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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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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비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70  추천:0  2020-04-07
[핵잼 사이언스] 바다에서 30일 만에 분해되는 플라스틱 개발  2020.04.07.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일본 연구진이 친환경 소재로 만든 신소재 플라스틱(오른쪽 위)과, 특정 미생물 농도의 바닷물에서 분해된 신소재 플라스틱(중앙)의 모습일본 연구진이 바다에서 30일 만에 분해되는 신소재 플라스틱을 개발했다고 밝혀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사이신문 등 현지 언론의 4일 보도에 따르면 오사카대학과 일본 최대 옥수수녹말 제조업체인 일본식품화공 공동 연구진은 열대지방에 주로 서식하는 카사바 나무에서 추출한 전분과 목재 펄프에서 추출한 셀룰로오스(섬유소)를 결합했다. 이후 이 혼합물을 수용액에 용해시킨 뒤 매우 얇은 투명시트 위에 펼치고 열을 가해 고체 형태의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플라스틱은 비닐봉투 제조에 주로 사용되는 폴리에틸렌 등으로 만든 기존 플라스틱보다 내구성이 두 배에 달하는 것을 확인했다. 동시에 이 플라스틱의 친환경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개의 용기에 각기 다른 농도의 미생물이 담긴 바닷물을 넣고 플라스틱을 담궜다. 그 결과 높은 농도의 미생물이 서식하는 해수에서는 30일 이내에 완전히 분해되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미생물의 양이 적은 경우, 연구진이 개발한 신소재 플라스틱은 해수에서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일반적으로 바다에 버려진 비닐봉투가 분해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년, 플라스틱 병은 최대 450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약 800만t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버려지며, 세계경제포럼은 2050년까지 바다의 미세플라스틱이 전 세계의 모든 어류보다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양을 뒤덮은 플라스틱 쓰레기가 모든 종류의 해양 생물과 인류를 위협하는 가운데, 연구진의 신소재 플라스틱이 해양 쓰레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연구진은 “우리는 이 신소재 플라스틱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시에 바다에 많이 버려지는 식품 포장재로 사용해보고 싶다”면서 “새로운 종류의 플라스틱은 제조단가가 저렴하고 공정이 단순해서 곧 실용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만든 플라스틱이 해양 쓰레기 축적으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영국에서 발행하는 바이오 소재 관련 전문학술지 ‘카보하이드레이트 폴리머스’(Carbohydrate Polymers)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2916    [민속] - 이남박 댓글:  조회:4101  추천:0  2020-04-05
한국의 농기구 이남박     쌀이나 보리쌀 등에 섞인 돌과 같은 협잡물을 고를 때 사용하는 연장으로 농사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통 부엌 살림으로 많이 썼다. 통나무를 바가지모양으로 파내고 다듬어서 만드는데 그릇 운두의 안쪽 면에 1/2∼1/3 정도만 둘레 방향으로 오톨도톨하게 요철을 냈다〈사진 9-6〉. 〈사진 9-6〉 이남박(농협 농업박물관) 조리로 일어 내고 남은 쌀을 이남박에 담아 흔들면서 따라 내는데, 요철 부분으로 곡식이 통과하면서 요철면과의 마찰력의 차이로 돌과 같은 협잡물을 가려낸다. 작은 것은 지름이 20cm 정도에서 큰 것은 70cm 이상 되는 것도 있으며, 모양도 원형, 타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남박을 한자음을 빌어 齒函只로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남박 (한국의 농기구) 한국언어지도 이남박     질문 이 그릇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쌀을 일 때 쓰는 나무바가지인데, 흔히 둥글게 파여 있음) '이남박'의 방언형은 모두 '박'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잡다하게 여러 형태로 분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방언형은 대개 '이남박'계, '함박'계, '쌀름박'계 및 '바가지'계 정도로 나눌 수 있을 듯한데 그 구체적인 방언형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① '이남박' : 이남박, 남박 ② '함박'계 : ㉮ 함박, 나무함박, 쌀함박, 함배기, 나무함배기                    ㉯ 함지, 나무함지, 함지박 ③ '바가지'계 : 나무바가치, 솔바가지, 박바가치 ④ '살름박'계 : ㉮ 쌀름박, 쌀람박, 쌀룸박, 쌀르박                       ㉯ 쌀배기, 살배기, 쌀뚝배기, 쌀람배기 이상의 세 계열 외에도 '바팅이', '구멍구시'가 각각 겨우 경북의 , 경남의 한 곳에서만 나타나며, 또 제주를 비롯하여 경남과 전남의 여러 곳 등 이에 해당하는 어휘 자체가 없는 지역도 꽤 있다. 개별적 방언형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들을 앞의 세 계열로 나누어 보면 그 분포가 꽤 선명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이남박'계는 경기를 거점으로 하여 강원, 충북의 일부에 퍼져 있고, '함박'계는 전남북과 충남이 그 중심지로서 충북, 경남 쪽으로도 확산되었으며, '쌀름박'계는 경북을 거점으로 강원의 동남부에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각 계열 안에서도 '남박'은 강원, '함지'나 '함지박'은 전남, '쌀름박'은 강원, '쌀배기'는 경북 등으로 그 분포가 선명한 경계를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박'을 그 핵심어로 가지고 있음이 주목을 끈다. 방언형이 이처럼 여러 갈래로 갈리면서 이렇듯 한 가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박'은 '나무로 된 박'이라는 뜻으로, '이남박'은 안으로 골이 파인 모양이 '이빨' 같다고 해서 거기에 '이'를 결합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쌀름박'은 '쌀+함박'에서 'ㅎ'이 약화되어 생긴 형태일 것이다.(I-077)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남박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이남박 (한국언어지도)   사진의 왼쪽에 있는 나무제품은 이남박이란 것으로 함지박의 일종으로 쌀, 보리쌀 등을 씻을 때 골이 진 부분에서 가벼운 마찰이 생겨 깨끗이 씻을 수 있게 하였고 또 조리로 쌀을 일어 건진 다음, 이남박에 남은 소량의 쌀과 돌 부스러기 등 불순물을 분리시킬 때도 이 골이 진 부분이 효과적인 구실을 하게 됩니다.   새로 만든 이남박은 사용하기에 앞서 표면에 들기름을 발랐다가 잘 마른 다음 행주로 길을 들여서 쓰거나, 주사의 붉은 칠이나 진흙 칠을 하여 잘 말린 다음 마른행주로 깨끗하게 닦고 그 위에 들기름을 얇게 먹여 약간 홍갈색이 돌게 길들인 다음에 사용하였는데 장기 보관을 위해서라도 들기름을 발라 마른 행주로 벅벅 닦아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여물바가지 입니다. 지금은 소를 키울때 대부분의 경우 사료를 먹이는데 예전엔 여물이라 해서 소나 말이 먹던 마른풀, 그것을 여물이라고 하는데 그 여물을 푹 끓입니다. 그럼, 그것이 여물죽이 되는데 그 여물죽을 풨던 도구.^
2915    [민속] - 함지박 댓글:  조회:4133  추천:0  2020-04-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함지박     이미지 크게보기 큰 나무를 쪼개어 안을 파내서 만든 큰 그릇.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주방용품 재질 고한지, 풀, 나무 용도 조리용, 음식운반용 목차 정의 내용 정의 통나무의 안을 파내서 바가지 같이 만든 큰 그릇. 내용 일명 ‘함박’이라고도 한다. 함지박에는 전함지·민함지·주름함지 등이 있다. 전함지는 전이 달리게 판 것이며 민함지는 둥근 함지이고 주름함지는 안쪽이 주름지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식품류를 담고 떡가루를 버무리거나 반죽할 때, 또는 김장소나 깍두기를 버무리는 등 조리의 여러 조작을 할 때, 혹은 떡이나 과줄 등을 담아 운반할 때 등 여러가지 일에 쓰인다. 크기는 여러가지이며 무겁고 튼튼하므로 한 가정에서 대를 물리면서 사용하였다. 중간 크기의 것은 가운데 지름이 80㎝, 깊이 20㎝ 정도이며 주변에 5∼6㎝ 정도의 전을 붙인다. 전을 좌우 양쪽에만 10㎝ 정도로 넓게 붙인 것도 있으며, 큰 것에는 붙이지 않는다. 새로 만든 함지박은 콩댐을 먹여 반들거리고 견고하게 하였다. 목제 외에 종이로 만든 종이함지도 있다. 이것은 먼저 물에 담가서 땟국물과 풀기를 뺀 고한지(古韓紙)를 꼭 짜서 묽은 풀에 다시 담가 풀물이 고루 배도록 한 다음, 목함지 둘레에다 2∼3㎝의 두께로 부착시켜 형태를 만들고 잘 말린다. 잘 마르면 목함지에서 떼어 다시 손질하여 콩댐을 한다. 물기 없는 음식을 다룰 때 사용하면 가벼워서 매우 편리하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대관』2(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관련이미지 5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함지담아 보관하거나 나르는 도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함지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재학습백과 초등 국어 용어사전 함지박   [ wooden bowl ] 목차 1. 함지박 2. 소쿠리 3. 대야 4.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 오너라! 1. 함지박 함지박   [비슷한말] 함지, 함박 함지박에 물을 담아 오면 되나요? 바가지와 비슷한 모양으로, 통나무를 잘라 그 속을 파내어 만든 그릇을 '함지박'이라고 해요. 여러 가지 음식을 담아 놓을 때나 음식을 버무릴 때 사용한답니다. [예] 갓 쪄낸 송편이 함지박 안에 가득 있었습니다. [교과서예] 삽을 들고 함지박 안으로 들어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만두소를 버무리는 모습     2. 소쿠리 소쿠리 '소쿠리'는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둥글게 짜고, 그 위에 테두리를 둘러서 단단하게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해요. 주로 음식을 담아 놓을 때 사용한답니다. 길동이는 거북 옹이 소쿠리에 가득 담아 온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3. 대야 대야 '대야'는 세수를 할 때나 발을 씻을 때처럼 무엇을 씻기 위하여 물을 담아서 쓰는 둥글넓적한 그릇을 말해요. 길동이는 햇빛을 가리려고 머리에 대야를 뒤집어썼습니다. 4.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 오너라! 옛날에는 아이가 이불에 오줌을 싸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동네를 다니며 소금을 얻어 오게 했답니다. 키를 쓰고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쌌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창피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관련이미지 4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함지큰 나무를 쪼개어 안을 파내서 만든 큰 그릇.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함지박 [wooden bowl] (천재학습백과 초등 국어 용어사전)  
291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식량위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14  추천:0  2020-04-04
  못 팔아서 '우유' 버리고 '감자' 쌓였는데… 식량위기?  2020.04.04.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뉴스데스크]◀ 앵커 ▶ 이렇게 우리 일상을 바꿔놓은 코로나19. 그 여파가 어디까지일지 가늠하기가 어려운데요.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고, 이동이 제한되면서 전세계적인 식량위기가 올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정은 기잡니다. ◀ 리포트 ▶ 미국 위스콘신의 한 젖소 농장, 갓 짜낸 우유를 하수구에 버리고 있습니다.  도시에선 사재기로 우유값이 올랐는데 미국 전역에 내려진 이동제한 조치로 유통을 못시켜 그냥 버리는 겁니다.  코로나19로 유통망이 붕괴되면서 농촌에선 식량을 처치못해 골머리를 앓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지역간 이동이 막혀 팔지 못한 딸기를 소에게 먹이는가 하면, 네덜란드에선 새로 파종할 철이 됐는데도 작년 감자가 남아 수백만 톤을 쌓아놨습니다.  [헤에르 드라크/네덜란드 감자농장주] "감자를 젖소 농장에 팔기로 했습니다. 예전엔 1kg당 18센트를 받았지만 이번엔 1센트 받기로 했어요." 코로나19를 막으려 국경을 봉쇄한 유럽의 농촌에선 수확철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독일이 연간 30만명, 프랑스가 연간 80만명씩 해외에서 농업 인력을 수혈해 왔는데 국경이 막혀 일손들이 넘어오질 못하는 겁니다.  [율리아 클뤼크너/독일 농림부장관] "아스파라거스 수확뿐 아니라 파종에도 일손이 필요합니다. 5월까지 8만명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로 식량안보를 우려한 나라들이 식량 수출을 일부 중단하면서 전세계적인 식량위기까지 점쳐지고 있습니다.  3대 쌀 수출국인 베트남이 지난 24일부터, 캄보디아가 내일부터 쌀 수출을 중단하는데 국제 곡물시장의 쌀 값은 이미 7년내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유엔농업기구 FAO는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4·5월에 큰 식량혼란이 일어날 거라 경고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한 식량 공급체계를 회복시키긴 어려워 보입니다.  MBC 이정은입니다. /영상편집 : 이지영  
2913    [그것이 알고싶다] - "짝짓기" 몇초 사이 호박속에... 댓글:  조회:3899  추천:0  2020-04-04
[핵잼 사이언스] 4100만 년 전 ‘짝짓기’ 중 호박에 갇힌 파리 한쌍 발견 2020.04.04.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지금으로부터 4100만 년 전 교미 중 영원한 무덤에 갇힌 한쌍의 파리가 발견됐다. 최근 호주 모나쉬대학 연구팀은 호주 빅토리아의 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호박’에서 화석화 된 한쌍의 파리를 발견했다는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 2일 자에 발표했다. 긴 다리가 그대로 보일 정도로 전체적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이 파리들은 4100만 년 전 '짝짓기' 중 생을 마감한 매우 희귀한 사례다. 파리의 교미가 통상 몇초 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파리의 무덤이 된 호박(琥珀·amber)은 나무의 송진 등이 땅 속에 파묻혀서 수소, 탄소 등과 결합해 만들어진 광물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한쌍의 파리가 교미를 위해 송진에 내려 앉았던 몇 초 동안 이들은 영원히 갇힌 셈이다. 논문의 선임저자인 제프리 스틸웰 교수는 "유기체들을 호박이라는 3D 공간에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어 마치 어제 죽은 것처럼 보인다"면서 "이 때문에 호박은 고대 지구 생태계에 대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에 연구팀은 빅토리아와 태즈메이니아에서 발굴된 최대 5400만 년 전 암석에서 거의 6000개에 달하는 호박 조각들을 발견했고 이 중 파리를 비롯한 거미, 개미 등의 곤충을 찾아냈다.    이번 발견이 한가지 더 의미있는 이유는 지구상 대부분의 호박은 미얀마 등 북반구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스틸웰 교수는 "호박은 호주와 같은 남반구에서 발견된 것이 거의 없다"면서 "이번 발견은 지구의 호박 화석 기록의 균형을 잡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종익 기자 
2912    [세계속에서] - 애매불쌍한 유채꽃들... 댓글:  조회:3709  추천:0  2020-04-03
  "상춘객 발길 끊이지 않아서"… 삼척 5.5ha 유채꽃밭 갈아엎어 2020.04.03.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코로나19 예방 위해 트랙터 4대 동원 3시간여만에 모두 제거  갈아엎은 삼척 유채꽃밭(삼척=연합뉴스) 3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트랙터로 갈아엎은 강원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유채꽃밭이 황량한 풀밭으로 변해 있다. 2020.4.3 [삼척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byh@yna.co.kr (삼척=연합뉴스) 배연호 기자 = 강원 삼척시가 맹방 유채꽃밭을 모두 갈아엎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축제를 취소한 데 이어 꽃밭 출입까지 통제했으나 상춘객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채꽃밭을 따라 벚나무가 이어진 옛 7번 국도도 주·정차하지 말고 차량으로 통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기 위해 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유채꽃밭으로 들어가는 상춘객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는 상황이었다. 삼척시 관계자는 "이런 모습에 상당수가 고령자인 마을 주민 사이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불안감도 커지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상춘객이 대거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주말 전에 유채꽃밭을 갈아엎기로 결정한 삼척시는 트랙터 4대를 동원해 3일 오후 1시 20분께부터 오후 4시 10분께까지 3시간여만에 유채꽃을 모두 제거했다. 유채꽃밭은 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옛 7번 국도변에 축구장 넓이의 7.8배인 5.5㏊ 규모로 조성돼 있다. 갈아엎는 삼척 유채꽃밭(삼척=연합뉴스) 3일 강원 삼척시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출입통제에도 상춘객 발길이 끊이지 않자 트랙터를 동원해 근덕면 상맹방리 유채꽃밭을 갈아엎고 있다. 2020.4.3 [삼척시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byh@yna.co.kr 이곳에서는 매년 봄 삼척 맹방 유채꽃 축제가 열려왔다. 19회째인 올해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28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취소됐다. 삼척시는 축제 취소에도 상춘객 발길이 이어지자,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하나로 지난달 27일부터 유채꽃밭 출입을 통제한 바 있다.
2911    [민속] - 탈 댓글:  조회:8014  추천:0  2020-03-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탈     이미지 크게보기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와 이웃마을인 병산리에 전해오는 탈. 이칭별칭 가면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개설 탈의 발생 한국 탈의 역사 한국 탈의 종류와 구조 한국 탈의 특징 탈 제작기법 탈의 형상과 색상 탈의 성격 표현 정의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주로 얼굴에 써서 분장에 사용하는 물건. 가면 개설 한자어로는 면(面)·면구(面具)·가면(假面)·대면(代面)·가두(假頭)·가수(假首) 등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광대·초라니·탈·탈박·탈바가지 등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얼굴 앞면을 가리는 면구를 가면, 머리 전체 후두부(後頭部)까지 가리는 것을 가두·가수·투두(套頭)라고 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탈’이라는 말이 가면을 나타내는 우리말로 쓰여지고 있지만, 우리 탈놀이[假面劇]에 사용되는 탈은 모두 얼굴 전면을 덮게 되어 있으며, 탈 뒤에는 ‘탈보[假面布]’가 붙어 있어서 이것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후두부를 가리게 되어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 탈은 그리스가면이나 기악면(伎樂面)과 마찬가지로 가두에 가깝다고 하겠다. 탈은 동양이나 서양, 문명한 민족이나 미개한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민족 사이에 존재하며 기원도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원시민족사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탈의 발생 탈은 원시시대의 집단생활에서 여러 가지 종교의식에서 신령·악귀·요괴·동물 등 비인간적인 것으로 가장하여 주술(呪術)을 행할 필요에서 요구되었다. 그 하나는 외적이나 악령을 위협하기 위하여, 두번째는 신의 존재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번째는 죽은 사람을 숭배하고 죽은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하여, 네번째는 토테미즘(totemism)의 신앙에서 여러 가지 동물로 가장하기 위한 의태(擬態)에서 발생한 것 등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발생된 탈은 우리나라에서도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외적이나 악령을 위협하기 위한 탈로는 5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상례(喪禮) 때 사용되었던 방상시가면(方相氏假面)과 음력 정초의 악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행사 때 사용되었던 사자가면(獅子假面)이 있다. 또한 신의 존재를 표시하기 위한 탈로는 개성 덕물산(德物山) 위의 신당(神堂: 장군당과 부인당)과 영천군 신령면(新寧面)의 무당 신막(神幕)에 안치돼 있던 광대시(廣大氏)·창귀시[倀鬼氏]·소미시·놋도리 및 장군가면 등이 있는데, 이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무당이 그 가면에 고사를 지낸다. 죽은 사람을 숭배하고 비슷하게 만들기 위한 탈로는 문헌상에 나타난 것과 같이 신라시대의 관창(官昌)의 탈과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 등의 탈이 그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신숭겸·김락 두 장수를 비롯하여 전사한 공신들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열석(列席)시켰다. 이 제전(祭典)은 그 뒤 해마다 되풀이되었는데, 1120년에 고려 예종이 향가(鄕歌) 형식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신숭겸·김락 두 장수를 추모하였다. 그리고 동물로 가장하기 위한 의태에서 발생한 탈로는 원숭이·범·담비·사자를 비롯하여 십이지(十二支)의 소·말·토끼·양·돼지·개 가면 등이 있다. 이들 가면은 산대(山臺)·봉산(鳳山)·강령(康翎)·마산(馬山)·통영(統營)·수영(水營)·하회(河回)의 탈놀이에서, 또 십이지의 탈은 조선왕조 궁중의 나례(儺禮) 행사 때에 사용돼왔다. 이러한 것이 한편으로는 그대로 신성시된 형태로 제마초복의 탈과 같은 신앙가면(信仰假面)이라는 것으로 전래되고, 또 한편으로는 점점 가무(歌舞)를 주로 하는 예능의 주요소의 하나가 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사실적으로 정교해져 예능가면(藝能假面)으로서 예술적으로 완성되어갔다. 한국 탈의 역사 우리나라의 탈이나 탈놀음의 시작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패면(貝面)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토면(土面) 등 신석기시대의 가면유물을 들 수 있다. 그 뒤 6세기경의 것으로 추측되는 나무로 만든 옻칠을 한 탈이 발견되었다. 이는 1946년 경주 노서리(路西里) 고분인 호우총(壺杅塚)에서 출토된 유물가면으로 그 구조는 나무로 만든 탈에 옻칠을 한 것인데, 눈알은 유리이고 두 눈에는 황금으로 된 환(環)이 둘려져 있다. 이 탈은 방상시가면으로 보이는데, 방상시가면은 황금사목(黃金四目)을 연상하게 되므로 그 탈의 눈이 두 눈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다. 하지만 『태평광기(太平廣記)』 견이록(甄異錄)에 두 눈의 방상시가면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 『순자(荀子)』 비상편(非常篇)에도 두 눈의 방상시가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탈은 방상시가면이 틀림없다. 신라시대의 이 탈은 당시 왕후·귀족들의 상례 때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과는 달리 이 유물은 탈이 아니라 화살통이라는 견해도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밖에 덕물산가면(德物山假面)과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13개의 하회(河回)탈 및 병산(屛山)탈 등 옛 가면이 전해지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제사조(祭祀條)에 보이는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중 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의 네 가지이므로, 이는 실로 9세기 말엽의 일로 탈 및 탈놀음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신라시대에는 탈놀음으로 검무(劒舞)와 처용무(處容舞)가 있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정확한 문헌과 유물은 없다. 하지만 19세기의 조선조 현종 때의 학자 민주면(閔周冕)이 『구동경지(舊東京志)』를 증보,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에 검무가 탈놀음임을 밝히고 있다. 이 가면검무는 중국 북제(北齊) 난릉왕(蘭陵王)의 고사(故事)를 놀이화한 대면희(大面戱)와 같이 나이 어린 관창의 용감한 이야기를 춤으로 놀이화한 것이다. 처용무는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탈을 쓰고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고려사』 고종 23년(1236)조에 복야(僕射) 송경인(宋景仁)이 취흥하여 처용무를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나례행사 때 방상시가면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나례의 신앙가면에서 뒷날 예능가면으로 진전하였다. 조선왕조에는 산대잡희(山臺雜戱)에서 파생된 산대가면극(山臺假面劇)을 비롯하여 최근까지 우리 민간에 연중행사의 하나로 각 지방에서 연희되어 오던 해서가면극(海西假面劇)·야류(野遊)·오광대가면극(五廣大假面劇)·서낭신제가면극[城隍神祭假面劇] 등이 있어 여기에 사용된 탈이 무척 많다. 한국 탈의 종류와 구조 우리나라 탈은 크게 신앙가면과 예능가면으로 나눌 수 있다. 신앙가면이란 일정한 장소에 가면을 안치하여 두고 그 가면에 제사(또는 고사)를 지내거나 가면을 얼굴에 쓰고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능가면이란 얼굴에 가면을 쓰고 무용할 때나 연극할 때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이 예능가면에도 신앙적 일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신앙가면에는 일정한 장소에 안치해 두고 고사만을 지내는 신성가면(神聖假面)과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얼굴에 쓰는 구나가면(驅儺假面)이 있다. 이 신성가면에는 광대시가면·창귀시가면·소미시가면·놋도리가면·장군가면이 있고, 구나가면에는 방상시가면과 사자가면이 있다. 둘째, 예능가면에는 춤을 출 때 얼굴에 쓰는 무용가면, 연극할 때 쓰는 연극가면이 있다. 이 무용가면에는 처용무가면이 있고, 연극가면에는 산대가면극·해서가면극·야류·오광대가면극·서낭신제가면극의 탈이 있다. 우리나라 탈의 구조를 보면 그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는 조형(造型)에 지나지 않으나, 방상시가면의 눈알과 봉산사자가면의 눈알, 북청사자가면의 입, 산대가면극의 눈끔적이가면의 양쪽 눈, 마산오광대가면극의 턱까불가면의 턱을 비롯하여 동래야류가면극의 양반탈의 턱, 수영야류가면극의 수양반(首兩班)탈의 턱, 하회가면극의 선비·양반·중·백정 탈의 턱, 그리고 해서가면극의 황주양반탈의 턱은 움직이는 것이다. 한국 탈의 특징 우리나라 탈은 한국적인 표정을 지니고 있고 우리나라 사람의 골격과 용모가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역(役)에 따른 인물의 개성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하회가면의 선비·양반·각시·중·백정 등이 그러하며, 그 가면들의 사실적인 조각수법은 우리나라 나무탈 중 일품(逸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탈은 대부분 그 형모가 괴이하고, 또 색채가 짙은 데 그 특질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 야간에 장작불 아래에서 연출되므로 강렬한 색채로써 하지 않으면 표현의 힘을 약하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면극에 사용하지 않는 개성 덕물산의 신앙가면과 야간에 연희하지 않는 하회 및 강릉의 탈은 색채가 그렇게 강렬하지 않다. 그리고 그 탈들의 용모가 무시무시함과 동시에 표정이 매우 딱딱한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그리고 색채상으로 보면 주홍색이 대부분이고, 그 다음에 흑남색을 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또 금색·은색도 적지않게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탈 중에 하회의 나무로 만든 가면에는 얼굴의 상반부와 하반부인 턱을 따로따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는 끈으로 연결한 것으로서 얼굴의 표정을 변화시키는 데 대단히 유리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색채·형모 외에 거의 모든 탈에는 탈보인 헝겊조각 및 노끈을 탈 뒤에 붙여놓았다. 이것으로 연희자는 탈을 자기의 머리에 밀착시켜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고 또 추한 자기의 후두부를 관람자에게 보이지 않아도 된다. 가면은 대다수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나 그 중 더러는 여러 가지 신의 형상을 표시한 것도 있다. 방상시가면·처용가면·오방신장가면(五方神將假面)·산대가면극에 있어서 연잎가면[蓮葉假面]과 눈끔적이 탈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영노와 같은 가상(假想)의 동물탈도 있으며, 연극의 줄거리가 희극적인 관계로 실제의 동물탈도 상당히 있다. 즉, 산대가면극·해서가면극의 원숭이, 오광대가면극의 사자·범·담비 등과 같은 탈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반가면은 대부분 쌍언청이·언청이·입비뚤이·코비뚤이·사팔뜨기 등 불구자의 용모가 특징인데 이는 조선시대 양반계급에 대한 평민들의 반감이 탈에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 탈은 형모가 괴이하고 색채가 짙은 데 특질이 있지만, 그 표정은 사실적이기보다 대부분 상징적인 것이 또한 그 특색의 하나이다. 탈 제작기법 탈의 제작기법은 재질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탈은 재료에 따라 나무탈·종이탈·바가지탈·털가죽탈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종이탈과 바가지탈이 주종을 이루는데, 그것은 재료의 특징 때문이다. 종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손쉽게 탈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바가지는 이미 그 형상이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조금만 손질을 하면 탈을 완성할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재료는 가벼워서 탈을 만들어 쓰고 탈춤을 추는 데 편리한 까닭도 있다. 이 밖에도 사자탈과 같이 규모가 큰 특수한 탈은 소쿠리나 키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종이탈은 몇 가지 방식으로 제작된다. 첫째, 종이를 얼굴 모양으로 자르고 먹과 물감으로 그려서 얼굴에 쓸 수 있도록 한 종이탈이 있다. 동해안에서 별신굿을 하는 세습무(世襲巫)들이 탈굿을 할 때, 한지(韓紙)를 이용해 눈·코·입 부분을 적절히 가위로 오리고 먹과 물감으로 채색하여 인물에 맞는 탈을 만든다. 종이에 거의 손질을 하지 않는 탈도 있다. 한지를 그대로 보자기처럼 덮어쓰고 목 부분을 끈으로 묶은 다음 눈만 뚫어준다. 복면에 가까운 탈로 제주도의 도깨비탈은 이렇게 만든다. 한지 한 겹으로 만든 평면적인 종이탈이지만, 한지의 재질로 인하여 얼굴에 쓰고 있는 동안 얼굴 각 부위의 윤곽이 드러나서 입체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진주오광대탈은 마분지를 사용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만든다. 두꺼운 마분지를 세로로 접어서 윤곽을 오리고 눈과 입 등을 도려내어 좌우가 대칭을 이루게 한다. 코는 다른 종이를 덧붙여서 코의 입체감을 살린다. 둘째, 흙으로 탈의 모양을 양각(陽刻)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한지를 여러 차례 발라서 말리고 흙으로 탈의 형상을 떠낸다. 여기다 눈·코·입을 뚫고 물감으로 채색하여 탈을 완성시킨다. 이와 반대로 음각(陰刻)한 탈의 모형에 안쪽으로 종이를 발라서 탈을 떠내기도 한다. 양각의 모형에서 떠내는 경우에는 탈의 표면이 모형보다 무디게 나오고 모형을 그때마다 부수어야 한다. 셋째, 신문지와 마분지 등을 물에 오랫동안 불려서 풀을 넣고 절구로 찧어 종이찰흙을 만든 다음, 이 종이찰흙으로 탈을 빚어 만든다. 고성오광대탈은 이렇게 제작되는데, 종이찰흙의 재질감 때문에 탈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바가지탈은 잘 마른 바가지를 이용해 만든다. 먼저 바가지를 얼굴 모양으로 적당하게 자른 다음 눈과 입은 도려내고, 눈썹과 코는 짚·새끼·노끈·털가죽·나무조각 등을 덧붙여서 만든다. 또 얼굴의 혹은 종이찰흙을, 귀는 바가지 조각을 이용해 만들어 붙인다. 따라서 바가지탈은 얼굴형이 바가지 모양으로 통일되어 있다. 탈의 형상이 완성되면 한지를 몇 겹 바른 다음 채색을 한다. 가볍고 제작하기 편리한 장점이 있다. 나무탈은 오동나무와 오리나무 등을 이용하여 칼로 깎아 제작한다. 따라서 나무탈은 조각품이라 할 수 있다. 원목을 깎아내어 만들되 수염 외에는 덧붙이는 것이 없다. 탈의 형상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탈의 뒷면을 깊게 파내어 얼굴에 쓰기 알맞도록 한다. 나무탈 위에 종이를 바르고 채색을 한다. 나무탈로는 하회탈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데 턱이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작과정에 턱을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 아니라, 탈의 형상을 온전하게 완성한 다음 턱을 따로 떼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노끈으로 연결하므로 전혀 이질감이 없다. 하회탈은 턱이 떨어져 있어서 자유로이 움직일 뿐 아니라, 입체감이 특히 강하며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도록 조각하여 상하 좌우의 움직임에 따라 표정이 바뀌므로 고정적인 탈의 한계를 극복하여 그 기법이 주목된다. 털가죽탈은 종이로 먼저 탈의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털가죽을 붙여서 제작하였다. 주로 개의 털가죽을 사용한다. 바가지에 털가죽을 입히는 경우도 있고 먼저 털가죽을 얼굴에 맞게 잘라서 그 안쪽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는 경우도 있다. 눈과 입은 구멍을 뚫어서, 코와 눈썹은 다른 털가죽을 덧붙여서 나타낸다. 머리털·눈썹·수염 등을 나타내는 데에는 실제 머리카락이 쓰이기도 하지만, 실이나 털가죽이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탈을 덮어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검은색 헝겊으로 만든 탈보를 탈 뒷면에다 부착시킨다. 탈보는 머리카락을 나타내기도 하고 쓴 탈을 얼굴에 고정시켜주는 구실도 한다. 탈의 형상과 색상 일반적으로 우리 탈의 형상은 기괴망측하게 생겼다고 한다. 실제보다 코·입·눈이 과장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코는 삐딱하고 눈꼬리는 사납게 찢어져 있는가 하면, 입이 크게 비뚤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언청이탈·문둥이탈·옴탈과 같이 특수한 입이나 안면(顔面)을 지니는 탈 외에도 이마·볼·턱 등에 커다란 혹이 제멋대로 나 있고, 이가 어긋나게 톱니처럼 두드러져 있으며, 이마가 넓고 파도처럼 주름이 많아서 얼굴 각 부위의 비례가 맞지 않는 탈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탈이 인간적이다.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탈이나 원숭이탈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 점 또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얼굴의 윤곽과 비슷하게 타원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바가지탈의 경우는 거의 원형에 가깝고 나무탈과 종이탈은 장방형·역사다리꼴·역삼각형 등 다양하다. 가죽탈은 특히 모가 나게 생겼다. 일반적으로 우리 조각품이 평면적인 것과는 달리 가죽탈을 제외하면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부분적인 형상을 보면 눈이 대체로 크고 동그랗거나 치켜 뜬 모양을 하고 있다. 실눈을 하고 있는 것은 하회탈의 일부뿐이다. 코는 남녀노소에 따라 달라 젊은 남성탈은 코가 지나치게 크게 과장되어 있고, 여성탈은 콧대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거나 굽어 있다. 입은 단순하게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서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밑으로 깊게 처져서 불만스러운 모습을 짓고 있기도 하다. 언청이와 입비뚤이 등 병신스러운 입 모양을 하고,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치켜 덮고 있어 심술궂은 입 모양을 하고 있는 탈도 있다. 귀는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산대탈이나 오광대탈에는 귀가 있다. 동래와 수영의 들놀음탈에는 귀가 특히 과장되어 있다. 통영오광대의 양반탈은 턱이 없고, 하회탈의 일부는 턱이 분리되어 있다. 탈광대의 움직임에 따라 턱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므로 웃는 표정과 화난 표정을 가변적으로 지어 보일 수 있다. 산대놀이의 눈끔적이탈과 함께 탈의 고정성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색상은 대체로 원색적이고 강렬하다. 원색으로는 붉은색·검은색·흰색이 많이 보이며, 푸른 남색도 더러 있다. 간색(間色)으로는 얼굴색에 가까운 황색이 주로 쓰인다. 사실성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인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에는 원색이 기능적이다. 탈의 원색들은 신분계층에 따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남녀노소에 따라서 일정한 성격을 부여한다. 늙은이 탈은 검고 어두우며, 젊은이 탈은 붉고 밝으며, 젊은 여성의 탈은 흰색이 많다. 이들 색상은 방위와 계절을 나타내기도 한다. 검은색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나타내며 북쪽을 뜻한다. 붉은색은 생산의 계절인 여름을 나타내며 남쪽을 뜻한다. 늙은이 탈이 검은색이고 젊은이 탈이 붉은색인 것은 겨울과 여름의 계절적 상징과 관련되어 있다. 탈춤에서 보이는 노소의 극중 싸움에서 늙은이가 지고 젊은이가 이기는 것은, 겨울과 여름의 싸움굿에서 겨울을 물리치고 여름이 승리함으로써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간색으로 칠한 것은 하회탈이 대표적이다. 간색을 칠하되 미리 몇 가지 색으로 배합된 간색을 한 차례만 칠한 것이 아니라, 몇 차례로 나누어 거듭 칠함으로써 입체감과 사실성이 두드러졌다. 이를테면 부녀와 각시탈은 살색인 주황색을 몇 차례 칠한 위에 다시 흰색을 덧칠하고, 그 위에 연지·곤지를 찍어서 화장한 여성의 얼굴을 실감 있게 표현하였다. 눈썹의 경우도 곧바로 검은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녹색을 칠하고 난 다음 검은색을 덧칠하여 한층 깊이를 느끼게 하였다. 탈의 성격 표현 탈의 성격 표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인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놓고 극중 행동을 통해 어긋난 면을 폭로하는 경우와, 처음부터 인물의 부정적인 성격을 형상화하여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하회탈은 앞의 경우에 해당되고 다른 탈들은 뒤의 경우에 해당된다. 하회의 양반탈은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안색이 밝아서 허우대가 멀쩡한 양반의 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극중에서 하는 행위와 말은 양반답지 못하게 함으로써, 양반의 드러나지 않은 허위를 폭로하는 효과를 올린다. 그리고 초랭이탈은 이와 달리 입이 비뚤어져 턱이 뾰족하고 콧대가 잘려 있으며, 얼굴색이 검붉어서 못난 아랫사람의 성격과 말의 자유가 제약되어 있는 신분적 한계를 그럴듯하게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극중에서는 이러한 한계와 제약을 뛰어넘어서 상층의 허위를 비판하는 구실을 적극적으로 한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는 셈이다. 따라서 하회탈은 인물의 생김새와 행위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인물의 성격을 역설적으로 풍자하는 효과를 올리는 것이다. 즉, 멀쩡하게 생긴 양반은 병신짓을 하고, 병신처럼 생긴 초랭이는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나머지 탈들은 대부분 탈의 생김새에서 극중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양반의 바보스러움과 병신스러움을 우스꽝스럽게 나타내기 위하여 언청이와 문둥이 등으로 형상화하고, 노승의 관념적 허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검은 얼굴에 파리똥이 덕지덕지 앉은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탈의 형상에서 이미 비판적인 극중 인물의 성격을 희화적(戱畫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말뚝이탈은 코를 과장하여 남성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들놀음의 말뚝이탈은 코가 이마에서부터 입까지 걸쳐 길게 늘어져 있을 뿐 아니라 모양도 남성의 성기에 가깝다. 과장된 성기 모양의 코는 성생활을 건강하게 즐기는 민중의식의 반영이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탈의 색상도 인물의 성격을 일정하게 창조하는데, 붉고 짙은 색의 탈이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면, 누렇고 옅은 색의 탈은 바보스럽고 무능한 성격을 나타낸다. 검고 어두운 색의 탈은 찌들리고 소외당한 인물의 성격을 나타낸다. 고성오광대의 홍백양반탈은 인물의 이중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얼굴 좌우에 붉은색과 흰색을 칠하기도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또는 탈의 움직임에 따라서 표정이 바뀌는 탈로는 하회탈이 있다. 특히, 입체성이 강한 탈은 상하 움직임에 따라 표정이 바뀌고, 좌우가 어긋나게 형상화된 탈은 좌우 움직임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양반탈은 눈두덩·광대뼈 등을 갈매기 모양의 곡선으로 깊게 파서 아래위의 움직임에 따라, 초랭이탈은 입매를 좌우 상반되게 형상화하여 좌우 움직임에 따라 화난 표정과 웃는 표정으로 바뀐다. 그리고 각시탈과 같은 경우에는 내려깐 눈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을 함께 조형함으로써 각시에 대한 사회적 제약과 이를 극복하려는 각시의 내면적인 의식을 더불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하회탈은 부조화의 조화를 통하여 탈의 고정성을 극복한 창조적 성격 표현을 하고 있다. 우리의 탈은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고, 각 시대의 인물들을 계층·남녀·연령별로 두루 보여주고 있다. 고려탈인 하회탈의 경우에는 양반·선비·초랭이·이매 등으로 인물의 상하우지(上下愚智)의 성격을 고루 표현하고, 각시·부녀·할미 등 여성탈은 생산력에 따라 처음·중간·끝을, 중·백정탈은 성속(聖俗)의 관계를 두루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탈에는 포도부장·포졸, 심지어 순사와 같은 탈이 나타나고, 용산 삼계 덜머리집과 같은 술집여자 및 취발이·신장수와 같은 탈이 등장하여 시장형성에 따른 상업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왜장녀·서울애기와 같은 탈도 조선조 후기에 등장한 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점점 복잡하여짐에 따라 새로운 탈이 계속 생겨나는가 하면, 같은 탈의 숫자도 계속 불어난다. 그러나 같은 인물의 탈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형상화되기도 한다. 고려탈인 하회의 중탈은 색상이 밝고 호방하게 웃는 상을 하고 있는데, 조선시태 중탈은 한결같이 어둡고 찌들려 있어 울상들을 하고 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의 중탈과 불교를 좌도로 몰아 탄압하던 조선시대의 중탈이 지닌 시대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회탈이 고려자기에 비유된다면 후대의 탈들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질그릇에 비유된다. 이것 또한 당시의 조각품이 지닌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고려의 조각품에 비하여 조선의 조각품이 일반적으로 나빠진 경향이 있다. 고려의 불교조각품이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조선의 것은 정적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교조각의 퇴보에서 오는 결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탈』(김수남, 행림출판, 1988) 『한국가면의 연구』(최상수, 성문각, 1984) 『한국의 탈』(국립민속박물관, 1982)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탈의 조형미가 지닌 예술적 형상성과 사회적 기능」(임재해,『한국민속과 오늘의 문화』, 지식산업사, 1991) 「탈과 조각품으로 본 하회탈의 예술성과 사회성」(임재해,『안동문화의 재인식』, 안동문화연구회, 1986) 「탈에 담긴 조형과 상징」(조동일,『문학이라는 시비거리』, 이우출판사, 1983) 「한국탈의 제작기법」(김기수,『한국의 탈』, 국립민속박물관, 1981) 「한국탈의 조형미」(유민영,『한국의 탈』, 국립민속박물관, 1981) 관련이미지 9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방상씨탈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의 공연예술 탈과 탈놀이     15세기 후반에 기술된 이육(李陸)의 『청파극담 靑坡劇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떤 사람이 탈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그 집에 병이 전염되자 무당이 말하기를 탈 때문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즉시 집에 둔 탈을 들판에 버렸더니 과연 병이 나았다. 수개월이 지난 후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마침 밭가를 지나다가 전에 버린 탈 위에 피어난 버섯을 잘못 알아보고 따다 먹었다. 한 송이를 먼저 먹자 갑자기 웃으며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마치 미치광이 같았지만 모두 우연으로 여기고 그다지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먹은 사람도 웃으며 일어나 앞사람과 같이 춤을 추었다. 춤이 그친 후 물으니 "처음 먹자마자 흥이 저절로 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1) 한국의 대표적인 탈놀이인 하회별신굿놀이(윤주영 촬영) 이 이야기는 탈의 민간 어원설을 잘 함축하고 있다. 탈은 얼굴에 쓰는 가면, 인체에 생긴 질병, 갑자기 일어난 사고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차적으로 탈은 질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내용을 반영한다. 즉, 탈(가면)이 탈(질병)을 불러온 것이다. 옛사람들에게 탈은 신체(神體)를 상징하는 신성한 대상이었다. 이런 물건을 사람 가까이 두고 함부로 다룬 까닭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탈을 소중히 여기고 신성시하면서도 사람이 사는 거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숭배하면서 보관했다. 2차적으로 탈은 인간에게 신명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의식을 반영한다. 고대의 신성가면은 15세기에 이르러 예능가면으로 전이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썩은 나무탈 위에 돋아난 버섯을 따서 먹고 저절로 흥이 나서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는 것은 탈이 지닌 예능성을 시사해준다. 3차적으로 탈은 그 자체를 이용해서 질병과 사고를 물리치고 해결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번에는 탈이 탈을 물리친 것이다. 이러한 탈의 의미는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를 퇴치하고 방지하기 위하여 탈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한편, 탈을 응용하여 집단적인 예능을 만들어 전승시켜온 인류의 내력을 설명해준다. 한국의 고유어 '탈'은 한자어 '가면(假面 혹은 面)'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탈놀이는 가면희(假面戱), 가면무(假面舞) 혹은 가면극(假面劇)을 통칭한다. 일반적으로 가면을 이용한 놀이를 통칭 가면희라 하고, 가면을 이용한 본격적인 연극을 가면극이라 한다. 탈을 쓰고 노는 사람은 탈꾼, 탈광대라고 하였다. 고대의 기록에서는 탈과 탈꾼을 괴뢰(傀儡), 귀두(鬼頭), 귀뢰(鬼儡), 면구(面具), 가두(假頭), 대면(代面), 가수(假首) 등으로 통칭하였다. 이는 탈이 지닌 허구적 인격성, 얼굴에 쓰는 도구, 귀신이나 병환을 퇴치하는 종교성 그리고 탈을 쓰고 노는 연희자 등을 포괄시킨 의미이다. 인형 역시 탈의 명칭과 같이 쓰였으며 탈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2) 일반적인 의미로는 탈을 도구로 해서 노는 놀이는 모두 탈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로서의 탈놀이는 전승연희로서 독자성을 지닌 경우에만 해당된다. 탈놀이가 독자적인 연희양식으로 발전하면서 탈과 탈놀이는 지역마다 다른 명칭과 특징을 갖게 되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산대탈놀이' 혹은 '별산대탈놀이'라는 명칭이 전승되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개성과 조선시대의 한성을 중심으로 산대놀이[山臺戱]가 성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약칭으로 산대 혹은 별산대라고 한다. 산대란 산과 같이 높은 무대를 설치하고 놀았던 데서 비롯된 말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행사를 위해 왕의 명령에 따라서 궁정(宮庭)이나 궁전 근처의 넓은 광장에 규모가 방대한 산대를 하나 혹은 여러 개 설치하고 다양한 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산대놀이라고 해서 모두 실제로 산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과거 산대놀이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의미에서 통칭 '산대놀이'라는 명칭이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춤'과 '놀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춤이 그만큼 중요시되었고, 잘 놀아야 탈놀이가 된다는 의미에서 탈꾼을 놀탈이라 했던 것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들놀음' '오광대' '별신굿놀이' 등이 탈놀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탈 자체보다는 야외에서 노는 놀음, 다섯 광대의 놀음, 다섯 마당으로 노는 놀음, 별신굿에서 노는 놀음 등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오광대에는 실제로 여러 인물이 출현하고, 오광대가 분명히 누구라는 규칙도 전승되지 않는다. 낙동강 유역의 여러 지역에서는 오광대탈놀이가 성행한 것이 확인된다. 경상북도의 하회나 동해안의 별신굿탈놀이에서는 굿과 탈놀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탈놀이 자체를 '굿놀이'라고 함으로써 굿의 넓은 개념을 인식케 한다. 강원도 강릉 단오제에서 놀아온 탈놀이도 고대적인 원형성을 느끼게 한다. 함경도에서는 애초부터 사자를 중심으로 놀았으므로 '사자놀이' 혹은 '사자탈놀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남사당에서는 탈놀이를 '덧뵈기'라고 한다. '덧보이기' 혹은 '덧쓰고 보이기'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탈과 탈놀이의 명칭은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관련이미지 9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양주별산대놀이 신할아비와 신할미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로 신할아비가 미얄할미와 다투다가 미얄이 죽자 아들과 딸을 불러 장사를 지낸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탈과 탈놀이 (동아시아의 공연예술)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탈     분류 용어 목차 정의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주로 얼굴에 써서 분장에 사용하는 물건. 내용 탈은 한자어로는 ‘면面·면구面具·가면假面·대면代面·가두假頭·가수假首’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말로는 ‘광대·초라니·탈·탈박·탈바가지’ 등으로 불러 왔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얼굴 앞면만 가리는 면구를 가면이라 하고, 머리 전체 후두부後頭部까지 가리는 것을 가두·가수·투두套頭라고 해 구별하기도 한다. 한국의 가면극이나 일본의 가면극인 노能에서는 대부분 얼굴 앞면만을 가리는 가면을 착용하고, 중국의 가면극인 나희儺戲에서는 주로 가두를 착용한다. 그동안 탈은 가면을 가리키는 한국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몽골어, 특히 고대 몽골어에서 탈은 얼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찰스 바우덴(Charles Bawden)이 편집한 『몽영사전(Mongolian─English Dictionary)』(1997)에 의하면, 몽골어 탈(tal)은 ‘일면(side)’, ‘한쪽 면’의 의미와 함께 ‘생김(feature)’의 의미가 있다. 몽골사회과학원의 수미야바타르(Sumiyabaatar) 교수에 의하면, 머리의 앞면, 즉 얼굴은 머리의 앞면과 뒷면 중 ‘한 면’에 해당하기 때문에, 현재도 탈은 얼굴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에서는 ‘탈박’을 ‘탈바가지’의 준말로 보았다. 그러나 탈박과 탈바가지에서 ‘박’과 ‘바가지’는 각각 몽골어로 가면과 도구라는 뜻이다. 이는 현재도 쓰는 말이다. 티벳과 몽골의 라마교 사원에서 거행되는 가면극인 ‘챰’의 가면은 ‘챰박’이라고 불린다. 그러니까 탈박은 얼굴 가면이란 뜻이고 탈바가지는 얼굴을 가리는 도구, 즉 가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탈박은 탈바가지의 준말이 아닌 것이다. 탈을 만드는 재료는 주로 나무이지만 종이, 가벼운 돌, 청동, 천, 도자기 등 다양하다. 탈에 채색을 하기도 하는데 황토를 입히거나 여러 가지 색깔의 염료로 그림을 그린다. 조각한 나무탈 위에 종이나 천을 바르고, 그 위에 옻칠을 하면 오래 보존할 수 있다. 한국의 하회탈이 그런 경우이다.  탈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인다. 탈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멜라네시아 등 전 세계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은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꾸며서 상연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아라비아·북동아프리카·발칸을 포함하는 근동近東 지역과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북아프리카에서는 탈을 사용할 수 없었다. 탈은 풍농 기원의 제의, 악귀를 쫓는 벽사의식과 나례儺禮, 병을 치료하기 위한 무속적 제의, 입사식, 장례식, 축제, 가장무도회, 연극, 무용 등에 폭넓게 사용된다. 그래서 그 기능과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 탈의 주술적 기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풍농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대체로 수렵, 목축 등으로 유동 생활을 하는 민족에 비해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 민족에게서 더욱 풍부한 탈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기술 수준이 낮고 자연 조건의 지배를 크게 받은 시대일수록 주술적인 농경의례가 성행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농경의례의 양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풍년을 가져오는 신격神格과 정령이 탈의 형태를 빌려 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탈에서 풍농을 기원하는 주술의 기능 다음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은 악귀惡鬼를 퇴치하기 위한 벽사辟邪의 기능이다.  신성탈은 사원이나 사당祠堂에 안치해 두고 숭배하며 제사 지내는 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탈을 쓴 신을 숭배하는 것도 신성탈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의술탈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건강을 지켜 주는 보호 세력들을 불러내는 탈이다. 다른 하나는 질병을 가져오는 악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탈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병굿에서 사용되는 탈도 일종의 의술탈로 볼 수 있다. 의醫의 옛 글자인 의毉는 무당이 병을 일으킨 악령을 쫓기 위해 화살[矢] 같은 무기를 손에 들고 사용하는 모습을 나타낸 문자이다. 추억탈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추도의 뜻과 죽은 사람의 넋을 기리는 뜻을 담고 있는 탈을 의미한다. 전쟁탈은 악의에 찬 표정이거나 적에게 두려움을 줄 만큼 무시무시한 얼굴이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기괴한 탈을 새긴 전투용 방패를 사용했고, 그들의 갑옷과 투구에 무서운 탈을 부착했다. 일본의 무사들도 가면 투구를 사용했다. 장례용 탈은 악령으로부터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기능,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서 끊임없이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해 본래의 모습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 기능, 장례 시 죽은 사람을 재현하는 기능 등 몇 가지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입사탈은 입사식, 즉 성인식에서 사용되는 탈이다. 입사식에서는 주로 젊은이들에게 입사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탈을 착용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입사식을 마친 젊은이가 성인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나타내는 탈을 쓰는 경우도 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젊은이들의 입사식에서 입사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탈을 착용했다. 원시시대에 원시인들은 사냥에서 위장의 수단으로 탈을 사용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원시인들은 짐승의 소리를 흉내 내거나 사냥하려는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동물들에게 접근했다. 토템은 원시인들이 자기 부족이나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에 있다고 믿고 신성하게 여겼던 자연물인데, 이 자연물을 자기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그와 관련된 금기禁忌를 통해 사회적 규제를 설정했던 것이 토테미즘이다. 토템을 숭상하는 집단은 오래전 자기들의 조상이 그 토템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으며 그 내용을 종교의식에서 거행하는데, 이때 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고위 사제·주술사·무당은 종종 그 자신의 매우 강력한 토템을 가졌는데, 이들은 그 토템탈을 쓰고 악령을 쫓아낼 수 있었다. 또한 적들을 응징하고 사냥감과 물고기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었다. 기우탈은 가뭄이 심할 때 비를 기원하는 제의에서 사용된 탈을 가리킨다. 기우제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는 제의인데, 종족에 따라서는 이때 탈을 사용했다. 예술탈은 무용과 연극 등에서 사용되는 탈을 의미한다. 예술탈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인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예술탈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처음에 연극 탈은 멀리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배우의 역할이나 성격을 알려 주기 위해 썼다. 따라서 탈 모양만 보고도 주인공을 도와주는 착한 인물인지, 나쁜 인물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동물과 나무, 태양, 구름 등 자연물도 탈로 표현했다. 문화의 발전과 함께 인간이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의 문제를 주술로 해결하던 단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예술탈이 생겨났다. 주술의 해결 기능이 창조적 표현 기능으로 변화되면서 탈도 주술탈에서 예술탈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전통사회에서 탈은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면서 탈은 나라별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탈을 만드는 재료, 탈에 새겨진 문양의 상징, 탈의 용도, 탈의 기능 등에서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이런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나라의 전통신앙, 전통문화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탈들을 통해서 인류 문화의 다양한 모습과 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탈은 원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거나 소망하는 바를 이루려는 주술적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종교를 갖고 있듯이, 탈을 사용하여 주술적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도 인간만이 가진 것이었다. 이 밖에도 탈은 수많은 형태와 용도가 있다. 특히 현대에도 탈은 병원에서 수술 시 착용하는 의료용 마스크, 야구의 포수와 심판의 마스크 같은 보호용 마스크, 아이스하키의 골키퍼가 착용하는 보호용 마스크, 산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방독 마스크, 소방관이 착용하는 화재 진압용 마스크, 프로레슬러들이 상대방에게 겁을 주기 위해 착용하는 마스크, 축제에서 착용하는 마스크, 탈극에서 착용하는 마스크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의 탈은 주술적 목적보다는 실용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주술적 탈이 실용적·예술적 탈로 전환된 것이다.  또한 10월 31일 핼러윈(Halloween)은 서양의 풍속이지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핼러윈이 되면 아이들은 마녀·유령·광대를 가장한 탈을 쓰고 돌아다니며 핼러윈 행사를 벌인다. 만화와 영화로 유명한 배트맨도 바로 복면탈을 씀으로써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신한다. 이런 이국적인 풍습에 대한 기호, 탈을 써서 자신을 감추고 변신해 보려는 욕구도 인간만이 가진 특징인 것이다.  베니스 축제 등 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스스로 탈을 쓰고 돌아다니면서 변신을 꾀한다. 변신에 대한 욕구, 그리고 탈을 쓰고 변신하면서 또한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를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탈 문화가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참고문헌 탈이 지닌 종교적 의미와 주술적 기능(임재해, 민속연구4,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4), 한국 가면의 연구(최상수, 성문각, 1984), 한국의 가면극(이두현, 일지사, 1979), 한국의 가면극(전경욱, 열화당, 2007). 집필자 전경욱(田耕旭) 갱신일 2019.01.18. 