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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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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창구멍 댓글:  조회:2651  추천:0  2018-12-20
    창구멍                   /윤동주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뒤자취 보고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옵니다. 눈 나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러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1936.초(추정). 이 작품은 동요인데 창작년대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의 제1습작시집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의 목차에 의하면 8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였다. 그러나 그의 제2습작시집 《창》에는 크게 수정되여《햇빛, 바람》으로 제목이 바뀌여 수록되였다. 그러므로《창구멍》을《햇빛, 바람》의 초고라고 볼수 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와 제2습작시집 《창》에 각각 실렸으나 그가 1914년 자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묶을 때 빼버렸으며 해방후 윤동주시집을 내는 과정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던것들이다.  
132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병아리 댓글:  조회:2680  추천:0  2018-12-19
  윤동주 /병아리     뾰뾰뾰 엄마 젖 좀 주 병아리 소리.   꺽꺽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 품속으로 다 들어갔지요.     이 시는 병아리와 암탉의 소리를 젖먹이 아이와 엄마의 관계로 생각하는 아동의 시선이 담긴 동시이다. 병아리가 뾰뾰뾰 내는 소리를 아기가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우는 소리와 같다고 생각하고 암탉이 꺽꺽꺽 내는 소리를 엄마가 아기 소리를 듣고 ‘오냐 좀 기다려’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소리 내며 운 뒤에 조금 있다가 병아리들 젖을 먹으로 엄마 품속으로 다 들어갔다고 말한다. /전한성   윤동주 /봄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이 시는 봄의 풍경을 아기와 고양이의 낮잠과 솔솔 부는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통해 나태내고 있다.   봄은 춘곤증을 몰고오는 계절이다. 한 낮에 하늘은 햇볕으로 쨍쨍하고 작은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솔솔 불고 아기는 엄마의 발치 아래에서 콜콜 자고 있다. 한가한 봄의 모습이다. ‘우리 애기’라 하는 이는 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발치에 아기를 재우는 사람은 엄마가 가장 적당하다. 그러므로 아기 엄마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코올코올’, ‘가릉가릉’, ‘소올소올’, ‘째앵째앵’의 음성상징어를 써서 사실감을 높였다. ‘애기 바람’은 봄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모습을 보고 아기에 비유한 것이고 ‘아저씨 햇님’은 그 빛이 따스할 정도가 넘어 뜨거움을 느낄 정도라 ‘아저씨’에 비유하여 의인화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전한성     윤동주 /비행기     머리에 프로펠러가 연자간 풍체보다 더---- 빨리 돈다.   따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 숨결이 찬 모앙이야.   비행기는--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이 시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보고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본 것이다. 1연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연자방아간 풍체(곡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따위를 날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농기구, ‘풀무’의 방언이다. 풀무 안에는 프로펠러처럼 생긴, 오늘날 선풍기 날개처럼 생긴 것이 돌아가서 이에 비교한 것이다)보다 더욱더 빨리 도는 것을 말하였다. 2연은 비행기가 땅에서 오를 때는 가까이에서 보니까 빨리 프로펠러가 빨리 돌아 빠르게 가는 것처럼 보이고 하늘에 높이 떳을 때는 멀어서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숨이 차서 천천히 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3연은 새와 비행기를 비교하여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지 못하고 엔진 소리를 내는 것을 숨이 차서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잘 표현한 프로펠러 비행기의 모습이다. /전한성    
1328    윤동주와 꿈 댓글:  조회:2617  추천:1  2018-12-19
"윤동주는 어떤 꿈을 꾸었을가"...(주; 필자, 제목 설정)   윤동주 시인을 다룬 영화 (2016)를 보면, 연희전문시절 윤동주, 송몽규와 친하게 지낸 강처중을 만날 수 있다. 송몽규와 윤동주에 영화의 초점이 맞춰져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나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집의 근간이 된, 연희전문 졸업 당시 윤동주가 수기(手記)로 만들어 준 시집을 잘 보관한 후배 정병욱의 역할이 가장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최근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윤동주의 시집 발간에 적극적이었고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가 보낸 시 다섯 편 등이 포함되어 31편의 시가 묶였다는 점, 그리고 이 시집의 발문까지 쓴 사실은 그의 공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의 발문에는 윤동주의 삶과 문학적 소양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말주변도 사귐성도 별로 없었지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찼다는 점, 아무리 바빠도 친구가 찾아오면 기쁘게 맞이해주었고 산책도 자주 했다는 점, 산책할 때 말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했다는 점, 돈이 궁해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돈 또는 외투 등을 주어 보냈다는 점 등이다. 이처럼 친구들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보이던 윤동주도 자기 시에 관한 부분에서는 철저했다고 한다.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시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 그리고 ‘흠이 없는’ 완성도 높은 시를 쓰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는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는 마음을 잘 담아내어 아름다운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1938년은 더 이상 우리말을 쓸 수 없었던, 일제의 군국주의가 점점 노골화된 시기였기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갈고 닦은 그의 시는 빛을 더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우리말에 대해 더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아울러 연희전문 시절에 우리말의 중요성을 일러준 최현배 한글학자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을 소설화한 ‘시인 동주’(창비, 2015)에 나오는, 최현배 교수의 말은 인상적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말하고 듣고 더불어 살아가는 모국어가 있습니다. 누구나 모국어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며, 삶을 배워 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모국어 속에는 그 민족의 역사적 얼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디 잊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한 그의 말은 윤동주 시인이 민족적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게 된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 전문   윤동주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용정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교토로 이어지는 낯선 길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찾아 나선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주어진 길”을 걸어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진정으로 꿈 꾼 길은 동아시아의 문화공동체적 삶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용정-평양-서울-도교-교토로 이어지는 그의 기나긴 행로를 통해 ‘강점’이나 ‘억압’이 아닌 서로 소통하고 평화가 공존하는 삶을 꿈꾸었을 것이리라. 윤동주 시인이 이러한 길을 꿈꾸는 데 그 이면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우리말에 대한 소중한 인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굿모닝충청 김현정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1327    ... 댓글:  조회:3066  추천:0  2018-12-19
비에도 지지 않고 작가 : 미야자와 겐지 | 그림 야마무라 코지 출간일 : 2015 년10 월3 일 추천일 : 2015년 11월 09일 쪽   수 : 40쪽 정   가 : 12,000원 독서연령 : 4~7세 분류 : culture 출판사 : 그림책공작소 ISBN : 9791186825006 KBBY 추천 정보 의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에 애니메이션 감독 야마무라 코지 특유의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그림이 묘하게 사무치는 그림책 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문할 때 볼 만한 그림책이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로 이어지는 이 자경 시는 시인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으로써 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답한다. 야마무라 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군중 속에 묻듯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멀찌감치 또는 옆모습 뒷모습과 흔적과 그림자로 주인공을 그렸다. 그렇게 우주의 한 점인 듯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의 조촐하고도 경건한 일상과 사고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데 바쳐져 독자의 마음에 창대한 나팔 소리를 울린다. 이 주인공은 당연히 시인 미야자와 겐지일까? 최근에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시인이 숭배하고 흠모했던 ‘사이토 소지로’라는 크리스천으로 미야자와 겐지네 마을 가까이에 살면서 지극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한 전설적 인물이라고 한다. 미야자와 겐지의 문학은 사이토 소지로에 대한 상상과 이해로부터 구현된 축복일까. 아, 시를 좀더 읽어드리지 않을 수 없다.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상희(시인, 그림책 작가) 책소개 뚝딱뚝딱 누리책 시리즈 4권. , ,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미야자와 겐지가 1931년 11월 3일 수첩에 처음 적은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85년이 흐른 2015년 11월 3일에 그림책으로 펴냈다.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을 통해 환생한 듯한 그림 속 모습에서 그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1933년 37살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사상과 작품들이 왜 지금까지 일본과 세계 문학계를 열광케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목차   출판사 책소개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꿈꿨던 문학가, 미야자와 겐지. 80여 년을 거스르고, 세기를 뛰어넘어 그가 다시 찾아옵니다. 비에도 지지 않는 참된 ‘삶’을 마주해 보세요. 우리는 삶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영원히 살 것처럼, 더 가지려 하고 더 누리려 하고 심지어 남의 것을 뺏으려고 합니다. 그 망각과 욕심 때문에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은 항상 피곤하고 괴로운 고난과 다툼의 연속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미야자와 겐지가 위로와 격려와 깨달음을 주는 한 마디를 던집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 , ,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미야자와 겐지가 1931년 11월 3일 수첩에 처음 적은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85년이 흐른 2015년 11월 3일에 그림책으로 만나 보세요.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을 통해 환생한 듯한 그림 속 모습에서 그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1933년 37살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의 사상과 작품들이 왜 지금까지 일본과 세계 문학계를 열광케 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어떤 말도 이 시의 감동과 울림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기에 이렇게 직접 시를 전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저마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 비에도 지지 않는 용기를 얻고 스스로 위로 받기를 바라며…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1326    ... 댓글:  조회:2385  추천:0  2018-12-19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1325    ... 댓글:  조회:2809  추천:0  2018-12-18
비에도 지지 않고 - 宮沢賢治       //           //   雨にもまけず                 비에도 지지 않고           雨にもまけず                 비에도 지지 않고 風にもまけず                바람에도 지지 않고 雪にも夏さ暑さにもまけぬ            눈에도, 여름의 열기에도 지지 않는 丈夫なからだをもち               건강한 몸을 가지고 欲はなく                    욕심도 없고 決して怒らず                  결코 화내지 않고 いつもしずかにわらっている           언제나 조용하게 웃고 あらゆることを                 여러 가지 일에 じぶんをかんじょうに入れずに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よくみききしわかり               잘 판단해서 알고 そしてわすれず                 그리고 잊지 않고 東に病のこどもあれば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行って看病して                 가서 간병해 주고 西につかれた母あれば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行ってその束を負い             가서 그 짐을 들고 南に死にそうな人あれば             남쪽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行ってこわがらなくてもいいといい        가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北にけんかやそしょうがあれば          북쪽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つまらないからやめろといい           가서 쓸데없으니 그만두라고 하고 ひでりのときはなみだをながし          가뭄일 때는 눈물을 흘리고 さむさのなつはオロオロあるき          더운 여름엔 안절부절 못하며 걷고 みんなにデクノボとよば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바보라 불리고 ほめられもせず                칭찬도 받지 못하고 くにもされず                 고민 거리도 되지 않는 そういうものに                 그런 사람이 わたしはなりたい                나는 되고 싶다             - 宮沢賢治 미야자와 켄지         (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 1933년 9월 21일)     일본 이와테 현縣 출신의 일본의 시인, 문인이자 교육자, 에스페란티스토이다. 향토애鄕土愛가 짙은 서정적인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작품 중에 자주 등장하는 이상향理想鄕을 고향인 이와테의 에스페란토식 발음인 ihatovo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단 1권의 시집과 동화童話 한편만을 발표했지만, 사후死後 100편의 동화童話와 400편의 詩가 발굴되어 출간出刊되었다.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국민작가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原作인 《은하철도의 밤》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평생 순수와 양심에 의한 이상향理想鄕을 갈망했다.    
1324    ... 댓글:  조회:2405  추천:0  2018-12-18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켄지     비에도 지지 않고                                  雨にも負けず 바람에도 지지 않고                               風にも負けず 눈에도 여름의 뜨거움에도 지지 않고        雪にも夏の暑さにも負けず 건강한 몸을 가지고                               丈夫な体を持ち 욕심은 없이                                         欲はなく 절대로 화내지 않으며                            決して怒らず 항상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いつも静かに笑っている   하루 현미 네 홉과                                  一日に玄米四合と 된장과 약간의 나물을 먹고                      味噌と少しの野菜を食べ 모든 일을                                             あらゆることを 자신에 감정에 넣지 않고                         自分に感情に入れずに 잘 분별하여 이해하고                             よくみききし分かり 그리고 잊지 않으며                                そして忘れず   들판의 소나무 숲 그늘의                         野原の松の林の蔭の 작은 초가집의 오두막에서                   小さな萱ぶきの小屋にいて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東に病気の子供あれば 가서 간병해주고                                    行って看病してやり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西に疲れた母あれば 가서 그 볏단을 지고                           行ってその稲の束を負い 남쪽에 죽을 듯한 사람이 있으면               南に死にそうな人あれば 가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行って怖がらなくてもいいと言い 북쪽에 싸움이나 분쟁이 있으면                北にけんかや訴訟があれば 쓸데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하고                 詰まらないから止めろ言い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日照りの時は泪を流し 냉해의 여름에는 안절부절 걸으며              寒さの夏はおろおろ歩き 모두에게 바보라고 불리며                  みんなにデクノボーと呼ばれ 칭찬 받지도 않고                                    褒められもせず 고통 받지도 않고                                    くにもされず 그런 사람이                                           そういうものに 나는 되고 싶다                                       私はなりたい       * 작가 소개                      미야자와 켄지     살아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일본 작가였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작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작품 중 은 유명한 애니메이션인 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다른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는 모든 글자가 일본의 가타카나로 쓰여 있다는 독특한 면이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일본의 국민들이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의 원력을 나타내 놓은 시 같다.                
1323    ... 댓글:  조회:2509  추천:0  2018-12-18
「雨にも負けず」 雨にも負けず 風にも負けず 雪にも 夏の暑さにも負けぬ 丈夫な体をもち 慾はなく 決して怒らず いつも 静かに笑っている 一日に 玄米四合と 味噌と 少しの野菜を食べ あらゆることを 自分を勘定に入れずに よく 見聞きし 分かり そして 忘れず 野原の 松の林の 陰の 小さな 萱ぶきの 小屋にいて 東に病気の子供あれば 行って 看病してやり 西に疲れた母あれば 行って その稲の束を負い 南に死にそうな人あれば 行って 怖がらなくてもいいと言い 北に喧嘩や訴訟があれば、 つまらないから やめろと言い 日照りの時は 涙を流し 寒さの夏は おろおろ歩き みんなに 木偶坊(でくのぼう)と呼ばれ 褒(ほ)められもせず 苦にもされず そういうものに 私はなりたい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1322    ... 댓글:  조회:2612  추천:0  2018-12-18
... 이럴 때 일본 사람들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비에도 지지 않고 한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다’라는 시를 떠올리며 인생을 생각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와 여름철 더위에도 지지 않는/튼튼한 몸을 가지며/욕심은 없고/결코 화내지 아니하며/늘 조용히 웃고 있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된장과 약간의 나물을 먹으며/이 세상 모든 셈에서 자신은 계산에 넣지 않으며/잘 보고 듣고 이해하며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초가집에 살며/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 주고/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 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냉랭한 여름에는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모두에게 얼간이 소리를 들으며/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 시는 숱한 역경을 견뎌낸 미야자와 자신의 경험을 적어 내려간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의 실제 모델은 사이토 소지로(?藤宗次?)라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이토는 1887년 도호쿠(東北)지방의 이와테(岩手)현 하나마키(花卷)에서 승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소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크리스천이 됐다. 당시 일본에서 기독교는 ‘야소교’(耶蘇敎)로 불리며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사이토도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만으로 돌에 맞기도 했다. 부모는 그와 의절했으며, 교사도 그만둬야 했다. 이뿐이 아니다. 근처에서 불이 났을 때 전혀 관련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가족에게 물을 뿌리고 집을 부서뜨렸다. 이때 아홉 살이던 큰딸이 예수쟁이의 딸이라는 이유로 배를 걷어차여 복막염으로 죽기까지 했다. 보통 이 정도 끔찍한 박해를 받으면 조금이라도 박해가 덜한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토는 오히려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내 아픈 사람을 위해 병문안을 가고 그들을 위로해주면서 기도했다.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쉬지 않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얼간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1926년 그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의 인연으로 하나마키를 떠나 도쿄로 오게 된다. 하나마키를 떠나던 날 배웅하러 나오는 사람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역에는 촌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 교사, 학생, 승려, 일반인, 걸인까지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로 인해 역장은 정차시간을 연장해 기차가 플랫폼을 떠날 때까지 서행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날 배웅하러 모인 사람 중에 미야자와가 있었다. 일본에서 기독교는 지금도 소수 종파이지만 이전에는 이교(異敎)의 종교로 인식돼 심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실천한 사이토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소금이 돼 일본을 비추고 있다. /야가사키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1321    ... 댓글:  조회:2440  추천:0  2018-12-18
[일상에 스민 문학]    - 미야자와 겐지,       저는 아직도 종이신문을 구독합니다. 새벽에 막 구워낸 듯한 빵과 같이 옅게 배어있는 기름 냄새가 참 좋습니다. 광고지가 많이 들어오는 날에는 왠지 제가 그 광고들을 다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제가 맡아서 하는 토요일 쓰레기 분리 수거에 신문을 버리지 않아 가족들에게 타박을 받는 것도 제 몫이랍니다.    신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면은 주말에 배달되는 입니다. 요즘은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에 나오면서 약간 소개란도 줄었습니다. 하지만, 최신 책에 대한 동향이나 해외 출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어서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가끔씩은 작가들이 자신이 읽고는 소개해주소 싶은 책들을 소개하는 칼럼이 실릴 때가 있는데, 소개한 작품이 제가 읽어 본 작품일때는 왠지 모를 짜릿함 마저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울게 만든 작품’이라는 내용으로 소설가 김연수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접했습니다. 그는 일본 아동문학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가 자신을 울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미야자와 겐지. 그는 동화 ‘강아지 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께서 생전에 존경했던 작가라고 합니다. 접해 본 적이 없어서 검색을 해 보았더니 일본에서는 국민 아동문학가였습니다.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농업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평생 동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즐겨보았던 일본 만화 의 원작이 된, 을 만들어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내친김에 주말에 도서관에 들러 그의 책들을 모조리 찾아보았습니다. 말씀드렸던 을 비롯하여 , 와 자전적 이야기인등이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들어온 책은 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4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었는데, 책 전체가 한 편의 짧은 시로 구성되어있는 책입니다.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지으며       (…)       동(東)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西)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南)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北)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겨울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김연수 작가의 동인문학상 수상작 에도 마지막에 수록된 라는 단편은 바로 이 시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기도 합니다. 학교폭력 문제를 감각적으로 다룬 작품인데,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제 자신을 되돌아 볼 때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명 존중 사상과 공생(共生)의 행복관을 담아내던 겐지의 동화들은 당시 주위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배타적이던 일본에서는 외면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겐지의 동화는 그가 살아있을 때 빛을 보지 못하고, 마쳤다고 합니다. 거의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서는 '겐지 붐'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인 독자군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되어 정서적 영감을 불어넣을 만큼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유튜브에만 들어가 보아도 그의 시를 암송하는 대회이며, 개인적으로 만든 비디오들이 즐비하니까요. 추운 겨울 날, 점심 식사 후에 한번 검색해보시고 암송해보시면 어떨까요?       /정재엽    
1320    ... 댓글:  조회:2688  추천:0  2018-12-18
은하철도 작가 미야자와겐지 4월… 시집 '봄과 아수라'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쓴 심상 스케치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2018-04-23              미야자와 겐지 시집 '봄과 아수라' 표지 이 시들은 스물두 달이라는/과거로 감지된 방향으로부터/종이와 광물질 잉크를 엮어/(전부 나와 함께 명멸하고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것)/지금까지 이어온/빛과 그림자 한 토막씩을/그대로 펼쳐놓은 심상 스케치입니다(서문 중에서) '은하철도 999'의 원작으로 알려진 '은하철도의 밤'을 쓴 일본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시집 '봄과 아수라'가 새로 출판됐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마음 속을 이리저리 파헤쳐놓는 감각들을 예순아홉 편의 시로 스케치했다. T.S.엘리엇이 시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면 겐지는 4월 속을 헤매는 나를 아수라에 빗댔다. 분노의 씁쓸함 혹은 미숙함/4월의 대기층 쏟아지는 햇빛 속을/침 뱉고 이 갈며 이리저리 오가는/나는 하나의 아수라로다(봄과 아수라 중에서)  동화작가이자 농업학교 교사였던 겐지는 동화적 상상력을 시를 통해 펼쳐놓는 동시에 동식물의 모습과 변화하는 자연은 물론 새로운 농업기술 등 농업학교에서 재직하며 겪었던 삶의 경험들을 시에 녹였다. 그는 마음 속을 어지럽히는 여러가지 생각들과 아름다운 자연 풍경들을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으로 서술했다.  특히 스물넷 나이에 스러진 여동생의 죽음과 교사로 일하며 목격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은 그의 시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모두들 이렇게 지키고 섰는데/너 아직 여기서 아파하고 있구나/아아 내가 거대한 진심의 힘에서 멀어져/순수와 작은 양심을 잃고/검푸른 수라도를 걷고 있을 때/너는 너에게 주어진 길을/홀로 외로이 가려 하느냐 (중략) 머리칼도 한층 검게 윤이 나고/뺨은 아이처럼 사과 같구나/부디 어여쁜 그 뺨으로/다시 하늘에서 태어나다오(무성통곡 중에서) 어째서 저기 저 두 마리 새는/저리도 구슬프게 우는 것일까/나를 구원할 힘을 잃었을 때/나의 누이도 함께 잃었다(흰 새 중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집을 나와 동화 창작에 몰두한 겐지는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살아 있는 동안 출간된 책은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점'과 시집 '봄과 아수라'(1924)뿐이었고 글을 써서 받은 원고료는 5엔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는 짧은 생애동안 총 100여편의 동화와 400여편의 시를 남겼다. 
1319    시 한수에 그림책 한부 나오다니... 댓글:  조회:2754  추천:0  2018-12-18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양평시민의소리 승인 2018.11.30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메일보내기 인쇄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미야자와 겐지 지음, 야아무라 코지 그림, 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2015)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었던 동화작가이자 시인이면서 농예과학자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는 평범한 언어만으로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그의 시 한편을 그림으로 꾸민 그림책,《비에도 지지 않고》를 소개합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 (중략)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 (중략)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 그러한 사람이 / 나는 되고 싶다.” 1896년에 태어난 미야자와 겐지는 그의 작품에 생명 존중 사상과 공생의 행복관을 담아냈지만 침략 전쟁을 벌이던 일본에서는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생을 마치지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처럼 모든 사람이 소박하지만 넓은 품으로 산다면 전쟁도 경쟁도 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양평시민의소리" 
1318    ... 댓글:  조회:2429  추천:0  2018-12-18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번역 :  권정생)   짧은 생애 그렇지만 굵은 족적을 남긴 미야자와 겐지의 문학을 보면 그가 상상했던 타인에 대한 열망과 타인의 행복을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전해지는 것 같다.  세상엔 남의 불행을 확인해야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반대로 남의 행복을 확인하면 속이 불편하고 나는 이런데 남의 행복을 못 이겨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미야자와 겐지는 비록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끊임없이 보편적 행복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이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행복은 뷔페 식당에 놓인 다양한 음식과 같은 것이고 남들이 먹는다고 남의 접시를 깨뜨린다면 그것은 자신도 타인도 불행하게 하려는 굴레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남의 접시를 깨뜨려버리는데 집중하면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시 음식을 찾아 먹을 때도 다시 또다른 누군가의 접시를 깨기 위해 정작 자신은 행복이라는 음식을 놓치게 되지 않는가.  ..............................................................................................................................................     이런 시를 쓴 사람이 있다.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작가. 짧은 생이지만 순수한 열정과 진정성 넘치는 이타심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미야자와 겐지. 병상에서 죽어 가는 누이를 위해 두 손 가득 눈을 그러모아 선물했다는 가슴 뭉클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미야자와 겐지는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었다. 순수한, 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는지. 특히나 문학에 있어 순수라고 하면 어떤 작가를 떠올리시는지. 나의 머릿속에는 백석과 미야자와 겐지 두 사람이 떠오른다.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서 혹은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순수한,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뭔가 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 경건하고 정화된 마음을 갖게 하는 작가 말이다.     미야자와 겐지(1896~1933)는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는 애니메이션 의 모티프가 된 《은하철도의 밤》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일본 이와테 현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겐지는 어린 시절부터 빈민들의 삶을 보며 자신의 행복이 그들을 착취해 유지되고 있다는 양심과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세계대전 시대에 태어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싹트던 일본사회의 삭막함과 비정함을 몸소 체험한 겐지는 평생을 가난한 농민들을 도우며 살아가리라는 열정을 품고 고향 이와테현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업기술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다 폐렴으로 사망한다. 작품으로는 《은하철도의 밤》을 비롯한 《첼로 켜는 고슈》, 《주문 많은 요릿집》 등 동화 100여 편과 시집 《봄과 아수라》를 남겼다. 국내에는 《은하철도의 밤》(바다출판사, 2000년 12월 출간), 《첼로 켜는 고슈》(보림 출판사, 2006년 5월 출간), 《주문 많은 요릿집》(소화 출판사, 2004년 5월 출간),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사계절 출판사, 2006년 4월 출간) 등이 출간되었고, 시집 《봄과 아수라》는 96년에 웅진닷컴에서 출간되었으나 현재 절판 상태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봄과 아수라》가 복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겐지의 시가 알려졌으면 한다. 겐지의 대표작인《은하철도의 밤》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소개되었지만 바다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가장 사랑받고 있으며 쇄를 달리하며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아무튼 각설하고, 겐지의 고향 이와테 현에서 미야자와 겐지 100주년을 기념하고 그의 생애를 기리고자 96년에 헌정 애니메이션 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을 소개할까 한다. 은 이와테 TV와 애니메이션 회사 그룹테크에서 공동 제작하고 와 를 만든 가와모리 쇼지가 감독을 맡았다. 현란한 CG 메카닉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가와모리 감독답게 CG 메카닉과 셀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가며 겐지의 실제 삶과 그의 정신적 고뇌를 효과적으로 묘사하였다.                 은 겐지, 겐지의 여동생 토시(코), 겐지의 친구 카나이.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야자와 겐지의 여동생 미야자와 토시코는 가족으로서 신념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 미야자와 겐지의 문학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24살 토시코의 죽음은 겐지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과 시련이었다. 은 누이를 잃은 그의 상실감에서부터 시작한다. 서글픈 아베마리아가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겐지로 보이는 고양이 캐릭터가 기차에 타고 있는 여자를 향해 달려간다. 기차는 점점 멀어지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결국 여자에게 닿지 못한 채 기차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겐지는 토시, 를 절규하며 주저 앉는 오프닝. 시작부터 비장하다.   겐지는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그를 시라캄바(시인선생)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무척이나 따르지만 급우의 돈을 훔친 가난한 학생의 사정을 들은 후 농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교사직을 그만둔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을 계몽하고, 농사기술을 개발하려 했지만 막상 농민들은 그의 의지를 부르주아 도련님의 변덕쯤으로 비하한다.        게다가 학창시절부터 뜻을 함께 한 친구 카나이가 함께 이루기로 한 이상을 접고 황실 소속의 군인이 되고 겐지를 외면한 채 "당신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군요. 이상이라는 구름을..." 이란 말을 남긴 채 곁을 떠난다.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겐지는 계속해서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을 교화하려 하지만 농사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농민들에게서 차갑게 외면당한다. 절망에 차 밭에 쓰러진 겐지는 마치 죽음처럼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자신의 의식을 희미하게 부여잡는다.         "깜빡이고 있는 것은 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이것은 변합니까 이것도 변합니까, 저것도 변합니까?" 아무리 변화시키려 애를 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삼키며 겐지는 읊조린다. 그러다 갑자기 토시의 환영이 떠오르며 겐지가 떠다준 비에 젖은 눈을 먹은 토시는 "차가워, 하지만 따뜻해."라는 말을 하고, 이 말에 힘을 얻은 겐지는 눈을 뜨고 외친다. "새로운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여. 심히 짓누르는 괴로운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이 은하계통을 해방시켜라." 그러자 두 대의 기차가 용솟음하듯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겐지는 힘을 내어 다시 일어선다.    애니메이션 은 미야자와 겐지의 실제 삶의 궤적을 세밀하게 잘 묘사할 뿐만 아니라 겐지의 관념적인 고뇌와 환상도 특수효과를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해낸 수작이다. DVD가 아직 국내에 출시되지 않았지만, 출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은하철도의 밤》에 나오는 주옥 같은 글귀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어떠한 괴로움에 부딪혀도 그것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다가 생긴 일이라면, 험준한 비탈길의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모두 진정한 행복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니까요."                                                                                                            -  《은하철도의 밤》 中 79쪽  
1317    ... 댓글:  조회:3191  추천:0  2018-12-18
미야자와 겐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일본어: 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1933년 9월 21일)는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의 문인이자 교육자, 에스페란티스토이다. 향토애가 짙은 서정적인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작품 중에 다수 등장하는 이상향을 고향인 이와테의 에스페란토식 발음인 ihatovo라고 명명하였다. 지주들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던 농촌의 비참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을 짓는 등의 문학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국민작가의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다. 저서[편집] 쥐돌이 쳇 주문 많은 음식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은하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카이로 단장 미디어[편집]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은하철도의 밤 (304회) EBS 《지식채널 e》 은하철도의 밤
1316    {자료} - 해방전 조선인 시선 댓글:  조회:3025  추천:0  2018-12-17
