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단군신화
여러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 檀君神話 ]
해설자
조현설(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목차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고전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반(反)토테미즘, 비판적 독해의 한 형식
단군신화를 다시 이야기하자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고전
한쪽에서는 학교나 공원에 국조단군상(國祖檀君像)을 세운다. 다른 한쪽에서는 몰래 단군상의 목을 자른다. 한쪽에서는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미신이자 우상숭배라고 외친다. 한쪽에서는 단군릉을 발굴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인물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한쪽에서는 보고서를 불신할 뿐만 아니라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이런 대립 속에서도 단군이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해마다 국경일로 되돌아온다. 단군은 이 대립 속에, 저 기념일 속에 '어쨌든' 살아 있다.
실존 인물이든 상징적 인물이든 단군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최고(最古)의 텍스트는 『삼국유사』다. 우리가 단군신화라고 부르는 이야기가 이 책의 기이(紀異) 편 첫머리에 실려 있다. 물론 『삼국유사』 역시 위서(魏書)나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임은 분명하다. 단군 논란의 진원지인 기이 편 고조선 조(條)를 보자.
고기(古記)에 일렀다. 옛날 환인(桓因)의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있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는데 이 분이 환웅천황이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에게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기고, 무릇 인간살이 삼백 예순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교화를 베풀었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이 때 환웅신이 영험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으리라"고 했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갔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한 범은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자리가 없었으므로 늘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를 배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했다.
단군왕검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수(壽)는 1,908세 였다.
다 아는 대로 고조선시대의 이 단군 이야기를 우리는 '건국신화'라고 한다. 신성한 존재가 출현해 나라를 세운 이야기란 뜻이다. 그런데 신성한 존재의 출현과 나라 세우기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 먼저 지상에 성스러운 나라를 세우려는 지극히 높은 신의 뜻이 있어야 하고, 뒤를 이어 뜻을 이룰 주인공이 지상에 탄생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탄생에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지고신(至高神)이 체통도 없이 직접 출현해 주인공을 낳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건국 드라마에는 최소한 세 배역이 있어야 한다.
단군신화는 건국신화의 이런 일반적 형식을 가장 적절히 보여준다. 지고신 환인은 홍익인간의 뜻을 가지고 환웅을 보낸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직접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세운 것은 신시(神市)다. 이 신의 마을은 나라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 머무는 상징적 공간이다. 환웅은 도우미 신들을 거느리고 인간계의 만사를 주관하지만, 그는 건국 영웅이 아니라 웅녀와 짝을 이뤄 단군을 탄생시키는 매개자일 따름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세 번째 존재인 단군의 일이다. 이런 형식은 고구려 주몽신화에도 보이고, 신라·가락국·만주·몽골·티베트 건국신화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이 건국신화가 국가 권력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건국신화 일반의 관점에서 단군신화를 이해하면 특별히 시비할 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단군신화가 고조선이라는 한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라면 거기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필경 도로(徒勞)에 그칠 테고, 반대로 완전히 꾸며진 이야기라는 주장도 무식한 소리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사는 단군신화를 그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모셔 두지 않았다. 단군신화는 필요할 때마다 불려 나와 다른 얼굴이 되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먼저 이런 물음을 던져 보자.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인데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화란 그 내용과 그것에 얽힌 의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어야 신화인 법인데, 고조선이 해체되었으니 단군신화의 운명도 꺼진 것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이구동성으로 고조선의 유민(遊民)들이 남하했다고 했으니 그 유민들의 기억과 구전 속에 유전되었을 것이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을 모시는 제단이 있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三聖)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이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의 무당들이 의례와 신화를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삼국유사』가 '옛 기록'을 인용하고 있으니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도 전해졌을 것이다. 고조선은 사라졌지만 단군신화는 여러 갈래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군신화는 그저 간신히 생존한 게 아니다. 얼굴을 고치고 되살아났다는 것이 옳다.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것이 고조선의 역사, 곧 단군신화다. 『삼국유사』는 삼국으로 이어지는 삼한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 앞에 단군신화를 수원지처럼 배치해 놓았다. 『삼국유사』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면 단군을 삼한 공동의 시조로 본 것은 13세기의 다수 고려인들의 공통감각이었던 것 같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의식이라고 한다. 이런 의식을 공유한 이들에게 단군신화는 이미 고조선만의 신화가 아니었다. 고조선이라는 일개 고대 국가를 넘어선 일종의 '민족' 신화였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도가(道家) 계통의 문헌에도 계승되어 16세기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이르면 숙신·부여·말갈이 모두 단군의 후예가 된다. 단군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더 높아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학집』은, 환인은 진인(眞人)이고 동방 선파(仙派)의 비조라고 말한다. 그 선맥(仙脈)이 환웅-단군으로 이어지면서 대대로 백성을 교화했으며, 단군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부루는 하우(夏禹)의 도산(塗山) 모임1)에 참여했고, 부여는 구이(九夷)의 난을 토벌했으며, 부우는 질병을 치료했고 부소는 맹수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는 꽤나 다른 얼굴을 지닌 신화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단군신화를 어떻게 읽었을까? 1396년 권근은 새로 건국한 이씨 조선의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에게 시를 지어 올리는데 시의 주석에 단군신화가 언급되어 있다.2)
옛날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박달나무 아래 내려왔으므로 이름을 단군이라고 했다. 이때가 당요(唐堯) 원년 무진일(戊辰日)이다.
