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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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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새벽이 올 때까지 댓글:  조회:3495  추천:0  2018-07-25
새벽이 올때까지                      윤동주 / 시인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년 5월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 편을  읽어 봅니다. 「새벽이 올때까지」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통 혹은 괴로움,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나 괴로움 등으로 죽거나  살거나 모두가 괴롭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죽어도 살아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한 가닥의 희망으로 이제까지의 고통은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노래한  시라고 합니다. 즉, 새벽이 오고 나팔소리가 들려 옴으로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또한 조국 광복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윤동주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절망 속에 사는 민중들을 보살피면 광복이 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고 이들이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여라. 이제 새벽이 오면 이를 알리는 나팔소리 들려 올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는 상징으로 쓰였다. ‘새벽’은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밤’이 사라지는 때로 광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광복이 올 때까지 해야할 행동을 알리는 시이다. 어조는 ‘-시오’라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령조의 행동을 지시하는 어조이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 검은 옷을 입히시오. //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 흰 옷을 입히시오. /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에서 1연과 2연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 ‘검은 옷’과 ‘흰 옷’이 대구를 이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색깔이 다른 옷을 입히는 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검은 옷’의 ‘검은 색’은 ‘절망, 불길함, 암울함’을 의미하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절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흰 옷’의 ‘흰색’은 ‘희망, 순결, 순수’를 의미하는 색이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다른 뜻이 더 있는 것 같다. 구지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색으로 구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화자(시인)이 이러한 구분을 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에 ‘낮과 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들을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는 데에 근거한다. 이들이 ‘한 침실(寢室)에’ 있다는 것은 생활터전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생활터전에서의 ‘흰 새’과 ‘검은 색’이 질서 있게 ‘가지런히’ 있다는 것은 낮과 밤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이 시의 전체적인 시간은 ‘새벽이 올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보면 ‘밤’이다. ‘밤’은 일제강점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아래 사는 희망을 잃고 또는 갖고 사는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인 낮과 밤을 ‘흰 옷’과 ‘검은 옷’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을 재우시오’는 일제강점기인 밤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이나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휴식 중에서도 ‘밤’에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적합한 휴식이다.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에서 ‘-시-’는 화자의 명령을 듣는 청자가 화자보다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임을 알려준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볼 때에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여자 어른이다.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실제의 여자 어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젖을 먹이’는 대상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젖먹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실제로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인 것이다. 청자는 일제강점기 아래서 살고 있는 민중들에게 휴식을 주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고귀한 대상인 것이다. 이들에게 휴식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므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이제 새벽이 오면 /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는 ‘새벽’이 오면 승리의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말이다. 앞 구절의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는 ‘젖을 먹이’라는 행동지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새벽이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윤동주 다른 시인 에서 ‘우리 집에는 / 닭도 없단다. / 다만 / 아기가 젖 달라 울어서 / 새벽이 된다.’에 근거한다. ‘젖 달라’ 우는 것은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막연하게 ‘새벽이 오면’이 아니라 ‘다들울거들랑’으로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새벽’이 오면 ‘이제’ 승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는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승리를 알리는 소리이다. 일제에 승리하여 일제강점을 물리치고 광복이 되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자신의 추측을 청자에게 알려주고 있다.///전한성        
1169    윤동주 시집 원 제목 "병원"이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댓글:  조회:3430  추천:0  2018-07-25
다고 기치로 전 NHK PD가 발굴한 윤동주의 진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의 시와 삶이 많은 조명을 받으며 많은 이들이 시혼을 그렸다. 윤동주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일본에서도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1995년 KBS와 공동으로 NHK 스페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전 NHK 베테랑 PD 다고 기치로씨도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30년째 윤동주의 삶을 쫒고 있다. 그는 특히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집 제목이 애초 ‘병원’이었던 사실에 주목했다. 아픔과 고통, 소멸이란 죽음의 이미지가 어떻게 생명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뀐 걸까? 윤동주는 애초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계기로 열여덟편의 시를 엮어 출판을 바라며 시집을 준비했다. 입학 직후인 1938년 5월10일의 ‘새로운 길’이란 시부터 마지막 작품 ‘별 헤는 밤’까지 재학 4년동안 쓴 것들이다. 윤동주는 세 부를 만들어 한 부는 스승 이양하 선생에게, 다른 한 부는 친구인 정병욱에게 주었다. 또 자신을 위해 작성한 나머지 한 부는 후에 교토에서 윤동주가 체포됐을 때 경찰에 압수돼 돌아오지 않았다.   윤동주가 ‘병원’이란 시집을 완성한 것은 1941년 11월5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서시’로 알려진 새로운 권두시를 쓴다. 이 시가 완성된 게 11월20일이다. 이 시에 ‘하늘’‘바람’‘별’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병원’이었던 시집이 11월20일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의 시집으로 새롭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서시와 함께 마지막 시 ‘별 헤는 밤’에 4행을 추가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란 시구다. 그렇게 바뀌기까지 그 기간은 대략 2주다.    기치로씨는 11월5일부터 20일까지 윤동주의 가슴 속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변화의 드라마가 전개됐다고 말한다. 그는 스승인 이양하에게 보여준 시집이 “잘 썼네만, 이 내용으로는 출판은 어렵겠네”란 말을 듣고 좌절하면서 죽음과 영원으로의 시상과 사상으로 심화· 성장했다고 분석한다.   기독교적 사상과 신앙이 그런 심화와 비약을 재촉했다. 일본의 폭압적 지배와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국과의 개전을 앞두고 가혹해지는 시기에 시집 출판이 좌절됨으로써 번민이 더 깊어지면서 오히려 그 괴로움을 뛰어넘어 영혼을 성숙·정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는 생전에 한 권의 시집조차 세상에 내놓지 못했지만 진정한 시인, 불멸의 시인이 됐다는 것이다.  기치로 씨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태어나기까지 약 2주간의 시간을 기적이라고 본다. “혼자만의 고독한 정신의 영위속에서 사상이 익게 하고 역전적인 발상을 통해 빛 가운데 시어를 빚어낸 윤동주의 집약적인 성장”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기치로 씨는 자신이 새롭게 발굴해낸 결과물을 정리해 ‘생명의 시인 윤동주’(한울)를 펴냈다.이 책에는 그가 발굴한 윤동주가 체포되기 한, 두 달 전 1943년 초여름 교토의 도시샤대학 학우들과 우지강으로 소풍가서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도 실려있다. =============== 시인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 윤동주에게는 완전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은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재일유학생 윤동주의 시와 삶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영원히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울러 친구에 대한 굳은 의리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까지 퇴색시킬 수 있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생이었던 강처중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윤동주와 함께 학창시절을 꽃피웠고, 재가 되어버린 윤동주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 필사본 시집에 들어가지 않은 원고와 그의 장서, 졸업앨범, 앉은뱅이책상 등속까지 죄다 보관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줌으로써 후세인들이 시인의 생생한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담겨있던 5편의 시를 공개함으로써 윤동주 시문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1947년의 소란스런 해방공간에서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봉직하면서 무명시인 윤동주의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후배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안에 있던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작품 가운데 12편을 추려내 1948년 1월 총 31편의 작품이 담긴 정음사 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발간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그 후 강처중은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반 남로당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강처중은 남쪽에서 기피인물이 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 삭제되었다. 그 영향으로 학계에서도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에서 그를 제외함으로써 절름발이 논문을 자초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탄압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옥사했다면 강처중은 그처럼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희생되었던 비극적인 존재였다. 브나로드 운동에 뛰어들다 강처중은 1916년생으로 함경남도 원산 출신이다. 부유한 한의사 집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성품이 매우 신중하고 과묵했다. 그가 어린 시절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7세 때인 1932년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한글보급과 문맹타파에 헌신했음은 당대의 동아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시작된 브나로드운동은 일제시기 광복군으로, 해방 후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활약했던 14세의 장준하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청년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당대의 수재였음에 분명한 강처중 역시 솔선수범하여 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애초에 한글보급을 통한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되었다. 식민지 조국의 비참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소년 강처중으로서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뉴스였다. 당시 강처중은 방학기간인 8월 2일부터 고향에서 가까운 함경도의 고평역에서 100여 명의 농민들에게 한글, 일용계수법, 성경, 지리, 역사, 유희, 창가, 체조, 동화 등을 가르쳤다. 책임대원이었던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처중 자신은 한글을 가르쳤고, 다른 과정은 여러 동지와 타처에서 피서 온 학생들이 가르쳤다. 그 결과 한글과 일용계수법을 해득한 사람이 20명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은 학생하기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도쿄, 간도 등지에서도 참가신청이 이어졌고, 특히 간도의 명신여학교에서는 40명이나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강처중은 전년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덕원군의 책임대원으로서 북성면 문평리에서 남녀 7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보고 내용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장소와 당국의 허가 관계로 하는 수없이 기독교에서 하는 하기아동성경학교와 연합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이나 당국 금지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고, 다만 교회에서 하므로 성경본위로 하여 한글(산술은 하지 않음)을 중요시 아니하는 것이 유감이오나, 책임이 있는 저로서는 최대의 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재미있는 일은 이것이 조직적으로 되어 이곳에 해변으로 인하여 피서 온 고등 대학교 학생 중등보통학교 교사 등을 강사로 하는 훌륭한 학교가 되어 각기 전문하는 학과를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수중하여 주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와 만나다 강처중은 23세 때인 1938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본과에 합격했다. 당시 송몽규는 문과 별과에 합격하여 동급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기숙사 핀슨홀의 3층 지붕 밑 방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문과 동기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면서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뒤틀린 심사를 에둘러 표현하는 풍자적인 면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이름을 신농처중(神農處重)이라고 지어 학적부에 올렸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심하지 않냐고 타박하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가 본래 강(姜)씨였으니 거리낄 게 무어냐며 되받아쳤다. 문과 학생이었던 강처중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문학에 심취했는데 3학년 때인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문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그때 평자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허구적이어서 실감이 없었다고 혹평했고, 특히 글에 설명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매사에 앞장섰던 그는 4학년 때 연전 문과 학생회인 문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문예부장인 송몽규와 함께 잡지 《문우》를 발간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잡지는 최종호가 되었으며, 국민총력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문우회까지 해산의 비운을 겪는다. 후배 장덕순의 회고에 의하면 그 무렵 강처중은 연희동 산기슭을 산책하다가 개울가에서 뱀을 사로잡은 뒤 자신에게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 제일 독한 종자가 바로 뱀이다. 동물은 보통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뱀은 먹이를 받아먹기는 하면서도 전혀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열정이 압제에 눌리고 패배감만 안겨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다 윤동주의 육필원고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옥사한 뒤 반년 만인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이 조카의 유품을 회수하기 위해 서울에 내려와 그가 한때 묵었던 북아현동 하숙집을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남북이 좌우로 갈리고 38선으로 가로막혀 어수선한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단신으로 월남하여 강처중을 찾아왔다. 그러자 강처중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유품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당시 그가 전해준 윤동주의 육필 시고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였다. 첫째, 윤동주가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기 전에 쓴 작품 가운데 시집에 넣은 19편의 작품을 제외한 시 작품. 〈팔복〉, 〈위로〉 등. 둘째, 자선시집을 엮은 뒤 새로 쓴 시 작품. 〈참회록〉, 〈간〉 등. 셋째, 일본에서 쓴 시 작품. 〈쉽게 씌어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 1947년 2월 16일의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강처중은 정병욱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작품을 모아 유고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출간시기는 사망 3주기인 1948년 2월 16일 이전으로 잡았다. 그 일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언론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강처중이 도맡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간에 앞서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작품을 게재했다. 정지용이 퇴사하고 난 뒤인 7월 27일자 지면에 세 번째 실린 〈소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고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이런 사전작업과 함께 강처중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정지용에게 유고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직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정지용은 강처중이 데려온 윤일주로부터 윤동주와 그의 집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그 내용을 서문에 자세히 썼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8년 1월 30일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강처중이 쓴 초판본 시집의 발문에는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그리움이 아래와 같이 애타게 묘사되어 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 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도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은 이처럼 친구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지극한 우정을 모아 윤동주를 무명시인에서 일약 민족시인으로 발돋움시켰지만 대가는 참담했다.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여파로 정지용과 함께 강처중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2월 윤동주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이 정병욱과 윤일주의 손에 의해 출간될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기까지 했다. 정지용은 전쟁 당시 월북했다는 이유로, 강처중은 좌익인사라는 이유였다. 1987년 공식적으로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학계의 논문이나 학술서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정○용’, ‘정용’ 등으로 표기했다. 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수차례의 개정판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가, 1983년 10월 1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판에서 강처중을 ‘서울의 한 벗’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자에서 좌익인사로 사라지다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1일 경성의 가톨릭재단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최초의 회장은 노기남 주교, 주간은 정지용, 편집국장은 횡보 염상섭이었다. 이때 강처중은 조사주임으로 창간작업에 참여했다. 1947년 1월 15일 정지용이 ‘여적(餘滴)’ 란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었다가 미군정 당국과 극우 단체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그와 같은 경향신문의 진보적인 성향을 주도했던 강처중은 이후 기자로 활동하면서 골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7년 4월 27일자 2면에는 충무공 탄생 402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가 올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민을 위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과 함께 강토를 지킨 때문이다. 인민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민과 함께 싸우던 위한 인물들은 영원히 민족의 마음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들은 민족존망의 위기에 나와서 인민과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하고 간 분들이다. 때문에 그 민족이 위기에 당면하면 그 인물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같은 정세에 처하여 이순신을 가일층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영웅 이순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동고동우(同苦同憂)하며 투쟁하던 이순신이 그리운 것이다.’ 현재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는 강처중의 흔적이 이순신과 윤동주에 대한 2편의 기사만 남아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계엄령 치하였던 1953년 9월 21일 손원일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정국은 간첩사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정국은은 일제 강점기 일본 마이니치(朝日)신문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었는데 해방 후 연합신문사 주일특파원, 국제신문사 편집국장 들을 지냈으며 동양통신사 및 연합신문사 주필로 재직하던 중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치안국 고위관리인 홍택희 총경을 비롯하여 언론, 정부, 국회의원까지 연루되어 국회 내에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었던 초대형 사건이었다. 정국은은 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단심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뒤 그해 12월 2일 사형이 언도받았다. 한데 1954년 1월 23일 총살형 장소로 예정된 홍제원 화장터 근처에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사형집행이 연기되었다. 결국 정국은은 1955년 2월 18일 수색에서 총살되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미국 극동사령부의 보호 아래 일본에서 이중스파이로 활약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바로 이 사건에서 강처중은 남로당의 젊은 실세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군 당국은 정국은의 모든 간첩 혐의가 남로당의 상부선인 강처중의 지령에 따라 행해졌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데 작가 송우혜의 조사에 따르면 강처중은 이미 1950년에 남로당 간부였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한 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강처중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9월 4일 강처중은 갑자기 부인 이강자 여사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해 버렸다. 어쩌면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건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참상이 이어지자 실망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먹이를 주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뱀 같은 민족의 비정한 세월을 조소하면서……. 그래서일까. 그 후 남로당과 관련된 어떤 문건이나 서적에서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었다. 그리고 2016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서 그는 해맑은 미소를 띠며 관객들의 앞에 섰다. =======================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작고(1945년)한 후 시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정음사'에서 라는 제목으로 간행함(1948년)     유고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작성하였고 발문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동료였던 강처중이 작성하였어.     ▲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윤동주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함 고인과 크게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닌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경향신문의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강처중 기자의 인연 덕이 크다고 함     영화 에도 강처중이 등장함   이 분!       다음은 강처중의 글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 꼮!꼭 읽어봐! 몽규와 동주 두 친구를 한번에 잃게 된 강처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영화를 보고, 또 글을 읽고 나서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넘나 궁금했어. 그런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는데, 왜 그런지 알게됐어       "(...) 강처중은 50년대 좌익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인물."     "(...) 강처중은 윤동주가 직접 묶었던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포함되지 않은 대표작들을 보관해 유족에게 전했고 48년 초간본 출판의 산파역을 했지만 그간 좌익이라는 이유로 시집에서는 '윤동주가 동경에서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한 벗' 정도로 익명화 되고 말았다. 42년 일본유학 길에 오르며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맡긴 시는 '참회록' '팔복' '간' '위로' 등. 또 유학시절 윤동주의 시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섯편의 작품은 모두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수록된 것이다.   강처중은 48년 윤동주의 연전후배 고 정병욱 교수가 보관했던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들에서 추린 시 31편으로 정음사에서 초간본을 발간하며 생전에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에게서 서문을 받아냈고 직접 발문을 썼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정지용이 납북되고 강처중마저 좌익으로 총살당해 이들의 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간본 이후 아예 삭제돼 버렸다. (...)"     .....   강처중은 경향신문의 창간 멤버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알려져있으나 사실 여부와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등은 밝혀지지 않음..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유고시집 발간의 주역 강처중은 그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어..   윤동주의 연전 후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 역시 강처중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 (경향신문)       ▲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 강처중.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그럼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일케 글을 쪘음..   영화 동주에서 강처중이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와서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여시들이 한번쯤 '강처중'을 초록창에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싶운데 그러한 점에서 영화 는 잊혀진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을 재발견한 고마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음!! 참 귀한 인물을 알게되어서 마음이 벅참 ☺       ++수정   방금 윤동주 평전을 찾아봤는데 강처중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더 자세히 적혀있어서 추가함     윤일주(현 성균관대 교수, 윤동주 동생)는 이 출간될 당시 강처중에 대해 기술하지 말아달 것을 요청했다고 함.  단순히 그가 좌익인사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었음.   이후 개정판에서 강처중이 좌익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라고 기술하였고 이를 본 강처중의 가족(부인,자녀)이 나타났음 가족들이 증언하길 "사형수로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맞지만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했을 때 형무소에서 나왔고 두달 남짓 집에서 요양하다가 9월 4일에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월북했다"는 것..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형 직전에 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하였다고 함  
1168    윤동주와 정병욱 가옥 댓글:  조회:2529  추천:0  2018-07-24
  1. 섬진강 하구의 망덕포구에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있다니 뜻밖이네요. 제가 알기로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북간도 아닌가요?   - 예, 북간도 맞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시에서 가까운 명동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한 항의로 자퇴를 하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했구요. 그리고 1938년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즉 윤동주는 38학번입니다.   2. 그러면 윤동주 시인과 광양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데, 어떻게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광양 망덕포구에서 발견된건가요?   -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만난 후배 정병욱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정병욱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곳이 바로 광양의 망덕포구였습니다.   3. 윤동주와 정병욱,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 졍병욱이 쓴 윤동주에 관한 회상문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1940년 연희전문 1학년 때 그가 윤동주와 선 후배로 만나게 되었을 무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대학생활을 동주로 말미암아 다져갔고, 시골뜨기 때가 동주로 말미암아 차차 벗겨져 나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숙사 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자져졌던 두 사람의 사귐은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했던 1941년에 들어서면서 기숙사를 떠나 같은 방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5. 정병욱이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윤동주의 시집 간행'이었다니, 대단하네요, 윤동주는 그 시집에 담긴 시를 언제 썼나요?   -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집 간행을 기획했습니다. 자기의 시작품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세 부를 직접 필사했는데요. 그 중 한 부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지도교수님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줬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5일로 적혀 있고, 시집을 여는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6. 윤동주는 계획대로 졸업기념 작품을 출판했나요?   -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받아 본 이양하 교수는 그에게 출판 보류를 권했습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들이 포함돼 있는 그의 시집은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윤동주의 신변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양하 교수의 권고에 따라 그 시집의 출판은 보류되었습니다.   7.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 1942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경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에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 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8. 안타까운 얘기네요, 그러면 국내에 있던 윤동주 후배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정병욱은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때로부터 반년 뒤인 1944년 1월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전에 정병욱은 선배 윤동주로부터 받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광양 망덕포구에 계신 집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잘 간수해 주실 것을 당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과 윤동주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하면 그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널리 알려달라는 비장한 부탁도 했습니다.   9. 일제 학병으로 끌려갔던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다행히 일제 패망 후 정병욱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정병욱의 어머니께서는 마루청 밑에 장독을 묻고 그 속에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윤동주의 원고를 꺼내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의 원고가 얼마나 위험하게 취급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윤동주 원고는 언제 시집으로 출판됐나요?   - 정병욱은 1948년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함으로써 윤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윤동주가 직접 제작한 세 부의 시집 중, 윤동주 본인 보관본은 일제에 체포 투옥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양하 교수님께 드린 것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극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망덕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비로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가 보관되었던 집이라는 말씀이죠?   - 맞습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바로 진월면 망적리에 소재한 정병욱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자택이었습니다. 후에 그 집은 정병욱의 부친 정남석 님의 외종동생 소유로 넘어갔고 현재는 그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12.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정병욱 교수가 1976년에 작성하였던 회상문에서 그 유고 보존에 대한 전말을 소개하였지만, 그 보관 장소에 대한 관심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가옥 소유자의 딸이 재학 중이던 광양제철고 교지편집부에서 취재를 하여 망덕리 23번지가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이라는 이야기를 2005년 '한빛' 교지에 실었습니다.   13. 광양제철고 교지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니, 재미있네요. 그 이후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도 궁금하군요.   - 망덕에서의 윤동주 유고 보존 사실은 광양 지역신문의 보도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그 보도를 접한 광양 시청이 망덕의 유고 보존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요. 마침내 광양시의 이성웅 시장님이 직접 찾아가면서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의 근대문화유산 등록 작업은 탄력이 붙었습니다. 그 결과 2007년, 망덕포구의 옛 정병욱 가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즉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로 지정됐습니다.   14.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행사도 광양 망덕에서 열리고 있나요?   - 예, 지난 2008년 여름에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만주의 조선족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동북3성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윤동주 문학상'에 입상한 고등학생 20여 명이 광양 망덕포구의 '윤동주 유고 보존 졍병욱 가옥'을 직접 방문해, 이곳에서 즉석 연극대회까지 펼치는 장면을 보고 가슴 찡한 민족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광양의 한 지역신문사에서도 '시인 윤동주와 광양의 만남'을 주제로 2008년 이후 매년 '윤동주 백일장 사생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윤동주 시인의 시와 그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니, 신기하고 재미있군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광양제철중 이은철 선생이었습니다. ========================///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쓴 글 124편을 모두 담은 ‘윤동주 전 시집’이 나왔다.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수록한 첫 책이다.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뿐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 후기, 발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동주 전 시집’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은 1948년 초판본 전문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소개했다.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없는 시들로 이뤄졌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는 기존의 윤동주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작품 8편이다. 1~3부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4부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창작연도에 따라 실었다. 9인의 윤동주 추모문은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평이다. 1부에서는 1948년 나온 원본 그대로 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추도 시, 강처중의 발문을 읽을 수 있다.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라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을 현대어로 정리해 넣었다. 2부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일주의 ‘선백(先伯)의 생애’, 3부에는 백철·박두진·문익환·장덕순의 후기가 들어있다. 윤동주 연보는 4부 뒤에 게재했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 이후 인쇄본에는 누락됐다. 시인 정지용은 6·25동란 때 납북됐고,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1950년 9월4일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서울로 침략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떠났다. 정지용은 1950년 9월께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희생됐다.  정지용은 ‘서(序)’에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애도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고 발문에 남겼다. 윤동주의 친구인 문익환은 ‘동주 형의 추억’을 전했다.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1167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는 홀로의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댓글:  조회:3013  추천:0  2018-07-24
  별을 노래한 시인..윤동주 탄생 100주년, 돌아보는 그의 삶       (2018년 12월) 내일(30일)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별 헤는 밤'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29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본의 차디찬 형무소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 오늘 리포트+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 '동주야 해처럼 빛나라', 어린 시절부터 시를 썼던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아명(兒名)은 '해환'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어린 시절 이름입니다. 윤동주의 동생 일주에게는 '달환',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막내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1925년 4월 4일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5학년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당숙으로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故 윤영춘 씨는 "명동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동주는 빠짐없이 동시를 발표했다"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적 소질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윤동주 시인을 기억했습니다. ■ 자기반성을 멈추지 않았던 그,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 윤동주는 22살이던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재학 중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등을 발표했습니다. 1941년에는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를 출간하려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던 이양하 교수와 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시집을 먼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 교수의 권고에 윤동주는 시집 출판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으나 후배 정병욱의 보관본으로 빛을 보게 됩니다. 1942년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송몽규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동경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윤동주는 등 5편의 시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윤동주의 고뇌는 당시 쓴 시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유학 첫해 여름 방학이 되자 윤동주는 고향에 돌아와 보름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윤동주 시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귀향이었고 친구에게 보낸 시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29년의 짧은 생애…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먼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고 4일 뒤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차표를 사고 짐까지 부쳐 둔 윤동주도 같은 혐의로 검거됐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윤동주 시인의 책과 작품, 일기 모두 압수해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1944년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고향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45년 2월 윤동주의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고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 집에 배달됐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고 해방 6개월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윤동주 시인도 일본의 끔찍한 생체실험 대상이었다고 그의 가족들은 입을 모읍니다.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 씨는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후쿠오카 형무소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구금돼 있었는데 당시 바닷물 증류수를 영양제라고 속이고 매일 한 대씩 그들에게 주사했다"며 "이런 일들이 종전 직전에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로 마지막까지 일본에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의 숭고한 정신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1166    윤동주와 이양하 댓글:  조회:2727  추천:0  2018-07-24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만주 간동성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최근 시인의 삶을 엮은 사진집 (윤동주100년 포럼)이 나왔습니다. 생가부터 학창시절, 육필원고, 장례식 모습을 담았습니다. 윤동주. 연희전문 입학 후 찍은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은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 윤동주 생가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태어나 명동중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함께 다닌 ‘청년 문사’ 송몽규. 윤동주의 장례식이 고향에서 치러진 것은 1945년 3월 6일. 하루 뒤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는 이종사촌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고종사촌이다.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송몽규, 문익환목사가 그의 은진중학교 동기이며, 강원룡 목사가 은진중학교 5년 후배다. 당시 은진중학교 건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아버지 윤영석은 윤동주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이 어려운 시대에 의학을 공부해야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의 조부와 외숙부가 아버지를 설득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연희 숲에서. 서 있는 사람 중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 친구 강처중은 1945년 자신이 다니던 에 ‘쉽게 씌어진 시’를 게재하며, 윤동주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렸다. 1941년 12월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자필 시고집 3부 만들었다. 한부는 자신이 갖고, 한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다른 한부는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줬다.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의 신변을 염려해 시집 출간을 보류하라고 권했고, 윤동주는 이를 받아들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권도 가지지 못한 시인이다. 1945년 경향신문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2년 4월 일본 릿교대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학부 단발령’이 발령됐다. 이후 한 학기 만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시적 스승으로 삼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다. 공초 오상순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릿교대 재학시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와서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삭발한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은 시모가모 경찰서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동주는 바닷물을 인체에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용정 고향집 마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 집례는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맡았다. 장례식 때는 연희전문 에 실렸던 ‘우물 속의 자화상’ ‘새로운 길’ 등 윤동주의 시 두편이 낭독됐다. 윤동주 장례식/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의 육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위), ‘쉽게 씌어진 시’(아래) 육필 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참회록’ 육필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곽희양 기자
1165    사람이 1년에 800만번 숨을 쉬는데... 댓글:  조회:2730  추천:0  2018-07-24
