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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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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7    [그것이 알고싶다] - "피뢰침"의 비밀?... 댓글:  조회:5655  추천:0  2018-08-01
[과학을읽다] 낙뢰(落雷) 막아주는 '피뢰침'의 비밀 김종화 2018.08.01.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초고층 건물의 피뢰침을 점검하는 기술자. [사진=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화면캡처] [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지난 주말 서울에는 소나기와 함께 낙뢰(落雷)가 쏟아졌습니다. 폭염에 소나기는 반가웠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엄청난 기세로 세상을 삼킬 듯 내려치는 낙뢰는 무서웠습니다. 낙뢰는 흔히 '벼락'이라고 합니다. 대지와 구름 사이에서 발생하는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급격한 방전 현상입니다. 벼락은 빛의 속도의 절반인 초당 14만9896㎞의 속도로 발생하는데, 우리 눈으로 한번 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게는 42회까지 위아래로 몰아친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인 번개는 42번이나 벼락이 치는 잠깐 사이에 비치는 불빛에 불과한 것이지요. 벼락이 칠 때 어떤 물체나 입자가 가진 전기의 양을 의미하는 전하량은 전압이 평균 10억 볼트, 전류는 2만~3만 암페어에 달합니다. 이는 100와트(W) 짜리 백열전구 7000개를 8시간 동안 켤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벼락칠 때의 열기는 태양 표면온도의 5배에 달하는 3만℃까지 뜨거워진다고 합니다. 방전범위도 최소 1㎞ 이상입니다. 흔히 나쁜 짓을 하거나 범죄자 등을 비난할 때 '벼락 맞을 놈'이란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벼락을 맞는 사람은 농부나 낚시꾼, 등산객 등이 많습니다. 벼락은 죄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노리는 것이지요.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2017년) 낙뢰가 발생한 횟수는 31만6700여 회입니다. 이로 인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는데 벼락 맞을 확률은 0.001%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봄, 겨울보다 여름(6~8월)에 낙뢰가 많이 발생하는데 지난해 7월에만 18만 여회 발생했다고 합니다. 최근 기상이변이 심화되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낙뢰 발생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지구 대기온도가 1℃ 상승할 때 낙뢰의 발생 가능성은 5~6% 정도 증가한다고 밝혔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1세기 전보다 지구 전체의 낙뢰발생 가능성은 약 30% 이상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낙뢰로 인한 피해는 사람이 감전 당하거나 가옥과 삼림의 화재, 건축물과 설비의 파괴 등 직접 피격으로 발생하는 직접적 피해보다 전원선이나 통신선 등 전력계통을 통해 장비에 과도한 전압이 침입하는 '서지(Surge)'를 통한 간접적 피해가 더 큽니다. 서지는 전기 회로의 이상을 초래하고 전력·통신설비의 오작동을 일으켜 국가기반 및 산업시설 등을 멈추게 해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해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벼락에 맞는 모습.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이런 피해를 막아주는 것이 '피뢰침(避雷針)'입니다. 글자 그대로 낙뢰를 피하기 위해 만든 침이라는 뜻입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능한 정치가이면서 뛰어난 과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피뢰침을 발명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프랭클린은 낙뢰도 전기가 아닐까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 호기심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됩니다. 1752년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 중에 그는 연줄에 열쇠를 매달아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도체인 열쇠를 이용해 낙뢰의 전기적 특성을 실험한 것입니다. 낙뢰가 치면서 열쇠에 불꽃이 튀자 프랭클린은 낙뢰의 실체가 전기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문제는 천둥번개와 벼락이 치면 건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는데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낙뢰가 건물이나 사람에게 떨어지지 않고 땅속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이를 위해 벼락이 치면 위험을 무릅쓰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 벼락이 떨어지는 모습을 열심히 관찰했습니다. 오랜 세월 벼락치는 모습을 관찰하던 끝에 그는 끝이 뾰족하고 높이 위치한 물체일수록 벼락을 많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전기가 잘 통하는 소재로 만들어진 뾰족한 막대기를 세운 후 전기가 잘 통하는 구리선을 땅속까지 연결했습니다. 그러자 벼락은 뾰족한 철막대기로 빨려들 듯 바로 땅으로 흘러가 흩어지게 됩니다. 마침내 피뢰침이 발명된 것입니다. 피뢰침은 돌침부, 피뢰도선, 접지 전극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돌침부의 돌침은 구리나 용융 아연 도금을 한 철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피뢰도선은 구리나 알루미늄이 사용됩니다. 피뢰도선을 건물의 외부에 설치할 때는 전등선·전화선이나 가스관으로부터 1.5m 이상의 간격을 두고 설치해야 합니다. 접지 전극은 아연 도금 철판 등을 사용해 접지저항이 10오옴(Ω) 이하가 되도록 지하에 묻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피뢰침으로 모은 낙뢰의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낙뢰로부터 완벽하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 따라 낙뢰의 빈도수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이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최고액권 100달러 지폐 속의 벤저민 프랭클린.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2010년에 브라질 캄피나대학 연구팀은 지붕에 태양 패널과 비슷한 '습기 전기' 수집 패널을 설치하고, 낙뢰를 이용해 전력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벼락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확실한 기술이 개발된 상태는 아닙니다. 반면, 피뢰침이 낙뢰를 끌어 당기는 만큼 낙뢰의 거대한 에너지로 인해 피뢰침 주변에 미치는 크고작은 피해를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기술들은 이미 개발돼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피뢰침 발명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안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재능 기부인 셈이지요. 그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허가나 비용 없이 피뢰침을 설치할 수 있었고, 많은 생명과 피해를 예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프랭클린은 "지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높은 이윤을 보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치가로서도 훌륭했지만 과학자로서도 인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일까요.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최고액권 100달러 짜리 지폐 속의 인물로 세계인에게 영원히(?)사랑받고 있습니다. /김종화 기자
239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독살사건",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608  추천:0  2018-07-31
지진 때 사람 살린 '영웅 구조견' 독살에 이탈리아 시끌 2018.07.3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사람구한 개를 사람이 죽여"..동물학대 처벌강화 목소리  로마서 개 17% 독살.."이웃집개 못참는 정서탓 독미끼 기승" 주인 파비아노 에토레와 함께 있는 카오스의 생전 모습 [에토레 페이스북 캡처]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 이탈리아 강진 당시 많은 사람을 구해 유명해진 구조견이 독살로 의심되는 죽임을 당하면서 동물권익운동가들은 물론 정치권까지 들썩이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과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들이 30일(현지시간) 전했다. 독일산 셰퍼드 종인 카오스는 지난 2016년 8월 규모 6.2의 지진이 이탈리아 중부 아마트리체 산간 마을을 강타, 2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잔해에 깔린 생존자들을 찾아내 '영웅 구조견'으로 이탈리아에서 널리 알려졌다. 두 달 뒤 발생한 근 10년 내 가장 강력했던 노르시아 지진 당시에도 구조 활동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실종된 남성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카오스 주인 파비아노 에토레는 지난 28일 라퀼라시에 있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카오스의 사체를 발견했다. 카오스는 2015년에 태어났다. 에토레는 카오스가 독살됐다고 페이스북에서 주장했다. 에토레는 "그런 끔찍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할 말이 없다"면서 "짖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카오스는 최소한 새벽 2시까지는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아마트리체 지진참사 현장에서 맹활약한 카오스 [주인 에토레 페이스북 캡처] 동물권익운동가들은 "위험한 범죄자"라며 맹비난했다. 동물권익보호 단체 '아니말리스티 이탈리아니'의 대변인 리날도 시돌리는 "범인들은 구조요원들과 함께 네 발로 땅을 파 참사 생존자들을 찾은 영웅을 죽였다"면서 "카오스는 사람을 구했지만, 이젠 같은 사람들이 그를 독살했다"고 말했다. 시돌리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이들을 더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법을 만들도록 정치권을 압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정에 참여 중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 소속 일라리아 폰타나도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며, 동물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동물 보호 운동에 열성적인 우파 정치인 미켈라 비토리아 브람빌라 의원은 AP통신에 "카오스의 죽음을 계기로 올 초 내가 발의한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 처벌 법안을 의회가 통과시키길 희망한다"고 촉구했다. 줄리아 그릴로 보건장관도 이번 사건에 애도를 표하면서, 법무장관 및 환경장관과 함께 동물 독살의 배후에 있는 '비정한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을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탈리아 연구진의 2014년 연구에 따르면 로마의 개 870마리에 대한 진단 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독살이 사망 원인 중 두 번째였다. 전체 개들 중 17% 이상이 유독성 물질을 먹고 숨진 것이다. 연구진은 도시 환경에서는 이웃집의 개에 대한 사회적 관용 수준이 낮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고의로 독이 든 미끼를 놓아두는 경우가 흔하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경찰은 이번 독살 의심 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예민한 후각과 청각으로 각종 참사에서 인명구조에 큰 역할하는 견공들[EPA=연합뉴스 자료사진]
2395    [쉼터] - 100년 = 고구마꽃 = 행운 댓글:  조회:3287  추천:0  2018-07-29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고구마꽃' 보셨나요 (ZOGLO) 2018년7월26일  완도군 신지면 한 텃밭에 핀 고구마 꽃. [연합뉴스]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고구마꽃이 최근 전남 완도군 신지면의 한 텃밭에서 활짝 피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아열대 지역에서만 7~8월에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즘 이상 고온으로 고구마꽃이 한국에서도 종종 눈에 띄고 있다고 한다.     고구마꽃은 평생 한 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귀한 몸이다. 꽃말이 '행운'인 고구마꽃은 1945년 광복 때와 53년 휴전, 70년 남북공동성명발표 직전에도 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꽃은 행운의 징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출처: 중앙일보] =================///{고향문단소식}/// 제2회 ‘단군문학상’에 최홍일 최룡관 수상 (ZOGLO) 2018년7월28일    우리 민족이 공인하는 시조의 이름으로 명명한 중국조선족문단 ‘단군문학상’이 7월 28일, 길림성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제2회 시상식을 가졌다.   제2회 ‘단군문학상’은 추천작품의 발표년한을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로 정하고 개혁개방 이후 40년이란 흐름에 걸맞는 작품에 초점을 두었으며 작품의 문학성과 그 무게에 평심기준을 맞추었다. 최종 소설가 최홍일의 작품 《눈물젖은 두만강》, 시인 최룡관의 작품 《최룡관시선》 및 시가 창작 리론서가 각기 소설부분과 시가부분 당선작으로 선정되였다.     시상식에서 김의진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상무부회장과 조약걸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이 수상자들에게 ‘단군문학상’ 메달과 증서 및 10만원 상금을 수여했다.   리여천 전 장백산잡지사 총편집이 종심보고를 통해 두 작품의 수상원인을 밝혔다. 최홍일의 작품에 대해 그는 “문학자료로 읽은 조상의 이주사를 문학작품으로 엮어내여 조상의 이민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해석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주사를 다룬 그 력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최룡관의 작품에 대해 그는 “작가의 천부적인 기질과 장시기 다 령역에 걸친 경력과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결과물이다”면서 “작품에서 보여주는 기존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 그 자세는 문단의 훌륭한 귀감이다”고 평가했다.   최룡관은 수상소감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하이퍼시라는 류파를 형성한 후 비판도 받고 지지도 받으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면서 “현대시는 하나의 이미지로 탑을 쌓기이며 하이퍼시는 다양체로 탑을 허무는 것이다. 언어의 결합에는 자유만 있고 그 어떤 구속도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홍일은 수상소감에서 “매 한편의 작품은 반드시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가보지 못한 령역을 탐색하는 새 기점으로 되여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봉철 ‘단군문학상’리사회 리사장은 연설에서 “우리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한 목적은 우리 민족 문인들이 시대, 인민, 민족, 력사에 부끄럽지 않는 문학명작을 더 많이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하기 위한 데 있다”고 밝혔으며 “새 시대 민족문학을 번영 발전시키는 데 정치성, 민족성, 브랜드화 등 세가지를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외 길림시정부를 대표하여 서영수 길림시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 축사를, 조선족문단 원로들을 대표하여 최삼룡 평론가가 축사를 했다.     한편 ‘단군문학상’리사회는 ‘단군문학상’ 사업에 지극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어준 김의진, 박걸, 리충실, 최옥련, 조약걸, 배철훈, 김룡규, 김홍도 등 8명 유공인사들에게 감사패를 증송했다. 동시 단군문학관 건설에 지지한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도서관,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등 4개 유공단위와 서봉학, 김춘선, 고 리태수, 고 안화춘, 홍길남, 리임원, 최룡관, 김련화, 방순애, 채희룡 등 10명 유공인사들에게 감사패를 증송했다. /료녕신문 김창영 기자
2394    [동네방네] - 백살... 댓글:  조회:3846  추천:0  2018-07-26
세계 최고령 113세 日 남성… 장수비결은 "온천욕과 단 것 즐겨"  2018/07/26      만 113세로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인증된 노나카 마사조 옹.[기네스협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경욱 기자 = '온천욕을 자주 하고 단 것을 즐기면 과연 오래 살까.' 일본인 노나카 마사조(野中正造)는 1905년생으로 올해 만 113세다.   세계 기네스 협회에 따르면 그는 세계 최고령 남성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여성 최초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나카는 지난 25일 113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세계 최고령 남성 타이틀을 쥐고 있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누녜스 올리베라가 지난 1월 113세를 일기로 숨진 이후 지난 4월 기네스로부터 세계 최고령 남성 인정을 받았다. 기네스에 따르면 북쪽 홋카이도 아쇼로(足寄町)에서 6명의 형제와 1명의 누이 사이에서 자라난 그는 1931년 결혼해 자녀 5명을 뒀다. 그는 아쇼로 온천지역에서 여관을 운영하면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노나카의 장수비결은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에서 자주 목욕을 하고 단 것(sweet)을 즐겨 먹는 데 있다고 한다. 그의 딸은 기네스 협회에 아버지가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장수를 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아침을 먹고 신문을 읽거나 사무라이 쇼나 스모 시청을 즐기고 고양이를 돌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노나카가 세계 최고령 남성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논란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알려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레디 블롬은 지난 5월 114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에 대해 기네스는 그가 세계 최고령 남성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만일 세계 최고령 남성 인정 신청을 하면 노인학자 등 전문가들을 동원해 인정 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기네스 측은 말했다. 장수 국가로 알려진 일본의 경우 지난해 현재 100세 이상 노인이 무려 6만7천824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88%는 여성이다. 지난 4월 117세를 일기로 숨진 일본의 다지마 나비(田島ナビ) 할머니는 세계 최고령자로 기록됐었다. 일본 최고령 남성 타이틀을 쥐고 있던 기무라 지로에몬 할아버지는 2013년 116세의 나이로 숨졌다.
239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폭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039  추천:0  2018-07-26
폭염에 새들도 식수대란 공정식 기자  2018.07.26.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산=뉴스1) 공정식 기자 = 폭염이 절정에 이른 26일 경북 경산시 하양읍의 낮 기온이 40.5도를 기록했다. 이날 오후 영남대 경산캠퍼스 천연잔디구장에 폭염으로부터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가동된 스프링클러가 멈추자 주변에 있던 까치가 몰려들어 주변에 남은 물을 마시고 있다. 2018.7.26/뉴스1
2392    [동네방네] - 농민공의 자식 최경도 북경대학으로... 댓글:  조회:3219  추천:0  2018-07-25
농민공의 자식 최경도 북경대학 입학통지서 받다 (ZOGLO) 2018년7월25일  운남성 시골의 한 농민공가정의 자식이 며칠전에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은 것이 요즘 인기뉴스로 뜨고 있다.  운남성 곡정시 《곡정일보》에서 본시 회택현 자해진 오리패촌 록음당마을 40대 중반의 최무영,허수란부부의 아들 최경도가 22일에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를 받아든 소식을 전하면서 네티즌들의 마음을 달구었다.    사진은 어머니와 함께 공지에서 일하고 있는 최경도(왼쪽). 최경도는 대학입시를 마치고 줄곧 부모와 함께 건축공지에서 삯일을 했다. 22일, 그날에도 정구당저수지마을의 한 개인저택 건축공지서 콘크리트반죽일을 하다가 우정국택배원으로부터 전화로 경도가 있는 위치를 확인받고 30분후면 그의〈북경대학입학통지서〉를 송달해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달받았다. 최경도의 부모는 최경도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다 외지에 나가 벌이를 했고 경도가 자해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의 아버지만 집으로 돌아왔고 집 가까이 건축공지들을 다니며 일을 계속했다. 어린 녀동생을 데리고 곤명에서 벌이를 하고 있던 경도의 어머니도 며칠전에 딸애가 방학을 하게 되자 집으로 돌아와 공지일을 하고 있었다. 경도와 그의 어머니가 반죽을 밀차에 실어 간이 기중기로 2층에 올리는 장면.     푸른색 우정배달차가 공지로 들어오고 있다.           배달원이 건네는 필을 받아 〈북경대학 입학통지서〉배달확인서에 싸인하고 있는 최경도.                         배달원이〈입학통지서〉와 축하의 꽃묶음을 드렸다.   ‘입학통지서'를 보고 또 보는 경도네 식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경도의 아버지는 1자 무식‘까막눈’이다. 하지만 통지서의 내용에 대해 알고퍼 남보다 서두른다. 전업은 북경대학 신문 및 미디어학원이고 8월 30일까지 그 통지서를 휴대하고 등교하라는 내용과 림건화 북경대학 총장의 싸인자까지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나서 경도의 아버지는 흐뭇해하며“아들아, 정말 장하다 !”고 경도를 치하했다. 순간 온집식구는 행복속에 잠겼다.   그날로 경도가 다니던 회택현 인왕고급중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최경도네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최경도의 가정형편을 료해한후 최경도와 그의 부모에게 조학대출방법과 절차를 알려주었고 경도더러 입학준비를 잘 하도록 당부했다.   ///신화넷  편역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      
239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극한 모성애",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562  추천:0  2018-07-25
