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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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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비닐쓰레기전쟁",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67  추천:0  2019-11-28
태국 야생 사슴 뱃속에서 나온 쓰레기들… 플라스틱만 7kg 2019년11월27일  태국 한 국립공원의 야생 사슴 뱃속에서 플라스틱 쓰레기 7㎏가 나와 다시 한 번 환경 오염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일간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지난 26일 북부 람팡주에 있는 쿤 사탄 국립공원 사무소 근처에서 수컷 야생 사슴이 발견됐다. 이 사슴은 키 135㎝에 몸길이 230㎝, 몸무게 200㎏에 달하는 대형 야생 동물로 1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됐다. 발견 당시 사슴은 죽은 지 수일이 지난 듯 다소 여위고, 털이 빠져있었다. 또 발굽에도 문제가 보이는 등 건강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체 부검에 나섰다. 부검 결과 사슴의 위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비롯해 속옷, 손수건 등이 나왔다. 위에서 나온 쓰레기양은 플라스틱 쓰레기만 7㎏에 달했다. 플라스틱 쓰레기에는 커피 용기와 즉석 라면 용기, 비닐봉지, 고무장갑, 플라스틱 밧줄 등이 포함됐다. 국립공원 사무소 측은 사슴이 각종 쓰레기를 먹어 장이 막히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 사건으로 해당 국립공원은 내년 1월 1일부터 비닐봉지나 일회용 도시락 등 플라스틱 제품 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태국은 지난 8월에도 해양 쓰레기로 멸종위기 해양 포유류 듀공 '마리암'을 잃은 바 있다. 지난 4월 남부 끄라비 지역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발견된 마리암은 듀공 보호구역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던 중 숨졌다. 국립공원보호국은 마리암을 보호국은 바다에 폭우와 거친 파도가 예보되면서 해상 보호구역에서 실내 수조로 옮겼다. 하지만 숨을 거둔 마리암의 장에서 20㎝ 크기의 플라스틱 한 조각을 발견했다. 보호국은 마리암이 플라스틱을 먹고 위장 염증 등 쇼크와 고통을 겪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일보
2796    [그것이 알고싶다] - "거북선"을 보고 "거북선"을 그리다... 댓글:  조회:4732  추천:0  2019-11-27
  실학자가 거북선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을 공개합니다 2019.11.27.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조선 후기 하백원 작품... 거북선 연구에 새로운 길 모색 가능한 중요한 자료 [오마이뉴스 황정수 기자] ▲  하백원 ‘영보정’ 중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조선 후기 전남 화순 출신의 규남(圭南) 하백원은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던 실학자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이재(?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과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렸다. 중앙의 학자들과도 교류가 많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과도 소통을 하였다. 그는 천문, 지리, 산술, 율력 등 실질적인 학문에 몰두하였고, 그림이나 글씨에도 능해 여러 종의 서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자승차(양수기)를 발명하였고, 동국지도, 만국지도, 천문도 등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명종, 계영배(戒盈杯), 방적기 등 많은 새로운 물건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평소에는 자명종을 걸어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도록 하는 등 과학 정신을 생활화 한 실질적인 실학자이기도 하였다.   ▲  현재의 충남 보령 오천항 ‘영보정’ ⓒ 황정수   하백원은 61세 되던 1842년 충남 보령으로 유배를 당한다. 석성(石城)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지방 토호들에게 모함을 당하며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보령은 충청 수영이 있는 군사 지역으로 매우 외진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약 1년 남짓 귀양 생활을 하는데, 그동안 보령 지역 선비들과 가까이 지낸다. 1842년 4월 15일, 하백원은 보령 출신의 이병중(李秉中), 이우명(李遇明), 조순영(趙淳榮), 이우정(李遇正), 심사숙(沈思淑) 등 5명의 선비들과 배를 타고 바다를 유람한다. 이곳은 군사 지역이지만 오랫동안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다. 지금의 충남 보령 오천항 지역이다. 이들은 배를 타고 바닷가의 명승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다. 그림을 잘 그렸던 하백원이 '송호(松湖)', '황학루(黃鶴樓)', '영보정(永保亭)' 등 명승 세 곳을 차례로 그리면, 나머지 여섯 명은 유람하는 동안 느낀 감상을 시로 지었다. 유람을 끝낸 후 이들은 그날 추억을 담은 글들을 모아 모두 여섯 개의 서화첩을 만들어 나누어 갖기로 약속한다.             ▲  하백원 ‘해유첩’ 표지와 속지 ⓒ 황정수 서화첩은 '해유시화(海遊詩畵)' 또는 '해유첩(海遊帖)'이라 제첨 하였고, 속지에 '서호기관(西湖奇觀)'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어 하백원과 이우명이 서문을 쓰고, 다음에 하백원의 그림 한 점을 싣고 여섯 명의 시를 차례로 붙였다. 마지막에는 이병중의 발문을 달아 끝을 맺었다. 각자 지은 글은 모두 자신이 직접 썼으며, 그림은 모두 하백원이 그렸다. 이 서화첩은 유람한 이듬해인 1843년 7월 16일에야 완성된다. 6개의 서화첩을 만드는데 꼭 1년 3개월이 걸렸다. 이때 쯤 하백원의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회합을 갖고 서화첩을 나누어 갖는다. 이 때 만든 여섯 개의 서화첩 중 현재 두 종이 전한다. 하나는 하백원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0여 년전부터 간직해오던 필자의 소장품이다. 하백원 집안 소장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왔으나, 필자 소장품은 이번에 처음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해유첩'을 입수한 후 글의 내용을 번역하고 그림과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거북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충청 수영(水營)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龜船)'의 모습을 보고 그린 이 그림은 그동안 전해 오던 거북선의 구조를 선묘로 그린 것이나, 민화 속 거북선과 달리, 실학자가 실제 거북선을 보고 회화적으로 그린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  하백원 ‘해유첩’ 중 ‘영보정’ 부분. ⓒ 황정수   하백원이 그린 '송호', '황학루', '영보정' 세 곳의 그림은 모두 지도식 산수화이다. 산세나 물에 떠 있는 배 등을 제대로 학습한 화법으로 그리지 못하고 지도식 민화 같은 양식으로 그렸다. 하백원이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하지 못하고 독학하다 보니 더 이상의 솜씨를 내기 어려웠던 듯하다. 이 세 점 중 '영보정'을 그린 그림 속에 거북선의 모습이 나온다. '영보정'은 충청 수영의 바닷가 쪽에 있는 가장 큰 정자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해안 바다가 가장 멀리 보이는 요지이다. 수영 앞에는 항상 이곳을 지키는 배들이 정박해 있거나 수영을 지키느라 바다 위를 떠다니며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하백원 일행이 이곳을 유람할 때 거북선이 판옥선(板屋船)과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하백원은 충무공 이순신의 옛 적 일을 생각하며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다.   ▲  하백원 ‘이충무공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서화첩 앞부분에 하백원이 시문 형식으로 쓴 서문에도 거북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거북을 숨겨 오묘하게 사용했던 이충무공의 전함은 물가에 가로놓여 있고, 교룡을 절단한 영매한 기풍의 장유격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네. 藏龜妙用李忠武之戰艦橫汀, 截蛟英風張游擊之紗籠揭壁" '해유첩'의 글과 그림이 실학자였던 하백원이 모두 실제 유람을 하고 기록한 것이니, 이 그림은 실제 본 거북선을 정확히 묘사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그림 중 당대 인물이 실제로 본 거북선을 그린 유일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서화첩의 다른 부분에서도 거북선에 대한 사실을 증빙할 만한 구절이 또 나온다. 이병중의 시에는 '거북은 한 쌍의 섬을 옮겨 골짜기를 단정히 단장하고(鰲移雙嶼端粧壑 )'라는 구절이 나온다. 곧 이어 나오는 하백원의 시에서도 '거북이 등에 진 섬은 어디서 온 것일까?(何處浮來鰲背島)'라는 구절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 경치 중 거북선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백원의 그림 속에 나오는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바로 그 거북선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하백원이 정조 때부터 살았던 인물이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실학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기록 방식의 신빙성을 믿을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과 충무공 거북선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할 수 있다. 그동안 거북선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1795년 정조 때 출판된 '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과 민화 형식의 '해진도(海陣圖)'에 나오는 거북선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들은 실제 현장을 확인하고 그린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한 개인 화가의 회화 중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거북선을 보고 기록한 그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하백원의 이 거북선 그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거북선의 외형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독립적인 거북 모양의 철갑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판옥선 이층에 거북 모양을 올린 것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백원의 그림을 보면 판옥선 위에 거북 모양을 올린 형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백원이 유배당했던 1842년까지도 여전히 거북선이 조선 해군의 유력 전함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북선이 고종 때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는 다른 기록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고, 거북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백원이 기록한 거북선의 모습은 비록 통제영 거북선이나 전라좌수영 거북선보다는 후에 기록된 것이나 실제 거북선을 보고 그린 현장성이 강하다는 면에서 역사적가치가 높다고 본다. 그동안 글이나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지해 연구해왔던 거북선 연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만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거북선   [ 거북船 ] 이미지 크게보기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인데 이미 고려말 또는 조선초부터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복원된 거북선. 이칭별칭 귀선, 철갑병선, 돌격전함 유형 유물 시대 조선 성격 전투선, 전함 제작시기·일시 16세기(추정) 재질 나무, 철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선체높이 6-6.5m, 선체길이 26-28m, 선체너비 9-10m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특징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임진왜란 당시 수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 개설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板屋船)의 상체 부분을 개량해서 덮개를 덮은 구조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선체 위에 그보다 폭이 넓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든 전선이다. 1층 갑판에는 한국식 노를 설치하여 격군들이 노를 젓고, 2층에는 사령부가 위치하는 ‘장대’를 설치하고, 갑판 둘레에는 방패를 두르고 각종 화포를 장착하였다. ‘상장’의 1층은 노역 공간, 2층은 전투 공간이었던 셈이다. 거북선은 바로 이와 같은 판옥선의 상장 부분을 개량해 덮개를 만든 구조였던 것이다. 연원 및 변천 1. 기원 우리나라 전선의 구조와 형식은 주로 해적선과의 싸움을 통해 발전되었다.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주로 사용한 전술은 배를 부딪쳐 해적선을 깨뜨리는 방법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해적들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육박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의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거북선〔龜船〕’이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1413년(태종 13)에 임금이 임진(臨津)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또 1415년 탁신(卓愼)은 국방 문제를 논하면서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를 입히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의 제도는 이미 조선 초기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그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것 같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다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작 거북선과 관련하여 임진왜란의 와중에 이덕홍(李德弘)이 제작을 건의한 ‘귀갑선(龜甲船)’이 주목된다. 그는 왜적들의 장기가 조총으로 대표되는 ‘철환(鐵丸)’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왜적들이 성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덕홍이 생각하기에 왜적의 ‘철환’을 막는 방법은 왜적들이 육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고안하였다. 하나는 왜적의 배가 육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구에 ‘침수진목전(沉水眞木箭)’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귀갑선’의 제작이었다. 이덕홍이 생각한 ‘귀갑선’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鎗劒)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射穴]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그 이전의 배무이 기술의 바탕 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이 거북선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나 고려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모두 훌륭한 배의 존재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시기 배무이의 전통이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과 거북선을 출현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싸움배는 판옥선이 주축이었다. 그것은 배 위 갑판을 덮어 다시 그 위에 누각이나 다른 건조물을 세운 구조를 가진 배였다. 즉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갑판 아래서 노를 젓는 노군들을 적의 화살이나 화포로부터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지붕을 덮은 것이었는데, 거북선은 이러한 판옥선 위에 다시 덮개를 씌운 것이었다. 적들이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내용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銃穴]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는 점 등이다.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징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모습과 규모에 대해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없다. “크기가 판옥선만하다”는 언급을 통해 거북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판옥선의 정확한 규모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정조 19년(1795)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이순신의 사후 그를 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정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은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일기·장계와 그를 예찬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문, 비명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인데,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2)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 배의 외판, 바깥판)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艣版, 배의 전면부)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 돌노쇠 구멍)을 두었다. 4) 주판(舳版, 배 뒤쪽 고물)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5)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머리에 서까래가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은 모습이다. 6)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패(牌,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7)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있다. 8)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9) 뱃머리에는 거북머리[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10)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11)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12)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礟穴)을 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礟穴) 한 개씩을 두었다. 13)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으며 ‘귀(龜)’자가 적힌 기를 꽂았다. 14)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 갑판)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15)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한 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16)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통제영 거북선의 대체적인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여장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바로 거북 뚜껑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가 설치되었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치수·길이·넓이 등은 같지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판옥선의 여장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뚜껑을 씌운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새겼고, 덮개 위에 거북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포구멍은 거북머리 아래에 2개, 현판 좌우에 각각 1개, 현의 난간 좌우에 각각 10개, 덮개 판목 좌우에 각각 6개씩 있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를 설치하였다. 현황 1. 거북선 관련 논쟁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그 가운데는 견해차가 뚜렷한 논의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거북선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물의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원형을 찾는 작업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들을 토대로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료들이 단편적이고 해석도 어렵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거북선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자료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이다. 흔히 ‘통제영(統制營) 거북선’과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거북선’으로 불리는 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제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이 경과한 1795년(정조 19)이었다. 결국 거북선의 원형을 찾는 작업은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토대로, 그 이외에 실록기사와 회고록 등의 단편적인 자료를 참조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선기술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거북선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양자는 구조면에서 같은 배인가를 밝히는 것이 거북선의 창시 문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아마도 태종 때의 거북선은 실전에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세종대 이후 왜구의 격감 등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에 의해 사라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 군관들이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하여 실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가 하는 점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일본측 문헌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일찍부터 일본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임진왜란의 패전을 거북선에 돌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충무공의 거북선은 철갑병선(鐵甲兵船)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정의하였지만 근거가 확실한 주장은 아니었다. 물론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날카로운 못이나 칼날(칼송곳) 같은 것을 꽂아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거북선의 표면에 철갑이 덮여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철갑을 덮을 경우에 배의 무게가 증가하여 민첩성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는 등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복잡한 문제는 거북선의 세부적인 구조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일까? 거북선에서 사용하였던 노는 어떻게 생긴 것이며, 노역의 위치와 노역의 공간은 어디인가? 포 구멍의 실질적인 쓰임새와 뱃머리에 설치된 거북머리[용두(龍頭)]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거북선의 내부가 2층 구조였는가, 아니면 3층 구조였는가 하는 논란과 연결된다. 2층 구조론에 따르면 아래층에는 병사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화포 등의 공격 시설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경우 노를 젓는 노역이 화포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이러한 거북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반면에 3층 구조론에 따르면 1층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군량·무기고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사격수)와 격군(노 젓는 병사)이 자리하며, 3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역의 위치가 2층 구조론의 주장과 달라지고, 전투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거북선의 크기와 배의 척수 역시 논쟁거리였다. 거북선의 크기와 척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거북선의 척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북선은 돌격용 전함이었다. 탑승자 전원을 덮개 밑에 수용함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하는데 유리한 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선과 접전을 벌일 때에는 매우 적합하지만,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는 데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은폐된 거북선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갑판 위의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판옥선이 훨씬 실용적이었다. 거북선의 척수가 제한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거북선은 일본 해적 집단과 일본 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해 개발한 돌격전함이었다. 즉 여러 개의 중화기로 무장한 연해용 돌격전함으로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특이한 모델의 전선이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거북 모양에, 용머리에서는 포를 쏘거나 유황 연기를 내뿜었다고 하니, 이런 새로운 디자인의 전투함은 적을 당황케 하여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 거북선 축제 전라남도 여수시는 거북선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켜 ‘여수거북선축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이 축제는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 현재 47회에 이르고 있다. 축제프로그램으로는 ‘통제영 길놀이’, ‘둑제’, ‘거북선그리기·만들기’, ‘승전한마당’, ‘수륙고혼천도대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거북선이 임진왜란에서 승전을 올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이후 조선과 일본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거북선에 대한 다양한 그림은 그러한 관심의 일환이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전하는 거북선 그림은 1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으로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오시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한 책 가운데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실린 거북선 그림으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치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1910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되어 현재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화백자에는 용머리에서 연기를 토하고 있는 모습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10폭짜리 병풍으로 된 「거북선해진도」도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선(戰船)의 포진 상황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순신 후손의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두 종의 거북선 그림이 있는데, 다른 거북선 그림과는 달리 거북선의 등 위에 두 개의 돛대가 달려 있고, 지휘소라 할 수 있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거북선의 크기를 비롯해 구조, 장대 설치 등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다. 참고문헌 『서유견문(西遊見聞)』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태종실록(太宗實錄)』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우리과학의 수수께끼 2』(신동원, 한겨례출판, 2007) 『우리역사 과학기행』(문중양, 동아시아, 2007) 『배무이』(최완기, 보림, 2003) 『유물의 재발견』(남천우, 학고재, 1997) 『거북선』(김재근, 정우사, 1992)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 Korean Boats and Ships (Horace H. Underwood, 1933) 관련이미지 6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통제영 귀선≪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귀선.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거북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거북선   [ 龜船 ] 요약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으로 평가된다. 이미지 크게보기 거북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참조항목 검선, 나대용, 이순신, 임진왜란, 전라좌수영귀선, 판옥선 역참조항목 거북선해진도, 마하수, 아산 이충무공 유허, 귀함별황자총통, 한국의 조선업, 조선의 과학기술, 대방진 굴항 카테고리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기술과학 > 무기 및 병기공학 > 해상병기 관련이미지 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거북선 모형강릉함정전시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龜船] (두산백과)   민족의 자랑 거북선? 오리무중 거북선! 영화 에서 단연 관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포함한 단 12척의 배를 끌고 나가  330척의 왜적을 물리치는 통쾌한 해상 전투 신입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처한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거침없이 쳐들어오는 왜군에 조선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주변의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앞선 칠천량 대전에서 130척의 배를 갖고도 대패한 원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피폐해져 있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아무런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힘으로 난파선을 수습해 전력을 재정비합니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 가지,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발명품일까요? 아닙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0여 년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 화포를 더해 거북선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이죠.  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없어도 이 거북선에서 먹고 자며 생활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거북선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 완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나가 23전 23승의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출처: 영화 공식 예고편 캡처 만약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패했다면 임진왜란은 더욱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군사들에게 먹고 마시는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 전쟁의 승패를 가릴 정도로 중요했는데 그 물자를 보급하는 경로를 해전에서 차단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통쾌하게 왜군을 깨뜨려버렸던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랑인 거북선의 원형은 오늘 날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에 대해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저자 디자이너 한호림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총 5척이 있었다는 거북선이 모두 침몰했다고 치자.  거북선을 해저에서 발견하려면  먼저 수없이 침몰한 일본 전투선의 잔해부터 발견되었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간혹 판옥선처럼 조선 수군의 다른 전투선도 발견되고 말이지. 그러다 그런 무더기 속에 아주 기적적으로 거북선의 잔해가 나오거나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거북선은 고사하고 일본 전투선의 파편조차 발견되지 않았어. 왜? 가장 중요한, 물리학에서의 '비중'. 이걸 놓치고 있는 거야. 선재(船材, 배 만드는 나무)는 비중이 0.44밖에 안 돼. 그러니 목선이 어떻게 가라앉을 수 있어? 신안 보물선처럼 아주 무거운 화물이라도 잔뜩 싣기 전에는. 그러니까 우리 공격으로 파괴되어 침수되거나 불에 타던 적선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다가 비중이 딱 맞으면 저절로 멈추고  그때부터는 물결 따라 떠밀려 다녔지. 그러면? 그걸 우리 수군이 모두 예인해 새로 배를 만들거나 고치는 데 썼지. 즉 재활용한 거지. 선재는 엄청 비싸고 귀하거든.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일본 전투선이고, 우리 판옥선과 거북선이고 가라앉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바다 빝에서 발견될 수 있겠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 괴짜 디자이너의 열정 이렇게 거북선의 원형이 종적을 감춰버린 지금.  학계에서 이 거북선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거북선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거북선을 실제로 물에 띄워 보았을 때에는  전투는커녕 제대로 항해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부두에 그냥 묶여만 있습니다. 통영 거북선. 오늘날 거북선들은 하나같이 모두 '묶여 있는' 신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주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1, 2》 등의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 있는 디자이너 한호림은 순전히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거북선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7년 반의 세월이 걸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을 출간하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정말야, 나로선 해군 상병 시절부터 모아온 '거북선 구슬'이  서 말이 뭐야? 삼십 말도 넘게 있었어. 국내고 세계 어디고 별의별 것을 '호기심'으로 돌아다니다가 특히 거북선과 뭐라도 연계가 될 듯싶으면 '뚜뚜뚜뚜-zoom in' 투시해보구,  프로로서 정밀하게 촬영하구 왈, 연구(?)를 했지.  […]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거북선 구조 생각 하여간 내 머릿속에는 늘 거북선 구조 퍼즐이 들어 있었는데 서로 뭔가가 통하는 것끼리는 저절로 이리 붙고 저리 연결되어  차츰 어떤 거북선 형태를 보이데. 그렇게 디자이나 한호림은 7년 반의 세월 동안 머릿속의 거북선 구조를 컴퓨터 2차 도면으로 그리고  이를 다시 3차원 투시도로 그려  거북선에 관해 수집한 모든 지식을 텍스트로 엮었습니다. 순전히 한 덕후의 호기심으로 완성한 거북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설계도면은 다음 회차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 '거북선' 하나에 몰두해 7년 여의 세월을 보낸 디자이너 한호림 선생님이 최근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거북선의 실제 모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보세요!    
