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 윤동주
후언─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로운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
1937년에 창작한 시이다.
식민지하의 고독한 영혼이 숨어 흐르는 듯하다.
한적한 시골의 정서에 담담한 슬픔이 어려있는 듯
시인의 내성적인 생각의 깊은 강에 놓인 현실,
어쩌면 터질 것 같은 암담함을 말하고자함인 듯싶다.
========================///덤으로 더...
1. 조선일보 39.2.6에는 윤동주의 이 실리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이하게도 필자의 이름이 ''尹 柱'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당일 신문의 마이크로 필름, 영인본 등에서 교차 확인했습니다.)
오기인지 필명 중 하나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자일 확률이 높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2. 는 조선일보의 1938년 10월 17일에 게재된 것이 맞습니다.
39년에 발표되었다는 연보가 틀린 것입니다.
3. 윤동주는 위의 2개 글 이외에도 조선일보에 산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1939년 1월 23일, ) 위의 두 작품이 수록된 신문지면은 전집에 수록되어 있으나
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 수록된 조선일보 신문을 영인한 PDF 파일...
4. 위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의 "學生 페-지'
(당연히 '페-지'는 page를 일본식 장음표현으로 음차한 것입니다.)라는 섹션에 수록되었습니다.
이 섹션은 일요일자 신문에 나오던 것인데(당시의 조선일보는 석간이고 일요일에 신문이 나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학생들의 글(비평, 수필, 시, 꽁트 등)을 수록한 지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덤으로 더 더...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 윤동주의 시를 읽는 새로운 방법 -
1)임현순*
1. 시작하는 말
2. ‘감는 눈’의 상징과 내재된 시선
3. 공간화된 ‘눈’과 시선의 확장
4. ‘눈’ 상징의 분화와 시선의 연계
5. 마치는 말
참고문헌
1. 시작하는 말
시인 윤동주가 1945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의 차디찬 감옥
에서 옥사한 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지용이 서문을 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발간된 것도 그로부터 오래지 않
다.1) 그런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윤동주는 독자
들 가까이에 있다.2) 세대를 초월해 독자를 사로잡는 윤동주 시의 매력
*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2) 1994년~2004년 상반기까지 최근 10년간 국내대형서점의 대표격인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본 결과 2002년을 제외하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매해 시 부문 베스트셀러로 집계되어 있다. 윤동주가 시작활동을
활발히 한 1930년대뿐만 아니라 우리 시사를 통틀어 이렇듯 오랜 시간 스테디
7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은 과연 무엇일까? 그 실체를 규명해내는 것은 전문독자로서의 연구자
가 담당할 몫일 것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저항시’로 분류되는 과거 윤동주의 시
를 지금, 여기의 의미로 읽어낸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제약받지 않
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그의 시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의 전형에서 벗어나 열린 구조를 지
닌 텍스트로 변화한다. 역설적이게도 시대에 밀착되어 있는 만큼 그의
시는 시대성에서 자유롭다. 아직까지 윤동주 시의 저항성이 논의의 대
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울림을 전해주는 시의 특질, 하나로 규정
되지 않는 윤동주 시의 면모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상징의 쓰임에
주목하는 것은 윤동주의 시를 해석하는 연구방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다. 여기에서는 특수한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 상징의 구조를
추적해 윤동주 시의 특질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시선은 크게 내부를 향한 자아 성찰의 시선과
외부를 향한 시선으로 나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시선을 전자에 한정된 의미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주로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와 같은 ‘뜬 눈’의 형상으로 논의되어 온 그러
한 시선은 기실 ‘감는 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에서 ‘감는 눈’의 상징은 이와 같은 내부를 향한 시선과 외부를 향한
시선이라는 의미의 이중성을 특질로 삼는다.
선행 작업에서 필자는 ‘뜬 눈’을 중심으로 주체의 자기 인식 과정에
매개로 작용하는 윤동주 시의 ‘눈’ 상징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3) 그
후속작업으로서 ‘감는 눈’의 상징을 중심으로 진행될 이번 연구에서는
셀러로 자리 잡게 된 시집을 발간한 시인은 전무하다.
3) 졸고, .윤동주 시의 ‘눈’과 매개된 인식., 한국근대문학회 편, 한국근대문학연
구 12집(태학사, 2005)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79
윤동주 시의 주체가 단순히 개인적 윤리, 도덕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
는 존재라는 사실이 저항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규명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다의성을 지닌 상징의 구조를 추적해 외부
적 계기로부터 규정되어 온 윤동주 시의 저항성을 시의 내부적 계기에
서 출발해 되짚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논의를 위해 이 논문은 일단 언어의 단계에서 출발하여 ‘눈’ 상징의
의미구조를 살펴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존중하는 가운데,
고정화, 신비화된 의미틀의 제한을 벗어나 시어, 비유의 유기적 연관성
을 분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다시금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이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 이 논문은 윤동주 시의 반성하는 주체에 대
한 논의가 정작 시에 내재된 저항성의 의미층위를 규명하는 작업과 연
계되어 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 하나는
몸 상징으로 살펴본 윤동주 시의 시선에 대한 논의로서, ‘감는 눈’의
상징에 집중하여 그 의미경로를 추적해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시선이 투과적 실체로서의 공간인 풍경4)과 결부되어 상징의미를 심화
시키는 과정에 대한 고찰인데, 이를 통해 ‘감는 눈’의 시선이 공간화를
통해 확장되는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는
눈’이 ‘뜨는 눈’, ‘뜬 눈’으로 형상화된 윤동주 시의 또 다른 ‘눈’ 상징들
과 맺는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윤동주의 시
에 나타난 ‘눈’ 상징의 총체적 고찰과 더불어 근대적 저항시로서의 윤
동주 시의 면모를 재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4) 오귀스탱 베르크는 독특한 역사를 공간에 담고 있는 하나의 현상인 풍경의 시
공간성을 ‘투과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환경 자체의 역사와 이를 바라보
는 자의 기억이 풍경 안에서 서로 결합하고 있다는 두 가지 시간성의 우연적인
합치가 풍경의 공간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오귀스탱 베르크(김주경 옮김),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미다스북스, 2001), 122면. 이는 시선을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3장과 2장간의 연계성을 설명해준다.