요약된 자료여서 간단하지만 또 다른 모습의 단군신화라고 할 만하다. 단군의 작명 유래와 요 임금 즉위 원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이전 문헌에도 있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환웅이 아니라 단군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추대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와도, 『청학집』과도 다르다. 환인이나 환웅 혹은 웅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단군을 신인(神人)이라고는 했지만 여기서 신인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개념이다. 신화적 신성성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요 원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청학집』의 자부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명나라 혹은 중화에 대한 민족적 자의식의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전승된 단군신화는 한반도가 외세의 총칼 아래 놓이자 강력한 민족통합의 담론으로 떠오른다. 이미 1895년부터 일본의 시라토리 쿠라키치, 나카 미치요 같은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그야말로 일연이 만든 허무맹랑한 신화로 평가절하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넘어 한반도와 요동지역 여러 종족들의 기원에 놓인 위대한 민족통합의 신화가 된다. 그 결과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처럼 찬란한 단군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비서(秘書)들이 쏟아져 나오고, 1909년에는 단군을 교조(敎祖)로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창시되기에 이른다. 오래 전에 존재했던 한 고대 국가의 건국신화가 근대적 민족종교로 재탄생한 것이다. 대종교가 그 후 항일운동의 중심에 선 내력을 돌이켜 보면 단군신화는 강력한 민족신화로, 단군은 민족을 하나로 묶어내는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민족신화로 재탄생한 단군신화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역사교육의 형식으로 지속된다. 단군신화로부터 고조선의 역사가 이야기되고, 우리가 단군의 자손인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자명한 사실이 된다. 대종교에서 시작되어 임시정부로,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어 해마다 반복되는 개천절이라는 국가적 의례는 그것을 되새기는 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로 빚어져 왔던 단군신화는 최종적으로는 민족, 더 정확하게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념의 홈 패인 공간으로 수렴된 셈이다.
