사는 환경보전 실천운동에 자율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산하기관 및 단체별로 기관 특성을 살린 환경테마를 선정해 환경친화적 행사를 여는데, 환경보전 캠페인과 전시회 등 홍보행사, 세미나·심포지엄·토론회 등 학술행사, 글짓기·웅변대회 등 문화행사가 주를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경의 날 [環境─] (두산백과)  
26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의 날"... 댓글:  조회:3797  추천:0  2019-04-21
  시사상식사전 지구의 날      지구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자연보호자들이 제정한 지구 환경보호의 날로, 매년 4월 22일이다.             외국어 표기     Earth Day(영어)     날짜     매년 4월 22일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제정한 날로, 유엔이 정한 세계환경의 날(6월 5일)과는 달리 순수 민간운동에서 출발했다. 이는 1970년 4월 22일 미국 위스콘신주의 게이로드 넬슨 상원의원이 앞서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해상원유 유출사고를 계기로 환경문제에 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지구의 날'을 주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하버드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가 주도해 첫 행사를 열었는데,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행사에 참가해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하였다. 특히 뉴욕 5번가에서는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6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환경집회에 참여하였다.  이어 1972년에는 113개국 대표가 스웨덴 스톡홀름에 모여 '지구는 하나'라는 주제로 환경보전 활동에 유기적인 협조를 다짐하는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 지구의 날이 세계적 규모의 시민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1990년에 이르면서부터로, 그해 지구의 날 행사에는 세계 150여 개국이 참가하여 지구 보호에 인류공영이 달려 있음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 땅을, 이 하늘을,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라는 슬로건 아래 '하나뿐인 지구, 하나뿐인 국토, 하나뿐인 생명'을 주제로 '지구의 날' 행사를 진행.  한편, 한국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지구의 날’을 전후한 일주일을 기후변화주간으로 정하여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저탄소생활 실천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소등행사 등을 전국 각지에서 진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구의 날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654    [그것이 알고싶다] - 바다가 제일 깊은 곳에서 사는 물고기?... 댓글:  조회:4646  추천:0  2019-04-21
PICK 안내 쇳덩이도 찌그러지는 해저 1만m ‘최상위 포식자’ 물고기가 사는 법  2019-04-2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마리아나해구에서 바다 밑으로 내려보낸 무인탐사기와 미끼에 마리아나 스네일피시가 모여든 모습. 아래 두 장의 사진은 연구진이 채집해 바다 위로 건져 올린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와 엑스레이로 촬영한 모습. 워싱턴대 제공 1000기압 이상의 암흑 세계…산소 농도 낮고, 수온은 1~4도 마리아나 스네일피시, 두개골 빈 공간이 체내 압력 조절 기능 2014년 첫 발견 …단백질 변성 막는 특수 물질도 다량 존재 북태평양 괌 인근의 마리아나해구는 평균 수심 7000~8000m로 지금까지 확인된 곳 중에서 가장 깊다.  특히 비티아즈 해연의 깊이는 1만1034m에 달한다. 700기압에서 1000기압에 달하는 수압 때문에 생태 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마리아나해구의 심해에서 2014년 발견된 ‘마리아나 스네일피시’(Mariana snailfish·마리아나 꼼치)는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엄청난 수압을 견뎌내는 척추동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저 7000~8000m에 사는 이 물고기를 연구한 과학자들이 최근 쇳덩어리도 찌그러지게 할 정도의 높은 수압을 견뎌내는 비결을 규명했다. 중국 서북공업대학 연구진은 마리아나 스네일피시가 심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 등을 포함한 논문을 지난 16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생태와 진화(Nature Ecology & Evolution)에 게재했다. 연구진은 무인탐사기를 이용해 포획한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의 몸 구조와 유전자 등을 조사했다. 올챙이와 비슷하게 생긴 이 심해어는 꼼칫과로 길이는 최대 30㎝가량이다. 마리아나해구의 심해 먹이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심해에 사는 다른 무척추동물들을 먹잇감으로 삼으면서 군림하고 있다. 연구진은 이 물고기가 극도로 높은 수압을 견뎌낼 수 있는 이유로 두개골 내에 빈 공간이 있다는 점을 꼽았다. 논문의 주저자인 서북공업대학 쿤 왕 박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이 빈 공간을 통해 체내와 체외 압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에게 머리 내 빈 공간이 없다면 수압에 눌려 찌부러지게 될 것이란 얘기다. 뼈가 단단한 어종에 속함에도 체내의 뼈 대부분이 연골로 이뤄진 사실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의 유전자 가운데 석회화를 담당하는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이 유전자가 기능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석회화란 칼슘이 뼈에 침착돼 뼈가 단단해지는 것을 말한다. 즉 마리아나 스네일피시는 자신이 속한 꼼칫과의 어류들과 달리 뼈가 유연하기 때문에 높은 수압을 견뎌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물고기가 처음 발견된 것은 2014년으로 당시 미국 워싱턴대 등 연구진은 고등어를 미끼로 단 탐사장비를 해저에 내려보내 촬영했다. 수심 7000m가량까지 장비를 내려보내는 데 4시간이 걸렸다. 연구진이 채집한 마리아나 스네일피시는 연분홍색 피부에 내장이 보일 정도의 반투명한 모습이었고, 비늘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연구진이 채집해 건져올린 마리아나 스네일피시는 수심 7966m에서 잡혔다. 촬영된 곳 중 가장 깊은 곳은 수심 8143m 지점이었다. 연구진은 이 물고기를 바다 위로 건져올리자 바로 녹아내리듯이 흐물흐물해졌다고 밝힌 바 있다. 극도로 높은 수압이 오히려 이 물고기에게는 몸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요소였던 것이다. 마리아나해구는 지구상에서 생물에게 가장 가혹한 환경으로 꼽힌다. 높은 수압과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암흑 외에도 1~4도 정도에 불과한 낮은 수온과 낮은 산소 농도, 부족한 먹이 자원 등 생존에 부적합한 요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극한 환경 때문에 인간이 직접 탐사한 기록도 드물다. 현재까지 인류가 세운 필리핀과 괌 사이의 마리아나해구 탐사 기록 중 가장 깊이 내려간 건 1만911m까지다. 1960년 미국 해군 장교 돈 월시와 스위스 기술자 자크 피카드가 잠수정 트리에스테를 타고 내려갔다. 다음으로는 터미네이터, 아바타 등의 영화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2012년 잠수정 딥시챌린저를 타고 챌린저해연에서 세운 1만898m다. 당시 캐머런 감독은 2시간36분 동안 해저로 내려가 3시간가량 심해를 촬영한 뒤 바다 위로 돌아왔다. 그가 탄 잠수정은 1125기압을 견딜 수 있는 64㎜ 두께의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북공업대 연구진은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의 체내에서 단백질이 유지되는 이유도 확인했다. 수압이 극도로 높기 때문에 체내 단백질이 변성되는 것을 막아주는 물질이 체내에 다량으로 존재하는 게 드러났다. 연구진은 ‘트리메틸아민엔옥사이드(TMAO)’라고 불리는 이 물질이 단백질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체내의 단백질 중 세포 간 물질 이동을 돕는 단백질도 확인됐다. 높은 수압하에서는 세포막을 통해 물질이 교환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마리아나 스네일피시의 체내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운반하는 역할의 단백질이 대량으로 생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마리아나 스네일피시가 무인탐사기의 조명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빛이 전혀 들지 않는 환경에 서식하고 있어 시각이 퇴화돼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빛의 자극에 반응하는 광수용체 관련 유전자 가운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들이 이 물고기의 체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빛을 감지할 필요가 전혀 없는 환경에 서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기범 기자 
265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플라스틱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51  추천:0  2019-04-20
자연으로 돌아가는 ‘썩는 플라스틱’도 있다? (ZOGLO) 2019년4월19일  ///출처:뉴스1
2652    [지금 이때] - 만드는것도 좋지만 지키고 관리하고 실천해야... 댓글:  조회:3467  추천:0  2019-04-17
《〈조선말규범집〉해설》 정식 출판 (ZOGLO) 2019년4월17일  요즘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이하‘3협판공실'로 략칭)에서 책임지고 편찬한《해설》이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정식 출판,‘3협판공실'의 명의로 국내 조선언어문자단위에 무료로 발행하기로 했다. 2017년 국가‘13.5’ 소수민족 언어문자 사업계획을 관철실행하고 새시기 조선언어문자 규범화 사업을 더 한층 잘하기 위해‘3협판공실'은 연변대학 해당 전문가들과 손잡고 책《해설》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조선말규범집(2016년 수정본)》의 해설책으로서 조선언어문자 학습사용을 과학적으로 지도한 참고공구서이다. 4월 13일,‘3협판공실'은 동북3성 조선족학교 조선말규범 강습반에서 《해설》발행 및 전달식을 가졌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김명철, 연변대학 해당 전문가, 동북3성 민족사무위원회 민족어문사업부문 책임자와 료녕, 길림, 흑룡강 3성 조선족중소학교에서 온 조선어문교원 등 150명이 전달식 활동에 참가했다. 새 책 발행식에서 김명철이 료녕, 길림, 흑룡강 3성 민족사업부문의 책임자와 교원대표들에게 새 책을 전달하고 연변대학 조한문학원 김철준 원장이《해설》집필소조를 대표하여 새 책의 해당 상황을 소개했다. 새 책의 발행은 조선언어문자의 규범화 관리와 사용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고 조선족군중들의 언어문자 능력수준을 제고시키며 소수민족 언어문자사업의 과학적 발전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한편, 은 지난해에 길림성 제12기 사회과학우수성과상 저작류 1등상을 수여받았다. /길림신문 박명화기자  
2651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10대 축제"?... 댓글:  조회:4015  추천:0  2019-04-15
