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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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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한국 시인 김지하 장편 풍자 담시 - 오적 댓글:  조회:3564  추천:0  2020-01-23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오적     요약 1970년에 발표된 김지하의 이 시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종류의 오적(五賊)으로 간주하고 풍자․비판한 작품이다. 작가 김지하 (1941년 ~) 발표 1970년 장르 현대시 종류 담시(譚詩) 1.작가소개와 작품해설 2.작품해설 3.작품 속의 명문장 4.작품읽기 & 참고자료 작가소개와 작품해설   김지하 이 작품은 1970년 5월《사상계》에 발표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이다. 담시란 “어원적으로 무가(舞歌)에서 출발한 장르로서 서정적, 서사적, 드라마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특수한 형식”(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인 서구의 발라드(ballade)를 번역․차용한 번역어인데, 김지하는 전통적인 민중적 예술 형식인 판소리의 미학을 계승하여 극적 요소, 서정적 요소, 서사적 요소를 모두 결합한 ‘소리’를 ‘담시’라고 규정했다. 김지하는 1970년대에 여러 편의 담시를 창작했는데, 「오적(五賊)」은 그 첫 번째 발표작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 개발독재 과정에서 부정부패로 엄청난 부(富)를 축적한 대표적 인물형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비판한 정치시이자 풍자시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오적’의 구체적 정체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다. 김지하는 이들 다섯 인물 유형의 한자 표기를 ‘개견(犬)’자(字)가 들어가는 새로운 조어로 표기함으로써 그들을 동물화했다. 이 시의 구체적인 배경은 6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인데, 시인은 국민들 대다수가 가난하게 살고 있음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이들 ‘오적’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 비판하기 위해 이 시를 썼다. 특히 이 시에는 ‘오적’ 이외에도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할 임무를 맡은 포도대장이 등장한다. 경찰이나 사법당국을 상징하는 포도대장은, 그러나 시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오적에게 매수되어 죄 없는 국민들을 투옥하는 권력의 앞잡이로 등장한다. 결국 포도대장은 날벼락을 맞고 갑작스럽게 죽는데, 이는 고전소설의 권선징악을 차용하여 경찰과 사법당국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김지하의 이 작품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상계》는 폐간되었고, 작가와 편집인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오적」은 외화(外話)와 내화(內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판소리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외화(外話)에는 창작의 배경을 서술한 부분(“~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과 자신의 시가 구전되는 이야기를 집약한 것임을 밝히는 뒷말(“~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의 두 부분이 포함된다. 내용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화(內話)는 9개의 작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대략적인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다.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담시는 민중적 장르이기 때문에 오적에 대한 비판과 풍자는 매우 적나라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시의 화자는 오적 이야기가 마치 전래되는 이야기를 구술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처럼 공간적 배경을 ‘서울’로 설정함으로써 60~70년대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시가 발표될 무렵 우리 사회는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권력의 강압적인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발표 직전인 1969년 9월에는 국회에서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이 단 6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통과됨으로써 군부 정권의 장기 집권 시도가 노골화되었고, 발표 즈음인 1970년 3월에는 정인숙이라는 여인이 한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4월에는 부실 시공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33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해 11월에는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며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발표된 「오적」의 영향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이 발표된 《사상계》5월호는 5,000부가 모두 팔려 매진되었다고 한다. 작품해설   「오적」은 외화(外話)와 내화(內話)로 구성되었다. 외화는 창작의 배경을 밝힌 부분과 자신의 이야기가 창작이 아니라 구전되는 내용임을 밝히는 뒷말로 이루어졌고, 내화는 ‘오적’에 해당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정 비리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작품 속의 명문장   “또 한 놈 나온다. / 국회의원 나온다. /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 가래끓는 목소리로 웅숭거리며 나온다 /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공약 휘휘감고 혁명공약 모자쓰고 혁명공약 배지차고”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행복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출세만을 살피는 정치인들은 문학의 유력한 비판 대상이었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김지하의 비판은 지금 보아도 섬뜩할 정도의 살기와 풍자이다. 특히 박정희를 비롯하여 권력을 장악한 군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은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 작품읽기 & 참고자료   크게보기 오적 한글판 + 영문판 김지하 저 답게 2001.10.25 크게보기 탈춤의 민족미학 미학강의 김지하 저 실천문학사 2004.02.15 크게보기 김지하 문학연구 홍용희 저 시와시학사 2000.03.20     관련이미지 담시 오적출처: e뮤지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오적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한국문학 오적   [ 五賊 ] 구분 장편 풍자시 저자 김지하 출판사 사상계 출판일 1970년 작품해설 시인 김지하가 1970년 『사상계(思想界)』 5월호에 발표한 장편 풍자시. ‘이야기조의 시’라는 의미로 ‘담시(譚詩)’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당대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실상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의 사회정치적 파장으로 더 유명하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전통적 운문양식인 가사, 타령, 판소리사설 등을 현대적으로 변용함으로써 새로운 풍자적 장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대담한 사설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언어의 해체를 부분적으로만 보게 된다면, 시적 긴장이나 정서의 절제보다는 격렬한 사설조에 조소와 풍자의 어조를 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해학을 동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장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이 풍자의 어조는 운문양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이래 으뜸 /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게 일쑤요 /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 (중략) / 서울이란 장안 한복판에 다섯도둑이 모여 살았것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그 풍자성과 격렬한 어조는 시대성 또는 상황성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실천적 의지를 보여준다. 시어의 반복과 대담한 생략, 이념적 추상성을 제거해 주는 의성 · 의태어의 활용, 시의 언어로서 부적절한 것으로 취급되어 온 비어와 속어의 배치 등은 김지하의 담시가 보여주고 있는 수사학적 특징들이다. 이러한 수사적 장치는 권위에 대한 부정, 비리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시인의 행동적 의지의 적극적인 구현을 위해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지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상은 재벌, 국회위원, 고급관료, 장차관, 장성 등이다. 이 다섯 역적을 탄핵하려 하지만, 포도대장마저 매수되어 오적(五賊)의 개집을 지키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포도대장과 오적(五賊)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벼락을 맞고 급살한다는 결말을 통해 당시 정치 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발표된 직후 시인 김지하는 반공법(反共法) 위반으로 100여 일간 투옥되었고 잡지 『사상계』는 강제 폐간당한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담시 오적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오적 [五賊]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뮤지엄 담시 오적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지(紙) 크기 가로 15 세로 21 용도 · 기능 문화예술 > 문헌 > 문학 > 시(詩) 소장처 목포자연사박물관 유물번호 문예역사(문예역사) 140036-000 1993년 5월 솔 출판사에서 펴낸 김지하 시집.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분단 시대를 통과해오면서 우리 민족문학사는 불운과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깊이 상처가 나고 그 상처는 치유를 잊은 대 거듭 덧났다. 민족문학사는 그러나 그 신음의 세월 속에서도 저 찬란한 민족사의 전통과 기억을 마침내 되살려 꽃피우니, 그 화려하고 장엄한 개화가 바로 김지하의 담시(譚詩)이다. 부정과 부패로 찌든대로 찌든 군사 독재 정권이 탄압과 흉계를 노골화하기 시작하던 1970년에 시인 김지하는 통쾌 무비하게 군사 정권의 부패상을 통타하는 내용의 장시를 (담시)라는 독창적인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민족의 무한한 문화적 긍지인 판소리 형식에 실어 당시 부정 부패의 주범들을 (오적 五賊)으로 규정, 이들의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를 통쾌하게 풍자하고 공격한 담시 (오적 五賊)은 살벌했던 군사 공포 통치에 대해 정면 항전을 전개한 민주적이고 민중적이며 애족적인 시인의 행동하는 양심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김지하의 담시가 지닌 귀중함과 탁월함은 단지 이러한 행동하는 양심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더 깊이는 오랫동안 짓눌리면서 무수히 유실되어온 우리 민족의 정통적 문화적 유산을 후련하게 복권시키고 창조적으로 계승한 민족문화사적 의의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김지하 1995년 9월 17일자 일간지에 김지하 시인은 고통과 수난, 압박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지하`란 이름을 버리고 `김형`이라는 필명(筆名)을 사용한다고 하며, 새롭게 태어난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다. 1941년 전남 목포 출생으로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했다. 그는 6.3 사태(1964) 당시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참가한 이후 1970년대를 온통 도피와 체포와 투옥을 거듭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날을 애타게 염원하며 절규하듯 살아왔다. 1963년 첫 시 를 발표한 이후, 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특유의 장시(長詩) 계열의 시들, , 등의 빼어난 70년대의 서정시들, 그리고 80년대의 `생명`에의 외경(畏敬)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생명`의 시편들을 만들어 냈다. 1975년에는 `로터스(LOTUS) 특별상`을 수상. 시집으로 (1970), (1982), (1986), (1988), (1989), 등이 있다. 관련이미지 김지하출처: (CC BY-SA)LTI Korea@wikipedia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담시 오적 (e뮤지엄)  
1449    [타산지석] - 리상, -"순간이지만 영원한 문화유전자 남기다"... 댓글:  조회:2519  추천:0  2019-12-22
죽음이 끝 아니라는 이어령, 아들 보낸 이광기가 담아낸 모습  2019년12월22일  '이상의 집'서 열린 문화유산국민신탁 행사 암 투병 이어령 전 장관 '이상의 세계' 강연 "순간이지만 영원한 문화유전자 남겼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강연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행사에 함께 하며 이날을 사진으로 기록한 방송인 이광기씨는 "암 투병 중에도 지치지 않는 지적 열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진 이광기] “사람에겐 생물학적 죽음 혹은 사회적 죽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죽지 않는 것이 있어요. 땅을 많이 남기거나 돈을 남기는 것보다, 죽음 후에도 내 생각이 끝없이 문화유전자처럼 퍼진다면 이게 하나의 희망이 되지 않겠나.(중략) 이상(본명 김해경)을 보세요. 스물일곱 살에 폐결핵으로 객사한 사람이 살던 자리에 우리가 지금 있어요. 순간이지만 영원한 것, 우리가 시간을 이기고 환란을 견디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이상이 보여주는 겁니다.” 여든 일곱 살 노학자의 나지막이 힘준 목청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 울렸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이상의 집’은 시인이자 소설‧건축가 이상(1910~1937)이 세 살 때부터 20여년 살았던 집터에 자리 잡은 일종의 기념관. 그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은밀한 이야기,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영영 몰랐을,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17일 저녁 풍경이다. 이날 행사는 ‘이상의 집’을 관리하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이하 국민신탁)이 일종의 송년 행사로 열었다. 각계 각지의 문화지킴이들 50여명이 한데 모여 작은 한옥이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암에 걸린 후 ‘투병’이 아니라 병과 친해지는 친병(親病)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온 이 전 장관의 특강 소식이 전해지면서 취재진도 몰렸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인사를 나누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연극배우 박정자씨. [사진 이광기]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이상의 시를 낭독 중인 연극배우 박정자씨. [사진 이광기] 17일 ‘이상의 집’에서 열린 '이상과의 만남' 행사 때 소리꾼 장사익씨가 ‘귀천’을 노래하자 생각에 잠겨 경청하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사진 이광기] 이들 가운데 탤런트‧방송인 이광기(50)씨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그는 사람들의 친목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소리꾼 장사익씨가 ‘귀천’을 노래할 때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상념에 빠진 이 전 장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상의 시 ‘거울’ 등 두편을 낭송한 연극배우 박정자씨와 반갑게 해후하는 모습도 잡혔다. 한발 떨어진 채, 어쩌면 마지막 될지 모를 어른의 나들이를 조심스레 기록하는 모습이었다. 이틀 뒤인 19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내에 위치한 ‘스튜디오 끼‘에서 이씨를 따로 만났다. 연기자 외에 사진작가, 미술 컬렉터로도 활동하는 그가 문화 창작자들을 매개하고 전시활동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이 전 장관과의 인연을 묻자 “매년 1월 김종규 국민신탁 이사장님, 임권택 감독님, 박정자‧손숙 선생님 등과 함께 새해 덕담 모임을 오래 해왔는데 늘 귀한 말씀 해주시는 큰 어른”이라고 소개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건강이 염려됐는데, 그날 뵈니 여전히 왕성한 지적 활력이 느껴져서 기쁘고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탤런트 출신으로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면서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내 문화창작매개공작소 '스튜디오 끼'를 운영 중인 방송인 이광기씨. [사진 끼 스튜디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방송인 이광기씨(가운데)가 정재숙 문화재청장(오른쪽)으로 감사패를 받고 김종규 이사장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씨는 국민신탁의 오랜 후원회원이기도 하다. 2010년 가입 이후 적극적으로 후원회원을 유치해온 활동 등으로 ‘이상의 집’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오기 전에 저랑 친한 개그우먼 이성미‧박미선 누나를 포함해 30명 가입신청서를 또 받아왔다”라는 소감에 박수가 쏟아졌다. ‘이상한 모임’에서 이상의 삶을 부르짖다 "이제 보니 참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어요. 문학과는 관계 없는… (건축가 김원을 가리키며) 건축도 있고, 아니, 구청장님도 오셨네. 이상한 모임이예요.(웃음)” 이 전 장관의 농담 섞인 인삿말처럼 참석자 면면은 다양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신임회장,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등이 함께 했다. 가수 조영남씨 등은 참석이 예정됐다가 자리하지 못했다. 이 전 장관 자신도 외부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황에서 “이건 외부 행사가 아니라 내부 모임”이라는 김종규 이사장 설득에 못 이겨 나왔다. 이를 두고 이씨는 “다른 곳도 아닌 ‘이상의 집’이라 더욱 각별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이상 집터는 2009년 헐릴 뻔하다가 국민신탁 및 각계 후원 덕에 가까스로 보존돼 지난해 말 재개관했다. “이상이 짧은 생을 살아갔지만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서 보여지듯, 그날 이어령 선생님을 통해서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힘을 느꼈죠.” 그랬던 이유가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상이라는 ‘잊혀진 유산’을 길어 올린 이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이라서다. 그가 1972년 문단의 ‘우상 파괴’를 주창하며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했을 때 첫호 표지가 꼽추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였다. 청년평론가 이어령은 이상에 대한 전복적인 해석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진‧자료 등 유품을 모으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서 강연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행사에 함께 하며 이날을 사진으로 기록한 방송인 이광기씨는 "암 투병 중에도 지치지 않는 지적 열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진 이광기]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17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송년 모임을 겸해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특강으로 성황을 이뤘다. 이 자리에서 발언 중인 김종규 이사장, 이 전 장관, 정재숙 문화재청장, 이홍구 전 총리.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그 유품이 곳곳에 배치된 ‘이상의 집’에서 이 전 장관은 지친 기색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 톤을 높이며 화이트보드에 맹렬하게 글씨를 휘갈겼다. 대표작 ‘날개’를 시각적‧건축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수평적 삶에서 수직적 삶으로의 이동’을 설명할 때 자리를 메운 이들이 순한 학생들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 장관은 특강에 앞서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도 ‘이상을 한국문학사에 복원시킨 것’을 첫손에 꼽았다. “올림픽‧월드컵 등을 보고 날더러 나라에 공헌했다고 하는데, 그거 내 삶에서 별로 중요한 것들 아니에요. 이벤트 ‘굴렁쇠’야 알지, 내가 공간기호론 쓴 사람인 거 아무도 몰라줘요. 나보고 장관이라 하지만 내 일생에서 장관은 2년 밖에 안 했어요. 오히려 내가 젊은 나이에 이상을 복원시켰고. 소수지만 그 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건축으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다방면에 팬들이 많은 것, 그게 나라에 공헌한 게 아닌가….”   10년 전 아들 잃은 이광기 "생명 순환은…" 이 말을 들으며 이씨는 겨울 나목(裸木)을 떠올렸다고 한다. “겨울나무가 가지 하나 없을 때는 죽었나 싶지만. 봄에 다시 꽃을 피우는 과정이잖아요. 선생님이 ‘만약 내가 없더라도 남겨진 것을 잊지 말라’면서 종자씨 같은 걸 남겨주시는 느낌이었어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맞이한 그대로 즐기시는 모습이랄까.” 뿌리가 썩지만 않으면 다시 꽃이 피는 생명의 순환. 자신의 사진작업과도 맞닿은 화두다. 앞서 이씨는 생화와 조화를 시간 경과에 따라 대조한 뒤 ‘삶이 꽃이라면 죽음은 삶의 뿌리’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한 바 있다. 이를 비롯해 임진각 피스 핀(Peace Pin) 프로젝트 등 전시·설치에 몰두하게 된 데엔 2009년 11월 아들 석규(당시 7세)를 신종플루로 잃은 고통이 깔렸다. 비탄의 낭떠러지에서 그를 끌어올려준 이가 김종규 이사장이었다. 덕분에 이어령 선생을 비롯, 많은 “인생의 어른들”을 만났고, 아이티·브룬디 등 세계 곳곳 재해·낙후 지역 봉사도 다녔다. “슬픔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배운 요즘은 문화창작·매개 및 봉사활동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세상에 되돌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말을 하면서도 그는 눈가에 차오른 물기를 닦아냈다.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흔적이 남아 떠돌고 그게 DNA로 후세에 이어지잖아요. 그 때 그 모습이 내가 남기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요즘은 옛 것과 새 것을 잇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상의 집'에서 이 전 장관도 이런 말을 남겼다. “바깥에서 이름나는 사람들은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별로 공헌한 게 없어요. 뒷골목에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끌고 갑니다. 늘 그랬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아무도 몰라주고, 외롭게 죽을 때 그는 공헌을 한 겁니다. (중략) 이상은 1930년대 외롭게 죽은 사람이지만 오늘날도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권력이나 돈을 남긴 사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의미죠.(중략) 우리가 모인 이 집은 그가 남긴 정신의 신탁이 돼 오래오래 갈 것입니다.”   '이상의 집'엔 이상의 초상화가 표지로 실린 문학사상 창간호가 전시돼 있다. 이상의 친구였던 꼽추화가 구본웅이 그린 초상화로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수집한 이상 유품들 중 하나다.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2018년 말 재개관한 '이상의 집'에 자리한 이상의 흉상. [사진 문화유산국민신탁] 2009년 헐릴 뻔했다가 가까스로 보존돼 2018년 말 재개관한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 [사진 문화재청]   중앙일보
1448    한국 최초 녀성신문... 댓글:  조회:2871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여성신문 여성운동의 한 수단으로 쓰인   요약 1947년 5월 2일, 일간지 이 창간. 발행인은 애국부인회를 이끌던 박순천. 신문이 좌우익으로 갈라진 혼란기에, 여성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목적으로 신문을 창간. 1면에는 가정·문화·연예 기사 한글 사용. 2면은 정치·경제·사회 기사 국한문 혼용. 6·25 때문에 창간 3년 만에 중단. 여성을 대상으로 맨 처음 발간된 신문은 이다. 창간일은 1947년 5월 2일. 판형은 타블로이드, 지면은 2면이었으며, 일간이었다. 발행인은 당시 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있던 박순천이었다. 애국부인회라고 하면 이승만 박사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여성단체, 이 산문의 창간도 그런 관계로 인해 계기가 된 것이었다. 광복 후 이박사가 먼저 귀국하고 나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했는데, 그 환영연에서 여성들을 위한 신문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적임자로 박순천을 추천한 사람들이 많았다. 여성 정치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박순천의 당시 나이는 50세였다. 경남 동래 출신인 그녀는 언론계엔 전혀 경험이 없었으나 의욕을 주무기로 해서 신문을 창간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인물들 중 문필과 편집 등 신문 제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있어야 할 편집국장도 지기였던 윤보선을 통해 금방 데려올 수 있었다. 윤보선은 당시 의 사장이었는데, 박순천의 부탁을 받고 막 편집부장으로 입사한 작가 최태응을 의 편집국장으로 보내준 것이다. 1947년이면 신문들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혼란스러운 때였다. 신문에서 다루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정치적인 것으로, 여성들을 위해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한 때 여성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목적으로 신문을, 그것도 일간으로 창간했다는 사실은 여간한 배짱과 추진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순천은 한편으로 주식을 팔고, 한편으로는 집을 담보로 잡아 운영자금을 확보하여 남대문로 1가에 윤전기를 갖춘 신문사를 설립했다. 창간 당시 멤버로는 최태응 이외에 구상·임옥인·임원규 등이 있었으며, 주필로는 모윤숙이, 그리고 논설위원으로는 전희복이 위촉되었다. 그러나 말이 신문사지 안에 들어가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책상 하나에 주필과 논설위원, 그리고 기자들이 둘러앉아 일을 하고 있었고, 부인회 회원들은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기사 자료를 가져왔다. 그래서 때로는 부인회 회원들의 수다를 들으며 신문을 제작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창간 때의 면면들을 보면 이 신문의 참신성과 패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시대상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들 멤버의 구성은 불과 2면짜리 일간지지만 편집방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은 그 창간 취지대로 1면에는 정치 관련 기사를 싣지 않고 가정·문화·연예면 기사를 실었다. 논조는 계몽적이었는데, 읽기 쉽도록 주로 한글을 사용했다. 2면의 정치를 비롯한 경제·사회 관련 기사만 국한문 혼용으로 실었다. 이 신문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운동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성의 문화에 가려 뒤쳐져 있는 여성들에게 자각의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 일이 이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구별이 되었던 것이다. 에 참여한 여성들은 그렇게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운동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일은 무엇보다도 신문의 보급 과정에서 나타났다. 박순천은 사장으로 일하면서 부인회의 조직을 이용하여 보급망을 넓혀나갔다. 그 규모는 부산·대구·광주·인천 등지에 지국을 둘 정도였다. 그리고 지국에서는 한 부라도 더 보급시키기 위해 먼 시골에까지 걸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부인회 회원은 20리, 30리 되는 길을 매일 걸어서 배달해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런 열성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은 창간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6·25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난으로 고전을 할 때, 운영비는 거의 지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뜻같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용지를 구하지 못해 신문을 찍을 수가 없었다. 원료를 대부분 북에서 가져왔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그 공급이 일체 중단된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결국 최초의 여성 전문 일간지로 발돋움하기 직전 은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여성신문 - 여성운동의 한 수단으로 쓰인 (한국 최초 101장면)  
1447    한국 최초 문학비... 댓글:  조회:3220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문학비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요약 이상화는 라는 시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 시인.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의 처녀작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쓰임. 대구 서문로의 한 시계포, 명금당 주인 이윤수가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고 의견을 냄. 명금당은 문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고, 수필가 김소운이 시비 건립을 제안, 만장일치로 합의.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의 시비시인이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썼다는 처녀작 가 열한 살 아들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세워진 문학비는 로 유명한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의 시비이다. 문학비는 그 대상이 되는 문인에겐 영예롭고 고귀한 기념비가 되지만,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는 창의력과 문화적 자존심을 말해주는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로부터 비석에 뭔가 새겨졌다는 것은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남다른 재능을 공인받는 일로도 여겼다. 그래서 병폐도 많았는데, 조선조 때만 해도 백성들 사이에서 개꼬리비니, 수렁밭비니, 또는 꾀꼬리비니 하고 비웃음 섞인 말은 모두 그런 데서 나온 것이었다. 생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잦은 요즘에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별로 의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비석이 도로변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오늘을 후인들은 뭐라고 할지···. 그러나 이상화 시비는 그 어떤 야유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문학을 숭상해왔던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살아 있는 혼백이다. 이상화 시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세워진 때는 1948년. 당시 대구에서 발간되던 시 전문지 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웠다. 이상화 시비가 대구에 세워지게 된 것은 시인의 고향이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시비는 충북산 오석으로 높이가 1.8m이며, 폭은 1.2m 정도다. 그 전면에는 그의 시 중 열한 번째 연인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상화는 마흔두 살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상징적인 서정시를 주로 썼던 그는 민족의 운명이 암흑기에 있던 1943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2년 앞둔 그해는 시인의 작품에 어려 있는 민족의식을 생각해볼 때 비통한 해인 것만은 분명하다. 시인 이상화는 교편을 잡고 있던 대구 교남학교에서, 나라를 빼앗겼으면 주먹 힘이라도 길러야 한다면서 권투부를 창설했다. 시인은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그의 역사 이야기와 야담 듣기를 더 좋아했고, 교가에 '만주벌 바람 타고'라는 가사를 집어넣었다가 대구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지금도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는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대신 노래해준 명작이다. 그 시인이 끝내 빼앗긴 땅에서 붓을 놓고 만 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의 대표작 가 시비에 올려지지 않은 것은 가 처녀작이기 때문이다. 상화는 이 시를 18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이상화 시비의 글씨는 상화의 셋째아들인, 당시 열한 살 된 태희가 쓴 것이다. 이상화 시비를 세우자는 최초의 의견은 대구 서문로에 있던 한 시계포에서 나왔다 시계포의 상호는 명금당. 주인은 시인 이윤수였다. 이윤수는 명금당을 편집실로 해서 을 발행해오고 있었다. 이 무렵 의 동인으로는 이윤수 외에 유치환·이응창·오란숙·박목월·이호우·이영도·김동사 등이 있었다. 소설가 윤장근이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이윤수와 죽순 주변'을 읽어보면 당시 명금당은 대구지역 문학인들뿐만이 아니라, 대구에 내려오는 타지역 예술가들에게도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명금당에 비 오는 9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밤색 중절모를 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수필가 김소운이었다. 문인들은 그래서 술자리를 마련하게 됐고, 거기서 갑자기 김소운이 이상화 시비 건립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이듬해 세우게 된 것이다. 이상화의 시에는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의 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국혼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 시인의 시비가 한국 최초의 문학비로 자리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문학비 -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비, (한국 최초 101장면) 이상화   [ 李相和 ] 이미지 크게보기 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이칭별칭 호 무량(無量), 상화(尙火), 상화(想華)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1년 ~ 1943년 성격 시인 출신지 경상북도 대구 성별 남 본관 경주(慶州) 저서(작품)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몽환병, 가상, 구루마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夢幻病)」(개벽, 1925)·「비음(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개벽, 1925)·「통곡(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화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문학과 역사적인간』(김흥규, 창작과 비평사, 1980) 『한국근대시인연구』(김학동, 일조각, 1974) 「파토스와 저항」(김준오, 『식민지시대의 시인연구』, 시인사, 1985) 「이상화시(李相和詩)의 연구사적검토」(최동호, 『이상화연구』, 새문社, 1981) 「현대한국의 낭만주의시(詩)에 관한 연구」(김용직, 『서울대학교논문집』 14, 1968)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상화와 고월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이상화 [李相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화1901-1943. 시인. 백조 동인.
1446    한국 최초 시 전문지 댓글:  조회:2997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시 전문지 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시 전문 잡지,   요약 1921년 5월 24일, 최초로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 창간. 크기는 사륙판, 23면에 15편의 시가 실림. 그중 1편은 번역시. 표지에 제호 아래 '자유시의 선구'라는 문구로 잡지 동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보여줌. 정가는 20전, 광고도 게재하고자 요금표도 실림. 그러나 2호를 내지 못하고 종간.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는 1921년 5월 24일에 창간된 이다. 이 무렵 문예지는 대개 동인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도 역시 상아탑 황석우, 월탄 박종화, 회월 박영희, 수주 변영로, 공초 오상순, 춘성 노자영, 우영 정태신, 근포 신태악, 이훈 등이 동인이 되어 발간된 것이었다. 잡지의 크기는 사륙판으로 23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1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 1편은 번역시이다. 이렇게 작은 잡지인데도 은 낭만주의를 맨 먼저 표방하고 나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박종화가 지에 기고한 '문단 1년을 회고하면서'를 보면 어느 정도 참고가 될 것이다. 1921년에 대한 회고다. 그는 힘의 문학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만 사람의 뜨거운 심장 속에는 어떠한 욕구의 피가 끓으며, 만 사람의 얽혀진 뇌 속에는 어떠한 착란의 고뇌가 허덕이느냐. 이 불안의 고뇌를 건져주고 이 광란의 핏물을 눅여줄 靈泉의 把持者는 '力의 藝術'을 가진 자이며 '力의 詩'를 읊는 자이다. 가장 경건한 태도로 강하고 뜨거운 그곳에 觀照하여 暝想의 경지를 넘어선 꿈틀꿈틀한 굵다란 線이 뛰는 듯한 하얀 종이에 시커먼 먹을 적어 椓大의 筆을 휘두른 듯한 그러한 예술의 把持者라야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 문단에는 이러한 소설가가 없으며 이러한 시인이 없다." 3·1운동 이후 많은 신문·잡지 그리고 출판물이 나와 문화적인 면에서 각성과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내용에 있어서 나약한 점을 드러내고 있는 문단에 만족치 못하는 글이다. 이 1921년에 창간되었고, 박종화가 이 문예지의 동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시인들이 어떤 각오를 지니고 이 잡지를 창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지엔 제호 아래에 '자유시의 선구'라는 문구가 실려 있어 이 잡지 동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또 그 아래엔 '선언'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첫 부분에 제호를 이라 한 연유가 있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고뇌의 촌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밟아나가는 길은 고독의 끝없이 삭막한 큰 설원이다. 우리는 이곳을 개척하여 우리의 영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촌, 장미의 훈향 높은 신과 인간과의 경하로운 화혼의 향연이 열리는 촌을 세우려 한다." 발간사에 해당하는 이 글은 수주 변영로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수주는 이 글에서 잡지가 황석우의 주도 아래 창간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판권란을 보면 황석우는 편집인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미국인 변영서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의 잡지 발행에 따른 제재를 피하기 위한 편법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잡지를 발행하려면 미리 원고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은 비록 출발은 작았지만 계획적이고 패기에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맨 뒤에는 '동인의 말'을 실어 동인들의 근황을 알려 친근감을 주었고, 독자 투고 안내문도 보인다. 정가는 20전. 광고도 게재하겠으니 참고하라면서 요금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2호를 내지 못한 채 종간되고 말았다. 회월 박영희는 1920년대를 '시의 황금시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시기에 우리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던 세 종류의 순수 문예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서도 그 표현은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가 최초로 출현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동인들의 당시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 은 재기발랄했던 젊은 문인들이 한국 문학사에 찍어놓은 작지만 분명한 족적이었다. 관련이미지 6                               이미지 이전 장미촌1921년 5월 24일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시 전문지 - 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시 전문 잡지, (한국 최초 101장면)  
1445    한국 최초 출판사... 댓글:  조회:2952  추천:0  2019-12-16
한국 최초 출판사 처음 납활자로 책을 만든 출판사, 광인사   요약 1884년, 근대적인 출판업을 하며 이윤도 추구하는 최초의 출판사 광인사 설립. 목활자 인쇄가 아닌 처음으로 납으로 만든 연활자를 사용/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해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 서적의 제작을 기획에 의해 함. 처음 출판한 책은 , 그밖에 , 이 있음. 단순히 서적을 펴내는 것을 넘어 개화의 한 수단으로 출판을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음. 1884년 3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제15호에는 여지껏 볼 수 없었던 짤막한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시내에 광인사(廣印社)라는 곳이 있는데, 민간인의 자본을 모아 세운 곳으로 장차 서적을 출판하여 이익을 얻는 한편 문화 창달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 기사는 물론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기사는 다름 아닌 최초의 출판사인 광인사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출판사 설립 보도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출판업을 하겠는데 이윤도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인사는 최초의 출판사로서 신문의 취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광인사를 출판사의 효시로 보는 이유는 첫째, 종래의 인쇄 방법인 목활자 인쇄가 아닌 납으로 만든 연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둘째,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했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서적의 제작을 기획에 의해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은 종래의 출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일이었다. 말하자면 광인사는 근대적인 출판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설립 시기는 그해 2월로 추정된다. 기사 내용으로 볼 때 광인사는 민간인이 세운 합자회사 형태의 출판사로서, 출판사업을 개화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광인사에서 펴낸 책을 보면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맨 처음 출판한 책은 「충효경집주합벽(忠孝經集註合璧)」이고, 그밖에 「농정신편(農政新篇)」과 「고환당집(古懽當集)」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이 정도이나, 광인사의 시설이나 연조로 볼 때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서적을 출판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 종류의 책만을 참고하더라도 광인사의 의도는 민중을 교화하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여, 부강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농정신편」은 안종수가 지은 것으로, 과거의 농업 전문서적과는 달리 근대과학을 토대로 한 식물학적 견지에서 씌어진 것으로, 농업기술서로서는 당시에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안종수는 4년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농업의 과학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돌아와 그에 입각해 저술한 것이 바로 「농정신편」이었다. 「고환당집」 역시 그 출판 의도는 「농정신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책은 개화해야 산다고 주장한 강위의 문집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의 문사들과 사귀며 신문물에 눈을 떴고,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에도 그곳에 들어와 있는 서양문물을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한 그의 주장은 국리민복과 관련된 것이었다. 광인사의 이러한 출판 의도는 당시로서는 서적을 펴낸다는 차원 이상으로 평가되는 것이었다. 개화의 한 수단으로 출판을 했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광인사에서 발간한 책들은 본문 용지가 한지이고, 제본도 전통의 방법인 한장(韓裝)으로 했다. 종이의 수급이나 제작상의 미비점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광인사의 시설은 꽤 규모를 갖추었던 것 같다. 를 찍었던 관영 인쇄소 박문국이 갑신정변으로 인해 불에 타자 광인사에 와서 를 인쇄하려 했기 때문이다. 광인사는 188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농정신편 / 광인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국 최초 출판사 - 처음 납활자로 책을 만든 출판사, 광인사 (한국 최초 101장면)  
1444    [문단소식] - 두만강 역 화룡 로과 호곡령에서 리욱시인 오다... 댓글:  조회:2503  추천:0  2019-12-10
중국조선족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제1회 리욱문학상 시상식 연길서 (ZOGLO) 2019년12월9일 중국조선족시인의 이름으로 명명한 첫 문학상인 ‘제1회 리욱문학상 시상식’이 지난 12월 7일 오전, 연길시 한성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연변대학 우상렬교수(차홍화 대독)가 리욱시인 소개를 하였으며 최룡관시인이 심사평을 했으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 주임, 연변작가협회 허룡석 전임 주석, 단군문학상 리사회  엄철인 사무국장,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이 축사를 했다.  방순애 회장은 환영사에서 리욱문학상을 설치하게 된 계기를 밝히면서 "시인들 모두가 리욱시인처럼 문학을 통해 사회와 력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그의 진취적 정신을 발양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최룡관 시인은 보고에서 강시나의 하이퍼시집 《굴레 씌운 말 탈출기》와 한설매시인의 하이퍼동시집 《애기 바람 꿈》이 각각 리욱문학상 성인시집상과 동시집상을 수상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전자는 돌연변이 수법의 령활한 표현으로 시의 본질인 애매성이 짙고 후자는 시에 표현되는 이미지들이 가상적이고 환각적인 동시에 천진란만한 꿈이 넘쳐흘렀다는데 그 수상리유를 밝혔다.   강시나 수상자와 함께     한설매 수상자와 함께.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박문희 편집국장은 페회사에서 "하이퍼시가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상범위를 확장함으로서 하이퍼시의 영향력을 넓히고 창작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발전에 벽돌한장이나마 쌓아올리자는 것이 우리의 초심"이라며  "문학상 상금이 많고 적기를 떠나서 그것이 우리 조선족문학의 터전에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에서이다. 더구나 태여난지 얼마 안되는 하이퍼시는 아직 성숙단계와는 거리가 먼 초기단계인만큼 아끼고 정성껏 키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앞선다."고 말했다.    리욱(1907-1984)시인은은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와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1924년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처녀작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해방전후를 이어오며 한시, 소설, 수필, 번역 등 문학창작활동을 연변땅에서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   글 조글로미디어 문야 / 사진 협회 제공  =============================================/// "구월이라/ 휘영청 푸른 하늘 아래/ 황금 국화 피였네/ 황금 국화에 솟아난/ 나의 고향/ 우리 연변!// 꽃송이에 때오르는/ 자색 노을은/ 지난 시절의 핏빛인가?// 꽃머리에 또오르는/ 꽃구름은/ 밝은 나날의 행운인가?// 고향 사람들/ 삼림으로 묶어져/ 당의 은덕 노래하거니// 황금 국화에 훤히 열린/ 연변의 하늘에/ 번영은 별무리처럼 빛나고// 황금 국화에 당실히 솟은/ 연변의 땅에/ 행복은 꽃떨기처럼 피여났네." 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리욱이 1984년 2월 사망하기 직전에 쓴 '고향'의 전문이다. 조선족 시인 리욱 (해란강닷컴 제공)   오는 15일 탄생 110주년을 맞는 리욱은 조선족 시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간도 문학을 대표했으며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토대를 일구었다. 암담했던 시절, 인간과 자연, 생명을 노래했으며, 새로운 이상과 민족의 앞날을 제시했다. 광고   그는 서정시와 서사시, 한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문학 이론,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했다.   리욱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장원. 해방 전까지는 학성, 월촌, 단림, 산금, 월파 등의 필명을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리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10년 지린 성 옌볜 허룽현으로 이주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 일대에서 저명한 한문학자인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중국과 조선의 고전을 배우며 자라 어린 나이에 한문에 능통하고 한시를 잘 썼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에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24년 1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간도 지역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만두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일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부지런히 시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리욱은 시인 김조규와 함께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재만조선시인집'을 간행하여 조선족 문단의 결집을 도모했다. 해방 이후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옌지중소한문회협회 문학국장, 문예지 ‘불꽃’의 편집 등을 맡아 조선족 문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조선족 문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동북군정대학에 들어가 혁명이론을 학습하며 첫 시집 '북두성'을 출간했다. 졸업 후 잡지 '대중'의 주필 겸 옌볜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북륜의 서정'을 펴냈다. 그는 옌볜대학을 세우는 데 참여했고, 옌볜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말부터 옌볜대학 조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소련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혁명적 사실주의 창작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리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시기 새로운 국가체제 안에서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모색했다. 1956년 조선족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해 중국작가협회 옌볜분회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족 문학이 중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받는 동시에 독자적인 문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중국 문학과의 교류에 힘썼다. 중국어로 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동 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교수자격은 취소됐으며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벽지 농촌으로 추방됐다.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지나고 복권된 리욱은 다시 시 창작에 힘을 쏟아 1980년 73세의 나이로 '리욱 시선집'을 내놓았다. 리욱은 시집으로 '북두성'(1947), '북륙의 정서'(1949), '고향사람들'(1957), '장백산하'(1959), '연변의 노래'(한문. 1959), '리욱시선집'(1980) 등을 남겼고, 이론서 '현대소설의 구성'을 출판했다. 1982년 항일투사들의 영웅적 투쟁을 담은 장편서사시 '풍운기' 제1부를 펴냈고 이어 제2부를 쓰다가 1984년 2월 6일 77세를 일기로 뇌일혈로 사망했다. '풍운기' 제2부는 유고로 발표됐다. 시집 '고향사람들'은 조선족의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소재로, 간도 개척 과정에서 발생했던 지주와의 투쟁, 만주사변 이후 장백산을 근거지로 벌였던 유격전, 항일 전쟁 이후 승리의 감격 등을 주 내용으로 하여 조선족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물에 대한 순수한 서정에서부터 간도 조선인들이 처한 삶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향한 열정, 역사적 항쟁과 혁명적 투지, 그리고 인생을 반추하는 명상적 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의 아들 리선호는 2015년 2월 9일 옌볜도서관에서 열린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세미나에서 "아버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가 일자무식이였지만 항상 어머니를 존중해주셨다. 자식들이 책을 사고 싶어 할 때마다 기꺼이 사주셨다. 아버지와 함께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모두들 우리 집에 쌍봉황이 날아들어 온다고 기뻐해 주셨다. '너무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틀을 벗어나 사는 것도 좋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리욱의 생애는 일제 치하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수립, 문화대혁명 등 격변기에 시련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 당당한 소수민족으로 정착한 200만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보여 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나 중국 땅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이며 개척사이다. / 김은주
1443    "하늘나라 천사가 눈 뜨는 별" 댓글:  조회:2384  추천:0  2019-12-04
[평론] ‘광란’ 속의 동요와 동시   1. 서론 문학발전사의 시각으로부터 보면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망명문학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사실상 비교적 긴 력사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단독적으로 동요나 동시를 실례로 든다면 다른 상황으로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문학발전사를 근거로 하여도 망명문학시기에는 동요나 동시와 같은 아동문학이 탄생되기 힘든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비교적 긴 력사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요나 동시 같은 아동문학은 사실상 1920년도 즉 이민문학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아야 한다. 상기에 언급한 것을 기초로 하여 본문에서는 당시 위만주국에서 동요나 동시와 같은 아동문학을 언급하였던 《북향》, 《카톨릭소년》, 《만몽일보》, 《만선일보》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2. 동요, 동시와 동심 우선 동요와 동시에 대해 리해하려면 아동문학에 대해 리해하여야 한다. 아동문학이란 어린이들한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의의로 하고 어린이들의 심신의 긴장을 풀고 욕구불만을 해소함으로써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학형식이다. 1930년대 이전까지 동요와 동시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은 두 분야였다. 이러한 경향은 1950―1960년대 초기까지 지속되였는데 심지어 많은 자유시들은 동요라는 이름을 달고 발표되였고 동요 모집 콩쿠르에서 동시와 동요를 통털어 이야기하는 경향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애착이 더 가면서 1980년대 동시 문학이 소실되는 위기에 도달하자 1981년에 ‘동요로 돌아가자’는 〈동요문학〉선언을 공포하고 동요의 참담한 모습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보면 본문에서는 해방전 동요와 동시를 동시에 언급하여도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어둡고 슬픈 ‘광란’의 년대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에 태여난 순수하고 깨끗한 ‘평심’을 위하여 창작된 동요와 동시들에 대해 론술을 진행하였다. 3. 북향회의 기관지ㅡ《북향》 《북향》은 1935년 10월에 룡정에서 무어진 문학단체 ‘북향회’에서 꾸린 문학잡지로서 도합 4호를 내였는데 주필은 리주복이고 편집위원들로는 안수길, 천청송, 김유훈 등이였다. 방울(동요) 정룡화 방울방울 무슨 방울/ 땡굴땡굴/ 왕방울// 방울방울 무슨 방울/ 떨렁떨렁/ 말방울// ―《북향》 제3호 여기서 왕방울과 말방울의 소리를 ‘땡굴땡굴’이나 ‘떨렁떨렁’과 같은 의성어를 사용하면서 어른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소리에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은 동심을 나타냈다. 다음 동요 〈골방쥐〉를 보자. 골방쥐(동요) 김릉 좁쌀단지에 골방쥐 드럿다/ 일 안하고도 먹고만 노는 놈/ 때려잡아라 에이차 에이차// 불눅뱃둑이 골방쥐 달는다/ 일 안하고도 훔처만 먹는 놈/ 쪼처가거라 하나둘 하나둘// ―《북향》 제3호 1934. 9. 25 여기서 말하는 골방쥐는 순 우리말로써 골방이나 지붕에서 사는 쥐를 말한다. 동요 〈골방쥐〉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도 좁쌀단지에서 먹을 것을 탐내는 쥐를 보면서 이것을 때려잡아라고 “에이차, 에이차” 소리를 친다. 또한 제2련에서는 좁쌀단지에서 좁쌀을 훔쳐먹은 관계로 인하여 불눅(불룩)하게 뱃둑(배)이 나온 골방쥐를 “하나둘, 하나둘” 하면서 쫓아가는 모습을 생동하게 그렸다. 상기에 언급한 것과 같이 〈골방쥐〉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생동하게 묘사하면서 동심을 만족시켰다. 4. 카톨릭소년사에서 발행한 《카톨릭소년》 《카톨릭소년》은 간도 룡정천주교회 카톨릭소년사에서 1936년 2월에 발행한 아동잡지이다. 도합 9호를 내고 1938년 9월에 페간되였다. 창간시기의 사장은 배광피, 총장은 독일인 철학박사 백주교(白主教)이며 주필은 황덕영이였다. 우선 동시 〈별〉을 보자. 별(동시) 방수룡 반작! 반작!/ 저녁하늘에 별들이 반작!/ 하늘나라 천사가 눈 뜨는 거래// 총 3구절로 구성된 동시〈별〉이다. 카톨릭소년사의 성질에 맞추어 천사라는 추상적인 요소를 사용하였다. 이 시에서는 저녁에만 볼 수 있는 별을 천사가 눈을 뜬다는 것에 비유를 시켰는데 이는 동심에서 많이 나올 수 있는 비론리적인 유희색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나타나고 있는 별들을 천사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으로 비유를 하는 것과 같이 비론리적이지만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호상 련결시키는 것이야말로 동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동시 〈가랑닙〉을 보자. 가랑닙(동시) 방수룡 욹읏붉읏 고읍게 물든 가랑닙/ 가랑닙 하나 주어 편지할가요/ 여기두 지금은 가을이라구/ 시골 게신 엄마한테 편지할가요// 욹읏뷹읏 고읍게 물든 가랑닙/ 가랑닙 하나 주어 편지할가요/ 나두 이런 꼭까옷을 입엇다구요/ 서울 게신 누나한테 편지할가요// 〈가랑닙〉에서 우리가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에서 언급하였던 〈별〉과 〈눈 내리는 저녁〉과는 달리 종교적인 요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체적인 시의 내용을 보면 가을의 단풍잎을 손에 들고 고향에 계신 엄마와 누나한테 편지를 쓰려는 것이다. 하지만 시골은 이미 가을이 되였는데 시적 주인공이 생활하고 있는 곳도 가을이 되였다고 편지를 쓰려 하는 모습, ‘꼭까옷(고운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여 기쁜 마음으로 서울에 있는 누나한테 편지를 쓰는 모습 등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접촉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어린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5. 《만선일보》와 《만몽일보》 여기서 말하는 《만몽일보》는 《만선일보》의 전신으로서 1933년 8월 25일에 창간되였고 1937년 10월 21일부터 《간도일보》와 더불어 《만선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만몽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위만주국 신경에서 발행된 친일 일간신문이고 《만선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난 후에는 평균 일주일간으로 진행되였고 1945년까지 어언 8년을 출간하였다. 우선 〈오리〉를 보자. 오리 리광현 돌돌돌돌 물소리 따라/ 아장아장 거러가지/ 오리오리 물오리가/ 물을 따라 차저가지// 돌돌돌돌 물소리 따라/ 갸웃갸웃 살펴보지/ 물이물이 어듸 잇나/ 아장아장 차저가지// 돌돌돌돌 물소리따라/ 오리오리 아장아장/ 물이물이 그리워서/ 소리차저 쭝긋쭝긋// ―《만몽일보》1937. 7. 21 〈오리〉는 내물가에서 걸어다니고 있는 오리를 보고 묘사하였다. 〈둥근달님〉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흐름이나 사물의 특징을 어린이다운 시선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고 있고 ‘돌돌돌돌, 아장아장, 갸웃갸웃’과 같은 소리나 동작을 묘사하는 반복어와 ‘오리오리, 물이물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만선일보》에 수록된 〈누가누가 잠자나〉를 보자. 누가누가 잠자나 리우범 끗도 없는 밤하날엔/ 누가누가 잠자-나/ 빤짝빤짝 아기별님/ 까물까물 잠자-지// 우수수한 숩속에선/ 누가누가 잠자-나/ 엄마 일흔 참새아기/ 바들바들 잠자-지// 포근포근 이불밋헨/ 누가누가 잠자-나/ 오동보동 우리 아기/ 새근새근 잠자-지// ―《만선일보》1940. 3. 3 시 전체를 놓고 보면 어른의 시각으로부터 ‘우리 아기’가 잠자는 모습에 대해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밖에서 ‘까물까물’ 잠자는 별과 ‘바들바들’ 잠자는 참새와는 달리 ‘포근포근’한 이불 밑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오동보동(포동포동)’한 아이이다. 작품은 전체적인 묘사를 진행하면서 집이야말로 따스하고 포근함을 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6. 결론 우에서 론술한 것을 기초로 보면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거나 심각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동문학이라는 천성적인 속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자주 보는 ‘성인문학’과는 다른 심리적 각도가 기초로 될 것이고 이러한 기초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과 다종다양한 환상이 주류로 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그 당시의 의식형태와 제도의 공해도 보다 적게 받고 순수하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심리세계가 나타나고 비리성적인 사유의 단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춘련
1442    글쟁이들과 조선말규범... 댓글:  조회:2517  추천:0  2019-12-04
글쟁이들의 직업정신□ 리련화 풍향계 2019-11-29 10:25:15     글쟁이들의 직업정신 / 리련화 취재통지가 오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주최측(主办单位), 주관측(承办单位)에 대한 정보이다. 그런데 행사에 가보면 프랑카드에 버젓이 주최측과 주관측을 바꿔 쓴 사례가 많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주최’란 “행사나 모임을 주장하고 기획하여 엶.”이고 ‘주관’은 “어떤 일을 책임을 지고 맡아 관리함.”이다. 굳이 간단한 비유를 하자면 아버지께서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손님접대, 음식준비는 어머니가 하였다고 하면 아버지는 주최측이 되고 어머니는 주관측이 된다. 우리 기자들도 헛갈릴 때가 많아서 ‘최관협’이라고 외우기도 한다. 행정사업을 하는 친구들은 가끔씩 회의 혹은 행사 프랑카드 번역을 나에게 물어보면서 페를 끼친다고 미안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을 치며 “이런 번역은 나한테 맡겨!” 하고 오지랖 넓게 나선다. 내가 번역을 잘한다기보다는 《연변일보》 기자로서 알맞는 번역과 옳바른 표기법에 자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새로운 《조선말규범집》이 출판된 후 《연변일보》에서는 통일적인 학습시간을 갖고 테스트까지 진행했다. 그만큼 《연변일보》는 정통일간지로서 장기간 우리 말, 우리 글의 옳바른 표기법의 든든한 기치로 앞장서왔다. 가끔씩 일부 독자들이 전화가 와서 나의 글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 지적이 아무 근거가 없는, 자신만의 자대로 지적하는 것이라서 나는 당당히 반박한다. “저는 새로 나온 조선말규범집에 근거해서 쓴 겁니다. 그 책을 학습했으면 좋겠네요.” 《조선말규범집》은 약 23만자 분량이다. 책을 펼치노라면 새롭게 바뀐 규범들이 눈에 띈다. 특히 문장부호가 많이 바뀌였다. 례를 들어 도서, 신문잡지의 이름과 영화, 드라마 등은 《》부호이고 글제목, 그림이나 노래와 같은 예술작품의 제목, 상호, 법률, 규정 등을 나타낼 때는 부호를 쓴다. 물론 언어문자는 사회적 속성을 띠였기 때문에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자주 변화한다. 우리의 언어도 10년 사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럴수록 우리에게는 언어규범이 더 필요하다. 조선어규범이 새롭게 바뀐 지도 3년이 다돼간다. 그럼에도 지금도 투고한 글을 받아보면 옛 기준 대로 쓴 작가들이 많다. 지어 옛 기준은커녕 틀린 철자가 수두룩한 문장도 많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라 해도 틀린 철자를 보면 자연히 눈이 찌프러지기 마련이다. 문장의 가치도 자연히 감점이 된다. 가끔씩 문장부호 한곳 고칠 데 없이 물이 못나게 완성해서 보내온 글을 보면 그런 작가들에게는 존경심이 들고, 단정한 직업정신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자연히 그런 글들은 소중히 다루게 된다. 조선말규범을 지키는 일은 편집만의 일이 아니다. 무릇 글을 쓴다면, 아니 조선족이라면 다 학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고심해서 쓰는 작품인데, 틈틈이 조선어규범을 학습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바람이다. 작가들이, 기자들이, 더 나아가서 우리 글을 가르치는 교원들이 조선말규범을 학습하고 지키는 것은 자기 직업에 대한 근엄한 태도이자 자기 작품, 자기 학생에 대한 책임이다.