이제 이쯤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천 수백 년 동안 다시 읽히다가 지금은 단일민족의 표상으로 읽히고 있는 단군신화를 새롭게 읽을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그 실마리가 단군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는 일, 그리고 단군의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추적하는 일에서부터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반(反)토테미즘, 비판적 독해의 한 형식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다. 건국신화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국가의 신성화, 국가 권력의 정당화가 건국신화의 목표다. 그런데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란 권력투쟁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복과 연합 혹은 배제와 적대가 발생한다. 건국신화가 이런 고대 국가의 성립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단군신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동물생태학이다. 한 굴에 살 수 없는 동물들이 동서(同棲)했다는 것은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곰 종족과 범 종족이 이웃하고 살았다는 말이다. 단군신화의 배후에는 토테미즘이 깔려 있다. 실제로 압록강 너머 동북 지역에서 에벤키 등의 곰 종족과 아크스크라 등의 범 종족이 있었다. 문화인류학적 보고에 따른다면 이들은 지금도 그 문화를 기억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이 두 종족이 환웅 - 또는 신웅(神雄) - 을 두고 경쟁한 것처럼 그리고 있다. 경쟁의 방식은 오래 견디기. 신화가 의례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제의학파적 관점에서는 통과의례라고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지만 곰의 머리와 가죽을 쓴 족장과 범의 머리와 가죽을 쓴 족장의 내기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선택과 배제다. 곰은 선택되고 범은 배제된다. 곰은 여자가 되어 환웅과 짝을 지어 단군의 어머니가 된다. 따라서 범 종족은 환웅과의 연합에 실패하고 곰 종족은 성공한 것이 된다.3)
그렇다면 곰 종족의 성공이란 어떤 의미일까? 지금껏 별로 심각하게 제기해 본 적이 없는 물음이다. 곰 종족은 웅녀의 이름으로 단군신화에 들어가 고조선 왕가의 모계를 이루지만 정작 웅녀가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유화처럼 숭배되었다는 언급도 없다. 웅녀는 단군신화에서 실종되었다. 웅녀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단지 단군 탄생 이후 웅녀의 이야기가 지워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웅녀의 실종은 웅녀가 본래 곰이었다는 것, 인간과 혈연관계를 맺은 곰이었다는 기억의 실종이다. 곰 종족의 성공은 토테미즘의 실종이다. 역설이다.
토테미즘에서 인간과 곰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이웃관계였다. 에벤키족에게 곰은 시조 어머니였고, 그래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곰 사냥을 하지만 그 사냥은 곰이 자신의 몸을 에벤키족에게 선물로 주는 때만 가능한 행위였다. 그래서 곰 사냥은 아무 때나 창, 활을 들고 나가 던지고 쏘는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예컨대 연어가 올라올 무렵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집단적 의례였다. 살해된 곰의 살은 모두 나눠먹지만 영혼이 깃들어 있는 뼈는 모아 제사를 올린다. 그러면 몸을 선물로 내어놓고 죽은 곰의 영혼은 제상에 올려진 제물을 가지고 자기 종족에게로 돌아가 그 선물을 나눈다. 이런 균형 잡힌 상호증여의 관계가 당시 사회의 세계관인 토테미즘의 본질이고 신화는 그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곰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증여의 관계가 아니다. 곰은 여자가 되기 위해서 환웅이 출제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출제자와 수험생이라는 일방적 관계다. 그리고 단군을 낳은 것은 정작 웅녀지만 단군이 모시는 존재는 웅녀가 아니라 환웅이고 환인이다. 환인-환웅-단군의 계보와 곰-웅녀 사이에는 이미 불평등한 관계, 곧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계급적 불평등, 성적 불평등의 관계라고 할 만하다. 기실 국가사회는 이런 불평등에 기초해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의 구조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국가사회의 구조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상동성을 지닌 것이다. 단군신화는 토테미즘에서 출발해 토테미즘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신화다.
단군신화의 본질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그저 민족신화로 찬양하고, 단군을 우리의 위대한 선조로 기릴 수만을 없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인간의 일방적 우월성에 기초한 근대 문명의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상호성에 기초한 토테미즘이 의미 있는 대안적 세계관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다른 민족을 차별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단군신화를 이전과는 다르게 읽는 한 방식이다.
단군신화를 다시 이야기하자
근래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이 다양성의 공존이다. 한동안 성적 소수자 문제가 담론의 장을 달구었고, 최근에는 혼혈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결혼, 농촌 지역 남성들의 동남아 여성들과의 혼인 등으로 인한 혼혈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차이들의 공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차이들의 공존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하나 있다. 다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그것이다. 혼혈에 대한 차별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차별의식과 공생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이다. 이 의식은 근대 이후 학교 교육에 의해 강화되고 강고해졌다.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의 원천이었던 단군신화는 당연하게도 이 의식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은 유전학적 실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우리 역사가 낳은 관념일 뿐이다. 이 관념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양성의 공존을 위해서는 공론의 장에 회부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 역시 같은 자리에 호명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란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너는 단군상을 건립하고 나는 파괴한다"는 식의 소모적 전쟁보다 훨씬 긴요한 일일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환웅은 왜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을까?