8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2. ‘감는 눈’의 상징과 내재된 시선
윤동주의 두 번째 습작노트인 에는 퇴고 과정을 보여주는 표기
외에 “베루린”5), “모욕을 참어라”와 같은 낙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 후자는 .異蹟.이라는 시의 뒷부분에 씌어진 것으로 시작(詩作) 당시
의 상황이나 시인의 마음자세를 유추해볼 단초를 제공해준다. 여기에
는 당시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하는 시인의 응전방식이 나
타나 있다.6)
5) 의 마지막 작품 .自像..의 뒷부분인 노트 맨 끝장에 기재되어 있다. 이
는 독자들이 .자화상.으로 알고 있는 작품의 습작으로 에는 아직 완성되
지 않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베루린”은 독일의 “베를린”을 의미하
는 듯하다. .자화상.에 나타난 ‘우물’ 이미지가 릴케의 그것과 닮아 있음을 상
기해보건대, 이 시를 창작할 당시 윤동주는 그가 즐겨 읽던 릴케를 염두에 두
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윤동주의 세심한 기록습관은 후대 연구자들의 노고를 일정 정도 덜어준다. 습작
용 노트에 자필로 또박또박 적어놓은 시편에는 창작년도와 개작일자, 그리고 퇴
고과정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간혹 “平壤서”와 같이 시를 집필한 장
소가 기록된 경우도 있어 창작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왕신영 외 엮
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전집 (민음사, 2002), 15~110면 참조) 미로의 비너
스상 탁본과 “藻文”이라는 활자가 새겨진 첫 번째 습작노트 표지에는 제목
와 “芸術은 길고 人生은 쩝다”라는 부제가 자필로
씌어 있다. 또 노트 첫 장의 목차는 창작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얼추 한 권의
시집 형태를 갖추었다. 노트 곳곳에 배인 이 같은 시인의 숨결은 시 창작에 임
하는 자세와 시에 대한 사랑, 예술관, 그리고 자신의 시에 대한 겸양과 자부심
등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습작노트는 첫 번째 노트에 비해 평범해 보인다. “窓”이라
는 표제를 붙인 겉표지 앞면에는 활을 쏘고 고삐를 당기는 포즈의 말 탄 기수
두 명이 상하로 배열된 그림이 있고, 그 상단에 “原稿 ノ-ト”라는 일문이 표기
되어 있다. 한편 뒤표지에는 문양그림 아래 작은 글씨로 “TOKYO”라는 영문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글씨는 사진상으로 인쇄 여부의 판독이 쉽지 않다. 하지만
앞, 뒤 표지의 정황상 이 노트가 일본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하는 데는 큰 무
리가 없다. 노트의 시편들은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당시는 윤동주가 광명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하고 있던 시기이므로,
국내에 유입된 일본산 노트를 구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한반도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1
글귀가 씌어진 1938년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등
의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철저한 군국주의 파쇼체제로 바뀌어가던 시기
에 거주하던 한국인이 일본에서 들여온 공산품을 사용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
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노트의 속표지에는 나막신을 신은 두 사람이 선창 부둣가에서 건너편의 풍
차와 돛단배가 떠 있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판화가 등사되어 있고, 그 그림 위
쪽에 첫 번째 습작노트의 겉표지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藻文”이라는 글자가
자필로 적혀있다. 이는 두 번째 노트와 첫 번째의 습작노트와의 연계성을 표현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첫 번째 노트에 수록된 여러 시들이 개작
되거나 혹은 원문상태 그대로 두 번째 노트에 재수록되었으며, 시인은 그러한
사항을 각각의 노트에 실린 개별시의 상단에 세밀히 기록하고 있다. 습작노트
에도 정규시집과 동일한 비중을 두는 이 같은 태도에서 시작과정에 쏟은 윤동
주의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각 노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실린 첫 번
째 작품은 .초 한 대., 마지막 작품은 .나무.라는 동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대략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씌어진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창작년도는 “昭和九年”과 같은 일본연호(“昭和(しょうわ)”는 124대 히로
히토 일왕의 재임기간(1926.12.25~1989.1.7) 나타내는 연호이다.)와 양력을 혼용
하여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昭和十一年一月六日”로 창작일자가 표기된 이후에는 일본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昭和十一年”인
1936년 제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취임하면서 일제는 탄압을 강화
하기 시작했고, 일장기 말소사건 등이 있었으나 이들 사건의 시점은 8월이다.
따라서 일본연호를 사용한 1936년 1월과 다음 작품의 창작시기―2, 3월에 집중
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데― 사이 윤동주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역
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두 번째 노트의 수록작품에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있나 살펴보도록 하
겠다. 1935년 10월로 기록된 시 한 편이 중간 부분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
에는 1936년 봄부터 창작된 시가 실려 있다. 또한 습작노트에는 1935년
부터 1938년에 창작된 동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절반가량이 1936년에 집
중적으로 씌어졌다. 동일한 시기인 1936년 봄에 창작된 시 중 동시의 대부분이
첫 번째 노트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인이 두 노트의 성격을
구분 짓기 위해 일부러 동일시기에 두 권의 노트를 병행하여 사용했다는 가설
이 성립될 수 있다. 또한 이렇듯 노트를 병행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가 매우 근접해있다는 점에서 노트를 분리, 사용한 것과
시대적 상황, 시인의 의식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관계가 형성되리라는 추
정이 가능하다.
82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였다. 당시 일본은 ①군사력과 경찰력의 증강 ②철저한 사상통제 ③전
시체제 강조를 통한 국민생활 감시 등의 방법으로 파쇼체제를 강화시
켜 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였으며,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기치 아래 우리말과 글을 금지
하고 창씨개명을 단행하는 등의 민족말살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도 하였다. ‘지원병’, ‘징용’, ‘보국대’, ‘위안부’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우리
민족을 전쟁에 동원시켰던 것도 1938년경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렇듯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 분야에 걸쳐 자행된 일제의 횡포로 당시
는 식민지 지배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7) 따라서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
시인이 원고 말미에 적어 넣은 “모욕을 참어라”는 구절을 단순한 개인
범주의 낙서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참상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절치부심의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
다.
정의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 맞서는 시인의 응전방식은 일단
모욕을 참는 형태로 드러났다.8) ‘참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
다리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인내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미래만 남아
7) 강만길, 韓國現代史(창작과비평사, 1984), 32~37면 참조.
8) 광기로 미쳐 날뛰는 일제치하에서 진실은 왜곡되었고, 용인될 수 없는 폭력의
정당화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한나 아렌트(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이후, 1999),
85면) 정당한 폭력의 규준은 공동체의 보존, 안녕, 평화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정당방위로 제한되며, 이 역시 보복정의의 차원을 넘으면 안 되고, 특히 전쟁의
경우 주권자의 명령, 정당한 근거, 올바른 의도 등이 있어야 한다는 성 토마스
의 견해(정의채, “현대사회의 폭력의 의미 - 폭력과 평화에 대하여”, .폭력이란
무엇인가 : 그 본질과 대안 - 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2002년도 한국학술진흥
재단 기초학문육성 일반연구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공동연구팀 발표논문집,
2003), 20면)에 비추어볼 때, 이차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수행과 식민통치는 그
들의 끊임없는 정당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고유성 속에 한국인을 포함시키려 했던 일본은 우리 민족
의 고유한 이타성을 부인하고 주체성의 장소를 말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던 것
이다.(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54~156면 참조.)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3
있다면, 현재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내일은 없다”()고 외치는 시인에게 “내일”은 또 하나의 “오
늘”이다. 잠깐의 혈기로 맞서는 것은 “오늘”로 존재태를 바꿀 “내일”
을 소멸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한 대응방식은 일을 그
르칠 뿐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윤동주가 말하
는 ‘참음’은 결국 비겁한 침묵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자의 기다림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참음’의 정신은 윤동
주의 시편 곳곳에서 발견된다.
太陽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 .눈감고간다. 부분9)
우선 텍스트에 충실하여 이 시의 전개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천
상에 있는 “태양”과 “별”은 ‘빛남’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태양”과 “별”을 사랑하지만, 2연에 제시된 상황은 ‘빛남’
의 대칭항에 놓여진 ‘어둠’일 뿐이다. ‘어둠’에 직면한 자는 주위를 분
9) 여기에 인용하고 있는 시들은 윤동주의 자선시집에 수록된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경우 퇴고과정을 고려하여 가장 나중의 형태를 원본으로 확정하여 사
용한다. 왕신영 외 엮음, 앞의 책 참조.; 논의의 흐름상 여기에서는 .눈감고간다
.의 마지막 연을 생략한 채 수록하였다. 윤동주의 시에는 ‘감는 눈’ 외에도 생
략된 연인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감었든 눈을 왓작떠라”에서 볼 수 있는
‘뜨는 눈’의 상징, 그리고 .자화상.등으로 대표되는 ‘뜬 눈’의 상징 형태가 발견
된다. 4장에서 이들 ‘감는 눈’과 ‘뜨는 눈’, ‘뜬 눈’의 연계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뜬 눈’의 상징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졸고, 앞의 책 참조.
8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간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주의를 기울여 사방을 살피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자는 “아이들”에게 “밤이 어두웠는데/눈감고” 가라고 상식에
위배되는 조언을 한다.
