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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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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98  추천:0  2020-11-19
  '역대급 가뭄'에 속수무책… 브라질 악어들 떼죽음 위기 2020.11.19.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렇게 많이 모인 악어는 처음" 판타나우, 가뭄·화재로 생태계 위협브라질 중서부 네콜란지아 지역에서 수백 마리의 악어가 물웅덩이 한곳에 몰려 있는 모습. 사진=브라질 뉴스포털 UOL. [아시아경제 김봉주 기자]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인 브라질 중서부 판타나우에 서식하는 악어들이 떼죽음 위기에 처했다.  18일(현지시간) 브라질 뉴스포털 UOL 등에 따르면, 마투그로수두술(Mato Grosso doSul) 주 네콜란지아 지역에서 악어 수백 마리가 물웅덩이에 몰려 있는 모습이 지난 15일 농부들에 의해 포착됐다.  이와 관련해 한 농부는 "물웅덩이에 이토록 많은 악어가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면서 "장기간의 가뭄으로 물이 마르고, 계속되는 화재로 악어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것 같다"고 했다. 브라질 중서부 네콜란지아 지역에서 수백 마리의 악어가 물웅덩이 한곳에 몰려 있는 모습. 사진=브라질 뉴스포털 UOL. 이 농부는 "어쩌면 여기가 마지막 물웅덩이일지 모른다"며 이런 상황이 더 길어지면 악어들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판타나우 농업연구공사 연구팀은 악어들이 이처럼 몰려든 이유를 파악 중이다.  전문가들은 "지독한 가뭄이 계속될 때 동물들이 물과 먹이를 찾아 특정한 곳으로 몰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면서도 "이 정도로 많은 악어가 한곳에 뒤엉킨 것은 판타나우에서 이례적인 일"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판타나우는 인간의 접근이 어려워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로 꼽히는데, 최근 거의 50년 만의 최악의 가뭄과 고온 건조한 날씨로 인한 화재 급증으로 이곳의 생태계는 위기에 처했다.  브라질 중서부 지역에 있는 세계적인 열대 늪지 판타나우에서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역대 최악의 화재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사진=브라질 글로부 TV. 브라질 국립우주연구소(Inpe) 자료에 따르면, 이 지역 올해 1∼10월 화재는 2만1천84건으로 집계돼 2005년 같은 기간의 1만2천536건을 훌쩍 넘어서며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판타나우 전체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한 약 220,000㎢으로 전체 면적의 80% 정도가 브라질에 속하고 나머지는 볼리비아·파라과이에 걸쳐 있다.  판타나우에는 3천500여 종의 식물과 550여 종의 조류, 120여 종의 포유류, 260여 종의 민물고기, 80여 종의 파충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곳에서는 브라질 당국이 환경보호보다 개발을 앞세우면서 단속이 느슨해진 틈을 타 가축 사육을 위한 목초지와 농경지 확보, 불법 광산개발 등을 위해 일부러 지른 불이 대형 화재로 번져 큰 피해를 내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봉주 인턴기자 
2996    [별의별] - 2.1kg = 20억 댓글:  조회:3022  추천:0  2020-11-18
  가정집 지붕 뚫고 떨어진 2.1kg짜리 운석, 20억원에 팔렸다  2020.11.18.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사진 조슈아 후타가룽 페이스북 캡처] 인도네시아 한 가정집에 2.1kg 무게의 운석이 떨어졌다. 45억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을 발견한 남성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됐다.  17일(현지시간) 영국 매체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사는 조슈아 후타가룽(33)의 집에 140만 파운드(약 20억원) 가치의 운석이 떨어졌다.  운석은 양철 지붕을 뚫은 뒤 집 부근에 15cm 깊이로 묻혔다. 근처에서 작업 중이던 후타가룽은 굉음에 놀라 운석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후타가룽은 “누군가 이 돌을 고의로 던지거나 위에서 떨어뜨릴 수는 없기 때문에 돌을 보자마자 운석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어 “운석을 만졌을 때 여전히 따뜻했다”며 “부분적으로는 부서져 있었다”고 했다.  해당 운석은 탄소질콘트라이트로, 나이는 45억년으로 추정된다. 미국 텍사스에 본부를 둔 달·행성연구소는 이는 매우 희귀한 품종이라며 운석의 이름을 'Kolang'으로 명명했다.  후탕가룽의 운석에 미국의 수집가들이 관심을 보였다. 달·행성연구소 소속 콜린스는 “나는 내가 수집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돈을 가지고 후탕가룽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콜린스는 후탕가룽에게서 운석을 건네받아 미국으로 가져왔다. 해당 운석은 인디애나주 의사이자 운석 수집가인 제이 피아텍에게로 돌아갔다. 피아텍은 운석을 140만 파운드에 사들였다.  후탕가룽은 “코비드-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 속에 이런 일이 발생해 운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후탕가룽은 운석을 팔아 번 돈의 일부를 지역 공동체를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정혜정 기자 ==============================///   마당에 날아든 돌 한덩이… 20억짜리 ‘로또’ 운석이었다 2020.11.1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Josua Hutagalung 페이스북 캡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30대 남성이 하늘에서 날아온 돌덩이를 팔아 거액을 거머쥐었다. 평범한 돌덩이인 줄 알았던 물체는 우주 희귀물질이 포함된 운석으로 260억 루피아(20억원) 상당의 가치인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트리뷴뉴스, 더선 등에 따르면 수마트라섬 중앙타파눌리군에 사는 조슈아 후타가룽(33)은 지난 8월 1일 오후 4시 집이 부서지는 듯한 굉음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는 “맑은 날이었는데 하늘에서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며 “둘러보니 지붕에 구멍이 나 있고 커다란 돌이 마당에 박혀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조슈아는 “아내와 함께 돌을 파냈더니 여전히 따뜻했다”며 “누가 일부러 던지기에는 너무 큰 사이즈라서 보자마자 우주에서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돌은 손바닥보다 큰 사이즈로, 무게는 2.2㎏였다. 조사 결과 조슈아의 돌은 45억 년 전 생성된 운석이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물질을 포함하는 ‘카보네이셔스 콘드라이트’(carbonaceous Chondrite)로 확인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즉시 돌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의 관심이 쏟아졌다. 돌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사겠다는 제안도 잇따랐다. 특히 인도네시아 운석 전문가 재런드 콜린스는 이 운석이 260억 루피아 상당 가치가 있다며 돈을 싸 들고 조슈아의 집으로 달려갔다. 콜린스는 “솔직히 이 운석을 나를 위해 사들일지 아니면 과학자나 미국의 수집가에게 중개할지 고민했다. 조슈아에게 30년 치 월급을 지불했다”고 말했다. 현재 운석은 인디애나폴리스의 의사 겸 운석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행운을 거머쥔 조슈아는 “관 짜는 일을 그만둘 것이고, 운석을 팔아 번 돈 중 일부로 마을에 예배당을 지을 것”이라며 “아들만 셋을 뒀는데 운석 발견의 행운을 통해 딸을 가질 수 있음 좋겠다”고 말했다. /박장군 기자  ===============================///   조슈아 후타가룽(33)이 지난 8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자신의 집 마당에서 발견한 운석을 들고 있다. /트위터 국제 “아 속았다”.. 1600만원에 판 45억년 운석, 22억짜리 였네 김승현 기자  2020.11.20    주택 지붕을 뚫고 마당으로 떨어진 45억년 전 운석이 2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돼 돈벼락을 맞았다고 알려진 인도네시아 남성이 실제로는 운석을 1600만 원에 팔았다며 실망감을 표현했다고 BBC인도네시아 등이 20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조슈아 후타가룽(33)이 지난 8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자신의 집 마당에서 발견한 운석을 들고 있다. /트위터 외신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중앙타파눌리군에 사는 조슈아 후타가룽이라는 33세 남성은 최근 영국 데일리메일 등 해외 언론들이 자신이 지난 8월 전문가에게 판매했던 운석 가치가 185만 달러(약 20억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도하자 놀라워하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는 “운석이 처음에는 2.2㎏ 정도였으나 내가 만지면서 부서져 남은 1.8㎏을 발리에 사는 미국인 재러드에게 2억 루피아(약 1600만원)에 팔았다”며 “만약 값어치가 진짜 260억 루피아(약 20억원) 정도라면 내가 속은 것 같다. 실망스럽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중앙타파눌리군에 사는 조슈아 후타가룽(33)이 지난 8월 자신의 집 마당에서 발견한 운석. /페이스북 조슈아의 운석은 지난 8월 1일 오후 그의 자택 지붕을 뚫고 들어와 마당에 박혔다. 당시 관을 짜는 일을 하던 조슈아는 “맑은 날이었는데 하늘에서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운석을 파내보니 여전히 온기가 있었다”고 했다. 이 운석은 조사 결과 45억 년 전 생성된 것이며 태양계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물질을 포함하는 ‘카보네이셔스 콘드라이트’(carbonaceous Chondrite)로 확인됐다.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들은 최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 운석은 매우 희귀해 1그램당 850달러(약 94만원)이며, 총 185만 8500달러(약 20억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른 조슈아는 운석 사진과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렸고, 유명세를 탄 이후 보름 정도 지난 이후 재러드에게 운석을 팔았다고 했다. 외신에 따르면 재러드 콜린스는 발리에 사는 운석 전문가이며, 앞서 운석 가격과 관련해 “조슈아에게 30년 치 월급을 지불했다”고 말했다. 이후 재러드가 미국으로 보낸 운석은 미 인디애나폴리스의 운석 수집가 제이 피어텍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슈아는 외신인터뷰에서 “운석 판 돈을 가족과 보육원에 나눠주고 예배당 만드는 일과 부모님 손보는 일에 이미 모두 썼다”고 했다. 그는 운석 중 1.8kg만 재러드에게 판 뒤, 남은 부스러기 조각들은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5g을 기념으로 가졌다고 했다.
2995    [고향문단소식] - 요즘,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댓글:  조회:2775  추천:0  2020-11-14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수상자는 누구? (ZOGLO) 2020년10월30일  조선족문단의 정통성과 권위성을 자랑하는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이 10월 30일, 코로나 여파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수상자들, 좌로부터 김창영,김성희(대리수상), 김순희, 리혜선, 리태복, 김영수. 2019년 《연변문학》잡지에 실린 소설, 시, 수필, 평론, 문학칼럼  등 여러 쟝르의 작품중에서 편집부의 추천과 심사위원들의 공정한 심사를 거쳐 소설부문에 김성희의 중편소설
299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공조명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40  추천:0  2020-11-13
뉴스홈   최신기사 "인공조명도 하나의 오염 물질" 2020-11-03   인쇄 김유아 기자 생명의 호르몬 수치, 활동 양상 등에 영향 홍콩의 한 공원에서 시민들이 보라색 조명으로 뒤덮인 나무를 지나치고 있다.[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유아 기자 = LED(청색 발광다이오드)와 같은 인공조명이 자연의 섭리를 방해하기 때문에 오염 물질로 다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엑서터대학교 생물학 연구팀은 인공조명이 생명체의 호르몬 수치, 번식 주기, 생존력에 영향을 주는 등 생태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논문은 학술지 '네이처 이콜로지 앤드 이볼루션'에 게재됐다.   연구진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인공조명은 식물부터 곤충과 동물 등 넓은 범위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먼저 인공조명으로 인해 수면 주기를 조절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수치가 감소하고 있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또 야행성 동물뿐만 아니라 낮에 활동하는 생명체의 활동 양상도 영향을 받는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쥐와 같은 설치류의 활동 시간은 줄어들고, 새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더 이른 시간에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이 외에도 일부 식물이 예정보다 이른 봄에 싹을 틔우고, 바닷새들은 빛이 밝은 건물로 진입하며, 바다 거북이는 조명을 일출로 착각해 건물로 들어갔다가 길을 헤맨다고 설명했다. 전구 램프와 주행하는 자동차의 불빛으로 향했다가 죽음을 맞은 벌레들도 조명의 부정적 영향 중 하나로 지목됐다. 일부 식물과 박쥐 종은 인공조명 덕분에 좀 더 빠르게 성장하는 등 긍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 연구진의 결론이다. 논문의 주요 집필진인 엑서터대 환경 및 지속가능성 연구협회의 케빈 개스턴 교수는 "인공조명의 영향이 매우 만연하다는 점이 놀랍다"며 "인공조명은 또 다른 오염 물질이다. 기후 변화와 유사한 관점에서 인공조명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개스턴 교수는 인공조명이 설치되는 범위와 그 빛의 강도가 매해 2%씩 증가하고 있다면서 지난 5∼10년간 전 세계 인공조명이 증가함에 따라 이의 영향을 입증할 증거도 함께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인류는 본능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지만, 밤을 낮처럼 바꿔버리는 것은 필요 이상의 일"이라며 "적시적기에만 조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5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화려한 조명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신화=연합뉴스]
2993    [세상만사] - 240 = 300 = 8 댓글:  조회:2811  추천:0  2020-11-13
국제 화상강의 들으려 8m 나무 올라요” 코로나로 고향간 러시아 대학생의 호소 서유근 기자  2020.11.13  대학 화상강의를 듣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러시아 대학생 알렉세이 두돌라도프(21) /인스타그램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고향에 간 러시아 대학생이 농촌의 열악한 인터넷 환경 때문에 화상 강의를 들을 때마다 8m 높이의 자작나무에 올라야만 한다고 호소했다. 12일(현지 시각) 러시아 리아노보스티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대학생 알렉세이 두돌라도프(21)는 고향 나즈바예프스키 지역 스탄케비치에서 화상 강의를 듣고 있다. 스탄케비치는 39명이 사는 농촌 마을이다. 두돌라도프가 재학 중인 고향에서 약 240km 떨어진 옴스크주(州) 수상교통대는 코로나 여파로 지난 9일부터 모든 강의를 화상 강의로 전환했다. 두돌라도프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마을에서 300m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뒤 8m 높이에 자작나무에 올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인터넷을 이용해 화상강의를 수강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선 통신 상태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다가오자 추위 속에서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상황이 담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해당 게시물이 퍼지고 현지 언론보도까지 이어지며 이 대학생의 사연은 화제가 됐다.   이후 지방정부의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두돌라도프도 주지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옴스크주 지방정부는 “우리는 반드시 두돌라도프를 도울 것”이라면서 그에게 알맞은 개별 교육 과정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옴스크주 정부 교육부서는 두돌라도프와 같은 처지에 놓인 학생이 영상뿐만 아니라 메신저, 전화, 이메일 등 다른 수단도 원격 학습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다만 농촌 지역의 열악한 인터넷 시설 개선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알렉산드르 부르코프 주지사는 통신 회사들이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곧바로 개선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2992    [세상만사] - 180 = 120 = 270 댓글:  조회:2728  추천:0  2020-11-11
  180cm · 120kg '전설의 심해어', 여수에서 잡혔다  2020.11.11.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20㎏짜리 심해어 돗돔 부산공동어시장서 270만 원 낙찰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전설의 심해어'로 알려진 대형 돗돔 1마리가 27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부산공동어시장은 11일 새벽 여수 지역 한 어선이 거문도 앞바다에서 조업해 차량으로 싣고 위판한 돗돔 1마리가 270만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위판된 돗돔은 몸길이 약 1.8m로 무게는 120㎏에 달합니다. 이 돗돔은 부산공동어시장 한 중도매인에게 낙찰됐고 부산 서구 한 선어 전문 횟집으로 판매됩니다. 부산공동어시장에서 돗돔이 위판된 것은 2017년 6월 몸길이 1.75m짜리 돗돔이 280만 원에 거래된 이후 처음입니다. (사진=부산공동어시장 제공, 연합뉴스)   /권태훈 기자
2991    [세상은 지금]- 그들은 쉽지 않았다...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댓글:  조회:2847  추천:0  2020-11-11
한국계 의원 4명으로... 2020.11.1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美 바이든 시대]“한국서 이민 와 시민대표” 당선인사미국 대선과 함께 실시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영 김(김영옥·58) 후보가 2년 전 패했던 민주당 현역 길 시스네로스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김 당선인의 입성으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 중 한국계는 4명으로 늘게 됐다. 13일(현지 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제39선거구)에 출마한 김 당선인은 50.6%를 얻어 시스네로스 의원(49.4%)을 약 4000표 차로 물리쳤다.  1962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 당선인은 1975년 가족들과 함께 괌으로 이주한 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의류사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선거 컨설턴트인 남편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장의 권유로 공화당 중진 에드 로이스 의원의 보좌관으로 21년간 일했고, 2014∼2016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김 당선인은 트위터에 올린 당선 인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민 온 소녀도 시민의 대표로 의회에서 일할 수 있는 나라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 당선인이 당선되면서 한국계 하원의원은 기존 1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에 따라 180만 교민의 영향력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당선인과 미셸 박 스틸 당선인(공화), 메릴린 스트리클런드 당선인(민주)은 최초의 한인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세웠다. 서울 출생인 스틸 당선인은 대학 시절 도미해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군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리클런드 당선인은 ‘순자’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총애한 ‘오바마 키즈’로 2018년 처음 하원에 입성한 앤디 김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다. /조유라 기자  ========================================/// 현역 꺾고 하원 입성… 한국계 4명 미 하원 동반 당선 2020.11.1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순자, 영옥, 은주. 이 친숙한 이름의 주인공들이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날에 함께 치뤄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한국계 인물 총 4명이 미국 연방 의회에 입성하게 됐는데요.  미주 한인 역사상 처음입니다.  로스엔젤레스 이영현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한국이름 김영옥, 미국명 영 김 공화당 후보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를 포함한 제39 선거구에서 득표율 50.6%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2년 전 중간 선거 때 민주당 의원에게 역전패 당했지만 이번에는 4천여 표 차이로 따돌리며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영 김/김영옥/美 하원의원 당선인/공화 : "대한민국에서 이민온 소녀가 하원의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저는 그 약속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으로 이민 온 김 당선인은 13선을 한 에드로이스 전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21년 간 근무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와 캘리포니아주에서 4선의 선출직 공무원을 지낸 박은주, 미셸 박 스틸 후보도 나흘 전 당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스틸 후보도 캘리포니아주 48 선거구에서 역시 민주당 소속 현역 의원을 누르고 하원 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미셸 박 스틸/박은주/美 하원의원 당선인/공화 : "여러분과 모습도, 말투도 다른 소수 인종이 보잘것 없는 시작에서 나올 수 있듯이 오렌지 카운티는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민주당 소속으로는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메릴린 스트릭랜드 후보가 워싱턴주에서 일찌감치 당선 소식을 알렸고 뉴저지주 앤디 김 의원도 잇따라 재선을 확정했습니다. 미국 한인사회에서 한국계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 나온 것은 처음인데다 미국 주류 정치권에 4명이 한꺼번에 진출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KBS 뉴스 이영현입니다. 영상편집:안영아  /이영현  ==================================/// 한국계 3명 미 연방하원 입성  2020.11.1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 미 연방 하원의원 한국계 당선자 미셸 스틸 박-메릴린 스트릭랜드-앤디 김 한국계 여성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65) 미국 공화당 후보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스틸 후보는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에서 접전 끝에 민주당 현역인 할리 루다 의원을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앞서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메릴린 스트릭랜드(민주·워싱턴주) 후보 당선과 앤디 김(민주·뉴저지주) 의원 재선 성공에 이어 한국계 당선자는 모두 3명으로 늘었습니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39선거구에서는 한국계 영 김(한국명 김영옥·57)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 길 시스네로스 의원을 1% 포인트 차로 앞서고 있습니다.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영 김 후보 따라서 추가로 김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면 '순자·은주·영옥'이라는 친숙한 한국이름을 가진 한국계 여성의원 트리오가 탄생하며, 미국 연방하원에 모두 4명의 한국계 의원이 자리잡게 됩니다. 뉴욕타임스(NYT) 개표 집계에 따르면 스틸 후보는 50.9% 득표율을 기록해 루다 의원을 1.8% 포인트 차로 제쳤습니다. 두 후보의 표 차는 7천300여 표로, 스틸 후보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스틸 당선인은 트위터에 "힘든 싸움을 했고, 어렵게 승리했다"며 "유권자들의 지지에 더욱 겸손해지겠다.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의회에서 봉사할 수 있게 돼 더없는 영광이다. 이제 일하러 가자"는 당선 소감을 올렸습니다. 패배한 루다 의원도 트위터에 글을 올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며 "바라던 결과는 아니지만, 국민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결과에 승복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는 민주당 안방이나 다름없지만, 스틸 후보가 출마한 48선거구는 보수 유권자가 많은 오렌지카운티에 속해 있어 공화당 강세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서울 출생인 스틸 후보는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페퍼다인 대학을 졸업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평범한 주부로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태입니다. 흑백 갈등 속에서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든 한인들이 주류 언론에 폭도로 매도되는 현실을 접하고, 그는 한인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남편 숀 스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했습니다. 1993년 LA 시장에 출마한 리처드 리오단 후보 캠프에 참여했고, 리오단 후보가 당선된 뒤 LA시 소방국장, LA 카운티 아동 가족 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스틸 후보는 한인 사회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통합니다. 이번 하원의원 선거까지 합치면 5전 연승입니다. 2006년 한인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조세형평국 위원에 당선되며 선출직 공직자로 첫발을 내디뎠고,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이어 2014년 오렌지카운티 2지구 수퍼바이저(행정책임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2018년 재선 고지에 올랐습니다. 스틸 후보는 선거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 가족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기회를 찾아 미국에 왔다"며 "내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듯이 미래 세대가 더 나은 번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한편, LA 한인타운이 위치한 캘리포니아주 34선거구에는 한국계 데이비드 김 후보가 출마했습니다. 개표율 98% 상황에서 46.9%를 득표한 김 후보는 53.1%를 득표한 현역 데이비드 고메스 의원에게 뒤지고 있으나 정치 신인으로서는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진=미셸 스틸 박 페이스북 캡처, 앤디 김 홈페이지 캡처, 영김 후보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 은주, 순자, 영옥씨… 120년 美이민사 아픔이 만든 '아메리칸 드림' 2020.11.1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美 연방 하원의원에 한국계 최대 4명 유력 스틸, 스트릭랜드 이어 영 김도 당선 가능성 꿈 좇아 이민 후 소수인종 고난 겪은 공통점 "목소리 못 내는 이들 위해 목소리 내겠다" 앤디 김, 재선 확정…'샛별' 데이비드 김 주목 "파워 커지면 한·미 의회 교류 수월해질 것" (왼쪽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공화당 소속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민주당 소속 메릴린 스트릭랜드,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한국계 영 김(한국명 김영옥) 공화당 후보.(사진=연합뉴스)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우리 가족도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지요. 홀로 조그만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가 부당한 세금 고지서에 힘겨워 하시는 걸 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뽑는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65) 당선인. 그는 50.9% 득표율로 민주당 현역인 할리 루다 의원을 1.8%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전체 435개 하원 지역구 중 가장 치열한 접전 지역으로 꼽힌 곳에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것이다.  ‘은주씨’ 스틸 후보가 하원의원에 도전장을 던지며 선거팀 홈페이지를 통해 털어놓은 이야기는 120년 한국 이민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청소년기 때 어머니, 두 여동생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스틸 후보는 “어머니는 홀로 일하는 이민자로서 주(州)에서 요구하는 부당한 세금을 어쩔 수 없이 냈다”며 “어머니가 힘겨워하는 걸 본 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큰 목소리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스틸 후보의 1호 공약은 ‘모든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위해 세금을 낮추는 것’이다. .  1992년 한인 상점들이 습격당하는 등 한인사회가 큰 피해를 입었던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태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미국 내 소수계인 한인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계 美 연방 하원의원 최대 4명 예상 스틸 당선인뿐만 아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선거에서 최대 4명의 한국계 당선인이 배출될 전망이다. 사실상 한국계가 미국 주류 정치에 입성하는 원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스틸 당선인에 앞서 230년 미국 의회 역사상 한국계 여성으로는 처음 하원행(行)이 결정된 이가 있다. 워싱턴주 제10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순자씨’ 메릴린 스트릭랜드(58·민주당)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돌이 지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하다고 한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며 “(내가 어렸을 적 미국에서) 부모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차별과 고난을 견뎌내셨다”고 돌이켰다. 그는 “부모님은 나에게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공동체에 봉사하고 약자를 위해 일어서라고 가르치셨다”며 “그 가치관은 (정치의 꿈을 이룬) 오늘날 나에게 영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가 어머니 김인민(90) 여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이유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2007년부터 워싱턴주 타코마 시의원으로 일했으며, 2010년~2017년 타코마 시장을 역임했다.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 소속 영 김(한국명 김영옥·57) 후보도 있다. 그 역시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다. 그는 “이민자, 작은 가게 주인, 그리고 어머니로서 투쟁하며 살았다”며 “(당선된다면) 워싱턴 정가에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초당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옥씨’ 김 후보까지 당선되면 3명의 한국계 여성이 미국 하원에 진출하게 된다. 미국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소속 앤디 김 하원의원.(사진=연합뉴스) “목소리 못 내는 이들 위해 목소리 낼 것” 지난 의회에서 435명의 연방 하원의원 중 유일한 한국계였던 민주당 소속 앤디 김(38)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다.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다. 그는 1993~2000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81) 전 의원 이후 첫 한국계였으며, 이번에 또다시 워싱턴행을 확정했다.  올해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하원선거에 나선 한국계 후보는 총 5명이었다. 최대 4명이 당선되는 건 예상 밖 성과라는 게 한인사회 안팎의 평가다. 30년 가까이 미국 정치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연방 하원의원이 4명 나오는 건 엄청난 쾌거”라며 “한국계가 주류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일본계, 중국계와 함께 아시안계의 한 축으로서 미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낙선한) 민주당 소속 데이비드 김(35·캘리포니아주 제34선거구) 역시 주목해야 한다”며 “그는 아시안계의 ‘라이징 스타(떠오르는 샛별)’로 평가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였던 앤드루 양의 공식 지지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코리안 파워’가 세지면 한국 정치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지난 의회에서 앤디 김 의원이 한미간에 중요한 가교역할을 많이 했다”며 “한국계 4명이 움직이면 한·미 의회 교류가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김정남  =============================///   좋아요 확대하기이전  