1441    "새의 지저귐 소리를 알아 들을수 있어야?!..." 댓글:  조회:2076  추천:0  2019-11-30
황홀한 시의 세계 2019년 11월 29일 작성자: 강룡운 황홀한 시의 세계 □ 강룡운   1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다. 소학교 다닐 땐 동요 동시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기천의 시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한 선생님은 휴교일이면 자주 학교에 나와 조용한 교무실에서 우람찬 목소리로 조기천의 시를 랑송하군 하였는데 격정에 차넘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가끔 선생님처럼 시랑송을 해보면서 시의 황홀경에 빠져보았다. 그 시절엔 무턱대고 시를 좋아하였기에 그저 손에 닥치는 대로 뿌쉬낀이며 레르몬또브며 이싸꼽쓰끼의 시집들을 들고 다니면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도 열심히 읽군 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해서는 김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그 아름다운 음률에 심취된 듯 때로는 시를 쓴답시고 무병신음 (无病呻吟)도 해보았고 한때는 마야꼽쓰끼와 하경지의 시를 흔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공이 중국문학이다 보니 주로는 당송시사(唐诗宋词)를 많이 접하게 되였고 ‘문화대혁명’ 때는 모택동의 시사를 최고의 시로 간주하기도 했었다.   2 이렇게 나도 명색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점점 시를 멀리하게 되였다. 왜 이렇게 되였을까? 그것은 줄곧 전통시만 읽어오던 나로서는 현대시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태여나는 시들을 보게 되면 아무리 읽어봐도 도통 그 뜻을 리해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다들 이미지시를 현대시라고 지칭한다. 한 시인이 쓴 《이미지》란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짱 처음 보는 것들이구나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니고 죄다 이 생 저 생에도 없는 것들 불과 물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닌 이런 시구들을 도대체 어떻게 리해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차츰 시와는 담을 쌓고 일찌감치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잡지나 신문지상에서 시를 보게 되여도 아예 곁눈조차 주지 않았다.   3 최근 몇년간 나는 북경, 청도, 무석 등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면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는데 금년 여름엔 무석이란 고장이 어찌나 무더운지 무작정 피서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7년 4월에 출간한 최룡관 저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책을 손에 쥐게 되였다. 범굴에 들어가야 범새끼를 잡고 배를 먹어봐야 배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만년에는 흔하디 흔한 게 시간이고 날마다 남아 도는 게 시간인지라 나는 어디 한번 시간을 허비해볼 셈 치고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이 범의 굴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작심했다.   4 최룡관 시인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알심들여 집필한 《이미지시 창작론》은 수많은 동서고금의 명시들을 이미지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48만자에 달하는 현대시론에 관한 전문적인 문학저서로서 우리 연변에선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미증유의 거작이였다. 그래서 나는 최룡관 시인이 우리 겨레 문학 발전을 위하여 큰 일을 해놓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자유문학》 문학계간(季刊)이 2008년 가을호 69기부터 시작하여 2011년 여름호 80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년동안이나 12기에 나누어 연변 조선족시인이 쓴 시론 《이미지시 창작론》을 련재했다는 것은 두말할것없이 이 책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최룡관 시인이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현대시의 세계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낮설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한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5 그러면 먼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 시인의 대표작부터 읽어보자.   하아얀 너울을 쓴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 휘우듬히 반원으로 둘러서서 장엄한 교향곡을 울린다 튕기는 하아얀 목소리에 하아얀 악음에 젖어 속세의 어지러움과 소음 쥐죽은 나라로 달아나고 청신과 순수만 메아리쳐 구중천을 휘젓는다 천만년 부르고 불러도 끝이 없는 다부작 연주 그속에서 한번만 젖어봐도 혼령마저 시원히 가셔지는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이여   이것은 최룡관 시인이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응준님의 수많은 시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으로 점찍은 “나이아가라폭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폭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한마디도 없다. 제목에 ‘나이아가라폭포’란 명칭이 있을 뿐 본문에는 폭포라는 언어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시가 바로 이미지시,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훌륭한 현대시도 온통 변형투성이라는 리유 때문에, 그리고 전통시처럼 쉽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리유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외면하여 왔다. 그런데 최룡관 시인이 펴낸《이미지시 창작론》을 읽고나니 김응준 시인의 “나이아가라폭포”를 비롯하여 김철 시인의 “대장간 모루우에서”, 조룡남 시인의 “옥을 파간 자리”, 리상각 시인의 “파도” 등 현대시 대표작품들이 차츰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고 비록 아직까지는 많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리해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현대시들의 묘미에 대해서도 재삼 음미해볼 수 있게 되였다.   6 서혜의 골짜기 파란 잔디밭에서 고독의 피스튼이 작업한다 한쌍 꽃망울의 향로에 취하여 무아의 황홀이 퍼득거림이여 비탄의 발광속에서 하늘의 열림이여 대지가 태여남이여 부옇게 휘여든 하늘에서 흐느끼는 구름구름 훨훨 태양의 힘찬 날개짓 아늑한 자장가의 부드러운 바람결에 별들이 익어가는 소리 생성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대지의 희열이여 면면한 산발은 그대 기발의 물결이런가 오색이 피여나는 오색의 소리는 그대의 아름다운 노래런가   이것은 최룡관 시인의 “고독의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한 부분이다. 몇번 읽어봐도 무엇을 썼는지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으면서도 알듯말듯 아리숭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참 아름답다. 게다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시이므로. 독자 나름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있기에 각양각색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시를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만약 자연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을 생각나는 그대로 직설한다면 그것 역시 문학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 만물 중에는 직선이라는 게 없다. 곡선미가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직선은 예술이 아니다. 미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직설적으로 씌여진 시는 문학이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자가 독자에게 전혀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례외없이 미를 추구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예술의 궁국적인 미적 감수는 애오라지 수용자의 상상과 재구성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미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 나는 온 세상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피카소의 일부 대표작들을 감상하면서 나도 남들처럼 그것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엄청난 천문학적인 수자로 헤아려지는 값어치를 지니게 된 명화들인가를 리해해보려고 무등 애를 써보았다. 그런데 그 게 다 허사였다. 아직까지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마냥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읽었던 피카소에 관한 한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였다.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그림은 어찌하여 그렇게 알아보기 힘든 겁니까?” 그러자 피카소가 되려 그 사람에게 물었단다. 그들의 일문일답은 아래와 같다 “당신은 새의 지저귐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까?” “예, 듣기 좋았습니다.” “그럼 그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이 일문일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2015년 9월 15일 연길에서)  
1440    반삭발을 한 윤동주... 댓글:  조회:2713  추천:0  2019-11-24
  윤동주가 한 학기 만에 릿쿄대학 그만둔 사연  2019.11.2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도쿄편⑦] 윤동주의 일본 유학 시절 [오마이뉴스 김보예 기자] ...이어 일본에서 윤동주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은 크게 도쿄에서의 생활(릿쿄대학, 立敎大學)과 교토에서의 생활(도시샤대학, 同志社大學)로 나뉜다. [도쿄편⑦]과 [도쿄편⑧]에서는 릿쿄대학 재학 시절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도쿄, 미션스쿨 릿쿄대학에 입학한 윤동주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단짝인 송몽규와 함께, 1942년 1월에 교토제국대학(현재 교토대학)에 입시 시험을 본다. 그러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윤동주는 떨어진다. 윤동주는 차선으로 릿쿄대학의 입시를 다시 보고, 릿쿄대학의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윤동주와 송몽규가 유학 입시로 인해 처음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릿쿄대학은 기독교 신교의 한 교파인 '성공회(聖公會)'에서 경영하는 미션스쿨이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성공회'는 당시 통치자였던 쇼와(昭和) 일왕의 친동생 중 한 명이 영국 유학 중에 성공회 신자가 되어 돌아옴으로써 황실의 배경을 갖게 되었다. 때문에 '성공회(聖公會)'는 신사(神社)와 황실(皇室)이 숭상되고 불교(佛敎)가 치성인 일본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릿쿄대학은 이런 튼튼한 배경 아래 경영되고 있는 좋은 대학이었다.   ▲ 릿쿄대학 전경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그러나 윤동주가 실질적으로 릿쿄대학에 다닌 기간은 매우 짧다. 릿쿄대학의 학적부를 보면 '1942년 12월 퇴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봄학기가 4월 시작, 가을학기가 10월인 것을 생각하면,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실제로 1942년 가을학기(10월)부터는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에 다니기 시작한다. 윤동주는 7월 하순, 여름방학을 맞아 약 2주간 북간도 용정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윤동주의 모친이 병환 중이었는데, 모친의 병석 가까이에서 이야기 동무를 해 드리고 있을 때, 일본에서 전보가 왔다고 한다. 도호쿠제국대학(현재, 도호쿠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한국인)가 본인 대학의 편입 수속을 치르러 오라는 전보였다. 편입 시험 등 각종 수속을 치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는지, 윤동주는 급히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부터 윤동주는 릿쿄대에 계속 다닐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공식 나라명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대학 이름에 '제국(帝國)'이 들어가면 명문국립대학이었다. 명문 학벌에 대한 선망이 만연했던 당시, 윤동주의 부친은 윤동주가 제국대학 중 하나에 다니길 바랐다. 그러나 윤동주가 옮겨 간 곳은 교토에 있는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이었고, 전보를 받은 윤동주 부친은 노여워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북간도 집으로 가기 전부터 도시샤대학에 전학 갈 예정이었으나, 제국대학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부친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7월 하순, 윤동주의 도쿄 하숙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는 교토로 내려갈 이삿짐을 꾸렸다고 한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을 떠난 사연, '교련 수업 거부' 윤동주 왜 이토록 급하게 릿쿄대학을 떠났을까? 릿쿄대학도 좋은 사립 미션스쿨이기에 또 다른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으로 굳이 전학을 갈 필요가 없었다. 윤동주가 교토에 있는 학교로 옮겨간 이유로는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의 영향을 많이 꼽는다. 물론 송몽규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교련 수업 거부'로 보인다.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씨는 1942년 4월 10일 자 으로부터, '學部斷髮令四月中旬實施'(학부 단발령 4월 중순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학생 중에서 교련을 거부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군국주의 사상이 세간을 지배하고 있을 때, '교련 수업 거부'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영화 에서도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을 당하는 윤동주가 묘사된다. 실제로 윤동주가 거행한 '교련 수업 거부'는 교련복을 입지 않은 채, 교련 수업에 출석한 것이었다.   ▲  영화 ‘동주’ 속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 당하는 윤동주(강하늘 역) ⓒ (주)루스이소니도스   1941년 가을, 육군 대좌 이지마 노부유키(飯島信之)가 릿쿄대학의 군사훈련 담당 교관으로 배속된다. 남학생들은 누구나 매주 1시간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그는 릿쿄대학에 오기 전에 같은 기독교 학교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대학에 있을 때도 어찌나 횡포가 심했는지, 그가 릿쿄대학으로 옮겨갈 때 메이지대학에서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릿쿄대학의 학생 중, 이지마 대좌에게 미움을 사 '교련 출석 정지' 조치를 당하고 '징병 연기'가 취소되어, 군대에 입대한 학생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군국주의가 일본의 모든 대학에 만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7월 하순, 윤동주가 고향집 북간도를 방문했을 때, 송몽규도 맞추어서 일시 귀향한다. 이때,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친지들과 함께 1942년 8월 4일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속에 반삭발한 사람은 윤동주뿐이 없다. 윤동주가 이토록 급히 릿쿄대를 떠난 것은 '교련 수업'에 대한 반감으로, '교련 수업'이 거행되지 않는 교토 지역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  1942년 8월 4일, 마지막 귀향 때, 남긴 사진. 뒷줄 오른쪽 반삭발 머리가 윤동주, 앞줄 가운데 안경을 낀 사람이 송몽규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올려진 사진 재촬영. ⓒ 시정시학   윤동주가 애정한 과목 , 1104호 교실 릿쿄대학에서 윤동주가 이수한 과목을 살펴보면 봄학기에 ,으로 단 두 과목만 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릿쿄대학에서 수강한 과목 중, 는 윤동주가 가장 애정한 수업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동양철학사를 들은 교실은 릿대교대학 정문에서 보이는 건물 1층에 있는 1104호 교실이다. 릿쿄대학 교목 김대원 신부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의 1104호 교실은 당시의 작은 교실 2개를 이어 넓게 만든 것이라고 하니,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의 1104호 교실은 지금의 약 절반 정도의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 윤동주가 수업을 들은 릿쿄대학의 1104호 교실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윤동주는 일본 유학 시절 한국에서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시를 지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1944년에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 죄'로 체포되었을 당시, 거의 모든 시가 압수되어 처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습유작품(拾遺作品)으로는 '흰 그림자' '사랑스런 追憶(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여진 詩(시)' '봄' 이렇게 5편의 시가 있다. 5편의 시 모두, 릿쿄대학 재학 시절에 적은 시이다. 위의 5편의 시가 압수되지 않은 이유는, 위의 시만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당시, 친우였던 강처중에게 한국으로 우송(郵送)하였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 습유작품 중, '쉽게 씌여진 시'에는 '노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구절이 있다. 연구자 야나기하라 씨는, 시 속의 '노교수'는 를 가르친 우노 데쓰토(宇野哲人) 교수라고 밝혔다. 우노 교수는 일본 동양철학계의 거목이자 도쿄제국대학의 명예교수로, 당시 릿쿄대학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였다. 이쯤해서 영화 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에 나온 교수는 누가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 (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2019년9월16일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용정시에서는 길가에 우뚝 솟은 웅장한 바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선바위'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사격훈련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선바위가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명동촌'이다. 이곳은 북간도 한인 문화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북간도로 옮겨와 새로운 터전을 다졌던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에서 눈에 띌 만큼 모범적인 공동체로 평가된다. 이곳은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이상적인 기독교 신앙촌이었다. 명동촌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와 같은 시대정신을 꽃피웠다. 바로 이곳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터전으로 다진 1세대에 이어 등장한, 윤동주가 포함된 명동촌 2세대는 부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나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일궈낸 승리의 기쁨은 물론 패배의 아픔까지 모두 듣고 자란 그들은, 민족 의식과 기독교 사상이 결합한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몸에 익히고 자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의 삶과 사상을 압축해 놓은 듯한 '서시'는 분명 이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리라. ◇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관념 아니라 뚜렷한 의미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여느 명동촌 집안처럼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고 삶의 태도를 다졌다. '십자가'와 같은 그의 시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기독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윤동주는 1936년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시, 시, 산문 등을 발표하면서 시집 간행의 꿈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러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극에 달한 일제의 탄압 탓에 한국어 사용과 창작이 금지됐던 시기다. 1941년 윤동주가 우리말 시집 출간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결국 그의 사후인 1948년, 어렵사리 보존된 육필 원고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윤동주의 생을 대변하는 시들은 그렇게 빛을 봤다. 익히 알려졌듯이 윤동주 시에는 '하늘'이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 연구에 천착해 온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을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한다.   그 첫 번째는 '맹자'에 나오는 하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의미는 '자아성찰의 대상'으로서 하늘이다. "(윤동주 시)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 "윤동주 정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줘"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발 붙인 시대, 그리고 그 험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을 향했던 두 눈과 가슴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그 뚜렷한 증거다.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며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윤동주의 시는 치열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김 교수 표현을 빌리면 윤동주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서시'를 두고도 김 교수는 "결국 윤동주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준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언론, 논문이 윤동주를 '자아성찰' 안에 가두고 있다"며 "윤동주는 그야말로 혁명의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 김 교수는 윤동주 시의 구절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 '십자가' 중에서),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시 '간' 중에서) 등을 들었다. 김 교수는 "윤동주처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고도 고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방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쪼개어 자기 능력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꼭 정치적 행위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피는 사회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고 믿는다. 윤동주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1439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철학가 - 고자 댓글:  조회:2885  추천:0  2019-11-20
두산백과 고자   [ 告子 ] 출생-사망 ? ~ ? 본명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국적 중국 제(齊) 활동분야 철학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고자의 존재를 알수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자 [告子] (두산백과)  
1438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법가학파 - 한비자 댓글:  조회:3189  추천:0  2019-11-20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한비자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韓非子 ] 목차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년)의 이름은 한비이고 전국 말기 한(韓) 출신이다.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34년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 13년으로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해 진왕 정이 한을 공격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진은 6국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6국 중에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진왕 정은 6국을 소멸시키는 자신의 숙원을 위해 인재를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진왕 정이 언젠가 한비자의 저술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고는 깜짝 놀라며 이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기재일 것이며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사(李斯)에게 감탄을 연발하며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는 "이것은 한비자란 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왕 정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 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비자를 지명하며 진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왕은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저주받은 비서(秘書)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한비자와 이사는 사실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도 잘 꾸미지 못했다. 하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썼다. 이사는 이런 한비자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책했다. 『한비자』는 군왕들이 보라고 쓴 책이다. 한비자는 유가 학설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권술(權術)에 대해 대서특필하여 훗날 군주가 전제독재로 신하를 통제하는 데 이론과 방법을 제공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씩씩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또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나라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로 허영과 사치에 빠져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갈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었고, 이 자들의 지위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보다 더 높았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 『오두』,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왕은 당초 한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비로소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자청하게 했다. 진은 한비자를 억류시킨 다음 단숨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이는 한비자가 제창한 치국의 길이었다. 한비자가 말하는 '법'은 상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술'은 신불해(申不害)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불해와 공손앙(상앙)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나라에 더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제다. 사람은 열흘 이상 먹지 않으면 죽고, 아주 추운 날씨에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 그런데 옷과 음식 중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긴요하냐고 묻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이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한비자』 「정법」) 그는 국가에서 '법'과 '술'은 사람에게 있어서 옷이나 음식과 같은 것으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법이란 먼저 관부에서 공포하여, 지키면 상을 받고 명령을 어기면 처벌받아 상과 벌이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법'이란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조령(條令) 같은 것으로, 이 조령은 각종 상벌 조건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군주에 복종하면 상을 받고 저항하면 벌을 받도록 한다. '술'에 대해서 한비자는 "지금 신불해는 '술'을 공손앙은 '법'을 제창하고 있다. '술'이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되 그 관직에 따른 직책을 맡긴 다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군주가 장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군주가 관직 임명과 일처리에 대한 검사,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 신하들을 심사하는 일 등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통치에서 '법'과 '술'이 갖는 중요성은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윗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밑에서 난리를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것이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법'과 '술'을 장악하여 운용하는 종합적 원칙은 "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 재물을 얻게 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빈부를 고르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 간사한 악행을 끊는다. 백성들이 땀을 흘려 일해서 부를 쌓고, 직무를 잘 처리하여 귀한 지위에 오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공적을 세워 상을 받게 하고 군주의 인자한 은혜만을 바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다(「육반」)"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법은 드러내는 것이 낫고 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략적 사상을 강조한다. 이 말의 뜻은 '법'은 널리 선전하여 집집마다 다 알게 해야 하고, '술'는 마음속에 꼭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을 통치하고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勢)'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킨다. 통치자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세'를 탈 줄 알면 좋은 사람도 나쁜 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유능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못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통치자로서 현명한 군신은 자신의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지만, 간사한 군신은 권력으로 백성과 어진 사람을 해친다. 군왕이라면 권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우화 한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조보(造父)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부자가 마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놀라 더 이상 가려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마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말을 끌고 아버지는 뒤에서 마차를 밀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밭을 갈고 있던 조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보는 농기구를 챙긴 다음 마차 위로 뛰어올라 말을 모는 자리에 앉은 다음 고삐를 잡고 채찍을 드니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이 고사를 이용하여 신하와 백성을 다루는 현명한 군주의 이치를 설명한다. 조보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더라면 있는 힘을 다해 마차를 미는 일을 도왔을 것이고, 그러면 말은 계속 버티고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보가 마부 자리에 편히 앉은 것은 그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군주에 있어서 국가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군주의 '세(권력)'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 없다는 것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피로하면 국가는 환란을 면하기 어렵고, 몸을 편안한 곳에 두면 국가도 다스려져 부강해질 것이다. 한비자는 현명한 군주는 "관리들만 잘 감독할 뿐이지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나무줄기를 흔들면 나무 전체 잎사귀가 흔들리게 되고,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힘들이지 않고 그물을 펼 수 있는 이치가 바로 이런 도리다(「외저설·우하」)"라고 말한다. 또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몰리고,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외저설·좌상」)"고도 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는 데는 효과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필요가 없고 각급 관리들을 통하여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줄기를 흔드는 것과 같아, 나무 전체가 흔들리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연못 주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도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연못 속의 물고기들은 바닥으로 숨는다. 또 그물을 잘 던지는 사람은 그물의 벼리만을 쥐면 되지, 그 많은 그물코를 일일이 건드리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관리는 나무줄기와 그물의 벼리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는 이 관리들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 불을 끄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다. 관리들에게 직접 물동이를 들고 가서 불을 끄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들에게 채찍이나 지휘용 깃발을 들게 하여 만 명의 백성들을 지휘하면 빨리 불을 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한비자는 또 백성들을 너무 사납게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앞서 인용한 조보의 이야기를 다시 들고 있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조보는 제나라 왕을 위해 마차를 몰았다. 그는 말을 길들이기 위해 백 리 동안 말에게 물을 주지 않고 갈증을 나게 만들어 말을 길들였다. 그런 다음 제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제나라 왕은 화원에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했다. 조보가 말을 몰고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말은 화원의 연못을 보자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보가 고삐를 당기며 통제하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조보는 말을 갈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말을 길들였지만 물을 본 말은 참지 못했고 조보도 어쩔 수 없었다. 조보는 이 일을 가지고 군주를 깨우쳤다. 백성의 생존방식으로 백성들을 길들이려 해서는 되레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用人)' 기술은 군주 통치의 중요한 방면이다. 한비자는 이 방면에서도 많은 견해를 제기했다. 한비자의 통치모략에는 법가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한비자는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군주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강태공의 예를 소개하고 있다. 강태공이 제(齊)나라에 봉해졌다. 제나라에는 동해에 숨어사는 은사(隱士) 광율(狂矞)과 화사(華士)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천자의 대신이 되는 것도 싫고, 제후와 사귀는 것도 싫고, 남의 도움 없이 그저 스스로 농사를 지어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높은 명성도 좋은 자리도 군왕이 주는 녹봉도 싫다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사람을 보내 이 두 형제를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주공(周公) 단(旦)은 그 두 사람은 모두 성현인데 왜 죽였냐고 물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이 군왕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면 그들을 기용하여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후들과 교류도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사신으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겠다고 하니 상벌도 그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큰 명망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지혜가 있다한들 써먹을 수 없습니다. 또 군주의 녹봉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유능하다한들 공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관리도 싫고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군주가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은 녹봉과 형벌 아닙니까? 이런 자들에게 네 가지 수단을 모두 동원해도 소용없다면 저의 법·술·세가 힘을 잃는 것이니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외저설·우」)" 강태공은 또 이런 말도 했다. "말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한 천하 최고의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그쳐도 달리지 않고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고 오른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이라면 주인에게 필요한 공구가 될 수 없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의 표본이 되어 다른 말들도 그것을 본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군주를 위해 소용이 없다면 말 안 듣는 천리마처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재를 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라야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유능한 인재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했다. 또 이런 인재들을 기용하고 추천하는 용인의 원칙도 제기했다. 그는 "안으로는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고, 밖으로는 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법'과 '술'의 요구에 부합하고 재능이 있으며 군주에게 소용이 있다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아도, 또 친척이나 원수라도 추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런 '용인' 철학은 지금 보아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깊은 산속이나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라도, 요리를 하거나 소를 치는 노예라도 현명한 군주는 그 지위의 비천함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 재능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추천하고 임용하여 법도를 밝히고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신의 몸과 지위를 존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진(晉)의 중모현(中牟縣)에 현령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진 평공(平公)이 조무(趙武)에게 "중모는 진나라의 요충지이며, 한단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오. 과인은 우수한 관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가장 적당하겠소?"라고 물었다. 조무는 형백의 아들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평공은 깜짝 놀라면서 "형백이라면 그대와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무는 "군주를 위해 국사를 말하는 데 사적인 은혜나 원한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진 평공은 또 "중부(中府) 담당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소?"라고 조무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무는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인재를 추천할 때는 원수나 아들이라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이런 예도 소개한다. 해호(解狐)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자기와 원수인 사람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재상에 추천된 그 사람은 이에 원한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하여 사례를 하고자 해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호는 그를 맞으러 나오면서 활시위를 당겨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면서 "당신을 추천한 것은 공적인 행동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원한은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고 왕께 당신을 추천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인의 원한이 공적인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비자는 진(秦)에서 6국을 병합하는 계책을 건의했다. 먼저 원교근공으로 6국의 합종을 깨고 한·조·위를 멸망시킨 다음 다른 제후국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마 뒤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이사가 진왕 앞에서 "한비자는 한의 공자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시는데, 한비자는 결국은 한을 돕지 진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기용도 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머물게 한 다음 돌려보내는 것은 후환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구실을 달아 법에 따라 그를 죽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진왕은 사법관에게 명령하여 한비자의 죄를 묻도록 했다. 이어 이사는 다시 사람을 보내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케 했다. 얼마 뒤 진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한비자를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자는 벌써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진왕은 법·술·세를 결합한 한비자의 정치모략을 모두 접수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실행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비자의 학설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두고 일을 단호하게 잘 처리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명쾌했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가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비자가 『세난』 편을 상세하게 저술했음에도 결국은 진에서 죽음을 당해 그 자신이 유세에 따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몹시 비탄해 했다. 인물소개 한비자 저주받은 '비기'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 그는 인성의 약점과 욕망을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지적한 칼날같이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무서운 지성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고, 그것은 통치술과 제왕학으로 표출되었다. 한비자, 영광과 비극을 한 몸에 지녔던 이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런 것이었다.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들의 감사를 바랄 필요가 없다. 또한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정부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한비자가 죽은 뒤 그를 숭배하는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한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비자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동문수학한 이사는 한비를 죽였지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접수하여 날로 커져가는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한껏 활용했다. 제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한비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제왕학과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력관계와 그를 둘러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서 인성(人性)이란 문제를 제기했던 한비자는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통치학)의 권술(權術)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력론-권술론-제왕학이 그에 이르러 하나로 결합되어 가장 실감나는 이론체계로 확립되었다. 그의 이론은 깨어 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다. 관련이미지 2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비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한비자 [韓非子] -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두산백과 한비자   [ 韓非子 ] 요약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BC 280?∼BC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구분 논저 저자 한비 시대 중국 전국시대 말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와 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등은 오래된 것이고,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 [韓非子] (두산백과) ================================///   중국사상의 뿌리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사상적으로 법가를 완성시킨 사람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였다. 제자는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 유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어디에서도 스승을 언급한 곳은 없다. 존경해서였으리라. 순자는 평생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하였고, 한비는 뛰어난 머리로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말더듬이였으나 글은 훌륭하여, 진시황이 "오호라!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보고 더불어 놀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사기』 「노장신한열전」)고 할 정도였다. 한비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의거하여, 우화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들을 얘기한다. "상고에는 도덕을 겨루었으며, 중세에는 지모를 쫓았고, 당금은 기력을 다투는데"(『한비자』 「五蠹」), 과거와 같은 도덕주의만 지향한다는 것은 토끼가 와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은 무리라고 힐난하며, 또 "의사가 사람들의 상처를 잘 빨아주고 사람들의 피를 입가에 머금는 것"(「備內」)이나, 수레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인성론을 제기한다. 또, 한비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신관계가 매매관계라고 말한 사람이다.1) 그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였고, 신하에 대한 통제 또한 군주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절대적 세를 가지고 공평무사한 법을 집행하여야 하며, 효율적인 술로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는 법·술·세를 혼융한 법가정치를 주창하였다. 이 입장에서 그는 초기 법가 노선을 비판하였다. 상앙은 법은 알았으나 술이 없어 법 또한 다하지 못했으며, 신불해는 술은 알았으나 법에 통달하지 못해 술 또한 다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2) 또, 신도의 세에 관한 주장은 미진했다고 보았다.3) 특히 한비자는 신하 제어술에 대하여, 노자사상을 흡수하여 독보적인 권모술수의 경지를 열었다.4) 한편 한비자는 정치에 관한 논의, 특히 조국 한나라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 강간약지(强幹弱枝)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국부는 농사에 달려 있다"(「오두」)는 주장에서처럼 경제 방면의 중본억말(重本抑末) 사상 또한 대단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자연의 규율에 따르고, 농사철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땅을 다루는 농사 지식을 익히도록 하고, 새로운 농사 도구를 개량하고,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등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전국시대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법가는 그 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가장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들은 전쟁과 형벌을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다. 전쟁을 통해 천하통일을 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형벌을 통해 사회적 죄악이 없어지면 마침내 형벌도 없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 실용적인 지식이나 법을 해석하는 관리만을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고 일체의 학문사상을 금지시키라고 주장한다. 한비자와 같이 순자에게 동문수학한 이사는 진시황의 재상을 하면서 강력한 법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주 전제제도와 중앙 집권에 큰 공헌을 하여 중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문화 이상의 결여로 법가사상 자체는 생명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중국사상의 뿌리) ============================================///참고...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부르게 되면서, 유가가 아닌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의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에 한자 쪽을 이름 전체를 넣어서 한비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43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백가묵가 - 묵자 댓글:  조회:3434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묵자   [ 墨子 ] 묵자 출생 - 사망 BC 479년경 ~ BC 381년경 이명 본명 : 적(翟) 직업 사상가 분야 묵가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초기 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 : 보편), '고'(故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주요저서 墨子 53편 관련이미지 2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묵자의 동상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묵자 [墨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묵자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 墨子 ] 이미지 크게보기 『묵자』 저자 묵적(墨翟) 해설자 강신주(인천대학교 중국학과 강사) 목차 민중 편에 서서 『묵자』의 10가지 주제 사랑의 정치철학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논리의 발견 아쉬운 묵가의 소멸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민중 편에 서서 우리는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秦)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혼란의 시대를 선진(先秦)시대 혹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탐욕, 의심, 모략, 갈등, 살육의 시대였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명목적이나마 주(周)나라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국들은 천하를 차지하려고, 혹은 다른 제후국들에 병합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쟁의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삶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일반 민중이다. 제후들의 탐욕과 강박관념에 의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살육되었던 사람들은, 제후들을 대표로 하는 위정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힘없는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전국시대에 습관적으로 자행되던 전쟁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非攻]을 보인 철학자이자 실천가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묵적(墨翟)이다. 전국시대에 있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따라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체는 묵자가 죽은 뒤에도 계승ㆍ유지되었는데 그 지도자를 거자(鉅子)라고 했다. 제자백가들 중 유일하게 선생의 이름을 학파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묵가(墨家)라는 사상가 집단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묵자』의 10가지 주제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묵가들의 철학적 주장들은 흔히 10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10가지 주제들은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尙賢)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尙同)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兼愛)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非攻)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節用)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節葬)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天志)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明鬼)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非樂)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非命)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얼핏 살펴보아도 이 열 가지 주제들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윗사람의 뜻을 숭상하고 따라야 한다거나 하늘과 귀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차원의 사랑인 '겸애'는, 수직적인 독재론이나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초월적인 종교론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 열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 주제인 '겸애'이며, 다른 주제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자』와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서 묵가의 핵심 주제로 '겸애'를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묵자』의 「겸애(兼愛)」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반드시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아야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마치 의사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병이 생겨난 까닭을 알아야만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며, 병이 일어난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묵가는 세상에 혼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바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현실에서 찾았다. 결국 문제는 사랑인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면,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혼란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묵가의 모든 사유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 성원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사랑의 정치철학 묵자의 '겸애'는 '차별이 없는 사랑'이나 '상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기독교적 사랑과 유사한 '박애(博愛)'의 의미로 속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겸애는 현존하는 정치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긍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의 부모를 나의 부모처럼 여기고, 남의 집안을 나의 집안처럼 여기고, 남의 도읍을 나의 도읍처럼 여기고, 남의 국가를 나의 국가처럼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 제도나 정치 질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남'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지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자의 '겸애'란 평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사랑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겸애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공리주의적1) 성격을 살펴보자. 묵가의 사랑은 아끼고 사랑하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묵가에게 있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겸애' 혹은 '겸상애(兼相愛)'2)라는 묵가의 주제는 항상 '교상리(交相利)'3)라는 표현과 연용해서 사용 한다. 예를 들어 참혹한 살육으로 점철되었던 전국시대 민중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인데, 묵가는 민중의 고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얻지 못하며 수고하는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환난이다. 군주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반드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추운 자에게 옷을 주어야 하며, 노동이나 병역으로 지친 자는 쉬게 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백성에게 가장 유효한 이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군주다. 그렇기 때문에 묵가는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는 독재론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독재를 지향하는 전체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군주만이 유일하게 실질적인 재력과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묵자』의 나머지 네 주제, 즉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하도록 하며, 장례를 간소화하고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군주가 겸애를 실천하려면 백성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하며, 백성의 삶 자체를 고통에 빠뜨리는 전쟁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묵가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물질적 이익을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물질적인 이익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준다면 그의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학적 원리다. 이러한 점에서 묵가의 고난에 찬 실천 과정이 유래한다. 『장자(莊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한다.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묵가의 무리는, 이러한 희생이 너무나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정신은 이기심이나 탐욕, 질투,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묵가는 위정자들로 하여금 겸애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논리 장치를 고안한다. 그 논리 장치가 바로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초월적 종교론이다. 천자는 천하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며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유하고 귀한 사람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 즉, 겸상애(兼相愛) - 서로를 이롭게 해주기 - 즉, 교상리(交相利) - 때문에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서로를 해쳐서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기 쉽다. 묵가들은 하늘과 귀신의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을까?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묵가의 초월적 종교론을 기독교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경향은 묵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가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겸상애'와 '교상리'라는 실천적 원칙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신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당시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통념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천 원칙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조상의 귀신이 있다는 믿음과 같은 종교적 통념이 통용되지 않았다면, 묵가들은 다른 논거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묵가의 주장은 '신을 믿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자는 데 있었다. 논리의 발견 서양의 철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데 비해 동양의 철학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성(理性)4)은 합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유는 기본적으로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대는 사유다. 이 점에서 『묵자』는 동양 철학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뒤엎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자』는 고유한 주장과 함께 철저하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이런 합리주의적 정신은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어진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것과 옳고 그른 것의 이유를 서로 알려 준다. 