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詩人 대학교

전체 [ 1570 ]

125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달같이 댓글:  조회:3230  추천:0  2018-09-16
윤동주 / 달같이   년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년륜처럼 피어나간다.     이 시는 고요한 밤에 외로운 사랑이 달처럼 커진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밤에 홀로 떠서 매일매일 자라는 달과 같은 화자의 외로운 사랑이 고요한 밤에 가슴이 뻐근하도록 커져간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는 화자의 외로운 사랑이 외롭게 밤에 뜬 ‘달같이’ 점점 커져가고 있으므로 자신의 사랑을 ‘달같’다고 하는 것이다.   ‘연륜이 자라듯이 /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은 달이 연륜이 자라듯이 느끼기 어렵우나 점점 커지고 있는 고요한 밤이라는 말이다. 화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달의 변화를 ‘연륜이 자라듯이 / 달이 자’란다고 표현하였다. 달은 시간이 갈수록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달을 보고 있는 순간에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적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시간이 지난 뒤에 볼 때에만 해가 뜨기 전의 달과 그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륜’ 또한 일년에 걸친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하루하루를 보면 그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화자는 ‘달이 자라는’ 것을 ‘연륜이 자라’는 것에 비유하여 사람의 눈으로 느끼기 어렵게 달이 커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고요한 밤’은 화자가 잠에 들지 못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달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시간적인 배경이다.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 가슴 하나 뻐근히 / 연륜처럼 피어나간다’는 화자의 외로운 사랑이 마음을 뻐근하게 하면서 보이지 않게 커진다는 말이다.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는 ‘달’이 밤에 혼자 떠 있는 것을 ‘외롭다’고 보고 자신의 ‘외로운 사랑’을 ‘달같’다고 비유한 ‘외로운 사랑’은 화자가 대상과 함께 하는 사랑이 아니라 화자 홀로 하는 짝사랑을 말한다. ‘가슴 하나 뻐근히 / 연륜처럼 피어나간다’는 화자의 ‘외로은 사랑이’ ‘가슴’인 마음에 ‘하나’ 피어서 마음을 ‘뻐근’하게 만들면서 ‘연륜처럼’ 눈으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계속해서 커진다는 말이다. ‘피어나간다’는 화자가 자신의 ‘외로운 사랑’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피어나가’는 것은 식물의 잎이나 꽃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외로운 사랑이’ 커지는 것을 ‘가슴’이 ‘뻐근’해짐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잎’이나 ‘꽃’이 피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전한성       =====================///   참으로 단시지만 시인의 깊은 만감이 녹아 있다. 그 사랑이 무엇일까 생각을 비추어보면 이성적 사랑 조국의 사랑 등 나열 되지만 아마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묻어나는 근심의 사랑이라면, 지성인의 깊은 고뇌 속에 처절한 고독함이 더 묻어난다. 사랑은 언제나 이뤄짐에 고난과 고뇌의 연속에서 풀길 없는 방황 등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이루려는 희망이 춤추는 곳엔 엷은 미소라도 함께함이리라. 조국의 그 깊은 골을 넘어서는 세월을 보지도 못한 채 비명횡사라는 쓰라린 삶의 막음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간단하고 큰 고민없이 밤에 읽을만한 시입니다. 외롭거나 고독하다는 것은 공유할 공통분모가 부족하여 교집합을 이룰 사람이 결여된 상태입니다. 공유할 그 무엇이 없는 상태는 둥근 달만큼 완벽해 보이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외로움만 쌓여가고 가슴시리는 일입니다. 그래도 그 외로움은 시린 향기처럼 고요한 밤에 퍼져 나갑니다.
124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코스모스 댓글:  조회:3566  추천:0  2018-09-15
코스모스    /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뚜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1938.9.20.     ===================///   윤동주님의 코스모스 시는 코스모스를 청초함으로 표현해 깨끗하고 고운 순수한 모습을 나타내고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라는 말로 이세상에 하나뿐인 연인을 코스모스로 표현해 연인이 깨끗하고 고운 그러면서도 순수한 이미지를 코스모스에 비유하여 나타낸것 같습니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결, 순정이랍니다. 이 시와 정말 잘어울리는 꽃말같습니다.       ===========================/// 윤동주   /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달빛이 추운 밤이면 옛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이 시는 옛날에 사랑하던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면 내 마음과 같은 소녀를 닮은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가서 그리움을 달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달빛이 비추고 추운 밤이면 옛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모습이 소녀와 같다. 나는 그녀와 닮은 코스모스 앞에서는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그녀 또한 나를 그리워하겠지.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마지막 연의 ‘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다 /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와 연관되어 코스모스와 화자의 마음이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달빛이 추운 밤이면 / 옛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는 달빛이 밝고 추위를 느끼는 밤이 되면 옛날의 소녀가 견딜 수 없게 그리워져서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정원으로 찾아가서 그리움을 달랜다는 말이다.   ‘코스모스는 /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는 화자가 코스모스를 찾아가는 첫 번째 이유이다. 코스모스는 ‘옛소녀’처럼 ‘귀또리 울음’처럼 작은 것에도 수줍어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는 화자가 코스모스 앞에 있으면 어렸을 적의 그 소녀 앞에 있을 때처럼 부끄러워지는 감정을 느껴서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처럼’은 ‘옛소녀’는 화자가 ‘어렸을 적’에 만났던 소녀라는 것을 말해준다. 화자와 ‘옛소녀’는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라 서로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사이일 것이고 그리워하면서 그립다고 말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다 /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는 화자가 생각하기에 청초한 코스모스 같은 그녀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옛소녀’도 수줍어서 화자가 좋다는 말을 못했지만 그 마음은 화자와 같이 화자를 그리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한성          
1248    윤동주와 시 세편속의 "순이" 댓글:  조회:2680  추천:0  2018-09-15
사랑의 전당 / 윤동주 순(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든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殿堂)은 고풍(古風) 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를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1938.6.19 소년  /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1939.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도 눈이 나리리라.  1941.3.12. =================///덤으로 더...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1.6.2.     ======= 당신의 "순이"는 잘 있나요???
124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사랑의 전당 댓글:  조회:3584  추천:0  2018-09-15
  순(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든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殿堂)은 고풍(古風) 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를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1938.6.19. ================   이 시에서도 순이(順伊)라는 이름이 나오는군요. 윤동주 시인한테는 여자친구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1941년에 쓴 시 「바람이 불어」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라는 구절도 나옵니다. 윤동주 님의 시적화자의 고백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윤동주님의 진짜 삶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윤동주 님의 시 세 편에는 순이(順伊)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소년」, 「눈 오는 지도」, 그리고 「사랑의 전당」입니다.     사랑의 전당이란 순이와 함께 하기 때문에 행복한 공간이고, 순이와의 교감을 꿈꾸며 희망을 되새기는 공간이겠지요.     가을이 떠나고 겨울이 찾아오면 왠지 모르게 외롭다고 느껴지고 누군가를 가슴 아리도록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삶이 고달프고 어려운 난관에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 이때 윤동주 님의 시 한 편을 읽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삶이 고달픈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마음의 위안이 되지요..     =====================/// 사랑의 전당이라는 시에서는 '순이'라는 이름이 자주 언급되지만, 윤동주 시인은 에서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순이'가 언급된 윤동주의 다른 시 그리고 시대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이 시에서의 '순이'를 '조국'에 빗대어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전당'이라는 공간은 순이와 시인만의 행복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 같고요.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은 마치 강점기 이전의 조국과 시인의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느낌이네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는 광복 후의 조국의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조국을 위해 일생을 몸 바치고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마음으로 기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1246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갈릴리 호수" 댓글:  조회:4283  추천:0  2018-09-13
  요약 이스라엘 북동부, 요르단 강의 중류에 있는 호수.   갈릴리 바다 ================///   위치 이스라엘 북동부 면적 166㎢ 대륙 중동 국가 이스라엘 길이 남북길이 21㎞, 동서길이 11㎞ 요약 이스라엘에 있으며 요르단 강이 흘러들어 가는 그리스도교 성서에 등장하는 호수. Lake Tiberias라고도 함. (아). Buhayrat Tabariya. (히). Yam Kinneret.   갈릴리 호(Sea of Galilee) ⓒ wikipedia | Public Domain 1948~67년 북동쪽 부분이 시리아와의 휴전선에 바로 맞닿아 있었으며 성서와 연관되어서도 잘 알려져 있다. 호수 표면은 해수면보다 209m가 낮으며 표면적은 166㎢이다. 가장 깊은 곳은 북동쪽 부분으로 최고 수심이 48m이다. 남북길이가 21㎞, 동서길이가 11㎞에 이르며 배 모양을 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이름은 긴네렛(긴네롯)이었으나 BC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겐네사렛(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렀다. 쾌적한 기후, 평평한 지형, 기름진 토양, 그리고 비교적 물이 풍부하다는 조건 때문에 갈릴리 호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가까이 있는 평야들은 역사를 통해 여러 민족의 생계의 바탕이 되어왔다. 호수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엘우베이디야에 있는 40만~50만 년 전쯤의 호상(湖上) 구조물에서는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에 속하는 선사시대의 도구와 2개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가나안(고대 팔레스타인) 시대에 만든 구조물들은 BC 1000~2000년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AD 1세기 무렵 이 지역은 번창했고 인구도 많았다. 유대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호수 가까이에 있던 고대 9개 도시에 대해 쓴 적이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은 티베리아스(디베랴)에 관한 내용뿐이다. 서쪽 해안에 있는 티베리아스는 유대인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던 4개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북서해안에서 가까운 카페르나움(가버나움)에는 2~3세기경 지은 유대교 회당이 남아 있다. 이 회당은 갈릴리 지역에서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드루즈파(이슬람교·유대교·그리스도교의 요소들을 포함한 교리를 따르는 독립 종파로 11세기에 만들어짐)의 성전이 서부 해안 부근 케파르히팀 가까이에 있다. 갈릴리 호는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일화를 남긴 장소로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특히 잘 알려져 있다. 1909년에 세워진 첫번째 유대인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릴리 호는 요르단의 대침하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북서쪽으로 겐네사렛 평원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고 북동쪽으로 시리아의 베트자이다(부테이하) 평원이 뻗어 있다. 서쪽과 남서쪽 호수 가장자리에는 갈릴리의 가파른 구릉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동부쪽에는 골란 고원의 절벽들이 솟아 있다. 고원과 연결된 남동쪽의 가파른 지형은 호수에서 남쪽으로 몇㎞ 떨어진 곳에서 요르단 강과 합류하는 야르무크 강 유역에 이르면서 점점 넓어지게 된다. 남쪽으로 요르단 강 줄기가 흘러가는 좁은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알가우르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약 2,600만 년 전쯤 시작된 마이오세(世) 이후 형성된 현무암지대로, 시리아에 있는 광활한 두루즈 산맥 일대에 연결된다. 마이오세가 시작된 이래 호상(湖上) 석회석과 이회토(석회질토)가 퇴적되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地溝帶) 일부로 요르단 해구를 이루는 리프트벨리가 갈릴리 호 동쪽을 통과하며, 서쪽은 단층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구를 이루는 침하지대는 700만~250만 년 전의 플라이오세(世) 말기에 이루어졌으며 호수와 강의 침전물이 다시 일부에 퇴적되었다. 신생대 제4기(250만 년 이전) 습기 찬 시대 동안 사해(死海)가 이 지점까지 확장되었고, 지각운동이 일어난 플라이오세 중기(약 125만 년 전)에는 용융상태의 현무암 줄기가 야르무크 강 유역을 통해 침하지대 아래 끝부분까지 이르렀다. 약 2만 년 전에 있었던 마지막 우기시대 동안 리산 호(湖)라고 부르는 커다란 호수가 이 지역에 생겨나면서 이회토 구성물이 퇴적되었다. 그 후 물이 줄어들고 요르단 강물이 현무암 광상에 막혀 저수되면서 현재의 호수가 형성되었다. 주변지역으로 감싸인 위치, 낮은 고도, 호수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겨울에도 1월평균기온이 14℃가 될 정도로 온화한 날씨가 계속된다.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없어 대추야자·감귤류·채소류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름은 평균기온 31℃로 더운 편이며 강우량(데가니아에는 거의 380㎜)은 50일이 채 안 되는 겨울 동안 세찬 소나기가 짧은 기간 내려 충당된다. 대체로 바람은 호수와 육지 양쪽 방향으로 매일 번갈아 부는데, 특히 여름의 경우 아침에는 호수에서 육지쪽으로, 밤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겨울에는 요르단 침하지대로 돌풍이 몰려와 갈릴리 호에 폭풍우를 일으키기도 한다. 갈릴리 호는 요르단 강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를 조절하고 끌어들여 주된 수원으로 삼는다. 갈릴리 구릉에서 갈릴리 호 쪽으로는 암무드 강과 잘몬 강 같은 작은 영구하천, 그리고 와디인 아르벨 강 등 북서쪽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흐른다. 골란 고원에서도 4개의 중간 크기의 강줄기가 흘러내린다. 갈릴리 호에 이어진 강들과 갈릴리 호 바닥에는 많은 광물이 묻혀 있다. 이 광물들과 강한 증발작용 때문에 갈릴리 호의 물은 비교적 짜며 계절적인 변화가 있지만 여름과 가을에 염도가 가장 높다. 갈릴리 호에서 발견되는 어류는 동부 아프리카 호수의 어류와 비슷한 생태를 보인다. 자리돔·비늘없는 베도라치·메기·마우스브리더·돌잉어 종류가 있으며 회유어들도 찾아든다. 주변지역의 농업이 발달하면서 동물들의 생태도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전에 많았던 야생 멧돼지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몇 세기밖에 되지 않는 동안 북서쪽 겐네사렛 평원과 남쪽 데가니아 주변지역은 관개와 집약농경 방식을 통해 체계적으로 발달해왔다. 어업 또한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동부해안에 있는 티베리아스·겐네사렛·엔게브는 어업중심지로 특히 잘 알려진 곳이다. 매년 모터보트나 트롤선으로 1,000t에 가까운 어획량을 기록한다. 정어리는 다른 큰 고기들과 함께 주로 겨울에 잡힌다. 온천이 있어 현대식 건강 휴양지를 만들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온천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한 겨울 휴양지로 손꼽힌다. 엔셰바(밧세바의 일곱 샘)라고도 부르는 북서쪽 해안의 타비가에도 비슷한 온천이 있다. 1960년대에 이스라엘 정부는 갈릴리 호에 송수용 수로를 만들었으며 그 후 여기에서 시작되는 큰 운하가 요르단 강에서 네게브 사막 남쪽은 물론 해안지대까지 물을 수송하게 되었다(→ 킨네레트-네게브 수로). 호수면은 강하류에 세운 댐으로 약간 높아졌다. 요르단 강하류로 흐르는 물은 수력발전에 쓰이며 일부는 호수면에서 240m 가량 되는 높이까지 파이프로 퍼올려진 다음 흡입관을 통해 암무드 강과 잘몬 강 하곡을 가로질러 이스라엘 서부지역을 관개하는 데 공급된다. 호숫가에는 작은 시장도시가 여럿 있다. 상품과 승객 수송은 주로 이들 도시를 이어주는 모터보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 ====================/// 갈릴래아 호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갈릴리 호 티베리아스 호 (지리 유형: 호수) 나라 이스라엘 지방 북부 구   섬 2개     유입 요르단 강 유출 요르단 강   수심    - 평균 25.6 m  - 최대 43 m 면적 166 km2   게네사렛 호수(히브리어: יָם כִּנֶּרֶת‎, 아람어: יַמּא דטבריא, 아랍어: بحيرة طبريا)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담수호이다. 호수의 둘레가 약 53km이고,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1km이며 면적은 대략 166km²에 이른다. 호수 둘레는 약 50km다.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물이 북쪽에서 흘러들어 온 뒤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빠져나간다. 해수면으로부터 약 209m 가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심의 평균 깊이는 약 26m, 가장 깊은 곳은 43m 이다. 갈릴래아라는 이름은 ‘구역’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갈릴’에서 나왔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모두 등장한다. 신약성경에는 주로 "바다"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와 관련해 유명하다. 구약성경에는 킨네렛 호수(민수기34:11, 여호수아 13:27)로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게네사렛 호수, 갈릴라이아스 바다, 티베리아스 바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요한 수원은 북쪽에 위치한 헤르몬 산이다. 이곳 정상은 1년 내내 눈이 쌓여있다. 이 눈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로 흘러가 호수는 생물이 풍성하다.    
124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이적 댓글:  조회:3310  추천:0  2018-09-12
  "이적",의 기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적」/ 윤동주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여 바리고 황혼(黃昏)이 호수(湖水)우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 잇가?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 이적(異蹟)이 외다.   오늘따라 련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꾸 금(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것을 여념(餘念)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 윤동주, , 1938. 6. 19.   세속과 신앙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투하는 시인의 자아가 엿보입니다. 「새로운 길」을 부르며 자신 있게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면 공장에”(「해바라기 얼굴」) 가야 하는 피곤한 현실을 경성에 와서 목도한 겁니다. 그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여(빼어) 바리고(버리고)” 왔다고 합니다. 마치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었듯이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더럽고 지저분한 것, 개운치 않고 답답하고 따분한 것을 버리고 호숫가 앞에 섰습니다. 윤동주 나이 21세. 이제 대학에 입학하고 2개월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문득 호숫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물론 관념의 호숫가겠지만,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제로 지금의 홍대 근처에 호수 비슷한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물가에서 시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연희의 숲은 무척 우거져서 여우, 족제비 등 산짐승이 많았고, 신촌은 초가집이 즐비한 서울(경성) 변두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시골 마을이었고, 사이사이에 채마밭이 널려 있었고,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지금의 홍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러한 사실은 1946년부터 신촌에서 살기 시작한 필자가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으나 실제 호숫가에서 썼는가 아닌가 하는 점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가 쓰고자 했던 생각이겠죠. 1연 끝에 “ … 보리잇가”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나를 불러 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전체적으로 기도문의 형식으로 써 있습니다. 1연에서 “황혼이 호수우로 걸어오듯이 / 나도 삽분 걸어 보리 잇가?”라는 구절은 당연히 파도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의 이야기(마 14:22-33)를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이 이야기 이전에 있었던 기적은 바로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이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이적을 행한 뒤, 예수는 “재촉하사 자기 무리를” 흩어지게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는 예수의 모습이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4-15)라고 적혀 있어요. 때는 해가 서산으로 지고 황혼도 완전히 사라진 한밤 중 “밤 사경”이었을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전날 낮에 오병이어라는 큰 이적을 보았기에, 예수처럼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적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이 성서구절을 인용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에 강조점을 두어 설교하곤 합니다. 실은 제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 성서구절을 패러디합니다.   이제 이 성서구절을 윤동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볼 차례입니다.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 버리”면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연의 의미죠. 아무튼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큰 이적이지요. 그런데 윤동주는 2연에서 그런 이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이적(異蹟)이 외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이적을 바랐을지 모릅니다. 아마 물 위를 걸었다면 베드로는 이후 간증이나 자랑거리로 여러 번 그 기적을 드러냈겠죠. 그런데 윤동주가 보는 기적은 전혀 다릅니다. 윤동주는 그저 호숫가에 불리워 온 것이 “참말이적”이라고 합니다. 풍랑 치는 고통 앞에 서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이적”인 것이죠. “내사”는 나야, 나아가 나와 같은 것이라는 겸손의 표현이겠죠.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도 없는데 불리워 온 것이 “참말 이적”이라는 겁니다. 가령 상상치도 못했던 순간을 경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와 햇살이나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구분한다면, 그냥 일상 속에서 느끼는 일반계시를 윤동주는 바로 ‘참말이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오늘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작고 금(金)메달처럼 만저 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것을 여념(餘念)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불려내소서.   여성에 대한 ‘연정’(戀情), 자기 도취(自惚), 남에 대한 시기(猜忌) 따위의 고민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습는데, 분노를 지우고 가장 앞에 ‘연정’을 써 놓습니다. 분노보다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유혹은 연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연정이란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 먼저 떨어졌습니다. /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그 여자(女子)」)라고 윤동주가 청소년기에 썼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능금을 얻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몰래 앓았던 사랑의 아픔도 나직히 느껴집니다.   자홀(自惚)이란 자기도취입니다. 그의 습작기의 작품인 「공상(空想)」을 보면 “무한한 나의 공상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 나는 두 팔을 펼쳐서 /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 금전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잡지 「숭실활천(崇實活泉)」(1935, 10.)에 발표했던 시인데 나중에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들어가면서 끝줄의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知慾)”으로 수정합니다. 황금의 지식을 탐하는 욕망,그것이 그에게 자기도취였을까요. 그가 억제할 수 없는 지식욕을 갖고 있었다는, 그 일에 자기 도취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따라 금메달처럼 만져”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금메달 같은 욕망들을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 물결에 씻어 보내”겠다고 합니다. 마음속의 욕망을 씻어 버릴 수 있을 ‘참말이적’을 경험한다는 생각이지요. 그는 이미 이적을 체험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파도치는 호수로 불러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있다면 물 위에 걸을 수 있다는 의타적인 말일까요.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연정과 자기도취와 시기를 버렸을 때 이미 그는 기적을 체험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4연이 원래 퇴고 전에는 “하나, 내 모든 것을 바리려니 /당신이 이 호수(湖水)우로 / 나를 불러 내소서 / 걸으라 명령(命令)하소서!”였다는 흔적을 볼 때, 시련을 당하겠다는 의미의 표출이며 능동적인 다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적」을 쓰고 창작날짜를 쓴 원고지에 “모욕을 참아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메모는 옆에 이어 쓴 「아우의 인상화」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욕을 참아라”라고 쓴 메모는 「이적」과 연관하여 시련과 부닥치고자 하는 능동적 다짐으로 읽힙니다.   결국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라는 표현은 수동과 능동 모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수동이든 능동이든 “내게 준험한 산맥이 있다”(「이적」)는 깨달음과 비슷한 다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에게 이적은 첫째 일상 속에서 느끼는 무한한 영원회귀(니체)이며, 메시아적 순간(발터 벤야민)과 비슷했습니다.둘째 그 이적은 연정, 자홀, 시기 등을 버릴 때 가능해집니다. 그 순간이 윤동주가 느꼈던 ‘현현’(epiphany)의 순간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다짐과 ‘참말이적’의 힘으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게로 다가서기 시작하는 청년, 대학교 1학년 때 윤동주의 모습입니다.   /김응교 l 교수는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을 거쳐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이적」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해 여름, 1938년 6월 19일에 쓴 것이다. 그는 지금도 남아 있는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3년이나 살았는데 시간이 나면 혼자 근처 산과 들을 산보하였던 것 같다. 당시 연희의 숲은 무척 우거져서 여우, 족제비 등 산짐승이 많았고, 신촌은 초가집이 즐비한 서울(경성) 변두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시골 마을이었고, 사이사이에 채마밭이 널려 있었고,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지금의 홍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러한 사실은 1946년부터 신촌에서 살기 시작한 필자가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 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필자도 5, 60년대에 그렇게 그 연못가로 산보를 하곤 했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갑자기 그의 몸이 가벼워져 물 위를 걸을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 베드로의 사건이 다시금 벌어질 듯하다. 풍랑 이는 갈릴리 호수에 배를 저어 가던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를 보자 유령인가 하여 놀랐지만 예수가 안심시키고 믿음이 있으면 물 위로 걸을 수도 있다고 하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걷다가 물결이 무서워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기사가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과 마가복음 6장 47절~52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기사를 인용하면 이렇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후세의 기독교인들이 으레 부딪치는 걸림돌이 성경에 나오는 이적 또는 표적에 대한 기사들이다. 어릴 때에는 실제로 일어난 놀라운 이야기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청소년기에 반드시 괴로운 불안과 의심을 죄책감과 함께 느끼기 마련이다.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도 그랬을 것이다. 실상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모든 종교의 기본 경전들은 모두 그런 기적적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된다. 그러나 이른바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이 사람의 근본적인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하는 한 종교적 이적은 언제나 어떤 힘을 가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상식적인 의미의 사실이라고 믿거나 안 믿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확증해야 할 지식이나 정보라기보다는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가지라는 준엄한 요청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금 황혼녘에 연못가에 선 윤동주도 성경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가 어느 틈에 보통 연못가가 아닌 성경의 갈릴리 같은 ‘호숫가’에 도달하여 호면으로 걸을 수 있을 듯한 놀라운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일부 서양 예술가들이 말하는 ‘현현(epiphany)’, 즉 순간적 비전 같은 것이다.   내사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기숙사 식당에서 여러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후에 혼자 ‘서호낙일’을 구경하러 산보를 나왔지만 갑자기 그는 그런 일상적 습관의 차원을 넘어 갈릴리 호숫가에 불려 나온 듯한 놀라운 느낌, ‘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다. 그의 말씨도 일상적 언어가 아닌 기도의 말씨로 변한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대신 “내사”라는 청록파 시인들이 즐겨 쓰던 말투를 써서 그의 순간적 경험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상식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를 물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물보다 비중이 큰 그의 몸뚱이이다. “몸뚱이”라는 말은 바로 ‘달을 쏘다’라는 그의 수필에서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 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달이 있다.”라고, 그가 못가에 선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이다.(이 수필은 예사롭게 못가로 산보하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물 위로 걷고 싶은 마음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그 “몸뚱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 인식은 돌연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를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온갖 무거운 것들에서 해방되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짐을 느끼는 순간적 “이적”을 그는 경험한다. 단순히 그의 무거운 “몸뚱이”보다도 연정, 자홀(自惚), 시기 따위가 그의 발에 “터분하게1) /+“터분한”이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터부한”으로 되어 있어 필자가 참으로 부끄럽게 우스운 해석을 한 적이 있다. ‘터분하다’라는 말은 ‘기분이 매우 답답하고 따분하다’란 뜻이다.” +/ 달라붙어 그를 침몰시키려고 위협하는 무거운 것들인데 그것들이 일순 씻겨져 나갈 것 같은 것이다. 바로 그렇게 가볍게 되는 순간, 그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명을 따라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윤동주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것이 민감한 청년의 이성에 대한 그리움(“연정”), 자기 도취(“자홀”), 남에 대한 질투(“시기”) 따위의 고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정”에 대해서는 「명상瞑想」에서,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라 말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1937년 8월 20일, 만주 용정학교 재학 시 지은 것으로 어떤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청소년 시절의 애틋한 연정은 1년 뒤 그가 연희 전문 1학년 시절 바로 위의 「이적」과 같은 날짜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2) /+원고를 보면 「이적」을 쓴 날짜인 1938. 6. 19.라는 날짜가 이 작품의 말미에 적혔다가 그 뒤에 한 연을 덧붙이면서 그 날짜를 지웠다. +/ 「사랑의 전당(殿堂)」에서도 다음 같이 표현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이적」에서 그가 벗어 버리고자 한 “연정”은 바로 이런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아가씨와 서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어져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혼자 몰래 앓을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마음의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자홀”, 즉 자기도취를 그가 괴로운 짐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이 쏠린다. 겸손하고 얌전한 윤동주, 그에게 무슨 자기도취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의 습작기의 작품인 「공상(空想)」을 보면 제2연에서 그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금전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이 작품은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잡지 ‘숭실활천(崇實活泉)’(1935, 10)에 발표했던 것인데 나중에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에 편입시키면서 끝줄의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知慾)”으로 수정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이 많은 민감한 소년답게 ‘금전과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자신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자기를 가슴 설레며 그려 보았음 직하다. 그것이 그의 “자홀”, 즉 자기도취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모든 똑똑한 소년의 꿈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그가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이라는 더 적극적인 부귀와 지식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말로 바꿈으로써 그것이 더욱 허망함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자기의 욕망에 대하여 스스로 은근히 비판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소년 시절의 자기도취를 지금 그는 자기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는 “시기”는 누구에 관한 것이었을까? 역시 소년기에 쓰인 「그 여자(女子)」에 보면,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 시에 「그 여자」라는 제목이 붙지 않았다면 시 자체로서는 먼저 익어 떨어진 “능금”을 전혀 엉뚱한 사람이 집어 갔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 제목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이 시가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예쁜 여자를 딴 동네 남자가 아마도 결혼하여 데려갔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가 몰래 그리워하던 여자를 빼앗아 간 남자를 질투하는 모양이다. 앞서 「사랑의 전당」에 나온 “순이”가 바로 그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성적 질투나 공부 따위의 집단행동에서의 경쟁자에 대한 시기가 없으면 그는 가벼워져서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그런 연정, 자홀, 시기 따위가 “오늘 따라 금메달처럼 만져”진다고 한다. 이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비유(직유)의 하나이다. 그러한 마음의 온갖 짐이 간단하게 떼어 버릴 수 있는 메달 같은 것이며, 세속적 승리를 상징하는 “금메달”이 떼어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발견은 그가 경험한 놀라운 “이적”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고, 앞뒤의 기도의 말씨에서 친근한 이웃에게 하는 말씨로 돌변한다. 그리하여 번쩍이는 영광의 표시인 금메달이 실상은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는 말은 오로지 그런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갈릴리 호수에서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가 실패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쩌면 “금메달” 같은 마음의 짐들을 떼어 버리면 베드로의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그는 다시 기도의 말씨로 돌아가 직접 기도의 대상에게 간절히 구한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그를 가라앉게 하는 마음속의 짐들을 남김없이 씻어 버릴 수 있을 절대 순수의 순간적 “이적”을 그는 경험했다. 피와 살을 가진 몸뚱이로서 물 위를 걷는 요술 같은 “이적”과는 상관없이 (그런 일은 실상 배를 타면 문제없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를 짓누르는 마음의 짐들을 금메달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진정한 “이적”임을 그는 발견하고 이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모든 평범한 물가는 갈릴리 호숫가가 되고 그는 그 호면으로의 부름을 따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예수의 제자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황혼”처럼,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순수한 시인으로서 자연처럼 호면 위로 걷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신앙만큼 순수한 시도 “이적”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하여 “당신”은 기독교적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서 시라는 이적을 허락하는 또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상당히 모호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124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 오는 밤 댓글:  조회:3201  추천:0  2018-09-12