관련이미지 10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양주별산대놀이 신할아비와 신할미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로 신할아비가 미얄할미와 다투다가 미얄이 죽자 아들과 딸을 불러 장사를 지낸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탈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시사상식사전 하회탈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만들어져 내려오는 목조탈로, 2개의 병산탈과 함께 국보 제121호로 지정돼 있다.             외국어 표기     河回─(한자) hahoe mask(영어)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재료는 오리나무가 많이 쓰였고, 옻칠을 하여 정교한 색을 내어 해학적 조형미가 잘 나타나 미적 가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많이 성행했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계층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전통역할극인 별신굿놀이에서 하회탈이 많이 사용되었다.  하회탈 | 출처: 시사상식사전 원래 극중 역할에 따라 14종류가 있는데, 현재 주지 2개ㆍ각시ㆍ중ㆍ양반ㆍ선비ㆍ초랭이ㆍ이매(하인)ㆍ부네(첩 또는 기녀)ㆍ백정ㆍ할미 탈 등이 남아 있고, 총각ㆍ별채ㆍ떡다리 탈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이 중에서 중ㆍ선비ㆍ양반ㆍ백정 탈은 턱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말을 할 때 턱 부분이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생동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 참고로 하회마을과 이웃한 병산리에서 전해져 온 2개의 탈을 병산탈이라 하는데, 하회탈과 함께 국보 제121호로 지정돼 있다. 2개의 탈은 양반탈과 선비탈로, 모두 하회탈의 이매탈처럼 턱이 없는 형태다. 한편, 원래 하회마을 소유였던 하회탈은 1964년 국보로 지정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 오다가 2017년 12월 27일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다. 이는 하회탈의 원래 소유주인 하회마을보존회 측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하회탈 보관 장소 변경을 요구했고 중앙박물관이 이를 수용함에 따른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국보 하회탈은 양반·선비·백정·각시·초랭이·이매·부네·중·할미·주지(2점) 등 하회탈 11점과 병산탈 2점이다. 탈은 하회마을에서 귀환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뒤 보관 장소인 안동시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수정일 2018. 04. 24. 관련이미지 19                                       각시조사자 : 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하회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하회탈     각시 분류 용어 목차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하회마을에서 별신굿을 할 때 광대들이 얼굴에 착용하던 탈. 역사 하회탈의 제작과 관련한 설화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설과 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허도령이나 안도령은 하회마을 거주민의 집단적 표상이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門前에, 류씨 배판(배반杯盤)에”라는 향언鄕言이 전하는데, 이는 하회마을의 지배적 거주민이 허씨에서 안씨를 거쳐, 류씨로 교체되어 온 마을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대체로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후에 순흥 안씨가 입향하였으며, 류씨는 조선 초기부터 정주하면서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여 집성촌을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나 안도령이라는 전설은 하회탈의 제작 시기가 고려 중엽이나 말엽까지 소급될 수 있는 방증이 된다. 허씨와 안씨, 류씨의 관계는 선주민과 이주민의 관계로, 허씨나 안씨가 선주민으로서 이주민인 류씨에 대항하여 별신굿과 탈놀이의 주도권을 고수하다가 다른 성씨 집단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보통 탈놀이를 하고 나면 정화와 송신送神의 의미로 탈을 소각하기도 하는데, 하회탈은 짚으로 엮은 섬에 담아 동사洞舍의 다락에 보관하다가 탈놀이가 있을 때 고사를 지내고 탈을 꺼냈다. 하회탈은 보수의 흔적이 있고 본래 턱이 없는 이매탈에 턱을 매단 구멍이 있으며, 떡다리나 희광이, 별채라는 이름도 언급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탈의 형태와 명칭에 얼마간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총각·별채·떡다리의 탈 세 개를 한 일본인이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된 바 없다. 하회탈은 각시탈, 주지탈2, 초라니탈, 백정탈, 할미탈, 중탈, 부네탈, 양반탈, 선비탈, 이매탈 등 열한 개 모두가 1964년에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면서, 하회마을을 떠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내용 하회탈은 오리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국내 최고最古의 나무탈이다. 사자로 보이는 주지만 동물탈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얼굴이다. 그러나 각시탈은 열일곱 살 서낭각시신의 신체가면神體假面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허도령이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를 하고서 탈을 만들 때 허도령을 사모하던 열일곱 살 처녀가 허도령을 몰래 엿보는 바람에, 허도령이 신벌을 받아 피를 토하며 즉사하고 처녀가 죽어서 서낭신으로 모셔졌다는 전설에 근거한다. 나머지 인물들도 서낭각시의 일행이므로 각시탈처럼 원래는 인태신人態神의 탈이었으나, 점차 신성성이 사라지고 예능탈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회 별신굿 탈놀이에서 공연용으로 사용하는 탈은 하회동탈박물관장인 김동표가 만들었다. 제작 과정은 먼저 오리나무를 10㎝ 두께로 잘라 2년 정도 건조하고,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에 세부적인 부위(코·눈·입·이마·턱·볼)의 작업으로 들어간다. 코를 먼저 만들고 눈·입·주름살·턱을 만든다. 그리고 한지를 앞면에 바르고 황토와 황색 안료를 섞어 바른다. 그 위에 다시 황토와 적색 안료를 섞어 바르고 먹물을 발라 말린 뒤, 젖은 헝겊으로 먹물을 닦아 내면서 농담을 살려 표정과 분위기를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옻칠을 하여 방수防水와 방부防腐의 효과를 꾀한다. 하회탈은 크게 ①여성탈(각시·부네·할미), ②남성탈(양반·선비·초라니·이매·중·백정), ③동물탈(주지)로 삼분된다. 탈은 각각 인물의 성격과 의미를 나타내며, 인물별 성격에 따른 행동 지침도 구전된다. 탈의 거동은 “주지걸음하듯 한다.”, “사뿐사뿐 각시걸음”, “능청맞다 중의 걸음”, “황새걸음 양반걸음”, “황새걸음 선비걸음”, “방정맞다 초라니걸음”, “비틀비틀 이매걸음”, “맵시 있다 부네걸음”, “심술궂다 백정걸음”, “엉덩이춤 추는 할미걸음” 등이 있다.  각시탈은 살구색 안면 위에 분粉을 칠하고 양 볼에 연지를, 이마에 곤지를 찍고, 입술도 붉게 칠하였다. 콧날은 펑퍼짐하고 광대뼈는 넓으며 입은 굳게 다물어, 생경하고 긴장한 표정을 한 젊은 처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오른쪽 눈은 내리감고 왼쪽 눈은 치뜨는 모습으로 성性에 대한 처녀의 억압 심리와 호기심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형상화하였다. 머리 위에 한일자로 올린 트레머리와 양옆으로 늘어뜨린 머리채도 각시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억압적인 성 문화를 상징한다.  부네탈은 살구색의 안면에 분칠을 하고 양 볼과 이마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입술도 붉게 칠한 젊은 여성의 얼굴이다. 타원형의 반반한 얼굴에 실눈과 입이 모두 초승달 모양으로 조금 열려 웃는 표정과 중심에서 우뚝 솟은 날씬한 코가 조화를 이루어 요염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어서, 여성의 성숙한 육체미와 넘치는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두발은 얼굴 상반부를 테두리같이 둘러 귀를 덮고 양 볼 끝까지 내려 드리웠다가 다시 위로 올려 쪽을 쪄서 마치 뿔처럼 보이는데, 이는 남성들을 유혹하는 능동적인 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할미탈은 검붉은 얼굴에 녹색 반점을 찍어 기미를 나타내고, 눈은 둥글게 뚫린 고리눈에 미간은 깊게 파이고, 작은 코가 오뚝하게 솟았다. 양 볼과 눈언저리와 입가에 주름살이 새겨져 있고, 턱은 뾰족하고, 입은 크게 벌려 있다. 늙고 못생기고 박복한 노파의 모습인데, 고리눈과 오뚝한 코와 크게 벌린 입은 오히려 가난과 차별의 세파를 헤치고 살아온 억센 생활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준다. 순종적이고 체념적이고 허약한 노파가 아니라, 오히려 욕심과 탐심이 많고 입이 거칠고 성깔이 사나운 할미의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세 개의 여성탈은 여성의 세 연령층을 대변하도록 제작되었는데, 이는 여성의 본질적 능력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자녀 생산으로 인식한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관에 근거한다. 남성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역할을 대변하도록 제작하였다. 백정은 도살에 종사하는 천민이고, 중은 종교적 사제이다. 양반과 선비는 사대부이고, 초라니는 양반의 노비이며, 이매는 하급 관원이다. 이매를 별채라고도 부르는데, 별채는 고려시대 관원 별좌別坐의 음이 잘못 전해졌을 개연성이 크다. 이매는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점이 왼쪽 다리가 약한 도깨비, 곧 이매魑魅와 비슷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백정탈은 안면은 주황색이고 미간에 혹이 있으며, 이마와 미간과 양 볼에 깊은 주름살이 어지럽게 파여 험상궂은 표정이다. 이에 더해 실눈과 약간 미소 짓는 입은 오히려 “심술궂다 백정걸음”이라는 말처럼 심술궂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낸다. 또한 미간의 혹과 넓고 큰 콧방울과 널찍하고 힘센 턱으로 백정이 완력이 대단함을 표현하였다.  중탈은 주홍색 안면에 큰 혹이 미간에 솟아 있으며, 두 개의 실눈을 위로 부릅뜨고 인중과 코끝을 위로 추켜올리며 입을 크게 벌려 웃는 웃음은 교활한 인상을 풍겨 “능청맞다 중의 걸음”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양반탈은 안색이 주황색이고, 굵고 긴 눈썹과 초승달처럼 뜬 실눈이 완만한 곡선미를 이루며, 입을 크게 벌리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얼굴이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코는 매부리코이며, 턱도 커서 강한 인상을 준다.  선비탈은 안색은 주홍색 바탕에 갈색을 덮고, 코는 매부리코이다. 눈은 고리눈이면서 눈 끝이 위로 찢어져 사납고 성난 표정이다.  초라니는 중과 선비처럼 주홍색 바탕에 갈색을 덧칠하였다. 두 눈은 눈알이 톡 튀어나온 고리눈인데 돌출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구멍의 테두리를 흰색으로 칠하였다. 코끝은 납작하게 눌렸고 입은 왼쪽으로 약간 올라가서 웃는 입이거나 입비뚤이이며, 위아래 치아가 드러나 있고 턱은 뾰족하다. 조각 기법이 다른 남성탈처럼 사실적이지 않고 동물탈인 주지탈처럼 단순화·양식화되어 있어,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매탈은 양반탈·백정탈과 같은 계통으로, 안면 바탕이 주황색이다. 이는 중탈·선비탈·초라니탈의 안색이 주홍색 계통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주홍색 계통이 강한 인상을 주며 공격적인 인물들이라면, 주황색 계통은 유순한 인상을 주며 포용적인 인물들이다. 이매탈은 눈이 실눈이고 눈썹도 부드러운 곡선인 점에서 양반탈과 비슷하지만, 코끝이 떨어져 나가고 턱도 분실되어 미완성의 미학을 보여 준다. 앞서 언급한 탈의 제작과 관련한 전설 또한 이매탈의 결손을 설명하는 데에 치중되어 있다. 이매가 “비틀비틀 이매걸음”과 같은 연기 지침에 따라 절름발이가 되어 관객을 웃기는 바보 역할을 하는 것은 유식하고 출중한 사대부와 대조되는 무식하고 어리석고 결함을 지닌 하인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탈은 주지탈로, 암주지탈과 수주지탈 두 개가 있으며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의 머리, 즉 눈이 있는 상반부는 반달형의 판자에 눈을 그리고, 위쪽 가장자리에 꿩 털을 꽂아 갈기를 표현한다. 코와 입은 돌출시키고 위턱과 아래턱을 손으로 조종하여 “딱 딱” 소리를 내도록 설계했는데, 이는 북청 사자놀이의 사자처럼 사실적인 기법이 아니라 양식적이고 상징적인 기법이다. 그리고 위턱과 아래턱을 합하였을 때 완전히 포개져서 다문 입이 되는 것이 수사자이고, 불완전하게 포개져서 벌린 입이 되는 것이 암사자인 것으로 암수를 구별하였다. 특징 및 의의 하회탈의 형태 및 모양은 민중의 삶과 사회상을 반영한다. 하회탈은 성별·연령·신분·성격에 따라 안색이 분칠한 살구색, 검붉은 색, 주황색, 주홍색으로 구분하였는데, 후대의 탈에서도 이러한 전통은 계승된다. 형태적으로는 좌우 대칭형과 좌우 비대칭형으로 양분된다. 양반탈과 선비탈은 좌우 대칭형이지만, 하인 초라니의 탈은 입비뚤이로 좌우 비대칭이다. 그러나 민중의식이 성장하면 이 설정이 역전되어 하인 말뚝이의 탈은 정상적인 대칭형이고, 양반의 탈은 비정상적인 비대칭이 된다.  눈은 실눈(각시·부네·양반·이매·중·백정)과 고리눈(선비·초라니·할미)으로 양분되는데, 실눈은 웃는 표정이고 고리눈은 성난 표정이다.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유리하거나 여유가 있는 강자가 실눈을 하고, 불리하거나 불만과 반감이 있는 약자가 고리눈을 하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성난 눈은 도끼눈을 하고, 웃는 눈은 붕어눈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코를 통해서도 사회적 신분과 역학 관계를 나타내는데, 양반과 선비는 매부리코로 콧대가 높고, 초라니와 이매는 콧대가 꺾여 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부네의 코는 오뚝하지만, 성적으로 억압 상태인 각시는 콧대가 눌려 있다. 민중의식이 성장한 후 양반의 코는 언청이로 비정상적이고 말뚝이의 코는 정상적이고 실팍하게 변화되었다.  입의 경우, 하회의 양반과 선비는 정상적인데, 신분이 낮은 초라니는 입비뚤이이고 이매는 무턱이다. 다른 지역은 양반이 언청이이거나 입비뚤이이고, 말뚝이는 정상적인 입이다. 그리고 힘을 상징하는 혹이 중과 백정의 미간에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노승·취발이·말뚝이·먹중 등의 탈에 혹이 달려 있어 유사성을 지닌다.  이처럼 다른 지역의 민속탈과 비교하다 보면 하회탈이 사회사·의식사와 탈의 역사적 상관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하회의 남성탈 일부(양반·선비·중·백정·이매)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래턱을 분리하여 위턱에 끈으로 연결하여 고개를 젖히거나 숙임에 따라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절악切顎의 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후대의 탈에서는 단절되었다. 참고문헌 탈놀이의 기원과 구조(박진태, 새문사, 1990), 하회별신굿탈놀이(박진태, 피아, 2006),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임재해 외, 민속원, 2005), 하회탈과 하회탈춤의 미학(안동문화연구소, 사계절출판사, 1999), 한국가면극(이두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탈놀이의 미학(박진태, 태학사, 2014). 집필자 박진태(朴鎭泰) 갱신일 2019.01.18. 관련이미지 1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백정조사자 : 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하회탈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문화유산채널 안동 하회탈 턱의 비밀 [ 安東 河回- ] 종목 국보 제121호 명칭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安東 河回탈 및 屛山탈) 분류 유물 / 생활공예 / 목공예 / 가구류 시대 고려시대 지정(등록)일 1964년 3월 30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수량 13개 소유자(단체) 하회병산동민 관리자(단체) 국립중앙박물관 ▶ 문화유산채널 7분 다큐 "하회탈, 턱의 비밀" 편 감상 [출처원문보기] 하회탈, 턱의 비밀 출처: 문화유산채널 설명글 한국의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안동 하회마을. 유무형의 민속적 전통이 공존한다는 특징 때문에, 201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하회마을에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단연, 800년을 이어온 하회 별신굿 탈놀이. 제 각각의 특징을 잘 살린 9개의 탈, 그 중에 유일하게 턱이 없는 선비의 하인 ‘이매탈’. 이 탈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낙동강 지류가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도는 안동 하회마을. 안동하회마을 /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 120개가 넘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모여, 옛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재다.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수령 600년의 당산 나무 앞, 삼신당. 정월 대보름에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에게 안녕과 무병, 풍년을 비는 동제가 열리는 곳으로 하회 별신굿 놀이에서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던 곳이다. 정월 대보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가 치러지는 곳이다. 하회마을 동제의 백미인 하회별신굿탈놀이 역시 이곳에서 시작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여덟 마당으로 이뤄진 탈놀이에는 아홉 명의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 마치 장단에 맞춘 신명나는 춤과 익살스러운 대사로, 양반과 선비, 승려의 치부를 속 시원히 드러내며 서민들의 울분을 풀어준다. 어허 상스럽게 소불알이라니 안살테니 썩 물러가거라 샌님 보소 이 소불알 먹으마요 양기에 억시게 좋으이데이 아니 뭐라꼬? 양기에 좋다고? 그러면 내가 사지 어허 여보게 선비 야가 나오자마자 첨부터 내보고 사라꼬 그랬으니께네 이 불알은 내 불알일세 내 불알 어허 내 불알이야 인터뷰 주연아 / 경기도 성남시 각각 캐릭터마다 걸음걸이가 다른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인터뷰 Remi / 프랑스 표현이 굉장히 풍부하여 인상적입니다. 탈을 보면 희로애락이 느껴집니다. 아주 흥미로워요 하회탈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 국보 제121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탈놀이가 8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오래된 하회 덕분이다. 고려 중기 때 만들어져 마을에서 신성시 여겨졌던 하회탈은 이 곳, 옛 동사의 궤짝에 보관되어 오랜 시간동안 전해졌다. 일제 강점기, 어느 날 이곳에 큰 불이 났다고 한다. 인터뷰 임형규 / 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그때 당시에 다른 건 다 타도 탈만큼은 꺼내야 한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들어가서 불이 난 곳에 들어가서 탈 궤짝을 가지고 나왔죠. 하회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마을주민에게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20년 정도에 그 해에는 ‘북촌댁’이라고 앞에 초가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보관하다가. 그 집에 불이 나서 다 타고 탈을 보관할 때가 없 북촌댁 행랑채 뒤 굴뚝에 갖다가 걸어 놨었대요.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았던 하회탈은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켜졌다. 그런데 하회탈에는 세 가지 형태의 턱이 존재한다. 우선 턱이 본체와 분리되어있는 탈, 극중 대사와 행동이 유난히 많은 양반과 선비, 파계승과 백정은 턱을 분리시켜 대사 전달력을 높였다. 인터뷰 임재해 /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하회탈의 특징은 턱이 떨어져 있어서 광대가 대사를 하면 실제로 턱 움직임에 따라서 턱이 움직이거든요 말하지 않고 뒤로 젖히면 턱이 열려서 “하하하” 하면 열려서 웃는 표정이 되고 “네 이놈”하고 고개를 숙이면 턱이 저절로 닫혀서 화난 표정을 짓고 아주 탈이 역동적인 가변성을 지니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반면, 턱이 붙어있는 탈은 여성 역할의 각시, 부네, 할미.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지위가 탈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초랭이’는 남성이지만 하층민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 역시 턱이 붙어있다. 그런데 턱이 없는 탈이 하나 있다. 하인역할의 이매다. 45년째 하회탈을 만들고 있는 김동표 장인.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회탈을 만들고 있는 그는 이매탈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인터뷰 김동표 / 하회탈 장인 하회탈 전설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12세기경에 마을에 허씨들이 살던 시기에 마을에 재앙이 많이 일어났었답니다. 허씨들이 살던 시기니까 허씨 집안의 총각 허도령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서 ‘탈을 12개를 만들어서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재앙이 물러갈 것이다‘ 허도령의 이야기는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의 계시를 받은 허도령이 탈 만들기에 열중해 있던 어느 날, “이제 이매탈만 남았구나” “오라버니” 허도령을 사모하던 김씨 처녀가 허도령이 그리워 그의 방문을 열고 말았다. 인터뷰 김동표 / 하회탈 장인 신이 ‘누구도 들여다보게 하지 말라’ 라고 했었는데 그 처녀가 들여다봄으로 해서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고 마지막으로 만들던 탈이 이매탈이었다고 하는데 턱을 채 못 만들고 허도령이 죽음으로 해서 그 이매탈은 지금까지도 턱이 없는 채로 전해져 온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세계에 유래 없는 이 탈 안에는 허도령과 김씨 처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비틀비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 나오는 이매. 턱이 없어 바보스러운 모습이다. 덕분에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 “놔라, 이놈아“ 인터뷰 임재해 /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이매탈을 쓰는 순간 내 턱이 거기 보태져서 사람마다 턱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색깔도 다르고 그 때 창조적으로 완성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자체로 보면 기형적이지만 이것을 쓰면 내 턱이 여기 들어가서 완성이 되는거죠. 변증법적인 미학 중에서 가장 탁월한 ‘미완성의 완성을 추구한 탈이다’ “등신같이 말을 못한다” 정해진 대사가 없는 즉흥연기로 관객들과 호흡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근데 외국 사람이라도 인물은 이쁘다” 탈의 얼굴과 배우의 턱이 조화를 이루어 극 중 가장 실감나는 인물을 창조해낸다. 인터뷰 김오중 / 전수교육조교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이 바보로서의 웃음을 이 탈은 넘어져도 웃고 맞아도 웃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받아도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마냥 웃음을 지을 수 있는 탈입니다. 천진난만한 웃음, 그것 하나만으로 사람들 마음을 그냥 사로잡을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탈입니다. 신명나는 춤사위 속에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사람의 얼굴에 씌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미완성의 탈, 해학과 풍자를 가장 잘 표현 할 줄 알았던 선조의 지혜가 만들어낸 유산이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담아내는 해학과 풍자의 한마당인 ‘하회별신굿탈놀이’. 그 중 9개의 탈 중 유일하게 턱이 없는 하인 ‘이매’ 그 사연은 무엇일까? 하회탈에 전해오는 ‘허도령의 전설’을 만나고 사람의 얼굴에 씌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미완성의 탈, 해학과 풍자를 가장 잘 표현 할 줄 알았던 선조의 지혜가 만들어낸 그 유산을 취재한다. 관련이미지 2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하회탈 | 출처: 시사상식사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안동 하회탈 [安東 河回-] - 턱의 비밀 (문화유산채널)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한국의 탈     요약 IUATLD 세계 크리스마스 씰 콘테스트 3위 입상 발행년도 1985년 디자인 조영제 작품명 한국의 탈 종류 10종 구성 10×5, 5×2 색도 4도 평판 발행 매수 1,974만 매 판매 가격 60원 인쇄처 상문사인쇄소 우리나라 민속춤에 널리 사용되는 탈을 소재로 하여 통영의 오광대 홍백가면과 담비가면, 봉산 사자가면과 취발이가면, 하회 선비가면과 부내가면, 구파발산대 말뚝이가면과 옴가면, 수영야유의 영노가면과 양주산대의 연잎가면 등 10종의 탈을 서울대 미대 조영제 교수가 도안하였다. 이 씰은 국제항결핵 및 폐질환연맹(IUATLD)이 주관하는 세계 크리스마스 씰 콘테스트에서 3위에 입상하였다. 1985년 씰   씰 홀더     씰도안 설명 전·후면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http://loveseal.knta.or.kr 1904년 덴마크에서 시작한 크리스마스 씰 모금은 오늘날 전 세계 항결핵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국보1호인 남대문을 소재로 한 크리스마스 씰이 발행되었으며, 1953년 협회가 창립된 이후 60여년간 모금운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조성된 결핵퇴치 기금은 국내외 결핵퇴치 사업의 소중한 재원으로 사용됩니다. 제공처 대한결핵협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탈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탈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뜻밖에 일어난 변고나 사고와 그에 따른 어떤 좋지 않은 결과를 가리키는 민간용어. 내용 예정한 노정을 탈없이 마쳤다거나 아무 탈없이 잘 지냈다는 것은 전자의 예이고, 속담에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을 두고 ‘탈이 자배기만큼 났다.’ 하는 것은 후자의 보기가 된다. 탈은 그밖에 병(病)의 뜻으로도 쓰이는데, 먹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체하거나 설사 나거나 하는 뱃속 병의 총칭으로 사용하는 배탈이란 용어에 잘 드러난다. 뜻밖에 발생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좋지 않은 결과를 두고 표현하던 탈이란 개념은 점차 민간 신앙에 수용되어 처벌과 관련된 막연한 영적 존재로 발전한다. 그런 막연한 민간신앙적 개념 가운데 임신 중이나 아이를 놓다가 죽은 여인들의 탈이 무(巫)에서 하탈(下頉)이라는 한 종류의 잡귀잡신(雜鬼雜神)으로 확정된다. 탈은 그러므로 한국인의 어떤 부정적인 관념이 하위신령으로까지 발전해 가는, 민간종교의 중요한 개념이다. 탈의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문헌적 출처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조선 후기의 학자 정동유(鄭東愈)가 지은 ≪주영편 晝永編≫에 탈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있다. 그는 우리 나라에는 자전(字典)에도 없는 글자가 많다 하고, 그 가운데 속명(俗名)과 뒤섞인 글자[雜字]의 한 예로 ‘칭탈(稱頉)’을 들었다. 사람들이 흔히 일을 사고(事故)라고 칭탁(稱託)하여 모면하는 것을 ‘칭탈’로 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쓰는 탈의 한자인 ‘頉’이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한자임을 알 수 있다. 민속신앙·생활·문학작품·속담 등은 탈의 종류와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속담에는 ‘죽는 놈이 탈 없으랴.’하여 어떤 재앙이라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계집과 숯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는 여자가 남자의 유인에 잘 넘어감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두 어떤 좋지 않은 결과나 그 원인으로서의 탈을 표현하고 있다. 생활 가운데서 탈은 여러 종류와 내용으로 사용된다. 앙탈·속탈·뒤탈·배탈·까탈 또는 가탈 등이 그러한데, 앙탈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핑계를 대어 피하거나 남의 말을 안 듣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생떼를 쓰는 것이다. ‘앙탈을 부린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속탈은 먹은 것이 잘 삭지 않아 생기는 병으로 배탈과 유사한 뜻을 가진다. 뒤탈은 어떤 일에 대하여 뒷날의 걱정이나 근심, 또는 뒤에 생기는 탈을 말한다. ‘모든 일을 뒤탈 없이 잘 처리하자.’는 용례는 일반적이다. 까탈은 ‘왜 이 일에 그다지도 까탈이 많으냐.’는 예처럼 일이 수월하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조건을 가리킨다. 탈의 생활적 용례는 이처럼 다양한데, 가요 가운데도 “이것 참 큰 일 났네, 큰 탈이 났네.”라는 구절이 있는 정도이다. 탈을 주제로 다룬 문학작품으로는 <변강쇠가>를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변강쇠가 경상도 함양(咸陽)의 장승을 뽑아다가 도끼로 패어 군불을 많이 넣었는데, 이 변고를 들은 팔도 장승들이 회의하고는 변강쇠에 달려들어 각기 자기네 맡은 대로 온갖 병을 들게 하여서 변강쇠는 송장이 되고 만다. 장승을 패어 덥게 때고 그날 밤을 자고 깨어나서도 변강쇠가 아직 별고 없음을 판소리에서 “아무 탈이 없었구나.”라고 노래한다. 그 탈은 그러나 결국 장승들의 징벌과 변강쇠의 병사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탈이 일상적인 뜻이 아니라 영적 존재 내지 민속신앙 대상의 처벌과 관련되어 있어 탈의 민속종교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런 면이 무(巫)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상(祖上)과 관련하여 1930년대까지도 서울에서 불리던 <지두서 指頭書>라는 무가(巫歌)에 “청산의 청나비는 입이 걸려 못 나오고 흥산의 흥나비는 꽃이 걸려 못 나온다더니 아모씨 조상님네 탈에 걸려 못 나오실 제 애탈 지탈 넋의 넋탈 지방 너미 천너미 가시문 지게쇠문 지게 넘어 오실 제 진언이나 외어 가옵소서.”란 대목이 있다. 조상이 탈에 걸려 이승의 굿판으로 못 나온다면 그 탈은 이미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탈이, 그 구체적인 뜻은 불분명하나 애탈·지탈·넋탈 등으로 개념화된다. 굿의 부정거리나 뒷전에는 탈이 잡귀잡신의 한 종류로 잡혀진다. 하탈이 그것이다. 제가(諸家)집 부녀 가운데 아이 배고 죽었거나 아이 낳다가 죽거나 아이 놓고 죽은 귀신을 가리키는 하탈은 전통굿의 뒷전에서 뒷전의 한 거리로 놀아졌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잡귀잡신 가운데 억울하고도 비참하게 죽은 귀신인 영산과 연결되어 영산의 하위개념으로서의 하탈영산이란 종류를 형성한다. 그래서 부정거리에서는 “낳구 가구 배고 가든 하탈영산”이라며 한 대목이 불려진다. 한국사회가 근대화되면서 의학의 발달로 임산부나 산모나 해산 모가 죽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에 따라 하탈이라는 잡귀잡신도 차츰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뒷전에서 더 이상 놀아지지 않는다. 다만 부정거리에서 하탈영산으로 잠시 언급될 뿐이다. 탈 개념도 근대화에 따른 서양과학 및 합리적 사고방식의 보편화로 이제 별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변강쇠가」 「주영편 하」(정동유, 남만성 역, 『을유문고』 78, 을유문화사, 1971) 『한국무가집』 Ⅱ(김태곤, 집문당, 1978) 『서울새남굿 신가집』(서울새남굿보존회 편, 문덕사, 1996) 『한국의 샤머니즘』(조흥윤,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朝鮮巫俗の硏究』 上(赤松智城·秋葉隆, 大阪屋號書店, 1937) 「잡귀잡신 연구」(조흥윤, 『종교신학연구』 제1집,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988) [네이버 지식백과] 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 탈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거라고요?   준비물: 사진기, 필기도구, 여벌 옷 * 경남 지방 탈놀이에 대해 알고 방문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 각 체험에는 이용비가 있으니 문의하고 가세요. 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나요? 탈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면의 한 종류예요. 탈은 또 하나의 얼굴을 상징하며, 또 다른모습을 보여 주지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옛날부터 탈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탈은 원래 제사를 위해 만들기 시작했어요. 자연재해나 질병, 죽음을 피하기 위해 탈을 쓰고 제사를 지냈지요. 이때 탈은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사냥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해 탈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사용했던 탈은 점점 놀이로 발전했어요. 고성은 오광대놀이라는 전통 탈놀이로 유명한 고장이에요. 고성 탈 박물관은 오광대 탈을 비롯해 경남 지역의 탈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어요. 전시된 540여 점의 탈을 보면서 탈의 종류와 다양한 쓰임새를 배울 수 있지요. 탈에 쓰이는 색채, 탈놀이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행동, 탈의 표정 등 탈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도 자세하게 알 수 있어요. 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고성 탈 박물관으로 떠나 볼까요? 오광대놀이는 무엇인가요?  경상남도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탈놀이예요. 양반의 잘못과 허세를 풍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우리나라의 탈춤의 종류와 내용을 알아볼까요?  봉산 탈춤, 오광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양주 별산대놀이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탈춤이에요. 탈춤에 담긴 내용은 모두 달라요. 주로 남녀 간의 사랑과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 서민들의 가난 등 옛날의 생활 모습을 나타냈어요. 2. 탈에 대해 알아볼까요? 탈은 나무나 종이, 흙 등으로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얼굴에 쓰는 물건이에요. 1) 탈의 역사 탈은 선사 시대 원시인들이 동물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 후에는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했지요. 우리 탈의 시작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요. 부산 동삼동에서 발견된 조개로 만든 탈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탈로 볼 때, 우리 탈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어요. 2) 탈과 탈춤의 종류 탈은 크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것과 탈놀이를 할 때 쓰는 것이 있어요. 탈놀이에 쓰이는 탈은 지역마다 달라요. 탈의 모양뿐만 아니라 복장과 춤사위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 산대놀이 : 서울 중심의 경기 지역에서 전승1)된 탈놀이예요. 산대놀이는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 궁중에서 많이 공연하다가 후에 민간에 전파되어 평민극으로 이어졌어요.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등이 대표적인 산대놀이예요. * 서낭굿 : 경상북도 일대와 강원도 지역의 탈놀이예요. 서낭굿 탈춤은 가장 오래된 탈놀이로 주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서낭굿 계통의 탈놀이로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 강릉 단오제의 관노 가면극, 동해안 별신굿의 탈놀음굿 등이 있어요. * 해서 탈춤 :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탈놀이예요. 5일장이 서는 장터에서 1년에 한 번씩 탈놀이를 했다고 해요. 지금은 강령 탈춤, 봉산 탈춤 등이 전해지고 있어요. * 오광대놀이 : 경상남도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탈놀이예요. 조선 후기 지방 시장과 함께 발달한 탈춤이지요. 고성 오광대놀이, 통영 오광대놀이가 대표적이랍니다. 다양한 탈 [네이버 지식백과]고성 탈 박물관 (천재학습백과 초등 창의적 체험활동)  
2910    [민속] - 대장간 댓글:  조회:4878  추천:0  2020-03-2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장간   [ ─間 ] 이미지 크게보기 현재 잔존하는 대장간.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풀무를 차려 놓고 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드는 곳. 내용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반드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는 대장간은 하나의 필수적인 존재였다.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정·메(앞메와 옆메)·집게·대갈마치·숯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루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철·구리·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장인을 대장장이라 한다. 또한, 딱쇠·대정장이·성냥·바지·야장(冶匠)·철장(鐵匠)이라고도 한다. 대장장이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기록상 최초의 야장은 신라의 석탈해(昔脫解)였다. 신라에는 철유전(鐵鍮典)·축야방(築冶房)과 같은 관서가 있어 무기·생활용품·농기구 등을 제작하였으므로, 이미 이때 많은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시대의 절에서는 불상과 종의 주조기술을 가진 사노(寺奴)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관직·제도상에서 여러 장(匠) 가운데 홀대대장(笏袋大匠)·연장(鍊匠)·전장(箭匠) 등은 대장간을 관장하던 관리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공전(工典)에는 서울에 192명, 지방에 458명의 야장, 즉 대장장이가 각 관서에 배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는 정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선 초기 야장이 부족하여 일반군인과 포로로 잡은 왜인(倭人) 야장을 사역시키기도 하였다. 야장은 다시 유철장(鍮鐵匠)·주철장(鑄鐵匠)·수철장(水鐵匠)으로 나누어지고, 그 중 무쇠를 다루는 수철장은 대로야(大爐冶)·중로야(中爐冶)·소로야(小爐冶)로 구분되어 각기 솔거인(率居人)을 거느렸다. 이와 같은 야장의 세분화는 금속가공기술 발달의 결과이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 와서 대장장이라고 하면 수철장만을 일컫게 되었다. 그들 중 오로지 관청수공업장에서만 사역당하는 대장장이도 있었지만, 스스로 농기구 등을 만들어 장시(場市)에 상품으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으로 생활하면서 관청의 사역에 때때로 응하던 자들이 많았다. 특히, 관청수공업이 붕괴되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었으며, 그들은 호조에 장세(匠稅)로 포 한 필을 납부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장역(匠役)이 없어지지 않았고, 장세와 함께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농기구의 생산을 촉진하기 위하여 장세를 면제하려는 정부의 논의도 있었다. 조선 전기 대장장이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이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양인화하여 관청의 사역에서 벗어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대장장이라는 천대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의 작업장인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그 밖에 모루·메·망치·집게 등의 연장이 있었다.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메질과 담금질을 계속한다. 그런 다음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시우쇠를 토막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한다. 깜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수메(슴베:손잡이 속에 들어간 부분)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다음에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를 박는다. 전통적인 대장장이가 호미 하나를 만드는 시간은 줄잡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로 제작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대장장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은 대장간과 대장장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미래 첨단정보화사회가 되더라도 쇠붙이를 다루는 대장간의 정신과 얼은 제철산업과 철강산업, 그리고 다양한 연장을 만드는 산업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특히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화되고 개성 있는 수공업 제품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대장간도 창조적으로 재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속에 담긴 얼과 문화를 재조명할 필요성은 커질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경국대전』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송찬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3) 『역주경국대전』-주석편-(한우근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철의 역사』(국립청주박물관, 1997) 『변진과 가야의 철』(東湖, 가야연학술총서, 1995)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함남 영흥 대장간함남 영흥 대장간. 1911~1912년 촬영.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대장간 [─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대장간     요약 풀무를 차려놓고 시우쇠를 다루는 곳. 이미지 크게보기 대장간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필수적이었다. 참조항목 메, 모루, 풀무, 헤파이스토스 역참조항목 담금질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제조업 > 금속및비금속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대장간미얀마 인레호수. 불에 쇠를 열 받게한 다음 쇠를 두드려 원하는 모습으로 만든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대장간 (두산백과)   천재학습백과 초등 명화미술관 대장간 단원 김홍도   아티스트 단원 김홍도 제작년도 18세기 후반 기법 종이에 옅은 채색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대장간 1. 작품 이야기 갖가지 풍속장면을 종합한 25엽으로 구성된 단원풍속화첩에 그려진 대장간 풍경을 그린 그림이에요. 2. 명화 이야기 김홍도의 대장간은 배경은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각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풀무에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한 대장장이가 달군 쇠를 짚게로 붙들고 다른 두 사람은 망치로 메질을 하고 있어요. 앞에 있는 아이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3. 화가 이야기 조선 후기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던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왕실에서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어요.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하는 목적 때문이라도 사실적인풍속화를 장려하고 발전시켜 왔어요. 4. 화법 이야기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신선도,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두루 갖추었고 조선 고유의 색을 짙게 드러내는 공통성이 있어요. 관련이미지 5                               이미지 이전 대장간현재 잔존하는 대장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대장간 - 단원 김홍도 (천재학습백과 초등 명화미술관)  
2909    [세계속에서] - 비상사태속에서의 은정... 댓글:  조회:3984  추천:0  2020-03-28
  갈 곳 잃은 노숙인 위해 도시락 싸는 식당 2020.03.28.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올해 17주년 인천 민들레국수집... 코로나19 여파로 무료 급식 대신 도시락 나눔 [오마이뉴스 이명옥 기자]   ▲   음식이 든 봉투를 건네는 서영남 대표 ⓒ 서영남    2003년 4월 1일 인천 동구 화수동에 문을 연 민들레국수집은 오는 4월 1일이면 17주년을 맞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토~수 운영, 목·금 휴무) 아무 때나 찾아가도 뷔페식 밥상을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노숙인들에게 값을 받지 않고 식사를 제공하지만 '무료급식소'라는 간판은 달지 않았다. 여느 식당처럼 노숙인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원하는 만큼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따금 필요한 물품 등도 지원한다.   민들레국수집은 정부나 지자체, 공공기관, 기업 등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오로지 시민 개인들의 자발적 지원과 봉사활동으로만 운영되는 곳이다. 후원하는 이들 중에는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어르신, 노점을 운영하는 가난한 이웃도 있다. 팔다 남은 채소를 슬그머니 놓고 가는 동네 상인, 설거지를 돕는 동네 청년 등 많은 이들이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대표 및 그의 가족과 함께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영남 대표는 2009년 민들레국수집 인근 허름한 건물에 '민들레희망센터'도 열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손님들이 빨래와 샤워를 하는 공간이다. 낮잠을 자거나 공부도 할 수 있다. 노숙인들은 오후 5시가 되면 다시 거리로 나가는데, 아프거나 다음 날 새벽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 센터에서 찜질방 표를 준다. 매월 두 번은 민들레진료소도 운영한다. 그러나 코로나19 발병 이후 감염 확산의 우려로 식당은 물론이고 희망센터 운영이 어려워졌다. 다중이 모이는 다른 시설들도 문을 닫고 있다. 외출 자제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무료급식소나 복지관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노숙인, 독거노인, 탈시설 중증장애인들에게 바이러스만큼 두려운 일이다.        인천에서 확진자가 나왔을 때 민들레국수집도 여느 무료급식소처럼 임시 휴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린 배를 채울 길이 없는 노숙인들을 생각하니 무작정 문을 닫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민들레국수집은 무료급식 폐쇄 대신 도시락을 준비해 나눠주고 있다. ⓒ 서영남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도시락이다. 요즘 민들레국수집은 하루 400개에서 500개의 도시락을 준비해 노숙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이전보다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은 더 분주해졌고 도시락을 필요로 하는 손님들은 더 늘어났지만, 경기 침체로 후원 물품이나 도움의 손길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다. 항상 최대치로 준비하지만 도시락과 물품이 매번 부족하다고 한다. "요즘 같은 때에 밥 한 그릇을 제대로 먹는다는 것은 노숙하는 사람에게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숙인 손님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마냥 배고픔을 참으라 할 수는 없지요. 도시락으로나마 작은 나눔을 계속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중단하고 겨우 도시락 나눔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무사히 지나가길 기원합니다."           민들레국수집은 4월 중 주변 초등학교가 개학하면 무료 급식을 재개하고 민들레희망센터와 민들레꿈공부방(2008년부터 운영)도 다시 열 예정이다. * 후원 문의 : 민들레국수집(인천광역시 동구 화도안로 5 / 031-764-8444 / http://www.mindlele.com)   서영남 대표가 말하는 민들레국수집 2003년 4월 1일 '민들레국수집'이라는 아주 조그마한 식당을 열었습니다. 가진 돈 삼백만 원을 전부 털었습니다. 사실 가진 것이 별로 없을 때 내어놓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조그맣게 식당을 열고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사람 대접을 받으면서 식사할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살로 가지 않는 눈칫밥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무료급식이라는 표시를 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통 음식점처럼 일반요식업으로 등록했습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예산 확보를 위한 프로그램 공모에 지원하지 않고, 조직을 만들지 않고, 부자들이 생색내면서 주면 받지 않았습니다. 착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나눔과 후원으로 운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겨우 식탁 하나 놓고 간이 의자 여섯 개를 놓고 국수 여섯 상자를 사 놓고 시작한 것이 바로 민들레국수집입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2908    [민속] - 올개심니 댓글:  조회:3737  추천:0  2020-03-25
한국세시풍속사전 올개심니     벼베기-충남 서산시 지곡면 장현2리-국립민속박물관 분야 의례 계절 가을(음력 8월) 날짜 음력 8월 15일경 다른이름 올계심리, 올게심리, 올기심니, 올이심리, 오리심리, 올벼천신 관련정일 추석(秋夕) 목차 정의 내용 지역사례 의의 정의 한 해 동안 벼농사를 지어 일찍 수확한 벼를 가장 먼저 조상에게 바치고 제사 지내는 풍속. 올개심니는 지역에 따라서 올계심리, 올게심리, 올기심니, 올이심리, 오리심리, 올베심리, 올비신미라고 하기도 한다. 올개는 일찍된 벼를 의미하고, 심니는 심례(心禮)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올개심니는 조상 숭배를 위한 신곡천신(新穀薦新)이라는 도미의례(稻米儀禮)적인 행사이다. 내용 올개심니는 지역에 따라서 시기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추석에 주로 많이 하지만 추석을 전후하여 적당한 날을 받기도 하고, 철이 늦어 벼가 미처 여물지 못하는 경우는 9월 중구에 하기도 한다. 햇곡식이 익으면 쌀 한 되 가량 장만할 만큼 벼를 베어내서 짚째로 실로 매어 방문 앞에 달아놓고 절을 하기도 하고, 음식을 장만해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또 잘 익은 나락을 베어다가 선영에 제사지내고, 쪄 말려서 샘, 당산, 마당, 곳간 등에 받쳐 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의 이삭을 한줌 묶어 기둥이나 벽에 걸어두는 일을 올개심니라고도 한다. 올개심니를 할 때에 이웃을 청해서 주연(酒宴)을 베푸는 수도 있고, 떡을 사당에 천신(薦新)하고 터주에 올리는 일도 있다. 올개심니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하며 또 이듬해에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지역사례 올베심리는 전남 도처에서 행한 세시행사로서 구례에서는 올베심리라고 하여 큰집에서 먼저 하고, 작은집에서는 별도로 길일을 택일하여 한다. 그런가 하면 큰집에서 올베심리를 하는 날 작은집에서는 불을 켜두기도 한다. 벼가 채 여물기 전에 많이 여문 벼포기를 가려서 베어다가 안방 윗목 시렁 밑에 가로 두세 곳 묶어 붙이고 한 줌 내외의 벼는 따로 솥에 볶는다. 지난해의 짚은 마당에서 태우고 볶은 쌀은 묵은 쌀에 섞어서 밥을 짓고 제상을 차린다. 햇병아리, 조기, 술, 햇무와 같은 햇곡식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주인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른 가족은 의관을 정제하여 함께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데, 집안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전남 강진에서는 새밥이라고 해서 벼포기를 걸어서 모시는 경우는 없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에서는 큰집과 작은집에서 모두 행하기도 하지만 보통 큰집에서만 한다. 일시는 별로 가리지 않지만 좋은 날을 가려서 하고 소날, 닭날과 같은 무일(戊日)에 들에 나가 잘 여문 벼를 베어서 그날이나 그 다음날 탈곡하여 볕이 나는 날 벼를 쪄서 말리고, 잘 말린 다음 찧어서 밥을 짓는다. 그리고 채소, 고기, 미역국 등을 준비하여 제상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대상은 조상이다. 제사지낼 무렵에 한 묶음 정도의 탈곡하지 않은 벼를 지붕 위에 던져놓기도 한다.  전북 남원에서는 대개 추석에 많이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길일을 받아서 하는데, 햇곡식이 익으면 쌀 한 되 가량 장만할 만큼 벼를 베어내서 짚째로 실로 매어 방문 앞에 달아놓고 절을 하기도 하고, 음식을 장만해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익산에서는 잘 익은 나락을 베어다가 선영에 제사지내고, 쪄 말려서 샘, 당산, 마당, 곡간 등에 받쳐 놓기도 한다. 이 습속은 농사를 짓지 않는 가정에서도 벼를 사다가 집에서 하기도 한다.  충남 금산에서는 햇나락이 나면 그것을 말려서 찧어 밥을 짓는다. 이것을 햅밥이라 하며, 당내(堂內)의 집안 어른을 모셔서 모두 함께 먹는다. 일찍 나는 조생종을 올벼라 하는데, 이것을 타작하는 날 친지들이 와서 일도 거들고 밥도 함께 먹었다. 올벼는 솥에서 쪄내는데, 사람이 먹기 이전에 먼저 한 그릇 떠서 방의 윗목에 떠다 놓는다. 반찬은 평소보다 많이 마련하여 윗목의 조상상에도 올린다.  충남 홍성에서는 그해 처음으로 수확한 오려베로 밥을 지어 집안의 곳곳에 가져다 두고 정성을 드린다. 이를 천신한다고 한다. 오려베는 일반 벼보다 20일 정도 일찍 생산되는데, 첫 수확한 벼로 집안을 위하는 것이다. 밥이 마련되면 부엌의 조왕, 장광의 터주, 방의 성주, 쌀을 넣는 광에 각각 한 그릇씩 가져다 둔다. 밥을 상이나 짚 위에 올리지 않고 그릇째 땅바닥에 놓을 뿐이며, 그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 밥을 거두어들이면 친척과 이웃을 불러 함께 먹는다.  경북 안동에서는 올개심니와 유사한 풋바심이 있다. 풋바심이란 채 익기 전의 곡식을 미리 베어 떨거나 훑는 일을 말하는데, 이것도 천신(薦新)을 목적으로 한 행사로서 추석 며칠 전에 하게 되지만 그때 벼가 채 익지 않으면 9월 중구 때에 하기도 한다. 논 가운데서 누렇게 잘 익은 부분을 지게로 한 짐 정도, 벼로는 두 말 정도, 쌀로는 한 말 정도를 베어내어 탈곡을 하여 그 쌀로 밥을 짓고 떡을 만들어 차례를 지낸다. 이때 조율시이(棗栗柿梨)를 비롯하여 조기, 수박, 참외, 옥수수, 풋밤과 그 밖의 햇곡식, 햇과일이 함께 제물로 쓰인다. 동고조(同高祖) 8촌 이내 당내 모임이 있고, 3대도 2대도 또 각각 모이는데, 남자 제관들도 서로 왕래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부인들도 다같이 왕래한다. 음복은 제상에 놓았던 한 그릇의 밥을 솥의 남은 밥들과 고루 섞어서 주로 비빔밥으로 해서 제관이나 참석자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다. 이와 같이 제상의 밥과 다 섞어 먹는 것은 제신(祭神)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그 덕을 이어받자는 것이다. 의의 올개심니는 조상숭배를 위한 신곡천신(新穀薦新)이라는 도미의례(稻米儀禮)적인 행사로서,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가장 먼저 조상에게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 추수감사 제의적인 성격을 지닌 세시행사이다. 참고문헌 張籌根. 韓國의 歲時風俗. 螢雪出版社, 1984년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全羅南道 篇, 1969년 충청남도 세시풍속, 2002년 이두현 외. 한국민속학개설. 일조각, 1991년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全羅北道 篇, 1971년 임동권. 민속의 슬기. 민속원, 2000년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1.벼털기-충남 서산시 지곡면 장현2리-국립민속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세시풍속사전 [네이버 지식백과]올개심니 (한국세시풍속사전)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풋바심     올베심리의 올베원본보기 이칭 올개심니, 올개심리, 올벼차례, 올벼천신, 풋바심 목차 1 정의 2 내용 3 지역사례 1 정의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은 새 곡식을 먹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대접하는 제의. 주로 백중, 추석 즈음에 행한다. 지역에 따라 올벼천신, 올기심리, 올개심리, 오리십리, 올비신미, 올벼차례 등으로 부른다. 경상북도지역에서는 풋바심이라고도 한다. 2 내용 농사를 짓는 전 지역에서 올벼심리가 행해지지만 호남지역에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올벼심리를 하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다. 깨끗한 날을 골라 행한다. 마을에 상(喪)이 나는 등 부정이 들면 올벼심리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임종을 맞을 상황이 보이면 미리 올벼심리를 행한다. 특히 집이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게 부족하여 올벼심리를 빨리 행하는 일이 잦았다. 벼가 여물기 전에 여문 일부분을 골라 훑어다가 솥에 찐다. 찐 나락은 잘 말렸다가 찧어서 밥을 짓는다. 나락을 쪄서 말리는 이유는 쌀알을 단단하게 여물게 하여 나락을 찧을 때 부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찧은 쌀로 밥을 짓고 나물, 술, 조기, 햇무 등 햇곡식과 햇과일을 상에 차려 집안의 조상에게 먼저 대접한 뒤에 온 집안 식구가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올벼심리를 할 때에는 집안사람끼리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가까이 거주하는 인척이나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미리 베어온 벼 포기나 옥수수, 수수, 조 등 곡식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안방의 윗목이나 마루 기둥에 묶어 두기도 한다. 이것 역시 올벼심리라고 한다. 이렇게 올벼심리한 곡식은 이듬해 씨앗으로 사용한다. 올벼심리는 이듬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따라서 남들보다 일찍 올벼심리를 행하면 좋다고 여겨 서로 경쟁하기도 하였다.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이 점차 많아지면서 점차 올벼심리 의례가 사라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추석 전에 시장에서 올벼쌀을 사다가 일반 쌀과 섞어서 밥을 지어 새로 나는 나물 등과 함께 상을 차려 제사를 올리는 형태로 변화된 양상도 찾아볼 수 있다. 3 지역사례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거의 올벼심리를 행한다. 올벼를 훑어서 찌고 말렸다가 찧어서 밥을 하고 햇과일, 나물 등과 함께 상을 차려 조상에게 올리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전라도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전라북도 전주지역에서는 삼신을 모신 집의 경우 올벼심리를 행하면 큰방의 살강 위에다 바가지를 놓고 새 음식을 넣어 둔 다음 절을 하며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빌었다고 한다. 남원시 운봉에서는 올벼심리를 할 때 당산제를 준비하는 것처럼 까다롭고 정성스럽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음식을 준비할 때 간을 보지 않는다. 또 올벼심리를 하려고 널어놓은 쌀을 새가 먹게 되면 그 새가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전라남도 화순지역에서는 올벼쌀뿐만 아니라 수수, 팥, 콩 등을 가지째 삶아서 상을 차리고, 닭을 잡고 미역국을 끓여 이웃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고흥군지역에서는 남보다 먼저 올벼심리를 하면 좋다고 여겨 ‘유두벼’를 심어 유두 이전에 올벼심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난해에 수확한 것을 나락 째 문 위에 매달아 놓았다가 그것을 올벼심리하는 일도 있었다.  해남군지역에서는 올벼심리를 주로 선영을 모시는 장남·종손 집에서 올린다. 올벼심리를 할 때 신주그릇(지그릇, 성줏단지, 조상단지, 제석항아리 등으로 부름)의 쌀을 햅쌀로 갈아 담고 원래 있던 쌀로는 밥을 해서 먹는다. 성주단지의 쌀은 집안의 종부가 갈아 담으며, 일 년에 딱 한 번 올벼심리를 할 때만 갈아 둔다. 이때 지은 밥은 식구끼리만 먹으며 짐승도 주지 않는다. 또한 이 시기에 혼례를 치른 집에서는 사돈집으로 옷과 음식(떡)을 장만해 보내기도 한다. 올벼심리를 할 때 신주그릇에 쌀을 바꾸어 담는 것은 장흥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올벼심리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2907    [그때 그시절] - 추억 영화 "꽃파는 처녀" 댓글:  조회:4359  추천:0  2020-03-24
영화 "꽃파는 처녀" 주제가 1.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어여쁜 빨간 꽃 향기롭고 빛갈 고운 아름다운 빨간 꽃 앓는 엄마 약 구하려 정성 담아 가꾼 꽃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이 꽃 이 꽃 빨간 꽃   2. 산기슭에 곱게 피는 아름다운 진달래   산기슭에 피여나는 연분홍빛 살구꽃    꽃 사세오 꽃 사세오 이 꽃을 사시면   설음 많은 가슴에도 새 봄빛이 안겨요         ▲1972년 11월 발간된 조선화보 1972년 11월 발간된 잡지의 표지는 영화 '꽃파는 처녀'의 녀주인공 '꽃분이'를 연기한 홍영희(당시 나이 16살)이 장식했다. 그녀는 이후 수많은 훈장을 받은 인민배우가 됐고, 구 1원권 지폐에 등장하기도 하는 등 조선에서는 가장 유명한 녀배우 중 한 사람이다. '꽃파는 처녀'는 조선의 불후의 명작, 가극이다. 영화는 1972년, 가극을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유럽의 대표적인 영화제 중 하나인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제18회)에서 특별상을 받는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악독한 지주와 일제 순사에게 억눌려 살던 주인공 꽃분이 일가의 생활을 통해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 바탕에는 순수 예술로 감상해 볼 가치가 있다.