이유를 대지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대는 사람을 따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을 따르며, 할 말이 없다면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묵가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나 근거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삼표(三表)'다. 말에 표준이 없는 경우, 이것은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에 대해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적 표본과 경험적 근거, 현실적 유용성이다. 무엇에서 역사적 표본을 찾는가? 옛날 성왕들의 사적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는가?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현실적 유용성을 찾는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위의 세 가지로 분류된 근거가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열 가지 주제들이 모두 이런 근거들로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다. 옛날 성왕들의 사적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또 사람들의 경험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현실적 유용성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묵가가 근거나 이유를 가지고 주장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따라서 묵가가 제시한 세 가지 근거는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정립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묵가는, 겸애라고 하는 유의미한 정치철학적 주장을 했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한 사유 방식을 최초로 피력했다는 측면에서도 중국 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묵가의 소멸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초기에서부터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가장 유력한 사상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 중기의 맹자, 말기의 순자(荀子)나 한비자(韓非子)가 당시의 유력한 사상으로 묵가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묵가는 춘추시대 말기에 인문 정신을 드러낸 공자와 그를 수장으로 하는 유가(儒家)에 맞서 싸웠고 이런 싸움은 전국시대 내내 지속된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너무나 강렬하고 지속적이어서 장자(莊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묵가가 이렇게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유가는 오만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이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음악을 좋아하며 사람들을 어지럽히기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세워 할 일에 태만하므로 직책을 맡겨서도 안 되고,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을 자애하도록 해서도 안 되며, 옷을 기이하게 입고 용모를 치장하는 데 힘쓰기에 백성들을 이끌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명한 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모든 제자백가들을 물리치고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선언한 뒤 중국의 역사는 유학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묵가의 사상과 실천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묵가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했던 유가들과는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요한 그들의 공헌은 동양 철학에 대해 해묵은 편견을 수정해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리와 이유를 강조했던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이 예술적이고 직관적이며 나아가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에 기초를 두지 않는 철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양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것이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유와 근거를 강조했던 묵가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동양의 정신을 다시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자』를 진지하게 읽게 되면, 우리는 동양에 합리주의적이며, 따라서 논증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에 대한 건전한 주장과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대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묵가는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의지로서 '천지(天志)'라는 외적인 권위를 도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에 의해 실현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를 두려워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사랑의 대상은 타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주체에 의해 결단되고 지속되는 정감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2. 묵가들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상호 애정의 결여에서 찾았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묵가에서는 군주, 관료, 인민으로 표현될 수 있는 통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후,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라면 사회적 문제는 개개인의 자의적 결단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묵자』, 묵적 지음, 김학주 옮김, 명문당, 2003. 각주 1)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따르면 도덕의 정당화는 더 많은 쾌락이나 이익에 대한 계산으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덕목은 음식을 과식했을 때 생기는 불쾌감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2) 겸애(兼愛)에 대한 자세한 표현으로, '모두를 아울러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묵자』를 보면 '겸애'를 공자 사유의 핵심 범주인 '인(仁)'으로 대치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유를 배우면서 그를 극복해 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3) '상호간에 서로 이익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묵자』에서는 '겸애'를 '인'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교상리'를 '의(義)'로 대치해서 쓰기도 한다. 4) 이성(reason)은 '계산'이나 '이유'를 뜻하는 라틴어 '라치오(ratio)'에서 온 말이다. 라치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첫째로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둘째로 동기나 이유, 셋째로는 정당화다. 그래서 '라치오'로부터 유래한 '이성'이란 말은 어떤 주어진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둔 채 반성하고 사유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그 행동의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묵자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지는 묵적(墨翟)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활동 반경을 미루어 볼 때 대략 BC 479~438年 경으로, 공자(孔子)보다 10여 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에는 묵자가 송나라 대부라고 적혀 있으나 노예 출신의 수공인이어서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에 입묵했으므로 묵(墨)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수성(守城)기구ㆍ병기ㆍ공구 등의 기계(器械) 제작에 능했으며 성곽 방위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주(周)나라의 사각(史角)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도 배웠으나 번거로운 예의가 백성들의 생산을 저해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배척했다.   그의 근본 사상은 [겸애설(兼愛說)]로서, 자타를 구별하여 사랑을 차등화하는 기존 유가의 한정적 사랑(묵가에서는 이를 “별애(別愛)”라고 부름)은 개인 간에 시기(猜忌)와 도둑질, 살인과 투쟁을 유발시키며 국제간에는 전쟁을 야기 시키는 등 천하의 가장 큰 화근이라 하여 비판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謙愛)를 실천하는 것만이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문제를 제거하여 궁극적인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랑을 실천할 때 사리사욕이 아닌 공리를 얻어 서로가 이익을 보게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교상리(交相利)]라 부른다.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상현정치(尙賢政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노력에 의한 생산의 증대와 절용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사치ㆍ낭비ㆍ부의 편중을 지탄했다.   묵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극히 검소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했으며 월나라 왕이 사방 500리에 달하는 봉지를 준다고 하는데도 분수에 넘는 대우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과 배치된다 하여 거절했다.   그는 천하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 찾아가 할만큼 근면하여 고통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했는데 “정강이의 털이 부스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맹자(孟子)》).”는 정도로 호인이며 선인이었다고 한다.   제후들과 귀족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을 받아오던 백성들은 묵자의 평등ㆍ박애 사상에 크게 공감하여 당시에는 오히려 유가를 능가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에서 진(秦)의 통일을 거치는 동안 점차 쇠퇴하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잊혀진 사상체계였던 묵가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묵자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묵가(墨家)는 묵자가 주창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설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 《묵자(墨子)》 53편에 남아 있는데 상현(尙賢)ㆍ상동(尙同)ㆍ겸애(兼愛)ㆍ비공(非攻)ㆍ절용(節用)ㆍ절장(節葬) 등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관념에 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분과 지위상의 귀천ㆍ경제적인 빈부ㆍ지능상의 현우(賢愚)ㆍ힘의 강약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함을 지적하며 육친간의 친소에 따라 사랑의 지향이 달라지는 유가(儒家)의 인(仁)을 배척했다.   만민에 대한 박애 정신인 겸애(兼愛)를 주창하는 묵가는 출발점부터 유가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양대 학파를 이루었으며, 상대방을 통박(痛駁)하면서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렸다.   묵가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혈연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겸애(兼愛), 인간의 숙명관을 타파하기 위한 비천명(非天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시비곡직을 바르게 가릴 수 있고 현우(賢愚)ㆍ근태(勤惰:부지런하고 나태함)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묵자의 생각이다. 이 겸상애(兼相愛)와 비천명은 묵자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겸애(兼愛)사상과 교상리(交相利)   묵자는 그의 중심 사상인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애, 곧 겸애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삼표(三表)]를 내세우고 이를 공리의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사리가 아닌 천하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 [교샹리(交相利)]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표란 성왕(聖王)의 사적에 근본을 두는 [본(本)], 백성들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 [원(原: 연원(淵源))]>,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에 일치하는 데에 효용성을 두는 [용(用)]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오히려 가능한 한 삼갔다. 비락(非樂)과 절장(節葬:장례식을 검약하게 함)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현(尙賢)사상과 상동(尙同)사상   국가 제도는 안정되고 통일된 세상을 견지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천하를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각인의 능력에 맞게 제후와 향장ㆍ이장(里長) 등을 임명해야 되지만 그러한 직분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범인이 아닌 현자(賢者)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이 위에 있는 현자를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상동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 사상인 비공(非攻)   [비공]이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전론이다. 묵자는 전쟁을 집단적인 살인행위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제적으로도 수성 장비를 제작하고 밤낮으로 10일을 달려 자기의 조국인 송나라를 침공하려는 초(楚)나라 왕과 공성 기구 제작자인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가 이를 저지시킨 일도 있다.   경제 사상인 절용   묵자는 근검절약을 주창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리라(마정방종 이천하위지(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외치며“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탁신이의 양복이식 비어빈맹 미감구사(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고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이며 노동자ㆍ수공업자들이었던 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의 증가를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산의 증대와 아울러 물자를 절약해 써야함을 강조했다. 길흉화복이 타고 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근면과 절약이 부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왕후장상 등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사치ㆍ낭비를 비난하고 특권 계층에 의한 부의 독점을 지탄했다.   묵자의 제자들과 묵가의 성쇠   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했는데 역대의 거자(鉅子: 묵가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금활리(禽滑釐)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활약이 두드려졌고 절용과 실리 비공 등을 주장한 학자 송형(宋銒)과 윤문(尹文)ㆍ공상과(公尙過)ㆍ허행(許行) 등등이 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여러 계파 중 상리씨(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제(齊)에서, 초나라 사람인 고획(苦獲)ㆍ등능(鄧陵)ㆍ자이치(子巳齒) 등은 남방에서, 상부씨(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진(秦)나라에서 활동했다.   그 중 별묵(別墨)으로 불리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등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면서 제가(諸家)에 대한 비평에 치중했는데 이들을 [명가(名家)]라고도 부른다.   한동안 묵가들의 활약은 유가를 압도했다.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 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한비자(韓非子)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 유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학(顯學: 뚜렷하게 드러난 학파)’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묵가 집단은 거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단결력으로 조직되어 종교 집단이나 정치 집단처럼 엄격하게 활동했으며 그 조직원은 [묵자(墨者)]라고 불렸다.   복돈(腹)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초기 거자들은 투철한 묵가 사상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 했으나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사상적 지도자가 계속해 출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가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말기 칠국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진(秦)ㆍ한대(漢代)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잊혀진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묵가 연구가 부활되었던 것이다.
1436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유가 성악설 - 순자 댓글:  조회:3243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순자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출생 - 사망 BC 298년 ~ BC 238년 직업 사상가 분야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성악설(性惡說)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중국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 그 시대는 전국의 7대 강국이 중국의 천하 통일을 지향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 와중에서 진(秦)이 통일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던 중국 통일의 과제에 몰두하여, '군거화일'(群居和一)이라고 하는 질서를 지향하고 '예의'(禮義)라는 수단을 제기하였다. '군거화일'이란 천자, 제후, 사대부, 관인백리(官人百吏), 서민이 직분에 따라 일을 하고 각각 그 '직분'(職分)에 만족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예의'는 이 '분'(分)을 결정하는 기준(귀천지등貴賤之等, 장유지차長之差, 지우능불능지분知愚能不能之分)이며, 선왕(先王 : 성인聖人)의 제작(制作)에 따른 것이다. 이 '예의'의 '분'은 '천인(天人)의 분'(分)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통성이 이것에 의해 크게 발휘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국강병의 문제도, 인재를 양성하는 문제도, 모두 '예의'에 의거하여 해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의'는 법가의 '법'(法)에 접근하고 있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그는 유가의 입장을 지키면서, 진(秦)의 입장에 서서 제가(諸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선진사상(先秦思想)의 집대성자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순자』는 그의 언론(言論)을 모은 것이다. 관련이미지 3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순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만화로 보는 교과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순자 [荀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순자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저자 순황(荀況) 해설자 장현근(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목차 『순자』와 실천 유학 『순자』와 그 시대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와 실천 유학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와 그 시대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각주 1) 양(倞)은 '경'이라고도 읽으나 당나라시대 음가는 '량'이다. 양량은 당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현존하는 『순자』의 최초 주석자이며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2)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순자의 주장이다. 성(性)의 실질은 정(情)이고 작용은 욕(欲)이며, 그 욕망이 만든 무질서의 결과가 악이라는 의미이다. 3) 왕선겸(1842~1917)은 호남성 장사(長沙) 사람으로 국자감(國子監) 좨주 등을 역임했으며, 신학문에 반대하고 유신파를 도살하기도 했으나, 1911년 혁명 후 낙향하여 고문헌의 주석 및 편집에 전념했다. 4) 만물을 낳는 것은 하늘이지만 그것을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순자의 인문주의적 우주관ㆍ인생관이다. 5)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겠다는 사유를 말한다. 6) 한 쪽으로 치우치는 주관적 인식의 폐단을 해소한다는 순자의 지식 방법론이다. 7) 순자는 역사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고, 이 원칙에 입각해서 예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원칙만 이해하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을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현실 문제에 유추 적용할 수 있는 예의의 역사적 원칙이 곧 '통류'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1435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道學 - 정자 댓글:  조회:2506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정자   [ 程子 ] 출생 - 사망 미상 ~ 미상 직업 철학자 분야 유교 국적 중국 시대 송나라 관련인물 주염계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 모두 유교철학자. 주염계(周簾溪)에게서 배우고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도학(道學)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하늘(天)을 이(理)라고 하여 달이 냇물에 그 모습이 비치듯이 천하 만물은 이 유일하고 절대인 이(理)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고, 천리(天理)가 일정한 목적 하에 우주의 질서를 세운다고 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부자ㆍ군신'도 '천하의 정리'(天下之定理)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불교의 출세간(出世間)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의 봉건적 신분질서를 절대화 시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 사상, 성격에 차이점이 있다. 명도는 천지의 움직임을 '역'(易)에 기초하여 '생생'(生生)이라고 보고, 만물(사물도 인간도 모두)은 모두 천지의 생의(生意)를 받은 '일체'라고 생각하였으며, 천지생생의 덕을 '인'(仁)이라고 하여 '만물 일체의 인'이란 관념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인(仁)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이 만물일체=물아(物我)일체로 되고, 범위를 확장시켜 종래엔 인(仁)과 병렬되어 있던 의ㆍ예ㆍ지ㆍ신(義ㆍ禮ㆍ智ㆍ信)도 모두 인(仁)으로 되어, 인(仁)은 덕(德)의 근본이고 의ㆍ예ㆍ지ㆍ신은 그 한정으로서 오상(五常)이 구조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이것은 주자학으로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인은 학자가 제1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 실현은 인의 규정에 따라서 천지 만물 만민의 생의를 직접 공감하는 체인(體認)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이 명도의 사상은 직관, 체인을 특징으로 한 데 비하여, 아우인 이천은 분석적, 사변적 태도와 엄격한 도덕주의를 본령으로 하였다. 이천은 '역'(易)의 '일음일양'(一陰一陽) 즉 '도'(道)라는 명제에 대하여 음양은 기(氣)로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도는 음양의 '이유'(所以)로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양자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았다. 윤리설에서는 '성즉리'(性卽理)의 명제를 세워 성선설을 천리로 삼아 절대화하고, 성을 천명(天命)의 성과 기질(氣質)의 성으로 나누고 또한 성과 정(情)을 구별하였다. 여기서 '천리'를 세우고 '인욕'(人欲)을 멸한다는 엄숙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이천은 '이'의 분석적 추구, '격물궁리'(格物窮理)를 강조함과 동시에 '경'(敬)을 통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거경'(居敬 ; 마음의 집중)이란 방법을 중시한다. 유일 절대한 '이'를 대상으로 하는 '궁리'는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기 때문에 '거경'이 '궁리'의 정신적 태도로서 강조되었다. 주자(朱子)는 명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이천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주자학의 골격을 세웠다. 주요저서 明道文集, 5권. 易傳, 4권(이천). 伊川文集. [네이버 지식백과] 정자 [程子] (철학사전)
1434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성선설 - 맹자 댓글:  조회:3514  추천:0  2019-11-20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맹자   [ 孟子 , Mencius음성듣기 ] 맹자 출생 - 사망 BC 372년 추정 ~ BC 289년 추정 대표분야 유가철학 대표이론 성선설 대표학파 선진유학 대표저서 맹자 관련철학자 공자 목차 생애 해설 생애 연보 생애 해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생애 연보 기원전 372년 : 중국 추鄒(산동성)에서 출생  기원전 320년 : 양梁나라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남  기원전 319년 : 혜왕 사망  기원전 318년 : 양왕襄王의 사람됨에 실망해서 양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감  기원전 315년 : 모친 사망, 노魯에서 장사 치름  기원전 312년 : 제나라를 떠남  기원전 311년 : 송宋에 체류. 송경을 만남.  기원전 307년 : 설薛을 거쳐 추鄒로 돌아감. 藤의 文公에게 초대 받음  기원전 305년 : 등나라에 1~2년 체류 후, 노魯를 거쳐 추도 돌아감. 이후 교육에 전념  기원전 289년 : 사망 관련자료 원문보기 맹자 『맹자』(해제) (PDF 파일) 관련이미지 3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맹자 [孟子, Men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중국인물사전 맹가   [ 孟軻 , mèng kē ] 요약 유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 이미지 크게보기 맹자 초상화 시대 전국시대 출생 - 사망 약 BC.372년 ~ 약 BC.289년 이칭 맹자(孟子) 관련 고사성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훈(斷機之訓), 단기지교(斷機之敎) 목차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4. 정치적 이상주의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2) 성선설(性善說)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6. 맹자의 공부법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5) 이의역지(以意逆志) 6) 지인논세(知人論世)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9. 관련 유적 1) 맹묘(孟廟) 2) 맹부(孟府) 3) 맹림(孟林)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맹자는 이름이 가(軻),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鄒,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나라 희(姬)씨 성의 귀족공자(贵族公子) 경부(庆父)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격(激)이고, 모친은 장씨(仉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집을 옮겼었다. 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바로 그것이다. 또 맹자가 공부하는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짜던 베를 끊어 경계했다는 ‘단기지훈’1)이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맹모삼천지교를 나타낸 청나라 때 그림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맹자 초상화 맹자가 난 곳은 공자의 탄생지인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취읍(현 산둥성 추현)과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또 사숙2)하였다. 자라나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즉 공급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 학파’로 불리며 공문(孔門)의 적통을 대표한다. 학설에 의하면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기도 하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으며, 『시경』과 『서경』(또는 『상서』)에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 문인 만장, 공손추 등과 함께 책을 써서 자신의 설을 세우는 한편, 시, 서 등 유학을 강론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종사했다. 그가 죽은 뒤 역대 왕조들이 잇따라 작위를 추증하여 그 위상을 높였는데, 송나라 때인 1083년에 추국공(鄒國公)에 봉해진 이래 1330년 원나라 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1530년 명나라 때 ‘아성(亞聖)’, 1935년(민국 24)에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 등으로 봉해졌다. 『한서』 「예문지」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는데, 제자들과 맹자의 언행록이 수록되어 있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맹자 초상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는 몹시 컸다. 공자가 처했던 춘추시대는 비록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했고 또 춘추오패가 나타났으나, 그래도 존왕양이3)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이 적게나마 있었다. 그러나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주 왕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여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각기 제후들은 승부를 다투는 싸움을 벌여 약육강식의 난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폭력과 허망한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천하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며 갈 바를 몰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기자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그 춘추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이었으니,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혼란시대였다. 이런 때에 맹자는 의연히 일어나 불타협의 굳은 신념으로 무력에 의한 패도를 버리고 하 · 은(상) · 주 3대의 전통인 인의왕도(仁義王道)의 덕치로 천하가 하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찾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4. 정치적 이상주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에게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찾으라고 했다. 불쌍한 것을 보고 못 견디는 마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하여 왕도덕치의 근원이 임금의 덕심(德心)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렇게 천하의 온갖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에 돌리면서도 맹자는 임금의 존재를 형편없이 격하시켰다. 즉,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다. 또 “임금은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권(民權)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맹자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악덕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지도 못하고, 또 천하를 통일하고 참다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歸順心腹)할 것이며, 그 때에야 스스로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참다운 왕좌에 오를 것이요,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력을 배제하고 덕치를 주장한 맹자는 당연히 보민양생(保民養生), 즉 민생을 중하게 강조했다. 맹자의 민생주의는 바로 맹자의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진작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정,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는 생각은 오늘에 와서는 당연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일대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맹자의 민생안정은 제후들의 포악을 막고 반대로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맹자는 민생안정을 국민복리 면에서도 강조했다. “양잠을 장려하여 비단을 증산하고 가축을 증산하여 노인들에게 따뜻한 비단옷을 입히고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라”고 강조했다. 또 백성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고 나아가서 백성을 교육하여 높은 경지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필연적으로 교육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말했다. “정성껏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더 나아가 효제인의를 넓히면 노인들이 길가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상태로 다스린다면 바로 왕도의 임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으로 추앙되었지만, 당시 정치판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맹자의 이러한 티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폭넓게 논의되었다. 특히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은 아주 귀중한 주장으로 정치사상의 질을 높였다. 그는 공자와 더불어 ‘공맹(孔孟)’으로 불리기도 하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함께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천리(天理)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천의(天意)의 발동자였다. 따라서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2)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문무(문왕(文王)과 무왕(武王)) ·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도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인 예(禮),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인 지(智) 등 사단(四端)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본선(本善)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천작(天爵)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작록(爵祿)을 인작(人爵)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인의(仁義)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仁),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의(義)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大道)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지대지강(至大至剛, 더없이 크고 굳셈)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존심양성4)이다. 한편,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요 · 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그리고 대장부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6. 맹자의 공부법 맹자의 공부법은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하여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독서 과정에서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하여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다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진심(盡心)」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의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구하면 얻는데 유리하고, 구하면 내게 존재하게 된다”(「진심」상).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니 그대가 돌아가 구하면 배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자(告子)」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깊이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하고, 삶이 편안하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나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이루(離婁)」하). 이 대목을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 보면 이렇다. 스승이 학생들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계발하고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구하여 얻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 하는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그 놓인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고자」상). 이런 저런 잡념과 딴 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냐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자」상)고 강조한다. 공부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진심」상)라고 하여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는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와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단계를 건너 뛸 수 없듯이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은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차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할 수 없다”(「진심」하).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계속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물을 공부에 비유하여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꾸준히 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꾸준히 한 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고자」상).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따라서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진심」상)라고까지 말한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이의역지(以意逆志)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띤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아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을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만장(萬章)」상). 이 중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란 대목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여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意)’자를 독자의 사상 · 지식 ·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즉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6) 지인논세(知人論世)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다’는 ‘지인논세’는 그 방법과 의미가 확대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가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책의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맹자는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 사람을 벗하는 것이다”(「만장」하)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는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또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 테면 그가 처했던 시대적 환경 따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명인들이 하나같이 제기하는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이루」하) 맹자가 말하는 ‘상세히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하여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공부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로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맹자의 어머니가 베틀을 끊고 아들에게 자극을 주었다는 기념비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이란 장에서 “부모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며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소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알았던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진심」상)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하여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또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맹자의 고향 마을 9. 관련 유적 맹자 관련 유적은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孟母林)과 ‘맹모삼천지교’와 관련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1) 맹묘(孟廟) ‘아성묘(亞聖廟)’라고도 부르는 맹자의 사당 맹묘는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다. 역대로 맹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맹묘의 역사는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인 1037년에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연주지주(延州知州)로 있으면서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방문하고 무덤 옆에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참배 및 제사가 불편해서 휘종 선화(宣和) 3년인 1121년에 지금 장소에 사당을 옮겨지었다. 북송 신종 원풍(元豊) 연간에는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했으며, 원나라 때 다시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계속 맹묘를 확장하고 수리했고, 명나라 때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맹자의 사당인 맹묘에 모셔진 맹자상 사당은 전체적으로 장방형이며, 모두 다섯 구역에 64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만 2,000여 평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역대로 중수한 횟수만 38차가 넘는다. 현존 건축물들은 청 강희(康熙) 연간에 지진으로 기울어진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아성전(亞聖殿)이 남북 중축선상에 자리잡은 사당 내의 주체건물인데, 7칸에 높이 17미터, 길이 27.7미터 깊이 20.48미터이다. 중층에 녹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처마 밑으로 팔각기둥이 26개가 있는데 기둥 전체에 용과 봉황 그리고 꽃을 조각했다. 중축선 양 옆으로 침전(寢殿) · 계성전(啓聖殿) · 맹모전(孟母殿) · 치엄당(致嚴堂) · 도주사 · 동서무(東西廡) · 제기고(祭器庫) · 성생소 · 강희 및 건륭(乾隆) 어비정(御碑亭)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 내 비갈5)이나 석각만 350기가 넘는다. 그 중 이름난 것으로는 원나라 때 다시 만든 진(秦)나라 이사가 소전체6)로 쓴 ‘역산각석(嶧山刻石)’을 비롯하여 서진시대 유보(한 순제)의 묘표, 당나라 구양순의 ‘소옥화묘지명(蘇玉華墓志銘)’ 등이며, 이밖에 청나라 때 세운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석이 있다. 사당 안은 고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인데 회나무가 많고 간간히 홰나무 · 은행나무 · 등나무 등이 눈에 띈다. 명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은 라는 시에서 맹묘의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지언문 밖에는 홰나무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 홰나무를 감싼 기이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측백나무가 홰나무를 끌어안았다’고 말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잎사귀가 자라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2) 맹부(孟府)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 맹자 후손들의 고택인 맹부는 처음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동쪽으로 맹묘와 이웃하고 있으며, 맹묘를 북송 선화 3년인 1121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맹부도 그 무렵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나라 문종 지순(至順) 2년인 1331년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하면서 맹부도 아성부(亞聖府)로 불리기 시작했고, 명나라 때 오면서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다. 맹부의 앞쪽은 관아이고 뒤쪽은 주택이다. 현재 건축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남북 길이 226미터, 동서 폭 99미터에 전당과 문 그리고 회랑이 모두 116칸이다. 대문은 검은 옻칠을 했고 양 옆에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문 안쪽 동서 회랑은 맹부를 지키는 수위와 심부름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두 번째 문을 들어서면 정중앙에 대당(大堂)이 있는데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문무관원을 접대하며 친족과 가족의 법규 따위를 논의하는 곳이다. 당 안에는 조정에서 하사한 각종 패와 깃발이 진열되어 있다. 당 앞 동남쪽에는 해시계가, 서남쪽에는 됫박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맹부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들의 사무실이다. 대당 뒤에는 맹자의 후손들이 거처하는 내택(內宅)과 사서루(賜書樓)가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3) 맹림(孟林) 맹림은 쩌우청시 동북 사기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맹자의 무덤이다.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墓記)’라 쓴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경우 4년인 103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맹자 무덤이 발견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선화 연간에 현성(縣城) 남관으로 사당이 옮겨졌다. 원풍 7년인 1084년 조정에서 30만 전을 내려 무덤과 사당을 정비하게 하고 제사를 위한 땅을 사는 한편 측백과 홰나무를 고루 심었다. 청 강희제 때 이르면 제사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땅이 약 2만 평으로 늘었다. 맹림 내에는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울창하며 작은 시내가 남북을 관통하고 흐른다. 신도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돌로 바닥을 깔아 향전(享殿) 대문 앞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향전은 5칸이고 전 뒤에 맹자의 무덤이 있다. 무덤 서쪽 300미터 지점에 옛 무덤 3기가 있는데, 맹손(孟孫) · 계손(季孫) · 숙손(叔孫)7)의 무덤으로 본다. 맹자의 무덤인 맹림 맹자 연구서인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맹모송(孟母頌) - 한(漢) 유향 孟子之母, 敎化別分. 맹자의 모친은 교화에 분별이 있었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맹자(孟子) - 송 왕안석 沉魄浮魂不可招, 가라앉은 백(魄)과 떠있는 혼(魂)은 불러들일 수 없고,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제맹자(題孟子) - 금 조정 戰國縱橫際, 전국(戰國)이 종횡(縱橫)할 때에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삼천교자(三遷敎子) - 명 유준(劉浚) 孟氏三遷宅已荒, 맹씨 삼천(三遷)의 집은 이미 황폐되고,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알맹자묘(謁孟子廟) - 청 고염무 古殿移邾邑, 고전(古殿)은 주읍(邾邑)으로 옮겨지고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아성맹자묘(亞聖孟子廟) - 청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歷) 戰國春秋, 又異其世. 전국춘추 또 그 세상은 기이하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8), 陳仲廉士9).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알맹자묘(謁孟子墓) - 청 심덕잠 夢寐懷鄒邑, 자나 깨나 추읍(鄒邑)을 그리다가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당시적구(唐詩摘句) 無國要孟子, 맹자를 원하는 나라가 없고, 有人毁仲尼. 어떤 이는 중니(공자)를 헐뜯네. - 두목  孟母遷鄰罷, 맹자의 어머니는 이웃을 가려 옮겼고, 將軍辭第切10).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 이교(李嶠) 韋生堪繼相, 위생(韋生)은 후손을 이어가길 감내했고,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 맹교  참고문헌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맹자(孟子)』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김영수, 역사의 아침, 2011.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관련이미지 2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맹가 [孟軻, mèng kē] (중국인물사전)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목차 사람은 본래 착하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1)는 산둥성 추현 지방 출생으로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다.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말썽꾸러기였다. 모방하려는 기질이 강하여 주변 지역의 풍습을 곧잘 흉내 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 " data-font-image="false" data-seq="2" data-title="" desc="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hastitle="N" height="227" source="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164_000_1/20151202174840317_VEGX9UCHG.jpg/ab87_13_i3.jpg?type=m4500_4500_fst_n&wm=Y"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690px;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617" /> 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이와 관련하여 《열녀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가 노는 모양을 보니,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2)하는 흉내를 냈으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 하고는 이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자꾸 내서,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며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여기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예를 다하는지라, 이때에야 비로소 맹모는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나 맹자가 생존했던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를 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나왔는데, 가령 유가 외에도 도가 · 묵가 · 법가 · 병가 등이 있었으며, 또한 황당무계하고 대담한 학설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잡다한 학설에 대항하여 유가의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 바로 맹자였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맹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이웃집의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돼지는 왜 잡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했다. “너를 먹이려고 그런단다.” 하지만 곧 맹모는 자신의 말에 크게 후회했다.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胎敎)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생각에 맹모는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맹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년 후에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 《맹자》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것으로 후세의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맹자는 노나라의 수도인 취푸(曲阜)로 가게 되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3)의 문하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겨우 6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흠모했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얼마 후 맹자는 말 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는데, 마침 어머니와 헤어진 지도 오래되고 하여 고향으로 갔다. 그때 길쌈을 하던 맹모가 물었다. “너의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별로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모는 칼을 들어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을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라고 한다. 증자(曾子), 기원전 504~기원전 436 그는 공자의 손자이기도 하고 또 증자4)의 제자이기도 한 자사의 문하에서 정통적인 유학을 배웠고, 수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유가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마흔 살을 전후로 추(鄒)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으나, 혼란한 세태에 실망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가 수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이동할 때는 일대장관을 이뤘으며, 용기가 넘치고 기질이 강했던 그는 여러 왕들에게 이상정치를 실시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 여든네 살까지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고, 자신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 《맹자》를 일곱 편까지 썼다. 철학논술 Q. 오늘날 서울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에서 불고 있는 학원 과외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녀 교육에 대한 어머니들의 순수한 열정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행태로 봐야 하는가?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천성은 선할까, 악할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천성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오직 선한 것만을 따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며,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착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잘못이나 죄는 밖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데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령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잘 사귀어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 아이의 지르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니···.”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다음 네 가지의 ‘착함의 처음’이 있다고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라.”5)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어질다고 하는 증거다. 둘째,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다. 셋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예의바르다고 하는 증거다. 그리고 넷째, 누구나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증거다. 그러므로 모두 이처럼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착한 인간의 마음일지라도 불의 불씨나 물의 샘 줄기와 같아서 그것을 바르게 잘 이끌면 요원(燎原)의 불길이나 큰 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꺼지거나 말라버리기 쉽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의 선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수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맹자는 우리가 착한 본성의 씨앗을 잘 보존하고 널리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존심양성(存心養性)6)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밖에서부터 찾아오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 맹자는 먼저 참된 용기(大勇)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다. 이는 스스로 반성해봐서, 자신을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겁을 내게 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설사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용기에 의해 부동심은 길러진다. 둘째, 우리가 부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 손상시키지 않고 곧게 키우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의리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면적으로 의리를 쌓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편 그것은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기 논에 심은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한 뿌리 한 뿌리씩 손으로 잡아 뽑아서 올려주었다. 그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나는 논의 모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돕느라 매우 혼이 났다.”라고 했다. 이에 놀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논의 모들은 벌써 다 말라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氣)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모를 억지로 뽑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맹자는 지적했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에 유혹되어 도덕적 신념이 흔들리지도 않거니와 어떤 위협이나 곤란 아래서도 인의의 행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리 부귀하여도 음탕한 데 빠지지 않으며, 아무리 빈천하여도 주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이 많아지면 성적인 음란에 빠지고 술이나 도박에 취하기 십상인데,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결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비굴해져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그러하지 않는다. 아울러 웬만한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릎을 꿇기 십상이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원칙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가령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지도 않고, 비빌 언덕조차 없이 가난해졌다고 해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지켜나가며, 어떠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개인마다 스스로 수양을 잘해야 하겠지만, 한 나라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국가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위정자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 정치론의 핵심이다. 왕도정치는 먼저, 공리주의(功利主義)7)를 배격한다. 맹자는 양 혜왕(梁 惠王)에게 공리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약 임금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大夫)들도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다투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신하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이 된다. 그러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맹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왕도정치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항산(恒産)8)이 있어야 항심(恒心)9)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왕들은 우선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안정시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주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맹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 제도는 여덟 집이 한 정(井)이 되어 집집마다 100무(畝)10)의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짓되, 한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5무 되는 집터 안에 뽕을 심고 누에를 치면 쉰의 늙은이도 모두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길러 새끼 치는 것을 돌봐주면 일흔의 노인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는 생업을 보장해준 뒤에 비로소 도덕적인 생활로 이끌어야 하는 반면, 지도층에게는 생업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녹봉을 주되, 그렇다고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을 쌓아놓아서도 안 되고 부와 사치와 음란을 누려서도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형벌을 줄여주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거두며,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먹고사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다. 즉 백성들이 효성과 공경, 우애와 진실, 신의와 도덕을 닦게 하여 살고 죽는 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맹자는 인의를 숭상하고 덕을 본위로 하는 왕도정치가 이(利)를 숭상하고 힘을 본위로 하는 패도정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왕도정치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천자(天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가운데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닌 선양에 의해 추대되어야 한다. 사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다시 세우는 세습제도나, 오늘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방식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왜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덕스러운 사람을 추대해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맹자는 본 것이다. 이렇게 추대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현재의 맹림(孟林)예전 중국에서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나무를 심었다. 주로 무덤 뒤편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래서 공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공림(孔林), 맹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맹림(孟林)이라고 한다. 성현의 무덤을 다른 말로 부르는 방식이다. 만일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군주를 모셔올 수도 있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여 백성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는 왕위를 물러나게 해야 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살해해도 좋다. 폭압정치를 펴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를 퇴위시키거나 죽인다 한들 신하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그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인의의 도덕정치,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공자가 주로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군왕이나 권력자, 그리고 귀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맹자가 그들에게 가르친 방법은 아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지와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군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도리어 맹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가 민심에 바탕을 둔 인의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민주제 아래에서는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야만 하는 데 비해, 군주제 아래에서는 왕후 한 사람만을 올바르게 이끌면 족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정치를 담당한 소수, 나아가 한 사람만 현명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한편 맹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와 글이 문묘(文廟)에서 제거된 일도 있었다. 즉 역대의 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도 있는 맹자의 정치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1433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儒敎의 시조 - 공자 댓글:  조회:3782  추천:0  2019-11-20