이러한 비상식적 조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밤이 어두웠는
데”의 언어적 용법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겠다. 여기서 ‘-는데’는
‘-으니’와 동일위치에 놓일 수 있는 연결어미이다. ‘-으니’가 ‘ㄹ’을 제외
한 받침 있는 용언의 어간이나 어미 ‘-었-’, ‘-겠-’ 뒤에 붙어 앞말이 뒷
말의 원인이나 근거, 전제 따위가 됨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실을 먼저
진술하고 이와 관련된 다른 사실을 이어서 설명할 때 쓰이는 연결 어
미라면, ‘-는데’는 ‘있다’, ‘없다’, ‘계시다’의 어간, 동사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뒤에 붙어 뒤 절에서 어떤 일을 설명하거나 묻거
나 시키거나 제안하기 위하여 그 대상과 연관되는 상황을 미리 말할
때에 쓰이는 연결 어미10)이다. 그러므로 만일 ‘밤이 어두웠으니’라고
표현했다면 어두운 밤에 눈을 감는 것이 당연한 수순의 상식적 행동이
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의 “밤이 어두웠는데”는 단
지 “눈감고 가거라”라는 제안을 하기 위한 관련 상황을 언급하는 표현
일 뿐인 것이다. 즉 .눈감고간다.의 ‘어두운 밤’과 ‘눈 감는 행위’ 사이
에는 문법상의 필연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밤이 어두웠는데/눈감고 가거라”의 내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의 접근이 필요하다. 유종호는 윤동주에게 세계의
어둠을 절감하게 한 것은 기독교적 세계파악의 영향력 못지않게 그의
시대의 식민지 상황과 그 부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11)
“밤”과 ‘어두움’이라는 시어에서 암흑과 같던 당시의 시대상을 추출해
내는 그 같은 의미부여는 문학사회학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에 의해 이
10)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연구원, 1999), 1310, 4836면.
11) 유종호, .청순성의 시, 윤동주의 시., 김학동 편, 윤동주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7), 35면.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5
미 충분히 규명된 바 있다. 이들 연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밤’이
다음 행의 ‘눈감는’ 행위와 결부되며 특수한 개별상징을 만들어내고 있
음에 주목해보도록 하겠다.
바른 의기를 가리고 내리눌러야 하는 세상, 못 볼 일들이 벌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는 그곳에서 버텨내기 위해 시인
은 ‘눈을 감는다’. 두 눈을 버젓이 뜬 채 모든 것을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 ‘눈’은 물리적 실체의 형상을 파악하는 신체기관으로 인
간존재를 특징짓는 얼굴에서 가장 응집력 있는 존재의 장소이며, 존재
의 진리탐구 또한 그 ‘눈’의 시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12) 그러
므로 시에서 ‘눈을 감는’다고 한 것은 시선을 차단하여 세상의 것을 보
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인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거짓과 위선에 호도
되지 않고 ‘마음의 눈’을 통해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바라보고 싶다
는 소망의 표명이기도 하다. 즉 그와 같이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
‘눈을 감는’ 것은 불구가 되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만이 역설적으
로 참된 의미의 정상적 생을 영위하는 진실의 수호자가 된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위라 하겠다.
이러한 해석은 눈을 감는 행위가 3연의 “가진 바 씨앗을/뿌리면서
가거라.”로 이어지면서 그 타당성을 담보 받게 된다. ‘눈감고 가는’ 자
에게 시인은 ‘씨앗을 뿌리며 가라’는 또 하나의 주문을 한다. 이는 ‘눈
을 감는’ 것이 단순히 보기 싫은 세상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씨
앗을 뿌리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로 이어짐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시의 “눈감고 가거라”는 주문은 어두운 시대상에 굴복하지 않고 참
12) 이렇게 시선은 인간 실존의 상징적 차원과 생태적 차원을 동시에 표현한다. 또
한 나아가 시인의 시선은 본질을 파악하는 물질적 상상력까지를 포함한다. 따
라서 ‘눈’의 상징을 중심으로 ‘시선’을 논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
한 우리의 의식과 우리 육체의 구체성(눈에 보이는 기관)인 시선 안에서 결합
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59~164
면 참조.
86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된 눈으로 진실을 바라보겠다는 시인의 강한 바람을 담은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물론 진실을 목도하려는 의지를 내포한 ‘감는 눈’의 모티프가 비단 .
눈감고가다. 한 편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윤동주의 시 전반
에 걸쳐 유사한 방식으로 유기적 의미군을 형성하면서 상징으로 작용
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돌아와 보는 밤., .소년., .사랑의 전
당., .명상., .유언. 등 여러 편의 시에 등장하는 “눈” 또한 그 같은
‘감는 눈’의 변주된 형태로 나타난다.
3. 공간화된 ‘눈’과 시선의 확장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延長이옵기에―
이제 窓을 열어 空를 밖구어 드려야
할턴데 밖을 가만이 내다보아야 房안
과같이 어두어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돌아와 보는 밤. 전문
이 시에는 세 개의 공간이 등장한다. ①‘비에 젖은 밖’, ②‘불을 끈
房안’, ③‘세상’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세 공간을 연결시키는 직유
의 용법을 살펴봄으로써 앞 장에서 논의한 ‘감는 눈’의 상징의미를 재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7
구해보도록 하겠다.
①, ②, ③은 ‘어두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 중 ③은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나 “세상같은데”에서처럼 직유의 형식과 결
부되어 쓰이고 있다. 전자는 “세상으로부터” 떠나 “내 좁은 방에 돌
아”온 실제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듯이”라는 직유의 형식을 취
함으로써 ③은 “밖”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층위를 넘어선다. ③의 두
번째 직유형식에서도 전자와 동일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같
은데”는 “房안과같이”에서처럼 “밖”의 어두움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
다. 여기서 “세상”, “房안”, “밖”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바로 ‘어두움’이
다. 이렇듯 ②와 ①의 공간에 동일하게 드리운 ‘어두움’이 “세상”으로
비유되면서 ③의 두 번째 용례 역시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어두운 현
실상황’이라는 새로운 의미차원에 속하게 된다.
이제 공간적 측면에서 논의한 위의 분석이 얻어낸 의미를 다른 각도
에서 조명하여 시를 분석해보겠다. 1연의 “낮”과 2연의 ‘어두운 밖’에
서 연상할 수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상반된 의미항은 ③을 공통분모
로 삼고 있다. 1연에서 “방”에 돌아온 내가 불을 끄는 것은 “낮”의 피
로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로써 “낮”의 피로와 “세상”
에서 느끼는 피로는 “~듯이”의 직유로 연결되어 유사성의 범주에 속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긍정의 의미항에 속하는 “낮”이 “피로”를 매개
로 “세상”과 동가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불을 켜두는것”이 “낮”의 피로함의 연장이라는 1연의 상황은
③과 결부되면서 다른 연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
여받게 된다. 그 논리에 따르면 ‘낮(밝음)’ : ‘밤(어두움)’ = ‘부정’ : ‘긍
정’과 같은 도식이 성립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밤’의 속성으로
알려진 ‘어두움’이 “세상”과 동일하게 취급되면서 부정적 의미를 가지
게 된다는 2연의 논의를 떠올려보면, 1연과 2연에 나타난 ‘어두움’이
각각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변별됨을 알 수 있다.