환웅은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인간세상을 주관하며 교화를 베푼다. 문헌에 따라서는 신단수의 '단'을 박달나무 단(檀) 자로 써서 나무의 종류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신단(神壇), 곧 제단이 강조되어 있다. 신단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제천의식을 드리는 제단에 솟은 나무라는 말이다. 굿을 할 때 굿상에 세우는 나무를 신목(神木)이라고 하는데, 신목은 무당이 불러낸 신이 깃드는 신체(神體)가 된다. 마을 앞 당산나무 역시 당신(堂神)이 깃드는 신목이고, 동시에 하늘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환웅이 신목에 깃든 신이라는 뜻이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 와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빌자 잠시 인간의 몸으로 변해 혼인을 했다는 대목에서도 우리는 환웅이 신목에 깃든 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를 구전의 홍수신화인 '목도령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목(木)도령은 나무에 깃든 목신(木神)의 정기에 천상의 선녀가 감응해서 태어나는데 홍수 후에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된다. 이 신화에 따르면 인류는 나무신의 자손인 셈이다. 천제의 아들 환웅은 신단수에 깃들어 나무신으로 모셔졌다면 환웅을 모시는 무당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단군이 바로 그 무당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천신을 모시던 무당과 천신의 관계를 바탕으로 '환인-환웅-단군' 식의 건국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2. 단군의 아들 부루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은 '기이편'에서는 하지 않은 이야기를 '왕력(王曆)편'에서 한다. 일설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이름이 추몽(鄒蒙)인데 단군(壇君)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몽신화를 기록하면서 「단군기(壇君記)」를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 이제 이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가리킨다 - 을 보니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기」에도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했다 하니 아마도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고 하여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삼국유사』보다 몇 년 늦게 쓰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 역시 "먼저 부여와 비류를 일컫네"라는 시구에 「단군본기(檀君本紀)」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면서 "비서갑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라고 적고 있다. 또 「동명본기(東明本紀)」의 내용도 끌어온다. 부여의 왕 부루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제사를 드렸는데, 말이 곤연이라는 곳에서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살펴보니 돌 밑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를 데려가 금와(金蛙)라고 이름을 지은 후 태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루는 고조선 단군의 아들인 동시에 고구려 주몽의 이복형제이자 동시에 부여의 왕이다!" 대체 왜 이런 혼란이 생겼을까?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아가 그 자료들 가운데는 고조선과 고구려, 혹은 부여를 같은 핏줄로 묶으려는 의도를 지닌 문헌들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3. 『환단고기』, 『규원사화』, 『신단실기』, 『단기고사』, 『부도지』 등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책들에 실린 단군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근 『환단고기』 류의 책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고대사에 대한 인식이 인터넷을 점령하면서 역사적 실상에 관한 보편적 지식처럼 행세하고 있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체계적이지 않은 우리 신화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런 자료의 기사들을 기반으로 하여 거대하고 체계적인 민족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책으로까지 출간되고 있다. 이런 흐름의 배후에는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신화를 통해 재구성하려고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있다. 단군상 건립 운동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민족주의가 반성의 대상이 되어 있는 지금 대중들의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위험하지 않을까?
추천할 만한 텍스트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002.
각주
1) 우 임금이 치수(治水)를 끝내고 도산 - 현재 중국 절강성 소흥현 서쪽 - 에서 개최했다는 축하의 모임을 말한다.
2) 왕조가 바뀌어 그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자, 명나라에서는 소국이 대국을 대하는 태도가 마땅치 않다면서 표전의 문구를 문제 삼아 시비를 걸어왔다. 이 외교적 마찰을 해결하게 위해 조선 태조는 해명서와 표전의 작성에 관여한 권근 등을 수도 남경에 함께 보냈다. 그때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역사를 묻자 이에 응해 지은 시가 「응제시(應製詩)」다.