새끼가 76마리? 어느 비오리 엄마의 '극한 육아' 2018.07.2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애니멀피플]  미국 미네소타 호수서 조류 사진가 촬영 남의 알 받은 데다 이웃 새끼 입양한 듯 [한겨레] 미국 미네소타주 베미지 호에서 지난달 촬영된 비오리 새끼의 기다란 행렬. 어미의 등에 올라간 것부터 한 프레임에 미처 담지 못한 새끼까지 50마리가 넘는다. 이후 그 수는 더 불어났다. 브렌트 시제크 제공. “새끼를 몇 마리 입양한 비오리 같네요” 지난달 23일 미국인 아마추어 조류 사진가인 브렌트 시제크는 미네소타주 베미지 호수에서 촬영한 사진을 사회관계망 서비스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저 ‘몇 마리’가 아니었다. 어미 비오리 뒤에는 50마리 이상의 새끼 오리가 긴 줄을 이루어 헤엄치고 있었다. “멋진 사진”이라는 댓글과 함께 “엄마가 너무 힘들겠다”는 반응이 달렸다.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난 17일 그는 인스타그램에 그 비오리 가족의 최근 사진을 올렸다. 새끼는 더 불어나 적어도 76마리나 됐다. 그는 “이제는 유명해진 비오리를 다시 찾았는데 입양한 새끼가 적어도 76마리였다. 이 사진이 전달하는 이야기가 좋다”라고 적었다. 17일 적어도 76마리로 불어난 비오리. 위험 분산을 위한 남의 알과 함께 어미를 잃은 이웃의 새끼를 입양한 것으로 보인다. 브렌트 시제크 제공. 비오리 어미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새끼를 가지게 됐을까. 비오리는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하며, 나무구멍에 둥지를 틀고 8∼12개의 알을 낳는다. 많아야 17개 정도의 알을 낳을 뿐이다. 미국의 조류보호단체 오듀본협회의 켄 카우프만 필드 에디터는 이 단체의 온라인 뉴스에서 “비오리가 종종 다른 오리의 둥지에 알을 낳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둥지가 라쿤 등 포식자의 습격을 받아 새끼를 모조리 잃는 사태에 대한 일종의 ‘보험’으로 어미 비오리는 다른 비오리 둥지에 몇 개씩 자기 알을 낳아 놓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알을 부화시킨 데다 어미를 잃은 다른 비오리의 새끼들까지 떠안다 보니 이렇게 식구가 불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비오리 부부. 벵트 니만,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아마추어 조류 사진가인 윤순영 한국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은 “비오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강에서만 번식하지만 이렇게 많은 새끼를 데리고 있는 것은 못 봤다”며 “흰뺨검둥오리나 원앙이 많은 새끼를 키우는 대표적인 새이지만 기껏해야 15마리 정도”라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2390    화룡적 "허씨네 3형제"작가 창작품 그림책으로 재탄생하다... 댓글:  조회:3717  추천:0  2018-07-24
           허씨 3형제의 중국 조선족 작가 창작 그림책 시리즈 출간     중국조선족 작가 창작 그림책 시리즈인 허봉남의 《칠동이의 변신술》, 허두남의 《뽐내던 날치》, 허충남의 《우주인의 만능옷》 등 허씨 3형제의 작품들이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허봉남 저, 신순칠 그림의 《칠동이의 변신술》은 , , 등 3편의 동화로 꾸며졌고 허두남 저, 김휘 그림의 《뽐내던 날치》는 , , 등 16편의 우화로 묶어냈다. 허충남 저, 신순칠 그림의 《우주인의 만능옷》은 , , , 등 4편의 동화로 꾸며졌다. 세 작품 모두 민족문자 출판물 특별보조 프로젝트로 출간됐다. /연변일보 신연희 기자
238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연길에서 공룡화석 보기를 기원한다... 댓글:  조회:3531  추천:0  2018-07-22
연길공룡왕국락원 15억원 투자로 곧 건설 시작 (ZOGLO) 2018년7월19일  연길시 도시구역 남부 40헥타르 되는 면적에 공룡주제공원 건설이 바야흐로 시작된다.풍부한 대형 레저주제공원 개발 및 건설 경험을 지닌 길림성 금두(金豆)투자지주그룹유한회사에서 15억원 투자 규모로 3단계로 나누어 바야흐로 건설을 시작하기로 했다. 연길시정부와 금두투자지주그룹유한회사는 14일, 연길공룡왕국금두환락원 대상 개발 건설 관련 협의를 연길에서 체결했다.   연길시당위 부서기이며 시장인 채규룡과 금두투자지주그룹유한회사 리사장인 김명남(왼쪽)이 대상 협의서를 체결했다. 소개에 따르면 공룡왕국환락원은 세계급 공룡자원을 토대로, 량질의 생태자원을 배경으로, 공룡문화을 핵심으로 하고 관광, 레저, 주제오락, 문화체험, 공연, 아이디어상품을 일체화한 공룡 본고장 주제공원으로 건설될 전망이다.  연길시는 세계적으로 드문 공룡화석 유적지를 가지고 있는바 매우 큰 관광개발 잠재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룡주제공원 건설 대상의 체결은 공룡을 주특색으로 하는 연길 관광산업이 높은 품질의 발전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며 연길은 반드시 두만강지역 내지 동북아지역의 가장 흡인력 있는 공룡문화 목적지로 될 전망임을 말해준다.  연길시 당위와 정부는 해당 대상 개발 건설에 주도면밀한 정무봉사와 정책적 지지, 량호한 투자환경을 제공할 것이며  협력을 순조롭게 실시해가는 데 성의를 다할 것이라고 채규룡 시장은 표했다. ///연변뉴스넷/ 길림신문 김영자 편역
238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아동보호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095  추천:0  2018-07-22
태국 "외신들, 동굴 소년 인터뷰 행태 무책임..기준 지켜야" 안호균 2018.07.2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뉴시스】 안호균 기자 = 태국 당국이 동굴에 갇혀있다 극적으로 구조된 축구팀 소년들에 대한 외신들의 무책임한 인터뷰 행태를 비판했다. 21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타왓차이 타이쿄 태국 법무차관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아동의 권리와 미성년자 보호에 대한 이해가 높을 것으로 생각되던 외신들이 실제로는 기준을 지키는데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슬프다"고 밝혔다. 타이쿄 차관은 언론들이 미성년자를 인터뷰할 때 심리학자를 참석시켜야 하는 기준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터뷰를 통해 소년들의 가슴 속 상처를 키울 수 있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태국 정부는 지난주 태국 언론들과 외신에 소년들의 안전과 정신 건강을 위해 인터뷰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17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소년들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에 외신들은 경쟁적으로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 치앙라이주는 이날 성명을 통해 "축구팀 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팀을 배정했다"며 "병원에서 퇴원한 소년의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는 외신 보도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치앙라이주는 아동보호법을 위반할 경우 최대 6만 바트(약 204만원)의 벌금과 최대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387    [고향문단소식] - 73세 할매 "달"과 "장난"질하다... 댓글:  조회:3463  추천:0  2018-07-21
첫 하이퍼동시집 '달은 장난꾸러기'출간세미나 연길서 (ZOGLO) 2018년7월20일  행사장 일각 방산옥 시인의 하이퍼동시집 출간세미나가 8월 20일 연길 환락궁에서 있었다. 이번 동시집의 출간은 중국에서 첫 하이퍼동시집이라는데 무게가 실린다. 연변동북아문화예술연구회, 연변아동문학학회, 연변아동문학연구회의 공동 주최, 연변생식건강연구소와 연길 환락궁에서 후원한 이번 세미나에는 40여명의 시인들과 문학애호가들이 참석했다. 방산옥의 시에 대한 평설은 평론가가 아닌 8명의 시인들이 나서서 평했기에 기존의 유명 평론가들의 평론보다 색다른 맛을 더해주었다. 최룡관 시인은 방산옥의 작품세계는 “뚝뚝 뛰기 언어예술”이라고 평하면서 “주역과 의학을 하이퍼문학에 접목시켰고 이미지의 복합 병렬과 독자적인 우주영위의 련결을 실천에 옮기기에 노력했다.”고 말했으며 김현순 시인은 “방산옥의 시는 독자를 망각하고 자신의 상상에 빠져 쓴 시’라며 하이퍼시문학도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출간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저자 방산옥 시인   엄창섭 시인은 “감성의 따뜻함과 생명의 교감. 자의적 은페와 매혹적 여백, 상상력의 확장과 즉물 대상의 시 인식’이란 3가지 내용으로 방산옥 시집 의  그 틈새를 좁혀나갔다. 김봉순 시인은 하이퍼시의 횡적구성과 이미지의 건너뛰기를 리좀의 원리에 밎춰 이야기하면서 하이퍼동시의 기능성에 대해 피력했고 정두민 시인은 론리와 추리를 떠나 가능과 부가능이 두서없이 뒤엉킨 환상의 무질서한 변형의 동심세계를 살아 꿈틀러기는 화폭으로 펼쳐보였다고 력설했다. 강려 시인은 사물, 현상에 대한 기존의 탈관념화를 동시’시계’를 빌어 해부하면서 그 가능성에 대해 긍정을 표했고 차홍희 시인은 “방산옥의 시는 의학과 주역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것들을 하이퍼적인 서술방식에 접목한 독특함이 엿보인다”며 은유와 환유로써 하이퍼동시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말했으며 방미화 시인은 “탈중심, 리좀으로 펼쳐보이는 상상의 무한대는 하이퍼시문학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고리”라며 방산옥의 작품에서 그 흔적을 넉넉히 엿볼 수 있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참석자들은 인간 방산옥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을가? 연변조선족아동문학연구회의 김만석 전임 회장과 림철 회장은 인간 방산옥에 대해 “그는 40여년간 줄곧 의학사업에 정진하면서 생식건강이라는 테마로 의학계를 주름잡았다면 67세의 고령에 문학과 ‘결혼’하고 늦깍이 문학도로 탈바꿈했다.”며 “그의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이 오늘과 같은 결실을 낳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자 방산옥은 “불가능에 도전하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줄곧 앞만 보고 달려왔다. 올해 73세인 그는 네번째 시집 를 출간했다. 이번 하이퍼동시집의 출간은 중국조선족아동문학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아왔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   ///조글로미디어 사진 글/ 문야 
2386    백두산 남파(南坡) 댓글:  조회:3470  추천:0  2018-07-19
                  ======================   백두산 남파 천지           우측 구름속에 있는 봉이  조선 장군봉   
2385    백두산 서파(西坡) 댓글:  조회:3866  추천:0  2018-07-19
서파는 북한과 국경이 맞닿아 있다. 산정에 오르면 중국과 북한의 경계비가 서있고, 북파보다 완만한 지세에서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서파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쑹장허(松江河)로, 서문까지 30km 떨어져 있다. 성수기에는 쑹장허 역에서 서문까지 봉고나 미니버스로 호객하는 이들이 있다. 서문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해발 1,570m이다. 여기서 천지까지는 1,442개 계단이 펼쳐져 있고, 올라가는 데는 30~40분 걸린다. 계단 끝 언덕의 해발은 2,470m이고, 서파에서 가장 높은 백운봉(白云峰)은 2,690m이다. 서파에 오는 가장 큰 이유는 6~8월 들판에 만발한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다. 야생화가 사라진 계절에는 아름다움이 반으로 줄고, 한겨울에는 정상까지 이어진 계단이 위험해 폐쇄되기도 한다. 매년 7월 초에는 서파에서 야생화 축제가 열린다. 서파(西坡) 금강 대협곡(锦江大峡谷)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협곡으로 독특하게 생긴 바위들이 볼거리다. 그 모양이 가지각색이어서 어떤 것은 낙타를 닮고, 어떤 것은 손가락을 닮았다. 이곳에는 화산이 폭발했을 때 동식물이 용암에 묻히면서 만들어진 화석이 많아서 당시의 생태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한다. 협곡의 총길이는 70km, 너비는 200~300m에 달한다. 서파에서 내려와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쯤 걸리며, 입구 현판에는 장백산 대협곡(长白山大峡谷)이라고 적혀 있다. 금강 대협곡(锦江大峡谷) 제자하(梯子河) 화산 활동으로 지각이 균열하여 사다리 모양의 계곡이 만들어졌다. 아래는 넓고, 위로 가면서 폭이 몹시 좁아진다. 제자하(梯子河) 고산 화원(高山花园) 천지와 함께 서파의 매력을 책임지고 있다. 야생화 군락지로 여름이면 지상의 천국으로 변신한다. 큰원추리, 하늘매발톱, 개불알꽃 등 1,800여 종의 야생화가 만발하여 나비와 꿀벌이 모여든다. 7월 중순~8월 초에 절정을 이룬다. 고산 화원(高山花园)                           백두산 북파 천지   백두산 서파 천지
2384    [동네방네] - "야생멧돼지"들은 더는 "야생멧돼지"가 아니다... 댓글:  조회:3739  추천:0  2018-07-18
태국 동굴소년 "엄마한테 혼날까 겁났다.. 구조대 만난건 기적"(종합) 2018.07.18.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코치 "탈출구 찾으려 번갈아 동굴벽 팠다".."절망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 다짐" "동굴 안 음식 전혀 없어..종유석서 떨어지는 물만 마셔" 담당 의사 "아이들 대체로 건강..동굴 안에서도 강인한 정신력" 기자회견하는 동굴소년들[epa=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태국 치앙라이 탐루엉 동굴에 최장 17일간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13명의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과 코치가 18일(이하 현지시간)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동굴에서 구조된 뒤 병원 치료를 받아온 이들은 이날 붉은색 멧돼지가 인쇄된 팀 유니폼을 입고 치앙라이 주 정부가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등장했다. 자신들을 구조한 태국 네이비실 대원들과 치료를 담당한 의사 등과 함께 회견장에 나온 이들은 축구공을 차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건강을 증명했고, 밝은 얼굴로 각자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고 동굴 고립 당시 상황 등을 풀어놓았다. 한 소년은 "동굴에 갇혔을 때 우선 집에 가서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까 봐 겁났다"고 말했다. 실종 상태였던 이들을 발견한 영국 잠수전문가와 영어로 대화해 주목을 받았던 아둔 삼온(14)은 "영국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고 놀랐다. 기적 같았다"고 구조대와 첫 만남의 감회를 전했다. 그는 이어 "그날 저녁 우리는 동굴 안의 바위를 긁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며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소년은 "모두에게 (이 상황에) 맞서 싸우자고 절망하지 말자고 했다"고 말했고 다른 소년은 프로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동굴에서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내 영웅이 된 엑까뽄 찬따웡(25) 코치는 "동굴 안에 들어갔을 때 음식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고 다른 소년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만 마셨다"고 고립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엑까뽄 코치는 "알려진 것과 달리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영을 할 줄 안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잘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고 "구조대를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탈출 방법을 찾아보려 노력했고 번갈아 가며 동굴 벽을 파 구덩이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감사 인사 전하는 동굴소년들[로이터=연합뉴스] 소년들을 치료해온 의사는 "치료 기간 아이들의 몸무게가 3㎏가량 늘었고 혈액검사 결과도 좋다"며 "아이들이 동굴에 있을 때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다"고 말했다. 앞서 당국은 실종 상태에서 열흘을 굶었던 아이들의 몸무게가 2㎏가량 줄었다고 밝힌 바 있다. 치앙라이 '무 빠'(야생 멧돼지) 축구클럽 소속 유소년 선수와 코치인 이들은 지난달 23일 팀원의 생일파티를 위해 매사이 지구의 탐루엉 동굴에 들어간 뒤 연락이 끊겼다. "드디어 집에 갑니다" 병원 나서는 동굴소년들[epa=연합뉴스] 동굴 앞에서는 이들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와 가방, 축구화 등이 발견됐다. 갑자기 내린 비로 동굴 내 수로의 물이 불어나면서 아이들이 갇혔다고 판단한 당국은 이튿날부터 수색에 나섰다. 아이들은 실종 열흘째인 지난 2일 2명의 영국 전문가들에 의해 동굴 안쪽 깊숙한 에어포켓 공간에서 발견됐다. 태국 당국은 외국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미 공군 구조대원 30명을 비롯한 동굴 잠수 및 구조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또 당국은 동굴 곳곳에 고인 물을 빼내는 한편 아이들에게 수영과 잠수장비 이용법을 가르친 뒤,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이들을 전원 안전하게 구해내 찬사를 받았다. 그동안 병원에서 심신을 치료해온 소년들은 곧바로 퇴원해 일상생활로 돌아가며, 이후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치앙라이 주 정부는 과도한 대중의 관심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해 향후 아이들은 물론 가족들도 일절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생환자와 가족의 생활을 방해하는 경우 아동보호법에 따라 기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383    [그것이 알고싶다] - 월드컵 상금?... 댓글:  조회:4204  추천:0  2018-07-16
프랑스, 월드컵 우승상금 431억 원… 19위 한국은? (ZOGLO) 2018년7월16일  프랑스 월드컵 우승 프랑스 축구 대표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8 러시아 월드컵이 프랑스의 우승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1998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 프랑스는 431억 원의 상금도 거머쥐었다.  프랑스는 16일(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크로아티아와 러시아 월드컵 결승에서 4-2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998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 이후 20년 만에 역대 두 번째 우승이다. 프랑스는 러시아 월드컵 우승으로 무려 3800만 달러(약 430억5400만 원)의 우승 상금을 받는다. 러시아 월드컵 우승 상금은 2014년 브라질 대회 때 3500만 달러(약 396억5500만 원)보다 300만 달러(약 33억9900만 원)나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 파란을 일으키면서 역대 처음 결승에 진출한 크로아티아는 준우승 상금으로 2800만 달러(약 317억2400만 원)를 받는다.  3위를 차지한 벨기에는 2400만 달러(약 271억9200만 원), 4위 잉글랜드는 2천200만 달러(약 249억2600만 원)의 상금이 입금된다. 5~8위를 차지한 4개 팀(우루과이, 브라질, 스웨덴, 러시아)은 1600만 달러(약 181억2800만 원), 9~16위에 오른 8개 팀(콜롬비아, 스페인, 덴마크, 멕시코, 포르투갈, 스위스, 일본, 아르헨티나)은 1200만 달러(약 135억9600만 원)를 차지했다. 17~32위인 16개 팀에겐 각각 800만 달러(약 90억6400만 원)씩 주어진다.    한국은 32개 본선 진출국 가운데 19위로 800만 달러(약 90억6400만 원)를 챙겼다. /최정아 동아닷컴 ========================== [기자]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이 터집니다.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 수천 개가 흔들리고 요란한 불꽃 놀이도 펼쳐집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쉴새 없이 경적을 울립니다. 오늘(16일) 새벽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우승했습니다. 프랑스는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를 4대2로 물리쳤습니다. 199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아트 사커'라는 별명을 얻은 프랑스는 2014년에는 8강에서 떨어졌습니다. 프랑스는 우승 당시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 감독에게 팀을 맡겼습니다. 데샹 감독은 선수 대부분을 20대로 구성해 기동력을 살리고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하나로 묶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이번 월드컵 7경기에서 6승 1무를 기록하며 무패로 우승했습니다. 데샹 감독은 브라질 마리우 자갈루 감독과 독일 프란츠 베켄바워에 이어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세 번째 감독이 됐습니다.
23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영화소통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5571  추천:0  2018-07-16
북한 영화 국내 첫 상영.. 직접 본 시민들 반응은? 2018.07.16.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부천 국제영화제에서 북한 영화가 공개 상영됐습니다.  아무 제한 없이 시민들에게 상영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인데요.  북한 영화를 처음 본 시민들의 반응을, 김예지 기자가 들어 봤습니다.  [리포트]  재작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영화 '우리 집 이야기'입니다.  [현장음]  "우리 집에는 엄마가 쓰던 한 권의 책이 있다."  부모를 잃은 삼 남매와 열여덟 살 소녀가 가족이 돼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포함해 총 9편의 북한 영화가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공개 상영됐습니다.  관계 법령상 북한 영화를 상영하려면 까다로운 제한을 받지만 정부가 남북 문화 예술 교류 차원에서 일반에 공개해도 된다고 판단한 겁니다.  [최용배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그 나라(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혹시라도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영화제에서 영화를 즐길 때 으레 겪을 수 있는… "  북한 영화를 처음 본 시민들은 신기하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반응.  [박성예 / 경기 부천시]  "생각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많아서 신기했어요. 우리나라 옛날 영화 보는 느낌? 80년대 영화 보는 느낌."  [경은 / 경기 부천시]  "북한의 생활 모습이 궁금해서 보려고 했는데 보면 볼수록 부자연스러운 면도 좀 있고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  북한 영화는 오는 일요일까지 부천국제영화제에서 공개 상영됩니다.  채널A 뉴스 김예지입니다.  영상취재 : 한일웅  영상편집 : 오수현  영상출처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381    [특보] - "야생멧돼지"들과 "자원봉사 영웅" 댓글:  조회:4751  추천:0  2018-07-15
"고마워요" 태국 동굴소년, 구조중 숨진 네이비실 前대원 추모 2018.07.1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구조중 숨진 사만 쿠난 추모하는 동굴소년들[태국 보건부 제공=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태국 치앙라이 탐루엉 동굴에서 구조된 13명의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과 코치가 자신들을 구조하던 도중 숨진 전 태국 해군 네이비실 대원 사만 쿠난을 추모했다고 태국 보건부가 15일 밝혔다. 젯사다 촉담렁쑥 태국 보건부 사무차관은 "아이들이 구조대원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해졌다고 판단해 어젯밤 소식을 전했다"며 "13명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추모의 메시지와 그림을 바쳤다. 그리고 1분간 묵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아이들은 사만에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표했고 사만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했다"고 덧붙였다. 구조도중 숨진 전 네이비실 대원 추모하는 동굴소년들[태국 보건부 제공=연합뉴스] 전역한 뒤 태국공항공사(AOT) 보안요원으로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일하던 사만은 동굴소년 실종사건 소식을 접한 뒤 수색 및 구조 현장 봉사를 자청했다. 그러나 지난 6일 동굴 내 산소통 설치작업을 하고 밖으로 나오다가 산소 부족으로 의식을 잃었으며 병원으로 이송된 뒤 숨졌다. 이번 동굴소년 구조 중 발생한 유일한 희생자다. 태국 해군은 사만을 예비역 병장에서 해군 대위로 특별 진급시켰다.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은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도록 후원하는 한편, 칙령을 통해 그를 소령으로 특진시키고 왕실 최고훈장도 추서했다. 동굴구조 도중 숨진 사만 쿠난[태국 네이비실 페이스북 캡처=연합뉴스] 14일 다비식을 거쳐 이날 열린 영결식에서 사만의 부인인 발리뽄 쿠난은 "사만은 이제 하늘에서 모든 사람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남편의 발자취를 따를 것"이라며 "우리는 함께 있으며 서로의 마음속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며 통곡했다. 사만의 유해는 메콩 강에 뿌려질 예정이다. 태국 국왕 후원으로 열린 사만의 다비식[태국 네이비실 페이스북 캡처=연합뉴스] 예술가들도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움직임에 동참했다고 일간 방콕포스트가 전했다. 찰럼파이 꼬싯피빳 등 300여 명의 지역 예술가들은 대형 캔버스에 사만을 비롯해 구조작업에 동참했던 사람들을 묘사한 '영웅들'이라는 그림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이 그림을 동굴 내 공간에 전시할 예정이다. 태국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작업중인 회화 '영웅들'[AP=연합뉴스] 또 예술가들은 6개월 이내에 사만의 동상도 제작해 동굴 입구가 마주 보이는 곳에 세울 예정이다.