8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
해 다시금 논의의 초점인 ‘눈을 감다’의 상징성으로 돌아가 보겠다. 앞
장에서 ‘눈을 감는’ 것이 모순된 세상을 거부하고 참된 진실에 눈뜨고
자 하는 의지의 표명임을 밝혀낸 바 있다. 1연의 ‘불을 끄는’ 행위에서
도 ‘눈을 감는’ 행위에 내재된 그 같은 불구의식이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누군가에 의해 실명을 당하는
(불이 꺼지는) ‘피동’의 상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눈을 감는(불을 끄
는) ‘능동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1연과 2연의 ‘어두움’
은 불을 끄는 능동적 행위로 인한 ‘어두움’과 해가 기울자 저절로 찾아
든 ‘어두움’으로 차별화된다. 1연의 ‘어두움’이 “세상”과 동일시되었던 2
연의 부정적인 ‘어두움’과 다른 층위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결국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타난 ‘눈 감는’ 행위는 이미 1연에서부
터 그 전조를 보여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반응
이 아니라, “울분”을 삭이기 위한 의지적 행위이다.13) ‘눈을 감는’ 것이
울분을 일게 한 “세상”을 거부하고 진실을 목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
명이라는 이 같은 해석은 이어지는 시구인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의 시상 전개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는 의지적 불구의 상
태로 접어든 주체가 혼란스러운 외부를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세상에 유혹당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질과 참된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듯 1연과 2연에 나타난 긍정과 부정의 ‘어두움’은 3연의 ‘눈 감
는’ 행위로 귀결되며 참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한 정, 반, 합의 변증법적 질서는 이 시의 상징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
13)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했던 “모욕을 참어라”를 연상케 한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9
가츨가츨한 머리갈은 오막사리 처마끝,
쉿파람에 코ㄴ마루가 서분한양 간질키오.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
- .명상. 전문
이 시에 나타난 ‘눈’의 공간화 양상은 전반적으로 유사성14)에 기반을
둔 비유의 용법과 몸과 사물 범주를 혼합시키는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다. 먼저 1연 1행을 보면 “가츨가츨한 머리갈”과 “오막사리 처마끝”이
은유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15) 신체 일부인 “머리갈”
과 “오막사리 처마”를 만드는 ‘볏단’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유추되는 계
열적(paradigmatic) 선택관계16)에 놓인 것이다.17)
14) 유사성은 기실 차이를 전제로 한 닮음이다. .명상.의 1연에 나타난 형태적 유
사성 또한 질료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형이상학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것을 닮음으로 정의하였다. 리쾨르는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은유란 다름을 같음 속으로 융합해가는 의미론적 과정이라고
했다. 은유가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을 찾아내는 의미론적 과정이며, 기존
의 낡은 범주화를 부수고 새로운 논리를 세우는 유별(classification) 작업이라는
리쾨르의 주장은 고전수사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정기철,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문예출판사, 2002), 71-72면 참조.
15) 이는 종에서 종으로의 전용(transference)인 은유의 양태를 보여준다. 아리스토
텔레스(천병희 역), (개역판)시학 (문예출판사, 1995), 116~117면; Paul Ricoeur
(1975), The Rule of Metaphor :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rans. by Robert Czerny with Kathleen McLaughlin and John Costello(1978),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3면 재인용; T. 토도로프(신진.윤여복 공
역), 상징과 해석 (동아대학교출판부, 1987), 96~98면 참조.
16) 소쉬르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계열적(paradigmatic) 관계, 연쇄를 이루
는 단어를 통합적(syntagmatic) 관계라고 불렀다.(페르낭 드 소쉬르(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 , 샤를르 발리.알베르 세쉬에 편(민음사, 1990)) 로만 야콥
슨은 소쉬르의 이런 논의를 받아들여 ‘통합체’를 ‘환유’에, ‘체계’를 ‘은유’에 접
근시켰다. 김치수 외, 현대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164면.
17) 한편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 외에도 개별 시어들이 갖는 어감에서 유추된 유사
성이 발견된다.(카시러에 의하면 “시 언어에서는 추상적인 개념 표현뿐만 아니
9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가츨가츨한 머리갈”과 “오막사리 처마끝”에서 ‘몸’의 한 부분을 ‘집’
의 일부로 전이시키던 혼합의 양상은 다음 행의 “코ㄴ마루”와 2연의
“들窓 같은 눈”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1연 1행에서 시작된
혼용의 원리―유사성에 근거한 은유의 특성―가 이어지는 시어(낱말)와
비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다. ‘머리카락’과 ‘지푸라기’, ‘콧등’과
‘마루’, ‘눈’과 ‘창’ 사이에는 형태상, 기능상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리
고 이들 유사성간의 유기적 관계는 2연 마지막행인 “이밤에 戀情은 어
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의 애매성을 해결해준다.18)
2연에서 밤에 “어둠”이 스며들듯이 “戀情”이 “골골히” 스며든다고
했다. 여기서 “골골히”는 현대어 “골골이”로 추정되는 표기이며,19) ‘고
을고을에’, ‘골짜기마다’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시 속에
서 “오막사리”, “들窓” 등 가옥을 표현하는 시어들과 맺는 관계를 고
려하면 전자의 의미를 취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戀情”은
인간의 마음, 즉 신체기관 중 ‘심장’과 관련된 단어이다. 결국 2연의 2
행은 “어둠”이 ‘마을’에 스며들듯 삽시간에 “戀情”이 ‘마음’에 스며드는
모양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인간의 몸
라 모든 단어가 소리가Klangwert와 감정가Gefuhlswert를 갖는다.” E. 카시러(오
향미 역),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 (책세상, 2002), 43면.) 이
경우 1연의 은유를 형성하는 “가츨가츨한”과 “오막사리”의 어감은 경제적 상
황에 대한 정보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일 뿐 1연의
은유를 추적하는 것으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 하나의 시어, 하
나의 비유가 다른 시어, 다른 비유들과 대응, 대립하며 공명하는 상호관계 속
에서 새로운 의미가 도출되고, 그 과정에서 상징의 형식이 발견되기 때문이
다.(위의 책, 42~44면 참조.)
18) 습작노트의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 작품을 창작할 당시 “골골히”라는 시어는 존
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왕신영 외 엮음, 앞의 책, 78면) 이는 퇴고과정에
서 부가된 부분인데, “골골히”가 첨가됨으로써 .명상.의 2연 2행은 단순한 직
유의 형태를 벗어나 시 해석상의 애매성을 불러일으키며 상징적 추론을 유도
하게 된다.
19) 권영민 엮음, 윤동주 연구 (문학사상사, 1995), 79면.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1
과 사물간의 전용양상이 기능적 유사성에 토대를 두고 표출된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戀情”을 의미적 대립항인 “어둠”에 비유했을까? 기
능적 유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들 결합의 애매성20)을 벗어나려면
.명상.을 포함한 윤동주 시 전반에 포진된 상징형식에 의존해 그 형식
들간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21)
이를 위해 먼저 시구에 있어서의 애매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연
은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
드오”의 두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1행의 맨 끝에 표기된 쉼표
(,)는 1행과 2행이 선후관계 혹은 인과관계로 인접되었음을 가리키는
연결표지이다. 즉 이 부분은 ‘눈이 닫히(감기)고 나서 연정이 마음에
스며들었다’와 같은 선후관계이거나, ‘눈이 감기자 빛이 차단되어 어두
워졌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유리돼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와
같은 인과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2행의 “어둠처럼”이라는 비유를 생
각해보면 후자의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이 때 “어둠”은 “밤”이라는
외부적 상황과 결부된 물리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눈이 닫히는” 신
체작용으로 초래된 결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연에 나타난, 머리카락이 콧마루를 간질이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 연의 “들窓 같은 눈”을 1연
의 해석틀과 동일한 연계성 속에 받아들이게 해준다.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의 신체와 사물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제 窓을 열어 空를
밖구어 드려야/할턴데”(.돌아와 보는 밤.)의 시구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窓”은 “空氣”가 집의 외부와 내부를 드나들게 해주는 매개체
이다. “窓”이 내부/외부의 경계인 동시에 이 두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
20) “독자들 입장에서 보면 애매성이란 연루(complicity)를 의미하는 것이다.” T. 토
도로프, 앞의 책, 118면.
21) 에른스트 카시러, 앞의 책, 면44.
92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체의 역할을 한다면, 내부에서 외부로 눈물을 흘려보내는 통로인 “눈”
은 인간신체의 내/외부를 가르는 기준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상태(마음)
를 외부로 드러내고 외부현상을 내부에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고 할 수 있다. 공간분할과 매개적 역할이라는 공통성을 지닌 “窓”과
“눈”의 이 같은 결합은 인간의 몸과 사물간의 기능적 유사성에 토대를
둔 비유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합의 근저에서 주위세계
를 향한 인간주관성의 개인적, 집단적 투사를 발견하게 된다.22)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지닌 그러한 시선의 특성은 비유와 상징의 사
용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2연의 1행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를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앞에 인용한 두 시와 달리 이 시에서
‘눈감는’ 행위는 피동의 형태로 묘사된다.23) 그렇다면 이러한 피동현상
을 초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명상.의 상징의미
를 탐사하는 열쇠가 된다.
