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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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대지도〉, 18세기, 채색필사본, 188.0×213.0c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7호, 서울역사박물관. 현전하는 서울 지도 중 가장 큰 지도로, 1753년에서 176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산과 산줄기는 진경산수화의 기법으로 그렸으며, 관청과 행정단위, 도로, 하천 등의 정보를 다양한 기호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
유형
개념용어
성격
고지명
목차
정의
서울의 어원과 의미
서울의 위치와 기능
근대 이전의 서울
단군조선의 서울
부족국가의 서울
고구려의 서울
백제의 서울
신라의 서울
발해의 서울
후삼국의 서울
고려의 서울
조선의 서울
근대 이후의 서울
근대의 서울
민족항일기의 서울
광복 후의 서울
정의
한국의 각 시대별 수도의 총칭.
서울의 어원과 의미
서울이라는 말은 원래 수도(首都)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 즉 서울특별시를 약칭할 때 서울이라고 함이 그것이다. 이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고유 명사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수도로서의 의미에 관해서이다.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서나벌(徐那伐)·서야벌 등으로 불려진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 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서는 수리·솔·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서 높다·신령스럽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고, 울은 벌·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서울이라는 말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자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며, 도는 거느린다·번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울을 가리키는 한자로는 경성을 비롯해 황성(皇城)·제경(帝京)·경사(京師)·경조(京兆)·도읍(都邑)·왕경·경도·황도(皇都)·왕도(王都)·도성(都城)·수도·국도(國都)·수선지지(首善之地) 등이 있다.
서울의 위치와 기능
서울이란 옛날에는 왕이 살고 있는 도시, 왕의 궁궐과 중앙 통치기관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왕조가 바뀌면 서울이 바뀌는 것이 통례였다. 새로운 국가의 인식을 심어주고 인심을 전환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서울에는 궁궐을 둘러쌓은 내성과 관아, 주민들의 거주지를 둘러싼 외성이 쌓여졌다. 서울의 출입은 성문을 통과해야만 가능했고, 밤에는 도성문을 닫았다가 새벽에 열었다.
서울은 왕이 거처하고 정사를 보는 궁궐이 설치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으로서 조상의 사당과 묘소가 있었고 국가 체제가 발전하면서 이는 종묘와 농업신을 제사지내는 사직단으로 변했다.
서울은 국가의 중심이었음으로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갖춘 곳에 설치되었다. 뒤에는 산이 둘러 쌓여 있고 한쪽으로는 강이 흘러야 방어에 유리했다. 이는 옛날에는 풍수지리설로 길지를 택해야 그 지덕이 왕성하여 국운이 오래간다고 설명되었다. 그러면서도 교통이 또한 편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 서울로 정해지는 좋은 입지 조건이기도 했다.
서울 주위에는 외적이 침입해 수도의 방어가 곤란한 경우 피해 싸울 수 있는 산성이 반드시 주위에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방어는 국가 유지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서울을 중심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 시설이 갖추어지고, 또한 국민의 조세가 서울로 들어옴으로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가 반드시 지어졌다.
그리고 서울을 지키는 군사가 국가 군대 중 최정예병이었고 지방의 군사들이 번갈아 와서 지키곤 했다. 서울을 옮기는 일은 국가가 발전해 웅비를 계획하거나 외적의 침입을 받아 옮기는 경우 등이었다.
근대 이전의 서울
단군조선의 서울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울은 단군조선의 왕검성으로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도읍을 정했는데, ‘신이 만든 신령스런 도시’라는 뜻에서 신시(神市)라 칭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태백산은 묘향산으로 비정되었고,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으로 오랜동안 이해되어왔다. 평양이 단군 선인(仙人)이 도읍한 곳이라고 쓰인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그 뒤 단군왕검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겼다고 하는 바, 이는 한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천도라 할 것이다.
부족국가의 서울
기원전 수 세기경에 성립된 부족국가에서도 도읍을 정하는 것이 국가 건설의 가장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다.
북부여에서 수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하늘에서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곳에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희는 동해의 가섭원(迦葉原)으로 피하라. 그곳은 오곡이 잘 된다.”고 계시함으로써 아란불이 해부루(解夫婁)에게 권해 도읍을 옮겨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그리고 옛 도읍처에는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이미 정착한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 도읍 터를 놓고 다투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 건설에 있어서 서울을 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음을 보여주는 실 예라 할 것이다.
이러한 부족국가를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칭하고 있는데, 당시 읍을 둘러싼 성은 주로 토성이었다. 토성은 흙을 다른 곳에서 옮겨와서 쌓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로 이용해 흙을 깎아내림으로써 경사를 좀더 급하게 만든 것이다. 성 안에는 지배 계층이 살았으며, 반면 성 밖에는 피지배 계층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는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로서 땅을 파는 데는 석기가 이용되었다.
고구려의 서울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졸본천(卒本川)변이었다. 이곳을 도읍으로 택한 이유는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내의 지세가 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식생활을 해결해줄 수 있는 농경지가 고려되었고,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택했다.
그런데 이렇게 택한 도읍지는 그대로 존속되지 못하고 인근 다른 부족국가와 투쟁해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상황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즉, 서기 3년(유리왕 22) 졸본 근처인 압록강 중류에 있는 국내성으로 옮겼다. 지형적으로 대단히 험하면서도 농사가 잘되고, 짐승과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자연적인 입지 조건이 매우 좋았다.