인물세계사 공자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이 된 고대 중국의 사상가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 ~ B.C. 479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년 ~ BC 479년 시대 춘추 시대 직업 사상가 출생지 노나라 이명 자 : 중니(仲尼) 국적 중국 목차 생애 사상 영향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을 지닌다. 생애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행과 사상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인 오경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학문에 힘써 17세에는 관리가 되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치에 실망하여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 생활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치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사상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쇠퇴하는 춘추 말기,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해지자 공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나라의 초장기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덕을 사람에 대한 사랑인 '인(仁)'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중심으로 삼았고, 정치에 있어서는 위정자가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이상적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인은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정인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禮)'의 형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의 신(神)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압박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영향 공자는 제자들에게는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도 인의 실현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살아생전에도 지대하였다. 공자 사후에도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유지되었으며, 특히 맹자는 제자백가 사상의 난립 속에서 세력이 약해져갔던 공자의 사상을 다시 일으켜 전파하였다. 그 후 전국 시대 말기에 순자는 다른 학파의 사상도 받아들여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집대성하였다. 관련이미지 1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공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공자 [孔子]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논어』(해제) 생애 해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의 나이 20세 무렵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벌여 대접을 했다. 공자도 가서 참여하려고 했는데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쫓아내며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이후 공자는 발분망식하여, 공자의 나이 34세 때에는, 노나라의 대부 맹리자(孟釐子 : 삼환의 하나인 맹손씨)가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맏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구는 성인(은나라 탕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여공에게 양위한 분이다. 정고보(正考父)에 와서 여러 임금을 보좌함에 그 공손함이 지극하였다. 내가 듣자하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세상을 맡아 다스리지는 못하나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는 나이가 젊고 예를 좋아하니 아마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실제로 맹의자는 공자에게 예를 배웠고 『논어』에 나온다. 공자 나이 35세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하다가 다투어 후소백의 집터를 침략하여 집을 늘려 지었다. 평소에도 계평자는 못된 짓으로 노나라 대부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평소 집안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싫어했던 소공도 가담하여 그를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쳤는데, 계평자는 맹씨 숙손씨의 세 집안과 더불어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노나라에 난리가 나자 공자는 제나라에 갔다.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그를 통해서 경공과 통하려고 했다. 제나라 태사(太師)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들은 다음 배우려고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자 제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로 말미암아 재상의 일을 대리하면서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 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과 순화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 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는 이들은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어진 이는 필히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 백이·숙제가 있었겠으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 : 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이상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임) [네이버 지식백과] 생애 해설 (공자 『논어』 해제) ===================================/// 중국사상의 뿌리 공자의 가르침     공자의 출현은 중국, 아니 인류의 큰 행운이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구수한 목소리에 술 잘 마시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 솔직담백하고 항상 세상일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 끊임없이 탐구하며 옳은 일에 고집불통인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독서와 사색을 겸하는 공부 방법, 재능에 따라 달리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공자는 그 이전 중화문명의 진수들을 집대성하여 유가 및 제자백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자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학자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록인 『논어』엔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한다. 임금의 아들[君子]이라는 기존 개념에 도덕적 의미부여[儒]를 함으로써 군자의 뜻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인(仁)이 그렇고, 예(禮)가 그렇고, 그의 철학적 개념이 모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사람의 말을 옮겼을 뿐 창조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한다. 예를 중시한 주나라에서 큰일을 치르는 의식에 밝은 유들은 예식을 돕는 상례(相禮)와 교육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공자는 거기에다 기존의 사상적 유산인 6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마른 고기 한 묶음만 가져오면 각지에서 찾아온 가난한 자, 강도·건달까지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가르쳐 그들을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만들어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의 기적이다. 그의 관심은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길 수 없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논어』 「선진」)고 대답한다. 사람과 사회를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개인의 수양과 품덕을 특별히 강조한 도덕주의자였으며,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예컨대 삼년상을 치를라치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합리적인 항의를 한 재아를 어질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양화」) 때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를 단다. 이렇게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성공한 공자는 기존의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재정리했고, 이로써 유가는 경전을 갖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학파가 될 수 있었다. 고문헌에 대한 선별·편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체계적인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줌으로써 오히려 육경의 의미는 더욱 승화되었다. 『예기』 「경해 經解」편은 공자의 육경에 대해, "사람됨에 온유하고 돈후하란 것이 『시』의 가르침이다. 소통하여 멀리 알라는 것이 『서』의 가르침이다. 폭넓고 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악』의 가르침이다. 정밀하고 미묘한 것을 잘 재어 보고 헤아리라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공손·검약하고, 엄숙·경건하라는 것이 『예』의 가르침이다. 사건을 잘 비유하여 말을 하라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스승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교육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복(儒服)이라는 독특한 복장을 하며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가 한 학파의 칭호가 된 것은 공자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승의 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급속히 분파가 생겨났다. 『순자』 「유효」편은 이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고,1) 구체적으로 제자들 이름을 거명해 자궁(子弓)을 공자의 정통으로, 자사와 맹자를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학한 사람으로, 자장(子張)씨의 유는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자들로, 자하(子夏)씨의 유는 의관만 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유(子游)씨의 유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비자』 「현학」편엔 "공자가 죽은 뒤 자장의 유, 자사의 유, 안(顔)씨의 유, 맹(孟)씨의 유, 칠조(漆雕)씨의 유, 중량(仲良)씨의 유, 손(孫)씨의 유, 악정(樂正)씨의 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유가가 쇠락했다기보다 발전했다는 징표이다. 즉, 이러한 분파 투쟁을 통해 이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뉜 초기의 유가 사상가들에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사상 형식·개념·범주가 있었다. 정치와 윤리를 일체화시킨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과 정치 사이를 오간 유가 사상가들은 첫째, 선왕 특히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도를 자신들의 깃발로 삼았다. 둘째, 전통 문화유산이며 공자가 정리한 육예를 모든 교육과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셋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논어』 「안연」)는 가르침에 따라 군신·부자·귀천·상하·친소의 구분이 엄격한 예의를 숭상하였다. 넷째, 인·의·예·지·충·효·신·애·화·중(仁義禮智忠孝信愛和中) 등을 사회생활을 실천하는 데 공통된 기본 개념이자 범주로 삼았다. 다섯째, 모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덕·중용·정명(正名) 등 공자의 주장은 항상 유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중국인물사전 공자   유교의 시조 [ 孔子 , kǒng zǐ ] 요약 중국의 대 철학자이자 사상가 이미지 크게보기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시대 춘추 전국시대 노나라 출생 - 사망 BC.551년 ~ BC.479년 목차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4. 공자와 유가학파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8. 관련 유적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11.  공자의 유머 1) 유머 사례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12.  공자연보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공자는 춘추 전국시대 즉 고대 노예제도가 차차 봉건제도로 옮아가던 시대에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가졌을 때 니구산(尼丘山)에서 백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후일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인 중니(仲尼)에 ‘니’자가 들어간 것도 기도를 드렸던 니구산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전한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정치적 실패로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공자는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귀족 집안의 소사1)가 되었다가 나중에 노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나 단기간의 임관에 불과했다. 19세에 결혼을 한 공자는 24세에 어머니 안씨를 잃었고 66세 때 부인이 죽었으며 69세 때는 아들 백어(伯魚)마저 세상을 떠나는 등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말년도 매우 불우했다. 그의 제자 안자(顔子, 안회)가 자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을 때 통탄하던 공자의 모습(『논어』)을 보면 그가 일찍이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오늘에 이르러 부모와 아들과 수제자마저 보내는 심정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공자는 10여 년 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각처에서 유세2)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자기의 정치적 이상 실현을 도모했으나 그 기대와 희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8세 때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세월을 한탄하며 관직을 단념하고 시,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육경을 풀이 및 정리하고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요, 순, 문왕, 무왕, 주공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고 고대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유가와 가학3)을 창립했다. 당시에 공자는 ‘하늘이 허락한 거룩한 성인(聖人)’, ‘하늘이 세상을 위해 목탁으로 삼으신 분’이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었고, 후대에 ‘지성(至聖)’,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문선황제(文宣皇帝)’, ‘문선왕(文宣王)’, ‘소왕(素王)’ 등으로 받들어졌다.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인(仁)을 이상의 도덕이라 하여 효제4)와 충서5)를 이상의 근거로 삼았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록을 기록해 놓은 『논어』 7권이 현재 전해진다. 노자를 만나는 공자의 모습을 나타낸 벽돌 그림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공자가 태어난 춘추시대 사회 실정을 보면 공자의 출현은 시대의 당연한 요청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사회 실정에 대해 『한서』 「화식전(貨殖傳)」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周)나라 왕실이 쇠하여 예법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자해졌다. 선비와 서민들은 각기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여 농사에 힘쓰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상업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만 많아져 쌀과 곡식이 부족한데 상품은 넘쳐흐른다. 제 환공, 진 문공 이후로는 예의가 크게 무너져 위아래가 없고 나라마다 정치가 제각각이고 집집마다 풍속도 제각각이며, 욕망은 제한이 없고 분에 넘치는 일이 허다하다. 상인은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다 들이고 공인(工人)은 사치스런 기물을 제조하기에 바쁘다. 선비는 정도에서 벗어난 학설과 유행만 좇은 공부에만 몰두하며, 호사스러운 자들은 헛된 명예를 위하여 진실은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친다. 폭도라도 나라를 뺏은 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고 왕위를 찬탈한 자는 영웅이 된다. 예의가 군자의 마땅한 도리가 되지 못하고 형벌도 소인을 무섭게 하지 못하여, 부자들은 헛된 우상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개와 말에게도 고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떨어진 베옷에 콩잎을 먹고 물만 마실 뿐이다. 군주를 도와주면 비록 그 출신이 노예의 신분이었더라도 사대부와 같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권모술수를 모르면 배고픔을 면치 못한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시대를 평가하기를,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희미해져 요망하고 간사한 말들과 폭행이 심하여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태에 공자가 이를 심히 염려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공자의 모습 4. 공자와 유가학파   비석에 새겨져 있는 공자상(시안 비림박물관) 『한서』 「예문지(藝文志)」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를 아홉 종류로 분류하여 1) 유가류 2) 도가류 3) 음양가류 4) 법가류 5) 명가류 6) 묵가류 7) 종횡가류 8) 잡가류 9) 농가류 학파의 특징을 논술하였는데, 그 중 유가류(儒家類)라 한 것은 공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가학파를 말한다.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유가의 학파는 주(周)나라 때의 ‘사도(司徒)’6)라는 관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그 임무이다. 음양의 이치를 따르고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임금을 바르게 도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사상은 인(仁)과 의(義)이며 인의사상이 유교의 경전인 육경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역사적 학통을 보면, 요 · 순과 문왕 · 무왕을 본받고 이를 집대성한 공자를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고, 유가학파의 도가 모든 학파 중에서 으뜸이며 동양의 모든 학술 · 문화의 사상적 근원으로 그 전통을 이루어온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과 후를 획기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가 갖는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공자사상은 도가처럼 자연주의도 아니고 묵가의 공리주의도 아니며, 성실성과 불변함을 지닌 인간가치에 관한 학문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파헤친 인생철학이다. 그런데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인(仁)은 자기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완성까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을 도덕실천의 최고 목표로 삼은 것이다.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유가 사상은 ‘인(仁)’으로 통용되는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인’은 유도(儒道)의 근본이며 인류애의 근본사상이다. 이 ‘인’에 관하여서는 『논어』에만 105자에 달하며 사서에 나타나 있는 ‘인’ 자를 모두 합하면 272자가 된다. 이로 볼 때 유교에서 얼마나 ‘인’자에 치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인’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혼자 존립할 수 없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仁者, 人也(인자, 인야: 인은 곧 사람이다)”라 하였고, 『맹자』에서는 “仁也者 人也(인야자 인야: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라 하였으니, ‘인’은 곧 사람, 다시 말하면 ‘인’은 인간 자체의 성실성 있는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의 길(仁道)’은 곧 ‘사람의 길(人道)’과 서로 통한다. 공자는 ‘인’ 사상에 대해서 뚜렷한 정의를 밝히지 않았고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때와 장소에 따라 인물에 따라 각각 그 답이 달랐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 했으나 다른 제자의 질문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서(恕, 관대함)가 그것”이라 하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신중하고 남과 사귀는 데는 성실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 공자는 증삼에게 내 도는 한결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제자가 증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자 “충서(忠恕)가 그것”이라 했다. 이런 말은 자공(단목사)도 하고 있어서 충서야말로 ‘인’일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주관에 따라 어떻게라도 해석이 가능한 반면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에 대한 학설들이다. 이는 공자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를 기피했고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도 ‘인’의 개념에 대한 규정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 어느 ‘덕(德)’도 ‘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 그 어느 것만으로는 그 내용이 대변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고 선(善)은 어디에라도 적용되는 반면, 어느 것으로도 포착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논어』 「자로(子路)」편 18장에는 엽공과 공자가 정직에 대해 문답한 것이 나와 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자식이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숨기는 것이 정직”이라고 하였다. 어떤 덕이든 그 형식적인 면에 얽매이면 도리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공자가 ‘인’의 규정을 회피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애정이 결핍된 사람에게는 교훈이 되겠지만 이 정의로 고정시켜 버리면 적군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인’에 대하여 완벽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한 것은 저울이 평형을 이루려면 상대의 무게에 따라 추의 무게나 위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듯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철인의 속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자가 정의를 안 내린 이 ‘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선이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다 싶다. 또 그것이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공자의 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를 살면서 평생 교육과 학술 활동을 펼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중국 인재사와 교육사에 있어서 계획적이고 전문화된 대량의 인재창출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상(商) · 주(周) 때부터 국가 차원의 교육기관과 체제를 갖추고 귀족과 그 자제들에게 시 · 서 · 예 · 악을 가르쳐 자질을 향상시켰다.(『순자(荀子)』 「왕제(王制)」)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여 실행한 이런 교육은 너무 형식적이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할 수는 없었다. 춘추시대 및 그 이전의 이름난 군주를 비롯하여 장수와 재상 및 기타 인재들 중에 귀족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교육에 있어서 귀족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학(私學)을 창립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초의 인물이다. 공자는 사학을 창립하여 각계각층의 자제들을 키웠는데, 스스로 ‘가르침에 부류는 없다’는 뜻의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그가 길러낸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뛰어난 학생만도 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노나라 사람이었지만 진(晉) · 정(鄭) · 송 · 오 · 초 등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맹의자 · 남궁적(南宮適) 등과 같이 귀족 집안 출신이 있는가 하면 안회 · 증삼 등과 같이 빈곤한 집안 출신도 적지 않았다. 또 염옹은 신분이 최하층민이었고, 공야장은 죄인의 몸이었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인재 배양을 독립된 사회활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인재와 관련한 이론 연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는 인재 발전사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재관과 관련하여 공자는 애인7)과 존현8)을 강조했다. 그는 “인(仁)이란 곧 사람이므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것이 옳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라고 했다.(『예기』, 『중용』) 공자의 교육 목적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는 데 있었다. 공자가 가르친 내용으로는 시 · 서 · 예 · 악 · 어(御) · 사(射)가 있었는데, 기본 경전과 예악은 물론 말타기와 활쏘기까지 익히게 하여 학생이 보다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한 인재들로 커가도록 의도했다. 공자의 교육방법은 생활 속의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교육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문(文, 지식) · 행(行, 실천) · 충(忠, 국가관) · 신(信, 신용)을 내세웠다. 이는 최초의 인재 평가기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며 책임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해보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후기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전국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당시 각국이 원했던 인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서주(西周)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던 공자의 정치사상은 당연히 이런 풍조와 맞지 않았고 현실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경험을 종합하여 이를 교육과 학술에 재투자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겪었던 불운을 거울삼아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존현(尊賢)’이란 용인관을 내세운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교육적 이상은 오늘날까지 살아 현대인의 삶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래 공자에 대한 논쟁은 주로 공자의 사상에 나타나는 계급적 속성 문제와 철학적 속성 문제에 집중되었다. 계급적 속성 문제는 중국 역사시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 문제와 한데 얽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주진(周秦, 주나라와 진나라) 봉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자 사상의 계급적 속성에 대해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견해를 제기한다. 1) 귀족 노예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2) 봉건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3) 노예주 귀족에서 변화한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4) 평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다음 공자의 철학적 속성 문제에 대한 견해 역시 크게 네 가지로 대표된다. 1) 공자는 무신론자이며 그의 천도관(天道觀)은 유물주의적이다. 2) 공자 사상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두 가지 성분을 아울러 갖고 있다. 3) 공자는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4) 공자는 은 · 주 이래 전통적인 천명관념을 계승한 유심주의자다.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와 차이는 있었지만 그가 수립한 사상체계와 교육사상 등은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고 또 여전하다. 그의 사상체계에 보수적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파악하고 이를 전통사상과 연계하여 새로운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제기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실제 정치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만년에 정리한 역사, 철학, 사상, 교육, 예술, 정치윤리 등과 관련된 이론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의 모습 8. 관련 유적   공자와 관련한 유적은 중국 전역에 남아 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삼공(三公)이 가장 유명하다. 삼공이란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저택인 공부(孔府)를 말한다. 삼공을 포함한 관련 유적을 아래에 정리해둔다. ① 창평니산부자동(昌平尼山夫子洞):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창평향 니산 동쪽 기슭 ② 궐리방(闕里坊): 산둥성 취푸시 공묘동장 밖 궐리가 중부 ③ 공자고택문(孔子故宅門): 산둥성 취푸시 공부대문 서측 ④ 공택고정(孔宅故井):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시례당 뒤 ⑤ 문례당(問禮堂):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1킬로미터 주공묘 동로 내 ⑥ 시례당(詩禮堂):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내 ⑦ 행단(杏亶):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전 앞 ⑧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북폐 동측 ⑨ 수사서원(洙泗書院): 산둥성 취푸시 공림 동북 1킬로미터 ⑩ 무우태(舞雩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2킬로미터 ⑪ 춘추태(春秋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8킬로미터 식감촌 내 ⑫ 석문사(石門寺):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26킬로미터 석문산 남쪽 기슭 ⑬ 관천정(觀川亭): 산둥성 취푸시 니산 공묘 대성문 동남 ⑭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산둥성 쯔보시 성 동쪽 소원촌 ⑮ 협곡(夾谷): 장쑤성 공유현 성 서북 15킬로미터, 위공자 상로회제후 ⑯ 호산(虎山):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비규령 동북 ⑰ 공자애(孔子崖):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서남 ⑱ 공자등림처방(孔子登臨處坊):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홍문궁 앞 반도 위 ⑲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동남 태평정 위 ⑳ 공망산(孔望山): 장쑤성 롄윈강시 신포 남쪽 2.5킬로미터 ㉑ 학당강(學堂崗): 허난성 창위안현 성 북쪽 5킬로미터 ㉒ 격경처(擊磬處): 허난성 급현 남관, 상전 공자증재차 격경습락 ㉓ 현가태(弦歌台): 허난성 화이양현 성 밖 서남 모퉁이 ㉔ 문아태(文雅台): 허난성 상추(商丘)현 동남 1.5킬로미터 태지 위 ㉕ 부자애여쇄서태(夫子崖與曬書台): 허난성 닝청현 동북 32킬로미터 망산진 서남 기슭 ㉖ 공자문례처(孔子問禮處): 허난성 락현시 노성 동관 ㉗ 공자묘(孔子墓): 산둥성 취푸시 공림 내 남부 ㉘ 공자묘(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성내 ㉙ 대성전(大成殿):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㉚ 규문각(奎文閣):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동문문여 십삼어비정 사이 ㉛ 십삼어비정(十三御碑亭):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앞 ㉜ 니산공자묘(尼山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니산 동쪽 기슭 ㉝ 확상포(矍相圃): 산둥성 취푸시 내, 공묘 서측, 상국가로 남쪽 ㉞ 공림(空林): 산둥성 취푸시 성 북쪽 1킬로미터 공자의 무덤인 공림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저택인 공부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70 평생을 단 38자의 문장으로 개괄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자서전 내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열다섯 무렵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무렵에 내 뜻을 세웠고, 사십 무렵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오십 무렵에는 하늘이 준 사명을 알게 되었다. 육십대에는 순종하게 되었고, 칠십이 넘자 마음 가는대로 따라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 「위정(爲政)」편) 위 38자의 회고록은 공자가 70이 넘자 인생을 회고하면서 제자들에게 구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면서 감개무량한 심경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공자의 가문은 역대로 통치자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어 많은 특혜를 받았다. 따라서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자로부터 공덕성(孔德成, 1920~2008)에 이르기까지 77대가 되고 있는데, 그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1) 오대 후량(後粱) 건화(乾化) 연간(911~912)에 공부9)에서 청소를 담당하던 공말10)이란 자가 공자의 42대손 공광사(孔光嗣)를 죽이고 공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18년 뒤 공광사의 아들 공인옥이 당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건을 밝히자 공말은 처형되었다. 이 일로 공인옥은 공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흥조(中興祖)로 존중되었다. 한편, 공말의 후손들은 이 사건으로 ‘가문 밖의 가짜 공씨’란 뜻의 ‘외원위공(外院僞孔)’, 줄여서 ‘외공(外孔)’으로 찍혀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2) 북송 말기 제 48대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후손을 이렇게 높여 불렀다) 공단우(孔端友)가 강왕(康王)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저장성 취저우(衢州)에 살게 되니, 이를 남쪽 지역의 공씨 가문이라는 의미로 ‘남종(南宗)’이라 한다. 그 동생 공단조(孔端操)는 취푸에 남아 가문을 이으니 이것이 ‘북종(北宗)’이다. 실제로는 남종이 공씨 가문의 장손 후예들이지만 취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남종과 북종이 정통을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1488~1505)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에 의해 북종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 종법제도에 따라 적장자는 윗대를 잇는 계승자다. 공씨 가문은 장자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장자가 아들이 없으면 반드시 가장 가까운 혈통을 골라 장손의 자리를 잇게 했는데, 조카가 장손 자리를 이을지언정 동생이 장손 자리를 이을 수는 없게 했다. 11.  공자의 유머11)   공자의 유머는 자연스럽다. 『논어』에는 유머러스한 공자의 말이 많은데, 이는 공자가 실제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정감 넘치고 이치에 합당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성리학의 기세가 너무 강했던 탓에 공자 이후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는 14년 동안 송 · 위(衛) · 진(陳) · 채(蔡) 사이를 떠돌아 다녔는데, 여의치 않은 경우가 열에 아홉이었지만 그 때마다 늘 의연하게 대처했다. 세상에 대해 상심하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고향인 노나라에서 계환자12)와 양화13) 같은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진(晉)나라로 가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하 가에서 “물이여, 물이여!”14)라며 탄식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환퇴란 자가 공자를 해치려 하자 “환퇴 그가 나를 어쩌겠는가?”15)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스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군자의 두려움 없는 기세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진 · 채 · 여(汝) · 영(潁)에서 왜 그렇게 특별히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1) 유머 사례   공자의 침착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진(陳)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무려 7일 간을 굶었을 때의 일이다. 제자들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자는 꼿꼿하게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침착하고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느냐?”16)고 물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우리가 공자에게 가장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17) 또 한 번은 공자와 제자들이 길에서 흩어져 서로를 잃어 버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동문에서 공자를 보았다면서 그 행색이 마치 ‘상갓집 개’ 같더라고 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다른 건 몰라도 상갓집 개란 말은 그럴 듯하구나.”라 했다.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공자는 인정(人情)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공손하면서도 편안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다. 천리 밖까지 찬바람이 쌩쌩 도는 도덕군자인양 점잔을 빼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자나 주자와 같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공자의 모습은 바뀌어 버렸다. 도학적 관점에서 공자를 논하면 공자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다. 그들은 마치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을 성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모름지기 도학적인 송대 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공자는 거침없이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유비18)라는 자가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거나 문지기를 시켜 집에 없다고 하라 했다. 그런데도 유비가 가지 않고 문 앞을 얼쩡거리자 공자는 일부러 유비가 들으라고 비파를 연주했다.19) 공자가 왜 그랬을까? 주자는 공자가 유비를 몹시 싫어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와는 달리 청나라 때 학자 최술은 다른 해석을 했다. 그는 이 대목이 후세 사람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라면서, 성인께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역사학자 고힐강은 최동벽의 이런 견해에 불만을 나타내며, “경서(經書)와 공자 · 맹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도처에 선입견과 주관이 물들어 있다.”20)라고 했다.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논어』의 멋을 알려면 먼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들을 음미해야 하는데, 그 중에는 유유자적하면서 한 말, 솔직담백한 말, 외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 말,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 유머러스한 말, 심지어는 농담 및 욕까지 다양하다. 요컨대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실록(實錄)으로, 공자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다. 진지함과 농담이 적당히 섞인 조용하고도 차분한 이 실록으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진짜 성품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대화 내용을 인용한다. “그게 바로 나다!”21)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전혀 격이 없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해 강의하면서도 후대의 정자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집착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공자는 “너희들 내가 너희들한테 뭐 숨기는 것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 숨기는 것 하나 없다. 지금까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너희들에게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게 바로 나다.”라고 말한다. 정겨운 모습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농담이야!”22) 공자는 자신이 한 농담에 대해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한번은 제자인 언언이 성재(城宰, 성의 우두머리)로 있는 무성(武城, 산둥성 더저우에 있는 현) 지방을 방문했는데,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와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공자는 싱긋이 웃으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했다. 그러자 언언이 공자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얘들아 언(偃)의 말이 옳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공자가 한가하게 제자들과 나눈 대화의 말투는 보통 이러했다. “나는 점아를 따라 가겠다.”23) 제자들에게 각자의 바람을 물어보는 대목이다. 모두들 매우 즐겁게 자신의 포부 등을 얘기했다. 공자는 딱딱한 겉치레 말이 아닌 은근한 정을 담은 말로 분위기를 끌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나자 증석(증점)은 자신의 ‘바람’은 관직을 하는 것도 아니오, 조정과 종묘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공자는 “무슨 상관이냐? 나는 그저 각자의 바람을 듣고 싶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증석은 비파의 굵은 줄을 한번 퉁겨 소리가 울리게 한 다음 비파를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 부분을 대략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3월과 4월 사이 새 옷을 입고 양음산24) 중정공원(中正公園)으로 놀러 갑니다. 어른들 대여섯이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논 다음, 근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다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25)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점(點)아! 나는 너하고 같이 가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네 말에 전적으로 뜻을 같이 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에서 진지하고도 점잖게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에 뒤이어 증석이 이렇게 느긋하게 분위기를 풀어 버리니 자연스럽게 유머 작용을 한 것이다. 공자도 흔쾌히 그 뜻을 알아주었다. “말을 탈까, 활을 쏠까?”26) 누군가 공자를 두고 “공자는 정말 위대하다. 그렇게 박학다식하면서도 특기 하나 없으니.”라고 비꼬았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나한테 무슨 특기를 가르쳐 주려고? 말을 탈까? 아니면 활을 쏠까? 아무래도 말을 타는 것이 낫겠지?”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진짜 유머의 멋이 물씬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그래? 어찌 그럴 수가!”27) 공자가 공명가(公明賈)28)에게 위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에 대해 묻기를 “정말로 그 사람 말하지도 웃지도 욕심부리지도 않느냐?”라 했다. 그러자 공명가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부풀려 한 말입니다. 그 분은 말할 줄도 웃을 줄도 아는데 다만 그럴 만한 때라야 말을 하고 웃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러냐? 정말 그러냐?”라고 말했다. 이런 중첩된 말투는 『논어』에 흔히 보이는 회화체 필법이다. “사야, 네 능력 밖이다.”29) 자공은 말을 아주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남이 저를 아무렇게 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저도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사(賜, 자공의 이름)야, (말은 쉽다만) 내가 보기에 네가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 냄새 맡고는 그냥 일어서다.”30) 이 대목은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는데, 최술은 또 위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별 것 아닌 대목이다. 그저 공자가 꿩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구역질이 나 먹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목은 「향당편(鄕黨篇)」에 보이는데, ‘향당편’은 주로 먹는 것에 관한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새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내려앉았다. 자로(중유)가 가만히 다가가서 “들새로구먼. 마침 잘 왔다!”며 잡아서는 공자에게 드렸는데, 공자는 서너 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들새의 비린내가 싫어 먹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원래 들새는 2~3일 말렸다가 먹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무슨 거창한 도리를 찾아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여럿이 하루 종일 죽치다.”31) 공자 왈 “여럿이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좋은 말 한 마디 않고 사사로운 꾀나 부리고 있으니,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 여기서 맨 뒤의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이라는 말은 ‘잘 하는 짓이다’라는 말이다. 주자는 이 대목을 ‘장차 근심과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지만 이것은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이라는 한적한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말투가 또 한 군데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이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쓰는 일 하나 않는구나. 정말 잘 하는 짓이다! 장기나 바둑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곳에라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데도 마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32) 유머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방에서 친한 친구와 나누는 한담 같이 전혀 꾸밈없고 허세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논어』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찌 담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표주박과 같을 수 있나?”33) 또, “팔아야지! 암, 팔아야지! 나는 누군가 나를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34)라는 말도 했다. 이 구절은 현명한 군주가 자기를 등용하길 기다린다는 뜻으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해 두었다가 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친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분위기라면 오해는 사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을 너무 진지하게 읽는다면 그 맛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자가 사람을 욕한 대목도 적지 않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떠냐는 물음에 공자는 “아, 째째한 인간들이니 인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35)라고 대답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 밥만 축내는 그 밥통들, 어디다 쓰겠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친구 원양을 욕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늙어서 죽지 않으면 도적이야!”라고 한 다음, 그것도 모자랐던지 몽둥이를 들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원양의 정강이를 때렸다. 염구를 욕하면서 “내 제자가 아니니라. 얘들아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가해도 좋다!”36)라고까지 말했다. 제자에 대해서까지도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염구가 권력자 계씨(季氏)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었다. “유(由)야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37) 이 말은 자로(중유)를 두고 한 욕으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진짜 위트 넘치는 공자의 말을 독자들은 평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가장 좋은 보기 중 하나가 『공자가어』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다. 자공이 죽은 자에게도 지(知)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대뜸 “네가 죽으면 알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이는 자로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38)라고 대답한 것처럼 위트가 넘친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39)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40) 이런 대목들도 같은 종류로 본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하는 것이다.”41) 또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하지 말고 알아 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라.”42)라는 대목은 알 ‘지(知)’43)자를 가지고 대단히 좋은 문장을 만들었는데, 위트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다. 공자는 화통한 사람이었다. 나오는 대로 말해도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여러 곳을 실제로 돌아다녔고, 또 쉬우면서도 친근한 말로 사람과 접촉했다.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존경해야 한다면서 “봉양이야 개나 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야.”44)라고 말한다.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나더러 마부가 되어 수레를 몰게 해도 기꺼이 하겠다.”45)는 말도 한다. 모두가 참으로 꾸밈없는 말들이다. 여러 곳을 몸소 다녔기 때문에 늘 유머러스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문호 칼 밴 도렌(Carl van Doren)은 공자의 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계문자(季文子, 계연)가 세 번 생각하고 난 다음 행동한다고 말하자 공자가 “두 번, 그 정도면 되네.”46)라고 말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일도 지나치면 못쓴다는 뜻으로 결단과 실천을 강조한 대목이다. 12.  공자연보   BC.551: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남 BC.549(3세): 아버지 사망 BC.535(17세): 어머니 사망 BC.533(19세): 결혼 BC.532(20세): 아들 공리 출생 BC.522(30세): 자로(중유), 증석(증점), 염경, 염구, 염옹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 BC.518(34세):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가 죽으면서 그의 맏아들 맹의자(孟懿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 BC.502(50세): 노나라 권신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공자를 부름 BC.501(51세):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 산둥성 중도 현령)가 됨 BC.500(52세): 다시 사공(司空, 정1품 관직)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가 됨 BC.497(55세):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세):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세):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위령공의 부인)를 만남 BC.494(58세):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세):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에게 액운을 당함 BC.489(63세):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세):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년)에 벼슬을 함 BC.484(68세): 노나라 계강자(노나라의 실권자)가 공자를 부르자 고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감. 이후 유약, 증삼, 자하(복상(蔔商)), 자장(전손사)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세): 아들 공리 사망 BC.481(71세): 제자 안회 사망.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세):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사망 BC.479(73세): 공자가 세상을 떠남 참고문헌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맹자(孟子)』 『공자전(孔子傳)』, 전목(錢穆), 삼련서점(三聯書店), 2002. 『논공자적유묵(論孔子的幽黙)』, 임어당(林語堂), 무소불담합집(無所不談合集) 『유머와 인생』, 김영수옮기고엮음, 아이필드, 2003. 『용인』, 리수시편저, 김영수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중국역대명인승적대사전』, 상해문예출판사, 1995. [네이버 지식백과] 공자 [孔子, kǒng zǐ] - 유교의 시조 (중국인물사전)  
1432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道家의 시조 - 로자 댓글:  조회:2931  추천:0  2019-11-19
철학사전 노자   [ 老子 ] 노자 출생 - 사망 미상 ~ 미상 출생지 초나라 이명 자 : 담(聃) 본명 : 이이(李耳) 직업 사상가 분야 도가 국적 중국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노자도덕경』이라고도 불리우는 『노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상당히 발전한 무렵부터 한(漢)대까지의 도가 사상의 소산(所産)이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주로 맹자)에 대하여, 도덕ㆍ지혜를 버리고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정치사상과, 동일하게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하여 성공ㆍ보신(保身)하려고 하는 처세술이다.  이들에 대한 근거로서, 현상의 배후에 불가지(不可知)의 실재(實在)인 도(道)를 설정하여, 우주생성설과 음양의 자연학을 도입하여, 세계는 도(道)로부터 나오고 '도'에 의하여 생성ㆍ사멸의 운동을 한다고 하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자 [老子] (철학사전) ===============================///   헤겔사전 노자   [ 老子 , Lao-tse ] 중국에서 사람들은 자기 밖의 황제 안에서 자기의 직접성을 보았지만, 다음의 단계에 이르면 자기 내면 안에서 자기를 보고자 하는 교설이 나타난다. 이것이 도교이다[『종교철학』 16. 328 참조]. 헤겔에 따르면 내적인 것, 즉 추상하는 순수사유로의 이러한 방향은 이미 고대 중국에서 발견되지만, 그러나 그 교설이 좀더 변화하여 심화된 것은 후대에서이며, 특히 노자에서이다. 노자에 의해서 심화된 교설에서는 사상이라는 순수한 지반으로의 이행이 싹트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 추상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그것 자체에서 순수한 불사의 존재가 되고자 의도했다. 그러므로 생명성 · 의식 ·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상은 완전한 추상에 그치게 된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공자와 노자를 동시대인이라고 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 노자는 공자보다 100년가량 후(춘추시대 말기)로 되고 있다. 헤겔은 노자에 관한 자료로서 아벨 레뮈자(Abel Rémusat 1788-1832) 「노자의 생애와 견해에 관한 각서」(Paris 1824)와 『노자도덕경』의 번역을 읽고 있었다. -핫타 다카시(八田隆司) [네이버 지식백과] 노자 [老子, Lao-tse] (헤겔사전) =====================================///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노자의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인물사전 ========================/// 공자-논어 인.예.정명사상.덕치.대동사회를 주장 맹자-맹자 인의.성선설.왕도정치.민본주의.역성혁명을 주장 노자-도덕경 도.무위자연.상선약수.무위정치.소국과민 주장 장자-장자 도.소요유.물아일체.제물론.좌망.심재를 주장  
1431    [그때 그 노래] - "손에 손잡고"... 댓글:  조회:2412  추천:0  2019-11-19
88올림픽 주제가 ㅡ"Hand In Hand" 손에 손잡고                   /조로지오 모로더 작곡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길 나서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사는 세상 더욱 살기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
1430    "그까짓 1000억,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댓글:  조회:2846  추천:0  2019-11-18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과 그의 연인 자야의 사랑 19.01.31 l 임영열      
1429    최소한 윤동주에게 욕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댓글:  조회:3040  추천:0  2019-11-14