3) 환웅이 백호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는 또 다른 단군신화가 17세기 승려 설암(雪巖)의 기행문인 『묘향산지(妙香山誌)』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곰 종족의 성공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관련이미지 1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무씨사당 후석실 제3석 상제3층, 하제4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단군신화 [檀君神話] - 여러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단군신화
[ 檀君神話 ]
연대
B.C.2333년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목차
1. 내용
2. 출전
3. 특징
4. 모티브 분석
5. ‘곰’ 선택의 의미
6. 신단수(神壇樹)의 의미
7. 약쑥과 마늘의 의미
8. 문학사적 의의
1. 내용
『위서(魏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었는데,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여러 아들 중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다스려 보고자 하였다.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면서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인간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桓雄]에게 인간이 되기를 빌었다. 이 때 신웅이 영험한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그것을 먹고 21일 동안 금기를 지켜서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임시로 변해서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그는 당(唐)나라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을 도읍으로 삼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묘년(己卯年)에 즉위하여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에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하니, 수명은 1908세였다.”
2.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紀異)ㆍ고조선(古朝鮮)」.
3. 특징
(1) 고조선 건국신화로 구전되다가 고려 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기록되어 정착.
(2) 환인-환웅-단군의 3대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천손하강(天孫下降)1) 형의 설화소(說話素)를 가지고 있음.
(3) 숭천사상(崇天思想)과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나타남.
(4) 후대 영웅서사시(英雄敍事詩)의 원류가 되기도 하지만 건국을 위한 투쟁 과정이 없으며, 영웅 설화 7단계2)에서 ‘고귀한 혈통(1단계)-비정상적 출생(2단계)-위대한 승리(7단계)’만 나타남.
4. 모티브 분석
(1) 환웅의 하강 : ‘하늘[天]→땅[地]/신(神)→인간’을 통해 이 땅이 하늘이 선택한 곳이며, 우리 민족이 천손의 혈통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보여 준다.
(2) 환웅과 웅녀의 결합 : 곰과 범은 토템이다. 따라서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① 신과 인간의 결합,
② 천신 숭배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
③ 이주족(移住族)과 선주족(先主族)의 결합을 의미한다.
5. ‘곰’ 선택의 의미
(1) 호랑이와 곰의 경쟁은 투쟁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리며 참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영웅성보다는 덕성(德性)을 상위의 가치(價値)로 두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 ‘곰’을 토템으로 삼았던 부족이 국가로의 통합에서 정통성을 획득하였다는 의미.
(3) 동면을 거쳐 봄에 다시 활동하는 곰을 통하여 자연의 순환과 재생력(再生力)이 인간에게도 파급되기를 희구하는 의식의 표현.
6. 신단수(神壇樹)의 의미
신령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에 서 있는 나무. 지상에 있으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지점의 표시. 세계의 중심.
7. 약쑥과 마늘의 의미
곰이 ‘약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는 것은 지상적 존재가 그 세속성(世俗性)을 탈피하고 신성한 존재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금기(터부)이다.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이 여러 단계나 상태를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중요한 단계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시련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의식으로 채택된 것이 통과 의례이다. 단군 신화의 쑥, 마늘, 어둠은 이러한 통과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는 보편적 인식이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 문학사적 의의
(1)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로 단군의 탄생, 민족의 연원을 보여줌.
(2) 민족주의적 영웅 서사시의 원류가 됨.
(3) 천손의 혈통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하고, 민족의 신성성ㆍ우월성을 강조하여 수난기에 민족적 힘을 발휘하게 함.(이는 건국신화의 공통적인 특성)
(4) 환인ㆍ환웅ㆍ단군의 삼대기 구조는 후대 서사 문학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데 영향.
(5) 웅녀의 시련은 후대 문학에서 여성 수난의 원형이 되었다.
각주
1) 천손하강(天孫下降) ; 하늘의 자손이 땅으로 내려온다.
2) 영웅 설화 7단계 ;
① 고귀한 혈통의 인물,
② 비정상적인 잉태 혹은 태생,
③ 비범한 지혜와 능력,
④ 어려서 위기를 겪고 죽을 고비에 이름,
⑤ 구출⋅양육자를 만나서 위기를 벗어남,
⑥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힘,
⑦ 위기를 극복, 승리자가 됨.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檀君神話]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단군신화
목차
정의
역사
줄거리
분석
특징
의의
정의
고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의 신화.
