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허창렬(필명 허인) 시인이 심근경색으로 불시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지난 9월 9일 저녁이었다. 1968년생인 그는 만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서 재한조선족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멘붕이 왔었다! 그래도 가슴 떨림과 함께 고 허창렬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과도 같은, 그 속에서 응축되고 점화되어 피어난 불꽃같은 생각이며 사상이며 감성들을 그린 시편들을 모으고 선정하여 기어이 '먼 훗날'이란 시문집으로 내놓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버금찼었다. 거의 두 달간, 나는 허창렬 시인의 시적 세계에서 그가 아파하고, 외치고, 갈구해온 시들을 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온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외롭게, 하루아침의 이슬마냥 허무하게 갈 수가 있을까? 삶이란, 목숨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누군가 훅 불면 쉽게 꺼져 버리고마는 그런 존재일까?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들은 물론, 그를 알고 그의 시를 아끼던 모든 독자들도 허 시인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애석해 했으며 깊은 조의를 표했다. 또 허 시인이 생전에 내지 못한 '시문집'을 출판해주자는 데 함께 뜻을 모았다. 맨 처음에 고인의 지기인 변창렬 시인이 찾아와서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허창렬 시문집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같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그러는 게 좋겠다"고 바로 결단을 내리고 '추진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시문집을 내는 것이 바로 고인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라는 생각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집을 편집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허창렬 시인이 생각하고 아파하고 사랑해왔던 것이 바로 우리 회원들이 지금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삶의 복사본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이 바로 우리 동포들의 문학이요, 그가 거둔 성취가 바로 우리 동포문인들의 성취인 것이다! 삶과 죽음의 터널에서 그가 주조해낸 시문학의 주춧돌들을 가져다가 마땅히 우리 동포문학의 성전을 쌓아가는 데 써야 바람직할 것이다.
이에 변창렬 시인이 '허창렬 시인 시문집' 출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장경률, 김경애 재한동포문인협회 공동회장과 리춘화 수필가가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총괄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변창렬 시인이 100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유족이 50만 원 후원금을 내자 중국과 한국의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들을 내서 바로 출판 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전광옥, 리춘화, 변창렬, 리다연, 리성철, 차영화 등 추진위원들이 위챗이나 조글로 등에서 허창렬 시와 평론을 앞다투어 수집해서 제공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리춘화 선생과 리다연씨의 노고가 컸다. 교정은 김경애 시인과 강성봉 동북아신문 편집인이 책임을 지고 했고, 책 편집 및 출판 등은 '도서출판 바닷바람(발행인 이동렬)'에서 진행을 했다. 마침내 '허창렬시문집'에는 허창렬 시인의 130수의 시와 8편의 평론, 김철호 시인과 장경률 칼럼니스트의 추모글 2편을 선정해서 수록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추모글을 보내오셨지만, 작품을 한편이라도 더 싣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아쉽게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솔직히 지난날, 고 허창렬 시에 대해 나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시를 너무 쉽게 쓰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성격도 어지간이 과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 부회장을 역임했고, 동포문학 대상도 받은 사람이라서 더욱이 그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곧 그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고 절대 독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협회 행사를 할 때 초청을 하면 꼭꼭 참석을 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항상 형님이 불러서 할 수 없이 왔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가끔 술잔을 나눌 때면 "형님, 형님" 하면서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우리 협회가 금방 설립됐을 당시 그는 "형님, 이래가지고 될 것 같아요? 다들 이런 수준을 갖고 무슨 문학을 한다고 그래요?"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협회 회원들한테 간혹 인정 사정없이 비평을 하면서 "시가 시 같지 않다. 그렇게 쓸 바에는 아예 절필해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물론 몇 년 후 협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자 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지적한 것이 옳았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의 경지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협회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문학다운 문학을 해야 진정한 문학 단체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선비였다. 