238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방음벽문제와 죽어가는 새들"... 댓글:  조회:5354  추천:0  2018-07-15
높이 낮춰도 스티커 붙여도.. 투명 방음벽에 죽어가는 새들 이용식 기자  2018.07.1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투명한 도로 방음벽에 새들이 부딪혀서 죽는 일이 많다고 자주 보도해 드렸습니다. 이런 투명 방음벽의 높이를 낮춰도 '새 충돌'을 막을 순 없다고 합니다. 다른 대책은 없는지 이용식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충남 세종시의 한 지방도로입니다. 높이가 낮은 1단 방음벽 아래에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멧비둘기와 직박구리, 참새가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 2급인 새매도 죽어 있습니다. 충남 서천에서 군산으로 향하는 국도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여름 철새인 물총새와 뱁새로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새 10여 마리가 방음벽을 따라 죽어 있습니다. 새가 충돌했던 투명방음벽입니다. 새의 깃털이 이렇게 붙어 있는 등 충돌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국도와 지방도여서 방음벽이 대부분 낮게 설치돼 있지만 새 충돌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강종현/국립생태원 선임연구원 : 산에서 나는 게 아니라 논에서 이렇게 날다 보니까 좀 낮게 나는 그래서 부딪치는 것 같습니다.] 맹금류 스티커가 붙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새는 눈이 머리 옆에 있어서 전방 인식이 느립니다. 때문에 스티커를 장애물로 보이게 하려면 아주 촘촘하게 붙여야 합니다. [이배근/국립생태원 동물관리연구실장 : 가로 10cm, 세로 5cm 간격으로 촘촘하게 붙여줘야지 새들이 인식을 하고 충돌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은 야생조류의 투명 방음벽 충돌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처음으로 피해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김민철)   /이용식 기자
2379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8)... 댓글:  조회:4801  추천:0  2018-07-13
국민의 애창가곡 '선구자'에는 그후 작곡자, 작사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시비거리기 생기기도 했다. 표절시비와 작사자의 친일논쟁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소개한다.   「선구자」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 세계일보 96. 11. 27 장렬한 조국 광복의 웅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손꼽혀온 가곡 「선구자」의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곡 「선구자」와 관련,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해방 때까지 2년여동안 조두남선생과 중국 흑룡강성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윤해영과는 1944년 처음 만난 후 45년 9월부터 한동안 작사가와 작곡가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종화옹(75·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작사자로 알려진 윤해영은 국내에서 1933년 어느날 하얼빈에 살고 있던 조두남선생을 찾아가 시 한편을 내어놓으며 곡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오겠다던 그는 지금도 소식이 없어 세인들에게는 표연히 사라진 「독립군」 쯤으로 인식돼 있다가 91년 이후 변절한 친일 시인이라는 주장이 나와 이 노래의 무분별한 방송 연주에 제동이 걸려왔다. 그러나 김옹의 술회 내용이 맞다면, 윤해영은 현재 불리고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쓴 적이 없고,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척토기」 「발해고지」 「해란강」 「오랑캐 고개」 「낙토만주」 등의 친일시를 썼기 때문에 「변절」 운운할 필요가 없는 친일시인이며 「선구자」의 작사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옹은 「용정의 노래」에는 「선구자」에 나오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의 구절은 전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등 유랑민의 서러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북경=연합>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 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임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   조두남의 ‘선구자’, 음원 표절과 가사 무단도용   항일 독립운동가의 기상과 해방의 꿈을 표현한 노래로 알려졌던 ‘선구자’는 한 때 제2의 애국가로 불리며 애창되었으나 거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곡이 되었다.   가사를 쓴 윤해영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에서 ‘오족협화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했던 친일 시인이다. 조두남은 윤해영과 함께 다수의 친일 노래를 만든 것이 밝혀졌다.   실제 2003년 옛 마산시가 ‘조두남 기념관’을 개관하려 하면서 시민단체와 충돌했을 당시, 기자는 중국을 방문해 조두남의 행적을 취재한 결과 연변의 학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기도 했다.   1940년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중국 연변작곡가 김종화씨는 ‘선구자’가 ‘용정의 노래’의 가사만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용정의 노래’의 눈물 젖은 보따리와 같은 가사를 다 버리고, 지금은 어느 곳에 깊은 꿈이 깊었나 등으로 바꾸었다”고 증언했다.   연변학자들도 조두남이 친일활동을 하고 가곡 ‘선구자’를 조작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박창욱 연변대 역사학부 교수는 “선구자 노래는 ‘징병간다’는 걸 찬양하는 친일노래”라고 단정했다. 만주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선구자는 항일독립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군들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일본군을 발견하면 인근 산을 향해 급히 도망가기에 바빴다”며, “독립군들은 광활한 벌판이 아닌 산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1940년대 연변에서 함께 음악활동을 한 조두남과 김종화씨.ⓒ구자환 기자 당시 가곡 선구자의 원곡 악보인 ‘님과 함께’가 확보되면서, ‘선구자’의 표절 논란도 드러났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인 ‘님과 함께’는 1922년 창작된 노래로 1932년 창작된 선구자보다 10년이 앞선다.   당시 노동은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는 ‘님과 함께’와 ‘선구자’를 비교하면서 “형식이 같고, 마디 수에서 전체적으로 조표와 박자가 같다”며, “전체적인 조표나 박자, 형식 등에서 너무나 일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2003년 당시 마산시 조두남기념관 공동조사단도 조두남의 친일행적과 선구자에 대한 표절 논란에 대해 중국 현지 연구자들의 조사결과를 인정하고 조두남 기념관은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     시대 현대 출생 1912년 10월 9일 사망 1984년 11월 8일 경력 한국음악협회 고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고문 유형 인물 직업 작곡가 대표작 선구자, 에밀레종, 환상무곡 성별 남 분야 예술·체육/현대음악 요약 1912~1984. 작곡가 목차 접기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6세 때 미국인 신부 캐논스(Cannons, J.)에게 작곡을 배운 뒤, 11세 되던 해인 1923년 가곡 ‘옛이야기’로 데뷔했다. 1928년 전후로 평양 산정현 잘로교회, 중앙교회, 남문외교회, 연화동교회, 명천교회, 기양교회 등 교회에서 개최하는 부흥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찬송가 지도자로 지냈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로 가 그곳에서 청년기의 작품 활동을 했다. 1943년 3월 만주국 『예문지도요강』의 취지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애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또한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만주와 오족협화로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작곡해 보급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25전쟁으로 마산에 피난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 정착한 후 작품 활동보다는 피아노 교육에 힘써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초대 지부장을 역임했고, 이어 경상남도문화상 심사위원, 한국음악협회 고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고문을 역임하면서 향토문화 발전과 예술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가곡 ‘선구자’·‘옛이야기’·‘그리움’·‘제비’·‘접동새’ 등과 교성곡 ‘농촌’, 오페레타 ‘에밀레종’, 피아노곡 ‘환상무곡’ 등이 있다. 작품 경향은 형식면에서는 고전주의, 내용면에서는 낭만주의, 정서면에서는 민족주의이다. 청년기에는 주로 우국(憂國)의 정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고, 장년기에는 민족 고유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풍류의 멋이 깃든 민족주의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집으로는 가곡집 『옛이야기』(1962)·『분수』 (1962)·『산도화』(1970) 등과 피아노작품집 『환상무곡』(1970) 등이 있고, 음반으로는 『조두남가곡집』(1973)·『조두남가곡선집』(1979) 등이 있다. 저서로는 수상집 『선구자』(1975)와 『그리움』(1982) 등이 있다. ================      조두남 (趙斗南 1912~1984) 아호는 석호. 작곡가. 피아노 교육자.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실학교 수학. 미국인 신부 죠셉 캐논스(Joseph Cannons)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11세가 되던 1923년에 첫 작품인 가곡 를 작곡하였고 16세 때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그 뒤 만주로 가서 해방 이전까지 그 곳에서 청년기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곡인 가곡 는 1933년 만주에서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ㆍ25가 일어나자 마산으로 피난 가서 그 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 정착한 후 작품활동보다는 피아노 교육에 주력하였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초대지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한국음악협회 마산시 지부장,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 경상남도 문화상, 1976년 눌원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MBC창사 20주년기념 가곡공로상을 받았다.          작품목록   가곡 1. 옛 이야기 (1923년) 2. 선구자 (윤해영 작사, 1933년) 3. 제비 (1937년) 4. 산 (1940년) 5. 뱃노래 (1941년) 6. 접동새 (1943년) 7. 새타령 (1943년) 8. 그리움 (1944년) 9. 산촌 (1958년) 10. 길손 11.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12. 해당화 13. 목탁소리 14. 학 교성곡 1. 농촌 (1942년) 오페레타 1. 어린의의 정경 (1929년) 2. 에밀레종 (1945년) 기악곡 1. 피아노곡 음반 1. (1973년) 2. (1979년) 가곡집 1. (1947) 2. (1949) 3. (1962, 정양사) 4. (1970, 세광출판사) 저서 1. 수상집 (1975년) 2. (1982년)      ======================   2014.11.14신고의견 쓰기  
2378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7)... 댓글:  조회:3402  추천:0  2018-07-13
뒤미처 또 신문에 발표된 윤해영선생의 글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였습니다.《흥안령 높이 솟아 우리들의 새 기상 / 송화강 힘찬 줄기 우리들의 뜻일가 / 손잡고 너도 나도 달려 모인 동지들 / 맹세도 장하구나 동북인민자위군 // 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 / 황하수 남북하늘 로선 리념 다르다 / 새로운 민주주의 자유평등 기발아래 / 이 한몸 혁명 위해 붉은 피도 바치리 // 동북은 우리의 터 우리들이 지키여 / 중국의 완전해방 실현하기 위하여 / 칼 들고 싸워 갈길 검산도수 험해도 / 막을자 그 누구냐 정의용사 우리들 // 새 세기 부는 바람 오대양은 끓는다 / 성을 넘어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 / 아세아 하늘가에 평화종을 울리다》(김종화선생은 격동된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1946년 7월, 목단강 서장안공영회관에서 부대의 위문공연을 했는데 2일간 걸렸어요. 끝나는 날 윤해영선생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이미 조선으로 가고 없어 윤해영의 다른 친구 두세분과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상봉이였습니다. 그후 우리 악극단이 도문에 이르러 공연을 할 때 극단의 사람들이 윤해영선생이 떡국장사를 하는지 어느 식당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디다. 그가 재취한 후처가 잔치해서 일곱달만에 해산을 했는데 윤해영선생의 아이가 아니였답니다. 그래서 리혼을 하고 떠돌다가 조선으로 건너갔지요. 1949년 16절지 석판인쇄로 된 조선 노래집에서 윤해영선생의 가사로 되여있는《분여받은 땅》인지 하는 노래를 보았어요. 가사 내용은 대개《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론 소식을 몰라요. (윤해영선생은 조선에서 1956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 필자 주) 문 :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선구자노래》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답 : 1962년엔가 어느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선생의 신곡작품으로 발표한 그《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제목이《선구자노래》로 되여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류랑민의 서러움이 력력히 보이는《눈물 젖은 보따리》거나《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활을 쏘던 선구자》,《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였더군요. 원 가사에는《선구자》라는 문구가 전연 없었답니다.《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 할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력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종래로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량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선구자노래》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고친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선구자노래》는 1932년에 창작된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선생도 그러한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나마 사귀여왔고 무랍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구요. 더구나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룡정의 노래》를 내놓았던것이랍니다.  문 : 조두남선생의 다른 애호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답 : 그분은 장기를 아주 잘 두었습니다. 신안진에서 그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다하는 오장기도 조두남선생한테 졌으니까요.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에 계실 때 담배돈이 떨어지면 거리에 나가 장기박보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벌써 장사군들이 슬그머니 돈을 쥐여주며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는겁니다. 평양에서도 그의 장기가 소문이 자자했던가 봅니다.  문 : 김선생님 외에 조두남선생을 아시는 분이 생존해계십니까? 답 : 있지요. 조두남선생의 작곡으로 된《고향생각》을 시창한 남수억(南寿亿)선생이랍니다. 지금 팔가자에 계십니다.  필자는 1995년 5월 16일 오후 1시 20분에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에 사시는 남수억선생을 찾았다. 남수억선생은 1922년 4월 4일 연길현 팔도향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그날 취재석에 동석한 분들로는 남수억선생의 부인 안경숙(安京淑 69세), 박장길(朴长吉 35세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김윤찬(金允灿 47세 한국 서울신문사 사진부 차장) 등이였다.  ▲ 목단강 ⓒ 봉황망(凤凰网) 당시 취재자료를 보자. 문 : 신안진으로 언제 갔습니까? 답 : 내가 7세 때에 조선 청진으로 이사를 갔다가 1942년 봄에 신안진으로 다시 이사를 갔댔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언제 왔습니까? 답 : 1942년 가을인가 겨울인가일겁니다. 자그마한 연출대가 신안진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두남선생이 손풍금을 쳤답니다. 약침쟁이였는데 안원장이 붙들어서 술을 먹이면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권녕일이 주동이 되여 조두남선생이랑 목단강에 가서 민족예술절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44년 녕안에서 가진 조두남선생의 신작발표회에서 노래《고향생각》을 불렀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 : 키가 크고 몸이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걀죽했습니다. … 나는 팔가자림업국 기본건설과에서 일하다가 1980년에 퇴직했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이름은 들었고《룡정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두남선생이 곡을 붙여서 녕안에서 있은 신작발표공연에서 불렀답니다.  김종화선생과 남수억선생의 회상담을 들어보면 조두남선생은 신안진에서 살았었고 녕안에 살았던 윤해영선생과 래왕하면서《룡정의 노래》,《목단강의 노래》,《산》,《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등 노래를 창작했다. 그리고《선구자노래》는《룡정의 노래》의 가사를 뜯어고친 재판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두남선생은 왜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선구자노래》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가?  김종화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두남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생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가 조두남선생의 이름을 빌어 력사를 분식한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물론 이는 김종화선생께서 조두남선생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력사는 력사인것만큼 조두남선생이 글로써 남겼으니 믿지 않을수도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두남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가?  광복후 랭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래왕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가?  그리고《룡정의 노래》를《선구자노래》로 뜯어 고친것은 조두남선생의 소행일가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가?  노래의 가사가 후세인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진다면 그것은 력사의 진실을 뜯어 고치는것과 같다.《동북인민행진곡》의 제4절 마지막 구절의《아세아의 평화를》하는것이《새 동북을 건설하자》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의 제2절 첫구절《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가《빛나는 혁명기발 대지를 휩쓰는데》로 그리고 제4절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 구절《장성을 넘고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가《장성을 넘어넘어 황하장강 건너서 간악한 내외 원쑤 한칼로 베고》로 후에 고침으로써 민족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혁명노래로 탈바꿈 한것과 같이 한수의 애수의 노래 -《선구자노래》가 비장한 민족 투사의 노래로 된것이 아닐가? 조두남선생은 1932년 윤해영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주고 표연히 사라진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독립군이였을것이라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창작했는데 그것 또한 무엇때문일가?  광복전 몇해간 윤해영과 래왕하면서 여러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였을것으로 추측을 했을가? 그렇다면 윤해영은 독립군이였던가?  만일 조두남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이《선구자노래》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전 창작품에서 이른바《선구자노래》를 내놓고 애수에 젖은 동요외에《발해고지》,《해란강》,《사계》,《오랑캐고개》,《락토만주》등은 친일시들이다.  1938년에 창작한《오랑캐고개》에서 시인은《오늘은 이 고개에 / 오색기 나붓기고 / 폭도군 젊은이들이여 / 노래소리가 우렁차서 / 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걸리고-》로 일제통치를 구가했다.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 "혈연의 강(류연산)"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봉황망코리아미디어 
2377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5)... 댓글:  조회:3539  추천:0  2018-07-13
      ▲ 조두남 수상집 (1982) 조두남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문법적으로 조금 다듬어 지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옮긴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윤씨로부터 내가 말로만 들었을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북간도 용정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 까지 뻗쳐 들어온 일본 경찰의 세력과 본토박이 중국 사람의 노골적 적대감, 그 속에서 고생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 또 용정을 배경으로 벌이는 독립군들의 용감한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면서 나는 독립투사들이 오고 가며 거친 발걸음을 잠시 쉬는 일송정 용정 고개를 쉽게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는 해란강 물줄기도 또 용주사 종소리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윤해영은 그가 내민 가사에 곡을 붙여주면 달포쯤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와 노래를 배워 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바람처럼 떠나갔다. 바쁜 걸음으로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약한 듯한 그의 몸이 만주 벌판의 거센 바람을 이겨낼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민족이 다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지어 달라며 떠나간 윤해영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후 해방이 될 때까지 만주 벌판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윤해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그는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당시 항일전선에 몸바쳐 나선 혁명 동지들은 서로의 정체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여려 번 바꾸고 때로 적의 음모로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낌새가 보일 때면 어디론가 사라져 숨어 살기 때문에 절친했던 동지끼리라도 연락이 끊어지기 일쑤고 심지어는 동지 중 누가 죽는다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윤해영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 목단강변의 석양 사이로 불쑥 나타났듯 꼭 그렇게 그가 나타나 줄 것만 같았다. 나는 유해영에 대해 이름 석자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조국이 해방된 그 기쁨을 송두리째 그에게 또 그처럼 조국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숱한 이름 모를 독립 투사들에게 바쳤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자칫하면 내 나라 내 민족을 잊어 버리기 쉬운 동포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 주려던 갸륵한 윤해영은 그토록 바랬던 해방이 된 지금 어느 차가운 땅속에서 이 기쁨을 누릴까? 낮에는 어두운 숲속 둥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논 밭 가까이에 나와 들쥐를 잡아먹는 접동새 마냥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밤에만 외진 길을 걸어야 했던 서러운 우리 독립투사들! 그 넋이 피어서인지 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불리어졌다. 해방을 맞고 나서 나는 과거의 한이 담긴 라는 제목 대신에 윤해영처럼 높푸른 기상을 지닌 독립투사들을 일컫는 로 제목을 바꾸어 달았다. 또 유랑민의 서러운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2∙3절의 가사에서도 “눈물 젖는 보따리”나 “흘러 흘러 온 신세” 같은 구절을 빼버리고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을 넣고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는 일절의 것을 그대로 후렴으로 반복시켰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해방을 맞아 새로운 희망과 환희에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만주 벌판에서의 쓰라린 유랑 생활의 한이 배어있는 지난날의 가사를 그대로 부르게 하는 것보다는 조국 광복을 위해 고생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내용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해영이 살아 있더라면 나는 꼭 그에게 새로운 가사를 지어달라고 졸랐을 터이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윤씨가 나에게 시를 건네주면서, 좀 더 강렬한 내용을 담고 싶었지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말을 토대로 가사의 2∙3절 가운데 일부를 내가 뜯어 고쳤다. 해방이 되자 는 많이들 불리어 왔으나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됐던 ‘63송년음악회’ 때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반주로 지금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였던 바라톤 김학근씨가 부른 것을 그때 기독교 중앙방송국 음악과장이었던 최성진씨가 그 연주를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 곡을 이란 프로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동안을 매일 방송함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곡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으나 소절 소절마다 정열을 기울여 정확하게 불러야 작곡자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두남 제2수상집 41~43쪽, 세광출판사, 1982)     ▲ 마산조각공원     ▲ 마산조각공원 안의 마산음악관 논란은 핵심은 조두남이 남긴 이같은 회고의 글이 사실이냐 허구냐 하는 것이다. 조두남 기념관에 반대했던 이들은 조두남이 자신이 작곡한 유명가곡 를 미화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했다, 즉 소설을 썼다고 주장한다. 과연 조두남이 소설을 쓴 것일까? 선생이 세상에 없으니 이에 대해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아무튼 이와같은 조두남의 기록에 따르면 의 원본인 원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의 원본, 1932년의 가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서 거친 꿈이 깊었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눈물 젖은 보따리 지금은 어느 곳에서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흘러흘러 온 신세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지금의 가사와 2절과 3절에 한군데 씩이 다르고 나머지는 같다. 조두남은 해방후 2절의 “눈물 젖은 보따리”를 “활을 쏘는 선구자”로 3절의 “흘러흘러 온 신세”를 “맹세하던 선구자”로 자신이 바꿨다고 했다. “맹세하던 선구자”는 괜찮은데, “활을 쏘는 선구자”는 좀 어색하다. ‘활’을 쏜다는 게 시대적으로 좀 안 어울린다는 얘기다... ///여성경제신문 
2376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4)... 댓글:  조회:4569  추천:0  2018-07-13
윤해영 (시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윤해영 출생 1909년 함경북도 사망 1956년? 직업 작가,교육인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 시 윤해영(尹海榮, 1909년 ~ 1956년?)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 3 4 생애[편집] 함경북도 출생으로 룽징에서 교사로 근무했다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항일 정신을 담은 노래로 알려져 대한민국에서 오래 불리면서 이 노래의 작사가로 유명해졌다. 윤해영은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을 통해 신비한 독립투사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조두남은 1932년 〈선구자〉를 작곡할 때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윤해영을 만나 가사를 받았으나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다시 보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이 되면서 오랫동안 접근이 쉽지 않아 조두남이 묘사한 내용에 따른 이같은 인식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당시 조두남과 함께 활동했던 음악인 김종하가 조두남의 회고록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폭로하면서 윤해영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새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윤해영은 조두남의 회고에 등장하는 시기보다 늦은 194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로,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사계〉, 〈발해고지〉, 〈척토기〉, 〈낙토 만주〉 등 일본 제국의 만주 침략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건국 이념을 찬양하는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1] 이 가운데 〈낙토 만주〉는 만주국에서 정책적으로 널리 보급한 노래이며, 〈아리랑 만주〉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만선일보》의 공모전에서 당성된 작품이다. 또한 무단장에서 관제 단체인 오족협화회지부의 선전과 간부를 지낸 인물인 것으로 드러났다. 학계의 연구가 잇따라 윤해영이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친일 시인이었다는 것은 통설이 되었으나, 문예비평가 김영수는 2005년에 《몽상의 시인 윤해영》에서 윤해영의 시에 등장하는 '오족', '오색기' 등 만주국의 상징이 실제로는 고구려 사상을 상징한다는 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2] 김영수는 윤해영이 검열을 속이기 위해 만주국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에 다른 뜻을 숨겨 사용했는데, 이를 표면만 읽은 학자들이 오독했다고 주장했다. 일제 패망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서 토지 개혁 정책을 찬양하는 〈분배받은 땅〉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1956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만주에서 애창된 〈동북인민 행진곡〉, 〈동북인민자위군 송가〉도 윤해영 작시의 노래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375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3)... 댓글:  조회:3469  추천:0  2018-07-13
가곡 의 수난과 진실   경남의 마산조각공원에 가보면 정자가 하나 서있다. 일송정(一松亭)이다. 가곡  가사에 나오는 중국 길림성 용정에 있는 일송정을 본떠 세워놓은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선구자 1절 가사)   그런데 일송정 정자 옆에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화강암 비석이 하나 서있다. 자세히 보면 무언가를 지운 자국이 있다. 원래는  노래비였다. 10여년전 가곡 가 작사 작곡자의 친일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의 작곡자는 젊은 시절 일찌기 만주에서 작곡활동을 하다가 해방후 마산에 터를 잡았던 조두남(1912~1984)이다. 작사자는 윤해영이라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인데, 해방후에 북한에 들어가 살다가 19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를 받아 를 작곡한 시기는 1932년경으로 알려져있다. 친일 논란은 조두남 사후 20년쯤 후인 2천년대 초반의 일이다. 일제 때의 예술가 치고 친일 논란의 대상이 안된 사람을 몇이나 찾을 수 있을까? 부수기로 말한다면 창원의 용지공원에 우뚝 서있는  노래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도 다 부숴야 하나? 친일 논란이 있기는  작사자인 시인 이원수(1911-1981)나 작곡자인 홍난파(1897~1941)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에 활동하여 친일 행적을 의심받고 있는 안익태, 현제명, 김동진 작곡가 등과 이들의 작품인  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부의 친일 주장과 달리 ‘의 작사자인 시인 윤해영은 친일시인이 아니라 민족시인이며 저항시인이었다’는 내용의 (2005) 이란 책을 쓴 김영수는 그의 책 속에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이인범(1914~1978)과 조두남의 다음과 같은 대화의 기억을 실어놓았다.   “1970년대 초 조두남이 성악가 이인범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 집 근처까지 필자(김영수)가 동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인범이 일제 말기에 일본 군가를 부르며 순회공연을 한 사실을 말하면서 조두남에게 당신도 만주에서 음악활동을 했다면 일본을 찬양한 곡들을 작곡했을 터인데 이실직고하시오라고 웃으면서 물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조두남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악극단을 위해서 하루 밤에 1,2곡 후딱 작곡을 해치웠지, 그러면서 반드시 당국을 지지하는 노래를 두 세곡 부르지 않으면 악극단 공연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라고 하던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 173쪽)   친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음악인들은 누구나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 바쳐 조국을 찾겠노라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을 생각하면 사소한 생계형 친일이라 한들 어찌 옹호하거나 변명하겠는가? 그러나 예술 작품은 탄생한 그 당시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자. 이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일제 말기 변명하기 어려운 짙은 친일의 흔적을 남겼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에 끝까지 친일로 돌아서지 않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마다 광복절에 낭독되는 기미독립선언문의 의미나 가치가 변하지 않듯 문학, 예술 작품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온 가곡 도 귀중한 음악적 자산으로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지워진 노래비에도 가사를 다시 새겨넣기 바란다. 일제 강점기, 우리민족에게 슬프고 잔인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한다. (광화문문화포럼 2015년 5월호, 글 : 이정식, 가곡 에세이  저자)
2374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2)... 댓글:  조회:4509  추천:0  2018-07-13
"가곡 "선구자" 작사 윤해영, 친일시인 아니다"  2005.07.14.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비평가 김영수씨 "몽상의 시인 윤해영"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가곡 "선구자"의 작사가인 윤해영(1909-?) 씨가 친일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원로 문예비평가 김영수(金榮秀.79) 씨는 최근 펴낸 "몽상의 시인 윤해영"(우신출판사)에서 "윤해영의 시에 등장하는 "오족" "오색기"는 만주국과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려는 낱말이 아니라 한민족을 상징하는 "고구려오족"이나 오행사상을 도상(圖像)한 조선군대의 의장기(儀仗旗)나 대방기(大邦旗)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윤해영이 가곡 "선구자"의 원작시 "용정의 노래"에서 보여준 민족의식을 버리고 만주국을 찬양하는 "낙토 만주" 등을 통해 친일분자로 변절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김씨는 "윤해영은 비평적 용어로 "저의(底意)있는 기지(機智)"를 통해 일제시대 억압과 금지에 선수를 쳤다"면서 "그는 만주국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라는 말과 그들의 국기인 오색기라는 말을 역으로 이용해 단일적 현실을 묘사하는 협의상징(steno-symbol)으로만 해석하는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고, 검열을 우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윤씨가 남긴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사계" "발해고지" "척토기" "낙토 만주" 등 9편의 시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김씨는 "그의 시에서 "오족"이라는 낱말은 "만주 아리랑"과 "아리랑 만주"라는 두 편에서만 나오는데 왜 하필 "아리랑"을 주제로 한 맥락 속에서 "오족협화"로 오해받을 이 말을 구사했을까"라고 묻는다. 또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란 낱말도 "오랑캐고개"와 "낙토 만주"라는 두 편의 작품에서만 나오는데 왜 건국의 서사와 관련해서만 이 말이 구사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윤해영은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시집 "만주시인집"이나 "만선일보" "반도사화와 낙토 만주" 등 어용신문과 잡지를 역이용해 역사적 불의와 허상을 담은 시로 정면 항거했다"면서 "그는 만주국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낱말을 차용하는 등 당국의 허를 찌르는 예술적 표현의 기교로 덫을 놓아 검열과 감시를 피해간 저항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윤해영은 "오족" "오색기"라는 낱말을 통해 당국의 검열자들이 "어용성"에 추호도 의심을 갖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시인의 이같은 시적 전략을 간과한 채 표면상에 나타난 단어 등으로 시를 오독하고, 그를 변절한 친일시인으로 못박았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김씨는 친일시비에 휩싸여 있는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에 대해서도 "그가 일제를 찬양한 노래를 작곡한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예술가로서 전모를 파악하려면 어떤 환경, 어떤 동기, 어떤 목적으로 그런 노래를 만들었는지 알아야 한다"면서 "그가 "징병령 만세"를 작곡한 것은 친일을 통해 출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하던 악극단의 생존과 운영을 위해 당국에서 규정한 공연규칙을 지키다보니 부득이 작곡가로서 짊어지지 않으면 안될 짐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년 전 만주에서 만난 조두남의 제자로부터 "징병령 만세"는 음정의 템포가 맞지 않아 부를 수 없게 작곡해 놓았다는 증언을 책에 밝혀 놓았다. 경주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김씨는 14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윤해영론을 쓴 것은 조두남의 "선구자"와 관련된 친일논란이 계기가 됐지만 이 곡의 작사가인 윤해영의 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윤해영의 시 "낙토 만주"가 만주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꿈이 깃든 "아리랑 만주"라는 것이 여러 편의 시를 연계해 해석했을 때 드러났다"면서 "후대 학자들이 윤해영의 불분명한 전기, 문학적 편견 등을 깨고 새로운 시각으로 그의 문학에 접근할 기회를 열어놓고자 책을 썼다"고 밝혔다. 김씨는 I.A. 리처즈의 "문예비평의 원리", 헨리 M. 드러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등 서구 이론서를 다수 번역했고, "성서와 문학" 등을 저술했다.