세계인들이 손 꼽는, 세계 10대 축제 세계인들이 손에 꼽는 세계 10대 축제를 조사해서 모아보았어요^^    브라질 리우 삼바 카니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매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4일간 열리는 세계 최대 축제입니다. 브라질은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이므로 당연히 우리와 정반대로 우리가 겨울일 때, 거기는 여름입니다. 여름 휴가가 끝날때 쯤 시작되는 리우 쌈바 카니발은 그 참가 인원수만 10만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노예들의 타악기 연주가 곁들여져 소규모 거리 행진에 불과하던 것이 각 학교의 학생들이 합쳐져서 거리를 걷기 시작하면서 이처럼 큰 행사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독일 뮌헨 맥주 축제, 옥토버 페스티벌 올해로 175회째를 맞는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입니다. 175회째 행사라고 해서 엄청나게 길게 보이지만 사실 독일 지방의 다른 크고 작은 축제들에 비해서 전통성은 많이 떨어지는 짧은 역사입니다^^; 독일의 아름다운 도시 뮌헨에서 매년 9월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간 행사가 개최되고, 연평균 축제 방문객 숫자는 60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으리으리하죠?^^ 흔히 뮌헨 맥주 축제라고도 부르지만, 10월에 열리기 때문에 옥토버 페스트라고도 불리웁니다. 시간 되시면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러 독일로 떠나보세요^^   일본 삿포로 눈축제 일본의 대표적 축제이자, 세계 최대 축제 중 하나인 일본 삿포로의 눈꽃 축제 입니다. 1950년, 삿포로시내의 중고등학생들이 6개의 얼음조각을 오도리 공원에 전시하면서 축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높이 15미터의 대형 얼음조각과.. 눈으로 만든 각종 예술 조각들이 1.5km에 걸쳐서 전시된다고 하네요~ 아마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영국 노팅힐 축제 은행들이 업무를 하지 않는 휴일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카니발입니다. 특히 카리브해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행사였다가, 현재는 전인종이 하나되어 즐기는 축제로 발전했습니다~! 유럽 최대의 거리축제 답게, 4.2km 달하는 카니발 길이로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공식적으로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보다 큰 행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몽골 나담 축제 인구 250만의 작은 나라 몽고에서 3일간(매년 7월 11일 부터 7월 13일) 열리는 축제로, 행사 기간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될만큼 몽고에서는 큰 축제라고 합니다. 전투에 강한 유목민족, 징기스칸의 후예 답게 축제의 내용도 매우 박력있습니다. 말타기, 활쏘기, 씨름등을 하면서 단어 뜻 그대로 '즐겁게 노는 축제'입니다.   이탈리아 베니스 카니발 이탈리아 최대 축제로, 화려판 패션과, 다양한 가면을 구경할 수 있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 카니발입니다. 가면축제이지요. 이 행사의 백미는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긴 상태에서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괴이한 행동을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 입니다. 축제 기간에는 곳곳에서 연극공연 등이 진행됩니다.   태국 송크란 축제 태국의 유서 깊은 도시 '치앙마이'. 이곳에서는 매년 4월 13일 부터 4월 15일까지 '물 축제' 송크란 축제가 열립니다~ 동남아시아의 설날이라고 하네요.. 다른 사람에게 물 세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축제라고 합니다~~   멕시코 세르반티노 축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멕시코의 작은 도시 '과나화토'에서 매년 10월 중 20일간 열리는 행사로 세계 4위 규모의 종합 예술 축제입니다.   영국 에딘버러 축제 매년 8월에 열리는 영국 최대 축제 중 하나입니다. 인구 45만명의 이 도시는 축제만으로 1,2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합니다. 에딘버러는 1년 내내 축제중이거든요. 흡사 서울시가 꿈꾸는 '하이서울 페스티벌'과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에딘버러 축제의 카니발 중 하나인 '타투 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군악대 카니발이라고 합니다. 축제만으로 연간 27조원의 경제적 이득을 이루고 있다고 하니.. 관광산업을 쉽게 볼 것만은 아닌 것 같죠?^-^   스페인 토마토 축제 줄지은 트럭들이 토마토를 가득 싣고 나타납니다. 도로위에 갇그 뿌려진 토마토는 2만명의 젊은이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습니다. 매해 8월 마지막 주의 하루를 골라서 열리는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는 너무나 유명해서, 지구상의 젊은피가 끓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참가하고 싶은 행사이지요~ '축제에 홀린 땅' 스페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축제가 열린다는 스페인에서도 단연 스페인 사람들이 손꼽는 토마토 축제입니다. 1944년 토마토가격 대폭락때, 화가 난 농부들이 의원들에게 토마토를 던지면서 시작된 축제라고 합니다. 실컷 던지고 뒤집고.. 토마토 범벅이 되며 하루쯤 보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요~   세계 3 대 축제는? 위의 세계 10대 축제중에 모두 다 있습니다. 브라질의 리우 쌈바 카니발이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로 손꼽힙니다.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눈꽃축제, 독일의 맥주축제(옥토버 페스트) 이렇게 3개의 축제가 세계 3대 축제로 불리웁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계 3대 축제로 손꼽히지는 않지만 리우 삼바 카니발과 규모가 거의 맞먹는다는 노팅힐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입니다.
2650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의 축제; "물축제(송크란)"... 댓글:  조회:5696  추천:0  2019-04-15
  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송크란 페스티벌   [ Songkran Festival ] 요약 타이 전통의 새해 첫날을 축하하며 매년 4월에 타이 전역에서 열리는 축제 외국어 표기 สงกรานต์(타이어) 분야 민속 > 계절 · 절기 지역 아시아 > 타이 개최 시기 매년 4월 13일 ~ 15일 개최 장소 타이 전역 시작 연도 13세기 주관 단체 타이 정부와 각 시도 단체 연관 축제 인도 홀리(Holi Festival), 미얀마 틴잔(Thingyan), 라오스 피 마이(Bpee Mai), 중국 발수절(潑水節), 캄보디아 촐츠남(Chaul Chnam Thmey), 인도네시아 녀피(Nyepi) 목차 1. 축제 정의 2. 축제 어원 3. 축제 유래 4. 축제 역사 5. 축제 주요 행사 1) 사원 행사 2) 물 뿌리기 3)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 6. 치앙마이 송크란 페스티벌 7. 새해 인사 1. 축제 정의 송크란 페스티벌은 타이(Kingdom of Thailand)의 전통 새해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해 열리는, 타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축제다. 송크란은 태양력을 기준으로 정한 새해 첫날인데, 타이를 비롯해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는 태양이 1년간 이동하는 길인 황도 12궁 가운데 제1자리인 양자리로 들어가는 이 시기를 한 해의 시작으로 본다. 11세기경 미얀마를 통해 타이 북부 치앙마이(Chiang Mai) 지역에 송크란 문화가 유입된 후13세기경 치앙마이에 세워진 란나(Lanna) 왕국에서 신년 행사인 송크란 페스티벌이 처음 시작됐다. 현재는 수도인 방콕을 비롯해 타이 전역에서 축제가 열린다. 국가가 정해놓은 송크란 공식 휴일은 4월 13일, 14일, 15일이지만, 송크란 전후 약 10일간 축제 분위기가 이어진다. 송크란이 가까워오면 우리나라의 설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새해를 함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묵은해의 안 좋은 기운을 닦아내 새로운 좋은 운이 들어오도록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새해 맞이 준비를 한다. 송크란이 시작되면 집안 어른들의 손에 향을 넣은 물과 기름을 부으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또 불교 국가답게 사원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불상에 물을 뿌리며 음식을 공양하고, 새와 물고기를 방생하는 등 종교 의식을 행한다. 방콕의 불상 행렬송크란 기간에는 방콕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불상을 광장으로 옮기고 새해에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물을 뿌린다. 이 시기에 타이는 농작물 수확을 마친 건기의 끝 무렵으로 한 해 중 기온이 가장 높이 치솟는 무더운 때를 맞이한다. 따라서 건기 뒤에 이어질 우기에 풍부한 비가 내려 한 해 농사가 풍요롭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무더위를 잠시나마 식히는 의미에서 서로서로의 손이나 어깨에 향기로운 물을 부어주는 것이 송크란 기간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오늘날 송크란은 흔히 ‘물 축제’라고 불리듯, 축제 기간 내내 벌이는 떠들썩한 물싸움이 송크란 페스티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관광객에게도 예외 없이 물을 뿌려대는데, 축복을 기원하는 행위이므로 누구도 화를 내지 않고 물에 흠뻑 젖은 채 축제를 즐긴다. 인도의 홀리, 라오스의 피 마이 라오, 중국 윈난성의 소수민족인 태족(傣族)의 발수절 등도 송크란과 같은 성격을 지닌 축제다. 물싸움새해맞이 축제인 송크란은 오늘날 모두가 어우러져 무더위를 날리는 격렬한 물싸움을 벌이는 물 축제로 알려져 있다. 2. 축제 어원 ‘송크란(สงกรานต์, Songkran)’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삼크란티’(saṃkrānti)에서 유래한 말로 ‘이동, 장소 변경’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동’은 태양이 움직인다는 의미로,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황도 12궁(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궁수자리, 염소자리, 물병자리, 물고기자리)의 제1자리인 양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아시아의 전통 명절이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고대 인도에서 건너온 송크란은 태양력으로 계산하는데, 특히 4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본 것은 고대 12궁이 정립되던 시기에 춘분점이 양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현재는 지구의 세차운동(歲差運動)으로 인해 춘분점이 물고기자리에 있다). 3. 축제 유래 라오스의 피 마이, 타이의 송크란 페스티벌 등은 인도에서 전해오는 신화와 관련돼 있다. 카빌라 프롬(KabillaPhrom)이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내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일곱 살밖에 안 됐지만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영리하다는 소년 탐마발 쿠마라(Thammabal Kumara)에 대한 소문을 듣고, 카빌라 프롬 신은 소년을 찾아가 그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냈다. “사람의 영기(靈氣)는 아침과 점심, 저녁에 각각 어디에 존재하는가?” 