아주 꿋꿋한, 문학에서만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온 올곧은 선비였다. 일찍 중국 요녕일보 문학편집 및 기자로 재직했던 그는 오직 문학으로 살고 문학으로 죽은 선비다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선정, 편집하면서 느낀 점은 먼저 우리가 너무도 허 시인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이미 허창렬다운 시풍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문학의 기조는 역시 디아스포라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가족과 친인들이 고향을 떠나 각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고국이라지만 낯선,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득불 돈 많이 받는 건설현장에서 뛰어야 했던, 고속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현대문명과 접목점을 찾을 수 없었던…! 아무튼, 신문사 기자 출신이었던 자존심을 한국 생활에 녹여 내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존심은 그대로 그의 시문학에서 표출됐다. 그의 시는 방황하고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 '춤추는 왜긍하倭肯河'는 첫 구절부터 '나는 왜 아버님을 그곳에 묻고 여기 왔을까?'로 시작을 해서 가족의 아픈 역사를 써 내려가다가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신한테 '왜긍하는 내 삶의 하나의 인생 정거장이다'라고 고백한다. 떠나면서 고뇌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란 말이다. '밥 한끼' 시 첫머리를 보자. "내 늘그막에/얼마나 큰 금덩이 안고 살려고/이 밥 한 끼/게걸스레 삼키고/목이 콰악 메이는가?"라고 토로했다.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뛰어온 중국동포들이라면 이 한 마디 시구에 누구나 가슴이 울컥해 날 것이다. 시 '산다는 것1' 마지막 연에서 그는 "산다는 건/눈물이 나는 일/산다는 건/미어지는 앞가슴을/햇볕에 깨끗이 말리워야 하는 일/웃으면 하얗게 소금이 내 돋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게 밥 한끼를 위해 뛰면서도, 밥 한끼에 "목이 콱악 메이"면서도, 그는 눈물을 "햇빛에 깨끗이 말리워" 웃으면서 "하얗게 소금"을 빚고 있었다. 시 '용쓰는 날'을 보면 그가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향에 두고/떠나 온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사랑하는 딸애의 학비를 부치며/먹고 살기 힘들다보다/그래 조금만 힘내자/눈물로 술 한 잔 삼키는 것이/이 세상 아버지들의/가장 쓰라린 마음일 뿐이다"라고 읊고 있다. 시인의 양심고백이다. 이런 시들이 그의 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그는 아파했기에 물욕으로 꽉 차서 넘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만의 아름다운 세계와 사랑을 추구했었다. 그의 시구속에는 유난히 '별'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많이 표현한 것 같다. 시 '먼 훗날'을 보면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에서/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여 불러 주리라"고 쓰고 있다. 이 시구에는 사람간에 삭막해지는 현실의 '非情'을 빗대고 비판하면서 서로가 나누고 싶어하는 정과 사랑에 대한 갈구를 눈물겹게 보여주고 있다. 묻노니 과연, 그게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서"만 가능한 일일까?
그의 시구는 소박하고 간결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수법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절대 미사여구가 없다.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선비의 기질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많이 보고 답습하면서 그들의 시풍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기의 시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또, 여기서 허창렬 시인의 시를 다 평한다는 것도 무리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편집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간략하게 적을 뿐이다. 앞으로 문학세미나 등을 통해 고 허창렬 시인의 시에 대해 제대로 되는 평가를 내려주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허창렬 시인의 딸 허효정씨와 연락이 되어 그가 보내온 글을 책의 머리글로 대신할 수가 있어 한결 마음의 위안이 된다. 고 허창렬 시인도 하늘나라에서 고마워할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해서 중국 광주 모회사에 출근하고 있는 허효정씨는 글을 통해 아빠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움은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허 시인의 시 '먼 훗날'에서 읊었듯이 "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어 불러 주리라". 서로가 부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고 사랑해준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지 않을까? 허창렬 시인이 꿈꾸며 바란 것도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이 사랑을, 고 허창렬 시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0년 11월 20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