이곳으로 천도한 뒤 위나암성(尉那巖城)을 돌로 쌓았는데, 이는 유사시에 피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중국 세력과도 투쟁했던 점으로 보아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석성을 쌓을 수 있는 문화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석성은 자연적인 험준한 지세를 더욱 보강해주었다. 그러나 도읍을 옮기기는 했으나 옛 도읍지인 졸본성에 태자 해명(解明)을 남겨둔 점에서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처로 삼았다고 이해된다.
서기 20년(대무신왕 3) 국내성 안에 시조의 사당을 새로이 세워 제사지냈고, 옛 수도에도 시조의 사당이 있어서 후대 왕들은 봄·가을로 졸본성에 행차해 시조에게 제사를 올렸다. 고구려는 점차 부근의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해 군현으로 삼고, 요동의 서안평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중국 세력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198년(산상왕 2) 서울 서쪽에 환도성을 쌓고, 209년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환도성으로의 천도는 비좁고 험한 곳에서 교통이 편리한 곳을 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246년(동천왕 20)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고 왕은 동해 가까지 피난했다. 이 결과 환도성을 복구하지도 못한 채 평양성을 쌓아서 이를 임시 도읍으로 삼았다.
342년(고국원왕 12)에 이르러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수리하고 다시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이해 연(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다시 침입했고, 이들의 주력 부대를 중도에서 격파하기는 했으나 남쪽으로 기습한 적군에 의해 환도성이 또다시 함락당했다.
이 결과 왕모와 왕비는 포로로 잡혀갔으며, 고국원왕은 평양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 도읍인 평양성마저도 남쪽에 있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왕까지 전사하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392년(광개토왕 2) 서울에 국사(國社)를 세웠다. 그 뒤 408년(광개토왕 18)에 이르러 서울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으며, 뒤를 이은 장수왕은 427년 지금의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평양은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250여 년간 서울이 되었다. 586년(평원왕 28) 일시 평양 인근의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나 궁궐만을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중국 세력에 대한 대비책이 고려된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성이나 환도성은 강북에 있는 관계로 적의 대공격에 쉽게 함락되었던 경험에 비추어, 압록강과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려는 의도가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601년(영양왕 23) 수(隋)의 200만에 가까운 대군을 압록강과 청천강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등 수나라의 네 차례의 침입을 막아냈다.
평양의 북쪽에는 한반도의 최고 영산(靈山)인 백두산에서 뻗어온 적유령산맥과 묘향산맥이 있고, 또 압록강과 청천강이 서쪽으로 흘러 중국 측의 침략에 대한 방어선으로서 좁은 이점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언진산맥이 가로질러 남방으로부터 침략에 대한 방어의 유리한 조건이 되었고, 대동강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지세가 아름답고 평양 평야의 곡창 지대는 풍부한 식량을 공급해준다는 점에서 수도로서 좋은 자연적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고구려 서울의 행정구역은 오부(五部)로 나누어졌고, 독특한 행사로는 매년 10월이 되면 국중 행사인 제천대회가 열렸다. 이때는 지방사람들까지 이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이 대회 때에는 시조를 보내준 하늘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제사를 올려 국가의 평안과 백성 생활의 안녕을 빌었다. 이와 함께, 활쏘기·말타기·씨름·그네타기 대회 등이 열렸다. 또, 2월과 9월 졸본성에 왕이 행차해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백제의 서울
북부여에서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는 온조(溫祚) 세력이 내려와 한강가의 하남 위례성(慰禮城)을 도읍으로 정해 백제를 건국했다. 하남 위례성의 위치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한강 남쪽의 풍납리 토성, 몽촌토성 등으로 추측된다.
백제가 이곳을 서울로 택한 이유는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 비상시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남쪽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서 경제적 여건이 좋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온조왕은 서울에 아버지의 사당인 동명왕 묘(廟)와 국모 사당을 세워 제사지냄으로써 자신이 천제자의 후손이라는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
온조왕 때는 낙랑과 말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책(木柵)을 세우기도 했는데, 병산책(甁山柵)·독산책(禿山柵)·구천책(狗川柵)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목책의 설치는 주로 북방으로부터 기마병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도성 안에 남단(南壇)을 쌓고 천지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15세 이상의 장정을 동원해 도성을 높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근초고왕 때는 이미 남쪽으로 마한 세력을 격파하고 신라와 국경 전쟁이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도읍을 한강 이북으로 옮겼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 뒤 고구려의 보복 전쟁으로 여러 차례 침입을 받아 공방전을 치르다가 광개토왕에게 북쪽 관방인 여러 요새를 빼앗겼으며, 장수왕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개로왕을 이은 문주왕은 공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동쪽과 북쪽·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고, 남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갖춘 곳이다. 이후 60여 년 동안 공주는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
한편, 성왕은 도읍을 부여로 다시 옮겨 국가 체제를 재정비했다. 부여는 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고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져 방어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일 뿐만 아니라 해상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부여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부여에는 나성(羅城)이 있고 그 안에 또 궁성을 두른 내성이 쌓여져 있었다. 공주와 부여에는 궁궐이 있어서 백제의 정치·행정·군사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사찰이 건립되어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구실도 했다.
백제의 수도는 동·서·남·북·중의 오방으로 나누어져 다스려졌고, 또한 수도의 풍속으로는 고구려와 같이 제천대회가 열렸으며, 농사가 끝나는 오월 단오날에는 농악을 울리면서 흥겹게 노는 국중 대회가 열렸다.
신라의 서울
신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수도를 건국 초부터 멸망될 때까지 1,000여년 간 경주 한 곳으로 운영했다. 경주는 형산강(兄山江)의 상류 지류인 북천·남천·서천의 세 시내가 흘러 북쪽에서 합쳐지고, 동쪽에는 낭산·토함산이 우뚝 솟아 있고, 남쪽에는 남산이, 북쪽에는 금강산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단석산이 둘러져 있어 외적 방어에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었다.