  비 오는 밤 - 윤동주 솨- 철썩! 파도 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떼처럼 살래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 삼경(三更). 념원. 동경의 땅 강남(江南)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 *** 비 오는 밤을 상상하면... 어둠이 짓게 깔린 고요한 밤... 솨아아---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더욱 외로워집니다... 고독감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가 말끔히 더러운 세상을 쓸고 가듯...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 행동들... 삶의 부정까지도 말끔히 씻겨 갔으면 좋겠습니다...   ==================///   국치(國恥)의 울분을 달래며 한(恨) 맺힌 일생(一生)을 시로 노래하고, 예술과 인생, 그 일치와 완성을 향해 부끄럼 없는 길을 걷고자 념원하신 윤동주님의 뜻을 기리며 "비 오는 밤"을 조용히 읽어봅니다.     ====================/// 고뇌하는 지식인의 상념의 강엔 시대 상황적 암울한 현실이 어둠과 밝음의 대조에서 언제나 꿈틀거린다. 위 시를 읽다보면 마찬가지로 뚫어야함에도 그럴 수 없는 무력이 언제나 저 찬란한 태양빛처럼 밝고 쾌활한 의지력이랴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을 강조 하 듯 살아나는  인식의 생동하는 모습이 내재되어 희망을 사르는 듯하다.   =======================///   광복절에 다시 윤동주를 생각하며[시사비평-함태식] 2009.08.15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인쇄하기 신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 뒷줄 오른쪽, 윤동주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있다.”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이 죽은 윤동주의 첫 시집 를 1948년 펴내며 쓴 서문의 글이다. 일본 유학 중 불온한 사상이라는 죄목으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는 자신의 바램, “내 고향 간도에 묻어 달라”는 말 대로 그의 고향 간도 용정에 묻혀있다. 오늘은 새 아침 서리같이 맑고 명징한 시인 윤동주가 기억나는 광복절이었다.   1917년 태어나 1945 2월 16일 옥사한, 겨우 28년의 삶을 살고 죽은 윤동주를 생각한다. 작년 초부터 이 나라에는 기존의 모든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의로운 죽음으로 세워놓았던 그 아름다운 말들, 생각들조차 의문에 처해졌다. 사람들 스스로 의심하고 사람들 스스로 걱정한다. 사람들 스스로 포기하고 사람들 스스로 말한다. “언제인가 그런 날이 오리라고...” 많이들 지쳤고 또 많이들 포기해 간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랬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 일본의 강점기가 막바지에 이를 때, 누군가도 일본의 종말을 감히 예측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아무도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가지지 못했다. 설사 모든 말들이 막히고 모든 집회가 금지되고 모든 사상이 머릿속에서 나오기 전부터 검열된다 하더라도, '희망'을 검열하진 못했을 텐데, 그 조차 꿈꾸길 두려워했고 그 말 '희망'의 길에 한발 내어 딛지 못했다.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얼마나 어려워질 것인지가 아니다. 차마 말 못하는 무서움은 지난 일 년의 거꾸로 된 역사가 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아니다. 실은 어느새 우리들 가슴과 가슴 사이에 싹터 이제 다 자라버린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 우리 희망에 대한 의심이다. 윤동주는 그 시절의 어느 겨울, 누이에게 편지를 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 전문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윤동주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 불온한 사상을 그대로 품으며 꿈을 꾸고 있었을까?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날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  전문   유신 정권하에서 싸웠던 시절, 그 독한 80년도 공안 정국, 그리고 87년 유월 항쟁, 그 시절 얻고자 했던 것과 지금 바라는 것이 다르지 않다. 역사는 반복이라고 했지만 아직 미완의 것을 이루어가는 그저 그 지난한 길일 뿐이리라. 그 시절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민주, 진정한 자유, 그리고 정의를 맛보지 못했었다. 우리의 자유는 남의 나라 독립선언서에 있었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와 서양 역사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 알았고 그러므로 승리를 늘 예감했었다. 비록 하루 이틀이 늦어질지언정 우리의 승리는 필연이라고. 결코 우리는 승리한다고.   그러나 이제 지난 10년간 우리가 새롭게 감지한 것이 있다. 진정 민주주의는 무력하기 짝이 없고. 진정 자유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진정 민주주의는 지루하고 골치 아프며, 진정 자유는 위험하고 어설프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랬다 진정 민주주의는 완성된 채로 제공되는 질 좋고 힘 있는 규정이 아니고 시시때때로 느닷없이 우리의 희생을 원하고 있음을, 진정 자유롭고 정의로움은 귀찮게도 어느 순간마다 우리의 새로운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놓아버렸다. 돈 안 되는 민주, 자유, 정의보다는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마음 편히 사는 쪽으로. 그래서 나라도 놓아버렸다. 아무렴 죽기야 하겠는가. 그나마 그 놈들 덕에 근대화도 이루고 철도도 뚫렸지 않은가. 매일매일 골치 아픈 결단과 자존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한 평생 아닌가 말이다. 조금은 수치스럽지만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어다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꼬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윤동주 '이적' 부분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 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윤동주 '눈 감고 간다' 전문   윤동주가 태어난 추운 간도의 삭풍보다는 못해도, 이 한 여름 들이닥친 서슬퍼런 사람으로서의 위기에서 그가 꾸었던 불온한 사상을 모두 함께 꾸어보길 희망한다. 원래 불온한 생각은 현실을 생각해야 재미있는 법. 또 다시 저녁 허름한 술자리에서도 끝없이 민주를 이야기하고 도래해야할 새로운 세상을 끝없이 꿈꾸어야하며, 또 다시 흘려야할 지 모르는 피에 대해서도 비장하게 소곤거려야 한다. 그리고 가슴 깊숙이 어느 구석에 품어야 한다. 새로움은 늘 혁명적이라는 것을. 이미 “발 뿌리에 돌이 채였다는 것을” 감지하였으니 눈을 번쩍 떠야 한다는 것을. /가톨릭뉴스   
1243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납인형" 댓글:  조회:3750  추천:0  2018-09-11
납인형은 고대 바빌론에서도 만들어졌으며, 알렉산더대왕은 자기의 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옛날에는 이것을 녹여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저주(咀呪)의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며, 14세기경까지는 사자(死者)를 기리는 뜻에서 교회의 벽에 나란히 세워놓는 풍습도 있었다. 후에는 장난감으로도 만들어져, 시장 같은 곳에서는 납인형 쇼가 열리기도 하였다. 유럽의 납인형은 역사나 일화(逸話)로 유명한 사람의 생존시 그대로의 모습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호기심에 부응하여 발달해왔다. 1761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M.타소는 프랑스 혁명 때 길로틴으로 처형당한 왕족들의 머리를 납세공으로 만듦으로써 납인형 기술의 완성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본인의 컬렉션을 전시한 ‘왁스 뮤지엄(납인형관)’을 개설, 세계 여러 나라의 왁스 뮤지엄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타소의 직계인 타소 공방(工房)이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에 따라 인형을 제작하고 있다. 납인형의 특색은 꼭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사실적인 조소(彫塑)에다 착색을 한 위에 백랍을 치는 독특한 기법을 쓴다. ========================/// 인형의 유래... 인형은 나라마다 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간소한 구성으로서 행복을 부르고 재액(災厄)을 쫓는 종교적인 의미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서도 만들어졌다. 또 문화가 발달하여 미(美)에 대한 감각이 갖추어짐에 따라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미적으로 만들어져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인형도 탄생되었다. 인간을 본뜬 상(像)이 최초로 출현한 것은 구석기시대 오리냐크문화기(BC 25000년경)이며, 이 문화기에 예술작품이 인류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여 유명한 《빌렌도르프비너스》를 비롯한 여성의 흉부나 둔부 등 신체의 특성을 강조한 인물상이 유럽에서부터 시베리아에 걸친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들은 다산(多産)을 상징·기원한 것이라고 하나 인형의 부류에는 넣지 않는다. 그후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인형의 기능을 가진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인형의 기원은 종교적·주술적인 것뿐 아니라 상당히 일찍부터 장난감으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의 어린아이 묘에 인형이 묻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 근처의 하이나란 작은 섬은 섬 전체가 고대 마야 문명의 유적지인데, 점토제의 인물상이 묘, 특히 어린아이 묘에서 다량 발견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소녀와 인형은 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로서 혼기를 맞은 처녀는 필요없게 된 인형을 여신 다이아나의 신전에 바쳤다고 한다. BC 500년 이후의 그리스 인형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인형의 목을 매달고 악의에 찬 주술을 행하는 흑마술(黑魔術)에 인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적(敵)을 본뜬 밀[蠟]이나 납인형을 주문을 외면서 파괴하는 일은 이미 로마 시대에 행해지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에서는 밀인형에 주문을 걸고 심장부를 바늘로 찌르면서 상대방 인물에게 병이나 죽음이 오기를 기원하는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인형은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오래 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품일 것이다. 그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서 얇은 널판지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머리카락 대신에 목제의 염주(念珠) 같은 것을 몇 줄 드리우고 있다. 또, 고대 이집트의 제19왕조(BC 1304∼BC 295)의 유아(幼兒)의 묘에서는 당시의 복장을 한 손이 움직이는 목제 인형이 발견되어 당시 이미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끈을 잡아당기면 널판지 위의 남자가 점토 덩어리를 앞뒤로 움직여서 빵반죽을 하도록 장치된 목각인형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유적에서도 많은 인형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BC 8세기~BC l세기에 만든 타나그라 지방의 초벌구이 소상(小像)은 타나그라 인형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 고대 로마에서는 조상을 본뜬 인형을 신성한 장소에 안치하여 집을 지키는 신(神)으로서 존경을 바쳤으며, 이 풍습은 근래까지도 유럽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밖에 인간을 대신하여 역병(疫病) ·재화(災禍) 등을 떠맡기기 위해, 또는 풍작(豊作)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속신앙적(俗信仰的) 인형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였다. 인형이 오로지 어린아이의 완구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8∼9세기경에는 포제(布製) 인형이 유럽 각지에 있었으며, 13∼14세기에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강탄인형(降誕人形)이 유행하였다. 점차 유럽 각지에 퍼지면서 크리스마스에 교회를 비롯한 일반 가정에서도 그리스도 강탄인형을 장식하게 되었다. 또, 14세기 초에는 파리의 의상점이 아름다운 포제 인형을 고안하여 패션모델 대신 외국에 파송했으며, 이것이 프랑스 인형의 시작이라고 한다. ===================///(참조하기) 윤동주의 서시 원작자가 따로 있는 서신이 나왔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구든 읽으면 마음이 선해지고 숙연해버리는 이 시는 윤동주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천재 시인의 부탁으로 윤동주의 이름으로 기록된 거라는, 윤동주와 그 시인 사이에 오간 편지가 발견됐다.  그 시인은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 이었다. 그 한하운의 유품이 나왔다.    한하운이 윤동주 보다 3살 아래쯤 되고, 이 시를 쓴 것은 21~22세인데 그 때 이미 나병 증세를 본인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작정이었는데 평소에 사랑하던 형, 윤동주를 생각하자  너무나 절실하게 삶이 다가 와서 윤동주의 마음이 되어 이 시를 쓴 모양이다.  써서는 간곡하게 윤동주의 이름으로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윤동주는 옥사를 하고, 한하운은 그 후로도 굳이 밝히지 않았고...   한하운은 그 때 죽지는 않았고, 다시 세상에 나왔는데 이미 나병이 밖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절창의 시들을 썼다. [출처] blog.naver.com/noteksc/221342953636   백구친구 윤동주의 서시 원작자가 따로 있는 서신이 나왔다.|작성자 백구 ・ 2018. 8. 21. 12:21   
1242    윤동주와 송몽규, 정병욱 댓글:  조회:3802  추천:0  2018-09-11
목차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족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지난한 인생살이에 기쁨과 위안을 주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에게는 가족이자 친구로서 평생을 동행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이다. 고종사촌 사이였던 송몽규와 윤동주는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윤동주는 오늘날 민족시인으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2016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계기로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의 가족은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구한말 간도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자 할아버지 송시억이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가다가 길목에 있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에 눌러앉아 터전을 잡았다. 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그의 집안은 전래 초기였던 기독교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몹시 진취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억은 웅상동에 북일학교를 세웠으며, 송창의의 육촌동생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미국에 유학하여 193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송창의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다. 1916년 그는 주시경의 《우리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을 따라 명동촌에 가서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약연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김약연의 딸이자 윤동주의 어머니였던 김용 여사의 눈에 들어 윤신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부터 송창의는 처가에 살면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봉직했고, 일제에 의해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자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17년 9월 송몽규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난 12월 30일 윤신영의 동생 윤영석이 맏아들 윤동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와 송몽규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 시작되었다. 송몽규는 8세 때인 1925년 4월 4일 윤동주, 문익환, 윤영선,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부터 송몽규는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엄하고 코가 커서 명동학교 생도들은 송호랑이, 콧대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윤동주,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리더십이 뛰어나서 늘 앞장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창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송몽규는 교사로 봉직하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그 무렵 춘원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된 제자들에게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과 대의를 일깨워주었다. 재기발랄했던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강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감에 젖었다. 그리하여 19세 때인 1935년 3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혈혈단신 남경에 다다른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을 만나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30여 명의 생도들과 함께 남경의 동관두 32호에 있는 민가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과 중국어 등을 공부했다. 교관은 엄항섭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안공근이었다. 김구는 종종 찾아와 이들의 교육상황을 점검했다. 생도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식비 9원, 용돈 3원, 도합 12원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개월여 뒤 생도들은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에 있는 불교사찰 용지사로 이동하여 10월 초까지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엄항섭이 총책임자였고, 김구의 장남으로 낙양군관학교 1기생이었던 김인이 교관으로 나섰다. 고된 훈련의 와중에도 송몽규는 생도들에게 원고를 받아 등사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려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생도들처럼 왕위지, 송한범, 고문해라는 세 가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송몽규는 정열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하던 생도들이 독립운동의 방법적 문제 때문에 점차 김구파, 김원봉파, 이청천파 등 세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낙양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 생도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송몽규는 용지산에서 내려온 뒤 산동성 성도인 제남(?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웅기경찰서로 복귀한 뒤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송몽규는 경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가 그 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와신상담,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1938년 초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수재 강처중과 함께 3층 꼭대기에 있는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는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 창문으로 내려다본 가을날 달밤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송몽규는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 있던 송몽규는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는 참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회장은 기숙사 동기였던 강처중이었다. 그해 6월 발행한 《문우》에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다. 윤동주는 여기에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문우》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이 일본어로 제한되었지만 시(詩)는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일제의 강요로 문우회가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처럼 부산한 시기에 《문우》가 최후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뒤편에 실려 있는 발행 후기에는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설명하는 송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여름방학을 맞아 윤동주와 함께 용정 집에 들른 송몽규는 집안 어른들의 고답적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졸업을 앞둔 두 사람이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단한 삶에 부대끼고 있던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송몽규는 내심 반발했지만 곁에 있던 윤동주의 만류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식혔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연전의 명예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와 원일한 교수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12월 8일 하오에 체포되어 폐교가 된 감리교 신학대학에 연금되었고, 친일파인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의식을 주관했다. 졸업생은 문과 21명, 상과 50명, 이과 18명이었는데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전체 2등이었으므로 우등상을 탔다. 한데 윤치호 교장이 부상으로 준 보따리를 펼쳐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 일색이었다. 분개한 송몽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성을 내며 책을 땅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그처럼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였지만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 초지를 꺾는 아픔을 겪는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자칫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집안의 설득을 받아들여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그때 윤동주 역시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된다. 당시 두 사람은 도항증명서를 받기 위해 직접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생 명부에 수록된 이름을 새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윤동주는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그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교토에 도착한 송몽규는 명문으로 알려진 제3고등학교 재학생 고희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갔지만 그는 따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가 릿교대학을 나와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그렇게 해서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면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송몽규의 하숙집을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급거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7월14일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갑작스런 조치는 그해 7월 24일로 예정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의 간도 시찰을 염두에 둔 예비검속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몽규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곧 석방될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경찰과 검찰의 지루한 심문이 이어지면서 구금 기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문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혐의의 대강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9년 1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가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체포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이 판결문에 씌어있는 송몽규의 혐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기에 당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재일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이전의 조선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라 확고한 이론 없이 감정적 폭동이라 실패한 것이라 하며, 우리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독립의식을 앙양했다. 둘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최근 조선에서 총독부의 압박으로 소학생, 중등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어와 조선문이 멸망해가고 있으며, 만주국에서는 조선인들이 식량배급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최근의 징병제도는 훗날 조선독립을 실현할 때 일면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송몽규는 하숙집에서 윤동준, 백인준에게 징병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징병제도 때문에 조선인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까지 얻으면 장차 일본이 패전할 무렵 우수한 지도자를 앞세워 무력봉기를 결행하여 독립을 실행할 수 있으며, 독립 초기에는 군 출신의 인사를 내세워 강력한 독재를 취해야 하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함께 실력을 양성하자며 독립 의식의 강화를 꾀했다. 넷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태평양전쟁은 강화조약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데, 그 과정에서 버마, 필리핀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니, 우리도 그때 조선독립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단숨에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며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다섯째, 송몽규는 6월경 윤동주에게 찬드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민족의식은 왕성하므로 훗날 일본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면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테니 그를 도와 궐기하자며 서로 격려했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데 그 다음날인 3월 7일에 송몽규마저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친척들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이 투옥 이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남김으로써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시 조카에 이어 아들의 부음까지 들은 어머니 윤신영은 주먹으로 가슴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버지 송창의의 처신은 더욱 비장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의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뼈를 빻는 자리에서 뼛가루가 주위에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몽규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1945년 5월 20일 언 땅이 녹자 아버지는 애달픈 심정으로 그의 무덤 앞에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훗날 유족들은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학계 공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재일유학생에 대한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검거되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송몽규와 윤동주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송몽규의 삶은 일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해맑은 윤동주의 시어와 함께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각주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 룡정도심에서 윤동주의 거처 집터 확인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  윤동주와 정병욱의 사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유고 시가 보존됐던 진월면 망덕리의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마루 밑에 숨겨진 윤동주 시인의 친필원고는 그의 사후에 유고로 공개된다         전남 광양시의 정병욱 가옥. 윤동주는 시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이양하 등이 반일작가로 낚인 찍힌다고 말려서, 일본으로 유학(도지샤대학)을 떠나기 앞서 친우 정병욱에게 시의 원고를 맡겼다. 정병욱은 일제말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직전 그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다시 맡기면서 '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에 보내주라'고 하여 그 어머니는 이 집의 마루밑에 곱게 싸서 감추어 두었다. 정병욱은 무사히 돌아왔으나 윤동주는 후쿠오카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 송별회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이 사진으로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우지시의 시민들은 인근 우지공원에 윤 시인의 기념비를 세우고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 시집을 발간해 한국 근대문학사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윤동주 시인.       해환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긴다. 그리고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해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게 된다. 이때부터 윤동주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소양을 보이며, 여러 편의 시를 남긴다.     윤동주와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집앞골목길 왼쪽 처마가 보이는 한옥 기와집이다       이후 18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게 되며,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해 본격적으로 시인에 등단하게 된다.  이후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하숙집 후배인 정병욱에게 친필원고 1부를 보관해줄 것을 부탁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다. 정병욱은 이후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필사본 원고를 맡기면서 아주 귀중한 것이니 일본인들에게 들키지 말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하며, 혹시 광복 후에도 자신이 전사해서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에게 가져가 시집이 발간 등을 통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에 정병욱의 어머니는 일제의 징발을 피해 이집(현재 망덕리 23번지)의 마루 밑 공간에 보관했다가 광복 후 아들이 돌아오자 정병욱은 윤동주의 형인 윤일주와 함께  1948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처음 발간하게 된다. 한편 윤동주 시인은 1942년 도쿄의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교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학을 가게 되고, 1947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검거돼 2년형을 선고 받은 후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동시에 특정한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는 정병욱 가옥은 건축물 자체보다 윤동주 원고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보존의 가치가 더해지고 있다.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정병욱의 옛집 지금은 바다쪽으로 20m 정도 나와 매립되어 돌축대가 없어졌다.    
