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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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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7    [고향사람] - 조선족과 영화... 댓글:  조회:3090  추천:0  2019-10-26
조선족 리송죽 '침략자 타격' 영화에 출연하다 (ZOGLO) 2019년10월21일  인물이름 : 리송죽 [70년 기억속의 연변]    영화 속 아름다운 조선인민군 녀전사 윤옥선을 기억하고 있는가?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가진 이 조선족 처녀는 “50후”, “60후” 사람들의 마음속 녀신으로 자리매김했다. 극중 이 캐릭터를 맡은 주인공은 연변가무단 무용수 리송죽이다.   리송죽은 1936년 룡정에서 태여났다. 16살때 그녀는 로투구 고무공장에서 일을 했다. 젊었을 때 리송죽은 아름답고 활달하며 부지런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선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한번은 공장에서 주최한 문예공연에 참가해 집체무를 추었는데 당시 관중석에는 배우를 고르기 위해 연변가무단에서 기층에 내려온 연출(编导)이 있었다. 리송죽의 잠재력을 보아낸 그는 리송죽을 연변가무단으로 전근시켰다. 이때로부터 리송죽은 조선족 안무가 조득현의 학생으로 되였다. 그녀는 무용에 대해 타고난 재질이 있었는데 한번만 가르치면 인차 몸에 익혔다. 게다가 열심히 노력한데서 그녀는 안무팀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당시 연변가무단의 련꽃춤, 장고무와 물동이춤 등 안무가 큰 인기를 받았는데 리송죽은 안무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1963년 장춘영화제작사 제작진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조선족 연기자를 뽑을 때 리송죽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처음으로 영화에 도전한 그녀는 장춘영화제작사 최우수 연기자로 평선됐다. 1965년 8.1영화제작사에서 항미원조 소재로 된 영화 (打击侵略者)을  촬영할 때 극 중 녀 주인공을 고민하자 감독은 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던 리송죽을 쓰겠다고 했고 장춘영화제작사를 통해 연변가무단에 기별을 보냈다. 령도의 동의를 얻은 후 리송죽은 8.1영화제작사로 잠시 옮기게 되였고 이라는 영화에서 조선인민군 유격대 전사 윤옥선 역을 맡게 되였다.   리송죽과 함께 연기호흡을 맡았던 장용수, 장량은 경험이 풍부한 우수한 연기자들이다. 장량은 영화 중  동존서 역을 맡았고 장용수는 영화 속 참모장 소검파 역을 맡았다. 비록 영화계에서 “대스타”로 부상한 두 사람이지만 리송죽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후배를 잘 이끌어주었다. 리송죽이 전쟁 및 전쟁터에 대한 료해가 부족하자 항미원조에 참가했던 장용수는 중조군민이 어깨 나란히 전투를 하던 광경을 이야기 해주면서 그녀가 빠르게 역할에 몰입하도록 했다. 리송죽은 후에 을 보면서 부족점이 적지 않았다며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 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관중들의 호평이 자자했다. 인민군 녀전사 윤옥선의 아름다운 형상은 청년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그녀가 했던 웨이브식(波浪式) 헤어스타일은 빠르게 류행되기 시작했다. 8.1 영화제작사 책임자는 리송죽을 찾아 와서 전문배우를 할 것을 권했지만 가족이 그리웠던 리송죽은 원 단위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연변의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을 촬영할 때 28살 된 리송죽은 이미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 그녀의 남편 김영규는 후에 연변대학 외국어학부 주임으로 되였다. 이들 부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업에서도 서로 도우면서 생활했다.   ///조간신문/연변라지오TV넷    
2756    [그것이 알고싶다] - 단성사와 "아리랑" 영화와 라(나)운규 댓글:  조회:3973  추천:0  2019-10-25
독립운동가 나운규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27. ~ 1937.8.9.     “조선 영화계의 위대한 개척자 나 군이여. 조선의 살림이 좀 더 넉넉하고 문화가 좀 더 발달되었더라면  그대는 벌써 세계적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서광제 이라는 사건   1926년 10월 1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羅雲奎)의 영화 이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1) ‘마치 어느 義烈團員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2)는 이경손(李慶孫)의 회고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의 열기는 단성사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도 상영되어 조선인 노무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3) 의 주인공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치광이가 된 최영진(나운규 扮)이었다. 소작인의 아들인 최영진에게는 여동생 최영희(신일선[申一仙] 扮)가 있었다. 최영희는 오빠의 친구인 윤현구(남궁운[南宮雲]4) 扮)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마름 오기호(주인규[朱仁奎] 扮)가 영희를 차지하려 한다. 미친 영진은 영희와 현구 사이를 훼방 놓던 오기호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단성사 의 한 장면"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9_167/1475138420889Y50LS_JPEG/17a.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영화 의 한 장면 6․10 만세운동 직후에 제작된 의 근저에는 토지를 매개로 한 계급문제가 있었다. 마치 “토지는 농민에게”와 같은 6․10 만세운동의 슬로건을 연상시킴으로써 6․10 만세운동의 열기를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고소설이나 일본 신파를 번안하여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이를 극적으로 묘사한 의 제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영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예컨대 카프 소속의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은 소설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하고 있다며 이전의 조선영화 모두를 불살라버려도 될 정도의 거상(巨像)이라 극찬했다.5) 이렇듯 은 식민지 조선영화인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나운규는 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기억되었다. 3.1운동 발발과 독립군 활동   나운규 나운규(1902~1937)는 1902년 10월 27일6)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羅亨權)으로 군대 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고 전한다.7) 나운규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나운규 역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도주한 나운규는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朴龍雲)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에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명동중학교 낙성식 (1918년 4월) 회령 시내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훈춘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하고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 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藝林會)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운규가 가입한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東明劇場)과 함흥극장(咸興劇場)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지두한(池斗漢)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8)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尹白南)이 만들었던 민중극단(民衆劇團) 출신의 전문연극인인 안종화(安鍾和)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운규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金兌鎭, 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9) 과 나운규 시대   예림회가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나운규는 반가운 인물과 조우한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안종화였다. 이 때 안종화가 활약하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원은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배우로 입사하여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미 부산에는 주인규와 김태진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나운규는 이들과 더불어 제2촬영반의 영화감독으로 초빙된 윤백남의 집에 하숙하며 영화배우로 첫발을 내딛는다. 나운규의 영화 데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윤백남 연출의 10)에서 가마꾼 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다.11) 이 영화가 제작되던 중 윤백남과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결별하고 조연출이던 이경손을 위시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연구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1925년 윤백남은 백남프로덕션을 세우고 이경손 연출의 을 제작했다. 윤백남을 따라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에서 중요 배역인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했다. 나운규는 살아있는 연기를 위해 실제 소경을 만나 그 모습을 탐구했다.12)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나운규는 의 심봉사 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 , 등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된다. 이즈음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았다. 윤백남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 중 나운규, 이규설, 주인규, 남궁운 등은 일본인 모자상(帽子商) 요도 도라죠(淀虎藏)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해 있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창립 작품은 이규설의 였다.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것이었다.   1 (매일신보 1926.9.17.)"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02/1475026020014KEWfE_JPEG/5.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2 5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79/14750260208966okAH_JPEG/9.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3"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14/14750260204144JFYw_JPEG/7.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4 영화 제작진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56/14750260206833jx9S_JPEG/8.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1 새 영화 (매일신보 1926.9.17.) 2 단성사 (매일신보 1923.12.21.) 3 영화 소설 4  영화 제작진들 5 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7.10.15.) 에 이어 나운규의 이 제2회 작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의 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흥미를 돋우었다. 관객이 쏟아져 들어왔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큰돈을 벌었다. 나운규는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282/1475026881268asuf7_JPEG/10.jpg?type=w646" style="border: 0px; clear: both; display: block;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title="" /> 신 영화 을 보고 (매일신보 1926.10.10.) 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에게 곧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나운규가 선택한 작품은 (1926)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운규가 연기한 니콜라이 박이였다. 그는 시베리아 방랑시절의 나운규를 연상시키는 듯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인물로 세탁소를 내서 고학생들을 돕고 악한을 응징하는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기 시작한 작품이라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예림회 시절부터 함께 활동하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나운규의 독선적인 행동을 이유로 주인규 등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한다. 이들의 빈자리는 나운규의 연락을 받고 회령에서 내려온 윤봉춘(尹逢春)이 메웠다. 나운규는 (1927), (1927)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야말로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한 나운규에게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朴承弼)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나와 독립할 것을 권한다.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나운규프로덕션 시절 나운규는 (1927), (1928), (1928), (1928), (1929)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 는 라는 원래 제목이 검열에 문제가 되어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작품으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은 나도향(羅稻香)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다.   1 3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로 변경하였다."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51/1475045294244guqJg_JPEG/13.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2 (1926)"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39/1475045293905W1FVq_JPEG/12.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position: relative; z-index: 10;" title="" /> 1 아리랑 선전지 압수 (매일신보 1926.10.3.) 2 나운규영화 (1926) 3 인기배우 나운규를 고등과에서 호출조사 (매일신보 1928.4.10.) 간도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하던 는 일제 경찰의 검열로 영화 제목을 로 변경하였다.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대구의 만경관(萬鏡館)에서 상영될 때에는 너무나 많은 관객이 들어 극장 2층이 붕괴되었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운규의 시대였다. 그러나 실상은 초라했다.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살림을 맡았던 형 나민규(羅泯奎)는 나운규와 다투고 회사 운영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나운규의 동료들 역시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절제치 못하는 행동에 반기를 들며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한다.13) 혼자 남은 나운규는 일본의 촬영소를 시찰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떠난다. 몰락과 재기   추장복 입은 나운규 (매일신보 1927.11.13.) 도쿄의 가와이영화제작사(河合映畵製作社)를 견학하고 돌아온 나운규는 1929년 12월 30일 서대문의 아성키네마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망년회에 얼굴을 비췄다. 나운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나운규는 자신에 대한 화살을 일간지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讚映會)에 돌렸다. 우수영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영화인들 위에 군림했던 찬영회에 대한 조선영화인들의 반감은 컸다. 망년회장은 찬영회 성토회장으로 바뀌었다. 유도선수 출신의 영화배우 이원용(李源鎔)이 조끼를 찢어 깃발을 만들었다. 몇 개의 조를 짜서 찬영회 회원인 중외일보의 최상덕(崔象德), 매일신보의 이서구(李瑞求), 정인익(鄭寅翼), 조선일보의 안석주(安碩柱), 동아일보의 이익상(李益相)의 집으로 향했다. 영화인들은 이들 신문기자들을 불러내 폭력을 가했다. 기자들에 대한 폭력사건으로 경찰에서는 다수의 영화인을 체포했다. 이중 김형용(金形容), 김태진(金兌鎭), 이원용, 홍개명(洪開明), 나웅(羅雄)이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충남 금산으로 도망친 나운규는 사태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14) 기자들과 영화인들 간의 폭력사건은 기자들이 찬영회를 해체하기로 약속하면서 일단락되었다.15) 찬영회 사건 이후 좌익영화인들은 민족영화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나운규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을 지원하던 단성사와 나운규 사이는 를 제작하면서 그 관계가 틀어졌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나운규가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원방각(圓方角, ○□△)이라는 영화제작회사를 만든 단성사에서는 이구영(李龜永) 연출로 (1930)을 제작하기로 한다. 의 제작을 위해서는 나운규의 이름이 필요했던 단성사에서는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이후 재기에 골몰하던 나운규를 영화에 출연시킨다. 이 개봉되자마자 나운규에 대한 좌익영화인들의 비난이 시작되었다. 포문은 좌익영화인인 평론가 남궁옥(南宮玉)과 서광제(徐光霽)가 열었다. 특히 서광제는 이 영화가 허무주의와 숙명론을 주입시키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가 현실적 문제를 들어 반론을 펼쳤다. 이에 대한 서광제의 반론이 이어졌고, 더불어 안종화, 윤기정(尹基鼎), 나운규 등이 가세한 논쟁이 이어졌다. 1930년을 뜨겁게 다뤘던 민족영화인과 좌익영화인 사이의 논쟁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에 대한 카프영화부의 해산명령으로 인한 좌익영화인들 사이의 분열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나운규는 카프연극부를 지도했던 최승일과 손잡고 미나도좌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시도했으나 소부르주아적인 연극이라는 비난을 들었다.16) 이어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遠山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하여 (1931)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고 배구자무용단(裴龜子舞踊團)과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나운규의 갈팡질팡한 행보에 나운규에 대한 영화인들의 성토는 높아졌다. 나운규의 죽마고우인 윤봉춘이 앞장서서 “나운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박완식(朴完植)은 “羅 氏에게 對하여 아모 企待도 가질 수 업게 되엿다. 오히려 朝鮮映畵界에서 避身하여 주기를 强迫하고 십다”17)고 비난 했으며 심훈(沈熏)은 “천인비봉 千仞飛鳳 기불탁속 饑不啄粟(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18)라며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으로 얻은 성공의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 그림자는 짙었다. 1932년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李圭煥)은 후원자인 강정원(姜鼎遠)의 도움으로 (1932)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라는 스타가 출연하기를 바랐던 이규환은 나운규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나운규는 출연을 결심한다. 이규환은 뱃사공이라는 배역에 어울리게 삭발을 한 채 나타난 나운규의 모습에 놀랐고 한편으로 고마웠다.19) 나운규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 는 성공적이었다. 이후를 대표하는 무성영화라는 평을 얻었다. 더불어 나운규는 제작비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1932)을 강정원의 도움으로 완성시킬 수 있게 된다. 의 한 장면" data-="" src="https://ncc-phinf.pstatic.net/20160928_110/1475035934312ycD4I_JPEG/15a.jpg?type=w646" style="border: 0px; margin: 0px; vertical-align: top;" title="" /> 영화 의 한 장면 1930년부터 토오키(talkie) 영화20)가 상영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31년 단성사의 후원으로 이라는 제목의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려 했던 나운규는 기술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와 을 통해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1932년 1월 조선영화 제작의 가장 큰 후원자이던 단성사의 박승필이 사망한 이후에는 영화제작을 지원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운규는 궁여지책으로 연쇄극(連鎖劇)을 제작, 상연하기 시작했다.21)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방순회극단이던 현성완 일행을 따라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 사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아 적조하던 조선영화계에 영화제작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운규에게도 영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나운규는 을 제작한 바 있었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1935)와 (1935)를 만들었다. 이 사이 차상은(車相銀)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를 세워 (1935)을 제작했다. 관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신화가 된 이름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나운규는 한양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다시 을 들고 나왔다. 3만원을 투자하여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고 일본에 가서 녹음기와 조명기를 구입하였다. 촬영은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3개월에 걸쳐 촬영된 필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동시녹음 촬영이 실패한 것이다. 부랴부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로 활약한바 있었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의 대표 이창용(李創用)의 도움을 받아 재촬영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이 사이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는 최초의 토오키 영화 (1935)을 세상에 내 놓았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는데 실패한데다가 3,000원의 추가비용까지 들었던 은 손해가 막대했다. 폐병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쉴 틈이 없었다. 조선흥행계의 실력자인 경성촬영소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나운규에게 접근해 왔다. 와케지마 수하에 있던 도야마 미츠루가 만든 원산만프로덕션에서 활동하여 조선영화인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많은 자본과 최신의 기술이 필요한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흥행업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나운규는 경성촬영소에서 (1937)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는 을 만들기 전, 어느 신문에서 한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고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라는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소설이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무명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이태준은 병으로 성북동 집에서 정양 중이었다. 나운규 역시 폐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준을 문병했다. 이태준은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의 스크랩북을 꺼냈다. 십여 년 전 읽었던 그 작품이었다. 이태준에게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승낙을 받았다. 검열을 고려하여 어떤 부분을 고칠 것인지를 상의하고 곧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22) 촬영은 강원도에서 진행되었다. 쇠약한 몸에 주사를 맞아가며 분투하고 있었기에 신경은 여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촬영 중 전기사용 문제로 시비가 붙자 주먹을 휘둘러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병색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나운규는 와케지마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병든 몸으로 힘들게 완성한 는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한국 영화계의 신화 나운규 나운규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쉬면서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차도가 있자 무성영화로 제작했던 를 발성판으로 바꾸기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였던 것이 독이 되었다. 폐병이 악화된 것이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일 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검열의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나운규가 만든 영화의 밑바탕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실천이 깔려 있었다. “진정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지난날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모를 일이다.”23) 1962년 나운규 탄생 60주년 기념을 맞아 오영진(吳泳鎭)이 남긴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참고문헌 . 《문학신문》. 1957.8.15. . 《朝鮮日報》. 1924.1.8. 金幽影. . 《東亞日報》. 1931.4.12.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朴完植. , 《中外日報》. 1930.3.15. 승일. . 《별건곤》. 1926.12. 沈熏. . 《東光》 제23호. 1931.7.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오영진. . 《한국일보》. 1962.11.25. 柳珍山. . 《大韓日報》. 1973.5.8. 李慶孫. . 《新東亞》. 1964.12. 李圭煥. . 《中央日報》. 1979.12.22.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 53호. 2012.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주석 1 당시 영화관에서는 요즘처럼 한편을 여러 번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와 코미디와 같은 단편과 멜로드라마 류의 장편 여러편을 묶어서 3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과 함께 상영된 영화는 미국 유니버셜사에서 만든 (1926)이었다. 2 李慶孫. . 《新東亞》. 1964.12. 346쪽. 3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178쪽. 4 남궁운의 본명은 김태진(金兌鎭)으로 1930년대 이후에는 극작가로 활동했다. 5 승일. . 《별건곤》. 1926.12. 107~109쪽. 6 남한에서 나운규는 190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청진형무소 수형기록에는 광무6년(1902년) 생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조희문, 위의 책, 35쪽). 반면 북한에서는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운규의 아들 나종익과 누이동생 나필규가 참석한 1957년 8월 9일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주최한 나운규 서거 20주년 추념식에서 나운규의 생년을 1901년으로 기록했다( 《문학신문》, 1957.8.15.). 이를 통해 보면 나운규의 실제 태어난 해와 호적상의 기록이 다를 수 있다. 7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37쪽. 8 . 《朝鮮日報》. 1924.1.8. 9 安鍾和. 『韓國映畵側面祕史』. 현대미학사, 1998. 72쪽. 10 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이다. 11 안종화, 이경손 등은 나운규의 영화데뷔를 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정황상 맞다. 그러나 나운규와 함께 연구생으로 있었던 이규설, 김태진 등은 나운규가 의 어부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고 전한다. 12 최창호·홍강성.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평양출판사, 1999. 65~68쪽. 13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윤봉춘 편』. 도서출판소도, 2004. 139~141쪽. 14 柳珍山. 〈映畵人 羅雲奎>. 《大韓日報》. 1973.5.8. 15 찬영회 사건에 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했음. 이효인. 「찬영회 연구」. 『영화연구』53호, 2012. 16 金幽影. . 《東亞日報》. 1931.4.12. 17 朴完植. . 《中外日報》. 1930.3.15. 18 沈熏.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東光》 제23호. 1931.7. 61쪽. 19 李圭煥. 〈映畵60年〉. 《中央日報》. 1979.12.22. 20 영사(映寫)할 때 영상(映像)과 함께 음성, 음악이 나오는 영화로 발성영화(유성영화)를 말한다. 기존의 무성영화와 대비. 21 연쇄극이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흥행물이었다. 1919년부터 1920년대 초반 사이에 유행하던 연쇄극을 다시 상연한 것은 토오키 영화의 유행에 따른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22 羅雲奎. 〈映畵時感〉. 《三千里》 9卷 1號. 1937.1. 231쪽. 23 오영진. . 《한국일보》. 1962.11.25.   관련이미지 15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 건국훈장 애국장 1993 (독립운동가, 한상언, 이달의 독립운동가)   ====================================/// 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관련이미지 41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   시사상식사전 나운규      한국의 영화감독으로, 1926년 으로 한국 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27년에는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특히 1936년 을 제작하면서 동시녹음을 실시하여 한국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외국어 표기     羅雲奎(한자)     출생~사망      1902~1937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춘사'이다. 1912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으며, 1918년에는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된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수감되었고, 1923년 출감하였다. 1925년 부산으로 내려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한 뒤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했으며, 이때부터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다 1926년 자신이 원작·각본·주연을 맡은 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조선키네마'에서 (1926), (1927), (1927) 등을 만든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해 시나리오 작가·감독·배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왔던 작품들이 그해 5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 1928년 와 , 등이다.  그러다 1929년 초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를 끝으로 잇단 흥행 실패와 운영난에 처해 있던 나운규 프러덕션은 문을 닫게 된다. 나운규는 이후 (아리랑 2편, 나운규 주연, 이구영 감독)을 만들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받는 데는 실패했으며, 1937년에는 수양딸과 아버지에 얽힌 인간의 애욕 문제를 다룬 (1937)를 내놓았다.  나운규는 잇단 흥행 실패 이후 이류 극단을 따라다니며 연기를 했는데, 이때 등 사회주의적 연극을 연출하거나 출연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1937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편, 나운규는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는 15편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755    [그것이 알고싶다] - 한국영화 100 댓글:  조회:3923  추천:0  2019-10-25
오는 27일은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영화는 눈부신 성장을 해 왔는데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고 명장면은 무엇인가요? 카드뉴스로 만나보시죠! [기획 = 유정화 인턴기자, 그래픽 = 조혜원 인턴기자]  
2754    [그것이 알고싶다] - 한국 최초 영화와 단성사 댓글:  조회:3883  추천:0  2019-10-25
  시사상식사전 의리적 구토      1919년 신극좌 김도산 일행이 만들고 단성사의 사장이었던 박승필이 제작한 연쇄극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다.  송산이라는 주인공이 가문에 위기를 일으키는 계모일파를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국어 표기     義理的 仇討(한자)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작품으로 김도산이 감독, 각본 및 주연을 맡고 신극좌의 단원들이 배우로 출연한 연쇄극이다. 연쇄극이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는데,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형식을 말한다. <의리적 구토>에는 약 1,000피트의 필름이 삽입되어 연극 중간에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연쇄극으로 제작되기 앞서 신파 연극으로 우미관에서 공연된 바 있다. 당시 국내 기술진이 전무해 각본과 연출은 김도산이 맡았지만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미야가와 소우노스케에 의해 진행됐다.  <의리적 구토>는 자신을 괴롭히고, 심지어 그의 유산까지 탈취하려는 계모일파에게 온갖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송산이 주인공이다.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송산은 어느날 매초라는 친구를 만나,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권유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계모일파를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이후 잠시 연쇄극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연쇄극을 시도하면서 영화 제작에 있어서 한 단계 진보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1962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에서는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하고,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도 이를 두고, 영화사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1923년 4월 9일 상영된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는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남자가 착실한 약혼녀의 저축으로 갱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비록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영화였으나 완전한 극영화라는 점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두산백과 의리적 구토   [ 義理的仇討 ] 요약 1919년에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극. 제작년도 1919년 감독 김도산 각본 김도산 출연 김도산, 이경환 제작 박승필 제작사 단성사 1919년에 단성사(團成社)의 사장 박승필(朴承弼)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다. 제목이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주장도 팽팽하다. 연극 공연에 영화 장면 일부를 삽입한 변형된 연극 형식인 연쇄극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1919년 7월 우미관(優美館)에서 신파연극으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김도산(金陶山)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으며 일본인 미야가와 소오노수케(宮川早之助)가 촬영과 편집을 맡았다. 김도산, 이경환, 윤화, 강원형, 최일, 양성현, 김영덕과 신극좌(新劇座) 단원들이 출연하였다.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불우하게 자란다. 재산을 욕심내는 계모의 간교한 계략으로 인해 집안에서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심하였다. 송산은 복잡한 집을 떠나 보람있는 일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죽산과 매초는 분노하며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송산이 만류한다. 송산은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참지만 매일 괴로운 마음을 술로 달랜다. 계모 일당에 의해서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처하여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든다.   박승필의 자본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대표 김도산의 인력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신파 연쇄극은 침체된 신파극계에 획기적인 재기를 가져다 주었다. 김도산 일행은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일본에서 촬영기사를 초청하여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이 작품을 완성하였고 1919년 10월 27일에 단성사에서 상영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구체적인 제작의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또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였다는 두 가지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두산백과)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의리적 구토   [ 義理的仇討 , Fight for Justice ] 해설   김도산의 본격적 활극. 일명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전 3막 22경으로 구성된 신극좌의 연쇄극으로 가문의 명예와 선친의 유산을 지키려는 전실 아들과 악랄한 계모간의 암투를 그린 내용. 단성사 사장이던 박승필이 제작·기획하고 신극좌를 창설하여 이끌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이 각본·연출·출연했다. 운동이 일어난 그해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기차와 한강 다리를 찍은 김도산 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과 함께 동시 상영됐다. 제작비 5,000원.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우리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의 기점이 되고 있다(한국영화 75년사 CD롬, 조선 95. 1. 1). 당시 광고에 보면 입장료는 특등 1원 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 등 4등급이 있고 촬영 장소는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정차장 등으로 밝히고 있다. 줄거리   송산(김도산)은 계모(김영덕)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선친의 유산을 탐내는 계모에게 온갖 설움과 구박을 당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계모의 흉계는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눈엣가시 같은 송산을 없애려는 음모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송산은 가문과 선친의 명예를 위해 집에서 잠시 떠나 의형제인 죽산(이경환), 매초(윤혁)와 함께 계모 일파와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다. 계모와 그 일당의 발악이 극에 달했을 때 송산은 정의의 칼을 뽑아 그들을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되찾는다.   [네이버 지식백과]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Fight for Justice]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2011. 4. 20., 이세기)    
2753    [고향사람] - 가야금과 "결혼한" 총각선생... 댓글:  조회:3600  추천:0  2019-10-25
가야금 열풍 일으킨 총각선생님–조용군 (ZOGLO) 2019년10월24일  인물이름 : 조용군   [편집자의 말]   길림신문 다큐 처녀작 오늘 첫선… 독자 여러분 시청 바랍니다.    뉴미디어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언론 매체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저마끔 새로운 시도로 개혁에 나서고 있습니다. 와중에 길림신문 역시 올해부터 전통적인 전파형식을 타파한 ‘문자+사진+영상’을 어우르는 매체 융합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독자들한테 조선족사회의 따뜻한, 긍정에너지가 넘치는 이야기를 살아있는 영상으로 체현해 더 현장감있고 생동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입니다. 오늘자 지면신문에 실리는 기사 은 본지와 함께 ‘다큐’(纪录片) 형식으로 영상에 담아 길림신문 사이트와 위챗공식계정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영상기사 은 길림신문 력사상 처음 영상으로 제작된‘인물다큐’처녀작입니다. 앞으로도 생동하고 무게있는 영상 작품으로 여러분들을 찾아가겠습니다. /길림신문 뉴미디어센터 조선족의 전통악기 가야금연주로 기네스북에 도전하고 싶다는 조용군 총각선생님(1982년생), 조용군은 연길시 신흥소학교 음악교원이다. 조용군의 노력하에 보급된 ‘가야금’은 이미 이 학교 명함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조용군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온 후 가야금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 5-6학년 학생들의 연주는 대학 예술전공 4학년 정도의 수준에 이를 정도입니다.” 신흥소학교 부교장 김향화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남자가 무슨 가야금을 하냐? “어머니, 저 악기 이름이 뭐예요?” 10살되던 해 부모님과 같이 공연 보러 간 조용군은 가야금 제3대 전승인인 김성삼선생님의 가야금연주에 푹 빠졌다. 그리고는 어머니한테 악기에 대해 물어보며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졸랐다. 하지만 “남자가 무슨 가야금을 하냐?”며 부모의 반대로 대학시기까지 가야금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가야금’이라는 세글자는 십몇년간 늘 그의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대학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 그는 가야금 학습반을 찾아 다니며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배울수록 참 매력이 있더라구요. 배울수록 더 배우고 싶고 들을수록 더 듣고 싶고 처음에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배우니깐 전문으로 배우고 싶어 졌어요.” 18년만에 꿈의 문을 열어 그러다가 조용군은 끝내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결정을 내리게 된다. 28살되던 해 그는 늦깍이 대학생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가야금 전공 시험을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도 대학입시 석달을 앞두고 … 그의 의외의 결정에 부모는 물론 모든 주변 사람들이 반대했다. “기초도 없는 네가 이 나이에 너무 늦었어.” “닭알로 돌을 치는 격이야, 포기해라.” “10년정도 책을 놓았는데 어떻게 대학입시 시험을 보겠느냐?” ... 한사람도 지지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가출하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대학교에 입학해 가야금수의 길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예상대로 연변예술학교 고중에서의 첫 3월 월고 성적은 72명 학생중 72명으로 꼴찌였다. 〈이런 성적으로는 가야금을 배우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조용군은 그후부터는 첫시간 강의부터 마지막 강의까지 모두 록음해놓고 100% 외우다 싶이 하면서 악착스레 공부를 했다. 72등에서 40등을, 40등에서 2등의 훌륭한 성적으로 2008년 그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가야금전공에 입학하였다. 대학에는 입학했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하다보니 손이 굳어져 남들이 1-2시간 련습해야 하는 것을 그는 7-8시간씩, 지어 밤을 새며 련습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손이 터지도록 련습해도 내가 좋아하는 가야금을 선택했기 때문에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참 행복하구나 라고 느껴졌어요”. 자신의 화려함보다는 꿈나무 키우는 원예사로 “우리 학교에 오셔서 꿈나무들한테 가야금을 배워주지 않을래요?” 민족예술 보급 취지를 확고히 했던 신흥소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조용군에게 제의한다. 교원들의 가야금공연 작품을 잘 만들어줬던 적 있는 조용군이 아이들도 잘 가르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원보다는 무대에 서서 화려한 가야금수로 멋진 공연을 하는 것을 동경했던 그는 출로의 갈림길에서 스승인 김성삼선생님을 찾아간다. 김성삼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많은 꿈나무들한테 꿈을 심어주면서 우리 민족 음악을 보급시키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에 조용군은 배움에 갈망했던 어릴적 자신을 돌이키며 가야금수로서의 진정한 책임감과 의무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원예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당시 신흥소학교를 비롯한 연변 각 소학교에는 가야금 선생님이 적었고 가야금도 보급되지 못한 정황이였다. 게다가 가야금써클에 참가하면 “공부에 지장되지 않을가? 가야금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학부모들도 그의 가야금써클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반년만에 그는 〈아리랑〉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에 힘 입어 그후 륙속 좋은 작품을 선보이자 연변TV, 북경 공연에 초청되면서 가야금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가야금을 30대에서 60대, 지금은 120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야금써클에 참가하겠다는 학생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한테 잠재해있는 민족 흥 이끌어내야 가야금은 손으로 줄을 뜯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줄과 손의 마찰로 물집이 생긴다. 한번 생기면 괜찮은데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계속 련습해야 하니 그 과정은 고통이 동반된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은 한명도 없다고 한다. “가야금은 두 손으로 하는 악기이기에 집중력 향상, 대뇌 발달에도 좋음을 알게 되였죠. 가야금을 배운 후로 아이가 무대에 오르며 단련 받다보니 내성적이던데로부터 활발해지고 성적도 향상되였습니다.” 6학년 김지민학생의 어머니가 말한다. 특히 올해 이 학교 가야금써클에 참가했던 3명 학생이 예술특장생으로 고중에 입학하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또한 이 학교 가야금팀은 전국중소학생예술류콩클에서 금상을 따냈고 향항에서 열린 아세아청소년예술절에 참가해 80개 팀중 단연 1등을 따내기도 했다. 조용군은 “요즘 애들은 현대가요를 좋아하지만 그들한테는 우리 민족 끼와 흥이 다 잠재해있죠. 이런 흥을 끄집어내고 예술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저의 큰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 높이에 맞게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죠.”라고 말한다. 1300여명 가야금연주로 기네스북에 도전해볼 터 이번 학기부터는 3, 4학년을 상대로 매주 1교시로 가야금수업도 진행하게 된다. 학교 전체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보급해야 함은 학교지도부와 그의 공동 희망이다. 제4대가야금전승인이기도 한 조용군은“학생들을 데리고 국내 무대에 서면서 곳곳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죠. 하지만 대부분 고쟁(古筝)에 익숙한 반면 가야금에 대한 인지도가 적음을 알게 되였죠. 금후 전국에 우리 민족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조용군한테는 한가지 소원이 더 있다. 바로 신흥소학교 전교 1300명 학생이 운동장에서 동시에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기네스북 등재에 도전해 국내외에 민족악기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가야금 교육에 모든 꿈을 바치며 아직 결혼도 못한 총각선생님, 그의 아름다운 소망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길림신문 최화,정현관 기자
2752    [력사속에서] - 한국 최초의 영화관 - 단성사(團成社) 댓글:  조회:5099  추천:0  2019-10-24