ㅁ[문화산맥] 해방전 조선인 시선(詩選)1-2-3-4   해방전 조선인 시선(詩選) 김여 (작자신원미상) 金与 (作者身元未詳) 3월1일 황하수 건너 부는 바람, 피바람 한숨바람 아아 이날에 수만의 무고, 왜칼에  왜총에 맞고 죽단 말가 오오 언제난 류혈이 끝나리,  언제나 끝나리 거룩한 싸움 의로운 싸움, 어느덧  1년이로다 지하의 의로운 영령- 철창에 자는  용사 그러나! 안심하소서, 안심하소서. 자유의 해빛이 정의의 기발이, 새 광채 발할 날 멀지 않나니 멀지 않나니 노예의 쓰라림 압박 악형 학대 아아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친다 내 아우 채우던 모습, 내 누이 끌리여가는 모양 내 부모의 여윈 혼, 아아 아직도 이 눈에 삼삼하다. 죽어도 이 기반 면하고말리라, 이 기반을 면하고말리라. 천만번 다시 죽어도 독립은 하고야말지어다 온 천하 다 막아도, 독립은 하고야말리라 삼천리 피우에 뜨고,  2천만 하나도 안남아도 독립은 하고야말리라. 이 가슴 뛰는 피 정의의 피,  이 팔뚝 흐르느 피 자유의 피, 이 피를 뿌릴 때, 영광의 무궁화  다시 피리라 그리운 조국강산, 환희에 차리라, 환희에 차리라. (1920년 3월1일 「독립신문」) 향수 고향에 피던 꽃 여기도 핀다 고향에서 울던 새 여기서도 운다 다 같이 사람이 생활하는 땅 어데나 순간의 쾌락 없으련마는 고향의 꽃 눈에 띠울 때  고햐의 새소리 귀에 울릴 때 이 가슴 그리워 터지려 한다 아아 언제나 돌아가리 산넘고 물넘어 저기 저 멀리 아침해빛 빛나는 저기 나 그리는 무궁화 피는 저기 비록 빈곤의 설음이 있다하여도 때로 불의의 재난 온다하여도 쓰든 달든 내 살림살이 아아 언제나 돌아가리 가는 비 창밖에 삽삽히 울 때 밝은 달 창공에 솟아오를 때 고향의 옛기억은 더욱 새로와 오고가는 바람비에 나의 초목은 얼마나 더 무너졌으며 반백이 더 넘은 나의 부모는 얼마나 백발이 더하였으랴 아아 언제나 돌아가리 먼길에 피곤한 뭄 풀우에 누워 무심히 바라보는 북녘의 하늘우 흰구름 두어덩이 불리여간다 아아 저밑에 나의 님 계시련마는 저밑에 나의 동산 푸르련마는 저밑에 나의 샘 흐르련마는 아아 언제나 돌아가리 사람이 살며는 만년을 살랴 하늘에서 받은 짧은 동안을 행복있게 유용하게 쓴다 하여도 오히려 최후의 눈 안감기거든 몸 다하여 맘 다하여 애쓰던 이 몸 속절없이 해외에 표박의 생활 생각하면 눈물이 더욱 흐른다 아아 언제나 돌아가리 (1920년5월11일 「독립신문」) 리욱 (李旭 1907년~1984년) 1907년7월5일 로씨아에서 출생. 1910년 만주의 간도로 이주. 1924년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여 데뷔. 1948년 「대중」잡지 주필. 1951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음. 시집 『북두성』(1947년),  『북륙의 서정』(1949년), 『고향사람들』(1957년),  『장백산하』(1959년 한문), 『연변의 노래』(1959년 한문), 『리욱시선집』(1980년) 등이 있음. 1984년2월6일 별세. 생명의 례물 생명은  우주이다 허나 우주도 생명보다 작다 산  바다 나도 생명의 한개 점이더니 나의 붉은 젖가슴에서 뛰는 생명의 거류여 생명의 전쟁이여 생명은 정복의 날개 창조의 힘 영생의 길 내 이제 뛰는 생명의 맥박을 찾으매로 생명은 찬연한 례물을 괴여들고 이 밤 이 광야에서 나의 앞에 홰불을 들었구나. (1924년) 바위 바위 바위 등가슴으로 풍진을 씹으며 루루이 침묵을 지키누나 바위 바위 한몸에 검푸른 갑옷 떨치고 장검만 벼리는가 루년루대… 언젠가 한번은 누리를 진감하리- 창천의 우뢰소리로  지심의 신곡소리로 기필코 한번은 무덤을 가르리니 암심에 묻힌 작탄- 세기의 기발로 (1935년) 조선심 (작자신원미상) 趙善心 (作者身元未詳) 백악산인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은- 겨레의 마음을 한데 태워서 옳바른 붉어진 자유의 품에 님을 비추는 삼노니 의 사조가 한없이 흘러서 사람의 마음은 는다 해도 님의 마음은 꾀일 길 없노니 환영을 헤치고 진을 찾아서 의 푸른기를 높이 세우자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은- 겨레의 뜻을 한데 맺어서 제단에 드리는 훈향을 삼노니 세상에 물결이 끝없이 거칠어 의 바퀴가 구른다 해도 님의 마음은 변할 길 없노니 울음을 그치고 환희를 간직해 축복의 한잔을 높이 들어라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을- 겨레의 피를 한데 빚어서 곱곱이 옥맺힌 원한의 가슴에 신의 꽃을 피우게 하려니 의 빛갈이 아무리 고와도 온 누리 사람이 죄다- 따라도 님의 마음은 변할 길 없노니 설음을 걷고 안위를 간직해 조선의 미를 깊이 맛보라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을- 겨레의 혼을 한데 뭉쳐서 나날이 빛나는 진역의 터전에 새로운 성탑을 높이 쌓으려니 악마의 벽력이 되거퍼 내리쳐 희생의 선풍이 이 땅을 삼키여도 님의 정화는 꺼질 길 없노니 락망을 버리고 용기를 내여 한토에 한빛을 길이 밝히라 (「민성보」1928년5월27일) 연가선 (작자신원미상) 涓佳善 (作者身元未詳) 철주 내 누워 앓는 방 란간끝에는 제비둥지가 있다 제비 암제비 낮에는 진흙을 물어다가 제 둥이를 수리하고 밤에는 목을 엇걸고 자더라 일기가 명랑하고 바람이 화창하면 둥이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귀를 기웃거리며 아픔을 잊고 그 노래의 뜻을 풀었다. (1928년6월3일 「민성보」)  천청송(千青松)  191×년 함경북도에서 출생. 1936년 룡정 광명중학교 사범부 졸업. 1945년 「불꽃」 편집원으로 일하다가 조선으로 나감. 두메 두메의 봄은 짧다 내 살던 곳은 거울이 없어도 괜찮았다 사슴뿔 솟는 샘엔 이쁜 색시 얼굴 돋고 뒤고개는 양춘삼월에도 흰눈을 이고 앉았겠지 내 향수도 차거운데 이런 밤엔 의례 뻐꾸기가 울었다   (1942년 『재만조선시인집』) 무덤 정은의 집 묘지는 적막하다 고향이 하 그리워 넋이나마 남쪽을 향했도다 오직 위무란 북두칠성이 비쳐줄뿐 표적없는 무덤들이 옹기종기 정답게 모여있다 눈보라 사납던 매듭않은 력사를 이야기하는거냐? (1942년 『재만조선시인집』) 무제 마음이 항상 공허에 무지를 때면 바다가로 들이밀리는 파도가 보고싶소이다 그믐밤 하늘을 우러러 별빛은 밤새워 차지건만 구름 널린 하늘에는 반디불조차 날지 않더이다 소낙비 맞은 내 가슴엔 정열의 불길마저 꺼졌는가봅니다 (1940년7월20일 「만선일보」) 이역의 밤 고요한 밤이면 고즈넉이 들리는 호궁소리 더욱 애닯구나 함박눈 퍼붓던 새벽녘에 떠나가신 사랑선비가 웬 일인지 한없이 그립다 답사리 우거진 담밑에 숨박곡질하던 흩어진 동무들이 보고싶다 눈보라 휘날려 문풍지 떨고 말 달리는 방울소리 요란쿠나 옛고장 물레방아간에서 맺어둔 기약을 어기고 시집간  순이가 원망스럽다 화로불가에 이마를 마주대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시절이 부럽다 먼동리 개짖는 소리 은은하고 시름없이 눈내리는 이역의 밤은 서글프구나 (1940년4월27일 「만선일보」)  고화 유서 잃은 고화 네 꿈이 정녕 서글프냐 차돌에 돋친 명조의 민속 인정은 다를망정 풍기는 정서 향기롭다 루거만년을 가도 오히려 령롱한 색채 내 침울한 방은 옛풍정을 지니기 가당찮아 슬프다 (1942년 『만주시인집』) 송철리 (작자신원미상) 宋鉄利 (作者身元未詳) 고향 달빛 파-랗고 밤 애련-도 하다. 울고 떠난 고장이건만 마냥 그리워 그리워 계모 찾아가는 서자처럼 마음 조이며 이밤 사르-시 나는 고향의 품속에 숨어들다. 너무나 처참한 풍경! 이렇게 변할줄이야! 푸른 기름 흐르던 산전야전엔 우거진 잡초 거칠고 들국화 꺾으며 놀던 동산엔 검은 무덤이 촘-촘 기름불 돋우고 전설 익든 두세집터엔 여우 처량히 목놓아 울고 암탉새끼치는 닭의장우엔 부엉이 부-헝 부헝 소리높여 울다니 공허와 우수에 함초롬-이 젖어 마도로쓰의 파이프연기처럼 짜릿-한 한숨 마시며 뿜으며 하-얀 박꽃 필무렵 그 녀자와 산호구슬 바꾸던 우물가를 지나다 나는 허겁지겁 숨고말다. 애기업은 어머니 우물 푸는 아낙 그는 벌써 남의 안해였다는걸 내 일찌기 모른바 아니였지만 그렇지만 아- 아- 새삼스레 피타는듯 나는 괴로왔다 나는 괴로왔다 사계 포근-히 잠들고 마을 고요-히 꿈꾸는데 마음어린 도적처럼 초조하게 망설이다 종내 허무만 안고 이 밤 나는 고향을 나오고말다. 만일 메마른 얼굴에 근육이  굳지 않았더면 내 고향의 달아래 굴욕을 뿌렸으리라 아- 아- 고향은 고향이런가? 고향은 고향이런가? (1940년3월25일) 오열 산 몇 넘었던고? 물 몇 건넜던고? 험로 수천리 후조처럼 찾아와보니 꿈에까지 그리던 옛 보금자리 꿈에만 그릴수 있게 될줄 내 어이 알았으랴! 내 어이 알았으랴 밤 심산같이 고요-한데 마음 도심처럼 소란타. 잎지는 숲속 버리고 꽃피는 섬 찾아간 파랑새 공작은 놀던 곳에 깃 남기던데 그는 와 튼 곳에 꽃잎 하나 남기잖았고나 이런줄 희미하게 짐작했거니 내 왜 왔던고? 내 왜 왔던고? 랭기 스미는 주막에서 외로이 등불 돋우는 마음 이 무거운 밤 밀리기전 아- 밤 심산같이 고요-한데 내 마음 도심처럼 소란타 (1940년3월27일) 가련 소녀야! 가슴에 시드는 수련인양 너는 애처로웁다 너는 애처로웁다 맑고 깊은 네 동자의 호수속에 파들거려야 할 희망의 송사리떼는 그림자도 없고 잔인한 애수만이 부평처럼 떠도누나 떠도누나 가마안 가만 뽑는 네 이야기 실오리에 가느다란 하소가 비가같이 슬프고 네 동그란 얼굴 탐스러운 뺨에 응당 붉어야 할 장미는 벌써  졌다 말이냐? 세상을 저주하는 싸늘한 원한만이 재처럼 차고나! 재처럼 차고나! 펴도 못보고 펴도 못보고 너는 꽃봉오리로 고만 져야 하는냐? 소녀야! 너는 가엾다 너는 가엾다 운명의 새장속에서 창공을 우는 카라리아처럼- (1940년5월7일) 침묵 나는- 침묵의 여울에서 명상의 송사리를 낚는 고독의 어옹이외다 나를- 세인은 가르쳐 벙어리! 말못하는 병신이라고… 그러나 나는- 어제도 오늘도 고독의 어옹이였나니 래일도 모레도 고독의 어옹이려나이다. (1942년 「만선일보」) 도라지 도라지 피면 8월도 피고 8월이 피면 향수도 피더라 산 물 길 될쇠 갓난이 삽살개 하염없이 쓸어보는 파란 꽃송이에 무지개마냥 아롱지는 흘러간 옛마을 그러나- 도라지 지면 8월도 지고 8월이 지면 향수도 지더라 (1942년 『만주시인집』) 함형수(咸亨洙 1914년~1946년) 1914년 함경북도에서 출생. 1935년 시 「마음의 단편」을 「동아일보」에 발표하여 데뷔. 一九三六년초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간도로 건너옴. 1946년 서거. 가족 1 고기와 꽃과 보리이삭과 그외 여러가지 보배를 어머니는 세여진 머리에 이고 걸어오셨다 인제 어머니는 눈을 가슴속에다 박으셨다 눈물이 기쁨에서 오는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2 휘황한 전등밑에서 누이는 밤마다 붉은알 푸른알 흰알 노-란알을 굴리느라고 눈길이 이상해졌다 오늘 누이는 대리석 돌층계에서 경주련습을 한다 돌층계 밑에 떨어져있는 찢어진 찬송가와 때묻은 행케치. 3 풍차와 연과 팽이와 그리고 노래와 춤을 동생은 자꾸 만든다. 동생의 사랑은 샤기-르와 그리고 나와 어머니와 누이와 이외에도 기수없다 동생은 해를 쳐다보고 웃는다 웃는다 (1940년3월1일) 나의 신은 멀-리 암흑속을 뚫고 오는 희미하나마 확실한 광선과 같이 아무리 쇠약한 육체와 아무리 패배한 정신에게도 또 하나의 문을 가르치는 나의 신은 그런 자비의 신이리라 영원사역에 떨어진 포로수와도 같이 불타는 정열과 굳센의지와 량심과 열정과 최후의 특성까지를 바쳐서 섬길지라도 오히려 우리를 의심하고 채찍질하는 나의 신은 그런 엄격한 신이리라 지상에 사는 온갖것의 향락 지상에 사는 온갖것의 자랑과 지상에 사는 온갖것의 가치와 지상에 있는 지상에 있는 온갖 모든것을 가지고도 바꿀수없는 나의 신은 그런 고귀한 신이리라 해와 달과 별과 동물의 계열과 식물의 종류와 인류의 력사와 이 모든것을 단 한번의 분노로써 재가 되게 할수 있는 나의 신은 그런 공포의 신이리라 (1942년 『만주시인집』) 귀국 그들은 묻는다 내가 갔었던 곳을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얻었는가를 그러나 내 무엇이라 대답할고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없는 그림자뿐이니 먼- 하늘끝에서 총과 칼의 수풀을 헤염쳐 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무찔렀으나 그것은 참으로 또 하나의 육체였도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새로운 행동을 배웠고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육체를 얻었나니 여기 돌아온것은 실로 그의 그림자뿐이로다 (1942년 『만주시인집』)  나는 하나의 손바닥우에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된 손바닥밑에  숨은 천사를 보았다 시간의 마술이여 물질이여 먼지같은 감상이여 천사가 깨여나면 찢어진 공간을 내음새가 돈다. 아름다운 피부의 호수여 노래의 망각자여 째라 진리의 빛이여 어두운 침상이여 돌이여 눈물이여 나는 하나의 피투성이 된 손바닥우에 이상스러운 천사를 보았다. (1942년 『만주시인집』) //     해방전 조선족시선(詩選)2 윤동주 (1917년~1945년) 1917년12월30일 만주의 간도성 화룡현(현재의 룡정시) 명동촌에서 태여남. 1941년 도일하여 립교대학, 동지사대학에 적을 둠. 1945년 독립운동의 혐의로 일경에 체포됨. 1945년2월16일 호쿠오카경무소에서 옥사함.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출판됨.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우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11월20일)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9월)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것은 너무나 피로로운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1941년6월) 십자가 쫓아오던 해빛인데 지금 교회당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였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년5월31일)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것이냐 백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좇는것일게다 가자 가자 좇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1941년9월)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래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였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1941년11월5일)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것은 어느 왕조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24년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뒤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1942년1월24일) 쉽게 씌여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년6월3일) 그 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1937년7월26일) 김달진(金達鎮1907년~1989년) 1907년2월2일 경상남도에서 출생. 1929년 시 「잡영수곡」으로 데뷔.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약. 1941년 만주의 룡정에서 「만선일보」 등에 시를 발표함. 1989년6월7일 서울에서 별세. 룡정 차창밖 두만강이 너무 빨라 섭섭했다 흐린 하늘 락엽이 날리는 늦가을 오후 마차바퀴가 길을 내는  쩔걱쩔걱한 검은 진흙길 흰종이쪽으로 네귀에 어찔러 발라놓은 창경창경 알수없는 말소리가 귀가로 지나가고 어디서 호떡굽는 냄새가 난다 시악시요 아 이국의 젊은 시악시요 아장아장 걸어오는 쪼막발 시악시요 흰 분이 고루 먹히지 않은 살찐 얼굴 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까 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까 황혼 길거리로 허렁허렁 헤매이는 흰옷자락 그림자는 서른 내 가슴에 허렁허렁 떠오르는 조상네의 그림자- 나는 강남제비새끼처럼  새론 옛고향을 찾아왔거니 난생처음으로 마차도 타보았다 호궁소리도 들어보았다 어디 가서 나 혼자라도 빼-주 한잔 마시고싶고나 뜰 잎 다 진 백양 두어주 있고 가끔 노마바람 지나가고 밤이면 찬서리 눈처럼 내리는 가난한 작은 이 뜰에도 한나절 해볕이 무르녹으면 해볕따라 참새들 날아와 놀면 백화란만한 봄화원인듯 눈부신다 차병 드리운 청동화로가인듯 평화로웁다 국화 나 적은 동무와 마주앉아 인생을 론하다가 대기염을 토하다가 문득 흥이 식어져 입다물고 무연히 창경밖을 내다보았다 화분에 피여나는 찬 국화 세송이 석양을 받고있다 김조규(金朝奎1914년~1990년) 1914년1월21일 평안남도에서 출생. 1938년 「단층과 맥」 동인으로 활약. 1942년 『재만조선시인집』을 펴냄. 해방후 평양에술대학 교수, 「조선문학」,「문학예술」 주필 등을 지냄. 1990년12월3일 별세. 북행렬차 안개 짙은 밤 나는 그늘진 나의 청춘을 안고 북행렬차에 실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노라 산속을 기여 해안을 달음질쳐 북관 천리 차창은 우리 모두가 안고있는 한폭 생활의 축도런가 행복은 문어구에도 없고 불행만 꽉 차 숨이 막힌다 차창을 적시는 가을 찬비는 울며 따라서던 어머니 눈물이냐? 마지막 넘던 집문턱  울바자에 맺혔던 밤이슬이냐? 눈에 보이는 모든것 잃었으니 어느 구석엔들 웃음이 있으리요 빈 젖을 파고드는 애기의 울음을 어머닌들 무엇으로 멈춘단 말인가 그런데 욕설로 무찌르는 이방말… 차바퀴소리 요란한걸 보니 두만강 다리를 건너는가부다 벌써 대지는 얼어 북만엔 눈발이 섰다는데 홀적삼 로즈레로 이제 대륙의 칼바람을 어이 견뎌낼것인가 오라는 글발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밤과 밤을 거듭한 추방의 막막한 나그네길 나는 내가 내리는 이곳 북행렬차는 끝닿는줄 알았는데 아, 어제도 오늘도 또 래일도 북행렬차는 더 큰 불행과 슬픔을  싣고 어덴가 자꾸 떠나고있어라 (1940년 조양천에서) 3등대합실 고향 사투리가 듣고싶어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저녁 정거장으로  내 창황히 나아오다 예서 고향이 몇천 몇백리이뇨? 남행렬차에 탄 길손이 부러워라 보내는 사람도 없는데 손을 들어 멀리 사라지는 푸른 신호등을 바래주노니 인생은 뭇자욱 어지러운 3등대합실 행복보다도 불행으로 가득찬 3등대합실 (할머니 그 늙으신 몸에 북행렬차를 더 타시렵니까?) 눈물의 북쪽 만리 아하하 쫓기우는 족속이여 쪼막발 이방의 아가씨가 인형처럼 아장아장 문을 열고 들어선다 슬픈 석고상처럼 창턱에 기대여 낯선 거리의 저무는 풍경을 실신한듯 내다보는 젊은이도 있다 아, 언제 닥칠지 모를 그 무서운 폭압의 채찍이 내리기전 나도 어데든지 떠나야 할것 아닌가 한마디 고별의 인사도 없이 밤차에 숨어 밤차에 홀로… (1941년 가을 조양천에서) 밤의 륜리 술을 불으고 돌아오는 밤은 노상 히틀러-의 시간도 가진다 와-샤 검은 장미송이를 뿌려라 꽃다발과 노래와 춤의 향연 충혈된 나의 욕망은 병곤을 잊을수도 있다 밤하늘이 너무 푸르고 맑아서 푸른 마음이기에 웃을줄 안단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밤을 행복하련다 화려한 밤의 륜리로 잠시 행복하련다 (1941년 『김조규작품집』) 장렬 원시적인 풍악소리가 흘러가고 소복한 녀인이 느끼며 지나가고 가까운 기억도 머얼리 황혼처럼 떠오르고 고목과 려마와 말과 조화의 기인 행렬이 흐느낄 때 나는 나의 위치를 슬퍼하고있었다 (1941년 『김조규작품집』)     해방전 조선족시선(詩選)3 권녕화 (작자신원미상) 権寧華 (作者身元未詳) 권태 대장간에서 뛰여오는 쇠뭉치 부딪치는 느린 박자 삐걱삐걱 거리로 구으는 구루마바퀴굽소리 둔중하고 착잡한 인간들의 지저거림 이○도가 몇천년을 경과한 전설인양 내게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하나의 별세계 방안에 홀로 앞발을 비비는 한마리 파리에 무심한 생각을 보내며 까실까실한 코밑수염을 쓰다듬는 오후- 피줄조차 피로한듯 느리게 꿈적이고 세기의 폭풍에 지친 머리는 꾸벅꾸벅 졸며 긴- 하품을 한줄기 뽑아내오 고막에 매여달린 길다란 선에 가지가지 회포가 오롱조롱 매여달리다 (1940년4월23일) 이국의 달 창틈으로 새여넘는 이국의 달은 고향의 소식 싣고 날 찾아왔나 나날이 식어가는 내 가슴처럼 그 모양 쌀쌀하여 차기도 하다 돌아갈 기약없는 나그네 몸은 부질없는 생각인줄 잘 알면서도 고향의 지난날을 더듬으면서 외로이 달을 보고 한숨지으오 십리가 백번 모여 겨우 천리인데 내 고향 그 어덴가 반만리 저편 은하수 맑은 물에 나무배 띄워 그리운 내 고향을 찾아가볼가 (1940년5월15일) 남승경 (작자신원미상) 南勝景 (作者身元未詳) 북만소묘 바람은 바람을 안고 지랄을 치고 눈은 눈을 안고 몸부림한다 하늘과 땅이 분별없이 얼어붙은 날 한떨기 파초는 남국이 그리워 밤새 운다. 령하 36도 9분! 썰매의 방울소리마저 바람에게 포로된 날 뻬치까우에 놓인 둥그런 빵 한개 누구 배를 불려서 코노래를 들으려는고. 자비로운 북국의 녀신이시여 푸른 하늘과 맑은 대지를 내여놓으소서 취하지 않은 고량주 씨원치 않는 스피어 차디찬 마음 마음속에는 언제나 봄이 옵니다 (1942년 『재만조선시인집』) 정와 태고적 성모를 등에 업은 정와가 세기의 천지를 품에 그러안고 설계없는 청주를 마시며 사막을  기여간다. 초연이는 어느 지방 상가앞에서 공복을 참다못해 조반을 구걸하는 파리마냥 전통잃은 우물개구리… 지평선이 뵈지 않는 무딘 천리안 깨여진 두개골 구부러진 척추 이제는 락타도 못 타는 한낱 물벌레. 그의 정든 고향은 언제나 우물속 매일 구름뭉치를 하나 둘 헤여보다가 수장이 되고마는 우물개구리여. (1942년 『재만조선시인집』)  류치환 (柳致環 1908년~1967년) 1908년8월 경상남도에서 출생. 1928년 연세전문학교를 중최후 도일하여 사진을 배움. 1931년 시 「정적」을 「문예월간」에 발표하여 데뷔. 1940년 만주로 건너옴. 시집 『청마시초』, 『생명의 서』 등 간행. 1967년2월3일 사망 노한 산 그 륜락이 거리를 지켜 먼 한천에 산은 홀로이  돌아앉아 있었도다 눈뜨자 거리는 저자를 이루어 사람들은 다투어 탐람하기에 여념없고 내 일찍 호올로 슬프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나니 일모에 하늘은 음산히 설의를 품고 사람은 오히려 우러러 하늘을 중오하건만 아아 산이여 너는 높이 노하여 그 한천에 굳이 접어주지 말고있으라 바위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여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사향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여와 나 대신 내 자리에 살짝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양 밀어놓고 가만히 일어나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같은 등불 두엇! 북방추색 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밭 십리 이랑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 석양에 두렁길을 호올로 가량이면 애꿎이도 눈부신 제 옷자락에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 신상보 (작자신원미상) 申尚宝 (作者身元未詳) 사막 여기는 아세아의 꿈많은 나라 명일이 즐겁게 해뜨는 나라다 은호털속에 극락보다 단꿈이 있고 유방보다 보드라운 모래언덕 넘어서 밤이면 별 하나씩 시집오는 사막이다 락타등에 생활을 싣고 걸어서 천년 앉아서 천년을 살아도 언제나 꿈속에 명일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1942년 『만주시인집』) 걸인 얼어터진 손목에 넋을 걸고 찬바람 안아 하루가 슬픈 생활 걸어서 걸어서 일륜처럼 돌기만 하는 그대 뉘 자손이뇨 족보가 우는 그의 세대는 정녕 서글프다 털모자 등거리 떨어진 장화 굽은 등에 일생을 보따리에 의지하고 뉘 문전이 고맙드뇨 뉘 문전이 괄시많드뇨 밤잠이 차거운 꿈속에도 별같이 아름거리는 추억마저 시들어 자리를 돌아눌제마다 끙- 소리 땅이 꺼지고 남음이여 무거운 한숨 뜨고지는 해가 소용이 없다 덥고 찬거움이 소용이 없다 걸어서 일생을 사방이 집이로다 드문드문 걸어도 쉬여본적 없는 인생걸인 (1942년 『만주시인집』) 려인숙 오늘 해가 저물었소 길가마귀 지저귀고 저기 가는 저 손님 짐내리시고 쉬여가오 어깨에 70년이 못박히고 보따리속에 한숨이 그득한듯 고랑처럼 패인 주름살에 그 땀을 식혀가오 차거웁기 얼음같은 표정 고요하기 상아같은 표정 무슨 비밀이뇨 말없이 굳게 다문 입 어서 짐을 내리시고 이 밤을 쉬여가오 해지는 겨울밤이 무섭게 차거웁소 가실 곳이 어디길래  바쁘다만 하시나뇨 가도가도 끝없길래  한없이 가고프오 한없는 길이길래 멀-리 가시는 길이길래 어서 천천히 머물러 나름나름 가시구려 (1942년 『만주시인집』)     해방전 조선족시선(4) 윤해영 (尹海栄 1909년~) 1909년 함경북도에서 태여남. 1930년초기 룡정에서 흑룡강성의 녕안으로 이주. 시 「해간강」 「룡정의 노래」(일명 「선구자」) 등이 있음. 해란강 적막한 강이로다 거룩한 강이로다 고원잃은 자식들 젖줄을 빨리기 해란강 백리언덕에 주름살은 잡혔느니 전설의 물줄기 더듬어오르면 령란이 핀 언덕에 어진 사슴이  호사로운 두뿔 비쳐보던 시절엔 정정한 락엽송의 아지가지가 은하의 별빛조차 가렸다건만 이주민의 부월에 력사가 빛날 때! 쓰러지는 환목의 도막도막을 가슴에 안고서 흘렀느니 은하장장 천심에 별이 종종 류역에는 아리아리 인연이 종종! 강낭대 마디마디에 희망을 맺은 어진 족속들이 별떼처럼 무성해서 잎이 필 때면 기러기가 울 때면 회향병 젊은이들의 로맨스도 실어갔다 근심많은 사나이들의 큰 뜻도 실어갔다 한세기 수다한 이 지역의 력사를 늙은 해란강 백사장에서 찾으리 (1939년5월 룡정에서) 발해옛터 5월의 석양 발해옛터에 지팽이와 나와 풀숲에 쓰다 력사란 모두다 거짓말같아서 6궁의 남은 자취 주추돌도 늙었는데 제일궁지 드높은 곳 응령사 종이 울어울어… 기와 편편 어루만져 회고에 잠기우면 저- 언덕 밭가는 농부 그 시절 백성인듯 멍에 멘 소잔등에 태고가 어리우다 (1942년5월 경박호기행시중에서) 설인( 雪人 1926년~) 본명 리성휘(李成徽). 1921년 연길시에서 출생. 중국작가협회 회원. 시집 『봄은 어디에』 『설인소시집』 『설인시선집』 등이 있음. 한야에 굶주린 창자 헐벗은 알몸들 지금 엄동설한 이 삼경에 누구의 집 모퉁이에서 지낼가 없나? 누가 그들에게 따스한 물 한모금 김나는 밥 한숟갈 그들에게 줄 사람 없는가, 없는가… 모대기다 못해 급기야 기한에 지는 한맺힌 이슬 누구 탓일가? 누구 탓일가? 이 밤이 왜 이다지 찰고? 아, 왜 이다지 찰고… (1940년) 소식 오늘도 끝없이 울부짖는 소리 들었나니 언제나 가시덤불속에서 아득한 지평선너머의  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순례자의 발끝에 피방울이 맺힌 서글픈 소식 (1942년) 채정린 (작자신원미상) 蔡貞麟 (作者身元未詳) 북으로 간다 내 눈알에 이야기 돋아 탐나게 기리하고 허연 나비 머리 풀고 내려앉은 등불밑길로 북으로 간다 버들꽃이 바람을 부는 두메날에서 모든것이 내 움직이는 모든것이 비로 눈으로 한갖 돌아가던 여러것이 머리칼우에 펴진 하늘만을 믿어 따라간다 고개마루너머로는 강 두만강이 오래다 붉은산에 얕은 한나절 피마른 열매를 물고 북으로 간다 뒤에는 다시 펴볼 꿈 한포기 없이 차다 물러간 구름속 오직 물러간 구름속은 문이 없고 북으로 가슴앞에 불꽃이 핀다 (1942년 『만주시인집』) 벌 까마귀는 매양 뒤골을 쫓는다는 가시꽃밭은 괴괴하여 전설은 내 가슴의 엷은 문을 두드리고 가쁜 호흡이다 벌은 아무도 없는 꿍이기에 나는 목화를 꺾는 허연 그림을 푼다 (1942년 『만주시인집』)  밤 나도 그림자도 말없는 돌인양 앉아 긴긴 밤 붉은 입술을 벌려 서로 꽃술을 따르는 밤 멀리 때아닌 꿈문이 열려 인제 괴이한 전설이 튀여날따름 호개는 넓은 벌에 오-랜 밤을 울고 나도 내가 끝없이 낯선 곳에 어디서 흉한 웃음이 히히 웃음인가 자꾸만 마음은 푸른 불을 물고 흐르는 손바닥우에 허연 이마는 별처럼 춥다 (1942년 『만주시인집』) 신활(申活) 혁명가의 안해 고량밭 지나 역까지 20리길 떠나는 남편을 보낸지도 그 몇해 눈보라치는 세린하골에 겨울을  보낼 때마다 어린아이를 안고 눈물지우는 밤이면 소식이 그리워 잠을 못이루었소 옥수죽 한그릇도 더웁게 앞에 놓으면 생각은 어느덧 먼곳으로 지금은 어는 산협에서 굶지나 않는지 목메인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소 그러나 그는 혁명가의 안해 늙은 부모를 도와 일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봄에 씨뿌리기와 여름에 김매기와 가을이면 걷어들일줄을  싫어한적 없소 혁명의 정열을 안고 발벗은 남편을 사시밭으로 내여쫓던 로씨야의 그들만 못지 않게 굳세게 튼튼한 안해였소 앞산고개넘은 옆으로 가로놓인 오솔길에 사람의 그림자만 얼른거려도 울타리나 마당앞 백양나무가지에  까치만 울어도 그리 쉽게 안돌아옴을 번연히 알면서도 마음은 남모르게 기다려졌소 깊은 밤 회오리바람이 왕왕 우는 밤 건너마을 호개짖는 바람에  잠을 깨면 또 다시 놈들의 경찰이 오는가 하여 고스란히 한밤을 그냥 새웠소 얘야 어서 자라, 그 놈의 성질을  너는 모르느냐 이 놈의 세상이 뒤집혀져야 그래야 내 자식은 돌아오리라 시아버지 역시 담배대 두드리며 잠못이루고 계시나니 우는 아이를 안고 돌아누우며 쉬는 긴 한숨 언제나 그 언제나 돌아오리라 새 세상이 오는 그날 아침이면 내 남편은 기어코 돌아오리라 아! 그러면 돌아오는 남편의 얼굴이 그 얼굴이… 이처럼 믿고 믿고서 그렇기에 튼튼한 마음 굳세게 믿어서 치마폭으로 코를 씽- 풀고 눈물 대신에 슬그머니 웃는 그는 혁명가의 안해 남모르게 래일을 기다리는 그는 혁명가의 안해였소 (1947년 시집 『태풍』)        
131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꿈은 깨여지고 댓글:  조회:2948  추천:0  2018-12-17
꿈은 깨여지고                     /윤동주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雾)에서. 노래하던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 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 황페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1935.10.27.
131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봄(2) 댓글:  조회:6502  추천:0  2018-11-30
봄 / 윤동주. 봄이 혈관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ㅡ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윤동주 /봄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이 시는 봄을 맞아 봄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화자는 희망을 갖으며 종달새가 높은 푸른 하늘 날기를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이 왔다. 시내는 돌 돌 흐른다.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이 폈다. 내 혈관에도 봄이 시내처럼 흘러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종달새가 어느 이랑에서나 즐겁게 솟구치기를 바란다. 푸르른 하늘이 아른아른 높기도 하지만 솟구쳐라.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계절적인 봄이면서 심정적인 봄이다. 이 말은 화자가 봄의 계절을 맞아 마음에도 희망을 갖는다는 말이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는 계절적인 봄은 왔으나 화자가 바라는 봄은 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시를 쓰는 경향이 많다.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은 시내가 봄을 맞아 돌돌 흐르고 시내 각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이 핀 것을 보니 화자의 혈관 속에도 봄이 시내처럼 흐르는 것을 느낀다는 말이다.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는 화자가 몸속에 생동하는 기운을 느낀다는 말이다.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겨우내 추위를 참으며 움추렸던 화자의 마음이 봄을 맞아 꽃을 피우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는 말로 마음에 희망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에서 ‘삼동(三冬)’은 계절인 겨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시대의 배경인 일제강점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로 보면 ‘봄’은 광복의 의미가 되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이 되고 이는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동(三冬)’은 계절인 겨울을 의미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시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겨울의 추위와 일제강점기의 시련을 참아온 나는 봄의 계절을 맞이하여 풀포기가 피어나듯이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로 본다.   ‘즐거운 종달새야 /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는 화자가 봄의 계절을 맞이하여 종달새가 즐겁게 푸른 하늘로 솟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푸르른 하늘은 /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에서는 화자가 바라는 하늘인 ‘광복’은 높아서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봄이 왔으니 종달새는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하늘을 향하여 솟치기를 바라고 화자의 마음도 ‘아른아른 높기도’하지만 ‘하늘’을 향해 솟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전한성   =============================///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첫연의 표현이 참신하지? 봄기운이 온몸 구석구석 흐르는 혈액인 마냥, 시의 화자인 내 속에 스며들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세상 만물이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삶의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참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지! 겨우내 따뜻한 봄날을 애타게 기다리다, 마침내 따뜻한 봄기운이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날들이 왔지만,  시의 화자는 즐겁게 푸른 하늘을 솟구쳐 오를 '종달새'만큼  행복하지 않은 듯하지? 마지막 연에서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만 한데...' 여기에서 시의 화자가 마저 하지 못한 말은 무얼까?  시의 화자는 고대하며 기다렸던 봄을 맞았건만,  왜 즐겁지만은 않을까? 각자 나름대로 마음껏 상상해서... 시의 화자가 즐겁지 않은..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볼까...     =================///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습니다.   *시인의 시는 대체로 고뇌와 슬픔이 겉으로 짙게 묻어나면서 가슴 한켠으로 울컥하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위 시는 그러한 느낌이 다소 적으면서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서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 「원초적 고향으로 가는 시간, 윤동주 '봄'」       한 사람의 업적에는 분명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담겨있다. 윤동주의 경우는 시에 그것이 녹아있을 것이다. 윤동주가 자라났던 환경에 대한 정보는 그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것 같다. 유교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인 민족주의가 녹아있는 윤동주의 세계관을 약간이나마 접하니 그가 써내려간 시에 담겨있는 단어들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자주 접했던 시가 「서시」,「십자가」,「쉽게 쓰여진 시」와 같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이 담긴 것이다보니 윤동주의 동시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동시라고해서 그가 살던 시대적 배경이 녹아있지 않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과거 가볍게 읽어넘겼던 것과 달리 윤동주의 시에 담긴 본질적인 뜻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글을 읽으니 익숙했던 시가 조금은 낯설고 새롭게도 느껴졌다.   「별 헤는 밤」의 마지막 네 구절에 대해 해 위대한 자연 앞에 설 때 우리가 느끼는 무력함과 보잘것없는 모습을 극복한 의지라고 한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않는다. 특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옴"이라는 부분을 보았을 때 이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를 말하고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이 고달픈 일제강점시기는 언젠가 지나가고 당연히 광복은 올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느낌으로 광복을 염원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에서의 윤동주 인식」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이었던 만큼 일본과의 연관성이 적지 않다.  글을 읽으면서 일본인이 바라본 윤동주의 시와 그에 대한 해석, 번역에 대한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첫번째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표면적으로 같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라도, 나라와 민족의 정서에 의해 그 내면의 뜻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나라의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은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라고 느껴졌다. 시대, 개인 등 여러가지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자칫 본래의 의미와 다른 시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잘못 번역된 부분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느꼈다. 죽어가는 것을과 살아있는 것들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았다. 죽어가는 것은 곧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결과였나보다. 그 시대 죽어가는 것은 조선의 것이었고 살아있는 것은  일본의 것, 그들의 제국주의라 해석되었던 것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별빛, 절대의 시간을 찾는 윤동주의 시에서 이전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렴풋하게 생각났다. 끝까지 절망해보아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절망의 끝에서 윤동주는 밤이 가고 새벽이 곧 올 것임을 굳게 믿으며 희망을 쫓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1313    윤동주와 "이상한 주사" 댓글:  조회:3035  추천:0  2018-11-30
  1945년 3월 복간도 용정에서 열린 윤동주 장례식.   #외마디 비명이 품은 뜻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한 간수가, 혹시 그것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바짝 청각을 돋우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복역수 평소동주(平沼東柱, 도일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해 얻은 윤동주의 이름)가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소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향년 만 27년2개월의 죽음이었다. 윤동주가 특수고등경찰에 체포된 것은, 42년 도쿄 닛교대학을 거쳐 편입해간 교토 도시샤 대학 시절인 43년 7월이었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독립운동, 이른바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2년형으로, 45년 11월30일이 출감 예정일이었다. 윤동주보다 더 오래 옥살이를 해야 하는, 또 한 사람의 핵심인물은 송몽규였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이 성장한 죽마고우이며, 연희전문과 일본 유학을 함께 하고 같은 사건으로 같은 형무소에 투옥까지 된 평생의 지기였다.  이해 들면서 두 사람은 형무소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 무렵 거의 매일 규슈 제국대학의 레지던트들이 찾아와 복역수들의 팔뚝에 이름 모를 주사를 놓고는 했다. 이 주사를 두어 대 맞고부터 살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눈앞에 사람이 있고 물체가 있어도 그저 흐릿해 보였다. 강제 노역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이상 증세였다. 아니나다를까, 독방을 쓰는 사람 몇이 밤 사이에 주검이 되어 나가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송몽규는 주사를 놓으려는 의사에게 소리쳤다.  “난 이 주사가 싫어. 이 주사를 맞지 않겠소.”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한 사람이 붙드는 정도인데도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어느날 윤동주가 주사를 맞고 나오는 걸 보았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송몽규를 보며 지나가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윤동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동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송몽규는 통곡을 할 힘이 없었다.  #이상한 주사, 끊이지 않을 증언과 발굴    윤동주가 복역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1940년대 말 모습.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도쿄 유학생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알이 반쯤 깨진 안경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송몽규를 두 사람은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건네 오는데 그게 마치 저세상에 들려오는 말소리 같았다. 윤영춘이 간신히 입을 뗐다.  “어째 모양이 이러냐?”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간신히 주고 받은 우리말이었다.  두 사람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47년 윤동주의 시가 경향신문에 처음 소개되고 이듬해 유고 시집이 발간된 이래, 그의 문학은 시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결코 빼놓지 않는 애송작이 되었다. 그를 거론할 때 또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그가 감옥에서 강제로 맞았다는 주사에 대해서이다. 결론을 말하면 그 주사는 일제의 생체실험용 주사다.  80년 고노 에이지(鴻農映二·문학평론가)는 그 주사를 당시 규슈 제대에서 실험하고 있었던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라고 주장했다. 혈장은 인체의 혈액 속에 있는 유형 성분 즉,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을 제외한 나머지의 액체 성분을 말한다. 그 실험은 사람 몸에서 피를 이루는 일부 액체 성분 대신에 소금물을 넣어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측정하는 생체실험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린 병사에게 귀한 혈장 대신 값싼 생리 식염수를 주입해 살리는 방법을 얻으려는 실험이었다.  이부키 고(伊吹鄕)도 당시 후쿠오카형무소 재소자들의 사망자 수와 사망률이 대단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는 통계 자료에 주목하면서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의 생체실험을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밝혀내고 있다.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는 2차 대전 중의 생체실험마저도 여태 공식적으로는 부정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그 주사가 진짜 생체실험용 주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윤동주의 죽음을 송몽규가 증언하면서 그 ‘주사’의 실재가 사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송몽규에게 그 말을 들은 윤영춘이 그걸 전파하고, 그 증언을 믿게 된 고노 에이지와 이부키 고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 내지 않았는가. 윤동주의 생애를 샅샅이 추적해 역저 ‘윤동주 평전’을 낸 송우혜는 그 책에서 그들의 활약을 자세히 밝혀두고 있다.  윤동주는 그냥 시인이 아니다. 그의 몸은 역사를 증언하는 실체로 살아남아 있다.   ///박덕규/ 소설가·단국대 교수  
1312    [작문써클선생님께] - 시를 어떻게 쓸가ㅠ.. 댓글:  조회:3513  추천:0  2018-11-27
목차 시는 무엇인가요 ┗ 운율이 느껴져요 ┗ 비유를 사용해요 ┗ 간결하게 표현해요 ┗ 이미지가 떠올라요 시를 쓰고 싶다면 라디오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노래 가사를 들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노래 가사가 원래 시라고 하시네요. 어떻게 시가 노래 가사가 될 수 있죠? 시는 무엇인가요 시의 특징을 알면 자연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시란 무언가를 보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 그것을 함축적인 짧은 글로 나타낸 것이에요. 만약 시를 쓰고 싶다면 주변의 것들을 천천히 보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런 후에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짧은 글로 표현하면 돼요. 그런데 짧게 쓰기만 한다고 시가 될까요? 시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봐요. 운율이 느껴져요 운율이란 시에서 느껴지는 말의 가락, 리듬을 말해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거나 글자 수를 일정하게 맞추면 자연스럽게 운율을 느낄 수 있지요.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 윤동주, 「산울림」 이 시는 ‘까치가’, ‘산울림’, ‘들었다’라는 말이 반복해 나오고 각 연에서 글자 수 3자씩, 어절 수가 3번 반복되는 특성이 있어요. 이런 반복으로 운율이 생기지요. 운율이 느껴지는 시를 읽다 보면 마치 노래 부르는 것처럼 느껴져요. 노래와 시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점이 많아요. 이런 이유로 시가 노랫말로 자주 쓰여요. 앞서 질문한 내용처럼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꽃」은 유명한 가수의 노래로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비유를 사용해요 시는 생각과 느낌을 전할 때 비유를 사용해요.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말해요. 길은 포도 덩굴 몇 백 년이나 자라 땅덩이를 다 덮었다 이 덩굴 가지마다 포도송이 같은 마을이 있고 포도알 같은 집들이 달렸다 - 김종상, 「길」 중에서(『국어 읽기-5학년 1학기』) 이 시에서는 길, 마을, 집을 각각 포도 덩굴, 포도송이, 포도알로 비유해 마을 풍경을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했어요. 버들강아지는 보들보들하다. 강아지 털같이 너무 보들보들하다. - 이수연, 「버들강아지」 중에서(탁동철 엮음, 『까만 손』, 보리, 2002) 이 시에서는 버들강아지를 강아지 털에 비유해 읽는 이가 버들강아지의 촉감을 생생히 느끼도록 했어요. 간결하게 표현해요 시 문장은 간결하고 함축적이에요. 설명문을 쓰듯 구구절절 풀어내거나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쓰지 않아요. 그보다는 한 단어 속에 많은 뜻을 한데 모아서 쓰지요.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의 하이쿠, (류시화 엮음, 『한 줄도 너무 길다』, 이레, 2000) 일본의 전통 문학 하이쿠는 아주 짧은 시예요. 하이쿠에는 간결성이라는 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요. 위 시를 보세요. 시인은 숯을 바라보며 숯이 나무였던 시절을 떠올려요. 숯은 검고, 눈은 하얗죠. 두 가지 색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이 시를 읽다 보면 흰빛 속에서 젊음을 자랑하던 건강한 나무가 한 줌 소박한 숯 조각으로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나무의 일생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요. 이미지가 떠올라요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과 분위기가 있어요. 시의 분위기는 시의 배경, 시에 나타난 표현, 글감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통해 표현돼요. 시를 쓰고 싶다면 시를 잘 쓰기 위해 억지로 내용을 꾸며 쓰거나 거짓을 쓰면 감동이 전해지지 않아요. 시는 내가 느낀 것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여자애들은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본다 내 머리 이상하지 않아? -예뻐. 이 옷 괜찮아? -예뻐. 솔직히 쟤보다 안 예쁘지? -예뻐. 솔직히 말했다간 죽는다 - 이병승, 「어려운 대답」(『초록 바이러스』, 푸른책들, 2010) 이 시에는 남자아이의 마음이 아주 솔직하게 표현돼 있어요. 아무리 정직한 것이 좋다고는 해도 가끔은 솔직한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요. 이런 마음이 드러난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땐 왠지 모를 웃음도 나면서 공감이 가요. 또, 좋은 시를 쓰려면 어떤 대상을 남들과는 다르게 보는 자기만의 시각이 필요해요. “이건 비밀이야.” 친구가 귓속으로 쑤욱 밀어 넣은 비밀이란 벌레 한 마리. - 오은영, 「비밀이란 벌레」 중에서(『넌 그럴 때 없니?』, 파랑새어린이, 2010) 비밀을 벌레로 표현해서 무척 새롭게 느껴져요. 이처럼 시를 쓰려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해요.