124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어머니 댓글:  조회:5457  추천:0  2018-09-11
어머니 /윤동주 좋은 글      어머니 / 윤동주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어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워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자랐나이까? 오늘도 흰 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 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납인형도 싫어진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줄근히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리까?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어 주시오. 1938.5.28.     이 시는 윤동주가 그의 어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하였다. 먼저 '수염자리 잡히도록' 이란 표현은 보통 수염이 14세 정도부터 난다. 이것을 보면 그 시대로는 애어른이 되었는데도 흰 주먹, 즉 밥이 입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단에서도 어머니께 달래어 달라는 것을 보면 보이그룹 위너의 랩퍼 송민호의 곡인 '겁(Feat : 태양)'과 같이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은 힘들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윤동주는 굉장히 여린 사람 중 하나. 그에게 어른이 되는 것은 아직 힘들었었던 것 같다. 나도 아직 어리지만 점점 커가는 중에 힘드는 점이 있다. 이것은 모두가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그에 필요한 책임도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가만히 있거나 운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힘들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은 인생에 꼭 필요한 힘 중 하나다. 아마 윤동주도 그래도 일본 유학을 간 것을 보면 힘들고 부끄러운 것을 알고 극복해나가려 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나도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극복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별'·'부끄러움'" / 2017.04.22.  독자들은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서 '별'과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인터넷 이용자 1천8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 312명이 '별'을 들었고 '부끄러움'(249명), '성찰'(78명)이 뒤를 이었다.     "'저항시인'보다 '성찰·실천하는 시인'으로 인식"..김응교 교수 설문조사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독자들은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서 '별'과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인터넷 이용자 1천8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 312명이 '별'을 들었고 '부끄러움'(249명), '성찰'(78명)이 뒤를 이었다. 윤동주의 시 중에서도 유독 별이 등장하는 작품을 독자들이 사랑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시로는 응답자의 667명이 '서시', 384명은 '별 헤는 밤'을 들었다. '별 헤는 밤'에는 별이 12번, '서시'에도 2번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96명),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73명),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73명) 등 별을 그린 시구가 많이 꼽혔다. 윤동주는 어떤 시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자기성찰하고 실천을 꿈꾸었던 시인'이라는 응답이 529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자기성찰의 시인'이라는 응답이 275명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민족시인'(79명)이나 '저항시인'(89명) 등 그동안 교과서에서 주로 써온 수식에 동의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기독교 시인'이라는 응답자는 5명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윤동주를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시인으로만 한정하면 더 많은 공감대를 갖고 세계인에게 다가갈 윤동주 시의 넓은 모습을 막아버리는 문제가 생긴다"며 "응답자들이 '성찰'과 '실천'을 같은 무게로 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결과는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27일 광화문 교보빌딩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2017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 목차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작품 설명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핵심 정리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이해와 감상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작품 설명 [발상과 표현의 유사성]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는 고향을 떠나 있는 화자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화자는 어떤 매개물을 통해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으며,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상과 표현 방법이 유사한 시이다.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핵심 정리   별 헤는 밤 흰 바람벽이 있어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회상적, 성찰적, 의지적, 사색적 회고적, 의지적 제재 별 타향에서의 고단한 삶 주제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성찰 고단한 삶 속에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특징 ① ‘현재 -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산문적 리듬을 가진 연을 삽입하여 운율의 변화를 줌. ① 화자의 내면 풍경과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형상화하여 표현함. ②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함. ③ 화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됨.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이해와 감상 별 헤는 밤(윤동주) 이 시는 부정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화자가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통해 현재의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이 시는 고향을 떠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화자가 쓸쓸한 흰 바람벽을 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감상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흰 바람벽에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화자는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지만 곧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현재 자신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1240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보헤미안" 댓글:  조회:3685  추천:0  2018-09-10
보헤미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위키낱말사전 bohemian 보헤미안(Bohemian)은 다음을 가리킨다. 보헤미안의 어원은 프랑스어 보엠(Bohême)으로,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15세기경부터 프랑스인이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근성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필리스틴(Philistine)에 대조되는 말로 쓰였다. ‘보헤미안’이란 영어를 일반화시킨 작가는 사카레이다. 또한 이 말은 집시처럼 방랑하는 방랑자(vagabond)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123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야행 댓글:  조회:3363  추천:0  2018-09-10
야행                     /윤동주 정각! 마음이 아픈데 있어 고약을 붙이고 시들은 다리를 끄을고 떠나는 현장 -기적이 들리잖게 운다. 사랑스런 녀인이 타박타박 땅을 굴려 쫓기에 하도 무서워 상가교를 기여넘다. -이제로부터 등산철도 이윽고 사색의 포풀러턴넬로 들어간다 시라는것을 반추하다 마땅히 반추하여야 한다. - 저녁 연기가 노을로 된 이후 휘바람 부는 햇귀뚜라미의 노래는 마디마디 끊어져 그믐달처럼 호젓하게 슬프다. 늬는 노래 배울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나보다 - 늬는 다리 가는 쬐꼬만 보헤미안 내사 보리밭 동리에 어머니도 누나도 있다. 그네는 노래 부를줄 몰라 오늘밤도 그윽한 한숨으로 보내리니....                                         1937년 7월 26일 (이 시는 1937년7월26일 씌여진것으로 제2습작시집에 실려있다. 이시에는 식민지 청년의 내적인 고뇌,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시대적 짐을 지지 못하고 가는 자아에 자기 가학적 고통의 세계가 드러난다.) 새로 발굴된 이 시들은 1934-1939년 즉 18세로부터 25세 사이에 룡정 은진학교와 광명학교, 평양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을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우며 썼던 문학습작기의 작품들로 추정됩니다. 많이 읽고 즐거운 시간 되길 바랍니다. 1. 창구멍 바람부는 새벽에 장터가시는 우리압바 뒷자취 보고싶어서 춤을 발려 뚫려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츰해 빛어옵니다 눈나리는 저녁에 나무 팔려간 우리압바 오시나 기다리다가 이끝으로 뚫려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2. 가슴 2 늦은 가을 스트램이 숲에 쌔워 공포에 떨고 우슴웃는 흰달생각이 도망가오 3. 개 이 개 더럽잔니 아-니 이웃집 덜정수개가 오날 어승렁어승렁 우리집으로 오더니 우리 집 바두기의 미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맛겠지 더러운줄도 모르고 보기숭해서 막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느냐 하는 상으로 뛰여가겠지요 나-참 4. 울적 처음 피워본 담배맛은 아츰까지 목안에서 간질간질 타 어제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보았더니 5. 야행 정각! 마음에 아픈데 있어 고약을 붙이고 시들은 다리를 끄을고 떠나는 현장 -기적이 들리잖게 운다 사랑스런 녀인이 타박타박 땅을 굴려 쫓기에 하도 무서워 상가교(上架橋)를 기여넘다. -이제로부터 등산철도 이윽고 사색의 포푸라텐넬로 들어간다 시라는 것을 반추하다 마땅히 반추하여야 한다. -저녁연기가 놀로 된 이후 휘파람 부는 해 귀뚤램이의 노래는 마디마디 끊어져 그믐달처럼 호젓하게 슬프다. 늬는 노래배울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나보다 -늬는 다리 가는 쬐꼬만 보헤미언 내사 보리밭동리에 어머니도  누나도 있다 그네는 노래부를줄 몰라 오늘밤도 그윽한 한숨으로 보내리니.... 6. 비ㅅ뒤 《어-얼마나 반가운 비냐》 할아버지의 즐거움 가물듯엇든 곡식 자라는 소리 할아버지 담바 빠는 소리와 같다 비ㅅ뒤의 해ㅅ살은  풀잎에 아름답기도 하다. 7. 어머니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여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혀 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살았나이까? 오늘도 한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랍인형도 쓰러진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우주군히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릿가?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여주시오 8. 가로수 가로수, 단촐한 그늘밑에 구두술같은 혀바닥으로 무심히 구두술을 핥는 시름 때는 오정 싸이렌 어데로 갈것이냐? ㅁㅁ그늘은 맴돌고 따라 사나이도 맴돌고     ===========================/// 尹東柱 童詩의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張貞姬*   본고는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화자의 욕망에 관한 연구이다. 살펴보면, 놀이 모티프는 그의 동시 절반에 걸쳐 직․간접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변주되 고 있다. 화자의 놀이 상황이 직접 표출된 시로는, 「조개껍질」, 「빗자루」, 「해비」, 「굴뚝」, 「참새」, 「반딧불」, 「호주머니」, 「둘 다」, 「만돌이」, 「못 자는 밤」 등을 들 수 있다. 본고는 윤동주 동시의 놀이 모티프와 화자의 욕망을 (1)내면의 지도와 식민 주체의 욕망, (2)주체의 자기 인식과 해학적 동심, (3)따뜻한 동심의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 공간 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윤동주 동시의 첫 작품이기도 한 「조개껍데기」에는 소꿉놀이의 행동을 통해 상실된 관계의 회복을 희구하는 화자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오줌싸개 지도」에서는 화자의 욕망이 식민지 주체의 국토 상실 의식을 보여 주는 심층적 지도로 나타나는데, ‘오줌’을 재료로 한 ‘그림 그리기’라는 놀이 형태와 결합되고 있다. 또, 「전봇 대」에서 화자는 전봇대를 놀이 공간으로 변용시켜 돌을 겨누어 맞춤으로써 시험에 억압 된 욕망을 해소하고 있다. 윤동주 동시는 놀이 모티프와 연계하여 따뜻하고 해학적인 동심이 표출시키는 주된 특징을 보여 준다. 윤동주는 놀이라고 하는 아동의 실생활 체험과 심리적 변화를 민감 하게 포착하여 동시 창작에 원용하였으며, 이는 동시 형성의 핵심적 원리인 동심(童心) 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제어 : 윤동주, 놀이 모티프, 화자의 욕망, 오줌싸개 지도, 만돌이 * 고려대학교 146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Ⅰ. 들어가며 본고는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그 가운데 투사된 화자의 욕망에 관해 살펴보고자 하는 연구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윤동주의 본격 동시 작품은 대략 37편 정도로 파악된다. 이 편수는 윤동주가 ‘동요’라는 장르명칭을 최초로 붙 이고 있는 1935년의 「조개껍질」부터 해서 1938년 5월 창작하여 1939년 3월 소년에 발표된 동시 「산울림」까지 이루어진 동시의 성취를 헤아려 본 것이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의 동시 범주에서 볼 때 윤동주의 동시 는 43편까지 수용이 가능하다.1) 이러한 수치는 윤동주 시 전체 가운데 3분지 1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무엇보다 9년에 불과한 그의 전체 창작 활동 기간 가운데 4년(1935~38)에 걸쳐 매우 집중적으로 동시 창작   1) 윤동주 동시의 분류에 대해서는 부가적 설명이 필요하다. ① 언급한 바와 같이 윤동주의 본격 동시는 대략 37편 정도이지만, 일반적으로 동시 분류에서 제외되고 있는 「비둘기」(1936), 「가슴1」(1936), 「빨래」(1936), 「새로운 길」 (1938), 「눈감고 간다」(1941), 「못 자는 밤」(1941) 등의 작품도 넓은 의미에서 동시 범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홍장학의 정본 윤동주 전집(문학과 지성사, 2004) 에서 동시로 분류한 「황혼이 바다가 되어」, 「야행」과 같은 작품은 시어의 운용 및 주제의 형상화 측면에서 동시로 보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 ② 연구자의 견해에 따라 1934년 12월 24일에 쓴 「내일은 없다」가 최초의 동시로 파악되기도 한다. 홍장학의 정본 윤동주 전집에서도 「내일은 없다」부터 윤동주의 동시로 분류하고 있다. 「내일은 없다」와 「조개껍질」은 모두 윤동주의 자필시고집인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윤동주는 「조개껍질」부터는 분명히 ‘童謠’라고 장르명이 표기해 두고 있다. 그 바로 앞에 수록된 「내일은 없다」는 따로 장르명을 표기하지 않았다. 「내일은 없다」에는 ‘어린 마음이 물은’이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 내일 내일 하고 찾던 화자가 자고 보니 오늘이더라는 1연과 2연의 대비적 내용과 구조는 내일에 가보고 싶은 동심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지만, 3연의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하는 데서 지나친 조숙성과 운명의식을 노출시켜 아동의 동심과 멀어 졌다. 동시문학의 잠재적 독자인 어린이를 파악하여 동심의 시선으로 창작한 본격 동시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시 습작에서 본격 동요․동시로 이행해 가는 단계에 놓여 있는 징검다리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재철․김용희 등 한국 아동문학 학계에서 는 대체로 「조개껍질」이 윤동주의 최초 동시라는 데 견해의 일치를 보인다.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47   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동시 장르에 대한 윤동주의 자각과 본격 장르 의식을 예증해 주고 있다. 윤동주 동시의 연구를 보면, ‘세계의 모습을 여러 위상에 밝히려는 탐 구활동의 일부’로 파악하여 윤동주의 동시가 그의 시세계를 확장해 나가 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 김흥규의 초기 지적이 있다.2) 이후 김수복은 역사주의적 접근법으로 윤동주의 동시에 나타난 민족적 어린 이의 현실과 비극적 동심 세계를 다루었는데,3) 이후 윤동주의 시 세계를 저항시로 귀결시킨 ‘의도된 오류’를 시인하면서 윤동주 시 연구의 한 시론으로 윤동주 시에 나타난 상징적 체계와 원형적 패턴을 고찰하기도 했다.4) 한편, 이재철은 시인 윤동주를 최초로 아동문학가가의 한 사람으로 분류하며 그의 아동문학사적 위치를 정립하고 있다. 먼저 윤동주의 동시 를 ‘유아기로의 퇴행’, ‘심리적 퇴행에서 오는 현실 생활의 파탄’으로 규정한 김열규의 견해5)가 근본적으로 동시에 대한 개념의 혼란에서 비 롯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6) 고형진은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첩어’와 화법상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구어체 어조’의 활용에 주목하면서 그의   2) 김흥규, 「윤동주론」, 창작과 비평 33호, 1974. 3) 김수복, 「윤동주 연구」,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1979. , 「윤동주의 동시 연구」, 한국아동문학연구, 일지사, 1980. 4) 김수복, 「윤동주 시의 원형상징 연구」, 국문학논집 12집, 1985. 5) 김열규, 「윤동주론」, 국어국문학 27집, 1964. 6) 이재철은 이 글에서 ‘동시’와 ‘아동시’의 구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흔히 동시를 ‘아동이 쓴 시’, ‘어른이 어린이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 쓴 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동이 쓴 시는 ‘아동시’이지 동시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동시의 주된 독자가 어린이인 것은 틀림없지만 어른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동시가 많다는 점에서 동심의 시선이 결코 심리적 퇴행은 아니며 오히려 윤동주가 “내적 고통의 상처를 童心 으로 감싸려는 노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현실적 아픔을 잊고자 동심의 공간 안에 순수 의 세계를 복원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재철, 「한국아동문학가연구(3)」, 단국대 국문학논집 15집, 1984. 148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동시 창작 기법을 분석하여 기법적 측면의 연구 영역을 넓혔다.7) 본고가 연구하고자 하는 윤동주의 놀이 모티프에 대해 처음 주목한 이는 최명표이다. 그는 윤동주 동시에 줄곧 등장하는 모티프의 변주에 초점을 겨누면서 그의 동시 세계가 상실당한 고향을 되찾으려는 ‘고향 모티프’를 기반으로 삼아 고향에 대비되는 ‘도시 모티프’, 고향집을 구성 하는 ‘식구 모티프’, 식구와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 모티프’로 변주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8) 최근에 제출된 김용희의 연구는, 윤동주 동시의 정체성을 ‘동요시’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윤동주의 동시가 지니는 한국 동시문학사적 의미를 논의하였다.9) 그밖에 본고가 검토한 연구로는 김효중10)․윤삼현11)․박종은12)․곽 춘옥13)이 있다. 이 가운데 윤동주 동시의 이미지 활용법에 대해 주목한 김효중의 연구는 윤동주 동시에 대한 방법론적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어 주목을 끈다. 윤동주의 동시에 전래동요가 수용된 양상을 살피는 박종은 의 연구는 경북 지방의 구전 동요 「꿩서방」과 윤동주의 「무얼 먹고 사나」 의 유관성을 분석하고 있다.   7) 고형진, 「윤동주의 동시 연구」, 어문학연구 5집, 1997. 8) 최명표, 「윤동주론 -원시적 평화의 훼절과 심리적 대응」, 아동문학평론 27권 1~3호, 1992. 9) 김용희는 윤동주가 동요, 동시를 발표하던 시기를 새로운 시적 성찰을 거쳐 시적 속성을 띤 시적 동요, 즉 동요시가 촉발된 시기로 파악하고, 이러한 새로운 시형을 촉발시킨 정지용, 강소천, 박영종(목월)의 계보 위에서 윤동주의 동시문학사적 위치를 부여한다. 또한, 윤동주의 동요시가 해방 이후 한국 동시문학에 형태의 자유로운 변이 와 사유의 깊이에 대한 시적 충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1950년대 최계락 등의 형상 동시 출현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용희, 「윤동주 동요시의 한국 동시문학사적 의미」, 아동문학평론 35권 3호, 2010. 10) 김효중, 「윤동주의 동시세계」, 국어국문학 108호, 1992. 11) 윤삼현, 「윤동주 시에 나타난 동심적 세계관」, 현대문학이론연구 27집, 2006. 12) 박종은, 「전래동요의 관점에서 본 윤동주의 시세계」, 한국문학연구 4집, 1995. 13) 곽춘옥, 「윤동주의 동시에 관한 고찰」, 청람어문학, 1989.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49   이상의 연구사 검토를 통해 본고가 도출한 몇 가지의 의미 있는 사실은 첫째, 윤동주의 동시가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형이 된다는 것이요, 둘째, 1930년대 중반 윤동주의 동시가 놓여 있는 한국 동시문학 사인 위상이요, 셋째, 식민지 민족 현실의 자각 아래 이루어진 윤동주 동시의 현실 인식의 제고, 넷째로는 창작 기법 상으로 두드러지는 윤동주 동시의 반복적 패턴과 어조, 언어의 운용 및 이미지의 활용이 동심적 표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상황에서 ‘시인 윤동주 시 읽기’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이유 를 묻고 있다.14) 특히 최근 윤동주 동시의 원형적 동심상이 그의 시 전편 에 흐르는 시 세계의 특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동시에 대한 본격 적인 연구가 진척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수백 편에 이르는 윤동주의 일반 시 연구에 비해 그의 동시를 조명하려는 본격 연구가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본고는 그 동안 주목되지 못했던 윤동주 동시의 놀이모티프에 대한 연구이다. 아동 생활의 원초적 경험이 되는 ‘놀이’의 관점을 통해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놀이 세계의 심층적 의미망을 탐색해 보려는 데 그 연구 목적이 있다. 먼저, 놀이모티프의 유형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 놀이 세계 에 투영된 시적 화자의 욕망을 분석해 볼 것이다.   14) 최동호는 ‘오늘의 상황에서 윤동주 시읽기’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를 첫째, 윤동주 가 지향한 인간적 자기 완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는 점, 둘째, 그가 지닌 역 사의식과 그 방향성에 대한 감각이 미래의 세대가 지녀야 할 중요한 시대적 감각이 라는 점, 셋째, 윤동주가 사랑하고 갈고 닦은 순도 높은 우리 모국어라는 점의 세 가 지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최동호, 「오늘의 상황에서 윤동주 시읽기」, 육필 원고 대 조 윤동주전집, 서정시학, 2010, 241-242쪽. 150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Ⅱ. 윤동주 동시의 놀이 모티프 유형과 그 특성 ‘놀이’의 관점으로 윤동주의 동시 세계의 특성을 해명해 보려는 이 방법론은 기왕의 ‘저항시인’, ‘민족시인’, ‘순절시인’으로서 고정된 윤동 주 이미지와는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놀이는 그 자체로 아동의 일상이며 동경 세계이다. 소박․단순하며 직관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동심은 매우 천진하고 자율적이기 때문에, 어른의 강제된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 시 해석이 주된 준거 역할을 해왔던 ‘저항시’ 담론을 넘어, 그의 동시 세계의 분석은 아동의 관점에 의한 동심의 시각으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윤동주의 동시는 전반적으로 아동의 생활을 밑바탕에 두고 있으며, 정적인 내향화(內向化)보다는 동적인 외향화(外向化)의 길을 추구한다. 그가 남긴 일반 시편에 비해서 볼 때는 밝고 낙천적이며 해학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궁극적으로 윤동주의 동시 세계는 부정의 현실을 극복하는 긍정의 동심 세계로 나아가며, 그것은 곧 강한 빛 지향의 이미지로 표출 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윤동주 동시의 이러한 특징적 경향들은 무엇보다 어린이의 눈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동심(童心)을 중요한 창작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세계로 인도하는 매개적 역할로 작용 하고 있는 것이 그의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이다. 놀이 모티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동시를 예로 들더라도, 「조개껍 질」, 「빗자루」, 「해비」, 「굴뚝」, 「참새」, 「반딧불」, 「호주머니」, 「둘 다」, 「만돌이」, 「못 자는 밤」 등 다수에 이른다. 「조개껍질」에서 화자는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를 장난 감 삼아 굴리며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빗자루」에서는 누나하고 가위로 종이 오리기를 하며 저고리도 만들고 큰 총도 만든다. 이 일로 그만 방바 닥이 어지러워져 화자는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볼기짝을 맞게 된다. 「굴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51   뚝」에서는 산골짝 아이들이 모여 감자를 구워 먹는 구수한 장면을 그려 보여 준다. 「둘 다」는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기, 하늘을 향해 침 뱉기 등, 천진한 어린 화자의 혼자놀이가 나타나며, 「만돌이」에서는 전봇대를 겨누고 그것을 몇 개까지 맞추나 스스로 내기를 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자연으로 확장된 놀이 공간으로는 「반딧불」과 「해비」가 대표적인데, 「반 딧불」에서는 숲 속으로 달 조각을 주우러 가는 아이들의 흥겨운 행렬이 묘사되며, 「해비」에 이르면 하늘다리(무지개)를 놓아 동무들을 불러 모아 함께 춤을 추는 한 바탕 축제로 이어지게 된다. 윤동주 동시를 살펴보면 그 절반 이상의 편수에서 직․간접적인 놀이 모티프가 변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 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 윤동주의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의 분석 도표15) 순번 창작 연도 제목 놀이 모티프 공간 구성 도구 시간 1 1935. 12. 조개껍질 소꿉놀이 바닷가 1 조개 낮 2 1936. 1. 6. 고향집     3 1936. 1. 6. 병아리 말놀이 마당 2 낮 4 1936 오줌싸개지도 지도그리기 담요 위 1 오줌 낮 5 1936 창구멍 창구멍내기 집안 1 손가락 새벽 6 1936 기와장 내외     7 1936. 9. 9 빗자루 종이놀이 집안 3 종이,가위 전날~아침 8 1936. 9. 9. 해비 하늘다리축제 들 다수 춤 비그친 낮 9 1936. 10. 초 비행기     10 1936. 10. 23. 가을밤 오줌 싸기 마루 1 오줌 가을밤 11 1936. 가을 굴뚝 감자 구워먹기 산골 다수 감자 낮 12 1936.10. 무얼 먹구 사나     13 1936. 10 봄     14 1936. 12 참새 말(글씨) 놀이 앞마당 1 낮   15) 본고는 윤동주의 본격 동시 37편 외에 넓은 의미의 동시 범주로 볼 수 있는 6편의 시(순번 38~43)를 포함하여 43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52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15 1936 개1 눈밭에서 뛰기 앞마당 1 겨울/낮 16 1936 편지 편지놀이 집 1 편지봉투 겨울/낮 17 1936. 12. 초 버선본 버선본 만들기 집안 1   18 1936.12. 이불     19 1936 사과 사과 나눠먹기  다수 사과   20 1936 눈     21 1936 닭2     22 1936. 겨울 겨울     23 1936 호주머니 손놀이 주머니속 1 손 겨울/낮 24 1937 거짓부리 거짓놀이 집마당 1 겨울 밤/낮 25 1937 둘 다 돌던지기/ 침뱉기  1 돌, 침   26 1937 반딧불 줍기놀이 숲 다수 그믐밤 27 1937. 3 밤     28 1937.3.10. 할아버지     29 1937 만돌이 전봇대맞추기 공차기 거리 1 돌 낮 30 1937 개2 개후쫓기 마당 1 낮 31 1937 나무     32 1937 비뒤     33 1938. 5 산울림 메아리 산골 1 낮 34 1938 해빛 바람 문풍지 뚫기 집안 1 손가락 새벽 35 1938 해바라기 얼굴     36 1938 애기의 새벽     37 1938 귀뚜라미와 나와 비밀놀이 잔디밭 1 달밝은밤 38 1936 빨래 귓속이야기 빨래줄 1 낮/7월 39 1936. 3. 25 가슴 1     40 1936. 2. 10 비둘기     41 1938 새로운 길     42 1941. 5. 31 눈감고 간다     43 1941 못 자는 밤 셈놀이  집 1 별밤 본고가 동시로 분류한 43편의 동시 가운데 놀이 모티프가 나타난 것은 4편으로 50%를 상회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장난감이 풍족하지 않았던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53   시대였던 만큼 놀이의 도구가 되는 것들은 주로 침․오줌․주먹 같은 신체의 일부, 길거리의 돌멩이, 빗자루․종이․버선본 같은 생활 속 소품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놀이의 도구는 친자연적이며, 때로는 숲 속에 떨 어진 달 조각을 줍는다는 「반디불」에서와 같이 천체적 상상력으로 확장 되기도 한다. 