오피니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작자 미상     2017-10-15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가야겠습니다 (후략) 지난 주말 MBN을 보다가 회사 이미지 광고로 이 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저자를 윤동주 시인이라고 밝힌 걸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 이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서시’와 ‘별 헤는 밤’의 그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시의 작자를 잘못 표기할 경우 현존 시인에겐 정신적 고통을,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에게는 명예에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마땅하다. 나도 유사한 사례로 인해 곤란을 겪은 일이 있다. 먼저 글에서 좀 간지럽고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무리 윤동주 시인이 요절하여 20대의 청춘만을 살다간 시인이지만 그의 삶과 대표작 몇 편을 알고 좋아하는 ‘정상적인’ 독자라면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야 온당하다. 학교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는 대신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시간만 가졌더라도 시의 어조에서 어렵지 않게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우선 내용의 상투성(물론 나쁜 글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이 느껴진다. 그리고 표현기법의 얼개가 얼핏 윤동주의 분위기를 연상케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주제의 심오함이 현격히 떨어져 윤동주 시인의 시와는 거리가 멀고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상처’ 운운 등의 표현도 눈에 거슬린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사망하여 생전엔 시집을 묶어내지 못하고, 1948년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이후 여러 판본의 ‘윤동주 시집’이 나왔으나 그 어느 시집 목록에도 같은 제목의 시는 없었다. 그동안 인터넷뿐만 아니라 일부 언론과 책에서도 윤동주의 시라면서 인용된 사례가 있었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분이 적지 않고 확실히 정리해 매듭을 짓자고 한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모교인 연세대학교 측이나 ‘윤동주 기념사업회’ 등도 이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몇 년 전 한국일보 논설고문인 임철순 선생께서 인터넷한국일보에 ‘그건 윤동주의 시가 아니다’라는 칼럼을 쓴 바도 있다. 그럼에도 오류가 방치된 채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금껏 유포되고 방송사에서 그걸 회사 이미지 광고에 인용한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의 심각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원작자가 ‘좋은 생각’ 정용철 발행인이란 설도 있고 뇌성마비 장애시인 김준엽이란 말도 있다. 어쩌면 동명이인의 한 젊은 여성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진위가 밝혀지길 바란다. 지금 ...라고 말하고 있다. 원통한 죽음도 모자라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 현실에 말로만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시인으로 추켜세울 게 아니라 최소한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이는 일은 없어야겠다. 올해 윤동주 시인 탄생 100년을 맞아 생각이 많다. ///ⓒ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 절실” 장안대 정승재 교수, 솟대문학 특집 통해 ‘강조’ “범죄에 취약한 약자…정부가 보호할 의무 있어” 에이블뉴스,  2014-03-26  관련기사 - 뇌성마비 시인, “작품 저작권 강탈당했다” 계속되는 표절문제에 놓인 위태로운 장애인문학. 정부가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장안대학교 행정법률과 정승재 교수는 최근 솟대문학이 발행한 통권 93호 신춘특집 ‘표절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 문학’을 통해 표절 사태를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보면, 20년 전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윤동주, 정용철, 작자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을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가미상,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1987년에 발간된 전신마비장애 김옥진 시인의 시집 ‘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에 수록된 ‘기도’ 라는 시가 변영인 교수의 시집 ‘그대의 강가에 서서’에 ‘기도1’로 절반 이상이 표절된 상태로 실려 있었다. 아울러 지체장애 이용석씨의 제8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당선 수상작인 단편소설 ‘바리데기꽃’이 2002년 제1회 전국 고교생 소설백일장 대상 수상자인 김해 A여고 김 모양이 수상경력으로 대학 특례 입학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면 이것은 오히려 표절이 아니라 도용에 해당한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일은 문학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라며 “문학이 그만큼 고독한 투쟁 속의 산물이고 그 창작의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남의 작품을 훔쳐오고픈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 문인들의 작품을 도용하거나 표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에서 보듯 유독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범죄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장애인이란 세상살이에서 불리한 조건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약자다. 범죄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무엇인가를 빼앗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정 교수는 “저작권은 기본적으로 사법영역이지만, 장애인의 저작권은 사회법영역이라 봐야 한다. 장애 작가의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며 “국가가 불리한 조건을 지원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의 장애문인에 대한 지원 속에는 장애문인의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까지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정 교수는 “정부의 적극적인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가 있어야 한다”며 “장애문인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이슬기 기자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 “내 시를 돌려달라”… 국민애송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알고 보니   정창교 기자입력 : 2014.01.04    [쿠키 사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페이스북에서 저작권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시를 쓴 실제 주인공은 2014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 보치아 선수로 출전하는 김준엽씨로 파악됐다. 솟대문학 방귀희 발행인은 3일 페이스북을 통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가 윤동주 시인으로 알려졌으나 이 시를 쓴 시인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씨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소개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으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위해,/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이 시는 당초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라는 제목이었다. 20년 전 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씨가 쓴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시 7편을 제출하기 위해 김준엽 시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김준엽 시인의 활동보조인이 문제의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인터넷상에서 좋은 글로 사랑받고 있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을 한 결과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꿔 윤동주, 정용철, 작자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나라 유일의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에 억울한 사정을 알려왔다. ‘솟대문학’ 방귀희 발행인은 신속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기로 하고 조사한 결과 김준엽 시인이 20여 년 전 하이텔 사이버문단을 통해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1995년 봄 서울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발간해주겠다고 해 시작품들을 보냈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김준엽시인은 시집 출간도 못하고 작품도 돌려받지 못한 정황도 파악됐다. 이 과정에서 월간 ‘좋은 생각’ 1995년 9월호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가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 시인의 작품으로 게재됐고, 정용철 시인은 ‘내 인생이 끝날 때’로 제목을 수정해 발표하기도 했다고 솟대문학측은 설명했다. 솟대문학측은 또 김준엽 시인의 시 제목 황혼을 그대로 사용한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이란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밝혔다. 가장 많이 알려진 시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윤동주/정용철로 작가가 표기되기도 하고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미상으로 표기될 뿐 그 어디에도 김준엽 이란 작가의 이름은 없다. 김준엽 시인은 중증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써서 2011년에는 첫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고, 새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당당한 시인이다. 그리고 뇌성마비 종목인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있다. 또한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방귀희 작가는 “김준엽은 시인으로, 운동선수로, 사회복지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무명의 힘없는 시인이라고 작품 저작권을 강탈한 사실을 세상에 알려 바로 잡아줄 것을 솟대문학에 호소해와 사실관계를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창교 기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열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리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2018.10.29. ========================///신문의 주필이라는 "양반"까지 윤동주의 시공부는 아니 하고 이 따위로 편집하고 아직도 오발하고 있으니... 참, 답답도 합니다... 이는 윤동주 시가 아님을 명백히 밝힙니다... 이 시는 김준엽이 쓴것 시입니다.ㅡ 죽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 몇가지가 있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 했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 입니다./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 해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것 입니다./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냐고 물을 것입니다./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 입니다./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가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가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다.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바람 끝은 쌀쌀하고 나뭇잎은 붉게 물들어간다. 여름의 긴 시간이 끝나고 산 위에서 바라보는 들녘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나의 인생도 이처럼 넉넉한가’ 되돌아 보게하는 계절이다. 이런 가을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한다. 아마도 계절 속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이 숨어 있어서가 아닐까?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가을이다. 사람들이 계절중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 되면, 세월 가는 것을 더 느끼게 된다. 단풍을 보면 철학적인 사색을 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면 인생도 후회가 없어야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마지막 남은 잎새를 상상하게 된다.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들이 생각나는 가을, 그러나 작년 이맘때 품은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가을이 주는 혼미함 인가.  ///경기신문/정준성 주필 ==========================/// 명색이 박사라는 분도 윤동주의 시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를 이 따위로 가위질해 써먹으니... 참, 참, 답답도 합니다...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은 김준엽이 쓴 시로서 절대로 윤동주 시 아님을 정중히 밝힙니다. ㅡ 죽림   가을철 명상 세월은 쏜살같고 흐르는 물(流水) 같다. 쉼 없이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아껴 써야 한다. 주자(朱子)의 권학시를 보자.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조그만 시간인들 가벼이 여길쏘냐?/ 뜰 앞의 풀들이 봄꿈을 깨기도 전에/ 계단 아래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감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도연명(陶淵明)도 비슷한 시를 지었다. “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인생에 청년의 때가 두 번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도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니 때에 맞춰 열심히 살아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세월 가는 것을 더 느끼게 된다. 뜨거운 여름에 혼미하고 바쁘다가도 가을철의 결실과 추수와 단풍을 보면 약간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윤동주(尹東柱) 시인은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이하 생략). 고은(高銀) 시인은 란 시를 썼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제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찾아보자. “가을이 봄보다 아릅답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가을의 분위기는 정(情)을 느끼게 하며 친근감을 주고 청명(淸明)한 가을하늘을 향해 해맑게 핀 코스모스(cosmos)를 보면 정녕 가을은 봄보다 아름답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속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생각(思索)이 스며들기 때문일 게다. 꽃이 할 일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려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어느 곳이든 발이 닿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이름(사명)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름 모를 들꽃들도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데 천하보다 귀중한 우리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불평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내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거만하지 않다. 자연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가을은 온 산하에 수많은 단풍들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단풍 한 잎을 보면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알아낸다면 참 좋겠다. 우리들은 확실히 가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도 좀 더 멀리 내다보게 되고 오늘의 내 모습도 세심히 살펴보게 되며 다른 이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바로 가을이다. 가을이 되어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인생의 무상함도 느낀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함에 의존하게 된다. 맑고 투명한 하늘을 볼 때, 우리는 진실의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가을은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마지막 남은 잎새’를 상상하게 된다. 그 잎마저 떨어지는 날 우리는 드디어 하늘을 바라본다. 가을은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들을 생각나게 한다. 생명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서로가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것뿐이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 크리스천투데이  
1426    한용운 시모음 댓글:  조회:2592  추천:0  2019-11-14
      * 산거(山居) - 한용운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깍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샘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언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을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기루어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 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 떠날 때의 님의 얼굴 -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 하지만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 사랑 - 한용운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의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춘화(春晝) 1 - 한용운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 춘화(春晝) 2 - 한용운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쌉쌀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 꿈이라면 -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 꿈과 근심 - 한용운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은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되고 꿈이 근심되어라.     * 나룻배와 행인(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길이 막혀 -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칩니다. 나의 손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괴로워요.     * 심은 버들 - 한용운 뜰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 버들을 꺾어 말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어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칠까하였더니 남은 가지 천만사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한을 잡아 맵니다. * 당신이 아니더면 -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에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더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터이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서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이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인연 - 한용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안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을 못 잊는 것이요 그 만큼 그 사람과 사랑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사랑하니 잡아달라는 것이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행복 -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 나를 잊고자 -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고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 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 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괴롭습니다. * 이별은 미(美)의 창조 - 한용운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풀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꽃이 먼저 알아 - 한용운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팽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다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春晝 2〉 는 원래 《불교》 96호 (1932년 6월 발행) 권두언으로 발표된 것인데 뒷날 《민성(民聲)》 29호 (1948년 10월 발행)에 〈공화란타(空華亂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고 있으며, 이때까지도 두번째 시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22) 〈춘주〉는 불립문자인 선의 특성을 시적 미감을 통해서 멋지게 나타낸 시조이다. 유마거사는 재가의 거사이면서도 불교의 깊은 뜻에 통달한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 왕유가 유마거사를 자처하였고, 만해도 유마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님의 침묵》에서 ‘침묵’은 유마의 침묵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해는 미완성이지만 《유마힐소경 강설》을 번역하고 강설하였다. 《유마경》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유마의 침묵’은 선가에서 《유마경》을 선서로 삼는 유명한 법문이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때 유마힐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이 찬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문자나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禪)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부득이 그 언어는 고도의 상징 또는 역설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침묵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유마의 침묵은 최고의 법문이 된다. 〈춘주(春晝)〉는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에는 시의 제목이 〈춘화(春畵)〉(344쪽)라고 되어 있는데 〈춘화(春畵): 그림같은 봄날〉보다는 〈춘주(春晝): 봄날의 낮〉가 시의 내용으로 보아 맞다. 그리고 시조 〈춘조(春朝)〉가 있는 것으로 보아 따사로운 봄날 아침과 낮에 시를 쓴 것으로 본다. 〈춘주〉는 따사로운 봄날 낮에 《유마경》을 읽는데 바람에 나는 꽃잎이 글자를 가렸다. 처음에 붙인 제목 〈공화란타(空華亂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꽃(空華)’은 허공에 핀 꽃으로 본래 실체가 없는 번뇌 망상을 상징하는 선어이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진리의 길에 이르는 길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인 참선의 체험뿐이다. 그러니 구태여 꽃 밑의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선의 세계를 시화한 것이다. 선가에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깨닫고 보면 휴지조각과 같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였다. 내 마음 속에 무진장한 여래지(如來智)가 함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해가 《유마경》을 번역 강설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었는지 모르겠다. 김대행은 〈한용운의 시조와 삶의 문제〉에서 〈춘주〉의 긍정적 의미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화란타(空華亂墜)〉와 더불어 지금까지 살펴본 바 있는 불교적 시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의 의미 지향은 순접관계에 있는 긍정적 전개다. 이것은 대부분의 시조 작품에서 그 구성의 기본 구조로 초·중장의 병렬 관계가 종장에서 종결된다. 그런데 이같은 긍정적 의미 지향은 한용운의 경우 불교적 혹은 교훈적 작품에만 한정된다는 것이 특색이다. 〈선우(禪友)에게〉, 〈남아(男兒)〉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정서적 시조에 오면 그 의미 지향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23) 시조는 형식면에서 초·중장이 연결되고 종장이 분리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춘주〉의 형태는 초·중장이 전대절(前大節)로 분단되고 종장이 후소절(後小節)로 분립되는 가장 전통적인 시조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음악(唱)과의 관련성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한국 고전 시가 특히 시조의 전통적 특징인 것이다. 봄날에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초·중장에 서술되고 종장에 이르러는 한흥(閑興)이 결구를 이루게 된 것이다.24) 〈춘주〉의 두번째 시조를 “후각 심상인 ‘향(香)’과 청각 심상인 ‘꾸꿍이 소리’가 공감각(共感覺), 심상을 형성하여 고요한 선(禪)감각을 표출한다”25)고 김재홍은 분석하였다. 초장 ‘봄날이 고요키로 香을 피고 앉았더니’는 고요한 봄날 향을 피워 놓고 단정히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중장 ‘삽살개가 꿈을 꾸고 거미가 줄을 친다’고 한 것은 삽살개도 따스한 봄볕 아래 참선하듯이 졸고 있고, 거미도 자신의 본분사인 거미줄을 치고 있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각기 불성을 발휘하고 있는 화엄성기(華嚴性起)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거미는 자기가 친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 무애한 해탈 자유를 상징한다. 종장에서 ‘어디서 꾸꿍이 소리는 산을 넘어오더라’라고 결구한 것은 선시 이론의 극치인 뜻을 글자 밖에 나타내는 운외지미(韻外之味)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산 너머에서 꾸꿍이 소리를 따라 깨달음, 봄의 정취가 들려오는 듯하다. 익재가 “도연명의 동편 울타리 밑 국화를 꺾어 들고 우두커니 남쪽 산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시구는 눈 앞의 경치를 묘사하지만 뜻은 글자의 밖에 들어 있다. 말은 다할 수 있으나, 의미는 다하지 못한다”26)고 한 경지를 표현한 명시조이다.     * 한용운 1894년 홍성생. 24세때 백담사에서 중이됨. 불교개혁에 앞장서 을 씀. 3·1운동때 33인의 한 사람, 독립운동 헌신, 1925년 발간, 소설 등 문필활동 활발     =================================================/// 서안 1000여년 은행나무 [ 2019년 11월 14일 ]     서안에 있는 1000년된 은행나무가 황금빛을 뿌리며 국외 SNS 타고 일파만파 전해지고 있다. 최근 국외 SNS에서 5만6000번 전재할만큼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누리군들은 황금이 찬란해 눈이 부신다며 극찬했다. 观察者网
1425    "님의 침묵" - 한용운 댓글:  조회:4000  추천:0  2019-11-14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님의 침묵     1926년에 한용운이 간행한 시집. 표제시인 을 비롯하여 , , , 등 초기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용운의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은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정한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세계에서 '님'은 해석하기에 따라 '조국, 부처, 연인'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님은 갔다'고 말함으로써 객관적인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면서 주관적인 의지로서 '님은 자기와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즉,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지만, 시인 자신은 조선을 독립된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님의 침묵 / 한용운한용운이 지은 시. 1926년에 발간된 ≪님의 침묵≫의 서시이자 표제시이다. 산문적 율격을 지닌 자유시로서 작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님의 침묵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 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 - 단행본 님의 침묵     구분 시 서명 님의 沈黙 저자 한용운(1879~1944) 발행 회동서관, 1926. 면수 168면 크기 13.2×19.2(cm) 한용운(韓龍雲)의 속명(俗名)은 유천(裕穿)이고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며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향리에서 서당교육을 받았다. 1897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며 불도에 입문하였다. 1910년 경술의 국치를 전후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혁신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1913), 『불교대전』(범어사, 1914), 『정선강의 채근담』(동양서원, 1916) 등을 연이어 간행하였다. 1918년 월간 교양잡지 《유심(惟心)》지를 발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 신문화 사업에 힘썼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공약삼장」을 추가 기초하였으며, 서대문 감옥소에서 일본인 검사가 독립에 대한 답변서를 요구하자 「조선독립의 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십현담주해』(법보회)와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을 발간하였다.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 불교대중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흑풍』, 『박명』 등의 장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만년에는 『삼국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불교 개혁과 독립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서 의연한 삶을 살던 한용운은 1944년 지병으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하였다. 1973년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이 발간되었다. 『님의 침묵』 표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님의 침묵』 속표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님의 침묵』은 한용운의 시집으로 회동서관에서 1926년 5월 20일 초판 발행되었다. 서두에 「군말」을 두고 88편의 시를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지 않고 배열하였다. 말미에 ‘을축년 8월 29일밤 ’이란 부기가 붙은 「독자에게」를 첨부하였다. 시는 「님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사랑의 판」으로 끝난다. 김재홍의 『한용운문학연구』(1982)에 의하면 시집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 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소멸(정(正))-갈등(반(反))-생성(합(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편들이다. 시집 『님의 침묵』은 부정과 역설로 가득차 있다. 이는 부정을 통해 긍정의 세계가 도출되며, 역설을 통해 참다운 진리가 생성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님’이 부재한 상황을 만해는 도리어 ‘님’의 존재를 자각하는 계기로 삼음으로써 주체와 세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와 그 궤를 달리한다. 이는 불교의 철학적 원리와 민족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님’이 부재하는 시대에 ‘님’과의 합일을 꿈꾼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에서 끝없는 구도와 견인의 자세를 보여 준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어갑니다”(「나룻배와 행인」)라는 시구처럼 시집 도처에서 ‘당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드러내 보인다. ‘당신’은 ‘님’이며, 그 ‘님’은 서두에 쓰인 「군말」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른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시집 전체가 겉보기에는 여성적 화자를 동원한 사랑의 노래이지만 불교적 사유와 민족 현실에 기초한 사상적 깊이는 『님의 침묵』을 일제강점기 최고의 시집 반열에 올리는 데 손색이 없게 만든다. 판권지에 의하면 『님의 침묵』은 1926년 5월 15일 인쇄되어 1926년 5월 20일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저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고 인쇄자는 권태균이다. 인쇄소는 대동인쇄주식회사이고 발행소는 회동서관(滙東書舘)이다. 진홍빛 천으로 감싼 하드 커버의 앞뒤 표지에는 어떠한 문양이나 글씨도 넣지 않고 등표지에만 ‘님의 침묵’이란 제목과 ‘한용운 저’란 저자명을 표시하였다. 앞표지에 제목이 없는 대신 내제지(內題紙)에 굵고 붉은 글씨로 ‘님의 침묵(沈黙)’이란 제명을 힘 있게 써 놓았다. 1934년 7월 30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재판본은 내제지(內題紙)와 판권지만 달라졌다. 그러나 1950년 4월 5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삼판본은 표지의 장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분홍색 바탕에 흰색 모란과 짙은 나무색 줄기가 ‘한용운 저, 님의 침묵’이란 각진 제호와 잘 어울려 있다. 내제지와 서두의 「군말」 사이에 저자인 한용운의 사진도 삽입하였다.(박용찬) 『님의 침묵』 판권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참고어 : 조선불교유신론, 독립운동, 소멸과 생성, 역설 참고자료 [님의 沈黙] 원문보기 참고문헌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일지사, 1982. 만해사상연구회 편, 『한용운사상연구』, 민족사, 1980. 불교문화연구원, 『한용운 전집』 (전6권), 2006. 송욱, 『님의 침묵 전편해설』, 과학사, 1974. 최동호, 『한용운』, 건국대학교출판부, 2001. 한용운전집편집위원회, 『증보 한용운전집』, 신구문화사, 1979.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님의 침묵 / 한용운한용운이 지은 시. 1926년에 발간된 ≪님의 침묵≫의 서시이자 표제시이다. 산문적 율격을 지닌 자유시로서 작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님의 침묵 (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 - 단행본)   ============================///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탐구//' 질문) 님의 침묵에서 서정적 자아에 대한 설명으로 ‘이별의 정한이 어린 전통적 자아’ 라는 말이 어울리나요?   답변) 이별의 정한을 서술한 행을 살펴 보면 이렇습니다.    1행과4행의 전개는 임과의 이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5과6행은 이별 후의 슬픔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7행과8행은 새 희망에의 의지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9행과10행은 불굴의 의지의 사랑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결과적으로  ‘이별의 정한이 어린 전통적 자아’ 라는 말이 어울리나요는 조금은 진보된 이별의 정한이라 여깁니다만  김소월의 이별적 정한을 비교하기는 조금은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님은 나라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 시적인 면면을 들여다 보면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불교적이면서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를 보인다는 점이죠, 여기에서는 그렇습니다.   질문하신 의도는 부정을 말하시는 것 같군요.  정통적 이별의 정한이 내포되지 않은 점은 아마도 민족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기에 순수의도와는 별개라 보여집니다. 정치적인 것을 두고 말합니다. 고로, 순수한 이별의 정한이 퇴색한 점이 있다 봅니다. 차라리 윤동주의 서시처럼 대놓고 하늘을 우러러 ! 그리 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저의 소견이었습니다.   
1424    독립운동가, 시인 - 한용운 댓글:  조회:3276  추천:0  2019-11-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용운   [ 韓龍雲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호 만해(萬海), 만해(卍海)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79년(고종 16)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성격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홍성 성별 남 본관 청주(淸州) 저서(작품)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흑풍, 후회 등 목차 정의 개설 생애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함께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흑풍』, 『후회』 등을 저술한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애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활동사항 그의 혁신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圓宗)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전교(傳敎)와 행정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사적 원류로 보아 일본 불교는 종파적 특색을 가진 데 비해 한국 불교는 선교 융합적 특색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에 넘어갈 추세였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규약·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일제의 야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결실된 것이다. 비록, 대다수 승려들의 개혁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실효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탁견(卓見)이었다. 오늘날에는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 등 한국 불교의 대부분 종단은 이 총무원제도와 본사제도를 병행하는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첫째로 염불당(念佛堂)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근본 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변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둘째로 불교의식의 개혁이다.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그의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취처(娶妻)이다. 생활 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엄밀한 의미로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서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 강령을 보면,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그 동안 오교구산(五敎九山)이니 선교 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듯이 오도(誤導)하여왔다. 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쓴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이 책은 요즈음에 간행되는 ≪불교성전≫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 결실을 보아 한글대장경 사업을 촉진시켰으며, 불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불교학 진흥을 위하여서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용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9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탁월한 불교개혁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었는데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 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첫째, 사원 운영의 조직에서 염불당 및 불필요한 법당을 타파하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이상론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로도 무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오히려, 그 사상성을 고양(高揚)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단순히 지난 과오를 매도하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승려의 대처(帶妻)에 관한 주장인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청정한 교단은 독신 수행승에 의하여 주도하여온 것이 우리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취처(娶妻)를 합법화시키는 일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이른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승려의 자격 기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적절한 개혁책이었지만, 보편타당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소간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었고 위대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혁신론자로서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님의 침묵≫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의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관련이미지 2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유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용운 [韓龍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한용운   [ 韓龍雲 ] 요약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만해 한용운 선사상 출생-사망 1879.8.29 ~ 1944.6.29 본관 청주 호 만해 별칭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충남 홍성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용운 연보 출생 1879.8.29~ 사망 1944.6.29 1879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의 아들로 출생.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92 전정숙과 결혼. 1894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이후 인제군 백담사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 1908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에 참여. 1913 통도사 불교강사 취임. 《조선불교 유신론》 간행. 1914 《불교대전》 저술.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1917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8 월간지 《유심》 창간.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함. 독립선언서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3년간 복역. 1926 시집 《님의 침묵》 출판. 《동아일보》에 발표. 1927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지냄. 1931 《불교》지를 인수함. 1932 수필 를 《조선일보》에 발표. 1935 장편 《흑풍》 연재. 1944 6월 29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 1973 7월 《한용운전집》 간행. 1997 백담사에 만해기념관 건립. 참조항목 신간회, 유심, 조선불교유신론, 민족대표 33인 역참조항목 님의 침묵, 3·1독립선언서, 민립대학설립운동, 한, 이별은 미의 창조, 나룻배와 행인, 당신을 보았습니다 카테고리 지역 > 아시아 > 한국 > 충청남도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인물 > 종교 > 불교 > 한국불교 인물 > 사회 > 한국사회 인물 > 문학 > 한국문학 인물 > 수상자 > 한국상과훈장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용운선생의 수형기록표만해 한용운선생이 1929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수형기록표에 붙어 있는 사진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주)연합뉴스 [네이버 지식백과]한용운 [韓龍雲] (두산백과)   독립운동가 한용운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 [ 韓龍雲 ] 출생 - 사망 1879.8.29. ~ 1944.6.29.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선생의 [님의 침묵]중에서(1926) 1905년 백담사에서 불교에 귀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충남 홍성에 소재한 선생의 생가    
1423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 댓글:  조회:3069  추천:0  2019-11-14
민족·국제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중)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있을까.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아 물결이 은빛처럼 반짝이는 강'같은 청량한 내면을 가진 이는 영랑 말고 대체 누가 있을까. 가장 애송되는 는 말할 것도 없고, , , , , , 등 영랑의 시는 한결같이 아름답고 영롱한 세상과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인간의 삶을 관조한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을 그는 '도른도른' 이란 정겹고 토속적인 남도 어휘의 조탁(彫琢, 갈고 닦음)으로 그려낸다. 흔히들 영랑을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심성으로 노래하는 탐미주의 시인의 전형이라 평한다. 그가 좋아해 마지 않았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명시 구절처럼 그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었다. 영랑 시의 아름다움은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제맛이 난다. 처음 읽으면 뭉클한 감동에 가슴이 '철렁'하고, 한 참 읽다보면 "부드럽고 섬세한 서정이 어느새 운율을 타고" 흐르며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고 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언어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과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라고 했다. '추한' 세상에 반기를 들고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 본래는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다.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1903년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전남 강진에서 탯줄을 끊고 나왔으나, 그가 당장 경험한 세상은 일제에 의해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추한' 세상이었다. 청소년기에 무용가 지망생 최승희와 목숨을 건 열애에 빠지고, 프랑스 미인 여배우의 그림엽서 한 장에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순수미'를 시어(詩語)로 담아내고자 했던 그였다. 나긋하고 달착지근한 서정시를 쓰며 세상을 호호낙낙 살기를 꿈꾸었을 영랑이 사실은 '독(毒)을 품고' 산 시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삶과 시를 제대로 조망하는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는 박속 같던 영랑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자연', 그리고 '아름다움'에 반하는 '추함'에 처음으로 저항한 것은 불과 14세때였다. 그는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휘문의숙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훈방조치 되었다. 아직 솜털이 송송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영랑의 항일정신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맞아 본격 발동한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자 서울에서 몰래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구두 안창에 숨기고 강진으로 내려온 영랑은 4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아 봉기하기로 친구들과 모의한다. 그러나 거사일 사흘을 앞두고 경찰에 급습 당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어린 학생(16세)신분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6개월 만에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다.    ▲  휘문 고보 시절의 김영랑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기를 꿈꾸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지 못한 영랑은 동경유학길에 올라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같은 하숙집에서 교유한 것도 이때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 영랑의 자유의식과 항일정신은 이때 더욱 고취되었다. 일본에서 '독을 차고' 귀향하다 일본에서 시문학을 공부하며 암중모색하던 영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한다. 관동대지진시 엉뚱하게 증오의 대상이 된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강진으로 돌아온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 , , 등 토속적 서정이 듬뿍 담긴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일제의 폭압이 극도로 심해지기 시작하자 저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 말에서 1940년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저항시를 쏟아내는데, 말랑한 서정시를 쓰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윤동주와 한용운의 저항시에 버금갈 만한 다수의 시편이 그때 발표되었는데, 는 그때 토해낸 시다.   ▲  김영랑의 생전 모습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중략)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중)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말, 일제는 황국신민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인의 혼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일제는 국책문학을 내세우며 천황을 찬양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도록 강요했다. 함석헌의 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나라의 지사, 사상가, 종교가, 교육자, 지식인, 문인은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가며 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내로라 하는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은 일제에 굴복했다. 영랑은 추한 세상에 빌붙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세태를 비관·비판하는 한편, '독을 차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힘썼다. 데뷔 초기작부터 유독 '내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온 영랑은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갈고 닦아 자연과 세상을 노래하며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제해 오던 터였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랑은 이리(일제)와 승냥이떼(친일 부역자)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독립이고 뭐고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를 회유하는 친구조차도 위협하며 '독을 차고' 일제가 지배하던 세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에 이어 , , 등에는 그의 결연하고 비장감이 감도는 '내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 중) 쓴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쓴 시인 영랑은 시를 쓴 그대로 살았고, 살아간 만큼 시를 썼다. 그가 일찍이 에서 고백했듯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하며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머리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은폐시키지 못한다"고 절규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문인들이 머리를 굴려 추한 짓을 할 때, 영랑은 교활한 폭압체제의 실체를 폭로하고 항거했다. 그는 갖은 탄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이 쓴 라는 책에 기록된 일화에 그의 '뚝심'이 잘 나와 있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가구주들에게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할 때면 영랑은 "내 성명은 김윤식이다. 일본 말로 발음하면 '깅인쇼큐'다. 즉 나는 '깅씨'로 창씨했다"라며 당당히 대응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거부하도록 했는데, 자녀들은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매주 토요일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도 습관성 설사병 등을 핑계로 이리 저리 이를 피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단발을 하라는 명령도 끝내 불복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한복을 벗지 않았다. '외로운 혼'으로 '독을 차고' 살던 영랑은 회유와 협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홀연 절필을 선언했고, 1940년 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기에 영랑은 일본어로 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총을 가지고 싸운 독립군이 있는가 하면 펜과 종이로 싸운 사람들이 있는데, 영랑은 총칼 대신 펜과 종이로 싸운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친일문학연구가임종국 선생이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일을 하지 않은 영랑을 '일제 저항시인 7인'(윤동주, 변영로, 김영랑, 이희승, 황석우, 이승기, 오상순)에 포함시킨 이유다. 일제에 펜과 종이로 싸운 시인, 해방을 맞다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본래 모습. 1997년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있다.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울들(울지) 못하는 기린(조선)'이 마음껏 목놓아 울 해방이 찾아왔다. 절필을 선언한지 5년 만에 그는 (일명 '치제'), , 등을 통해 해방 조국에 대한 벅찬 기쁨과 희망을 실토하고 현실 참여 의욕을 보인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제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저지다 휘모라보아 이러케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중략) 떠밧는 명기인듸 잔가락을 온통 이즈오 떡떡궁! 정중동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잇어 인생이 가을가치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 ( 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 중) 영랑은 해방 정국에서 한때 순진하게도 대한청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폭력적 상황에 질려 금방 그만 두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공보수석비서관이었던 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친일파들이 중앙청에 득실대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했다. 일제시대에 입었던 흰색 바지저고리와 검은색 두루마기를 그대로 다려입고 관청에 출근하는 그를 주변에선 못마땅해 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영랑이 경무대를 발칵 뒤집은 사건은 그의 유별난 결벽증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어느날 영랑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무실 뒷벽 전면을 장식하고 있던 대형 병풍 그림을 보고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영랑이 "각하,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에 일본 금각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놓아둘 수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볼까 두렵습니다"라며 직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저게 일본 사찰 그림이란 말인가? 누가 그런 말을 해줘야 내가 알지. 당장 치우도록 사람을 부르게!"라고 했다. 무질서한 정국과 이승만의 독재에 환멸을 느낀 영랑은 7개월만에 출판국장직을 그만 두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  영랑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49년 여름 신당동 자택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1950년 한국전에서 유엔군에 맞서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쏜 유탄에 맞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에 떡떡궁! 북을 쳤던 영랑은 "찬란한 슬픔"을 안고 일찍 그렇게 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영랑 사후 68년이 흐른 지난 2018년에서야 그의 애국정신을 기려 독립유공 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영랑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이 받는 금관문화훈장도 지난 2008년에서야 받았다. 전남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는 문학인의 생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순수한 시적 감성으로 추악한 일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여 '독하게' 그려낸 영랑. 교활하게 거짓을 감추며 더 추해져가는 현재의 일본과 잔류 친일파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시어(詩語)로 이들을 꾸짖을까. 아들 김현철이 본 아버지 영랑, 그리고 대한민국 슬하에 5남 3녀를 둔 영랑은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했으나, 두 딸을 제외한 5남 1녀가 글쓰는 일(영문학, 불문학, 언론인, 독문학, 영어학)을 전공하여 교수, 통역사, 언론인 등을 평생 업으로 삼아 아버지의 명을 어기며 살았다. 현재 영랑의 직계 자손 중 셋째 현철, 다섯째 현도, 여덟째 애란(여)이 생존해 있는데, 특히 셋째인 김현철(84) 선생은 전남 강진의 '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을 거치며 영랑 시인의 삶의 족적을 관리.보존하는데 초석을 다졌다. 김현철 선생은 MBC 본사 기자를 거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미주 동포언론 을 창간한 언론인 출신이다. 도미 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독하게 맞서 싸우다 한때 입국금지인물 명단에 오른적도 있다. 그가 7년 전 폭로한 박정희 관련 유튜브('비운의 여배우 김삼화')는 5백만 회가 넘는 클릭을 기록하며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와 등에 남북관계와 한국정치 관련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  영랑 사후 58년 만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 증서와 훈장.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 영랑이 뒤늦게나마 그 진면목을 인정받아 항일 저항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감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지난 2008년의 금관문화훈장에 이어 작년에 독립유공훈장 건국포장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장기간 친일파 정권이 지속된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늦게 진실을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 선친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모두는 아니지만 아버님의 시에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서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강하다고 본다. 가령 같은 시는 해방정국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나,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예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시 슬픔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희망의 세계가 암시되어 있다." - '영랑 시인의 시는 운율적 흐름이 강해 한참 읽다보면 절로 노래가 나온다'는 평들이 많다. "사실 아버지는 성악가(테너)를 꿈꾸셨다. 어머님과 지역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의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급이었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앵, 김소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생가에 초청하면 고수를 데려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북 연주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 선친과 음악에 얽힌 이야기 중 특별한 기억이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서양 클래식뿐 아니라 판소리까지 고전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 4살쯤부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는 그 긴 판소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셨다. 미칠 지경이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나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컸다." - 영랑시인은 일제에 대해 '독을 차고' 사셨으면서도 서정주 등 친일파 시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선친이 친일파 시인 서정주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대학생이던 큰 형님이 '왜 저런 분과 가까이 지내십니까'라고 종종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11년 연하의 서정주를 지칭하며) 불쌍한 사람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아버지는 매우 인간적인 분이셨다." - 선생님이 본 아버님의 성격은? "이광수, 김광섭, 정지용, 서정주, 박목월 등 선후배 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친은 수줍음을 매우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과격한 면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 출판국장 시절 한글맞춤법통일안 수용 여부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통일안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절친 김광섭에 뒤틀린 나머지 교자상을 뒤엎고 나온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옹졸한 직계 상사가 사사건건 월권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정도다." - 선친이 한국전 당시 북한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들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설령 인민군의 포격에 돌아가셨다고 해도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도 북한군을 원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님이 한때 잘 모르고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신 일이 있으나,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하신 분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모셔서 결혼식 주례를 서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여운형 선생이 주례를 설 정도였으면 해방정국에서 좌파 사회주의로 기울었을 법한데.  "큰 형님의 생전 전언에 따르면, 언젠가 일본 유학생 시절 친구들이 '자네 같은 엘리트가 택할 길은 우리처럼 사회주의인데 왜 그 길을 따르지 않나?'라고 추궁하며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사회주의 좋지… 그런데 말야, 자유가 없는 게 싫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선친은 같은 시문학파 동료이자 영랑이라는 호를 지어준 정지용과 단 둘이서 금강산 여행을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사상에서 차이가 있어 서로 멀어지며 결국 결별했다. 선친은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분이셨다."   ▲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영랑 시인의 삼남 김현철 선생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 한인사회 일각에서 선생님을 친북인사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한데. "(웃으며) 지겹도록 들어온 한심한 소리다. 나 스스로는 누가 뭐래도 선친과 같은 진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세대가 받아온 길고 긴 반공교육이 가져온 트라우마 때문에 북을 적대시 했다. 운영하던 신문사에서 김재준, 함석헌, 송건호, 함세웅, 문동환 등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 -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은 독립 후 242년간 200여차례나 타민족을 괴롭혀 왔다. 노엄 촘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평균 9개월마다 침략 전쟁을 벌인 나라다. 이러한 미국을 보고 친미를 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오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과 미국을 인권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가령 악명높은 관타나모 인권유린의 실상을 안다면 감히 미국을 인권국가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 - 영랑 시인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한일관계에 얽힌 논쟁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현재의 갈등은 친일파 70년 체제에서 나온 토착왜구 세력과 민족주의 진영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결단코 토착왜구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 ...