2906    [세상만사] - "가짜세상"... 댓글:  조회:3646  추천:0  2020-03-22
  “베네치아 찾은 백조와 돌고래”는 가짜뉴스 2020.03.2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코로나로 오버투어리즘 중단돼 생태 회복” 사진 공유  검증 결과, 베네치아 아닌 부라노섬과 사르데냐섬 사진베네치아 운하의 물이 맑아져 백조가 찾아왔다는 인도 여성의 트윗 사진. 이 곳은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40분 가량 가야 하는 부라노 섬의 운하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원래 주기적으로 백조가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Kaveri GanapathyAhujad의 트위터.코로나19 관련해 세계보건기구가 정보전염병(인포데믹)을 경고한 것에서 드러나듯, 코로나19 관련한 왜곡정보와 가짜뉴스의 폐해가 크다. 성남 은혜의강 교회는 소금물 소독이 코로나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주장을 믿고 신도들 입에 소금물 분무를 한 뒤 3월 두 차례(8, 15일) 예배를 강행했다가 50여명 넘는 감염자를 발생시켰다. 경기도 남양주의 한 주민은 지난 7일 공업용 알코올(메탄올)을 물고 섞어 소독제로 썼다가 가족 3명이 중독 증상을 일으켜 병원 치료를 받은 바 있다. 이달초 이란에서는 수십명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죽인다며 메탄올을 마시고 사망했다.  건강을 위협하는 치명적 허위정보말고도 코로나19 관련 가짜뉴스는 다양하다. 세계적 관광도시인 베네치아는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는데, 최근 코로나19로 예기치 않은 환경 개선 효과가 나타난다는 뉴스도 나왔다. 베네치아에서 관광과 이동이 중지되면서 수질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부수 효과’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들 뉴스는 탁하고 오염된 베네치아의 운하가 맑아진 덕분에 돌고래가 헤엄치고 백조가 돌아왔다는 사진을 통해 예기치않은 오버투어리즘 중단의 ‘부수 효과’를 전달했다.  출발은 인터넷에서 널리 공유된 트위터 사진과 글이었다. 인도 뉴델리에 살고 있는 여성 카베리 가나파시 아후자는 지난 17일 백조 사진 등을 올리면서 “팬데믹의 예기지 않은 부수효과가 있다. 베네치아 운하가 사상 처음으로 맑아졌다. 물고기가 보이고 백조가 돌아왔다”고 적었다. 이 트윗은 백만번 넘게 좋아요와 공유가 일어났고, 언론에 보도됐다.  베네치아 운하의 물이 맑아져 백조가 찾아왔다는 인도 여성의 트윗 사진. 이 곳은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40분 가량 가야 하는 부라노 섬의 운하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원래 주기적으로 백조가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Kaveri GanapathyAhujad의 트위터.미국 ‘에이비시(abc)뉴스’는 지난 19일 “베네치아 관광중단으로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운하가 맑아졌으며 운하에 백조가 돌아오고 항구에 돌고래가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베네치아 운하에서 물고기 떼가 헤엄치는 모습의 사진과 운하 다리에 백조가 노니는 사진, 돌고래 2마리가 헤엄치는 사진이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에서 지난 20일 이들 사진을 검증한 바에 따르면, 베네치아 운하에 돌아온 백조 사진은 부라노섬의 사진이다. 부라노는 베네치아에서 여객선을 타고 40여분 항해 뒤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부라노섬은 베네치아 석호 안의 섬이고 운하도 있지만 관광객으로 넘치는 베네치아와 수질 환경이 상당히 다르다. 원래 주기적으로 백조가 찾아오는 곳이다.  검증 결과, 돌고래 2마리가 나타난 곳도 베네치아의 운하나 항구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서부에 있는 지중해에서 코르시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인 사르데냐의 항구에서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이탈리아의 영토이긴 하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약 800km 떨어진 곳이다.  베네치아 운하에 돌고래가 돌아왔다고 올린 트위터의 동영상은 검증결과, 800km 떨어진 사르데냐 섬에서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Gianluca De Santis 트위터이번 일은 얼마나 쉽게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고, 어떤 구조로 만들어지는지를 알려준다. 베네치아 운하의 탁도가 개선돼 물이 맑아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는 베네치아 석호시스템 연구컨소시엄의 책임자 피에르파올로 캄포스트리니 인터뷰를 통해 “물이 투명해졌다고 물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수상 교통 감소로 침전물이 가라앉은 것과 낮은 물의 온도 영향이다”라고 말했다.  베네치아 관광이 중단돼 곤돌라와 모터보트 등 수상교통이 중단돼 운하의 탁도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물이 깨끗해져 백조와 돌고래가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진과 글의 일부는 사실이고 개연성 높은 내용이지만, 전체적으로 거짓정보이고 의도적 오해를 만들어내기 위해 구성된 정보라는 점이다.  /구본권 선임기자 
2905    [민속] - 비녀 댓글:  조회:5769  추천:0  2020-03-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비녀     이미지 크게보기 흑각석류비녀: 길이 14.5㎝, 나무. 도금니사죽잠: 길이 17.5㎝, 대나무. 산호매화비녀: 길이 18.5㎝, 산호. 옥초롱비녀: 길이 29㎝, 옥과 나무. 도금용비녀: 길이 37㎝, 은과 도금.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유형 물품 성격 장신구 용도 장식용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부녀자가 쪽을 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꽂거나, 관(冠)이나 가체를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꽂는 장식품. 내용 이를 표현하는 한자어로 잠(簪)·계(筓)·차(釵)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단군이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털을 땋고 머리를 가리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머리털을 정리하게 되면서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비녀도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면 남자는 대개 상투였으며, 여자는 얹은머리·쪽찐머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머리모양을 하였다. 따라서 정리한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녀의 사용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부여에서 발견된 백제의 은비녀는 한 끝이 고리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당시 비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서는 진골녀(眞骨女)는 장식비녀[釵]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거나[鏤刻], 구슬을 다는[綴珠]것을 금하였다. 육두품녀(六頭品女)는 순금 사용을 금하고 은에 누각하거나 철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오두품녀는 백은을 사용하게 하였고, 사두품녀에게도 누각·철주와 순금 사용을 금하였다. 그리고 평인녀(平人女)에게는 놋쇠[鍮石]를 사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 당시 비녀가 다양하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녀자의 머리모양은 고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별다름이 없어 고려의 여인들도 머리에 작은 비녀를 꽂았다. 조선 중기에는 가체에 의한 얹은머리가 유행하였다. 얹은머리(둘러머리)는 본머리[本髮]와 다리를 합쳐 땋아서 위로 둥글게 둘러 얹은머리모양이다. 다리를 본체에 고정시키는 데 비녀가 사용되었다. 궁중 의식용인 큰머리[巨頭味, 일명 떠구지머리]·대수(大首), 궁중 및 양반 집안의 예장용인 어여머리[於由味]등에도 비녀를 사용하여 가체를 고정시켰다. 얹은머리는 이에 소요되는 다리의 값이 너무 고가였고 장식을 위한 금옥주패(金玉珠貝)의 사치가 날로 심해졌다. 또 그에 따른 폐단이 많게 되자, 영조·정조 때의 발제개혁(髮制改革)과 더불어 이에 대한 금령이 여러 차례 있었다. 순조 중엽에 와서는 얹은머리 대신 쪽찐머리가 일반화되면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쪽머리는, 대개는 머리를 땋아 아래 뒤통수에서 둥글게 서리고 쪽이 풀어지지 않게 비녀를 꽂았다. 얹은머리의 가체에 치중하였던 사치가 점차 비녀로 옮겨지면서 그 종류가 다양해졌고 기교도 발달하여 당시의 공예미술을 대표하는 것의 하나가 되었다. 이 밖에 비녀는 관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면류관에 꽂는 옥잠도(玉簪導) 또는 금잠도(金簪導), 조신(朝臣)의 양관(梁冠)에 꽂는 각잠(角簪, 일명 木箴) 등이 있었다. 여자의 경우에는 화관에 비녀를 꽂아서 관을 고정시켰다. 부녀자의 수발용 비녀는 그 재료와 잠두(簪頭)의 수식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재료에 따라 금비녀·은비녀·백동비녀·놋비녀·진주비녀·영락비녀·옥비녀·비취비녀·산호비녀·목비녀·죽비녀·각비녀·골비녀 등으로 나누어진다. 잠두의 수식에 따라서는 봉잠(鳳簪)·용잠(龍簪)·원앙잠(鴛鴦簪)·조두잠(鳥頭簪)·어두잠(魚頭簪)·매죽잠(梅竹簪)·매조잠(梅鳥簪)·죽잠(竹簪)·죽절잠(竹節簪)·목련잠(木蓮簪)·모란잠(牡丹簪)·석류잠(石榴簪)·가란잠(加蘭簪)·국화잠(菊花簪)·화엽잠(花葉簪)·초롱잠(草籠簪)·호도잠(胡桃簪)·심잠(蕈簪)·두잠(豆簪)·완두잠(豌豆簪)·민잠(珉簪)·말뚝잠·조리잠·연봉잠 등으로 구분된다. 이미 흥덕왕 복식금제에서도 그 일단을 보았듯이 계급사회에서는 존비·귀천·상하의 차별이 심하였으므로 금은·주옥 등 귀중한 재료로 만든 비녀는 상류계급에서 사용하였다. 서민계급의 부녀자는 나무[木]·뿔[角]·뼈[骨] 등으로 만든 비녀를 사용하였다. 또한 잠두의 수식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있었다. 잠두의 수식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형태가 대부분 길상적(吉祥的)인 것으로 부귀·장수·다남(多男)을 기원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봉잠·용잠은 왕비나 세자빈이 예장할 때 다리를 드린 큰 낭자쪽에 꽂았다. 일반 부녀자는 혼례 때에 봉잠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일종의 보조비녀로 두 가닥으로 된 차가 있다. 이것은 가체 또는 족두리·떠구지 등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꽂았던 것으로 은으로 만들었다. 비녀는 재료와 잠두의 수식에 따라 예장 때와 평상시에 사용하는 것이 달랐다. 또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 계절에 따라서도 그 사용을 달리하였다. 이를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의 ≪사절복색자장요람 四節服色自藏要覽≫에서 보면, “비녀도 계절에 맞추어 직금당의(織金唐衣)에는 봉잠이나 옥모란잠을 꽂는다. 평시 문안에는 10월 초하루부터 용잠, 2월에는 모란잠, 4·8·9월에는 매죽잠이나 옥모란잠을 꽂는다. 원삼에 큰머리를 할 때는 칠보수식을 하고, 금박당의에는 옥봉잠·원앙잠 또는 이사련잠(泥絲蓮簪)을 꽂는다. 옥칠보가 무거울 때에는 금칠보를 하여도 좋으나, 원칙적으로는 젊어서는 옥칠보를 하는 것이 좋고 노년에는 금칠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조짐머리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도금용잠을 꽂고, 2월에는 옥모란잠을 꽂는 것이 좋으나, 조심스러울 때에는 은모란잠을 꽂아도 좋다. 옥모란잠은 호사할 때 꽂으면 더욱 좋다. 5월에 백광사당의(白光紗唐衣)를 입을 때는 민옥잠(珉玉簪)이나 용잠에 떨잠을 꽂는다. 봄과 가을에는 모란잠·매죽잠을 꽂고 그 위에 이사떨잠을 꽂아 수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경빈 김씨 개인이 궁중에서 사용하던 한 예이기는 하나, 일반 상류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지난날 비녀는 수식물로서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는 가보로도 귀중히 여겨졌다. 참고문헌 『석명(釋名)』 『고려도경』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관련이미지 7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비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비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규방 문화 비녀     우리 전통 사회에서 혼인한 여인은 치렁치렁한 머리를 곱게 빗어 둥글게 쪽찌었다. 다듬어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지지 않게 고정하고 더불어 훌륭한 장신구 역할을 한 것이 비녀이다. 이러한 비녀에는 꽂는 이의 넋을 모으는 마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화장 기구로 여겼다. 그래서 여성이 비녀를 잃거나 빼면 정절이나 긍지를 잃음을 상징했다. 비녀여인이 머리를 틀어 올려 장식할 때 꽂은 것으로 잠두의 모양에 따라 봉잠, 용잠, 모란잠, 국화잠 등으로 불렀다. 함경도 지역에서 구전되는 승천 신화 ‘치원대 양산복’에서는 비녀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매개물로 등장한다. 어느 마을에 치원대와 양산복 두 아이가 한날한시에 태어났다. 여자인 치원대는 부모에 의해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자라났다. 둘이는 한방에서 같이 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치원대가 여자임을 안 양산복은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치원대가 시집가는 길목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시집가는 날, 치원대는 양산복 무덤을 지나다가 오줌을 누겠다며 가마에서 내려 양산복의 무덤으로 가서 금채봉 비녀를 뽑아 무덤 한복판을 내리쳤다. 그러자 무덤이 둘로 갈라지고, 그 순간 치원대는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치원대를 삼킨 무덤은 신랑의 손에 치원대의 찢긴 치맛자락만 남긴 채 닫혀 버렸다. 얼마 안 되어 무덤에서 찬란한 쌍무지개가 솟고 두 남녀는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처럼 비녀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도록 하는 역할도 하였다. 제게 있는 이 하나의 금비녀 이것은 시집올 때 찌른 것이네 이제 떠나는 당신에게 드리오니 천리 멀리서도 늘 생각하시라 허난설헌의 「효최국보체(效崔國輔體)」이다. 비녀는 임과의 정표를 상징했다. 외형상 비녀는 남근을 상징하며, 비녀는 남자를 경험한 여자, 즉 기혼녀만이 꽂을 자격이 있었다. 다만 단옷날에 한해서 처녀도 비녀를 찌를 수 있었고, 부인은 새 비녀를 꽂았다. 단옷날 아침에 창포 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고, 여기에 붉은 글씨로 수(壽)자와 복(福)자를 새겨 양끝에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았다. 유만공의 『세시풍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단오 옷은 젊은 남자에게 잘 맞으니 가는 모시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네 꽃다운 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다 파하고 창포 뿌리 비녀 떨어지니, 작은 머리털이 비녀에 두루 있다 단옷날의 비녀는 삿된 것과 액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작은 머리털이 떨어진 비녀에 두루 있는 것은 재액이 모두 떨어졌음을 상징한다. 또 나무를 깎아 끝이 뾰족하게 하여 비녀로 삼아 머리에 꽂고 다녔는데, 마치 싹이 돋아나는 모습처럼 윗부분 양쪽에 창포잎을 붙였다. 비녀와 창포 잎은 머리를 장식하고 봄의 소생이 가져다주는 희망의 표지 역할을 겸했다. 무속에서는 비녀를 서낭신으로 신봉한 곳이 많은데, 삼척 지방에서는 비녀를 신격화하여 오금잠제(烏金簪祭)를 지냈다. 무당은 비녀 신을 통해 마을의 풍년과 풍어, 가정의 안녕을 빌어 주었다. 비녀는 벼슬이나 출세를 상징하기도 했다. 비녀와 갓끈을 가리키는 잠영(簪纓)이라는 말은 흔히 벼슬이 높은 사람을 뜻하고, 관에 꽂는 비녀와 손에 쥐는 홀을 뜻하는 잠홀(簪笏)은 예복을 입은 벼슬아치인 고관을 상징했다. 신분에 따라 비녀 사용에도 차별이 있었다. 신라 흥덕왕 때에는 비녀 사용을 제한하는 금제가 발표되었는데, 진골 여자는 비녀에 각루(刻鏤) 및 철주(綴珠)하는 것을 금했고, 6두품 여자는 순금 비녀와 은각루 및 철주를 금했다. 5두품 여자는 백은 이하를 쓰고, 4두품 여자는 각루, 철주 및 순금 비녀를 금했다. 평민 여자는 유석(鍮石) 이하를 사용하게 했다. 또 조선 시대에 봉황잠은 왕세자비, 용잠은 왕비만 꽂았다. 사대부가에는 혼례식 등 각종 의식에만 용잠이 허락되었으며, 서민에게는 혼례 때에만 용잠이 허락되었다. 재료도 차별되어 금, 은, 옥으로 된 비녀는 상류층 여인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깎아 만든 백목 비녀는 남편을 여읜 여인이 소상 때까지 쓰고, 흑목 비녀는 소상 때부터 대상 때까지 쓰는 미망인의 상징이었다. 비녀의 명칭은 잠두(簪頭)의 모양에 따라 달랐는데 봉황잠, 용잠, 원앙잠, 매죽잠, 모란잠, 석류잠, 국화잠 등이 있다. 이 같은 잠두의 장식은 대부분 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히 부귀와 다남, 장수의 기원을 담고 있다. 관련이미지 7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비녀흑각석류비녀: 길이 14.5㎝, 나무. 도금니사죽잠: 길이 17.5㎝, 대나무. 산호매화비녀: 길이 18.5㎝, 산호. 옥초롱비녀: 길이 29㎝, 옥과 나무. 도금용비녀: 길이 37㎝, 은과 도금.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비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규방 문화)  
290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핵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15  추천:0  2020-03-21
핵폭탄 한 발이라도 터지면 전 세계 최악의 기근 맞는다  2020.03.21.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인도-파키스탄간 전술핵 사용시 10년간 기근발생...전 세계 1억2500만명 사망가능성[서울신문] 국지적 핵폭발로도 전 세계 최악의 기근 온다 - 카슈미르 분쟁으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인도-파키스탄이 만에 하나 전술핵을 사용한 전쟁을 벌일 경우 전 세계에 파국이 온다는 국제공동연구팀의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네이처 제공현재 전 세계인은 코로나19가 얼마나 확산되고 언제 종식될 수 있을 것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이란이나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감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대립 중인 파키스탄과 인도가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1947년, 1965년, 1971년, 1999년 4번이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전면전을 벌인 바 있고 1974년 인도의 핵무기 보유에 이어 1998년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보유함에 따라 긴장감이 높은 지역을 주목받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여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해당 지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1억 명 이상의 사망자와 세계적인 기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를 내놨다. 사실 핵폭탄에 의해 만들어지는 블랙카본으로 인한 핵겨울의 개념은 동서냉전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그렇지만 이는 당시 러시아와 미국간 전면적인 핵전쟁을 상정했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구팀은 전략핵무기가 아닌 그보다 규모가 작은 전술핵무기를 사용한 국지전이 발생하더라도 전 지구적인 식량부족과 기아현상이 10년 이상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미항공우주국(NASA) 고다드우주연구소, 럿거스대, 컬럼비아대, 시카고대, 아르곤 국립연구소, 플로리다대, 국립대기연구센터, 콜로라도 볼더대, 독일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대, 칼스루에공과대,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 지속가능경제개발연구소, 프랑스 파리 샤클레대, 스위스 연방 수산과학기술연구소 공동연구팀은 전면적 핵전쟁이 아니라 국지적이며 제한적인 전쟁에서라도 핵을 사용하게 되면 전 세계는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21일 밝혔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미국국립과학원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PNAS’ 17일자에 실렸다.국지적 핵전쟁에 미치는 옥수수 수확량의 변화 - 인도-파키스탄간 전술핵을 이용한 국지전이 발생하고 5년 뒤 전 세계 옥수수 평균 수확량의 변화를 보여준 그래프. 미국과 캐나다, 유럽, 러시아, 중국 등 북반구 주요 곡창지역의 생산량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 컴퓨터과학과 제공연구팀은 1945년 연합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과 비슷한 폭발력을 가진 전술핵무기를 50개 정도 사용할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영향을 분석했다. 전술핵무기 50개는 전 세계 핵무기의 1%에 못미치는 양이다. 연구팀의 분석에 따르면 핵무기 사용으로 인해 직접적인 사상자 발생과 파괴 이외에도 블랙카본이 500만톤 정도 발생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지구 평균온도를 최소 5년 동안 1.8도 가량 낮추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 유럽, 러시아, 중국 등 북반구 주요 곡창지역이 큰 타격을 입게 돼 4대 곡물인 옥수수, 밀, 콩, 쌀 생산량이 평균 11% 감소하고 경제 침체가 10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특히 옥수수 수확량은 미국은 5분의 1, 러시아는 2분의 1이 줄어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국지적 핵전쟁이 발생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 캐나다, 유럽, 러시아, 중국 등 북반구 주요 곡창지역이 타격을 입게 되고 4대 곡물인 옥수수, 밀, 콩, 쌀 생산량이 급격히 줄게 된다. 러시아의 경우는 현재보다 생산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제공이렇게 되면 후진국 약 70개국의 13억명에 대한 식량공급이 20% 이상 줄어들어 극심한 기아가 시작돼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놨다. 더군다나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면 농업선진국들은 수출금지를 실시하면서 후진국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될 텐데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국가로는 소말리아, 니제르, 르완다, 온두라스, 시리아, 예멘, 방글라데시가 꼽혔다. 이에 앞서 미국 콜로라도대 대기·우주물리학연구실, 극지·고산연구소, 국립대기연구센터(NCAR) 대기화학관측·모델링연구실, 럿거스대 환경과학과, 연방과학자협회, 환경보호위원회, 텍사스 리오그란데밸리대 지구환경해양과학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대(UCLA) 대기해양과학과 공동연구팀은 지난해 10월 2일 기초과학 및 공학분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1억 명 이상이 즉시 사망하게 되며 해당 지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연구팀은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2025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인다는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분석한 결과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할 경우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보고 이들이 사용할 전술핵무기는 도합 250기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렇게 될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최대 1억 2500만명의 사망자를 유발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핵폭발이 일어날 경우 1600만~3600만톤의 블랙카본이 상층 대기로 올라가 1~2주 내에 전 세계로 퍼지게 된다는 것이다. 블랙카본은 햇빛의 20~35% 감소시키고 지표면 온도를 평균 2~5도 떨어뜨리고 강수량도 15~30% 줄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앨런 로복 럿거스대 교수(환경과학)는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카슈미르 분쟁으로 인해 두 핵무기 보유국간 분쟁 가능성과 지역적 긴장감은 그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있다”라며 “유일한 해결책은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용하 기자 
2903    [세계속에서] - 100배... 댓글:  조회:4092  추천:0  2020-03-19
  식당에 음식값 100배 '1180만원' 남기고 간 부부 감동 사연 2020.03.19.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위치한 한 멕시코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고객 부부가 1000만원이 넘는 팁을 남기고 간 사연이 공개됐다. / 사진=CNN 홈페이지 캡처 [아시아경제 임주형 인턴기자] 음식값보다 100배 더 많은 팁을 낸 손님이 화제에 올랐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난에 봉착한 음식점 종업원들 위해 많은 돈을 남기고 간 것으로 알려져 감동을 주고 있다.  18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위치한 멕시코 음식점 '어마스 사우스웨스트(Irma's Southwest)'에서 한 부부가 지난 16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팁 9400달러(약 1180만원)를 남기고 떠났다. 부부의 식사비는 90.12달러(약 11만원)에 불과, 무려 100배가 넘는 팁을 지불한 셈이다. 해당 음식점 주인인 루이스 갈반 씨는 방송에 출연,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그들 부부는 주방과 홀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를 위해 팁을 남기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갈반 씨에 따르면 팁을 남기고 간 부부는 "앞으로 남은 몇 주 동안 직원들을 위한 팁으로 써달라"는 메모를 남겼다. 또한 부부는 자신들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갈반 씨는 "어려운 시기에 직원들을 돕기 위해 돈을 남기고 갈 만큼 배려심 있는 고객이 있다는 사실에 직원들도 놀랐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어 "우리도 현 시점에선 수익성은 커녕 생존 모드에 돌입한 상태여서 정상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게 힘들다"고 소개하면서도 "직원들은 계속 출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 /임주형 인턴기자
290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비닐쓰레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95  추천:0  2020-03-18
[안녕? 자연]  ‘쓰레기계의 좀비’… 바다서 1300년간 안 썩는다 2020.03.17.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바닷가에 버려진 레고연구진은 바닷가에 버려진 레고의 색깔과 모양 등을 토대로 생산연도를 역추적하고 새 레고와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했다.전 세계 어린이뿐만 아니라 키덜트들이 애정하는 장난감 레고가 바다에 버려질 경우, 최대 1000년이 넘도록 썩지 않아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국 공립대학이자 해양학 분야의 명성이 높은 플리머스대학 연구진은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 해안에서 버려진 채 떠밀려 온 레고 조각들을 수거한 뒤 실험실로 가져와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진은 플라스틱의 원재료인 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스티렌(ABS)으로 만들어진 ‘버려진 레고’ 50개를 세척한 뒤 무게를 측정했다. 이후 물체를 이루는 화학적 요소 등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연에서의 수명을 예측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XRF(X-rayFluorescence, 엑스레이 형광분석)를 이용해 각 블록의 화학적 특성을 분석했다. 동시에 버려진 레고와 동일한 레고의 생산년도를 역추적하고, 레고의 마모수준을 파악해 해양 환경에서 레고가 얼마나 오랫동안 분해되지 않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레고는 최소 100년에서 최대 1300년까지 바다에서 분해되지 않고 떠다니거나 바닷속에 머무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해안에서 발견된 레고 조각은 대부분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가지고 놀다 분실하거나 생활 쓰레기와 함께 바다로 유입된 것”이라면서 “레고는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장난감 중 하나다. 레고 역시 강점 중 하나가 내구성이라고 자랑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수거해 분석한 버려진 레고 조각은 색이 벗겨지고 물러져 있는 상태였다. 이는 시간이 더 지나면 이것이 미세 플라스틱으로 잘게 부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환경분야에서 세계 3대 학술지로 꼽히는 ‘환경오염(EnvironmentalPollution)’ 저널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2901    [세계속에서] - 올림픽 "연기"? "연기"!... 댓글:  조회:3525  추천:0  2020-03-17
올림픽, 연기 전례 없다… 칼자루 쥔 IOC의 결정은?   현재 일본 정부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올림픽 연기'다.  IOC 정관에 따르면 전쟁·내란 외에도 '대회 참가자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합리적 근거가 있는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다만 올림픽 취소뿐만 아니라 연기 시에도 다방면으로 막대한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IOC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이 1년 뒤인 2021년 개최된다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육상선수권대회, 또 2년 연기된다면 베이징 동계올림픽, 월드컵 등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와 겹쳐 대대적인 일정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편 올림픽은 1896년 근대 올림픽 시작 이후 4년마다 빠짐없이 개최됐다. 191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1940년 도쿄올림픽, 1944년 영국 런던 올림픽 등 전쟁을 이유로 대회가 취소된 적은 있으나 '연기'한 전례는 없다. 만일 이번 도쿄올림픽이 연기될 경우 첫 사례가 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했지만 개최 50일 전 "올림픽 개최로 감염이 퍼질 위험은 낮다"고 밝히며 예정대로 올림픽을 진행했다. 이번에도 IOC는 WHO의 진단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과연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사상 첫 올림픽 연기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강소현 기자  ======================================/// ... ... 도쿄올림픽의 예정대로 개최가 불투명해지자, 망언으로 악명 높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저주받은 올림픽”이라고 말했다. 아소 부총리는 18일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서 일본이 중-일 전쟁 때문에 열리지 않았던 1940년 삿포로 겨울올림픽과 동서 냉전 영향으로 참가국이 축소됐던 1980년 모스크바 여름올림픽의 사례를 들면서 “(모스크바 올림픽 뒤) 40년이 지나니 올해다. 저주받은 올림픽이라고, 언론이 좋아할 만한 말 아니냐. 그렇지만 현실이 그렇다. 40년마다 문제가 일어났으니까, 사실 아니냐”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 2020 도쿄올림픽ㆍ패럴림픽 정상 개최를 고집했던 꿈은 결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 추세와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반발에 꺾이고 말았다. 연기가 확정된 도쿄올림픽은 근대올림픽 역사상 전염병 탓에 일정이 변경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앞서 1916년 베를린대회, 1940년 도쿄 대회, 1944년 런던 대회는 세계대전 탓에 취소됐고,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냉전 보이콧으로 불완전하게 치러졌지만 전염병으로 연기된 건 최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오는 7월 24일 개막 예정이던 대회를 연기하되, 명칭은 ‘2020 도쿄올림픽ㆍ패럴림픽’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24일(한국시간) 밝혔다.  ... 이로써 2020 도쿄올림픽은 전쟁이 아닌 전염병 때문에 일정이 조정된 첫 사례가 됐다. 공교롭게도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최근 올림픽과 관련해 “40년마다 문제가 생겼다”며 “저주받은 올림픽”이라고 내뱉은 실언이 현실화 한 모습이다. 그간 하계올림픽은 40년 주기에 맞춰 홍역을 치러왔다. 일본은 1936년 아시아 최초로 1940년 동ㆍ하계 올림픽 개최권을 모두 가져왔지만, 1년 뒤 자국이 일으킨 중일전쟁에서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대회를 열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서방국가의 보이콧으로 반쪽 대회로 치러졌다. 한편 로이터통신은 도쿄올림픽 개막시기를 내년 5월로 내다봤다.  /김형준 기자 /김진욱 기자 /오지혜 기자
2900    [세계속에서] - ...다면???... 댓글:  조회:3491  추천:0  2020-03-13
히틀러가 시력을 잃지 않고 화가로 계속 지냈다면… ‘역사의 물결’을 바꿔놓은 질병들  2020.03.13.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군대의 가장 선두에서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강인한 체력과 용맹한 기질을 겸비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의 발을 내디딘 알렉산드로스는 이번에도 역시 선두에서 군을 지휘하며 페르시아의 대군을 무찔렀다. 밤에는 측근들을 불러놓고 술을 마셨다. 친한 이들끼리 와인을 함께 마시는 그리스 문화를 심포지아(symposia)라고 하는데, 알렉산드로스와 측근들에게 ‘술 없는 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연일 강행군과 밤마다의 음주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시름시름 앓았다. 이 책에 따르면, 고열에 시달리던 알렉산드로스는 사망하기 11일 전부터 상복부의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사흘 뒤 친구인 메디오스와 주사위놀이를 할 만큼 건강이 호전됐으며, 사망하기 이틀 전에는 함대에 다음 출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서른세 살이던 기원전 323년 6월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원인으로는 독살설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상복부의 갑작스러운 통증”을 근거로 “급성 췌장염일 가능성이 높다. (장기간의) 과음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질병에 걸린 권력자들”에 대해 흥미진진한 서술을 펼쳐내는데, 그중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있다.  저자는 이 황제에 대해 “불안정했고 거만했으며 두뇌가 명석하고 충동적이었다. 신기술에 열광했으며 위풍당당하고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기 좋아했다”고 평한다. 한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어머니인 빅토리아 공주가 15시간 넘게 난산을 치르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아기의 왼팔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넘겼고, 그로 인해 아기는 신경총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는 왼팔의 불편함을 평생 겪어야 했다. 길이도 오른팔보다 15㎝쯤 짧았다. 실제 그의 사진들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왼팔을 감추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독일이 강대국임을 저돌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면에 그렇게 개인적 질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렇듯이 책은 전제 군주나 황제, 근현대 정치가들까지 아우르면서 개인적 질병이 역사의 물결을 바꿔놓은 사례들을 다양하게 살핀다. 그러면서 저자는 가정법 질문들을 툭툭 던지는데, 예컨대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헬레니즘 문명을 이어받은 로마 제국이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까?” “히틀러가 시력이 약해지지 않아서 그냥 화가로 계속 지냈다면?” “레닌이 53세에 극심한 동맥경화로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것들이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별 의미 없는 가정법이지만 그럴듯한 흥미를 유발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책이 특정 인물과 질병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페스트나 콜레라, 매독 등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덮치며 한 시대를 휩쓸어버린 질병에 대해서도” 다룬다.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염병은 결핵이다. 사망자가 지난 200년간 약 10억명이다. 페스트가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기록된 것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사망자”를 냈기 때문이다. 5년(1347~1352) 만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이 죽음을 맞았”는데,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이 지난 2000년간 있었던 어떤 자연재해나 역병들보다 높다”는 것이다. 이런 질병들은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했다. 페스트로 수많은 이들이 사망한 결과, 살아남은 자들은 기근과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약 1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매독은 역으로 금욕주의를 촉발했으며, 19세기에 유행했던 콜레라는 식수와 하수를 철저히 구분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신대륙에 천연두 바이러스를 퍼트렸던 유럽인들은 면역체계를 지니지 못한 원주민들의 30%가 사망하고 있을 때 자신들 깃발을 그 땅에 꽂을 수 있었다. 저자인 게르슈테(63)는 독일의 의사이자 역사학 저술가다. /문학수 선임기자
2899    [별의별] - "원숭이 패싸움"... 댓글:  조회:3708  추천:0  2020-03-13
  원숭이 수백 마리 '패싸움'…  2020.03.13.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최근 태국에서는 도로 한복판에서 단체로 패싸움을 하는 장면이 목격됐습니다. 그런데 패싸움을 한 건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 수백 마리였다고 하는데요. 세 번째 검색어는 '원숭이 패싸움'입니다. 지난 11일 태국 중부 롭부리에서 촬영된 영상입니다. 도로 한가운데를 원숭이 수백 마리가 점령했습니다. 사방에 흩어진 원숭이들 때문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는데요.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갑자기 서로 달려들더니 두 무리로 나뉘어서 몸싸움까지 벌입니다. 수백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엉켜서 공격과 반격을 이어갔는데요. 지역 주민들은 원숭이들이 싸움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한 무리가 다른 무리의 구역을 침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근 사원에서 생활하던 원숭이들이 먹이가 부족해지자 시내 쪽 원숭이들의 구역을 침범해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는 건데요. 한 현지인은 "최근 코로나19의 여파로 사원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원숭이들의 먹이도 부족하게 됐다"며 현지 상황을 전했습니다. 누리꾼들은 "살다 살다 원숭이 패싸움을 보다니~ 코로나가 원숭이도 잡는군요ㅠㅠ" "다 똑같이 생겼는데 네 편 내 편 어떻게 구별하고 싸우는 걸까?ㅋㅋ"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료출처 : 유튜브 World World) 
2898    [민속] - 우물 댓글:  조회:4130  추천:0  2020-03-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물     이미지 크게보기 경주에 위치한 분황사 석정 정면이다. 2016년 이전 촬영.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음료수를 얻기 위하여 땅을 파서 지하수를 괴게 한 설비. 내용 맨땅을 깊거나 얕게 파서 물이 괴게 하는 토정(土井)과 바위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괴게 하는 석정(石井)이 있다. 석정은 바위를 옴폭하게 파서 만든 것과 그 위에 다시 시설을 첨가하여 완성하는 것이 있다. 솟아서 괴는 물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물홈을 판 수통[椧]을 설치하는 상수도시설을 하여서 골짜기 아래의 절이나 정자, 살림집들에 급수할 수 있게 한다. 맨땅을 파서 깊이 만들었을 때에는 물기를 머금은 우물벽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통나무[椿木]를 둘레에 촘촘히 박아 방지한다. 급하게 임시변통하는 군진(軍陣)의 우물이나 습지에 가까운 지대의 우물에 이러한 장치를 하는 데 비하여 영구적인 우물에서는 알맞은 돌을 쌓아올려 벽을 구성한다. 돌 쌓는 기법은 매우 정교하다. 샘물의 출입이 자유스러워야 하기 때문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쌓아야 한다. 한번 집수(集水)된 물은 잦아들거나 흘러나가지 않도록 저수(貯水)가 되어야 유리하므로 그 점도 고려하고 쌓아야 한다. 물의 성질을 천연스럽게 유지하고 탁하거나 썩지 않게 하기 위한 고려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발달된 축조법이 공돌쌓기인데, 돌과 돌을 이맞추어 쌓는 기법으로 돌각담 쌓는 방식과 비슷하다. 우물돌은 운두가 낮고 뒤뿌리가 길찍하여야 한다. 접착시키는 모르타르 등을 이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쌓아야 하기 때문에 돌끼리 편하게 놓여야 토압(土壓) 등으로 인한 충격을 감당해낼 수 있다. 물에 닿는 돌의 표면은 거칠면서도 궁글리게 하는 방법으로 다듬는다. 그래야 물에 자극을 주어 늘 유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들여다보는 물은 마치 그릇에 담긴 물처럼 정체되어 있는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솟는 샘물로 인하여 늘 유동하고 있다. 이 유동을 적절히 자극하여줌으로써 물의 성격을 차분하게 하고, 맑고 깨끗하고 차고 맛있게 만들어준다.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의 대규모 작례(作例)가 공주산성에서 발굴된 연지(淵池)이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골짜기의 물을 방죽[堤堰]을 쌓아 막고, 방죽에 괸 물을 아래로 흘려주어 다시 머물게 한 저수시설이 연지이다. 거대한 우물인데, 금강에 면하게 된 쪽은 우물벽 쌓는 기법으로 하여 금강의 수위에 따라 맑은 물이 스며들고, 그래서 우물의 수량은 늘 필요한 만큼의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규모가 커서 우물 구멍도 넓고 쌓아올린 돌벽도 거대한데, 사면에 따라 쌓는 방식이 다르다. 절벽같이 쌓은 부분, 부른 배가 불거진 부분, 층층대 쌓듯이 꾸민 부분 등이 있어서 스며든 물이 이에 따라 늘 흐를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이러한 축조기법은 서라벌의 안압지(雁鴨池)에서도 볼 수 있다. 늘 물이 알맞은 속도로 흐르게 하여서 머물면서 썩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우물은 남한산성에도 있다. 지수당(地水塘)이 그것인데, 소·말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한 시설이다. 우물의 벽체는 지표의 높이까지만 쌓는다. 지표 위로 노출되는 부분에는 통나무를 井자형으로 쌓아 설치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방식이었다. 고구려에서도 그러한 우물 구조가 보편적이었다. 안악제3호분(安岳第三號墳)이라는 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생활풍속도에서도 그러한 구성의 우물을 볼 수 있다. 용두레까지 설비된 이 우물 가에는 고구려 여인들의 자태도 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井자형의 꾸밈을 석재로 한다. 분황사(芬皇寺)의 우물돌이나 김유신(金庾信)장군 집의 재매정(財買井) 등은 상대작품(上代作品)의 유례(遺例)인데 아직도 신라시대의 우물과 우물돌은 상당수 남아 있다. 또, 첨성대의 모습은 정수(井宿)라고 하여 별이 머무는 우물의 형태를 구현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우물 중에는 창덕궁 후원의 어정(御井)이 으뜸이다. 물맛이 좋고, 시원하고 차며, 우물돌의 시설이나 주변 정리 등이 일품이다. 우물은 용궁에 드나드는 출입구로도 인식되었다. 한우물[大井]이라는 개성의 우물은 고려시대 현인들이 서해용궁에 드나들던 출입구로 이용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송도고징(松都古徵)』 『산림경제(山林經濟)』 『택리지(擇里志)』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신라인의 생활미술」(『민학회보』 3, 1976)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경주 월암 종택 중 우물가경주에 위치한 월암 종택 중 우물가이다. 1986년 이전 촬영.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우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우물   [ well음성듣기 ] 요약 지하수를 퍼올리기 위하여 지면을 수직으로 파놓거나 관을 세로 방향으로 박아 넣은 설비를 말하는데 인구의 증대와 함께 자연수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땅을 파내려가서 지하수를 이용하는 우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불교의 전도와 함께 우물굴착기술이 도입되어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사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온양 어의정 미개시대 사람은 자연에 있는 샘 또는 하천 등에서 음료수를 구하고 인공적인 우물의 필요가 없었는데, 인구의 증대와 함께 자연수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땅을 파내려가서 지하수를 이용하는 우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산기슭지대에서는 산을 향해서 수평으로 판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수평우물이라고 한다. 또한 석유 ·천연가스의 채취 또는 온천 ·지열가스의 탐사를 위하여 파는 구멍도 넓은 뜻에서는 우물에 속한다. 샘이나 하천을 이용한 자연우물의 유적은 발견하기 어려우나 굴착우물의 예는 많다. 고대 중국에서 불교의 전도와 함께 우물굴착기술이 도입되어 우물에 관한 전설이 전래되고 있는데, 이는 물을 신성시하는 옛 관습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생활에 물은 불가결한 것이므로 태고시대의 인류는 강변에 취락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그후 우물 파는 법을 알게 되자 비로소 광대한 들로 진출해서 농경이나 목축을 영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사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근대화와 함께 공업성장으로 각종 공업용수도 초기에는 거의 지하수에 의존하여 우물파기가 성행하였다. 근래에 와서 도시화에 따라 많은 고층건물이 건설되고 있는데, 그 잡용수 ·냉방용수도 지하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가지 및 공장지역에서는 지하수가 점차 고갈되고, 나아가서는 지반침하(地盤沈下)가 발생하여 교통이나 환경위생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외국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물에서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채취하고 있는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 참조항목 두레박, 샘굿, 자분정, 지하수, 피압지하수 역참조항목 몽고정, 완속여과, 효감천, 달천구천, 분황사 석정, 사현정, 남간사지 석정 카테고리 기술과학 > 토목건설공학 > 수리 관련이미지 1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황룡사 우물터황룡사의 우물터. 지하수를 퍼올리기 위하여 지면을 수직으로 파놓거나 관을 세로 방향으로 박아 넣은 설비.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우물 [well] (두산백과)   용두레우물     분류 민속 주제 주택생활풍습 용두레우물 [네이버 지식백과]용두레우물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897    [세계소에서] - "악수금지령"... 댓글:  조회:4338  추천:0  2020-03-11
  “악수 하지 말자”고 외친 뒤 바로 악수한 네덜란드 총리… 장내 웃음바다 2020.03.11.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왼쪽)가 10일 헤이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악수를 하지 말자’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보건 책임자에게 악수를 청했다(왼쪽 사진). 곧바로 실수를 깨달은 뤼터 총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신체 접촉을 최소화한 팔꿈치 인사로 대신했다. 가디언 홈페이지 캡처네덜란드 총리가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악수를 하지 말자’고 외친 뒤 악수로 회견을 마쳐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정부 관료들과 비상 대책회의를 마친 9일 저녁 기자회견을 열고 “발키스(발을 맞대는 것), 팔꿈치 부딪히기 등 마음에 드는 걸로 하면 된다. 모쪼록 (코로나19를 예방하려면) 오늘부터 악수는 멈춰야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총리는 회견 막바지에 옆에 서있던 감염병 통제 센터(RIVM) 얍 반 디젤 센터장에게 악수를 청하며 본인이 강조한 ‘악수금지령’을 바로 위반했다. 악수를 나눈 직후 센터장이 실수를 지적하자 총리는 “죄송하다”를 연발한 뒤 “다시하자”며 재빨리 팔꿈치를 내밀었다. 코로나 시대에 지양해야할 에티켓이 된 ‘악수’탓에 머쓱함을 겪은 수장은 뤼터 총리만이 아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9일 여왕 등 왕실 인사와 종교 지도자가 참석하는 영(英)연방의 날 기념예배에서 한 주교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에 주교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황급히 손을 빼냈다. 웨스터민스터 성당 측은 ‘악수금지’를 권고하고 있다. 존슨 총리는 평소 “과학적으로 악수를 안 하는 것보다는 손 씻기가 중요하다”며 “악수를 계속 하겠다”는 소신을 밝혀왔다.  미국의 신세대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은 일찌감치 트위터에 “악수를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쓰는 방법은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인사할 사람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라며 자신의 ‘대안악수’ 팁을 공유하기도 했다.  /임보미 기자
289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901  추천:0  2020-03-11
  ‘흰 기린’ 케냐서 밀렵꾼 손에 죽어… 딱 1마리 남았다  2020.03.11.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케냐에서만 서식하는 흰 기린 밀렵돼 뼈만 찾아…“고기와 가죽 노린 듯”세계에서 유일하게 케냐에서만 서식하던 흰 기린이 밀렵 됐다. 케냐 이샤크비니 히롤라 커뮤니티 보전기구 제공. 2016년 케냐에서 발견된 흰 기린의 어미와 새끼가 밀렵꾼 손아귀에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세계에서 유일한 흰 기린 집단은 수컷 새끼 한 마리만 남게 됐다. 케냐 매체인 ‘더 이스트아프리칸’과 영국 ‘비비시(BBC)’ 등의 보도를 보면, 흰 기린 가족은 석 달 전부터 자취를 감춰 이들이 살던 이샤크비니 히롤라 커뮤니티 보전기구가 수색에 나섰다. 모하메드 아흐메드누르 소장은 “오래 수색했지만 고기와 가죽을 노린 무장한 밀렵꾼이 남긴 흰 기린의 뼈만 찾았을 뿐”이라고 10일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그는 “이 지역뿐 아니라 케냐 전체에 슬픈 날”이라며 “흰 기린의 밀렵은 희귀하고 독특한 종을 보전하려고 나선 지역사회에 타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보전노력을 이어가려면 지원이 계속돼야 한다는 경종을 울렸다”고 말했다. 흰 기린은 2016년 한 마리가 발견된 이후 지난해에는 흰 기린 새끼 2마리를 출산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고, 지역사회에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냈다. 흰 기린은 색소를 부분적으로 상실한 백변종(루시즘)으로 피부는 희지만 눈 등 연한 조직은 검다. 케냐 이샤크비니 히롤라 커뮤니티 보전기구 제공. 흰 기린은 색소를 부분적으로 상실한 백변종(루시즘)으로 피부는 희지만, 눈은 검은색이다. 피부는 물론 눈까지 색소가 없어 붉은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 눈이 붉게 보이는 백색증(알비노)과는 구별된다. 밀렵꾼의 정체와 동기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기린은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 널리 밀렵 돼 지난 30년 동안 개체수가 40% 줄었다고 아프리카 야생동물재단은 밝혔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지속해서 개체수가 감소한다는 2016년 재평가를 바탕으로 2018년 기린을 멸종위기 적색목록에서 ‘취약’ 종으로 분류했다. /조홍섭 기자