두산백과 단성사   [ 團成社 ] 요약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 이미지 크게보기 단성사 구분 영화관 설립일 1907년 소재지 서울 종로3가 지도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웠다. 1909년 이익우가 사장이었으나 한흥석으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일본인 후지하라[藤原雄太郞]에게 넘어갔다. 주로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중반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19년 10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 《의리적 구토》를 상영함으로써 한국영화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하였고,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여 서울 장안을 들끓게 하였다. 그 후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인 영화관인 황금좌(黃金座)·희락관(喜樂館)·대정관(大正館) 등과 맞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발표회 등에도 무대를 제공하여 새로운 문화의 매체로 큰 몫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樂劇)을 공연하였다. 2005년 2월 지하 4층, 지상 9층에 7개 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하였고, 이듬해 9월 3개 관을 추가하여 총 10개 관에 1806석을 갖추고 있다. 2008년 4월에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9월 23일 경영악화로 부도처리된 뒤,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성사 [團成社]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성사   [ 團成社 ] 이미지 크게보기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대륙극장 유형 단체 시대 근대/개항기, 근대/일제강점기, 현대 성격 연극영화전문극장 설립일시 1907년 6월 4일 설립자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의의와 평가 정의 1907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있는 극장. 개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지명근(池明根)·주수영(朱壽榮)·박태일(朴太一) 등이 공동 출자하여 기존 목조 2층의 건물을 가지고 세웠다. 무대설비와 대도구 등의 제작은 경성좌(京城座) 일본인 무대디자이너가 맡았다. 연원 및 변천 단성사(團成社)는 처음에는 기생들의 창이나 무용 등으로 자선공연을 주로 하였다. 1908년 7월 붕괴사고와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908년 10월 문을 닫았다가 곧 다시 개관해서 각종 연희(演戱)를 공연하였다. 1909년이익우(李益雨)가 사장으로 있었으나, 다음해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와 함께 경영권이 일본인 후지와라 유타〔藤原雄太郎〕에게로 넘어갔다가 1911년최우석(崔禹錫)·장기형(張機衡)·박기영(朴基英) 등 3인 공동경영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광무대(光武臺) 경영자 박승필(朴承弼)이 인수하였다. 박승필에게 넘어가기 전 주로 판소리·창극 등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이었고, 가끔 활동사진도 상영하였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단성사는 영화관으로 사용하였으며, 3층 벽돌건물로 개축하였다. 영화전용극장으로 바뀌고 나서도 개화기의 극장들이 연극과 영화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도 많이 공연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의리의 구토」가 개봉되어 ‘영화의 날’이 이 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1929년 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도 단성사에서 창립공연을 하였으며, 대체로 신파극단들이 이곳에서 연극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0년대에는 외국영화도 상영하였고, 1940년대륙극장(大陸劇場)으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단성사로 환원하였다. 2001년 9월단성사 건물이 철거되고 신축공사로 착공되어 2005년 2월 7개관을 갖춘 규모의 멀티플랙스(Multiplex) 영화관으로 개장되었다가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부도처리되어 같은해 11월아산엠그룹이 인수하여 아산엠단성사로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단성사는 광복 후 악극(樂劇)을 공연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영화관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단성사는 극장이 드물던 개화기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연극과 영화상영의 주요근거지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신극사이야기』(안종화, 진문사, 1955) 단성사(www.dansungsa.com) 관련이미지 12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1930년대 단성사(경성) 극장 건물의 앞모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단성사 [團成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의 극장 ‘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목차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위상 해방 이후 한국 영화 중흥 시기 단성사 멀티플렉스 시대 단성사의 우여곡절 1907년 대한제국 수도 한성에 최초로 민간인이 설립한 실내 극장 단성사가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단성사는 무대예술 공연을 비롯해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상영의 주역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외화 상영관의 대명사를 자처한 단성사는 2015년 폐관할 때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극장으로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 단성사의 위상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제국 황실 극장 협률사(協律社)가 문을 열었다. 협률사가 개관한 지 5년이 지난 1907년 한성의 몇몇 실업가들이 종로에 모여 단성사(團成社)를 설립했다. 단성사는 조선이 근대와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등장한 극장답게 극장의 운영 방침에 조선인 교육과 자선(慈善)을 앞세웠다. 즉,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시기, 극장은 흥행장 성격을 넘어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장소가 되었다. 단성사가 자리한 종로3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종족(ethnic) 간 거주지 공간 분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곳이었다. 일본인이 조선에 이주하면서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이라는 조선인과 일본인 주요 거주지가 각각 나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거주지에 조선인이 설립한 단성사는 불안정한 재정으로 1917년 일본인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郎)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조선인 박승필이 극장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극장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1910년대 단성사는 극장에서 인기를 누린 서양 영화를 전국 12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단성사가 조직한 지방 순업대(巡業隊)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닌 작품은 할리우드 유니버설(Universal)영화사의 연속영화(serial film) (Francis Ford, 1915)이었다. 연속영화는 연속적인 이야기 순서 내에서 짧은 주제의 시리즈로 영화를 구성하고, 각 주제의 시리즈는 위기일발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 형식을 일컫는다. 이러한 영화는 다음 편 주제에서 전편의 이야기를 이어 가는 ‘감질이 나는’ 구성이어서, 다음 편 내용이 궁금한 관객들이 매주 극장을 찾았고 그 결과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단성사는 할리우드 연속영화의 흥행을 지켜보면서 조선 최초의 영화이자 연쇄극 (김도산, 1919)를 제작했다. 연쇄극은 연극 장면과 영화 장면을 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번갈아 가며 보여 주는 형식을 말한다. 는 한강철교와 장충단 등 경성의 명소를 비롯해 전차와 기차 등 근대 신문물을 담아내어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단성사는 의 흥행 이후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19편에 달하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발전의 선봉이 되었다. 또한 단성사는 일제강점기 흥행작 (나운규, 1926)을 상영하고,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이명우, 1935)을 개봉하면서 신기술 도입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소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인 극장의 중심이었던 단성사는 1939년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일본인의 손에 흥행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명칭도 대륙극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한국 영화 중흥 시기 단성사 해방을 맞이하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1946년 3월 1일 단성사는 대륙극장에서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이때 단성사는 개화기 출범 당시 그랬던 것처럼 “계몽 선전 기관”으로서 성격을 다시 부여받았다. 단성사에 대한 공적(公的) 공간으로서 요청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극장은 국방부 정훈국 주최로 일선 사병의 실전(實戰) 보고(報告)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단성사는 기본적으로 흥행 장소였으며, 1953년 영화수입사 불이무역 대표 김인득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으며 본격적인 외화 상영관으로 변했다. 외화 전문 상영관으로서 단성사의 정체성은 1962년 이남규에게 매각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70년대 단성사의 흥행 장르는 홍콩 검술영화 같은 액션 영화였는데, 이들 작품은 인구와 교통의 집산(集散)이 신속히 이뤄지는 ‘종로3가’라는 지리적 상황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흥행 장르였다. 또한 단성사는 극장 인근에 소재한 고등학교 덕분에 학생을 동원한 단체 상영도 가능했다. 1966년 스크린 쿼터(Screen Quota) 제도가 도입되자 외화 상영을 고집하던 단성사도 한국 영화 상영에 동참했다. 국산 영화 보호와 육성을 위해 공보부(公報部)가 시행한 스크린 쿼터 제도는 외화 상설관도 연간 4~6편의 한국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만든 조치였다. 이러한 스크린 쿼터 실시 이후 단성사가 처음으로 상영한 한국 영화는 (김묵 · 설봉 · 박호태, 1966)이었다. 이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반공주의 선전 영화라는 점에서, 단성사의 이 영화 상영은 반공 이념에 기반을 둔 정권에 대응한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1970년대 초중반에 단성사의 한국 영화 상영은 급증했으나 여전히 흥행을 올리는 작품은 할리우드 영화였고, 그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시는 1978년 140일 동안 상영한 (Lewis Gilbert, 1977)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단성사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대표적인 극장이 되었다. 그 기폭제는 바로 (임권택, 1993)였는데, 이 영화는 하루 평균 4318명이 입장해 총 84만6500여 명의 관람 인원을 기록했다. 단성사를 비롯해 서울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한 는 6개월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이와 같은 의 흥행 배경은 일차적으로 영화적 완성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당시 회자된 세계화 구호와 민족주의 상승의 작용 결과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멀티플렉스 시대 단성사의 우여곡절 단성사는 개관 이래 제작과 상영을 아우르며 한국 영화 발전의 중심에 자리하였고,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 시내 개봉관 흥행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강남 개발에 따른 서울 도심의 확대와 1980년대 외국영화 직접 배급의 실시는 단성사를 과거의 명성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1990년대 후반 스크린을 다수 보유하며 배급 라인을 장악한 대기업의 영화 시장 진출은 단성사의 존립을 위협하였고, 이에 따라 단성사는 극장 회생을 위한 새로운 변신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단성사는 지하 4층과 지상 9층에 7개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고, 2006년 3개관을 추가하여 총 10개관에 1806석을 갖췄다. 이후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체인 ‘씨너스단성사’가 되었으나 부도 처리되어 ‘아산엠단성사’로 변했으며, 2016년 8월 복합 귀금속 쇼핑 문화 공간으로 전환했다. 요컨대, 단성사는 연극장으로 출발하여 영화관과 멀티플렉스를 지나 쇼핑 장소로 변한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흥망성쇠를 겪은 단성사를 보노라면, 인생사 그것과 다르지 않아 숙연해진다. 건물 외관은 변해도 관객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단성사는 영원히 극장으로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송영애(2016). 1960~1970년대 서울 시내 개봉관 연구: 단성사를 중심으로. ≪2016년 한국영화사연구소 심포지엄 은막의 사회문화사: 개봉관의 등장부터 1970년대까지≫ 자료집, 37~56. 한국영상자료원. 이길성 외(2004). 『1970년대 서울의 극장산업 및 극장문화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이순진(2011). 『(조선인 극장) 단성사: 1907-1939』. 영상자료원. 이효인 외(2004). 『한국영화사 공부(1960-1979)』. 이채. 한국영화사연구소 주제사채록연구팀(2010). “ 1960~1970년대 영화관 1: 조상림 · 이용희”. 한국영상자료원. “단성사 신발족”, ≪중앙신문≫, 1946년 3월 1일. “일선사병 실전보고 강연 단성사로 장소변경”, ≪조선일보≫, 1954년 1월 13일 조2면.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www.koreafilm.or.kr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www.kmdb.or.kr 관련이미지 1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단성사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동아일보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수도 서울’ 극장의 자존심: 단성사 (한국의 극장, 2017.01.31, 위경혜)  
275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67  추천:0  2019-10-24
신문 배달 소년이 발견한 1500년전 가야 ‘말 갑옷’ 보물 된다 2019.10.24.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992년 발굴된 함안 마갑총 유물 5세기 철기 제작기술 보여줘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 옷 및 고리자루 큰 칼(김해박물관). [사진 문화재청] 지난 1992년 6월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당시 지명) 아파트 건설현장. 공사가 한창인 주차장 부지를 지나던 신문 배달 소년이 독특한 모양의 녹슨 쇳조각을 발견했다. 소년은 이를 신문지국장에게 알렸고 지국장이 이를 신고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4년 6개월간 보존처리를 거쳐 드러난 쇳조각들의 정체는 말 갑옷(마갑·馬甲)이었다. 비늘 같은 쇳조각 450여 개를 연결한 것으로 길이 226~230㎝, 너비 43~48㎝다. 쇳조각들은 보호 부위에 따라 크기가 서로 달랐고 줄을 꿰는 구멍도 정교했다. 질서정연한 비늘 연결 상태는 철의 나라, 아라가야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됐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최초로 온전하게 발굴된 말 갑옷이었다.  이 공로로 당시 중학생 신문 배달 소년이던 이병춘(44)씨와 사학과 출신의 신문지국장 안삼모(57)씨는 지난 5월 경남도지사상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23일 함안 마갑총(馬甲塚) 조사 때 발굴했던 말 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을 비롯한 가야문화권 출토 중요 유물 5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말 갑옷과 고리자루 큰 칼은 당시 무덤 주인공 좌우에 하나씩 매장됐던 것으로 함께 나온 여러 유물에 대한 연구 결과,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반도에서 말 갑옷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삼국이 서로 영토 싸움을 벌이던 4~6세기다. 이 시기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됐지만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극히 드물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황정연 연구사는 “마갑총 외에 5세기 신라 유적인 쪽샘지구 10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것 정도만 원형을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함안 마갑총 출토 당시 모습. [사진 문화재청] 마갑총 마갑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頸胸甲, 목가슴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또한 함께 나온 고리자루 큰 칼은 철을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모양을 만들고 철제 위에 무늬를 새기는 기법이 고루 적용돼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 공예기법 수준, 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동북아에서 철제 무구와 중장기병 전술이 확산하는 양상과 높은 수준의 철기 제작기술이 개발되고 교류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합천 옥전 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3쌍과 큰 칼들도 보물 지정 예고됐다. 이 중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 한 쌍은 1985~1986년 경상대 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야 시대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사슬고리나 S자형 금판고리를 연결하여 기다란 형태를 만드는 독창적 기술은 당대 신라나 백제와 다른 가야 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며 5세기 후반~6세기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는 가야귀걸이 양식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인 가늘고 둥근 주고리아래 속이 빈 공 모양의 장식을 달고 그 아래 심엽형(나뭇잎 모양) 장식과 마지막으로 산치자 열매 모양의 입체형 장식을 달고 있다.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는 출토지와 발견 위치, 함께 출토된 유물이 확실해 고고학적 맥락이 뚜렷하고 현존하는 가야 산치자형 장식을 가진 금귀걸이 중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합천 옥전 고분에서 나온 가야시대 금귀걸이들. 왼쪽부터 각각 28호분, M4호분, M6호분에서 출토.[사진 문화재청] /강혜란 기자
2750    [그때그때] - "단성사" 100 = 한국영화 100 댓글:  조회:3516  추천:0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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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살되는 사과배선조나무 구합시다... 댓글:  조회:3672  추천:0  2019-10-24
근 100년 된 소기촌의 사과배선조나무 구합시다! (ZOGLO) 2019년10월22일    사과배선조나무가 스러질가봐 가슴을 앓는 리태수선생, 정부와 전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소기촌에 있는 사과배선조기념비 키를 한어로 버치(簸萁)라고 부른다. 그런 “버치”가 희한하게도 지명으로 기재되여있는 곳이 있었다. 룡정시 로투구진의 소기촌(小萁村)이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지형이 마치 키처럼 생겼다해서 버치골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소기촌으로 불리웠다고 지명지는 적고 있었다. 지금은 여러 마을들이 합쳐져 용진촌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입버릇처럼 소기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도중에 소기촌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길가던 촌로 한분이 로투구시가지를 들어가기전 다리를 건느지 말고 왼쪽길로 꺽어들라고 신신당부했다. 연길에서는 30키로메터가 넘는 거리였다. 자전거로 한시간 반쯤 달리니 도착했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였다. 특히 연변의 명물인 사과배가 산에서 내릴 때쯤인 10월이면 더욱 떠오르는 고장이기도 했다. 소기촌이 기억에 남는 것은 이곳에 바로 연변사과배의 시조로 되는 사과배선조나무가 있고 그 모수(母树)를 육성해낸 최창호의 전설들이 깃들어있기때문이다. 로투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산골짜기를 따라 2~3키로메터쯤 달렸을 때 오른쪽 길가에 “연변사과배선조나무”라고 쓴 표지석 하나와 사과배고목 한그루가 나타났다. 사과배선조나무는 올해 99세라고 한다. 1921년도에 조선 북청에서 갖고온 배나무 접가지와 당지의 돌배나무를 접해서 육종해낸 나무가 바로 현재 연변의 유명한 사과배선조나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변지역 모든 사과배나무의 원시조로 되는 모수격인 사과배선조나무가 아직 소기촌에 한그루 남아 있는 것이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마주하니 풍상고초를 겪을대로 겪어온 백발이 성성한 로인을 마주한 느낌이였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했으나 너무 늙어서 차마 말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듯 그런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제1대 사과배선조나무의 마지막 한그루. “가끔은 사람들이 찾아와 신기한듯 구경하고 가기도 하지요.”방옥하라고 부르는 촌민이 일본은 물론, 한국손님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몇해전 일본에서 온 손님은 연변에 와서 사과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미혹된 나머지 사과배의 유래에 대해 긍금증을 느껴 소기촌까지 찾아왔더라고 방씨는 말했다. “외지에 있는 제 친구들도 많이 보고갔는데 이들도 소기촌에 이같은 연변사과배나무의 시조나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들 말합니다…”방옥하씨는 연변에 살면서도 사과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 선조나무가 소기촌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고 말했다. 사실 그러했다.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로 되기까지는 어떤 내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도 사과배는 원래부터 연변에 있었던 재래종과일쯤으로 쉽게 생각했고 지역명물에 대한 료해가 부족했다. “사과배는 저의 이모부인 최창호어르신께서 1921년도부터 시작해 다년간 알심들여 배육해낸 연변지역의 우수한 배품종이였습니다.”최창호선생의 일가친척벌되는 리태수(79세)선생의 소개였다. 연변사과배선조나무 전승인 자격으로 다년간 최창호선생의 고택에 머물면서 사과배선조나무에 대한 애정을 몰부어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과배선조나무 전승인의 자격으로 고목을 돌보고 있는 리태수선생. 리태수선생에 따르면 원래는 사과배선조나무를 최창호어르신의 아드님이였던 최승묵과 함께 퇴직 후 고향에 돌아가 함께 돌보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형님벌되는 최승묵선생이 먼저 병으로 돌아가면서 고향의 사과배선조나무를 그가 돌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퇴직 후 리태수선생은 연길에서 소기촌에 옮겨가 최창호선생이 살던 고택에서 살면서 7년간이나 돌보았다. 그사이 말라서 거의 다 죽게 된 늙은 사과배선조나무에 영양제도 투여하고 지극정성으로 관리하면서 죽어가던 나무를 다시 살려냈고 지어는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까지 달리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2년전 들어서 살고있던 고택이 무너질 우려가 있는 위험주택으로 판명나면서 부득불 다시 연길에 돌아와 살고 있다고 했다. 밤에 자다가도 “우찌끈 우찌끈”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고택이 지은지 무려 120년이나 된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비운지 2년이 넘어되고 사과배모수에 대한 관리가 힘들어지게 되니 지금은 겨우 한대밖에 남아있지 않은 제1대 사과배모수가 자나깨나 늘 걱정된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했다. 120년이 넘는 최창호선생이 살던 고택. “이게 어떤 나무입니까? 연변의 유명한 명물인 사과배를 전 연변에 퍼뜨린 모수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명물을 배육하기 위해 한생을 분투해온 최창호어르신이 손수 배육하고 키워내신 나무가 아닙니까?! 이제 그 제1대 모수가 1대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이 귀중한 나무를 어찌 관심없이 바라보고 방치해둘 수 있단 말입니까?!” 리태수선생의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인 것 같았다. 소개에 따르면 1927년에 최창호가 접가지로 접목한 나무에 드디여 과일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달고도 수분이 많고 시원했으며 저장하기도 까다롭지 않았다. 그때는 배이름을 “참배”,“청배”,“큰배”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배품종이 좋다보니 30년대부터 처음 접목에 성공한 제1대 3그루의 사과배나무를 모수로 소기촌에서부터 3헥타르의 과수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뒤를 이어 로투구와 화룡, 도문 등지로 널리 퍼져나갔다. 알고보면 “사과배”라고 정식이름이 붙은  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1952년도에 연변에 온 길림성과일품종조사조는 소기촌에서 세밀한 조사를 거친 후 확실히 새로운 배품종임을 긍정했다. 또한 최창호가 1921년도에 접목한 제1대 모수 3그루를 연변사과배의 모수로 결정하였다. 배처럼 노랗고 사과처럼 붉은 색갈을 띤 과일의 형태를 보고 “사과배”라는 정식이름을 달아주게 된 것이였다. 그후 1954년도에 길림성농업과학연구소의 고모가 연변의 사과배는 추자리(秋子梨)계통과 사리(沙梨)의 자연교잡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해방후 소기촌은 배나무덕에 번신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과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20~30년대부터 심기 시작한 사과배나무가 과일이 잘 열리고 품질이 좋은 장년기에 접어든데다가 거름도 잘내고 관리도 잘해준 보람으로 품질이 좋았던 것이다. 1955년도 가을에 최창호를 비롯한 소기촌의 촌민들은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으로 농민들이 번신했다는 감사의 뜻을 담아 10광주리의 사과배를 모주석께 보내드렸다고 한다. 사과배 하나에 한근반, 두근씩 되는 희귀한 것들이였다고 리태수선생은 과거를 회억했다. 1961년도 련속 3년 자연재해가 들었던 때에도 소기촌은 부유했었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했다. 그해 사과배를40만근이나 수확했다고 한다. 그때 다른 마을들은 하루에 일공이 3전도 되나마나 했지만 소기촌은 2원 64전5리나 되였고 성급 모범상장도 탔다고 말하면서 리태수선생은 수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당시 3대 가장기물이던 손목시계, 재봉침, 라지오를 거의다 갖추었을 정도로 잘사는 마을이였다. 시골마을이지만 부유하다보니 전기도 62년도에 일찍 마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 “그게 다 사과배덕이였지요” 리태수선생이 자랑하는 사과배의 덕은 소기촌 하나만 혜택본 것이 결코 아니였다.  연변의 특산물로 유명한 연변사과배. 50년대초 자치주 초대주장이셨던 주덕해가 사과배 새품종의 확대생산을 위해 1951년도에 모아산기슭에 과수원자리를 잡아주고 과수농장건설을 지시격려했다고 력사는 기록하고있다. 그후 불과 40년사이 과수농장의 사과배재배면적이 1만 3000헥타르로 확대되였다. 사과배는 그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길림성은 물론 우리 나라 20여개 성과 조선, 로씨야, 벌가리아 등 해외에까지 전파되면서 현재 총재배면적이 8만헥타르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특히 내몽골, 청해, 감숙, 료녕성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사과배가 지역의 주요한 과일품종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1976년에 있은 전국배과학연구협작회에서는 설리, 태양리와 함께 사과배를 중국의 3대 명표배로 인정했다. 사과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강한 저장성과 내한성 그리고 품질이 우수하기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1987년 농목축어업부는 룡정현을 “사과배의 고향”으로 명명했으며 전국의 유일한 량질사과배생산기지로 결정했다. 화룡시는 길림성생산기지로 되였다. 1989년에는 《해란강표》사과배가 농업부의 명표과일로 되였고 1990년에는 사과배가 록색식품으로 되였다. 2002년에는 국가기술질량감독총국의 심사를 거쳐 룡정시가 사과배의 국가원산지보호산품지로 되였다… 흘러간 세월속에 세상에 널리 이름떨친 사과배를 보면서 소기촌의 사과배모수가 우리에게 중요한 리유를 알 것 같았다. “사과배가 어떤 나무입니까?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박고 개척하면서 가꾸어낸 노력의 열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응당 사과배를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생각해야 하며 문화적, 정신적인 유산으로 길이길이 계승하고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리태수선생의 말은 인심을 격동시키는데가 있었다. 1987년 사과배선조나무 비석 락성식 장면(자료사진). “물마실 때 우물 판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어느 위인이 하신 말씀이 있다. 사과배와 최창호의 공덕을 기리여 룡정시인민정부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1987년과 1998년도에 각각 사과배재배 성공과 최창호가 재배한 제1대 3그루 사과배선조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기골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사과배는 연변 여러민족인민들이 연변을 개척한 성과의 하나로서 그 선조나무는 연변인민들이 대자연과의 투쟁에서 따낸 승리의 상징이며 연변경제의 중요한 유산이며 연변인민들의 애국주의와 향토애교양의 산 교과서이다.”고 적혀있었다. 1987년 오장숙, 장룡준 등 당시 지도일군들이 락성식 테프를 끊었다. “이제 2년만 지나면 사과배선조나무도 만 100살이 됩니다. 최창호어르신과 사과배나무 100년은 매우 기념적의의가 있는 매우 소중한 력사적 유산입니다.” 사과배선조나무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리태수선생은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바로 말라가는 고목을 제때에 관리하고 돌볼 수 있는 집을 한채 짓고 사과배선조나무기지에 최창호선생의 석고상을 세워놓고 싶은 것, 그리고 허물어져가는 사과배선조나무비석을 다시 수건하여 우뚝 세워놓고 싶은 것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1대 사과배모수도 제대로 관리해주기만 하면 아직도 꽤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아직 건강한 제2대 사과배모수도 6대나 있어 사과배브랜드창출과 사과배력사박물관, 그리고 향촌관광에 밝은 전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기골에서 나는 질좋은 꿀제품과 과일, 목이버섯, 홍송, 소, 양 등 다양한 특색자원들을 리용하면 향촌경제의 미래와 출로는 더욱 밝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사과배선조나무를 브랜드로 한 향촌의 민속문화와 지역특색, 그리고 력사를 결부시킨 독특한 사과배문화를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리태수선생의 타산이였다. 그러나 혼자힘으로는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과배선조나무기지의 전승권을 팔라고 찾아오는 개인투자자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지를 결코 양도할 수 없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어찌보면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과 중국조선족의 엄연한 력사적 유물이기때문이다. 력사유물은 보호하고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100년 유물을 개인투자자들의 돈벌이로 전락시킬 수는 없다고 리태수선생은 말한다. 얼마 못가 그 대가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리태수선생은 단호히 거부했다. 현재 리태수선생은 사과배선조나무의 계승과 보호를 위한 정부적 차원의 합작과 도움을 박절히 수요하고 있었다. 해당부문을 찾아 다니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중이라고 한다. 소기골에 사과배문화의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여나 새로운 현대판 사과배의 전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2748    [고향사람] - "중국 조선족의 주시경"... 댓글:  조회:3329  추천:0  2019-10-24
최윤갑교수 한국정부의 ‘화관문화훈장’수훈 (ZOGLO) 2019년10월22일  인물이름 :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수인 최윤갑교수 일전 연변대학 원로교수인 최윤갑교수가 한국정부의 한글날 경축행사에서 ‘한글 발전 유공자’훈포장• 표창의 최고 영예인 ‘화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최윤갑교수는 48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에서 우리글 전문 인재양성 및 우리 글의 발전과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화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1930년 룡정에서 태여난 최윤갑교수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제1기 졸업생이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도 빼앗긴 채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일제시대의 뼈 아픈 세월을 살아온 최윤갑교수는 조선어에 대한 사랑이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윤갑교수가 받은 ‘화관문화훈장’증서와 메달 최윤갑교수는 1949년도에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퇴직할 때까지 줄곧 연변대학에서 조선어연구와 교수 및 인재양성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왔다. 지금까지 최윤갑 원로교수는 《조선어문법(1980)》,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 신강(2009)》 등 11부의 학술저서를 펴냈고 조선어연구 론문 60여편을 발표했다. 론문들은 고대조선어로부터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음운론으로부터 통사론에 이르기까지, 방언학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본체론 연구로부터 대조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최윤갑교수는 대학 재직 48년간 연변대학 어문학부 교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 학과장, 연변대학 언어문학대학 학장, 연변대학 초빙교수 등을 력임하면서 조선어(한국어) 전문인재를 양성했다. 대부분 제자들은 국내 대학들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부분 제자들은 훌륭한 언어학자로도 성장하였다. 동시에 여러 종의 대학교과서를 편찬하여 연변대학 국가중점학과 건설과 국내 대학 한국어학과 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최윤갑교수는 일생의 심혈을 중국 조선어의 발전과 세계화에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업적을 기리여 연변대학 전임교장이였던 김병민은 그를 우리 조선민족이 낳은 ‘중국의 주시경’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한편 최윤갑교수는 1992년도에 우리 나라 고등교육사업의 발전을 위해 특수한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원의 정부특수당금을 받았으며 1993년도에 한국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기도 했다. ///길림신문 /김룡, 안상근기자
2747    [고향시단] - 시인들의 명절 -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댓글:  조회:3366  추천:0  2019-10-23
시인들의 큰 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0월19일  "조선족시인들과 국내외 시인들의 만남의 장" "시와 사진, 시와 예술의 만남으로 조선족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다니 과히 놀랍도다" "감동 그 자체였다. 민족이 따로 없이 시와 노래로 하나가 된 축제" ... 건국 70주년을 맞으며 조선족시인들의 큰 잔치인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이 10월 19일 국내외 시인들과 조선족시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막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 선포   연변주당위선전부,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시랑송대회, 대형시화전, 공로시인 표창, 문예야회, 시창작세미나, 현지답사, 대형다큐멘터리제작 등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이 사회를 한 이날 개막식에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이 환영사를,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이 축사를 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   김기덕 부장은 " 문화가 흥(兴)하면 국운도 흥성하고 문화가 강대해지면 민족도 강대해진다"며 "시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시가절행사를 계기로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문화로써 관광산업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는 전국정협 상무위원 겸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 백경성 부주석은 "연변문련과 연변작가협회가 설립된이래 문학예술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냈으며 따라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왔다."면서 "조선족의 문학과 예술은 중국 70년의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이를 장식했다. 이는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헌신정신,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막식 사회를 하는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 이날 조선족시단에서 혁혁한 공훈이 있는 리욱, 김철, 리상각, 한춘, 조룡남,리삼월, 김성휘,박화, 남영전, 최룡관,정몽호  등 11명 시인들을 표창했다. 그중 8명은 작고한 원로시인들이다. 수상자 및 대리수상자와 함께  "리욱 원로시인은 해방전과 해방 후 두 시대에 걸쳐 시창작을 진행하여 조선족시단을 개척하고 정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토신이라 지칭하기에 손색없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로 시창작을 하고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이하 략함)   모택동이 1936년에 쓴 시"시원춘설"을 읊조리는 임지원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는 건국 70주년 맞이 두만강천리답사 계렬활동을 펼치면서 현지답사를 통해 더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물은 오늘에 전시된 시화이며 "중국조선족시선집"을 편찬해낸 것.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창작위원회 주임이자 이번 행사를 총 기획한 김영건은 "시인들은 현지답사를 통해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하는 좋은 시화들을 창작해냈다.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리라고나 할가. 시화를 전시하고 시선집을 펴내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와 춤으로 시와 예술의 만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건국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련다."며 "'뿌리 깊은 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야회는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아래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대서양 건너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담아냈다. 전반 무대를 시가 흐르는 야회로 장백산의 산생, 그날의 자취를 찾아 인정의 세계로 펼쳐지는 진달래 산천으로 펼쳐지며 우리 민족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뿌리 깊은 토대를 바탕으로 이 땅에 당당한 주인 된 오늘을 노래하고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속에 그 뿌리를 뻗치는 건실한 미래를 구가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야회는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서사시처럼 고도로 째이고 전반을 시의 흐름으로 풀면서 우리 무용의 최고의 경지로 옷 입고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전반을 이어나갔으며 특수처리 등 수법으로 매 장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적 무대로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무대하 할 수 있다.     시가절의 일환으로 오후 연길 상우호텔에서 시가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일에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영상 방호범     시화전 한장면   시선집     파일 [ 43 ]                                     
2746    [그것이 알고싶다] - 돌배나무... 댓글:  조회:5605  추천:0  2019-1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돌배나무     이미지 크게보기 경북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는 돌배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 나무 높이는 18m이고, 나이는 200년으로 추정된다. 이칭별칭 꼭지돌배나무, 돌배, 산배나무 유형 동식물 시대 현대 성격 식물, 나무 학명 Pyrus pyrifolia (Burm.) Nakai 생물학적 분류 장미과 배나무속 원산지 한국, 중국, 일본 서식지·소재지 중부 이남 출산·개화시기 4∼5월 목차 정의 개설 생태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정의 장미과 배나무속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또는 소교목. 개설 중부 이남 표고 700m 이하의 산록에 자생한다. 꼭지돌배나무, 돌배, 산배나무라고도 부른다.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이다. 학명은 Pyrus pyrifolia (Burm.) Nakai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의 상리 돌배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태 잎은 어긋나기를 하고 달걀모양의 타원형 또는 달걀형이다. 잎의 길이는 7∼12㎝, 너비는 4∼6.5㎝이다. 잎의 양면은 털이 없거나 혹은 어릴 때 갈색의 솜털이 있다. 꽃은 암수한몸 양성화(兩性花)로 4∼5월에 백색으로 피는데, 6∼9개의 작은 꽃이 산형화서로 달린다. 꽃의 지름은 3.5∼4㎝이고, 꽃줄기에는 어릴 때 작고 가는 털이 있다. 줄기는 곧게 선다. 어린가지는 통통하고 암갈색인데, 처음에는 털이 있다가 후에 떨어진다. 많은 개량종이 있으며 변종으로 일본배나무가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한방에서는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문배나무의 열매를 산리(山梨)라 하여 독성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외용하거나 화농성 골수염에 짓찧어 붙이거나 어혈을 푸는데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갈증해소와 변비에 사용하고, 삶은 후 즙을 내어 먹으면 버섯중독, 구토 증세에 효용이 있다고 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기침이 심할 때 배 속을 비우고 꿀을 넣어 달여 먹는다고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더위 먹었을 때 열매의 껍질을 달인 물을 마신다고 한다. 목재는 가구재, 기구재로 쓰이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나무는 정원수나 분재용으로 많이 애용된다. 청도의 상리 돌배나무는 청도김씨의 시조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1190∼1266)의 묘제인 염수제(念修齊) 앞뜰에 자라고 있다. 수령은 약 200년, 높이는 18m, 둘레는 3.68m로 경상도에서 보기 드문 노거수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돌배나무는 대부분 벌목되어 거목은 그리 흔치 않으나 청도김씨 대종친회에서 잘 관리해 온 까닭에 고유의 수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생육상태도 양호하다. 다른 지역의 나무에 비해 열매가 크며 신맛이 강해 돌배나무의 변종 연구에 귀중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돌배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약초도감 돌배나무     돌배나무 꽃 (4월 5일) 계 식물 과 장미과(Rosaceae) 학명 Pyrus pyrifolia (Burm.f.) Nakai 생약명 이수근(梨樹根, 배나무와 같은 약재) 개화기 4~5월 핵심어 양성화1), 총상화서2) 목차 1. 구분 2. 서식지 3. 특징 잎 꽃 열매 줄기껍질 줄기 속 가지 겨울눈 4. 용도 민간요법 식용방법 5. 계절별로 알아보자 1. 구분 장미과의 잎지는 넓은잎 작은 큰키나무로 줄기가 하나 또는 몇 개가 올라와 키 5~10m 정도로 곧거나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가지가 옆이나 위쪽으로 구불구불하고 길게 뻗어 위쪽이 둥근 반원형이 된다. 2. 서식지 중부 이남의 높은 산 햇볕이 조금 비치는 평원지대에 주로 서식한다. 배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면 돌배가 된다. 3. 특징 줄기껍질이 직사각형의 비늘처럼 갈라지고 아기 주먹만 한 배가 달린다. 잎 길이 7~12㎝ 정도의 잎이 가지에 달린다. 끝이 점점 뾰족해지는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짧은 바늘 같은 잔톱니가 있다. 앞면은 윤기가 조금 있고 뒷면은 회색빛 도는 녹색을 띤다. 어릴 때는 붉은빛이 돌기도 하며 뒷면에 잔털이 있다가 없어진다. 앞뒷면과 잎자루에 털이 없다. 잎자루는 길이 3~7㎝ 정도 된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다. 꽃 4~5월에 잎과 함께 잎 달리는 자리에 흰색으로 핀다. 같은 길이로 어긋나게 갈라진 꽃대가 나와 지름 3㎝ 정도의 꽃이 달린다. 한 꽃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나온다. 암술대는 4~5개다. 꽃잎은 5장이다. 꽃받침잎은 5갈래로 갈라지며 긴 피침형이다. 열매 9월에 씨방이 응어리지고 과육이 많은 지름 2~3㎝ 정도의 둥근 열매가 노란 갈색으로 여문다. 과육에 돌처럼 까슬까슬한 돌세포가 있으며 열매꼭지는 길이 3~5㎝ 정도 된다. 줄기껍질 어린 나무는 연한 갈색빛 도는 회색을 띠며 매끄럽다. 묵을수록 회색빛 도는 갈색이 되며 직사각형의 비늘처럼 잘게 갈라진다. 줄기 속 가장자리는 흰 주황색을 띤다. 안쪽에는 밝은 주황빛 도는 넓은 심이 있다. 한가운데에는 연한 주황색의 작은 속심이 있다. 속껍질은 붉은 갈색을 띤다. 가지 햇가지는 연한 녹색 빛 도는 회갈색을 띠다가 점차 붉은 갈색이 되며 잔털이 있다가 없어지고 윤기가 있다. 묵으면 갈색이 되었다가 회색빛 도는 갈색을 띤다. 짧은 가지는 가시처럼 변하기도 한다. 밝은 갈색의 껍질눈이 있다. 겨울눈 위가 뭉툭한 불룩한 원뿔 모양이다. 갈색을 띠며 잔털이 조금 있다. 4. 용도 약용: 기침 가래, 열병, 폐결핵, 변비 식용: 과실 민간요법 배나무와 같은 약재다. 배나무보다 약효가 낫다. 뿌리(이수근, 梨樹根) · 가지(이지, 梨枝) · 줄기껍질(이목피, 梨木皮) 뿌리와 가지는 수시로, 줄기껍질은 봄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려서 쓴다. 기침 가래, 열병에 말린 것 30g을 물 700㎖에 넣고 달여서 마신다. 열매(이, 梨) 늦여름~가을에 채취하여 생으로 또는 햇볕에 말려서 쓴다. 폐결핵에 말린 것 15g을 물 700㎖에 넣고 달여서 마신다. 변비에 생즙을 내어 마시거나 같은 양의 흑설탕에 재워서 효소를 만든 뒤 물에 타서 먹는다. 식용방법 열매는 1개월간 재워서 연해지면 과실로 먹는다. 달면서 향기가 매우 좋다. 5. 계절별로 알아보자 ■ 봄 돌배나무 꽃봉오리와 어린 잎 (4월 6일)꽃봉오리에 분홍빛이 돈다. 돌배나무 꽃 (4월 5일)흰색으로 핀다. 돌처럼 딱딱한 배가 달린다고 돌배나무이다.       돌배나무 - 꽃 핀 모습 (4월 2일)나무가 커지면 줄기와 가지가 아주 굵어진다.   돌배나무 어린 잎 (4월 8일)어릴 때는 뒷면에 잔털이 있다가 없어진다. 돌배나무 잎 (5월 2일)잎자루가 길다.         ■ 여름 돌배나무 수형 (6월 23일)여름 모습. 줄기가 하나 또는 몇 개가 올라오며 가지가 옆이나 위쪽으로 길게 뻗어 위쪽이 둥근 반원형이 된다. 키가 5~10m 정도 된다.   돌배나무 잎 앞뒷면 비교 (6월 25일)왼쪽부터 돌배나무,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풋열매 (6월 20일)붉은빛이 돈다.   돌배나무 열매 (8월 24일)배와는 달리 단단해서 1개월간 숙성시켜 먹는데 숙성이 되면 매우 달다. 돌배나무 열매 채취 (8월 25일)열매 떨어진 모습. 산짐승이 열매를 먹고 이동하여 똥을 싸면서 씨앗들이 멀리 번식된다. 열매 떨어진 자리에 가면 잎이 진 후에도 나무를 찾기 쉽다.       돌배나무 열매 채취 (8월 25일)열매 떨어진 모습. 산짐승이 열매를 먹고 이동하여 똥을 싸면서 씨앗들이 멀리 번식된다. 열매 떨어진 자리에 가면 잎이 진 후에도 나무를 찾기 쉽다.     ■ 가을 돌배나무 - 늦가을 모습 (11월 2일)높은 산의 평원지대에서 볼 수 있다. 멀리에서 보면 회갈색을 띤다. ■ 겨울 돌배나무 겨울 모습 (1월 23일)겨울이 되면 거무스름하게 보인다.   돌배나무 겨울 군락 줄기와 가지 (1월 2일)아래에서 보면 줄기가 여러 개 올라와 가지를 많이 뻗는다. 돌배나무 어린 나무 줄기와 잔가지 (1월 24일)잔가지가 가시처럼 변하기도 한다.   돌배나무 겨울 줄기 비교 (2월 11일)왼쪽부터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돌배나무는 가지가 굵다. 돌배나무 겨울눈 (1월 27일)지난해 봄에 나온 햇가지가 윤나는 붉은 갈색을 띠고 있다.         ■ 줄기 돌배나무 고목 밑동 (1월 2일)줄기가 곧고 굵게 나왔다. 돌배나무 줄기 속 (1월 24일)주황빛이 돈다. 돌배나무 고목 줄기껍질 (1월 2일)직사각형의 비늘처럼 갈라진다. 왼쪽은 조각난 줄기껍질이 떨어져 나가 붉은 속껍질이 드러나 있다. 고목이라 이끼가 끼어 있다.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Pyrus pyrifolia (Burm.f.) Nakai)"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2/20161112122138603_H9PVJ7W7W.JPG/ib58_1255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5" />    Pyrus pyrifolia (Burm. f.)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65_000_1/20150107160947944_C6DLNI8FU.jpg/ia40_1064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pyrifolia (Burm.f.) Nakai)"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2/20161112122210305_T62GF2X7Z.JPG/ib58_1255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9" />    Pyrus pyrifolia (Bu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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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그루씩의 사과나무가 들어와 재식되기는 하였으나, 성공한 예는 드물었고, 대부분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정도였다. 그 뒤 1901년에 윤병수(尹秉秀)가 미국 선교사를 통하여 다량의 사과묘목을 들여와 원산(元山) 부근에 과수원을 조성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경제적 재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8월에 정부에서는 농상공부 소속으로 뚝섬에 12㏊ 규모의 원예모범장(園藝模範場)을 설치하고, 각국에서 각종 과수의 개량품종을 도입하여 품종비교, 재배시험 등을 실시하는 한편, 모범재배와 육묘(育苗)도 실시하여 과수재배의 국가적인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 과수의 유망성이 국민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하여 과수 재배면적은 급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 나라의 1986년도 사과 재배면적은 3만6443㏊로 전체 과수 재배면적의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생산량은 53만7737t으로 전체 과실 생산량의 37%를 차지하고 있다. 사과의 연도별 생산량은 재배면적은 줄어들고 있으나 재배기술의 향상으로 늘어나고 있다. 사과의 주산지는 경상북도·충청북도·충청남도로 이들 세 도에서의 생산량이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경상북도의 생산량은 전체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었던 주요 품종은 국광과 홍옥으로 전 사과의 55%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 일본으로부터 후지(富士) 등의 우수품종이 도입되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비율로 품종이 구성되게 되었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후지(當士):숙기가 10월 하순 또는 11월 초순인 만생종으로 과중이 300g 정도이다. 과육이 단단하고 신맛이 적고 과즙과 단맛(당도 15도)이 많을 뿐만 아니다. 저장성이 매우 높아 품질이 극히 우수한 품종으로 앞으로도 계속 재배면적의 증가가 예상된다. ② 쓰가루(아오리2호):숙기가 8월 하순으로부터 9월 초순인 중생종으로 과중은 250g 정도이며 과즙이 많고, 당도는 14도로 신맛이 적은 우수한 장려품종이다. 추석기 출하에 알맞는 유망품종으로 그 재배면적이 증가되고 있다. ③ 골덴데리샤스(golden delicious):황색과실로 과중은 200∼250g 정도이며, 즙이 많고 향기가 높아 품질이 매우 좋다. 당도는 13도 정도이고, 숙기는 10월 중순경인데, 12월 정도까지는 저장이 가능하다. 동록[銹]의 발생이 심하여 2회의 봉지씌우기를 하여야 하는 단점이 있다. ④ 육오(陸奧):만생종으로 과중이 430g 정도이고, 당도는 13도 정도이며 과육이 단단하여 저장 및 수송에 용이하다. ⑤ 세카이이치(世界一):만생종으로 과중이 600g 정도인 대과이다. 육질이 치밀하여 과즙이 많고 당도는 12도로 신맛도 적은 우수한 품종이다. 이 밖의 주요 품종으로는 스타킹(Starking)·홍옥·어얼리브레이즈(Eali Blage)·국광·축·혜·인도·왕령 등이 재배되고 있다. 사과는 다른 과수에 비하여 비교적 냉량한 기후를 좋아하므로, 연평균기온이 7∼12℃이며, 4∼10월의 기온이 15∼19℃, 6∼8월의 월평균기온이 18∼24℃인 온대북부지역이 적합하며, 강우량은 1,000∼1,200㎜가 적당하다. 토질은 토심이 깊고 토양산도가 pH 5.5∼6.5인 사양토가 적당하다. 사과나무의 묘목(苗木) 양성은 접목에 의하고 있다. 접목에 이용되는 대목에는 일반대목과 왜성대목(矮性臺木)이 있는데, 1970년대 후반부터 사과의 왜화재배(矮化栽培)가 장려, 보급됨에 따라 왜성대목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보통재배에서 사용하는 일반대목의 종류에는 환엽해당(丸葉海棠)·삼엽해당(三葉海棠)·야광나무(매주나무)·실생(實生) 등이 있고, 왜성대목에는 M27·M9·M26·M7·MM106 등이 있다. 묘목은 배수가 잘되는 토양이면 둥글게 구덩이를 파고 퇴비와 흙을 섞어서 구덩이를 메운 다음 심는다. 구덩이는 일반사과나무일 때는 직경 120㎝, 깊이 90㎝ 정도로 크게 파고, 왜성사과나무일 때는 직경 90cm, 깊이 70㎝ 정도로 판다. 사과는 대부분의 품종들이 자가결실률(自家結實率)이 극히 낮으므로 수분품종(受粉品種:꽃가루받이를 한 품종)을 20% 정도 혼식하여야 하는데, 수분수(受粉樹)가 한쪽에 몰려 있으면 효과가 적으므로 주품종 4열에 수분품종 1열씩 배식하여야 한다. 또한 우량한 과실을 생산하기 위하여서는 착과 후, 적당한 수의 과실만 남기고 나머지를 솎아 주는 적과(摘果)작업을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적과는 일찍 할수록 양분 이용면에서는 유리하지만 수정(受精)의 불완전이나 기타의 영향으로 과실이 발육 초기에 낙과하는 일이 많으므로 너무 일찍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과는 대개 만개일조부터 30일 후에 실시하는 것이 대과의 비율도 높고 다음해의 화아분화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과의 주성분은 탄수화물이며, 단백질과 지방은 비교적 적고 비타민C의 함량이 특히 많다. 사과는 가식부(可食部)가 95%이고, 수분이 90%인데, 생식용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고, 각종 음료와 양조의 원료로도 이용되며, 잼·건과·분말·통조림 등의 가공품과 일부 약품에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상당한 열량이 있어서 보조식량으로의 이용도 가능하다. 참고문헌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낙엽과수재배각론』(김성복 외, 선진문화사, 1982) 『농림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 1987) 관련이미지 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사과나무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사과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배나무   [ Pear tree ] 요약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배나무속의 총칭. 이미지 크게보기 배나무의 수형 학명 Pyrus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꽃은 흰색이고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다. 과피는 갈색이거나 녹색을 띤 갈색이고 과육에는 돌세포[石細胞]가 들어 있다. 암술은 2∼5개, 수술은 여러 개이다. 열매는 꽃턱이 발달해서 이루어지며 2∼5실을 기본으로 한다. 종자는 검은빛이다.  열매에는 당분 10∼14%, 과육 100g에 칼륨 140∼170mg, 비타민C 3∼6mg이 들어 있다. 주로 유라시아의 온대지방에 분포한다. 전세계에 20여 종이 있으며 크게 일본배·중국배·서양배의 3품종군으로 나눈다. ① 일본배(P. pyrifolia var. culta (Makino) Nakai):일본 중부 이남, 한국 남부와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연안 일대에 분포하는 돌배나무(P. pyrifolia)를 기본종으로 개량한 품종군이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고 온난한 기후에 적합하며 잎은 크고 달걀 모양이다. 열매는 둥글고 육질은 서양배보다 질이 떨어지지만 과즙이 많고 신선한 맛이며 저장성도 강하다. 현재 한국에서 주로 재배하는 품종이다. ② 중국배:중국의 허베이[河北] 지방과 북동부, 한국 북부 등지에 분포하는 산돌배(P. ussuriansis)를 기본종으로 하여 중국에서 개량한 것이다. 중화리(中華梨)와 중국소리(中國小梨)로 나누는데, 그중에 널리 알려진 야리[鴨梨]와 쓰리[慈梨]는 중화리 계통이다. 여름 생육기간에 비가 적은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타원형이거나 둥근 모양이고 꽃 피는 시기가 빠르다. 열매는 대체로 크며 녹색이고 약간 떫은맛이 있다. ③ 서양배(P. communis):유럽 중부로부터 터키 일대에서 야생한 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여름에 비가 적은 곳에서 개량한 것이다. 잎은 달걀 모양이거나 긴 타원 모양의 달걀 모양으로 잎자루가 가늘고 길다. 열매는 보통 병 모양의 원뿔형이지만 변이가 많다. 성숙한 것을 따서 다시 후숙하여 먹는다. 돌세포가 적고 향기와 맛이 매우 좋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같은 품종들을 재배하였고, 지방에 따라 금화배·함흥배·안변배·봉산배가 유명하였다. 