131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산울림 댓글:  조회:3383  추천:0  2018-11-27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윤동주 시 ‘산울림’에서 윤동주 시인의 동시 계열의 시들은 순수한 마음을 잘 표현한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 가운데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이라고 쓴 ‘반딧불’을 즐겨 읽는다. 식민지 시대 고뇌하는 지성인의 내면을 담아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 그 바탕에는 이처럼 깨끗한 영혼의 시심이 놓여 있다. 까치 한 마리가 산 아래 나무에 앉아 울고 있었을 것이다. 공산(空山)에 까치가 울어 산울림이 생겨나고, 생겨난 산울림을 까치 홀로 적적하게 듣고 있었을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어떤 느낌이 산울림처럼 마음에 일어난다. 한 존재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가서 다른 시공간에 영향을 주는, 연쇄적 파동의 생생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연에서는 쉼표를 행마다 일부러 두어서 여음(餘音)과 여운을 길게 늘이고 있다.   [/2018년4월7일]  /문태준 시인
1310    윤동주와 "원산 송도원" 댓글:  조회:3801  추천:0  2018-11-26
원산 송도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송도원(松濤園)은 조선 강원도 원산시 송흥동에 있는 명승지이다. 해안을 따라 너비 40~100cm, 길이 2.7km의 1901년 개장한 해수욕장이 이어져 있으며, 수온 또한 적당해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있다. 육지로부터 100m 거리의 지점까지도 수심이 최대 2m 정도로 얕은데, 바다를 갈마반도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700여년 전 방풍림을 목적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송도원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있었다.원산 시내와의 거리는 약 3km이다. 원산역에서 분기하는 철도인 송도원선이 있다. =================///   문화재 지정 조선 천연기념물 제193호 성격 사빈, 해수욕장 유형 지명 면적 길이 4∼6㎞, 너비 0.7∼1.3㎞ 소재지 강원도 원산시 용천리 분야 지리/자연지리 요약 강원도 원산시 용천리에 있는 백사장. 목차 개설 명칭 유래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현황 개설 명사십리는 북쪽의 송도원해수욕장(松濤園海水浴場)과 더불어 수심이 얕은 좋은 해수욕장으로, 금강산·석왕사(釋王寺)·삼방협곡(三防陜谷) 등의 관광휴양지와 더불어 하나의 관광권을 형성한다. 사빈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그 길이가 두남산 기슭으로부터는 4㎞이고, 안변남대천 아래로부터는 6㎞이다. 사빈의 높이는 해면보다 1∼6m 가량 높고 너비는 0.7∼1.3㎞이다. 명칭 유래 십리 구간에 펼쳐진 이름난 사취라는 뜻에서 명사십리라고 한다. 자연환경 원산시 남동쪽 용천리남대천하구에서부터 길게 뻗은 갈마반도(葛麻半島) 끝에서 남쪽으로 끝없이 펼쳐 있는 하얀 백사장과 10여 리에 걸쳐 만발하여 있는 해당화의 군락, 그 뒤에 둘러져 있는 푸른 소나무와 푸른 바다가 어울려 명승을 이룬다. 명사십리의 북쪽 끝부분은 해발 100m 내외의 구릉으로 되어 있다. 이 구릉의 바다쪽 기슭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가 자라고 있다. 명사십리의 입구에는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모감주나무가 있다. 형성 및 변천 금야만 해변에 솟아 있는 화강암산의 풍화와 바닷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모래가 되고 안변남대천의 물흐름에 의하여 생긴 모래가 해변에 함께 쌓여 천연적인 사취를 형성하였다. 사취는 점점 발달하여 금야만으로부터 십리나 떨어진 바닷가 섬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섬은 육지와 연결되어 갈마반도를 형성하였다. 명사십리는 제4기 해성층으로 된 모래벌판으로서 지각의 운동과 바다와 육지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자연유물이다. 현황 명사십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도 있다. “명사십리 해당화야/꽃진다고 설워마라/잎진다고 설워마라/동삼(冬三)석달 꼭죽었다/명춘삼월(明春三月) 다시오리.” 또한, 원산항을 드나드는 기선과 범선, 그리고 웅도(熊島)·신도(薪島)·여도(驪島) 등을 조망할 수 있다. 1980년 1월 국가자연보호연맹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   요약 강원도(북한) 원산시 동부에 있는 반도.   원산만 남쪽 연안에 자리하며, 원산시 동쪽에 있는 갈마에서 북쪽으로 돌출하여 호도반도와 마주하고 있다. 길이 약 5㎞, 평균너비 1㎞이다. 본래는 높이 100m 정도의 갈마도였으나, 안변 남대천의 퇴적작용에 의해 사주가 발달하면서 육계도화된 것이다. 반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그 끝은 갈마각이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편리하다. 사주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며, 주변에는 해송과 해당화가 어우러져 일대장관을 이룬다. 특히 송도원관광지-원산-통천-고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해안관광지구로 개발되고 있다.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의 모습. 2018.11.01. (사진=조선중앙TV 캡처)           
130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바다 댓글:  조회:3329  추천:0  2018-11-26
실어다 뿌리는  바람처럼 씨워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침히  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부로. 바다는 자꾸 섧어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바다  /윤동주 /1937.9.원산 송도원에서.  
1308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로봉 댓글:  조회:3235  추천:0  2018-11-25
비로봉           /윤동주 만상을 굽어보기란ㅡ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자락이  춥다. 1937.9. ================/// 평양, 그리고 윤동주의 '서시'와 '비로봉'   유시경 신부(성공회 교무원장, 평통연대 운영위원) 평화칼럼             올해는 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이다.(1917-2017) 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윤동주의 첫 일본 유학지인 동경의 릿쿄대학에서 교목으로 일했다. 재직 중에 알게된 사실은, 한국에서는 유치원생도 알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일부 일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시인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는 극소수의 일본인들은 시인의 오늘날의 위상에 큰 공적을 남겼다. 이 중에는 70년대에 시인의 존재를 수필로 알려 교과서에 실리게 한 분, 유학생 독립운동 취조와 재판 기록을 발굴한 분, 80년대에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한 분, 아직 한국이 중국과 수교되기 전에 고향에서 묘소를 발견한 분, 90년대 들어 광복 50주년의 해인 1995년에 KBS와 NHK 공동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든 분, 고향방문단을 조직하고 이후 줄곧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분, 두번째 유학지인 쿄토 동지사대학에 시비를 세운 분들, 20년 이상 후쿠오카 형무소 유적지에서 시낭독 모임을 해온 분들, 쿄토 우지강가에 시비를 세운 분들 등, 결코 적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이 분들과 연결되면서, 동경에서도 윤동주 추모회를 조직하고 2007년부터 매년 시인의 기일에 맞춰 동경 릿쿄대학에서 추모집회를 10년간 개최하고 윤동주 장학금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인을 기억하고 조금씩 배움과 깨달음이 늘어가는 가운데, 뒤늦게 다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윤동주 연구가들을 통해 북한에서도 90년대에 윤동주 시인이 재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의 가장 포악하고 암담한 그 마지막 시기 조선문학 발전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사실 중의 하나는 시인 윤동주의 출현이다."(박종식 '통일문학')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고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평양 방문 때에, 환영 인파 앞에서 연설 중에 윤동주의 서시를 인용한 일이다. 문익환 목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대화하러 왔노라고 선언했다. 윤동주도 장준하도 문목사의 용정 명동초등학교의 동창이었다.   동주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것은 해방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이다. 시인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분단 이전의 "통일 한국"만이 존재했다. 1936년 평양 숭실고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해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인은 수학여행으로 금강산을 다녀왔고, 시를 한 수 읊었다.   비로봉   만상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 자락이 춥다. (1937.9)   지금 통일의 꿈이 멀어지고 작아지는 듯한 어려운 때이지만, 시인 윤동주가 걸었던 금강산 등산로를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함께 오르는 평화통일 시대를 꼭 열고 싶다. 북의 청년들이 한라산 백록담을 보고, 남의 처녀들이 백두산 천지를 함께 노래하는 때를 앞당기고 싶다. 윤동주의 100주년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 ▲  서울 신촌 연세대 내 핀슨홀 2층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와 관련한 원고와 평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작가 송우혜의 집념으로 탄생한 ‘평전’  ◇ 비허구 장르의 흐름  최근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고 있는 책들 가운데는 이른바 ‘비허구 장르’가 많다. 회고록이나 자서전 같은 전통적 나르시시즘 독서물도 많지만, 사실적 기억에 토대를 둔 이른바 증언문학도 많이 눈에 띈다. 일례로 연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학살과 재난 현장의 고통을 기록해 왔고, 그렇게 사실성의 기억으로 그녀만의 문학적 기념비를 세웠다. 전통 서사인 소설보다 논픽션에 가까운 기록문학의 요청이 절실해진 측면도 이러한 평가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김숨의 최근 장편 ‘한 명’은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 문제를 제재로 하여 증언으로서의 속성과 기억의 문화사로서의 지향을 추구한 확연한 결실이다. 이 작품은 비록 허구이지만, 정밀한 역사적 자료와 기억의 재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최근 흐름을 입증하고 있다.  윤동주와 관련하여 이런 생각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역시 이러한 기억과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지고 각인된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령 윤동주는 자신의 삶과 생각과 실천에 대한 산문적 정보를 일절 남기지 않았다. 개개 시편에는 꼼꼼하게 창작연월일을 일일이 달아놓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산문, 이를테면 일기나 고백적 에세이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에 대한 자료는 그가 남긴 소중한 시편들과 4편의 문학적 산문뿐이다. 하지만 윤동주를 우리가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가족과 지인과 선후배들의 증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것은 대부분 정확한 기억과 우호적인 증언이었고, 그 기억과 증언에 기초하여 그의 시편들이 낱낱의 풍부함을 얻으면서 윤동주라는 상(像)이 형성, 착근되어간 것이다. 시집 초판에 거의 첫 기억을 남겨준 아우 윤일주, 초판에 서문과 발문을 달았던 정지용과 강처중, 육필 시집 원본을 보관했다 세상에 알린 정병욱, 그리고 윤영춘, 윤혜원 등의 가족들, 김정우, 문익환 등의 북간도 친우들의 기억 속에서 윤동주는 선하고 치열한 생을 살아간 시인의 모습으로 충일한다. 이분들의 기억과 증언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가 아는 윤동주는 텍스트 안으로 옹색하게 갇혀버렸을 것이다. ◇ 청춘과 사랑과 실천의 기억들  이러한 기억과 증언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우리 근대문학사의 비허구 장르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문제적 개인의 생애를 재현하면서도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하는 ‘사실적 허구’의 양식이 바로 평전일 것인데, 이 책은 가장 순결하고도 고독한 삶을 살아갔던 윤동주 시인을 통해 험난했던 한 시대를 전체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평전문학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방대한 노작(勞作)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송우혜는 북간도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연구해온 근대 사학자이다. 그 점에서 그가 윤동주 연구에 착수하고 기념비적인 저서를 낸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간도의 가파른 역사를 연구해온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에 가장 적합한 작가임을 알아본 이는 시인 최하림이었다. 최하림의 권면으로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지난해 개봉해 커다란 호응을 얻은 영화 ‘동주’의 감독 이준익은 “평생을 함께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말을 했는데, 이들의 신산한 세월을 흑백 화면에 담아 고고학적 속성을 높여간 이 영화의 저본이 된 것 역시 송우혜의 이 책이었다.  어쨌든 송우혜의 평전은 ‘지금 여기’에서 윤동주-송몽규-강처중으로 이어지는 청춘과 사랑과 실천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우리에게 탕진되지 않는 감동으로 전해주고 있다. 송우혜는 평전 서문에서 “나의 아버지 송두규 목사님의 삼종형인 송몽규 어른이 윤동주 시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점이 더욱 집필의 동력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처럼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형제요, 친구요, 운명적 동지에 대한 고증과 각인은 송우혜의 노고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  송우혜 작가와 윤동주 평전 표지. 왼쪽부터 1998년 세계사, 2004년 푸른역사, 2014년 서정시학 출간본. ◇ 판을 거듭해간 새로운 기억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열음사 주간이었던 최하림의 정성스러운 부탁을 작가가 오랜 숙고 끝에 받아들인 결실이었다. (이때 우리는 최하림 역시 또 한 편의 명작 ‘김수영 평전’의 저자라는 사실을 삽화처럼 만나게 된다.) 송우혜는 이 책에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는데,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윤동주의 동기 동창이자 함경도 사나이인 강처중에 대한 발견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강처중이 처형되었다는 증언을 기록했는데, 나중에 그 글을 읽은 강처중 가족이 그 기억을 수정해준 과정은 평전문학의 백미였다. 판을 바꾸면서까지 그 변모 과정을 기록해내는 작가 정신은 적지 않은 감동과 외경을 내게 주었다. 나는 지난해 3월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강처중의 가족이 증언하는 것을 보고는, 이 또한 송우혜의 공적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또한 작가는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헌신적 증언에 대해서도 깊은 사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던 분들을 호명하고 있다. 마치 윤동주가 별마다 소중한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간 것처럼 말이다.  윤동주 시인의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현준명 선생님, 중국 낙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와 같이 훈련을 받았고 또 후일 윤동주와 송몽규가 연전 입학시험을 치르러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숙소를 제공해 주었으며 윤동주와 함께 북아현동에 있는 정지용 시인의 집에 찾아갔던 라사행 목사님, 일본 경도(교토)에서 사건의 공범으로 윤동주와 같은 날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고희욱 선생님…. 그런 분들이 별세하기 전에 만나서 직접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두고두고 큰 위로가 되었다.  이 ‘행운’과 ‘위로’의 끝에 작가는 네 번이나 판을 거듭하면서 새롭게 증보된 윤동주 평전을 태어나게 하였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초간본은 1988년에 ‘열음사’에서 나왔고, 1차 개정판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2차 개정판은 2004년에 ‘푸른역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책은 지금 ‘서정시학’에서 출간되고 있다. 그렇게 여러 번 판을 거듭할 때마다 작가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그에 대한 예리하고도 전문가적인 해석을 덧보태 갔다. 특별히 소설가로서의 정확하고 소통 지향적인 문장은 이러한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더없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송우혜의 평전은 그야말로 수많은 인터뷰를 하고 발로 뛰면서 귀납한 자료들을 적정한 곳에 배치하고 또 풍부하게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대기를 차근차근 구축해 간다. 책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전(傳)적 체제를 취하게 되었고, 시인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을 거쳐 가혹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치밀한 고증과 필치로 드러나고 있다.  ◇ 평전의 세목과 성취  책의 1장에서는 시인의 출생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는 윤동주 개인사라기보다는, 2장 ‘지사들의 마을 명동’, 3장 ‘해란강의 심장 용정’과 함께 북간도의 역사이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이산(離散, diaspora) 역사로서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북간도 근대사 연구자로서의 작가의 역량과 개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우혜 득의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4장 ‘송몽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책에서도 확인 불가능한 창의적 궤적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송몽규 개인의 생각과 실천을 올바로 드러냄으로써 한국 독립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추가했다는 보람을 가질 만하다. 영화 역시 이 장에 많은 빚을 졌다.  ‘평양에서 보낸 7개월’을 지나 다시 용정에 돌아와 공부를 마치는 과정이 삽화처럼 펼쳐져 있고, 7장 ‘젊음의 정거장,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오면 이 책은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쓰이는 맥락과 배경에 대한 더없는 참고서가 되어준다. 사실 윤동주는 이 시절에 가장 아름다운 절편(絶篇)들을 썼거니와, 이때 윤동주가 겪었던 신앙적 고민이나 시대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은 송우혜의 답사와 서사적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재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8장 ‘6첩방의 고장, 일본’과 9장 ‘체포, 재판, 복역, 옥사’에서는 일본인들의 도움과 증언이 많은 역할을 하였고, 특별히 최근 공개된 판결문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해석함으로써 일본 현지에서 일어났던 우리 독립 운동사의 흔적을 선명하게 알려준다. 마지막 10장 ‘시인윤동주지묘’와 11장 ‘민족시인의 영광’은 죽음 이후의 윤동주에 대한 소묘로서, 정지용과 강처중의 역할을 새삼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연하게 정리된 소중한 연보로 책은 끝이 난다. ◇ 불멸의 기억을 가능케 한 기록    이처럼 송우혜의 저작은 우리 시대 평전문학의 대표 격이 되어주고 있다. 물론 작가 송우혜의 열정은 또 다른 자료가 공개될 때마다 판을 거듭해갈 것이다. 사실 윤동주 연구의 역사에서 아이러니가 있다면, 하나는 문학 연구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시인에 대한 가장 적확하고 풍부한 기록자가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윤동주에 대한 중요한 발굴과 발견에 일본인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기억했던 그 오롯한 ‘고독’이 윤동주를 불멸의 시인으로 남게 했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불멸의 기억을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송우혜의 노고 때문이다. 다행스럽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나는 윤동주 시 전편 해설서를 쓰고 있다. 평전으로는 송우혜 저작을 넘어설 수 없어서, 작품을 꼼꼼히 읽어내고, 시의 영향사와 수용사를 알리고, 그가 가장 성실한 ‘학생’(윤동주는 평생 학생이었고, 학생으로 죽었다.)으로서 선행 고전들을 수용하며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성장 드라마를 보여주었다고 논증하려고 한다. 이 또한 윤동주 기억의 결정(結晶)으로서의 송우혜 선행 업적이 없었다면 착수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문화일보 8월 22일자 25면 5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30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산협의 오후 댓글:  조회:3478  추천:0  2018-11-25
산협山峽의 오후                                    윤동주     내 노래는 오히려 섧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暝想은 아- 졸려.   1937년 9월. =================== 윤동주 (1917.12.30. ~ 1945.2.16)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아명은 해환(海煥).  출생 전조부 윤하현(尹夏鉉) 때인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 증조부 윤재옥(尹在玉) 때인 1886년에 함경북도 종성에서 간도의 자동(子洞 또는 紫洞)으로 이주, 조부 윤하현 때인 1900년에 명동촌으로 옮기어 살았다. 1910년에는 일가가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金躍淵) 선생은 1899년, 역시 종성에서 명동촌으로 이주한 한학자로서 1900년대 초에 명동학교를 세우고 많은 지사를 길러낸 선각자이며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17년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아명은 해환(海煥). 당시 조부 윤하현은 개척에 의한 소지주로서 기독교 장로였고, 부친은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후에 윤동주와 함께 옥사하게 되는 고종(姑從) 송몽규(宋夢奎)는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서 같은 해 9월 28일에 태어났다(부친 송창희, 모친 윤신영, 아명 한범(韓範)).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연도 미상). 호적상 윤동주 생년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 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3년(7세) 9월, 부친 윤영석은 관동대지진때 동경에 유학 중. 12월, 누이동생 혜원(惠媛)이 출생하다. 1925년(9세)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다. 같은 학년에는 고종 송몽규, 당숙 윤영선(의사), 외사촌 김정우(시인), 문익환(목사, 시인) 같은 분들이 있었다. 1927년(11세) 12월, 동생 윤일주 출생하다. 1928~1930년(12세~14세)급우들과 함께 이란 잡지를 만들다. 명동소학교 4학년 무렵부터 서울에서 간행되던 , 구독, 5학년 때에는 급우들과 함께 이란 등사 잡지를 만들다. 그림에도 소질을 보이다. 1929년(13세)외삼촌 김약연은 목사 안수를 받다. 1931년(15세)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다. 학교에서는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주다.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소읍인 대납자(大拉子)의 중국인 소학교 화룡 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高等科)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하다. 4월, 명동에서 20리 서쪽에 있는 소도시인 용정의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하다. 윤동주의 집에서는 명동의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에 이사하다. 부친은 인쇄소를 내었으나 사업이 여의치 않았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교내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 선수로 뛰고, 교내 웅변 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을 하기도 한다. 1933년(17세)4월, 동생 윤광주 출생하다. 1934년(18세)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다. 1월 1일, 송몽규, 신춘 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아명인 송한범이라는 이름으로 당선되다. 4월경, 송몽규는 가출하여 난징(남경)의 독립운동 단체로 가다.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하다(만주 학제와의 차이로 1년 늦어지다). 숭실학교 4학년에는 한 학기 전에 옮겨간 문익환이 있었다. 10월, 숭실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내던 제15호에 시 ‘공상’이 최초로 인쇄화되다. 이 무렵 수학여행으로 동룡굴을 구경하다. 1936년(20세)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다. 3월 말,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 고향 용정(룽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다. 문익환은 같은 학교 5학년에 편입하다. 3월, 중국 남경(난징)과 제남(지난)의 독립운동 단체에 가 있던 송몽규가 고향에 돌아와 4월에서 8월까지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에 구금, 문초를 받고 나오다. 그 후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계속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다. 윤동주는 간도의 연길(옌지)에서 발행하던 에 동시 ‘병아리’(11월호), ‘빗자루’(12월호)를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광명중학교 시절, 일본판 [세계문학전집]과 한국인 작가의 소설과 시를 탐독하다.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다. 이 무렵 용정(룽징)의 외가에 와 있던 동요 시인 강소천을 만나다. 한국 문학작품을 신문과 잡지에서 스크랩하다. 이상(李箱)의 작품을 스크랩하다. 이 무렵, 부친은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나 선비형인 그에게 맞지 않았다. 1937년(21세)윤동주(尹童舟)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다. 에 동시 ‘오줌싸개지도’(1월호), ‘무얼 먹고 사나’(3월호)를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하다. 동주(童舟)란 필명은 이때 처음 사용하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휴양하던 송몽규는 용정 대성중학교(룽징중학) 4학년에 편입하다. 이 무렵 광명중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다. 8월, 100부 한정판인 백석 시집 [사슴]을 완전히 베껴내다. 9월, 수학 여행으로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 같은 곳을 구경하다. 이때 ‘바다’, ‘비로봉’ 2편의 시를 얻다. 광명중학교 졸업반인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상급 학교 진학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택하라는 부친과의 대립이 심해지다. 조부 윤하현의 권유로 부친이 양보하여 문과를 택하기로 하다. [영랑시집]을 정독하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다. 대성중학교 4학년을 졸업한 송몽규도 함께 입학하다. 윤동주는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다. 연희전문 3학년에는 고향 은진중학을 졸업한 선배 박창해가 있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 촉탁의 이름으로 있던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우다. 연희전문 입학 초부터,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던 지를 매달 동생 윤일주에게 우편으로 보내다. 여름 방학에 고향 용정의 북부(감리) 교회 하계 아동 성경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이 무렵 동생들에게 태극기, 애국가, 기미독립만세, 광주 학생사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다.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하다.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23), 시 ‘유언’(2.6), ‘아우의 인상화’(10.17)를 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동시 ‘산울림’을 (3월호)에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발표하다. 이를 계기로 편집인인 동요시인 윤석중 씨를 만나다.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다. , 을 매달 사서 읽다. 신문에서 한국 작가 작품을 스크랩하다. 이 무렵, 부친은 한국인 경영의 삼화물산회사의 취체역 상무로 취직하다.   1940년(24세) 릴케, 발레리, 지드 등의 작품을 탐독한다. 4월, 고향 광명학원 중학부 후배 장덕순,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정병욱(1922~1982)을 알게 되어 그 후 깊이 사귀다.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니며,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던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다. 이해 여름 방학, 고향 용정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에게서 ‘시전’을 배우다. 이해 무렵 릴케, 발레리,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한편, 프랑스어를 자습하다. 고향에 오면 안과 의사인 당숙 윤영선의 방에서 함께 고전 음악을 듣다. 이해(또는 다음 해) 논산, 부여 낙화암 같은 곳을 여행하다.   1941년(25세)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김송 씨와는 하숙생이 됨으로써 우연히 알게 되다). 9월에, 요시찰인인 주인 김송 씨와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옮기다. 서정주 시집 [화사집]을 즐겨 읽다.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본래 예정했던 시집 제목은 ‘병원’이었으나 ‘서시’가 씌어진 후 위와 같은 제목으로 바꾸었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이었다. 같은 시고집 3부를 작성하여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하다. 오늘날 시집 그 부분의 유일한 원고가 된 것은 정병욱 보관본에 의한 것이다. 이해 말 고향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 이기고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라고 '창씨'하다. 송몽규 집에서는 성씨를 '소오무라(宋村)'라고 창씨하다. 1942년(26세)연희전문을 마치고 일본에 갈 때까지 1개월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나이와 경제 사정 같은 이유로 진학을 망설였으나 부친은 일본 유학을 권하다. 가계가 다소 어려워지다. 당숙 윤영선에게 서정주 시집 [화사집]과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의 시집 [春の岬]을 선물하며 이상의 작품 읽기를 권하다. 이 무렵 키에르케고르를 탐독하다. 용정에 돌아와 있던 박창해에게서 [퀴리부인전]의 영문 원서를 빌려 일역판과 대조하여 읽다.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1월 19일,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다. 1월 24일의 시작품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다. 일본에 건너가(날짜미상) 4월 2일, 도쿄 릿쿄대학(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다(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다). 일시 도쿄 한인 YMCA 숙소에 기거하다가 개인 집에 혼자 하숙하다. 학적부에 의하면 릿쿄대학 한 학기 동안 과 2과목만 수강하였는데, 각기 85점, 80점을 취득하다. 릿쿄대학 시절인 4-6월의 시 작품 ‘쉽게 씌어진 詩’를 비롯한 5편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하다.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작품이다. 여름 방학에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가다. 이 때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다. 방학 도중 도호쿠 제국대학 입학을 목표로 다시 도일하였으나 10월 1일 교토 도시샤 대학(동지사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입학하여 교토시 사교구 타나카타카하라 마을(京都市 左京區 田中高原町) 27, 타케다(武田) 아파트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 봄에 교토제국대학에 와 있던 송몽규는 사교구 키타시라카와 히가시히라이 마을(左京區 北白川 東平井町) 60번지에 하숙하고 있었다. 10월 29일, 외삼촌 김약연 목사, 고향 용정에서 별세하다. 1943년(27세)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1월 1일, 동경에서 온 당숙 윤영춘, 그리고 송몽규와 함께 비와호(비파호, 琵琶湖)를 구경하다. 일본 체류 중 읽은 책은 [고흐 서간집], [고흐의 생애], [다치하라 미치조우(立原道造) 시집] 같은 책들이다. 여름 방학 중인 7월 10일,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려고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쳐놓은 윤동주도 송몽규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되다. 송몽규와 같은 하숙집에 있던 고희욱도 같은 날 검거되다. 윤동주와 고희욱은 학생 식당에서 두 번 가량 상면하여 인사를 나눈 정도의 사이였다. 그 후 도쿄에서 교토의 경찰서에 면회하러 간 당숙 윤영춘은 윤동주가 '고오로기'란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 일역(日譯)하는 것을 목격하다. 외사촌 김정우도 면회하여 같은 장면을 목격하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이 송청(검찰청으로 넘겨짐)되다. 이해 무렵, 부친은 회사를 그만두고 양계업을 하며 10여 년 동안 다니지 않던 교회에 다시 나가다. 1944년(28세)후쿠오카 형무소(복강 형무소)에 투옥되다.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윤동주는 도쿄 지방재판소의 재판 결과 1941년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의 언도를 받다(구형은 3년이었다). 그중 미결 구류일 수 120일이 산입(算入)되다. 재판장 이시이 히라오(石井平雄) 외 판사 2인. 이 재판 결과는 4월 1일 확정되다. 4월 13일, 송몽규는 재판 결과 윤동주와 같은 죄목으로 역시 2년 형의 언도를 받다(구형 3년). 미결 구류 일수 산입되지 않다. 재판장 코니시 노부하루(小西宣治) 외 판사 2인. 이 재판 결과는 4월 17일 확정되다. 윤동주,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다(날짜미상). 수감된 후 고향에의 서신으로는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고향 집에 부탁하여 보내진 [영화대조 신약성서(일문으로 번역된 신약성서, 英和對照 新約聖書)]를 옥중에서 읽다.   1945년(29세)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사망하다. 2월에 엽서는 오지 않고 중순이 지난 18일에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어 윤동주의 사망이 알려지다. 부친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 인수차 일본으로 떠난 후, 이라는 요지의, 고인 생존시에 보낸 형식의 우편 통지서가 뒤늦게 고향집에 배달되다. 일본에 도착한 부친과 당숙은 송몽규를 먼저 면회하다. 그로부터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다. 그는 매우 여위어 있었다. 라고 일본인 간수가 말하다. 형무소측에서는 운명 시간이 오전 3시 36분임을 알려주다.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를 사용하여 윤동주의 시신은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유해는 화장하여 고향에 모셔와 3월 6일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묻히다. 장례식에서는 지에 발표되었던 ‘우물속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다. 3월 10일, 송몽규도 옥사하다. 그의 부친에 의해 시신이 인수되어 고향인 대납자(大拉子)에 묻히다. 이해 단오 무렵, 윤동주 묘소에 라는 비석을 가족들이 세우다. 8월 15일, 윤동주, 송몽규 사망한 지 반 년 만에 일제가 패망함으로 해방이 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 연보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타임라인)
130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서시" 분석 댓글:  조회:4181  추천:0  2018-11-25