.돌아와 보는 밤.의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에 쓰인 능동태의 행위동사는
“마음” 속의 “思想”이라는 직접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와 비
교해볼 때,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
골히 스며드오”에 나타난 피동태의 동사는 “戀情”이 “스며드”는 모호
한 상황을 유발시킨다. 여기에는 “마음”과 같은 장소가 명시되지도 않
았고, 능동의 의지가 “思想”으로 표출되지도 않았다. “밤”이 되어 “어
둠이” 도처에 스며들듯이 “戀情”이 “골골히” 스며든다는 간략한 정보
가 제공될 뿐이다.
22) 풍경의 시공간성은 투과적이나, 이는 단지 세계를 주관화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다. 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08~116, 122면 참조.
23) 위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피동태는 주어가 어떤 동작의 대상이 되어 그 작용
을 받을 때 서술어가 취하는 형식이므로 그 이면에 동작을 초래한 원인이나
주체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졸음에 겨운 눈이 스르르 감겨버리는 행위에는
화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3
이 부분에서 초래되는 해석상의 애매성24)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
며드오”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스며들다”라는 동사는 외부로
부터 내부로의 진입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戀情이 어둠처럼 고을고을
에 스며들다’에서와 같이 이 시의 ‘스며들다’는 무형의 것들이 부분에서
전체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상황을 전달해주는 주
체는 시간적으로 “밤”에 위치해 있다. 밤풍경을 바라보다 눈이 감기자
차단된 내면 속에 외부와 동일한 상황―“어둠”―이 발생한 것이다.25)
이제 인체의 외부와 내부에는 각각의 분리된, 그러나 유사한 공간이
형성된다. 이 두 장소를 이어주는 매개체인 “눈”이 닫히자, 이들 공간
에 “스며듬”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밤이 되어 외부적 공간에 고을
고을 어둠이 스며들고, 눈이 감기니 차단된 내면 곳곳에 연정이 스며
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두운 밤’의 상징의미에 대한 사회, 역사적
틀의 개입이 비로소 요구되고, 그에 따라 “戀情”의 대상과 의미는 진폭
을 확대하게 된다. “戀情”이라는 내면정서를 발생시킨 원인이 외부적
상황인 ‘어두운 밤’일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에 따르
면 “밤”의 어두움이 “눈”을 감기게 하였고, 그러한 외부적 상황이 외
부와 차단된 내면 속에 “戀情”의 감정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명상.에 묘사된 밤풍경은 단순한 시, 공간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투과된 실체로서 인간의 몸과 결부되어 시인의 시
선을 전달해준다. 인간의 신체와 외부 사물의 혼합이라는 유기적 관계
성이 이 시 전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24)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대어 “골골이”의 표기로 추정되는 “골골히”는 “밤”에 “어
둠”이 ‘고을고을마다’ 퍼져나가는 물리적 현상의 표현 혹은 “戀情”으로 ‘마음’
이 구석구석 가득히 채워지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애매성으로 인해 “어둠”과 “戀情”은 단순한 비유적 결합을 넘어선다.
25)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유언.)와 같은 또 다른 예에서도 피동적으로
감기게 된 “눈”이 “밤”을 배경으로 “슬픔”이라는 감정과 연계되어 나타남을 확
인할 수 있다.
9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다. 그 결과 ‘집’이 ‘고을고을’로 범위를 확장했듯이 신체기관인 “눈”은
인간의 의식 전반으로 ‘시선’을 확대, 전이한다.
이로써 2연의 “戀情”26)은 개인의 내면 정서에 국한된 의미범주를 벗
어나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고, 시의 제목인 “명상”은 단순한 감상적
사유의 단계를 넘어 실존에 대한 총체적 성찰과 반성을 의미하게 된
다. “밤”의 일반화된 상징성이 윤동주 시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부적 상황이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는 시어들과 긴
밀한 연관관계를 형성하면서, 자기 인식의 방식뿐만 아니라 ‘불구의식’
을 통해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해보려는 주체의 의지까지도 상징적으로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금까지 살펴본 ‘감는 눈’의 상징
은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의 표출로서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자 하는 자세인 동시에, 내재된 시선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
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대적 저항성의 표명이라는 의미 또한 지닌
다고 할 수 있다.
4. ‘눈’ 상징의 분화와 시선의 연계
지금까지 ‘감는 눈’의 상징과 그것이 공간으로 확장된 경우를 중심으
26) ① 順아 암사슴처럼 水晶눈을 나려감어라 - .사랑의 전당. 부분
② 少年은 황홀이 눈을 감어 본다 - .소년. 부분
“戀情”이 갖는 일차적 의미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라 할 수 있
다. 인용한 ①과 ②는 “순이”라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시의 일
부이다. “영원한 님에의 그리움”이라고 정의한 마광수(마광수, 尹東柱 硏究 :
그의 詩에 나타난 象徵的 表現을 中心으로 (정음사, 1984), 108~115면 참조)를
비롯해 많은 논자들이 “순이”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해왔다. ①
과 ②에서 “순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각각 피동형과 능동형의 눈감는 행위
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눈을 감는 행위는 .명상.에서의 “戀情”과
유사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5
로 내재된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는 주체의 ‘의지적 불구의
식’에 대해 논구해보았다. 그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 장에서는
‘감는 눈’의 상징이 다른 형태의 ‘눈’ 상징과 맺는 연관관계를 살펴봄으
로써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눈’의 시선이 지닌 의미를 총체적으로 규
명해보고자 한다.
기실 ‘시선’은 외부적 확장의 방향 외에 근원으로의 내부적 지향의
방향성 또한 지니고 있다. 이는 윤리적, 역사적 의미, 그리고 더 나아
가 종교적 의미범주와 결부될 수 있는 죄의 속성을 감지하는 주체의
자기 인식 방법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부적 지향성으로서의 시선에
대한 이 같은 논의는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윤리의식의 범주만으로 해
명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는 방법이 된다.27)
이에 대한 고찰은 앞에서 인용한 .눈감고간다.의 마지막 연에 제시
된 ‘뜨는 눈’으로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동일한 시에 제시된 ‘감는 눈’
과 ‘뜨는 눈’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앞 장에서 개진한
‘감는 눈’의 상징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왓작떠라.
- .눈감고간다. 부분
이 시에서 ‘뜨는 눈’은 앞에서 살펴본 ‘감는 눈’의 상징과 연계되어
나타난다. 이 때 전자는 특정 계기로 인한 개안(開眼)을 의미하고, 후
자는 응시의 시선을 나타낸 것으로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에 대한 주
27) 졸고, 앞의 책, 참조.
96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체의 성찰과 반성을 의미한다. ‘눈’을 감게 되는 계기가 외부적 상황
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에 대
한 주체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한 마지막 연의 “발뿌리에 돌이 채이면” “눈”을 뜬다
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진실을 목도할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한 주
체가 현실의 상황에 직면해 비의지적 신체의 일부였던 이전의 ‘눈’이
아니라, 행위를 이행하는 의지적 신체기관으로서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특정 계기로 인해 참된 것을 볼 수 있게 된 ‘뜬 눈’의 시
선은 다음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빨리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어
- .또太初의아츰.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눈이/밝어”라고
했다. 이는 “눈이 밝”는 현상이 “봄”이라는 시간성과 연관되어 있음
을 나타내준다.
