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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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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토템시/ 사슴= 남영전, 해설= 현춘산(7) 댓글:  조회:2263  추천:0  2020-10-10
7.사슴, 하늘 땅을 이어놓는 신비한 정령(精灵) 2020년 09월 10일 /현춘산
1529    토템시/ 물= 남영전, 해설= 현춘산(6) 댓글:  조회:2184  추천:0  2020-10-10
6.물, 인류와 만물 창조의 영구한 생령 2020년 08월 24일 /현춘산  
1528    토템시/ 흙= 남영전, 해설= 현춘산(5) 댓글:  조회:2192  추천:0  2020-10-10
5.흙,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어머니 2020년 08월 24일 /현춘산  
1527    시=흥취 댓글:  조회:2133  추천:0  2020-10-09
시를 쓰는 10가지 흥취 2020년 10월 09일  /리문호 리문호: 제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두 차례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역임.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 '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의 정감과 정서의 심리적 현상이다. 물론 시인의 정감과 정서는 시인이 축적한 체험, 지식, 감각에서 오는 것이 당연하다. 시인의 심리학을 연구하려면 지각과 감각, 형상 사유와 이미지, 사유와 언어, 운율과 정서, 정감과 의지, 체험과 기억, 관념과 지향 등을 떠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종합적 심리활동인 것이라 본다. 이런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깊은 작업으로서 이론에 종사하는 분이나 시인들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물론 이미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나는 나의 시 창작 경험에서 체득한 를 정리함으로서 시인 심리학을 연구하는데 혹시 참고적 재료가 될까하고 제공하는 바이며 시를 쓰는 초학자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시를 씀에 흥취가 없다면 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심리활동과 구별되는 심리 상태로서 사회의 직업이나 명령, 임무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형이나 자발적인 심리현상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는 미적 향수의 심리 현상이다. 이런 향수를 간단하게 로 귀결하여 본다. (1) 상상하는 흥취 시인은 상상하는 흥취가 있다. 몸은 비록 좁은 공간이나, 노동현장이나 술좌석이나 회의실에나 혹은 커피점에 있지만 마음은 그 장소를 벗어나 대자연의 절경에나, 누구와의 만남이나, 추억이나, 과거이나, 미래에나 혹은 동화나 신화 속으로 가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단순이 말하는 이른바 이 부족한 류의 사람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현실, 역사, 미래, 추억, 혹은 동화, 환상, 공상. 잠재의식, 등 무한한 상상이나 연상 속에서 시상이 발견된다. 시인의 정감활동의 무대는 상상이다. 그 무대(시인의 시적 세계)가 얼마나 큰 가에 따라 상상의 깊이와 폭이 결정된다. 시인은 자기의 시적 세계가 있어야한다 이 시적 세계는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방식, 개성, 표현 능력, 풍격, 정서 등으로 구성된다. 상상은 미의 정신활동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상상하려 하지 추한 것과 악한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시인은 상상 사유, 즉 형상 사유가 발달되었으며 형상 사유의 기본 요소는 언어와 운율이다. 어떤 시적발견이 나타날 때 그것은 시로 나타난다. 즉 한수의 시가 머릿속에 생긴 것이다. 혼자 고요히 상상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잠기는 좋은 일이다. (2) 고독의 향수를 즐기는 흥취 현대인은 고독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탈이다. 고독하면 안절부절 한다. 심지어는 고독을 참지 못해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 많은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고독에 취약해 우울증이 쉽게 나타나는데 원인의 하나는 고독과 허무이다. 무대에서 수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다가 일단 막이 내리게 되면 고독이 밀려온다. 공허하고 허무해진다. 즉 고독이다. 그들이 고독을 극복하려면 공명심과 허영심을 최소한 억제하는 심리적 자질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시인은 원초로 고독한 사람이며 고독에 습관 된 사람이다. 고독 속에 사유를 하며 고독을 합리하게 즐길 줄 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상상과 작시의 좋은 환경이다. 혼자 적막하고 외롭다고 생각될 때 책을 본다. 시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상상의 여행이나 시정의 여행을 한다. 그러면 새로운 시가 생각난다. 이것이 바로 심리를 자아 조절하는 고독을 즐기며 향수하는 흥취이다. 다른 시인은 몰라도 나 만은 고독할 때 시를 쓴다. (3) 자작시를 감상하는 흥취 자기가 쓴 시를, 특히 오래된 시를 가끔 읽어 보게 되는데 향수를 느끼곤 한다. 그 시를 쓸 때의 감정 정서 속에 잠기는 일은 즐겁다. 또한 부족 점을 찾는 일도 즐겁다. 시란 감정저서의 기록이며 자국이다. 또한 인생행로의 자취이다. 자기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감정과 상상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감수이다. 서안의 진시황릉을 밟는 향수, 무한의 황학루에 올라 장강을 굽어보는 향수, 황산에 올라 운해의 해돋이를 감상하는 향수, 백두산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는 향수, 역사의 유적지에서 수천 년의 역사 속으로 여행하는 향수, 어떤 시정에 잠기는 등등 자기의 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감수를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시 창작 개성을 다시 발견하고 발양한다. (4) 시를 쓰고 다듬는 흥취 시 초고를 써놓았지만 설익은 때가 많다. 꼭지가 떨어지지 않고 풋내 나는 때가 많다. 그러면 푹 익게 나둬야 한다. 즉 상상의 사유를 익게 하는 것이다. 몇일 후, 혹은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다시 보면 그 시의 수개 가치가 나타난다. 시인의 사유 속에는 무수한 시적 소재들을 축적하고 시로 완성 시켜야한다, 그러야만 다산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생활경력이 풍부해야하며 부단히 관찰하고 모색하는 습관으로 시적 소재들을 발견해야한다. 모든 시가 다 발표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의 수개가 있어야한다. 어떤 시는 수개하다 보면 원래의 감정정서와 완전히 달라질 때가 있다. 변화됨이 초고보다 못해 졌다고 생각될 때는 다시 원초로 돌아가 다시 수개하게 된다. 어떤 시는 즉흥으로 써 놓고 만족 되여 급급히 발표하였지만 후회할 때가 많다. 이것은 과정과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잘 다듬지 않은 결과이다. 한수의 시는 진물이 나도록 잘 익어야 한다. 반복 다듬는 과정을 거쳐 푹 익어 극치의 향기가 날 때의 향수. 이를 다듬는 재미라 하겠다. (5) 시적 발견에 흥분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창의력(創意力)은 중요하다. 창의력은 부지런한 학습과 관찰과 사고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창의력을 발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관찰과 사유를 통해 습관 된 사물이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문뜩 새로운 시적 발견이 나타날 때가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하다가 문뜩, 잠을 자다가도 문뜩 영감이 떠오른다. 이럴 때는 적어 놓아야 한다. 게으르면 잊어버리게 된다. 그때의 정서를 놓치고 만다. 시적 발견은 나만의 것 이여야 한다. 다른 시인의 시와 유사하면 시적 발견이라 말할 수 없다. 시적 유사성이나 일반화, 도식화, 보편화는 작시의 실패다. 다른 시인이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발견이 나만의 시를 완성시킨다. 물론 나만의 풍격과 나만의 개성도 뒤따라야 한다. 개성이란 시인의 몸에 배어있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장기적인 시 창작 활동을 통해 수립되며 또한 발전하고 개변한다. 시적 발견도 시인의 개성을 떠날 수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적발견 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시인은 이런 흥분이 있기에 시를 쓰는 모양이다. (6)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흥취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그 어떤 대상의 마음을 이끌어 잡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거나 토로할 때 시를 쓰는 흥취가 있다. 특히 애정시가 그런 경우이다. 애정 시는 여러 가지 감정 정서로 나타나는데 실연, 열연, 초연, 미련(迷戀), 추련(追戀) 등이 있다. 심지어 거리나 상가에서 스쳐간 전혀 모르는 대상을 위해 쓰는 시도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륙유는 평생 당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쓴 애상 시로 유명하다. 그의 사랑 시는 애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귀납한다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사랑에 입각한 시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할 수 없는 이상적 사랑에 대해 쓰는 시가 있다. 사랑은 많은 시인들이 시인으로 된 원동력의 하나이다. 만약 한수의 시가 읽는 독자와 공명을 일으킨다면 기쁜 일이다. 기실 시는 혼자서 쓰지만 혼자서 감상하는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세상에 퍼뜨리는 표현주의 문학이다. 하기에 독자를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기본이다. 여기서 이란 독자에 대한 시인의 감정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는 언제까지나 시인 본인의 감정 에너지의 발로이지 독자의 구미에 맞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독자층도 복잡한 만큼 어느 독자층의 공명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시를 써놓고 란 말을 들으면 불쾌한 것은 당연하다. 시는 언제나 객관 사물에 대한 주관 심리 활동인 것이다. 추상시라도 기실 객관사물이 우리의 두되에 반영된 결과이다. 이 심리 활동이 잘 되고 못 됨은, 공명을 일으키건 안 일으키건 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달렸다. 한수의 시를 잘 썼다고 자기는 흥미진진해 하지만 독자의 냉대를 받을 때가있다. 하기에 우리 시는 어떠한 독자층을 공명할 수 있는가를 막론하고 숨결이 담겨있어야 하며 살아 있는 시를 써야한다. 대상을 위해 쓰는 시는 반드시 순정이여야 한며 진정이여야 한다. 슬프더라도, 기쁘더라도, 간절하더라도, 감정의 진실성이 있어야한다. 위선이나 가식이나 언어 장난의 시는 그 효과에 손색이 간다. 죽은 시는 독자가 없다. 옛날의 좋은 시가 지금도 애독되는 원인은 그들의 시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수의 시를 대상이 애독하고 사랑할 때 시인에게 즐거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시 창작 욕구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7) 사물을 감수하는 흥취 시인도 모든 보편적 심리활동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감각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감수를 얻는다. 또한 정신세계의 그 어떤 추상적 사고를 통해서도 감수를 얻는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도 객관의 활동에서 축적된 결과이다. 감수는 시적 발상의 기초이다. 인간의 사회활동속의 한 성원으로 감수를 할 줄 모르는 둔감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마음을 교감하게 할 수 있는 특수한 사유의 교류방식이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꽃을 대면하였을 때 향기와 모양만을 감상할 것이 아니라 음운을 감상해야하며 향, 빛, 색, 모양의 움직임 등에서 언어로 대화가 통해야한다 이것이 교감이다. 마음으로 사물과 이야기하는 것을 미적 향수를 얻는 시인에게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 말해야할까. 흥미 있는 것은 어느 대학의 저명한 교수 수묵화 화가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칠 때 학생들더러 시를 많이 읽으라고 강조한다. 즉 시정이 있어야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폭의 수묵화가 시정이 없으면 죽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사물과의 교감을 언어로 표현한 시정, 혹은 음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언어적 감각으로 두뇌에 전환하여 감상하는 것이요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언어적 감각을 시각으로 두뇌에 전환시켜 감상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인류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공구이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함에서도 언어는 감정교류의 매체이다. 언어가 풍부하면 교감도 풍부해진다. 한수의 시를 구상하거나 감상할 때 기실은 묵독의 과정이다. 즉 시각적으로 글을 보지만 두뇌에 반영되어 혀로 반사시킨다. 낭독은 없지만 언어들이 혀에 와 닫는다. 왜냐하면 목젖과 혀에 언어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 청각, 미각, 피부 등의 감각 기능을 자극한다.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활동 과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사물을 감수한다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언어적 활동이라고 생각된다. (8) 운율과 감정이 율동하는 흥취 시는 운율의 문학이다. 언어를 조직함에 있어서 감정 정서의 율동과 유기적으로 배합되어야 한다. 쉬운 말로 말해서 언어 조직은 외재율이라 한다면 감정 정서의 흐름은 내재율이다. 언어로 감정정서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시인의 수련과 리듬의 미적 관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인은 감정 정서의 흐름을 시적 언어로 잘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의 정감이 진실해야한다 시를 쓰면서 이런 것에 유의 한다면 리듬에 감정을 실어 움직이는 미적 감수를 느낄 수 있다. (9) 마음과 언어가 통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형상 사유의 기본 원소이다. 언어가 결핍하면 감수도 결핍해진다. 유람하면서 어떤 절경을 본 감수를 언어가 부족하면 하고 감탄할 뿐이지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다만 시각적 기억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가 풍부하면 시로 잘 묘사할 수 있다. 언어로 이미지를 그려 낼 수 있다. 시 창작을 하면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고민할 때가 많다. 수개란 기실 언어의 수개이며 감정 정서를 언어로 다듬는 수개이다. 알맞은 언어를 찾지 못해 사전을 찾아보아도 생각나지 않다가 문뜩 며칠이 지나 생각 날 때가 있다. 기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가 중요한 것은 언어는 감정정서의 표기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수련은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가장 간고한 것이며 경상적으로 탐구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감정정서를 언어 외에 다른 어떤 수단으로는 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심리적 효과의 흥취 시를 쓰는 것은 미적 향수이다. 직업과는 관련이 없이 각 분야의 직업에서 시인들이 배출된다. 그것은 자기의 정감을 시란 쟝르로 누구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객관사물이 혼잡하게 반영된 심리를 추리고 정화하는 과정이다. 시를 쓰기를 몰입하면 다른 불미한 인상들이 담박해지거나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진다. 청정해진다. 밝아진다. 아름다움 속에 머물게 한다. 분노할 때 시를 쓰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고 슬플 때 시를 쓰면 마음을 달랠 것이고 우울할 때 시를 쓰면 경물에 마음을 의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효과의 반응이다. 이상 시를 쓰는 열 가지 재미를 나의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아직 이론적으로 승화하지 않은 나 자신의 경험인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이 되여 부자가 되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하더라도 고생하더라도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심리활동에는 언제나 경쾌함, 건강함, 명쾌함, 진실함, 순수함, 후련함이 뒤 따르는 것이다. 상상은 힘겨운 생활에서 평온을 찾고 희망을 구상하고 미를 그리며 시정에 머무는 정신생활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영상과 시인이 그리는 지향 펼쳐져 있다. 시인이 되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일이지만 일반인이 감수할 수 없는 정신적 행복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명한 시인이 되는 목적이기 보다는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는 혹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다.  -끝-​ /동북아신문 
1526    조선족문단 우화시 개척자 - 허두남 댓글:  조회:2320  추천:0  2020-09-08
                                  글/최룡관(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인)                                   세계적으로도 일생동안 심혈을 몰부어 우화와 우화시를 연구하는 작가는 아마 많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우리 연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일찍 이십대에 자신의 첫 우화시집이자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우화책을 펴내서부터 40년동안 우화와 우화시 창작에 몸을 담그어온 허두남이다.     1979년  첫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로 우화책이 없던 우리 문단의 공백을 메꾼 허두남은 지금까지 8권의 우화책을 출판했는데 산문으로 쓴것이 2권, 시로 쓴것이 6권이다. 허두남은 산문으로 된 우화보다 우화시 창작에 더 많은 심혈을 쏟아붓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허두남이 창작한 6권의 우화시집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저 한다. 일찍 맏형님의 영양을 받아 소학교시절부터 우화시를 습작해오던 허두남은 1979년 처녀작 우화시집《개미와 코끼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화시 25수가 수록되여있는 이 책은 정영석의 중편소설 “제2호순라선에서”와 더불어 문화대혁명후 제일 먼저 출판된 개인아동문학서적이다. 책장을 열면 집채만한 코끼리로부터 입쌀알만한 개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동물들이 살아움직이는데 대뜸 아이들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작품집중의 “잣새의 계획”은 국경30돐창작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지녔고  소학교교과서에도 번듯이 올랐다. 작품집에 호구를 올린 우화시들은 거개 이야기가 흥미롭고 주제가 뚜렷하다. “잣새의 계획”은 조건타령을 하며 일을 미루다간 랑패볼수 있다는 도리 ,”사슴의 후회”는 작은 흠집도 제때에 고치지 않으면 큰 흠집이 될수 있다는 도리, “고양이건축기사”는 일을 첫시작부터 착실히 하지 않다간 망쳐버릴수 있다는 도리, “알깔줄 모르는 소쩍새”는 부질없는 자존심을 부려서는 배울것도 못배우게 된다는 도리를 재미있는 이야기속에 재치있게 집어넣었다. 그밖에 우화시 “뽐내던 원숭이”, “퇴박맞은 담비”, “여우의 선물” 같은 작품들은  풍자성과 유머감이 아주 짙다. 책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 반면 부족점도 적지 않다. 첫째: 산문화경향이 심한것이다. 우화시에선 산문화를 허용한다고는 하나 허용한다는 것은 좋다는 말과는 다르다. 이야기를 담자면 산문화를 피면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너무나 산문화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 작품집의 많은 우화시들은 시행을 붙여놓으면 산문이 된다. 둘째: 편폭이 너무 길다. 우화시라면 무조건 꼭 짧아야 한다는 도리는 없지만 어느 작품이나 다 기니 문제인것이다. 우화시 “민들레씨의 이사”는 주견 없는 민들레씨가 좋은 고장으로 이사가려다가 가지 못하는 이야기를 생동하게 그려낸 작품인데 내용은 매우 좋으나  산문화되고 편폭이 너무 길다. 무려 58행이나 된다. 주인공 민들레씨가 네 인물-동풍, 서풍, 남 풍,북풍과 대화를 주고받은것을  직접담화법의 수법으로 옮겼으니 그렇게 길어질수 밖에 없는것이다. 전반 시도 길고 시행도 늘차니 좀 숨이 찬감이 난다. 허두남의 우화시집《승냥이와 범》은 첫 작품집이 출판되여서부터 5년뒤인 1984 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이 책엔 31수의 신작이 수록되여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작자가 첫 작품집에서 나 타난 약점을 미봉하려고 모대긴 흔적을 “함축”이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수 있다. 이 책에도 좋은 우화시들이 적잖게 있다. 첫 작품집에서 나타났던 시가 너무 긴  페단을 극복하고 완정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간결하게 쓴 우화시들이 여러편이다. “범나비”, “도마뱀의 재간”, “대충의 대화””후회만 하는 염소” 등은 아주 풍자적이고 재미 있다. 우화시 “범나비”를 살펴보기로 하자.   풀이슬에 날개 젖은 친 범나비/큰길에 앉아 볕쪼임하는데/ 꼬꼬수탉 한마리/모 이 찾아 기웃기웃 다가왔다// “거기 오는 수탉놈아/ 냉큼 제자리에 서지 못할가?/ 내가 누구라고 / 감히 내앞으로 지나가려하는거냐?/ 그 말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나비는 가장 위엄있게/ 목청을 가다듬어 꾸짖었다./ “이 버릇 없는 수탉놈아/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느냐?/ 내 이름을 들으면 넌 기절할게다./ 이 어른이 바로 범나비란말이다.// 여진히 못들은듯/ 기웃기웃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 나비는 날개를 퍼덕이며/ 고래고래 욕설 퍼부었다./ “이 되지 못한 수탉놈아/ 하루강 아지 범 부서운줄 모른다더니/  내 이름 듣고도 그냥 다가와?/ 범나비란 나는 범이란 말이다./ 네놈이 뛰는 범 무서운줄 알면서/ 나는 범 무서운줄 모르다니…”// 그제야 범나비를 발견한 꼬꼬수탉/ 씽 달려가 뚝 찍어먹었다. 이 우화시를 보면 웃음을 금할수 없다. 범나비야말로 풍자의 대상이고 우습광스 러운 우화적 인물이다. 이름보다 실속이 중요하고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것을 반면적으로 일러주고있다. 그런데 작품은 내용은 재미 있지만 표현수법은 별루인감이 든다. 전반 시는 29 행으로 첫번째 우화집에 실렸던 대다수의 우화시들보다 절반가량의 편폭이다. 그런데 도 여전히 함축미가 결여한 느낌이 드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원인은  작품구상이 산문적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이 우화시는 비록 편폭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첫번째 책 에 수록된 우화시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창작되였다. 사건발전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서술했는바 붙여놓으면 산문이 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많은 우화시들이 이런 공통적인 단점을 갖고있다. 편폭은 줄이 려고 애썼으나 다양한 수법을 동원하여 재치 있게 예술적으로 표현하지 못했기에 단 조롭고 딱딱하며 매력이 모자란다. 우화시를 보다 짧고 감칠맛 있게 쓰려면 고운 시어를 고르고 조화롭게 다듬는것 도 중요하지만  구상할때 “시적”으로 구상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줄글의 구성과 시 의 구성은 서로 다른 특점을 갖고있는것이다.  우화제재를 찾기가 그처럼 어려운데 마음 드는 제재를 손에 넣었다면 매 한편의 작품마다 제재를 찾는것만큼 그 형식에도 고심해야 할것이다. 1995년에 출판된 세번째우화시집 《춰주는 바람에》(우화시 64수)에서는 작자가 시도한 개혁이 보다 폭이 크다 앞의 두책에서는 이야기과정을 전개했지면 세번째책에서는 과정을 전개하지 않고있다. 따라서  산문적이던 구성도 시적으로 해결되였다    우화시 “떨어져버린 록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따스한 새 봄/ 꽃사슴 머리에 돋아났어요/ 솜털 보시시한 “록용나무”가// 귀한 보약이라/ 만나는 짐승마다/ 간청 했어요, 록용 팔라고// (어쩔가, 팔가?/ 안야/ 두고 두고 자랑거리 삼을테야!)// 꽃사슴 고개 건뜩/ 어깨를 으쓱/ ㅡ나의 보밴 한평생 안 판다 안 팔아// 가을 되니 보배 록용/ 뼈처럼 땅땅/ 이듬해 봄 되자 떨어져버렸어요   이왕에 쓴 우화시같으면 또 독자가 다 내다본 과정을 지루하게 서술했을것이다. 례컨대 곰할아버지가 록용을 팔라고 청들었지만 도리머리를 저으며 안 팔았다, 노루아저씨가 사정했지만 또 밀막아버렸다, 토끼아우가 간청했지만 그것도 외면해버렸다….그렇게 전개했더라면 그 편폭이 “민들레씨의 이사”와 거의 비슷하게 되였을것이다. 하지만 작자는 이 작품에서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내용을 집중,개괄하여 표현했기에 편폭이 절반나마 줄어들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우화시가 이 우화시처럼 이야기를 씀에 있어서  사건을 따라가며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점에 서서 그려냈다.  역시 우화시 64수가 수록된 네번째 우화시집《세수해선 뭘해, 또 때가 낄텐데》 (동북3성교육출판사,2002년년)는 많은 새로운 특점이 있다. 첫째: 동식물을 쓰던데로부터 아이들을 쓰는것으로 개혁을 가져왔다.   64수가운데56편이 아이들을 쓰고있다. 이른바 “랑만주의우화시”로부터  “사실주의우 화시”로 바뀐것이다. 둘째: 시어가 한층 세련된 것이다  우화시 곤충채집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돌쇠하고 누나하고/ 곤충채집 간다야// 누나는야 맨손이지만/ 돌쇠에겐 포충망// 나풀나풀 꽃나비/ 또로록또로록 베짱이// 나무잎우에 앉아/ 그네뛰는 매미// 쑥초리끝에서 파르르/ 발레추는 잠자리// 누나는야 살금살금/ 발꿈치 살짝 매미 한놈// 돌쇠는야 우쭐우쭐/ 포충망 휙 잠자리 한놈// 누나는야 한나절에/ 열마리 잡았는데// 돌쇠는야 웬 일일가/ 살펴보면 빈 포충망// 포충망에 포충망에/ 구멍난줄 몰랐네.   이 우화시는 허두남에게서 늘 나타나는 산문화가 가장 잘 극복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제를 볼 때 전혀 새롭지 않다 가능하게 “구멍난 독에 물 퍼붓기”란 속담에서부터 구상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어가 아주 잘 짜였다.  “그네 뛰는 매미”,  “발레추는  잠자리” 등 구절들은 매우 생동하며 운률도 성공적이다.  전반 작품이 이른바 산문적으로가 아니라 시적으로 언어구사가 이루어졌다. 셋째: 유머감이 한층 진해졌다.  우화시 우화시 “약 먹을 때”를 살펴보자.   파리가 썰매 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만지며/ 의사 선생님/ 한 눈 찡긋 일러준 말//ㅡ꼬마아가씨/ 이 약 먹을때/ 물 마시면 절대 안돼/ 물 마시는 날엔/ 이 할아버지처럼 대머리가 돼// 의사 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도 미끄러져 떨어지는듯/ 몸이 오싹//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면/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머리가 대머리 될가봐/ 작은 배구공 될가봐/ 갈증이 나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어요//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한꺼번에/ 얼음과자 열대 먹었을뿐   이 작품은 풍자와 유머가 강할뿐 아니라 표현도 아주 훌륭하다. “파리가 썰매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의사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로 미끌어떨어지는듯”,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는 날엔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등 표현들은  극히 성공적이다. 이렇듯 작품의 언어가 갓난아기처럼 귀한 주요원인은 아이들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천진란만한 동심에 비쳐진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기때문이다.     춰주면 좋아하는 아이/ 코흘리개는/ 숱한 애들이 앞다투어/ 너 참 힘세다 춰주니/ 너무 좋아 코를 풀쩍풀쩍/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나 진짜 힘장사야/ 얼마나 센지 보련?/ 커다란 돌 척 들고서/ 다들 보라는듯 우쭐우쭐/ 국수오리 같은 코물이/ 발등까지 드리운줄도 몰랐대요   이는 우화시 “코흘리개”의 전문이다. 이 글의 주제는 “칭찬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놈에게 쉽게 리용된다.”로 될것이다. 이 주제를 표현하자면 “큰 인물”의 “큰 사건”을 가지고 “큰소리”를 치는 페단이 생길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와는 정반대로 코를 많이 흘리는 한 아이를 통해 그것을 생동한 만화처럼 잘 보여줬다. 자칫 꽛꽛하게 만들수 있는 문제를  작고 재미있는 해학으로 원만히 표현하였다   앞으로 이러루한 제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작자는 이 책에서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내용을 많이 취급했다.  흔히 아이들을 쓴 작품들에 학굫생활, 특히 공부에 대해 쓴것이 적다 그만큼 중요하고 가장 일반적인 것일수록 쓰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 책에는 학교생활, 공부를 두고 쓴 우화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성급한 아이”, “사내애가 그럼 못써”, “구멍난 책장”,   “”그런 로봇”, “락제생된 사연”, “두고보자”, “책을 많이 읽을테야”,  “빵점”,  “꾀보→“울보”,  “지각대장” 등이다  작자의 다섯번째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우화시 80수)는 2006년 한국에서 출판되였다. 이 책에는 네번째 책의 우화가 절반 넘게 들어있다 하지만 그대로 실은 우화는 기본상 없고 다시 손본것들이다 작자는 이 책에서 우화시의 언어를 많이 “미용”했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창조하려고 품을 넣었다. 우화시 “뚝쇠의 자존심”을 보기로 하자   아이참, 저 뚝쇠/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자존심은 쇠처럼 강해서/ 이름도/ 뚝/ 쇠// 저보세요/ 상우에 숙제책 펼쳐놓고/ 책장우에 연필장단 똑똑/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녀동생 꽃분이 들여다보더니/ 오빠, 내 알려줄가?// 힐끗 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까불지 마/ 쥐방울같은게 뭘 알아서…// 연필장단에/ 애꿎은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바꼭질하는/ 답안// 시계소리 재깍재깍/ 텔레비죤아동프로 이제 곧 시작한다/ 뚝쇠를 재촉하며 재깍재깍’’ 바빠 난 뚝쇠/ 궁둥이 들썩들썩/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이 뚝쇠를 구해줄 사람은 없나?)// 이제 다시 동생에게/ 묻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하고   이 작품도 인물에게 꼭 맞는 어휘를 사금 일듯 골라서 주인공의 행동을 잘 묘사했다. 하나도 능하게 없으면서 녀동생앞에서 으시대는 이웃집의 코흘리개와 비슷한 뚝쇠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온다. “연필장단 똑쪽”,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힐끗 녀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쥐방울같은게”, “”연필장단에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박곡질하는 답안”,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등 구절들은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동생앞에서 오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웃기는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격이다. 마지막 련에서 “묻지도 못하고”를 반복한것도 주제을 강조하는면에서도 좋거니와 문체론적효과도 충분히 나타냈다. 마지막련도 잘 처리했지만 이 작품이서 특히 훌륭하게 쓴 부분은 첫련이다. 첫행에서  “아이참, 저 뚝쇠”-이렇게 “문을 열자 산이 보이는” 수법으로 시작한것부터 좋다. 편폭이 짧은 우화시에서 “짧은 밤에 긴 노래 부를”것 없이 글줄을 아낀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첫 련에서도 가장 첱금싸게 잘된 점은 이름도 뚝 쇠 이렇게 세개행에다 갈라놓은 것이다. 이것은 형태이미지이다. 종이를 랑비하면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뚝쇠라는 이름이 바로 주제이기 때문에 강조한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모순의 성격을 이 두 글자로 잘 표현했지 않은가? 그러니 두 글자에게 당당하고 분명한 자리를 드린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행을 한글자씩 뜯어서 내리배렬하니 자기도 한번쯤 그렇게 해본 그런 언어장난과는 전혀 다른 좋은 착상이고 설정이다.  “뚝쇠의 자존심”이 이름 두글자를 두행에 나눠놓은것이 형식상 성공적이라면 전반 우화시를 새로운 형식으로 쓴것도 있다.  우화시 “착한 일”이 그렇게 씌여졌다.   일과에서 빠짐없는/ 일기 적기/ 착한 일 적기// 보배둥이 일기책에/ 또박또박/ 연필도 신이났나/ 미끄럼질 쭉쭉// ㅡ오늘은 뜻깊은 날/ 낯선 할머니 도와/ 짐 들어다 드린 날/ 착한 일 찾아하니/ 칭찬받은것보다 더 기쁘다// 귓가에 속삭이는/ 자애로운 목소리/ 일기란 진실하게 써야 해!//! 뒤머리 썩썩/ 덧붙이는 몇줄// 아래 학급 돌이/ 자기가 할머니 돕겠다/ 짐 붙잡고 놓지 않았다/ 달래여도 듣지 않아/ 겁을 줘도 듣지 않아/ 빵! 한주먹 먹이고/ 제꺽 짐 빼앗았지 헤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 그러면서도 너무 진실하게 아이의 성격을 그려낸 성공작이다. 