  100년을 거슬러 온 윤동주의 숨결     “ 사람이 1년에 800만 번 숨을 쉬고, 이 숨을 다 합치면 2억 리터가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생애 53년 간 내쉰 숨이 지구 대류권에 흩어져서 지난 400년간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고 가정하면, 이순신 장군의 입에 한 번이라도 들어갔던 숨을 현재의 우리도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   지난(2017년) 6월 2일 방송된 tvN ‘알면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알쓸신잡)’에서 물리학자 정재승이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실제로 그 숨결을 계산해 봤다고 한다. 다양한 과학적, 수학적 이론을 동원해 내린 결론이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으로부터 472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불과 100년 전에 태어나 28년 간 살았던 윤동주 시인의 경우는 어떨까.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가까운 시기를 살아간 윤동주 시인의 숨결은 더 많이, 더 자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 시인 윤동주의 숨결을 느끼는 시간   “ 윤동주 시인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도 자주 산책을 즐겼습니다. 그의 숨결을, 그가 사랑했던 연희전문학교 교정에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지난(2017년) 6월 23일 오전 10시,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 4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윤동주 시인이 대학시절 시에 대한 열정을 안고 거닐던 산책길을 따라 걷기 위해서다. 이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작품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교육청 서대문도서관이 마련한 ‘윤동주, 읽다 쓰다 걷다’ 행사의 일환이다.          △‘윤동주 산책길 따라 걷기’ 행사의 코스는 ‘연희 연전숲길2’ 코스였다. ‘연세대 정문-윤동주 시비-핀슨관- 청송대-외솔관-최현배 흉상-언더우드가 기념관-연세대 서문-연희 문학 창작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강민혜     정문에서 출발, 연세대 교정을 걷기 시작한지 5분 만에 참가자들이 만난 것은 윤동주 시비였다.    윤동주는 의대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에게 맞서 단식과 가출까지 감행하며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에 시집 를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연세대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1968년에 윤동주를 아끼는 학생·친지·동문·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것이다. 참가자들은 잠시 동안 시비 앞에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시비 앞쪽에는 윤동주의 육필 원고 글씨체를 그대로 옮긴 시 한 수가, 뒤쪽에는 윤동주의 생애가 새겨져 있다. ⓒ 강민혜     시비 뒤쪽으로는 윤동주 기념관인 핀슨관이 보였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는 핀슨관 3층 다락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친구인 강처중이 “동주 너는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니, 경치 좋은 방을 써야한다.”며 3층 방을 내줬다고 한다. 지금은 3층이 아닌 2층에 작은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윤동주가 사용했던 책상, 가방, 연필, 펜, 읽었던 책(시집, 철학서), 쓰고 다니던 모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 강민혜     △윤동주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 강민혜     참가자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즈음, 청량한 숲 내음이 가득한 청송대(聽松臺)에 도착했다. 청송대는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윤동주 시인의 스승이었던 이양하 교수는 수필 에서 “우리 연희전문학교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며 청송대의 생명력을 칭송했다. 그래서일까. 제자인 윤동주도 산책을 위해 청송대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소리를 들으며 윤동주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았다.   | 걷기를 예찬한 철학자들   “ 무엇보다 걷고자 하는 열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 날마다 나는 나 자신을 행복 속으로 바래다주고, 모든 아픔에서 걸어 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최고의 생각 속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걸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생각을 알지 못 한다.   ”  -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 앉아서 지내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진정한 죄악이다. 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  - 독일 철학자 니체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지만, 걷는 행위를 통해 위로받았다. 평생 우울증을 알았던 니체도 걸으면서 마음의 병을 다스렸다. 또 제네바의 철학자인 루소는 파리 외각 전원을 걷는 시간을“하루 중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통해 사색을 즐기고, 정신적 치유와 위안을 얻었다.   윤동주는 어땠을까. 그도 걷기를 즐겼다. 안소영의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주의 산책은 유명했다. 산보라기엔 꽤 먼 길이었고, 족히 두어 시간 걸릴 때도 많아 원족(遠足, 소풍)이라 할만 했다.” 이처럼 윤동주는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연희전문 교정을 자주 산책했다.      “ 언더우드 동상을 가로질러 노천극장 뒤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맞은편에 이화여전 건물이 보이고 쉬어갈 만한 언덕이 나왔다. 달맞이하기도 좋고, 밤바람 쐬며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나누기도 좋았다.   ”    이 대목이 바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의 시작이었다. 이번 ‘윤동주 산책길 따라 걷기’ 행사의 주축이 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은 윤동주의 산책길을 개발하고 알리자는 취지로 지난해 결성된 모임이다. 현재 회원은 11명이며, 절반 이상이 서대문도서관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독서동아리 출신이다.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의 조미환 대표는 “안소영의 를 통해 윤동주가 하루도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산책길이 바로 내가 사는 동네임을 깨달았다”며 “윤동주와 그의 시에 조금 더 공감하기 위해 그 길을 우리도 걸어보자는 취지로 동주산책길을 발굴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또 이번 행사 기획에 대해선 “우리가 찾은 길을 서울 시민에게 알려주고, 윤동주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함께 가져보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동주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면 숲의 청량함과 마주하게 된다. ⓒ 강민혜     산책이란 본래 천천히 걷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걷기란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곳을 향해 가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가는 동안에는 효율을 따질 수밖에 없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에게 걷기란 시를 완성해 나가는 일이었다. 피부 위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평소에 못 보던 푸른 나뭇잎과 맑은 하늘을 보면서, 윤동주는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조 대표는 “사람들이 윤동주와 같은 마음으로 ‘산책’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조 대표는 또 “좀 더 나아가서는 윤동주의 시에 담긴 참뜻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4년 간 공부했고, 일본으로가 후쿠오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동주를 시인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때문에 윤동주의 작품 중 알려진 것들은 서정적인 시들이 대다수다. 윤동주가 시에 담고자 했던 항일의 원뜻이 굉장히 많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가 걸었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고민했던 윤동주와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윤동주의 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 학적부와 성적표.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에 빨간 펜으로 두 줄이 그어져 창씨 개명된 성이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강민혜     ‘동주산책길 발굴기획단’이 그동안 고증을 통해 찾아낸 완성된 산책길은 총 3개. 지금도 꾸준히 발굴 중이다. 서대문도서관은 "산책길을 거닐며 윤동주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걷기 행사는 지난 5월 27일에 1차, 이날에 2차가 열렸고, 3차는 오는 7월 8일에 열린다.    이 밖에도 ‘윤동주, 읽다 쓰다 걷다’ 중 ‘윤동주 읽다’에서는 의 저자 안소영 작가, 의 저자 송우혜 작가, 류양선 교수, 김응교 작가 등이 윤동주와 관련된 책을 시민들과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다. ‘윤동주 쓰다’에서는 오는 7월 5일, 유지희 시인이 시민들과 함께 윤동주의 시를 읽어보고 느낀 점을 시로 적는 시간을 가진다. 서대문도서관은 "이번 사업을 통해 지역주민들이 문학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글. 강민혜 기자    
116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무서운 시간 댓글:  조회:3243  추천:0  2018-07-24
윤동주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이적」에서 윤동주는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썼었다. 자기를 무겁게 잡아당기는 “여념”들을 모두 물결에 씻어 버려 가볍게 될 터이니 “당신”은 자기를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위를 걷듯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불러 달라는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을 기다렸던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자기를 부르신다고 믿는다. 사람이 평생 성심성의로 할 일, 즉 평생 직업을 기독교에서는 “소명(召命)”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름 받은 사명”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 개념에서 기독교적 냄새를 없애고 “천직(天職)”이라고 옮겨서 쓰기도 한다. 서양말로는 “콜링(calling)” 또는 “베루프(Beruf)”이니 우리말로는 그냥 “부름”이라 옮겨도 좋겠다.   「이적」을 쓸 때만 해도 윤동주는 머나먼 만주에서 “경성”의 연희 전문 문과 1학년생이 되어 있어서 장래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에 응답할 기분이었다. 그런데 1941년 2월 7일, 3학년 마지막 무렵 방학 중에 만주 용정 본가에 돌아온 그가 자신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음을 통렬히 느끼면서 지은 「무서운 시간」에서 그 어떤 “부름”에 응답하기를 거부한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그는 어떤 부름을 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그냥 얌전히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퉁명스럽게 힐문하는 투로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부름일까? 우선 당시에 조선 청년에게 “독립 운동”을 권유하던 은밀한 부름이라고 해석해 보자. 이는 특히 만주 출신 청년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당위적 부름이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죽음의 길도 됨을 거의 누구나 의식했을 것이다.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공부에 정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당위의 명분은 언제나 강압적이었다. 그의 고종 사촌으로 연희 전문 동창인 송몽규는 바로 그런 부름에 응답하여 독립군 모병에 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름에 그는 강하게 거부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강력한 부정으로 이끄는가? 이 시를 자세히 읽어 보자. (그러나 3년 뒤 그는 끝내 그런 부름에 응한 것으로 일본 법정의 판결이 나서 옥사하였다.) 그때 윤동주와 같이 일본 교토에 유학 중이던 송몽규도 같이 체포되어 비슷한 시기에 옥사했다. 일본 관헌은 특히 송몽규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그를 늘 미행하였는데, 송몽규는 사촌이요 연희 전문 동창이며, 교토대의 이웃 대학인 도시샤대에 다니는 윤동주의 하숙방(“육첩방은 남의 나라”)에 자주 와서 독립 운동 얘기를 했고 하숙집 주인은 이를 관헌에 밀고했다고 한다. 송우혜 지음, 『윤동주 평전』 개정판. 세계사(1998) 참조.)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아직도 호흡이 남아 있는 자기를 구태여 불러 가지 말라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곧 멈출 “호흡”을 미리 불러 가지 말라는 것이다. “가랑잎”은 보통 가을에 말라서 떨어지는 잎, 즉 낙엽을 뜻하는데 왜 윤동주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라고, 이른 봄철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낱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여, 아니다. 우리는 “가랑잎”의 정확한 뜻을 더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우창은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을 “여기에서는 그것이 그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랑잎까지도 푸르러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효과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물론 틀린 해석이다. “가랑잎”을 그냥 낙엽이라고 해석하고 들어가면 그렇게 좀 억지를 부려야 한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곳에서」, 이선영 편, 『윤동주 시론집』, 바른글방, 1989, 102쪽) 큰 사전에 보면 “가랑잎”은 “갈”이라고도 하며 “갈”은 다시 “떡갈나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랑잎”은 “떡갈나무 잎”이라는 말도 되겠다. 우리 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떡갈나무는 그 넓은 잎이 가을에 바짝 말라도 안 떨어지며 한겨울에도 바람에 부딪쳐 서걱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붙어 있다가 이른 봄에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윤동주가 이 시를 지은 때는 2월이니 늦겨울, 그러니까 떡갈나무의 마른 이파리들이 떨어지면서 파란 새잎이 돋아날 새봄을 내다볼 수 있는 때이겠다. 한참 뒤에 그가 「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누렇게 마른 떡갈나무 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파란 새잎이 돋아 나올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른 가랑잎은 나무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호흡도 극도로 위축되긴 했어도 채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미리 끊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의미의 재생이나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앞으로 곧 피어날 새잎에 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질 묵은 가랑잎에 비한다. 새잎은 밝고 넓은 하늘 향하여 손짓하듯 활짝 피지만 ---푸른 떡갈나무 잎은 활짝 편 손바닥처럼 생겼다--- 그는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묵은 가랑잎 같은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이 그에게 절대적 기준이 됨을 그의 「서시」에서 읽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는 그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하늘이 거부되고 오로지 절망의 어두운 좁은 공간(“그늘”)만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방”의 이미지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방은 하늘의 정반대의 공간이다. 방은 구속이요, 하늘은 자유다.   그는 자유를 “마음껏 손을 뻗어 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손을 들어 표하는 것은 회의 같은 데서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하는, 매우 일상적인 행위다. 그러나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당연한 기본적인 자유가 당시의 그에게는 거부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하늘을 마음대로 손을 뻗어 뜻을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심상화하고 있었다. 몸뿐 아니라 정신의, 영혼의 손을 마음대로 뻗어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는 이른바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도 저절로 주어지는 특권은 아니다. “하늘”이 아니라면 그를 불러갈 만한 어떤 공간도 없다는 것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일이 마치고”는 “일을 마치고”의 잘못인 듯하지만 대사전에 보면 “마치다”는 “끝이 나다”라는 뜻의 자동사도 된다. 거의 모든 윤동주 시집들의 원천으로 되어 있는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자필 원고와는 다르게 “일을 마치고”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항간에 그렇게 알려져서 유포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윤동주에게는 자연스러운 용법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을 마친다는 말인가? 긴긴 겨울 동안 억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랑잎처럼 그냥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그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가랑잎은 새잎이 돋아나면 “서럽지도 않”게 저절로 떨어진다. 가랑잎은 자연의 순리대로 그냥 “서럽지도 않게” 떨어지고 만다. 「병원」에도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사람은 서로 교감하여 사람이 슬퍼하면 자연도 슬퍼한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자연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이 없다고 믿는데 이것이 사람의, 특히 시인의 슬픔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믿을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하다. 이 구절에서 윤동주는 그냥 가랑잎처럼 떨어져 버릴 존재이니 무거운 사명 운운하지 말라는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런 가랑잎처럼 그냥 있어도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나를 불러내어 괴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로 몰아가지 말라는 절규인 듯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명분을 가진 소명이라도 무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부름이 반드시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라고 한정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과 뒤섞여서 종교적 의미의 소명,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향한 결단에 대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는 괴롭고 버겁기만 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있는 순간은 “무서운 시간”이며 이 무서운 부름에 무섭게 잘라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윤동주의 무서운 운명이다.   이 시는 절망의 늪에서 아프게 외치는 윤동주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가랑잎”이 손바닥 같은 싱싱한 떡갈나무 잎을 뜻하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정반대로 앙상한 겨울 가지에 붙어 있는 바싹 마른 잎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막히면서도 무섭게 이용하여 이처럼 무서운 시를 만든 것이다. ============================/// 이 시는 화자를 부르는 죽음의 소리가 들리는 시간은 무서운 시간이므로 일을 마치고 서러움없이 죽을 때까지 죽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를 하늘로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무서운 시간(時間)이다. 아직 호흡이 남아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무섭다.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 있는 봄날에, 죽음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하고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었고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다고 나를 부르는가? 일을 끝마치고 내 죽는 날에는 서러움도 없을 것이고 가랑잎이 떨어지는 가을일 것이니 죽음이여 나를 부르지 마라. 너가 나를 부르니 무섭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제목으로 화자가 현재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원인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죽음이 부르는 소리이다. 화자는 해야할 일을 마쳐야하는데 일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이 부르니 화자에게는 ‘무서운 시간’인 것이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는 호흡이 남아 있고 이파리 푸르른 봄의 나무 그늘에 있는 화자를 부르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는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화자가 아직 죽음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은 5연의 ‘가랑잎이 떨어질’과 대응되어 화자가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일이 마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랑잎’은 화자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의지와 소명을 가진 화자를 누군가 부르고 있다. 화자를 부르는 존재는 누구일까? 이 존재는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라고 화자가 말하는 것으로 볼 때에 아직 살아있는 화자가 거부하는 대상이다. 화자를 부르는 ‘누구’는 화자의 호흡이 남아있지 않을 때에 화자를 불러야 정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4연에서 화자가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에 ‘누구’는 ‘하늘’에 화자를 데려가는 존재이면서 화자가 호흡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 즉 죽은 상태에서 화자를 부르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저승사자’ 또는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는 화자가 세상을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이유는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시에서는 ‘꿈, 희망, 이상’을 의미하므로 화자는 살면서 한번도 ‘희망’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절망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화자를 부르는 존재가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화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있어’ 화자를 부른다면 긍정적인 존재일 것인데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나를 부르지 마오.’고 부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누구’가 부르는 시간을 ‘무서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화자를 부르는 ‘누구’는 부정적인 존재이면서 화자에게 ‘한 몸 둘 하늘’을 주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는 화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화자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을 맞이 하고 싶고 그렇게 된다면 ‘서럽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은 화자가 ‘일’을 끝마치고 즉 화자에게 주어진 길을 다 간 후에 ‘내 죽는 날’은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아침’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은 시에서 희망이 이루어진 때를 의미한다.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에서 ‘가랑잎’이 화자의 삶을 의미하므로 ‘떨어질 텐데’는 죽을 것이라는 의미이고 ‘서럽지도 않’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인 ‘가랑잎’이 화자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화자가 ‘일’을 ‘마치고’ 죽기 때문에 죽는 것이 서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아직 화자는 일이 마‘쳐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고 ‘죽음’이 화자를 부르는 시간이 ‘무서운 시간’이 되는 것이다. ‘……’는 아직 ‘일이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오려고 하는 '누구'인 죽음이 주는 ‘무서운 시간’에 대한 온갖 감정이 생략된 것이다. ’나를 부르지 마오.’는 화자가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이 올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화자의 각오가 담긴 말이다.20130710수후1159전한성 참고 “가랑잎”은 보통 가을에 말라서 떨어지는 잎, 즉 낙엽을 뜻하는데 왜 윤동주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라고, 이른 봄철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낱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여, 아니다. 우리는 “가랑잎”의 정확한 뜻을 더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우창은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을 “여기에서는 그것이 그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랑잎까지도 푸르러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효과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물론 틀린 해석이다. “가랑잎”을 그냥 낙엽이라고 해석하고 들어가면 그렇게 좀 억지를 부려야 한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곳에서」, 이선영 편, 『윤동주 시론집』, 바른글방, 1989, 102쪽) 큰 사전에 보면 “가랑잎”은 “갈”이라고도 하며 “갈”은 다시 “떡갈나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랑잎”은 “떡갈나무 잎”이라는 말도 되겠다. 우리 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떡갈나무는 그 넓은 잎이 가을에 바짝 말라도 안 떨어지며 한겨울에도 바람에 부딪쳐 서걱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붙어 있다가 이른 봄에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윤동주가 이 시를 지은 때는 2월이니 늦겨울, 그러니까 떡갈나무의 마른 이파리들이 떨어지면서 파란 새잎이 돋아날 새봄을 내다볼 수 있는 때이겠다. 한참 뒤에 그가 「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누렇게 마른 떡갈나무 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파란 새잎이 돋아 나올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른 가랑잎은 나무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호흡도 극도로 위축되긴 했어도 채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미리 끊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의미의 재생이나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앞으로 곧 피어날 새잎에 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질 묵은 가랑잎에 비한다. 새잎은 밝고 넓은 하늘 향하여 손짓하듯 활짝 피지만 ---푸른 떡갈나무 잎은 활짝 편 손바닥처럼 생겼다--- 그는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묵은 가랑잎 같은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일이 마치고”는 “일을 마치고”의 잘못인 듯하지만 대사전에 보면 “마치다”는 “끝이 나다”라는 뜻의 자동사도 된다. 거의 모든 윤동주 시집들의 원천으로 되어 있는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자필 원고와는 다르게 “일을 마치고”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항간에 그렇게 알려져서 유포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윤동주에게는 자연스러운 용법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을 마친다는 말인가? 긴긴 겨울 동안 억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랑잎처럼 그냥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그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가랑잎은 새잎이 돋아나면 “서럽지도 않”게 저절로 떨어진다. 가랑잎은 자연의 순리대로 그냥 “서럽지도 않게” 떨어지고 만다. 「병원」에도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과 사람은 서로 교감하여 사람이 슬퍼하면 자연도 슬퍼한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자연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이 없다고 믿는데 이것이 사람의, 특히 시인의 슬픔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믿을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하다. 이 구절에서 윤동주는 그냥 가랑잎처럼 떨어져 버릴 존재이니 무거운 사명 운운하지 말라는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같다. 그런 가랑잎처럼 그냥 있어도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나를 불러내어 괴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로 몰아가지 말라는 절규인 듯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명분을 가진 소명이라도 무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부름이 반드시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라고 한정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과 뒤섞여서 종교적 의미의 소명,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향한 결단에 대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는 괴롭고 버겁기만 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있는 순간은 “무서운 시간”이며 이 무서운 부름에 무섭게 잘라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윤동주의 무서운 운명이다. 이상섭∙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평론가  
116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팔복 댓글:  조회:5828  추천:0  2018-07-23
         팔복 /윤동주       -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1940년 12월 추정)       (읽은자의 몽상) 윤동주시인은 마태복음 5장 3~12절, '팔복'을 차용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복음 모두가 '슬픔'으로 치환되어 시인의 마음으로 기록된다.  시인의 '슬퍼하는', '슬플'은 극진한 측은지심의 발로로 보인다. 점령당한 조국과 떠도는 동포에 대한 '슬픔'은 시인에게 조국을 향한 마음과 행동으로 이끈 내적동기인 듯하다.    마치 석가모니가 카필라성의 세자로 동문 밖에서 늙은 노인, 남문 밖에서 병자, 서문 밖에서 장례식, 북문 밖에서 사문(沙門,수행자)을 보시고 인생의 생로병사를 슬피여기셔서(고,苦), 출가를 하시게 되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시인의 마음과 종교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김응교교수는 강좌를 통해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그의 타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강조했다. 이는 윤동주가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였다는 점, 또한  가문을 통해 이어 받은 민족정신, 신앙심에 기반해있다.  28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는 22년 4개월은 중국에서 생을 보냈다.  4년 남짓한 국내 체류기간 동안 그가 한국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시 에 잘 나타난다. “매우 복잡한 소속이죠. 윤동주에게 있어 정체성은 평생의 질문이자 시의 주제였습니다.”     팔복(八福)            -윤동주(1917~1945)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산상수훈의 패러디인 이 시에서 복의 여덟 가지 조건들은 '슬퍼함' 하나로 압축된다. 일제 말의 가혹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대응이다. 같은 문장을 여덟 번 썼으니 '저희'는 복수로서  ‘그들'이나 '우리'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어째서 복이 슬픔인가. 수훈의 부정도 신성모독도 아닐 것이다. 이 슬픔의 끝을 묻지 않는 것에, 슬픔의 영구 실천 속에 희망의 씨앗이 있다는 뜻 아닐까. 사도와 시인에게 슬픔은 복이다.            ====================/// 윤동주의 시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상'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일본 도쿄대 비교철학연구소의 나카지마 다카히로 교수는 오늘(2017년 12월 8일) 연세대에서 열린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윤동주, 우리의 동시대인'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며 윤동주의 시를 이같이 철학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윤동주의 시 '무서운 시간'의 마지막 행 "나를 부르지 마오"와 '서시'의 첫 행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연결지어 "윤동주가 시인으로서 우리의 동시대인이 된 것은 그 거절에 있어서이다. '부끄러움'이란 윤동주의 윤리감각인 동시에 부끄러운 시대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또 '쉽게 씌어진 시'의 구절을 인용해 "시 한 줄 쓰는 것으로 '어둠을 조금 내몰'려고 하는 시인은 다음의 시대를 대망한다. 시인으로서 다음 시대의 등불을 밝히면서 '최후의 나'를 배웅한다"고 풀이했다.  이어 "1943년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체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부당한 체포이며 윤동주는 이른바 사상범이 아니지만, 사상이 시대에 절단선을 긋고 시대를 도려내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한다면 윤동주 시의 업적 또한 문학의 한 장르를 넘어서서 '사상으로서 시'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 경찰은 민족 독립의 정치활동에 필적하는, 아니 그것을 능가하여 마음을 불온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시인의 시에서 느꼈을 것"이라며 " 윤동주의 고종 사촌 형이자 친구인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세계를 바꾸는 혁명가라고 한다면 윤동주는 시대를 바꾸는 시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116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위로 댓글:  조회:2929  추천:0  2018-07-22
위로  윤동주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ㅡ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퍼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ㅡ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해석] 1. 거미의 '흉한 심보'  - 화자의 감정이입.  - 거미가 일부러 자신보다 강한 인간의 손을 피하려고 인적 드문 곳에 거미줄 쳐 놓았다고 생각함.  - 꽃밭에 도달하기 전에 나비를 잡으려고 꽃밭과 뒤뜰 난간 사이에 거미줄을 쳐 놓음  - 사나이가 누워서 잘 쳐다볼 수 있는 곳에 거미줄을 쳐 놓았다. (비수를 꽃는 행동)   2. 사나이가 한숨을 쉬는 이유  - 사나이는 노-란 나비(본인에 대입)가 꽃밭(이상향)에 도달하길 바랐지만 영악한 거미의 흉한 심보로 인해 허우적 대는 나비를 본인에 대입했다. 감정이입.   3. 진짜 화자의 등장과 위로.  - 진짜 화자는 위로를 섣불리 건내지 않고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며 젊은 사나이를 위로한다.   [감상]  윤동주 선생님의 상황에 비유한다면 젊은 사나이는 본인, 거미줄과 거미는 일제 강점기, 꽃밭은 독립을 뜻한다. 적절한 비유를 통한 시의 전개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화자에 대한 공감과 위로 능력이 돋보인다. 상대방을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일은 그 누구든 힘들고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와 공감이 순도 100%가 되기 위해선 '내'가 '아픈 사람'이 되어야 한다. 화자는 나비에 대한 한탄과 거미에 대한 비방보다 그 상황 자체를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주고 있다.  누군가가 힘들고 지칠 때 '말'로만 표현하지 말고 떄로는 직접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116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장미 병들어 댓글:  조회:2733  추천:0  2018-07-19
    장미 병들어                                              윤동주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   뚜 -구슬피 화륜선(火輪船)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成層圈)에 보낼거나 ​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   자라가는 아들이 꿈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 ​ ​==========/// 오늘은 오랜만에 윤동주님의 시 한편을  읽어봅니다.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장미 병들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어두운 일제강점기의 현실에  침울해있던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시절에 산울림, 비 오는 밤, 사랑의 전당, 슬픈 족속 등과 같이 생활 속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막연한 방황에서 탈피를  모색하며 쓴 시라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국치의 울분을 달래며  한 맺힌 일생을 시로 표현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다가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죠.           윤동주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 구슬피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이 시는 자라가는 아들이 병든 장미를 보고 꿈을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의 가슴에 묻어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미 병들어 있다. 이 장미를 다른 곳에 옮겨 놓을 이웃이 없다. 이 장미를 달랑달랑거리며 외로이 가는 포장이 씌여진 황마차 태워 산에 보내야 하나? 아니면 뚜―― 하며 구슬피 우는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내야 하나? 아니면 프로펠러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나는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내야 하나? 아니다.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에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는 장미가 병들었는데 이 장미를 옮겨 놓을 이웃이 없다는 말이다. 이 때 ‘장미’는 우리가 식물이 아니라 상징으로 쓰였다. 이 ‘장미’를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에서 알 수 있다. 식물이라면 ‘가슴에 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랑달랑 외로이 / 황마차 태워 산에 보낼거나 // 뚜―― 구슬피 /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는 화자가 ‘장미’를 ‘아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낼 궁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달랑달랑 외로이’는 ‘황마차’를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이다. ‘뚜―― 구슬피’는 ‘화륜선’을 생각하며 느끼는 감정이다. ‘황마차’는 포장이 처있는 마차를 말한다. ‘산’, ‘대양’, ‘성층권’은 화자와 ‘아이’가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먼 곳을 말한다. 이렇게 장미를 먼 곳으로 보내려고 궁리하는 것은 ‘장미’가 병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자라가는 아들이’ 병든 ‘장미’를 보고 ‘꿈’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저것 / 다 그만두고 //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는 앞 연의 방법을 다 포기하고 아들이 꿈을 깨기 전에 화자의 가슴에 묻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꿈’은 화자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 또는 ‘소망’ 등으로 ‘장미’로 표현되었다. 그러기에 ‘아들’은 병든 ‘장미’를 보면 가지고 있는 ‘꿈’이 깨지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아들’이 병든 ‘장미’를 보고 실의에 잠겨 ‘꿈’을 깨기 전에 ‘아들’이 ‘꿈’을 가지고 자라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인 ‘가슴’에 병든 ‘장미’를 옮겨 심어서 ‘장미’를 회복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옮겨 심는다는 말 대신에 ‘묻어다오’라고 말을 한다. 이 단어는 앞선 해석과 달리 병든 ‘장미’를 화자의 ‘가슴’에 숨겨서 아들이 병든 ‘장미’를 찾아 볼 수 없도록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산’, ‘대양’, ‘성층권’은 멀기는 하지만 ‘황마차’, ‘화륜선’, ‘비행기’를 타고 갈 수는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화자의 ‘가슴’은 아들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실제의 장소가 아니고 화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깰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 앞선 해석이 전체적인 맥락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의 태도는 매우 수동적이다. 자신이 직접 옮겨 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묻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1연에서 ‘옮겨 놓을 이웃이 없’기 때문이다. 화자가 옮겨놓을 마음을 먹고 스스로 할 때까지.20161123후0434전한성      
1160    윤동주와 윤석중 댓글:  조회:4056  추천:0  2018-07-18
  시대 현대 출생 1911년 5월 25일 사망 2003년 경력 새싹회 회장 유형 인물 직업, 이름 아동문학가 - 윤석중 대표작 『윤석중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어깨동무』, 『굴렁쇠』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본관 파평 요약 1911∼2003. 아동문학가. 목차 개설 생애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개설 아명 노마, 호 석동(石童). 1911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수표동 13번지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이 일찍 죽어 독자로 살았다. 1921년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했다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가 발발하자 자퇴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뽑혀서 일본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에 유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박용실과의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생애 1923년 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심재영, 설정식 등과 소년문예단체 꽃밭사를 결성하고 동인지 『꽃밭』을 발간했으며, 1924년소용수, 이원수, 이성홍,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 이정구, 윤복진, 최경화 등과 글벗사를 만들어 동인지 『굴렁쇠』를 발간하며 일찍부터 소년문예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소년주간』 주간, 1945년 『주간 소학생』 주간,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 등을 거치면서 동요의 창작과 보급에 일생을 바쳐 ‘한국 동요의 아버지’로 불린다. 활동사항 그는 13세의 나이로 『신소년』에 동요 「봄」이 입산되고,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다음,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되었으며,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그는 작품의 소재를 어린이들의 일상과 자연에서 찾았다. 그의 동요 세계는 4·4조나 7·5조의 형태에 반복과 대구를 사용하던 초기의 정형동요에서 시적 동요로 나아갔고, 낙천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어린이들의 밝고 긍정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형상화한 특징을 보였다. 그는 1956년 1월 3일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등과 새싹회를 창립하여 어린이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고, 1961년 장한 어머니상 제정했으며, 1964년 마해송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해송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67년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전국 30여 개 초등학교의 교가를 지어주었다. 그는 1974년 방송용어심의위원장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1977년 『새싹문학』과 『한글나라』 주간을 지냈다. 그는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79년 방송윤리위원장,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초대 방송위원장, 1986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1997년 마해송문학비건립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2003년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 2005년부터 새싹회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 동요집 『윤석중동요집』(1932), 『잃어버린 댕기』(1933), 『어깨동무』(1940), 『새벽달』(1943), 『초생달』(1946), 『굴렁쇠』(1948), 『아침까치』(1950), 『윤석중 동요 100곡』(1954), 『노래동산』(1956), 『노래선물』(1957), 『엄마손』(1960), 『윤석중동요집』(1963), 『해바라기 꽃시계』(1966), 『카네이션 엄마꽃』(1967), 『꽃길』(1968), 『윤석중 노래동산』(1971), 『윤석중 동요 525곡집』(1980), 『아기꿈』(1987), 『윤석중전집 (1-30)』(1988), 동요동시집 『여든 살 먹은 아이』(1990), 『그 얼마나 고마우냐』(1994), 『반갑구나 반가워』(1995),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1999), 동화집 『열손가락 이야기』(1977), 『열두 대문』(1985), 아흔 기념 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2000) 등이 있고, 기간 작품들은 『윤석중전집 (1-30)』에 집성되어 있음. 상훈과 추모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리몬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 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KBS동요대상(1990), 인촌상(1992) ==========================     출생 1911. 5. 25, 서울 사망 2003. 12. 9,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아동문학가. 1924년 지에 동시 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의 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방정환 선생의 뒤를 이어 지 주간을 맡았으며, 일생을 동요와 글짓기에 바쳤다. 대표작은 ·· 등이다.   윤석중(尹石重) 아동문학가.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0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마쳤다. 1924년 에 동시 과 1925년 에 를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 및 반복과 대구를 사용해 율동적 표현을 구사하는 동시를 개발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주간, 1936년 주간을 역임했으며, 이후 편집고문, 고문,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3년 '새싹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에 펴낸 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며, 여기에 실린 ··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1933년에 펴낸 동시집 에는 기존의 3·4조나 7·5조의 음수율을 벗어난 동시 여러 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는 이 동시집을 통해 글자수를 맞추어 지은 것을 동요라 하고 자유롭게 지은 것을 동시라 하여 동시의 문학적 성격을 규정했다. 동시집으로 (1940)·(1948) 등과 동화집으로 (1966)·(1977) 등이 있다. 1961년 3·1문화상, 1979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대한민국 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22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   한자 尹石重 영어음역 Yun Seokjung 이칭/별칭 석동(石童),노래 나그네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정의] 충청남도 서산이 원적인 근현대 아동문학가. [가계] 본관은 파평. 호는 석동(石童).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윤덕병[1885~1950]이고 어머니는 조덕희다. 부인은 박용실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다. [활동 사항] 윤석중(尹石重)[1911~2003]은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 자녀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들도 일찍 죽어 외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이름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석중(石重)으로 지었다고 한다. 외로운 환경 탓에 일찍 자아에 눈을 떴고, 유년 시절 풀지 못한 수많은 의문이 훗날 어린이를 위한 시를 짓고 문화 운동을 펼치는 자양분이 되었다. 윤석중은 1921년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초등 교과서에 실린 일본 노래 「봄이 왔다[春が来た]」에서 모티프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봄」을 썼다. 이 시가 『신소년』에 실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았다. 1923년 심재영(沈在英)과 『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창간하였다. 심재영은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沈熏)의 조카이다. 1925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어린이』 잡지에 「오뚝이」가 입선되어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같은 해 8월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을 1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 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 보았다. 『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 잡지 굴렁쇠’라 쓰고 회원들이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넣어서 편집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어린이』의 부록인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렸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정환(方定煥)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이후 한층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윤석중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졸업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이듬해 짧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2년 7월 첫 창작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하였다. 1933년 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발간하고, 방정환을 대신하여 『어린이』 잡지의 주간이 되었다. 1935년에 황해도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혼인을 하였다. 결혼식 주례는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 여운형(呂運亨)이 섰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어린이 잡지 『소년』의 편집을 맡았다. 국내 최초의 그림 잡지 『유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가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벨기에인 고라르 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 『빛』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날 노래」를 지었다. 졸업식에서 불리는 「졸업식 노래」도 윤석중의 작품이다. 