2990    [세상만사]: 30 = 14 댓글:  조회:2780  추천:0  2020-11-07
  '태어나보니 오빠만 14명'… 30년 만에 첫 딸 얻은 미국 부부  2020.11.07.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4명 아들의 부모인 제이·카테리 슈반트 부부가 지난 5일 낳은 딸 매기 제인. [A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유아 기자 = 미국에서 열네 명의 아들을 낳은 한 부부가 처음으로 딸을 얻어 주목을 받고 있다. 미시간주에 사는 아들 열넷의 엄마 카테리 슈반트(45)는 지난 5일(현지시간) 그랜드래피즈시 한 병원에서 3.4㎏의 건강한 딸을 낳았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첫 딸의 이름은 매기 제인.  남편 제이 슈반트(45)는 "매기는 상상도 못 했던 가장 큰 선물이다. 이번 해는 여러 가지로 정말 기쁜 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만 14명이던 슈반트 가족은 그간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됐다.  슈반트 부부는 '14명의 아웃도어스맨'이라는 제목으로 아들들의 성장기를 보여주곤 했으나 이번에 딸이 태어남에 따라 새로운 제목이 필요해질 참이다. 장남인 타일러(28)는 "14번째 출산에서도 남동생이 태어나자 부모님은 '딸을 낳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집에 핑크색 같은 여자아이 옷도 없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슈반트 부부는 미시간주 페리스주립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93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는 이미 아들 3명의 어엿한 부모가 돼 있었다. 이들 부부는 양육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카테리는 연이은 임신과 출산에도 꾸준히 공부해 그랜드밸리 주립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땄다. 제이는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고 토지측량 분야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 제이·카테리 슈반트 부부가 14명의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AP=연합뉴스]
298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변화 주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986  추천:0  2020-11-05
한경 경제용어사전 파리기후변화협약   [ Paris Climate Change Accord ] 2015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채택한 협정.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주도로 체결된 협정이다.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1차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협정'이나 `파리기후변화협정'이라고도 부른다. 2020년 이후 적용할 새로운 기후협약으로 1997년 채택한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것이다. 교토의정서에서는 선진국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었지만 파리 협정에서는 참여하는 195개 당사국 모두가 감축 목표를 지켜야 한다. 195개 당사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협정은 보다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급변하는 기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각 국가가 자발적으로 정하는 '국가결정기여(NDC)'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NDC로 2030년까지 26~28% 절대량 감축을 약속했고,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절대량 40% 감축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배출량 기준 60~65% 감축, 한국은 2030년의 목표연도 배출전망치 대비(BAU) 37% 감축 목표를 제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일본에서 열린 G7정상회담에서 파리협정 이행을 약속하면서 같은해 9월 행정명령을 통해 파리협정을 비준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부터 파리협정 파기를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주장은 사기이며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따른 미국 규제가 중국 인도 등에 비해 너무 강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2017년 6월 1일에는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해 미국의 파리협약 탈퇴가 기정사실이었으나, 2016년 11월 4일 발효된 협약은 3년간 탈퇴를 금지하고 있어 2019년 11월 3일까지는 탈퇴 통보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다음 날인 11월 4일 유엔에 협약 탈퇴를 통보했다. 탈퇴는 통보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인 2020년 11월 4일 이뤄진다. 미국이 파리 협정에서 최종 탈퇴한다면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이 협정을 지지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가 된다. ====================================/// 시사상식사전 파리기후변화협약      2020년 만료 예정인 교토의정서를 대체, 2021년 1월부터 적용될 기후변화 대응을 담은 기후변화협약으로 2016년 11월 발효됐다. 파리협약은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여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보편적 첫 기후합의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외국어 표기     Paris Climate Change Accord(영어)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총회(COP21)에서 채택된 것으로, 2020년 이후의 새 기후변화 체제 수립을 위한 최종 합의문이다. 즉 2020년 만료 예정인 교토의정서를 대체해 2020년 이후의 기후변화 대응을 담은 국제협약이다.  파리협약은 선진국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었던 1997년 교토의정서와는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보편적인 첫 기후합의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다만 각국이 제출한 INDC(자발적 감축목표)에 부여하려던 국제법상의 구속력은 결국 제외됐다는 한계는 있다.  한편, 파리협약은 '55개국 이상', '글로벌 배출량의 총합 비중이 55% 이상에 해당하는 국가가 비준'이란 두 가지 기준이 충족되면서 2016년 11월 발효됐다.      파리협약 주요 내용 파리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신(新) 기후체제로, 오는 2020년 말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직후인 2021년 1월부터 적용된다. 파리협약에는 ▷장기목표 ▷감축 ▷시장 메커니즘 도입 ▷적응 ▷이행점검 ▷재원 ▷기술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담겨 있다.  협약은 장기목표로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2℃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키로 하고,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을 추구'하기로 했다. 또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량은 각국이 제출한 자발적 감축목표(INDC)를 그대로 인정하되 2020년부터 5년마다 상향된 목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정기적인 이행 상황 및 달성 경과 보고를 의무화하고, 이를 점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종합적 이행 점검 시스템을 도입해 2023년에 최초로 실시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아울러 차별적인 책임 원칙에 따라 감축목표 유형은 선진국은 절대량 방식을 유지하며, 개도국은 자국 여건을 감안해 절대량 방식과 배출 전망치 대비 방식 중 채택하도록 했다. 이에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해 UN 기후변화협약 중심의 시장 이외에도 당사국 간의 자발적인 협력도 인정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국제 탄소시장 매커니즘 설립에 합의했다. 이 밖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꾸준히 감소시켜 이번 세기 후반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내용에도 합의했다. 또 선진국들은 오는 2020년부터 개발도상국 등의 기후변화 대처를 돕는 데 매년 최소 1000억 달러(약 118조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신기후체제 마련 파리협약은 선진국에만 감축 의무를 부과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가 지켜야 하는 첫 합의이면서,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신(新)기후변화 체제를 마련했다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 또 파리협약이 기존 교토의정서와 다른 특징은 ▷지구온난화 억제 목표 강화(2도 이내에서 1.5도 이내 노력) ▷온실가스 감축 행동을 선진국ㆍ개도국ㆍ극빈국 등 모든 국가로 확대 ▷5년마다 상향된 감축목표 제출(진전 원칙) 및 이행 여부 검증(5년마다) ▷2025년 이후 개도국에 대한 자금 지원 확대 ▷상향식 감축목표 방식 등이다. 다만 각국의 기여방안 제출은 의무로 하되, 이행은 각국이 국내적으로 노력키로 합의함에 따라 국제법적 구속력은 결국 부여하지 못했다. 한편, 1997년 일본 교토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돼 2005년부터 발효된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첫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는 선진국(38개국)들에만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지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애초부터 의정서 참여를 거부하고 일본ㆍ캐나다ㆍ러시아 등이 잇따라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데 이어,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과 인도(3위) 등 개도국에는 감축 의무가 부과되지 않으면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반면 이번 파리 총회에서 결정된 2020년 이후의 신기후체제는 선진국ㆍ개도국ㆍ극빈국 등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적용된다.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2015년 파리총회를 앞두고 한국을 포함해 187개국은 2025년 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기여방안ㆍINDC)를 유엔에 전달했다. 중국과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배출국들은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5~65%까지 감축하겠다고 공언했고, 우리나라도 2030년 배출전망치(BAU, 특별한 감축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미래의 배출량) 대비 37%를 줄이겠다는 내용의 감축목표를 2015년 6월 제출했다. 한편, 파리협약에서는 국가별 INDC에 대해 스스로 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모든 국가가 차기 감축목표 제출 시 이전 수준보다 진전된 목표를 제시하고, 최고 의욕 수준을 반영해야 한다는 진전원칙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협약국들은 2020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전 목표치보다 높은 수치를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서를 제출해야 한다.    국가     감축 목표     중국     2005년 1인당GDP 대비 60~65%     미국     2005년 배출량 대비 26~28%(2025년까지)     EU(28개국)     1990년 배출량 대비 40%     인도     2005년 1인당 GDP 대비 33~35%     러시아     1990년 배출량 대비 25~30%     일본     2013년 배출량 대비 26%     캐나다     2005년 배출량 대비 30%     멕시코     2030년 배출전망치 대비 25~40%     한국     2030년 배출전망치 대비 37%     미국,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유엔에 통보(2019. 11.)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19년 11월 4일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유엔에 공식 통보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미국이 파리협약에서 탈퇴하기 위한 공식 절차를 개시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2017년 6월 미국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으나, 발효(2016년 11월 4일) 이후 3년간 탈퇴를 금지한 규정에 따라 2019년 11월 3일까지는 탈퇴 통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유엔에 통보했는데, 다만 규정에 따라 탈퇴 통보 1년 뒤 최종적으로 탈퇴가 이뤄지게 된다. 이처럼 미국이 파리협약 탈퇴 절차에 착수하면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지구촌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트럼프 과오”트럼프 행정부가 탈퇴한 파리협정(파리기후변화협약)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트위터.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정부가 탈퇴한 파리협정(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를 선언하기도 했다. 바이든 후보는 이날 트위터에 ‘파리협정 공식 탈퇴’와 관련한 ABC 방송 보도를 공유하며 ‘정확히 77일 안에 바이든 행정부는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글을 올렸다. 그가 ‘시한’으로 스스로 정한 77일은 이날부터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1월 20일까지 기간이다. 파리협정 복귀는 기후 변화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 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과오’를 되돌려 놓겠다며 바이든 후보가 상징적으로 내세운 공약이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6월 협정 탈퇴를 선언한 후 지난해 11월 4일 탈퇴 절차를 시작했다. 2015년 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채택해 이듬해 발효된 파리협정은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협약 규정에 따라 절차 개시 후 1년이 지난 4일 미국의 탈퇴가 공식 발효됐다. 협약 서명국 중 탈퇴한 국가는 현재까지 미국이 유일하다. ====================================/// ...반기문 전 유엔총장에 대해서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착한 모범생(nerdy kid) 같았다”고 했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예정된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를 앞두고 상원에 발목이 잡혀 있던 그는 국제회의에서 구속력 있는 온실가스 감축 합의를 하기가 어려워 참석을 고민했다고 한다. 이런 오바마에게 반 전 총장은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대통령에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반 전 총장을 백악관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기후변화 회의 참석을 약속하라고 압박했다. 그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다. 그는 정직했고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특히 최우선 과제로 정한 기후변화 문제에선 대단히 끈질겼다.”          ㅡ  "약속의 땅" 버락 오바마 회고록에서.
2988    [이런 저런]- "낭" 댓글:  조회:2792  추천:0  2020-10-31
  하루에만 30만개 '낭' 생산... '낭' 종류 126가지... 2020-10-27       신강에 가면 밥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낭(위구르족 전통 빵)'이다. 많은 살마들은 '낭'이 발효한 후 구워낸 밀가루 빵인줄로만 알지만 신강 가스현(伽师县) 낭문화산업단지에 가면 들깨낭, 밀크비스켓낭, 백낭, 장미낭, 매운낭 등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맛볼 수 있다.    산업단지 책임자 마군(馬軍)의 소개에 따르면 단지에서 생산하는 낭의 종류는 총 126가지, 낭을 굽는 화덕만 402개에 달하며 하루 생산량이 30만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가스현에만 매일 20만개 팔리고 광동성 불산(佛山), 섬서성 서안(西安)의 직영점에서 하루 4만 장 주문하며 온라인 판매량이 3~5만 장 된다고 한다.      낭문화산업단지는 가스현에서 낭문화 전시, 생산과 가공, 제품 판매를 목적으로 중점 운영하는 산업단지다. 단지는 "낭산업+기능 양성+탈빈곤 취업+관광"의 발전 모식에 따라 낭산업단지 건설을 다그치고 특색 산업과 관광업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노동력 취업의 길을 넓히고 군중들을 부유에로 이끌고 있다.    이 곳에서는 취직한 사원들은 정부에서 기능 양성 지원금을 대주며 숙소도 제공한다. 마군은 "단지 내 1200명의 사원 중 696명은 빈곤가정 출신이었으나 현재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다"며 "1인당 월급이 3500위안(한화로 약 59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2987    방언을 살려야... 댓글:  조회:2707  추천:0  2020-10-28
방언과 지역문화 전승 /안성호 /2020년 10월 28일      근래에 음악, 영화, 문학, 예술 등 창작에서 지방방언요소를 내포한 작품들이 독특한 풍격과 창의성으로 인하여 각광을 받고 있다. 심지어 너무 많은 방언요소들로 인하여 거품현상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조선족가수들이 전국적인 무대에 나설 때도 조선족문화의 독특성을 내포함으로 하여 특색적인 작품으로 전국 관중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역특색이 농후한 방언과 지역문화배경은 특색 있는 작품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중국어에 “일반수토양일방인(一方水土养一方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한 지방의 풍토가 한 지방의 특색 있는 문화와 생활습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방언도 이러한 지역의 풍토에 의하여 형성된 언어문화이다. 인류의 력사적인 이동과 집거, 재이동으로 인하여 지역에 따라 부동한 언어가 형성되였다. 력사적인 언어 전승과 보존의 차이로 인하여 여러 지방의 언어들에는 많은 고대언어가 전승되여 보존되여있다. 일본어가 당음으로 불리우고 우리말에 절강 오월, 복건 민남방언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이 많은 것은 고대의 언어들이 보존되여왔기 때문이다. 개개의 방언은 모두 그 지방의 독특한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바 문화를 전승하는 매체이다. 중국 전역에는 북방방언, 산서(晋)방언, 오(吴)방언, 민(闽)방언 등 10대 방언 외에도 또 100여가지 방언이 있다고 한다. 복건성의 경우, 민남방언, 객가(客家)방언이 주류를 이루면서도 크고작은 방언 지역이 형성되여 산 하나를 넘으면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방언의 차이가 심하다. 또한 인구의 이동에 의하여 특수한 방언섬들이 형성되였다. 즉 한 마을 혹은 소수 마을들이 주변 방언과 완전히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반도에도 경상도방언, 전라도방언, 충청도방언, 경기도방언, 강원도방언, 황해도방언, 평안도방언, 함경도방언 팔도방언에 제주도방언까지 더하여 9대 방언이 있다. 조선족사회의 경우, 주로 팔도방언이 이주민들과 함께 전하여왔지만 이주인구 수와 집거 여부에 따라 주로 함경도방언, 경상도방언과 평안도방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방언섬들도 두루 만날 수 있다. 즉 연변지역의 충청도마을, 경상도마을 등 집단이주에 의하여 형성된 마을들에서 주변의 함경도방언과는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투리라고 표현하는 방언은 지역문화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1940년대에 같은 조선족마을 내부에서도 남부 출신과 북부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면 밎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현지조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너무나도 의외적이여서 “진짜입니까?” 하고 다시 확인하여 보았었다. 그 만큼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온 사람들이 같은 조선사람이라고 한 마을에 모여살았지만 그 만큼 지역적 문화적 차이가 컸던 것이다. 일본식민주의세력에 의하여 ‘남선사람’, ‘북선사람’ 등 차별적인 용어가 사용되였고 이를 받아들였던 것은 그 만큼 남북 출신간의 차이가 컸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 벼농사의 보급과 공동로동에 의하여 새로운 지역 민족공동체가 형성되고 지역언어 또한 교류와 융합을 거쳐 새로운 지역방언으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목단강지역 같은 경우, 함경도출신이 다수이지만 경산도출신도 많음으로 하여 경산도방언요소가 다분히 포함된 함경도방언으로 정착하게 되였다. 중국이라는 대환경 속에서 한어의 문화요소도 다분히 포함시킴으로 하여 조선족사회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은 우리만의 정서와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상징이 되였다. 지금도 간혹 위챗그룹들에서 드문드문 요즘 접하기 드문 이러한 사투리 언어들을 고의적으로 사용하면 그룹 성원들이 고향 향수애에 흠뻑 젖어있고 지나간 고향 생활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곤 한다. 이는 이러한 방언이 우리만의 정서, 우리만의 문화, 우리만의 고향의 정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이 지역적 정서, 지역만의 문화특색을 나타냄으로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교류에 저애가 된다. 이로 인하여 일찍 진시황시대부터 문자통일을 통하여 문자를 통한 교류를 추진하였고 명나라, 청나라 시기에는 관방용어와 더불어 음운서를 편찬하여 널리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권장하였다. 명나라시기에 제정한 남경지역 언어를 표준으로 하는 남경 관용어가 표준어로 되여 조선반도에까지 보급되였었다. 오늘날 우리말 한자음 발음의 일부가 명나라시기의 남경음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지적도 있다. 근대 이후 서방의 국민국가체제가 보편적인 국가건설체제로 자리잡으면서 표준어는 국가의 강력한 추진하에 더욱 추진되였다. 학교교육을 통하여 표준어의 교육이 일관적으로 추진되였고 지방방언의 사용이 금지되였다. 표준어사용의 중요성 또한 높아가고 있다. 글로벌화, 도시화 시대의 급격한 인구이동과 도시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하여 표준어는 더는 선택적인 언어, 외부인과 만났을 때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꼭 필요한 언어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방언의 사용환경은 날로 위축되여가고 있으며 중국 전역에서 방언은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상해말을 지역자존심으로 여기기로 이름난 상해에서 토배기 상해출신 자녀들마저 상해말을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필자가 있는 항주도 소학생들 가운데 일부 항주말을 알아듣는 학생들은 있어도 항주말을 할 줄 아는 학생은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되였다. 가족의 련대를 굉장히 중시하는 객가의 방언도 소실되기 쉬운 위태로운 언어로 지정되였다. 방언전승위기를 극복하려고 여러 지역들에서 지역특색이 있는 방언을 살리기 위한 캠페인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 중국 언어자원보호프로젝트가 실시되여 지역 방언과 소수민족언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상해, 복건, 항주, 소주 등 여러 지역들에서는 지방방언 텔레비죤프로그람 개설, 공공뻐스 지역 언어 안내방송, 유치원 지방 언어교류 행사, 지방 언어 이야기시합 등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큰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용성과 인문성, 지역성의 선택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실용성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연변을 포함한 조선족집거지 학생들의 일상용어도 이미 한어로 변하여가고 있다. 이는 민족적인 차원의 문제임과 동시에 상해와 같은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화 시대, 다매체 시대에 실용성에 대한 추구라고도 볼 수 있다. 민족적 정서와 고향의 정이 넘쳐나는 고향 방언 환경에서 자라난 우리 세대조차 한국과의 교류가 심화됨에 따라 고향의 말을 점차 멀리하고 있지 않는가 반문하고 싶다. 지역문화 보존 차원에서 방언과 민족언어 보존과 발전을 역설하고 싶지만 커다란 력사적 흐름 속에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방언의 형성, 발전이 지역의 풍토에 의하여 형성되였듯이 현시대의 빠른 인구류동과 교류의 풍토가 지역적 특색과 지역발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로 인한 균일화, 표준화가 추진되면서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지역적 특색, 지역문화가 특색 있는 문화창작의 원천이 되고 지역살리기의 든든한 기초가 되고 있다. 지방언어를 지역 특색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중시하고 지역 활성화와 특색문화 창출에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의 길을 함께 힘을 모아 모색하여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안성호(安成浩)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2986    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댓글:  조회:2972  추천:0  2020-10-15