2795    [그것이 알고싶다] - "모나리자"의 화장법?... 댓글:  조회:3590  추천:0  2019-11-27
모나리자 미소 뒤에 달팽이팩 효과 있다?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  기사입력 2019.11.27.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르네상스 마스크팩 르네상스 시대 여인들은 오늘날 마스크팩이라 할 만한 미백용 팩을 만들어 사용했다. 동물성 기름이 주로 사용된 그 팩은 당시 화장품 속 납 성분의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중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의 모델인 리자 게라르디니는 수녀원에서 얻은 달팽이점액 추출물을 함유한 마스크팩을 붙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점성가이자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가 ‘화장법’에 관한 글을 썼다. “치아를 검게 하지 않고 얼굴을 희게 하는 화장품” 이야기였다. 그를 프랑스 궁정으로 초빙한 사람은 셔벗, 과실주, 파라솔, 포크, 하이힐, 마카롱 등을 프랑스에 전달한 여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이 죽고 세 명의 아들이 차례로 왕이 되는 동안 섭정을 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다. 그녀는 앙리 2세(1519~1559)와 결혼해 프랑스에 자신의 미용사를 대동하고 와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식 화장법을 전파했다. 남편을 이어 첫째아들마저 죽자 겁먹은 그녀는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노스트라다무스를 궁정 의사로 초빙했다. 바로 그 예언가가 하필 화장품, 그것도 치아를 검게 하지 않는 화장품에 대해 말했다. ■ 르네상스 여인의 치아는 왜 까맸을까 중세의 속박이 느슨해지고 여성들의 화장이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 여인들은 치아까지 검게 화장했다는 오해가 있었다. 사실은 화장한 것이 아니라 치아가 검게 변색된 것이다. 얼굴에 칠했던 분에 납과 같은 중독 성분이 많아 치아에 흡수돼 쌓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여인들, 하얀 피부 갈망 수은·납 성분 섞인 분으로 화장 독성물질 쌓이며 치아 까맣게 변해 르네상스 시대에 이상적인 미녀는 얼굴이나 살갗, 손가락이 하얗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검은 벨벳으로 된 가느다란 리본을 이마에 늘어뜨리면서까지 얼굴이 대조적으로 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화장품은 은과 수은, 납 가루와 백반을 섞고, 유향을 씹었을 때 고인 침으로 그것을 묽게 만들어 빗물 속에서 끓인 뒤, 발생하는 연기를 식혀 만들어졌다. 납은 몸속에 축적돼 치아와 뼈를 검게 만들고 백반은 치아가 힘없이 빠지게도 했다. 이런 독성물질을 함유한 화장품이 프랑스와 영국에까지 전해지면서 이후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의사였던 노스트라다무스가 치아를 검게 하지 않는 화장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중세에 꺼렸던 화장품이 유럽에서 다시 사용됐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납 가루의 중독성이 밝혀지자 베네치아 여인들은 그 독성을 중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지금이야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해결되지만 당시는 그럴 수 없는 시기였기에, 해독 정보가 필요했던 르네상스인들은 다시 고전을 살폈다. 특히 르네상스인들이 관심을 가진 책은 고대 로마의 플리니우스(24~79)가 저술한 였다. 이 책은 플리니우스가 464명의 작가가 쓴 2000여권의 책을 읽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약 2만개 항목을 37권으로 정리한 백과사전이었다. 르네상스인들은 그 책에서 ‘얼굴 화장품(Medicamina faciei)’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약을 의미하는 영어 ‘medicine’의 고대 라틴어는 약품만을 의미하지 않고 화장품까지 포함했다. ■ 로마시대 화장법에서 마스크팩을 찾아내다 로마시대 화장법서 해독정보 찾아 플리니우스 책에 소개된 피부 덮개 가면 쓴 것처럼 보여 ‘마스크’라 불러 오비디우스의 동물성 기름에도 관심 송아지 생살 저며 얇은 팩 만들어 플리니우스는 1세기의 이상한 메이크업을 소개한다. 벌꿀, 콩과 보리 가루, 달걀, 포도주의 앙금, 녹용 가루, 수선화 뿌리를 반죽해 얼굴에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피부의 미백을 유지하는 일종의 덮개였다. 르네상스 여인들은 이것을 보고 전해져 내려오는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네로 황제(54~68년 재위)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30~65)가 사용했다는 ‘포파이아 마스크’다. 지방, 벌꿀, 곡물 가루를 반죽한 두꺼운 팩으로, 얼굴에 올리면 가면을 쓴 것처럼 보여서 당시 사람들은 ‘마스크’라 불렀다고 한다. 포파이아는 네로가 로마를 비우면 며칠 동안 밤낮 없이 반죽을 얼굴에 올리고 있었고, 네로가 돌아올 때까지 그것을 떼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녀의 살결이 진주나 비단처럼 고운 색채를 띠고 있었기에 이 마스크가 로마에 크게 유행하게 돼 남편들은 밤마다 부인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됐다. 그 정도로 유명했던 마스크가 베네치아 여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르네상스 여인들은 ‘포파이아 마스크’를 활용해 납 성분을 해독하는 새로운 마스크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떤 성분의 팩을 만들어야 할까? 르네상스인들은 또 고전에서 ‘재발견’하는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플리니우스보다 이전 사람인 오비디우스(BC 43~AD 17)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의 작가 오비디우스는 과 에 메이크업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당신은 분을 발라 희게 할 줄 알지요. 창백한 혈색도 화장술로 붉게 하죠. 숱이 적은 눈썹은 기술적으로 그려 넣고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양쪽 볼에는 연지를 찍지요.(오비디우스, 에서) 요즘과 같은 ‘치크 블러셔’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 여인들은 연지를 열심히 찍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지(aluta)’는 ‘컴프리(Comfrey)’라는 약초로 상처 부위에 바르면 효험은 있지만 피부에 자극을 가해 그 주위를 붉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극받아 벌겋게 된 민감한 피부에 로마 여인들이 ‘양모기름(oesypum)’을 사용했다고 오비디우스는 전한다. 양모기름은 피부에 자극적이지도 않고 흡수가 잘돼 피부연화제나 자극완화제로 쓰였다. 오비디우스는 미인들이 이 기름으로 만든 액체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몸에 발랐다고 전한다. 결국 르네상스 여인들은 오비디우스에게서 힌트를 얻어 마스크의 성분으로 동물성 기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플리니우스의 저서에도 동물성 약품(화장품)을 말한 곳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송아지 기름을 리넨천에 싸서 얼굴에 얹으면 미백과 주름 개선, 상처 완화, 햇볕에 자극받은 민감한 피부와 건조해진 입술 개선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르네상스 여인들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해독용 마스크팩을 생각해 낸다. 그것은 더 이상 올리지 않고 얇은 동물성 팩으로 얼굴에 붙이는 것이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베네치아 여인들은 송아지 생살을 얇게 저민 것으로 가장 효과적인 팩을 만들었다. 천연성분의 곡물이나 흙을 반죽해 올리는 팩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요즘처럼 간편히 붙이는 마스크팩의 역사는 이렇듯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됐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 모나리자의 달팽이점액 추출물 르네상스에 있었던 증류법의 발전을 통해 마스크팩에는 이제 갖가지 성분이 들어가게 된다. 꽃잎뿐만 아니라 동물성 원액도 포함된다. 추출물에 함유된 단백질, 즉 콜라겐, 엘라스틴, 케라틴 및 점액 다당류를 마스크팩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반죽을 통해 시트지를 얼굴에 깔고 그 위에 덮어야 했지만 꽃잎 에센스를 팩에 흡수시키면서 향을 낼 수도 있었다. 증류법 발전으로 갖가지 성분 추출 모나리자 모델로 알려진 리자 부인은 달팽이점액 추출물 얼굴에 바르기도 점차 완성을 향해 가던 르네상스의 마스크팩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달팽이점액 추출물이 함유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리자 게라르디니(1479~1542)는 달팽이를 껍질이 녹을 때까지 고아서 거기에 레몬즙과 포도즙을 가미해 만든 에센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피렌체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내였던 리자, 즉 ‘모나 리자(리자 부인)’의 은은한 미소는 ‘달팽이점액-마스크팩’의 효과로 만들어진 흐뭇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리자 부인이 달팽이점액을 얻은 곳은 성 우르술라 수녀원이었다. 리자는 이 수녀원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달팽이의 신비한 추출물을 얻고 관대한 기부를 했다고 전한다. 여성들이 화장을 시작하자 보수적이던 수녀원에서도 화장품을 만드는 시대가 르네상스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레온 알베르티(1404~1472)의 , 여걸이었던 카테리나 스포르차(1463~1509)의 등 메이크업과 관련된 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고전의 재발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사람들은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저술한 책만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일상이 현실에서 새롭게 부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샅샅이 뒤지고 또 그런 책들을 저술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초상화(1580년경). ■ 회복을 향한 열망 전쟁·전염병 쓸고간 르네상스 시대 재생·부활의 열망 담긴 마스크팩은 ‘회복을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 미용, 화장법, 성형 등을 뜻하는 영어 ‘cosmetic’은 ‘질서’ ‘조화’ ‘세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의 형용사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혼란을 뜻하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만드는 것이 코스메틱의 원래 의미다. 십자군전쟁과 흑사병으로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을 잃은 직후 르네상스인들 마음에는 파괴되고 상처 입은 세상을 회복하려는 열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질서’와 ‘조화’를 불어넣어 ‘세상’을 회복하려는 르네상스인들 이야기는 화장품이라는 그리스어의 뜻과 그 맥을 같이한다. 르네상스 여인들에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추구가 있었다. 그러다가 얻게 된 납중독, 비록 치아는 검게 변색됐지만 또 회복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건강이 필요했고 치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모든 것을 동원해 들춰보고 수소문하며 오랜 시도 끝에 만들어낸 마스크팩, 그것은 회복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구체적 실천의 하나로서 마스크팩을 얼굴에 붙이며 회복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마스크팩에는 ‘재생’과 ‘부활’의 열망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보다 책도 많고 정보도 많고 수명도 길어진 오늘날, 르네상스와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는 당장 나 자신부터 회복을 향한 열망이 없다. 변색되고 찢기고 터졌는데도 회복과 재생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상처와 결핍에 민감한 적이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애써 포기하고 순응하며 산다. 그러다 보니 상처가 곪고 있는데도 둔감하거나 무감각한 사람들이 된다. 돌같이 딱딱한 마음이 되었다.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고 미소마저 사라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문주의자들의 ‘문예부흥’이나 ‘고전의 재발견’ 이전에 회복의 열망이 먼저 돋아나고 있었다.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전쟁과 전염병의 지울 수 없는 생채기에 새살이 돋듯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감기에라도 걸렸다가 회복될라치면 그동안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던 입맛부터 되살아난다. 관심 없었던 하늘이 갑자기 푸르고 드높은 것으로 보인다면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세상의 색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마냥 아름다워진다. 상처 때문에 겁부터 먹고 닫아뒀던 감각의 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재생을 향한 감각이 불 일 듯 열리는 시기였다. 오늘 밤에는 마스크팩 하나 가만히 붙이고 그 ‘재생’의 꿈을 꾸고 싶다. 회복을 향한 르네상스인들의 열망을 진정 닮고 싶다. /김동훈 
음악의 뿌리를 찾아 민족예술의 혼을 불태워 (ZOGLO) 2019년11월25일  인물이름 : 김예풍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김예풍 교수      문화부 민족민간문예발전중심 “서남연구중심”부주임,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회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상무리사, 사천민족문화예술연구회 리사, 사천성음악가협회 회원, 사천 중국서부연구와 발전촉진회 챵(羌)학 연구원 특약 부원장 등 수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예풍 교수는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중국소수민족예술, 음악과 무용학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의 주요 연구령역은 작곡과 음악리론, 민속과 의식음악 등이다.   1959년 연길에서 태여난 김예풍 교수는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음악을 시작한건 아니였습니다. 시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문학에 흥취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늦게 손풍금을 접하게 되였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경연에 참가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 뒤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였고 작곡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따로 음악에 끼가 있는 건 아니였고 작곡 역시 창작이기때문에 문학과 갈라놓을수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아버지는 저명한 조선족 시인 김성휘 시인이다. 문학을 좋아하게 된것도 시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강박은 없었고 단지 집에 책이 많았고 책밖에 없었기 때문에 책과 친해지게 되였다고 한다.   1986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대학예술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았다. 그 해에 마침 좋은 기회로 상해음악학원에 연수를 떠나게 되였다.   “그때 당시 연변대학 교장이였던 김삼진 교장님께서 연변의 음악을 발전시키고자는 큰 뜻을 안고 저희들에게 상해음악학원 지휘학부에서 연수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남자 마자 바로 상해로 가서 3년동안 작곡공부를 했습니다.”   1986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김예풍 교수는 음악학부 작곡교연실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98년, 아직 공부에 대한 끊을 놓지 못한 김예풍 교수는 자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석사연구생을 졸업한 그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음악학부에서 4년만에 동아시아 중한일 음악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서남민족학원이 서남민족대학으로 바뀌면서 예술학원이 새로 설립되였다. 인재가 필요했던 학교의 관계자들은 인재영입차 한국에 가서 수소문하게 되였고 김예풍 교수를 발견하고 바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의향을 물었다.   그렇게 되여 2004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남아 음악인,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 음악사 공부를 하면서 서남지역의 음악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서남 지역이 저의 연구방향과 적합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서남민족대학을 선택하게 되였습니다.”   서남민족대학에 있는 약 15년동안의 시간에 김예풍 교수는 많은 일들을 했다.   선후하여 국가 과학기술기초사업 전문항목 ,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항목 (사천 음력설편), 교육부 인문사회과학연구 기획기금항목 , 사천성 교육청 교육교학개혁 과학연구중점항목 등 5개 항목을 주관했고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학목등 3개 항목을 공동 합작했다.   이밖에 , , , , 등 5권의 학술전문서적을 출판했고 화성학교재 을 출판했으며 , 등 책 2권을 번역했고 , 등 서적을 공동 편찬했다.   또한 , , 등 학술기간지에 2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했고 그중 는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제3회 “학회컵”론문평선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김예풍 교수는 창작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곡한 , 등 노래는 전국음악류 핵심기간지에 발표되였다.   “머타먼 타향 사천성에서도 이렇게 무언가를 해낼수 있다는것 또한 우리 민족을 빛낼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다시 돌아보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   김예풍 교수는 처음 사천에 왔을때 언어장벽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성도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서 학원의 통지도 잘못 전달 받을 때가 많았고 이밖에 조습한 기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오직 학술연구 하나만 바라보고 버텨냈다.   민요악보수집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방학이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산골로 무작정 차를 몰고 지도를 보면서 찾아갑니다. 술과 간단한 안주를 사들고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그렇게 함께 일도 도와주고 하면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따라갑니다.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그때 록음기를 꺼내서 록음을 하는거죠. 처음 2,3년은 그렇게 했던것 같습니다. 민요수집하느라고 방학도 없었고 명절도 없었죠.”   한번 마을로 찾아가면 며칠씩 그곳에서 묵어야 한다. 대부분 깊은 산골이라서 길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향진에 차를 세워놓고 배낭을 메고 해발이 높은 곳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산이 많다 보니 가끔씩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발생하면 산골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개학까지 나오지 못했을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가기로 되였던 마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미나 일정이 잡혀서 못가게 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2시에 회의장에 들어가게 되였고 2시20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2008년 5월12일이였다.   이런 렬악한 조건을 마다하고 끝까지 견지한 김예풍 교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김예풍 교수는 자신이 편찬한 책, 자신이 수집한 민요로 작곡을 가르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개 민족의 민요를 가지고 작곡법을 가르치는 건 이 책이 유일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소수민족의 음악도 공부하면서 작곡원리도 배울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안해 최선자 가수도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는 교단에 설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남지역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조선말 책으로 편찬하여 한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본과 교류하는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조선족의 민족 우월성을 발휘하여 문화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김성휘 시인의 뒤를 이어서 또 하나의 예술령역에서 자신의 기량을 널리 펼치는 김예풍 교수, 우리 민족의 숨은 보석이 따로 없다.   앞으로 그의 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되기를 바란다.        /중국조선어방송넷
2793    [별의별] - "이색 수염 겨루기 대회" 댓글:  조회:2759  추천:0  2019-11-26
'수염으로 이게 가능해?' 2019년 최고의 수염 한 자리에 (ZOGLO) 2019년11월25일  상남자들이 모여 자신의 이색 수염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 '2019 National Beard and Mustache Championships'가 그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열린 이 대회는 이상한 모양의 콧수염, 가장 긴 턱수염까지 여러 종류의 콧수염과 턱수염 모양을 뽑는 대회로 올해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다. 크게 콧수염(Mustache),반수염 (Partial Beards), 완수염(Full Beards)으로 나뉘며 각 부문은 살바도르 달리·귀족·헝가리안·중국인 스타일 등으로 나뉜다. 지난 2017년부터는 여성 부문도 신설됐다. 미국 온라인 매체 보어드판다는 지난 23일(현지시간) 최종 결선에 오른 30인의 모습을 공개했다. 수염 대회 참가자들은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사진촬영에 응했고 기금은 참전용사 후원과 유기동물 보호시설 등에 기부될 예정이다. 아래는 이색 수염을 자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다.
2792    [그것이 알고싶다] - "에밀레종" 타종소리... 댓글:  조회:5670  추천:0  2019-11-26
  1200년 전 ‘에밀레종’ 복원, SKT 첨단기술 한‧아세안 행사 빛내 2019.11.2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디지털데일리 최민지기자] SK텔레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한‧아세안 리더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SK텔레콤은 미디어 기술로 1200년 전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을 복원하고 마지막 타종소리까지 고음질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SK텔레콤(대표 박정호)은 지난 25~26일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5G‧인공지능(AI) 기반 성덕대왕신종 미디어아트 ▲5GX K-팝 퍼포먼스 ▲미래형 무인장갑차 등을 선보였다고 26일 밝혔다.  지난 25일 SK텔레콤은 한‧아세안 환영 만찬이 열린 부산 힐튼 호텔 로비에 설치한 5G‧AI 기반 미디어아트 ‘선향정’을 전시했다. 바른 울림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선향정은 아세안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 구조물과 한국 전통 수묵산수화를 담은 3면의 특수 스크린으로 구성됐다. SK텔레콤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1200년의 시간과 경주‧부산 간 공간을 넘어 천년왕조 신라 시절 성덕대왕신종을 행사장에 복원했다. 선향정은 성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로 각국 정상과 대표단을 환영했다. 범종에는 정상이 입장할 때마다 각국 국기가 형상화되고, 특수 스크린에는 한국의 사계를 표현한 초고화질(12K) 수묵화가 살아있는 듯 움직였다. 여러 개 산수화 영상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초고화질 동영상으로 구현하는 SK텔레콤 ‘엣지블랜딩’ 기술이 더해졌다.  성덕대왕신종은 2003년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타종이 중지됐다. 이에 SK텔레콤은 마지막 타종 소리 음원을 AI 기반 미디어품질 개선 기술 ‘5GX슈퍼노바’를 통해 잡음 없는 고음질(FLAC) 음원으로 16년만에 복원했다.  ... ...   윤용철 SK텔레콤 커뮤니케이션센터장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한국의 5G, 인공지능, 미디어 기술 우수성을 해외 정상과 대표단에게 소개하는 최고의 쇼케이스가 됐다”며 “앞으로도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5G‧AI 기반 실감형 콘텐츠를 지속 선보여 한국 ICT 위상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에 걸려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1],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조선시대인 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191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2]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을 위해 이를 금하고 있다. ====================/// 일명 에밀레종인 성덕대왕 신종은 국보 29호이고 첨성대는 국보 31호입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결코 국보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정순서를 나타낼 뿐이죠. 이 두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때는 1962년 12월 20일이라네요.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국보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한다. 국보는 관보(官報)에 고시(告示)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국보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국보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하여 지정되었고, 1955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유형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지정하였으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이 법에 의하여 1963년 728점에 이르는 지정문화재 중 116점을 국보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국보는 303호에 이르고 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에밀레종의 전설     교과과정 초등학교 > 5학년 > 2학기 > 사회 5-2 > 1. 우리 역사의 시작과 발전 >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목차 1. 눈물이 깃든 종 2. 내용 정리 1. 눈물이 깃든 종 “어째서 종소리가 이리 탁하단 말이오?” 경덕왕의 말에 봉덕사1) 스님들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이 종은 선왕이신 성덕 대왕2)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종소리가 이래서야 되겠소이까!” 옷자락을 팽 하니 뿌리치며 경덕왕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어요. 스님들은 화가 난 경덕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구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잠시 뒤, 주지 스님3)이 먼저 말문을 열었어요. “종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내서 시주4)를 모아 오세요.” 주지 스님의 말에 한 스님이 대답했어요. “좋은 종을 만들려면 정성어린 시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신라의 백성들은 가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맞습니다. 귀족들은 사치를 누리고 있지만 백성들은 가난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시주를 얻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스님들 모두 근심어린 얼굴로 백성들을 염려했어요. 결국 봉덕사 스님들은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제대로 울리는 종을 만들지 못했어요.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다시 봉덕사를 찾아왔어요. 혜공왕은 아직도 비어 있는 종루5)를 바라보며 스님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아버님의 꿈을 꼭 이루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스님들은 종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주를 받으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이 낡고 허름한6) 집에 들러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주를 해 주십시오.” “주지 스님이 직접 오시다니…….” 가난한 집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저희 집에 있는 것이라곤 이 아이뿐입니다.” 여인은 아이를 주지 스님에게 건네려 했어요. “아, 아닙니다. 아이를 시주로 받을 수는 없지요.”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얼른 발길을 돌렸어요. 가난한 집에 시주를 하라고 한 것을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했지요. 그 날 밤 주지 스님은 꿈을 꾸었어요. 깜깜한 하늘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말소리가 들려 왔지요. “봉덕사의 종을 제대로 울리려면 그 아이가 필요하니 어서 데려오거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주지 스님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어요. 주지 스님은 밤새 고민을 하다 아침이 오자 곧바로 여인을 찾아갔어요. “부인, 전에 말씀하신 아이를 시주로 내어 주시겠습니까?” “꼭 원하신다면 보내 드려야겠지요.” 여인은 아이를 내어 주며 눈물을 흘렸어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지 스님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여인을 위로했어요. 얼마 후, 봉덕사에서는 새로운 종을 만들며 아이를 넣었어요. “부디 좋은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주지 스님은 아이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어요. 그러자 그 동안 계속 깨지고 찌그러지던 종이 너무도 쉽게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어요. 성덕 대왕 신종(국보 29호)통일 신라 시대의 범종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상원사 동종과 함께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종이다.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혜공왕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봉덕사로 찾아왔어요. “그토록 기다리던 종이 완성되었다니……, 어서 울려 보거라.” 혜공왕의 명을 받은 스님들이 힘껏 종을 쳤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종소리는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아이의 소리 같았어요. 종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할 때 한 여인이 털썩 주저앉으며 목놓아 울었어요. “아가야, 네가 나를 원망하는구나. 이 어미를 용서해 다오.” 그녀는 얼마 전 아이를 시주로 바친 여인이었어요. 사람들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을 ‘에밀레종7)’이라고 불렀어요. 성덕 대왕 신종의 비천 상(飛天 象)종에 조각된 비천 상은 신라의 여러 문양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5미터, 무게 18.9톤에 이르는 거대한 종이에요. 크기뿐만 아니라 겉면에 새겨진 조각은 너무도 아름다우며, 소리 또한 세계의 어떤 종에서도 들을 수 없는 뛰어난 음을 들려 주지요. 에밀레종은 우리 조상이 남긴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답니다. 2. 내용 정리 신라의 경덕왕은 선왕인 성덕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을 만들지 못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혜공왕이 스님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은 꿈에서 아이를 넣어야만 종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지난 날 아이를 시주로 내놓겠다던 집을 찾아가 아이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소리는 마치 ‘에밀레’ 하고 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종을 에밀레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생방송 한국사 3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의 전설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 한국문학 에밀레종설화     구분 고전 저자 작자미상 작품해설 구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물이 왜 그러한지를 설명해 주는 유래담(由來譚)에 속하는 설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에밀레종이 어린애를 희생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에밀레종은 신라(新羅) 제36대 혜공왕(惠恭王) 6년 12월에 완성된 봉덕사종(奉德寺鐘) 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이칭(異稱)인데, 이 종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나라에서 주종(鑄鐘) 작업을 계속 실패하게 되자 모든 사람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주종 실패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께 시주할 것이 없으니 어린애라도 가져가라’고 한 여인의 불경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그 여인의 아이를 데려와야 종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절의 주지(住持)는 정재(淨財)를 거두러 다녔던 중들을 불러 어떤 여인이 그러한 말을 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왕명(王命)으로 여인의 아이를 빼앗아다가 끓는 쇳물에 어린 애를 던진다. 그 뒤에야 종이 완성된다. 다른 하나는 종을 만드는 공장(工匠) 일전(一典)이 계속 주종에 실패하자 모두가 비난한다. 종을 만들지 못하자 일전의 누이는 자기의 부덕(不德)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그 때 시주 온 중이 그녀에게 어린애를 인주(人柱)로 해야 종이 완성된다고 일러준다. 누이는 고민하다가 오빠를 위하여 자신의 딸을 주종을 위해 바친다. 그래서 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주종을 위해 어린애를 강제로 빼앗아 희생시키는 경우와 자진하여 희생하게 하는 데에서 서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모두 인신공희담(人身供犧譚)의 모티프를 담고 있다. 현대소설 가운데 박용숙(朴容淑)의 단편 과 박용구(朴容九)의 장편 은 모두 이 설화를 소재로 작품화하고 있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설화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봉덕사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였다. 1915년8월 종각과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   성덕대왕신종의 특징;ㅡ 성덕대왕신종의 특징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번 타종되었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0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 없이 서라벌에서 울려온 종소리였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하였다.   에밀레 종;ㅡ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 종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명백히 일제 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1925년8월 5일자 조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 동화가 올라있다.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득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었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즉 에밀레종이란 말은 일제치하에 친일극작가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출처문화재청 자료 ==========================/// 천년고도 경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내는 종이 있다. 771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이다. 이 종에는 가슴 아픈 설화가 전해진다. 당시 구리 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기로 했으나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았다. 한 승려의 조언대로 갓난아기를 쇳물이 끓는 가마에 넣었더니 종이 깨지지 않았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 인신공양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과학자들이 검증에 나선 일이 있다. 1998년 국내 한 연구기관이 에밀레종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했더니 사람 뼈에 있는 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인신공양이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제조 과정에서 인골 성분이 쇳물 위에 떠올라 제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기 울음과 흡사한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일까. 이는 맥놀이 현상과 관련이 깊다. 맥놀이란 진동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종소리는 치는 표면의 위치에 따라 진동수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신비스러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가 이번에 국내 최첨단 기술로 복원됐다. 25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선 새로 복원된 에밀레종이 단연 인기였다. 각국 정상들은 종을 배경으로 깊은 울림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에밀레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2003년부터 타종이 중단됐으나 SK텔레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종소리를 살려냈다. 슬픈 에밀레종 소리에는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는 대왕의 애민정신이 녹아 있다. 종에 새겨진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큰 소리는 천지에 진동하고 있으나 귀로 듣고자 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국가 지도자들이 들어야 하는 큰 소리는 바로 민심(民心)의 소리다. 그것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다. 1200년 만에 ‘큰 소리’가 이 땅에 복원됐지만 마음으로 듣는 지도자가 없다. 애끊는 민심의 소리가 ‘에밀레’ 소리보다 슬프다.   /배연국 논설위원 ///세계일보 ===================================/// [fn스트리트] 성덕대왕 신종 파이낸셜뉴스2019.11.26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공유 더보기 인쇄 글자 작게 글자 크게 한국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종이다. 삼국유사에는 한국종이 6세기부터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500년 동안 수많은 종이 제작됐다. 현존하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오대산 상원사종(725년)이다. 그러나 모양과 소리가 아름답기로는 성덕대왕 신종(771년)을 최고로 꼽는다. 성덕대왕 신종은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인신공양의 슬픈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대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내려 큰 종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덕이 부족한 탓인지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다 세상을 떴다. 아들 혜공왕 때에 이르러 어느 여인의 갓난아기를 끓는 쇳물에 던져넣자 놀랍게도 종이 완성됐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과학의 신비도 함께 스며 있다. 김석현 교수(강원대)는 "미세한 비대칭성 맥놀이 현상이 아기울음 같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분석했다. 맥놀이란 주파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이다. 그에 따르면 종을 칠 때 표면의 위치에 따라 두께와 모양의 차이로 미세한 차이를 지닌 진동수의 소리가 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에밀레종 특유의 신비스러운 소리가 난다는 설명이다. 성덕대왕 신종이 1200년 시간의 벽을 넘어 한·아세안 정상회담 만찬장에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25일 부산 힐튼호텔 만찬장 입구에서는 실물의 5분의 4 크기로 재현된 에밀레종이 각국 정상들을 맞았다. SK텔레콤이 최첨단 5세대 이동통신(5G)과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입체 홀로그램 이미지와 음원을 복원한 것이다.   신종은 각국 대표단이 입장할 때마다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이들을 환영했다. 한국과 아세안의 평화와 공동번영도 기원했다. 전통문화와 최첨단 과학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염주영 논설위원  ///파이낸셜뉴스 ===================================/// ▲  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신라시대 궁궐터인 월성 곁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경주시 인왕동)은 들러야 할 이유가 많은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에 서있는 큰 범종 소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 신라 771년 12월 14일에 만들어진 한국의 대표하는 범종으로 국보 29호다. 범종(梵鐘)은 불교 사찰에 걸려 있는 커다란 종으로 성덕대왕신종 또한 봉덕사라는 절에 있었다. 아쉽게도 녹음된 종소리가 나오지만 진중하고 여운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종의 표면을 장식한 꽃구름 속의 선인(仙人)과 2쌍의 비천상(飛天像)을 볼 수 있다.    ▲  범종 앞에 서면 녹음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  멋진 그림이 새겨져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종소리가 좋아 몇 번 더 들었는데 별칭처럼 '에밀레~' 하고 울지 않는다. 박물관 문화해설사에게 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에 대해 물어보았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됐다. 인신공양설화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흔히 나오는 설화인데, 놀랍게도 에밀레종 설화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에밀레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창작문예란에 실린 렴근수(廉根守) 작가의 이라는 동화다. 1943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희곡 을 집필하고 현대극장에 상연했다. 이후 에밀레종 설화는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김종성  
279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55  추천:0  2019-11-24
  2000년 전 나스카인이 그린 땅그림 143점 추가 발견  2019.11.24.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페루 나스카인, 2100~1700년전 제작 추정 일 야마가타대-아이비엠 항공사진 분석 1개는 딥러닝 인공지능 추론으로 찾아내 천문현상과 관련한 종교의식 일환인 듯2천년 전 페루 나스카인들의 땅그림. 사람 형상이다. 오른쪽은 윤곽선을 표시한 가공사진. 야마가타대 제공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남쪽으로 약 400km 거리에 있는 동태평양 해안지대의 나스카 평원에 가면 오늘날 세계 고고학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를 만나볼 수 있다. 널따란 평원에 새겨져 있는 대형 땅그림(geoglyphs, 지상화)이다. 무려 45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평원에 땅을 파헤친 자국이 만들어낸 문양들이 즐비하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이 땅그림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나스카인들이 기원전 500년~서기 50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기기묘묘한 기하학적 도형, 다양한 동물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그림 등은 최대 길이가 수킬로미터나 돼 항공 촬영을 통해서만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찾아낸 페루 나스카평원의 땅그림. 막대기를 든 사람의 형상이다. 야마가타대 제공 일본 야마가타대 연구진과 아이비엠이 최근 이 지역에서 143개의 땅그림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 가운데 1개는 기존 사진 분석으로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아이비엠의 딥러닝 인공지능을 이용해 찾아냈다. 인공지능을 앞세워 땅그림을 발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오른쪽은 윤곽을 뚜렷하게 표시한 가공사진) 머리 두개인 뱀과 사람. 물고기 2016~2018년에 촬영한 항공사진 분석을 통해 새로 확인한 땅그림에는 사람, 뱀, 새 등이 포함돼 있다. 야마가타대 연구진은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3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인공지능이 이번에 찾아낸 땅그림은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인공지능이 항공 사진을 분석해 형상을 추론한 뒤, 이를 토대로 현지 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땅그림을 확인했다. 페루의 나스카평원(노란색 점). 나스카인들이 거대한 땅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 확실한 이유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웹사이트에 따르면 천문 현상과 관련한 종교의식의 일환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곽노필 기자
2790    [이런저런] - "생가문제"... 댓글:  조회:2750  추천:0  2019-11-24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가는 규모가 엄청나다. 인도 콜카타에 학교 규모로 세워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생가와 비견될 정도다. 온 집안을 돈으로 칠갑해 놓은 것으로는 괴테 쪽이 단연 앞선다. 4층 건물에 20여개의 방이 있는 고딕 양식의 괴테 생가는 18세기 유복한 중산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1층에는 당시의 조리대와 그릇장 등이 있는 부엌과 식당이 있고, 괴테가 태어난 2층에는 아버지의 서재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대형 골동품 시계가 있다. 시인의 방이라 불리는 3층 왼쪽의 방은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가 탄생한 곳이다. 괴테의 책상과 자필 원고가 전시돼 그의 문학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생가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관광 제1 코스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의 생가는 소박함 그 자체로 괴테의 생가와 대비된다. 호찌민은 응에안성 호앙쭈 지역에 있는 외가의 방 5개짜리 초가집에서 태어나 5살까지 살았다. 그의 생가는 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지붕과 벽을 뜯어 보관했다가 나중에 복원했다고 한다. 호찌민을 향한 국민들의 존경심이 읽힌다. 이곳은 응에안성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이 태어난 후난성 사오산의 생가는 혁명 성지로 꼽힌다. 주말에는 10만명이 넘는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중국인들이 일생에 한 번은 가고 싶어 하는 ‘최애’ 장소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후진타오 등 역대 중국 지도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부주석 때인 2011년 3월 생가를 방문했다.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도 이곳을 찾는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제 아돌프 히틀러 전 독일 총통 생가를 경찰서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건물이 유럽 극우세력의 성지가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신나치주의자들은 매년 히틀러 생일인 4월20일이 되면 생가를 찾아 참배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여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재자가 히틀러다.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활개 치는 한 히틀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까 두렵다. /김환기 논설위원 ⓒ 세계일보 
278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생태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959  추천:0  2019-11-23
[와우! 과학] “안녕, 올라프!”… 멸종위기 두꺼비, ‘체외수정’으로 부화  2019.11.23.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세계 최초로 체외수정을 통해 태어난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올라프’미국 텍사스에서 세계 최초로 체외수정을 통해 멸종 직전의 두꺼비가 부화하는데 성공했다고 AP통신 등이 23일 보도했다. 미시시피주립대학 연구진과 텍사스주 포트워스동물원 연구진은 최근 체외수정을 통해 알을 수정시키고, 이를 부화해내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카리브해 대앤틸리스 제도의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서식했던 것으로 알려진 ‘푸에르토리칸 볏두꺼비’(학명 Peltophryne lemur)는 푸에르토리코와 영국령 버진고르다섬 등지에서 서식했지만, 1987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으로부터 ‘매우 가까운 장래에 야생에서 멸종 위험성이 매우 높은 종'을 의미하는 CR(critically endangered) 등급을 받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 두꺼비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시작됐지만 개체수는 좀처럼 늘지 않았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 30년간 이 두꺼비가 완전히 멸종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에 연구진은 실험실에서 키우던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암컷 두 마리에게서 추출한 난자와 야생에 서식하는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수컷 6마리에서 추출한 뒤 얼려 둔 냉동정자를 결합하는 체외수정을 시도했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9월 포트워스동물원에서 태어난 세계 최초의 체외수정 두꺼비는 몸무게 6g으로 매우 작지만 건강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멸종위기 두꺼비의 개체수 보호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해당 두꺼비를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의 눈사람 캐릭터의 이름을 본 따 ‘올라프’라고 명명했다. 연구진은 “양서류에 대한 체외수정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야생에 사는 동물을 해치지 않고 정자만을 채취해 냉동시킨 뒤 이를 체외수정에 이용해 (부화에) 성공한 사례는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실험의 성공은 멸종 직전에 있는 동물들의 개체수를 확장시키는데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야생에 서식하는 푸에르토리칸 두꺼비는 그대로 놔둔 채 (정자 등) 생물학적 시료만 채취한 뒤 이를 미래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현서 기자
278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일회용품 사용",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99  추천:0  2019-11-22
카페·식당에서 종이컵 못 쓴다  2019.11.22.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일회용품 사용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만 아직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정부가 일회용품 대책을 내놨는데 플라스틱에 이어 종이컵도 2021년부터는 카페나 식당 등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음료를 살 때 보증금을 내고 컵을 반환하면 돌려주는 컵 보증금제 도입도 추진됩니다. 황선욱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이 커피 전문점은 지난해부터 매장 내 종이컵을 아예 없앴습니다. 다만 테이크아웃에 한해 종이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율적으로 하고 있지만 2021년부터는 카페와 식당,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종이컵 사용이 금지됩니다. [이승재 / 서울 상암동 : 안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나갈 때 컵을 바꿔서 나가야 하는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일회용품 사용 문제가 워낙 심각하니까 저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시다 남은 음료를 일회용 컵에 다시 담아가려면 컵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합니다. 일회용 컵 보증금 반환제도 추진됩니다. 현재 국회에 법안이 계류 중인데 법안이 통과하면 2008년 폐지됐다가 다시 부활하는 셈입니다. [유은혜 /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 온라인 쇼핑과 음식 배달 등 순간의 편리함을 위해 불필요하게 사용되는 일회용품이 450억 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비닐 봉투 사용 금지 대상도 확대됩니다. 지금은 백화점과 쇼핑몰, 대형 슈퍼마켓 등이 대상인데, 2022년부터는 편의점, 제과점도 비닐 봉투 사용이 금지됩니다. 이밖에 포장 배달 음식의 일회용 수저와 플라스틱 빨대, 우산 비닐도 제공할 수 없게 됩니다. 정부는 이번 대책이 제대로 이행되면 2022년까지 일회용품 사용량이 35% 이상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YTN 황선욱입니다.