1906년 서울 근교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세우고 일본배를 도입, 재배하면서 이들 재래배는 점차 사라졌다. 뒤에 일본배 장십랑(長十郞)과 재래배 청실네를 교배하여 단배를 신품종으로 육성하였다. 참조항목 과수, 돌배나무, 산돌배, 장미과 역참조항목 검은별무늬병, 돌세포, 만삼길, 배나무검은별무늬병, 배나무굴나방, 배나무붉은별무늬병, 배나무줄기마름병 카테고리 식물 >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 > 장미목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배나무 밭전남 나주시의 특산물인 배.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배나무 [Pear tree]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배나무     이미지 크게보기 과수원에서 배꽃이 개화한 모습이다. 1985년 5월 촬영되었다. 유형 동식물 성격 식물, 나무, 낙엽과수 학명 Pyrus serotina var. culta (REHDER NAKAI) 생물학적 분류 장미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내용 학명은 Pyrus serotina var. culta (REHDER NAKAI)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고실네·황실네·청실네 등 여러 가지 배품종들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생산지에 따라서도 금화배·함흥배·봉산배 등이 널리 알려졌으나, 1906년 뚝섬원예모범장[纛島園藝模範場]이 설립된 뒤에 개량품종들이 보급됨에 따라 점차 도태되어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새로 도입된 품종들은 일본배·중국배·서양배 등이다. 일본배는 일본의 중부 이남과 우리 나라의 남부 및 중국의 양자강 연안에 분포되어 있는 돌배를 기본종으로 하여 일본에서 주로 개량된 품종군으로, 그 분포는 일본과 우리 나라에 국한되어 있다. 서양배는 유럽 중부와 동남부 및 아시아 서부에 분포되어 있는 야생종을 기본종으로 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량된 품종군들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배와 중국배는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에 맞지 않아 장려되지 못하였고, 현재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들은 거의가 일본배이다. 우리 나라의 1987년도 배재배면적은 8,088㏊로 전체과수 재배면적의 7%를 차지하고, 그 생산량은 14만4856t으로 전체 과실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있다. 배의 주산지는 경기도와 경상남도로 전체 생산량의 51.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배의 주요 품종은 장십랑(長十郎)과 만삼길(晩三吉)이 70%를 차지하여 단연 우세를 보여왔으나, 이 중 만삼길은 새로운 우량품종의 도입에 따라 앞으로 점점 감소할 추세이다. 또한 금촌추(今村秋)와 신고(新高)가 20%를 차지하고 있고, 기타 품종으로 단배·이십세기·신흥 등이 있으며, 최근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삼수품종(新水·幸水·豐水)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앞으로는 이들 품종의 재배면적이 증가될 추세이다. 배재배의 적지로는 연평균기온이 11∼16℃로서 4, 5월 평균기온이 20℃, 발육기인 8, 9월에는 평균기온이 22℃가 적온이다. 강우량은 1,200㎜ 정도가 적당하며, 특히 7월 상순∼9월의 과실발육기에는 강우량이 많을수록 우량과실을 생산할 수 있다. 토질은 비옥하고 배수가 잘 되고 표토가 깊은 양토 또는 사질양토가 좋다. 우리 나라는 전국에 걸쳐 재배가 가능하나, 특히 중부 이남이 적지이다. 번식은 아접(芽椄)이나 절접(切椄)을 이용하며, 일본배의 대목(臺木:접목하는 나무)으로는 재배품종의 실생(實生:씨를 심어서 자란 식물)이나 돌배나무의 실생을 이용한다. 배나무는 조기결실성이 강하여 재식 후 3, 4년 후면 경제적 수확이 시작되어, 그뒤 30∼40년간은 경제적 재배가 가능하다. 개원시 주의하여야 할 점은 20%의 수분수(受粉樹:꽃가루받이를 한 나무)를 혼식하여야 된다는 점이다. 재식 거리는 품종 및 재배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5∼9×5∼9m 정도이다. 최근에 배나무의 조기 결실성을 이용하여 조기에 밀식한 뒤 수관 확대에 따라 간벌해나가는 계획밀식재배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다. 전정은 자름전정[斷切剪定]을 주로 해서 복잡한 곁가지를 줄이며, 수형은 배상형(盃狀形)이나 장간개심형(長幹開心形)으로 한다. 배는 당분과 수분함량이 많아 그 시원한 과즙 때문에 주로 생과로 많이 이용되며, 이 밖에도 통조림·넥타·잼 등도 만들 수 있고, 식초·사탕조림·약용 등으로도 이용된다. 참고문헌 『과수원예각론』(이광연 외, 향문사, 1978) 『낙엽과수재배각론』(김성복 외, 선진문화사, 1982) 『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 1988) 관련이미지 38 이미지목록 이전         Pyrus pyrifolia var. culta (Makino)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3044926169_E54DPXUW6.jpg/ib58_1859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pyrifolia (Burm. f.) Nakai var. cultiva (Makino) Nakai"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65_000_1/20150107170917884_0W56469PL.jpg/ia40_1239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배나무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성 낙엽과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과일나무의 하나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배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문배     이미지 크게보기   학명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생물학적 분류 문 : 피자식물문(Angiospermae) 강 : 쌍자엽식물강(Dicotyledoneae) 목 : 장미목(Rosales) 과 : 장미과(Rosaceae) 속 : 배나무속(Pyrus) 개화기 4월~5월 꽃색 백색 형태 낙엽 활엽 교목 크기 높이 10m 목차 분포 특징 잎 꽃 열매 줄기 수피 생육환경 번식방법 이용방안 유사종 분포 한국(홍릉에서 처음 발견) 특징 꽃이 크다. 맹아력이 강하다. 잎 잎은 어긋나기하며, 난상 원형이며, 길이와 폭은 각 5-10cm × 4-6cm로, 양면에 털이 없으며, 가장자리에는 침상의 톱니가 있고, 잎자루 길이 2-5cm이고, 털이 없다. 꽃 꽃은 4-5월에 개화하며, 5-7개씩 편평꽃차례에 달리며, 지름은 3.5cm 이상이고, 백색이며, 꽃받침조각은 삼각상 피침형이고 끝이 둥글며 옆으로 퍼지고, 꽃잎은 거꿀달걀모양이며, 작은꽃대의 길이는 1-2cm로, 털이 없다. 열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은 3-4cm로, 8-10월에 황색으로 성숙한다. 줄기 높이가 10m에 달하며 줄기는 단립하여 통직하고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잘게 갈라지며 일년생가지는 갈색이며 털이 없다. 수피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잘게 갈라지며 일년생가지는 갈색이며 털이 없다. 생육환경 • 부락 근처 또는 산지에서 자란다. • 내한성이 강하고 음지와 양지 모두에서 잘 자라나 내건성이 약하며, 대기오염에 대한 저항성이 강한 편이다. 번식방법 번식은 가을에 채취한 종자를 노천매장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파종한다. 이용방안 하얀 꽃과 수형이 우아하여 도시의 공원에 적합하며 열매는 생식하거나 술을 담근다. 유사종 • 참배 : 열매의 지름이 5-6cm이고, 과피에 0.5mm정도의 껍질눈이 산재한 것. • 털산돌배 : 잎 뒷면에 털이 있다.  • 금강산돌배 : 잎 뒷면 맥위에 면모가 있고 잎이 타원형, 넓은 타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 청실리 : 열매가 난상 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 남해배 : 일년생가지와 엽병 및 열매자루에 털이 있다.  • 취앙네 : 열매가 지름 4-5cm로서 햇볕에 닿은 곳이 붉은 빛이 돌고 톱니의 길이가 2-3mm이다. 관련이미지 4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154922_AJGQ0SF06.JPG/ib58_1614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159222_5IFC8NWQ4.JPG/ib58_1614_i3.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52"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217357_P1K5ILA8C.JPG/ib58_1614_i4.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80" />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3/20161112211301295_C3GDWWPX3.JPG/ib58_1614_i5.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9" />                  이미지 이전 문배(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이미지 갤러리 출처: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네이버 지식백과]문배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지식정보 : 식물)   =======================================/// 두산백과 문배     요약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미지 크게보기 문배의 꽃이 핀 가지 학명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계 식물 문 속씨식물 강 쌍떡잎식물 목 장미목 분포지역 한국 서식장소/자생지 산지 크기 높이 약 10m, 잎길이 5∼10cm 산지에서 자란다. 높이가 10m 정도이며, 작은가지는 갈색이고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며 길이 5∼10cm이다. 둥글고 끝이 뾰족하며 털이 없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고, 잎겨드랑이에 4∼5개씩 산방꽃차례로 달린다. 다른 유사종의 꽃지름이 3∼3.5cm인 것에 비해 이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꽃받침조각은 끝이 둥글고 옆으로 퍼져 있으며, 암술대 밑부분에 털이 있다. 열매는 지름 3∼4cm로 둥글고 노랗게 익는다. 신맛이 강하다. 한국 전역에 분포한다. 참조항목 낙엽교목, 산돌배, 쌍떡잎식물, 장미과 카테고리 식물 >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 > 장미목 관련이미지 문배출처: doopedia.co.kr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문배 (두산백과)   =================================/// 국립중앙과학관 식물정보 참배     생물학적 분류 계 : 식물계(Plantae) 문 : 피자식물문(Angiospermae) 강 : 쌍떡잎식물강(Dicotyledoneae) 크기 15m 개화시기 5월 분포지 한국 꽃말 위로 특징 수고는 15m까지 자라며 어린가지는 흑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기를 하며 넓은 달걀모양이다. 끝은 뾰족하며 기부는 심장모양이다. 가장자리에는 잔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잎과 같이 흰색의 꽃이 모여 핀다. 자웅동화이며 꽃잎은 5장, 길이는 2.5cm이며 가장자리는 물결모양이다. 꽃받침은 5조각으로 갈라지며 끝은 뾰족하며 잔톱니가 있다. 수술은 20개, 암술은 1개이며 5갈래로 갈라진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5-6cm로 황록색으로 익는다. 중부지방과 북부지방에서 재배하는 낙엽활엽교목이다. 관련이미지 7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0636721_URRYVBZ60.JPG/ib58_3721_i2.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1" />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1015263_HPUZ5PLPO.JPG/ib58_3721_i3.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2" />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1031783_CCUZY5N0C.jpg/ib58_3721_i4.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3" />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1048329_G6BD00PSA.JPG/ib58_3721_i5.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0" />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721_000_4/20161115130444360_6KQ1WBHF5.JPG/ib58_3721_i1.JPG?type=r100&wm=Y"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0" />  이미지 이전 참배 이미지 갤러리 출처: 국립중앙과학관 - 식물정보 [네이버 지식백과]참배 (국립중앙과학관 - 식물정보, 신재성, 유난희, 신현탁, 손에 잡히는 생태수목도감)  
27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사과배나무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31  추천:0  2019-10-16
96년 된 연변사과배 선조나무 지킴이 되여 북청의 참배와 연변의 돌배가 만나 사과배로   2017-06-29        해마다 모아산기슭을 하얗게 덮는 만무과원의 사과배꽃은 연변의 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와 함께 이 고장의 봄을 알리는 메시지다. 특히 사과배는 연변의 명물로, 연변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난 24일,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에 수령이 96년 되는 연변사과배의 선조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 곳에서 기자는 연변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나무를 지키고 있는 77세 고령의 리태수선생을 만났으며 그를 통해 연변사과배의 시초에 대해, 90여년 전 이 땅에 처음으로 사과배나무를 심었던 최창호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树)로 그 개척자는 최창호(1897-1967)이다. 흔히들 사과배는 ‘사과나무 접가지를 돌배나무에 가접하여 키운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여러 인터넷포털사이트나 일부 서적들에서는 이같이 설명하고 있으며 여러 문예작품들에서도 이 같은 묘사를 통해 디아스포라인 중국조선족의 민족특성을 비유한다. “사과가 아니라 조선의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접가지였습니다.”리태수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과배나무의 시초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창호는 1909년에 조부를 따라 중국 료녕성 안도현 내두산에 이주했으며 1916년에 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에 정착했다. 당시 동생 최범두는 일본에 류학 중이였는데 ‘일본에서도 조선의 배나무가지를 당지 과일나무와 접목해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형님도 한번 해보라’고 제안했다. 1921년, 최범두는 조선 북청에서 우수한 품종의 참배나무가지를 6대 가져왔는데 최창호가 그 것을 김치움에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4월에 꺼내여 집 뜨락의 돌배나무에 가접했다. 그중 살아남은 것은 세그루, 최창호는 알뜰히 보살펴 1927년에 처음으로 나무에 흰꽃을 피웠다. 달린 과일은 모양이 배 같기도 사과 같기도 했으며 새콤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해 보통 배들과는 다른 뛰여난 맛이였다. “그때의 그 세그루에 달린 과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연변사과배의 시초였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한그루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뜰 한켠에 서서 찬연한 해빛 속에 푸른 잎사귀를 펼친 고고한 자태의 배나무를 가리켰다. “7년 전 제가 고향에 왔을 때 보니 남아있던 한그루마저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꽃이 피지 않았고 싹이 돋아있는 가지가 몇대 없었습니다.” 문득 리태수선생은 이 나무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여 친구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생장소 10통을 사들여 부지런히 나무에 주면서 소진해가는 고목의 생명이 다시 푸르게 피여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선 산자락에 비스듬히 서있는 오래된 팔간초가집은 최창호선생의 옛집이다. 오래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찌그러졌고 흙벽이 부서지는 그 집에 머물면서 리태수선생은 3년을 하루와 같이 매일 선조사과배나무를 돌봤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난 2013년부터는 드디여 고목에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2015년부터는 과일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사과배가 적잖게 열려 수확의 기쁨도 아주 컸다. 사실 배의 이름은 처음부터 ‘사과배’가 아니였다. 시원하고 맛도 좋으며 저장하기에도 까다롭지 않은 이 배를 사람들은 ‘참배’ 혹은 ‘큰배’라고 불렀다. 1952년에 국가에서 과수품종을 전면조사하면서 이 배는 새로운 품종으로 인정됐는데 모양새가 사과 같기도 배 같기도 하여 그 이름을 ‘사과배’라 했다. 지난 80여년 동안 사과배는 연변 각 지에 널리 퍼져 연변경제의 기둥산업의 하나로 되였고 중국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만큼 유명해져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과배의 창시자 최창호의 로고가 가장 크다. 그는 평생을 바쳐 사과배나무를 지켰으며 전지, 과원관리기술, 병충해예방퇴치, 과일의 한항성 등 연구들을 체계적으로 해나감으로써 소기촌에 완전한 규모를 갖춘 질좋은 사과배과수원을 꾸려갔다. “그 분은 저의 이모부였습니다. 인품도 훌륭했고 또 학식도 대단했지요.” 최창호에 대해 리태수선생은 이렇게 회억했다. 과수원을 갖고 있었던 관계로 최창호는 ‘부농’으로 락인이 찍혀 ‘문화대혁명’기간에는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아낌없이 자신의 고간의 문을 열어 배 고픈 마을사람들에게 량곡을 나눠주고 또 적잖이 장악하고 있는 의술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었으며 사람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쳤는데 이처럼 후한 인품과 덕으로 마을사람들에게는 항상 존중을 받았고 ‘부농’임에도 불구하고 동란의 년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다리를 약간 절었고 그때 집에는 말을 못하는 남자가 머슴으로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머슴에게 한자(번체자)를 가르쳤지요. 말로 사람과 소통할 수 없으니 글로 소통하라는 뜻이였습니다.” 말을 하며 리태수선생은 후날 자신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굳히게 된 것도 이모부의 영향이 컸다고 얘기했다. “큰아버지처럼 이 나무도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다 겪었지요. 일반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령혼 아니겠습니까! 이젠 제가 지켜나가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신의 여생을 다 바쳐 나무 지킴이가 되겠다며 리태수선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연변일보 ///글·사진 박진화 기자 ==========================/// "구문"이지만...   “핑궈리”                    —김태욱   2009-05-14      우리 집 이웃은 산동이 고향인 젊은 부부간이 산다.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애를 키우며 과수원을 다루고있는데 그들과 무랍없이 드나드는 사이이다. 남편의 이름은 손덕량이 (孙德亮)이라 부르는데 이름을 부를 때 한어음대로 《더랑아》로 통한다.  3월 초순에 덕량이가 사과배나무의 전지[剪枝]를 하고 있기에 다가가니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자기에게 제자가 둘씩이나 생겼다면서 어깨를 살구었다. 반세기나 원예사로 살아온 나의 활발한 인생에는 조선족 젊은 과수업자들이 나를 따르며 《선배님》, 《스승님》이라고 하더니만 모두 과수원을 떠나 외국으로 가버려 제자 하나 없나 서글퍼 했는데 생각밖으로 한족젊으이가 제자로 자리를 잡아 마음의 빈구석을 겨우 달랜다. 득량이 부부는 8년전에 나의 집뒤에 있는 과수원을 임대맡고 늙은 사과배나무의 전지는 골격지를 보호하고 배양해야 질좋은 과일을 생산할수 있다는 나의 훈계를 들으면서부터 열심히 과수기술을 배웠다. 우리들 사이에는 강호에서 술을 마시면서 스승과 제자로 기약한 수준도 없었고 칠판식 기술전수도 없었다. 그저 꿀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과수밑 현장에서 나의 잔소리에 가까운 설교를 듣고 그대로 따르는 소박한 격이였다. 하지만 더랑이는 이제 조선족의 상징이라도 과언의 아닌 연변사과배를 가꾸는 베테랑 원예사로 컸다. 연변 사과배는 여러차례나 우리 나라 북방 과일품종 평의대회에서 《량질과일》이라는 월계관을 안아온 귀중한 품종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에 가면 1987년 9월 25일에 세운 《사과배 선조 기념비》가 있다. 비석옆에 서있는 사과배나무는 90년 가까운 년륜을 아로새긴 이 세상의 수천수백만주의 달하는 사과배나무의 《어머니》 나무이시다. 이 사과배나무를 배육하신분은 연변 과수력사에 공훈을 세우신 최창호다. 하기에 최창호라면 연변사과배를 떠올리게 된다.  최창호는 1916년도에 소기골에 정착하시고 양지바른 뒤산비탈밭에 여러가지 과일나무와 야생종 과일나무를 심어 가꾸다가 1927년봄에 사과배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최창호가 배육한 새로운 배품종이 저장력이 강한 특점이 있고 맛좋은 배라는 소문이 펴져나가면서 1930년대초반에 소기꼴에 3헥타르에 달하는 과수원이 일떠섰고 로투구는 물론 세린하와 화룡으로 급파되였고 도문까지 재배되여 해방전까지 일정한 규모의 면적을 갖게 되였다. 그런데 해방전까지 이처럼 훌륭한 배품종은 제 이름없이 《큰배》 혹은 《참배》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청실》이라 불렀지만 《핑궈리》라 부루게 된데는 이런 일화가 있다. 국내해방전쟁 당시 로투구 《대물리거우》에 길동군구 야전병원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과일이 무르익는 가을에 과수원밑에 난 큰길로 관내에서 온 민주련군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하는말이 “아! 여기에 핑궈(苹果)가 많구만” 이들은 사과로 착각한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당지 사람들은 “이건 핑궈가 아니라 배입니다”라고 말하니 그중 한 군인이 “그렇다면 가능하게 핑궈리(苹果梨)겠습니다” 이때로부터 핑궈리라 불렀는데 우리 말로 사과배이다. 그후 1952년도에 전문가들이 모여서 “핑궈리”라 명명하였으니 오늘까지 우리는 연변 사과배라고 정답게 불러왔다 연변에서 대면적 보급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그래도 최일선선생이다. 연변전원공서에 갓 부임한 주덕해동지는 화룡으로 가시는 길에 화룡 서성 명암촌에 자리잡은 최일선선생의 과수원을 몸소 찾으셔 “연변의 과수사업에 크게 기여를 해주십시요” 하면서 굳게 손을 잡으셨다. 그해부터 화룡 서성에는 두개의 과수묘포장을 꾸리고 해마다 수십만주의 과일묘목을 생산하여 연변 각지에다 공급하여 사과배 과수원 건설에 공헌하였다.  연변 사과배의 창시자이신 최창호님과 수많은 우리 민족의 원예가들이 피타는 노력으로 건설된 사과배 과수원인데 이제 이 사과배나무를 가꿀 후계자가 대를 끊긴것이다. 안타까운 현실다. 외국나들이바람이 일면서 과수원을 남에게 임대해주거나 애당초 매각해버리고 외국으로 떠났다. 이제 누가 최창호의 얼을 지키고 최일선의 정신을 지키랴.  “핑궈리”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하얀 배꽃속에 부지런한 꿀벌들이 날아드는 새봄을 다시 기약해본다.    ======================================/// "구문"이지만... 中 연변 '사과배' 생산·판매 부진에 농가 타격  2012.11.22.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명물인 '사과배'를 재배하는 과수농가들이 올해 작황 부진과 판매량 감소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연변일보가 22일 보도했다. 신문은 연변 지역 90% 이상의 사과배 재배농가가 지난봄 서리 피해와 8월에 몰아친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전했다. 또 시장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판매 초기에 가격을 상자당 70~80위안(1만2천~1만2천원)으로 높게 책정하면서 다른 지역의 저가 상품에 밀렸다고 설명했다. 연변 지역 과수농가들은 뒤늦게 상자당 30위안(5천원)까지 가격을 내렸지만 이미 판매 성수기가 지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용정(龍井)의 한 농민은 "예년에는 4천상자를 수확했는데 올해는 작황이 나빠 1천상자를 수확하는 데 그쳤다"면서 "그나마도 200상자밖에 팔지 못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신문은 올해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규모 과수농가들이 연합해 공동 생산·판매에 나서고 당국이 유통 구조 개선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용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정에서 재배가 시작돼 점차 연변 전역으로 퍼졌으며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 ======================================/// 역시 "구문"이지만... 中 연변 명물 '사과배' 수확량 40% 감소  2011.10.1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명물인 '사과배'가 작황 부진으로 올해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고 연변인민방송이 10일 보도했다. 방송은 현지 과수 농가들을 인용, 올해 극심했던 가뭄의 영향으로 연변 일대 과수원의 사과배 수확량이 40% 이상 감소했다고 전했다. 연길(延吉)에서 2천 그루의 사과배를 재배하는 한 농민은 "올해는 가뭄 탓에 사과 크기도 작고 생산량도 지난해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고 말했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용정(龍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정에서 재배가 시작돼 점차 연변 전역으로 퍼졌으며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명성을 얻었다. 관광객 유치와 사과배 홍보를 위해 용정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4월 사과배꽃 축제를 개최한다.  ===========================///역시 또 "구문"이지만... 中 옌볜 봄맞이 행사 풍성 2013.03.15.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지난해 '관광객 1천만명 시대'를 연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가 본격적인 관광시즌을 맞아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를 마련해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15일 연변일보에 따르면 중국 내 조선족 최대 밀집 지역인 옌볜주에서는 이달부터 지역별로 특화한 다양한 축제와 행사가 펼쳐진다. 오는 27일부터 4월4일까지는 옌볜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시에서 '중국·러시아 청소년문화관광축제'가 열려 이국의 정취를 만끽할 기회를 제공한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룽징(龍井)시에서는 옌볜의 명물인 '사과배꽃 관광축제'가 5월에 개막된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룽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허룽(和龍)시에서는 4월 말~5월 초 '진달래 문화관광축제'가 열리고 안투(安圖)현에서는 5월에 '중국조선족제일촌 민속문화축제'가 펼쳐진다. 관광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옌볜주는 지난해 전년 대비 18.3% 증가한 1천15만4천명의 관광객(외국인 54만1천명 포함)을 유치했으며 138억2천만위안(약 2조4천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렸다. ==========================/// 또 역시 "구문"이지만... 中 연변, 사과배꽃축제 내달 9일 개막  2011.04.3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중국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봄 축제인 '룽징(龍井) 사과배꽃축제'가 내달 9일부터 11일까지 열린다. 룽징의 명물인 사과배와 조선족 전통 문화 홍보를 위해 2007년 시작해 해마다 열리는 이 축제는 9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사과배꽃 아가씨 선발대회, 조선족 전통 혼례와 전통 소싸움, 조선족 전통음식 시연회, 민속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내년 연변조선족자치주 건립 60주년을 앞두고 조선족 주인공들을 내세워 1950년대 이후 연변 조선족들의 변화상과 풍습을 담게 될 TV드라마 '백두산 아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 제작 발표회도 열린다. 연변주 정부와 중국중앙(CC)TV가 30부작으로 공동 제작하는 이 드라마는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방송된다.  사과배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들여와 룽징에서 야생하는 돌배나무에 접목해 탄생한 과일로, 배 맛을 내지만 생김새는 사과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의 3대 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한 룽징의 명물이다. 연변주는 여름철에만 몰리는 관광객을 사시사철 유치하기 위해 ▲봄-룽징 사과배꽃 축제 ▲가을-옌지(延吉)ㆍ룽징ㆍ투먼(圖們) 조선족 민속관광축제 ▲겨울-투먼 두만강 빙설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74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27  추천:0  2019-10-16
퍼즐처럼 짜맞춘 토기… 1500년 전 '신라 행렬도' 발견 2019.10.16.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고구려 벽화 보듯…'신라귀족 나들이 풍경' 담겨   [앵커] 1000년의 신라 역사를 품고 있는 경주의 오래된 고분에서 나온 토기 조각을 하나씩 맞춰봤더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됐습니다. 말을 탄 사람, 치마나 바지를 입은 무용수, 그리고 활을 들고 사슴과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람 마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듯이 생생하고 다채로웠습니다. 1500년 전 신라 귀족들의 나들이 풍경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강나현 기자가 발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기자] 갈기를 뿔처럼 묶어 맨 말의 모습, 전설의 동물 유니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춤을 추며, 혹은 사냥을 하며 뒤따르는 무리 끝에 말 탄 귀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1500년 전인 5세기 신라 사람들이 40cm 높이의 큰 토기에 그린 귀족의 나들이 풍경, 행렬도입니다. 토기에 신라시대의 행렬도가 담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종훈/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무덤 주인공 생전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도 있고요. 사후 세계로 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사례도 있습니다.]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는 지름 30m의 이 무덤 옆에서 발견됐습니다. 제사 때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7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평범한 밭이었습니다. 10년 전, 또 다른 무덤에서 발견된 말에 입힌 철갑옷은 이번에 완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5세기 전후 전쟁에 나선 말을 보호한 갑옷은 2.9m 길이에 무게만 36kg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삼국시대 철갑옷 말의 실체를 확인해주는 유물입니다. 말 탄 장수의 갑옷과 말의 얼굴가리개 같은 부속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된 것은 처음인데, 복원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토기가 나온 무덤을 비롯해 경주 도심에 자리잡은 쪽샘지구에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신라 귀족들의 무덤 1000기 이상이 모여 있습니다. 신라 1000년의 역사의 타임캡슐, 쪽샘지구 발굴은 앞으로 6년 뒤인 2025년에야 마무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제공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영상디자인 : 신재훈) 강나현 기자  [영상취재: 변경태 / 영상편집: 이지혜] ▶ JTBC 뉴스
2743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3대 문학상 中 "공쿠르상"... 댓글:  조회:4307  추천:0  2019-10-15
  시사상식사전 공쿠르상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외국어 표기     Le Prix de Goncourt(프랑스어)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가 매년 12월 첫 주에 신인작가의 작품 중 가장 우수한 소설 작품을 뽑아 수여하는 상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평가되고 있는 공쿠르상은 르노도상(Prix Renaudot), 페미나상(Prix Femina), 앵테랄리에상(Prix Interalli)와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루스트의 , 생텍쥐페리의 , 말로의 , 보부아르의 , 뒤라스의 등이 대표적인 수상작이다. 상금은 10유로다.   공쿠르 형제 공쿠르(Goncourt)는 소설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 1822~1896)와 쥘 드 공쿠르(Jules de Goncourt, 1830~1870) 형제를 말한다. 이들은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사색가인 형과 문장가인 동생이 공동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동생인 쥘은 문체 쪽을 맡았고, 형인 에드몽은 작품의 창조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동생 쥘이 사망할 때까지 , , ,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인상주의적 문체'라는 고유의 특징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이들 형제가 그날그날 적었던 25권의 방대한 양의 는 19세기 후반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일기 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카데미 공쿠르 에드몽은 죽으면서 전 재산을 아카데미에 기탁한다. 에드몽 공쿠르의 유언에 따라 가난한 예술가를 돕기 위해 1902년 아카데미 공쿠르가 생기게 되었다. 이 학술원은 1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며 1903년부터 공쿠르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0명의 종신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의 심사 과정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시상 및 상금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은 매년 11월 파리의 드루앙(Drouant) 레스토랑에서 수상자를 시상하고 있으며, 수상자에게는 상금으로 50프랑을 수여한다. 2002년부터는 유로화로 바뀌면서 10유로로 결정되었다. 상금은 상징적인 액수에 지나지 않지만 역대 수상작은 평균 60만 부 이상 팔리고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루스트, 앙드레 말로, 시몬느 드 보롸르, 미셸 투르니에,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프랑스문학의 거장들이 공쿠르상을 수상하였거나 공쿠르상 수상을 계기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수상작 1916년 바르뷔스 1919년 프루스트 1929년 아를랑 1933년 말로 1954년 보부아르 1982년 도미니크 페르난데스 1985년 얀 케펠렉 1989년 장 보트랭 1992년 파트리크 사모아스 1994년 디디에 반 코엘라에르 등 [네이버 지식백과] 공쿠르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742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3대 문학상 中 "맨부커상"... 댓글:  조회:3906  추천:0  2019-10-15
두산백과 맨부커상   [ Man Booker Prize ] 요약 1969년부터 매년 영국연방 국가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문학상으로, 2005년부터는 영어 번역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국제상이 함께 시상되고 있다. 분야 문학(소설) 주최기관 영국 부커상 재단(Booker Prize Foundation), 맨 그룹(Man Group) 주최시기 및 기간 매년 10월(맨부커상), 매년 5월(맨부커국제상) 시작년도 1969년(맨부커상), 2005년(맨부커국제상) 시상내역 맨부커상: 상금 5만 파운드 맨부커국제상: 작가 2만 5천 파운드, 번역가 2만 5천 파운드 1969년 영국의 부커-맥코넬(Booker-McConnell) 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연방 국가에서 출간된 영어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한다.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며, 노벨문학상·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영국 연방, 아일랜드, 짐바브웨 국적의 작가만 대상으로 하였으나 이후 점차 확대되어, 2013년부터는 전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시상하게 되었다. 초기 공식 명칭은 '부커-맥코넬상'(Booker-McConnell Prize)이었으나, 간단히 '부커상'으로 불렸다. 2002년부터는 부커상 재단에 의해 영국의 '맨 그룹'(Man Group)이 스폰서로 선정됨에 따라 공식 명칭이 '맨부커상'(ManBooker Prize)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에는 영어로 출간하거나 영어로 번역가능한 소설을 출간한 작가에 대해 상을 수여하는 '맨부커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이 신설되었다. 이 상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격년으로 시상하였으며, 2016년부터 영어 번역 소설을 출간한 작가와 번역가에 대해 매년 시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맨부커상은 매년 10월, 맨부커국제상은 매년 5월에 시상하며, 영어권 출판업자들의 추천을 받은 소설작품을 대상으로 평론가·작가·학자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심사해 최종 후보작을 선정한 뒤, 다시 수상작을 선정한다. 맨부커상은 수상작에 2만 파운드, 최종 후보작들에 1,000파운드의 상금을 수여하였으나, 2002년부터 수상작에 5만 파운드, 최종 후보작들에 2,500파운드의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맨부커국제상은 총 5만 파운드의 상금을 작가와 번역자에게 각각 2만 5천 파운드씩 수여하며, 후보작들에 1,000파운드를 수여한다. 1969년 영국의 소설가 뉴비(Percy Howard Newby)가 처음 맨부커상을 받았고, 최근에는 인도의 여성 작가 로이(Arundhati Roy)의 《작은 것들의 신 The God of Small Things》(1997), 맥완(Ian McEwan)의 《암스테르담》(1998),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눈 먼 암살자 The Blind Assassin》(2000), 캐리(Peter Carey)의 《갱 켈리의 진정한 역사 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2001), 마텔(Yann Martel)의 《파이 이야기 Life of Pi》(2002) 등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쿠체(John Maxwell Coetzee)는 1983년과 1999년에 맨부커상을 받으면서, 맨부커상을 두 차례 받은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2003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마약 중독 환자였던 피에르(DBCPierre)의 데뷔작 《버넌 갓 리틀 Vernon God Little》이 선정되었다. 수상작 대부분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맨부커국제상은 2005년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e)가 처음 수상하였으며, 2016년 5월에는 한국의 소설가 한강(Han Kang)과 영국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의 《채식주의자 The vegetarian》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맨부커상 [Man Booker Prize] (두산백과)    
2741    [세계문학] - "부커상" - 녀성시대... 댓글:  조회:3623  추천:0  2019-10-15
여성작가 2명 ‘부커상’ 공동 수상 2019.10.15.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인쇄하기  보내기 마거릿 애트우드(왼쪽)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 14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길드홀에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2019부커상(픽션 부문)을 공동 수상한 후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이 1명의 작가에게 수여 한다는 규정을 깨고 올해 이례적으로 2명에게 상을 줬다. 1969년 제정된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加 애트우드, 〈증거들〉로 영예 英 에바리스토, 흑인여성 첫 수상 14일(현지 시간) AFP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올해 수상자로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79)와 버나딘 에바리스토(60)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에바리스토는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부커상 수상자가 됐다. 수상작은 애트우드의 〈증거들〉과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성, 다른 것〉이다. 애트우드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해마다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달 출간된 〈증거들〉은 가까운 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여기는 전체주의 사회를 묘사한 소설 〈시녀 이야기〉(1985년)의 속편이다. 1959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바리스토의 수상작은 대부분 19~93세의 흑인 영국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영국에서 살아가는 12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000년에 〈눈먼 암살자〉로 이미 부커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애트우드에 비해 에바리스토는 세계적으로 덜 알려진 감이 있어 이번 수상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에바리스토는 부커상을 받은 첫 번째 흑인 여성이라고 NYT는 전했다. 이날 런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애트우드는 “나는 관심이 필요하지 않은데, 당신이 관심의 한 부분을 공유해 매우 기쁘다”고 말했고 에바리스토는 “전설인 애트우드와 함께 공동 수상하다니 믿을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2명의 수상자는 상금 5만 파운드(약 7464만 원)를 나눠 갖게 된다. /정달식 기자· ///연합뉴스 =====================================/// 애트우드(왼쪽)와 에바리스토.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79)의 장편 `증언들(The Testaments)`과 영국 태생 버나딘 에바리스토(60)의 `소녀, 여성, 다른 것(Girl, Woman, Other)`이 2019년 부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15일 외신과 국내 출판사 민음사가 함께 밝혔다.  올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애트우드는 부커상 수상으로 `문학 거장`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에바리스토는 흑인 여성 가운데 첫 부커상 수상자가 됐다. 애트우드의 소설 `증언들`은 1985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녀 이야기`의 속편이다. 가까운 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여기는 전체주의 사회를 묘사했다. 성과 가부장적 권력의 어두인 이면을 파헤친 이 소설은 최근 TV드라마로도 제작되며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영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를 둔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성, 다른 것`은 19~93세의 흑인 영국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2019-09-03        【서울=뉴시스】김재영 기자 = 마가렛 애트우드와 살만 루슈디 올해 부커 문학상 결선 6인에 들었다고 3일 BBC 등 외신이 보도했다. 특히 캐나다 여류작가 애트우드의 결선 진출작 '유언'은 전작 '시녀 이야기' 15년 뒤 이야기로 내주 발간될 예정으로 일반 독자들에는 미지의 소설이다. 애트우드는 2000년에 이미 부커상을 수상했으며 1986년 '시녀 이야기'로 결선 리스트에 오른 바 있다. 인도 출신으로 아직도 이슬람 체제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은신 중인 루슈디의 작품은 '돈키호테(키쇼트)'이다. 루슈디 역시 1981년에 이미 부커상을 탔다.     이밖에 영국, 나이지리아, 터키, 미국 작가가 결선에 올랐다. 151개 출품작 중 13개 소설이 추천을 통과한 뒤 여기서 6개가 추려졌다. 부커상은 10월14일 발표된다. 18년 동안 부커상을 재정 지원하던 맨 그룹이 올 초 손을 떼었으나 미국 실리콘 억만장자 겸 자선가 마이클 모리츠와 부인 해리엇 헤이먼이 5년 지원을 약속했다.  이들 부부는 상에 자신들의 이름 붙이기를 바라지 않아 "맨 부커상"이 다시 원래대로 "부커상"이 되었다. /////////////////////////////////////////////////////////... 최신기사 여성작가 2명, 英 부커상 공동수상… 애트우드·에바리스토  | 2019-10-15    규정 깬 '파격'…"에바리스토, 흑인 여성작가로는 첫 수상"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이 1명의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규정을 깨고 올해 이례적으로 2명에게 상을 줬다. 14일(현지시간) AFP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올해 수상자로 '거장' 마거릿 애트우드(79)와 버나딘 에바리스토(60)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에바리스토는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부커상 수상자가 됐다.   부커상 수상자들(런던 로이터=연합뉴스) 마거릿 애트우드(왼쪽)와 버나딘 에바리스토 수상작은 애트우드의 '증거들'(The Testaments)과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성, 다른 것'(Girl, Woman, Other)이다.   애트우드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해마다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달 출간된 '증거들'은 가까운 미래 미국을 배경으로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여기는 전체주의 사회를 묘사한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 1985년)의 속편이다. 1959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바리스토의 수상작은 대부분 19~93세의 흑인 영국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영국에서 살아가는 12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백인 영국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를 부모로 둔 작가는 앞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흑인 영국 여성의 삶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 부커상 수상자는 여러모로 화제를 낳은 '깜짝 발표'였다. 심사위원장인 피터 플로런스는 "규정에 우리가 수상자 1명만을 뽑을 수 있다고 돼 있다는 점을 매우 확실하게 들었다"면서도 "합의 내용은 규정을 어기고 올해는 2명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커상 공동 수상은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던 만큼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2년 부커상은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의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와 배리 언즈워스의 '성스러운 굶주림'(Sacred Hunger)에 돌아갔다. 이때 부커상 운영진 측은 공동 수상으로 인해 어느 한 작품의 권위가 약화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추후 1명의 수상자만 내기로 규정을 바꿨다고 NYT는 소개했다. 이후 이러한 규정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동안 1명의 수상자라는 관행이 정착됐다고 부커상 재단의 문학 부문 책임자인 개비 우드는 설명했다. 이번에 2명의 수상자를 배출하기까지 심사위원들은 논의를 거듭해 부커상 운영진 측에 세 번이나 의사를 타진했고 이는 결국 받아들여졌다. 두 작가 중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TV 드라마로도 제작돼 이른바 '미투 운동 세대'를 위해 페미니스트를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만큼 34년 만의 속편인 '증거들'에 쏠린 관심이 컸던 터라 애트우드는 일찌감치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애트우드는 이날 시상식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글로벌 환경단체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의 배지를 달고 나오기도 했다. 2000년에 '눈먼 암살자'로 이미 부커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애트우드에 비해 에바리스토는 세계적으로 덜 알려진 감이 있어 이번 수상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에바리스토는 부커상을 받은 첫 번째 흑인 여성이라고 NYT는 전했다. 실험적 작가인 그는 총 8개의 소설 작품에서 이른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삶을 탐색했다. 이번 수상작에 대해선 시와 산문이 혼재돼 스스로 '퓨전 소설'이라고 부른다. 올해 부커상 후보로는 영국의 유명 작가 살만 루슈디도 포함됐다. 이날 런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애트우드는 "나는 관심이 필요하지 않은데, 당신이 관심의 한 부분을 공유해 매우 기쁘다"고 말했고 에바리스토는 "전설인 애트우드와 함께 공동 수상하다니 믿을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애트우드는 "우리 중 아무도 이 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69년 제정된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올해 수상자는 상금 5만 파운드(약 7천464만원)를 나눠 갖게 된다.   (c) 연합뉴스, 
2740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상은 어떻게 선정?... 댓글:  조회:3849  추천:0  2019-10-13