  추모수필;  허창렬이 죽었다고? 20-09-29          /살춘각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구제비 스무고개 같은 소리를??       부고:     (재한동포그룹)의 췬주님이신 허창렬시인님이 어제(9일) 불상사로 타계하셨습니다. 지금 사인 해명중입니다.     부고 작성자: 정동(장경률)       9일이면 어제가 아닌가? 나는 변사또한테 전화를 넣었다. 변사또라면 잘 알 터이다. 창렬이가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곁에서 도와준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러나 신호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끊는다. 다시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다가 이번에는 배사장한테 넣었다. 받는다.     “야, 사실이냐?”     “응.”     “상세히 좀 말해봐.”     “나도 금방 들었어야. 잘 몰라.”     녀석의 목소리는 잔뜩 꺼져 있었다. 우리 셋은 동갑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진천이지.”     “충주? 아직도 거기냐?”     “아니면 어떡해? 일자리가 없는데... 지난 달 와이프가 중국서 돌아왔잖아? 한 번밖에 못 봤어야.”     그러는데 변사또한테서 문자가 왔다. 창렬이 갔다?     문턱 하나 넘는 게 그렇게도 간단한지?     내가 창렬이를 본 것은 아마도 1998년도였을 것이다. 년말이였고, 작가협회 “문학의 밤” 행사모임때였을 것이다. 저녁식사자리에 우리 또래들 일여덟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떤 두억시니 같은 놈이 우리 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와서는 다짜고짜,     “여기 혹시 량영철이라고 있소?”     묻는다. 김현순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내 앞의 잔에다 들고 온 술을 철철 넘치게 붓는다.     “량영철이야말로 진짜 소설가지! 나머진 다 쓰레기들이야.”     그리고는 되돌아서 가는 것이였다.     현순이랑 발끈했다. 두억시니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씩 꼬아 던졌다.     “저 놈 누구야?”     “어디서 온 새낀데 시건방지네.”     “우리한텐 붓지도 않고... 인사도 안하고 갔잖아.”     “허창렬이 아니야? 시를 쓰는.”     “몰라. 처음 보는 놈이야.”     그때 나는 처음 들었다, 허창렬이란 이름을. 그 해박한 두억시니처럼 생긴 놈이 허창렬이라는 것도 그날 알 게 되였다. 감히 문인들을 앞에서 쓰레기라 말할 수 있는 간이 크고 배짱이 둑실한 놈이라는 것을 모르던 데로부터 알 게 된 것이다. 하루 강아지 같은 놈! 귀여운 놈!! 어쩌면 나는 그때 속으로 그렇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놈을 잊어버렸다.     20년이 지났다. 이번에 나는 놈을 한국에서 만났다. 놈은 나보다 석 달 먼저 와 있었는데, 방문취업제 H-2 비자였다. 어떻게 알고 내 위챗을 먼저 추가해왔다.     “살춘각?1언, 2언, 3언을 읽었다. 글 안 쓰니까 죽었는가 했더니 죽진 않았더구나.”     녀석은 신대방의 한 개장집에다 료리를 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였다. 나는 가던 길을 틀어 사촌동생 조은경네로 향했다.     창렬이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야, 이놈아. 이 형 면목도 좀 봐줘야지. 대갈통도 안 디밀구 가뻐리ams 나는 뭐가 되냐? 암튼 난 이미 샀으니까 나중에라도 군소리하기 없기다?”     그때부터 나와 창렬이는 자주 만났다. 집 떠나기 딱 싫어하는 령감님 성질 때문에 주로 창렬네 집에서 만났다. 대신 술과 안주는 허령감이 갖췄다. 하기 쉬운 닭이나 오리 따위였다.     마주 앉으면 우리는 티각태각했다. 나는 창렬의 시를 시도 아닌 가사도 아닌 짬뽕이라고 놀렸고, 창렬이는 내 소설을 삼류라고 비하했다. 창렬이는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재간둥이였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창렬이는 돈이 없다보니 평론을 돈 받고 퍼그나 써 줬는 모양이였다. 그것을 창렬이는 한면으론 부끄러워 하면서도 두면으론 자랑스러워도 하는 것이였다. 부끄럽다는 것은 돈을 받았다는 것이였고 자랑스러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시인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창렬이는 노래도 많이 만들었다. 시도 가사에 시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문단행태를 보면 가차없이 필을 날렸다. 그런 칼럼이 나간 뒤면 모두들 뒤에서 욕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썼다. 그래서 창렬이는 친구가 별로 없다. 한때 중국조선족문단을 욕해놓고 스스로 왕따 당하기도 했다. 입이 걸싸서 욕이 심한 건 둘째 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느냐고 지사 왼고개를 치는 걸 어찌하겠는가.     알아본즉, 창렬이는 리혼을 하고 한국에 나온 터였다. 말로는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그리 됐다는데 진실여부는 알바 없다. 하지만 창렬이는 리혼한 마누라를 몹시 사랑했다. 돈지갑에 마누라사진을 항상 넣고 다녔는데 어느 날 창렬이 취한 틈을 타 억지로 구경했다. 미인이였다. 가히 미인이라 할 수 있는 한 미모를 지닌 녀인이였다. 사진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라면 이쯤 되는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지 않겠냐? 나 이제 돈 벌어서 꼭 마누라를 데려오고야 말거다. 절대 다른 놈한테 안 뺏겨!”     창렬이한테는 효정이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연변대학에 다녔다. 어느 여름방학 때에는 한국에 와서 놀았는데 계산해보니 한화로 500만원이나 썼더라는 것이다. 기집애, 돈 쓰는 건 지 애비 닮아갖고, 잔뜩 헤퍼서 어쩌겠는지 몰라. 혀를 툭툭 차는 것이였다.     남들은 창렬이를 속이 좁아 터졌다, 남자란게 잘 삐진다... 말하지만, 의외로 나한테만은 수월했다. 나는 창렬이네 집에 가면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고 나온다. 피우는 거, 마시는 거, 신는 거, 입는 거... 그래도 창렬은 더 주지 못해 헤맨다. 그만큼 창렬은 의리파인 것이다.     창렬은 웬만한 사람들의 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창렬의 말대로라면 세상에서 허창렬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렬의 눈에 드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욕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합지졸 같은 시를 놓고 창렬은 한바탕 훈계까지 서슴치 않는 것이였다. 그러니 옆에 사람이 있겠는가. 창렬이를 따르던 녀자들마저 다 떨어져나가고 마는 것이였다. 해도 창렬은 꿈쩍도 안했다. 널린 게 녀자인데 뭐.     창렬은 부지런했다. 눈만 뜨면 시를 썼다. 밥 먹다가도 쓰고, 화장실 가면서도 쓰고, 지하철은 물론, 일을 하면서도 썼다. 하도 핸드폰을 들고 끄적이고 있어서 나한테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니가 토끼냐.     한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노가다일이란게 보통일이 아니다. 노가다일을 십년만 하면 온몸이 다 노달이 나서 절거덕거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창렬이는 노가다에 붙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8남매의 막내로 자라난 창렬이가, 그것도 별 고생 모르고 성장한 창렬이가 노가다를 하면서 시를 쓴다는 걸 한 번 상상해보라. 그림이 안 나올 것이다. 어느 한 번 창렬이는 나한테 손을 내보여줬다.     “아침이면 손이 펴지지를 않는다. 싹 꼬부라들어서 반시간씩 주물러줘야 그날 일을 할 수가 있다.”     작년 12월 말이였다. 중국에 들어왔던 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시험 보러 한국에 들어갔다. 창렬한테 전화를 넣었더니 수원에 있단다. 일자리가 줄어들어서 지방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있느냐 시간 맞춰 올라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배부른 소리를 했다. 힘들게 올라오느라 바쁘게 내려가느라 하지 말고 새해에 다시 만나는 걸로. 그런데 놈이 내가 귀국하기전 밤도와 올라왔다. 역시 은경네다.     “니눔 하나 보구 싶어서 왔지. 아직까지 이 세상엔 나를 미친 눔, 꺼질 눔, 싸가지 없는 눔이라고 욕할 수 있는 놈은 너밖에 없다. 나는 남을 욕할 수 있어도.”     그게 놈과의 마지막 자리였음을 그때의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때까지만도 나는 태평스레 래년 일이월에 다시 보자, 벚꽃축제때 보고 무궁화머리때 또 보자 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럴 수 있을 줄로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다. 코로나씹구인지 코로나씹팔인지 하는 것이 전 지구를 휩쓸지 누가 꿈엔들 알았겠는가.     구정 쇠고 나간다던 것이 못나갔고, 꽃이 필 무렵이 되자 하늘길이 완전 막혀버렸다. 좀 잠잠해질 것 같더니 이번에는 광화문집회요 사랑교회요 하더니 아주 트위데믹으로 터져버렸다. 녀석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8월 1일 저녁 8시 20분으로 나와 있었다.     그날 녀석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지. 딸 허효정에 대해 얘기했었지.     “야, 내 딸 대학 졸업하고 얼마 전 광주에서 취직했다”     “그래? 잘 됐다. 시름 놨구나. 이제 집어주기만 하면 되겠네? 제발 너 같은 밴댕이만 만나지 말기를.”     “이런, 코풀레기. 그나저나 우리 딸내미 돈이 필요하다는데 나 지금 돈이 얼마 없어. 한 이천소시 있을가. 광주에서 세집 맡고 생활비 쓰고 하자면 적어도 만원은 있어야겠는데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 몇 달 일을 전혀 못했잖니.”     “효정 외가집에다 말해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햐~ 그나저나 개 쪽팔린다야. 이 허창렬이 언제부터 이런 신세가 됐다냐...”     이게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서 녀석은 9월 7일 일요일 서울시간으로 오전 11시 27분 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강원도 철원에 하루 일당 8만원 받고 감자 캐러 가는 친구를 지켜보며 내가 왜 눈물이 날가?     ?그놈은 그래도 친구인 내가 생각이 났는지 전화가 와서 좀 힘들긴 하지만 한 번 해볼래 하길래 하루 일당 15만원씩 받던 내가 그것까지 해야 되나 잠간 망설여지다가도 너무 갑갑한 현실에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어느 강원도 깊은 산골에라도 들어가 감자라도 캐야 하나도 싶고? 내 인생이 진짜 드라마 ㅋㅋ.     그리고 월요일 오전 9시 42분에는 “새끼 손가락”이라는 신작 시를 올린다.       산으로 간 애인은     다섯 손가락 중 어느 것이 제일 예쁜가고 묻는다     이 세상의 수많은 것을 움켜쥐였다가     남자의 심장을 꽈악 움켜쥔 그 손에서는     맑은 피방울이 아침 미소로 곱게 피여 오른다     살고 싶은가 순종하라     태여나면서 내 것이였던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태양이 지구를 팽이 돌리듯이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힘,     우리가 매일 산으로 가는 원인은     숨가쁜 하루 일상에서 잠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뿐이다     수컷들이 암내를 맡고 매일 암컷들의 주변을 맴도는 것은     암컷들에 대한 일종의 존중일뿐이다     암컷들이 매일 수컷들의 눈치를 살피고     수컷들이 암컷들에게 선뜻이 고기 한 점 내여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본능일뿐이다     기실 난 내 애인의 다섯 손가락 중에서     가냘픈 새끼 손가락을 제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창렬이는 그렇게 강원도 산골로 감자 캐러 떠났다. 화요일 오후에 올라가서 이튿날 9일 새벽에 잠자는 모습 그대로 시체로 발견됐다.     창렬이는 현재 경기도 파주 의료원에 있다고 리동렬이 전했다. 한국에 있는 큰누나가 경찰서에서 상담 받고 있고,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잠정 결정됐다 한다. 경찰서에서는 부검까지 갈 모양이다. 따라서 장례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설사 정해졌더라도 나는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명복만 빌뿐이다.     창렬은 소신이 있다. 우리 둘은 마주 앉으면 풍란화 같은 지조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작가에게서 지조를 빼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소신이 있는 만큼 창렬은 외로웠다. 어디 술 마실 친구조차도 변변찮았다. 창렬은 생활에서도 외로웠다. 말로는 널린 게 녀자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마음먹고 만날 녀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창렬은 본처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랑했다. 어느 날 창렬은 본처에게 남자가 생긴 것 같다며 눈가에 물기를 번들거리는 것이였다. 그 이후로 창렬은 본처에 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창렬의 사인 심근경색에 대해서는 나름 짚이는 데가 있다. 창렬이는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양위에 시달렸다. 그 처방으로 비아그라를 복용한 것이다. 한 번은 나한테 비아그라 한 알을 주면서 하얀 병 두개를 주는 것이였다.     “심장에 관여하는 약이다. 비약 먹을 땐 꼭 함께 먹어줘야 돼. 안 그럼 위험해.”     “너 혹시...?”     “응. 별로 좋진 않아. ㅎㅎ.”     그 노란색의 비아그라를 나는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 속에서 창렬이가 방불히 웃고 있는 것 같다.     살려고 애썼던 친구.     시를 목숨처럼 여기고 일가를 이루려고 했던 친구여.     너 알고 있니? 니가 죽자 그룹마다에서 너의 시로 도배되고 있다는 걸. 살아서는 개싸가지였다가 죽으니까 천재로 칭송되는 너라는 걸. 너 알고 있니?     살아서 술 마실 적에도 우린 롱담처럼 그런 말을 주고받았었지. 천재가 되고 싶거든 일찍 죽어라.     하지만 창렬아, 넌 너무 일찍 죽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서두른 것이냐. 그리도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냐. 나는 지금도 네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창렬이가 죽었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하던 창렬이가 죽었다고!     “우리는 ”이라고 웨치던 풍란화 같은 삶을 신봉하던 그 창렬이가 죽었다고?!       1     나는 살아 죽어야 하리     이 나라 이 땅에     개구쟁이처럼 쑥부쟁이처럼     가난에 목 메인 웃음     신들메로 꼬옥 조이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들로 산으로 그렇게 떠나 가리!     구려하 칠백리 료동벌은     삼학사의 통곡소리련가?     백암성 오홀골성 소쩍새 울음소리는     뼈에서 짜낸 휘파람소리련가?     선친들이 일궈놓은     밭고랑 떠나 나는 구름으로     먼 곳을 떠나간다       2     한치의 제땅도 없는 내 인생에     진달래꽃이 활짝 핀다     아리랑꽃이 활짝 핀다     눈물은 사치한것,     뒤돌아 보면     위나암성 성벽에는     류혈이 랑자하구나! 누가     우리를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압록강 건너     살길 찾아 떠나온     월강 민족이라 하였던가?     어디에 살던 우리네     가락에 덩실덩실     우리네 정서에 훈민정음이     뼈속까지 법글로     새겨진 중국조선족       3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     내 이름 석자에 조상의     얼이 깃들어 있으면 그만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던     만나면 반가워     서로 어깨 부둥켜 안고     김치에 막걸이에     진한 정 짠하게 나누면 그만     생성사멸의 인생     두만강 기슭의 자갈돌이면     어떠하리 압록강 기슭의     이름 모를 물새면 또 어떠하리?     봄이 오면 새 울음소리에     씨앗 뿌리고     가을이면 도리깨 높이     쳐들어 하늘을 타작하던     우리는 중국조선족       4     너무 멀리는 가지마라     갔던 길 되돌아 올수 있게끔     길섶에 봉선화며     진달래꽃 뿌리며 가자     백합이 만개할 무렵     고향이 그리워     친구가 그리워     인정이 그리워     엄마가 그리워     아빠가 그리워     고향으로 되돌아 올적에     갔던 길에 꽃내음     맡으며 길 잃지 않게끔       5     올망졸망 강기슭 따라     오손도손 모여앉았던     하얀 초가집이 쓰러진다     아버님의 연자방아     디딤돌위에 잡초가 무성하다     내 고향은 컴퓨터 마우스로     이제 말끔히 지워야 하나?     품생품사 품두논족     난 이제 내 이름에     금빛 도금해야 떠떳이     살수가 있나?       6     남에 가면 조선족     북에 가면 동포     이률배반의 어설픈 명작ㅡ     동질의 이질감에     상처만 깊게 패인다     백년도 채 못 사는 인생     뭘 바라고 네것 내것     그렇게 알뜰히 따져왔던가?     돌아서면 언제나     슬며시 따라와 내곁에 서는     너는 나의 그림자     나는 너의 구름     한송이ㅡ       7     연변에 살아도 좋다     료녕에 살아도 좋다     흑룡강에 살아도 좋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살아도 좋다     만나면 반갑게 두 손     덥썩 잡고 알싸한 된장국에     술 한잔씩 털어 넣고     아리랑에 쓰리랑     눈물 딲으면 너는 조선족     이 나라 이 땅에     무궁화 꽃이 아닌     개나리 천지꽃이라도 좋다     북경에서 만나도     상해에서 만나도     서울에서 만나도     뉴욕에서 만나도     품생품사 품두논족     우리는 중국 조선족?       그렇다. 창렬이는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중국조선족”, 창렬아. 너야말로 진짜 프로다.     잘 가라, 친구야.     부디? ===============================================/// [편집후기] 「허창렬시문집」을 펴내면서 (ZOGLO) 2020년11월25일  이동렬 재한동포문인협회 대표 고 허창렬(필명 허인) 시인이 심근경색으로 불시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지난 9월 9일 저녁이었다. 1968년생인 그는 만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서 재한조선족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멘붕이 왔었다! 그래도 가슴 떨림과 함께 고 허창렬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과도 같은, 그 속에서 응축되고 점화되어 피어난 불꽃같은 생각이며 사상이며 감성들을 그린 시편들을 모으고 선정하여 기어이 '먼 훗날'이란 시문집으로 내놓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버금찼었다. 거의 두 달간, 나는 허창렬 시인의 시적 세계에서 그가 아파하고, 외치고, 갈구해온 시들을 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온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외롭게, 하루아침의 이슬마냥 허무하게 갈 수가 있을까? 삶이란, 목숨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누군가 훅 불면 쉽게 꺼져 버리고마는 그런 존재일까?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들은 물론, 그를 알고 그의 시를 아끼던 모든 독자들도 허 시인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애석해 했으며 깊은 조의를 표했다. 또 허 시인이 생전에 내지 못한 '시문집'을 출판해주자는 데 함께 뜻을 모았다. 맨 처음에 고인의 지기인 변창렬 시인이 찾아와서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허창렬 시문집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같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그러는 게 좋겠다"고 바로 결단을 내리고 '추진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시문집을 내는 것이 바로 고인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라는 생각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집을 편집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허창렬 시인이 생각하고 아파하고 사랑해왔던 것이 바로 우리 회원들이 지금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삶의 복사본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이 바로 우리 동포들의 문학이요, 그가 거둔 성취가 바로 우리 동포문인들의 성취인 것이다! 삶과 죽음의 터널에서 그가 주조해낸 시문학의 주춧돌들을 가져다가 마땅히 우리 동포문학의 성전을 쌓아가는 데 써야 바람직할 것이다. 이에 변창렬 시인이 '허창렬 시인 시문집' 출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장경률, 김경애 재한동포문인협회 공동회장과 리춘화 수필가가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총괄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변창렬 시인이 100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유족이 50만 원 후원금을 내자 중국과 한국의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들을 내서 바로 출판 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전광옥, 리춘화, 변창렬, 리다연, 리성철, 차영화 등 추진위원들이 위챗이나 조글로 등에서 허창렬 시와 평론을 앞다투어 수집해서 제공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리춘화 선생과 리다연씨의 노고가 컸다. 교정은 김경애 시인과 강성봉 동북아신문 편집인이 책임을 지고 했고, 책 편집 및 출판 등은 '도서출판 바닷바람(발행인 이동렬)'에서 진행을 했다. 마침내 '허창렬시문집'에는 허창렬 시인의 130수의 시와 8편의 평론, 김철호 시인과 장경률 칼럼니스트의 추모글 2편을 선정해서 수록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추모글을 보내오셨지만, 작품을 한편이라도 더 싣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아쉽게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솔직히 지난날, 고 허창렬 시에 대해 나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시를 너무 쉽게 쓰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성격도 어지간이 과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 부회장을 역임했고, 동포문학 대상도 받은 사람이라서 더욱이 그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곧 그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고 절대 독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협회 행사를 할 때 초청을 하면 꼭꼭 참석을 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항상 형님이 불러서 할 수 없이 왔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가끔 술잔을 나눌 때면 "형님, 형님" 하면서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우리 협회가 금방 설립됐을 당시 그는 "형님, 이래가지고 될 것 같아요? 다들 이런 수준을 갖고 무슨 문학을 한다고 그래요?"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협회 회원들한테 간혹 인정 사정없이 비평을 하면서 "시가 시 같지 않다. 그렇게 쓸 바에는 아예 절필해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물론 몇 년 후 협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자 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지적한 것이 옳았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의 경지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협회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문학다운 문학을 해야 진정한 문학 단체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선비였다. 아주 꿋꿋한, 문학에서만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온 올곧은 선비였다. 일찍 중국 요녕일보 문학편집 및 기자로 재직했던 그는 오직 문학으로 살고 문학으로 죽은 선비다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선정, 편집하면서 느낀 점은 먼저 우리가 너무도 허 시인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이미 허창렬다운 시풍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문학의 기조는 역시 디아스포라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가족과 친인들이 고향을 떠나 각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고국이라지만 낯선,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득불 돈 많이 받는 건설현장에서 뛰어야 했던, 고속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현대문명과 접목점을 찾을 수 없었던…! 아무튼, 신문사 기자 출신이었던 자존심을 한국 생활에 녹여 내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존심은 그대로 그의 시문학에서 표출됐다. 그의 시는 방황하고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 '춤추는 왜긍하倭肯河'는 첫 구절부터 '나는 왜 아버님을 그곳에 묻고 여기 왔을까?'로 시작을 해서 가족의 아픈 역사를 써 내려가다가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신한테 '왜긍하는 내 삶의 하나의 인생 정거장이다'라고 고백한다. 떠나면서 고뇌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란 말이다. '밥 한끼' 시 첫머리를 보자. "내 늘그막에/얼마나 큰 금덩이 안고 살려고/이 밥 한 끼/게걸스레 삼키고/목이 콰악 메이는가?"라고 토로했다.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뛰어온 중국동포들이라면 이 한 마디 시구에 누구나 가슴이 울컥해 날 것이다. 시 '산다는 것1' 마지막 연에서 그는 "산다는 건/눈물이 나는 일/산다는 건/미어지는 앞가슴을/햇볕에 깨끗이 말리워야 하는 일/웃으면 하얗게 소금이 내 돋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게 밥 한끼를 위해 뛰면서도, 밥 한끼에 "목이 콱악 메이"면서도, 그는 눈물을 "햇빛에 깨끗이 말리워" 웃으면서 "하얗게 소금"을 빚고 있었다. 시 '용쓰는 날'을 보면 그가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향에 두고/떠나 온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사랑하는 딸애의 학비를 부치며/먹고 살기 힘들다보다/그래 조금만 힘내자/눈물로 술 한 잔 삼키는 것이/이 세상 아버지들의/가장 쓰라린 마음일 뿐이다"라고 읊고 있다. 시인의 양심고백이다. 이런 시들이 그의 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그는 아파했기에 물욕으로 꽉 차서 넘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만의 아름다운 세계와 사랑을 추구했었다. 그의 시구속에는 유난히 '별'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많이 표현한 것 같다. 시 '먼 훗날'을 보면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에서/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여 불러 주리라"고 쓰고 있다. 이 시구에는 사람간에 삭막해지는 현실의 '非情'을 빗대고 비판하면서 서로가 나누고 싶어하는 정과 사랑에 대한 갈구를 눈물겹게 보여주고 있다. 묻노니 과연, 그게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서"만 가능한 일일까? 그의 시구는 소박하고 간결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수법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절대 미사여구가 없다.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선비의 기질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많이 보고 답습하면서 그들의 시풍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기의 시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또, 여기서 허창렬 시인의 시를 다 평한다는 것도 무리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편집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간략하게 적을 뿐이다. 앞으로 문학세미나 등을 통해 고 허창렬 시인의 시에 대해 제대로 되는 평가를 내려주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허창렬 시인의 딸 허효정씨와 연락이 되어 그가 보내온 글을 책의 머리글로 대신할 수가 있어 한결 마음의 위안이 된다. 고 허창렬 시인도 하늘나라에서 고마워할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해서 중국 광주 모회사에 출근하고 있는 허효정씨는 글을 통해 아빠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움은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허 시인의 시 '먼 훗날'에서 읊었듯이 "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어 불러 주리라". 서로가 부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고 사랑해준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지 않을까? 허창렬 시인이 꿈꾸며 바란 것도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이 사랑을, 고 허창렬 시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0년 11월 20일
2985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상 상금" 댓글:  조회:3431  추천:0  2020-10-09
지난 10월5일부터 12일까지 노벨위원회가 제120회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수상자는 노벨의 기일인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시상식을 생략해 수상자들이 시상식을 즐길 수 없다. 대신 수상자 나라에서 수여하는 모습을 화상 중계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오슬로 시청(1000명 수용 가능)에서 따로 진행했던 노벨평화상 시상식만 오슬로 대학 강당(100명)으로 옮겨 진행할 예정이다. 아쉬움을 달랠 점은 작년보다 수상자 상금 혜택은 커졌다는 것. 노벨상 수상자는 어떤 혜택을 받을까. 혜택을 정리해봤다.   지난 10월5일부터 12일까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기금운용 상황에 맞게 상금 유동적, 올해는 증액 노벨상 수상자가 받는 혜택 중 하나는 상금이다. 2020 노벨상 수상자는 작년보다 상금 약 1억3000만원을 더 받을 수 있다. 노벨재단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올해 각 부문의 노벨상 상금을 작년 900만스웨덴크로네(약 11억6700만원)에서 1000만크로네(약 12억9700만원)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증액 이유는 재단 재정 상황이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간 상금액은 변화가 많았다. 예를 들어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 김대중 대통령은 상금으로 900만스웨덴크로네를 받아 당시 역대 최고 금액을 받았다. 전년도 790만크로네에서 크게 오른 금액이었다. 이듬해인 2001년 노벨재단은 상금을 추가로 증액해 수상자에게 1000만크로네를 지급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 여파로 기금운용에 어려움을 겪은 노벨재단은 2012년 63년 만에 상금을 삭감했다. 상금액은 1000만크로네에서 800만크로네가 됐다. 장기적 운용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5년 뒤인 2017년 재정 확충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돼 900만크로네로 인상, 3년 뒤인 올해 1000만크로네로 추가 인상했다.    상금 받으려면 조건 있어 상금은 노벨재단이 한 해 동안 운영한 기금 이자 수입의 60% 이상을 5개 부문으로 나눠서 준다. 다만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 설립 300주년 기념으로 만든 노벨 경제학상 부문 상금은 노벨재단이 아니라 스웨덴 중앙은행 300주년 기념 기금에서 지급하고 있다. 노벨상은 한 부문당 최대 3명에게까지만 시상한다. 복수의 수상자가 나오면 상금을 나눠 갖는다. 만약 3명이 수상자일 경우 3명의 공적이 같으면 3등분을 한다. 3명 중 2명이 한 팀일 때는 팀을 이루는 이들에게 절반 그리고 나머지 한 명에게 절반을 지급한다.     상금을 받으려면 조건이 있다. 수상자는 6개월 이내 수락 강연을 해야 한다. 노벨상 시상식인 12월10일을 기준으로 6개월인 다음 해 6월 10일까지다. 강연하지 않으면 상금을 받을 수 없다. 일반적인 강연 형태뿐 아니라 동영상, 녹음, 공연 등 다양한 형식으로도 가능하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시상식에 불참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은 2017년 4월 스톡홀름에서 콘서트를 열어 뒤늦게 메달과 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근처 호텔에서 따로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강연을 하지 않아 상금은 받지 못했다. 결국 두 달 뒤인 6월 녹음물 형태로 강연을 진행하고 나서야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노벨상 상금에 비과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수상자를 대우한다. 소득세법 18조 2항에 노벨상을 명시해 비과세되는 기타소득으로 노벨상 수상금을 지정했다.   수상과 함께 얻는 각종 영예 수상자는 상금과 더불어 메달과 증서를 받는다. 노벨상 메달은 1980년까지 지름 66mm에 무게 200g에 달하는 23K 금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이후 18K 금에 24K 도금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무게도 175g으로 가벼워졌다. 메달에 쓰이는 금 비용은 약 1만 달러로 추정된다. 한화로 약 1160만원이다.     올해는 시상식이 취소됐지만 12월10일 노벨상 시상식 후 수상자들은 스웨덴 왕과 왕비와 함께 만찬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갖는다. 다음 날인 11일은 수상자들끼리 한데 모여 연구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Nobel Minds’ 토론회에 참석하게 된다. 해당 연도 수상자들이 함께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무엇보다도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적 위상이 달라지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특히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는 연구자의 경우 대개 교수인 경우가 많아 전 세계 명문대에서 정교수로 모시려고 하는 러브콜을 많이 받는다. 또한 수상자들 사이에는 “비용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다”라는 말도 있다. 노벨상을 받으면 정부와 대학, 기업 등 각종 기관에서 연구비를 지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글 와이낫 공이 