2787    [그것이 알고싶다] - "난 다 봤어요"... 댓글:  조회:3179  추천:0  2019-11-21
신상옥 “조선시대 빤스가 어딨냐” 최은희 치마 입고 ‘강화도령’ 촬영 기사입력 2019.11.2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내 영화의 뮤즈 최은희 최은희 “난 다 봤다” 두고두고 놀려 신 감독 북한서 네 차례 탈출 시도 수용소 갇혀 단식하다 간염 얻어‘분단의 여배우’라 불리는 최은희씨와 나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함께 누빈 환상의 콤비다. 연인으로, 부부로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지난해 봄 최씨가 세상을 떴을 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괴로웠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함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말년에 몸이 아파 고생하다 돌아간 게 참 마음 아프다.  “세월이 갈수록 더 보고 싶어요.” 최씨는 2006년 4월 남편 신상옥 감독을 먼저 떠나보내고 종종 이런 말을 했다. 1978년 1월 최씨가 홍콩에서 북한에 납치되자 신 감독은 2년 전 이혼한 전처를 찾겠다며 홍콩에 갔다가 그해 7월 똑같이 납북됐다. 최씨는 신 감독이 북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병을 얻은 것 같다고 한탄하곤 했다. 술·담배도 안 하던 이가 북한을 다녀온 뒤 건강이 악화됐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네 번이나 탈출하려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거기서 단식을 하니까 강제로 영양제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소독이 제대로 안 돼서 C형 간염균을 얻은 거예요. 숨지기 2년 전엔 간 이식 수술도 받았어요.”  최은희 북 배우들 한복 지어 입혀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복녀(최은희)가 원범(신영균)에게 찢어진 바지를 꿰매줄 테니 벗어달라며 자신의 치마를 빌려주고 있다. [영화 캡처] 신 감독이 타계한 후 최씨도 점점 쇠약해졌다. 2010년부터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졌고, 말년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도 받았다. 그래도 바깥 활동을 할 때는 여배우의 품위를 지키겠다며 한껏 치장을 하고 씩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최은희씨와 종종 식사자리를 마련해 정담을 나눴다.  최씨를 처음 만난 건 신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다. 김진규·최은희씨가 주연이고 나는 조연으로 그녀의 오빠 역을 맡았다. 신 감독은 이때 갓 데뷔한 나를 눈여겨본 모양이다. 우리 셋은 ‘상록수’(1961), ‘연산군’(1961), ‘열녀문’(1962), ‘강화도령’(1963), ‘빨간 마후라’(1964), ‘이조 여인 잔혹사’(1967) 등에서 손발을 맞췄다. 다른 감독 연출작까지 포함해 최씨와 나는 30여 편을 함께했다.  300편 넘는 영화를 찍었지만 내 신체의 은밀한 부위까지 목격한 여배우는 최씨가 유일하다. ‘강화도령’ 촬영 때니 5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왕손인 줄도 모르고 강화도 갯벌에서 뛰놀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철종으로 등극한 촌뜨기 ‘원범’, 최씨는 원범의 단짝 친구 같은 말괄량이 섬처녀 ‘복녀’로 나왔다. 원범이 산에서 칡뿌리를 뽑으려다 굴러 한 벌뿐인 옷이 찢어지자 복녀를 찾아가 꿰매 달라고 부탁한다. 복녀가 벗어준 한복치마를 입고 기다리는 장면을 찍는데 신상옥 감독이 이런 주문을 했다.  “신영균씨, 이거 찍을 땐 ‘빤스’까지 다 벗어야 해.”  “예? 농담이지요?”  “아이 벗으라니까. 조선시대에 ‘빤스’가 어딨느냐 말이야.”  신영균이 나무 뒤에 숨어 최은희의 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벗어 던져준 후 드러난 속살을 감추고 있는 모습. [영화 캡처] 조선 말기에는 속옷이라고 해봐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흰 천이었다. 나는 결국 흰 천만 걸쳐 입고 치마를 둘렀다. 한창 촬영하다 강둑에 앉아 쉴 때였나 보다. 아래쪽에 있던 최씨가 나한테 손가락질하며 웃기 시작했다.  “최은희씨, 갑자기 왜 그래?”  “아유 난 몰라, 다리 쩍 벌리고 편히 앉으니 속이 다 들여다보이잖아요.”  최씨는 이후 두고두고 나를 놀려댔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그때 다 봤다”며 깔깔 웃곤 했다. 마침 영화 속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최씨는 상대 배우를 참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영화계 선배였지만 나는 “최은희씨” 혹은 “최 여사”라고 불렀다. 영화밖에 모르는 남편, 신 감독 때문인지 최씨는 손재주가 좋고 생활력도 강했다. 밤 늦게까지 촬영이 이어질 때도 대기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신 감독은 젊어서 못질 한 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을 등한시했다).  “최 여사, 가만히 쉬지 않고 뭘 그렇게 계속해요?”  “바느질이든 뜨개질이든 뭘 해야 시간이 잘 가요.”  탈북 후 미국 머물 때 찾아가 만나  신영균과 최은희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중앙포토] 나중에 최씨에게 들은 얘기지만 78년 신 감독과 함께 납북돼 북한 영화를 제작할 땐 배우들의 한복을 직접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옷은 우리 전통 한복에 비해 볼품이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 사랑 내 사랑’ 등 영화 17편을 찍었다. 최씨는 북한 영화 ‘소금’으로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두 사람은 86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지만 간첩이 두려워 바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신 감독 부부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부부가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북한에서 영화 만들 때 신영균이 생각 많이 났어.”  “그렇다고 날 불렀으면 큰일났겠네. 나도 납치당할 뻔했구먼.”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냉면도 먹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나라로 간 최씨가 신 감독을 잘 만났는지 모르겠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신필름’ 같은 영화사를 만들고 있으라고, 같이 출연하자고 당부해 두었는데….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2786    [그것이 알고싶다] - "살아있는 다리" 댓글:  조회:3322  추천:0  2019-11-21
수백 년 견디는 '살아있는 다리'의 비밀  2019.11.21.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인도 전통기술, 고무나무 공기뿌리 자라 얽혀 다리 형성고무나무의 공기뿌리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다리’. 시간이 갈수록 자라 튼튼해진다.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교수 제공. 인도 북동부 메갈라야주는 연평균 강수량이 1만2000㎜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아열대림 지역이다. 이곳 산악지대 원주민인 카시족과 자인티아족은 석회암 지대의 가파른 협곡에 물이 차오르는 몬순 때마다 고립됐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대나무나 목재로 만든 다리는 습한 날씨에 쉽게 썩어 떠내려가고, 강철이나 콘크리트 다리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결국 낡아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찾은 해결책은 ‘살아있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도고무나무의 공기뿌리를 강 건너로 유도하는 방식으로 나무다리를 만들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가 자라 점점 튼튼해지는 실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건축물이 된다.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독일 뮌헨공대 교수 등 연구자들은 인도의 ‘살아있는 나무다리’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주민의 전통지식으로 지은 이 다리가 수백 년을 견디는 비결을 찾아냈다. 메갈라야의 ‘살아있는 다리’는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54년 그림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모두 74개의 다리를 분석 대상으로 수천장의 사진을 촬영해 3차원 입체 모델을 만들고, 형태와 구조, 관리 방법 등을 조사했다. 루드비히 건축학 교수는 “촘촘하게 서로 꼬인 뿌리가 안정된 다리를 형성하는데, 가장 긴 것은 50m가 넘는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가정에서 화분에 많이 재배하는 인도고무나무는 자연상태에서 보통 30∼40m, 크게는 60m 높이로 자란다. 정글의 숲 지붕(수관)에서 새의 배설물을 통해 옮겨져 싹튼 고무나무는 숙주 나무 아래로 수많은 공기뿌리(기근)를 뻗는다. 인도고무나무의 공기뿌리. 정글의 숲 지붕에서 숙주 나무를 죽이고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서로 얽힌 공기뿌리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뿌리는 서로 얽히고 결합해, 마치 건축물 거푸집처럼 숙주 나무를 에워싸 결국 숙주를 죽인다. 숙주 나무가 썩어 없어져 가운데가 텅 빈 공간에서 공기뿌리끼리 튼튼한 구조물을 이루는 고무나무의 속성이 ‘살아있는 다리’의 핵심이다. 연구에 참여한 토마스 스펙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식물학 교수는 “다리 놓기 공사는 다리의 끝이 놓일 절벽 끄트머리에 고무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며 “나무가 자라 공기뿌리가 나오면 대나무나 야자 줄기로 만든 틀에 감아 강 건너 다리 쪽으로 수평으로 자라게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움모노이 다리는 53m로 가장 긴 ‘살아있는 다리’이다(a). 다리 위에서 본 바닥 모습(b).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외 (2019)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뿌리가 강 건너편에 도달하면 땅에 심는다. 새로 공기뿌리가 생겨나고, 기존의 뿌리는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 얽혀 ‘접합’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스펙 교수는 “식물 줄기에 상처가 나면 세포가 분열해 상처를 막고 비대해지는 현상을 나타내는데, 같은 원리로 공기뿌리끼리 만나 하나로 뭉치는 접합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접합은 자연적으로 또는 사람이 매듭을 지어줘 형성되는데, 결과적으로 전체 뿌리의 강도를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공기뿌리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매듭을 지은 모습(위). 이 부위는 결합되고, 그곳에서 새 공기뿌리가 나와 구조를 강화한다(아래).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외 (2019)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뿌리가 서로 얽히고 융합해 튼튼한 구조물을 이루고, 손잡이를 만들고, 바닥을 채워 제 기능을 하는 다리를 만들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연구자들은 현재 주민이 만들고 있는 살아있는 나무다리뿐 아니라, 알려진 조상이 시작해 200년 된 다리, 그리고 마을만큼 오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다리도 확인했다. 다리 만들기를 시작한 지 66년이 됐는데도 아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도 있었다. 뿌리가 점점 자라 다리가 튼튼해지는 것은 좋지만 늘어나는 무게는 어떻게 감당할까.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과 짐의 무게, 그리고 홍수 때는 범람하는 물살의 하중까지 견뎌야 한다. 연구자들은 하중을 주로 받는 수평 방향의 뿌리 단면이 뒤집힌 ‘T’ 자 모양으로 심하게 변형된 사실을 발견했다. 또 수직 방향의 뿌리 단면에 원형이 많았지만 수평 방향에는 타원형이 많았다. 스펙 교수는 “뿌리는 기계적 하중에 이차적인 성장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농그리아트 마을의 복층 살아있는 다리 모습. 여러 세대에 걸쳐 짓고 수백 년을 쓰는 지속가능한 건축물이다. 아르쉬야 우르비자 보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고무나무를 이용한 살아있는 다리는 인도 산악지대의 토착기술이지만 현대 건축에 응용할 수도 있다. 이른바 ‘식물 건축’이 그것이다.  루드비히 교수는 ‘식물 건축’이 기후변화의 충격에 더 잘 적응한다고 말한다. 그는 “석재, 콘크리트, 아스팔트는 고온 사태 때 빠르게 더워지기 때문에 특히 도시에서 열 스트레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식물은 냉각 기능이 있어 도시 기상을 완화한다. 식물 건축의 개념은 나무를 심을 공간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무를 아예 건축의 필수 구조물로 삼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 8월 22일 치에 실렸다. 살아있는 나무를 주요한 건축 재료로 쓰는 ‘식물 건축’이 기후변화 시대에 관심을 끌고 있다. 루드비히 쇤레 제공. /조홍섭 기자
278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사음(私蔭)"과 "문화재기증" ... 댓글:  조회:3257  추천:0  2019-11-21
52살 이항복이 6살 손주에게 직접 써준 등 유물 17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이기환 선임기자       2019.11.21  .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이 52살 때 6살 짜리 손자에게 직접 써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과 한음(이덕형·1561~1613)’ 설화로 유명한 분이다. 한음과 함께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알려졌다. 그런 백사가 52살 때 6살 손자(이시중·1602~1657)에게 손수 써준 이 있다. 백사는 이 천자문을 써준 뒤에 “50살 노인이 힘들게 쓴 것이니 할아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직접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이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가 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가 쓴 친필 중에는 이 있다. 백사가 유교경전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 ‘제통’, ‘예기’ 편을 써서 병풍으로 만든 것인데, 백사의 9대손이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제작했다. 백사는 “나이 어린 학도나 아이들이 제사를 지낼 때 무턱대고 윗사람만 따라할 뿐, 그것이 무슨 의의인 줄 전혀 모르고 있음을 걱정해서 엣 경전에 나온 제의(祭儀)를 직접 써서 병풍으로 남긴다”고 기록했다.   .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의 15대 종손인 이근형씨(47·사업가)는 21일 400년 넘게 종가에서 간직해온 조선의 명재상인 오성부원군 이항복 관련 유품 1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유물 중에는 백사가 자손교육을 위해 쓴 과 ,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에 받은 와 등이 있다. 14대 종부 조병희씨(74)는 “백사 할아버지 유물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면서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손 이근형씨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항복이 쓴 .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증품 가운데는 , 외에도 백사가 임진왜란 직후 호성공신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가 눈에 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교서이다. 백사는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선조는 호성공신 86명 중에 이항복과 정곤수(1538~1602) 등 2명에게만 1등의 작위를 내렸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가 바로 그 유물이다. 이 교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임금을 수행한 백사의 공적’이 자세히 언급돼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교서에는 공신호(功臣號)와 공적, 특권(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노비·은자)과 공신 명단이 적혀 있다. 백사는 호성공신을 포함, 모두 5차례나 공신에 임명되었다. 35살 때인 1590년(선조 22년) 정여립(1546~1589)의 난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1613년(광해군 5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재위 1608~1623)을 호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임해군(1572~1609) 역모사건 처리 공로로 익사공신 2등에, 김직재(1554~1612) 옥사처리의 공로로 형난공신 2등에 각각 임명된 바 있다. 보통 공신의 후손들은 하사받은 초상화를 가문의 영광으로 귀하게 보존한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백사의 가문도 초상화가 낡으면, 베껴 그려서 후모본(後模本)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계승했다”며 “이번에 기증된 이항복 초상화 2점 모두 1604년 호성공신 초상과 1613년 위성공신 초상을 18세기에 모사하여 보존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항복 관련 유물들은 후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보존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전쟁 때도 후손들이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피난가면서 이 유물들을 모시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평소에도 정기적으로 초상화나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려 포쇄하며 보관에 힘썼다”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항복 종가 기증 기념 특별전을 2020년 3월부터 7월까지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종가의 품격’… 400년 오성 이항복 유물, 박물관 품으로 2019.11.2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민족의 귀한 보물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나선 종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 종가입니다. 400년 넘게 지켜온 보물들을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함께 보시죠, 김석 기자입니다. [리포트]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보필하며 지혜와 기개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이항복. 둘도 없는 벗 이덕형과 함께 힘든 시기에 나라를 이끈 공신이었습니다. ["이 조정 잘 지키고 있게. 내 돌아와도 엉망이면 그땐 정말 절교할 걸세."] 최고의 공신에게 내려준 특별한 초상화. 17세기 그림을 18세기에 다시 베껴 그린 것으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이항복의 기개와 인품이 엿보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등 공신으로 뽑힌 이항복에게 선조가 내려준 공신 교서입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를 잘 호위하며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았다.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학예연구관 : "교서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1등 공신은 유일한 교서인 거죠. 가치가 굉장히 높고 보물급으로도 가능한 문화재입니다."] 어린 손자를 위해 이항복이 손수 써준 천자문. 굵고 단정한 글씨로 정성껏 쓴 이 천자문은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선 가장 오래돼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후손들은 400년 넘게 종가에서 고이 간직해온 유물들을 널리 알려달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종가의 품격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은 내년 3월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됩니다. KBS 뉴스 김석입니다. /김석 기자 ================================/// 백사 이항복의 全身 초상화 나왔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임란 종전 3년 뒤 화원이 그린 2m 크기의 국보급 문화재… 14대 宗婦, 한석봉 쓴 공신녹권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키로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 1618)의 전신 초상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조선 중기 최고 수준의 화원이 그린 작품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된다. 이항복의 초상화는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반신상이 있지만,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전신상은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초상화는 이항복의 임진왜란 공신녹권(공신을 책봉하고 공훈을 적어 수훈자에게 준 문서) 등 다른 유물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될 전망이다.   1601년에 그려진 백사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 이항복의 후손이 27일 공개했다. /이태경 기자 이항복의 14대 종부인 조병희(72)씨는 27일 서울 종로구 한국미술발전연구소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들과 만나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백사의 공신(功臣) 초상의 대형 사진을 공개하고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 자리에는 원로 미술사학자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배석했다. 조씨가 조심스럽게 말아 가져 온 사진을 펼치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정말 처음 보는 그림인데…." "훼손이 거의 없네요!" 원본 그림의 길이가 2m에 달하는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는 임진왜란 종전 3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 작품. 공신으로 책봉된 직후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백사의 모습을 그렸다. 눈썹과 수염을 터럭 한 올까지 세밀하게 묘사했고, 흉배(관복의 가슴에 붙인 사각형 표장)의 공작과 모란은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청색과 홍색의 색채가 생생했다. 바닥의 채전(彩氈·카펫) 문양까지도 정교하게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엔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영의정(領議政)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증시(贈諡·시호를 내림)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선생(李先生) 휘(諱·이름) 항복(恒福) 화상(畵像)'이라 써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이항복임을 분명히 했다. 정양모 전 관장은 "이렇게 누구라고 적은 조선시대 초상화는 드물다"고 했다. 안휘준 교수는 "세부까지도 정성을 들인 묘사와 표현에서 기존에 알려진 반신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며 "조선 중기의 초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은 "기법이 매우 뛰어난 공신 초상화로, 보존 상태도 좋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종부 조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힌 유물은 이 초상화와 또 다른 이항복의 전신상 1점,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1642~1718)의 반신 초상화, 이항복을 임진왜란 극복의 일등공신으로 봉한 석봉 한호 글씨의 공신녹권, 이항복이 53세 때 손자를 위해 직접 쓰고 한글로 토를 단 '천자문' 등이다.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는 경기 포천시 가산면 묘소 앞에 있는 사당에 걸려 있었으며, 1940년대 한 차례 도난당했다 되찾은 적도 있었다. 2008년부터는 사당에 사진을 대신 걸어 놓고 원본은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다. 14대 종손 이상욱씨는 포천에 유물을 수장할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2015년 작고했다. 15대 종손 이근형(45)씨는 "제대로 보존하려면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종부 조씨는 "시부모님이 6·25 피란길에도 소중히 모셨던 초상화인데… 내 대(代)에서 기증하게 돼 안타깝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병하 학예연구실장은 "소장자의 뜻대로 기증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2784    [별의별] - 碑가 悲哀하다... 댓글:  조회:3504  추천:0  2019-11-20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또 '땀방울'... 무슨 일을 예고한 걸까 [중앙일보] 입력 2019.11.19  기자 위성욱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18일 약 1ℓ의 땀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 밀양 표충비. [연합뉴스]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밀양 표충비’에 또 ‘땀’이 맺힌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5시간동안 약 1ℓ의 물방울 흘러내려 민간에선 "사명대사의 우국충정", 전문가들 "결로 현상 가능성" 18일 경남 밀양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 동안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있는 표충비에서 약 1ℓ의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9시 이후에는 흐르던 물방울이 멈추고 이날 오후부터는 비석이 마른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홍제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표충비각에서 흥건하게 땀이 흐른 것은 처음”이라며 “하지만 오전 9시 이후부터 더는 땀이 흐르지 않아 비석 주변도 물이 마른 상태”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인 표충비는 ‘사명대사비’로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승려 신분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승병장이다. 무안면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출생지여서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불러 포로 귀환 임무를 줬다. 스님은 일본에 들어가 협상 끝에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표충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표충비는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그 조짐을 알려줬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등에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 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물방울이 맺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표충비에 땀 같은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이 비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과학계에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 밀양시 관계자는 “표충비는 좋을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땀을 흘리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대기가 함유한 수분이 온도 차가 있는 물체 표면에 물방울로 맺히는 결로현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위성욱 기자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땀 흘리는 비석     목차 정의 역사 줄거리 변이 분석 특징 의의 정의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전설. 역사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증거물만 있다면 인물이나 사건을 제시하여 환상적 요소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전한다.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결로 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으로 해명해도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민중은 비석이 지닌 영험함을 믿는다. 줄거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삼천 명을 환국시킨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옛 표충사 터에 비를 세웠다. 이 비를 세우고 나서부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혔다고 한다. 땀방울은 마치 구슬처럼 비석 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이 이 설화는 비석을 증거물로 하여 땀을 흘리거나 피를 흘리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이다. ‘땀 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알려진 비석은 경남 밀양에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기를 전후하여 물방울이 맺혀서 몇 시간씩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피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 벽골제의 복구비에는 비석에 낫을 갈다가 다친 사람은 영원히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분석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것은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 준다는 예지력을 믿는 민중의 신앙에 바탕을 둔다. 피 흘리는 비석에서는 본래의 자리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는 비석이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성성과 진실성을 갖춘 객관적 증거물을 바탕으로 인간의 왜소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특징 과 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한다.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는 경남 밀양 표충사에 있는 비석은 사명대사를 기리는 것이고, 전북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비석 근처에 몹쓸 짓을 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비석이 피를 흘린다는 전설이 있다. 의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비석이 먼저 알고 땀을 흘린다고 믿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훌륭한 인물들이 미리 알려 줄 수도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비석에 해를 가하거나 탐욕으로 훼손하면 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민중에게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집필 박성석(朴性錫)/경상대학교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개론(김태곤 외, 민속원, 1996년) 우리 민속 문학의 이해(김열규 외, 개문사, 1979년) 출처 김제 시사(김제시 편찬위원회, 1995)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네이버 지식백과] 땀 흘리는 비석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불교설화 땀흘리는 비석     분류 문학 > 콘텐츠모음 > 시놉시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스님의 충훈을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이 비석을 보면 섬뜩하다 하여 비석옆에다 창고를 세워 혈맥을 끊으려하자 한동안 못견딜 정도로 비석이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피가 흐르는 형상으로 금이 갔다.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그때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 · 25동란, 4 19학생의거, 5 ·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 · 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홀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설화내용]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확」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25동란, 4 ·19학생의거, 5·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 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 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밀양 · 표충사) [네이버 지식백과] 땀흘리는 비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ㅡ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   밀양 "얼음골";ㅡ       종 목  천연기념물  제224호  면 적 86,612㎡ 지 정 일 1970.04.24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외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의 높이 600-750m쯤 되는 곳의 골짜기 9천여평을 얼음골 이라고 한다. 봄부터 얼음이 얼었다가 처서가 지나야 녹는 곳이며, 반대로 겨울철에는 계곡물이 얼지 않고 오히려 더운 김이 오른다는 신비한 곳이다.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겨울에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더운 김이 나 "밀양의 신비"라 불리며 천연기념물 22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곳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이런 신비한 이유로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얼음골의 신비와 함께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인 가마볼 협곡은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이 태고적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두터운 암반이 깍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이 가마볼(암,수 가마볼)이 되었다 한다.    비가 온 뒤에는 녹아서 얼음이 보이지 않으며 어는 경우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곡입구에 들 어서면 냉장고 속에 들어간듯 쏴아한 얼음바람을 맛볼 수가 있다. 얼음골의 여름 평균기온은 섭씨 0.2도, 계곡물은 5℃ 정도. 물이 차서 10초 이 상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렵다. 얼음골의 정식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으로 불리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은 이 곳 밀양의 천황산 얼음골, 의성군 빙혈, 전라북도 진안군의 풍혈, 냉천, 울릉도 나리분지의 에어컨굴 등 네 곳이다.   이러한 곳은 특이한 기상현상으로 인하여 기상관광의 대상이 되는데, 지질학상 이 러한 지형을 애추(talus 혹은 scree)라고 한다. 단애면으로부터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풍화 산물이 단애 밑에 쌓여 만들어진 지형 을 애추라고 한다. 얼음골에서 냉기가 나오는 곳은 이 애추 사면인데 주로 주빙하 기후하에서 풍화작용에 의해 발달한 화석지형으로서, 구성물질이 모난 바위덩어리 로 되어 있다. 여름철에 이 애추사면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도로의 교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수십 미터를 미꾸러지듯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는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가 있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만어사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1)의 만어산(萬魚山, 670m) 만어사(萬魚寺)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사실이 되고야 만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내린 듯 또는 쏟아부은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대개 골짜기이기 쉽다)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만어사가 안겨 있는 만어산 곳곳이 그렇다. 이런 너덜지대가 가장 크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만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만어사 주변이다. 그 규모도 장관이지만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처럼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신기하게도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 그러나 모든 돌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고, 서너 개 중 한두어 개 어림으로 쇳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 또한 불분명하여 더 신비롭다. 만어석만어사 주변 골짜기 너덜지대를 가득 메운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들은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수많은 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만어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어사 주변 너덜지대의 돌들은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린다.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또,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고 하여 ‘종석’(鐘石)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만어석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무겁고 야물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는 이 돌로 ‘종경’(鐘磬)이라는 악기를 만들려고 돌을 채집하여 시험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어산은 옛날의 자성산(慈聖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인데, 그 옆에 가락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2)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레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3)를 받았는데, 그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옥 또는 돌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 또 살펴보면 대정(大定) 20년 경자(庚子)는 고려 명종 10년(1180)인데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만어사가 창건된 것은 46년 김수로왕에 의해서이며,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비로운 고대왕국 가야시대에 세워진 뜻깊은 절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그런 오랜 창건 역사를 기대할 만큼 고색창연한 고찰의 모습은 아니다.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 그리고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다만 수로왕 때나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많은 고기떼를 이끌고 불교에 귀의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자연경관이 독특하고, 고려시대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삼층석탑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어사 전경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석탑은 흔히 법당의 마당 중심에, 쌍탑일 경우에는 법당 마당의 좌우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만어사 삼층석탑은 현재 이런 가람배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절이 여러 차례 고쳐지어지면서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때문으로 보인다. 높이 3.7m 정도의 만어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이지만, 전체적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이나 지붕돌의 체감률 또한 조화로운 편이다.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었다거나 기단부 면석이 4매로 간소화되고, 몸돌의 굄이 1층과 2층에서는 1단이었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불규칙해진 점들을 감안하면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탑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고려 명종 때 중창되면서 현 위치에 세워진 탑으로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그외에 기단면석과 몸돌에 귀기둥이 표현돼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지붕돌 낙수면이 밖으로 불룩한 곡선을 그리며 급하게 내려오다 처마선에서 살짝 반전하여 수평을 찾고 추녀 쪽에서는 다시 살짝 치켜올라가 반전을 이루는 모습이 독특하다. 만어사 삼층석탑고려 중기에 세워진 자그마한 삼층석탑이다.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 역시 너덜지대의 만어석 또는 종석으로 만들어졌는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석탑 전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어서 더욱 신비롭다. 이런 석탑의 신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듯, ‘석탑을 두드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서 있는 자리나 모습이 마치 만어석들을 굽어보는 듯한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색적인 너덜지대의 터를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 아니냐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며, 『삼국유사』 ‘어산불영’의 ‘불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이 미륵바위를 신비스럽게 하는 이야기로는 해마다 0.3㎝씩 큰다거나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활빈당이 활약할 때, 한일합방, 3·1만세운동 때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며, 그외에도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때에도 땀이 흘렀다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근래에는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미륵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미륵바위 앞쪽에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으로 작은 샘이 보이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로써 만어산 너덜지대의 만어석들이 동해바다에서 낙동강을 타고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전설이 확실해지는 셈인가. 아무튼 너덜지대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만어사는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더불어 멀리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만어사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두드리며 전설을 확인하는 재미와 아울러 만어석의 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사색의 공간으로 삼아봄이 좋을 듯하다. 돌을 두드렸을 때 그 맑은 정도가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즐겁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어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783    [그 사람, 그 세계] - 뻣속까지 악기인... 댓글:  조회:3484  추천:0  2019-11-19