놀이 구성원을 보면, 매우 내성적인 성향을 보여 주는데 대부분 혼자 놀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2인 이상이 참여한 경우는 2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윤동주 동시의 놀이 모티프는 크게 보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언어와 감각 놀이 유형으로, 주로 말놀이나 글씨 쓰기, 숫자 놀이, 신체의 일부를 활용한 놀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청각적 체험에 의한 ‘메아리 듣기’가 나타나는 「산울림」,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손감각을 즐기는 「호주머니」, 밤하늘의 별을 세는 「못 자는 밤」, 의성어와 의태어 활용을 통해 놀이의 실감을 높이는 「병아리」․「참새」․「거짓부리」 등의 시편을 들 수 있다. 둘째, 경험적 생활 놀이 유형으로, 대체로 집안이나 마당, 거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아동 화자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며, 집안의 식구들과의 관 계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되는 특징을 보인다. 윤동주 동시에 있어 가장 분포도가 높은 놀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개껍데기를 굴리며 소꿉 놀이를 하는 「조개껍질」, 장날 새벽에 엄마 아빠와 떨어져 혼자 방안에 남아 창에 구멍 내기 놀이를 하는 「창구멍」․「햇빛 바람」, 하늘과 바다, 또는 전봇대를 대상으로 침 뱉기나 돌을 던져 맞추기 놀이를 하는 「둘 다」․「만돌이」, 누나와의 종이 오리기 놀이와 그로 인한 소동이 해학적 으로 그려진 「빗자루」, 국토에 대한 열망을 지도 그리기로 나타낸 「오줌 싸개 지도」 등의 시편이 여기에 속한다. 154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셋째, 자연 공동체 놀이 유형으로, 산이나 들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놀이나 다수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이루는 특징을 보여준다. 동네 아 이들이 모여 감자 구워먹기를 하는 「굴뚝」, 숲속으로 열을 지어 달 조각 을 주우러 가는 「반디불」, 비가 온 뒤 무지개가 뜬 들판에서 춤을 추는 「해비」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윤동주 전체 동시에서 볼 때, 공동체적 놀이 성격이 크게 나타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암울한 시공간 가 운데 빛을 지향하는 동심적 화자의 동경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Ⅳ. 놀이 모티프에 나타난 화자의 욕망 분석 1. 내면의 지도와 식민 주체의 욕망   놀이는 아동의 총체적 성장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놀이’는 곧 아동의 생활 자체이면서 그 자신의 감추어진 욕망의 실현 과정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놀이 모티프를 그의 동시에 적극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아동이 아니라 구체적 아동의 현실적 감각을 형상 화하였다. 「조개껍질」은 윤동주가 평양의 숭실학교에 재학 중인 1935년 12월에 쓴 작품으로 최초의 본격 동시이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잃은 조개껍대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조개껍질-바닷물 듣고 싶어」 전문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55   4연 12행으로 이루어진 이 동시는 잃어버린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희 구하는 화자의 욕망을 소꿉놀이 속에 투사시키고 있다. 놀이에 열중한 화자의 상상 공간은 넓은 바닷가 모래밭으로 펼쳐진다. 그곳에서 언니는 “아롱아롱”한 조개껍데기를 주워 왔다. 그러나 그 조개껍데기는 “짝 잃 은 조개껍데기”로 표현된다. 나머지 한쪽을 잃어버린 조개껍데기의 형상 은 파괴된 공간에 대한 자각과 운명적 결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 기에 조개껍데기를 “데굴데굴 굴리며” 노는 소꿉놀이의 행동은 “짝 잃은 조개껍데기”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원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이 되고 있다. 윤동주 동시에는 화자를 가족 구성원으로 ‘언니’, ‘누나’, ‘어머니’, ‘고 향’, ‘고향집’, ‘아빠’, ‘아버지’ 시어가 자주 출현한다. 아동의 시기에 가 족이라는 공간은 각별히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성장기의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족이 라는 공동체는 더욱 불가결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린 화자가 느끼는 엄마 아빠의 부재 의식은 성인이 받아들이는 깊이와 비견되지 못한다.   바람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창구멍」(1936년) 전문   156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손가락에 침 발라 쏘--ㄱ,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ㄱ,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빤짝. 손가락에 침 발라 쏘--ㄱ,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ㄱ,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해빛․바람」(1938년) 전문   이 두 시편은 시상 전개로 보아 「창구멍」을 후에 「해빛․바람」으로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첫 번째 동시의 ‘창구멍’이라는 제목을 버리고 개작된 동시에서 ‘해빛․바람’으로 붙인 것이 눈길을 끈다. 「창구 멍」에서는 유난히 뚫려 있는 ‘창구멍’이라는 어휘가 강조된 데 비해, 「해 빛․바람」에서는 ‘창구멍’이라는 어휘가 종적을 감추고 “쏘--ㄱ, 쏙, 쏙” 하고 창구멍을 내는 화자의 행동이 동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2년 사이에 윤동주의 동시 창작 기법이 이만큼 달라질 수 있었던 데는 동시를 완성하 기 위한 윤동주 자신의 정려한 열의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 다. 비록 기다리는 대상이 ‘아빠’에서 ‘엄마’로 바뀌었지만, 두 편의 동시 가 형상화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와 그 성취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는 점에서 두 시는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57   즉,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는 화자의 행위는 「창구멍」보다는 「해빛․바 람」이라는 동시에서 보다 더 놀이답게 그려진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뚫는 ‘창구멍’이나 ‘문풍지’는 어린 화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놀이 공간이 다. 저를 남겨 놓고 혼자 장에 가시는 엄마 아빠에 대한 야속함과 그리움 이라는 화자의 복합적 심리는 구멍을 뚫는 행위로 표출된다. 즉, 이 동시 에서 창이나 문풍지의 ‘구멍 뚫기’ 행위는 그리움을 감추려는 화자의 은폐 심리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 표현이 역설적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쏘-ㄱ, 쏙, 쏙” 하고 몇 차례나 이어지는 반복적인 연속 행동은 이미 소리의 맛을 즐기는 놀이로 발전되었음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주저 하듯 “쏘-ㄱ” 머뭇거리며 뚫다가 이내 급한 마음에 “쏙, 쏙” 거침없이 뚫어버리는 화자의 행동을 통해 심리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놀이는 카타르시스의 정화 작용으로 갈등과 긴장 을 해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는 ‘fort/da’(없다/있다) 놀이가 어린이에게 대상의 사라짐과 되돌아옴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사라진 엄마에 대한 불안을 이 놀이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16) 이 동시에서 화자가 뚫어 놓은 소통의 구멍 역시 엄마와 아빠의 부재를 확인하는 ‘없다/있다’의 놀이 유형으로 변주된다. 두 시편의 구도 는 모두 ‘가고/옴’이라는 이원적 순환 구조를 띠고 있으며, 이 같은 동일 구조의 반복은 기다리고 있는 어린 화자의 마음이 갈 때나 올 때나 변하 지 않고 그대로라는 것을 형식미를 통해 구현해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침 발라 뚫어 놓은 구멍에서 “아롱아롱 아침해”, “햇빛이 반짝” 비친다는 표현에서 엄마 아빠의 부재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밝은 동심의 화자를 확인하게 된다.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는 피식민지 주체의 국토에 대한 억압   16) 프로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역, 민음사, 1997. 158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된 욕망을 ‘지도 그리기’라는 놀이 세계로 구현하고자 한다. 먼저, 1936년 작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의 창작과 퇴고 과정을 통해 욕망의 표층과 심층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 빠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간밤에 내 동생 오줌 싸서 그린 지도 우에 큰 것은 꿈에 본 만주 땅 그 아래 길고도 가는 건 우리 땅 -「오줌싸개 지도」(퇴고 전)   [나]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서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어머님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퇴고 후)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59   오늘날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는 [가]와 [나]유형이 함께 유통 되고 있다.17) 윤동주의 자필 시고집인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보면, [가]의 내용이 윤동주가 처음 창작하여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위에 파란색 잉크로 1연의 일부 어휘를 바꾸고, 2연의 내용 전부를 두 줄로 긋고 [나]와같이 퇴고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윤동주는 [나]와 같이 퇴고한 내용을 카톨릭소년 1937년 1월호에 발표할 때 다시 조금 손을 보게 된다.18)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신문․잡지에 발표된 윤동주의 동시 가운데 이 「오줌싸개 지도」만이 유일하게 첫 시고(詩稿) 내용의 절반 이상을 퇴고하였다는 것이다. [가]에 담겨 있던 “우리 땅”에 대한 국토 의식은 상당 부분 탈색되고, [나]에서는 “어머님 계신”, “아버 님 계신” 육친적 현실 공간으로 변용된다. 아마도 [가]의 원고 형태로는 일제 강점기에 작품 발표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 어머니가 당시 생존해 있었다는 전기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나]의 “꿈에 가 본 어머님 계신/ 별나라 지도”가 [가]에서 서술된 “우리 땅”의 암시적 상징일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서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의 지도가 “별나라”라는 추상 적 관념 지도 밑에 억눌려 있는 화자의 무의식적 욕망 지도라는 점이다. ‘오줌 싸기’는 우리 몸속에서 이루어지는 배뇨 행위의 자연스런 현상이 다. 신체의 내부 기관은 곧 욕망의 원천으로써, 그 욕망이 분출되기 위해 서는 출구가 필요하다. 수잔나 밀라에 의하면, 놀이는 반드시 출구를 찾   17) 가령,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명작동시(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 엮음, 예림 당, 2005)에서는 [가]를 수록하였으며, 정본 윤동주 전집(홍장학 엮음, 문학과 지성 사, 2004) 역시 [가]를 수록했다. 그 뒤, 육필 원고 대조 윤동주전집(최동호 엮음, 서정시학, 2010)은 [나]를 수록하였다. 18) 카톨릭 소년 1937년 1월호에 실린 작품의 원본을 보면 ‘어머님’, ‘아버지’를 ‘엄마’, ‘아빠’로 바꾸고, 1연의 시행을 7․7․7․7로 “빨래줄에 걸어논 / 요에다 그린지도 / 지난밤에 내동생 / 오줌쏴 그린지도”와 같이 맞추고 있다. 160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아야 하며 그것은 물줄기의 속성과 같다. 만일 놀이가 억제된다면 알려지 지 않은 코스 즉, 지하로 흐를 것이며,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 분출될 수밖에 없다.19) 동시 「오줌싸개 지도」에서 화자는 놀이와 욕망을 유기적 으로 결합시켜 식민지 주체의 국토 상실 의식을 오줌 지도라는 심층에 환원시켜 놓고 있다. “우리”로 표현된 화자의 언표는 곧 영토의 회복을 갈망하는 식민 주체의 강한 저항의 몸짓에 다름 아닐 것이다.   2. 주체의 자기 인식과 해학적 동심   앞마당을 백로지인 것처럼 참새들이 글씨 공부하지요 짹, 짹, 입으론 부르면서, 두 발로는 글씨 공부하지요. 하루종일 글씨 공부하여도 짹 자 한 자밖에 더 못 쓰는 걸 -「참새」(1936. 12) 전문   「참새」는 윤동주의 미완성․삭제 시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시인 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동시는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윤동주의 대표 동시 가운데 한 편으로 꼽히고 있다.20) 여기서 참새는 시적 화자의 객관 적 상관물로 활용되고 있다. 입으로는 “짹 짹” 부르면서 두 발로는 그것   19) 수잔나 밀라, 놀이의 심리, 형설출판사, 1986, 26쪽. 20) 2010년 6월 27일, 중국 연길에서 연변작가협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한국청소년 운동연합은 ‘윤동주 옥사 6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고, 연길시 연길공원 동시동네 에 윤동주 시비를 제막했다. 이 시비에 새겨진 윤동주의 동시가 「참새」이다.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61   을 받아쓰는 “글씨 공부”를 한다는 독특한 상상력을 펼친다. 반복되는 “짹”의 청각적 자질은 이 동시의 밝고 경쾌한 느낌을 발산시킨다. “공부”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하루 종일 해도 “짹 자 한 자”밖에 못 쓴다는 해학적인 정경이 결부되어 참새의 글씨공부는 사실상 놀이에 가깝게 그 려지고 있다. “하루 종일”이라는 시간의 길이와 “짹 자 한 자”라는 어휘 공간이 반어적으로 결합되어 표출되는 동심의 성격은 매우 해학적이다. 백로지를 펼친 듯한 하얀 앞마당은 참새들의 놀이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앞마당을 백로지인 것처럼” 펼쳐놓고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 복하는 참새의 모습을 ‘글씨 공부’와 연계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참 새의 글씨 공부는 “짹 자 한 자”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 때 “짹”한 자가 참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자기 정체성을 상기시켜 준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긴 식민지 상황에서 부지런히 제 소리를 받아쓰는 참새의 행위는 곧 우리말과 글 을 연습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거나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이라고 묘사되었던 부정성이 그의 동시 「참새」에서는 부단한 자기 이름의 확인과 긍정으로 전환되어 나 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동시는 하루 종일 “짹 한 자”밖에 못 쓰는 참새의 글씨 공부라는 해학적 동심의 이면에 강한 저항 의식을 결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요-리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구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162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누나 하나 나 하나 볼기짝을 때렸소 땅바닥이 어지럽다고- 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더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빗자루」(1936. 9. 9) 전문   카톨릭소년 1936년 12월호에 발표된 「빗자루」에서는 누나와 가위로 종이를 쏠면서 노는 놀이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 종이와 가위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 “요-리조리 베면 저고리도 되고 이-렇 게 베면 큰 총”도 되는 종이 놀이는 의식주의 일상에서 전쟁까지 표현 가능 영역이 넓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이이들의 상상 세계는 쉽사리 용인 되지 못한다. “방바닥이 어지럽다”는 하나의 이유로 누나와 함께 어머니 한테 볼기짝을 얻어맞게 된다. 상황의 전이는 다음 연에서 이루어진다. 볼기짝은 어머니한테 얻어맞았으면서 화자의 분풀이가 “고놈의 빗자루” 로 전가되어 어머니를 골탕먹이게 된다. 여기서 ‘빗자루’는 아이들의 종이 놀이를 알아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미적 등가물로 인 어 종이 놀이를 계속 하고 싶은 아이들의 세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때 “괘씸하여 벽장 속에” 빗자루를 숨기는 행위는 아이들이 놀이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 은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역시 빗자루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63   를 숨긴 화자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빗자루를 찾아 야단인 익살스런 상황이 연출된다. 이제 누나와 화자의 종이 놀이는, 빗자루를 매개로 하 는 화자와 어머니의 감추기-찾기 놀이로 확대되고 있다. 이렇게 해학적 동심 세계는 「빗자루」 외에도, 「둘 다」, 「사과」, 「닭2」, 「호주머니」, 「거짓부리」, 「만돌이」, 「참새」, 「할아버지」, 「개2」 등 다수의 시편에서 발견되는 전반적 특징이다. 또한 이들 동시가 발산하는 해학적 웃음이 놀이적 요소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그다지 우연적인 것이 못된다. 「둘 다」에는 끝없는 세계로 표현되는 바다와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는 화자의 행동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화자가 받은 수신호는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일 뿐이다. “벙글”이라는 것은 파도치는 형상에서 유추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옇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가 갑북갑북. -「호주머니」 전문   불과 28글자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단시(短詩) 형태를 띠는 이 동시는 호주머니와 주먹 두개가 만들어 내는 해학적인 동심의 세계를 그린다. 「호주머니」는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불룩해지는 포만감을 느끼고 있 다. 1연의 “옇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가 2연에서 “주먹 두 개”로 꽉 차도록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겨울”이라는 추위이다. 이 때 호주머니는 주먹 두 개가 리듬에 맞춰 갑북거리는 놀이 공간으로 164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변주되어 나타난다. 궁핍한 현실 속에서도 이 동시가 퍽 따뜻한 정감으로 그려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불룩해진 바지 양쪽의 호주머니는 신체 의 양쪽에 달려 있는 폐와 같은 형태를 보이는데, 두 주먹이 “갑북갑북” 움직거리는 모양은 호흡에 맞춰 박자를 맞추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윤동주 동시 「만돌이」는 전봇대를 겨냥하여 돌을 던져 맞추는 놀이 공간의 묘사와 화자의 억눌린 심리를 결합시켜 해학적 동심 세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첫 개를 뿌렸습니다. --딱-- 두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세 개재 뿌렸습니다. --딱-- 네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다섯 개째 뿌렸습니다. --딱-- -「만돌이」(1937. 3 추정) 부분   학교에서 돌아오던 만돌이는 전봇대 앞에서 돌 다섯 개를 줍는다. 내일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65   있을 시험에서 얼마의 점수를 받을지 전봇대를 빌어 점쳐 보려는 것이다. 시험에 억눌려 있는 이대로의 심리로는 마음 놓고 공을 차러 놀러 갈 수도 없다. 그러나 전봇대를 겨누고 차례차례 돌을 맞춰 나가면서 화자의 심리는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딱-’과 ‘-아뿔사-’가 교대로 반복되 는 것은 ‘돌’을 매개로 전봇대와 만돌이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 을 잘 보여 준다. 만돌이는 다섯 개의 돌 가운데 세 개를 맞추고 “허양 육십 점”이라고 자신의 예상 점수를 매긴다. 절반의 점수는 넘은 셈이니, 일단 심리적 위로를 찾은 셈이다. 이 동시에서 만돌이가 겨누고 있는 ‘전봇대’라는 존재는 공연히 애꿎 은 과녁이 된 것이 아니다. 일단 학교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전봇대는 제공한다. 그리고 거리의 한 지점 위에 돌출하여 서 있는 팔루 스(Phallus, 남근상) 형태로 그것은 위압적인 욕망 기호를 이루고 있다. 그 전봇대를 놀이 공간으로 변용시켜 돌을 겨누는 만돌이의 행위는 아 동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학교사회와 시험에 대한 일종의 풍자 행위이기도 하다. 이렇듯 윤동주의 동시는 놀이 모티프를 변주하여 화 자의 해학적 동심을 묘파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어린 화자의 억압되 어 있는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데로 나아가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3. 따뜻한 동심의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 공간 이와 같은 윤동주 동시의 놀이 모티프는 대체적으로 강한 빛 지향성과 밝고 따뜻한 정조를 추구하고 있다. 놀이 모티프가 변주되고 있는 윤동주의 동시는 대부분 대낮이거나 아 침, 이른 새벽이 시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밤인 경우는 「귀뚜라미와 나와」, 「못 자는 밤」, 「반디불」, 「가을밤」 등 5편 정도로 나타나지만, 이들 166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동시류에서조차 빛 지향성을 보인다. 그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반딧 불」에서는 아이들이 숲 속으로 달 조각을 찾으러 가고, 「못 자는 밤」에서 화자가 밤하늘의 별을 세는 셈놀이를 통해 빛을 호명하고 있다. 「귀뚜라 미와 나와」에서도 화자는 귀뚜라미와 둘만 알자고 그들만의 비밀 공간을 만든다.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는 마지막 행 속에는, 아무에게도 들 키지 않을 그들만의 비밀놀이가 매우 밝고 떳떳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계절 감각이 부각되는 시편은 5편 정도인데, 「개1」․「편지」․「호주머 니」․「거짓부리」의 4편이 모두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흰색의 ‘눈’ 을 핵심 심상으로 취하거나 따뜻한 정조를 지향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개1」은 눈밭에서 뛰어노는 개의 모습을, 「편지」는 편지 봉투에 눈을 한 줌 넣어 누나에게 마음의 전송을 하는 화자의 모습을, 「호주머니」에서 는 곤궁한 빈 주머니 속에서 느껴보는 따뜻한 체감을 보여 주고 있다. 윤동주는 그의 시 「돌아와 보는 밤」에서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 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延長이옵기에ㅡ” 하고 빛의 차단 의식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동시에서는 보다 의식적으로 어둠보다는 빛의 공간 창출에 힘을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반딧불」을 보자.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반디불」(1937년 초 추정) 전문   이 동시는 반딧불이라는 작은 곤충의 세계를 천체의 상상력으로 확장 해서 펼치고 있다. 하늘의 그믐달이 숲에 떨어져 반딧불이 되었다는 동심 적 발상은 숲의 이미지를 신화적 공간으로 만든다. 예나 지금이나 숲은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 공간이 된다. ‘보물찾기’, ‘줍기’, ‘캐기’, ‘뽑기’ 등, 온갖 탐색 놀이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반딧불」의 화자는 첫 행부 터 참여 의식을 고조시키는데, “가자, 가자, 가자” 동사의 반복은 역동적 인 움직임을 유발시키며, 글씨의 모형에서도 팔을 휘저으며 발걸음을 내딛는 아이들의 행렬을 연상시킨다. 달빛이 없는 그믐밤이기 때문에 숲으로 가서 “달 조각”을 줍자는 아이 들의 놀이 발상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부서진 달 조각=반딧불”은 잡는 대상이 아니라 줍는 대상이다. “잡는다”는 강 제된 침략의 과정을 동반하지만, “줍는다”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스스로 떨어진 것을 거두어들인다는 순응적 비폭력성을 상징한다. “부서진 달 조각”을 줍는 행위는 암울한 현실에 의해 부서져 버린 한 가닥 빛을 밝은 동심으로 건져 올리겠다는 은유적 표현이라 하겠다.   하늘 다리 놓였다. 알롱달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해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해비」부분   「해비」는 “해”와 “비”라는 얼핏 상충되는 이미지를 “하늘다리=무지개” 로 결합시켜 이어놓는다. 하늘다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놀이 공간은 동무들과 함께 모여 춤을 추고 해님도 즐거워 웃는 축제 한마당을 이룬 다. 춤을 출 수 없는 식민지 현실이었기 때문에, 화자가 펼치는 비온 뒤의 하늘 풍경은 “하늘 다리”, “알롱알롱 무지개”와 같은 왜곡된 천상 세계로 그려진다. 「해비」는 「반딧불」과 아울러, 동무들을 초대하여 이루 는 공동체적 놀이 공간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동시이다. 그럼에도 이 동시가 극적으로 이상화된 공간 속에서 현실과 유리된 공허감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분리되며 온갖 상상 과 가상의 요소로 가득찬 내면의 욕망을 투사시켜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 또한 놀이의 한 측면이라고 할 때, 이 「해비」가 묘사하고 있는 빛으로 충만한 원형적 상상공간 속에서 우리는 식민지 현실을 견뎌 나가야 하는 어린이의 굴절된 현실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본고는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그 심층에 깔려 있는 화자의 욕망에 대한 탐색을 1)내면의 지도와 식민 주체의 욕망,   2)주체의 자기 인식과 해학적 동심, 3)따뜻한 동심의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 공간으로 살펴보았다. 尹東柱 童詩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와 話者의 慾望 169   그에 따라, 「조개껍데기」는 소꼽놀이의 행동을 통해 잃어버린 관계의 회복을 희구하는 화자의 욕망이 투사된 것으로, 「오줌싸개 지도」는 놀이 와 욕망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식민지 주체의 국토 상실 의식이 ‘오줌 지도’라는 심층에 투사되어 나타난 것으로, 「전봇대」는 권위적이고 위압 적인 전봇대를 놀이 공간으로 변용시켜 돌을 겨누는 화자의 행위를 시험 에 억압된 화자의 욕망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윤동주 동시는 놀이적 요소와 연계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그로 인해 따뜻하고 해학적인 동심이 표출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동시에 나타난 놀이 모티프는 승부의 개념보다는 조화롭고 평화로 운 원융의 세계를 지향하는 중요한 특징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대개 의 놀이는 ‘내기’, ‘시합’, ‘승부’의 개념으로 타자에 대한 굴복 심리를 전제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윤동주 동시의 놀이 공간은 타자에 대한 승부 개념보다는 화자의 억눌려 있는 심리를 보상 받고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 킴으로써 거기서 내적인 쾌감을 맛보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동주가 이처럼 아동의 실생활 체험과 심리적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 하여 동시 창작에 적극적으로 원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동시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동심의 원리를 체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 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동시에 나타난 놀이 체험이 단순한 유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당시 아동의 심리 변화와 욕망의 지도를 체현시켜 놓았다는 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170 Journal of Korean Culture 19   [참고문헌] 기본 자료 왕신영, 심원섭, 大村益夫, 윤인석,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민음사, 1999. 홍장학,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편, 육필원고 대조 윤동주 전집, 서정시학, 2010. 논문 및 평론 김흥규, 「윤동주론」, 창작과 비평 33호, 1974, 가을호. 김수복, 「윤동주 연구」,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1979. , 「윤동주의 동시 연구」, 한국아동문학연구, 일지사, 1980. , 「윤동주 시의 원형상징 연구」, 국문학논집 12집, 1985. 이재철, 「한국아동문학가연구(3) -윤동주․권태응론」, 단국대 국문학논집 15집, 1984. 김열규, 「윤동주론」, 국어국문학 27집, 1964. 고형진, 「윤동주의 동시 연구」, 어문학연구 5집, 1997. 최명표, 「윤동주론 -원시적 평화의 훼절과 심리적 대응」, 아동문학평론 1992. 김용희, 「윤동주 동요시의 한국 동시문학사적 의미」, 아동문학평론 35권 3호, 2010. 김효중, 「윤동주의 동시세계」, 국어국문학 108호, 1992. 윤삼현, 「윤동주 시에 나타난 동심적 세계관」, 현대문학이론연구 27집, 2006. 김재홍, 「윤동주, 운명애와 부활 정신」, 현대시와 삶의 진실, 문학수첩, 2002. 박종은, 「전래동요의 관점에서 본 윤동주의 시세계」, 한국문학연구 4집, 1995. 곽춘옥, 「윤동주의 동시에 관한 고찰」, 청람어문학, 1989. 최동호, 「오늘의 상황에서 윤동주 시읽기」, 육필 원고 대조 윤동주전집, 서정시학, 2010. 프로이드, 박찬부 역, 쾌락 원칙을 넘어서, 민음사, 1997. 수잔나 밀라, 놀이의 심리, 형설출판사, 1986.