2984    "진달래문예상" 주인들은 들러리... 댓글:  조회:3023  추천:0  2020-10-09
제9회 “진달래문예상” 시상식, 35편 작품 수상 편집/기자: [ 김영화 ]  [ 길림신문 ]  [ 2020-09-30 ]    29일, 연변주당위 선전부에서 주최하고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주관한 제9회 “진달래문예상”시상식이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있었다. 다년간 연변주당위와 연변주정부는 줄곧 문화사업에 높은 중시를 돌리고 문화강주전략 실시를 견지했다. 특히 2017년에 열린 연변주 문화사업회의는 연변의 여러 민족 문예사업일군들로 하여금 문예정품을 창출하여 문예의 고봉에 톺아오르도록 크게 고무격려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지난 4년간 창작된 35편의 문학예술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문학부문은 소설, 아동문학, 평론집, 번역작품, 시집, 수필집 등으로 나뉘였는데 김혁, 김호웅, 박장길, 김승종, 김인덕 등 15명이 수상했다. 예술부문은 무용, 노래, 민족악기, 화극, 소품, 곡예, 민간예술, 문예평론집, 미술, 서법, 촬영 등으로 나뉘였는데 무극 ‘아리랑꽃’, 노래 ‘엄마의 아리랑’, 화극 ‘제1서기’ 등 16개 작품이 영예란에 이름을 올렸다. 영상류에는 다큐멘터리 ‘연변의 맛’, ‘2016년연변음력설야회’, 라지오극장‘탈옥’, 미니영화 ‘정 깃든 땅’등이 수상했다. 시상식에서는 또 ‘준마상’수상자인 허련순과 번역성과상 수상자 주하를 표창했다.     알아본데 따르면 올해로 제9회를 맞은 진달래문예상은 연변주당위와 주정부가 설립한 연변문학예술계의 최고의 상으로, 1987년에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지금까지 33년간 선후하여 365편의 우수 문예작품과 134명의 우수문예창작일군들을 표창했다. 이 우수한 문예작품과 창작일군들은 선후로 국가 ' 5개1공정'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준마상, 길림성 장백산문예상 등 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며 진달래문예상은 문학예술인들이 지향하는 영예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298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식량평화백신",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06  추천:0  2020-10-09
노벨평화상 세계식량계획… "혼란 극복할 최고의 백신은 식량" 2020.10.0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코로나19 백신이 나오기 전 대혼란을 극복할 최고의 백신은 식량이다”  전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고통받는 가운데 올해 노벨평화상이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에 돌아갔다. 심각한 기아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19가 불러온 빈부 양극화 심화, 국제 연대의 약화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2014년 아프리카 수단의 난민 여성들이 다르푸르 인근의 실향민을 위한 킬마 캠프에서 WFP가 제공하는 구호 식량을 받는 모습. [AF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WFP를 202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기아 퇴치에 노력하고 , 분쟁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여건 마련에 기여했으며, 굶주림이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또 WFP가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항하는 노력을 강화하는 인상적인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WFP는 1963년 기아 퇴치와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설립된 유엔 산하 식량 지원 기구다.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지구촌에 굶주리는 사람이 전혀 없는 '제로 헝거(Zero Hunger)'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2011년부터 집행이사회 이사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전세계 83개국 1억 3400만명 이상이 WFP의 원조를 받았다.  노벨위원회의 언급대로 코로나19 이후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빈곤층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전세계에 봉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가뭄과 홍수 등 이상기후, 전염병과 분쟁까지 덩달아 늘면서다. 특히 예멘과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남수단 등에서는 아사 직전까지 내몰린 주민들이 급증했다. 최근 세계은행(WB)는 전세계 인구의 4분의1이 하루 3.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극빈층이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WFP도 올해 말까지 2억 6500만 명이 기아에 가까운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4월에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안보리)에서 각국 정부에 대응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은 “2020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 위기에 있어) 최악의 해가 될 것”이라며 추가 지원과 함께 식량 공급망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행위를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WFP도 악전고투를 벌였다. 하늘길이 끊기고 이동이 중지된 상황에서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피해 가며 식량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 등 기존의 주요 배급 거점이 문을 닫은 것도 큰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WFP는 자체 운영하는 인도적 지원 항공 서비스(UNHAS)를 확대해 물자를 날랐다. UNHAS는 공항이 지어지기 어려운 오지나 고립된 지역에도 착륙할 수 있는 경비행기, 헬리콥터, 화물기 등을 운영해 물자를 나르는 방식이다. 손광균 WFP 한국사무소 공보팀장은 "UNHAS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감염 예방을 위해 배급 일정을 세분화하고 중간 거점을 마련해 많은 사람이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며 배급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올해 WFP의 도움을 받은 식량 취약계층은 전세계에 1억명이 넘는다. 우리 외교부도 UNHAS 사업에 3년간 500만달러(약 57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아미르 압둘라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차장이 9일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WFP측은 수상 직후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톰슨 피리 대변인은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각국서) 봉쇄조치가 시행되고 교통이 제한된 상황에서 WFP는 주어진 의무 이상을 수행했다”면서 “거의 모든 민항기 운항이 중단되면서 한때는 WFP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는 개인 211명, 단체 107곳 등 318명으로 역대 4번째로 많았다. 이런 가운데 노벨위원회가 WFP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희미해져 가는 국제연대의 정신의 되살리자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뜻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지구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자적 국제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WFP란 단체가 갖는 상징성도 크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유엔 등 다자기구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WFP는 국제주의 신조가 넘쳐나던 시절 미국이 사실상 주도해 만든 기구이기도 하다. 최근 외부 지원을 일절 안 받겠다고 선언한 북한조차도 WFP의 지원은 받는 것으로 보인다.  노벨평화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에 따라 국가 간 친선, 군대 폐지와 감축, 평화회의 설립과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현직 국가원수 등 일정 자격을 충족하는 개인과 단체라면 자유롭게 추천할 수 있다. 다만 추천자와 후보 명단은 50년 동안 공개되지 않는다.  역대 주요 수상자로는 미국 인종 차별에 맞선 마틴 루서 킹,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이끈 넬슨 만델라 등이 있다. WFP가 올해 평화상을 받게 되면서 평화상을 받은 단체는 모두 25곳으로 늘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유엔난민기구(UNHCR)가 각각 3차례와 2차례 수상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메달과 증서, 1000만크로나(약 13억원)의 상금을 받는다. 시상식은 12월 노르웨이 오슬로대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민정·정은혜 기자 
2982    [그것이 알고싶다] - "삼정검" 댓글:  조회:3012  추천:0  2020-09-24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신고식에서 원인철 합동참모본부의장으로부터 보직신고를 받고 원 합참의장의 삼정검(三精劍)에 수치(綬幟·끈으로 된 깃발)를 수여했다.  문 대통령은 또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이성용 공군참모총장, 김승겸 연합사 부사령관, 김정수 육군 2작전사령관, 안준석 지상작전사령관으로부터도 보직신고를 받고 수치를 매달아줬다. 특히 남영신 총장은 학군(ROTC) 출신이며, 비육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에서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에게 삼정검 수치 수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방력, 전쟁 안전판 역할 해야” 문 대통령은 진급자들과의 환담에서 “군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강한 국방을 갖추는 것”이라며 “국방력은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서면브리핑으로 전했다.  문 대통령은 강한 국방력을 만드는 정부의 전략으로 ▶새로운 기술·장비 도입과 달라지는 전쟁 개념 선도 ▶굳건한 한ㆍ미 동맹 ▶전시작전권 전환을 언급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서욱 국방부 장관이나 원인철 합참의장 임명 등 이번 인사가 아주 파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세 가지 발전전략 아래 능력의 관점에서 인사를 했음을 유념해 달라”고 말했다.  원 합참의장은 “막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봉산개도 우수가교(逢山開道 遇水架橋·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다)’하면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님의 의지와 정부 정책을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고 한다. 남영신 총장은 “특전사 첫 부임 받아 공수훈련 받을 때 첫 강하를 위해 비행기 문에 선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1월 2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준장 진급자들에게 수여했던 삼정검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호국·통일·번영을 상징하는 삼정검 삼정검은 조선시대 임금이 병마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하사하는 사인검(四寅劍)에서 유래했다. 삼정검이라는 이름에는 ‘육군, 해군, 공군 3군이 일치해 호국, 통일, 번영의 3가지 정신을 달성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삼정검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3년 처음 제작됐다. 당시엔 삼정도(三精刀)로 불렸다. 1983년 연재된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 기사에 따르면, 장세동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도검 장인 전용하씨에게 “칼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관심과 기대가 각별하십니다”라며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삼정도가 공식 수여된 것은 1983년 8월이다. 1호는 통수권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았다. 2호는 윤성민 당시 국방부 장관이 받았다. 1985년까지 대통령이 재가한 장성 직위자 또는 기관장에게만 수여했다가 1986년부터는 전체 군 장성에게, 그 이듬해부터는 준장 진급자에게만 수여했다.  삼정도가 삼정검으로 바뀐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국방부는 2006년 “외날인 기존의 삼정도는 서양식 칼과 흡사해 한국 전통에 맞는 양날의 삼정검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2007년부터 현재 모습과 같은 삼정도가 수여됐다.  지난 6월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장 진급자 16명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삼정검 수치 수여식. 수치들이 선반에 나란히 놓여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삼정도는 길이 100㎝, 무게 2.5㎏이다. 피나무에 상어가죽을 입힌 칼집에는 대통령 휘장과 무궁화가 조각돼 있다. 칼날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병사들에게 내세운 임전훈(臨戰訓)으로 알려져 있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이 새겨있다고 한다.  이전 정부에서는 과거에는 국방부 장관이 준장 진급자에게 삼정검을 주는 게 관행이었으나, 문 대통령은 2018년부터 삼정검 또는 수치를 직접 수여했다. 군 사기를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수치엔 장성의 보직과 이름, 임명 날짜, 수여 당시 대통령 이름이 수놓아져 있다.  /윤성민 기자
2981    30여년 = 조선족민속유물 만여점 댓글:  조회:3160  추천:0  2020-09-10
김인국, 30년 동안 조선족민속유물 만여점 수집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9-10 ]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 원장.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 원장이 과거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민속유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수집을 시작한지도 어언 30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그가 각고의 노력을 들이면서 한점, 두점 수집한 민속유물은 저그만치 만여점으로서 조선족민속유물 수집대가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이 만여점의 민속유물을 수집하느라 연변의 8개 현, 시는 물론 선색을 따라 길림성의 기타 조선족집거지와 료녕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구에까지 갔다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부 개인 돈을 팔면서 수집해 왔지요.” 멀리로는 수백년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동거울로부터 가까이로는 수십년전에 조선족부녀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기 위하여 옥수수껍질로 만든 똬리... 이런 것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조상들이 돌아와 우리에게 호랑이가 담배 피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김인국 원장, 조선족민속유물 수집에 처음에는 그저 애호와 애착으로 시동을 걸었으나 후에는 우리 세대에서 수집해 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려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사명감으로 좀처럼 제동을 멈출 수가 없게 되였다고 한다. “매 한점의 민속유물마다에는 과거 조상들의 이주사와 이 땅을 개척하면서 흘린 피와 땀의 력사가 슴배여 있고 또 한 가족의 생활사가 얽히여 있습니다. 민족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런 물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인국 원장은 전시관에 진렬한 물건들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몇세대에 거치는 가족이야기가 담겨져 있을 법한 끝이 다 닳고 모지라진 밥주걱.   조선족의 진귀한 민속유물을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알려 민족전통을 이어가는데 힘을 보태기 위하여 2017년 5월 18일 국가박물관일을 맞으며 김인국 원장은 연길시박물관과 합작하여 박물관 내에 조선족민속전시실을 개설했다.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가끔 박물관을 찾아와 민속유물들을 신기해서 만져보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때 김인국 원장은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장백산풍경구에서 민속박물관을 세울 때 조선족민속유물이 한점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한겨울에 폭설을 무릅쓰면서 장백산관리위원회를 직접 찾아가 일푼의 대가도 없이 자신이 어렵게 수집한 물품들을 가져다 전시하라고 했다. 지금 장백산풍경구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70여점의 조선족민속유물은 전부 김인국 원장이 제공한 물품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약상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기억해 두었다가 수집에 나설 때마다 잊지 않고 알아봤다. 이렇게 수소문한 끝에 드디여 선색을 알게 된 그는 박물관에 소식을 알려 문물수집일군들이 내려가서 수집해 들이도록 했다. 현재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진렬되여 있는 공예가 정교한 약상자는 바로 김인국 원장이 선색을 제공해 구한 물품이다. “현대공업과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오늘 많은 것이 얼마 못가서 도태되고 있지만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민속물품들은 오래될 수록 그 가치가 더 소중해지지요. 앞으로 연변에서 관광업이 발전할수록 이런 물건들은 더욱 빛을 발산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인국 원장은 30년 동안 조선족민속유물들을 수집하느라 거기에 판 발품은 말할 것도 없고 북경에 있던 집까지 팔아버릴 정도였지만 종래로 후회한 적이 없다면서 자신의 힘으로 조상들이 써내려오던 진귀한 유물들을 얼마라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2980    인민음악가 - 정률성 친필 원고 할빈으로... 댓글:  조회:3132  추천:0  2020-09-10
정률성 친필 기증식 할빈에서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9-10 ]  지난 7일, 정률성 친필 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악보 기증식이 할빈에서 있었다. 저명한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독녀인 정소제녀사가 이날 기증식에 직접 참석해 부친 정률성의 친필 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등 8부의 악보와 모친 정설송 녀사의 서예작품 및 유품을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인민음악가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했다.     할빈시 손철 시장(우) 정소제에 기증 영예서 발급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지난해 년말에 새로 발견 된 아버지의 친필 원고를 어디에 기증해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고민 끝에 할빈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하기로 마음 먹었다. 기념관이 성립 당시에 기증을 못해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에 와서야 아버지의 친필 원고를 기증 하게 되면서 나의 오래 소원을 이루게 되였다.”고 기증 원인을 밝혔다. 이어 정소제는 정률성기념관에 대한 할빈시의 다년간의 관심과 보호에 감사를 전했고 정률성기념관이 앞으로 국방교육의 기지 및 국제문화교류의 플랫폼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면서 기념관의 향후 발전에 자기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소제(우)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에‘팔로군행진곡’,‘팔로군군가’ 친필원고 기증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 료해에 따르면 지난 2009년 7월, 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에 개관 할 당시 정소제는 이미 소장해두었던 부친 정률성의 유품 400여점을 기념관에 기부하면서 기념관의 설립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올해 년초에 인민음악가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에서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률성은 1914년 7월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여났고 어릴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끼를 보였다. 1933년, 중국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면서 항일 활동을 시작했다. 성악 공부를 시작하면서 정률성은 음악이 혁명역할에 주는 영향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기증식 관련 참석자 단체 사진   정률성은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음악작품 400여수 창작했다. 그중 ‘연안송’과 같은 작품들은 애국청년들의 항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또 중국혁명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특히 항일전쟁 승리 이후 정률성이 창작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명명됐고 이어 1988년 당중앙의 피준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지정되면서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영원한 상징으로 지금도 억만인민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정률성 독녀 정소제   이외 정률성은 해군, 륙군, 공군  삼군 모두를 위해 창작한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창작한 군악은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사회주의 건설 등 여러 시대를 넘나들면서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으며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러 시대를 모두 거친 혁명 음악가로 기록되였다. 중국 최고의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나란히《새중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에 오른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상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길림신문 정현관기자 ====================///   정률성 딸, 아버지 친필원고 정률성기념관에 기증   2020-09-10                  정률성 독녀 정소제, 아버지 친필원고 기증... 할빈시 손철 시장 친히 접견   중국 최고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중국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 걸출한 음악가 정률성의 친필원고가 할빈시조선족예술관에 입주한 인민음악가 정률성기념관에 기증돼 요즘 태풍으로 인해 침침했던 할빈 날씨에 한가닥 해빛을 비쳐주었다.   지난 7일, 정률성 독녀, 저명한 인민음악가 정소제가 정률성 친필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등 8부 곡보와 정률성 부인 정설송(丁雪松)의 유품 및 서예작품을 기증하는 기증식이 할빈시인민정부에서 진행됐다.   손철 시장(우)이 정소제녀사에게 기증 영예서를 발급하고 있다.   손철 시장이 정소제녀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기증식에 참가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날 기증식에 할빈시 시위 부서기, 시장 손철(孙喆)을 비롯한 시위시정부 령도와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시문화광전관광국, 연예그룹 등 부서 령도 및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기증식에 앞서 손철 시장이 정소제를 친히 접견하고 할빈에 대한 사랑 및 신임, 그리고 정률성기념관이 성립할때 기여한 적극적인 노력과 공헌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나서 할빈시는 계속해서 정률성기념관을 잘 건설하고 국내외 영향력을 넓히는 동시에 할빈시의 특색명함으로 부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소제도 정률성기념관에 대한 할빈시정부의 관심과 지지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정률성기념관의 향후 발전을 위해 노력을 다할것이며 정률성기념관이 국방교육의 기지, 국제문화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다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   한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시작된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에게 손수 정률성‘팔로군행진곡’과 ‘팔로군군가’친필원고를 넘겼고 손철 시장이 정소제에게 기증 영예서를 발급했다.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정률성기념관이 성립될때 아버지의 친필원고를 찾지 못해 오늘에 와서야 기증할 수 있어 오래된 소원을 이루게 되였다”면서 “얼마전 아버지가 창작한 ‘팔로군행진곡’ 등 곡보 친필원고를 발견하고 격동된 나머지 국가박물관 혹은 국가도서관 아니면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그 어디에 기증하면 의미가 더 깊을지 많은 고민도 했지만 결국은 할빈에 있는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할빈에 정률성기념관을 세울때 할빈시 관련령도들이 팔보산혁명묘지에 가서 아버지를 추모했고 어머니께서도 기념관을 할빈에 세울것을 동의하셨기에 아버지의 유품은 응당 할빈에 있는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기증 원인을 밝혔다.   정률성기념관이 지난 2009년 7월 할빈시경비구에 최초로 개관했을때 정소제가 다년간 소장해두었던 아버지의 유품 400여점을 기부해 기념관의 설립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이는 할빈시의 특색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되 보귀한 정신문화재부로 남았다. 올해 년초 인민음악가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로부터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소제(우)가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에게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를 기증하는 장면.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은 “정률성의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등 친필원고는 관내 수많은 소장품 가운데서 가장 진귀한 소장품으로 전시될 것이며 우리는 유족의 뜻을 받들어 정률성 유품을 잘 보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1914년 7월7일, 한국전라남도에서 태여난 정률성은 어릴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장끼를 보였고 1933년에 셋째형을 따라 중국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으며 항일활동을 하는 동시에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음악이 가지는 혁명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그는 일생에 400여수 각종 음악작품을 창작했는데 ‘연안송’ 등 우수작품들은 애국청년들의 항일 열정을 불러일으켜 중국형명력사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특히 그가 창작한 오늘도 억만 인민의 심금을 울려주는 ‘팔로군진행곡’은 1988년 등소평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채택되여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영원한 상징으로 부상됐다.   정률성은 중국 해, 륙, 공 삼군의 모든 병종을 위해 악곡을 창작했고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항미원조시기, 사회주의 건설시기 등 여러시기에 모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훌륭한 작품을 남겨 중국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했다.   2009년 정률성은 ‘새중국창건특수기여영웅모범인물’에 올라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흑룡강신문 리흔 기자  
29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68  추천:0  2020-09-10
기후변화로 자연재해 점점 더 심각  2020.09.10.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올해 전 세계가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는데요.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의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올해가 그리워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박혜준 PD입니다. [리포터]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오렌지 빛 하늘이 재난 영화를 방불케 합니다. 대형 산불로 연기가 시내 깊숙이 들어오면서 하늘을 뒤덮은 겁니다. "지금이 몇시인지 궁금해서 밖에 나와 봤는데 최후의 날 같습니다.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집니다. 꽤 무섭습니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 한 일이 나를 울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덮친 가뭄과 대형 화재, 54℃가 넘는 데스밸리의 이상 고온, 한국과 일본을 잇따라 강타한 태풍.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전 세계가 연이은 재난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이를 뛰어넘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거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10년, 20년, 아마도 50년 후에 '2020년은 말도 안 되는 해였어. 하지만 그때가 그립다'고 말하게 될 겁니다." 기후학자들은 "화석연료의 연소가 기후변화나 재해를 악화시킨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라며 이런 자연재해는 10~20년 전부터 예견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후변화 변수로 인해 세계 경제라는 발등 위에도 불똥이 떨어졌습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기후변화의 물리적 여파가 이미 미국에 영향을 주고 있고 '배출가스 제로' 사회로의 체질 개선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금융당국의 대응을 촉구했습니다. 연합뉴스TV 박혜준입니다.