경주는 한반도 동편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내지로부터의 공격 위험성은 적었지만, 일본의 침략 위험이 있었다. 신라는 영토를 서북쪽과 남쪽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서울의 편재성을 해결하고, 또 새로이 정복한 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피정복민의 귀족 세력을 이주시켜 소경(小京)을 설치했다.
가야 지방에 금관경(金官京), 고구려 부흥 세력인 보덕국의 안승(安勝) 등을 옮겨 설치한 남원경(南原京), 대가야 귀족을 옮겨 살게 설치한 충주의 중원경(中原京), 백제 귀족을 옮겨 살게 하여 설치한 청주의 서원경(西原京), 원주의 북원경(北原京) 등 오소경이 그것이다.
경주에 사는 사람은 왕경인(王京人)이라 해 지방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고, 4두품 이상의 귀족은 17관등급의 경위(京位)를 받았으며, 지방 족장 세력의 후예인 지방 세력가는 경위와 구별되는 외위의 위계를 받게 했다.
경주에는 모든 중앙 관서가 있어서 정치·행정의 중심지였고, 군사·경제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였다. 궁궐 앞에는 호국 사찰 황룡사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태민안을 빌고 외적의 정복을 상징하는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이 우뚝하게 세워졌다. 또한, 주위로는 선대 왕들의 묘가 있었으며, 선도성모의 신앙이 깃들인 선도산, 시조와 시조비의 출생지인 양산(楊山)과 나정(蘿井) 등은 신라인들의 성지(聖地)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영토와 인구가 3배 정도로 확대되고 이에 따른 많은 조세 수입도 경주에 집중됨에 따라 경주인들은 자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즉, 동시·서시·남시 등 시장이 열렸으며, 경주 시내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모든 시민이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를 볼 수 없었으며, 귀족의 거대한 저택이 35채나 되었다.
경주의 독특한 풍속으로는 가배(嘉俳)라는 것이 있었다. 즉, 경주의 육부(六部) 여자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왕의 두 딸을 대장으로 삼아 7월 16일부터 매일 이른 아침 큰 부의 뜰에 모이게 해 밤늦게까지 길쌈시합을 하는 것이었다. 8월 15일에 길쌈한 양을 심사해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해 승리한 편을 축하했는데, 춤을 추며 노래를 하면서 온갖 유희가 행해졌다.
이때 한 가난한 집 여자가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까닭에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라고 외쳤는데,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해 후대 사람들이 이 소리를 따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이라 했다. 그 뒤 가배놀이 때는 마냥 이 회소곡을 합창하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월보름 날에는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고, 문밖 출입을 금했는데, 이를 ‘달도(怛忉)’라고 불렀다. 이는 슬퍼하고 근심한다는 뜻으로 이 날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했다.
한편, 경주에서는 20대의 청소년 500∼600인이 무리를 이루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것이 화랑도이다. 화랑도의 교육 목표는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친구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살생이 불가피한 경우는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것이었다. 이 도덕률은 유고·불교·전통 사상이 종합된 것이었다.
경주 사람들은 염불사 등 인근 사찰에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염불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었고,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가에 은은히 울려퍼졌다.
발해의 서울
고구려가 멸망한 뒤 30년이 지나 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일어난 발해가 당나라의 세력을 만주에서 축출하고 오히려 당의 본토까지 침공했다.
발해가 처음 도읍지를 정한 곳은 동모산에 있는 중경이었다. 그 뒤 지금의 동경성 지방에 있는 상경으로 천도했다가 혼춘(琿春) 지방에 있는 동경으로 천도한 뒤 다시 상경으로 환도했다.
발해는 오경(五京)을 설치해 지방 15부와 62주의 지방 행정을 통할했는데, 오경은 숙신의 옛 땅을 관장하는 상경(上京), 그 남쪽을 관장하는 중경(中京), 예맥의 옛 땅을 관장하는 남경, 고구려 발흥 지역을 관장하는 서경, 혼춘 지방을 관장하는 동경이 그것이다. 상경은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같은 큰 가로가 있었음이 발굴 결과 밝혀졌다.
후삼국의 서울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은 백제 부흥의식이 강했으며, 전주를 수도로 정해 40여년 간 유지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는 철원에 처음 도읍했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성으로 옮겼으나 여의치 않아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철원으로 다시 옮겼다.
고려의 서울
개성의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 왕건(王建)은 궁예를 몰아낸 뒤 왕이 되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무렵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 세력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왕건의 가문은 이 중의 하나였다.
개성은 백두산에서 낭림산맥·마식령산맥으로 뻗어 나와 동북쪽으로 크게 봉우리진 오관산, 다시 이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마지막 봉우리로 솟은 송악(松嶽)을 주산(主山)으로 해 동서로 좌청룡·우백호의 형상을 이루었다.
또한, 남쪽의 용수산(龍岫山)·진봉산·덕적산은 주산에 조회하는 듯하는 형세를 갖추었고, 서쪽으로는 마탄강(馬灘江), 동쪽과 남쪽은 임진강이 둘러 흘러 풍수지리설로 보아 명당의 지세였다.
송악은 신라 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道詵)이 이미 왕도로 점지(點知)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해가 가까워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대내적으로도 해상 교통과 육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덕이 왕성해 국운이 번창할 것이라는 점과 이곳을 기반으로 왕건의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신라시대의 경주가 국가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폐단을 시정, 국토의 중앙으로 수도를 옮겨 전국토를 재개발한다는 의미 등을 담고 있었다.