역사
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국가가 세워진 사연을 담은 개국의 시조신화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를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일연(一然)이 저술한 것으로 그 저술연대를 고려 충렬왕 7년 전후로 보고 있다. 내용에 『위서(魏書)』나 『고기(古記)』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는 이미 그 이전의 문헌에 등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는 신화의 내용으로 보아 전승되면서 도교나 불교의 영향으로 변모된 흔적이 발견된다. 본래 신화의 모습은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곰이 여인으로 변하여 단군을 출산하였다는 수조신화(獸祖神話)의 흔적을 보이고 있어 동물을 숭배하던 고대사회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조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桓因)은 서자 환웅(桓雄)이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 태백산 주변을 굽어보다 그곳이 나라를 세워 다스릴만한 곳으로 여겨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으로 내려와, 바람의 신, 강우의 신, 구름의 신을 데리고 곡물과 생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 같은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다스렸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신령한 쑥과 마늘 20개를 주고 “너희가 이것을 먹고 햇빛을 100일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곰은 금기를 지킨 지 21일 만에 여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웅녀는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지만, 결혼할 사람이 없어 환웅이 사람으로 변화하여 웅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뒤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가 다시 평양성으로 옮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갔다가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수명이 1,908세였다.
『삼국유사』와는 달리 『제왕운기』에는 단군의 출생 과정에 대해서 환인의 서자 단웅천왕(檀雄天王)이 태백산정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시켜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고 되어 있다.
분석
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고조선의 개국 과정을 말해 주는 신화이다. 신화의 주역은 환웅으로 되어 있는데도 신화 명칭을 라고 하고 단군을 한민족(韓民族)의 시조로 인식하는 이유는 환웅이 창건한 신시(神市) 집단과 단군이 건국한 조선 집단의 민족 구성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단군의 조선은 환웅의 신시집단과 웅녀로 대표되는 곰 토템 부족이 연합하여 새로 형성된 확장된 집단이라고 본다. 환웅 집단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하고 곡물의 생산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면서 농경생활을 하였던 도래(渡來) 집단의 성격을 띤다. 한편 웅녀로 표상된 집단은 환웅이 곰을 여인으로 변하게 하였다는 내용에서 환웅 집단에 복속된 곰을 숭앙하는 토착집단의 성격을 띤다. 단군이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산신으로서 제향을 받는 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징
환웅이 신시를 개창한 태백산(太白山)은 신성공간으로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산을 말한 것이다. 백두산이라는 설과 묘향산이라는 설이 있는데, 태백산을 백산 중에 가장 큰 산이라는 보통명사로 본다면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에는 천부인 세 개라는 통치자로서의 징표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신경(神鏡), 신검(神劍), 신령(神鈴) 또는 신고(神鼓)의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신경은 한 집단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동경(銅鏡, 구리거울)인데 고대 부족장들의 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신검은 신성한 칼로서 군사의 통솔권을 나타내는 군주의 칼이다. 고구려 에서 주몽이 유리가 친자임을 확인할 때 부러진 단검을 사용하였는데 고대의 군장들은 세형동검(細形銅劍) 등 신성기물로 칼을 지니고 있었다. 신령은 제전(祭典)을 행할 때 소리를 울리는 방울이다. 신에게 인간사를 고하려면 신의 주의를 끄는 장치가 필요한데 방울소리나 북소리로 신이 귀를 기울이도록 한 뒤에 사연을 고해야 한다.