2978    백년 박바가지와 백년고목 댓글:  조회:3091  추천:0  2020-09-08
백년 박바가지 백년고목의 품에 안기다 (ZOGLO) 2020년8월9일  반남박씨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어온 바가지가 민족력사의 견증물로 백년고목의 품속에 안겼다. 안개비가 자욱이 내리던 그 날 7월 28일,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룡가미원) 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에 참가하고저 수심 깊은 호수 우에 보기 좋게 걸린 나무다리에 올라섰다. 다리 량 켠으로 련꽃이 화사하게 피여있고 그 꽃을 받들어 푸르른 련잎들에는 수정 같은 은방울들이 내려앉아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룡가미원에 핀 련꽃 다리끝자락에서 외로 꺾어서니 솔이 푸른 사이에 운치 있는 한옥 한채가 마주하고 있었다.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라는 프랑카드가 한옥 바람벽에 걸려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온갖 색상의 한복을 떨쳐 입은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발에 연한 한복을 받쳐입은 녀사가 바로 100년을 넘어 가족의 대물림으로 전해지던 바가지를 이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덕림장학회 회장 박민자 녀사이고 함께 한 이들은 우리 민족 후대양성에 뜻을 같이 해오는 덕림장학회 멤버들이였다.   이민사 100년 시리즈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를 찾은 덕림장학회 회원들 민속박물관에 들어서니 바로 정면 한 가운데 100년 박바가지를 한 백년 엉킨 나무옹지로 받쳐 올리고 오랜 세월의 년륜으로 굵어지고 다져진 고목 속에 넣어 자연과 생명, 문화와 력사가 어우러지게 한 생태문화예술작품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 바가지는 박민자녀사의 증조할머니 김근애가 1917년 아들 딸을 거느리고 살길을 찾아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할 때 시댁 외삼촌이 박을 켜서 바가지를 만들어서는 쏘련 연해주일대로 들어가는 시형네와 각기 한짝씩 나눠주며 나중에 이 바가지를 징표로 한 가족임을 확인하라고 주신 것이였다. 반남박씨 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온 이 바가지는 한세기가 지나는 동안 갈라진 친지들과 만나지 못한 채 조손 3대를 이어 보관되여 오면서 한 가족 나아가 우리 민족의 이주와 정착의 견증물로 되였다 . 이 바가지 표면에는 ‘년년등풍 일일생재’(年年登丰 日日生财) 라는 한문번체자가 씌여있고 바가지 안쪽에는 ‘황금존비’(黄金存备)라는 한문번체자가 씌여있다. 100년이라는 파란 많은 세월 속에 바가지 안쪽 글자는 좀이 먹어 희미해졌을 뿐 형체는 그대로 남아있다. 한가족 확인 징표로 100년을 넘게 간직했던 바가지는 혈육 확인 의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한 일가의 이주와 정착을 동반한 견증물로 되였다. 박민자녀사는 2017년 4월 "증조할머니께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친지에 대한 애정을 담았던 바가지, 어머니께서 시할머니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앉으나 서나 바가지의 안위를 걱정하시며 가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았던 바가지, 이 바가지를 민족의 사명감을 담아 연변룡가미원 민속박물관(필충극 원장)에 정중히 기증한다."고 밝혔다. 그 뒤로 필충극 원장은 사가(史家)의 사명감에 따른 예술가의 안목으로 "이 100년 력사를 그 누구도 견주어 볼 수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전시하려고 언녕부터 준비를 하여” 그에 어울리는 100년 고목으로 틀을 세워 민속박물관에 전시하였던 것이다. 필충극 원장은 “우리 조선족은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 온 민족'이라고들 하는데 이 바가지는 동냥 쪽바가지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씨앗을 담아온 바가지이며 복을 담아주는 바가지로 이민사의 주선률을 이룬다."고 하였다. 지극정성 일솜씨만 통하는 필충극 원장. 필충극 원장은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을 건설하면서 화강암으로 된 돌바가지를 조각하여‘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적목(红豆杉)기둥을 세워 지키고 있으며 그것으로 우리 민족의 천만년 행복과 영생발전을 상징하였다. 여기에 100년 실물 박바가지까지 기증받아 전시하게 되였으니 이 바가지 하나만으로도 민족사의 유구한 징표로 의미가 크다고 하였다. 필충극 원장은 이 민속박물관을 서민박물관으로 꾸며오고 있다. 그는 중국조선족의 이주와 함께 이루어진 중국 동북에서의 벼농사개척사를 높이 구가하여 벼농사에 관련한 로동도구와 생활용품들을 구전하게 전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이주와 정착, 개척, 발전, 번영의 력사를 고스란히 읽게 하고 있다. 그 속에 ‘반남박씨 바가지'가 한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견증하고 있는 것이다. 백년 바기지를 옹위하고 조상들의 넋과 지혜를 우러르는 전시회 참가자들. ‘반남박씨 바가지’전시회가 진행되는 속에 민속박물관을 둘러 조상들의 혼이 서려있고 체취와 정감이 슴배여있는 손때 묻은 기물과 도구들을 마주하면서 매 하나의 민속품은 매 하나의 력사이고 문화이며 민속박물관은 그야말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가치를 품어안은 보물고임을 절감하게 되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2977    [고향문단소식] - "두루미" 시인을 기리다... 댓글:  조회:3149  추천:0  2020-09-08
리상각시인 3년제 기념세미나 (ZOGLO) 2020년8월23일  지난 7월 25일에 시작된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대목산청생물과학(길림)유한회사가 손잡고 진행하는 ‘대목산청 시의 려행'은 8월 22일, 다섯번째 코스로 도문시 장안진에 자리잡은 룡가미원을 찾아 ‘리상각시인 3년제 기념쎄미나르’를 개최하여 고 리상각(1938-2018)시인의 창작성과와 문학업적을 기리였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시인은 개막사에서 “우리 전통시가의 한 봉우리를 이루고 일찍 주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많은 문학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고 그들에게 활무대를 제공하면서 중국조선족시문학의 오늘을 이끌어오신 탁원한 리더의 한분이다.”, “시인은 갔어도 (그가 남긴 시와 노래를 통해 전해지는) 시인의 숨결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고 하면서 이같은 행사를 후원한 연변작가협회와 대목산청생물과학(길림)유한회사에 감사를 표시하였다. 세미나에서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문학》 시편집 김창희시인이 《연변문학》에서 사업한 경력을 위주로 리상각시인의 략력을 소개하고 연변대학 리해연박사가 평론 을 발표하였으며 연변인민출판사 《문화시대》편집 림은화가 고 김경훈 교수의 평론 를 랑독하였다. 소설가 림원춘, 정세봉, 시인 최룡관, 김동진, 리임원 등이 자유발언을 통해 시인을 추모하고 리상각시인의 차남 리동혁이 답사를 하였다. 세미나에서는 또 연변인민방송국의 아나운서 서태문과 윤련순이 리상각시인의 시 와 를 각각 랑송하였고 연변가무단의 가수 임향숙, 황매화, 리상길이 리상각시인이 작사한 노래 , , 를 각각 열창하여 시인이 남긴 문화재산을 다시 확인하였다. 김학철문학비 앞에서.     한편 이번 행사를 위해 연길, 화룡, 룡정, 도문, 훈춘 등지에서 모여온 40여명 문화예술인들은 필충극화백이 26년의 시간을 들여 건설한 룡가미원에서 한락연기념비, 김학철문학비, 미술관, 박물관 등을 참관하면서 중국조선족의 력사문화를 견학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 추모글 시백님 가시는 길에                                   김동진   먼 곳에서 전해오는 비보는 언제 보아도 뜻밖의 비통한 소식이다. 그래서 청천벽력에 비유하거나 태풍이 폭우를 몰아온다고 한다. 이번에 리상각 시백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도 그러하였다. 8월 18일(2018년도) 아침 6시경, 평시의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열고 위쳇을 돌아보는데 내두산작가촌 김춘택 촌장이 올린 메시지가 있었다. “2018년 8월 17일 21시 45분, 원로시인 리상각시인이 청도에서 작고”라는 슬픈 내용의 소식이였다. 아니, 얼마 전에도 텔레비죤 앞에서 딴스를 추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리고 그 동영상을 나의 서류함에 저장해놓았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그 안타까운 글자를 한자씩 다시 확인하는 순간, 나의 눈 앞에는 나의 마음 속에 각인된 고인의 생전의 인자하신 모습과 마지막으로 찾아가보았던 그날의 만남이 하나의 생생한 화면으로 떠올랐다. 재작년(2016년) 여름이였다. 연변시인협회의 현지창작모임이 있어 연길에 갔었는데 김응준 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리상각선생이 엘리 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그런데 거동이 전보다 더 못하다고 하시는 것이였다. 활동이 끝나 돌아오는 날, 김영능, 최기자와 나는 집을 안다는 김철학 이를 앞세우고 선생님댁으로 병문안을 갔었다. 그날 선생님은 병환에 계시면서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그날 우리는 받지 않겠다고 뒤걸음치는 선생님의 손에 우리의 작은 마음을 억지로 떠맡기였다. 선생님 은 1층 문어구에서 나의 손을 꼭 잡고 “고맙소”를 반복하시였다. 우리가 돌아올 때 선생님은 불편한 몸으로 큰길까지 나와서 차를 타고 떠나는 우리를 손저어 바래주시였다. 왜소한 체구, 창백한 안색, 다듬지 않아 헝클어진 하얀 머리, 불편하신 걸음걸이 이것이 내가 본 그 날의 리상각선생님의 모습이였다. 이 모습이 이제 와서 내가 본 리상각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된 것이다. 그후 들려온 소식은 청도에 있는 딸이 선생님을 모셔갔다고 하였다. 돌이켜보면 나도 리상각선생님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수많은 후배들 중의 한 사람이다. 황장석선생이 생전에(1997년 5월 2일) 훈춘에 왔을 때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79년 년말의 어느날, 리주필이 내 사무실로 건너와 ‘장석동무 좋은 글이 올라왔다니까. 이 원고를 한번 보오.’ 하기에 하던 일을 밀어놓고 그 원고부터 보았다니까. 문혁이 쓴 서정서사시 였소. 단숨에 끝까지 읽었는데 속이 찡해 나더구만. 내가 아주 좋다고 채용하겠 다고 하니 리주필이 즉석에서 동의하였소. 이렇게 이 시가 이듬 해 2월에 잡지에 실리고 민의조사와 평심을 거쳐 그 해에 처음 설치한 제1회 문학상 수상작이 된 거라오.” 뜻인즉 내가 수상자로 된 데는 시편집인 황선생의 수고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리상각 주필님이 나의 작품에 관건적인 찬성표를 놓았기에 그런 결과를 보았다는 이야기였다. 옳은 말이였다. 아무리 시편집이 좋다고 해도 주필이 반대한다면 그 작품은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니까… 그 덕을 입어 나는 하늘의 별따기로 생각하던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되였고 정식으로 시인들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니 문학의 풋내기 에게 시운이 트이게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의 그 은혜를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리상각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시상식 때  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고 자기도 흑룡강사람이니 우리는 한 고향사람이라 하시면서 기뻐하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의 세월 속에서 초기에는 거리와 지역 관계로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훈춘으로 이사를 와서부터는 문단의 여러가지 모임에서 종종 만나뵐 수 있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생님댁 에서 하루밤을 묵은 이야기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였다. 한번은 문단행사가 있어 연길에 갔다가 저녁만찬까지 참가하고 보니 밤이 되였었다. 촌바우인 내가 잠자리 때문에  근심하는데 선생님께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였다. “가기오. 우리 집으로 가기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시였다. 정작 따라가 보고서야 나는 손님을 재울 만한 집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다. 판자로 만든 쪽대문 안에 초라하게 들어앉은, 고작 20평방미터가 되나마나한 헐망한 단층집 이였다. 부엌이 딸린 정주칸에 사이문을 단 웃방이 하나 있었는데 웃방은 리주필 내외의 거처이고 정주칸은 로모님께서 손군들을 데리고 자는 자리였다. 내가 웃방에 들어가 리선생님과 나란히 누울 때까지 사모님께서는  (원잡지사 주필, 김세영선생님) 아직 퇴근하지 않았었다. 체면을 무릅쓰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여나보니 로모님께서 부엌마루 우에 담요를 펴고 새우잠을 쉬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난감했던 심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 어리숙한 손님 때문에 리주필네 하루밤 수면질서가 마구 헝클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로모님과 사모님은 안쪽 시골에서 온 나를 귀한 손님처럼 뜨겁게 대해주시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미안한 대로 사모님이 지어주신 밥을 먹고 귀로에 올랐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름 있는 잡지사의 주필님이 어찌하여 둘이 누우면 돌아누울 자리도 없는 그런 코구멍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리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 일을 생각하면 그 때 내가 너무나 철이 없었다는 가책을 받군 한다. 한편 손님을 데리고 갈 형편이 아니 되는데도 데리고 가서 재워주신 선생님의  그 날의 처사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지워 버릴 수 없는 감동을 심어주었다. 내가 리상각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결코 이런 저런 신세를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리상각선생님의 너그러운 품성과 뛰여난 문학재능 을 존경하는 동시에 또한 참되고 정직한 인격을 존경한다. 나에게는 28년전 내가 녕안현문련에 있을 때 리상각선생님이 보내 주신 한통의 편지가 있다. 다른 문안편지는 다 버리면서 이 한통의 편지를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해두고 있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한 선배님의 지극히 순결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월간사의 사무용 종이에 쓴 그 편지의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김동진동무 안녕하오? 바삐 보낼 줄로 아오. 작년에 연변에서 만든 록음대에 , 등 노래가 나의 작사로 발행되였으므로 내가 에 글을 써서 빨리 시정하라고 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요즘 노래 원고비가 나에게로 왔소. 다시 텔레비방송국에 의견을 제출하니 그들 말이 한사코 내가 쓴 거라고 했소. 그래서 작곡가 리정옥을 찾아가서 원고를 뒤적여 보았더니 김동진 작사더군. 이제야 작사자를 찾아냈소. 얼마나 서운하겠소. 나에게로 온 원고료를 동진동무에게 보내니 받아두오. 좋은 원고를 계속 보내오. 안녕히   90.2.27 상각 ”   보다싶이 리상각선생님은 이런 분이시였다. 작사자의 이름이 바뀐 노래가사 때문에 그리고 그 한수의 가사 원고비 때문에 신문사와 텔레비죤 방송국에 시정을 요구하는 글을 쓰고 의견을 제기하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작곡자를 찾아가서 끝내 가사의 임자를 찾아내신 선생님! 그리고 고작해야 10원 밖에 안되는 원고비를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선생님! 참대처럼 곧은 마음 하나로 사업하고 생활하신 선생님의 정직한 인격은 내가 따라배워야 할 하나의 귀감을 보여주시였다. 선생님은 인생만년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시였다. 망각증이 와서 손목에 시계를 차고서 시계를 찾는 사모님, 밖에 나가면 방향감각을 잃고 계속 다른 곳으로 가는 사모님, 치매에 걸린 사모님 때문에 늘 마음을 놓지 못하시였다. 중요한 회의나 모임 같은 데는 부득불 사모님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년세에 치매가 온 부인을 밤낮으로 돌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인들 오죽했으랴. 선생님은 연변시인협회의 고문으로 있는 동안 처음에는 모든 활동에 꼭꼭 참가하시였는데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자신의 건강에까지 문제가 생기여 더는 활동장소에 나오시지 못하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스마트폰에 위쳇이 활개치는 세월이여서 사이버라는 가상공간을 통하여 선생님의 모습을 두번 볼 수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의 생신날, 식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식사하는 사진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고 다른 한번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 회담이 이루어진 다음 날 즉 4월 28일, 석문주시인이 연변시인협회췬에 올린 사진과 동영상에서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모습을 만나게 되였다. 선생님은 객실에 놓인 액정텔레비죤 앞에서 병환을 털고 일어난 사람처럼 웃음이 넘치는 얼굴로 딴스를 추시는 것이였다. 이전처럼 무릎을 꺾고 두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손으로 무릎을 치고 좌우로, 앞뒤로 바꿔치기를 하면서 즐거워하시였다. 사실 선생님의 로씨야딴스 실력이 프로급이라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우리 문단의 문인들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경쾌하면서 날렵한 동작과 멋스럽고 세련된 기교로 하여 어느 오락장소에서나 한몫을 단단히 했으니 말이다. 그 날 선생님의 자제분은 아버지께서 남북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 에서  조선반도의 통일서광을 보시였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옛날의 딴스 동작이 절로 나오신 것 같다고 하였다. 비록 젊은 날의 고급동작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80고령 로인의 몸에서 딴스가 나온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기적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생황혼의 남아있는 기력을 모아 여생의 한 순간을 장식한, 꽃보다 향기롭고 시보다 아름다운 선생님의 마지막 걸작이였다. 동작은 헝클어졌어도 환히 웃으시면서 딴스를 추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몸과 정신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였다. 저런 상태에서 조금만 더 회복이 된다면 얼마든지 연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고 또 만나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나의 판단과 바램이였다. 선생님은 그 때로부터 3개월이 조금 지나 영별의 길, 영면의 길에 오르시였다. 인연의 갈피에 새겨진 하많은 이왕지사와 운명을 앞두고 남북통일에 대한 소원을 담아 추신 선생님의 딴스를 그려보는 나의 마음의 하늘에서는 지금 존경과 슬픔으로 반죽된 애도의 비가 내리고 있다. ‘백설’이라는 필명으로 하얗게 살다가 가신 선생님! 처럼 하얀 날개를 저으면서 가신 선생님! 선배님이면서 은사님이신 리상각 시백님이시여! 부족함이 많은 이 후배가 시백님이 가시는 길에 눈물에 젖은 하얀 국화꽃 한송이를 드리옵니다.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모아쥐고 머언 청도의 하늘을 우러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2018.8.20.        