신은 만약 소년이 수수께끼를 7일 안에 풀면 자신의 머리를 줄 것이고, 7일 안에 풀지 못하면 소년의 머리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6일이 지나도록 수수께끼의 답을 찾을 수 없던 쿠마라가 야자나무 아래 누워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나무 위쪽에서 독수리 한 쌍의 대화가 들렸다. 소년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죽고 나면 그 몸으로 만찬을 즐기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독수리들은 문제의 답에 대해 이야기했다. 7일째 날 탐마발 쿠마라는 독수리들의 대화에서 엿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카빌라 프롬에게 말했다. “아침에 사람의 영기는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내고, 점심에는 가슴에 나타나 거기에 향수를 뿌리며, 저녁에는 발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냅니다.” 내기에 진 카빌라 프롬 신은 약속대로 자신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런데 카빌라 프롬의 머리는 진기한 힘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땅에 닿으면 불이 붙었고 공중에 두면 비가 오지 않았으며 바다에 떨어뜨리면 바다가 말라버렸다. 신의 머리에서 발산하는 열기로 인해 세계가 불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카빌라 프롬의 일곱 딸(일주일, 즉 7일을 뜻한다)이 아버지의 머리를 다리가 달린 접시에 담아 수미산(須彌山, 불교에 나오는 상상의 산) 주변을 돌았다. 그리고 카빌라 프롬의 머리를 크라일라트 산(Krailat, 타이 북부 수코타이 지역의 산)의 동굴에 넣어두었다. 이후 카빌라 프롬의 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매년 새해가 시작되는 때에 아버지의 머리를 수미산 위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뜨겁게 불타는 머리를 세상에 내놓고 제사를 지내는 이 시기가 일 년 중 가장 더운 철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기 전, 뜨거운 태양이 대지에 내리쬐는 건기에 새해를 맞이하는 타이와 라오스 등지에서는 무더위를 식히고 이어질 우기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기를 기원하며 물로써 사람과 대지를 적시는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또 몇몇 지역에서는 카빌라 프롬 신의 제사를 지내는 일곱 딸들을 상징하는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4. 축제 역사 11세기경 인도의 문화가 당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얀마를 통해 타이 북부 지역으로 전해졌다. 이때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어 새해를 시작하는 송크란 또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13세기에 타이 북부, 오늘날의 치앙마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립된 란나(Lanna) 왕국에서 새해맞이 행사로 송크란 축제가 처음 시작돼 타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타이 정부는 1940년에 세계 공통화되어 있는 양력 1월 1일을 공식 새해 첫날로 규정했다. 따라서 1941년부터 현재까지 1월 1일이 새해 첫날로 지속돼 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타이인들은 4월 13일을 지구가 완전히 태양을 한 바퀴 돈 날로 생각하고, 송크란 전통을 따랐다. 원래 축제일은 태양의 주기에 따라 4월 12일 또는 13일로 달라졌으나, 1948년에 정부가 4월 13일을 송크란으로 공식 지정해 공휴일로 공포했다. 1989년에는 송크란 앞뒤인 4월 12일에서 14일까지 공휴일로 지정했다가 1997년에 다시 4월 13일부터 15일까지로 송크란 연휴를 바꾼 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송크란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짜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규모가 가장 크고 전통적인 송크란 축제의 색깔이 잘 남아 있는 치앙마이 송크란 페스티벌은 4월 12~15일이며, 수도인 방콕 송크란 페스티벌은 4월 9~15일에 걸쳐 진행된다. 그 외에 파타야 송크란 페스티벌은 4월 18~20일, 푸껫 송크란은 4월 12~13일, 아유타야 송크란은 4월 13일 등이다. 5. 축제 주요 행사 송크란 연휴 전날인 4월 12일에는 집과 사찰, 공공장소와 정부 건물 등을 청소하며 지난 해를 정리하고 새해 맞이를 준비한다. 오래된 옷과 물건을 태우기도 하는데, 묵은 물건을 계속 갖고 있으면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13일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연장자에게 공경을 표한다. 젊은이들이 집안의 가장 큰 어른과 마을의 연장자를 찾아 손바닥에 향기 나는 물과 기름을 뿌리며 존경을 뜻을 표하고 가호를 바란다. 이를 로드 남 둠 후아(Rod Nam Dum Hua)라고 한다. 아랫사람의 인사에 어른은 답례로 축복의 덕담을 건넨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난해의 잘못했던 점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연장자가 손에 향기 나는 물을 묻혀 아랫사람의 머리를 문지르며 축원해 주기도 한다. 14일은 국가에서 지정한 가족의 날로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서 절을 방문한다. 연휴 마지막 날인 15일이 되면 이른 아침 절에 모여 음식과 과일 등을 부처님과 승려에게 봉헌한다. 전통적으로는 이날 가벼운 물싸움이 시작됐지만, 지금은 축제 기간 내내 물싸움이 벌어진다. 로드 남 후아집안과 마을의 연장자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으로 향기로운 물을 적셔준다. 부처님과 승려에게 공양불교 국가인 타이에서는 새해를 맞이해 미리 장만해둔 음식을 가까운 절에 공헌하며 축복을 기원한다. 그 외에 축제 기간 중에 새와 물고기를 방생하며 복을 빌기도 하고, 지역별로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 송크란 퍼레이드, 등 만들기, 모래 탑 쌓기 등의 행사가 열린다. 1) 사원 행사 타이는 전 국민의 95퍼센트 가량이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다. 따라서 송크란이 되면 불상을 물로 씻고 물을 뿌리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행사다. 방콕에서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불상(Phra Buddha Sihing)을 왕궁 앞 사남 루앙(Sanam Luang) 광장에 모시고 안녕과 번영을 바라며 불상에 물을 뿌린다. 또 불상을 타고 흐르는 물을 받아 다시 자기 몸이나 서로에게 뿌리면서 복을 빈다. 이러한 행사는 방콕 외에 전국 각지의 사원에서 진행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종교 행사는 방생으로, 살아있는 새와 물고기를 강이나 산에 놓아주면 행운이 따른다는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예전에는 타이의 중앙 평야에 홍수가 난 후 물이 빠지면서 생기는 웅덩이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 기르다가 송크란 기간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송크란 기간에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의식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방수쿤 아티(Bangsukun Atthi)라고 한다. 과거 타이에서는 시신을 화장한 후 재를 집에 가져가지 않고 사원의 보리수 아래 묻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승려가 죽은 자의 혼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하며, 이는 인도의 영향을 받지 않은 타이 고유의 전통이라고 전해진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과 도시의 수호령에게 제물을 바치기도 한다. 2) 물 뿌리기 송크란 페스티벌을 ‘물 축제’라고 부르는 것처럼, 축제 기간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물을 뿌리는 일이다. 원래는 상대방의 어깨나 손 위로 향기 나는 물을 뿌리면서 새해에 복을 많이 받기를 빌어주는 의식이었으나, 점차 거리에 나와 물싸움을 하는 등 형태가 좀 더 활동적으로 변했다. 요즘에는 물총, 호스, 양동이 등 물을 담을 수 있는 온갖 도구를 동원해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길에서도 드럼통 등에 물을 담아 누구나 물을 뿌리며 어울릴 수 있게 한다. 최근에는 얼음물이나 물감을 섞은 물을 뿌리기도 하고, 오토바이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물을 뿌리기도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외국인까지 포함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뿌리는데, 물을 뿌리는 것은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물을 맞은 사람도 화를 내지 않고 고맙다고 답한다. 그러나 물싸움의 양상이 점차 격렬해지고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가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지적도 따르고 있다. 물싸움송크란은 새해맞이 기간으로 가족, 친지와 함께할 뿐 아니라 이 시기에 타이를 방문한 관광객들까지 어우러진 물싸움이 축제 기간 내내 계속된다. 물뿌리기원래는 상대방의 어깨나 손 위로 향기 나는 물을 뿌리면서 새해에 복을 많이 받기를 빌어주는 의식이었으나, 요즘에는 물총, 호스, 양동이 등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서로에게 물을 뿌린다. 3)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 매년 송크란이 되면 각 지역에서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가 열린다. 송크란과 연관된 신화에 등장하는 신 카빌라 프롬의 일곱 딸들에서 유래한 행사로, 선발된 여인은 낭 송크란(Nang Songkran, 송크란 아가씨)이라고 부른다. 해마다 선발되는 낭 송크란은 카빌라 프롬의 일곱 딸의 이름과 차림새를 따른다. 카빌라 프롬의 일곱 딸들은 각자 이름이 있다. 일요일의 딸은 퉁사 데비(Tungsa Devi)라고 하며 빨간색 옷을 입고 전설의 새인 가루다를 탄다. 월요일의 딸 코라카 데비(Korakha Devi)는 노란색 옷을 입고 호랑이를, 화요일의 딸 라크솟 데비(Raksot Devi)는 밝은 빨간색 옷을 입고 돼지를 탄다. 수요일의 딸 몬타 데비(Montha Devi)는 에메랄드 색 옷을 입고 당나귀를, 목요일의 딸 키리니 데비(Kirini Devi)는 초록색이 도는 노란색 옷을 입고 코끼리를 탄다. 금요일의 딸은 키미타 데비(Kimitha Devi)라고 하며 흰색 옷을 입고 버팔로를 타고, 토요일의 딸 마호톤 데비(Mahothon Devi)는 검정색 옷을 입고 공작을 타고 이동한다. 매년 선발되는 낭 송크란은 그 해 송크란의 요일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가령 2013년 송크란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2013년의 낭 송크란은 토요일의 딸인 마호톤 데비가 되어 공작을 타고 행진하고, 2014년 송크란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일요일의 딸인 퉁사 데비가 되어 가루다를 타고 행진한다.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송크란과 관련 있는 신 카빌라 프롬의 일곱 딸들을 상징하는 낭 송크란(송크란 아가씨) 선발대회가 열린다. 6. 치앙마이 송크란 페스티벌 치앙마이는 송크란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자 본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축제 기간 동안 란나 왕국의 전통과 문화를 만날 수 있다. 먼저 4월 12일(Wan Songkran)이 되면 집과 사원 등을 청소하며 새해 맞이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송크란의 개회식이라 할 수 있는 송크란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이는 불상과 배 모양의 조형물과 함께 치앙마이 전통 의상을 차려 입은 여성들이 재스민 향이 나는 물을 뿌리며 행진하는 것으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다. 