추천ㅡ 노벨상의 권위는 엄격한 심사를 통한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다.  노벨상은 매년 10월과 11월에 수여된다. 수상자 선정 작업은 그 전해 초가을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노벨상 수여 기관들은 한 부문당 약 1,000명씩 총 6,000여 명에게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안내장을 보낸다.  안내장을 발부받는 대상은 전해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상 수여 기관을 비롯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과 대학교 및 학술단체 직원들이다. 안내장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후보를 추천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검토ㅡ 후보자 명단은 그 다음해 1월 31일까지 노벨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후보자는 부문별로 보통 100∼250명 가량 된다. 2월 1일부터 6개 노벨 위원회는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각기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각 위원회는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후보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검토 작업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수상자 선정ㅡ 각 노벨 위원회는 9∼10월초 사이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기타 상 수여 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자가 결정되지만, 상 수여 기관들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며 11월 15일까지는 최종 수상자를 결정해야 한다.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의 예처럼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면 번복할 수 없다. 이밖에도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선정 기준ㅡ 노벨은 각 노벨상의 선정 기준을 유언장에 일부 명시하였다. 그 기준은 아래와 같다. * 노벨 물리학상 - 그 전 해에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큰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 노벨 화학상 - 그 전 해 화학 분야에서 가장 큰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 * 노벨 생리·의학상 -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큰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에게 준다. * 노벨 문학상 -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 준다. * 노벨 평화상 - 국가간의 우의나, 현존하는 군대의 폐지와 축소, 그리고 평화 의회의 유지나 증진에 가장 최선의 일을 한 사람에게 준다. 선정기준의 변화ㅡ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반 원칙은 노벨의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다. 유언장 해석과 집행을 둘러싼 추가 세칙은 1900년 유언 집행자와 시상기관 대표단, 노벨 가족이 모여 합의했다. 이들 원칙은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나 적용 과정에서 수정된 부분도 약간 있다. 예를 들어 노벨이 명기한 '전해'에 이루어진 업적에 상을 수여하라는 조항은 과학자는 물론 작가들까지도 대개 몇 년이 지나야 연구 성과나 저작 성과가 드러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적용이 불가능하다. 문학상의 경우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집필한 작가한테 수여하라는 노벨의 모호한 표현은 처음에는 엄격하게 해석되었으나 점차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그 외 경제학상은 정치적·사회적 근거보다는 과학적 근거, 즉 수학적·통계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은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그 성격상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도 평화상은 수상이 가장 많이 보류된 부문이다. ============================/// 시사상식사전 노벨상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6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에 대한 수상이 이뤄진다.             외국어 표기     Nobel Prizes(영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96, Alfred Bernhard Nobel)이 기부한 유산 3100만 크로나를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the Nobel Foundation)이 설립된 후 1901년부터 매년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노벨은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러),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기초공학, 화학을 수학했으며, 이후 스웨덴에 돌아와 폭발성이 강한 위험 물질인 니트로 글리세린에 관한 수차례 실험 끝에 1867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영국(1867), 미국(1868) 등지에서 특허를 받았고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 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노벨은 계속해서 다른 폭탄들을 개발해 전 세계에 판매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노벨은 사망 1년 전 재산을 헌납한 후 5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에 걸쳐 전년도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유언장에는 900만 불 상당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고 전 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매년 분배하도록 적혀 있었으며, 수상자 선정은 평화상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나머지 부문은 스웨덴의 3개 기관이 맡도록 지목하였다. 이처럼 노벨상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두 나라에서 시상되게 된 이유는 노벨이 1895년 유서를 작성하고 노벨재단이 1900년 설립되었을 때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합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합국가는 1905년 분리되었으나, 노벨기구들의 내부적인 관계는 변경되지 않았다. 노벨상의 수상 부문은 물리학ㆍ화학ㆍ생리학 및 의학ㆍ문학ㆍ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수여됐으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새로 추가되었다. 물리ㆍ화학ㆍ경제는 스웨덴 학술원, 의학은 스웨덴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은 스웨덴 예술원에서 선정하나,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맡는다. 수상 대상은 생존해 있는 사람이며 수상자로 선정된 후 사망한 경우에도 수상 자격이 유지된다.수상자는 수상 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대해 강연해야 하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노벨상은 생존자 개인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나 평화상은 단체나 조직에 줄 수 있다.  한편 제1ㆍ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8년, 1939~43년 등 여섯 차례 노벨상 시상식을 치르지 못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는 매년 10월에 이뤄지고, 시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에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900만 크로나(약 13억 원)의 상금과 금메달, 상장이 주어진다.   노벨상 개관   주최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개최 원년     1901년     개최 시기     매년 12월 10일(노벨 사망일)     개최 장소     스웨덴 스톡홀름(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상 분야     평화, 문학,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경제학(경제학상은 1969년 추가)     수상자 심사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한림원),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 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 위원회가 분담     수상식 특징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 추천사는 스웨덴어. 스웨덴 국왕이 시상.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 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 상금은 공평 배분한다. 상금은 800만 크로나(1000만 크로나에서 2012년 6월 800만 크로나로 인하됨)로 금메달과 상장이 주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노벨상 수상자 선정과정 노벨상은 지적 업적에 수여되는 상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노벨상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상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이 차지하는 중요성 면에서 노벨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제적인 상으로는 올림픽 대회에서 수여되는 상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실업가인 알프레드 노벨이 증여한 기금에서 출발했다. 그는 1895년 자신이 헌납하는 재산으로 5개 부문의 상을 정해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하라는 내용을 유언장에 명기했다. 이런 그의 유언에 따라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최초의 노벨상 수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지 5년째인 1901년 12월 10일에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으로 알려져 있는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리크스방크에 의해 제정되어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했다. 노벨 재단은 1896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 후 그의 유언 내용을 집행하는 한편 그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유언장에서 노벨은 상을 수여하는 기관으로 4개의 기관(3개는 스웨덴에, 나머지 하나는 노르웨이에 있음)을 지목했다. 그 가운데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을 수여한다. 그 외 생리학·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에서,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평화상은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수여한다. 노벨 재단은 기금의 법적인 소유주이자 관리자로서 상을 주는 기관들의 공동집행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만, 앞서 말한 4개 기관에서 전담하는 수상자 선정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선정 과정 노벨상의 권위는 엄격한 심사를 통한 수상자 선정 과정에 기인한다. 수상자 선정 작업은 그 전해 초가을에 시작된다. 이 시기에 노벨상 수여 기관들은 한 부문당 약 1,000명씩 총 6,000여 명에게 후보자 추천을 요청하는 안내장을 보낸다. 안내장을 발부받는 대상은 전해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상 수여 기관을 비롯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서 활동중인 학자들과 대학교 및 학술단체 직원들이다. 안내장을 받은 사람들은 해당 후보를 추천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후보자 명단은 그 다음해 1월 31일까지 노벨위원회에 도착해야 한다. 후보자는 부문별로 보통 100∼250명 가량 된다. 2월 1일부터 6개 노벨 위원회는 접수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각기 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각 위원회는 수천 명의 인원을 동원해 후보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검토 작업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각 노벨 위원회는 9∼10월초 사이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기타 상 수여 기관에 추천장을 제출하게 된다. 대개는 위원회의 추천대로 수상자가 결정되지만, 상 수여 기관들이 반드시 여기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상 수여 기관에서 행해지는 심사 및 표결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며 11월 15일까지는 최종 수상자를 결정해야 한다. 상은 단체에도 수여할 수 있는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개인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그 함마르시욀드(평화상, 1961)와 에리크 A. 카를펠트(문학상, 1931)의 예처럼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고 나면 번복할 수 없다. 이밖에도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은 시상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외교적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수상과 관련해 노벨상은 금메달과 상장, 노벨 재단의 수입에 비례해 책정되는 일정액의 상금으로 구성된다(2001년 현재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크로나'약 94만 3,000달러'이다). 수상자가 1명일 때는 상금 전액이 지급되며 2명일 때는 상금을 반으로 나누어 지급한다. 수상자가 3명일 경우에는 각각 1/3씩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1명에게 1/2을, 다른 2명에게는 나머지 1/2을 다시 나누어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해까지 시상이 보류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따라서 한 해에 같은 부문에서 2개의 상, 즉 전해에 보류됐던 상과 그 해의 상이 동시에 수여되는 경우도 있다.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도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수상자 본인이 상을 거부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수상을 막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일단 수상자로 결정되면 '수상 거부'라는 언급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기재된다. 수상 거부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실제로는 외부 압력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  노벨의 유언 내용에 합치하는 후보자가 없거나 제1,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세계 정세 때문에 수상자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수상이 보류된다. 노벨상은 국적·인종·종교·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며 한 사람이 1번 이상 받을 수도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시상식은 스톡홀름에서, 평화상 시상식은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다. 대개는 수상자들이 직접 시상식에 참석해 상을 받으며, 수상을 기념하는 강의를 한다.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반 원칙은 노벨의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다. 유언장 해석과 집행을 둘러싼 추가 세칙은 1900년 유언 집행자와 시상기관 대표단, 노벨 가족이 모여 합의했다. 이들 원칙은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으나 적용 과정에서 수정된 부분도 약간 있다. 예를 들어 노벨이 명기한 '전해'에 이루어진 업적에 상을 수여하라는 조항은 과학자는 물론 작가들까지도 대개 몇 년이 지나야 연구 성과나 저작 성과가 드러난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적용이 불가능하다. 문학상의 경우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집필한 작가한테 수여하라는 노벨의 모호한 표현은 처음에는 엄격하게 해석되었으나 점차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그 외 경제학상은 정치적·사회적 근거보다는 과학적 근거, 즉 수학적·통계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은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문학상과 평화상은 그 성격상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도 평화상은 수상이 가장 많이 보류된 부문이다. 참고도서 목록 노벨상이 수상자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후보자 선정 및 평가 기준은 사회학자들이 즐겨 찾는 주제 중 하나다. 대표적인 예들로는 해리엇 주커만의 (1977년 초판 발행, 1996년 재발행), 초기의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학·의학상의 역사와 관련해 유용한 정보를 수록한 카를 구스타프 베르나르드와 엘리자베스 크로퍼드, 페르 소르봄 공저의 (1982), 헬 에스프마르크의 (미국에서는 1991년에 발행되었으나 원래는 1986년 스웨덴어로 발행되었음), 엘리자베스 크로퍼드의 (1992), 데니스 브라이언의 (1995)가 있다.  노벨상 시상 위원회(Les Prix Nobel)는 매년 수상자의 수상 수락 연설문과 전기를 수록한 을 부문별로 묶어 발행한다. 대개는 스웨덴어로 발행되지만 영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타일러 워슨 편집의 (1987), 역대 수상자들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폴라 맥과이어 편집의 (1992), 클리퍼드 톰프슨 편집의 (1997),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전기와 연구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버나드 S. 슐레싱거와 준 H. 슐레싱거 편집의 (1996),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노벨상을 수상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14명의 여성을 다룬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1993) 등이 그 예이다  
2739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문학상 118... 댓글:  조회:3476  추천:0  2019-10-13
유럽·男을 사랑한 노벨문학상…정치인·가수 품기도 ■118년 노벨문학상의 역사 佛 14명·英 11명·스웨덴 6명… 유럽권 국가 출신이 70% 육박 114명 수상자 중 여성은 14명뿐 처칠·밥딜런 등 비문학계도 영예 '닥터 지바고' 작가는 수상 거부 최성욱 기자 2019-10-10      가즈오 이시구로(앞쪽), 파트릭 모디아노(두번째줄 왼쪽), 스베트라나 알렉시예비치(위쪽), 밥 딜런(두번째줄 오른쪽)   노벨문학상은 1901년 시작해 지금까지 총 11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성도 고려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 등 작품 외적 요소도 많이 고려된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상자들도 정통 문학인 시인부터 소설가 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가수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지난해 스웨덴 한림원이 ‘미투’ 파문에 휩싸여 수상자를 내지 않으면서 올해는 115, 116번째 주인공을 한꺼번에 발표하기로 했다.  ◇유독 여성들에게 높았던 노벨의 문턱 =1900년대 초반 시작된 노벨문학상은 그동안 ‘유럽권’, ‘남성 작가’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초점이 맞춰졌다. 마지막 수상인 지난 2017년까지 114명 수상자 가운데 여성은 14명에 불과하다. 전체의 12.3%이다. 첫 여성 수상자는 스웨덴의 아동문학작가 셀마 오틸리아나 로비사 라겔뢰프였다. 그 후 다시 여성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는 이탈리아 소설가 그라치아 델레다까지 무려 17년이 걸렸다. 이후 여성 수상자들이 간간이 호명됐지만 90년대 이전까지는 총 6명밖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특히 1970~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20년 넘게 여성작가 수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당시 문학계에서의 여성 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들어 여성작가들의 수상 주기가 점점 짧아지면서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미국의 펄 벅(1938년)과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2007년),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2009년)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작가는 2015년에 상을 거머쥔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벨라루스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였다. 대륙별로도 성별만큼이나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프랑스가 14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영국과 미국이 11명, 독일 9명, 이탈리아·스웨덴 6명, 스페인·폴란드 5명, 노르웨이·덴마크·아일랜드·소련·일본 3명, 스위스·칠레·그리스·남아프리카공화국·중국 2명 등이다. 대륙별로 구분하면 유럽 출신이 총 79명(69.2%)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제3국 출신으로는 1913년 인도 출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뱅골어와 영어로 출간한 시집으로 처음 유럽이 아닌 국가 출신의 수상자로 기록을 남겼다. 남아메리카에서는 1945년 칠레 시인 카브리엘라 미스트랄이, 아프리카에서는 1986년 나이지리아 소설가 월레 소잉카가 각각 처음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노벨문학상에서 아시아 출신 작가들의 수상은 중국(2명), 일본(2명), 인도(1명)에 그칠 정도로 기회가 적었다.  ◇이색 수상자와 수상을 거부한 이들도=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시인, 소설가들이지만 그외에도 철학가나 정치인, 가수에게도 상을 수여했다. 노벨문학상 역사상 처음으로 작가가 아닌 수상자는 윈스턴 처칠(1953년) 전 영국 총리다. 그는 평의원 시절 역사서 ‘제2차 세계대전사’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터라,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역사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평가다. 사상 최초로 대중음악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가수 밥 딜런(2016년)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딜런은 수상자 발표 직후 한동안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림원은 독일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1902년), 독일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1908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927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950년), 프랑스 철학자 겸 소설가 장 폴 사르트르(1964년), 벨라루스의 르포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까지 총 7명의 비문학계 인사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모두가 바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이도 있었다.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자의로 수상을 거부한 최초이자 마지막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자로 기록돼 있다. 노벨문학상은 전 세계 전문가들로부터 200명의 후보군을 추천 받은 위원회가 1차로 후보 20명을 고르고, 2차에 5명을 가려낸 후 한림원 위원들이 투표를 실시해 과반 이상 최다 득표자를 수상자로 선정한다. 후보군 명단은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900만 스웨덴크로나(10억9,791만원)가 주어지는데 공동 수상일 경우 상금을 나눠 갖는다.  /서울경제 /최성욱기자
2738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문학상 116... 댓글:  조회:4233  추천:0  2019-10-13
HOME  Global 데이터를 통해 살펴본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116명 분석  이상석 기자   2019.10.10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전체 수상자 올해까지 모두 116명 영예 수상자 평균 나이 65세, 최연소 41세 사르트르 등 2명 노벨상 수상 거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지난 1901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116명으로 집계됐다. 사진=노벨재단 홈페이지 [오피니언뉴스=이상석 기자]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선정·시상하는 노벨상 중 하나로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성향을 가진 최고의 작품을 만든 사람"을 매년 표창한다. 10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올해 2018년과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했다. 스웨덴 문학원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이 성추문 등으로 신뢰 위기에 몰리면서 수상자 선정을 취소했다.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에 기록한 노벨문학상은 1901년부터 2017년까지 110차례에 114명이 수상했다. 올해 2명이 추가되면 모두 116명에 달한다. 지난 1914년, 1918년, 1935년,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 2018년 등 시상하지 않은 해는 9번이다. 지난해 기준 노벨 문학상 수상자 평균 나이는 65세로 집계됐다. 지금까지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1907년 41세의 러디어드 키플링(영국)으로 수상작품은 정글북이다. 가장 나이 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도리스 레싱(영국)이다. 필명은 제인·서머스, 대표 작은 황금노트, 다섯째 아이를 꼽는다. 2007년 수상 당시 88세였다. 같은해 노벨문학상을 두 사람이 공동 수상한 것은 모두 4번으로 집계됐다. 1904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프랑스)와 호세 에체가라이(스페인), 1917년 카를 아돌프 기엘레루프(덴마크)와 헨리크 폰토피단(덴마크), 1966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과 넬리 작스(독일/스웨덴) 1974년 에위빈드 욘손(스웨덴)과 하뤼 마르티손(스웨덴) 등이다. 노벨문학상 공동 수상은 1974년 이후 중단했다. 피터 잉글런드 스웨덴 왕립과학원 상임이사는 노벨문학상 공동 수상에 대해 "문학의 특질에 의해 결정됐을지 모르지만 문학은 자연과학처럼 협력하거나 같은 일을 해서 상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114명 가운데 여성은 14명이다. 올해 발표한 수상자에 여성이 1명 포함돼 15명으로 늘었다. 최초 여성 수상자는 1909년 스웨덴 여성 작가 셀마 라겔뢰프가 이름을 올렸다. 1909 셀마 라겔뢰프에 이어 △ 1926년 그라치에 델레다(이탈리아) △ 1928년 시르리드 운세트(노르웨이) △ 1938년 펄 벅(미국) △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 △ 1966년 넬리 작스(독일/스웨덴) △ 1991년 네이딘 고디머(남아공) △ 1993년 토니 모리슨(미국) △ 1996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폴란드) △ 2004년 엘프리데 옐리네크 △ 2007년 도리스 레싱(영국) △ 2009년 헤르타 뷜러(독일) △ 2013년 엘리스 먼로(캐나다) △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 등이다. 1901년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쉴리 프리돔(본명 르네 프랑수아 아만드 프루돔) 등 지금까지 수상자 가운데 11명이 필명을 사용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작가는 2명이다. 1958년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수락했지만 당시 소련 당국이 거부했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장 폴 사르트르(프랑스)는 수락을 거부했다. 모든 공식적인 명예를 지속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시인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는 193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망한지 반년이 지난 상황에서 수상자를 발표했다. 노벨재단은 1974년 사후 노벨상을 수여할 수 없다고 규정을 바꾸었다. 많은 사람들은 윈스턴 처칠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으로 믿는다. 처칠은 1953년 노벨평화상이 아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에서 1953년 사이 처칠은 21번의 문학상 후보와 2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13년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로 기탄잘리, 동방의 등불 등이 대표작이다.
2737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평화상" 력대 기록... 댓글:  조회:3791  추천:0  2019-10-13
세계평화인물열전 노벨평화상: 기록과 역대 수상자 노벨평화상 수상에 얽힌 다양한 기록들   기록으로 보는 노벨평화상 1901-2017 1901-2017년까지 시상횟수 : 총 98회 1, 2차세계대전 기간을 포함해 19년은 선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1916, 1918, 1923-24, 1928, 1932, 1939-43, 1948, 1955-56, 1966-67, 1972) 그리고, 1925년과 1962년에는 수상자는 선정되었으나, 시상이 1년 연기되었다. 총 98회의 전체 수상자 수 : 131   2017년 현재까지, 개인은 104명, 단체는 27개가 수상. 단, 국제적십자위원회가 3번 수상 (1917년,1944년,1963년), UNHCR이 2번 수상 (1954년,1981년), 따라서 실제 단체의 개수는 24개. 수상자가 1명(개)인 경우 vs 여러 명(개)인 경우     수상자의 평균 연령: 62세   대륙별 분포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대륙별 분포. 역대 수상자 전체를 보면 서유럽과 북미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시아,아프리카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백인⋅서구중심성은 노벨평화상 비판에 빠지지 않던 단골 메뉴였다. 1901-2017년 사이 전체 수상자 중 서유럽과 북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65%에 달한다. 가장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도 미국(21명), 프랑스(9명), 영국(7명) 순이다. 특히 초기 50년간 북미와 서유럽이 아닌 곳에서 수상자가 배출된 경우는 1936년 아르헨티나의 사베드라 라마스 단 한 번뿐이었다. 아프리카인이 최초로 선정된 것은 1960년, 아시아인은 1974년에 와서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 인권의 시기에 이르러 남성중심성과 더불어 개선되기 시작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의 수상 비율이 약 70%, 미국과 유럽은 약 25%로 완전히 역전되었다. ‘최초의’ 수상자들   진기한 기록들   여성 수상자 1901년부터 2017년까지 총 104명의 수상자 중 여성수상자는 16명으로 전체의 15.3%에 불과하다. 특히 처음 75년간 여성수상자는 단 3명으로, 그마저 모두 유럽과 미국 출신이었다. (이는 노벨위원회 구성과도 관련된다. 약 50년간 노벨위원회는 단 1명의 여성위원도 갖지 못했다. 현재는 총 5명 중 3명이 여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인권의 시기를 거쳐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0년대(2001-2017)만 따졌을 때 여성 비율은 35% (총 17명 중 6명)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상 파리 평화협상 중 레득토(오른쪽)와 키신저(왼쪽) 1973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리더 레 득 토의 수상 결정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노벨평화상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경우로 꼽힌다. 두 사람은 같은 해 파리에서 이루어진 베트남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공로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두 전쟁 당사자 간의 다분히 정치적인 협상에 노벨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사람들은 nobel 평화상이 아니라, 전쟁상 또는 ‘ig-noble’ 평화상이라고 조롱했다. 뿐만 아니라 레 득 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수상자로 지명된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이를 거부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키신저는 수상을 허락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 이후 노벨평화상을 반납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사건으로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위원직을 사임했다. 받았어야 했으나 받지 못한 사람들: 간디와 톨스토이     인도의 간디(왼쪽)과 러시아의 톨스토이(오른쪽)은, 의외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평화인물들이다. ⓒ Unknown / http://lj.rossia.org/users/john_petrov/849786.html 당연히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인도의 간디와 러시아의 톨스토이다. 간디는 무려 5번이나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끝내 받지 못했다.(1937-39, 1947-48년) 노벨평화상은 물론,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평화상도,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특히 ‘평화와 비폭력의 아이콘’인 간디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상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수상이 유력시됐던 1948년에도 간디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은 발표 몇 달 전 그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적합한 후보자가 없다”며 수상자 없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1961년 스웨덴 출신이자 노벨재단 이사장 아들이었던 D. 함마르셸드에게는 사후수상이 허락된 바 있다. 또 위원회가 사후수상 불가를 정식으로 공식화한 것도 간디 사후 거의 30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간디의 수상실패를 그의 갑작스런 죽음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간디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었다. 후자는 비폭력 원칙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더 큰 폭력과 유혈을 야기했다는 점 (특히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과 관련해), 그가 지나친 인도 민족주의자라는 점 등을 근거로 간디의 수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노벨위원들의 그런 견해가 노르웨이와 영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 당시의 백인우월주의나 서구중심주의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간디의 사례는 ‘노벨평화상의 가장 큰 실수’, 또는 ‘노벨평화상의 수치’로 불린다. 이런 사람들도 노벨평화상 후보에? 히틀러, 스탈린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1939년 스웨덴 국회의원에 의해, 스탈린은 2차대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45년과 1948년 두 차례나 후보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한국의 전두환도 추천된 바 있다. 그 외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한 유명인으로는 윈스턴 처칠(대신 처칠은 2차대전 회고록으로 헤밍웨이를 제치고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아르헨티나의 후안 & 에바 페론, 세계 평화학의 아버지 요한 갈퉁 등이 있다. 노벨평화상 역대 수상자 (1901-2017)   참고문헌 · www.nobelprize.org  · www,nobelpeaceprize.org  · Ǿ. Stenersen, I. Libæk, A. Sveen, 『The Nobel Peace Prize : One Hundred Years for Peace』 (Oslo: Cappelen, 2001) · G. Lundestad, , Nobelprize.org. Nobel Media AB 2014. Web. 21 Aug 2015. · C. Toffolo, R. Vandenbroucke, R. P. Alford, N. J. Young,  in J. Nigel ed.,「TheOxford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Peace」, vol. 1, USA: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 B. L. Mitchell-Green,  in L. Kurts ed.,「Encyclopedia of Violence, Peace & Conflict」Oxford: Elsevier, 2008 이미지출처 · J.로트블랫, ⓒ The Norwegian Nobel Institute  · 랠프 번치, wikimedia ⓒ U.S. Information Agency.  · 사토 에이사쿠, wikimedia ⓒNijs, Jac. de / Anefo  · UNHCR, wikimedia ⓒUNHCRflag.svg: *UN_refugee.jpg: UNHCR / UNHCRflag.svg: *UN_refugee.jpg: UNHCR / uploaded by: Montgomery (talk) 16:26, 14 July 2011 (UTC)  · 아웅 산 수 치, wikimedia ⓒClaude TRUONG-NGOC  · 류사오보, flickr ⓒBlatant World  · 베티 윌리암스, wikimedia ⓒhttp://www.centersofcompassion.org  · 메이리드 코리건, wikimedia ⓒMairead_Corrigan_Gaza.jpg: Free Gaza movement / derivative work: Materialscientist  · 마더 테레사, wikimedia ⓒEvert Odekerken  · 리고베르타 멘추, wikimedia ⓒSurizar, cropped by Jen  · 조디 윌리엄스, wikimedia ⓒJustin Hoch photographing for Hudson Union Society  · 시린 에바디, wikimedia ⓒPersianDutchNetwork  · 왕가리 마타이, wikimedia ⓒFredrick Onyango  · 레이마 그보위 wikimedia ⓒJon Styer/Eastern Mennonite University  · 타와쿨 카르만, wikimedia ⓒHarrywad  · 말랄라 우사프자이, wikimedia ⓒRussell Watkins/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평화상: 기록과 역대수상자 - 노벨평화상 수상에 얽힌 다양한 기록들 (세계평화인물열전, 이문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73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100 = "노벨평화상"... 댓글:  조회:4508  추천:0  2019-10-12
국제 7만명 숨진 전쟁 끝낸 ‘평화 전도사’… 100번째 노벨평화상 아비 아머드 전채은 기자 , 파리=김윤종 특파원 2019-10-12  트랜드뉴스 보기     작년 에티오피아 총리 취임 석달만에 에리트레아와 20년 전쟁 종식 아프리카 최초 남녀 동수 내각 구성, 100만 난민에게도 포용정책 펼쳐 《‘동아프리카의 평화 전도사’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43·사진)가 201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8년부터 20년간 벌어진 이웃나라 에리트레아와의 내전을 종식시킨 공로다. 100번째 평화상 수상자로 12월 1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상금 900만 크로네(약 11억 원)를 받는다. 그는 8월 말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가졌다.》 지난해 7월 15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앞줄 오른쪽)가 아페웨르키 이사이아스 에리트레아 대통령과 손을 붙잡고 높이 들어 보이고 있다. 1998년부터 20년간 전쟁을 벌여온 두 나라는 당시 종전을 선언했고 두 달 후 평화협정도 체결했다. 아디스아바바=AP 뉴시스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43)가 11일(현지 시간) 이웃 나라 에리트레아와의 20년 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뽑혔다. 지난해 이라크 인권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공동으로 평화상을 받은 콩고민주공화국 의사 드니 무퀘게에 이은 2년 연속 아프리카 출신 수상자다. 그는 올해 8월 한국을 찾았을 때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관계는 남북한 관계와 비슷하다. 두 나라가 화해했듯 남북한 관계도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베리트 라이스안데르센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그는 화해, 연대,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아비 총리도 “매우 행복하고 감격스럽다. 이 상은 아프리카와 에티오피아 전체에 주는 상”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에티오피아는 나이지리아에 이은 아프리카 2위 인구 대국(약 1억 명)이다. 지난해 4월 취임한 그는 자국 내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아비마니아(Aby+mania)’로 부른다. 전쟁 종식 외에도 아프리카 최초의 남녀 동수 내각을 출범시키고 종교·종족 분쟁이 심각한 에티오피아의 사회 통합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100만 명의 자국 내 난민에게도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고 수단 분쟁도 중재했다. 과거 정권의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고 고문 관행도 비판했다. CNN 등 서구 언론이 오래전부터 그를 유력한 평화상 후보로 꼽은 이유다. 올해 4월 유네스코 평화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에티오피아는 1952년 에리트레아를 병합했다. 42년의 분쟁 끝에 1993년 에리트레아가 독립했지만 갈등은 여전했다. 결국 1998년부터 20년간 전쟁이 벌어져 7만 명 이상이 숨졌다. 에티오피아는 또 다른 이웃 나라 소말리아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소말리아는 소말리족이 주로 살고 있는 오가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아비 총리는 취임 3개월 만인 지난해 7월 에리트레아와 종전을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평화협정도 체결했다. 소말리아의 침공 후 41년간 중단됐던 에티오피아항공의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운항도 재개했다. 한 달 후 아프리카 최초로 20명의 정부부처 장관 중 10명을 여성으로 채운 양성평등 내각도 출범시켰다.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국방, 평화(경찰 및 정보기관 총괄부서) 등 주요 부서 장관이 모두 여성이다. 올해 1월 난민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 활동도 허용했다. 서구 선진국의 강력한 반(反)난민 정책과 대조적이다. 그는 1976년 무슬림인 오로모족 아버지와 정교회 신자였다 무슬림으로 개종한 암하라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엔 평화유지군, 사업가 등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고 지난해 42세 나이로 최고 권좌에 올랐다. /동아일보 ///전채은 기자 / 파리=김윤종 특파원 ========================/// 文대통령 만났던 노벨평화상 수상자 "韓 모델에 영감" 머니투데이 최경민 기자   2019.10.12    글자크기 댓글··[the300]文, 지난 8월 에티오피아 총리와 정상회담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8월26일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을 공식방문 중인 아비 아흐메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와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19.08.26.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흐메드 총리는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 만찬을 가졌었다. 아비 총리는 포용적경제, 녹색경제를 에티오피아의 목표로 거론하며 한국이 '롤모델'이라고 추켜세웠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26일 청와대에서 아비 총리와 청상회담을 갖고 "아프리카 내 평화 프로세스를 선도하는 열정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에티오피아는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에리트레아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남수단 분쟁 중재에도 앞장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비 총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업적을 추켜세운 것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1일(현지시간) 아비 총리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수십년 간 지속됐던 에리트레아와의 유혈 영토 분쟁을 종식하는데 기여했다"고 평했었다. 문 대통령은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지상군 각뉴(Kagnew) 부대를 파병하여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매우 고마운 나라"라며 "한국인들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아프리카의 중심국가인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며 "혈맹관계이고 많은 가치를 공유하는 양국이 이번을 계기로 우호협력 관계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키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힘을 줬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관계가 남북관계와 흡사한 면이 많이 보이고 있다"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관계가 개선이 됐던 것과 같은 그런 성과가, 남북관계 간에 목도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격상을 시켜서 전략적인 파트너로 발전하기를 간절히 희망을 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와 한국과의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과의 관계가 한층 더 증대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과정에서 제가 에티오피아의 총리로서 한국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대사 역할을 하고자 희망한다"고 밝혔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와 한국은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공유한다. 한국의 발전 모델에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며 "에티오피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 국가들이 향후 몇십년 내로 많은 경제 발전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한국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만찬에서는 "과거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형제자매들이 한국인들을 위해서 국왕께서 파병을 했다"며 "이러한 양국 간의 오랜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가치와 평화와 화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에티오피아는 한국이 그동안에 이룬 놀라운 발전상과 한국의 모범사례를 뒤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는 현재 녹색, 그리고 녹색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력 있는 경제건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또 이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비 총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으로부터도 에티오피아가 배울 점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며 "왜냐하면 한국의 국민들은 자연보호를 위해서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에티오피아는 포용적인 경제 구축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며 "현재 수백만의 고용창출이 이뤄지도록 노력을 하고 있고, 이런 차원에서 많은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비즈니스 환경 조성을 위해서도 노력을 하고 있다. 전세계 비즈니스가 에티오피아에 진출했을 때 우호적인 환경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비 총리는 "과거 우리 양국 간의 혈맹관계가 혹시나 우연에 의해서 탄생을 했다면 앞으로 에티오피아와 한국 양국이 굉장히 강한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관계를 구축하자"며 "양국, 그리고 양국 국민 상호 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 '에티오피아의 기적'으로 불린 남자, 100번째 노벨평화상 [중앙일보] 2019.10.11    기자 김성탁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SNS 공유 더보기 2019년 노벨평화상을 탄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AFP=연합뉴스]  ‘아비 아머드는 우리에게 기적 같은 존재다.’       독재 중단, 망명 반체제 인사 귀국 허용 수감된 야당 인사 석방…자유주의 개혁 평화상은 에리트레아와 전쟁 종식 인정 올해 경쟁률 300대 1…상금 10억 여원 민족간 폭력 갈등 해결은 숙제로 남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비 아머드 알리(43) 에티오피아 총리가 2018년 4월 집권한 이후 독재와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 사라지면서 민주주의와 비슷한 양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서다. 수년 동안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본보기로 꼽히는 나라가 됐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에 자유주의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극도로 통제되던 국가를 뒤흔들었다. 야당 운동가 수천 명을 감옥에서 풀어줬다. 추방한 반체제 인사들이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반체제 인사들의 귀향을 반겼다. 과거 정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두려워하던 주민들은 이제 자유롭게 발언하고, 오랫동안 금지돼 있던 현수막 등도 시내에 나부낀다고 BBC 등이 전했다.  지난해 6월 아비 아머드 총리를 지지하는 집회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이런 개혁은 에티오피아 민족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사라지자 민족 간 폭력 충돌이 빚어져 250만 명이 피난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소셜미디어에 인종 혐오 발언이 난무하고, 무법 행위도 빈발하고 있다. 아비 총리를 반기는 주민들이 그를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가 국내적으로 안고 있는 숙제다.     아비 총리가 100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1일(현지시간) 아비 총리를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의 독재주의를 허문 당사자이지만 노벨위원회는 특히 그가 에티오피아와 오랫동안 대립해온 이웃 에리트레아와 화해한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노르웨에 노벨위원회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노벨위원회는 “평화와 국제 협력을 위한 노력, 특히 이웃 에리트레아와의 국경분쟁 해소를 위해 결단력 있는 이니셔티브를 시행해 노벨평화상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에리트레아는 1952년 에티오피아에 합병됐다가 30년간 투쟁을 하다 1993년 독립했다. 이후 1998∼2000년 국경을 둘러싸고 전쟁이 발발해 양측에서 7만명 이상이 숨졌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아비 총리가 에리트레아와 화해를 추진한 데 힘입어 양국은 지난해 7월 종전을 선언했다. 20년간의 군사적 대립 상태를 끝낸 것이다.     에티오피아 총리실은 수상 소식에 성명을 내고 “국가적 자랑"이라며 “모든 에티오피아인의 승리이자 에티오피아를 번성하는 국가로 만들려는 우리의 의지를 더 강하게 하라는 요구"라고 했다.     에리트레아 국기(왼쪽)와 에티오피아 국기가 나란히 들려 있다. [AFP=연합뉴스] 노벨위원회는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역할도 컸다고 인정했다. 노벨위원회는 “평화는 한쪽 당사자의 행동만으로 일어설 수 없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아비 총리가 내민 손을 잡고 양국 평화 프로세스가 공식화하는 것을 도왔다"고 소개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러면서 평화협정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전 국민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길 희망한다고 했다.     노벨위원회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고 동아프리카에서 최대 경제국인 에티오피아가 평화롭고 안정될 경우 해당 지역 국가와 민족들이 우의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비 총리는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공식 방문했었다.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아비 총리는 “하나의 한국, 남북의 통일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의장이 100번째 평화상 수상자인 아비 아머드 총리의 사진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노벨 평화상은 지난해까지 99차례 수여됐기 때문에 아비 총리가 100번째 수상자다. 그동안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국제 외교와 국민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2002년), 아동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유럽연합,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상 시상식은 오는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9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0억9000만원)의 상금과 노벨상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에는 개인 223명과 단체 78개가 올랐다. 301대 1의 경쟁을 뚫은 셈이다.       누가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될지 관심을 모았지만, 노벨위원회의 규칙상 후보자 명단은 50년간 공개되지 않는다. 기후변화 활동가인 16세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그가 수상했다면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출처: 중앙일보] '에티오피아의 기적'으로 불린 남자, 100번째 노벨평화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에티오피아   [ Ethiopia,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 이미지 크게보기 중앙에 있는 오각형 솔로몬의 별은 국민들의 단결을 상징한다. 이칭별칭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유형 지명/국가 시대 현대 성격 국가 위치 아프리카 동북부 인구 9946만 5819명(2015년 현재) 면적 110만 4300㎢ 수도 아디스 아바바 언어 암하릭어, 영어, 이태리어 종교 에티오피아 정교, 이슬람교, 토착종교 정치·의회형태 이원집정제, 공화제, 양원제 목차 정의 개관 약사 한국과의 관계 정의 아프리카 동북부 홍해에 면한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면적은 110만 4300㎢, 인구는 9946만 5819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이다. 주민은 오모로족이 35%, 암하라족이 27%, 티크레이족이 6% 등 80여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암하릭어와 영어가 사용되는데, 암하라는 암하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종교는 에티오피아 정교 45%, 이슬람교 35%, 토착종교 15%이다. 국토의 절반이 고원이며, 저지대는 아주 덥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 사막을 이룬다. 주요 산업은 커피 생산이었으나 국제수지 악화로 국민소득은 적은 편이다. 천연자원은 풍부하지 않으나 금·은·동 등 광물은 비교적 많이 산출된다. 2015년도 국민총생산은 576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619달러이다. 이 나라는 이원집정제의 공화제로, 총리가 실권을 가지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각각 5년의 상원(108석)과 하원(547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민주연합당(UEDP), 오로모 해방전선(OLF) 등이 있다. 약사 이 나라는 기원전 1000년경에 이미 고대 에티오피아왕국으로 성립하여 16세기까지 중세형 국가를 유지하였으나 1889년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6년 10월 독립하였으나 1935년 무솔리니에 의해 다시 정복당하기도 하였고, 1944년 완전 독립하였다. 1930년 이래 셀라시에(Selassie, H.) 황제 치하에서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1974년 9월 군부쿠데타에 의해 사회주의국가가 되었으며, 친소좌경노선을 대외정책으로 삼아왔다. 그 후 거듭된 지역간 분쟁과 내란, 기근 등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이 인근 국가로 피난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다. 1991년 반정부세력에 의해 군사정권이 붕괴되었다. 1994년 12월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정책은 중도중립의 비동맹중립외교를 펴고 있으며, 1945년유엔에, 1961년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인근의 국가와 선린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와는 1963년 12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5년 3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이 나라는 6·25전쟁 당시 보병 1개 대대를 파병한 바 있으며, 셀라시에 황제가 방한한 바도 있으나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한국과 정치적으로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69년 5월 의료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92년 11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8년 10월에 문화 협정, 2003년 4월에 무역 협정 등을 체결하여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2015년 현재 1억 6883만 달러로 백신, 화학제품 등이 주종목이고, 수입액은 5543만 달러로 커피, 참깨 등이 주종목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경남기업, 명성병원 등이 진출해 있으며, 약 460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한편, 북한과는 1975년 6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상호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있으나, 2002년 4월 상주공관을 폐쇄하였다. 1975년 11월에 항공봉사 협정, 1985년 12월에 경제 및 기술협조협정, 2000년 5월에 문화교류 협정을 체결하고, 2008년 4월에는 보건협조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제3세계론』(신정현, 일신사, 1986) 『아프리카 아프리카』(최평규 편, 국풍, 1983) 『아프리카정치론』(하경근, 일조각, 1974) 관련이미지 1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네이버 지식백과]에티오피아 [Ethiopia,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에티오피아   [ Ethiopia음성듣기 ] 요약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1935년 이탈리아가 침공하였으나 1944년 영-에티오피아 협정으로 완전 해방되었다. 