1238    백석 / 자작나무 댓글:  조회:2750  추천:0  2018-09-08
  백석 /자작나무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그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처음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때에 너무도 단순한 내용이 의아했습니다. 그냥 산골의 모습을 말하고 있으면서 화자의 감정도,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시가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가 되는 이유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백석이 시로 발표했으니까 시라고 해야하는데 지금까지 백석의 시를 보았을 때 이렇게 단순하게 쓴 것이 없어서 화장을 하는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도 자작나무다'의 반복을 시로 본다면 이 시는 운율을 반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라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 부분이 없을 때에 오히려 운율이 살아납니다.   이 부분을 없애고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그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山도 자작나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그러면 화자가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는 산골에 가서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담샘물을 마시고 맛있는 모밀국수도 먹고 산골집에 자면서 밤에 여우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하얀 대들보, 기둥, 문살 등 온통 흰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외는 다른 뜻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석이 단지 자신이 본 자작나무을 통해서 본 흰색을 강조하는 것인가? 이렇게 단순하게 나열을 통해서 운율을 보여주려고 시를 쓴 것인가? 그렇다면 백서이 생각하는 시는 무엇인가? 아니면 내가 못 본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는 부분을 괜히 붙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안'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걱정이나 탈이 없음'이란 의미이다. 화자는 이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궂이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 첫구에 붙여 첫구의 길이가 길어서 부조화를 이루고 이 첫구를 제외하고 모두 '-도' 붙은 것을 볼 때에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시상이 점점 큰 곳에서 작은 곳(산에서 집안의 방)으로 좁아지면서 단샘물도 마시고 맛있는 모밀국수도 먹고 편안하게 방에 있고 하니 이 산골방이 바로 평안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석의 다른 시를 보면 이렇게 뜬금없는 말이 하나씩 있어 백석이 말하려는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함주시초'에 시에서 두드러진다.'백화'는 '산중음'에 속해있는데 '산중음'은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아서 이런 면이 있는지 확신할 수없다. 그러나 이전 시를 바탕으로 보면 백석이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을 그냥 붙인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그러므로 백석은 이 시에서 백석이 원하는 '평안'을 더 확장하면 백석이 일제강점하에 있는 이 땅에 이 자작나무 숲에서 느끼는 '평안'이 오기를 바라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번 생각한 끝에 그렇다고 확신했다. 다만 이 부분을 첫구에 써서 조금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시를 검색하니 시가 이렇게 되어있었다.   백석 白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山넘어는 평안도平安道땅도 뵈인다는'이 맨 뒷구인 것이다. 백석이 말하려는 결론인 것이다. 백석이 '산골집'에서 자신이 원하는 '평안'에 가까운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오! 그리고 이렇게 시를 읽으면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된다. 역시 백석은 단순하게 운율만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시 속에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백화(白樺) /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山) 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조선 건국 70주년  [ 2018년 09월 10일 ]        
123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유언 댓글:  조회:3492  추천:0  2018-09-08
유언 / 윤동주 후언─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로운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 1937년에 창작한 시이다. 식민지하의 고독한 영혼이 숨어 흐르는 듯하다. 한적한 시골의 정서에 담담한 슬픔이 어려있는 듯 시인의 내성적인 생각의 깊은 강에 놓인 현실, 어쩌면 터질 것 같은 암담함을 말하고자함인 듯싶다.   ========================///덤으로 더...   1. 조선일보 39.2.6에는 윤동주의 이 실리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이하게도 필자의 이름이 ''尹 柱'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당일 신문의 마이크로 필름, 영인본 등에서 교차 확인했습니다.) 오기인지 필명 중 하나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전자일 확률이 높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2. 는 조선일보의 1938년 10월 17일에 게재된 것이 맞습니다. 39년에 발표되었다는 연보가 틀린 것입니다.    3. 윤동주는 위의 2개 글 이외에도 조선일보에 산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1939년 1월 23일, ) 위의 두 작품이 수록된 신문지면은 전집에 수록되어 있으나  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 수록된 조선일보 신문을 영인한 PDF 파일...   4. 위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의 "學生 페-지' (당연히 '페-지'는 page를 일본식 장음표현으로 음차한 것입니다.)라는 섹션에 수록되었습니다. 이 섹션은 일요일자 신문에 나오던 것인데(당시의 조선일보는 석간이고 일요일에 신문이 나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학생들의 글(비평, 수필, 시, 꽁트 등)을 수록한 지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덤으로 더 더...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 윤동주의 시를 읽는 새로운 방법 - 1)임현순* 1. 시작하는 말 2. ‘감는 눈’의 상징과 내재된 시선 3. 공간화된 ‘눈’과 시선의 확장 4. ‘눈’ 상징의 분화와 시선의 연계 5. 마치는 말 참고문헌 1. 시작하는 말 시인 윤동주가 1945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의 차디찬 감옥 에서 옥사한 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지용이 서문을 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발간된 것도 그로부터 오래지 않 다.1) 그런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윤동주는 독자 들 가까이에 있다.2) 세대를 초월해 독자를 사로잡는 윤동주 시의 매력 *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2) 1994년~2004년 상반기까지 최근 10년간 국내대형서점의 대표격인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본 결과 2002년을 제외하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는 매해 시 부문 베스트셀러로 집계되어 있다. 윤동주가 시작활동을 활발히 한 1930년대뿐만 아니라 우리 시사를 통틀어 이렇듯 오랜 시간 스테디 7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은 과연 무엇일까? 그 실체를 규명해내는 것은 전문독자로서의 연구자 가 담당할 몫일 것이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저항시’로 분류되는 과거 윤동주의 시 를 지금, 여기의 의미로 읽어낸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제약받지 않 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그의 시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윤동주의 시는 저항시의 전형에서 벗어나 열린 구조를 지 닌 텍스트로 변화한다. 역설적이게도 시대에 밀착되어 있는 만큼 그의 시는 시대성에서 자유롭다. 아직까지 윤동주 시의 저항성이 논의의 대 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울림을 전해주는 시의 특질, 하나로 규정 되지 않는 윤동주 시의 면모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 상징의 쓰임에 주목하는 것은 윤동주의 시를 해석하는 연구방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다. 여기에서는 특수한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 상징의 구조를 추적해 윤동주 시의 특질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시선은 크게 내부를 향한 자아 성찰의 시선과 외부를 향한 시선으로 나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시선을 전자에 한정된 의미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주로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와 같은 ‘뜬 눈’의 형상으로 논의되어 온 그러 한 시선은 기실 ‘감는 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에서 ‘감는 눈’의 상징은 이와 같은 내부를 향한 시선과 외부를 향한 시선이라는 의미의 이중성을 특질로 삼는다. 선행 작업에서 필자는 ‘뜬 눈’을 중심으로 주체의 자기 인식 과정에 매개로 작용하는 윤동주 시의 ‘눈’ 상징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3) 그 후속작업으로서 ‘감는 눈’의 상징을 중심으로 진행될 이번 연구에서는 셀러로 자리 잡게 된 시집을 발간한 시인은 전무하다. 3) 졸고, .윤동주 시의 ‘눈’과 매개된 인식., 한국근대문학회 편, 한국근대문학연 구 12집(태학사, 2005)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79 윤동주 시의 주체가 단순히 개인적 윤리, 도덕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 는 존재라는 사실이 저항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규명될 수 있 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다의성을 지닌 상징의 구조를 추적해 외부 적 계기로부터 규정되어 온 윤동주 시의 저항성을 시의 내부적 계기에 서 출발해 되짚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논의를 위해 이 논문은 일단 언어의 단계에서 출발하여 ‘눈’ 상징의 의미구조를 살펴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존중하는 가운데, 고정화, 신비화된 의미틀의 제한을 벗어나 시어, 비유의 유기적 연관성 을 분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다시금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이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 이 논문은 윤동주 시의 반성하는 주체에 대 한 논의가 정작 시에 내재된 저항성의 의미층위를 규명하는 작업과 연 계되어 있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 하나는 몸 상징으로 살펴본 윤동주 시의 시선에 대한 논의로서, ‘감는 눈’의 상징에 집중하여 그 의미경로를 추적해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시선이 투과적 실체로서의 공간인 풍경4)과 결부되어 상징의미를 심화 시키는 과정에 대한 고찰인데, 이를 통해 ‘감는 눈’의 시선이 공간화를 통해 확장되는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는 눈’이 ‘뜨는 눈’, ‘뜬 눈’으로 형상화된 윤동주 시의 또 다른 ‘눈’ 상징들 과 맺는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윤동주의 시 에 나타난 ‘눈’ 상징의 총체적 고찰과 더불어 근대적 저항시로서의 윤 동주 시의 면모를 재조명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4) 오귀스탱 베르크는 독특한 역사를 공간에 담고 있는 하나의 현상인 풍경의 시 공간성을 ‘투과적’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환경 자체의 역사와 이를 바라보 는 자의 기억이 풍경 안에서 서로 결합하고 있다는 두 가지 시간성의 우연적인 합치가 풍경의 공간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오귀스탱 베르크(김주경 옮김),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미다스북스, 2001), 122면. 이는 시선을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3장과 2장간의 연계성을 설명해준다. 8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2. ‘감는 눈’의 상징과 내재된 시선 윤동주의 두 번째 습작노트인 에는 퇴고 과정을 보여주는 표기 외에 “베루린”5), “모욕을 참어라”와 같은 낙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 후자는 .異蹟.이라는 시의 뒷부분에 씌어진 것으로 시작(詩作) 당시 의 상황이나 시인의 마음자세를 유추해볼 단초를 제공해준다. 여기에 는 당시대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대하는 시인의 응전방식이 나 타나 있다.6) 5) 의 마지막 작품 .自像..의 뒷부분인 노트 맨 끝장에 기재되어 있다. 이 는 독자들이 .자화상.으로 알고 있는 작품의 습작으로 에는 아직 완성되 지 않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베루린”은 독일의 “베를린”을 의미하 는 듯하다. .자화상.에 나타난 ‘우물’ 이미지가 릴케의 그것과 닮아 있음을 상 기해보건대, 이 시를 창작할 당시 윤동주는 그가 즐겨 읽던 릴케를 염두에 두 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윤동주의 세심한 기록습관은 후대 연구자들의 노고를 일정 정도 덜어준다. 습작 용 노트에 자필로 또박또박 적어놓은 시편에는 창작년도와 개작일자, 그리고 퇴 고과정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간혹 “平壤서”와 같이 시를 집필한 장 소가 기록된 경우도 있어 창작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왕신영 외 엮 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전집 (민음사, 2002), 15~110면 참조) 미로의 비너 스상 탁본과 “藻文”이라는 활자가 새겨진 첫 번째 습작노트 표지에는 제목 와 “芸術은 길고 人生은 쩝다”라는 부제가 자필로 씌어 있다. 또 노트 첫 장의 목차는 창작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얼추 한 권의 시집 형태를 갖추었다. 노트 곳곳에 배인 이 같은 시인의 숨결은 시 창작에 임 하는 자세와 시에 대한 사랑, 예술관, 그리고 자신의 시에 대한 겸양과 자부심 등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습작노트는 첫 번째 노트에 비해 평범해 보인다. “窓”이라 는 표제를 붙인 겉표지 앞면에는 활을 쏘고 고삐를 당기는 포즈의 말 탄 기수 두 명이 상하로 배열된 그림이 있고, 그 상단에 “原稿 ノ-ト”라는 일문이 표기 되어 있다. 한편 뒤표지에는 문양그림 아래 작은 글씨로 “TOKYO”라는 영문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글씨는 사진상으로 인쇄 여부의 판독이 쉽지 않다. 하지만 앞, 뒤 표지의 정황상 이 노트가 일본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하는 데는 큰 무 리가 없다. 노트의 시편들은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창작된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당시는 윤동주가 광명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하고 있던 시기이므로, 국내에 유입된 일본산 노트를 구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한반도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1 글귀가 씌어진 1938년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등 의 침략전쟁을 일으키며 철저한 군국주의 파쇼체제로 바뀌어가던 시기 에 거주하던 한국인이 일본에서 들여온 공산품을 사용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 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노트의 속표지에는 나막신을 신은 두 사람이 선창 부둣가에서 건너편의 풍 차와 돛단배가 떠 있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판화가 등사되어 있고, 그 그림 위 쪽에 첫 번째 습작노트의 겉표지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藻文”이라는 글자가 자필로 적혀있다. 이는 두 번째 노트와 첫 번째의 습작노트와의 연계성을 표현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첫 번째 노트에 수록된 여러 시들이 개작 되거나 혹은 원문상태 그대로 두 번째 노트에 재수록되었으며, 시인은 그러한 사항을 각각의 노트에 실린 개별시의 상단에 세밀히 기록하고 있다. 습작노트 에도 정규시집과 동일한 비중을 두는 이 같은 태도에서 시작과정에 쏟은 윤동 주의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각 노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실린 첫 번 째 작품은 .초 한 대., 마지막 작품은 .나무.라는 동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대략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씌어진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창작년도는 “昭和九年”과 같은 일본연호(“昭和(しょうわ)”는 124대 히로 히토 일왕의 재임기간(1926.12.25~1989.1.7) 나타내는 연호이다.)와 양력을 혼용 하여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昭和十一年一月六日”로 창작일자가 표기된 이후에는 일본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昭和十一年”인 1936년 제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취임하면서 일제는 탄압을 강화 하기 시작했고, 일장기 말소사건 등이 있었으나 이들 사건의 시점은 8월이다. 따라서 일본연호를 사용한 1936년 1월과 다음 작품의 창작시기―2, 3월에 집중 적으로 시를 쓰고 있는데― 사이 윤동주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역 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두 번째 노트의 수록작품에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있나 살펴보도록 하 겠다. 1935년 10월로 기록된 시 한 편이 중간 부분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 에는 1936년 봄부터 창작된 시가 실려 있다. 또한 습작노트에는 1935년 부터 1938년에 창작된 동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절반가량이 1936년에 집 중적으로 씌어졌다. 동일한 시기인 1936년 봄에 창작된 시 중 동시의 대부분이 첫 번째 노트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인이 두 노트의 성격을 구분 짓기 위해 일부러 동일시기에 두 권의 노트를 병행하여 사용했다는 가설 이 성립될 수 있다. 또한 이렇듯 노트를 병행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가 매우 근접해있다는 점에서 노트를 분리, 사용한 것과 시대적 상황, 시인의 의식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관계가 형성되리라는 추 정이 가능하다. 82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였다. 당시 일본은 ①군사력과 경찰력의 증강 ②철저한 사상통제 ③전 시체제 강조를 통한 국민생활 감시 등의 방법으로 파쇼체제를 강화시 켜 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였으며,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기치 아래 우리말과 글을 금지 하고 창씨개명을 단행하는 등의 민족말살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도 하였다. ‘지원병’, ‘징용’, ‘보국대’, ‘위안부’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우리 민족을 전쟁에 동원시켰던 것도 1938년경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렇듯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 분야에 걸쳐 자행된 일제의 횡포로 당시 는 식민지 지배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7) 따라서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 시인이 원고 말미에 적어 넣은 “모욕을 참어라”는 구절을 단순한 개인 범주의 낙서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참상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절치부심의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 다. 정의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 맞서는 시인의 응전방식은 일단 모욕을 참는 형태로 드러났다.8) ‘참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 다리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인내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미래만 남아 7) 강만길, 韓國現代史(창작과비평사, 1984), 32~37면 참조. 8) 광기로 미쳐 날뛰는 일제치하에서 진실은 왜곡되었고, 용인될 수 없는 폭력의 정당화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한나 아렌트(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이후, 1999), 85면) 정당한 폭력의 규준은 공동체의 보존, 안녕, 평화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정당방위로 제한되며, 이 역시 보복정의의 차원을 넘으면 안 되고, 특히 전쟁의 경우 주권자의 명령, 정당한 근거, 올바른 의도 등이 있어야 한다는 성 토마스 의 견해(정의채, “현대사회의 폭력의 의미 - 폭력과 평화에 대하여”, .폭력이란 무엇인가 : 그 본질과 대안 - 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2002년도 한국학술진흥 재단 기초학문육성 일반연구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공동연구팀 발표논문집, 2003), 20면)에 비추어볼 때, 이차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수행과 식민통치는 그 들의 끊임없는 정당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고유성 속에 한국인을 포함시키려 했던 일본은 우리 민족 의 고유한 이타성을 부인하고 주체성의 장소를 말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던 것 이다.(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54~156면 참조.)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3 있다면, 현재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내일은 없다”()고 외치는 시인에게 “내일”은 또 하나의 “오 늘”이다. 잠깐의 혈기로 맞서는 것은 “오늘”로 존재태를 바꿀 “내일” 을 소멸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한 대응방식은 일을 그 르칠 뿐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윤동주가 말하 는 ‘참음’은 결국 비겁한 침묵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자의 기다림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참음’의 정신은 윤동 주의 시편 곳곳에서 발견된다. 太陽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 .눈감고간다. 부분9) 우선 텍스트에 충실하여 이 시의 전개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천 상에 있는 “태양”과 “별”은 ‘빛남’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태양”과 “별”을 사랑하지만, 2연에 제시된 상황은 ‘빛남’ 의 대칭항에 놓여진 ‘어둠’일 뿐이다. ‘어둠’에 직면한 자는 주위를 분 9) 여기에 인용하고 있는 시들은 윤동주의 자선시집에 수록된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경우 퇴고과정을 고려하여 가장 나중의 형태를 원본으로 확정하여 사 용한다. 왕신영 외 엮음, 앞의 책 참조.; 논의의 흐름상 여기에서는 .눈감고간다 .의 마지막 연을 생략한 채 수록하였다. 윤동주의 시에는 ‘감는 눈’ 외에도 생 략된 연인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감었든 눈을 왓작떠라”에서 볼 수 있는 ‘뜨는 눈’의 상징, 그리고 .자화상.등으로 대표되는 ‘뜬 눈’의 상징 형태가 발견 된다. 4장에서 이들 ‘감는 눈’과 ‘뜨는 눈’, ‘뜬 눈’의 연계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뜬 눈’의 상징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졸고, 앞의 책 참조. 8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간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주의를 기울여 사방을 살피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자는 “아이들”에게 “밤이 어두웠는데/눈감고” 가라고 상식에 위배되는 조언을 한다. 이러한 비상식적 조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밤이 어두웠는 데”의 언어적 용법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겠다. 여기서 ‘-는데’는 ‘-으니’와 동일위치에 놓일 수 있는 연결어미이다. ‘-으니’가 ‘ㄹ’을 제외 한 받침 있는 용언의 어간이나 어미 ‘-었-’, ‘-겠-’ 뒤에 붙어 앞말이 뒷 말의 원인이나 근거, 전제 따위가 됨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실을 먼저 진술하고 이와 관련된 다른 사실을 이어서 설명할 때 쓰이는 연결 어 미라면, ‘-는데’는 ‘있다’, ‘없다’, ‘계시다’의 어간, 동사 어간 또는 어미 ‘-으시-’, ‘-었-’, ‘-겠-’ 뒤에 붙어 뒤 절에서 어떤 일을 설명하거나 묻거 나 시키거나 제안하기 위하여 그 대상과 연관되는 상황을 미리 말할 때에 쓰이는 연결 어미10)이다. 그러므로 만일 ‘밤이 어두웠으니’라고 표현했다면 어두운 밤에 눈을 감는 것이 당연한 수순의 상식적 행동이 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의 “밤이 어두웠는데”는 단 지 “눈감고 가거라”라는 제안을 하기 위한 관련 상황을 언급하는 표현 일 뿐인 것이다. 즉 .눈감고간다.의 ‘어두운 밤’과 ‘눈 감는 행위’ 사이 에는 문법상의 필연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밤이 어두웠는데/눈감고 가거라”의 내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의 접근이 필요하다. 유종호는 윤동주에게 세계의 어둠을 절감하게 한 것은 기독교적 세계파악의 영향력 못지않게 그의 시대의 식민지 상황과 그 부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11) “밤”과 ‘어두움’이라는 시어에서 암흑과 같던 당시의 시대상을 추출해 내는 그 같은 의미부여는 문학사회학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에 의해 이 10)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연구원, 1999), 1310, 4836면. 11) 유종호, .청순성의 시, 윤동주의 시., 김학동 편, 윤동주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7), 35면.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5 미 충분히 규명된 바 있다. 이들 연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밤’이 다음 행의 ‘눈감는’ 행위와 결부되며 특수한 개별상징을 만들어내고 있 음에 주목해보도록 하겠다. 바른 의기를 가리고 내리눌러야 하는 세상, 못 볼 일들이 벌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는 그곳에서 버텨내기 위해 시인 은 ‘눈을 감는다’. 두 눈을 버젓이 뜬 채 모든 것을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 ‘눈’은 물리적 실체의 형상을 파악하는 신체기관으로 인 간존재를 특징짓는 얼굴에서 가장 응집력 있는 존재의 장소이며, 존재 의 진리탐구 또한 그 ‘눈’의 시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12) 그러 므로 시에서 ‘눈을 감는’다고 한 것은 시선을 차단하여 세상의 것을 보 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인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거짓과 위선에 호도 되지 않고 ‘마음의 눈’을 통해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바라보고 싶다 는 소망의 표명이기도 하다. 즉 그와 같이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 ‘눈을 감는’ 것은 불구가 되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만이 역설적으 로 참된 의미의 정상적 생을 영위하는 진실의 수호자가 된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행위라 하겠다. 이러한 해석은 눈을 감는 행위가 3연의 “가진 바 씨앗을/뿌리면서 가거라.”로 이어지면서 그 타당성을 담보 받게 된다. ‘눈감고 가는’ 자 에게 시인은 ‘씨앗을 뿌리며 가라’는 또 하나의 주문을 한다. 이는 ‘눈 을 감는’ 것이 단순히 보기 싫은 세상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씨 앗을 뿌리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로 이어짐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시의 “눈감고 가거라”는 주문은 어두운 시대상에 굴복하지 않고 참 12) 이렇게 시선은 인간 실존의 상징적 차원과 생태적 차원을 동시에 표현한다. 또 한 나아가 시인의 시선은 본질을 파악하는 물질적 상상력까지를 포함한다. 따 라서 ‘눈’의 상징을 중심으로 ‘시선’을 논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 한 우리의 의식과 우리 육체의 구체성(눈에 보이는 기관)인 시선 안에서 결합 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59~164 면 참조. 86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된 눈으로 진실을 바라보겠다는 시인의 강한 바람을 담은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물론 진실을 목도하려는 의지를 내포한 ‘감는 눈’의 모티프가 비단 . 눈감고가다. 한 편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윤동주의 시 전반 에 걸쳐 유사한 방식으로 유기적 의미군을 형성하면서 상징으로 작용 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돌아와 보는 밤., .소년., .사랑의 전 당., .명상., .유언. 등 여러 편의 시에 등장하는 “눈” 또한 그 같은 ‘감는 눈’의 변주된 형태로 나타난다. 3. 공간화된 ‘눈’과 시선의 확장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延長이옵기에― 이제 窓을 열어 空를 밖구어 드려야 할턴데 밖을 가만이 내다보아야 房안 과같이 어두어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돌아와 보는 밤. 전문 이 시에는 세 개의 공간이 등장한다. ①‘비에 젖은 밖’, ②‘불을 끈 房안’, ③‘세상’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세 공간을 연결시키는 직유 의 용법을 살펴봄으로써 앞 장에서 논의한 ‘감는 눈’의 상징의미를 재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7 구해보도록 하겠다. ①, ②, ③은 ‘어두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 중 ③은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나 “세상같은데”에서처럼 직유의 형식과 결 부되어 쓰이고 있다. 전자는 “세상으로부터” 떠나 “내 좁은 방에 돌 아”온 실제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듯이”라는 직유의 형식을 취 함으로써 ③은 “밖”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층위를 넘어선다. ③의 두 번째 직유형식에서도 전자와 동일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같 은데”는 “房안과같이”에서처럼 “밖”의 어두움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 다. 여기서 “세상”, “房안”, “밖”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바로 ‘어두움’이 다. 이렇듯 ②와 ①의 공간에 동일하게 드리운 ‘어두움’이 “세상”으로 비유되면서 ③의 두 번째 용례 역시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어두운 현 실상황’이라는 새로운 의미차원에 속하게 된다. 이제 공간적 측면에서 논의한 위의 분석이 얻어낸 의미를 다른 각도 에서 조명하여 시를 분석해보겠다. 1연의 “낮”과 2연의 ‘어두운 밖’에 서 연상할 수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상반된 의미항은 ③을 공통분모 로 삼고 있다. 1연에서 “방”에 돌아온 내가 불을 끄는 것은 “낮”의 피 로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로써 “낮”의 피로와 “세상” 에서 느끼는 피로는 “~듯이”의 직유로 연결되어 유사성의 범주에 속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긍정의 의미항에 속하는 “낮”이 “피로”를 매개 로 “세상”과 동가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불을 켜두는것”이 “낮”의 피로함의 연장이라는 1연의 상황은 ③과 결부되면서 다른 연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 여받게 된다. 그 논리에 따르면 ‘낮(밝음)’ : ‘밤(어두움)’ = ‘부정’ : ‘긍 정’과 같은 도식이 성립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밤’의 속성으로 알려진 ‘어두움’이 “세상”과 동일하게 취급되면서 부정적 의미를 가지 게 된다는 2연의 논의를 떠올려보면, 1연과 2연에 나타난 ‘어두움’이 각각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변별됨을 알 수 있다. 8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 해 다시금 논의의 초점인 ‘눈을 감다’의 상징성으로 돌아가 보겠다. 