/ 이승훈 ㅡ윤동주의 '서시' 분석     1)분석의 목표    윤동주의 '서시'는 해방 후 간행된 그의 유고 시집 (1948)의 첫 머리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시집은 1941년말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 18편의 시를 자선하여 출간하려던 것이었으나,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해방 후 유고 시집으로 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시'는 그가 1941년 11월 20일에 완성한 것으로 흔히 그이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시를 그의 대표작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이제까지 많은 분들이 그의 시를 논의하면서 이 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논하는 자리에서 정한모는 이 시를 일제 말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윤동주의 지적 고뇌와 서정이 단적으로 드러난 대표작이라고 언급한다. 이 시를 그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다른 하나의 이유로는, 이 시가 윤동주의 시정신을 집약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말 그대로 그의 시세계를 해명할 수 있는 서시로서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찬찬히 읽어보면 그의 시집 표제에 해당하는 "하늘" "바람" "별" "시"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는 원래 그가 펴내려던 자선 시집에 수록될 시편들 가운데 제일 나중에 씌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이 시를 통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그가 자신의 시세계를 일단 요약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 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윤동주의 시세계를 밝히는 자리에서 누구나 한 번씩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만을 별로 독립시켜 찬찬히 분석한 논문들은, 필자가 알기로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까지 필자가 읽은 것으로 홍희표, 이동순, 노대규의 논문 정도이며, 이 시만 다룬 것은 아니지만 마광수의 글이 있다. 홍희표는 이 시를 4단락으로 나누고, 1단란(1,2행)에서는 결백하고자 하는 진실의 선언, 2단락(3,4행)에서 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적 고뇌 3단락(5,6,7행)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찾아 떠나고 싶은 갈구, 4단락(9행)에서는 아픈 자기 성찰을 읽는다. 그에 의하면 이 시의 주제는 이 시의 주제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결백한 양심의 선언이 된다. 그런가 하면 이동순은 이 시를 3단락으로 나누고, 1단락(1,2,3,4행)에서는 삶의 도적적 완성을 염원하며 지조를 지켜가려는 시인의 의지, 2단락(5,6,7,8행)에서는 시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창조적 진화의 연속성, 3단락(9행)에서는 어둠의 역사에서 괴로운 시련을 당하고 있지만 극복의 의지를 잃지 않고 있는 마음을 읽는다. 그에 의하면 시 시의 주제는 근원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갈등을 겪으면서도 현실에서의 조화로운 공간을 그리워하는 의식이 된다. 또한 마광수는 이 시를 4단락으로 나누고, 1단락(1,2행)에서는 윤동주가 자신의 도덕적 윤리를 성취시키려는 윤리 의식, 2단락(3,4행)에서는 1단락의 의지가 현실 상황에 부딪쳐 시련을 겪는 것, 3단락(5,6,7,8행)에서는 어려운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며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시켜 보려고 애쓰는 시인의 의지와 실천적 다짐, 4단락(9행)에서는 2단락의 연장, 곧 시인이 처한 시대적 상황의 제시를 읽는다. 그에 의하면 이 시는 기-승-전-결의 구성법을 연상시키며, 이 시의 주제는 자연 심상을 염두에 둘 때, 대자연의 운행 질서를 겸손하게 바라보며, 그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분수에 맞는 일을 찾아 천명에 따르려 애쓰는 청년의 모습이 된다.  노대규는 언어학적 방법에 의해 이 시의 언어 구조를 분석한다. 앞의 세 논문이 이 시의 구조를 막연한 의미론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살피고 있다면, 노대규의 논문은, 필자가 알기로는 이 시를 언어학적 시각에서 분석한 최초의 글이 아닌가 싶다. 그는 통사-의미론적 시각에서 이 시를 5문장으로 나누고, 1문장(1,2행)에서는 불변적 지속적 준법 정신에 대한 소망, 2문장(3,4행)에서는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죽음에 대한 괴로움, 3문장(5,6행)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책임감과 의무감의 확인과 다짐, 4문장(7,8행)에서는 이러한 존중하는 책임과 의무의 수행 의지, 5문장(9행)에서는 역사적, 사회적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희망 불멸의 정신을 읽는다. 그에 의하면 이 시의 주제는 윤동주의 준법 정신, 생명 존중 정신, 책임과 의미의 수행 정신, 희망 불멸의 정신이 된다, '서시'를 언어학적 방법에 따라 면밀히 고찰한 이 논문은, 이 시의 언어학적 특성, 그것도 통사-의미론적 특성을 최초로 해명했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 하지만, 이상의 요약에서 알 수 있듯이, 논문의 주제를 작가 정신의 해명에 두었다는 점에서 시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았나 싶다. 시의 언어 분석은 시를 형성하고 있는 언어 체계의 체계성, 바꿔 말하면 조직 원리를 드러내는 일로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 분석을 통해 작가 정신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의 언어에 대한 분석은, 시의 언어는 하나의 자율적 체계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언어적 특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어왔다. 무카졸브스키는 시적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비판하면서 그 특성을 시적 효과의 성취에서 찾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시적 언어의 특성은 언어의 특성이 아니라, 언어의 특수한 기능으로 나타난다. 시적 언어는 표현 행위 자체를 지양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언어나 표현적 언어, 나아가 표준적 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른 기능을 보여 준다. 논리적 언어에서 중시되는 것은 표현의 정확성, 바꿔 말하면 논리적 상관성에 의해 의미론적 단위를 확정하는 일이다. 그러니 시적 언어에서는 이러한 의미로서의 표현의 정확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확성으로부터의 이탈, 따라서 표현의 애매성이 문제가 된다. 표현적 언어에서 중시되는 것은 화자의 감정이다. 시적 언어에서도 물론 이러한 감정은 중시된다. 그러나 시적 언의 경우 이러한 표현성, 곧 화자의 감정 전달은, 무카졸브스키도 지적하듯이, 어디까지나 기능적 다양성을 내포하는 표현의 세계로 드러난다. 따라서 시적 언어의 경우 표현이라는 개념은 표현적 언어의 경우와는 다르게 사용된다. 끝으로 표준적 언어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살피기 위해 특히 강조되어야 할 언어 형식이다.  무카졸브스키에 의하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시적 언어의 기능은 표현 행위 자체를 지향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산출함에 있다. 표현 행위 자체를 지향한다는 것은 소위 일상적 표준어의 기능이 낯설게 되거나, 뒤로 물러갈 때 가능하다. 이렇게 낮익은 표준어의 기능이 낯설게 되거나, 뒤로 물러가는 현상을 러시아 형식주의에서는 낯설게 만들기(ostranenie), 체코 구조주의에서는 배경화(backgrounding)라고 한다. 모든 예술은 이렇게 자동화된, 따라서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만들거나 배경화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런 점에서 시적 언어의 기능은 표현 행위의 전경화(foregrounding)를 극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적 언어는 역동적 구조를 보여 준다. 곧 시적 언어는 표준어와 대비할 때, 표준어의 형식을 배경화하면서 표현 행위 자체를 전경화하는 역동적 구조로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것은 전경화와 배경화의 역동적 체계로 나타난다. 시적 언어가 전경화를 성취하는 기법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체계성과 수미 일관성이 무엇보다도 강조된다. 다시 말하면 시를 구성하는 전경화된 요소들은 체계성과 수미 일관성을 띠어야 하며, 이 요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될 뿐만 아니라, 요소들간에는 위계 질서(hierarchy)가 존재한다. 무카졸프스키는 최고의 위계에 속하는 요소를 지배소(dominant)라고 부른다.  시의 언어를 분석한다는 것은 결국 시를 구성하는, 전경화된 요소들의 체계성을 살피고, 나아가 시의 조직 원리라 할 지배소를 살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리취는 전경화된 요소들의 체계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언어의 중요한 세 가지 수준을 지적한 바 있다. 실현의 수준, 형식의 수준, 의미론의 수준이 그것이다. 실현의 수준에서는 음성학적 특성과 자소론적 특성, 형식의 수준에서는 문법적 특성과 어휘론적 특성, 의미론적 수준에서는 의미론적 특성이 해명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시는 언어학적 인습과 규칙을 파괴한다. 그러한 파괴는 일상 어법으로부터 이탈하는 전통적 파괴, 새로운 경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는 창조적 파격으로 양분된다. 한마디로 모든 시적 언어는 일상적 언어로부터 이탈하는 특수한 언어 형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비록 시적 언어가 일상 어법으로부터 이탈한다고는 해도, 그러니까 무카졸브스키식으로는 표현 행위 자체를 전경화한다고는 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경화된 요소들은 체계성과 위계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리취가 제시한 세 가지 언어 수준 가운데 소위 형식 수준에 해당하는 문법적 특성과 어휘론적 특성을 중심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시제의 구조   '서시'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2)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3)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4) 나는 괴로워했다.  (5)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6)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7)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8) 걸어가야겠다.  (9)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행 앞의 번호는 분석에 필요할 것 같아 필자가 붙인 것이다. 전체 시는 크게 두 개의 연으로 이루어졌지만, 관점에 따라 시는 몇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단락이라고 하는 것은 산문 분석에서 사용되는 의미로서보다는, 연과 관계없이 전체 시의 구조적 단위들을 절단하기 위한 임의적 개념이다. 야콥슨이 셰익스피어의 소넷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그러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어느 경우나 비슷하겠지만 하나의 대상을 구조로 인식하다는 것은 구조적 단위들을 절단하고, 그 단위들의 상관성을 읽는 일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절단에는 나름대로의 시각이 수반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시각에서 대상을 보는가에 따라 대상의 구조는 다르게 드러난다.  먼저 이 시를 문법적 시각, 특히 시제의 개념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전체 시는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1단락(1,2,3,4행)은 과거 시제, 2단락(5,6,7,8행)은 미래 시제, 3단락(9행)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이 세 단락의 상호 관계, 곧 전경화된 요소들로써의 체계성 과연 어떻게 드러날까, 일상적 어법에 따르면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시간을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 어법에 따르면 이 시의 체계성은 1단락→3단락→2단락의 순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것은 과거→미래→현재의 순서를 밟고 있다. 곧 1단락→2단락→3단락의 순서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 인식을 낯설게 함으로써 독특한 미적 효과를 생산한다. 독특한 미적 효과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요소들의 통합 관계를 중심으로 하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계열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요소들의 통합 관계, 수평적 차원에서 요소들의 상호 관계를 통시적으로 바라보면, 요소들의 계기적  질서라는 측면에서 이 시의 체계성은 과거→미래→현재로 나타나며,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지향한다는 시간 인식을 암시한다. 흔히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지향하거나,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지향한다고 생각해온 터이다. 그러나 이 시의 통합적 관계는 시간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가 현재를 지향한다는 말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시의 화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시간이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라는 것, 또한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는 인식을 내포한다.  그런가 하면 요소들의 계열 관계, 곧 수직적 차원에서 요소들의 상호 관계를 공시적으로 바라보면, 이 시의 체계성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미래→현재로 되어 있지만, 의미의 무게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놓인다. 왜냐하면 수평적 시각이 아니라 수직적 시각에 따를 때, 이 시의 세 요소 가운데 미래가 중시되며,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감싸는 구조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열적 측면에서 이 시의 체계성은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암시한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통합적 측면에서 이 시의 구조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지향한다는 시간 인식을 보여 주지만, 계열적 측면에서는 이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가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 바꿔 말하면 시간의 본질은 미래에 있다는 시간 인식을 낳기 때문이다. 시제를 중심으로 살펴본 이상의 구조적 의미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정당한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시적 표현은 논리적 정확성을 노리지 않기 때문에 시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시의 주제는 시간에 대한 이러한 양가적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우리들의 자동화된 인식을 갱신한다. 이러한 양가적 인식이 아니라, 어떤 단일한 인식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적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 혹은 논리적 언어가 될 것이다. 물론 표면 구조와 심층 구조의 논리에 따르면 이 시에서 화자는 미래 지향적 삶을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상의 세 단락에서 읽을 수 있는 화자의 태도는 어떤가. 태도라는 것은 시 속에서 화자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양상을 의미한다. 대체로 모든 서정시에서는 자아와 세계가 융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정시의 이러한 특성은 어디까지나 서사시나 희곡과의 비교를 전제로 한다. 서사시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 희곡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긴장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그렇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슈타이거도 말했듯이, 이러한 장르 개념이 어디까지나 작가나 시인의 태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 세 가지 장르 개념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자아와 세계가 회상 속에서 융합되는 시적 공간을 형상화하지만, 좀더 따져보면 이 시적 공간은 다시 서사적 태도, 극적 태도, 서정적 태도로 세분될 수 있는 것이다. '서시'의 경우 우리가 화자의 태도를 살핀다는 것은, 소박하게 말하면, 이 시가 한편의 서정시의 범주에 들지만, 이러한 서정시의 범주를 지니면서도 화자는 그 범주 속에서 과연 세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살핌을 의미한다.  이 경우 화자의 태도는 크게 갈등의 양상과 화해의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의 경우 1단락에서는 화자와 세계의 갈등, 2단락에서는 화자와 세계의 화해, 3단락에서는 다시 화자와 세계의 갈등이 드러난다. 재미있는 것은, 시제와 관련시킬 때,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1단락에서는 과거로, 2단락에서는 미래로, 3단락에서는 현재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화자의 괴로움은 과거에 속하며, 화자의 사랑과 의지는 미래에 속하며, 화자의 갈등은 현재에 속한다. 그러나 1단락과 3단락은 비슷한 갈등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그 갈등의 내용이 다르다. 1단락에서는 부끄럼이 없는 삶에 대한 자기 갈등을 노래한다면, 2단락에서는 1단락에서 노래된 과거의 갈등과, 2단락에서 노래된 미래의 화해가, 다시 말하면 과거와 미래가 어느 한쪽을 지향하지 않고 한데 엉켜 있는 심리적 복합성을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화자가 느끼는 갈등은 앞의 시간 인식에서도 암시했듯이, 과거의 고뇌와 미래의 사상이 얽혀 있는 현재의 갈등이다. 3단락의 갈등이 1단락과 2단락의 태도에 얽혀 있는 그러한 구조라는 것은, 1단락의 중심 이미지 "바람"과, 2단락의 중심이미지 "별"이, 3단락에서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노래함으로써 서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3단락의 갈등 구조는 미래의 사랑이 과거의 고뇌에 상처를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화자의 태도는 크게 1,2단락이 심리적 현실, 곧 화자의 주관적 현실을 서술하고, 3단락은 객관적 현실, 곧 화자가 그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만을 묘사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줄여 말하면 1,2단락에서는 내면 세계, 3단락에서는 외면 세계가 노래된다. 이러한 특성은 시간의 논리에 그대로 대응한다. 과거나 미래는 화자의 주관적 현실이며, 현재는 화자의 객관적 현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특성은 이 시에 나타나는 공간의 양상을 중심으로 할 때에도 그대로 확인된다. 1단락에서는 천상(하늘)과 지상(나)의 대립, 2단락에서는 천상(별)과 지상(나)의 화해, 3단락에서는 다시 하늘(별)과 지상(바람)의 대립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3단락의 대립은 1단락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이 시의 구조적 특성을 간탄히 도표로 나타내면,            1단락      2단락      3단락 시간     과거        미래       현재 태도     갈등         화해      갈등      현실     주관적       주관적    객관적 공간     천상/지상  천상=지상 천상/지상 심상    하늘/나       별=나    별/바람   3) 시행의 구조    이제까지 필자는 이 시의 구조를 시제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의 구조를 분석한다는 것은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들, 여기서는 세 단락으로 나타난 요소들이 어떤 미적 효과, 곧 어떤 시적 인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가를 살피는일이다. 그것은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체계성, 리취 식으로 말하면 요소들 상호간의 관계의 그물(cohesion)을 읽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는 시제 개념에 의한 구조적 특성 말고도 시행 자체를 중심으로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시행은 연이나 단락보다는 미시적 구조 단위이다. 이 시의 경우 시행들 사이에는 어떤 체계성이 드러나며, 그것들은 또한 어떤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을까. '서시'는 모두 9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9행 사이에는 표면적으로는 어떤 체계성도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좀더 찬찬히 읽을 때 시행 배열의 법칙성, 곧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기수행(odd)과 우수행(even)을 중심으로 시행들의 체계를 밝히기로 한다. 각 시행에 나오는 중심이 되는 낱말들을 추려 적으면 다음과 같다.   기수행         우수행 (1)하늘        (2)부끄럼 (2)바람       (4)괴로움 (5)별         (6)사랑 (7)길         (7)의지 (9)별-바람    이 도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으로는 첫째로 시행들 사이에 일정한 규칙, 곧 체계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수행은 모든 물질 세계를 노래하며, 우수행은 모두가 정신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문장 구조를 염두에 둘 때, 이 시가 다섯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면, 각 문장은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가 대응되는 양식을 띠고 있다.  대체로 한 문장이 분할되어 두 개의 시행을 이루는 경우는 많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그것은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수행은 물질 세계, 우수행은 정신 세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에서 읽을 수 있는 의미는 이 시의 경우, 기수행이 종속절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물질 세계보다 정신 세계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시행 구조를 중심으로 할 때, 화자의 삶의 원리는 정신 세계가 물질 세계를 포섭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곧 물질 세계가 환기하는 현실주의적 삶의 태도보다 정신 세계가 환기하는 이상주의적 삶의 태도가 강조된다.  둘째로 이 도표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은 마지막 문장이 한 시행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도 기수행 곧 물질 세계로만 제시되고 우수행 곧 정신 세계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암시할 수 있겠지만,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의 대립 혹은 대응 구조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우선 마지막 문장이 기수행으로만 나타난다는것은 화자의 현재의 삶이 물질 세계에 지배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앞의 네 문장, 곧 과거간 미래 속에서는 물질 세계가 정신 세계에 의하여 극복되거나 물질 세계보다 정신 세계가 중시되지만, 현재 속에서는 정신 세계에 대해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음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미래의 정신적 승리를 노래한다기보다는 현재의 물질적 고뇌, 현실적 갈등, 한마디로 객관적 현실 속에서의 불안감을 노래한다.  세째로 이 도표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성으로는, 단락을 염두에 둘 때. 1-2단락을 이루는 시행들은 모두가 대응 구조로 이루어졌음에 비하여 3단락만 단일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곧 1-2단락은 각각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며, 각 문장은 서로 대응되는 두 시행들로 이루어 짐에 비하여 3단락은 한 문장으로, 그것도 한 시행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이러한 특성은,     연   단락   문장     시행          1      1     (1)(2)   1             2     (3)(4)          2      3     (5)(6)                  4     (7)(8)      2     3      5       (9)   와 같다. 이 도표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해명할 수 없었던 이 시의 또 하나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의 형식과 관련되는 바, 어째서 이 시가 두 연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이 시는 크게 세 연으로 구성되었어야 할 터이다. 곧 과거-미래-현재의 시제를 각각 분리시켜 독립된 연으로 설정함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과거-미래를 한 연으로 처리하고, 현재를 다시 한 연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한 이유를 제대로 밝힐 수 없었던 바, 이 도표에서 비로서 그 이유가 밝혀진다. 그것은 1-2단락의 문장 구조와 3단락의 문장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곧 1단락과 2단락은 유사한 문장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한데 묶어 한 연으로 처리하고, 3단락은 별도의 연으로 처리했다고 본다. 문장 구조의 이러한 차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대수로운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시의 구조 분석에서는 매우 섬세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바로 이 시만이 환기하는 독특한 미적 효과를 낳고, 그러한 효과를 제대로 읽을 때 이 시의 시적 메시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장 구조를 전제로 1-2단락이 이웃해 있고, 3단락이 고립되어 있는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이 시에서 화자가 과거-미래보다 현재의 삶을 한결 고립된 것으로, 바꿔 말하면 과거-미래의 삶에서 소외된 것으로 느낌을 암시한다. 또한 이러한 현재의 삶의 고립성은 기수행, 곧 물질 세계로만 포섭되는 삶과 은밀히 연관된다.  네째로 위의 도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조적 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단락 구조을 따질 때 언급한 바 있듯이 1-2단락은 심리적 현실을, 3단락은 객관적 현실을 노래한다, 그렇지만 앞에서는 같은 심리적 현실을 노래한다고만 했지 1단락과 2단락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같은 심리적 현실을 노래하지만, 1단락과 2단락의 내용은 다르다. 그 다음은 문장 구조, 나아가 시행 구조를 전제로 할 때 한결 뚜렷해 진다. 이러한 차이를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단락   문장     시행           내용                           의미     1      1    (1)(2)   부끄럼없는 삶을 바랬다.               동경            2    (3)(4)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갈등     2      3   (5)(6)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             사랑            4    (7)(8)   나의 길을 가겠다                     의지     3      5     (9)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와 같다. 화자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과거의 갈등은 부끄럼이 없는 삶에 대한 동경이 계기가 되는 그러한 갈등이며, 미래의 사랑도 어디까지나 의지와 결합된 그러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1-2단락은 같은 내면 세계를 노래하고 있지만, 1단락에서는 동경과 갈등, 2단락에서는 사랑과 의지의 대응적 양상으로 제시된다. 결국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노래하는 화자의 현재의 삶은, "별"이 2단락의 의미를, "바람"이 3단락의 의미를 함축하는, 그러한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3단락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객관적 현실을 노래하지 않고, 그 속에 과거-미래의 삶에 내용들이 내포된 그러한 객관적 현실을 노래한다. 객관적 세계가 주관적 세계를 내포한다는 이러한 진술은 모든 객체가 주체이며, 모든 주체가 객체일 수 있다는 인식을 낳는다. 그렇긴 하나 "오늘 밤에도"라는 부사는 과거의 갈등이 현재에도 지속됨을 암시한다.   4)어휘의 구조    이제까지 필자는 "서시"의 구조를 시제-시행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시제를 중심으로 하든, 시행을 중심으로 하든, 언제나 시의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분석 내용들의 상관성, 곧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는 데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분석에서도 그것은 이를테면 전체 시-연-단락-문장-시행들의 상관성이 중시되었다. 끝으로 이러한 요소들의 상관성을 전제하면서 이 시의 구조적 특성을 몇 가지만 보여줄까. 한 편의 시를 어휘론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시 속에 나오는 어휘의 빈도를 조사하는 것이 있다. 이 시에서 두 번 이상 나오는 낱말은 "바람"과 "별"이다 단락을 중심으로 할 때 이 낱말들은   1단락    2단락      3단락  바람      별       별-바람   과 같은 분포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포 형식은, 어휘론을 중심으로 할 때. 이 시의 열쇠가 되는 낱말이 "바람"과 "별"이며 따라서 이 시는 "바람"과 "별"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구조를 형성한다. "바람"의 의미는 1단락의 문맥에 따를 때, "하늘"의 의미와 대립된다. "하늘"은 우러러보는 세계요, "바람"은 귀를 기울려 듣는 세계이다. 전자는 시각, 후자는 청각의 세계이며, 다시 전자는 천상, 후자는 지상의 세계를 표상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 후자는 "괴로움"곧 부끄럼이 있는 세계를 표상한다.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이러한 의미의 대립은      하늘                              바람   우러러보다                        귀를 기울리다 시각                              청각 상승                              하강 천상                              지상 부끄럼이 없다                     부끄럼이 있다 행복                               고뇌   처럼 정리된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구조주의의  시각에서는, 다른 사물과의 대립성을 전제로 획득되며, 이것이 언어 기호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경우 "바람"의 의미 역시 "하늘"의 의미와 대립될 때 드러난다. 그것은 한마디로 지상의 괴로운 삶을 표상한다. "별"의 의미 역시 2단락의 문맥에 따를 때 "죽어가는 것"과 대립된다. 간단히 도표로 나타내면 이러한 의미의 대립은,   별          죽어가는 것   불멸         소멸 삶           죽음 천상         지상 상승         하강 사랑         증오 단단함      연약함    처럼 정리된다. 결국 "별'은 죽음과 대비되는 영원한 삶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상의 두 도표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하늘"과 "바람"의 대립은 "별" "죽음"의 대립에 대응된다. 다시 말하면 이상 네 낱말은 의미론적인 체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하늘과 별의 등가 관계, 바람과 죽음의 등가 관계로 요약된다. 따라서 1단락과 2단락의 관계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할 때, 다음과 같은 통합체(syntagm)와 계열체(paradigm)를 보여준다.   통합체→ 1단락  하늘  우러르다  부끄럼이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  괴로워하다   개  2단락  별    노래하다  죽어가는 것을 열                             사랑하다 체                           나의 길을 가다    이 도표는 1-2단락을 중심으로 이 시의 통합 관계와 계열 관계를 밝혀본 것이다. 먼저 통합 관계는 시에서 등가성의 원리가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된다는 야콥슨의 견해에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모든 시의 결합 원리는 선택의 축에 해당되는 등가성의 원리를 결합의 축에 투사한다, 다시 말하면 이 도표에서 1단락의 결합은 "하늘"→"우러르다"→"부끄럼이 없다"처럼 등가 관계에 있는 요소들로 성립된다. 곧 1단락의 전반부는 등가성의 원리에 의해 낱말들이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 "우러르다" "부끄럼이 없다"는 결국 서로 동의어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 원리는 이 단락의 후반부라 할 "잎새에 부는 바람"→"괴로와하다"와 대립된다. 곧 1단락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대립되지만, 개별적으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낱말들이 결합되고 있다. 결국 1단락은 대립성의 원리와 등가성의 원리에 의해 낱말들이 결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등가성의 원리는 2단락에서도 나타난다. 곧 "별"→"노래하다"→"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다"→"나의 길을 가다"에서 낱말들은 등가 관계에 의하여 결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의 대립은 1단락의 경우 "하늘"과 "바람"의 대립, 2단락의 경우, "별"과 "죽어가는 것"의 대립을 전제로 한다. 다음 이 도표에서 읽을 수 있는 계열 관계는, 1단락과 2단락을 중심으로 할 때, "하늘"과 "별", "우러르다"와 "노래하다" "부끄럼이 없다"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다" 및 "나의 길을 가다"가 등가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결국 계열 관계를 중심으로 살필 때, 이 시에서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별을 노래하는 삶"이며, 또한 "나한테 주어진 길"임을 알게 된다.  3단락에서는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노래한다. 이때의 "별"과 "바람"의 의미는 1-2단락을 전제오 해명된다. 이 시의 구조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살피면, 바람(1단락)→별(2단락)→별-바람(3단락)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구조에서 읽을 수 있는 특성은 "바람"이 표상하는 과거의 갈등과 "별"이 표상하는 미래의 화해 및 사랑이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3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의 화자의 삶 속에 섞여 있다는 점이다. 3단락은 표면적으로는 1단락과 2단락의 종합 지양되는 단계인 것 같지만, 좀더 찬찬히 살펴보면 3단락 자체가 다시 갈등의 양식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별"이 "바람"에 스친다는 것은, 화자의 미래의 삶이 과거의 괴로왔던 삶의 영향 속에서 아직도 흔들리고 있으며, 이러한 흔들림, 곧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가지 필자는 윤 동주의 대표시로 평가되는 '서시'의 구조를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그러한 구조가 환기하는 시적 의미를 살펴 보았다. 첫째로 시제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 시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며, 그것은 과거→미래→현재의 시간 구조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간 구조는 수평적 시각과 수직적 시각, 혹은 통합 관계와 개열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제까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수평적 시각에 의한 해석이 보편성을 띨 것 같다. 수평적 시각에 의하면 이 시에서 과거, 미래는 현재를 지향하며, 수직적 시각에 의하면 이 시에서 과거, 현재가 미래를 지향한다.  둘째로 시행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 시는 기수행과 우수행의 대립 구조를 보여주며, 특히 기수행은 물질 세계를, 우수행은 정신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다시 문장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필 때, 기수행이 대체로 한 문장의 종속절로 나타남으로써 물질 세계에 대한 정신 세계의 승리라는 의미를 환기한다. 세째로 어휘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 시는 변증법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때 어휘란 시 속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어휘, 곧 중심 어휘를 의미한다. 이 시에서 그것은 "바람"과 "별"이며, 이 낱말들은 바람(1단락)→별(2단락)→별-바람(3단락)같은 변증법적 구조를 보여준다. 여기서 "바람"과 "별"은 이미지 혹은 상징으로 드러나며, 그 의미는 시의 문맥에 따라 다른 낱말과의 대림 속에서 해명되었다. 한마디로 '바람"은 과거의 갈등, "별"은 미래의 사랑을 표상한다. 따라서 3단락을 강조할 때 이 시는 화자가 지향하는 미래의 사랑스런 삶이 아직도 과거의 갈등에 침륜당하는, 불안한 현재의 심리적 상황을 노래한다고 할 수 있다.    