2373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 댓글:  조회:4343  추천:0  2018-07-13
[필진] 겨레를 속여 온 친일노래 '선구자' 2006.01.04.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겨레] 선구자에 얽힌 작곡가 조두남의 대 국민 사기극 이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시의 '선구자'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노래말의 내용이 장엄하기도 하거니와 곡에 나오는 "말 달리는 선구자"는 바로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를 연상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동지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은근히 콧등이 시큰해 졌던 기억이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곡 선구자가 이렇게 자리매김 되도록 일조한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이 완전히 날조된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조두남이 말하는 선구자의 진실 조두남의 회고록 '그리움'에 의하면 이야기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두남이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기거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선구자의 가사를 주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민족의 구심점이 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가사를 전해 주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조두남이 그의 이름을 물으니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윤해영이란 것을 밝히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조두남은 '윤해영의 행방을 여러 차례 수소문 했으나 끝끝내 찾을 수 없었노라'고 하여 그의 행적을 신비로 포장함으로서 자신의 선구자를 미화 하였습니다. 조두남의 회고가 거짓임이 드러나다 1932년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홀연히 나타나 조국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며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종적을 감춘 신비의 독립시인 윤해영을 조두남은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중국 길림성에서는 꽤 알려진 음악가인 김종화씨입니다. 그는 조두남이 단장으로 있던 고려악극단원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만주 흑룡강성의 녕안시의 녕안극장에서 있었던 조두남의 신작 발표회에 윤해영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날 발표된 곡 들이 선구자의 원작 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 뿐 아니라 윤해영이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목단강의 노래' '산' '아리랑 만주'등의 신곡을 발표하였는데 그날 발표된 곡 대부분이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인 것 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즉,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윤해영'은 계속해서 조두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 입니다.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 그런데 왜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인 윤해영을 1932년 여인숙에서 만난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만 했을까요 ? 바로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하던 친일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일제가 만주침략을 노골화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소극적으로 일제를 옹호하던 다른 문인들과 달리 그는 적극적이고도 열성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만주 최대의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만주괴뢰정부'를 찬양하는 [낙토만주]를 공공연히 외친 유일한 문인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두남 자신도 '스파이와 오드르'라는 악극을 작곡하였는데 이 내용이 스파이가 설치니 일본인들은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긴 친일 악극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두남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윤해영과의 관계를 숨길 수밖에 없었고 한 술 더 떠서 해방 이후 자신과 윤해영의 행적을 미화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가곡 선구자 무엇이 문제인가? 가곡 선구자는 원곡이라고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에서 비롯됩니다. 원래 용정의 노래는 만주를 떠도는 유랑민의 애환을 표현한 서정적인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광야에서 말 달리는 선구자 같은 내용으로 개작하면서 오늘날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선구자'라는 말이 독립투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윤해영이 만주괴뢰국을 찬양한 '락토만주'란 시에는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고 당시 선구자가 어떤 의미로 쓰여 지던 단어였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꿈꾼다. 백방의 전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중략) ... 끝 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금실렁 노래가 들리 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천야만야 빛나리 이 낙토만주에서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구자란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만주국의 건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선구자라 지칭한 것이며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구자가 아닌 '산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오족이란 일본. 조선. 만주. 몽골. 한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윤해영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제의 나팔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곡'선구자'를 부르며 콧등이 시큰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광야에서 말달리던 선구자를 동경해야 할 이유는 더 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님은 조두남의 선구자가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평생 '선구자'를 부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일송정 푸른 솔에..말달리는 선구자...'로 우리의 가슴을 비장하게까지 했던 이 노래가 지난 60년간 이 나라의 백성들을 속여 온 조두남에 의해 날조된 거짓 노래임을 인식하고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다른 친일 매국노들이 자신들의 친일 반민족 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애국자를 껍질을 뒤집어썼을까?" 하는 의문에 다시 한 번 가슴이 갑갑해 집니다. PS : 이 글은 KBS 라디오에서 방송된 "사건과 인물(2005년 6월26일 방송)"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여 한토마에 올린 적이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한 관계로 다시 올립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  
2372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를 직시하기... 일본 "국기(國旗)"?... 댓글:  조회:4770  추천:0  2018-07-13
일본의 국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일본의 국기 이름 日章旗 닛쇼키, 日の丸 히노마루 용도 국기 비율 2:3 채택일 1870년 2월 27일 (민간기) 1999년 8월 9일 (디자인 변경 후 국기) 요소 흰색 바탕의 가운데에 붉은 원이 있다.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일본어: 日章旗 닛쇼키[*], 영어: Flag of Japan)를 의미하며, 히노마루(日の丸)라고 부른다. 1999년 8월 9일에 통과된 일본의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하면, 국기의 형태는 가로세로비가 3대 2인 직사각형이며, 가운데 동그라미의 지름은 세로의 5분의 3으로, 중심은 기의 중심에 위치한다. 바탕은 흰색, 가운데 원은 붉은색이다. 흰 바탕은 순수함과 고결함을, 붉은 원은 성실함과 밝고 따뜻함을 나타낸다. 목차  [숨기기]  1규격과 색상 2역사 2.1일본 제국 시대 2.2현재의 일본 3거부 운동 4역대 깃발 5같이 보기 규격과 색상[편집] 일본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국기 규격 색상 하양 빨강 RGB 255–255–255 (#FFFFFF) 188–0–45 (#BC002D) 역사[편집] 일본 제국 시대[편집] 일장기가 국기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870년 2월 27일(메이지 3년 음력 1월 27일)로, 메이지 유신에 따른 일본 제국의 성립으로부터 2년 후이다. 일장기를 처음으로 제창한 곳은 일본 제국을 수립하였던 사쓰마 번이며, 일본 제국의 성립 8년 전인 1860년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 비준으로 미국에 건너 간 한 사절단이 "일장기"를 이용했다는 기록이있다. 당시는 도쿠가와 왕조가 잇따르는 불평등 조약(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통해 명성을 잃고 있어, 미토 번의 무사들이 사쿠라다 문밖의 변을 일으킨 이후로, 사쓰마 번, 조슈 번, 히코네 번 등의 도쿠가와 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 제국을 세우려고하는 정치 세력이 도쿠가와 왕조의 '접시꽃'을 부정하기 위하여, '일장기'를 새로운 체제 운동의 목표로 사용한 것이다.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사절단에 참가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제국의 성립 후에 "제실론"(帝室論)을 저술하여 천황에 의한 지배를 찬양하고 있다. 일장기는 일본 제국의 77년간(1868년 ~ 1945년)의 공식 국기 역할을 했으며, 1931년 2월, 일본 제국의회에 일장기에 법적 근거를 부여하는 〈대일본 제국 국기 법안〉이 상정됐다가 천황기가 등장함에 따라 폐기되었으며, 이는 그 후로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현재의 일본[편집]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주권을 박탈당한 일본 제국은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의 시행을 통해 새로운 국가인 일본국(日本國)이 법적으로 성립되었으며, 1999년에 시행된 〈국기와 국가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일장기와 기미가요에 법적 근거가 부여되었다. 거부 운동[편집]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로 인한 착취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동북아시아권에서는 반일 감정으로 인한 '일장기'에 대한 증오의 감정도 강하다. 역대 깃발[편집] 기 사용 기간 쓰임 1603년 - 1868년 에도 막부 시절의 기 1870년 - 1945년 일본 제국 시절의 국기 (비율 7:10) 1945년 - 1952년 군정기 당시에 사용한 기 1952년 - 1999년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이후에 사용된 일본의 국기 (비율 7:10)  
2371    [그것이 알고싶다] - 력사를 직시하기...일본 "군기"?... 댓글:  조회:5790  추천:0  2018-07-13
요약 일본 자위대의 깃발이자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군기 목차 개요 형태 역사적 배경 상징과 논란 개요 일본의 군기(軍旗).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이며 현 자위대의 군기이기도 하다. 종종 우리나라에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일본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말로 고사성어 욱일승천(旭日昇天)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에 16줄기의 햇살이 도안된 모양이다. 붉은 태양 주위에 16줄기의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햇살 줄기의 수는 4개, 8개, 12개, 24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낸다. 욱일기 역사적 배경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1870년대였다. 1870년 16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문양의 욱일기가 일본 제국주의 육군의 군기로 공식 채택됐으며, 1889년에는 해군도 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면서 ‘대동아기(大東亞旗)’로 부르기도 했다. 독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와 같이 전범기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종전 이후 잠시 동안만 사용되지 않았을 뿐 1952년 해상자위대와 육상자위대를 창설하면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해상자위대는 군국주의의 깃발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육상자위대의 깃발은 줄기 수만 8줄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상징과 논란 일본 내에서는 욱일기를 전범기로 인식하지 못하며, 아무런 규제 없이 상품의 로고, 응원기, 대중문화에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인식과는 달리 한국과 중국에서는 욱일기를 전범기이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긴다. 2013년 7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 경기가 시작되기 전, 관중석에 등장한 욱일기로 인해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또한 201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발간하는 공식 주간지 의 50호 표지에 욱일기가 사용되었는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비난의 여론이 일어나자 공식 홈페이지 소개 표지에는 욱일기 대신 일장기로 교체되는 사건도 있었다. ====================  ...욱일기는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쳤던 20세기 초반 일본의 침략전쟁을 상징하는 깃발입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에 큰 피해를 봤던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타이완 등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일부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여전히 노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SBS 뉴스 ========================   요약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의 군기로, 일본이 침략 전쟁을 강화했던 시기에 사용함.    욱일기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주위에 욱광(아침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만든 일본의 군기로,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당시에 쓰던 것이다. 욱일승천기는 잘못된 말이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전 세계에 경제 불황과 사회적 불안이 만연하였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고, 공업 부문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본의 군부 세력은 사회 불안과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략주의 정책을 강화하였고,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등으로 사회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하던 지주와 자본가들도 이러한 군부 세력에 지지하였다. 그 결과 1930년대 일본의 군인 세력은 국가 정책 결정의 중심에 있게 되었고, 군비를 확장하여 침략 전쟁을 강화하였다.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침략하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욱일기를 사용하였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육군과 해군이 해체되면서 욱일기의 사용도 중단되었다. 이후 욱일기는 일본의 극우파 세력이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데, 최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스포츠 경기 등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욱일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추진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어린 시절 모습 =====================     1. 욱일기? 전범기? 우선 전범기 라는 개념은 날조에 가깝습니다. 국어사전으로도 외국에서도 사전적으로 정의된 바가 없고, 국제적으로도 사용 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전범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쟁 범죄 혹은 전쟁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전범+기 라는 표현 자체도 문맥상 말이 되지 않는 말 이기도 합니다.   2. 그 당시 일본의 국기는 무엇이었는가? 흔히들 욱일기를 나치 독일의 국기와 동일시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 걸로 압니다.     이 깃발은 나치 독일의 공식 국기 였습니다.   욱일기는 일본군의 상징이었고, 일본의 국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똑같은 거지만, 해외 국가들 입장에선 얘기가 좀 다르게 되죠.      이들에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은 일장기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실 그리고 그 일본군의 모든 만행을 주관하던 일본군 대본영의 문양은 국화 문양이었죠.   요건 아직 일본황실 상징입니다. 우리가 화내야 할건 이런것들이죠.   3. 그래도 욱일기는 2차대전기 일본군의 상징이 아닌가? 욱일기는 1870년 일본 육군의 군기로 정해졌고, 1889년부터는 일본 해군의 군기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보다 욱일기가 일본군의 군기가 된 시기가 빨랐어요. 이건 일본인들이 자기네들 욱일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자주 쓰는 말이죠, 하겐크로이츠처럼 나치 시기를 특정하는 게 아니라 철십자 처럼 전통적으로 군기로 쓰였다! 라고 말이죠.,.   4. 그럼 이 사진은 뭐냐     많은 분들이 욱일기를 나치 독일의 국기와 동일시 하는 데 이 사진을 증거로 들곤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사진은 말레이시아에서 일본 해군이 독일 해군의 기지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주최한 오찬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사진 속의 욱일기는 일본 해자대가 현재까지도 쓰는 형태의 욱일기 이고, 하겐크로이츠가 있는 깃발은 나치 독일의 해군기 입니다. 해군 간의 행사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징을 건 것이지 이게 국가 간의 상징을 대표하는 그런 사진은 아니라는 거죠.   5.종합하자면 결론을 짓자면, 흔히 인터넷에서 말하는 '전법기'라는 프레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을 욱일기로 국한 시켜 버리는 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역사왜곡 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ps, 그래서 미국이 2차대전 끝나고 일왕 폐위 안시키고 국기 일장기로 유지시겼던 게 전 정말 맘에 안듬, 결국 달라진게 하나도 없거든요.   ps2. 그리고 요게 현재 일본 정부의 마크인데, 이건 일본 전국시대 한 가문의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오다 노부가나의 가신이었던 한 하급 무사가 그에게서 하시바라는 성을 하사했고,  태정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성을 다시 한번 바꿈과 동시에 저 문장을 가문의 문장으로 정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니다.     ======================= 욱일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구 일본 제국 해군기, 해상자위대기 욱일기(일본어: 旭日旗 교쿠지쓰키[*])는 빨간색 원 주위에 욱광(旭光)을 그린 깃발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구(舊) 일본 제국 시대에 사용된 일본군의 군기(軍旗)이자 현재의 일본 자위대(自衛隊)의 기(旗)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1] 목차  [숨기기]  1개요 1.1일본 제국 시대 1.2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2사진 3비슷한 기치 4 5 개요[편집]   욱일기를 내거는 니콜라옙스크 주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일본 제국 시대[편집] 1870년(메이지 3년) 16줄 욱일기가 일본 제국 육군기로 사용되었으며[2] 이와 유사한 기가 1889년 일본 제국 해군 군함기로도 사용되면서 모든 일본군에서 욱일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 제국 해군의 각종 장군기(將軍旗)도 8줄 욱일기를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편집]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자 일본군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국 헌법에 따라 자위(自衛) 목적으로 창설된 해상자위대가 1952년부터 16줄 욱일기를 다시 군기로 사용하였고, 육상자위대 또한 변형한 8줄 욱일기를 군기로 사용하였다. 사진[편집] "); zoom: 1;"> 구 일본 제국 육군기   육상자위대기 비슷한 기치[편집] "); zoom: 1;"> 마케도니아 공화국   아사히 신문   카렌 국민 해방군   티베트의 기   애리조나주   소련 공군   러시아 공군 도네츠크 주   계평화통일가정연합    
2370    [쉼터] - 랑비는 최대의 수치, 절약은 문명의 표징 댓글:  조회:3259  추천:0  2018-07-13
손님초대밥상을 두고 2018년 07월 10일 작성자: 김춘식 [두만강칼럼]  손님초대밥상을 두고 사람마다 각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푸짐히 차려야 성의를 충분히 표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검박하게 차려도 대방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간 한 한국인이 친구네 집으로 초대되였다. 저녁때가 되자 친구의 며느리가 저녁밥상을 올려왔다. 시아버지 밥상 하나, 손님 밥상 하나, 남편 밥상 하나였다. 이렇게 밥상이 세개인데 작은 밥상마다 밥 한그릇과 된장국 한그릇, 반찬은 꽁치 하나 구워놓고 단무지 다섯개를 썰어놓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김 일곱장, 시금치를 데쳐 썰어놓은 데다 갓을 좀 올려놓은 것 뿐이다. 이것이 외국에서 온 시아버지의 친구를 초대하는 밥상이다. 만약 우리 조선족 녀성들이라면 아마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을 것이다. 벤츠회사는 독일에서 제일 큰 공업집단회사인데 한번은 슈트트가르트에서 년도보고회를 하면서 일부 기자들을 초청했다. 집행 행사를 회사 행정본부 식당에서 거행했는데 식사 때 매 사람당 국 한공기, 남새샐러드 한접시, 고기 한덩어리와 감자료리를 내주었다. 손님들은 빡빡 긁어먹었다. 어떤 손님들은 빵으로 접시에 발린 남새국물까지 찍어먹었는데 아주 자연스러웠고 ‘얼굴이 깎일가봐’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식사 후에 자기절로 선택하는 단음식을 공급했는데 식사량이 많은 사람은 자기절로 더 보충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라면 식탁이 좁을세라 산해진미를 가득 차려놓았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 한국에서 돌아와 고향에 정착하게 되자 여러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우리 식구들을 초대했는데 집에서 초대하든 음식점에서 초대하든 식탁마다 너무나 푸짐했다. 료리가 십여가지씩 되는 데다 접시마다 량이 또한 많아서 절반도 먹나 마나 했다. 어떤 음식에는 겨우 저가락 몇번 오갔을 뿐이다. 음식을 좀 적게 올리라고 미리 귀띔해도 어쩌다 초대하는 귀인인데 어떻게 약소하게 대접하냐며 듣지 않았다. 내가 계산해보니 끼니마다 천원씩은 소비하는 것 같았다. 옛 직장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서 몇년 많이는 20여년이나 함께 지냈던 동료들이라 귀국하자 마자 돌림으로 식사초대를 하는데 역시 식탁마다 풍성했다. 그대로 버려지는 음식도 아깝고 음식값도 만만치 않아 좀 적게 주문하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뭐, 그러면 성의가 부족하다나? 그래서 후에는 별수없이 이 핑게 저 핑게를 대며 극력 초대를 막는 수 밖에 없었다. 귀한 친척이라고 반가운 동료라고 진정을 다해 대접해주는 그 성의는 너무 감사하지만 그들이 번마다 적지 않은 돈을 팔고 또 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손님초대에서의 과소비는 체면 때문이란다. 과소비는 어떻게 보면 랑비이다. 랑비는 최대의 수치이고 절약은 문명의 표징이다. 절약이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는 것이지 한끼 굶자거나 식사를 적게 하란 말이 아니다. 입에 맞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을 장만해 식탁을 꾸미라는 것이다. 손님초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소보다 색다른 음식 하나만 더 올려도 괜찮다. 손님을 초대하는 식탁에서 차린 음식이 꼭 남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주인의 진심어린 성의를 표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절약은 결코 린색이 아니다. 절약을 린색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위인이고 부자라도 자신이 쓰는 비용이나 남을 위해 쓰는 비용을 랑비함이 없이 아껴쓸 것을 권장한다. ‘소 같이 벌어서 쥐 같이 먹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어렵게 마련되는 돈을 가치없이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 써서는 안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례의는 지키고 있지만 음식에 대해서는 거의 개의치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유럽인들의 공통점이다. 이는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바이다. 한국인들도 손님초대에서 우리처럼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지 않는다. 전문점에 가서 순대국 한그릇이나 뼈다귀국 한그릇, 김치찌개 한그릇에 막걸리 한두병이면 그만이라 역시 공감이 가는 손님초대법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길림신문 2018.7.9
2369    [록색평화주의者]"평화의 랭면", "통일의 랭면" 거듭나기만을... 댓글:  조회:3554  추천:0  2018-07-13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랭면관 —옥류관 탐방 [ 2018년 07월 11일 ]       올해 4월 27일 조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진행할 때, 조선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평양에서 가져온 랭면을 맛보게 했다. 이로 하여 평양랭면은 순식간에 글로벌 핫 키워드로 되였으며 조선 지도자들이 외빈을 초대할 때 늘 랭면을 만드는 옥류관도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9일, 기자는 평양 옥류관을 탐방하여 조선 3대 지도자의 관심과 조선인민의 사랑을 깊이 받고 있는 이 랭면관에 대해 료해했다. 옥류관은 평양 대동강반에 위치해있는데 청자기와 흰벽으로 구성된 2층 조선전통건축이다. 옥류관 봉사부 직원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은 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1958년 8월 지시를 내려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1960년 8월에 준공되였다고 한다. 옥류관이라는 이름은 김일성 주석이 지은 것으로 대동강을 옥류라고도 하기에 옥류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옥류관은 건설 초기 본관 건축 하나 밖에 없었고 면적은 약 4400평방메터였으나 그후 옥류관을 찾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두개 별관을 확장건설했으며 1988년 5월 두개의 별관이 정식으로 준공되여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옥류관은 도합 3개의 관으로 나뉘는데 본관, 1호관과 2호관이다. 2010년 10월, 김정일 장군의 지시하에 옥류관은 또 료리관을 설립하여 철갑상어료리, 메추리구이 등 특색료리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외국료리도 만들 수 있게 되였다. 현재 옥류관의 총 면적은 19200여평방메터에 달하며 수많은 초대행사를 담당하고 있는데 조선의 김일성 주석, 김정일 장군과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는 여러차례 옥류관을 시찰하고 옥류관의 건설과 봉사 사업에 대해 지도했다. 명예화는 한국 전 대통령 김대중과 전 대통령 로무현이 조선을 방문한 당시에도 옥류관에서 초대를 받았다고 밝혔다. 올해 4월 27일 북남 정상회담에서 조선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한국 대통령 문재인에게 옥류관에서 만든 랭면을 맛보게 했으며 이로 하여 옥류관의 랭면은 ‘평화의 랭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손님들이 평양을 방문하면 꼭 옥류관에서 랭면을 맛보는데 여기에는 많은 중국손님들도 포함된다. 며칠전, 한국롱구팀의 선수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도 옥류관에서 식사했는데 그들도 이곳의 랭면을 아주 좋아했으며 일부 선수들은 2그릇 심지어 세그릇씩 먹었다.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의 랭면은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쟁반고기랭면, 평양랭면, 쟁반랭면이다. 쟁반고기랭면은 김정일 장군의 지도하에 고대 조선의 왕궁에서 먹던 식단과 식기를 참조했으며 끊임없는 개량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쟁반고기랭면의 그릇은 굽이 높은 쟁반이며 일인분은 400그람의 랭면에 280그람의 닭고기, 계란, 배조각 등 보조재료를 겯들였다. 평양랭면은 전통 랭면의 제작방법을 이어왔는데 랭면그릇은 놋그릇이며 일인분은 200그람 혹은 100그람에 랭면에 소량의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계란, 배조각, 오이채 등 보조재료를 겯들였다. 쟁반랭면의 그릇도 굽이 높은 쟁반이며 일인분은 200그람 혹은 100그람의 랭면이 담겨있으며 보조재료는 평양랭면과 같다. 하지만 식기가 다르기에 세팅효과가 다소 부동하다. 평양랭면은 모든 보조재료를 랭면 우에 쌓아놓지만 쟁반랭면은 랭면우에 펴놓는다. 명예화의 안내로 기자는 본관에 위치한 연회청을 참관했다. 본관 연회청은 동시에 320명이 식사할 수 있는데 한국롱구팀의 선수와 한국예술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모두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기자가 본관에 도착했을 때에는 정식 영업시간이 아니여서 접대원들이 식기와 랭면을 차리고 있었다. 정식 영업이 시작되자 조선민중들이 륙속 연회청에 진입해 식사를 했다. 명예화의 소개에 의하면 옥류관은 평균 매일 6000여명의 손님을 접대하며 많은 단체손님은 사전에 예약해야 한다고 한다. 옥류관 료리사 박영옥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26년간 옥류관에서 일했다. 그녀는 기자에게 랭면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원인은 주로 두가지가 있는데 한 방면으로 랭면은 메밀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영양이 풍부하고 쉽게 소화되며 혈액지질을 낮출 수 있어 건강음식에 속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 방면으로 랭면육수는 여러가지 식재료를 우린 것으로 감칠맛이 강해 랭면과 함께 먹으면 더욱 시원하고 조화롭다고 밝혔다. 이번 북남 정상회담에 박영옥 료리사도 판문점에 파견되여 랭면 제작에 참여했는데 이 경력에 대해 그녀는 “우리가 만든 랭면이 전 민족의 사랑을 받고 평화의 랭면, 통일이 랭면이 되였습니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한몫을 기여했다는 생각에 아주 자호감을 느낍니다.”라고 감격스레 말했다. 취재가 끝난 후 기자는 옥류관에서 쟁반고기랭면을 시켰는데 접대원은 랭면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잔의 평양소주도 들고왔다. 명예화의 소개에 따르면 평양사람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먼저 술을 마시고 후에 랭면을 먹는’ 습관이 있는데 먼저 한잔의 소주를 마시고 다시 랭면 한그릇을 먹으면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기자도 그대로 맛보았는데 랭면의 량이 넉넉하고 맛도 아주 훌륭했으며 평양소주를 겯들이니 또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인민넷 기자 망구신).                