앞 장에서 ‘눈을 감는’ 것이 모순된 세상을 거부하고 참된 진실에 눈뜨고 자 하는 의지의 표명임을 밝혀낸 바 있다. 1연의 ‘불을 끄는’ 행위에서 도 ‘눈을 감는’ 행위에 내재된 그 같은 불구의식이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누군가에 의해 실명을 당하는 (불이 꺼지는) ‘피동’의 상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눈을 감는(불을 끄 는) ‘능동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1연과 2연의 ‘어두움’ 은 불을 끄는 능동적 행위로 인한 ‘어두움’과 해가 기울자 저절로 찾아 든 ‘어두움’으로 차별화된다. 1연의 ‘어두움’이 “세상”과 동일시되었던 2 연의 부정적인 ‘어두움’과 다른 층위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결국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타난 ‘눈 감는’ 행위는 이미 1연에서부 터 그 전조를 보여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반응 이 아니라, “울분”을 삭이기 위한 의지적 행위이다.13) ‘눈을 감는’ 것이 울분을 일게 한 “세상”을 거부하고 진실을 목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 명이라는 이 같은 해석은 이어지는 시구인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의 시상 전개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는 의지적 불구의 상 태로 접어든 주체가 혼란스러운 외부를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세상에 유혹당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질과 참된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듯 1연과 2연에 나타난 긍정과 부정의 ‘어두움’은 3연의 ‘눈 감 는’ 행위로 귀결되며 참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한 정, 반, 합의 변증법적 질서는 이 시의 상징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 13)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했던 “모욕을 참어라”를 연상케 한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89 가츨가츨한 머리갈은 오막사리 처마끝, 쉿파람에 코ㄴ마루가 서분한양 간질키오.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 - .명상. 전문 이 시에 나타난 ‘눈’의 공간화 양상은 전반적으로 유사성14)에 기반을 둔 비유의 용법과 몸과 사물 범주를 혼합시키는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다. 먼저 1연 1행을 보면 “가츨가츨한 머리갈”과 “오막사리 처마끝”이 은유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15) 신체 일부인 “머리갈” 과 “오막사리 처마”를 만드는 ‘볏단’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유추되는 계 열적(paradigmatic) 선택관계16)에 놓인 것이다.17) 14) 유사성은 기실 차이를 전제로 한 닮음이다. .명상.의 1연에 나타난 형태적 유 사성 또한 질료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형이상학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름 속에서 같음을 보는 것을 닮음으로 정의하였다. 리쾨르는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은유란 다름을 같음 속으로 융합해가는 의미론적 과정이라고 했다. 은유가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을 찾아내는 의미론적 과정이며, 기존 의 낡은 범주화를 부수고 새로운 논리를 세우는 유별(classification) 작업이라는 리쾨르의 주장은 고전수사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정기철,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문예출판사, 2002), 71-72면 참조. 15) 이는 종에서 종으로의 전용(transference)인 은유의 양태를 보여준다. 아리스토 텔레스(천병희 역), (개역판)시학 (문예출판사, 1995), 116~117면; Paul Ricoeur (1975), The Rule of Metaphor :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rans. by Robert Czerny with Kathleen McLaughlin and John Costello(1978),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3면 재인용; T. 토도로프(신진.윤여복 공 역), 상징과 해석 (동아대학교출판부, 1987), 96~98면 참조. 16) 소쉬르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계열적(paradigmatic) 관계, 연쇄를 이루 는 단어를 통합적(syntagmatic) 관계라고 불렀다.(페르낭 드 소쉬르(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 , 샤를르 발리.알베르 세쉬에 편(민음사, 1990)) 로만 야콥 슨은 소쉬르의 이런 논의를 받아들여 ‘통합체’를 ‘환유’에, ‘체계’를 ‘은유’에 접 근시켰다. 김치수 외, 현대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164면. 17) 한편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 외에도 개별 시어들이 갖는 어감에서 유추된 유사 성이 발견된다.(카시러에 의하면 “시 언어에서는 추상적인 개념 표현뿐만 아니 9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가츨가츨한 머리갈”과 “오막사리 처마끝”에서 ‘몸’의 한 부분을 ‘집’ 의 일부로 전이시키던 혼합의 양상은 다음 행의 “코ㄴ마루”와 2연의 “들窓 같은 눈”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1연 1행에서 시작된 혼용의 원리―유사성에 근거한 은유의 특성―가 이어지는 시어(낱말)와 비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다. ‘머리카락’과 ‘지푸라기’, ‘콧등’과 ‘마루’, ‘눈’과 ‘창’ 사이에는 형태상, 기능상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리 고 이들 유사성간의 유기적 관계는 2연 마지막행인 “이밤에 戀情은 어 둠처럼 골골히 스며드오”의 애매성을 해결해준다.18) 2연에서 밤에 “어둠”이 스며들듯이 “戀情”이 “골골히” 스며든다고 했다. 여기서 “골골히”는 현대어 “골골이”로 추정되는 표기이며,19) ‘고 을고을에’, ‘골짜기마다’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시 속에 서 “오막사리”, “들窓” 등 가옥을 표현하는 시어들과 맺는 관계를 고 려하면 전자의 의미를 취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戀情”은 인간의 마음, 즉 신체기관 중 ‘심장’과 관련된 단어이다. 결국 2연의 2 행은 “어둠”이 ‘마을’에 스며들듯 삽시간에 “戀情”이 ‘마음’에 스며드는 모양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인간의 몸 라 모든 단어가 소리가Klangwert와 감정가Gefuhlswert를 갖는다.” E. 카시러(오 향미 역),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 (책세상, 2002), 43면.) 이 경우 1연의 은유를 형성하는 “가츨가츨한”과 “오막사리”의 어감은 경제적 상 황에 대한 정보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일 뿐 1연의 은유를 추적하는 것으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 하나의 시어, 하 나의 비유가 다른 시어, 다른 비유들과 대응, 대립하며 공명하는 상호관계 속 에서 새로운 의미가 도출되고, 그 과정에서 상징의 형식이 발견되기 때문이 다.(위의 책, 42~44면 참조.) 18) 습작노트의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 작품을 창작할 당시 “골골히”라는 시어는 존 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왕신영 외 엮음, 앞의 책, 78면) 이는 퇴고과정에 서 부가된 부분인데, “골골히”가 첨가됨으로써 .명상.의 2연 2행은 단순한 직 유의 형태를 벗어나 시 해석상의 애매성을 불러일으키며 상징적 추론을 유도 하게 된다. 19) 권영민 엮음, 윤동주 연구 (문학사상사, 1995), 79면.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1 과 사물간의 전용양상이 기능적 유사성에 토대를 두고 표출된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戀情”을 의미적 대립항인 “어둠”에 비유했을까? 기 능적 유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들 결합의 애매성20)을 벗어나려면 .명상.을 포함한 윤동주 시 전반에 포진된 상징형식에 의존해 그 형식 들간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21) 이를 위해 먼저 시구에 있어서의 애매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연 은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골히 스며 드오”의 두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1행의 맨 끝에 표기된 쉼표 (,)는 1행과 2행이 선후관계 혹은 인과관계로 인접되었음을 가리키는 연결표지이다. 즉 이 부분은 ‘눈이 닫히(감기)고 나서 연정이 마음에 스며들었다’와 같은 선후관계이거나, ‘눈이 감기자 빛이 차단되어 어두 워졌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유리돼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와 같은 인과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2행의 “어둠처럼”이라는 비유를 생 각해보면 후자의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이 때 “어둠”은 “밤”이라는 외부적 상황과 결부된 물리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눈이 닫히는” 신 체작용으로 초래된 결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연에 나타난, 머리카락이 콧마루를 간질이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 연의 “들窓 같은 눈”을 1연 의 해석틀과 동일한 연계성 속에 받아들이게 해준다.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의 신체와 사물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제 窓을 열어 空를 밖구어 드려야/할턴데”(.돌아와 보는 밤.)의 시구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窓”은 “空氣”가 집의 외부와 내부를 드나들게 해주는 매개체 이다. “窓”이 내부/외부의 경계인 동시에 이 두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 20) “독자들 입장에서 보면 애매성이란 연루(complicity)를 의미하는 것이다.” T. 토 도로프, 앞의 책, 118면. 21) 에른스트 카시러, 앞의 책, 면44. 92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체의 역할을 한다면, 내부에서 외부로 눈물을 흘려보내는 통로인 “눈” 은 인간신체의 내/외부를 가르는 기준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상태(마음) 를 외부로 드러내고 외부현상을 내부에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고 할 수 있다. 공간분할과 매개적 역할이라는 공통성을 지닌 “窓”과 “눈”의 이 같은 결합은 인간의 몸과 사물간의 기능적 유사성에 토대를 둔 비유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합의 근저에서 주위세계 를 향한 인간주관성의 개인적, 집단적 투사를 발견하게 된다.22)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지닌 그러한 시선의 특성은 비유와 상징의 사 용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2연의 1행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를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앞에 인용한 두 시와 달리 이 시에서 ‘눈감는’ 행위는 피동의 형태로 묘사된다.23) 그렇다면 이러한 피동현상 을 초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명상.의 상징의미 를 탐사하는 열쇠가 된다. .돌아와 보는 밤.의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에 쓰인 능동태의 행위동사는 “마음” 속의 “思想”이라는 직접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와 비 교해볼 때, “들窓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이밤에 戀情은 어둠처럼 골 골히 스며드오”에 나타난 피동태의 동사는 “戀情”이 “스며드”는 모호 한 상황을 유발시킨다. 여기에는 “마음”과 같은 장소가 명시되지도 않 았고, 능동의 의지가 “思想”으로 표출되지도 않았다. “밤”이 되어 “어 둠이” 도처에 스며들듯이 “戀情”이 “골골히” 스며든다는 간략한 정보 가 제공될 뿐이다. 22) 풍경의 시공간성은 투과적이나, 이는 단지 세계를 주관화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다. 오귀스탱 베르크, 앞의 책, 108~116, 122면 참조. 23) 위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피동태는 주어가 어떤 동작의 대상이 되어 그 작용 을 받을 때 서술어가 취하는 형식이므로 그 이면에 동작을 초래한 원인이나 주체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졸음에 겨운 눈이 스르르 감겨버리는 행위에는 화자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3 이 부분에서 초래되는 해석상의 애매성24)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 며드오”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스며들다”라는 동사는 외부로 부터 내부로의 진입이라는 함의를 갖는다. ‘戀情이 어둠처럼 고을고을 에 스며들다’에서와 같이 이 시의 ‘스며들다’는 무형의 것들이 부분에서 전체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 상황을 전달해주는 주 체는 시간적으로 “밤”에 위치해 있다. 밤풍경을 바라보다 눈이 감기자 차단된 내면 속에 외부와 동일한 상황―“어둠”―이 발생한 것이다.25) 이제 인체의 외부와 내부에는 각각의 분리된, 그러나 유사한 공간이 형성된다. 이 두 장소를 이어주는 매개체인 “눈”이 닫히자, 이들 공간 에 “스며듬”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밤이 되어 외부적 공간에 고을 고을 어둠이 스며들고, 눈이 감기니 차단된 내면 곳곳에 연정이 스며 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두운 밤’의 상징의미에 대한 사회, 역사적 틀의 개입이 비로소 요구되고, 그에 따라 “戀情”의 대상과 의미는 진폭 을 확대하게 된다. “戀情”이라는 내면정서를 발생시킨 원인이 외부적 상황인 ‘어두운 밤’일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에 따르 면 “밤”의 어두움이 “눈”을 감기게 하였고, 그러한 외부적 상황이 외 부와 차단된 내면 속에 “戀情”의 감정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명상.에 묘사된 밤풍경은 단순한 시, 공간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투과된 실체로서 인간의 몸과 결부되어 시인의 시 선을 전달해준다. 인간의 신체와 외부 사물의 혼합이라는 유기적 관계 성이 이 시 전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24)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대어 “골골이”의 표기로 추정되는 “골골히”는 “밤”에 “어 둠”이 ‘고을고을마다’ 퍼져나가는 물리적 현상의 표현 혹은 “戀情”으로 ‘마음’ 이 구석구석 가득히 채워지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애매성으로 인해 “어둠”과 “戀情”은 단순한 비유적 결합을 넘어선다. 25)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유언.)와 같은 또 다른 예에서도 피동적으로 감기게 된 “눈”이 “밤”을 배경으로 “슬픔”이라는 감정과 연계되어 나타남을 확 인할 수 있다. 9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다. 그 결과 ‘집’이 ‘고을고을’로 범위를 확장했듯이 신체기관인 “눈”은 인간의 의식 전반으로 ‘시선’을 확대, 전이한다. 이로써 2연의 “戀情”26)은 개인의 내면 정서에 국한된 의미범주를 벗 어나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고, 시의 제목인 “명상”은 단순한 감상적 사유의 단계를 넘어 실존에 대한 총체적 성찰과 반성을 의미하게 된 다. “밤”의 일반화된 상징성이 윤동주 시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부적 상황이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는 시어들과 긴 밀한 연관관계를 형성하면서, 자기 인식의 방식뿐만 아니라 ‘불구의식’ 을 통해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해보려는 주체의 의지까지도 상징적으로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금까지 살펴본 ‘감는 눈’의 상징 은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의 표출로서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자 하는 자세인 동시에, 내재된 시선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 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대적 저항성의 표명이라는 의미 또한 지닌 다고 할 수 있다. 4. ‘눈’ 상징의 분화와 시선의 연계 지금까지 ‘감는 눈’의 상징과 그것이 공간으로 확장된 경우를 중심으 26) ① 順아 암사슴처럼 水晶눈을 나려감어라 - .사랑의 전당. 부분 ② 少年은 황홀이 눈을 감어 본다 - .소년. 부분 “戀情”이 갖는 일차적 의미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라 할 수 있 다. 인용한 ①과 ②는 “순이”라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시의 일 부이다. “영원한 님에의 그리움”이라고 정의한 마광수(마광수, 尹東柱 硏究 : 그의 詩에 나타난 象徵的 表現을 中心으로 (정음사, 1984), 108~115면 참조)를 비롯해 많은 논자들이 “순이”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논의를 전개해왔다. ① 과 ②에서 “순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각각 피동형과 능동형의 눈감는 행위 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눈을 감는 행위는 .명상.에서의 “戀情”과 유사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5 로 내재된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는 주체의 ‘의지적 불구의 식’에 대해 논구해보았다. 그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 장에서는 ‘감는 눈’의 상징이 다른 형태의 ‘눈’ 상징과 맺는 연관관계를 살펴봄으 로써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눈’의 시선이 지닌 의미를 총체적으로 규 명해보고자 한다. 기실 ‘시선’은 외부적 확장의 방향 외에 근원으로의 내부적 지향의 방향성 또한 지니고 있다. 이는 윤리적, 역사적 의미, 그리고 더 나아 가 종교적 의미범주와 결부될 수 있는 죄의 속성을 감지하는 주체의 자기 인식 방법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부적 지향성으로서의 시선에 대한 이 같은 논의는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윤리의식의 범주만으로 해 명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는 방법이 된다.27) 이에 대한 고찰은 앞에서 인용한 .눈감고간다.의 마지막 연에 제시 된 ‘뜨는 눈’으로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동일한 시에 제시된 ‘감는 눈’ 과 ‘뜨는 눈’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앞 장에서 개진한 ‘감는 눈’의 상징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밤이 어두었는데 눈감고 가거라. ············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왓작떠라. - .눈감고간다. 부분 이 시에서 ‘뜨는 눈’은 앞에서 살펴본 ‘감는 눈’의 상징과 연계되어 나타난다. 이 때 전자는 특정 계기로 인한 개안(開眼)을 의미하고, 후 자는 응시의 시선을 나타낸 것으로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에 대한 주 27) 졸고, 앞의 책, 참조. 96 민족문화연구 제43호 체의 성찰과 반성을 의미한다. ‘눈’을 감게 되는 계기가 외부적 상황 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에 대 한 주체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한 마지막 연의 “발뿌리에 돌이 채이면” “눈”을 뜬다 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진실을 목도할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한 주 체가 현실의 상황에 직면해 비의지적 신체의 일부였던 이전의 ‘눈’이 아니라, 행위를 이행하는 의지적 신체기관으로서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특정 계기로 인해 참된 것을 볼 수 있게 된 ‘뜬 눈’의 시 선은 다음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빨리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어 - .또太初의아츰.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눈이/밝어”라고 했다. 이는 “눈이 밝”는 현상이 “봄”이라는 시간성과 연관되어 있음 을 나타내준다. 윤동주의 시에는 계절의 변화를 동반한 시간성의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많은 경우 “봄”은 과거의 시간성인 동시에 인고의 시간을 거쳐 도래할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에 서 그러한 “봄”은 현재의 실존상황과 맞물리며 표면적으로 해독될 수 없는 역설적 의미로 상징화된다.28) 28) 윤동주의 시에서 ‘봄’은 대체로 ‘음산함’, ‘우중충함’, ‘등지다’ 등의 어휘와 함께 쓰이곤 한다. 그러나 이를 암울한 시대배경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시 를 단순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과거의 시간이나 이상 속에 존재하지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7 이 시에서 그러한 해석의 애매성은 ‘봄이 오다’와 ‘눈이 밝다’라는 두 사건을 연계해주는 인용한 3행의 “罪를 짓”는 상황으로부터 초래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나타난 ‘뜨는 눈’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봄”과 “罪”의 연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봄’의 밝음은 ‘어둠’이 사라 진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의 에덴동산 모티프를 차용한 .또太 初의아츰.에서는 그러한 ‘봄’의 밝음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는 계 기로 작용하게 된다. ‘봄’의 밝음이 내부로 향해 “눈이 밝”아지는 것 은 외부의 빛이 내부의 시선으로 전이되면서 자신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이 지점에서 이 시의 ‘뜨는 눈’은 본질 을 바로 직시하기 위해 눈을 감는 ‘감는 눈’의 시선과 상통하는 의미 를 갖게 된다. 한편 눈을 감음으로써 형성된 영역에서 진리를 보게 되는 그러한 ‘감는 눈’의 시선은 특정 공간에 진입하여 자신의 본질을 목도하려는 ‘뜬 눈’의 시선과 연계되기도 한다. ①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 .自畵像. 부분 ②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것은 어느 王朝의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 않는 ‘봄’의 시간성은 현재의 시간을 무화시키며 시간성의 혼재를 가져온다. 그 러한 특성을 지닌 윤동주의 ‘봄’은 역사적 실존의 저항의식, 윤리적 실존의 자 기반성, 종교적 실존의 죄의 고백과 같은 실존상황을 다층위적으로 함의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 시대의 여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제한된 ‘봄’의 의미와 차별화된 윤동주의 고유한 ‘봄’을 만들어낸다. 98 민족문화연구 제43호 그러면 어느 隕石밑우로 홀로거러가는 슬픈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懺悔錄. 부분 ③ 故鄕에 돌아온날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엇다. ············ 어둠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것이냐 白骨이 우는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것이냐 - .또다른故鄕. 부분 위에 인용한 시들에는 ‘뜬 눈’의 상징형태가 간접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이들 시편에서 ‘뜬 눈’의 상징이 신체기관으로서의 몸 상징의 형 태로 구체화되지 않고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와 같은 형태로 간접화 되어 제시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러한 ‘들여다보기’, ‘바라보기’의 행위가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우물을 홀로/찾어가선”(①),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②), ‘고향집의 어두운 방 안’(③)과 같이 외부로부터 차단된 독립적 공간이 전제된 상황에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이들 ‘뜬 눈’의 시선은 비의지적 신체기관의 물리적 시선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통과해 참된 자신의 본 질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지적 시선이라는 이차적 의미에 가닿는다.29) 이러한 ‘뜬 눈’의 상징 역시 앞에서 논의한 ‘감는 눈’의 상징에서 살펴 29) .自畵像.의 “어쩐지”가 보여준 감정의 근원으로 대표되는 해석의 애매성을 포 함한 ‘뜬 눈’의 상징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앞의 책 참조.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99 볼 수 있던 본질 직관의 시선과 연계되면서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눈’ 상징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윤동주의 시에서 ‘뜬 눈’, ‘뜨는 눈’, ‘감는 눈’으로 삼분되는 ‘눈’의 상징은 자기 인식과 관련하여 각각 주체의 분화로 귀결되는 주체의 반성행위, 특정 계기로 인한 각성, 참된 본질의 인식을 의미 한다. 오류가능성을 지닌 낯선 주체에 대한 거부감은 기존 논의에서 ‘들여다보기’의 형태로 다루었던 윤리적 반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 러나 간접적으로 형상화된 ‘뜬 눈’의 상징이 ‘감는 눈’, ‘뜨는 눈’의 형태와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논문의 ‘눈’ 상징이 기존 논의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감는 눈’의 상징이 ‘뜨는 눈’, ‘뜬 눈’의 상징형태와 관계를 맺으면서 유한성이라는 인간 실존의 본질적 조건 을 드러내는 한편 그러한 실존이 처한 외부적 상황에 대한 저항의 태도를 함의한다는 사실을 규명한 데 있다. 기존 논의에서 도덕적 정결성에서 비롯된 자기반성으로 인식되던 주체의 내부를 향한 시선은 결국 죄의 속성을 비롯한 자신의 오류가 능성, 불완전성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주체의 자기 인식을 담고 있 다. 그러나 ‘눈’을 매개로 한 이 같은 자기 인식은 내부를 향한 시선 으로만 머물지 않고 외부적 상황에 의해 촉발된 의지 발현으로서의 저항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정성을 특질로 하는 윤동주 시의 많은 시편들에 내재된 저항성의 의미층위는 이렇듯 상징의 다의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같은 특질은 저항시로서 의 특성을 지닌 윤동주의 시가 시대를 초월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100 민족문화연구 제43호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이 논문은 언어적 측면의 분석을 기반으로 상징의 의미구 조를 분석하여 윤동주 시의 주체상이 형상화된 방식을 살펴보았다. 이 는 특히 주체의 존재태가 농축되어 있는 “눈”이 ‘눈을 감는’ 특수한 형 태로 반복되며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음에 주목한 논의이다. 이를 통해 그러한 몸 상징이 외부의 풍경과 비유적으로 결합하여 변주된 상징의 형태로 의미를 심화시키는 특성과 ‘뜨는 눈’, ‘뜬 눈’과 연계되어 형성 된 ‘감는 눈’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논문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감는 눈’의 상징의미가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의 표출임을 밝혀내었다. 이는 ‘뜬 눈’의 시선과 상통하는 의미화의 지점에서 주체의 내부로 향하는 자기 인식 의 시선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를 바라보는 내재된 시선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대적 저항 성을 표명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감는 눈’ 상징의 의미적 이중 성을 도출함으로써 이 논문은 ‘감는 눈’, ‘뜨는 눈’, ‘뜬 눈’으로 삼분되 는 윤동주 시의 ‘눈’ 상징을 총체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논지 전개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감는 눈’의 변주형태로 설명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저항의 방식인 퍼소나의 치환을 논의에서 배제하였다. 타자와의 직접적 소통을 거부하는 외면행위로 변주되는 ‘가면 쓰기’의 양상은 동시를 포함한 윤동주 시의 퍼소나가 순진성을 가장한 주체의 의도된 저항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이에 대한 고찰은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 주제어 : 감는 눈, 공간, 확장, 뜨는 눈, 뜬 눈, 의지적 불구의식, 저항, 주체, 자기 인식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101 참고문헌 1. 자료 권영민 편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문학사상사, 1995. 왕신영 외 엮음, (증보판)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 민음사, 2002.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음사, 1948. 2. 국내 논저 강만길, 韓國現代史, 창작과비평사, 1984. 권영민 엮음, 윤동주 연구 , 문학사상사, 1995. 김영윤, .보들레르에 있어서 우울과 도취., 상징주의 문학론 , 민음사, 1982. 김열규, .윤동주론., 국어국문학 27집, 1964. 김치수 외, 현대기호학의 발전 ,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김흥규, .윤동주론., 창작과 비평 9.3, 창작과 비평사, 1974. 마광수, 尹東柱 硏究 : 그의 詩에 나타난 象徵的 表現을 中心으로 , 정음사, 1984. 유종호, .청순성의 시, 윤동주의 시., 김학동 편, 윤동주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7. 임현순, .윤동주 시의 ‘눈’과 매개된 인식., 한국근대문학회 편, 한국근대문학 연구 12집, 태학사, 2005. 정기철, 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 문예출판사, 2002. 정 양, .동심의 신화., 국어국문학연구 5집, 원광대학교, 1979. 정의채, .현대사회의 폭력의 의미 - 폭력과 평화에 대하여., 폭력이란 무엇인 가 : 그 본질과 대안 - 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 (2002년도 한국학술진 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일반연구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공동연구팀 발 표논문집), 2003. 3. 국외 논저 아리스토텔레스, (개역판)시학 ,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1995. 알베르 베갱, 낭만적 영혼과 꿈―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시에 관한 시론 , 이 상해 옮김, 문학동네, 2001. E. 카시러,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 , 오향미 역, 책세상, 2002. 오귀스탱 베르크,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 김주경 옮김, 미다스북스, 2001. 오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와 한국문학 , 소명출판, 2001. 102 민족문화연구 제43호 T. 토도로프, 상징과 해석 , 신진.윤여복 공역, 동아대학교출판부, 1987. 페르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 최승언 역, 민음사, 1990.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 양명수 역, 아카넷, 2001.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 김정한 옮김, 이후, 1999. 大村益夫, .尹東柱の事跡について., 朝鮮學會 編, 朝鮮學報121, 1986.10. ‘감는 눈’의 시선과 폭력에의 저항 103 【국문초록】 이 논문은 윤동주 시 상징의 의미구조를 분석하여 그의 시에 나타난 ‘감는 눈’의 상징과 그것이 확장, 변주된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윤동주 시의 저항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이는 외재적 계 기에 의존해 식민지 반동일화 담론으로 시를 읽어내는 선행 연구의 제 한에서 벗어나 시 자체의 내재적 계기로부터 출발해 의미화에 다다르 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 논문은 주체의 존재태가 농축되어 있는 “눈”이 ‘눈을 감는’ 특수 한 형태로 반복되며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음에 주목한 논의이다. 이를 통해 그러한 몸 상징이 외부의 풍경과 비유적으로 결합하여 변주된 상 징의 형태로 의미를 심화시키는 특성을 살펴보고, 그것이 ‘뜨는 눈’, ‘뜬 눈’과 맺는 의미상의 연관관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윤동주 시의 ‘눈’ 상징을 종합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논문은 ‘감는 눈’의 상징이 실존의지를 전제한 불구의식 의 표출로서, 자기의 내부로 향하는 자아 성찰의 시선뿐만 아니라 내 재된 시선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관찰, 그에 대응하는 근 대적 저항성의 표명을 담고 있는 시선을 나타낸다는 의미적 이중성이 서로 대치되지 않고 상통함을 도출해내었다. 104 민족문화연구 제43호 ========================덤으로 더 더 더... 윤동주에 대하여   1.'이름도 없는 윤동주'와 함께 있고 싶어/ 이누가이 미쯔히로  -윤동주와 가도 게이지 씨  2. 그리스도를 본받아/다카도 가나메  -윤동주의 신앙  3. 윤동주를 보는 일본인의 시각/김우규  -속죄와 화해를 바라는 양심의 소리  -위의 글들은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 이누가이 미쯔히로와 7인/민예당' 책에서 일부만 발췌한 것입니다.  1. '이름도 없는 윤동주'와 함께 있고 싶어  - 윤동주와 가도 게이지 씨  作 이누가이 미쯔히로  내가 윤동주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가도 게이지씨에게서엿다.  그는 1980년대의 지문 날인 거부 투쟁을 정력적으로 떠맡았고, 그 필연적인 전개로서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가는 여행'의 리더가 되어 수차례나 현해탄을 왕복하였다. 