“수백년 동안 튜닝한 악기, 시간 지날수록 좋은 소리 들려줘”  2019.11.1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탈리아 명품 古악기 복원 전문가 플로리안 레온하드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드(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4대의 고악기도 함께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인 ‘W.E Hill & Sons’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벵게로프, 레오니다드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와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자문해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컬렉터들에게 자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딘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독일의 한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즈음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주었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앨버트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느 이자이, 미샤 엘만,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하게 됐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 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개성이 각기 다른 두 악기를 비교한 평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과르네리는 말을 한다”(바딤 레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아무리 슬퍼도 너무 고고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는 귀족이라면, 과르네리는 울고 싶을 때 땅바닥에 탁 퍼져 앉아서 통곡할 수 있는 솔직하고 겸손한 농부와 같아 인생의 맛이 묻어 있다.”(정경화) ―세계적으로 고악기 거래 시장의 규모는 얼마인가.  “연간 약 4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약 3000개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 중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라는 별명이 붙은 작품은 2011년 경매 당시 980만 8000파운드(당시 한화로 약 172억 원)에 팔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1741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비외탕(Vieuxtemps)’은 옥션에서 1600만 달러(약 179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레온하드는 22살 때부터 런던에서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는 ‘셜록 홈즈’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그는 “악기 시장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바이올린 중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며 주의를 상기시켰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셜록 홈즈가 범죄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면서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나도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죠. 바이올린을 CT촬영으로 스캔 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합니다.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나갑니다. 결국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진짜냐, 가짜냐.”  ―새로운 악기를 제작할 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  “런던에 있는 나의 작업장은 복원 전문가들에게 파라다이스다. 전 세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가 모든 이 워크숍을 거쳐 수리되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고악기들을 복원하면서 뚜껑을 열어보고, 틈을 메우고, 목재를 분석하면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터치하고, 느끼고, 기록해왔다. 이렇게 최고의 악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경험이 내 손과 머리에 쌓여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가 고악기 복원과 새로운 악기 제작에도 적용된다. 악기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그러한 장점을 종합하고 단점을 보완한 악기를 만들어낸다. 우리 공방에서 만들어낸 현대 악기의 경우 가격이 6만 달러 정도 한다.”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아 온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살짜리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연주하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대여해주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2782    [그때 그 사람] - 뼛속까지 영화인... 댓글:  조회:3034  추천:0  2019-11-19
안내 최은희와 입맞춤 연기 쭈뼛··· 남편 신상옥 "제대로 해라" 호통  2019.11.1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ㅡ 뼛속까지 영화인 신상옥 감독 신 감독 촬영 준비 중 낭떠러지 추락 “에이, 앵글 좋았는데…” 아쉬워해 김승호·김진규·최무룡 제치고 ‘연산군’ 주연 발탁 스타 만들어줘 은막 떠나자 “왜 일찍 관뒀나” 타박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다 죽어가는 철종(신영균)에게 복녀(최은희)가 입으로 물을 먹이는 장면. 신영균씨는 신상옥 감독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인 최은희씨와 입 맞추는 연기를 하는 게 곤혹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영화 캡처] “우리 좋은 작품 하나, 다시 한번 멋지게 해봅시다.”  천국에 가서 신상옥 감독을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최은희씨와도 약속한 일이다. 최씨가 투병 중일 때 “살아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자고, 셋이 다시 뭉쳐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맘껏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 첫 번 작품은 신 감독이 평생의 대작으로 기획한 ‘징기스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영균은 수도꼭지” 내 연기 늘 칭찬 신 감독은 말년에 병환으로 고생하다 2006년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영화계장’으로 진행됐고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영결식 때는 공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모두가 ‘빨간 마후라’를 불렀다. 수도 없이 부른 노래지만 그토록 슬프게 들린 적은 없었다.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가기 한두 달 전쯤 내 제주 집에 온 적이 있다. 하루 이틀 머물러 보고는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그가 부탁 하나를 해왔다.  “나 여기서 좀 쉬게 해줘. ‘징기스칸’ 콘티를 여기서 끝내야겠어.”  “예, 언제든 오십시오. 우리 마지막 작품 같이 하십시다.”  우리는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곧 보따리 싸서 다시 오겠다던 신 감독과 그렇게 영영 이별을 하게 될 줄을….  내 인생의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신 감독이 1순위다. 나를 영화계에 발 들이도록 한 건 ‘과부’(1960)의 조긍하 감독이지만,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건 신 감독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이끌고 있었는데 잘나가는 배우들도 그와 일하고 싶어 경쟁을 했다. 특히 ‘연산군’(1961)은 김승호·김진규·최무룡 등 당시 최정상 스타들이 서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는데 신 감독이 “이건 신영균이 딱이다”며 아직 충무로 신출내기인 나를 점지했다. 연극 무대에서 다진 나만의 폭발력을 주목한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신 감독은 정말 영화를 위해서 태어나 영화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는 빛을 좇는 불나방이 됐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신상옥 감독은 카메라가 돌면 물불을 안가렸다. 북한산에서 영화 ‘강화도령’을 찍다가 7~8m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했다. [중앙포토] 한번은 ‘강화도령’(1963)을 찍을 때였다. 신 감독은 카메라 앵글을 잡으려고 북한산 암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했다. 한쪽 눈을 감고 루페(렌즈)를 보며 앞으로 가다가 한순간 이끼 낀 곳을 헛디뎠는지 7~8m 아래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낭떠러지 아래 가시넝쿨이 있어 목숨을 건졌다. 팔이 좀 긁히고 뒷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가 박살 나는 정도로 끝이 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정작 그는 아픈 내색도 않고 “에이, 앵글 좋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도 그렇고 당시 배우들은 신 감독을 참 좋아했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자를 카메라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선을 정해두고 몇 발짝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가 자유롭게 자기 감정을 맘껏 표출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움직여줬다. 물론 맘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거침없이 ‘컷’ ‘NG’를 외쳤다.  신 감독, 사망 두 달 전까지 작품 몰두 그때는 영화 필름이 비싸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는 감독들이 많았는데 신 감독은 달랐다. 남들은 필름을 한 3만~4만 자 쓴다면 신 감독은 7만~8만 자씩 썼다. 사업 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빚쟁이들이 촬영장까지 찾아와 옆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세트장에 고급 가구나 집기가 필요하면 자신의 집에서 쓰던 걸 가져와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아 부인 최은희씨가 종종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양반은 진짜 뼛속까지 영화인이구나’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 감독 앞에서 최은희씨와 입술이 맞닿는 연기를 하느라 진땀 뺐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강화도령’에서 최은희씨가 물 한 모금을 자기 입안에 넣어 다 죽어가는 내게 먹이려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인 신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정면으로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가 약간 비뚤어지게 고개를 돌리면 신 감독은 어김없이 컷을 외쳤다. “물을 입속에 넣어야지 왜 옆에 다 흘리나. 제대로 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신 감독은 사랑하는 여인보다 영화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 같았다.  같은 ‘평산 신씨’라서인지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신 감독은 “연기 지도를 안 해도 쓸 수 있는 배우 중 하나”라고 나를 치켜세우곤 했다. 한번은 촬영장을 찾은 내 아내에게 이런 말도 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10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10번을 다 진짜 울어요.” 무뚝뚝한 신 감독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 감독은 100% 영화인이었다. 70년대 후반 내가 은막을 떠난 이후 나는 그의 불만 섞인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는 “신영균에게 흠이 있다면 배우를 일찍 그만둔 거야”라며 아쉬워했다. 늙으면 늙은 대로, 노망이 들면 노망이 든 대로 배우의 생명은 길고 길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욕심 같아선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멋진 영화를 남기고 싶지만, 신 감독이 없으니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2781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큰 글자 책" 있었으면... 댓글:  조회:3486  추천:0  2019-11-18
“돋보기 필요 없어요”… ‘큰 글자’로 되찾은 독서의 즐거움 기사입력 2019.11.18.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작은 글씨 읽기가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 글자 크기를 키운 큰 글자 책이,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빌려 볼 수 있다는데, 1.5배 큰 글자로 채워진 책을 김세희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종종 동네 도서관을 찾아 독서를 즐기는 최행식 할아버지. 그런데 다른 책들과 뭔가 달라 보입니다. 보통의 책들보다 글자 크기를 1.5배 키운 '큰 글자 책'입니다. [최행식/서울시 동작구 : "안경을 벗었는데도 크게 잘 보여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평소 인문 서적을 즐겨 읽는 문성재 할아버지도 큰 글자 책이 반가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글자가 커진 대신 책이 조금 두껍고 무거워지긴 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성재/서울시 동작구 : "(무게는)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조금 무거운 건 그만큼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죠)."] 10년 전 80여 개 공공 도서관에서 시작된 큰 글자 책은 이제는 전국 대부분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 인기 대출 목록과 인터넷 서점 판매 목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큰 글자 책이 2백여 종이 넘습니다. 다만, 크기가 커진 만큼 비싸진 제작비가 관건. 여지껏 국고 보조금으로 운영돼 왔는데, 출판업계의 자발적인 참여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손지혜/한국도서관협회 사업본부 운영팀장 : "일본 같은 경우에는 특정 한 출판사가 모든 도서의 판권을 사서 대활자본, 큰 글자 책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유통이 더 잘 되고 있는 편이고..."] 고령화 시대, 어르신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아주려는 노력이 큰 글자 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세희입니다. /김세희 기자
2780    "제 핏줄을 이어가며 건사한다는것은..." 댓글:  조회:2807  추천:0  2019-11-15
형님전 상서 2019년 11월 14일  작성자: 김인섭                                                 /대련 김인섭  형님,이번 한가위를 부모님 선산에서 보내며 보고 느낀 바를 적어 올리겠습니다..   그날 오전 부모님들께 제사상을 올리면서 작년 이맘때 영생의 길에 오르신 어머니를 아버지 유택에 합장하고 형님과 나란히 엎드렸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나이가 말미암인가요 어쩐지 지난날 굶주리며 헐벗어 배고프며 춥던 시절의 모진 사연들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며 우울해 지고 있습니다.부모님들이 우리 가족을 이끌고 보릿고개의 엉키고엉킨 가시덤불을 헤가르며 지어낸 만가지 고생담들이 가슴에서 교차되며 퍼그나 먹먹해 지었습니다.하산하는 산길에서 허허로운 벌판에 외홀로 서있다는 심란한 기분을 도저히 삭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제일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꼴불견이었다면 주위 선산에 온 제꾼 거의가 60대 혹은 70대인데 벌초객 중 젊은이의 모습은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간혹 로구(老躯)를 이끌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올라오신 존장(尊长)들과 갈 길 바쁘신 로인들이 가을 옷자락을 여미며 조상 영전에 엎드린 모습은 보기에 숙연했습니다.각자가 당신의 예정을 짐작하는 듯 숙배(肃拜)를 올리는 자태에 파란이 많았던 지난 세월의 세례가 슴배었다고 류추해보니 무척 가긍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형님,지금 문중벌초(门中伐草)의 분위기가 옛날과 완연히 달라졌습니다.화장이 법제화 된 현실에서 더 이상의 분묘를 들일 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말말고 유구한 나날을 두고 전해오던 장묘의례(葬墓儀禮)가 사라지지 않는가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제사 흔적이 보이지 않는 묘소가 수두룩하고 가토 벌초를 했다해야 지난 시절과 대비가 안되는데 버려진 묘자리도 숱해였습니다.지난날 이랬다면 곱빼기로 욕을 얻어먹었을 행실이 오늘은 눈앞에 버젓이 펴져서 드러나 있습니다.오래지 않아 고향 산역을 주선하고 산소를 돌볼 후손이 씨가 말라가지 않겠는가 걱정했습니다.물질주의가 팽창하는 오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핏줄을 근거로 사회를 전승시키고 조상과 고향을 습득시키기가 쉽지않을 같기만 합니다.뒤이어 들이닥칠 전환의 소용돌이는 우리 몫이 될 것만 같아서 당혹하기만 합니다.사뢰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멀잖아 성묘의 발길마저 끊어질 고향의 선영들을 도대체 어찌 해야 할가요!?   이웃의 젯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옛날 번성하던 민족 촌락의 대부분에는 아기 울음소리에 이어 초등학생마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절반도 남지않은 가옥들엔 로년 어른들 아니면 당신을 숙명에 맏겨버린채 최후 행사만을 기다리는 외짝들이 거의 전부라는 이야기입니다.지난날 우리 시대에는 경조사 행사 때 각지의 피붙이들이 모여앉아 서로 안부를 전해가며 뉴대를 맺아가던 미풍은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생업의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혹시 참여한다 해도 그들에겐 강제로 불려나온 부역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세상살이가 치열해진 탓이라 체면차리기조차 어렵다는 세월의 개탄이기도 합니다만 세태가 그러하니 그들을 나쁘다고 일갈(一喝)할 일만이 결코 아닌 같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 문제입니다.지금 넘들은 기껏해야 아들 딸 구별없이 하나만 생산하는데 자식이 둘이면 치다꺼리로 되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리유입니다.웰빙이라는 시대의 화두 앞에서  물질 풍요를 자기들만 누리면 된다고 오도된 잘살기 폐해입니다.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 행복하거나 없어서 섭섭하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다는 이것입니다.이렇게 몇 세대가 내려간다면 어떤 집안은 절손(絶孫)의 화를 면할 수 있을가요.제 핏줄을 이어가며 건사한다는 가장 기본적 본능이 사라지고 있는 엄중한 현실입니다.이제는 친족들의 혈통 관리가 어려워지고 고향 마을도 선산과 함께 사라질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이제는 자식이 어미나 아비의 성에서 골라 달아도 문제시 되지않는 세월이 되었습니다.자식이 제 어미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된다 합니다.김씨 피붙이가 리씨의 혈육으로 둔갑하고 내 자손이 생면부지 남의 후손으로 매김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느새 사촌부터 가파로운 망각 곡선을 타는 오늘인데 형제 자매의 성이 이렇게 갈라진다면 사촌끼리 혼인을 한들 하등의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아니 될가요!   형님,이제는 지나간 불효의 변명이나 유아적인 슬픔을 거듭하지 않겠습니다.세태 조류인 양 밀려드는 심란한 과제들이 하나같이 벅찬 탓입니다.불평을 부리기엔 너무도 힘겹고 다급합니다.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 이제 남은 시간마저 길지 않다는 각성 때문입니다.유사이래 전례없는 풍요를 누린다고 너나없이 호언하는데 밀어닥친 시대의 소용돌이가 원망스럽습니다.우리 등 뒤로 겹쳐지는 고향마을의 상실과 문화전통이 퇴락하는 정경이 흡사 시대의 종막인 양 비감스러운 것입니다. 하필 이 비운이 왜 우리 인생에 드리워 질가요?아닌게 아니라 원망스럽습니다.   형님,무심코 간지를 짚어 보니 나도 예순갑자를 한 바퀴 돌고도 일곱 고개를 넘었다는 각성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고 쌓여가는 나이 더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시계 시보판처럼 명백한 인생 단계의 확정 앞에서 아연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실이 이러히 엄연하니 선배들과 부모님들이 지성으로 꾸려온 우리 민족사회가 우리의 손에서 거덜이 나지 않는가는 자책에 민망하고 무색해 지고 있습니다.   형님 늘 하던 버릇대로 수다가 도를 넘는 같습니다.이 생각 저 생각이 갈피없이 떠올라 되는대로 적었으니 괘념하지 마십시오.세월이 가는 대로 눈치나 보며 살다 보면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민족도 새 정착과 부흥을 이루겠지요.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해도 력사는 그냥 자기 맥을 이어 가겠지요. 남의 뒤를 따르다 보면 새로운 질서야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형님,고향마을의 지난날들이 불현듯 그립습니다.그 공동체 속에서 동잇땀을 흘리던 나날의 어느 것이 그립지 않은 것 없습니다.더구나 농사의 계절마다와 설명절이면 동네 남녀로소가 모여 즐기었고 동네의 관혼상제 때면 좌상 어른들의 주선하에 제 풍속과 전통을 정연히 뽐내던 그 때가 바짝 그리워 지고 있습니다. (끝)
27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장애인 문학",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99  추천:0  2019-11-14
전용 집필공간 단 한 곳뿐… 작품발표도 바늘구멍 뚫기 사각지대는 어느 분야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부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대중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각지대가 발견되곤 한다. 장애인 예술에선 ‘문학’이 그렇다. 미술, 무용 등 분야가 미약하게나마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것과 달리 엄연히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 분야는 정부의 지원과 관심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 대한민국장애인창작집필실 개관식 모습. ◆한 곳뿐인 집필실도 없어질 처지  현재 장애인 문인을 위한 집필 공간은 전국에 단 한 곳뿐이다. 대전에 있는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 집필실’이 그것이다. ‘장애인인식개선오늘’이라는 시민단체가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한 ‘장애인 전용공간 임차 지원사업’에 선정돼 마련한 공간이다. 그동안 이 집필실을 직간접적으로 거쳐 발표된 책만 35권이다. 발굴한 작가는 51명에 이른다.  정부 지원은 전혀 없다시피하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는 지원금만으로는 매월 200만원에 육박하는 집필실 운영비를 대기에도 빠듯하다. 집필실을 운영하는 박재홍 대표는 “장애인 창작 집필실은 중중 장애인이 직접 와서 문학에 관해 토론하고 집필하는 공간인데도 휠체어 리프트 등 장애인 관련 편의시설 설치비 등에 관한 지원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박 대표가 사비를 털어 운영비를 충당해왔다. 그마저도 최근 공모사업 마감에 따라 임차 지원금을 반납해야 할 위기에 내몰렸다.  장애인 문인들의 창작 결과물을 선보일 매체 역시 크게 부족하다. 현재 장애인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는 계간 문예지 ‘솟대문학’과 장애인 창작 집필실이 운영하는 출판 지원 프로그램 외에는 없어 바늘구멍보다 좁은 실정이다. 자비로 책을 펴내거나 언론사 신춘문예 같은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 문학 발전을 위해선 그 토대부터 다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국내에서 발간된 서적 중 장애인이 읽거나 들을 수 있게끔 대체자료로 변환된 서적의 비율은 겨우 5%에 그쳤다. 시각장애 또는 청각장애를 가진 국민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는 20종 가운데 한 종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열악한 지식정보 접근성 문제가 장애인 문학의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  대통령 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는 올해부터 2018년까지 적용되는 제2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을 내놓으며 “대체자료 비율을 2018년까지 10%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놓고 장애인들 사이에 ‘보여주기식 숫자놀음’에 그쳐선 안 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애인 문인들은 대체자료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2013년 중봉조헌문학상 대상을 받은 1급 시각장애인 손병걸 시인은 “조금 전문적인 인문학 서적이나 다양한 고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국에 단 하나뿐인 장애인 문인 전용 집필실인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 집필실’의 모습. 집필실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장애인인식개선오늘’의 박재홍 대표는 “단순히 공간만 유지할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게끔 정부 차원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인식개선오늘 제공 ◆표절 사각지대에 놓이다  이처럼 열악한 현실을 비집고 세상에 얼굴을 내민 장애인 문인의 작품은 저작권 등 측면에서 법적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이 붙어 온라인을 떠돌거나 고교생이 작품을 도용해 백일장에서 수상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인들은 “우리의 권리가 너무나 무시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2013년 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 시인은 자신의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제목이 바뀌어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문장 몇 개를 조금 수정했을 뿐 시의 흐름이나 주제는 완전히 똑같았다.  확인해 보니 그 시는 1995년 한 문예지에 발행인 이름으로 게재됐다. 그해 김 시인은 시집 출간을 위해 한 출판사에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등 자작시들을 보냈다. 이 문제를 조사해 온 ‘솟대문학’ 측은 저작권 반환을 위한 소송을 준비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현재는 손을 놓고 있다.  표절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김옥진 시인의 작품 중 하나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아 온 모 대학교수는 잘못을 인정하고 해당 시를 삭제했다. 한 여고생이 장애인 문인의 단편소설을 베껴 쓴 작품으로 수상한 다음 그 경력에 힘입어 대학에 합격한 사례도 있다. 정승재 장안대 행정법률과 교수는 “정부의 장애인 문인 지원 대책에 적극적인 저작권 보호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며 “장애인 문인들의 저작권 침해 피해를 막을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필웅·김승환 기자  ///ⓒ 세계일보  =======================///   뇌성마비 시인, “작품 저작권 강탈당했다” 솟대문학에 도움 요청…조사한 결과 ‘도용 맞다’ 방귀희 발행인, “바로잡기 위한 법적절차 밟을 것” 에이블뉴스, : 2013-12-31  관련기사 - ‘표절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문학 -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 절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은 20년 전 김준엽(뇌병변장애) 시인이 쓴 작품이다. 김준엽 시인은 중증 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써서 2011년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고, 새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으로, 운동선수로, 사회복지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발행인 방귀희)에 “작품 저작권을 강탈당했다. 세상에 알려 바로잡아 줄 것을 바란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시 7편을 제출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김준엽 시인의 활동보조인이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인터넷상에서 좋은 글로 사랑받고 있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을 했더니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윤동주, 정용철, 작가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솟대문학은 신속히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정한 뒤 사실 관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준엽 시인은 20여년 전 하이텔 사이버문단을 통해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하던 중 1995년 봄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시집 발간 제의를 받고 작품을 보냈다. 하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시집 출간도 못하고, 작품도 돌려받지 못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알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월간 ‘좋은 생각’ 1995년 9월호에 게재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가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 솟대문학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 시인의 작품으로 게재됐다”면서 “정 시인은 ‘인생이 끝날 때’로 제목을 수정해 발표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작자미상을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고 있고, 가장 많이 알려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경우 윤동주, 정용철로 작가가 표기되는 등 김준엽 이란 작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방귀희 발행인은 “김준엽 시인의 작품이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면서도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김준엽 시인의 작품임을 밝혀 저작권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밝혔다. 방 발행인은 또한 “이 같은 작품 도용 사례가 적지 않기에 장애인들의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환혼이 들면’, 정용철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 미상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보기로 하자.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정용철 (좋은 생각 발행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가족에게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미상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볍게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사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권중훈 기자 ======================/// [박지영의 잠꼬대] 김준엽 시인의 카톡 문자를 보고     박지영 문학마당 편집장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앞으로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다 1994년 봄날에 지은 작품입니다.”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 카톡으로 필자에게 전해 온 말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온라인 상에서 작자미상 혹은 윤동주 시로 떠돌다 1995년 9월호 ‘좋은 생각’에 게재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정용철 작품으로 실렸는데, 원래 어느 출판사에서 펴내려고 하다 출판사의 부도로 허사가 된 원고도 못 받은 작품이라 기억이 가물거리는 김준엽 시인의 작품인“내 인생의 황혼이 들면”과 유사하다고 여겼다. 특히 작품성이 좋아 둔갑한 것이라는 점과 중증 장애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십 수 년 전에 “홀로서기”라는 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서정윤시인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교가 되는 간과되지 않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묵과할 수 없는 것이 그가 대처하기 어렵고, 법적 제도적 대응이 늦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요 중증 장애인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공분을 사고 있는 일이다. 그는 2011년 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장애인 문학창작예술전용공간인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집필실(운영단체인 장애인 인식개선 오늘 대표 박재홍)에서 장애인과 일반인 창작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대장글 시리즈 첫 번째 공모사업에서 선정 작가로 선정되어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이라는 설움을 겪는 것도 억울한데 표절까지 짊어져야 한 것이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다.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을 앞둔 대표 선수로 대구사이버대학교에 재학 중인 사회복지학과 전공의 늦깎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매력적인 남자다. 표절(剽竊)의 어원적 의미는 '표절(Plagiarism)'의 어원인 라틴어의 '플라지아리우스(Plagiarius)'라는 유괴범을 뜻했다(위키피디아). 17세기에 말은 영어에 끼어 들었지만,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가의 문예 창작물을 최대한 똑같이 베끼고 불필요한 창작을 배제하라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지금의 표절 인식은 근대화의 산물이고 작금에 이르러 선진화 된 사회를 살고 있는 한국은 인식과 제도적으로 그 초입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짙다.  장애도 천형이라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가 영혼으로 쓴 시가 승화되기 보다는 건강한 그것도 “좋은 생각”의 발행인이 그랬다는 생각에 김준엽 시인의 작품을 보면서 더 가슴이 저리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시인)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중략)  이렇듯 일상에서 자신의 성찰에 담담하게 명상하듯이 내려가는 이타심이 가득한, 불편하기 때문에 바로 보이는 세상이라고 어느 시인이 얘기했듯이 그 사람에 있어 진실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그는 이미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으로 살고 있고 그것을 훔치는 행위를 하는 부적절한 정상인이 편협되어 보이는 것에 대해 신년 벽두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 디트news24  
2778    [겨레자랑] - "사전동행자" = "사전사나이" 댓글:  조회:3273  추천:0  2019-11-13
'마음의 부자' 김성규씨의 사전 사랑 (ZOGLO) 2019년11월13일  인물이름 : 김성규   “숙명이라 할가…”   1983년 21세 때다.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과 3학년생 김성규(1962년 생)는 시간 날 때마다 훑어보는 《조선말사전(6권사전)》 속의 낯선 외래어에 점차 호기심을 갖게 되였다. 그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사전 속 외래어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베껴보는 것.   무작정 베끼다 보니 어느새 3, 4천개 외래어를 접하게 됐다. 워낙 언어에 애착이 있어서 그는 그 외래어에 상응한 중국어도 알고 싶어 외래어 단어 번역을 취미삼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훗날의 사전편찬으로 이어지고 평생직업으로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때다. 우연 속에도 필연이 있다고 했던가? 졸업실습을 출판사에서 하게 되였고 출판 업무를 접촉하면서 외래어사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198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출판계통이 아닌 정부기관에 배치받았다. 그러나 사전에 대한 애착은 가셔지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김성규씨는 낮에는 맡은 바 사업을 착실히 완수하는 한편 저녁시간을 리용하여 사전편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사전 편찬은 인내력과의 싸움이였다. 표현의 자유가 무한한 문학작품과 달리 사전 편찬은 티끌 만한 상상력도 용납할 수가 없다. 무미건조하게 기계적으로 한페지 한페지씩 쌓아가는 과정이 혹독한 마음 수련의 과정이였다. 출근시간을 제외하곤 매일 6~7시간 정도 사전편찬에 심혈을 몰부은 결과 1년 만에 원고를 마무리지었다.   이내 들뜬 마음으로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했으나 결국 ‘퇴짜’를 맞았다. 무어라 간곡하게 당부하던 편집선생의 말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공든 탑이 일조일석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런 헛고생을 하지 않겠다고 원고를 트렁크 속에 처박아두고 몇년 동안 필을 놓았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 한국간 민간래왕의 문이 차츰 열리면서 그는 신문과 간행물을 통해 다시 낯설은 외래어를 접촉하게 되였다. 마음 속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사전 편찬’이란 소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중한 교류에 외래어사전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금 사전 편찬 작업에 뛰여들었다.   원고 작성에 이어 조판까지 스스로 마쳤다. 리유는 단순했다. 활자조판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서 모은 돈으로 ‘386 컴퓨터’ 한대를 마련하고 조판프로그램을 깐 후 직접 조판에 들어갔다. 드디여 《한중외래어사전》이 1996년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150만자 되는 이 사전은 국내 여러 대학 조선어(한국어)학과로부터 필수 공구책으로 선정되여 각광을 받았다.   사전 편찬에서 행복감, 획득감을 느낀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예 출판사로 자리 옮겨 매일매일 사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2001년 출판사에서 사직하고 지금까지 자유작가로 지내오고 있다.   《한중외래어사전》을 시작으로 그는 계속해서 2000년에 《한중외래어사전(중한대조편)》, 2001년에 《영-한-중 컴퓨터용어사전》(공저), 2005년에 《뉴밀레니엄 한국어외래어사전》, 2011년에 《신편 한국어외래어사전》, 2019년에 《포켓 한국어외래어사전》 등을 펴냈으며 큰 공을 들인 《중한대사전》(공저)도 출판을 앞두고 있다.     총 천여만자에 달하는 사전들을 펴낸 그는 지금도 매일 사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휴식 삼아 텔레비죤 방송을 시청할 때도 새 단어들이 나타나면 꼭꼭 메모하군 한다. 사전이 나오는 순간에도 세상에 새로운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에 사전 편찬은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자의 성공 절반은 녀자의 공로”라는 말은 김성규씨에게 너무나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모든 정력을 사전 편찬에만 쏟아붓는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아내는 소리없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았고 짬만 나면 책상에 마주 앉아 원고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아내의 든든한 뒤바라지가 그에게 큰 조력임이 틀림없다.   사전과 수십년간 인연을 이어오면서 비록 부와 지위 등 세속적인 성공을 얻지 못했지만 그는 "후대들에게 무언가 남겨줄 수 있는 보람찬 삶을 살고 있다"며 ‘마음의 부자’라 자칭했다.   ///료녕신문 /최동승 기자
2777    [별의별] - 장춘에 "술문화박물관" 없다?... 있다!... 댓글:  조회:3172  추천:0  2019-11-13