개경은 몽고 침략기 28년 간 강화도로 천도한 이외는 고려 멸망까지 400여 년 동안 정치·경제·문화·교육·군사·교통·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궁성(宮城) 내성과 외곽 성곽인 나성이 수축되고, 종묘와 사직단이 세워졌으며 삼성육부·중추원 등 모든 정부 관서가 설치되었다.
또, 전국의 조세가 조운과 육운으로 이곳에 들어왔으며, 국가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이 설치되고, 사학(私學) 12도(徒)가 있었으며, 과거를 보기 위해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모든 중앙 관료도 이곳에 거주함을 의무화함으로써 고려 귀족의 생활 근거지가 되고, 4만 8000인에 달하는 중앙군이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한편, 2,800칸에 이르는 거대한 왕흥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성내에 세워졌다.
개경에서 행해졌던 연례 행사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 연등회는 석가 탄신을 경축하는 행사로 궁성으로부터 가로수에 비단으로 줄을 매고 연등을 걸었으며, 팔관회는 원래 신라에서 전몰 장병에 대한 위령제로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개경에서는 11월, 서경에서는 10월에 천지·산악·해독(海瀆)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였다. 이때는 외국 사신도 참여했으며, 국내의 지방 장관들이 선물과 축하의 글을 바치기도 하였다. 팔관회 때는 화랑이라는 희극이 행해졌다.
고려 태조는 폐허된 고구려의 옛 서울 평양을 왕식렴 등으로 새로이 개척케해 서경으로 삼고 개성 주변의 군현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또한, 이곳에 학교와 사찰을 세워 교육 문화의 환경을 갖추고, 개경에 있는 중앙 관서의 분사(分司)를 신설했다. 그리고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풍수지리설로 보아 길지이므로 왕들이 자주 순행해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또한, 서경은 북진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서 정변이 일어날 경우와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고 왕실의 후원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개척이 추진되었다.
이에 서경은 지덕이 왕성한 곳으로 그 지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역대 왕들의 믿음에서 중시되었으며 준수도적인 성격을 띠었다. 광종 때는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로 호칭한 바도 있다. 국왕은 가끔 서경에 행차해 머무르다가 돌아오고 했다.
서경에 대한 관심은 고려 태조 이후 역대 왕 모두 크게 가졌다. 특히, 인종 때는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소실되어 궁궐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서경천도론이 일어났고, 이곳에서 실제로 궁궐이 축조되는 과정 중 개경파 관료들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난이 일어난 뒤 서경에 대한 국왕들의 관심은 줄어들게 되었고, 국왕의 순행(巡幸)과 팔관회 개최, 분사 제도 등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려시대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국운을 왕성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삼경제도를 운영했다. 삼경은 성종 때에 경주를 동경으로 승격시킴으로써 개경·서경과 함께 갖추어졌다.
그러나 동경은 너무 멀기 때문에 군주가 직접 순주(巡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종 때는 동경을 폐하고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시켜 국왕이 순주했다.
1232년(고종 19) 몽고족이 대거 침입하자 이들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용해 당시 집권 무인이던 최우(崔瑀)는 강화도로 천도해 몽고에 대항했고, 1270년(원종 11)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우왕·공양왕 때는 국내외적인 정세가 혼란하던 때라 왕조 멸망의 도참설이 유행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의 서울
1392년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하면서 민심을 일신할 목적으로 천도를 단행하고자 했다.
이듬해 계룡산을 수도로 정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계룡산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河崙)의 반대로 논의 단계에서 그치고, 정도전(鄭道傳)과 승려 무학(無學)을 보내 한양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제2대 정종 때는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태종에 의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뒤 조선 500년의 도읍이 되었다.
한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으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정기가 봉우리로 뭉친 북한산을 주산(主山)으로 해 좌청룡으로 낙산(駱山: 駝駱山이라고도 함.)이 동쪽으로 뻗었고,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이 서쪽으로 뻗쳐 있다(일설에는 무악, 즉 길마재로 보는 설도 있다.).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남산이라고도 함.)이 안산(案山)으로 솟아 있으며, 한강이 남쪽과 서쪽을 둘러 흐르며, 관악산이 북한산에 조회하는 듯해 고려 초부터 도선에 의해 풍수지리학상 왕도가 될만한 명당으로 지목되어온 곳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풍수지리설을 부연해 한양은 삼각산이 후 주산(主山)이고, 강원도 금강산은 외청룡, 황해도 구월산은 외백호, 제주도 한라산은 외안산(外案山)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설에서 한양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찾을 수 있다. 한양은 이처럼 풍수지리설로 보아 명당일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또한 서해가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자연적 이점을 가졌고 실제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북악 아래에 경복궁을 정남으로 향하게 짓고 그 앞에 남으로 대로를 내어 길 양쪽에는 의정부·육조 등 중요 중앙 관청이 세워졌다. 그리고 산줄기를 따라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두루는 도성을 쌓고, 도성의 출입을 위해 큰 문 4개와 작은 문 4개를 동서남북에 내었다.
한양을 한성이라고도 했던 바 한성은 성 안과 성 밖 10리까지가 포함되었다. 성안은 가로계획(街路計劃)이 세워졌고, 길은 대로·중로·소로가 있었는데, 대로는 너비 17m나 되어 반듯하게 그어졌다.
광화문거리, 광화문에서 동대문, 남대문에서 광교까지가 대로로 만들어졌다. 중로·소로는 길을 직선으로 내지 않았다. 소로는 특히 자연의 길로서 굽은 상태가 많았다.