윤동주의 시에는 계절의 변화를 동반한 시간성의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많은 경우 “봄”은 과거의 시간성인 동시에 인고의 시간을
거쳐 도래할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에
서 그러한 “봄”은 현재의 실존상황과 맞물리며 표면적으로 해독될
수 없는 역설적 의미로 상징화된다.28)
28) 윤동주의 시에서 ‘봄’은 대체로 ‘음산함’, ‘우중충함’, ‘등지다’ 등의 어휘와 함께
쓰이곤 한다. 그러나 이를 암울한 시대배경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시
를 단순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과거의 시간이나 이상 속에 존재하지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7
이 시에서 그러한 해석의 애매성은 ‘봄이 오다’와 ‘눈이 밝다’라는
두 사건을 연계해주는 인용한 3행의 “罪를 짓”는 상황으로부터 초래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나타난 ‘뜨는 눈’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봄”과 “罪”의 연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봄’의 밝음은 ‘어둠’이 사라
진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의 에덴동산 모티프를 차용한 .또太
初의아츰.에서는 그러한 ‘봄’의 밝음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는 계
기로 작용하게 된다. ‘봄’의 밝음이 내부로 향해 “눈이 밝”아지는 것
은 외부의 빛이 내부의 시선으로 전이되면서 자신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이 지점에서 이 시의 ‘뜨는 눈’은 본질
을 바로 직시하기 위해 눈을 감는 ‘감는 눈’의 시선과 상통하는 의미
를 갖게 된다.
한편 눈을 감음으로써 형성된 영역에서 진리를 보게 되는 그러한
‘감는 눈’의 시선은 특정 공간에 진입하여 자신의 본질을 목도하려는
‘뜬 눈’의 시선과 연계되기도 한다.
①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 .自畵像. 부분
②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것은
어느 王朝의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
않는 ‘봄’의 시간성은 현재의 시간을 무화시키며 시간성의 혼재를 가져온다. 그
러한 특성을 지닌 윤동주의 ‘봄’은 역사적 실존의 저항의식, 윤리적 실존의 자
기반성, 종교적 실존의 죄의 고백과 같은 실존상황을 다층위적으로 함의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 시대의 여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제한된 ‘봄’의
의미와 차별화된 윤동주의 고유한 ‘봄’을 만들어낸다.
9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그러면 어느 隕石밑우로 홀로거러가는
슬픈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懺悔錄. 부분
③ 故鄕에 돌아온날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엇다.
············
어둠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것이냐
白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것이냐
- .또다른故鄕. 부분
위에 인용한 시들에는 ‘뜬 눈’의 상징형태가 간접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이들 시편에서 ‘뜬 눈’의 상징이 신체기관으로서의 몸 상징의 형
태로 구체화되지 않고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와 같은 형태로 간접화
되어 제시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러한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의 행위가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우물을 홀로/찾어가선”(①),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②),
‘고향집의 어두운 방 안’(③)과 같이 외부로부터 차단된 독립적 공간이
전제된 상황에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이들 ‘뜬 눈’의 시선은 비의지적
신체기관의 물리적 시선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통과해 참된 자신의 본
질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지적 시선이라는 이차적 의미에 가닿는다.29)
이러한 ‘뜬 눈’의 상징 역시 앞에서 논의한 ‘감는 눈’의 상징에서 살펴
29) .自畵像.의 “어쩐지”가 보여준 감정의 근원으로 대표되는 해석의 애매성을 포
함한 ‘뜬 눈’의 상징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앞의 책 참조.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9
볼 수 있던 본질 직관의 시선과 연계되면서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눈’
상징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윤동주의 시에서 ‘뜬 눈’, ‘뜨는 눈’, ‘감는 눈’으로 삼분되는
‘눈’의 상징은 자기 인식과 관련하여 각각 주체의 분화로 귀결되는
주체의 반성행위, 특정 계기로 인한 각성, 참된 본질의 인식을 의미
한다. 오류가능성을 지닌 낯선 주체에 대한 거부감은 기존 논의에서
‘들여다보기’의 형태로 다루었던 윤리적 반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
러나 간접적으로 형상화된 ‘뜬 눈’의 상징이 ‘감는 눈’, ‘뜨는 눈’의
형태와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논문의 ‘눈’ 상징이 기존
논의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감는 눈’의 상징이 ‘뜨는 눈’, ‘뜬 눈’의
상징형태와 관계를 맺으면서 유한성이라는 인간 실존의 본질적 조건
을 드러내는 한편 그러한 실존이 처한 외부적 상황에 대한 저항의
태도를 함의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데 있다.
기존 논의에서 도덕적 정결성에서 비롯된 자기반성으로 인식되던
주체의 내부를 향한 시선은 결국 죄의 속성을 비롯한 자신의 오류가
능성, 불완전성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주체의 자기 인식을 담고 있
다. 그러나 ‘눈’을 매개로 한 이 같은 자기 인식은 내부를 향한 시선
으로만 머물지 않고 외부적 상황에 의해 촉발된 의지 발현으로서의
저항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정성을 특질로 하는 윤동주 시의 많은
시편들에 내재된 저항성의 의미층위는 이렇듯 상징의 다의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같은 특질은 저항시로서
의 특성을 지닌 윤동주의 시가 시대를 초월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10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이 논문은 언어적 측면의 분석을 기반으로 상징의 의미구
조를 분석하여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형상화된 방식을 살펴보았다. 이
는 특히 주체의 존재태가 농축되어 있는 “눈”이 ‘눈을 감는’ 특수한 형
태로 반복되며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음에 주목한 논의이다. 이를 통해
그러한 몸 상징이 외부의 풍경과 비유적으로 결합하여 변주된 상징의
형태로 의미를 심화시키는 특성과 ‘뜨는 눈’, ‘뜬 눈’과 연계되어 형성
된 ‘감는 눈’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논문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감는 눈’의 상징의미가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의 표출임을 밝혀내었다. 이는 ‘뜬 눈’의
시선과 상통하는 의미화의 지점에서 주체의 내부로 향하는 자기 인식
의 시선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를 바라보는 내재된 시선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대적 저항
성을 표명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감는 눈’ 상징의 의미적 이중
성을 도출함으로써 이 논문은 ‘감는 눈’, ‘뜨는 눈’, ‘뜬 눈’으로 삼분되
는 윤동주 시의 ‘눈’ 상징을 총체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논지 전개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감는 눈’의
변주형태로 설명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저항의 방식인 퍼소나의 치환을
논의에서 배제하였다. 타자와의 직접적 소통을 거부하는 외면행위로
변주되는 ‘가면 쓰기’의 양상은 동시를 포함한 윤동주 시의 퍼소나가
순진성을 가장한 주체의 의도된 저항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이에 대한 고찰은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
주제어 : 감는 눈, 공간, 확장, 뜨는 눈, 뜬 눈, 의지적 불구의식, 저항, 주체,
자기 인식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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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103
【국문초록】
이 논문은 윤동주 시 상징의 의미구조를 분석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감는 눈’의 상징과 그것이 확장, 변주된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윤동주
시의 저항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이는 외재적 계
기에 의존해 식민지 반동일화 담론으로 시를 읽어내는 선행 연구의 제
한에서 벗어나 시 자체의 내재적 계기로부터 출발해 의미화에 다다르
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 논문은 주체의 존재태가 농축되어 있는 “눈”이 ‘눈을 감는’ 특수
한 형태로 반복되며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음에 주목한 논의이다. 이를
통해 그러한 몸 상징이 외부의 풍경과 비유적으로 결합하여 변주된 상
징의 형태로 의미를 심화시키는 특성을 살펴보고, 그것이 ‘뜨는 눈’,
‘뜬 눈’과 맺는 의미상의 연관관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윤동주
시의 ‘눈’ 상징을 종합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논문은 ‘감는 눈’의 상징이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
의 표출로서, 자기의 내부로 향하는 자아 성찰의 시선뿐만 아니라 내
재된 시선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
대적 저항성의 표명을 담고 있는 시선을 나타낸다는 의미적 이중성이
서로 대치되지 않고 상통함을 도출해내었다.
10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덤으로 더 더 더...