당신은 백만원짜리 모태주를 보았는가? (ZOGLO) 2019년11월13일  길림성술문화박물관 67개 계렬, 6천병에 달하는 소주 소장해 기네스북에 올라     물과 곡물이 만나 손을 꼭 잡고 오랜 기다림 끝에 빚어진 옥액경장, 술은 천시와 지리, 인화의 걸작이다. 술은 또 생활과 기억의 기록이다. 술하면 떠오르는 두 명인이 있으니 바로 시선 리백과 방랑시인 김삿갓이다. 리백은 “기로인께서는 황천에서도 여전히 맛있는 술 빚고 계시리라. 그러나 무덤 속 저승에 리백이 없으니 그 술을 누구에게 파시려는지( 纪叟黄泉里, 还应酿老春。夜台无李白,沽酒与何人。)”라는 유명한 시구를 후세에 남겼다.  김삿갓은 “천리 먼 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는데 남은 엽전 겨우 일곱잎이나 오히려 많다 여기네. 주머니 속의 너에게 깊이 숨어라 경계했는데 황혼녘 들판의 주막에서 술을 봐버렸으니 어이할가.(千里行裝付一柯/餘錢七葉尙云多/囊中戒爾深深在/野店斜陽見酒何)”라는 명시를 남겼다. 술향기가 천년 두고 기억할 시인을 낳았다면 시인은 그 답례로 반만년 두고 전할 술이야기를 빚었다. 중국 17대 명주 전시해 술 문화와 력사 알리다 백산방대그룹의 녕봉련을 알기전 명주 한병도 나오지 않는 장춘에 술문화박물관이 있다는게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민영기업인 백산시의 방대그룹이 중국 명주 류통업계에서 한자리를 당당히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은 지 꽤 오래 되지만 장춘에 세워진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이 이 민영기업의 주인 녕봉련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고 길림성술문화박물관에 한병에 백만원에 가는 고가의 모태주를 포함해 소장가치가 어마어마한 명주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 줄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야 알게 되였다. 장춘 아태대가를 따라 남쪽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리다보면 위성로와의 교차점에서 500메터쯤 직진하면 바로 큰길 옆에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이 시선에 안겨온다. 이 박물관은 국내 명주 류통업계의 쟁쟁한 실력파인 백산방대그룹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야심작으로서 2012년 8월에 개관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3,000여평방메터의 공간에서 참관도 할 수 있고 또 주류 구매 그리고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까지도 동시에 가능한 기능을 갖추었다. 3층으로 된 건물은 그중 두층을 술문화전시구로 사용하고 있는데 국내의 현대명주로부터 세계명주, 길림성술과 기타 성에서 생산되는 지방술, 담금술 그리고 한병에 백만원도 넘어가는 국가급진품소장술인 모태주전문전시구에 이르기까지 70종류에 가까운 근 6,000병에 달하는 각종 술을 전시하고 있다.     현대명주전시구에 들어서면 전국 동서남북의 내노라하는 술공장들에서 생산한 명품술과 잘 팔린다는 술들과 대면할 수 있다. 전시와 판매를 동시에 겸비한 장소라서 피뜩 보아서는 어느 술은 구입이 가능하고 어느 술은 진렬품인지 구분이 잘 안되므로 유관 일군에게 물어봐야 한다. 술문화박물관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또한 술과 술문화력사를 알아가는 좋은 시간이다. 담금술전시구는 유리병에 소주와 함께 가득 채워진 담금재료들을 통해 우리에게 양생술로서의 담금술의 문화를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인삼, 록용, 불로초 그리고 령지, 천마, 더덕, 송이에 운남의 삼칠, 청장고원의 설련화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국가급진품소장술진렬구에는 공화국이 건립되여서 1952년에 있은 첫 주류평의회에서 탄생한 전설의 4대명주로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 마지막으로 있은 제5회 주류평의회에서 나온 17대명주가 한병도 빠짐없이 진렬되여 있다. 중국 명주의 력사를 료해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1989년 이후 유관부문에서는 더는 주류평의회를 조직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제 다시 명주이름을 가지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미정이다. 량곡대성인 길림성에 명주가 하나도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4대명주로부터 17대명주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쟁쟁한 부동한 지역, 부동한 브랜드, 부동한 향을 가진 명주들은 부동한 시기 국내 전반 소주 소비시장을 령솔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주류기업들의 생산과 기술 수준을 향상하는 추진제 역할을 남김없이 발휘해왔다. 한병에 백만원 넘는 모태주와 친근감 주는 길림성 지방술 국주로서의 모태주는 세계 3대명주에 속한다. 주식시장에서 팔고 사는 모태주 한주의 주가가 지금 1.200원에 간다고 하니 이 고귀한 명주의 값을 잘 설명해주는 또 한가지 생동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의 주인장인 녕봉련은 모태주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가지고 박물관 2층에 단독전시구를 만들어 명주들을 귀빈을 모시듯이 진렬하고 있다.     국주로 불리우는 모태주.     한병에 백만원 넘는 모태주.   부동한 년대에 만들어진 모태주, 인민대회당 준공 50주년, 공화국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특제한 모태주 그리고 300세트만 출품된 한정판 10대 청동기모태주, 56개 민족을 상징하는 모태주...구태여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이 진렬장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해설원이 알려주는 소장품 모태주 가격에 두눈이 뒤집어질 정도다. 그중에는 모태주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1915년 빠나마국제박람회 때 얼굴을 보인 모태주가 일정량으로 들어간 술이 있으니 말 그대로 이 박물관의 자존심이다. 지금의 시가로 따지면 100만원을 훨씬 넘기고 있다고 한다.   길림성술전시구에 들어서면 당년에 백성들의 술상에 흔하게 올랐던 대중술들이 눈안에 안겨온다. 저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고 거리감을 확 줄여주는 술전시구임에 틀림이 없다. 애주가들은 덧없이 흘러간 그 세월에 종종 마셨던 유수천, 도남향, 토얼하, 대천원, 룡천춘 그리고 연변 애주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조양주... 그 술이름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느라면 그때 이야기에 푹 젖어들어가 감개가 무량하기만 하다. 길림성술전시구에는 우리 성 12개 현, 시의 술공장에서 생산되던 150여종의 600여병에 달하는 술이 전시되여 있다.     길림성에서 생산된 술.   술문화박물관에서는 또 시민들을 위하여 매달 9일에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을 무료로 해드리고 있다. 공장과 계약을 체결하고 직접 술공장에서 전문일군이 매달 9일이 되면 박물관에 와서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하다고 하니 장춘 시민들로 놓고 말하면 일종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집에다 애지중지 보관해오던 모태주나 오량액이 진짜인가를 알아보려면 시간을 내 한번 가서 시원하게 감별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013년 10월,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은 67개 계렬, 5,759병에 달하는 소주를 소장해 기네스‘제일 많은 수량의 소주를 소장'한 세계기록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14년 10월,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은 또 국가 4A급유람구로 선정되여 장춘을 찾는 유람객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유구한 술문화의 력사를 료해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세상만사를 론하던 감각을 찾고 싶은가? 술향기 따라 문화 따라 길림성술문화박물관으로 한번 행차해보시라.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2776    [그것이 알고싶다] - 할리우드 댓글:  조회:3557  추천:0  2019-11-11
영화사전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1]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지구.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약 12㎞, 비벌리힐스 동쪽에 있는 지역.  [2] 세계적인 영화 산업의 중심지.  [3] 미국 대자본 영화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교외로 영화 산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곳이었다. 1908년 영화특허회사(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사가 설립되자 많은 독립 영화사들이 미국 동부의 강력한 법적 규제와 트러스트 집단의 견제를 피해 남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10년 겨울, 바이오그래프(Biograph)에서 일하던 D. W. 그리피스(D. W. Griffith)는 자신의 영화사를 이 지구에 두었다. 이 회사가 바로 네스터사(Nestor FilmCompany)인데 실질적으로 1911년 10월 27일 로스앤젤레스시 교외, 할리우드라고 불리우는 곳에 사무실을 열었다. 1911년까지 거의 20여 개의 독립 영화사가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화창한 날씨, 사막과 산, 바다로 이어지는 다양한 풍경, 값싼 부동산이라는 천혜의 조건은 영화를 만드는 데 매우 이상적인 곳이었다. 땅값이 쌌으므로 페르난도 계곡에 유니버설 시티(Universal City)와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튜디오가 들어설 수 있었다. 1920년까지 할리우드 주변에 세워진 50개의 스튜디오가 미국 영화의 90%를 제작했다. 영화 스튜디오는 매우 전문화된 제작 지향적인 공간이었다. 각 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완벽하고 신속하게 구현하기 위해 감독, 촬영 기사, 음악가, 배우를 비롯해 많은 조직과 인원을 보유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메이저 스튜디오로는 엠지엠(MGM), 패러마운트(Paramount),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 유니버설(Universal),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thers), 알케이오(RKO), 콜럼비아(Columbia) 등을 들 수 있다. 할리우드는 이 시기 연간 400~500편을 제작했는데 대개 미국인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영화였다.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는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로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몰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는데 우선 1948년 미국 대법원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영화관을 계열로 지배하는 것을 불법화했다. 또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영화 관객이 감소했고 유럽 영화가 일취월장해 세계 시장을 잠식했으며, 영화 제작의 경제적 측면에서 스튜디오 제작보다 야외 및 해외 촬영이 더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됐다. 할리우드는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해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의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5)을 성공시키는 등 대작을 연이어 내놓았으나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스튜디오는 임금 지불에 차질을 겪으면서 재산과 부동산을 압류 당하기 시작했으며 독립 영화사와 TV방송사에 스튜디오를 대여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오늘날 대부분 메이저 영화사들은 대기업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메이저 영화사는 이제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면서 독립 영화 제작에 자본을 투자한다. 때때로 기자재를 대여하기도 하고, 그들이 투자한 영화나 다른 회사가 투자한 영화를 배급하기도 한다. 미국의 관객 수는 1980년대에 크게 증가해 10년 동안 총 매표 수익은 두 배로 늘어나 50억 달러에 달했고 비디오 판매와 대여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비슷한 수익을 올렸다. 동시에 세계 시장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 1993년 한 해에 거의 8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오늘날 메이저 영화사로는 디즈니(Disney), 패러마운트, 워너 브러더스, 엠시에이 유니버설(MCA/Universal), 20세기 폭스, 콜럼비아 트라이스타(Columbia Tristar)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최근의 영화는 이른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multi use)의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즉 개별 영화는 상영 수입뿐만 아니라 DVD와 홈 비디오, 케이블 영화 채널, 텔레비전으로 이어지는 배급 라인과 캐릭터 산업과의 연계 등으로 수익을 증폭시킨다. 세계적으로 영화는 이제 대중문화 산업의 중심이다. 영화계 뉴스는 이제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출연료 협상을 벌이는 스타, 독점 경쟁을 벌이면서 자산을 매각하고 인수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제작자, 스타 못지않게 돈을 버는 영화감독, 2천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출연료로 받아 영화 제작 예산의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영화배우에 관한 소식이다. 영화에 드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흥행을 점치기 어려운 점 때문에 이미 성공을 거둔 영화의 형식과 틀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열중하기도 한다. 2003년 미국 영화 산업은 자국에서 95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으며 해외에서 108억 달러를 벌여들였다. 2003년 미국에서 2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는 모두 7편이었다. 할리우드는 거의 언제나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이런 영화는 가장 안목이 떨어지는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제 2수출 품목으로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에서 총수익 중 40%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영화사전)   ======================///   할리우드가 LA에 있는 있는 이유는 LA시에 한 지역이기 때문 입니다.   할리우드는 180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거주를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농사를 짓던 농장 지역이었습니다. Hollywood 라는 이름은 할리우드를 개발하고 할리우드의 아버지"로 알려진 H. J. Whitley 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이 사람이 이곳에 신혼여행을 와서 중국 사람이 수레에 나무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하냐고 묻자, hauling wood(나무 운반)을 한다고 한 것에서 유래를 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된 것은 1903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1910년 로스앤젤레스 시와 통합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영화 산업은 초창기에 미국 동부 뉴저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Thomas Edison의 영화 사진 회사 (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가 대부분 제작을 했는데, 영화 필름에 대한 특허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 여건이 좋지 않자, Edison의 특허를 피할 수 있는 서부로 이전을 하게 되어 1910대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1911년에 최초로 영화가 촬영이 되면서 파라마운트 (Paramount), 워너 브라더스 (Warner Bros), RKO (R), 콜롬비아 (Columbia)등 4대 영화사가 1920년대부터 스튜디오를 두고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0 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할리우드는 영화 엔터테인먼트의 성지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   두산백과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요약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지구. 영화의 중심지. 이미지 크게보기 할리우드 간판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1910년에 시(市)의 일부가 되었다. 1920년 영화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발전하였다. 미국의 주요 영화회사에 대한 중앙배역사무소(中央配役事務所)와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 영화계의 총본산 구실을 한다. 할리우드볼(Hollywood Bowl)이라고 불리는 1919년에 건설된 유명한 야외극장과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연극 원형극장, 콘크리트 앞뜰에 많은 배우들의 손바닥 또는 발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중국극장 등이 있다. 할리우드 지구 서쪽에 인접한 비벌리힐스 일대는 부호나 영화배우가 많이 사는 고급주택지이며, 선셋 대로(大路)가 할리우드를 동서로 관통하여 비벌리힐스와 이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두산백과)      
2775    [세계속에서] - 전쟁속에서 피여난 "순애보" 댓글:  조회:3992  추천:0  2019-11-11
6·25 와중에 꽃핀 美해병대원과 한국 여성의 '순애보'  2019.11.10.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해리스 美대사, 92세 해병대원 조지 램프먼 소개 / 1949년 주한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한국에 첫발 / 대사관 근무하던 한국 여성과 사랑… 1950년 결혼 / 2015년까지 해로… "그런 여성은 또 없을 겁니다" 미국 해병대 창설 기념일(11월10일)을 맞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70년 전에 주한 미국 대사관 보안을 책임졌던 90대 노(老)해병 용사를 한국인들한테 소개했다. 이 노병은 6·25 전란의 와중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60년 넘게 해로한 것으로 전해져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해리스 대사는 10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1775년 11월10일 필라델피아에서 출범한 미 해병대가 창설 224주년을 맞았음을 알리고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는 “이번에 열린 창설 기념 파티에는 1927년에 출생하고 44년 입대해 49년 미국 대사관의 첫 보안요원이 된 조지 램프먼 준위가 함께했다”면서 램프먼 준위와 찍은 사진도 게재했다. 미국이 외국에 있는 자국 대사관 등 외교공관 보안을 해병대에 맡기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위해 미 해병대는 산하에 ‘대사관경비대(Marine Corps SecurityGroup)’라는 전문 부대를 두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램프먼 예비역 해병 준위와 한국의 깊은 인연이다. 그는 해병대 입대 6년차이던 1949년 신생 대한민국에 갓 설치된 미국 대사관의 보안 업무를 맡아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램프먼 준위는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던 3살 아래의 한국인 여성 이숙이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듬해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다. 현역 해병대원인 램프먼 준위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서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해 9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미군 등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3개월 여 만에 대사관에 복귀한 램프먼 준위는 오랫동안 마음에 둬 왔던 일을 기어이 실행에 옮겼다. 이숙이씨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다시 뒤집히고 말았다. 서울이 도로 적군 수중에 떨어졌고 램프먼 준위 부부는 다른 대사관 식구들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듬해인 1951년 부부는 새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수도 워싱턴 외곽에 정착해 자녀 4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램프먼 준위에게 2015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모처럼 온가족이 이숙이씨 고향인 서울 여행에 나선 것이다. 램프먼 준위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태어나 자라고 아버지 역시 한때 자국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일했던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색다른 감상에 젖었다. 그런데 이숙이씨가 가족이 투숙한 호텔 객실에서 수면 도중 그만 급서하고 말았다. 향년 85세였다. 2년이 지난 2017년 램프먼 준위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6·25 전쟁을 나와 함께 온몸으로 겪은 여성(부인)을 기리는 조그만 기념물을 서울에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해준 것처럼 나를 보살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김태훈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2774    [그것이 알고싶다] -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댓글:  조회:3263  추천:0  2019-11-10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보이저 1·2호에 실어 보낸 인류 메시지 2019.11.10.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구리 함유 레코드판 ‘골든 레코드’ ㆍ외계 생명체 찾기 일환으로 탑재 ㆍ55개국 인사말·음악 27곡 등 담아 보이저 2호 동체 겉면에 붙어 있는 골든 레코드. NASA 제공 국내에 2017년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미국 영화 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각국 영토로 진입한 외계 비행물체가 등장한다. 여기서 내린 생명체는 문어를 닮은 몸을 지녔지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췄다. 생물학적·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인간과는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외계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접촉한 지구인 언어학자가 그들의 기호 체계를 하나둘 익힌다. 외계 생명체의 말을 알아들으면서 진보된 지적 능력까지 얻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지구인은 외계인을 깊숙이 연구한 영화 속 박사가 유일하다. 완전히 다른 별에서 생겨난 문명과 대화를 하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20세기 중반 우주 시대를 열면서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 가능성은 과학계의 화두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외계 지적생명체 탐색계획(SETI)’이라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프로그램에 속한 과학자들은 접시처럼 생긴 크고 작은 전파망원경에 눈과 귀를 고정하고 외계인이 만들었을 법한 인공적인 전파를 찾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만 외계 생명체가 전파를 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특정 천체로 전파를 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좀 더 능동적인 외계 생명체 찾기다. 지난해 11월 태양이 내뿜는 에너지의 영향권, 즉 ‘태양권’을 벗어난 보이저 2호에는 조금 특별한 방식의 외계 생명체 찾기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바로 동체에 부착된 레코드판이다. 비슷한 시기 발사된 보이저 1호에도 실린 이 레코드판은 구리로 만들어졌고 지름은 30㎝이다. 레코드판 전체에 금이 입혀져 있다. 이 때문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골든 레코드’라고 부른다.  골든 레코드의 목적은 명확하다. 외계 생명체가 보이저호를 우연히 발견할 경우 지구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레코드 탑재를 주도한 건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과학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던 칼 세이건이다. 같은 스테디셀러의 저자이다. 그는 NASA와 협의해 음악 27곡, 사진 115장, 55개국의 인사말 등을 실었다. 음악은 클래식이 많다. 모차르트와 바흐, 베토벤의 곡을 짤막짤막하게 녹음했다. 음파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외계 생명체라면 감정이 움직일 만한 것들이다. 사진들은 매우 다채롭다. 우선 달 표면과 목성, 지구의 사진을 넣었다. 남녀로 구분되는 인간의 신체적 특징, 키와 몸무게를 알려주는 정보도 실려 있다. 사람의 일상을 표현한 사진들은 무척 구체적이다. 어린이의 공부를 지도하는 교사,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주부, 트랙에서 전력 질주 중인 육상 선수, 교통체증 상태에 놓인 도로의 모습 등이 내장돼 있다. 인간이 외계로 보내는 메시지인 만큼 인사말도 수록됐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고대어부터 중국 방언까지 다양하다. 한국어도 실려 있다.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NASA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지금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 여성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주는 워낙 방대해 이 메시지가 외계 생명체에게 발견될 확률은 낮은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우주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이 메시지는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의 속삭임… “태양권이 숨쉬는 폐와 닮았어요”  2019.11.1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보이저 1호 측정한 ‘태양권 범위’, 6년 만에 관측한 2호에선 감소 ㆍNASA “태양풍 양 증감 따라 호흡하는 상황처럼 크기 달라진 듯” 1977년 3월 발사 5개월을 앞두고 최종 점검 중인 보이저 2호. 당초 목표는 태양계 행성 탐사였지만 발사 뒤 성간 우주로 나아가는 것으로 임무가 변경됐다. NASA 제공 1977년 8월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육중한 덩치의 ‘타이탄 3E 센타우르 로켓’이 불꽃과 흰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이 로켓에는 여행자란 뜻을 가진 ‘보이저(Voyager)’ 탐사선이 실려 있었다. 중량은 722㎏, 덩치는 소형버스 정도였다. 당시 발사된 건 보이저 2호였으며 비슷한 형태와 임무를 가졌던 보이저 1호는 2호보다 2주 늦게 우주로 향했다. 보이저 2호는 발사 뒤 2년 만인 1979년 목성을, 1981년에는 토성을 탐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보이저 2호를 인도한 뒤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번엔 태양계를 벗어나 먼 우주를 탐사하는 임무를 시작한 것이다. 각종 측정 장비를 움직이는 전기는 탐사선에 내장된 핵물질인 플루토늄을 통해 얻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 임무가 가능한 특징을 십분 살린 결정이었다. 먼저 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보이저 1호였다. 이동 경로가 2호와 달랐던 보이저 1호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2년 이른바 ‘태양권(heliosphere)’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보이저 2호는 이보다 늦은 2018년 11월5일 태양권을 돌파했다. 태양권은 뭘까. 우리가 익히 아는 태양계는 태양과 함께 태양의 중력에 묶여 있는 천체들을 일컫는다. 수성과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크고 작은 행성들이 주요 구성원이다. 하지만 태양권은 개념이 다르다.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기의 성질을 띤 입자의 바람, 즉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를 뜻한다. 태양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인 태양권은 태양계보다 훨씬 넓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태양의 영역인 셈이다.  보이저 2호가 이 태양권을 넘어선 지 1년 만인 이달 초 NASA는 태양권의 크기가 일정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보이저 1호가 2012년 통과했을 때 측정한 태양권 경계의 위치가 지난해 보이저 2호가 지나갔을 때와 달랐다는 것이다. NASA에 따르면 보이저 1호는 122.6AU 지점에서 태양권을 벗어났지만, 보이저 2호는 119.7AU에서 태양의 힘을 뿌리쳤다. 1AU는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인 1억5000만㎞를 뜻하는 천문학 개념이다. 6년 만에 태양권이 꽤 많이 좁아졌다는 뜻이다.  태양에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NASA는 태양 활동이 11년 주기로 활발했다 잠잠해졌다를 반복하는 것에 주목했다. 문용재 경희대 우주과학과 교수는 “태양 활동이 활발하다는 건 태양풍의 양이 증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2012년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저 2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지난해는 2012년보다 태양 활동이 훨씬 줄어 있었다. 이 때문에 태양풍의 양도 줄어 태양권 크기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NASA는 태양권의 범위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상황을 빗대 “숨을 쉴 때 폐가 확장하고 수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양권은 외계 별에서 날아오는 우주 방사선의 70%를 막아내며 지구와 다른 행성들을 보호한다. 이런 보호막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는 사실이 보이저 1호와 2호가 연달아 태양권 계면을 통과하며 입증된 것이다.  NASA 보이저 프로젝트 담당자인 에드 스톤 캘리포니아공대 물리학과 교수는 “보이저 2호가 보낸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는 보이저 1호의 자료가 태양권의 일반적인 특징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우주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태양권을 넘어 먼 우주로 들어선 탐사선은 지금까지 보이저 1호와 2호 단 두 기에 불과하다. 현재 보이저 1호는 태양에서 220억㎞, 보이저 2호는 182억㎞ 떨어진 거리에서 맹렬하게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보이저 2호에서 지구로 불빛을 겨냥해 쏜다면 지구인들은 16시간 반은 지나야 볼 수 있는 먼 거리다. 먼 우주에 나가 있는 척후병처럼 소중한 존재이지만 보이저 1호와 2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인류에게 아쉬운 대목이다. 동력원인 플루토늄이 2024년쯤에는 탐사선에 내장된 장비를 돌릴 수 있는 수준의 전기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보이저 탐사선은 지구에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전하지 않는 ‘방랑자’가 된다.  NASA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한정된 전력을 최대한 아낄 예정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장비에는 보온용 전기를 끊는 식이다. 우주는 영하 200도가 넘는 강추위 때문에 장비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보온용 장비가 같이 탑재돼 있다.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향하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임무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정호 기자
277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통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21  추천:0  2019-11-10
“동·서독 ‘보이지 않는 벽’ 여전… 격차 해소 반세기 걸릴 수도”  2019.11.1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메르켈 “자유·인권·관용 지켜야” / 슈타인마이어 “美 동반자 돼야” / 자국 우선주의 트럼프에 비판적 / 동독 1인당 GDP 서독 75% 그쳐 / 평균임금·생활비용 등도 격차 커 / 주한 독일 대사 “머지않은 미래에 / 한국도 통일·자유 기릴 수 있기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9일(현지시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장벽 붕괴 기념일은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증오와 인종차별, 반유대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장벽의 붕괴는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벽이 너무 높고 두껍더라도 결국 뚫린다는 가르침을 준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유럽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관용을 지켜내야 한다”면서 “이런 가치는 항상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자유는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동서 지역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은 30년 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선전담당 비서가 TV 회견을 통해 “서독으로 상시 왕래가 허용될 방침”이라고 밝히자 동독 주민들이 장벽에 몰려들면서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 날로, 이듬해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됐다. 메르켈 총리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뿐 아니라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 주변국 정상들도 참석해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숨진 동독 시민들을 함께 추모하고 장벽 붕괴 3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현지시간) 베를린 장벽기념관에서 촛불을 켜고 있다.연합뉴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평화혁명을 이뤄낸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미국이 국가 이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존중받는 동반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촉구했다.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1987년 6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찾아 “장벽을 무너뜨리자”고 연설했던 것을 언급하며 “이 외침을 여전히 듣고 있다”고 했다. 전날 미 대사관저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레이건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9일(현지시간)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베를린=AFP연합뉴스 이날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기념사에는 국제 질서 유지의 동반자이자 자유주의 수호의 중심이었던 미국을 향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슬람국가(IS)’ 격퇴전 동맹이었던 쿠르드족과 상의 없이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택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유럽의 비판적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날 메르켈 총리도 “미국과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독일 통일의 길을 도왔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을 ‘상업적인 대상’으로 본다”며 “미국이 전략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유럽)에게 빠르게 등을 돌리고 있고, 어떤 식의 전략적 의사 결정이 이뤄지든 간에 미국과 다른 동맹국 사이에 사전 조정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시민단체에서도 멕시코 접경에 ‘이민 장벽’을 건설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독일의 비영리단체 ‘열린사회 이니셔티브’는 이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남은 콘크리트 덩어리 일부를 트럼프 대통령에 보냈지만 백악관이 수령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장벽 표면에는 ‘베를린 시민’ 명의로 “장벽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미국이 헌신해온 사실을 당신께 일깨우려 이 조각을 보내드린다”라는 내용이 새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주 베를린에서만 혐오 배제, 화합, 자유의 가치를 내세운 200여 관련 행사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동·서 간에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슈테펜 마우 베를린 훔볼트대 사회학 교수는 “독일의 동·서는 많은 부분에서 그 차이가 좁혀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동독 출신 독일인들이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고 지적했다. CNN에 따르면 통일 직후인 1991년 옛 서독지역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2687유로의 약 43%에 불과했던 동독지역 1인당 GDP(9701유로)는 그동안 상당 폭 증가했으나, 2018년 현재에도 여전히 서독지역 1인당 GDP(4만2971유로)의 75%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기준 양쪽의 연평균 임금 차도 1만유로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한 달 평균 생활비 격차도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옛 동독과 서독 지역 간 격차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격차를 해소하는 데 반세기가 더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분단국인 한국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특별한 의미일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이날 보도했다. WP는 베를린에서 8000㎞ 떨어진 서울 이태원에서 장벽 붕괴 기념 파티가 열렸다고 소개하며, 이는 독일 통일 사례로부터 교훈을 찾으려는 분위기라고 해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슈테판 아우어 주한 독일대사는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 역시 통일과 자유를 기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조성민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이민 장벽 건설 트럼프 겨냥해 베를린 장벽 선물한 시민단체 2019.11.1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獨 시민단체 ‘열린사회’ 선물  “영원한 장벽은 없다”는 뜻 백악관 거부…“미 전역 홍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 독일 시민단체 '열린사회'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베를린 장벽 조각이 세워져 있다. [AFP=연합뉴스] 독일의 한 시민단체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장벽의 잔해 일부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단체는 과거 미국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도운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했지만, 실제 의미는 따로 있었다.  독일 dpa통신은 9일(현지시간) 비영리단체 ‘열린사회 이니셔티브’(열린사회)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남은 콘크리트 잔해 일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보도했다. 열린사회가 백악관에 보내려던 장벽 조각은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높이에 무게만 2.7t에 달하는 대형 콘크리트 덩어리다. 단체는 지난 3일 민간 후원금을 통해 이 잔해를 사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열린사회 측은 장벽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장벽들에 맞서는 장벽’(The Wall AgainstWalls) 캠페인의 일환으로 이 같은 일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남미 불법 이민을 막겠다며 미국 남부와 멕시코 국경지대에 ‘트럼프 장벽’을 건설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고립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캘리포니아주의 국경에 설치되고 있는 장벽 건설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AP=연합뉴스] 이 단체가 보낸 장벽 표면에는 ‘베를린 시민’ 명의의 “우리는 장벽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헌신한 미국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베를린 장벽의 마지막 조각 중 하나를 보내드린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열린사회 측 관계자는 “존 F. 케네디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데 있어 수십 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를린 장벽은 이제 파편으로만 남아 그 어떤 장벽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면서도 “우리 사회는 새롭게 지어지는 물리적 장벽들뿐만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 지어지는 새로운 벽들로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장벽 조각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다. 현재 조각은 백악관 인근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열린사회는 만일 백악관이 계속 수령을 거부할 경우 장벽 조각을 싣고 미 전역을 돌며 적극적 홍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이승호 기자
2772    [그것이 알고싶다] - 독일 통일의 상징 = 브란덴브르크 문 댓글:  조회:4903  추천:0  2019-11-10