1305    윤동주, 그 뒷이야기???... 댓글:  조회:3108  추천:0  2018-11-24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나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개는 기억하고 있을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의 들머리다.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한국의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윤동주(尹東柱·1917~45) 시인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뜻밖이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는 미국의 백인 작곡가 제임스 브랜드가 만든 곡으로, 흑인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연도는 1911년이다. 당시 여건을 감안할 때 윤동주 시인에게 매우 빨리 전해진 셈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타관(他關)’ ‘객지(客地)’ ‘이역(異域)’ 같은 단어들이 주는 울림은 반세기 이전인 윤동주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그 무렵의 타관과 객지는 고달픔이나 서러움의 상징이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객지에서 생활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감옥에서 객사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것.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 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윤동주를 포함해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로 1986년에 호주로 이민 와 살고 있는 여동생 윤혜원(82·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는 오빠가 즐겨 부르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죠.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방학을 맞아 북간도에 돌아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조무래기들을 빙 둘러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노래 부르던 동주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운명을 이 노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긴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들이 어휘나 시행(詩行) 또는 연(聯) 배치 등에서 영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그의 육필원고와 영 다르다. 그래서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16일 호주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에 강사로 초빙된 윤동주 연구가 홍장학(52·서울 동성고 교사)씨는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사후에 늘어난 유작들     1999년 삼일절을 기해 윤동주 시인 유족들의 용단으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 세상에 나왔다. 1948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발간된 지 51년 만의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고독하게 살다 갔다. 그러나 오늘날 윤동주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의 생애를 우리 사회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생인 고(故) 윤일주(1985년 작고·건축가, 시인) 교수를 비롯한 유가족과 연희전문 시절의 지기(知己)인 정병욱, 강처중 같은 이들이 기울인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일주와 정병욱은 윤동주의 유작 31편을 모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했는데 이는 발간 직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고 시집은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의 유일무이한 원전으로 취급됐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윤동주 연구자들이 여기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수백 편의 논저를 발표해왔다. 오늘날 이 시집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 불어, 체코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윤동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계속)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윤동주의 묘를 찾게 한 사진 :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중, 옌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지에 도착했는데, 옌볜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와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로 단장한 윤동주의 묘소 :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묘가 처음 들어섰을 땐 봉분만 있었다. 같은 해 6월14일 묘비가 세워졌다.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을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연증(捐贈)하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윤혜원·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윤동주의 마지막 시 : 윤동주가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는 1942년 1월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의 마지막 시는 ‘쉽게 씌어진 시’이다. 이 시는 1942년 6월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혜원·오형범 부부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또 다른 작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전해줬다.   1947년 이들 부부가 옌볜 생활을 정리하고 함경도 청진에서 살고 있을 때 교회에서 우연히 윤동주의 친구 박춘애와 김윤입을 만났다. 그때 김윤입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시 1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고향에 가면 그것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기다릴 형편이 못 돼 서울로 월남하게 됐다.       그러니까 윤동주가 감옥에서 김윤입이란 친구에게 보낸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쓴 사실과 그 작품을 받은 사람까지는 확인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윤동주의 누이동생 부부가 보관자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실재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김윤입이 옥중에서 윤동주가 쓴 마지막 작품을 잘 보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1942년 서울의 한 친구에게 우송해 오늘 날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 처럼.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       여러 나라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의 60주기 추모행사 소식이 호주에 전해졌다. 윤 시인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동생 윤혜원씨가 호주 시드니에서 19년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출생지인 옌볜 자치주에서 전해온 소식부터 전한다. 옌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개최한 ‘윤동주 서거 60주기 추모 모임’ 소식인데, 표현방식이 특이해 분량만 줄여 원문대로 옮겨본다.   [오늘은 2월16일,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 서거 60주기 기념일이다. 옌볜인민출판사 ‘중학생’ 잡지 편집부와 옌볜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 내리는 야외 룡정(龍井) 동산의 윤동주 시인 묘소에서 뜻깊은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조성일 회장은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 세대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빛날 한 점의 별빛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기에 손색이 없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 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 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옌볜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 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윤동주 시랑송. 석화 시인이 윤동주의 ‘서시’를 랑송한 뒤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서시’를 재차 랑송하여 시랑송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초·고·중 대표 녀학생 5명도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쉽게 씌어진 시’ ‘십자가’를 읊으면서 윤동주 시랑송에 열을 올리였다.   정오가 되어 추모모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참가자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숫눈길을 헤치며 룡정시가지에서 늦게야 점심상을 받았을 때 연길고급중학교 1학년 허은희 학생이 “날씨는 추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고 속셈을 털어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윤동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그의 시의 저항성은 시인의 주체의식의 사상적 핵이며 시의 령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성은 후기시에 이르러 내면화에로 전향함으로써 전민족을 일제와 대결하는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 제약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성한 객관적 요인 외에 그가 줄곧 학창생활을 하면서 인민대중의 투쟁과 격리되었고 그의 인생관에 강력한 영향을 준 기독교의 교리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관으로 인한 것이였다. 그의 시는 기법상에서도 남다른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상징성은 시의미의 내포와 외연을 몹시 넓히고 깊게 했으며 저항의식을 미묘하게 살려나갔다. 그것은 시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의 다의성, 암시성, 함축성, 모호성을 잘 살리였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 곧잘 하던 오빠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2002/9/12] 윤동주(尹東柱) 메모                                             미나미 구니가즈(南邦 和)   글                   이  보  혜 (李 保 慧)      옮김                          금년(1995년) 2월 16일은 조선의 시인 尹東柱의 기일이었다. 1945년 이 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 순수하고 고고한 시인이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그것을 듣는 간수는 조선말을 몰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 필시 원통하고 절통한 가슴의 소리였을 것이다.) 숨진 그 날로부터 오십 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 서울 시내에 있는 尹東柱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는 약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저항시인· 尹東柱를 그리는 모임'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朝日新聞). 그 추도식의 모습은 그 후, 한·일 공동제작의 텔레비젼 프로그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尹東柱·일본치하의 청춘과 죽음' NHK스페셜로 방영되었는데 시비 앞에서 서시(序詩)를 낭독하던 젊은 여대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2월 16일 尹東柱가 재적해 있던 교토(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에서 '尹東柱詩碑완성 기념예배'와 그 제막식이 있었는데 한·일 양국에서 2백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고 있다. 제막식이 끝나고 니이지마회관에서 한·일 다섯명의 패널리스트에 의한 심포지움이 열려서 尹東柱작품의 번역을 둘러싼 열띤 공방전이 있었다고 한다.  또 2월 18일 토쿄 東京의 敎文館에서는 일본기독교詩人會의 후원으로 '尹東柱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에 地緣的 연고가 있는 시인 두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는데 나도 십여 명의 발기인 명단에 끼어 참석을 했다. 오후 두 시 발기인 대표의 인사와 尹東柱가 살던 시대상황에 자신의 체험을 통한 '식민지 통치' 해설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기조강연자인 宇治鄕毅씨가 '尹東柱의 생과 그 의미'라는 연제로 尹시인의 대표작인 를 채택하여 어휘 분석에 의한 작품론을 전개해 나갔다.(우지씨는 尹東柱의 同志社大 후배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한 달 전인 1941년 11월 20일자에 쓰여있는 에 담긴 죽음, 하늘, 부끄럼, 바람, 고통, 별, 사랑, 길, 오늘밤… 등의 어휘가 尹東柱의 모든 작품에 이어지는 키워드이고 그때까지의 삶을 총괄하여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 시는 쓰여졌을 거라는 해석에는 크게 배울 점이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은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의 소상한 내역이었다.  다음에 몇 사람의 발표가 있었는데 종군위안부 문제 고발詩를 썼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 등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나타내는 이시카와(石川逸子) 시인이 등단하여 尹東柱 작품의 순수성과 그 시법의 특성을 (눈이 오는 지도)를 낭독하여 시사하고 나서 尹東柱에게 바치는 자작시를 읽었다.  다음엔 재일한국시인 최화국 씨가 "尹東柱는 나보다 세 살 연하입니다…"로 시작, 동시대를 살던 尹東柱의 너무나도 순수, 무방비로 인했던 불행을, 또 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시절의 '特高'와의 교제술에 관해서 자신의 체험을 술회하였고 한글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엄한 지적이 있었다. 올해 여든 한 살인 이 현역시인의 진솔한 언변도 이 날의 큰 수확이었고 특히 원문대로 낭독된 의 여운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실 나는 자신이 조선반도에서 성장했다는 것 외에는 尹東柱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므로 양해를 구해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에 찍었다는 준수하고 단정한 사진의 인상을 말한 다음, 긴 세월 재판소라는 특수직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써 '우리 말'을 사랑한 이 시인에게 그 작품의 일본어 번역을 강요한 관헌의 잔혹성과 시인 尹東柱가 받은 굴욕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그 모임을 주관했던 시인으로부터 보내온 '대학통신' 속에 고당요(高堂要)라는 사람이 쓴 '모순의 사람 尹東柱'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尹東柱와 모국어, 그리고 일본어와 윤동주에 관해서의 '언어'와 '시인'의 관계가 단도직입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인용을 해보려고 한다.  "尹東柱에 관해 일본어로 쓰는 것은 매우 적당치 않다. 일본어는 尹東柱에게 있어 어거지로 배워야 했던 이국의 언어이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하여 반일적, 항일적 행위로서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의 시적 세계, 문학적 세계를 심화, 추구, 연마하기 위해서 일본어로 문학을 배워야 했다. 좋아하는 시인 릴케와 프랑시스 잼을 읽은 것도 주로 일본어였다……"  高堂씨의 문장의 일부분이지만 예리한 필치로 尹東柱에게 접근하여 "내가 그에게 끌리는 것은 '모순의 사랑', 안으로 찟긴 혼의 상처를 별 수 없이 껴안고 있는 사람, 고뇌뿐이 아니라 허무에 시달리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모순의 사람' 尹東柱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尹東柱 이해를 돕는 큰 길잡이이고 새삼 그 시점에서 尹東柱의 사람과 작품에 다가가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尹東柱는 일본 통치하의 가혹한 상황에서 '치안유지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에 의해 체포 구류되었다. 그리고 '옥사'라는 비극적 최후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악업과 잔학성을 상징하는 '순교의 사랑'을 '저항의 사랑'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 접해 가면 그 어디에도 노골적인 저항의 자세나 정치적인 문구는 없다. 오직 내성적인 우수에 찬 서정시인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사상성을 지니는 의지의 시인이다. 여기서도 현대에 있어서의 尹東柱 평가에 큰 모순을 보는 것이다.  나는 길지 않은 발언의 마지막을 尹東柱 작품 의 낭독으로 맺었지만 이 시는 그의 전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尹東柱의 이름이 일본의 시단이나 매스컴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수년 남짓이지만 한국에선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필적되는 '국민시인'으로서 일찍이 그 작품과 사람이 크게 평가되어 있다.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윤동주시집을 입수해 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한글 실력으로 읽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후 입수한 尹東柱全詩集 와 평론 , 또 尹棟柱詩篇의 일본어역 등을 실마리로 해서 나 나름의 '尹東柱메모'를 시도해 보고싶다. 이 작업은 나의 본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조선반도에의 뜨거운 그리움과 이국땅에서 옥사한 애절한 시인에게 깊은 애도로서 보내는 나의 頌歌이며 鎭魂歌이다.  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동북부의 북간도 明東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현재도 조선족의 자치구로 알려져 있지만 증조부 尹在玉시대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尹永錫, 모친은 金龍, 여동생 惠媛과 역시 시인인 남동생 一柱, 光柱가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조부 尹夏鉉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東柱는 조신하고 차분한 성격, 그 안에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중학으로 이어지는 친구에 한국의 간디로 불린 목사 文益煥이 있다.  1932년 東柱는 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부터 그의 문예활동은 시작되었다. 그 후 崇實중학, 다시 光明학원중학부로 전전하고 있으나 이미 延吉에서 발행된 「카톨릭 소년」에 , ,  등의 동화를 발표해 온 尹東柱는 이 숭실시절에 학우회지 의 편집을 맡았었고 詩 을 발표하고 있다. 空想-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空想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황금 知慾의 수평선을 向하여  尹東柱가 다닌 恩眞, 崇實 이 두 중학교는 反日色이 짙은 학교였다. 총독부가 각지에서 신사를 건립하고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구호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尹東柱의 모교인 崇實은 '참배냐, 폐교냐…'를 협박하는 총독부를 향해 'NO'를 고집하여 1938년 폐교되었다. 이 사건은 필시 尹東柱의 다감한 청춘기 정신형성 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光明학원중학부 편입 후에 4학년, 5학년을 통틀어서 '일본어의 성적이 가장 나빴다'고 하는 尹東柱였다.  그가 의식적으로 문학에 뜻을 세운 것은 중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에서 의과대학에 가라는 부친과 대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택한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사촌이며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친구 宋夢奎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이미 중학시절에  신춘문예콩쿨 꽁트부문에 당선되었을 정도로 조숙한 文才인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는 등 과격한 사상과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윤동주가 입학한 1938년 당시의 연희전문은 민족주의의 기풍으로 꽉 찬 학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시기에 그가 가장 신뢰하던 국어학자 최현배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강제사직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연희에서의 4년간이 윤동주로서는 가장 여유롭고 가장 자유롭게 삶을 구가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고들 말한다.(송우혜 지음에서).  이 시기에 그는 정병욱(후에 서울대학의 고전문학교수)이라는 생애의 지기와 만나고 존경하는 선배 시인 정지용과도 교류하고 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학제단축으로)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도일, 입교대학 영문과에, 그 두 달 후에는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연희 재학시부터 일본 유학 무렵(23∼24세)의 것이고 이 시기에 이미 自選시집 의 간행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西日本新聞의 井手俊作기자의 신문연재를 '빼앗긴 시혼-발굴·尹東柱의 옥사'에서 이 박행한 시인의 생애와 비참한 죽음의 사실, 그 슬프도록 투명하고 고고한 詩정신에 접할 수가 있었는데, 그 '빼앗긴 詩魂'이 말하듯이 우리말의 소멸 위기감을 안고 있던 국어학자 최현배에게 강렬히 기울고 있던 윤동주는 단연코 한글로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內鮮一體 정책하에서의 한글교육 폐지(1938년) 강행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러나 창씨개명 실시라는 일제통치 하에서 어쩔 수 없이 平沼東柱가 된다. 그것이 일본 유학에의 渡航증명서를 얻어낼 수 있는 필수 요건이어서였다.  최현배에 의해 우리말에 눈을 뜬 윤동주에게 있어 한글에 의한 詩행위는 글자 그대로 죽음을 건 선택이었다. 그의 작품으로서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다음의 작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독자 개인의 감수성에 맡겨질 일이지만 나는 프롤로그로서의 그것이기보단 오히려 에필로그로서의 죽음을 예감한 終詩(유서)로도 생각되어진다. 24세에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버린 요절시인의 천재성과 비극성을 거기서 보며 마음이 아파온다. 尹東柱의 작품에는 거의 삶의 정의와 생활의 추구에 괴로움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尹東柱 이해를 위해서는 그 작품들 저변에 깔려있는 기독교적 윤리관과 유교적 정신의 자세, 그리고 조선어가 갖는 표현의 깊이에 관해서의 학습과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봄의 京都·同志社大 심포지움에서도 尹東柱작품의 번역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한다. 그 一例로서 序詩의 첫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 관해서 번역자인 伊吹鄕씨와 주최측과의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듣는다.  伊吹씨 번역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되어있는 하늘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지식으로선 하늘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휘이지만 어원적으로는 이 나라의 고유 數詞인 '하나'에 유래하고 있어 空, 天, 神 또는 天國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죽는 날까지 天을 우러러'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森田進씨 번역에는 '天을 우러러'로 되어 있으며 이 두 줄에 대해 森田씨는 '동남아세아적 윤리관인 恥…는 여기선 수직적인 天上에의 視線과 이어져 있다. 이 청렬하기까지 한 의지야말로 조선의 기독인이 터득한 순절의 의지이다'라고 尹東柱를 찬양하고 있다.  윤동주가 체포된 것은 1942년 7월 14일이었다. 완전한 기습체포였으니 그의 경악과 실망은 어떠했으랴 상상이 간다. 그의 구체적인 용의사실이 밝혀진 것은 1970년이 한참 지나서 윤동주 연구가인 宇治鄕毅씨에 의한 '特高月報' 복각본의 열람에 의해서였다. 윤동주의 수난의 계기는 사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성장해 온 宋夢奎의 사상과 행동을 눈여겨오던 '特高'의 먹이로 말려들은 불행이었다.  그 부분의 사정을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었던 高熙旭(당시 三高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송몽규씨가 경찰의 要觀察人이었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宋을 경찰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함께 '우리 민족의 장래' 또는 '독립운동' 등을 주거니받거니 한 거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경찰이 깡그리 엿듣고 미행해서 사건을 만든 거였어요…"  그리고 高熙旭은 尹東柱의 인품을 "체격은 마른 편이고 흰 얼굴에 목소리는 좀 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침착한 면이 있으면서 반면 정열적이었지요. 무척 공부를 잘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창백한 인텔리라는 인상이었구요. 항상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색조가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산 동지의 증언인 만큼 현실감이 있다. (宋友惠 지음 에서)  그러나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어 숨졌다고도 말해지는 尹東柱 옥사의 진상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 미나미 구니가즈가 윤동주獄死 50년을 맞아                                         1994년 봄호에 발표한 문장    
130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개(2) 댓글:  조회:2963  추천:0  2018-11-24
             개                           윤동주   「이 개 더럽잖니」 아 ― 니 이웃집 덜렁수캐가 오늘 어슬렁어슬렁 우리 집으로 오더니 우리 집 바둑이의 밑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맡겠지 더러운줄도 모르고, 보기 흉해서 막 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냐 하는 상으로 뛰여가겠지요 나 ― 참. 1937.봄(추정).   ==================//////////////// 자화상’에 나타난 연약한 자아 윤동주 시인 작품 '자화상' 전문. 이 교수는 1939년 본격적인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첫 작품, ‘자화상’에 대한 시 분석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은 작품을 남기면서 창작 년, 월 종종 일자까지 자세히 기록했는데, 마치 일기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연희전문 2학년 2학기를 앞두고 여름방학에 쓴 시 '자화상'은 연약하고 예민한 자아를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시 '자화상'의 배경은 고향 북간도 명동촌으로 알려졌다. 시에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 후에 유족들은 당시 집 가까이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교수는 “시에는 자기 분신에 대해 미웠다가 가엾다가 다시 그리워지는 여러 갈래의 심정이 들어있다”며 “식민지 지식인이자 대학생 청년으로서 역사와 민족을 위해 나설 수 없는, 나약한 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후 1941년 2월 7일 쓴 시 ‘무서운 시간’, 같은해 6월에 완성한 ‘바람이 불어’ 등의 작품도 결을 같이 한다. 민족 현실에 대해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과 공포가 상존한다. 이 시기에도 나약한 존재로서의 자아가 나타난다. 자아의 변환, ‘십자가’       반면 1941년 5월 31일 쓴 작품 ‘십자가’에서는 두려움과 의지 두 가지의 감정을 가진 자아가 교차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 가정에서 자라온 윤동주 시인이 희생에 대한 의지를 엿보인 대목도 나온다. 이 교수는 “시 ‘십자가’의 전반부는 무력하고 나약한 자아가 나타나지만 후반부에는 희생을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반대의 자아가 있다”며 “암담한 현실에 조용히 순교의 피를 흘리겠다는 구절을 통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진 자아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1941년 9월에 쓴 작품 ‘또 다른 고향’은 2학기를 앞두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완성한 시다. ‘백골’이라는 시어를 통해 표현된 무력하고 약한 존재는 ‘지조 높은 개’로부터 각성해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향한다. 이듬해 윤 시인은 1942년 1월 24일 ‘참회록’, 같은 해 6월 3일 ‘쉽게 씌어진 시’를 남겼다. 특히 쉽게 씌어진 시는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돼 세상에 공개됐다. 이후 2년 8개월 후인 1945년 2월 16일 청년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교수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몇 달 후 조국은 해방됐고, 이후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됐다”며 “암흑의 시대에 쓴 그의 시와 안타까운 죽음이 민족사의 어둠을 밝힌 구원의 불꽃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시인 윤동주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핀 순결한 영혼의 불꽃은 생생하다는 점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유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세월을 보냈다”며 “하지만 결국 윤동주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십자가에 피 흘린 예수의 상징성을 지닌 시인으로 남게 됐다”고 강조했다. ===============================///   “슬퍼 하는자......” 윤동주를 만나다   “언니! 이거 선물이야, 졸업 축하해...... ” 경희가 수줍은 목소리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내민다. 옆집 살던 한 살 아래 경희가 내게 내민 것은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열세 살 이후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30년 동안 늘 함께 하는 시집 ,오늘 나는 또다시 윤동주의 시집과 함께 추억속의 경희의 모습을 회상한다. 국민 학교 때 오빠는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이육사의 를 외우게 시켰고 그날 밤 나는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 해 두렴’을 수없이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오늘의 주인공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일제하의 민족 시인으로 대표됨을 알기도 했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를 보며 연희전문 교복에 모자를 쓰고 뱃전에 서서 현해탄(당시 명칭-지금은 대한해협)을 건너던 청년 윤동주의 가없는 슬픔을 나 역시 느끼기도 했다.   슬픔을 자아내는 시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서시’나 ‘별 헤는 밤’을 교과서에서 배우며 시인의 섬세하고 여리며 순수한 서정에 감동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인이 된 내게 더욱 뭉클히 다가오는 세편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 그 첫째가 ‘자화상’이다 인간의 고뇌와 나약함이 잘 드러나 있어서 애틋한 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  전문   이 시에는 사람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과 시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다음으로는 ‘팔복’이란 시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2절의 내용을 시로 썼지만 물론 마태복음의 내용은 이와 다르다.   슬퍼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전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시인이 성경을 잘못 이해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내면에 꽉 찬 슬픔을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시인의 마음,여과 없이 다가온다. 다음의 시는'쉽게 씌어진 시'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 하나,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홀로 침전 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전문   이 시속에서 시인은 학비를 받아 공부하는 유학생이다.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며 땀내 나는 학비 받아 공부를 하러 다니면서도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도 들으며 쉽게 씌어지는 시에 대한 회한을 한다. 그럼에도 등불을 밝혀 어두운 조국에 아침을 몰고 올 그날을 기다리는 조국을 사랑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어쩌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적은 손”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가엾이 여긴다.여러 시가 다 심금을 울리지만 특히 ‘쉽게 씌어진 시’는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나 잃어버린 조국을 가진 청년의 서글픔이 잘 드러나 있다.   슬픔 속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 인간  아무리 어려운 상황,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남았고 역사를 창조했고 그리고 시를 썼다. 그래서 시인은 아름답다. 나 역시 슬퍼도 복이 있는 자 시인으로 남고 싶다.  
130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나무 댓글:  조회:2505  추천:0  2018-11-23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나무는 백성·바람은 일제 강압 상징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성찰 담긴 시 하늘·바람·별 등 서정적 표현 많았던 시인의 고뇌 가득 차 참담·우울한 시대 아니었다면 연기를 노래한 게송 같은 시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윤동주 / 나무 (1937.3. 추정.) 보통사람 같으면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잠잠하면 나무가 자오”라고 읊었을텐데, 윤동주(1917~1945) 시인은 거꾸로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라고 하였다. 인과가 거꾸로 나타난 역인과의 관계이다. 물론 좋은 원인이 좋은 결과를 만들고, 또 좋은 결과가 새롭게 좋은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보통 인과관계가 하늘이 꾸물꾸물하여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 그러나 가랑비가 내리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인이나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고정관념이 타파되어 생각의 관점이 다르다. 중국 당나라 육조 혜능선사의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 공안 화두는 윤동주의 ‘나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무꾼 출신 혜능이 오조 홍인을 찾아가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고, 황매산을 떠나 남쪽 광동성 광주의 법성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을 설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서 당간(幢竿)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말하자 다른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며 서로 다투었다. 이 모습을 보고 혜능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라고 말하자, 인종법사는 예절을 갖추어 혜능 스님을 맞은 일화가 있다. 마음은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마음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따라서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보고 느낀 대로 “나무가 흔들리면 바람이 분다”고 하였고, 혜능선사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무와 바람은 연기 관계이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로서 평생을 자신의 뿌리를 땅에 묻고 서서 살아간다. 다만 바람이 다가와서 흔들어 주고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있게 해 줘서 춤을 추기도 한다. 나무가 자라서 거대한 숲을 이루고 홍수도 막아주고, 사막화 되는 미세먼지도 걸러준다.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다”고 노래하였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집 서문을 대신하여 쓴 시 ‘서시’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하는 바람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괴로움이고, 별은 사랑과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나무’의 “바람이 잠잠하면 나무가 자오”에서 일제의 탄압이 잠잠해지면 조선의 백성은 비로소 편안히 잠을 잔다고 하는, 그래서 ‘나무’는 우리 민족의 백성을 상징하고 ‘바람’은 일제의 매서운 강압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윤동주의 시는 자연의 서정적인 표현을 하면서도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의식이 담겨 있다. 시인이 일제의 참담하고 우울한 시대만 살지 않았다면 ‘나무’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과 나무의 순수한 연기(緣起)의 사랑을 노래한 24자의 간명(簡明)한 게송 같은 선시(禪詩)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운수자연을 노래한 운수시(雲水詩)이다. 윤동주는 조국의 광복을 눈앞에 두고 1945년 2월에 27세의 젊은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 감옥에서 요절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그의 시를 마음에 새겨서 광복절을 맞아 다시 임에게 헌사한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130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황혼이 바다가 되여 댓글:  조회:3388  추천:0  2018-11-20
황혼이 바다가 되어                     /윤동주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요 ========================///     이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ㅡ 검푸른 물결, 검은 고기떼, 해초, 풍경화, 수많은 배 등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데 ,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면 황혼이 물들고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때의 풍경은 바다로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낙엽은 검은 고기떼와 해초로 표현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침몰된 배처럼 어둠에 잠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 시가 한결 재미있게  읽혀질 것이다. 그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아와 같이 쓸쓸한 설움에 잠기게 된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구절을 듣는다면 우린 한명의 아름다운 이를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바로 시인 윤동주이다.어릴적 우연히 읽었던 윤동주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시인 ‘서시‘는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아름답고 처연한 하지만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젊은이의 진취적인 느낌이 나는 시는 서정적이고도 아름다웠다. 그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한참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부끄럽지만 생생하다. 동아리 방에서 시집을 받고서 너무나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 났다. 처음 보는 시도 그러나 익숙한 시들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말 감명을 받았던 두 시에 대해서 감상을 남기고 싶다. 윤동주의 시는 대부분 유명하지만 편수가 많기에 그에 비해 유명하지 못한 작품 또한 적지않다. 그 중 하나인 ‘황혼이 바다가 되어’ 라는 시는 윤동주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서시를 쓰기전 쓰여진 시로서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연희전문의 입학을 준비하던 당시 쓰여졌다. 잔잔하지만 어딘가는 외롭고도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이다. 이 시는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을 걱정 하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를 황혼과 연결시키기는 힘들지만, 황혼이 바다가 되어 밀려와 잠기듯 나또한 깊은 밤이 바다가 되어 밀려오는 듯 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바다가 짓눌러 오듯 숨이 막히는 막막함과 무력함을 느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 밤이 지나면 혹은 황혼이 끝나 밤이 가라앉는다면 내일이 다가 올 것이고 그렇다면 또다시 앞으로 나를 스쳐지나갈 시간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가끔씩 그것은 무료하기도 혹은 두렵기도 하다.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대학,진로 혹은 개인적인 걱정거리들은 밤이 되면 바다에 가라앉아 물을 먹고 부풀어 나를 무겁게만 짓눌러 오는 것만 같다. 당장에 해결가능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심해와 같은 공포를 주고 그것은 때로는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윤동주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생각도 했다. 또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시가 있다 바로 ‘무서운 시간’ 이다. 이 시는 일제치하라는 배경을 쉽게 알 수 있었던 시이기도 하다. 무서운 시간이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이 보낼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또 이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은 순전히 공포를 느끼기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일까? 나는 시를 읽으며 시에서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기에 하는 말 같았다. 떳떳하게 서지 못하기에 나를 부르지 말라달라는 애원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시를 읽으며 슬픈 감정과 동질감을 느꼈다. 소심하고 항상 위축되어 다니던 중학교때의 나 자신이 떠올랐다. 나는 항상 나에게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모자라기에 떳떳이 다니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듯이 이 시에서 슬픈 감정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와 반대로 나를 알아달라고도 하는 것 같았다. 내 숨이 남은 곳을 알려주며 사실은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는 듯 말이다. 나 역시 사실은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하고 곁에 누가 있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면서도 사실은 누군가의 시선과 온기를 갈구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중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많은 느낌과 생각을 주는 시이며 그와 별개로 하지만 동시에 윤동주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모든 마음들이 담긴 아름다운 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가히 최고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크게 자부한다. ///김예지                 =======================/// “젊음은 거기 남아 있거라” 詩句처럼… ㅡ‘불멸의 靑春’으로 승화       ▲  일본 교토 우지시 우지강변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지난 10월 새로 만들어진 이 시비에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라고 새겨져 있다.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ㅡ생애의 마지막 동선을 찾아…  1942년 도쿄로 유학 떠나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에 응해   입학뒤 ‘참회록’에 심경 담아   도시샤大·하숙집 터 詩碑 외에   동주가 소풍오던 우지 강변에   ‘새로운 길 · 화해의 碑’ 세워져   1943년에 체포돼 2년형 언도   2년뒤 후쿠오카 형무소서 별세   비극적 삶을 산 청년의 이상이   대체불가능한 ‘섬광의 사건’ 돼  ◇ 삶의 최후 동선을 따라 = 윤동주의 말년은 일본 체류 기간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3월에 일본의 심장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성공회 계열의 릿쿄(立敎)대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원치 않았던 창씨(創氏)였지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명서 발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주)’로 고쳤다. ‘평소’라는 새로운 성씨는 파평(坡平) 윤 씨에서 ‘평(平)’을 가져왔고, 그네들의 비조(鼻祖)가 못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소(沼)’를 가져와 만들었다. 창씨에 응하면서도 고스란히 ‘윤 씨’의 맥락적 전통을 지킨 그 나름으로 고육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도 ‘송 씨’의 성을 그런대로 지킨 ‘소오무라(宋村)’로 창씨하였다. 입학이 결정되고 난 직후에 윤동주가 쓴 ‘참회록’은, 이러한 과정에 따르는 부끄럼 자체를 부끄럼의 대상으로 삼은 고백 시편이었다.  그가 도쿄에 머무른 시간은 릿쿄대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을 맞은 7월 하순까지의 5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 윤동주는 ‘흰 그림자’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다.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부친 편지에 동봉했던 이 시편들은, 윤동주 최후의 작품들이자 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지남(指南)과도 같다. 1942년 4월 14일 창작된 ‘흰 그림자’는 윤동주의 유고를 지상에 남기는 데 큰 공헌을 한 정병욱이 자신의 아호인 ‘백영(白影)’을 취한 작품이기도 하다. ‘흰 그림자’는 황혼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황혼은 ‘낮과 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시간으로서 불안한 운명과 함께 행복했던 과거와 부정적 현실 사이에 놓인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작일이 밝혀진 최후의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는 ‘남의 나라’라는 중의법이 타국과 객지라는 이중의 울림을 동반하면서 시인으로서 느끼는 생성과 소멸의 동시적 가능성을 잘 담아낸 명편이다. 모두 도쿄에서의 윤동주가 가졌을 불안과 성찰의 양면적 시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그해 10월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년 가까이 교토에 살면서 새로운 미래를 계획했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다녀오려고 차표까지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떠나오려던 때, 교토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체된다. 송몽규와 함께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이다. 송몽규와 윤동주 그리고 교토3고 학생 고희욱은 서로 어울리면서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가지고 군사 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 체포 사유였다. 이어 윤동주는 1944년 6월 사상불온, 독립운동, 비일본 신민, 온건하지만 서구 사상이 농후한 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윤동주 삶의 최후 동선이었던 셈이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 인근 윤동주 하숙집 터에 자리 잡은 시비. ◇ 교토의 가을, 우지(宇治)강에 새로 세워진 시비 = 지지난 주에 교토를 찾았다. 교토 여행은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윤동주의 자취를 따라 걸었다. 교토의 가을은 단연 고즈넉하고 잔잔했다. 먼저 도시샤대를 찾았다. 도시샤대 역시 연희전문학교처럼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시샤대가 그가 그토록 흠모해 마지 않았던 정지용의 모교였다는 사실이다.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오던 날, 윤동주는 아마도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수없이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시비 앞에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가 원문과 일본어 번역문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라고 말했던 그 무서운 ‘고독’이 이곳에서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 세워진 윤동주 시비는 윤동주를 사랑하고 흠모하던 일본인들의 정성으로 가능했다. 그에 비해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된 충북 옥천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살아서는 정지용이 윤동주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죽어서는 윤동주가 정지용 시비를 이곳에 파생시켰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윤동주는 이미 정지용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간 곳은 도시샤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윤동주의 하숙집 터였다. 거기에는 교토조형예술대 다카하라 교사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교토조형예술대의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단아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 앞에는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과 서시가 양국어로 새겨진 시비가 함께 서 있었다. 거기서 또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송몽규의 하숙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윤동주와 송몽규는 매일 하숙집에서 각각 교토대와 도시샤대를 걸어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우지에 위치한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찾았다. 윤동주는 도시샤대 재학 시절 급우들과 함께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특별히 기억할 일은, 지난 10월 28일 시쓰카와(志津川)의 우지강변에 또 하나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시비에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후에 쓴 ‘새로운 길’과 함께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詩人 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걸어갔던 “새로운 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나한테 주어진 길”로 이어지기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이 거기 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교토의 가을이, 막 상류 댐을 열어 급류로 흘러내리던 우지강을, 그날 소풍을 나왔던 도시샤대 학생들의 평화처럼 감싸고 있었다. ◇ 윤동주의 죽음과 후쿠오카 = 후쿠오카는 ‘아시아로 열린 창’이라는 별명답게 항구 도시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 터는 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친 사와라(早良)구에 있다. 후지사키(藤崎) 지하철역에서 퍽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96년에 새로 지은 형무소 건물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형무소 터만 남아 공원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후쿠오카 구치소는 형무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어서, 이곳에서 추모 묵념을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막 일본 프로야구 저팬시리즈에서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한 소프트뱅크가 우승하여 후쿠오카 각 백화점이 세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명예교수는 후쿠오카 현립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분으로서, 연세대에서 춘향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문학 연구자이다. 그분은 형무소 터와 함께 그가 1994년부터 만들어 운영 중인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대체 혈액 실험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쓰였다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은 생리식염수를 개발 연구하고 있었는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을 한 죄로 윤동주 등이 그 실험 대상이 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밝힌 것이다. 그때 후쿠오카 앞바다 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에서도, 일본 패전 후 전범 재판 문서에서도, 규슈(九州)제국대에서 대체 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는 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 남겨진 731부대의 악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 마지막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가 죽자 명동촌 집으로 그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윤영석이 시신을 넘겨받으러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27년 1개월 남짓 되는 짧은 생이었다. 한 줌 재가 되어 부친의 품에 안겨 돌아와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용정 땅에 묻혔다. 유족들은 그의 묘비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표현을 적어 넣었는데, 이 기념비적 순간은 ‘청년 윤동주’를 ‘시인 윤동주’로 태어나게끔 해주었다.  도쿄에서 쓴 작품 가운데 한 편인 ‘사랑스런 추억’에서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고 씀으로써, 그 말을 예언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젊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다.   이러한 윤동주만의 특권은, 삶의 비극성을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한 장면을 선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시에 나타난 부끄럼과 성찰의 의지는 후천적으로 노력해 얻은 성정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나한테 주어진 길’과 ‘허락된다면’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 감각 역시 그의 천성이 능동적이지 않고 자성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오래도록 쌓은 원숙함과는 전혀 다른 청년기의 과정적 속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청년의 이상과 실존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대체 불가능한 섬광의 사건이 된 셈이다. 그래서 그의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은 물론,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실존의 어둑함을 따라 우리의 기억이 환해지는 가을 여정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문화일보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301    백두산 / 조기천 댓글:  조회:3072  추천:0  2018-11-18