내용도 새롭고 형식도 새롭다. 작자는 천진란만한 아이의 성격을 잘 그려냈을뿐 만 아니라 그 그림을 일기라는 액틀에다 정히 넣어서 걸었는데 형식이 아주 맘에 쏙 든다     형식이 생신하고 독특한 우화시로는 또 “친구사귀기”가 있다. “친구사귀기는 인터넷사이트를 리용해서 친구를 사귀는 형식을 빌어 웃음거울에 비친듯 우습광스러운 주인공의 형상을 보여주고있다.   인터넷 사이트로/ 친구나 사귀여 볼가/ 아무렴!/ 나처럼 훌륭한 애에겐/ 친구도 많아야지// 제 자랑한다 말아/ 나하고 사귀고 싶은 애들은/ 검색 창에 내 간력 쳐보렴/ 내가 허풍 쳤나// 나는나는/ 장점은 하늘만큼/ 단점은 손톱눈만큼// 내 또래중 키도 껑충/ 학급에서 힘도 으뜸/ 성미 활달한 사내대장부// 밥은 아빠보다 더 먹고/ (애들은 잘 먹어야 잘 큰대)/ 잠은 하루 열시간/ (애들은 잘 자야 건강하대)/ 늘 토끼처럼 뛰놀지/ (애들은 잘 놀아야 밝게 자란대)// 장점은 무지무지/ 많고 많지만/ 단점은 딱 하나 공부싫어증   “친구사귀기”나 “착한 일”같은 형식은 아주 좋은 추구이다. 앞으로 이런 추구들이 많아져 허두남이 독자친구들을 더 많이 사귈수 있기를 바란다.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도 생동성, 형상성면에서 약간 아쉬운 점을 남긴 다. 2015년에 출판된 여섯번째 우화시집 《빵순이 다이어트》(연변인민출판사)에는 보다 세련된 우화시가 무려137나 수록되여있다. 이 책에서 작자는 우화시를 보다 동시처럼 개조하는데 모를 박았고 많은 성과를 올리고있다. 작자는 아예 책의 쟝르를 우화동시집이라고 밝혔다. 이 책은 이전의 책들보다 질이 한 차원 높아졌다. 우선 우화시들이 재미 있어졌다. 다음 편폭이 한층 짧아졌다. 편폭은 짧아졌지만 작품을 인위적으로 줄여놓은 느 낌이 들지 않고 생동한 세부와 형상적인 구절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간결하고 재 치로우며 깜찍하다. 많은 우화시들은 형식상 완전히 일반적인 동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반 동시처럼 쓰여진 몇편의 우화시를  살펴보자     내 가슴속에 피여난 꿈/  아롱다롱 칠색무지개/ 저 하늘의 무지개보다 더 고운 고운 꿈/ 목화송이 흰구름 말끔히 닦은/ 파란 저 하늘보다 더 고운 꽃꿈//나의 고운 꿈 멋진 꿈은/ 아롱다롱 칠색무지개 베여다가/ 색동저고리 지어 입고/ 파란 하늘 한 자락 살짝 베여다가/  파란 치마 곱게 지어 입는거야!// 너무 너무 소중한 꿈이기에/ 맘속으로만 고이 키우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다른 사람 내 꿈 훔쳐갈가봐//저 높은 곳에 있는 무지개를/  어떻게 베여올가?/ 누가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파란 하늘을 베여온담?/ 그리 큰 가위는 또 어데서 구하나?        이는 우화시 “고운 꿈”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존의 우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일반 동시처럼 썼 다. 아주 감칠맛 난다. 작자는 한 녀자애의 아롱다롱 고운 무지개꿈을 그리고있다. 파란하늘을 베여다가 치마를 지어입고 칠색무지개를 베여다가 색동저고리를 지어입 었으면 하는 천진란만한 어린아이의 꿈은 그야말로 “목화송이 흰 구름이 말끔히 닦은 파란 저 하늘보다 더 곱고 아롱다롱 칠색무지개보다도 더 고운 꽃꿈인것이다. 좋기는 파란 하늘을 베여올  때 해까지 함께 베여다가 옷을 지어입는다면 더 리상적이겠지. 하늘색 파란 바탕에 황금빛 해를 수놓은 옷,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옷이 아름다운걸 물론 해까지 있으니 겨울에 춥지도 않고 그처럼 좋은 옷이 더 없을것이다.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서 눈이 비뚤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파란 하늘을 누가 베여오고 어떻게 베여오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화시는 이소프의 우화 “쥐들의 회의”와 비슷하다. 쥐들이 모여서 어떻게 고양이를 대처할가를 토론하는 회의에서 모두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자고 한다. 어떤 방울을 달고 어떤 끈으로 달 것인지를 열렬하게 토론했지만 누가 가서 그 무서운 고 양이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하자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고양이가 무서워서 방울을 못 달듯이 하늘은 너무 높아서 팔이 자라지 않으니 베여올수 없다. “분선이가 미워요”도 일반 동시처럼 쓴 우화시이다.   속눈섭 긴 쌍가풀눈도 미워요/ 오똑한 코도 미워요/ 볼우물 파며 생글생글/사과 같은 얼굴도 미워요// 선생님 물음에/ 남먼저 대답하는 입/ 남먼저 쳐드는 손도 미워 요/ 이름도 미워요// 남학생들 눈길 혼자 끌어가는/ 욕심쟁이 분선이/ 얄미운분선이// 미운 분선이/ 요즘 더 미운 짓 해요/ 밤마다 내 머리속에 찾아와/ 단잠 들지 못하게/  막 휘저어놓군 해요// 분선이를 미워하다가/잃어버린 잠       이렇게 써도 우화가 되는가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 존의 우화형식에 길들어있는 사람들이다. 꼭 “토끼와 거부기”처럼 보자마자 그 뜻이 다 알리게 써야만 하는가? 일정한 심도를 심어주고 사색을 거쳐야 그 뜻이 알리게 쓰는것이 더 예술적효과가 있고 현대적 미감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풍자속에 교훈을 담으면 우화시는 다양한 형식으로 쓸수 있다고 본다. 아니, 다양한 형식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싶다. 그럼 이 작품이 왜서 우화로 될수 있는가?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작품 의 주제는 친구를 미워하고 미워하다가 밤잠까지 잃게 되였다는것이다. 남을 너무 미 워하다가 결국 자신을 해쳤다는 뜻이니 풍자가 성립되는것이며 풍자속에 분명한 따끔 한 교훈도 담긴것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우화시를 이런 형식으로 쓴적이 없는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써서는 안된다는 도리는 없다. 우화시를 “이야기→교훈” “교훈→이야기”의 낡은 도식으로 가두지 말고 다양한 새 형식으로 써서 작품의 매력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에는 우화시 “바람”을 살펴보자   살구나무가지끝에서 /바람이 앵앵 울고있어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못된 장난 재미삼던 개구쟁이 바람 /빨래줄에 걸린 옷 팽개치고 /장독뚜껑 허공중에 날려버리더 니 /나무가지 부러뜨리려 심술 부리다가 /가지끝에 옷자락 걸렸나봐요/도와줘요!/도 와줘요 /애처롭게 구원 청하는데 /아무도 내다보지 않네요 /저러다 옷자락이 찢어지 면 어쩐담? /아이참, 그러게 /고약한 미운 짓 일삼지 말게지   얼핏 봐도 훌륭한 동시이다. 내용으로 보면 이는 또한 교훈과 풍자를 두루 갖춘 완미한 우화이기도 하다. 잘 짜인 동시안에 “남잡이 제잡이”라는 철리와 나쁜 일을 일삼는 자는 도와주는 이가 없다는 철리를 담고있다.     완전한 동시형태로 쓰여진 우화시로는 또 “파란 호수”를 들수 있다.       아빠 함께 뽀트 타던 날/파란 호수물 처음 보았다/노랑병아리빛 치마에 파란 물 튕길가/가슴에 두손 포개고 조심히 서있는데/심술쟁이 파도가 처절썩/치마자락에 물방 울 튕겨놓겠지/난 몰라/난 몰라/내 옷 어쩌나 발 동동 굴렀는데/참말 신기했다/옷에 한 점도 옮지 않은 파란 물감    이 작품을 보고 한수의 매력적인 동시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파란 호수물을 눈에 보는듯이 그려낸 한폭의 수채화이다. 물방울이 튕기면 옷에 파란 물이 옮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은 진실하게 과장 없이 표현된것이다. 이 작품은 시어도 참 아름답게 씌여졌다. “노랑병아리빛 치마” “가슴에 두손 포개 고” “심술쟁이 파도”  “난 몰라! 난 몰라!” “발 동동 굴렀는데” 등 구절들은 말이 고우 면서도 어린 소녀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 그럼 이처럼 아름다운 동시가 어떻게 우화시로 될수 있는가? 무엇을 풍자했고 어 떤 교훈을 던져주고있는가?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가려볼줄 모른다는 천진란만한 생 각에 가벼운 웃음이 생기는 풍자적인 요소가 살짝 깃들어있는것이다. 파란 물감을 풀 어놓아 파란 물과 해빛이 반사되여 파랗게 보이는 물은 얼핏 보면 비슷한 면이 있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방울이 튕기면 옷에 파란 물이 옮으리라고 생각하는건 서 산마루에 물든 빨간 저녁노을을 보고 서산에 불이 났다고 소방대에다 전화를거는것과 같은것이라 하겠다. 우화시 “내 만약 미용마술사라면”도 일반 동시의 형태로 씌여졌다.   내 만약 미용마술사라면/ /엄마를 다시 젊어지게 하고싶다/더 예쁘게 만들고싶다 // 눈귀와 입귀 잔주름/  /다리미질한듯 곱게 펴드리고 세월의 그늘 비낀 볼도/싱싱한 사과처럼/ 반들반들 윤기 돌게 만들련다// 군데군데 나이살/  날씬한 곡선 잃어가는 엄마에게/ 그제날의 몸매 돌려드리고/ 날아갈듯 사뿐사뿐/ 예쁜 걸음걸이도 되찾아드 리련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아름답게는 안 만들거야/  선녀처럼 변한 엄마/옷자락  이 날개로 변하여/ /훨훨 하늘로 날아가면 안되니깐!/ 옛말에 나오는 선녀처럼/아빠와 날 버리고 가버리면 안되니깐!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겠다 이외에도 벨, 시계바늘 날 닮았어, 무지개, 세배 등 동시처럼 쓴 우화시들이 여 러편이다. 이 책에서 작자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짓는데도 정성을 쏟아부었다. 하는 짓이 망태기인 개차반 망택이, 옹졸한 옹남이, 얼핏하면 앵돌아지는 앵나, 노래 잘 부르는 여울이, 큰소리 잘 치는 왕구, 남의 흠 잘 잡는 “짹짹2인방”, 그외에 도 꽃분이, 초롱이, 영재, 망칠이, 뚝쇠, 대식이, 미숙이, 울남이, 떼돌이, 빵순이, 달 인이, 으뜸이, 우승이, 진수, 보석이, 금이, 구슬이, 똘똘이, “배살공주” 등 이름들은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고 작품의 주제를 반영하는데 한몫 담당하고있다. 이상으로 우화작가 허두남이 40여년간 땀으로 가꾸어온 6권의 우화시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두어보면 허두남은 크릴로브우화시와 조선의 우화시 등 재래의 우화시로부터 양을 섭취하였으나 그의 우화시는 재래의 우화시들보다 많은 다른 개성적특점이 있다. 제일 중요한 특점은 이야기 과정을 전개하지 않고 일반 동시와 비슷한 형태로 쓴것이다. 허두남은 초기에는 동화시 비슷하게 이야기 과정을 전개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서 일반 동시형태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다. 재래의 우화시를 “풍자시. 철리시. 이야기시”로 정의를 내린다면 허두남 우화시는 “풍자시, 철리시. 동시”로 정의를 내릴수 있다. 비뚠 인물의 비뚠 행동을 빌어 작고 깜찍한 도리를 귀띔해주는 우며동시-이것이 허두남이 수십년의 탐구로 만들어낸 우화시이다. 허두남우화시의 다른 특점은 동식물을 주로 쓰던 전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주인 공으로 한것이다. 허두남은 끈질긴 노력으로  우화시창작에서 많은 결실을 맺었지만 그의 우화시에 는 미숙한 점이 적지 않다. 여섯권의 책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부족점은 생동성과 형상성이 부족한것이다. 많은 우화시들은 형상이 론리에 묻히고있다. 우화작품은 론리정연해야할것이 자명하 지만 우화도 문학인이상 생동하고 형상적이여야 하며 재미있어야 한다.     갱신을 위해 공을 들이는데 린색하지 않은 작자가 이제 꼭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 로 돌려놓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 조선족문단에 한떨기 이색적인 꽃을 피운 우화작가 허두남, 재능 있는 구연 작가인 그가 앞으로 구연작품의 특점을 우화시에 배합하여 완정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스찔을 갖춘 우화작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1525    토템시/ 백학= 남영전, 해설= 현춘산(4) 댓글:  조회:2160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4) (ZOGLO) 2020년7월30일      백학(흰 두루미), 백의 민족의 혼   현춘산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 목과 다리가 훤칠하게 생긴 흰 두루미가, 그 백학(白鹤)이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솟아오른다. 너울너울 춤추는 날개짓은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염치는 듯, 하늘하늘 창공에 뜬 모습은 흡사 어여쁜 천사의 모습이런 듯, 그 기품 있고 정결하고 도고한 자세는 또한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고대의 동이족(东夷族)은 각별히 조류를 숭배했었다. 동이족의 조류숭배는 그가 처했던 자연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양이 솟는 동쪽나라, 첩첩 뭇산과 천리 림해와 만경창파를 안고 사시절이 분명한 자연지리적 조건에서 말이다. 일년치고 사시절이 바뀜에 따라 철새들이 날아오고 날아간다. 동이족의 천신(天神)숭배는 바로 태양숭배였다. 그들은 하늘높이 비상(飞翔)하는 새들이 태양으로 날아갔다가 태양에서 대지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중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새가 백학이다. 그래서 신선들이 하늘에 오를 때면 백학을 타고 오른다고 했다. 동이족은 태양의 밝은 빛을 흰색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태양이 비추는 낮을 "백천"(白天)이라고 불렀다. 태양이 비치는 "백천"과 백설 같이 흰 백학. 과연 우리 선조들의 시각으로 보는 백학은 어떤 새였을가. 태양숭배에서 비롯된 흰 색에 대한 숭상, 흰 색에 대한 숭상으로 옷도 흰 색만을 고집했던 백의민족(白衣民族). 그 백의민족에게 있어서 백학은 과연 어떤 새였을가. 백학은 또한 성인(圣人)의 화신으로 되기도 한다. 옛날 고기붙이 아니면 식사를 못하는 모친을 위해 사냥을 하던 신효거사가 마땅한 사냥감이 없어 하늘 높이 날아가는 다섯 마리의 학을 바라고 화살을 날린다. 그러자 그중의 학 한마리가 깃털 한대를 떨어뜨린다. 거사가 그 깃털을 눈에 대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훗날 거사를 만난 오류성중(五类圣众)의 하나가 자기의 깃털을 돌려달라고 해서 그 깃털을 주니 떨어진 옷자락에 갖다대는데 그 깃털이 삼베쪼박으로 변하여 꼭 들어맞는 것이였다. 그 다섯 도사가 바로 신효거사가 활로 쏜 다섯 마리의 학이였다. 백학은 그 도사들의 토템이였다. 토템과  인간의 호상전환을 보여준 사례다. 백학은 소나무, 사슴, 불로초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십장생(十长生)의 하나로 간주되였다. 백학은 천지간에 아름다운 것만 취하여 그 몸을 보양하고 사기(死气)가 없는 가운데 살므로 장수한다고 한다. 백학은 다른 조류에 비하여 높이 나는 새로서 비상과 높이를 상징하는 동물. 억센 날개로 하늘높이 나는 새, 풍운(风云)을 헤가르며 풍랑을 맞받아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새, 그는 피와 불의 세례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희망이였고 간난신고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던 백의민족의 귀감이였고 힘이 아니였을가.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 "백학"은 백학의 성격을 백의 민족의 혼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의 혼이여 천만년 깊이 묻힌 피비린 내음에 절고 천만년 검붉은 질식속에 몸부림치고 천만년 무거운 층암속을 뚫고 나오며 검은 삿갓 검은 두루마기 검은 적삼 불살라버리고 천지간에 하얗게 다듬어진 넋   백의 혼은 바로 이렇게 유구한 세월 험악한 환경과 엄혹한 시련속에서 련마된 것이다. 이렇게 련마된 백의민족의 넋이였기에 "결백속의 붉은 피방울/백두의 얼음속에 스며든데도 애탄하지 않고/더욱 더 많고 많은 백의 혼 낳아키웠"던 것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표현된 백학의 토템이미지는 광명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풍랑을 헤쳐온 백의 민족의 억센 투지와 생명력이며 백의민족의 깨끗한 지조와 굴함없는 령혼이다.
1524    토템시/ 신단수= 남영전, 해설= 현춘산(3) 댓글:  조회:2152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3) (ZOGLO) 2020년7월30일  신단수, 조선민족의 세계수   현춘산   아득히 멀고 먼 옛날, 아아하게 솟은 산마루에 거목인 박달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그 나무는 아찔하게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그 박달나무는 저 멀리 지중해연안으로부터 이란문화권을 거치고 인도를 포괄하면서 아세아대륙의 북부를 총망라하다시피 하면서 솟아오르던 우주의 나무 즉 세계수중의 한그루였다. 고대인들은 우주의 질서가 천계와 지계 그리고 지하계로 이루어졌다고 여겼고, 이러한 우주구조의 수직관념에 따라 하늘과 대지와 지하세계를 하나로 얽매여 련결시킬 수 있는 매개물이  즉 우주의 축이 수요되였다. 그런 매개물로 나무이상이 없다고 여긴 선조들은 어떤 한그루의 나무를 선택하여 그것을 우주의 나무 즉 세계수로 삼았던 것이다.이처럼 세계수는 인간의 의지가 심고 가꾼 나무였다. 그런 나무들은 뿌리로 지하의 샘을 빨아올리고 초리로는 하늘의 샘을 자아내리기에 영원한 생명의 원천과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하늘과 땅을 비티고 있는 기둥으로 되고 있었다. 씨비리야 각 민족의 세계수가 한그루의 봇나무나 락엽송 혹은 참나무였다면 우리 민족의 세계수는 박달나무였다. 하늘에 닿은 그 신기한 박달나무를 통해 천신 환웅이 내려서 그 아래에다 신시를 열고 인간세상을 다스리자 곰과 범이 사람이 될 소원을 신단수에게 빈다. 결국 금기를 지켜낸 곰만이 성공하여 웅녀로 된다. 웅녀가 자식소원을 신단수에 빌자 환웅이 잠시 사람의 형체를 빌어 웅녀와 더불어 아들을 보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민족의 시조 단군임금이였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사실 신단수가 단군의 부친토템이 된다는 점이다. 신단수는 천신 환웅이 깃든 나무이기에 환웅과 동심일체를 이룬다. 게다가 단군의 단(檀)자는 신단수의 단(檀)자이다. 이것은 단군(檀君)이 사실상에서는 신단수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단군신화는 한폭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민족서사시다. 단군신화는 천신 환웅과 신단수, 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선조들의 우주관과 민족의 생명력에 대하여 알게 하였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신단수"에서 웅위롭고 호방하며 장엄한 신단수의 형상을 다음과 같은 시구로 묘사하고 있다.   창천을 쪼각쪼각 떠받들고 대지를 뙈기뙈기 거머쥐고 (중략) 하늘의 구름 몰아오고 딸의 물 빨아올리며 (중략) 소탈하고 영특한 웅신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천지개벽의 연분 맺었네 (중략) 막강한 기백으로 빙산의 두개골 열어젖히고 화애로운 락원 일떠세웠네.   시인은 신단수의 형상묘사를 통하여 영구불멸의 생명력과 하늘에 닿는 기개, 굽힘없는 굳센 의지와  천지개벽의  기백과 슬기를 지닌 민족의 상징인 신단수의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1523    토템시/ 곰= 남영전, 해설= 현춘산(2) 댓글:  조회:2015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2) 조글로미디어 2020년7월30일      곰, 우리 민족의 시조모   현춘산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우람한 산악을 끄는 그림자"가 가고 있다."덩쿨풀 우거진 어두운 수풀을 뚫고, 물풀이 우거진 황량한 수렁창을 지나" 산악을 끄는 우람진 그림자가 가고 있다. 산악마냥 우람진 몸집, 기둥 같은 네다리, 쟁쟁 쇠소리날 듯 탄탄한 발톱, 오직 앞을 향하여 엉기적거리며 가고 있는 그는 과연 누구일가. 아득히 멀고 먼 태고의 시절, 우리의 조상들의 생존환경도 그러했다. 가시덤불 우거진 원시림속, 잡초가 무성한 크고 작은 수렁창들, 해빛을 모르는 컴컴한 동굴속... 자연계와 채 분리되기 전의 인류의 시야에 안겨온 그 우람한 그림자의 임자는 과연 무엇이였을가. 그것은 험악한 생존환경에서도 태연하고 침착하며 난관을 두려워함이 없이 역경을 헤치며 끈기있고 용감하게 앞날을 개척해가는 초자연적인 힘이였다. 그는 인간들처럼 두발로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앞발로 적수와 싸우고 로획물을 거머쥐기도 하는 동물이였다 그는 인간들과 육체적 동질성외에 생리상의 동질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포유동물이였고 암컷의 생식기나 자웅의 교배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는 인류에게서 아바이나 할배로 불리우는 존재였다. 인간들이 그가 듣는 데서 경칭으로 부르면 화를 자아낼 수도 있다고 우려할 만큼 그는 경외의 대상이였다. 고대에 그의 분포망은 지구의 북반구 대다수의 지역이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호로웰의 조사에 의하면 동유럽과 서유럽의 일부, 로씨야내륙, 동아시아일대, 에스키모 및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그의 서식처였고 그를 위한 인류의 제의(의례)가 치러지던 그의 문화대였다. 그는 추운 겨울 내내 인간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가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리고 나무잎이 파랗게 돋아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엉기적엉기적 나타났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구한 삶을 꿈꾸는 고대인들의 관념세계에서 그는 달처럼 죽음과 부활의 원리를 지닌 신비한 동물이였고 영생불멸의 신령 그 자체였다. 시인 남영전은 토템시 "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쓰고 떫은 쑥맛 볼대로 보았고 창자 끊는 마늘맛 씹고 또 씹었다 별을 눈으로 달을 볼로 이슬을 피로 삼아 련꽃처럼 예쁘장한 웅녀로 변하여 이 세상 정령의 시조모 되였더라   육체나 생리상에서 동질성을 가진 동물들이 서로 전화하는 것은 원시적 신화가 즐겨 표현하는 모티프였다. 단군신화에 그는 범과 한 굴에 살았고 범과 함께 인간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는데 왜 범은 실패하고 그만 성공했을가. 그의 성공비결은, 끈질긴 인내성에도 있겠지만 그와 인간들과의 동질성이 범보다 우월한 조건이였으리라. 그가 사람이 되는 조건은 인간과의 그런 동질성외에도   신기한 쑥과 마늘을 먹고 백날동안 금기를 지키는 것이였다. 말하자면 그가  인간으로 변하려면 꼭 어떤 "수속"같은 의례를  통과해야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훗날의 성인식 같은 그런 것이였다. 인류가 유구한 모계씨족사회를 경과하던 고대에 성인식은 녀인들에게 많이 치러졌다. 소녀가 녀성으로서의 첫 성숙징조(초경)를 나타내면 일정기간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독특한 금기와 단련기간을 보내며 피를 정화시켜야 했다. 쑥과 마늘은 바로 피를 정화하는 식물이다.그가 하필이면 녀인으로 태여난 리유가 바로 인간들이 녀인에게 행하는 것과 흡사한 독특한 금기와 단련이라는 의례를  통과했기 때문이였다고 생각된다. 금기를 지켜낸 그는 마침내 아름다운 용모와 이슬과 같은 맑은 피를 지닌 녀인으로 변신한다. 녀인이 된 그는 모성을 지니고 아기를 가지려는 소원까지를 성취한다. 달과 같은 죽음과 재생의 원리를 지닌 그에게 달이 지닌 녀인의 생산적이미지가 적용되여  민족의 시조모로 된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신화적 사고로 보면 자연적이고 합리적이였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 "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더운 피와 열물 젖삼아 마셨기에 어진 성미에 너그러운 풍채 갖추고 억센 의지와 의력은 근골이 되고 발톱은 쟁쟁 소리나는 도끼와 활촉이 되여 애탄이 무어랴 구걸이 무어랴 길 아닌 길을 거쳐 죽음길도 뚫고 나갔더라 .......   태고의 전설속에 엉기적 백의의 넋속에 엉기적 요원한 미래속에 엉기적   곰의 형상은 그 산악처럼 우람한 그림자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그의 내재적 성격에서 표현되고 있다. 억센 의지와 의력, 애탄과 구걸을 모르고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왕매진하는 그 랑만성이 곰의 내재적 성격이다. 시인은 이 시구들을 통하여 순박하고 근로하며 굴함없이 역경을 헤치고 영원히 미래를 개척하는 조선족의 상징인 곰의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1522    토템시/ 달= 남영전, 해설= 현춘산(1) 댓글:  조회:2086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1) 조글로미디어 2020년7월30일  1.달, 영구한 생명력의 상징   현춘산   인간에겐 환상과 상상이라는 꿈이 있다. 꿈이 있는 인간들만이 삶과 죽음이란 이 심각하고 원천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다. 밤하늘에 높이 솟아 휘영청 빛 뿌리는 달, 해처럼 뜨겁지 않고 별처럼 차지도 않으며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둥글었다가 기울어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달은 몽롱하고 신비한 베일에 가리워있다. 삶과 죽음이란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인간이 달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하였을가. 달은 둥글었다가 기울어지고 때로는 인간들의 가시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달의 죽음과 재생으로 보았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인간들은 달의 반복되는 삶과 영구한 삶이 부러웠을 것이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달에다 초라하기 짝이 없을 자기의 "1회용"삶을 비추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달과 같이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을 두고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노래도 나왔고 원을 이루었다가 풀어지고 풀어졌다간 다시 원을 그리는 흥겨운 "강강수월래"춤도 생겼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부드러운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흰옷차림 녀인들의  "강강수월래", 그것은 정녕 달의 원리를 상징하는 춤이 아니였던가. 고대인류의 관념세계에서 우주는 무생물들의 물리적,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천체들의 생명공간이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해와 달에, 저 무수한 별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달이 우선 숭배의 대상으로 된 것은 바로 달의 신비한 삶 때문이였으리라. 둥근 달이 점차 이지러지다가 마침내 조각을 이루고 그 조각이 조금씩 줄어들다가 사라져 버리고 다시 조각달로 소생하여 점차 커지다가 둥그러지는  달의 삶이야말로 영구한 삶이였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려고 모지름을 쓰는 인간에게 있어서 달이 지닌 신비한 생명의 원리와 생명의 힘은 무엇보다 친절하게 안겨왔을 것이다. 이 달의 원리에 의해 원초의 물인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고 이 달의 원리에 따라 녀인들에게 생리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달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고 그래서 달은 지상만물과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토템으로 되여왔던 것이다. 이같은 인류의 신화적 사고는 달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 이집트의 오리시스신화나 우리 민족의 세오녀신화를 낳기도 했다. 이 두 신화에서 달의 정령인 주인공들이 사라지자 달도 빛을 잃고 주인공이 돌아오자 달이 다시 빛을 내고 있다. 이는 달의 주기적 운행을 죽음과 재생이라고 본 고대인류의 신화적 사고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영원히 동경하는 달의 정령의 매력이자 토템으로서의 달에 대한 숭배였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달"에서의 달의 이미지도 바로 달의 원리에서 비롯돤다. "둥그러짐은 이지러지기 위함이요/이지러짐은 둥글어지기 위함이라/둥그러지고 이지러짐은 영생으로 통한 산길이다-"에서는 달의 둥글음과 이지럼에다 생명의 반복과 영생이라는 철리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강강수월래"를 묘사한 시구"풍요의 원리는 이에 따라 밀물이 되고/모성의 원리는 이에 따라 회전이 되고/생명의 원리는 이에 따라 연장이 된다"에서는 달과 물, 인간(녀인)의 일치한 원리를 천명하므로써 영구한 생명을 지닌 달은 결국 만물과 인류의 위대한 어머니라는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1521    토템과 남영전시인 11 댓글:  조회:2487  추천:0  2020-09-03
지상토론(11)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8-06 ]          저자 오기활   《길림신문》에서 펴낸 대형구술시리즈 에서 남영전 시인은 여섯편의 구술로 토템과 성씨, 민족, 민족전통풍속, 인류운명공동체 등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에서 문화에 대한 정의, 문화내용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고 생각한다. 2006년 3월 20일, 필자는 길림신문사의 “귀하를 길림신문사‘연변25시'의 대외사업/기획부장으로 정식 초빙합니다”란 초빙서를 받고 ‘연변25시'의 창간, 기획, 발행 등 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3년 후인 2009년 3월 28일에 필자는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이 내준 초빙서를 받고 신문칼럼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2019년 2월, 남영전 시인은 일본에 머물고 있는 나에게 위챗으로 자신이 집필한 라는 글을 보내면서 “오선생님, 시간이 날 때 한번 봐주시고 조언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면으로 기쁘기도 하고 또 한면으로는 큰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기쁨은 중국의 이름난 시인의 한분인 남영전선생이 필자에 대한 믿음에 고마웠고 압력은 시에 대해 물에 연돌인 내가 어떻게 명시인이 내준 숙제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는 우려 때문이였다. 고민 끝에 나는 를 통독한 후 는 제목으로 남영전선생에게 답장을 올리는 형식으로 숙제를 완성하기로 했다. “남사장님, 나는 시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단 소학교에 다닐 때 조선어문에서 배웠던 동요시 몇 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고리끼의 산문시 을 암송하고 농촌오락장에서 읊기도 했고 술상에서 모주석의 시사도 몇수 쯤은 읇었으며 20대에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도 사서 보면서 도깨비가 기와장을 번지듯 책장을 번졌답니다. 공자에 따르면 말(言)이 시(詩)가 되고 시가 노래로 되고 노래가 춤으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시, 노래, 춤이라는 흥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일본에서 개최한 시인 윤동주연구 국제포럼에 참가하여 시의 생명력과 인류에 남겨주는 공헌을 절실히 감수하게 되였습니다. 이 기회가 밑받침이 되여 최근에는 김학송, 석화 등 몇몇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한층 시인을 우러러 보고 숭배하며 짤막한 시구에 슴배여 있는 시인들의 로고를 얼마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감명 깊은 몇구절의 시구가 시인들의 머리에서 짜낸 고귀한 뇌즙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덕분으로 를 공부했고 순간이나마 일연(一然)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기실 저는 토템에 대한 개념이 없고 몇년전부터 남영전이란 성함과 더불어 토템이란 명사를 듣게 되였습니다. 저는 를 읽으면서 믿겨지기도 하고 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전에 수로왕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를 약간은 들은 바가 있었고 특히 근년에 김수철교수님의 전기를 쓰면서 김교수님의 시조가 수로왕의 여섯째 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로왕을 김수철교수님의 전기에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남사장님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물음과 답안을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에서 찾았다는 것,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과목으로 설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가 국내 일부 대학 석사와 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으며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 내용이 대학입시 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는 등등의 점에서 남사장님이 중국시문화발전에 남긴 거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썩 몇년전에 읽었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2002년 3월에 프랑스 전역에서‘시는 령혼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는 주제로 시인의 봄이라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 때 도시의 공공기념물에는 현대의 명시를 담은 기발을 걸었고 지하철과 뻐스안에는 시민들이 접하기 쉽게 짧은 시들을 비치했습니다. 축제기간에 학교 교실에서 매일 시를 읽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영화관에서도 영화상영전에 시를 랑송했습니다. 방송은 물론 연극배우와 가수들도 시의 대중화에 나섰습니다. ‘시인의 봄’포스터는 ‘시는 자연적이다. 그것은 제2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고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 역시 시가 삶의 열정을 채워주는 령혼의 샘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남영전 시인은 에서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인간생활은 이 다섯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 어는 언어를 말한다.”고 세분화 하면서 바로 이런‘5가지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간결하고 통속적으로 귀납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이런 문화정의에 머리가 숙여지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오기활 프로필: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 출생.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통신학부) 졸업.연변일보사 도문주재기자, 연변일보사 해외부 기자, 대외사업부 부장, 《중국저널(月刊中國)》(한국), 《중앙경제신문》(한국) 연변지사장, 길림신문사 초빙기자, 특별기고인 《성공을 위하여》, 《부자로 가는 길》, 《일하는 멋 베푸는 삶》(정경락공저),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 쉬는 사람들》,《기업가의 인격》,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공저,《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전》,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등 여러 편. 