가사 중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부분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며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그렇게 많은 꽃다발이 등장할 줄 몰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편 윤석중은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을 모두 잃었다. 또다시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그는 이듬해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아서 책을 펴냈다. 어린이의 글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새싹회로 바꿔 새로 창립하고 합창단과 합주단, 글짓기 교실 등 어린이를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957년에는 소파상을 제정하고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다. 이 책은 2011년 현재 115호까지 발행되었다. 윤석중은 스스로를 ‘노래 나그네’라고 부르며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다가 2003년 12월 9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작품과 저술] 윤석중의 작품 활동과 저술, 그리고 관련 활동은 매우 방대하다. 일생동안 1,300여 편의 시를 썼고, 이 가운데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져 불리었다. 전국 30여 학교의 교가를 짓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새신」, 「똑같아요」, 「옹달샘」, 「나란히」, 「기찻길 옆」, 「집 보는 아기」,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8년 동양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윤석중은 수상 소감에서 “어린이는 나의 스승이다. 동심은 국경이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라는 말로 평생 품어 온 어린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 문학제가 해미읍성과, 서산 호수공원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윤석중 동시 "넉 점 반" 윤석중 시인이 1940년에 발표한 〈넉 점 반〉이라는 동시가 있습니다. 부잣집에나 시계가 있던 시절에 엄마가 아이에게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모양입니다. 과연 아이는 엄마 심부름을 잘 완수할 수 있을까요?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 윤석중, 〈넉 점 반〉 절로 미소 짓게 하는 예쁜 동시입니다.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오긴 했으나,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여기 저기 기웃기웃 닭 구경하고, 개미 구경하고, 잠자리 따라 돌아다니고, 분꽃 물고 놀고, 그러면서도 엄마 심부름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계속 “넉 점 반, 넉 점 반” 합니다. 그리곤, 해가 꼴딱 져 돌아와서는 당당하게 말하지요. 인용문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아이에게 시방은 지금도 시방이고, 아까도 시방입니다. 그러니, 계속 넉 점 반일 수밖에요. 그런데 넉 점 반은 도대체 몇 시일까요? 그리고 아이는 대략 몇 시간 동안 해찰하며 돌아다녔을까요? 넉 점 반은 4시 반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시간을 표시하는 표시로 ‘점’을 사용했는데 구체적으로는 괘종시계가 종을 치는 횟수를 뜻했습니다. 아이가 가겟집에 가서 몇 시냐고 물어봤을 때 시간은 4시 반. 잠자리 따라 돌아다니고,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했다는걸 보니까 계절은 여름. 그리고 여름에는 대략 8시가 넘어야 해가 꼴딱 지니까, 네 시간 가량 놀다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요. 지금 몇 신지 알아오라고 심부름 보낸 아이가 저녁 여덟 시 넘어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엄마, 지금 네 시 반이래.” 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가슴 따뜻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윤석중 시인의 〈넉 점 반〉, 우리에게도 그처럼 지금이 몇 시인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115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자화상 댓글:  조회:5670  추천:0  2018-07-18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 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서사시인이 있고, 서정시인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이 있다. 서사시인은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체로 전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시인이고, 서정시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통해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는 시인이며, 그리고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며, 영혼이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호머와 단테와도 같은 서사시인은 매우 드물고, 보들레르와 랭보와도 같은 서정시인은 매우 많으며----비교적 드물지 않으며----, 이름뿐인 삼류 시인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윤동주 시인은 서정시인이며, 자아의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자아의 형성사가 세계의 발전사와 그 보조를 맞추고, 따라서 이처럼 피눈물 나는 수행의 모습은 대 서정시인의 그것과도 똑같다. 시인은 순교자이고, 고행자이며, 그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은 예술품 그 자체와도 같다. 시는 시인의 예술품이고,예술품은 시인의 얼굴과도 같다. 순교, 혹은 고행의 과정은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의 왕복운동과도 같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은 국보급 [자화상]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할 최고급의 서정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한 사나이는 이상적인‘나’일 수도 있고, 한 사나이는 현실적인‘나’일 수도 있고, 우물 밖의‘나’는 그‘나’를 비판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심판관으로서의‘나’일 수도 있다. 산모퉁이 외딴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 가을은 맑고 청아하고, 가을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오곡백과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물 속의 한 사나이는 그만큼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고귀하고 위대한 서정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쓰지 못하고, 이미 자포자기했거나 반쯤은 전의를 상실한 존재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시인은 인간 중의 인간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언어의 소유권을 통해서 전체 인류를 지배하는 문화적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정시인의 길은 멀고 험하며, 서정시인의 길은 이미 그 실체가 없거나 불가능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고귀하고 위대한 이상에 비추어 보면, 우물 속의‘나’는 더없이 비천하고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애정과 자기 사랑은 중단없는 전진을 좋아하고, 혐오와 자기 학대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이나 패배와의 관련이 있다.   모든 꿈은 불가능한 꿈이고, 불가능한 꿈은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 사이를 왕복운동하게 한다. 따라서“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여워”지는데, 왜냐하면 그 이상은 다만 이상일뿐, 결코 현실화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열 번, 백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초라한 사나이는 초라한 사나이일 뿐, 나의 이상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라는 시구는 애정과 혐오, 혹은 자기 사랑과 자기 학대의 진수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도 고행자이고, 순교자도 고행자이다. 고행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며, 이 고행의 언어는 만국의 공통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중에는 폭풍을 몰고 오는 말도 있고, 말 중에는 소리가 되지 못한 말도 있다. 폭풍을 몰고 오는 말은 가짜 혁명의 말일 수도 있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진짜 혁명의 말이 될 수도 있다. 혁명은 새로운 언어이며, 혁명은 새로운 세계이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의 언어는 조용조용하고 소리가 되지 못한 독백의 언어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처럼 전면적인 반성과 성찰의 언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더욱더 넓고 크게, 멀리 멀리 퍼져나간다.   자화상이 자화상을 짓밟고, 자화상이 자화상의 목을 비틀며, 자화상이 자화상의 최종 단계에서 그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보인다.   아름답고 멋진 자화상이며, 국보급의 자화상이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최고급의 서정시이다.     ...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이다. 1939년이라면 그가 23세 때이고, 연희전문 2학년이었던 시절이다.   시 속의 우물은 어디일까. 이 우물이 어디냐를 두고 사람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예전에는 만주 용정 인근의 명동(明東: '동쪽=조선을 밝게 만들자'는 뜻에서 마을사람들이 붙인 동명) 소재 윤동주의 고향집에 있는 '물맛 좋던 수십 길 깊이의 우물'이 바로 속의 우물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연세대 유영 교수가 '명동집의 우물은 수십 길이나 되는 깊은 우물인데 그 안에 대고 소리를 치면 우물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깊은 우물에서는 얼굴을 비춰볼 수가 없다'면서 이 쓰인 시기가 동주가 서소문에서 하숙하던 때이고, 그 하숙집 인근에 우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 우물이 시 속의 우물이라고 주장한 이래 우물의 소재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러나 시를 곰곰 읽어보면 윤동주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때는 낮이 아니라 밤이다. 우물 안에 달이 있으니 응당 밤이다. 그렇다면 그 우물의 깊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달이 떠 있는 우물은 없으니까 말이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면, 달만이 아니라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사나이(=나)도 물에 얼굴이 비칠 리가 없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그것도 우물 물에 무슨 얼굴이 비치랴. 우물이 고향집의 것이냐, 서소문 하숙집 근처의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물은 용정 명동도 서소문도 아닌, 대도시도 농촌마을도 아닌, 심지어 산 아래나 비탈도 아닌, '산모퉁이를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을 가'나 '동구(洞口)'도 아닌 '논가'에 있는 우물이니 말이다.  그런 우물에, 사나이는 지금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안에 있다. '홀로' 찾아갔으니 물론 '홀로' 있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져 있고 파아란 바람도 우물 위로 불고 가을도 한창이지만, '어쩐찌' 쓸쓸하다. 그 아름다운 자연도 하나같이 쓸쓸하다.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 이 모든 것이 말이다. 사나이가 '홀로' '외딴' 곳에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이 캄캄한 밤 , 그 우물에 비친 것들이 어찌 쓸쓸하지 않으랴.   그 쓸쓸함에 젖어 있는 사나이가 윤동주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밉다.' 그래서 그를 떠나는데, 조금 지나니 그가  '가엾다.' 가여운 고독자를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어 그의 곁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여전히 '홀로' 있는 걸 보니 다시 '밉다.' 재차 그를 떠나 가다말고 '생각하니' 이제는 그가 '그립다.' 그도 혼자이고, 나도 혼자이니 어찌 그립지 않을까. 동병상련이다. 예나지금이나 변하지 못하는 채 여전히 '홀로' ('사나이'는 '한' 사나이이다.) 존재하는 사나이를 '홀로' 찾아간 '나'의 마음은 애증(愛憎)으로 뒤범벅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밉다. 낮이 아닌 밤에, 세상이 아닌 우물 속에, 해가 아닌 달과 함께, 강건하고 견고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하늘을 이리저리 흐르는 구름이나 파아란 바람처럼,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처럼, '홀로' 갇혀있는 내가 밉다. '어쩐지' 밉다. 그러나 그가 바로 나 스스로이니, 가엾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껴안기도 하지만, 문득 미운 마음은 다시 소용돌이를 친다. 나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 스스로를 떠난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립기도 하다. 밉고, 가엽고, 또 밉고, 그립고, 그렇게 애증으로 뒤범벅된 존재가 바 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추억(追憶)이다. 어쩐지 미운 것이 나 자신이고, 생각해보면 가여운 것이 나 자신이고, 돌이켜보면 미운 것이 나 자신이고,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운 것이 나 자신이니, 나는 영원한 추억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의 여운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것이 여운(餘韻)이다. 의 끝 구절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와 마찬가지이다. 피천득의 수필 이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로 끝나는 것도 같은 방식의 끝맺음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애는 하루하루가 나날이 여운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는 행복하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것을 바라보며 추억처럼 잠에 빠져들면서, 내일 하루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삶, 그렇게 사는 그가 어찌 행복하지 않으리.   다 쓰고 나니, 추억처럼 윤동주의 생가가 떠오르고, 노트북 앞에 나는 추억처럼 앉아 있다!                         (사진) 만주에 있는 명동교회 건물. 용정 일대에 최초로 건립되었던 교회인 이 명동교회는                       윤동주 생가 바로옆에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윤동주 생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명동 일대의 역사(독립운동 등)를 해설하는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제재 :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주제 :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특징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출전 : “문우”(1941) 작품의 구성 [1연] 우물을 찾아가 자아를 성찰함. [2연] 우물 속의 평화로운 풍경 [3연] 초라한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 [4연] 자아에 대한 연민 [5연] 자아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6연] 추억 속 자아에 대한 그리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는 2연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작품 연구실 이 시의 화자와 ‘사나이’의 관계는?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으로, 때로는 밉지만 때로는 가엾거나 그리워지는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화자를 ‘사나이’를 바라보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반성적 자아라고 한다면, ‘사나이’는 성찰의 대상으로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우물’의 기능   이 시에서 ‘우물’은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한다. 화자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즉, 우물은 화자에게 현실 속의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아 성찰에 이르도록 하는 매개체로, 화자는 우물을 통해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시대 상황과 연관된 화자의 정서 및 태도 변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일제 강점기라는 부정적 현실 상황에서 화자는 현실과 타협, 안주하려는 자신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를 혐오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 그런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연민의 정서를 느끼고, 다시 미워했다가 순수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태도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애증을 반복하던 화자는 마지막에서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추억을 통해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연민과 미움의 이중 감정 화자가 우물을 통해 달과 구름, 하늘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를 지상에 옮겨 놓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래서 ‘미워져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되돌아오는, 연민과 미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성찰의 과정에는 자기에 대한 미움과 연민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는 부끄러움과 거의 같은 자리에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반성과 내면 성찰의 시인 윤동주의 시 세계 전반을 지배하는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는 가장 기초적이며 근원적인 사색의 형식이다. 이는 윤리적인 존재가 되려는 의지를 표방하는 인간에게 존재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윤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최고선(最高善)의 실현에 있다고 할 때 윤동주의 반성과 성찰은 나약한 자기 위로나 달램이 아닌 철저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자화상’, 서정주/자아 성찰의 태도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 모두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자화상’이 ‘부끄러움’과 ‘내적 화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서정주의 ‘자화상’은 ‘치열한 삶의 과정에 대한 회고’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작품 설명 [‘자아 성찰’을 주제로 한 작품] 윤동주의 ‘자화상’은 우물을 자아 성찰의 매개체로 하여 둘로 양분된 자아가 부정과 긍정을 거듭하다가 화합에 이르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참회록’과 ‘자화상’은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는 대상인 ‘구리거울’과 ‘우물’을 매개로 하여 ‘자아 성찰’이라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참회록’의 화자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암울한 현실에 맞서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전망하고 있는 반면에, ‘자화상’의 화자는 우물을 매개로 순수했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핵심 정리   참회록 자화상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자기 성찰적, 고백적, 상징적 성찰적, 고백적 제재 구리거울, 부끄러운 자기 삶의 참회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주제 자기 성찰을 통한 순결성 추구, 현실 극복 의지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특징 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구리거울을 매개로 치열한 자기 성찰의 모습을 보여 줌.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참회록(윤동주)과 자화상(윤동주)의 이해와 감상 참회록(윤동주) 이 시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삶에 대한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 시는 화자가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을 차례로 참회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자화상(윤동주)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는 앞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작품 설명 [자아 성찰의 태도]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 모두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자화상’이 ‘부끄러움’과 ‘내적 화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서정주의 ‘자화상’은 ‘치열한 삶의 과정에 대한 회고’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핵심 정리   자화상(윤동주) 자화상(서정주)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성찰적, 고백적 상징적, 회고적, 고백적 제재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자화상 주제 자아 성찰과 자신에 대한 애증(愛憎) 지난 삶에 대한 회고와 성찰 특징 ①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진술함. ② 시상 전개에 따라 화자의 심리가 분명한 변화를 보임. ① 삶을 성찰하면서 강한 삶의 의지를 드러냄. ② 고백적 어조와 직접 서술의 형태를 취함. 자화상(윤동주)과 자화상(서정주)의 이해와 감상 자화상(윤동주) 이 시는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든 문장을 ‘-ㅂ니다’로 끝내는 평이한 구어체를 사용하여 산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물은 화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이 우물에는 화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는 우물에 비친 화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화자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암담했던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니 가여움이 생겨 다시 들여다보고, 또 미워져 돌아가고, 다시 그리워지는 심리적 갈등을 보인다. 이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는 앞의 장면을 되풀이하면서 시적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고 있으며,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추억하면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자화상(서정주) 이 시는 시인이 초기에 쓴 시로 강렬한 생명 의식과 원시적 관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 ‘자화상’이 보여 주듯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종의 아들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 왔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바람’에 비유한다. 이는 바람처럼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화자에게 더욱 굳세게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찬란히 틔어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은 삶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얻은 정신적 · 예술적 결정체로 볼 수 있다. ==========================///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마음이 여린 영혼의 소유자란 생각이다. 이렇게 여리디 여린 심성의 소유자를 우리는 조금은 억센 의미가 담긴 ‘저항시인’이라고 학교에서 가르쳤다. 실제 그의 시에는 어느 곳 한 군데 저항의 자세라든가, 아니면 조국광복을 생각하는 구절이 없다. 오로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아성찰이 돋보일 뿐이다. 그 자아성찰조차도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다가온다.   산문시처럼 쓴, 6연으로 된 이 시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논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에 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기서 우물은 거울과 같은 이미지이다. 샘물이란 의미보다는 우물물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리라. 즉 객관적 자아성찰이다.   우물 속에는 달, 구름, 하늘, 바람 등이 아주 평온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화자가 물에 비친 것으로 이는 곧 성찰된 자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밉다. 즉 평온한 배경과는 달리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다.   문득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서고 만다. 이를 ‘자기혐오’라고 어느 평론가가 지적하는데 꼭 그렇게 심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다 생각하니 사나이가 가엽다는 느낌이 든다. 앞에 것이 자기혐오라면 이는 자기연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가서 들여다본다. 이어 3연의 반복이 나오는데, 이는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망설임일 것이다. 돌아섰다가 다시 되돌아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시 속 화자에게는 미워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미워하는 대상은 현재의 내 모습이요, 그리워하는 대상은 어쩌면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과거의 내 모습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연에 나오듯이 추억에 잠기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리라.   마지막 연에서 1, 2 연을 한꺼번에 묶어 반복한다. 그러면서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이‘추억’은 그리움 혹은 동경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온한 배경을 뒤로 하고 우물 속에 또 다른 자아, 즉 추억처럼 서 있는 – 과거의 내 모습이 있고, 이를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윤동주는 시 말미에 1939년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세상에 빛을 본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39년 현재의 내 모습을 미워하며 이전의 나, 즉 어린 시절 혹은 유년 시절의 순수했던 소년 시절의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자아성찰을 독자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우물 속에 달, 구름, 하늘, 바람이 보인단다. 구름과 하늘이 보이면 낮인 것 같은 데 달이 보인다고? 그럼 낮달? 그렇다면 왜 ‘낮달’이라 하지 않았을까. 우물 안을 들여다 본 경험으로 밤에 뜬 달까지 한꺼번에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윤동주의 시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 전편에 흐르는 자아성찰과 자기연민이 아주 슬프게 그려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        
1158    윤동주 동생 윤일주 댓글:  조회:2846  추천:0  2018-07-18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동시집 영원한 소년 윤동주와 아우 윤일주의 동시를 만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2017년도)을 맞아 윤동주와 그의 아우 윤일주의 동시를 한데 엮었다. 윤일주는 형 윤동주가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부쳐 준 문예지를 읽으며 형과 같은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꿈을 키운다. 그는 형의 시심에 영향을 받는 한편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일구었다.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민들레 피리」에는 형을 따르는 아우의 그리운 마음과 형제의 애틋한 우애가 절절하다. 익히 읽혀 온 윤동주의 동시뿐 아니라 그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윤일주의 시 역시 우리 동시의 귀중한 자산으로 새로이 조명할 필요가 있다. 두 형제가 시를 통해 펼쳐 보인 천진한 소년의 마음은 어린이뿐 아니라 시를 아끼는 독자들에게 기꺼이 간직됨직하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본문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시인 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윤동주와 그의 동생 윤일주(1927∼1985)가 쓴 동시를 묶은 '민들레 피리'(창비)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윤동주가 1935년부터 3년여간 쓴 동시 34편과 아우 윤일주가 쓴 동시 31편이 담겼다.   윤동주의 동시는 그가 쓴 주옥같은 시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밈없는 동심을 깨끗한 서정으로 그린 뛰어난 작품들로 아동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가족의 가난하고 고된 삶까지도 밝게 끌어안는 낙천적인 동심과 아기자기한 운율이 두드러진다. "누나의 얼굴은/해바라기 얼굴./해가 금방 뜨자/일터에 간다.//해바라기 얼굴은/누나의 얼굴./얼굴이 숙어 들어/입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넣을 것 없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빨랫줄에 걸어 논/요에다 그린 지도는/지난밤에 내 동생/오줌 싸서 그린 지도//꿈에 가 본 엄마 계신/별나라 지돈가/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윤동주는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만주의 아우들에게 문예지를 부치거나 동화를 권해주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아우 중 특히 윤일주는 건축학 학자·교수가 된 뒤에도 일하는 틈틈이 동시를 썼다. 작고한 뒤인 1987년 유고 동시집이 출간됐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됐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보잘것없는 존재를 귀하게 여긴 형 윤동주의 정신을 이으면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이뤘다. 따뜻한 서정성과 순수함을 담은 시들은 형의 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본문   "숯불은 따뜻하게/피어오르고//아기는 토끼처럼/잠이 들었네.//아기가 잠든 새에/엄마는 장에 가고//아기가 깰까 봐/함박눈도 가만가만/소리 없이 내리네." (윤일주 '함박눈') "새벽 아닌 대낮에 어디선지/길게 오는 닭 소리 들려옵니다.//울며 울며 팔려 간 우리 집 수탉/어쩐지 그 수탉의 소리 같아요." (윤일주 '대낮') "햇빛 따스한 언니 무덤 옆에/민들레 한 그루 서 있습니다./한 줄기엔 노란 꽃/한 줄기엔 하얀 씨.//꽃은 따 가슴에 꽂고/꽃씨는 입김으로 불어 봅니다./가벼이 가벼이/하늘로 사라지는 꽃씨.//-언니도 말없이 갔었지요.//눈 감고 불어 보는 민들레 피리/언니 얼굴 환하게 떠오릅니다.//날아간 꽃씨는/봄이면 넓은 들에/다시 피겠지.//언니여, 그때엔 우리도 만나겠지요." (윤일주 '민들레 피리') 우리 옛말에서 '언니'는 동성의 손위 형제를 부르는 말로 쓰였다. 윤일주는 이 시에 형 윤동주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이 동시집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조안빈의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실려 시의 정취를 더한다.   윤동주 윤일주 형제 동시집 '민들레 피리' ==========================/// 선백(仙伯)의 생애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을 詩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舍兄(사형)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전 일이었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 明東(명동) -(현주소 : 중국中國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 가시어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어 맏손주를 볼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였습니다.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용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海煥(해환)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2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大拉子(대랍자)라는 곳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詩 『별 헤는 밤』의 佩(패), 鏡(경), 玉(옥)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용정 은진중학교(註. 1932 ~ 1935)에 입학하자, 저희 집은 용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 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운동복이거나 문학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 가는 것에는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 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註. 1935 ~ 1936)에 옮기였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 합니다. 이 즈음 백석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註. 1936 ~ 1938)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詩稿(시고)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문학 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동경에 유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의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로 온것은 1938년 봄이었습니다.   상경하자 두분 다 延專(註. 1938 ~ 1941, 연희전문학교 문과, 現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그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도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소꼴도 비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앉어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傷(상)함을 입어 끓어오르는 時興(시흥)과 독서시간의 아쉬움에서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미소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마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관유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정은 인구 10만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으스름때면 의레이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북원백추(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연소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註. 1941. 11. 20. 作, 『서시』 中에서)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은 그의 천품의 기록이었습니다. 방학때 마다 짐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小川末明(오가와 호노카) 동화집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판화지 『백과 흑』7, 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구득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8백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 지이드 전집 기간분 전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적, 발레리 시전집, 불란서 명시집과 키에르케고르의 것 몇 권, 그밖에 原書(원서)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찬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 『참회록』이란 시를 써놓고 도일하여 立敎(릿코)대학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침대에 걸터 앉아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북대학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그 학교 입학수속 치르러 오라는 전보까닭이었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여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드랍니다. 아마 운명시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동북대학(註. 1942, 당초 일본 미야기현 도호쿠東北대학이 아닌 도쿄東京 릿교立教대학 영문과에 입학)에 간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동지사(註. 1942 ~ 1943,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습니다.   東京(도꾜)와 京都(교또)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戰火(전화)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 –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의 11절 1942. 6. 3.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실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습니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외,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화물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교또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압천서(鸭川署)에 미결로 있는 동안 당시 동경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 이래, 한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길이 없었으나, 『영화대조 신약성서(英和对照新约聖書)』을 보내라고 하여 보내 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상기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형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후쿠오카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不然(불연)이면 九州帝大(큐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하시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망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땅 간도에 돌아왔습니다. 약 20일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내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上梓(상재)함에 있어 사제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舍第(사제) 一柱(일주) 謹識(근지)   (정음사 1955년 2월 16일 발행 – 2016년 3월 1일 발행) ======================== 교토(京都)에서 우연히 만난 윤동주의 잔영(殘影)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 정류장은 도시샤(同志社) 대학 앞입니다."   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던 필자는 안내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도시샤(同志社) 대학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차 확인하자 운전사는 ‘내려서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   서정문에서 바라본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에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대학은 한 청년의 뜻(志)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쇄국의 일본을 개방하려는 의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가 됐다. 청년의 이름은 니지마 조(新島 襄, 1843-1890). 그가 1875년 도시샤 대학(同志社英學校)을 설립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학교가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캠퍼스는 고즈넉했다.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필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경비원 신세를 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윤동주 시비(詩碑)가 어디 쯤 있나요?”   “똑바로 가시다가 우측으로 돌아가세요. 저기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 앞에 있습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나란히 있어   경비원의 말대로 건물사이로 들어가자 나무아래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의 시비가 나란히 있었다.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정지용 시비 사실을 토대로 한 글이었다. 바로 옆에 서있는 윤동주 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동주에 대한 글도 일본어와 우리말로 쓰여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윤동주 시비의 글   다소 어눌한 한글 표현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필자는 혼자서 시비에 새겨진 빛바랜 서시(序詩)를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필자는 읽고 또 읽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시(詩)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필자는 ‘주변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정의 벤치에 앉았다. 오래 전에 필자가 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윤동주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줄기위에 핀 일 순간의 꽃이다./ 바람과 새가 날라다 준 종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피고 지는 존재/ 인간도 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느니….”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라는 수필에 담긴 내용이다. 그 책에도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누군가가 그린 윤동주의 작은 액자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1990년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씨를 도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인은 윤인석 씨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우의 인상화(印象畵)’란 시를 소개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작은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슬픈, 진정코 슬픈 대답이다...”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윤인석 씨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며 “자신도 이에 공감한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京都)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한일 간의 간극(間隙)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뚜벅뚜벅 도시샤 대학 교문을 나섰다. 등록일 : 2018-05-23
1157    우리는 민족혼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댓글:  조회:2317  추천:0  2018-07-18
조철호가 만난 사람 - 이임원 연변포석회 회장 (ZOGLO) 2018년7월18일    “중국 동포들은 포석의 ‘낙동강’으로 민족혼 되새겼지요” 중국 연변동포들이 조명희 선생의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를 17년 동안 자체적으로 열고 있다.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에서 이임원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포석抱石조명희趙明熙(1894~1938) 선생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일본에서 공부했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문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꾀했고, 한글로 민족문학의 혼을 일깨우는데 향도역嚮導役을 맡았다. 농민학교와 사범대학에서 후진들을 키워냈고, 조국을 등진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포석을 ‘항일 독립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소련 스탈린은 소수민족 압살 정책의 일환으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직전,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숙청했다. 그 표적 중 한사람이 바로 포석이었고 KGB(소련비밀경찰)는 그를 연행하여 간첩죄로 처형했다. 그의 나이 44세.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러시아 땅에 한글문학의 씨를 뿌렸던 한 걸출한 조선 사내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잃어버렸던 선각자들의 위업을 뒤늦게나마 찾기 시작했다. 포석 조명희- 그가 꿈에서도 그리던 조국 광복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은 1938년 5월11일. 올 해로 꼭 80년이 됐다. 지난 1988년 해금과 더불어 이름을 찾은 포석은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로, 최근 들어 ‘국민작가’로 부활했다. 그 사이 그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켄트엔 ‘조명희기념실’과 ‘조명희거리’가 생겼고, 중국 연변자치주의 수부인 옌지연길시에선 ‘연변포석조명희문학제’가 매년 막을 올렸다. 생전의 포석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연변자치주에 단 한 차례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음에도 그곳의 동포들은 매년 그를 깍듯하게 기리고 있다. 지난 해 부터 중국의 사드 보복이 전 방위적으로 행하여지는 가운데 한국과 연변의 포석회는 연변의 문화예술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격조 있는 무대를 마련하여 포석의 얼을 전했던 행사를 접어야 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깊이와 의미가 있는 학문적 접근으로 포석을 조명키로 했다. 지난 7월초, 연변포석회는 ‘포석조명희문학학술세미나’를 마련했다. 17년째 연변포석회를 이끌고 있는 이임원(61·시인) 회장이 주도했다. 나는 연변에서 포석의 발자취를 찾는 그를 만나러 연길로 달려갔다.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이 회장은 반팔 남방셔츠 차림이었다. -연길 날씨는 무더운 듯한데, 한·중 기온은 아직도 냉랭하지요? “아직은 해빙 전입니다.” -충북도를 방문했던 분들 모두 잘 계신가요? “대체적으로 잘들 있지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이제는 현직에서 물러난 분들이 상당수이지요. 그러나 워낙 많이 갔었기 때문에 현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지요.” -모두 몇 명이나 방문했던가요.? “13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7명에서 12명 정도가 초청받아 충북방문을 했으니까 연인원 110명 쯤으로 봅니다.”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나요? “동양일보의 초청자 대상 주문이 문화예술인이나 교육자나 언론인이나 출판인 중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여 거의가 한국방문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지요. 문명과 문화의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이랄까, 가벼운 공포감 같은 것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맞는 분들이 성심성의껏 도와 주셨고, ‘순회명사시낭송회’라는 낯선 행사에 참가하면서 이런 고급문화를 배워가야겠다는 욕심도 생겨 불편한 것을 열심히 극복하려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귀국 후 한국의 시낭송을 따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습니다. 지역마다 각계각층의 책임자들이 서슴없이 무대에 올라와 열심히 시낭송을 하는 모습이 한마디로 눈부셨습니다. 더구나 시·군 지역에서 사단장이나 경찰서장들이 멋진 제복을 입고 나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지요. 귀국하는 사람들마다 ‘한국에 갔더니 장군이나 경찰서장들이 시낭송을 하더라’라며 신기한 듯 이야기들을 했어요.” -그 행사에 잊을 수 없는 분이 청주 서원경교회를 창립하여 담임목사로 계시던 장석연 목사 이셨지요. “그렇지요. 10여 일간의 순회행사가 끝나는 날엔 언제나 2박3일간의 제주도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연변에서 온 우리들로는 익숙하지 않은 행사에 참여하느라 심신이 피곤하였어도 꿈에 그리던 제주도 여행을 한다는 황홀한 꿈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 아름다운 제주도 여행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과 맛있는 음식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장 목사님 부부께서 시종 함께하시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시려고 애쓰시던 모습도 선해요.” -그 장 목사님이 은퇴 후 세종시에 가셔서 세종 서원경교회를 세우셨어요. 아직 아주 건강하시고 명 설교도 여전하십니다. -이 회장께선 오랫동안 봉직하던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직에서 퇴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지난 3월 말까지로 13년간이 소장 직에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매년 해오는 포석청소년문학상 시상식은 올 해도 잘 되었나요? “여러가지로 여건이 힘들었지만, 매년 십 수 년을 두고 중단 없이 해오는 행사여서 정치적인 기상도가 좋지 않다 해도 매년 때가되면 당연하게 작품공모를 하는 것으로 알아서 학교별로 응모작품들이 들어오곤 하지요. 올 해도 이미 새해가 되면서부터 응모작품들이 들어 왔습니다. 심사를 거쳐 시상식을 마친 것이 6월 24일이었습니다. 마침 이를 알고 동양일보에서도 보도를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동양일보에서 보도한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아시듯이 이 곳(연변)에서는 동양일보 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초청해 한국의 문화예술에 눈을 뜨게 해 주신 곳이 동양일보 였고, 또 연길에서 매년 ‘연변포석문학제’를 열도록 후원해 주신 곳도 동양일보여서 우리는 일과처럼 인터넷으로 동양일보를 꼼꼼하게 보고 있지요. 지난 6.13 지방선거도 열심히 보았어요. 우리들이 만났던 시장·군수님들이 어떻게 되는가가 큰 관심들이었습니다. 이시종 지사님이나 김병우 교육감님을 비롯한 낯익은 시장 군수님들이 다시 당선된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포석선생의 고향인 진천의 송기섭 군수님은 큰 표 차이로 재선이 되셨더군요. 전에 포석회장을 하셨던 진천의 박양규 의원은 의장이 되셔서 우리가 기뻤습니다.” -왜 연변에서 포석 선생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을까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곳 연변은 조선족 동포들의 집거集居지역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동포들은 자녀들의 학교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지요. 해방 직후부터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학교편제인 소학교(5년),중학교(고급중학교 포함-5년),대학(2년과 4년)을 다닙니다. 그중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교 교과서 조선어문 제1단원에 포석 조명희 선생의 소설 ‘낙동강’(1927년 발표)이 최서해의 ‘탈출기’와 라도향의 ‘벙어리 삼룡’과 함께 나옵니다. 이 때 우리는 조명희 선생이 어디 출신 인지, 호가 무엇인지는 모르되 이 작품을 통해 민족민중문학에 관해, 소설문학에 관해,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란 말도 알고 있어요? “근래 들어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어서 익혀 두었지요. 사전적 풀이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살던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산재해 살면서도 정체성과 민족성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오는 공동체를 이른다고 알고 있어요. 이국땅을 떠돌던 이들과 그들의 후손이 쓴 문학작품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포석은 망명의 땅 러시아에서, 이 형과 같은 연변의 시인 작가들은 틀림없는 ‘코리라 디아스포라 문학가’들이라 칭해도 되는 것이군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포석 선생은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문학가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생이 태어난 1894년은 이 나라 근대문화-개화기가 비롯되는 때이고, 선생이 일본 유학시절부터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발표된 모든 문학 작품들은 장르마다 거의 개척 적이거나 선구적인 창작활동을 펼쳐 온 사실이지요. 일본 도쿄에서의 ‘극예술협회’ 참가(1920년)-한국 최초의 희곡 ‘김영일의 사死’(1921)발표-한국 최초의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 발간- 소설 ‘낙동강’ 발표(1927) 등을 보아도 소설 ‘임꺽정’만을 쓴 벽초 홍명희나 시 창작에만 몰입했던 정지용과는 달리 문학의 여러 장르를 뛰어넘으면서 그 분야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낸 선구자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연변 동포들이 포석 선생에 대한 인식이 해방이 되자마자 부터 이제까지 70년이 넘도록 연모의 정을 이어오는 것이라 생각이듭니다.” -이 회장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나요? “연변대 사범대 조문학과(현재의 한국어과)를 졸업하면서 소학교 교사를 잠시하고는 약관 23세에 연변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정치 생활부-문화체육부 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2006년 5월부터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 된 때는 몇 살 때였는지요. “40세 때였습니다. 작가협회 주석단에 마흔 살짜리가 낀 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2007년까지 9년간을 활동했습니다.” -이 회장은 매년 한국과 평양 방문을 한 차례씩 해 온 것이 10년이 넘지요? “예. 10년 쯤 되나 봐요. 한국방문은 매년 동양일보의 초청에 따라 연변동포방문단의 인솔책임자로, 평양엔 매년 친선예술축전 참가 연변문화예술단 단장으로 다녀오곤 하지요.” -무엇이 크게 다르던가요. “한국은 문명이 앞서고 모든 것이 서구화 되었다면, 조선은 사는 것은 다소 궁핍해도 소박하고 당당해요. 최근 몇 년 간은 주민들이 전에 없던 활기가 보이고 축전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들에게 통제지역도 많이 풀어 보여주는 등 변화가 느껴져요. 몇 년 전에는 평양의 한 노 시인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슬며시 옆에 와 앉더니 ‘조선에는 지금도 거지가 그리 많으냐’고 묻더군요. 그저 ‘여러 해 다녔지만 거지는 보지 못 했습니다’라 말하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군요. 한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장마당이라는 시장이 활성화되어 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돈이 있으면 웬만한 것을 거의 구할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자본주의 사회현상이 밀어닥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지요.” -이 회장의 시가 연변 동포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렸다고 들었는데요. “몇 년 전부터 ‘진달래’ 등 3편이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 조선어문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서정시의 본보기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시집도 여러 권이지요? “첫 시집 ‘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1997)를 낸 이후 3,4년 만에 한 권꼴로 한글시집 3권, 중문시집 1권 등 4권을 발간했습니다.” -해마다 연변포석문학제를 치르면서 가장 보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포석청소년문학상’이겠지요. 올 해로 17년간을 중국 전역에 살고 있는 동포 청소년을 대상으로하다보니 완전히 뿌리를 내린 사업입니다. 중국대륙의 넓은 지역에서 많이 응모해 오지요. 그 중에 우리 민족의 삶의 양태가 다양하게 묻어나고 청소년들이 중국 속의 조선족 동포로써 겪는 많은 일들을 우리말로 정제시키고 정리하여 보내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으나 포석의 고향 충북 진천군에서 지원하는 일부 시상금이 입상한 청소년들에겐 교통비와 상품비로 쓰이고 있어 큰 위로가 되지요. 하얼빈 같은 곳에서 입상자가 시상식에 오려면 오는데 하루, 가는데 하루 열차를 타야합니다. 꼬박 사흘이 걸리지요. 수상자 혼자만 오지 못합니다. 가족이나 지도교사가 동행을 하면 교통비와 숙박비와 식사비가 수월치가 않지요. 이것을 주최 측이 부담하지 못하면 시상식 참석은 엄두를 내지 못하지요. 중국에서의 행사 비용은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겠지요. 그러나 어려움이 있어도 동포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얼의 존엄하고 훌륭함을 깨우치기 위한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마치 포석 선생이 이국(소련)에서 한글과 문학을 통해 조국광복에 이바지하고 민족정신을 고양高揚하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성의를 다 합니다.” -지난해부터 요즘까지의 한·중 관계의 어려움이 더 계속된다면 과거처럼의 연변포석문학제를 개최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숙면熟眠의 시기로 봅니다. 포석청소년문학상 공무와 시상식은 지속하되 문학제는 학술적인 접근을 꾀해 포석에 대한 이해와 기개와 예지를 익히는 기간으로 활용한다면 포석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무장이 될 것으로 봅니다.” -오랜시간 고맙습니다. 중국의 동포들에게 포석 선생의 선각적인 삶이 또 하나의 에너지 원源으로 전해졌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 와 주심에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우정의 감동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이임원李任遠 시인은… * 1958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 1979년 연변대 사범대 조문학과 졸업 * 1981년 연변일보사 입사 정치생활부 부부장-문화체육부 부장- 편집국 국장 * 1989년 두만강여울소리 시인상 수상 * 1997년 초대 연변정지용시문학상 수상 * 1998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 2001년 해란강문학상 수상 * 2001년 연변 포석회 회장 * 2003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 2004년 장백산문학상 수상 * 2006년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 2018년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퇴직 현 연변포석회 회장. 현 연변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시집 ‘사랑, 그리고 바보들의 이야기’(1997) ‘작은 시 한 수로 살아간다는 것은’(2001) ‘바다가 육지로되지 않는 까닭은’(2014) ‘사랑의 꽃’(2015) ///동양일보