1422    민족저항 3대시인... 댓글:  조회:2462  추천:0  2019-11-14
일제시대의 민족저항 3대시인으로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상화(尙火) 이상화는 대구의 명문 이시우의 차남으로 현진건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다. 형 이상정은 임시정부 장군으로 항일전을 지휘했으며, 동생 이상백은 잘 알려진 유명한 사학자겸 체육인이다. 중앙학교 3년 수료 후 금강산 등을 방랑하며 고민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창간호에 발표한 가 이때 씌어졌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주요한의 보다 앞서 탁월한 자유시를 쓴 것이 된다. 동경 아테네 프랑세스에서 불어를 공부하던 그는, 동경 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학살에서 천운으로 목숨을 구하고 귀국하여 경향팡에 기울어지면서 를 쓰고, 연애하던 류보화를 폐병으로 잃은 뒤의 을 썼다. 요정 출입을 하며 울분을 달래던 이상화는 1936년 중국으로 형 이상정을 만나고 돌아왔다가 간첩 혐의로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 나온 후, 대구에서 교육 문화사업에 주력하며 교남학교의 무료 강사가 되었다. 중앙중학 시절 야구부의 3루수였던 이상화는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교남학교에서 권투를 권장했다. 일제 밑에서는 벙어리와 같다 하여 말년의 호를 '백아(白啞)'로 했던 이상화는 바라마지 않던 원고를 끝내지 못하고 위암으로 운명하니, 1948년에 세워진 달성 공원의 상화시비가 그의 저항정신을 여전히 기리고 있다. ------------> 백아 이상화 시인의 프로필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년하기 위하여 뜻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출간 되었다. 동주는 대부준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자화상'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무폅에는 '별헤는 밤'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주는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품으로 점철된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고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은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괴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프로필 1904-1944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북경에 갑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입니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육사 이육사 시인의 프로필 =================================///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제라 해도 좋죠. 화자의 당신이라는 존재는 백발, 눈물, 죽음 등 화자에게 있어 부정적인 요소로 비칠 수 있는 모습들 조차도 사랑합니다. 조건없는 사랑, 다시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해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용운 시에서 당신 혹은 님이라는 존재가 한용운 삶의 배경때문에 여러가지로 해석되곤 합니다만, 시를 즉물적으로 바라본다면 화자의 연인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경지에 도달한 (이상적인) 인물을 그려놓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그것이 당연히 붓다일 수도 있구요.  조국이나 국가가 이런 절대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베풀진 않잖아요ㅋㅋㅋㅋ 한용운 이 시인의 의식 혹은 인식의 수준은 당시 상황과 당시 많은 사람들에 비추어 봤을때 높아 존경스럽습니다. 당시로썬 쉽게 나타나기는 어려운 위인이란 생각이 듭니다.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윤동주는 청년기를 보내며, 자신 개인의 삶이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와 역사 흐름에 이바지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많이 한듯 합니다. 다수의 시에서 윤동주의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많이 보이구요. 이 시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1.바람은 혼란스럽고 힘겨운 당시 시대상으로 여겨지네요.  첫째 연에서는 그러한 모습의 정체(바람의 연기緣起 혹은 인과)가 무언지 읊조리며, 자신의 고민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2.바람이 부는 모습을 보고, 시선을 옮겨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니 '괴롭습니다'(2연).  3.세번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그 이유가 또한 무엇인지 사색을 하죠. 여자를 사랑하거나 시대를 슬퍼해서 괴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괴로움의 이유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4.한번더 시선이 이동하여,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그것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화자의 발은 '안전한 반석 위에' 있고, 강물(시대의 흐름,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흐름)도 자꾸 흐르는데 '그 흐름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언덕 위'에 있다고 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은 윤동주의 고민이 보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들에서는 청년기에 가져야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 순수함 그대로 느껴집니다.     반드시 저항시인의 관점에서만 보기 보다는 그런 타이틀을 일단 내려놓고 한 인간의 모습에서 부터 출발하여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1421    264, 저항 시인 이육사... 댓글:  조회:4476  추천:0  2019-11-13
생방송 한국사 - 근대 · 현대 죄수 번호 264번, 저항 시인 이육사     목차 1. 이육사의 독립운동 2.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간 이육사 3. 이육사, 총 17번 감옥에 갇히다 4. 이육사의 다양한 독립 투쟁 활동 5. 시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6. 이육사의 「광야」 감상 7. 이육사의 갑작스런 죽음 8.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육사. 그가 마흔 하나라는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다음 해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더욱 안타깝지요. 오늘은 이육사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이육사의 독립운동 이육사는 친가와 외가 모두 일제에 저항했던 대쪽 같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답니다. 그는 앞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투쟁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형제들과 함께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이육사와 형제들은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국내 소식과 군에 필요한 돈을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요. 2.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간 이육사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의 주동자로 휘말리게 되어 이육사와 형제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일본 경찰들은 이들 형제가 사건을 계획하고 폭탄을 운반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주동자였던 장진홍 의사가 잡히게 되어 2년 4개월 만에 석방되었어요. 이육사는 이때의 죄수 번호였던 264번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육사라고 지은 거랍니다. 원래 이름은 이원록이에요. 3. 이육사, 총 17번 감옥에 갇히다 모진 고문 끝에 병을 얻은 이육사는 휴양을 하며 건강을 회복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이미 일본에 감시 인물로 찍힌 터라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투옥을 당하곤 했죠.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934년에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났지요. 이런 식으로 감옥에 투옥된 횟수가 무려 열일곱 차례나 된다는군요. 4. 이육사의 다양한 독립 투쟁 활동 일본이 이육사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살아생전 정말 쉼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든요. 그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 독립운동 기지의 조선 군관 학교에서 독립 투쟁을 준비하며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적 몰래 통신하는 법, 폭발물을 설치하고 터뜨리는 법 등의 훈련을 받기도 했어요. 뿐만 아니라 끝없이 만주를 오가며 국내외 소식을 전하고 독립군을 모집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요. 그러느라 이육사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어요. 5. 시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건강이 나빠진 이육사는 시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쓰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어요. 시를 통해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거예요. 6. 이육사의 「광야」 감상 이 무렵 이육사가 쓴 「절정」, 「청포도」, 「광야」 등의 작품은 광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한 편을 감상해 보시죠.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7. 이육사의 갑작스런 죽음 광야를 지은 후, 이육사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육사 갑작스럽게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생 이원창이 황급히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일본 영사관은 가족이 이육사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화장해 버렸거든요. 8.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다 이육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미아리 공동 묘지에 안장했다가 광복 후 안동시에 이장했어요. 1990년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내렸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죄수 번호 264번, 저항 시인 이육사 (생방송 한국사)  
1420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댓글:  조회:3107  추천:0  2019-11-13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참여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분야 현대 시 목차 김수영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신동엽 : 종로 5가의 비참한 현실 조태일, 이성부, 민영, 김지하, 고은의 작품도 주목하길!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과 사회적 소통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참여시가 많이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참여시인에는 누가 있나요?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김수영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우리나라 참여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는 김수영 시인입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풀」은 부당한 권력에 의해 고통받는 민중의 저항의지를 불태운 작품이었습니다. 「풀」은 민중들이 힘겹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었지요. 연약해서 거센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졌지요. 김수영 시인은 원래 모더니즘적인 시를 쓰던 작가였습니다.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전통적 시 형식에 대한 실험적 의식을 지닌 시인이었지요. 그런데 정치 권력이 지나치게 부패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중에서 이 시에서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는 부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젊은 시인에게 “기침을 하자”고 권하는 것은 부정한 현실에 대해 용감하게 대응하자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눈을 바라보며” 가래를 뱉자고 한 것일까요. 순결한 눈 위에서 더러운 가래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김수영 시인은 현실 참여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폭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푸른 하늘을」과 같은 시도 함께 감상해 보기 바랍니다. 신동엽 : 종로 5가의 비참한 현실 참여시인 중에 빠뜨려서는 안 될 이로는 신동엽 시인이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여러분에게 「껍데기는 가라」라는 작품으로 익숙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신동엽은 4월 혁명의 정신과 동학 혁명의 정신적 본질을 잊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남과 북이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화해를 이루자는 메시지를 형상화했습니다. 신동엽은 1960년대 시대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 내 현실 참여를 적극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 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신동엽, 「종로 5가」 중에서 한 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작품 전체를 살펴보면 시적 화자인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어떤 소년 하나를 마주합니다. 그 소년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어린 나이에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소년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소년이 찾으러 온 사람이 누굴까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 상상 속의 인물들은 모두 어렵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을 파는 여자였고 두 번째는 위의 인용부에서 보듯이 고층건물 공사장에서 자갈지게 등짐 지다가 허리를 다쳐 쓰러진 노동자였습니다. 신동엽은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당시의 현실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지를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마지막 세 행을 보면 이토록 현실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외세의 침략과 관련이 있다고 시인이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대륙, 섬나라, 은행국은 각각 중국, 일본, 미국을 가리키는데 이들에 의해서 현실의 삶이 어려워졌음을 제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참여작품... 김수영, 신동엽 이외에도 현실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자 했던 시인은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조태일, 이성부, 민영 시인의 작품은 여러분이 직접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조태일의 「국토 서시」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담긴 시이며, 이성부의 「벼」는 민중의 공동체적인 연대의식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의 태도가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성부의 또 다른 시 「봄」은 부정한 현실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시인의 마음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민영의 「용인 지나는 길에」는 외세에 물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밖에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고은의 「화살」 같은 작품도 꼭 읽어 보길 바랍니다. 문학의 현실 참여 논쟁은 무엇인가요? 문학에서의 현실 참여 논쟁은 1960년대,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지, 순수한 문학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두고서 벌였던 논쟁을 가리킵니다. 이 논쟁은 문학평론가 김우종이 당시의 문학이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작되었지요. 이후 이형기 시인이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또다시 김수영 시인과 이어령 평론가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 시인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며 문학을 한 가지 흐름에만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비판했습니다. 현실 참여 논쟁은 서구의 앙가주망(참여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4 · 19 혁명을 경험하면서 싹튼 사회 참여적 흐름이 문학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여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419    활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불멸은 같다... 댓글:  조회:2660  추천:0  2019-11-04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퇴계 이황 14대손으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친가·외가 모두 선비 집안, 독립운동으로 평생 17차례 피검, 투옥돼... 지조와 절개 번뜩이는 시 36편 남기고 광복 1년 전 베이징서 순국   9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기념관의 벽시계는 9시30분에 멈춰서 있었다. 107년 전 그날의 거사 시각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안 의사 흉상을 지나면 ㄷ자 형의 좁은 공간에 성장과 거사 과정 등이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 안쪽에서 유리벽 너머로 기차역 플랫폼이 내다보인다.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렸다. 플랫폼의 바닥에 삼각형과 사각형 표시가 선명하다. 플랫폼의 천장에는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 사건 발생지’란 팻말이 걸려 있다. 1909년 10월 26일, 세계를 뒤흔들었던 현장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열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했다. 거리는 불과 5m. 이토에게 3발이 명중됐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四書)와 등을 읽으며 자랐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익혀 명사수로도 이름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귀국한 뒤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그는 반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된다. 거사 5개월 만인 이듬해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31세 나이로 순국한다. 여기 또 한 명의 독립지사가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맞섰다. 그도 조부로부터 사서를 배우고 교육에 참여했다. 그리고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명사수가 된다. 총을 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안 의사 기념관에서 떠올린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1944) 시인이다. 안 의사의 흔적을 찾아간 여행에 마침 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75) 여사가 동행해 분위기는 숙연했다. 시인은 왜 권총을 들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10월 1일 육사가 태어난 마을을 찾았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다. 안동시청에서 퇴계로를 따라 북쪽으로 25㎞를 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면 퇴계종택이다. 다시 퇴계 묘소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육사의 고향 원촌이다. 마을 입구에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확장공사로 휴관 중이다. 진성 이씨 집성촌인 원촌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쇠락했다. 육사가 살 때만 해도 100여 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사의 생가는 옮겨지고 그 자리엔 지금 ‘청포도’ 시비와 시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웃한 목재(穆齊)고택에서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조선 철종 시기 대사간을 지낸 목재 이만유의 증손 이원봉은 육사와 8촌이었다. 이 여사는 이 집에 머물며 문학관 일을 돕고 있다. 먼저 28세 육사로 돌아간다. 1932년이다. 당시 육사는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 펑톈(奉天), 즉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간다. 거기서 의열단 창립멤버이자 핵심인 윤세주를 만난다.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는 육사가 ‘일거리를 찾아 펑톈으로 갔다’고 돼 있다. 육사는 처음에 테러를 일삼는 의열단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육사는 결국 의열단이 설립한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한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졸업하면 일제의 요인을 해치우는 등 비밀조직원이 된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김원봉이었다. 육사는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거기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운다. 놀랍게도 당시 육사는 권총 사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룬 모양이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 5자루를 촛불을 꺼놓고 해체한 뒤 짧은 시간에 다시 조립해낼 만큼 무기를 잘 다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말을 타고도 명사수였다고 한다. 나라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펜 대신 총을 든 것이다. 육사는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넉 달 뒤 귀국한 그는 언론계 복직과 문필 활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귀국한 지 8개월이 지난 1934년 3월 육사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진 것이다. 육사는 당시 일제 경찰의 고문이 혹독해 몇 차례 옷이 피로 얼룩졌다. 그가 풀려난 직후인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가 경성으로 보고한 ‘이원록 소행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위에 선전할 우려가 있으며 (…) 본인의 성질로 보아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육사는 이때부터 문학에 뛰어든다. 시작(詩作) 활동을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기백을 키우고 길러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곧 행동이오.” “시를 생각하는 것도 곧 행동이오” ▎육사의 고향에 들어선 청포도 시비.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를 통해 당시 민족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1939년 8월 그는 지에 시 ‘청포도’를 발표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는 스스로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1943년 7월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지인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라며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일본도 곧 끝장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했다. 안동시는 최근 육사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도산면 도로변에 청포도 단지를 조성했다. 올해는 ‘264청포도 와인’도 선보였다. 육사는 시를 쓰면서 말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가까웠던 신석초 시인은 “동동주를 연거푸 아홉 사발 마시고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신석초는 육사가 시를 쓰거나 술을 마실 때 즐겨 쓴 한 구절이 있었다고 했다. 에 나오는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거워도 탐닉하지 않고 슬퍼도 상하지 않는다)’이다. 한결같은 자세다. 전하는 시 36편 중 ‘절정’ 등 12편이 1940∼41년에 발표된다. 하나같이 지조와 절개가 번뜩인다. 1943년에는 ‘만등동산(晩登東山)’ 등 한시 3편만을 남겼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1943년 4월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독립 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변절했다. 친일로 돌아서 침묵했다. 한 술 더 떠 일제의 앞잡이가 돼 민족을 기만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육사는 홀연히 견위수명(見危授命: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당시 중국행은 무기를 들여와 무력항쟁을 도모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두운 밤에 더 빛나는 별빛과도 같은 행보였다. 베이징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육사는 1943년 7월 귀국한다. 그는 안동에서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른 뒤 잠시 서울에 머물던 중 다시 검거된다. 이제 그의 삶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부인 안일양은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만난다. 이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딸 옥비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이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이옥비 여사는 기자에게 “당시 아버지께서 밀짚으로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증언했다. 모습이 특이해 어렸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그렇게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두고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 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는 베이징 감옥의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길로 달려가니 육사는 옷이 피로 낭자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육사의 눈을 쓸어 내리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육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억울한 옥살이 뒤 ‘육사’를 필명으로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성장 과정은 문사에 가까웠다. 육사의 조부 이중직은 향리에 신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을 세워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육사는 여섯 살 때 조부로부터 을 배우고 10대에 경서를 외는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은하수’라는 육사의 수필에는 한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논어나 맹자에 시전(詩傳), 서전(書傳)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나올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외조부 허형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왕산 허위와 사촌이다. 육사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어머니로부터 “(나라를 찾는 날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 되었다. (…)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규모’는 이 마을에 내려온 정신일 것이다. 이처럼 육사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선비요, 독립운동가인 환경에서 자랐다. 육사는 16세 때 대구로 나간다. 이듬해는 부친의 엄명으로 혼인한다. 육사는 직후 처가가 관여하던 영천 백학(白鶴)학원을 다니고 9개월 동안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을 쓴 김희곤(62) 안동대 교수는 “이 시기에 육사가 민족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육사는 귀국해 대구 조양(朝陽)회관에서 신문화운동에 참여했다. 도서실·신문사·문화운동단체 등이 들어서 청년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던 공간이다. 1925년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한다. 1927년 육사가 귀국하자 대구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린 장진홍 의거다. 일경은 1600명을 투입하고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육사 형제도 잡혀 들어갔다. 폭탄상자 겉면에 적힌 글씨가 육사의 동생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정작 거사의 주인공은 사건 1년 4개월 뒤 일본 오사카에서 붙잡힌다. 육사는 당시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1년 7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때 수인번호가 264번. 필명 ‘육사(陸史)’의 유래다. 한자는 ‘식민지 역사를 베어낸다’는 뜻을 담았다.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육사는 기자가 된다. 당시 기자들은 다수가 언론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1931년 육사는 기자 신분으로 2개월간 구금된다. 광주학생사건 이후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대구에 뿌린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육사는 신문기자를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육사는 일생 17차례 피검, 투옥된다. 육사는 일제의 탄압이 가혹해지는 생의 마지막에 시 ‘광야’를 썼다. 이 작품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에 발표된다. 시로 쓴 유언이었다.   ▎육사의 마지막 시 ‘광야’의 시상지인 ‘쌍봉·윷판대’에서 바라본 왕모산과 낙동강. 앞에 펼쳐진 들판은 원촌의 강 건너 마을인 내살미다.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 지녀 이육사문학관 건너편 산에는 ‘광야’의 시상을 다듬은 곳이 있다. 원촌 마을을 떠나면서 그곳에 들렀다. 깊은 산속에 큰 강이 흐르고 이런 탁 트인 들판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육사는 옥중에서 일제에 맞서는 용기와 광복의 희망을 심었다. 그러면서 순국하는 그날까지 일제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해 기꺼이 권총을 든 눈 속 매화 같은 선비였다. 이옥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현장에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며 “아버지도, 기회가 주어졌으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상은 “그에게는 시보다도 문학보다도 조국이 더 컸었다. 조국을 찾은 뒤에야 시도 있고 문학도 있었다”고 기렸다. 이육사에게 광복은 곧 지조이자 절개였다. 하얼빈에 동행했던 도진순(57)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육사는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를 지니고 옥중에서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안 의사와 닮았다”고 말했다. 한학을 공부하고 명사수가 된 것도 공교롭다. 물론 사상은 차이가 있다. 육사는 나이가 안 의사보다 25년 아래다. 기록은 없지만 육사는 틀림없이 안 의사를 흠모했을 것이다. 육사는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던져 의를 취하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선비가 아닐까. [박스기사] 한국의 ‘별’ 이육사 | 북간도의 ‘별’ 윤동주 - 출신, 사상, 시 세계 달랐지만 일제에 맞서다 옥중 순국 ▎민족시인 이육사(왼쪽)와 윤동주.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시는 한국과 중국 조선족 교과서에 모두 실렸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묘비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민족시인이 있다. 올 초 란 영화로 친숙해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로 불린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옌볜의 김승종(53) 시인은 “윤동주는 북간도의 ‘별’, 이육사는 한국의 ‘별’로 밤하늘 별처럼 남북에 드리운 한줄기 빛”이라고 표현한다. 또 이육사와 윤동주는 이상화·김소월과 더불어 한국은 물론 옌볜 조선족의 교과서에도 작품이 동시에 실린 시인이었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두 시인의 성장 배경은 판이하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윤동주는 살기 어려워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디아스포라(離散: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집단) 3세다. 육사가 요즘 말로 ‘금수저’라면 윤동주는 ‘흙수저’라고나 할까. ‘살신성인하는 좌경적 유교’가 육사의 사상적 바탕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최근 중국이 윤동주의 국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가면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글·한자로 함께 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고 한 이른바 동북공정 역사 왜곡의 흔적이다. 이곳에 들른 한국 관광객들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분노하는 이유다. 사상적 바탕을 보면 이육사는 유학이다. 김관웅 옌볜대 교수는 “그것도 살신성인하는 좌경적인 유교”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군사훈련까지 받은 이육사를 “직업적인 혁명투사”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또 서구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시(詩) 세계도 달랐다. 이육사는 선비의 기개로 일제에 항거하고 타협할 줄 몰랐다. 반면 윤동주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했다. 육사의 시 ‘광야’, ‘절정’은 선비풍이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 ‘서시’는 속죄하는 인간을 그린다. 김관웅 교수는 “윤동주는 투사이기보다 항일을 양심적으로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두 시인이 주는 감동의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나이는 이육사보다 13년 아래다. 활동무대도 서로 달라 생전에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일제에 맞서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만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불멸의 공통점이다.  /글 송의호 기자
1418    [그것이 알고싶다] - 나운규와 아리랑을 부른 가수... 댓글:  조회:3332  추천:0  2019-11-01
연예스타 나운규 '아리랑' 첫 상영 가수는 유경이 페이스북 트위터공유하기 최종수정 2019.10.01  구글번역 아시아경제  뉴스듣기 인쇄하기스크랩RSS 폰트축소폰트확대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1926년 10월1일 나운규의 ‘아리랑’이 처음 상영했을 때 ‘아리랑’을 부른 가수가 유경이로 확인됐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단성사가 발간한 ‘조선영화소곡집’에 실린 자료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1일 전했다. 이 자료에는 아리랑의 악보와 유경이의 사진이 실려있다. 사진에는 ‘유경이양(劉慶伊孃)’이라는 이름과 함께 ‘스테이지에서 노래한 분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담긴 무성영화다. 변사가 해설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상영됐다. 재상영에서는 김연실 등 가수 다수가 참여했다. 연합회 측은 “첫 상영 당시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며 “영화 필름이 없는 현재 이를 통해 개봉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조선영화소곡집이 단성사 영화구락부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아세아경제  /이종길 기자 
1417    [그것이 알고싶다] - 나(라)운규와 영화 "아리랑" 댓글:  조회:3104  추천:0  2019-11-01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아리랑   [ Arirang ] 해설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줄거리   서울에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영진(나운규)은 3·1 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정신이상자가 되기 전까지는 친구인 현구(남궁운)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던 건강한 청년이었다. 영진의 동생 영희(신일선)는 오빠의 친구인 현구를 사랑하고 있다. 한편 악덕 지주의 머슴 오기호(주인규)는 영진네 빚을 빌미로 영희에게 흑심을 품는다. 그해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농악제가 열리던 날, 오기호는 혼자서 집을 보는 영희를 범하려 든다. 마침 영진을 찾아 왔던 현구가 영희를 구하기 위해 오기호에게 달려들고 정신이상자인 영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남자의 격투를 구경할 뿐이다. 그러다가 영진은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다. 상인이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으려 하자 영진은 순간적으로 낫을 들어 상대방을 후려친다.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고약한 오기호였다. 영진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악덕지주, 일본 순사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진의 손에 포승이 묶여지자 사람들은 영진을 에워싸고 오열한다. 그때 영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부디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 일본 순사에게 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의 뒤로 청년회 깃발을 든 청년들이 말없이 따른다.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관련영화   크게보기 아리랑(1926) 평점 9.98  개요 한국 | 19261001 | 0분 | 감독 나운규 출연 나운규       관련이미지 출처: EBS 어린이 지식e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아리랑 [Arirang]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   시사상식사전 나운규의 아리랑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 무성영화이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인공 영진 역은 나운규가 맡았고 영진의 동생 영희 역은 신일선, 영진의 친구이자 영희의 연인인 현구 역은 남궁운, 악덕 지주의 청지기인 오기호 역은 주인규가 각각 연기했다.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당시의 정황에 대해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 였다고 표현할 만큼 영화 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어 온 겨레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나운규의 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화시킨 것이다. ■ 아리랑의 줄거리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이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가 그 낫에 찔려 죽고 그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의 아리랑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인물한국사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 羅雲奎 ] 출생 - 사망 1902.10.17. ~ 1937.8.9.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태프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관련이미지 41                                   나운규알제강점기에 활동한 영화인.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제공.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나운규 [羅雲奎] -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1416    [그것이 알고싶다] - "아리랑"... 댓글:  조회:3624  추천:0  2019-11-01
창악집성 아리랑     요약 「아리랑(본조아리랑)」은 경기 민요다. 일반적으로 「아리랑」이라고 한다. 분류 경기소리 - 민요 목차 노랫말과 풀이 해설 관련항목 노랫말과 풀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靑天) 하늘엔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엔 수심(愁心)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  ] 부분은 후렴 해설 「아리랑」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민요다.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로 널리 퍼진 「아리랑」은 1926년에 나온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아리랑」이다. 이를 다른 「아리랑」과 구분하기 위해 「본조(本調)아리랑」이라 한다. 본조란 본바탕이란 의미보다는 서울 본바닥이라는 의미다. 수많은 「아리랑」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아리랑」은 강원도 지방의 토속민요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다. 「정선아리랑」은 「정선긴아리랑」과 「정선엮음아리랑」으로 구분된다. 조선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원도 지방의 인부들이 부른 「정선아리랑(정선아라리)」이 영향을 미쳐 서울 · 경기제의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과 「서울자진아리랑」이 나타난다. 이 「서울자진아리랑」을 변주한 새로운 아리랑이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 부르기로 함에 따라 「서울자진아리랑」은 「구조(舅調)아리랑(구아리랑)」이라 부른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정선아리랑」을 변주한 신민요풍의 새로운 「아리랑」이 나타나는데 이를 「강원도아리랑」이라 부른다. 또한 「정선엮음아리랑」을 서울 · 경기제로 부른 「정선엮음아리랑(서울 · 경기제)」도 있다. 이밖에도 수많은 「아리랑」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등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여러 지방에서 수많은 「아리랑」이 있고, 새로운 「아리랑」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항목 「정선아리랑」, 「긴아리랑(서울긴아리랑)」, 「구조(舅調)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서울 · 경기제)」,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해주아리랑」 참고문헌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민요 편)』.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10 by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Foundation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창악집성, 2011. 07. 04., 하응백)   ====================================///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아리랑     아리랑 목차 정의 역사 내용 특징 및 의의 정의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게 된 신민요의 제목 또는 그 이전부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 계통의 악곡과 그 이후에 만들어져 불리는 다양한 아리랑 계통 악곡 모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 역사 은 ‘아리아리’, ‘아라리’, ‘아라성’, ‘아리랑’ 등의 입타령으로 된 후렴을 수반하는 장절형식의 민요군을 가리키며, 그 제목에 주된 전승 지역의 이름을 붙여 ‘○○아리랑’ 또는 ‘○○아라리’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아리랑 계통 악곡으로는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노래를 포함하여 통속민요와 신민요, 나아가 대중가요나 예술가곡 작품으로 만들어진 악곡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 중 통속민요로 전승되는 아리랑은 , , , , , , , 등이 있다. 또한 이들 노래의 가락을 조금 변형하거나 가사를 다양하게 붙여 부르면서 제목을 달리하는 많은 노래들이 전승되고 있다. 함경도의 이나 평안도의 ·를 아리랑계 악곡으로 보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계 입타령이 들어 있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아리랑 계통 악곡에 넣지 않는다. 오늘날 아리랑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악곡은 경기민요의 하나인 이다. 이 곡은 1926년 나운규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전과 이후의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또는 이라 불리다가, 성경린·장사훈의 『조선의 민요』(1949)에서부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용 다양한 갈래의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로 전승되는 것은 강원도 지역의 노래들이다. 강원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 등으로 불리는 노래가 널리 전승된다. 3소박 3박을 기본 리듬으로 하고, 메나리토리의 선율로 구성된 이들 악곡은 비교적 느리게 불리기 때문에 흔히 라 부른다. 강원도의 중에서는 정선 지방의 노래가 널리 알려져서 흔히 이 노래를 또는 이라 부른다. 정선 지역에서는 를 부르다가 중간에 해학적인 내용을 담아 사설을 길게 확대하고, 이를 빠른 속도로 촘촘하게 엮어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노래를 라 한다. 반면에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2소박과 3소박으로 구성된 혼소박 리듬의 가 등의 노동요로도 불린다. 이 노래는 강원 영서 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동부와 충청북도, 경상도 북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불리고 있다. 오늘날 전승되는 아리랑계 악곡 중 향토민요(토속민요)로 확고한 전승 기반을 지닌 노래는 강원도에 바탕을 둔 위의 세 가지 아리랑이다. 따라서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의 원형은 이들 세 아리랑이라 할 수 있다. 강원도 지역에 전승되던 향토민요 아라리계 악곡들이 조선 후기에 유희요로 통속화되면서 후렴의 ‘아라리’ 또는 ‘아리아리’라는 말이 ‘아리랑’이라는 말로 변하여 , , 등으로 그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들이 경기 명창들의 공연용 악곡으로 수용되면서 은 , 은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 정선 지방에서 향토민요로 불리는 과 경기 명창들이 부르는 은 사설을 엮어 부르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경기 명창들의 노래를 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전문 음악인인 경기 명창들이 강원도 지역의 향토민요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공연종목으로 삼은 경우이다. 