행렬은 치앙마이를 가로지르는 핑(Ping) 강의 나와랏(Nawarat) 다리에서 시작해 불교 사원인 왓 프라싱(WatPrasingh)까지 이어진다. 송크란 퍼레이드치앙마이에서는 송크란 연휴 하루 전날인 4월 12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4월 13일(Wan Nao)에 치앙마이 사람들은 다음 날 사원에 바칠 음식을 준비한다. 오후에는 핑 강의 강둑에서 모래를 퍼 와 사원 안에 탑(chedi, 체디)을 만든다. 탑을 만드는 일은 화려한 옷을 차려 입은 여성과 아이들이 주로 하는데, 모래에 물을 섞어 덩어리지게 해서 탑을 만든다. 탑 안에는 동전과 무화과나무 잎을 묻고 탑의 맨 아랫단은 노란색 또는 붉은색 천 조각으로 덮는다. 탑이 세워지면 향기나는 물을 뿌리고 깃발과 꽃, 천, 색종이, 향, 초 등으로 탑을 장식한다. 이는 사원을 짓거나 불상을 조각하거나 탑을 세우거나 하는 신성한 믿음을 위해 벌이는 행위가 커다란 공훈을 세우는 것과 맞먹는다는 생각에서, 실제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정성을 보이는 행사라고 전해진다. 이 외에 춤 공연, 미스 송크란 선발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모래 탑사원 가득히 모래 탑을 만들며 실제 탑을 짓듯이 정성을 들인다. 4월 14일(Wan Payawan)은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은 사원에 가서 불상과 승려들에게 음식을 바친다. 집에서는 불상에 말린 꽃, 쿠민 등 허브를 넣은 향기로운 물을 뿌려 깨끗하게 한다. 전통적으로는 이날부터 물 뿌리기가 시작된다. 4월 15일(Wan Parg-bpee)에는 조상, 집안 어른들, 마을의 어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날이다. 향기로운 물을 손과 어깨에 뿌리며 축복의 말을 전한다. 그러면 어른들 역시 덕담을 건네고 물을 적셔주며 새해 건강과 안녕을 빌어준다. 축제의 마지막 날, 사원에서 행하는 종교 행사도 모두 끝낸 치앙마이 사람들은 이후 격렬하고 다양한 방식의 물싸움을 즐긴다. 7. 새해 인사 송크란 기간에 타이인들은 한국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같은 뜻의 ‘사와티 피 마이(สวัสดีปีใหม, sawatdi pimai)’보다는 ‘숙크 산 완 송크란(สุขสันต์วันสงกรานต, suk san wan songkran)’이라는 인사를 더 많이 주고받는다고 한다. 이는 ‘행복한 송크란 맞으세요’라는 뜻이다. ‘피 마이’는 양력 1월 1일에 더 많이 쓴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크란 페스티벌 [Songkran Festival] (세계의 축제 · 기념일 백과) =========================/// 13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시암 광장에서 연례 송크란 축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즐겁게 물총 싸움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태국 최대의 축제 '송크란'이 열렸다.   13일(현지시간) 태국 곳곳에서 연례 송크란 축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즐겁게 물총 싸움을 하고 있다. 물축제로 알려진 송크란 축제는 태국 전통 새해의 시작을 기념하고 축복과 건강,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로, 매년 4월 태국 전역에서 열린다.   송크란 공식 휴일은 13~15일이지만 송크란을 전후해 약 10일간 축제 분위기가 이어진다.   송크란 축제에서 물을 뿌리는 건 정화의 의미다. 송크란 기간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집안의 불상, 불탑 등에 물을 부어 깨끗이 씻기도 한다.  ◇인파 북적… "태국 최대 축제답네"  【방콕=신화/뉴시스】13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시암 광장에서 연례 송크란 축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즐겁게 물총 싸움을 하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물총 싸움  【방콕=신화/뉴시스】13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시암 광장에서 연례 송크란 축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즐겁게 물총 싸움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코끼리도 물 뿜으며 '송크란' 【방콕(태국)=신화/뉴시스】2011년 4월1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태국 전통 새해맞이축제인 송크란 축제를 이틀 앞두고 코끼리들이 관광객들을 향해 물을 뿜고 있다. ◇시원하게 물 맞는 어린이들  【방콕(태국)=신화/뉴시스】2011년4월1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한 동물원에서 태국 전통 새해맞이축제인 송크란 축제를 이틀 앞두고 코끼리들이 관람객들을 향해 물을 뿜고 있다.     ◇태국 비롯 미얀마, 라오스 등지에서도 '송크란 축제'  2009년4월1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근방 페탈링 자야에서 열리는 물축제 '송크란 축제'에서 한 남성이 여자친구에게 물을 퍼붓고 있다.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2649    [그것이 알고싶다] - 우주는 지금... 댓글:  조회:3891  추천:1  2019-04-10
[블랙홀 첫 관측] 100년간 인류가 상상한 각양각색의 블랙홀 모습들 2019-04-10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검은 구멍부터 노랗고 빨간 원반까지블랙홀의 상상도. 천체물리학자들은 전파망원경을 동원해 블랙홀의 그림자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4월, 마침내 그 결과가 공개된다. NASA, ESA, and D. Coe, J. Anderson, and R. van der Marel(STScI) 10일 오후 10시 인류 사상 처음으로 블랙홀의 실제 모습이 공개됐다. 유럽남방천문대는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을 통해 관측했던 블랙홀의 실제 이미지를 세계 7개국에 동시 생중계로 공개했다. 블랙홀은 중력장이 극단적으로 강한 공간을 뜻하는 말로 엄청나게 강한 중력으로 어떤 물체든지 흡수해 버리는 별이다. 빛조차도 블랙홀을 피해갈 수 없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블랙홀은 우주공상과학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였다. 그 중 블랙홀을 소재로 삼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는 바로 ‘인터스텔라’다. 인터스텔라는 2014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으로 그 어떤 영화보다 실제에 가까운 블랙홀을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나리오 작가인 조나단 놀란이 인터스텔라 각본을 쓰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4년간 공부하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인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에게 감수를 받기도 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묘사된 블랙홀의 모습이다. 그 어떤 영화보다 블랙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터스텔라 캡쳐. 인터스텔라 속 블랙홀은 검은 도화지에 붓으로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가운데 수평으로 같은 색깔의 선을 그은 것처럼 보인다. 이 노란선들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물질들을 나타낸 것으로 물질이 원반 형태를 그리며 빨려가는 모습과 중력렌즈의 영향을 고려했다. 중력렌즈는 블랙홀에서 내뿜는 커다란 중력장에 의해 빛이 굴절되어 보이는 현상을 뜻한다.  놀란 감독의 2013년작인 영화 ‘맨오브스틸’에서도 블랙홀이 나온다.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두 물체가 충돌해 검정색 구멍을 가진 블랙홀이 지구에 생성된다. 맨오브스틸의 슈퍼맨은 블랙홀에 빨려드는 속도보다 더 빨리 비행해서 블랙홀로부터 빠져나왔다. 마블 영화시리즈 중 하나인 ‘토르: 다크월드’에서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수류탄이 무기로 사용된다.  주인공 진구 입에 들어가 있는 블랙홀이 열리며 이슬이를 끌어당기고 있다. 도라에몽 캡쳐 만화 도라에몽에도 블랙홀이 등장한다. 친구들 집에서 간식을 배터지게 먹은 주인공 진구는 배가 불러 저녁밥을 먹지 못한다. 부모님이 이런 진구의 행동을 걱정하고 도라에몽은 부모님의 걱정을 덜기 위해 진구에게 블랙홀을 먹인다. 진구의 입으로 들어간 블랙홀은 모든 음식을 빨아들인다. 여기서 블랙홀은 단순히 검은색 구멍으로 묘사된다. 블랙홀은 거대한 별이 수명을 다할 때 폭발하며 생성된다. 별의 폭발 이후 질량은 그대로 보존한 채 크기만 엄청나게 줄어든다. 수축의 정도가 심해지며 검은색 구멍이 모든 물질을 빨아들이게 된다.  1964년 발견된 블랙홀 백조자리 X-1을 나타냈다. NASA 제공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1964년 발견된 블랙홀 백조자리 X-1를 한가운데 검은색 구멍을 가진 붉은 원반으로 표현했다. 백조자리 X-1은 태양에서 약 6100광년 거리에 있다. 백조자리 X-1 옆에는 HDE 226868이라는 동반성이 존재한다. 백조자리 X-1은 HDE226868을 흡수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X선이 블랙홀 백조자리 X-1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실제 이미지로 백조자리 X-1이 관측된 적은 없다.  이번 발표에서 실제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관측이 확인된다면 첫번째 직접 관측이 될 전망이다. 유럽남방천문대는 1일부터 “4월 10일 오후에 벨기에 브뤼셀과 미국 워싱턴DC,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대만 타이페이 등 세계 여섯 곳에서 EHT 프로젝트의 ‘놀라운(groundbreaking)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헤이노 팰케 네덜란드 라드보드대 교수(EHT 과학위원장)과 에두아르도 로스 독일 막스플랑크 전파천문학연구소 교수(EHT 이사) 등은 브뤼셀 기자회견에 참석해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다. /고재원 기자
2648    [그것이 알고싶다] - 화가 반 고흐와 "자살 권총"?... 댓글:  조회:4112  추천:0  2019-04-09
6월 9일 파리 경매에서 5만 유로 안팎 낙찰 예상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하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 경매에 나온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외신에 따르면 7mm 포켓 리볼버인 이 권총은 오는 6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옥션 아트' 경매에 출품될 예정이다.    ▲ 반 고흐가 자살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은 75년 뒤인 1965년 들판에서 발견됐다. [뉴시스]   이 권총은 반 고흐가 1890년 7월 27일 가슴에 총을 쏴 자살했을 때 머물렀던 프랑스 북부 오베르 쉬르 와즈 마을의 인근 들판에서 75년 후인 1965년에 발견됐다.   당시 37세였던 반 고흐는 이틀 후 숨을 거뒀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슬픔은 영원히 지속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권총은 한 농부가 발견해 고흐가 머물고 있던 여관의 주인에게 전달했고, 이후 자손들이 대대로 보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 반 고흐가 귀를 잘라낸 후 그린 1898년작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이 권총은 2012년 처음 공개됐으며, 2016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이 개최한 전시회에서 선을 보인 바 있다. 옥션 아트 측은 발견된 장소와 정황 등을 들어 반 고흐 사망에 사용된 권총이 확실하다며 4만(약 5100만 원)~6만 유로(약 7700만 원) 선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 고흐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을 밀밭에서 두 명의 10 대 괴한에 의해 피살됐다는 설도 있다. 그는 1888년 자신의 귀를 면도 칼로 잘라낸 것으로 유명하며, 숨진 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의 인근 묘역에 동생 테오 반 고흐와 함께 나란히 묻혀있다.   ///UPI뉴스 / 장성룡 기자 