  시대 현대 저작자 조기천 창작/발표시기 1947년 성격 시 유형 작품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조기천(趙基天)의 장편 서사시. 목차 구성 및 형식 내용 현황 의의와 평가 구성 및 형식 이 시는 194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머리시’, 제1장∼제7장의 본시, ‘맺음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전체 1,564행(1989년 ‘실천문학사’판 기준)으로 되어 있다. 내용 이 서사시는 1930년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특히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시는 “삼천만이여!/오늘은 나도 말하련다!/‘백호’의 소리 없는 웃음에도/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천지의 푸른 물줄기로/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천 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육박의 창끝인 듯 고루며/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해방의 오늘 말하련다”로 시작된다. 본시 1장에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이 등장하는데,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축지법을 쓴다고―/북천에 새 별 하나이 솟아/압록의 줄기줄기에/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백두산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과 같이 ‘신비화ㆍ영웅화’하고 있다. 2장에서는 ‘박철호’와 ‘꽃분이’가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하게 되고, 3장에서는 철호와 꽃분이가 등사기로 ‘선포문’을 찍던 중 일본순사가 출현하나 꽃분이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4장에서는 유격대원들의 숙영지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김대장’은 밤에도 책을 읽는 지도자로 등장하며, 식량부대가 끌고 온 ‘농민의 소’를 놓고 책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5장에서는 일본수비대의 추격과 철호의 동지였던 ‘영남이’의 죽음을 다룬다. 6장에서는 철호와 꽃분이의 전위대 역할과 김장군의 지휘로 ‘H시’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특히, ‘H시’가 불길에 싸인 장면에서는 “화광이 춤추는데/밤바다같이 웅실거리는 군중/높이 올라서 칼 짚고 웨치는/절세의 영웅 김일성장군!/동포들이여!/저 불길를 보는냐?/조선은 죽지 않았다!/조선의 정신은 살았다!/조선의 심장도 살았다!/불을 지르라/원쑤의 머리에 불을 지르라!”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7장은 토벌대의 추격과 유격대의 후퇴, 철호와 석준의 전사를 그리고 있다. 맺음시에서는 독립 조국의 건설이 역사적 소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내 세세로 모은 힘 가다듬어/온갖 불의를 즉쳐부시고/내 나라를/민주의 나라를 세우리라!/내 뿌리와 같이 깊으게/내 바위와 같이 튼튼케/내 절정과 같이 높으게/내 천지와 같이 빛나게/세우리라―/자유의 나라!/독립의 나라!/인민의 나라!/백두산은 이렇게 웨친다!/백성은 이렇게 웨친다”는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현황 이 서사시는 1947년 4월 30일북한의 『로동신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는데, 1940∼50년대에 출간된 것과 1980년대 이후 출간된 판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1980년대 남북한에서 간행된 판본에는 소련과 관계된 내용이 모두 삭제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1989년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한 『백두산』의 해설에서 임헌영은 이 작품을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응고되기 이전에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거치가 있는 서사시”라고 평가했다. 한편,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문학개관(2)』에서는 이 서사시가 “현대 서사시의 풍격을 완전히 갖춘 새 시대 서사시 문학의 빛나는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130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둘 다 댓글:  조회:3126  추천:0  2018-11-17
  둘 다               Sea and Sky   바다도 푸르고   The sea is blue. 하늘도 푸르고   The sky is blue.   바다도 끝없고   The sea is wide and wide. 하늘도 끝없고   The sky is wide and wide.   바다에 돌 던지고 I throw a stone to the sea. 하늘에 침 뱉고  I spit into the sky.   바다는 벙글     Nevertheless the sky smiles back. 하늘은 잠잠     Nevertheless the sea is silent. 1937  윤동주                                Translated by RCN ========================///   *끝없고 푸르기가 바다나 하늘이나 똑같다. 의미 없이 그런가? 아니다. 바다에 돌을 던져 보고, 하늘에 침을 뱉어 본다. 바다와 하늘의 반응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그럽다. 돌을 맞았는데도 '벙글'하고, 침이 튀겨졌는데도 '잠잠'할 뿐이다. 바다와 하늘의 포용력이 푸르고 끝없다. 사람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바다와 하늘. 그래서 그 앞에 서면 가슴이 열리나 보다. 박두순(시인.아동문학가)    =======================///   이 시는 바다와 하늘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이 둘을 모욕해도 잠잠하거나 벙글 웃는 끝없이 넓은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동시이다.   제목 는 바다와 하늘이 둘 다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1, 2연은 바다와 하늘의 공통점이 ‘푸르고’ ‘끝없고’이다. 3연은 이러한 바다와 하늘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바다에 돌 던지고 / 하늘에 침 뱉고’에서 행위는 다르지만 대상을 모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바다는 벙글 / 하늘은 잠잠.’도 화자가 모욕한 행위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를 가진 반응을 하지만 둘 다 화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바다’와 ‘하늘’이 ‘둘 다’ 아량이 끝없이 넓고 큰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전한성        
1299    "한국의 안데르센" - 강소천 댓글:  조회:2591  추천:0  2018-11-17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 삶 자체가 한국아동문학사   '한국의 안데르센' 강소천  30여년간 동요·동시 240·동화 150편 남긴 거장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하늘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한글을 깨우치고 나서 귀가 닳도록 듣고, 입이 닳도록 불렀던 동요들이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동요. 이 동요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바로 '한국의 안데르센'이라고 불리는 아동문학의 대가인 강소천이다.  한 때 '초등학교 음악교과서는 강소천 개인소장품'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동요 노랫말 가운데 3분의 1이 그의 작품이었다. 그가 30여년 동안 남긴 동요와 동시는 240여편, 동화는 150여편에 달한다. 그를 빼고 한국아동문학사를 논할 수 없는 이유다.  소천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근처인 고원군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전인 1915년에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잣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 솜씨가 유난히 좋았던 소천은 16살(1930년)에 이미 '아이생활'이라는 잡지에 동시 '버드나무 열매'를 발표했다. 이듬해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진학하면서 그 해에만 '봄이 왔다', '무궁화에 벌나비' 등 총 9편의 동시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한다.  1933년에 조선어연구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한 뒤 일제의 한글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간도로 활동영역을 옮긴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 외삼촌이 살고 있는 용정으로 넘어가 윤동주와 교유를 하면서 조선중앙일보 9월3일자에 '호박꽃 초롱'을 발표한다.  '호박꽃을 따서는/무얼 만드나/무얼 만드나/ 우리 애기 조그만/초롱 만들지/초롱 만들지/반딧불을 잡아선/무엇에 쓰나/무엇에 쓰나/우리 애기 초롱에/촛불 켜 주지/촛불 켜 주지.'  1년만에 간도에서 돌아온 소천은 영생고보를 졸업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8년동안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일을 하면서 우리말과 우리글로 된 동시 집필에 더욱 매진한다. 그의 나이 23살때인 1937년에 '소년' 창간호에 발표된 작품이 소천의 대표작인 '닭'이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소천은 후일 회고록에 윤석중의 원고청탁을 받고 물을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는 닭을 보면서 고향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밝혔다.  아동문학사에서 소천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일제의 한글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1년에 순 한글로 된 동요 시집인 '호박꽃 초롱'을 출간했다는 점이다. 아동문학가 서석규는 "호박꽃 초롱은 일제 말기의 강압적 국어말살 정책 아래서 우리말 우리글로 펴낸 창작동요 시집이라는 점에서 강소천 문학의 기대에 찬 출발을 선언한 뜻있는 금자탑"이라면서 "이 동요시집에 실린 33편의 동요시와 2편의 동화는 그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우리 아동문학사에 길이 남을 귀한 보석"이라고 평가했다.  소천의 삶에서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찾아오는 것은 6.25전쟁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소천은 공산주의를 피해 1950년 12월에 혈혈단신으로 월남한다. 흥남철수 당시 마지막 배를 타고 월남한 소천은 부산에서 만난 지인의 소개로 문교부 편수국에 근무를 하게 된다. 소천은 1951년에 육군 정훈부대인 772부대의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대전으로 올라와 대전일보 1951년 3월28일자에 '자라는 대한'이라는 월남 후 첫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 작품을 계기로 대전 진잠에서 피란중이던 윤석중을 만난 소천은 대전지역 문인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게 된다.  1952년에 부산으로 다시 내려간 소천은 본격적으로 어린이문학활동에 나선다. '어린이다이제스트'라는 월간잡지를 만들어 전쟁 통에 읽을거리가 없던 어린이들에게 우리말로 된 어린이동화를 들려줬다. 이후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소천은 1957년에는 어린이의 복지와 건강을 지켜주기 위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제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는 등 11개항으로 구성된 어린이 헌장은 1923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과 더불어 어린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소천은 아동문학의 체계화에도 앞장 섰다. 국정교과서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던 1959년에 이화여대에서 아동문학 강좌를 처음으로 개설해 직접 강의를 하기도 했다.  소천은 아동문학의 이론적 저변을 확대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인 1962년에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등 기라성같은 문인들과 함께 부정기 간행 잡지인 '아동문학'을 창간했다. '아동문학'은 매호마다 아동문학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주제로 심도있는 지상 심포지엄을 여는 등 아동문학의 이론을 정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63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소천은 30여년동안 동시와 동요, 동화를 쓰면서 살았다. 어린이만을 위한 외길인생을 살아온 소천의 높은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정부는 1985년에 아동문학가로서는 최초로 소천에게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올해는 소천이 세상에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아동문학계에서는 '강소천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해오고 있다. 소천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는 '꽃신을 짓는 사람을 그리며'라는 강소천 탄생 100주년 기념 글모음을 발간했으며, 지난 5월28일에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강소천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대전문학관에서도 이달 말까지 '아동문학전-책 밖으로 나온 문학세상'이라는 기획전시를 통해 소천의 삶을 되돌아보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탄생100주년을 맞아 소천의 대표 동요시집인 '호박꽃 초롱'을 비롯해 '꽃신', '꿈을 찍는 사진관', '조그만 사진첩', '진달래와 철쭉' 등 9권의 동화집도 복간된다.  단국대문예창작과 박덕규 교수는 최근 발간한 '아동문학의 마르지 않는 샘 강소천 평전'을 통해 소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분단시대를 강소천의 문학을 즐기지 않고 살아낸 한국인은 없다. 그게 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다른 아동문학이 없지 않았지만, 강소천만큼 아동문학 전 분야에서 독보적 지위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강소천의 문학 전반은 한국 아동문학 그 자체를 대변하고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중략).강소천의 문학과 생애를 이해한다는 건 한국 아동문학 전부를 이해하는 것 만큼의 효력이 있다."    ///한경수  
1298    윤동주와 강소천 댓글:  조회:4527  추천:0  2018-11-17
  시대 현대 출생 1915년 사망 1963년 유형 인물 직업 아동문학가 대표작 호박꽃초롱, 조그만 사진첩, , 꿈을 찍는 사진관, 꽃들의 합창, 봄이 너를 부른다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15∼1963. 아동문학가. 목차 생애 활동사항 강소천 / 강용률 1915~1963. 아동문학가. ⓒ 동아일보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생애 본명은 용률(龍律).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신. 1930년 고원보통학교, 1937년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원중학교, 1946년 청진여자고급중학교, 1948년 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월남하였다. 1951년 문교부 편수관을 거쳐 1959∼1963년 한국보육대학·이화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의 강사로서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활동사항 1952년 어린이 잡지인 『새벗』과 『어린이다이제스트』의 주간, 1953∼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1960년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아동문학』의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1931년에 「길가에 얼음판」·「얼굴 모르는 동무에게」·「호박꽃과 반딧불」·「봄비」, 1933년에 「닭」 등 우수한 동요·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1937년 이후에는 동화 및 소년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와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이야기」, 『조선일보』에 「마늘먹기」, 『소년』에 「딱다구리」 등의 단편과 『아이생활』에 「희성이의 두 아들」 등 장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윤석중(尹石重)이 시도한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의 동요·동시는 낭만적 기조 위에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이미지 형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에 나타난 경향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글이 아닌 의도적인 창작에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닭」·「달밤」·「조그만 하늘」 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초기의 낭만적이고 예술적 향기가 짙은 율문 시대를 거친 다음 현실에 대한 긍정적 태도 위에 강한 교훈성을 부여한 후기의 산문시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꿈을 찍는 사진관」(1954)인데, 이 작품은 교화성 문제로 많은 논란을 겪기는 하였으나, 많은 아동독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열렬한 아동애호가로, 마해송(馬海松) 등과 함께 「어린이헌장」을 기초, 반포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동들의 독서와 글짓기 지도에 열성을 기울여 아동문예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3년 아동소설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가 49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5년 배영사(培英社)에서 ‘소천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동요동시집 『호박꽃초롱』과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진달래와 철쭉』·『꽃신』·『꿈을 찍는 사진관』·『종소리』·『무지개』·『인형의 꿈』·『꾸러기와 몽당연필』·『대답 없는 메아리』, 그리고 소년소설집에 『해바라기 피는 마을』·『꽃들의 합창』·『봄이 너를 부른다』 등이 있다. 전집으로는 『강소천아동문학전집』(전6권)·『강소천아동문학독본』 등이 있다. =======================///   출생 함남 고원, 1915. 3. 16 사망 1963. 5. 6, 서울 국적 한국 요약 강소천은 어린이의 바탕으로 한 많은 아동 문학들을 써냈으며, 시적 동요를 계승하여 동시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로 등단했다.   어린이의 밝고 건강한 정서를 바탕으로 시적 언어로 동화를 썼다. 본명은 용률(龍律). 고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함흥 영생고보를 마쳤으며 고원중학교·청진여자고급중학교·청진제일고급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다. 6·25전쟁 때 혼자 월남하여 1951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었고 1952년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으로 있었으며 한국문학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장, 〈아동문학〉 편집위원을 지냈다. 1930년 〈아이생활〉·〈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들레와 울아기〉가 뽑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닭〉·〈보슬비의 속삭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들을 묶어 동시집 〈호박꽃초롱〉(1941)을 펴냈는데 1939년 무렵부터 동시보다 동화를 더 열심히 써서, 해방 전까지 〈돌멩이〉·〈토끼 삼형제〉 등을 발표했다. 마해송 등과 함께 '어린이 헌장'을 기초하여 널리 알렸으며 어린이 독서와 글짓기를 가르쳐 문학교육에도 이바지했다. 1963년 〈어머니의 초상화〉로 제2회 5월문예상을 받았다. 그의 동시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밝고 건강한 생활을 담아 표현했으며, 동화는 시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표현과 운율로 사회악과는 무관한 동심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사회현실의 좋은 면만 돋보이게 하여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을 주고, 소년소설은 어른들이 옛 일을 회고하는 것에 그쳐 아동문학 발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동화집은 〈꿈을 찍는 사진관〉(1954)·〈무지개〉(1957)·〈어머니의 초상화〉(1960) 등, 장편에는 〈달 돋는 나라〉(1955)·〈꽃들의 합창〉(1957) 등이 있다. 죽은 뒤 〈강소천문학전집〉 전6권을 배영사에서 펴냈으며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강소천 姜小泉 본명 강용률  姜龍律 출생 1915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고원 사망 1963년 5월 6일 (4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필명 호(號)는 소천(小泉)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 직업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  대학 교수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  前 연세대학교 강사  前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前 서라벌예술초급대학 전임교수 학력 함경남도 고원보통학교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활동기간 1930년 ~ 1963년 장르 아동문학, 시문학, 소설 대표작 《꿈을 찍는 사진관》 《바둑이와 편지》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시집 속의 소녀》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통합)[1] 강소천(姜小泉, 1915년 9월 16일 ∼ 1963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목차 1생애 2인간 관계 3각주 4 5 6 생애[편집] 본명은 강용률(姜龍律)이고,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이다. 소천(小泉)은 아호이며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생이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여자고급중학·청진제일고급중학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당선되었으며, 그 뒤 〈닭〉을 비롯한 동요·동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1940),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 이야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월남 후 피난지 경상남도 부산에서 독서 지도와 글짓기지도 등 아동문학의 보급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1952년), 《아동문학》 편집위원(1962년), 한국보육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강사(1959년 ∼ 1963년),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1960),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름답고 무한한 동심의 세계와 착하고 고운 소년 소녀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표작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소년세계》 1954.3)[2], 《호박꽃 초롱》(1941, 박문서관), 《꽃신》[3] 등이 있다. 금성출판사가 펴낸 창작동화전집에 실렸던 강소천 선생의 글중에는 사이가 나쁘던 두 나라가 삶으면 꿀이 되는 꿀꽃, 꽃잎이 무지개무늬인 무지개꽃 같은 신기한 꽃씨를 주고받으면서 갈등을 풀어간 이야기도 있다. 평화라는 기독교 사상을 담아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인간 관계[편집] ");"> 1950년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시인 박목월(朴木月)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었다. 각주[편집] 이동↑  "); padding-right: 13px;">강소천 선생 가시다, 동아일보 이동↑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사진으로 찍는 사진관 이야기. 이동↑ 구두를 만드는 노동자가 아기를 위해 예쁜 꽃신을 짓는 이야기. ====================================================///   1934년(20세)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외사촌 누이 허흥순의 안내로 간도의 용정으로 감. 1935년(21세) 용정 외삼촌 집에서 1년간 머무름.   이 시기에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를 만남. 1936년(22세) 용정에서 돌아옴. ==========================///     그 무렵 윤동주의 시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화려하고 조숙한 낱말을 이용하여 관념적으로 그려내던 그의 시가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표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은 용정의 외가에 온 동요시인 강소천을 만나고 습작에 대한 조언과 함께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정지용시집’을 탐독한 영향이 컸다. =======================/// 장원재 박사의'그것이 알고 싶지?'...  불멸의 시인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 링컨·잡스 외국에선 역사인물 영화 인기   영화 ‘동주’,ㅡ 윤동주 시인(1917년 12월30일~1945년 2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 시인과 함께 순국한 사촌 송몽규(1917년 9월28일~1945년 3월7일)의 생애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최근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흑백으로 펼쳐진 화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총 제작비가 5억원에 불과한 저예산 영화여서, 거리 소품, 의상, 거리 재현 등에 큰 예산을 들일 수 없었던 감독의 ‘현실적 고뇌’가 느껴졌습니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청년 시인의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아닌 영화로 만든 전기 최근에는 영화로 쓰여진 전기(傳記)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바이오그래피컬 필름(biographical film)이라고 하지요. 최근에 나온 전기 영화로는 ‘링컨’, ‘잡스’, 프랑스 샹송가수 피아프의 일대기 ‘라 비앙 로즈’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위인이나 기억할 만한 사람들의 생애가 책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대가 변했다는 신호입니다. ‘진지한 정보’를 취득하는 통로가 다양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원시시대 이래 몸짓언어, 음성언어, 문자언어를 발명하며 의사소통 수단의 진화를 이룩했습니다. 후자로 갈수록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많은 용량의 정보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문자언어에 비해서는 음성언어가, 음성언어에 비해서는 몸짓언어가 더 배우기 쉽고 인간의 본성과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인간 본성’ 몸짓을 담는다     기술이 인간의 본성을 담기에는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획기적인 수단이 태어났습니다. 인터넷과 휴대폰 발명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송하는 일이 가능해졌지요. 저는 이 현상을 ‘몸짓언어의 부활’이라고 정의합니다. 몸짓언어가 번성할 수 있는 ‘대중적 기록, 저장, 전파’의 수단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시대에는 문자보다 동영상이 번성하리라고 예측합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은 ‘문자’를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언어이고 문자는 단지 언어의 기록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언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동작, 표정, 기타 여러 가지 행위도 의사전달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발아한 학문이 기호학입니다. 예컨대 영화감독이 잡은 특정 화면에 인물과 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일반인들이 일상적인 차원에서 통신, 녹음, 녹화 및 모든 정보를 실시간 전송·공유·확산할 수 있는 휴대폰 보급은 인류가 정보를 전달하는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만큼 인류사에 혁명적인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영화 ‘동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영화 서두에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영화적 허구가 섞여 있다’는 자막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적 표현을 몇 장면 비교해 보겠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데이트하던 여성이 두 분 나옵니다만, 둘 다 가상의 인물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1902~1950) 시인을 직접 만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말미에 ‘정지용 서문을 붙여 윤동주 시집이 간행되다’라고 나오지요.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1936년 《정지용 시집》을 정독하고 정지용 시인을 흠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분의 인연은 윤동주 시인 사후에 비로소 이뤄집니다. 1947년 2월13일 경향신문에 ‘쉽게 씌여진 시’가 해방 이후 최초로 발표되는데 이때 정지용 시인이 소개문을 씁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의 서문도 정지용의 것인데, 이 글 속에서 정 시인은 ‘생전에 윤동주 시인을 만난 일이 없다. 그래서 성품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몸은 건강했는지를 시집 원고를 가지고 온 시인의 동생에게 물어본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누가 셔츠를 벗어달라면 그냥 벗어줍니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습니다’가 답변이었지요. 생전에 만나지 못한 정지용과 윤동주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교분은 없었지만 일본 교토에 있는 기독교계 대학인 도시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습니다. 캠퍼스 안에 두 시인의 한글 시비(詩碑)가 서 있습니다. 혹시 방문할 일이 있거든 두 분 모두를 뵙고 오세요. 6·25전쟁 중 정지용 시인이 납북되는 바람에 1955년 《시인 사후 10주기 기념 개정판》에는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빠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55년 복각판에 정지용 시인의 서문이 없는 이유입니다. 영화 말미에 숭실대 신사참배에 항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자막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는 평양 숭실대 부설 중학부, 즉 지금의 고등학교였습니다. 1936년 3월 말 숭실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를 당합니다. 학교가 없어졌기에 시인은 애교심을 가졌던 숭실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지요. 이 무렵 용정 외가에 와 있던 동요 시인 강소천(1915~1963)과 교우합니다. 연희전문 졸업 무렵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던 시집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습니다.   필사본 3부 가운데 외우 정병욱이 보관했던 판본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를 보아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설가 송우혜는 송몽규의 조카딸, 통기타 가수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라는 사실도 알려 드립니다. ///장원재 박사    
1297    {자료} - 남영전시인이 보는 중국조선족문학 댓글:  조회:2520  추천:0  2018-11-17
[남영전 평론] 내가 보는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 2014.12.25   - 작게+ 크게   공유   - 남영전       ▲ 중국조선족 저명한 시인, 전장백산문학지 남영전 사장 [서울=동북아신문] 들어가는 말    필자는 문학비평가가 아닌 시인의 신분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을 담론한다는 것은 분에 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만 중국 개혁개방의 덕을 입어 1980년부터 문학동인들과 손잡고 조선족의 산재지구에서 대형 문학지 《장백산》을 창간하여 30년을 경영해왔고 2005년부터 5년 동안《길림신문》의 직무를 겸했으며 2012년부터는 중국작가협회의 기관지 《민족문학》(조선문판)의 심독평을 하게 되다보니 조선족문단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일가견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번 세미나 주최측의 부탁으로 자신의 견해를 지면에 옮겨본다. 얼마간의 참고가치가 있다면 필자로서는 더없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작가의 사망이 가져다주는 충격   새천년에 들어서서 어찌된 일인지 중국조선족문단은 불행하게도 적지 않은 중요한 작가들을 잃는다. 2001년에 항일투사이고 노작가인 김학철선생(1916-2001)은 9월, 대학교수이고 문학이론과 비평가인 정판룡선생(1932-2001)은 10월, 시인이고 시비평가인 박화선생(1938-2001)은 12월, 세분이 선후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부터 농촌제재로 소설창작에 활약했던 윤림호(1954-2003), 원로시인 임효원(1926-2006), 소설가 고신일(1942-2006), 소설가와 서예가인 김호근(1948-2007), 원로작가 유원무(1934-2008), 원로시인 이삼월(1933-2009), 민족의 발자취에 대한 작품을 많이 펴낸 작가 유연산(1956-2011), 노작가 이홍규(1927-2011), 아동문학가 최문섭(1942-2012), 소설가이고 문학활동가인 박성군(1945-2013), 시인이고 시비평가인 한춘(1943-2013), 노시인 설인(리성휘, 1921-2014) 등 10여명의 중요한 시인, 소설가들이 타계를 하였다. 이상 10여명의 시인, 소설가들은 조선족문단에서 영향이 비교적 큰 문인들이다. 특히 문단의 정신적 기둥이였고 작가들의 뒷심이 되었던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교수의 타계는 조선족문학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또 시 비평을 하는 2중 신분을 지니셨던 조선족시단의 보귀한 존재이며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주지시(主知詩)창작을 탐구하였고 시평에도 조예가 깊은 박화선생, 80년대 후반부터 현대시창작을 견지해왔고 시평에 활약했던 한춘선생의 타계는 조선족시단에 미봉할 수 없는 큰 충격이다. 민족의 발자취에 대한 작품을 많이 펴낸 유연산은 이미 완성한 작품보다 더 많은 양의 미완성고를 남기고 55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를 했으니 조선족문단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활기 띤 전기문학창작   21세기의 조선족문단은 전례 없는 전기문학 창작 붐이 일어난 것이 돋보인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지난세기 80-90년대에 조선족문단의 거두인 김학철선생의 전기문학 『‘항전별곡』(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3년),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문학과 지성사, 1995년), 정판룡 선생의 회고록 『고향 떠나 50년』(1990년부터 《장백산》과 《금호문화》에 2년좌우 연재, 1997년 민족출판사 제1판, 2000년 제2차 인쇄, 1996년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중문판 출판.), ‘나의 아내’(2000년 《연변여성》 연재)가 조선족문단에 주는 감동과 계시가 컸었다. 그리고 젊은 작가 유연산이 21세기에 들어서서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고 역사인물을 찾는 인물전기 『불멸의 지사 유자명 평전』, 『불멸의 지사 심여추 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 『삼인삼색의 운명』,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등의 작품창작이 선두작용을 하였다. 문단의 중요한 작가들의 전기문학을 읽으면서 민족역사에 공헌이 있는 인물들의 정신에 감동을 받아 작가들은 인물전기창작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와 문단에서 영향이 상대적으로 큰 작품들은 김호웅, 김해양의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11), 이해영의 『청년 김학철과 그의 시대』(도서출판 역락, 2006. 10), 한족작가 우레(于雷)가 쓴 김학철 전기 『쇠지팽이 밑의 발자취(鐵拐下的足痕) 』(상, 하. 작가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3.8), 최국철의 『주덕해 평전』(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2.8), 이혜선의 『정률성 평전』(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3. 10), 한족작가 곡애국(曲愛國), 증범상(曾凡祥)의 『조남기전』(인민출판사, 2003년. 2004년 김성의 조선문으로 번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 김호웅의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재외동포재단, 2007년. 민족출판사 2008년), 허련순의 김진경 평전 『사랑주의』(홍성사, 2012.9), 김수영의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7) 등이 있다. 《장백산》잡지는 2012년 3호부터 2014년 4호까지 이혜선의 『정률성 평전』을 연재하였고 2014년 1호부터 허련순의 김진경 평전 『사랑주의』를 연재하고 있다. 《길림신문》은 2007년부터 전기인물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김수영), 『조남기전』(김성의 번역), 『주덕해 평전』(최국철)을 연재하였고 지금은 『정률성 평전』(이혜선)연재중이다. 《길림신문》은 2013년부터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 대형계열보도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1일까지 85인의 사적이 실렸다. 일인 일면 분양의 사적은 실상 간략한 인물전기다. 길림성 조선족 경제 과학기술 진흥총회는 2013년 7월부터 《흑룡강신문》, 《요령조선문보》, 《길림신문》, 연변TV방송국 등 국내 각 언론매체, 사회단체와 손잡고 ‘감동중국조선족걸출인물’ 평선 활동, 개혁개방 30년의 조선족사회를 점검하는 의의 있는 큰 행사를 가졌다. 그해 12월 20일, 연변TV방송국에서 선출된 20명 걸출인물시상식을 가졌고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요령조선문보’ 세 언론지는 동시에 걸출인물들의 사적을 실었는데 이 사적 역시 인물전기에 속한다. 이 두 활동의 인물사적은 모두 책자로 출판하게 된다. 전기문학창작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한 젊은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1965년생인 김혁이다. 김혁은 《장백산》에 연재하는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에 작가 강경애, 최서해, 김창걸, 화가 한락연, 아동음악가 윤극영, 민간예술인 황구연의 인물전기가 발표되었고 금년부터 ‘중국민족’에 인물시리즈 ‘소설가 김혁의 조선족 인물사’가 연재되고 있다. 60만자 분양인 ‘윤동주 평전’은 《장백산》에서 2015년 1호부터 2017년 6호까지 3년 동안 연재를 한다. 김혁은 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조선족인물전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주덕해의 이야기』(2011), 『한락연의 이야기』(2013)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김학철 청소년전기』는 명년 연초에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윤동주, 정률성, 이화림, 이홍광, 양림, 이추악, 김염, 정판룡, 김약연, 강경애, 이상설, 홍범도 등 12명의 인물 전기를 펴내려 기획, 집필중이다. 북경의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는 연합으로 방대한 ‘중국조선족명인평전시리즈’출판을 진행하고 있다. 유자명, 김염, 주덕해, 최채, 정률성, 석희만, 조득현 등의 평전은 이미 출판되었거나 혹은 육속 출판될 것이다. 조선족문단 전기문학창작의 뚜렷한 성과로 제10회(2008-2011)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평선에서 김호웅은 인물전기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 교육가 임민호』작품으로, 심승철은 인물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등 번역 작품으로 국가급상의 수상의 영예를 받았다.   성숙한 소설 창작   21세기에 들어서서 소설창작은 지난세기 80-90년대에 활약했던 중견작가들에 의해 지속된다. 다만 그 시기 이름을 날렸던 몇몇 소설가들의 새로운 소설작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이와 반면에 신인들이 많이 나타나 활약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점이기도 하다. 노작가중 임원춘(1937년-), 강효근(1935-) 두 분의 소설 창작이 돋보인다.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전국 우수단편소설 상을 받은 임원춘선생은 ‘골회’ 등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간행물에 발표하였고 2012년 1호부터 《장백산》에 장편소설 ‘그날의 25시’를 연재했으며 2011년 6월에 『임원춘 소설선집』 전 5권(1, 2권 단편집, 3권 중편집, 4권 장편소설 『오랑캐령』, 5권 장편소설 『족보』)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지난날 이미 중단편소설집 『정신 있소』, 『꽃피는 시절』, 『둥지를 떠난 새』, 『살아 숨 쉬는 상흔』, 『객귀』, 『혼자 사는 여의사』를 펴낸 강효근선생은 새시기에 장편소설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토지개혁시기의 현실을 반영한 장편소설 ‘산 넘어 강’을 《장백산》에 연재를 하였고 이 작품이 《장백산》의 상을 받아 2011년 4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또 자신이 장기간 은행에서 사업한 경력으로 금융제재를 다룬 장편소설 ‘욕망의 한계’를 완성하여 《연변문학》에 연재하였고 2014년 3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을 하였다. 하련순(1955-), 이혜선(1956-)은 소설 창작에 활약한 여류작가다. 허련순은 소설창작과 극본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로서 21세기 첫해인 2000년 10월, 《장백산》에 연재한 장편소설 『뻐꾸기는 울어도』가 《장백산》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이 작품이 요령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후 그는 또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펴냈고 장편소설 『중국색시』는 《연변문학》에 연재를 하였다. 그의 단편 ‘거미를 살려줘’, ‘사슬은 끊을 수 있는가’(중문번역)는 각기 2012, 2013년 ‘민족문학’ 소설 상을 수상하였다. 이혜선은 새천년에 들어서서 중문으로 번역된 장편소설 『빨간 그림자(紅胡蝶) 』로 제7회(1999-2001)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을 받았고 장편소설 『생명』, 소설집 『푸른 잎은 떨어졌다』, 『야경으로 가는 여자』를 출판하였다. 한국에서 아동소설 『폭죽소리』, 『사과배 아이들』, 『자유 찾아 만 리길―김학철 이야기』, 장편르포 『코리안 드림』, 『코리안 드림, 그 희망과 방황의 보고서』, 『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 등을 출간하였다. 조선족의 이민역사를 반영한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최홍일(1954-)은 다년간의 고심 끝에 2013년 9월, 『눈물 젖은 두만강』 속편, 대하소설 『용정별곡』(1, 2부 연변인민출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세천년에 들어서서 소설가 리동렬(1957-)은 왕성한 창작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장편소설 《고요한 도시》(2000), 《낙화유수》(2006)를 펴낸다음 중단편소설집 《눈꽃서정》, 《토양대》 등을 출간하였다. 그는 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동북아신문》사장, 《동포문학》발행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9년에 장편소설 『간도전설』과 소설집 『여름은 추운 계절』을 출판한 최국철(1962-)은 2010년에 장편소설 『광복의 후예들』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2013년 3호 《민족문학》(조선문판)에 실린 단편소설 ‘왕씨’로 2013년 ‘민족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문단에서 농민작가로 불리우는 박선석(1945-)의 소설은 백성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랐고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까지 왕성한 소설 창작을 하는 작가다. 농촌의 문화대혁명을 반영한 그의 장편소설 『쓴웃음』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문단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장백산》에 6 년 반 연재되었고 상, 중, 하3권으로 출판된 다음 제8회(2002-2004)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그는 또 농업합작화로부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농촌사를 다룬 『재해』를 《장백산》에 연재하였고 지금은 토지개혁 때의 농촌사를 다룬 『압록강』을 《장백산》에 연재중이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조선족문단에는 소설을 들고 나오는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60후’의 박옥남(1963-), ‘70후’의 구호준(1972-), 조용기(1972-), 김춘택(1972-), 김금희(1979-), 박은희(1978-), 주향숙(1975-), 김영해(1975-), ‘80후’의 김서연(1983-), ‘90후’의 한영남(1997-), 박초란(1996-) 등 신인들이 점점 활약해지는 것이 기꺼운 일이다. 박옥남(1963-)의 소설창작을 두고 천상규(한영남)는 이런 비평 글을 썼다. “요즘의 몇 안 되는 조선족문학잡지와 신문들에서 박옥남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만큼 박옥남은 우리의 팔도사투리들을 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조선족작가이기 때문이다.”