윤동주에 대하여
1.'이름도 없는 윤동주'와 함께 있고 싶어/ 이누가이 미쯔히로
-윤동주와 가도 게이지 씨
2. 그리스도를 본받아/다카도 가나메
-윤동주의 신앙
3. 윤동주를 보는 일본인의 시각/김우규
-속죄와 화해를 바라는 양심의 소리
-위의 글들은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 이누가이 미쯔히로와 7인/민예당' 책에서 일부만 발췌한 것입니다.
1. '이름도 없는 윤동주'와 함께 있고 싶어
- 윤동주와 가도 게이지 씨
作 이누가이 미쯔히로
내가 윤동주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가도 게이지씨에게서엿다.
그는 1980년대의 지문 날인 거부 투쟁을 정력적으로 떠맡았고, 그 필연적인 전개로서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가는 여행'의 리더가 되어 수차례나 현해탄을 왕복하였다. 또한 필연적인 전개로서 반천황제 투쟁에 감연히 나서서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차, 암 선고를 받고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가도 게이지 씨가 만년에 더없이 사랑한 사람이 윤동주였다.
최근 일본에서도 윤동주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그 시비가 세워지기도 하고, 그의 시나 전기가 출판되어 나오는데 대해 큰 기쁨을 느끼는 터이지만, 가도 게이지 씨를 통해 윤동주를 알게 된 나로서는 한가닥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원래가 산문적인 인간이라 나 같은 것이 윤동주에 대해 감히 무엇을 쓴다는 것부터가 가당찮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일본이 윤동주를 받아들이는 데 기여한 가도 게이지 씨의 역할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가도 게이지 씨에게 있어 윤동주란 어떤 존재인가를 증언해 보고자 한다.
가도 게이지 씨는 1991년 11월 2일에 말기 암의 선고를 받았다. 그 때 쓴 글이 이제 소개할 이다. 윤동주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가도 게이지 씨의
-시모노세키를 오후 5시에 출항한 관부연락선은 1시간쯤지나 육련도 부근을 통과합니다.
지난해도 지지난해도, 아니 첫 해부터 그랬습니다. 현해탄의 팔월의 바다는 바람이 거셉니다.
갑판에 부는 바람으로 여러분의 뺨이 일그러지고, 빗어내린 머리카락도 휘말려 올라가겠지요.
그러나 자세를 그대로 하여 바다위를 바라보아 주십시오. 이 해협을 거쳐 강제로 끌려간 이백만명이라는 조선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신음소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릴 잊지 말아 다오. 우릴 보상해 다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의 마음을 되돌려 다오!" 분명히 들으셨지요?
그로부터 1시간쯤이면 앞바다 섬 근처까지 가게 됩니다. 이젠 해질녘인 7시지요.
시선을 서쪽 지평선 쪽으로 돌리십시오. 서녘 하늘에서 해원으로 떨어지고 있는 저녁해가 오늘도 보일런지요.
현해탄은 슬픔의 바다입니다. 당시 배 밑바닥의 누에섶과도 같은 삼단으로 된 선실에 처박혀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뺨을 스치는 바람도 빨간 저녁해도 딴 세상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현해탄을 거너는 연락 페리 위에서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오직 사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잇느냐는 말을 주위에서 항상 들어왔습니다. 당신이나 내가 직접 저지른 잘못은 아니니 그런 일에 구애 받지 말고, 자유로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도 종종 들어왔습니다. 나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과 아시아의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일본이라는 죄 지은 배(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조상이 지은 죄를 대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를 가른 바다에 가으링 오고, 진눈깨비 내리던 겨울이 가고 , 봄이 찾아들 무렵이면 바다 사이를 물새가 날아오고 날아갑니다. 물새는 "자, '희망'을 실어왔어요!"하고 정답게 울면서, 죽어간 조선인의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씻어 주려 애를 씁니다. 그러한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런 바다에 잠들고 싶습니다
1991년 11월 2일
죽음을 알려온 날에 가도 게이지
나는 이 을 11월 4일에 건네 받았고, 유골을 현해탄에 뿌려 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당한 윤동주의 유골의 일부가 아버지의 손에 의해 현해탄에 뿌려진 것을 가도씨는 알고 있어서 그렇게 부탁했던 것이다. 가도씨와 절친했던 친구들은 가도씨 역시 산문적인 인간으로 결코 시를 이해하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도 동감하는 터이지만, 만년의 가도씨는 이 에서 알 수 있듯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몇 편의 문장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도씨는 윤동주를 투병의 와중에서 읽으셨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항 시인 윤동주'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윤동주의 시는 태어났던 것이며, 따라서 윤동주의 시는 투쟁 속에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 속에서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 자신의 욕됨과 신념 없음을 철저히 깨달아 알았기에, 어디에 의지해야 할 지를 알고 꿋꿋이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던 것이다.
이 가도씨가 1989년 12월 3일에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가는 여행' 보고서의 권두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목은 .
*'이름도 없는 윤동주'에게
서 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저항 시인' 윤동주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꾀했다 하여 붙들려가서 일본의 패배와 조선의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한글로 시를 쓰고 ,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맹세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던 윤동주를 죽인 것은 일본인과 일본 정부였습니다
납골 단재에 담기지 못하고 하얀 재가 되어 버린 윤동주의 뼈는 고향으로 돌아가다 아버지의 손으로 현해탄에 뿌려졌다고 그 동생이 전하고 있습니다.
9일 동안의 여행길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아니 어쩌지도 못하고 죽어간 이름없는 '윤동주들'의 뼈를 밟고 걷는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무라 강제수용소의 허물어진 흙답벼락에서 본 것은 '한마음......산도 바다도 보인다......기어코 해내리라......바른 마음으로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온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치듯이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그러한 '봄'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이름없이 죽어간 한국인.조선인에게 바칩니다.
1989년 12월 3일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 가는 여행'
실행위원회 대표 가도 게이지
가도씨는 윤동주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바다(현해탄)에서 잠들고 싶습니다.'고 끝나는 가도씨의 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 젊은 나이로 죽은 윤동주의 뼈의 일부가 그 아버지의 손으로 현해탄에 뿌려진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추도문집을 나는 가도 게이지 씨의 비문으로 삼고 싶다. 몇 번이라도 다시 꺼내 읽으며 우리들의 결심을 새롭게 하고 싶다.
1993년 2월 24일
2.
그리스도를 본받아
- 윤동주의 신앙 作 다카도 가나메
나는 이 교회에 오기 전에 이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찾아가 둘러보고 왔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아시다시피 그 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는 1941년 11월 20일에 쓰여졌으므로 이제 17일 뒤면 만 50년, 꼭 반세기가 되는 것입니다. 50년 전에 쓰여진 시가 오늘도 싱그럽게, 오늘에 쓰여진 시처럼 내 영혼을 뒤흔들어 줍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내 가슴에 끓어 오르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일본인인 내 가슴을 도려내고 마구 쥐어 뜯어 마음에 아픔을 안겨 줍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 시커멓게 갈앉은 죄와 더러움이 정화되고 내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이 위로받아, 이 나에게도 새로운 만남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캠퍼스를 걸으면서 나는 윤동주의 발소리를 듣고, 윤동주의 체온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우러른 '하늘'을 펴다보고, 그의 피부를 스친 '바람'을 느끼고, 그가 사랑한 '별'을 환상으로 보고, 그가 좋아했던 코스모스를 바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음속에 떠올린 것은 시인 박두진 선생의 말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늠름한 희생은 그 작품과 생애의 불멸의 가치와 더불어 일제의 만행과 침략, 군국주의의 죄악사를 언제까지나 고발하고 또 심판하고 있다."