1156    "윤동주 수업 늘이자"... 댓글:  조회:3077  추천:0  2018-07-17
“윤동주 수업 늘리자”      팔 걷은 日교사 장원재 특파원2018-05-08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도쿄 기치조여고 하기와라 부교장  “고인 삶 통해 日 어두운 면 교육”… 2년전 교내 심화수업 기획 수업경험 소논문 써서 연구지 게재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통해 일본 역사의 어두운 부분과 차별은 좋지 않다는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2일(5월), 일본 도쿄(東京) 기치조(吉祥)여고 접견실에서 만난 하기와라 시게루(萩原茂·62·사진) 부교장은 “식민지 시대에 살면서 순수하고 청아한 언어로 시를 썼던 한 청년의 죽음이 (일본) 고교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학교는 2015년부터 윤동주(1917∼1945)의 작품이 실린 현대문학 교과서를 채택하고 매년 고교 2학년에게 윤동주의 시와 이를 소개한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子)의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가르치고 있다.  평소 이바라키 노리코를 좋아하던 하기와라 부교장은 윤동주의 시를 읽고 “한 젊은이를 이토록 몰아붙인 일본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2년 전 직접 심화수업을 기획했다. 시대 배경과 시인의 생애를 담은 자료를 배포한 후 학생들에게 “내일부터 일본어를 쓰지 못하고 일본어 이름도 바꿔야 한다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다섯 번의 수업이 끝난 후엔 교과서에 소개된 윤동주의 작품 ‘서시’ ‘쉽게 쓰여진 시’ ‘아우의 인상화’ 중 하나를 골라 감상문을 쓰게 했고 이를 묶어 감상문집을 제작해 함께 읽었다.   문집을 보면 한 학생은 “서시에서 아름다움과 청량함, 강한 의지를 느끼는 동시에 일본인으로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썼고, 다른 학생은 “분노와 슬픔의 대상이 예전의 우리나라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적었다. 수업이 끝난 후 윤동주 시비(詩碑)를 보기 위해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까지 다녀온 학생도 있었다.    하기와라 부교장은 수업 경험을 소논문으로 써서 학교 연구지에 실었다. 또 지난해와 올해 소논문 200부씩을 자비로 인쇄해 다른 학교의 교사 등에게 나눠주며 ‘윤동주 수업’ 확산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제 학술대회에서도 경험을 발표했고 이달 말에는 윤동주가 유학했던 릿쿄(立敎)대에서 특강이 예정돼 있다.  정년을 3년 남긴 하기와라 부교장은 “몇 년 전 한국어를 배우다 중단했는데 은퇴하면 역시 한국에 관심이 많은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단기유학을 가고 싶다”며 “윤동주에 대해서도 힘이 닿는 데까지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115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아우의 인상화 댓글:  조회:4342  추천:0  2018-07-17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이 시는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일제강점기를 인식하여 생긴 슬픔을 아우의 인상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이 시는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지닌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을 해야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밤이다. 싸늘한 달이 뜬 밤이다. 아우와 달빛을 받으며 길을 가고 있다. 아우의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이 슬픈 그림으로 보인다. 발걸음을 멈추고 살그머니 아우의 앳된 손을 잡으며 물어본다.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하니까 아우는 ‘사람이 되지’ 라고 대답한다. 아우의 대답은 현실을 모르는 설은 대답이다. 나는 슬며시 잡았던 아우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있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아우의 대답을 듣고 화자는 슬픔을 느낀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제목인 ‘아우의 인상화’에서 ‘인상’을 ‘인상(印象)’으로 보면 ‘인상주의적인 화풍의 그림’이되고 인상(人相)으로 보면 아우의 얼굴 생김새를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화자가 아우의 얼굴을 거듭 보는 것을 보면 인상(人相)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는 화자가 아우의 얼굴을 보고 느낀 느낌을 말하였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면 ‘슬픈’ 것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시에서 시간적 배경이 갖는 의미의 중요함을 알아야한다. 이 구절에서 ‘싸늘한 달’을 보면 시간적 배경이 밤이고 가을이거나 겨울인 것으로 추측된다. 시에서 ‘밤’은 절망적이거나 암울한 상황을 상징합니다. ‘별’이나 ‘달’은 이러한 상황에서 갖는 ‘꿈, 이상, 희망’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싸늘한’입니다. 부정적인 수식이 붙음으로서 희망이 점점 사라지거나 거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공간적 배경은 ‘길’이다. 화자와 아우는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길’은 삶의 여정을 관습적으로 상징하다. 그러므로 화자와 아우는 암울하고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삶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이란 수식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에서 ‘붉은 이마’는 화자와 아우가 길을 가는 중이었으므로 몸에 열기가 올라서 불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싸늘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온이 싸늘해서 붉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었다는 것으로 볼 때 ‘서리어’는 ‘어떤 기운이 스미거나 가득 차다’이므로 싸늘한 기온으로 인해 붉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붉은 이마’보다는 ‘붉은 얼굴’이 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이마’라 한 것은 ‘이마’가 아우의 생각 또는 신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싸늘한 달이 서리’었다는 것은 아우의 신념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시련 중에 있고 ‘붉은 이마’는 이러한 시련에 저항하는 상황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앳된 아우가 형인 화자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외부의 시련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그 결과를 생각할 때 화자는 아우가 앞으로도 힘들게 계속 살 것을 생각하며 형으로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림’은 아름답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므로 아우의 얼굴을 ‘그림’으로 비유한 것은 아우의 얼굴이 형이 보기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발걸음을 멈추어 /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에서 화자는 길을 가다가 ‘발걸음을 멈추어 /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는 것은 아우가 현실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형과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발을 멈추고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는 것은 형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아우에게 애정을 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아우가 자라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묻는다. 그런데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어른이 되지’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한다. 형의 생각보다 성숙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되지’에서 ‘사람’은 생물학적 종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사람’이란 사람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주위 환경에 상관없이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을 해야 한다. ‘붉은 이마’에 가지고 있는 아우의 신념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람은 시세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는다. 나라를 빼앗겼으면 나라를 되찾아야하고 절개를 지키며 공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한다. 그러려면 수많은 소인들로부터, 침략자로에게 고난을 당해야한다. 암울한 상황에서 사람노릇을 하려면 수많은 시련과 고통과 고민이 수반된다. 그런데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이 일제강점의 현실에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화자는 아우의 대답이 현실을 모르는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라고 생각한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아우의 대답을 들은 후에 다시 아우의 인상을 보는 것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는 아우에 대한 실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화자가 아우의 대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는 행동이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는 다시 본 아우의 인상에서 1연에서 본 ‘서리어’ 있는 ‘싸늘한 달이’ ‘젖어’로 심화되어 있음을 본다. ‘서리어’는 아직 깊이 침투한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젖어’는 깊이 침투한 상태이다. 아우가 자신의 신념인 ‘사람이 되지’를 지키며 겪는 시련이 더 심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우의 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아우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러므로 형의 입장에서 볼 때에 아우에 대해 안쓰러운 슬픈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고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걸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 감상의 길잡이 1  이 시는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던 1938년에 쓴 작품으로 어느 날 밤, 형인 화자가 아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하여 삶의 우수(憂愁)를 노래하고 있다. 언뜻 보면 뛰어난 문학적 기교도 없고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도 담겨 있지 않은 평범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이 시는 윤동주가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가늠케 해 주는 열쇠 구실과 함께, 일제 치하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 앞에서 어떤 시를 쓰게 될지 알게 해 주는 나침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2․3․4연에서 형제가 주고받는 몇 마디 대화와 동작뿐이며, 나머지 1․5연은 아우의 얼굴에서 느낀 화자의 슬픔을 변주하여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즉,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는 화자의 질문에 아우는 ‘사람이 되지’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이러한 아우의 말에 대해 화자는 ‘진정코 설은 대답’이라고 여기며, 아우의 순진성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서 슬픔을 느낀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온전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형제가 나누는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화자가 아우에게서 ‘슬픈 그림’ 같은 모습을 발견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십일 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온 화자이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다분히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자식으로, 그것도 한 많은 만주 유이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민족의 아픔을 맛보면서 남다른 민족 의식과 각별한 신앙심을 키우며 성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자신의 이상과 암울한 현실 사이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을 겪으며 이 같은 부정적 인식이 배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신의 행복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부끄러운 삶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직한 인간으로서 양심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몸소 체험으로 터득하게 된 화자로서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라는 물음에 ‘사람이 되지’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어린 아우의 대답이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스런 아우가 어른이 되기까지 겪어야 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알고 있는 화자는 그 순진 무구한 아우의 대답을 듣고, 다시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그 때, 아우의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어리어’ 있음을 발견한 화자는 그의 얼굴에서 ‘슬픈 그림’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달빛에 젖은 아우의 얼굴이 화자의 눈에는 마치 ‘슬픈 그림’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실제로 슬픈 것은 아우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이다.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행복하게 생활하는 아우에게서 잃어버린 자신의 유년을 찾곤 하던 화자로서는 아우가 자라면서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 행복과 순진 무구함이 더할 수 없이 슬프게 느껴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이 시는 암울한 식민지 치하에서 온갖 고통을 극복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시인이 어린 아우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순진 무구함과 행복스런 모습을 발견하지만, 자신이 소망하는 성실한 인간으로 성장하며 겪어야 할 아우의 고통을 생각하며 괴로움에 빠지는 진지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다소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시인의 비극적 자기 인식이야말로 투철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올곧은 삶을 살고자 했던 참 신앙인으로서의 철학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삶의 자세가 바로 그로 하여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완벽한 삶을 살게 해 준 버팀목이 되었음은 물론, 그러한 삶이 표출된 훌륭한 시를 다수 창작해 내게 함으로써 우리 시문학사에 ‘위대한 시인’이라는 수식어로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핵심 정리 [이 작품은] 화자가 아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인상과 생각을 노래한 작품으로,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에 비유하여 일제 강점기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애상적, 상징적 *제재 : 어린 아우 *주제 : 암울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우에 대한 안타까움 *특징 ① 수미 상관을 통한 주제 의식 강조 ② 화자(형)와 시적 대상(아우)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됨. *출전 : ‘조선일보’(1939) 시어 풀이 *앳된 : 애티가 있어 어려 보이는. *늬 : ‘너’의 방언. *설은 : 빈틈이 있고 서투른. 작품의 구성 [1연] 암울한 현실에 놓인 아우의 모습 [2연] 아우와의 대화 [3연] 아우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4연] 암울한 현실에 놓인 아우의 모습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아우의 얼굴에 대한 묘사와 아우와의 대화를 통해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아우의 얼굴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구체적 설명 없이 제시하고 있다. ‘싸늘한’ 달과 ‘슬픈’ 그림이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가 아우의 얼굴에서 슬픔을 읽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연에는 아우와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다. 자라서 사람이 될 거라는 아우의 철없는 대답이 화자에게 진정 철없는 것으로 들린다. 사람이 되는 것, 사람답게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3연에서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아우의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 때문이다. 4연에서 화자는 1연의 진술을 반복, 변주하고 있다. 앞부분에서 아우의 얼굴에서 화자가 슬픔을 느끼는 이유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4연은 1연과는 달리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된다.   작품 연구실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이라고 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투영하여 아우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점과 앞으로 살아갈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시어의 의미 *슬픈 그림 : 아우의 얼굴을 보며 느끼는 화자의 슬픔 *앳된 손 : 아우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나타냄. *싸늘한 달 :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함. 시상 전개의 특징과 효과   표현상의 특징 이 시는 화자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절제하고, 감각적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의 이미지 ‘싸늘한 달’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서는 달을 ‘밝음’과 ‘희망’이 아니라 ‘싸늘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 짓고 있다. 달을 이러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 이유는 시적 대상인 ‘아우’와의 관련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달은 아우의 얼굴에 비친 상태로 화자에게 인식된다. 즉, 달은 암울한 현실에 놓인 아우의 얼굴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띠게 된 것이다. 형과 아우의 대화   화자(형)는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현실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우의 대답을 듣고 ‘진정코 설은 대답’이라고 하면서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다.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참회록’, 윤동주/암울한 시대 현실 인식 ‘참회록’은 구리거울을 통해 어두운 시대에 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성찰한 작품이다. ‘아우의 인상화’와 ‘참회록’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각 시의 ‘아우의 얼굴’과 ‘구리거울’은 시대적 슬픔을 감지하는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아우의 인상화’가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아우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데 그친 반면, ‘참회록’은 자기 성찰을 통해 시련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화자의 의지를 나타낸다.  
115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새로운 길 댓글:  조회:9137  추천:0  2018-07-17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목차 핵심 정리 이해와 감상 작품 연구실 ┗ 시의 구성 한눈에 보기 ┗ 말하는 이의 상황과 태도 ┗ 시에 쓰인 상징과 그 의미 ┗ 시의 표현상의 특징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주제 : 언제나 새로운 길(인생)을 가고자 하는 의지 *특징 ① 인생을 상징하는 '길'을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됨. ② 3연을 중심으로 앞뒤 부분이 의미상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음.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길'은 인생을 상징한다. 말하는 이는 같은 길을 가고 있지만 언제나 가야 할 길을 '새로운 길'이라고 말하며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보여 준다. 말하는 이는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를 통해 삶에 대한 희망을 느끼며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화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작품 연구실 시의 구성 한눈에 보기   말하는 이의 상황과 태도   시에 쓰인 상징과 그 의미   시의 표현상의 특징 ① 상징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말하는 이의 삶에 대한 자세를 표현함. ② 3연을 중심으로 1연과 5연, 2연과 4연이 의미상 대칭을 이룸. ③ 수미 상관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 ④ 같은 위치에서 일정한 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운율을 형성함. ⑤ 대조적인 의미의 시어를 통해 의미를 강조함. [내 , 고개 ↔ 숲, 마을]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북간도에서 태어나 연희 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에 유학한 후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어두운 현실과 역사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내용의 시를 많이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이 있다. ==================/// 윤동주님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해 5월에 쓴 시로써 연희전문학교 교지에 기재되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이 녹아 있는 새로운 길 단지, 전원 풍경에의 몰입만이 아닌, 보다 넓고 활달한 의식 세계의 전개를 그려본 시로써 이해할수 있어요. =====================/// 새로운 길 /해석 이시의 화자는 항상 어디론가 향하여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새로운 길이 화자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아주 친숙하고 익숙한 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시는 새로움(낯설음)과 익숙함(낯익음)이 함께 느껴지는 길을 쉽없이,끊임없이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민예원)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전문   지난 2017년 10월 28일, 일본의 교토 우지시(宇治市) 시츠카와(志津川)의 우지강(宇治川) 강변에서는 감동적인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바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서 ‘새로운 길’이 낭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것으로 1938년 작품이다. 가을비는 시비에 새겨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 라는 글자를 또렷하게 읽고 있었다.   감개무량할 뿐이다. 일본 땅에서 그의 시가 허공에서 빗줄기를 헤치며 울려 퍼졌을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특히나 시비가 세워진 우지천 근처는 그가 생전에 ‘아리랑’을 불렀던 곳이라고 하니, 그때의 노래와 그의 작품 ‘새로운 길’이 서로 부둥켜안는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감흥만은 아닐 것이다.   교토는 윤동주 시인이 유학생활을 했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날은 시인의 영혼이 살아 움직였으리라. 하염없이 내린 비는 그가 흘린 감격의 눈물이었을까. 슬픔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양자의 의미가 혼재된 것이었을까. 시비에 새겨진 시가 그의 마지막 숨결처럼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파문을 일으킨다. 그날의 이 감동적인 낭송과 기념비 제막은 모든 이에게 뜻깊은 울림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윤동주 시인의 시비 제막식과 관련한 여러 기사를 접하면서 특히, 나는 다음의 점에서 한국의 독자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좋아하는 모든 세계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무엇보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순수하게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의 뜻과 정성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45년 2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지 7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단지 시비 건립에 소요된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제작에 참여한 그들의 숭고한 뜻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비는 선뜻 그것을 세울 공간을 허락하지 않은 지자체를 설득하여, 무려 12년이란 시간의 공을 들인 노력의 땀방울이고 인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 시비는 단순히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 이상의 값어치에 더하여, 시비에 새겨진 문구대로 ‘기억과 화해’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기존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던 교토의 대학 교내가 아닌 곳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도 그의 시와 그의 정신이 일본인들에게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시비가 품고 있는 정신이 세계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민족과 국경을 넘어 중요한 메시지로 확산될 모티브로 작용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 시비에 흐르는 고귀한 뜻이 평행선처럼 느껴지는 작금의 한일관계에 밑거름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시 ‘새로운 길’ 의 지향점도 평화로운 세상과 아름다운 사람을 꿈꾸는 바로 그런 길과 이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한국인보다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런 일본인들이 우리의 시인 윤동주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높은 가독성과 그의 시를 관통하는 맑은 영혼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일본의 어느 국어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이 세 편이나 수록되어 있는 등, 일본에서는 윤동주 읽기가 계속될 것이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시 ‘자화상’일부) 라고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 그가 만일 교토에서 날아든 자신의 시비 제막식 소식을 들었다면, 과연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고독이나 슬픔이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글을 쓰는 내내 깊어가는 계절만큼이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교수    ====================///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새로운 길 작품 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상징적, 의지적 -주제: 언제나 새로운 길(인생)을 가고자 하는 의지 -특징: - 인생을 상징하는 ‘길’을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됨. -3연을 중심으로 앞뒤 부분이 의미상 대칭 구조를 이룸. ☆상징과 의미 -길: 삶, 인생 -내, 고개:시련, 고난, 어려움 -숲, 마을: 희망, 평화 -민들레, 까치, 아가씨, 바람:살아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존재,  -삶에 대한 희망을 주는 존재 ☆표현상 특징 - 상징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말하는 이의 삶에 대한 자세를 표현함. - 3연을 중심으로 1연과 5연, 2연과 4연이 의미상 대칭을 이룸. - 대조적인 의미의 시어를 통해 의미를 강조함. - 수미 상관의 구성과 같은 위치에 일정한 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운율을 형성함. ☆작품 해석 이 시는 인생을 상징하는 ‘길’이라는 시어를 바탕으로 인생을 대하는 말하는 이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언제나 가야 할 길을 ‘새로운 길’이라고 말하며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보여 준다.  말하는 이는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를 통해 삶에 대한 희망을 느끼며,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겨 내고 평화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구성 -1연: 어려움을 이겨 내고 평화로운 곳으로 나아감. 공간적 배경 (아름다운 변화가 가득찬 길) -2연:언제나 걸어가는 길을 새롭게 바라봄. 시간적 배경(영원히 변치 않을 새 길) -3연:길에서 만나는 존재들  -4연: 앞으로도 새로운 마음으로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함. -5연:어려움을 이겨 내고 평화로운 곳으로 나아감.     =================///     서울 은평구(구청장 김우영)는 일곱 번째 공공도서관인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을 오는 21일 신사동에 개관한다.     도서관은 신사동 산80-66 대지 1200㎡에 지하1층, 지상2층(연면적 1982여㎡) 규모에 170개 좌석,1만 380여권의 책을 갖췄다. 종합자료실, 어린이자료실, 디지털자료실과 윤동주 시인의 작품 등을 포함한 시문학자료실 등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위탁 운영은 (사)더불어배움이 맡는다.     신사동 지역은 독서문화시설이 부족해 도서관 건립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요청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곳이다. 주민들은 지난 2015년 8월 1만 2800여명이 참여한 공공도서관 건립 요구 동의서를 구에 전달했다.     구는 이를 받아들여 설계공모를 통해 공원시설과 어우러진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 사업을 추진했다. 도서관 이름 ‘내를 건너서 숲으로’는 주민 및 구 직원 대상 공모를 통해 선정했다.      도서관 이름인 ‘내를 건너서 숲으로’는 은평구 주민 및 구 직원대상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는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학우와 백련산 불광동 연희동을 산책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동주가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구는 개관 기념 프로그램으로 오는 23일부터 내달 20일까지 4주간 유아․어린이 대상 동화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인 ‘사서가 읽어주는 동화책’ 과 북바인딩 프로그램 ‘나만의 윤동주 시집만들기’, 원작과 영화 비교하기 프로그램 ‘책이 있는 영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임형찬기자 ======================///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는 1938년 4월 9일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이 시 '새로운 길'은 그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그 해 5월 10일에 쓴 것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정형편과, 의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문과를 지망한 점 등 때문에 윤동주의 연희전문 유학은 어렵게 성사되었다.) 백두산을 넘고 두만강을 건너고, 함경도 평안도를 다 지나 이곳 서울까지 유학을 왔으니, 새봄에 새 상급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22세 젊은 청년 윤동주의 가슴속은 시의 내용처럼 너무나도 화창하고 맑았으리라. 겨우 5년이 지나 27세가 되면 극악한 일제에 의해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비명횡사할 줄이야 부모는 물론 그 본인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노래하였으리.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내일도......'   간도 용정의 윤동주 생가에 가보았다. 이제야 가보았다. 명동교회 건물은 아직도 건재했지만 그의 집은 가까스로 복원한 상태였다. 명동촌('동쪽에 있는 우리나라를 밝히리라'는 의미에서 당시 이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최초의 교회였던 명동교회 내부는 명동역사기념관이 되어 그 안에 김약연 목사를 비롯한 '운동'가들의 유적을 기리고 있었다. 조선인 안내원 한 명이 상주하면서 관광객이 오면 해설도 하고 기념품 판매도 하였다. 명동역사기념관에서 윤동주 관련 책 한 권과 열쇠고리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평전을 다 읽었는데 언젠가는 윤동주를 실존모델로 한 장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간도 지방을 최소한 한 달은 여행하여야 하리라. 가능하다면 일본에도 가보아야겠지. 통일 되기 이전에 쓴다면 북한에는 못 갈 것이고, 통일 이후라면 윤동주가 걷고, 기차를 타고 하면서 간도 용정에서 서울까지 온 길을 답사할 수도 있으리라.   22세의 윤동주가 이미 잘 말해준 것처럼, 살아가는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다. 열심히 살아가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새로운 길’ 전문   지난 2017년 10월 28일, 일본의 교토 우지시(宇治市) 시츠카와(志津川)의 우지강(宇治川) 강변에서는 감동적인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바로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서 ‘새로운 길’이 낭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것으로 1938년 작품이다. 가을비는 시비에 새겨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 라는 글자를 또렷하게 읽고 있었다.   감개무량할 뿐이다. 일본 땅에서 그의 시가 허공에서 빗줄기를 헤치며 울려 퍼졌을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특히나 시비가 세워진 우지천 근처는 그가 생전에 ‘아리랑’을 불렀던 곳이라고 하니, 그때의 노래와 그의 작품 ‘새로운 길’이 서로 부둥켜안는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감흥만은 아닐 것이다.   교토는 윤동주 시인이 유학생활을 했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날은 시인의 영혼이 살아 움직였으리라. 하염없이 내린 비는 그가 흘린 감격의 눈물이었을까. 슬픔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양자의 의미가 혼재된 것이었을까. 시비에 새겨진 시가 그의 마지막 숨결처럼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파문을 일으킨다. 그날의 이 감동적인 낭송과 기념비 제막은 모든 이에게 뜻깊은 울림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윤동주 시인의 시비 제막식과 관련한 여러 기사를 접하면서 특히, 나는 다음의 점에서 한국의 독자뿐만 아니라 그의 시를 좋아하는 모든 세계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무엇보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순수하게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의 뜻과 정성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45년 2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지 7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단지 시비 건립에 소요된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제작에 참여한 그들의 숭고한 뜻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비는 선뜻 그것을 세울 공간을 허락하지 않은 지자체를 설득하여, 무려 12년이란 시간의 공을 들인 노력의 땀방울이고 인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 시비는 단순히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 이상의 값어치에 더하여, 시비에 새겨진 문구대로 ‘기억과 화해’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기존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던 교토의 대학 교내가 아닌 곳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도 그의 시와 그의 정신이 일본인들에게 더 깊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시비가 품고 있는 정신이 세계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민족과 국경을 넘어 중요한 메시지로 확산될 모티브로 작용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 시비에 흐르는 고귀한 뜻이 평행선처럼 느껴지는 작금의 한일관계에 밑거름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시 ‘새로운 길’ 의 지향점도 평화로운 세상과 아름다운 사람을 꿈꾸는 바로 그런 길과 이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한국인보다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런 일본인들이 우리의 시인 윤동주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높은 가독성과 그의 시를 관통하는 맑은 영혼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일본의 어느 국어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이 세 편이나 수록되어 있는 등, 일본에서는 윤동주 읽기가 계속될 것이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시 ‘자화상’일부) 라고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 그가 만일 교토에서 날아든 자신의 시비 제막식 소식을 들었다면, 과연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고독이나 슬픔이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글을 쓰는 내내 깊어가는 계절만큼이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교수                                               (감상)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쓴 시라고 한다. 즉, 이 시에서 '길'은 일차적으로 시인의 등굣길이다.   그런데 내를 건너서 숲으로, 또 고개까지 넘어야 할 정도라면 꽤 먼 거리인데 시에서는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왤까? 윤동주 시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에게 연희전문학교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 명동촌, 시, 연희전문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간도 명동촌은 시인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한 계획 이주촌이다. 증조부는 원래 함경북도의 양반이었는데 구한말 극심한 가뭄과 일본의 국권침탈로 희망을 찾아 마을의 다섯 가문이 두만강 너머 간도로 집단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조국을 밝힌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명동촌'이라 짓고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문명개화, 자주독립을 위해 교육에 정성을 들였다. 교육열은 실로 대단했는데, 신교육을 위해 마을 어른들이 상투를 자르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회와 근대식 학교를 운영할 정도였다. 명동촌은 광복의 등불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시를 소명으로 여겼는데, 이때문에 문과 진학을 반대했던 아버지와 심각한 충돌을 겪었다고 한다. 문과에 진학해봤자 할 수 있는 건 신문기자 정도니, 이왕이면 취직이 보장되는 의대나 법대를 희망했던 것이다. (채만식의 을 보면 그당시 문과생의 취업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문송하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풍문에 따르면 집에서 밥그릇이 날아다닐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문과 진학을 말렸던 할아버지조차도 사태가 너무 심각해지니 윤동주 시인의 편을 들었다고..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1938년엔 민족말살정책으로 한글을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고로 시란 모국어로 노래해야 그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이 향찰로 향가를 기록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우리말로 시조를 썼던 것도 한시로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희전문은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학풍이 자리잡고 있었고, 특히 문과는 당대 민족 의식 교육의 산실이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에겐 꿈에 그리던 곳이었던 셈인 것이다.   2/ 새로운 길, 새로운 삶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한글로 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곳, 연희전문은 윤동주 시인에게 희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새로운 배움으로 향하는 길,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있고, 까치가 울고, 거리엔 아가씨가 지나가고, 기분 좋은 봄바람이 이는 길, 이만큼 평화롭고 설렘 가득한 길이 또 있을까?   시인에게 연희전문으로 향하는 길은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며 마음껏 시를 쓰는 삶,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삶 말이다. 4연의 '오늘도... 내일도...'에 있는 말줄임표에서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난다. 내를 건너고 숲을 건너 고개를 넘는 같은 코스지만, 그곳을 지나는 마음은 하루하루 다를 것이다. 아마 새로운 배움에 대한 열망, 나날이 자라는 꿈으로 새로워지는 길이겠지..   3/ 꽃길은 만들어 가는 것   이처럼 은 문학청년의 설렘 가득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새출발, 희망, 봄이 떠올라서인지 개인적으로는 대학 새내기 시절이 생각나서 그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이 다른 곳에 가서도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연희전문이 아니었더라면, 문과가 아니라 의대나 법대에 갔더라면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그는 강과 산, 고개를 넘기 전에 아버지를 넘어야 했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소명을 찾고, 지키고, 쟁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걸어갈 길이 설레기 위해서는 그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어야 한다. 흔히들 꽃길만 걷자고 하는데, 꽃길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야기가 꿈이나 노력 이야기로 끝나서 나도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나를 낳은 건 부모님이지만, 나를 만들어 가는 건 내 몫이다. 한번 뿐인 삶이니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
115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창 댓글:  조회:4452  추천:0  2018-07-16
창/윤동주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이 인게외다.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이 울어만 싶습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윤동주시 창 해석 암울하고 갇힌 시절에 '창은 하나의 구원의 상징이 될수도 있습니다. 가능성, 희망, 출발,미래 등등 마지막 창에 매달리고픈 심정은 어둠을 견디는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의 공통된 바람이었을것입니다. 가혹한 시대에 바라보는 창과 밝고 자유로운 시대에 바라보는 창은 그만큼 투명성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예가)     ====================         이 시에서 비로소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윤동주 씨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그리고 이후로 평생 그 주변을 맴돌게 되지.    우리에게 익숙한 윤동주 씨의 모습은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다.('창'도 거울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여기서 거울은 두 세계의 경계야. 이쪽은 현실, 저쪽은 이상. 이전 시들에서 보이던 '현실에 대한 혐오'가 거울 속의 이상 세계를 만든 게 아닐까 싶어.(이 두 세계를 더 이해하고 싶다면 영화 [매트릭스]를 추천한다.)  이제 그에겐 거울 안의 세계가 의미 있는 세계이고 거울 밖의 세계가 허구가 돼. 마찬가지로 거울 안의 자신은 '이상적 자아'이고, 거울 밖의 자신은 '현실적 자아'이자 이상적 자아의 '그림자'가 되지.    '창'은 '문'이나 '벽'과는 달라. '벽'은 '외면'이야. 반대편의 세계가 아예 안 보여. '문'은 '통로'야. 반대편의 세계로 나갈 수 있지. 어느 쪽이든 부끄러움은 안 생길 거야.  거기에 비해 '창'은 외면할 수도 없지만 나갈 수도 없는 공간이지. 외면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뛰쳐나가기엔 용기가 부족했던 윤동주 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쉬는 시간만 되면 창가로 달려간다.    창밖에는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현실이 보이는데, 창안에서는 식민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윤동주 씨는 공부를 통해 민족적 이상에 보탬이 되려 했던 것 같애. 그런데 일본은 그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쳤을까? 조선인은 열등하다는 거?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거?  당연히 윤동주 씨는 이런 교육에 크게 실망했던 것 같애. 그래서 그는 창 건너편이 살아있는 가르침이고, 창 안쪽은 죽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항상 그의 육체는 거울 이쪽에 있지만 정신은 저쪽에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괴롭다.    윤동주 씨는 누군가가 나서서 자기 대신 이 현실을 타파해 주기를 바라는 데, 그 누군가는 아마도 절대자겠지. 그래서 3연의 내용은 기도로 볼 수 있어.(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그야말로 윤동주 씨 다운 모습이지.)    하여튼 윤동주 씨는 절대적인 힘에 의해 자신의 상황을 깨트리고 싶어 하지만, 그의 바램은 '자그마한 선풍'으로 끝나고 말아.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봐.    기대가 깨어지면서 그는 쉬는 시간도 곧 끝날 거라고 예감해. 금방 상학종이 칠 테고, 그럼 자신은 다시 교실로 돌아가 '죽은 가르침'을 듣게 되겠지. 그래서 자괴감에 빠져.  여기서 '울어만'은 상학종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심정이기도 해.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하다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으려 하고 있어.    좀전에 말했듯이 만약 창밖으로 뛰쳐나간다면 윤동주 씨의 부끄러움은 해소될 거야. 그런데 만약 그에게서 부끄러움이 사라진다면? 혹시 그의 시도 함께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마다 고유의 스펙트럼이 있는데, 윤동주 씨는 '부끄러움'에 특화된 시인이야. 어쩌면 그래서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평생 그걸 놓지 못한 걸지도 몰라.  
