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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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영화인 신상옥 감독
신 감독 촬영 준비 중 낭떠러지 추락
“에이, 앵글 좋았는데…” 아쉬워해
김승호·김진규·최무룡 제치고
‘연산군’ 주연 발탁 스타 만들어줘
은막 떠나자 “왜 일찍 관뒀나” 타박
“우리 좋은 작품 하나, 다시 한번 멋지게 해봅시다.”
천국에 가서 신상옥 감독을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최은희씨와도 약속한 일이다. 최씨가 투병 중일 때 “살아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자고, 셋이 다시 뭉쳐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맘껏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 첫 번 작품은 신 감독이 평생의 대작으로 기획한 ‘징기스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 감독은 말년에 병환으로 고생하다 2006년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영화계장’으로 진행됐고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영결식 때는 공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모두가 ‘빨간 마후라’를 불렀다. 수도 없이 부른 노래지만 그토록 슬프게 들린 적은 없었다.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가기 한두 달 전쯤 내 제주 집에 온 적이 있다. 하루 이틀 머물러 보고는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그가 부탁 하나를 해왔다.
“나 여기서 좀 쉬게 해줘. ‘징기스칸’ 콘티를 여기서 끝내야겠어.”
“예, 언제든 오십시오. 우리 마지막 작품 같이 하십시다.”
우리는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곧 보따리 싸서 다시 오겠다던 신 감독과 그렇게 영영 이별을 하게 될 줄을….
내 인생의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신 감독이 1순위다. 나를 영화계에 발 들이도록 한 건 ‘과부’(1960)의 조긍하 감독이지만,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건 신 감독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이끌고 있었는데 잘나가는 배우들도 그와 일하고 싶어 경쟁을 했다. 특히 ‘연산군’(1961)은 김승호·김진규·최무룡 등 당시 최정상 스타들이 서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는데 신 감독이 “이건 신영균이 딱이다”며 아직 충무로 신출내기인 나를 점지했다. 연극 무대에서 다진 나만의 폭발력을 주목한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신 감독은 정말 영화를 위해서 태어나 영화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는 빛을 좇는 불나방이 됐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한번은 ‘강화도령’(1963)을 찍을 때였다. 신 감독은 카메라 앵글을 잡으려고 북한산 암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했다. 한쪽 눈을 감고 루페(렌즈)를 보며 앞으로 가다가 한순간 이끼 낀 곳을 헛디뎠는지 7~8m 아래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낭떠러지 아래 가시넝쿨이 있어 목숨을 건졌다. 팔이 좀 긁히고 뒷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가 박살 나는 정도로 끝이 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정작 그는 아픈 내색도 않고 “에이, 앵글 좋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도 그렇고 당시 배우들은 신 감독을 참 좋아했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자를 카메라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선을 정해두고 몇 발짝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가 자유롭게 자기 감정을 맘껏 표출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움직여줬다. 물론 맘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거침없이 ‘컷’ ‘NG’를 외쳤다.
그때는 영화 필름이 비싸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는 감독들이 많았는데 신 감독은 달랐다. 남들은 필름을 한 3만~4만 자 쓴다면 신 감독은 7만~8만 자씩 썼다. 사업 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빚쟁이들이 촬영장까지 찾아와 옆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세트장에 고급 가구나 집기가 필요하면 자신의 집에서 쓰던 걸 가져와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아 부인 최은희씨가 종종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양반은 진짜 뼛속까지 영화인이구나’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 감독 앞에서 최은희씨와 입술이 맞닿는 연기를 하느라 진땀 뺐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강화도령’에서 최은희씨가 물 한 모금을 자기 입안에 넣어 다 죽어가는 내게 먹이려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인 신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정면으로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가 약간 비뚤어지게 고개를 돌리면 신 감독은 어김없이 컷을 외쳤다. “물을 입속에 넣어야지 왜 옆에 다 흘리나. 제대로 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신 감독은 사랑하는 여인보다 영화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 같았다.