한편, 종로 북쪽의 주거지를 북촌이라 했는데, 이곳에는 권세있는 귀족들이 살았고, 남산 밑의 남촌에는 지체가 좀 떨어진 가난한 양반들이 거주했다.
또, 청계천 양쪽에는 서리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서울의 중앙에 산다는 뜻에서 중인(中人)이라고 칭해졌다. 한성은 행정 구역이 동·서·남·북·중 오부로 나누어지고 그 아래 52방(坊)이 있었다.
한성의 인구는 15세기 말 1만 8000호(戶)로서 10만 명 내외가 거주했고, 종로의 대로 곁에는 쌀·베·종이·생선 등을 파는 3,000칸에 달하는 상점이 즐비했다.
한편, 한성에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좌측인 동쪽에 열성조(列聖祖)의 제사를 받들기 위한 종묘가 세워졌고, 우측인 서쪽에는 토지신과 곡신(穀神)을 제사지내는 사직단이 세워졌다. 이 종묘와 사직단은 왕조와 국가의 상징으로서 종교적·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교육을 위해 국립대학으로 생원·진사가 된 자들을 입학시켜 교육시키는 성균관이 설치되었다. 이곳에는 명륜당과 문묘가 세워졌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가 있었다. 오부에는 초급 교육기관으로 학당(學堂)이 세워졌으나 북학은 곧 폐지되어 4부학당만이 운영되었다.
한편, 서울의 도성은 음양오행설로 볼 때 소우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북쪽은 양, 남쪽은 음을 상징했다. 양을 받아들이기 위해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열어놓았다가 양기가 너무 세면 북촌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 해 이를 닫아두기도 했다. 또, 도성민의 상여를 동쪽은 광희문(光熙門: 水口門이라고도 함.)과 서쪽은 서소문(西小門: 昭義門)으로만 통과하도록 했다.
도성문은 밤 열시가 되면 종루에서 28번의 종이 울림과 동시에 닫혔는데, 이를 인정(人定 또는 인경)이라 하며 사람과 우마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새벽 4시에 종소리 33번의 울림과 동시에 통행 금지가 해제되었으니 이를 파루(罷漏)라 한다.
통행 금지 시간에는 순라군(巡羅軍)이 순찰을 돌았는데, 이때 걸리면 치도곤을 당했다. 시골에서 올라왔다가 통행금지에 한 번 걸려본 사람들은 서울에 가면 순라군이 가장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한성에는 고관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마를 타고 거리를 갈 때는 호위병들의 벽제(辟除: 길을 비키라는 소리)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들은 당황했다.
또 문·무과의 최종 시험이 실시될 때이면 시골 선비와 무사들이 망태기를 짊어지고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이를 비유해 ‘낙양의 종이값을 올린다.’는 속담이 생겼고, 시골에서 서울에 가려면 과거보러 한양간다고 떠벌이는 일화가 많았다.
양반이나 일반인들이 삶을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경우 이 외에 양인(良人)들이 상경하는 기회는 군역을 치르는 과정에서 주어졌다. 즉, 서울에는 오위(五衛)의 중앙군이 편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군인들은 시골에서 번갈아 올라와 근무하는 장정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2, 3개월의 근무를 하기 위해 의식(衣食)을 준비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경복궁도 불에 탔다. 왕은 의주로 파천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과 명나라 군대의 후원으로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으나 경복궁은 복구되지 못했다. 이에 임금은 별궁인 창경원을 재건해 궁궐로 사용했으며, 경복궁이 다시 지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1867년(고종 4)이었다.
17세기에는 한성의 인구가 15세기의 두 배나 되는 20만 명으로 증가되는데, 이는 자연적인 증가보다는 농촌 인구의 이입 때문이었다. 서울의 인구가 이렇게 증가되자 관청을 상대로 물품을 파는 육의전 이외에 시민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시장이 생겨서 번창하게 되었다. 오늘날 동대문 시장의 전신인 이현(梨峴)과 남대문 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의 발달은 바로 시민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시장의 발달 배경은 전국이 교환경제 체제로 된 향시(鄕市)의 발달과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공물 제도가 돈이나 쌀, 또는 포로 내도록 한 대동법으로 전환되고, 상평통보라는 주전(鑄錢)의 화폐가 통용된 점 등에 연유한 것이다.
육의전과 시전 상인들은 상세(商稅)를 국가에 바치는 대가로 상품 판매권을 독점해 많은 이득을 취함으로써 규모가 큰 상업자본가로 발전했다. 이들을 도고(都賈)라고 한다. 이들은 일반인의 상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청에 물품을 납부하는 청부업으로 경제권을 독점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인구가 더욱 증가되자 소매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소매상들은 점점 금난전권을 위협하는 규모로 성장했고, 점차 시전 상인들의 상품 판매 독점권의 부당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1791년(정조 15) 전매상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서울의 인구도 늘게 되고 경제 규모도 커져서 시가지는 마포까지 확대되었다.
이곳 포(浦)에서 조운업을 하던 강상(江商)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쌀을 통제해 값을 조작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취해 대상업자본가로 발전했다. 이처럼 서울의 인구가 증가되고 시장 경제가 발전됨에 따라 서울 근교의 농민들은 채소 농사를 지어 서울에 내다 팔았다.
한성의 풍속 중 고유한 것으로는 다리밟기를 들 수 있다. 정월 보름날이면 저녁을 먹고 부녀자들이 청계천 가로 나와 12개의 다리를 건너야 일년 열두 달 건강하다는 믿음에서 다리밟기의 풍속이 있었다.