1520    [그것이 알고싶다] - "조선어학회" 댓글:  조회:3472  추천:0  2020-09-03
한국근현대사사전 조선어학회   [ 朝鮮語學會 ]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193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현재의 한글학회. 처음의 명칭은 였으며,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한편, 27년 2월부터 기관지 을 발간했다. 29년에는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했다. 31년 학회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33년에 을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을 완간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 [朝鮮語學會]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 · 기구와 단체 · 역사 인물 조선어 학회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요약 1921년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인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 8 · 15 광복 후에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대 일제 강점기 목차 풀이 심화 풀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3 · 1 운동으로 터져 나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에 놀란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다. 이에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한 학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학회’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만든 모임을 뜻한다. 장지영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면 우리 고유의 말과 글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국어에 대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주로 했으며, 1927년부터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끝을 맺지는 못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 학회’로 고쳤고, 1933년에는 오늘날에도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조선어 학회는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일제는 1937년부터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만 쓰게 했고, 1940년부터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아예 못 쓰게 했다.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역사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작은 사건을 꼬투리 잡아 조선어 학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을 모질게 고문해 조선어 학회가 학술 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고, 이를 구실로 회원 33명을 잡아간 뒤 28명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과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 끝에 이윤재, 한징 등은 목숨을 잃었다. 심화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 학회 사건 이후 조선어 학회는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었으나 8 · 15 광복 후에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글 학회는 1929년에 시작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에 6권의 《큰사전》을 펴냈다. 조선어 학회는 국어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연과 잡지 출간, 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조선어 학회의 학자들은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쏟았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끝을 맺지는 못했다. 사전은 해방 후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에 완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 학회 -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조선어학회(한글학회)     교과단원 국어(상), Ⅱ. 짜임새 있는 말과 글, Ⅱ-보충 가람일기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주시경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앞장섰던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에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가 이후 〈배달말글 몰음〉, 〈한글모〉, 〈조선어강습원〉 등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1931년 1월에 잘 알려진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이후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그 명칭을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 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개화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글이지만 실제로 보급되어 매체 등을 통해 대중화 된 기간이 짧은데다,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 한글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은 열악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올바른 한글 사용을 위한 맞춤법 통일안 마련에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1933년 10월에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고 1936년 10월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오게 된다. 학회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1941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가람일기〉의 저자 이병기 선생도 함께 참여해 국어 연구와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맞춤법과 표기법을 정비한 조선어학회는 이와 함께 우리말 사전 제작에도 박차를 가한다.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봄에 이르러 조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 해 가을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고 구성원 대다수가 검거되고 투옥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후에는 일제 말기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인해 흐름이 끊겼던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한글첫걸음〉,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하여 우리말 되살리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45년 10월에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바꾸어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 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사전 편찬 사업도 다시 시작하여 1947년과 1949년 그리고 1950년에는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내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에 6권을 마지막으로 사전 편찬 사업을 완결지었다. 한글학회의 활동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현재까지 수많은 사전과 고문서의 한글본을 펴내는가 하면 북한의 언어 연구와 디지털시대에 맞는 한글 연구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 인물들이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받아 대규모로 검거되어 투옥된 사건이다. 이는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의 정체성 및 언어를 완전히 말살하고자 한 일제의 발악이 빚어낸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던 조선어학회를 일찍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는데 특히 1929년부터 시작된 〈큰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기 시작한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이 사업에 소속된 조선어학회 회원 모두를 강제해산하기 위한 술책을 꾸민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제는 먼저 함흥학생 사건을 꾸민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그해 9월 5일 그를 검거한다. 일제는 정태진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어 10월에는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 11명을 검거한다. 이후 1943년 4월까지 모두 33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한다. 이들은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되는데 이 중 16명은 기소되고 12명은 석방된다. 기소되어 수감되었던 회원들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오로지 조선의 국어인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연구·보존하기 위해 헌신하였을 뿐이나 일제는 이들 순수 연구자들까지 민족주의 운동가로 몰아 무고한 죽음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되었다.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것으로 1948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개화기에 우리 나라는 한글을 공용문으로 채택하였으나, 통일된 맞춤법이 없어 그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13일 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할 것을 결의하고,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등 12명이 참여하여 3년에 걸쳐 이 통일안을 만들었다. 이 통일안의 대원칙은 ①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語法)에 맞도록 하고, ②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③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1988년에 〈한글맞춤법〉이 새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 나라 국어 문법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941년에 제정된 것으로 외래어를 한국어로 적을 때는 국제음성기호를 표준으로 하지만 외래어의 원음을 완전히 나타내기 힘들 시에는 우리 나라 말에 존재하는 자모와 자형으로 바꾸어 적는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와 외래어에 대한 생소함이 이 표기안이 널리 알려지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한림학사)
1519    우아하게 삽시다 / 우상렬 댓글:  조회:2775  추천:0  2020-08-24
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 2020년 08월 24일 /우상렬 연길은 현재 전국문명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너도나도 떨쳐나서 분발하고 있다. 일시에 새로운 면모가 펼쳐지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촌티를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돈에 너무 연연하는 것 같다. 천민자본주의적 냄새가 많이 풍긴다. 연길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미식의 도시다. 조선족음식에 조선음식, 한국음식, 한족음식〜 찍고 박기다. 그런데 제법 그럴듯한 식당에 들어갔다가도 메스꺼울 때가 있다. 입구 카운트 한 귀퉁이에 황금색 구리로 실물보다 몇 배 크기로 주조한 두꺼비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입에는 중국 돈 제일 큰 액면인 백 원짜리를 선두주자로 많은 돈을 물고 말이다. 분명 나보고 돈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돈도 돈이겠지만 두꺼비 몸뚱아리에 난 특유의 우둘투둘 옴 모양이 몸서리치게 한다. 그 옴 모양이 당장 내게로 옮겨 붙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이 두꺼비가 눈에 띄일 때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피해 달아난다. 그럼 왜 이 을씨년스러운 두꺼비를 카운트에 모셔놓았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꺼비는 조선족이나 한족이나를 막론하고 민속학적으로 복두꺼비라 식당 주인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아 모셔놓았다고 한다. 또 어떤 식당은 보면 두꺼비보다는 좀 점잖게, 그래도 무슨 귀신딱지 같은 財神爺-재물을 가져다준다는 관우상을 모시고 있다. 그 멋진 관우님이 어찌 이렇게 속되게 변해버렸는지, 참! 그래 '잘 모셨다'. 연변대학교, 우리 조선족 교육, 문화의 메카-성지. 나는 우리 대학교 주위가 먹자골목이 되는 것도 아니꼽지만 돈 냄새를 확 풍기는 것은 더구나 꼴 볼견이다. 우리 연변대학교 정문 앞 길을 건너 좀 오른 쪽으로 치우쳐 우뚝 선 건물 꼭대기를 한 번 보라. 거기에 돈이 박혀있지 않은가. 옛 날의 구리엽전 모양을 크게 주조하여 말이다. 물론 구리엽전 모양이되 변형을 주고 있다. '상평통보' 같은 글자가 박혀있을 주변에 태극무늬를 박아 넣은 것이 다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미지는 분명 구리엽전을 연상시킨다. 그 태극무늬는 세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돈만 많이 벌게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이 구리엽전이 전반 건물의 중간지점 꼭대기에 척 붙어있으니 돈, 돈, 돈을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돈은 우리 건물 안으로 말이다. 그래 건물주의 '포부'도 참 야무져! 요새 우리 중국도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쩍 하면 시상식이 아니더냐. 무슨, 무슨 상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사실 이상할 것도 없지. 좋은 일, 좋은 사람이 있으면 표창하고 상을 주고 해야지. 좋은 일, 좋은 사람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상에 따르는 상금이로다. 요새 시장경제니 맨 입으로 표창만 하고 상장만 줘서는 안 통한다. 상응한 상금을 주는 것도 정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이 상금액수를 큰 간판에 큰 수자로 달달달 써서 사회자가 큰 소리로 돈 수자를 또박또박 외우면 수상자는 두 손으로 그 큰 간판을 높이 들어 흔들어대며 거들먹거리니 말이다. 그래 정말 '잘 났다'! 이 세상 돈 참 좋지. 이 세상 돈 싫어할 놈 있나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 먼저 있고 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돈을 좀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돈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니깐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챙겨야 한다. 그렇다하여 돈 욕심을 내는 것은 꼴불견이다. 위의 행태들은 바로 돈 욕심을 너무 속되게 노골적으로 격에 안 맞게 드러낸데 문제점이 있다. 돈에 있어서 우리는 양반정신, 귀족정신을 좀 갖출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의 진정한 양반들은 돈과 거리가 멀었다. 청빈함을 생활의 지조로 삼았다. 아예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정신  적인 우아함을 많이 추구했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 아직 이런 양반정신이 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돈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직접 만지기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음 디테일을 보자. 돈, 돈, 돈... 한국 사람들은 치사한 감이 들어 직접 거론하기를 좀 난감해하고 월급봉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경조사나 남에게 큰 돈을 줄 때도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도 너도나도 이전에 양반이었다고 하는 데는 적어도 이런 정신적인 우아함을 많이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돈을 둘러싼 유렵의 귀족정신이란 것도 그렇다. 귀족들은 돈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우습게 보아오기도 했다. 정신적인 우아함 내지 도고함을 추구했다. 이에 반해 귀족들을 치고 올라오는 초기 자산계급들은 돈이라 하면 눈에 벌개서 설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19세기 비판적 사실주의대가 발자크는 멸망해가는 귀족에 대해 지대한 동정을 보냈고 욱일승천하는 돈의 구린내가 나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해 질타했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양반정신과 귀족정신에서 분명 본받을 것이 있다. 적어도 이 욕망시대 돈에서 초탈하는 우아한 모습을 배우야 한다. 양반과 귀족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다고? 물론 돈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아한 모습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하나의 마인드고 삶의 자세다. 연길시를 전국문명도시로 건설하고 우리 매개 시민이 문명시민으로 되는 데는 바로 이런 우아한 모습이 필요하다. 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        2020.8.23 /동북아신문
1518    토템과 남영전 시인 10 댓글:  조회:2665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10)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16 ] 지상토론(10)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ㅡ대형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을 읽고     (저자 김수영) «길림신문»에서는 지난해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70주년을 기념하여 를 펼치고 우리 조선족 문예계의 저명인사들의 사적을 소개하거나 문화에 대한 그들의 진술을 련속 소개하고 있는바 애독자들의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 나는 구술시리즈들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의 여섯편의 주옥같은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많은 지식을 새롭게 배웠으며 많은 일들이 련상되기도 하였다. ㅡ1ㅡ 남영전 시인은 이 글에서 우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문화와 민족의 개념에 대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은 토템의 개념에 대하여 아주 명석한 해석을 내렸다.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이다싶이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똑똑하지 않으며 국내외의 사전들에서의 해석은 대동소이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리해하기 쉽지 않다.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인류가 사회의 력사발전중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 특히는 문학, 예술, 교육, 과학 등 정신재부를 가리킴.»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라, 그렇다면 물질재부는 무엇이고 정신재부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량자의 총화는 또 무엇인가? 과연 따분하고 아리숭하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 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는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의식주행어가 표준으로 될 수 있고 자대라고 봅니다.» 남영전 시인의 문화에 대한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의식주행어’는 문화의 표지이고 문화의 본질이며 문화의 핵심내용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의식주행어’는 인류사회의 모든 문제의 표준으로 될수 있고 모든 개인과 군체를 감별하는 라는 것이다. 그의 정의는 아주 명석하며 아주 리해하기 쉽다. 따라서 민족의 개념을 리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민족문화, 민족단결, 민족의식, 민족정신, 민족정책, 민족주의 등등 민족이란 단어를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이란 무엇이냐 묻는다면 누구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며 국내외의 사전들을 들추어봐도 그 개념이 명석하지 못하다. 례를 들면 한국의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족의 정의를 내리고있다. «동일한 지역· 언어· 생활양식· 심리적습관· 문화· 력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사전들의 해석과 대동소이하며 민족에 대한 쓰딸린의 명제와도 거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명석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실제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본질적 요소인 ‘의식주행어’가 민족과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한 표지이며 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의 개념이라고 명시하였다. 쉽게 말하면 민족이란 ‘의식주행어’로 구별되는 인간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주 간단명료하고 누구나 리해하기 어렵지 않다. 남영전 시인의 글의 주제는 ‘문화를 말하다’인데 첫편을 제외한 다섯편의 소제목을 보면 시종 토템과 토템문화를 떠나지 않았다. , , , , 그리고 진술의 내용을 보더라도 토템과 토템문화에 대한 론술과 재미나는 토템이야기로 관통되여 있다. 그것은 무엇때문일가? 이에 대한 남영전 시인의 답복은 십분 명확하다.«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고 토템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성씨가 생겼으며 또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 형성되였습니다.» 그렇다면 토템이란 무엇인가? 우리 말의 토템이란 외래어(totem)를 한어에서도  图腾이란 외래어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토템이란 원시사회의 사람들이 자기네 씨족과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자기네 씨족의 표지로 삼았다. 례를 들면 어떤 씨족은 룡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고 어떤 씨족은 곰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다. 남영전 시인에 따르면 씨족마다 토템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씨족토템이 3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남영전 시인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의 전통문화란 무엇인가? 실상은 토템숭배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였다.» «토템이란 무엇인가? 파고 들면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게 토템문화이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관계라는 것이다.» 천인합일은 전통문화의 핵으로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론술들은 우리가 토템이 무엇이며 토템문화가 무엇인가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명언들이다. ㅡ2ㅡ 남영전 시인의 글에는 문화, 민족, 토템과 관계되는 개념들이 명철할 뿐만 아니라 새롭거나 독자적인 견해와 론단들이 많아 지식성이 아주 풍부하고 구술 또한 통속적이고 생동하다.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아래와 같이 제강식으로 렬거할 수 있겠다. 에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 세계적으로 제일 답복하기 어려운 단어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문화, 다른 하나는 민족. 에서: 왜 토템과 인류의 문화를 련결시켰는가? 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 세상의 모든 물체는 다 생명체. 문화가 산생한 원인 두가지, 하나는 토템제의, 다른 하나는 토템금기. 에서: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 조선민족의 성씨: 왕씨의 조상은 단군 왕검, 왕씨의 토템은 곰.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 토템은 태양. 고씨의 조상은 고주몽, 토템은 태양.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 경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 토템은 역시 태양. 석씨의 조상은 석탈해,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표지. 최씨의 조상은 최치원, 토템은 금돼지. ※토템과 성씨의 기원을 아주 재미나는 이야기로 구술하고 있는데 조선민족의 시조의 탄생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온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규명해온 조상들의 시생설을 토템신화로 명명한것은 남영전 시인이 처음이다. 에서: 토템성씨를 가진 씨족들이 한데 모여서 민족을 형성.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탄생. 인류가 중국에 발자욱을 들여놓은것은 5만년 전, 조선민족은 2만년 전. 중화민족의 시조는 염제, 황제, 치우. 중국에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300개의 성씨가 실상은 300개의 토템. 에서: 하늘의 일곱 신: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땅의 일곱 신: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동성불동혼. 한족토템은 300개 정도, 그 300개중에 우리 민족의 248개 모두 포함. 에서: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은 «천도», «하늘의 뜻을 따른다»,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고대 4대문명: 애급문명 7500년 전. 토템은 태양, 바빌론문명 7200년 전, 토템은 승냥이, 중국문명 6500년 전, 토템은 룡과 봉황, 인도문명은 중국보다 500년 후, 토템은 코끼리, 사자 등.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ㅡ3ㅡ 남영전 시인의 구술시리즈를 읽으면서 나는 남영전 시인이 무엇때문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했는가를 한층 더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남영전 시인이 처음 위챗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시인되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 리해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왜 토템시인이라 보는가? 우선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하는 시인이니까 토템시인인건 분명하다. 남영전 시인이 출판한 시집으로는 «상사집», «신혼», «백의녃», «신단수», «원융», «꽃이 없는 이 봄날에», «남영전토템시집» 등 많이 있지만 대표작을 꼽으라면 토템시가 첫번째로 꼽힌다. 남영전 시인이 중국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주류문단, 더 나아가서는 세계시인대회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또 중국문단에 «남영전의 문화현상»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가 처음으로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길래 «토템시의 창작자이며 명명자»라는 호칭이 아주 지당한한 것 같다. 다음으로, 남영전 시인은 또한 토템과 토템문화를 탐구하는 학자이자 시인인건 틀림없다. 그는 30여년 동안 줄곧 토템문화를 연구해왔다.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와 중국의 토템문화뿐만아니라 모든 인류의 토템문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연구는 범위가 아주 넓고 심도가 아주 깊다. 때문에 나는 남영전 시인이야말로 명실공히 토템시인이라고 처음부터 시인했다. 하지만 근 30년간 «장백산»잡지사에서 그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고상한 인품을 잘 알고있는 나는 그처럼 겸손하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 왜 «토템시인»이라 자칭하는지 미처 리해하지 못했다. 남들이 자기가 토템시인이라는걸 모를가봐, 인정해주지 않을가봐 념려한 때문은 결코 아닐텐데 말이다. 나는 의 그의 여섯편의 글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남영전 시인이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두가지 리유를 알 것 같다. 첫째, 토템시의 창작과 탐색을 통해 우리 민족의 백의혼을 구가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토템의 영원한 가치, 천지인의 조화, 세계의 평화와 원융을 호소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 토템문화에 대한 자기의 인식과 주장을 확신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가 아닐가. 우리 민족 력사의 많지 않은 보귀한 문헌의 하나인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을 토템이라 명명하고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를 시화한 것 또한 그의 또 하나의 창거이다. 둘째, 남영전 시인이 언제나 안타까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는 우리의 지식인들이 토템문화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 토템문화를 관심하고 리해하며 공동히 탐구하자는 절절한 기대와 강력한 호소가 아닐가. ㅡ4ㅡ 남영전 시인은 에서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다면서 우리 조선민족의 성씨가운데서 왕씨의 토템은 곰, 고씨와 박씨, 김씨와 석씨의 토템은 태양, 최씨의 토템은 금돼지라고 례를 들어 성씨의 유래를 밝혔다. 그리고 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기의 성씨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 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나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자기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김씨의 본이 연안이라는 것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연안 김씨의 조상은 누구이며 이 성씨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1989년 한국에 친척방문을 갔을 때 김건영이라는 사촌형님한테서 받은 족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퍽 늦게 알게 되였다. 그때 내 나이 이미 53세였으니 나는 반평생을 조상도 모르고 헛살아온 셈이다. «연안김씨 대동계보»라는 족보에는 김씨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우리 나라의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계와 신라의 대보공 알지계로 대별된다. 신화문헌에는 신라의 왕계, 박, 석, 김 3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김씨의 원조 알지의 시생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4대 탈해왕 9년(65) 봄 어느날 서라벌(현재 경주) 서쪽 시림 숲 속에 서기가 있음을 그 마을 촌장 포공이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가보니 금빛 찬란한 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아래에 흰 수탉이 있으므로 이를 왕에게 보고한즉 왕이 나아가 그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비범한 사내아이가 있는지라 왕은 하늘이 주신 사람이라 하여 키우고 이름을 알지(아기라는 뜻)라 하고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이라고 태자를 삼았으나 왕위는 받지 아니하고 파사에게 양보하였다. 閼智는 热汉을, 热汉은 阿道를, 阿道는 首留를, 首留는 郁部를, 郁部는 味邹를 낳았으니 이 분이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김씨로는 최초의 임금이다. 그후 알지를 대보공으로 추존하고 발상지 시림을 닭이 나왔다 하여 계림으로 고쳤다. » 김씨는 조선민족의 성씨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이다. 김씨는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본만 해도 100여 본이라고 하지만 족보에서 말한 것처럼 원 시조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두 갈래이다. 김해 김씨계의 시조는 옛날 가락국의 수로왕이고 경주 김씨계의 시조는 신라의 김알지이다. 족보에서 말하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시생설은 신화문헌에 나오는 건국신화와 대동소이하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계에서도 대종이다. 연안 김씨처럼 많은 본들이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니 원조는 모두 김알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인정해왔지만 남영전 시인은 다년간 토템문화를 탐구한 결과 신화문헌의 이야기들은 분명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이며 우리의 성씨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왔다고 단언하였다. «김수로의 토템탄생은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으니 그는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수호신, 하늘이 내린 자주색 줄은 무지개(토템)로 보여진다.»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린 금궤에서 나왔으니 그도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자주및 기운, 흰 수탉, 즐겁게 춤을 추는 새와 짐승들 모두 그의 친척(토템)이다.» 족보에서는 연안 김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혔다. «우리 연안 김씨는 고려 명종조(1171--1198)의 사문박사공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라 천년의 력사상 56왕중 대보공의 후손인 김씨가 38왕(박씨 10왕, 석씨 8왕)인데 우리 선조는 왕가의 후손으로 처음에 형제 2인이 당시의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먼곳으로 류배되여 형은 북빈경(현재 강원도 강릉)에 살았고 제는 고염성(현재 황해도 연안)에서 각각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고염성이 연안으로 고쳐짐에 따라 연안을 본관으로 정한 것이다.» «길림신문»에 실린 을 읽고나서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에서는 심득교류회를 조직할 타산으로 지금 준비중이다. 이번 심득교류회를 계획한 주요한 취지는 아래와 같이 세가지이다. 첫째, «길림신문»에서 펼치고 있는 대형구술시리즈 는 독자들에게 민족문화의 전통을 알리는 면에서 교육교양적 의의가 깊다. 우리 회원들은 우리의 신문을 사랑하는 애독자들인만큼 응당 앞장서서 열심히 읽고 참답게 배우며 널리 선전해야 한다. 둘째, 문화, 민족, 토템의 개념을 투철히 리해하고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종지를 진일보 명확히 인식하고 특히는 민족문화와 중화문화의 관계를 정확히 리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번영과 중화문화의 번영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자는 클럽의 구호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습근평 총서기는 소수민족문화와 중화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화문화는 여러 민족 문화의 집대성이다. 한족문화를 중화문화와 동등시하면서 소수민족문화를 홀시하거나 본 민족의 문화를 중화문화와 구별시하면서 중화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릇된 것이니 견결히 극복하여야 한다.» 저자 김수영 프로필: 1937년 서울에서 출생 196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60~1983년 통화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 어문교원, 교원실주임 1984~2006년 «장백산»잡지사 편집, 부편심, 편심 중편소설 «무쇠바우»(1977), 장편인물실화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2007) 외 장편소설 등 번역작품 6권 출판. 길림성우수편집1등상, 전국소수민족문학 , 중국번역협회 등 수상.
1517    토템과 남영전 시인 9 댓글:  조회:2880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9)문화 그리고 남영전 토템시가 민족문화산업발전에 주는 계시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13 ]  김성우 우선 《길림신문》에서‘문화를 말하다’ 지상토론을 전개한데 대하여 참으로 의의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중국조선족 독자의 일원으로서 말하고 싶고 또 남영전 시인의 ‘문화를 말하다’에 현춘산, 김동훈,박일 등 작가와 교수들을 망라한 많은 지성인들이 문화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좋은 글을 발표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였다. 모두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입을 모으지만 사실 문화라는 개념자체가 범위가 넓어 광의적인 뜻에서나 또는 협의적인 뜻에서나를 막론하고 토론의 장으로 펼치기에는 너무 벅차고 크다는 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림신문》에서 이 토론을 조직하고 집중적으로 문화의 개념부터 시작하여 인류 원시문화인 토템에 이르기까지 특히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지론을 펼치고 각자 나름대로 ‘문화’를 토론하게 한 것은 《길림신문》이 민족문화의 진흥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문화에 대해 말한다면《조선말사전》을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① 력사발전의 행정에서 인류가 창조한 물질적 및 정신적 부의 총체. ② ‘일반지식과 기술지식’을 통털어 이르는 말. ③ 현대적 요구에 맞는 문명한 생활양식.” 《현대한어사전》(제7판)에서는 문화를 “ ① 인류가 사회력사발전과정 중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체. 특히는 문학, 예술, 교육, 과학 등과 같은 정신재부를 가리킴. ② 문자를 운용하는 능력 및 일반적인 지식을 가리킴. ③ 고고학 용어. 같은 력사시기에 있어서 분포지점에 따라 전이하지 않은 유적, 유물의 종합체를 가리킴.”이라고 하였다. 상기 두 사전의 풀이에서 보다싶이 의미항이 약간 다르지만 내용으로 봐서는 앞서 김동훈교수가 말한 광의적인 해석과 협의적인 해석이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문화명인 여추우(余秋雨)는 문화에 대한 긴 정의가 아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나름대로 자기가 내린 정의가 전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정의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문화를 말하였다. “문화란, 정신가치와 생활방식을 포함한 일종 생태공동체이다. 그것은 축적과 인도를 통하여 집단인격을 창건한다.”(余秋雨 《何为文化》)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태공동체’와 ‘집단인격’이라는 키포인트다. 사실 이보다 더 간단한 정의는 문화인류학에서 일찍 이렇게 정의한 것이 있다. 한상복 등이 쓴 《문화인류학개론》에서는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가장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문화는 한 인간집단의 생활양식이다.’라는 대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은 ‘총체론적인 전망(관념론적인 전망이 아닌) ’으로 문화를 해석한 것인데 이 정의는 아마도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Tylor)가 1871년에 저서《원시문화》에서 말한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관습, 그리고 사회의 각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얻어진 다른 모든 능력이나 관습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라고 한 것이 원조일 것이다. 후에 미국 인류학자 위슬러(Wissler)가 보다 간단하게 정의하였는데 그는 문화란 “인류의 습관과 사상의 전부의 복합물(total complex)이며 그런 습관과 사상은 그가 출생한 그 군체에서 얻어진다.”라고 하면서 더 간단하게 말하면 “생활형식(mode of life)”라고 하였다. “생활양식”과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문화인류학의 정초자인 림혜상(林慧祥)도 타일러와 위슬러의 상기관점을 소개하면서 “문화란 인류행위의 총화”라고 정의하고 인간 본체와 문화의 밀접한 관계를 천명하였다. 내가 이처럼 장황하게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선철들의 정의와 사전의 해석을 소개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번 토론에서의 ‘주역’역할을 한 남영전 시인의 ‘문화’에 대한 정의에 좀 더 학술적으로 쉽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시인 남영전은 문화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문화란 개인이나 군체를 감별하는 의식주행어 표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지’에 대하여 시인 남영전은 그것을 ‘공동부호’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키워드는 ‘의식주행어’와 ‘표지’가 되겠다. 이 정의를 우에서 렬거한 정의들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정의가 좀 더 직설적이고 간추려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전 해석에서 몇가지 의미항을 갈라놓은 것은 사전의 리해에서의 평이성과 지도성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문화수준이 높다’, ‘문화가 없다’. ‘문화교원’, ‘문화주택’ , ‘문화생활’, ‘홍산문화’ … 등등의 ‘문화’는 앞에 든 례의 사전에서의 ②나 ③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로보아 문화인류학 각도에서 ①, ②, ③을 아우르는 개괄적인 정의로 “개인이나 군체의 의식주행어를 감별하는 표지(또는 공동부호)”라고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개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남영전은 문화를 이렇게 정의하였고 그것을 전개하여 그 연장선에서 바로 민족을 특징짓는 첫째가는 것이 문화라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또 이런 견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이란 부동한 토템 성씨들이 장기간 한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의 문화공동체”라고 정의하면서 그 문화의 뿌리가 바로 원시문화인 토템원형에 있다는 것을 밝히였다. 시인 남영전은 토템원형은 애니미즘으로부터 원초의 숭배대상에서 생겨났고 이것이 조상숭배, 자연숭배, 제신숭배 등으로 발전하여 원시예술로 신화, 전설, 토템시 등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한 민족의 민족정신에 ‘집단잠재의식’으로 깊이 뿌리내려 후날의 ‘의식주행어’에 잔재로 퇴화되였거나 또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어느 민족이나 례외가 아니다. 독일 예술학자 그로세(Ernst Grosse)는 저서 《예술의 기원》에서 “예술이 없는 민족은 없다. 우리가 알건대 가장 거칠고 곤궁한 부락 사람들도 그들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예술에 쓰고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인류의 기원이나 인종학적으로 보는 민족의 기원이나 딱히 이렇다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의 가설이 제기되였다가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 무너지고 또 다른 가설이 제기되였다가는 무너지고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과학적인 유전자분석이 도입되여 고고학적 발견, 문헌학적 고증과 결합되여 이 방면의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였고 새로운 성과들이 륙속 나타나 세인을 놀래우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의 인종학적인 유래도 원래는 그 제기설이 대체로 북방기원설, 북방과 남방 혼합설, 본토기원설 등 세가지 학설이 있었는데 유전자과학의 도입과 고고학 분석, 문헌학 고증으로 새로운 발견들을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한 결과 점점 그 차이가 좁혀지고 있다. 여기서 유전자분석은 인체 자체에 대한 직접조사를 내놓고 고고학 발굴에 나오는 문물과 고대문헌 연구는 다가 문화를 상대로 하는 조사연구다. 그런데 고고학문물은 직관적인데 반해 문헌에 나오는 신화, 전설 따위들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인, 관념적인 것들이며 그나마도 희소하고 산재적이며 파편적이여서 리해하는데 견강부회하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으나 토템 원형들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다시 합리적으로 리해하고 재구한다면 연구결론을 내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전자분석으로 인종적 차원에서 군체를 분류할 수 있었고 민족은 인종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개념이 우선 순위이기 바로 문화에 의해 식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 개념이기에 나는 민족문화자체가 바로 민족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바로 시인 남영전이 내놓은 ‘민족이란 부동한 토템 성씨들이 장기간 한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의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를 떠나서 그 민족은 그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파쑈적인 “조선민족말살정책’을 내놓고 조선민족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과 더불어 민족언어를 없애려했고 지어는 성씨마저 갈아치우려고 발광하였다. 바로 민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문화를 없애여 조선민족이란 고유명사가 지구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간교하고 흉악하기 이를데 없는 일제 만행이였다. 습근평 주석은“문화는 한 나라와 한 민족의 령혼이다. 력사와 현실이 말해주다싶이 자신의 력사와 문화를 포기하거나 배신하는 민족은 발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력사적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자신감은 보다 기초적이고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심도있는 자신감이며 보다 기본적이고 보다 무게있고 지구적인 힘이다.”( 습근평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서 지적했다. 중화민족의 한 성원인 우리는 자기 민족의 문화에 대해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가지고 민족문화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며 꽃 피워나가야 한다.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전통문화를 다루며 정수를 발휘, 발전시켜 새로운 력사시기에 맞는 문화자원으로 승화시키는데서 남영전 토템시가 우리 민족문화산업발전에 주는 계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방면이다. 여지껏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연구나 토론에서 이를 현실에 맞게 우리민족 현 상황에 맞게 리론적으로 제시한 문장은 없었다. 오늘날 문화경쟁은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중 중점이 바로 지식경쟁이고 문화산업경쟁이 그 초점이고 그중에 문화가치경쟁이 기저에 깔려있는 동력원인이 되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중심문화와 변연문화, 현대문화와 전통문화,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등의 서로간 문화경쟁이 날로 우심해지고 있다. 문화의 침투와 흡수, 견지와 배제 이를 두고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 피터 버크(Burke, P)는 《문화 혼종성(文化杂交)》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갈수록 더 잦아지고 거세지는 다양한 문화의 만남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 시대에 문화의 혼종성이란 주제에 대한 몰두는 자연스럽다. 문화적 전지구화의 결과는 론란의 여지가 있으며 여전히 론쟁 중이다. 뒤에서 론의할 가능한 한가지 방안은 문화 동질화이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이와 반대로 문화 이질화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이 (특히 장기적인 결과를 분석할 경우에) 갖는 장점이 무엇이든지간에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어떤 종류의 혼합체 즉 경제적 전지구화에 의해 촉진되는 동시에 그 전지구화를 촉진하는 혼종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문화의 발전을 이렇게 내다 보았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화들에 대한 분석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류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creol)’를 예견하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크레올화는 각이한 문화가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거나 또 다른 문화가 생기는 현상이다.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와 토템시에 대한 평론들을 읽고 나서 이런 크레올화가 되는 기저에는 가장 강력한 불멸의 문화요소인 원시 토템관념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민족대가정이다. 현대에 우리가 말하는 ‘중화민족’은 우선 사회ㅡ정치적 개념이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민족문화를 꽃피워가는 문화적 개념이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중국특색사회주의 민족문화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는 원시문화 ‘집단잠재의식’이 민족문화심리의 기저에 잔여로 즉 문화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굴해내여 시화한 것이다. 이런 시들은 민족적인 동시에 전 인류적인 것으로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관계가 날로 악화되여 가는 현시대에 토템물의 형상과 정신경지의 미적표현’으로 인류의 원시 “집단잠재의식”을 환기시켜 ‘인간과 자연의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고 인간 대 자연, 인간 대 인간의 대등하고 조화로운 구도’를 만들어가려는 평화의 호소문인 것이다. 이러한 남영전 토템시의 성공적으로 부각된 시적 형상들은 민족문화의 소중한 씨앗이며 풍요한 문화자원으로서 이를 시초로 다종다양한 문화재부를 창조해낼 수 있는바 문화경쟁력을 갖추고 우리 민족문화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근한 실례로 영국 영화 《반지의 녀왕》은 판타지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먼 실례로는 중외의 수많은 명작들이 신화의 원형들을 발굴하여 활용한 것들이 많다.《봉신연의》, 《서유기》, 《고독의 백년》...등등.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애니메이션 《대어해당(大鱼海棠)》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바로 신화와 토템 형상들이 대거 등장한 그야말로 신들의 대출동이다. 《대어해당》은 영어권은 물론 우리 말로도 번역되여 표제를 《나의 붉은 고래》라고 달고서 한국에 소개되였다. 《장자(庄子)》에 나오는 곤붕(鯤鵬)신화에다 여러 신화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창작된 이 작품은 중국신화에 나오는 별의별 신적, 령적 인물들이 종횡무진으로 거의 다 나오며 마감에 가서는 이 세상에 한쌍의 남녀가 새롭게 등장하는 걸로 끝난다. 대일통으로도 분석되는 의미심장한 결말이다. 이 영화는 2017년에 제15차 부다페스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누르고 직접 신화를 소재로 문화경쟁에서 성공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21세기 문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경쟁력연구》라는 책이 나왔는데 거기에 따르면 ‘문화경쟁력’을 이루는 요소로 문화생산력, 문화소비력, 문화전파력, 문화창조력, 문화지속력 이 다섯가지를 들고 있다. 이것이 구전하고 강력할수록 경쟁력이 강해진다. 반대로 이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흠결이 가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바로 남영전 토템시의 문화콘텐츠가 이 점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끔 해주는 민족문화의 저력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토템과 그 잔재로 된 문화요소는 아무리 가져다 써도 다 쓸 수 없는 무진장한 문화보물고다. 우리도 문화의 각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종합적으로 이러한 자원을 잘 개발한다면 우리민족 경제문화진흥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시대, 문화 경쟁의 시대에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들과 그의 토템시학은 우리에게 실로 다방면적인 계시를 주는바 그중에 홀시 할수 없는 것이 바로 민족문화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단인격’ 또는 ‘부호’로 ‘조선족’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리랑’, ‘진달래, 등 근대에 굳어진 개념들이다. 우리가 문화자신감을 가지고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들 및 그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민족문화산업에서 어떤 중대한 돌파를 시도해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가 주는 이러한 계시는 우리 민족이 자신의 문화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서는 전반 중화민족이 위대한 부흥을 이루며 세계의 평화와 대동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0년 여름 진황도에서) 김성우(金声宇) 프로필: 흑룡강성 목단강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77학급 졸업. 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은하수》잡지 주필 력임. 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심. 조선족민속학회 명예회장. 도서《남영전토템시감상》,《남영전토템시학》 책임편집. 시집: 《지평선 사나이》, 《계절의 소리를 새기며》 등. 편저:《조선민족성씨와 본》, 《조선족거주문화》, 《조선족명절문화》(공저) 등 고전문학번역:《초사》,《주역》,《시경》,《산해경》,《중국신화》, 《론어》,《맹자》,《한비자》,《선진산문선》, 《사기선》,《모란정》,《료재지이선》 등 다수. 당대문학번역: 장편소설《검은 십자가》,《로마의 밤》 등 다수. 시 작품 번역: 중국당대문학 시작품 다수. 《중한대사전》, 《조선말소사전》,《조선말대사전》등 사전편찬의 주요 성원.   
1516    토템과 남영전 시인 8 댓글:  조회:2699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8)자연과 인류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7 ]  -- 《토템과 문화의 기원》을 읽고서 8년전 남영전 시인의 시집 《백의 넋》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땐 토템에 관한 시인 줄을 모르고 그냥 재미로 읽었었다. 솔직히 토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얼마전 《길림신문》을 통해 남영전의 구술문화 《토템과 문화의 기원》을 읽게 되면서 토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게 되였다. 글줄마다에서 남영전 시인의 민족에 대한 사명감과 애착심을 엿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사고로부터 인류문명에 대한 추구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런 것이 토템문화입니다.”라고 해설한 구절구절마다 나의 마음 속에 와닿았다. 사회가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무리한 자연개발, 인간의 편리와 리익의 추구로 우리의 자연은 막대한 재난을 겪고 있다. 인류가 자연을 마구 파괴하면서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이 한낱 선전구호로 그치고 실제 행동으로 별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놓고 보더라도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이번 사태는 자연계에서 온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떠한 사물의 발생이든지 모두 그 규칙을 따르는 법이다. 우리는 대자연을 개발하기에 앞서 반드시 대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토지와 물과 산에 감사함을 알아야 하고 곰, 백학, 사슴 등 동물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늘 소유하고 있는 달, 바람, 비와 같은 자연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로 표현하였다. 20년 넘게 피타는 노력으로 공을 쌓은 거창한 작업이 개가를 올리여 후세대들에게 어제와 오늘, 래일을 이어주고 있다. 좋은 글을 읽게 되여 깊이 감사를 드리고 초학자로서 미흡한 소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여 더없는 영광을 느낀다.  /김봉금 (1979년8월, 흑룡강성 림구현 출생. 흑룡강성 할빈조선족사범학교졸업. 중앙방송통신대학 본과 연수 수료. 현재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교원. 수필, 서평, 평론 등을 《연변문학》, 《중국민족》, 《흑룡강신문》 등 잡지, 신문에 발표.)