2976    [세상만사] - "미술을 모르는 거 같더라"... 댓글:  조회:3224  추천:0  2020-09-08
  조영남 "국가가 지난 5년 동안 나를 화가로 키웠다, 고맙다" 2020.09.08.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1월까지 서울서 '아트 하트 화투'전 8일 서울 피카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조영남. [이은주 기자] "너 소리도 안나오고 늙었으니까 (앞으로) 그림 그려서 먹고 살아라 한 거다. 국가가 나를 5년 동안 화가로 키운 거 같다. 안고마울 수가 없다."  가수 조영남(75)의 말이다. 조영남은 8일 서울 청담동 피카프로젝트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가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내 선전을 해줬다. 그 일(대법원까지 간 재판)이 아니면 지금처럼 내가 호화롭게 전시를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신의 그림 대작과 관련해 2016년 사기 혐의로 기소돼 지난 6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안을 두고 한 말이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지난 지난달 12일부터 천안 아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온 그는 서울에서도 1일부터 개인전을 시작했다. 현재 천안과 서울에서 두 개의 개인전을 동시에 열고 있는 것. 이번 서울 전시에서 그는 1960년대에 그린 추상화를 비롯해, 최신작까지 약 50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화투, 바둑알, 소쿠리, 태극기 등을 활용한 작품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이날 자신을 "가수이자 현대미술 애호가"라고 소개한 그는 "지난 5년 유배생활 하는 동안 그림에 더욱 집중했고, 책을 두 권이나 썼다. 6월에 나온 책에 이어 곧이어 『시인 이상과 5인의 아이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이상, 말러, 피카소, 아인슈타인, 니체와 가상밴드를 결성해 공연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들의 가상 문답과 대화로 풀어낸 이야기책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조영남의 신작. [피카프로젝트] 화투를 소재로 한 조연남 작품. [피카프로젝트] 지난 6월에 무죄 판결에 대한 소감을 묻는 말에 " 주변에서 1심 판결(집행유예)에 승복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한 그는 "그러면 내가 평생 사기꾼이 되는 거다. 그건 아닌 거 같아서 대법원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법정에 서보니) 검찰도 미술을 모르고, 변호사도, 판사도 다 모르는 거 같더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영남은 또 "지난 5월 대법원에서 공청회를 열었는데, 그게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 그때 법원에서 내게 5분간의 최후 진술 기회를 줬다. 미리 준비해간 원고를 읽는데도 막바지에 결국 내가 울먹이기까지 했다. 여자 때문에도 울어 본 적 없는데 울먹울먹하게 되더라. 지금 생각해보니 5년 동안 쌓인 설움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조영남의 1980년 대 작품. 화투를 가지고 꼴라주 작업을 했다. [이은주 기자] 조영남의 1960년대 회화 작품. [이은주 기자] "고등학교 때 미술부장을 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다"는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때도 지금도 나는 아마추어 화가다. 그림은 계속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시와 간담회를 이어가고 책을 내는 데 대해서는 "내 안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서도 "단지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297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632  추천:0  2020-08-24
  쥐들의 천국 된 홍콩... 코로나가 쥐떼를 불러냈다  2020.08.24.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홍콩에 악명 높은 그들이 나타났다. 홍콩 점령한 쥐떼에 관한 보도 이미지/동방일보 홍콩에서 테이크 아웃한 음식을 야외 공간인 공원에서 먹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쥐떼가 도심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24일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는 “홍콩 정부가 지난달 코로나 확산 대응을 위해 저녁 시간 식당 내 식사를 금지하자 사람들이 야외에서 포장 음식을 먹고 있다”며 “주변에 쓰레기통이 부족한데다 제대로 치우는 사람도 적어 음식물 쓰레기가 도심 곳곳에 넘쳐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홍콩에서 테이크아웃이 늘면서 길거리 휴지통이 부족해졌다/동방일보 음식물이 널부러진 벤치나 휴지통 주변은 쥐들에게 최고의 뷔페 식당이 된다. 밤이 되면 쥐떼가 몰려와 음식물 포장지를 핥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남은 음식을 찾아 헤멘다. 코로나로 인해 오래 굶주렸던 쥐들은 겁도 없어 사람들 신발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공원 벤치에 올라타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홍콩의 환경단체들은 정부가 식당 내 식사를 금지하면서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우지 않아 도시 위생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청소부들은 이미 손을 놓은 상태다. 워낙 많은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지만 충원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벌찬 기자
2974    [세상만사] - 가위 바위 보 댓글:  조회:4125  추천:0  2020-08-16
‘가위바위보 43연승’ 전문가가 밝힌 이기는 비법은? 2020.08.1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가위바위보 43연승’ 전문가가 밝힌 이기는 비법은?(사진=123rf)살면서 가위바위보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준비물도 필요 없고 규칙도 간단해 승자를 정해야 할 때 비교적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위바위보도 행운보다 요령이 크게 작용하는 모양이다. 가위바위보로 세계 대회까지 열고 있는 ‘세계가위바위보협회’(WRPSA)의 와이어트 볼드윈 회장은 최근 미국 과학매체 ‘인버스’와의 인터뷰에서 ‘가위바위보를 행운에 의지하지 않고 이기는 법’에 대해 밝혔다.‘세계가위바위보협회’(WRPSA)의 홈페이지 화면(사진=WRPSA)5년 전인 2015년 설립된 WRPSA는 가위바위보를 경기 수준으로 하기 위한 협회다. 이 협회는 가위바위보가 매력적인 이유로 “나이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근력 운동이 필요 없다”, “타고난 재능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전 준비가 필요 없다”, “시합 종료 뒤 뒷처리가 필요 없다”, “나이나 성별에 결과가 좌우되지 않는다” 등의 장점을 들며, 가위바위보가 지닌 공정성과 편리성 등을 강조한다. 그런 WRPSA의 수장인 볼드윈 회장은 4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지닌 확고한 가위바위보 마니아다. 이 협회를 운영하면서도 동서양의 가위바위보 규칙이나 전략에 대해 망라한 ‘가위바위보 핸드북’(The Rock Paper Scissors Handbook과 가위·바위·보를 의인화해 그 우정을 그린 가위바위보 학습용 그림책 ‘가위바위보 이야기’(The Rock PaperScissors Story)를 출판하는 등 가위바위보 보급에 힘써 왔다.2006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위바위보 대회의 한 장면(사진=유튜브)볼드윈 회장은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스포츠이므로, 가위바위보 역시 스포츠”라고 단언했다. 그런 그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기기 위한 요령으로 “먼저 내지 않는다”, “무작위로 낸다”, “상대를 읽어라”라는 세 가지 팁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가위바위보에 능숙해지려면 가장 먼저 승부 전 무언가를 내려고 생각할 때 드러나는 일종의 준비 동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초보자는 주먹을 내기 직전 손을 너무 꽉 쥐고 있거나 가위를 내기 직전 검지를 조금 벌리는 경향이 있어 앞으로 내놓을 손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볼드윈 회장은 “준비 동작은 가장 좋지 못한 습관으로 이를 하면 심리적인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큰 초보임을 들키게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를 할 때는 타이밍에 맞춰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가위바위보의 핵심은 무작위로 내는 것이 최고라고 그는 말했다. 가위바위보를 각각 3분의 1의 확률로 내는 전략은 상대로 하여금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게 해 내쉬 균형이라는 게임 이론이 적용된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무작위로 손을 내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이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참가자 354명에게 각각 300회 가위바위보를 하게 한 중국 저장대의 실험 연구에 따르면 이들 참가자가 내는 손에는 두 가지 경향이 인정됐다. 첫 번째 경향은 이기고 있는 손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 참가자는 이기고 있을 경우 그 손을 고집하며 지고 있으면 손을 바꾸는 경향을 보였다. 두 번째 경향은 일정한 법칙으로 손을 바꾼다는 것. 손을 바꾸는 경우에는 바위에서 보, 보에서 가위, 가위에서 바위로 손을 바꾸는 데 반대 방향으로는 그다지 손을 바꾸지 않았다. 또 WRPSA의 조사에 따르면, 통계적으로는 바위을 낼 확률이 35.4%, 보를 낼 확률은 35%, 가위를 낼 확률은 29.6%이다. 볼드윈 회장은 “최고의 가위바위보 선수는 이런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대를 읽어라’는 팁에 대해서는 ‘가위바위보계의 마이클·조던’으로 불리며 2002년과 2003년 세계 대회를 제패한 팀에 소속해 있던 켄 왓슨의 전략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예를 들어 왓슨은 강한 남자로 보이는 상대에게 “당신을 보면 마초 같아서 당신은 바위를 낼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가 “심리학자냐?”고 되묻는데 그러면 “TV에서는 그렇게 보였다”와 같은 이유를 댄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상대가 바위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가위를 낸다. 만일 상대가 보가 아니라 가위를 냈다고 해도 그는 그다음에도 가위를 낸다. 이때도 상대는 바위 대신 보를 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런 추측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볼드윈 회장은 이런 전략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험이 풍부한 선수 중에는 상대의 심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거나 무작위로 내기 위해 3~5수 뒤까지 정해두는 사람도 있다. 볼드윈 회장은 경기로서 가위바위보에 도전할 때 중요하게 평가하는 점은 “상대가 인간적인 편견을 갖게 하면서도 자신은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승리의 관건에 대해 “가위바위보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선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 알고 있어 가위바위보에 강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2973    [세상만사] - 개와 모성애... 댓글:  조회:3919  추천:0  2020-08-14
새끼 구하려 강물에 뛰어든 어미 개 모성애...    2020.08.14.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한 남성이 폭우에 휩쓸려간 어미 개와 강아지 4마리를 구조하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베이징=정지우 특파원】집중 호우에 떠내려간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어미 개의 모성애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집중 호우로 흙더미에 파묻혔던 강아지 4마리가 어미 개의 필사적인 노력에 극적으로 구조됐었다.  14일 신랑망 등 중국 매체에 따르면 지난 12일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로 떠돌이 어미 개와 강아지 4마리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겼고 이를 발견한 주민들 중 한 남성이 물속에 들어가 이들을 구해냈다.  하지만 불어난 물속에는 다른 강아지 1마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남성이 다시 강아지를 구하려 했지만 안전을 염려한 경찰이 막아섰다.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에 강아지가 휩쓸려가자, 어미 개가 경찰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그러나 어미 개는 경찰의 제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맹렬한 기세의 물살에도 이 어미 개는 강아지에게 헤엄쳐 접근한 뒤 입으로 물고 겨우 물 밖으로 벗어났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어미 개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네티즌들도 ‘모성애는 위대하다’ 등의 댓글을 달며 찬사를 보냈다. 어미 개와 강아지는 현장에 있던 주민이 입양해 보살피고 있다고 중국 매체는 전했다.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에 강아지가 휩쓸려가자, 어미 개가 입에 물고 물 밖으로 헤엄치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정지우 기자
2972    [별의별] - "..." 댓글:  조회:4078  추천:0  2020-07-19
  구두 날아들고... 달걀에 맞고... 2020.07.19.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물병과 달걀과 신발...정치인의 투척 수난史] 文, 대선 후보시절 물병 날아와..."처벌 안원해" 노무현 계란 봉변만 4번..."맞아줘야 국민 화풀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2014년 4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연설하는 도중 한 여성이 무대 쪽으로 신발을 집어던지자 움찔하며 피하고 있다. /조선DB 일반인이 국회 경내에서 대통령에게 접근해 신발을 던지며 위협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에도 ‘물병 투척’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포용적 차원에서 처벌을 원치 않는단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와대는 신발 투척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국내·외 유력 정치인은 이처럼 ‘정치적 항의’ 표시로 이런 공격을 심심찮게 받는다. 투척 소재는 신발과 물병, 계란 등 다양하다. ‘투척 공격’을 받은 정치인들의 반응도 엇갈린다. 지난 16일 오후 정모씨가 국회 본청 인근 계단 앞에서 21대 국회 개원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신발을 던지고 "북한인권 무시" 등의 구호를 외쳤다가 제지 당하고 있다. /조선DB 국회 신발 투척에 경찰 체포 후 구속영장 신청…이날 밤 기각 국회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발을 벗어 던진 정모(57)씨는 19일 구속을 면했다. 정씨는 지난 16일 오후 3시30분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차량에 탑승하려던 문 대통령을 향해 자신의 검은색 구두 한 짝을 벗어 던지며 "가짜 평화 위선자 문재인은 당장 자유 대한민국을 떠나라!"고 외쳤다. 당시 문 대통령은 국회 개원 연설을 마치구 국회를 나서는 길이었다. 이 신발은 문 대통령 몇m 앞에 떨어졌다. 현장에 있던 경찰이 정씨를 곧바로 둘러싸고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빨갱이 문재인을 당장 끌어내야 한다" "가짜 인권주의자, 가짜 평화주의자 문재인"이라고 외쳤다. 정씨는 일부러 문 대통령에게 신발을 던지기 위해 국회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신발을) 문재인을 향해 던졌으니 그 사람(문 대통령) 보고 고소하라고 하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17일 정씨에게 공무집행방해 및 건조물침입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남부지법은 정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했다. 정씨에 대한 구속 영장은 이날 오후 11시쯤 기각됐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인근 계단 앞에서 21대 국회 개원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던진 정모씨의 신발이 본청 계단 앞에 떨어져 있다. /뉴시스 날아드는 신발 피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외국 정치권 존 하워드 전 호주 총리는 2010년 10월 호주 공영 방송 ABC 채널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Q&A(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던 도중 신발 투척 봉변을 당했다. 방청객 중 한 남성이 "이라크의 죽은 사람과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며 하워드 전 총리를 향해 신발 두 짝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신발은 하워드 전 총리를 비켜갔고 신발을 던진 남성은 스튜디오 밖으로 끌려나갔다. 당황한 사회자의 사과에 하워드 전 총리는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존 하워드 전 호주 총리가 생방송 도중 한 방청객으로부터 신발투척의 봉변을 당했다. /ABC Q&A 방송 캡쳐 2008년 12월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 도중 날아오는 신발과 마주해야 했다. 알 바그다디아 방송의 기자 문타다르 알자이디는 신발을 내던지며 "이라크의 과부와 고아, 미국에 살해당한 이라크 사람들의 몫"이라고 외쳤다. 부시 대통령이 재빨리 피해 맞지는 않았다. 부시 전 대통령은 사건 직후 “이런 일도 일어나는 것이 자유로운 사회”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알자이디는 현지에서 외국 원수를 모독한 죄로 기소돼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9개월 만에 가석방됐고 사건 10년 뒤 이라크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알자이디 기자가 던진 신발(점선)이 날아들자 조지 부시(왼쪽) 미 대통령이 고개를 숙이며 피하고 있다. /유튜브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날아오는 구두를 피하고 농담까지 던지는 재치를 발휘한 일화도 유명하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14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연설을 하다 한 여성이 집어던진 구두 한 짝을 피한 후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저에게 뭘 던진 건가요? 설마 '태양의 서커스' 공연 일부는 아니겠죠? 신발을 던진 사람이 과거 나처럼 소프트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연설 도중 날아든 신발을 피한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의 모습. /조선DB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012년 2월 차량을 타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지나다가 시위대가 던진 신발에 맞는 봉변을 당했다. 반 전 총장이 탄 차량은 당시 도로에서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재소자의 친척 40여 명에게 둘러싸였다. 시위대는 영어와 아랍어로 '반기문, 이스라엘을 지나치게 편애한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인간띠를 만들어 반 총장의 차량 행렬 이동을 저지하려 했다. 팔레스타인 시위대 중 2명은 반 총장이 탑승한 차량을 향해 신발을 던졌다. 이후 반 총장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보안요원의 도움을 받아 가자지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계란 봉변’ 盧 “정치인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 화 풀려” 2002년 11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연설하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던진 달걀에 턱을 맞고 입을 감싸고 있다. 노 후보 옷에도 달걀이 튀었다. /조선DB 문 대통령의 평생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계란 봉변을 받은 것은 알려진 것만 모두 4번이다. 노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계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0년. 당시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역 앞 시민집회에서 계란을 맞았다. 이어 민주당 고문시절인 2001년 5월에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방문했다가 계란세례를 받았고,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 연설을 하는 도중 참석자가 던진 계란에 얼굴을 맞았다. 계란을 닦아낸 뒤 연설을 마친 노 전 대통령은 “달걀을 맞아 일이 풀리면 얼마든 맞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이튿날 ‘계란 봉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고 웃어넘겼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리무진 버스를 타고 대검청사 정문을 통과하다가 보수단체 회원들이 버스 쪽으로 던진 신발 한 짝과 날계란 5~6개를 맞았다. YS·MB도 계란 봉변…이회창은 “계란마사지 받아 예뻐졌다” 농담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9년 6월 3일 일본 출국을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왼쪽 얼굴애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부인 손명순씨가 놀라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조선DB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도 퇴임 이후 계란봉변을 당했다. 지난 1999년 6월 3일 퇴임 후 일본으로 첫 외국출장을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왔던 김 전 대통령은 재미교포 박의정(당시 71세)가 던진 계란에 이마에 맞았다. 계란에는 빨간색 유성페인트가 들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얼굴과 상의에 빨간색 페인트가 가득 묻은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계획적이고 살인적인 행위”라며 정치테러설을 주장했다. 경찰은 박씨를 구속하고 배후에 대해 조사했으나 결국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11월 17일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거행된 ‘국난극복 참회 대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이순자 여사 등 일행과 함께 광주공항에 도착해 차량을 타고 정문을 빠져나가다 20~30대 청년 5~6명에게 날계란 세례를 받았다. 이회창 전 총재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지난 2007년 11월 1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다 이모(당시 32세)씨가 던진 달걀 두개에 이마와 볼을 맞았다. /조선DB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와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계란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이 전 총재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지난 2007년 11월 1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다가 이모(당시 32세)씨가 던진 달걀 두 개에 이마와 볼을 맞았다. 이씨는 현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이 후보는 이후 “계란 마사지를 받아 얼굴이 예뻐졌다”는 농담으로 웃어넘겼다. 경찰은 이틀 뒤 이씨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석방했다. 2007년 12월 3일에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경기 의정부 중앙로 앞 거리 유세에 들어가기 위해 차량 연단에 오르던 중 왼쪽 허리 부근에 계란을 맞았다. 달걀을 던진 사람은 스님 복장을 한 50~60대 남성이었다. 이 후보는 코트의 가슴 및 왼쪽 허리 부분에 계란이 묻은 채 곧바로 바로 연설에 들어갔다. 계란을 던진 남성은 현장에서 체포돼 경찰서로 연행됐다. 2007년 12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경기 의정부 중앙로에서 허리에 계란을 맞고 옷을 갈아입지 못한 채 유세를 하고 있다. /조선DB 주한 미국 대사관에도 신발 날아들었으나…경찰 현행범 체포는 0명 작년 11월 30일 민노총·민중당 등 좌파 또는 친북 성향 단체 50여개로 구성된 '민중공동행동' 소속 수천~1만여명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전국민중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 도중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인상 요구에 반대한다"며 주한 미국 대사관을 향해 신발과 물병 등을 던졌다. 경찰의 제지에도 신발이 계속 날아들자 경찰은 대사관 주변의 경찰 버스 위에 그물망을 설치해 신발이 대사관 담장을 넘지 못하도록 막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5시쯤엔 청와대 사랑채로 행진하면서, 미리 준비해온 횃불 30여개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경찰은 당시 이들중 단 한 명도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2019년 11월 3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9 전국민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던진 신발이 주한 미국 대사관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오종찬 기자 문 대통령, 후보 시절 물병 투척사건 땐 “처벌 원하지 않아” 2012년 10월 14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30회 대통령기 이북도민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김모씨 등 참석자 10여명은 문 후보를 향해 500㎖ 물병 10여개를 던졌고, 문 후보 주변에 있던 여기자가 물병에 맞아 이마에 타박상을 입고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물병을 투척한 이들은 ‘친북 종북세력 물러가라’ ‘햇볕 정책 폐기하라’ 같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문 후보를 향해 “빨리 지나가라, 개××” “밥맛 떨어진다” 등의 욕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공직선거법상 선거의 자유방해 등 혐의로 수사에 나섰으나, 문 후보는 물병 투척사건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문 후보 주변에 날아온 물병과 문 대통령 근처에 떨어진 신발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2012년 10월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이북도민 체육대회에서 참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가운데 관중석에서 물병(빨간 점선 안)이 날아들고 있다. 문 후보는 경호원들이 에워싸 물병 공격을 피했지만 일부 수행원과 기자가 물병에 맞아 얼굴을 다쳤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세영 기자 
2971    [고향소식] - 화룡에서 대형 가무극 선보인다 댓글:  조회:3589  추천:0  2020-07-18
화룡 대형 원작가무극〈붉은 해 변강 비추네〉펴낸다 편집/기자: [ 김영화 김가혜 ] [ 길림신문 ] [ 2020-07-16 ]  화룡에서 대형 원작가무극 를 펴내게 된다. 그 프로젝트 가동식이 7월 15일, 화룡시진달래국제포럼중심에서 있었다. 는 1966년 화룡에서 생겨난 노래로 40년이 지난 2006년에‘화룡시가'로 지정되였다. 2019년말 중국음악가협회 에 입선된 이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음악명함 우수가요로도 선정되였다. 알아본 데 따르면 가무극 의 총 투자가 980만원에 달하고 총길이는 60분, 연변가무단 박광춘선생이 가무극 총감독을 맡았다. 이 가무극은 중국조선족특색이 선명한 무용, 노래, 연극, 곡예 등 다양한 문예종목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서곡 를 시작으로 제1막‘천년일욕(千年一峪), 제2막 , 제3막 , 제4막 , 종성 6개 편막으로 구성되였다. 연변가무단 가수 임향숙이 이날 가무극 가동식에 참가해 축하 노래를 선물하였다. 궁전, 경전, 물동이춤, 지게춤, 모내기춤 이외에도 항일전쟁시기 투쟁정경을 배경으로 다룬 이 가무극은 현대화 무대설비와 멀티미디어 효과를 활용해 화룡의 각 력사시기의 정신면모와 인문풍경을 구현하고 예술적 시각으로 화룡의‘관광도시, 개방도시’건설진척을 보여주게 된다. 소개에 따르면 가무극을 위해 올해 4월부터 화룡시에서는 자원봉사자팀을 무어 100여명의 가무극 출연자들을 모집하였는데 교육, 림업과 소방대 등 부문의 군중출연자들로 구성되였다. 그들은 약 두달간의 련습을 거쳐 지금까지 가무극의 40%를 완수했다. 가무극은 올해 9월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길림신문 김영화 김가혜 기자