같은 ‘평산 신씨’라서인지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신 감독은 “연기 지도를 안 해도 쓸 수 있는 배우 중 하나”라고 나를 치켜세우곤 했다. 한번은 촬영장을 찾은 내 아내에게 이런 말도 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10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10번을 다 진짜 울어요.” 무뚝뚝한 신 감독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 감독은 100% 영화인이었다. 70년대 후반 내가 은막을 떠난 이후 나는 그의 불만 섞인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는 “신영균에게 흠이 있다면 배우를 일찍 그만둔 거야”라며 아쉬워했다. 늙으면 늙은 대로, 노망이 들면 노망이 든 대로 배우의 생명은 길고 길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욕심 같아선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멋진 영화를 남기고 싶지만, 신 감독이 없으니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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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영화인 신상옥 감독
신 감독 촬영 준비 중 낭떠러지 추락
“에이, 앵글 좋았는데…” 아쉬워해
김승호·김진규·최무룡 제치고
‘연산군’ 주연 발탁 스타 만들어줘
은막 떠나자 “왜 일찍 관뒀나” 타박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다 죽어가는 철종(신영균)에게 복녀(최은희)가 입으로 물을 먹이는 장면. 신영균씨는 신상옥 감독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인 최은희씨와 입 맞추는 연기를 하는 게 곤혹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영화 캡처]
천국에 가서 신상옥 감독을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최은희씨와도 약속한 일이다. 최씨가 투병 중일 때 “살아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자고, 셋이 다시 뭉쳐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맘껏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 첫 번 작품은 신 감독이 평생의 대작으로 기획한 ‘징기스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영균은 수도꼭지” 내 연기 늘 칭찬
신 감독은 말년에 병환으로 고생하다 2006년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영화계장’으로 진행됐고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영결식 때는 공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모두가 ‘빨간 마후라’를 불렀다. 수도 없이 부른 노래지만 그토록 슬프게 들린 적은 없었다.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가기 한두 달 전쯤 내 제주 집에 온 적이 있다. 하루 이틀 머물러 보고는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그가 부탁 하나를 해왔다.
“나 여기서 좀 쉬게 해줘. ‘징기스칸’ 콘티를 여기서 끝내야겠어.”
“예, 언제든 오십시오. 우리 마지막 작품 같이 하십시다.”
우리는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곧 보따리 싸서 다시 오겠다던 신 감독과 그렇게 영영 이별을 하게 될 줄을….
내 인생의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신 감독이 1순위다. 나를 영화계에 발 들이도록 한 건 ‘과부’(1960)의 조긍하 감독이지만,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건 신 감독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이끌고 있었는데 잘나가는 배우들도 그와 일하고 싶어 경쟁을 했다. 특히 ‘연산군’(1961)은 김승호·김진규·최무룡 등 당시 최정상 스타들이 서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는데 신 감독이 “이건 신영균이 딱이다”며 아직 충무로 신출내기인 나를 점지했다. 연극 무대에서 다진 나만의 폭발력을 주목한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신 감독은 정말 영화를 위해서 태어나 영화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는 빛을 좇는 불나방이 됐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신상옥 감독은 카메라가 돌면 물불을 안가렸다. 북한산에서 영화 ‘강화도령’을 찍다가 7~8m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했다. [중앙포토]
나도 그렇고 당시 배우들은 신 감독을 참 좋아했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자를 카메라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선을 정해두고 몇 발짝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가 자유롭게 자기 감정을 맘껏 표출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움직여줬다. 물론 맘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거침없이 ‘컷’ ‘NG’를 외쳤다.
신 감독, 사망 두 달 전까지 작품 몰두
그때는 영화 필름이 비싸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는 감독들이 많았는데 신 감독은 달랐다. 남들은 필름을 한 3만~4만 자 쓴다면 신 감독은 7만~8만 자씩 썼다. 사업 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빚쟁이들이 촬영장까지 찾아와 옆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세트장에 고급 가구나 집기가 필요하면 자신의 집에서 쓰던 걸 가져와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아 부인 최은희씨가 종종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양반은 진짜 뼛속까지 영화인이구나’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평산 신씨’라서인지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신 감독은 “연기 지도를 안 해도 쓸 수 있는 배우 중 하나”라고 나를 치켜세우곤 했다. 한번은 촬영장을 찾은 내 아내에게 이런 말도 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10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10번을 다 진짜 울어요.” 무뚝뚝한 신 감독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 감독은 100% 영화인이었다. 70년대 후반 내가 은막을 떠난 이후 나는 그의 불만 섞인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는 “신영균에게 흠이 있다면 배우를 일찍 그만둔 거야”라며 아쉬워했다. 늙으면 늙은 대로, 노망이 들면 노망이 든 대로 배우의 생명은 길고 길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욕심 같아선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멋진 영화를 남기고 싶지만, 신 감독이 없으니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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