2895    [민속] - 한복 댓글:  조회:6988  추천:0  2020-03-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복   [ 韓服 ] 이미지 크게보기 한복으로 정장을 한 모습.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우리나라 고유의 의복. 내용 전통한복이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상·관습·행위·형태·기술 등의 양식과 정신이 깃든 한복으로, 우리 고유 의복인 치마·저고리·바지·두루마기에 조끼·마고자가 포함된다. 1600여년간 이어진 고유 한복의 전통성은 세계에서 제일 길며,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4∼6세기)와 신라·백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의 선을 현대부터 그어보면, 영·정조시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에 나타난 한복까지 그을 수 있으며, 다시 조선초기·고려·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본복(유·고·상·포)까지 이어진다. 더 나아가 가시적인 자료는 없으나 고조선까지도 이을 수 있다고 본다. 기본복(基本服)의 원류는 스키타이계이며 북방민족의 복식이다. 고대 한국의 복식문화는 주변국가보다 매우 발달하여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우리의 유(襦)와 고(袴)를 서기전 4세기경에 중국의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융복(戎服)으로 채용하였다. 후한대(後漢代)에 고습(袴褶)이라고 불렸으며, 위진(魏晉) 이후 천자(天子), 백관의 융복과 사인(士人)·서민복으로, 당대(唐代)에는 삭망(朔望) 때 조회복(朝會服)으로도 입혀졌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 집단으로 이주할 때 입고 간 우리 옷(유·고·상·포)을 계속 입었으며 원주민에게도 전했음을 하니와(稙輪)로 알 수 있다. 유의 기본형은 전개좌임착수(前開左袵窄袖)에 옷 길이는 둔부정도 길이[短衣]이고, 옷깃·섶·밑단·수구에 흑색 선(襈)이 둘러져 있고, 여밈은 깊지 않은데 선 넓이 내외로 여며진다. 반드시 옷을 겹쳐 입었으며, 유의 안쪽 옷은 둥근 깃과 곧은 깃 2가지 형태가 보인다. 기본형 이외에 무릎 길이 정도의 장유(長襦)와 우임(右衽)을 많이 착용하였다. 소매길이는 상류층은 길고 하류층은 짧다. 통일신라 때의 유는 이색선(異色襈)보다 동색선(同色襈)을 댄 옷을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상류층은 당(唐)의 착용법인 저고리 위에 치마 차림이었으나, 서민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차림새였다. 고려시대 말기 짧은 저고리가 유행되고 고름이 생겼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긴저고리는 계속 서민들이 착용하였고, 조선 중기까지도 계속되면서 옆 트임이 생기고 겉옷화 한다. 조선 숙종조에 팔꿈치 길이까지 짧아지고 영조대에는 가슴을 덮는 45㎝ 정도에서 점차 짧아지기 시작하여 정조대에는 약 26㎝ 정도였으며, 1890∼1900년대는 19㎝까지 짧아 겨드랑이가 보였고, 1920년대에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저고리 길이는 더욱 길어져 옆선이 7∼8㎝ 정도까지 내려갔고 배래선이 오늘날과 비슷한 곡선이 되었다. 1940년대에는 저고리가 배꼽까지 오는 길이였으나, 1950년을 전후해서 차츰 짧아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오늘날의 저고리 길이 정도로 고정되었다. 삼국시대의 치마는 밑단까지 주름이 잡힌 주름치마와 여러 쪽을 이은 치마, 색동치마가 있었으며, 밑단에 선을 댄 치마도 있었다. 상류층의 치마는 길고 하류층은 짧았는데, 치마 속에 여러 가지 속옷을 입어 A라인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상류층은 당나라의 치마 형태와 입음새를 따랐다. 현대 치마와 같게 허리부분에만 주름을 잡은 내상(內裳)과 표상(表裳) 2개를, 유 위에 입었으며, 치마 말기가 보이므로 좋은 옷감으로 만들었다. 서민의 입음새는 상 위에 유를 입는 방법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이 두가지 입음새가 계속되다가 고려말에는 우리 전통 입음새로 돌아가 현재까지 이른다. 치마길이는 저고리가 길 때는 짧았고 저고리가 짧을 때는 치마가 길었다. 삼국시대 바지의 기본형은 바지통이 좁고 발목에서 대님을 맨 것이었으나, 넓은 바지, 짧은 바지가 있었고, 바지 부리에 이색선이나 동색선을 댄 바지 등이 있었다. 여자도 유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많다. 치마 속에 여러 겹의 바지를 입어 치마를 부풀린 시대는 삼국시대·고려·조선 중기이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속속곳·바지·단속곳을 입어 항아리형을 만들었다. 유물을 통해 살펴 본 남자의 사폭바지는 임진왜란 전후에 생긴 것이다. 포의 기본형태는 유와 같으나 길이만 긴 것으로, 종아리 아래 길이이다. 유·고와 유·상 위에 입는 예복용이었다. 상류층 남자는 중국풍의 포를 입었으나 서민남자와 여자들은 기본포를 입었다. 통일신라·고려·조선 초기의 서민 남녀는 계속해서 우리 고유 포를 입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기에 고름이 생겼고, 포의 용어가 두루마기로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가 강화되면서 여자들의 외출이 금지된 후 여자의 포 착용대신 쓰개로 장의와 쓰개치마가 사용되다가 개화기에 방한복으로 두루마기를 착용하게 되었다. 조끼와 마고자는 개화기 때 생긴 옷으로 현재 우리 전통 한복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끼는 1880년대 이후 남자 양복이 들어오면서 한복에 도입되었다.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가 달린 조끼는 매우 급속히 보급되었다. 마고자는 저고리 위에 덧 입는 옷으로, 1887년(고종 24)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만주에서 귀국할 때 청나라 옷이었던 마괘(馬褂)를 입고 온 것에서 유래되었다. 모습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깃과 동정이 없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대출판부, 1973)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7)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네이버 지식백과]한복 [韓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우리 한복, 곱게 바르게     목차 우리가 입고 자랑해야 할 한복 한복 치마저고리의 구조와 변천 좌우가 바뀌면 곤란한 남자 바지 한복 착용 방식의 핵심은 매듭법! 우리가 입고 자랑해야 할 한복 우리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 특히 여성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화려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풍기는 치마와 저고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 의상이다. 팔을 끼워 넣어 입는 저고리는 상체를 작게 보이게 하고, 허리에 감아 입는 치마는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균형을 잡아준다. 우리나라 여성의 체위는 물론 어떤 나라 여성들 체형에도 무난하게 어울린다.「대장금」에서 「동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극(史劇)이 외국에서 인기를 끄는 배경엔 분명 한복의 영향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한복은 '제대로' 입어야 자태가 살아난다. 고전적인 격식의 의미가 아니라 한복의 멋을 살리는 최소한의 가치와 기준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한복 치마저고리의 구조와 변천 한복을 바르게 곱게 차려입기 위해선 한복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한복은 서양 의복과는 구조가 많이 달라서 부위별 명칭도 독특하다(그림 참조).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부르던 명칭이지만 요즘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저고리 가운데 고름과 소매 아랫부분의 배래선은 유행의 흔적을 보인다. 고름의 경우는 원래 의복을 정돈하는 기능이었으나 점차 그 길이가 길어지면서 장식의 비중이 높아졌고, 소매 아랫부분 외곽선인 배래선 또한 아주 둥근 형태를 이루다가 거의 직선 형태로 좁아지는 시절도 있었다. 치마의 변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조선시대 영조 20년경까지는 긴 저고리와 함께 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갈수록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치마는 드디어 가슴에 허리끈을 두르게 되었다. 좌우가 바뀌면 곤란한 남자 바지 남자 바지는 얼핏 앞뒤가 구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앞과 뒤가 구분되어 있다. 바지는 큰 사폭이 오른쪽, 작은 사폭이 왼쪽으로 가도록 입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허리끈을 맬 때도 아무렇게 두르면 바지의 매무새가 살지 못한다. 헐렁한 바지 허리 부분을 앞으로 당겨 왼쪽으로 접되, 왼쪽의 마루폭과 사폭의 시접선이 왼쪽 허벅지 중앙을 지나는 정도가 가장 적합하다. 그런 다음 허리끈을 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한복은 완전 예외다. 대량 생산되는 개량 한복은 물론 전문 한복집에서 맞춘 한복 중에도 아예 허리끈을 바지 허리에 부착시켜 놓거나 고무줄을 넣은 경우도 있다. 이런 형태의 한복은 허리끈뿐만 아니라 대님조차 단추나 스냅 처리를 해 편의성을 부여하는데, 아무리 간편해서 좋을지언정 품위와 자태가 떨어진다는 점은 염두에 두자. 한복 착용 방식의 핵심은 매듭법! 한복의 장점은 많다. 우선 입고 벗기가 편하다. 몸을 넉넉하게 감싸주는 풍성함이 체형의 결점도 가려준다. 치마 · 저고리 · 바지 모두가 납작하게 접혀 보관하기에 좋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키 작은 반닫이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한복의 단점은? 착용 절차가 복잡하고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평상복 아닌 예복의 개념이 되고 있다. 심지어 한복 착용을 생활화하자는 명분 아래 '개량'이라는 수식어를 단 일부 옷들은 대님은커녕 고름마저 생략되고 있다. 아무리 편의성도 좋지만 고름 없는 옷을 어찌 한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문제는 매듭법! 허리끈과 대님, 고름 매는 방법은 한복을 자주 입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 책의 용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한복한복으로 정장을 한 모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우리 한복, 곱게 바르게 (매듭의 여왕 묶음의 달인)   두산백과 한복   [ 韓服 ] 요약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의복. 이미지 크게보기 한복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 고유의 의복으로서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직선과 약간의 곡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며, 특히 여자 옷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가 어울려 옷차림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예복과 평상복이 나뉘어 있으며 남녀별 성인과 어린이용, 계절별로 나뉜다. 참조항목 복식, 소매, 저고리, 치마 역참조항목 고름, 고쟁이, 단속곳, 대님, 대란치마, 대례복, 돌옷 카테고리 생활 > 의생활 > 한국전통의상 및 장신구 관련이미지 1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한복 [韓服] (두산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 치마 저고리     한국인이 착용하는 전통적인 민족 의상. 치마는 한 장의 천으로 된 스커트 모양의 아래옷을 말한다. 기장은 가슴에서 복사뼈까지이며, 어깨에서 끈으로 여미어 입게 된다. 저고리는 길이가 30cm 정도의 짧은 상의로서, 통소매, 동정, 가슴에 늘어뜨리는 옷고름으로 요약된다. 저고리는 보통 치마보다 엷은색이 사용되며, 이 두 벌의 짝맞춤으로 여성의 의상이 된다. 소재는 비단이 많다. 또한 남성은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착용한다. 관련이미지 치마 저고리(조선시대, 18세기)출처: 패션전문자료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치마 저고리(패션전문자료사전,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시집가고 장가가고 흰옷과 치마저고리     전통시대에는 농상(農桑)이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었다. 지방 수령이 챙겨야 할 일곱 가지 주요 업무 가운데에도 농상이 들어 있다. 농상이란 농사와 양잠이니, 농사는 먹기 위한 것이요 양잠은 입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쳐서 만드는 비단은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옷감이었다. 비단은 지체의 상징이었고 서민은 고래로 삼베옷이나 가죽옷 따위를 입었다. 조선 성종 때 기록을 보면, 북방의 병사들은 추운 날씨에도 삼베옷에 갑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평민이 비단옷을 입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종 9년(1131) 5월에 서울과 지방에서 비단 짜고 수놓는 일을 못하게 하고, 10년을 기한으로 평민이 비단 상의와 비단 바지를 입는 것, 도성 안에서 말 타는 것, 노비들이 가죽띠를 띠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려사』1) 금령 그런데 비단과 삼베의 간극을 메워준 것이 고려 말기인 1363년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목화였다. 남방 산물인 목화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 서양에서는 양털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양’으로 생각했고, 중국에서는 비단을 대신했다고 해서 ‘나무에 열린 누에고치’로 생각했다. 목화는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한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한 필을 짰다. 이웃 마을에 전하여 서로 배워서 한 고을에 보급되었고, 또 10년이 되지 않아서 전국에 두루 퍼졌다. 태조실록 7년(1398) 6월 13일 10여 개의 씨앗을 심어 하나만 싹을 틔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10년 사이에 전국에 퍼졌을 정도니 목화 도입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목화실로 짠 무명이 화폐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옷을 만들 때에 따뜻하게 입으려면 명주를 쓰고 시원하게 입으려면 삼베를 쓰지만, 모두 무명만 못합니다. 무명은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추위나 더위에도 적당하여, 마치 음식물로 흔히 대하는 차, 밥, 콩, 조와 같습니다. 정조실록 24년(1800) 2월 22일 이렇게 무명이 일반화했으나, 북방인 함경도에는 면화가 재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에서 운송해 가야 했다. 따라서 무명이 귀해 다른 옷감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삼이 아뢰기를 “북쪽 병영에는 목면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개가죽 옷을 입습니다. 평안도 병영에는 정목(正木, 품질 좋은 무명)이 제법 여유가 있으니, 북쪽 병영의 삼베 10여 동(同)을 매년 평안도 병영으로 보내어 10동의 무명과 바꾸어 군관의 의복과 상품에 쓸 수 있도록 의정부에 정식으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조실록 5년(1729) 5월 6일 1동은 50필을 이른다. 북방 군사들은 이처럼 개가죽 옷을 입기도 했지만 종이옷도 입었다. 평안병사 신응주가 강변을 파수하는 군졸들에게 지의(紙衣)와 유의(襦衣)를 나누어주고 급히 아뢰기를, “강변의 읍과 진에서 동상에 걸릴 근심은 파수꾼이 봉수군보다 더 심하고, 군졸이 장수보다 더 심합니다. 봉수대와 파수막을 막론하고 장수에게는 모두 지의를 주고 파수꾼에게는 모두 유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봉수군의 유의가 부족하여 각 봉수대마다 유의 세 벌과 지의 두 벌을 주어 번갈아 입게 하였습니다. ···”고 하였는데, 연말에 유의 385벌과 지의 400벌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정조실록 20년(1796) 1월 1일 ‘지의’는 솜 대신에 종이를 넣어서 만든 옷이다. ‘유의’는 남자 저고리인 동옷으로 겹옷과 홑옷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솜저고리일 것이다. 조정에서는 군사 의복으로 솜저고리마저 모두 조달하지 못해서 종이를 넣은 옷을 지급하였다. 심지어 과거시험을 치른 뒤에 낙제자 답안지를 변방에 보내서 옷감으로 사용하게 하는 관례도 생겼다. 국가에서 으레 과거시험장의 낙방지로 납의(衲衣, 누비방한복)를 만들어서 북쪽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보통 비변사에서 시험관에게 고지하여 북쪽 변방에 보내는 낙방지를 남김없이 모아 실어보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300장 정도로 책임만 면하고 있으니 아주 온당치 않습니다. 감시(監試, 생원진사과) 초시(初試, 첫시험)의 낙방지를 서울과 지방의 시험관들이 자기가 차지하거나 남에게 주는데, 이는 재물 횡령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시험장에 들어왔던 사람 수를 보고해서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광해군일기 9년(1617) 6월 22일 시험지는 원래 응시자가 지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가 귀하다 보니 낙방지를 돌려주지 않고 관청 용품으로 사용하였고 군사들의 옷감으로도 이용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종이를 빼돌려 사사로이 사용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과거시험을 자주 볼수록 북방의 군사들은 더욱 혜택을 보았을 것이다. 종이는 이처럼 군사의 옷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여러 겹을 겹치기도 하고, 누비기도 하고, 소금물에 담그기도 해서 종이갑옷도 만들었다. 일반인들도 두터운 종이를 마름질하여 옷을 해 입었다. 그런가 하면, 추위에 떠는 죄수에게 짚으로 만든 섬을 지급한 사례도 보인다.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서울에 번들러 온 군사 가운데 옷이 얇은 자에게 유의를 나누어주게 하고, 여러 곳의 수비 군졸과 옥중 죄인들에게 빈 섬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이어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실록 10년(1632) 12월 26일 섬의 모습 담요로 만든 아이 옷     겨울 추위에 대비하여 병사와 옥중 죄인에게 공석, 즉 곡식을 담지 않은 빈 섬을 나누어주었다. 지금 쓰는 가마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이전에 사용한 것이 섬이다. 이것도 역시 짚으로 만들었으니, 이불이나 겉옷 대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구멍을 뚫어서 손과 목만 내놓을 정도로 입었을 것이다. 6.25 때 담요에 구멍을 뚫어서 아이들 옷으로 사용했던 기억과 겹쳐진다.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면 더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이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든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가 몇 푼이나 되어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크기의 베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 가린다. 『삼국지』2) 읍루 전기 읍루족은 만주 북방에 살던 종족으로 여진족, 말갈족의 먼 조상이 된다. 이들은 여름에 거의 벌거벗고 겨울에는 몸에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라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 후예인 물길족에서는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북방 민족 사이에 유행하던 것으로 오줌에 어떤 기운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아마 따스한 물로 세수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890년대에 한반도를 여행한 혼마 규스케도 이를 목격했다. 오줌은 더러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사람은 이것을 더운물, 혹은 물처럼 생각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조선 사람이 불결한 인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으로 삼을 만하다. 정말로 소변으로 얼굴을 씻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을 두고 이르기를 피부를 윤기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혼마 규스케 책3), 116쪽 고대 기록에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만주에 살던 부여 사람들이 흰옷을 숭상했다는 대목이다. 국내에 있을 때에는 흰옷을 좋아한다. 흰옷에 큰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 부여 전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모직옷을 즐겨 입지만 일상적으로 국내 거주시에는 흰색 옷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무명도 없었으니 모시처럼 삼베로 흰옷을 만들거나 다른 재료를 사용하였을 터인데, 더러워지기 쉬워 오래 입기 어려운 흰옷을 좋아했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다. 신라에서도 관복으로 흰색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이런 흰옷 전통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 끊임없이 내려왔다. 오죽하면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겠는가? 몽골에서는 국가별로 색깔을 인식하는데, 하늘색은 몽골이고, 노란색은 중국이고, 흰색은 한국이라고 한다. 조선 말기 서양인의 기행문에 자주 나오는 것이 흰옷 물결이다. 서울은 한 가지 점을 제외하면 내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음울한 도시이다. 한 가지 예외란 사람들이 입은 흰옷이다. ··· 멀리서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흰 겉옷은 확실히 거리를 환하게 만든다. 퍼시벌 로웰 책4), 183쪽 코레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여름이나 겨울을 막론하고 옷을 따뜻하게 입는 편이다. 조끼, 외투, 오버코트 등 온통 흰색 일색으로 층층이 껴입는다. ··· 그러나 이 흰옷들도 자세히 보면 더 깨끗한 것도 있고 덜 깨끗한 것도 있어 그 흰 정도가 천차만별이며, ··· 아손 그렙스트 책5), 124쪽 울산 장날의 흰옷 물결(1930년대) 과연 조선 백자와 더불어 흰옷은 조선을 상징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흰옷으로 위장해서 명나라 군사를 혼란스럽게 했을 정도다. 다음은 장운익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방금 직산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중국 병사가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 왜적 선봉이 모두 흰옷을 입고 들판을 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인이라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서로 죽이며 한참 동안 교전했습니다. ···”고 했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9월 9일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런 복색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어 이목을 끈다. 선조 39년(1606)에 일본에 파견되는 사신의 흰옷을 벗어버리고 중국식으로 바꾸자는 건의가 있었다. 현종 때에는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조정의 관리와 선비들에게 검은옷을 입게 하고 흰옷을 금지시켰다. 동방인은 자고로 흰것을 숭상했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으나 그대로 습속이 되어 바꾸지 못했다. 임금이 이를 바꾸려고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현종실록 12년(1671) 1월 1일 영조는 오행사상에 따라 흰옷을 푸른옷으로 바꾸도록 조치를 내렸다. 우참찬 이덕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한 제안자가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는 나라인데, 동쪽은 시절로 말하면 봄에 해당하고 색으로 말하면 청색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풍속이 흰옷 입기를 좋아하지만 마땅히 흰옷을 금지하고 푸른옷을 숭상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전하께서도 이미 그 말에 따라서 이를 시행하도록 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 우리 동방의 풍속에 흰옷을 숭상한 것은 앞 시대의 역사책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수서』와 『송사』 및 명나라 동월의 기록에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대체로 풍속이 이루어진 지 수천 년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고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신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마땅히 생각해보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지시를 내려 말하기를, “우참찬이 상소한 말을 묵묵히 생각해 보았는데 그의 말은 지나치다고 할 만하다. ··· 우리나라에서 흰옷을 숭상해 왔다는 것은 비록 옛 선비들이 한 말이지만, 숭상한다고 말한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요즘처럼 심했겠는가? ··· 근래에 인심이 경박해져서 남색을 흰색으로 바꾸는 자가 장차 어지럽게 나타날 것이니, 전국에 깨우쳐 타이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14년(1738) 8월 16일 명나라 사신 동월이 조선에 왔다가 돌아가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다. 영조의 이러한 지시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 정조 때에도 흰옷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좌의정 김이소 등에게 지시하기를, “창의(氅衣)를 푸른색으로 하자는 것과 소매가 넓은 폐단에 대해 영의정이 초기(草記, 간략히 왕에게 아뢰는 문서)에 첨부하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대체로 창의 문제는 위에서 지시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법령으로 정했다가 준수하지 않아 실행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법령을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고 하니, 김이소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창의도 관리 예복의 하나이면서 집에서 늘 입는 옷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푸른색과 흰색 두 벌을 갖추어서 관청에 갈 때는 푸른색을 입고 집에 있을 때는 흰색을 입습니다. 진실로 그 이유를 찾자면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인데, 지금 만약 흰색을 푸른색으로 바꾸면 예법에 부합될 뿐 아니라 번잡함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당장 오늘부터 솔선하여 푸른 창의를 입겠습니다 ···”고 하였다. 정조실록 17년(1793) 10월 20일 ‘창의’는 조선 후기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적으로 입던 웃옷이었다. 이를 두 가지 색으로 만들어 집과 바깥에서 각각 달리 입음으로써 규정과 전통을 모두 순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온통 흰옷을 입은 군중이 모여 있는 3 · 1운동 사진을 보면, 흰옷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비친 흰옷은 일본인에게 쓸쓸함과 애상을 연상시켰던 데에 비해 서양인에게는 축제와 쾌활함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와 함께 흰옷은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근대화란 이름으로 양복과 양장이 보급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통의복의 고수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YWCA를 중심으로 ‘흰옷 염색하기’를 내세우며 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전라남도에서 나온 색옷 권장 전단에는 “생활 개선은 우선 물든 옷 입는 것으로부터”라고 하였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쉽고 자주 빨래를 해야 하므로 비경제적이니 모두 물들인 옷을 입자고 하였다. 이 사진을 보면 ‘백의퇴산’ ‘색복장려’란 표어가 보인다. 흰옷을 쫓아내고 색깔 있는 옷을 장려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흰옷은 근대까지도 뿌리깊게 내려와 한국인의 상징물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흰옷 퇴치 운동 흔히 염색이 발달하지 못해서 흰옷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 서민들도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물감이 개발되면서 여러 가지 염색법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장기간 흰옷을 고수한 것은 그것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굳이 색옷을 입으려 했다면 요새 개량 한복처럼 각종 염료를 개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일단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다. 삼한의 의복제도는 염색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 옛날 풍속에 여자 옷은 흰 모시에 노랑 치마인데, 위로 왕실과 귀족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고려도경』6) 부인 고려에서도 중국 옷이 들어오기 전까지 모든 여자는 흰 모시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염색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염색이 발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염색을 선호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흰옷 전통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아직도 살아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단순한 색인 원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는다. 흰색이나 색동옷의 색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일본 사람이 중간색 옷을 즐겨 입는 것과 대비된다. 옷 색깔의 배합에서 일본 사람보다 색감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흰옷과 더불어 뿌리깊은 전통을 보이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여성의 치마와 저고리가 그것이다. 우리 옷의 역사를 보면,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마다 크게 바뀌어왔다. 첫 변화는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일어났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다가 옷과 허리띠를 가져와 전통 복장을 당나라 복장으로 변경하였다. 문무왕 4년(664)에는 부인 의복도 바꾸어 복식제도가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마와 저고리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고려 충렬왕 4년(1278)에는 원나라 영향을 받아 개체(開剃) 머리를 하였다. 개체는 머리의 가장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것으로 변발이라고도 한다. 머리 깎는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청나라 사람 머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자 옷도 즉시 바뀌었다. 우왕 14년(1388)에는 명나라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해서 개체 머리와 몽골 옷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에도 만주족 복장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여성이 남자 옷을 입는 풍습도 등장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이 남복을 입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나라 그림에는 여성이 남자 관복을 입은 모습이 보인다. 이 영향으로 발해 정효공주 무덤 벽화에서도 남장 여성이 등장한다. 공주의 시녀들이 모두 남자의 관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도 이런 풍습이 보인다. 우왕이 서해도로 사냥 갔는데 숙녕옹주와 궁녀들이 모두 남복을 하고 따라갔다. 『고려사』 우왕 12년(1386) 2월 총신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관기로서 얼굴이 예쁘고 기예를 가진 자를 선발하고, 또 성 안의 관비와 무당 가운데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등록하게 하였다.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갓을 씌워서 따로 한 대열을 짓게 하였으며, 이것을 남장(男粧)이라 불렀다. 『고려사』 사룡(蛇龍) 원상의 딸에게 남복을 입혀서 임금 수레를 따르게 했다. 태조실록 7년(1398) 2월 29일 그런데 여성 옷은 외래문화의 영향에도 꿈쩍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통을 고수했다. 우리나라 옷은 기본 구조가 상의와 하의로 나누어진 형태다. 이것은 유목민족이나 추운 지방에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서, 중국의 원피스 옷과 달랐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는데, 특히 여성 옷은 고대에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외래 영향과 무관하게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태종이 문신들을 불러서 직접 시험을 치를 때에 낸 문제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왕은 이르노라. ··· 의관 규정은 모두 중국제도를 따르는데 여자 옷만 오히려 옛 풍속을 따르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다 고칠 수 없는 것인가? 태종실록 7년(1407) 4월 18일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이런 여자 옷이 몽골 의복제도라고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중국이 오랑캐 옷을 입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하면서도 자기 집안에 몽골 복장이 지배하여 금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치마와 저고리도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는데, 특히 저고리의 길이가 크게 변하였다. 고구려 벽화에는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고 조선 초기까지도 그런 모습이 유지되었다. 선조 때인 1589년에 그려진 감로탱에 나오는 여인들의 복장만 봐도 그렇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가면서 점점 길이가 짧아져 나중에는 젖가슴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다. 조선 전기 여인들(일본 약선사 소장 감로탱) 조선 후기 아기 업은 여인(신윤복)     다음은 이익(1681-1763)이 비판한 말이다. 말세가 되어 부인 옷은 소매가 좁고 옷자락이 짧아져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이를 싫어하지만 모두 그런 풍속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하겠는가? 『성호사설』7) 만물문, 부인복 그런가 하면 이덕무(1741-1793)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찍이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옛날에는 여자 옷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죽어서 염할 때에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은 신체 크기가 같지 않으니, 그 옷이 작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새옷을 시험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넣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니 솔기가 터졌다. 심지어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부어올라서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런가. 대개 요즘 유행하는 의복 단장은 모두 창기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이다. 세상 남자들이 그 요사스러움에 빠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처와 첩에게 권하여 본받게 하고 서로 전하며 익히게 한 것이다. 오호라, 시와 예를 배우지 못해서 규중 부인들이 기생 복장을 하였구나. 부인들은 빨리 이를 고쳐야 한다. 『청장관전서』8) 부의(婦儀) 이처럼 부인들이 기생의 복장을 모방하면서 좀 더 섹시한 옷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예외적으로 옷사치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화려한 옷차림이 부인들의 선망이 되었고, 남편들도 이를 부추겼던 것 같다. 이리하여 치마는 속바지를 겹겹이 받쳐 입어서 점점 풍성해진 반면에 저고리는 길이가 더욱 짧아지면서 입기도 힘들 정도로 좁아져 상박하후(上薄下厚)의 실루엣을 보이게 되었다. 저고리 길이가 19세기 초에 30센티미터 정도였다가 말엽에 이르면 18센티미터 정도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자 옷의 윤곽선 변천 여자 옷의 윤곽선 변천 16세기 중반 18세기 중반 18세기 후반 19세기경 19세기 후반     [네이버 지식백과] 흰옷과 치마저고리 (시집가고 장가가고 - 가족과 의식주)   두산백과 저고리     요약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여며 입는 한복의 웃옷. 이미지 크게보기 반회장저고리 길·소매·섶·깃·동정·고름이 갖추어져 있으며, 겹과 홑의 2가지가 있다. 옛 문헌에는 유(襦) 또는 위해(尉解)로 표현되어 있는데, 위해는 신라어(新羅語)의 사음대자(寫音對字)일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에 부른 '우티', 오늘날 전국적으로 사용하는 '우치', '우태','우티' 등의 방언도 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저고리라는 명칭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太宗妃 閔氏)의 선전의(選奠儀)에 '홍단자 저고리[紅緞子 赤古里]'란 말이 처음 나온다. 상고시대 한국 복식의 기본형에서 저고리는 깃을 외로 여미는 좌임(左衽)에 소매가 좁은 통수(筒袖)이고, 길은 둔부선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으며, 깃·도련·소맷부리에는 선(襈)이 있었고, 요대(腰帶)를 매었다. 이것이 상류사회에서는 중국 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에서 우임(右衽)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져 관수(寬袖)로 바뀌었는데, 고려 이후는 완전히 우임으로바뀌었고, 길이도 다소 짧아지면서 요대 대신 고름으로 여미었으며, 깃에 동정을 달았다. 선은 겨드랑이·깃·끝동에 여운을 남길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몽골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소매도 착수화(窄袖化)되고 길이도 아주 짧아졌는데, 이러한 저고리의 단소화(短少化) 경향은 조선시대 말기에 더욱 심했으며, 개화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기 초 기독교 전도부인들 사이에서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의 간편함을 보고 이를 본떠 저고리를 길게 하고 치마를 짧게 해서 입기 시작하자, 이를 신여성들이 본받았고, 여학생들의 교복도 이와 같이 하여 오늘날의 저고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저고리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봄·가을용에 물겹저고리·박이저고리, 여름용에 적삼·깨끼저고리, 겨울용에 솜저고리·삼겹저고리 등이 있으며, 모양에 따라서 보통저고리·삼회장저고리·반회장저고리·색동저고리·쌍깃저고리·개량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고리는 뒷길·앞겉길·앞안길·소매·겉섶·안섶·동정·깃·옷고름·안옷고름·끝동·곁마기 등으로 구성되며, 긴고름과 짧은고름 두 가닥으로 앞가슴에서 맺어 왼쪽으로 고를 내어 착용한다. 옷감은 겉감에 견·목면·모직·화학섬유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안감에는 얇은 견이나 얇은 목면을 사용한다. 빛깔은 종래에는 흰색이나 엷은 색을 주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입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저고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저고리     이미지 크게보기 1800년대 누비저고리로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웃옷인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유형 물품 성격 의복, 한복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윗옷. 내용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언제부터 저고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처음 보이기는 1420년(세종 2) 원경왕후 천전의(遷奠儀)에 나오는 ‘赤古里’ 또는 ‘短赤古里’라는 기록인데, 이는 우리말을 취음한 한자표기인지, 몽고의 영향인지 그 어원을 단정할 수 없다. 고려 이전에 윗옷을 이르는 말로는 신라의 ‘위해(尉解)’가 있다. 위해는 신라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현재에도 ‘우티’·‘우치’ 등의 방언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같은 뜻으로 ‘곁막음[脥隔音]’ 또는 ‘곁막이[絹莫伊]’가 있고, 궁중용어로는 ‘동의대(胴衣襨)’라는 말도 쓰였다. 저고리의 구성은 길·소매·깃·동정·고름이 기본형제(基本形制)이며, 여자저고리는 경우에 따라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하여 왔다. 저고리는 감·재봉법·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홑[單]·겹·솜·누비저고리는 감·재봉법에 따른 명칭이고, 여자저고리 중 ‘당코저고리’는 깃의 모양에 따른 것이다. 삼회장·반회장·민저고리는 저고리 각 부분에 별색의 감을 쓴 데 따른 명칭이다. 이 중 가장 격식이 높고 화려한 것이 삼회장저고리이다. 삼회장은 깃·끝동·겨드랑이에 길과는 다른 색의 감을 댄 것으로, 단(緞)·견(絹)·주(紬)·사(紗) 등의 고급직물로 색은 자주나 빨강을 즐겨 썼다. 궁중이나 양반층에서는 직금(織金)이나 금박을 사용하여 한층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고리는 풍만한 치마와 어울려 독특한 곡선미와 색채조화를 자아낸다. 그러나 남자저고리는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장식 등의 변화가 따로 없이 도포나 두루마기의 속에 입어왔다. 우리 민족의 고유복식은 바지저고리를 기본구조로 하는 북방계통이다. 특히 저고리에서는 북방계 옷의 공통된 특징인 곧은깃(直領), 왼쪽으로 여밈(左袵), 좁은소매(窄袖)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상고시대 저고리의 실상은 4∼6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의 저고리는 길이가 허리 아래에 이를 정도로 길며,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좁은 소맷부리와 도련·깃·섶에 별포(別布)의 선(襈)을 두른 특징적인 모습이다. 또한 길이만 좀더 길어지면 포(袍)가 될 수도 있어, 저고리와 포의 엄격한 구별이 없었던 것 또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삼국이 공통된 것이었다. 그 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너른 소매, 오른쪽으로 여밈[右袵]이 혼용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섶의 처리가 우임으로 통일되었다. 고구려의 벽화를 제외하고 한동안은 저고리의 변천을 실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와 ≪삼국사기≫ 잡지(雜志) 색복(色服) 신라조(新羅條)에 저고리로 생각되는 ‘단의(短衣)’·‘내의(內衣)’ 등이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저고리에 대한 기록으로 ‘동의(胴衣)’라는 말이 보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두 가지가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구별은 길이의 길고 짧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이 터지거나 막힌 형제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옆이 터지고 긴 저고리가 후대의 당의로 발전하고, 옆이 막히고 짧은 저고리인 단저고리가 현재의 여자저고리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차이를 그 길이에 있다고 보는 것으로, 단저고리는 내복으로 입던 저고리라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길이가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생김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저고리의 모양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저고리의 길이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짧아진다. 지금까지 조사된 저고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30년대와 1560년대의 유물이다. 이것은 이미 띠가 필요 없을 만큼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달려 있고, 각 부의 구성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로 여러 점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어 조선시대 저고리의 변천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1600년대의 저고리는 길이가 60∼80㎝이고, 1700년대에는 45㎝ 정도, 1800년대에는 35㎝ 정도, 1900년대에는 22㎝ 정도로 짧아졌다. 여자저고리는 줄곧 단소화(短小化)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경향은 조선시대 중기·후기에 더욱 가속화되어 그 길이가 가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지고, 직배래를 이룬 소매는 벗을 때 소매를 뜯어내야 할 정도까지 이르러 요사(妖邪)하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고리가 짧아짐에 따라 각 부의 형태도 작아졌고, 특히 고름은 가늘고 짧아졌다. 반면, 회장은 겨드랑이에서 소매를 따라 나아가는 등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저고리가 짧아진 현상은 엄청나게 큰 머리모양, 풍성한 치마와 어울리기 위한 것으로, 그 당시의 해이하고 화미(華美)하였던 사회풍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소화의 경향은 말기에 약간의 반전기미를 보이다가 개화기에 들어 1920년대까지 지속된다. 그 뒤 1930·1940년대에는 저고리의 길이와 각 부가 커지는 장대화(長大化)의 경향이 나타난다. 의생활의 합리화에 대한 시도로서 길어진 저고리와 함께 개량된 짧은 치마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광복과 6·25를 지나면서 다시 바뀌어 오늘날에는 다시 짧아지고 있다. 현대의 저고리는 조선 후기에 해당할 만큼 그 길이가 짧으며, 겨드랑이의 회장이 크고, 소매의 곡배래가 극단적으로 강화되며, 깃이 아주 늘어진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양장이 일상복으로 입혀짐에 따라 한복은 의례복화·특수복화하고, 여기에 현대적 미의식과 민족의식이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고리는 우리 고유양식의 특성을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전승력과 변화·발전을 거듭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 나라 복식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7)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1)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복식사론』(이경자, 일지사, 1983) 「고구려고분벽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김원룡, 『진단학보』 21, 1960) 관련이미지 2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백색 광목 솜저고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저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뮤지엄 저고리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사직(絲織) 크기 화장 63.2 등길이 33.2 용도 · 기능 의 > 의류 > 평상복(平常服) 소장처 원주시립박물관 유물번호 원주시립(원주시립) 001389-000 한복의 여자 웃옷. 길·소매·섶·깃·동정·고름이 갖추어져 있으며, 겹과 홑의 2가지가 있다.옛 문헌에는 유() 또는 위해(尉解)로 표현되어 있는데,위해는 신라어(新羅語)의 사음대자(寫音對字)일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에 부른 '우티', 오늘날 전국적으로 사용하는 '우치', '우태', '우티' 등의방언도 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저고리라는 명칭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太宗妃 閔氏)의 선전의(選奠儀)에 '홍단자 저고리[紅緞子 赤古里]'란 말이 처음 나온다. 상고시대 한국 복식의 기본형에서 저고리는 깃을 외로 여미는 좌임(左)에 소매가 좁은 통수(筒袖)이고, 길은 둔부선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으며, 깃·도련·소맷부리에는 선()이 있었고, 요대(腰帶)를 매었다. 이것이 상류사회에서는 중국 복식의영향을 받아 좌임에서 우임(右)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져 관수(寬袖)로 바뀌었는데, 고려 이후는 완전히 우임으로바뀌었고, 길이도 다소짧아지면서 요대 대신 고름으로 여미었으며, 깃에 동정을 달았다. 선은 겨드랑이·깃·끝동에 여운을 남길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몽골 복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소매도 착수화(窄袖化)되고 길이도 아주 짧아졌는데,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전기 이후 심해져, 여름 홑저고리의 경우 위로 말려 올라가 치마 허리도 감추지 못하고 유방이 보일 정도로 짧아졌다. 이러한 저고리의 단소화(短少化) 경향은 조선시대 말기에 더욱 심했으며, 개화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기초 기독교 전도부인들 사이에서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의 간편함을 보고 이를 본떠 저고리를 길게 하고 치마를 짧게 해서 입기 시작하자, 이를 신여성들이 본받았고, 여학생들의 교복도 이와 같이 하여 오늘날의 저고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저고리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봄·가을용에 물겹저고리·박이저고리, 여름용에 적삼·깨끼저고리, 겨울용에 솜저고리·삼겹저고리 등이 있으며, 모양에 따라서 보통저고리·삼회장저고리·반회장저고리·색동저고리·쌍깃저고리·개량저고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고리는 뒷길·앞겉길·앞안길·소매·겉섶·안섶·동정·깃·옷고름·안옷고름·끝동·곁마기 등으로 구성되며, 긴고름과 짧은고름 두 가닥으로 앞가슴에서맺어 왼쪽으로 고를 내어 착용한다. 옷감은 겉감에 견·목면·모직·화학섬유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안감에는 얇은 견이나 얇은 목면을 사용한다. 빛깔은 종래에는 흰색이나 엷은 색을 주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입는다. 관련이미지 2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누비저고리1800년대 누비저고리로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웃옷인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저고리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치마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군 유형 물품 성격 의복, 한복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저고리와 함께 입는 여자의 하의(下衣). 내용 옛 문헌에는 상(裳) 또는 군(裙)으로 표현되어왔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만록 閑中漫錄≫에 ‘문단(文緞)치마’가 있어, 이를 치마라 일컬어왔음을 알게 된다. 또한, ≪훈몽자회≫에서 보면, 호(鋒)를 ‘쵸마호’, 상을 ‘츄마샹’이라 하고 있다. 또 ≪내훈 內訓≫에도 ‘치마’로 나와, 치마는 ‘ㅊ, ㅁ’ 두 음을 가진 말임을 알 수 있다. ㅊ은 차다[佩], ㅁ은 말다[卷]를 나타내어 곧 차고 마는 그 형태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와 비슷한 한자 표현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나오는 선군(旋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마는 치마[赤亇]로 표음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길이가 길고 잔주름이 치마단까지 잡혀 있으며 또 단에는 선(襈)이 있다. 이때의 저고리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내려오면 ≪고려도경≫ 부인조(婦人條)에 보이는바, 상하가 다 황상(黃裳)을 입었다. 또 천사조(賤使條)에는 8폭의 선군을 몇 겹 둘러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었다. 부귀한 집 처첩은 7·8필을 겹쳐 입었다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무지기에서 보듯 치마 아래를 푸하게 하기 위하여 그때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때만 하여도 고려 전기이니 만큼 아직도 저고리는 좀 길었을 것이고, 후기 몽고복식의 영향을 받아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치마 형태에 그다지 큰 변화가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평상복으로는 짧은 치마·긴 치마, 예복용으로 스란(膝襴)치마·대란(大襴)치마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치마는 서민이나 천민이 입었고, 긴 치마는 반인(班人) 계급에서 착용하였는데, 때로는 이 긴 치마를 예식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짧은 치마나 긴 치마나 홑 또는 겹이 있었고, 긴 치마에는 출토유물에서 얇게 솜을 둔 것도 볼 수 있다. 스란치마는 스란단을 한 단, 대란치마는 두 단을 치마단에 더한 것으로 겹이었다. 이에는 무지기를 3·5·7층 겹쳐 입어 허리 아래를 푸하게 버티었고, 특히 왕가(王家)에서는 무지기 밑에 대츔치마를 입어 치마 아래도 버티었다. 중기 이후로는 저고리 길이가 짧아질대로 짧아진 때였으니, 여자 한복의 하후상박(下厚上薄)의 특징을 이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 곡선이 더없이 아름다운 가운데 치마는 유동적인 것이어서 그 곡선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개화기에 들어서는 여자도 자유로운 외출과 사회활동이 허용됨으로써 짧은 통치마가 생겨났다. 이 통치마는 최활란(崔活蘭)이 1907년 동경 유학에서 귀국할 때 입은 데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통치마나 짧은 치마가 활동하는 여성의 사회복이 되자 짧아져가기만 하던 저고리 길이도 이와 알맞을 정도의 길이가 되었다. 치마 허리끈이 이때에 와서는 어깨허리로 하게 되기도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피복 재료의 다양성과 함께 복식미의 발전으로 짧은 치마류는 양장으로 대신되고, 오히려 긴 치마는 한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때마다 환영받는 옷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증보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우리나라여자치마의 시대적고찰」(함옥상, 『과학논집』 1, 계명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73) 관련이미지 2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반물염색 치마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치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주름치마       고구려의 예술과 문화는 일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는데, 태자를 가르치는 사이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문화가 일본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역시 승려였던 담징은 일본에 유교의 5경을 전했고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또 종이와 먹을 만드는 방법도 알려 주었습니다. 일본 호류사의 금당 벽화는 담징이 그린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사이,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승려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통해서도 고구려 문화가 전해졌습니다.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를 보면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옷차림과 매우 비슷합니다. 고구려의 미술이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고구려 강서 수산리 고분벽화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       [네이버 지식백과] 주름치마가 똑같네 : 일본 전파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 한복 세계화 이끈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씨 별세 2020.03.22.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역대 영부인 한복 도맡아 한복의 세계화를 이끈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본명 이은임)씨가 2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고인은 1975년 국내 최초로 한복 작품 발표회를 개최하며 ‘한복 디자이너’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충남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66년 ‘이리자 한복연구소’를 세웠고 1970년 한국인의 체형을 보완하는 이른바 ‘이리자식 한복패턴’을 개발해 보급했다. 일자로 허리에 주름을 잡는 기존의 ‘항아리형’ 한복 디자인을 밑단이 퍼지는 ‘A-라인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100회 넘게 한복 패션쇼를 개최했으며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미스유니버스대회 등 세계 미인대회에서 최우수 민속 의상상을 수상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부터 이순자, 이희호, 권양숙 여사까지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그가 만든 한복을 입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별세 후 입관 때도 고인이 만든 한복 차림으로 영면에 들었다. 한복 발전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화관문화훈장과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 /이창수 기자   
289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마스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14  추천:0  2020-03-10