두산백과 브란덴부르크문   [ Brandenburg Gate ] 요약 독일 베를린의 파리저 광장에 위치한 건축물로 독일의 상징과도 같다. 이미지 크게보기 브란덴부르크 문 원어명 Brandenburger Tor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건축물로 운터덴린덴로(Unter den Linden)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독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의 명령으로 1788년에서 1791년에 걸쳐 건축됐다.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설계했다.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26m, 가로 길이는 65.5m 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정문인 프로필라에(Propylaea)를 본따 설계한 것이다. 문 위에 올려진 '승리의 콰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Schadow)가 조각한 것으로 네마리의 말이 승리의 여신이 탄 마차를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의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전소되지 않고 남았다. 전쟁이후 1956년 부터 약 1년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일반인들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협정됐으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허가 받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서만 동·서 베를린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11월 약 10만 여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독일 통일과 함께 1990년 서독 정부가 이 문의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보수공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자욱을 지워내는 등 새단장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주화에 등장했던 이 문의 모습은 현재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새겨져 있다.   참조항목 베를린, 파리저광장 역참조항목 카를 랑한스, 운터덴린덴로, 베를린장벽, 성의 대문, 서양의 문 카테고리 문화예술 > 건축 > 각종 건축물 > 기타건축물 역사 > 유럽사 > 독일사 > 근세 지역 > 유럽 > 독일 > 베를린 관련이미지 1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베를린 장벽과 브란덴부르크 문독일 베를린. 동·서 베를린을 남북으로 나누었던 길이 45km의 경계선으로, 통독 이후 현재에는 슈라이쉐스 토어 부근에만 잔재가 남아 있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브란덴부르크문 [Brandenburg Gate] (두산백과)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브란덴부르크 문   [ Brandenburg Gate ] 이미지 크게보기 브란덴부르크 문 분류 해외여행 > 관광지 지역 유럽 > 독일 > 베를린 유형 시설물·건축물 주소 Pariser Platz 10117 Berlin-Mitte 가는방법 U5를 타고 Brandenburger Tor 역 하차 1791년 완공한 프로이센의 개선문.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본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했다. 베를린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이 문은 높이 26m, 폭 65.5m로 6개의 원형 기둥과 그 사이로 5개의 길이 나 있다. 중앙의 양 기둥 사이가 가장 넓으며 그 길로는 왕과 그의 손님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는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고 베를린의 새로운 관문을 건축할 목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의 건립을 지시했다. 문 중앙 상단을 장식한 청동상인 은 브란덴부르크의 상징이다. 이 조각상은 1806년 프로이센을 함락했던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가 1814년 다시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문 주변으로 폭격이 자주 있었고 이로 인해 청동상 일부와 기둥에 손상이 생겼다. 그러나 냉전시대였으므로 별다른 보수를 하지 못했고 1961년 독일의 동서가 분단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한 통행도 금지되었다. 그로 인해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과 함께 독일 분단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부각되었다. 한동안 방치되던 문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수많은 인파로 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서독의 수상과 동독의 총리가 이 문을 통해 만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분단이 아닌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다만 몰려든 인파로 인해 문이 많이 훼손되었고 오랜 복원 및 보수 공사를 거쳐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년을 기념해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현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대형 문화, 스포츠 행사의 주요 장소로 사용되며 여행자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핵심 코스로 꼽힌다. 문의 모습은 독일에서 주조하는 30센트 유로화에도 새겨져 있다. 브란덴부르크문 위치   일반 지형 위성 확대보기 마지막 수정일 2019. 6. 27. (본문 내용 업데이트) 길찾기 http://travel.justgo.kr/default.aspx?lid=4900&hUid=1&eUid=1 관련이미지 브란덴부르크의 문칼 고트하르트 랑그한스, 베를린, 1788~9년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 1989년 9월에 라이프치히 에서 시작된 월요 시위가 기폭제가 되어 동독 전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번진다. 동독지도부는 시위대를 달래기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 58분경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되느냐?"는 질문을 했고, 휴가 후 복귀하자마자 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에서 결정한 정책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동베를린 SED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지연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 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여행자유화 조치를 베를린 장벽붕괴로 착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장벽들 넘었던 것입니다.   출처 : 나무위키 /베를린 장벽 항목 ​   베를린 장벽 - 나무위키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독 의 경찰 과, 미소를 짓고 있는 동독 국경수비대 원이 미묘하게 비교된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반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동독 국경수비대 준사관 들과 악수 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은 서독 사람들의 모습. 독일어 Berliner Mauer 영어 Berlin Wall 프랑스어 Mur de Berlin 러시아어 Берлинская стена 1 . 개요 2 . 왜 생겼는가? 2.1 .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2.2 . 육지의 섬 3 . 베를린 장벽 ... namu.wiki ================================///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은 초기 고전주의적인 양식의 개선문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다. 프로이센(Prussian) 왕국의 제4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헤름 2세(Frederick William II )의 명을 받아 1788년부터 1791년까지 건설되었고, 건축가는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 이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그 상단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마전차(馬戰車) 모습의 청동상인 "콰드리가(Quadriga)" 그리고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로 장식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의 콰드리가(Quadriga) 와 빅토리아(Victoria)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이 개선할때 반드시 통과하는 장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1957년부터 1958년까지 복원 공사를 했다. 독일의 재통일 전에는 베를린 장벽의 상징적인 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폐허가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의 야경 =============================/// 최신기사 장벽붕괴 기념일에 메르켈 "동서격차 해소, 반세기 더 필요"(종합) 2019-11-10        30주년 기념식서 "자유 당연히 얻는게 아냐…증오·인종주의에 맞서야"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 정상들 참석 베를린 장벽붕괴 기념행사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르켈 총리 [EPA=연합뉴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현지시간) "장벽의 붕괴는 자유를 제약하고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 장벽이 너무 높고 두껍더라도 결국 뚫린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날 베를린 장벽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구도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기념일이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현재 마주하고 있는 증오와 인종차별, 반(反)유대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관용을 지켜내야 한다"면서 "이런 가치는 항상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자유는 당연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서 지역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옛 동독지역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다 동독 경비병의 총격에 숨진 동독 시민들을 추모했다. 옛 서독지역 함부르크에서 1954년 태어난 메르켈 총리는 생후 3개월 만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했다. 남아있는 장벽 앞에 있는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동유럽 국가 정상들 [EPA=연합뉴스] 메르켈 총리는 이날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옛 동독과 서독지역 간의 격차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격차를 해소하는 데 반세기가 더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기념식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동유럽에서 평화혁명을 이뤄낸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자유에 대한 의지와 용기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체코, 헝가리 등의 정상들도 참석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독일, 전 세계를 위한 역사의 새로운 길의 시작이자 자유의 여명"이라며 "분단과 증오의 벽이 없는 유럽은 시민이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는 이날 저녁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었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린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도 참석한다. 공연에서는 독일의 세계적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 아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심포니가 연주하고, 독일의 유명 뮤지션들도 출연한다.   (c) 연합뉴스
2771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속에서의 "베를린 장벽"... 댓글:  조회:3946  추천:0  2019-11-09
  두산백과 베를린장벽   [ Berlin Wall음성듣기 ] 요약 1961년 동독 정부가 인민군을 동원하여 동베를린과 서방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서베를린 경계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 이미지 크게보기 포츠담광장 베를린장벽 1945년 5월 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km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참조항목 독일, 독일통일, 베를린문제, 베를린협정, 브란덴부르크문 역참조항목 공산권, 베를린의 역사, 프리덤 공원, 뉴지엄 카테고리 역사 > 유럽사 > 독일사 > 현대 관련이미지 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포츠담광장 베를린장벽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장벽 [Berlin Wall] (두산백과)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베를린 장벽   [ Berlin Wall음성듣기 , -障壁 ] 이미지 크게보기 1961년 베를린 장벽 동 · 서 베를린 경계선 약 45.1킬로미터에 걸친 콘크리트 벽으로, 1961년에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람들과 동독 마르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오랜 기간 동 · 서 냉전의 상징물로 인식되어 온 베를린 장벽은 동유럽의 민주화로 1989년 11월 9일에 철거되었다.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베를린 장벽ⓒ 이봉섭/NAVER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 장벽 [Berlin Wall, -障壁]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도시는 역사다 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1989년 12월 25일,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나드 베른슈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가운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악보에는 ‘환희’가 들어갈 자리에 ‘자유’가 들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단일팀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이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8월 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동독 장교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 있다. 1962년 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다.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2)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 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 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년 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1961년 베를린 장벽베를린 봉쇄 13년 뒤, 동독 정부는 서방을 행한 탈출을 막기 위하여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축조하였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도시는 역사다)   세계사 개념사전 베를린 장벽  하나 되는 독일, 해체되는 소련   목차 제3세계의 등장 -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공존의 시대 -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 동유럽에 분 자유화 바람 베를린 장벽 붕괴 - 무너지는 장벽, 하나의 독일 개혁 개방 정책 - 고르바초프가 몰고 온 개혁 독립 국가 연합의 탄생 - 무너진 ...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았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괜스레 눈물이 나더라고. 정말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저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처럼 서로 갈라져 있다가 통일이 된 독일 국민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제3세계의 등장 - 미국도 싫고, 소련도 싫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29개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했어. 이들은 오랫동안 식민 지배에서 신음했던 나라들이었지. 그래서 강대국 중심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고 서로 단결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느새 세계가 동·서로 나뉘어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거야. 이들의 선택은 동·서 어디와도 동맹1)을 맺지 않겠다는 ‘비동맹 중립’이었어. ‘제3세계2)’를 선택한 거지. 1961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등이 1차 ‘비동맹 회의’를 열고 미국,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지 않은 모든 국가의 결속3)을 다짐했어. ‘제3세계’의 탄생은 동·서 진영4)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 이들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거든. 물론 이들이 강대국에 맞설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이들의 협력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어. 비동맹 회의 참가국이 계속 늘고, 국제 연합에 가입하는 나라가 늘면서 총회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거든. 공존의 시대 -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다 미국과 소련, 동행의 길로 들어서다 쿠바 위기를 넘기면서 미국과 소련은 극단적인 대결을 삼가고, 각자 자기들의 체제5)를 유지하면서 함께 행동하는 사이로 바뀌었어.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자본주의 세력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외교 정책을 펼쳤어.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체제를 헐뜯으면서도 각자의 진영 내에서 제일 맏형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이였던 거야. 각자의 편을 향해 ‘너희들 마음대로 하다간 쟤들이 우리를 무너뜨릴 거야. 그러니, 이 형 말을 들어!’ 이런 식이지.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핑계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짓밟았어. 그러나 미국, 소련 둘 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1960년대부터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두 개의 진영을 형성한 것이 마치 건전지의 양극과 같다고 해서 냉전 체제를 ‘양극 체제’라고 해. 하지만 점차 극이 여러 개로 변화하는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어. 다극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거야. 첫 번째 변화는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거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일찍부터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했고,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어. 또한 1960년대에는 중국이 소련과 국경 문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차이로 대립하다 중국이 제3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했어. 두 번째 변화는 유럽의 경제가 회복되면서 ‘유럽 공동체(EC)’가 만들어지고, 경제 면에서 미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세 번째 변화는 제3세계의 등장이야. 네 번째 변화는 프랑스가 미국과 따로 가겠다며 나토를 탈퇴하고,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고 나선 거야. 마지막으로 일본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지. 다극 체제로의 변화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해.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1969년 미국의 닉스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더 알아보기 세계의 외교를 바꾼 스포츠 공산권의 중요한 나라인 중국과 미국이 스포츠를 계기로 은근슬쩍 화해하기 시작했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중국과 미국이 같은 탁구 대회에 참가한 거야. 우선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 가서, 나중에는 미국이 중국에 가서 탁구 대회를 했어. 스포츠를 계기로 정치권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세계는 화해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거야. 우리나라도 북한과 정치적으로는 계속 대립하면서도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어. 스포츠 정신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 동유럽에 분 자유화 바람 바웬사의 대통령 당선 1970년대부터 동유럽 사람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불신은 커져만 갔어. 군사비에 막대한 돈을 써서 경제가 말이 아니었고, 소련의 간섭도 계속되었거든. 조선소 전기공에서 대통령이 된 폴란드의 바웬사는 1980년 정부와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연대’라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어. 동유럽 중 공업화가 가장 잘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고, 헝가리는 기업의 자유를 강화했어. 경제 개혁을 시작으로 정치에도 자유화 바람이 불었어.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 루마니아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려는 공산당 정부가 대립하면서 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결국 독재자였던 차우셰스크를 몰아냈어. 한번 일어난 자유화 움직임은 결코 꺾이지 않았지. 드디어 1989년 폴란드에서는 동유럽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바웬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같은 해 헝가리에서도 자유 선거를 했지. 결국 동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산당 일당 독재가 폐지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야. 새롭게 정권을 잡은 것은 대부분 공산당이 아니었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약속했어.   더 알아보기 프라하의 봄이 뭐예요? 196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이것이 정치의 민주화 요구로 발전하면서 공산당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혁이 추진되었어. 결국 1969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서기장이 된 두브체크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진할 것을 약속했어. 드디어 그동안 공산화로 인해 얼어붙었던 나라에 봄이 온 거야. 그러나 소련은 이런 개혁을 소련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진압했어.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지. 이 민주화 운동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연방 분리에 합의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어.   베를린 장벽 붕괴 - 무너지는 장벽, 하나의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의 통일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면서 동독 주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장벽을 뛰어넘었어.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어.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서독과 동독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국제 연합에도 가입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는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어. 마침 1980년대 동유럽에서 불어 온 개혁과 자유화 바람이 독일의 통일에 힘을 실어 주었어. 그러나 동독 정부는 그 변화를 모른 척했고, 여기에 실망한 동독 사람은 200만 명이나 서독으로 탈출했고, 9월에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지. 결국 독재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동독 정부는 자유 총선거를 통해 서독과 통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어.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렸어. 문을 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저마다 망치와 삽을 들고 나와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어. 벽이 무너지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고 웃으며 기쁨을 나누었어. 다음해 1990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마침내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었지. 나뉘어진 지 41년 만이야. 동독 사람 토르스텐 뢰셔의 통일 적응기 “저는 원래 바이올린 만드는 기술자인데, 동독에서는 볼 수 없는 이름난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싶어서 서독으로 왔어요. 제가 동독에서 일했던 ‘무지마’라는 곳은 2,000여 명의 종업원을 둔 국영6) 대기업이었는데, 통일 후 민영화가 되면서 종업원이 150명으로 줄어들었어요. 공장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모두 서독 출신이었어요. ‘기업의 구조 조정7)은 돈에 눈이 먼 서독 사람들의 떼돈 벌기 수작’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어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고향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길몽이 실업자라는 악몽으로 둔갑했다고 한탄했어요. 우체국 직원이셨던 저희 부모님 역시 일찍 퇴직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고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라는 아버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줬어요. 노동은 신성한 의무였으니 실업은 아예 존재할 수 없지요. 물론 최저 생계를 보장하는 대신 끊임없는 통제와 감시가 따랐지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 이외에 경쟁이라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파는 것도 신경 써야 해서 힘들어요. 예전의 동독에서는 만들어서 품질 검사에 합격만 하면 됐거든요. 통일이 되어 오시8)(동독인)로 베시9)(서독인) 세상에서 살면서, 삶을 꾸리고 책임지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지금 제가 사는 비스바덴에서는 동독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진 않지만, 왠지 정이 좀 없는 것 같아요. 동독 사람들은 인정과 여유가 넘치거든요. 그러나 이건 동독인과 서독인 간의 이해 부족이라기보다는 지방마다 나타나는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독은 동독을 자신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동독은 늘어가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 되었어." hastitle="Y" height="686" origin_height="1372" origin_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1779_000_1/20120423120223987_KVH4LP7TC.jpg/bh4_91_i5.jpg?type=m4500_4500_fst_n&wm=Y" origin_width="1340" source="세계사 개념사전"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0892_000_1/20120423120223987_KVH4LP7TC.jpg/bh4_91_i5.jpg?type=w670_2&wm=Y"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690px;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670" /> 통일 이후 동독은 서독 사람들이 들어와 싼 값에 공장을 사고는 많은 사람을 해고해서 실업자들은 점점 늘어만 갔어. 서독은 동독을 자신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동독은 늘어가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 되었어. 더 알아보기 독일 통일에서 배우는 교훈은? 독일 통일은 너무 짧은 시일 안에 이뤄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어. 화폐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망하는 동독 회사가 아주 많았고, 이에 따른 실업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지. 두 지역의 물가, 화폐, 체제 때문에 준비 과정이 꽤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거든. 통일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은 거야. 이를 통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수라는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의 장벽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야. 서로를 인정하기 쉽지 않았거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단 걸 알 수 있지. 개혁 개방 정책 - 고르바초프가 몰고 온 개혁 1986년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어.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터키와 이탈리아, 독일까지 방사능10)에 오염되는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대피하라는 명령이 늦게 내려져 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았어. 바로 한 해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결심했어. 첫 결실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었어. 그동안 모든 권력이 일부 공산당에게 집중되고, 국민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거든. 그런데 개방 정책으로 국민들이 자기 의견이나 생각을 말이나 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부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어.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지나친 군비 경쟁으로 하루가 다르게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어.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일부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이상 소련은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했어. 그동안 정부가 은행과 회사, 공장 등을 소유하고 통제했는데, 개혁 정책 실시로 보통 사람들도 기업이나 은행을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어. 또한 그동안 서로 앙숙처럼 지내던 미국과 핵무기를 줄이는 조약을 맺고,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서로 친한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어. 1990년 대통령제 도입 후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 개방 정책을 폈어. 독립 국가 연합의 탄생 -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몰타 섬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냉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어. 또한 1991년에는 무기를 서로 줄이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그즈음 미처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어.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야. 그때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개혁 세력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어. 이 사건으로 공산당 세력은 완전히 약해지고 옐친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어.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개혁을 원했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소련을 만들고 싶어 했어. 결국 1991년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11개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CIS)’을 결성하면서 마침내 소련은 해체되었어.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거야. 읽을 거리 러시아에만 있다. 레닌-코카콜라, 맥-레닌? 코카콜라와 햄버거는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동시에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음식이지.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 곳곳에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음식들이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공산권 문화의 상징인 레닌을 이용한 광고가 많이 등장하고 있어. 자본주의를 뒤엎으려고 했던 레닌이 자본주의의 상징에 쓰이는 것을 알면 레닌의 기분이 어떨까?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 장벽 붕괴 - 하나 되는 독일, 해체되는 소련 (세계사 개념사전)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연도 1989년 11월 9일 저자 존 스위프트 독일 국민들이 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의 길을 열다. 독일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냉전의 상징이었던-의 양쪽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벽을 무너뜨렸다. 28년 전, 이 벽을 건설한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동독 국민들을 보호하는 "반파시스트 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에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동독 국민들이 대규모로 보다 풍요로운 서독으로 이주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서독은 동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지난 세월 동안 몰래 벽을 넘어 탈출한 사람들도 있고, 벽을 넘으려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베를린 장벽은 굳건하게 동독 체제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이러한 안정도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변화를 간절하게 갈망하던 동독 시민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개혁이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로 귀착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공산당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고, 이는 결국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헝가리를 통한 탈출이 쇄도하였다. 당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천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향했다. 1989년 10월, 동독을 살리려는 절박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서 에곤 크렌츠로 교체되었다. 크렌츠 정권은 점점 악화되는 위기 상황을 놀랄만큼 무능력하게 대처했다. 서방으로의 여행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고 공표했으나, 세부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았다. 장벽이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수천 명이 검문소로 몰려들었다. 질서가 무너진 군인들은 군중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동독 정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도 명운을 다했다. "바스티유 함락과 신년 축하의 떠들썩함이 결합..." 타임지, 1989년 11월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세계사 개념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法, 청계천 '베를린 장벽' 그라피티 그린 예술가에 1500만원 배상 판결 김경아 인턴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2019.09.17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 15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 조정현 부장판사는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화가 정태용(29)씨를 상대로 배상금 3000만원을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5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   서울 중구 청계2가 베를린광장 안 베를린 장벽이 지난해 6월 정태용씨의 그라피티로 훼손돼 있다. /서울시 제공 정씨는 지난해 6월 6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라피티와 자신의 브랜드 이름을 그려 넣었다. 이 사건은 정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서 알려졌다.  해당 베를린 장벽 조각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에서 독일 베를린시가 실제 장벽의 일부를 2005년 서울시에 기증한 것이다.  분단된 독일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의 양면은 대조적이다. 공산진영인 동독 쪽 벽은 깨끗한 반면, 자유진영인 서베를린 쪽 벽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독일인들의 그림과 낙서가 가득하다.  서울시는 예산을 투입해 훼손된 베를린 장벽을 복원하고, 정씨에게 복구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2월 정씨에게 배상금을 2000만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지난 4월 수원지법 형사12부도 공용물건을 손상한 혐의로 기소된 정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모든 그라피티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 도의감에 반하는 행위로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을 유지했다.    좋아요  ⓒ 조선일보 청계천 '베를린 장벽'에 그림 그린 예술가, '1천 500만 원' 배상 판결 /이소현  /2019.09.19 서울 청계천에 설치된 독일 베를린 장벽 조각 위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린 예술가가 서울시에 1천 5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9단독은 서울시가 그라피티(Graffiti⋅낙서처럼 그리는 거리예술) 작가 정태용 씨를 상대로 제기한 배상금 3천여만 원 규모의 소송에서 "정 씨는 서울시에 배상금 1천 5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 씨는 지난해 6월 6일 서울시 중구 청계2가 베를린 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조각 양면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글씨를 그려 훼손했습니다. 이 베를린 장벽 조각은 지난 2005년 독일 베를린시가 한국의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로 서울시에 실제 장벽의 일부를 기증한 것입니다. 서울시는 사건 발생 후 9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장벽을 복원하고 정 씨에게 관련 비용과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지난 2월 법원은 정 씨에게 배상금을 2천만 원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지만, 서울시와 정 씨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조정이 불발됐습니다.   정 씨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형사재판에도 넘겨져 지난 4월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정 씨는 불복해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뉴스 픽' 입니다. (사진=연합뉴스)    출처 : SBS 뉴스
277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변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863  추천:0  2019-11-09