2368    [동네방네] -" 흑사과 맛보세요"... 댓글:  조회:3302  추천:0  2018-07-13
‘흑사과 본 적 있으세요?’... 사과 한알에 150元 (ZOGLO) 2018년7월12일  최근 칭장(青藏)고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 노인이 8년 간 노력 끝에 흑사과 재배에 성공해 화제가 되고 있다.    칭장고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 노인은 8년 전 흑사과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항상 꽃을 피우지 못해 열매를 수확할 수 없었다. 8년 째 되는 올해, 흑사과 나무에 드디어 꽃봉오리가 맺혔고 노인은 결국 흑사과 재배에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이 흑사과는 칭장고원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특산품, 흑사과나무를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흑사과의 당도는 일반 사과보다 높아 인기가 높다.    가격은 한개당 150위안(약 2만 5천원)으로 매우 비싼 편이다. /봉황코리아   
236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탄소배출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886  추천:0  2018-07-12
'기후의 조정자' 극지가 기후변화 가속하는 화약고가 되고 있다 윤신영 기자 2018.07.1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알래스카 영구동토지역(툰드라)의 경계선까지 가문비나무가 진출해 있다. 지구온난화가 빨라지면서 가문비나무가 북상하고 있다. 2년 이상 영하의 온도로 얼어붙어 있는 극지의 땅(영구동토층)은 인류가 방출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후변화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최근 기후변화가 진행되면서 동토층이 녹고 있고, 이에 따라 대기중에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늘면서 극지가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지구의 화약고’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11일자에 따르면,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와 미국항공우주국(NASA), 스위스 취리히대 등 공동연구팀은 미국 알래스카 지역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 데이터 42년치를 수집했다. 그 뒤 토양 및 식물에서 흡수하거나 내뿜는 탄소량을 계산해 장기적인 변화 패턴을 알아냈다. 연구 결과 동토층의 탄소저장시간(탄소가 동토와 지상의 식물에 흡수된 채 머무르는 시간)이 42년 사이에 13.4%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위부터 월별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량 비교(빨간색이2006년 이후), 이산화탄소 농도의 변동폭(해가 갈수록 월별 변동폭이 커짐), 그리고 연간 농도 변화(해가 갈수록 많아짐). -사진 제공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정 교수팀은 이런 결과가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밝혔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사용해 일어난 온난화는 특히 북위 60도 이상의 고위도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뜻해진 기후가 동토를 녹이고 식물이 번성하게 한다. 이런 변화는 기후에 두 가지 정반대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동토가 녹으면서 탄소를 배출하는데, 그 양은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급격히 늘어난다. 하지만 식생은 그렇게 빠르게 탄소 흡수량을 늘리지 못한다. 정 교수팀은 이런 차이가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대기중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경향이 계속된다면 극지의 지표면 탄소 배출량이 결국 식물의 흡수량을 앞지를 수 있다. 연구팀은 “인간의 활동에 의한 탄소배출뿐만 아니라 생태계가 배출하는 자연적 탄소배출량이 늘어나, 미래에 우리가 예측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기후변화를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윤신영 기자
2366    [그것이 알고싶다] - "골패놀이"?... 댓글:  조회:6100  추천:0  2018-07-12
  성격 민속놀이, 세시풍속 유형 골패(骨牌)놀이 분야 생활/민속·인류 요약 둘 또는 네명이 골패를 가지고 하는 노름.   기산풍속도첩 / 골패 기산풍속도에 보이는 전통 놀음인 골패. 내용 노름기구인 골패는 가로 1.2∼1.5㎝, 세로 1.8∼2.1㎝의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효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긴 것으로 모두 32쪽이다. 골패라는 이름은 그 재료로 뼈를 사용하는 데서 왔으나 뼈로만 만든 것은 민패라 하고, 뒤에 대나무 쪽을 붙인 것은 사모패(紗帽牌)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상아로 만든 까닭에 초기에는 아패(牙牌)로 불렸다. 골패는 중국 송나라 때 생겨났다고 하므로 우리 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으나 청나라 때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우리 나라의 골패에 소골(小骨)·미골(尾骨)의 이름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서 투전과 골패를 합하여 ‘마조강패(馬弔江牌)’라는 연구(連句)를 들고 있다. 골패 32쪽의 이름과 쪽수는 다음과 같다. 오륙(五六, 2쪽)·퉁소(通踈, 2쪽]·쥐코[鼻, 1쪽]·진아(眞兒, 2쪽)·백사(白四, 1쪽)·백오(白五, 2쪽)·백륙(白六, 2쪽)·직흥(直興, 2쪽)·사오(四五, 1쪽)·사륙(四六, 2쪽)·주륙(主六, 2쪽)·소삼(小三, 2쪽)이다. 또,아삼(兒三, 1쪽)·장삼(長三, 2쪽)·삼사(三四, 1쪽)·삼오(三五, 1쪽)·삼륙(三六, 1쪽)·준오(準五, 2쪽)·어사(御四, 2쪽)·관이(冠二, 1쪽)·아륙(兒六, 1쪽)이다. 골패놀이는 앞의 32쪽으로 모두 227점을 만드는 놀이로, 둘이도 하지만 넷이서 노는 일이 더 많다. 놀이방법에는 꼬리붙이기·포(飽)·여시·골여시·쩍쩍이 따위가 있다. (1) 꼬리붙이기 두 사람이 노는 방법으로, 앞사람이 낸 숫자에 맞추어 패를 내어야 하므로 ‘꼬리붙이기’라고 불린다. 이 방법은 먼저 패를 12쪽씩 나누어 가진다. 저쪽에서 한 패를 내면 그 패 아래쪽 수에 맞는 것을 이쪽에서 내어야 한다. 저쪽은 이쪽이 낸 패 아래쪽 수에 맞는 것을 다시 내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 1]처럼 계속한다. 상대편 숫자에 맞는 것을 내지 못한 쪽이 진다. 또, 자기가 가진 총수를 셈하여 불리할 때는 버리는데, 버린 수가 많은 쪽이 지는 것으로 치기도 한다. (2) 포(飽) 네 사람이 한패를 이루어 둘러앉는다. 처음 패를 떼어 물주(物主)를 정한 다음, 패를 모두 방바닥에 엎어놓고 섞는다. 각기 5쪽씩 떼어서 앞에 놓으며 물주는 다시 2쪽을 떼어내고 그 가운데 1쪽을 보인다(역·좌·순·월 따위는 이때만 쓴다.). ‘역’이 나오면 물주는 왼쪽에 앉은 사람 ‘나’에게, ‘월’이 나오면 맞은 쪽의 ‘가’에게, ‘순’이 나오면 오른쪽의 ‘다’에게 물주의 지위를 양도한다. 이때 물주의 골패는 ‘나’에게, ‘나’의 것은 ‘가’에게, ‘가’의 것은 ‘라’에게, ‘라’의 것은 ‘다’에게 넘겨서 서로 바꾼다. 그러나 ‘좌’가 나오면 바꾸지 않고 놀이를 시작한다. 패는 물주만 6쪽을 가지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5쪽씩 돌린다. 사람들은 자기 패가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손에 쥔다. 물주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1쪽을 버리며(이것은 앞이 보이도록 젖혀놓아 다시 쓰지 않도록 한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엎어놓은 패 가운데 1쪽씩 가져간다. 이들 가운데 다음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긴다. 1, 2포는 자기가 가진 5쪽과 바닥에서 집은 1쪽이 각각 2쪽씩 같은 모양에, 같은 수로 이루어진 세 쌍이고, 3포는 앞의 6쪽이 형태는 다르나 2쪽씩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세 쌍이다. 4포는 손에 쥔 5쪽의 형태가 같거나, 형태가 다르더라도 같은 수의 두 쌍과 남은 1쪽과 바닥에서 떼어낸 1쪽의 형태와 숫자가 같은 것이며, 5포는 4포에 바닥에서 뗀 것과 형태는 다르나 숫자가 같은 것이다. 그리고 6포는 형태와 숫자가 같은 4쪽을 손에 쥔 경우인데, 6포가 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운이 매우 좋은 것을 ‘6포 잡았다’고 이른다. 골패는 투전과 더불어 대표적인 노름기구로 손꼽혀왔으나, 값이 비싸고 놀이방법이 복잡하여 투전처럼 대중화되지는 못하였다. ========================   한자 骨牌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기도 광명시 집필자 간호윤 [상세정보]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구멍의 숫자와 모양에 따라 패를 맞추는 놀이. [개설] 골패란 뼈로 만들었다는 뜻이며 쌍륙, 투전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도박에 속하였던 놀이이다. 각 패에는 1에서 6까지의 점수를 섞바꾸어 위 아래로 새겼으며, 모두 32짝이 한 벌로서 점수는 127점을 만점으로 한다. 여시, 골여시, 짝짜기, 꼬리붙이기, 포(飽)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며, 마작의 원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연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강패(江牌)’라고 밝혀 도박하는 놀이로 나와 있다. 골패 놀이 방법을 기록한 조선시대 『골보(骨譜)』 혹은 『골부(骨簿)』라는 작은 크기의 수진본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꽤 오랜 연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전소설 「이춘풍전」에 “장기, 골패, 쌍륙 투전, 육자배기…….” 등의 명칭과 함께 이 골패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조선 후기에는 광명 지역에서도 이 놀이가 꽤 성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놀이도구 및 장소] 골패는 실내에서 즐기는 놀이로서 골패와 놀이 공간만 있으면 된다. 골패는 가로 1.2~1.5㎝, 세로 1.8~2.1㎝의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 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긴 것으로 모두 32짝이다. [놀이방법] 손가락 한 마디만한 나무나 뼈에 같은 크기의 흰 뼈를 붙이고, 그곳에 하나부터 여러 개의 구멍을 뚫는다. 모두 서른두 짝이 한 목인데 구멍의 수에 따라 백이[쥐코]·아사·어사·관이·이륙·삼사·삼오·삼륙·사오 등이 각 한 짝이고, 통소·소삼·백오·백륙·진이·장삼·적홍·중오·사륙·오륙·준륙 등이 각각 두 짝이다. 두 사람부터 다섯 사람까지 둘러앉아서 한 짝을 대고, 한 짝을 맞추는 놀이이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골패는 민간놀이의 하나이지만 그 노는 방법이 복잡하여 널리 보급되지는 못한 놀이이다. [현황] 광명 지역에서는 일부 노인들에 의해 1970년까지 골패 놀이가 행해졌으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하여 현재는 자취를 감추었다. 골패는 노는 방법이 복잡하여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으나 경상도에는 「골패 타령」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에 따라 어른들의 놀이로 꽤 이용된 듯하다. ================================== 정의, 유래 [정의] 구멍의 숫자와 모양에 따라 패를 맞추는 전통적인 놀이 및 도박 도구. 강패(江牌)·아패(牙牌)·호패(號牌)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래] 골패의 역사적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낙천(白樂天)이 하늘에 떠있는 27개의 별을 본 따서 만들었다는 설,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만들었다는 설 등이 있다. 『정자통(正字通)』에서는 1120년(宋 宣和 2) 송의 어느 신하가 아패(牙牌)와 계점(計點)을 만들어 별자리의 배열을 살펴볼 것을 청한 사실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골패의 유입에 대해서도 임진왜란 때 명(明)의 군사들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설과 이후 청(淸)에 의해 전해졌다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風俗篇)에서 “골패가 한 번 성립되어 그 수리적(數理的) 변화성으로 인하여 이용이 복잡하여 오락·도박의 양 방면으로 무수한 법식을 유발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중국에서 골패가 유입되었다고 하지만 골패의 놀이양식과 방법이 한국의 상황에 따라서 많이 변화하였음을 말해준다. 종류, 놀이방법 [종류] 골패는 제조양식에 따라서 뼈로만 만든 것을 민패, 흰 뼈와 검은 대나무를 붙여서 만든 것을 사모패(紗帽牌)라고 한다. 패는 소·사슴 등 동물의 뼈를 나무에 덧붙여서 손가락의 마디 크기로 만든다. 그리고 대·중·소 원모양의 구멍을 판 뒤에 붉은색, 검은색(혹은 푸른색)을 칠하여 완성한다. 골패는 총 32개의 패가 있으며, 구멍수는 모두 227개이다. 구멍수에 따라 각기 별칭이 붙어 있다. 같은 패가 2개(짝패)인 것과 1개의 패(홀패)로 된 것이 있다. 32개의 패 중에서 우두머리는 ‘관이’이다. 관이는 패중지왕이라 하여 제일 어른 대접을 받는다. 각각 별칭과 구멍수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소소(1·1, 짝패), 쥐코(1·2, 홀패), 소삼(1·3, 짝패),  백사(1·4, 홀패), 백오(1·5, 짝패), 백륙(1·6, 짝패), 진아(2·2, 짝패), 아삼(2·3, 홀패), 어사(2·4, 홀패),  관이(2·5, 홀패), 아륙(2·6, 홀패), 장삼(3·3, 짝패),  삼사(3·4, 홀패), 삼오(3·5, 홀패), 삼륙(3·6, 홀패),  직흥(4·4, 짝패), 사오(4·5, 홀패), 사륙(4·6, 짝패),  준오(5·5, 짝패), 오륙(5·6, 짝패), 주륙(6·6, 짝패).  가야금 병창으로 불렀던 골패타령에서는 이러한 별칭들이 잘 녹아들어 있다. “얼싸 오늘 하 심심하니 골패 짝패 하여 보자. 쌍준륙에 삼륙을 지르고 쌍준오에 삼오를 지르니 삼십삼천 이십팔수 북두칠성이 앵돌아졌구나. …… 청부동(靑不同) 백부동(白不同) 매화가되고 소삼관이 사륙하고 소삼어사 오륙하니 옥당쌍수가 뒤집어 지누다.” [놀이방법] 골패의 놀이방법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며 거의 8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일례로 충북 지역에서는 톡·밑달기(미골)·그대기·오관떼기·쑤시기 등의 많은 놀이방식이 있다. 톡은 가장 널리 즐기는 놀이로서 ‘톡을 모르면 양반이 못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톡은 카드방식과 비슷한데 처음에는 주로 5명이 하면서 6개의 골패를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타인이 내놓은 패를 집어가고 자신의 패를 내놓으면서 패를 맞추어 간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손을 털거나 남은 구멍의 숫자가 제일 적은 사람이 장원이 된다. 짝맞추기와 꼬리맞추기도 널리 즐기는 골패놀이 중의 하나이다. 짝맞추기는 다음과 같이 한다. 먼저 선이 들고 온 패 중에서 짝이 맞는 패를 내려놓는다. 짝패가 없을 경우는 아무것이나 하나 내려놓는다. 다음 사람은 선이 내려놓은 패 중에서 맞는 패가 있으면 가져간다. 맞지 않을 경우에는 나머지 골패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와서 짝을 맞추어 본다. 이 또한 없을 경우에는 패 하나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놀이를 진행하다가 먼저 짝을 세 번 맞추어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꼬리맞추기는 상대방이 내려놓은 패의 아래쪽 숫자에 맞는 패를 짝지으면서 하는 놀이이다. 짝지을 패가 없으면 자신의 패 중 하나를 뒤집어 놓는다. 손에 든 패를 다 내려놓을 때까지 계속 진행한다. 뒤집어 있는 패의 숫자를 합하여 높은 사람이 지는 것이다. 내용 골패는 투전(鬪牋)·쌍륙(雙六)과 함께 도박성이 강한 놀이였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여러 가지 내기놀이 중에서도 심보가 나빠지고 재산을 탕진하며 가문과 친족들의 근심이 되게 하는 것은 투전이 첫째가 되고, 쌍륙·골패가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골패는 주로 양반·기생 등이 즐겼던 놀이였다.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에서는 당시의 골패놀이 풍속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손님들이 기생집에서 모여 술상을 시켜놓고 기생과 골패를 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옛 신문을 살펴보면 양반들 혹은 부유층과 관련한 골패놀이 기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예컨대, 대한매일신보 1908년 8월 9일자를 보면 “양반들이 골패짝잡기를 밥숟가락 붙잡기보다 좋아하여”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골패에 빠져든 이도 적지 않았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주일공사 조민희(趙民熙)를 도박 중에서도 골패를 생명처럼 여긴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주야로 저고리의 중단(中單)을 만지면서 골패를 하다가 중단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위에서 그를 ‘골귀(骨鬼)’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골패는 때로는 점술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골패를 일렬로 쭉 늘여놓고 패들을 뒤집어 본다. 패들을 맞추어 본 다음 패의 점수를 더해서 점괘를 보는 것이다. 패를 가지고 신수점을 보는 풍속은 중국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중국에서도 골패는 매우 인기 있는 놀이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골패는 32개의 패가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골패에 뚫려 있는 구멍과 짝짓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패는 보통 흑단(黑檀)으로 만들어지며,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칠한 점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패의 상단에는 빨간 점이 새겨져 있다. 골패는 놀이방법이 많을 뿐더러 복잡하고 까다롭다. 복잡한 골패의 놀이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골보(骨譜)』라는 책자가 전해지기도 한다. 놀이방식이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투전만큼 백성에게 쉽게 파고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골패에 한번 빠져들면 며칠씩을 골패판에서 지새울 정도로 도박성이 강하다고 한다. 골패는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화투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조선시대 골패(骨牌)놀이         가. 놀이의 개관                               상아(象牙)나 짐승의 뼈,뿔 등으로 만든 놀이도구, 또는 그것을 가지고 노는 놀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검은 나무 바탕에 흰뼈를 붙여 여러 가지 수효의 구멍을 판 것이다. 모두 32쪽이 한 벌이다. 뼈를 깎아 만들었다고 해서 골패(骨牌)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뼈로만 만든 것을 '민패'라고 하고, 뒤에 대나무 쪽을 붙인 것을 '사모패'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상아로 만든 까닭에 '아패(牙牌)'라고 불렀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도박(賭博)에 이용되어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도박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놀이를 할 수 있다. 특히 놀이방법이 간단하고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놀이이다. 그리고 부피가 작아 휴대하기가 간편하기 때문에 오늘날에 활용하기에 좋은 놀이이다.   나. 놀이의 유래 기산풍속도첩중-골패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 나라의 골패에 소골(小骨), 미골(尾骨)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골패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놀이는 중국 송(宋)나라 때 생긴 놀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으나, 청나라 때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행해지던 이 놀이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한 까닭은, 놀이가 비교적 간단한 탓에 사행적 요소인 내기가 강조되면서 도박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는 놀이도구는 간단하지만 다양한 놀이방법이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를 활용하여 일상 놀이로 발전시켰다.  골패는 점복(占卜) 도구로도 쓰였는데, 천패이선(天牌二扇) 24점은 24기(氣)를, 지패이선(地牌二扇) 4점은 사방을, 인패이선(人牌二扇) 16점은 사단(四端)을, 화패이선(和牌二扇) 8점은 대화원기유행팔절지간(大和元氣流行八節之間)을 상징한 것으로 성수의 배열을 비유한 것이다.       다. 놀이의 방법 1) 놀이도구 모두 32쪽인데 서양에서는 28쪽을 사용한다. 크기는 가로 1.2~1.4cm, 세로 1.8~2cm, 두께 0.4~0.5cm 정도로 작다. 모양은 납작하고 네모진 검은 나무 바탕에 상아나 짐승 뼈를 붙이고, 여러 가지 수효를 나타내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겼다. 1을 새긴 구멍은 가장 크고 1과 4는 붉은색을 넣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검정색으로 칠했다. 32개 가운데 짝패가 22개이고, 홀패가 10개이다. 짝패(같은 모양의 패)로 되어 있는 것은 1-1, 2-2, 3-3, 4-4, 5-5, 6-6, 1-3, 1-5, 1-6, 4-6, 5-6이고, 홀패로 되어 있는 것은 1-2, 1-4, 2-3, 2-4, 2-5, 2-6, 3-4, 3-5, 3-6, 4-5이다(그림에서 네모의 가장자리가 진하게 칠해진 부분). 각각의 패에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고, 쌍륙에서 쓰는 명칭에서 따온 부분도 있고 독자적으로 생성된 부분도 있다.     백 : 빨강색으로 된 가장 큰 구멍 아 : 검정색으로 표시된 2개의 구멍(백 다음으로 구멍 이 큼) 삼 : 검정색 작은 구멍 3개가 사선방향으로 표시된 것 흥 : 빨강색 작은 구멍 4개가 표시된 것 오 : 검정색 작은 구멍 5개가 표시된 것 육 : 검정색 작은 구멍 6개가 표시된 것     1-1(2):통소, 코백  2-2(2):만아, 진아  3-3(2):장삼  4-4(2):직흥  5-5(2):전오, 준오  6-6(2):주룩, 줄육  1-3(2):백삼, 소삼  1-5(2):백오/ 오  1-6(2):백륙/ 육  4-6(2):사륙, 흥륙  5-6(2):오륙/ 육오 1-2(1):백아, 쥐코/ 아백  1-4(1):백흥, 백사/ 흥백 2-3(1):아삼/ 삼아 2-4(1):아흥, 어사/ 흥아 2-5(1):아오, 관이/ 오아 2-6(1):아륙/육아 3-4(1):흥삼, 삼사/ 삼흥 3-5(1):삼오/ 오삼 3-6(1):삼륙/ 육삼 4-5(1):흥오, 사오/ 오흥        2) 놀이방법  놀이방법은 79가지이다. 그 중에서 꼬리 붙이기, 포, 여시, 골여시, 쩍쩍이, 톡 등이 주로 사용되는 놀이이고, 탑 쌓기나 거북패, 오관 등은 혼자 운수를 점치는 방법인데 놀이방법이 잘 전해지지 않고 있다.      1) 톡     이 놀이에는 놀이를 진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물주'라고 한다.  ① 5명이 놀이를 하는데 1인당 6개의 골패를 나누어주고 나머지 2개는 물주가 가지고 있는다. 이 놀이에는 마지막 장 또는 마지막 개수라는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 골패를 나누어 받을 때 놀이가 바로 끝날 수도 있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놀이가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② 물주는 처음 시작할 때 남은 2개 가운데 골패 한 개를 '갑'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갑으로부터 골패 한 개를 가져온다.  ③ '을'도 마찬가지로 골패 한 개를 내놓으면 물주는 갑이 내놓은 골패가 아닌 다른 골패를 을에게 건네준다.  ④ 이런 식으로 계속 골패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한 사람이 6개가 모두 짝이 맞으면 "이겼다."고 외친다. 과연 3쌍이 되었는가를 확인한 후 놀이가 끝난다.  ⑤ 다시 새로운 골패를 받아서 놀이를 계속 진행한다.  2) 꼬리 붙이기 두 사람이 노는 방법으로, 앞사람이 낸 숫자에 맞추어 패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① 먼저 선을 정하는데 정하는 방법은, 자기 골패 가운데 2-5(이오·아오)가 있거나, 만약 둘 다 없으면 6-6(줄륙)이 있는 사람이 선이 된다. ② 선이 임의로 패 한 쪽을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은 그 끗수에 맞는 것을 이어서 내야 한다.  ③ 다음은 다시 선이 앞사람의 끗수에 맞는 것을 이어서 낸다. ④ 상대편 숫자에 해당하는 것을 잇지 못하면 지게 된다.   3) 짝맞추기     ① 2~4명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골패를 뒤집어 놓고 하나씩 들어 제일 높은 수를 든 사람이 선이 된다. 선은 6쪽, 나머지 사람은 5쪽의 골패를 갖고 시작하며 남는 골패는 모아둔다. ② 선은 먼저 자신의 골패 중 짝패가 있으면 둘 다 내려놓고, 또 다른 패 하나를 더 내려놓을 수 있다. 짝패가 없으면 그냥 하나의 패만 내려놓는다.  ③ 다음 사람은 선이 내려놓은 하나의 패와 짝을 이루는 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 패를 집어와 짝이 있으면 2쪽을 내려놓는다. 짝이 맞는 패가 없으면 모아둔 골패 중 하나를 집어와 짝이 있으면 내려놓고 없으면 아무 패나 하나를 내린다.  ④ 다음 사람도 계속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다가 짝맞추기를 세 번 먼저 해서 내려놓으면 이기게 된다. 4) 골패     ① 보통 5~7명이 하지만 놀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4명까지 제한된다. 따라서 나머지 사람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 사람이 빠지면 대신 들어가 놀이를 한다.  ② 4명이 각기 8장씩의 골패를 나누어 가지는데, 2-5(아오)를 잡은 사람이 선이 된다. 그러나 3명이 할 경우 10장씩 갖고 2장을 빼고 2명이 할 때는 16장씩 갖고 한다. ③ 먼저 선이 자기의 패 중에서 하나의 골패를 내려놓으면, 반 시계 방향으로 2·3·4등은 차례로 1등에 맞는 골패를 내려놓아 이어가야 한다. 꼬리 붙이기처럼 아래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약 선이 3-3(장삼)을 내놓았으면 다음 사람은 3이 들어간 골패, 즉 1-3, 2-3, 4-3, 3-6 중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 만일 자기 차례가 왔을 때 3이 들어간 골패가 없어 내려놓지 못하면 자기가 가진 골패 중 한 개를 빼서 상대방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엎어서 내려놓는다. 이것을 '꿇어놓는다'고 한다. ④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 뒤에, 앞사람의 골패를 이어가지 못해 꿇어놓은 골패의 구멍수로 승부를 가린다. 즉 4명 중 구멍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장원이 되고, 가장 많은 사람이 꼴찌가 된다. 5) 거북패     ① 먼저 20짝을 가로로 다섯 짝, 세로로 네 짝씩 붙여 네모지게 거북의 몸을 만들고, 다음 두 짝으로 머리, 두 짝으로 꼬리를 각각 붙이고, 끝으로 몸의 네 귀퉁이에 각각 두 짝씩 엇비슷하게 네 발을 붙인다.  ② 머리, 꼬리, 네 발 등 바깥 짝들과 맨 앞줄의 둘째 짝, 넷째 짝과 맨 뒷줄의 둘째 짝, 넷째 짝을 젖혀 맞는 짝끼리 떼어낸다.  ③ 다음 짝들을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여 끝까지 다 떨어지면 재수가 좋다고 한다.   6) 골패의 용어 ① 조사:내려놓은 골패의 구멍수가 가장 많은 사람, 즉 꼴찌를 말한다. ② 삼시 : 등위와 관계없이 꿇어놓은 골패의 총 구멍수가 30이 넘는 사람을 말한다. ③ 통:여덟 장을 모두 이어가서 한 개도 꿇어놓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데, 네 명 중에서 한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사람은 벌칙을 받거나 돈내기의 경우 돈을 내야 한다.   7) 골패의 세부규칙. ① 첫판을 제외하고는 꼴찌를 한 사람이 선이 된다. ② 장원이 셋이고 조사가 한 명이면 돈을 내지 않는다. ③ 돈을 낸 사람, 즉 조사가 둘일 경우 가운데 사람이 선을 잡는다. ④ 구멍수가 가장 적은 사람이 동수인 경우 함께 돈을 나누어 갖는다. ⑤ 한 명이 통을 해서 세 명 모두 돈을 물으면 일등이 다시 선이 된다. ⑥ 5~6명이 할 때는 장원인 사람이 쉬고, 대기 중인 사람이 들어온다. ⑦ 패를 나눌 때는 잘 섞어서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은 다음, 선이 2장을 먼저 가져가면 그곳에서부터 반 시계방향으로 2장씩 가져간다.   라. 교과서 속의 놀이                               '톡'과 같은 놀이는 골패의 안쪽에 구멍이 패여 있어서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놀이로 손의 감각을 익힐 수 있는 놀이이다. '짝맞추기'나 '꼬리 붙이기'와 같은 놀이는 두뇌를 최대한 활용해야 이길 수 있고 또한 정확한 수 읽기 내지 판단력이 있어야 능숙하게 놀이할 수 있다. 또한 '골패'의 경우 전체상황을 파악해야 하며, 심지어 바닥에 내려놓은 패를 잘 읽고 기억해야 놀이에서 이길 수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하여 총체적인 지능발달을 꾀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통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이에 몰입할 때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적 효과이다.    마. 기타                               돈을 내고 하면 도박이지만 친목도모 및 여가를 활용하는 차원에서 하면 여러 가지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서양의 포카는 우리의 경우에는 도박에 이용되지만 서양에서는 가정에서 가장 쉽게 하는 건전한 놀이도구로 활용되고 있음은 좋은 예이다.      