1515    토템과 남영전 시인 7 댓글:  조회:3223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7)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길림신문》이 펼친 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의 토템이야기를 들으면서 15년전 내몽고사범대학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나 감회가 깊었다. 2005년 9월15일, 내몽고사범대학에서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개원식 및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필자가 이 큰 행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전국에서 100여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모였었다. 내가 책 속에서 보아오던, 꿈에도 흠모했던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의 중점 발언은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주임, 몽고족작가 터싸인 바야얼 (特•赛音巴雅尔), 현대문학관 관장, 만족작가 서을(舒乙),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이며 조선족시인인 남영전 등 5명의 작가들이였다. 남시인의 발언고는 였다. 남시인의 발언 서두는 특이하였다.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고정관념은 민족을 왕왕 혈통으로 보는데 오늘 나는 이자리에서 반기를 들겠습니다. 저의 견해를 점검해 주시고 틀리면 비판하십시오.” 참석자들은 다들 긴장해서 남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시인은 자신이 토템문화를 관심하게 된 경우와 토템문화가 현대생활에서의 표현 등을 이야기 하고 나서 민족개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발전사, 민족의 형성사를 보면 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성씨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衣食住行语)의 문화공동체입니다. 이 문화공동체가 곧 민족의 탄생이고 민족의 표지입니다. 때문에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관계입니다. 저의 결론이 틀리면 여러분들이 비평하십시오.” 장내는 삽시에 열렬한 박수가 지속되였다. 그날 오찬 때 중국소수민족작가 대표인물인 몽고족 로작가 마라친부(원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는 특이한 제의를 하였다. “오늘 오찬은 남영전 시인의 발언을 축하하는 토템연회입니다. 모두들 토템술을 기쁘게 듭시다.” 옆에 앉은 현대문학관 서을 관장도 술잔을 들고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민족개념은 확실히 도리가 있습니다. 저도 대찬성입니다.”라고 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때 행사에 참석한 조선족은 남시인 외 심양의 소설가 박성군, 그리고 연변의 김승종 시인 세명이였다. 8년 후인 2013년 6월, 전국작가 내몽고견학방문단 일원으로 나는 새롭게 건립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아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건립하는 데는 남영전시인의 공로도 한몫 있었다. 2005년, 그번 행사가 있은 다음 몽고족작가 터싸인바야얼, 조선족시인 남영전 등 소수민족작가 10명이 련명으로 온가보 총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온가보 총리는 이에 중시를 돌려 일주일안에 2,500만원의 경비를 비준하였다. 이리하여 4년 후인 2009년 9월, 내몽고사범대학 교정내의 100무의 부지에 5,500평방메터 되는 현대화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이 건립되였다. 문학관 공원에는 다섯개 정자, 다섯개 대리석다리가 있는데 련명으로 청원서를 써올렸던 소수민족작가들이 정자와 다리에 한개씩 이름을 짓도록 했었다. 남영전 시인은 그중 한개 다리의 이름을 원융교(圆融桥)라고 지어 그가 쓴 세글자가 다리기둥에 음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공원에는 만족작가 조설금(《홍루몽》저자), 로사(老舍)를 비롯한 10명의 소수민족 유명한 작가들의 동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영전 시인의 제의로 조선족의 대표작가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이 10명의 유명한 작가들 속에 의젓이 세워져 있었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원융의 기치를 든 시인이다. 그는 토템원융사회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 시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김승종(1963년 출생, 화룡시작가협회 전임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등 시집 3부 출판. 두만강여울소리,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등 다수 수상)
1514    토템과 남영전 시인 6 댓글:  조회:3042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6)인간 존재의 근원 의식의 뿌리를 더듬어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맑게 개인 밤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각자 자기 길을 가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침이면 사계절에 따라 진달래, 개나리, 라일락, 백일홍, 들국화…들이 다투어 피여서 이 지구의 모퉁이들을 환히 밝혀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양, 소, 말, 닭, 개 등 가축가금들이 뒤뚱거리며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정글에서는 코뿔소, 표범, 이리 등 야생동물들이 그 신성한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하다 못해 발아래를 잘 살펴보면 개미들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생명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고 있다. 그렇다. 지구라는 이 푸른 별에서는 왕성한 생명활동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런 생명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존재의 리유를 가지고 이 지구촌에 더욱 생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를 계속 괴롭혀오는 명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라는 질문이다. 인간이라면, 지성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이 질문은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의식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인류의 모지름에 다름아닌 것이다. 문학의 아버지로서 시 역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고민을 숙명적인 숙제로 떠안고 그것을 풀어나가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 탐구에 탐구를 거듭해왔고 하고 있으며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필요하며 어쩌면 상기 원색적인 질문에 가장 근접하는 접근법이 아닐가 싶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신주의 대지에 세차게 불어쳤던 상처문학, 뿌리찾기, 의식의 흐름 등 사조들도 나름 인류의 존재 근원과 의식의 뿌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였을 것이고 자아성찰을 위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야겠다. 그러나 남들이 모두 큰 흐름을 따라갈 때 조선족 저명한 시인인 남영전선생은 토템문화연구를 평생의 연구테마로 삼고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에 걸맞는 토템시들을 륙속 펴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시인의 토템문화연구는 마침내 중국문단을 놀래웠고 학계를 놀래웠다. 그리하여 남영전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였고 각종 연구서적들이 출판되였으며 전문세미나들도 줄기차게 열려왔었다. 그렇다. 우리(인류)는 과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이 명제는 시가 탐구해야 할 영원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광범위하게 론의되여야 할 과제이며 문명사회에서는 더욱 보편적으로 거론되고 연구되여야 할 테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 및 토템문화연구는 일독을 권장할만한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한영남(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집, 《민족문학》상, 연변작가협회 진달래문학상 수상)
1513    토템과 남영전 시인 5 댓글:  조회:3026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5) 뿌리 깊은 나무가 무성하리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23 ]  일전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에서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옛날 아버지가 해주는 주몽의 이야기를 듣듯이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남영전 시인은 한어와 조선어로 동시에 시창작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시인으로서 장장 30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서 토템시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많은 토템시를 써서 중국의 시단에 한획을 그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시인이다. 그리고 조개가 아픔으로 진주를 품듯이 한생의 피타는 노력으로 “토템문화” 연구에서 일가견을 보여주면서 중국의 시문학에 큰 기여를 한 존경스러운 시백이다. 내가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끝까지 재미있게 들은 것은, 남영전시인과의 스치는 인연도 한몫 한 것 같다. 20여년전에 “장백산”잡지사 사장으로 몸 담그고 계시던 남영전 시인이 사업차 목단강에 오신 적이 있는데 김성룡 시인이 저녁을 대접하면서 한자리에 앉게 되였다. 그때도 남영전 시인은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문화에 대해, 시에 대해, 주로는 토템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당시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아리송하기만 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잘 리해되지 않았다. 다만 정말 시에 대해 깊이 연구하시는 분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그리고 우연히 남영전 시인에 대한 뒤담 칭찬을 여런번 들으면서 시인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였다. 그런 계기로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아주 진지하게 잘 들은 것 같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통해 토템에 대한 광범위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였다. 인류의 문화의 형성 근원을 파헤친 문화의 원천에 대해, 우리 민족의 기원, 우리 민족의 성씨, 중국의 토템, 중국 성씨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되였다. 시인의 알아듣기 쉽고 간단명료한 구술에서 일생의 피타는 탐구와 뼈를 녹이는 로고가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시인의 문화에 대한 불타는 열정, 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정신은 우리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토템문화에서 시인이 자연과 인류는 동일체라는 인식을 환기시켜 보다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바라는 념원을 엿볼 수 있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토템문화에 대해 알고 문학의 기원을 료해하고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면 뿌리 깊은 나무가 병들지 않고 천년만년 풍성하듯이 우리 민족의 문화도 오래오래 륭성발전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릴레이 경주를 하듯 남영전시백의 뒤를 이어 출중한 시인과 문학인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두손 모아 기원한다. /한경애(목단강시조선족소학교 교원. 수필, 소설, 시 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 전국녀성수필백일장 대상, 전국교원수필응모 대상 등 수상)
1512    두만강은 알리라... 댓글:  조회:2773  추천:0  2020-07-17
투혼의 작가 령혼의 메시지 (ZOGLO) 2020년7월17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8](김학철편7)   김학철의 문학작품은 주요하게 두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몸소 겪은 항일전쟁력사와 피 흘려 싸우고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항전승리 후 사회주의혁명과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쓴 작품들입니다. 항일전쟁에 관한 작품으로는 《격정시대》와 《항전별곡(抗战别曲)》이 대표작인데, 《항전별곡》은 한국에서 '빨찌산문학의 시조(始祖)'라고 공인합니다. 력사학자들은 《항전별곡》에 대한 많은 론문으로써 중국에서의 의렬단과 조선의용대의 력사를 재조명하였습니다. 또한 중문으로 된 《김학철문집》제1권이 출판되여 주목을 끌었습니다. 심혼을 몰부어. 김학철은 돌아가시기 며칠전 그 힘든 나날에 유일하게 남은 조선의용대 성립 사진 속 인물들을 확대경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바뀐 이름과 본명 그리고 본적을 밝혀 저에게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시는 있을 수 없는 력사의 중요한 증언이였지요. 사실 따져보면 김학철의 작가로서의 문학창작활동은 혁명에 참가할 때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는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피압박계급의 해방 즉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였지요. 한번은 밀양에 가서 김학철강연회를 하는데 대회장에 큰 프랑카드가 걸려 있었어요. '항일투사 김학철강연회'라고 쓴 그 표어를 가리키며 “사실 저 앞에 있는‘항일투사'라는 규제어는 삭제해도 됩니다. 나는 지금도 현역이예요.”라고 하는 것이였지요. 즉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계속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붓을 총으로 삼고 항전에 투신'한 김학철 작가에게 항일전쟁승리 50돐을 맞으며 중국작가협회에서 증정한 기념장. 그리고 여기서 김학철 문학창작의 방법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학철이 쓰던 책상은 지금도 원상 그대로 소중히 보존되여 있습니다. 그 책상모서리는 작가의 팔꿈치에 닳아 반질반질 각이 사라지고 칠이 벗겨졌어요. 이 책상에서 《격정시대》, 《항절별곡》, 《최후의 분대장》 등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하였습니다. 김학철은 평소 창작할 때 중요한 단어나 어구는 꼭 어원을 찾아 내여 확인합니다. 김학철의 창작언어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사전들로는 첫째로 평양에서 출판된 여섯권으로 된 《조선말대사전》이였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출판된 이희승의《국어대사전》이 있고 일본에서 출판한 《광사림(广辞林)》과 《광사원(广辞苑)》이 있습니다. 그 중 일본어 사전은 그 가격이 당시 우리에게 부담이 되였지만 이런 사전들의 새 판본이 나오면 어김없이 교체하였습니다. 김학철은 또 “이 사전들은 아령처럼 나의 육신을 건강하게 지켜줬다.”고 롱담하셨습니다. 시시로 그 무거운 사전들을 외다리로 일어서서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것이 좋은 신체 단련이 되였다는 것이지요. 김학철 작가의 부분적 저작들. 김학철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홍명희의 (장편소설)《림꺽정》이였어요. 김학철은 《림꺽정》을 거의 외우다 싶이 하였는데 출판사 편집선생들이 련락이 와서 “선생님, 이 단어는 조선말대사전에도 없고 한국어사전에도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가요?”라고 하면 김학철은 “〈림꺽정〉의 제 몇권 몇페이지를 보세요.”라고 회답을 보내지요. 이렇게 김학철은 창작가운데서 언어에 대하여 엄격하였고 출판사 편집분들도 김학철의 문장은 한 구절을 고쳐도 꼭 저자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김학철문학의 원천은 평생의 꾸준한 독서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학철의 일생은 끊임없는 열광적인 책 읽기로 연장되였어요. 소학시절 일본어로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하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였습니다. 김학철은 일어를 모국어처럼 쓸 수 있었어요. 조선어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로도 사고할 수 있었지요. 김학철은 책상머리 손이 닿을 수 있는 책장에 《로신전집》 10권과 홍명희의 《림꺽정》 6권(평양출판)을 두고 닳도록 읽었으며 《홍루몽》도 외울 정도로 자주 읽었습니다. 《홍루몽》은 중국사회의‘백과사전'이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읽기 힘든 중국의 《사기(史记)》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손쉽게 펼쳐들고 자주 읽었습니다. 그리고 숄로호브와 똘스또이의 작품도 당연히 좋아하셨지요.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북경, 연길까지 가지고 온 유일한 물품이 바로 숄로호브의 일본어판 《고요한 돈》이였습니다. 독서에 대한 분에 넘치는 열정과 문학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작품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글은 쓴다고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예요. 그 밑바탕에는 미친듯한 독서 열정과 신념, 문학에 대한 사랑, 인민에 대한 애정, 력사에 대한 책임감 이런 것들이 문학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아닐가요? 1994년 제2기 한국 KBS해외동포상(특별상)을 수상한 김학철과 부인 김혜원. 김학철은 여름이면 이른 새벽 세시나 네시에 일어나 집 부근 강뚝에 나가 아침운동을 합니다. 일생을 동반한 쌍지팽이를 짚고 산책도 하고 체조도 하고 그리고 돌아와서는 글을 썼어요. 점심에는 잠간 낮잠을 자고 오후에 다시 글 쓰기를 다그치는데 생명의 제한된 시간이 아까운 것입니다. 저녁에는 주로 독서와 신문(〈인민일보〉,〈다이제스트신문〉) 읽기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의 독서 취향은 다방면이였어요. 중국의 《유림외사(儒林外史)》, 《관장현형기(官场现形记)》도 너무나 좋아하였지요. 《유림외사(儒林外史)》가 너무 좋아 우리 말로 번역까지 하여 출판사에 교부하였는데 문화대혁명기간 원고가 분실되여 출판이 안되였습니다. 참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지요. 물론 똘스또이, 숄로호브, 발자크, 유고도 너무나 사랑했는데 식구들이 함께 식사할 때면 자주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석합니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력사책과 소설들이 인기였어요. 《고요한 돈》은 숄로호브가 교조주의(教条主义)적 수법이 아닌 사실주의로 쏘베트혁명을 묘사하였어요. 이 책에서 주인공은 당시 쏘련 홍군부대와 백군사이를 들락날락하는 농민계급의 량면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어요.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흐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 것이지요. 이것이 김학철이 이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리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 흘려 싸운 전우들을 세상에 기록해놓고 시름없이 떠나가는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정령이 저의 집에 와서 김학철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저도 옆에서 들었는데 문학은 인간을 쓰는 것이라고 말씀했어요. 정령과 숄로호브 작품의 공통점이 바로 밑바탕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김학철이 문학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한 시그널(signal,신호)이지요. 후날 KBS 해외동포상 제2기 수상식에 김학철부부가 동반참석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중, 한, 일 그리고 미국의 우리 동포(민족) 작가들과의 교류가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김학철은 마지막으로 한국 밀양 조선의용대 지도자 김원봉, 석정의 고향을 방문하고 조선의용대연구 한중세미나에 참석하여 단독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건강에 문제가 좀 생겨 밀양강연을 마치고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몇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강상태는 계속 악화되여 도저히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였지요. 본인은 갈 때가 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모시고 가려 해도 거절하셨고 병원치료 뿐만 아니라 지어 집에서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더는 쓸 수 없다면 나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한명(限命)을 아는 것이 영웅이다.”라고 하셨어요. 두만강에 꽃을 뿌리며 고인을 바래는 유족과 후배작가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식사도 중단하신다고 결단을 내리니 누구도 막지 못했지요. 금식을 해서 스무 하루만에 아주 존엄있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렇게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김학철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부고를 내지 말고 조용히 장례를 치러라. 고향 원산으로 가고 싶다. 화장을 하여 우편박스에 담아 두만강에서 원산 앞바다로 보내다오. 그리고 두만강으로 가는 길에 듣고 싶은 노래들이 있으니 지정해주는 노래들로 음악테이프를 만들라고 하셨어요. 〈조선의용군추도가〉, 〈황포군관학교교가〉, 〈가거라 38선〉 외 우리 민요 10곡을 선정해 주셨어요. 영혼이 떠나가는 길에서 들을 노래를 생전에 미리 듣고 가신 분은 아마 김학철 한사람 뿐일 것입니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김학철은 조용히 세상과 영영 리별하였습니다. 다음 날 김학철이 지정한 열두분의 친우들과 가족은 두만강하류의 폭 넓은 곳까지 그의 골회와 함께 쌍지팽이도 모시고 갔어요. 기념비로 솟은 김학철의 유언. 해가 너울너울 질 무렵 일부 골회는 두만강에 뿌렸어요. 남은 골회를 우편박스에 잘 봉해 두만강 물결에 띄웠습니다. 쌍지팽이 목발도 떠나보냈지요. 참 멀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랬어요. 중,한 TV방송국 기자들이 안 보일 때까지 촬영을 계속하였습니다. 두만강 물결 따라 세차게 흘러간 우편박스에는 다음과 같은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원산 앞바다 김학철의 고향〉그리고 아래에는 〈김학철 가족 친우 보내드림〉이라고요. 돌아가실 때 김학철은 또 친필 유언을 남겼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1511    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 "길림신문"/ 김승종 댓글:  조회:3053  추천:0  2020-07-02
지상토론(7)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김승종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길림신문》이 펼친 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의 토템이야기를 들으면서 15년전 내몽고사범대학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나 감회가 깊었다. 2005년 9월15일, 내몽고사범대학에서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개원식 및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필자가 이 큰 행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전국에서 100여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모였었다. 내가 책 속에서 보아오던, 꿈에도 흠모했던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의 중점 발언은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주임, 몽고족작가 터싸인 바야얼 (特•赛音巴雅尔), 현대문학관 관장, 만족작가 서을(舒乙),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이며 조선족시인인 남영전 등 5명의 작가들이였다. 남시인의 발언고는 였다. 남시인의 발언 서두는 특이하였다.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고정관념은 민족을 왕왕 혈통으로 보는데 오늘 나는 이자리에서 반기를 들겠습니다. 저의 견해를 점검해 주시고 틀리면 비판하십시오.” 참석자들은 다들 긴장해서 남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시인은 자신이 토템문화를 관심하게 된 경우와 토템문화가 현대생활에서의 표현 등을 이야기 하고 나서 민족개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발전사, 민족의 형성사를 보면 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성씨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衣食住行语)의 문화공동체입니다. 이 문화공동체가 곧 민족의 탄생이고 민족의 표지입니다. 때문에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관계입니다. 저의 결론이 틀리면 여러분들이 비평하십시오.” 장내는 삽시에 열렬한 박수가 지속되였다. 그날 오찬 때 중국소수민족작가 대표인물인 몽고족 로작가 마라친부(원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는 특이한 제의를 하였다. “오늘 오찬은 남영전 시인의 발언을 축하하는 토템연회입니다. 모두들 토템술을 기쁘게 듭시다.” 옆에 앉은 현대문학관 서을 관장도 술잔을 들고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민족개념은 확실히 도리가 있습니다. 저도 대찬성입니다.”라고 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때 행사에 참석한 조선족은 남시인 외 심양의 소설가 박성군, 그리고 연변의 김승종 시인 세명이였다. 8년 후인 2013년 6월, 전국작가 내몽고견학방문단 일원으로 나는 새롭게 건립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아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건립하는 데는 남영전시인의 공로도 한몫 있었다. 2005년, 그번 행사가 있은 다음 몽고족작가 터싸인바야얼, 조선족시인 남영전 등 소수민족작가 10명이 련명으로 온가보 총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온가보 총리는 이에 중시를 돌려 일주일안에 2,500만원의 경비를 비준하였다. 이리하여 4년 후인 2009년 9월, 내몽고사범대학 교정내의 100무의 부지에 5,500평방메터 되는 현대화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이 건립되였다. 문학관 공원에는 다섯개 정자, 다섯개 대리석다리가 있는데 련명으로 청원서를 써올렸던 소수민족작가들이 정자와 다리에 한개씩 이름을 짓도록 했었다. 남영전 시인은 그중 한개 다리의 이름을 원융교(圆融桥)라고 지어 그가 쓴 세글자가 다리기둥에 음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공원에는 만족작가 조설금(《홍루몽》저자), 로사(老舍)를 비롯한 10명의 소수민족 유명한 작가들의 동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영전 시인의 제의로 조선족의 대표작가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이 10명의 유명한 작가들 속에 의젓이 세워져 있었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원융의 기치를 든 시인이다. 그는 토템원융사회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 시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김승종 (1963년 출생, 화룡시작가협회 전임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등 시집 3부 출판. 두만강여울소리,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등 다수 수상)
1510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323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문화와 인류운명공동체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5-12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51](남영전편-6)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고 토템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성씨가 생겼으며또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형성되였습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무엇인가, 실상은 토템숭배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토템이 무엇인가, 파고들면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게 토템문화입니다. 사람과 사람 지간의 관계도 혈연관계로 되여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5천년 전부터 황제가 “우리 세 부락의 사람들은 룡과 봉황이 토템이다.”라고 하자 사람들은 맞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관계라는 것입니다. 천인합일은 전통문화의 핵으로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림성 민족중학교 교장들과 함께 인성교육에 대하여 담론하는 남영전 선생 그래서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게 되면 황제가 룡토템, 봉황토템 기치를 든 다음부터 중국사람들의 전통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언제 와서 공고히 되였는가 하면 기원전 5세기, 6세기 후부터입니다. 왜서 그런가 하면 기원전 5, 6세기 세계적으로 인류력사발전을 보게 되면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다섯명의 성인이 출현했습니다. 로자, 장자, 공자, 맹자, 그리고 인도의 석가모니 이렇게 다섯명의 성인이 나타났습니다. 로자와 장자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깨우쳐주는가 하면 ‘세계의 진상은 천인합일이다. 사람도자연의 일원이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로자와 장자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사람은 반드시 인, 의, 례, 지, 신의 오덕을 지켜야 한다. 오덕을 지켜야만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사상은 ‘사람은 자연을사랑하여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오직 자비로 마음을 채워야만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 세 성인의 말은 다 같은 뜻인데 이것이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입니다. 이 세가지를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천도(天道)’입니다.   서남 소수민족지구를 찾아 토템문화를 답사하는 남영전 (오른쪽) 천도란 무엇인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며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천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4대 문명고국입니다. 사전에서 보게 되면 첫번째는 중국이 아니라 고대애급문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입니다. 중국은 삼황오제를 따져봐야 6,500년이 됩니다. 그렇지만 고대애급문명은 7,500년이 됩니다. 고대애급의 토템은 태양입니다. 애급의 금자탑을 보게 되면 태양숭배물입니다. 그리고 애급에사람 얼굴에 사자 몸뚱이를 한 스핑크스 조각상이 있는데 사자가 뭔가 하면 태양의 화신입니다. 고대바빌론문명은 한 7,200년이 됩니다.  그 다음에 6,500년 전의 중국문명입니다. 그리고 인도문명은 중국문명보다 한 천오백년 뒤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개 문명이 왜서 없어졌는가. 외국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원래 있던 사람들이비록 다 없어지진 않았지만 원래 가지고 있었던 풍속들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풍속들이다 없어지니 문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행스럽게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염제, 황제와 치우 이 세개 부락이 있을 때 강대하였습니다. 지금 봐서 알겠지만 그때 5천년 전에치우가 전문 군대를 길렀기 때문에 중국이 옛날에 강대하였습니다. 그때 중국은 이미 철과 동으로 예리한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치우가 멸망하였지만 치우의 문명이 중국을 강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서는 범접을 못했습니다.      사천 문천대지진 현장을 찾아 고대바빌론의 토템은 승냥이입니다. 몽골족, 위글족, 까자흐족, 돌궐족들은 전부 승냥이토템입니다. 왜서 승냥이토템인가, 서아시아가 지금은 평지이고 사막지대이지만 원래는초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승냥이들이 출몰하던 곳이였지요. 인도도 역시 외세 침략, 영국의 침략을 받았지요. 그래서 인도의 문명은 날아갔지요. 특히 중요한 것은 5세기에와서 5명의 성인이 나타난 다음에 중국의 전통문화가 아주 공고히 된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더 긴장해지고 있습니다. 왜서 긴장해지는가? 인류의 력사를 보게 되면 농경문화 때에는 사람이 자연에 대한 파괴가 극히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가 자연과 긴장한 상태는 1780년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발명한 다음부터, 공업문명이 시작된 다음부터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공업문명이 발달하면서 공업이 제일 으뜸으로 자연을 파괴하였습니다. 공업페기물, 자동차 배기가스, 공장에서 뽑는 연기 이렇게 공업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자연과의 관계는 긴장해집니다. 240년 동안 세계의 인구가 불어났고 공업문명이 발전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사람과 자연 관계는 긴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말하자면 자연규칙이라는 것은 대자연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자연은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늘고 공업문명이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 자연이 병이 든 것입니다. 자연도 생명체입니다. 자연도 병이 들었으니 사람과 똑같은 생명체인데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는 것입니다. 자연의 몸이 찌뿌둥하고 못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자연재해가 들어옵니다. 다음 병독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실상은 자연이 일부러 사람을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병든 상태입니다. 제가 이에 관해 시를 썼습니다.   2012년 대만에서 48년 전에 영국의 톰인비라는 력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인류가 21세기에 들어가면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점점 긴장해진다고 예측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오직 하나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십년 후인 1982년 유엔에서 노벨수상자 70명을 불러다가 21세기에 대비해서 인류의 재난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노벨수상자들이 그 학술회에서 이구동성으로 2,500년전 중국의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벨수상자들이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있습니다.  2011년 일본에 9급 지진과 함께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일본천황이 중국에 련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큰 자연재해를 입었는데 그 해법이 무엇인가? 그 해법은 당연히 사람과 자연의 긴장 상태를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사건도 우리한테 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왜서 그런가면 지금 21세기는 글로벌시대가 아닙니까, 경제의 글로벌이라는 것은 실상은사람의 글로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류동의 글로벌인 것이지요. 지금 21세기에 사람과사람은 모두 련계가 되여 있습니다. 한사람이 문제가 있다 하면 전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좋든 나쁘든 실상은 인류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좋아도 공동체고나빠도 공동체고 인류의 운명은 누구도 빠질 수 없습니다. 다 련결되여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문화행사에서   인류가 직면한 이번의 재난도 어디에서 왔던지간에 인류와 자연의 관계가 긴장하기 때문에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에서 매년마다 독감이 류행하는데 그게 왜서 그런가, 자연에서 다 오는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인류는 앞으로 살길이 없습니다. 그 해법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완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응당 자연을 회복시키는 데힘을 써야 근본상에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지구가 생명체인데 점점 더엄중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밤나무가 있는데 수명이 천년 이상 됩니다. 이 나무가 천년을 사는데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후가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세계 온난기후가 1도만 변해도 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죽습니다. 자연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지금은 원자탄을 가지고 론하는 전쟁문제가 아니고 자연과의 문제입니다. 이번 문제가 지나고 몇달 후에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자연과의 관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가 점점 빛이 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지식인들이 토템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영전이 왜서 이상하게 토템을 가지고 자꾸 론하는가? 이것은 사람을 놓고 보면 근본입니다. 인류가 어디서 왔는가, 토템을 캐려면 인류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남영전 토템예술 쎄미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토템과 전통문화는 련결되여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되면 인류가 어떻게된 걸 알게 되고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중국어로 시 3수를 썼습니다. 자연과 사람 관계인데 총 450행 됩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룬 탕록, 중국의 세 조상이 어떻게 되여 있는가. 그리고 또 치우를 썼습니다. 치우가 어떻게 되여 있는가. 그리고 전문 천도를 썼습니다. 천도를 따르면하늘이 돕고 천도를 어기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우리가 누구며 우리가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자기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한다면 조선민족이 어디에서 왔고 개개인이 어디에서 왔으며 솔직히 구체적으로 말해서 당신의 성씨가 이건데당신의 성씨가 어디에서 왔다는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자기의 성씨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1509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2989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과 민족전통풍속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5-0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50](남영전편-5) 옛날 토템으로부터 성씨가 오고 민족이 형성되고 했잖아요. 그래서 토템숭배가 풍속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서 풍속이 되였는가를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중국을 보면 5천년 전에 황제가 룡 기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북경을 한번 봐요. 북경의 자금성은 명나라 때에 세운 것이 아닙니까.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이였습니다. 북경 천안문 앞에 화표가 뭔가 한번 주의해서 보았습니까? 천안문 앞의 문을 지키는 화표가 룡의 토템주입니다. 전하는 데 의하면 화표는 씨족부락 시대의 토템 표지라고 합니다. 화표 자료를 찾아보면 화표의 기둥에는 룡과 구름이 조각되여 있습니다. 룡과 구름은 같은 의미로 통하는바 옛날에는 룡이 날아가면 구름이 된다고도 하였습니다. 북경 천안문 앞의 화표가 자금성을 지키는 수호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650년 전에 제왕들이 룡 토템을 새긴 화표를 천안문 앞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중국의 전통에 룡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토템 수호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금성에 장수궁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장수궁에 구룡벽이 있는데 아홉마리의 룡을 새겨놓았습니다.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자금성은 앞에 있는 대문은 토템주인 룡을 새긴 화표가 문을 지키고 옆에서는 아홉마리의 룡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천안문광장의 화표에는 룡과 구름무늬가 조각돼 있는데 자금성을 지키는 토템주다   신화문 앞에 사자 두마리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자가 없는데 왜 사자가 나왔는가. 사자는 인도에서 나왔는데 말입니다. 우리 조선민족도 그렇고 사자가 수호신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왜서 사자를 중히 여기는가 하면 사자가 태양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를 광명의 화신이라 하지요. 장춘에도 많습니다. 새집을 짓게 되면 앞에 사자를 갖다 놓는 것입니다. 북경대학 도서관에도 사자 두마리가 있고 북경대학 정문에도 사자 두마리가 있습니다. 중국의 많은 곳에서 새로 건물이 나오게 되면 사자를 놓는데 왜냐하면 사자가 태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광명신이며 문지기 수호신이지요. 토템 숭배의 표현이지요. 그다음 북경 천단이 무슨 곳이냐 하면 하늘신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하늘이 뭔가 하면 일곱신이 있는데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이렇게 일곱신입니다. 무엇이 천신인가 하면 이를 가리켜 천신이라고 합니다. 천단은 바로 이 일곱신을 일년에 한번씩 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이는 토템 숭배입니다. 그리고 북경에는 또 지단이 있습니다. 일년중 황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가 바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과 땅에 제를 지내는 일입니다. 땅에도 역시 일곱신이 있는데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이렇게 일곱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에 천신제를 지내고 땅에 지신제를 지내지요. 청나라 광서황제 때 한번은 오래동안 비가 한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서황제는 음식을 전페하고 천단에 가서 하늘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과 돌아올 때에는 비를 맞으며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템문화는 자연과 조화하는 것으로서 내용이 깊습니다.     조선민족의 장승은 토템신화에서 기원하였다   우리 민족과 토템이 어떻게 련결되여 있는가? 조선민족은 옛날에 부락마다 장승을 세웠습니다. 이 장승이 뭔가 하면 하나는 처룡의 얼굴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형의 얼굴입니다. 처룡은 룡왕의 아들입니다. 처룡이 인간세상에 나와서 미모의 안해를 삼았는데 역신(疫神)이 그 아름다움을 탐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밤에 처룡의 집에 가서 처룡의 안해와 몰래 잠을 잤습니다. 처룡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처룡은 춤을 추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사라졌습니다.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역신은 처룡이 화를 내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을 알고 처룡 앞에 꿇어앉아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 안해 미모를 탐내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대는 화내지 않으니 그 마음에 감동하였습니다. 맹세하건대 앞으로는 당신의 얼굴이 있는 그림만 봐도 그 문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후에 처룡의 모습을 그려 문에 봍이기만 해도 역신이 얼씬거리지 못했다는 풍속이 생겨났습니다. 처룡의 얼굴을 집 주위에만 붙이던 것이 그 후에 장승이 되였습니다.   운남 소수민족지구를 찾아서 비형은 귀신을 막는 토템입니다. 신라시대 진지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비형은 귀신을 전문 다루는 귀신의 ‘왕’입니다. 귀신들은 비형의 말만 들어도 놀라서 달아납니다. 이렇게 하나는 처룡의 얼굴을 만들어 역신을 막고 하나는 비형의 얼굴을 만들어 귀신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마을어귀신의 토템입니다. 그리고 솟대를 세우는 풍속이 있는데 솟대는 집어귀에 세웁니다. 마을 앞에는 장승을 세우고 집마당에는 솟대를 세웠지요. 솟대의 끝에는 새(까마귀)를 조각해 달았습니다. 여기에는 까마귀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신라시대 비처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까마귀가 왕을 도와 왕을 해치려는 것을 피하도록 하여 왕은 이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정월 열엿새날을 까마귀한테 제를 지내는 날(오기일)로 정하고 찰밥을 해서 까마귀에게 먹였는데 후에 풍속으로 되였지요. 후에 집집마다 액을 막기 위해서 까마귀가 달린 솟대를 세웠습니다. 중요한 풍속이지요. 그리고 민족풍속에 ‘동성불동혼'이라는 것이 있는데 왜서 동성불동혼인가 하면 같은 토템은 혼인이 허락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선족도 그렇지요. 토템이 같다는 것은 조상이 같다는 말이지요. 같은 조상 끼리는 결혼이 안되지요.     조선족들의 모임에 참가한 남영전   한개 민족의 풍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혼례풍속과 장례풍속입니다. 조선민족의 결혼풍속을 보게 되면 수탉을 큰상에 올립니다. 그리고 닭 주둥이에 붉은 고추를 물립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닭은 광명을 상징하고 액운을 쫓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고추를 물리는 것은 아들을 낳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밥에다는 닭알을 묻는데 이는 무슨 풍속인가 하면 그것 역시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입니다. 간적(简狄)이 제비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닭알을 먹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속이지요. 장례풍속에서 왜서 조선민족은 석장을 하고 토장을 하는가? 금와왕이 돌 밑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게 되여 있습니다. 흙과 돌은 토템으로서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기 때문에 흙으로 가고 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011년 길림성문련, 길림성작가협회, 길림성사회과학원과 길림일보그룹의 주최로 남영전 토템시 세미나가 장춘에서 열렸다 문씨가 어떻게 왔는가 하면 섬(련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련못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우에 석함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는 하늘이 나한테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온 석함에 문(文)자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씨가 된 겁니다. 돌(석관)로 들어가는 풍속은 거기에서 왔으니까 거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보게 되면 석장이 아닙니까. 고구려 때에 석장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 248개 성씨 가운데 토템이야기가 서책에 있는 것만 해도 여라문개 됩니다. 왕씨, 전씨, 옥씨, 금씨, 김씨, 고씨, 석씨, 박씨, 리씨, 최씨, 문씨…     장춘공업대학에서 남영전선생이 학생들에게 토템문화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윤씨는 토템이 잉어입니다. 련못가에서 잉어가 함을 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윤씨 조상이 나왔다고 하여 토템이 잉어입니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인데,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윤신달은 한국 경기도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련못 가운데에 잉어떼가 함을 지고 있었는데 그 옥함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여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조상이 적군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렇게 윤씨 성의 토템이 잉어이기 때문에 그 후대들은 잉어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이 있기도 하다.) 한족은 토템이 한 300개 정도 되는데 이 300개 중에 우리 민족의 248개가 모두 포함되여 있습니다. 이때는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무슨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후에 와서 민족이라는 것이 나왔지요. 그전에는 토템, 씨족, 부락 이런 것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1508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261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씨족과 민족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2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9](남영전편-4)   사람은 원래 성씨가 없었습니다. 토템씨족이라는 말은 실상은 토템성씨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성씨는 처음에 토템에서 온 것입니다. 토템씨족이라는 말은 토템성씨를 가진 족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템성씨를 가진 씨족들이 한데 모여서 민족을 형성하였습니다. 민족의 기원이라는 것은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탄생해서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 먼저 중화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기원설을 보게 되면 구파라설, 아시아설, 호주설 등이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가 구라파에 언제 도착했고 아시아에 언제 도착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완전히 구라파와 아시아, 호주에서 인류가 탄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토템시인 남영전   사람은 원인에서 진화하였습니다. 사람과 원인의 제일 큰 구별점은 사람은 직립하고 원인은 네발로 기여다녔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두발로 서게 되고 공구를 만들고 공구를 사용해서 채집하며 수렵활동에 종사하면서 사람은 점차 기타 동물들과 구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핵심적인 것들입니다. 구라파로 넘어간 사람들은 백인이 되였고 아프리카에 남은 사람들은 흑인이 되였으며 아시아로 간 사람들은 황종인이 되였습니다. 이것은 기후, 먹는 음식 그리고 유전자의 변이 때문입니다. 중국에 인류가 발자욱을 들여놓은 것은 5만년 전입니다. 조선민족은 2만년 전입니다. 상고시대의 중국 력사를 보게 되면 삼황오제가 등장합니다. 삼황은 불을 발명한 수인씨를 천황이라 하며 그리고 지황, 인황을 말하는데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지금의 황하 상류입니다. 복희씨와 녀와씨의 후대들이 황하류역을 따라서 번식하였습니다. 황하 상류가 염제부락이였고 중류가 황제부락이였으며 하류에 치우부락이 살았습니다. 농업을 제일 먼저 시작한 부락이 염제부락이였습니다. 염제는 땅을 파서 곡식을 심었지요. 치우는 병기의 신이였습니다. 황제집단의 토템은 범, 표범, 곰 등 날카로운 맹수들이지요. 치우집단의 토템은 소인데 염제집단과 같습니다.     중화민족의 시조 염제, 황제, 치우   토템을 보게 되면 모두 머리에 뿔을 하고 있습니다. 염제는 치우의 형인데 둘이 마음이 안 맞아서 치우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후에 치우는 황제부락에 와서 소호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며 두 사람은 뜻과 마음이 맞았습니다. 둘은 황하 하류에 와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습니다. 이때 황하류역을 보게 되면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대하였는데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을 습득하고 하류로 내려오면서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세개 부락 가운데서 제일 약한 부락은 염제부락이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부락이 중간 수준이였고 제일 강대한 부락은 치우부락이였습니다. 치우부락이 얼마나 강대하였느냐 하면 그때 당시에 염제와 황제 부락에서 꿈도 못 꿨던 동으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치우가 그때 당시에 군대를 키웠습니다. 염제와 황제 부락은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냥 무기를 들고 나가서 싸우는 정도였지요.     중화민족의 토템인 룡과 봉황   치우에게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대가 있었지요. 솔직히 말해서 염제와 황제 부락이 상대가 안되였지요. 그 당시 세개 부락을 둘러볼 때 치우부락이 지금의 산동반도 하남성 동쪽 탁록이라는 곳에다 수도를 정하기도 하였지요. 치우의 수도는 산동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령토 확장을 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리질 못했지요. 