이 풍속은 서울뿐 아니라 시골에도 있었는데, 시골에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한 다리를 열 두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은 풍기를 문란시킨다는 명목으로 양반들이 금지시키기에 이르러, 조선 후기에는 다리밟기를 할 수 없었다.
근대 이후의 서울
근대의 서울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개화의 물결이 맨 처음 일기 시작한 곳 역시 서울이었다.
부산의 왜관 근처에 있었던 종래의 일본 대표부가 없어지고 이제는 서울의 용산 근처에 공사관을 설치했으며, 개화의 새로운 이기가 점차 들어와 전통적인 서울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1885년 배재학당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치되어 신식 교육이 행해졌고, 1886년 이화학당이 설치되어 여인들이 가마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녔고, 1883년 조폐창이 설치되어 지폐를 발행했으며, 1884년 우정국이 설치되어 근대적인 우편 업무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1894년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의 종로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차가 놓였다. 1896년 국왕이 나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고종은 명동에 원구단을 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1897∼1898년 광화문과 종로에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대신들을 불러내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만민공동회라는 최초의 대시민 운동이 세 차례나 열렸다. 1897년 파고다 공원이 설치되었고, 정동에 최초의 호텔인 손탁 호텔이 개업되었으며, 근대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설치되었다.
1896년 경인선이 부설되어 한강 철교가 놓였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에 의해 의주와 서울을 잇는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부산과 서울 사이에 전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전기가 들어왔으며,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이 간행되어 시민에게 배포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는 국문이 국가의 공용 문자로 채택되어 순한문투에서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유길준(兪吉濬)·주시경(周時經)·지석영(池錫永)에 의한 국어문법 연구에서 서울말이 표준말로 채택되었다.
서울은 1876년부터 30여 년 사이에 급변해갔다. 즉, 각 곳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수용되었다. 이때 서울 시민을 위시한 전국의 지도자들은 국민 운동으로서 교육부흥 운동·언론 운동 등을 일으켜 개화와 자주라는 구호 아래 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40년 간은 한국인의 의식과 사상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고, 이러한 변화는 수도인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정치·군사·경제·교육·문화·종교의 중심지로 의식되었는데, 이러한 민중의식은 당시의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거나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만 가면 그만이다.” 라는 속담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쓰던 말이다. 이러한 속담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서울은 진출의 목표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은 교육을 받고 또 출세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서울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지체가 높은 곳이고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평안도나 함경도에서조차도 서울 갈 때는 “서울에 올라간다.”고 한 표현에서 지체 높은 곳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울은 낭떠러지라 과천에서부터 기어간다.”라든가 “서울이 무섭다니까 새재부터 기어간다.”라는 속담은 지방 사람이 서울 나들이에 공포증을 가지는 것을 비유한 표현들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순라군에게 붙잡히면 억울하게 당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방학중과 순라군』이라는 소설에서 “순라군에게 잡히면 두들겨 맞기만 한다.”는 표현은 순라군의 횡포를 묘사한 것이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자, 이를 비유해 “서울에서 매맞고, 송도에 가서 주먹질 한다.”라든가, “종루에서 뺨맞고 한강가서 눈흘긴다.”는 속담이 유포되었다.
서울은 상업이 발달해 지방 사람은 서울에 오면 많이 속았다. 이에서 연유해 “시골깍쟁이 서울 곰만 못하다.”, “서울은 눈뜨고 코베가는 곳”이라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지방처럼 인심이 후하지 않고 각박하다는 뜻에서 “서울 인심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약삭빠른 서울 사람을 일컬어 ‘서울 까투리’라 부르고, “서울 까투리가 시골 의뭉이에게 속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조선시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서울에 가려면 한 달 이상이나 걸어야 했다. 이러한 장거리에 신고 갈 짚신도 준비해야 하고, 의복과 식량도 짊어지고 와야 했음으로 서울에 한번 가려면 짐꾸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라도 불필요한 것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던 까닭에 “서울 가는 놈이 눈썹빼고 간다.”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서울은 시골 사람이 가서 살고 싶은 곳이었다. 이는 “사는 곳이 서울이다.”, “내 집이 서울이다.”, “살아 정들면 서울이다.”라는 속담에서 서울 지향적인 의식을 살필 수 있다. 또, 서울에 나들이를 한 번 한 사람은 시골에 가서 허풍을 대단히 떠는 사람을 비유해 “서울 가본 놈하고 안 가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는 속담이 생겼다.
서울은 인구가 많았던 관계로 여러 면에서 복잡했다. “서울 가서 김서방 찾기.”라든가, “광주(廣州)생원 첫 서울이다.”라는 속담은 서울의 복잡함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복잡한 서울에 살다 보니 서울 사람은 시골 물정에 대단히 어두웠다.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는 속담은 이를 비유한 말이다.
서울은 시골에 대비되어 도시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었는데, 서울과 시골은 서로 이해가 상반되는 의식을 보통 사람들이 가졌으면서도 시골 사람들에게 서울은 선망의 도시로 동경됐다.
민족항일기의 서울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한국인의 서울에 대한 의식 중 일부는 원한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빼앗기게 한 장본인이 거처한 경복궁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조선 왕조를 원망했을 것이고, 한국 민족을 착취하고 무단으로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를 쳐다보고는 독립 의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이를 폭파해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의식이 있는 사람은 민족항일기에 교육을 받으면 일본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 하여 교육을 기피했다. 이 시기 서울의 거리와 동 이름은 일본식으로 명명되어 정(町)·정목(丁目) 등으로 붙여졌고, 일본식 가옥도 많이 지어졌다. 서울을 빼앗긴 한국인은 1919년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 운동을 총지휘했다.