1987년 9월 12일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고, 1995년 총선을 통해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에티오피아 국기 위치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서쪽 경위도 동경 38° 00', 북위 8° 00' 면적(㎢) 1104300 해안선(km) 0 시간대 EAT (UTC+3) 수도 아디스아바바 종족구성 오모로족(34.5%), 암하라족(26.9%), 소말리족(6.2%), 티그러웨이족(6.1%), 시다모족(4%), 구라기족(2.5%) 등 공용어 암하라어, 영어, 아랍어 종교 에티오피아정교(43.5%), 이슬람교(33.9%), 개신교(18.6%) 건국일 1941년 국가원수/국무총리 물라투 테쇼메(Mulatu Teshome) 대통령(2013.10 취임) 국제전화 +251 정체 공화제 통화 비르(Br) 인터넷도메인 .et ISO 3166-1 231 ISO 3166-1 Alpha-3 ETH 인구(명) 91,195,675(2012년) 평균수명(세) 49.43(2008년) 1인당 명목 GDP($) 471(2012년) 수출규모(억$) 29.57(2011년) 수입규모(억$) 96.94(2011년) 인구밀도(명/㎢) 79(2012년) 1인당 구매력평가기준 GDP(PPP)($) 1,159(2012년) 소리듣기   소리듣기에티오피아(국가)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정식명칭은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북쪽으로 에리트레아, 동쪽으로 지부티·소말리아, 남쪽으로 케냐, 서쪽으로 수단에 접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솔로몬왕 시대부터 시작되는 약 3000년의 긴 역사를 가졌으며, 1936~1941년을 빼고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국명은 ' '혼혈인' 또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이라는 뜻으로, 아랍어(語)로 '아비시니아'라고도 부른다. 행정구역은 9개주(kilil)와 2개 자치시(astedader)로 되어 있다.   주요도시 디레다와, 아디스아바바, 하레르 에티오피아 위치   에티오피아 1000km © NAVER Corp. OpenStreetMap Natural Earth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 [Ethiopia] (두산백과)   지식리스트 수정문의 공유 인쇄 글꼴가- 글꼴 작게가+ 글꼴 크게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     목차 개요 분석 일지 기타 아프리카 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위치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지도     개요 1) 에리트레아 독립 투쟁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의 북부지역에 위치하여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2차 대전을 전후한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이 일시적으로 통치하였고, 1952년에는 미국 정부의 압력과 UN의 제안에 의해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하여 자치주가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에티오피아를 강권 통치해온 독재자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가 무력으로 에리트레아를 강제 합병하였다. 합병 직후부터 에리트레아 주민들은 분리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반정부세력인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EPLF)을 결성하고, 이웃 아랍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30년간에 걸친 무력투쟁을 개시하였다. 1974년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키고 정권을 획득한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Mengistu)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의 군사지원을 이용해 EPLF에 대한 탄압을 일층 강화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정부군의 EPLF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대규모의 가뭄과 기아 문제의 발생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EPLF와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은 1990년을 정점으로 격화되었으며, EPLF는 대표적 반정부단체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EPRDF) 및 다른 지역 반군들과 연합하여 멩기스투 정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EPLF는 반(反)멩기스투 연합전선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91년 냉전 종식으로 독립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멩기스투 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해온 소련이 에티오피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이에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멩기스투 정권이 반정부세력의 공격에 의해 1991년 5월 붕괴되면서, 에리트레아의 독립문제가 해결 국면을 맞이하였다. 1991년 5월, 멩기스투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반정부세력인 EPRDF의 제나위(Zenawi) 의장을 원수로 한 신(新)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1962년 이후 약 30년을 끌어온 에리트레아 독립투쟁이 종료되었다. 에리트레아는 1993년 4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99.8%의 찬성을 얻어 동년 5월 24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아프리카에서 53번째의 독립국이 되었다.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EPLF의 리더로서 아프리카 최고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as Afwerki)가 당선되었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은 에티오피아가 제나위 신(新) 정권을 확립함에 있어 EPLF가 EPRDF, 티그레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는 티그레인인민해방전선(Tigrayan People's Liberation Front, TPLF), 오로모인민민주조직(Oromo Peoples' Democratic Organization, OPDO) 등이 중심이 되어 구정권의 타도에 참여한 것에 대한 합의사항으로서,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한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티그레 및 오로모 분리주의자들은 제나위가 연방제 실시를 약속하자 에티오피아에 잔존하기로 합의하였다. 2)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국경 분쟁 1993년 독립 이후 에리트레아는 혁명 동지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며 에티오피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내륙국가가 된 에티오피아는 무역의 대부분은 에리트레아의 항구인 아사브(Assab)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 간의 관계는 경제문제를 둘러싸고 점차 긴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억압당해온 에리트레아 민족주의가 독립을 기점으로 날개를 단 듯 급격히 발현됨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에티트리아의 외교관계는 더욱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와의 경제마찰을 통해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1998년 5월 에리트레아는 독립한지 7년 만에 독립 이후부터 소유권 분쟁이 있었던 국경 지역을 무력 점령하였다. 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간 경제마찰은 에리트레아가 1997년 11월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주권'을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자 화폐를 채택하자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가 무역결제를 '달러'로 할 것을 요구해 에티오피아의 경제에 50%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에리트레아의 경제에 타격을 준 것이다. 이때,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 농부를 티그레이 지역(Tigray Region)의 바드메(Badme) 마을에서 추방하고 일부 에리트레아 관료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에리트레아는 1998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의 북동부 티그레주에 위치한 4백㎢의 이르가(Yirga) 삼각지를 무력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인 분쟁이 개시되었다.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는 1998년 6월 5일과 6일 미그 23 전투기를 동원하여 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Asmara)의 국제공항과 공군 기지, 아사브항 등에 전격 공습을 강행했다. 에리트레아도 6월 5일 에티오피아 북부의 메켈레(Mekele) 공항을 폭격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방측은 양측이 잠정 휴전한 6월 6일 오후부터 13시간 동안 군용기와 프리깃함을 동원하여 자국민들을 인근 지부티로 소개(疏開)하였다. 6월 9일 새벽 국경지대에서 전투가 재개되었으며, 6월 14일 양국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공 폭격을 중단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고, 에리트레아는 미군과 UN군이 포함된 PKO 부대가 비무장지대를 관리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7월에 양국은 보복전의 일환으로 자국 내 거주하는 상대방 국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경제 악화와 빈곤을 핑계로 자국 내 거주하고 있던 약 50만 명의 에리트레아인들에 대한 추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던 에리트레아인들 대부분은 1952년부터 에티오피아 정부가 실시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정착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일부는 에티오피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고 일부는 영주권을 보유하는 등 분쟁 직전인 1998년 5월까지는 에티오피아 국민으로 취급받았으나, 에티오피아 정부는 자국의 빈곤을 핑계로 에리트레아인들의 출국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수천 명이 에티오피아를 떠났고, 수천 명은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또한 3만 명 이상의 에티오피아인들도 에리트레아의 항구에 억류되었다. 1999년 2월 말, 에티오피아는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고, 에리트레아는 자국이 상당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음을 인정했다.1) 이 전쟁으로 두 국가의 피해는 상당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35만 명 정도의 피난민을 발생하였으며, 전쟁으로 인한 에티오피아의 경제적 피해는 무려 290억 달러에 이르렀다.2) 또한 양국 국민 약 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3) 그러나 실제로 양국의 전투는 여전히 종결되지 않고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이후 UN, 아프리카 연합(당시 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 OAU), 그리고 알제리 정부 등이 협력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성과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았다. 결국 2000년 5월 25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이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알제리 정부의 중재 하에 2000년 12월 12일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국경선을 획정하고, 수감자들을 교환하며, 난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평화협정 준수와 국경선 획정을 위해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위원회(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 EEBC)가 설치되었으며, 임시안전지대(Temporary Security Zone, TSZ)를 설정하여 양국 간의 분쟁 재발을 방지하도록 유엔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Mission in Ethiopia and Eritrea, UNMEE)이 파병되었다. 2002년 4월, EEBC에 의한 국경 획정이 이루어졌다. 결정에 따르면, 양쪽에게 각각 영토의 일부가 주어졌으나, 바드메 마을은 에리트레아에 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에티오피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고 이로 인한 양국의 외교적 분쟁은 2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2005년 12월,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 국경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유엔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양국 간의 대립은 다시 첨예해졌고, 에티오피아는 결정을 번복했다. 이후로 실질적 군사적 대립은 없었지만, EEBC가 정한 국경을 지키려는 에리트레아와 이를 부정하려는 에티오피아는 다시 전쟁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그리고 바드메 마을은 여전히 에티오피아의 실질적 지배로 에티오피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국제사회가 EEBC의 결정을 강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에리트레아의 불만은 지속되었고, 에리트레아는 유엔 평화유지군을 강제로 추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EEBC가 결정한 대로의 영토 분리는 2014년 현재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비록 국경 분쟁에 따른 물리적 충돌은 아니었으나, 2012년 3월 16일, 에티오피아군이 3개의 반란 그룹 기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에리트레아 영토인 접경 지역 인근을 공격하는 일에 발생하여 또 다시 전운이 감돌기는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가 이것이 에리트레아에 대한 공격이 아님을 분명히 했고, 이에 대해 에리트레아는 이는 국경 분쟁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라며 이러한 농락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결국 에리트레아가 물리력으로 대응하지 않아 전쟁은 재발되지 않았다.4) 이처럼 전쟁이 종결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양국은 국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긴장과 대립을 지속하는 관계로 남아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점이 달라지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지난 10년간 경제적으로 매우 성장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고, 에리트레아는 붕괴 직전의 국가로 여겨질 만큼 온갖 인도적 위기 속에 놓여있을 뿐 아니라 악명 높은 소말리아 출신 테러단체 알샤바브를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에티오피아는 이제 국경문제에 따른 에리트레아와의 전쟁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국가 에리트레아의 붕괴, 그리고 이들이 지원하고 있는 알샤바브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5) 분석 [의미 및 영향] 에리트레아의 독재자인 이사이아스 아페워르키(Isaias Afwerki)는 2010년 전 세계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독재자 6위에 이름을 올렸다.6) 2014년 기준으로 21년째 에리트레아를 통치하고 있는 아페워르키 대통령은 에리트레아 해방을 주도한 인물로서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 최고의 지성’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 받았으나,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이후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심하게 탄압해왔다. 독립적 언론매체를 불허하고 선거를 금지시켰으며, 청소년들에게 무기한 군복무를 의무로 할 뿐 아니라 자국민보다 소말리아 반군을 보호하는 데 더 주력하는 등 독재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7) 이러한 아페워르키의 통치로 인해 가장 즉각적으로 나타난 징후는 지난 10년간 지속된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피난 및 이주다.8) 이는 기아와 가뭄으로 인한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로 앞서 언급한 무기한 군복무 제도 때문이다.9) 이 제도는 1995년에 시작되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기간 중 연장되었는데, 이 때문에 에리트레아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15세가 되면 군대에 잡혀가기 전에 국가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레아 정부는 어떠한 개혁적 조치도 시도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해외로 빠져나간 젊은 인력들이 본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송금과 세금으로 나타나는 이익을 국가 재정에 이로운 것으로 여겨 이를 일정부분 묵고하는 실정이다.11) 더욱이 정부는 스스로 위험 부담을 하면서까지 현상을 변경할 이유가 없다. 그 많은 젊은이들이 가족을 두고 국가를 떠날 작정을 할 정도로 국가와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물론 그들의 아버지 세대조차 국가와 맞서 싸워 국가 내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오늘날 에리트레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피난과 이주의 방법을 계속 택할지, 아니면 언젠가 상황이 국민들에게 훨씬 우호적인 때에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택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 에리트레아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바쁘다.  이 같은 젊은 인구의 대량 유출은 장기적으로 에리트레아의 모든 분야의 발전에 반드시 요구되는 인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야기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에리트레아 국민들을 수용해야 하는 주변국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아프리카 뿐 아니라 유럽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이 외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선진화된 공부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이들이라면, 이들의 출신 국가나 이들을 받는 국가에게나 긍정적일 수 있다.12) 그러나 이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특히 이들의 이동은 생존을 위해 불법적 수단과 거래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유럽 내 불법 체류 1위 국가인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건너 밀입국한 난민들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는데, 이들 중 가장 많은 수인 연평균 만 명 이상이 과거 이탈리아령이었다가 독립한 에리트레아로부터 오고 있다.13) [추후 전망]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양국 정상은 한 차례의 대화도 갖지 않았다. 국경 분쟁이 지속되진 않았으나, 양국의 관계는 케냐와 소말리아의 관계처럼 적대적인 채로 남아있었고, 이는 아프리카를 유럽과 중동, 아시아로 잇는 아프리카 뿔 지역의 불안정에 기여함으로써 국제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고 2012년 8월, 에티오피아의 제나위 총리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구시대와 작별한 것인 동시에, 새 시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제나위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하일레마리암 데살렌(Hailemariam Desalegn)은 에리트레아와의 대화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해오고 있다.14) 이는 에리트레아와 달리 전쟁 종결 이후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한 에티오피아의 자신감 표출일 것이며, 역내 안정을 주도함으로써 자국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려는 의도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인해 내륙국이 된 에티오피아는 홍해로의 원활한 진출과 이에 따른 대외무역 증대를 위해서라도 에리트레아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총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제나위 역시 줄곧 에리트레아와 대화를 원했지만, 에리트레아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15) 더욱이 이번 분쟁의 발단에서도 보았듯, 에리트레아는 독립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은 하지만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하는 상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에리트레아가 설득되어 대화의 장에 나온다 할지라도, 양국이 이견 없이 진정한 합의를 이루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단, 아페워르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 양국과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이 있다. 그리고 일부 전문가는 이것이 멀지 않았다는 예측을 내놓았다.16) 문제는 아페워르키가 어떻게 권좌에서 물러나는가 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쿠데타 혹은 반란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17)젊은 층의 대량 피난 및 이주와 함께, 정보부 장관을 비롯한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2012년과 2013년에 줄줄이 망명했다. 또 2013년에는 군 인사에 의한 쿠데타와 유사한 시도도 있었다.18)더불어 최근 몇 년 사이 아페워르키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강도가 높아졌다. 유엔은 알샤바브를 돕는 혐의로 에리트리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였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제 비정부 조직들은 에리트리아의 정치범 수용소 운영 등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해왔다.19) 이처럼 안팎으로 압박이 강해질 경우, 아페워르키는 개혁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이 넘게 이를 시도하지 않았음을 비추어볼 때, 그는 개혁에 따른 현상변경에 두려움을 크게 느낄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의 정권이 전복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에리트레아의 미래는 굉장히 비극적인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에리트레아의 미래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양국의 관계에도 핵심적인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지   일자 주요내용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됨 1952년 영국이 통치개시 후, 미국정부 압력. UN 제안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 자치주로 편입 1961년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 결성, 무력투쟁 개시 1962년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Selasie) 황제가 에리트리아를 강제 합병 1989년 EPLF, 반정부 연합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참여 1991년 에티오피아의 좌파 멩기스투(Mengitsu) 정권 붕괴, 에리트리아 독립기반 마련 1993년 5월 에리트리아 독립 1997년 9월 에티오피아 제나위(Zenawi) 수상, 에리트리아 방문 관계 회복 협의, 결렬됨 1997년 11월 에리트리아 경제주권 선언, 에티오피아 달러화 결재 개시로 긴장 증대 1998년 5월 6일 에리트리아군, 이르가(Yirga) 삼각지를 점령 1998년 5월 12일 티그레(Tigre,Tigray)주 바드메(Badme) 지역 점령 1998년 6월 1일 에리트리아가 아쌈(Assam)항에 군대 진주. 에리트리아는 메켈레(Mekele) 북부 알리트나(Alitena)를 공격. 미국과 르완다는 중재 노력 계속(르완다의 투치족은 종족상 에티오피아와 관련). 동 분쟁에서 최대의 피해국은 분쟁 양 당사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하니쉬(Hanish) 섬을 점령하려는 에리트리아를 지원해 옴 1998년 6월 2일 아이가(Aiga), 인달게다(Indalgeda), 알리트나(Alitena) 격전에서 1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 교황 바울 2세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가 지도자로 있는 양국에 대해 정전을 촉구 1998년 6월 3일 에티오피아는 남부지역 암베세트 겔레바(Ambesete Geleba)를 공격, 에리트리아는 아이가 재탈환에 실패하는 등 양군 간 격전 지속. 미국은 평화봉사단의 철수 개시, 에리트리아의 철군과 국경협상 재개를 제시한 르완다의 평화안을 지지. 에리트리아는 이를 거부하면서 자국영토 고수를 주장,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영유권 주장을 거부 1998년 6월 4일 에티오피아는 미-르완다 평화안 수락. 국경논쟁에 군사력 사용은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EU의 입장과 대조적으로 OAU는 양국에 평화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요구 1998년 6월 5일~6일 에티오피아군 에리트리아 수도(아스마라-Asmara)와 공항, 항만에 대해 수회에 걸쳐 전격 보복 공습(5일 에리트리아 공격으로 에티오피아군 5명 사망) 1998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국경부근에서 공습을 개시하였다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이집트에 중재를 요청. 6월 10일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담에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에 대표단 파견할 것을 결정. 전쟁 확산을 우려하는 지부티는 국경지역에 전군을 배치 1998년 6월 14일 에리트리아는 비무장 국경지대를 통제하기 위해 미군과 UN군을 포함한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요청.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수뇌급 대표단은 양국을 방문 분쟁 조정에 진전 없음을 발표. 이유는 국경지역으로부터 양국군의 철수를 포함한 미국과 르완다가 제시한 '4개 항목 제안'에 대해 에리트리아가 거부 1998년 6월 26일 UN 안보리는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비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수단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 6월 11일 이후 전투 소강 상태, 3만 명에 이르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에리트리아의 아사브(Assab)항에 억류. 에리트리아 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에티오피아는 지부티에 자유무역지대 설치.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 전투기 구매 요청(이스라엘은 결정 보류) 1998년 7월 양국 주재 상대방 국민 추방 1998년 8월 1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주재 외국 공관은 부루키나파소에서 협력단국(ContactGroup Nation)과 각각 회동하였으나, 성과 무 1998년 8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린 중재회담에서 국경 긴장 해소에 실패. 에리트리아는 5∼6월에 발생한 에티오피아와의 전투에서 생포한 71명의 에티오피아군을 석방. 에티오피아는 UN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30명의 에리트리아인의 출국을 명령 1998년 12월 6월~7월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양국 간 국경 분쟁 이후 총 39,075명의 에티오피아인을 강제 추방하였다고 발표. 미국은 레이크 특사를 이 지역에 3번째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OAU는 양국의 자제력 발휘를 요구 1999년 1월 5일 에티오피아는 제3국에 의해 에리트리아 군이 국경지대에서 철수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자국군은 정당한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거부 1999년 1월 24일 미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에 대해 철수하도록 통고, 주요 인사를 제외한 민간인 철수 개시 1999년 1월 29일 OAU와 UN 새로운 전쟁 발발 방지를 위해 경쟁 1999년 2월 4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군의 기동을 제압하기 위해 아디그라(Adigrat)에 소재한 연료창을 폭격, 실패 1999년 2월 6일 양국군간 대격전 재발 1999년 2월 7일 에티오피아의 제2차 에리트리아 중부지역에 대한 공격 개시 1999년 2월 9일 에리트리아는 1,500명의 에티오피아인을 사살했다고 발표. 이집트, 미국, UN안보리는 정전을 요구 1999년 2월 10일 UN안보리 교전상태에 있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 양국에 대한 회원국의 무기 금수를 만장일치로 채택 1999년 2월 1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OAU가 제시한 평화안을 수용하도록 국제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UN이 에티오피아를 침략자로 보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주장.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자국 항구를 통한 전쟁물자의 반임을 불허한다고 발표 1999년 2월 12일 에티오피아는 전쟁 재발 이후 7,000명의 에리트리아군들이 사망 혹은 부상하였다고 발표 1999년 2월 14일~16일 양국은 각각 포격 지속 1999년 2월 20일 에리트리아는 정전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선에 대한 국제감시가 필요하다고 시사 1999년 2월 21일 에티오피아 정부군은 에리트리아의 아사브 공항을 폭격, 공적을 거두었다고 발표. 2월 6일 분쟁 재연 후 공항 폭격은 처음 1999년 2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불가리아인 용병이 에티오피아군에 고용되어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고 발표 1999년 2월 27일 에리트리아 대통령은 아난 UN사무총장과 안보리 의장에 서한을 보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평화안 수락 의사 표명 1999년 2월 28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 점령지(바드메-Badme) 탈환 전투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 1999년 3월 3일 에티오피아는 정전협상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 1999년 3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OAU가 제시한 평화안에서 요구한 철군지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 * 에티오피아는 정전과 협상 개시 이전에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전 영토에서 에리트리아군의 철수를 주장 1999년 3월 14일 에티오피아군은 일라자모(Ilazamo) 평원에 대한 공격을 개시, 적어도 10,000명의 에리트리아인을 사살하고 57대의 탱크를 파괴, 2대의 Mig 23, Mi‐35 소총을 노획했다고 주장. 에티오피아는 자국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에리트리아는 무모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 양국 간 전투는 서부전선지역인 메라브(Merab) 강을 따라 3월 17∼18일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도 1999년 3월 29일 전투는 다소 진정. 양국은 상대국이 무기를 수입하고 민간인을 추방하고 있다고 주장. OAU는 분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중재 노력 지속 * 양국 간 전선을 따라 산발적 전투 지속. 미국은 자국민의 에티오피아 여행 자제 촉구, 핵심 요원을 제외한 대사관 직원의 귀국 허용. UN 사절단 산훈(Sanhoun)은 정전 방법 모색 1999년 4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에티오피아영토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 1999년 4월 16일 에티오피아 공군기는 중부전선의 목표물을 폭격. 에티오피아 공군기, 사와(Sawa)에 있는 에리트리아 훈련소를 폭격 1999년 4월 28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항공기가 폭격을 개시했다고 발표 1999년 5월 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간 제2차 연도 전투 개시. 이집트의 중재 무산 1999년 5월 15일~17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군용기가 5월 15일 잘라 안베사(Zala Anbesa)와 16일에는 마사와(Masawa)를 폭격, 17일에는 포병부대가 비비나(Bibina)를 공격했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분쟁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 대화나 정전은 있을 수 없으며, 에리트리아가 자발적으로 철군하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선언 1999년 6월 9일 국경선 획정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군간의 전투 재개, 에리트리아군 8,2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 또는 생포(에티오피아 정부 발표). 이에 맞서 에리트리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5일째 계속되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 2,3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 인접국 사이인 양국은 지난해 5월 국경선 획정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래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음. 에리트리아는 지난 62년 에티오피아에 합병된 이래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끝에 지난 93년 독립을 쟁취 1999년 7월 15일 소규모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에 진군, 파솔레이(Farsoley) 마을을 점령. 그러나 소말리아 지방군은 무 대응 1999년 7월 16일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는 효과적인 정전 개시일, 평화유지군 설치 장소 등 대화를 통해 평화 조건 설정할 것에 동의 1999년 7월 17일 에티오피아군과 OLF(Oromo Liberation Front) 및 ONLF 간에 2시간여에 걸친 전투 발생. 반군들은 정부군 500명을 사살하고 200명의 정부군이 부상당했다고 주장 1999년 7월 2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평화조건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음 1999년 7월 30일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정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함. 국경지역에서 전투 지속, 양측 모두 낮은 수준이긴 하나 국경 경계 계속 1999년 8월 12일 최근 3개월 동안 에티오피아군은 소말리아를 이탈한 OLF와 격전, OLF군 700명을 사살하고 300명이상을 생포.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오로모(Oromo)지역 독립 투쟁 단체인 OLF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8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최근 1주일간 OLF와의 전투에서 OLF의 리더인 보레다 비루(BoredaBirru)를 사살하고 고위 간부들을 생포함으로써 동 독립단체는 붕괴되었다고 주장 1999년 8월 24일~5일 소말리아 민족전선(Somali Nationa Front: SNF)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역 소재 에티오피아 용병 수백명이 루크(Luuq)와 돌로우(Dolow)시에 잠입하였다고 발표 1999년 8월 26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도록 강조 1999년 8월 28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국경지역 인근의 잘라 안베사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9월 2일 에티오피아는 잘라 안베사 전선내의 친 케렌(Chin Keren)에 있던 에티오피아인들을 공격했다고 비난 1999년 9월 6일 영토의 격전지인 잘라 안베사 지역에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접전이 보도됨 1999년 9월 7일 소말리아 소식통은 RRA(Somali Rahanwein Army)와 DSAL(Digil Salvation Army)의 지원을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군이 샤벨레(Shabelle)의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를 공격했다고 보도. RRA와 DSAL은 모가디쉬에 기지를 둔 후세인 모하메드 아디드(HusseinMohamed Aidid) 장군에 반대하는 세력 1999년 9월 10일 에리트리아군은 1,000㎞에 이르는 국경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수개 도시에 대한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에 대비 고도의 경계태세 유지 1999년 9월 13일 에티오피아정부는 에티오피아와의 에리트리아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개전 이전의 국경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영토분쟁의 대상지역은 잘라 안베사-아가(Zala Anbesa‐Aiga), 에갈라(Egala), 바두바두(Badu‐Badu) 등임 1999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는 쿠바와 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고 발표. 쿠바군은 에티오피아 막시스트 멩기스투 체제를 지원 중 1999년 9월 28일 미 외교 당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표 1999년 10월 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여전히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에티오피아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에리트리아와의 전쟁 협정 서명을 거부 1999년 10월 5일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지역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에리트리아의 주장을 부정 1999년 10월 24일 UN 고등 난민위원회는 25만 명이 동원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전쟁에서 60,000명의 난민 등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 1999년 10월 25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상호 비방과 침략행동 중지에 노력. 에티오피아는 65,000명의 에티오피아내 에리트리아 노동자를 추방하고 자국내 항만 창고에서 에티오피아인 소유 재산 1억 3,000만 달러어치를 약탈했다고 비난한 바 있음(에리트리아는 이를 부인) 1999년 10월 30일 에티오피아는 자국군이 10월 23일과 24일 제베르트(Jerbert) 강 근처에서 공격을 감행해 오던 에리트리아군을 격퇴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300명의 에리트리아군을 사살하였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이같은 에티오피아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에티오피아는 1998년 5월에 발효된 전쟁종식을 위한 중재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에리트리아가 전투를 유발했다고 있다고 주장. OAU(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가 제시한 평화계획에 대해,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어떠한 평화협정도 에리트리안인을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1999년 11월 8일 프랑스는 에리트리아가 프랑스군 2,5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지부티(Djibouti)를 침략하려하고 있다고 우려 표명. 지부티는 내륙국 에티오피아에 해안접안을 위한 통과권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리트리아는 지부티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FRUD(Front for the Restoration of Unity and Democracy) 반군을 지원하고 있음 1999년 11월 9일 에티오피아의 반정부 세력들은 2년 전부터 새로운 언어법의 채택을 요구하고 있음 1999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 정부 소식통은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간을 운항중인 기차를 파괴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군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 1999년 11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외국의 반군세력의 공격에 공동대처하며,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양국국민의 보호를 상호 지원한다는 안보협정에 서명 1999년 12월 3일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ritria Liberation Front)의 게릴라들은 12월초 1주일 사이에 26명의 에리트리아군 52사단 소속요원을 포함하여 총 56명의 에리트리아 정부군들이 투항해왔다고 발표 1999년 12월 20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 국적을 가진 17명의 아파즈(Afars)족을 살해했다고 비난. 이들 아파즈족들은 보킬라(Bokila)근교에서 살해되었음 1999년 12월 27일 OAU, 평화계획안에 대한 에리트리아의 우려(충돌국경선에의 평화유지군 배치 문제 등) 검토 2000년 1월 18일 에티오피아는 수단과 140㎞에 이르는 고속도로 개방협정에 서명하였다고 발표. 동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에티오피아는 수단항을 통해 물자를 신속하게 거래할 수 있다고 함 2000년 1월 21일 평화 및 인권 네트워크(The Peace and Human Rights Network)은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와 군수물자의 제공을 금지한다는 UN헌장 제733조를 위배하고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내 무사 수디 얄라호우(Musa Sudi Yalahow)가 이끄는 부족 군대인 아바갈(Abagal)에 물자와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이를 부인 2000년 1월 22일 에리트리아와 수단간 국경 재개방. 양국은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수단이 에리트리아 항만에의 접근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음(FYEO 분석) 2000년 2월 18일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의 침입에 대비, 전군에 비상경계령 2000년 2월 23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아사브(Assab)항(港) 부근의 부리에(Burie) 전선에 1개여단(3천명)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 이로써 8개월간의 정전상태가 깨어짐 2000년 4월 8일 양국간의 국경분쟁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로 지원되는 물품의 조루트를 제공하겠다고 발표 2000년 4월 16일 에리트리아, 18세∼40세 사이의 남자에 대한 징집령 발표 2000년 4월 2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이 알제리에서 개최됨 2000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가 잘라 안베사(Zala Anbesa) 전선, 바드메(Badme) 지역에서 전면공격 개시 2000년 5월 15일 에티오피아가 메레브‐세딧(Mereb‐Sedit) 강을 건너서 진격. 남동지역에서는 다스(Das), 바렌투(Barentu) 지역으로 진격 2000년 5월 17일 에티오피아군이 다스와 바렌투지역에서 에리트리아군을 포위 2000년 5월 18일 에티오피아군이 바렌투, 다스를 점령 2000년 5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에르트리아와 OAU에게 평화회담을 가질 의사가 있음을 표명. 에티오피아는 팽창정책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중부전선의 잘라 안베사지역, 동부지역의 부리에지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힘. 에리트리아는 멘데페라(Mendefera)로부터 50km 떨어진 군사적 요충지 마이디마(Maidima)도 포기 2000년 5월 20일 에티오피아 서부지역에서도 공격 개시 2000년 5월 23일 잘라안베사‐에갈라(Egala)전선에서 치열한 전투. 에리트리아는 "조건없이" 평화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아스마라, 아싸브를 점령할 의도는 없으며, 에티오피아가 바렌투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에리트리아는 잘라안베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 2000년 5월 25일 에리트리아는 1998년의 전쟁 개시 이전의 상태로 군대를 철수할 의사를 표명 2000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와의 평화교섭 재개에 동의.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힘. 에티오피아군은 세나페(Senafe) 점령 2000년 6월 6일 테세네이(Teseney)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 에티오피아는 1개사단과 2개여단을 투입 2000년 6월 9일 에티오피아 수상(Meles Zenawi), 에리트리아가 재침하지 않도록 분쟁지대에 대한 평화유지군 개입 요청 2000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는 부리에 전선(에리트리아는 아싸브 전선이라고 부름)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다고 발표. 또한 테세네이 전선에서도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중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를 요청하는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1일 알제리에서의 정전협상이 진전을 보임. OAU의 지휘하에 유엔이 평화유지활동을 하는 안을 포함한 평화계획이 검토되고 있음 2000년 6월 14일 에티오피아가 OAU의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알제리에서 평화협정에 조인. 정전협정의 내용은 ①1998년 5월 6일 이전 에티오피아 영역이 아닌 지역으로부터 에티오피아가 철수, ② 1000㎞에 달하는 국경이 정해질 때까지 평화유지군이 "일시적 안전보장지대"(에리트리아 영내의 25㎞의 완충지대)에 전개, ③ 평화유지군이 전개된 뒤 2주 후까지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리아 점령지대에 체재 가능, ④ 이후 평화협정의 체결을 위해, 식민지시대의 조약, 국제법 등에 기반하여 국경선을 획정지을 예정 2000년 6월 19일 에티오피아군 테세네이 지역에서 철수 시작 2000년 6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정전협정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려 한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의 규모를 감축할 것을 요구 2000년 7월 13일 워싱턴에서 양국간의 평화협상 개시 2000년 7월 31일 유엔 안보리는 100명의 국경감시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 2000년 9월 11일 유엔안보리는 4,200명의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정(UNMEE: United Nations Mission inEthiopia and Eritrea) 2000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간의 전투로 총 7만명 사망하고 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 2000년 11월 27일 네덜란드가 UNMEE에 700명을 파병하는 데 동의 2002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의 최악의 가뭄에 대한 원조 노력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기로 약속20) 2004년 11월 25일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는 의회에서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의 에리트리아와의 국경분쟁에 대한 중재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에티오피아 5개안'이 표결을 통해 통과된 직후 행한 연설에서 "원칙적으로 에리트리아와의 국경 분쟁에 대한 국제적 중재 결정을 수용할 것이며 에리트리아와의 협상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힘. 또한 5개안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 요원들이 에티오피아 국경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같은 활동에 대한 자국 부담 경비도 지급할 것임을 천명21) 2005년 10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전쟁 재발 가능성을 경고하고 에리트리아에 대해 유엔 평화 유지군의 헬리콥터 비행금지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22) 2005년 10월 10일 유엔대표부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지대를 감시하는 평화유지군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림 2005년 11월 3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최근 국경지대에 병력을 증파하고 부대를 전진배치하는 등 국경지대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지난 2000년 종식된 양국 간의 국경분쟁이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음23) 2005년 11월 4일 아프리카연합(AU)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국경 부근의 군사적 행동으로 야기된 긴장이 자칫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며 양국의 자제를 촉구24) 2005년 12월 23일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부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에티오피아 군 병력이 국경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밝힘25) 2007년 2월 1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지난달 29‐30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를 겨냥한 에리트리아의 폭탄공격 음모를 분쇄했다고 밝힘26) 2007년 4월 25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동부 유전에서 반군 공격으로 74명이 피살된 것과 관련해 에리트리아 정부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비난. 이에 대해 에리트리아 정부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호전적 행위를 취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 2008년 7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대에 배치된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기로 만장일치로 의결27) 2009년 8월 18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지난 1998년부터 2년간 이어진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 분쟁과 관련해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에 대해 각각 1억7천 400만 달러, 1억 6천 300만 달러를 각각 상대방에 배상하라고 판결.28) 2011년 2000년 6월 18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의해 배상 판결이 난후 별다른 직접적인 분쟁상황은 있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감정)를 유지하고 있음. 2012년 3월 15일 Shimelis Kemald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자국군이 에리트레아 국경을 16-18km가량 진격해 에리트레아의 3개 군기지를 공격했다고 발표함. Kemald 대변인은 에리트레아가 동 군사시설에서 에티오피아 반군을 양성하고 있어 사전 공격하였다고 발표. 특히 최근 아파르 지역에서 외국인 관광객 피살 등 에티오피아 내에서 에리트레아가 자행한 일련의 테러 행위가 금번 군사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함. 이에 에리트레아 외교부는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고 발표하는 등 금번 주재국측 도발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시사함. 에리트레아 정부는 또한 에티오피아가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일부 영토에 대한 불법 점령 및 △에티오피아 국내 문제 등으로 부터 주재국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금번 도발을 자행하였다고 주장함 기타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구분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인구 5900만 명 360만 명 면적 113만 2천㎢ 11만 7천㎢ 병력 12만 명 3만 5천 명 군사비 1억 2700만 $ 8천 만 $ ※ 에티오피아 : 인구 5500만, 87개 종족, 290개 언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병력 12만명(10만은 육군) ※ 에리트리아 : 인구 350만, 9개 종족, 2개 언어, 병력 46,000명, 1889년 이태리로부터 독립, 1952년 에티오피아와 연합, 1962년 에티오피아에 의해 영토 합병, 1993년 독립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에티오피아ㅡ소말리아 국경분쟁   [ Ethiopia-Somalia boundary disipute ] 처분적 조약에서 이른바 속지적 의무의 계승문제에 연결되는 국경분쟁. 소말리아 독립(1960. 6. 26) 전의 식민지시대에 영국보호령 정부는 영지(領地)의 바운드지역 및 오가던 관련지역을 에티오피아에 할양하는 조약(1897. 5. 14)을 체결하고 국경선을 획정하였지만 이 국경선이 소말리부족의 관습적인 방목지대를 분단하였기 때문에 양측의 소말리부족은 방목을 위해 국경선을 넘어 왕래할 수 있다는 취지의 교환공문이 붙여졌다. 1935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이탈리아는 영국보호령 정부와 교환공문에서 양측 부족의 방목권과 용수권에 관하여 합의에 달한 취지, 성명을 하였다(1937. 1. 27).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된 에티오피아는 영국정부와 행정권 반환협정(1954. 11. 