(‘팔도사투리로 엮어가는 중국 조선족 삶의 현주소―박옥남의 팔도사투리를 따라 그녀의 고향을 가다’ 《‘도라지》, 2012년 3호) 박은희(1978-)의 단편소설 ‘바람의 뜰’, ‘네 번째 맞선’, 수필 ‘어느 지루한 날의 지루한 이야기’를 두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소설을 시처럼 쓰고 수필을 소설처럼 쓰는 수준의 제고는 우리 작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과시한다는 것이 박은희의 근작을 읽는 필자의 생각이다”고 하였다(‘사랑의 원근법, 상식과 인습에 대한 역설―박은희의 근작을 놓고’, 《도라지》, 2013년 6호). 김금희(1979-)의 소설 창작에 대하여 박사연구생 노신주는 이런 평가를 한다. 김금희는 “신진작가답게 당대사회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근대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파악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여기서 근대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성찰적 태도와 작가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격변기를 겪는 우리 사회에 던진 일종의 각성의 메시지가 된다 하겠다.”(‘김금희 소설의 근대성 성찰’, 《장백산》, 2014년 4호) 김춘택(1972-)의 단편소설 ‘뱀과 남자(蛇郞)’를 놓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김춘택의 치열한 문학정신과 독특한 창작발상에 대하여 크게 치하하고 싶은 마음”이며 “김춘택의 끈질긴 자아성찰의 의지와 치열한 문학정신에 감동된다”하였다(‘치열한 문학정신과 독창적인 창작발상’, 《도라지》, 2013년 3호). 박초란(1996-)의 단편소설 ‘수박사냥꾼’, ‘빨간 벽돌’ 등 근작 4편을 두고 비평가 최삼룡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근년래 북경에서 야심찬 작품 활동을 벌리고 있는 박초란의 소설은 그 인성탐구의 깊이와 그 방법과 수법의 독창성으로 하여 필자의 주의를 끌고 있다.” “우리의 민족문화의 여건에서 사람들이 박초란씨의 작품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문제지만 창조주체가 이 처절한 실험을 어디까지 끌고 나가는가는 더 큰 문제일 것이다”(‘한 개체의 파편화된 실존과 상실된 자아―박초란의 근작 4편에 붙여’, 《도라지》, 2013년 4호). 구호준(1972-)은 특이하게 소설을 수개하는 젊은 작가다. 그는 소설을 수개할 때면 언제나 컴퓨터에 저장된 처음의 원고를 지워버리고 다시 사작하여 새롭게 쓴다. 이렇게 새로 쓰기를 거듭하여 마음에 드는 최종 완성고를 내놓는다. 그의 중편소설집 《사랑의 류통기간》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이렇게 완성된 작품이다. 우리 문단에 특이한 형상이라 해야 할것이다. 젊은 소설가중에서 현재 연변작가협회 소설 창작위원회 주임으로 있는 김혁(1965-)의 소설 창작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지난세기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연변인민출판사, 1999),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연변인민출판사, 1998)를 펴냈고 새천년에 들어서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연변문학》, 2010년 연재), 『마마꽃 응달에 피다』(상해원동출판사, 2014),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연변문학》, 2003년 연재), 『완용황후』(《도라지》, 2013년 연재)를 펴냈고 명년 (2015)부터 《연변문학》에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연재한다. 그는 현재 장편소설 『무성시대(火焰) 』가 2013년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중점지지 작품에 당선되어 집필중이다. 장편창작 외 그는 또 수십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윤동주 문학상, 김학철 문학상, 《연변문학》상(2차), 《장백산》문학상(2차), 《도라지》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2차),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주정부 ‘진달래’문학상(2차), 한국재외동포재단 한민족 청년상, 한국계몽사 해외문학상 등 30여차 수상을 하였다. 비평가 조성일 선생은 김혁의 창작을 두고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장백산》, 2014년 2호) 하였다. 형상적인 적절한 비유다. 2014년 10월 19일,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의 지지와 후원으로 연변작가협회, 중앙민족대학, 연변대학은 공동으로 “50후”소설가작품연구세미나를 연길에서 가졌다. 허련순(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김관웅은 《중국조선족 페미니즘, 디아스포라문학의 선두주자 허련순의 소설세계》, 연변대학박사생 김미란은 《디아스포라의 치유와 소통의 꿈을 담은 》 론문을 발표하였다. 리혜선(1956-)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김경훈은 《리혜선의 작품세계를 말하다- 녀성 인물형상을 중심으로》, 평론가 조일남은 《가족과 운명, 그리고-리혜선의  관견》론문을 발표하였다. 최홍일(1954-)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영변대학교수 김호웅은 《치열한 작가의식과 철학적 안목- 최홍일의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연변교육출판사 김호선생은 《최홍일의  소고》론문을 발표하였다. 리여천(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우상렬은 《리여천의 작품세계》, 북경제2외국어대학교수 김영옥은 《한 가족과 민족의 수난의 기록- 리여천의 소설세계》론문을 발표하였다. 우광훈(1955-)의 소설작품에 대하여 연변대학교수 리광일은 《인간과 자연의 관련속에서의 우광훈의 소설-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흑룡강대학교수 리태복은 《실존의 본연을 찾기 위한 ‘흔적’ 만들기와 지우기- 우광훈의 장편소설 을 앞에 두고》론문을 발표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 “50후” 5명 소설가들의 소설작품세계를 집중조명하였고 기타 참석자들도 열렬한 발언을 하였다.   부단히 탐구하는 시문학   조선족시단은 시인들이 부단히 탐구를 하고 자주 쟁론이 벌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1987년 김정호가 쓴 모더니즘 시 ‘추억’을 두고 시단에는 쟁론이 있었다. 이 쟁론을 통해 많은 시인들은 사상을 해방했고 문학의 본연을 추구하며 창작기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부터 많은 시인들이 나름대로 탐구의 길에 들어선다. 시인 박화는 주지시를 주장하면서 탐구에 열중하였고 시인 한춘은 현대식창작을 고수하면서 흑룡강의 젊은 시인들을 이끌었다. 그중의 조광명은 선시(禪詩 )창작을 탐구하여 적지 않은 시편들을 내놓았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조선족시단은 탐구를 계속하는 것이 돋보이고 쟁론도 활발히 진행되는 것이 기꺼운 일이다. 김파는 1986년부터 지(知), 정(情), 의(意) 3자를 융합한다는 입체시(立體詩)를 들고 나온 시인이다. 그때 비록 문단에서는 약간의 부정적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는 탐구를 게을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탐구작 시집을 내놓았다. 『대륙에 묻혀있는 섬』(동아출판, 1988.12), 『겨울나비』(명문당, 1992.12), 『하얀 메아리 새』(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2월), 『보랏빛 이유』(요령민족출판사, 2004년 8월), 『태양의 종소리』(연변인민출판사, 2005년 10월), 『프리즘 속에 비낀 풍경』(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월) 등 탐구작 시집을 펴냈고 2005년 4월 에는 『입체시론』(요령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다. 그의 시 탐구는 한국의 비평가 임헌영선생과 노시인 고은선생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고은선생은 김파의 시집 『대륙에 묻혀있는 섬』의 발문에서 “시 ‘소라의 슬픔’은 퍽이나 소녀 적이다. 소녀 적인 정서 안에 담겨진 우주관은 달관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는 순전히 언어에 부딪치는 주지적 감각시로서 이것이 곧 김파 시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고은선생이 긍정하는 ‘소라의 슬픔’을 옮겨본다.   썰물이 너를 버리고 갔구나 작은 발자국에 고였던 물 해가 홀짝 마셔버렸으니 울어도 소리 없는 생명이여 애들의 여린 웃음소리에 미물의 영혼 하늘에 오르고 이승에 남아 휘파람 부는 껍질 소꿉놀이 파란 꿈만 담겼구나 ―시 ‘소라의 슬픔’ 전문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장기간 김파의 시 창작을 지켜보고 그와의 대화를 여러 번 가진 다음 시인과 시작품을 연구한 ‘『김파론』(도서출판 백암, 2010년 10월)을 펴냈다. 최룡관 시인은 지난세기 90년대 후반기부터 시의 이미지에 모를 박고 시를 쓰고 연구를 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서서 ‘이미지시 창작론’을 《장백산》에 4개 부문을, 《도라지》에 2개 부문을 발표하였다. 2003년에 이 창작론을 둘러싸고 문단에서는 쟁론이 있었지만 시인은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 제5기 문학강습반에서 ‘이미지시 창작론’을 강의하면서 청년시인들의 시창작을 지도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시의 문외한이었던 심명주가 시의 이미지를 파고들면서 반년 만에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을 따내었고 심예란이 ‘제22차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우수상을 획득하였고 그 뒤에 또 박춘월이 《연변일보》 ‘해란강’ 부간을 통하여 ‘CJ’문학상을 획득하였으며 심명주와 심예란이 ‘정지용 문학상’을 따내어 각기 시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최룡관 시인이 제창하는 이미지시란 미국의 루이스가 말하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묘사된 언어의 그림”, 영국의 시드니가 말하는 “시는 말하는 그림”, 한국의 문덕수가 말하는 “글로 그린 그림” 또는 “언어의 회화”이다. 최룡관 시인은 이미지시를 제창하면서 자신도 이미지시를 많이 썼었다. 그의 시 ‘바다의 아침’을 지면에 옮긴다.   하얀 백마떼들 질주하는 파란 잔디밭에 갈매기들 오선보 그으며 음표를 늘인다 백사장으로 달려왔던 백마들은 갈매기들 지은 노래 배우려고 다시 하늘가로 달려간다 머나먼 잔디밭에 샛노란 태양이 떨어지면 백마들 부르는 찬송가소리가 건뜻 하늘을 들어올린다 ―시 ‘바다의 아침’ 전문   최룡관 시인은 2007년 4월에 『이미지시 창작론』(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고 2009년 10월에 『최룡관 문집』(전 4권,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시집 『사랑링크』, 『이미지시 창작론』, 동화시집 『다리 하나 놓자야』, 기행문집 『연길-카스 2만리 기행』)을 펴냈으며 2012년에는 『최룡관 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출간하였다. 이 몇 년간 최룡관 시인은 또 하이퍼시를 창도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우리와 해외의 시풍을 접목시키는 일이며, 21세기 세계시의 새로운 흐름과 발걸음을 함께 하는 작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이퍼시란 다선시라고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개척자 테드넬슨이 만든 말이다. 하이퍼시는 조지•P란도의 ‘하이퍼텍스트’(1992)라는 책에서 란도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이 말을 한국시단에 처음 도입해서 쓴 사람은 문덕수시인과 하이퍼시 동인들(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이라고 한다. 최룡관 시인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소개하면서 자신도 이런 시를 내놓았고 시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2013년 10월에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문고의 명의로 시집 ‘비비(飛飛)’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연변 하이퍼시편’란에 강동한, 김견, 김승종, 김철호, 여순희, 박장길, 방산옥, 방순애, 신금화, 심예란, 정두민, 최려나, 최룡관, 허옥진, 황희숙 등 15명, 매인 5수, 도합 75수의 하이퍼시가 실렸고 ‘한국 하이퍼시’란에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은자, 문덕수,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심상운 등 12명 시인의 12수의 시를 선보였다. 그리고 ‘하이퍼시즌’란에 최룡관의 ‘하이퍼시에 대한 탐색’, 조지•P란도의 ‘하이퍼시 텍스트3.0’, 이선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연구’를 실었다. 여기서 최룡관의 하이퍼시 ‘비’를 옮긴다.   하늘의 이발이 와르르 내려와 보송보송한 땅을 뭉텅뭉텅 씹어 삼킨다 만리장성위에 여러 색 꽃물결이 사품치고 태양은 무수한 빨대로 땅이며 풀이며 나무의 물을 빨아 목을 추기다 시인은 사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징검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땀방울이 뚝뚝 이마에서 떨어진다 ― ‘비’ 전문   줄곧 입체시를 탐구하던 김파시인은 이 몇 년간 또 하이퍼시를 탐구하여 200여수의 시로 작품집을 묶는다고 한다. 하이퍼시의 탄생은 조선족시단의 하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조선족시단에서 쟁론이 제일 활발했고 또 쟁론시간이 긴 것은 필자의 토템시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2006년 8월부터 시작되어 근 4년 지속되었다. 쟁론의 핵심은 2003년에 출판된 42수의 토템시집 『원융』을 놓고 우리 민족 속에 무슨 토템물이 그리도 많은가 하는 문제였다. 실상 이것은 토템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 속에서 토템을 어떻게 찾는가, 성씨와 토템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민족학, 인류학적인 문제이다. 한 개 민족의 토템물 수량의 여하는 그 민족 성원들 성씨의 많고 적음, 역사의 길고 짧음, 민속신앙의 풍부와 빈약을 말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가 유구할수록, 민족성원의 성씨가 많을수록, 토템물이 많고, 민속신앙이 다채롭고 풍부하기에 그 민족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는 것이다. 토템시에 대한 쟁론은 우리 민족을 이해하는 좋은 장을 열어놓은 셈이다. 쟁론에서 승자나 패자는 없는 것이다. 부동한 견해 모두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원동력이다. 필자는 특히 반론에 감사한 마음이다. 반론이 있기에 독자들의 흥취를 자아냈고 반론이 있기에 쟁론은 심도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반론자, 찬론자 모두 공로자이다. 어차피 토템시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지간의 조화, 인류의 평화를 호소하는 것으로 세미나나, 쟁론은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문단에서는 4차례의 세미나가 있었고, 한국 한림대, 부경대의 주선으로 4차례의 한중세미나를 가졌으며 중국주류문단은 나름대로의 흥취로 4차례의 세미나가 있었다. 하나의 시작품을 두고 12차례의 세미나가 있었다는 것은 작자로서는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기꺼운 일이 있다. 현하 한국학계는 성씨문화연구에 관심을 돌려 적지 않은 연구서적들이 나왔다. 그중 일부를 나열하면 조상신 연구가 김문순의 『조상성씨의 세계』(도서출판 답게, 2009년 3월), 서해숙의 『한국성씨의 기원과 신화』(민속원, 2005년 12월), 김정호의 『한국의 귀화성씨―성씨로 본 우리 민족의 구성』(지식산업사, 2003년 12월), 박기현의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성씨』(역사의 아침, 2007년 3월), 김정현의 《김씨姓 이야기》(보고사, 2013년 9월) 등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우리 민족의 구성을 이해하고 민족의 토템물을 이해하는데 좋은 계시를 주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알고 자기의 민족을 진정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넓지 않은 조선족시단, 시인들의 탐구와 학계의 쟁론은 시문학 발전에 특수한 의의를 가지는 좋은 현상이다. 조선족시단은 이러한 풍경 속에서 점차 성숙의 길로 나갈 것이다. 요즈음, 조선족시단에는 또 좋은 일 하나가 있다. 최룡관(1944-)시인의 주선으로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은 길림성 조선족 경제 과학기술 진흥총회의 경제지원으로 조선족시단의 원로시인 김철(1932-), 김응준(1934-), 조룡남(1935-), 이상각(1936-) 네 분의 공적을 기리는 ‘시스승님상’ 시상식을 10월 18일 연변에서 가졌다.   인기 있는 수필문학   수필창작은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새천년에 들어서서는 작가들이 즐겨 쓰는 장르로 되었다. 조선족문단에서 최초에 수필의 매력을 보여준 작가는 양은희와 남영도(남복실)이다. 신문사에 직업을 둔 양은희는 드넓은 시야, 다양한 생활내용, 독특한 구상, 재치 있는 글 솜씨로 수필의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하였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남복실은 진지한 감정과 참신한 글 솜씨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많은 작가, 특히 여성작가들이 수필을 쓰는 붐이 일어났다. 제8회(2002-2004)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평선에서 이선희의 수필집 『어머니의 사랑』이 선참으로 수상의 영예를 지녔다. 제10회(2008-2011)중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평선에서 장정일의 수필집 『세모의 설레임』(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0월)은 명액의 제한으로 아쉽게도 수상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족문단의 수필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현하, 조선족의 어느 잡지나 신문을 물론하고 수필작품이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비평가든 느낌과 감촉이 있을 때 흔히 수필로 표현한다. 독자들도 짧은 수필을 즐겨 읽는다. 적지 않은 작자들은 수필창작을 고수하고 또 수필창작의 성과로 작가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수필장르는 조선족문단에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지속적인 창작풍기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간행물에서는 작가들의 수필작품을 집중조명하는 붐도 일어나고 있다. 《장백산》은 다년간 매호마다 ‘계열수필’란을 설치하여 한 작가의 수필작품을 집중조명한다. 금년(2014)의 경우를 보면 이러하다. 《장백산》 1호에 서정순의 계열수필 ‘열사흘, 딸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싣고, 이진윤의 수필평 ‘정에 얽혀 정으로 엮는 사랑노래’를 발표하였다. 《장백산》 2호에 채복숙의 수필 ‘가을바람 소슬하니 술 데우고 친구 부르자’(외 3편)에 최학송의 수필평 ‘불혹의 사색과 포용’이 실렸다. 《장백산》 3호에 금이(김금희)의 수필 ‘나의 땅강아지’(외 2편)에 노신주의 수필평 ‘인간성에 대한 사색과 관조’가 실렸다. 《장백산》 4호에 김영옥의 수필 ‘푸른 하늘을 꿈꾸며’(외 3편)에 우상렬의 수필평 ‘김영옥의 수필 삼매경’이 실렸다. 《장백산》 5호에 구호준의 수필 ‘밤의 여행자’(외 2편)에 유려의 수필평 ‘답을 찾고 있는 즐거운 여행자’를 실었다. 이번호에 조선족고급간부로서 조선족사회의 인기를 모은 신봉철의 수필 ‘어머니를 그리며’(외 4편), 그리고 신봉철인상기인 남영전의 ‘신봉철현상의 계시’, 남명옥의 ‘현명한 지도간부―신봉철 서기’를 ‘기획조명―작자와 작품’란에 실어 조선족사회에 좋은 반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도라지》는 해마다 한해 본 지면에 발표된 수필작품을 한번 돌이켜보는 총화의 평을 싣는다. 조선족문단에서 짧게 쓰는 수필이 그 편폭이 늘어남에 따라 ‘중편수필’이란 호칭이 달리기도 한다. 《도라지》(2012년 1호)에 발표된 조광명의 중편수필 ‘기록: 2012년 2월 20일 전화사연’, 동년 6호에 발표된 이홍규의 중편수필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가 그 사례로 된다. 조선족문단에서는 모든 작가가 다 수필을 즐겨 쓰고 해외에 있는 조선족작가들의 수필도 종종 여러 간행물에 얼굴을 보인다. 1997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엄정자는 2011년 8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민족작가 수작의 교류의 장 《민족문학》(조선문판)   《민족문학》(조선문판)은 중국작가협회의 기관지인 《민족문학》잡지사가 소수민족모어창작을 격려하고 모어독자들을 위해 중앙관계부문의 비준과 경제지원을 받아 2009년에 몽골어, 장어, 위글어, 세 개 문판의 잡지를 펴낸 다음 2012년에 까자흐어판 잡지와 함께 창간된 중국 5개 소수민족어판 잡지중의 하나로서 국가급 잡지에 속한다. 《민족문학》(조문판)은 격월간으로 매호에 ‘명작감상’, ‘특별추천’, ‘모어창작 작품’, ‘우수민족작품’, ‘평론’ 등 다양한 종목내용을 설치하여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수작을 발표하고 ‘세계문학’난에 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그의 창작세계를 소개한다. ‘모어창작 작품’에 게재되는 조선족의 작품은 조선문 잡지와 신문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선정된다. 금년 10월까지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도합 13권이 출판되었다. 2012년 《민족문학》(조선문판) 창간호(9월-10월)의 ‘특집’난에 《민족문학》의 전임주필, 노시인 김철선생의 시 ‘명상’(외 3수), 그의 창작담 ‘갈피 없는 나의 생각’, 그리고 김형직의 평론 ‘시인 김철의 생애와 창작의 길’을 실었다. ‘소설’난에 허련순의 ‘거미를 살려줘’, 채운산의 ‘땅의 자식들’이 발표되었고 ‘시’란에 《인민일보》의 수상작 남영전의 시 ‘인간의 정’이 실렸다. 2012년 제2호(11월-12월) 《민족문학》(조선문판)에는 “제10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특집”난에 김호웅의 수상작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발취), ‘소설’난에 《민족문학》의 수상작 김인순의 ‘오동’이 실렸다. 《민족문학》(조선문판)은 2013년 제1호부터 ‘모어창작’난을 설치하여 당해에 매호 2편의 모어작품을 채용했고 2014년부터는 3편으로 늘어났고 많을 때는 5편까지 실었다. 모어란에 발표된 작품이 많지 않기에 장르별로 2013년 1호부터 금년 5호까지의 모어작품을 한번 나열해본다. 단편소설, 2013년: ‘유목민들’(김서연, 2호), ‘왕씨’(최국철, 3호), ‘참새’(소리, 5호), ‘소리가 보이니?’(김영해, 6호). 2014년: ‘아B정전’(허련순, 1호), ‘바위벌레’(박옥남, 2호), ‘추(醜)의 이중협주곡’(박은희, 3호), ‘판도라의 상자’(박초란, 4호), ‘반편들의 잔치’(강재희 5호). 수필, 2013년: ‘진달래’(이태근, 1호), ‘나는 60억을 왕따시켰다’(한영남, 2호), ‘어머니의 사월 초파일’(강용운, 3호), ‘시인보다 가난한 라면은 없다’(조광명, 5호), ‘목동의 눈 속에도 소가 있네’(양영철). 214년 ‘망월송’(임선자, 1호), ‘사랑은 뭘 먹고 사나?’(이홍규, 2호), ‘400년과 만나다’(김홍란, 2호), ‘겨울 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이화, 3호), ‘막걸리 한잔 하실래요’(전연, 4호). ‘풋강냉이’(이춘열, 5호). 시작품, 2013년: ‘지는 장미 앞에서’(박경상, 1호), ‘위태로운 마침표’(조광명, 6호). 2014년: ‘깨어난 빛은(외 1후)’(석화, 1호), ‘시간(외 6수)’(이임원, 1호), ‘춘삼월(외 1수)’(김혁일, 2호), ‘서탑’(김창영, 2호), ‘중국의 꿈’ 공모 작품 수상작 시 ‘희망과 꿈’(남영전, 2호), ‘시계(외 3수)’(최화길, 3호), ‘섬의 여인’(김옥결, 4호), ‘민들레(외 1수)’(강효삼, 5호), ‘못박힌 긴 영원(외 1수)’(김파, 5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매년 모어우수작과 우수역작(한어 조선어 번역)을 평선하고 시상식을 가진다. 2012년의 수상작은 허련순의 소설 ‘거미를 살려줘’(창간호), 남복실의 수필역작 ‘장마철’(2호), 이범수의 시역작 ‘나의 전서’(2호). 2013년의 수상작은 최국철의 소설 ‘왕씨’(3호), 장춘식의 소설역작 ‘장미장원에서의 일곱밤’(2호), 김성우의 소설역작 ‘이제 가면 언제 오나’(3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또 중한문학교류의 장이다. 2012년 11월, 한국 언어문화교육진흥원 원장 소설가 신상성 교수(용인대)가 북경에서 《민족문학》잡지사를 방문하고 교류의사를 밝혀 창간호에 실린 철응(鐵凝, 한족)의 ‘기침 깇는 고니(咳嗽天鵝)’, 이시단쩡(益希丹增, 장족)의 ‘갈림길(向南還是向東)’, 2013년 2호 예메이(葉梅,투쟈족)의 ‘장미정원의 일곱밤(玫瑰莊園的七個夜晩)’ 세편의 단편소설을 아시아문학 콩쿠르상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2013년 4월에 ‘2013년 아시아대표문제소설’(창조문학사)를 펴냈다. 2013년 4호 ‘민족문학’(조선문판)은 ‘한국문학작품특집’을 꾸려 김경희의 소설 ‘꽃배’, 신상성의 수필 ‘중국소수민족정서와 조화의 큰 마당’, 신수연의 평론 “한국에서의 ‘블랙스완’의 광폭성”, 그리고 6명 시인의 시작품, 장자통의 ‘나비가 된 대왕고래(외 1수)’, 임승민의 ‘언두부(외 1수)’, 이철현의 ‘철 잃은 넝쿨장미’, 정시언의 ‘나비효과(외 1수)’, 조성순의 ‘고등어(외 1수)’, 김금용의 ‘완전범죄’ 등이 실렸다. 2013년 7월 27일, 《민족문학》잡지사는 할빈에서 중한작가좌담회를 가졌다. 중국측에서는 작가, 번역 50여명, 한국측에서는 신상성 교수 일행 13명의 작가, 시인들이 참석하여 진지하고 열렬한 토론을 가졌다. 필자도 이 좌담회에서 ‘민족문학’(조선문판)에 대한 일가견을 이야기하였었다.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수상작   중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수작을 표창하기 위하여 1982년에 설립한 국가급상이다. 이 상은 중국작가협회의 4대 문학상 중의 하나로서 모순문학상(장편소설), 노신문학상(중단편소설, 시, 산문, 실화, 평론, 번역), 아동문학상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상이다. 소수민족신분의 작자가 중국내의 정식간행물과 출판사에서 발표되거나 출판된 작품(모어, 중문창작)은 모두 평선에 참석할 자격을 가지고 한족작자의 소수민족어 중문번역 작품도 평심자격을 가진다. 이 상은 지난 제9회(2005-2007)까지 매 3년에 한번 진행되다가 제10회(2008-2011)부터는 4년에 한차례로 바뀌었다. 상금도 제9회까지 조금 낮았지만 제10회부터는 노신문학상, 아동문학상과 똑같이 인민폐 10만원으로 올렸다(장편소설 모순문학상은 상금 인민폐 50만원).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은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시집, 산문집, 실화문학, 번역 등 장르를 망라한 상으로 제7회(1999-2001)까지 수상작의 수량이 많았지만 제8회(2002-2004)부터는 엄격히 매 장르에 5편(부)로 제한되었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조선족작자들의 수상작을 아래에 옮긴다. 제7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1999-2001) 이혜선의 장편소설 『빨간 나비』(중문) 고신일의 중단편소설집 『9월의 눈물』(조선문) 김학천의 시집 『세기지교의 고행』(중문) 이옥화의 조선문의 중문번역 제8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2-2004) 박선석의 장편소설 『쓴웃음』(조선문) 남영전의 토템시집 『원융』(중문) 이선희의 산문집 『어머니의 사랑』(조선문) 제9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5-2007) 김학송의 시집 『사람들 속에서 인정을 갈망하다』(조선문) 장춘식의 평론집 『일제점령시기 조선족이민문학』(조선문) 제10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2008-2011)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중문) 김호웅의 인물전기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조선족교육가 임민호』(조선문) 심승철의 조선문의 중문번역 필자는 제9, 10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의 평심위원으로 평심과정을 통해 받은 감촉이 크다.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중 인구수자로 12위에 있지만 인구비례로 따지면 타민족보다 작가들이 많은 편이고 작품의 질도 높다. 때문에 매번 모어수상작 2편(부)가 보장이 되고 중문작품은 전체평심위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 7회에서 10회까지 4회의 평심활동 중 중문으로 된 2부의 장편소설과 2부의 시집이 수상을 하였다. 제10회 ‘준마상’ 경우, 조선족의 수상작은 3편, 이 숫자는 소수민족 중 많은 인구를 가진 장족(5편), 몽골족(4편)보다 좀 적지만, 위글족의 3편과 맞먹는 숫자이다. 역시 많은 인구를 가진 만족과 회족은 각기 2편이고 까자흐족, 이족은 1편밖에 안 된다. 조선족의 문학창작은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활동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있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맺는 말   이상으로 필자는 윤곽적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학의 흐름을 장르별로 살펴보았다. 보다시피 조선족문단은 점차 활발과 성숙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시인, 작가들 지간의 관계도 이해, 관용, 포옹의 길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금후 조선족문학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어쩌다 보니 말이 빨랫줄처럼 길어졌다. 이쯤에서 끊는다.   2014년 10월 20일 장춘에서 (본고는 2014년 10월 31일~ 11월 1일, 한국공주대학 “중국조선족작가 초청포럼”에서의 발표문임)    남영전 약력   남영전, 1948년 길림성 휘남현 출생. 길림성작가연수학원 졸업. 미국세계문화예술원 영예문학박사, 대형문학 간행물 《장백산》잡지사, 《길림신문》사 사장 겸 총편집 역임. 현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부회장,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미국세계시인대회, 영국국제전기협회 종신회원,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연구원, 길림대학 문학원, 동북사범대학 상학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겸직교수, 제9, 10기 중국소수민족 문학 ‘준마상’ 평심위원. 1971년 중문시작품으로 중국문단 데뷔. 『상사집(相思集) 』, 『원융(圓融) 』, 『남영전 토템시집(南永前圖騰詩集) 』 등 시집 16권,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 수필집 3권, 중국고전문학번역 『당송전기선집』, 『봉신당』 등 3부 출판. 3차례 국가급상인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6차례 전국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4차례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등 50여차례 각종문학상 수상. 한국에서 《문예시대》‘제1회 해외동포문학상’, 호미예술제 ‘제1회 중국조선족문학상 본상’ 등 4차례 문학상 수상. 1986년이후 창작한 토템시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지간의 조화와 인류의 평화를 호소하는 새로운 시 장르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 지금까지 300여편의 논문이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되었고 학자, 전문가들의 『남영전 토템시학』, 『남영전 토템시의 인류학경지』, 『남영전 토템시연구』 등 학술저서, 논문집, 감상집, 서예시화집, 정각집 13권이 출판. 1995년 이래 국내외 10개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12차례 ‘남영전 토템시 연구세미나’를 진행.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 ‘남영전 토템시 연구’를 공공학과로 설치해 교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는 국내 일부 대학 석사, 박사 연구생의 졸업논문제목이 되었음.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 작문모의시업제목으로도 선정되었음. 2014년 4월 23일 ‘세계 독서날’을 맞아 길림성열독협회와 길림성작가협회는 남영전 토템시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們從哪里來)’를 전민열독작품으로 선정하고 독서회를 진행, 5월9일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토템시문화축제”가 있었음. 1993년, 2003년 미국세계문화예술원에서 두 차례 문학영예박사 학위 수여, 영국, 미국세계명인전기센터에서 ‘20세기 성과상 메달’, ‘세계걸출인물메달’ 등 4개 메달 수여. 1995년부터 중국 국무원 특수수당금 획득, 2008년 길림성고급전문가로 평선, 2010년 중국당대 10대 걸출민족시인으로 당선, 2013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 개혁개방 30년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로 평선.   [편집]본지 기자 
1296    윤동주가 좋아했던 아동문학가 - 윤석중 댓글:  조회:2617  추천:0  2018-11-16
      100년 전, 어린이의 영원한 벗이 태어나다 한국 문학사에서 1930년대는 ‘상실의 시기’로 기록된다.  실제로 당시 문학을 보면 부모와 고향을 잃거나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그린 작품이 많다.  일제의 수탈과 착취가 심해진 결과인데, 이러한 작품들은 공교롭게도 1911년에 태어나 갓 스무살을 넘긴 문인들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태어나 상실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밝고, 맑은 노랫말로 동심(童心)에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이가 있다. 1,000여 편에 이르는 동시와 동요로 어린이들에게 밝은 마음을 심어준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이다. 소년 문사, 글을 쓰다  1911년 5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난 윤석중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년 문사로 활약했을 정도로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13세 때인 1924년 어린이 잡지《신소년》에 동요 〈봄〉으로 등단해 동요를 짓기 시작했는데 윤석중이 아동문학에 정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윤석중은 열 살(1921년)이 되어서야 교동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늦게 들어간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은 이상하기만 했다. 우리 말, 우리 글이 있는데 일본 동요만 배우고, 그 노래를 못 하면 야단을 맞는 일제 치하의 현실이 어린 석중에게는 한없는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열두 살 때 소파 방정환의 주도로 열린 첫 번째 어린이날 행사를 보고 ‘어린이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 민족의 미래가 있다’는 해답을 얻은 윤석중은 우리말의 재미와 아름다움을 살린 동요로 필명을 날렸다. 또한 1929년에는 작곡가 홍난파와 교유하면서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를 탄생시켜 그 전까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같이 한숨과 눈물이 나는 ‘창가(唱歌)’를 불렀던 어린이들에게 아이들의 노래를 선사했다. 창작 동요의 1세대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쓴 윤석중이 ‘한국 동요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한국 노래에 전통적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율동감은 시조에서 3·4조, 민요에서 7·5조, 가사에서 4·4조의 율격(律格)으로 나타나는데, 윤석중은 이 3가지 율격을 종합한 생동감 있는 기본 리듬으로 동요를 써 그의 노래를 부르면 누구나 숨결에 와 닿는 따뜻한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나라는 어렵고, 시대는 암울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자라나는 세대들이 밝은 노래를 불러야 '한(恨)'으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정서가 아이들의 마음에 파고 들지 않고, 아이들이 희망을 노래해야 나라의 미래도 밝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자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윤석중은 1933년 국내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펴내고, ‘기차길 옆 오막살이’, ‘우산 셋이 나란히’ 등 요즘 아이들도 즐겨 부르는 동요를 연이어 발표했다. 80년 가까이 1200여편의 노랫말을 지은 동시의 역사 1942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징용을 피해 곧 귀국한 윤석중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새 나라의 어린이’로 표현했다. 또 그 이듬 해에는 한국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며 ‘어린이날 노래’를 지었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를 만드는 등 제2의 창작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마음에 슬픔이 괴여갈수록 자라나는 아이들이 희망이라 믿은 윤석중은 1956년 ‘새싹회’를 창립해 어린이를 위한 각종 사업을 전개했고 2003년 12월 9일 타계하기까지 1천300여 편의 동요와 동시를 남겼다. 이같은 공로로 1978년 동양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창작상)’을 받은 윤석중은 “동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정을 나누는 마음”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믿었던 대로 한국의 어린이들은 “♬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윤석중이 지은 ‘어린이날 노래’의 새와 냇물처럼 푸른 하늘과 푸른 벌판을 날고 달리며 자라서 아들 딸을 낳아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를 불러주며 키우고, 그 아들 딸들은 장성해 자신의 아이들에게“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같은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니, 우리의 마음은 윤석중의 노래가 있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
1295    윤동주와 윤석중 댓글:  조회:3086  추천:0  2018-11-15
  시대 현대 출생 1911년 5월 25일 사망 2003년 경력 새싹회 회장 유형 인물 직업 아동문학가 대표작 『윤석중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어깨동무』, 『굴렁쇠』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본관 파평 요약 1911∼2003. 아동문학가. 목차 개설 생애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개설 아명 노마, 호 석동(石童). 1911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수표동 13번지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째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이 일찍 죽어 독자로 살았다. 1921년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했다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가 발발하자 자퇴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뽑혀서 일본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에 유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박용실과의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생애 1923년 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심재영, 설정식 등과 소년문예단체 꽃밭사를 결성하고 동인지 『꽃밭』을 발간했으며, 1924년소용수, 이원수, 이성홍,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 이정구, 윤복진, 최경화 등과 글벗사를 만들어 동인지 『굴렁쇠』를 발간하며 일찍부터 소년문예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소년주간』 주간, 1945년 『주간 소학생』 주간,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 등을 거치면서 동요의 창작과 보급에 일생을 바쳐 ‘한국 동요의 아버지’로 불린다. 활동사항 그는 13세의 나이로 『신소년』에 동요 「봄」이 입산되고,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다음,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되었으며,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그는 작품의 소재를 어린이들의 일상과 자연에서 찾았다. 그의 동요 세계는 4·4조나 7·5조의 형태에 반복과 대구를 사용하던 초기의 정형동요에서 시적 동요로 나아갔고, 낙천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어린이들의 밝고 긍정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형상화한 특징을 보였다. 그는 1956년 1월 3일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등과 새싹회를 창립하여 어린이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고, 1961년 장한 어머니상 제정했으며, 1964년 마해송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해송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67년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전국 30여 개 초등학교의 교가를 지어주었다. 그는 1974년 방송용어심의위원장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1977년 『새싹문학』과 『한글나라』 주간을 지냈다. 그는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79년 방송윤리위원장,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초대 방송위원장, 1986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1997년 마해송문학비건립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2003년 대전 국립현충원 국가사회봉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 2005년부터 새싹회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윤석중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 동요집 『윤석중동요집』(1932), 『잃어버린 댕기』(1933), 『어깨동무』(1940), 『새벽달』(1943), 『초생달』(1946), 『굴렁쇠』(1948), 『아침까치』(1950), 『윤석중 동요 100곡』(1954), 『노래동산』(1956), 『노래선물』(1957), 『엄마손』(1960), 『윤석중동요집』(1963), 『해바라기 꽃시계』(1966), 『카네이션 엄마꽃』(1967), 『꽃길』(1968), 『윤석중 노래동산』(1971), 『윤석중 동요 525곡집』(1980), 『아기꿈』(1987), 『윤석중전집 (1-30)』(1988), 동요동시집 『여든 살 먹은 아이』(1990), 『그 얼마나 고마우냐』(1994), 『반갑구나 반가워』(1995),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1999), 동화집 『열손가락 이야기』(1977), 『열두 대문』(1985), 아흔 기념 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2000) 등이 있고, 기간 작품들은 『윤석중전집 (1-30)』에 집성되어 있음. 상훈과 추모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리몬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 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KBS동요대상(1990), 인촌상(1992) ==========================///     출생 1911. 5. 25, 서울 사망 2003. 12. 9,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아동문학가. 1924년 지에 동시 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의 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방정환 선생의 뒤를 이어 지 주간을 맡았으며, 일생을 동요와 글짓기에 바쳤다. 대표작은 ·· 등이다.   윤석중(尹石重)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동문학가.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0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마쳤다. 1924년 에 동시 과 1925년 에 를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 및 반복과 대구를 사용해 율동적 표현을 구사하는 동시를 개발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주간, 1936년 주간을 역임했으며, 이후 편집고문, 고문,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3년 '새싹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에 펴낸 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며, 여기에 실린 ··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1933년에 펴낸 동시집 에는 기존의 3·4조나 7·5조의 음수율을 벗어난 동시 여러 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는 이 동시집을 통해 글자수를 맞추어 지은 것을 동요라 하고 자유롭게 지은 것을 동시라 하여 동시의 문학적 성격을 규정했다. 동시집으로 (1940)·(1948) 등과 동화집으로 (1966)·(1977) 등이 있다. 1961년 3·1문화상, 1979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대한민국 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22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129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아침 댓글:  조회:3188  추천:0  2018-11-15
휙,휙,휙,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는 소 엉덩이처럼 푸드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오.  잎,잎. 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오.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윤동주 / 아침 / 1936. ===================///   우선...제목이 아침이죠?? 그렇다면 시가 전체적으로 아침이 밝아오는 모습에 관해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우선 이 부분은 아침 일찍 일어난 소가 꼬리를 흔들며 어둠을 쫓는다는 표현이군요~ 아마도 일찍 일어난 소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밤의 어둠을 쫓아내는 채찍질로 생각한 것 같아요^^ 다음으로 캄,캄은 운율을 형성하기 위한 말로 보여지구요~ 아마도 뜻은 캄캄한 밤의 캄을 딴 거겠죠??^^ 그리고 어둠이 깊다깊다 밝는다는 것은 밤이 계속 깊어지면 시간이 지나 아침이 오니까... 그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약간 난해한 듯 하는 부분이나~ 그래도 이미지가 잡혀오는 듯 한데요~^^ 사실 저두 풀살 오른 소 엉덩이는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아침 해가 돋아 언덕이 풀빛으로 다시 밝아오는 것이 아마 풀살 오른 소 엉덩이처럼 보이지 않을 까요??^^ 콩죽 먹은 사람들은 아마도 가난한 농민들을 말하는 것 같고~ 여름을 기른다는 것은 여름까지 농민들이 고생해서 농사를 지어서 여름이 되어 농작물이 파릇파릇해 지도록 땀흘리며 노력했다는 이야기일듯 하고  이 부분은 역시 앞의 잎, 잎은 운율을 형성하기 위한 요소~ 풀잎마다 맺힌 땀방울은 농부들의 땀방울인 동시에~ 아침에 내린 이슬이겠지요~^^ 마지막 부분은~ 농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싱그러운 아침이 화자에게는 구김살없이 느껴져서 몇 번이고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는 거죠~^^ 아마도 주제는 이른 아침 농촌의 풋풋한 모습 정도가 되겠군요~^^ 이정도면 될까요??^^   ===========================///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조선어로 동시 쓰면 누가 읽겠어, 염려하는 친구 윤석중의 말에 “땅에 묻지”라고 박목월이 경주에서 말했던 해였다. 재일(在日)시인 김시종은 제주도에서 아잇적 조선어로 말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숫제 없어 시인 고은은 아잇적 머슴 대길이에게 가갸거겨를 배웠다(고은, ‘머슴 대길이’). 이때부터 일본어 친일시가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한글로 글을 쓰면 손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윤동주는 좋아하던 최현배 교수의 두툼한 ‘우리말본’(1937년)을 읽었다. 최현배 교수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수강했고, 입학하고 한 달 후 5월 10일 동주는 검박한 언어로 ‘새로운 길’을 썼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광화문에 현판으로도 걸렸고, 서대문구청에서 연북중학교 뒷면으로 이어진 ‘안산 자락길’ 산책로 왼편에 시비도 있어 친숙한 작품이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일 수 있다. 1연과 5연이 같은 수미상관이다. 2연과 4연은 묘하게 비틀린 대칭을 이룬다. 쉽게 오지 않을 희망을 그는 반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윤동주는 힘들 때 성찰할 때 산책을 즐겼다.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이 길(この道)’을 동생들에게 자주 불러줬던 그는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구절도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스승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스승 최현배와 제자 윤동주는 1940년대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고 한글을 잊지 않았다. 최현배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에서 함께 배웠던, 윤동주의 2년 선배 박창해는 광복 후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를 만들어 국어교과서 독립선언을 완성한다. 최현배는 제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신의 큰아들이 대표로 있는 정음사에서 가로쓰기로 낸다. 최현배는 여러 학자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시킨다.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29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겨울 댓글:  조회:3122  추천:0  2018-11-15
시래기와 말똥으로 그려낸 "쨍한" 겨울 -윤동주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1936년. 겨울) 윤동주(1917∼1945)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사후 단 한 권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를 냄으로써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특히 "서시"는 청순하고도 고결한 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애송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윤동주가 한 때 동시를 쓴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윤동주가 동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고향 용정에 있는 은진 중학에 재학할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는 당시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에서 "오줌싸개 지도"를 비롯한 수 편의 동시를 발표한다. 이후 연희 전문 재학 중에 지에 동시 "산울림"를 싣기도 했다. 은진중학 시절의 급우였던 문익환의 회상에 따르면 윤동주는 1,2학년 때 윤석중의 동요 동시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년이었을 윤동주에게, 지 소년문사에서 출발해 30년대 개성 있는 시인으로 거듭난 윤석중은 훌륭한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동시 "겨울"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추운 겨울 풍경을 너무나도 실감나고 선명하게 제시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실인즉슨 그 추운 풍경은 단 두 개의 사물 "시래기"와 "말똥"에 의지해 있을 뿐이다. 하찮고 천하기만 한 처마 밑 시래기와 길바닥에 떨어진 말똥 말이다. 이 작고 하찮기만 한 사물들은 그러나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영하 십 몇 도의 겨울 이미지를 대표하는 "선수"로 떠오른다. 처마 밑에 매달려 바삭바삭 추운 시래기 말고, 길바닥에 떨어져 달랑달랑 어는 말똥 말고 그 무엇이 추운 겨울을 더 "춥고 꼬숩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얼핏 보면 단순한 시이지만 이 시는 댓구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다. 처마 밑과 길바닥, 시래기와 말똥, 다래미와 동그래미, 바삭바삭과 달랑달랑, 추워요와 얼어요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이 시가 예사로 쓰여진 시가 아니라 상당한 공력을 들인 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20년대 우리 동요에 나타나는 가을의 정조는 대개 쓸쓸함이었다. 가을이 쓸쓸한 것은 뒤에 올 겨울이 죽음과 이별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겨울이 "쨍"한 울림으로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다. 바삭바삭 추운 시래기와 달랑달랑 어는 말똥에서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대하는 것 같은 생동감이 뿜어져 나온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거론하는 시들은 대개 그의 생애 막바지에 쓴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청소년기에 쓰여진 그의 동시들을 유년기로의 퇴행이나 습작기의 부산물쯤으로 깎아 내리고자 하는 의식이 아주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시 "겨울"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 숨겨진 천진난만함이야말로 이후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청순하고도 참담한 고뇌를 부여안는 따스하고 넉넉한 자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1292    한춘&김혁 댓글:  조회:2513  추천:0  2018-11-15