광복 후의 서울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서울은 국제적인 관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8월 15일 서울헌장이 공포되고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나 지방의 각 도와 마찬가지로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다가 1962년 수도 서울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수도를 잠시 부산으로 옮겼다가 몇 개월 만에 다시 환도했으나, 이때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1870년대 이후 40여 년의 변화가 문화적·정신적인 면에서 극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1950년대 이후 최근 40여 년의 변화는 물질적·외형적인 면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엄청난 변화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말처럼 40년 간에 서울 인구는 10 배 이상 증가했다. 제주도 면적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면적을 가진 서울에 인구는 1000여 만 명 이상으로 전국민의 4분의 1이 살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전철도 만원이고 병원·예식장도 만원이고 공동묘지도 만원이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가난하면 서울에 가라.’든가, ‘서울에 가야 출세할 수 있다.’는 일화에서처럼 지방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서울 지향적인 사고 방식은 서울이 비대화된 중요한 심리적인 이유이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사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심리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요인이 보다 중요한 것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40여 년 간 대통령 중심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유지되어왔으며 한국 자본의 60%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고, 굴지의 금융 기관, 대재벌의 본사가 모두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명문 대학이 서울에 있으며 자식을 명문 대학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들의 욕구가 서울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 서울은 모든 생활면에서 한국의 중심이 되었고 교통·통신망은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뻗어졌다. 서울이 만원이라는 것은 지방에서 업무로 일시 올라오는 사람과 서울 근교와 직접 닿은 인천광역시·과천시·성남시·광명시·부천시·안양시·의정부시·고양시·하남시·구리시 등의 사람들이 서울에 자주 내왕함으로써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둘째, 서울의 시가지가 크게 변모했다. 광복 직후는 5층의 화신건물이 제일 높은 빌딩이었으나 이제는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세워져 빌딩 숲을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도로망이 바둑판 모양이었으나 서울이 강남·강동·강서 쪽으로 확장되면서 크게 볼 때 방사선 형태로 변했다.
광복 직후 좁았던 도로가 크게 확장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서울의 도로는 차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교통난은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도로 가운데를 달리던 느린 전차와 선로가 철거되고, 이제는 지하철이 시민들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옛날의 서울에 처음 온 시골 사람이 어리둥절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셋째, 옛날 서울이 가졌던 자연지형적 의미가 상실되었다.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너려면 한강교가 유일한 다리였고, 뚝섬·노들(노량)·용산·삼개(마포)·양화진에 나룻배가 있어 배를 타고 건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강이 가지는 방어선으로서의 구실은 대단했다. 1950년 6·2전쟁 때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을 건너는 교량이 13개나 되어 나룻배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고 한강은 이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서울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또한, 중앙으로 흘렀던 청계천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완전히 복개되고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생겼다. 따라서 그 위를 지나면서도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 맑은 물이 흘렀던 청계천은 이제 하수구로서의 구실을 할뿐이다.
또한, 인왕산과 낙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설명했던 풍수지리설도 이제 적용될 수 없게 되었다. 낙산 위에 주택이 가득 들어섰으며 인왕산에는 터널을 뚫어 지맥이 끊어졌다.
서울의 안산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남산은 이제 세 개의 터널이 뚫려 더 이상 안산이 아니라 중앙에 있는 언덕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예전에 성문 안만을 서울이라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광복 이전만 해도 섬으로서 존재했던 여의도와 밤섬도 이제는 섬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확대된 서울의 방어 전략을 서울의 지형에서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넷째, 서울의 전통적인 생활 풍습과 풍속이 점차 쇠퇴되고 서양화되었다. 8·15광복 직후만 해도 혼인식에서 신랑은 사모관대하고, 신부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혼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예식장에서 30분 내외에 끝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고, 음식과 주거 생활에서도 서양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식생활에서는 아직도 쌀밥과 김치·된장찌개 등의 전통 음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어린이들은 이보다 양식을 즐겨먹는 성향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주거 생활은 아파트가 크게 늘어나면서 부부 중심의 생활로 핵가족화하고 있다. 자식이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 생활 기반을 가진 경우 노부모들이 서울에 오면 갑갑하고 답답해 곧바로 내려가는 경향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식 둘 낳기 운동을 벌인 가족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가족 성원도 축소되어 핵가족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결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 여성은 집에서 밥 짓고 아기 기르는 일을 하던 옛날의 여성과는 크게 달라졌다. 여성도 직업 사회에 뛰어들어 사회 활동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생활 습속의 서양화를 급속히 촉진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를 들 수 있다. 도시에는 교회 건물이 모든 구역마다 있고, 교직자와 신도의 수적인 면에서도 한국 제일의 종교가 되었다. 비록, 통계 수치에 있어서는 기독교세가 불교와 대등한 비율을 보이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기독교가 우세한 편임은 상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은 제사와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함으로써 전통적인 생활 습속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오직 남아 있는 습속이라면 음력 정월과 8월 보름 한가위 명절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절에도 전통적인 유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다섯째, 서울은 이제 한국의 도시로만 아니라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1947년 서윤복(徐崙福)이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 미국 시민들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서울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1949년까지만 해도 서울에 두·세 개밖에 없었던 댄스홀에는 한국인 단독 입장이 금지되었고 미국 군인이나 외국인과 동행해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1950년 6·25로 한국과 서울이 외국에 알려졌으나 이때의 서울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로 빈곤한 도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1970년 이후의 급성장한 경제력은 해외에 한국 상품을 수출하고 해외 건설에 나섬으로써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한국과 서울이 알려졌고, 1986년에 치른 아시아경기 대회는 서울의 명성이 아시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질서정연한 입장, 공평한 응원 태도, 거기에 중국과 금메달 수에서 1위를 다툰 좋은 성적 등은 한국 민족의 저력이 왕성함을 우리 자신들에게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예견하게 했다. 더구나, 굳게 닫혀 있던 중국에 경기 실황이 중계됨으로써 인구 10억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발전상을 새로이 인식시켰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대회 개최는 서울의 국제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훌륭한 호텔이 지어졌고, 우수한 경기장, 훌륭한 경기 운영과 경기 결과는 한국과 서울을 세계에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섯째, 서울은 교육의 도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서울 인구의 4분의 1이 학생이므로 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인구를 살핀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사회 교육까지 합친다면 교육 인구는 서울 총인구의 절반 가량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의 교육 수준이 전국적으로 제일 높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문 대학이 서울에 몰려 있어 매 년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입학과 동시에 서울의 시민이 되는 것이 예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취업을 주로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나라가 여러 부문에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교육의 힘이다. 교육받은 우수한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저력이다.