29)을 체결하고 1조에서 1897년 조약에 의해 승인된 영역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배타적 주권, 2조에서 국경선 양측의 소말리아부족의 방목권을 각각 재확인하고, 3조에서 방목권 실시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소말리아 독립직전 영국정부는 ‘1897년 조약의 규정은 유효, 1954년 협정 제3조는 소멸’이라고 표명하였으며(1960. 4. 11), 에티오피아도 '방목권은 자동적으로 무효’라고 하여 양국 모두 당연히 승인을 부인하였다. 소말리아도 1897년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국경획정 조약은 일단 국경선이 유효하게 획정되면 다른 모든 국가는 이것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일반국제법의 원칙이다. 또한 토지 및 그것에 부과된 부담, 이른바 속지적 의무는 영역의 이전과 함께 승계되는 것이 통설이다. 본 건은 토지에 부과된 부담의 당연한 승계가 부인된 예는 있지만 방목권이 토지의 이용에 관하여 인정된 일종의 부담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조약에 있어서 국가승계에 관한 비엔나협약’(1978. 8. 22) 11조, 12조에서도 목초지의 이용은 영역에 대해 승계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소말리아도 1982년 북부에서의 정부타도운동으로부터 1988년에는 내전에 돌입, 1991년 5월에는 북부가 소말릴란드 공화국이라고 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질서와 빈곤의 사태를 중시한 국제연합은 1992년 12월 3일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무력행사를 포함한 다국적군을 파견하는 결의(S/RES/794)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미군이 지휘권을 갖는 최초의 평화집행부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태의 조기수습을 위해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부대를 증파하는 한편 1994년 3월말까지 미군의 완전철수를 표명(1993. 10. 7)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소말리아국경분쟁 [Ethiopia-Somalia boundary disipute]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 분쟁     목차 개요 분석 아프리카 내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분쟁 위치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분쟁 지도     개요 • 나일강 유역의 용수 확보권을 둘러싼 물 분쟁 • 분쟁 당사자 : 이집트와 수단,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10여 개 나일강 상류 연안국가들 1958년 이집트가 아스완댐을 건설하기 시작해 10만 명의 수단인이 이주하였다. 당시 이집트와 수단 사이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집트는 물을 더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수단인들과의 문제는 일단 해결된 듯 보였다. 1959년, 이집트와 수단이 ‘나일강 이용협약’으로 알려진 쌍무협정에 조인하였다. 양국 간의 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두 나라의 협약이 상류 연안국가의 물 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또 다른 물분쟁을 유발하였다. 즉 수단보다 나일강 상류에 연해 있는 에티오피아와는 나일강 물을 나누어 쓰는 문제에 관해 전혀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일강 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용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였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는 1960년대에 아프리카 개발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빌리고 미국 등의 기술지원을 받아 청 나일강(Blue Nile)의 유역에 29개의 댐을 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상류에 새로운 댐이 건설되면 이집트의 물 공급이 8.5%나 감소하게 됨으로 당국은 차관 승인에 반대하고 사업의 착수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분쟁이 계속되자 유엔은 1997년 ‘국제수로의 비항해적 사용법에 관한 회의’를 개최해, 두 나라 이상을 지나가는 강을 공유하는 경우에 적용할 지침을 만들었다. 첫째, 다수의 물 사용자 간에는 공평하게 물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 강에 인접한 국가들 사이에는 서로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1999년 2월, 탄자니아에서 10개의 나일강 유역 국가들이 ‘나일강 유역 물 관련 장관 협의회’를 갖고, 연안 국가들은 나일강 수자원을 국경 내에서 개발을 목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나일강 유역 전략행동프로그램’을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나일강 물 분쟁은 일단락지었다. 2000년대 들어 나일강의 수자원을 이용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일강 상류 연안국들은 이집트와 수단만의 인근 하이댐으로 인한 혜택이 부당하다는 판단하에 공동 이용 및 합당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이집트, 수단 및 다른 연안국들 간의 불만과 긴장이 지속되었다. 2010년 이집트가 나일강유역구상(NBI) 국제조약체제에 가입할 것을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설득하였고, 어느 정도 완화된 입장과 함께 분쟁 해결의 조짐이 보였으나, 수단의 지속적인 반대와 함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티오피아 수자원부 장관인 알레마예후 테게누는 2011년 3월 30일 아디스 아바바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나일강 상류에 거대한 ‘그랜드 댐’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밝혔으며, 이집트와 수단을 제외한 7개국(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콩고-예정)이 동의한 상태라고 하였다. 이에 이집트와 수단은 만일 여러 국가가 나일강 물을 나눌 시에 심각한 물부족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며 댐 건설에 반대하고 있어, 나일강의 물을 둘러싼 긴장관계는 댐 프로젝트 진행과 함께 점점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분석 [추후 전망] 나일강 유역 국가들 간의 물 분쟁은 국경 분쟁으로도 비화되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다. 2003년 12월에 들어, 수단과 국경지역인 서부의 감벨라(Gambela) 지역에서 토지와 거주권 문제를 둘러싼 종족간의 분쟁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종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깊어 언제든 폭동 재발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더욱이 2009년 2월에도 모얄(Moyale), Borana(보라나), Gehri(게리) 등 케냐와 에티오피아 국경 지대에서 토지와 용수 사용권을 둘러싸고 유혈충돌이 발생, 3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 이주민이 생겨났으며, 2011년 3월 30일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나일강 상류의 국가들(총7개국)이 수단-에티오피아 국경 ‘베니상굴-구모즈’ 서부지역에 ‘그랜드 댐’을 건설할 계획임을 밝히면서 연안 국가들의 긴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월에도 케냐북부의 모얄(Moyal)e 지방에서 있었던 유목 부족들 간의 유혈 충돌로 인해 4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이웃나라인 에티오피아 북부로 이주하였다. 그 배경에는 그 전해인 2011년 Moyale 지방에서 일어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유목 부족들 간에 목초지와 용수를 둘러싼 투쟁이 자리한다. 이번 유혈 충돌은 케냐 북부의 Moyale 지방에 거주하는 Borana 부족과 Gabra 부족 간에 일어나 국제분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수만 명이 에티오피아와의 국경지대로 삶의 터전을 옮김에 따라 에티오피아인들과의 긴장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Borana 부족과 Gabra 부족은 목초지와 물을 둘러싸고 자동소총과 machete1)를 동원한 유혈 충돌을 일으킴에 따라 적어도 1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 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2735    [그때그시절] - 졸라 졸라 졸라... 댓글:  조회:3499  추천:0  2019-10-12
졸라 "길림성에 남고싶어 장춘아태를 선택" (ZOGLO) 2019년10월10일 일찍 갑A시대를 주름잡았던 외적용병, 연변축구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졸라가 장춘아태 U11팀에서 지도자의 길을 이어가게 되였다.   1997년부터 연변오동팀에서 활약하였던 졸라는 은퇴후 청소년 훈련감독을 맡으며 연변축구에 많은 기여를 해왔었다. 그리고 올해 4월부터 장춘아태구단에 소속, 장춘아태 U11팀의 감독직을 맡으며 길림성의 축구꿈나무들의 양성에 힘을 싣고 있다.   아래는 졸라와 장춘아태구단의 인터뷰 내용이다.   Q: 왜서 장춘아태구단을 선택하게 되였는가?   졸라: 나와 나의 가족들이 중국을 좋아하고 길림성을 떠나기 싫어한다. 작년에 친구와 감독을 만나러 장춘아태팀에 왔었는데 그때부터 장춘아태구단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원래는 섬서 서안에도 갈 기회가 있었지만 길림성에 남고 싶어서 가지 않았다. 길림성에 남고 싶은건 내 마음속의 생각이다. 또한 장춘아태는 훌륭한 구단이기에 최종 장춘아태로 오게 되였다.   Q: 장춘아태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졸라: 이곳 생활에 금방 익숙해 졌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 동료들도 나를 잘 료해하고 나도 길림성이란 곳을 잘 알고 있기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Q: 장춘아태의 많은 감독들이 예전의 동료 혹은 적수였지 않은가?   졸라: 맞다. 많은 감독들과 예전에 같이 뽈을 찾었다. 비록 장춘에 왔지만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좌조개(左兆凯) 선수와 인연이 깊는데 지금은 어린 선수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많이 토론하고 있다.   Q: 섬서팀의 오스카 선수는 졸라가 발굴하여 중국에 영입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장춘아태에도 우수한 용병을 영입해 줄 생각이 있는가?   졸라: 당시 오스카를 영입하는 것은 연변팀의 생각이였지 나의 생각은 아니였다. 그러나 장춘아태구단에서도 그것을 원한다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 Q: 가족들이 모두 중국에 있는가?   졸라: 맞다. 가족들은 모두 연변에 있다. 그들도 나를 따라 곧 장춘에 올 것이다. 첫째 아이는 현재 상해에서 대학을 다니고 둘째 아이도 곧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Q: 자식들을 프로선수로 양성할 계획이 있는가?   졸라: 8살때에 공부를 할 것인가 축구를 찰 것인가 물어밨었는데 당시에는 공부를 하겠다고 답했다. 최근 고중을 졸업할 때가 되니 축구를 차겠다고 하는데 2년이나 훈련하지 않았기에 아마 힘들것 같다. 그러나 스스로 안된다고 포기하기 전까지는 지지해 주겠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졸라: 앞으로도 5년 내지 10년은 중국에서 일하기를 희망한다. 특히 장춘아태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 만약 장춘아태구단에서도 내가 남기를 원한다면 구단을 도와 많은 어린 선수들을 배양할 것이다. 그후에는 고향에 돌아가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힘쓰겠다.     /장춘아태축구구락부/연변라지오TV넷 
2734    [별의별] - "임신한 다이아몬드"... 댓글:  조회:3727  추천:0  2019-10-12
다이아몬드 안에 또 다이아… 이중 다이아몬드 세계 최초 발견 (ZOGLO) 2019년10월12일  [서울신문 나우뉴스] 러시아 국영 다이아몬드 채굴 기업 알로사(Alrosa)가 다이아몬드 속에 또 다른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는 이중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알로사는 이 다이아몬드 구조가 마치 큰 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를 닮았다 하여 ‘마트료시카 다이아몬드’라고 이름 지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러시아 연방 극동부에 위치한 야쿠티아 공화국의 니우르바(Nyurba) 광산에서 발견됐다. 외부 다이아몬드는 0.62 캐럿으로 크기는 4.8 x 4.9 x 2.8㎜이다. 내부 다이아몬드는 0.02 캐럿, 크기는 1.9 x 2.1 x 0.6㎜정도다. 외부 다이아몬드와 내부 다이아몬드 사이에는 공간이 있어 흔들면 내부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알로사 연구소에서는 이 다이아몬드를 라만 분광법과 적외선 분광법, X-레이 미세단층촬영을 통해서 구조와 생성 과정을 연구했는데 이 다이아몬드는 8억년 이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알로사 연구소의 올레크 코발추크는 이중 다이아몬드의 생성 과정을 2가지 가설로 제시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내부의 다이아몬드가 먼저 형성되었고 외부 다이아몬드가 차후에 형성되었다고 추정했는데, 첫번째 가설은 다이아몬드는 지구의 맨틀 부분에서 탄소 성분이 지구 내부의 고압과 고열에 의해서 생성되는데 이러한 생성 과정에서 맨틀 부분에 있던 광물질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고, 다이아몬드가 화산 활동과 함께 지구 표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섞여진 광물질 부분이 녹아 없어져 공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두번째 가설은 지구의 맨틀 부분에서 다이아몬드가 생성될 때 매우 빠른 성장으로 인해 내부 다이아몬드에 다공성의 다결정질 부분이 생성되었고 차후에 더 강력한 맨틀 활동으로 이부분이 녹아 없어지면서 중간에 공간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했다. 알로사는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이 다이아몬드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석 감정기관인 미국 GIA (Gemological Institute of America)에 보낼 예정이다. 알로사 대변인은 “마트료시카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 역사상 최초로 발견된 매우 특이한 다이아몬드로서 가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2733    [별의별] - 38... 댓글:  조회:3312  추천:0  2019-10-12
이란 여성 축구장 처음 들어가던 날…"벅찬 눈물 흘러" [ 2019년 10월 11일 ]     축구경기장 광고판에는 여성용품 광고…출입구·관람석 분리   "빈자리 많은 데 왜 여성에 표 안 파나" 항의도 이란 여성 축구경기장 입장 38년만에 첫 허용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38년 만에 드디어 이란에서 축구경기장의 문이 여성에게도 열렸다.   10일(현지시간) 오후 테헤란 아자디스타디움 19번 게이트로 이란 국기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두른 여성이 줄지어 입장했다.   이란축구협회는 남성 관중과 섞이지 않게 하려고 여성 관객을 경기 4시간 전인 이날 오후 1시부터 입장하도록 했다. 출입구와 주차장도 여성 전용 구역을 마련했고 관람석도 높이 2m 정도의 분리 벽을 쳤다.     이란축구협회 관계자는 "혹시라도 여성 관중이 불상사를 당할 수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다"라고 설명했다.   축구장에 '당당하게' 입장한 여성 팬들은 킥오프가 한참 남았는데도 끊임없이 함성을 지르고 부부젤라를 불었다.   흡사 여성만을 위한 파티가 열린 것처럼 흥겨운 분위기가 경기 끝까지 내내 이어졌다.   한 여성 관객은 "그간 처벌될 각오를 하고 남장을 한 채 가슴을 졸이며 몰래 입장했었는데 떳떳하게 아자디스타디움에 들어오니 너무너무 기쁘고 벅차다. 축구장에 들어올 수 있다니 정말 큰 일이다"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란 3500명 여성축구팬 , 오늘 밤 38년만에 테헤란 아자디경기장 달군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1월10일 테헤란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AFC(아시아축구연맹) 결승전 경기를 구경하고 있다. 이날 경기장에는 이란 축구협회와 관련된 여성팬들 일부가 입장, 이란 페르세폴리스와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의 경기를 관람했다. [EPA=연합뉴스] 10일 오후 (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아자디경기장에 여성 축구팬들의 함성이 38년만에 울린다. 이날 이란은 캄보디아와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홈경기를 갖는다.    [서소문사진관] 이란 - 캄보디아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열려 10일 열리는 이란과 캄보디아 월드컵 예선전 경기 티켓을 예매한 이란 여기자가 8일 아자디경기장 앞에서 AFP 기자에게 온라인티켓을 보여주고 있다.[AFP=연합뉴스]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여성 축구팬들의 경기장 관람을 금지한 이란 정부는 FIFA(국제축구연맹)의 거듭된 항의를 받아왔다. 특히 지난달 이란 프로축구리그 경기가 열린 아자디경기장에서 남장을 한 여성이 체포 후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란 정부는 마침내 여성 축구팬의 경기장 관람을 허용했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0월16일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 볼리비아의 남자축구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경기장에는 이란 대표팀 선수와 협회의 여성 관계자들이 입장했다.[AP=연합뉴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1월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 페르세폴리스와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의 AFC 결승전 경기 응원을 하고 있다. 가시마 앤틀러스가 페르세폴리스를 꺽고 AFC 우승컵을 가져갔다.[EPA=연합뉴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1월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 페르세폴리스와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의 AFC 결승전 경기 응원을 하고 있다.[EPA=연합뉴스]    이란 정부는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지는 아자디경기장 좌석과 출입구에 남녀를 구분하고 여성 전용 화장실 등을 마련하는 조치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11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축구경기 도중 관중들이 이란 여성의 축구장 출입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0월16일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 볼리비아의 남자축구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앞쪽으로 남녀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비워둔 좌석이 보인다. [AP=연합뉴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0월16일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 볼리비아의 남자축구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미 작년 10월과 11월에도 아자디경기장은 일부 여성축구팬이 남자 축구경기를 관전한 바가 있다. 하지만 당시 관중석에 앉은 여성들은 일반 축구팬이 아닌 이란 대표팀 선수들의 가족과 이란 축구협회와 관련된 여성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오늘(10일) 열리는 이란의 월드컵 예선전이 일반 여성축구팬이 38년 만에 남자 축구경기를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첫 경기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1월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 페르세폴리스와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의 AFC 결승전 경기 응원을 하고 있다.[EPA=연합뉴스] 이란 여성축구팬들이 작년 11월 아자디경기장에서 열린 이란 페르세폴리스와 일본 가시마 앤틀러스의 AFC 결승전 경기 응원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한 여성 축구팬이 지난 1월 16일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서 열린 이란과 이라크의 AFC 남자축구 경기에서 이란 국기를 들고 응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온라인을 통해 판매된 여성 축구팬들을 위한 3500장 티켓은 순식간에 다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축구경기 이후에도 여성 스포츠팬들의 경기장 출입이 전면 허용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FIFA 랭킹 23위인 이란은 아시아 최강이다. 한국은 37위.  [출처: 중앙일보] 이란 3500명 여성축구팬 , 오늘 밤 38년만에 테헤란 아자디경기장 달군다
2732    문자가 없으면 력사서도 전통 문학도 없다... 댓글:  조회:3529  추천:0  2019-10-11
《찌아찌아족이 사는 부퉁 섬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서울에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까지 비행기로 7시간. 자카르타에서 다시 마카사르를 들러 큰다리(Kendari)까지 비행기로 5시간을 더 가야 했다. 큰다리에서 하루 두 번 있는 배를 타고 5시간 걸려 바다를 건넌 뒤에야 부퉁 섬에 도착했다. 8일 오후 3시 45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부퉁 섬에 도착한 것은 9일 오후 9시. 28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한글을 쓰는 찌아찌아 사람들을 보자마자 피곤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찌아찌아 사람들은 웃음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꼬레아?”라며 관심을 보였다. 기자가 “할로(halo·영어의 헬로와 같음)”라고 손을 흔들자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며 깔깔 웃었다. 11일 먼 이국에서 만난 찌아찌아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들이 쓰는 한국말로 금방 정겹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한국인의 발걸음이 거의 없었던 곳. 가는 길도 마음도 멀기만 했던 부퉁 섬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쓴다. 찌아찌아족에겐 고유의 말이 있지만 글은 없었다. 지키고 싶은 아름다운 말이 있어도 짧은 문학작품 하나 글로 남기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글을 글로 가지게 되면서 찌아찌아족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찌아찌아족은 근대까지 고립을 자처하며 자기만의 문화를 고수해 온 덕분에 독특한 전통 문화를 때 묻지 않은 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바우바우 시내에는 그들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녹아 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닭을 키우며 한가롭게 사는 곳 옆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둘레 2.47km의 ‘크레톤 요새’가 있다. 1542년 이 섬에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첫 술탄(Sultan)이 된 왕의 무덤도 마을이 내다보이는 곳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전통 춤인 린다춤과 무술을 가르쳐온 라사미리 씨(46)는 “찌아찌아족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고 자랑했다. 찌아찌아족은 해마다 두 번씩 전통 춤과 무술, 음악을 미리 부족 주민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내기철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면서, 수확 뒤 감사 인사를 드리며 축제를 열었지만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8월 17일 독립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공연을 펼친다. 공연은 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제단인 바루가 앞에서 열린다. 찌아찌아족은 바루가를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들어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글이 없어 이렇다 할 역사서나 전통 문학이 하나도 없다. 글이 없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 보니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소멸돼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바루가 앞에서 열린 찌아찌아 전통 공연에서 1등상을 거머쥔 아리스 씨(23)는 “직접 전통 춤을 배워 소중한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어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글이 없다는 게 우리에게 모자란 부분이었다”며 “앞으로 한글을 통해 찌아찌아족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고교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카사타니아 양(15·여)은 찌아찌아족인 아버지와 삼촌, 어머니에게서 찌아찌아족의 전설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전설은 많지 않다. 찌아찌아어로 된 이야기를 인도네시아어로 그대로 번역하기도 힘들고 어린 시절 잠결에 들었던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키만큼 긴 여자가 연인을 기다리다 돌이 됐대요.” 아버지가 찌아찌아어로 들려준 길고 긴 망부석 이야기 중에서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카사타니아 양은 “책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잊어버리지 않고 친척 동생에게도 자세히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글 수업에 열심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그는 한글 공책을 펼쳐 들었다. ‘바하사 찌아찌아’ 교과서도 30권밖에 없어 초등학교 4개 반이 조금씩 나눠 가졌는데,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아비딘 선생님이 쓰는 한 권밖에 없다. 카사타니아 양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써준 노트 필기만 가지고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은 빈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한다. 카사타니아 양의 어머니 와사리 씨(52)는 찌아찌아어밖에 할 줄 모른다.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도 함께 할 줄 알지만 와사리 씨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부모님께 배운 찌아찌아어만 한다. 카사타니아 양은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어만 해 글을 쓸 줄 모르는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단다. 그런 딸을 보며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모범생인 막내딸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한국어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영어 선생님이 한글 전도사로 아비딘 씨, 이호영 교수와 교과서 내… 사전 출간 계획도▼ 바우바우 시 제6고등학교(SMA6) 영어 교사인 아비딘 씨(33)는 한여름 인도네시아에서도 긴팔에 잠바를 입고 다닌다. “한국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아비딘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기를 빼고는 1년 내내 무더운 날씨 속에 살아 추위를 많이 타는 인도네시아인 아비딘 씨는 한국 이야기를 꺼내자 추웠던 기억에 몸서리쳤다. 서울대 이호영 교수(언어학)와 함께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를 만들기 위해 아비딘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서울대 근처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16.5m²(5평)짜리 원룸을 구해 놓고 혼자 5개월을 지냈다. 무슬림이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어 학교 밥 대신 근처 시장에서 쌀과 생선을 사다 밥을 지어 먹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먼 고향에 두고 온 그는 코끝이 시리게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 생각이 났다. 같이 한국을 찾은 다른 영어 선생님은 매일 가족 생각에 울다가 포기하고 부퉁 섬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깊숙한 섬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한국에까지 와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된 것은 한글로 된 교과서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전태현 교수(말레이·인도네시아통번역학과)의 소개로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자기 글이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주고 싶었던 전 교수는 고유의 말은 있지만 글이 없고 중앙정부의 견제가 덜한 부족을 찾다가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이 교수는 지난해 7월 찌아찌아족을 만나러 와 바우바우 시의 아미룰 타밈 시장과 교육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한글을 쓰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이 교수와 아비딘 씨는 내년 여름 전까지 ‘바하사 찌아찌아’ 2권을 만들 계획이다. 찌아찌아어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아랍어 등 4개 국어로 된 사전도 낼 계획이다. 바우바우(인도네시아)= 동아일보 /신민기 기자
2731    문자가 없으면 력사서도 전통 문학도 없다... 댓글:  조회:3443  추천:0  2019-10-11
《찌아찌아족이 사는 부퉁 섬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서울에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까지 비행기로 7시간. 자카르타에서 다시 마카사르를 들러 큰다리(Kendari)까지 비행기로 5시간을 더 가야 했다. 큰다리에서 하루 두 번 있는 배를 타고 5시간 걸려 바다를 건넌 뒤에야 부퉁 섬에 도착했다. 8일 오후 3시 45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부퉁 섬에 도착한 것은 9일 오후 9시. 28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한글을 쓰는 찌아찌아 사람들을 보자마자 피곤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찌아찌아 사람들은 웃음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꼬레아?”라며 관심을 보였다. 기자가 “할로(halo·영어의 헬로와 같음)”라고 손을 흔들자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며 깔깔 웃었다. 11일 먼 이국에서 만난 찌아찌아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들이 쓰는 한국말로 금방 정겹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한국인의 발걸음이 거의 없었던 곳. 가는 길도 마음도 멀기만 했던 부퉁 섬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쓴다. 찌아찌아족에겐 고유의 말이 있지만 글은 없었다. 지키고 싶은 아름다운 말이 있어도 짧은 문학작품 하나 글로 남기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글을 글로 가지게 되면서 찌아찌아족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찌아찌아족은 근대까지 고립을 자처하며 자기만의 문화를 고수해 온 덕분에 독특한 전통 문화를 때 묻지 않은 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바우바우 시내에는 그들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녹아 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닭을 키우며 한가롭게 사는 곳 옆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둘레 2.47km의 ‘크레톤 요새’가 있다. 1542년 이 섬에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첫 술탄(Sultan)이 된 왕의 무덤도 마을이 내다보이는 곳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전통 춤인 린다춤과 무술을 가르쳐온 라사미리 씨(46)는 “찌아찌아족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고 자랑했다. 찌아찌아족은 해마다 두 번씩 전통 춤과 무술, 음악을 미리 부족 주민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내기철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면서, 수확 뒤 감사 인사를 드리며 축제를 열었지만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8월 17일 독립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공연을 펼친다. 공연은 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제단인 바루가 앞에서 열린다. 찌아찌아족은 바루가를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들어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글이 없어 이렇다 할 역사서나 전통 문학이 하나도 없다. 글이 없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 보니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소멸돼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바루가 앞에서 열린 찌아찌아 전통 공연에서 1등상을 거머쥔 아리스 씨(23)는 “직접 전통 춤을 배워 소중한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어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글이 없다는 게 우리에게 모자란 부분이었다”며 “앞으로 한글을 통해 찌아찌아족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고교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카사타니아 양(15·여)은 찌아찌아족인 아버지와 삼촌, 어머니에게서 찌아찌아족의 전설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전설은 많지 않다. 찌아찌아어로 된 이야기를 인도네시아어로 그대로 번역하기도 힘들고 어린 시절 잠결에 들었던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키만큼 긴 여자가 연인을 기다리다 돌이 됐대요.” 아버지가 찌아찌아어로 들려준 길고 긴 망부석 이야기 중에서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카사타니아 양은 “책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잊어버리지 않고 친척 동생에게도 자세히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글 수업에 열심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그는 한글 공책을 펼쳐 들었다. ‘바하사 찌아찌아’ 교과서도 30권밖에 없어 초등학교 4개 반이 조금씩 나눠 가졌는데,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아비딘 선생님이 쓰는 한 권밖에 없다. 카사타니아 양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써준 노트 필기만 가지고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은 빈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한다. 카사타니아 양의 어머니 와사리 씨(52)는 찌아찌아어밖에 할 줄 모른다.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도 함께 할 줄 알지만 와사리 씨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부모님께 배운 찌아찌아어만 한다. 카사타니아 양은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어만 해 글을 쓸 줄 모르는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단다. 그런 딸을 보며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모범생인 막내딸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한국어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영어 선생님이 한글 전도사로 아비딘 씨, 이호영 교수와 교과서 내… 사전 출간 계획도▼ 바우바우 시 제6고등학교(SMA6) 영어 교사인 아비딘 씨(33)는 한여름 인도네시아에서도 긴팔에 잠바를 입고 다닌다. “한국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아비딘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기를 빼고는 1년 내내 무더운 날씨 속에 살아 추위를 많이 타는 인도네시아인 아비딘 씨는 한국 이야기를 꺼내자 추웠던 기억에 몸서리쳤다. 서울대 이호영 교수(언어학)와 함께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를 만들기 위해 아비딘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서울대 근처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16.5m²(5평)짜리 원룸을 구해 놓고 혼자 5개월을 지냈다. 무슬림이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어 학교 밥 대신 근처 시장에서 쌀과 생선을 사다 밥을 지어 먹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먼 고향에 두고 온 그는 코끝이 시리게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 생각이 났다. 같이 한국을 찾은 다른 영어 선생님은 매일 가족 생각에 울다가 포기하고 부퉁 섬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깊숙한 섬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한국에까지 와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된 것은 한글로 된 교과서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전태현 교수(말레이·인도네시아통번역학과)의 소개로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자기 글이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주고 싶었던 전 교수는 고유의 말은 있지만 글이 없고 중앙정부의 견제가 덜한 부족을 찾다가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이 교수는 지난해 7월 찌아찌아족을 만나러 와 바우바우 시의 아미룰 타밈 시장과 교육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한글을 쓰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이 교수와 아비딘 씨는 내년 여름 전까지 ‘바하사 찌아찌아’ 2권을 만들 계획이다. 찌아찌아어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아랍어 등 4개 국어로 된 사전도 낼 계획이다. 바우바우(인도네시아)= 동아일보 /신민기 기자
2730    한글 띄어쓰기는 외국인이 처음 도입했다?!... 댓글:  조회:4431  추천:0  2019-10-11
시리즈Fact Check   Fact Check! 한글날 - 띄어쓰기는 외국인이 처음 도입했다?!   CMS에듀     2019.09.25. 10:4586 읽음         안녕하세요. CMS멘토 입니다. 10월 9일은 한글창제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한글날 입니다. 한글날은 국경일로 지정됐을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CMS멘토와 함께 한글에 관련된 통설들의 진실을 체크해봅시다! 한글 띄어쓰기 외국인이 처음 만들었다?!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띄어쓰기기가  외국인이 의해 도입됐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그 주인공은 영국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입니다.  띄어쓰기가 적용된 최초의 한글 문헌이 1877년 존로스가 펴낸 ‘조선어 첫걸음 Corean Primer)’이기 때문입니다. 띄어쓰기가 없는 훈민정음 압록강을 건너온 한약 장수에게  한국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진 존 로스 목사는  한글 문장을 영어식으로 띄어 쓰고,  여기에 영어 단어로 발음을 표기했습니다. 이후에는 1896년 서재필, 주시경,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허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면서 한글 띄어쓰기가 더 보편화 됐답니다.   한글을 사용하는 또다른 민족이 있다?! 고유의 말은 있지만 고유한 문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인도네시아 북부의 소수부족 찌아찌아족은 2009년 표기언어로 한글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공식적인 채택은 아니었고 우리나라 정부 차원의 지원도 줄어 한글을 가르치던 ‘세종학당’이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입 10년이 지난 지금 찌아찌아족의 한글 교육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마을 길거리에는 한글로 찌아찌아족의 말을 표기한  ‘까르야바루’, ‘잘라 아마후다니’ 등의 한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찌아찌아족은 초등학교에선 한글로 찌아찌아어를 고등학교에선 한국어를 교과목으로 배우고 있다고 하는데요. 알파벳과 달리 하나의 글자에 하나의 소리가 대응되는 특징과 소리를 명확히 표기할 수 있다는 점이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선택한 이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찌아찌아어 회화 표기  자료: 사단법인 훈민정음학회 의미  한글 표기  감사합니다. 따리마까시 나는 찌아찌아 사람입니다. 인다우미안노 찌아찌아 사랑합니다. 인다우뻬엘루이소오 용서하세요. 모아뿌이사우 예 움베 아니오  찌아 한글은 세종대왕의 지시로 집현전 학자들 주도로 만들어졌다?! 2018년 한글문화연대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고 답한 사람은 17%,  세종대왕은 지시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은 25%에 달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가 함께 만들었다는 것으로 절반이 넘는 55%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학계의 의견은 다릅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 창제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세종 홀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것 입니다. 만약 집현전 학자들이 주도했다면  실록에 한글창제 과정이 지속적으로 등장해야 하지만  세종실록에는 한글창제 관련 기록은 단 한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한글 반포를 가장 반대한 이들이 집현전 최대 실세였던 최만리 등 이었다는 점도 세종의 단독 창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2729    재밋는 한글 배우기 6... 댓글:  조회:4400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한글을 그리다   수학동아     2018.10.01.          돋움, 바탕, 굴림, 궁서부터 안상수체까지. 문서 파일을 열어보면 폰트의 종류가 많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이렇게 다양한 폰트를 만드는 원리를 알면 내 글씨로도 폰트를 만들 수 있을까? 글_조혜인 기자 일러스트_김윤재 손글씨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유의 성향이 드러난다. 반면, 컴퓨터는 폰트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글꼴로 출력하기 때문에 개성을 표현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글자를 손으로 쓰기보다는 키보드로 입력하는 경우가 많아져 다양한 폰트가 나오고 있다. 폰트가 다양해지면서 원하는 모양과 크기를 선택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직접 원하는 글씨체를 만들 수도 있게 됐다. 현재 사용하는 폰트는 주로 벡터 방식을 이용하는데, 트루타입폰트(.ttf)와 오픈타입 폰트(.otf)가 대표적이다. 트루타입은 용량이 적어 속도는 빠르지만 해상도가 조금 떨어지는 반면에 오픈타입은 해상도는 높지만 용량이 커서 속도는 느리다. 두 방식은 글자 모서리 부분을 얼마나 세밀하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폰트는 비트맵 방식과 벡터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 비트맵 폰트는 픽셀이라고 부르는 사각형 모양의 점을 이어 붙여 만든다. 이미지를 확대하면 윤곽선이 계단 모양으로 깨져 지금은 폰트를 만들 때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벡터 폰트는 크기와 방향을 모두 표현하는 벡터를 이용한 수학식으로 만든 문 자의 형태를 선분이나 곡선 데이터의 집합으로 입력해 표시한다. 곡선이기 때문에 확대를 해도 원래와 모양이 같다.   물결표로 폰트를 만든다!? 고무줄의 양끝을 고정해 놓고 중간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해보자. 팽팽한 직선이었던 고무줄이 여러 곡선이 된다. 원하는 지점을 어떻게 끌어당기느냐에 따라 고무줄은 다양한 모양과 방향으로 늘어난다. 물결표 “~”를 그리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시작점 A에서 위로 볼록하게 포물선을 그린 뒤,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번에는 오목한 포물선을 그려 점 D에 도착한다. 이때 점 B와 점 D는 곡선을 위아래로 잡아당겨 방향만 유도하고 곡선 위를 지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베지에 곡선이라는 수학식이 숨어 있다. 두 점을 잇는 선분을 일정한 비율로 나눈 점인 내분점을 이용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점의 집합이 베지에 곡선이 된다. 세 개의 점을 이용하는 베지에 곡선은 다음과 같은 2차식으로 표현된다. P (t )=(1-t ){(1-t )A+tB }+t { (1-t )B +tC }, 0 ≤ t ≤ 1 (1-t)A+tB는 A와 B를 잇는 선분을 t:(1-t)의 비율로 나누는 내분점을 의미하고, (1-t)B+tC는 B와 C를 잇는 선분을 t:(1-t)로 나누는 내분점이다. 두 내분점을 차례대로 M과 N이라 두고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P (t )=(1-t )M +tN, 0 ≤ t ≤ 1 두 내분점 M과 N을 잇는 선분을 t:(1-t)로 나눈 점이 P(t)이며, t가 0에서 1까지 움직이면서 포물선이 그려진다. 이 식에서 이용되는 세 개의 점을 ‘조절점’이라고 한다. 양 끝점(A,C)은 고정돼 있지만 중간에 있는 점(B)은 방향만 알려주고 선 위를 지나지는 않는다. 선을 계속 연결해 윤곽을 만들어놓고, 원하는 점을 당겨 조절하면 부드러운 곡선이 나온다. 조절점이 많을수록 곡선이 정교해진다. 처음 그린 베지에 곡선의 도착점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설정해 같은 방법으로 그린다. 최초의 시작점이 도착점이 될 때까지 연속해서 그리면 문자의 윤곽선이 완성된다. 세 점만 이용하면 2차식의 포물선이 그려지고, 네 점을 사용하면 3차식의 베지에 곡선이 물결 모양을 만든다. 베지에 3차식으로는 두 번의 굴곡을 한 번에 나타낼 수 있어 폰트를 만들 때 베지에 2차식을 쓸 때보다 더 효율적이다. 트루타입은 베지에 2차식을 사용하고 오픈타입은 3차식을 사용해 앞서 말한 차이가 나타난다.
2728    재밋는 한글 배우기 5... 댓글:  조회:4115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고딕과 명조의 차이는?   수학동아     2018.10.02.          돋움, 바탕, 굴림, 궁서부터 안상수체까지. 문서 파일을 열어보면 폰트의 종류가 많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이렇게 다양한 폰트를 만드는 원리를 알면 내 글씨로도 폰트를 만들 수 있을까? 글_조혜인 기자 일러스트_김윤재 고딕과 명조의 차이는? 폰트 개발 업체인 정글시스템의 폰트 개발 프로그램인 ‘드리거’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드리거로 만든 고딕체와 명조체를 보면 같은 문자라도 조절하는 점의 개수가 다르다. 완전한 원과 선분으로만 이뤄진 고딕체와 다르게 명조체는 선 끝마다 돌기가 있기 때문이다. 굴곡이 많은 명조체는 제작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고딕체 ‘ㅎ(위)’보다 명조체 ‘ㅎ(아래)’에 조절하는 점이 훨씬 많다. 조절하는 점이 많을수록 선에 굴곡도 많다. 사진/정글시스템 서양은 펜으로 글씨를 썼고 한국을 포함한 동양은 붓글씨를 썼다. 이 차이가 폰트 제작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알파벳 ‘O’나 ‘Q’의 원은 어느 부분에서나 일률적으로 두께가 같은 완전한 동그라미를 이룬다. 이렇게 로마자는 기본이 되는 원이 있어 다양하게 변형하는 게 쉽다. 반면 붓글씨의 ‘ㅇ’은 선의 굵기가 대칭적이지 않고 기울어져 있으며 돌기가 있다. 로마자보다 모양이 훨씬 복잡하고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명조체는 디자인하기 가장 어려운 폰트로 알려져 있다.   한글 1만 1172자를 전부 만들어야 할까? 알파벳은 글자 하나하나가 그대로 완성형이라 다음에 오는 문자에따라 모양이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알파벳을 가장 균형 있게 만드는 최적의 비율에 대한 연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글은 초성, 중성, 그리고 종성을 합쳐 만드는 조합형 서체라서 하나의 자소만으로 글자를 표현할 수 없다. 특히, 기본 서체의 경우는 같은 자음이라도 모든 글자에 동일한 크기와 모양으로 사용할 수 없다. 초성에 오는 자소의 크기나 모양에 중성과 종성이 영향을 받아 전체 글자 모양의 균형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문 알파벳은 대문자와 소문자를 모두 합해도 52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폰트를 만드는 과정이 한글이나 한자에 비해 쉽다. 그래서 알파벳 서체의 개발이 빨랐다. 사진/GIB, Lees 1만 1172자의 한글을 전부 디자인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한글 폰트 제작 프로그램에 초성과 중성에 오는 자소에 따라 어울리는 모양의 종성이 오게 하는 조합 법칙을 미리 입력해 놓는다. ‘가’와 ‘구’는 초성이 모두 ‘ㄱ’인데 모양이 다르다. 고딕과 명조는 모든 글자가 같은 네모 틀에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딕과 명조의 종성은 중성에 있는 모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ㅏ‘와 ’ㅓ’ 같은 세로모양의 모음이 올 때와 ‘ㅜ’와 ’ㅠ‘와 같은 가로로 획을 긋는 모음이 올 때는 같은 자소라도 종성의 모양이 달라진다. ‘강’이라는 글자와 ‘겅’이라는 글자가 입력했을 때는 같은 모양의 종성(‘ㅇ’)을 사용하지만, ‘궁’에 쓰이는 ‘ㅇ’은 같은 자소라도 좀 더 납작한 모양으로 다르다. 고딕과 명조는 모든 글자를 같은 네모틀에 맞춰 만들기 때문에 미세하게 달라지는 모양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글자를 조합할 때 경우의 수가 많아 제작이 어렵지만, 균형이 잘 맞고 가독성이 높아 사람들이 꾸준히 이용한다. 하지만 모든 폰트에 균형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흘림체처럼 손글씨에서 착안해 만든 폰트는 네모틀에 맞춰 제작하지도 않고 글자 모양에 예외를 적용하기도 한다.   유행에 따라 바뀌는 글씨체 고딕, 견고딕, 그리고 맑은 고딕은 어떻게 다를까? 기본적으로 고딕의 모양을 유지하지만 유행에 따라 조금씩 바뀌면 이름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기본 폰트의 굵기를 두껍게, 또는 얇게 만들어 차이를 뒀다. 이후에 한글은 로마자와 다르게 블록을 쌓듯이 만든 글자라서 정사각형틀에 맞추면 오히려 왜곡이 일어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세로로 긴 직사각형틀에 맞춰진 폰트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맑은 고딕이다. 전 세계에는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서체가 쓰이고 있다. 사진/GIB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만든 폰트도 있다. 표지에 쓰여 있는 ‘수학동아’를 보면 ‘동’의 종성 ‘ㅇ’과 ‘아’의 초성 ‘ㅇ’은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ㅇ’이다. 이 폰트는 정해진 네모틀을 벗어나 한글 창제 원리에 따라 만든 ‘안상수체’다. 끝소리는 첫소리를 다시 쓴다는 훈민정음 조항대로 안상수체는 종성의 자음 모양이 초성에 오는 자음 모양과 같다. 그럼 내 글씨체로도 폰트를 만들 수 있을까? 사람이 쓴 손글씨는 쓸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폰트로 표현하기에는 어렵다. 또한, 손글씨를 정확히 표현하려면 1만 1172자를 모두 써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다. 그 대신 최소한의 손글씨 입력으로 개인 서체를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앱이 있다. 정글시스템이 개발한 ‘Mr.마이글’은 손글씨 12개만 입력하면 손쉽게 개인 폰트를 만들 수 있다. 지금 한번 ‘Mr.마이글’로 나만의 폰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2727    재밋는 한글 배우기 4... 댓글:  조회:4829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대칭과 회전으로 만든 한글   수학동아     2018.10.03.          10월 9일은 한글날이야.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지. 이번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가르쳐 주는 사이버외교관이 되기로 했어. 처음 한글을 가르쳐 줄 친구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사리안또란 친구야.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는 작년부터 한글을 문자로 쓰고 있어. 사리안또에게 한글을 쉽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을까? 글_장경아 기자 일러스트_김재희 사리안또, 반가워. 영어를 배울 때 먼저 알파벳을 배우는 것처럼, 한글을 배우려면 한글 자음과 모음을 알아야 해. 한글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이뤄져 있어. 한글을 만든 원리를 알면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우선 한글은 소리를 표현한 문자야. 소리를 낼 때 움직이는 입술과 혀, 어금니, 목구멍의 모양을 관찰해서 문자로 만들었지. 어금닛소리 ㄱ(기역)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 ㄴ(니은)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 ㅁ(미음)은 입술모양, ㅅ(시옷)은 이의 모양, 그리고 ㅇ(이응)은 목구멍 모양을 본 따 만들었어. 이 다섯 개 자음을 기본자음이라고 해. 한글은 기본자음 ㄱ, ㄴ, ㅁ, ㅅ, ㅇ에 소리의 성질에 따라 획을 더해서 다른 자음을 만들었지. 예를 들어 ㄴ보다 강한 소리인 ㄷ(디귿)은 ㄴ에 획을 더해서 만들고, ㄷ보다 강한 소리 ㅌ(티읕)은 ㄷ에 획을 더해서 만들어. ㄴ과 ㄷ, 그리고 ㅌ은 모두 혀가 잇몸에 붙는 비슷한 소리지만 세기에 따라 모양이 다른 거야. 또 ㄲ, ㄸ, ㅃ, ㅆ, ㅉ와 같은 겹자음은 같은 자음을 반복해 원래 자음보다 된 소리를 표현해. 이렇게 획을 더해서 만드는 것을 가획이라고 불러. 한글은 획의 수가 늘어날수록 소리의 세기도 강해지는 비례관계로 글자를 만든 거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음은 선대칭이나 점대칭 모양을 하고 있어 안정적이고 균형을 이뤄. 한글 자음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선대칭 도형과 점대칭 도형, 그리고 점대칭 관계가 있어. 세종대왕이 지은 ‘훈민정음’은 국보 70호로 지정됐다. 선대칭 도형을 이루는 자음에는 ㄷ, ㅂ(비읍), ㅅ, ㅈ(지읒), ㅊ(치읓), ㅌ, ㅎ(히읗)이 있고, 점대칭 도형을 이루는 자음은 ㅁ, ㅇ, ㄹ(리을), ㅍ(피읖), 그리고 ㄱ과 ㄴ은 점대칭 관계가 돼. 또 점대칭 도형 중 ㅁ, ㅇ, ㅍ 은 점대칭 도형이면서 선대칭 도형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모음은 어떨까? 모음은 하늘을 의미하는 •(천)과 땅을 뜻하는 ㅡ(지),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ㅣ(인)을 기본으로 만들었어. 도형을 다루는 기하학의 기본 요소인 점과 선을 이동하고 회전해 여러 개의 모음을 만든 거야. 먼저 ㅡ는 반시계방향으로 90° 회전하면ㅣ가 돼. 그리고 ㅡ에 획을 추가해 만든 모음 ㅗ를 반시계방향으로 90° 씩 회전하면 모음 ㅓ, ㅜ, ㅏ를 만들 수 있지. 또 모음 ㅗ에 획을 더 그어 만든 ㅛ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반시계방향으로 90°씩 회전하면 ㅕ,ㅠ,ㅑ를 만들 수 있어. 이렇게 3개의 모음을 회전해 모두 10개의 모음을 만들지. 회전을 이용하면 한 모양을 여러가지로 활용해 경제적이야. 처음 한글 문자를 봤을 때 20개가 넘는 자음과 모음을 어떻게 외워야 할지 막막했어. 그런데 원리를 알고 나니까 쉽게 외울 수 있을 것 같아. 가획과 대칭으로 만든 자음은 모양이 아름답고, 모음은 회전 덕분에 같은 모양을 활용할 수 있으니 말이야.  