2647    [그때 그시절] - 검은 머리, 흰 머리... 댓글:  조회:4529  추천:0  2019-04-01
PICK 안내 [포커스] "흰머리가 어때서"… 당당히 드러낸 '인생 훈장'  2019-04-0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노화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흰 머리가, 해외에선 최신 유행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염색으로 감추기보다 흰머리를 당당하게 공개하는 커밍아웃에 오늘의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리포트]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관능미를 뽐내는 여성. 할리우드 배우 셀마 헤이엑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일까요? "흰 머리가 자랑스럽다"며 본인이 당당히 공개한 사진입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성들 자세히 보니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와 벤 에플렉이네요. 당대의 청춘스타들도 은발을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전세계 남녀불문 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흰머리. 한 가닥이라도 눈에 뛸라 염색약 발라 꼭꼭 숨기기 일쑤였지만, 이젠 드러내놓고 뽐내는 머리 색, 첨단 유행이 됐습니다. 인터넷엔 흰 머리로 변신한 해외 여성들의 얘기가 쏟아집니다.  "20년동안 염색을 해왔죠." "드디어 흰 머리가 됐어요!"  "예전엔 흰 머리가 남성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이게 내 모습이야. 더 자신감을 느껴요."  지금이야 새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지만 한때, 흰머리가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세계 관심이 집중된 인사도 있었습니다.  오바마 / 2012  "제 흰 머리 보셨죠. 개혁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화당과 예산 갈등때문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정치적 해석이 구구했지만,  미셸 오바마 / 2013년 ABC방송  "사람들은 대통령 흰머리가 업무 때문인줄 아는데 사실은 아이들 때문이에요."  흰 머리 하면 떠오르는 국내 배우, 생전의 신성일씨죠.  신성일/2012년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거 아닙니까? 참 무식한 소리야. 그런 소리 안해줬으면 좋겠어. (멋있어요!) 그래 이제는 자유 만세 아냐. 자유인, 자유 만만세"  흰 머리의 자유를 외치던, 영원한 맨발의 청춘이었습니다.  신성일  "하나도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머리만 하얗지 하나도 안 늙었어요."  당대 최고 미녀였던 김지미씨도 멋진 은발의 노배우가 되었죠.  김지미 / 2017년  "제가 100살을 먹어도 또 그 이상을 먹어도 영원히 철이 안 날 것 같에요."  왕년의 톱스타. 한지일씨도,  2019년  "저는 지금 웨이터" 백발 성성한 모습으로 인생 2막을 살고 있습니다.  정병석 / 서울 중구  "제가 이게 좀 더 멋있어보여요, 염색한 것보다"  허명강 / 서울 노원구  "특히 햇빛 있는 날은 더 멋있다고들 야단입니다. 이 흰머리가 은빛 색깔이 더 밝게 보이더라고요"  인생이 주는 은빛 훈장, 바로 흰머리 아닐까요. 뉴스9 포커스였습니다.
2646    [문단소식] -전병칠시인 "한가닥의 진화"을 붙잡고 읊조리다... 댓글:  조회:3606  추천:0  2019-04-01
전병칠시인 두번째 시집 출간 (ZOGLO) 2019년4월1일  연변작가협회 회원이며 연변시인협회 회장인 전병칠(70)시인의 두번째 시집 《인류는 이제 한가닥의 진화만 남았다》가 일전에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여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1973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한후 선후로 연변와룡강철공장, 연변통용기계공장, 연변군중예술관, 연변음향출판사, 연변예술집성판공실 등 단위에서 로동자와 문학편집, 부사장, 주임으로 근무하다가 2009년에 퇴직한 전병칠시인은 1975년에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시, 수필, 실화 등 문학작품 300여편을 발표하고 시집 《종려나무》를 출간한외 정지용문학상, 《시향만리》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문학상 등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전병칠시인이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주임으로 있을 때 해외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무료로 인입하여 연변관중들에게 선물하였는데 이는 연변관중들이 공중파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외국드라마였다. 이번에 출간된 시집에는 전병칠시인이 최근에 창작한 125수의 시를 수록되였는데 감정이 진지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짙으며 내용과 형식상에서 독창적인 추구를 보여주었다는 보편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혼란한 세상을 우습게 바라 보는 , , 사라져가는 것들에 우는 , , 겨레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는 , , 독창적인 시탐구를 보여준 , 와 같은 시들이 시평론가들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26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길고양이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285  추천:0  2019-04-01
[밀착카메라] 곳곳에 쥐약 살포… 갈길 먼 길고양이와의 공존  2019-04-01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주인에게 버림받거나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고양이들이 전국에 100만 마리가 넘습니다. 각 지자체가 길고양이들 중성화 사업도 하고 함께 살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곤 있지만 허울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1일) 밀착카메라는 고양이들과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선화 기자입니다. [기자] 담벼락 곳곳에 고양이가 그려져있습니다. 골목 한귀퉁이나 담장 위처럼 실제로 고양이가 나올 법한 곳마다 그려 놓은 것인데요. 이곳은 강원도 춘천의 '고양이 마을'로 불리는 곳입니다. 길고양이가 많아지면서 주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아예 고양이 마을로 조성한 것입니다. 막상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고양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임현정/대구 복현동 : 고양이들이 케어 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을 정도로 그냥 방치되어 있는. 음식물 쓰레기 헤치고 있는 모습도 봤었고요. 왜 고양이 마을이라고 지정이 됐는지는 조금 의문스러웠어요.] 고양이들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곳이 고양이들이 지냈던 쉼터입니다. 빈집을 거처로 만든 것인데요. 입구 바닥을 보시면 그릇을 치우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떨어져 있습니다. 집 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빈 사료 캔과 그릇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고요. 집 안쪽으로 들어와보시면 먹다 남은 사료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곳곳에 남아있는 고양이 털만이 한때나마 이곳이 고양이들이 살았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건 올초 부터입니다. [차인규/강원 춘천시 효자동 : 다 죽었죠 뭐. 누가 쥐약을 타서. 거기에 8마리가 있었어요. (안 보여서) 어 이놈들이 떠나나 어디를, 아직 어린데. 나중에 보니 한 마리만 남은 거야.] 주민센터도 일부 주민 반발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주민 : 지금 파 심으려고 키우고 있는데. 저런 데 파고선 똥을 싼 다음에 묻어요. 파고선 똥을 놓고. 여기 똥 쌌잖아. 이게 똥 아냐? 봤어 안 봤어.]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 지난달 아파트 단지 주변 6개 급식소에서 쥐약이 발견됐습니다. [주민 : 사료는 전부 버려져 있고. 스팸과 멸치, 멸치가 담겨진 쥐약이 온 급식소에 다 되어 있었어요. 여섯 군데.] 이곳에서 사료를 먹다 죽은 고양이 사체에서도 쥐약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주민 : 못 움직이고 몸은 위로 들릴 정도로 꿀렁꿀렁. 항문이 열려서 배변한 흔적들이 있었어요.] 길고양이가 다니는 곳에 무차별적으로 쥐약을 뿌린 지자체도 있습니다. 보건소에서 쥐를 잡겠다면서 3만개에 달하는 쥐약을 곳곳에 뿌렸습니다. 공개한 작업 지역 목록을 보시면 공원이나 풀숲, 그리고 주거지역 인근 등 총 30곳에 달하는 곳에 쥐약을 살포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이 항의가 심해지자 수거에 나섰고요. 이렇게 사과를 드린다는 현수막까지 내걸었습니다. [주민 : 웬 사탕 같은 게 떨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왜 사탕이 이렇게 많이 떨어져 있지 하고 만졌는데 부서지는 거예요.]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게 쥐약입니다. 파란 알사탕처럼 생겼는데요. 조금만 손에 힘을 주어도 이렇게 부스러집니다. 실제 지난 3월에만 3마리의 고양이가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상록구 보건소 관계자 : 업무 미숙이죠 하다 보니까. 처음 해도 사실 이렇게 미스(실수)가 나면 안 되는 건데.] 경기도는 올해부터 2022년까지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을 위해 72억 원을 투입할 계획입니다. 중성화를 위해서는 고양이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급식소가 필요한 상황. 하지만 일부 구청에서는 민원을 이유로 기존 급식소까지 철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길고양이는 100만 마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부에서는 중성화 사업 등 동물보호와 관련된 예산을 매년 추가하고 있는데요. 예산 확보 뿐 아니라, 일관된 정책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선화(lee.sunhwa@jtbc.co.kr) [영상취재: 이학진 / 영상편집: 김정은]