2970    [문단시단] - 詩碑와 是非는 계속 되고.../최룡관시비 댓글:  조회:3383  추천:0  2020-07-17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ZOGLO) 2020년7월13일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최룡관선생이 창작한 애향시 가 덩실한 시비로 태여나 중국조선족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잔잔한 향수를 선물하게 되였다. 7월 11일 오전에 개최된 최룡관시비제막식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은 “연변동북아문학연구회 회장단은 최룡관시인의 문학창작생애 50주년을 계기로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 유관 부문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하에 모아산자락에 자리잡은 중국조선족민속원에 설립지를 마련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답사를 하고 있는 최룡관시인.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 전임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 단군문학상 리사회 리사장 신봉철, 연변시인협회 회장 전병칠 등과 시인의 제자, 고중동창, 대학동창대표가 축사를 하고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등 문학지 대표들의 축하메시지가 대독되였다. 부분적 참가자들이 시인과 함께 시비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최룡관시인은 연변사범학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일보 문예부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50여년간의 문학인생에《이미지창작론》, 《하이퍼시창작론》, 《동시창작론》 등 론문집과 시집, 문집 등 여러가지 작품집 총17권을 출간하였으며 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주인민정부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단국문학상,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공로상 등 다수를 수상하였으며 40여명의 문학후배를 양성해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2969    [고향소식] - 고향 화룡에 비행장 선다... 댓글:  조회:3707  추천:0  2020-07-02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건설 첫 삽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 2020-06-10 ]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정초의식이 6월 10일 오전 펼쳐지면서 화룡시는 통용비행장 건설의 첫삽을 떴다.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국가민항국에서 확정한 단거리운수 시범공정이며 전성적으로 처음 비준받은 A일류 통용비행장 대상이다. 이 대상은 화룡시에서 국가의 내수확대정책의 기회를 다잡고 “3성”건설을 깊이있게 추진하는 중대한 조치인바 립체교통 네트워크를 완벽화하고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관광자원을 종합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놀게 될 전망이다. 료해에 따르면 새로 건설되는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화룡시 룡성진 흥서촌에 자리잡고 있는데 총투자가 9.89억원에 달한다. 비행장의 총 부지면적은 97헥타르에 달하며 길이가 1200메터, 너비가 30메터에 달하는 활주로와 비행구 등급 2B로 건설되며 운-12통용비행기와 각종 직승비행기 및 기타 소형비행기들이 비행할수 있다. 이 대상은 3년내에 건설되는데 완공후 전성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A1류 통용비행장으로 될 전망이다. 통용항공산업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갓 흥기하기 시작한 전망밝은 산업인바 국가에서 통용항공산업의 발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통용비행장 건설을 크게 지지하고 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화룡시당위서기인 김렬은 축사에서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개통된 후 장춘, 장백산,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조선 청진 등 국내, 국제 항공로선이 개통되면서 화룡을 중추로 중조로 3국 공중통로를 구축하게 되여 화룡시의 기초시설이 락후한 면모와 교통물류가 박약한 현황을 철저히 개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화룡시에서는 진달래통용비행장을 지탱점으로 공항경제구와 항공산업건설을 함께 추진시키면서 항공강습, 물류운수, 가공제조 등 기능이 일체화한 종합성적인 항공산업군을 창출하며 아울러 공로, 철로, 항구합작개발 등 기초시설건설을 다그치는것으로 점차 륙해공 립체교통망을 형성하며 두만강 출해구를 열고 해양경제를 발전시키며 동북아 지역의 상호 련락과 소통을 적극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화룡시에 통용비행장이 들어선 후 변경합작구건설과 전면적인 대외개방 확대 및 지역경제발전의 추진으로 빈곤부축개발이 큰 탄력을 받게 될것이며 길림성 항공운수사업에 적극적인 네트워크 지지를 주게 된다. 이외에도 장백산비행장과 연길비행장의 지선보충 작용을 하게 되여 우리 성 동부지역관광의 전역 련동도 실현하게 되며 지역경제발전과 변경안정, 생태환경보호에도 중요한 작용을 놀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화룡시당위 선전부제공
296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233  추천:0  2020-07-02
‘천년의 빛’ 고려 나전칠기 돌아왔다 기사입력 2020.07.02.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고려시대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나전칠기는 전 세계에 20여 점만 전해질 만큼 귀중한 유물인데요. 이 중에서도 전 세계에 단 3점밖에 안 남은 독특한 형태의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안다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작디작은 국화 꽃잎과 넝쿨무늬가 영롱하게 빛납니다. 2~3mm 정도로 아주 작게 자른 자개와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바다거북 등껍질을 붙인 기법이 세밀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시대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12세기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김동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 : "다양한 문양과 기법이 총망라된 우수한 작품입니다. 오랜 시간 보존하면서도 수리가 거의 되지 않아서 원형이 잘 남아있고."] 길이 10cm, 무게 50g의 작은 크기로, 뚜껑이 있는 '나전합' 형태입니다. 향이나 화장품 등을 담는 데 쓰였을 걸로 추정됩니다. 이 유물은 특히 큰 원형 합 속에 들어있는 작은 합 중 하나인데, 나머지 합들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런 모양의 작은 합은 이 유물을 비롯해 전 세계에 단 석 점뿐. 미국에 1점, 일본에 2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의 한 개인이 소장해오던 한 점을 되찾아 왔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년간의 협상 끝에 구매에 성공해 지난해 12월, 환수했습니다. [최응천/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우리가 어느 시점에 환수하지 않으면 다시 일본의 국유문화재로 바뀔 수 있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018년 보물로 지정된 나전경함 등 모두 3점의 나전칠기 유물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돼 올해 12월 특별전을 통해 관람객과 만납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안다영 기자  ======================================///   세계에서 단 3점 뿐인 나전칠기, 800년만의 귀환… 1.5~3mm의 '극초정밀' 예술 2020.07.0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경향신문]  일본의 한 소장가가 갖고있던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 구입 환수되어 2일 언론에 공개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남아있던 온전한 형태의 나전합 중 1점이 환수된 것이다. 유일하게 매입가능했던 유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환수라 할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말이 있다. 고려시대 극한의 정밀한 공예품을 가리켜 ‘세밀하여 귀하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 ‘세밀가귀’란 말은 본디 고려시대 공예품 중 나전칠기 기술을 콕 찝어 표현한 것이다. 즉 1123년(인종 재위 1122~1146)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에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언급했다. 현존하는 고려나전 제품을 보면 중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할만 하다. 고려 나전에는 대모(玳瑁·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을 얇게 갈아 재료로 사용했다. 이 껍질을 일일이 곡선으로 오려내는 줄음질 기법으로 꽃잎과 이파리 등의 무늬를 표현했다.  그런데 꽃잎과 이파리의 한조각 크기는 1㎝를 넘지않는다. 작은 것은 2~3㎜에 불과하다. 꽃송이를 이은 넝쿨은 금속선으로 만드는데 그 두께가 불과 0.3㎜였다. 금속은 옻칠을 한 나무표면에 야교를 묻힌 이 작디작은 꽃잎과 이파리 조각을 일일이 붙이는 일은 극한의 인내력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단위를 오리고 갈아내어 원하는 문양을 맞추는 일은 가히 극한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나전으로 만든 경전함의 경우 2만5000개의 나전 조각이 사용되었으니까…. 이렇게 만든 고려나전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입 환수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화장용기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화와 넝쿨무늬가 빈틈없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심지어 1080년(문종 34년)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나전장차·螺鈿裝車)까지 송나라에 진상한 일이 에 등장한다. 지금으로 치면 나전칠기로 장식한 최고급 승용차를 송나라 조정에 선물한 것이다. 또 인종 연간에 요나라 사신으로 떠난 문신 문공인(?~1137)은 요나라 관리들에게 고려나전제품을 개인적으로 선물했다는 기록이 에 등장한다. 는 고려 나전제품에 반한 요나라 관리들이 고려사신이 갈 때마다 ‘선물 안주냐’고 요구하는 바람에 큰 폐단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가 “1244년(고종 32년) 연회를 베풀 때는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한 화분 4개에 얼음산을 쌓았다”( ‘열전’)는 기록도 있다.  이밖에 몽골 간섭기인 1272년(원종 13년)에는 “대장경을 보관할 함(경전함)을 만들라”는 원나라 황후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나전제품을 제작하는 임시관청인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의 칠기서인 에는 “나전 필갑(필통)은 고려국에서 생산되어 들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만큼 고려 나전은 중국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전함, 염주함, 향합(향을 넣는 그릇), 불자(먼지 터는 총채와 같은 불교의식용 도구) 등 고려 나전제품은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 전세계를 통틀어 22점 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주요박물관에 흩어져있다.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세밀가귀’ 제품이 왜 이렇게 적은 숫자만 남았을까.  환수된 나전합의 세부무늬. 고려나전은 ‘세밀가귀’라는 칭송을 들을만큼 세밀하고 정교한 문양 구현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북등껍질과 전복 껍질을 얇게 갈아 3~8㎜ 정도의 크기로 일일이 오린 뒤 문양에 따라 붙여넣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우선 조선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빈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했다. 단적인 예로 1448년(세종 30년) 6월3일 세종은 “속절(俗節·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에 진상하는 함을 나전으로 꾸미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제품을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쓰겠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전제품은 옻칠한 나무에 1㎝도 안되는 수백 수천 수만개의 문양을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떨어지기 쉽다.  이러니 고려나전이 남아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불자(拂子·먼지 터는 총채처럼 생긴 불교의식용 도구) 1점 뿐이었다가 2014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나전경전함을 구입함으로써 2점이 되었다. 이 나전경전함은 2018년 보물(제1975호)이 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12월 전 세계에 단 3점 뿐인 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하 나전합)을 일본소장가로부터 구입했다”고 2일 밝혔다. 이로써 국내의 고려나전 유물은 온전한 것을 기준으로 총 3점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구입환수된 나전합은 이미 14년 전인 2006년 국내에 공개된 바 있는 유물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에 출품됐다. 이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오랜 시간 일본의 개인 소장자와 협상 끝에 나전합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구입환수된 ‘나전합’에는 떨어져나간 부분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것이 오히려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12세기 고려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환수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향 혹은 화장용기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큰 합(그릇)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간 일종의 ‘모자합(母子盒)’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부장은 “전 세계 단 3점 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매입할 수 있었던 나전합이었다”고 의미를 두었다. 이 나전합의 길이는 10㎝ 남짓이며, 무게는 50g 정도된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가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이다. 뚜껑과 몸체에 반복되는 주요 무늬는 국화와 넝쿨무늬다.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작게 오려진 나전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배치되며 유려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화 꽃은 지름이 10㎜였고, 꽃잎 길이는 3㎜, 폭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에는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특징 중 하나인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 사용됐다. 대모복채법은 바다거북의 등껍질(대모)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 안쪽에 안료를 칠해 앞면에 비쳐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뚜껑 테두리는 점 혹은 작은 원을 구슬 꿰매듯 연결시켜 만든 연주문(連珠文)으로 촘촘히 장식되었다. 또한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표현하고 두 줄을 꼬아 기물의 외곽선을 장식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꽃잎과 이파리를 표현한 대모(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 넝쿨을 표현한 금속(구리)선이 이토록 조화롭게 구현된 고려나전 제품은 보기 드물다”면서 “고려 나전의 전성기인 12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4년 구입환수된 나전경전함. 무려 2만50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보물제 197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합에는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곳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또한 나전합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라고 입을 모은다. 김미라 문화재청 감정관실 감정위원은 “수리 흔적이 있는 다른 고려나전과 달리 이 나전합은 원형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비파괴 분석 결과 나전합은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무로 모양을 잡은 뒤 그 위에 천을 바르고 옻칠을 한 목심칠기이고, 판재 안쪽 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을 넣고 부드럽게 꺾어 곡선형의 몸체를 만들었으며, 몸체는 바닥판과 상판을 만든 후에 측벽을 붙여 제작된 점 등이 확인됐다.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며, 오는 12월22일부터 열릴 특별전(‘고대의 빛깔, 옻칠)’에 출품될 예정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2967    [그것이 알고싶다] - 송진속 곤충 = 호박 댓글:  조회:4724  추천:0  2020-07-01
송진에 갇힌 곤충서 찾아낸 9천900만년 전 공룡시대 색깔 2020.07.0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청벌·딱정벌레 몸체 청록색 등 생생하게 보존…"백악기 색깔" 구조색이 생생하게 보존된 백악기 중기 호박 속 곤충 화석[NIGPA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화석 속 생물은 대부분 살아있을 때 가졌던 색을 잃고 탈색된 상태로 발견된다. 생전의 색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표면의 미세 구조가 보존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고생물학자들이 송진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호박(琥珀) 속에서 약 9천900만년 전 공룡과 같이 살았던 작은 곤충들의 '살아있는' 색깔을 찾아내 학계의 관심을 받고있다. 중국과학원에 따르면 난징 지질·고생물학연구소(NIGPAS)의 차이천양 부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미얀마 북부 호박 광산에서 곤충이 정교하게 보존된 호박 35개를 모아 분석한 결과를 영국 '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최신호에 발표했다.  열대우림 환경에서 자란 고대 침엽수에서 나온 수지가 주성분인 이 호박들은 공룡시대 황금기인 약 9천900만년 전 백악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 호박들에 갇혀 화석이 된 곤충 중에는 머리와 흉부, 복부, 다리 등이 청록색과 황록색 등의 색깔을 가진 '청벌'(cuckoo wasp)이 포함돼 있다. 이런 색깔은 현재의 청벌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지적됐다.  청벌 이외에 청색과 보라색을 가진 딱정벌레 종(種)과 암녹색을 띤 등에 등도 포함돼 있다.  논문 공동저자인 황디잉 교수는 "수천개의 호박 화석을 봐왔지만 이번 호박 화석처럼 색깔이 잘 보존된 것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고생물 색 복원 전문가인 NIGPAS의 판양훙 교수는 "생물 표면의 나노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을 분산하고 매우 강렬한 색을 만들어내는데, 호박 속 화석에 보존된 색도 이런 '구조색'(structural color)"이라고 설명했다.  물질 고유의 색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표면 구조에 의해 빛이 회절하거나 간섭하면서 나타나는 색으로, 공작의 날개를 비롯해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색이 이런 구조색이다.  연구팀은 호박 속 보존된 곤충의 색이 9천900만년 전 실제 색과 같은지 등을 분석하기 위해 다이아몬드칼을 이용해 색깔이 남은 청벌의 겉껍질과 탈색된 각피(殼皮) 샘플을 절개해 전자 현미경으로 분석했다.  호박 속에서 색깔이 보존된 화석과 탈색된 화석 비교 [NIGPA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 결과, 색깔을 가진 청벌 화석의 겉껍질은 빛을 분산하는 나노구조가 잘 보존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호박 속의 색깔이 백악기 때 갖고있던 것과 같은 색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색깔이 보존되지 않은 화석에서는 각피 구조가 크게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현재의 청벌이 '뻐꾸기 벌'이라는 별명처럼 알을 다른 벌집에 낳는 습성을 갖고있다면서 화석 속의 백악기 청벌도 다른 벌집에 몰래 알을 낳는데 구조색을 이용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이 부교수는 이와관련 "현재로서는 구조색이 위장용 이외에 체온조절 등과 같은 다른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2966    [우리의 것] - 하찮은 벼짚이 문화재 벼짚공예 되다... 댓글:  조회:3653  추천:0  2020-06-27
벼짚공예의 장인 고원건, 전통문화 보존과 선양에 힘써 (ZOGLO) 2020년6월25일    벼짚공예전승인 고원건, 리려 부부   “짚신이나 방석이나 망태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벼짚은 반드시 낫으로 잘라야지 기계를 들이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벼줄기가 편평한 것으로 골라야 합니다. 이런 벼짚은 새끼줄을 꼬는데 최고죠.” 태여나서 줄곧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땅에서 살아온 한족 사나이 고원건(54세)은 손에 들고 있는 평범한 새끼줄을 흔들어 보이며 전문가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조선족 전통문화가 깃들어 있는 새끼줄과 벼짚공예품을 여느 조선족 못지 않게 잘 알고 있는 그는 비범하고 남달라 보였다. 새끼줄을 서두로 필자는 고원건과 담소를 나누었다.    고원건이 벼짚공예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든 손으로 엮어보기를 즐기던 그의 어릴적 취미에서 비롯됐다. 부모가 버드나무가지로 광주리를 엮거나 옥수수 잎으로 물건을 담아두는 작은 바구니를 엮으면 그는 무조건 동참해 일손을 거들었다. 현재 보면 조금 따분해 보이는 중복작업이였으나 그에게는 둘도 없는 취미생활이였다. 부모옆에서 열심히 배우던 그는 어느새 홀로 원자재를 장만해 광주리도 엮고 바구니도 엮으면서 기술적으로 막히는 곳이 있으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귀띔을 받으면 금방 해결할수 있었다. 현재의 시간대에서 고원건의 유년시절을 바라보면 사실 그는 후날 벼짚공예에 필요한 기본기능을 련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고원건의 남다른 손재주를 알게 된  화룡시부련회에서는 신민촌 민간공예조사를 떠나면서 그를 동참시켰다. 조선족 마을인 신민촌은 편벽한 시골이지만 손재주의 장인들이 대거 운집해 있다는 부련회 책임자의 소개에 고원건은 호기심이 잔뜩 동해 걸음마저 빨라졌다. 그가 만난 장인들은 대부분 70~80대의 조선족 로인들로서 신민촌이란 이 동네를 손수 일구었거나 혹은 신민촌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벼짚 엮기에 탄탄한 실력을 쌓은 분들이였다. 로인들은 여유롭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 벼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이리꿰고 저리 돌리고 하더니 금방 짚신을 만들었고 모양새가 그럴듯한 새초롱도 선보였다. 고원건은 새끼줄의 신통함에 놀랐고 로인들의 손재주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로인들과 함께 벼짚을 주어 새끼줄을 꼬고 있었다. 유년시절에 갈고 닦은 실력덕에 벼짚공예 입문이 신속했다. 로인들은 허우대가 좋은 한족 청년이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척하면 척”하는 눈썰미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대부분 고희를 넘긴 로인들은 조선족 전통문화인 벼짚공예가 후계무인인 상황에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벼짚공예의 “전성시대”는 건국 초기 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벼짚으로 엮은 짚신, 망태기, 올방자 등은 가정집의 필수 생활용품이였다. 신민촌 촌민들은 생각을 넓혀 겨울 농한기가 오면 따뜻한 구들에 앉아 바구니, 멍석, 삼태기 등을 양산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민촌” 표 벼짚 생활용품들은 원양선박을 타고 동남아로 수출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촌민들도 새끼줄 덕에 약간의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호황기를 누리던 벼짚 상품들은 플라스틱 제품이 출현하면서 수출길이 점차 좁혀졌고 가정집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품이 많이 드는 대신 내구성과 실용성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현재 벼짚공예에 관한 이야기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한동안 력사더미에 묻혀 있던 벼짚 상품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시점을 딱히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들의 생활질이 대폭 상승하면서 벼짚공예를 전통문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실용보다는 수장과 관상용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원건은 마침 시대의 물결에 편승했다.        현재의 고원건은 벼짚공예를 리용해 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화룡시부련회직업기능학원의 책임자이자 벼짚공예 과목의 강사이다. 2016년부터 시작한 일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매기 학생 등록수가 40~50여명 되면 한달 간의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강사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작품을 제작하다 차차 련습이 깊어지면서 기술력도 좋아지고 숙련도도 현저하게 제고되는데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야무진 학생들은 독립적으로 꽤나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원건은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대신 판매하며 판로까지 해결해 준다. 가장 간단한 짚신, 새초롱은 시장에서 40~50원에 판매되고 항아리 같은 부피가 큰 공예품은 한개당 700~800원에 팔린다고 한다. 수업에 등록한 학생들은 대부분 화룡시 현지의 50~60대 농민들이다. 그들은 벼짚 공예기술을 배워 여름철과 겨울철 농한기에 공예품을 제작해 짭잘한 수입을 올려 살림에 보탬한다. 고원건은 화룡시장애인련합회와도 이미 여러번 합작을 했다. 현재까지 총 3기를 거쳐 150여명의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그중 18기 학생인 50대 녀성 리화방은 연변기능경진대회에 참가해 벼짚 새초롱으로 2등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장애인들이 만든 제품을 고원건은 우선 자기돈으로 “선불”해 사서 두었다가 시장에 판매한다. 그들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고안해낸 방법이다.    벼짚공예품은 생각밖으로 판로가 넓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화룡시 현지와 연변주에서 진행되는 여러 전시회에서는 고원건을 귀빈으로 모셔갈 정도다. 고원건이 만든 제품들을 전부 전시할 수 있도록 아예 커다란 부스 한칸을 무료로 내어주기도 한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전통문화이다 보니 언론들도 앞다투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 덕에 벼짚공예품을 넘어 전시회까지 덩달아 홍보가 된다. 전통 산장, 수장 애호가, 어린이들이 벼짚 공예품을 사가는 주요 고객이다. 산장 주인들은 벼짚 공예품들을 산장 이곳저곳에 걸어두거나 배치해 전통 느낌을 살리고 수장 애호가들은 전통문화 보존과 감상을 위해 사간다. 간혹 부스를 찾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에 못이겨 부모를 졸라 하나씩 산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어릴적 물품에 관심을 갖는 것에 흐뭇해하며 기꺼이 장바구니에 담는다. 전시회에 나갈 때면 하루에 적어도 3000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며 고원건은 만족해 하였다.      2008년을 기점으로 벼짚공예를 접한지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고원건은 여전히 자신을 가르쳤던 신민촌의 스승들을 기억하고 있다. 신민촌 생산대 대장을 지냈던 전용철 로인과 그의 부인 최순자, 그리고 최영희, 림윤호, 림영금……이중 일부 로인은 이미 세상을 떴다. 이 로인들은 저마다 능한 한가지 제품들이 있었는데 고원건은 하나씩 배워나가며 1년도 안되는 사이 모든 “학과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자체의 생각을 넣어 새로운 제품들도 창작해 냈다. 기술을 배우며 로인들과 두터운 정을 쌓은 그는 현재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로인들을 뵈러 간다. 명절 때면 과일과 채소를 듬뿍 사서 방문한다. 로인들이 남김없이 배워주었기에 오늘날의 자신이 가능했다며 고원건은 감격해 하였다.  2018년, 고원건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로부터 벼짚공예 무형문화재 전승인으로 추천됐다. 향후의 계획에 대해 고원건은 전통문화의 지속적인 보존과 발양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벼짚공예에 관심을 갖고 직접 체험해보며 흥취를 가지고 재미를 느꼈으면 하기를 바랐다. “산업화시대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널리 선양해야 합니다. 전통문화인 벼짚공예가 사회경제활동에서 더욱 빛을 뿌리고 립지를 굳히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원건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신심이 가득차 있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한동준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2965    [그때 그시절] - 전쟁은 싫다 싫어... 댓글:  조회:4000  추천:0  2020-06-27