또한 필연적인 전개로서 반천황제 투쟁에 감연히 나서서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차, 암 선고를 받고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가도 게이지 씨가 만년에 더없이 사랑한 사람이 윤동주였다.  최근 일본에서도 윤동주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그 시비가 세워지기도 하고, 그의 시나 전기가 출판되어 나오는데 대해 큰 기쁨을 느끼는 터이지만, 가도 게이지 씨를 통해 윤동주를 알게 된 나로서는 한가닥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원래가 산문적인 인간이라 나 같은 것이 윤동주에 대해 감히 무엇을 쓴다는 것부터가 가당찮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일본이 윤동주를 받아들이는 데 기여한 가도 게이지 씨의 역할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가도 게이지 씨에게 있어 윤동주란 어떤 존재인가를 증언해 보고자 한다.  가도 게이지 씨는 1991년 11월 2일에 말기 암의 선고를 받았다. 그 때 쓴 글이 이제 소개할 이다. 윤동주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가도 게이지 씨의   -시모노세키를 오후 5시에 출항한 관부연락선은 1시간쯤지나 육련도 부근을 통과합니다.  지난해도 지지난해도, 아니 첫 해부터 그랬습니다. 현해탄의 팔월의 바다는 바람이 거셉니다.  갑판에 부는 바람으로 여러분의 뺨이 일그러지고, 빗어내린 머리카락도 휘말려 올라가겠지요.  그러나 자세를 그대로 하여 바다위를 바라보아 주십시오. 이 해협을 거쳐 강제로 끌려간 이백만명이라는 조선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신음소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릴 잊지 말아 다오. 우릴 보상해 다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의 마음을 되돌려 다오!" 분명히 들으셨지요?  그로부터 1시간쯤이면 앞바다 섬 근처까지 가게 됩니다. 이젠 해질녘인 7시지요.  시선을 서쪽 지평선 쪽으로 돌리십시오. 서녘 하늘에서 해원으로 떨어지고 있는 저녁해가 오늘도 보일런지요.  현해탄은 슬픔의 바다입니다. 당시 배 밑바닥의 누에섶과도 같은 삼단으로 된 선실에 처박혀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뺨을 스치는 바람도 빨간 저녁해도 딴 세상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현해탄을 거너는 연락 페리 위에서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오직 사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잇느냐는 말을 주위에서 항상 들어왔습니다. 당신이나 내가 직접 저지른 잘못은 아니니 그런 일에 구애 받지 말고, 자유로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도 종종 들어왔습니다. 나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과 아시아의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일본이라는 죄 지은 배(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조상이 지은 죄를 대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를 가른 바다에 가으링 오고, 진눈깨비 내리던 겨울이 가고 , 봄이 찾아들 무렵이면 바다 사이를 물새가 날아오고 날아갑니다. 물새는 "자, '희망'을 실어왔어요!"하고 정답게 울면서, 죽어간 조선인의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씻어 주려 애를 씁니다. 그러한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런 바다에 잠들고 싶습니다  1991년 11월 2일  죽음을 알려온 날에 가도 게이지  나는 이 을 11월 4일에 건네 받았고, 유골을 현해탄에 뿌려 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당한 윤동주의 유골의 일부가 아버지의 손에 의해 현해탄에 뿌려진 것을 가도씨는 알고 있어서 그렇게 부탁했던 것이다. 가도씨와 절친했던 친구들은 가도씨 역시 산문적인 인간으로 결코 시를 이해하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도 동감하는 터이지만, 만년의 가도씨는 이 에서 알 수 있듯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몇 편의 문장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도씨는 윤동주를 투병의 와중에서 읽으셨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항 시인 윤동주'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윤동주의 시는 태어났던 것이며, 따라서 윤동주의 시는 투쟁 속에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 속에서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 자신의 욕됨과 신념 없음을 철저히 깨달아 알았기에, 어디에 의지해야 할 지를 알고 꿋꿋이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던 것이다.  이 가도씨가 1989년 12월 3일에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가는 여행' 보고서의 권두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목은 .  *'이름도 없는 윤동주'에게  서 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저항 시인' 윤동주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꾀했다 하여 붙들려가서 일본의 패배와 조선의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한글로 시를 쓰고 ,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맹세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던 윤동주를 죽인 것은 일본인과 일본 정부였습니다  납골 단재에 담기지 못하고 하얀 재가 되어 버린 윤동주의 뼈는 고향으로 돌아가다 아버지의 손으로 현해탄에 뿌려졌다고 그 동생이 전하고 있습니다.  9일 동안의 여행길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아니 어쩌지도 못하고 죽어간 이름없는 '윤동주들'의 뼈를 밟고 걷는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무라 강제수용소의 허물어진 흙답벼락에서 본 것은 '한마음......산도 바다도 보인다......기어코 해내리라......바른 마음으로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온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치듯이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그러한 '봄'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이름없이 죽어간 한국인.조선인에게 바칩니다.  1989년 12월 3일  '강제 연행의 자취를 젊은이들과 더듬어 가는 여행'  실행위원회 대표 가도 게이지  가도씨는 윤동주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바다(현해탄)에서 잠들고 싶습니다.'고 끝나는 가도씨의 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 젊은 나이로 죽은 윤동주의 뼈의 일부가 그 아버지의 손으로 현해탄에 뿌려진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추도문집을 나는 가도 게이지 씨의 비문으로 삼고 싶다. 몇 번이라도 다시 꺼내 읽으며 우리들의 결심을 새롭게 하고 싶다.  1993년 2월 24일  2.  그리스도를 본받아  - 윤동주의 신앙 作 다카도 가나메  나는 이 교회에 오기 전에 이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찾아가 둘러보고 왔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아시다시피 그 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는 1941년 11월 20일에 쓰여졌으므로 이제 17일 뒤면 만 50년, 꼭 반세기가 되는 것입니다. 50년 전에 쓰여진 시가 오늘도 싱그럽게, 오늘에 쓰여진 시처럼 내 영혼을 뒤흔들어 줍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내 가슴에 끓어 오르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일본인인 내 가슴을 도려내고 마구 쥐어 뜯어 마음에 아픔을 안겨 줍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 시커멓게 갈앉은 죄와 더러움이 정화되고 내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이 위로받아, 이 나에게도 새로운 만남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캠퍼스를 걸으면서 나는 윤동주의 발소리를 듣고, 윤동주의 체온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우러른 '하늘'을 펴다보고, 그의 피부를 스친 '바람'을 느끼고, 그가 사랑한 '별'을 환상으로 보고, 그가 좋아했던 코스모스를 바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음속에 떠올린 것은 시인 박두진 선생의 말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늠름한 희생은 그 작품과 생애의 불멸의 가치와 더불어 일제의 만행과 침략, 군국주의의 죄악사를 언제까지나 고발하고 또 심판하고 있다."  나 자신도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리스천 홈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나는 '비국민'이란 욕을 듣고,괴롭힘을 당했던 지난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나는 자신이 직접 범하지 않은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원죄'로 받아 몸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윤동주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더러운 손'은 바로 나의 것입니다. 나는 윤동주가 쓴 가장 원숙한 만년의 그 귀중한 시원고가 일본 관헌의 손에 몰수되어 어쩌면 쓰레기처럼 소각되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 마치 내가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자 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한 '원죄'를 나는 평생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시비가 있는 언덕 위에서 시인이며 목사인 문익환 선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모든 대립이 해소되었다. 그 미소에 감도는 포근한 기운으로 녹지 않는 얼음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피를 나눈 형제였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둘 때 그는 일본인들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리라고. 인간성의 깊이를 간파하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이하고도 따뜻한 위로의 말은 실은 나 자신이 (記錄社,1984)를 일본어로 읽으면서 느끼고 있었던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윤동주는 일본인을 고발하고 심판하면서 동시에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려 했고 용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과거를 간파할 뿐만 아니라 미래도 함께 내다보고 있던 '예언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생략.....  나의 상상은 너무 멋대로인지도 모릅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동주를 바라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을 허락받은 자로서 이와 같이 상상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시이나 린조는 한 인간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그 만남은 '상대방을 위해 죽는다고 하는 비주체적 행위를 통하여 상대방의 것이 되어 상대방의 슬픔과 괴로움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공감'없이는 '어떤 대화도 교통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대방에게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거기서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성립시키자면 상대방 속에 자기를 죽이는, '주체'가 죽는다고 하는 '비주체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상대방의 것', 상대방의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상대방의 슬픔'이나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이나 린조라는 작가는 기독교 작가이므로 이 점을 잘 알고 말했을 터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죽여서 '상대방의 슬픔'이나 '괴로움' 속에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이나 린조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공감,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시이나 린조라는 기독교 작가가 호소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만남을 성립시켜 주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말인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고 '나'를 죽여, 죄있는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속에 살아가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불가능한 만남을 가능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윤동주에게 있어서의 '만남'은 일본의 소설가인 시이나 린조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만남'일 뿐 '참'된 '만남'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가능로서는 불가능한 '참된 만남'을 기구하고 있던 한 사람의 가난한 기독교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윤동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해서 죄사함을 받고 부끄럼을 씻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참"된 만남을 성취했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노래할 여지가 없습니다.  윤동주가 옥사한 시대에 비해서 지그의 이 시대가 조금은 나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쉽고 부서져 버리기 쉬운 영혼이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일까요. 절망으로 하여 신에 대한 불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될 시대일까요. '만행', '침략', '죄악' 따위의 '고발'이나 '심판' 같은 것이 없이도 넘어갈 수 있는 시대일까요.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에 아픔을 깨달으면서도 '별을 노래하는마음'으로 인간 모두가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우리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하늘'로 부터 주어진 길을 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두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가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허락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 번에 한국어판인 (전망사)과일본어판 (교문관) 이 두 시집의 출판 기념회를 위해 서울에 왔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과 일본의 기독교인이 시와 문학을 통해서 더욱 싶은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우리들 모두의 '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충이라고 믿습니다.  찬양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1991년 11월 3일  연세대학 교회에서 일요예배 설교  3.  윤동주를 보는 일본인의 시각  -속죄와 화해를 바라는 양심의 소리 作 김우규  1.일본 속의 윤동주 바람  만일,우리말과 우리 글을 빼앗겼던 일제말의 암흑기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써 남겼던 윤동주의 시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더라면 이 시기는 우리 문학사에 영원한 공백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흙으로 덮였던 윤동주의 이름은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이 땅의 '언덕'위에 영롱한 별빛으로 자랑스럽게 되살아나 우리 문학사의 공백을 메워 준 소중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우리 한국인 모두의 마음이 되어 공감의 폭을 넓혀가며 애송되고 있다. 이 별빛은 또한 지금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남의 나라' 일본 땅의 '언덕'위에도 촉촉이 내리고 있다. 한국 시인의 시가 이처럼 일본인의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굴욕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한 시인의 작품이 바로 그가 최후를 마친 형무소가 있는 후쿠오카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애송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마 생전의 윤동주 자신도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윤동주는 모국에서 뿐만 아니라 '남의 나라' 일본에서도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전집이 일본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으로 이부키고에 의해 번역 출간된 데 이어, 소설가 송우혜의 이 역시 같은 역자의 손으로 번역 소개된 이래 1992년에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이 생기면서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에도 크게 다루어졌다(일본 여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에 의해 윤동주의 시와 생애가 11페이지 분량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졌다). 한국 시인의 작품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또 1994년에는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시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이 생겨 지금까지 20여회의 낭송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같은 해 일본 NHK에서는 윤동주 50주기 추모행사로 '윤동주 특집'을 방영하여 대대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다. 한 편 시비 건립위원회에서는 윤동주가 다니던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여 언론에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시비에는 윤동주의 가 확대된 그의 친필과 일역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모리다 스스무가 번역한 윤동주의 시편들을 곁들여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들이 집필한 평설집이 란 제목으로 일본 그리스도교단 출판국에서 출간되어 한 달 만에 재판이 나올 정도로 큰 반향(反響)을 얻고 있다. 이로써 윤동주는 오십 년 전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 땅에서 지금은 바야흐로 일본의 '성실한 지성과 양심'에 의해 '한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조명을 받고 있다.  .....중간 생략....  2. 한일(韓日) 화해의 파이오니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윤동주의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독특한 이해의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윤동주의 시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부끄럼'의 의미를 종교적. 실존적 차원에서 해명한 점과 그의 저항 정신을 일제말의 암흑기에 '한글로 시를 썼다'는 문학행위에서 확인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 정신이 완벽하게 일체화된 시정신의 높이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성실한 통찰력이 주목된다. 그리고 그 보다도 그 저변에 깔려 있는 한결같은 염원-즉 '그의 혼은 한일의 화해와 우호를 바라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이어질 것'을 믿고 소망하는 충정에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이 감명 깊게 다가옴을 느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윤동주로 상징되는 한국인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업보를 윤동주의 이름으로 용서받고자 하는 진솔한 사죄의한 표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의 '후기'가 잘 대변해주고 있다.  "1995년은 일본으로서는 패전 50년째가 되는 해이다. 우리는 이 해에 새로운 50년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위하여, 일본이 세계, 특히 아시아에 대해서 자행한 침략과 전쟁의 죄악에 가득찬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리다 스스무와 같은 이의 작품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의 마지막 행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를 '비벼진다'라고 번역한 부분을 들 수 잇다. 여기에서 별은 이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 혹은 이데아의 세계이다. 바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시련과 같은삶의 저해 요인이다. 따라서 별과 바람은 대립적인 존재이다. 그가 추구하는 순수 가치의 세계가 바람과 같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시달리는 상황을 뜻한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이 '비벼진다'라는 것은 마치 서로 사랑하는 것끼리 정답게 어깨를 마주 비벼대는 것처럼 보고 있다. 대립이나 적대가 아니라, 오히려 우호요 포용의 몸짓이다.  또 다카도 가나메 같은 이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 그 '사랑해야지'의 대상으로 일본인 까지 포용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 가운데는 미워해야 할 다른 사람인 일본인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인인 난만이 독선일까요." 그러면서 문익환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모든 대립이 해소 되었다...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둘 때 그는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눈불을 흘렸으리라고. 인간성의 깊이를 간파하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윤동주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더러운 손'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죄의식에서 죄사함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원수를 용서하듯이 미워해야 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한 윤동주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한일간의 화해'는 윤동주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사랑'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날 일제하에서 저들이 우리에게 자행한 엄청난 만행과 학대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죄악' 임에 틀임없다. 그리고 걸핏하면 독도 영유권 등을 들고나오는 일본인들의 책략이 한없이 가증스럽다. 아마 일본인의 근성가운데는 악의적인 막뿌리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동주를 사랑하는 적지 않은 일본인 가운데는 지난날의 일본의 죄악사를 사죄의 심정으로 돌아보며 진정한 화해를 희망하는 진솔한 양심과 휴매니티가 내재되어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윤동주의 존재는 일본의 다카도 가나메가 윤동주 50주기에 추모 강연에서 말했듯이 "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하고 고발한 파이오니어가 된 시인은 사랑으로 이어주는 파이오니어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123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명상 댓글:  조회:3849  추천:0  2018-09-07
명상 / 윤동주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  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영화 "동주"를 봤다.   80년 전에  이 땅에서 나라를 위해 살았던  청춘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하다. 주인공 윤동주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부끄러움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부끄러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마음속 화두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것일까?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래... 부끄럽게 살지말자고 다짐해 본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 마음을 바라 봐야지!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1235    윤동주와 윤혜원, 오형범 댓글:  조회:2948  추천:0  2018-09-06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을 시키고 있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 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1234    윤동주와 "련인" 댓글:  조회:2590  추천:0  2018-09-06
  윤동주의 시에는 '순이'라는 특정 인물이 총 세 번 나온다.        「눈 오는 지도」, 「소년」, 「사랑의 전당」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윤동주 자신이라면  마치 사모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듯한 인물로 묘사된다.  물론, 시의 내용을 윤동주의 삶과 1:1로 등치시켜서 생각해서는 안되겠으나  '사랑시'라는게 없다고 봐야하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 중에  유독 핑크빛 기류를 발산하는 이 인물은 과연 윤동주의 연인의 모티브였을까.   . . .   아니다.     만 27년간의 짧은 생애 속에서 윤동주는 어떠한 연인도 없었다는 유족과 친구, 지인들의 (잔인한) 증언들이 가득하다.  유독 이런 증언들에 열을 올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아마 주변에서 궁금하니까 계속 물어봐서 그렇겠지.  감정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이기에, 그 감정이 폭발하는 '사랑'의 대상이 있었는가는  어쩌면 윤동주 연구에 큰 가닥일 수 있을테니까.  영화 《동주》(이준익, 2016)에서는 감독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연인같던 인물을 창작해냈지만 이는 픽션이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면서 한 여인을 흠모했으나  그 마음을 전하지 못했고, 친구의 여동생에 관심이 있어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여름방학 때 고향집에 갔다가 그녀가 돌연 약혼을 하고 돌아오자 마음을 접었으며,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여인의 사진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는 허락을 받아놓고는  알고보니 윤동주 혼자 좋아하고 고백도 못한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윤동주의 수줍음 많은 성격 때문이었는지, 유학 생활과 독립 운동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이었을 것이다...아마도.     그렇다면 이렇게 혼자 짝사랑만 했던 윤동주가 계속 언급하던 '순이'는 대체 누구인가.    윤동주가 좋아하던 여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적 세계를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윤동주가 가장 바라고 있는 것, 지키고 싶은 것의 총체를 뜻한다고 보는게 적합하다.  그것은 당시 문화 말살을 시행하던 일제로부터 지키고자한 우리의 언어이기도 할테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혹은 연인이기도 할테고, 문화와 국가이기도 할테다.  혹자는 일본군 '위안부'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특정한 어떤 사건과 단체를 말한다기 보다는  소중한 그 어떤 것들을 종합적으로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   (여동생 윤혜원과 매제 오형범의 증언) 동주 시인이 방학때 한번 용정집에 왔는데 집안어른들에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사진을 보여주더랍니다.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이고, 어디 집안 사람이고 하도 이쁘고 참한사람이다 어른들 눈엔 어떠신지 궁금하다며 소개를 하니.. 어린 여동생의 눈에서 봤을땐  당연히 그 여자와 결혼하겠구나 싶어서 얼굴을 눈여겨 봐두었답니다. 45년도에 오빠가 죽고 몇년후에  6.25 전쟁이 터졌을때 피난을 내려가던 와중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여동생부부가 당시 성가대 활동을 하던 박춘애를 우연히 알아보고 몇마디 나누다가 오빠 이야기가 나와서 혹시 서로 좋아한 사이였는지  물어보니 깜짝 놀라더랍니다 '전혀 고백을 받은적이 없었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시인에게 건네받은 시가 한편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는데 미처 동생부부가 시를 건네받기 전에 연락이 끊겨 현재는 시의 행방을 알수없는  상태입니다    
1233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능금" 댓글:  조회:3914  추천:0  2018-09-06
  분류 속씨식물 > 쌍떡잎식물강 > 장미목 > 장미과 > 사과나무속 원산지 아시아 (대한민국,중국) 서식지 화강암계, 화강편마암계, 변성퇴적암계, 경상계 등의 토질 크기 약 10m 학명 Malus asiatica 꽃말 은화, 참애호자 요약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교목.   능금나무(Malus aslatica) ⓒ Łukasz Szczurowski/wikipedia | CC BY-SA 3.0 키는 10m 정도이며 어린가지에는 털이 많이 달려 있다. 잎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고 어긋나며 잎가장자리에는 조그만 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분홍색으로 피고 꽃잎과 꽃받침은 각각 5장이며 꽃받침은 뒤로 젖혀진다. 암술대 밑에는 털이 나 있다. 사과처럼 생긴 둥그런 열매는 8~10월에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으로 익으며 겉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사과나무와 비슷하나 사과나무는 꽃받침 밑부분이 열매가 맺힐 때 혹처럼 커지지 않는 반면에 능금은 혹처럼 두드러지게 커진다. 경기도·황해도에서 마을 주변에 흔히 심고 그 열매를 먹어왔으나 외국에서 들어온 사과에 밀려 지금은 거의 심지 않고 있다. 능금이란 이름은 임금에서 나온 것으로, 전설에 따르면 임금은 왕을 뜻하는 임금과 똑같이 읽혀지므로 아마도 고귀한 과일이라고 생각되어 고려 때 수도인 개성에 능금 심는 것을 장려했고, 조선시대에 태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역시 능금 심는 것을 장려했다고 한다. 사과보다는 열매가 작고 시며 떫은 맛이 난다.   분류 장미과 성격 식물, 나무, 과일 유형 동식물 크기 높이 10m 학명 Malus asiatica NAKAI 분야 과학/식물 개화기 5월 요약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소교목.   내용 학명은 Malus asiatica NAKAI이다. 우리나라 야생의 사과나무로 서울 자하문 밖과 강원도·황해도의 표고 100∼700m에서 자생한다. 나무의 높이는 10m에 달한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이고 뒷면에 면모(綿毛)가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엽병(葉柄)은 길이 1∼4㎝로서 털이 있다. 꽃은 양성(兩性)으로 5월에 피고, 짧은 가지에 우산모양으로 달린다. 소화경(小花梗)은 길이 1.8∼2.8㎝로서 털이 있다. 꽃잎은 다섯 개로 연한 홍색의 타원형이고, 수술은 5∼10㎜이며, 암술대는 5개로서 밑부분이 합쳐지며 털이 있다. 꽃받침의 밑부분이 혹처럼 부푼 것이 사과나무와 다르고, 열매는 지름 4.0∼5.5㎝로서 10월에 황홍색으로 익으며 겉에 하얀 가루가 덮여 있다. 전국 어디서나 잘 자라는 양수(陽樹)로서 음지에서는 개화결실이 불량하고, 바닷가에서는 피해를 입는다. 내건성(耐乾性: 가뭄에 견디는 성질)은 약하나 대기오염에 대한 저항성은 강하다. 줄기는 직립하여 원추형의 나무모양을 이루고 가지는 홍갈색이다. 봄에 피는 연분홍색 화사한 꽃은 아름답고, 가을에 무르익는 탐스러운 주홍색의 능금은 우리 고유의 참사과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이 가꾸어 온 재래종의 특산 과수로서, 유전자를 잘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 가을에 종자를 채취하여 노천에 매장하였다가 봄에 파종하거나, 확실한 품종을 얻으려면 아그배나무나 야광나무를 대목으로 하여 접목하여야 한다. 열매에 달린 꽃받침 밑부분이 혹처럼 되지 않은 것을 사과라 한다. =====================///   綾衾능금 ①무늬가 있는 비단(緋緞) 이불   ②무늬가 있는 비단(緋緞)으로 바른 미닫이   沙果사과 사과(沙果ㆍ砂果)나무의 열매. -비타민 C가 풍부(豐富)하며, 신맛ㆍ단맛이 있음. 세는 단위(單位)는 개ㆍ알ㆍ접(100개)   능금1[능금] [명사] 1.능금나무의 열매. 사과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훨씬 작다. 2.‘사과(사과나무의 열매)’의 잘못. 유의어 : 사과   능금2 (綾衾) [명사] 1.무늬가 있는 비단 이불. 2.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바른 미닫이. ==========================///     능금은 능금나무의 열매로, 지름이 4∼5.5cm이며 10월에 노란빛을 띤 붉은 색으로 익고 겉에 흰 가루가 덮여 있습니다.   크기가 골프공보다 작거나 비슷하고,맛은 새콤달콤합니다.   사과보다 작고 지금의 사과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능금을 품종 개량해서 많은 사과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먹는 것은 사과입니다.   능금은 작고 상품성이 없기 때문에 넓은 범위로 따로 재배하지는 않습니다.   주로 분재로 이용되거나, 관상수나 가로수로 심습니다.  