[안녕? 자연]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마저 녹기 시작했다(연구). . . 2019.11.09.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알래스카 타쿠 빙하의 2014년 8월 당시 위성사진2018년 8월에 촬영한 타쿠 빙하의 위성사진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산악 빙하 중 하나가 마침내 지구 온난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새로운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USA투데이 등 해외 언론의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니콜스칼리지 연구진은 알래스카 주노 주 북부에 있는 타쿠 빙하(Taku Glacier)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평균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두께와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타쿠 빙하는 알래스카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이자, 세계 20대 빙하 중 하나이다. 표면에서 밑바닥까지의 두께가 1477m에 이른다. 연구진은 지금까지 추적관찰한 빙하 250개가 모두 녹아내리는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 중 하나인 타쿠 빙하만큼은 큰 변동이 없었으나, 최근 타쿠 빙하마저도 질량이 감소해 녹아내리는 빙하 중 하나에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미국항공우주국(NASA) 지구관측소가 2014년 8월과 2018년 8월에 찍은 위성 사진을 분석한 뒤, 1946년 타쿠 빙하를 관측한 이래 처음으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를 이끈 마우리 펠토 니콜스칼리지 빙하학자는 “이번 연구결과는 (타쿠 빙하는 그동안 지구온난화에도 큰 변화가 없던 거의 유일한 빙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면서 “지구 온난화로 매년 3600억t의 눈과 얼음이 녹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타쿠 빙하를 관찰한 이래 가장 큰 빙하 질량 손실이 확인됐다. 이러한 변화는 주노 주에서 기록된 가장 따뜻한 7월, 빙하가 녹는 수준과 일치한다”면서 “타쿠 빙하의 이러한 현상은 몇 년 동안 지속돼 온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지난달 스위스 온라인학술지출판연구소(MDPI)가 발행하는 원격탐사저널 ‘리모트 센싱‘(Remote Sensing)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276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 비상사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61  추천:0  2019-11-09
과학자 1만여명 ‘기후 비상사태’ 첫 선언 (ZOGLO) 2019년11월6일  “말할 수 없는 고통 야기” 경고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청소년 기후파업 집회 도중에 연설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전세계 과학자들이 “지구는 명백하고 분명하게 기후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이행해야 할 6가지 광범위한 정책 목표를 제시했다고 미 워싱턴포스트(WP) 등이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53개국 1만1258명의 과학자들은 이날 ‘세계 과학자들의 기후 비상사태 경고’라는 새 보고서를 발표했다. 바이오사이언스지에 발표된 보고서에서 과학자들은 “기후 위기가 부유한 생활 방식에 따른 과도한 소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정책 입안자들이 관련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과학자들이 공식적으로 기후변화를 ‘비상사태’라고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WP는 전했다. 과학자들은 “우리는 과학자로서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며 “인류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기후변화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드니 대학의 수석 저자인 토머스 뉴섬 박사는 “비상 사태란 우리가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가축 생산을 줄이며 토지 개간과 화석연료 소비를 줄임으로써 기후 변화의 영향에 대해 행동하거나 대응하지 않을 경우, 그 영향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지난 40년 간 세계 기후 협상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사업을 해왔고 이 곤경을 대부분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에 인류가 가장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교체, 메탄과 매연 같은 기후오염 물질의 배출량 삭감, 육류 섭취 감소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생태계 복원 및 보호, 탄소없는 경제 구축, 가족계획 서비스와 여학생 교육 투자를 통해 인구 증가를 안정화시키는 것도 6가지 정책 목표에 포함됐다. ///헤럴드경제    
2768    [민족의 자랑] - "중국의 주시경" - 최윤갑 댓글:  조회:2853  추천:0  2019-11-09
90세를 바라보는 중국 조선어연구 선구자 최윤갑 (ZOGLO) 2019년7월25일  인물이름 : 최윤갑          최윤갑(崔允甲),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학창시절 때의 교재들, 책장에 꽂힌 우리말 도서, 신문잡지에서 본 문장, 대학입시때 작성한 답안지...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의 기틀을 마련한 선배가 바로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수다. 그만큼 중국 조선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90세를 바라보는 지금,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의 탐구 정신과 실사구시 정신은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어 연구에 빠진 사나이   1930년 2월 28일 룡정(현 연변주 룡정시)에서 태여난 최윤갑 원로교수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1기 졸업생이다. 일본침략자 통치세월을 친히 겪었던 그에게 조선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였다. 조선어를 잘 배우는 것으로 민족의 력사를 제대로 지키겠다는 것도 당시 열혈 청년의 다짐이다.   교수들로부터 학문연구의 옳바른 자세를 배운 그는 재학기간 교수와 부동한 견해를 단호하게 밝힐 수 있었으며 견해에 근거해 론문도 발표했다. 론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학구적인 정신과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후 발표한 론문 《의성의태어에서의 밝은 소리와 흐린 소리》는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문연구의 자세와 남다른 열정 때문에 그는 1952년에 졸업하고 바로 교원으로 학부에 남게 되였다.   두각을 일찍 낸 그는 1956년에 조선의 저명한 언어학자 정렬모 교수로부터 “앞으로 대학자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날의 성과를 거둘 줄은 당시 누구도 모르는 미래일 뿐이였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에게 뜻 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1970년경 연변대학에서 ‘문화대혁명’이 고조되면서 그는 학문연구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촌에 내려가 2년반 동안 로동개조를 당했다.   그래도 그의 생활 속에서는 우리 말 연구가 떠난 적 없었다. 늘 품사의 성질이나 특정된 쓰임새들을 생각하는 등 농사일을 하면서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이였다. 새로운 법칙을 깨닫거나 알 수 없는 구조가 확연히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될 때마다 그는 환희를 느꼈다. 뿐만 아니라 휴식의 틈을 빌려 학생들에게 조선어 문법리론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담론하였다. 그 시절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그에게는 아주 값진 연구의 시간이였다.   1972년 농촌 로동개조를 마친 그는 대학 강단으로 돌아왔지만 학술자유는 여전히 박탈되던 때였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을 강의하던 중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강의한 죄로 ‘불온학자’로 지목되여 로동자선전대의 감시와 문초를 수없이 당했다. “로동인민이 력사를 창조한 것이지 어찌 왕이 문자를 창조할 수 있느냐”는 식의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학자의 량심을 꺾지 않고 력사문헌에 따른 사실주의 원칙을 견지했다. 후날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의 실사구시 학문정신은 해내외 학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회의를 이끌고 있는 최윤갑 원로교수(자료사진)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 기틀 마련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조선족들의 민족언어 사용이 점차 줄어들고 중국 조선어가 한어식으로 동화되가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중국 조선어를 살리기 위해 조선어학계가 뭉치고 나섰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최윤갑 원로교수, 그는 중국조선어학회 부리사장(1981~1988), 중국조선어학회 리사장(1988~1993),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주임(1986~1999) 등 직을 력임하며 근 20년 동안 조선어 연구와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주도했다.   앞서 최윤갑 원로교수는 1957년 젊은 나이에 벌써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 문제》 문장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찍부터 중국 조선어 규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임직기간 그는 중국조선어 표준문법(규범집)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조선어문법(연변인민출판사, 1983년)》 편찬을 주도했고 《조선어 규범집 해설(수정본, 1987년)》 편찬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실사구시 정신으로 중국의 실정에 맞게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지도했다. 중국 조선어의 표준문법과 규범화 작업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 조선어가 자기만의 문법체계를 갖게 되였으며 문화, 교육, 일상생활 등 제반 령역의 조선어 사용 혼란을 바로잡은 동시에 앞으로의 발전방향도 제시했다. 다른 측면에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정체성 수립에도 큰 역할을 발휘한 것이다.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에 대한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규범화사업을 직접 주도하면서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와 조선어 사용 현황(1996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사업에 대한 회고와 현재 부딪친 문제(1997년)》, 《조선어 띄여쓰기의 변화로부터 생각되는 조선어 띄여쓰기 통일안(1997년)》 등 론저를 발표해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을 완선화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2012년에 82세의 고령으로 론문 《사잇소리표기에 대하여(2012년)》를 발표하고 사잇소리 표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학술회 때마다 강조했다.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 등 학술성과 주렁   최윤갑 원로교수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떠한 출국류학, 국내연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형편에서 개인만의 노력으로 조선어 연구의 권위학자로 성장해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중국 조선어를 살리고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서 힘을 얻은 것이다.   그는 1980년에 자신의 학술성과를 집대성한 리론문법서 《조선어문법(료녕인민출판사)》을 출간해 조선과 한국의 문법체계를 그대로 직수입하는 1970년대 이전의 연구풍토를 바꾸고 부동한 시각에서 조선어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단어는 어휘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를 동시에 갖춘 언어적 단위’라는 단어의 정립기준을 세웠고 전통문법의 한계를 넘어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학, 미국의 기술언어학 및 현대언어학 리론을 대담히 수용하여 남과 북의 학자들과 다른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을 수립하였다.   특히 80세 고령에 출간한 《한국어문법 신강(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9년)》을 통해 ‘결합가’ 리론을 ‘문법 지배’ 리론으로 한걸음 더 발전시켜 한국어 품사 하위분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였다. 한국어의 동사, 형용사, 명사에 대한 하위분류법은 특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이 중국의 한국어교육 현장에서 증명되고 있다.   지금까지 최윤갑 원로교수는 《조선어문법(1980)》,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 신강(2009)》 등 13부의 학술저서를 펴냈고 조선어연구 론문 60여편을 발표했다. 론문들은 고대조선어로부터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음운론으로부터 통사론에 이르기까지, 방언학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본체론 연구로부터 대조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교재편찬, 인재양성 등 후대교육에 ‘한마지로’   조선어 연구 뿐만 아니라 후대교육에서도 그는 상당한 공을 들였다. 연변대학 어문학부 교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 학과장, 연변대학 언어문학대학 학장, 연변대학 초빙교수 등을 력임하면서 조선어(한국어) 전문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여러종의 대학교과서를 편찬하여 연변대학 국가중점학과 건설과 국내 대학 한국어학과 건설에 ‘한마지로’를 다했다.   대학시절 교재없이 힘들게 공부한 경력이 교재편찬을 시작한 계기였다. 당시 교수가 우에서 강의를 하면 그는 밑에서 철필로 마분지에 죽기내기로 필사를 해야 했다. 불편한 그 시절을 겪은 그는 연변대학 교원으로 남게 되자 교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부터 가졌다.   1957년에 그는 당시 쏘련이나 조선에서는 어음, 문법, 문장, 어휘를 배운다는 것을 참조해서 자신이 배우던 《조선어문법》에 이러한 내용들을 첨가하여 《현대조선어》로 고치고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어음론은 리세룡 교수, 어휘론은 김학련 교수, 문장론은 최윤갑 교수가 맡았다. 당시는 인쇄도 안되는 시기라 그들은 손으로 직접 적어서 등사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착수한 과목이 고대조선어였다. 같은 해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북대반’이 생기면서 그는 북경대학 류열 교수와 친분을 맺고 북경대학에 가서 《룡비어천가》, 《금강경언해》 등 자료들을 빌려올 수 있게 되였다. 그는 빌려온 자료들을 카드가 집에 넘치도록 필사를 하여 《고대조선문선집》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냈고 중국 경내에서 최초로 《고대조선어강독》이란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후 조선어학강좌는 전 교의 모범강좌로 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편찬한 《조선어어음론》과 《조선어문장론》도 줄곧 대학 교과서로 사용되였다. 1977년에 그는 교연실 동료들을 동원하여 《언어개론참고서》, 《조선어어음론참고서》, 《조선어형태론참고서》, 《조선어문장론참고서》, 《조선어어휘론참고서》, 《고대조선어참고서》 등을 인쇄본으로 출간하였다. 1984년에는 리세룡과 함께 《조선어학사전》을 집필하여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출간하였고 1987년에는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와 도서관에 련계를 취해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언해본), 《룡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설》, 《월인석보》, 《구급방언해》 등 20여권의 고전저서들을 얻어다 비교연구를 깊이 한 기초 우에서 마침내 실용가치가 큰 24만자에 달하는 《중세조선어문법》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교재들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중점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조선언어문학전공과 조선어전공이 국가 특색전공으로 선정되는 데 중요한 포석으로 되였다.   특히 중한 수교후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중국인 학습자들이 많아지면서 그는 70세에 《한국어문법(2000년)》을, 79세 고령에 《한국어문법 신강(2009년)》을 편찬했다. 이 책들은 중국내 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필독교과서로 큰 환영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학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반 중국 조선족의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착안점을 두었다. 1987년에 《조선어문을 대학입학시험 과목에 넣지 말아야 하는가》를 시작으로 《중국 조선민족 산재지구에서의 아동들에 대한 조선어 교육(1991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교육과 사용으로부터 본 조선어 통일의 필요성(1995년)》 등 론저를 통해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고민을 토로했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대학 재직 48년간 수만은 조선어(한국어) 인재를 양성했는데, 대부분 제자들은 국내 대학들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분 제자들은 훌륭한 언어학자로도 성장하였다. 류은종(연변대학), 최희수(연변대학), 전학석(연변대학), 강은국(복단대학), 강보유(복단대학), 렴광호(청도대학), 최순희(북경언어대학)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한국어 연구자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그중 류은종 박사는 2006년 한글날에, 강은국 박사는 2012년 한글날에, 강보유 박사는 2016년 한글날에 각각 한글발전 유공자로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았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일생의 심혈을 중국 조선어 발전과 한글 세계화에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업적을 기리여 김병민 전 연변대학 교장은 그를 우리 조선민족이 낳은 ‘중국의 주시경’이라고 평가했다. '구순 로인'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연구에는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료녕신문
2767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청년바람"이 불었으면... 댓글:  조회:3411  추천:0  2019-11-08
직장까지 그만두고 간 곳… 지방 빈집에 부는 '청년 바람' 2019.11.08.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10%를 조금 넘는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사람이 올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모두가 서울로 수도권으로 모여드는데, 한편에서는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박병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전남 목포의 명소 유달산. 중장년 관광객들 사이로 20대 청년들이 눈에 띕니다. 모두 서울 청년들로, '목포에서 석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 중입니다. [서지은(29세) : (여기 오게 된 계기가 있어요?) 서울에서 사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좀 지치고 그냥 뭔가 항상 급하고.] 이들을 인솔하는 김한나 씨 역시 지난해 여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아예 눌러앉게 됐습니다. [김한나 (28세·목포 정착) : 끝나고 나니깐 너무 아쉬운 거예요. 이 친구들이랑 헤어지기가…사실 목포도 정이 들었지만.] 지난 한 해 목포살이 참가자 60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28명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박은혜 (29세) : (부모님께서 여기 내려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어땠어요?) 저희 아빠는 미쳤다고 했고, 목포까지 가서 뭐 하냐고? 그런데 지금은 그래 잘살고 있으면 됐다고…] 빈집을 고쳐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를 운영하는 이도 있고 망한 가게를 세내어 채식 전문 식당을 연 사람도 있습니다. [정정이/목포 주민 : 이런 (젊은) 분들이 오시면서 여기 구도심이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젊은 층 인구가 급감한 전북 군산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인천서 내려온 27살 백서희 씨는 군산에서 빈집을 고쳐 사진관을 열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근대의상을 빌려주고 사진도 찍어줍니다. [백서희 (27세) : 인테리어 같은 경우에는 그냥 도면 그리고 컨셉을 짜고 뭐 하나 하나 사는 것까지 제가 했습니다.] 백 씨 말고도 서울, 수도권에서 내려온 13팀의 청년들이 한 대기업의 창업 지원을 받아 군산 살리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인천 원도심에 넘쳐나는 빈집도 참신한 사업 아이템이 됐습니다. 30대 청년 최 환 씨는 빈집을 고쳐 청년들에게 임대하는 이른바 '빈집은행'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반지하 빈집에는 버섯 농장도 여러 곳 만들었습니다. [최 환 (35세·'빈집은행' 대표) : 서울이었으면 경쟁이 치열해서 아무도 기회를 저희한테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이 아닌 지방, 신도심이 아닌 구도심이기에 오히려 기회와 도전의 문이 열렸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VJ : 윤 택)    、박병일 기자
2766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리다... 댓글:  조회:3243  추천:0  2019-11-04
중국조선족시가절 고고성 울렸다   2019-10-21  편집/기자: [ 김영화 ] [ 길림신문 ][ 2019-10-20 ]   19일, 연변주당위 선전부와 연변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및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최하고 연변가무단과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주관한 제1기중국조선족시가절행사가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이며 주석인 정봉숙의 사회로 진행되는바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백경승, 저명한 작가이며 중외작가 교류캠프조직위원회 주석인 조안표,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 임백, 저명한 작가이며 중국시가학회 상무리사 장경화, 저명한 시인이며 작가넷 부주필 안기, 이외에도 미국, 먄마, 라트비아 등 외국 유명 작가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김기덕은 축사에서 “아름다운 중국 신선한 연변 2019년 제1기 ‘중국조선족시가절’은 ‘민족시가의 전통문화 발양, 문화관광 융합발전을 추진, 변강사회 조화로운 번영’을 취지로 한다. 또한 민족문화특색을 부각시키고 시가문화정신을 전승하며 민족문화자신감을 지켜가고 대외문화교류를 주선으로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독특한 지역, 인문자원 우세를 발휘해 건국70주년과 개혁개방 40년래 새 시대 연변인민의 생활수준과 정신면모에서 생겨난 거대한 변화로 민족시가창작과 연구에서 풍성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연변의 농후한 민족특색과 풍부한 관광문화자원을 선전, 전시하여 연변의 지명도를 알리고 문화영향력을 제고하여 ‘문화강주’, ‘관광강주’로 일떠세우기 위해 정신문화력량을 힘써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경승은 축사에서 “‘중국조선족시가절’의 발족은 중국작가협회의 력사에 길이 남을 한페지로 그동안 연변작가협회는 수많은 민족문학인재들을 배출해내며  문학창작에 힘써 왔다”면서 앞으로도 습근평 총서기의 중국특색 사회주의사상의 인솔지도아래 연변작가협회는 새 시대 더 깊이 있고 품격있는 작품들로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주선률을 노래하며 문학예술에 더 큰 기여를 희망했다.         행사에서는 특별히 리욱, 김철,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리삼월, 한춘, 최룡관, 남영전, 박화, 정몽호 등 11명을 건국70주년 조선족 특수공헌시인으로 선정하여 상패와 영예증서를 수여했다. 이어 연변텔레비죤라지오방송 아나운서들이 무대에 올라 격정에 넘치는 시랑송을, 연변가무단과 예술학원에서 준비한 문예공연으로 시가절 분위기를 무르익혀갔다.     시인들의 큰 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 (ZOGLO) 2019년10월19일  "조선족시인들과 국내외 시인들의 만남의 장" "시와 사진, 시와 예술의 만남으로 조선족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다니 과히 놀랍도다" "감동 그 자체였다. 민족이 따로 없이 시와 노래로 하나가 된 축제" ... 건국 70주년을 맞으며 조선족시인들의 큰 잔치인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이 10월 19일 국내외 시인들과 조선족시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막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개막식 선포   연변주당위선전부, 연변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관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는 시랑송대회, 대형시화전, 공로시인 표창, 문예야회, 시창작세미나, 현지답사, 대형다큐멘터리제작 등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이 사회를 한 이날 개막식에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이 환영사를,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이 축사를 했다.   환영사를 하는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김기덕   김기덕 부장은 " 문화가 흥(兴)하면 국운도 흥성하고 문화가 강대해지면 민족도 강대해진다"며 "시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시가절행사를 계기로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문화로써 관광산업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는 전국정협 상무위원 겸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백경성. 백경성 부주석은 "연변문련과 연변작가협회가 설립된이래 문학예술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해냈으며 따라서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왔다."면서 "조선족의 문학과 예술은 중국 70년의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이를 장식했다. 이는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헌신정신, 피타는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개막식 사회를 하는 연변작가협회 정봉숙 주석 이날 조선족시단에서 혁혁한 공훈이 있는 리욱, 김철, 리상각, 한춘, 조룡남,리삼월, 김성휘,박화, 남영전, 최룡관,정몽호  등 11명 시인들을 표창했다. 그중 8명은 작고한 원로시인들이다. 수상자 및 대리수상자와 함께  "리욱 원로시인은 해방전과 해방 후 두 시대에 걸쳐 시창작을 진행하여 조선족시단을 개척하고 정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토신이라 지칭하기에 손색없다. 그는 조선어와 한어로 시창작을 하고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이하 략함)   모택동이 1936년에 쓴 시"시원춘설"을 읊조리는 임지원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는 건국 70주년 맞이 두만강천리답사 계렬활동을 펼치면서 현지답사를 통해 더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물은 오늘에 전시된 시화이며 "중국조선족시선집"을 편찬해낸 것.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겸 시창작위원회 주임이자 이번 행사를 총 기획한 김영건은 "시인들은 현지답사를 통해 삶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노래하는 좋은 시화들을 창작해냈다.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리라고나 할가. 시화를 전시하고 시선집을 펴내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와 춤으로 시와 예술의 만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건국 7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련다."며 "'뿌리 깊은 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야회는 당의 민족정책의 혜택아래 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산해관 넘어 대륙으로 대서양 건너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가는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담아냈다. 전반 무대를 시가 흐르는 야회로 장백산의 산생, 그날의 자취를 찾아 인정의 세계로 펼쳐지는 진달래 산천으로 펼쳐지며 우리 민족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뿌리 깊은 토대를 바탕으로 이 땅에 당당한 주인 된 오늘을 노래하고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속에 그 뿌리를 뻗치는 건실한 미래를 구가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야회는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서사시처럼 고도로 째이고 전반을 시의 흐름으로 풀면서 우리 무용의 최고의 경지로 옷 입고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전반을 이어나갔으며 특수처리 등 수법으로 매 장의 아름다운 화폭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적 무대로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준 무대하 할 수 있다.     시가절의 일환으로 오후 연길 상우호텔에서 시가세미나를 개최했으며 20일에는 답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영상 방호범     시화전 한장면   시선집   파일 [ 43 ]                                         
2765    "새 래일을 갈망, 아우성 칠 때 새 래일의 주인공이 된다"... 댓글:  조회:3635  추천:0  2019-11-01
최신기사 민족을 위해 살다간 '떠돌이' 문동환 목사의 삶 | 2019-03-10       6.15공동행사 해외측 준비위 공동위원장이었던 고인이 2005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2005.8.13.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3월 9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는 스스로 '떠돌이 목자'라 불렀다. 고인은 목사이자 교육자, 신학자였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고인이 한곳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든 그는 민족과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떠돌이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펼친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친동생으로 알려졌지만, 고인 역시 큰 족적을 남긴 한국 근·현대사의 증인이다.   고인은 일제를 피해 고국을 떠난 이들이 모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한 근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 목사를 보며 6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민족을 위해 살겠다는 꿈을 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는 명동촌을 일구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다. 명동학교는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을 배출했다. 고인은 어린 시절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고인은 명동촌에서 1921년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 김신묵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CBS TV가 지난 1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는 당시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 인사였던 고인의 육성을 담았다. 고인은 "김약연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교사였고 만주 일대 한국인의 지도자였다"며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진다"며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말한 대로 목사가 된 고인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에 뛰어들어 역사와 통하는 삶을 살았다. 1961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다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1975년 해직됐다. 해직 교수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치던 그는 생명문화 공동체 '새벽의 집'을 열었다.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시도였다. 고인은 명동성당에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인은 명상기도와 성서를 통해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 죄수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면서 민중신학의 실마리를 잡았다. 출옥 이후 '새벽의 집'은 민주화운동의 둥지가 됐다. 고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구속자 석방을 위한 농성과 시위를 벌였고, 1979년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그 해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됐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직한 고인은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고인은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고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냈지만 1992년 유학 시절 만난 미국인 아내 페이 핀치백(한국명 문혜림)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도 세계 현안과 한국의 현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말년까지 성서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고인은 2009년 자서전 '문동환 자서전 - 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2012년 '바벨탑과 떠돌이'를 펴냈다. 90대 중반 나이에도 '예수냐, 바울이냐' (2015년), '두레방 여인들'(2017년) 등을 출간했다. 고인은 80대에 접어들면서 민중신학을 넘어 '떠돌이 신학'을 펼쳤다. 고인은 저서에서 "성서에서 새 역사를 창출한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온 민중과 다르다"며 "강자들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완전히 밀려난 떠돌이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떠돌이라는 개념을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도 접목해 설명했다. 고인은 "자본주의 산업 문화가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하여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다"며 "그들이 떠돌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새 내일을 갈망하면서 아우성을 칠 때 새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 문동환 목사 별세 2019-03-09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크랩 프린트 크게 작게   거짓과 싸워온 개혁가이자 공동체운동가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사 100년 온몸 겪어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월남 형 문익환 목사와 민주화운동…투옥·망명 한때 정치 참여…5·18특위 위원장 맡기도 “안으론 따뜻했지만 밖으론 단호했던 분”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65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590px;" title="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 생전의 문동환 목사. 자료사진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3월 9일 오후 5시50분께 별세했다. 향년 98.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 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 교육사, 민중사, 민주화운동사, 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194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교사로 근무했던 용정 명신여중 교정에 서 있는 문동환 목사. 1946년 5월 ... 월남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 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전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 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올린 결혼식에서 신부 문혜림과 함께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문동환 목사. 맨오른쪽이 주례를 한 은사 김재준 목사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 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1972년 낸 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 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 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 교수, 직원, 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 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1980년 3월1일 사면 복권 소식을 듣고 부인 문혜림(왼쪽 둘째), 딸 영미(오른쪽 둘째)씨 등 가족들에 싸여 기뻐하고 있는 문동환 목사.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게 선교신학대학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 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년 3월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80년 이른바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자료사진"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9/0309/00500473_20190309.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00px;" title="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 1987년 2월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문동환 목사가 부인 문혜림(왼쪽), 형수인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자료사진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다.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합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문동환(뒷줄 왼쪽 넷째)·문혜림(왼쪽 다섯째)씨 부부가 형수 박용길(왼쪽 여섯째), 조카 문성근(앞줄 맨왼쪽), 딸 문영미(앞둘 왼쪽 둘째)씨 등 가족들과 2002년 2월 중국 룡정시 동커우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2008년 7월21일~10월3일 ‘길을 찾아서-떠돌이 목자의 노래’를 연재하고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으로 펴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씨와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사위 정의길( 선임기자)씨 등이 있다. 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이다. ...   /조현 기자 
276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온난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66  추천:0  2019-10-30
30년 뒤 호찌민·방콕 물에 잠겨?… 1억5천만 명 집 잃을 위기 2019.10.30.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기후 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일부 도시들이 물에 잠길 것이란 경고가 제기돼 왔었죠. 예상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넓은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란,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는데, 상하이, 방콕 같은 대도시들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기현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순식간에 도시를 덮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로,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트남 남부 일부 지역은 30년 뒤 물에 잠길 거라 예상돼 왔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부 거의 모든 지역, 경제수도인 호찌민 마저 수몰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베트남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천만 명이 밀집한 지역입니다. 미국 비영리단체 '클라이밋 센트럴'에 따르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영향 범위가 기존 예상치의 3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형지물을 배제하고 땅의 높이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해보니 예상치가 크게 달라진 겁니다. [벤자민 스트라우스/'클라이밋 센트럴' 대표 : "기존 연구는 위성에 의존해 빌딩 높이와 땅의 높이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태국은 수도인 방콕을 포함해 인구의 10%가 수몰 위험이 높은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체의 1%만 영향을 받을 것이라던 기존 예상치를 훌쩍 넘긴 겁니다. 중국의 상하이와 인도의 뭄바이 역시 도시 중심부 등이 해수면 상승에 취약한 지역으로 조사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 1억5천만 명이 해수면 상승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이라크 바스라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역사 문화유산이 많아 조치가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연구진은 해당 지역들에 임시 방파제를 설치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위험 지역 인구를 재배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KBS 뉴스 기현정입니다. 