           [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 ◇공급이 모자라…마스크 대란 확실시  ... 그러나 이는 산술적으로 보면 이미 예고돼 있던 대란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마스크는 일평균 1000만장입니다. 5000만 국민들이 마스크를 하루 한 개씩 소비한다고 가정한다면 4000만명은 마스크를 쓰지 못 하는 상황이어서입니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마스크는 한참 모자랍니다. 경제활동인구만 2800만명이니까요. ...   ◇코로나19가 만들어낸…한국판 ‘정의란 무엇인가’ 모든 국민들이 마스크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제 관건은 원천적으로 부족한 마스크를 어떻게 공평하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가 한국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참고할 도서가 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열풍을 일었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책을 참고하면 마스크 부족이 촉발한 질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마스크 수급을 자본주의 원리에 맡길 거냐는 질문입니다.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됐으니 생산업체들은 마스크 가격을 올리려는 유인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이를 금지해야 하는지의 문제도 생겨나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예로 든 것은 지난 2004년 미국 플로리다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 ‘찰리’ 때의 사례입니다. 당시 올랜도의 주유소는 평소 2달러이던 얼음주머니를 10달러로, 모텔 방값을 40달러에서 160달러로 올렸습니다. 당시 플로리다에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었습니다. 허리케인 이후 2000여건의 피해사례가 접수됐고, 일부는 승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격폭리를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남겼습니다. 자유 경제학자들은 공정가격은 허구이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가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위기를 더 빨리 해결할 수 있게 된다고요. 가격폭리를 처벌해야 한다고 본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행위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서민들에게 폭리는 심각한 고통이어서, 안전하게 몸을 피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가 생긴다고요.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생겼습니다. 마스크 생산업체 ‘이덴트’가 한때 마스크 생산 중단 선언을 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이덴트는 “조달청에서는 생산원가 50% 정도만 인정해 주겠다는 통보와 일일생산량 10배에 달하는 생산수량 계약을 요구하고 있다”며 “더 이상 손실을 감수하면서 마스크를 생산해야 하는 명분도 의욕도 완전히 상실한 상태”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가 한발 뒤로 물러섰습니다. 조달청은 이덴트와 계약과정에서 일일생산량 10배를 요구한 것은 계약물량 표기 오류였다면서 계약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부족한 마스크, 누구에게 줄 것인가 두 번째 질문은, 부족한 마스크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입니다. 정부는 의료진과 기저질환이 있는 취약층, 대구·경북 등 감염위험이 높은 지역에 우선 배포하되, 일반 국민들에는 일주일에 두 개씩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해법을 내놨습니다. 다만 아이가 있는 가정 등 마스크가 좀 더 필요한 국민들을 위해서 자발적 양보도 동시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이 해법은 롤스의 정의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롤스는 개인이 스스로 어떤 사회적 위치를 갖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정의 원칙을 선택할지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빌 게이츠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무일푼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정의의 몇 가지 원칙이 나오는데요, 그중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입니다.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회적·경제적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코로나19가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정부는 답하고 있습니다. 판단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국민들은 연일 정부가 내놓은 답을 채점하고 있습니다. ==========================================///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정의란 무엇인가요?     분야 법 목차 정의란 공정함 정의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 분배적 정의 교정적 정의 절차적 정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학년 단원 중학교 1학년 우리의 생활과 법 고등학교 1학년 인권 및 사회 정의와 법 고등학교   「법과 정치」민주 정치와 법 요즘 가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어요. 제가 응원한 후보는 다른 건 몰라도 노력 실력만큼은 정말 훌륭했어요. 그런데 그 후보가 일등을 했지 뭐예요! 아빠도 결과를 보시더니 사람들이 그만큼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거라고 하셨어요. 가수 오디션에서 노래 잘하는 후보가 일등하는 건 당연한데, 정의로운 사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정의란 공정함 정의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좀 막연해지지만 생각해보면 정의란 말은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들어보았을 거예요.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만화영화 속 대사나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교과서나 책에서 본 적이 있을 거예요. 헌법 재판소 앞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나 악인을 심판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나 모두 지은 죄에 맞는 공정한 벌을 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요. 가난해서, 여자라서, 어려서, 외국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을 보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어떤 유명 기업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과연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정의란 ‘공정함’을 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저건 참 공정하다’거나 ‘저건 정말 공정하지 않아’라는 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의나 공정함과 관련된 문제를 겪게 됩니다. 질문한 친구가 재미있게 보았다는 가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결과가 왜 정의와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볼까요? 가난하고 학벌이 안 좋고 키가 작다고 노래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많아요. 시청자들은 참가자의 다른 조건은 보지 않고 노래 실력만을 공정하게 평가해 정의로움을 실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정의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 앞에서 정의는 공정함을 말한다고 했지요. 사실 많은 유명 철학자들이 ‘정의’란 무엇인지, ‘공정함’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나누었어요. 어렵게 들리나요?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답니다. ‘평균적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를 말해요. 여기서 정의란 절대적 평균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선거권 같은 것입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정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영국이나 프랑스도 100년 전에는 여자와 노동자, 농민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으니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배분적 정의’란 ‘다른 것은 다르게’를 말해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는 것으로, 급여나 성적을 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 그 만큼의 대가를 주라는 것입니다. 롤즈(1921~2002, 미국의 철학자)라는 유명한 철학자도 정의로운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해 말했어요. 롤즈는 정의와 관련해 두 가지 원칙을 주장했는데 하나는 ‘평등의 원칙’으로 모든 사람은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차등의 원칙’인데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원칙이에요.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게만 문화비를 지원해주는 문화 바우처가 있다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 불평등이 그 사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면 불평등해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분배적 정의 어떤 것을 분배하거나 나눌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한가와 관련된 ‘정의’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즈 같은 철학자도 이런 분배적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분배하려는 것은 ‘이익이 되는 것’과 ‘부담이 되는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이익이 되는 것은 임금이나 용돈, 성적, 선거권 같은 것이고, 부담이 되는 것은 숙제, 세금, 청소나 집안일 같은 노동, 벌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을 분배할 때에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원칙을 적용하면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것을 받기 위해 노력한 정도나,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거나, 꼭 그것을 받아야 할 필요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같게 분배하고 다르다면 다르게 나눠주는 것이지요. 장학금을 생각해볼까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주는 성적 장학금은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에게 주는 것이 정의로운 분배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 장학금이 가장 필요한 학생에게 주면 정의로운 분배입니다. 만약 똑같이 성적이 높은 학생이 여러 명 있거나 똑같이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이 여러 명 있다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의 원칙에 따라 같은 사람 모두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서 분배해야겠지요. 교정적 정의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다. 저울은 법 집행의 형평성을 상징하고, 법전은 법전에 의한 법 적용을 상징한다. 교정적 정의는 만화 주인공이나 정의의 여신과 관련이 있어요. 악인을 심판하겠다는 만화 주인공이나 저울처럼 공정하게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정의의 여신은 모두 교정적 정의를 상징합니다. 교정적 정의란 어떤 잘못이나 피해에 대한 대응이 공정한가와 관련된 정의예요. 그럼 잘못과 피해는 어떤 것인지 살펴볼까요?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교실에 있지 않고 운동장에 있다가 친구와 싸워서 친구를 다치게 했다고 합시다. 수업 시간에 자리를 이탈한 것과 친구와 싸운 것은 교칙을 위반한 ‘잘못’이고 교칙 위반과 상관없이 친구를 다치게 한 것은 ‘피해’입니다. 교정적 정의는 ‘잘못’에 대해 어떤 처벌을 할지, ‘피해’에 대해 어떤 배상을 할지를 결정하는 문제예요. 이런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려면 당연히 ‘잘못’은 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벌해야 하고 ‘피해’는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해야겠지요.   절차적 정의 절차적 정의란 어떤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방법이 공정했는지, 결정과 판단의 과정이 공정했는지와 관련한 정의예요. 예를 들어 어떤 재판에서 재판 결과를 바꿀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새롭게 확보했다고 생각해볼까요? 새로운 증거를 확보한 변호사나 검사는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겠지만 만약 그 증거가 법으로 금지된 도청으로 얻어냈거나 불법으로 개인 정보를 빼낸 경우라면 그 증거는 효력이 없습니다.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과정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학교 중간시험에서 커닝한 학생을 어떻게 처벌할지를 두고 회의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커닝을 했다고 의심되는 학생한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로지 교사의 의견만으로 처벌을 한다면 이것도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에요. 결정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절차적 정의란 이렇게 어떤 것을 결정하거나 판단할 때의 과정이 공정한지를 판단하는 문제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어떠세요? 이렇게 정의, 즉 공정함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니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정의’라는 게 사실은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이 지금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지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훌륭한 지도자나 정치인이 나타난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리 주변의 작은 문제부터 정의롭게 해결해나가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일상의 문제를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의와 관련해 파악해보려는 노력, 그리고 정의롭게 해결하는 노력을 지금부터 해보세요. 우리가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의란 무엇인가요?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전국사회교사모임)  
289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균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88  추천:0  2020-03-10
    [한겨레21] 의사 이낙원이 보내온 ‘코로나19 일기’ 서울 송파구 ‘드라이브 스루(자동차 이동형)’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에 ‘방관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일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들이 있는 곳은 ‘최일선’입니다. 이낙원씨는 인천 나은병원 호흡기내과 의사이면서 중환자실장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나은병원에는 선별진료소가 마련됐고, 이낙원씨는 여기서 일주일 두세 번 순환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순환근무를 하지 않을 때는 안심병원으로 지정된 병원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내원한 환자들을 맞고 있습니다. 그가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써온 소중한 일기를 공개합니다. 일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따라가며 연재될 예정입니다. _편집자                               2월1일 마스크     요즘, 마스크를 쓰라는 강한 권고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부가 예민한 나는 마스크를 쓰면 코와 뺨이 가렵다. 근질거리니 벗었다 썼다를 반복하고, 그렇게 얼굴에 손이 가면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난 진료할 때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번 겨울엔 유난히 독감 환자가 많았다. 내 손으로 진단한 사람만 100명 가까이 될 것 같다. 마스크를 안 쓰고 독감 환자들을 대면했지만, 다행히 난 독감은커녕 감기도 걸리지 않고 한겨울을 잘 버티고 있다. 지난 11년간 소소한 감기는 여러 번 앓았어도 독감은 딱 두 번 걸렸다. 그러니까 굳이 계산하자면 5.5년에 한 번꼴이다.     내 진료실에 들어왔다 나가는 환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난 어떻게 바이러스가 안 옮을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는 모든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중력’이라는 공평한 힘 때문이다. 중력은 크기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작용한다. 몸살감기에 걸린 사람을 이부자리로 끌어당기는 그 중력이 바이러스에도 작용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인간도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코와 입에서 튀어나온 바이러스는 상승의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추락하고 만다. 책상, 문손잡이, 핸드백, 쓰레기통 속 코를 푼 휴지에 바이러스는 갇혀버리고 만다. 새로운 숙주를 찾아 침투하고 번성하고 싶은 원초적 본성을 지닌 바이러스에 중력은 그야말로 쥐약이다. 숙주 없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바이러스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즉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해진다’는 우주적 규칙은 바이러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변하듯, 바이러스는 시간 속에 분해돼 흙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이 30분에서 길어봐야 수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이러스에도 구원의 여지가 있을까? 책상 위에 떨어져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를 구원해줄 자가 있을까? 벼룩처럼 뛰어오를 줄도 모르고, 나비처럼 날아다닐 줄 모르고, 그저 비말 속에 묻혀 하염없이 추락만 거듭했던 바이러스에 상승의 기회를 줄 자 있을까? 있다. 바로 인간의 손이다. 인간의 손만이 바이러스를 상승시켜 새 생명의 길로 안내할 수 있다. 따듯하고 촉촉하며, 맛있는 유전물질이 있는 생존과 번영의 약속의 땅, 코와 입의 점막으로 안내하는 손.     천성적으로 마스크를 쓸 수 없었던 난, 강박적으로 손에 집착한다. 손을 자주 씻는 건 당연하고 웬만하면 무언가를 만지는 것을 삼간다. 회진할 때 걸음을 조금 늦추면 간호사가 앞서가면서 병실 문을 열어준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은 꼭 씻는다. 전철을 탈 때도 어지간하면 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종아리에 힘을 주면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그럭저럭 다닐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코를 파야 할 때는 세정제로 손을 박박, 특히 해당 부위를 집중적으로 씻어낸 뒤 일 처리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불안도 함께 퍼지고 있다. 뉴스만 보다보면 좀비 영화 속 비극이 현실의 공포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정말 불안해하는 분을 많이 봤다. 그러나 지나친 불안에 생활을 위축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눈이 충혈되면서 누군가를 물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 바이러스가 출현한다면 그게 진짜 공포지.)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날개 비슷한 것을 얻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중력장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먼지 덩어리일 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람이 밀접한 공간에선 마스크를 쓰고, 바이러스의 가장 강력한 구원자는 바로 ‘나의 손’이라는 것만 잊지 말자.     2월3일 미생물계의 외모지상주의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학교에 가서 보니 교실 구석에 아이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질퍽해 보이는 물건이 한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살아 있는 생물이 죽은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벗어놓은 커다란 손모아장갑 같기도 했는데, 냄새가 쾨쾨하고 고약했다. 낯선 물건인지 생물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물건을 처리하기 위해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옆 반에 다니는 지혜로운 복학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복학생은 그것을 쳐다보며 골몰히 생각했다. 옆에 있던 어떤 학생이 물건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고 말한 후, 복학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다가 오늘 밤쯤에는 아홉 개의 꼬리 달린 여우로 자라나 우리 간을 훔쳐 먹을지도 몰라.” 아이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힘을 합쳐’ 녀석을 무찌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근 교실의 청소도구가 총동원됐고, 자는 그 녀석을 향해 공격했다. 빗자루와 마대 걸레로 녀석을 쑤셔댔고, 지혜로운 복학생은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녀석 위에 쏟아부었다. 곧 개똥 냄새는 교실 전체와 복도에 퍼져버렸고, 학교 전체가 똥 냄새로 진동하기에 이르렀다.     ‘패혈증’은 이런 것이다.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온 미생물 자체보다, 미생물에 대한 대처가 과도해서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이 개똥임을 한눈에 알아봤다면 삽으로 살짝 들어올려 가져다버리면 해결될 것이듯이, 몸 안의 미생물을 면역계가 한눈에 알아봤다면 근처의 몇몇 백혈구가 작용해 먹어치우면 된다. 그러나 낯선 것이거나 그로 인해 발생한 불안이 확장된 상태라면 그것을 해치우기 위해 후방의 면역세포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백혈구가 모바일 기기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면역세포 안에 요청서가 담긴 단백질(사이토카인)을 혈액 내로 분비하면 소식은 금세 온몸으로 퍼진다. 전국에서 지원군이 해당 지역에 모여들고, 전쟁은 확대된다. 전방과 후방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신호가 넘쳐나고, 전방에선 미생물과의 전투에서 나오는 사상자가 늘어난다. 이 모든 것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과하게 진행되면 혈압이 떨어질 수도 있다. 전쟁터는 우리 땅(인간의 몸)이므로 전쟁의 규모가 커질수록 몸의 상처도 커진다. ‘적군 규모’와 함께 아군이 쏟아부은 화력이 더해져 피해는 더욱 커진다.     독감에 걸리면 열이 나고 온몸이 죽도록 아프다. 바이러스는 코와 목구멍에 있는데, 왜 머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는 걸까. 이러한 전신반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앞에서 말한 몸의 면역계 활동 때문이다. 그럼 어떤 바이러스는 목만 아프고, 어떤 바이러스는 온몸이 아픈 걸까? 면역계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바이러스의 ‘외모’다.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 몸의 면역계가 보기에 얄밉게 생긴 게 분명하다. 한 대만 때려도 될 것을 두세 대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동료들에게 일러바쳐 일을 크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본래 평범한 외모의 감기 바이러스였다. 콧물이 나거나 목이 칼칼한 상태로 2~3일 지나면 몸속에서 소멸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유전적 변이를 일으켜 외모를 바꿨다. 외모만 바꾼 게 아니라 능력도 업그레이드했다. 목에서 기관지를 타고 내려가 폐부 깊숙이 내려갈 수 있는 침투 능력이 향상됐다. 대체로 면역세포가 알아보고 금세 처리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만성 환자나 노약자는 ‘낯선 얼굴’ 때문에 대처가 늦기 마련이다. 때때로 바이러스는 하기도(기관지와 허파를 포함하는 호흡기) 깊숙이 침투해 폐렴을 일으키고, 어떤 이에겐 패혈증을 일으켜 죽음에도 이르게 한다.     안타깝지만 몸의 면역계는 절대 미생물의 내면이나 성품을 보려 하지 않는다. 외모만 본다. 잘 알려졌다시피 독감을 분류하는 H5N1, H1N1 같은 명칭은 면역계가 바이러스를 인식하는 표면 항원의 종류(역시 외모)를 나타낸다. 면역계 외모지상주의는 수억 년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외모를 지닌 미생물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해왔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출현이 가져온 공포와 불안을 경험했듯, 미생물의 외모 변화 전략도 만만치 않다.     2월10일 바이러스와 불안     퇴근길 선별진료소 앞 직원들을 지나쳐왔다. 한 분이 레벨D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흰색 원피스로 몸을 둘러쌌고, 얼굴은 고글과 마스크로 가렸는데, 생화학전에 참전해도 될 정도였다. 사람들 얼굴엔 하나같이 깊은 피곤이 드리워 있었다. 잔뜩 늘어난 일과에다 예전보다 더욱 민감한 환자들을 응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철을 탔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썼다. 젊은 사람들은 귀마저도 이어폰으로 막고 있으니 어지간한 구멍은 다 막은 셈이다. 한국 사람들의 위생 개념도 대단하거니와, 정부의 정책 홍보가 이렇게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마스크도 색상과 디자인이 다양해졌다. 무엇보다 얼굴을 찰떡같이 달라붙어 감싸는 밀착형 디자인이 일품이었다. 몇몇 마스크는 방독면 가스통처럼 일부가 돌출했는데, 기능 못지않게 패션을 중시하는 사람들 심리를 잘 이용한 것 같다. 마스크를 안 한 학생 두 명이 전철 안에서 웃고 떠드는데 몇몇 사람이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니, 이내 대화가 멈췄다.     이 모든 일이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벌어졌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이면 보이는 대상만 피해다니면 될 테고, 그럼 훨씬 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대처가 가능할 텐데 말이다. 대상이 존재할 때의 감정을 두려움이라 하면 대상이 모호해 정의할 수 없을 때의 감정이 ‘불안’이다. 불안이 두려움보다 불편한 것은 대상이 모호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필요한 감정을 동원해야 한다. 바로 ‘혐오’다. 왠지 싫고 불편한 이 느낌은 우리를 현재의 여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과학자들은 ‘혐오’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노래기를 햇볕에 놓아두면 다리를 움직여 그늘을 찾아가고, 대장균조차 생존을 위협하는 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섬모를 돌려 움직인다. 그냥 있으면 죽기 때문에 행동해야 하고 그러려면 행동의 동기를 제공해야 한다. 행동의 동기로서 ‘혐오’라는 감정은, 그래서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하다.     불안이란 감정이 사회에 팽배할 때 사람들은 ‘대상’을 찾게 된다.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찾아 혐오하면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러한 성향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혐오를 부추기는 전략은 늘 매력적인 수단이 된다. 그 나쁜 유혹은 언제나 사회적 스피커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유통되는데, 대개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 유색인종, 성소수자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그 비난의 자리를 차지했다.     불안에 대한 대처를 혐오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긍정적 감정은 고등동물에게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행복과 감사는 인간 안에서도 고차원적 감정에 속한다니,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더욱 고차원적으로 지내보자고 몇 마디 적어본다.     피부! 바이러스는 절대 피부를 뚫을 수 없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인가. 여러 층의 세포로 구성되고 맨 바깥층 피부 세포는 죽은 채로 몸을 뒤덮고 있다가 스스로 탈락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때 함께 떨어져나가는 바이러스와 세균이 하루에도 수십조 개에 이른다.     눈빛! 눈빛으로는 절대 미생물이 침입하지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눈빛으로 누군가를 쏘아보면 싸늘한 감정만 되돌아올 뿐 절대 바이러스가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니 눈빛으로는 사랑스러운 감정만 전하자.     그리고 중력! 바이러스와 인간은 모두 똑같이 중력장 안에 살아가는 미물이다. 바이러스에 중력을 거스를 날개가 없음을 조물주에게 감사하자. 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 과학자 그룹은 바이러스를 발견한 지 수주 만에 염기서열을 밝히고 진단 방법을 개발했다. 얼마 안 있으면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고, 언론에 나오는 걸 보면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따듯한 맘과 실력을 겸비한 의사도 많은 것 같다. 글을 쓰는데 드라마가 시작했다고 아내가 부른다. 이만 글 쓰고 TV 보러 가야겠다.     2월13일 레벨D 방호복     물론 내 피부만으로도 바이러스 침투를 막을 수 있겠지만 나는 선별진료소 진료를 위해 레벨D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바이러스 감염자 가까이에서 진료해야 하는 의료인을 위해 준비된 옷이다. 이 옷은 바이러스뿐 아니라 사람들 불안까지 차단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 역시 옷을 입는 순간 평온을 느꼈고, 비장함마저 솟아올랐다.     옷을 입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다리부터 집어넣은 뒤 팔을 끼우고 허리에서 목까지 올라오는 지퍼를 올린 다음, 머리덮개를 쓰고 고글을 착용한다. 마지막으로 발싸개를 신고 끈으로 동여맨다. 발싸개만 빼면 아이언맨이 슈트를 입는 순서와 비슷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AI)을 갖춘 방호복이 나오리라고 예상된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공상을 현실로 실현해왔지 않나.     안타까운 점은, 이 하얀 옷을 한 번 입고 폐기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옷을 입고 진료실을 나오면서 마스크와 장갑까지 버려야 한다. 정말 아깝다. 이 모든 게 일회용이라니. 새 옷을 한 번 입고 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버려진 옷들은 어딘가 폐기돼 땅속에서 썩지 않고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쓰레기로 전락한 시대다. 청정지역 바닷속에서도 비닐 로프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상어나 거북이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닐과 플라스틱이 위협적인 이유는 썩지 않아서 지표면과 바다 위를 부유하기 때문이고, 썩지 않는다는 건 어떤 미생물도 이것을 먹어치울 수 없다는 말이다. 바이러스가 위협하는 곳에서 바이러스가 먹지 못하는 옷을 입으니 내 마음이 평온해지는 건 옳은 일이나,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이것들 때문에 지구가 생니를 뽑게 되는 건 옳지 않다. 하여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지구를 위해서라도 빨리 바이러스의 계절이 지나가야 한다.     어떤 생태신학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게 오히려 잘됐다고 했다. ‘끓는 물 이론’이란 게 있다. 개구리들을 냄비 속에 넣어두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나중에 물이 끓으면서 다 죽고 만다. 그러나 개구리들을 펄펄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개구리들은 뜨거움에 놀라 모두 냄비 밖으로 뛰쳐나온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이런저런 기후변화 정책을 했다지만 냄비는 서서히 데워지고 있다. 트럼프의 여러 가지 반생태적 정책이 ‘끓는 물 효과’를 내서 사람들을 각성시킬 것이다. ‘이대로’는 다 죽게 되니 행동하자는 각성 말이다.     바이러스 변종 하나에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떠들썩했다. 불안해하며 너도나도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고, 정부 대응을 비난하기도 했다. 아쉬운 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후변화 이슈에선 너무나 조용했다는 사실이다. 변종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게 인류를 위협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는데 말이다. 변종 바이러스 사건이 일종의 ‘끓는 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개구리보다 총명한 인간이 아닌가.     추신. 지구가 더워지면 냉방 슈트를 만들어 입고 다니자는 인간이 있을까봐 한마디 덧붙인다. 오늘 방호복을 입어봤는데 입는 데 5분, 벗는 데 5분 걸린다.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낙원 나은병원 호흡기내과 의사  
289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오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742  추천:0  2020-03-09
6번째 맞이한 지구 대멸종, 유력 용의자를 수배합니다    2020.03.09.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환경인문학과 인류세 21세기는 지질 시대 구분에서 신생대 4기 홀로세에 속한다.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 등 과학자들은 다음 지구상 생물멸종 위기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을 것이란 점에서 ‘인류세(Anthropocene)’로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 플라스틱 등 인간이 만든 화학물질로 인한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바이러스 확산과 생물상의 급변 등이 이 시기 특징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사진은 환경디자이너 윤호섭의 설치작품 ‘동물 얼굴’. 동물과 식물로 사람 얼굴을 구성해 인간 자신이 곧 동물이자 식물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인간의 오만함과 우월의식을 지적하고 있다. ⓒ윤호섭 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재러드 다이아몬드(1937~)는 문명이 붕괴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를 “이해관계의 충돌”로 본다.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들의 단기 이익과 사회 전체의 장기 이익이 충돌할 때 단기 이익이 선택되어 그 집단 전체가 붕괴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집단만의 문제가 아닌 지구 전체 운명과도 직결된다. ■ 닭뼈와 플라스틱 행성 지구상에 생물이 출현한 이래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그 멸종으로 지구는 생물 종 75% 이상을 잃었다. 일각에서 현재 지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겪고 있다고 한다. 다른 대멸종에선 화산 폭발이나 운석 충돌이 그 용의선상에 올라 있지만, 이번에는 인류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후반 이후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오존층 파괴 등이 나타났는데, 그 직접적 원인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2000년 2월, 대기화학자이자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파울 크뤼천(1933~)은 지금의 지질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 부를 것을 제안했다. 지질 시대는 지질학적 특징을 따라 대(era), 기(period), 세(epoch)로 구분되는데, 예를 들면 21세기는 신생대 4기 홀로세에 속해 있다. 하지만 크뤼천은 이 시대를 인류세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조하는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얻어 구성된 인류세 워킹그룹(AWG·Anthropocene Working Group)은 2021년까지 인류세 지정에 대한 공식 제안서를 지질 시대를 정의하는 국제층서위원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단, 이들은 크뤼천과는 달리 원폭 투하가 있었던 20세기 중반을 인류세의 시작으로 본다. 그렇다면 인류세의 흔적으로 남을 지질학적 특징은 무엇일까? 주로 거론되는 것으로 최고치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합성 유기화합물, 플라스틱, 살충제, 방사능 물질 등이 있다.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 낙진, 희토류 원소, 콘크리트, 알루미늄이나 납 등 금속도 그 흔적으로 꼽힌다. 인간이 만든 화학물질들은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이상기후, 바이러스 확산 등의 원인이 된다. 2019년 유럽환경청 보고에 따르면, 유럽 전체 바다의 75%가량이 오염되었는데, 그중 플라스틱 쓰레기의 피해도 심각하다. 코에 긴 빨대가 박힌 거북이, 플라스틱과 비닐을 먹고 죽은 고래. 미세플라스틱이 축적된 플랑크톤 등 사람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때문에 바다동물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해양생태계가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생물상의 급격한 변화도 인류세의 큰 특징이다. 특히 양계장에서 기르는 닭의 경우, 지구에 사는 모든 조류를 합친 것보다 더 많기 때문에 인류세를 상징하는 유력한 지표 화석이 닭뼈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 “이 시대를 인류세로 호칭해야” 인간이 만든 화학물질들이 지질학적 특징 닭뼈가 상징 지표 화석 될 가능성 주장도 2013년 3개 대륙 인문센터 모인 환경인문학연구소 설립 인류세에 있어 인문학의 역할 논의 ■ 환경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1세기 세계 환경 변화의 주요 원인은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환경 문제는 거기에 내재된 인간의 가치 문제와 연결된다. 인간이 선호하는 행동과 관행이 환경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인간의 선호는 그 사람이 가진 동기와 신념,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산업사회가 일으킨 심각한 환경 파괴로부터 지구 생태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가치관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가치관 형성에는 철학, 역사, 언어와 문학, 종교, 심리 등이 작용하는데, 근대 이후 숫자와 통계로 객관성이 확보되다 보니 이런 분야에 주의를 덜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특히 환경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환경인문학연구소(Humanities for Environment·HfE)’가 설립되었다. 전 세계 180개 이상의 인문기관에 소속된 CHCI(Consortium of Humanities Centers andInstitutes)에서 지구환경 변화에 대한 인문학 연구에 초점을 맞춰 설립한 것이다. 이 연구소는 환경과 관련된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분과를 조직하여 ‘인류세에 있어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북미(애리조나주립대, 웨이크포레스트대, 클라크대), 유럽(트리니티칼리지 더블린), 호주(스디니의대) 등 3개 대륙의 인문센터들을 모았다. 각 센터에는 지역사회, 기업, 비정부기구(NGO), 정부 및 학술 협력자가 포함되었다. 연구소는 이 특별한 주제의 인문학을 ‘환경인문학(EnvironmentalHumanities)’ 또는 ‘생태인문학(Ecological Humanities)’이라 지칭하고, 전 세계 환경 도전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인식과 이해, 보다 효과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문학의 범위를 넘어 친환경과 물질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또한 ‘환경인문학’은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고자 여러 분야의 방법을 융합한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는 물론 자연과 문화 사이의 전통적 격차를 좁히며 정의, 노동, 정치에 관한 인간 문제에 얼마나 많은 환경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전염병 퇴치에 유용했던 살충제 DDT 해양생물학자 카슨이 위험성 파헤치며 ‘사용중단’ 다시 말라리아 등 전염병 기승 ■ 생태학에서 생태인문학으로 ‘환경인문학’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되는 ‘생태인문학’은 그동안 발전했던 생태학의 문제를 인문학과 연결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때 생태계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지에 따라 많은 논란이 생긴다. 생태학을 뜻하는 영어 ‘ecology’에서 ‘에코’는 그리스어의 ‘집, 세간, 살림’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이중모음 ‘오이’가 ‘에’로 축약된 것이다. 뒤의 ‘로지’는 ‘언어, 이성, 원리’를 뜻하는 ‘로고스’에서 왔다. 그렇다면 생태학은 ‘집, 세간, 살림에 관한 이야기 내지 원리’를 뜻한다. 이때 ‘에코’란 집이나 가족에서 시작하여 일정한 지역사회의 생물과 무생물의 환경이라는, 좁은 의미에서 지구 전체 환경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기를 매개로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전염병들이 있다. 말라리아, 지카바이러스 질병, 뎅기열 등이다. 아프리카와 중남미, 인도는 물론 동남아시아에서 집중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질병들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살충제 DDT 때문에 퇴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매해 5000건에 불과하던 말라리아 발생이 1999년 별안간 5만건으로 늘어났다. 인도의 경우 10만명으로 줄었던 말라리아 환자 수가 약 300만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이런 피해는 개발도상국가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1970년대 이후 DDT 사용이 금지된 이유는 해양생물학자인 레이철 카슨(1907~1964)의 사상이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에서 DDT와 같은 합성살충제가 자연계와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구체적으로 파헤쳤다. 농산물 수확을 높이기 위해 뿌린 DDT는 토양과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강과 호수로 스며들어 플랑크톤에서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축적된다. 매우 안정된 화학구조라 쉽게 분해되지 않고, 한 번 체내에 흡수되면 지방조직에 저장돼 쉽게 배출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금지된 지 40년이 흘렀지만 신생아들에게서 검출되었으며, 2017년에는 계란과 닭에도 다량의 DDT가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케 했다. 현재 DDT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판매 및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다. 그러자 말라리아나 뎅기열, 기타 곤충에 의해 전염되는 질병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DDT 도입 이후 사라졌던 머릿니가 2018년 초등학생에게서 나타났으며, 올해 2월에는 프랑스 파리에 때 아닌 빈대가 창궐했고,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인도를 거쳐 중국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경우 생태계를 보전하고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DDT를 전 세계에서 금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사용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생태계 보전·환경오염 막기 위해 DDT 금지 옳은가’ 고민 생겨나 빈곤국서 되레 재앙되기도 하는 환경운동 선진국·제3세계 동일한 환경운동 전개는 과연 옳을까 ■ 환경(생태)인문학의 역할 2006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사실상 DDT의 사용을 발표했다. 물론 실내 벽면이나 지붕, 축사 등으로 제한적이었지만,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결정에 대해 환경단체에서는 무조건적인 반대를 했다. 환경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DDT가 다시 허용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발생할 때마다 환경단체의 원칙을 예외 없이 고수해야 할지 주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태학을 주장한 미국의 사상가 머레이 북친(1921~2006)은 일방적인 생태운동에 대해 그 위험성을 일깨우고 있다. 어떤 생태운동은 기괴한 혼합물로서, 어떨 때는 생태파시즘의 색깔을 띠기도 한다. (…) 히틀러가 ‘인구 통제’라는 명목 아래 수백만의 사람들을 아우슈비츠 같은 살상의 막사로 보내도록 한 ‘피와 흙’(민족과 자연)이라는 이론을 고안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조악한 생태야성주의로부터였다.(머레이 북친, ) 머레이 북친의 주장에 따라 판단하건대, 혈통과 자연 보전을 명분으로 제3세계의 인명 피해에 눈감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 즉 ‘생태파시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환경인문학’은 환경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인명 피해가 오염된 환경 자체보다 가난 때문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DDT 금지와 같은 환경운동은 잘사는 나라에선 인체에 피해가 적은 살충제가 사용되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살 수 없는 빈곤국에선 오히려 더 큰 재앙을 일으켰다. 선진국의 많은 환경운동가들은 DDT 금지운동을 성사시켜 새들의 죽음으로 침묵했던 봄을 깨우고 생태계를 복원하며 지구를 살렸다고까지 확신했지만, 빈곤 지역에 사는 수십만, 수백만의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든 셈이었다. 만일 환경운동이 거대 제약 기업들로 하여금 저렴하면서도 덜 해로운 살충제를 개발하도록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현재까지 그런 살충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가난한 국가들을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서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제약회사에 수익이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온실가스를 뿜어내고 있을 때 빈곤국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에 사막화가 진행되어 해마다 식량 2000만t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에서 7년간 생산된 쌀이 매년 없어지는 꼴이다. 물 부족을 겪으며 전기를 사용할 수 없고, 화장실이 없는 환경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오염된 지하수를 먹고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20초에 한 명, 하루에 4000명이 목숨을 잃는데, 희생자는 대부분 아이들이다. 잘사는 계층이 경제 성장을 이루는 대신 그 역습을 받는 계층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진국과 제3세계에 동일한 환경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환경인문학’은 사회와 자연이라는 환경에 인문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한다. 환경 문제의 경우 하나의 원칙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환경과 능력, 그리고 다른 대안을 사용하는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 인지적 요인을 연구하고 반영한다. 또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인류의 경험과 호기심, 상상력을 반영하여 아직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통찰력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서두에 밝힌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을 때 ‘환경인문학’은 그 생활권 영역 안에서 사회-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장기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환경에 대한 인문적 관심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사회-생태적 지속 가능성’에 있는 것이다. /김동훈
289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온난화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46  추천:0  2020-03-07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  2020.03.07.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가 감염병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같은 시기 과학자들은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바로 온난화로 인한 문제들 입니다. 네덜란드 사진작가 프랜스 랜팅이 찍은 남극의 펭귄입니다. 온난화로 얼음이 녹아버려 눈 대신 진흙뻘을 뒤집어쓴 채 모여 있는 모습이 충격을 안겼죠. /사진=내셔널지오그래픽 SNS 지난달 16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네덜란드 사진작가 프랜스 랜팅이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습니다. 랜팅은 남극에 서식하는 펭귄들을 찍었는데 사진 속 펭귄들은 하나같이 하얀 눈이 아닌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었죠. 남극의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올라가면서 눈과 얼음이 녹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올해 2월 4일과 같은 달 13일 남극 대륙 일부를 촬영한 위성사진입니다. 온난화로 인해 눈과 얼음(흰색 부분)이 녹아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죠. /사진=NASA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남극은 현재 온난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최근 50년 동안 평균 기온이 약 3도 올랐고, 최근엔 남극 기온이 사상 최고인 영상 20도를 기록했습니다. WMO의 추정에 의하면 남극의 빙하가 전부 녹아 없어질 경우 전 세계 해수면은 약 60m 상승한다고 합니다. 감염병으로 시작해 갑자기 온난화 이야기를 꺼낸다니 다소 뜬금없을 수 있지만, 감염병과 온난화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죠. 과학자들, 특히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온난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온난화로 인해 오랜 시간 빙하·동토 속에서 잠들었던 고대 미생물과 바이러스들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빙하 속 잠든 신종 바이러스가 깨어났다 지난 1월 학술논문 사전공개 사이트인 바이오 아카이브(bioRxiv)에 미·중 공동 연구팀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소개됐습니다. 굴리야 빙하에서 얻은 샘플을 조사 중인 미·중 공동연구팀. 연구팀은 이 얼음 덩어리 안에서 신종 바이러스 20여 종을 발견했습니다. /사진=오하이오주립대 2015년 연구팀은 1만5000년 전 형성된 티베트 고원(칭장고원)의 굴리야 빙하에 깊이 50m짜리 구멍을 뚫어 얼음 샘플을 채취했습니다. 두 샘플 중 하나는 520년 된 얼음 덩어리였고, 다른 하나는 약 1만5000년 전 형성된 퇴적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분석 결과 샘플 속에는 여러 종의 바이러스가 들어 있었죠. 이 중 4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러스, 나머지 28종은 처음 발견된 '신종' 바이러스였습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빙하 속 동결 보존된 바이러스를 손상 없이 온전히 꺼낼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수백 년 혹은 수만 년 전 냉동보관된 바이러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죠. 연구팀은 고대 바이러스를 통해 오래 전 지구 생태계가 어땠는지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에 유행할 감염병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얼어붙은 땅인 동토, 혹은 빙하에서 미생물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러시아·프랑스 공동연구팀은 2014년 3만년 된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거대 바이러스를 발견해 이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3만년 전,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오래전 이야기죠. 비슷한 시기 지구상엔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 거대 바이러스는 인류의 조상과 함께 살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러시아·프랑스 공동연구팀이 2014년 3만년 된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발견해 부활시킨 피토바이러스. /사진=악스-마르세유대 연구팀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이 판도라에게 건넨 항아리를 뜻하는 '피토스(Pithos)'라는 단어에 착안해 이 신종 바이러스를 '피토바이러스(Pithovirus)'로 명명했습니다. 피토바이러스는 1.5㎛(마이크로미터)로 평균 20㎚(나노미터) 크기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보다 몸집이 훨씬 큽니다. 다행히도(?) 이 신종 바이러스는 아메바만을 감염시켰습니다. 다른 동식물엔 해가 되지 않았죠.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던 이런 고대 바이러스들이 부활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좀비 바이러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적이 드문 극지방에서 발견되는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미·중 공동연구팀이 신종 바이러스를 무더기로 발견한 굴리야 빙하는 평균 해발고도 4500m의 칭장고원(티베트 고원)에 있습니다. /사진=NASA 미·중 연구팀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굴리야 빙하는 칭장고원에 있습니다. 시짱 자치구, 칭하이성, 신장 자치구, 인도 카슈미르 일부에 걸친 이 고원의 평균 해발고도는 4500m입니다. 눈 속을 헤치고 산을 오른 뒤 얼음을 뚫어야 비로소 바이러스를 만날 수 있죠. 러·프 공동연구팀도 시베리아 영구 동토층을 굴착해 바이러스를 확보했습니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는 아메바만 감염시켰죠.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곳에, 심지어 해롭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발견되는데 이게 걱정할 일일까요.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탄저균. 2016년 러시아에선 75년 전 동토층에 매장한 사람과 동물의 유해에서 나온 탄저균이 지역 감염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16년 러시아 북부, 서시베리아지역에 위치한 살레하르트시에서 12세 소년이 목숨을 잃고, 10여 명이 감염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역민들은 이를 '시베리아 역병'으로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 75년 전 동토층에 매장한 사람과 동물의 사체에서 나온 탄저균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사망한 소년이 유목민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따뜻한 날씨에 동토층이 녹으며 사체가 드러났고, 이 사체와 밀접 접촉한 순록들이 탄저균을 사람에게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했죠. 자외선, 산소, 고온인 환경은 바이러스의 생존에 치명적입니다. 반대로 춥고 어둡다면 바이러스 생존에 도움이 되며, 춥고, 어두운 데다 산소까지 없다면 최적입니다. 동토층· 빙하·심해 퇴적층 등이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이 오랜 기간 생존하기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토바이러스처럼 미생물은 이런 환경에서 수만 년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 북극곰이 유빙 위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북극도 온난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중이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온난화의 영향은 앞서 소개한 남극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WMO와 유엔환경계획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동아프리카 등의 빙하 약 80%가 21세기 말 소멸될 것이라고 하죠. 북반구의 4분의 1을 덮고 있는 동토층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내로 제한한다 해도 결국 동토층의 40%가 녹아 없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북극항로'가 열린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뱃길이 열리면 물류 운송시간이 크게 단축된다는 것입니다. 온난화로 인해 빙하와 동토층이 사라지면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게 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이동도 자유로워지죠. '시베리아 역병'의 사례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감염병, 혹은 신종 감염병이 동물을 매개로, 혹은 직접 접촉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습니다. 또 빙하나 동토가 녹은 물이 토양을 오염시키거나, 강과 호수 등 식수원에 유입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피토바이러스를 발견한 연구팀의 일원인 장 미셸 클라베리 프랑스 악스-마르세유대 교수는 논문을 통해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영구동토나 빙하가 녹으면 이 속에 들어 있던 원시 미생물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며 "우리가 모르는 신종 바이러스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영욱 기자]