염제집단과 황제집단은 치우집단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염제와 황제의 혼자 힘으로서는 치우의 상대가 안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 힘을 합쳐서 치자고 했습니다. 아니면 방법이 없었지요. 치우집단이 탕록에 치우성을 만들었는데 지금 말하면 수도인 셈이지요. 염제, 황제 집단이 련합해서 치우성를 쳤는데 아홉번을 쳐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치우가 너무 강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승승장구로 나가던 치우는 전쟁판에서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소홀한 거지요. 죽을 때 나이가 41살이였습니다.     남영전 시가창작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이 남영전 토템시에 대해 담론하고 있다   황제가 대단한 것은 류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치우성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령이 죽으니 대성통곡할 것이고 염황의 군대들은 좋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황제가 군기를 하나 들었는데 치우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쟁영웅이라는 뜻이지요. 치우의 군대들이나 염황의 군대들이나 다 존경하라, 모든 군대들은 치우를 영웅으로 숭배하라는 거지요. 량측의 군대들은 모두 놀랐지요. 황제가 통이 큰 사람이 아닙니까. 흉금이 넓고 시야가 넓고 큰 지혜를 가진 인물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 황제가 이런 사람이였구나 하면서 놀랐지요. 치우가 죽은 후 치우 군대는 몰락되고 황제는 당연히 수령으로 되였습니다. 제일 큰 인물로 된 거지요. 세개 부락에서는 황제가 저희들을 령도하는 인물이라고 받들면서 세개 부락의 공동 수령으로 추대되였습니다.     1980년 남영전 선생은 통화에서 《장백산》 잡지를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을 담임했다   공동 수령으로 된 다음 황제는 또 기발 하나를 내들었습니다. 무슨 기발인가 하면 룡과 봉황을 그린 기발을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서 룡과 봉황인가를 설명한 거지요. “왜서 룡과 봉황이냐? 룡을 보라, 우리의 조상 복희씨와 녀와씨, 실상은 우리 세개 부락의 조상이다. ” 염제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치우도 그렇고, 치우 이름부터 실상은 세 사람 중에서 제일 정통입니다. 황제는 녀와씨의 후손으로서 외손입니다. 그다음 염제가 복희씨 아버지의 계통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우리는 다 복희씨와 녀와씨의 후손들이라고 말하니 모두 동의했지요. 그리고 황하를 보면 황색의 룡과 같습니다. 황제가 대단한 게 그때 룡을 그렸는데 치우의 토템인 소의 머리를 룡의 머리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룡의 머리를 보게 되면 소의 머리입니다. 룡의 몸뚱이는 뱀의 몸뚱입니다. 복희, 녀와씨 토템인 뱀 몸뚱이를 룡의 몸뚱이로, 염제와 치우의 토템인 소의 머리를 룡의 머리로 그다음 염제집단의 토템인 악어 잔등의 비늘을 룡 몸뚱이의 비늘로 하였습니다.     2011년 10월 복건성 하문에서 열린 제3회 중국시가제 포럼에 참석하여 대회에서 발언하는 남영전 시인   그리고 황제집단의 곰, 범, 표범 이런 맹수들의 날카로운 발톱을 룡의 발톱으로, 치우의 새 토템의 날개를 룡의 날개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부락의 토템을 합쳐서 만들어진 게 룡이 되니 세 부락에서는 룡이 확실히 세 부락의 공동 토템이 맞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룡 토템이 나온 것입니다. 5천년 전 일이지요. 중국의 룡 토템이 이렇게 되여 나오게 된 겁니다. 룡이 상상 동물이 아닙니까. 이 상상 동물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황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이걸 보게 되면 황제가 정말 대단한 거지요. 치우부락의 봉황 토템이 뭔가 하면 천도(天道)를 가리키는 토템입니다. 봉황은 천도를 밝혀줍니다. 황제는 치우집단의 천도를 가리키는 봉황 토템을 공동 토템으로 정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이는 봉황 토템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에서는 룡과 봉황을 세개 부락의 공동 토템으로 하였습니다. 세개 부락이 합쳐서 점차 중화민족을 형성한 겁니다. 이렇게 토템에 대해서 간단하게 례를 들었는데 매개 씨족마다 토템이 있기 때문에 씨족 토템이 실상은 한 300개 정도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토템이 있는 성씨가 한 300개 됩니다. 그러니깐 300개 성씨가 실상은 300개의 토템인 거지요. 이렇게 중화민족이 점차 형성되였습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1507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107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과 성씨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24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8](남영전편-3) 옛날에 우리 인류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성씨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지요. 그래서 인류가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였으며 인류문명사회에서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씨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구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물체와 관계가 있어서 조상이 탄생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계가 있는 물체를 친척처럼 생각한 것이지요. 친척이라는 말이 토템이라는 말입니다. 1903년 중국의 엄복이라는 학자가 번역을 하면서 토템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지금 따져보면 토템이라는 말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실상은 묘족들의 방언입니다. 조선민족의 제일(第一) 성씨가 뭔가 하면 왕씨입니다. 왜냐하면 조선민족은 단군 왕검을 시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성씨는 바로 왕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산해 보면 왕씨는 지금으로부터 4353년 전에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군신화가 기원전 2333년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하늘나라에 천제 환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환웅이였는데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을 동경해 내려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2007년 길림신문사 《창업의 길》 도서출판좌담회에서 발언하는 남영전(왼쪽 두번째).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주면서 땅에 내려가 인간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환웅은 신단수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 등 세 사람과 함께 인간세상을 다스릴 무렵 그때 한 동굴에 범과 곰이 살고 있었습니다. 범과 곰이 인간세상을 동경했습니다. 자기네들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단수 앞에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지요.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동굴 안에서 백일 동안 금기를 지키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착실하게 금기를 지켜 예쁜 녀자로 변했지요. 웅녀로 된겁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호람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화신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으로 화신한 웅녀는 혼인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맺아 아들을 보았으니 그가 바로 단군 왕검(檀君王俭)이였습니다. 단군이 바로 조선민족의 조상인 것입니다. 이는 기원전 2333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단군의 성씨가 왜서 왕씨였을가요. 제가 한번 분석을 해봤습니다. 일반적으로 호랑이를 산중의 왕이라고 하는데 단군의 가족들은 산중의 왕은 호랑이 아니라 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곰은 금기를 지켜 사람으로 변했지만 호랑이는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으므로 곰보다 한수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곰을 산중의 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왕씨를 곰의 대변인이라고 여기고 성씨를 왕씨라고 한 것입니다.   2007년 재한화교협회 한성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영전(왼쪽). 그럼 왕씨가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데 왜서 지금 왕씨 성이 거의 없을가요? 력사적으로 보면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려왕조 5백년 력사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사람이 왕씨였습니다. 그런데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리씨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씨 성들은 피해를 면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왕(王)자 우에 인(人)자를 붙여 온전할 전(全)씨로 바꾸거나 량쪽에 내리금 하나씩 그어 밭 전(田)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옥(玉), 마(馬), 금(琴),김(金) 등 성씨로 고친 것입니다. 이렇게 왕씨 성은 하루아침 사이에 없어져버렸습니다. 지금의 전씨, 마씨, 옥씨 등 성들은 전부 다 왕씨에서 온 성들입니다. 이렇게 왕씨의 토템은 곰인 것입니다. 리씨 성의 토템은 범입니다. 왕씨가 조선민족의 첫번째 성씨라면 두번째 성은 바로 박씨입니다.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입니다. 기원전 69년에 박씨 성의 조상인 박혁거세가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혁거세는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습니다. 그 시대 선인들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해를 날개 달린 태양새로 보았습니다. 이 자주색 알은 곧 하늘이 내린 태양새의 알이지요. 때문에 혁거세는 태양의 아들, 태양은 그의 어머니 토템입니다. 무릎 꿇고 절하는 백마, 어쩌면 이 백마가 하늘에서 알을 실어왔고 또 알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닿는 기운은 소식을 알리는 번개, 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토템수호신입니다.   토템문화 답사를 하고 있는 남영전.  알에서 나온 동자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일어났습니다. 빛이 인간세상에 왔다 하여 그의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은 박처럼 둥글다 하여 성을 박씨로 하였습니다. 세번째 성씨는 고씨입니다. 고주몽이라는 고씨이지요. 여기에는 이런 신화가 있습니다. 동부여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우발수에서 우연하게 귀양살이 신세인 하백의 딸 류화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가엾게 여겨 궁중에 (데려다) 보살펴주었더니 이상하게도 해빛이 쫓아와서 규방의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류화가 몸을 피했지만 해빛은 그녀를 따라 다녔습니다. 이로 인해 류화는 임신하여 몸을 풀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아니라 알이였습니다. 그 알 크기는 다섯되나 되였습니다.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그 알을 개,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개와 돼지는 먹지 않았고 돼지는 핥아주었으며 마구간에 버렸더니 소가 젖을 먹여주었고 길에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해가고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덮어주었습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여지지 않으니 다시 류화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류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동자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였습니다. 나이 7세에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였습니다.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동자의 이름을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2014년 길림시조선족예술관에서 토템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영전.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니 맏이 대소가 왕에게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금와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왕자는 다른 장수들과 주몽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어머니 류화는 아들 주몽에게 “그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못살겠니, 속히 떠나거라.”라고 말합니다. 주몽이 도망가는데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가는 길인데 뒤쫓는 자가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 주몽을 건너게 한 다음 사라졌으므로 뒤쫓아오던 기병들은 못 쫓아오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토템이야기입니다. 졸본부에 이른 주몽은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도읍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천제의 아들이므로 성을 고씨로 하였습니다. 왜서 고씨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버지 천제가 고신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도 중국의 황하류역에서 황하를 다스린 실존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네번째 성은 김씨입니다. 조선민족의 김씨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입니다. 김수로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은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동여있는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함(金盒)이 있어 그것을 열어보니 안에 태양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여섯개 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까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로 하고 금함, 황금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씨를 김씨(金氏)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2011년 중국작가협회와 인민일보사에서 조직한 성세민족정응모에서 수상한 남영전 시인(오른쪽 세번째). 그리고 허씨 성은 인도에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뒤 인도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는데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수로와 허왕후 사이에 자식 열명이 태여났는데 큰아들은 김수로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성을 허씨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은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였습니다. 여섯번째 성씨, 석씨 성의 조상은 석탈해입니다. 신화를 보게 되면 주몽의 탄생과 비슷합니다. 어머니로부터의 란생(卵生)입니다. 주몽의 그 알은 짐승먹이로 버려졌지만 탈해는 배에 실려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홍룡의 호위로 탈해가 실린 배는 신라 아진포까지 왔는데 또 까치들의 보호를 받았고 까치들이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으니 룡과 까치는 탈해의 충실한 토템 수호신이였습니다. 탈해라는 이름은 궤를 열(解) 때, 알을 깨(脱)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脱解)라 하였고 까치의 보호를 받았다 하여 까치 작(鹊)자에서 석(昔)자를 떼여서 성을 석(昔)씨로 하였으니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 표지입니다. 일곱번째 성씨는 남평 문씨입니다. 옛날 조선반도의 남평이라는 곳에 련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련못의 한가운데에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어느 하루 바위 우에 석함이 나타났는데 왕이 신하를 시켜 가보게 하니 그 석함 안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신하가 석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어린 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속으로 이는 하늘이 내려보낸 은혜라고 생각하고 동자를 궁궐에 데려다가 키우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다섯살이 되자 세상물정을 다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다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성씨는 아이가 나온 석함에 글월 문(文)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문씨로 정했습니다.   단군 왕검(자료사진),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 왕씨성의 시조이자 역시 조선민족의 조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최씨 성의 토템은 금돼지입니다. 돼지는 복의 상징입니다. 옛날 한 고을이 있었는데 부임되여 오는 원님마다 부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님들은 누구도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담대한 사람이 자처해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원님은 명주실을 가만히 부인의 치마에 매놓았습니다. 이번에도 원님 부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인의 치마에 매놓은 명주실을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찾아갔더니 한 심심산중에 큰 바위가 있는데 명주실이 돌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위 밑으로 들어가 보니 글쎄 부인이 금돼지한테 갇혀있는 것이였습니다. 원님은 가지고 간 노루가죽으로 금돼지를 처치하고 자기 부인을 구출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금돼지가 노루가죽을 제일 무서워하였던 연고로 그다음부터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임신하였는데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금돼지의 아이라고 생각한 원님이 화가 나서 벌판에 아이를 버렸는데 이때 학이 나타나서 그 아이를 보살펴주는 것이였습니다. 후에 한 로파가  나타나서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일곱살이 되니 글 읽는 소리가 장안성(지금의 경주)까지 들렸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최치원입니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성씨가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기자
1506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088  추천:0  2020-06-27
[구술 ]토템과 문화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1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7](남영전편-2) 인류의 문화기원은 아주 재미있는 화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면 동물과 사람의 구분은무엇인가 하면 동물은 문화가 없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동물도 노래를 한다거나 구애를 한다거나 둥지를 튼다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생존본능이지 문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구분은 사람은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동물과 점점 차이를 보입니다. 동물은 태여나서 동물의 본능으로 성장하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요.   2007년 11월 《도라지》발전연구회 설립대회에 참가한 남영전 시인 왜서 토템과 인류의 문화를 련결시켰는가? 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토템문화가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발단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템은 어떻게 산생되였을가요? 사람과 동물의 또 하나의 구별이 있는데 바로 만물유령입니다.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가 되였지요.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토템이 산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국의 이족 시인이며 작가협회부주석인 지디마가(吉狄马加)는 창작담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만물유령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물유령이라는 것은 세상의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피뜩 생각하면 미신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현대과학이 발전할수록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은 그래도 리해하기 쉽지만 생명이 없는 물건 례를 들면 걸상, 돌, 자갈 이런것도 령혼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납득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지금 과학가들은 세상의 모든 물체는 다 생명체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체라는근거는 진동한다는 것이 실험에서 증명된 겁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에서 이런사실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템과 문화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남영전 선생   토템을 인류문화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언제 나타났을가요.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구석기시대 말엽에 나타 났습니다. 즉 1.3만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1.3만년 전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하여 먹은 후에 그 동물들의 뼈를 그냥버리지 않고  동굴 안에 아주 정교하게 배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토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동물을 잡아먹은 후 무슨 제사의식활동 같은 것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를 토템제의(图腾祭仪)라고 합니다. 그후에 와서또 증명된 것이 암벽화입니다. 바위에다 동물그림을 그리고 색칠까지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상 됩니다. 이것이 바로 토템숭배의 증거입니다. 암벽화를 그린 장소가 바로 토템제의의 장소였습니다. 토템제의를 례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곰숭배를 할 경우 사람들은 곰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숭배합니다. 하지만 또 곰을 사냥하여 먹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곰을 사냥하여 먹으면곰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인정하지요. 옛날 사람들도 자신이 힘이 있고 잘 되기를 바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과정에 토템제의 활동을 가졌습니다.   2006년 3월 저명한 시가 평론가이며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쎈터 주임인 오사경(오른쪽 첫번째)과함께 있는 남영전 시인 그후 토템숭배를 통해 원시공동사회인 모계사회가 형성됩니다. 당시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동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무리를 지어 살았지요. 그러다가 토템문화가 점차 발전하면서 모계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 또 노예사회로 그리고 봉건사회로 발전해 왔습니다. 모계사회는 말그대로 어머니 중심의 사회이지요. 우리 나라 귀주성과 운남성에 아직도 모계사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후에 수렵활동이 중시되면서 남자들의 위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녀자들은 집안에서의 활동이 위주로 되였구요. 이렇게 부계사회로 바뀌게 되지요. 부계사회 후기에 들어서서 재산으로 인해 노예사회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는 또봉건사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문화가 산생한 원인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토템제의 그리고다른 하나는 토템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수도사범대학에서 열린 남영전시가연구세미나 곰을 숭배하는 씨족들이 곰을 잡아서 먹은 후 곰뼈를 가죽과 함께 제의를 지내는 장소의한가운데에 놓습니다. 그런 후 사람들이 빙 둘러서 앉거나 서서 제의(祭仪) 행사를 벌였습니다. 제의 내용은 주요하게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해치려고 하는 것이아니니 용서를 빕니다. 당신의 용기와 힘과 지혜를 주시오. 그럼 제가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다 보니 점점 노래로 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토템제의 행사를 할 때 사람들은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곰이면 곰의 동작 그리고 학일 경우는 학의 동작을 모방하였지요. 이것이 바로 무용의 원초가 된 거지요. 지금 무대에서 공연하는 공작새춤을 보게 되면 하나하나의 움직임들이 전부 다 공작새의 동작을 모방한 것들입니다.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동작들 중 많은 것들이 토템동물의 동작을모방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운동회를 열 때 세계 각 나라들에서는 자기 나라의문화가 유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원시사회나 아주 오래전의 문화를 전시하군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민족은 력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지요.   2014년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과 민속문화 관련행사가 열렸다   수천년 전에 고대인들이 암벽에 그린 채색벽화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색갈이 지워지지않고 있습니다. 지금 상상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작업 도구가 발전하여 아무렇지도 않지만 수천년 전에 이렇게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울산에암벽에 고래그림을 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3천년 전의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암벽화는 귀주, 사천, 운남, 호남 등 지역에 많습니다. 토템제의의장소로 리용된 곳이였습니다. 이렇게 고대 씨족들의 토템제의를 통해 노래가 나왔고 춤이 나왔으며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암벽화 등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상형문자가 나오게 된것입니다. 중국의 상형문자를 보게 되면 실상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곰 하면 상형문자가 곰그림과 같습니다. 상형문자가 토템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7년 연변민들레생태원에서 발언하는 남영전선생 문자가 나온 후 사람들은 성씨가 점차적으로 있게 됩니다. 동물들은 성씨가 없지요. 사람은 성씨가 있음으로 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은 매개인으로 분류되는데 매개인마다 하나의 대단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오랜 성씨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변함이 없이 이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노래, 춤, 그림, 문자그리고 성씨에 이르기까지 토템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금기에 대해 말하자면 유명한 정신심리학자 프로이더의 《토템금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토템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금기가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규칙들이였지요. 례를 들면 같은 토템 끼리는 ‘동성불동혼’ 즉 수천년 전부터 같은 토템 사이에 결혼하면 안되다는 금기 같은 것을 세운 것입니다. 이는 후대 번식에도 좋은 작용을 놀았지요. 그리고 부동한 토템 끼리 결혼을 함으로써 씨족과 씨족 사이에 친척관계가 형성돼 화목을 유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키울수 있었습니다. 토템금기로 인하여 많은 풍속들이 형성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문화가 한발자욱씩 발전돼온 것입니다. 노래와 무용, 그림, 문자와 성씨 그리고 많은 풍속습관들이문화의 한개 내용들이지요.   2008년 토템시학술세미나에 참석한 남영전시인(왼쪽) 이런 토템신화가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비처왕이 행차를 하였는데 까마귀가쥐를 데리고 비처왕 앞에 나타나서 울었습니다.쥐는 왕더러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왕은 쥐의 말대로 까마귀를 따라갔습니다.한참 따라가다가 돼지두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신기해 구경을 하다가 그만 까마귀가 가는 방향을 잃었습니다.한참 방황하는데 이 때 한 로인이 련못에서 나와 편지 한통을 주었습니다.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여있었습니다.“이것을 뜯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뜯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한사람이란 왕 자신인 것을 알고 편지를 뜯으니 안에서 “射琴匣(거문고 갑을 쏘라!)” 세글자가 나왔습니다. 왕이 급하게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발견하고 쏘았더니 그 속에 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궁주(왕비)와 간통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두사람은 처형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정월 16일을 오기일 즉 까마귀 제사날로 정하여 찰밥으로 까마귀를 대접하는 풍속이 민간에서 행하게 되였습니다.이렇게 토템으로 인해 많은 풍속들이 형성되였으며 우리의 문화가 출현했습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정현관 최승호 기자
1505    토템과 남영전 시인 4 댓글:  조회:2730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4) 토템문화, 생존개척을 위한 디딤돌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23 ]  남영전선생의 토템문화를 접하면서 저도 모르게 문화와 민족이란 명사에 대해 다시금 더듬어보게 되였다. 확실히 우리는 문화와 민족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너무 방대하고 추상적이여서 단마디명칭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하면서도 몽롱한 뜻을 리해하고 인식하려면 토템문화를 접해야 하고 그로 인해 토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류문화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민족의 생성과 그 발전 려정을 투철하게 더듬어볼 수 있음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필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뿌리 깊은 심오한 토템문화에 대하여 나름대로 일종의 미신적인 옛말로 가볍게 여겨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과연 토템이란 무엇인가?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 게 토템문화다.”라고 남영전선생은 피력하였다. 글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는 것, 다시 말해서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문화가 생겼고 사람의 성씨가 생겼으며 토템 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 형성되였다는 상세하면서도 설복력있는 관점과 해설이 일목료연하게 안겨온다. 문화는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라는 것,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이라는 것과 같은 관점 혹은 정의는 너무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조선민족의 제일(第一) 성씨가 김씨가 아닌 왕씨(​王氏)라는 놀라운 사실을 비롯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의 유래를 알 수 있어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였다. 남영전선생이 얘기하는 토템문화는 문화와 민족, 인간과 자연지간의 내재적 상관 관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한다. 특히 글에 빠지다 보면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다시 곰곰히 사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반드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 길을 찾기 위한 과제가 궁극적으로 토템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죽음과 삶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종착역을 향한 힘든 려정에서 방황함이 없이 꿋꿋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가! 굽어보면 인류는 확실히 ‘인간, 기계, 자연 ’이 지혜롭게 공존해야 하는 새로운 문명을 맞고 있다. 공존의 지혜를 찾지 못하면 파멸은 예정돼 있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한, 자연을 착취하는 급류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인류, 비극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인간에게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공존하기보다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자연의 존재방식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과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자연법칙에 종속되여 있는, 자연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은 하루빨리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어느 모퉁이에 머물고 있으며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 그것이 기울어진 삶의 운동장을 바로잡는 급선무인지도 모른다. 토템에서 론하고 탐구하는 리론적 시도는 끊임없이 물질에 종속 당하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는 현대인에게 정신적 오아시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모종의 의미에서 토템문화에 대한 탐구, 어쩌면 그것이 생존개척을 위한 희망의 설계도가 아닐가! /주해봉(1963년생, 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고급중학교 교사 출신, 연변대학 조선언어학과 통신학부 본과 졸업, 여러 잡지와 신문에 소설, 수필, 시 다수 발표. 현재 한국 서울에 거주)
1504    토템과 남영전 시인 3 댓글:  조회:3119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3)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18 ]  ㅡ남영전선생의 를 읽고 남영전선생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걸출한 시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이다. 그는 우리 글은 물론 중문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국의 주류사회, 주류문단에서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에, ‘중국의 10대 걸출한 민족시인’에 떳떳이 이름을 올린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고 문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을 꾸준히 인류문화의 원천이고 뿌리인 토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쌓고 있는 존경스럽고 돋보이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근 남영전선생이 《길림신문》에 펴낸 는 글 역시 무게 있고 폭이 넓으면서도 아주 재미나게 엮어 애독자들의 큰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글은 원시 인류문명의 발단인 토템의 출현, 토템숭배로부터 인류, 민족, 력사, 문화, 종교 등 넓은 령역을 고루 살펴보면서 원시문명과 현대문명이 의존하고 발전하게 된 토템이란 원초적 문명의 씨앗을 생동하고 체계적으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아츨하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여서 퍼그나 어렵다면 어렵고 난해하다면 난해하기도 한 전통적인 뿌리문화인 토템 명제를 우리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흥미를 가지도록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그것이다. 남영전선생이 엮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행,어 문화개념을 풀이도 해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을(문화가 있냐 없냐) 비교도 해보면서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임을 알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혼례, 장례풍속…지어는 결혼식 때 왜 큰상에 수탉이 오르고 수탉의 주둥이에 고추를 물리우느냐는 등 구체적인 세절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며 형상적으로 생동하게 설명해주고 또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그럴듯 퍼그나 엄숙하고 퍼그나 딱딱하게 안겨올 수도 있는 토템이란 문화지식을 독에서 푹 익어 나오는 김치처럼 대가 다운 목소리로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이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템문화에 접촉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마저도 가슴에 와 닿고 실물을 보듯이 그 륜곽과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도록 한다. 이는 글을 다루고 주무르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문인, 학자들이 따라 배울바라고 본다. 이 또한 덕망높은 남영전선생이 우리 독자들을 배려하는 어진 성품이고 덕량이 아닐가 생각한다. /박일( 소설가, 흑룡강신문사 고급편집, 부총편집, 현재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
1503    토템과 남영전 시인 2 댓글:  조회:2987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2): 우리가 우리를 알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16 ]    저자 현춘산 현춘산 프로필: 1950년 흑룡강성 수화시 북성촌에서 출생 다년간 중소학교 교사로 근무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 졸업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흑룡강작가협회, 연변작가협회 회원 장편소설 1부, 수필집 3부 출판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등 다수 수상 ㅡ1ㅡ 2018년 여름, 나는 위챗그룹에서 우연히 남영전선생을 알게 되였다. ‘토템시인 남영전'이라 하면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분이고 그의 토템시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아왔지만 한번도 만나뵙지 못한 처지였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소통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중국고대력사를 제재로 쓴 나의 소설 몇편이 계기로 되여서였다. 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위챗으로나마 자유롭게 말이 오가자 나는 토템에 대해 문의하게 되였다.그때까지 나는 토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남영전선생은 내가 중국고대사를 제재로 소설을 쓰는지라 고전(古典)을 많이 읽을 텐데 중문으로 읽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20년전부터 북경과 광주에서 생활하였기에 많은 자료를 중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그것은 사실이였다.그렇다고 내 중문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였다. 대도시의 주류문화권이 나를 그렇게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른 것’이 오히려 다행이였다 할가. 중문서적들과 중문자료들이 나의 시야를 넓혀준 것이다. 선생은 중문으로 고전을 읽는 수준이면 학술저작을 볼 수 있을테니 중국당대의 토템문화학자 하성량(何星亮)의 저서《토템과 중국문화(图腾与中国文化)》를 읽어보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나는 토템문화와 접촉하게 되였다. 나는 《토템과 중국문화》를 몇십페지 읽은 후 선생에게 글이 잘 읽혀진다고 전했다. 선생은  기뻐하면서 지금 우리의 조선족지식인들중 중문으로 학술서적을 읽는 사람이 적다면서 그래서야 어떻게 많은 정보를 접수하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개탄하였다. 하성량의 《토템과 중국문화》를 사서 여럿에게 보냈으나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토템문화 유관 자료는 중문으로 출판된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고급지식인으로서 중문학술서적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족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고 선생은 안타까와 했다. 필자는 하성량의 《토템과 중국문화》를 세번 읽고 요점은 필기도 했다. 《토템과 중국문화》는 나에게 적어도 토템문화는 세계적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문화현상이라는 사실과 토템문화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남영전선생이 지적한바와 같이 이 책에는 결함이 있었다. 어떻게 토템을 판단하고 식별할 것인가 하는 표준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 창작과정에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神话文献)에 근거하여 토템을 감별하고 식별하였다고 하면서 토템을 알려면 신화문헌을 꼭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토템문화를 터득한 후 토템문화수필을 쓰는게 어떻겠는가고 제의하였다. 선생은 내가 수필로 문단에 데뷔를 했고 수필집 세부를 출판한 일을 념두에 두고 있었다. 토템시가 나왔으니 토템수필도 토템소설도 나올 수 있지 않을가. 사회가 발전하고 문학이 발전할 수록 쟝르도 더 세분화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류문단에서는 이미 《승냥이토템(狼图腾)》이란 장편소설이 나와 국내외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조선족작가들중에서도 응당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를 반영하는 '황소토템'이나 '백학토템' 같은 토템수필 혹은 토템소설이 나와야 하지 않을가. 그런데 토템의 정의조차 제대로 모르는 내가 어떻게 토템수필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잖아도 내가 력사소설을 쓰는 리유도 남다른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내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내게 여추우(余秋雨)의 작품을 봤는가고 하면서 여추우는 한족의 저명한 문화수필대가인데 조선족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ㅡ2ㅡ 그로부터 석달 후, 나는 광주에서 삼아로 날아가 료양중에 있는 남영전선생을 방문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국내외에 명성을 날리고 영향을 끼친 토템시인의 건강상황이 그 정도일줄 알지 못했다. 나도 장기간 심장질환으로 시달리는 처지지만 말이다. 휠체어에 앉았던 선생이 나를 맞아주었다. 몇년전 뇌출혈로 쓰러졌었다는 것이였다. 민족문화와 문학을 위한 몇십년의 로심초사가 선생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나는 삼아에서 3일 묵었다. 그러면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은 사흘낮 동안 휠체어에 앉아 한번에 일여덟시간씩 나와 담화를 나누었다. 그때 삼아에 있던 전승기 시인이 나를 배동했다. 선생이 전승기에게 물었다. 당신의 전(全)씨 성이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가고. 전승기가 대답하지 못하자 선생은 흥미진진하게 단군신화를 들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왕씨는 단군왕검의 후대라고 하였다. 왕씨는 우리민족의 제일성씨로서 원래는 큰 성씨였는데 후에는 변을 당하여 왕씨들은 하루아침에 자기의 성을 전(全)씨, 전(田)씨, 옥(玉)씨, 금(琴)씨, 마(马)씨 등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왕씨의 토템이 곰이였으니까왕씨의 후예들인 이들의 토템 역시 곰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또 나의 현(玄)씨는 황제의 후손이기에 황제의 토템 곰이 현씨의 토템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열렬한 분위기속에서 이어졌고 우리는 천진한 소학생마냥 진지하게 들었다.전혀 앓는 분같지 않게 활기찬 모습의 선생은 토템문화에 대한 화제를 담론할라치면 두눈에서 광채를 뿌렸고 목소리도 청아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부터 민족의 뿌리문화인 토템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우리 민족의 문화,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전통풍속 그리고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 《길림신문》에서 펼친 ‘문화를 말하다' 계렬보도의 남영전편을 보면서 새삼스레 그때의 담화가 떠오른다. 선생이 그때 우리에게 전수한 것이 바로 문화와 민족에 관한 오늘의 그 화제였다. 그번 만남이 있은 후 전승기시인은 삼아와 해구의 서점을 돌면서 10여부의 토템 유관 서적들을 구입했는데 그중 한책에 남영전선생의 토템시와 토템관에 대한 평론들이 실려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번 만남 후 전혀 계획에 없던 서울행을 했다. 국내에서는 도무지 구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들 때문이였다. 문화와 민족에 대한 선생의 독특한 정의는 일찍 국내의 반향을 일으켰다. 선생의 문화에 대한 정의는 "개인과 군체(群体)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공동 부호"였고 민족 형성에 대한 선생의 정의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서이다"라는 것이였다. 말이 난 김에 문화에 대한 정의를 더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중국당대의 저명한 문화학자 여추우선생은 저서 《문화란 무엇인가(何谓文化)》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문화에 대한 정의가 수백개나 되는데 모두 번쇄적이고 너무 길어 터득하기 힘들다. 여추우선생의 문화에 관한 정의는 "정신가치와 생활방식의 일종 생태공동체로서 루적과 인도를 통하여 집단인격을 창건하는 것"이다. ㅡ3ㅡ 필자 역시 문화의 정의를 두고 오래 동안 골치아파했었다. 몇년전 《흑룡강신문》에 문화에 관한 칼럼들을 써내면서부터였다.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3년에 펴낸 《현대조선말사전》의 풀이는 이러하다. (1) 력사발전의 행정에서 인류가 창조한 물질적 및 정신적 재부의 총체 (2) 일반지식과 기술지식을 통털어 이르는 말 (3) 현대적요구에 맞는 문명한 생활양식 《엣센스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러하다. (1) 인지가 깨고 세상이 열리여 밝게 됨 (2) 권력보다 인덕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끔 (3)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리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의 총칭(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적 소득을 가리킴) 지금까지 중국에서 권위사전으로 꼽히는 《대사해》의 정치학, 사회학권(2010년판)의 풀이는 이러하다. 광의적 의미로 말하면 인류가 사회실천과정에서 획득한 물질, 정신적 재부와 생산능력과 창조한 물질, 정신재부의 총화이고 협의적 의미로 말하면 정신생산능력과 정신산품을 가리키는데 일체 사회의식형식,자연과학,기술과학,사회의식형태가 포함되며 때로는 전문 교육, 과학, 문학을 가리킨다. 조선족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은 다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공동부호이다." 얼마나 간명하고 구체적인가! 맑스는 《자본론》에서 사람들이 매일 보고 만지는 상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의식주행어, 이렇게 사람들의 생존활동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틀어쥐여야 문화의 진정한 함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가. 세계의 그 어느 민족이나 다 자기의 문화가 있다. 세계의 어느 민족이나 의식주행어문화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복식문화, 음식문화, 주거문화, 행위문화, 언어문화 여기에 인류의 물질적재부와 정신적재부가 포함 되여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에 대한 남영전선생의 정의는 토템이란 문화뿌리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인류와 민족의 력사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있다. 이는 문화정의에 대한 중대한 공헌이 아닐수 없다. ㅡ4ㅡ 토템수필, 토템소설은 우리 문단에 아직 없지만 토템시는 있다. 중문으로 창작된 남영전의 토템시는 42종의 조선민족 씨족토템을 쓴 것으로서 문창남, 박화, 김응준 등 조선족 시인들에 의하여 우리 글로 번역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토템을 쓴 이 토템시들이 조선족문단에서보다 주류문단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국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조선족문단에서도 일부 문인들이 ‘남시(南诗)'에 대해 긍정하고 찬양하고 있었지만 주류문단처럼 성세를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토템시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실천이 우리 문화를 알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토템시는 민족의 뿌리문화(토템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기에 토템시에 대한 연구는 바로 토템문화를 습득하는 기회로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과 토템 유관 자료들을 얻은 후 나는 남영전선생의 토템시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잘하면 ‘남시'에 대한 매 한편의 해석이 괜찮은 토템수필이 될상 싶었다. 그러나 ‘남시'를 분석한다는 그 자체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미지(意像)조합이 복잡하고 주제가 심오하여 난해한 점이 많은게 토템시의 특점이였다. 이미지란 영상(映像)이미지와 심상(心像)이미지로 나뉘는데 ‘남시'에는 이 두가지 이미지가 매편에 관통되여 있었다. 례하면 토템시 에서 웅녀로 변하여 단군을 낳은 곰토템을 민족의 시조모(始祖母)로 보는 것은 영상이미지이고 끈기있고 용감하며 애탄과 구걸을 모르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곰토템의 성격을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심상이미지이다. 만약 내가 ‘남시'의 이런 토템이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토템수필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토템시를 해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기 위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에 근거하여 토템시 몇수를 분석한 것을 보고 남영전선생은 자기가 소장한 《문화상징사전(文化象征辞典)》을 부쳐주었다. 선생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만했다. 토템시에 대한 나의 분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문화상징사전》은 우리 민족의 토템숭배와 토템금기로부터 점차 형성된 민족전통풍속, 전통문화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선생의 체험으로부터 내린 결론이였다. 선생은 42수의 토템시를 다 발표한 후에야 상징사전을 구입했다. 상징사전이 없을 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에 의해서 토템시를 창작하였다. 토템시를 발표한 뒤에야 구입한 상징사전을 펼친 선생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토템시에 상징이미지를 제대로 도입한 것이였다. 그것이 우연한 일치였을가, 아니였다. 상징사전의 편찬자들도 알게 모르게 토템문화를 수록한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의 풍속, 습관이 기실 토템문화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민족문화의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문학에서 상징이미지가 없는 작품이 어디 있는가.더구나 현대시의 상징이미지들은 풍부하고 복잡하다. 우리의 《문화상징사전》은 사회와 시대가 발전할수록 더욱 보완되고 풍부해지고 완미화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학자, 작가, 시인들은 민족의 상징문화보물고를 부단히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매 하나의 상징물들이 새롭게 태여나고  매 한가지 상징이미지들이 새롭게 빛을 뿌려야 한다. 《문화상징사전》이 아니였더라면 내가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42수의 토템이미지를 발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과정은 내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아가는 과정이였다. 지금 《료녕신문》에 련재되고 있는 필자의 남영전 토템시 이미지해설문들은 기실 실습중에 있는 토템문화수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도 아직 미숙한 점들이 있어 부단히 수정하고 보충하고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우리의 문화상징보물고에 대한 저그마한 기여로 될 수 있으므로 필자 하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학자, 작가, 교수, 시인들을 포함한 광대한 독자층의 참여를 기대한다. ㅡ5ㅡ 우리가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토템문화를 꼭 알아야 한다. 토템은 문화의 시원(始源)이고 문화의 뿌리이다. 인간의 최초의 노래나 무용은 토템제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토템숭배로 인한 제의(祭仪)는 풍속습관으로 되였고 토템숭배를 표현한 암벽화가 점차 문자로 발전해왔다.성씨도 토템에서 기원되였고 여러 토템씨족이 모여서 민족이 형성되였다. 토템문화는 우리에게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온 인간들이다. 우리의 작가들이 토템문화를 알게 되면 우리자신을 알게 되여 더욱 특색있고 정채로운 작품을 창작해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조선족들 가운데 토템문화를 아는 사람이 쌀의 뉘만치도 없는 상황이다. 토템문화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수원(水源)이 없는 강이 없다. 자기의 성씨가 어떻게 온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민족문화를 위해 일한다면 어떻게 믿어줄가. 2006년 3월에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중심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회가 있은 후 중앙민족대학에서 남영전 시인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토템문화 강의를 조직했다. 첫날에 조선족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했는데 토템이란 말이 나오니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였고  례의적으로 자리를 지킬뿐이였다. 다음날은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학생들 차례였다. 사전에 공고에서 토템시인의 토템문화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본 학생들이 필기장과 볼펜을 갖추고 밀물처럼 강당에 모여들어 초만원을 이루었다.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서 한마디라도 놓쳐버릴세라 빨리 메모를 하느라고 바빴다. 조선족학생들과 판이한 풍경이였다. 이 얘기를 듣는 필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학생들이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학생들보다 선천적으로 몽매하고 무지할가. 결코 그것이 아니였다. 우리의 민족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조선족대학생들은 토템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라났다. 팔자의 부모는 각기 1910년과 1911년에 탄생했다. 그로부터  35년 동안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왔다.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36년이란 세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유린하고 박멸했으며 우리 민족은 말과 글과 성과 이름마저 빼앗겼다. 일제는 민족의 시조 단군의 력사가 기록된 문헌들을 불살랐고 우리 민족의 토템신화문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조선민족을 영원히 저들의 노예로 만들려고 광분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 제3세대에 속하는 우리도 선배들에게서 토템문화를  전수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원생태문화(原生态文化)는 단절된 상태이다. 어찌 지금의 우리 대학생들 탓이라고 하랴! 남영전선생의 ‘구술문화 6강'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로 가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문화정의와 민족개념 이 핵심을 분명히 알고 장악해야 우리의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현춘산