1152    "리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댓글:  조회:2405  추천:0  2018-07-15
  + 아름다운 이별           우리는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오래 빛날 수 있다.  저 높은 곳의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더욱 확실할 수 있다.  누가 이별을 눈물이라 했는가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빛날 수도 없다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빛나는  이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헤어짐을 서러워하지 말라  이별은 초라하고 가난한 인생에  소중하고 눈부신 보석을 붙이는 일  두고두고 빛날 수 있는  사랑의 명패를 다는 일  (윤수천·시인, 1942-)  + 사랑법 2  누군가 말했지  헤어져 있을 때 더 많은 축복이 있다고  함께 있을 때 내 님 오직 하나더니  헤어진 지금 온 세상 님으로 가득  (작자 미상)  + 이별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이재무·시인, 1958-)  + 이별(離別)에게  지우심으로  지우심으로  그 얼굴 아로새겨 놓으실 줄이야  흩으심으로  꽃잎처럼 우리 흩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실 줄이야  비우심으로  비우심으로  비인 도가니 나의 마음을 울리실 줄이야  사라져  오오,  永遠을 세우실 줄이야  어둠 속에  어둠 속에  寶石들의 光彩를 길이 담아 두시는  밤과 같은 당신은, 오오, 누구이오니까!  (김현승·시인, 1913-1975)  + 마음에게  신록이여,  죽은 마음에 움트는 강철의 새 잎이여  나는 이제 어떤 이별도 껴안을 수 있다  저렇게 많은 사랑들이, 저렇게 많은 아픔들이  자기와의 투쟁을 통과하여 이제 막 연록 햇빛 속으로 걸어나온 사람들이라니  (이시영·시인, 1949-)  +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시인, 1933-2005)  + 그대는 들으소서  하루에도 몇 번씩  눈감는 소리  그 깊은 속눈썹의 떨림을  그대는 들으소서  어둠 속에 눈물 한 방울  툭, 떨어지는 소리  그대 들으소서  그대를 생각할 때면  혼자 흔들리던 그네처럼  내 마음, 허공 속에  흔들립니다  나의 태양, 나의 태양이여  이제는 돌아서야만 할 시간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은  그대 잠시 돌아보던  노을 속에 적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점점 밝아지던 눈빛  그대만의 별을 찾아 헤매던  내 눈빛의 서러움  그대는 들으소서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그대는 들으소서... 들으소서...  (최옥·시인)  + 나도 그랬듯이  머지 않아 그 날이 오려니  먼저 한마디 하는 말이  세상만사 그저 가는 바람이려니,  그렇게 생각해 다오  내가 그랬듯이  실로 머지 않아 너와 내가 그렇게  작별을 할 것이려니  너도 나도 그저 한세상 바람에 불려가는  뜬구름이려니, 그렇게 생각을 해다오  내가 그랬듯이  순간만이라도 얼마나 고마웠던가  그 많은 아름답고 슬펐던 말들을 어찌 잊으리  그 많은 뜨겁고도 쓸쓸하던 가슴들을 어찌 잊으리  아, 그 많은 행복하면서도 외로웠던 날들을 어찌 잊으리  허나, 머지 않아 이별을 할 그날이 오려니  그저 세상만사 들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을 해 다오  행복하고도 쓸쓸하던 이 세상을  내가 그렇게 했듯이  (조병화·시인, 1921-2003)  + 꽃샘추위  이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  겨울 끝자락의  꽃샘추위를 보라  봄기운에 떠밀려  총총히 떠나가면서도  겨울은 아련히  여운을 남긴다  어디 겨울뿐이랴  지금 너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 보라  바람 같은 세월에  수많은 계절이 흘렀어도  언젠가  네 곁을 떠난  옛 사랑의 추억이  숨결처럼 맴돌고 있으리  (정연복)  * 엮은이: 정연복
1151    "강은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낸다"... 댓글:  조회:2403  추천:0  2018-07-15
  + 세월의 강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으로 그를 화나게 하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장 슬로우)  + 강물  강물은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누가 길을 막으면  돌아서 가고  그러면서도  앞서지 않고  차례로 간다.  강물은 강물끼리  서로 손잡고 간다.  (노원호·아동문학가)  + 강물처럼  왜 강물인 줄 아니?  흐르기 때문이래  고여 있고만 싶다면  강물이 될 수 없는 거래  흐르고 흘러서  내게도 오고  네게도 가고  바다까지 가는 거래  거기엔 고래가 산다잖아  강에선 볼 수 없는  글쎄, 집채만 하대  너도 흘러 본 적 있니?  음…  음…  함께 웃고  도와 주고  나눠 주고  이런 게 흐르는 거라면  (현경미·아동문학가)  + 강물이 흐르며  먼저 가려고 다투지도 않고  처져 온다고 화도 안 낸다.  앞서 간다고 뽐내지도 않고  뒤에 간다고 애탈 것도 없다.  탈없이 먼길을 가자면  서둘면 안 되는 걸 안다.  낯선 물이 끼여들면  싫다 않고 받아 준다.  패랭이꽃도 만나고  밤꽃 향기도 만난다.  새들의 노래가 꾀어도  한눈 팔지 않고 간다.   (최춘해·아동문학가)  + 강물은  바다로 나가기 싫어서  일부러 구불구불 산을 돌아서 들을 돌아서  천천히 천천히 흐른다.  댐을 만나면  다이빙도 해보고  나룻배를 만나면  찰싹찰싹 나룻배 꽁무니도 밀어 주고  강물은  학교 가기 싫은  내 동생하고 똑같다.  (전영관·아동문학가)  + 강  강은 언제나  앞과 뒤  그리고  옆을 둘러보며  천천히  흘러간다.  천천히 가다가  산이 좋고  물이 좋은  곳을 만나면  집과 집이  서로 정답게 껴안은  마을을  옹기종기  매달아 놓고  들이 시원하고  바람이 시원한  곳을 만나면  곡식과 채소가  다투어 자라는  논밭을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만들어 놓고  심심한 아이들이  뒹굴고 놀  넓은 모래밭을  펼쳐 놓고  염소와 송아지가  풀을 뜯고 쉴  풀밭도  펼쳐 놓고  강은  어두운 밤이 되더라도  달이나 별이 찾아와  목욕할 수 있도록  언제나  다니는 그 길로  꼬박꼬박  그리고 천천히  흘러간다.  (오규원·시인. 1941-2007)  +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강은 가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가르지 않는다.  제 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이며  쪽배를 띄워 서로 뒤섞이게 하고,  도움을 주고 시련을 주면서  다른 마음 다른 말을 가지고도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건너 마을을 남의 나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버려 두지 않는다.  한 물을 마시고 한 물 속에 뒹굴며  이웃으로 살게 한다.  강은 막지 않는다.  건너서 이웃 땅으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짐짓 몸을 낮추어 쉽게 건너게도 하고,  몸 위로 높이 철길이며 다리를 놓아,  꿈 많은 사람의 앞길을 기려도 준다.  그래서 제가 사는 땅이 좁다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가서 꿈을 이루고,  척박한 땅 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강 건너에 농막을 짓고 오가며  농사를 짓다가, 아예  농막을 초가로 바꾸고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새 터전으로 눌러 앉기도 한다.  강은 뿌리치지 않는다.  전쟁과 분단으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제 고장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와 바라보는  아픔과 회한의 눈물 젖은 눈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제 조상들이 쌓은 성이며 저자를  폐허로 버려 둔 채  탕아처럼 떠돌다 돌아온  메마른 그 손길을 따듯이 잡아 준다.  조상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수없이 건너가고 건너온  이 강을 잊지 말란다.  강은 열어 준다, 대륙으로  세계로 가는 길을,  분단과 전쟁이 만든 상처를  제 몸으로 말끔히 씻어 내면서.  강은 보여준다,  평화롭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어두웠던 지난날들을  제 몸 속에 깊이 묻으면서.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신경림·시인, 1936-)  * 엮은이: 정연복 /  
115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양지쪽 댓글:  조회:4339  추천:0  2018-07-15
  양지쪽               윤동주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임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 6. 26.       =====================     이 시는 사월의 봄에 누구 땅인지 모르고 애들을 보고 한스러워 하면서도 지금의 작은 평화가 깨질까봐 근심이 생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롱진 사월의 태양의 햇빛이 비추는 양지쪽에서 벽에 기대어 서서 저쪽에서 황토먼지를 실은 봄바람이 회오리를 치며 돌아서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따스한 사월의 태양빛이 벽을 등지고 서 있는 화자의 서러운 마음을 하나하나 만지며 편안하게 한다. 양지쪽에서 서로 땅을 따먹는 지도째기 놀음을 하면서도 지금 이 땅이 누구의 땅인 줄 모르는 아이들이 땅따먹기를 하면서 한뼘 손가락이 짧아서 땅을 많이 먹지 못한다고 한(恨)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화자가 이 아이들에게 이 땅이 누구의 땅인지 알려주려고 하다가 잘못되면 일제감시에 걸려서 이 양지쪽에서 사월의 태양빛을 받으며 서러운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마저 깨어지고 사라질까 근심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화자와 노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햇볕이 있는 장소로 희망이 아직 있는 곳 또는 절망적인 마음을 달래주는 곳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봄바람이 /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내고 //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화자가 양지쪽에 벽을 등지고 서서 멀리 봄바람이 황토를 빨아올리며 회오리바람처럼 돌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는데 사월의 햇빛이 서러운 마음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달래준다는 내용이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봄바람이 /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내고’는 화자가 있는 곳에서 거리가 제법 있는 곳에서 흙먼지를 빨아올린 봄바람이 호인이 사용하는 물레바퀴가 돌 아가듯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화자가 있는 양지쪽을 피해서 돌아서 지나갔다는 말이다. 화자가 지금 있는 ‘양지쪽’은 먼지를 담고 있는 바람도 비켜가는 안온한 평화로운 장소인 것이다.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계절이 봄이고 사월이며, ‘아롱진’은 아지랑이를 일으킬 정도의 따뜻한 햇볕을 말하는 것 같다. 양지쪽에서 따뜻한 햇볕이 벽을 등지고 햇볕을 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서러움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달래준다는 말이다. 의인화된 표현이다. 따뜻한 햇볕을 쬐면 몸이 따뜻해져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를 말하면서 한편으로 ‘태양’으로 상징되는 희망이 양지쪽에 있는 ‘설운 가슴마다’ 생겼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이 / 한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 깨어질까 근심스럽다.’는 양지쪽에서 화자처럼 햇볕을 쬐는 사람들 말고 아이들은 지도째기 놀음을 하며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화자는 아이들이 이 땅이 누구의 땅인 줄도 모르고 손가락이 길면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 한 뼘을 재는 손가락이 짧다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고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를 알려주려다가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우리 땅의 사연을 말하다가 잘못되면 겨우 봄날 햇볕을 벽을 등지며 쬘 수 있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걱정이 되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도째기 놀음’은 정확하게 어떤 놀이인지 알 수 없으나 아이들이 손을 이용해서 하는 땅따먹기 놀이로 보인다.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이’는 아이들은 이 땅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지도째기 놀음’을 보면서 이 땅이 우리 땅이었으나 일제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아서라!’는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를 알려주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 깨어질까 근심스럽다.’이다. ‘가뜩이나 엷은 평화’는 ‘양지쪽’에 모여 벽을 등지고 사월의 ‘아롱진’ 햇볕을 쬐며 ‘설운 가슴’을 어루만지는 평화인 것이다. 이 땅을 빼앗아 가진 일제가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작은 평화마저 빼앗기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괴로운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하여 이 땅이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에게 아무 말을 못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었는지 어떻게 빼앗겼는지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다./전한성   ==================    이 시는 이상화 씨의 와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쉬울 거야.            아마 윤동주 씨는 따뜻한 봄볕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있는 것 같애. 시간적 배경이 낮이라는 점이 드문 일이지.    1연에서는 토속적인 것들과 이국적인 것들이 섞여서 나타나고 있어. 그만큼 윤동주 씨가 살고 있는 그 시대의 정체성이 불분명해. 그건 윤동주 씨 자신도 마찬가지고.    2연에서 따뜻한 햇살이 그의 서러움을 조금씩 녹여주고 있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가 봐.  이렇게 햇살에 의해 현실에서 공상으로 이동하던 윤동주 씨의 시선은 3연에서 아이들을 발견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 와.    이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 윤동주 씨의 모습과 비슷해. 즉 그들은 윤동주 씨의 과거야. 그렇다면 이 시에서 그는 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이 아이들은 일종의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나 봐. 놀이가 끝났을 때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아이가 이기는 거지. 아이들은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벌려서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다투는데, 이걸 바라보는 윤동주 씨는 아이들의 다툼과 상관없이 이미 조선 땅 전부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떠올려. 그래서 슬퍼져.    이렇게 이 시에서 윤동주 씨는 이제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나 봐. 그런데 그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말려. 그러지 말라고. 마치 지금 자신이 짧은 햇살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있듯이 잠시나마 저 아이들이 평화를 즐기도록 놔 두라고. 왜냐하면 저 아이들도 머지않아 누구의 땅인지 알게 될테니까.    '가뜩이나 엷은 평화'는 식민지 조선에서 평화란 것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지. 그래서 마지막에는 생각을 고쳐서 다시 한 발 물러서고 있어. 그럼으로써 아이들도 윤동주 씨도 다시 처음의 평화로 돌아가게 되지.      이 시에서 윤동주 씨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그런 점에서 한결 어른스러워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    
1149    윤동주와 동시인 강소천 댓글:  조회:3350  추천:0  2018-07-15
강소천 용률(龍律)姜小泉     시대 현대 출생 1915년 사망 1963년 유형 인물 직업 아동문학가 대표작 호박꽃초롱, 조그만 사진첩, , 꿈을 찍는 사진관, 꽃들의 합창, 봄이 너를 부른다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15∼1963. 아동문학가. 목차 접기 생애 활동사항 강소천 / 강용률 1915~1963. 아동문학가. 생애 본명은 용률(龍律).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신. 1930년 고원보통학교, 1937년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원중학교, 1946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1948년 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월남하였다. 1951년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1959∼1963년 한국보육대학·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의 강사로서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활동사항 1952년 어린이 잡지인 『새벗』과 『어린이다이제스트』의 주간, 1953∼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1960년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아동문학』의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1931년에 「길가에 얼음판」·「얼굴 모르는 동무에게」·「호박꽃과 반딧불」·「봄비」, 1933년에 「닭」 등 우수한 동요·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1937년 이후에는 동화 및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와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이야기」, 『조선일보』에 「마늘먹기」, 『소년』에 「딱다구리」 등의 단편과 『아이생활』에 「희성이의 두 아들」 등 장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윤석중(尹石重)이 시도한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의 동요·동시는 낭만적 기조 위에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이미지 형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에 나타난 경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글이 아닌 의도적인 창작에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닭」·「달밤」·「조그만 하늘」 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초기의 낭만적이고 예술적 향기가 짙은 율문 시대를 거친 다음 현실에 대한 긍정적 태도 위에 강한 교훈성을 부여한 후기의 산문시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꿈을 찍는 사진관」(1954)인데, 이 작품은 교화성 문제로 많은 논란을 겪기는 하였으나, 많은 아동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열렬한 아동애호가로, 마해송(馬海松) 등과 함께 「어린이헌장」을 기초, 반포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동들의 독서와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기울여 아동문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3년 아동소설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가 49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5년 배영사(培英社)에서 ‘소천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동요동시집 『호박꽃초롱』과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진달래와 철쭉』·『꽃신』·『꿈을 찍는 사진관』·『종소리』·『무지개』·『인형의 꿈』·『꾸러기와 몽당연필』·『대답 없는 메아리』, 그리고 소년소설집에 『해바라기 피는 마을』·『꽃들의 합창』·『봄이 너를 부른다』 등이 있다. 전집으로는 『강소천아동문학전집』(전6권)·『강소천아동문학독본』 등이 있다. ===================     출생 함남 고원, 1915. 3. 16 사망 1963. 5. 6, 서울 국적 한국 요약 강소천은 어린이의 바탕으로 한 많은 아동 문학들을 써냈으며,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로 등단했다.   어린이의 밝고 건강한 정서를 바탕으로 시적 언어로 동화를 썼다. 본명은 용률(龍律). 고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함흥 영생고보를 마쳤으며 고원중학교·청진여자고급중학교·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다. 6·25전쟁 때 혼자 월남하여 1951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었고 1952년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으로 있었으며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장, 〈아동문학〉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0년 〈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들레와 울아기〉가 뽑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닭〉·〈보슬비의 속삭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들을 묶어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을 펴냈는데 1939년 무렵부터 동시보다 동화를 더 열심히 써서, 해방 전까지 〈돌멩이〉·〈토끼 삼형제〉 등을 발표했다. 마해송 등과 함께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여 널리 알렸으며 어린이 독서와 글짓기를 가르쳐 문학교육에도 이바지했다. 1963년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을 받았다. 그의 동시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건강한 생활을 담아 표현했으며, 동화는 시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표현과 운율로 사회악과는 무관한 동심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사회현실의 좋은 면만 돋보이게 하여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고, 소년소설은 어른들이 옛 일을 회고하는 것에 그쳐 아동문학 발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동화집은 〈꿈을 찍는 사진관〉(1954)·〈무지개〉(1957)·〈어머니의 초상화〉(1960) 등, 장편에는 〈달 돋는 나라〉(1955)·〈꽃들의 합창〉(1957) 등이 있다. 죽은 뒤 〈강소천문학전집〉 전6권을 배영사에서 펴냈으며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강소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강소천 姜小泉 본명 강용률  姜龍律 출생 1915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고원 사망 1963년 5월 6일 (4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필명 호(號)는 소천(小泉)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 직업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  대학 교수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  前 연세대학교 강사  前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 학력 함경남도 고원보통학교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활동기간 1930년 ~ 1963년 장르 아동문학, 시문학, 소설 대표작 《꿈을 찍는 사진관》 《바둑이와 편지》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시집 속의 소녀》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통합)[1] 강소천(姜小泉, 1915년 9월 16일 ∼ 1963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인간 관계 3각주 4 5 6 생애[편집] 본명은 강용률(姜龍律)이고,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이다. 소천(小泉)은 아호이며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생이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여자고급중학·청진제일고급중학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당선되었으며, 그 뒤 〈닭〉을 비롯한 동요·동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1940),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 이야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월남 후 피난지 경상남도 부산에서 독서 지도와 글짓기지도 등 아동문학의 보급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1952년), 《아동문학》 편집위원(1962년), 한국보육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강사(1959년 ∼ 1963년),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1960),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름답고 무한한 동심의 세계와 착하고 고운 소년 소녀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표작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소년세계》 1954.3)[2], 《호박꽃 초롱》(1941, 박문서관), 《꽃신》[3] 등이 있다. 금성출판사가 펴낸 창작동화전집에 실렸던 강소천 선생의 글중에는 사이가 나쁘던 두 나라가 삶으면 꿀이 되는 꿀꽃, 꽃잎이 무지개무늬인 무지개꽃 같은 신기한 꽃씨를 주고받으면서 갈등을 풀어간 이야기도 있다. 평화라는 기독교 사상을 담아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인간 관계[편집] 1950년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시인 박목월(朴木月)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었다. 각주[편집] 이동↑  강소천 선생 가시다, 동아일보 이동↑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사진으로 찍는 사진관 이야기. 이동↑ 구두를 만드는 노동자가 아기를 위해 예쁜 꽃신을 짓는 이야기.
1148    [시시비비] - 력사는 력사이다... "선구자의 노래"의 내막?(6)... 댓글:  조회:3674  추천:0  2018-07-13
     한 시인의 안타까운 민족 배반                ~의 시인 윤해영의 만주에서의 친일 창작활동                                                                                      오양호(인천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시인)                                            Ⅰ 윤해영은 누구인가  윤해영의 ‘선구자’는 한 때 ‘애국가’에 버금갈 만큼 있기 있는 가곡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가곡을 열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77년부터 만주이민문학을 연구해1) 오던 나는 윤해영이 독립군이 아닌 시인이고, 그것도 여러 편의 친일시를 쓴 것을 발견하고, 그 충격과 번민 속에 있을 때 1993년 3월 마침 문민정부가 출범하여 대통령식이 거행되는데 ‘애국가’가 제창된 후 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속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게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윤해영의 가 내 머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머뭇거리지 못하고 「동아일보」에 칼럼을 썼고2), 「동아일보」가 내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3) 선구자를 국가행사에서는 부를 수 없는 가곡이라는 공감대가 천천히 대중 속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후「국어국문학회」지에 이란 논문을 발표하였고4), 이 논문을 읽은 독자들이 논문내용을 인터넷에까지 여기저기 퍼 날랐다.5)  윤해영尹海榮이 시인으로 밝혀진 것은 1990년이다6). 그 이전까지는 윤해영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였다. ‘신비한’이라는 말은 그가 만주천지를 주름잡던 독립군이자 가곡 의 작사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 한국인들에게는 애국가만큼 숭엄한 가곡으로 애창되어 온데다가, 더욱이 이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 에 그에 대한 신비감은 더 강했다.     1932년 10월의 어느 저녁 무렵, 만주 모란강변에 있는 서장안가西長安街의 한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던 조두남趙斗南에게 윤해영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윤청년은 평소 만주의 평원을 무대로 일제와 싸우다가 쓰러져간 독립투사의 혼을 위로하고 아울러 만주지역에 사는 동포가 선열을 추모하며 노래할 수 있는 장엄하고 위대한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목단강에 젊은 작곡가 조두남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작시 한 편을 들고 그 곳을 헤맨 끝에 조두남을 찾아냈다고 했다.   두 명의 청년은 의기투합했다. 윤해영은 조두남에게 용정에서의 동포들의 고생과 독립운동의 상황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조두남은 윤해영의 시에 감격하여 ‘내 민족이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남긴 그 소원에 응하기 위해서 젊은 정열을 기울여 작곡에 착수했다.7)     조두남은 불과 16세가 되던 1928년 첫 작곡집을 출판하는 재능을 보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기가 출중하였던 까닭에 1930년대에는 그에 대한 소문이 인근지역은 물론 만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에 조두남의 이름을 듣고 만주의 용정에서 찾아온 윤해영이라는 청년으로부터 노랫말이 적힌 메모를 받아서 작곡한 노래가 이다. 이노래는 라는 제목으로 불려졌으나, 해방 후 선구자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8)     1933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 편을 내 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 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 간 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 것이다9).    전설 같은 내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윤해영이나 조두남에 대한 이런 신비한 내력에 관계없이 가곡 를 애창한다. 가사 전체가 가지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곡이 주는 장중한 선율이 우리를 항상 압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윤해영의 이력을 이렇게 기술하기도 한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중된 곳으로서 전후로 여러 가지 반일 단체와 반일 문화 조직들이 발족되어 반일투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선배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담아 노래한 것이 (선구자)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반일 사상이 경정한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작품을 썻으며 해방직후에도 (김종화 작곡)등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조선 회령으로 나갔다10).    조두남이 윤해영을 보는 것과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김덕균은 다른 하나의 사실을 더 전해준다. 즉 윤해영이 해방 후에도 와 같은 ‘우수한 시’를 썼다는 사실과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으로 갔다는 내력이다. 와 같은 ‘우수한 작품’은 대할 수 없으니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지만, 글의 문맥으로 보아 그 ‘우수한 작품’은 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한 글일 듯하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에 수록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半島史話와 樂士滿洲」에 수록된 , 역시「반도사회와 낙토만주」에 수록된 는 의 시의식과는 제목만 봐도 거리가 멀다. 작품 제목이 모두 친일문제를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윤해영의 시가 문제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와 의 시의식이 정반대를 형성하는 점은 완전히 독자들의 예상을 뒤집는다. 시 가 민족의 독립의지를 너무나 곡진하게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만주시인집」에 수록된 다른 세편의 시 ,, 도 와 동일한 시의식이 작품을 지배하는 점 역시 그러하다.  박팔양朴八陽은「만주시인집」의 서문에서 윤해영의 를 인용하면서 ‘만주 땅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고향’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당시 만주 문인의 대부 노릇을 하던 박팔양이 민족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빌미로 윤해영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글은 윤해영의 이런 문제의 시 6편, 곧 를 지배하는 시의식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과제이다.   Ⅱ, 민요적 율격과 반민족적 시의식   와 는 형식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시의 내포(Connotation)는 그렇지 않다. 먼저 시 형식을 검토해 보자.     ①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래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②   一, 五色旗 너울 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 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광이 두르자     三, 끝없는 지평선에 五穀金波 굼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榮華萬世 빛나리11)    시 ① ② 의 각 행 첫 음절이 3음절로 된 것을 제외하면 시 ① ②가 모두 4음절로 이루어진 4음보격 율격양식이다. 또 두 시가 모두 3연으로 되어 있는 점도 같다. 4보격 음보의 연속은 우리말의 발화구조에 잘 어울릴뿐더러 4보격으로 율격적 효과 창출에 도움을 준다. 또 말의 자연스러움을 훼손시켜야 하는 부담도 가장 적다. 이런 점에서 4음 4보격은 완전한 율격적 평형을 얻고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4보격 특유의 유장한 율동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시의 경우도 만주 황야를 달리는 선구자에 대한 고양된 정서, 그리고 그 만주를 약속된 땅으로 생각하며, 어떤 숭고한 정신에 대한 교시적 헌사의 의미가 4음4보격 때문에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시 ①은 한국인들이 체험했던 반일적 민족 정서를 4보격의 장중한 시어로 형상화시켰다. 그 결과 가곡의 가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곡 를 해설하는 한 연구자는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를 부르며 비장하고 엄숙한 기분을 느껴보던 청소년기를 가지고 있다. 는 가사에 내포되어 있는 바와 같이 독립투사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하여 만든 노래이다.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 노래는 숱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오늘에도 불려지고 있다.12)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유가 4음4보격의 운율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물론 가곡으로 불릴 때는 그 곡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의 경우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율격적 특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4음4보격이 한국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요 가락이기 때문이다.  4음4보격의 율격은 그 연원이 고려가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잘 아는 등을 지배하는 율격은 4음4보격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임란을 거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시조, 가사의 장르를 넘으면서 서민들의 기층문화의 영역에까지 이 율격이 영향력을 뻗친다. 곧 판소리, 잡가, 민요에서도 4음4보격이 지배적인 율격 형태로 정착한다. 이런 점에서 위의 시 ① ②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바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감탄할만한 율격적 특징이다.  4음4보격의 민요는 원래부터 민요적 전통으로서 존속되어 온 것이 아니다. 상층문화의 영향력이 기층문화의 저변에까지 확대되고, 민요가 이것을 새로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장된 영역이다. 시 ②가 선 자리가 바로 여기다. 시 ②는 민요에서 파생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문학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념성의 표출’이다. 곧 일본에 대한 ‘관념적 찬미’다. 이것은 시조나 가사가 4음4보격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가장 우세한 가락의 자리를 형성하던 15, 6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하다. 당시의 4음4보격은 새로운 지배 이념이 된 유가儒家적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이상으로 삼았던 지배계층(사대부)들의 미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율격모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가치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이의 확산을 위해 4음4보격의 형식을 절대화하였던 것이다. 4음4보격의 이런 민요 율격화의 과정은 시 ②가 차용하고 있는 민요 율격과 발상에서 그 시대와 지배계층의 성격이 유사하다.  시 ①과 ②는 형식면에서는 꼭 같다. 그러나 시 ①을 지배하는 시 의식은 생생한 체험에 바탕을 둔 민족의식이고, 시 ②는 체험되지 않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지배 계층의 속성인 그 ‘관념론적 진술’이다. 시 ①과 ②가 형식면에서 동일하면서도 내용면에서 반대가 되는 것은 시의 이런 기본 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의 새로운 지배 계층, 친일 세력은 일본이 장차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믿기에 일본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 추상화, 관념화가 불가피했다. 당시는 친일 세력이 당당한 지배 세력이었고, 그 지배 세력은 하나의 이상을 민중 속에 실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윤해영은 민요의 형식, 또는 파생적 민요 형식이라도 빌어 와야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은 대단한 지력자적 면모를 띤 시인이다. 시 ②가 반민족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사항이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이긴 하지만 발상 자체가 우리민족의 고유한 4음4보격의 양식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이 본질적으로 반민족적인 것과 제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조의 가사가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던 사대부의 논리가 민요형식으로까지 확산된 것은 민족 정서의 지속과 변화로 설명할 수 있지만, 타민족의 지배 논리가 가장 민족적인 형식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동일한 시각의 해석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민족 정서를 기층에서부터 뒤집어엎으려는 기도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섭고 두렵다.  그러면 시 ①과 ②가 가지고 있는 내포(Connotation)는 어떤가.  시인은 한 시대를 예언하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시인으로서의 윤해영이 남긴 반민족적인 행적에 대한 문책은 지나가는 말로 면책될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예술적 행위가 어떤 시인의 그것 보다 강하게 우리들 앞에서 생생히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를 열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가곡 와 시인 윤해영의 문제는 온 국민이 알아야 할 급박한 과제이다.  시 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시①과 ②는 다 같이 매 연 제 3행이 명사로 끝난다. 먼저 이점이 문제다. 시 ①에서는 모두 ‘선구자’이고, 시 ②에서는 제 3연만 ‘선구자’다. 그런데 그 ‘선구자’의 내포(Connotation)는 정 반대이다. 지칭하는 대상이 앞의 것은 ‘우리, 곧 조선’이고 뒤의 것은 ‘일본’이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에서)    의 ‘이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만주국이다. 그러나 그 만주국이라는 것은 일본이 세운 허수아비 나라이며, 꼭두각시 정부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연, 제 1연과 제 3연의 제 3행은 그 시상이 서로 비슷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주제와 시상이 반대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시 ②           이역하는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시 ②    제 1연에서는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말을 달리며 독립운동을 하던 거룩한 선구자의 시의식 대신, 만주국의 복을 받은 백성이란 시상이 자리 잡고 있고, 제 2연에서는 망명지의 땅을 누비며 무예를 닦던 선구자의 자리에 만주국의 흙을 개척하는 백성들이 서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이란 것이 다름 아닌 시 ②의 제 1연 제 2행의 그 척사拓士이다. 척사들의 개척으로 황야인 만주가 열리기에 만주국으로서는 그 공로를 마땅히 칭송해야 할 일이다. 윤해영이 이런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란 시가 바로 그런 행적을 보여 준다.    ③    고향을 떠나든 날 진달래 꺽거훗고    하룻밤을 오구나니 눈이 상기 쌓였구나    찬바람 滿洲벌판이 바로 예가 거기리      사나히는 城을 쌓고 婦女들은 흙을 날라    創世記 神話처럼 새 部落은 일워졌다    아들 딸 代代孫孫이 이 땅우에 사오리      언덕은 무연하고 온갖 雜草 욱어진데    나는야 소를 모라 것친 땅을 일구는 이    地平線 저-너머로 봄바람은 부러온다13)    이글의 형식은 연시조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형식면에서는 아주 민족적이다. 앞에서 고찰한 시 ②가 4음4보격의 민요율격으로 민족 정서를 파고들어 가려던 그런 시의식과 동일하다. 아니 그런 전략을 앞지른다. 우리민족 고유의 형식 시조에 주제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진달래를 꺾어 그 꽃잎을 뿌리며 고향을 떠나 말로만 듣던 만주를 찾아온 남녀는 힘을 모아 만주국의 국민으로서 자손만대가 복을 누리며 살 마을을 만든다. 그 계절은 봄, 희망이고, 평화의 봄이다. 이상향을 만주, 곧 만주국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40년대의 만주 현실이 이렇다고 믿을 조선 사람은 많지도 않고, 내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려울 탠데 를 쓴 윤해영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시는 그런 현실을 뛰어 넘기 위해 이상향을 노래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문학적 특질은 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윤해영이 시조형식을 차용해 쓴 시 ③을 낭만적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할 근거가 없다. 척토, 곧 땅을 개척한다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고, 가장 고통스런 문제인데 그 힘든 노동을 찬양하고 있는 까닭이다. 낭만시의 대상은 현실 너머에 있다. 1930년대부터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그 황야를 힘들게 개척했다는 것은 그 때의 역사가 분명히 증명하는 일이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이렇게 미화시킨다. 관념적 과장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정치적 선동문학의 전형이다. 이렇게 윤해영은 1940년대 민족 현실을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실의 배반이고, 민족의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은 민족의 한과 고통이 육화된 아리랑과 같은 작품을 날조하던 당시의 반민족적 기류와 그 궤도를 같이한다.      ④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들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세         말밥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드네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五族의 새살림 평화롭네       븨였던 곡간에 五穀이 차고     입담배 주머니에 쇠소리 나네       보아라 東方에 이 밤이 새면     격양가 부르며 萬사람 살리14)    만주 봉천의 홍아협회라는 데서 발행되던 만주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에 실린 이다. 이것은 아리랑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 민요 아리랑에 ‘오족협화五族協和…’ 운운하는 구절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고, 민족 정서와도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만주를 밝고 활기차며, 희망의 대지로 인식하는 시 의식 또한 현실성이 약하다. 유민으로 떠돌고, 독립군으로 쫓기고, 두만강을 건너가 도둑 농사를 짓다가 월강죄로 참수를 당하고, 가난으로 딸을 팔아가며 목숨을 잇고, 마적 떼에 시달리면서도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었던 민족사의 그 엄혹한 내력이 무시되고 있는 까닭이다. 민요 아리랑은 어떤 경우라도 민족의 고난사와 연결된다. 따라서 민족사와 연결되지 않은 밝음은 가짜다.  이런 점은 당시 최남선이 만주에 거주하면서 고 외치며 ‘만주는 이제 왕도의 지표 하에 새 역사의 건설이 재촉되고 잇다. 이에 대한 일본제국의 지도력이 아모러한 저해도 늣기지 아니할 것은 진실로 무론이다’고 하면서 ‘우리가 어떠케 이 위대한 천직을 소홀히 할 것인가. 그리고 만주낙토화 이외에 무슨 조흔 일을 다시 어듸에서 어들 것인가’라며 정신을 팔던 언사와 일치한다.  시인 유해영의 1940년대 초의 정신이 이러하지만 한「중국조선족 문학사」는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문학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 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 몸에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되어 불리우고 있다15).    의 주제를 염두에 둘 때 윤해영에 대한 위와 같은 문학사적 평가는 용인될 수 없다. 특히 시 ②, 제 2연의 제 3행이 의 바로 그 시의식과 동일함이 분명하고, 제 3연의 ‘아리랑도 흥겨워’의 그 아리랑도 이름이 아리랑이지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는 민요 아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이다. 은 일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고유민요 형식에 당시의 반민족적 정서를 담아낸,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을 훼절하게 만들던 노래의 하나다.