2644    [그것이 알고싶다] - "오줌싸개 소년동상" ... 댓글:  조회:5197  추천:0  2019-03-31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오줌싸개 소년   [ Statue of the Pissing Boy ] 이미지 크게보기 오줌싸개소년 분류 해외여행 > 관광지 지역 유럽 > 벨기에 > 브뤼셀 유형 시설물·건축물 휴관일 없음 주소 35, rue de l’Etuve 1000 Bruxelles 가는방법 그랑 플라스에서 시청사를 바라보고 섰을 때 시청사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정도 따라 가면 있음. 브뤼셀의 가장 나이 많은 시민이라 불리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벨기에 관광에서 빼지지 않는 코스이다.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에 의해 제작된 이 동상의 실제 크기는 60cm 남짓하다. 이 동상과 관련한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프랑스 루이 15세가 브뤼셀을 침략했을 때 이 동상을 탐내 프랑스로 가져갔다가 이후에 사과의 의미로 화려한 후작 옷을 입혀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줌싸개 소년 [Statue of the Pissing Boy]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 오줌싸개 소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오줌싸개 소년 오줌싸개 소년(네덜란드어: Manneken Pis 마네컨 피스[*])은 오줌누는 소년을 본뜬 동상, 분수이다. 1619년 제롬 듀케뉴아가 만든 높이 약 60cm의 청동상이다. 여러 차례 도난 당하는 수난을 겪었고, 현재 설치되어 있는 동상은 1965년 복제본이다. 원래의 동상은 그랑플라스의 브뤼셀 시(市) 박물관(Maison du Roi/Broodhuis)에 보관되어 있다. 이 동상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14세기에 프라방드 제후의 왕자가 오줌을 누어 적군을 모욕했다는 설이 유명하다. 현재 세계 각국으로부터 옷을 보내어 옷을 입혀놓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오줌싸는 자세는 오른손으로 허리,왼손으로 "고추"를 잡고있다. ======================/// 오줌싸개 동상의 옷; 오줌싸개 동상이 얼마나 자주 옷을 갈아입는지 모를 것이다. 왕의 집(King's House), 그랑 팔라스, 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쥘리앙의 의상은 미키마우스 복장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복장 등을 포함해 600벌이 넘는다. 1698년 네덜란드 총독을 시작으로 브뤼셀을 방문한 많은 국빈들이 꼬마 쥘리앙을 위해서 옷을 만들어와 입히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오줌싸개 동상의 유래; 오줌싸개 동상에 얽힌 여러 전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어린 소년이 마녀가 살고 있는 집앞에 오줌을 싸 그녀가 너무 화가 나서 소년을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 국제 2019년 03월 29일 KST 벨기에의 오줌싸개 동상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줌"을 쌌을까? 쉬~~~~~~~~                 /강병진     MIKE KEMP VIA GETTY IMAGES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브뤼셀을 찾는 관광객들의 인기 명소다. 1619년 제롬 듀케노와라는 프랑스 조각가가 만든 이 동상이 세워진 지도 올해로 400년이 되었다. 그런데 400주년이 되는 해에 동상에 얽힌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됐다. 3월 26일,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레지 칼렌이란 이름의 에너지 전문 기술자는 이 동상이 하루에 배출하는 물의 양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동상에 미터기를 설치한 후, 물의 양을 측정했다. 그 결과 오줌싸개 동상이 하루에 쏟아내는 물의 양은 하루에 1,000리터에서 2,500리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물이 식수로 쓸 수 있는 깨끗한 물이라는 것. 또한 약 10개 가구가 쓸 수 있는 양의 깨끗한 물이 그냥 하수구로 흘러가면서 낭비되고 있었다. 레지 칼렌은 현지 언론인 ‘La Derniere Heure’를 통해 ”우리는 동상이 쏟아내는 물이 순환되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며 ”그동안 아무도 이 문제를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KENZO TRIBOUILLARD VIA GETTY IMAGES 레지 칼렌이 파악한 수치로 계산하면 오줌싸개 동산은 지난 400년 동안 약 2억 5천만 리터를 뿜어냈다. 브뤼셀시는 지난 3월 중순, 조사 결과를 접수한 후 물을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브뤼셀 시의원인 브누아 에링스는 “400년 만에 처음으로 오줌싸개 동상이 신선한 물을 싸지 않게 됐다고 말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시 당국은 이와 같은 물낭비를 막기 위해 중앙에 위치한 분수들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6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구걸하지 말고..." 댓글:  조회:4001  추천:0  2019-03-31
PICK 안내 [단독]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2년 만에 재개관 …  2019-03-3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30일 재개관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가보니 안 의사 이토 저격 현장 표식도 복원돼 기념관에서 직접 볼 수 있어 기념관 정문 방향 바뀌고 공사 지역 바리케이드 지나야 찾을 수 있어 중국인 관람객 “기념관 간판을 정면에 달고 안내 표시해줘야” 새로 설치된 안중근 동상. 하얼빈=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사형을 받은 아들에게 그녀는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라는 말을 전했다.” 31일 오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김민형(25) 씨는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한 말을 소개한 글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따라 읽어 내려갔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30일 규모를 확대해 재개관했다. 하얼빈역사 개축 공사를 이유로 2017년 3월 돌연 휴관, 철거된 지 2년 만이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하얼빈역 플랫폼 현장의 표식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 발생지’라는 표지판과 함께 복원됐다. 이 표식과 표지판은 개축 과정에서 사라졌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저격 시간인 9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 조각품 아래 안 의사의 전신 동상이 새로 설치됐다. 올해는 안 의사 탄생 140주년, 의거 110주년이 되는 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현장 표식도 복원 하얼빈에서 어학연수 중인 김 씨는 지난해에는 기념관이 철거된 상태라 기념관에 있던 자료들을 보관하던 인근의 조선민족예술관을 대신 방문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김 씨와 함께 이날 기념관을 찾은 허담(26) 씨는 “통유리 너머로 하얼빈역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1번 플랫폼 장소를 직접 보니 안 의사의 역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개관 이틀째인 이날 관람객이 거의 없어 분위기는 한산했다. 중국은 30일 하얼빈일보 3면 최하단에 1단으로 재개관 사실을 짧게 알렸다.  원래 하얼빈역 남광장 방향으로 나 있던 기념관 정문 방향이 남광장 왼쪽으로 바뀐데다 여전히 진행 중인 하얼빈역사 개축 공사 구역 안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졌다. 공사 구역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기념관으로 가는 안내 표지는 없었다.  이날 기념관을 찾은 중국인 양취안위(楊全余·55) 씨는 “저녁 기차를 기다리다가 관리 직원이 알려줘 왔다”며 “기념관 간판을 광장을 바라보는 정면에 달고 (역사에) 기념관 안내 표시를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어떻게 알고 오겠나”라고 지적했다.  양 씨는 “(안 의사는 일제에 대항하는) 반(反)파시스트 전쟁 중에 선도자처럼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 고난을 겪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며 “이런 정신이 매우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인들도 안 의사를 정신을 배우기 원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중국은 공식적인 재개관 기념행사를 열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중일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안 의사 기념관 재개관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현지 소식통은 “일본 정부는 기념관 재재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기념관 안 방명록에는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미 기념관을 찾은 한국인들이 남겨 놓은 글들이 있었다. 30일 개관 당일 가족과 함께 기념관을 찾은 한 관람객은 “해외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애국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적었다. 다른 관람객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많은 것을 느끼고 갑니다. 한국에서 국가를 위해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을 가슴 한 켠에 묻고 가겠습니다”라고 남겼다.  /하얼빈=윤완준 특파원 
264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물랑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83  추천:0  2019-03-31
벨기에 명물 오줌싸개 동상, 이제 물 다시 쓴다… “먹지 마세요” (ZOGLO) 2019년3월31일  [서울신문 나우뉴스] 사진=Myrabella / Wikimedia Commons(CC BY-SA 3.0)벨기에 브뤼셀의 관광 명소 ‘오줌싸개 동상’(Manneken-Pis)이 앞으로 '새 오줌'을 쌀 일은 없을 것 같다. 지난 400년간 한 자리를 지키며 약 2억 5000만 리터의 오줌을 싼 오줌싸개 동상에 이제 ‘순환 급수 시스템’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브뤼셀 타임즈 등 현지 언론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하루 10여 가구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물 1000~2500리터가 17세기부터 매일 ‘오줌싸개 동상’을 통해 버려졌다고 전했다.  ‘오줌싸개 동상’은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의 작품으로 그간 수도 없이 도난당했으며 현재 설치되어 있는 것은 1965년에 만든 복제품이다. 원본은 그랑플라스에 있는 박물관 ‘왕의 집’에 전시되어 있다. 이 동상은 각종 행사를 기념하는데 동원되며 일년 내내 다른 의상으로 장식된다. 1년에 약 130 차례 장식이 바뀌며 사용되는 의상만 1000여벌에 달한다.이 동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레우벤의 공작 듀크 고드프리 3세에 관한 것이다. 1142년 전쟁통에서 당시 2살이었던 고드프리 3세가 적군 부대를 향해 소변을 본 뒤 아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오줌싸개 동상이 14세기 방어벽을 폭파하려는 적들에 의해 불이 붙은 퓨즈에 오줌을 싸서 도시를 구한 줄리앙스케라는 청년에게 바치는 공물이라고도 말한다.  다양한 전설을 품고 400년간 브뤼셀의 관광 명소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오줌싸개 동상’은 그러나 지금까지 2억 5000만 리터의 식수를 흘려보내 물 낭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브뤼셀시는 앞으로 ‘오줌싸개 동상’으로 흐르는 물이 끝없이 재순환된다고 밝혔다. 브뤼셀 시의원 브누아 에링스는 “400년 만에 처음으로 오줌싸개 동상에서 깨끗한 오줌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시 당국은 또 브뤼셀 전역에 있는 분수에서 식수가 낭비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사할 계획이다.