에서는 환인과 환웅의 부자관계가 먼저 설정되어 있고 그다음으로 환웅과 웅녀의 부부 관계가 나타난다. 여기서 환웅을 중심으로 본다면 부자 관계만 나타나고 부부 관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환인의 부인이 누구인지도 나타나지 않고 환웅의 탄생 경위도 없다. 또한 단군을 중심으로 보아도 부계는 조부부터 기술하고 있으나 모계는 어머니만 기술하고 있으며 즉위 경위는 있으나 결혼 사연은 없다. 이런 점에서 에서는 아버지가 중시되는 가부장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의의
는 천신계의 아버지와 지신계의 어머니가 결합하여 시조를 출산한다는 천부지모(天父地母)형 신화이다. 천부지모신화는 가부장제사회가 확립된 이후에 이루어진 신화로서 한반도의 건국신화 대부분이 천부지모신화라고 할 수 있다. 는 한반도 최초의 개국신화라는 점에서 왕권신화의 효시라는 의의가 있다. 에는 곰이 금기를 지켜 여인으로 변한다는 통과의례를 나타내는 삽화가 있다. 이 삽화에서 곰이 금기를 지킨 굴이라는 공간은 주체의 질적 변화를 위하여 통과하는 시련의 공간이고 쑥과 마늘은 주술적 효능이 있는 약품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햇빛을 피하는 100일이나 21일은 금기의 기간으로서 재탄생에 필요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고대사회에서의 통과의례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집필
서대석(徐大錫)/서울대학교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의 기원(김정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년)
단군, 그 이해와 자료(윤이흠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
한국신화의 연구(서대석, 집문당, 2001년)
출처
三國遺事
帝王韻紀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
원불교대사전
단군신화
[ 檀君神話 ]
필자
박도광(朴道廣)
목차
[개요]
[내용 및 변천]
[개요]
단군신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신화적 요소와 상징체계는 종교 의례를 통해 나타나게 되며, 단군신화는 고대 한국사회의 ‘하느님’ 또는 ‘천신(天神)’과 관련한 제천(祭天)의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죠셉 캠벨(Joseph Campell)이 언급한 것처럼, 신화적 사실이 설사 입증될 수 없다고 하여도 우주와 자연현상, 인간과 진리에 대한 상호관계에 대한 중요한 인식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고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건국신화 중 단군신화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전승과 단군에 대한 인식 또한 시대와 글쓴이들의 학문 또는 종교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전승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변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대에 이루어진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 등 13세기 이후의 기본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비롯하여 단군에 대한 자료들이 조선조의 《세종실록(世宗實錄)》뿐만 아니라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서 발견된다.
서영대는 단군신화의 유형을 13세기 《삼국유사》 유형, 《제왕운기》 유형, 14세기의 권람(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유형, 조선조 후반기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유형 등으로 나누어 단군전승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했다. 《삼국유사》는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천상으로부터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하강하여,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컫고 지상세계를 교화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ㆍ명(命)ㆍ병(病)ㆍ형(刑)ㆍ선(善)ㆍ악(惡) 등 무릇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린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고 내려오는 과정을 설명한다.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신과 인간이 함께 만나는 공동의 장소이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이루고,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신단수에서 기도하는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햇빛이 차단된 굴속에서 고난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곰은 환웅의 금기사항을 지켜 여인(熊女)으로 변신할 수 있었으며, 웅녀는 아이를 갖기 위해 단수(壇樹) 밑에서 재차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환웅과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단군이 천신과 웅녀사이에 탄생하게 된 과정을 기술했다.
《삼국유사》의 환웅과 웅녀의 결합과 단군의 탄생 내용은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신화의 원초적 요소를 담고 있다. 곰이 웅녀로 변신하는 모습과 웅녀가 천신인 환웅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는 과정에서 곰의 토템 신앙과 천신 신앙의 결합, 인간과의 조화적 결합의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같이 환웅이 천상으로부터 태백산정 신단수에 내려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나, 풍백ㆍ우사ㆍ운사를 거느리고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린 부분 등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승휴는 “금손웅녀 음약성인신(今孫熊女 飮藥成人身)”이라고 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이 인간으로 변화하는 신화적 요소를 삭제했다. 곰의 인간으로의 변신과정과 인간의 천신과의 결합 과정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지에 대한 단군신화의 내용에 따라 단군전승의 계보(系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승휴는 유교적 관점에서 곰의 신화적 요소를 삭제하고 단군이 단수신(檀樹神)과 단웅(檀雄)의 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유학자로서 단군신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곰신화의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원초적 단군신화를 변형시킨 것이다.
《대종교경전》과 《규원사화》는 《삼국유사》ㆍ《제왕운기》ㆍ《응제시》 등에서 거의 다루지 않고 있는 환인과 환웅의 시대를 중요시여겨, 우주와 인류의 기원 그리고 인류의 역사적 전개를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대종교경전》과 기타 교서에서는 ‘한임에 의해 한웅천왕(桓雄天王)이 한얼로서 사람으로 화하여(以神化人) 한밝뫼(太白山 = 白頭山) 밝달나무(神檀樹)에 내려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철(弘巖羅喆)은 ‘중광가(重光歌)’에서 “처음 빛은 어느 때뇨 첫 갑자(甲子) 상달상날 한울 열고 교(敎)세운 혁혁상제(赫赫上帝) 나리사 삼신(三)뫼 히뜩히뜩 단(檀)나무 푸릇푸릇 동(東)에서 차차 퍼져 온 세계(世界) 다 덮었네”라고 밝히고 있다. 상원갑자(上元甲子)의 해 10월 3일을 하늘이 열린 날로 여기고 있다.