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의 문제에 늘 쫒긴 것을 감안 하더라도 은 의 그 도저한 민족성을 너무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인용 ④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확연히 나타난다.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활발함도 만주를 희망의 땅으로 인식하는 데서 온다. 이것은 만주국 국가에 나타나는 ‘세계동화원지즉 흥천지동류世界同化遠之則興天地同流’란 의미나 ‘조선인의 오래 폐쇄되얏던 종족적 원기는 일본의 국책에 자극되야 바햐흐로 진장의 고조를 보이고 잇다. 그리고 이를 추진함에 놀라운 종족 번식의 고율이 잇다. 이 두가지가 합하야 조선인의 발전력은 역외로 향하여도 저절로 활발하지 아니치 못할 터’16)라며 순천안민順天安民을 기원하던 언사와 같이 간다. 또  이란 민요를 날조해서 ‘오족의 새살림 풍년든 땅에/ 춤추며 노래로 배 떠나가네’ 라는 정신세계와도 같다. 가 형식면에서 시조로 나타나는 것, 이 민요란 이름으로 날조되던 그 의식과 발상이 동일하다.  오족협화란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대동아 건설정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정신을 바꿔야 하고, 그 정신 개조가 예술의 형태로, 그것도 우리 민족 고유의 모습을 갖춘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윤해영의 와 시조 가 놓인 자리가 바로 그러하다.  이런 점을 에서 살펴 보자.    ⑤     오날 이 고개엔     五色旗 발붓기고     목도군 절믄이들의     노랫소리가 우렁차서     豆滿江 나룻터엔 다리라 걸니고     南쪽으로 通한 길은 널버저……     이 봄도 나의 族屬들이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     한숨도 恐怖도 다 흘러간 뒤     다-만 希望의 깁분 노래 불으며 불으며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17)                              에서    ‘昭和 十二年 四月 於 龍井’(1937년)이라고 창작일자가 명기된 이 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정신적 갈등은 어디에도 없다. 오색기가 봄바람에 나부끼는 아래에서 젊은이 들이 목도를 메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우렁차단다. 긴긴 봄날 목도를 메는 일이 고통스러울 텐데 어째서 그 소리가 우렁차게만 들릴까. 두만강을 건너 넓은 길을 메우며 떼를 지어 밀려오는 동족들을 보았지만 한숨과 공포가 사라졌단다. 관념이 너무 앞서 있다. 현실에 대한 막연한 선험적 희망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 아니다.      물ㅅ 개와 坐首의 딸과 살아서    사람과 갓튼 물ㅅ 개를 낫코    물ㅅ 개와 갓튼 사람이    사람과 갓튼 사람을 나서    그 어른이    큰아큰 中原을 통트러 다스렀다는    아리숭한 이야기가 있다.    몽고 건국 설화와 연루된 첫 연이다. 만주의 내력을 몽고족으로부터 끌어 오고, 청나라로부터 끌어와 오족이 화합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삭막한 대륙을 무대로 살아 온 만주족에게 있어서는 ‘물’은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 물에서 사는 물개와 사람 사이에서 누르하치 같은 영웅이 태어났고, 그래서 몽고족은 본질적으로 큰 힘을 지닌 족속이 됐다고 찬미하고 있다. 물론 ‘오랑캐 고개’란 말 속에는 이런 신화를 그냥 웃으며 말해 버리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시 는 두만강을 건너던 북간도 이사군의 한숨의 관문이었고, 10년 전부터는 밀수꾼 젊은이들의 공포의 관문이었는데 이제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넘는 관문이 되었다며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시대에 대한 고통스러운 반응이 없고, 현실을 완전히 낙관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다. 작가의 선험적 진술이 리얼리티를 거세시킨다.    Ⅲ, 순수 서정, 그 역사의식과의 결별    윤해영의 시가 앞 항의 내용과 같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만주시인집」에는 외에 , , 가 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윤해영의 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로 대표되는 민족의식의 맞은편에 가 놓여있기에 우리는 이런 시에 더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시의식도 한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세 작품의 전문을 찬찬히 읽어 보자.     寂寞한 江이로다   거룩한 江이로다   고원일흔 자식들 젓줄을 빨리기   해란강 백리 언덕에 주름t살은 잡혓느니   전설의 물ㅅ 줄기 더드머 오르면   영란이 핀언덕에 어진사슴이   호사로운 두 뿔을 빗처보든 시절엔   정정한 낙엽송의 아지 가지가   은하의 별빗좃차 가렷다건만   이주민의 斧鐵에 역사가 빗날 때   쓸어지는 환목의 모닥도막을   가삼에 안고서 흘럿느니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城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 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입히 필때면   懷鄕病 절믄이들의   로맨스도 실어갓다.   금심만흔 사나히들의   큰 뜻도 실어갓다.   한世記 雜多한 이地城의 歷史를   늘근 해란강 백사장에 차즈리                            전문     오월의 석양   발해 옛터에   집팽이와 나와   풀숩에 스다.   歷史란 모도다   거짓말 갓태서   六宮의 남은 잣최   줏추돌도 늘것는데   第一官址 드놉흔곳   應靈寺 鍾이 울어울어……   기와 片片 어루만저   회고에 잠기우면   저-언덕 밧가는 농부   그 시절 백성인듯!   멍에민 소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18)                     전문     1. 봄   그옛날 오막사리가 사랏다는   傳說이 시린 각담에      냉이와 달래는   보람업비 파르럿고!      한그루 활작핀   살구나무 가지에는      그래도 벌들의 살임은   옛갓치 오븟하이    2.여름   구진비 뿌리는 黃昏이면      영산가닥 입입에   落水가 지름지름!      새끼 기르는 오치래기 둥지엔   지붕이 업서서 실탄다.    3.가을   알뜰이 길너논 코쓰모쓰   꽃치 폇건만     여름은 벌서   늘거서 갓네      쌀살한 바람이   몸맵시를 흔들고      파-란 하날이   너무도 매몰차      코쓰모쓰는 季節의   계못 자식 이란다.   4.겨울   욋딴집 저녁 굴뚝에   煙氣가 숫지다.      아마 靑솔가지를 때는 게지   바람도 새들도   모두 잠들어      삽사리 컹컹   寂寞을 불으다.      조각달 눈빗우에 조으는 밤   감자 입김쉬는 火爐가엔      金僉知 보는 趙雄傳   혼자서 흥겨우리19)                    전문    위의 시 세편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과거에 가 있다는 점이다. 에서는 한 세기전의 역사는 강가 백사장에 묻혀버렸고, 에서는 옛 궁터에 종이 우는 석양이다. 한 때 민족의 웅지가 피어났던 대국의 성터에는 풀이 무성한데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지금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과거의 영화가 꿈으로만 남은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그런 과거지향의 시상이다. 도 봄에서 시작된 생성의 세계가 겨울의 적막함으로 끝나고 있다. 겨울은 죽음의 시간이고, 과거의 시간이다.  둘째는 공간적 배경이 민족사와 깊이 연관된 곳이거나 그 현장이다. 해란강은 간도 이민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다. 시 은 그런 해란강이 이민사와 연결되면서 민족사의 한 시대를 형상화한다. 백의민족이 개척의 혼을 기르던 간도, 그 굽이굽이에서 저항의 숨결을 생성해내던 공간이 해란강이다. 항쟁의 일 번지 청산리가 있고, 전쟁의 원귀가 뒤엉킨 수해가 있고,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선구자들이 말을 달리던 용정을 있게 한 근원이 해란강이다. 의 육궁터나 의 김첨지, 조웅전 읽는 외딴집도 이런 민족사와 간련된 속에 서 있다.  세 번째의 특징은 작품의 정조가 낭만적 소멸구조로 시의식이 하강되다가 곧 회복됨으로써 긴장을 이루는 점이다. 이것은 서정시로서의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에서 이런 점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잠깐 말했지만 해란강은 만주이민의 고난의 현장이자 북간도의 상징이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남강산맥과 영액령산맥의 분기점인 증봉산, 계관라자산에서 시작되는 이 강물은 비옥한 분지, 북간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다가 마침내 두만강으로 잦아든다. 두만강에 얽힌 우리 민족의 애환은 巴人의 「국경의 밤」과 같은 작품이 특징 있게 그 서사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해승은 에서 이 강을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지형이 복잡하고 험준한 데다가 삼림 또한 거대하므로 그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수 많은 물줄기는 산골마다 경지를 살찌게 하였고, 일찍이 여락민이 정착하여 풍요한 곡창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해란강이야 말로 간도인들에게는 다시 없는 샘이며 생명의 젖줄인 것이다.  유동(柳洞), 부동(釜洞), 서작동(西作洞), 청산리(靑山里) 등 마을 이름도 그렇거니와 용수골, 통수골 매바위골 등 산골의 이름들도 한국적인 지명이 많다. 그런데 개척시대에 해란강변에서 제일 큰 마을은 용두레촌이었다. 두만강, 횔여 방면에서 강을 건너 남강 산맥을 넘어가노라면 오랑캐령에 이르게 되며 거기서 북으로 흐르는 육도하를 따라 백리 가량 북상하면 넓은 평원에 이르러 해란강에 합쳐지는데 그곳이 통칭 용두래골(龍井)이다20).    그러니까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분명 구원의 땅인 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을 있게 한 강이 해란강인 것이다. 김학철이 간도지방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과 역사를 증언하는 소설을 쓰면서 그 제목을 「해란강아 말하라」고 했고, 이욱이나 김효원이 그들의 시집을 묶으면서도 「해란강의 두견새」라 했으며, 이근전이 자전적 장편「고난의 년대」의 배경을 이 강변에서 전개해간 까닭 역시 이런 점에 있다.  이런 내력으로 볼 때, 윤해영이 의 서두를 ‘적막한 강이로다/ 거룩한 강이로다’한 것은 관념적 진술이 아니다. 당대의 조선족으로서는 절로 나올 말이다. 그리고 이 강을 이주민의 고난사와 연결시킴도 민족적 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그가 일찍이 노래했던 바로 그 ,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와 바로 연결되는 시의식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결말은 서두의 이런 현재시제와는 달리 과거시제로 끝난다. 바로 낭만적 소멸 구조다.  ‘-갓다’, ‘-갓다’, ‘늘근 해란강의 백사장에 차즈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점은 시의 중반부의 톤과 역접된다. 그래서 다소의 긴장을 형성한다.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밝고, 다정한 이미지다. 그러나 그 다음을 잇는 것은 ‘회향병, 로맨스, 근심, 역사’와 같은 하강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또 시의 톤이 잡자기 떨어지며 꺾인다. 다시 소멸구조, 비극적 정조를 이룬다. 하지만 상승과 하강의 대립, 이런 것은 서정시의 정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가 서정시로서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도 시 의식은 과거에 가 있다. 찬란한 과거, 역사에 대한 회고가 오월 석양 무렵의 밝음과 대비를 이룬다. 한시에서 즐겨 쓰는 대구법 형태다.   또 ‘제일 궁지 드놉은 곳/ 음영사 종이 울어 울어……/ 기와 편편 어루만져/ 회고에 잠기우면’이란 구정과 ‘저-언적 밧가는 농부/ 그 시절  百姓인 듯/ 멍에 멘 소 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는 어조가 비슷한 문구로 병렬되어 있다. 찬란한 과거가 현재의 무심한 자연과 대비되어 세월의 덧없음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회고의 정을 돋운다.   발해란 나라가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였고, 그 국세가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한 대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런 나라의 성터를 민족의 흥망이 또한번 바뀌는 역사 앞에서 바라본다. 시인의 착잡한 심회가 큰 무리 없이 개진되어 있다. 이런 억제된 감정이 아니었으면 외연(Denotation)의 회고를 내포로 연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곧 서정적 자아는 음영사 종이 우는 석양에 허물어진 궁궐터를 바라보며 다시 찾을 길 아득한 민족의 영화를 생각한다. 이런 시의식이 처연하고 감미롭게 다가옴은 시의 소재를 우리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대를 선택함으로써가 아니라, 이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치, 곧 낭만적 소멸구조 때문이다.    역시 시점은 과거에 가 있고 낭만적 정조가 중심 시상이다. ‘봄’은 전설이 서린 돌각담, 냉이. 달래가 파란 속에 오고, 옛날처럼 살구꽃이 피고, 벌들도 부산히 날아들지만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때의 오막살이와 그때 사람들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봄날의 화창함이 겨울의 닫힌 이미지로 끝나버렸다. 다른 봄의 예고가 마지막 행에서 시도되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다. 김첨지의 ‘조웅전’도 흥이 없고, 칭얼대는 손자도 없고, 새도 바람도 자고 삽살개만 짓는 적막한 천지인 까닭이다.   ‘여름’은 여름 저녁 한 때의 밝음이 가볍게 스켓치 되고, ‘가을’은 소멸적 시상이 코스모스, 가을, 하늘 등의 오브제를 통해 소박한 서정으로 처리되고 있다. ‘겨울’에서는 ‘겨울밤-조웅전-전통적 서경의 자장’으로 변전된다.   는 이렇게 시대감각이나 역사의식이 거의 배제된 순수서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같은 열정과 비장미도 없고, 와 같은 아세(阿世)도 없고, 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시의식도 없다.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고, 시로 육화하려는 자세가 기본 틀을 이루고 있다.  윤해영의 시의 다른 특징, 민족적 허무의식이다. 무섭고 두렵다. 의 힘과 양양함이 사라진 소멸의식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나 는 이런 민족의 소멸의식이 마침내 이 시인을 절망으로 몰아가 생성시킨 혼혈아일지도 모른다.   Ⅳ, 한 시인의 안타까운 종말을 정리하며    지금까지 이 글은 윤해영의 와 를 대비하고, 와 의 시 의식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와 는 형식면에서 다 같이 4음4보격의 민요적 율격이지만 시의 주제는 완전한 대립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곧 가 민족의 투혼과 독립의지의 형상화라면, 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건설에 대한 송축이다. 이런 점에서 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합리화 하는 정신을 앞장서서 수행한 작품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와 의 시 의식은 당시 만주를 大日本건설의 전진기지로 만들려 했던 일본의 그 정신과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윤해영이 당시의 정신적 사정을 문학이란 형식, 그것도 민요라는 형식에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민족적인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는 일본이 그들의 대동아 건설을 효과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만주 개척 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그런 정신을 함양해야 된다는 시의식이 주제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시조란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윤해영이 에서 형식을 내용과 일치시킴으로써 거둔 시적 성취가 무너져 내리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윤해영의 와 는 결과적으로 의 그 도저한 민족의식을 아주 지략적으로 배반하였다.   셋째, 이런 점에서 윤해영을 일제에 항거하고 그 투혼을 노래한 민족문인의 차원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윤해영 평가에서 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문학사적 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넷째, 윤해영의 는 모두 그 시의식이 과거에 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종의 민족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기대의 세계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라면, 그 기대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이후에 오는 허망감이 이고, 그 절망을 극복하지 못함에서 야기된 돌이킬 수 없는 회고의 정, 반민족적 정서가 지배하는 작품이 와 라 하겠다.  유약한 시인의 불행한 인생유전이 치욕의 민족사와 합치되는 부끄러운 과거를 하필 의 시인 윤해영에게서 발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인의 작품에서 단편적이긴 하지만 고난의 시대를 뚫고 나왔던 자존적 민족과거사를 발견했고(), 영화로웠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서는 ‘은하장장 천심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 아리 인연이 종종’과 같은 생동적 모국어가 그 엄혹한 시대에 새로운 서정시의 가능성으로 활용되는 예도 보았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의 시 몇 편은 한 시대가 생산한 혼혈아라 하겠다.    Ⅴ.마무리; 불행한 시인을 위한 변호   젊은 시인의 혼을 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호곡하던 윤해영씨! 해방이 되자 당신이 찾아간 북쪽의 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다시 를 불렀습니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만주 땅에서 고혼이 될 것이지! 를 땅에 묻지도 않은 채 당신이 시대를 앞지르며 외친 그 가 이 무명의 후배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그렇게 종적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끝까지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의 장중한 선율, 의 배반, 이 아이러니가 나를 야유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의 일생 또한 약소민족의 후예이기에 당했던 비극!  나는 2011년 한해를 만주, 북경, 장춘에서 백석白石과 함께 혹시 당신의 다른 자취가 있을까 하고 안타까와 찾아 헤맸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득한 만주공간에서 그렇게 종적이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지금도 그들은 독도를 죽도라며 우리를 넘보고 있는데!         오양호吳養鎬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경북고, 경북대 졸업. 영남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지도교수 조동일.1981).『현대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수년 전부터 월간『시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있고, 수필집에『백일홍』(신곡문학대상)이 있다. 평론집으로『낭만적 영혼의 귀환』『*문학의 논리와 전환사회』『*한국현대소설의 서사담론』등이 있다. 1970년대부터 만주조선족 문학연구를 하여 『한국문학과 간도』『*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만주이민문학 연구』(심연수문학상 수상), 백석의 만주행을 고찰한『그들의 문학과 생애, 白石』이 있다.  교토대(京都大) 객원교수 시절(‘일·한교류기금’ 지원) 재교토 유학생들과 “정지용기념 사업회”를 결성했고, 그 후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정지용시비’를 세웠다. 대산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정지용시를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였다(『鄭芝溶 詩選』, 東京, 花神社, 2002). 북경의 중앙민족대(객좌교수), 장춘의 길림대(특빙교수)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을 강의했다. 현재, 인천대 명예교수.(*표 저서;문화공보부,문화체육부,문화부, 대한민국학술원선정 우수도서)                          1) 오양호, 『영남어문학』4집. 영남어문학회,1977,10월. 이 소논문은 박계주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쓴 소설에 대한 고찰이다. ‘영남어문학회’는 그 후 한민족어문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한국문학과 간도』간행을 준비 할 1980년대 초 나는 홍대 앞 극동방송국에서 북만주 조선동포에게 만주조선인 문학 방송도 했다.   2) 오양호, 「동아일보.」,1993, 3, 10(수)일.   3) 「동아일보」1993, 3, 12일(금). “이런 사실을 안 이상 이 노래는 며칠 전 문학평론가 오양호교수(인천대)가 본지 기고문에서 지적한 대로 적어도 정부의 공식행사에서만은 삼가야겠다는 의견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회절한 시인의 작품을 애송한다는 것은 국민적인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4) 오양호, ,「국어국문학」 114호.(국어국문학회, 1995년 5월)   5) 그 중의 한 사람이 노무현 정권 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김삼웅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글 수편이 「동아일보」 독자투고 난에 오르기도 했다.   6)「동아일보」1990,2,28(수). . 이때는 윤해영이『만주시인집』에 발표한 시가 친일성향의 시로 밝혀지면서이다. 극동방송 사장 윤지관 목사 방에서 오양호, 연변대 권철, 윤동주 재종제 가수 윤형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가 모여 윤해영의 시를 검토했다. 나는 그 후 만주 자료를 뒤지던 중 윤해영의 본격적인 친일 시 를『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新京特別市.1943) 우연히 발견했고 그 충격이 아주 커서 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글은 17년 전의 그 논문의 일부분을 조금 수정 보완한 것이다.   7) 박찬호, 『1895~1945 한국가요사(Kankoku Kayoshi)』, ( 안동림 역, 현암사,1992),117쪽   8) 김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 1994), 389쪽   9) 조두남, 『그리움』(세광출판사, 1982), 41~43쪽. “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 윤해영과의 상봉” 참조   10) 김덕균, 『조두남과 용정의 노래』중국조선족 발자취 총서·4(민족출판사,1991,북경), 566쪽   11) 윤해영, 「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1943. 新京特別市), 690쪽   12) 김영준, 「한국 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1994), 388쪽   13) 윤해영,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만선학회사, 1943, 신경특별시), 539쪽   14) 「在滿朝鮮人通信」16호(1936,11월호). 맨 뒷 표지에 광고처럼 수록되어 있음.   15) 「중국조선족 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1990), 193쪽   16) 최남선, 「재만조선인통신」39호, 24쪽   17) 윤해영, 「滿洲詩人集」(第一協和俱樂部 文化部, 1942, 吉林市). 12쪽   18) 「만주시인집」15~16쪽   19) 「만주시인집」, 13~15 쪽   20) 李海承,「잊어버린 해란강」(진명출판사,1988). 57쪽    
1147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였다... 댓글:  조회:3438  추천:0  2018-07-13
1917년 9월 28일~1945년 3월 7일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이자 몽규, 동주와는 학우였던 윤영선[1]이며, 오른쪽은 그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 소개2. 생애 2.1. 출생2.2. 학업2.3. 독립군 투신2.4. 학업 재개2.5. 체포와 사망 3. 사후4. 송몽규 전집5. 대중문화   1. 소개[편집]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 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3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5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편집]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 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썼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편집]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2]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본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본 경찰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편집]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과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3]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4]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까지,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편집]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5]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편집]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편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6]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사념)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욕)의 殘滓(잔재)만 쓰디쓴 追憶(추억)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연인)이 없어 孤獨(고독)스럽지 않아도 故鄕(고향)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기원)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편집]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 한 59편의 시를 엮어 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을 정도.   [1] 형은 윤영춘이다. 때문에 윤영춘도 윤동주의 당숙이다.[2]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3]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4] 출처[5] 동주(영화)에서도 송몽규(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자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6] 아내
114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이런 날 댓글:  조회:3298  추천:0  2018-07-13
               이런 날                                        윤동주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五色旗오색기와 태양기(太陽旗)가 춤을 추는 날 금(線선)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乾燥건조한 學課학과로 해말간 권태(勸怠)가 깃들고 '모순(矛盾)'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이런 날 /윤동주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햇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 일제 침략에도 개돼지처럼 받아들이는 조센징들 비판하는 시. ==================== 다시 용정으로... 중국 용정 광명중 5학년 시절의 윤동주(왼쪽). 오른쪽은 대성중 4학년이던 고종사촌 송몽규. 연변윤동주연구회 홈페이지 캡처   1936년 3월 다시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4월 6일 5년제 일본학교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기독교계나 민족계가 아니지만 광명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심경을 시 ‘이런 날’(1936년 6월 10일)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 오색기는 만주국 국기이고, 태양기는 일본 국기다. 윤동주에게는 서슴없는 능멸이었다. 모순을 모르고 ‘머리가 단순’하게 된 아이들을 깨우듯이, 1936년 8월 13일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했다.  이 시기에 윤동주는 여러 시인의 작품을 스크랩해 두곤 했다. 1935년 10월 27일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을 동주는 평양에서 1936년 3월 19일 구입해 내지에 서명해 둔다. 이미 읽어 왔겠지만 시집을 구입하고 더욱 깊이 읽었던 윤동주는 정지용 시 10여 편을 모방하며 습작해 본다.     윤동주 시 ‘오줌싸개 지도’의 육필원고. 유족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가톨릭 신자였던 정지용은 ‘가톨릭청년’을 편집했는데, 광명 시절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延吉) 교구에서 낸 월간 어린이잡지 ‘가톨릭청년’에 다섯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동주는 ‘오줌싸개 지도’를 1936년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써 놓았고, 이후 1937년 1월호에 발표했다. 시 한 편 완성하는 데 1년 이상 걸린 것이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쏴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제목과 1연만 보면 재미있고 귀엽다. 엄마 아빠 모두 떠나고, 남은 두 아이의 이야기다. 2연을 보면 엄마는 별나라 갔고, 아빠는 돈 벌러 만주에 갔다.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을까. 윤동주가 보관하고 있던 발표본에는 수정한 흔적이 있다. 오줌 ‘싸서’니 ‘싸’가 아니라, 오줌 ‘쏴’라고 고친 흔적이 분명히 있다. 원고지에도 ‘쏴’라고 썼는데, 투고했을 때 잡지사 편집부에서 ‘싸서’로 고쳤다. 그것을 다시 동주는 왜 ‘쏴’라고 고쳤을까. ‘싸서’보다 ‘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부모 없는 아이가 밤이 무서워 참다 참다가 쏴버리는 오줌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두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돈 벌러 다녀야 하는 난민이다. 당시 북간도 주요 도시에는 조선인 중 부자들이 가기도 했지만 일제의 착취가 극심해지면서 ‘돈 벌러 간 만주 땅 지돈가?’라는 구절처럼 만주 등 해외로 떠난 사람이 많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구절은 관념으로 갑자기 나온 그럴듯한 문구가 아니다. 이미 10대 때 쓴 동시들을 보면 그의 시에는 그가 자주 인용하던 ‘맹자’의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난민, 고아 등 ‘죽어가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불’이 나오는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지난 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 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윤동주, ‘눈’  만주의 12월 ‘지난 밤’은 누군가 죽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운 을씨년스러운 밤이다. 그런 밤에 내리는 눈이란 모든 사물을 얼려버리는, 생명을 죽여버리는 적대적 대상이다. 그런데 윤동주는 악한으로 상징될 눈을 ‘소복이 왔네’라고 표현한다. 싸늘한 ‘지난 밤’에 ‘지붕이랑 길이랑 밭’을 이불같은 눈이 덮는다.  왜 이 시에도 ‘이불’이 나올까. 낮에 온돌방은 군불을 때니 훈훈하다. 뜨거운 아랫목의 화끈한 기운을 종일 이불로 덮어둔다. 전기밥솥이 없었던 시대에 이불은 공깃밥을 따스하게 보온하는 보온기구 역할도 했다. 밤에 온돌방의 난방기구는 이불 외에는 따로 없다. 그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훈훈히 덥히며 자면 머리 위로는 코 시린 웃풍이 지나곤 했다. 이 시에서 핵심적인 단어인 ‘이불’을 제목으로 두면 시의 의도가 너무 빤히 드러나 암시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원고지를 보면 제목을 ‘이불’이라고 썼다가 ‘눈’으로 바꾼 흔적이 보인다. 본래 제목이 ‘이불’이었는데 지우고 ‘눈’으로 바꾼 것은 썩 괜찮다.  2연은 ‘그러기에’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추워 한다’고 하는 사물에 대해 ‘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고 있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을 덮어주기 위해 ‘그러기에’ 눈은 추운 겨울에만 내린다는 것이다. 약자를 생각하는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이 시는 1936년 12월에서 1937년 1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시다. 시에서 주인공은 호주머니다. 호주머니는 채울 것이 없어 걱정한다. 돈 없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뭘 넣을 수 있을까. 가장 추운 겨울에 채울 만 한 게 주먹 두 개란다. ‘갑북갑북’은 ‘가득가득’이란 평안도 방언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랐던 시대에 소년은 주먹 두 개만 넣어본다. 넉넉하지 않은 일상을 주먹 두 개로 견뎌내자는 뜻일까. 가난도 절망도 ‘주먹 두 개 갑북갑북’이라는 해학으로 녹여버린다. 이토록 간결하고 투박하게 사랑해야 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 영혼의 의자에 들어앉기 시작했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145    윤동주와 "4총사" 댓글:  조회:3157  추천:0  2018-07-13
                Look by look   윤동주의 사람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017. 11. 30. 18:00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영원한 청년, 윤동주에 대해 알면서 많은 사람을 알았습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윤동주가 존경했던 시인 정지용과 영화 '동주'를 통해 알게 된 송몽규 열사와 강처중. 이번 포스트에서는 그들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사진 출처 : 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영화 '동주' 송몽규 1917년 9월 28일 ~ 1945년 3월 7일 영화 '동주'를 통해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윤동주와 이종사촌 관계. 그리고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합니다. 은진 중학교 재학 중 중국 난징에서 김구 선생이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 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뒤 독립운동에 투산 하였다가 일본 영사관에 잡혀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조사받다가 석방되었습니다. 1938년 4월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 '이런 날'에서 형 '송몽규'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런 날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그는 방에서 시를 쓰던 윤동주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몽과 독립을 위해서는 시를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총대를 멘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윤동주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방식대로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이지요. 그는 결국, 일본 유학 중에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인 거 같다는 정보를 전하고, 본인 역시 실험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윤동주를 사후 3주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강처중 연희전문시절 함께 기숙사 핀슨홀에서 생활을 했던 핀슨홀 3총사가 바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입니다. 그리고 2년 후 후배 정병욱이 입학하면서 4인방이 되었습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일본 유학까지 함께 하게 되었고, 죽음도 비슷한 시기에 맞이하게 되었죠. 그리고 6개월 후 해방이 되고 1947년 2월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알리기로 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집 발간하는데 후배 정병욱의 역할 윤동주 시집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처중의 역할도 컸습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초판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은 10년 후 증보판에서 사라졌습니다. 증보판이 나오던 시기에 정지용은 월북하였고, 강처중은 해방 전 후언론계의 남로당 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발문에 있던 내용입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강처중은 윤동주의 유고 시집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사진 출처: (우) 뮤지컬 '달을 쏘다' 정병욱 1922년~ 1982년 연희 전문 후배로 앞서 소개한 인물들과 윤동주, 이렇게 4인방이었습니다.  윤동주는 본인이 만든 시집을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본인의 시집을 건넸는데요. 본인이 가지고 있던 것은 옥사하면서 없어졌고, 이양하 교수에거 건넨 시집도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병욱에게 건넨 것은 정병욱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고향 집에 보관되어 지금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자신의 집 마루에 숨겨두었던 시를 모아 1948년 발간하였습니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추모기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윤동주를 추억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저자 윤동주 출판 카멜북스 발매 2017.12.01.   윤동주의 주변 인물을 보니 그를 알 수 있었어요. 곧은 성품과 나라에 대한 걱정. 그의 친구들이 그리 했던 거처럼 그의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지인들로 인해 그를 조금이나마 추억 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윤동주의 사람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작성자 카멜북스  
1144    "가슴속에 어머니라는 산(山) 하나 들고 있다"... 댓글:  조회:2299  추천:0  2018-07-12
  + 어머니의 땅  대지진이었다  지반이 쩌억 금이 가고  세상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하느님은 사람 중에  가장 힘 센 한 사람을  저 지하 층층 아래에서  땅을 받쳐들게 하였다  어머니였다  수억 천 년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  그 땅을 밟고 살고 있다  (신달자·시인, 1943-)  + 어머니 1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 다리  그러나 팔십 년 긴 역정(歷程)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정한모·시인, 1923-1991)  +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시인, 1948-1991)   + 해빙  아기를 낳은 후에 젖몸살을 앓았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시며  굳었던 내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땀이 나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다   가장 깊은 속 완고했던 응어리들이 풀릴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맺혔던 젖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가슴위로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젖이 아니었다  잊혀져 가던 옛사랑이었다  어둠에서 나를 이끌어 낸 것은  주님이 아니라 어머니 속의 어머니  새벽이 되자 열이 내리고 젖이 풀리면서  나는 이제야 어머니가 된 것이다  (나희덕·시인, 1966-)  + 어머니 연잎  못 가득 퍼져간 연잎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최영철·시인, 1956-)  + 어머니의 편지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문정희·시인, 1947-)  + 어머니  새벽기도 나서시는,  칠순 노모(老母)의  굽어진 등 뒤로  지나온 세월이 힘겹다.  그곳에 담겨진  내 몫을 헤아리니  콧날이 시큰하고,  이다음에, 이다음에  어머니 세상 떠나는 날  어찌 바라볼까  가슴에  산(山) 하나 들고 있다.  (김윤도·시인, 1960-)  * 엮은이: 정연복  
1143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큰 못이다"... 댓글:  조회:2349  추천:0  2018-07-12
  + 어머니의 못  교회에 다니는 작은 이모는  예수가 사람의 죄를 대신해  못 박혀 죽었다는 그 대목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흐느낀다  어머니에게 전도하러 왔다가  언니는 사람들을 위해  못 박혀 죽을 수 있나, 며  함께 교회에 나가 회개하자, 며  어머니의 못 박힌 손을 잡는다  어머니가 못 박혀 살고 있는지  작은 이모는 아직 모른다  시를 쓴다며 벌써 여러 해  직장도 없이 놀고 있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작은 못이며  툭하면 머리가 아파 자리에 눕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큰 못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나는 삐뚤어진 마루판 한 짝이어서  그 마루판 반듯하게 만들려고  삐걱 소리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스스로 못을 치셨다  그 못들 어머니에게 박혀 있으니  칠순 가까운 나이에도 식당일 하시는  어머니의 손에도 그 못 박혀 있고  시장 바닥으로 하루 종일 종종걸음치는  어머니의 발바닥에도 그 못 박혀 있다  못 박혀 골고다 언덕 오르는 예수처럼  어머니 못 박혀 살고 있다  평생을 자식이라는 못에 박혀  우리 어머니 피 흘리며 살고 있다  (정일근·시인, 1958-)  + 두 개의 무덤  1  어머니의 젖무덤은  오래된 무덤이다  봉분이 다 가라앉아  평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결혼 생활 오십여 년에  희망이나 바람 따위  모두 그 무덤에 묻혔다  2  이 땅의 여자들  두 개의  무덤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사랑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하나는 자신을  묻기 위해)  (이대흠·시인, 1968-)  + 히말라야의 노새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눈물을 쥐어짠다  멜로드라마는 손수건을 적신다  비웃지 마라  멜로드라마가 슬프다면  그건 우리 삶이 슬프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가 통속적이라면  그건 우리 삶이 통속적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만이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그들만큼은 겪어봐야 안다  삶을 연습하고 싶다면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멜로드라마  위대한 멜로드라마  (강연호·시인, 1962-)  + 손등에 떨어진 눈물  늙으신 어머니를 씻겨드리다  손등에 눈물을 떨구었네  퉁퉁 핏줄 불거진 손등을 매만지다가  내 마음 주저앉아 버렸네  뼈마디 앙상한 손등을 쓰다듬다가  와르르 무너져 참회하였네  울고싶어도 눈물 참아온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위해  아픔조차 아픔인지 모르고 살아온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위해  섭섭함도 먼 시선에 묻어 살아온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위해  여자이기 전에 어머니였던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위해  오늘 나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야윈 손을 씻겨드렸네  향기로운 외로움을 씻겨드렸네  (홍수희·시인)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홀로 대충 부엌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어머니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오셔  일곱 자식 뿌리시고  서른일곱에  남편 손수 흙에 묻으신 뒤,  스무 해 동안을  보따리 머리에 이시고  이남 땅 온 고을을  당신 손금인 양 뚝심으로 누비시고  휜히 익히시더니,  육십 고개 넘기시고도  일곱 자식 어찌 사나  옛 솜씨 아슬아슬 밝히시며  흩어진 자식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시는 분.  에미도 모르는 소리 끄적여서  어디다 쓰느냐 돈 나온다더냐  시 쓰는 것 겨우 겨우 꾸짖으시고,  돌아앉아 침침한 눈 비비시며  주름진 맨손바닥으로  손주놈의 코를 행행 훔쳐주시는 분.  (조태일·시인, 1941-1999)  +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沈淳大)  초등학교 마당도 못 밟아서 글 모르지만  열여섯에 시집와서 자식 일곱 낳고  한 자식 잃었지만 육남매 거뜬하게 키운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다  내 나이 열두 살이 되도록 시집살이에 매여  남동생 둘 잃고도 친정 한 번 못 가보고  주정뱅이 외삼촌 술 취해 올 때면  소나무장작으로 두들겨 패 쫓고는  불 아궁이 앞에서 눈물짓던 어머니  행여 누가 볼 때면 덜 마른 장작 탓이라며  두들겨 팬 동생보다 가슴에 멍이 더 든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  장날 그 흔한 자장면 한 그릇 못 사드시고  녹두콩 열무다발 푼푼이 내다 팔고  벼농사 고추농사 찌들려서  끝물 고추대궁처럼 바삭 마른 어머니  이제는 관절염으로 두 무릎 쇠붙이 박아  걸음조차 못 내딛는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  병원 약국 앞에서  심순대씨! 심순대씨! 하고 부를 때  사람들 그 이름 우습다고 키득대지만  '여기 갑니다. 심순대씨 갑니다'  나는 소리치며 약봉지 받아든다  이제 좀 편히 사시라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지어드렸더니  새 집에 흙 묻는다고 현관부터 맨발로 들어서는 어머니  무릎 수술자국이 눈에 아려 왜 맨발로 들어가느냐고 소리치면  그냥 말없이 웃는, 이제는 너무 작아 어린아이 같은  내 어머니 이름은 심순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202번지  마당 넓고 잘 지은 그 집 문패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하나가 걸려있다  어머니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한문으로 쓴 이름 沈淳大  내 어머니는 거기서부터 맨발로 들어가시며  매일매일 바라보신다  (김시탁·시인, 1963-)  * 엮은이: 정연복    
1142    윤동주 시작품에서 나오는 "레그혼" 댓글:  조회:3060  추천:0  2018-07-12
레그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레그혼은 리보르노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다.   레그혼 종 레그혼(Leghorn)은 이탈리아 원산의 산란용 닭 품종이다. 이탈리아 서해안의 항구도시 리보르노 원산이며, 레그혼은 리보르노를 과거에 영어로 부르던 명칭이다. 리보르노 원산으로 그 곳 항구를 통해 수출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개량하여 전 세계로 보급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닭 품종의 하나가 되었다. 성장 속도가 빨라 어릴 때부터 알을 낳을 수 있으며, 암컷 한 마리가 연 평균 220개 이상의 많은 달걀을 생산한다. 몸집이 하얗고, 하얀 색깔의 달걀을 낳는다. 대한민국에서도 최근까지 가장 널리 기르던 닭 품종이었으나, 하얀 달걀보다 갈색 달걀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그 비중이 다소 줄어들었다.