전문 음악인들은 음악적인 훈련을 거쳐 뛰어난 음악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악어법의 노래도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부를 수 있으나, 음악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서민·대중은 다른 지역의 음악어법으로 된 노래를 그대로 부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강원도 지역의 아리랑계 악곡들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음악어법이 변화되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이 같은 변화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는 조선 말기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따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되자, 강원도 지역의 인력도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목재의 주된 생산지였던 강원도에서는 다량의 목재를 뗏목으로 엮어서 남한강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서울 지역으로 수송할 인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무렵 대표적인 뗏목의 출발 지역인 강원도 정선 지역의 인력이 대거 한양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강원도의 향토민요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의 아리랑이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면서 본래 강원도의 음악어법인 메나리토리로 짜였던 노래가 서울 지역의 보편적인 음악어법인 경토리(진경토리)로 변화되어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1896년 헐버트H. Hulbert, 1863~1949가 채보한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현재 경기 통속민요 중 이라는 곡명으로 전승되는 곡이 헐버트 채보의 과 같은 곡임을 볼 때, 이 곡은 19세기 말경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흔히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의 전승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곡은 영화 음악인 이다.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이 곡은 나운규 감독이 단성사 악단에 편곡을 의뢰하여 완성한 것이라 한다. 편곡자는 당시 단성사 극장의 변사이자 영화감독이었고, 작곡가이기도 하였던 김영환金永煥, 1898~19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운규는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청진까지 이어지는 철도 공사를 위하여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가락을 기억하였다가 이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하는데, 영화 음악 의 후렴 선율을 살펴보면 강원도 지역의 선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즉 메나리토리로 된 후렴 구절의 선율을 경토리로 변화시킨 것이 영화 음악 후렴구의 선율과 같다. 결국 나운규가 고향에서 들었다고 하는 선율은 함경도의 남쪽인 강원도 지역의 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강원도 지역의 메나리토리 곡조인 이 서울지방의 진경토리로 변화되어 경기민요 이 되었고, 강원도 이 전문 음악가의 편곡을 통하여 영화 음악 이 된 것이다. 그런데 메나리토리 구성음 중 최저음이 종지음이 되는 는 진경토리에 잘 맞았지만, 메나리토리의 중간음 ‘라’로 종지하는 는 진경토리와 달리 ‘솔·라·도·레·미’의 5음 음계 중 중간음인 ‘도’가 종지음이 되어 마치 서양 음악의 5음 음계 도선법, 즉 일본 음악의 요나누키 장음계와 같은 음계 구조를 갖게 되었다. 영화 의 대중적인 인기와 더불어 영화 음악 도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로 민족적인 감성의 표현인 동시에, 피압박 민족의 저항의식까지를 드러내는 노래로 한민족의 정서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녹음된 유성기 음반의 아리랑 곡조들은 서양 악기의 반주에 창가식 창법으로 불렀으며, 전통민요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창법이나 시김새 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영화 음악 은 그 초기에는 민요라는 인식보다는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음악 은 대중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하고, 경기민요의 일반적인 특성인 5음 음계 진경토리와 구성음을 공유한다는 음악적 유사성을 더하여 ‘신민요’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전통음악을 연주하던 민요 명창들이 을 자신들의 공연 종목으로 수용하고,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아리랑계 악곡과의 구별을 위하여 이 곡을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의 ‘본조’란 모든 아리랑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요 명창들이 부르는 통속민요 아리랑계 악곡 중 서울 지방의 음악어법을 지닌 주된 아리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은 고향 땅을 떠나던 무렵에 전국적으로 불리던 을 조국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으며, 타향에서 고향을 떠 올릴 때면 으레 아리랑을 부르면서 망향의 한을 달랬다. 이후 아리랑은 한민족 해외 이주민들에게는 조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제2의 국가처럼 온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노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기 명창들은 이나 등의 노래를 음반에 남기기도 하였으며, 강원도의 곡조를 바탕으로 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유성기 음반에 녹음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기 명창들은 혼소박계통의 악곡인 강원도 를 수용하여 부르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오늘날의 통속민요 이 되었다. 한편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박남포는 의 선율을 차용하고, 밀양 지역의 설화 등을 토대로 노랫말을 붙여 을 만들었다. 다른 아리랑계 악곡에 비하여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의 이 곡은 광복군의 군가처럼 불리면서 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의 모곡으로 보이는 은 오늘날 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으나, 해주 지방과의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라남도 진도 출신의 대금 명인 박종기는 1930년대에 의 곡조를 짰는데, 이 곡은 전라도 지역에서 불리던 향토민요 의 선율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후렴을 붙인 것이다.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는 저마다 자기 고장의 전설이나 유명한 소재를 노랫말로 지어 다양한 아리랑 선율에 얹어 부르면서, 자기 고장의 이름을 앞에 넣어 ‘○○아리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제목의 수 많은 아리랑이 있으나, 이들 악곡의 모곡이 된 것은 주로 , , , 등이다. 특징 및 의의 강원도의 향토민요였던 아리랑 계통 노래가 서울·경기 지역에 전해지고, 영화 의 주제곡으로 거듭나면서, 한민족의 민요를 대표하는 악곡이 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아리랑계 악곡을 생성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수많은 아리랑계 악곡의 모곡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의 차원을 넘어 세계 속에서 한국과 한민족을 상징하는 문화코드가 되었으며, 이제 아리랑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민요 아리랑에 대한 북한의 인식 태도(김영운, 한국 음악연구54,한국국악학회, 2013), 북한에 전승되는 민요 아리랑 연구(김영운, 한국민요학39, 한국민요학회, 2013),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이보형, 한국민요학5, 한국민요학회, 1997), 아리랑소리의 생성문화 유형과변동(이보형, 한국민요학26, 한국민요학회, 2009), 아리랑 형성과정에 대한음악적 연구(김영운, 한국문학과 예술7,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1) 집필자 김영운(金英云) 갱신일 2019.01.22. 관련이미지 2                               이미지 이전 아리랑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민속예술사전 : 음악)   ===============================///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원본보기 목록구분 대표목록 등재연도 2012년 국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목차 지역 정보 본문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전승 정보 무형유산의 의미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은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일반 민중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餘音)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 보편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편, 지극히 단순한 곡조와 사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흥적인 편곡과 모방이 가능하고, 함께 부르기가 쉽고, 여러 음악 장르에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새로운 사설을 지어 낼 수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아리랑의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는 계속 늘어나고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아리랑은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애창되며 사랑받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지방 민요인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한민족을 하나로 묶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진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한민족의 노래이다. 지역 정보 아리랑은 한민족의 가장 대표적 민요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랑은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 지역의 ‘진도아리랑’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 등 3가지이다. 아리랑은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세계 어디에 거주하든 한국인과 대한민국, 또 한국인과 다른 한국인 사이를 이어주는 문화의 탯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적인 연결 끈은 특히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이주하여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본·중국·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다. 아울러 비교적 최근에 이민을 통해 이주한 브라질·독일·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리랑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본문 한민족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리랑을 알고 즐겨 부른다. 아리랑은 단일한 하나의 곡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곡조로 전승되었다. 전문가들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의 수가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노래로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여음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의 사설로 발전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아리랑의 가사(사설)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사설)” 아리랑의 사설은 특정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 일반 민중이 공동으로 창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랑, 연인과의 이별, 시집살이의 애환, 외세에 맞선 민족의 투쟁 등 민중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랫말에 담았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의 전통음악이라는 영역을 넘어 초현대적인 한국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리랑은 발라드·로큰롤·힙합 등의 다양한 현대의 대중가요 장르는 물론이고 관현악곡 등으로도 편곡되어 폭넓은 청중에게 호소하며 한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의 비공식적 국가(國歌)로 묘사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는 2011년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아리랑 선율을 주제로 편곡한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피겨스케이트 프로그램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 상징의 하나이기도 한 아리랑은 영화·연극·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로, 상품명이나 식당 이름, 방송국 회사 이름 등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예능보유자 / 기능보유자 아리랑은 한민족이 보편적으로 애창하는 곡이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지방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아리랑의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적·사적 영역에서의 노력은 동시다발적이고 열정적이며 또한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정부 및 각 지방 자치단체는 예능보유자 및 기능보유자 또는 단체를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또는 시·도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으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이들의 기예가 전승될 수 있도록 전수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전수 단체 및 개인은 미래 세대에게 아리랑을 전승할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 아울러 지역의 많은 민간단체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존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대부분 해당 지역의 명창이 주도하고 있는 아리랑 보존회들은 전문 소리꾼, 그리고 특별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있다. 아리랑 보존회는 공연, 전수교육, 홍보, 해당 지방 아리랑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면서 해당 아리랑의 보존 및 전승에 힘쓰고 있다. 이들 단체 중에서도 특히 정선아리랑 보존회, 진도아리랑 보존회, 밀양아리랑 보존회 등이 대표적이다. 전승 정보 한국인이라면 요람에서부터 아리랑을 배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아리랑의 폭넓은 인기는 일상생활에서의 지속적인 노출과 광범위한 공교육 프로그램의 힘이 컸다. 명창, 각종 보존회, 전문 음악가, 초등학교·중학교 및 국립국악원 등은 아리랑의 보급 및 전승을 위한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노력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중의 요구와 열정이라는 원동력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국가가 지원하는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및 전승 프로그램은 아리랑의 세대 간 전승을 위해 주력한다. 국가 공인 예능보유자들은 주민의 열정적인 참여 속에 1주일에 1번 또는 2번 단위로 정규 전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매년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고 선보임으로써 사회의 문화적 소외 계층에게도 다가가고 있다. 공교육 기관에서도 아리랑을 광범하게 교육하고 있다. 아리랑은 초등학교·중학교 음악 수업 및 방과 후 활동의 의무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각 지방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역 문화센터에서는 아리랑 보존회와 명창을 초청하여 아리랑을 교육하거나 관련된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고 기량의 한국 전통 음악인들의 전당인 국립국악원은 참신한 전통 음악 축제를 통하여 아리랑 홍보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그 분원인 국립부산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진도 소재) 역시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하여 국내외 아리랑의 홍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형유산의 의미 2006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설문조사를 토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상징’ 중 하나로 아리랑을 선정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가장 널리 불리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근대 이전의 아리랑은 전통 사회의 서민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개인적·국가적 차원의 고난, 가슴속에 품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한국인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가락을 타고 전달되는 이러한 희망과 바람 덕분에 아리랑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서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오늘날 아리랑은 한민족의 통합에 있어서도 한몫 하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대표팀은 올림픽 경기장에 공동 입장하면서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2002년 한국 - 일본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열정적인 응원단체인 ‘붉은 악마’는 아리랑을 날마다 불렀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매순간에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을 지닌 아리랑은 심금을 울리는 민족의 노래라고 여겨져 왔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를 때마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고국의 동포들은 각 지방의 아리랑이 해당 지방의 정체성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아리랑은 또한 영화·뮤지컬·드라마·춤·문학 등을 포함하는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와 매체에서 대중적인 주제이자 모티프로 이용되어 왔다. 해외에서 일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열풍과 함께 오늘날의 아리랑은 한국을 가장 명확하게 대표하는 문화 상징이자 음악적 영감의 순수한 원천으로서 전 세계인에서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이미지 4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2009 by Jeongseon Arirang Research Institute 원본보기 출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네이버 지식백과]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영/불어 원문))  
1415    [시학소사전] - "서사시"란?... 댓글:  조회:3351  추천:0  2019-10-30
두산백과 서사시   [ epic음성듣기 , 敍事詩 ] 요약 일반적으로 발흥기·재건기의 민족이나 국가의 웅대한 정신을 신(神)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읊은 시. 어느 민족이나 고유의 신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서사시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사시의 흐름은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시(詩)로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유사 이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사시로서는 BC 800년경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이들 작품은 다 같이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그리스 전체의 국민적 서사시일 뿐만 아니라 그후 모든 서사시의 전형이 되었으며 현대에까지 서유럽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헤시오도스에 의해서도 읊어졌는데 '테바이 이야기' 또는 '아루호(號)의 원정' 등이 서사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로마에서는 베르길리우스(BC 1세기)의 《아에네이스》가 유명한데 로마 문학 황금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중세에서는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인 《롤랑의 노래》, 북유럽의 《에다》, 영국의 《베어울프》 그리고 독일의 비극적 국민시 《니벨룽겐의 노래》가 있다. 《에다》는 북유럽 신화와 영웅전설을 집대성한 것이며 《베어울프》는 주인공이 괴물과 화룡(火龍)을 퇴치하는 무용담이다. 영국에는 아더왕의 전설에서 딴 맬로리의 《아더왕의 죽음》과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또 단테의 《신곡(神曲)》과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은 세계문학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두 작품이 모두 특이한 이야기시인데 《신곡》은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부로 되어 있고 단테 자신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다음에는 애인 베아트리체의 선도를 받아 그들의 미지의 세계를 순력(巡歷)하는 이야기이며, 《실낙원》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원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종교시이다. 근세에는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 바이런의 《돈 후안》, 스콧의 《호수의 여인》, 하이네의 《아타 트롤》 등의 발라드와 이야기시가 있으나 이들 작품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옳으며, 서사시 자체는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산문소설로 변용한다. 한국의 서사시로는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대 작품으로는 서사시다운 것이 거의 없으나 3·1 운동 이후 한때 유행한 김동환(金東煥)의 《국경(國境)의 밤》 《승천(昇天)하는 청춘》이 있고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김용호(金容浩)의 《남해찬가(南海讚歌)》 등이 서사시에 가깝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사시 [epic, 敍事詩] (두산백과)  
1414    한국의 최초의 서사시 ㅡ "국경의 밤"... 댓글:  조회:2289  추천:0  2019-10-30
한국의 최초의 서사시 ㅡ "국경의 밤"  작자 소개 김동환(1901-?) 시인. 호 파인(巴人). 창씨명(創氏名)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함북 경성(鏡城) 출생. 중동(中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과 수학,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지에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로 일컬어지는 대표작이며 동명 시집인 을 간행, ꡐ우리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다크호스ꡑ라는 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암담한 현실에 놓인 민족의 설움과 고통을 노래한 그는, 초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에 가까운 시를 썼으나, 차츰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토로한,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여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한때 와 의 기자로 일을 하다가 1929년 월간지 를 창간 주재하였고, 1938년 을 발간하여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39년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새로운 동양의 건설” 등을 에 실어 잡지의 내선일체 체제를 마련한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으로 친일매족의 선봉에 나서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이다. 저서에 , (이광수․주요한 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소설과 평론, 수필 등이 있다.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사시 배경 : 시간적(밤). 공간적(북쪽 국경 지방)  어조 : 두만강변 주민의 삶의 애환을 서술하는 북녘 사투리의 남성적 어조 등장 인물  순이 - 젊은 아내  병남 - 순이의 남편  청년 - 옛날 순이와 사랑을 나누던 사나이  표현 : 설명과 대화를 통한 산문적 표현 특징 : 국경 지방에서 밀수출을 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비극적 삶과 순이의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구조 : 실연(失戀)과 상부(喪夫)의 이중 구조 구성 :  제1부(현재. 저녁→밤. 두만강변) 1장-7장 남편의 밀수 길을 근심함 8장-10장 미지의 청년이 마을을 배회함 11장 요약 반복 12장-16장 순이의 옛 사랑 회상 17장-27장 순이와 청년과의 재회 제2부(과거. 회상. 산곡 마을) 28장-35장 순이의 혈통인 재가승(在家僧)의 내력 36장-46장 순이와 청년의 사랑 47장-57장 신분의 장벽으로 인한 청년과의 이별 제3부(현재. 밤→새벽→낮. 두만강변→산곡 마을) 58장 순이와 청년의 감격적인 재회. 청년의 구애를 거절함 59장-62장 남편 병남이 마적의 총에 맞아 시체로 돌아옴 63장-72장 이튿날 고향(산곡)에 남편의 시신을 매장함  제재 : 일제 치하 두만강변 주민의 애환 주제 : 어느 여인의 슬픈 사랑과 비극적 삶.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애환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 출전 : (1925) 이해와 감상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김동환의 서사적 장시이다. 국경 지대인 두만강변의 작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현재-과거-현재’의 시간 구조를 채택하여, 밀수꾼 병남(丙南)과 그의 아내 순이, 그리고 순이의 첫사랑이었던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이미지를 통해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안을 형상화했다는 점에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 시대 많은 우리 백성들은 만주에 가서 살았다. 강제로 이주되어 간 사람도 있었고, 독립 투쟁을 하기 위해 간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였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 한겨울 밤의 삼엄하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전편에는 순이, 병남, 청년(옛 애인) 간, 또는 순이와 상황 간의 갈등이 순이의 내부에서 관념적, 낭만적으로만 일어나고 있어, 서사시로서의 특징인 영웅화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제재나 주제가 개인 단위의 정서 표출에 있지 않고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여, 1920년대 감상적(感傷的)인 서정의 세계와 획을 긋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작품 전편의 줄거리  1부 (1 - 27장) : 설이 가까운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두만강 유역의 국경 마을에서 한 여인(순이)이 소금 밀수출 마차를 끌고 강 건너로 간 남편(병남)을 걱정하고 있다. 저녁 무렵, 한 청년이 나타나 그 여인의 오두막을 두드리며 주인을 찾는다.  2부 (28 - 57장) : 그 청년은 여인이 어렸을 때 함께 소꿉놀이 하던 친구로, 두 사람은 차차 연정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하였으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인 순이는 다른 혈통의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사랑 잃은 소년은 마을을 떠난다. 그 소년이 8년 뒤에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3부 (58 - 72장) : 청년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순이에게 다시 구애(求愛)의 손을 내미나, 순이는 남편에 대한 도리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들어 이를 거절한다. 그 때, 밀수출을 나갔던 그녀의 남편은 마적들의 총을 맞고 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시 전문 (전문은 아래에 있음) 1장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명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2장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 산림실이 화부(花夫)떼 소리언만. 3장  마지막 가는 병자의 부르짖은 같은 애처로운 바람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못 건넌 채 얻어맞은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가며 운다 - 겨울에도 한 삼동,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긋는 소리언만, 4장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파수막)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빨-간 불빛이 보인다. 까-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5장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 벌에는 외가지 백양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안고 춤을 춘다, 가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놓으면서 - 6장  전선이 운다, 잉 - 잉 - 하고  국교(國交)하러 가는 전신줄이 몹시도 운다. 집도 백양도 산곡도 외양간 '당나귀'도 따라서 운다, 이렇게 춥길래 오늘따라 간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밤마다 밤마다 외로이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없지 얼음장 깔린 강바닥을  바가지 달아매고 건너는 함경도 이사꾼도 별로 안 보이지, 회령서는 벌써 마지막 차고동이 텄는데. 7장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 줄 모르는  간 건너 산천으로서는 바람에 눈보라가 쏠려서 강 한판에 진시왕릉 같은 무덤을 쌓아놓고는 이내 안압지를 파고 달아난다, 하늘땅 모두 회명(晦暝)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백설로 오백 리, 월광으로 삼천 리,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8장  그날 저녁 으스러한 때이었다 어디서 왔다는지 초조한 청년 하나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나 오르명내리명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 "달빛에 잠자는 두만강이여! 눈보라에 깔려 우는 옛날의 거리여, 나는 살아서 네 품에 다시 안길 줄 몰랐다, 아하, 그리운 옛날의 거리여!" 애처로운 그 소리 밤하늘에 울려 청상과부의 하소연같이 슬프게 들렸다. 그래도 이 마을 백성들은 또 '못된 녀석'이 왔다고, 수군거리며 문을 닫아 매었다. 9장  높았다 - 낮았다 - 울었다 - 웃었다 하는 그 소리 폐허의 재 속에서 나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외우는 백조의 노래같이 마디마디 눈물을 짜아내었다, 마치 "얘들아 마지막 날이 왔다"하는 듯이 "모든 것이 괴멸할 때가 왔다"하는 듯도. 여럿은 어린애고 자란 이고 화롯불에 마주 앉았다가 약속한 듯이 고요히 눈을 감는다. 하나님을 찾는 듯이 - "저희들을 구해 줍소서" 그러다가 발소리와 같이 "아하" 부르는 청년의 소리가 다시 들리자, "에익! 빌어 먹을 놈!"하고 침을 배앝는다, 그 머리로서는 밀정하는 소리가 번개치듯 지나간다, - 그네는 두려운 과거를 가졌다 생각하기에도 애처로운 기억을 가졌다. 그래서 그물에 놀란 참새처럼 늘 두려운 가슴을 안고 지내간다, 불쌍한 족속의 가슴이 늘 얼어서! 10장  청년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옛날의 거리여! 부모의 무덤과 어릴 때 글 읽던 서당과 훈장과 그보다도 물방앗간에서 만나는 색씨 사는 고향아, 달빛에 파래진 S촌아!" 여러 사람은 더욱 놀랐다 그 대담한 소리에 마치 어느 피 묻은 입이, '리벤지'를 부르는 것 같아서, 촌 백성들은 장차 올 두려운 운명을 그리면서 불안과 비포(悲怖)에 떨었다, 그래서 핫! 하고 골을 짚은 채 쓰러졌다. 11장  바람은 이 조그마한 S촌을 삼킬 듯이 심하여간다 S촌뿐이랴 강안(江岸)의 두 다른 국토와 인가와 풍경을 시름없이 덮으면서  벌부(筏夫)의 소리도, 고기잡이 얼음장 그는 소리도, 구화(溝化)불에 마주선 중국 순경의 주정소리도,수비대 보초의 소리도 검열 맡은 필름같이 뚝뚝 중단되어가면서, 그래도 이 속에도 어린애 안고 우는 촌 처녀(처녀)의 소리만은 더욱 분명하게  또 한 가지 방랑자의 호소도 더욱 뚜렷하게, 울며, 짜며 한숨짓는 이 모든 규음(揆音)이 바숴진 피아노의 건반같이 산산이 깨뜨려놓았다, 이 마을 평화를 - 12장  처녀(妻女)는 두렵고 시산하고 참다못하여 문을 열고 하늘을 내다보았다 하늘엔 불켜논 방안같이 환-히 밝은데 가담가담 흑즙 같은 구름이 박히어 있다. "응, 깊고 맑은데-"하고 멀리 산굽이를 쳐다보았으나 아까 나갔던 남편의 모양은 다시 안 보였다 바람이 또 한 번 포효하며 지난다 그때 이웃집으로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우물가 버드나무 째지는 소리 요란히 난다 - 처마 끝에 달아맨 고추 다램이도 흩어지면서 그는 "에그 추워라!"하고 문을 얼른 닫았다. 13장  먼 길가에선 술집막(幕)에서 널문 소리 들린다, 이내 에익… 허… 허… 하는 주정꾼 소리도 "춥길래 오늘 저녁 문도 빨리 닫는가보다"하고 속으로 외우며 처녀(妻女)는 돌부처같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근심 없는 사람 모양으로. 이렇게 시산한 밤이면은 사람 소리가 그리우니 웩 - 웩 - 거리고 지나는 주정꾼 소리도. 14장  처녀(妻女)는 생각하는 양 없이 출가한 첫해 일을 그려보았다 - 밤마다 밤마다 저 혼자 베틀에 앉았을 때, 남편은 곤히 코구르고 - 고요한 밤거리를 불고 지나는 머슴아이의 옥퉁소 소리에 구곡의 청제비 우는 듯한 그 애연한 음조를 듣고는 그만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도 하였더니 그저 섧고도 안타까워서 - 산으로 간 남편이 저물게 돌아올 때 울타리 기대어 먼 산기슭을 바라보노라면 오시는 길을 지키노라면 멀리 울 리는 강아지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더니 갓난애기의 첫해가 자꾸 설워서 - 그보다도 가을밤 옷 다듬다 뒷서당집 노훈장의 외우는 "공자 왈, 맹자 왈"소리에 빨래 다듬이도 잊고서 그저 가만히 엎디어 있노라면 마을돌이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구운 감자 갖다주는 것도 맛없더니 그래서 그래서 저 혼자 이불 속에서 계명(鷄鳴) 때 지나게 울기도 하였더니, "아. 옛날은 꿈이구나!"하고 처녀(妻女)는 세상을 다 보낸 노인같이 무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녀(妻女)는 운다, 오랫동안을 사내를 속이고 울던 마음이 오늘밤 따라와 터지는 것 같아서, - 그는 어릴 때 아직 머리태를 두었을 때 - 도라지 뿌리 씻으로 샘터에 가면 강아지 몰고 오는 머슴아이, 만나던 일 갈잎으로 풀막을 짓고 해 지기도 모르게, 물장구 치고 풀싸움하고 그러던 일, 그러다가 처녀(妻女)는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옳아, 그이, 그 언문 아는 선비! 어디 갔을까?" 하고 무릎을 친다. 그리고 입속으로 "옳아, 옳아, 그이!"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꿈길을 따르면서 - 옛날을 가슴에서 파내면서. 15장  바깥에선 밤개가 컹컹 짖는다. 그 서슬에 "아뿔사 내가 왜?"하고 처녀(妻女)는 황급히 일어나 문턱에 매어달린다, 죄 되는 일을 생각한 것같이. 그러나 달과, 바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산 봉화당 꼭지에선 성좌들이 진치고 한창 초한(楚漢)을 다투는데 - 16장  "아하, 설날이 아니 오고, 또 어린애가 아니었더면 국금(國禁)을 파하고까지 남편을 이 한밤에 돈벌이로 강 건너 외땅으로 보내지 않았으련만 무지한 병정에게 들키면 그만이지. 가시던 대로나 돌아오시랴. 에그, 과부는 싫어, 상복 입고 산소에 가는 과부는 싫어" 빠지직빠지직 타오르는 심화에 앉아서 울고 서서 맴도는 시골 아낙네이 겨울밤은 지리도 하여라. 다시는 인적기조차 없는데 뒷산곡에는 곰 우는 소리 요란코. 17장  이상한 청년은 그 집 문간까지 왔었다, 여러 사람의 악매(惡罵)하는 눈살에 쫓겨 뼉다귀 찾는 미친 개모양으로 우줄우줄 떨면서 모막살이집 문 앞까지 왔었다, 누가 보았던들 망명하여 혼 이방인이 보리(補吏)의 눈을 피하는 것이라 않았으랴. 그는 돌연 "여보, 주인!" 하고 굳어진 소리로 빽 지른다. 그 서슬에 지옥서 온 사자를 맞는 듯이 온 마을이 푸드득 떤다, 그는 이어서 백골을 도적하러 묘지에 온 자처럼 연해 눈살을 사방에 펼치면서 날카로운 말소리로 "여보세요 주인! 문을 열어주세요" 18장  딸그막딸그막 울려나오는 그 소리, 만인의 가슴을 무찌를 때 모든 것은 기침 한 번 없이 고요하였다. 천지 창조 전의 대공간같이…… 그는 다시 눈을 흘겨 삼킬 듯이 바라보더니 "여보, 주인! 주인! 주인?" 아, 그 소리는 불쌍하게도 맥이 풀어져 고요히 앉아 있는 아내의 혼을 약탈하고 말았다. 사내를 사지(死地)에 보내고 정황없어 하는 아내의 - 19장  처녀(妻女)는 그 소리에 놀랐다. 그래서 떨었다 밖으로선 더 급하게 "나를 모르세요? 내요! 내요!" 하고 계속하여 난다, 그러면서 주먹이 똑 똑 똑 하고 문지방에 와 맞힌다. 처녀(처녀)의 가슴도 똑똑똑 때리면서 젊은 여자를 잠가둔 성당 문을 똑똑똑 두다리면서. 20장  처녀(妻女)는 어떨 줄 몰랐다, 그래서 거의 기절할 듯이 두려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남편이 떠날 때, 동리 구장이 달려와 말모개를 붙잡고 "오늘 저녁엔 떠나지를 마오, 부디 떠나지를 마오, 이상한 청년이 나타나 무슨 큰 화변을 칠 것 같소, 부디 떠나지를 마오, 작년 일을 생각하거든 떠나지를 마오." 그러길래 또 무슨 일이 있는가고, 미리 겁내어 앉았을 때 그 소리 듣고는 그는 에그! 하고 겁이 덜컥 났었다. 죽음이 어디서 빤-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몸에 오소속 소름이 친다. 21장  그의 때리는 주먹은 쉬지 않았다, 똑 - 똑 - 똑 - "여보세요, 내요! 내라니까" 그리고는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있다, 한참을. "아, 내라니까, 내요, 어서 조금만" "아하, 아하, 아하 -" 청년은 그만 쓰러진다. 동사(凍死)하는 거지 추위에 넘어지듯이, 그때 처녀(妻女)는 제 가슴을 만지며 "에그, 어쩌나, 죽나보다 -"하고 마음이 쓰렸다. "아하, 아하, 아하, -" 땅속으로 꺼져하는 것 같은 마지막 소리 차츰 희미하여가는데 어쩌나! 어쩌나? 아하 - "내라니까! 내요, 아, 조금만……" 그것은 확실히 마지막이다. 알 수 없는 청년의 마지막 부르짖음이다 - 이튿날 첫아침 흰 눈에 묻힌 송장 하나가 놓이리라. 건치에 말아 강물 속에 띄워보내리라,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방랑자를 - 처녀(妻女)는 이렇게 생각함에, "에그 차마 못할 일이다!"하고 가슴을 뜯었다. 어쩔까, 들려놓을까? 내 버려둘까? 간첩일까? 마적일까? 아니 착한 사람일까? 처녀는 혼자 얼마를 망설이었다. "아하, 나를 몰라, 나를- 나를, 이 나를……" 그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꼭 한 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물귀신에게 홀린 제주도 해녀같이 그래서 문고리를 쥐었다. 금속성 소리 딸까닥하고 난다, 그 소리에 다시 놀라 그는 뒷걸음친다. 22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청년이었다. 그는 창살에 넘어지는 아낙네의 그림자를 보고는 미친 듯, 일어서며, 다시 "내요 - 내요 -" 부른다. 익수자(溺水者)가 배를 본 듯, 외마디 소리, 정성을 다한 - 23장  처녀(妻女)는 그래도 결단치 못하였다, 열지 않으면 불쌍하고, 열면 두렵고, 그래서 문고리를 쥐고 삼삼 돌았다. "여보세요, 어서 조금만 아하……" 그러면서 마지막 똑똑을 두다린다, 마치 파선된 배의 기관같이 차츰차츰 약하여져가면서 - 24장  처녀(妻女)는 될 대로라듯이 문을 열고 있다, 지켜섰던 바람이 획! 하고 귓볼을 때린다, 그때 의문의 청년도 우뚝 일어섰다 더벅머리에 눈살이 깔리고, 바지에 정갱이 달빛에 석골조상같이 꿋꿋하여진 그 방랑자의 꼴! 25장  어유(漁油)불이 삿!하고 두 사이를 흐른다, 모든 발음(撥音)이 죽은 듯 하품을 친다. "누구세요, 당신은 네?" 청년은 한 걸음 다가서며 "내요, 내요 내라니까 - " 그리고는 서로 물끄러미 치어다본다, 아주 대담하게, 아주 심정(沈精)하게.  26장  그것도 순간이었다 "앗! 당신이 에그머니!"하고 처녀는 놀라 쓰러진다. 청년도 "역시 오랫던가 아, 순이여" 하고 문지방에 쓰러진다. 로단이 조각하여논 유명한 조상같이 둘은 가만히 서 있다, 달빛에 파래져 신비하게, 거루하게. 27장  아하 그리운 한 옛날의 추억이어. 두 소상(塑像)에 덮이는 한 옛날의 따스한 기억이어! 8년 후 이날에 다시 불탈 줄 누가 알았으리. 아, 처녀와 총각이어, 꿈나라를 건설하던 처녀와 총각이어! 둘은 고요히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따스한 늘을 들춘다 - 국경의 겨울밤은 모든 것을 싸안고 달아난다. 거의 10년 동안을 울며불며 모든 것을 괴멸시키면서 달아난다. 집도 헐기고, 물방앗간도 갈리고, 산도 변하고, 하늘의 백랑성 위치조차 조금 서남으로 비틀리고 그러나 이 청춘남녀의 가슴속 깊이 파묻혀 둔 기억만은 잊히지 못하였다, 봄꽃이 져도 가을 열매 떨어져도 8년은 말고 80년을 가보렴 하듯이 고이고이 깃들었다 아, 처음 사랑하던 때! 처음 가슴을 마주칠 때! 8년 전의 아름다운 그 기억이여! 제2부 28장  멀구 광주리 이고 산기슭을 다니는 마을 처녀떼 속에, 순이라는 금년 열여섯 살 먹은 재가승(在家僧)의 따님이 있었다. 멀구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 게다가 웃울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 백두산 천지 속의 선녀같이 몹시도 어여뻤다. 마을 나무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을 썼다. 될 수 있으면 장가까지라도! 하고 총각들은 산에 가서 '콩쌀금'하여서는 남몰래 색시를 갖다주었다. 노인들은 보리가 설 때 새알이 밭고랑에 있으면 고이고이 갖다주었다. 마을서는 귀여운 색시라고 누구나 칭찬하였다. 29장  가을이 다 가는 어느 날 순이는 멀구 광주리 맥없이 내려놓으며 아버지더러, "아버지, 우리를 중놈이라고 해요, 중놈이란 무엇인데" "중? 중은 웬 중! 장삼입고 고깔 쓰고 목탁 두다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중이지, 너 안 보았디? 일전에 왔던 동냥벌이 중을" 그러나 어쩐지 그 말소리는 비었다. "그래도 남들이 중놈이라던데"하고, 아까 산에서 나뭇꾼들에게 몰리우던 일을 생각하였다. 노인은 분한 듯이 낫자루를 휙 집어 뿌리며, "중이면 어때? - 중은 사람이 아니라든? 다른 백성하고 혼사도 못하고 마음대로 옮겨 살지도 못하고" 하며, 입을 다물었다가 "잘들 한다. 어디 봐! 내 딸에야 손가락 하나 대게 하는가고" 하면서 말없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낯에는 눈물이 두루루 어울리고, 순이도 그저 슬픈 것 같아서 함께 울었다, 얼마를. 30장  재가승(在家僧)이란 - 그 유래는 함경도 윤관이 들어오기 전, 북관의 육진 벌을 유목(遊牧)하고 다니던 일족이었다. 갑옷 입고 풀투구 쓰고 돌로 깎은 도끼를 메고, 해 잘 드는 양지볕을 따라 노루와 사슴잡이하면서 동으로 서로 푸른 하늘 아래를 수초를 따라 아무데나 다녔다, 이리저리. 부인들은 해 뜨면 천막밖에 기어나와, 산 과일을 따 먹으며 노래를 부르다가 저녁이면 고기를 끓이며 술을 만들어, 사내와 같이 먹으며 입맞추며 놀며 지냈다. 그러다가 청산을 두고 구름만 가는 아침이면 산령에 올라 꽃도 따고, 풀도 꺾고 - 31장  말은 한가히 풀을 뜯고 개는 꿩을 따르고, 하늘은 맑았고, 푸르고 이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이 일족이 잡아서 먹고서, 먹고서 잡아가지고 - 그래서 술을 먹고 계집질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싸움하고 영지를 빼앗고, 암살이 일어나고 - 추장, 무사, 처, 모, 아이,석부(石釜), 초의(草衣) - 이것이 서로 죽고, 빼앗고 없어지고 하는 대상 평화스럽고 살벌한 세대를 오래 보내었다. 32장  새벽이면 추장이 "얘들아 일어나거라!"하는 소리에, 천막 속 한자리에서 잠자던 부부와 부모와 처자와 모든 것들이 이슬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장정은 활을 메고 들에 나가고 처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쪼인다. 추장은 연해 싸움할 계획을 하고서 - 일족은 복잡한 것을 모르고 그날 그날을 보내었다. 33장  그네들은 탐탐한 공기를 모르고 성가신 도덕과 예의를 모르고 아름다운 말씨와 표정을 몰랐었다 그저 아름다운 색시를 만나면 아내를 삼고 그래서 어여쁜 자녀를 내어 기르고 밤이면, 달이 떠 적막할 때, 모닥불 옆에서 고기를 구워서는 술안주하여 먹으며, 타령을 하면서 짧은 세상을 즐겁게 보내었다 몇백 년을 두고 똑같이. 34장  그러나 일이 났다. 앞마을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고 떠들 때, 천막에다 여러 곳에서 나많은 장정들이 모조리 석부를 차고 활을 메고 여러 대 누려 먹은 제 땅을 안 뺏기려, 싸움터로 나갔다. 나갈 때면 울며불며 매여달 리는 아내를 물리치면서 처음으로 대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보면서. 남은 식구들은 떠난 날부터 냇가에 칠성단을 묻고 밤마다 빌었다, 하늘에 무사히 살아오라고! 싸움에 이기라고!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엔 슬픈 기별이 왔었다, 싸움에 나갔던 군사는 모조리 패해서 모두는 죽고 더러는 강을 건너 오랑캐령으로 달아나고, - 사랑하던 여자와 말과 서부와, 석퉁소를 내 버리고서. 즉시 고구려 관원들이 왔었다 이 천막촌에 그래서 죽이리 살리리 공론하다가 종으로 쓰기로 하고 그대로 육진에 살게 하였다, 모두 머리를 깎이고 - 35장  몇 백 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고구려 관원들도 갈리고 그 일족도 이리저리 흩어져 어떻게 두루 복잡하여질 때, 그네는 혹 둘도, 모여서 일정한 부락을 짓고 살았다. 머리를 깎고 동무를 표하느라고 남들은 집중이라 부르든 말든 - 재가승(在家僧)이란 그 여진의 유족. 그래서 백정들이 인간 예찬하듯이 이 일족은 세상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며 지냈다. 순이란 함경도의 변경에 뿌리운 재가승의 따님. 불쌍하게 피어난 운명의 꽃, 놀아도 집중과 시집가도 집중이라는 정칙받은 자! 그러나 누구나 이 중을 모른다, 집주이란 뜻을 그저 집중 집중 하고 욕하는 말로 나뭇꾼들이 써왔다. 36장  마을 색시들은 해 지기까지 하여서 물터에 물 길러 나섰다, 국사당 있는 조그마한 샘터에로, 그곳에는 수양버들 아래,  오래 묵은 돌부처 구월 볕에 땀을 씻으면서 육감을 외우고 앉아 있었다. 지나던 길손이 낮잠 자는 터전도 되고 -  그 아래는 바로 우물, 바가지로 풀 수 있는 우물, 여러 길에 쓰는 샘물터가 있었다. 또 그 곁에는 치재(致齋) 붙이던 베 조각이 드리웠고, 나무꾼이 원두 씨름아여 먹고 간 꺼-먼 자취가 남았고 샘물 우엔 벌레 먹은 버들잎 두어 개 띄웠고 - 37장  "순이는 벌써 머리를 얹었다네, 으아, 우습다 시집간다더라, 청혼왔다구." "부잣집 며느리 된다고, 어떤 애는 좋겠다" 하며 여럿은 순이를 놀려대이며 버들잎을 가려가며 물을 퍼 담았다. "밭도 두 맥 소쉬 있고 소도 세 마리나 있고 흥!" "더구나 새신랑은 글을 안다더라, 언문을"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며 마을 처녀들은 순이를 놀려대었다. 38장  순이는 혼자 속으로 가만히 '시집' '신부'하고 불러보았다. 어여쁜 이름이다 함에 저절로 낯이 붉어진다, "나도 그렇게 된담! 더구나 그 '선비'하고" 그러다가 문득 아까 아버지 하던 말을 생각하고 나는 집중 집중으로 시집가야 되는 몸이다 함에 제 신세 가엾은 것 같아서 퍽 슬펐다. "어찌 그 선비는 집중이 아닌고? 언문 아는 선비가, 에그 그 부잣집은 집중 가문이 아닌고? 가엾어라" 그는 그저 울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여지면서 멀리 해는 산마루를 넘고요 - 39장  얼마나 있었는지 멀리 방축 건너로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하는 나무꾼의 목가가 들릴 때, 순이는 깜짝 놀라 얼른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았다 가을바람이 버들잎 한 쌍을 물동이에 쥐어넣고 - 40장  동무들은 다 가고 범나비 저녁바람 쏘이려 나왔을 때, 하늘이 부르는 저녁 노래가 고요히 떠돌아 향기로운 땅의 냄새에 아울려 순이를 때릴 때, 그는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 성장한 처녀의 가슴에 인생의 노래가 떠돌아 못 견디게 기쁘었다, 그때 어디서 갈잎이 째지며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새알 만한 돌멩이 발충에 와 떨어진다. 41장  순이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로 돌아섰다. 귓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소년은 뛰어나왔다. 갈 밖으로 벙글벙글 웃으면서 "응, 순이로구나!" 하면서 앞에 와 마주섰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콩쌀금'을 내어 슬며시 쥐어준다. 순이는 오늘따라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였다 늘 하던 해죽 웃기를 잊고 - "너 멀구밭으로 갔던? 어째 혼자 갔나?" "나허구 같이 가자구 하지 않았나? 누가 꼬이든?" "……" "어째 너 나를 싫어하나? 응" 순이는 그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년은 빨개진 소녀의 귓볼을 들여다보며 "왜 울었니? 누구에게 맞았니?" "누가 맞았다니!" "그럼 어째 말을 아니 하니?" 그래도 순이는 잠잠하다. 소년은 손뼉을 치며 하하하 웃으면서 "옳지 알았다 너 부끄러워 우니? 우리 아버지 너 집으로 혼사말 갔다더니 옳지 그게 부끄럽구 우냐!" "……" "얘 너는 우리 집에 시집온단다, 권마성(勸馬聲) 소리에 가마에 앉아서 응" 순이는 한 걸음 물러서며 "듣기 싫다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그리고는 물동이 앞에 와 선다. 아무 말도 없이 고요히 - 수정(水精)같이 소년은 웃다가 이 눈치를 차리고 얼른 달려들어 물동이를 이워주었다. 그리고는 뒷맵시와 불그레한 뺨빛을 또 한 가지 여왕같이 걸어가는 거룩한 그 자태를 탐내보면서 마치 원광 두른 성녀를 보내는 듯이 한껏 아까워서 - 42장  조선의 시골에는  백일에 짓는 사랑의 궁전은 없으랴. 종이 무서워 무서워 상전을 바라보듯 거지가 금덩이 안아보듯 두려움과 경이가 큐-피트의 화살이 되었다. 43장  그러는 속에도 사랑은 허화(虛火), 봄눈을 뒤지고 나오는 움같이 고려 지방족의 강득한 씨는 아침나절 호풍이 부는 산국(山國)에도 피기 시작하였다. 여성은 태양이다! 하는 소리가 소년의 입술을 가끔 스쳤다, 두 절대한 친화력에 불타지면서 사랑은 재가승과 언문 아는 계급을 초월하여서 붙었다. 44장  그 뒤로부터 비 오는 아침이나 바람 부는 저녁이나 두 그림자는 늘 샘터에 모였다 남의 눈을 꺼리면서, 물 우엔 갈잎 마음속엔 '잊지 말란 풀' 45장  뻐꾸기 우는 깊은 밤중에 처녀의 짓두그릇엔 웬 총각의 토수목 끼었고 누가 쓴 '언문본'인지 뎅굴뎅굴 굴렀다 순이의 맘에는 알 수 없는 영주가 즐어앉았다. 콩쌀금 주던 미소년이 처녀의 가슴에 아아 언문 아는 선비가 안기었다. 46장  소년은 - 날마다 꼴단 지고 오다가 그 집 앞 돌각탑 우에 와 앉았다, 땀 씻을 때에 부르는 휘파람 소리는 어린 소녀에게 전하는 그 소리라. 사랑하는 이의 사랑받으면서 꿈나라의 왕궁을 짓는 하루 이틀 아침은 저녁이 멀고 저녁은 아침이 그리운 만리장성을 쌓을 때 - 47장  쌓기는 왕자, 왕녀의 사랑 같은 사랑의 성을 두 소년이 쌓았건만, 헐기는 재가승의 정칙이 헐기 시작하였다. 꽃에는 벌레가 들기 쉽다고 아, 둘 사이에는 마지막 날이 왔다, 벌써부터 와야 할 마지막 날이 전통은- 사회 제도는 인간 불평등의 한 따님이라고, 재가승의 자녀는 재가승의 집으로 그래서 같은 씨를 십대 백대 천대를 순이도 재가승의 씨를 받아 전하는 기계로 가게 되었다. 죽기를 한하는 순이는  울고 떼쓰다가 아버지 교살된다는 말에 할 수 없이 그해 겨울에 동리 존위(尊位)집에 시집갔었다, 언문 아는 선비를 내어버리고 - 여러 마을의 총각들은 너무 분해서 "어디 봐라!"하고 침을 배앝으며 물긷기 동무들은 "어찌 저럴까, 언문 아는 선비는 어쩌고, 흐흥, 중은 역시 중이 좋은 게지"라고 비웃었다. 48장  이 소문을 듣고 소년은 밤마다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단 한 번만 그 색시를 만나려 애썼다. 광인같이 아침 저녁 물방앗간을 뛰마니며 "어찌 갔을까, 어여쁜 순이가 맹세한 순이가 어찌 갔을까?"하면서. 49장  열흘이 지나도 순이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이게 무슨 짓입니까 팔목에 안기어 풀싸움하던 단순한 옛날의 기억을 이렇게 깨뜨려좋습니까?" "아, 순아, 어디 갔니 옛날의 애인을 버리고 어디 갔니? 너는 참새처럼 아버지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너는 참새처럼 내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순아, 너는 물동이 이어줄 때, 언문 아는 집 각시 된다고 자랑하더니만 언문도 내보리고 선비도 없는 어디로 갔니?" "멀구알 따다 팔아 열녀전을 쌓겠다더니 순아, 열녀전을 버리고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귀여운 말하던 네가 어디 갔니? 