2763    [타산지석] - 력사는 다 알고 있다... 세월이 약이다... 댓글:  조회:2953  추천:0  2019-10-30
검열을 딛고 선 한국영화... 삭제 장면 공개  2019.10.29.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영화 검열로 삭제됐던 장면이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통제와 간섭을 받았던 한국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선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영화 '자유부인'은 대학교수 부인이 젊은 남자와 춤바람이 난다는 내용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키스 장면이 잘린 채 상영허가가 났습니다. '피아골'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소위 '반공법' 위반에 걸려 내용을 바꾼 뒤 극장에 걸릴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 절망과 좌절 등의 표현이 금기시됐던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가장 많이 가위질당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감독이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의 계몽영화로 바꾸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했습니다. 한국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았고 1996년 '사전 심의'가 위헌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한순간도 검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장호 / 감독 : 검열보다 무서운 게 자기 검열이에요. 검열을 의식해서 나도 무장이 돼서 미리 작품을 고르며 검열을 하게 되고 이런 장르는 안되고 촬영할 때 밀 빼버리고.] 서슬 퍼런 검열의 역사를 신랄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한국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는지 생생히 보여줍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관 중이던 필름 자료를 디지털화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표현 장면 등 1950∼70년대 검열 삭제 영상을 최초 공개했습니다. 당시 배우와 감독들의 실감 나는 증언을 들을 수 있고, 70년대 검열실을 재현해 놓은 곳에서 검열로 삭제된 필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종원 / 영화사학가 : 이렇게 부끄러운 우리 시대가 있었다는 부끄러운 초상을 우리가 볼 수 있다라는 것. 그걸 통해서 우리가 자성의 마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통제와 간섭으로, 때로는 정치적 도구로 70년 넘게 '검열'로 점철됐던 한국영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내년 3월까지 계속됩니다. YTN 김선희 입니다. '키스도 자살도 안된다'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  2019.10.2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칸 영화제 최고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영화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지나 온 100년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영화사는 검열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데요.  그동안 삭제되고 편집된 장면들이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박효정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60년, 가난한 샐러리맨의 방황을 그린 영화 '오발탄'. 한국 영화 희대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온전히 상영되지 못했습니다. 아기를 업은 여성이 목을 맨 장면, 미군이 여성을 희롱하는 장면 등이 심의에 걸려 삭제됐습니다.  암울한 시대 청년들의 번민을 경쾌하게 그린 '바보들의 행진'은 자살하는 장면과 대학 휴강 장면 등이 가위질 당했고.  "더도 말고 C학점만 주세요. (안돼.) 그럼 D학점이요. (안된대도!) 그럼 E학점! (E학점은 없어. 다음엔 F야.)" 버스 안내양이 회사 내 비리와 성폭력을 견디지 못해 투신하는 내용의 '도시로 간 처녀' 역시 여러 군데 난도질당했습니다.  "검열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우리 영화는 30~50년을 앞질러 갔을거에요. 봉준호 감독이 50년전에 태어났을거야." 한국영상자료원이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영화 장면들과 검열 서류 등을 공개했습니다.  키스 장면은 풍기문란을 일으켜서, 자살은 사회상을 암울하게 그려서 등 검열 명분은 다양했습니다.  정권의 입맛을 거스르는 영화를 만들었다간 구속까지 당했던 시대.  엄혹한 가운데서도 1세대 감독들은 예술혼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검열을 의식한 적이 없어요. 언제나 우리곁에 있는 검열이고 그 검열에 의해 2차적인 피해로 내가 나 스스로 검열하는 입장이 되면 더 위험하다." 험난한 시대를 견뎌내고 세계 수준에 도달한 한국영화.  창작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되새기는 전시가 될 전망입니다.  연합뉴스TV 박효정입니다. 
276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25  추천:0  2019-10-27
[안녕? 자연]ㅡ  아이슬란드 최대 만년설, 30년 새 이만큼 줄었다 2019.10.26.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유럽 최대 규모 만년설이 지구온난화로 녹아 없어진 모습. 영국 던디대학 연구진 제공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로 지구상의 빙하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비교사진이 공개됐다. 영국 스코틀랜드 던디대학 연구진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년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 드론 장비를 이용한 공중 촬영을 시도했다. 연구진은 지난 2년간 유럽 최대의 빙산인 아이슬란드 남부 바트나이외퀴들(Vatnajökull) 지역을 집중 촬영했다. 고원지방인 바트나이외퀴들에는 곳곳에 많은 활화산이 있으며, 빙원의 녹은 물이 수백 개나 되는 강의 수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위성항법장치(GPS)가 장착된 장비와 헬리콥터를 이용해 바트나이외퀴들의 빙하와 만년설을 촬영했고 촬영 결과를 3D 매핑기술을 이용해 지도화 했다. 이후 이를 1980년대 당시 아이슬란드 국토조사를 통해 촬영된 항공지도 사진과 비교했다. 그 결과 면적이 7700㎢에 달했던 바트나이외퀴들의 만년설은 지난 30년간 평균 20m씩 그 두께가 낮아진 것을 확인했다. 일부지역은 30년 전에 비해 두께가 100~150m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슬란드대학, 아이슬란드기상청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특정 지역에 어떤 물리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아이슬란드 남동부의 눈과 얼음이 녹는 속도가 빨라진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다행히 우리는 1980년대 사진을 지도화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더 오래된 항공사진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서 “과학과 예술(사진)이 공통의 플랫폼을 공유하는 이러한 활동과 새로운 수단의 개발은 현재 진행중인 기후 변화의 전례없는 규모와 다양성, 복잡성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던디대학 연구진은 최근 같은 기술을 이용해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이탈리아명 몬테 비앙코)의 눈과 얼음이 기후변화로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송현서 기자 
2761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초의 영화... 댓글:  조회:3801  추천:0  2019-10-26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최초의 영화 상영     연도 1895년 12월 28일 저자 피터 퍼타도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의 영화를 선보이지만 결국 사진으로 관심을 돌린다. 파리 카퓌신 대로 그랑 카페 지하의 방은 가득 모인 사람으로 붐볐다. 이들은 어둠 속에 앉아 열 편의 짧은 영화 연속물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 사람들로, 각 영화는 40초 남짓한 길이에 주제는 '담요 위에 뛰어내리기', '아기의 식사', '바다에서 수영하기' 등 일상생활을 직접 관찰하여 가벼운 희극을 섞어 넣은 내용이었다. 상영은 큰 성공이었고 계속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 역사적인 최초 상영회보다 조금 뒤에 촬영한 한 장면은 화면을 거슬러 비스듬하게 달려오는 증기 기관차를 찍은 것으로, 관객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기려 들었다. 상영회를 연 것은 리옹의 한 사진사 겸 초상화가의 아들인 30대 초반의 형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1894년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형식의 에디슨의 영사기 시연을 보고 영향을 받아 아들들에게 영화 실험을 해보라고 격려했고, 둘은 곧 스프로켓 구멍을 이용해 카메라 안에서 필름을 감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1895년 초에 두 형제는 카메라, 인화 기계, 영사기 역할을 다 하는 작은 기계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를 냈다. 최초의 영화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퇴근하는 일꾼들을 담은 것으로 1895년 3월 22일 개인적인 자리에서 상영했지만, 최초로 영화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영화를 스크린에 비춘 것은 그랑 카페에서였다. 두 형제는 그들이 만든 기계를 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 조수를 고용했고,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극장을 개관했다(그들은 극장을 '시네마'라고 불렀다). 영화 한 편은 1900년 파리 박람회 때 거대한 화면에 투사하기도 했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루이 뤼미에르는 곧 이것이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 단정 지었고, 결국 형제는 기계에 대한 권리를 팔고 대신 컬러 사진에 집중했다. "영화는 전 세계를 즐겁게 한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있을까…?" 루이 뤼미에르, 영화의 선구자 [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영화 상영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최초의 유성영화     연도 1927년 10월 6일 저자 리처드 카벤디쉬 앨 존슨이 최초의 유성영화에서 첫 줄의 대사를 연기하는 영광을 누린다. 미국에서 전국 개봉한 최초의 유성영화-적어도 부분 유성영화-는 브로드웨이의 히트작 「재즈 싱어 The JazzSinger」로 워너 브라더스사(社)는 새로운 비타폰 사운드 프로세스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장면은 무성이었지만, 음악 시퀀스와 일부 대화 장면은 사운드를 삽입했다. 이 영화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는 시나고그 독창자인 아버지와 감상적이고 세속적인 곡들을 불러 스타가 된 유대인 소년(앨 존슨 분)의 이야기다. 존슨은 당대 최고의 매력적인 무대 연기자였으며, 활기찬 동작과 제스처, 관객과의 대화를 도입하여 비교적 절제된 보드빌 공연을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감의 소유자였으며 브로드웨이의 주요 작품을 공연할 때는 연기를 중단하고 관객에게 다가가서 공연을 마저 다 보고 싶은지 아니면 지금 당장 노래를 듣고 싶은지 묻곤 했다. 관객들은 언제나 후자를 선택했고, 그러면 그는 한 시간 동안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곤 했다. 1928년 존슨은 「싱잉 풀 Singing Fool」에서 "Sonny Boy"를 불러 미국 최초로 밀리언셀러 앨범을 기록했다. "잠깐 기다려요! 아직 아무것도 못들었잖아요! 기다리라니깐요!" 「재즈 싱어」에서 앨 존슨의 첫 번째 유성 대사 [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유성영화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276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미세먼지제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222  추천:0  2019-10-26
집 안 공기청정기는 필수… 이젠 집 바깥에서도 '청정기'  2019.10.2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날씨가 쌀쌀해지면 불쑥 찾아오는 미세먼지 많이 걱정되죠. 그러다보니 공기청정기를 집 안에 두고 쓰는 분들 많은데요. 요즘은 집 바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합니다. 조금이나마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박영우 기자가 담아왔습니다. [기자]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단지. 단지 안 버스 정류소가 눈에 띕니다. 이 곳엔 미세먼지를 차단하는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정류소 안에는 공기청정기가 설치돼 있고, 미세먼지 농도도 실시간으로 확인합니다. [임기상/경기 고양시 향동동 : 미세먼지가 버스정류장에 집중되잖아요. 미세먼지 제거시설이 있다는 것은 버스를 이용하는 이용자 입장에서 굉장히 고무적인 거죠.] 이처럼 미세먼지를 줄여주는 버스정류소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하나 둘 늘고 있습니다. 터널 안으로 차량 한대가 들어옵니다. 국내 한 회사가 정부 지원을 받아 만든 미세먼지 정화 차량입니다. 달리는 대형 공기청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서울시와 함께 미세먼지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지 실험도 진행했습니다. 이 정화 차량이 지나가면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가 3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이 효과가 20분 정도만 유지돼 지속시간을 얼마나 늘리느냐가 숙제로 남았습니다. 추워지면 불시에 들이닥치는 미세먼지. 그럴 때마다 외출을 삼가고 밖으로 나갈 땐 마스크를 쓰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한편에선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갖가지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영우 기자 / [영상취재: 이동현,이완근 / 영상편집: 김범준]
2759    [록색평화주의者] - "얘들아, 래일은 전쟁난다. 학교 오지마..." 댓글:  조회:3526  추천:0  2019-10-26
무기를 가까이 하면 죽음도 가까이 있다 2019.10.26.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인쇄하기  보내기 긴장감 도는 최전방에서 남북간 평화통일을 꿈꾸다 [오마이뉴스 글:오문수, 편집:김혜리] ▲  국제평화아트파크에 있는 조형물로 평화를 약속하는 높이 38m의 거대한 반지와 탱크 포신에 커다란 나팔이 붙어있다. 평화를 노래하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 오문수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러시아 정치인 레온 트로츠키가 한 말이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지나간 전쟁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또다시 6.25 같은 전쟁을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며칠 전 지인들과 함께 강원도 화천을 다녀왔다. 서울 잠실 운동장을 떠난 버스가 춘천을 거쳐 화천으로 들어가니 거리 곳곳에 "27사단 해체, 화천군민 분노한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화천 시장에 들러 한 상인을 만나 '27사단이 해체되면 지역 경기에 영향이 있느냐?'고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화천 하면 군인 가족이나 면회객이 대부분입니다. 27사단이 나가면 지역경제에 타격이 큽니다."    ▲  화천군 곳곳에 27사단 해체를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지역경제가 타격을 받는다는 게 이유다 ⓒ 오문수     플래카드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44년 전, 필자는 27사단 모 연대 수색중대에 배치되어 34개월 동안 근무했다. 일명 이기자부대인 27사단. 당시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왜 이기자 부대인가'를 묻자 "사단장 사모님 이름이 '이기자'"라는 우스운 풍문이 돌기도 했다.   난생처음 강원도 땅을 밟고 첩첩산중에서 밤중에 보초 서던 순간 전방이라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전방이지만 적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식이 끝나고 기분이 좋아진 주임상사의 무용담은 전쟁을 모르는 졸병을 더 긴장시켰다. 부대에 갓 배치된 동기병들은 노병인 주임상사의 경험담에 귀를 쫑긋하며 등골이 서늘했다.   "우리 수색중대가 최전방 DMZ에서 근무할 때 밤마다 긴장하지 않으면 죽는 수가 많았다. 어느 날 밤 북한 인민군이 철조망을 끊고 내무반에 들어와 군인들을 죽이고 증거로 코를 베어 가면 우리도 복수조를 북한에 보내 똑같이 코를 베어왔다."   다행히 필자가 부대에 배치되기 얼마 전부터 우리 부대는 최전방 DMZ 근무에 배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필자는 부대 내무반에 있는 한국 전쟁사 읽기를 좋아해 쉬는 시간이면 종종 전쟁사를 읽으며 일반인들이 몰랐던 6.25 당시의 현장 역사를 알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려 패주하자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이 당시 필자가 근무했던 지역에서 적의 급습을 받아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모습. 6.25전쟁 당시 화천과 철원일대를 관할했다고 한다.이 근방에서 살았던 89세된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6.25가 터지기 하루전인 6월 24일 초등학교 선생님이 "얘들아! 내일은 학교 오지 말아라. 내일은 전쟁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 오문수    그래서일까? 부대 인근에서 구덩이를 파다 미군 잠바에 붙어있던 녹슨 지퍼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일지도 모를 미군의 흔적. 자신의 땅도 아닌 먼 타국까지 와서 죽어간 그를 생각하며 영면을 빌었다.   수색중대는 정찰훈련이 많고 이동도 많다. 어느 날 부대가 이동한 후 막사에서 나온 쓰레기를 보니 상당량이다. 선임하사가 우리 분대에 "땅을 파 쓰레기를 태워 묻어라"고 명령했다. 분대원들은 깊이 70㎝ 너비 5m 정도 땅을 파 쓰레기를 모아놓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선임하사가 감독하기 위해 현장에 와 호통을 쳤다.   "야! 이놈들아! 그 정도 파서 되겠어? 1m 정도 더 파서 불태워 묻어."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구덩이를 겨우 파 힘들었는데 더 깊이 파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에 모두 투덜댔지만 하는 수 없었다. 군대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다시 걷어내고 분대원 하나가 맨 가운데를 삽질하면서 "돌이 있는지 삽이 잘 안 들어가는데요"라고 하자 다른 선임병이 "내가 해볼 테니 삽 이리 줘"라며 돌을 비켜 삽질을 한순간 돌과 다른 물체가 나왔다. 쇳덩어리다. 그냥 쇳덩어리가 아니라 느낌이 이상해 조심스럽게 쇳덩어리 주위를 파자 팔뚝만 한 크기의 80밀리 박격포탄이 나왔다.    6·25 때 사용한 불발 박격포탄이었다. 분대원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임하사의 명령을 안 듣고 쓰레기에 불을 붙였다면 분대원 모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등병으로 진급한 필자는 인근 부대원 몇 명이 수류탄 사고로 희생되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3대 독자의 부모가 부대에 찾아와 부대장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 아들 내놔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부대원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수류탄 폭발사고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사고 현장은 하루 전까지 필자가 보초 근무를 섰던 자리다. 만약 내무반장이 "이것들 근무상태가 개판이야! 내일부터 보초 근무 위치를 변경한다"라며 보초근무지 이동 명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내무반장의 명령에 따라 필자는 대공초소로, 필자와 보초근무지를 바꿔 나갔던 선임병은 사고 현장으로 나가 변을 당했지만 살아 돌아왔다. 선임병은 다행히 살아남아 복부와 허벅지에 박힌 파편을 빼냈다. 하지만 코뼈 부분에 파편 2개가 박힌 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수술을 담당했던 군의관이 "코뼈 부분에 박힌 파편을 빼내면 흉터가 크게 생긴다. 파편은 독성이 없으니 죽을 때까지 그냥 안고 살아라"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문득 어딘가에 살고 있을 선임병을 만나보고 싶다. 온갖 살상 무기로 가득한 한반도는 언제 또다시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 한반도에 두 번 다시 전쟁이라는 악몽이 불어닥쳐서는 안 된다.      평화를 염원하는 기념물들   ▲  평화의 댐 모습으로 댐높이를 높인 공사현장 모습이 보인다. 총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수량 26억 3천만톤인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댐이다. 수도서울이 물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전국민이 성금 661억을 전달했었다 ⓒ 오문수     일행과 함께 말로만 들었던 평화의 댐 관광에 나섰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평화로 3481-18에 있는 평화의 댐은 북한강 줄기의 최북단, 군사분계선 남쪽 9㎞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총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의 대규모 댐이다. 1986년 북한이 200억 톤가량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임남댐을 짓고 있어 만약 붕괴한다면 강원도는 물론이고 서울 국회의사당이 잠기게 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이를 들은 전 국민이 성금 모금에 나서 661억 원을 모아 댐 높이를 높이는 평화의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  평화의 댐 인근에 세워진 세계평화의 종 모습. 30여개 분쟁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된 탄피와 포탄, 무기류를 모아 만든 종이다 ⓒ 오문수   평화의 댐 인근에는 세계평화의 종이 있다. 평화의 종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철물을 재료로 만든 게 아니라 세계 30여 분쟁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됐던 탄피와 포탄, 무기류 철물을 모아 만든 종으로 높이 4.7m, 무게 1만 관(37.5t)이다.   평화의 종은 종 위에 달린 비둘기 날개(1관)를 따로 떼어내 보관하고 있다. 비둘기 날개 모양의 1관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9999관의 종에 1관을 추가해 세계평화의 종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2009년 공원개장식 때는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탄 인물이다.            ▲  평화의 댐 아래 있는 '국제평화아트파크'에는 대북방송용 확성기를 이용해 평화를 뜻하는 영어 'PEAC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오문수     ▲  국제평화아트파크에 있는 조형물로 '우리가 전쟁속에 살고 있다면'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 오문수    평화의 댐 아래에는 '국제평화아트파크'가 있다. 지난 2009년 화천군이 38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만 2000㎡여 부지에 전쟁의 아픔과 안보·평화·생명을 주제로 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 있는 30여 점의 조형물은 전쟁의 상징인 무기를 활용해 평화예술품으로 재구성했다. 노란 나팔을 달고 오색 바람개비로 장식한 탱크, 평화를 약속하는 높이 38m의 거대한 반지, 폐기 처분된 탱크, 자주포, 전투기 등은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화천 인근 호수위에 세워진 조형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 땅에 더 이상 전쟁이 없어야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이 유지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화천북방 최전방에서는 뺏고 뺏기는 고지전으로 수많은 군인들이 전사했다. ⓒ 오문수   군에서 제대한 지 오래됐지만 가끔 대공초소에서 보초 서던 중 '펑!' 하며 온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던 수류탄 사고와 30미터쯤 하늘로 올라가던 파란색 화약 연기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가끔 생각해 본다. 남북이 극한적인 무력대결을 관두고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아니 평화통일이 된다면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생당할 필요가 있을까?       ///오마이뉴스(시민기자)
2758    [이런저런] - 1... 5억... 댓글:  조회:3304  추천:0  2019-10-26
  '일당 1만원' 어부 6.5kg 앰버그리스 발견… '바다의 로또' 대박  2019.10.25.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향유고래 '토사물'…지속효과 좋아 향수 원료로 사용 발견직후 창고 쳐박아두기도…당국 "5억원 이상 가치"태국 남부 코사무이의 해변에서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한 줌루스 티아초(55)/사진=호주 야후뉴스 화면 캡처 [아시아경제 김가연 인턴기자] 생활고를 겪던 태국의 한 어부가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했다. 호주 야후 뉴스 등 외신은 줌루스 티아초(55)가 태국 남부 코사무이 해변을 걷던 중 6.5kg에 달하는 앰버그리스 덩어리를 발견했다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앰버그리스는 향유고래의 장에서 배출되는 회색 향료 물질로, 오징어를 주식으로 삼는 향유고래의 체내에 각질이 축적된 뒤 결석이 돼 배설된다. 용연향이라고도 한다. 앰버그리스 자체에서는 향기가 거의 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향기 성분을 알코올에 녹인 뒤 보류제로 사용된다. 보도에 따르면 티아초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고래 토사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확실하지 않아 창고에 넣어둔 채 매일 400바트(한화 약 1만5532원)를 버는 어부 일을 계속해왔다. 태국 남부 코사무이의 해변에서 47만 달러(한화 약 5억5248만 원) 상당의 고래 토사물을 발견한 줌루스 티아초(55)/사진=호주 야후뉴스 화면 캡처 '티아초가 창고에 고래 토사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확산하자, 이웃들은 그를 찾아가 발견물이 토사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티아초는 "내 조카가 마을 사람들에게 '고래 토사물을 찾은 것 같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몇 명이 찾아왔었다"라며 "그들은 표본 몇 개를 채취해 갔지만 이게 고래 토사물이 맞는지는 아무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 고래 토사물이 맞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진실을 알고 싶어서 관련 당국에 연락해 확인했다"고 전했다. 수라타니 지방의 주지사 위쇼우트 진토는 전문가들과 함께 지난 22일 티아초를 찾았다. 전문가들은 분석 결과, 티아초가 발견한 덩어리의 80% 이상이 앰버그리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선례들로 미루어보아, 이는 약 47만 달러 상당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티아초는 "이게 진짜 고래 토사물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앞서 지난 2016년 11월 80kg에 달하는 앰버그리스가 오만의 어부 세 명에 의해 발견된 바 있다. 해당 앰버그리스는 약 300만 달러(한화 약 35억 원)에 판매됐다.   /김가연 인턴기자  ===============================/// 국제 ‘바다의 로또’ 용연향 주운 태국 어부… 5억 5000만원 가치 횡재 2019.10.25            태국의 한 어부가 ‘바다의 로또’로 불리는 값비싼 용연향을 건지는 횡재를 만났다. 수컷 향유고래의 배설물인 용연향은 고급 향수 등의 재료로 사용되며, 희소가치가 높아 고가에 거래된다. 횡재를 만난 태국 어부는 올해 55세의 치아콧이라는 어부로, 올해 초 태국 타이만 남서쪽에 있는 사무이섬에서 우연히 커다란 돌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주운 용연향을 작업장에 보관했다. 이후 이웃들에게 자신이 주운 것의 정체를 아느냐 물었고, 값비싼 것으로 보인다는 주민들의 말을 들은 후에야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22일 현지 관청에서 파견된 전문가가 그의 집을 찾았고, 분석 결과 그가 주운 것이 값비싼 용연향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문가는 그가 주운 6.5㎏의 용연향의 가치가 최고 한화로 5억 5240만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용연향의 필수 성분으로 알려진 암브레인의 비율이 80%에 달한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바닷가에서 일하며 하루 평균 400바트(한화 약 1만 5600원)를 벌어 온 치아콧은 “전문가의 분석을 기다리기까지 약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면서 “내가 주운 것이 값비싼 용연향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으며 이를 곧 판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2016년 오만의 한 어부는 80㎏에 달하는 용연향을 발견해 300만 달러(35억 2600만원)를 손에 쥐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송현서 기자 ///서울신문 ======================///     [과학백과사전] 앰버그리스(ambergris)       향유고래의 장내(腸內)에서 배출되는 회색의 향료 물질. 용연향(龍涎香)이라고도 한다. 앰버그리스 자체는 향기가 거의 없으나 향기의 성분을 알코올에 녹여 보류제(保留劑)로 사용한다, 주된 향기성분은 앰브레인이라고 하는 트리테르펜 화합물이다. 향유고래는 오징어를 상식하기 때문에 「오징어의 주둥이」로 불리는 각질이 체내에 축적, 이것이 결석이 되어 몸 밖으로 배설된다. 비중이 작은(0.9~0.92 정도) 왁스(蠟) 상태의 이 덩어리가 앰버그리스인데 포획한 고래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배설되어 해상에 떠 있기도 하며, 해변에 떠밀려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대의 것은 무게가 약 152kg에 이른다.   =============================///     시사상식사전 용연향      수컷 향유고래의 배설물로, 고급 향수의 재료로 사용됨             외국어 표기     龍涎香(한자) ambergris(영어)   용연향은 향유고래의 창자 속에서 생성되는 물질로, 향유고래가 먹은 먹이 중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분이 돌처럼 모여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고래의 몸에서 배출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거나 해안가로 밀려나와 발견되기도 한다. 신선한 상태에서의 용연향은 부드러운 질감과 검은 색상을 띠며 악취가 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바다 위를 떠다니며 햇빛과 소금기에 노출되면 딱딱해지면서 검은색이 점차 연해지고, 좋은 향이 나 고급 향수의 재료로 사용된다. 매우 희귀한 북쪽 잉글랜드 연안에서 발견된 향유고래의 용연향. 고급 향수 산업에 사용 됨(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용연향은 바다 위에 오래 떠다닐수록 향이 좋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며, 「바다의 로또」 혹은「 바다의 황금 덩어리」라 불릴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 이처럼 용연향은 값이 매우 비싸 예로부터 「바다신의 선물」으로 일컬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연향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용연향   [ 龍涎香 ] 유형 물품 성격 약재 재질 말향경의 장내 분비물질 용도 약용, 강장제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말향경과(抹香鯨科)에 속하는 동물인 말향경의 장내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건조시킨 약재. 내용 말향경은 크기가 거대하여 14∼23m에 달하고 자웅의 개체 차이가 크다. 이마 부위는 둔원형이고 비교적 세장한 아래턱이 심하게 돌출되어 있으며, 치아가 하악에 붙어 있다. 머리의 꼭대기 왼쪽에 한 개의 분수구멍이 있고, 눈 부위부터 입가 뒤쪽으로 외이공(外耳孔)이 작게 나와 있다. 다리는 비교적 작고 넓은 원형이며 꼬리는 넓다. 몸의 등 부위는 암흑색이며 옆은 담색을 띠고 배 부위는 은회색 또는 회색이다. 열대·아열대지방에 서식하는데, 깊은 바다에서 생활하고 오징어를 즐겨 먹는다. 이 약은 열대 남방지방에서 생산되는 유향(乳香)·몰약(沒藥)·안식향(安息香)과 함께 고려시대에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들어온 것이다. 용연향은 포획 즉시 분비물을 수거하여 건조시킨 것으로 불투명하며 아교상으로 흑갈색을 띠고 때로 오색의 광채를 발할 때도 있다. 성분은 암브레인(ambrein)·회분 등이 함유되어 있다. 약리작용은 소량에서 중추신경의 흥분작용을 나타내고, 대량에서는 억제효과가 있으며, 강심작용과 더불어 혈압강하작용도 있다. 약효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진통·이뇨작용이 있어서 해소·천식·복통·임질 및 때로 강장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1회 용량은 1g이며, 금속제에 넣어 보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참고문헌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김두종, 탐구당, 1979) 『中藥大辭典』(江蘇新醫學院, 上海 科技出版社, 1979) 관련이미지 매우 희귀한 북쪽 잉글랜드 연안에서 발견된 향유고래의 용연향. 고급 향수 산업에 사용 됨(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용연향 [龍涎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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