2365    [고향자랑] -"축구의 고향"-그 축구문화의 향기 만방에 떨쳐라 댓글:  조회:3309  추천:0  2018-07-12
축구문화의 향 짙어간다 2018년 07월 11일 작성자: 해란강축구타운 룡정해란강축구문화타운-축구문화의 향 짙어간다.       여름이 짙어가면서 룡정시 공업집중구에 위치한 룡정해란강축구문화타운도 계절과 더불어 자신의 의미지에 색상을 짙게 그려가고 있다. 지난 6월 29일 올들어 가장 큰 축구행사인 전국고중축구리그 총결승경기를 성공적으로 총화한 뒤를 이어 축구를 담체로 한 각종 경기 축제가 이어가면서 ‘축구의 고향’ 이 땅에 축구문화의 향을 짙게 뿌려주고 있다.      축구의 미래가 기대되는 연변축구협회 청소년 축구 정기훈련 꼬마 축구선수들이 푸른잔디에 동심을 심어가고있다     7월 3일부터 6일까지 제1회 연변 '헤브론'로년축구문화축제가 펼쳐졌다. 연변백운축구팀을 비롯한 3개의 60세이상 로년축구팀과 한국로년축구팀이 해란강축구문화타운에서 승부를 걸었다.  제일 나이많은 선수는 80세도 넘는다. 70세이상 선수도 여러명, 허나 축구장에서 이들은 나이를 잊었고 푸른잔디를 주름잡아 뛰는 모습에서 나이를 판단키 어렵다.        연변 '헤브론'로년축구문화축제와 동시에 조선압록강축구대표단 남녀축구팀이 훈련 및 친선경기일정으로 룡정해란강축구타운에 입주했다. 7월 6일 조선압록강FC축구팀은 역시 룡정에 찾아온 흑룡강FC축구팀과  '캔미컵'국제친선경기를 치렀다.       축구장에서 조선압록강축구대표단을 만나게 된 한국로년축구팀은 조선축구팀측에 선물을 전달하고 잠간이나마 민족의 그리움과 만남의 정을 나누는 소중한 자리를 가졌다.     연변'부덕컵'경기초청으로 각현시 업여축구학교 6개 업여축구팀이 이틀간 해란강축구문화타운에서 뜻깊은 경기를 치렀다. 그외에도 전국 청소년 축구슈퍼리그, 국가축구코치 자격강습을 비롯한 축구관련 강습 경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7월 10일 조선압록강축구대표단의 중조친선경기 원만한 결속 및 승리적 귀국 축제모임이 룡정해란강축구타운에서성황리에 펼쳐졌다. ,, 직업가수와 사업일군의 열창,조선남녀축구팀선수들의 열광적인 동참으로 축제분위기는 고조에 고조를 거듭하는 과정에 아쉬움으로 막을 내렸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남녀로소, 국제국내 만남의 장이고 짙어가는 축구문화의 장이며 산업과 문화의 융합으로 구축되여가는 교류와 화합의 장이다. 룡정시해란강축구문화투자유한회사가 추진하고있는 룡정해란강축구문화타운은 현재 제1기 공사가 곧 마무리되고 오는 8월 8일에 제3기 연변축구축제와 더불어 1기공사 준공식을 갖게된다.   2기공사까지 마무리하면 체육, 건신,관광, 레저,양성시설이 구전하고 체육관련 산업이 흥성하며 뚜렷한 민족특색과 국제영향력을 갖춘 축구문화타운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2364    [얼쑤절쑤] - 춤에는 반드시 스스로의 령혼이 숨배여야... 댓글:  조회:3648  추천:0  2018-07-12
“우리 전통무용…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 (ZOGLO) 2018년7월11일    우리 민족 전통무용은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이다. 무용수들의 현란한 춤사위는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한다. 그런 마력을 지닌 우리 춤으로 무대우에서 빼여나게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대형무극 ‘아리랑꽃’에서 주인공 역할을 거뜬히 소화해내며 우리 겨레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만방에 알린 무용수 방려미(29세)씨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난 6월 27일, 연변가무단을 찾았다.   방려미씨의 공연모습.   2년전, 대형무극 ‘아리랑꽃’이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전국적으로 큰 이슈를 몰고 왔다. 1시간 30분 가량의 창작무극은 많은 이들에게 긴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무용수 방려미씨한테도 ‘아리랑꽃’은 특별했다. 그는 자신의 춤을 두고 타고난 것 보다는 반복된 련습과 노력의 산물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그녀가 일곱살 나던해, 학교 무용반에 뽑히면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 전통춤을 접하게 되였다. 춤을 이토록 좋아하게 된 건 웃학년 언니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본 그 때부터였다. 무용은 누구나 다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란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줄곧 믿어왔다. 열세살 때 훈춘동아무용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용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였다. 4년간 무용기교를 부지런히 다지는 한편 국내외 각종 경연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2007년,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했다. 그녀의 대학시절 경력 역시 화려했다.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개막식 무대에 올라 현란한 춤사위를 한껏 뽐내여 우리 민족 전통춤을 세계인들에게 선보이는 영예를, 2011년에는 CCTV 드라마‘장백산 아래 우리 집’에서 조선족 출연자로 캐스팅되여 안방극장에도 데뷔했다. 이렇듯 재기 넘치는 수준급에 대도시로 진출할 여러번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방려미씨는 “조선족 무용수로서 뿌리인 연변을 떠날 수 없었다”며 여기저기서 온 러브콜을 마다하고 대학교 졸업 후 결연히 연변가무단을 선택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여 그녀는 2012년 제4회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에서 독무 출연 외에도 무용 , , 등 에서 주인공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 금상 수상과 동시에 난생처음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받아안았다. 련습실에서의 방려미씨.   허리부상, 발목부상 등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힘든 나날속에서도 그는 한마디 원망 없이 련습실 바닥을 땀으로 흠뻑 적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진‘주인공 무용수’의 무게를 감내 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춤에 몰입하는 동안에는 잠시 스스로를 내려놓게 돼요, 무릎이 까지고 군데군데 멍들어도 아픈 줄도 모르고 련습에만 매진하게 되더라구요.” 2014년 중국조선족무용대회에서 으로 우수상, 2016년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금상, 2017년 제11회 중국무용 ‘련꽃상’민족민간무용콩클 1등상, 2017년 제3회 동북3성 무용대회에서 독무 로 우수상 등 크고작은 대회에서 묵직한 영예를 받아안으면서 그녀의 끈기는 결국 빛을 발했다. 그녀는“춤을 잘 추려면 춤선도 고와야 하고 기교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춤을 통해 전달하려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무용의 진수가 아닐가 싶어요. 그 도리를 깨우치고 하나하나 난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하죠.”라고 하면서“자신의 삶과 정신을 반영하지 않은 춤은 령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모든 춤에는 반드시 스스로가 있어야 해요.”라고 자신에 일침을 가했다. “언제까지 주인공 역할을 맡을지는 모르죠. 그러나 춤은 계속 이어갈 겁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춤을 추고 싶어요. 앞으로도 수준 높은 공연과 작품을 선보이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 민족 전통무용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에도 힘 다할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녀는 민족 전통무용에 대한 애뜻한 사랑을 솔직히 터놓았다. 우리 민족 전통춤을 출 때마다 가슴이 설레인다는 방려미씨, 그가 오래도록 무대를 빛내야 할 리유다. ///연변일보 글·사진 최미경 기자
2363    [동네방네] - "동굴소년(야생멧돼지)"들..." V "... 댓글:  조회:5074  추천:0  2018-07-12
태국 동굴소년 병실 영상 첫 공개.. 카메라 향해 'V' 2018.07.11. 23:40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하노이=연합뉴스) 민영규 특파원 = 최장 17일간 동굴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태국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1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카메라 향해 'V' 사인 보내는 태국 동굴소년 [브라이트TV 영상캡처] 태국 당국이 격리실 창밖에서 촬영해 공개한 짤막한 영상에는 환자복을 입고 마스크를 낀 소년 7명이 보였다. 링거를 맞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다소 지친 듯해 보였지만, 병원 측이 사전에 설명한 것처럼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병상에 앉은 소년 2명은 촬영 카메라가 보이자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는 태국 전통예절로 인사하더니 곧바로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만들어 흔들어 보였다. 태국 동굴소년 구조후 첫 영상 공개 [브라이트TV 영상 캡처] 다른 소년들도 대부분 카메라를 향해 V 사인을 보내는 등 깜깜한 동굴에 오랜 기간 갇혔다가 가까스로 구조됐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심리적 안정을 찾은 듯했다.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와 고글, 장갑을 착용하고 머리에 비닐 캡까지 쓴 의료진 2명이 소년들과 뭔가 얘기하는 모습도 영상에 잡혔다. ===================== 태국 달려온 전세계 구조 영웅들, 암흑의 동굴서 기적 밝혔다 (ZOGLO) 2018년7월11일  호주 의사 다이버, 영국 IT기술자, 태국 네이비실… 코치·소년 13명 전원 구조   영국 IT 기술자 존 볼런튼은 노트북 대신 잠수 장비를 챙겨 9000㎞를 날아왔다. 호주 마취과 전문의 리처드 해리스(53)도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일본·스웨덴의 동굴 전문가도 태국 북부 미얀마와의 접경 산골로 급히 달려왔다. 오래전 군을 떠났던 태국 예비역 특전사 대원 사만 구난(37)은 10여 년 만에 잠수복을 꺼내 들었다. 세계 각국에서 동굴 탐사 전문가이거나 수중 잠수 전문가로 자처한 사람들이 13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천㎞를 달려왔다. 이들 다국적 구조팀은 지난 8일부터 사흘간 구조 작업 끝에 동굴 속 암흑에서 16~18일간 고립돼 있던 소년과 코치 13명을 모두 동굴 밖 빛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미지 크게보기병원 가는 '기적의 소년들' - 10일(현지 시각) 태국 북부 치앙라이주(州) 탐루앙 동굴에 고립됐다가 18일 만에 구조된 소년이 인근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지난달 23일 폭우로 불어난 물에 고립된 태국 유소년 축구팀 13명은 이날 전원 구조됐다. /데일리메일 '야생 멧돼지 12명과 코치가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모두 안전합니다.' 다 살아 돌아왔다. 10일 오후 6시 48분(현지 시각) 태국 네이비실 페이스북에 전원 구조 첫 소식이 떴다. 지난달 23일 동굴을 탐험하기 위해 들어갔다 폭우로 고립됐던 태국 치앙라이주(州) 유소년 축구팀 '무 빠'(야생 멧돼지) 단원 13명이 전원 구조됐다. 고립된 지 18일, 생사가 확인된 지 8일 만이다. 작전 첫날 4명, 둘째 날 4명이 구조된 데 이어 사흘째인 10일 나머지를 모두 구조한 것이다. 구조 작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소년들은 동굴 입구에서 4.5㎞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었다. 깜깜한 동굴 속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소년들이 견디는 동안 동굴 밖에선 전 세계에서 달려온 탐험·잠수·구조 전문가들이 힘을 합쳤다. 모든 사람이 기적을 이뤄냈다.   이미지 크게보기태국 동굴소년들 전원 생환… 그들을 구한 영웅들 - 전 세계인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지난 달 23일 태국 북부 치앙라이주(州)의 탐루앙 동굴에 탐험하러 들어갔다 폭우로 고립됐던 유소년 축구팀‘무 빠’(야생 멧돼지) 단원 13명이 10일 전원 구조돼 돌아왔다. 동굴 입구에서 4.5㎞ 떨어진 곳에 고립된 지 18일, 생사가 확인된 지 8일 만이다. 태국 네이비실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소년들을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 지난 8일부터 사흘간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 사진은 이날 구조작전에 참여한 태국 네이비실 대원들이 동굴을 빠져나온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 든 모습. /태국 네이비실 소년들의 구조 작업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린 사람은 호주의 마취과 의사 겸 잠수 전문가인 리처드 해리스다. 해리스는 동굴 잠수 경력 30년의 베테랑으로 소년들의 생존이 확인된 직후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구조 순서를 정했다. 그는 소년들과 코치 등 13명이 동굴을 안전하게 빠져나간 뒤 맨 끝에서 이들을 따랐다. 지난 2일 아이들의 생존 사실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영국의 잠수 전문가인 전직 소방관 리처드 스탠턴과 IT 기술자인 존 볼런튼이다. 전 세계 동굴 조난 사고 때마다 출동 요청을 받았던 이들은 이번에도 직접 입수해 수㎞의 동굴 바닥을 기어들어가 소년들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 다국적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구조 작전을 실행한 주역은 태국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이다. 희생도 있었다. 구조팀 일원인 사만 구난 예비역 원사가 지난 6일 산소탱크 동굴 내부 주입 작업 중 산소 부족으로 의식 불명에 빠져 끝내 숨졌다. 네이비실 전역 뒤 2006년부터 방콕 수완나폼공항 경비대에서 근무해온 그는 구조팀에 자원했다. 치앙라이로 떠나기 전 직접 동영상을 찍고 "아이들을 모두 구해오겠다"고 다짐했다. 아르파꼰 유꽁테 태국 네이비실 사령관은 "귀중한 동료를 잃었지만 언제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멧돼지는 축구 단원, 개구리는 잠수 전문가, 아이언맨은 머스크 - 13마리의 멧돼지가 동굴 속을 헤엄치고 있다. 동굴에 고립됐다 18일 만에 구조된 태국 유소년 축구팀‘무 빠(야생 멧돼지)’팀원 13명을 상징한다. 아이들을 둘러싼 물범은 태국 네이비실을, 개구리는 전 세계 잠수 전문가들이다. 동굴 곳곳엔 각국 구조대를 상징하는 사자(영국), 캥거루(호주), 판다(중국), 두루미(일본)가 멧돼지들을 지켜보고 있다. 동굴 오른쪽 위 편에는 기술자를 보내 도움을 준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를 상징하는‘아이언맨’도 있다. 태국 한 만화가가 이번 사건을 인류애를 구현한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로 표현한 걸 10일 태국 네이비실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태국 네이비실 페이스북 소년들 곁에는 축구팀 인솔 코치 에카폴 찬타웡(25)이 있었다. 그는 13명 중 유독 건강 상태가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기 몫의 음식까지 소년들에게 먹였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다독이고 될 수 있으면 몸을 덜 움직이도록 했다. 바닥에 흐르는 흙탕물은 절대 못 마시게 했다. 실종 초기 축구팀을 인솔해 동굴 탐험을 떠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지만 결국 아이들을 지킨 것은 그였다. 찬타웡은 열 살에 부모를 잃고 한때 스님 생활을 했다가 환속 후 축구팀 보조코치로 일해왔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태국 네이비실은 이틀째 구조 작업이 끝난 뒤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에 동화 같은 카툰 한 컷을 올렸다. 새끼 멧돼지(소년들)와 형 멧돼지(코치)가 개구리(전 세계에서 온 잠수 전문가)와 물범(네이비실)의 호위를 받으며 구불구불한 동굴을 헤쳐나가는 그림이다. 영화 캐릭터 아이언맨의 얼굴도 보인다. 사고 초기부터 에어 튜브와 소형 잠수정 등 최첨단 장비로 구조 제안을 했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터널 굴착 업체 보어링 컴퍼니 소속 기술자 9명과 장비를 파견해 배수 작업 등을 도왔고 자신도 직접 현장을 찾았다. ///조선일보 ==================== 영어 통역 소년도, 코치도 '난민'.. 태국 국적 받는다 이지은 2018.07.12. 21:39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앵커] 동굴에 갇혀있던 소년들 중 1명은 그들을 처음 발견한 영국 잠수사에게 영어로 '감사하다', '우리는 모두 13명이다' 이렇게 또박또박 말을 했습니다. 이 소년은 태국 국적이 없는 난민이었습니다. 끝까지 소년들을 지킨 코치도 국적이 없었습니다. 이지은 기자입니다. [기자] 구조팀이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 울먹이는 영어 한 마디가 들립니다. [태국 소년 : 고맙습니다!] 영국 대원이 동굴 안에 몇 명이 있냐고 묻자, 소년은 영어로 곧잘 대답합니다. [태국 소년 : 13명이요! 우리를 구하러 왔대.] 영어를 잘 모르는 친구에게 태국 말로 옮겨주던 14살 아둔 삼온은 국적이 없습니다. 아둔은 미얀마 북동부에서 태어났지만, 분쟁 지역에서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부모를 따라 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마크와 티로 불리는 다른 10대 2명도 난민입니다. 코치 엑까뽄 찬따웡도 같은 처지입니다. 미얀마에서 감염병으로 가족을 잃은 뒤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를 돌보려고 태국에 와 코치가 됐습니다. 축구팀에서 함께 꿈을 키웠지만 난민이라 기회랄 게 없었습니다. 소속 축구팀은 이 4명에게 태국 국적을 주려는 절차가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태국에는 미얀마와 캄보디아와 맞닿은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난민 48만 명이 국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상디자인 : 강아람) (화면제공 : 태국 네이비실)        
2362    문학과 작가들과 문학애호가들과의 뉴대는 계속 되여야... 댓글:  조회:3265  추천:0  2018-07-10
[연변] 청소년 ‘문학과 글짓기 캠프’ 열려 (ZOGLO) 2018년7월10일  주당위 선전부에서 주최하고 연변작가협회와 주교육국에서 주관한 ‘문학과 글짓기 캠프’가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간 주내에서 진행됐다.   ‘문학과 글짓기 캠프’는 전 주 민족문화사업회의 정신을 전면적으로 관철하고 중국조선족문학 후비력량의 단층문제를 해결하며 중국조선족문학발전인재양성 ‘신인프로젝트’ 및 ‘묘목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직됐다. 조선족문단의 저명한 작가들이 청소년문학애호자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훈춘시 제1실험소학교와 제4소학교, 연변1중, 연변대학 사범분원 등 주내 여러 학교의 학생 40여명과 작가, 문학보도원 56명이 캠프에 참여한 가운데 룡정곰락원, 한락연전시관, 일본간도 총령사관 옛터, 윤동주생가, 대성중학교 옛터,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안도현 이도백하진 소나무조각공원, 영경향 동청촌 대관동문화원, 만보진 홍기촌 조선족민속촌 등 곳을 탐방했다.   학생들은 허련순, 김혁 등 저명 작가의 문학강좌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문학 창작 기교를 터득하였으며 교육 일선에서 사업하는 우수한 청년교원, 여러 문화매체 사업일군들과 교류하는 가운데서 문학에 대해 새롭게 인식했다.캠프에 이어 8월까지 ‘중소학생 문학캠프’ 글짓기 공모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우수한 작품들은 《중국조선족소년보》와 《중국조선족중학생보》에 발표된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2361    [특별기고] - "조선족은 우리의 미래일수 있다"... 댓글:  조회:3208  추천:0  2018-07-10