114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닭 1 댓글:  조회:2280  추천:0  2018-07-12
닭 1  윤동주  한칸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  자유의 향토(鄕土)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나온  외래종 레그혼,  학원에서 새무리가 밀려나오는  3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던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물도록 ──.                 1936. 봄   위 시의 배경은 시골의 집 풍경이다. 아마 요즘 세대는 잘 모르리라. 아마 이 시는 일제의 억압에 대하여 자신의 심경을 닭장을 보면서 읊은 시일 것이다. =============   닭2  윤동주  ── 달은 나래가 커도  왜, 날잖나요  ── 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 봐.  
114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가슴 1, 2, 3 댓글:  조회:2878  추천:0  2018-07-11
      가슴 1                      윤동주   소리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         가슴 2   늦은 가을 쓰르래미 숲에 싸여 공포에 떨고, 웃음 웃는 흰 달 생각이 도망가오.   ---------------------------       가슴 3   불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      가슴                    윤동주     불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 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년 7월 24일     지금 사람들은 [화독]의 존재를 이해 못한다. 창호지 문짝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겨울 밤의 으슬한 추위를 모른다. 꺼져 가는 화독의 온기를 가랑이 사이에 놓고 마지막 온기를 느끼는 밤을.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936년은  윤동주 시인이 19세이다. 숭실학교 신사참배 문제로 관청에 접수되어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로 전학 하였다     19세 7월24일 밤 이 [가슴]을 지었다. 조숙하다고 할까. 나라를 잃은 이 청년의 가슴엔 재만 남은 싸늘한 가슴이다. 독립은 요원하다. 희망이 없다. 춥기만 하다. 집을 쫓겨난 사람이 겨울 밤 한데서 웅크리고 있어 보아라 마치 불끼 없는 재만 남은 가슴 얼마나 추울까     옛날 초가집 창호지문은 아귀가 딱 밀착되지 않아 창호지를 여유있게 붙여 바람을 막고자 한 것이 오히려 부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에 더욱 마음은 춥다. 윗목에 마시려고 한 사발 떠 논 물대접엔 물이 꽁꽁 언다.     이 때는 왜 이리 가난하고, 물자도 없고 땔 나무도 없고 먹어야 할 음식도 없다. 요즘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가난하기때문에 더욱 애국자가 된 모양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희박해진다.  자유가 너무 많아 자유가 그립지 않은가보다.                                                       /운산 최의상  
1139    윤동주와 숭실학교 댓글:  조회:3721  추천:0  2018-07-11
시대 근대 위치 평양, 및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설립 1897년 성격 근대교육기관, 중-고등교육기관, 미션학교 유형 단체 설립자 베어드(Baird, W.M.) 분야 교육/교육 요약 1897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중·고등교육기관.   숭실학당(1921년) 1897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중고등교육기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계의 교육기관이다. 연원 및 변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Baird,W.M.)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계의 교육기관이다. 같은 해에 선교부(宣敎部)의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자, 선교부가 설치되어 있는 전국 주요 도시마다 남녀 중학교가 설립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는 청소년 교육에 대한 책임을 거의 전담하였다. 바로 이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가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해 온 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중등교육을 실시하고자 숭실학교를 창설하여 스스로 교장이 되었다. 그때 한국인 교사로는 한학자(漢學者) 박자중(朴子重)이 있었으며, 학생은 13명이었다. 처음 가르치던 학과는 성경·한문·수학·음악·체조였다. 그러나 그 뒤 도덕·사민필지(士民必知)·만국통감(萬國統監)·지세략해(地勢略解)·천문(天文)·논리(論理)·생리(生理) 등도 가르쳤다. 그러다가 점차 선교부는 고등교육(高等敎育)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베어드에 의하여 1897년에 설립된 숭실학교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13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중학교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중등학교만으로는 학생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보다 높은 교육기관이 요청됨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1901년) 벌써 숭실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소안론(蘇安論)이 본국에서 별세한 부친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이 기금을 가지고 평양시 신양리(新陽里) 39번지에 광대한 교지를 매수하여 2층의 교사를 신축함으로써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하여 1905년에는 숭실중학교 재학생이 160명이나 되었고, 이미 3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생수가 증가했다는 것은 전문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었다. 1906년, 마침내 북장로교 선교부지의 결정에 의하여 대학부(大學部)를 개설하고, 12명의 학생을 입학케 하였다. 이 숭실학교 대학부는 사실상 중학교 과정에 2년 과정을 더 늘려 전문학교 설립을 향해 일보전진한 조처였다. 동시에 이 대학부는 장로교·감리교 양교파(兩敎派)의 연합사업으로 출발하였다. 이 대학부 과정의 시작은 또한 중등학교 학생수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1906년에 중학교에 등록한 학생수는 1905년의 160명에 비해 25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여기에 특기할 일은 숭실의 기지(基地)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토마스 목사가 평양에서 순교할 무렵, 토마스 목사를 환영하러 나갔던 신자 지달해(池達海)와 그의 사촌 동생 지달수(池達洙)의 순교한 시체가 매장되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순교자의 뜨거운 피가 묻힌 곳에, 그로부터 30년 후 숭실의 큰 열매가 맺은 것이다. 이후 숭실학교 대학부는 1908년에 제1회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재학생이 54명이었으며, 졸업생 수는 모두 7명이었다. 이러는 동안 기독교 대학의 위치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는 중심지 서울을 지지하였고, 또 어떤 이는 기독교 분위기가 농후한 평양이 더 좋다고 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10년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대학부가 설립되어 여성들을 위한 고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숭실학교는 일제하에서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로의 승격문제 및 신사참배 강요 등에 따른 민족의 수난과 함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제정 공포한 사립학교규칙 제1조·제2조·제3조는 형식상으로는 사립학교의 설치 및 폐지를 말하는 조항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사립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자 한 조항이다. 즉, 일본 강점자들은 1911년과 1915년의 사립학교규칙에서 문제가 되어 온 사립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킨다는 명분 아래 새로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강화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사립학교를 그들의 교육방침대로 운영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그때까지의 민간인 혹은 기독교계 중학교에 대하여 교명을 고등보통학교로 고치라고 강요하는 한편, 전문학교 등의 상급학교 입학 자격자를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규정하였다. 이때 우리 나라 사학(私學)에서는 승격, 비승격을 주장하며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였다. 총독부가 하는 일이 속이 들여다보이는 일이니, 그 굴레를 받아 쓸 까닭이 없다는 것이 비승격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승격론자들의 의견은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지 않는 학교는 무자격 학교로 만들어 학생들의 취직과 진학에 따른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니 학교에 학생들이 모이지 않을 것이며, 이는 곧 학교를 폐교한다는 의미하니, 이 때문에 승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학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선교의 근본 목적을 위해 성경 과목과 기도회를 정규 과정표에 넣으려고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고등보통학교로 바꾸지 않은 사학은 모두 총독부에 의해 이른바 잡종(雜種) 중등학교 혹은 각종 학교(各種學校)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장로교측에서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데 응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 자체가 일반 학교와 같이 성경 과목을 빼고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는 동시에 배일정신을 억압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평양 숭실학교의 모페트(Moffett,S.A.) 교장은 총독부가 계속해서 고보(高普)로 고치라고 강요했지만 절대 거부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한번은 이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에서 모페트는 “우리 좀더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다려 봅시다. 아직도 기한은 몇 해 남았으니 그대로 계속하면서 총독부에게 우리들로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학교는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말합시다.”라고 말하였다. 또 모페트 교장은 숭실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격려하기를 “할 수 있기는 있는 것인데는 낙심하지 말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는 고보로 고치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페트 교장이 이처럼 폐교를 각오하고 반대하자, 총독부는 드디어 손을 들고 이른바 지정학교(指定學校)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때 장로교측 학교들은 일대 수난기를 맞았다. 그 당시 교도의 자제들도 감리교계의 고등보통학교와 관공립학교로 입학하는 학생이 많았으므로 장로교측에는 중등학교 수가 줄어들었고, 중등 정도로 유지해 오던 학교들도 잡종학교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잡종중등학교 졸업생은 전문학교에 본과생(本科生)으로 입학할 자격이 없었고, 오직 별과성(別科性)이라는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런 차별대우는 조선교육령 제27조에 “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연령 16세 이상으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한다.”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성학교(信聖學校)에서는 선교사 배척,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숭실학교에서는 한국인 무자격 교사 배척 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은 총독부 학무국이 소위 지정·인가라는 잡종학교 명목으로 특히 장로교 계통의 사학에 압박을 가한 결과로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인정하는 학교로 승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이들 학교의 학생들이 친일이나 일본식 교육을 결코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장로교파의 함흥 영생여학교(永生女學校)는 1929년에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영생학교는 1931년에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숭실학교는 끝까지 버티었다. 한편, 대학부는 일제의 전문학교규칙(專門學校規則)에 의해 1925년에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얻어 전문학교로 출발했지만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1937년 10월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그 나머지 북장로계(北長老系) 남녀 중학교 10개 학교와 남장로파 중학교 2개 학교, 초등학교 8개 학교는 총독부에 학교 폐교원을 제출하였다. 이 때 평양의 숭전·숭중·숭의여중 등 3숭(三崇) 폐교에 직면하게 되자, 이를 몹시 애석하게 생각하여 사회적으로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살려 보려고 애쓴 이들은 이 학교 교우회(校友會)와 학교 관련자들이었다. 이들은 모교를 존속시켜 달라고 선교 당국에 대표를 파견해서 간절히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 당국은 존속 경영을 단념하고 숭실전문학교 이사 고한규(高漢奎) 장로를 청하여 자신들은 존속 경영할 의사가 없으니, 고장노가 맡아서 한국 형제들이 경영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고장로는 동지(同志) 오윤선(吳胤善), 조만식(曺晩植), 김동원(金東元) 등과 상의하고 후계자를 물색케 하였다. 제1차로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方應模)가 숭전(崇專)·숭중(崇中)을 합동 경영하고자 하였으나, 숭중 교장 정두현(鄭斗鉉)과 재단측 이춘섭(李春燮)이 숭실중학만 분리 경영할 것을 고집하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제2차로 평양 기림리(箕林里)에 거주하는 한인보(韓仁輔)가 숭전만 분리 경영한다고 하여 도(道) 주최로 이(李)·한(韓) 양씨의 찬하회(攢賀會)까지 하였으나,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3차는 1937년 가을에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株式會社) 사장 이종만(李鍾萬)이 1백20만 원의 재단으로 숭전만을 인계하기로 승낙하였으므로, 교수회 대표 문과 과장 우호익(禹浩翊), 이사회 대표 고한규(高漢奎), 교우회 대표 김취성(金聚成) 등 3인이 상경하여 이종만과 만나 악수한 채 환희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모(某) 요정에 서울 각계 유지들을 초대하여 피로연까지 베풀어 가며 환담을 나누었다. 이 소식을 들은 총독부 당국은 숭전 인계를 거부하고 대동공전(大同工專)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그러자 숭전은 구명운동을 단념하고, 폭악한 일제 탄압하에 40여 년의 역사를 남긴 채 1938년 3월 31일 자매교 숭의여중(崇義女中)과 함께 3숭은 폐교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이는 총독부가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3숭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정임에 틀림없었다. 이로써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그리고 같은 계열의 숭의여학교 등 이른바 3숭의 학원들이 자진 폐교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평양에서 사학의 명문이요 많은 선각자를 길러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숭실학교가 민족의 설움 안은 채 교육활동을 끝냈다. 이 학교는 서북지방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신문화 섭취의 선각자적인 지도자를 많이 길러냈다. 그 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숭실 관계자들은 전부 남하하여 서울에서 모교를 재건하게 되었다. 숭실 중·고등학교는 박하성(朴夏成)이 희사한 재단으로 1953년 5월 문교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하였으나, 실은 1948년 9월에 신당동에서 학교의 문을 열었고, 숭실대학 역시 박하성이 기증한 재단으로 1954년 4월에 문교부의 인가를 얻어 개교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자진 폐교했던 숭실이 17년 만에 다시 부활된 것이다. ====================     시대 현대 위치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2동 300-88 설립 1897년 10월 성격 중등교육기관 유형 단체 설립자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분야 교육/교육 요약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목차 접기 연원 및 변천 기능과 역할 현황 숭실고등학교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이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개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연원 및 변천 1897년 10월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배위량(裵緯良, W. M. Baird)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중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서 학당으로 문을 열었다. 입학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아 16세에서 36세까지의 학생 13명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듬해에는 60명이 지원하여 18명을 선발하였다. 1900년 수업연한을 5년으로 하고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을 입학 대상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성경·한문·산수·역사·음악 등을 가르쳤으나 1900년경부터 조선어·음악·수학·위생학·미술·체조·식물학·성경·천로역경·지리 등으로 교과목을 늘려 가르쳤다. 1901년소안론(蘇安論)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한식 기와로 된 2층 교사를 신축하면서 교명을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명명하였고, 1904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그 뒤 교육열의 고조로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1906년 9월 대학부를 설치하고, 중학부는 숭실중학교,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명하였다. 1928년 성경 과목과 종교의식을 폐지하면 고등보통학교로 인가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다 진학 및 취직에 제한을 받게 되는 지정학교(指定學校)로 격하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1938년 3월평양의 숭실전문학교·숭의고등여학교와 함께 자진해서 폐교함에 따라, 33회 1,25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개교 4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졸업생을 중심으로 학교의 재건을 추진하여 1948년 9월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학생 52명, 교원 7명의 숭실중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던 성도교회로 교사를 이전하였다가, 이듬해 4월 3학급의 숭실고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서울 용산구 용산동으로 이전하였다. 1975년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82년 도서관을 개관하고, 1999년 백주년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2002년 5층 규모의 정보센터를 개관하고, 2005년 2월 사이버스쿨을 개강하였다. 기능과 역할 개화기에 설립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근대 중등교육에 큰 몫을 담당하였고, ‘진실 숭상’을 의미하는 교명 ‘숭실’의 정신대로 을사조약 체결되자 반대시위를 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105인사건, 3·1운동,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과 구국운동에 앞장서 105인사건에서는 졸업생인 차이석·변인서·곽태종·김두화·길진형·윤원삼·안세환 등이 검거되어 대거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현황 2010년 현재 42학급에 총 1,5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교직원은 95명이 재직하고 있다. 교훈은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이다. 건학이념인 민족정신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탐구·봉사정신·자유구현’의 실천에 힘쓰고 있으며, 신앙과 영적 수월성, 인간교육의 수월성, 지적 수월성을 지향하고 있다. 현재 선교부·미술반·서예반·합창부 등의 동아리를 중심으로 계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운동부는 1911년에 창단된 축구부가 있다. 1997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1997년, 1999년, 2001년 학교평가 우수학교에 선정되었다.  
1138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모란봉 댓글:  조회:3400  추천:0  2018-07-10
  성격 봉우리 유형 지명 높이 96m 소재지 평양시 기림리 분야 지리/자연지리 요약 모란봉, 평양시 기림리금수산(錦繡山)에 있는 봉우리. 목차 개설 명칭 유래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현황 개설 모란봉의 높이는 96m이다. 절벽을 이루고 있는 모란봉 아래 대동강 물 위에는 유명한 능라도(綾羅島)라는 하중도(河中島)가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명칭 유래 원래 금수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최승대(最勝臺)의 생김새가 마치 피어나는 모란꽃 같다 하여 함박뫼, 모란봉이라 하던 것이 점차 산 전체의 이름으로 되었다. 자연환경 모란봉에는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삼엽송, 향나무 등 20여종의 침엽수들과 피나무, 참나무, 자귀나무, 살구나무 등 70여종의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에는 수령이 200년인 기이한 형태의 청류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모란봉에는 철따라 70여종의 새들이 날아든다. 꾀꼬리, 밀화부리, 개구마리 등과 추운 북쪽에서 살다 가을이면 찾아와 겨울을 나는 콩새, 양지니 등이 관찰된다. 형성 및 변천 모란봉의 청류벽 부근에는 모란봉나무화석(규화목)(천연기념물 제465호)이 있는데, 이것은 약 1억8,000만∼1억4,000만년전 이 일대의 호숫가에서 자라던 나무가 지각운동에 의해 땅속에 묻힘으로써 지하수 속에 있던 규소성분과 흙이 나무세포의 공간에 들어가 굳어져서 형성된 것이다. 주변에 나무화석그루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대에 키 큰 나무들이 수림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란봉나무화석은 지층의 지질시대와 지구의 기후변동을 비롯한 고지리적 환경과 고생물연구에서 의의가 크므로, 1989년 6월에 천연기념물 제 465호로 지정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다. 현황 예로부터 천하제일강산으로 이름이 높아 ‘평양팔경’, ‘평양형승’의 거의 절반이 모란봉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시기 이래의 성문, 누정 등 고적들이 있다. 모란봉 중턱에 있는 을밀대(乙密臺)는 북한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허정(四虛亭)이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을밀대와 대조되는 언덕으로 모란대(牡丹臺)가 있으며, 이 언덕 위에는 최승대(最勝臺)라고 하는 봉화대가 있다. 모란봉 밑 절벽에는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알려진 부벽루(浮碧樓)가 있다. 그리고 을밀대 서쪽 언덕 위에는 기자릉(箕子陵)이 있고, 모란대 밑에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건립하였다는 영명사(永明寺)가 있다. 이밖에도 가장 전망이 좋은 경승지인 청류정(淸流亭)과 칠성문(七星門)·현무문(玄武門)·전금문(轉錦門)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 이 모란봉은 평양을 장식하는 공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반만년역사의 애화가 담긴 유서깊은 명소이기도 하다. 모란봉 기슭에 위치한 ‘김일성경기장’은 평양공설운동장을 1969년에 개축하면서 모란봉경기장으로 부르다가 1982년 4월 11일에 또다시 증축, 개장하면서 김일성 출생 70돌을 기념하여, 김일성경기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규모는 연건축면적 4만 6,000㎡, 경기장바닥면적 2만 300㎡, 인공잔디면적 9,375㎡, 관람석 면적 1만 2,133㎡, 관람석 계단수 43계단, 수용인원 10만명 정도이다. 30m 폭의 차양이 설치된 관람석과 각종 체육시설을 비롯하여 TV송신시설, 동시통역시설, 야간조명 등의 설비를 갖추고 있다. 축구, 육상경기와 집단체조 뿐만 아니라 각종 군중대회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모란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좌표: 북위 39° 02′ 35.2″ 동경 125° 45′ 43.9″ 모란봉(牡丹峰) 을밀대에서 본 모란봉과 대동강 전경 높이 95 m 위치 위치 평양직할시 모란봉(牡丹峰, Moranbong)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의 중심지 북쪽 모란봉구역에 있는 작은 언덕이며, 정상에는 최승대가 있다. 전체의 모습이 모란꽃과 같다고 하여 모란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변 지역을 합쳐서 금수산이라고 부른다. 동쪽으로 대동강과 접하고, 남.북.서쪽에는 골짜기가 있다. 평양에서도 경관이 훌륭하고, 조선팔경이나 평양팔경의 하나로 불린다. 고구려 시대 이래 평양성의 최북단을 지키는 요새였는데, 지금도 성벽이나 누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에 의해 누각과 절이 파괴됐다. 청일 전쟁 때는 청나라군이 지켰던 모란대 요새이며, 1894년 9월 15일부터 일본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지가 되었고, 여기가 함락되자 이어서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구릉지나 주위 일대는 현재 공원이 조성되었고, 유원지가 정비되고 있다. 금수산태양궁전, 을밀대 등이 있다. 또, 공원 주위는 문화 시설이지만 개선문, 김일성경기장등 기념물도 많이 있다. 목차  [숨기기]  1성곽.누각 등 2갤러리 3공원.문화.체육시설 3.1기념물 4모란봉의 이름을 딴 것 5같이 보기 성곽.누각 등[편집] ");"> 을밀대 최승대 부벽루 청류정 칠성문 현무문 전금문 영명사 갤러리[편집] "); zoom: 1;"> 1949년의 모란봉 일대. 정상에 최승대가 있고, 그 아래에 영명사, 부벽루와 벽라교가 보인다. 공원.문화.체육시설[편집] ");"> 개선청년공원 모란봉극장 조선혁명박물관 김일성경기장 기념물[편집] ");"> 천리마동상 개선문  
1137    영원하다... 영원할... 영원하리... 댓글:  조회:3539  추천:0  2018-07-10
[카드뉴스] 영원한 청년 윤동주를 추억하다...                                                     [중앙일보] [카드뉴스] 영화 '동주' ...영원한 청년 윤동주를 추억하다     서 시 윤 동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13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모란봉에서 댓글:  조회:2633  추천:0  2018-07-09
모란봉에서                            윤동주 앙당한 소나무가지에  훈훈함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물에 한나절 해발이 미끄러진다  허무러진 성터에서  철 모르는 녀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  평양 숭실학교 윤동주의 시 ‘모란봉에서’(위 사진 오른쪽) 및 ‘창구멍’의 육필원고 일부와 1930년대 윤동주가 다녔던 평양 숭실중학교(아래 사진). 유족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숭실고등학교 제공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일본 와세다대)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약간 달뜬 표정이 낯설었다. 윤동주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폄훼하고 있었던 미물이 스승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었다. 종이 몇 장을 대수롭지 않은 듯 가방에 쑤셔 넣고 나왔다. 다음 해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 ‘문예상식’에 3면에 걸쳐 윤동주 시 ‘서시’ ‘슬픈 족속’ ‘쉽게 쓰여진 시’에 대한 분석이 실렸다. 북한에서 윤동주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국외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총독부 지정학교로 인정받은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18세의 윤동주는 4학년 편입에 실패하고 3학년에 편입한다. 최초의 큰 좌절이었다. 9월에 입학한 그는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다. 10월에 숭실중학교 YMCA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에 ‘공상’을 발표했다. 1935년 12월에는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을 썼다. 이 시 끝에는 현재 평양의 봉수동 ‘봉수리에서’ 썼다고 쓰여 있다.  편입 실패보다 더 큰 좌절이 그에게 다가온다. 1925년 조선신궁을 세운 뒤 조용했는데, 1935년 4월 19일 조선 도지사 회의에서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정무총감은 신사참배를 강조한다. 1935년 9월 애써서 입학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18일자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했고, 3월 20일 총독부가 교장을 파면한다. 곧바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시작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 등과 숭실중학교를 떠난다. 이 무렵 3월 24일에 시 한 편을 쓴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윤동주, ‘모란봉에서’  모란봉과 대동강이라는 지명이 나오니 분명 평양에서 쓴 글이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저도 모를’ 이국 말(일본말)로 노래 부르며 ‘재질대며’ 뜀 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명동마을에서 이렇게 놀면 야단맞을 괴이쩍은 풍경이다.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다.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1938년)을 생각하게 한다.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동시 ‘창구멍’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된다.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윤동주, ‘창구멍’   구절구절 아빠 사랑이 간절하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침 발라 작은 창구멍을 뚫는다. 얼마나 궁하면 나무가 젖을 수밖에 없는 눈 내리는 날 나무 팔러 나갈까. 새벽도 아니고 저녁에 말이다. 새벽부터 밤늦게 고단하게 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 소담한 비애가 독특한 리듬으로 반복된다.  숭실에서 머문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을 썼다. 15편의 시를 쓰며 창구멍으로라도 들어오는 희망을 꿈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희망은 싸구려가 아니다. 희망은 ‘살랑살랑 찬바람’으로 날아든다. 마치 발터 베냐민이 나치 정권에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희망을 얘기했듯이, 희망은 냉혹하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때도 평양에 가서,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다방 ‘세르팡’에 들르곤 했다. 원로 화가 김병기 선생은 중요한 순간을 회고했다. “한번은 초현실주의 등 현대예술 관련 토론이 벌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인 윤동주, 바로 그였다. …1940년대 초 연희전문 시절에도 곧잘 평양 나들이를 했다.”    고전음악을 듣던 평양은 윤동주에게 편입시험 실패라는 좌절을 안긴 곳이다. 자신의 작품이 활자로 변하는 기쁨을 체험한 평양에서 ‘조선=식민지’라는 환멸을 몸으로 체험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의 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가서 절명했던 그의 이력은 ‘중국-북한-한국-일본’을 연결하는 아시아평화공동체에 대한 작은 창구멍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윤동주 강연을 할 때, 중국과 일본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볼 때마다, 나는 윤동주가 내놓은 작은 창구멍이 떠오른다.    이제 북한에서 윤동주가 연구된 것을 반가워하던 오무라 교수님의 반가운 표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한때 남북공동 문학교과서를 만든다면 어떤 작가를 넣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함께 윤동주는 통일문학을 위한 창구멍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시아문학교과서를 만든다면 윤동주가 작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윤동주는 우리 시대와 아시아인에게 다가오는 희망과 실천의 앙당한 상징이다. 희망은 아롱아롱 아침해, 살랑살랑 찬바람으로 희미하게 다가온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135    "저 바다 건너 배고픈 아이들 배불리는 빵 한덩이 되고싶다"... 댓글:  조회:2231  추천:0  2018-07-09
  + 징검돌   개울을 건널 때  등을 내어 준  돌이 아파할까 봐  나는 가만가만 밟고 갔어요.  (오순택·아동문학가, 1942-)  + 꽃 . 잎  잎이 다칠까봐  위에서 피는 꽃  꽃이 다칠까봐  아래에 놓인 잎  그래서 예쁜  꽃 . 잎이구나  (한귀복·아동문학가)  + 그건 너지  누가 느낄까  네 개의 귀를  활짝 펴서  무어든 덮어주는  보자기의 고운 마음을  누가 배울까  네 개의 귀를  꽁꽁 묶어  누구든 감싸주는  보자기의 귀한 마음을  (홍우희·아동문학가)  + 덩이  흙덩이, 복덩이, 햇덩이  달덩이, 돌덩이, 메주덩이  눈덩이, 얼음덩이, 불덩이  똥덩이, 소금덩이, 황금덩이  모두 작은 덩이로 이루어졌지만  하는 일은 다 다르다.  나는 총소리 울리는  저 바다 건너  배고픈 아이들 배를 불리는  빵 한 덩이 되고 싶다  (박예분·아동문학가, 전북 임실 출생)  + 수재민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너무 무겁다.  머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너무 아프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둘이는 똑같이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신발은  미안했어요.  흙이 묻어서......  "괜찮아.  주인을 위해 일했잖아?"  신발주머니는 신발을  꼭 안아 주었어요.  둘이는 똑같이  흙투성이가 되었어요.  (이혜영·아동문학가)  + 그 병실에서  달리기하는 아이  산책하는 아이  병실 창문으로  부러운 듯 내려다보던  그 길을 혼자 걸어봅니다.  걸으면서 내가 내려다보던  그 병실 창문을 올려다봅니다.  지금도 누군가  그 병실 창문으로 나를  부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겠지요.  병실로 달려가  그 아이 손을 꼬옥 잡아주고 싶습니다.  (전영관·아동문학가)  +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한 대학생 누나  너무 배고파  메추리알, 우유, 김치, 핫바  6,650원어치 훔쳤다고 한다.  설 때도 고향집에  아무도 없는 누나  누나의 가난을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누나의 슬픔을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이화주·교육자이며 아동문학가)  + 더 주고 싶어  퐁퐁  샘솟는  옹달샘 마냥  마냥  주고도  모자란 마음.  풋고추를  빨갛게  풋사과를  빨갛게 익혀 놓고도  해님은  서산마루에서  머뭇머뭇  마냥  주고도  더 주고 싶어.  (김재용·아동문학가)  + 어린 고기들  꽁꽁 얼음 밑  어린 고기들.  해님도 달님도  한번 못 보고,  겨울 동안 얼마나  갑갑스럴까?   꽁꽁 얼음 밑   어린 고기들.   뭣들 하고 노는지  보고 싶구나.   빨리빨리 따순 봄  찾아오거라.     (권태응·시인, 1918-1951)  + 세탁소집 아저씨  키가 작아요  걸음이 서툴러요  다림질할 때는  온몸이 흔들려요  팔도 다리도 웃고 있어요.  저녁이면  바느질하던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집으로 가요  아저씨가 웃어요  눈도 입도 눈썹도 웃어요  아저씨 가슴에는 웃음이  세들어 살고 있나봐요  (정현정·아동문학가, 1959-)  + 텔레비전 속의 아프리카  물을 얻기 위해  40킬로를  걸어가야 한다면  물 한 컵 마시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면  수돗물 틀어 놓고  이 닦진 않을 거야.  거품 벅벅대며  머리 감진 않을 거야.  정말 내가  아프리카 케냐의 아이라면  수많은 꿈 제쳐 두고  비 되고 싶을 거야.  메마른 물동이마다  그득그득 채우고  강과 호수에 넘실거리는 비.  (유은경·아동문학가)  + 동전 한 닢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  발바닥에 밟혀 누그러들지 않고  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고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정성껏 닦고 닦아 빛을 냈습니다.  따스한 손바닥에 꼬옥 쥐고  밟히고 깔려 멍이 들었을  아픔을 감싸주었습니다.  (허형만·시인, 1945-)  + 돌멩이 한 개  학교 갔다 오던 길에  돌멩이 한 개를 발로 찼다.  돌멩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찻길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지만  언젠가 내 짝꿍이 내게 준  고 작은 조약돌처럼  자꾸 마음에 걸린다.  -혹시 차에 치이지는 않을까?  -누군가 멀리 던져버리지는 않을까?  무심코 차버린 돌멩이 하나가  이렇게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이야.  어둠이 내리는 방안에  나는 내 스스로  나를 가두어 놓고 있다.  (노원호·아동문학가)  + 참 잘 했어요  '김밥천국', 세탁소, 25시 편의점  나란히 줄 선 상가 모서리에  폐지 줍는 할아버지  손수레 세워 놓고  쪼그리고 앉았어요.  손에는 호호  때늦은 점심 컵라면  "할아버지,  이거랑 같이 드세요."  옷 수선 맡기고 돌아서던  하늘채 아파트 1층 아줌마  '김밥천국' 김밥 한 줄  은박지에 사 왔어요.  "참 잘했어요."  해님이 반짝  은박지에  칭찬 도장 찍어 주고  지나갑니다.  (박경옥·아동문학가)  * 엮은이: 정연복  
1134    윤동주와 문익환 댓글:  조회:2536  추천:0  2018-07-09