1502    토템과 남영전 시인 1 댓글:  조회:2889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1): 토템·문화·민족·미래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0 ]       김동훈   김동훈 프로필: 1942년 4월 길림성 화룡현 출생. 1965년 중앙민족학원 어문학부 졸업 후 중앙민족학원 조선어번역학과 강사,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비서, 연변문학예술연구소 부소장, 연변대학출판사 총편집,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연구소 소장, 상해공상외국어대학 학술위원겸 한국어학부장,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고문, 중국소수민족문학학회 리사, 동아시아비교민속학회 리사,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력임. ≪조선족문화≫, ≪중국조선족구전설화연구≫, ≪조한민담비교연구≫,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전11권, 주필), ≪중국조선족문학대계≫(전30권, 주필), ≪간명한국백과사전≫(주필), ≪중조고전시가비교연구≫(주필), ≪조선고전시화연구≫(주필) 등 저서 외 백여편의 론문이 있음. 중국출판정부상 도서상, 길림성 장백산문예상, 연변대학 및 한국고등교육재단 와룡학술상 등 수상. 《길림신문》에서 펴낸 대형구술시리즈 에서는 시인, 작가, 예술가와 문화학자들을 초청하여 열띤 토론을 벌리였다. 각계 저명 인사들이 여러가지 고견을 내놓아 민족문화전통의 계승과 민족융합, 문화강국의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는데 큰힘을 모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구술이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특히 남영전 시인의 여섯편의 구술을 읽고(듣고)나서 여러모로 감회가 깊었다. 그는 문화와 관련된 여러가지 큰 테마들을 한달음에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후생이 가외란 성인의 말이 생각나서 기뻤다. 나도 덧붙여 몇마디 말하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이 녹쓴 필을 다시 들었다.     조선족문화와 번역에 대해 강의하는 김동훈(중간).   1. 남영전 시인이 보는 문화의 시각이 독특했다. 그는 문화의 핵심내용을 의식주행어로 개괄했다. 내가 재래로 인식해온 문화란, 여전히 맑스가 백여년전에 말한 ≪인류가 창조한 물직적 재부와 정신적 재부의 총화≫였다. 서구의 문화학자들의 해석은 사상과 행위, 정신능력과 가치표준을 강조하고 있는데 음미하면 할수록 난해스러운 점이 많아진다. 25년전에 북경대학의 계흠림교수가 연변대학에 와서 교원들을 상대로 문화특강을 하였는데 그때까지 세계의 중요한 사전과 저서에 나오는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무려 800종이 넘는다고 했다. 그것들을 분류해보면 대체로 광의적 개념과 협의적 개념 두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 광의적 문화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량자를 다 포괄한 것이고 협의적 문화는 정신문화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이 내놓은 문화의 개념은 매우 간단하고 명철했다. 문화의 표지는 ‘의식주행어'란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인터넷에도 가끔 등장하지만 남영전 시인처럼 그렇게 확고하진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견해에는 상당한 도리가 있었다. 그가 말하는 의식주행어를 하나하나 풀이해보면 문화의 본질과 부합되는 점이 매우 많았다.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의는 복식문화, 식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행위도덕, 어는 언어문자를 대칭한다. 그 개념들을 다시 풀이해보면 물질생활, 사회제도, 의식형태 등 문화의 정체가 모두 드러난다. 마치 감자의 줄기를 잡아당기면 감자알들이 뿌리채 통채로 묻어나오는 것과 같다. 례를 들어보자. 인류의 음식문화는 천가만호의 생존과 직결되여있다. 식물의 채집, 동물의 수렵, 농작물의 재배, 가축의 사양, 음식의 가공 등 다양한 물질생산활동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제의, 금기, 례절과 같은 다양한 사회제도가 산생되며 또한 사회제도와 관련된 생존의식, 계급의식이 산생된다. 복식문화도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여 있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른다. 베를 짜고 염색하고 복잡한 가공을 거쳐 옷이 생산된다. 민족, 성별, 년령, 직종, 신분의 요구에 따라 옷모양도 천태만상이다. 민족, 계급에 따라 각이한 복식제도가 생기고 각이한 가치관, 심미관이 발달한다. 주거문화도 마찬가지다. 비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동굴에서 움집으로, 움집에서 초가집, 벽돌집으로 끊임없이 주거환경을 개진한다. 궁궐, 성당, 사찰, 민가 등 각이한 건축물들의 축조와 더불어 신분적 차별에 따른 사회제도와 귀족의식, 평민의식, 종교의식이 산생한다. ‘행'의 본뜻은 길을 걷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행위도덕, 풍속습관을 대칭한다고 했다. 민간신앙과 종교신앙, 세시풍속, 통과의례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어'는 언어문자를 뜻하는데, 언어문자는 곧 사상의 직접적인 현실이므로 의식형태를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밖에도 더러 루락된 문화현상이 있을 수 있으나 물질적, 제도적, 정신적 측면에서 잘 살펴보면 상호간의 그 어떤 련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기원을 토템의 탄생과 련결시켜보았다. 문화는 언제나 우리의 몸 가까이에 있다. 처음에는 뜨거운 가스에 불과했던 지구가 차츰 식어지며 암석과 흙의 형태로 변질된다. 땅과 물에는 거대한 생물이 생성하여 마침내 원인이 출현한다. 원인이 두다리로 걷게 되면서 구석기시대가 탄생되고 수렵채집시대(BC 3만년경)에 들어서면서 씨족집단과 맹수들의 싸움이 치렬해진다.     연변대학 김병민(오른쪽) 전임 교장과 함께.   맹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에게는 구명의식과 동물숭배의식이 산생한다. 동물에 대한 경외심과 사과의 마음으로 동물의 량해를 구하고 그들과 친족같이 지내고 싶어한다. 스스로 동물에 대한 제의와 금기를 만든다. 하지만 문화를 모르는 동물이 인류와 친족으로 지낼 수 있을까? 인간은 동물을 토템으로 숭배하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짝사랑을 한다. 토템수호신의식의 탄생원인을 남영전 시인은 만물유령설에서 찾았다. 세상만물이 다 령혼이 있다는 믿음은 자연의 모든 신비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의식구조였다.  포유동물의 피와 사람의 피의 동질성 및 생명의 원천에 대한 표상적 인식, 임신부의 출산이 동물 혹은 자연물의 감응에 의한 결과라는 믿음, 꿈속에서 자주 보는 동물의 변신, 죽은 사람의 회귀 등 신비한 체험들은 동물과 인간이 상호전환할 수 있다는 진화인지의 승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였다. 즉 원시인의 진화인지가 자연과 인간이란 2원적 사유방식에서 자연, 인간, 정령이라는 3원적 사유방식에로 발전하고 승화된 것이다. 령혼관념의 출현과 만물유령설의 탄생은 토템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정령이란 제3 존재의 출현으로 모든 자연물은 신적 성격을 부여받게 된다. 하늘에는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일곱가지 신이 있고 땅에는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일곱가지 신이 있다고 믿는다. 물활론, 정령설을 바탕으로 태여난 숱한 자연신은 토템친족, 토템조상, 토템수호신들에게 무한한 선택가능성을 제공했다. 토템의식은 인류의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된 사회의식 형태이며,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된 종교신앙형식이다. 토템제도는 가장 이른 시기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체계적인 사회제도였다. 그 제도안에는 토템표지, 토템명칭, 토템제의, 토템금기 등 일련의 내용이 포함된다. 토템족외혼은 원시적인 혼인법이였으며 동일한 토템남녀 사이의 근친혼을 방지함으로써 생육의 질을 높이고 인류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보증했다. 독일문화학자 퐁트는 “토템제도는 인류력사에 나타난 4,5개 주요한 문화시대중의 하나였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토템조직제도의 건립은 지역의 평화를 수호하는 진보적인 사회제도였으며 여러 부족들 사이의 안전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수만년을 이어온 선사시대를 풍미했던 토템문화는 원시시대의 가장 주요한 주류문화로 자리매김을 했다. 3. 성씨의 기원은 남영전 시인이 관심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테마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전까지 원시인들에게는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물유령설과 토템의식이 나타나면서 인류가 비로서 성씨를 가지게 되였으며 성씨의 출현으로 사회적 분공이 발달하게 되였다. 집단과 집단을 구분하기 위한 필요성은 동물에게도 가끔 나타난다고 한다. 프랑스의 동물학가 드발은 이란 글에서 총명한 돌고래가 각자 고유한 억양을 가진 고주파음의 서명 휘파람소리로 자기의 특정한 동료를 부르며 또 그 소리를 들은 특정한 돌고래도 자기의 특징적 고주파음으로 곧 응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특징적 고주파음'이 곧 이름역할을 했다. 인류가 토템의 도움으로 성씨를 가지게 되였다는 것은 역시 거대한 진보였다. 삼황의 첫사람인 수인씨는 지상만물이 바람에 의해 생긴 것이라 하여 바람‘풍'자를 성씨로 삼았는데‘풍'은 곧 중국에서 첫번째로 명명한 성씨라고 한다.     조선족문화를 둘러싸고 발언하고 있는 김동훈.   토템에서 기원한 우리 민족의 성씨는 남영전 시인이 렬거한 단군왕검의 왕씨, 박혁거세의 박씨, 고주몽의 고씨, 해금와의 해씨, 김수로의 김씨, 김알지의 김씨, 수로부인 허황옥의 허씨, 석탈해의 석씨, 남평문씨, 경주최씨, 파평윤씨 외에도 내가 알고있는 토템성씨가 또 여러 개 더 있다. 평강 채(蔡)씨의 시조 채보한은 오색이 령롱한 거북이 평강이란 강에서 나와 사람으로 화하였으므로 채씨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충주 어(魚)씨의 시조 어중익은 태여날 때 겨드랑이에 물고기비늘이 있었다고 하여 어씨성을 하사받았다. 운(云)씨의 시조는 290년전에 륙지에서 강화도로 이주할 때 벽공에 백운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것을 보고 성을 운씨라고 했다. 부여시대에 임금이 말, 소, 개, 돼지를 사양하는 관리들에게 가축들의 이름을 따서 마씨, 우씨, 구씨, 저씨 등 성을 하사했다고 하며 그 토템성씨가 우리 민속의 윷놀이에 반영되여 말, 슝, 개, 도와 같은 속칭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조선반도로 건너간 토템성씨도 수두룩하다. 3천년전에 기자(한씨, 선우씨, 기씨의 시조)가 5천명의 주나라 백성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주했고 진(秦)나라 때는 3-4만명의 연나라 난민들이 진한(辰韩) 땅에 피난가서 정착했다고 하며 수당시대에도 전란과 무역, 정치 등 원인으로 숱한 중국인들이 조선반도에 이주해 가서 살았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의 토템성씨를 그대로 조선에 가지고 갔으므로 토템이 성씨에 준 영향은 그야말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말그대로 토템은 성씨의 뿌리이며 성씨문화의 숲을 거창하게 가꾸어온 무명의 원예사이며 유공자이다. 4. 토템과 민족의 기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템씨족이 모여 부족이 되고 부족련맹의 결과로 더 큰 민족이 탄생한다. 염제, 황제, 치우 세 부족련맹이 합쳐 하나의 중화민족이 형성되였다는 력사사실에서 우리는 토템의 중대한 역할을 실감하게 된다. 워낙 황제부락의 토템은 범과 곰이였고, 염제부락의 토템은 소와 악어였으며, 치우부락의 토템은 소와 새였다고 한다. 황제는 복희녀와씨의 후예라는 뜻에서 뱀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소의 머리, 맹수의 발톱, 새의 날개, 악어의 비늘을 본따서 룡이라는 통합적인 토템을 만들어 중화민족의 기틀을 잡았다고 한다. 룡토템은 씨족과 부족의 개념을 뛰여넘어 민족의 상징으로 승화되였다. 중국에는 6,000개의 성씨가 있다 하니 6,000개의 혈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000개의 성씨가 모여 56개의 민족을 구성하고 또 56개의 민족이 융합되여 중화대민족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중화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의 개념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원융의 개념이다. 문화는 민족의 령혼과 표지이며,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며, 민족의 동질감과 응집력을 강화하는 기본 토대이다. 문화의 본질적 요소를 의식주행어라고 한다면 의식주행어가 또한 민족과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한 표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을 문화의 개념이라고 한 남영전 시인의 말은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5. 토템은 민족의 풍속습관속에 융해되여 오늘도 살아숨쉬고 있다. 거대한 룡이 새겨진 천안문앞의 화표, 룡이 활개치며 춤추는 자금성의 구룡벽, 천단 앞에서 올리는 천신제, 지단에서 올리는 지신제… 그런 풍속들은 모두 토템숭배에서 연변되여온 것이다. 지난날 조선족마을 동구에 세워졌던 장승과 솟대에 그려진 처룡, 비형과 새의 형상은 각각 룡토템, 구름토템과 까마귀토템의 상징이였다. 정월보름날의 오곡제와 윷놀이, 오월단오절의 산신제와 수신제,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영고, 동맹, 무천 등 제천의례는 모두 토템숭배와 밀접히 련계되여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족마을의 장승에 새겨져있는 룡토템과 구름토템의 조합이 천안문광장의 화표에 부각된 룡토템, 구름토템의 조화와 매우 일치하다는 것이다. 이는 길상물에 대한 조선족과 한족의 토템의식이 오래전부터 밀접히 련결되여 있었다는 산 증거이다. 민족풍속은 의식주행, 관혼상제, 세시풍속, 정신신앙 등 내용으로 구성되여있으며 그 것들이 모여 민족의 문화전통을 이룬다. 선사시대에 산생된 장구한 토템문화는 여러 민족의 풍속습관에 깊이 침투하여 아름다운 문화전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6. 남영전 시인은 제나름대로 인류 4대문명의 광범한 시각에서 중국토템문화의 우세를 발견하였고 토템문화의 긍정적 시각에서 미래지향적인 문화발전전략을 구상해보았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류역의 고바빌론문명, 나일강류역의 애급문명, 인더스 갠지스강류역의 인도문명이 오래전에 조락되여간 현실세계에서 오로지 황하류역의 중국문명이 서구문화학자들의 특별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원인중의 하나는 중국인들이 룡토템을 기치로 평화, 원융, 천일합일의 문화전통을 세세대대로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토템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평등관계의 추구는 현시대 민족공동체, 인류운명공동체의 구축에 긍정적인 정신력으로 작용할 것이며 지구상의 자연재해를 감소하고 인류의 평화와 세계의 원융을 도모하는 새로운 문화생산력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문화의 개념, 민족의 개념에 대한 투철한 리해는 다민족국가인 우리 나라의 매개 공민에게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길림신문≫에서 이번 문화칼럼의 성공을 계기로 토템, 문화, 민족, 미래라는 주제의 토론을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전개함으로써 신문매체의 향도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중화전통문화와 조선족문화의 우세를 널리 선전하며 조선족과 기타 민족의 토템식 형제관계의 구축에서 계속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바이다. /길림신문   
1501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063  추천:0  2020-06-20
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ZOGLO) 2020년4월1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6](남영전편-1)   시인 남영전은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의 소의산이라는 한 농촌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여났습니다.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였고 어머니마저 모진 정신타격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영전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서로 의지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시인은 후날 , , , 등 시를 통해 혈육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습니다. 남영전은 중국문단에서 한어와 조선어로 동시에 자유자재로 창작을 할 수 있는 보기드문 조선족 시인입니다. 특히 1986년부터 시작하여 남영전은 토템시라는 새로운 시가 령역을 개척하여 중국문단을 장식했으며 30여년 동안 토템시와 토템문화 연구에서 일가견을 보여주면서 중국 시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남영전 프로필: 략력: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 소의산에서 출생. 길림성작가연수학원 졸업, 문학영예박사, 길림성 고급전문가. 1980년 《장백산》잡지를 창간하고 사장, 주필 담임. 2005년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길림신문사 사장.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명예부회장,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평심위원 주요작품: 1971년 한문시작품으로 주류문단 데뷔. 1987년부터 시집 《상사집》, 《산혼》, 《백의 넋》, 《신단수》, 《원융》, 《남영전토템시집》 등 18권 출판. 중국고전작품《당송전기선》, 《봉선연의》와 《파금단편소설》 등 번역 출판. 수상과 영예: 전국소수민족문학 창작준마상,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등 50여개 수상, 국무원 특수수당자, 2010년 중국당대 10명 걸출한 민족시인. 2017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으로 당선.      걸출한 민족시인 남영전. 금년은 21세기 세번째 십년을 맞는 첫해입니다. 21세기 세번째 십년을 맞이하는 새해 벽두에 문화 화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주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기 말에 21세기를 전망하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어요. 그중의 중요한 화제가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는 것이였어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 그 의견에 저도 동감입니다. 20세기를 보면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 이렇게 두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그 후에는 복구시기와 새로운 경제건설, 산업혁명을 경과했습니다. 20세기 말에 들어와서는 세계경제의 산업화 즉 경제 글로벌이 형성되였습니다. 21세기를 전망할 때 많은 사람들은 20세기를 경제건설의 세기라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전망하였습니다. 문화의 세기란 무엇일가요? 문화의 세기란 21세기에 와서 문화 이 두 글자가 돌출된다는 말이지요. 문화의 세기란 뜻은 민족이나 국가가 문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지요. 문화의 대결 즉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실력의 대결이란 것이지요. 그래서 21세기는 문화를 말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되겠어요. 1989년에 제가 카나다 토론토대학 교수의 초청으로 카나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카나다에는 한인(조민족)들이 15만명 좌우 살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중국이 한창 개혁개방을 힘있게 추진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지의 한인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상당한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해서도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대화를 가졌지요. 카나다에서는 한인들의 문화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2007년 8월, 연변민들레생태원에서(오른쪽 여섯번째). 카나다에서 한 일주일간 활동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도 교류를 하자는 초청이 왔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120만명에 달하는 우리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200만명이 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9년 당시 이들도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하여 굉장히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문화에 흥취를 가지고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해 궁금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의 요청으로 3주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중국의 주류문화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화를 가지고 밤낮을 이어가면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있습니다. 1989년, 11년만 있으면 21세기에 진입하는 시기에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21세기에 가서 중국은 아침의 해, 미국은 점심의 해라고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중국을 아침의 뜨는 해에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중국의 21세기를 이렇게 높게 전망하고 있는 데에 대해 상당히 고무적이면서도 또 충격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부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인 토인비가 《21세기를 여는 대화》(1973년)에서 21세기는 중국의 세기일 것이라고 전망한 것입니다. 토인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력사학자입니다. (주: 토인비(1889년~ 1975년), 토인비의 력작 《력사의 연구》는 독일 슈펭글러의 《서방의 몰락》, 《로마제국의 흥망》과 함께 세계 사학계에서‘거형의 력사박물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세기 이후의 전통 사학에 맞서 새로운 력사학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11월, 길림성당위 전임 부서기 전철수(왼쪽 두번째)가 사업조사로 길림신문사에 왔을 때 신문사 상황을 회보하고 있는 당시 길림신문사 사장 남영전(왼쪽 세번째).   그 책의 주요 관점이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방세계를 놀래웠습니다. 특히 미국을 놀라게 했습니다. 많은 학자와 기자들이 영국에 가서 토인비를 만났지요. 왜서 21세기를 중국의 세기라고 하는가? 무슨 근거라도 있는가? 토인비는 21세기는 상당히 복잡한 세기가 될 것이며 중국의 유교사상, 즉 중국의 전통문화가 21세기의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입니다. 세계력사를 둘러보면 바빌론, 애급, 인도, 중국 등 4대 문명고국이 있었습니다. 왜서 문명고국이라 했느냐면 그 당시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빌론, 애급, 인도 등 3개 문명고국의 문화는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파괴되고 전승을 못한겁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문화는 이어져 내려왔지요. 4개 고대 문명국가중 3개는 아시아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대 바빌론은 지금의 이라크지요. 고대 바빌론은 서아시아, 인도는 남아시아 그리고 중국은 동아시아, 북아프리카에는 고대 애급 이렇게 4개 문명고국가운데서 다른 세개(바빌론,인도,애급)의 문명은 소실되고 끊어졌지만 유독 중국만이 5천년을 내려오면서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중요성이지요.     2006년 3월, 북경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쎈터에서 남영전 시가 세미나가 열렸다.   문화의 정의를 (내리자면) 솔직히 말하면 쉽지 않지요. 문화는 다루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누구나 문화를 입에 담고 있고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딱 찍어서 말하자면 어려운 것입니다. 사전에는 문화는 인류 정신활동의 산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맞는 말인데 또한 난해한 해석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난 세기 80년대로부터 토템문화 공부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문화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문화와 민족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왔습니다. 제가 느끼건대 세계적으로 제일 답복하기 어려운 단어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문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족입니다. 문화는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단어지만 딱 집어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사전과 인터넷에서도 딱 찍어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서 그럴가요? 그것은 바로 문화의 함의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개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을 말할라 치면 세계에는 200개에 달하는 나라가 있으며 거기에 2000여개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한개 나라에 평균 열개 민족이 있는 셈이지요.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으며 세계에서 민족이 가장 많은 국가의 하나입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세계에 2000개 민족이 살고 있지만 각자의 결론이 다 다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후 우리는 민족 획분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민족 획분 문제와 관련해 쓰딸린이 정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쓰딸린은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민족문화 특징으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 이렇게 4가지 공동한 특징으로 민족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쓰딸린의 민족 정의에 근거하여 민족을 구분하려고 했으나 힘들었습니다. 로씨야는 중국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였습니다. 그곳은 대부분 한개 지역에 한개 민족이 집중해 살고 있었습니다. 쓰딸린의 민족 정의는 로씨야(쏘련)에 한해서는 맞는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한개 지역에 여러 민족이 섞여서 생활하다 보니 이 정의가 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민족 획분에서 애를 먹었습니다. 민족 획분 문제가 1958년까지 지적되여 왔습니다.     2015년 4월에 열린 남영전 토템시 랑송회.   토템공부를 하면서 민족과 문화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파고들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토템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문화와 민족 이런 것이 포괄되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연구하면서 저의 나름대로 문화와 민족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2004년에 장춘에서 중국 소수민족 번역가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해에 저의 토템시집 《원융》이 출판되였을 때입니다. 저는 회의에서 토템에 대해 설명하면서 문화와 민족의 개념에 대한 발언을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회의 참가자들은 저의 발언에 동감을 표했습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마라친부(소설가,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 력임)는 저의 의견에 찬성을 표하면서 글을 써서 발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마라친부는 금년에 90세가 되는데 신체가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저는 〈토템문화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게시〉라는 글을 써서 마라친부에게 보여주었더니 좋다면서 빨리 발표하라고 해서 《문예보》에 발표했습니다. 그후 《민족보》에서 인츰 전재했으며 길림성 《새장정》,《민족종교》잡지를 포함해 남방까지 열몇개 잡지에서 이 문장을 전재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문화와 민족에 관한 문제는 제 나름대로 깨달은 느낌입니다. 이 두 문제는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앞길이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개념부터 명확하지 못하면 곤난하지요. 여기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정의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구경) 맞는지 틀리는지는 사회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하겠지요.     한어와 조선어로 출판된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작품집.   그럼 문화란 무엇인가? 저는 30여년 동안 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인간생활은 이 다섯가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식'은 음식문화,‘주'는 주거문화,‘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어'는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감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의식주행어가 표준으로 될 수 있고 자대라고 봅니다. 중국의 56개 민족을 보면‘의'라는 전통복식문화를 통해 구분할 수 있습니다. 56개 민족의 56개 전통민족복식을 주제로 하는 우표도 있습니다. 복장이 모두 부동하지요. 조선족이 입은 전통복장을 보고 바로 조선족임을 알 수 있지요. ‘식'ㅡ음식문화도 민족마다 부동하지요. 그리고‘주'ㅡ주거문화도 민족마다 다르지요. 지금은 아빠트에 살아서 주거문화가 잘 알리지 않지만 그러나 실내의 꾸밈새는 약간씩 다를 수 있습니다. 민족이 다름에 따라서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행'ㅡ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에 대해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범위가 굉장히 방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어'는 언어문자를 말합니다. 곰곰히 따져보면 이 다섯가지‘자대'를 갖고 재여보면 다 가능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리철수기자/영상:정현관 최승호 기자  
1500    친족, 친척 = 토템 댓글:  조회:2826  추천:0  2020-06-20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박일 2020년 06월 19일 작성자: 박일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남영전선생의 를 읽고     남영전선생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걸출한 시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이다. 그는 우리 글은 물론 중문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국의 주류사회, 주류문단에서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에, ‘중국의 10대 걸출한 민족시인’에 떳떳이 이름을 올린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고 문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을 꾸준히 인류문화의 원천이고 뿌리인 토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쌓고 있는 존경스럽고 돋보이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근 남영전선생이 《길림신문》에 펴낸 는 글 역시 무게 있고 폭이 넓으면서도 아주 재미나게 엮어 애독자들의 큰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글은 원시 인류문명의 발단인 토템의 출현, 토템숭배로부터 인류, 민족, 력사, 문화, 종교 등 넓은 령역을 고루 살펴보면서 원시문명과 현대문명이 의존하고 발전하게 된 토템이란 원초적 문명의 씨앗을 생동하고 체계적으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아츨하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여서 퍼그나 어렵다면 어렵고 난해하다면 난해하기도 한 전통적인 뿌리문화인 토템 명제를 우리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흥미를 가지도록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그것이다.   남영전선생이 엮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행,어 문화개념을 풀이도 해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을(문화가 있냐 없냐) 비교도 해보면서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임을 알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혼례, 장례풍속…지어는 결혼식 때 왜 큰상에 수탉이 오르고 수탉의 주둥이에 고추를 물리우느냐는 등 구체적인 세절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며 형상적으로 생동하게 설명해주고 또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그럴듯 퍼그나 엄숙하고 퍼그나 딱딱하게 안겨올 수도 있는 토템이란 문화지식을 독에서 푹 익어 나오는 김치처럼 대가 다운 목소리로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이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템문화에 접촉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마저도 가슴에 와 닿고 실물을 보듯이 그 륜곽과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도록 한다. 이는 글을 다루고 주무르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문인, 학자들이 따라 배울바라고 본다. 이 또한 덕망높은 남영전선생이 우리 독자들을 배려하는 어진 성품이고 덕량이 아닐가 생각한다.   /길림신문    
1499    [시공부 101] - 38... 댓글:  조회:2836  추천:0  2020-05-13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신체시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 근대 자유시의 형성은 1910년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국문학의 역사를 배울 때 신체시라는 말이 나왔어요. 근대 문학 초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신체시는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자유시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 우리나라는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시 문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통적인 시조와 가사 외에도 다양한 시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전통적인 가사가 변한 개화가사도 있었고, 서양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창가도 있었습니다. 개화가사와 창가는 글자수에 엄격한 제약이 존재했습니다. 개화가사는 4 · 4조 2행으로 대구의 형식이었고 창가는 7 · 5조를 기본 율격으로 반드시 글자수를 지켜야 했습니다. 자유로운 형식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차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글자수를 맞추는 정형적인 외형률에서 벗어난 작품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당 최남선이 주로 창작했던 신체시입니다. 신체시라는 명칭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시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부여했던 이름이지요. 신체시는 형태적인 고정성에서 벗어나 시적 형식의 자유로움과 개방성을 추구했습니다. 비록 뚜렷한 한계는 있었지만 근대 자유시가 형성되는 데에 계기를 만들어준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최남선,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중에서 이 작품은 의인화된 ‘바다’가 ‘소년’에게 강한 힘과 기개를 지닐 것을 전하고 있는 시입니다. 표현이 소박하고 내용이 계몽적이어서 본격적인 자유시라고 하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의 형식은 창가라든가 개화가사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1행과 7행은 파도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로 표현되어 있고 2행과 4행과 6행은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처럼 ‘3 · 3 · 5조’ 혹은 3음보 율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3행은 4자, 3자, 4자, 5자로 총 4음보로 구성되어 있으며 5행은 4자, 3자, 4자, 4자, 3자로 5음보로 되어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이 시에는 정해진 율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각 행이 서로 다른 글자수로 배열되어 있으니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리듬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이처럼 신체시는 우리 시에서 최초로 정형률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정형률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신체시를 근대적인 자유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용된 1연의 리듬이 전체 6연에 계속 반복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 시의 형태가 6연까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체시를 자유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시는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기보다 계몽적인 주제를 전달했다는 점에서도 근대 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랐지요. 근대 자유시의 형성은 1910년대 우리나라에서 근대 자유시는 1910년대에 들어와서 창작되었습니다. 김억과 주요한 같은 시인들이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소개하면서 신체시보다 형식적으로 자유로우며 시적 형식과 리듬을 중시한 작품들을 발표했던 것이지요.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 「불놀이」 중에서 이 작품은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았던 작품입니다. 1919년 잡지 『창조』의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슬쩍 봐도 알겠지만 이 시는 산문적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글자수의 제한이라든가 연과 행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지요. 내용을 살펴보아도 전혀 계몽적이지 않습니다.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와 같이 시적 화자의 개인적인 정서가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민중 계몽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적인 정서가 시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시들은 이 작품처럼 형식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적인 정서를 담고 있었지요.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 자유시는 대략 1910년경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서구 문학을 소개한 잡지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최남선이 만든 『소년』과 이후에 『창조』, 『백조』, 『폐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서구 문학을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한 잡지로는 김억 등이 창간한 『태서문예신보』가 있습니다. 이 잡지에는 서구의 근대 시를 비롯하여 당대의 최신 시와 시 이론까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김억은 이 잡지에 다양한 서구의 시들을 번역하여 실었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오뇌의 무도』라는 번역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체시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98    [시공부 101] - 37... 댓글:  조회:3103  추천:0  2020-05-13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는 무슨 뜻인가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아름다움의 여러 갈래 우아미 : 조화와 균형, 통일성의 아름다움 숭고미 : 장엄하고 거룩한 초월적 아름다움 비장미 : 비극의 아름다움 골계미 : 웃음 속의 아름다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시의 해설을 읽다 보면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와 같은 말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비장미는 슬픔을, 숭고미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막상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름다움에도 종류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려 주세요. 아름다움의 여러 갈래 시를 포함한 문학과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미술을 예로 들어 볼까요? 어떤 작품은 인체 비례가 조화와 균형을 잘 이뤄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면에 또 다른 작품은 인체가 왜곡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만화에서 사람의 눈을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크게 그려 놓았는데도 아름답게 보였던 것을 여러분도 한 번쯤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슬프고 애잔한 그림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에는 다양한 범주가 존재한답니다.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름다움의 범주를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로 나누어 설명하지요. 우아미 : 조화와 균형, 통일성의 아름다움 우아미는 조화롭고 균형을 잘 갖춘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아름다움입니다. 대개 고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아미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자연입니다. 8등신처럼 비례가 잘 갖춰진 인체에서도 우아미를 느낄 수 있지요. 시에서도 우아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터 거닐다 주워 온 깨진 질그릇 하나 닦고 고이 닦아 열 오른 두 볼에 대어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라 질항아리에 곱게 그린 구름무늬가 금시라도 하늘로 피어날 듯 아른하다. 눈 감고 나래 펴는 향그러운 마음에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흰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치어 자애롭다. 조지훈, 「향문(香紋)」 중에서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성터를 거닐다 깨진 질그릇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고이 닦지요. 그런데 그 깨진 질그릇에 그려진 구름무늬가 “하늘로 피어날 듯 아른”거립니다. 구름무늬가 마치 실제 구름인 것처럼 우아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시적 화자는 질그릇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동화되어 먼 옛날 할 아버지의 흰 수염이 등불에 비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지요. 시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의 정체는 질그릇 무늬의 우아함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숭고미 : 장엄하고 거룩한 초월적 아름다움 숭고는 현실 세계를 초월한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추구해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바로 숭고미이지요. 숭고미는 대체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시에서 숭고미를 찾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는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 모두 숭고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신석정, 「들길에 서서」 위 시에서 시적 화자는 인간의 현실 세계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라는 구절에 현실이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시인은 생활에 집착하기보다는 생활을 초월해서 ‘푸른 별’을 바라볼 거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구차한 인간 세계의 생활을 초월한 것이지요.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삶에 대해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평범한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를 접할 때 느끼는 미적 정서를 숭고미라고 합니다. 비장미 : 비극의 아름다움 비장미는 현실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주어진 여건을 극복할 수 없을 때 미적인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비장미입니다. 비극적인 것이 아름답다고 하면 모순적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비극이 아름다운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 자체가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꽃」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이던 이육사가 쓴 작품으로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려는 몸부림을 북극 툰드라에 피어나는 꽃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북극 툰드라는 뭇 생명들이 살아가기가 대단히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꽃이 오히려 빨갛게 피어난다고 표현합니다. “목숨을 꾸며”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꽃은 수도 없이 피었다가 다시 져 버리는 운명을 겪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꽃에게는 비극적인 결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비장하게 계속 피어납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수처럼 말이지요. 여기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비장미입니다. 골계미 : 웃음 속의 아름다움 비장미에 비해 골계미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리킵니다. 대개 풍자나 해학의 수법으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인간상을 그릴 때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요. 골계미는 대상과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근거로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재미와 기묘함 등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가리킵니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오탁번, 「토요일 오후」 중에서 이 시에는 아직 사물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순수한 딸아이와 그것을 깨우쳐 주려는 아빠 사이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이 작품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상황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의 유년 세계와 아빠의 성인 세계는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조화를 겪습니다. 물론 그 부조화를 보며 독자들은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라든가, 풍자, 해학이 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우리는 골계미라고 부릅니다. 풍자와 해학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풍자와 해학은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는 사실은 같지만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풍자에서 ‘자(刺)’는 찌른다는 뜻으로서 대상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직접 비판을 하기 어려울 때 간접적으로 돌려 비꼬는 것이 바로 풍자입니다. 이에 반해 해학은 풍자보다는 비판적인 의도가 적은 것으로 익살스러운 행위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장미, 골계미, 숭고미는 무슨 뜻인가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97    [시공부 101] - 36... 댓글:  조회:4319  추천:0  2020-05-13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시 한 편을 배우는데도 작가와 역사를 알아야 하나요?     분야 현대 시 목차 작품 밖에서 작품을 바라보다 표현론적 관점 : 작가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효용론적 관점 :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반영론적 관점 : 현실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비평과 소통 고등학교 문학 문학의 비판적 수용과 창의적 생산 제가 속한 독서 클럽에서는 작품을 감상하기 전후로 꼭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시대 상황은 어땠는지 찾아서 발제하곤 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작품 밖에서 작품을 바라보다 ‘외재적 비평’은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중에서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표현론적 관점’이라 하고 독자를 중심으로 감상하는 방법을 ‘효용론적 관점’이라 하며 현실 세계가 어떻게 작품 속에 반영되었는지를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을 ‘반영론적 관점’이라고 하지요.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비평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정신분석 비평도 있고, 여성주의 비평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비평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표현론적 관점 : 작가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표현론적 관점은 작가가 자신의 체험이나 사상, 감정 등을 작품 속에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요소들보다도 작품과 작가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관점을 택할 때에는 작가의 창작 의도라든가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 즉 가족 관계, 성장 배경, 학력, 취미, 생활 환경 등을 고려하거나 작가가 영향을 받은 사상과 종교 등에 주목해야 합니다. 작가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이 작품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이 시는 시인 윤동주가 1942년 일본 유학 시절에 지은 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시절에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고 순수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했던 분이지요. 그는 비록 공부를 위해 일본에 건너갔지만 그곳이 남의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인들에게 협조할 때에도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을 잊지 않았지요. 그러면서 그는 민족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러한 심정이 이 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시가 쉽게 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위 인용부의 후반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처럼 시인이 추구했던 삶이 작품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표현론적 관점입니다. 효용론적 관점 :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효용론적 관점은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효용을 주었는가를 살펴서 작품을 평가하고 감상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독자의 감동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 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앞에서 인용한 「쉽게 씌어진 시」를 예로 들어 볼까요. 이 시는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무엇이 참된 삶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시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지요. 잘못된 상황을 모른 척할 것인지, 순수한 학문과 지식을 배우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현실의 모순을 몸소 개선하는 것이 나은지 성찰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읽고 독자가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판단하고 감상하는 것이 효용론적 관점입니다. 반영론적 관점 : 현실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반영론적 관점은 작품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관점입니다. 작품이 현실 세계의 반영이라고 보는 태도이지요. 반영론적 관점은 일단 작가가 살았던 현실 세계와 작품이 창작된 시대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작품 속에 삶의 구체적인 현실이 진실하게 드러났는지를 판단해야 하지요. 「쉽게 씌어진 시」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의 현실인식이 제대로 드러나 있는지를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7연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구절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표현에서 시적 화자가 분명한 민족의식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 스스로 자신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 현실 속에 존재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품 속에 현실 세계가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통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태도가 반영론적 관점입니다. 그 밖의 비평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작품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다양한 비평 방법이 있습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지닌 심리적인 상황을 파악하여 감상하는 정신분석 비평이라든가, 우리 문학에 남아 있는 서양적인 것들, 즉 식민지 경험이 미친 영향을 파헤치는 탈식민주의 비평,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변화 과정을 추적해 보는 여성주의 비평 등 다양한 방법들이 비평을 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 한 편을 배우는데도 작가와 역사를 알아야 하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96    [잊혀진 민속] - 다듬이 댓글:  조회:4526  추천:0  2020-05-08