한국 교수 파격 발언... "조선족은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ZOGLO) 2018년7월10일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의 저자 신혜란교수 인터뷰       ▲사진= 한국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신혜란 교수.      “조선족은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조선족 관련 연구를 발표하고 나서 이런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는 서울대 신혜란교수가 쓴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동안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은 폭력, 인신매매, 장기적출 등 비뚤어진 시각 뿐이었고 조선족의 집단 이주에 대한 언론들의 초점도 불법 이주나 가족 해체, 3D업종 종사 등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해는 거의 백지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혜란교수는 세계화, 변화하는 중국에서 조선족이 살아가려는 전략과 그 변화의 진화 과정에 눈길을 돌렸다고 했다. 조선족에 대한 입체적, 역사적, 다각적인 각도의 조명이 필요한 시기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혜란교수에게 조선족이란?   지난 6월 25일 오후 필자는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신혜란교수의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이주자 연구와 도시 정치를 연구하는 신교수가 조선족에게 관심의 눈길을 돌리게 된 계기는 런던에서 아들을 낳고 나서 아들을 돌봐줄 도우미가 필요했는데 주위사람들의 소개로 조선족 도우미를 찾게 되면서부터다. 그때 처음으로 조선족을 접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몇 년간 가사도우미를 했던 경험이 있는 그 조선족아주머니는 애를 돌보는 일과 가사일도 맘에 들게 척척 잘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화끈하여 조선족들의 이야기도 틈만 나면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족에 눈을 뜨고 나서 2012년에 지인의 요청으로 “객지에 사는 사람들이 공감할 글”을 쓰기로 하면서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쓰기까지 신혜란교수는 런던에서 3년, 한국에서 3년, 중국 청도에서 1년 동안 수많은 조선족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사실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인터뷰할 때 너무 힘들어서 6번을 하고 몇 달을 쉬었어요.”         ▲사진= 한국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신혜란 교수.       연구자의 입장에서 가능한 담담한 태도로 들었지만 자신이 전혀 모르는 브로커를 통한 입국이며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이주의 삶 이야기가 신교수에겐 너무나 생소하고 가슴 아프고 힘들게 다가왔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조선족의 이야기가 그녀 안에 가득 쌓이고 있었다.   런던의 뉴몰든, 중국의 청도, 한국의 대림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모두 달랐다. “청도의 조선족들은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줬지만 한국이나 뉴몰든의 조선족들은 달랐어요. 쿨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개를 받아도 딱 잘라서 거절을 하더라고요. 특히 한국에 나온 조선족들은 아마도 한국인들에게 당한 서러움이 많아서 그런지 제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요.”   이렇게 인터뷰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한동안 그녀는 조선족이 많이 가는 사우나에 일부러 자주 다녔다. 가서 무작정 조선족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했으나 조선족들은 단마디로 응대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무시로 다가가고 여러 번 거절당하고 사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조선족을 “괴롭혔다”. 이 책은 이렇게 만나고 들은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떠남’을 선택한 사람들   조선족의 ‘떠남’에 대해 신혜란교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족은 20세기 초에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소수 민족으로 살았다. 조상에게서 떠나온 이들의 삶을 배운 후손들은 세계화, 중국의 성장, 한-중 관계 개선 속에서 떠나는 삶의 진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중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던 조선족들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 곳곳에 진출했다. 조선족의 이주는 빠르고 넓다. 1992년 전에는 190만 명 정도이던 조선족 중 60만여 명이 90개국 넘는 나라로 이주했다.               이동성, 떠나기, 셀 수 없이 많은 ‘아마도’라는 미래 계획 등으로 흔들리는 개인의 삶은 세계화의 완성이다. 이런 이동에는 이민을 뜻하는 장거리의 영속적 이주뿐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동, 출장, 짧은 휴가 여행, 이사, 답사, 어학연수, 인턴십 프로그램 대비 단기 이주도 들어간다. 조선족은 그런 이동을 조금 일찍 시작했다. 사람들의 존재가 점점 더 불안해지는 경향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면, 조선족은 일찌감치 불안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혹시 우리는 모두 조선족일까? 아직 아니어도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걸까?   조선족들은 이런 새로운 떠남에 적응해 살고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경험을 하는 셈이니 훗날 혁신의 선두 주자로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조선족은 외국으로 갈 뿐 아니라 중국 안에서도 멀리 뿔뿔이 흩어져 산다. (중략) 그 결정의 토대가 ‘지정학적 눈치’다. 지정학적 지식을 깔고 전문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선족들 사이에는 ‘어디는 요즘 어떻다’고 하는 전세계적 ‘카더라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일단 이민자들은 내가 결행한 떠나기가 맞는 판단인지 불안하기 때문에 두 나라의 형편을 늘 비교하게 된다. 조선족은 두 나라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능성을 열어두는 만큼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거기에서 도는 얘기는 다름 아니라 조선족이 가서 할만한 일들이 지닌 전망이다. 국가별 발전 현황과 전망에 기대어 가늠한다.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   신혜란교수는 몇 년에 걸쳐 조선족이야기를 쓰면서 내내 이주자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녀는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왔고 그 후 로스앤젤레스, 런던을 거쳐 서울로 왔다. 서울에 와 학부, 석사, 박사, 교수 단계마다 학교가 계속 바뀌고, 전공이 바뀌고, 결혼을 한 일도 연거푸 새로운 환경에 놓인 이주자가 되는 과정이었다.   제목을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라고 정한 것도 요즘은 이주자의 마인드로 살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든 다른 사회든 예전에 비해 지금 다니는 직장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늘 구인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늘어난 현실은 조선족들에게 일어난 변화랑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신혜란교수는 또 요즘 인터뷰를 통해 만난 조선족들의 소개로 대림 PC 방을 전전하는 조선족 4세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싶다는 생각을 비쳤다.     다문화시대에 조선족을 잘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신혜란교수가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족”,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몸부림을 이해하면 자기와 타인의 모습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주의 역사 속에 내가, 조선족이,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자본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듯이 내 삶도 지리적 이동을 한다. 궁극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다.   “이주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주자는 좀 더 낳은 삶을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신혜란교수는 말했다. 요즘은 이주자의 양상도 다양해졌다. 전에는 잘 사는 나라로 이주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나라로 이주한다. 이주했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가거나 두 나라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 이주하는 것처럼 다양해졌다. 전에는 잘 사는 나라로 대거 이주해서 그 나라에 뿌리박고 살려고 했다면 지금은 소규모 이동이 다양해졌다. 또한 난민과 이주자 구별도 잘 되지 않고 결혼이주-노동이주 구별도 힘들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영화 '차이나 블루'와 '황해'를 보는 시선   신혜란교수는 이 두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면은 조선족의 진화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중국의 농촌에서 지내다가 자본주의 한국의 도시에 와 고생도 많이 하고 더 큰 불평등에 빠지기도 했지만 학습 효과는 컸고 성공한 조선족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의 유목민적 특징은 21세기에 큰 장점일 수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한국과 조선이 통일된 후에 조선족이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다. 서울 가리봉과 구로 지역은 어떻게 변할지, 2020년이나 2030년쯤에 이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무엇을 볼 수 있을지 기대된다”고 했다.        ▲사진= 가리봉동. /자료사진      “조선족은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조선족 관련 연구를 발표한 뒤 토론에서 신혜란교수가 이 말을 하자 대부분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내비쳤다고 한다. 그것은 미래라는 말은 보통 더 발전한 사회를 뜻하고, 앞서간 사회가 지니는 장점과 단점을 어떻게 취하고 버릴 지를 말할 때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족이 미래라니 과연 무슨 의미인가?   자본이 국경을 더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 변화가 기본적 세계화라면 사람의 이동, 생각의 이동, 정책의 이동은 본격적 세계화다. 요즘처럼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때, 자기 나라나 도시에서만 직업을 찾지 않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활동 무대가 넓어진데다 노동시장도 유연해졌기 때문이다.   또 단일민족의 신화 속에서 다른 인종에게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한국사회에 이주자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 사회도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변화에 적응할 수 밖에 없다. 2015년 신혜란교수가 맡은 한 대학원 세미나 수업은 6개국 출신의 학생들이 들어올 만큼 다국적으로 변했다. 그런 변화가 개인의 삶에도 들어온다.   경쟁에 내몰린 개인들의 삶은 늘 불안하다. 불안해서 살기가 힘들고 비정규직이 싫다고 하지만 정규직 일자리에 들어가서도 좀더 나은 조건을 찾아 늘 기웃거린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찾아서, 정말 더 좋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그 미래를 좇아 가족을 두고 떠난다. 궁극적으로 세계는 지금 이주의 시대다.   부유하는 사람들이 어디든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는 듯하지만, 그 갈망만큼이나 떠도는 삶에 익숙해져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필연적으로’ 떠나게 된다고나 할까.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족은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는것이다.   ///흑룡강신문/특별기고 곽미란
2360    [쉼터] - 련못가에 인련꽃 피다... 댓글:  조회:3155  추천:0  2018-07-10
복건에서 펼쳐진 련못가의 요가 쇼 [ 2018년 07월 10일 ]     7월 8일, 요가 애호가들이 련꽃이 핀 푸졘(福建 복건)성 싼밍(三明)시 졘닝(建寧)현 쥔커우(均口)진 슈주(修竹)촌의 천묘에 달하는 련못가에서 요가 실연을 하고 있다. 당일, 제3회 중국 졘롄(建蓮)문화관광축제 및 세계요가대회가 푸졘성 싼밍시 졘닝현에서 거행되었다. 근 1,000명에 달하는 요가 애호가들이 련꽃이 활짝핀 련못가에서 아릿다운 자태를 뽐냈다. ///신화망         
2359    [이런저런] - 갈매기들도 "술주정뱅이" 댓글:  조회:4979  추천:0  2018-07-10
[영상pick] '휘청휘청'.. 관광객이 해변에 버린 술 먹고 취한 갈매기 조도혜 작가, 김도균 기자 2018.07.09.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갈매기 영상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6일, 영국 가디언 등 외신들은 영국 동물보호협회(RSPCA)가 공개한 영상을 소개했습니다. 영상 속 초점을 잃고 흐리멍덩하게 눈을 뜬 갈매기 한 마리가 있습니다. 갈매기는 비틀거리며 걷고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립니다.  어지러운지 고개를 흔드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RSPCA 관계자는 "최근 몇 주간 해변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갈매기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며 "처음에는 식중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술에 취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갈매기들은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의식을 잃기도 했지만, 다행히 토하고 나면 상태가 회복되었다"며 "구조된 갈매기들이 하나같이 술 냄새를 풍겨서 구조 차 안이 마치 선술집이 된 것 같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RSPCA는 그 중 한 마리의 영상을 공개하며 당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협회는 "해변을 찾는 관광객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맥주나 다른 술들을 남기고 가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지적하며 "먹이를 찾는 야생 동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술을 그대로 버리고 말아 달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상 픽' 입니다.  /유튜브 Guardian News  /조도혜 작가, 김도균 기자 ===================
2358    [기적신화] - "야생 멧돼지"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댓글:  조회:4332  추천:0  2018-07-10
마지막 생환자는 '코치'.. "끝까지 아이들 지켜냈다" 이진연  2018.07.10.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동굴 탐험에 나섰다가 실종되면서 비관적 전망까지 나돌았던 태국 소년 12명과 코치 모두 구조됐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실종자 전원이 극적으로 구조되면서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해요.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다고 약속해요" 코치 편지 구조대가 마지막으로 동굴에서 구출한 사람은 축구단 코치 25살 '에까뽄 찬따웡세'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간 죄책감 때문에 내내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에까뽄 코치는 아이들의 작은 메모지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부모들에게 이 같은 편지를 전달했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해요. 제가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다고 약속해요." 앞서 일부 현지 매체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양보한 코치가 건강이 악화돼 지난 8일 구조됐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였다. 그는 동굴에서 끝까지 아이들을 돌봤다. 결국, 에까뽄 코치는 부모들과 약속을 지키고 마지막 생환자로 돌아왔다. 실종자 전원 구조...."코치의 리더십과 지혜 빛나" 동굴 속 코치 태국 치앙라이의 '무 빠'(야생 멧돼지) 축구 클럽에 소속된 소년들과 코치가 동굴에 갇힌 건 17일 전이다. 이들은 지난달 23일 오후 훈련을 마치고 관광 목적으로 이 동굴에 들어갔다가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동굴 내 수로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고립됐다. 이후 9일간 지속한 수색 끝에 영국 동굴탐사 전문가 2명에 의해 동굴 입구에서부터 3.2㎞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지난 2일 밤 발견됐다. 구조대원이 처음 발견했을 때 소년들은 유니폼을 입고 맨발인 상태로 캄캄한 동굴 속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해 다소 여윈 모습이었다. 이들의 발밑에선 뿌연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굶주려 건강이 악화했을 것이라는 애초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 소년들은 동굴에 갇혀 있는 동안 과연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함께 있었던 축구단 코치 에까뽄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많다. 우선 에까뽄 코치는 소년들의 체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소리를 지르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소년들이 집에서 가져온 과자를 조그맣게 나눠서 먹게 했다. 흙탕물은 복통을 일으킬 수 있어 천장의 종유석이나 천장에 맺힌 물을 마시게 했다. 덕분에 소년들은 구조대에 의해 발견될 당시 다소 야위었으나 건강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코치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고, 자신의 거의 공복 상태로 버틴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그는 동굴에 갇힌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극한의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도록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우리는 한 팀'이라는 의식을 계속 심어 주며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이끌었다. 아이들은 축구 게임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가 되어 코치가 시키는 대로 동작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뛰는 시늉도 했다. 코치는 때로는 명상을 하면서 침착하게 시간을 보내게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줬다. 특히 아이들에게 살아나 갈 것이라는 확신과 의지를 심어줬다. 발견 당시 구조대원들은 "아이들은 음식 없이 지내 다소 지쳐 보였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강인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매우 사랑하고, 아이들도 그를 잘 따른다" 소년들의 부모는 원망보다는 동굴 안에서 아이들을 잘 보살펴준 코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한 소년의 어머니는 "코치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애초 우기가 시작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간 것에 비난 여론도 많았으나 그의 헌신적인 활약상이 알려지면서 비난은 잦아들었다. 또 엑까뽄 코치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랐고, 12살부터 사찰에 들어가 10년간 수도승 생활을 했다는 사연도 전해졌다. 그는 3년 전 병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수도승 생활을 접고 무빠 축구팀 보조 코치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인들을 뭉클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평상시에도 소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코치의 이모는 CNN방송에 "엑까뽄은 아이들을 매우 사랑하고, 아이들도 그를 잘 따른다"고 말했다. 태국 동굴 소년들의 구조 소식은 전 세계인들이 숨을 죽이며 실시간 지켜봤다. 전원 구조라는 기적 같은 일에 모두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보살핀 '에까뽄 찬따웡세' 코치의 리더십과 활약상은 앞으로도 태국인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진연기자  =============== "12일 밤낮을 뜬눈으로 물 퍼냈다" 태국 동굴 기적의 숨은 영웅  2018.07.11. 19:5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논밭에 물대는 사업용 펌프로 혼신의 배수 자원봉사자.."아이들 도와 그저 기쁠 뿐" 태국 동굴기적의 숨은 영웅 타왓차이씨[카오솟 홈페이지 캡처=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아이들을 도울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요. 잠을 못자서 집에 가서 푹 자야겠어요" 치앙라이 매사이 탐루엉 동굴에 갇혔던 13명의 유소년축구팀 선수와 코치의 구조 소식으로 태국 전역이 흥분과 환호에 차 있던 11일(이하 현지시각) 오전. 주황색 우비를 입고 트럭에 배수용 펌프와 18m 길이의 파이프를 실어 구조현장을 조용히 빠져나간 사람이 있다. 소년들이 갇혀있던 탐루엉 동굴에 파이프를 연결하고 물을 퍼내온 자원봉사자 타왓차이 추엉까촌(42)씨다. 방콕 인근 나콘빠톰 주(州)에서 펌프로 농장 등에 물을 대주는 사업을 하는 그는 소년들이 동굴에 갇혀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접은 채 이번 구조작업에서 '그레이트 나가 워터 펌프 팀'으로 불린 20명의 직원을 이끌고 치앙라이 동굴로 달려왔다. 차로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펌프와 파이프로 지난 12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굴안에 가득 찬 물을 퍼냈다. 덕분에 구조대의 활동이 훨씬 자유로워졌고 13명의 소년과 코치를 구하는 일도 수월해졌다. 배수용 파이프를 트럭에 싣고 구조현장을 빠져나가는 타왓차이씨의 트럭 그는 논과 밭에 물을 대주고 시간당 1천바트(약 3만4천원)를 받는다. 자원봉사에 나선 지난 12일간 벌 수 있었던 돈이 적지 않지만, 그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물을 빼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처럼 동굴소년 구조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그에게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비추지 않았고 '영웅 칭호'를 붙여주는 이도 없었다. 타왓차이씨는 현지 인터넷매체 카오솟 기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이곳에 왔고, 아이들을 도와서 기쁠 뿐"이라며 "그동안 제대로 잠을 못자 졸리다. 집에 가서 푹 자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구조작업에서 얻은 교훈을 묻자 "모두가 저마다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얻은 교훈은 우정"이라며 웃었다. 18m길이의 육중한 배수 파이프를 실은 타왓차이씨의 트럭 4대가 한꺼번에 혼잡한 구조 현장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를 알아본 경찰이 구조현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트럭을 배웅했다. '13명 전원생존'이라는 동굴의 기적을 만든 숨은 영웅 타왓차이씨의 임무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잠수하는 의사·끝까지 버틴 코치.. 태국 '동굴기적' 만든 영웅들 입력 2018.07.10.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영국인 잠수사, 생존자 발견·구조계획 토대 세워 태국 전 네이비실 대원 사만의 희생에 안타까움 더해 (하노이=연합뉴스) 민영규 특파원 = 태국 동굴에 최장 17일간 갇혔던 유소년 축구팀 선수와 코치 등 13명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는 기적 뒤에는 눈부신 활약을 펼친 영웅들이 있었다. 우선 실종 열흘 만인 지난 2일 동굴 입구로부터 무려 5㎞가량 떨어진 경사지에서 소년들과 코치가 모두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 영국인 전문 잠수사들이 있었다. 태국 동굴 소년들 찾아낸 영국 잠수사들 [AP=연합뉴스 자료 사진] 소방관 출신인 리처드 스탠턴과 영국 브리스틀에서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는 존 볼랜던이었다. 전문가 자격으로 현장에 급파된 이들은 동굴 속 바닥을 기고 급류 속을 헤엄쳐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향후 구조계획의 토대를 세웠다. 특히 2004년 멕시코에서 홍수로 지하에 9일간 갇힌 영국 병사 6명에게 잠수를 가르쳐 9시간 만에 모두 탈출시킨 스탠턴의 경험은 이번 구조에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과 함께 깜깜한 동굴 안에서 거센 물살을 헤치며 구조활동에 동참한 미군 인도태평양사령부 소속 구조대원과 태국 해군 네이비실 대원 등 다이버 90여 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사만 푸난(37) 전 태국 네이비실 대원은 지난 6일 동굴 내부 작업을 하다 산소 부족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병원으로 이송된 뒤 숨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해군에서 전역한 뒤 태국공항공사(AOT) 보안직원으로 근무하던 사만은 소년들이 동굴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구조작업에 참여했다가 변을 당했다. 이번 구조작업 과정에서 나온 유일한 희생자다. 지난 2일 소년들이 발견된 직후부터 10일 모두 구조될 때까지 곁을 지키며 건강을 돌본 호주인 의사 리처드 해리스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잠수하는 의사 리처드 해리스 [호주 오즈텍 홈페이지 캡처=연합뉴스]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는 그는 동굴 잠수 분야에서 30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다. 덕분에 소년들이 있는 곳까지 큰 어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는 생존자 13명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구조 순위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조 당국은 해리스의 조언을 토대로 본격 구조 첫날인 8일과 9일에 각각 4명씩 우선 구조했고 10일에는 나머지 5명을 한꺼번에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소년들과 함께 동굴에 들어갔다가 고립됐던 코치 엑까뽄 찬따윙(25)도 숨은 영웅으로 꼽힌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동굴 안 수위가 급상승하자 소년들을 경사지 위로 올라가게 해 생존 공간을 확보한 뒤 천장과 종유석에 맺힌 물방울을 마시게 하는 등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칠흑같이 캄캄한 동굴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소년들을 추스르며 소년들을 모두 내보낸 뒤 마지막으로 동굴을 빠져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엑까뽄 코치는 동굴에 갇혀 있는 도중 소년들의 부모님께 보낸 손편지에서 사죄의 뜻을 밝히고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   '13명 전원 구조' 신화 쓴 '나롱싹' 전 주지사.. 돋보이는 리더십 최성원  2018.07.11. 00:17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위기는 기회이다!' 살다 보면 누군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17일간의 드라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태국에서 벌어진 '동굴 소년' 기적의 생환 스토리이다. 