2726    재밋는 한글 배우기 3... 댓글:  조회:3428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한글은 디지털에도 안성맞춤   수학동아     2018.10.08.          10월 9일은 한글날이야.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지. 이번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가르쳐 주는 사이버외교관이 되기로 했어. 처음 한글을 가르쳐 줄 친구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사리안또란 친구야.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는 작년부터 한글을 문자로 쓰고 있어. 사리안또에게 한글을 쉽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을까? 글_장경아 기자 일러스트_김재희 한글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만든 글자지만 요즘 시대에도 손색이 없는 첨단 글자야. 아마도 한국이 IT산업이 발달해 인터넷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에도 한글이 공을 세운 것 같아. 우선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쓰기 때문에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이 쉬워. 모음은 오른손으로, 자음은 왼손으로 입력하기 때문에 입력 속도도 빠르고 말이야.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의 한자와 비교해 보면 한글의 위대함이 더 빛나는 걸 알 수 있어.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뜻글자인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결국 중국 사람들은 한자 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입력한 뒤 한자로 바꾸는 방법을 쓰기로 했어. 우리가 한자를 쓸 때도 한글을 입력한 뒤 한자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야. 속도와 정확성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한자를 입력하는 속도와 한글을 입력하는 속도를 비교하면 한글이 무려 7배나 빠르다고 해. 이번엔 영어와 비교해 볼까? 영어는 자음과 모음이 번갈아 나타나는 규칙이 없어서 한 손으로 여러 번 자판을 입력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READ’란 단어를 입력하려면 왼손으로만 연달아 4번 입력해야 하는 불편을 겪지. 이제 컴퓨터로 한글을 입력하는 두 종류의 키보드에 대해 말해 줄게. 우리는 대부분 자음을 왼손으로, 모음을 오른손으로 입력하는 2벌식 키보드를 쓰고 있어. 1949년 최초로 3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공병우 박사. 사진/동아일보 또다른 키보드로는 3벌식 키보드가 있는데, 3벌식 키보드는 초성, 중성, 종성을 한꺼번에 입력해 2벌식보다 속도가 빨라.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가 처음 만들었고, 무려 1분에 1200타까지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고 해. 뿐만 아니라 한글은 입력 버튼이 적은 휴대폰에서 더 진가를 발휘해. 한글 자음은 가획 원리로 만들었고, 모음은 모두 점과 선분으로 만들어 몇 개의 버튼만 있어도 한글을 입력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야. 휴대폰에서 한글을 입력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어. 첫 번째, 천지인방법은 모음을 최대한 적게 입력하기 위해 만든 방법이야. 모음 버튼은 겨우 세 개. 세 개의 버튼으로 20개가 넘는 모음을 모두 입력할 수 있어. 두 번째, 나랏글방법은 자음 입력을 최대한 적게 해. 자음을 만들 때 획을 더하는 원리를 이용해 가획 버튼을 만들었지. 나랏글방법으로 ㅋ을 입력하려면 ‘ㄱ+가획버튼’을 누르면 돼. 마지막으로 한글Ⅱ는 천지인방법과 나랏글방법의 혼합형으로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만든 방법이야. 이처럼 한글은 만들어진 지 500년이 넘었지만 첨단 시대에도 잘 어울려. 소리도 다양해 다른 나라 언어를 표현하기에도 좋고 말이야. 한글로 만들 수 있는 글자 개수와 소리 개수를 알고 나니까 한글은 정말 세계적인 문자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아. 또 컴퓨터와도 잘 어울리는 문자여서 미래형 문자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바우바우시에서 한글을 문자로 쓰게 된 것도 한글의 이런 장점 때문이겠지.  
2725    재밋는 한글 배우기 2... 댓글:  조회:3729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조합으로 만든 한글 글자는 몇 개일까?   수학동아     2018.10.07.          10월 9일은 한글날이야.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지. 이번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가르쳐 주는 사이버외교관이 되기로 했어. 처음 한글을 가르쳐 줄 친구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사리안또란 친구야.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는 작년부터 한글을 문자로 쓰고 있어. 사리안또에게 한글을 쉽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을까? 글_장경아 기자 일러스트_김재희 사리안또, 오늘은 본격적으로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 주려고 해. 영어와 다르게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쓰면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초성(자음)과 중성(모음)으로 한 글자를 만드는 이분법과, 초성(자음)과 중성(모음), 그리고 종성(자음)으로 한 글자를 만드는 삼분법 두 가지 가 있지.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개로 아주 많은 글자를 만드는 데, 간단한 곱셈으로 그 개수를 구할 수 있어. 그리고 한글 자음은 14개지만 같은 자음을 겹쳐 쓰는 겹자음과 서로 다른 자음을 써 받침에만 쓰는 받침 겹자음이 있어. 또 모음에는 두 개의 모음을 합해서 쓰는 이중모음도 있지. 한글로 글자를 만들 때는 기본 자음과 모음 말고도 겹자음, 이중모음 등 다양한 자음과 모음이 쓰이는 거야. 집합 A는 자음 하나로 이뤄진 집합, B는 같은 자음이 두 개로 이뤄진 집합, C는 서로 다른 자음으로 이뤄진 받침집합, D는 하나의 모음으로 이뤄진 집합, E는 서로 다른 모음 두 개로 이뤄진 집합이다. 그리고 집합 A의 원소 개수를 n(A)로 표시한다. 초성에 올 수 있는 자음은 집합 A와 B야. n(A) + n(B) = 19개가 되지. 중성에는 모든 모음이 올 수 있으니까 모음 집합인 D와 E가 돼. n(D) + n(E) = 21개야. 그리고 종성에는 집합 A와 집합 C의 받침 자음이 모두 올 수 있고, 집합 B에서는 ㄲ, ㅆ 두 가지만 골라서 써. 따라서 받침 개수는 n(A) + n({ㄲ, ㅆ}) + n(C) = 14 + 2 + 11 = 27개가 돼. 그런데 받침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종성에 올 수 있는 받침 경우의 수는 27에서 1을 더해야 해. 이렇게 계산한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에 올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곱하면 19×21×28 = 1만 1172개가 되지. 조합으로 무려 1만 1172개의 글자를 만들 수 있어. 수학동아 표지 글씨체는 안상수체다. 안상수체는 초성, 중성, 종성의 모양과 크기가 같은 글씨체로 조합형 폰트의 대표적인 예다. 그렇지만 1만 1172가지 글자가 모두 다른 소리를 내는 건 아냐. 우선 글자를 만들 때는 종성에 27가지 받침이 올 수 있지만 소리를 내는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ㅇ 으로 7가지밖에 없거든. ‘갔, 갓, 갇’이 ‘갇’으로 한 소리를 내듯이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소리를 내는 글자가 있기 때문이야. 또 초성 중에 중성에서 서로 다른 모음을 만나지만 같은 소리를 내게 하는 자음이 있어. 자음 ㅈ,ㅊ,ㅉ는 ㅑ, ㅒ, ㅕ, ㅖ, ㅛ, ㅠ와 글자를 만들 때 ㅏ, ㅐ, ㅓ, ㅔ, ㅗ, ㅜ 모음으로 소리가 나. 이런 경우에 속하는 글자의 수는 3×6×8=144개가 돼. 여기에 ㅇ을 제외한 자음과 모음 ㅢ로 만든 글자는 소리가 ㅣ로 나므로 18×1×8=144개도 빼야 해. 따라서 한글로 만들 수 있는 소리 개수는 19×21×8=3192에서 144를 두 번 뺀 2904개야. 만약 사라진 자음과 모음 4개가 더 있었다면 글자와 소리는 이보다 더 많았겠지. p.s. 원래 세종대왕이 처음으로 한글을 만들 때는 17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으로 지금보다 4개가 더 많았어. 모음 하나(•)와 자음 3개(ㅿ,ㆆ,ㆁ)가 더 있었지. 모음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아래 아)’는 한글이 만들어질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어. 그리고 자음 ㅿ은 여린 시옷으로 ㅇ과 ㅅ의 중간음을, ㆆ은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로 ㅎ보다 깊고 ㅇ보다 얕은 소리, 그리고 ㆁ은 여린 기역으로 목구멍과 혀 사이의 소리를 내.  
2724    재밋는 한글 배우기... 댓글:  조회:3772  추천:0  2019-10-11
시리즈수학동아 스페셜   [한글날 특집] 한글 자음 ‘ㅇ’은 숫자 0과 비슷해   수학동아     2018.10.09.          10월 9일은 한글날이야.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기념하는 날이지. 이번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가르쳐 주는 사이버외교관이 되기로 했어. 처음 한글을 가르쳐 줄 친구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사리안또란 친구야.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는 작년부터 한글을 문자로 쓰고 있어. 사리안또에게 한글을 쉽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을까? 글_장경아 기자 일러스트_김재희 사리안또, 네게 한글을 가르쳐 주면서 나도 한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 오늘은 마지막으로 한 글과 숫자 사이에 닮은 점을 이야기해 주려고 해. 한글 자음 ㅇ은 숫자 0과 묘하게 비슷한 점이 많아. 숫자 0과 자음 ㅇ의 닮은 점을 알면 한글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우선 숫자 0과 자음 ㅇ은 모두 값이 없다는 점이 비슷해. 숫자 0이 수의 값이 없는 숫자인 것처럼 자음 ㅇ도 소리가 없거든. 예를 들어 ‘아름답다’를 ‘ㅏ름답다’라고 써도 읽는 소리는 같아. 아름답다의 자음 ㅇ은 소리가 없기 때문이야. 이번에는 우리말을 읽을 때 자음 ㅇ의 역할을 볼까? ‘봄이 온다’를 소리내서 읽으면 ‘보미 온다’가 돼. 여기서 어떤 자음이 없어졌을까? 자음 ㅇ이 사라졌어. ㅇ은 소리가 없는 자음이기 때문에 다른 자음과 만나면서 ㅇ이 사라진 거야. 그런데 이런 일은 숫자의 덧셈에서도 관찰할 수 있어. 10 + 2=12라는 덧셈식을 봐. 10과 2를 더한 값을 102라고 쓰지 않고 12라고 써. 숫자 0이 사라졌지. 12라는 숫자에는 0이 사라졌지만 10과 2의 의미가 모두 들어있어. 마찬가지로 한글을 읽을 때도 ‘봄이’는 ‘보미’로 소리나 자음 ㅇ이 사라졌지만 ‘보미’에는 ‘봄’과 ‘이’의 의미가 모두 들어있어. 숫자 0과 자음 ㅇ의 닮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야. 숫자 0이 놓이는 자리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처럼 자음 ㅇ도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거든. 우선 숫자 10의 0과 01의 0을 생각해 봐. 10의 0은 의미가 있는 0이지만, 01에서 십의 자리 0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이런 0은 생략해 1이라고 쓰지. 지금은 아니지만 한글이 만들어진 당시 한자에 음을 달 때 받침소리가 없는 글자에는 꼭 받침에 ㅇ을 썼다고 해. 예를 들어 한자 ‘語(어)’의 음을 쓸 때 ‘어’로 쓰지 않고 ‘엉’으로 썼는데, 여기서 받침 ㅇ은 의미가 없는 형식적인 ㅇ이야. 의미없는 자음 ㅇ인 거지. 이처럼 자음 ㅇ은 숫자의 0처럼 한글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 그리고 자음 ㅇ과 숫자 0은 동그란 모양인 것까지 닮았고 말이야. 앞으로 한글에서 ㅇ을 쓸때 숫자 0과 닮은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에 사는 찌아찌아족은 고유 언어는 있지만 글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2009년 7월 한글을 문자로 도입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됐다. 수학을 이용해서 한글을 배우니까 더 쉽고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아. 수학에서 규칙을 발견하고 정리를 만드는 것처럼 한글은 수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만든 문자 같아. 숫자 0과 자음 ㅇ이 닮은 점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앞으로 한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어. 뜨리마까시~! (고마워)    
272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한글보급",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02  추천:0  2019-10-11
시리즈카드뉴스   한글 채택한 찌아찌아족 10년 후 모습   중앙일보     2019.10.09.          한글을 문자로 사용하는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찌아찌아족’. 한글 공부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선 소수민족 언어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인구수가 7만여 명인 찌아찌아족은 부족 언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2009년 한글을 문자로 채택했다.    찌아찌아어를 표기할 고유 문자가 없어서다. ‘안녕하세요’를 찌아찌아족은 ‘마엠 빠에 을렐레’라고 한글로 표기한다.    10년 전 찌아찌아족의 ‘한글 교육’ 소식이 처음 한국에 전해졌을 땐 정부 지원, 지자체 지원 약속이 쏟아졌다. 하지만 관심이 시든 이후 많은 지원이 끊겼다.   현재는 10년째 민간 소액 후원으로 한글 교육을 힘들게 이어나가고 있다. 찌아찌아족이 사는 ‘소라올리오 마을’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유일한 한국인 교사는 정덕영 씨다.   정 씨는 지원이 끊겨서 두 차례나 섬을 떠나야 했다. 그는 “‘한국 찌아찌아 문화교류협회’ 소액기부금으로 체재비, 교재비까지 모두 충당하고 있다”고 했다.   부족한 지원 탓에 찌아찌아족은 교재도 없이 얇은 복사본으로 한글을 공부한다. 찌아찌아족 바따우가군 군수는 “학생들이 한글을 배우는 걸 정말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찌아찌아족 마을 곳곳 간판에는 아직도 한글이 표기돼 있다. 한국찌아찌아문화교류협회는 일단 현지 한글 선생님을 많이 양성하는 것을 첫 목표로 삼고 있다.  =====================================/// 찌아찌아족이 아직도 한글 쓰나요? YTN 공식 2015.10.12. 09:08  717,956 읽음     '찌아찌아족이 아직도 한글 쓰나요?'   한 포털 사이트 질문 글입니다. 공식 언어가 없어서 사라져가는 찌아찌아어를 살리기 위해, 한글을 공식 언어로 채택한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 기억하시나요?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공용어와 교유 문자가 없는 지방 어를 로마자로 표기합니다. 찌아찌아족은 로마자에는 없는 파열음을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적용했을 뿐, 공식 언어로 채택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이 아닌 생소한 부족에게 '글자'를 수출한 사례는 우리에게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한글날 행사에서 찌아찌아족을 언급하며. 문자가 없는 언어의 새로운 문자로 한글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세종학당'을 확대 설치하겠다는 약속도 했었죠.   하지만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찌아찌아족이 진짜로 한글을 쓰나요?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과는 달리, 찌아찌아족의 한글 교육을 책임질 세종학당은 예산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뒤늦게 문을 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철수했습니다.    [인터뷰:정덕영, 세종학당 교사] "(교육비자를) 올해 7월에 받게 돼 안정적으로 교육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철수하게 돼 아쉽습니다" 기대와 달리 한글 교육기관이 현지에서 자리 잡지 못한 건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정부 지원금은 연간 수천만 원에 그쳤고,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는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인터뷰: 와완, 세종학당 현지 교사] "지금은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어요. 학생들이 선생님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부는 세종학당 사업을 접고 민간인인 정덕영 씨와 현지인 한글 강사 두 명과 함께 500명이 넘는 찌아찌아족 한글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이를 후원하는 ‘한국 찌아찌아 문화교류협회’도 설립되어 있지만 현지인 강사 두 명의 급여를 충당하기도 벅찹니다.   "선생님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부족장 회의까지 열며 한글을 문자를 받아들였던 찌아찌아 족.   찌아찌아족이 정말로 한글을 쓰나요?   흐지부지된 한글 수출 사업을 보면 "모르겠다. 그거 거짓말 아니에요?"라는 답변이 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     순경음(脣輕音)이란;ㅡ  우리의 옛 말에서, 입술을 거쳐 나오는 가벼운 소리로. 《훈민정음》에서 순음(입술소리) 아래 ‘ㅇ’을 연서(連書)하여 표시한 음인 ‘ㅱ-순음 미음’, ‘ㅸ- 순음 비읍’, ‘ㅹ-순음 쌍 비읍’, ‘ㆄ-순음 피읍’ 등등입니다. 달리 표현하여 가벼운 입술소리,   입술가벼운 소리· 경순음 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ㅱ-순음 미음’ 등등의 순경음 글자들은 옛 한글의 자음들을 지칭하는 이름들입니다.   찌아찌아족들의 발음상 이러한 순경음을 사용하여야 문자표현이 됨으로, 순경음 사용하도록 "특별이 허락함"을 일러 특허라고 하는것이지, 특허 법률상의 특허가 아닌것입니다. 특허 법률상의 특허란 전혀 새로운 이치에 의한 발명을 사용하도록 능력을 주거나 포괄적인 법령 관계를 설정하는 행정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미 훈민정음에 순경음 문자가 있었음으로 새로운 이치에 의한 문자 발명이라고 볼수는 없는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찌아찌아족에게 순경음 사용을 "특별히 허락함"의 특허이지, 특허 법률상의 특허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2722    [그것이 알고싶다] - 2018, 2019,노벨문학상 댓글:  조회:4171  추천:0  2019-10-10
2018,2019,노벨문학상 올가 토카르추크·페터 한트케 2019.10.1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지난해 '미투' 파문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무산돼, 지난해와 올해 수상자가 오늘(10일) 동시에 발표됐습니다. 2018년 노벨문학상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2019년 문학상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에게 각각 돌아갔습니다. 김석 기자입니다. [리포트]  한해 늦게 발표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선정됐습니다. [매츠 말름/스웨덴 한림원 상임이사 :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입니다."] 1962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도서관 사서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작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1993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으며 90년대 폴란드 문학의 큰 발견이란 찬사를 받았고, 지난해 '플라이츠'로 세계적인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습니다. [매츠 말름/스웨덴 한림원 상임이사 : "해박한 지식과 열정으로 삶의 형태로서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사적 상상력을 보여줬습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에게 돌아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전쟁과 궁핍 속에서 불우하게 성장했습니다. 전통극 형식에 반기를 든 첫 희곡 '관객모독'으로 주목 받았고, 이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소망 없는 불행' 등 잇단 문제작으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우리 시대 가장 전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매츠 말름/스웨덴 한림원 상임이사 : "언어적 독창성으로 인간 경험의 주변성과 특수성을 탐험한 영향력 있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지난해 미투 파문으로 수상자를 내지 못한 스웨덴 한림원은 2018년과 2019년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시상식은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립니다. KBS 뉴스 김석입니다. ================================/// [서울신문] 지난해 ‘미투’ 사건으로 수상자 발표 미뤄 45년 만에 2018·2019 수상자 동시 발표 토카르추크, “백과사건 같은 열정” 평가 한트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2018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와 2019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폴란드의 여성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7)를 2018년 수상자로, 오스트리아 희곡 작가 페터 한트케(77)를 올해 수상자로 발표했다. 지난해 한림원 ‘미투’ 파문으로 시상을 건너뛰어 이번에 두 명이 호명됐다. 두 명을 발표한 것은 1974년 이후 45년 만이다. 한림원은 토카르추크에 대해 “경계를 가로지르는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백과사전 같은 열정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한트케에 대해서는 “인간 체험의 뻗어 나간 갈래와 개별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며, 수상자는 총상금 900만 크로나(약 10억 9000만원)와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예상 가능’이었던 토카르추크…여성들 삶에 관심 많은 페미니즘 작가 폴란드의 여성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수상자 2명을 한꺼번에 발표하는 올해, 둘 중 한 명은 여성 작가일 것이라는 기대가 지배적인 가운데 지난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토카르추크는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그는 영국의 온라인 베팅 사이트 나이서오드에서도 앤 카슨, 마거릿 애트우드(이상 캐나다), 마리즈 콩데(프랑스)에 이어 배당률 4위에 올랐다.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를 선정했다. 토카르추크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백과사전 같은 열정으로 표현했다”고 한림원은 설명했다. 2019.10.10 AFP 연합뉴스토카르추크는 15번째 여성 수상자이자 다섯 번째 폴란드인 수상자다. 그는 폴란드에서 가장 두꺼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그야말로 ‘폴란드 문학의 현재’다. 바르샤바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문화인류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다. 특히 칼 융의 사상과 불교 철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신화와 전설, 외전(外典), 비망록 등 다양한 장르를 차용해 인간의 실존적 고독, 소통의 부재, 이율배반적인 욕망 등을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한다. 작품으로 맨부커상 수상작인 ‘방랑자들’을 비롯해 ‘E. E.’(1995), ‘낮의 집, 밤의 집’(1998), ‘세상의 무덤 속 안나 인’(2006), ‘망자의 뼈에 쟁기를 휘둘러라’(2009), ‘야고보서’(2014)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장편소설 ‘태고의 시간들’(은행나무)이 첫 번역 출간됐다. 허구와 현실이 절묘하게 중첩되는 공간인 가상의 마을 ‘태고’에서 20세기의 야만적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시간을 기록한 작품이다.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로부터 분할 점령당했던 시기, 제1·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동,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마을 주민의 신화적 삶과 어우러졌다. 토카르추크의 세 번째 장편인 이 소설은 40대 이전의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인 코시치엘스키 문학상을 받았고, 폴란드 니케 문학상의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 부문에 선정됐다. 이달 말에는 ‘방랑자들’이 민음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토카르추크는 여성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지닌 페미니즘 작가다. ‘태고의 시간들’이 국내에 출간될 당시 그는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자리는 남성의 그것과 비교할 때, 늘 턱없이 부족했다”며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 역사라는 것이 일상의 내밀하고 사적인 측면으로도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토카르추크의 책을 번역한 최성은 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교수는 “페미니즘 작가인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묘사될 때가 많다”고 부연했다. 이어 “최근 폴란드 문학의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 온 작가”라면서 “작가가 되기 전 심리치료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과 연민 같은 타인과의 관계처럼 미시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엮어 거대 담론을 만들어 낸다”고 소개했다. 토카르추크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2006년 서울, 젊은 작가들’ 대회에 초청돼 방한해 국내 작가들, 학생들과 만났다. 2014년에는 폴란드에서 한강(49) 작가와 대담을 나눈 후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슬기 기자 /박성국 기자  ●페터 한트케, 전위적인 독창성 ‘관객모독’으로 명성…자전적 소설 다수 올해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페터 한트케는 전통극 형식에 대항한 희곡 ‘관객모독’(1966)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다. 전위적인 문학관과 기존 질서를 향한 도발로 주목받았다. 문단에서는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내놓는다.2019 노벨문학상에 한트케…“체험의 갈래 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 - 올해 노벨문학상 영예를 차지한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 사진은 지난 2016년 3월 23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한 시상식에 참석할 당시의 모습. 한림원은 한트케가 “인간 체험의 뻗어나간 갈래와 개별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을 썼다”고 평가했다. 2019.10.10 AP=연합뉴스한트케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붙는 수식어는 ‘전위적’, ‘파격적’이다.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1965년 첫 소설 ‘말벌들’을 출간한 뒤 학업을 중단한다. 바로 그해 전후 독일 문학계를 주도하던 ‘47그룹’ 모임에서 거침없는 독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1966년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객모독‘을 발표해 명성을 얻는다. 전통적인 연극과 달리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거나 무대 위에서 보여 주지 않고 등장인물 4명이 오직 ‘언어’에 집중한다. 배우들은 무대와 객석은 물론 연극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고 관객들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현대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조롱하고 풍자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많은 점도 특징이다. 한트케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르텐주 그리텐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척박한 벽촌에서 보내며 전쟁과 궁핍을 경험했고 성년이 되기까지 국경을 넘어 여러 곳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특히 스물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니의 자살을 겪는다. 한트케는 1972년 이런 경험을 녹여낸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을 내놓는다. 같은 해 출간한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오스트리아 남자가 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을 횡단하는 내용의 자전적 소설이다. 1986년 출간한 소설 ‘반복’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1700년 초 농민폭동 지도자로 처형당한 주인공의 조상 이야기, 고향 땅에서 쫓겨나 오스트리아 케르텐주에 사는 가족 이야기, 전쟁 중 사라진 형을 찾기 위해 그가 옛날 공부했던 마리보르의 농업학교 작업노트 한 권과 슬로베니아-독일어 사전을 배낭에 넣고 슬로베니아로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를 비롯해 희곡 ‘카스파’, 예술 에세이 ‘어느 작가의 오후’ 등 지금까지 8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1987년에는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대본 ‘베를린 천사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 실러 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프란츠 카프카 상 등 독일의 저명한 문학상을 휩쓸면서 일찌감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됐다. 2014년에는 노벨문학상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올해 선택을 받은 그는 수상 소식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매우 감동적”이라는 짧은 소감을 전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문학동네)를 번역한 안장혁 동의대 교수는 “워낙 전위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이라 평단에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주류적 시각에 갇혀 있지 않고 시대를 앞서 실험적인 무언가를 시도했다”며 한트케를 소설 ‘양철북’ 저자 귄터 그라스와 함께 독어권 문학계의 쌍벽이라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그러면서 “주류 세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관된 노선과 현대인의 불안을 작품에서 드러내며 그 방식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점을 한림원이 뒤늦게나마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이정수 기자 =================================///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란드 우파 정부에 비판적 입장 뚜렷해 살해 위협도  소설 ‘방랑자들’ 작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도 볼로냐 라가치 픽션 수상  올가 토카르추크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지난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받았다. 한국 소설가 한강이 2016년 로 수상한 바로 그 상이다. 그는 2006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한 제1회 세계젊은작가축전(지금의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한 바도 있다. 이런 사실은 노벨 문학상과 한국 문학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지지를 두루 얻고 있는 작가다. 다만 그는 채식주의자에 환경보호론자이며 현재의 폴란드 우파 정부에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고 있어서 우파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을 정도로 정치적 성향도 뚜렷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가 토카르추크. 민음사 제공바르샤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토카르추크는 점성술과 카를 융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는 시집을 출간하면서 문학을 시작했지만, 곧 산문으로 옮겨와서 1993년에 낸 을 필두로 지금까지 10여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은 폴란드의 한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삼고 기이하면서도 원형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20세기의 야만적인 삶을 기록한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 점령당한 시기, 양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동,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이 마을 주민들의 신화적 삶과 어우러진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인 (2007)은 여행길에서 마주친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그들에게 불멸의 가치를 부여한다. (2009)는 폴란드 남부 체코 접경 지역의 추운 산골 마을에서 겨울에도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세 주민을 등장시켜 스릴러 같은 전개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두 소설은 최성은 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교수의 번역으로 국내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 토카르추크의 2014년작 은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일곱 나라와 세 개 종교, 다섯 개 언어를 다루며 18세기 폴란드에서 발흥한 유대의 메시아주의 분파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2008년 에 이어 그에게 폴란드 최고 문학상인 니케상을 두 번째로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에 번역 소개된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2018 볼로냐 라가치 픽션 수상작인 그림책 이 있다. /한계레 ///최재봉 선임기자 =======================///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1942년 오스트리아 남부 그리펜 태생 작가 희곡 ‘관객모독’,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집필 한림원 “언어의 독창성 돋보이는 작가” 평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페터 한트케(77)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면서 독일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온 작가로 그동안 여러번 노벨 문학상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곤 했다. 1942년 오스트리아 남부의 그리펜에서 독일 군인 아버지와 세르비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트케는 어린 시절 동독에서 자라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그라츠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1966년 첫 소설 과 희곡 이 성공을 거두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네 배우가 무대 위에 올라 별다른 플롯 없이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형식의 은 인습에 대한 ‘모독’으로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실험극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대표작은 시집 (1969), 소설 (1970) (1972), 예술 에세이 (1987) 등이 있다. 영화 시나리오 집필을 비롯해 빔 벤더스 감독과의 여러차례 협업으로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벤더스 감독은 “한트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어린 시절에 겪은 가난과 비참함, 청년기에 닥친 어머니의 자살 등은 그의 작품에 이단아적 기질과 특유의 어둠을 자아냈다. 언어 현상의 탐구,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며 독창적 문학세계를 구축해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잘츠부르크 문학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브레멘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상, 실러상, 게오르크 뷔히너상 등 독일어권 저명한 문학상을 대거 휩쓸었다. 그는 관습을 부수는 문학작품뿐 아니라 독설로도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독일문학을 창조하자는 문인들의 모임 ‘47그룹’에서 활동하면서 1960년대 당대 독일 작가들을 향해 ‘기술(묘사) 불능’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고 독일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을 놓고 “끔찍한 작가”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201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같은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라고 말했지만 정작 한트케는 ‘노벨 문학상은 폐지돼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가장 큰 논란을 빚은 것은 발칸전쟁이 발발한 1990년대에 그가 세르비아 편을 들면서부터다. 그는 심지어 코소보의 학살자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두둔했고 심지어 2006년 밀로셰비치의 장례식까지 참석했다. 이 때문에 그가 받기로 했던 하인리히 하이네상이 취소되기도 했다. /한계레 ///이주현 김지훈 기자  =========================/// 파격과 실험을 좇다… '이단아' 한트케의 문학 외길(종합) 2019.10.1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대표작 '관객모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고정관념 깬 새 형식 창조 몰두 "정치적 이유로 오랫동안 노벨상 단골 후보만…밀로셰비치 옹호"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강종훈 기자 = 독일 문단의 이단아. 올해 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페터 한트케(77)를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는 평생 문학 외길을 걸으며 파격과 실험 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독창적 영역을 구축했다. 소설, 희곡, 방송극, 시 등 장르를 넘나들며 평생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고 21세기 들어 독일어권 작가 중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랫동안 꼽혔다. 노벨문학상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단골 후보로 거명됐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라고 할 정도였다. 한트케가 오랜 시간 단골 후보에 오르면서도 노벨상을 거머쥐지 못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는 '인종 청소'로 악명 높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 유럽 전체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윤용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으나 한트케가 밀로셰비치 편을 들면서 유럽 정치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면서 "문학은 문학으로만 봐야 한다고 하나 정치인들은 그렇게 보기 어렵다"고 했다. 2019 노벨문학상에 한트케…"체험의 갈래 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 (슈투트가르트 AP=연합뉴스) 올해 노벨문학상 영예를 차지한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 사진은 지난 2016년 3월 23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한 시상식에 참석할 당시의 모습. 한림원은 한트케가 "인간 체험의 뻗어나간 갈래와 개별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을 썼다"고 평가했다.  bulls@yna.co.kr 한트케의 파격과 실험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바로 희곡 '관객모독'이다. 1966년 발표한 출세작이면서 우리나라에도 연극으로 소개돼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며 기존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깬다. 이런 이유로 '반(反)연극'으로 불릴 정도였다. 형식 파괴는 물론 기성 문단에 대한 불만과 공격성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언어를 비틀고 해체하는가 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제멋대로 띄어 읽거나 반복하도록 해 문법과 틀을 해체한다. 특히 극 말미에 관객에게 거침없이 욕설과 물세례를 퍼붓는 장면으로 세계적 화제가 됐다. 이런 '반골 기질' 때문에 그가 새롭게 발표하는 작품은 항상 논쟁의 소재가 됐다. 매번 고정 관념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들고 독자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소망 없는 불행','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희곡 '카스파', 에세이 '어느 작가의 오후',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 등이 있다. 몇몇 작품은 영화화했고 자신이 직접 연출을 맡은 작품도 있다.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도 썼다. 잘츠부르크 문학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브레멘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상, 실러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등 독일어권 저명한 문학상을 대거 휩쓸며 일찌감치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그리펜에서 출생한 한트케는 유아 시절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등 성년이 되기까지 국경을 넘어 여러 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유랑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유년 시절 대부분을 척박한 시골에서 보내며 전쟁과 궁핍을 경험했고, 스물아홉 살 때 모친이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해 자살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의 이단아 기질은 순탄치 않은 유소년과 젊은 시절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데뷔작은 1966년 출간된 소설 '말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독일어권 문학을 창조하자는 문인들의 모임 '47그룹'에서 활동하며 '독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47그룹'은 2차 대전에서의 전쟁 범죄 같은 현실을 미화하지 말고 사실대로 쓰자는 입장이었지만, 한트케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윤 교수는 "한트케는 '관객 모독'처럼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문학을 만든다고 주장하며 선풍을 일으켰다"면서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페터 한트케연합뉴스 자료사진 =============================================/// '관객모독' 한트케·'방랑자들' 토카르추크 지난해 발표 연기하며 올해 2명 동시 발표 그간 국내에서 여러 작품 소개되며 인지도노벨문학상의 2018년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왼쪽)와 2019년 수상작가인 페터 한트케. [서울경제] 올해와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희곡작가 페터 한트케(77)와 폴란드 여류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7)가 각각 선정됐다. 예상했던 대로 단골 후보와 여성작가가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토카르추크를 2018년 수상자로, 한트케를 2019년 수상자로 각각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림원은 지난해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논란에 휩싸이면서 노벨문학상 발표를 연기해 올해 두 명의 수상자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두 명의 수상자가 동시에 발표되기는 지난 1974년 이후 45년 만에 처음이다. 많은 예상이 오갔지만 결국에는 시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여성 작가와 당대 문학계를 흔든 전위적 작가에게 돌아갔다는 평가다. 우선 지난해 수상자로 선정된 토카르추크는 자국 폴란드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작가로 꼽힌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등단하기 전까지 심리학 치료사로 활동했으며 철학과 불교 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9년 ‘거울속의 도시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처음 등단한 토카르추크는 이후 소설 ‘책의 인물들의 여정(1993)’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소설 ‘태고의 시간들(1996)’은 그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준 대표작이다. ‘방랑자들(2007)’로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현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국내에는 그동안 ‘태고의 시간들’ ‘잃어버린 영혼’ 등이 출간됐고 오는 21일 방랑자들(민음사)이 발간될 예정이다. 토카르추크의 수상은 여성 작가로는 2015년 수상자인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벨라루스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후 4년 만이며 역대 15번째 여성 수상자다. 또 폴란드 작가로는 1996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이후 22년 만이다. 그는 영국 베팅업체 ‘나이서오즈(Nicer Odds)’가 예측한 수상 확률 높은 후보 가운데 4위를 기록하며 일찍부터 유력 후보로 주목받아왔다. 한림원은 토카르추크에 대해 “경계를 가로지르는 삶의 형태를 구현하는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백과사전 같은 열정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최성은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폴란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이 많은 역할을 했지만 역사가 기억하지 못해 아쉽다는 토카르추크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화적인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여성상을 작품에서 보여준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성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점에서 그의 수상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수상자로 지목된 한트케는 우리 시대 가장 전위적인 문제 작가라는 호칭이 뒤따른다. 한트케는 파격과 실험 정신을 추구한 작가로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꼽혔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동료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그에 대해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라는 찬사를 했을 정도로 ‘작가들의 작가’로 통한다. 1966년 첫 소설 ‘말벌들’을 통해 등단한 한트케는 같은 해 희곡 ‘관객모독’을 통해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관객모독’은 치열한 언어 실험을 통해 글쓰기의 새 영역을 연 작가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한트케는 등단 이후 50여년간 희곡 ‘카스파(1968)’와 시 ‘내부 세계의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1969)’, 소설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1972)’ 등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 덕에 1973년 실러상과 뷔히너상을 수상한 데 이어 잘츠부르크 문학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브레멘 문학상, 프란츠 카프카상 등 각종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세잔의 산을 찾아서-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 등의 작품이 출간됐다. 한림원은 한트케에 대해 “인간 체험의 뻗어 나간 갈래와 개별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을 썼다”고 평가했다.  류신 중앙대 교수는 “한트케는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모색하는 언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언어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화한 예술가로 대표된다”며 “언어가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현실을 통해 언어의 허위, 위증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진행된다. 수상자에게는 900만크로나(10억9,000만원 상당)의 상금과 노벨상 메달과 증서가 주어진다. /서울경제 ///최성욱기자 ================================/// 노벨문학상 2년치 수상자 발표 2018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 2019 오스트리아의 페터 한트케 지난해 미투 논란에 시상 걸러 전범 밀로셰비치 옹호 한트케 노벨상 수상에 또 다른 논란 예고지난해 성폭력 스캔들로 노벨문학상 발표를 하지 못한 스웨덴 한림원이 10일 2018년과 2019년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했다.  작년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57)는 현재 폴란드에서 가장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다. 그의 작품은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해 서사의 축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 『태고의 시간들』(은행나무)을 번역한 최성은 번역가는 “토카르추크는 페미니즘 작가이지만, 특히 ‘포스트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작가”라며 “여성의 삶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면서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고 평했다.  1962년 폴란드 술레후프에서 교사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바르샤바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첫 장편소설인 『책의 인물들의 여정』을 1993년 발표했다. 17세기 프랑스와 스페인을 배경으로 피레네에서 신비로운 책을 찾아다니는 인물들을 그린 이 책으로 그는 그해 폴란드 출판인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책’ 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다. 세 번째 장편 소설인 『태고의 시간들』로 젊은 작가들에게 주는 코시치엘스키 문학상을 받았고, 2008년 『방랑자들』, 2014년 『야고보서』로 니케 문학상 대상을 두 번 수상했다. 2018년 『방랑자들』의 영어판 『플라이츠(Flights)』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야고보서』를 언급하며 "그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서술해내는 데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격찬했다.  그는 단문이나 짤막한 에피소드를 씨실과 날실 삼아 촘촘히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쓴다. 최성은 번역가는 "그의 소설에는 인간뿐 아니라 각종 동식물과 신성을 가진 개체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체가 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며 "작가는 이런 개체들의 삶의 방식과 존재의 의미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심리 치료사로 활동한 이력도 그의 작품 세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는 인물의 꿈이나 내면, 무의식 등을 정교하게 형상화해 인간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13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프로이트를 읽고 난 이후로 나는 세상을 더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토카르추크는 2006년 한국에 방문한 적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초청으로 ‘제1회 세계 젊은 작가 축전’에 참가한 것. 칼 융의 사상과 불교에 관심이 많아 당시 직접 템플 스테이를 경험한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색깔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국 스님들이 입는 승복의 회색빛이었다”고 밝혔다.  올해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오스트리아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페터 한트케. [AFP=연합뉴스] 스웨덴 한림원은 2019년 수상자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77)를 발표하며 “인간 체험의 주변성과 개별성을 독창적 언어로 탐구한 작가”라고 평했다. 문학의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자기 세계를 구축해온 여정을 박수를 보낸 것이다. 기존 문법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온 한트케는 87년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를 썼고 소설·시·방송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글을 썼다. 그는 또 1960년대 귄터 그라스와 같은 문호가 속한 ‘47그룹’에 대해 “문학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후에 독일의 범죄행위에 대해 속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47그룹’은 20대였던 한트케의 이러한 비판에 따라 해체됐다.  특히 1969년에 발표한 희곡 『관객모독』은 전통적 의미의 연극에 도전한 작품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소도구나 장치가 없는 무대에서 배우들은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관객을 모독하는 욕설, 사회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다. 김윤철 연극평론가는 한트케에 대해 “관람자와 공연자 사이의 관계를 허물었으며 도발하는 작품이 많다. 관습적 사고에 저항하는 메시지가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트케는 오스트리아의 산골인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슬로베니아 태생이었고 독일 병사 사이에서 한트케를 가졌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트케가 29세이던 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해 자살했으며 한트케는 중편소설 『소망 없는 불행』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을 묘사하며 어머니를 기억했다. 전쟁 후의 정치 상황과 가정의 모순을 담은 한트케의 대표작이다. 한림원은 한트케의 일생을 소개하며 “그에게 과거는 끊임없이 새로 써야 하는 것이었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와는 달리 기억으로 치유받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한트케의 수상에는 논쟁도 따른다. 워싱턴포스트는 “파시스트와 세르비아 민족주의 옹호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며 “최근 스캔들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노벨상 위원회가 또 다른 논란으로 뛰어든 격”이라고 평했다. 한트케는 90년대에 ‘발칸의 도살’이라 불린 인종청소를 벌였던 신유고연방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이후 “밀로셰비치는 다소 비극적 남자였다. 나는 작가이지 판사가 아니다”라고 해 논란이 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2006년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나의 발언 이후 노벨상에 대한 기대는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김호정·정아람 기자 =====================================/// [국내반응] 노벨문학상 2명 수상에 출판계 훈풍 불듯...  2019.10.1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베팅업체 나이서오드 예상 빗나가【스톡홀름=AP/뉴시스】스웨덴 아카데미 상임이사 마쓰 말름(Mats Malm)이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2018년과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 2018년 제118회 노벨 문학상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2019년 제119회 노벨문학상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에게 돌아갔다. 2019.10.10.【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올 가을 출판계는 노벨문학상 두 명 수상으로 훈풍이 불 전망이다. 폴란드 여성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7)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77)라는 두 바퀴의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크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해 '미투' 파문에 휩싸이면서 수상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2명이다. 이들의 작품이 순수문학으로 회귀하면서 독자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박여영 민음사 해외문학팀장은 "작가 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꺼번에 발표됐기 때문에 출판계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며 "한트케의 대표작인 '관객모독'을 독자들이 많이 검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한트케는 워낙 유명하고 오랜 작가"라며 "이미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살짝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영화로도 제작됐다"고 했다. 윤용호 고려대 독문과 교수는 한트케에 대해 "이미 1980년후반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작가로 평가받았다"고 회상했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리아의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73)도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베를린=AP/뉴시스】2018년 제118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spkas). 2017년 2월 12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스웨덴 아카데미를 뒤흔들었던 성추행 의혹으로 2018년 노벨 문학상이 연기된 뒤, 2019년 10월 10일, 올가 토카르추크가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발표됐다. 2019.10.10.노벨문학상 수상자 2명이 나오는 것은 1974년 이후 45년 만이다. 문학상은 보안이 철저하다. 수상자 선별 과정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며 후보자들도 공개하지 않는다.  전세계 도박사들은 매년 수상 결과를 예측해왔고, 베팅업체 나이서오드는 올해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캐나다 시인 앤 카슨(69), 프랑스 소설가 마리즈 콩데(82), 중국 소설가 찬쉐(66) 등 여성 작가를 꼽았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0)도 유력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나이서오드의 예상은 빗나갔다. 연극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가 피터 한트케(77)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폴란드 여성작가 올카 토카르추크(57)는 지난해 이미 내정된 수상자였다. 노벨문학상은 개별 작품이 아니라 한 문인의 전체적인 성과를 평가하는 게 특징이다. 문학적 성취 이외에 장르·지역·정치적 상황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은 더 다양한 관점으로 문학계를 조명할 기회가 됐다. 순문학 분야의 작가에게 상을 주면서 노벨문학상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여성 작가에게도 수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로써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총 116명 가운데 여성 작가는 15명이 됐다. 【슈투트가르트=AP/뉴시스】2019년 제119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 2016년 3월 23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모습. 2019.10.10.   ======================///(발췌)점점점... 토카르추크는 장편소설 로 지난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다. 최근 페미니즘 조류와 지난해 선정 취소 사유까지 감안해 ‘수상자 중 최소 1명은 여성 작가일 것’이라는 문학계 관측이 적중했다. 여성 수상자가 나온 것은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 이후 4년 만이다. 한트케는 연극 ‘관객모독’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극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2005년 영국 작가인 해럴드 핀터 이후 14년 만이다. 