두산백과 다듬이질     요약 옷감의 구김살을 펴고 반드럽게 하기 위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는 일. 이미지 크게보기 다듬이돌과 다듬이방망이 다듬이 ·다듬질이라고도 한다. 다듬잇감을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다듬잇방망이로 두드리거나 홍두깨에 감은 다음 홍두깨틀에 의지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면 홍두깨가 돌면서 골고루 다듬어진다. 잘 다듬어진 옷감은 다림질한 것 이상으로 매끈하고 구김도 잘 지지 않는다.  다듬이질을 하려면 먼저 푸새를 한 세탁물을 일단 완전하게 말린다. 이렇게 하면 풀이 서고 올이 잘 펴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물을 축이는데, 물을 손에 묻혀 조금씩 골고루 뿌리거나 물을 입으로 뿜는다. 물을 축인 빨래는 대강 접어서 빨랫보에 싸놓아 물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잠시 기다린 후에 솔기를 맞추어가며 다시 접는다. 홑이불과 같은 큰 빨래는 2명이 맞잡고 잡아당겨 올을 펴면서 적당한 크기로 접는다. 이것을 다시 빨랫보에 싸서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한참 동안 밟아주면 온기가 빨래에 고루 퍼지고 구김살도 어느 정도 펴진다. 이렇게 한 다음 다림질이나 다듬이질을 하는데, 다듬이질을 할 때는 보자기에 싼 빨래를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1명이 양손에 방망이를 잡고 두드리거나, 다듬잇돌을 가운데 두고 2명이 마주 앉아서 맞다듬이질한다. 어느 정도 두드린 후에 펼쳤다 접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빨래는 윤기가 나고 구김이 펴지며 풀기도 골고루 스며든다. 명주 빨래는 홍두깨에 올려서 다듬이질하는데, 다듬잇돌에서 애벌다듬이를 하고 알맞게 마르면 너무 두껍지 않고 편편하게 홍두깨에 만 다음 홍두깨틀을 이용하여 방망이질한다. 이때는 다듬잇돌 위에 놓고 두드릴 때보다 투명한 음향이 들린다. 방망이나 홍두깨는 모두 박달나무로 만드는데, 홍두깨는 보통 지름 7∼8cm의 나무막대기의 표면을 곱게 깎아 길을 들여 매끄럽게 한 것으로 가운데가 약간 굵고 양끝으로 갈수록 가늘다. 참조항목 다듬잇돌, 홍두깨 카테고리 생활 > 의생활 > 의생활일반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다듬이 방망이옷감의 구김살을 펴고 반드럽게 하기 위하여 두드리는 방망이. 이미지 갤러리 출처: 디자인하우스 [네이버 지식백과]다듬이질 (두산백과)     e뮤지엄 다듬이 방망이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나무 > 기타(其他) 크기 길이 40 용도 · 기능 주 > 생활용품 > 재봉구 > 기타(其他) 소장처 문경새재박물관 유물번호 문경새재박(문경새재박) 000253-001 다듬이질을 할 때 사용하는 방망이. 세탁된 옷감을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는 일을 마듬이질이라고 하며, 이때 사용하는 방망이를 가리켜 다듬이방망이라고 한다. 19세기의 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에서?18세기 경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한자어로는 ‘도침(棘砧)’이라고 하는데, 이는 19세기 초의 에 도침법이라 하여 옷감의 종류나 색에 따른 다듬이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비단에는 대왐풀을 먹이는데, 특히 쪽빛에는 이것으로 먹여야만 빛이 난다. 진홍색은 대왐풀과 아교풀을 섞어 먹인 다음 밟아서 살이 오르고 물기가 거의 마른 뒤 홍두깨에 감아 다듬는다. 무명과 모시는 잇꽃 담갔던 진한 누런 물을 조금 넣고, 오미자물에 풀을 섞어 개어 먹여야 푸른 빛이 나지 않는데, 이때 풀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자주색은 풀을 묽게 개어 먹인 뒤 부채질을 하여 약간 마르거든 힘껏 밟아 홍두깨에 감아 밀어가며 밟아 다듬는다. 보라색은 생토란을 갈아 그 즙을 먹여 다듬고 아청색은 아교풀을 먹인다. 흰색 명주는 달걀 흰자를 녹말풀에 섞어 쓴다. 무명에는 백면가루를 섞어 먹이면 풀이 세면서도 보드랍고 윤이 나며, 모시는 활석이나 녹말을 먹여 다듬으면 윤이 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옷은 평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탁을 할 때마다 바느질한 모든 솔기를 뜯어 빨고 새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래서 풀을 먹여 새 옷감과 같이 올이 바르고 윤기 있게 손질하는 다듬이질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가족의 옷 손질과 바느질 솜씨는 그 집 주부의 안목을 표현하는 일이었기에, 주부는 부지런히 가족의 옷을 정갈하게 빨고 새롭게 물들여 체형에 맞게 다시 짓거나 계절의 변화에 조화되게 재구성하였다. 다듬이질의 방법은 풀기가 마르기 전 비틀린 올을 바로 펴서 밟아 홍두깨에 말아서 다듬거나 다듬잇돌에 놓아 다듬어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하였다. 이때 사용되는 도구로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다듬잇방망이와 장방형의 표면이 고운 다듬잇돌, 홍두깨와 이를 고정시키는 홍두깨틀, 옷감을 싸는 보자기와 끈 등이 있다. 다듬이질을 하는 것은 주로 겹옷이나 솜옷?침구류 등이었고 주로 늦가을과 겨울철에 하였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두 사람이 네 개의 방망이로 음률에 맞추어 옷감을 다듬는 다듬이소리는 우리 풍속의 일면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듬이 방망이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듬이질       이미지 크게보기 다듬이질 유형 개념용어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세탁된 옷감을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는 일. 내용   한자어로는 ‘도침(擣砧)’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옷은 평면 구성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세탁 때마다 바느질한 모든 솔기를 뜯어 빨고 새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그러므로 풀먹여 새 옷감과 같이 올이 바르고 윤기 있게 손질하는 다듬이질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가족의 옷 손질과 바느질 솜씨는 그 집 주부의 안목을 표현하는 일이었기에, 주부는 부지런히 가족의 옷을 정갈하게 빨고 새롭게 물들여 체형에 맞게 다시 짓거나 계절의 변화에 조화되게 재구성하였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에도 도침법이라 하여 옷감의 종류나 색에 따른 다듬이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에 의하면 “비단에는 대왐풀을 먹이는데, 특히 쪽빛에는 이것으로 먹여야만 빛이 난다. 진홍색은 대왐풀과 아교풀을 섞어 먹인 다음 밟아서 살이 오르고 물기가 거의 마른 뒤 홍두깨에 감아 다듬는다. 무명과 모시는 잇꽃 담갔던 진한 누런 물을 조금 넣고, 오미자물에 풀을 섞어 개어 먹여야 푸른 빛이 나지 않는데, 이때 풀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자주색은 풀을 묽게 개어 먹인 뒤 부채질을 하여 약간 마르거든 힘껏 밟아 홍두깨에 감아 밀어가며 밟아 다듬는다. 보라색은 생토란을 갈아 그 즙을 먹여 다듬고 아청색은 아교풀을 먹인다. 흰색 명주는 달걀 흰자를 녹말풀에 섞어 쓴다. 무명에는 백면가루를 섞어 먹이면 풀이 세면서도 보드랍고 윤이 나며, 모시는 활석이나 녹말을 먹여 다듬으면 윤이 난다. ”고 하였다. 다듬이방법은 풀기가 마르기 전 비틀린 올을 바로 펴서 밟아 홍두깨에 말아서 다듬거나 다듬잇돌에 놓아 다듬어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하였다. 이때 사용되는 도구로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다듬잇방망이와 장방형의 표면이 고운 다듬잇돌, 홍두깨와 이를 고정시키는 홍두깨틀, 옷감을 싸는 보자기와 끈 등이 있다. 다듬이질을 하는 것은 주로 겹옷이나 솜옷·침구류 등이었으므로 늦가을과 겨울철에 밤늦게까지 두 사람이 네 개의 방망이로 음률에 맞추어 옷감을 다듬는 다듬잇소리는 우리 풍속의 일면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합성섬유가 발달하고 옷감의 후처리와 가공법이 발달함에 따라 다듬잇소리가 사라지고 다듬이질한 옷감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규합총서(閨閤叢書)』 [네이버 지식백과] 다듬이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듬이돌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나무 > 기타(其他) 크기 가로 52 가로 37 높이 17 용도 · 기능 주 > 생활용품 > 재봉구 > 다듬이돌 소장처 문경새재박물관 유물번호 문경새재박(문경새재박) 000152-000 옷감, 이불감 등의 천을 다듬을 때에 밑에 받치는 돌. 세탁된 옷감을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는 일을 다듬이질이라고 하며, 두들기는 방망이를 다듬이방망이, 밑에 받치는 돌을 다듬이돌이라고 한다. 본 유물의 명칭은 다듬이 돌이지만 박달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19세기의 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8세기 경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듬잇감을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다듬잇방망이로 두드리거나 홍두깨에 감은 다음 홍두깨틀에 의지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면 홍두깨가 돌면서 골고루 다듬어진다. 잘 다듬어진 옷감은 다림질한 것 이상으로 매끈하고 구김도 잘 지지 않는다. 다듬이질을 하려면 먼저 푸새를 한 세탁물을 일단 완전하게 말린다. 이렇게 하면 풀이 서고 올이 잘 펴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물을 축이는데, 물을 손에 묻혀 조금씩 골고루 뿌리거나 물을 입으로 뿜는다. 물을 축인 빨래는 대강 접어서 빨랫보에 싸놓아 물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잠시 기다린 후에 솔기를 맞추어가며 다시 접는다. 홑이불과 같은 큰 빨래는 2명이 맞잡고 잡아당겨 올을 펴면서 적당한 크기로 접는다.이것을 다시 빨랫보에 싸서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한참 동안 밟아주면 온기가 빨래에 고루 퍼지고 구김살도 어느 정도 펴진다. 이렇게 한 다음 다림질이나 다듬이질을 하는데, 다듬이질을 할 때는 보자기에 싼 빨래를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1명이 양손에 방망이를 잡고 두드리거나, 다듬잇돌을 가운데 두고 2명이 마주 앉아서 다듬이질을 한다. 어느 정도 두드린 후에 펼쳤다 접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빨래는 윤기가 나고 구김이 펴지며 풀기도 골고루 스며든다. 명주 빨래는 홍두깨에 올려서 다듬이질하는데, 다듬잇돌에서 애벌다듬이를 하고 알맞게 마르면 너무 두껍지 않고 편편하게 홍두깨에 만 다음 홍두깨틀을 이용하여 방망이질한다. 이때는 다듬잇돌 위에 놓고 두드릴 때보다 투명한 음향이 들린다. 다듬이 졸은 주로 화강암, 납석, 대리석 등으로 만들며 박달나무, 느티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도 만든다. 모양은 두꺼운 직사각형으로, 윗면은 반드럽게 하고 밑면보다는 약간 넓게 한다. 밑면의 양쪽에는 손을 넣어서 들어 옮길 수 있도록 홈을 팠다. 시대 한국 > 조선(朝鮮) 재질 석 > 화강암(花崗岩) 크기 전체길이 57 너비 21.5 높이 11.5 용도 · 기능 주 > 생활용품 > 재봉구 > 다듬이돌 소장처 명지대학교 박물관 유물번호 석(돌)(석(돌)) 001127-000 옷감의 구김살을 펴고 반드럽게 하기 위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는 다듬질을 위한 도구. 옷감의 구김살을 펴고 반드럽게 하기 위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는 일을 다듬이, 다듬질이라고 한다. 다듬잇감을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다듬이방망이로 두드리거나 홍두깨에 감은 다음 홍두깨틀에 의지하여 방망이로 두드리면 홍두깨가 돌면서 골고루 다듬어진다. 잘 다듬어진 옷감은 다림질한 것 이상으로 매끈하고 구김도 잘 지지 않는다. 다듬이질을 하려면 먼저 푸새를 한 세탁물을 일단 완전히 말린다. 이렇게 하면 풀이 서고 올이 잘 펴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물을 축이는데, 물을 손에 묻혀 조금씩 골고루 뿌리거나 물을 입으로 뿜는다. 물을 축인 빨래는 대강 접어서 빨랫보에 싸놓아 물기가 골고루 퍼지도록 잠시 기다린 후에 솔기를 맞추어가며 다시 접는다. 홑이불과 같은 큰 빨래는 두 명이 맞잡고 잡아당겨 올을 펴면서 적당한 크기로 접는다. 이것을 다시 빨랫보에 싸서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한참 동안 밟아주면 온기가 빨래에 고루 퍼지고 구김살도 어느 정도 펴진다. 이렇게 한 다음 다림질이나 다듬이질을 하는데, 다듬이질을 할 때는 보자기에 싼 빨래를 다듬이 돌 위에 올려놓고 한 명이 양손에 방망이를 잡고 두드리거나, 다듬이 돌을 가운데 두고 두 명이 마주 앉아서 한다. 어느 정도 두드린 후에 펼쳤다 접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빨래는 윤기가 나고 구김이 펴지며 풀기도 골고루 스며든다. 둘이서 할 때는 방망이가 부딪히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호흡을 맞추면서 한다. 주로 모녀(母女)나 고부(姑婦) 동서(同壻)끼리 하였다. 다듬이는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이 가까워지거나 혼사(婚事), 겨울옷을 마련 할 때가 되면 집집마다 하는데 다듬이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가을에 많이 하게 되는데 시원하고 밝은 달밤의 방망이소리는 청아(淸雅)하여 듣기에 거슬리지가 않으므로 밤중까지 소리가 들려도 이웃에서 시비를 걸지 않았다. 특히 옛 사람들은 다듬이 소리와, 글 읽는 소리, 아기우는 소리는 아무리 심해도 탓하지 않았다. 이 소리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이며, 집안에 이러한 소리가 그치면 "망한 집안"이라고 하였다. 푸새한 옷이나 옷감의 구김을 펼 때 사용하는 받침대로 재료는 나무와 돌 두 가지가 있다. 돌은 화강암, 납석, 대리석 등으로 하고, 나무는 주로 재질이 단단한 박달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것으로 했다. 본 유물의 경우 조직이 치밀한 회색의 납석으로 제작하였으며 모양은 직사각형이다. 약한 곡면으로 처리된 윗면은 매끄럽게 잘 다듬고 밑변보다는 약간 넓으며 모서리는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무게가 무거워 이동시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밑면의 중앙에 손을 넣어서 움직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파 놓아 단이 진 것처럼 처리하였다. 바닥을 평평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측면에 돌을 쪼아 문양대를 만들었다. 양 끝 원형 문양대에는 부(富), 귀(貴) 두 글자를 세기고 중앙의 방형 문양대에는 잎사귀가 두툼한 난(蘭)을 조각해 넣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듬이 (e뮤지엄) 본 유물의 경우 나뭇결이 곱고 조직이 치밀한 갈색의 박달나무로 제작하였으며 모양은 직사각형이다. 윗면은 매끄럽게 잘 다듬고 밑변보다는 약간 넓고 모서리는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무게가 무거워 이동시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밑면의 중앙에 손을 넣어서 움직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파 놓아 단이 진 것처럼 처리하고 따로 다리는 만들지 않았다. 바닥과 윗면을 평평하게 마무리하였으며 다른 다듬이에 비해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듬이 (e뮤지엄) 본 유물의 경우 조직이 치밀한 박달나무로 제작하였으며 모양은 직사각형이다. 나뭇결무늬가 그대로 남아있는 윗면은 매끄럽게 잘 다듬고 밑변보다는 약간 넓고 모서리는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밑변의 양쪽에는 손을 넣어서 움직일 수 있도록 얕은 홈을 파 놓았다. 다듬이 도구인 한 쌍의 방망이와 함께 한 틀을 이루고 있다. 방망이의 모양은 손잡이가 가늘고 머리가 두꺼워 무게를 두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듬이 (e뮤지엄)    
1495    [그것이 알고싶다] - "토템"연구와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123  추천:0  2020-05-02
토템과 성씨의 기원 (ZOGLO) 2020년4월30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8](남영전편-3) 옛날에 우리 인류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성씨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지요. 그래서 인류가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였으며 인류문명사회에서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씨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구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물체와 관계가 있어서 조상이 탄생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계가 있는 물체를 친척처럼 생각한 것이지요. 친척이라는 말이 토템이라는 말입니다. 1903년 중국의 엄복이라는 학자가 번역을 하면서 토템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지금 따져보면 토템이라는 말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실상은 묘족들의 방언입니다. 조선민족의 제일(第一) 성씨가 뭔가 하면 왕씨입니다. 왜냐하면 조선민족은 단군 왕검을 시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성씨는 바로 왕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산해 보면 왕씨는 지금으로부터 4353년 전에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군신화가 기원전 2333년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하늘나라에 천제 환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환웅이였는데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을 동경해 내려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2007년 길림신문사 《창업의 길》 도서출판좌담회에서 발언하는 남영전(왼쪽 두번째).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주면서 땅에 내려가 인간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환웅은 신단수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 등 세 사람과 함께 인간세상을 다스릴 무렵 그때 한 동굴에 범과 곰이 살고 있었습니다. 범과 곰이 인간세상을 동경했습니다. 자기네들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단수 앞에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지요.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동굴 안에서 백일 동안 금기를 지키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착실하게 금기를 지켜 예쁜 녀자로 변했지요. 웅녀로 된겁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호람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화신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으로 화신한 웅녀는 혼인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맺아 아들을 보았으니 그가 바로 단군 왕검(檀君王俭)이였습니다. 단군이 바로 조선민족의 조상인 것입니다. 이는 기원전 2333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단군의 성씨가 왜서 왕씨였을가요. 제가 한번 분석을 해봤습니다. 일반적으로 호랑이를 산중의 왕이라고 하는데 단군의 가족들은 산중의 왕은 호랑이 아니라 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곰은 금기를 지켜 사람으로 변했지만 호랑이는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으므로 곰보다 한수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곰을 산중의 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왕씨를 곰의 대변인이라고 여기고 성씨를 왕씨라고 한 것입니다.     2007년 재한화교협회 한성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영전(왼쪽).   그럼 왕씨가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데 왜서 지금 왕씨 성이 거의 없을가요? 력사적으로 보면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려왕조 5백년 력사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사람이 왕씨였습니다. 그런데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리씨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씨 성들은 피해를 면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왕(王)자 우에 인(人)자를 붙여 온전할 전(全)씨로 바꾸거나 량쪽에 내리금 하나씩 그어 밭 전(田)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옥(玉), 마(馬), 금(琴),김(金) 등 성씨로 고친 것입니다. 이렇게 왕씨 성은 하루아침 사이에 없어져버렸습니다. 지금의 전씨, 마씨, 옥씨 등 성들은 전부 다 왕씨에서 온 성들입니다. 이렇게 왕씨의 토템은 곰인 것입니다. 리씨 성의 토템은 범입니다. 왕씨가 조선민족의 첫번째 성씨라면 두번째 성은 바로 박씨입니다.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입니다. 기원전 69년에 박씨 성의 조상인 박혁거세가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혁거세는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습니다. 그 시대 선인들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해를 날개 달린 태양새로 보았습니다. 이 자주색 알은 곧 하늘이 내린 태양새의 알이지요. 때문에 혁거세는 태양의 아들, 태양은 그의 어머니 토템입니다. 무릎 꿇고 절하는 백마, 어쩌면 이 백마가 하늘에서 알을 실어왔고 또 알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닿는 기운은 소식을 알리는 번개, 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토템수호신입니다.     토템문화 답사를 하고 있는 남영전.    알에서 나온 동자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일어났습니다. 빛이 인간세상에 왔다 하여 그의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은 박처럼 둥글다 하여 성을 박씨로 하였습니다. 세번째 성씨는 고씨입니다. 고주몽이라는 고씨이지요. 여기에는 이런 신화가 있습니다. 동부여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우발수에서 우연하게 귀양살이 신세인 하백의 딸 류화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가엾게 여겨 궁중에 (데려다) 보살펴주었더니 이상하게도 해빛이 쫓아와서 규방의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류화가 몸을 피했지만 해빛은 그녀를 따라 다녔습니다. 이로 인해 류화는 임신하여 몸을 풀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아니라 알이였습니다. 그 알 크기는 다섯되나 되였습니다.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그 알을 개,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개와 돼지는 먹지 않았고 돼지는 핥아주었으며 마구간에 버렸더니 소가 젖을 먹여주었고 길에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해가고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덮어주었습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여지지 않으니 다시 류화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류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동자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였습니다. 나이 7세에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였습니다.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동자의 이름을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2014년 길림시조선족예술관에서 토템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영전.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니 맏이 대소가 왕에게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금와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왕자는 다른 장수들과 주몽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어머니 류화는 아들 주몽에게 “그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못살겠니, 속히 떠나거라.”라고 말합니다. 주몽이 도망가는데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가는 길인데 뒤쫓는 자가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 주몽을 건너게 한 다음 사라졌으므로 뒤쫓아오던 기병들은 못 쫓아오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토템이야기입니다. 졸본부에 이른 주몽은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도읍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천제의 아들이므로 성을 고씨로 하였습니다. 왜서 고씨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버지 천제가 고신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도 중국의 황하류역에서 황하를 다스린 실존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네번째 성은 김씨입니다. 조선민족의 김씨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입니다. 김수로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은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동여있는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함(金盒)이 있어 그것을 열어보니 안에 태양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여섯개 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까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로 하고 금함, 황금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씨를 김씨(金氏)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2011년 중국작가협회와 인민일보사에서 조직한 성세민족정응모에서 수상한 남영전 시인(오른쪽 세번째).   그리고 허씨 성은 인도에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뒤 인도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는데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수로와 허왕후 사이에 자식 열명이 태여났는데 큰아들은 김수로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성을 허씨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은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였습니다. 여섯번째 성씨, 석씨 성의 조상은 석탈해입니다. 신화를 보게 되면 주몽의 탄생과 비슷합니다. 어머니로부터의 란생(卵生)입니다. 주몽의 그 알은 짐승먹이로 버려졌지만 탈해는 배에 실려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홍룡의 호위로 탈해가 실린 배는 신라 아진포까지 왔는데 또 까치들의 보호를 받았고 까치들이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으니 룡과 까치는 탈해의 충실한 토템 수호신이였습니다. 탈해라는 이름은 궤를 열(解) 때, 알을 깨(脱)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脱解)라 하였고 까치의 보호를 받았다 하여 까치 작(鹊)자에서 석(昔)자를 떼여서 성을 석(昔)씨로 하였으니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 표지입니다. 일곱번째 성씨는 남평 문씨입니다. 옛날 조선반도의 남평이라는 곳에 련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련못의 한가운데에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어느 하루 바위 우에 석함이 나타났는데 왕이 신하를 시켜 가보게 하니 그 석함 안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신하가 석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어린 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속으로 이는 하늘이 내려보낸 은혜라고 생각하고 동자를 궁궐에 데려다가 키우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다섯살이 되자 세상물정을 다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다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성씨는 아이가 나온 석함에 글월 문(文)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문씨로 정했습니다.     단군 왕검(자료사진),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 왕씨성의 시조이자 역시 조선민족의 조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최씨 성의 토템은 금돼지입니다. 돼지는 복의 상징입니다. 옛날 한 고을이 있었는데 부임되여 오는 원님마다 부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님들은 누구도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담대한 사람이 자처해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원님은 명주실을 가만히 부인의 치마에 매놓았습니다. 이번에도 원님 부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인의 치마에 매놓은 명주실을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찾아갔더니 한 심심산중에 큰 바위가 있는데 명주실이 돌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위 밑으로 들어가 보니 글쎄 부인이 금돼지한테 갇혀있는 것이였습니다. 원님은 가지고 간 노루가죽으로 금돼지를 처치하고 자기 부인을 구출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금돼지가 노루가죽을 제일 무서워하였던 연고로 그다음부터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임신하였는데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금돼지의 아이라고 생각한 원님이 화가 나서 벌판에 아이를 버렸는데 이때 학이 나타나서 그 아이를 보살펴주는 것이였습니다. 후에 한 로파가  나타나서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일곱살이 되니 글 읽는 소리가 장안성(지금의 경주)까지 들렸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최치원입니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성씨가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리철수기자/영상: 정현관 최승호기자
1494    [그것이 알고싶다] - "단군신화" 댓글:  조회:2922  추천:0  2020-04-30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단군신화 여러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 檀君神話 ] 해설자 조현설(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목차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고전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반(反)토테미즘, 비판적 독해의 한 형식 단군신화를 다시 이야기하자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살아 있는 신화, 살아 있는 고전 한쪽에서는 학교나 공원에 국조단군상(國祖檀君像)을 세운다. 다른 한쪽에서는 몰래 단군상의 목을 자른다. 한쪽에서는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미신이자 우상숭배라고 외친다. 한쪽에서는 단군릉을 발굴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인물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한쪽에서는 보고서를 불신할 뿐만 아니라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이런 대립 속에서도 단군이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해마다 국경일로 되돌아온다. 단군은 이 대립 속에, 저 기념일 속에 '어쨌든' 살아 있다. 실존 인물이든 상징적 인물이든 단군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최고(最古)의 텍스트는 『삼국유사』다. 우리가 단군신화라고 부르는 이야기가 이 책의 기이(紀異) 편 첫머리에 실려 있다. 물론 『삼국유사』 역시 위서(魏書)나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임은 분명하다. 단군 논란의 진원지인 기이 편 고조선 조(條)를 보자. 고기(古記)에 일렀다. 옛날 환인(桓因)의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있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는데 이 분이 환웅천황이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에게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기고, 무릇 인간살이 삼백 예순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교화를 베풀었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이 때 환웅신이 영험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으리라"고 했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三七日) 동안 몸을 삼갔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한 범은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자리가 없었으므로 늘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를 배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했다. 단군왕검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수(壽)는 1,908세 였다. 다 아는 대로 고조선시대의 이 단군 이야기를 우리는 '건국신화'라고 한다. 신성한 존재가 출현해 나라를 세운 이야기란 뜻이다. 그런데 신성한 존재의 출현과 나라 세우기에는 어떤 원리가 있다. 먼저 지상에 성스러운 나라를 세우려는 지극히 높은 신의 뜻이 있어야 하고, 뒤를 이어 뜻을 이룰 주인공이 지상에 탄생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탄생에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지고신(至高神)이 체통도 없이 직접 출현해 주인공을 낳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건국 드라마에는 최소한 세 배역이 있어야 한다. 단군신화는 건국신화의 이런 일반적 형식을 가장 적절히 보여준다. 지고신 환인은 홍익인간의 뜻을 가지고 환웅을 보낸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직접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세운 것은 신시(神市)다. 이 신의 마을은 나라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 머무는 상징적 공간이다. 환웅은 도우미 신들을 거느리고 인간계의 만사를 주관하지만, 그는 건국 영웅이 아니라 웅녀와 짝을 이뤄 단군을 탄생시키는 매개자일 따름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세 번째 존재인 단군의 일이다. 이런 형식은 고구려 주몽신화에도 보이고, 신라·가락국·만주·몽골·티베트 건국신화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이 건국신화가 국가 권력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건국신화 일반의 관점에서 단군신화를 이해하면 특별히 시비할 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단군신화가 고조선이라는 한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라면 거기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필경 도로(徒勞)에 그칠 테고, 반대로 완전히 꾸며진 이야기라는 주장도 무식한 소리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사는 단군신화를 그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모셔 두지 않았다. 단군신화는 필요할 때마다 불려 나와 다른 얼굴이 되었다.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먼저 이런 물음을 던져 보자.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인데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화란 그 내용과 그것에 얽힌 의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어야 신화인 법인데, 고조선이 해체되었으니 단군신화의 운명도 꺼진 것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이구동성으로 고조선의 유민(遊民)들이 남하했다고 했으니 그 유민들의 기억과 구전 속에 유전되었을 것이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을 모시는 제단이 있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三聖)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이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의 무당들이 의례와 신화를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삼국유사』가 '옛 기록'을 인용하고 있으니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도 전해졌을 것이다. 고조선은 사라졌지만 단군신화는 여러 갈래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군신화는 그저 간신히 생존한 게 아니다. 얼굴을 고치고 되살아났다는 것이 옳다.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것이 고조선의 역사, 곧 단군신화다. 『삼국유사』는 삼국으로 이어지는 삼한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 앞에 단군신화를 수원지처럼 배치해 놓았다. 『삼국유사』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면 단군을 삼한 공동의 시조로 본 것은 13세기의 다수 고려인들의 공통감각이었던 것 같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의식이라고 한다. 이런 의식을 공유한 이들에게 단군신화는 이미 고조선만의 신화가 아니었다. 고조선이라는 일개 고대 국가를 넘어선 일종의 '민족' 신화였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도가(道家) 계통의 문헌에도 계승되어 16세기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이르면 숙신·부여·말갈이 모두 단군의 후예가 된다. 단군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더 높아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학집』은, 환인은 진인(眞人)이고 동방 선파(仙派)의 비조라고 말한다. 그 선맥(仙脈)이 환웅-단군으로 이어지면서 대대로 백성을 교화했으며, 단군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부루는 하우(夏禹)의 도산(塗山) 모임1)에 참여했고, 부여는 구이(九夷)의 난을 토벌했으며, 부우는 질병을 치료했고 부소는 맹수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는 꽤나 다른 얼굴을 지닌 신화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단군신화를 어떻게 읽었을까? 1396년 권근은 새로 건국한 이씨 조선의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에게 시를 지어 올리는데 시의 주석에 단군신화가 언급되어 있다.2) 옛날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박달나무 아래 내려왔으므로 이름을 단군이라고 했다. 이때가 당요(唐堯) 원년 무진일(戊辰日)이다. 요약된 자료여서 간단하지만 또 다른 모습의 단군신화라고 할 만하다. 단군의 작명 유래와 요 임금 즉위 원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이전 문헌에도 있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환웅이 아니라 단군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추대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와도, 『청학집』과도 다르다. 환인이나 환웅 혹은 웅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단군을 신인(神人)이라고는 했지만 여기서 신인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개념이다. 신화적 신성성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요 원년에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청학집』의 자부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명나라 혹은 중화에 대한 민족적 자의식의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전승된 단군신화는 한반도가 외세의 총칼 아래 놓이자 강력한 민족통합의 담론으로 떠오른다. 이미 1895년부터 일본의 시라토리 쿠라키치, 나카 미치요 같은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그야말로 일연이 만든 허무맹랑한 신화로 평가절하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넘어 한반도와 요동지역 여러 종족들의 기원에 놓인 위대한 민족통합의 신화가 된다. 그 결과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처럼 찬란한 단군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비서(秘書)들이 쏟아져 나오고, 1909년에는 단군을 교조(敎祖)로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창시되기에 이른다. 오래 전에 존재했던 한 고대 국가의 건국신화가 근대적 민족종교로 재탄생한 것이다. 대종교가 그 후 항일운동의 중심에 선 내력을 돌이켜 보면 단군신화는 강력한 민족신화로, 단군은 민족을 하나로 묶어내는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민족신화로 재탄생한 단군신화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역사교육의 형식으로 지속된다. 단군신화로부터 고조선의 역사가 이야기되고, 우리가 단군의 자손인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는 자명한 사실이 된다. 대종교에서 시작되어 임시정부로,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어 해마다 반복되는 개천절이라는 국가적 의례는 그것을 되새기는 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로 빚어져 왔던 단군신화는 최종적으로는 민족, 더 정확하게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념의 홈 패인 공간으로 수렴된 셈이다. 이제 이쯤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천 수백 년 동안 다시 읽히다가 지금은 단일민족의 표상으로 읽히고 있는 단군신화를 새롭게 읽을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그 실마리가 단군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는 일, 그리고 단군의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추적하는 일에서부터 풀릴 것으로 생각한다. 반(反)토테미즘, 비판적 독해의 한 형식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다. 건국신화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국가의 신성화, 국가 권력의 정당화가 건국신화의 목표다. 그런데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란 권력투쟁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복과 연합 혹은 배제와 적대가 발생한다. 건국신화가 이런 고대 국가의 성립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단군신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동물생태학이다. 한 굴에 살 수 없는 동물들이 동서(同棲)했다는 것은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곰 종족과 범 종족이 이웃하고 살았다는 말이다. 단군신화의 배후에는 토테미즘이 깔려 있다. 실제로 압록강 너머 동북 지역에서 에벤키 등의 곰 종족과 아크스크라 등의 범 종족이 있었다. 문화인류학적 보고에 따른다면 이들은 지금도 그 문화를 기억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이 두 종족이 환웅 - 또는 신웅(神雄) - 을 두고 경쟁한 것처럼 그리고 있다. 경쟁의 방식은 오래 견디기. 신화가 의례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제의학파적 관점에서는 통과의례라고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지만 곰의 머리와 가죽을 쓴 족장과 범의 머리와 가죽을 쓴 족장의 내기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선택과 배제다. 곰은 선택되고 범은 배제된다. 곰은 여자가 되어 환웅과 짝을 지어 단군의 어머니가 된다. 따라서 범 종족은 환웅과의 연합에 실패하고 곰 종족은 성공한 것이 된다.3) 그렇다면 곰 종족의 성공이란 어떤 의미일까? 지금껏 별로 심각하게 제기해 본 적이 없는 물음이다. 곰 종족은 웅녀의 이름으로 단군신화에 들어가 고조선 왕가의 모계를 이루지만 정작 웅녀가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유화처럼 숭배되었다는 언급도 없다. 웅녀는 단군신화에서 실종되었다. 웅녀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단지 단군 탄생 이후 웅녀의 이야기가 지워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웅녀의 실종은 웅녀가 본래 곰이었다는 것, 인간과 혈연관계를 맺은 곰이었다는 기억의 실종이다. 곰 종족의 성공은 토테미즘의 실종이다. 역설이다. 토테미즘에서 인간과 곰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이웃관계였다. 에벤키족에게 곰은 시조 어머니였고, 그래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곰 사냥을 하지만 그 사냥은 곰이 자신의 몸을 에벤키족에게 선물로 주는 때만 가능한 행위였다. 그래서 곰 사냥은 아무 때나 창, 활을 들고 나가 던지고 쏘는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예컨대 연어가 올라올 무렵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집단적 의례였다. 살해된 곰의 살은 모두 나눠먹지만 영혼이 깃들어 있는 뼈는 모아 제사를 올린다. 그러면 몸을 선물로 내어놓고 죽은 곰의 영혼은 제상에 올려진 제물을 가지고 자기 종족에게로 돌아가 그 선물을 나눈다. 이런 균형 잡힌 상호증여의 관계가 당시 사회의 세계관인 토테미즘의 본질이고 신화는 그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곰과 인간의 관계는 상호증여의 관계가 아니다. 곰은 여자가 되기 위해서 환웅이 출제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출제자와 수험생이라는 일방적 관계다. 그리고 단군을 낳은 것은 정작 웅녀지만 단군이 모시는 존재는 웅녀가 아니라 환웅이고 환인이다. 환인-환웅-단군의 계보와 곰-웅녀 사이에는 이미 불평등한 관계, 곧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계급적 불평등, 성적 불평등의 관계라고 할 만하다. 기실 국가사회는 이런 불평등에 기초해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의 구조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국가사회의 구조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상동성을 지닌 것이다. 단군신화는 토테미즘에서 출발해 토테미즘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신화다. 단군신화의 본질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그저 민족신화로 찬양하고, 단군을 우리의 위대한 선조로 기릴 수만을 없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인간의 일방적 우월성에 기초한 근대 문명의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상호성에 기초한 토테미즘이 의미 있는 대안적 세계관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다른 민족을 차별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단군신화를 이전과는 다르게 읽는 한 방식이다. 단군신화를 다시 이야기하자 근래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이 다양성의 공존이다. 한동안 성적 소수자 문제가 담론의 장을 달구었고, 최근에는 혼혈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결혼, 농촌 지역 남성들의 동남아 여성들과의 혼인 등으로 인한 혼혈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차이들의 공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차이들의 공존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하나 있다. 다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그것이다. 혼혈에 대한 차별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차별의식과 공생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이다. 이 의식은 근대 이후 학교 교육에 의해 강화되고 강고해졌다.