우리 시간으로 10일 저녁 8시 48분, 마지막으로 동굴 안에 남아 있던 12번째 소년이 구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3분 후인 8시 51분 드디어 축구단 코치 25살 '에까뽄 찬따웡세'씨가 구조대의 도움으로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태국 네이비실은 같은 시각 페이스북에 "12명의 소년과 코치가 모두 안전하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는 임무 완료 메시지를 남겼다. 이들의 구조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태국 국민들은 그야말로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전원구조라는 기적을 이룬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 그 자체였다. 치앙라이의 '무 빠(야생 멧돼지)' 축구 아카데미 소속 선수 12명과 코치 1명 등 13명은 6월 23일 오후 훈련을 마치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내린 비로 동굴 내 수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고립됐다. 이후 이들의 실종 소식이 접수됐고, 영국 동굴탐사 전문가 2명에 의해 실종 열흘째인 지난 2일 밤 동굴 입구로부터 5k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극적으로 발견됐다. 나롱싹 오솟따나꼰 전 치앙라이 주지사 이후 구조작업이 시작됐고, 기적의 생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구조를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는 한 사람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차분하고 정직한 현장 상황설명,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백 명의 취재진과 구조대, 고립자 가족 등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혼잡한 사고 현장에서 묵묵하게 구조 현장을 지휘한 사람이 있다. 나롱싹 오솟타나꼰 前 치앙라이 주지사다. 사실, 소년과 코치 등 13명이 처음 동굴에 갇혔다는 소식은 나롱싹 주지사에게는 임기 말에 떨어진 날벼락과 같았다. 나롱싹 전 주지사는 이미 지난 4월에, 7월 초 파야오 지방의 주지사로 전보 발령이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책에 前 주지사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 것이다. 나롱싹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그는 지질학과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말 그대로 '전문가'다. 깊은 동굴 안에서 벌어진 고립 사고, 동굴 내부 수로의 거센 물살과 폭우 등으로 동굴 내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위험한 상황에서 13명의 고립자들이 생존했는지 여부 자체가 너무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 미군 인도태평양사령부 소속 구조대원과 영국 동굴탐사 전문가 등 다국적 구조팀이 꾸려진 상황, 누군가는 확실한 지휘를 해야 했고, 모두가 바라고 있었다. 그동안 내린 폭우로 아이들이 있는 공간 주변을 막고 있는 동굴 안 물웅덩이의 수위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다국적 구조팀은 우선적으로 가용한 모든 장비를 동원해 배수 작업을 진행했다. 태국 동굴 고립 사고 구조 현장 이 과정에서 현장 지휘를 책임진 나롱싹의 결정은 신중하고 정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의 능력이 돋보인 것은 미디어와의 기자 회견장이었다. 태국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에 현장 상황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한 건 물론, 구조 작업과 구조 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와 오보를 막는 데 주력했다. 현지 언론은 나롱싹 전 주지사가 6월 29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파야오 주의 주지사로 발령받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태국 정부는 나롱싹을 애초 다른 주의 주지사로 발령낸 뒤에도 사고 현장에 대한 구조 지휘권을 계속 부여했다. 태국 내무부 장관인 아누퐁 파오찐다는 탐루앙 동굴에 있는 아이들이 전원 구조될 때까지 나롱싹 전 치앙라이 주지사가 계속 현장을 지휘할 것을 명했다. 현지언론들은, 이것이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탐루엉 동굴 구조 작업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나롱싹 전 주지사를 차기 총리로 추대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총리 여부를 떠나 17일 만에 13명 전원 구조라는 신화를 쓴 나롱싹의 탁월한 리더십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성원기자 =======================       동굴에 갇힌 지 17일.. 소년들을 살린 건 '희망'이었다 최민지 기자 2018.07.10. 21:59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경향신문] ㆍ구조 사흘 만에 전원 생환 ㆍ날씨·산소부족 등 고비에도 태국 당국 과감·신중한 작전…소년들 수영 등 빠르게 적응 ㆍ생환자들 동굴병 우려 격리…유리창 밖 가족과 만나기도 다급한 이송 현장 태국 치앙라이주 탐 루앙 동굴 부근에서 10일 헬리콥터 한 대가 동굴에서 구조된 유소년 축구팀원을 태우고 80㎞가량 떨어져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매사이 | AP연합뉴스 “12 야생 멧돼지와 코치가 동굴에서 나왔다. 모두 안전하다.” 태국 네이비실이 10일 오후 6시48분(현지시간)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북부 치앙라이주 탐 루앙 동굴에 갇힌 유소년 축구팀 13명 전원의 생환을 알렸다. ‘야생 멧돼지’는 축구팀 명칭이다. 구조작업 사흘째인 이날 선수 4명과 코치 1명 등 5명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지난달 23일 동굴에 고립된 축구팀 13명이 17일 만에 전원 구조된 것이다. 태국 네이비실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날 첫 구조자이자 9번째 생환자는 오후 4시6분에 나왔다. 오전 10시8분 구조작업이 개시된 지 5시간58분 만이다. 코치 에카폰 찬타웡(25)은 마지막으로 구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구조된 5명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네이비실이 ‘개구리’라고 부른 의사와 태국 해군 잠수사 3명 등 4명도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동굴 안에서 선수들과 코치 곁을 지켜왔다. 구조작업을 지휘하는 나롱삭 오솟타나콘 전 치앙라이 주지사는 이날 낮 12시쯤 기자회견에서 “오늘 남은 5명 모두를 구하겠다”고 밝혔다. 구조 사흘째인 이날에는 구조대원 19명이 투입됐다. 지난 8~9일 이틀간 진행된 구조작업에서 4명씩 모두 8명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생환자 8명은 현재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젯사다 촉담렁쑥 공중보건부 사무차관은 “8명 모두 건강하다. 정신적으로도 안정돼 있다”고 밝혔다. 폐질환 등 감염 우려로 격리돼 왔던 이들 4명은 생환 이틀째인 9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가족을 만났다. 2주 넘게 암흑 속에 있었던 아이들은 시력 보호를 위해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며, 정신 건강을 위해 TV 시청은 금지된 상태라고 당국은 밝혔다. 당국은 이들이 동굴병 등에 감염됐을 우려가 있어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병원에 격리할 계획이다. 아이들의 생환까지 구조당국은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날씨, 동굴 내 수위, 부족한 산소 등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6월 말 시작된 폭우는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구조당국의 마음을 애태웠다. 동굴 안에 물이 차오르는 만큼 산소는 희박해져갔다. 실제 지난 6일 전직 해군 출신 잠수사 사만 쿠난(38)이 동굴 내 산소 탱크 설치 작업을 마치고 귀환하다 산소 부족으로 사망했다. 구조당국은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작전을 폈다. 아이들의 생존이 확인된 지난 2일부터 의료진을 보내 이들의 상태를 살피고 영양을 보충해 체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잠수를 가르쳤다. 당국은 이후 구조대원이 아이를 인도해 잠수 및 도보로 동굴을 나오는 구조 방식을 택했다. ‘가장 빠르지만 가장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작전이었다. 특히 10~11일 큰비가 예고되면서 작업 연기에 대한 우려도 나왔지만 당국이 쉬지 않고 물을 빼고 산소를 공급해온 덕에 구조 환경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소년들도 빠르게 적응했다. 잠수를 배운 지 일주일도 안돼 1.7㎞ 구간을 잠수해 나오는 데 성공했다. 구조 작업에 참여한 덴마크 출신 잠수사 이반 카라지치는 “소년들은 오직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존해야 하는 극도로 위험한 환경에서 잠수를 했다. 놀랍도록 강하다”고 BBC에 말했다. 축구팀 13명의 생환에 가족들과 태국, 전 세계가 환호했다. 전원 구조 소식을 알린 네이비실의 게시물은 5분 만에 2만3000차례 이상 공유됐다.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축하의 트윗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미국을 대표해 성공적 구출을 축하한다”고 썼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영국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축구팀과 구조팀을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리는 경기에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최민지 기자    태국 동굴소년·코치 13명, 17일만에 '기적의 생환'(종합2보) 2018.07.10.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6월23일 이후 열흘간 고립..2일 극적으로 발견된지 7일만에 전원 구조돼 25세 코치 끝까지 아이들 지키다 마지막에 동굴서 나와 구조현장을 빠져나가는 구급차 행렬[AFP=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태국 치앙라이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과 코치가 17일간의 '동굴 드라마'를 기적 같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 태국 네이비실은 10일(이하 현지시간) 저녁 페이스북을 통해 동굴 안에 갇혀있던 12명의 소년과 코치의 구조 소식을 전했다. 당국은 이날 오전 10시께 19명의 다국적 구조팀을 투입해 사흘째 구조작전을 벌였고, 동굴에 남아 있던 5명의 마지막 생존자를 무사히 구출해냈다. 첫 구조 소식은 오후 4시 12분께 전해졌다. 9번째 생환자였다. 이후 20여 분 뒤인 4시 33분 10번째 생환자가 동굴을 빠져나왔고, 5시 13분께 11번째, 6시 51분께 12번, 13번째 마지막 생환자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굴에 들어갔던 엑까뽄 찬따웡(25) 축구팀 코치는 끝까지 동굴 안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에 구조된 것으로 전해졌다. 태국 네이비실도 같은 시각 페이스북에 "12명의 소년과 코치가 모두 안전하게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게 기적인지 과학인지 얼떨떨하다"는 임무 완료와 감격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로써 지난달 23일 오후 훈련을 마친 뒤 동굴에 들어갔다가 폭우로 물이 불어나면서 고립된 13명은 17일 만에 전원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이날 추가로 구조된 소년들과 코치의 건강상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국은 이들을 구급차와 헬기에 태워 치앙라이 시내 쁘라차눅로 병원으로 이송했다. 생환자 이송하는 태국 경찰 헬기[태국 경찰 페이스북 캡처=연합뉴스] 이들은 치앙라이의 '무 빠'(야생 멧돼지) 축구 아카데미 소속으로, 지난달 23일 오후 훈련을 마치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내린 비로 동굴 내 수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고립됐다. 이들은 태국 네이비실 잠수대원들과 함께 동굴 내부를 수색하던 영국 동굴탐사 전문가 2명에 의해 실종 열흘째인 지난 2일 밤 동굴 입구로부터 5㎞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됐다. 이후 태국 네이비실 잠수대원과 의사 등이 동굴 내부로 들어가 음식 등을 제공하고 다친 아이들을 치료했다. 또 당국은 동굴 안에 가득 찼던 물을 빼내 수위를 낮추는 한편 아이들이 침수구간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수영과 잠수장비 사용법을 가르쳤다. 이어 8일 본격적인 구조작업에 나서 당일 4명을 구조했고 이어 9일 추가로 4명을 구출해냈다.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동굴구조를 주도한 것은 영국과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에서 온 50여 명의 동굴구조 전문가였다. 이들은 40여 명의 태국 네이비실 잠수대원들과 함께 사흘간 차오르는 물과 사투를 벌이며 13명을 동굴 밖으로 구출했다. 자원봉사자로 구조에 동참했던 전직 태국 네이비실 대원 1명이 지난 6일 산소 부족으로 숨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   '동굴소년' 구조중 숨진 네이비실대원 아내의 망부가 '애틋'  2018.07.1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이제 눈뜨면 누가 키스해주죠?"..인스타그램에 사무치는 마음 글·사진으로 올려 (하노이=연합뉴스) 민영규 특파원 = 태국 동굴에 17일간 갇혔던 유소년 축구팀 선수와 코치 등 13명이 모두 생환하는 기적을 만드는 구조작업에 참여했다가 숨진 사만 푸난(37) 태국 해군 네이비실 대원의 아내가 남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표현했다. 11일 일간 카오솟에 따르면 사만의 아내 발리뽀안 쿠난은 이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남편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과 함께 사랑을 듬뿍 담은 글을 올렸다. 태국 동굴기적 의사자가 생전 아내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 [카오솟 캡처=연합뉴스] 발리뽀안은 "당신이 그리워요. 너무 사랑해요. 당신이 마치 내 심장인 것처럼 사랑해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또 "당신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누가 나에게 키스해주지요?"라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다. 이어 "시간을 되돌려 그것을 영원히 멈출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졸지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비통함을 나타냈다. 발리뽀안은 사만이 숨진 다음 날인 지난 7일에도 소셜미디어에 "당신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거예요. (이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없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또 "당신이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숨 쉬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 함께 살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요"라고 말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사만은 지난 6일 오전 1시께 동굴 내 3번째 공간에 산소 탱크를 전달하고 돌아오던 도중 산소부족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된 뒤 숨졌다. 이틀 뒤인 8일부터 3일간 본격 진행된 구조작업으로 소년 12명과 코치 1명은 전원 무사히 구조됐다. 해군에서 전역한 뒤 태국공항공사(AOT) 보안요원으로 취직해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일하던 그는 소년들이 동굴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대원으로 자원했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사만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러주기로 했다. 와치랄롱꼰 국왕은 또 숨진 사만의 가족을 특별히 보살필 것을 지시했고, 쁘라윳 짠 오차 태국 총리도 깊은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첼타 자이피움 태국 해군 대변인은 국왕의 뜻에 따라 사만에 대해 특별 진급을 추진할 예정이며, 유가족도 지원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만이 근무하던 수완나품 공항 측도 최소 100만 바트(약 3천3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사만의 빈소가 마련된 태국 북동부 로이엣 주의 한 관광버스 회사는 오는 14일로 예정된 다비식 때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기로 하는 등 각계에서 온정이 답지하고 있다. 사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다비식장은 9개의 상스러운 뾰족탑이 있는 15㎡ 규모로, 제작비용만 30만 바트(약 1천만원)로 알려졌다. 구조 준비 도중 사망한 전직 네이비실 대원[태국 네이비실 페이스북 캡처] ==============   "동굴속 소년들 30분 잠수 참아.. 생존의지 강해"..구조과정 공개  2018.07.11. 22:53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부력보정기·후드형 잠수복·특수 마스크 등 활용..좁은 공간 통과 여러 차례 실패 구간에 따라 1∼4명의 구조인력이 동행..에어포켓 구간에서는 공중에 띄워 이동 구조 과정 설명하는 미 공군 앤더슨 상사[AP=연합뉴스]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하니스 안에 있던 소년들은 시계(視界)가 제로인 상태에서 최장 30분간 잠수를 견뎠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코치가 똘똘 뭉쳐 강한 생존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주목했던 태국 치앙라이 탐루엉 동굴의 유소년 축구팀원 구조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됐을까. 태국 구조 당국이 지난 8일 구조 개시와 함께 인근을 통제한 탓에 사흘간 기적의 구조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동굴 안은 물론 입구의 상황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이 파견한 구조단을 이끈 미 공군 구조전문가 데렉 앤더슨(32) 상사는 11일 AP통신과 인터뷰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구조 당시 동굴 안의 상황을 일부 공개했다. 그가 이끄는 미군 인도 태평양사령부 소속 구조전문가 30명은 지난달 28일 태국의 요청으로 동굴로 달려왔다. 당시만 해도 13명의 소년과 코치의 생존 여부와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동굴 소년 구조 장면[태국 네이비실 영상 캡처=연합뉴스]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말랐던 동굴 입구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앤더스 상사는 "우리가 동굴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바닥이 말라 있었지만 불과 1시간∼1시간 30분 만에 동굴 안쪽에 물이 가득 고여 밖으로 나와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태국 당국이 제3의 출입구를 찾거나 바위를 굴착하는 방법 대신, 몸도 허약하고 수영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잠수법을 가르쳐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선택을 한 배경도 풀어놨다. 앤더슨 상사는 "동굴 안의 산소 농도는 떨어지고 아이들이 아플 위험도 있었다. 비가 더 내리면 소년들이 장기간 동굴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잠수장비 사용법 교육은 최대 난코스로 불리는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데 맞춰졌다. 앤더스 상사는 "아이들이 있던 동굴 안쪽의 수심이 잠수부가 훈련하는 수영장의 깊이와 비슷했다"며 "잠수훈련의 목표는 아이들이 전문 잠수사를 따라 성인 한 명이 겨우 나갈 수 있는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탐루엉 동굴의 영웅들[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실제 탈출 과정에서는 전면마스크 등 이미 알려진 것 이외에도 다양한 장비가 쓰였다고 한다. 물속에서 몸이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도록 유지해주는 '부력 보정기', 머리까지 감싸는 후드형 잠수복, 번지 코드(신축성 있는 고무끈), 특수 마스크 등이 사용됐다. 앤더슨 상사는 "특히 ( 대기압력보다 높은 압력의 공기를 방출하는) 양압 호흡기가 달린 마스크가 결정적이었다"며 "이 마스크를 쓰면 아이들이 좁은 통로에서 패닉 상태에 빠져 마스크 안에 물이 들어와도 압력때문에 자동으로 배출된다"고 부연했다. 그는 이런 장비를 갖췄음에도 좁은 통로에 저체온증을 유발하는 빠른 물줄기가 흘러 초기 여러 차례 돌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동굴 통로를 따라 안전 로프를 설치해 상황이 다소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위험이 컸다. 앤더슨 상사는 "이런 지형에서 잠수할 때 설치되는 로프는 생명줄"이라며 "로프가 설치된 아주 조금 진전이 있었지만, 불과 40∼50m를 나아가는데 5∼6시간을 허비해야 했다"고 말했다. 당국은 생존자 1명당 잠수 전문가 2명이 붙어 아이들을 빼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동원된 인력은 훨씬 더 많고 구간에 따라 보조 인력의 수도 달라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생환자 싣고 이동하는 구급차[AFP=연합뉴스] 구급차로 옮겨지는 생존자[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앤더슨 상사는 "동굴 안에는 100명에 가까운 구조인력이 있었다. 총 9개의 공간(chamber)을 통과하는 위험천만한 과정에 생존자 1명당 10여 명이 붙었다"고 말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2명, 좁은 구간에서는 1명의 잠수사가 이들과 동행했고, 에어포켓이 있는 공간은 아이를 공중에 띄워 통과시켰다. 일부 구간은 물이 없었지만, 바위투성이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동굴 중간중간에 설치된 생존자 공기통 보충용 실린더에는 일반 공기가 아닌 산소 농도 80%의 공기를 채웠다. 그래야만 생존자들의 산소포화도를 높여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구조작전은 나도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일생에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한 것"이라며 "우리는 지극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원했던 결과를 얻었다. 많은 퍼즐 조각을 맞춘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원구조 환호하는 동굴소년 친구들[로이터=연합뉴스] 앤더슨 상사는 "정말 중요한 것은 코치와 소년들이 뭉쳐서 강해지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생존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동굴에서 아이들을 들것에 태워 옮기는 임무를 수행했던 전직 네이비실 대원은 AFP 통신에 "동굴에서 나온 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 어떤 아이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고 전했다. 앞서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소년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려고 불안 완화제를 제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   동굴소년 끝까지 지킨 코치는 무국적 난민.. 맨유 구장 못가 2018.07.12. 00:1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이주해 국적없어.."국적 보유 절차 시작" 태국 동굴소년들을 끝까지 지킨 엑까뽄 코치(왼쪽)[연합뉴스 자료사진]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태국 치앙마이 탐루엉 동굴에 17일간 갇혀있다가 구조된 유소년 축구팀 코치와 일부 선수가 무국적 상태라고 현지 언론이 11일 보도했다. 이들이 소속된 축구클럽 '무 빠'(야생 멧돼지)의 창립자 놉빠랏 칸타봉은 엑까뽄 찬따웡(25) 코치가 현재 무국적 상태의 난민이라고 밝혔다. 또 영국 구조전문가가 이들의 생존을 처음 확인했을 당시에 촬영된 영상에서 영어 통역을 했던 아둔 삼온과 마크, 티로 불리는 소년 3명 역시 무국적자다. 동굴 속에서 먹을 것을 양보하는 등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엑까뽄 코치는 미얀마의 고향 마을에 감염병이 돌면서 어린 시절 고아가 됐고, 10살 때부터 사원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했다. 그러나 병든 조모를 부양하기 위해 사원에서 나온 뒤 태국 치앙마이의 매사이로 넘어와 축구팀 코치 일을 시작했다. 멧돼지 축구클럽의 영어 통역으로 더 유명해진 아둔은 미얀마 북동부 와주(州)에서 태국으로 들어왔다. 마약과 인신매매 등 범죄와 소수민족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부모의 결정에 따라 국경을 넘은 것이다. 미얀마,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치앙라이 등 태국 북부 지역에는 이들처럼 소수민족 탄압이나 내전을 피해 국경을 건너 사는 난민이 적지 않다. 유엔 난민기구에 따르면 태국 내 난민 수는 48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유엔에 정식으로 난민 지위를 신청하거나 태국 국적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15일 열리는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초대장을 보내고, 잉글랜드 축구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홈구장인 올드 트래 포드로 이들을 초대했지만, 정식 여권이 없는 이들이 원칙적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는 없다. 놉빠랏은 "국적을 갖는 것이 (무국적) 소년들의 가장 큰 희망이다. 과거에는 치앙라이 밖으로 원정경기를 하러 가는 것도 어려웠다"며 "국적이 없는 그들은 프로축구 선수가 될 수도 없다. 이들이 국적을 갖도록 하는 절차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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