나 자신도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리스천 홈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나는 '비국민'이란 욕을 듣고,괴롭힘을 당했던 지난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나는 자신이 직접 범하지 않은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원죄'로 받아 몸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윤동주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더러운 손'은 바로 나의 것입니다. 나는 윤동주가 쓴 가장 원숙한 만년의 그 귀중한 시원고가 일본 관헌의 손에 몰수되어 어쩌면 쓰레기처럼 소각되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 마치 내가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자 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한 '원죄'를 나는 평생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시비가 있는 언덕 위에서 시인이며 목사인 문익환 선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모든 대립이 해소되었다. 그 미소에 감도는 포근한 기운으로 녹지 않는 얼음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피를 나눈 형제였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둘 때 그는 일본인들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리라고. 인간성의 깊이를 간파하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이하고도 따뜻한 위로의 말은 실은 나 자신이 (記錄社,1984)를 일본어로 읽으면서 느끼고 있었던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윤동주는 일본인을 고발하고 심판하면서 동시에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려 했고 용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과거를 간파할 뿐만 아니라 미래도 함께 내다보고 있던 '예언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생략.....
나의 상상은 너무 멋대로인지도 모릅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동주를 바라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을 허락받은 자로서 이와 같이 상상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시이나 린조는 한 인간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그 만남은 '상대방을 위해 죽는다고 하는 비주체적 행위를 통하여 상대방의 것이 되어 상대방의 슬픔과 괴로움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공감'없이는 '어떤 대화도 교통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대방에게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거기서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성립시키자면 상대방 속에 자기를 죽이는, '주체'가 죽는다고 하는 '비주체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상대방의 것', 상대방의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상대방의 슬픔'이나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이나 린조라는 작가는 기독교 작가이므로 이 점을 잘 알고 말했을 터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죽여서 '상대방의 슬픔'이나 '괴로움' 속에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이나 린조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공감,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시이나 린조라는 기독교 작가가 호소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만남을 성립시켜 주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말인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고 '나'를 죽여, 죄있는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속에 살아가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불가능한 만남을 가능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윤동주에게 있어서의 '만남'은 일본의 소설가인 시이나 린조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만남'일 뿐 '참'된 '만남'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가능로서는 불가능한 '참된 만남'을 기구하고 있던 한 사람의 가난한 기독교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윤동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해서 죄사함을 받고 부끄럼을 씻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참"된 만남을 성취했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노래할 여지가 없습니다.
윤동주가 옥사한 시대에 비해서 지그의 이 시대가 조금은 나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쉽고 부서져 버리기 쉬운 영혼이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일까요. 절망으로 하여 신에 대한 불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될 시대일까요. '만행', '침략', '죄악' 따위의 '고발'이나 '심판' 같은 것이 없이도 넘어갈 수 있는 시대일까요.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에 아픔을 깨달으면서도 '별을 노래하는마음'으로 인간 모두가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우리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하늘'로 부터 주어진 길을 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두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가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허락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 번에 한국어판인 (전망사)과일본어판 (교문관) 이 두 시집의 출판 기념회를 위해 서울에 왔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과 일본의 기독교인이 시와 문학을 통해서 더욱 싶은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우리들 모두의 '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충이라고 믿습니다.
찬양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1991년 11월 3일
연세대학 교회에서 일요예배 설교
3.
윤동주를 보는 일본인의 시각
-속죄와 화해를 바라는 양심의 소리 作 김우규
1.일본 속의 윤동주 바람
만일,우리말과 우리 글을 빼앗겼던 일제말의 암흑기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써 남겼던 윤동주의 시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더라면 이 시기는 우리 문학사에 영원한 공백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흙으로 덮였던 윤동주의 이름은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이 땅의 '언덕'위에 영롱한 별빛으로 자랑스럽게 되살아나 우리 문학사의 공백을 메워 준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우리 한국인 모두의 마음이 되어 공감의 폭을 넓혀가며 애송되고 있다. 이 별빛은 또한 지금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남의 나라' 일본 땅의 '언덕'위에도 촉촉이 내리고 있다. 한국 시인의 시가 이처럼 일본인의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굴욕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한 시인의 작품이 바로 그가 최후를 마친 형무소가 있는 후쿠오카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애송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마 생전의 윤동주 자신도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윤동주는 모국에서 뿐만 아니라 '남의 나라' 일본에서도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전집이 일본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으로 이부키고에 의해 번역 출간된 데 이어, 소설가 송우혜의 이 역시 같은 역자의 손으로 번역 소개된 이래 1992년에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이 생기면서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도 크게 다루어졌다(일본 여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에 의해 윤동주의 시와 생애가 11페이지 분량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졌다). 한국 시인의 작품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또 1994년에는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시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이 생겨 지금까지 20여회의 낭송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같은 해 일본 NHK에서는 윤동주 50주기 추모행사로 '윤동주 특집'을 방영하여 대대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다. 한 편 시비 건립위원회에서는 윤동주가 다니던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여 언론에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시비에는 윤동주의 가 확대된 그의 친필과 일역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모리다 스스무가 번역한 윤동주의 시편들을 곁들여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들이 집필한 평설집이 란 제목으로 일본 그리스도교단 출판국에서 출간되어 한 달 만에 재판이 나올 정도로 큰 반향(反響)을 얻고 있다. 이로써 윤동주는 오십 년 전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 땅에서 지금은 바야흐로 일본의 '성실한 지성과 양심'에 의해 '한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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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일(韓日) 화해의 파이오니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윤동주의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독특한 이해의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윤동주의 시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부끄럼'의 의미를 종교적. 실존적 차원에서 해명한 점과 그의 저항 정신을 일제말의 암흑기에 '한글로 시를 썼다'는 문학행위에서 확인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 정신이 완벽하게 일체화된 시정신의 높이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성실한 통찰력이 주목된다. 그리고 그 보다도 그 저변에 깔려 있는 한결같은 염원-즉 '그의 혼은 한일의 화해와 우호를 바라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이어질 것'을 믿고 소망하는 충정에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이 감명 깊게 다가옴을 느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윤동주로 상징되는 한국인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업보를 윤동주의 이름으로 용서받고자 하는 진솔한 사죄의한 표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의 '후기'가 잘 대변해주고 있다.
"1995년은 일본으로서는 패전 50년째가 되는 해이다. 우리는 이 해에 새로운 50년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위하여, 일본이 세계, 특히 아시아에 대해서 자행한 침략과 전쟁의 죄악에 가득찬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리다 스스무와 같은 이의 작품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의 마지막 행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를 '비벼진다'라고 번역한 부분을 들 수 잇다. 여기에서 별은 이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 혹은 이데아의 세계이다. 바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시련과 같은삶의 저해 요인이다. 따라서 별과 바람은 대립적인 존재이다. 그가 추구하는 순수 가치의 세계가 바람과 같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시달리는 상황을 뜻한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이 '비벼진다'라는 것은 마치 서로 사랑하는 것끼리 정답게 어깨를 마주 비벼대는 것처럼 보고 있다. 대립이나 적대가 아니라, 오히려 우호요 포용의 몸짓이다.
또 다카도 가나메 같은 이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 그 '사랑해야지'의 대상으로 일본인 까지 포용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 가운데는 미워해야 할 다른 사람인 일본인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인인 난만이 독선일까요." 그러면서 문익환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모든 대립이 해소 되었다...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둘 때 그는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눈불을 흘렸으리라고. 인간성의 깊이를 간파하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윤동주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더러운 손'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죄의식에서 죄사함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원수를 용서하듯이 미워해야 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한 윤동주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한일간의 화해'는 윤동주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사랑'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날 일제하에서 저들이 우리에게 자행한 엄청난 만행과 학대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죄악' 임에 틀임없다. 그리고 걸핏하면 독도 영유권 등을 들고나오는 일본인들의 책략이 한없이 가증스럽다. 아마 일본인의 근성가운데는 악의적인 막뿌리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동주를 사랑하는 적지 않은 일본인 가운데는 지난날의 일본의 죄악사를 사죄의 심정으로 돌아보며 진정한 화해를 희망하는 진솔한 양심과 휴매니티가 내재되어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윤동주의 존재는 일본의 다카도 가나메가 윤동주 50주기에 추모 강연에서 말했듯이 "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하고 고발한 파이오니어가 된 시인은 사랑으로 이어주는 파이오니어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