'6·25전쟁으로 빼앗긴 삶' 달래준 그 시절 그 노래들 2020.06.27.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1950년대 전쟁으로 삶이 뿌리째 뽑혀버린 사람들은 함께 울어주는 노래에, 혹은 발랄한 리듬에 위로를 받곤 했는데요. 김나한 기자가 들려드립니다. [기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전우야 잘 자라' (1950년) : 1990년대까지도 소녀들이 고무줄을 넘으며 무심하게 불렀던 이 노래, 70년 전 포화 속에서 병사들을 달랜 군가입니다. 남편을, 아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이들은 애끊는 마음을 담은 노래들을 기도처럼 흥얼거렸습니다.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나" - '님 계신 전선' (1953년) 전쟁의 폐허 속에도 삶은 계속돼, 사람들은 화려한 영화를 통해 남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었습니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분홍치마에…" - 영화 '자유부인' (1956년)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던 피란민 소년의 고단함은 경쾌한 리듬으로 살아났습니다. "아무리 피란통에 허덕거려도 구두 하나 못 닦아 신는 도련님은요" - '슈샤인 보이' (1954년) : 피란 도시의 판잣집에도 사랑은 있어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청년의 마음도 그렸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4년) 식민 지배부터 전쟁과 분단의 아픔까지, 곡절 많은 삶을 달랜 우리 가요 2만 6000여 곡을 조사해 보니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사랑'이었습니다. (영상그래픽 : 박경민) /김나한 기자 /[영상취재: 김재식 / 영상편집: 유형도]
2964    [타산지석] - 우리 연변 미술계에도 이런 "현상" 없는지?... 댓글:  조회:4116  추천:0  2020-06-25
미술계 논란 계속... 법적 분쟁 2라운드 가나? 2020.06.25.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조수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이른바 '대작'으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조영남 씨에 대해 사기죄가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미술계 반응은 엇갈립니다. 한국미술협회 측은 법적 분쟁 2라운드를 예고했습니다. 이승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조수 도움으로 완성한 그림을 자신의 이름으로 팔았다가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영남 씨, 무죄 판결은 한국에도 현대미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린 것이라며 대한민국이 이제부터는 공식적으로 화가 노릇을 하라고 한 느낌이 든다고 밝혔습니다. 국내외 거장들이 조수를 두고 많이 작업하고 있는 요즘, 조영남 씨라고 남달리 비판 받아서는 안된다고 밝혀온 미술계 인사들은 이번 판결이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반이정 / 미술 평론가 : 자기 브랜드가 생긴 미술가가 조수를 고용해서 작업을 시키는, 그래서 어떤 부분을 그걸 더 잘하는 사람을 불러서 작업의 완성도를 더 높이는 것은 미술계의 일종의 공식으로 굳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과에 울분을 드러내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화폭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수십 년 정진하는 작가들의 노력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격이라고 말합니다. [김순지 / 화가 : (대학 입시) 실기시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으로 누구한테 시켜서 그 작가가 가져온 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힘들게 피땀 흘리면서 어려운 작업을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또 당장 공모전에도….] 한국미술협회는 이번 재판은 사기죄 여부를 물은 것이라며 조영남 씨 작품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법적인 판단을 다시 한 번 물을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수의 역할은 그야말로 도움에 그쳐야 하며, 형상화에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양성모 /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직무대행 : 작가적인 양심에 얼마나 진정성 있게 해나갔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저작권법에 대한 그 부분은 저희가 다시 제소할 계획입니다.] 미술계에 숱한 논쟁을 낳은 이번 재판의 파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YTN 이승은 입니다.   ===================================/// "조영남이 꼴보기 싫은가? 적어도 사기꾼은 아니다" 2020.06.25.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그림 대작 사건 무죄 판결 本紙 조영남 자택 인터뷰 "유명인에 대한 질투도 한 몫 …논란 억울해도 얻은 것 많아" 25일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영남이 자신의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달 공개 변론 당시 대법관에게 보여주기 위해 법정에 가져갔지만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상혁 기자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가수 겸 화가 조영남(75)씨는 ‘그림 대작(代作) 사건’에 휘말렸다가 25일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씨는 “지난달 공개 변론 분위기가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해 무죄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4년만의 승소 통보를 받아든 조씨는 본지 인터뷰 도중에도 빗발치는 지인들의 전화를 응대하느라 분주했다. ―큰 풍파를 겪었다. “사는게 만만치 않다는 걸 절감한다. 이 일로 수모를 치렀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믿었다. 이번 사건으로 얻은 게 많다. 자연히 친구와 적을 구분할 수 있었고, 시간이 많아져 그림을 열심히 그리게 됐다. 그리고 내 하나 뿐인 딸과의 결속이 단단해졌다.” 조씨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송모(63)씨 등 화가 2명을 고용해 화투 그림 26점을 그리고, 자기 작품이라고 속인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송씨 등이 거의 대부분을 완성한 그림에 조씨가 가벼운 덧칠과 서명만 한 뒤 전시·판매한 것은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대법원은 그러나 미술품 제작에 제3자의 도움이 있었는지 여부가 구매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며 조씨의 손을 들어줬다. ―억울한가? “억울한 면이 왜 없겠나. 검찰이 나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그렇게 자꾸 내가 사기꾼으로 인식되는게 너무 억울했다. 나도 모르게 한(恨)이 쌓였던 것 같다. 그래도 그간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게 컸으니 그걸로 퉁 쳤다.” ―이 사건에 선입견이 작용했다고 보나? “그게 거의 전부 아니었을까. 돈 잘 버는 유명 대중가수가 그림까지 그린다니 못마땅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자연 현상이다. 이건 무죄가 나왔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기 죽어서 할 일 못할 필요는 없다. 미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별 볼 일 없던 그림 그리는 가수한테 ‘너 그림 제대로 그려라’고 본격적인 사명감을 줬다. 대한민국 법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대체로 미술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애초에 사법 판단에 기댈 성격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저작권 측면에서는 다툼의 여지가 없고, 조수를 쓰는 것도 이미 널리 퍼진 관행이기 때문이다. 특히 열성적으로 조씨의 편에 섰던 평론가 진중권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인데, 아이디어는 조영남이 냈고, 시장에 예술적 논리를 관철시킨 것도 조영남이고, 화투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한 것도 조영남이고, 마지막으로 작품을 확인하고 사인을 한 것도 조영남”이라며 옹호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은 싸늘했다. 고가(高價)의 그림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송씨의 작업 보수가 알려지자 인터넷에는 조씨를 비판하는 게시글이 빗발쳤다. ―일각에선 “조영남은 화가가 아니다”라고 한다. “지난달 공개 변론 당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신제남 화가가 ‘조영남은 캔버스를 액자에 끼운 채로 그림을 손본다’고 뭐라고 하는데, 그건 내 취향이다. 나는 액자도 그림의 일부로 생각한다. 미술에 얽매여야 할 규칙 같은 건 없다. 규칙과 연마가 중요한 음악과 달리, 미술은 거의 100% 자유다. 그게 미술의 매력이다.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아닌 거다.” ―법정에선 이겼지만 도덕적 차원의 비판은 여전하다. “작품 대부분을 조수에게 맡기고 관리·감독이 미진했다고 하는데, 송씨가 우리 집에서 3개월간 같이 살았다. 서로 이미 원하는 걸 다 아는데 관리·감독 할 이유가 어디 있나. 그냥 ‘이대로 똑같이 그려오라’고 하는건데. 돈 문제도 그렇다. 만약 제대로 안줬다면 그가 가만히 있었겠나.” ―이후 송씨와 연락 안했나? “2018년 2심에서 무죄 판결 나온 날, 전화가 왔다. 다시 같이 일 할 수 없겠느냐고 묻더라. ‘지금은 내가 너 보기 서먹하니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다.” 그는 현재 다른 조수를 한 명 두고 있다. 조영남 자택 현관 입구에 놓여 있는 화투 그림. /정상혁 기자 그는 집에 1000점의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지난 4년간 완성한 그림만 수백점이다. 싸리 바구니 등을 활용해 초가집을 형상화 한 콜라주 작품 등이 방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날도 조씨는 시인 이상(1910~1937)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신병자 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누구보다 추종자가 많다. 내 처지에 빗댄 건 아니다.” ―승소하자마자 책도 냈는데. “법정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부터 쓴 책이다.” 현대미술의 계보와 자신의 지향을 담은 책 제목은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현대미술에 관한 조영남의 자포자기 100문100답’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실제 똥을 통조림 통에 담아 봉인한 뒤 ‘예술가의 똥’이라 이름 붙인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만초니를 인용하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모든 예술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 똥조차 훌륭한 예술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전시도 여나? “서울 윤갤러리, 경기도 이천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앞으로도 화투 그림은 계속 그릴 것이다. 잘 팔리니까. 내 그림은 어렵지 않다. 어떤 화가들은 그림 위에 서명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지만 나는 아예 그림 위에 제목을 적어버린다. 영어제목, 한글제목, 거기에 낙관까지 찍는다. 나는 말하자면 트로트파(派)다. 누구나 봐도 쉽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니까. 트로트파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그림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정상혁 기자  ====================================///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어” 진중권이 ‘조영남 무죄 확정’에 한 말 2020.06.25.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대법원,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 무죄 선고 / “대한민국 전문가 집단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 대법원이 ‘사법자제’ 명확한 표현으로 하나의 판례 세워” / “우리 미술계 이제야 1917년 맞아, 그것도 대법원의 힘으로… 그냥 지나쳐선 안 돼” 가수 조영남(왼쪽)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연합뉴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가수 조영남씨의 ‘그림 대작’ 사건 ‘무죄’ 선고와 관련해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었는데 이제 끝났다”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진 전 교수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같이 적고 “거의 집단린치 수준이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얘기하면 좀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씁쓸한 심정을 전했다. 이어 “하긴 이 소동(조영남 사건)에서 몇몇 사람 빼고 수많은 전문가가 엉뚱하게 검찰 편을 들어줬으니”라며 “대한민국 전문가 집단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했다. 진 전 교수는 “대중이야 몰라서 그런다 쳐도, 그걸 알아야 할 전문가 집단마저 현대미술이 탄생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예술에 대한 이해 수준이 19세기 인상주의 시절에 가 있으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라고 일갈했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2심 재판부의 판결이 명판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 전 교수는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검찰의 기소논리를 하나하나 명확하게 반박하고 있다”라며 “대법원 판결이 그저 2심 판결에 손을 들어준 데에 그친 것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사법 자제’라는 표현이다. 이런 문제는 사법부에서 함부로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법 자제’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법원에서 하나의 ‘판례’를 세웠다”면서 “대한민국 미술계는 이제야 1917년을 맞았다. 그것도 대법원의 힘으로. 현대미술의 개념적 혁명이 시작된 지 무려 103년 만”이라고 했다. 진 전 교수는 “이 사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면서 “무엇이 대중과 전문가들을 모두 19세기적 예술관념에 빠뜨렸는지, 이 가공할 시대착오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진중권 페이스북 갈무리.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화가 송모씨 등이 그린 그림에 가벼운 덧칠 작업만 한 작품 21점을 17명에게 팔아 1억5300여만 원을 받은 혐의로 2016년 6월 불구속기소 됐다. 이후 1심 재판부는 조씨의 사기 혐의를 ‘유죄’로 판단,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018년 8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문제가 된 화투 소재) 미술작품은 조씨 고유의 아이디어”라며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판결 결과에 불복한 검찰이 상고했고,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5일 오전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씨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날 재판부는 조씨 사건처럼 미술작품 거래 시 발생하는 다툼은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판시했다.  /현화영 기자  /사진=연합뉴스, 페이스북   =============================================///   조영남의 대작이 무죄라면, 인공지능 작품도 예술일까 2020.06.27.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사진=픽사베이 가수 겸 작가 조영남(75) 씨의 화투 작품 대작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 무죄 판결을 냈다. 2016년부터 약 4년여에 걸쳐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건의 소송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조 씨는 2011~2015년 무명 화가 A씨를 시켜 화투 작품들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겐 대작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20여 점을 팔아 1억5000만원을 벌었다. 사기죄에 몰린 조 씨는 소송에서 ‘작가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조수가 작품을 만드는 건 현대 예술의 관행’이라 항변했다. 법원은 조 씨가 작품을 팔 때 조수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다고 봤다. 나아가 작가 스스로 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현대 예술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예술 작품의 탄생에서 ‘주체의 물리적 행위 여부’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법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예술의 정의를 뒤흔든 조영남 씨 대작 사건 대작 논란으로 대법원까지 간 조영남 씨의 화투 작품. 조 씨 판결에 대해 세간의 의견이 분분하나, 적어도 대중 일반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요컨대 그림에서 미세한 붓 터치 하나만으로도 결과가 바뀌는데, 물리적 행위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아이디어만 제공한 사람을 작품의 주인으로 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다만 조 씨가 감상자들을 ‘기만’했는지와 별개로, 미술계의 입장은 ‘예술이 맞다’는 쪽으로 보는 듯하다. 현대 ‘개념미술’의 탄생 이후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건 그걸 만들게 된 아이디어이며, 이에 조영남 씨를 창작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 개념미술의 아버지 격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아트 작품 ‘샘’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적 작품을 만든 주체(즉 소변기 공장 제조업자 ‘R.MUTT’)를 작가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걸 작품으로 격상시킨 아이디어(뒤샹의 의식)다. 실제로 적지 않은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을 만들지 않고 있다. 조 씨가 재판에서 예로 든 앤디 워홀은 조수를 고용해 작품을 ‘대량생산’했다. 물론 워홀의 경우 작품 생산방식 그 자체가 창작 철학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조 씨 사례와 다르게 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의 애니메이션 작품 창작 과정에선 조수 35명이 투입된다. 심지어 데미안 허스트는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에서 “여기 전시된 그림 중 내가 그린 건 단 한 점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창작에서의 필요성 여부와 별개로, 이제 현대미술에서 조수를 기용하는 건 일반적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미술평론가 진중권 씨는 그의 페이스북에 “(조영남 씨에 대한 비판은) 거의 집단 린치수준이었다”라며 “대중이야 몰라서 그런다 쳐도, 그걸 알아야 할 전문가 집단마저 현대미술이 탄생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예술에 대한 이해 수준이 19세기 인상주의 시절에 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논란의 요지는 결국 현대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함으로 귀결된다. 19세기 낭만주의 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예술과 미학 개념의 잣대가 현대 예술을 해석하는 데 맞지 않음에도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영남 씨 대작 논란은 이 같은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은 예술일까 현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인공지능(AI)이 만든 작품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나타난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네덜란드 연구진이 함께 만들었다. 딥러닝을 통해 렘브란트의 작품 346점을 분석했는데, 3D 기술을 통해 심지어 질감과 붓 터치까지 따라 했다. 심지어 미술 전문가들조차 진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질감과 붓터치까지 비슷한 렘브란트 풍 작품을 만들었다. 럿거스 대학에서 만든 ‘AICAN’은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란 측면을 충족하면서도 기존 예술의 평가 범주에도 머무르도록 학습됐다. AICAN은 인공지능의 지적 능력을 평가하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고, 오히려 사람의 창작물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조영남 씨가 물리적 행위 없이 작품을 만들었듯, 인공지능 작가들도 별도의 물리적 행위 없이 창작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대중은 보통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로봇’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사실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다. 물리적 작품을 만드는 건 그걸 이어받는 프린터 등의 출력장치다. 이 같은 점에서 현대 개념미술과 인공지능 창작은 비슷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도 대체적으로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을 오늘날의 창작 범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간의 창작 활동은 ‘의식’의 결과지만,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지각이나 의식이 없이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리학과 철학을 함께 수학한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인공지능의 핵심적 특징으로 ‘지각 없는 수행’을 꼽는다.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인공지능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 경험을 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인공지능의 창작에는 인간이나 다른 인과적 대상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를 쓴 김재인 경희대 교수는 ‘에이전트(주체)’를 강조한다. 인간의 경우 창작 활동에서 그 스스로 주체가 돼 판단하는 반면 인공지능은 수행 기준이 주체 바깥에 있어 고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 교수는 인공지능 작가를 창작의 ‘유용한 도구’로 본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 취급은 가능하나 창작은 아니라는 게 제 입장이며, 이는 인공지능이 무작위적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이라며 “미적 가치 평가가 없이 평가 기준이 밖에 있기 때문으로, 평가작업을 못 한다는 점에서 창작 주체가 아닌 도구이자 획기적 매체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공지능 창작의 탄생, 예술 개념을 바꾼다 로봇 경감 ‘게지히트’는 특정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도화된, 감정을 가진 로봇의 존재를 알게 된다. ‘로봇은 인간을 상해하거나 죽일 수 없다’는 로봇법 13조를 어기고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로봇들. 이 시도를 막는 게지히트는 수사 과정에서 소중한 존재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각한다. 데쓰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 을 리메이크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속 이야기다. 에선 로봇이 보편화 된 세계에서 지각과 감정을 가지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전투 로봇 ‘노스 2호’는 피아노를 치며 스스로 음악 창작을 시도하기도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 작 속 로봇 경감 ‘게지히트’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세상이 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현생 인류의 두뇌 속 의식이 어떤 물질적 인과 작용을 거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인공지능에 이를 심는 건 그 방법조차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공신경망이 갖는 결함도 문제다. 요컨대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인공지능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걷기나 장애물 피하기를 잘 해내지 못한다. 이미지 판독 인공지능은 때때로 토끼를 고양이라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바둑 기사 이세돌과 구글 알파고 간 대국에서 역사적 ‘78수’ 이후 알파고가 저지른 터무니 없는 실수도 그러하다. 이에 대해 이상욱 한양대 교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를 인공지능의 특징 중 하나로 정의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인공지각망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강조했다. 인공지능 작가 ‘이메진AI’와 협업한 ‘Commune with...’을 만든 두민 작가는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은 자율적 사고와 물리적 움직임이 있어 창작한다면 창작자로 봐야겠지만, 인간과 정말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인공지능도 지금은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고 결국 예술가는 이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미술사조나 미술 장르를 만들어 낼 거라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두민(오른쪽 상단) 작가는 펄스나인 사의 인공지능작가 ‘이메진AI’와 협업해  ‘Commune with…’을 만들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 수준에 범접해 작품을 만든다면 창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이나 소유권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작품에 대해 저작권을 알고리즘 개발자나 이용자, 혹은 인공지능 그 자체 중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등이 그것이다. 학계에서도 인공지능 작품을 두고 다양한 논의가 나온다. 지난 26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전문가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자 8명은 인공지능의 창작에 대해 법적, 문화적, 예술적 관점에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날 토론회 좌장을 맡은 한경구 서울대 교수는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예술의 기준을 19세기에 둘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20세기 들어 기술 발전과 함께 성찰과 반성 고민을 거쳐 업데이트된 개념을 갖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야 앞으로 진보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일호 기자
296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653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미얀마 축구선수의 26시간 대탈출 작전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21:31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96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523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96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18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미얀마 축구선수의 26시간 대탈출 작전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21:31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96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40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95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48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95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87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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