264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그럴수도 있지..." 댓글:  조회:3407  추천:0  2019-03-31
젖 먹이는 의원, 아기 안은 의장… 세계 의회는 ‘베이비 붐’ (ZOGLO) 2019년3월30일 美상원도 지난해 4월 자녀동반 허용 이탈리아 의원, 딸과 3년간 유럽의회 참석 일본·덴마크 일부선 아기 입장 반대 “육아=여성일 못 박아선 안돼” 의견도 2017년 3월 호주 의회에서 라리사 워터스 호주 상원 의원이 모유수유를 하면서 발언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세계 의회 역사상 최연소 출석자는 누굴까. 생후 10일에 미국 의회 문턱을 넘은 마일리 펄 볼스비다. 볼스비는 타미 덕워스 민주당 상원의원의 딸로 지난해 4월 상원이 1살 이하 영아의 의회 출입을 허용한 바로 다음 날 의회에 얼굴을 비쳤다.  덕워스는 미 상원 역사상 임기 중 아이를 낳은 첫 의원이다. 그만큼 출산과 육아는 여성의원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덕워스 의원은 관련 규정 개정을 요구하면서 “표결 참여나 아기 돌보는 것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기존 제도하에선 일과 가정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에 로이 블런트 상원 의사운영위원회 위원장은 “아이를 기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며 의회가 부모의 일을 더 어렵게 해선 안 된다”며 영아의 의회 입장을 허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80대가 다수 있는 조직에서 이런 변화는 기념비적”이라고 평했다.  전세계적으로 정치인들이 자녀와 함께 의회에 출석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16년부터 영아의 의회출입을 허용한 호주에선 녹색당 소속 상원의원이 모유 수유를 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다. 라리사 워터스 의원은 지난 2017년 학교 지원금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너무 배고파했다”는 이유로 생후 3개월 된 딸 알리아 조이에게 수유를 했다. 그는 “직장에서 모유 수유하는 게 더 이상 뉴스가 돼선 안 된다”는 말도 남겼다. 또 크리스포터 파인 하원의원은 “누구든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의정활동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며 일 가정 양립을 위한 자녀 동반출입 허용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트레버 맬러드 뉴질랜드 국회의장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 [NZ Herald 캡쳐] 2년 전 뉴질랜드에선 트레버 맬러드 국회의장이 아기를 안고 의사 진행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맬러드 의장품에 안긴 아기는 동료의원인 윌로 진 프라임 의원의 딸 히니였다. 맬러드 의장은 “의원들에게 바람직한 예시를 보여주고 일하는 부모들을 지지하는 마음에서 아기를 안았다”고 설명했다.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 역시 지난해 유엔총회에 생후 3개월 된 딸 니브와 함께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유엔은 니브에게 ‘뉴질랜드 퍼스트 베이비’라는 ID카드도 발급해 니브는 ‘퍼스트 베이비’라는 별명도 얻었다.  3년간 딸과 함께 의회에 참석한 의원도 있다. 리치아 론줄리 이탈리아 소속 유럽의회 의원은 딸 빅토리아가 생후 6주였던 2010년부터 함께 의회에 출석했다. 덕분에 그의 유럽의회 의정활동 사진엔 빅토리아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론줄리 의원은 “모든 여성이 육아와 일을 함께 할 수는 없다”며 “임신과 가사노동, 사회생활을 병행하는 여성들의 고충을 보여주기 위해 딸을 데리고 왔다”고 밝혔다.  리치아 론줄리 유럽의회의원의 딸 빅토리아의 성장과정을 엿볼 수 있는 2010년 9월 22일부터 2013년 11월 19일까지 촬영된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이처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정치인들이 자녀와 의회에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한 이유는 육아 때문에 경력단절이 발생하는 걸 막고 일·가정 양립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가디언은 “말도 안 되는 논의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더 많은 여성을 국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모두가 어린아이의 의회 출입에 우호적인 건 아니다. 2017년 일본 구마모토(熊本) 시의회 오가타 유카(緒方夕佳) 의원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는 이유로 7개월 된 아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섰지만 ‘당장 회의장에서 나가라’는 등 일부 의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아기를 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덴마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19일 메테 아빌가드 보수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남편이 아이를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생후 5개월 된 자녀를 의회에 데리고 가자 피아 키에르스고르 의회의장이 의회에서 나가라고 지시했다”는 글을 올렸다. 덴마크는 공식적으론 영아의 의회출입을 허용하지 않지만 지금까지는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게 아빌가드 의원의 설명이다. 이에 극우정당 출신인 키에르스고르 의장은 “의회엔 아이들이 아닌 의원이 있어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보수적인 의원들뿐 아니라 일부 페미니즘 단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지난 2016년 스페인의 카롤리나 베스칸사 포데모스 소속 의원이 의회에서 생후 5개월짜리 아들에게 모유 수유를 하자 페미니스트 단체 레드 페미니스타는 “베스칸사가 모성애를 전시 요소로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또 진보여성연합(FPW)은 “이런 모습은 여성이 일할 때도 풀타임으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비생산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며 “육아가 오로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못 박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2640    "나는 천국에 가서도..." 댓글:  조회:3816  추천:0  2019-03-27
  [앵커의 눈]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년… 일본에서도 ‘영웅’ 2019-03-26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안중근 의사 유언 :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오늘은(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9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울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도 추모행사가 열렸고요, 안 의사가 144일을 갇혀있다 순국한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도 추모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 속에서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사형장에서까지 동양의 평화를 염원했던 모두의 영웅이었기 때문인데요, 일본에도, 이런 안 의사를 영웅으로 기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도쿄 이승철 특파원이 만났습니다. [리포트]  추모비로 향하는 길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 아래 전범기인 욱일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워낙 세게 붙어 있어서 잘 떼지지도 않네요."] 그리고 안내판을 따라간 곳, 절 앞마당에 안중근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안 의사가 중국에서 처형당할 당시 형무소의 간수였지만 그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던 일본인 헌병 지바 도시치. 안 의사가 처형 직전 지바 씨에게 써 준 '유묵'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계기로 지난 80년 세워진 추모비입니다. 이곳에서는 매일처럼 안중근 의사께 예를 표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협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이토/스님 : "(협박이 있다고요?) 빨리 비를 철거하라고, 왜 안중근이 일본에 있느냐면서."]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지난 2002년에는 지역 역사모임 회원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추모비를 건립했습니다. ["영웅... 안중근 의사"] [오노데라/구리하라시 역사이야기회 회장 :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안중근 의사의 신념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건 어느 시대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 단체는 일본 전국을 돌며 20차례 가까이 강연회를 열어 안 의사의 사상을 설파했고 건립비를 모금했습니다. 비에는 안 의사의 평화사상을 새겼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평생 그의 신념을 되새기며 살았던 지바 씨의 마음을 한일 양국이 공유할 수 있길 바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가져 온 안 의사의 유묵을 모셔놓고 (지바 씨가) 매일 예를 올렸다고."] [스가와라/구리하라시 국제교류회 회장 : "두 사람의 인연처럼... 서로 신뢰하는 것이 평화운동의 기본이 되는 것이죠."] 지금도 매년 안중근 의사 순국일에는 한국을 찾고, 탄생일엔 일본에서 행사를 치르며 안 의사를 기리는 일본 시민들. 평화를 위해 침략을 멈춰야 한다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이 일본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야기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이승철 기자
2639    [그것이 알고싶다] - 안중근 유해 찾아 안식시켜야... 댓글:  조회:3957  추천:0  2019-03-27
109년째 지키지 못한 안중근 유언… 유해 발굴 제자리  2019-03-26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오늘(26일)로 꼭 109년이 됐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뼈를 중국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말을 남겼었는데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 가족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도 지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송욱 특파원이 그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뤼순 감옥의 사형대 위에서도 대한국인의 의기를 꺾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 109년이 지난 오늘 그곳에는 안 의사에 대한 추모와 유언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은 지난 2008년 실패 이후 답보 상태입니다. 유력한 매장지로 뤼순 감옥 공동묘지 터가 지목됐지만 중국은 남북한의 합의와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월배/하얼빈이공대 교수 : (유력 매장지) 지역에 일반인의 묘지들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더 요원하기 전에 지표투과 조사라든지, 그런 형태의 (조사를) 실현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안 의사 가족들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형을 앞둔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던 조마리아 여사와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동생 안정근 선생,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고 상하이의 한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이 안장됐던 곳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상하이 도심 개발 사업으로 이처럼 공원으로 변했습니다. [스위안화/푸단대 교수 : 당시 상하이 정부에서 그 공동묘지에 있는 묘들을 일정 기간을 주고 이장하라고 공고했습니다. 기간이 지나면 정부에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묘지 이장 과정에서 안 의사 가족의 유해는 사라졌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관련 서류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쑤즈량/상하이사범대 교수 : (기록보관소, 민정국 등을) 지난 1년여 간 모두 조사했습니다만 정확한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장 관련 일을 했던 사람을 찾으면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안중근 일가의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닌 외교적 역량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영상취재 : 이국진, 영상편집 : 정용화, 자료 : 안중근의사숭모회)   /송욱 기자