2890    [민속] - 방아 댓글:  조회:5744  추천:0  2020-03-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한천리에 있는 양다리 디딜방아. 유형 물품 성격 농기구 목차 정의 내용 정의 곡물을 쓿어 겉껍질을 벗기거나 빻아서 가루를 내는 데 쓰는 연장. 내용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이 많으나 흙이나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다. 방아는 갈돌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발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갈돌에서 돌확·맷돌·매통·토매·연자매로 발전한 무리와, 둘째 갈돌에서 절구·디딜방아·물방아·물레방아 따위로 나아간 무리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은 아래짝 위에 놓인 물질을 위짝을 돌려서 으깨듯 부수는 연장이고, 뒤의 것은 공이로 내리쳐서 찧는 연장이다. 인류는 식량생산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굳은 나무열매를 갈돌로 가루를 내어 먹었다. 갈돌은 윗부분이 평평한 돌판에 둥근 돌(갈개)을 한 손에 쥐고 으깨듯 문질러 쓰는 연장이었으나, 뒤에는 안장처럼 앞뒤가 들리고 갈개도 방망이모양으로 바뀌어서 국수 밀듯 두 손으로 밀어 쓰게 되었다. 갈돌은 우리 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의 유적에서 나오며, 이러한 유적지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에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인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에서 거의 완전한 모양의 갈돌 1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안장형 갈돌은 전 유럽·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몽고·동만주 등 주로 밀 생산지대에 분포하며,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에 이것을 사용하는 석상이 발견되었다. 돌확은 오늘날에도 농가에서 보리를 대끼거나 고추 따위의 양념을 빻는 데 많이 쓴다. 갈판은 자연석을 방아확처럼 우묵하게 파거나 평평한 바닥에 전이 달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전라남도지방에는 벽과 바닥을 우툴두툴하게 구운 오지확도 있다. 갈개는 흔히 손 안에 드는 둥근 돌을 쓰나 도제(陶製) 확에는 흙으로 구운 것을 사용한다. 맷돌은 도시국가가 성립되는 등 식량의 대량 소비에 따라 생겨난 연장이다. 이것은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오리엔트지방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한쪽으로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한나라)에, 다른 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맷돌이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37년 봄 평안남도 대동군 토성리의 낙랑군터에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지름 52㎝, 윗돌 높이 21㎝, 아랫돌 높이 13㎝)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도 1∼2세기경에는 맷돌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맷돌은 다시 일본에 전래되었는데, ≪일본서기≫에는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이를 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의 두께가 서로 비슷한 것과 아래짝이 매우 높고 주둥이가 길게 달리도록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뒤의 것은 남부지방에서 많이 쓴다. 앞의 것은 받침 위에 올려 놓거나 함지 또는 맷방석 따위에 앉혀 놓는다. 맷돌의 재료로는 흔히 화강석을 쓰나 벌레가 파먹은 듯한 구멍이 나 있는 청흑석(靑黑石)이나 속돌로 만들며, 속돌제는 매우 가벼워서 이것으로는 풀매를 제작할 뿐이다. 화강석제는 마찰면이 닳아 없어지기 쉬우므로 이따금 쪼아 주어야 하지만 남부지방에서는 맷돌에 홈을 새겨서 쓴다. 이 홈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어떠한 경우에도 양쪽의 것이 평행이 되지 않도록 하며, 두 짝의 홈이 만나는 점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렇게 해야 곡식이 잘 갈릴 뿐 아니라 갈린 가루가 바깥쪽으로 밀려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큰 맷돌에 많은 양의 곡물을 갈 때는 맷손에 맷지게를 연결하고 두세 사람이 노를 젓듯이 돌리며, 경우에 따라 Y자 모양으로 끝이 벌어진 맷손을 잡아맨 맷지게를 천장에서 내린 줄에 걸고 서너 사람이 돌리기도 한다. 맷돌에서 더욱 발전한 것이 연자매이다. 연자매는 맷돌보다 수십 배나 크고 사람 대신 소나 말이 돌리게 되어 능률도 그만큼 높다. 맷돌은 위짝과 아래짝을 마주 포갠 채 돌리나, 연자매는 아래짝 가운데에 박은 기둥을 의지하여 위짝을 세워 돌리는 구조이다. 곳에 따라서는 톱니장치를 한 연자매도 나타났는데, 이것은 톱니의 회전에 따라 아랫돌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가축의 힘을 이용한 연자매는 서양의 경우 15세기 무렵에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1313년에 간행된 중국의 왕정(王禎)이 쓴 ≪농서 農書≫에는 연자매의 위짝을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그림과 함께 톱니장치를 한 것이 실렸다. 우리 나라 문헌으로는 1527년(중종 22)에 나온 ≪훈몽자회 訓蒙字會≫가 있다. 이 책에는 맷돌을 가리키는 마(磨) 자 외에, 연(碾)·애(磑)·아(砑) 자의 새김이 실려서 당시에 연자매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 간행된 ≪역어유해 譯語類解≫에 ‘연자(碾子)’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때는 연자매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 말이 귀한 데에서는 연자매를 사람이 돌리기도 하였으며, 특히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도의 것은 비교적 가벼워서 사람이 운전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디딜방아나 물레방아를 쓰지 않았던 만큼 마을마다 연자매를 공동으로 세웠는데, 이에는 대체로 혈연이 중심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쓰던 방아를 아들이 쓰게 마련이었다. 매통은 쌀을 주식으로 삼는 지역의 연장으로, 밀을 상식하는 서양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원리나 공정은 맷돌이나 연자매와 같으나 벼의 껍질을 벗기는 데에만 쓰기 때문에 재료가 나무인 것이 다를 뿐이다. 몸체는 길이 50㎝ 정도의 통나무(지름 40∼60㎝) 두 짝으로 이루어지며, 두 짝이 서로 닿는 마구리에는 요철로 이를 파놓았다. 곡식을 위짝 중앙에 길이로 낸 구멍에 흘려 넣으면서 앞뒤로 돌리면 껍질이 벗겨져 나온다. 위짝은 아래짝 기둥을 의지하여 돌아간다. 매통은 중국 남부의 수도(水稻)지대에서 발명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수당(隋唐)시대부터 써왔다. 이에 대한 우리 나라의 기록은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 처음 보이지만, 우리에게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되는 매통이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도 있었다고 하니 사용연대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중국·일본의 매통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중국 것은 이[齒]를 매통처럼 세로로 파서 위짝을 회전시켜야 하지만, 우리나 일본 것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팠기 때문에 반회전시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한 사람 또는 서너 사람이 돌리지만, 두 나라에서는 반드시 두 사람이 마주보며 돌린다. 한편, 일본 것은 아래짝의 기둥이 위짝 위로 솟아올랐으며, 이를 위짝에 있는 손잡이모양의 가로막대에 꿰어 놓았다. 그리고 위짝에 잡아맨 새끼줄을 두 가닥씩 잡고 앉은 채로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것은 아래짝 기둥은 위짝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위짝 가운데에 박힌 손잡이를 한쪽씩 쥐고 서서 돌린다. 토매의 기능은 매통과 같으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이것은 둥우리모양의 그릇에 진흙을 다져 넣은 것으로, 위쪽에 단단한 나무를 박아 이[齒]로 삼는다. 매통보다 매우 능률적이나 무게 때문에 낟알이 깨지는 흠이 있다. 중국에서는 원대(元代)에 생겨났으며,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간행한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에도 보인다. 일본에는 17세기 초에 전래되었다. 절구는 돌이나 나무토막을 우묵하게 판 것으로 벼농사를 많이 짓는 아시아지역에서 널리 사용된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썼으며, 로마시대에 널리 보급되었으나 로마시대 말기부터 중세에 이르는 사이에 수차(水車)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경우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 “황제 요·순이 만들다. 나무를 잘라 공이를 만들고 땅에 박은 절구를 쓴다. 절구는 매우 쓸모 있어 만민을 구하다.”라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구는 옥수수농사를 짓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중요한 연장의 하나로 손꼽았다. 절구는 또 그 형태에 따라 허리 부분이 좁은 잘록절구와 위아래가 밋밋한 통절구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통절구는 중부지방에서, 잘록절구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많이 쓴다. 그러나 제주도의 절구는 이와 달라서 넓고 큰 함지를 닮았으며 가운데에는 돌확을 박았다. 이러한 절구는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찧는 데 편리하다. 한편, 절구공이에도 차이가 있어서 중부에서는 가운데가 잘록한 것을 쓰나 남부지방에서는 손으로 쥐는 부분만을 가늘게 깎은 것을 사용한다. 일본 절구와 공이에도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 절구의 전래 사실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이도 곧은 공이와 굽은 공이 두 가지가 있다. 굽은 공이에는 나무자루에 직각이 되도록 쇠몽둥이를 박은 것이 많으며, 큰 나무 끝에 돌을 박아 쓰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굽은 공이는 18세기에 나타났으며, 절구도 통절구로 바뀌었다. 디딜방아는 절구에서 비롯되었다. 절구는 주로 손의 힘을 빌렸으나 디딜방아는 몸무게를 실은 발의 힘을 이용하게 되어 그만큼 능률이 높아졌다. 디딜방아의 역사도 절구 못지않게 오래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후한시대의 무덤에서 흙으로 빚은 디딜방아의 모형이 출토되어 적어도 기원전에 디딜방아가 사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 나라의 것으로는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덤의 벽화를 들 수 있다. 방앗간에서 한 사람은 방아를 찧고 다른 한 사람은 찧은 곡식을 키에 담아 까부르는 장면이다. 이 무덤에서는 347년이라는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에서의 디딜방아 역사는 4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일본에는 7세기 무렵에 들어갔으며 나라시대 노래집인 ≪만엽집 萬葉集≫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한편, 유럽에서는 중세에 사용되었다. 디딜방아는 우리 나라·중국·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인도·카프카스·라오스·버마(지금의 미얀마)·우크라이나·이탈리아, 그리고 폴란드·헝가리·스위스 북부·독일을 비롯한 동부 유럽에서도 쓴다. 그런데 우리네 방아와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방아 사이에는 형태상의 큰 차이가 있다. 우리 방아는 다리가 Y자 모양으로 벌어져서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이 서로 마주서서 찧으나(양다리방아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 다른 곳의 방아는 곧은 나무로 되어 한 사람이 쓴다(이를 외다리방아라 함). 다시 말하면, 양다리방아는 우리의 발명품이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고구려 벽화의 방아는 외다리방아인데 이는 디딜방아가 중국에서 들어온 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더러 쓰기도 한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고 이에 따라 공이가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방아이다. 물레의 ‘물’은 ‘물[水]’을, ‘레’는 수레·굴레의 ‘레’처럼 ‘바퀴’를 뜻하는 말이다.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낙차가 없는 데에서는 물이 흘러가는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이를 밀방아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나 바퀴 굴대에 붙은 두 개의 누름대가 바퀴가 돌 때마다 번갈아 가며 방아채를 눌러서 공이가 오르내리게 한다. 근래에는 바퀴를 돌리는 힘만을 물에 의존할 뿐, 내부에는 기계장치를 한 것이 많이 생겨났다. 이 방아는 서아시아지방에서 발명되었으며, 로마에서는 1세기경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역으로부터 들어왔다.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의 것으로, 지금의 서울 세검정 근처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물레방앗간은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의 유숙처나 남녀의 밀회장소로 이용되었다. 또 민간에서는 이곳에서 해산하면 사내아이를 낳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 많은 남아가 태어나리라고 여겨 진통이 시작되는 산모를 일부러 업어와 몸을 풀게 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용잡기(舂雜記)』(윤병준, 회상사, 1975) 『한국의 물레방아』(이춘녕·채영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농서(農書)』(王禎, 1313) 『농정전서(農政全書)』(徐光啓, 1639) 『臼』(三輪茂雄, 法政大學 出版局, 1978) 『中國農業技術史硏究』(天野元之助, 御茶の水書房, 1979)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삼척 신리 소재 너와집 및 민속유물 중 물레방아물의 힘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고 이에 따라 공이가 오르내리도록 고안한 방아.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재학습백과 초등 다양한 문화 방아     방아에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등이 있어요. 디딜방아는 발로 디디는 방아예요. 두 사람이 Y자 모양의 갈래 끝에 올라서서 찧지요. 시소처럼 생겨서, 갈래의 끝을 발로 밟으면 방앗공이가 올라가고 발을 떼면 방앗공이가 내려가 곡식을 찧게 돼요. 삼국 시대에도 디딜방아를 썼다고 해요.나무 한쪽 끝에 공이를 박고 다른 쪽은 두 갈래로 나누어 발로 디딜 수 있게 했어요. 연자방아는 고정된 커다란 돌판 위에 바퀴처럼 생긴 넓적한 돌을 굴리면서 곡식을 가는 거예요. 바퀴 축에 긴 나무를 꽂아 소나 말에게 걸면 가축이 방아 주위를 빙빙 돌며 돌을 굴린답니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해 곡식을 찧는 기구예요. 흘러내리는 물이 물레를 돌리면 공이1)가 위아래로 움직여 곡식을 찧어요. 디딜방아 디딜방아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 한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것과 두 사람이 딛고 한 사람이 께끼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한천리에 있는 양다리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천재학습백과 초등 다양한 문화)   두산백과 방아     요약 곡물을 절구에 넣고 탈각(脫殼) ·정곡(精穀)하거나 제분하는 데 이용되던 농기구. 이미지 크게보기 연자방아 그 종류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발로 디디어 찧는 디딜방아, 물의 힘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그리고 소 ·말 등의 축력(畜力)을 이용하는 연자방아 등이 있다. 이러한 탈각 ·제분 등에 이용된 기구는 석기시대에 석명(石皿)과 석봉(石棒) 한쌍으로 알이 작은 곡식을 탈각하고 제분하는 데 사용하였던 갈돌[磨殼石:碣石]에서부터 맷돌로 발전하였다. 이 때까지 인력(人力)을 유일한 동력으로 쓰던 단계에서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축력을 이용하는 연자방아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러 능률에 큰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방아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강원도 道溪에 몇 개의 재래식 물레방아가 보존되어 있음), 발동기와 병행하는 변형된 물레방아 100여개가 전국에서 가동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참조항목 농기구, 제분, 방앗간 역참조항목 디딜방아, 물레방아, 물방아, 축력, 남방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동영상                                 00:00 | 00:15 화질 선택 옵션270p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돌방아와 돌공이곡물을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 데 이용되던 농기구.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방아 (두산백과)   두산백과 물레방아     요약 냇가에 물길을 만들어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여 곡식을 찧는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물레방아 물레방아는 큰나무바퀴와 굴대에 공이를 장치하여,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를 돌리면 굴대에 꿴 넓적한 나무가 방아채의 한 끝을 눌러 번쩍 들어올렸다가 떨어뜨리면 그 끝의 공이가 확 속의 곡식을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아채와 공이의 동작이 자동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찧을 수 있으며, 공이가 양쪽으로 두 개가 물려 있어 엇갈려 찧어지는 것과 한 개만 있는 것 등이 있다. 물방아는 일명 통방아라고도 하는데, 긴 통나무로 된 방앗대 한쪽을 파내어 물받이를 만들고, 반대쪽에는 공이를 달아 가운데를 받친 원시적인 물방아이다. 물받이에 물이 차면 그 무게 때문에 아래로 내려가 반대쪽의 공이가 들리고 물받이가 기울어져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아래로 떨어져서 확 속의 곡식을 찧는다. 참조항목 농기구, 방아, 수차 역참조항목 정선 백전리 물레방아, 백운면의 물레방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애산리 아라리촌.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두산백과) 한국의 농기구 물레방아     디딜방아와 같은 원리지만 밟는 것을 물의 힘을 이용한다. 흐르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바퀴(水車)를 돌리면 바퀴의 굴대(軸)에 고정된 누름대(발)가 방아채의 다리를 누른다. 이 때 방아공이가 올라가고 누름대가 더 돌아 다리에서 떨어지면 공이가 아래로 처박히면서 방아를 찧는다〈그림 11-7〉〈사진 11-8〉. 〈그림 11-7〉 물레방아의 부분 이름(박호석, 1990)1. 방아채, 2. 굴대, 3. 물레바퀴, 4. 발 〈사진 11-8〉 물레방아 누름대는 굴대를 가로질러 꽂혀있기 때문에 물레바퀴가 한 바퀴 돌면 공이가 두 번 들린다. 물레바퀴는 밖에 설치하고 굴대를 길게 하여 방앗간 안까지 들어오게 했다. 보통은 물레 하나에 방아 한 채를 걸지만 물이 많은 곳에서는 물레바퀴 양쪽으로 걸거나 아니면 굴대를 길게 늘여 한쪽으로 두 채의 방아를 거는데 이때 한쪽방아가 올라오면 다른 방아는 내려오도록 발을 엇갈리게 박았다. 물이 많아 물레가 빨리 돌면 방아찧기도 빠른데, 보통 하루 5∼6가마의 매조미쌀을 쓿을 수 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의 무게와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水車)를 돌리는 상괘식 물레방아가 일반적이었지만 물이 흐르는 힘을 이용하여 물레를 돌리는 하괘식 물레방아도 있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초의 사진으로 보이는 〈사진 11-9〉는 개울에 봇도랑을 막아 무넘기(堤)를 약간 높인다음 그곳으로 빠르게 흐르는 물에 물레바퀴의 아랫부분을 잠기게 했다. 〈사진 11-9〉 조선시대의 물레방아(서문당, 1996) 아마도 물의 낙차가 크지 않은 평야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물레방아는 앞서 물방아와 이름이 혼동되어 쓰이기도 하며, 물레 하나에 방아가 둘인 것을 ‘쌍방아’ 또는 ‘양방아’라고 부른다. 관련항목 절구, 디딜방아, 물방아, 돌확, 맷돌, 매통, 토매, 연자매, 기름틀, 국수틀, 물절구, 안반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한국의 농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물레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농기구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시도민속문화재 제6-1호 문화재 지정일 1996년 09월 30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물의 힘으로 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 내용 물레방아에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앞의 것을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동채방아’, 뒤의 것을 ‘밀채물레방아’라고 하며, 같은 것을 경상북도 청도에서는 ‘밀방아’로 부른다. 동채방아의 바퀴는 방앗간 밖에 설치하나 밀채물레방아의 바퀴는 집안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동채물레방아는 물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힘을 더 얻는다. 일반적으로는 개울 옆에 도랑을 파서 물을 대지만, 이를 위한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를 따로 마련하는 곳도 있다. 보의 물은 농사철에는 농사에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물레방아에 대므로 매우 효과적이다. 이 방아에는 대부분 방아틀을 한 대 걸지만, 물이 많은 데서는 좌우 양쪽에 두 대를 설치한다. 이 방아를 ‘양방아’(강원도 도계) 또는 ‘쌍방아’(전라남도 구례, 충청북도 음성)라고도 한다. 방아 굴대에 설치된 눌림대가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어서 방아공이가 번갈아 가며 오르내린다. 재래식은 방아가 모두 나무이므로 궁글목 양끝처럼 닳기 쉬운 데는 끌로 파고 질이 단단한 박달나무 조각을 박아 둔다. 또, 마찰열을 낮추기 위해 수로 끝에 대나무로 만든 홈대를 달아 물이 이리로 떨어지도록 한다. 방아는 대체로 소나무로 만드나 공이와 같은 것은 단단한 박달나무를 쓰며 공이 끝에 쇠를 박기도 한다. 돌확은 땅에 묻는다. 바퀴의 물받이를 어떤 곳에서는 반으로 갈라서 물이 더 많이 실리도록 한다. 요즈음에는 동력만을 나무바퀴로 얻고 나머지 부분은 철제로 설비하며, 곳에 따라서는 바퀴 자체도 철제를 쓰기도 한다. 밀채물레바퀴의 구조는 앞의 것과 같으나, 다만 물레의 살과 살을 연결하여 너비 30㎝, 두께 5㎝ 정도의 널판을 가로 대 놓았다. 흐르는 물은 이 널판을 밀고 나가므로 이에 따라 물레가 돌아가는 것이다. 이 쌍방아로는 벼 한 가마를 찧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물레방아는 흔히 마을에서 계를 모아 공동으로 세우며, 계원이 아닌 사람의 방아를 찧을 때는 삯을 받아 모았다가 수리할 때 쓰거나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방아를 걸고 나서는 외다리방아에서처럼 고사를 올린다. 이 때 고사를 지내는 날까지 방앗간 입구의 좌우 양쪽에 붉은 흙 세 무더기를 쌓아 둔다. 이 흙의 붉은 기운이 잡귀를 막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방앗간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서 잡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고사 때 올리는 축원의 내용은 외다리방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고사를 지낸 뒤 주인집의 방아를 제일 먼저 찧는데, 이 때 곡물의 일부를 ‘방아몫’이라 하여 작은 항아리에 넣고 다락이나 시렁에 얹어 둔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햇곡식이 나오면 먼저 곡식을 꺼내고 새 곡식으로 갈아 넣는다. 가을에 안택(安宅)굿을 할 때도 방아몫단지 앞에 떡 한 켜와 정화수를 차려 둔다. 또, 어떤 집에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떡고사를 지낸다. 이렇게 해야 방앗간의 도깨비가 만족해서 방아 동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앗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금기를 지켜왔다. ① 방앗간의 비는 생리중인 여자가 깔고 앉으면 나쁘다. ② 임신부가 방아공이를 깔고 앉으면 나쁘다. ③ 방아로 만들어 쓴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④ 액막이를 위해서 훔쳐 간 방아를 주인이 나서서 찾으면 해롭다. ⑤ 방아의 머리 쪽에 집안의 방문이나 조상의 무덤이 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 ⑥ 방아고사는 반드시 해진 뒤에 지낸다. 한편, 물레방앗간은 매우 넓어서 방아를 찧는 것 외에 인가에서 거절당한 손님이 하룻밤 머물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의 반허락 아래 걸인들이 당분간 유숙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농기구』(김광언, 문화재관리국, 1969)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물레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물레방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의 농기구 디딜방아     절구〈그림 11-1〉와 같은 기능을 가지지만 발로 밟아 움직이고 충격력이 커서 보다 능률적으로 발전된 방아연장이다. 디딜방아는 밟는 다리가 하나인 외다리 방아와 둘인 양다리 방아가 있다. ‘디욤방아’라고도 하는 외다리방아〈사진 11-3〉는 고구려 시대의 안악(安岳) 고분벽화〈제1편 그림 29-1〉 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특히 고구려 스님 담징(曇徵)이 일본에 전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11-3〉 외다리 방아 (출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hastitle="N" height="461" origin_height="2507" origin_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41_000_1/20140403173834828_VP7R2HICP.jpg/do2_i1-94.jpg?type=m4500_4500_fst_n&wm=Y" origin_width="1500" source="한국의 농기구"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841_000_1/20140403173834828_VP7R2HICP.jpg/do2_i1-94.jpg?type=w276_fst_n&wm=Y" style="border: 0px; max-width: 690px; vertical-align: top;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276" /> 〈그림 29-1〉 디달방아와 키질황해도 안악 3호분(상), 평남 약수리 벽화고분(하). (출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75)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는 양다리방아〈그림 11-2〉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는 『해동농서』에서 ‘외다리방아(單梃碓)는 중국에서 쓴다’고 한 점이나 『임원경제지』에서 디딜방아를 ‘東臼’라고 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1-2〉 디딜방아의 부분 이름(박호석, 1990)1. 공이, 2. 방아채, 3. 쌀개, 4. 볼씨, 5. 다리, 6. 확돌 그렇다고 외다리 방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다리방아는 가지가 ‘Y’자로 뻗은 길이 3m 남짓한 통나무를 깎아 밑동 쪽에는 공이를 박고 가지부분은 다리(발판)로 했다. 다리가 합쳐져 방아채가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앞쪽에 채를 가로질러 쌀개(굴대)를 박고 이를 볼씨(받침대)에 얹었다〈그림 11-3〉.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고 오르면 사람의 몸무게로 공이가 위로 들리고, 발을 떼면 아래로 처박히면서 공이 밑의 확 속에 넣은 곡식을 찧는다. 방아를 밟는 사람이 일하기 쉽게 다리 앞에 손잡이를 두거나 천장에 끈을 매 잡도록 했다〈사진 11-4〉. 〈그림 11-3〉 방아(碓)(『해동농서』) 〈사진 11-4〉 디딜방아(양다리) 디딜방아에 쓰는 공이 끝에는 촉을 붙이는데 용도에 따라 촉의 모양이 다르다. 쇠나 돌로 부처님 머리처럼 오톨도톨하게 만든 촉은 왕겨를 벗기는데 쓰고, 돌로 된 밋밋한 촉은 빻는데 쓰며, 촉이 없는 나무공이는 쓿는데 사용했다〈사진 11-5〉. 〈사진 11-5〉 방아촉 그리고 부엌이나 그 가까이 설치하여 양념을 찧는데 쓰는 ‘조작방아’〈그림 11-4〉〈사진 11-6〉는 다리가 없이 틀을 발로 밟고 손으로 당기면 공이가 들리는 특이한 형태의 방아로 크기가 작다. 〈그림 11-4〉 조작방아(‘조작방에 모양’, 「기산풍속화」) 〈사진 11-6〉 조작방아(한국민속촌) 디딜방아는 지방에 따라 ‘딸각방아’ · ‘발방아’ · ‘돈방아’라고도 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방아’(『사류박해』 · 『방언류석』 · 『물명고』 · 『농가월령가』) · ‘방하’(『사시찬요초』 · 『역어류해』 · 『동문류해』)라 했고, 한문으로는 碓(『사성통해』 · 『훈몽자회』 · 『과농소초』 · 『임원경제지』 · 『사류박해』) · 碙碓(『북학의』) · (『산림경제』 · 『고사신서』 · 『과농소초』)라고 썼다. 디딜방아로 셋이서 하루 2∼3가마의 매조미쌀을 쓿을 수 있었다. 관련항목 절구, 물방아, 물레방아, 돌확, 맷돌, 매통, 토매, 연자매, 기름틀, 국수틀, 물절구, 안반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한국의 농기구)   두산백과 디딜방아     요약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 이미지 크게보기 디딜방아 이에는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 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으며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방아를 찧는다. 참조항목 농기구, 방아 역참조항목 방앗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동영상                                 00:00 | 00:15 화질 선택 옵션270p           관련이미지 1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양곡리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두산백과)   지식리스트 수정문의 공유 인쇄 글꼴가- 글꼴 작게가+ 글꼴 크게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디딜방아     저자 이한길(李漢吉) 목차 정의 내용 지역사례 정의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주술적 도구. 내용 디딜방아는 절구에서 나왔다. 흔히 절구는 손방아, 디딜방아는 발방아라고 일컫는다. 디딜방아는 벼농사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디딜방아는 중국 한나라 초기에 등장하여 우리나라는 4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디딜방아는 외다리방아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개량하여 두다리방아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민속이 만들어졌다. 디딜방아를 만들고 나서 흔히 몸체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고 쓰기도 한다. 액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또한 디딜방아는 민요의 주요 재료가 되었다. 디딜방아 민속신앙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조사 내용이 일부 차이를 보인다. 때로는 상충된 내용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상충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딜방아는 주술적으로도 사용되는데 그중 하나가 액막이 의례이다. 천연두, 홍역 같은 돌림병이 돌면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강구된다. 그 대책 가운데 하나가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한밤중에 몰래 훔쳐 와서 제사를 올리는 일이다. 이 주술적 액막이 의례는 대개 1950년대까지는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오늘날 이 놀이는 전라도 일원에서 주로 행하여지고 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우선 부녀자들은 어느 마을에서 디딜방아를 훔쳐 올 것인지를 논의한다. 어느 마을에 크고 좋은 디딜방아가 있는지, 또는 어느 마을의 것을 비교적 쉽게 훔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한다. 간혹 마을의 여러 일을 단골처럼 보아 주는 무당이 “언제 어느 방위의 마을에서 훔쳐 와야 효험이 있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다음에는 누가 훔치러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대개는 기운이 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20~30명으로 구성한다. 때로는 남자들이 일부 포함되기도 한다. 디딜방아를 훔치러 떠날 때 부녀자들은 하얀 소복을 갖추어 입고 상여를 준비하기도 하고,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숨을 죽이며 갔다. 반드시 소복을 입거나 상여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디딜방아는 한밤중에 몰래 훔쳐 오는데, 어떤 때는 그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서 싸우거나 미수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돌림병을 막기 위한 ‘뱅이(주술적인 방어의례)’에 쓴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기 때문에 순순히 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든 그 마을 어귀를 무사히 빠져 나오면 그곳 사람들도 더 이상 반환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훔친 디딜방아는 상여 위에 놓고, 그 위에 흰 광목천을 덮어서 마치 죽은 시신을 모시듯 한다. 디딜방아를 훔치는 것은 다른 마을의 여자 시체를 가지고 오는 것을 뜻한다. 이때문에 자기 마을로 돌아올 때는 소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상여소리와 함께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거나 또는 “어흥! 어흥!” 하고 호랑이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돌림병의 종류에 따라서 “홍역 물리자! 홍역 물리자!” 하면서 돌아오기도 하였다. 전남에서는 축원가를 부르며 돌아오면서 마을의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역량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훔쳐 온 디딜방아는 마을 어귀나 마을 앞의 삼거리에 거꾸로 세워 놓고 금줄을 두르고 제상을 차려 제사를 모신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치며 한바탕 흥겹게 논다. 여기저기에서 아낙네들은 벗은 속곳이나 준비해 온 속곳을 디딜방아의 Y 자형으로 벌어진 곳에 감기도 하고, 금줄 사이사이에 끼우기도 한다. 특히 경도혈이 묻은 속곳을 걸어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더욱 정성이 지극한 아낙네들은 자신의 속곳을 가지고 온 마을을 다니면서 다른 집의 대문에서 나뭇조각을 조금씩 떼어내기도 하고, 다른 집 흙을 속곳에다 문질러서 디딜방아에 걸기도 한다. 이런 속곳은 매우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는 팥죽을 쑤어서 속곳과 디딜방아에 뿌렸다. 이렇게 하면 돌림병이 마을로 들어오다가도 디딜방아에 걸린 경도혈 묻은 속곳을 보고, “이 마을은 더러워서 못 쓰겠다”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다. 디딜방아가 더러우면 돌림병이 물러나고, 깨끗하면 더 덤빈다는 말도 전해 온다. 디딜방아 액막이놀이는 주로 호남의 동부 산간지대에서 행해졌는데, 정월대보름에 당산제가 끝나면 여성들이 인근 마을에 디딜방아를 훔치러 갔다가 성공하여 돌아온 후에는 신명나게 풍물놀이를 하였다. 훔쳐 온 디딜방아는 ‘뱅이’를 끝낸 후에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때 방아를 잃어버렸던 마을에서는 금방 찾아오면 그 마을의 액도 함께 가져오는 것이라 하여 몇 달 후나 한 해를 지낸 다음에 찾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로 되찾아간 마을도 있었다. 또한 훔쳐 온 디딜방아는 자칫 잘못하면 부정을 탄다 하여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세워 둔 자리에서 썩어 없어지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한소리의 주민들은 이웃 마을에 돌림병이 들어오면 물레방아의 공이만을 뽑아다가 붉은 흙칠을한 다음 마을 어귀에 거꾸로 박아 두었다. 훔쳐 왔던 디딜방아는 정월이 지나면 돌려주지만,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에서는 개울에 다리를 놓는 데 사용했다. 이와 같은 액막이 의례는 학자에 따라 액막이놀이, 액막이굿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디딜방아로 액을 막는 민속은 2000년 민속예술로도 탈바꿈하여 운곡대보름액막이굿(전남)이 대통령상을, 부남방앗거리놀이(전북)가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지역사례 디딜방아 액막이 의례와 관련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순군의 양촌과 용호에서는 여자들이 훔친 디딜방아를 남자들이 메고 오기도 한다. 디딜방아가 무거워서 여자들이 운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강진군 덕동마을은 아예 남자들이 직접 디딜방아를 훔쳐 온다. 전승 주체가 여자에서 남자로 변경된 것이다. 디딜방아는 보통 이웃 마을에서 훔쳐 오는데, 거리가 멀수록 효력이 크다고 믿기도 한다. 화순군 용호마을은 담양군에서, 진안군 종평마을은 장수군에서 훔쳐 온다. 디딜방아를 세우는 위치는 마을 어귀인데, 이곳은 장승을 세워 악귀와 역병을 막는 곳으로서, 디딜방아에서 한시적으로 장승과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 디딜방아를 하나같이 거꾸로 세우고 윗부분에 여자의 속곳을 거꾸로 씌우는데,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는 밀대 모자까지 씌워서 의인화하기도 한다. 속곳은 월경이 묻은 것이 주력이 강하다고 한다. 월경이 묻은 속곳이 없으면 황토를 칠하거나 붉은 물감을 칠하기도 한다.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울 때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에서는 이웃 마을에 돌림병이 들었다는 소문이 돌면, 여럿이 다른 마을에 몰래 가서 방아를 훔쳐 가지고 “어이어이” 곡소리를 내며 돌아온다. 방아는 마을어귀에 다리가 위로 향하도록 세우고, 장가를 세 번 간 사람의 아내 속곳을 걸어 둔다. 이렇게 하면 돌림병이 더럽게 여겨서 달아난다는 것이다. 충남 아산시 온양에서는 여자들이 나서서 훔쳐 온다. 방아 가랑이에 개의 피를 바르고 주위에 왼새끼를 두른 다음 전나무 가지를 꽂아 둔다. 또 아낙네 단속곳을 방아머리에 씌우면서 “네가 여기에 와 있었구나”하고 읊조린다. 1940년쯤 전북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에서도 열병이 돌자 여자들이 이웃 마을의 디딜방아를 뽑아다가 서낭당 옆에 세웠다. 여자들이 훔친방아를 메고 돌 때 남자들은 절대로 내다보지 않는다. 여자로 꾸민 남자들이 방아를 훔쳐 오는 고장도 있다. 돌림병의 귀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가리기도 한다. 여성은 디딜방아에 잠방이를 씌워서 세우고, 남성은 여자를 상징하는 짚신이나 수박 또는 호박을 잘라 문전에 달아맨다. 디딜방아는 또 기우제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를 ‘디딜방아 매기’라고도 불렀다.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부녀자들은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물이 흘러나오는 강 상류의 마을에서 방아를 메고 와서 이것을 거꾸로 세워 두고 ‘장례식’을 치른다. 우선 디딜방아를 훔칠 집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훔칠 집으로는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집, 삼대가 함께 살던 집,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방아나 또는 개인 방아를 갖고 있는 집을 조건으로 결정하며, 도둑맞는 집은 대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부녀자들 중에서 남장을 한 상주와 선두에서 만가를 부를 사람을 정한다. 부인들은 장례식에서 하듯이 흰 옷에 흰 수건을 두르고 방아를 훔치러 간다. 도둑을 맞는 집 주인은 간섭할 수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또는 큰 재앙을 만나서 몰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 도둑을 맞는 집 주부가 방아 곁에서 장례식을 하듯이 곡을 하면 그 방아의 효험이 사라진다고 한다. 방아를 내오면확(방아에서 움푹 파인 곳)에다 물을 가득 채워 둔다. 훔친 디딜방아를 운반하려면 방아머리 부분에 기름을 짠 천을 씌운 뒤 새끼줄로 디딜방아를 7곳으로 묶고, 그곳에 금줄처럼 한지를 끼운다. 그런 다음 창호지로 싸서 새끼줄로 디딜방아를 묶고 손잡이를 7개 만든다. 또 병에 물을 넣고 솔잎으로 입구를 막아 디딜방아에 매달아 두는데, 그렇게 하면 메고 올 때 물방울이 떨어진다. 운반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오호 방아야 이 방아를 메고 오호 방아야 서둘러 떠나자꾸나 오호 방아야 이 방아를 멨더니 오호 방아야 모래가 떨어졌다네 오호 방아야 남편이 오면 오호 방아야 좋은 일이 있다네 오호 방아야 여자들이 많지만 진심을 담아서 오호 방아야 오도산에서 물을 얻어온다 그런 다음 운반해 온 방아를 세우는데, 세우는 장소는 항상 강 나루터로 정해져 있다. 세울 때는 구멍을 파서 방아의 머리 부분이 땅에 묻히도록 거꾸로 박는다. 그것이 끝나면 참가한 부인들 가운데 월경 중인 사람이 피가 묻은 속곳을 벗어서 디딜방아의 공이에 걸쳐 놓고 비가 오기를 기원한다. 3일 이내에 비가 와서 디딜방아를 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3일이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디딜방아와 속곳은 비에 떠내려갈 때까지 내버려 둔다. 경남 합천군과 산청군은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부녀자들이 이웃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다가 강이나 모래사장에 거꾸로 세운다. 이것을 방아매기(매기는막이의 사투리)라 한다. 합천군 봉산면에서는 주인 몰래 옮겨온 방아를 앞산 높은 곳에 세우고 돼지를 잡아 고사를 지냈다. 또 방아가 마을 앞을 지날 때 사람들이 방아에 대고 “비가 내리게 해주소서”라고 축원하며 절을 하였다. 이 풍속은 가뭄을 돌림병과 한 가지로 보았다. 그리고 디딜방아의 가랑이를 여성의 음부로 여기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디딜방아는 액막이와 기우제 외에도 사용되었다. 디딜방아로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경북 상주에서는 귓병이 생겼을 때 귀지를 후벼서 쌀개에 넣고 찧는다. 쌀개에 낀 귀지가 가루가 되듯이 병도 그렇게 없어진다는 유감주술이다. 또 정월대보름 찰밥을 얻어다가 디딜방앗간에서 먹으면 버짐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정월대보름 아침에 아이들이 조리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음식을 거둔 다음 디딜방앗간에서 먹었다. 이렇게 하면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서는 못 쓰게 된 방아일지라도 불에 태우거나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한다. 함부로 굴리면 방아귀신이 들러붙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딜방아와 관련한 민속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또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마을신앙의 사회사, 이필영, 웅진, 1994 기우제와 지역사회, 임장혁, 민속원, 1999 금산의 마을공동체 신앙,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0 남도민속의 이해, 표인주, 전남대학교출판부, 2007 디딜방아액막이굿의 주술성과 오락화현상, 박진태, 비교민속학 31, 비교민속학회, 2006 디딜방아연구, 김광언, 지식산업사, 2001 한국민속제의와 음양오행, 김의숙, 집문당, 1993 관련이미지 1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디딜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디딜방아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지식리스트 수정문의 공유 인쇄 글꼴가- 글꼴 작게가+ 글꼴 크게 두산백과 연자방아   [ 硏子─ ] 요약 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연자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 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참조항목 농기구, 제분, 탈곡 역참조항목 방앗간, 하남시 상사창동 연자마 카테고리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기계및장비 관련이미지 4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연자방아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방아 [硏子─] (두산백과)   e뮤지엄 연자방아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재질 석(石) 크기 지름(지름)+159+높이(높이)+31 용도 · 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 농업(農業) > 도정(搗精) > 연자방아 소장처 목아박물관 유물번호 민(민) 001289-000 곡식을 탈곡 또는 제분을 하는 방아.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밀을 빻을 때 마소의 힘을 이용한 방아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 위가 잘 맞닿도록 하고 마소가끌고 돌린다. 정미소에 밀려 강원도 산골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옛날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을 연자방앗간 또는 연자맷간이라 하였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제주 애월 말방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에 있는 연자매. 중요민속자료 제32호. 보리와 조가 주곡인 제주에서는 연자매가 필수적인 농기구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방아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자매     이미지 크게보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에 있는 연자매. 중요민속자료 제32호. 보리와 조가 주곡인 제주에서는 연자매가 필수적인 농기구이다.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농기구/상세정보 〉 용도 제분, 탈곡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우고, 이를 마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연장. 내용 ≪북학의≫에는 ‘연마(連磨)’로 적혔으며, 경상북도 경산에서는 ‘돌방아’, 경기도의 백령도에서는 ‘돌방애’ 또는 ‘연자간’이라고 한다. 밑돌은 땅바닥에 괸돌 위에 얹혀 있으며, 안쪽이 우긋하도록 나무로 만든 테를 두르고 돌과 흙으로 그 주위를 덧쌓는다. 밑돌 가운데에는 구멍을 뚫고 이에 고줏대를 박아 윗돌은 이에 의지하여 돌아간다. 한편, 고줏대는 힘을 많이 받아 흔들거리거나 빠져나가는 수가 있으므로 밑돌 아래의 아궁이처럼 뚫린 구멍으로, 역시 굵고 둥근 나무를 넣어 고줏대 밑 구멍에 끼워서 고정시킨다. 윗돌은 안쪽은 낮게 바깥쪽은 조금 높게 깎아서 언제나 안쪽으로만 돌아간다. 또 윗돌 양 가운데를 우긋하게 파고 고줏대와 방틀에 의지하여 양쪽에서 뺑이를 박아서 윗돌은 고줏대에서 함부로 이탈하지 않는다. 이 돌에는 방틀을 씌우고 그 한 끝을 마소에 잡아맨다. 한 사람이 마소 고삐를 잡고 앞에서 몰고, 다른 사람이 그 뒤를 따르며 넉가래로 곡식을 뒤집어주는데 이 사람을 ‘께끼꾼’이라고 한다. 마소를 모는 사람이 따로 없이 한 사람이 하는 경우도 있다. 연자매를 장만하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일반적으로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한다. 이것으로는 벼·보리·수수·조 따위를 찧으며, 밀을 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벼 한 가마의 겉곡을 벗기는 데에는 두 시간이 더 걸린다. 먼저 애머리 찧은 것(약 20분이 걸린다.)을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 뒤에, 다시 넣고 방아를 돌린다. 이와 같은 과정을 네 번 반복해도 알갱이가 현미인 채로 남으며 잘 대껴지지 않는다. 보리를 찧을 때에는 알곡이 부서지지 않고 겉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방아를 돌린다. 한 차례 돌리고 꺼내어 햇볕에 말리고 풍구에 넣어 껍질을 날린다. 다시 넣고 다시 말리고 하는 과정을 세 번 거듭해야 한다. 볕이 약해 얼른 마르지 않으면 여러 날 걸린다. 조는 두 번 거듭해서 찧으며 한가마에 세 시간쯤 걸린다. 밀을 가루로 내는 데에는 한 가마에 한 시간 반쯤 걸린다. 방아질을 하려면 방아는 물론이거니와 소도 있어야 하므로, 주인은 마소와 방아를 함께 빌려 준다. 삯으로는 겉곡 한 섬 찧는 데에 알곡 한 말을 받았으며 이의 하루 사용을 사람의 이틀 품으로 잡기도 한다. 윗돌의 지름은 150㎝, 두께는 50㎝ 내외이다. 아랫돌의 지름은 170㎝쯤 되며, 두께는 윗돌보다 얇다. 매는 해마다 쪼아주어야 일이 쉽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을 ‘매조이꾼’이라고 부른다(전라남도 영광에서는 ‘석쇠아치’라 한다). 아래위 두짝을 쪼는 데에는 4∼5시간 걸린다. 삯으로는 쌀 한 말을 낸다. 연자매 한틀을 제작하는 데에는 한 달 가량 걸린다. 이 방아의 각 부분의 이름과 그 구실은 다음과 같다. ① 고줏대:밑돌 가운데 구멍에 박아놓은 기둥나무. 윗돌은 이를 의지하여 돌아간다. 쇠기둥을 박기도 한다. ② 고줏구멍:밑돌 한가운데에 고줏대를 박기 위하여 뚫어놓은 네모난 구멍. ③ 넉가래:윗돌이 갈고 지나간 곡식을 뒤집는 데에 쓰는 끝이 넓적한 막대기. ④ 방틀:우물 정자(井字) 모양으로 굵은 나무로 짠 틀. 이것을 윗돌에 끼워서 마소가 끌도록 한다. ⑤ 후리채:방틀에 끼우는 단단한 나무. 여기에 끈을 달아 소에 맨다. 이것은 마소가 끌기에 편리하도록 어스러지게 박는다. ⑥ 뺑이:윗돌이 함부로 벗어나 구르지 못하도록 고줏대와 방틀을 의지하여 윗돌 양가운데에 박는 짧은 나무. 괴목이나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재목을 쓴다. ⑦ 테:곡식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밑돌 주위에 비스듬히 둘러 놓은 나무. 방아를 방앗간에 안치하고 나면 간단한 음식을 방아의 고줏대 앞에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촛불을 밝힌 앞에서 주인은 절을 올리고 여주인은 다음과 같이 축원한다. “토지지신(土地之神)님, 목신(木神)님, 지금 ○씨댁 대주(大主) ○○생(生)이 ○○년 해운 ○월○일날 연자방아를 이루었나이다. 이 정성 받으시고 방아가 이 집 가중에 재수를 일으키고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내 아무 뒤탈 없도록 도와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옵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연자매가 중요한 연장이었음을 시사한다. 참고문헌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연자방아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연자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889    [민속] - 바가지 댓글:  조회:3912  추천:0  2020-03-06
두산백과 바가지     요약 박으로 만든 다목적 그릇. 이미지 크게보기 합덕수리민속박물관 바가지 한국 가정의 필수용품으로서 쌀을 퍼내는 쌀바가지, 장독에 두고 쓰는 장조랑바가지, 물을 퍼내는 물바가지, 소의 먹이를 떠내는 쇠죽바가지 등 용도가 다양하다. 봄에 박씨를 뿌렸다가 가을에 박을 따서 만드는데, 반(半)으로 켜고 속을 파낸 다음, 삶아 다시 안팎을 깨끗이 긁어낸 후에 말려서 쓴다. 우리 민족이 바가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오랜 옛날부터이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신화라든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에 바가지를 두드려 악기로 썼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에도 남녀 유아들이 겨울부터 파랑 ·빨강 ·노랑으로 물들인 호리병박을 차고 다니다가 정월 대보름 전야에 남몰래 길가에 버리면 액(厄)을 물리칠 수 있다 하여 차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고, 《흥부 놀부전》에서도 바가지를 신비적 존재로 다루고 있다. 이 밖에 주술이나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혼인 때 신부의 가마가 신랑집 문 앞에 다다르면 박을 통째로 가져다 깨뜨렸고, 납채(納采) 때에는 바가지를 엎어놓고 발로 밟아 깨뜨려 소리를 냈다. 또 병액을 쫓는 굿이나 고사에도 이용되었으며, 가정에서는 바가지를 밥상 위에 올려놓지 못하게 하였고, 바가지 파편이 아궁이에 들어가면 불길하게 여기는 등, 박은 실용성의 한계를 지나 민속신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고려 때에는 아악(雅樂)의 8음(音)에 속하는 생황(笙簧)이라는 악기의 재료로 썼는데, 지금도 쓰인다. 고대 아프리카에서도 부양구(浮揚具)로서 배에 싣고 다녔으며, 제주에서는 해녀들이 부양구로 쓴다. 오늘날에는 플라스틱 제품의 이용도가 높아지면서 생활용구로서보다는 그림 등을 그려넣는 공예품이나, 실내장식품 등으로 쓰인다. 참조항목 뒤웅박, 함지박 역참조항목 두레박, 한국의 식기, 박의 이용 카테고리 생활 > 생활용품 > 식생활용품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나무바가지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바가지 (두산백과)   e뮤지엄 바가지       국적 > 시대 한국 > 초기철기(初期鐵器) 재질 나무 > 기타(其他) 크기 전체길이 41.5 너비 19.9 높이 7.1 용도 · 기능 식 > 음식기 > 저장운반 > 바가지 출토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장처 국립광주박물관 유물번호 신창동(新昌洞) 000084-000 비교적 굵은 자연목(自然木)을 반절(半切)하여 만든 대형(大形) 용기(容器)로 평면(平面) 장방형(長方形)이며 수평(水平) 손잡이가 달려 있다. 용기(容器)의 내형(內型)과 외형(外型)은 평면(平面) 장방형(長方形)이고, 단면(斷面)의 형태는 위가 넓은 역(逆)사다리꼴이다. 내외면(內外面) 모두 예리한 도구(道具)로 깎아 낸 흔적(痕迹)이 잘 남아 있다. 부식(腐蝕)으로 쪼개지고 바닥은 균열이 심한 상태이며 동부일부(胴部一部)에는 결실(缺失)된 곳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가지 (e뮤지엄)  
2888    [세계속에서] - "나는 고발한다"... "그는 고발당하다"... 댓글:  조회:3840  추천:0  2020-03-06
  "이것은 수치다" 감독상 발표에 퇴장해버린 여배우    2020.03.0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파국 자초한 세자르상, 문제적 감독에게 기어이 상을 안기다 [오마이뉴스 목수정 기자] "나는 고발당했… 아니 고발한다."  지난 2월 28일 제45회 세자르상 시상식은 기어이 가야할 그곳으로 가고야 말았다. 파국. 로만 폴란스키(86)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시점에 세자르상 집행위원회가 그의 영화 를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시켰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미투운동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강력해진 영화계의 변화를 감지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변화하기도 거부해온 세자르상 집행위가 자초한 정면 충돌이기도 했다. "이것은 수치다"   ▲  십여차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2020년 프랑스 세자르상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배우 아델 에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면. ⓒ 유튜브캡처 이날의 단독 사회자였던 희극배우 플로렌스 포레스티는 참석하지 않은 폴란스키를 내내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영화 제목을 소개할 때 그는 "나는 고발당했… 아니, 나는 고발한다"라고 말하며 실수를 가장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감독상 수상자로 로만 폴란스키가 호명되었을 때 장내는 폭풍전야의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찼고, 이윽고 소심한 박수와 몇몇 대담한 야유가 터져나왔다. 배우 아델 에넬이 "이것은 수치"라 소리치며 시상식장을 떠난 데 이어 몇몇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결정적으로 사회자 포레스티는 무대 뒤로 퇴장한 후 다시 나오지 않아, 집행위원장이 마지막 상인 작품상 을 호명하고 시상해야 했다. 포레스티는 스스로 "독이든 선물과도 같다"고 표현했던 이날의 사회자 자리를 결국 내려 놓아야 할 만큼, 폴란스키의 감독상 수상은 "구역질 나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지난해 11월, 로만 폴란스키의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영화 의 개봉을 앞두고, 프랑스의 사진작가 발렌틴 모니에(63)는 자신 18살이던 1975년에 폴란스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발렌틴 모니에가 45년만에 침묵을 깬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때문이었다. "나는 고발한다." 그녀가 늘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  영화 포스터 ⓒ .   프랑스법은 성범죄 피해자가 18세가 된 이후 30년까지를 성범죄의 공소시효로 두고 있다. 모니에는 이제 폴란스키를 법정에 서게 할 순 없지만, 그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고발에 즉각 반응하며, 전국 곳곳에서 그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키고, 보이콧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는 소소하게 관객을 불러모아 프랑스에서 15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45년 전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 더구나 공소시효가 지난 지 오래여서 법정에서 진실을 다툴 수도 없는 사건으로 한 감독과 영화를 심판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상이 이토록 격렬한 영화계의 비난과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그에게 같은 종류의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10여 명이나 더 있기 때문.   로만 폴란스키가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라는 치명적 낙인을 얻은 것은, 1977년 3월 미국에서 13살 소녀였던 사만다 가이머를 성폭행한 혐의 때문이다. 사건 다음날 체포된 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했다. 이 일로 그는 3개월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42일만에 석방된다. 그런데 그를 풀어주었던 판사가 생각을 바꿔 그에 대한 재판을 재개할 뜻을 전했고, 이번엔 50년까지 형이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폴란스키는 미국 땅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고, 프랑스는 범죄자 인도를 요청하는 미국의 청을 거절했다. 폴란스키가 뒤늦게 사만다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서 미안함을 표하고, 민사소송의 결과로 일정의 배상금도 지급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2009년 그가 취리히에서 스위스 경찰에 의해 붙잡히면서 폴란스키는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을 각인시켰다. 사만다 사건이 미국에선 여전히 형사법상으로 종결되지 않아 수배중인 상태였고, 스위스와 미국간의 조약에 따라 스위스 경찰이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8개월을 자신의 스위스 집에서 전자팔찌를 차고 지내야 했으나 결국 스위스 당국은 이미 죄값을 치렀다며 그를 미국에 송치하지 않고 석방했다. 지금도 인터폴에 의해 수배중인 그는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이 세 나라를 제외하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이후 1970년대에 폴란스키에 의해 성추행이나 폭력을 겪었다는 여성들이 10명이나 더 등장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폴란스키를 고소하지 않았고, 이제는 30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여, 그 죄를 물을 수조차 없게 됐다. "당신들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모든 피해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수상." 배우 아델 에넬의 평대로 로만 폴란스키의 세자르 감독상 수상은 분노한 여성들을 불끈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의 영화제목대로 고루한 마초들의 세상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적 수상과, 시상식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성들에 대한 반응이 밤새 인터넷 공간을 달구었다. 시상식 다음날에는 소설가 비르지니 데스팡트가 활활 타오르는 폭탄 같은 글을 에 기고했다.   "국회에서든, 문화계에서든, 당신들 권력자들은 완전하고 지속적인 존중을 요구하죠. 그것이 강간이든, 경찰의 강제집행이든, 세자르상이든, 당신들의 연금개혁이든. 게다가 피해자는 침묵해야 하고요. (중략) 당신들이 군림하기 위해 창조한 이 세상은 초라하고 숨을 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제 일어나 떠납니다. 끝났습니다. 우린 일어나, 떠납니다. 엿먹어라." 17세 때 자신도 강간의 피해를 입었다고 밝힌 이 여성 소설가는 폴란스키가 감독상 수상자로 지목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델 에넬의 행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 같은 글을 썼고, 그의 글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배우 코린 마시에로도 세자르상 집행위를 가리켜 "부르주아, 헤테로, 가톨릭, 백인, 우파들 집단"이라며 맹비난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 시위대와 맞닥뜨린 폴란스키 감독 2017년 10월 3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시네마테크 건물에 폴란드계 프랑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도착하자 시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폴란스키는 이날 자신의 회고전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 EPA/연합뉴스   로만 폴란스키는 1933년 파리에서 폴란드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다시 아버지의 나라인 폴란드로 온 가족이 돌아가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 하에 놓이자 유태인이었던 임신한 어머니와 누이, 아버지가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6살인 그만 홀로 살아남는다. 마치 40년 뒤인 1969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26살의 임신한 아내와 친구들이 광적인 살인마 찰스 맨슨 일당에 의해 살해 당하고, 혼자 살아남았던 것처럼. 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잔인한 방법으로 잃고, 세상이 만들어내는 추문에 시달리던 그가 당시를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추측할 만하다. 추악한 소아성애자라는 대중의 비난에도 일부 동정론을 펼치는 영화계 인사들이 있는 것은, 그가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는 이미 죄값을 치렀고, 더 이상 그의 어두운 과거로 영화적 성과를 옭아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03년, 영화 로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세자르상의 감독상, 작품상을 비롯 7개상 수상, 오스카에서 감독상 외 2개상을 석권할 때엔 아무도 그의 성범죄자 이력을 들추지 않았었다. 그때도 그는 여전히 인터폴이 수배중인 범죄혐의자였고, 그 때문에 오스카상을 타러 미국에 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미투 이후, 하비 와인스타인(미투운동을 촉발한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이 마침내 감옥으로 끌려간 이후, 더 이상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지도, 범죄자들이 앉아 있는 시상식장에 예의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25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온 86세의 현역 감독, 문제적 인간, 로만 폴란스키는 낡은 세계와 새로운 힘으로 무장하며 깨어난 세계를 충돌시키는 폭풍을 일으키며 그 한가운데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 세자르상 : 프랑스 영화인들의 축제로, 우수한 프랑스 영화들을 대상으로 상을 주는 국내영화상이다. 외국영화상 부문도 있는데, 2020년 수상작은 봉준호의 이었다.