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의 원천이었던 단군신화는 당연하게도 이 의식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은 유전학적 실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 우리 역사가 낳은 관념일 뿐이다. 이 관념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양성의 공존을 위해서는 공론의 장에 회부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 역시 같은 자리에 호명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란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너는 단군상을 건립하고 나는 파괴한다"는 식의 소모적 전쟁보다 훨씬 긴요한 일일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환웅은 왜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을까? 환웅은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인간세상을 주관하며 교화를 베푼다. 문헌에 따라서는 신단수의 '단'을 박달나무 단(檀) 자로 써서 나무의 종류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신단(神壇), 곧 제단이 강조되어 있다. 신단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제천의식을 드리는 제단에 솟은 나무라는 말이다. 굿을 할 때 굿상에 세우는 나무를 신목(神木)이라고 하는데, 신목은 무당이 불러낸 신이 깃드는 신체(神體)가 된다. 마을 앞 당산나무 역시 당신(堂神)이 깃드는 신목이고, 동시에 하늘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환웅이 신목에 깃든 신이라는 뜻이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 와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빌자 잠시 인간의 몸으로 변해 혼인을 했다는 대목에서도 우리는 환웅이 신목에 깃든 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를 구전의 홍수신화인 '목도령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목(木)도령은 나무에 깃든 목신(木神)의 정기에 천상의 선녀가 감응해서 태어나는데 홍수 후에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된다. 이 신화에 따르면 인류는 나무신의 자손인 셈이다. 천제의 아들 환웅은 신단수에 깃들어 나무신으로 모셔졌다면 환웅을 모시는 무당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단군이 바로 그 무당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천신을 모시던 무당과 천신의 관계를 바탕으로 '환인-환웅-단군' 식의 건국 서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2. 단군의 아들 부루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은 '기이편'에서는 하지 않은 이야기를 '왕력(王曆)편'에서 한다. 일설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이름이 추몽(鄒蒙)인데 단군(壇君)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몽신화를 기록하면서 「단군기(壇君記)」를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 이제 이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가리킨다 - 을 보니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기」에도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했다 하니 아마도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고 하여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삼국유사』보다 몇 년 늦게 쓰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 역시 "먼저 부여와 비류를 일컫네"라는 시구에 「단군본기(檀君本紀)」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면서 "비서갑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라고 적고 있다. 또 「동명본기(東明本紀)」의 내용도 끌어온다. 부여의 왕 부루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제사를 드렸는데, 말이 곤연이라는 곳에서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살펴보니 돌 밑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를 데려가 금와(金蛙)라고 이름을 지은 후 태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루는 고조선 단군의 아들인 동시에 고구려 주몽의 이복형제이자 동시에 부여의 왕이다!" 대체 왜 이런 혼란이 생겼을까?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아가 그 자료들 가운데는 고조선과 고구려, 혹은 부여를 같은 핏줄로 묶으려는 의도를 지닌 문헌들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3. 『환단고기』, 『규원사화』, 『신단실기』, 『단기고사』, 『부도지』 등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책들에 실린 단군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최근 『환단고기』 류의 책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고대사에 대한 인식이 인터넷을 점령하면서 역사적 실상에 관한 보편적 지식처럼 행세하고 있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체계적이지 않은 우리 신화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런 자료의 기사들을 기반으로 하여 거대하고 체계적인 민족의 신화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책으로까지 출간되고 있다. 이런 흐름의 배후에는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신화를 통해 재구성하려고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있다. 단군상 건립 운동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민족주의가 반성의 대상이 되어 있는 지금 대중들의 단군과 고조선사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위험하지 않을까? 추천할 만한 텍스트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002. 각주 1) 우 임금이 치수(治水)를 끝내고 도산 - 현재 중국 절강성 소흥현 서쪽 - 에서 개최했다는 축하의 모임을 말한다. 2) 왕조가 바뀌어 그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자, 명나라에서는 소국이 대국을 대하는 태도가 마땅치 않다면서 표전의 문구를 문제 삼아 시비를 걸어왔다. 이 외교적 마찰을 해결하게 위해 조선 태조는 해명서와 표전의 작성에 관여한 권근 등을 수도 남경에 함께 보냈다. 그때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역사를 묻자 이에 응해 지은 시가 「응제시(應製詩)」다. 3) 환웅이 백호와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는 또 다른 단군신화가 17세기 승려 설암(雪巖)의 기행문인 『묘향산지(妙香山誌)』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곰 종족의 성공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관련이미지 1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무씨사당 후석실 제3석 상제3층, 하제4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단군신화 [檀君神話] - 여러 얼굴을 지닌 단군신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단군신화   [ 檀君神話 ] 연대 B.C.2333년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목차 1. 내용 2. 출전 3. 특징 4. 모티브 분석 5. ‘곰’ 선택의 의미 6. 신단수(神壇樹)의 의미 7. 약쑥과 마늘의 의미 8. 문학사적 의의 1. 내용 『위서(魏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었는데,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여러 아들 중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자주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다스려 보고자 하였다.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면서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인간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桓雄]에게 인간이 되기를 빌었다. 이 때 신웅이 영험한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그것을 먹고 21일 동안 금기를 지켜서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임시로 변해서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그는 당(唐)나라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을 도읍으로 삼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묘년(己卯年)에 즉위하여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에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하니, 수명은 1908세였다.” 2.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紀異)ㆍ고조선(古朝鮮)」. 3. 특징 (1) 고조선 건국신화로 구전되다가 고려 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기록되어 정착. (2) 환인-환웅-단군의 3대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천손하강(天孫下降)1) 형의 설화소(說話素)를 가지고 있음. (3) 숭천사상(崇天思想)과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나타남. (4) 후대 영웅서사시(英雄敍事詩)의 원류가 되기도 하지만 건국을 위한 투쟁 과정이 없으며, 영웅 설화 7단계2)에서 ‘고귀한 혈통(1단계)-비정상적 출생(2단계)-위대한 승리(7단계)’만 나타남. 4. 모티브 분석 (1) 환웅의 하강 : ‘하늘[天]→땅[地]/신(神)→인간’을 통해 이 땅이 하늘이 선택한 곳이며, 우리 민족이 천손의 혈통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보여 준다. (2) 환웅과 웅녀의 결합 : 곰과 범은 토템이다. 따라서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① 신과 인간의 결합, ② 천신 숭배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 ③ 이주족(移住族)과 선주족(先主族)의 결합을 의미한다. 5. ‘곰’ 선택의 의미 (1) 호랑이와 곰의 경쟁은 투쟁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리며 참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영웅성보다는 덕성(德性)을 상위의 가치(價値)로 두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 ‘곰’을 토템으로 삼았던 부족이 국가로의 통합에서 정통성을 획득하였다는 의미. (3) 동면을 거쳐 봄에 다시 활동하는 곰을 통하여 자연의 순환과 재생력(再生力)이 인간에게도 파급되기를 희구하는 의식의 표현. 6. 신단수(神壇樹)의 의미 신령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에 서 있는 나무. 지상에 있으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지점의 표시. 세계의 중심. 7. 약쑥과 마늘의 의미 곰이 ‘약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는 것은 지상적 존재가 그 세속성(世俗性)을 탈피하고 신성한 존재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금기(터부)이다.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이 여러 단계나 상태를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중요한 단계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시련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의식으로 채택된 것이 통과 의례이다. 단군 신화의 쑥, 마늘, 어둠은 이러한 통과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는 보편적 인식이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 문학사적 의의 (1)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로 단군의 탄생, 민족의 연원을 보여줌. (2) 민족주의적 영웅 서사시의 원류가 됨. (3) 천손의 혈통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하고, 민족의 신성성ㆍ우월성을 강조하여 수난기에 민족적 힘을 발휘하게 함.(이는 건국신화의 공통적인 특성) (4) 환인ㆍ환웅ㆍ단군의 삼대기 구조는 후대 서사 문학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데 영향. (5) 웅녀의 시련은 후대 문학에서 여성 수난의 원형이 되었다. 각주 1) 천손하강(天孫下降) ; 하늘의 자손이 땅으로 내려온다. 2) 영웅 설화 7단계 ; ① 고귀한 혈통의 인물, ② 비정상적인 잉태 혹은 태생, ③ 비범한 지혜와 능력, ④ 어려서 위기를 겪고 죽을 고비에 이름, ⑤ 구출⋅양육자를 만나서 위기를 벗어남, ⑥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힘, ⑦ 위기를 극복, 승리자가 됨.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檀君神話]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단군신화     목차 정의 역사 줄거리 분석 특징 의의 정의 고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의 신화. 역사 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국가가 세워진 사연을 담은 개국의 시조신화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권람(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를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일연(一然)이 저술한 것으로 그 저술연대를 고려 충렬왕 7년 전후로 보고 있다. 내용에 『위서(魏書)』나 『고기(古記)』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는 이미 그 이전의 문헌에 등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는 신화의 내용으로 보아 전승되면서 도교나 불교의 영향으로 변모된 흔적이 발견된다. 본래 신화의 모습은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곰이 여인으로 변하여 단군을 출산하였다는 수조신화(獸祖神話)의 흔적을 보이고 있어 동물을 숭배하던 고대사회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조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桓因)은 서자 환웅(桓雄)이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 태백산 주변을 굽어보다 그곳이 나라를 세워 다스릴만한 곳으로 여겨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으로 내려와, 바람의 신, 강우의 신, 구름의 신을 데리고 곡물과 생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 같은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다스렸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신령한 쑥과 마늘 20개를 주고 “너희가 이것을 먹고 햇빛을 100일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곰은 금기를 지킨 지 21일 만에 여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웅녀는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지만, 결혼할 사람이 없어 환웅이 사람으로 변화하여 웅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뒤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가 다시 평양성으로 옮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갔다가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수명이 1,908세였다. 『삼국유사』와는 달리 『제왕운기』에는 단군의 출생 과정에 대해서 환인의 서자 단웅천왕(檀雄天王)이 태백산정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시켜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고 되어 있다. 분석 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고조선의 개국 과정을 말해 주는 신화이다. 신화의 주역은 환웅으로 되어 있는데도 신화 명칭을 라고 하고 단군을 한민족(韓民族)의 시조로 인식하는 이유는 환웅이 창건한 신시(神市) 집단과 단군이 건국한 조선 집단의 민족 구성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단군의 조선은 환웅의 신시집단과 웅녀로 대표되는 곰 토템 부족이 연합하여 새로 형성된 확장된 집단이라고 본다. 환웅 집단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하고 곡물의 생산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면서 농경생활을 하였던 도래(渡來) 집단의 성격을 띤다. 한편 웅녀로 표상된 집단은 환웅이 곰을 여인으로 변하게 하였다는 내용에서 환웅 집단에 복속된 곰을 숭앙하는 토착집단의 성격을 띤다. 단군이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산신으로서 제향을 받는 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징 환웅이 신시를 개창한 태백산(太白山)은 신성공간으로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산을 말한 것이다. 백두산이라는 설과 묘향산이라는 설이 있는데, 태백산을 백산 중에 가장 큰 산이라는 보통명사로 본다면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에는 천부인 세 개라는 통치자로서의 징표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신경(神鏡), 신검(神劍), 신령(神鈴) 또는 신고(神鼓)의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신경은 한 집단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동경(銅鏡, 구리거울)인데 고대 부족장들의 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신검은 신성한 칼로서 군사의 통솔권을 나타내는 군주의 칼이다. 고구려 에서 주몽이 유리가 친자임을 확인할 때 부러진 단검을 사용하였는데 고대의 군장들은 세형동검(細形銅劍) 등 신성기물로 칼을 지니고 있었다. 신령은 제전(祭典)을 행할 때 소리를 울리는 방울이다. 신에게 인간사를 고하려면 신의 주의를 끄는 장치가 필요한데 방울소리나 북소리로 신이 귀를 기울이도록 한 뒤에 사연을 고해야 한다. 에서는 환인과 환웅의 부자관계가 먼저 설정되어 있고 그다음으로 환웅과 웅녀의 부부 관계가 나타난다. 여기서 환웅을 중심으로 본다면 부자 관계만 나타나고 부부 관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환인의 부인이 누구인지도 나타나지 않고 환웅의 탄생 경위도 없다. 또한 단군을 중심으로 보아도 부계는 조부부터 기술하고 있으나 모계는 어머니만 기술하고 있으며 즉위 경위는 있으나 결혼 사연은 없다. 이런 점에서 에서는 아버지가 중시되는 가부장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의의 는 천신계의 아버지와 지신계의 어머니가 결합하여 시조를 출산한다는 천부지모(天父地母)형 신화이다. 천부지모신화는 가부장제사회가 확립된 이후에 이루어진 신화로서 한반도의 건국신화 대부분이 천부지모신화라고 할 수 있다. 는 한반도 최초의 개국신화라는 점에서 왕권신화의 효시라는 의의가 있다. 에는 곰이 금기를 지켜 여인으로 변한다는 통과의례를 나타내는 삽화가 있다. 이 삽화에서 곰이 금기를 지킨 굴이라는 공간은 주체의 질적 변화를 위하여 통과하는 시련의 공간이고 쑥과 마늘은 주술적 효능이 있는 약품의 성격을 가진다. 또한 햇빛을 피하는 100일이나 21일은 금기의 기간으로서 재탄생에 필요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고대사회에서의 통과의례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집필 서대석(徐大錫)/서울대학교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의 기원(김정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3년) 단군, 그 이해와 자료(윤이흠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 한국신화의 연구(서대석, 집문당, 2001년) 출처 三國遺事 帝王韻紀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 원불교대사전 단군신화   [ 檀君神話 ] 필자 박도광(朴道廣) 목차 [개요] [내용 및 변천] [개요] 단군신화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신화적 요소와 상징체계는 종교 의례를 통해 나타나게 되며, 단군신화는 고대 한국사회의 ‘하느님’ 또는 ‘천신(天神)’과 관련한 제천(祭天)의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죠셉 캠벨(Joseph Campell)이 언급한 것처럼, 신화적 사실이 설사 입증될 수 없다고 하여도 우주와 자연현상, 인간과 진리에 대한 상호관계에 대한 중요한 인식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고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건국신화 중 단군신화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전승과 단군에 대한 인식 또한 시대와 글쓴이들의 학문 또는 종교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전승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변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단군신화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대에 이루어진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 등 13세기 이후의 기본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비롯하여 단군에 대한 자료들이 조선조의 《세종실록(世宗實錄)》뿐만 아니라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서 발견된다. 서영대는 단군신화의 유형을 13세기 《삼국유사》 유형, 《제왕운기》 유형, 14세기의 권람(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유형, 조선조 후반기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유형 등으로 나누어 단군전승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했다. 《삼국유사》는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천상으로부터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하강하여,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컫고 지상세계를 교화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ㆍ명(命)ㆍ병(病)ㆍ형(刑)ㆍ선(善)ㆍ악(惡) 등 무릇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린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는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고 내려오는 과정을 설명한다.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신과 인간이 함께 만나는 공동의 장소이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이루고,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신단수에서 기도하는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햇빛이 차단된 굴속에서 고난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곰은 환웅의 금기사항을 지켜 여인(熊女)으로 변신할 수 있었으며, 웅녀는 아이를 갖기 위해 단수(壇樹) 밑에서 재차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환웅과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단군이 천신과 웅녀사이에 탄생하게 된 과정을 기술했다. 《삼국유사》의 환웅과 웅녀의 결합과 단군의 탄생 내용은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신화의 원초적 요소를 담고 있다. 곰이 웅녀로 변신하는 모습과 웅녀가 천신인 환웅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는 과정에서 곰의 토템 신앙과 천신 신앙의 결합, 인간과의 조화적 결합의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같이 환웅이 천상으로부터 태백산정 신단수에 내려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나, 풍백ㆍ우사ㆍ운사를 거느리고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린 부분 등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승휴는 “금손웅녀 음약성인신(今孫熊女 飮藥成人身)”이라고 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이 인간으로 변화하는 신화적 요소를 삭제했다. 곰의 인간으로의 변신과정과 인간의 천신과의 결합 과정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지에 대한 단군신화의 내용에 따라 단군전승의 계보(系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승휴는 유교적 관점에서 곰의 신화적 요소를 삭제하고 단군이 단수신(檀樹神)과 단웅(檀雄)의 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유학자로서 단군신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곰신화의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원초적 단군신화를 변형시킨 것이다. 《대종교경전》과 《규원사화》는 《삼국유사》ㆍ《제왕운기》ㆍ《응제시》 등에서 거의 다루지 않고 있는 환인과 환웅의 시대를 중요시여겨, 우주와 인류의 기원 그리고 인류의 역사적 전개를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대종교경전》과 기타 교서에서는 ‘한임에 의해 한웅천왕(桓雄天王)이 한얼로서 사람으로 화하여(以神化人) 한밝뫼(太白山 = 白頭山) 밝달나무(神檀樹)에 내려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철(弘巖羅喆)은 ‘중광가(重光歌)’에서 “처음 빛은 어느 때뇨 첫 갑자(甲子) 상달상날 한울 열고 교(敎)세운 혁혁상제(赫赫上帝) 나리사 삼신(三)뫼 히뜩히뜩 단(檀)나무 푸릇푸릇 동(東)에서 차차 퍼져 온 세계(世界) 다 덮었네”라고 밝히고 있다. 상원갑자(上元甲子)의 해 10월 3일을 하늘이 열린 날로 여기고 있다. 또한, ‘한웅은 한얼사람으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가지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와 뇌공(雷公) 등 여러 신장(神將)을 부려 산하(山河)를 개척하고 사람과 사물을 이치(理致)로 자라게 하고 한얼의 도(天道-神道)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단군신화를 기술하는 사람의 역사관과 종교관에 따라 환인ㆍ환웅ㆍ단군 호칭의 의미가 달리 나타난다. 불교 승려인 일연은 《삼국유사》에는 고대 한국사회에 최고신을 ‘환인(桓因)’, ‘천제(天帝)’, ‘상제(上帝)’ 등 한문식 표기로 나타내고 있다. 환인을 불교와 힌두교의 신(神)인 인드라(Indra)와 동일시하여 ‘제석(帝釋)’으로 부르기도 했다. 윤이흠은 단군에 대한 다양한 연구의 원초적 자료가 주로 한문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윤이흠은 고조선에 샤머니즘, 천신숭배, 그리고 자기수련 전통들이 존재했었으나, 우리 민족이 한문(漢文)을 수용하면서 정신문화에 일대 변혁을 겪게 되었으며, “일연은 한문을 쓰면서 한문 이전의 지고신을 지칭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환인’이란 용어를 썼다”고 보고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사료(史料)에서 언급한 한국의 고대종교와 문화가 한문으로 쓰여 있기에, 한문 수용 이전에 있었던 고조선(古朝鮮)의 신앙과 고대의 문화적 원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논저들은 한국기층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유학자인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불교의 ‘석제(釋帝)’ 또는 유교와 도교의 ‘상제(上帝)’로 호칭했으며 유학자적 입장에서 단군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했다. 《세종실록》에도 ‘상제(上帝)’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하늘에서 ‘신인(神人)’이 내려왔다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북애자는 《규원사화》에서 천상의 일대주신(一大主神) 환인을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으로 우주와 만물과 인간의 근원으로 서술하고 있다. 《규원사화》 ‘조판기(肇判紀)’에서 하늘(上界)의 일대주신인 환인은 태고에 음양이 나누어지기 이전부터 전 세계를 통치하는 밝은 빛의 존재이며 만물생성의 본원(本源)인 존재이다. 일본 사학자와 한국의 일부 사학자는 일연에 의해 환인의 존재와 불교의 제석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불교화 한 용어라고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나철과 대종교 입장에서는 환인이 결코 불교화 된 용어가 아니며 한국 고유의 언어라는 것이다. 대종교의 교서인 《신사기》는 《규원사화》와 같이 환인의 존재를 절대적 최고신으로 여긴다. 또한, 나철과 서일(白圃徐一)은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큰 존재를 의미하는 순수한 한글 ‘한임’을 한자로 표기하여 ‘환인(桓因)’이라 표기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문맥으로 보았을 때, 불교적 입장에서 ‘환인’을 불교의 최고신인 ‘제석’과 같은 존재임을 부연하여 설명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근ㆍ현대 한국사회는 고대 건국신화, 단군신화 및 제천의례와 관련하여 다양한 연구를 통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오는 단군신화와 종교사상을 조명해 왔다. 북한의 학자들도 1993년 단군릉 발굴 이후 단군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북 학자들의 교류가 점차 증대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신화 [檀君神話] (원불교대사전)   ======================================================///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13세기) 시대의 , , 조선 전기(15세기)의 , , 등에 기록되어 있다. 단군 건국 신화의 내용은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비 신, 곡식 신, 구름 신 등과 함께 태백산에 내려왔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찾아왔다. (중략) 웅녀와 환웅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 왕검이라 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이다. 이 건국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 사회는 선민 사상과 홍익 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건국하였고,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신앙을 가진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 건국 신화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493    [시문학소사전] - 토테미즘 댓글:  조회:3702  추천:0  2020-04-30
두산백과 토테미즘   [ totemism음성듣기 ] 요약 토템 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이미지 크게보기 토템상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물류(독수리·수달·곰·메기·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붙인 예는 원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의례·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 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②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 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④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다. 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토테미즘은 현재도 북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멜라네시아·인도 등 넓은 범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전에는 남아메리카·폴리네시아·아프리카·북극 에스키모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토테미즘은 J.F.맥레넌의 조직적인 연구에 의해 1870년경부터 학계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É.뒤르켐의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연구에 의해서 종교기원론 ·본질론으로서 전개되었으며, 그 후의 조사연구로 여러 가지 측면이나 형태가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토테미즘을 제도적인 주술(呪術), 종교적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여러 학문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실체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테미즘 [totemism] (두산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토테미즘   [ Totemism음성듣기 ] 토테미즘은 원시공동사회의 종교의 한 형태이다. 혈연적, 지연적 집단이 동·식물이나 자연물과 공통의 기원을 갖는다고 믿거나 결합관계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숭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의 '오토테만(그는 나의 일족이다)'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집단의 명칭은 그들이 숭배하는 동·식물이나 자연물의 명칭과 같다. 오늘날에는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사용하는 사회현상을 가리키는 데 토템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산 신념, 의례, 풍습 등을 제도화한 체계를 지칭한다. 인류학자들이 처음에 토테미즘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한 인간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를 뜻했으며, 한 동물이 단지 한 사람과만 관계에서 수호정령과 초자연적 힘의 근원이 될 때는 토템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샤먼(무당)이 동물정령에 사로잡혀 동물신과 동일시되는 것 등의 특정 개인에 관계된 것은 토테미즘으로 지칭되지 않는다. 한편 집단과 동·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무조건 토테미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 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당해야 한다. 조건은 다음과 같다.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 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토템으로 삼은 동·식물을 해치는 것은 금기이다. 같은 토템 집단 내의 결혼은 금지된다. 토템에 대해 집단 전체의 의식을 행한다. 즉 토테미즘은 동식물 숭배의식, 희생, 정화, 금기, 신화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토템신앙 연구는 제도적인 주술이나 종교에 비중을 두는 입장과 그 사회적 측면에 주목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J.F. 매클레넌은 토테미즘을 동물숭배에서 유래된 종교로 간주하였고, J.G. 프레이저는 주술로 보았다. 프랑스의 E. 뒤르켐은 토테미즘의 발생이 사회적인 데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토템은 사회의 상징이며 사회적 결합력으로서의 구실을 한다고 설명하였다. 레비 스트로스는 토테미즘을 미개민족 사이의 것으로 보는 시각을 뒤집고 미개와 문명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 정신을 표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토템으로 선정된 것이 '생각하기에 알맞은'데 있었으며, 집단 사이의 관계를 다른 사물관계로 표현하는 토테미즘의 논리가 문명사회에서 집단의 분류·차이·대립 등의 관계와 같거나 평행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토테미즘을 근친상간 금지라는 집단의 금기와 관련시켜 설명함으로써 문명의 기원을 말했다. 여자를 독점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아버지를 자식들이 살해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후회하고 가장 힘이 센 동물을 아버지의 대용물로서 선택하고 그 토템집단 안에서의 혼인을 금지하였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테미즘 [Totemism]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 ​ 1. 애니미즘 무생물에게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농사가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가장 많았습니다. ​ 2. 토테미즘 동물을 신성시하여 숭배하는 종교입니다. 곰과 호랑이가 나오는 단군왕검설화에서도 토테미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 3. 샤머니즘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샤먼이라고 부르며 무당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 ====================================/// 문화인류학 단계집단의 여러 형태     단계집단(unilineal descent group)은 그 결합의 범위에 따라 여러 가지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나라의 당내(堂內) 집단과 같이 누가 누구와 어떤 친족관계에 있는지 또는 몇 촌 관계에 있는지를 어느 정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고 일상생활에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는 집단을 좁은 의미에서 종족(宗族, lineage)이라고 부른다. 이 집단은 일반적으로 같은 조상의 단계 자손들로 이루어진 지역적인 집단이며 하나의 협동집단이기도 하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하나의 족보 또는 파보를 형성할 정도의 규모로 여러 지역에 흩어져있는 동족들이 공통의 조상을 중심으로 결합된 것을 씨족(clan)이라고 부른다. 이 씨족의 성원들 간에는 주의 깊게 족보상의 계보를 따지지 않는 이상 서로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거의 모르지만 그들도 단지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믿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은 많은 미개사회에서 볼 수 있는 관습으로 씨족은 보통 ‘토템(totem)’을 가지고 있다. 이 토템은 대체로 동물이나 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씨족의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씨족집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토템이란 용어 자체는 원래 ‘오토테만’(ototeman)이라는 미국의 오지브와(Ojibwa) 인디언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나의 친척’이라는 뜻이다. 마치 스포츠세계에서 ‘청룡’팀, ‘사자’팀 등과 같이, 어떤 낯선 사람이 ‘곰’, ‘늑대’, ‘거북’ 또는 ‘사슴’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씨족의 성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가 자기와 같은 씨족의 성원인지 아닌지를 곧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동성동본집단도 이 씨족의 범주 속에 넣어도 좋겠다. 동성동본집단에서는 고유의 본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또한 항렬이 있어서 이 항렬만 파악되면 그 사람이 어느 세대에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어서 ‘아저씨뻘’이다 또는 ‘나의 조카뻘’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씨족의 토템에는 흔히 금기가 적용되기도 한다. 즉 씨족의 성원들은 그 씨족의 상징인 동물을 죽이거나 먹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관습을 가진 경우가 많다. 다시 몇 개의 씨족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포족(胞族, phratry)을 형성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에 포족의 구성단위인 씨족들은 분명한 실제인물로서의 공동조상을 갖지는 않지만 막연하나마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지 친족관련이 있었다고 믿고 있어서 서로 간에 혼인하지 않는 관습이 있다. 즉 포족도 하나의 외혼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대개는 여러 씨족들이 하나의 신화적인 인물을 공동조상으로 하여 결합되어 있고, 분명히 어떤 계보관계는 따질 수가 없지만 동일조상의 단계 자손들이라고 믿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계집단의 여러 형태 (문화인류학)    
1492    [시공부 101] - 35... 댓글:  조회:2801  추천:0  2020-04-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내재적 비평이란?     분야 현대 시 목차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보인다 작품 자체에만 주목하라!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작품 비평과 소통 고등학교 문학 문학의 비판적 수용과 창의적 생산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꼭 작가가 살았던 삶이나 시대를 알아야 작품을 잘 읽을 수 있나요?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배경 지식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관점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보인다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음미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각도와 방향에 따라서 달리 보이듯이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어느 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요. 작품을 창작한 사람의 관점에서 감상할 수도 있고, 작품에서 반영하는 현실을 고려하면서 감상할 수도 있으며, 독자들이 무엇을 느끼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감상하는 방법도 있지요. 물론 작품의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품 속에 사용된 언어라든가 작품의 구조 자체에만 주목해서 감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작품 자체에만 주목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다른 말로 ‘절대주의적인 관점’이라고도 하지요. 작품 자체에만 주목하라! 내재적 비평은 작품 외부에 존재하는 작가, 독자, 현실 세계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작품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작품을 외부 요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내재적 비평은 시와 소설을 비롯한 모든 문학 작품에서 적용 가능합니다. 시에서는 주로 어조, 운율, 이미지, 수사법, 시상 전개 등의 요소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소설에서는 서술자라든가, 구조, 인물의 유형, 문체, 시점 등을 중심으로 감상합니다. 내재적 비평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짧은 시 한 편을 감상하며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위 시는 전체 3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연의 첫 행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요. 또한 ‘~리라’라는 어조를 사용하여 화자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이미지로는 ‘이슬’과 ‘노을빛’, ‘소풍’ 등이 있습니다. 모두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지요. 세 가지 시어의 공통점은 모두 ‘잠시’ 동안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생이 잠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어들은 모두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시적 화자는 인간의 짧은 삶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볼 수 있듯이 시적 화자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아름다웠더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새벽빛 와 닿는 이슬이나 노을빛 등을 소재로 활용한 것도 삶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하려고 동원된 것 같습니다. 시적 화자는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지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겠지만 그 유한성을 깨닫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는 시적 화자의 겸허한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볼까요? 방금 시를 감상한 부분에서 혹시 시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나요? 아니면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작품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상과 관련된 언급이 있었나요? 그 어디에서도 작품 외적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의 이미지와 어조, 언어에 대한 탐구만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작가, 현실, 독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지요. 이처럼 작품 자체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합니다. 내재적인 관점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나요? 내재적인 관점은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기 때문에 작품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작품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내재적 비평이란?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91    [시공부 101] - 33... 댓글:  조회:3466  추천:0  2020-04-04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는 선경후정, 는 수미상관?     분야 현대 시 목차 노래의 짜임새 선경후정 : 경치를 제시한 후 감정을 노래한다 수미상관 : 머리와 꼬리가 닮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이동에 따라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본질과 속성 고등학교 문학 문학 작품의 구성 원리 시의 짜임을 설명하는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각각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도 함께 설명해 주세요. 는 선경후정, 는 수미상관?" data-font-image="false" data-seq="1" data-title="" desc="" hastitle="Y" height="256" source="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3459_000_1/20140915143343278_4J7LWOG4L.jpg/eb101_064_i1.jpg?type=m4500_4500_fst_n&wm=Y" style="border: 0px; max-width: 690px; vertical-align: top;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1224" /> 노래의 짜임새 시는 어떤 문학 장르와 비교해 봐도 개성이 강한 장르입니다. 시에 사용되는 짜임새도 다양하지요. 선경후정, 수미상관 등은 모두 시의 짜임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노랫말의 짜임새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노래 두 곡의 가사를 들여다볼까요?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밤엔 수많은 별이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들국화, 중에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윤석중 작사의 동요, 선경후정이란 경치를 먼저 제시하고 경치에서 느낀 감정을 그 뒤에 표현하는 짜임을 뜻해요. 마침 의 가사는 석양이 지는 하늘 아래 정경을 묘사한 후, 이별의 기억에 젖어드는 자신의 감정을 그리고 있네요. 다음으로, 수미상관은 시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비슷하거나 같게 만드는 방법을 말하는데, 를 보세요. 노래의 시작과 끝이 반복되고 있지요? 자, 그럼 각각의 용어와 효과를 시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알아볼까요? 선경후정 : 경치를 제시한 후 감정을 노래한다 선경후정은 문자 그대로 경치를 보여 주고 그다음에 화자의 정서를 제시하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런 방법은 과거에 한시에서 많이 쓰였지요. 자연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거나 위로를 받거나 또는 흥겨움을 느낄 때 전통적으로 쓰였던 방법입니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가고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저 물은 언제쯤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정지상, 「송인」 위 작품은 친구를 보내며 쓴 작품으로 이별의 슬픔이 잘 나타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별의 정서를 단순히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지요. 슬픈 노래를 부른다며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풀빛이 짙어 간다는 경치를 먼저 제시하고 이별의 눈물을 흘린다는 감정 표현에 앞서서 대동강 물이라는 경치를 먼저 제시하고 있지요. 이처럼 감정을 표현하기에 앞서 경치를 제시하는 시의 전개방식을 선경후정이라 합니다. 수미상관 : 머리와 꼬리가 닮았다 수미상관은 처음(머리)을 가리키는 ‘수(首)’와 끝(꼬리)을 가리키는 ‘미(尾)’가 서로 관련성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과 끝 구절을 비슷하거나 같게 해서 전달하려는 시적 의미를 강조하는 방법이지요.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시의 형태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얻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위 시에서 처음과 끝은 유사한 시 구절로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이 전체적으로 순환구조를 이루면서 자연 현상이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것을 제시하기에 적절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지요. 이처럼 수미상관의 짜임은 시적인 의미를 만들어 가는 데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이 시에는 기승전결의 구조도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기승전결은 본래 한시의 구성 방법이었지만 현대 시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요. 대개 ‘기’에서는 시상을 제기하고 ‘승’에서는 시상을 심화하며 ‘전’에서는 시상의 전환이 나타나고 ‘결’에서는 중심 생각이나 정서가 제시됩니다. 「산유화」는 ‘기’에서 ‘산에 꽃이 핀다’는 시상을 소개하고 있고, ‘승’에서는 ‘꽃과 떨어져 있는’ 화자의 처지를, ‘전’에서는 ‘꽃을 좋아하는’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결’에서는 자연 현상을 다시 소개하여 전체적인 완결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간이나 화자의 시선을 이동시켜 시를 전개할 수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시를 전개할 수도 있지요. 또한 기승전결의 짜임이나 점층적인 전개방식도 생각할 수 있으며, 이미지를 대비시켜 시의 짜임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의 짜임새를 몇 가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이동에 따라 선경후정이나 수미상관처럼 전통적인 시상 전개방식 외에도 우리 시에서는 다채로운 시상 전개방식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시상이 전개되는 방식입니다. ‘아침—점심—저녁’, ‘과거—현재—미래’,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을 가리키지요. 이러한 시간적 구성을 다른 말로 추보식 구성이라고도 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중에서 이 시에서 1연과 2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2연에는 계절적인 표현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오는 것을 볼 때 여름 장마가 연상되지요. 이어지는 3연과 4연에 국화꽃이 피어난다는 표현이 있으니 이 시는 전체적으로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이동도 시상 전개방식으로 유용하게 쓰입니다. 화자가 위치한 공간이 변화하거나 정서의 흐름이나 전개 양상이 공간의 이동에 따라 전개되는 것입니다.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船)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는 사람이 많았소 양지바른 뒷산 푸른 송백(松柏)1)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旗)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크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 높이 창가2)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 약국 행이불언(行而不言) 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冊曆)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유치환, 「귀고」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자기 고향을 찾아가며 쓴 시입니다. 고향의 선창가에서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공간을 이동하면서 각 공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과거의 추억들이 하나둘 소개되지요. 이런 점에서 이 시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화자의 정서가 전개된다고 볼 수 있지요. 공간의 이동은 시상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소개한 내용은 모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의 짜임일 뿐 전부를 소개한 것은 아닙니다. 시인 각자의 개성에 따라 얼마든지 독특한 짜임새를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이미지가 대립하며 시상이 전개될 수도 있나요? 하나의 작품에서 이미지가 대립하며 시상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같은 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다’는 험난하고 ‘나비’는 연약한 존재인데 이 두 가지 이미지가 함께 제시되면서 시상이 전개되지요. 이런 대립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면 두 대상이 모두 보다 더 선명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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