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일본의 한 소장가가 갖고있던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 구입 환수되어 2일 언론에 공개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남아있던 온전한 형태의 나전합 중 1점이 환수된 것이다. 유일하게 매입가능했던 유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환수라 할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말이 있다. 고려시대 극한의 정밀한 공예품을 가리켜 ‘세밀하여 귀하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 ‘세밀가귀’란 말은 본디 고려시대 공예품 중 나전칠기 기술을 콕 찝어 표현한 것이다.
즉 1123년(인종 재위 1122~1146)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언급했다. 현존하는 고려나전 제품을 보면 중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할만 하다. 고려 나전에는 대모(玳瑁·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을 얇게 갈아 재료로 사용했다. 이 껍질을 일일이 곡선으로 오려내는 줄음질 기법으로 꽃잎과 이파리 등의 무늬를 표현했다.
그런데 꽃잎과 이파리의 한조각 크기는 1㎝를 넘지않는다. 작은 것은 2~3㎜에 불과하다. 꽃송이를 이은 넝쿨은 금속선으로 만드는데 그 두께가 불과 0.3㎜였다. 금속은 옻칠을 한 나무표면에 야교를 묻힌 이 작디작은 꽃잎과 이파리 조각을 일일이 붙이는 일은 극한의 인내력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단위를 오리고 갈아내어 원하는 문양을 맞추는 일은 가히 극한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나전으로 만든 경전함의 경우 2만5000개의 나전 조각이 사용되었으니까…. 이렇게 만든 고려나전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입 환수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화장용기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화와 넝쿨무늬가 빈틈없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심지어 1080년(문종 34년)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나전장차·螺鈿裝車)까지 송나라에 진상한 일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지금으로 치면 나전칠기로 장식한 최고급 승용차를 송나라 조정에 선물한 것이다. 또 인종 연간에 요나라 사신으로 떠난 문신 문공인(?~1137)은 요나라 관리들에게 고려나전제품을 개인적으로 선물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고려사>는 고려 나전제품에 반한 요나라 관리들이 고려사신이 갈 때마다 ‘선물 안주냐’고 요구하는 바람에 큰 폐단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가 “1244년(고종 32년) 연회를 베풀 때는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한 화분 4개에 얼음산을 쌓았다”(<고려사> ‘열전’)는 기록도 있다.
이밖에 몽골 간섭기인 1272년(원종 13년)에는 “대장경을 보관할 함(경전함)을 만들라”는 원나라 황후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나전제품을 제작하는 임시관청인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의 칠기서인 <휴식록>에는 “나전 필갑(필통)은 고려국에서 생산되어 들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만큼 고려 나전은 중국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전함, 염주함, 향합(향을 넣는 그릇), 불자(먼지 터는 총채와 같은 불교의식용 도구) 등 고려 나전제품은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 전세계를 통틀어 22점 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주요박물관에 흩어져있다.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세밀가귀’ 제품이 왜 이렇게 적은 숫자만 남았을까.
환수된 나전합의 세부무늬. 고려나전은 ‘세밀가귀’라는 칭송을 들을만큼 세밀하고 정교한 문양 구현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북등껍질과 전복 껍질을 얇게 갈아 3~8㎜ 정도의 크기로 일일이 오린 뒤 문양에 따라 붙여넣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우선 조선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빈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했다. 단적인 예로 1448년(세종 30년) 6월3일 세종은 “속절(俗節·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에 진상하는 함을 나전으로 꾸미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제품을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쓰겠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전제품은 옻칠한 나무에 1㎝도 안되는 수백 수천 수만개의 문양을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떨어지기 쉽다.
이러니 고려나전이 남아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불자(拂子·먼지 터는 총채처럼 생긴 불교의식용 도구) 1점 뿐이었다가 2014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나전경전함을 구입함으로써 2점이 되었다. 이 나전경전함은 2018년 보물(제1975호)이 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12월 전 세계에 단 3점 뿐인 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하 나전합)을 일본소장가로부터 구입했다”고 2일 밝혔다. 이로써 국내의 고려나전 유물은 온전한 것을 기준으로 총 3점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구입환수된 나전합은 이미 14년 전인 2006년 국내에 공개된 바 있는 유물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에 출품됐다. 이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오랜 시간 일본의 개인 소장자와 협상 끝에 나전합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구입환수된 ‘나전합’에는 떨어져나간 부분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것이 오히려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12세기 고려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환수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향 혹은 화장용기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큰 합(그릇)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간 일종의 ‘모자합(母子盒)’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부장은 “전 세계 단 3점 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매입할 수 있었던 나전합이었다”고 의미를 두었다.
이 나전합의 길이는 10㎝ 남짓이며, 무게는 50g 정도된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가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이다. 뚜껑과 몸체에 반복되는 주요 무늬는 국화와 넝쿨무늬다.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작게 오려진 나전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배치되며 유려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화 꽃은 지름이 10㎜였고, 꽃잎 길이는 3㎜, 폭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에는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특징 중 하나인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 사용됐다.
대모복채법은 바다거북의 등껍질(대모)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 안쪽에 안료를 칠해 앞면에 비쳐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뚜껑 테두리는 점 혹은 작은 원을 구슬 꿰매듯 연결시켜 만든 연주문(連珠文)으로 촘촘히 장식되었다. 또한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표현하고 두 줄을 꼬아 기물의 외곽선을 장식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꽃잎과 이파리를 표현한 대모(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 넝쿨을 표현한 금속(구리)선이 이토록 조화롭게 구현된 고려나전 제품은 보기 드물다”면서 “고려 나전의 전성기인 12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4년 구입환수된 나전경전함. 무려 2만50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보물제 197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합에는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곳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또한 나전합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라고 입을 모은다. 김미라 문화재청 감정관실 감정위원은 “수리 흔적이 있는 다른 고려나전과 달리 이 나전합은 원형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비파괴 분석 결과 나전합은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무로 모양을 잡은 뒤 그 위에 천을 바르고 옻칠을 한 목심칠기이고, 판재 안쪽 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을 넣고 부드럽게 꺾어 곡선형의 몸체를 만들었으며, 몸체는 바닥판과 상판을 만든 후에 측벽을 붙여 제작된 점 등이 확인됐다.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며, 오는 12월22일부터 열릴 특별전(‘고대의 빛깔, 옻칠)’에 출품될 예정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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