2887    [세계속에서] - 지나간 100, 앞으로 100... 댓글:  조회:3595  추천:0  2020-03-05
역사의 순간 꼼꼼히 기록한 100년…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2020.03.05.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한국언론 최초로 조선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조선일보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공식 행사를 취소하고, 앞으로의 100년을 다짐했습니다.  이루라 기자입니다.  [리포트] 민족 독립을 외친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5일. 우리말로 쓴 민족지, 조선일보가 탄생합니다.  정진석 / 교수 "피의 대가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야말로 3.1 운동으로 전국민이 들고 일어나니까 결과물로서 조선, 동아일보가 생겨났다..." 조선일보는 가장 먼저 우리말 보급에 힘씁니다. 당시 인구 2천 만명 중 1700만 명이 문맹이었습니다. 또 민족 시인 한용운, 백석, 홍명희, 윤동주 등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해, 거듭된 정간과 폐간 속에서도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할 말은 했습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졌을때  이승만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고..." 조선일보는 '젊음을 바친 학생들의 거룩한 영령'이라는 사설을 썼습니다.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두고 정부에 떳떳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대한민국이 안정기로 들어선 1990년대 초. 조선일보는 언론사 최초로 환경운동을 기획해 유엔환경계획의 글로벌 500 상을 수상했습니다. 특히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사실보도를 통해 권력을 감시해 왔습니다.  조선일보는, 코로나 19 상황을 고려해 공식 행사 대신 조촐한 사내 행사를 통해 100주년 의미를 되짚었습니다.  방상훈 사장 "지난 100년이 그랬듯 앞으로 100년에도 사실보도라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권력을 비판하고 사실을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존재 이유입니다." TV조선 이루라입니다.  /이루라 기자
2886    [별의별] - 세월, 시간, 시계, 시시비비... 댓글:  조회:4221  추천:0  2020-03-04
  "가장 비싼 대통령 시계는?"… 역대 디자인, 중고값 총집합 2020.03.04.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각양각색 역대 대통령 시계 디자인. 박정희(왼쪽 상단부터 차례대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전·현직 대통령 기념 시계. ‘박근혜 시계’가 난리다. 지난 2일 기자회견 도중 신천지 이만희 교주가 착용한 ‘박근혜 시계’ 정품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사과 큰절’은 잊히고, 금장으로 치장한 시계만 빛낸 꼴이 됐다. 이만희 교주가 찬 시계가 관심을 끈 덕분인지 ‘대통령 시계’ 키워드는 4일 오후 현재 네이버 쇼핑 시계 분야 2위를 질주 중이다. ■대통령 시계가 뭡니까? 첫 대통령 시계 출시는 ‘박정희 정권’ 때다. 위엄 있는 봉황 문양과 친필 서명을 넣은 손목시계와 탁상시계다. 당시 보기 드문 ‘오토매틱 무브먼트’ 기술을 접목했다. 시계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1970년대. 청와대에서 만찬을 즐긴 새마을지도자들이 첫 선물을 받았다. 이후 시계는 보통 국가유공자나 외빈 선물용으로 쓰였으며, 1982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종합 우승 복싱 선수단, 보훈가족 등에도 증정됐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내규에 따라 청와대 행사 초청자, 훈장 포장 대상자, 생일을 맞은 청와대 직원에게 시계를 선물로 준다. 시계 제작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실 담당이다. 일반 예산으로 개당 4만 원에 제작한다. 납품량은 매월 1000여 개. 시계마다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수령자는 모두 기록해 관리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시계 전문 중소기업에 의뢰해 제작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업체명은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시계는 정·관·재계 등에서 현 정부 ‘실세’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정치권에서도 특별한 친분 없이는 받기 힘들다고. 부산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 시계가 여권 일각에서 ‘이니(인이) 시계’로 불리며 인기가 고공행진했다”면서 “청와대 관리가 워낙 철통이어서 김정숙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도 받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미래통합당 이성권 부산진을 예비후보는 “당시 시계를 요청하려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줄 것인지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일했던 이해성 민생당 부산시당위원장도 “‘노사모’ 회원은 대통령 시계 가지는 걸 영광으로 여겼다. 다만 시계와 관련된 일화까지는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최고 디자인은? 김영삼,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시계 뒷면. 엇비슷하지만 시계마다 디자인은 제각각이다. 여러 가지 출시 버전이 있지만, 기본 모델만 보자. ‘깔끔형’은 박정희, 전두환, 노무현, 박근혜 시계다. 분·초침과 봉황문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은장’을 둘렀다. 약간 촌스러운 느낌이 나는 요일, 날짜를 표기하기도 했다. 노무현 시계는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사각형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화려형’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시계. 테두리나 시간 문양 등에 눈에 띄는 노란색 빛의 금장을 둘렀다. 노태우 시계의 일부 버전은 알알이 박힌 화려한 금테두리가 눈길을 끈다. ‘도시형’은 현직 대통령인 문재인 시계다. 요즘 유행하는 은은한 로즈골드색으로 분위기를 냈다. 각 시계 뒷면은 해당 정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김영삼 시계 뒷면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적혔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좌우명이다. ‘세계화 추진’ 정부답게 영문으로도 새겼다. 노무현 시계에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 노무현’ 문구가 새겨졌다. 이명박 시계에는 대통령 내외의 친필 사인으로 장식됐다. ‘스폐셜 에디션’도 출시됐다. 김대중 시계는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 시계 두 종류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와 한국 시각을 동시에 나타내는 시계를 만들어 이라크로 파병된 자이툰부대에 선물했다. ■‘유니크’할수록 비싸…최고 ‘중고 시계’는? 4일 오후 3시 20분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 올라온 최근 판매글 참고. 세부 모델마다 다를 수 있음 이만희 교주의 박근혜 시계 착용 논란에 ‘대통령 시계’ 몸값이 덩달아 뛰고 있다. 인터넷 카페, 블로그, 중고거래 사이트 등 곳곳에서 시계 판매글이 줄줄이 올라온다. 남녀 세트에 스폐셜 에디션까지 등장했다. 케이스, 보증서까지 있어 애프터서비스까지 된다고 홍보하고 있다. 금액은 천차만별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박정희 시계가 60만 원으로 월등히 비싸다. 일각에서는 정권에 대한 향수, 최초의 청와대 시계, 제작 방식(일제 오토매틱 무브먼트)이 인기를 끈 것으로 본다. 이어 모델과 상품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재인, 박근혜, 노무현 시계 순으로 가격이 높다. 시계에 새겨진 대통령 이름 위치 등도 제각각이어서 짝퉁인지 진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박근혜 시계는 11만 원으로 시세가 형성된 이후 한때 30만 원 이상으로 올랐다. 그러나 탄핵 이후 10만 원대까지 떨어졌다가 최근 다시 가격이 오르는 추세다. 노무현 시계는 대통령 서거 이후, 유족 기부 명목으로 180만 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고 한다. 짝퉁 제조는 불법이다. 청와대에 따르면 봉황 휘장과 서명이 각각 공기호(정부기관 인장·서명·기호), 공서명(정부기관 관계자 서명)이어서 위조해서 만들면 안 된다. 민정수석실에서 위조품 유통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우리도 있다 문희상(왼쪽부터), 정세균 전현직 국회의장,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제작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시계. 기념 시계는 앞선 대통령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자신의 이름으로 시계를 제작했다. 국무총리 신분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기 때문에 봉황 문양은 새겨지지 않았다. 황교안 시계도 20만 원 내외로 가격이 형성됐다. 특히 중고나라 사이트 등에서는 판매자보다 구매자가 상대적으로 많다. 권한대행이다 보니 제작 물량도 적고, ‘권한대행 시계’라는 희소성 때문으로 분석한다. 이 밖에 정세균, 문희상, 정의화 등 전·현직 국회의장, 일부 지역 국회의원 등도 시계를 제작했다. 인터넷 블로그 등에서 10만 원 내외로 거래되고 있다. 국회 문양과 함께 자신의 이름 석자나 ‘국무총리’ 등의 문구를 새기는 방식으로 디자인했다. /박세익·이승훈 기자 =================================================/// ‘손목 위의 완장’ 대통령 시계의 허무한 역사  2020.03.04  인쇄스크랩글자크기 작게글자크기 크게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 공유 이메일 공유   역대, 현직 대통령 시계의 워치페이스(시계상판)들. 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시계 이만희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 총회장이 2일 오후 경기도 가평군 신천지 연수원 '평화의 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 총회장의 손목에 청와대 박근헤 전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가 보이고 있다. 가평=고영권 기자 지난 2일 사죄 기자회견을 한 이만희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 총회장의 시계가 논란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손목 시계를 이 총회장이 지니고 있는 것을 두고 정치적 해석이 분분하자 박 전 대통령측은 집권 당시 제작하지도 않은 ‘가짜’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온라인상에선 일부 국회의원들에게만 전달된 ‘한정판’일 가능성이 제기됐고, 여기에 “과거 정치활동을 했던 성도가 자신이 가진 ‘박근혜 시계’를 선물한 것”이라는 신천지측의 해명이 더해지며 논란은 더 커졌다. 진품 가품 여부와 상관없이 이 총회장의 철 지난 ‘박근혜 시계’ 논란은 역대 대통령 시계의 기억을 소환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 시계는 ‘손목 위의 완장’ 같은 존재였다. 대통령으로부터 시계를 선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최고 권력자의 측근이자 그 비호를 받는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 후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사회는 바뀌었지만 이 같은 인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권력 자체를 상징하던 대통령 시계는 점차 지지자들 사이의 ‘레어템’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특히 정권 초기 대통령 시계에 대한 갈망이 넘치면서 ‘짝퉁’이 등장, 유통되기도 했다. 짝퉁 대통령 시계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시절에는 무서워서 누구도 만들 엄두를 못 냈고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는 권력에 억눌렸던 한을 풀 듯 다량 제작해 각계에 선물했기 때문에 굳이 가짜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특히, ‘김대중 시계’의 경우 10 종류 이상 제작됐는데 남북 정상회담이나 한일월드컵, 노벨평화상 수상 등 각종 이벤트를 기념하기 위한 시계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청와대뿐 아니라 집권 여당에서도 김대중 시계를 선물용으로 제작해 배포했고,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 시계는 아예 선물용과 판매용 두 가지 종류로 제작하기도 했다. 종로 시계방에서 만들어진 가짜 이명박 시계, 가짜 박근혜 시계 가짜 대통령 시계가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이 전 대통령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정부 출범과 동시에 가짜 ‘이명박 시계’ 1,300여개가 청계천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상인들이 무더기로 적발돼 실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그러나 퇴임 후 이 전 대통령의 인기가 폭락하면서 이명박 시계 역시 값어치가 하락했다. 현재 인터넷 중고 거래장터에선 5만 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2종류의 대통령 시계를 제작했는데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아 가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지층을 중심으로 구매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중고 시세가 25만원 선 정도로 높은 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권력의 상징처럼 비칠 수 있는 기념 시계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가 2013년 광복절 이후 청와대 방문객 중 일부 인사들에게만 기념 시계를 선물했다. ‘박근혜 시계’는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품귀 현상이 벌어지면서 가짜조차 인기를 끄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검찰이 가짜를 제작해 유통한 업자를 재판에 넘기는 일도 있었는데, 해당 피의자가 과거 가짜 이명박 시계 제작자로 드러나기도 했다. 대통령 시계의 뒷면 문구.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노무현, 이명박 시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제작한 시계 뒷면에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황교안'이라는 각인이 선명하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도 ‘VIP 시계’를 제작했다. 통상 총리가 대통령을 대행해 선물하는 시계의 경우 전면에 봉황 무늬는 있으나 대통령의 서명이 없고 시계 뒷면에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글씨만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황 전 총리는 시계 뒷면에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황교안’이라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 넣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황교안 시계’ 역시 당시 중고 장터에 나왔는데, 권한대행 시계라는 희소성 덕분에 20만원 선에 거래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도 시계를 만들었다. ‘문재인 시계’는 청와대 행사에 초청된 손님에게 1인당 1개씩만 선물로 증정한다. 시계를 한 번 선물 받은 사람은 두 번째 방문 시엔 시계 대신 다른 선물을 받게 된다. 청와대가 선물 수령자 명단과 시계 수령자 명단을 일일이 대조해 확인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시계를 두 번 받는 경우는 없다. 청와대는 “증정용 기념 시계의 시리얼 넘버를 관리한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고 확인했다. 집권 초기 문 대통령 자신도 문재인 시계를 받지 못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도 못구한다는 '문재인 시계'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이오리기로 문재인시계만들기와 스마트와치의 와치페이스를 공유하고 있다. 대통령 시계는 보통 증정용이지만 중고 장터에서는 꾸준히 거래되고 있다. 시계 자체의 희소성이나 당시 대통령의 인기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진품 박정희 시계의 경우 빈티지로써의 가치가 인정돼 50만원선에 거래된다. 전두환 시계는 7만원, 노태우 시계는 4만원, 김영삼 시계는 5만원, 김대중 시계는 15만원 선이다. ‘손목 위의 완장’ 대통령 시계의 증정 취지는 어느 대통령을 막론하고 사회 공익과 질서 유지를 위한 희생, 봉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여기에 권력이라는 인간의 탐욕이 얹히면서 의미는 변질됐다. 이 총회장 손목 위의 철 지난 대통령 시계는 그 진위와 정치적 의도를 떠나 스스로가 무상한 권력에 기대 허황된 꿈을 쫓고 있음을 증명한 소품에 불과했다. /류효진 기자         
288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의식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462  추천:0  2020-03-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범도   [ 洪範圖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기타 홍범도(洪範道)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68년(고종 5) ~ 1943년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평안북도 양덕 성별 남 관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대표관직(경력)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홍범도(洪範道). 평안북도 양덕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삼수(三水)·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趙孟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같은 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갖고 정예부대를 인솔,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1920년 5월 합작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조직으로 제1군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27일 북로사령부로 개명되었고,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하였다. 최진동이 독군부 부장, 안무가 부관, 홍범도가 북로제1군사령에 임명되었다. 확대 개편된 500여 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조직을 총망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그 뒤 간도지방의 김좌진·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 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東文社書店, 1946)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4(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관련이미지 1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홍범도 원본보기 출처: Wikimedia [네이버 지식백과]홍범도 [洪範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거 77년 만에 고국 땅 묻히는 홍범도 장군   세계일보     2020.03.01.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지. 1943년 서거 후 7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제101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가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인 가운데 문 대통령은 국가보훈처에서 신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두 전투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취지의 특별 지시를 내릴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합작한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에 각각 벌어졌으며 나란히 올해 100주년을 맞는다. 문 대통령은 이날 3·1절 기념사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 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며 “오늘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가속화하던 1907년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중국 만주의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4개월 뒤에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전투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던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소련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사후 그곳에 묻혔다.   이날 문 대통령은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홍범도 장군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며 “협조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오신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해 특히 카자흐스탄 측에 고마움을 전했다. 홍범도 장군과 늘 함께 거론되는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는 충남 보령에 있으며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김좌진 장군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김좌진 장군의 경우 청산리 전투 후에도 중국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0년 1월 *****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좌진 장군이 워낙 투철한 반*주의자이다보니 **진영의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 장군의 유해는 장례 절차 후 동지들에 의해 비밀리에 고국으로 운구, 임시로 안장됐다가 1957년 지금의 묘지로 이장됐다. /김태훈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일 발표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정부의 숙원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방문 때 독립유공자인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도 추진했다.     하지만 홍 장군의 유해는 지난해 돌아오지 못했다. 분단의 현실과 장군의 묘역이 여전히 동포 사회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정부는 당시 “홍 장군의 유해도 봉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우리나라가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부터 추진됐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연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카자흐스탄 정부나 동포 사회는 남북 사이에서 장군 유해 봉환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장군이 여전히 카자흐스탄 동포 사회에서 정신적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하고 장군을 민족 지도자로 기린다. 카자흐스탄 정부 역시 1994년 ‘홍범도 장군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을 존중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해 봉환에 가장 동의가 필요한 장군 후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홍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의병 투쟁에 몸을 던졌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올라 간도와 연해주에서 일제와 싸웠다. 3·1 독립운동 이듬해에는 독립운동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다. 하지만 장군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정책 탓에 연해주에서 크질오르다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장군은 이후 움막집에서 살며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을 만큼 힘든 말년을 보내다가 75살로 숨졌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겨레신문 /성연철 기자  =================================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모셔온다" 박정엽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20.03.01    [제101주년 3·1절 기념식] 文대통령,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 때 洪장군 유해 봉환 소식 전해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 국가 존재가치 일깨우고 선열 애국심 되새기는 계기 되길"   홍범도 장군/반병률 교수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1일 3·1절을 맞아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항일(抗日) 무장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전승(戰勝)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이뤄질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을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면서 "오늘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분의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이라며 "협조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오신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갈 힘을 키우는 일"이라며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는 "1920년 1월 13일,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독립군 홍범도 의용대장의 권고문을 실어 무장투쟁의 정당성과 국토회복을 위한 각오를 다졌다"며 "1월 30일에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 될 76명의 졸업식이 열렸다"고 했다. 이어 "그해 6월,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로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며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였다.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라 불렀다"고 했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와 체코군 간에 무기 매수계약이 이뤄졌다"며 "9000명의 인간사슬로 연결해 운반해온 이 무기들이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반자가 되었다"고 했다. 홍 장군은 1907년 의병이 일어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을 지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던 홍 장군은 1937년 러시아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사후 이곳에 묻혔다.     홍범도 필적   ===================================///   '봉오동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선옥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0 좋아요0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19.12.30    최진동 장군 동생, 운산 추정 사진도 공개 일제강점기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최진동(1882∼1945) 장군의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최진동 장군은 독립군 부대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을 지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30일, 레닌에게 선물 받은 권총을 찬 최진동 장군이 홍범도 장군과 함께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반 교수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있는 인물을 고려인 출신의 볼셰비키 적군(赤軍) 장교로 추정했는데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 장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홍 장군과 함께 레닌에게 권총과 군복을 선물 받았다면 그에 버금가는 독립군 대장으로 예우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 교수는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해 그해 8월 공개했다.  당시 반 교수는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참가 접수증과 사진 여러장을 확보했지만 홍범도 장군과 함께 사진에 찍힌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하다가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 장군임을 확인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레닌에게서 선물 받은 권총을 차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반병률 교수 제공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1885∼1945) 장군의 손녀인 최성주(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씨는 "이 사진을 미국 하와이에 사는 당고모(최진동 장군의 딸 최경주 씨)에게 보내 '아버지가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찍은 이 사진이 어릴 때 집에 걸려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최경주(87) 씨는 최진동 장군 자녀 가운데 홀로 생존해 있으며 현재 최진동·최운산 형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 한편 최운산 장군 유족은 반 교수가 입수한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 속에서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샤프카(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외투 차림의 세 인물 중 가운데가 최 장군이라는 것이다. 왼쪽은 여운형이고 오른쪽은 알 수 없다. 최성주 씨는 "제대로 된 할아버지 사진이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영상 속에서 발견하고 반가웠다"면서 "하와이의 당고모께서도 '작은아버지가 맞는다'고 확인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 교수는 "참가 접수증에서 최운산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해 사진 속 인물이 최운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중국의 경우 옵서버로 참가해 참관기를 남긴 사람도 있어 최운산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 지도자들. 왼쪽은 여운형이고 가운데가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된다./반병률 교수 제공 최진동·운산 형제는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아들이다. 이들은 동생 최치흥과 함께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봉오동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로 기록돼 있다. 봉오동을 본영으로 하는 독립군 이름은 북로독군부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간도국민회군과 최진동-최운산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한 부대였다. 1군사령관은 홍범도, 독군부 부장(연합사령관)은 최진동이었다. 축산, 미곡, 무역에 주류, 제면, 성냥, 비누 공장까지 운영해 간도 제1의 거부가 된 최운산은 독립군에 자금을 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288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36  추천:0  2020-02-27
  조선 함경도 지도, 보물되다 2020.02.27.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요약봇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지금의 함경도 아우르는 관북여지도 조선 영조때 제작된 총 13면 지도집 동아대 석당박물관 소장품 기법과 표현 탁월해 보물로 지정보물 제2061호로 지정된 ‘관북여지도’의 제1면인 길주목. /사진제공=문화재청 [서울경제] 한반도 북동부를 칭하는 조선 시대 관북(關北) 지방의 마을과 군사 요충지를 13면에 걸쳐 그린 지도집이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조선의 영조 재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여지도(關北輿地圖)’를 보물 제2061호로 지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유물은 부산 동아대 석당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관북여지도’의 원조는 1719년(숙종 45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이삼(1677~1735)의 지시로 제작된 함경도 지도집이다. 조선과 청나라 정계(定界)를 계기로 함경도 지역 방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시대상황이 반영됐다. 당시 지도에는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호구수(戶口數), 군사수(軍士數), 역원(驛院·일종의 여관) 등 관련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관북여지도’는 지리적 내용과 표현방식 등을 근거로 볼 때 1738(영조 14년)~1753년(영조 3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총 13개 면으로 이뤄져 있는데 1면의 길주목(吉州牧)을 시작으로 2면 명천부(明川府), 3면 경성부(鏡城府), 4면 부령부(富寧府), 5면 무산부(茂山府), 6면 회령부(會寧府), 7면 종성부(鍾城府), 8면 온성부(隱城府), 9면 경원부(慶源府), 10면 경흥부(慶興府), 11면 함관령(咸關嶺), 12면 마운령(磨雲嶺), 13면 마천령(磨天嶺)으로 이어진다. 보물 제2061호로 지정된 ‘관북여지도’의 제5면인 무산부. /사진제공=문화재청 이 지도는 횃불과 연기로 먼 지역에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조선의 통신방식인 봉수(烽燧)를 표시하고 이들 사이의 연락 관계를 실선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른 함경도 지도나 지방도에서 확인된 적 없는 참신한 방식이다. 봉수 간의 거리도 수치로 표기해 이용자가 알아보기 편리하다. 문화재청 측 관계자는 “화사한 채색의 사용, 회화적으로 그려 실제감을 살린 지형(地形)의 모습, 강물 표현 등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의 솜씨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면서 “‘관북여지도’는 현존하는 북방 군현지도(郡縣地圖) 중 정밀도와 완성도가 뛰어나고 보존상태도 매우 좋으며 조선 시대 지도 발달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등 국내외 현존하는 약 8점의 관북여지도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라고 문화재 지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관북여지도의 마지막 13면인 마천령. /사진제공=문화재청
2883    [별의별] - "평평"... "둥글"... 댓글:  조회:3810  추천:0  2020-02-25
  ‘평평한 지구’ 증명 나선 비행사 결국 사망 2020.02.24.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구본권의 사람과디지털] “우주로 날아 평평한 지구 증명해보이겠다” 또다시 로켓발사 했다가 귀환못하고 추락사’평평한 지구’를 입증하겠다며 미국의 마이크 휴스는 2014년부터 사제로켓을 개발해 여러차례 발사를 거듭해왔으나, 2020년 2월22일 로켓 발사에서 무사귀환하지 못했다.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로켓을 타고 하늘로 치솟은 ‘플랫 어스(Flat Earth)’ 신봉자가 결국 사망했다.  지난 22일 오후 2시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동쪽편 사막에서 평평한 지구 탐사 로켓발사가 이뤄졌다. 마이크 휴스 자체 제작 로켓이 이동형 장비에 탑재돼 있다. @justindchapman 트위터 캡처.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사제로켓 개발자이자 비행사인 마이크 휴스가 지난 22일 오후 2시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동쪽의 샌 버나디노 카운티의 사막에서 사제로켓 발사 직후 추락사했다. 마이크 휴스는 전직 리무진 운전사로, 2002년 링컨 타운카 리무진에서 31미터를 점프한 세계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2018년 3월엔 모하비사막에서 자신이 개발한 사제로켓을 타고 572m 상공까지 올라간 뒤 낙하산을 이용해 무사귀환한 바 있다. 22일 마이크휴스 사제로켓 발사 직후의 모습. @justindchapman 트위터 캡처. 스페이스닷컴에 따르면, 휴스의 이번 로켓 발사는 1525m 고도에 이른 뒤 귀환하는 게 목표였으나 사제로켓에서 발사 몇초 만에 착륙용 낙하산이 너무 일찍 펼쳐지는 바람에 사고로 귀결했다.  이번 발사는 미국의 사이언스 채널로 방영될 예정인 TV 시리즈의 ‘홈메이드 우주비행사’ 프로그램의 일부로 제작과 촬영이 이뤄졌다. 휴스의 사제로켓은 증기추진 엔진을 사용하며, 개발비용은 1만8000달러(약 2000만원) 안팎이다.  샌 버나디노 카운티 당국도 22일 마이크 휴스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  ‘평평한 지구’는 황당한 허위정보이지만,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활성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음모론이다. ‘평평한 지구’ 학회는 국제적으로 회원 규모가 10만명을 넘으며, 국제콘퍼런스(FEIC)를 조직해 세계 각국을 돌아가며 전체·지역별 학회를 열고 있다.  ■ 지구 평면설이란?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은 “지구의 중앙에 있는 북극을 중심으로 각 대륙이 배치돼 있고 가장자리를 이루는 바다의 끄트머리는 45m 남극 얼음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넘치는 것을 막아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지구가 공 모양이면 수평선이나 지평선은 양쪽 끝이 아래로 휘어져 보여야 하나 그렇게 관찰되지 않는 게 증거라는 등 200여가지의 ‘지구 평면설 증거’ 동영상을 공유한다. 이들은 중력은 없다고 말하며 아폴로 계획의 달 탐사와 착륙도, 우주로켓과 국제우주정거장, 우주인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구 평면설에 어긋나는 모든 사실적 증거에 대해서는 ‘조작된 영상’이라고 묵살한다. 구본권 선임기자 starry9@hani.co.kr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은 지구는 둥근 공 모양이 아니라 그림처럼 원반 형태이고 중앙에는 북극이, 바다의 가장자리에는 얼음벽인 남극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한다. 관련 정보와 동영상은 유튜브를 주된 경로로 유통되고 확산되어 왔다. 유튜브 갈무리  
28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전염병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03  추천:0  2020-02-24
[글로벌 피플] “10억명 죽일 무기, 핵 아닌 미생물”… 주목받는 5년 전 예언  2020.02.25.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2015 TED서 “전염병이 최고 재난” 나토식 전염병 대응군 창설 주장 최근 “글로벌 대유행 저지 도울 것” 1억 달러 기부에 시진핑 감사 편지 빌 게이츠 빌 게이츠 “전염병 확산은 전시상황(war time)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미사일이 아니라 미생물(microbes)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64)가 5년 전 미국 테드(TED) 토크에서 전염병 대유행을 경고한 발언이 현실이 되면서 그의 ‘예언’이 재조명 받고 있다.  빌 게이츠는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인 자선가다. 그가 아내 멜린다와 함께 운영하는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중국 등에 1억 달러(약 1220억원)의 기부를 약속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게이츠 부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중국 인민일보가 23일 보도했다.  빌 게이츠는 지난 14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전미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행사에서도 코로나19에 대한 우려로 운을 뗐다. 그는 “코로나19는 세계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만약 글로벌 팬더믹(pandemic·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으로 치닫더라도 우리 재단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의사도, 병리학자도, 그렇다고 경제학자도 아닌 빌 게이츠는 2015년 왜 전염병을 주제로 ‘18분 스피치’에 나서고, 전염병에 대한 경고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걸까. 그는 인류의 가장 큰 위협으로 ‘전염병’을 꼽는다. 빌 게이츠는 “어렸을 때 가장 두려웠던 재난은 핵전쟁이었다”며 “우리 가족은 통조림과 생수통으로 가득 채워진 ‘생존 저장품(survivalsupplies)’ 상자를 지하실에 두고, 핵폭탄이 터질 경우 지하실에 숨어있을 계획을 세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재난은 핵무기도 기후변화도 아닌, 전염성이 강한 인플루엔자(influenza) 바이러스”라고 강조했다. 핵전쟁이 발발할 확률은 국가 간 정치·외교적 이해관계 때문에 희박하지만, 독감처럼 퍼지는 신종 바이러스는 언제든지 수천만 명을 사망케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1918년 스페인 독감 창궐로 1억명 사망  실제로 20세기 인류의 목숨을 앗아간 가장 치명적이었던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스페인 국립도서관에 따르면, 1918년 스페인 독감 창궐로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에서 1억 명이 사망했다. 스페인에서만 3000만 명이 죽었다. 반면 1차 세계 대전(1914~1918년)과 2차 세계 대전(1939~1945년)으로 사망한 수는 각각 2500만 명과 6000만 명으로 집계됐다.  빌 게이츠는 심지어 테러 조직이 바이러스를 활용해 대량 살상에 나설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정보 당국은 핵무기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테러리스트가 바이러스를 활용하면 수억 명도 죽일 수 있다”며 “10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무기는 핵미사일이 아니라 미생물”이라고 지적했다.  빌 게이츠에 따르면, 인공 전염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은 과거 국가 차원에서 다뤄졌으나 지금은 일반 생물학자도 할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됐다. 이 때문에 그는 “전염병 확산 가능성은 매년 커지는 중”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각국 보건 당국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게이츠는 지적했다. 그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예로 들자면, 당시 우리의 문제는 ‘시스템의 작동 여부’가 아니라 ‘시스템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며 “전염병 환자를 돌볼 전담 의료진, 치료제를 개발할 연구진, 데이터의 집계와 발표 등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영화 ‘컨테이젼’(2011,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처럼 잘생긴 전문가가 혜성처럼 등장해 신약을 개발하고 인류를 구하는 시나리오는 그저 할리우드에나 있다”며 안일한 현실을 꼬집었다.  빌 게이츠는 전염병 창궐을 전시상태로 여기고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의료계·군·학계를 진두지휘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전쟁을 대비해 항상 훈련받고 대기 중인 군인이 있듯, 전염병을 상대로도 동일한 대비책이 필요하다”며 “전쟁이 발발할 경우 몇 시간 내로 신속하게 투입되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군(軍)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핵전쟁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사용하는 핵 억제 비용을 고려하면,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서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염병 대응 조직이 해야 할 일로는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신흥국에 강력한 공중보건 체계를 구축해 산모가 위생적인 환경에서 출산하고, 아이들이 모두 백신을 맞게 지원해야 한다. 둘째, 전염병이 확산할 때 활약할 담당 의료팀을 지정한다. 셋째, 의료팀은 군대와 협력체계를 구축한다. 넷째, 워 게임(war game·전쟁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상응하는 ‘미생물 게임’을 준비한다. 다섯째, 연구·개발(R&D) 투자로 치료제를 개발해야 한다.  /배정원 기자
2881    [그것이 알고싶다] - "윷놀이" 댓글:  조회:5406  추천:0  2020-02-24
한국세시풍속사전 윷놀이     윷-국립민속박물관 분야 놀이 계절 봄(음력 1월) 날짜 음력 1월 1일 다른이름 사희(柶戱), 척사희(擲柶戱) 관련정일 설 목차 정의 유래 유래 내용 놀이방법 의미 기능 변천과정 지역사례 의의 정의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윷이라는 놀이도구를 사용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어울려 즐기면서 노는 놀이. 사희(柶戱) 또는 척사희(擲柶戱)라고도 한다. 유래 윷놀이 유래에 대한 연구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아직 그 정설은 없다. 부여의 관직명인 저가(猪加)·구가(狗加)·우가(牛加)·마가(馬加)·대사(大使)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 가설이 유력하다. 유래 윷놀이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자료는 중국의 『북사(北史)』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인데 이 책에는 부여의 저포(樗蒲)·악삭(握槊) 등의 잡희(雜戱)가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 고구려, 신라에도 윷놀이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윷놀이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고려말 『목은집(牧隱集)』에서 이색(李穡)은 저포를 세시풍속이라 하고 현재의 윷판과 같은 것으로 윷말을 써 가며 저포놀이를 하는데, 변화가 무궁하고 강약을 가릴 수 없는 이변도 생겨서 턱이 떨어질 지경으로 우습다고 하였다. 또 남녀노소가 어울려 윷놀이하는 광경을 그린 시(詩)도 있다.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와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에도 윷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고, 특히 김문표(金文豹)의 『중경지(中京誌)』 사도설조(柶圖說條)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사희변증설조(柶戱辨證說條)에서는 주역과 성리학적인 견지에서 윷놀이를 논술하고 있다. 그리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윷과 윷판뿐만 아니라 윷패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에 널리 전승되었고, 고려말 이전에 현행 윷판과 같은 것이 쓰이면서 시(詩)에 등장할 정도로 성행하였으며, 나아가서 조선조에는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윷놀이는 윷과 윷판 및 윷말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놀 수 있다. 이 간단한 도구가 준비되면 편을 갈라서 윷을 던져 나온 윷패에 따라 윷말을 써서 먼저 4동이 나면 승리한다. 매우 간단한 도구와 단순한 방법으로 놀이를 하지만 놀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수들이 흥을 돋우기도 하고 탄식을 자아내기도 한다. 윷의 종류는 가락윷·밤윷·콩윷 등으로 구분된다. 가락윷은 장작윷과 싸리윷이 있다. 장작윷은 길이 20센티미터 정도에 직경 3~5센티미터 정도의 소나무 두 개를 쪼개어 만들고 싸리윷은 길이 10센티미터에 직경 2센티미터 가량의 싸리나무를 쪼개어 만든다. 가락윷은 대체로 중부지방에서 많이 가지고 논다. 밤윷은 굵기가 새끼손가락 정도, 길이는 3센티미터 정도 되는 윷을 종지에 담아 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어 바닥에 붓는 식으로 논다. 주로 경상도 등의 남부지방에서 많이 논다. 콩윷이나 팥윷은 콩이나 팥알의 절반을 쪼개어 만든 윷으로 주로 북부지방에서 많이 논다.  윷판이 언제 만들어져서 보편화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 말기 이색의 『목은집』에 현행의 윷판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이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문표는 『중경지』 사도설조에서 윷판 중앙의 ‘방혀’는 북극성이고 윷판의 바깥까지 둥근 모양은 하늘을, 안의 모난 것은 땅을, 윷판을 이루는 점들은 별자리를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윷판의 네 점과 중점을 오행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윷말이 윷판을 돌아 나오는 양상을 춘분(春分)·하지(夏至)·추분(秋分)·동지(冬至)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윷말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하는데, 남자들은 주로 바둑알을 많이 이용하고 여자들은 숯이나 사금파리 등을 이용한다. 놀이방법 윷놀이를 할 때 편 구성은 아주 다양하게 할 수 있다. 크게는 마을 단위와 문중 단위로 편을 가르지만 개별 윷놀이는 아주 다양하게 편을 가를 수 있다. 편을 가를 때 윷을 던져서 편을 가르기도 하고 또 마을의 골목이나 도랑을 경계로 가르기도 한다. 개별 윷놀이나 문중 윷놀이를 할 때는 주로 나이순으로 윷을 던져서 편을 가르고, 마을 전체가 놀이를 할 때는 마을의 골목이나 도랑 등을 경계로 가른다. 간혹 지역에 따라 심지를 뽑아 편을 가르기도 한다. 마을 전체나 문중이 윷놀이를 할 때는 마을의 큰집이나 종가(宗家) 혹은 서원(書院) 마당에서 한다. 그러나 소수 인원이 윷놀이를 할 때에는 방이나 대청 등 적당한 공간만 있으면 놀 수 있다. 윷놀이를 할 장소가 결정되고 편을 가르면 바로 윷놀이가 시작된다. 먼저 윷을 던져서 선후의 차례를 정한다. 선후가 결정되면 상대편과 교대로 윷을 던져서 나오는 윷패에 따라 윷말을 써서 윷말 4동이 다 나면 이긴다. 윷말은 ‘참’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놀이꾼이 윷을 던져서 나온 윷패에 따라 윷말을 쓰는데 윷말이 전진하다가 자기편이나 상대편의 윷말을 지나쳐 갈 수 있다. 이때 만약 자기편의 윷말이 있는 지점에 도착하면 두 윷말을 묶어서 한꺼번에 나아간다. 만약 윷말이 상대편 윷말이 있는 곳에 도달하면 그 윷말을 잡으며 윷을 한 번 더 던진다. 그러나 참에 있는 윷말을 잡았을 때는 한 번 더 던질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윷판에 윷말을 쓰는 데 다양한 규칙이 있어서 승부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뒤도나 자동임신, 퐁당 등의 변이 요소가 새로이 등장해서 승부에 더 큰 변수가 생긴다. 의미 윷패는 4개의 윷을 던져서 엎어지고 젖혀진 상황에 따라 도·개·걸·윷·모로 결정된다. 윷 3개가 엎어지고 1개가 젖혀진 것은 도라 하여 한 밭을 가고, 2개가 엎어지고 2개가 젖혀진 것은 개라 하여 두 밭을 가며, 1개가 엎어지고 3개가 젖혀진 것은 걸이라 하여 세 밭을 간다. 그리고 4개가 모두 젖혀진 것은 윷이라 하여 네 밭을 가고, 4개가 모두 엎어진 것은 모라 하여 다섯 밭을 간다. 윷과 모를 했을 때는 ‘사리’라 하여 한 번 더 던진다. 윷패에 따라 밭 수를 이렇게 계산하는 근거는 동물의 걸음걸이에서 찾는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상징하고 있다. 즉 가축의 크기와 빠르기에 따라 윷패의 밭 수와 윷말의 움직임이 결정된다.  윷놀이는 정월의 마을 축제로서 남녀노소 누구나 신명으로 놀이를 한다. 윷놀이는 재미로도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윷판은 농토이고, 윷말은 놀이꾼이 윷을 던져 나온 윷패에 따라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상징해 풍년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 기능 윷놀이가 다른 놀이에 비해 승부의 재미가 특히 큰 것은 이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의 원리와 윷말을 쓰는 원리 때문이다. 또한 윷말을 쓰는 원리도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서 윷패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 잡고 잡히면서 승부를 겨룬다. 여기에는 무궁무진한 변화가 따르므로 놀이꾼과 응원꾼은 흥분과 탄식을 교차되는 가운데 놀이에 몰입되어 무아지경에 이른다. 이처럼 윷놀이는 윷패의 우연성과 윷말쓰기의 합리성이 윷판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 작용하여 다양한 변수 속에서 승부를 가리기 때문에 독특한 재미가 있다. 이러한 재미는 승부와 직결되기 때문에 마지막 윷말이 갈 때 그 절정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민속놀이 중에서 집단놀이는 주로 지역이나 마을에 의해서 전승된다. 마을 단위로 전승되는 집단놀이는 마을 주민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豊農)을 기원함으로써 마을공동체가 통합하게 된다. 윷놀이는 지연공동체와 혈연공동체를 통합시킨다. 우리 선조들은 윷판을 농토로 삼고 윷놀이를 통해 윷말을 돌려 계절을 변화시키면서 항구적인 풍년농사를 기원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윷놀이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윷놀이는 윷·윷판·윷말을 이용하여 흥겨운 놀이기도 하지만 윷을 가지고 하는 윷점도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제석조(除夕條)와 『경도잡지(京都雜志)』 원일조(元日條), 『오주연문장전산고』 사희변증설조에도 새해의 길흉이나 농사에 대해서 점을 치곤했다는 기록이 있다. 변천과정 윷놀이는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윷패의 변화이다. 윷패는 도·개·걸·윷으로 일컬어지는 사진법 놀이에서 도·개·걸·윷·모로 일컬어지는 오진법 놀이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은 뒤도가 하나 더 생겨나서 육진법의 놀이로 변화되었다. 뒤도란 윷 하나에 특정하게 표시하여 놀이를 할 때 이것 하나만 젖혀지면 도가 아니고 뒤도라 하여 윷말이 앞으로 한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한밭 물러나게 된다. 따라서 윷패가 하나 더 생겨나고 윷말이 후진함으로 해서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더욱더 흥미를 자아낸다. 도 자리에 있던 윷말이 다음에 뒤도를 하면 한밭 후진하여 참으로 간다. 때로는 윷을 하여 마지막 동이 났지만 사리를 하면 한 번 더 노는 규칙에 따라 던져서 뒤도가 나면 참의 자리로 되돌아 와야 한다. 이로 인해서 승패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 뒤도의 등장은 산업화에 따라 나타나는 복잡한 사회상이나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투기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윷놀이가 산업사회의 사회·문화에도 기능적으로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윷판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윷말이 윷판을 시계방향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 사회·문화 변화에 따라 길이 바뀐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윷판에 자동임신·자동유산·퐁당 등이 등장했다. 윷판의 특정한 곳에 표시하여 여기에 다다르면 한 동 가던 것이 두 동이 되기도 하고, 한 동 가던 것이 죽기도 한다. 이는 윷판에 새로운 변이 요소가 등장한 것이다. 전자는 그 시대의 생활 양식과 사고 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에 생활양식은 좌측이 우선이고 한자 문화의 영향으로 문서(文書)나 가사(歌辭) 등 모두 좌서(左書)로 썼다. 또 사고 체계도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내려 있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동양적 사고 체계가 서양적 사고 체계로 바뀌었다. 또한 신교육구국운동이 전개되면서 학교가 급격히 증가하여 한자기록시대에서 한글기록시대로 바뀌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 변화가 윷말이 윷판을 돌아가는 길을 변화시킨 것이다. 자동임신은 뒤도라는 윷패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윷판에도 변화를 주어서 승부에 변수를 주고 놀이가 더욱 재미있도록 했다. 자동임신 밭에 가서 한 동이 두 동으로 횡재를 하지만 반드시 그 뒤에는 자동유산이나 퐁당 밭을 둠으로써 위험을 수반하도록 한다. 이러한 요소 등장은 뒤도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이후 사회 병리적 현상이나 부동산 투기 심리 등이 반영된 결과이다. 윷과 윷말은 그 변화가 미약하다. 그것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윷은 일반적으로 소나무나 싸리나무 대신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아카시아나무를 많이 이용하고, 또 공장에서 만든 제품도 나온다. 윷말도 마찬가지다. 생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추나 동전 등이 많이 쓰인다. 산업화에 따라 마을공동체는 무너졌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윷놀이는 새로운 전승집단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시문화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아파트에서 윷놀이가 행해지는 것이다. 물론 놀이꾼은 농민이 아닌 도시 근로자이다. 이들은 주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나 계(契)모임, 동창회 등이다. 즉 특수 목적으로 모인 집단이다. 이처럼 윷놀이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혈연·지연으로 구성되었던 풍농을 기원했던 놀이에서 이제는 특수 목적을 지닌 집단이 친목을 도모하는 놀이로 변해가고 있다. 지역사례 경북 안동에서는 윷놀이를 할 때 윷판과 윷말 없이 머리 속에 윷판을 그려 놓고 윷판의 명칭을 이용하여 윷말을 운영하는데 이를 ‘건궁윷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은 윷판의 명칭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또 안동에는 저포송(摴蒲頌)과 채윷대풀이이라는 윷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이 노래는 도송(刀頌)·개송(介頌)·걸송(傑頌)·유송(由頌)·모송(毛頌)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해도 장연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시절윷놀이를 한다. 대보름날 아침 ‘산패’와 ‘들패’로 나누고 각기 2~3명의 대표를 뽑아 수숫대로 만든 작은 윷을 가지고 시절윷놀이를 벌인다. 산패가 이기면 밭농사가, 들패가 이기면 논농사가 잘 되며 양쪽이 비슷한 점수를 얻으면 두 농사가 다 잘 되리라고 믿는다. 산윷(보습윷)은 평안도, 함경도에 분포되어 있는 놀이로 윷판과 윷말이 없이 노는 것이 특징이다. 산가지나 콩·팥 등을 늘어놓고 윷을 던져 나온 수대로 산가지나 콩·팥을 거두어 많이 차지하는 편이 이기는 놀이다. 의의 농경사회에 있어서 농사의 흉풍은 삶과 직결된다. 그래서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세시풍속을 통해 항구적인 풍년농사를 기원했다. 