또한, ‘한웅은 한얼사람으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가지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와 뇌공(雷公) 등 여러 신장(神將)을 부려 산하(山河)를 개척하고 사람과 사물을 이치(理致)로 자라게 하고 한얼의 도(天道-神道)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단군신화를 기술하는 사람의 역사관과 종교관에 따라 환인ㆍ환웅ㆍ단군 호칭의 의미가 달리 나타난다. 불교 승려인 일연은 《삼국유사》에는 고대 한국사회에 최고신을 ‘환인(桓因)’, ‘천제(天帝)’, ‘상제(上帝)’ 등 한문식 표기로 나타내고 있다. 환인을 불교와 힌두교의 신(神)인 인드라(Indra)와 동일시하여 ‘제석(帝釋)’으로 부르기도 했다.
윤이흠은 단군에 대한 다양한 연구의 원초적 자료가 주로 한문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윤이흠은 고조선에 샤머니즘, 천신숭배, 그리고 자기수련 전통들이 존재했었으나, 우리 민족이 한문(漢文)을 수용하면서 정신문화에 일대 변혁을 겪게 되었으며, “일연은 한문을 쓰면서 한문 이전의 지고신을 지칭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환인’이란 용어를 썼다”고 보고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사료(史料)에서 언급한 한국의 고대종교와 문화가 한문으로 쓰여 있기에, 한문 수용 이전에 있었던 고조선(古朝鮮)의 신앙과 고대의 문화적 원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논저들은 한국기층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유학자인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불교의 ‘석제(釋帝)’ 또는 유교와 도교의 ‘상제(上帝)’로 호칭했으며 유학자적 입장에서 단군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했다. 《세종실록》에도 ‘상제(上帝)’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하늘에서 ‘신인(神人)’이 내려왔다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북애자는 《규원사화》에서 천상의 일대주신(一大主神) 환인을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으로 우주와 만물과 인간의 근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규원사화》 ‘조판기(肇判紀)’에서 하늘(上界)의 일대주신인 환인은 태고에 음양이 나누어지기 이전부터 전 세계를 통치하는 밝은 빛의 존재이며 만물생성의 본원(本源)인 존재이다. 일본 사학자와 한국의 일부 사학자는 일연에 의해 환인의 존재와 불교의 제석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불교화 한 용어라고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나철과 대종교 입장에서는 환인이 결코 불교화 된 용어가 아니며 한국 고유의 언어라는 것이다. 대종교의 교서인 《신사기》는 《규원사화》와 같이 환인의 존재를 절대적 최고신으로 여긴다. 또한, 나철과 서일(白圃徐一)은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큰 존재를 의미하는 순수한 한글 ‘한임’을 한자로 표기하여 ‘환인(桓因)’이라 표기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문맥으로 보았을 때, 불교적 입장에서 ‘환인’을 불교의 최고신인 ‘제석’과 같은 존재임을 부연하여 설명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근ㆍ현대 한국사회는 고대 건국신화, 단군신화 및 제천의례와 관련하여 다양한 연구를 통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오는 단군신화와 종교사상을 조명해 왔다. 북한의 학자들도 1993년 단군릉 발굴 이후 단군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북 학자들의 교류가 점차 증대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檀君神話] (원불교대사전)
======================================================///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13세기) 시대의 , , 조선 전기(15세기)의 , , 등에 기록되어 있다. 단군 건국 신화의 내용은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비 신, 곡식 신, 구름 신 등과 함께 태백산에 내려왔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찾아왔다. (중략) 웅녀와 환웅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 왕검이라 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이다. 이 건국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 사회는 선민 사상과 홍익 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건국하였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신앙을 가진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 건국 신화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