한국 교육이 이처럼 왕성한 것은 부모들이 교육을 출세의 기초라고 믿어온 데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적 전통이며, 오늘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모든 희생을 바친다. 따라서, 교육에 쏟는 한국인의 정열은 불길과 같다. 이러한 교육의 힘은 서울, 나아가서는 한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값진 원천이며, 현대 한국의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다.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근본도 교육에 있다고 한국인은 믿는다. 교육은 한국의 무한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중심인 서울은 한국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한국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서울을 깨끗하고 명랑하며, 아름답게 전진하는 희망에 찬 도시로 키워나가는 것은 곧바로 한국을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비대화는 상대적으로 지방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앞으로는 서울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시책이 강구되어 전국의 어느 곳이나 균등한 발전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자연 환경은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매일 쏟아내는 자동차의 매연은 여름에 오존 경보가 울리며, 서울의 상수도인 한강은 이미 폐수가 흘러 들어와 오염되었고, 식수로 이용하기 어려운 정도이며, 서울의 공원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자동차의 급증으로 소방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화재를 당하면 소방차가 출동할 수 없도록 길이 차로 막혀 있으며, 생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그리고 서울에는 재개발 구역이라고 하는 낙후된 집들이 꽉 차 있는 곳이 많다. 이제 서울은 도시 계획을 하기에는 너무나 비대해졌다.
1997년 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체제로 들어가 경제와 산업의 구조 조정이 일어나고 1998년 6월 현재 150만에 달하는 실업 인구가 생겨 가정을 잃은 노숙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경기의 침체는 처음으로 서울인구의 감소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
자연 환경을 복구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는 없다. 또한 서울이 축소되지 않고는 엄청난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도도 없다. 서울의 도시 계획은 장기적인 전망 하에 종합적으로 세워져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아일보』(1994년, 1월∼12월, 매주 월요일 기사)
『조선시대 한성부연구』(원영환, 강원대학교출판부, 1990)
『한양오백년가사』(신영길, 범우사, 1985)
『서울시통계연보』1∼9(서울특별시기획관리실, 1977∼1985)
『서울육백년사』1∼5(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71∼1981)
『한국통계연감』1∼10(한국기획원, 1953∼1982)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조동일,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1979)
『제주도민요연구』상(김영돈, 일조각, 1977)
「서울문화의 종교적 의미」(김종서, 정신문화연구, 1986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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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바라본 서울특별시
[네이버 지식백과]서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서울, 높고 신령스러운 큰 마을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한 줄기가 남쪽으로 500~600리를 달리다가 양주에 이르러 자잘한 산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우뚝이 솟아올라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을 향해 가면서 잠시 끊어지는 듯하다가 또 우뚝 솟아 삼각산(현재의 북한산) 백운대가 되었다. 삼각산1)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되었다. 여기서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 백악산이 되었다. 백악산을 보고 형가(刑家)는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의 형국으로 궁성(宮城)의 주산(主山)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ㆍ남ㆍ북쪽으로 모두 큰 강이 둘렸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의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얽혀 있어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알려져 있다. 옛날 신라 때의 승려 도선의 『유기(留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왕씨를 이어 임금 될 사람은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 그런 연유 때문에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터를 잡아 오얏나무(李)를 심어놓고 무성하게 자라면 잘라서 왕성한 기운을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날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 무학(無學)을 시켜 도읍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 세 곳 맥이 합쳐져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터로 정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고려 때 오얏을 심던 곳이었다.
용출봉과 의상 © 이승태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서울에 대한 기록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45.6킬로미터, 신의주까지는 496.5킬로미터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약 500킬로미터 거리 안에 있다. 동쪽은 구리시와 하남시, 서쪽은 부천시와 인천광역시와 김포시, 남쪽은 광명시와 안양시, 과천시, 성남시, 북쪽은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 남양주시에 인접해 있다.
서울이라는 말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 등으로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 백제 말기에는 수도인 부여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통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으며, ‘울’은 벌, 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서울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고 도는 거느린다, 번성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나라의 수도로서 점진적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어 주변에 수많은 위성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인구 또한 고도로 밀집하여 세계에서도 몇째 안 가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높고 신령스러운 큰 마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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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도읍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다.
‘서울’의 본래 뜻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서(徐), 서나(徐那), 서라(徐羅)는 높고〔高〕 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 ‘솔’, ‘솟’의 음사(音寫)이고, 벌(伐)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벌’의 음사이다.
따라서 ‘서울’, 즉 서벌, 서나벌, 서라벌은 상읍(上邑) 혹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이라는 말은 약 1,900살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서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일제가 쫓겨가고, 경성을 ‘서울’이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