2721    [그것이 알고싶다] - "훈민정음 상주본"은 어디에?... 댓글:  조회:4007  추천:0  2019-10-10
'훈민정음 상주본' 소유자 집 불(2015년 03월 26일)… 책 소실여부 미확인 2015.03.2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훈민정음 해례본도 탔을까 (상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26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난 이후 경찰관이 감식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주택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소유자인 배모씨의 집이다. 2015.3.26  주택 모두 불 타…소유자 배모씨는 외출 중 (상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집에서 불이 났다. 소유자는 훈민정음 상주본이 탔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탔을까 (상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26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난 이후 경찰관이 감식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주택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소유자인 배모씨의 집이다. 2015.3.26  26일 오전 9시 25분께 경북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의 주택에서 불이 나 30여분 만에 진화됐다. 이 주택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배모(52)씨의 집이다. 이 불로 배씨의 어머니가 얼굴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주택 1채가 모두 타면서 집 안에 있던 많은 골동품, 고서적, 내부집기 등도 함께 소실됐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탔을까 (상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26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난 이후 경찰관이 감식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주택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소유자인 배모씨의 집이다. 2015.3.26  불이 날 당시 배씨의 형이 집 안에 있었고 어머니는 인근 텃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배씨는 이날 오전 외출한 상태였다. 불이 작은방에서 시작돼 번졌다고 배씨의 형은 경찰에 진술했다. 집 안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훈민정음 상주본 왼쪽은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고 오른쪽은 기존 국보 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해례본의 사본. > 경찰 관계자는 "배씨를 상대로 조사했으나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2008년 7월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던 중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같은 판본이면서 보존상태가 좋아 높은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상주의 골동품 업자 조모씨(2012년 사망)는 "배씨가 상주본을 내게서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민·형사 소송이 벌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탔을까 (상주=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26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난 이후 경찰관이 감식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주택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소유자인 배모씨의 집이다.2015.3.26  배씨는 민사소송에서는 졌으나 형사재판에서는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소송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훈민정음 상주본은 사라졌다. 배씨가 낱장으로 나누어 어딘가에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정확한 보존 상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배씨는 "나만 아는 장소에 상주본을 뒀다"며 현재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소유한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 배모씨의 집에서 26일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주택 2동을 태우고 30여분만에 진화됐다.   =============================/// (종합)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집에 "일부 있었다" 배씨 주장 (아시아뉴스통신= 김철희기자)2015년 03월 30일      30일 오전 최초 발화지점으로 알려진 작은방에 대한 현장감식을 배씨가 폴리스라인 밖에서 바라다보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김철희 기자  국보급으로 평가받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지난 2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30일 오전 경북 낙동면 구잠2리 화재 현장에서 실시된 현장감식 진행 중 상주본의 소장자로 알려진 배모씨(52)가 "화재 전 집에 일부가 있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감식에는 국과수, 경북청 과학수사팀, 문화재청, 경북소방본부 등이 참여해 오전 11시부터 시작해 오후1시30분쯤 끝이 났다.  배씨는 이날 화재 현장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에는 실화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갈수록 아닌 것 같다"며 "분명 집안에 (훈민정음 해례본) 일부가 있었다"고 주장해 주목된다.  30일 오전 11시 국과수 직원이 최초 발화지점으로 알려진 작은방에서 잿더미를 걷어내며 단서를 찾고 있다. /아시아뉴스통신=김철희 기자  그는 "화재가 나기 전 모 언론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취재가 있어 보관 중이던 작은방 내부를 자세히 보여줬다"고 밝히고, 현장감식 도중 해당 기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서도 "촬영한 화면을 제출해 달라"고 말하는 등 단순 화재가 아니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또 "과거 문화재청이 못찾았다고 주장하지만 아니다. 분명 찾았고, 소유권 문제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만 파악하고...일부니까 더 큰 것을 노리고 덮어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그는 '나만이 알 수 있는 표시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문화재청의 압수수색 과정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라 향후 진실공방이 예상된다.  경북 상주시 구잠2리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모씨(52)의 화재난 농가에 대한 현장감식이 국과수, 문화재청, 경북소방본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김철희 기자  배씨는 화재 직후 경찰조사에서도 집안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관하고 있었는지, 또는 보관하고 있었다면 이번 화재에서 소실됐는지 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경찰은 해례본이 전소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원인조사를 해온 터라, 이같은 배 씨의 주장에 대해 일방적인 주장일뿐이라는 입장이다.  한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지난 2008년 7월 배씨가 "집 수리를 하던 중 발견했다"며 공개한 것이다.  이후 배 씨는 골동품상 조모 씨(2012년 사망)와 소유권 다툼을 벌였으며, 배 씨는 민사에서는 패소, 형사재판에서는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배 씨는 당시 항소심 재판부에 "억울한 절도 혐의를 벗고 명예를 회복하면 상주본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내놓지 않고 있다 화재가 발생했다.  30일 국보급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 배모(52)씨 집 화재 현장에서 국과수 관계자들이 감식을 위해 화재현장을 살펴보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김철희 기자.   ===============================/// 배익기, 훈민정음 상주본 공개(2017년 04월 10일)… 일부 불에 훼손  2017.04.10.   화나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국경제TV 이휘경 기자] 배익기, 훈민정음 상주본 공개… 일부 불에 훼손 4·12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 나선 무소속 배익기(54) 후보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진을 공개했다. 배익기 후보는 10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공개하며 "사진 속 훈민정음 상주본은 전체 중간 앞부분에 해당하고 대부분 합쳐 놓은 일체본"이라고 설명했다. 상주본 아래쪽이 불에 그슬려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3월 배익기 후보 집에서 불이 났을 때 일부 훼손됐다고 했다. 훈민정음 상주본은 산속에 있었던 듯 솔잎과 참나무잎이 사진에 나타난다. 배익기 후보는 "상주본 본문이 이 정도 피해에 그쳤고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국회의원 재선거에 뛰어들어 선거를 며칠 앞두고 훈민정음 상주본을 공개한 이유는 자신이 국회의원에 당선해야 훈민정음 상주본을 완전히 공개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배익기 후보는 재산신고 때 1조원을 등록하려다가 선거관리위원회가 "실물 보유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자 이번에 실물을 공개했다. 그는 "상주본을 갖고 있어서 재산신고를 하려 한 것"이라며 "공개해야 한다면 재선거에 출마한 지금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한편, 배익기 후보는 훈민정음 상주본을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다가 2014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이휘경기자  ===================/// “훈민정음 상주본 가치에 버금가는 해례본 또 있어”   세계일보     2019.07.16.        상주본의 소재를 알고 있는 배익기씨. 연합뉴스 훈민정음 상주본의 소재를 아는 배익기(56)씨가 반환 대가로 1000억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한 사립대학 박물관에 상주본과 비슷한 해례본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16일 “상주본의 가치에 버금가는 해례본이 모 사립대학 박물관에 있다”며 “오래된 대학의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의 희귀자료에 대해 일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 소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간송본과 상주본에 더해 존재가 드러난 해례본은 3개가 된다. ◆“한 사립대학 박물관에 해례본 있어… 어딘지는 못 밝힌다” 황 소장은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배씨가 줄곧 1000억원을 요구하는 배경에 대해 “(상주본의) 가치 판단할 때 문제가 생긴 건데 맨 처음에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이 가셔서 약간 호들갑을 좀 심하게 떤 측면이 있다”며 “(담당 전문가가) 검토를 하며 깜짝 놀라 이게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표현을 1조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얘기를 했다. 그 1조에서 10분의 1이 1000억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1조원을 말했다는 것. 상주본은 훈민정음의 해설본인 해례본이라 그 가치가 높다고 했다. 황 소장은 “쉽게 말하면 해례라는 말이 이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부터 사용할 수 있는 설명서”라며 “상주본이 공개되면 한글 창제나 사용 등에 대해 더 면밀하고 구체적이고 학술적으로 완벽하게 연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황 소장은 한 사립대학 박물관에 상주본과 비슷한 해례본이 있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지금 처음 얘기하는 거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조사를 해야하지만 모 사립대학 박물관에 (상주본과) 비슷한 해례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문화재청에서 등록하러 오면 확실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다만 황 소장은 해당 자료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박물관 측에서 일부 연구하는 사람들만 이에 대해 알고 있다”며 “서울대 규장각이나 서울대 도서관에도 고문서가 정확하게 다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서울대는 절대 아니다. 오래된 대학의 박물관이나 도서관들의 희귀자료에 대해서 좀 일괄 자료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 “지속해서 배씨와 협의… 강제집행과 검찰 고발도 가능” 한편 문화재청은 배씨에게 반환 요청 공문을 보내는 등 상주본 회수를 위한 설득을 계속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배씨가 훈민정음 상주본 강제집행을 막아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된 뒤 “당장 강제집행 계획은 없지만, 지속해서 배씨와 협의해 나가겠다”며 “일단 안전기준과장이 17일 배씨를 직접 만나 상주본 자진 반환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3회 이상 독촉 문서를 발송한 뒤에도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할 수 있으나 신중하게 추진할 것이며 배씨를 문화제 은닉 및 훼손죄로 검찰에 고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2017년 배익기씨가 공개한 훈민정음 상주본. 2015년 3월 배씨 집에 불이 나면서 상주본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세계일보 자료사진 해례본 상주본은 2008년 7월, 배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국보 70호인 해례본(간송미술관본)과 같은 판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내용 중 일부가 없어졌지만 상태가 양호했고 간송본에는 없는 표기와 소리 등에 관한 연구자 주석이 있어 학술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그 재산가치가 1조원’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를 근거로 배씨는 줄곧 그 10분의 1인 1000억원을 반환 대가로 요구하고 있다. 배씨는 골동품업자 조용훈(2012년 사망)씨 가게에서 고서적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배씨가 상주본을 훔쳤다’고 주장한 조씨는 송사 끝에 소유권을 확보해 사망하기 전에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다만 배씨가 소장처를 밝히지 않아 상주본의 행방은 10년 넘게 묘연하다. /나진희 기자  ============================/// “훈민정음 상주본 있는 상주에 집현전 재현하자” 곽인규기자       2019.10.09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상주지역 ‘해례본 되찾기’ 운동에  한글날 맞아 시민 송병길씨 제안  “보존상태 좋아 내용도 선명해  학술적 가치 높아 세계 알리길 ”   제573회 한글날을 맞아 상주지역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되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상주고 학생들이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에게 상주본을 돌려달라는 염원을 담은 편지를 전달한데 이어 한글 창제의 산실이었던 조선시대 집현전을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이 있는 상주시에 재현하자는 제안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운용법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 원본이다. 현존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두 권 뿐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 제70호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제된 간송본(안동본)과 상주의 배익기(57)씨가 소장하고 있는 상주본이다. 상주본은 아직까지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소송 등에 얽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에 상주에 살고 있는 송병길(64·전 대구지법 상주지원 부이사관)씨는 9일, 한글날을 맞아 아직까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훈민정음 상주본이 있는 상주시에 집현전을 재현하자는 제안을 했다. 송씨는 “상주본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일종으로 2008년 상주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새로 발견되면서 훈민정음 상주본이라고 불린다”며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보존상태도 좋고 뒷면에 낙서가 없어 내용이 잘 보인다. 특히 책 여백에 훈민정음 관련 주석이 적혀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글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자 가운데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창제 원리가 알려진 유일한 문자이며 이 모든 내용이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에 담겨 있다”며 “문화재청으로부터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을 영구임대 받은 뒤 상주박물관에 집현전을 만들어 전 세계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목판본이며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 부분은 세종이 직접 만들었고, 해설에 해당하는 해례(解例)는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  해례의 집필에 참여한 학자는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이다.  훈민정음해례 상주본과 관련해 국민반환 서명운동을 벌여온 상주고 2학년 김동윤 군 등은 9일 오전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의 골동품점을 찾아 상주고 전교생 416명이 서명한 서명서와 상주본 반환의 염원을 담은 학생들의 손편지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현재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은 배익기씨가 소장하고 있지만 대법원은 지난 2011년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유권자는 골동품상을 하는 조모씨라고 확정 판결했고 조씨는 이를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상주/곽인규기자  
2720    [그것이 알고싶다] - "訓民正音" 解例本 댓글:  조회:4101  추천:0  2019-10-10
  시사상식사전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 세종 28년(1446) 창제 반포된 훈민정음과 동시에 출간된 한문 해설서. 줄여서 훈민정음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해례본은 서울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간송본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까지 모두 2건이 있다.             외국어 표기     訓民正音 解例本(한자)       훈민정음 해례본(서문) | 훈민정음 해례본(예의편) | 훈민정음 해례본(제자해) (출처: 문화재청)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성삼문, 최항,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훈민정음 한문 해설서로,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세종이 직접 쓴 서문에 해설이 붙어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 부른다.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 사용법 등을 소개하고,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증명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값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가된다.  1446년 출간된 해례본 한 권(1962년 국보 제70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이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8년에 상주에서 동일 판본이 발견되었는데 간송본에 비해 보존 상태가 좋은 데다, 표제와 주석이 모두 16세기에 새롭게 더해져 간송본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논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배익기 씨가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까지 배 씨가 소유권자에 대한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배 씨는 2008년 집을 수리하다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방송을 통해 상주본을 처음 공개했다. 그러나 골동품 판매업자 조 씨가 자신의 골동품가게에서 배 씨가 고서적을 사가면서 몰래 상주본을 훔쳐 갔다고 주장하며, 2010년 2월 배 씨를 상대로 물품 인도 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5월 대법원은 조 씨의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배 씨는 조 씨에게 상주본을 인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배 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해 9월 검찰이 문화재 절도죄로 배 씨를 구속, 형사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2월 배 씨는 형사소송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됐지만 상주본의 행방은 여전히 밝히지 않았다. 그해 5월 소유권자 조 씨는 추후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9월에는 배 씨가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같은 해 12월 조 씨가 사망하면서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넘어갔다. 이후 2014년 5월 배 씨는 3심에서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2015년 3월에는 배 씨 집에 불이 나면서 상주본 한 장이 소실되고 나머지도 불에 그을리는 등 상주본이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배 씨는 상주본을 돌려주는 대가로 상주본 추정 가치의 10%인 1000억 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7년 4월 배 씨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상주본 전체를 공개하겠다고 밝히며 경북 상주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했고, 상주본 한 장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배 씨가 낙선하면서 자발적 공개는 무산됐다. 2017년 배 씨는 앞서 진행된 형사소송에서 무죄를 받았기 때문에 상주본 소유권은 본인에게 있다며 문화재청의 강제집행을 막아 달라는 내용의 청구이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2019년 7월 대법원은 증거 부족으로 형사판결에서 무죄가 확정됐을 뿐 상주본의 소유권이 인정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이를 기각 확정 판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논란 일지   2008. 7.     배 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발견·방송에서 공개     2010. 2.     골동품 판매업자 조 씨, 배 씨가 상주본을 훔쳐갔다며 배 씨 상대로 물품 인도 청구 민사소송 제기     2011. 5.     민사소송 3심, 조 씨 소유권 인정·조 씨에게 인도 요구                9.     검찰, 문화재 절도죄로 배 씨 구속, 형사소송 제기     2012. 2.     형사소송 1심, 배 씨에게 징역 10년 선고. 배 씨, 감옥에서 수감                9.     형사소송 2심, 증거 불충분으로 배 씨 무죄 선고                12.     조 씨 사망으로 소유권 문화재청에 넘어감.     2014. 5.     형사소송 3심, 배 씨 무죄 확정 판결     2015. 3.     배 씨, 집에 화재 발생, 상주본 한 장 소실·불에 탐.                10.     배 씨, 상주본 헌납 대가로 1000억 원 보상금 요구, 민사 재심 계획 밝힘.     2016. 12.     법원, 문화재청에 강제집행 허가하는 민사판결 집행문 부여     2017. 4.      배 씨, 강제집행 청구이의의 소 제기     2018. 2.     1심, 배 씨 패소 판결     2019. 4.     2심, 배 씨 항소 기각                7.      3심, 상고 기각하고 원심 확정 판결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 해례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71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훈민정음 상주본"아, 너 보고싶다... 댓글:  조회:3388  추천:0  2019-10-10
배익기씨 "상주본은 '개인 재산'"… 국가 반환 요구 거절 한글날, 국가 반환운동 벌여온 상주·서울 고교생 4명 배씨 면담 (상주=뉴스1) 남승렬 기자 | 2019-10-09    한글날인 9일 오전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56)가 경북 상주시 낙동면 자신이 운영하는 골동품점에서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 요청 서명서와 손편지를 가지고 찾아온 고등학생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2019.10.9 /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한글날인 9일 오전 상주고등학교 2학년 김동윤(오른쪽 네번째) 학생 등 고교생 4명이 경북 상주시 낙동면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56·왼쪽)의 골동품점을 찾아 배씨에게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 요청 서명서와 손편지를 전달한 뒤 이야기 나누고 있다. 2019.10.9 /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 은닉 소장자인 배익기씨(56)가 상주본 국가 반환 여부에 대해 '개인 사유 재산'이라며 반환 의사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밝혔다. 배씨는 한글 창제 573돌을 맞은 9일 경북 상주와 서울 등의 고교생들이 자신을 찾아와 상주본 국가 반환을 요청하는 면담에서 "반환은 말도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당초부터 국가 것이라면 지금 제가 감옥에 있지 않겠느냐. 국가는 사유 재산(상주본)을 지켜주는 의무를 하면 되는 것"이라며 "이해관계에만 결부해서 사유 재산을 무조건 국가에 줘라고 하는 것은 문제"라고도 했다. 배씨는 "제가 상주본을 규장각 내부에서 꺼내온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노력해서 찾은 것"이라며 "당사자인 제 재산을 누가 나보다 더 안전하게 보존하려고 노력하겠느냐. 나를 두고 다른 관리인에게 상주본 보존을 맡길 이유는 없다"고 했다. 한 학생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정신은 '백성을 어여삐 여긴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상주본을 국민들이 다 볼 수 있게 국가에 반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국가는 개인의 사유 재산을 보호해주는 의무만 하면 된다"고 답했다. 상주본 보관 상태에 대해 배씨는 "어떤 기준이 안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450여년 동안 안전하게 보존된 것 같지는 않다. 박물관에서 보관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주본 국민반환 서명운동을 벌여온 상주고 2학년 김동윤군 등은 이날 오전 배씨의 골동품점을 찾아 상주고 전교생 416명이 서명한 서명서와 상주본 반환의 염원을 담은 학생들의 손편지 등을 전달했다. 이날 방문에는 김군을 포함해 상주와 서울지역 고교생 4명이 함께했다. 김군은 "훈민정음 상주본을 국가에 반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어른들만의 일이 아니다. 학생들도 한글 창제의 원리가 담긴 국보급 문화재인 상주본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국보급 유산을 개인이 소장한 채 공개하지 않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배씨 면담 이유를 설명했다. 배씨는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상주본 문제가 정상화돼 보고싶다는 이야기이지 않느냐"며 "그건 저도 동감하는 부분으로 당사자로서 오히려 더 시급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한테만 (상주본 반환을) 독촉하는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다"며 "하지만 염려했던 것 보다는 순수한 뜻으로 와서 희망사항을 전한 걸로 그 뜻을 잘 알겠다"고 덧붙였다. 배씨는 앞서 언론에 미리 배포한 '학생들의 오도된 서명요청에 대한 훈계답변서'라는 입장문을 통해 "십년이 넘도록 은폐와 왜곡, 거짓으로 점철하는 해례본 사건이 급기야는 학생들에게까지 오도된 방향의 압박의 이용물로 나서고 있다"며 "고등학생이면 주위 어른들의 암시·부추김·선동에 수동적으로 착실히 따르려고만 할 게 아니라 관계적 상황에 따라 다른 사정도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객관적 본연의 진실에 따라 행동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정신의 정화인 상주본 발견·소유자로서 그 뜻을 수호·계승해 훈계의 뜻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한글날인 9일 오전 상주고등학교 2학년 김동윤(오른쪽 두번째) 학생 등 고교생 4명이 경북 상주시 낙동면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56·오른쪽)의 골동품점을 찾아 배씨에게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 요청 서명서와 손편지를 전달하고 있다. 2019.10.9 /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고서적 수집가인 배씨는 지난 2008년 자신이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세상에 처음 알렸다. 하지만 골동품 판매업자 조모씨(2012년 사망)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긴 법적 공방과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은 시작됐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상주본의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판결했지만 배씨는 상주본 인도를 거부했다. 배씨는 이 때문에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구속(2014년 대법원 무혐의 판결)되기도 했다. 정부는 조씨가 사망하기 전 상주본을 서류상으로 문화재청에 기증했다는 점을 들어 배씨에게 상주본 소유권 인도를 요구하고 있으나 배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대법원은 상주본 소유권이 문화재청에 있다고 판결했으나 배씨는 여전히 상주본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국가가 가져가려면 상주본 가치의 10분의 1인 1000억원을 내라"는 등의 요구를 하고 있다. 상주본은 국보 제70호인 해례본(간송미술관본)과 같은 판본으로, 간송본에는 없는 표기와 소리 등에 관한 연구자 주석이 있어 학술적 가치는 간송본 이상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편 지난 7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화재청은 "그동안 배씨를 45차례 만났으며 반환을 설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상주본이 이미 3분의 1 이상 훼손됐다는 주장이 나오자 문화재청은 "실물을 보지 못해 모른다"고 답했다. 지난 2008년 존재가 알려진 뒤 자취를 감췄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불에 그을린 모습의 사진으로 공개됐다. 상주본의 소장자인 배익기씨(54)가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공개된 상주본은 지난 2015년 3월 배씨의 주택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탄 모습이었다. 책 하단 부분이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지만, 본문 부분은 다행히 불길을 피해 온전한 상태였다.(배익기씨 제공) 2017.4.11 /뉴스1 © News1 DB   ==========================/// “45회 면담을 진행하고 프로파일러까지 동원해 (소장자의) 심리 상태를 짚어내려 노력했지만 돌려 받을 합리적인 방법이 없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 9일 573돌 한글날을 맞지만 한글 학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11년 전 존재가 처음 알려진 뒤 소유권을 놓고 지난한 법정 공방까지 벌였지만 해결될 기미는커녕 파손 우려만 커지는 상황이다. 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장에서는 10년 넘게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논란의 근황이 전해졌다. 문화재청이 소장자인 배익기씨를 수십차례 면담하는 등 협상을 진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정 청장은 “소장자가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해 회수를 못 하고 있다”며 “검찰과 법원 등 유관기관과 협의해 다각적으로 회수 조치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주본은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70호)과 같은 책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사용법이 설명돼 있다. 2008년 배씨가 본인 집을 수리 하던 중 발견했다고 밝히면서 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후 배씨의 입수 경위를 놓고 도난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민ㆍ형사 소송이 진행됐다. 그러나 결과가 엇갈리면서 상주본 소유권 공방은 끝나지 않았다. 배씨는 지난 7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상주본을 건네는 대가로 문화재청에 1,000억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주본은 배씨가 일부만 공개를 해 전체 실물이 확인된 적이 없다. 오히려 지난 2015년 배씨 집에 화재가 발생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배씨는 당시 화재 이후 자신만 아는 장소에 상주본을 보관 중이라고 주장해왔다. 문화재청의 상주본 환수 작업이 진척을 보지 못하는 사이 상주본 파손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배씨의 2008년 상주본 공개 상황 촬영 영상을 분석한 전문가들 가운데는 총 33장 가운데 이미 10장 이상이 손실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문화재청은 강제집행 등도 고려 중이지만 실제 상주본 회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김창선 PD  /조원일 기자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민의 품으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김성대 기자   2019년 10월 09일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상주고·상주 우석여고·서울 해성여고 등 학생 4명 '상주본 반환 촉구' 서명부 소장자 배익기씨에 전달 한글날인 9일 오전 고교생들이 경북 상주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가 운영하는 골동품점에서 배 씨에게 상주본 반환 서명을 전달하고 있다. 상주고, 상주 우석여고, 서울 해성여고 등의 학생들은 지난 8월부터 상주본 반환을 촉구하는 서명과 함께 반환 촉구 손편지 운동을 벌여 이날 그동안 모인 손편지 등을 배 씨에게 전달했다.연합 제573돌 한글날을 맞은 지난 9일 상주고등학교 김동윤 학생을 비롯한 학생 4명(서울 해성여고 2명, 상주 우석여고 1명)이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 씨의 고서적 가게(상주시 낙동면)를 방문했다. 상주고, 상주 우석여고, 서울 해성여고 등의 학생들은 지난 8월부터 상주본 반환을 촉구하는 1000여 명의 서명부와 함께 반환 촉구 손편지 운동을 벌여 그동안 모인 손편지 등을 배 씨에게 전달했다.  결연한 마음을 담아 배 씨에게 전달한 이 서명부가 배씨의 마음을 움직여 훈민정음 상주본이 하루빨리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해 본다. 다음은 전국 최초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은 김동윤 상주고등학교 학생(2학년)과의 일문일답. -서명을 받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보고 크게 감동해 친구들하고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훈민정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 보니 현실은 영화 내용과 너무 달라 실망했다. 이에 그 자리에서 친구들하고 서명을 통해 이를 바로잡자고 의기투합했다. 특히 훈민정음 상주본과 관련해 지금까지 학생들이 목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학생들도 훈민정음 상주본은 개인의 소장물이 아니라 국민과 나라 소장물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서명을 받을 때와 소장자인 배익기 씨에게 전달했을 때 느낀 점은. △솔직히 처음 서명을 받을 때는 우리가 이런다고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올까 라는 회의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 동참해 주고 서명 인원수가 1000명이 넘어가면서 힘이 났다. 또 이 서명 명부를 배익기 씨한테 전달할 때 혹시 배 선생이 이를 거부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많은 걱정을 했는데 막상 전달하러 가보니 걱정과 달리 배익기 씨가 학생들의 순수한 뜻을 잘 받아줘 뿌듯했다. -이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향후 훈민정음 상주본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나. △저희가 소망을 담아서 전달한 1000명의 학생 서명부가 배 선생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718    [그것이 알고싶다]-"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언제면 해빛??? 댓글:  조회:3548  추천:0  2019-10-10
"상주본 상태 묻겠다"··· 한글날 배익기씨 찾는 상주 학생들 [중앙일보] 2019.10.08    기자 백경서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상주본의 국가 반환을 바라는 학생이 쓴 손편지. [사진 김동윤군] “상주본 소장자를 만나 상주본의 보존 상태나 위치 등 국민으로서 궁금한 점을 물어볼 겁니다.”       상주본 반환 서명 운동한 경북 상주고 학생 친구들과 9일 한글날 배익기씨 찾을 계획 김동윤군 "상주본 가치 국민과 공유했으면" 배씨 "상주본 사건이 학생들에게까지 오도" 경북 상주고등학교 2학년 김동윤(18) 군의 말이다. 김군은 한글날인 오는 9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하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56)씨를 그의 집에서 만날 예정이다. 김군은 그간 같은 학교 이경민(18)군 등과 상주본의 국가 반환을 요청하는 서명 운동을 전개해 왔다. 김군과 이군 등은 이날 배씨를 만나 상주고 전교생 416명의 서명서와 전국에서 받은 손편지를 전달할 계획이다.       김군은 8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압적으로 상주본을 반환하라고 요구할 계획은 없다”며 “(배씨의) 억울한 부분에 대해서도 듣고 상주본의 가치와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군은 지난 8월부터 상주본 국가 반환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는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를 보고 상주본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됐다”며 “상주본은 한글의 창제 원리가 담긴 문화재이고, 상주시민의 자부심인데 지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상주본 반환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어 직접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으니 (배씨가) 손편지 등을 보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연합뉴스]    배씨 “학생들, 못 만날 이유 없다”    배씨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학생들을 만나지 않으면 나를 나쁘게 몰아갈 것 아니냐”며 “잘못한 점이 없으니 못 만날 이유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오도된 서명요청에 대한 훈계답변서’라는 입장문을 전달했다. 그는 입장문에서 “십년이 넘도록 은폐와 왜곡·거짓으로 점철하는 해례본 사건이 급기야는 학생들에게까지 오도된 방향으로 이용된다”며 “고등학생이면 주위 어른들의 암시·부추김· 선동에 따르려고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사정도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주본의 위치와 현재 상태 등에 대해서 배씨는 “사정상 답해줄 수 없다”고 짧게 답했다. 문화재청과의 상주본 반환과 관련한 협의 부분에 대해서는 “정해진 답을 가지고 오니 진척이 없다”고 했다.       문화재청 “배씨와 45차례 면담했지만….”    지난 7일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화재청은 “그동안 배씨를 45차례 만났으며 반환을 설득하고 있다”며 “프로파일러를 동원해 배씨의 심리상태를 짚어내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상주본이 이미 3분의 1 이상 훼손됐다는 주장이 나오자 문화재청은 “실물을 보지 못해 모른다”고 답했다.       지난해 11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훈민정음 상주본 이대론 안된다' 토론회에서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씨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서적 수집가인 배씨는 2008년 자신이 상주본을 갖고 있다고 처음 알렸다. 하지만 골동품 판매업자 조모(2012년 사망)씨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상주본의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판결했지만 배씨는 상주본 인도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구속(2014년 대법원 무혐의 판결)되기도 했다. 조씨가 사망하기 전 상주본을 서류상으로 문화재청에 기증하면서 정부는 배씨에게 상주본 소유권 인도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7월 대법원은 상주본 소유권이 문화재청에 있다고 판결했다. 배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상고를 기각하고, ‘상주본의 소유권이 배씨에게 있지 않다’는 원심을 확정하면서다. 하지만 배씨는 여전히 상주본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국가가 가져가려면 상주본 가치의 10분의 1인 1000억원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상주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같은 판본이면서 표제와 주석이 16세기에 새로 더해져 간송본보다 학술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사회] 게재 일자 : 2019년 10월 08일(火)   고교생들 한글날 ‘훈민정음 상주본 반환 요청서’ 소유자에게 전달       소유자 “오도된 서명” 훈계 답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상주본 반환 촉구 서명운동을 벌인 고교생들이 한글날(9일) 상주본 실소유자라고 주장하는 배모 씨를 만나 반환 및 공개 요청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8일 경북 상주고등학교에 따르면 김동윤(18·2학년) 군 등 이 학교에서 상주본 반환 서명운동을 주도한 고교생 3명은 9일 전교생 416명 가운데 380명의 서명서와 손글씨가 담긴 상주본 반환 및 공개 요청서를 배 씨 집에 찾아가서 전달할 계획이다. 앞서 이들 학생은 8월 12일부터 서명운동에 나섰으며 이 같은 운동이 알려지면서 상주 우석여고, 서울 해성여고, 세종 국제고, 경북 김천고 등에서도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김 군 등은 이들 학교의 서명서도 이날 받아서 함께 전달할 예정이다.  김 군은 “상주본은 한글의 창제 원리가 담긴 문화재이기도 하지만 상주 시민의 자부심이기도 하다”면서 “상주본이 국가가 관리하면서 제 역할을 다 하는 문화재가 되도록 하기 위한 학생들의 염원을 반환 요청서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배 씨는 학생들에게 ‘훈계’하는 내용을 담은 답변서를 내놓기로 했다. 배 씨는 미리 배포한 ‘학생들의 오도(誤導)된 서명요청에 대한 훈계답변서’를 통해 “학생들은 어른들의 부추김이나 선동에 수동적으로 따르려고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사정도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10년이 넘도록 은폐와 왜곡, 거짓으로 점철한 상주본 사건이 급기야 면학의 학생들에게까지 오도된 방향으로 이용된다”면서 “상주본 발견·소유자로서 세종 정신을 계승해 훈계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한편 배 씨는 문화재청의 상주본 반환 강제집행을 막아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청구이의 소송 상고심에 패소하면서 문화재청의 소송 비용 1000만 원을 부담하게 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최근 배 씨에게 소송비용을 오는 11월까지 내라는 고지서를 직접 전달했으며 이후 독촉해도 납부하지 않으면 소유물을 압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 씨는 예전에는 골동품을 수집·판매하면서 겨우 생활했으나 이 소송을 1년 넘게 끌게 되면서 일을 하지 못해, 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배 씨는 상주본의 가치가 1조 원 이상으로 알려졌으니 10분의 1인 1000억 원이라도 주면 내놓겠다는 뜻을 비치고 있다.  배 씨는 상주본을 꼭꼭 숨겨둔 채 10년이 넘도록 실물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행방마저 묘연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도 상주본 회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배 씨는 2008년 상주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지역 방송사에 총 33장 가운데 28장을 공개한 바 있다. 상주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례본과 같은 훈민정음 해설서로,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 사용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문화일보 ///상주=박천학 기자  배익기 "훈민정음 반납 안해" 예전에는 "천 억 줘도 안돌려준다" 발언 하기도  나원석 수습기자   2019.10.09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배익기 씨 / 사진 연합뉴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로 알려진 배익기(56) 씨가 상주본을 국가에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계속해서 밝혔다. 배익기 씨는 상주본 국가 반환 요청에 대해 한글날인 9일 경북 상주 및 서울 지역 고교생들을 만나 “사유 재산을 무조건 국가에 줘라고 하는 것은 문제. 반환은 말도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배익기 씨는 “(상주본이) 국가 것이라면 지금 제가 감옥에 있지 않겠나”라면서 “국가는 사유 재산을 지켜주는 의무를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제가 상주본을 규장각 내부에서 꺼내온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노력해서 찾은 것”이라며 “당사자인 제 재산을 누가 나보다 더 안전하게 보존하려고 노력하겠나”라는 말도 덧붙였다. 상주본 보관 상태에 대한 질문에는 “어떤 기준이 안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450여년 동안 안전하게 보존된 것 같지는 않다”며 “박물관에서 보관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배익기 씨는 2018년 있었던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상주본을 국가에 되돌려줄 뜻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익기 씨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훈민정음 상주본이) 국민에 공개돼 민족 자산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느냐"고 묻자 "당연하다"면서도 "저 같은 국민이 잘 갖고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도 생각한다"고 답을 했었다. 이어 "(훈민정음 상주본을 국가에 내놓는 조건으로) 1조원을 요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엔 "그런 적은 없지만 문화재청에서 (상주본은) 최소 1조원 가치를 가진다고 감정했다"면서 "귀속 사례금으로 (감정가의) 10분의 1 정도인 1000억원을 제시한 적은 있다. 하지만 1000억원을 받아도 주고 싶은 생각이 사실 없다"고 말하며 화제가 된 적 있다.      © 금강일보 [출처: 중앙일보] "상주본 상태 묻겠다"···한글날 배익기씨 찾는 상주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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