  한춘과 김혁의 문학대담 2018년 11월 11일 작성자: 김혁   . 대담 .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대담자   김혁&한춘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한춘 (시인, 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     김혁:      한춘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이렇게 메일로 “변강의 오지” 연변에서 “동방의 빠리” 할빈에 있는 선생님과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어 참 기쁘군요. 한춘:   반갑습니다. 김혁작가님.   김혁:   그런데 생님이 보내신 대담고가 저의 컴퓨터의 시스템이 구식이여서 파일이 열리지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려 신식 시스템을 쓰시는군요. 오늘 저희들이 이야기하려는 화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각 TV채널들에서 드라마 “신판 수호전”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붐을 타서 90년대판 “옛 수호전”도 어떤 채널들에서 더불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신구 드라마를 비교하하면서 시청하노라니 느끼는바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불변하는 명작의 매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가 합니다.   한춘:   네.마침 중국 항간에 도는 이런 말이 떠 오릅니다."나이들어서는'삼국(연의)'를 읽지 않고 어려서는'수호(전)'을 읽지 않는다(老不看三国,少不看水浒)" 말하자면 다 명작은 명작인데 부동한 년령에 따라 부동한 자세로 작품을 접수한다는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명작일진데는 명작으로서의 '매력'이 객관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 할때 응당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긍정하고 보편적으로 존중하고 보편적으로 선호한다는 공성을 띄고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이런 대담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조설근의 ”홍루몽” 원문을 읽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홍루몽”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30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만화책을 읽고 알게 되였다는 것, 영화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에니메이션을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테레비 특강을 듣고 알게 되엇다는 것,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엇다는 등 그 도경은 각기 달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공동한 점이 있으니 ”홍루몽”이 중국의 명작이고 보옥, 대옥, 보차의 삼각관계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는 점입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비록 작품 원문을 읽지 않았지만 ”홍루몽”이란 작품을 대체로 긍정하고 대체로 선호하며 대체로 숭상한다는 이 점입니다.    김혁:   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명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발표이후 오랜 시간 국계와 민족을 넘어 여러계층의 인류에 회자되는 명작들은 지난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있지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물결속에 “옥석”을 가려내기는 쉽지않습니다. 여기서 널리 회자된 명작들을 찾아드는것이 바로 그 옥석을 가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일겁니다. 그러고보면 명작들은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게 아닙니다. 명작만이 가지고있는 매력은 우리 독자들 더욱이 우리 문학창작자들이고 보면 영원히 읽어가야 할, 연구해 나가야할 화두이겠지요.   한춘:   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이 그 명작들을 소외하고 있다는 그점이지요. 학생들에게 다른 한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잎 얼마이던가(夢里花落知多少)를 읽어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수풀처럼 손을 들더군요. 나는 이 책을 한 30페지쯤 읽고 더는 읽어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작품의 재미는 20대 좌우 청춘남녀들의 구미에 맞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일흔을 바라는 나의 독서취미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혁:     곽경명은 어느 설문조사에서 로신, 파금(巴金), 로사(老舍), 가평오(贾平凹), 여추우(余秋雨)와 더불어 중국10대작가명단에 올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0대작가이지요. 제 딸애도 곽경명의 팬 입니다. 곽경명이 주필을 맡고있는 잡지 “최소설(最小说)”을 창간호부터 소장해 두고 있습니다. 몇백만부가 나가는 신세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알고있습니다. “소설월보”나 “수확”, “망종”같은 80년대 베스트 잡지를 읽어온 저의 세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보이는 잡지였습니다. 다른건 제쳐놓고도 오늘의 세대와 오늘 독자층의 미감을 겨냥한 모던한 잡지로서 그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잡지를 딸애네 또래들은 걸탐스레 읽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을 읽으라고 몇권 굳이 추천하니 “그런 ‘구닥다리’를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딸애또래들의 이런 반응을 보노라니 곽경명이 10대작가에 선정된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리던 비평가들의 론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비평가의 남다른 분석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청소년들은 류행문화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고있고 독자의 독서취미와 문화형성은 종합적인 형성과정이다. 례를 들면 류행가요, 네트워크 등은 청소년들의 문화형성에 거름을 주고있으며 문학은 단지 류행문화의 일부분일뿐이다.하기에 억지로 독자들에게 로사,파금의 작품을 읽게 하는것은 이제 더는 현실적인 독서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론점으로 볼때 신세대들을 위한 그들만의 적성에 맞는 열독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춘: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와 명작의 구별점을 화닥닥 팔리는 것과 오래 오래 줄곧 팔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사실 지금 신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취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있을 따름입니다.그러나 명작은 어느 한 사람의 취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은 다 문학감상과 예술감상에서 자기의 취미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내심 수요에 따라 좋아하는 어느한 풍격이라던가 어느 한 내용이라던가 혹은 어느 한 형식에 취미를 가질수있습니다.이런 취미는 타고 난 천성이며 천성이기 때문에 당당한 당위성과 합리성이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취미의 각도와 시점과 층차와 차원이 각기 부동할 뿐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표준과 대중적인 표준이란 두가지 표준이 있습니다.때로는 대중적 표준과 개인적 표준이 통일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때문에 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본다면 백사람이면 백 하나의 답이 있을수 있습니다.   김혁:   이른바 명작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요즘 독자들은 우수개로 말하더군요.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게 “명작”이라는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들어 달라진 독자들의 “열독취미”대로 명작은 대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려행기”,  “돈키호테”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른바 “잘 읽혀지는 명작”이라 할수 있지요. 이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라 하겠지요. “제인에어”, “몽떼그리스도 백작”, “삼총사”같은 작품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되겠죠.   다음 한가지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강”, 또스또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까뮈의 “페스트”, 유고의 “93년”같은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작가와 작품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완정한 문학 텍스트로 읽지 못한 이들이 많지요. 책의 분량이나 문체의 표현, 구성방식이 독자들뿐아니라 전문 창작자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유고의 “레미제 라블”같은 명작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듯 합니다.   한춘:   여기서 독자들의 시각을 헤아려 볼수 있겠지요. 로신이 ”홍루몽”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독자의 감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경학자들이 읽으면 '점치기'로 볼것이요 도가들이 보면 남녀 상열지사로 볼것이며 문인들이 보면 사랑이야기로 볼것이며 혁명가들이 보면 청나라를 반대하는것으로 볼것이고 난봉꾼이 보면 대궐안의 스캔들이라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라 할 때 명작으로서의 기본 요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예술표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작 예술 표준에도 여러가지 설법이 있겟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서 명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고 봅니다.   첫째 독자의 기본 심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 요소입니다. 이 매력요소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리론과는 좀 다른 견해일것입니다.모택동은 ”홍루몽”을 세번이나 읽었다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후에 두번 다시 읽으면서 홍루몽을 통해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력사를 읽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즉 작품의 심각한 철리, 사상, 시대성 등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령 철리나 사상이라 할때 이와같은 사상이나 철리는 다 우리 내심의 기본심성 본체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존재한것입니다.공자나 로자, 장자, 그리고 맑스나 헤겔이나 칸드의 사상이 다 위대한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고금중외 대현인, 대사상가,대철학가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만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튀워줄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본 심성의 각성을 대치할수는 없는것입니다. 명작이라 할때 작품에서 제시하려는 사상을 자기가 체득한 인간 심성의 보편적인 감수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일생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로 남아 있게 합니다.즉 명작은 작자의 감수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수를 새롭게 살려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둘째 명작은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를 개우쳐 준다.인간심층의식이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역성을 초월하여, 시간의 전후를 초월하여, 피부색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전달하는 하늘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예하면 궤테의 ”파우스트”는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일단 그 희구가 실현되었던가 자기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면 그 즉시 파멸, 추락,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는 영원한 추구의 힘을 실어다 줍니다.이점은 인간 실존의 기본이라고도 말할수 있거니와 이와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심층의식의 각성은 작품의 예술감화력, 즉 작품의 매력과 정비례가 됩니다.     셋째 명작은 남다른 독특한 작품 형식과 수사법으로 읽는 이의 신경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쌓은 ”금병매(金甁梅)”는 역사이야기를 쓴 ”삼국연의”나, 영웅전기를 담은 ”수호전”이나. 판타지같은 ”서유기”와 달리 인정세태, 세상물정을 쓴 명작입니다.서문경이 갑부로 된 이야기로부터 그가 쇠락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인정세태를 묘파하기 위하여 작자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그에 합당한 형식인 간결한 묘사(白描)법을 아주 능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로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금병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자는 당시 인정세태와 세상물정을 통달하였으며 손금보듯 환하게 잘 알고 있다. 작자가 형용한 것을 보면 혹은 류창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인 폭로로, 혹은 함축적인 풍자, 때로는 여러가지 수법을 겸용하여 서로 어울리어 변화무쌍하게 하는 등 정말 무릎을 칠 정도다.’금병매’작자의 간결한 묘사법에 관한 한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한 인믈을 쓸때 그 말투로부터 시종 일관하게 그 인물의 기본 성격을 그려냈는바 간결한 묘사 몇 마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었다" 그 어떤 형식을 취했든, 그 어떤 수법을 취했던 작품의 표달방식과 전달형태에서 독특한 개성을 구비했을 때 독자들의 취미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틀, 즉 형식이 있으며 이 형식이야 말로 읽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수 있습니다.   김혁:   네 때문에 비록 손쉽게 접하는 명작이라 해도 읽는자의 시각에 따라 틀릴수도 있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그 극적인 스토리와 뛰여난 판타지성격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에게도 매우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뛰여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젊은 층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들어 있어 베스트라는 쉬운 범주로는 묶을수 없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어눌한자의 코믹한 무용담으로 보이겠지만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지요. 또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데서 그 작품이 가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작에 대한 번안, 개작작업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진행되고있는것이지요. 그중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끊임없이 번안되고 드팀없는 사랑을 받는 “삼국지”를 일례로 들수 있겠지요.   한춘:   아시다싶이 중국, 한국, 일본은 이른바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서 고대로부터 상호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일찍 당나라시기 일본과 신라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 장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당나라는 빈공과를 설치하여 이와같은 외국 유학생의 과거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신라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그중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취록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신라방 사적이 유명합니다.즉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화가 일본과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상황을 살펴볼때 조선조 초기 선조(1568――1608제위)가 ”삼국지연의”를 읽었습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다니는 사절단들이 중국의 소설을 행장에 몰래 넣어 들여 왔고 가장 처음 정음으로 소설을 지은 허균(1569――1618)의 중국문학소개를 보면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서유기”등 중국의 명작이 이미 한국에 전파되였습니다.원래 유일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한 국가가 중국이며 이로서 중국문화에 경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시기 아주 발달한 중국의 소설문학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 소설에 경도되는것은 가히 리해할만한 일입니다.이때로부터 ”삼국지연의”에 관한 내용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재탕되었는데 시조에도 자주 나오고 서울 잡가에도 나오며 유명하기는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마당으로 자리를 굳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야기로 남게 되였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에 물젖은 한국인들의 사유방식과도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쇄문화의 발달과 다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삼국지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삼국지 파생물이 소비자들의 구미를 한껏 돋우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번역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찍 월탄 박종화의 번역이 있었으며 이어 리문열, 황석영의 번역서와 중국 조선족 리동혁의 번역서가 줄줄 이어 나오면서 한국독서계의 장안화제로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삼국연의란 명작 자체의 브랜드 자원을 빌린것도 있겠지만 전투장면의 세밀한 묘사, 대규모 전쟁의 용병술, 일대 일 교전의 충격,명책사, 명재상, 명장군 등 각 부동한 력사인물의 개성적인 성격과 그들의 운명 등이 가슴에 구멍이 나도록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놓고 볼때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높고 적극적으로 외국 문화를 접수하는 전통이 있으며 한국의 고전 군담소설에서 삼국지와 같이 인기를 끌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익숙하고 또 접수 수용에 거부감이 적은 중국의 삼국연의를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것은 선진문화에 대한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김혁: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는 그 정평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방영되고있는 “신판 수호전”에 앞서 “신삼국연의”가 새로운 버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화제가 끊기지않고 있지요. 총 95회라는 방대한 용량에 중국 최고의 연기자 군단과 거대한 투자가 결합되어 화려하고도 거대한 영상미와 숨 가쁜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진정 명작이라는 그 웅숭깊은 문화력의 력동을 보아낼수 있었습니다.   한춘:   이 현상은 마치 오월단오가 중국에서 유래되였다고 하더라도 오월단오에 담은 문화내역이 완전히 한국화되었고 또한 극대화 되어 강릉단오제가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여 유네스코에 기록된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도 한국의 종묘제레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 무형문화로 지정되고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지만 한국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여러 문화, 종교 령역에서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화라는것은 류동하고 접목되고 파생하는 특징을 갖고 잇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다 자체의 국한성과 제한성과 빈 공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타국이나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접수, 수용, 개조, 활용하여 자체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것이 인류뮨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김혁:   장예모의 영화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그 복색차림이나 미술배경이 일본의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 擇 明) 의  영화 “란(亂)”을 많이 닮았다고 비평가들이 꼬집었는데 면바로 보았지요. 그 복장설계는 다름아닌 구로사와의 손녀가 맡았던거지요.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서 장예모는 그 우수한 영상미를 수용하고 활용해 냈던거지요. 사실 구로사와 자신도 영화 “란”의 모티브는 쉑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따오지 않았습니까. 장예모의 경우 그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는 류항(刘恒)의 명작 “복희(伏羲伏羲)”를 개편한것이고 그 영화가 다시 무극으로 개편된적 있습니다. 또 이딸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세계적인 오페라 “투란도트(图兰朵)”도 장예모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적 있습니다.   조선족의 저명한 테너 김영철도 극중에서 한 인물을 맡은걸로 알고있는데요.   이렇게 명작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독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 수용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로운 명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대미감에 걸맞는 새로운 쟝르와 문체로 변화하여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거지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말하자면 그중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의 개편현상도 일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한춘: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된것은 커뮤니케이선이 고도로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그 진원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놓고 볼때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이런 문화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혁: 네.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어 있는 나라이지요. 일본에서는 오래전 90년대초에 이미 “삼국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2009년전에야 삼국지를 애니메이션화 했는데 그것도 제작진을 살펴보니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한춘:   네 그것이 이제는 또 게임으로 변화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또 한차례의 고조를 이루었으며 지금 중국도 청소년들이 여기에 매몰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은 도박성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인데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집을 저당잡히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편에 빠지면 안해까지 팔아 먹는다." 도박이 사람을 끄는 그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명작 게임같은것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력이 약한 그들에 끼치는 피해는 너무너무 엄청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태여나면서 즐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운것은 번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선호하고 이를 좋아하고 이를 반기는 청소년들이 많아 시장전경은 언제나 밝다. 이것이 명작 게임이 시들지 않는 원인입니다.   에니메이션은 게임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내 손녀가 지금 1학년에 다니는데 학교 가기전까지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데로부터 지금은 테레비나 컴퓨터앞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글자도 한 2천자쯤은 읽을수 있는 형편이며 슈제트 발전변화도 가히 알수 있는 처지라 집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여 손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아동프로만 보는데 주로는 에미메이션을 봅니다. 일단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하면 할매 할배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밥도 테레비 앞에서 독상을 차리고 먹습니다.아주 생동하고 기이한 인물 이미지 디자인, 그리고 층격을 주는 등장인물(등장물)의 엑션동작, 맑고 밝은 화면설계 등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끄는데는 너무도 충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손녀의 생활이 너무도 단조롭기에 테레비나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견문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출발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드문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제접 청산류수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이어 엮는다.말하자면 에니메이션은 아동들의 지력개발에 일정한 도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하기에 애니메이션제작이 요즘 영상 제작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미식”으로 되여 있지요.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꼬마양과 승냥이(喜羊羊 与灰太狼)”라는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캐릭터에 권선징악의 낡은 제재를 되풀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7억여원의 수입흥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춘:   그러나 여기에 역작용도 있을것입니다. 그 역작용은 적어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테레비같은 시청에 취미를 붙이면 앞으로 독서취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김혁:   저희 세대까지도 흑백텔레비 그리고 컴퓨터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환경을 지내왔습니다. 변변한 대중매체가 없어 어차피 도서에 친숙하게 되였지요. 그런 우리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에 로출된 요즘 세대가 독서에만 매여 있는다는게 사실 쉽지않은 일로 되여버렸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모바일등 을 통한 다양하고 현대화한 기기들을 통해 새로운 독서방식이 새 세대들에게 널리 풍미되고있습니다.   한춘:   도서는 인류문명에서 지금까지 창조한 가장 최고, 최상의 문화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성장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취미는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여야 하는것이지 다 큰 다음에 새로 독서습관을 키운다는것은 가능성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학을 지망한다던가 인문과학에 취미를 붙였다면 몰라도 대체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명작의 내용을 거의 다 알게 되면 앞으로 명작 본문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결과 그는 명작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명쟉을 읽고 읽지 않는것은 한 사람의 문화품위와 관계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긴 컴퓨나 테레비가 없을 때도 명작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해진 지금 작가지망생이 아니면 꼭 명작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것 또한 고루한 생각일것입니다.    김혁:   네, 절주빠른 요즘의 현대생활에서 몇권 지어 수십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작품의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등 여러가지 탓도 있을 것이구요. 때문에 명작을 번안함에서의 현대독자들의 새로워진 감수에 맞추기 위해 제작자들은 고심하고 있지요. 그 좋은 일레가 삼국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중국 방송국들은 삼국지를 드라마로 만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완연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삼국지”의 재래의 판본들은 전체적으로 류비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조조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러한 틀을 버리고, 삼국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그려냈으며 “간웅” 조조를 시대의 영웅으로 발굴해 새롭게 력사의 무대에 올려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지”하면 무조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도원결의”는 이번 작품에서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   언어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정통사극 형식을 따르면서 매우 “난해한” 용어들이 많았다면, 신작의 경우에는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웅장하고 스케일이 넘치는 화면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도로 바쁜 절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참조계의 “성찬”에 미뢰을 잃고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는 독자군에게 명작의 진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지요.   서점가에서 보니 “자동차족(汽车族)”들에게 명작의 일독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족들의 CD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명작 고전들을CD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나오고있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도라 볼수 있습니다. 명품차를 몰고 달리면서 “동으로 흐르는 강물/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성패 다 씻어가 버렸네”하고 “삼국지”를 경청하는 장면, 그야말로 현대인의 맛과 멋이 우러나는 쿨한 풍경이 아닌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온라인에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고있는 “타임머신 삼국지”에서는 “보마”승용차를 몰고 동한말기로 돌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명작의 패러디 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가 합니다. 명작에 대한 패러디는 상업에 치우친 결과물일가요? 아니면 명작에 대한 비하일가요?   한춘:    명작의 페러디 현상을 단순한 모방작으로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넓게 파생작품으로 확대하여 볼때 할말이 많아집니다.    십수년 전 섬서성의 유명한 작가 가평오(贾平凹)가 장편소설 “페허의 도읍(廢都)”을 발표한 즉시 평단의 빛발같은 지탄을 받았다. “금병매”를  흉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어보아도 그 지탄이 과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왕씨 노친이 서문경에거 금병매를 접근할때 술상에서 맘을 떠는 열가지 수작을 서술한 “금병매”와 “수호전”의 그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서안일대의 인정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수작이 틀림이 없다. 곽경명의 성공작(成名作) “꿈속에 지는 꽃 그 얼마이던가”는 완전히 도작이라는 볍원결론까지 나온 작품입니다. 비록 그가 도작한것은 명작은 아니지만 그가 도작하여 새로 쓴 작품은 베스트가 되였다. 곽경명은 도작이라는것을 승인하면서도 공개사과서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우겨 지금까지 나왔다. 이처럼 패러디 현상이 문단을 흐리는 일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 하는것은 이런 패러디가 아니라 파생작, 이를테면 명작을 견본으로 한 다른 예술쟝르의 개작, 예하면, 후속작(續作), 개작(아동판, 축소판), 드라마, 영화, 회곡, 만화, 에니메이션, 음악, 미술작품 등을 두고 몇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형식으로 파생되었던간 명작 원작은 이로서 괴멸됩니다는 점입니다. 즉 원작은 사라지고 개변된 작품만 살아있게 됩니다. 개변된 작품은 원작을 두번이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한다. 첫째는 예술형식의 개변이요, 두번째는 시대적 개변입니다. 부동한 예술 형식은 부동한 예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하여도 원작 원유의 예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한 시대에 부동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원유 예술의 지향과 멋과 맛과 향기를 변형없이 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열기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신편삼국연의”와 “신편수호전”, 그리고 얼마전에 구설이 많았던 “신편홍루몽”은 거대한 투자와 최고의 출연진, 최고의 연출 들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보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원작에 물든 사람을 끌기에는 택부족한 것입니다.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그나마 전쟁장면이나 격투 장면이 있어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일정하게 안구를 흡인할수 있지만 “홍루몽”은  안구를 끌수 있는 장면을 만들 그런 ‘감’이 별로 없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혀 볼품없이 됩니다. 예하면 림대옥의  ‘명작’, “홍루몽”의 주제시라고 할수 있는 “꽃을 묻으며 읊은 시(葬花詩)” 는 림대옥의 애절한 심경을 가장 핍진하게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 대목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림대옥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차적인 시청각 예술로서 시청자의 시간적 음미여지를 주지 못한다. 때문에 림대옥의 인물성격을 요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존재하고 자원은 그것을 활용할때라야 충분히 자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문화자원의 가치는 시장가치와 예술가치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문화가 무대를 만들고 경제가 주역이 되어 출연한다”라는 말이 성행했고 각지의 관원들의 입말이 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이 말에 어페가 있습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도 하나의 산업이 되어 얼마든지 재부를 창출할수 있습니다는 일념이 선것입니다. 장이모오의 영화 한편의 입장권 요금이 2억원을 넘는것이 있습니다고 하니 그가 창조한 문화제품의 재부는 대단한것입니다.   명작의 여러가지 파생물은 문화자체가  문화자원을 개발하여 일정한 예술가치와 시장가치를 잘 결합시키려는 한 도경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극(越剧)  “홍루몽”은 원작의 묘미를 다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월극으로서의 예술미는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또한 월극이 중국의 국수(國粹)나 다름없기 때문에 문화자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시장을 겨누고 명작을 리용하는것은  예술의 ‘매력’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것일뿐입니다. 지금 많은 명작 파생물에 돈냄새가 너무 나는것이 현실이며 이 또한 어쩔수 없는 시장경제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같은 생각입니다. 명작은 영화나 예술 작품에 무궁무진한 모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쟝르와 국적, 세대간의 벽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된 명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유기”의 경우를 보아도 그 패러디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그중 홍콩의 코믹영화의 선두주자 주성치가 패러디한 몇부는 이제 오승은판 서유기가 아닌 주성치판 서유기로 새로운 경전으로 자리매김되여있습니다. 영화에서 손오공은 시시때때 깝쳐대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랑의 순애보에 빠진 인물로, 당승은 진지한 승려가 아닌 수다스러운 아낙네로 나오고 대사도 지어 영어나 신조어로 란무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 그리고 제법 깔끔한 촬영화면, 공력들인 몬따쥬 구성으로 영화팬들의 환영을 받고있는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시장경제에 매여 란발하는 차용이나 그 시장의 생리에 무릎꿇은 조야한 개편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피겨경기에서 명성에 대해 급급한 욕망으로 젊은 피겨선수가 히틀러의 복장을 하고 나치스의 행위를 패러디하다가 그자리에서 분노한 관중들과 심판들에 의해 쫓겨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또 고전의 굴지로 꼽히는 “홍루몽”도 “외설 홍루몽”이라는 아예 에로영화로 개편된 일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패턴의 정신적 진수가 아닌 겉면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고 지어 왜곡한다면 그건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의 타매를 받게 되는거지요.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혼돈세계에서 자맥질하고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랄(moral)을 찾고 패턴(样式)을 찾는 과정에 명작을 패러디 하고 적극 번안하면서 그 무진한 매력속에서 자신의 생활에서의 답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또 명작을 차용한 직장생활 지침서들도 수두룩히 쏟아져 나오고있지요.   한춘:   2003년 성군억(成君憶)이 “삼국연의로 본 경영관리(水煮三国)”란 책을 출판하여 한때 베스트가 되였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환영받는 경영류 도서작자라는것을 대충 알고 있었고 또 “삼국연의”와 경영을 어떻게 비빔했는가가 궁금하여 해적판 한 권을 구입해 보았다. 제법 재미있게 썼다. 다른 경영류 도서를 읽지 않아 비교할수 없은 탓인지 인상이 괜찮았다.매마르고 까다롭고 추상적인 경영학, 시장학, 관리학의 이론을 삼국지의 인물에 담긴 이야기와 묘하게 빈죽하여 유모어적이고 해학적으로 '정숙'하게 썼다. 새롭고 기이하고 생동하고 재미있는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구미에는 맞을것 같았다.     2005년 여름 마침 성군억이가 할빈에 와서 서명판매활동을 가지게 되였다.그날 서명판매가 거의 끝날 때쯤 내가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책 한권을 사든 나는 그에게 기자인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습니다니깐 시간이 없다면서 사절했습니다. 하긴 그는 중국 경영류 도서 1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니깐 지방신문의 기자쯤은 별로 눈에 차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때 내가 한국의 출판계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책은 전에 이미 읽어보았고 시장전경이 괜찮아 보여 한국과 판권무역을 추진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찾아 본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반짝 정기가 돌았더군요.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후에 메일이 두세번 오고 갔는데 판권가격이 맞지 않아 판권 무역은 파탄 되였습니다. 그후에 도서시장을 보니 성군억의 '水煮'란 아이디를 빌려 후삼국이니 초한풍류니 춘추전국이니 잇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복제품이 이처럼 줄지어 내려오는 현상은 력사를 설쩍 데쳐 낸것이 아니라 아예 폭삭 무르게 끓여 버리고 말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런 도서는 독서구미나 당기게 할수 있지 직장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긴 부동한 직장인에게 부동한 역할이 있겠지만 이런 직장 지침서에 취급한 그 비결, 책략, 수양,인격, 품위 등은 어느 한두권의 책을 보아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현실상생활중에서 터득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것입니다. 경영관리는 과학입니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성실, 신뢰를 앞세웠을 때라야 그것이 장기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일차적이고 일시적인 수작을 쓰는 한탕치기로는 그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것입니다. 독서 취미가 았는 사람이라면 좀 문학적으로 다룬 책자를 선택해 재미로 읽고 유모감이나 해학담을 키우는것쯤은 바랄만 합니다. 전업 리론이 아닌 이야기식 이른바 '경영학'책은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라는게 나의 견해다.그래서 나는 경영, 관리 지침서는 이 한권으로 완전 졸업했습니다.      김혁:   요즘은 “시크릿(秘密)”이라는 지침서가 대세이군요.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탐구한다는 책인데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그 비밀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나와 있더군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서와 같은 논픽션(非虚构)서적들이 소설과 같은 픽션(非虚构)서적보다 더 잘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지침서 전문코너가 따로 비치되여있는거지요. 한춘:   인생지침서는 이와같은 실리적인 지침서와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때 베스터 1위에 올랐던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谁动了我的奶酪)”는  인생의 생존 본질은 부단한 추구와 노력과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가히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생지침서다. 인생 지침서는 심심하면 이책 저책 둘쳐 읽는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끄는 인생지침서는 공자의 “론어”와 로자의 “도덕경”입니다.  남들은 이 책을 치국(治國)지침서로 읽는다는데 나는 수신(修身)지침서로 읽고 있습니다.     김혁:   네. 번안작품, 애니메이션, 지침서 여러가지 참조물을 통해 여러가지 문체로 명작을 다시 접해보는 그 감수의 농도와 줄기가 다릅니다. 요즘 저도 명작들을 다시한번 체계적으로 읽어보려고 독서계획을 다시 세우고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하루에 단 몇페지씩 읽더라도 오랜 시간을 잡고 죽- 다시 읽어내려가려 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린 불운한 운명때문에 희망이 저버려지는 순간순간에도 버릇처럼 되여버린 독서로 명작들을 다시금 읽으며 감동을 받고 아픔을 잊는 시간은 내 창작과 독서생애에 가장 값진 시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학도 시절 읽은 눈과 지금의 읽고있는 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제는 남이 읽으니 나도 읽는다는 식으로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어 학교와 선생들의 강요에 가까운 권장에 숙제하듯이 읽기까지 했던 명작들 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갈피갈피에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면서 하나씩 깨치는건 남다른 맛입니다. 10여년후, 지어 20여년후 다시 읽는 순간 나는 그전에 느꼈던 전혀다른 백설공주와 어린왕자와 달따냥과 에드몽 당떼스와 에스메랄다와 보바리와 그랑데와 쏘렐과 닥터 지바고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흥미진진 스토리를 쫓아가며 읽었다면 지금은 그 스토리를 있게한 력사와 사회배경을 읽게 되고 이전에는 주인공의 용모를 살폈다면 지금은 주인공의 내심 심경을 살피며 읽게됩니다. 그리하여 진지한 얼굴,  성숙된 얼굴로 명작과 다시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전의 주인공사이의 해피엔딩에 대한 바람과 같은 설익은 질문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과 사랑과 종교와 민족에 관련된 대담을 건넬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명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명저”를 읽게되지요. 여기서 작(作)은 지을 작이지만 저(著)는 두드러질 저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말장난같지만 그저 이름난 작품에서 빼여나고 두드러진 작품으로 그 진미를 알고 읽게 된거지요. 명작에 대한 진수를 인제야 깨쳐 알고 읽기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을수록 외려 생겨나는 지적 공허감, 그 공복의 꾸르럭대는 욕망의 소리 같은 허전한 부분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명작이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명작은 세계 문화권의 공동 문화자산이며 강물처럼 흘러온 인류문화의 원천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유산가운데 그렇게 훌륭한 명작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이러한 명작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성을 고매하게 만들고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삶의 조건을 바람직하게 꾸미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읽지 않고서도 아는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과거 발달되지못한 참조계나 왜곡된 미디어로 잘못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서가의 한구석에서 크게 팔을 벌린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 듣게 되여, 아니 보게 되여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빨리 컴퓨터와 머리속에 시스템을 새로 깔도록 하지요.   한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깔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안녕히.   "도라지" 2011년 2월호  
1291    리상(이상)이 동시를 썼다???!!! 댓글:  조회:2547  추천:0  2018-11-14
  송아지는 저마다 먼산바래기   할말이 잇는데두 고개 숙이구 입을 다물구   새김질 싸각싸각 하다 멈추다   그래두 어머니가 못잊어라구 못잊어라구   가다가 엄매- 놀다가두 엄매-   산에 둥실 구름이가구 구름이오구   송아지는 영 영 먼산바래기   - 이상의 ‘목장’ -       시인 이상(1910~37)         시인 이상(1910~37)이 쓴 동시 한 편이 최초로 발굴됐다. 지금까지 이상이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알려진 적이 없다. 월간 문학사상은 11월호에서 ‘가톨릭 小年(소년)’ 1936년 5월호(제2호)에 수록된 이상의 동시 ‘목장’을 찾아 공개했다. ‘가톨릭 小年’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연길교구가 1936~38년 28개호에 걸쳐 발간한 어린이 잡지다. 수도회가 올해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해 그 중 25개호를 국내에 공개하면서 이상의 동시가 발견됐다. ‘목장’이란 제목의 동시는 총 7연 17행. 이상은 작가로서 줄곧 써왔던 필명 ‘이상’을 쓰지 않고 본명인 김해경에서 성을 뺀 ‘해경’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는 잡지 표지와 지면 삽화도 그렸다. 당시 이상은 절친했던 화가 구본웅의 부친 구자혁이 경영했던 출판 인쇄소 ‘창문사’에서 근무했다. ‘가톨릭 小年’ 편집진이 창문사에 편집·인쇄를 의뢰하면서 연을 맺게 돼 시와 그림을 청탁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 ‘목장’이 실린 뒤 2개월 지나 나온 7월호 ‘독자실’란에는 ‘해경’이 누군지를 묻는 독자의 질문이 실렸는데, 편집실은 “김해경 선생님이 바로 이상 선생님입니다. 시인으로 이름 높으시고 또 그림으로도 모르는 이가 없을 많큼 이모저모로 유명하신 선생님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문학사상 주간인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이상 문학 속에 빈 칸으로 남아 있던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가톨릭 小年’은 식민지시대 한국 아동문학 전개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잡지 대부분은 곧 영인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한편 윤동주 시인의 동시 ‘눈’ ‘개’ ‘이불’ 세 편이 그동안 개별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공개를 통해 ‘눈 三題’로 묶인 하나의 작품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윤동주는 36~37년 ‘가톨릭 小年’에 일곱편의 동시를 실었다. 그 중 37년 4월호에 세 편을 묶은 ‘눈 三題’가 게재됐다. /이영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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