부엉이 운다 부엉새가 운다 뒷산곡에서 물레젓기 타령하던 때에 듣던 부엉새가 운다 아, 순아!" 50장  소년은 너무도 기막혀 새벽에 칠두성을 향하여 "하늘이시여, 칼을 주소서, 세상을 무찌를 순이가 살고 옛날의 샘터가 놓인 이 세상을 무찌를!" 51장  에라, 나 보아라! 자유인에 탈이 없는 것이다, "가헌(家憲)'이라거나 '율법'이라거나, 모두 짓밟아라 뜯어고쳐라 추장이란 녀석이 제 맘대로 꾸며논 타성의 도덕률을 집중을 사람을 만들자, 순이는 아버지의 따님을 만들자, 초인아, 절대한 힘을 빌려라. 이것을 고치게, 아름답게 만들 게 불쌍한 눈물을 흘리지 말 게. 큐피트의 지나간 뒤는 꿈이 쓰러지고, 박카스의 노래 뒤는 피가 흐르나니. 52장  몇 날을 두고 울던 소년은 열흘이 되자 모든 바람이 다 끊어지고 할 때 산새들도 깃든 야밤중에, 보꾸러미 하나 둘러메고 이 마을을 떠났다 마지막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이 땅을 안 디딜 작적으로 - 구름은 빌까 험하게 분주히 내왕하는데. 53장  소년이 떠난 뒤 하늘은 잊은 듯이 해마다 해마다 풍년을 주었다 때맞춰 기름진 비를, 자갈 돌밭에 출가한 순이의 맘에도 안개비를 농부들은 여전히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갔다. 마을 소녀들은 멀리 따러 다니구요 언문 아는 선비 일은 차츰차츰 잊으면서. 54장  몇 해 안 가서 무산령상(茂山嶺上)엔 화차통 검은 문명의 손이 이 마을을 다닥쳐왔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전토를 팔아가지고 차츰 떠났다. 혹은 간도로 혹은 서간도로 그리고 아침나절 짐승 우는 소리 외에도 쇠 찌적 가는 소리 돌 깨는 소리, 차츰 요란하여갔다, 옷 다른 이의 그림자도 붇고, 55장  마을 사람이 거의 떠날 때 출가한 순이도 남편을 따라 이듬해 여름 강변인 이 마을에 옮겨왔다.  아버지 집도 동강(東江)으로 가고요 - 56장  멀구 따는 산곡에는 토지 조사국 기수가 다니더니, 웬 삼각 표주가 붙구요, 초가집에도 양(洋)납이 오르고 - 57장  촌부들이 떠난 지 5년 언문 아는 선비 떠난 지 8년. 이것이 이 문간에서 서로 들추는 아름다운 옛날의 기억, 간첩이란 방랑자와 밀수출 마부의 아내 되는 순이의 아! 이것은 둘의 옛날이 기억이었다. 제3부 58장  -- 청년 너무도 기뻐서 처녀를 웃음으로 보며 "오호, 나를 모르세요. 나를요?" 꿈을 깨고 난 듯이 손길을 들어, "아아, 국사당 물방앗간에서 갈잎으로 머리 얹고 종일 풀싸움하던 그 일을- 또 산밭에서 멀구 광주리 이고 다니던 당신을 그리워 그리워하던 언문 아는 선비야요!" "재가승이 가지는 박해와 모욕을 같이하자던 그러면서 소 몰기 목동으로 지내자던 한때는 봄이 온다고 기다리던 내야요" -- 처녀(妻女) "언문 아는 선비? 언문 하는 선비! 이게 꿈인가! 에그, 아!, 에그! 이게 꿈인가, 이 추운 밤에, 당신이 어떻게 오셨소, 봄이 와도 가을이 와도 몇 가을 봄 가고와도 가신 뒤 자취조차 없던 당신이 이 한밤에, 어떻게 어디로 오셨소? 시집간 뒤 열흘 만에 떠나더라더니만." -- 청년 "그렇다오, 나는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에 못 이겨 열흘 만에 떠났소, 언문도 쓸데없고 밭 두렁도 소용없는 것 보고 가만히 혼자 떠났소. 8년 동안 - 서울 가서 학교에 다녔소 머리 깎고, 그래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을 알고 페스탈로치와 루소와 노자와 장자와 모든 것을 알고 언문 아는 선비가 더 훌륭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고향이 그립고 당신을 못 잊오 술을 마셨더니, 어느새 나는 인육을 탐하는 자가 되었소, - 네로같이 밤낮 - 매독, 임질, 주정, 노래, 춤,-깽깽이- 내가 눈 깨일 때는 옛날이 육체가 없고 옛날의 정신이 없고 아 옛날의 지위까지. 나는 산송장! 오고갈 데도 없는 산송장. 아, 옛날이 그리워 옛날이 그리워서 이렇게 찾아왔소, 다시 아니 오려던 땅을 이렇게 찾아왔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 아하, 어떻게 있소, 처녀 그대로 있소? 남의 처로 있소! 흥, 역시 베를 짜고 있소? 아, 그립던 순이여! 나와 같이 가오! 어서 가오! 멀리 멀리 옛날의 꿈을 둘추면서 지내요. 아하, 순이여!" -- 처녀(妻女) "아니! 아니 나는 못 가오 어서 가세요, 나는 남편이 있는 계집, 다른 사내하고 말도 못 하는 계집. 조선 여자에 떨어지는 종 같은 팔자를 타고난 자이오, 아버지 품으로 문벌 있는 집에 - 벌써 어머니질까지 하는 - 오늘 저녁에 남편은 이것들을 살리려, 소금 실어 수레를 끄을고 강 건너 넘어갔어요 남편도 없는 이 한밤에 외인하고 - 에그 어서 가세요 -" "내가 언제 저 갈 데를 간다고? 백두산 위에 흰 눈이 없어질 때, 해가 서쪽으로 뜰 때 그때랍니다, 봄날에 강물이 풀리듯이요 -" "타박타박 처녀의 가슴을 드디고 가던 옛날의 당신은 눈물로 장사지내구요. 어서 가요, 어서 가요 마을 구장에게 들키면 향도 배장(鄕徒排杖)을 맞을 터인데" 그러면서 문을 닫는다 애욕의 눈물을 씻으면서 - -- 청년 "아니, 아니 닫지를 마세요, 사랑의 성전문을 닫지를 마세요. 남에게 노예라도 내게는 제왕, 종이 상전 같은 힘을 길러 탈을 벗으려면 그는 일평생 종으로 지낸다구요 아, 그리운 옛날의 색시여!" "나는 커졌소, 8년을 자랐소, 굴강한 힘은 옛날을 복수하기에 넉넉하오. 율법도 막을 수 있고 혼도 자유로 낼 수 있소. 아, 이쁜 색시여, 나를 믿어주구려, 옛날의 백분의 일만이라도." "나는 벌써 도회의 매연에서 사형을 받은 자이오, 문명에서 환락에서 추방되구요, 쇠마치, 기계, 착가(捉枷), 기아(飢餓), 동사(凍死) 인혈을, 인육을 마시는 곳에서 폐병균이 유리하는 공기 속에서 겨우 도망하여 온 자이오 몰락하게 된 문명에서 일광을 얻으러 공기를 얻으러, 그리고 매춘부의 부란한 고기에서, 아편에서 빨간 술에서 명예에서 이욕에서 겨우 빠져나왔소, 옛날의 두만강가이 그리워서 당신의 노래가 듣고 싶어서." "당신이 죽었더라면 한평생 무덤가를 지키구요 시집가신 채라면 젖가슴을 꿈으로나 만질까고, 풀밭에서 옛날에 부르던 노래나 찾을까고 -" -- 처녀(妻女) "무얼 또 꾸며대시네, 며칠 안 가서 그리워하실 텐데!" -- 청년 "무엇을요? 내가 그리워한다고." -- 처녀(妻女) "그러믄요! 도회에는 어여쁜 색시 있구 놀음이 있구,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날마다 밤마다 퍼붓는 함박눈밖에 강물은 얼구요 사람도 얼구요, 해는 눈 속에서 깼다가 눈 속에 잠들고 사람은 추운 데 낳다가 추운 데 묻히고 서울서 온 손님은 마음이 여리다구요. 오늘밤같이 북풍에 우는 당나귀 소리 듣고는 눈물을 아니 흘릴까요? 여름에는 소몰기, 겨울에는 마차몰이 그도 밀수입 마차랍니다, 들키면 경치우는- 단조하고 무미스러운 이 살림, 몇 날이 안 가서 싫증이 나실 텐데 -" "시골엔 문명을 모르는 사람만이 언문도 맹자도 모르는 사람만이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만이 소문만 외우며 사는 곳이랍니다." -- 청년 "아니, 그렇지 않소, 내가 도회를 그리워한다고? 비린내 나는 그 도회에를 우정을 도량형으로 싸구요, 명예하는 수레를 일생 두고 끄으는 소와 막잡이하는 우둔한 차부들이 하는 곳을." "굴뚝이 노동자의 육반 위에 서고 호가사 잉여가치의 종노릇하는 모든 혼정(魂精)이 전통과 인습에 눌리어 모든 질곡밖에 살 집이 없는 그런 도회에, 도회인 속에," "데카당, 다다, 염세, 악의 찬미 두만강가의 자작돌같이 무룩히 있는 근대의 의붓자식 같은 조선의 심장을 찾아가라고요! 아, 전원아, 애인아, 유목업아! 국가와 예식과, 역사를 벗고 빨간 몸뚱이 네 품에 안기려는 것을 막으려느냐?-" 그러면서 청년은 하늘을 치어보았다. 모든 절망 끝에 찾는 것 있는 듯이 - 하늘엔 언제 내릴는지 모르는 구름기둥이 조고마한 별을 드디고 지나간다. 멀리 개 짖는 소리, 새벽이 걸어오듯 - 8년 만에 온 청년의 눈앞에는 활을 메고 노루잡이 다닐 때 밤이 늦어 모닥불 피워놓고 고리를 까슬며 색시 어깨를 짚고 노래부르던 옛일이 생각난다. 독한 물지 담배 속에 "옛날에 남 이 장군이란 녀석이……" 하고 노농(老農)의 이야기 듣던 마을 총각떼의 모양이 보인다. 앗! 하고 그는 다시금 눈을 돌린다. -- 처녀(妻女) "그래도 싫어요 나는 당신 같은 이는 싫어요, 다른 계집을 알고 또 돈을 알구요, 더구나 일본말까지 아니 와 보시구려, 오는 날부터 순사가 뒤따라다닐 터인데 그러니 더욱 싫어요 벌써 간첩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내가 미나리 캐러 다닐 때 당신은 뿌리도 안 털어줄 걸요, 백은(白銀) 길 같은 손길에 흙이 묻는다고 더구나 감자국 귀밀밥을 먹는다면 -" "에그, 애닯아라. 당신은 역시 꿈에 볼 사람이랍니다, 어서 가세요." -- 청년 "그렇지 않다는데도, 에익 어찌 더러운 팔자를 가지고 났담!" 그러면서 그는 초조하여 손길을 마주 쥔다, 끝없는 새벽하늘에는 별싸락이 떴구요 - 그 별을 따라 꽂히는 곳에 북극이, 눈에 가리운 북극이 보이고요. 거기에 빙산을 마주쳐 두 손길 잡고, 고요히 저녁 기도를 드리는 고아의 모양이 보인다, 그 소리 마치 "하늘이시여 용서하소서 죄를, 저희들은 모르고 지었으니"하는 듯. 별빛이 꽂히는 곳, 마지막 벌판에는 이스라엘 건국하던 모세와 같이 인민을 잔혹한 압박에서 건져주려고 무리의 앞에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초인의 모양이 보이고요, 오, 큰 바람이어, 혼의 수난이어, 교착이어! "버린다면 나는 죽어요 죽을 자리도 없이 고향을 찾은 낙인(落人)이에요, 아, 보모여 젖먹이 어린애를  그대로 모른다 합니까"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두루루 흘렀다. -- 처녀(妻女) "가요, 가요, 인제는 첫닭 울기, 남편이 돌아올 때인데 나는 매인 몸, 옛날은 꿈이랍니다!" 그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애처로운 옛날의 따스하던 애욕에 끌이면서, 그 서슬에 청년은 넘어지며 낯빛이 새파래진다 몹시 경련하면서, "아, 잠깐만 잠깐만" 하며 닫아맨 문살을 뜯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옥소 철비(鐵扉)와 같이 굳어졌다, 옛날의 사랑을 태양을 전원을 잠가둔 성당을 좀처럼 열어놓지 않았다. "아, 여보 순이! 재가승의 따님, 당신이 없다면 8년 후도 없구요, 세상도 없구요" -- 처녀(妻女) "어서 가세요, 동이 트면 남편을 맞을 텐데" -- 청년 "꼭 가야 할까요, 그러면 언제나?" -- 처녀(妻女) "죽어서 무덤에 가면!" 하고 차디차게 말한다. -- 청년 "아, 아하 아하 ……" -- 처녀(妻女) "지금도 남편의 가슴에 묻힌 산송장, 흙으로 돌아간대도 가산(家山)에 묻히는 송장, 재가승의 따님은 워난 송장이랍니다!" -- 여보시오 그러면 나는 어쩌고. -- 가요, 가요, 어서 가오. 가요? 뒤에는 반복된는 이 요음(擾音)만 요란코 - 59장  바로 그때이었다, 저리로 웬 발자취 소리 요란히 들리었다. 아주 급하게 - 아주 황급하게 처녀(妻女)와 청년은 놀라 하던 말을 뚝 그치고, 발자취 나는 곳을 향하여 보았다. 새벽이 가까운지 바람은 더 심하다, 나뭇가지엔 덮였다 눈더미가, 둘의 귓불을 탁 치고 달아났다. 60장  발자취의 임자는 나타났다. 그는 어떤 굴강(屈强)한 남자이었다 가슴에 무엇을 안은- 처녀(妻女)는 반가이 내달으며 "에그 인제 오시네!"하고 안을 듯한다, 청년은 "이것이 남편인가"함에 한껏 분하였다. 가슴에는 때아닌 모닥불길. "어째 혼자 오셨소? 우리 집에선?" 처녀(妻女)의 묻는 말에 차부(그는 같이 갔던 차부였다)는 얼굴을 숙인다 "네? 어째 혼자 오셨소 네?" 그때 장정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보꾸러미를 가리킨다 처녀(妻女)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이게 무언데?"하고 몸을 떤다 어떤 예감에 눌리우면서. 61장  처녀(妻女)는 하들하들 떠는 손으로 가리운 헝겊을 벗겼다, 거기에는 선지피에 어리운 송장 하나 누웠다. "앗!"하고 처녀(妻女)는 그만 쓰러진다, "옳소, 마적에게 쏘였소, 건넛마을서 에그"하면서 차부도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다. 백금 같은 달빛이 삼십 장남인 마적에게 총 맞은 순이 사내 송장을 비췄다. 천지는 다 죽은 듯 고요하였다. 62장  "그러면 끝내 - 에그 오랫던가" 아까 총소리, 그 마적놈, 에그 하나님 맙소서! 강녘에선 또 얼음장이 갈린다, 밤새 길 게 우는 세 사람의 눈물을 얼리며 -" 63장  이튿날 아침 - 해는 재듯이 떠 뫼고 들이고 초가고 깡그리 기어오를 때 멀리 바람은 간도 이사꾼의 옷자락을 날렸다. 64장  마을서는, 그때 굵은 칡베 장삼에 묶인 송장 하나가 여러 사람의 어깨에 메이어 나갔다. 눈에 싸인 산곡으로 첫눈을 뒤지면서. 65장  송장은 어느 남녘진 양지쪽에 내려놓았다, 빤들빤들 눈에 다진 곳이 그의 묘지이었다. "내가 이 사람 묘지를 팔 줄 몰랐어!" 하고 노인이 괭이를 멈추며 땀을 씻는다, "이 사람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네!"하고 젊은 차부가 뒤대어 말한다. 66장  곡괭이와 삽날이 달가닥거리는 속에 거-먼 흙은 흰 눈 우에 무덤을 일궜다, 그때사 구장도 오구, 다른 차꾼들도, 청년도 여럿은 묵묵히 서서 서글픈 이 일을 시작하였다. 67장  삼동에 묻히운 '병남(丙南)'의 송장은 쫓겨가는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순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며 '밤마다 춥다고 통나무를 지피우라더니 추운 곳으로도 가시네 이런 곳 가시길래 구장의 말도 안 듣고 -" 68장  여러 사람은 여기에는 아무 말도 아니 하고 속으로 "흥! 언제 우리도 이 꼴이 된담!" 애처롭게 앞서가는 동무를 조상할 뿐. 69장  얼마를 상여꾼들이 땀을 흘리며 흙을 뒤지더니, 삽날소리 딸까닥 날 때 노루잡이 함정만한 장방형 구덩 하나가 생겼다. 70장  여러 사람들은 고요히 동무의 시체를 갖다 묻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71장  거의 묻힐 때 죽은 병남이 글 배우던 서당집 노훈장이, "그래도 조선땅에 묻힌다!"하고 한숨을 휘-쉰다. 여러 사람은 또 맹자나 통감을 읽는가고 멍멍하였다. 청년은 골을 돌리며 "연기를 피하여 간다!" 하였다. 72장  강 저쪽으로 점심 때라고 중국 군영에서 나팔소리 또따따 하고 울려 들린다. -끝-
1413    [문학용어] - "리좀(根莖)" 댓글:  조회:3142  추천:0  2019-10-07
문학비평용어사전 리좀   [ Rhyzome ] 리좀은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가리키는 식물학에서 온 개념으로 철학자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에 의해 수목으로 표상되는, 이분법적인 대립에 의해 발전하는 서열적이고 초월적인 구조와 대비되는 내재적이면서도 배척적이지 않은 관계들의 모델로서 사용되었다. 리좀은 마치 크랩그라스(crab-grass)처럼 수평으로 자라면서 덩굴들을 뻗는데 그것은 새로운 식물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줄기를 뻗는 방식으로 중심(center, 그러므로 그것은 한계 지어진 구조로부터 자유롭다.) 또는 깊이(depth: 그러므로 그것은 주관하는 주체를 지니지 않는다)가 없이 불연속적인 표면으로 형성된다. 간략히 말하자면, 수목모델에서 리좀모델로 전환한다는 것은 경직된 조직이미지에서 유연한 조직이미지로의 이동을, 다수성의 지배체제에서 복수성의 지배체제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수목모델이 근대성의 표상방식이라면, 리좀모델은 포스트모던한 세계의 표상방식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리좀의 성질이라고 주장하는 여섯 가지 원리를 제시하였다. 1. 접속(connection): 수목 모델이 부분의 가능성들을 제약하는 위계와 질서를 세우는 것인 반면, 리좀은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고 접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접속의 결과는 항상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낸다. 2. 이질성(heterogeneity): 리좀적인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도 전제하지 않으며, 다양한 종류의 이질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것, 새로운 이질성을 창출하게 된다. 동시에 그 속에서는 어떠한 결정적인 보편적 구조도 안정적인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다. 3. 다양성(multiplicity): 리좀적 다양성은 차이가 어떤 하나의 중심,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며 따라서 하나가 추가될 경우 전체의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드는 그런 다양성을 의미한다. 배치라는 개념은 그런 리좀적 다양체를 함축한다. 4. 비의미적 단절(asignifying rupture or aparallel evolution): 비록 리좀들이 의미작용의 구조들을 내포하더라도(그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territorialization)라고 부른다) 그들은 또한 그 구조들을 파열시키고 탈영토화하는 비행의 선들을 내포한다. 이러한 비기표적인 단절은 리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좀은 어떤 근원적인 의미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채, 떼어내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두 언어 사이만이 아니라 언어와 비언어, 동물과 식물 등처럼 이질적인 지층들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말벌과 오르키데(orchid, 난초의 일종)의 관계가 흔히 예로 제시된다. 오르키데는 말벌을 유혹하기 위해서 말벌(wasp)의 색깔을 흉내냄으로써 자신을 탈영토화하고 말벌은 난초의 이미지를 재영토화하는데, 그러나 거기서 말벌은 꽃의 재생산시스템의 부분으로 탈영토화하고 꽃은 그 꽃가루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 때 재영토화된다. 리좀들은 이원론과 구조들을 횡단하지만, 결코 그것들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5. 지도그리기(cartography): 리좀은 하나의 지도로서, 미리 수립된 한정된 중심 주변에서 구축된 발생적이거나 구조적인 모델의 흔적을 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실재와의 접촉을 통한 실험을 위해 형성되었다. 6. 데칼코마니(decalcomania): 재현과 대비되는 말로, 모상(calque)을 정확히 옮기는 과정에서 대상의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는(dé-calque)점을 강조한다. 이는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손종업) 참고문헌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이진경,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2000년 고길섶,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문화과학사, 1998년 이진경, 『노마디즘1·2』, 휴머니스트, 2002년 참조어 수목모델, 초월적 서열구조, 탈영토화 , 재영토화 , 접속, 포스트모던, 근경(根莖). [네이버 지식백과] 리좀 [Rhyzome]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 철학사전 리좀   [ rhizome음성듣기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좀 [rhizome] (철학사전)  
1412    시와 시인과 독자와 그리고... 댓글:  조회:3291  추천:0  2019-09-18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시집이 읽히지 않는다는 지적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굳이 통계를 내지 않더라도 지하철이나 카페 등 공공장소에서 시집을 읽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집이 드라마나 영화, 예능 프로그램 등 미디어에 노출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쇄, 3쇄 발간도 어렵지 않다. 이는 출판계가 시름 앓는 현 시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과연 이 시집이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았어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어쩌면 시인과 독자는 미디어의 도움 없이는 만나기 어려운 관계까지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독자와 시인의 멀어진 거리감’을 꼬집으며, 그 원인을 탐색해보는 자리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3층 세미나실에 마련됐다. 지난 1일 한국시문학아카데미와 심산문학진흥회가 공동으로 준비한 이승하 중앙대학교 교수의 특강 “21세기 우리 시단의 문제에 대하여”이다. ... 행사를 시작하며 이승하 교수는 “권혁웅 평론가는 서정시의 시대는 갔다며 미래파를 거론”했으나, 미래파는 우리 시에 공로보다는 과오를 많이 가져왔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며 이 교수는 전 고려대 교수인 최동호 시인의 “미래파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인용했다. 미래파의 등장 이후 시에서는 난해성이 심화됐으며,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져 오히려 미래성이 상실됐다는 진단이다. 더해 이승하 교수는 요즈음의 시는 지나치게 장형화, 산문화 되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동시에 제기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김혜순의 “피어라 돼지”나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김경주의 “기담”, 장석원의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등 미래파 시인들의 시집에는 이 두 가지 문제가 함께 드러난다고 예로 들었다. 10페이지가 훌쩍 넘는 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해석하기 어려운 복잡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이다. 이승하 교수는 “요즘 시집들은 되게 무겁다. 열 쪽이 넘는 시도 더러 있고 시 한 행, 한 행이 정말 어렵다.”며 “현대의 바쁜 삶 속에서 이런 시집을 열독하는 독자가 과연 있을지 의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중앙대학교 백일장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승하 교수는 학생들이 산문시를 종종 써서 낸다며 “학생들이 쓴 산문시는 내재율조차 없는 일기에 가까워서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유행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의 시가 운율과 함축성 등, 시의 본질을 잃고 있다는 우려의 표명이다.  그렇다면 독자와 시인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승하 교수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5.7.5조의 극도로 짧은 시 ‘하이쿠’가 세계적 사랑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나 파블로 네루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이자 언어학자인 롤랑 바르트 등은 자신의 저서에서 하이쿠를 예찬했다는 것. 이 교수는 국내에도 하이쿠처럼 쉽게 이해되는 성질과 함축성, 리듬감을 가진 문학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17세기에 형식이 정립된 하이쿠보다 500년이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향가나 고려가요, 민요, 경기체가 등의 ‘시조’이다.  이승하 교수는 시조 시인들은 현재 20여 개의 문예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 하버드대학의 데이비드 매캔 교수는 시조에 매료되어 한정판 영문 시조잡지 “Sijo”를 직접 펴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며 “일본이 하이쿠에 들이는 노력의 10분의 1이라도 시조를 알리는 데에 힘을 쓴다면, 우리 시문학 전반에 대한 외국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자부했다.  이 교수는 바로 시조 시인들을 보며, 시인들은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시에도 쉽게 이해되는 성질과 간결한 함축성, 운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현대는 인터넷으로도 대부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시대이기에 더욱이 그러하다. 산문에 가까운 분량과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난해성은 스마트폰을 든 독자들에게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것.  이승하 교수는 시인과 문예지는 사람들이 시집을 외면하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시조 시단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 시인들은 모더니즘의 물결을 헤쳐 오며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신기하고, 기이하고, 세련된 것만을 써온 것은 아닌가에 대해 반성이 필요하다.”며 “시를 좋아하는 독자와 창작자가 멀어지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탐구”해야 한다고 전했다.  물론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생겨난 부작용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승하 교수는 “시를 널리 알려주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무단으로 글을 퍼가거나 타이핑한 시를 웹사이트에 올리는 행위가 독자들이 시집을 구입하지 않고, 원작이 엉망으로 훼손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에 대한 이승하 교수의 시 “혜초의 시간”은 “해초의 시간”이라는 바다냄새 물씬 풍기는 제목으로 둔갑해 현재까지도 인터넷을 표류하고 있다.  또한 시가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를 구분할 수단이 없어, 시인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일례로 이승하 시인은 “한 번은 평생교육원의 제자가 멋모르고 동명이인의 시집을 사와서는 ‘선생님 사인해주세요’라고 해서 당황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 
1411    일본 특유의 短詩 ㅡ 하이쿠 댓글:  조회:4599  추천:0  2019-09-18
상담학 사전 하이쿠   [ haiku , 俳句 ] 요약 5, 7, 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短詩) 분야 문학치료(시치료) 하이쿠는 우리나라 말로 배구(俳句)라고 하며, 특정한 달이나 계절의 자연에 대한 시인의 인상을 묘사하는 서정시다. 일본 시 문학의 일종으로, 각 행은 5, 7, 5음으로 모두 17음절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하이쿠는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키고(季語)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키레지(切れ字)를 가진다. 하이쿠를 짓는 사람은 하이진(俳人)이라고 부른다. 하이쿠는 근세에 발전한 문예인 하이카이렌가, 줄여서 하이카이에서 태어난 근대문예다. 무로마치시대에 유행한 렌가(連歌)의 유희성과 서민성을 높인 문예가 하이카이였는데, 17세기에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등장하여 그 예술성을 높였다. 그중에서도 단독으로 감상할수 있을 정도로 자립성이 높은 홋쿠(發句), 이를테면 지봇쿠(地発句)를 수없이 읊은 것이 후세 하이쿠의 원류가 되었다. 더욱이 근대 문예로서 개인의 창작성을 중시해서 하이쿠를 성립시킨 것은 메이지시대의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였다. 시키는 에도 말기의 하이카이를 진부한 하이카이(月並俳句, 쓰키나미 하이카이)라고 비판하였고, 근대화한 문예로 만들기 위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홋쿠가 하이쿠로서 성립했고, 하이쿠의 자립 후 시점에서 마쓰오와 같은 이가 읊은 홋쿠를 거슬러 올라가서 하이쿠로 보는 의견도 있다. 영어 등 일본어가 아닌 언어에 의한 3행시도 하이쿠로 불리는데, 일본어 이외의 하이쿠에서는 5, 7, 5음절의 제약이 없으며, 계절을 나타내는 키고도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일본어로 하이쿠를 짓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하이진에는 마브송 세이간, 아서 버나드 등이 있다. 일본 시가의 전통을 이어서 성립한 하이쿠는 5, 7, 5의 음수에 따르는 언어윤율과 키고의 짧은 시지만 마음속에 풍경(심상)을 크게 펼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행은 자연적 이미지를 담고, 두 번째 행은 그 이미지를 이어서 움직임을 더한 뒤, 세 번째 행은 전체적인 진실을 끌어온다. 이 세 번째 행에서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하이쿠로 협력적 글쓰기를 하면 집단에 안전감과 탐색의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 현재에 머물러서, 원한다면 천국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하이쿠는 불안한 미래를 예견하거나 과거에 머물러 버리는 것을 막아 주기도 한다. 마쓰오 외에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요사부손(与謝蕪村) 등이 유명한 하이쿠 시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이쿠 [haiku, 俳句] (상담학 사전) ======================================///   두산백과 하이쿠   [ 俳句(배구) ] 요약 일본 고유의 단시형(短詩形). 5·7·5의 17음(音)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원래 일본에는 중세 무렵부터 조렝카[長連歌]라는 장시(長詩)가 있었는데, 15세기 말부터 이 조렝카는 정통(正統) 렝카[連歌]와 서민생활을 주제로 비속골계화(卑俗滑稽化)한 하이카이렝카[俳諧連歌]로 갈리었고, 에도시대에 이르러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같은 명인이 나와 하이카이렝카는 크게 유행하였다. 이 하이카이렝카의 형식이 제1구(句)는 홋쿠[發句]라 하여 5·7·5의 17음으로 이루어지고, 제2구는 7·7의 14음, 제3구는 다시 5·7·5의 17음 등, 장·단이 교대로 엮어져 많은 것은 100구, 짧은 것은 36구 등이 있다. 마쓰오 바쇼는 이 렝카의 제1구, 즉 홋쿠를 매우 중요시하여 홋쿠만을 감상하기도 하였으며, 에도 중기 이후에는 이 홋쿠의 비중이 더 커졌다. 메이지[明治]시대에 이르러 시인(詩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렝카의 문예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 홋쿠만을 독립시켜 하이쿠[俳句]라 이름하였는데 이것이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학적이고 응축된 어휘로 인정(人情)과 사물의 기미(機微)를 재치 있게 표현하는 이 하이쿠는 일본의 와카[和歌]와 함께 일본 시가문학의 커다란 장르를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이쿠 [俳句(배구)] (두산백과) =======================================///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하이쿠   [ 俳句 ] 일본 와카의 5·7·5·7·7의 31글자에서 앞의 5·7·5인 혹쿠(発句)가 발전한 것인데 이것에 계절어(季語)와 매듭말[키레지(切字)]을 써서 형식적으로 발전시킨 세계에서 가장 짧은 노래이다. 이어령 교수는 5·7·5의 혹쿠만을 노래하고 나머지 7·7의 츠케쿠(付句)를 노래하지 않은 것에 대해 혹쿠가 시인의 영역이고 츠케쿠가 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츠케쿠가 기다림의 텍스트이며 침묵의 공간이며 공백의 언어공간이기에 반대로 혹쿠는 상상력을 자아내게 하고 암시적인 것을 이끌어내게 하는 공간이라고 했으며 하이쿠는 결국 혹쿠가 발전한 것으로 반 이데올로기 문학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애잔한 무형의 감동을 형태로 만들어서 남기는 것이 하이쿠인데 결정적인 순간이나 마음의 감동을 찍는 면에서는 카메라와 닮았다. 하지만 카메라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찍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어 이 교수는 이 형태를 17글자에 욱여 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포인트를 포착하여 그것을 17음으로 늘리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 하이쿠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이징(俳人)은 애정의 시선으로 하이쿠라는 뜰채를 들고 자연 속으로 뛰어든다. 그 행위는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투신 행위이다. 자연의 일부가 되다보면 개안의 경지가 되고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다보면 그때까지 가리고 있던 장막이 순간적으로 걷히고 대상은 내밀한 모습과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섬광처럼 스쳐가는 순간의 생각을 하이징은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그 곳에 혼을 담는다. 하지만 늘 그렇게 쉽게 대상이 내밀한 의미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이징은 응시의 공간 앞에서 하이쿠적 어휘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하릴없이 서성거리기도 하고, 기웃거리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하이진들에게는 시시각각 변모하는 사계절 속에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기록을 만들거나 담아내기 위한 언어 포착의 순발력과 조탁의 장인정신과 사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전제조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이쿠 [俳句]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 ===========================================///   하이쿠는 일본 근대의 시 문학으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로 유명하죠.   감탄사(일본에선 감동사라고 함)가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하이쿠에 감탄사가 필수적인 요소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죠.   첫 번째가 5.7.5 운율의 정형시라는 점. 두 번째가 계절감을 나타내는 단어를 넣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가 중간에 쉬어가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   네 번째는 여운을 남겨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이쿠(俳句)는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일컫는 말이다. 하이쿠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보기 드문 짧은 시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시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전통적인 하이쿠는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季語)가 필히 있어야 하며 짧은 시의 형태인 만큼 한꺼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레지(切字)라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계어는 계절을 상징하는 시어를 가리키는 말로, 특정한 계절을 환기시키면서 오랜 일본시가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미의식을 함축적으로 나타낸것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4계절이 확실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이 특징을 정형시의 필수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을 통하여 일본인에게 있어 4계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며, 새로운 상징어를 작품에 적용하기 위해 해마다 새로운 세시기(歲時記)가 출판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시기하면 연말연시의 연중행사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기 쉬우나 일본의 세시기는 동식물, 기후, 풍토, 연중생사 등의 계절을 상징하는 모든 언어를 망라한 것을 일컫는 말로, 하이쿠 창작의 기본 교과서가 되기도 한다. 기레지(切字)는 5, 7, 5 음율의 어느 한 단락에서 끊어줌으로써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줄 때 사용하는 표현을 지칭한다.  예컨대 『∼や(∼이여)』『∼かな(∼로다)』『∼けり(∼구나)』와 같은 것이다.  기레지는 짧은 시의 폐단이라 할 수 있는 단순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짧은 시의 어느 한 부분을 끊어줌으로써 그 다음 부분과의 산순 연결을 피하고 중층적인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서는 계어(季語)와 기레지라는 제약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면서 하이쿠가 일반대중들 속에 깊이 침투하게 된다. 짧은 시의 형태이기 때문에 나타내고 싶은 것을 산문처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없지만, 시로 나타내지 못한 여백을 작자나 독자들 나름대로 메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이쿠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일본인에게는 생활 수단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하이쿠의 국제화로 세계 각국에서 자국어로 하이쿠를 짓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일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하이쿠의 이해를 통해 일본인의 심층적인 정서를 파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르리라 판단되는 바이다. =====================/// 「하이쿠(俳句) 」라는 말은, 지금부터 대략 100년 조금 전, 마사오까 시키 (1867~1902)를 중심으로한 그룹에 의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인 에도시대에는「하이카이(俳諧)」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던 오래된 시의 형태를, 메이지유신으로 재 탄생한 일본에 걸 맞는 새로운 “시”로 소생시키자 생각한 마사오까 시키가 「하이쿠(俳句)」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써「샤세-(사생:写生)」라는 것을 주창하였습니다. 「샤세-(사생:写生)」란, 자연이나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선명한 인상으로 그려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사오까 시키의 시도를「하이쿠 혁신(俳句革新)」이라고 합니다.   =============================/// 17음절의 知的 재치… 삶의 지혜까지 녹여내 매일신문  2011-12-24  |     바쇼의 하이쿠 기행/ 마츠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쇼의 하이쿠 기행/ 마츠오 바쇼 지음/ 김정례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하이쿠(俳句)는 일본의 전통 시다. 홋쿠(癸句)라고도 하는데, 3행에 17음절로 5'7'5로 구성되어 있다. 세로로 쓸 때는 한 줄로 쓰는 게 일반적인데, 가로로 쓸 때는 행의 의미를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해 3행으로 쓰기도 한다. 하이쿠는 서정시이며 계절을 지칭하는 낱말이 반드시 들어간다. 가끔 하이쿠를 두고 '언어유희' '지적재치'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모든 시(詩)가 그렇듯 하이쿠 역시 지적재치나 시적 아름다움을 넘어, 살아 있는 것들의 의미와 본질,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장맛비 내리고 // 물가에 서 있는 //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이는 하이쿠의 거장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작품이다. 바쇼는 렌가(連歌)와 단카(短歌)에서 비롯된 짧은 시를 '하이쿠'라는 하나의 형식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하이쿠란 용어는 그의 사후에 나왔다. 장마가 시작되고, 강의 물안개는 짙어지고, 물은 점점 불어난다. 거기, 물새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바쇼가 이 강물 앞에서 만약 '장맛비 내리고, 강물이 불어나네' 라고 읊었더라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현상에 그쳤을 것이다. 해가 뜨고 지고, 날이 밝고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것은 다만 현상일 뿐이다. 이 현상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할 때, 비로소 그것은 시가 되고 하이쿠가 된다. 물가의 물새와 점점 물속으로 잠기는 다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있는 것들을 은유한다. 이 같은 특징은 비단 바쇼의 작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52세로 세상을 떠난 타다토모(忠知)을 보자. '이 숯도 한때는 // 흰 눈이 얹힌 //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는 찻물을 끓이기 위해 숯불을 피우면서 이렇게 썼다. 숯은 땔감으로 생의 마지막 절차를 따르는 중이다. 시인은 검은 숯에서 찻물을 데워줄 '열기'를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생명으로 활기찼던 푸른 시절을 생각함으로써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숯을 통해 지금은 살아서 찻물을 끓이고 있지만 머지않아 생을 마치게 될 시인 자신의 운명 혹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이 생각처럼 답하기 쉬웠더라면 그 많은 시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많은 하이쿠 시인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이쿠에 반드시 들어가는 '계절어'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시간과 인연 맺고 살아가는 존재의 유한함을 토로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쿠는 도쿠가와 시대(에도막부 시대;1603~1867) 단카와 함께 유행했다. 당시 마츠오 바쇼가 쓴 하이쿠는 대부분 렌가와 홋쿠였다. 하이쿠라는 말은 하이카이(俳諧 : 17음절의 우스꽝스러운 시)의 하이와 홋쿠라는 단어의 쿠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계절을 암시하는 단어 혹은 묘사가 반드시 들어가야 했지만, 나중에는 주제범위가 넓어졌고, 가능한 적은 단어로 더 많은 것을 암시하는 예술로 발전했다. 18세기 요사부손(與謝蕪村), 18, 19세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9세기 말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등이 유명한 하이쿠 시인이다. 현대 일본에는 프로와 아마추어 하이쿠 시인이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유럽, 한국에도 하이쿠를 짓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전통 하이쿠에 들어가는 계절어처럼 ... 어떤 면에서 인생은 한편의 하이쿠다. 조두진기자 =============================/// 1)影はみな祈りのしぐさ花菖蒲 그림자는 모두 기도하는 몸짓 꽃창포   2)ため息が集まっている春の雪 한숨을 모우는 봄의 눈   3)冬銀河蛇行の渓へ流れ込む 겨울은하(은하수) 뱀처럼 흐르는 계곡으로 흘러간다   4)鳥を入れ夕日を入れる雪は無敵 새를 넣고 겨울해를 넣는 눈은 무적   5)飛魚の滞空時間星ふやす 뛰는 물고기의 체공시간 별은 늘어난다 ==================================/// 이 첫눈 위에  오줌을 눈 자는  대체 누구인가 ? (기가쿠)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있네... (이싸:1763~1827)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1644~1694)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부손1716~1827)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항아리  얼면서 금 가는 소리... (바쇼)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 (소칸)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바쇼)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청소를 잘 안 하니까 (이싸)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말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 (시키)  내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이싸)  저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하진(죽음을맞이하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기가쿠)  내 전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모리다케(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눈사람에 대해 나눈 말  눈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시키)  눈 내리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는 미움받는 까마귀조차도... (바쇼)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바쇼)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겨울비 속의  저 돌부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싸)  한번의 날까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 버렸다... (이메이)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이싸)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흰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  우리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벗꽃의 생애가 있다... (바쇼)  너무 오래 살아  나 역시 춥구나  겨울 파리여! (인생의 마지막 시) 타요조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시메이)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하지만......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이싸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이싸)  은하계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떠돌이 별은... (이싸)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본초)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바쇼)  대문 앞에 난  단정한 노란 구멍,  누가 눈 위에 오줌을 누었지? (이싸)  모든 종교와 말들을 다 떠나니  거기 자두꽃과  벗꽃이 피었구나... (난후꼬)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임종때 남긴 시)이싸  절에 가니 파리가  사람들을 따라  합장을 하네...(바쇼)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이싸) 쉰 살 생일을 맞아  울지마라,풀벌래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니,  눈사람아...... (소세키)  매미 한 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쇼세키)정치인의 초대를 받고서 답장으로 쓴 시.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이사)  그녀가 젊었을 때는  벼룩에 물린 자리조차도  예뻤다네...(이사)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바쇼)  *참고*  하이쿠 시인 바쇼(1644~1694)의 여행 규칙  같은 여인숙에서 두 번 잠을 자지 말고, 아직 덥혀지지 않은 이불을 청하라.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어떤 것, 같은 땅 위를 걷는 어떤 것도 해치지 말라.  옷과 일용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지 말라.  물고기든 새 종류든 동물이든 육식을 하지 말라. 특별한 음식이나 맛에 길들여지는 것은 저급한 행동이다. '먹는 것이 단순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라.  남이 청하지 않는데 스스로 시를 지어 보이지 말라. 그러나 요청을 받았을 때는 결코 거절하지 말라.  위험하거나 불편한 지역에 가더라도 여행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꼭 필요하다면 도중에 돌아서라.  말이나 가마를 타지 말라. 자신의 지팡이를 또 하나의 다리로 삼으라.  술을 마시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마시더라도 한 잔을 비우고는 중단하라. 온갖 떠들썩한 자리를 피하라.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말라.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은 가장 세속적인 짓이다.  시를 제외하고는 온갖 잡다한 것에 대한 대화를 삼가라. 그런 잡담을 나눈 뒤에는 반드시 낮잠을 자서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성간의 하이쿠 시인과 친하지 말라. 하이쿠의 길은 집중에 있다.  항상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  다른 사람의 것은 바늘 하나든 풀잎 하나든 취해서는 안 된다. 산과 강과 시내에게는 모두 하나의 주인이 있다. 이 점을 유의하라.  산과 강과 역사적인 장소들을 방문하라. 하지만 그 장소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글자 하나라도 그대를 가르친 사람에게 감사하라.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가르치지 말라. 자신의 완성을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남을 가르칠 수 있다.  하룻밤 재워 주고 한 끼 밥을 준 사람에 대해선 절대 당연히 여기지 말라.  사람들에게 아첨하지도 말라.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천한 자이다.  하이쿠의 길을 걷는 자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저녁에 생각하고, 아침에 생각하라. 하루가 시작될 무렵과 끝날 무렵에는 여행을 중단하라.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이 멀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근데 이런거 올린 난 누구인가요? ====================================///   漱石の全俳句約2400句のうち100句   1 あ 秋の山南を向いて寺二つ 2 あ 秋の日のつれなく見えし別かな 3 あ 秋はふみ吾(われ)に天下の志 4 あ 秋風の一人を吹くや海の上 5 あ 秋風や唐紅の咽喉仏(のどぼとけ) 6 あ 秋立つや一巻の書の読み残し 7 あ 赤き日の海に落ち込む暑さかな 8 あ 朝顔や咲いた許(ばか)りの命哉(いのちかな) 9 あ 天草の後ろに寒き入日かな 10 い いかめしき門を這入れば蕎麦(そば)の花 11 い 一里行けば一里吹くなり稲の風 12 い 稲妻や折々見ゆる滝の底 13 い 生きて仰ぐ空の高さよ赤蜻蛉(あかとんぼ) 14 う うつむいて膝(ひざ)にだきつく寒さ哉 15 う 梅の奥に誰やら住んで幽(かす)かな灯 16 え え(ゑ)いやつと蝿叩(はえたた)きけり書生部屋 17 お 温泉や水滑かに去年(こぞ)の垢(あか) 18 お 思う事只一筋に乙鳥かな 19 お 親方と呼びかけられし毛布(けっと)哉 20 お 落ちて来て露になるげな天の川 21 か 傘を菊にさしたる新屋敷 22 か かしこまる膝のあたりやそぞろ寒 23 か 上江津や青き水菜に白き蝶 24 か かんてらや師走の宿に寝つかれず 25 か 化学とは花火を造る術(わざ)ならん 26 か 肩に来て人なつかしや赤蜻蛉(あかとんぼ) 27 か 枯野原(かれのはら)汽車に化けたる狸(たぬき)あり 28 き 切口の白き芭蕉に氷りつく 29 く 雲来たり雲去る瀑の紅葉かな 30 く 草山に馬放ちけり秋の空 31 ぐ 愚陀仏(ぐだぶつ)は主人の名なり冬籠(ふゆごもり) 32 こ 衣替えて京より嫁を貰いけり 33 こ 凩(こがらし)に裸で御はす仁王哉 34 こ 凩(こがらし)や真赤になって仁王尊 35 ご 午砲(ごほう)打つ地城の上や雲の峰 36 さ 三十六峰我も我もと時雨けり 37 さ 颯(さっ)と打つ夜網の音や春の川 38 し しめ縄や春の水沸く水前寺 39 し 詩を書かん君墨(すみ)を磨(す)れ今朝の春 40 し 時雨(しぐ)るるは平家につらし五家荘 41 す すずしさや裏は鉦(かね)うつ光琳寺 42 す 菫(すみれ)程な小さき人に生れたし 43 そ 其許(そこもと)は案山子(かかし)に似たる和尚哉(おしょうかな) 44 そ 反(そり)橋の小さく見ゆる芙蓉(ふよう)かな 45 そ 某(それがし)は案山子(かかし)にて候(そうろ)雀(すずめ)どの 46 た たたかれて昼の蚊を吐く木魚哉 47 た ただ一羽来る夜ありけり月の雁(かり) 48 た 手向(たむ)くべき線香もなくて暮の秋 49 た 大慈寺(だいじじ)の山門長き青田かな 50 だ 駄馬(だば)つづく阿蘇街道の若葉かな 51 だ 達磨(だるま)忌や達磨に似たる顔は誰 52 つ 月に行く漱石妻を忘れたり 53 つ 弦音(つるおと)にほとりと落ちる椿かな 54 て 寺町や土塀の隙の木瓜(ぼけ)の花 55 と 唐黍(とうきび)を干すや谷間の一軒家 56 と 灯を消せば涼しき星や窓に入る 57 と 蜻蛉(とんぼう)の夢や幾度杭の先 58 ど どっしりと尻を据えたる南瓜(なんか)かな 59 ど 堂守に菊乞ひ得たる小銭かな 60 な なき母の湯婆(ゆたんぽ)やさめて十二年 61 な 永き日や欠伸(あくび)うつして別れ行く 62 な 永き日を太鼓打つ手のゆるむ也 63 な 何となく寒いと我は思ふのみ 64 な 菜の花の遥(はる)かに黄なり筑後川 65 な 菜の花を通り抜ければ城下かな 66 な 鳴きもせでぐさと刺す蚊や田原坂(たばるざか) 67 ね 寝てくらす人もありけり夢の世に 68 の 能もなき教師とならんあら涼し 69 の 野菊一輪手帳の中に挟(はさ)みけり 70 は 灰に濡(ぬ)れて立つや薄(すすき)と萩のなか 71 は 春の雨鍋(なべ)と釜(かま)とを運びけり 72 は 春の水岩を抱いて流れけり 73 は 春雨や寝ながら横に梅を見る 74 は 梁(はり)上の君子と語る夜寒かな 75 ひ 雛(ひな)に似た夫婦もあらん初桜 76 ひ 瓢箪(ひょうたん)は鳴るか鳴らぬか秋の風 77 ふ 河豚(ふぐ)汁や死んだ夢見る夜もあり 78 ふ 降りやんで蜜柑(みかん)まだらに雪の船 79 ぶ 仏壇に尻を向けたる団扇(うちわ)かな 80 べ 弁慶に五条の月の寒さ哉 81 ほ 時鳥(ほととぎす)厠(かはや)半ばに出かねたり 82 ぼ 煩悩(ぼんのう)は百八減って今朝の春 83 ぼ 木瓜(ぼけ)咲くや漱石拙(せつ)を守るべく 84 ま 曼珠沙華(まんじゅしゃげ)あつけらかんと道の端 85 み 耳の穴掘って貰(もら)いぬ春の風 86 み 水攻の城落ちんとす五月雨 87 む 無人島の天子とならば涼しかろ 88 め 名月や十三円の家に住む 89 め 名月や無筆なれども酒は呑(の)む 90 も 木蓮(もくれん)の花ばかりなる空を見る 91 も 木蓮に夢のやうなる小雨哉 92 も 餅を切る包丁鈍し古暦 93 や 安々と海鼠(なまこ)の如き子を生めり 94 ゆ ゆく春や振分髪も肩過ぎぬ 95 ゆ 行く年や猫うずくまる膝の上 96 ゆ 行く年や膝(ひざ)と膝とをつき合せ 97 ゆ 行けど萩(はぎ)行けど薄(すすき)の原広し 98 よ 寄り添えば冷たき瀬戸の火鉢かな 99 わ 我に許せ元旦なれば朝寝坊 100 わ 湧くからに流るるからに春の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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