우리 조상들은 정월에 윷놀이를 통해 지연·혈연집단을 통합했을 뿐 아니라 풍년농사를 갈망했다. 윷놀이는 농경사회에 기반을 두고 전승되어 왔으나 산업사회에서도 기능적으로 적응하면서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金宅圭. 韓國農耕歲時의 硏究, 1985년 安東民俗資料誌, 1981년 東國歲時記, 牧隱先生文集, 五洲衍文長箋散稿, 訓蒙字會 林在海. 민속문화론. 學과 知性社, 1986년 김인구. 윷놀이 俗 原形 再構를 위한 試論, 1986년 成炳禧. 윷놀이의 比較民俗的 考察, 1990년 임재해. 윷놀이의 이치와 민중적 세계관, 1991년 朴長煐,. 安東地方의 윷놀이 硏究, 1992년 관련이미지 9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지윷판-국립민속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세시풍속사전 [네이버 지식백과]윷놀이 (한국세시풍속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윷놀이     이미지 크게보기 윷가락을 던지고 말을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정월대보름날의 전통 놀이이다. 이칭별칭 사희, 척사희 유형 놀이 성격 민속놀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즐기며, 4개의 윷가락을 던지고 그 결과에 따라 말[馬]을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민속놀이. 내용 한자어로는 ‘사희(柶戱)’라고 한다. 2인이 대국(對局)하여 각각 4말을 가지고 29밭이 있는 윷판을 쓰는데, 말 길은 원근(遠近)과 지속(遲速)의 방법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인원수가 많을 때에는 두 패 또는 세 패로 편을 나누어서 논다. 우리 나라 설날놀이의 하나로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날까지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유서 깊고 전통 있는 놀이이다. 이 놀이의 명칭이 윷놀이인 것은 나무막대기 넷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므로, 도·개·걸·윷·모 중 넷을 뜻하는 윷과 놀이가 복합된 것이라 추측된다. 윷의 한자어 사(柶)도 나무막대기 넷을 가지고 논다는 뜻이다. 윷놀이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사희조(柶戱條)에서 “윷놀이를 고려의 유속(遺俗)으로 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북사 北史≫와 ≪태평어람 太平御覽≫ 등의 문헌에 백제에는 저포(摴蒲)·악삭(握槊) 등의 잡희(雜戱)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저포는 오늘날의 윷놀이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윷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또, 일본 ≪만엽집 萬葉集≫ 주석(註釋)의 권위자인 시카모치(鹿持雅澄)는 ≪만엽집고의 萬葉集古義≫에서 일복삼향(一伏三向)을 ‘고로 (コロ)’, 삼복일향(三伏一向)을 ‘시쿠(シク)’라 방훈(旁訓:두루 해석)하였는데, 가쓰라기(葛城末治)는 이 삼복일향을 ‘시쿠’, 일복삼향을 ‘고로’라 훈(訓)한 데 대하여 의문을 품어 오다가 우리 나라의 윷놀이 중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삼복일향과 일복삼향이란 도(徒)와 걸(杰)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 마침내 그 뜻을 구명하였다. 즉, 우리 한자음으로는 ‘杰’자를 ‘걸’이라고 발음하므로 걸이 와전되어 ‘고로’로 되었다 하며, 그 일례로 현재도 노루[獐]를 일본인은 ‘노로(ノロ)’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이 이두법(吏讀法)은 신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시쿠는 ‘도’, 고로는 ‘걸’이라는 우리말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사카이(酒井欣)는 그의 ≪일본유희사 日本遊戱史≫에서 “일본문화는 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이것을 소화하여 일본화 하였으며, 당시 당나라문화도 삼한(三韓)을 거쳐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삼한과의 교섭도 역시 빈번히 행하여졌던 관계상 그곳의 문화·문물과 같은 것도 일본에 많이 들어왔고, 유희도 역시 그러하였다.”라고 하여 일복삼향의 유희가 삼국시대에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로 미루어볼 때, 윷놀이는 고려시대는 두말할 것 없고, 8세기 일본의 ≪만엽집≫이 찬성(撰成)되기 이전, 즉 신라시대에 이미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윷에는 가락윷(채윷)과 밤윷의 두 종류가 있다. 가락윷은 길이 3치, 너비 4푼 가량의 작은 윷과 길이 5치, 너비 6푼 가량의 중윷(서울윷)이 있고, 이보다 큰 윷은 장작윷 또는 장자윷이라 한다. 가락윷은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드는데, 가운데는 굵고 양끝은 조금 가늘게 하고, 등은 둥글게 하여 화조(花鳥) 등을 채화(彩畫)하거나 낙화(烙畫)한다. 배는 약간 평평하게 하되 모서리를 살짝 둥글려서 구르기 좋게 한다. 농가에서는 참나무로 크고 굵게 장작만 한 윷을 만드는데, 손이 작은 사람은 한 손아귀에 쥐기가 어려워서 두 손으로 던질 정도이다. 이것이 장작윷이다. 밤윷은 길이 6푼, 너비 4푼 가량이다. 이 명칭은 다 그 윷의 생김새에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장작윷 또는 가락윷이라 함은 그 모양이 장작의 축소형처럼, 또는 엿가락처럼 생긴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밤윷은 밤알처럼 작아서 그렇게 부른다. 밤윷은 장작윷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인데, 세로로 쪼개어 4개를 1조(組)로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한다. 사용할 때에는 간장종지 같은 것에 넣어 손바닥으로 덮어 쥐고 흔들어 던지는데, 손가락으로 그 종지 하반부를 쥐고 그 속에 든 밤윷만 땅바닥에 던진다. 또, 이 밖에도 정식 윷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농민들 사이에 콩밭에서나 또는 팥밭에서 작업하다 점심시간이나 잠시 쉬는 사이에 팥이나 콩 두 알을 가지고 그 절반을 쪼개어 흔들어서 땅바닥에 던져 노는 일이 더러 있다. 이러한 윷은 그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그것이 팥이면 팥윷이라 하고 콩이면 콩윷이라 한다. 이밖에 상수리나 도토리, 살구씨, 은행 등의 열매를 이용하기도 한다. 살구씨나 은행은 양면을 두 가지 빛깔로 칠하여 쓴다. 먼저 29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윷판[馬田]을 펴놓고 놀이를 하는데, 2, 3명이 보통이지만 인원이 많을 때에는 두 패 또는 세 패로 편을 나누어서 한다. 이 때 서로 윷가락을 던져서 끗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선후 차례를 정한다. 그리고 윷말은 각자 또는 각 편이 네 개씩 가지고 사용한다. 게임은 정해진 선후에 따라 시작한다. 윷가락을 던져서 네 개가 다 엎어진 것은 ‘모’요, 네 개가 다 잦혀진 것은 ‘윷’, 두개가 엎어지고 두개가 잦혀진 것은 ‘개’, 한 개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잦혀진 것은 ‘걸’, 한 개가 잦혀지고 세 개가 엎어진 것은 ‘도’라고 한다. 윷말의 가는 말[行馬]을 보면 도는 한 발, 개는 두 발, 걸은 세 발, 윷은 네 발, 모는 다섯 발을 간다. 이와 같이 다섯이 각각 걸음이 다르다. 말 네 개가 모두 입구(入口)인 도에서 출발하여 참먹이[出口]를 먼저 빠져나가는 편이 이긴다. 윷말 쓰는 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윷말 한 마리를 ‘한 동’이라 하고, 두 마리면 ‘두 동’, 세 마리면 ‘석 동’, 네 마리면 ‘넉 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나 윷이 나오면 한번 더 할 수가 있으며 계속 나오면 계속할 수가 있다. 윷말은 윷가락을 던져서 그 수가 나타나는 데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가는 말이 마지막 자리인 참먹이(결승점)를 나오는 데에는 길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는 말이 모에 오면 ‘모도’·‘모개’·‘방(中央)’으로 나올 수가 있어, 이 길은 가장 가까운 길이다. 그러나 던진 윷가락이 도·개·걸이 아니고 윷이나 모가 나오면 ‘속윷’이나 ‘속모’로 가야 하므로 이 때는 부득이 ‘찌모’(쨀밭:윷판의 첫 밭으로부터 꺽이지 않고 열다섯째 되는 밭)를 거쳐서 참먹이로 나가야 한다. 또, 가는 말이 걸이나 윷에 있는데, 던진 윷가락이 개나 도가 나오면 모로 가서 앞밭으로 접어들어 빠른 길로 나갈 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하여 걸이나 윷이 나오면 나는 말은 뒷밭까지 치올라가서 ‘뒷도’·‘뒷개’로 가야 한다. 이렇게 하여 올라간 말이 ‘뒷모’에 오게 되면 그 말은 그 안으로 ‘뒷모도’·‘뒷모개’로 내려와서 윷가락의 그 나오는 끗수에 따라 참먹이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뒷걸’이나 ‘뒷윷’에 있던 말이 던진 윷가락의 끗수가 걸이나 윷이나 모가 나오면 이때는 부득이 ‘찌도’와 ‘찌개’의 가장 먼길로 돌아가야 한다. 윷말을 잡을 때에는 앞서 가는 상대편 말 자리에 이편 쪽 말이 뒤따라가다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상대편의 말을 잡게 된다. 그러면 또 한번 윷가락을 던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상대편의 잡힌 말은 애써 멀리까지 간 것이 헛수고가 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윷가락을 던져서 처음 말이 모자리에 있는데, 다음 차례에 또 모가 나오면 처음 것을 업고서 달린다. 두 마리가 한꺼번에 뛰게 되므로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지만, 뒤따르는 상대편 말이 이것을 잡게 되면 두 말이 한꺼번에 죽게 된다. 그러므로 윷놀이는 윷가락을 잘 던져서 모나 윷이 잘 나오게 하여 연달아 던지는 데에도 승부에 영향이 있지만, 말을 잘 쓰고 못 쓰는 데에도 승패에 많은 영향이 있다. 윷가락의 호칭은 일반적으로 하나를 도, 둘을 개, 셋을 걸, 넷을 윷, 다섯을 모라 부르는데, 이는 끗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도·개·걸·윷·모는 본래가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본다. 즉, 도는 돼지[豚]를, 개는 개[犬]를, 걸은 양(羊)을, 윷은 소[牛]를, 모는 말[馬]을 가리킨 말이다. 도는 원말이 ‘돝’으로서 어간(語幹) 일부의 탈락형이다. 돝은 돼지의 고어로 지금은 일반적으로 돼지라고 하지만 아직도 종돈(種豚)을 ‘씨돝’이라 부르고, 또 일부 노인들 사이에는 돼지고기를 ‘돝고기’라 부른다. <용비어천가> 제65장에 “苑囿엣 도틀 티샤(斬豕苑囿)” 하였고, ≪두시언해≫에는 “아침 엔 과 도티 흐텟도다(旭日散鷄豕).”라 함을 보아도 도가 돼지임이 분명하다. 개는 지금도 개[犬]이다. 걸은 일부에서 코끼리(金思燁 說), 또는 신마(神馬, 梁柱東 說)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다 잘못이다. 지금의 양(羊)을 옛날에는 ‘걸’이라 하였다. 자전(字典)에 수놈의 양을 결[0x9560]이라 하는데, ‘0x9560’자를 ‘수양 결’이라 함을 보아 분명하다. 또, 큰 양은 갈(羯)이라 하는데, ‘羯’자를 ‘거세한양 갈’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걸은 한자인 결(0x9560)·갈(羯)자의 취음(取音)인 것이 분명하다. 윷은 소[牛]이니 방언에 슈·슛·슝··중·쇼·소라고 함을 보아 알 수 있거니와 ≪훈몽자회 訓蒙字會≫에 “저(摴)를 뎌, 포(蒲)를 표, 탄(攤)을 놀탄”이라 하였음을 보아서 은 슛으로, 이 슛은 또 윳으로 변하였는데, 최근에는 철자법 때문에 윷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ㅿ음(반치음)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ㅈ음으로도 변하였으나 대체로 ㅅ음과 ㅇ음으로 변하였음을 본다. 모는 말[馬]이다. 방언에 몰·모·메라 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는 몰의 어간 일부 탈락형이다. ≪훈몽자회≫에 “馬를 마”라 하였고, <용비어천가> 제109장에는 “리 病이 기퍼(我馬孔病)” 하였음을 본다. 이 ‘·’(아래아)음은 후대로 내려오며 ‘오’·‘아’음으로 변하였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지금도 ‘오’로 사용됨을 본다. 팔을 ‘폴’이라 하고, 파리를 ‘포리’라 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 가축은 고대인에게 있어서는 큰 재산이었고 또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친밀한 짐승이었다. 그러므로 그 가축의 이름과 함께 몸의 크기와 걸음의 속도도 윷놀이에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몸 크기의 차이를 보면 개보다는 양이, 양보다는 소가, 소보다는 말이 더 크며, 또 걸음의 속도도 돼지가 한 발자국의 거리를 뛰는 사이에 말이 한 발자국을 뛰는 거리는 돼지의 다섯 발자국 뛰는 정도의 거리가 되므로, 이렇게 대비하여 끗수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윷판은 29개의 동그라미로 되어 있다. 윷판의 유래에 대하여 종래 일부에서는 상대(上代)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라 하기도 하고, 부여(夫餘)의 관직제(官職制)를 모의(模擬)한 사출도(四出道)에서 나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은 윷판이 어떻게 보면 그 관직제를 모의한 것 같이도 보이는 데에서 나온 견해일 뿐 그 이상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윷판의 동그라미가 왜 29개인가에 있다. 이에 대하여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 선조 때의 문인 김문표(金文豹)의 윷판설[柶圖說]이다. 그의 설을 보면, “윷판의 바깥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안의 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즉 하늘이 땅바닥까지 둘러싼 것이다. 별의 가운데에 있는 것은 추성(樞星)이요, 옆에 벌려 있는 것은 28수(宿)를 본뜬 것이다. 북진(北辰)이 그 자리에 있으며 뭇별이 둘러싼 것을 말한다. 해가 가는 것이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들어가 중앙을 거쳐 다시 북으로 나오는 것은 동지의 해가 짧은 것이요,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들어가 서쪽까지 갔다가 다시 북으로 나오는 것은 해가 고른(平均) 것이요, 북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지나 남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북으로 나오는 것은 추분의 밤이 고른 것이다. 북에서 시작하여 동을 지나고 남을 지나고 서를 지나 또다시 북으로 나오는 것은 하지의 해가 긴 것이니, 즉 하나의 물건(윷판)이로되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윷놀이는 오늘날 단순한 하나의 오락으로서 정초에 하는 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본래의 뜻은 세초(歲初)에 농민들이 윷놀이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던 고대 농경시대의 유풍의 하나로 보인다. 산촌(山村)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보름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산촌의 젊은이들이 모여 높은지대 편[山便]과 낮은지대 편[平地便]의 두 편으로 나뉘어 윷놀이를 하였다. 그 때 높은지대 편이 이기면 그해의 농사는 높은지대 편이 잘된다고 하였고, 낮은지대 편이 이기면 낮은지대 편의 농사가 잘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놀이가 끝나면 그들은 마을의 넓은 마당으로 나와서 모심기놀음[稻植劇]을 하였다. 이러한 습속으로 보아서 윷놀이의 본의는 농사 점으로 하여오던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그 본래의 뜻이 차츰 없어지고, 오늘날에 와서는 단순히 오락적인 놀이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놀이는 한때 놀이와는 달리 아무 때나 하지 않고,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하다가 거의 예외 없이 이 놀이를 그만두었다. 이것을 보더라도 윷놀이는 일반적으로 아무 때나 하는 놀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농가에서 세초에 행하는 허다한 민속점(民俗占)은 이를 방증(傍證)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이러한 농사의 점단(占斷 : 점을 쳐서 판단함)에 있지 않고 단순히 유희나 도박이라면 연중 아무 때라도 많이 하여야 될 것인데, 윷놀이는 그렇지 않다. 요컨대, 윷놀이는 상대(上代)에 농민들이 목편(木片)으로 해마다 세초에 그해의 풍흉을 점단하는 데 그 뜻이 있었다고 보며,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농사에 관한 점풍(占風 : 점술과 지술)행위가 대개 세초에 있음에서 입증된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경지(中京誌)』 『잠곡필담(潛谷筆談)』 『주영편(晝永編)』 『성호사설(星湖僿說)』 『한국의 세시풍속』(최상수, 고려서적, 1960) 『日本遊戱史』(酒井欣) 『日本の遊戱』 「한국윷놀이의 연구」(최상수, 『신라가야문화연구』 1, 청구대학 신라가야문화연구소, 1966) 「윷의 유래와 명칭 등에 관한 고찰」(이일영, 『한국학보』 2, 일지사, 1976) 관련이미지 9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윷놀이윷가락을 던지고 말을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놀이. 우리 나라 설날 놀이의 하나로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날까지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윷놀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의 놀이 윷놀이     이미지 크게보기 나무꾼의 윷놀이 윷놀이 분포도 윷은 숫 ⇨ 윳을 거쳐 굳어진 듯 하다. 다음이 용례이다. 저(樗)  뎌 저사수도박(樗四數賭博)(『훈몽자회』 초 하 ; 10) 포(蒲)  포 유학자회저(幼學子會樗)(『훈몽자회』 초 하 ; 10) 탄(擹) 놀 탄 탄포도박(擹蒲賭博)(『훈몽자회』 초 하 ; 10) 한자 뉴(扭, 『오주연문장전산고』), 뉴(忸, 『경도잡지』), 유치(遊齒, 『잠곡선생필담(潛谷先生筆譚)』) 등은 소리 값을 빌려 적은 것이다. 가장 그럴 듯 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사희(柶戱)이다. ‘사’는 가락이 넷인 데에서 왔다(『태종실록』 17년, 『세종실록』 26년). 윷은 우리네가 오래 즐겨온 으뜸 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정월 대보름이면 집 안은 물론이고, 골목마다 윷판이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윷가락을 잡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윷가락 윷밭과 말     윷은 기구나 노는 방법이 간단하고 누구와도 즐길 수 있다. 나는 기차에서 손톱만큼 접은 방석 딱지를 원뿔꼴로 말아 세운 신문지 안으로 떨어뜨리며 놀았다. 주위 사람을 부추겨서 달걀 · 땅콩 · 소주 따위의 내기도 걸었다. 그 재미로 말하면, ‘지화자’를 외쳐며 두 손으로 뿌리는 장작윷 못지 않았다. 40여 년 전에는 서울에서 대전까지도 서너 시간이 좋이 걸렸으니, 기차에서 윷판을 벌일만도 하였던 것이다. ‘빽도’와 ‘맞춤나기’ 규칙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빽도는 일(一)자를 그은 가락이 젖혀져 도가 되면, 말을 온 길로 한 밭 뒤로 물리는 것이고, 맞춤나기는 참먹이[출구(出口)]에 이른 말은 반드시 도를 쳐야 나가는 규칙이다. 따라서 상대의 뒤를 바짝 좇다가 오히려 덜미를 잡히거나, 끝내 도가 나지 않아 판이 뒤집히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둘은 아슬아슬한 맛도 맛이려니와, 판이 기울었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지니게 하는 묘미가 있다. 윷을 언제부터 놀았을까? 『주서(周書)』 에 “투호 · 저포 따위가 있으며, 특히 바둑을 즐긴다”고 적혔다(「백제전」). 저포(樗浦)가 윷이라면, 적어도 6세기초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고려 이색(1328~1396)의 저포시 내용은 윷놀이를 닮았으며, 앞에서 든 대로 최세진도 저포를 윷으로 새겼다. 이수광(1563~1628)도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정초에 남녀가, 뼈나 나무를 잘라 만든 네 토막을 던져서 승부를 짓는 놀이가 탄희(攤戱)”라며, 『훈몽자회』에서 ‘탄’을 ‘저포’라고 한 것을 보기로 삼았다. 『동국세시기』에도 “사희는 저포이자 탄희”라고 적혔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규경은 저포와 윷을 한 가지로 설명하면서도 “윷과 저포는 거의 비슷하여, 양자를 판별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권57 「희구변증설(戱具辨證說)」). 『경도잡지』도 마찬가지이다. 붉은 싸리나무 두 토막을 쪼개어 네 쪽으로 만들며 길이는 10센티미터쯤이다. 콩을 반으로 나누기도 한다. …(중략)… 이수광이 『지봉유설』에 나희(儺戱)라 적었지만, 나는 저포(樗蒲)로 생각한다. 사희(柶戱)는 저포 종류이지만, 저포 자체는 아닌 것이다(권2 「세시」 원일). 최남선도 “옛 사람 가운데 윷이 지나(支那)의 저포에서 나온 것인듯 생각한 이가 있지마는 꼭 어떨까” 주저하였다. 신원봉은 윷과 저포는 다른 놀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저포에서 다섯 가락(五木)을 쓰는 외에, 노는 방법과 이름이 다른 점을 증거로 들었다. 그가 든 『태평어람』 내용이다. 저포는 이렇게 논다. 자(子) 360개를 3등분하고 그 사이에 관(關) 둘을 둔다. 말은 여섯, 가락은 다섯이다. 가락 위는 검은색, 바닥은 흰색이다. 검은색 면 둘에 독(犢), 흰색 면 둘에 치(雉)자를 새긴다. 다섯을 한 번에 던져서 모두 검은색이 나오면 노(盧)가 되어 16채(彩) 얻는다. 둘이 검은색, 셋이 흰색이면 치(雉)로 14채이다. 둘이 검은색, 셋이 흰색이면 독으로, 10채이다. 다섯이 흰색인 백(白)은 8채이다. 이 넷은 귀한 채이다. 개(開) 12채, 새(塞) 11채, 탑(塔) 5채, 독(禿) 4채, 효(梟) 2채, 궤(撅)는 3채이다. 귀한 채가 나오면 거듭 던지는 동시에, 말을 잡고 관을 통과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또 신원봉은 이고(李翶)의 『오목경(五木經)』을 들고 “저포는 저포와 저포판 그리고 말을 가지고 노는 점에서, 윷가락과 윷판 윷말을 가지고 노는 윷놀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던지는 가락 수와 차이 외에도 놀이판의 구성이나 가락에 새기는 글씨, 가락을 던져 나온 채에 대한 명칭 등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성병희는 “현재 안동지방에 ‘저포송’이라 하여, 오래 전부터 전승되는 윷놀이 가사가 있다. 특히 안동군 북후면 도촌동과 남선면 신흥동에서는 요즈음도 정초 윷놀이에 흔히 이 가사를 부른다.”면서, 저포와 윷을 하나로 보았다. 15세기 후반에 나온 김시습의 한문 소설 『만복사 저포기(萬福寺 樗浦記)』는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그린 애정물이다. 전라도 남원의 양생이 만복사에서 짝이 없음을 한탄하며 지내던 중, 부처와의 저포놀이에서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아내를 맞았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어째서 주인공이 부처와 저포를 벌였다고 하였을까? 이 놀이가 불교 전래나, 불교 자체와 연관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인도 승려들은 쉴 때 장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밭 이름 도 · 개 · 걸 · 윷 · 모는 부여의 관직명인 저가(猪家) · 구가(狗家) · 우가(牛家) · 마가(馬家)에서 왔다고 한다. 곧 저가는 도, 구가는 개, 우가는 소인 슝이 윷으로 바뀌었으며, 모는 마가가 뿌리라는 것이다. 걸이 코끼리라는 설이 있었으나, 임동권의 주장대로 노새를 가리키는 거루(駏)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밭 이름은 집짐승의 크기와 달리는 속도에 따라 붙인 듯 하다. 이익이 『성호사설』에 인용한 김문표(金文豹)의 『사도설(柶圖說)』 내용이다. 위가 둥근 것은 하늘, 아래가 모난 것은 땅을 상징한다. 중앙에 추성(樞星)이, 사방에 28수(宿)가 있다. 북에서 떠난 말이 동을 거쳐 가운데로 들어왔다가 다시 북으로 나오는 것은, 동지의 태양 궤도 그대로이다. 북에서 떠난 말이 동과 중앙을 지나, 다시 서를 거쳐 북으로 나오는 것은 춘분의 태양 궤도이다. 북에서 떠난 말이 동 · 남 · 서를 거쳐, 북으로 되돌아 나오는 것은 하지의 태양 궤도이다. 북에서 떠난 말이 동 · 남을 지나 북으로 나오는 것은 추분의 태양 궤도이다. 네 개의 말은 사시(四時)를 가리키고, 둥근 나무 토막 넷을 엎어지거나 잦혀지게 한 것은 음양을 나타낸다. 말을 던지면 세 개가 엎어지고 하나가 잦혀지거나, 두 개가 엎어지고 두 개가 잦혀지거나, 하나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잦혀지거나, 네 개가 모두 잦혀진다. 넷은 땅, 다섯은 하늘을 뜻하는 수이다. 둘이 마주 앉아 던져서 고농(高農)이 이기면 산골 농사가, 오농(汚農)이 이기면 바닷가 농사가 잘 될 징조이다. 반드시 세시(歲時)에 윷놀이를 하여 그 해 흉풍을 점친다. 이에 대한 이익의 설명이다. 윷은 고려 풍속인 듯 하다. 고농과 오농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중략)… 안정복(安鼎福)은 이 책을 선조(宣祖) 때 송경(松京)의 김문표(金文豹)가 지었다고 하였다. 추성은 북두칠성의 첫 별이다. 넷은 윷을, 다섯은 모를 이른다. 하도(河圖) 낙서(洛書)에서 1 · 3 · 5 · 7 · 9는 천수(天數)를, 2 · 4 · 6 · 8 · 10은 지수(地數)를 가리킨다(제4권 「만물문」 사도(柶圖)).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렇게 적었다. …(전략) 심익운(沈翼雲)도 사희경(四戱經)을 지었으므로 (김문표의 사도설)을 확인할 수 있다. 윷가락을 도 · 개 · 걸 · 윷 · 모라 부른다. 정월 초하룻날 아낙네들이 던져서 길흉을 점쳤다. 세 번 던진 뒤 주역의 64괘를 본 받아 점사를 붙였다. 혹 이것도 문표가 지었던가? 심익운의 『사희경』은 전하지 않지만, 당시 윷점이 성행되었고 이를 64괘로 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원봉은 『경도잡지』에 실린 64괘에 대해, “윷과 주역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상 체계였음에도 이를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하였다. 마당에서 벌이는 윷놀이 앞에서 든 고농 · 오농 운운한 대목은 황해도 장연지방의 시절 윷놀이를 연상시킨다. 산과 들에 사는 사람들이 윷을 놀아서 들 쪽이 이기면 벼농사가, 산 쪽이 이기면 밭농사가 잘 되리라 여긴 것이다. 이밖에 가족이나 개인의 한 해 운수를 알아보는 ‘윷점’도 있다. 윷놀이를 정월 초부터 대보름 사이에 벌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또 윷밭을 익산 미륵사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여러 산꼭대기의 큰 바위에 새겨 놓은 것도 옛적에는 놀이로서보다 신의 뜻을 알려는 의례로 벌였던 것을 알리는 보기로 생각된다(익산 미륵산 바위에 새긴 윷밭 · 밭을 따로 그린 그림 이미지 참조). 익산 미륵산 바위에 새긴 윷밭 익산 미륵산 바위에 새긴 윷밭을 따로 그린 그림     곳에 따라 윷 가락으로 여러 놀이를 즐겼다. 자새받기 · 손가락꼽기 · 산가지따기 들이 그것이다. 충청남도 부여지방의 자새받기이다. 한패가 던져 도가 나면, 똑같이 잦혀진 윷가락 옆에 다른 가락 하나를 세워 대고, 잦혀진 가락이 서너 뼘 밖으로 떨어지도록 던진다. 이것이 엎어지면 다시 한 번 던진다. 개가 나면 잦혀진 가락 두 개를 나란히 붙인 다음, 다른 가락 두 개의 끝으로 좌우 양쪽에서 떠서 한꺼번에 엎는다. 걸이 나면 잦혀진 세 가락 중 두 개를 조금 떼어 나란히 놓는다. 이들은 잦혀도 좋고 엎어도 좋다. 잦혀진 나머지 하나를 나란히 놓은 두 가락 위에 잦혀서 걸쳐 놓는다. 엎어졌던 나머지 가락으로, 걸쳐 놓은 가락의 한 끝을 탁 쳐서 엎는다. 윷이 나면 네 가락을 손바닥에 나란히 모아 걸쳐놓은 채, 공중으로 띄워 올린 다음, 손바닥을 재빨리 뒤집으면서 넷을 다시 잡는다. 이를 잦혀치기라 한다. 모가 나면 엎어치기를 한다. 네 가락을 나란히 모아 손 등에 걸쳐놓았다가 공중에 띄운 다음 재빨리 다시 잡으며, 손바닥을 잦히거나 가락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 콩 윷놀이 이렇게 거듭해서 열 번 마친 쪽은 잦혀치기 · 엎어치기 · 돌려잡기 · 장작패기 등 더 복잡한 과정으로 넘어간다. 장작패기는 윷가락 셋을 그림 '손가락 꼽기'처럼 놓고, 나머지 가락으로 한 가락 끝을 탁 치되, 셋이 각기 흩어져서 서로 닿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를 먼저 끝내는 쪽이 이긴다. 손가락 꼽기 손가락꼽기와 산가지따기는 평안북도 희천군에 퍼져 있다. 손가락꼽기는 엄지손가락을 모, 집게손가락을 윷, 가운뎃손가락을 걸, 약손가락을 개, 새끼손가락을 도로 정하고, 가락을 던져서 손가락을 먼저 모두 꼽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이미 가운데 가운뎃손가락을 꼽은 경우, 걸이 나오면 소용이 없다. 산가지따기는 산가지를 그림 '산가지따기'처럼 늘어놓고 윷이 나는 데에 따라 따는 놀이이다. 산가지가 없음에도 그에 해당하는 윷이 나오면 물어내야 하며, 산가지가 남아 있지 않으면 그만큼 빚이 된다. 이렇게 하여 산가지를 많이 딴 쪽이 이긴다. 산가지따기 중국의 저포가 하 · 은 · 주 시대에 나왔다고도 하지만, “노자가 서융(西戎)에서 배워왔으며, 호족(胡族)은 점도 친다.”는 『태평어람』의 설명이 그럴듯하다. 동한의 마융(馬融)도 “노자가 호(胡)에 들어가 저포를 두었으며, 판은 흰 단양목이나 자주 빛 양탄자로 만든다.”는 내용의 저포 노래를 지었다. 호나 서융은 신강성 및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위글족으로, 서융이 아라비아라는 설도 있다. 기원전 5~4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저포로 점을 쳤다는 부분은 흥미롭다. 『수서(隋書)』나 『북사(北史)』 「돌궐전」에도 “남녀가 모두 저포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저포에 빠져 재산을 날리고 패가 망신하였다는 기사도 적지 않다. 저포는 남북조시대(4~6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진서(晉書)』의 “갈홍은 학문을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였다. …(중략)… 바둑을 어떻게 두는지도, 저포의 치명(齒名)도 몰랐다.”는 내용이 그것이다(「갈홍전(葛洪傳)」). 당시의 저포는 360자로 이루어진 판에 다섯 개(또는 네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에 따라 말 여섯 개를 옮겼다. 주사위의 등은 검고 배는 흰빛이며, 모두 엎어지는 노(盧)의 점수가 가장 많고, 꿩(雉) · 송아지(犢) · 백(白)의 순이었다. 이들이 나오면 다시 던졌고, 남의 말을 잡거나 문을 지나갔다. 저포는 당대에 이미 사라졌다. 『태평어람』에 “당 덕종(德宗, 785~805) 때 낙양 현령 최사본(崔師本)이 옛 문헌에 쓰인 저포놀이를 즐겼다.”고 적힌 것이다. 다음은 상병화(尙秉和)의 저포 설명을 요약한 것이다. 한대 이전에 육박(六博)이라 불리다가 뒤에 저포 또는 오목(五木)으로 바뀌었다. 육박이라는 이름은 여섯 개의 가락(箸)을 던져서, 말 여섯 개를 옮기는 데에서 왔다. 12개인 말의 반은 희고 반은 검다. 고대에 육박이라고 한 것은, 말과 가락이 중요한 기구였기 때문이다. 저포는 박(博)의 다른 이름으로, “오목(五木)을 가장 높이 꼽는다.”거나, “오목으로 가락을 삼는다.”는 말처럼, 저포가 다섯 개의 가락을 쓰는 까닭에 오목이라 불렸다. 대로 만드는 가락의 길이는 20센티미터쯤 된다. 육박치기 모습 『오목경』에 “저포 가락 다섯 개는 본디 나무였으나 뒤에 상아나 뿔로 만들었으며, 위는 검고 아래는 희다. 이 가운데 두 개의 흰 쪽에 새를, 반대쪽에 소를 새겼다. 꿩과 소가 잦혀져서 소 두 마리가 나타나면 꿩 둘이 보이지 않고, 꿩 둘이 보이면 소 둘이 보이지 않는다.”고 적혔다. 『산당사고(山堂肆考)』에 “올빼미(梟) · 노(盧) · 꿩(雉) · 송아지(犢) · 새(塞)로 승부를 짓는다. 머리에 올빼미를 새긴 것이 으뜸이며 노 · 꿩 · 송아지 · 새의 순으로 나간다.”는 내용이 있다. 육조에서 당까지는 다섯 가락이 모두 엎어진 것을 노라 하였으며, 반대를 오백(五白)이라 일렀다. 처음에는 둘이 놀다가 동진 때는 셋 이상이, 당대에는 다섯이 놀았다. 초기에는 올빼미 가락을 가장 높은 수로 쳤으나, 동진대에는 노와 꿩을 첫손에 꼽았다. 놀이판에서 “노 나왔다.” 또는 “꿩 나와라.” 외친 것은 이 때문이다. 노는 꿩보다 세다. 남송(南宋)의 무제는 안사백(顔師伯)과의 저포놀이 때, 꿩이 나와 기뻐하였으나, 사백이 노를 내자 얼굴색이 바뀌었다고 한다. 진(晉) 유의(劉毅)가 동부(東府)에서 놀 때, 다른 이는 모두 흑과 소가 나왔음에도 자신이 던진 가락이 꿩이 되자, 기쁜 나머지 옷을 벗고 주위를 돌며 “노를 내고 싶었지만 일부러 내지 않았다.”며 외쳤다. 이번에는 유유(劉裕)가 천천히 집어 던졌다. 네 개는 흑이고, 다른 하나는 굴러갔다. 이에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자 노가 되었다. 역시 노가 꿩을 누른 것이다. 남송 명제가 제장(諸將)과 저포를 놀 때, 이안인(李安人)이 다섯 번이나 이어 노를 내어 황제가 놀랐다는 기록도 있다. 『국사보(國史補)』에 “가락(箸) 360개를 셋으로 나누고 양관(兩關)을 둔다. 한 사람이 여섯 개의 말을 쓰며 가락 다섯을 던져서 왕채(王采)가 나오면 한 번 더 던진 뒤, 말을 움직여 관을 벗어난다.”고 적혔다. 『오목경』에는 “말이 처음 관을 벗어나면 업어서 간다.”는 내용도 보인다. 옛적에는 놀이(博)에도 신이 깃들여서 사람의 부귀를 좌우한다고 여겼다. 진의 모용보(慕容寶)가 가락을 던지기에 앞서 “저포에 신이 있다고 합니다. 부귀를 바라오니 원컨대 노를 세 번 주십시오.” 기도하자, 모두 노가 나왔고, 그는 기쁜 나머지 옷을 벗고 맨발로 환성을 질렀다고 한다. 저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앞의 상병화도 “말을 움직이고 가락을 던지는 것 등에 대해 상세히 적은 책이 없다. 가락을 던져서 나온 수의 이름은 알지만, 다른 것과의 연관성도 불분명하다.”고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놀 때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떠는 행위가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윷놀이는 우리에게서 건너갔다. 8세기 말의 『만엽집(萬葉集)』에, “하나가 엎어지고 셋이 잦혀진 것(一伏三向)은 고로,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잦혀진 것(三伏一向)은 사쿠라는 대목”이 있다. 고로와 사쿠는 우리말 걸과 도의 이두식 표기이다. 가쓰라기 스에지(葛城末治)는 앞 책 권제10(春雜歌), 권제12(古今相聞往來歌), 권제13(雜歌)의 삼복일향(三伏一向) · 일복삼기(一伏三起) · 일복삼향(一伏三向)을 들어 “윷놀이 때 주사위 대신 네 개의 가락을 던졌으며 …(중략)… 이 때문에 사희(柶戱) 또는 척사(擲柶)라 불렸다. …(중략)… 겉과 바닥 수에 따라 말을 옮긴다.”고 하였다. 8세기 무렵에 윷을 놀았던 셈이다. 또 다른 학자(酒井欣)는 “척사(擲柶)의 유희적 내용을 고(구)려로부터 전해 받은 우리가, 그 놀이에 쓰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략) 당시 당조(唐朝) 문화 유입 경로로 삼한(三韓)을 거친 것은 사실인 동시에 삼한과의 교섭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진 까닭에, 그들의 문화와 문물도 많이 들어왔다. 유희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적었듯이 고(구)려의 미광(米光)과 수광(袖光) 등이 매사냥을 일본에 가져온 것처럼, 고(구)려의 다른 놀이도 당연히 일본에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척사(擲柶) 또는 척사(尺四)라 불리는 놀이이다. …(중략)… 그 시기는 아마도 나라조 일 것이다. 한편, 시바 료타로오(司馬遼太郞)는 김사엽(金思燁)이 “윷놀이에서 한 개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잦혀진 것을 이르는 일본말 ‘고로’는 곧 우리말 ‘걸’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네 개의 나무 토막을 던져서 한 개가 엎어지고 세 개가 잦혀진 것을 고로(ころ, 象, 걸)라 한다. 오늘날 마작(麻雀)에서 중국어 용어를 쓰듯이 만요(萬葉)시대 사람들이 이 놀이를 할 때의 용어는 조선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 고로가 ‘무렵’ 또는 ‘굴림대’나 ‘주사위’라는 뜻인 까닭에 윷놀이의 걸(고로) 곧, 1복3향(一伏三向)이라고 적는 재치를 부린 것이다. 마스가와 고우이치의 설명이다. 『강담초(江談抄)』에 사가(嵯峨)천황(809~823) 때의 낙서 가운데 일복삼앙(一伏三仰) 운운한 대목이 있다. 이것도 역시 윷의 말을 이른다. 당시는 조선으로부터의 지식인과 기술자의 도래(渡來)도 끊임없이 이어졌으므로 조선의 반상유희(盤上遊戱)가 전해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윷은 일본에서 오래 이어 내려오지 않았다. 규슈 다자이후(太帝府)에서 가장 오랜 윷 가락이 나왔다. 네 개의 작은 막대기(길이 5센티미터, 너비 1센티미터)로, 각각 하나에서 넷까지 금을 그은 것이다. 윷의 고향은 어디인가? 많은 학자들은 저포와 윷이 인도의 파치시(Pachisi)에서 나왔다고 한다. 파치시는 인도뿐 아니라, 중동에서 오래 전부터 즐긴 놀이이다. 방선주가 “중국명인 저포가 외국 이름인데다가, 챠우파와 추푸의 중국 발음이 비슷한 점 등을 들어, 인도에서 들어왔다.”고 한 것은 옳다. 인도의 파치시놀이 페르시아의 파치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고, 이것이 다시 우리게로 건너와 윷이 된 것이다. 저포 놀이의 전모를 알 수 없지만, 우리네 윷과 닮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만, 우리네 밭이 29개인 것은 고려시대에 우리 식으로 바꾼 결과로 보인다. 파치시는 왕 · 코끼리 · 말 · 양으로 불리는 네 개의 말을, 십자 꼴로 벌여 놓은 3 × 8개의 밭 위로 옮기는 놀이이다. 말은 붉은색 · 검은색(뒤에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 노란색 · 연두색으로 구별한다. 중심부에서 출발한 말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자기 쪽 왼편 끝에 이른다. 말은 등이 둥글고 바닥에 홈을 판 7~8개의 조개 껍질로, 이를 던져서 나온 숫자에 따라 옮긴다. 두 개가 엎어지고 나머지가 잦혀지면 2점, 엎어지고 잦혀진 것이 각 셋이면 3점, 둘이 엎어지고 넷이 잦혀지면 4점, 하나가 엎어지고 나머지가 잦혀지면 5점이다. 그리고 모두 잦혀진 6점이 나오면, 한 번 더 던진다. 이밖에 하나만 잦혀지고 나머지가 엎어지는 10점 때도 더 던진다. 여섯이 모두 엎어져 ‘파치시’가 되면, 최고점인 25점을 따며, 역시 한 번 더 던진다. 우리네 윷처럼, 남의 말 자리에 이르면 그 말을 잡으며, 잡힌 말은 처음 자리로 되돌아간다. 인도의 파치시는 무갈 왕조 때 성행되었다. 귀족들은 프아디프아시크림 궁전 · 아그라 궁전 · 알아바드 궁전에 놀이판꼴 정원을 꾸미고, 궁녀나 심부름꾼을 말 삼아 이리저리 옮아 다니게 하는 초호화판 놀음을 벌였다. 이것은 세일론 · 미얀마 · 수마트라로 퍼져나갔고, 서쪽으로 페르시아와 팔레스티나를 거쳐 스페인과 소말릴랜드까지 들어갔다. 노는 방법은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다. 조개 껍질은 파치시(25점이라는 뜻)라 부르지만, 양끝이 뭉툭한 긴 타원꼴 가락이나 장방형 윷가락 세 개는 챠우파(Chaupar, 네 개로 벌어진 헝겊 판), 또는 챠우서(십자꼴 말판)라 부른다. 한편, 임동권은 중국의 저포는 다섯 가락(五木)이고, 고구려 관련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윷이 중국에서 들어오지 않고, 우리 나라 남부 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윷은 아메리카대륙 원주민들도 즐겨 놀았다. 콜로라도 · 뉴멕시코 · 유타주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뼈 윷이 나와 역사 오랜 사실을 알려 준다. 로스엔젤레스 서남박물관(SouthwestMuseum)에는 우리네 밤윷만한 것에서부터, 큰 가락윷에 이르기까지 서너 종류가 있다. 컬린은 “윷놀이를 130여 부족들이 즐겼으며, 거의 전 지역에 퍼졌다.”고 하였다. 이 지역의 윷 형태나 말판 모양 그리고 노는 방법 등은 우리 윷과 차이가 많지만, 같은 것 또한 적지 않다. 길이 25센티미터의 버드나무를 반으로 쪼갠 오클라호마주 쿄와(Kiowa)족의 네 가락은 단면이 우리 것처럼 반달꼴이다. 윷이 나오면 한 번 더 던지고, 누운 것이 하나면 한 밭, 둘이면 두 밭, 셋이면 세 밭 가고(그러나 모는 열 밭, 윷은 다섯 밭 간다), 같은 밭에서 만나는 말을 잡으며, 이를 처음부터 다시 쓰는 점도 우리와 같다. 뉴멕시코주의 주니(Zuni)족은 우리처럼 윷으로 점을 쳤다. 컬린도 “본디 북아메리카의 윷놀이는 활 모양을 본뜬 것으로, 남서지역 원주민이 받드는 전쟁의 신과 관련이 깊다.”고 적었다. 윷가락은 막대꼴 외에 반달꼴 · 둥근꼴 · 의자꼴 · 동물꼴 등이 있다. 동물의 뼈나 식물의 씨앗 따위로 만드는 반달꼴이나 둥근꼴 윷은 우리네 밤윷을 닮았고, 던질 때도 소쿠리나 쟁반을 이용한다. 사람 · 여우 · 새 등의 동물꼴은 그린랜드와 알래스카 일대의 에스키모족 윷이다. 의자꼴은 뼈나 나무로 깎은 작은 의자의 등이 바닥에 닿는가, 바로 서는가에 따라 점수를 내는 윷으로, 서북 해안에 퍼져 있다. 가락은 흔히 3~4개이지만, 6~8개를 던지기도 한다. 밭 형태나 크기도 각기 다르다. 크리(Cree)족 윷 (네) 가락 길이는 35센티미터쯤이며, 한 쪽은 평평하게 다른 쪽은 둥글게 다듬었다. 그림 '크리족 윷가락'처럼 두 개의 바닥에 불에 달군 부젓가락으로 가위다리표를 하고, 다른 두 개에 흰 칠을 한다. 놀이 방법은 우리와 같지만 승부는 다르게 짓는다. 이들은 말을 밖으로 내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는 가락 형태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예컨대, 세 개가 엎어지고 흰 가락 하나가 잦혀지면 6점, 두 개가 엎어지고 흰 가락 두 개가 잦혀지면 24점, 세 개가 엎어지고 가위다리표 하나가 잦혀지면 14점, 두 개가 엎어지고 가위다리표 두 개가 잦혀지면 56점, 모두 엎어지면 14점을 따며, 가위다리표가 모두 잦혀지면 이긴다.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며 네 패로 나뉘어 겨룬다. 아라파호족 윷가락 포모족 윷가락   크리족 윷가락 유마족 윷가락   가죽에 표시한 파우니족의 윷밭 윷을 넣고 흔드는 바구니와 가락(그로스 벤트리족)   Relm of the Iroquios, 1993, Time-Life Books@@@@@@@@@@@@@@@@@@@@"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3541_000_1/20141022191216127_KPHBAIR9Q.jpg/ea27_24_i18.jpg?type=h168_fst_n&wm=Y" style="border: 0px; max-width: 690px; vertical-align: top;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252" /> 이로코이족 여인의 윷놀이 HandBook of North American Indians 10 Southwest, 1983, Smithsonian Institution@@@@@@@@@@@@@@@@@@@@"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3541_000_1/20141022191218562_D5XOR4MW0.jpg/ea27_24_i20.jpg?type=h168_fst_n&wm=Y" style="border: 0px; max-width: 690px; vertical-align: top;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249" /> 윷놀이를 즐기는 북아메리카 피마족     윷은 남아메리카 사람들도 놀았다. 특히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의 챠코(Chaco)부족 윷은 우리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윷’이라는 보고도 있다. 멕시코 여러 부족은 파톨리(Patoli)라 부른다. 특히 네 개의 옥수수 알을 짝으로 삼는 북 과테말라 케치(Kekchi)족은, 우리처럼 누가 먼저 시작하는가를 가락을 던져 정한다. 그리고 던지기 전에 유리한 짝이 나오기를 바라 “모 나와라.” 또는 “모 나왔다.” 소리친다. 남아메리카 윷은 1521년 아즈텍(Aztec)족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단편적인 보고를 남겼지만, 19세기말에 이르러 멕시코의 파톨리와 인도의 파치시가 이름은 물론 노는 방법이 닮은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시기에 타일러(E. B. Tyler)가 “멕시코 윷은 아시아에서 건너왔고, 이것이 다시 북아메리카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도에서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 동북아시아를 거쳐 아메리카로 들어갔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들 지역에는 윷뿐만 아니라 문화적 친연성을 보이는 문화 요소가 적지 않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의 윷 이름인 ‘파르치시(Parcheesi)’가, 인도의 파치시와 남미의 파톨리를 연상시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는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은 밭을 쓰지 않고, 머리 속에 그리며 놀았으며, 이를 ‘걸궁윷말’이라 일렀다. 인용 문헌 리근영, 1964년, 「윷놀이」 『조선의 민속놀이』, 군중 문화 출판사 방선주, 1991년, 「아시아 문화의 美州 傳播」 『아시아문화』 제7호,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성병희, 1989년, 「윷놀이의 비교민속학적 고찰」 『민속학연구』 제1집, 안동대학교 민속학회 신원봉 편역, 2002년, 『윷경』, 정신세계사 유득공, 19세기 말, 『경도잡지』 이하우, 2003년, 『바위문화 이야기』, 민속원 임동권, 1983년, 「사희고(柶戱考)」 『한국민속문화론』, 집문당 최남선, 1973년, 「조선상식」 『육당 최남선 전집』 3, 현암사 홍석모, 19세기 중반, 『동국세시기』 尙秉和 지음, 秋田成明 옮김, 1969년, 『中國社會風俗史』, 平凡社 葛城末治, 1974년, 「東アジアの古代文化」 『朝鮮』 第164號 司馬遼太郞 지음, 박이엽 옮김, 1998년, 『탐라기행』, 학고재. 酒井欣, 1934년, 『日本遊戱史』, 建設社 增川宏一, 1978년, 『盤上遊戱』, 法政大學出版局 Stewart Culin, 1907년, Games of the North American Indians 관련이미지 7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윷-국립민속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세시풍속사전 [네이버 지식백과]윷놀이 (동아시아의 놀이)   천재학습백과 초등 체육 4학년 윷놀이를 즐겨보기     교과과정 초등학교 > 4학년 > 연간 > 체육 4 > 5. 여가 활동 목차 1. 윷놀이 방법을 알고 놀이하기 1) 윷판에 대해 알아보기 2) 윷 셈하는 방법 알아보기 3) 윷놀이에 사용되는 용어와 규칙 알아보기 4) 말이 움직이는 길에 대해 알아보기 5) 윷놀이하기 2. 사람 윷놀이하기 1) 놀이 방법 2) 사람 윷놀이하기 3. 참고 자료 - 여러 종류의 윷 1) 가락 윷 2) 밤 윷 3) 콩 윷 윷놀이란  윷놀이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전해 오는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로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하였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놀이로 풍년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1. 윷놀이 방법을 알고 놀이하기 1) 윷판에 대해 알아보기 - 말을 쓰기 위하여 그린 판으로 둥근 원에 20개의 밭(칸)과 그 안쪽에 9개의 밭(칸)이 교차하여 총 29개의 밭(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윷 셈하는 방법 알아보기 - 네 개의 윷가락을 동시에 던져 나온 경우의 수 : 도 → 한 칸, 개 → 두 칸, 걸 → 세 칸, 윷 → 네 칸, 모 → 다섯 칸 앞으로 움직인다. - 한 번 더 던지는 경우: 윷·모가 나오는 경우, 상대방의 말을 잡는 경우 3) 윷놀이에 사용되는 용어와 규칙 알아보기 - 말: 윷판에 위치를 표시하는 소품으로 동전, 바둑알 등을 이용한다. - 말 쓰기: 한 편에 보통 네 개의 말(넉동)을 갖고 시작하며 새로 말을 달거나 말을 옮길 때에 사용한다. - 업고 가기: 자기편 말이 있는 곳에 말이 또 오게 되면 업어서 함께 이동할 수 있다. 두 개를 업고 가면 두동사니, 세 개를 업고 가면 세동사니, 네 개를 업고 가면 넉동사니라고 한다. - 잡기: 말을 옮길 때 밭에 상대편 말이 있으면 그 말을 잡는다. 잡힌 말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 이기기: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돌아 상대편 말보다 먼저 네 개의 말이 모두 나오면 이긴다. 4) 말이 움직이는 길에 대해 알아보기 - 던지는 끗수가 꺾어지는 밭(칸)에 오면 빠른 길로 갈 수 있다. ‘모 → `걸’을 놓았을 때 ‘윷 → 윷 → 개’를 놓았을 때 ‘모 → 윷’을 놓았을 때 ‘윷 → 윷 → 윷’을 놓았을 때 5) 윷놀이하기 - 두 편(한 편에 4~5명 정도)으로 나누고 윷가락을 두 개씩 던져 차례를 정한다. - 모둠원끼리 던지는 순서와 말을 쓰는 사람을 정한다. - 번갈아 가면서 윷을 놓는다. - 4개의 말(말 개수 정하기)이 상대편보다 먼저 말판을 돌아오는 편이 이긴다. 2. 사람 윷놀이하기 사람 윷놀이 1) 놀이 방법 - 한 모둠이 5명으로 두 모둠(10명)으로 나눈다. - 매트 4장을 붙여 윷판을 만든다. - 지름 4~5m 정도의 원을 그려 말판을 그린다. - 양 모둠 두 사람씩 4명이 윷이 되고 나머지 2명씩은 모둠 조끼를 입고 말이 된다. - 모둠의 1명씩은 시작 신호와 자기 모둠의 말 쓰는 역할을 한다. - 모든 말(2명)이 상대편보다 먼저 말판을 돌아 나오면 이긴다. - 학급 구성원의 인원수에 따라 말의 수를 조정하여 놀이를 시행한다. 2) 사람 윷놀이하기 -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다. - 눈을 가리고 누워 ‘시작’신호와 함께 3초간 움직인 후 멈춘다. - 나온 윷 패에 따라 자기편 말 쓰는 사람의 지시를 받고 말이 움직인다. - 말 쓰는 사람이 번갈아 가며 시작 신호를 하여 윷을 놓는다. 3. 참고 자료 - 여러 종류의 윷 1) 가락 윷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길이 15~20cm, 지름 3~5cm 크기의 윷으로 가운데는 굵고 양끝은 조금 가늘며 등은 둥글고 배는 약간 평평하게 하되 모서리를 살짝 둥글려서 구르기 좋게 한다. 2) 밤 윷 굵기가 새끼손가락 정도인 나무로 1~2cm가 되게 만든 윷으로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종지 같은 것에 넣어 손바닥으로 덮어 쥐고 흔들어 던진다. 3) 콩 윷 정식 윷은 아니지만, 농부들이 밭에서 점심시간 등에 콩알이나 팥알을 반으로 쪼개어 땅바닥에 던진다. 가락 윷 밤 윷 관련이미지 8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윷-국립민속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세시풍속사전 [네이버 지식백과]윷놀이를 즐겨보기 (천재학습백과 초등 체육 4학년)  
2880    [타산지석] - 우리는 언제부터 "저작권문제"를 중시할려나... 댓글:  조회:3748  추천:0  2020-02-23
“지금 저작권은 차세대 창작자 육성하는데 도움돼야”  2020.02.22.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가디 오론 CISAC 사무총장 서면 인터뷰, “한국이 ‘미래 BTS·봉준호’ 위해  공정한 환경 조성에 주도적 목소리 내야” “음악을 포함해 창작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들이 남아있다. 지금 저작권은 20년 동안 변모한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차세대 창작자를 육성하는 데 도움이 돼야한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정기총회 참석 차 최근 한국을 찾은 가디 오론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CISAC) 사무총장은 20일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BTS)과 봉준호의 ‘기생충’(parasite)으로 케이팝(K-POP)과 한국 영화의 뛰어난 성공을 보여준 만큼, 한국이 ‘미래의 BTS·봉준호’를 위해 공정한 환경 조성에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말했다.  가디 오론(Gadi Oron)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 사무총장. [사진 CISAC] CISAC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으로 세계 120여개국 230여개 회원사를 보유한 비영리단체다. 세계 400만명 이상의 창작자의 권리보호와 지위향상에 힘쓰고 있을 뿐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저작물을 폭넓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오론 사무총장은 “오늘날 디지털 세계는 창작자들에게는 기회들로 가득 차 있지만, 창작자와 그들의 작품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새롭고 불리한 힘의 균형을 만들어냈다”며 “창작자의 협상력이 위협받을 때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이하 한음저협)와 한국영화감독조합(DGK) 등이 그들을 대신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양한 사업자와 방송사, 배급사가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반면, 작가·감독 등의 창작자가 영화나 TV 시리즈의 재사용·재방송에 대한 권리가 없다”며 영상 저작물의 창작자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보호해야한다고 했다. 특히 영화의 경우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별도의 계약이 없다면 제작자와 투자자가 편의상 영화 전반의 저작권을 갖는다. 오론 사무총장은 작가·감독 등의 창작자가 실질적 저작권자로 명시되는 관련 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론 사무총장은 한국 음악 저작권 디지털 부문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 중 하나라고 칭찬했다. 그는 “로열티 징수에서 차지하는 디지털 부문의 점유율을 보면 한국은 33.4%로, 스웨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라며 “지난 5년간 102%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이 수치는 한국이 진정한 ‘디지털 챔피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은 음악 산업이 디지털 시장으로 변화하는 것을 다른 국가들보다 빠르게 적응했고, 새로운 사업 모델을 빨리 개발했다”며 “세계 모바일 음악 및 음악 스트리밍 구독 시스템을 빨리 접목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11월 CISAC가 발표한 세계 음악 저작권 징수액 순위를 보면, 한음저협이 관리한 한국 저작권 징수액은 2018년 기준 세계 12위를 기록했다. 일각에선 BTS를 비롯한 K-POP 성공을 감안하면 저작권 시장 규모가 ‘기대 이하’라고 하지만, 업계는 ‘지속적인 성장’이라고 평한다.  지난해 11월 국제저작권관리단체연맹(CISAC)가 발표한 세계 음악 저작권 징수액 순위. [표 CISAC] 한음저협에 따르면 CISAC 발표가 없었던 2015~16년을 제외하면 2014년 20위, 2017년 13위, 2018년 12위로 지속적인 상승을 보이고 있다. 한음저협 또한 2019년에 2208억원을 징수하는 등 최근 5년간 1000억원의 징수액 성장을 보였다. 한음저협은 지난달 초 징수한 2208억원 중 2135억원을 저작권자에게 분배했다고 밝혔다. 한음저협은 작곡·작사·편곡 등 3만명이 넘는 음악 창작자들을 회원으로 둔 사단법인이다.  한편 정부는 2014년 음악 저작권 관리의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함저협)의 저작권 신탁관리업을 허가했다. 하지만 함저협은 CISAC 가입이 승인되지 않아 국제 음악 시장에서 음원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영혜 기자
28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두호랑이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04  추천:0  2020-02-22
버스에 치여 숨진 어린 호랑이…    2020.02.22.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최근 러시아 연해주에서 어린 호랑이 한 마리가 버스에 치여 희생당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버스 앞에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태어난 지 겨우 5개월 된 어린 호랑이였습니다. 러시아 아무르 호랑이센터에서 공개한 블랙박스 영상입니다. 충격에 한참을 쓰러져 있던 어린 호랑이는 숲으로 돌아갔지만 다음날, 결국 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안타까운 사고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호랑이 센터엔 비상이 걸렸습니다. 호랑이 사체가 야생동물 연구센터에 보내졌고 전문가들이 모여 사고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경찰까지 사고 조사에 나섰는데 이렇게 난리가 난 이유는 이 호랑이가 시베리아 호랑이, 즉 '백두산 호랑이'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 6백 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현재 국제 자연보전 연맹에 적색목록으로 등록된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20세기 초에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을 포함해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었지만 모피 등을 노린 밀렵꾼들이 무분별하게 사냥하고 벌목으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개체 수가 급감해 한반도 지역은 사실상 절멸 상태입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협력에 백두산 호랑이를 보호하고, 국내에서도 백두산 호랑이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멸종위기를 벗어나기엔 갈 길이 먼 실정입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고 살 곳을 빼앗기고 있는 백두산 호랑이… 언제쯤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2878    [그것이 알고싶다] - "베를린 국제영화제" 댓글:  조회:3974  추천:0  2020-02-21
두산백과 베를린 국제 영화제   [ Internationale Filmfestspiele Berlin , ─國際映畵祭 ] 요약 독일의 베를린에서 매년 개최되는 국제영화제. 이미지 크게보기 제55회 베를린영화제 시상식 국가 독일 주최시기 및 기간 매년 2월 중순 개최장소 독일 베를린의 포츠담광장 일대 시작년도 1951년 행사내용 400여 편의 장단편 영화 상영, 심포지엄, 유럽영화 회고전, 아동영화제 1951년 동서화합을 기치로 내걸고 당시 분단 상태에 있던 독일의 통일을 기원하는 영화제로 시작되었다. 베네치아(이탈리아)·칸(프랑스)·모스크바(러시아연방)와 더불어 국제영화제작자연합에서 공인한 A급 영화제의 하나로, 매년 2월 중순에 약 10일간에 걸쳐 개최된다. 독일의 국영 베를린영화사가 주관하고, 500여 명의 진행요원이 행사를 지원한다. 매년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개막작을 시작으로 전세계에서 초청된 400여 편의 장단편 영화가 상영되는데, 상영작들은 다시 공식 경쟁부문을 비롯해 포럼과 파노라마, 유럽 영화, 아동 영화제 등 별도의 섹션으로 나뉘어 포츠담광장 일대의 10여 개 상영관에서 상영된다. 또 시사회를 비롯해 독일 영화의 전망, 베를린 영화학교가 주최하는 심포지엄, 유럽 영화 회고전 등 해마다 별도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최우수작품상인 금곰상[金熊賞], 감독상인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 남녀 연기상, 예술공헌상, 최우수 유럽영화상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시상이 이루어지며, 10명의 심사위원단이 공식 경쟁부문 출품작 가운데서 부문별로 선정해 시상한다. 2002년의 경우 2월 6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총 23편의 공식 경쟁부문 출품작 가운데 금곰상은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과 영국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이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심사위원 대상은 독일 영화 《할베 트레페 Halbe-Treppe》가, 감독상은 《월요일 아침 Lundi Matin》의 오타 이오셀리아니(프랑스)가 각각 선정되었다. 한국에서는 1958년 제8회 영화제 때 동아영화사의 《시집가는 날》을 처음으로 출품한 이래 거의 매년 극영화와 문화영화를 출품하고 있다. 1961년에는 강대진(姜大振) 감독의 《마부》가 특별 은곰상을, 1962년에는 전영선이 《이 생명 다하도록》에서 아동특별연기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장선우(張善宇) 감독의 《화엄경》이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였다. 또 2002년에는 김기덕(金基德) 감독의 《나쁜 남자》와 한일 합작영화 《KT》(감독 사카모토 준지:阪本順治)가 경쟁부문 초청을 받았는데, 김기덕 감독은 2000년 《섬》, 2001년 《수취인 불명》에 이어 이 영화제를 통해 한국 최초로 3년 연속 국제영화제 진출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국제 영화제 [Internationale Filmfestspiele Berlin, ─國際映畵祭] (두산백과) ==================================================================================/// 시사상식사전 베를린국제영화제      독일 서베를린 시장 빌리브란트가 세계의 평화ㆍ우애를 지향하고자 1951년 창설한 국제영화제이다. 매년 2월 중순에 개최되며 금곰상, 은곰상, 감독상 등을 시상한다.             외국어 표기     Internationale Filmfestspiele Berlin(독일어)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영어)     시작년도     1951년     개최시기     매년 2월 중순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베니스(이탈리아) · 칸(프랑스)과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1951년 동서화합을 모토로 하여 분단 상태에 있던 독일의 통일을 기원하는 영화제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6월에 개최되다가 1978년부터매년 2월 중순에 10일간의 행사 기간을 가진다. 독일의 국영 베를린영화사가 주관하며 메인 극장은 조 팔라스트(Zoo Palast) 극장이다. 시상 부문에는 금곰상(최우수작품상), 은곰상(심사위원대상, 감독상, 남녀배우상, 알프레드 바우어상 등 10종), 블루엔젤상, 평생공로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1961년 강대진 감독의 가 은곰상을, 1994년에는 장선우 감독의 이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4년에는 김기덕 감독이 로 감독상을, 2005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명예황금상을, 2007년에는 박찬욱 감독이 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에는 박찬욱 · 박찬경 감독이 스마트폰으로 제작한 이 단편 부문 최고상인 금곰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장 · 단편을 통틀어 세계 3대 영화제(칸 · 베를린 ·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스마트폰으로 찍은 작품으로서 세계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이어 2016년에는 이동하 감독의 퀴어 영화 가 파노라마 다큐 부문 관객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에는 배우 김민희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로 한국인 최초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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