2638    [그것이 알고싶다] - "실록" = 2219책 = 국보 댓글:  조회:4442  추천:0  2019-03-27
  "이 일을 모르게 하라"까지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 실록 2219책 모두 국보된다 2019-03-26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보내기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반출해간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무주)사고본 중 일부(4책)가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3책)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었다. |문화재청 제공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1401년(태종 1년) 태종은 임금이 정사를 보다가 쉬는 공간(편전)을 따로 마련하고는 “이곳은 내가 쉬는 곳이니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사관들은 “무슨 소리냐. 안된다”고 버텼다. 임금이라면 편전에서 쉬다가도 대신들을 불러 정사를 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경연장(경전을 논하고 논쟁하는 곳)을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 정사의 한 대목 한 대목까지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는 사관들은 당연히 임금이 쉬는 편전에도 입시해야 했다. 이복동생(방석)을 죽이고, 동복형(방간)까지 쫓아내고 정권을 틀어쥔 태종 이방원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가. 태종은 지존인 군주의 뒤를 찰싹 들러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관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껏해야 7~9품 하위직에 불과하던 사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봉모당’ 실록.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부속 건물로 건립한 봉모당(奉謨堂)에 보관한 실록이다. 실록은 원래 임금들에게는 ‘열람불허’가 원칙이었다. 따라서 18세기 이후에는 일상적인 실록 외에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들의 생애와 행적 중심의 ‘어람용’ 실록을 따로 제작했는데, ‘봉모당본’이 대표적인 어람용 실록이다. |문화재청 제공 사관 홍여강은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다가 쫓겨났다. 내시들은 버티는 홍여강의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쫓아냈다. 내시들은 대롱대롱 매달린 홍여강을 내동댕이 쳤다. 이번에는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 도승지(박석명)의 제지에도 민인생은 편전 문을 밀고 쳐들어왔다. 태종이 “내 말이 말같지 않냐. 왜들어왔냐”고 꾸짖자 민인생은 “전하의 좌우에는 사관이 입시해야 정사를 기록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 태종이 “과인이 쉬는 편전에는 왜 들어오냐. 굳이 쓰려면 편전 밖에서 쓸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웃으며 좋게 타일렀다. 그러나 민인생은 정색하면서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4월29일) 7월8일에는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민인생은 결국 편전의 휘장까지 걷고 엿보는 등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태종은 시도 때도 없이 사냥을 나갔는데 이것은 나라의 안녕에는 큰일이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한다 말인가. 그런데 1404년(태종 4년) 임금이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관은 태종 임금의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결국 에 남겼다. 결국 당대의 사관들은 천하의 지존인 임금이 쓰지 말라는 것까지, 즉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어놓은 것까지 쓴 것이다. 은 이렇듯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는 정신으로 군주와 신하들의 잘잘못과 당대의 정사를 일일이 기록하며 또 포폄까지 했던 뭇사관들의 춘추필법 정신이 녹아있는 결정체이다. 조선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의 편년식으로 정리했다. 조선 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당시 국왕도 마음대로 열람하지 못했다. 그만큼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자료이므로 1973년 국보(제151호)로 지정되었고, 국제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정족산사고본 실록. 1973년 정족산 사고본 1181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실제로 책수를 세어보니 1180책이었다, 왜 1책이 빠졌는지는 알 수 없다. 태백산 사고본(848책)은 제151-2호, 오대산 사고본(27책)은 제151-3호, 기타 산엽본(21책)은 제151-4호로 각각 지정됐다. 2006년 일본 도쿄대가 반환한 오대산사고본 47책은 국보 151-3호로 추가 지정됐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 한국전쟁, 분단 등의 이유로 실록은 거듭 수난을 당해왔다. 2016년에는 국보 151-1호인 ‘실록 정족산(강화)사고본’의 일부가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부터 누락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2017년부터 실록 소장처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함께 1년에 걸쳐 현황을 재검토한 뒤 지난해 실록의 소재지를 전수조사했다. 그 결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85책,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9책,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각 1책씩, 모두 96책을 새롭게 확인했다. 원소장처별로 보면 적상산사고본 4책과 오대산 사고본 1책, 정족산사고본의 누락본 7책, 봉모당(규장각 부속건물)본 6책, 낙질 및 산엽본(낱장으로 떨어져 흩어진 자료) 78책 등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확인된 96책을 추가로 국보로 지정예고했다. 96책이 별다른 이의없이 국보로 지정될 경우 1973년 지정된 2077책(실제로는 2076책)과, 2006년 추가로 지정된 47책을 합해 모두 2219책의 조선왕조실록이 국보가 되는 셈이다. 황정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왕조실록 모두가 이번에 국보로 지정되는 셈”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성과는 한국전쟁("6.25전쟁") 때 북한군(조선군)이 북으로 반출했다고 알려진 적상산(무주) 사고본(4책)이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3책)이 나눠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상산 사고본은 ‘광해군일기’이다. 북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진 적상산 사고본 일부의 발견으로 조선의 4대 사고(史庫)인 정족산·오대산·적상산·태백산 사고에 소장된 실록이 완질 또는 일부 형태로나마 국내에 다 남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정족산사고본 누락본인 ‘성종실록’과 산엽본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었으나, 1973년대 국보 지정 과정에서 빠졌다. 오대산사고본은 문화재청이 지난해 3월 문화재 매매업자로부터 구매한 ‘효종실록’이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는 ‘봉모당본’은 정조가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부속 건물로 건립한 봉모당(奉謨堂)에 보관한 실록이다. 푸른색 비단으로 장정하고 첫면에 ‘봉모당인(奉謨堂印)’이라는 인장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봉모당본’은 특히 어람용 실록으로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의 행적을 기록한 일대기이다.  어람용을 특별히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록은 객관성 보장을 위해 임금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까지도 부왕(태조와 태종)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궁금해서 실록을 열람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료들은 1438년(세종 20년) “임금이 사서를 열람하면 그때부터는 사관들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게 된다”면서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만 따르게 되는데, 그럴 경우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느냐”고 정색했다. 그럼에도 임금들은 실록을 보고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18세기 이후에는 일상적인 실록 외에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들의 생애와 행적 중심의 ‘어람용’ 실록을 따로 제작했다. 황정연 학예연구사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당대의 정치를 포폄한 사관들의 일관된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새로 확인된 ‘낙질과 산엽본’은 78책이다. 낙질본은 원래 사고에서 제외된 중간본(重刊本)이 많고, 산엽본은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낙장을 엮은 책이다. 그런데 ‘낙질과 산엽본’은 재해로 인해 훼손됐거나 일부를 오리거나 붙여 수정한 흔적이 많다. 그러나 일부 조각이라도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는 사관들의 마음가짐과 편찬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에 지정예고한 실록은 갑작스런 재난에 대비해서 여러 사고에 나누어 보관한 체제와 수정, 개수 등 실록 간행의 종합적인 실상을 알려주고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관리 정신을 다시한번 증명해주는 유산”이라면서 “국보로 추가지정하기에 충분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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