구약학의 대가이자 서울 한빛교회 목회자, 성서번역 책임위원이었다가 민주투사와 통일운동가로 나선 문익환 목사(1918∼1994·사진)는 시인이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 목사는 “하나가 되는 일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와 같은 경구를 남겼다.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성동문화재단, 사계절출판사 등은 7일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란 제목의 평화콘서트를 열었다. 사계절출판사는 최근 같은 제목의 문 목사 시집을 출간했다. 가수 안치환은 “1987년 여름 문 목사를 신촌 거리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연설하지 않았고 울부짖었다. 열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울부짖었다”고 회고했다. 영화 ‘1987’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이한열 영결식 연설 이야기다. 문 목사는 1918년 윤동주보다 반년 늦게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한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 소속으로 정전회담의 통역자가 돼 판문점에서 일했다. 1955년부터 한신대 교수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성서번역 책임위원으로 지내다 친구이자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계기로 58세였던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며 반독재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이후 6차례 투옥되며 11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문 목사 스스로 연고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명동촌 문씨네 사랑방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독립운동가 이동휘 김약연은 그 동네 지도자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학창시절 은사였으며 ‘아리랑’의 나운규는 명동학교 선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3·1민주구국선언을 함께한 동지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는 1918년생 4인방인 문 목사, 장 선생, 서남동 목사, 박봉랑 목사를 ‘기장 믿음의 유산’으로 명명하고 “선배들의 신앙고백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우성규 기자 ///국민일보    ▲ 거리에 선 목사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 ㅡ문익환   ▲ '하나됨을 위하여' 고 문익환 목사가 분단 상징인 철조망을 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임옥상 화백 작품. '하나됨을 위하여' All for One 235x266cm 종이부조,아크릴릭 1989ⓒ 임옥상 화백 제공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그래 그 한 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 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 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적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_ 문익환 시     ===========================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6월 05일 (화)  김정형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유원호, 정경모와 함께 일본 도쿄와 중국 북경을 거쳐 북한의 평양 땅을 밟은 것은 1989년 3월 25일 저녁이었다. 문익환을 태운 조선민항기가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안착하는 순간 해방 후 줄곧 철옹성처럼 높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분단의 벽은 한순간에 무력화되었다. 문익환은 도착 일성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왔다”고 성명을 낭독했다. ▲ 문익환 노구의 문익환을 북한으로 향하게 한 것은 통일 문제가 더 이상 정권 안보용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는 남북을 잇는 창구 단일화의 금기를 깨기 위해 방북을 단행했다. 김일성을 만나 통일방안을 모색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9개항의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등 거침없이 이어지는 그의 방북 활동은 냉전의 분단 상황 하에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방북 일정 하나하나가 모두 분단구조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호불호를 떠나 국민의 첫 반응은 당혹감과 놀라움이었다. 뒤이어 격렬한 논란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극과 극이었다. 보수 쪽에서는 ‘환상적 통일주의자’, ‘돈키호테’라고 폄훼했고,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공안정국을 불러 전체 민중운동의 이익을 훼손하게 된다”며 ‘소영웅주의적 돌출행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진보진영 대부분은 ‘통일을 위한 선각자적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문익환은 4월 3일 평양을 떠나 북경과 도쿄를 거쳐 4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속 영장이었다. 19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시작해 유신헌법 비판 성명(1978), YWCA 위장결혼 사건(1980), 5·3 인천사태와 서울대 강연(1986)에 이은 5번째 구속이었다. 법원은 그의 방북을 ‘감상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문익환은 수감생활 19개월 만인 19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1991년 6월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6번째 투옥이었다. 생전에 그의 자택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처럼 문익환은 이렇게 12년 동안 차가운 감옥을 드나들었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당시 명동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어울려 놀던 친구가 윤동주, 송몽규였다. 1919년 3·1 운동이 터졌을 때 그의 고향 명동촌에서도 ‘조선 독립만세’의 봉화가 타올랐다. 아버지는 구속되고 어머니는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생후 9개월된 문익환은 어머니 등에 업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문익환은 캐나다 선교부가 간도의 용정에 세운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6년 평양 숭실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5학년 때인 1932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도쿄의 일본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제가 학도병을 강요하자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릴 생각은 없다”며 1943년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 평탄했던 삶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 쳐 만주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해방을 맞은 그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1946년 8월 서울에 도착했다. 1947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1949년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유엔군의 통역관으로 정전회담에서 활동했다. 종전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프린스턴신학교를 마치고 1955년 봄 귀국했다. 이후 한빛교회 목회자 겸 한신대 교수로 활동하던 그가 매진한 것은 성서 번역이었다. 1968년 신·구교 합동 공동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1976년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때 번역한 성경이 ‘공동번역 성서’로, 천주교에서는 2005년 ‘성경’을 내기까지 사용했다. 신구약 66권과 외경(가톨릭에서는 제2의 정경) 9권을 망라한 공동번역 성서는 1977년 4월 출간되었다.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이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느님’(구교)과 ‘하나님’(신교)으로 각기 달리 불리던 신의 명칭이 ‘하느님’으로 통일되었다. 그동안 일어와 중국어 성경을 중역한 데서 빚어진 혼란도 거의 해소되었다. 고유명사는 원음에 충실하게 통일하고 그동안 높임말로 표현되던 예수의 말씀은 모두 예사말로 바꾸었다.  8년간의 성경 번역은 문익환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죽마고우 윤동주와 함께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문익환은 1973년 6월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펴냈다.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꿈을 비는 마음’, ‘두 하늘 한 하늘’,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등의 시집을 남겼다.  고상하고 평탄하던 삶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쳤다. 50대 후반의 ‘늦깎이’는 스스로 아호를 ‘늦봄’이라고 짓고 숨막히는 유신체제에 뒤늦게 도전장을 냈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을 때도 “구국선언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장준하의 혼이 시킨 것”이라며 의연하게 행동했다. 이후 그는 ‘재야의 대부’로 불리며 1980년대를 뜨겁게 저항하다가 1994년 1월 18일 76년간의 고단하지만 희열에 가득찬 생을 마감했다. 문익환의 죽음에 북한과의 갈등과 북한의 악의적 비방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문익환 밑에서 통일운동을 하던 하태경이 2011년 자신의 책 ‘민주주의에는 국경이 없다’에서 문익환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해체하려다가 ‘안기부 프락치’로 몰려 화병으로 숨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익환은 한동안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3년 “범민련으로는 북한과 대등할 수 없다. 북한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민족회의를 만들어야 한다”며 범민련이라는 조직을 벗어나 새로운 합법적 통일운동체인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을 구상했다. 그리고 1993년 12월 김일성에게 “범민련을 해체하고 통일 운동을 위해 더 크게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이 답신을 보내 “범민련의 해체나 위상 약화를 통한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결성을 반대한다”며 문익환을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안기부 프락치로 몰아갔다. 이런 사실이 지하조직에 퍼지면서 종북(從北) 세력의 문익환 때리기와 비난이 본격화했다.  사망 당일(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재야인사들과 점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통일운동의 향후 노선을 놓고 재야인사들과 심하게 다퉜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내가 안기부 프락치냐”라고 고함을 치다가 밥알이 기도를 막아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환자가 많아 입원을 못하고 차 안에서 잠깐 회복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날 눈을 감았다. =========================== 들어가면서(각주 1) 저에게 있어 ‘통일’이라는 사회선교적 과제는 70년대 유신독재라는 격동의 시절 한신대 재학 중 김재준, 함석헌,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 여러 훌륭하신 스승들의 영향을 통해 예수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군 생활 3년간의 철책선 근무는 민족모순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80년도 초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해방신학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남미, 흑인, 여성관련 담론과 함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기반 한 민중신학과의 대화를 학문적 과제로 삼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는 감히 비교할 순 없지만, 그간 교회와 사회의 간극을 좁힘과 동시에 교회의 경계를 넘어 사회와 통일운동에 깊게 관여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부터 ‘빨갱이목사’로 불려왔으며 사람들이 간혹 문익환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셨다고 착각하는 향린교회 목사로 시무를 했으며, 문 목사님께서 초대이사장을 지내셨던 전태일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역임한 바 있으며, 615남측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통일운동 조직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다 아시다시피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하였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향한 북미정상회담이 6월 12일로 잡혀있습니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설사 무산된다 하더라도 평화통일을 향한 거보(巨步)는 결코 돌이킬 수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는 역사의 필연으로 문 목사님의 ‘통일은 다 됐어!’라는 30년 전의 카이로스적 발언이 오늘의 크로노스 시간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클로스 민중주체’의 역사적 관점에서 1980년대 중반, 재야 민주세력 최대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연’) 의장으로 문 목사님께서 두 번이나 선출되었을 때, 당시 체육관의 거수기들에 뽑힌 관(官)의 대통령 대신 민(民)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뜻에서 ‘민통령’이라 불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29년 전 1989년 3월 28일 문 목사님은 방북을 통해 김 주석과 통일방안 합의를 도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 목사님이야 말로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1) 해방의 신학과 문익환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이 글은 재판정에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에 의해 직접 낭독이 되었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 (2) 시 신학 (Poem Theology) 1) 문익환의 다양한 신학 훈련 문익환은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윤동주 그리고 반 박정희유신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상계의 주필 장준하와는 명동 은진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퇴학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신학교에 입학한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이후 학병 거부로 인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가 해방 후 1947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문 목사는 교회를 섬기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접고 귀국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일하다 휴전 후 1954년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다. 이후 한빛교회 초대목사로 봉직하는 가운데,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사상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설교와 글을 발표한다. 이어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공부한 신학교만 만주 일본 미국의 모두 저명한 다섯 개 학교이다.(각주 2) 당시 이렇게 다양한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이는 문익환이 처한 시대의 난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는 그의 신학 또한 영혼처럼 자유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성서번역가 문익환 문 목사는 51세가 되던 1968년, 개역한글판 번역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독자에겐 이해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세계 최초, 개신교•가톨릭 공동성서번역 작업에 책임위원으로 8년간 참여한다. 성서번역에 매진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히브리 성서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56세에 『새삼스런 하루』라는 첫 시집을 낸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은 제국들의 침략과 압제 그리고 추방 속에서도 야훼 신앙을 고백했던 시편 기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펼쳐가야 할 신앙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체계 조직신학, 다른 말로는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는 백과사전적 조직신학(encyclopedia systematic theology)에 대비되는  ‘비체계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신학 혹은 ‘이야기 조직신학(Narrative systematic theology)’ 등으로 명명된다. 히브리성서나 헬라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물론 모세 율법의 상당부분도 역사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전전승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비유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으며, 복음서 기록 이전 순회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문학은 크게 이야기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야기 신학에 비교하는 ‘시 신학(Poem Theology)’라는 용어는 아직 신학 세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시인이었다는 주장은 많지만, 시 신학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신학(Theo + logos)’이라는 학문 자체가 ‘logos(말 곧 논리성)’를 기반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반드시 논리학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의 논리성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때문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 치환하려는 서구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예수보다는 바울을 선호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신학’이라는 말은 없어도 ‘바울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의 절대 영역을 인간의 상대 영역인 언어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문 목사님은 시야말로 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시작이란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그 이미지로 표현된 감정의 빛깔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에 맞는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이점에 있어서 시는 철두철미 과학적이에요. 시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이 없으면 새 말을 만들어도 돼요.”(각주 3) 인간 역사 속에서 시와 종교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내려왔다. 예배의 무게 중심이 개신교에서는 설교에 있지만, 이를 제외한 찬송과 기도는 모두 시어(詩語)이다. 복음서의 헬라어를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역번역했을 때, 학자들은 예수의 언어가 본래 시어였다고 논증한다.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의 언어들은 대표적이다.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빠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저 들에 피는 꽃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시어체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비유 곧 이야기로 분류되는 예수의 짧은 비유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대비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야기가 아닌 시인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과 예언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편이다. 히브리 성서의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예언서 중 후기예언서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시어체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40%가 시다. 성서의 시 신학을 오늘에 몸소 재현한 이가 문익환 목사님이다. 왜 목사님은 시를 그토록 사랑했는가? 시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시는 대부분의 설교가 지향하는 일방적 방식인 가르침과 설득보다는 읽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백이 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하나 둘 셋의 삼단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입을 닫는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성찰 단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상대를 이끌어낸다. 그건 시인들 자신들이 경험하는 그 영적 혹은 신비의 세계가 언어로 결코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서구의 전통신학의 훈련을 받은 신학자이긴 했지만, 본래 그의 품성이 갖고 있는 이상형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틀을 깨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직신학 서적으로 분류되는 『히브리 민중사』도 매장마다 종국에는 시로 끝맺고 있다. 혁명은 감성이 주도하는 시적 통찰력에서 일어나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3) 시편 1편 번역 비교와 우리말로 신학하기 시편은 무엇인가? 시편은 삶의 현실 앞에서 김정을 표현하는 운율을 담은 시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기도이다. 시편은 새 역사를 향해가는 믿음 위에서 출발하며, 시편 속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 가운데 현존하면서 생명과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게 함으로 청중 자신들의 삶과 역사 안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시어(詩語)가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순수 우리말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문 목사님 또한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1편을 공동번역과 이전 개역한글과 비교해 보자. 시편은 노래로 하는 시이자 기도이다. 반복되는 운율과 박자가 중요하다. 시는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하나의 단어가 갖는 함축성은 더욱 중요하다. 시에서 단어 하나는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개역과 공동번역의 첫 단어는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면서 하나의 서술체로 변해가는 단어와 그냥 “복 되어라!” 하는 선언의 차이는 단순한 단어가 차이가 아니라 시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 않는가?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개역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여 ‘묵상하는 자로다/ 하리로다/ 같도다/ 못하리로다/ 망하리로다’ 곧 ‘다.’ ‘다.’로 끝나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중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 되어라!” 하는 축복 시어로 시작하고 또 중간에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하는 감탄 시어로 연결되면서 ‘다’(보살피신다)라나 결어는 끝에 딱 한번 나온다. 문법적으로 보더라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려면 1절의 의인이 악인의 길에 가까이 다가가는 세 개의 형용구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개역은 ‘좇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한 어조가 맨 앞에 등장하므로 이후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반면 공동번역은 ‘가지 아니하고,’ ‘거닐지 아니하며,’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점진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역동감을 더하고 있다. 끝으로 시어를 보자. 개역의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리고 공동번역의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를 비교하면 후자가 주는 표현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없다. 이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도 개역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겨가 ’흩날린다’는 문구와 ‘까불린다’는 문구를 비교해 볼 때, ‘까불린다’는 표현이 우리말의 강점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겨가 악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신학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 발제자가 시무했던 향린교회는 홍근수 목사시절부터 지난 25년 동안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얘기할 게 많지만, 시편에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예배 시에 시편교독문을 읽는데, 본인은 원시편이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이를 국악풍의 짧은 가락으로 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부르는 형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담당 교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공동번역 시편이 없었더라면 많은 부분 생동감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2013년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에서 “The Korean Traditional Hymn in Connection with Ecumenical Spirituality”란 워크샵을 향린교회 단독으로 주최한 바 있었다. 당시 보통의 워크샵은 많아야 2, 30명인데, 여기에는 200명이 참가 신청을 하고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었다. 예배 전체 틀을 국악으로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시편 교독문이라도 국악풍의 가락에 공동번역의 시어를 사용하면 한국교회 개혁에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 지난 4월26일 수유동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요강좌에서 문익환 목사의 신학에 대해 강연하는 필자 조헌정 목사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학교 문예지 편집 일을 맡았던 윤동주가 목사님에게도 시 한편을 써내라고 하여 한편을 보냈더니 ‘이게 어디 시야’하면서 되돌려 받게 되면서 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번역에 참가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상상하기를 만약 동주가 살아 있어 시편 번역을 도와주었더라면 자신은 영영 시를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각주 4) 문 목사님께서 히브리 성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조선인의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함으로서 투명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한 것을 생각할 때,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문익환의 짧은 시 두 개를 읽어보자. - 예수의 기도 6(각주 5)- 새벽 하늘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와락 다가서시는이시여 가까워지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로 이 새벽에도 이 외로운 감방으로 찾아오시는이시여 당신은 오직 사랑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진실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희망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자유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우리의 노래만 들어도 목이 메이시죠 우리의 기도만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시죠 아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슬픔에 얻어맞으며 노래도 잃고 기도도 막히는 바닷가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는가요 익히 잘 아는 꿈을 비는 마음(각주 6)의 시작 부분이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각주 (각주 1) 본 강연에서 신의 호칭은 공동성서번역을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부르고, 신구(新舊)라는 언어가 규정하는 무의식적인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구약성서는 제1성서 혹은 히브리성서로 신약성서는 제2성서 혹은 헬라성서로 부른다. 필자가 굳이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ᄒᆞᆫ’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아래 ㆍ의 발음은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 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ㅏ’ 소리 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둘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강조와 토착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문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자를 붙이는 것 또한 맞지 않다. 현재 세계 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 대신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각주 2) 이 중 세 개의 신학교가 필자와 겹친다. (각주 3)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서울: 삼민사, 1991), 139쪽. (각주 4) 문익환, 『혁명의 해일』 (서울: 청노루, 1988), 118쪽. (각주 5) 상게서, 36쪽. (각주 6)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서울: 실천문학사, 1992). /조헌정  
113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거리에서 댓글:  조회:4212  추천:0  2018-07-09
  윤동주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이 시는 괴로운 회색빛 밤거리를 걸으면서 화자의 마음에 있는 희망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밤에 광풍이 휘날리는 추운 북국의 거리에 있는 도시의 전등 밑을 걷는다. 달과 전등에 비쳐 내 몸은 둘 셋의 그림자를 가진다. 그림자는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괴로운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에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안정이 되지 않는다. 외롭다. 그러나 혼란한 마음속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피어난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2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1연에는 흔들리는 마음을 2연에는 심하게 흔들리는 마음속에 희망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는 밤거리를 말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일제가 강점한 암울한 상황을 의미한다.   ‘달밤의 거리 / 광풍이 휘날리는 / 북국의 거리 / 도시의 진주 / 전등 밑을 헤엄치는 / 조그만 인어 나, / 달과 전등에 비쳐 /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 커졌다 작아졌다.’는 광풍이 휘날리는 달이 뜬 추운 거리에 있는 전등 밑을 지나가는데 달과 전등에 비쳐서 그림자가 둘 또는 셋이 생기고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한다는 말이다. ‘밤’은 절망적인 상황을 말한다. ‘광풍’은 종잡을 수 없는 바람으로 시련을 의미한다. ‘북국’은 겨울의 날씨가 지배하는 곳으로 역시 시련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관습적인 상징이다. 그러므로 ‘달밤의 거리 / 광풍이 휘날리는 / 북국의 거리’는 절망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암울한 시간을 말하며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으로 인하여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도시의 진주’는 ‘전등’을 비유한 말이다. 당시의 전등은 모두 알처럼 생겨서 둥그런 ‘진주’에 비유한 것이다. ‘헤엄치는’은 ‘그림자, / 커졌다 작아졌다.’는 모습이 헤엄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라 생각해서 표현한 것이다. ‘조그만 인어 나’는 화자가 헤엄치는 인어 같다고 말한 것이다. ‘둘 셋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시에서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생각으로 혼란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괴롬의 거리 / 회색빛 밤거리를 / 걷고 있는 이 마음 /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 외로우면서도 / 한 갈피 두 갈피 /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 푸른 공상이 / 높아졌다 낮아졌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거리를 걷고 있는 마음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혼란스럽고 외로우나 푸른 공상을 하나 둘 생각하니 희망이 높았다 낮아졌다한다는 말이다. ‘괴롬의 거리 / 회색빛 밤거리’는 괴롭기만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에서 ‘선풍’은 ‘회오리바람’이다. 이는 마음이 몹시 괴롭고 혼란스러움을 말한다. ‘외로우면서도’는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 외롭다는 것을 말한다. ‘한 갈피 두 갈피 /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는 화자가 절망 속에서 자그마하지만 하나 둘 ‘푸른 공상’인 희망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푸른 공상’이 한결같이 유지 되지 않고 ‘ 높아졌다 낮아졌다.’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전한성 =============== 일단 지난 번에 샘이 설명한 대로 시를 몇 번 읽으면서 그림을 한 장 그려 보자고. 처음엔 많이 번거롭지만 익숙해지면 Literature 과정의 final exam paper1을 풀거나 IOC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림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보자.    - 화자(윤동주)  - 달  - 전등  - 그림자  - 도시    이 정도 되겠지.  각자 자기가 그린 그림을 확인해 보자고. 그림에 어색한 부분이 없다면 잘 된 거야.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 보자고.  샘이 그린 그림은 이래.  그렇다면 이제 이 그림을 바탕으로 시를 상세하게 해석해 보자고.  아래 그림은 해석을 위해 만든 레이아웃이야.          시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이미 많이 되어 있으니, 샘은 포괄적으로만 분석할 거야.    이 시는 19살의 윤동주 씨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윤동주 씨는 북간도에서 태어난 조선인이야. 그런데 이미 조선이란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지. 그렇다면 윤동주 씨는 조선인인가, 중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바로 이 정체성들이 '그림자'로 나타나.(아직은 '거울 속의 세계'가 완성되지 않았어.) 몸은 하나인데 그림자는 서너 개야. 게다가 그것들이 각자 다른 방향을 가리켜. 마치 '넌 어느 방향으로 갈래?'라고 묻는 것 같지.    저 시대에는 주변 환경이 윤동주 씨를 가만 놔두지 않았겠지.  누구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할 거고, 누구는 대세에 따르자고 할 거고...  이게 시 속에서 '광풍'으로 나타나. 윤동주 씨를 떠 민다고. 그래서 그는 집을 떠나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을 거고, 북간도의 밤거리는 춥고 외로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서 잘 적응해 가고 있는데, 그 혼자 아직 방황하고 있어.      하지만 당시의 윤동주 씨는 아직 이런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조그만 인어 나'라고 말하지. 이건 '현실의 문제를 제게 묻지 마세요!'란 외침이기도 해. 인어는 상상 속의 동물이잖아.  아무튼 그는 자신의 놀이(아마도 시 쓰기)에 몰입해서 현실을 도피하려고 한 것 같아. 하지만 전등이란 것이 집처럼 항구적인 안식처는 될 수 없지. 조만간 그는 또 다시 어둠 속으로 쫓겨나게 될 거야. 그렇게 2연이 시작 돼.    2연에 가면 양상이 조금 바뀌는데, '광풍'이 '선풍'으로 변해. 선풍은 회오리바람의 다른 이름이거든. 회오리바람은 제자리에서 맴도는 바람이지. 이제 윤동주씨는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선풍에 갇혀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어.('선풍'은 윤동주 씨의 시에서 자주 나오니까 꼭 기억해 두자.)    1연에서는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는데, 2연에서는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해. 즉, 윤동주 씨가 어떤 '이상'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이렇게 보면 그가 1연에 비해서는 조금 더 성숙했다고 볼 수 있겠어.    이렇게 19살의 윤동주 씨는 자신의 정체성과 이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 그런데 아직은 그 고민이 버거운지 그냥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1132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륙첩방(다다미방)" 댓글:  조회:4030  추천:0  2018-07-08
다다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다다미가 깔린 방 다다미(일본어: 畳 다타미[*])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전통식 바닥재를 말한다. 속에 짚을 5 cm 두께로 넣고 위에 돗자리를 씌워 꿰맨 것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1] 다다미의 종횡비는 2:1로 된 장방형과 그 반인 정방형 2종류가 있다. 크기는 3자×6자 (910mm×1820mm)로 된 것이 기본이지만, 방의 크기에 맞추어 주문 생산하는 경우도 있어 크기는 일정치 않다. 일반적인 규격은 교마(京間,본간(本間)), 주쿄마(中京間,삼육간(三六間)), 에도마(江戸間,오팔간(五八間), 단치마(団地間,오육간(五六間)로 된 4종류가 널리 사용된다. 그 밖에도 지역마다 다양한 규격이 존재한다.
1131    윤동주와 정지용, 경향신문 댓글:  조회:2406  추천:0  2018-07-08
#대시인 정지용, 고민에 빠지다 1947년 2월, 정지용은 며칠째 낯선 시 10여편을 눈앞에 펼쳐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미 작품을 가려 뽑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서른도 되기 전인 1930년에 박용철, 김영랑 등 내로라 하는 시단의 총아들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 무수한 시들을 천거하고 평해 온 그였다. 39년 창간된 '문장'지의 시 심사위원으로 나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 3인과 이한직, 박남수 등 쟁쟁한 신인들을 뽑아 올린 공적은 벌써부터 문학사적 기록이 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해방 이후 좌우익으로 갈린 문단의 틈새에서 문학적 지향점도 열정도 잃어버렸다고 자학하던 차에 신기하게도 문학작품 선발 때문에 갈등을 겪는 셈이었다. 그는 해방 직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이의 시 원고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40대 중반 나이로 당대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보다는 전해에 창간한 경향신문의 주간(현재의 주필)으로서 비명에 죽은 한 시인이 남긴 시편들 중 한 편을 뽑아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세우는 일을 맡은 것이다. 시인으로 등단하는 순간 이미 그 이름 앞에 '故'(고) 자를 붙여야 하는 사람은 1917년 간도 출신으로 서울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의 닛교 대학에서 수학하다,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해 다니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44년 2월 옥사한 그의 이름은 윤동주였다. 정지용은 읽을수록 그의 시가 슬픔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생각할수록 그 생애는 뜨겁고 비통했다.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으면 눈앞에 병든 세상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젊은이의 표정이 살아나는 듯했다. #죽은 시인을 되살리려는 친구들 정지용에게 맨 처음 이런 갈등을 선물한 사람은 윤동주의 연전 동기생으로 46년 10월 경향신문 창간 때부터 조사부 기자로 있은 강처중이었다. "시를 잘 쓰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선생님 시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 얘기는 정지용으로서는 자주 들어온 편이었다. 게다가 일제에 개죽음을 당한 청년이 한둘도 아니던 터라 그저 가슴만 먹먹할 뿐 별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특히 해방 후 좌익 문사들이 문학가동맹을 창립하면서 중앙위원으로 정지용의 이름을 올린 일로부터 좌우익 모두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문학 얘기는 애써 피해오던 차였다. 도쿄에 있을 때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냈다는 시는 모두 다섯편이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안으로 힘이 꽉 차 있는 듯 보이는 윤동주의 육필을 보고 나서야 정지용의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사명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저희들은 동주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내려고 합니다." 유고 시집 발간 뜻을 밝힌 강처중은 며칠 뒤 윤동주의 연전 후배로 서울대에 편입해 다니던 정병욱(서울대 교수 역임)을 데려왔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연전 졸업 한 해 전 발간하려 했다는 친필 시집 원고를 정지용에게 펼쳐보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집을 내지 못한 동주형은 대신 필사본으로 세 권을 만들어 본인이 한 권, 은사 이양하 교수 한 권, 그리고 제게 한 권을 줬습니다. 그 뒤 동주 형은 감옥에 갇혔고, 저는 학병에 끌려갔지요. 우리가 다 죽어도 이 시집만은 남겨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해 남겨 두었습니다." 지은이도 죽고, 보관하던 사람도 사선을 넘어서는 우여곡절 끝에 남은 시집 원고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모두 19편이 들어있었다. 모두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윤동주라는 생면부지의 시인의 시와 생애가 준 감동과, 그 친구들의 적극성이 결국 정지용 입에서 책임 있는 말을 하게 하고 말았다. "시집을 내기 전에 우선 신문에 실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하세." 이후 정지용은 윤동주의 돋보이는 시편들을 베껴 쓰고 빌리고 해서 10여편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제 윤동주의 사후 2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시인 탄생, 우리의 자랑 정지용은 고심 끝에 윤동주가 42년 6월에 쓴, 유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시 한 편을 택했다. 바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시작되는 '쉽게 씌어진 시'였다. '육첩방'은 일본의 다다미 방을 뜻한다. 자기 나라를 빼앗은 침략국에 유학가 있으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으려는 자의 몸부림이 잘 묻어나는 시였다. 아마도 정지용은 특히 시의 마지막을 보았을 것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어두운 시대를 욕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딛고, 이제 새로 태어날 자신과 만나고 있는 역동적인 전환으로 정리된 대목이다. 이 전환은 현실 삶에서 시인의 죽음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정지용은 그 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시 경향신문은 목·일요일에만 4면, 다른 날은 2면을 발행했다. 정지용은 2월 13일 목요일자 4면에 이 시의 전문을 싣고, 간단한 해설을 달았다. "간도 동촌 출생. (……) 복강(지금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 중 음학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로 갔다. 일황 항복하던 해 2월26일에 일제 최후 발악기에 '불령선인'이라는 명목으로 꽃과 같은 시인을 암살하고 저이도 망했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지용." 험악한 세상을 뜻깊게 살려고 몸부림치다 비명에 간 한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뛰어난 선배 시인의 자랑. 윤동주는 이렇게, 우리에게 슬픔과 분노로 와서 어느덧 그런 자랑을 선사하는 존재로 살아남게 되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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