123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그 녀자 댓글:  조회:3331  추천:0  2018-09-05
  그 녀자(여자) / 윤동주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중심 어는 붉은 능금입니다. 상징은 그 여자입니다. 제목의 상징어이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붉은 능금을 보면서 가을날 여인을 생각한 아주 짧은 시이지만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른 사람이 아니 손님이 데리고 간 것을 아무런 감정이입이 없이 시는 끝입니다. 하지만 윤동주의 기독교적인 관념에서 살펴본다면 이것이 원죄인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사랑한 적이 없다고 밝히지만 그 나이면 아마 짝사랑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시인의 양심을 존중할 밖에요. 내가 사실 거두어야함에도 시인은 손님으로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추측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을 프롤레타리아라고 했고, 조르조 아감벤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을 호모사케르(Homosacre)라고 했고, 가야트리 스피박은 스스로의 상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서벌턴(Subaltern)이라 했다. 이런 용어들은 연구자 자신의 시각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에 대한 정의일 뿐이다.   주변인(周邊人·The Marginal)이란 용어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신체적이거나 지역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문제를 포괄해, 한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해 공동체의 중심에 있지 않고 테두리에 있어 소속감이 아니라 소외돼 살아가는 인물들을 말한다.   윤동주가 사랑하는 대상은 대단히 넓다. 그가 말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다짐은 너무도 넓은 대상을 포괄하고 있다. 그 시대에 죽어가는 것은 너무도 많았다. 윤동주는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했다. 그는 여성 노동자(《해바라기 얼굴》)와 복선철도 노동자(《종시》)라는 주변인뿐만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 같은 생태계도 사랑한다. 이렇듯 주변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슬픈 족속》에서도 볼 수 있다.   힌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힌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힌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힌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 《슬픈 족속》(1938년 9월) 이 시는 당시 남성(1연)과 여성(2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 이 시를 지었다. 이제까지 주로 오줌싸개 아이들(《오줌싸개 지도》), 주머니에 넣을 것이 없는 사람들(《호주머니》) 등 개별적인 이웃의 모습을 그렸던 윤동주는 ‘족속(族屬)’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시 언어로 끌어들인다. 그 규모는 그 시대의 조선인 전체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동주는 조선인을 상징하는 흰색을 동질성으로 포착해,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를 통해 슬픈 조선인을 호명한다. 아낙네가 구르마를 끌고 가면 뒤에서 밀어주고, 일하다가 지쳐 있는 농부 아저씨와 자주 대화했던 그였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해바라기 얼굴》 《슬픈 족속》에서도 이미 그는 슬픔 곁에 있다.   윤동주의 시는 자기성찰 및 모든 이와 함께 슬퍼하려는 연대를 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팔복》)는 구절은 이미 온갖 슬픔을 명랑하게 노래해 온 그에게는 자연스럽다. 《팔복》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병원》을 보면 윤동주가 주변인의 슬픔을 함께하며 ‘영원히 슬플 것’이라는 태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 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1940년 12월) 2, 3연 이 시에서 ‘병원’은 그가 찾아갔던 공간일 수도 있으나 식민지 조선으로 읽힌다. 식민지의 젊은 청년은 자신의 병을 모른다. ‘성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식민지 통치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해선 안 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강요된 침묵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탄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시대의 극복 방식을 윤동주는 넌지시 밝힌다.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사라지는 모습은 절망과 질병의 상황에서 작은 회복을 암시하는 희망으로 읽힌다. 이어서 시적 화자는 여자와 자신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길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고통받는 주변인과 병을 모르는 또 다른 주변인이 회복하는 방식은 다른 곳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이 주변인 ‘곁으로’ 다가가는 실천에 있음을 암시하면서 시는 마무리된다. 작은 행동이지만 ‘곁으로’ 가는 실천은 ‘고통의 연대’를 통한 희망을 보여준다.   《팔복》 《병원》 《위로》(1940.12)를 쓰고 5개월 후에 쓴 《십자가》(1941.5)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슬픔과 함께 살아왔던 예수는 괴로웠지만 행복했다. 이어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내놓겠다고 한다. 모가지를 내놓는 태도야말로 ‘영원히 슬퍼하’겠다는 다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1941년 11월)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을 택한다. 그는 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쓰고, ‘그리고’라고 썼다. 산문이든 시든 접속사는 되도록 안 쓰는 게 좋다. 다만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만 써야 한다. 《서시》에서 ‘그리고’는 단순한 접속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그다음에’라는 뜻이다. 순서로 보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자기성찰을 한 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그 후에, 마지막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자기성찰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이후에 ‘그리고’ 나서 나한테 주어진 길,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단다. 내게 주어진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못 말릴 다짐이다. 함께 통곡하면 위로가 되고, 연대가 생기며, 힘이 솟는다. ‘영원히’ 함께 슬퍼하고 함께 웃는 삶이 행복하다며 그는 축하보다 애도 곁으로 가려 한다.   영원히 슬퍼하는 행복한 몰락에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 윤동주는 그냥 교과서에 실린 시, 혹은 팬시상품일 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 곁에서 영원히 슬퍼하는 길, 이 짐승스러운 시대에 긴급히 필요한 행복론이다. /김응교 =========================/// 홍익대 앞 잔다리 윤동주가 산책했던 ‘잔다리 마을’은 서울 홍익대 앞 동·서교동의 옛 이름이다. 현재는 ‘잔다리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경의선 책거리 등 문화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최혁중 기자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흘,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異蹟)’(1938년 6월 19일)    윤동주는 ‘이적’ 육필 원고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단말마 같은 글귀를 남겼다.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보리이까’,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기도문이다. 아이 적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사진이 네 장 남아 있는 그의 시에는 성경에서 얻은 모티프가 많다.      ‘이적(異蹟)’이라 하면 죽을병에서 낫거나, 복권이 당첨되는 기적을 떠올린다. 그가 생각했던 이적은 무엇일까.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듯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지저분하며 개운치 않고 군색한 것을 버리고 섰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물 앞에 서면 자신을 성찰하곤 했다. 물결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내면을 성찰하고(‘달을 쏘다’), 우물 안에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하고(‘자화상’), 냇가에 앉아 성찰하기도(‘산골 물’) 했다.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라는 구절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 이야기, 마태복음 14장의 패러디다. 바로 전에 예수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 예수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 서커스 같은 ‘이적’을 흉내 내고 싶었다.  윤동주는 베드로와 다르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는 ‘부르는 이 없다’는 말과 ‘불리워’ 왔다는 말은 서로 맞지 않는다. 부르는 이가 없는데도, 까닭 모를 이유로 불리어 왔다는 것은 ‘참말 이적’이라고 한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어도, 전혀 모를 황당한 미래 앞에 ‘불리워 온’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 이적’이라는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체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보다, 그저 ‘따순 햇살’ 아래 살아가며 운명에 부닥치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참말 이적’이라며 그는 감내한다. ‘내사’는 ‘나야말로’, ‘나 같은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란다. 이어서 ‘터분한 것’들이 나온다.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는데, 분노를 지우고 맨 앞에 ‘연정’을 써넣었다. 시를 교정할 때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분노보다 연정이었겠다. ‘이적’과 같은 날에 쓴 시 ‘사랑의 전당’에 그는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고 썼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그 여자’)에서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자기도취인 자홀(自惚)이나 쪼잔한 시기와 함께 터분한 욕구들이 오늘따라 ‘금(金)메달처럼 만져’진다. 바로 그 금메달 같은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물결에 씻어 보내’겠단다. 어설픈 너스레를 씻어버리며 ‘참말 이적’으로 살아가겠다니, 당연히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망망한 ‘호수 위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마무리한다. 퇴고 전에는 원고를 보면 ‘이 호수 위로/나를 불러내소서/걸으라 명령하소서!’였는데 ‘걸으라 명령하소서!’를 삭제했다. ‘걸으라 명령하소서!’라고 하면 특별계시가 된다. 이 문장을 지웠을 때 물 위를 걷지 않아도 시련을 당하겠다는 다짐이 돋아 보인다.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깨달음에는 운명에 당차게 단독자로서 나서는 키르케고르의 자세가 겹친다. 이상섭 교수는 이 시를 쓴 배경을 이렇게 추측한다.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 자세히 읽기’)   잔다리 연못가로 윤동주가 산보 갔다는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옛날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지금의 서교동 일대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고, 거기에는 많은 작은 다리가 놓여 마을 이름이 ‘잔다리 마을’로 불려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 세교리계, 현재 마포구 동교동의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 ‘잔다리’,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다.    자주 오랫동안 먼 길을 걷곤 했다는 윤동주, 들녘이었던 홍익대 앞 어디쯤을 거닐었을까. 1938년 그가 마주했던 호수는 그 무렵 그가 보았던 ‘해바라기 얼굴’의 여성 노동자나, ‘슬픈 족속’의 흰옷을 입은 한민족이라는 거대한 호수였을 수도 있겠다. 시 원본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어떤 굴욕적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적었을까. 이 메모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찌할 수 없는 자신과 민족의 운명 앞에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다짐은 서늘하다. 물이 흐르던 시내는 복개되어 찾을 수는 없으나, 홍익대 근처에 가면 낮고 고독한 고백이 가슴속에 우직하다. 나를 불러내소서.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서울=뉴시스】신진아 기자 = 영화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1917~1945)를 연기한 박정민(28)이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박정민은 28일 송몽규의 삶과 감정을 이해했느냐는 질문에 “일제시대를 살았던 그분들의 마음의 크기를 잘 모르겠다”며 “그냥 죄송할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는 ‘동주’ 촬영 이후의 변화도 전했다. “의식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자였다. 근데 송몽규를 연기한 이후 내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역사책도 뒤적이게 됐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찾게 된 느낌이다.”   윤동주의 팬인 강하늘(26)은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내 무의식에 윤동주 시인은 거대하고 거창한 존재였다. 순결하고 고결한 이미지뿐이었다. 하지만 대본 속 윤동주는 20대의 나처럼 질투심을 느끼고 열등감, 패배감, 승리감도 느끼는 평범한 젊은이로 그려져 있었다. 인간적 면모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충격이었다.”   강하늘은 “예술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영화 중간중간 윤동주의 시가 동주의 심리변화에 맞춰 강하늘의 목소리로 나오는데, 이를 통해 시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게 한다.   ‘왕의 남자’(2005) ‘사도’(2015)의 이준익(57) 감독이 연출했다. 이 감독은 두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로 “강하늘은 항상 마음에 뒀던 배우”라고 답했다. “내가 ‘평양성’(2010)을 연출할 때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시 스무살이던 강하늘을 데뷔시켰다. 직감적으로 느껴진 본성이 있다. 그 본성에서 동주를 봤다. 또 흑백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외모가 강하늘과 닮은 점도 영향을 끼쳤다.”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신촌좀비만화’(2014)를 보다가 점찍었다. ‘전설의 주먹’(2012)에서 황정민의 10대 시절을 연기한 그 배우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다가 황정민의 추천을 받고 출연을 제의했다.   박정민은 “제의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매니저에게 재차 확인했었다”면서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며 영광스러워했다.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와 송몽규의 짧고 비극적이라 더욱 찬란했던 삶을 그렸다. 이 감독은 “몇 년 전 일본 도지샤대학에서 윤동주 시인의 비석을 보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국영화사 최초로 윤동주를 스크린으로 옮긴 계기를 밝혔다.   “윤동주 한 사람 이야기로는 드라마가 잘 구성이 안 됐다. 그런데 3개월 먼저 태어나고 며칠 늦게 죽은 송몽규와 같이 하면 드라마가 되더라. 윤동주는 과정은 보잘 것 없으나 사후 시인으로 기억되는 결과가 좋은 사람이라면, 송몽규는 과정은 아름다웠지만 존재가 잊혀진 사람이다. 결과가 아름다웠던 동주를 통해 과정이 아름다웠던 송몽규를 기억하고 싶었다.”    흑백영화로 촬영한 이유는 흑백 사진 속 윤동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일제시대를 재현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제작비를 낮추다 보니 흑백이 필요했는데,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이었다.”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민족시인이자 한국인이 사랑하는 윤동주를 영화화한 데 따른 부담감은 “물론 있었다”고 인정했다. “겁나고 두렵고 잘못 찍으면 죽을 때까지 비난을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근데 내가 의외로 철이 없다. 깊이 생각 못한다. 단세포적으로 산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어서 힘 빼고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전체의 약 30%를 극화했다. “두 명의 여학생이 등장하는데, 윤동주 평전에는 없다. 하지만 ‘그 여자’라는 윤동주의 짧은 시가 있고 ‘별 헤는 밤’에도 여자가 나온다. 일본 유학시절 여학생과 소풍 간 사진도 있다.” 극중 윤동주의 시집을 내주려고 애쓰는 일본 여대생 구미는 가공의 인물이다. 하지만 구미를 보호해주는 문학교수는 실존인물이다.     이 감독은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1935년부터 두 청년이 별이 된 1945년까지를 그린다. 10년간 일어난 일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연표 고증을 알면서도 극적으로 무시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사실을 근거로 상상력을 펼쳤다.”   한편 이날 시사회에는 한 대학의 국문과 교수가 제자들과 참석해 “국문학과에서 교재용으로 많이 활용할 거 같다”며 “송몽규와 윤동주의 이야기를 함께 한 점과 윤동주의 미세한 심리변화, 그리고 마지막 일본 형무소 장면에서 두 사람의 판결문 해석이 잘 된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123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달밤 댓글:  조회:3514  추천:0  2018-09-03
  윤동주 /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야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숙만이 군데 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   이 시는 무겁고 슬픈 마음으로 고독하게 달밤의 묘지에 갔으나 아무도 없어 슬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흘러가는 달빛을 밀쳐 낸 듯한 여윈 나무의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해 가는데 발걸음은 무겁고 고독한 마음은 슬프다. 누군가 있을 것만 같은 북망산에 도착했으나 묘지에는 아무도 없고 달빛만 고요하게 내린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화자의 슬픈 마음을 심화시키는 시간적인 배경이다. 그러면서 ‘밤’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시간이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에 화자의 마음은 슬프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는 화자가 달밤에 나무 사이로 홀로 고독하게 북망산을 향해가는 데에 발걸음은 무겁고 슬프다는 말이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은 달빛을 물결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달이 서쪽으로 움직이면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밀쳐’는 ‘여윈 나무 그림자’의 모습을 달빛을 밀어내었다고 관점을 다르게 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윈 나무’는 계절이 여름이나 초가을이 아님을 알려준다. ‘영윈 나무’는 겨울이나 초봄에 잎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는 화자가 나무 숲 사이를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북망산’은 ‘죽음’을 의미하는 곳이다.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북망산이 화자의 목적지라는 것을 말한다. ‘북망산’은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로 화자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화자는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 아래 구절에서 화자가 도착한 곳이 ‘누가 있어야만 싶은 묘지’라 하여 ‘북망산’에 도착하면 ‘누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그를 만나려는 마음으로 ‘북망산’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북망산’의 담고 있는 의미를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시 안에서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윤동주의 다른 시인 을 보면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 이 노래가 언제 끝나랴 // 중략//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 죽고 뼈만 남아 / 죽음에 승리자 위인(偉人)들!’이라 하여 ‘죽고 뼈만 남’은 것이 ‘죽음에 승리자 위인(偉人)들!’이라 하고 있다. 즉 ‘북망산’의 ‘묘지’에서 ‘죽음에 승리자 위인(偉人)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무거웁고’는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을 향해서 사는 것이 힘들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을 반려한’은 화자가 홀로 ‘북망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화자와 지향점이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고독’한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화자의 ‘마음은 슬프기도’ 한 것이다.   ‘누가 있어야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 정숙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는 화자의 목적지인 ‘북망산’에 있는 묘지에 도착했어도 화자가 기대했던 ‘누구’는 없고 고요한 가운데 달빛만 환하게 비친다는 말이다. 화자의 기대는 좌절되고 고독감은 심화되어 마음은 더 슬퍼지는 것이다.///전한성       =====================///   위 시의 시상이 무거워 놓칠 것 같은 분위가 염습함처럼 작가의 깊은 상처의 흔적이 묻어 있는 듯 참담함이 밀린다. 모든 움직임의 마지막 종점 죽음 앞에 선 작가의 마음에 흐르는 심안의 곡절은 말하지 않아도 파란의 심상이 보일 듯하다 그러나 작가는 죽음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룸에 귀결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엿 보인다 전문을 살펴보면 달빛 고운 밤의 옅은 그림자 밟으면 아마 이파리 진 나목의 가녀린 가지에서 아마 그림자조차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아스라한 마음 길인지도 모르랴 죽음을 예시한 북망산을 오름도 납덩이처럼 무거운 죽음조차 미화한 삶의 슬픈 곡절은 무엇을 말하려 함이라 고독조차도 반려하는 이미 비운 마음 어찌 묘지에 인적이 있으랴 고요한 밤의 달빛어린 정적엔 즐비한 표지석의 하얀빛이 달빛 젖어 더욱 애달픈 마음 자아내어 박명(薄明)조차도 가슴 품어 안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는 시인의 심상 아 애처로워라  
1230    윤동주와 "별"의 기호와 "코드"... 댓글:  조회:2900  추천:0  2018-08-31
  . 후기 .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김 혁     1. 출판계와 서점가를 강타한 “다빈치 코드”라는 초베스트셀러가 있다. 추리소설과 비슷한 쟝르적특성으로 미스터리함과 긴장감을 유지시킨 특징이 그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게 한 원인이였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은 작품에 새삼스럽게 기호학을 잉용(仍用)해 작품의 골조를 이룬것이였다. 기호라는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수 있고 인지하고있는것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받아들였던것이다. 교통표지판, 상표, 간판, 영화포스터, 시, 그림, 핸드폰속 이모티콘 등등 다양한 기호학적문화읽기는 사실 은연중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사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기호를 통해 그 단순함 리면에는 뭔가 특별한것이 있다는 기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어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작품에 나름 깊숙한 의미를 부여했다. “다빈치 코드”의 흥행은 광범위한 범위에서 “코드열풍”을 일으켰다. 이어 쉐익스피어, 단떼, 피카소, 모짜르트 등 문화, 예술 분야 인물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책자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 일례로 중국에서의 “병마용 코드”, “진시황 코드”, “청명상하도 코드” 등 일련의 관련 연구서들을 들수 있다.   이처럼 근년 들어 기호학은 단순히 언어학적분석의 패러다임에 머물지 않고 문화콘텐츠의 해석을 통해 일반문화의 령역으로 폭넓게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   2.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다. 학계에서는 그이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문학의 으뜸 가는 우수한 대표로 꼽는다. 또한 올해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돐 기념일이자 “저항시인” 윤동주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본 후꾸오까감옥에서 숨진지 꼭 70주기 되는 해이다.   외국에서 윤동주연구 관련 석사, 박사가 50여명이나 배출되고 그 연구물이 수백편에 이르는 방흥미애(方兴未艾)의 열조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물이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미비하고 그 기림의 열조 또한 미온적인것은 세계가 자호하는 고향의 시인에 대한 “홀대”이며 자라나는 새 세대에 그의 문학적재부를 승계해주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10여년전부터 윤동주연구에 몰두하여왔고 언론사시절에는 관련 추모, 연구 행사들을 빠짐없이 보도했으며 이미 2010년에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최초로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에 일년간 련재하였고 또 윤동주 관련 연구 시리즈물들을 여러 간행물들에 평론, 칼럼, 수필 등 여러 쟝르를 동원하여 수십편 창작,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의 시인에 대한 추모와 선양이 외려 다른 지역들에 비해 미온적인데 대해 늘 가슴 깊은 곳에 체증 같은것을 담고있었다. 그러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으며 새로운 격식, 새로운 시각의 윤동주연구물을 내놓으려 나름 시도해보았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여러가지 텍스트로 나왔지만 새로운 격식과 문체, 다각적인 시각으로 나름 조명하고싶었다. 몇해전 대학가의 청탁을 받고 연변대학의 문학도들에게 윤동주 관련 문학특강을 한적 있었는데 그때 어린 문학도들이 윤동주의 보편적이면서도 심대한 문학생애를 비교적 알기 쉽게 접하도록 열개의 편린으로 나누어 이야기했었다. 평론가의 말투나 난해한 해설이 아니라 독자와 공감할수 있는 언어로 특히 삶의 의미와 관련해 스토리텔링으로 전해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그후 연변작가협회 문학강습반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강의했고 몇번의 윤동주 생몰일 기념모임에서도 그 뼈대를 계속 보완해 이야기했다. 그 연구물을 지난 2012년경에는 문화종합지 《문화시대》에 근 1년간 련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본 책자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론문이나 특강, 칼럼, 기행 형식으로 써놓았던 글들을 련작칼럼으로 다시 다듬었다.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아 문학생애에 대한 료해와 더불어 그의 시집을 접하는것과도 같은 다중효과를 거두기로 꾀했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들어 해설함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도록 노력했다. 비록 타이틀을 련작칼럼이라 달고 몇배로 되게 크게 보완하고보니 련작칼럼이 내용도 충실해지고 부피도 묵직하니 짜장 인물연구서처럼 되였다.   집필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된 작업이였다. 적지 않은 작품을 량산(量产)했지만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이 우리 민족 모두가 애대하는 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 하는 부담감에 지독한 창작슬럼프에 시달렸다. 출판사에서 청탁한 시간이 거의 만료되도록 한 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이는 그 이전에 작가협회 계약작가로 선정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집필할 때와 꼭같이 겪게 된 슬럼프였다. 그 슬럼프를 이겨내게 해준것이 또 다름아닌 그 슬럼프를 안겨준 윤동주의 삶이였고 윤동주의 시였다. 송우혜작가의 윤동주연구의 결정판이요 평전문학의 진수인 《윤동주 평전》이라는 경전이 이미 앞서 있지만 “외계에서 들여다본 윤동주”가 아닌, “고향에서 내다본 윤동주”로 시각의 차이를 바꾸고 윤동주가 오래동안 생활해온 룡정지역이라는 이 유서깊은 곳의 지역특색의 문화풍토를 덧입히려는 나름의 시도가 슬럼프로 흔들리려는 나의 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고향 시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의 승계를 위한 나의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이 기회에 다시한번 천명하고싶다. 장편소설은 련재가 끝난지 몇해가 지난 오늘도 계속 탁마에 탁마를 거듭하고있고 인물평전은 유명 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으며 청소년전기물도 곧 출시될 예정이다.   3. “민족시인”, “저항시인”, “별의 시인” 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오늘날 윤동주라는 코드는 그저 시인이라는 수식과 호칭을 뛰여넘는 풀이를 우리앞에 숙제처럼 남기고있다. 오늘도 우리가 윤동주라는 코드를 굳이 여러 각도로 풀이하는것은 그이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령혼, 진리를 향한 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여넘는 우주적, 보편적 량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소꿉친구 문익환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이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짐”을 우리는 경험한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되뇌이는 일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비전을 위해 뛰고있는이들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체험과 계시로 될것이다.   전대의 력사는 후대의 전성기에 쓴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라는 말이 있다. 그 민족과 민족의 시인이라는 깊은 명제의 코드를 풀이해내는 벅찬 작업을 나름 완수할수 있어 마음은 뿌듯하다. 한편 걱정 또한 갈마든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의 생애를 연구,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적 있다. “천한 사람의 입으로는 찬양하는것조차도 그를 모욕하는것이다.” 이처럼 내 작은 둔필로 그이를 찬양하는것이 오히려 시인의 고매한 생애에 흠결(欠缺)을 주는것이 아닐가 내심 조심스러워진다. 관련 연구를 선행한 작가, 학자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많은 연구가와 윤동주를 사랑하는이들의 동참과 편달을 바란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2015년, 백로(白露)       윤동주 코드 - 29개의 코드로 풀이해 보는 스물아홉 살 시인의 삶과 문학   김혁 지음  출판 연변인민출판사  20015년 12월  페이지 수 324  정가 30원   목차   코드 1. 파평 윤씨 코드 2. 월강곡 코드 3. 선바위 코드 4. 공덕비 코드 5. 생가 코드 6. 명동학교 코드 7. “3.13” 코드 8. 15만원 코드 9. 우물 코드 10. 영국더기 코드 11. 은진중학 코드 12. 청년문사 코드 13. 처녀작 코드 14. 신사참배 코드 15. 늦봄  코드 16. 낭인(浪人) 코드 17. 카톨릭소년 코드 18. 연희전문 코드 19. 순이 코드 20. 자필시집 코드 21. 창씨개명 코드 22. 육첩방 코드 23. 구름다리 코드 24. 판결문 코드 25. 의문사(疑问死) 코드 26. 장례식 코드 27. 오오무라교수  코드 28. 아우 코드 29. 시비(诗碑)   책소개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인 김혁작가의 인물연구서.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특히 윤동주가 대부분의 시간을 지냈던 북간도 용정과 명동의 풍토에 대해 더욱 많은 편폭을 들여 세세하게 조명했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았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듦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다.     저자소개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나와 베이징 루쉰문학원을 수료했다.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했다. 현재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부회장),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회장)직을 담임하고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후신인 북안소학교, 은진중학의 후신인 용정중학을 나온 학연(學緣)을 자각하고 10여년간 윤동주 연구에 매진했다.  중국조선족 최초로 2010년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 발표하여 이슈가 됐고, 현재 조선족 권위간행물에 "윤동주 평전"을 2년째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난장 속에 스러져간 청춘의 군상을 그려낸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조선족 최초로 되는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만주국 황후 완룽의 생애를 그려낸 "제국의 황후"등 장편소설 7부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등이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평전",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 등 인물전 다부가 있으며  논픽션물로는 북간도 용정의 백년역사를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한국 초청사기행각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을 비롯하여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등 조선족문단의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으며 2004년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을 수상한바 있다. ======================///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인 김혁소설가 뒤에서 뭘 생각하는 竹林  
122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리별 댓글:  조회:4746  추천:0  2018-08-31
  윤동주 /리별(이별)     눈이 오다 물이 되던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며, 조고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리별(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 굽으로 돌렸다.     이 시는 일터로 가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하고 멀리 기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을 안타까워 하는 내용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이 오다가 물이 되던 날이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다. 하늘은 구름이 껴서 잿빛 하늘이다. 기차역이다. 뿌연 연기를 내품는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며 이별을 재촉한다. 자그만 가슴이 이별의 슬픔으로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이별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고, 기차는 기다리지 않고 떠나서 이별하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떠나며 맞잡은 더운 손의 맛과 구슬 같은 눈물이 마르기 전에 기차는 끝칸이 산굽이로 돌아갔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이 시의 제재이다. 기차역에서 일터로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눈이 오다 물이 되던 날 /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며, / 조고만 가슴은 울렁거린다.’는 눈이 오다가 하늘에서 빗물이 되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 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며 떠난다는 신호를 하니 여인의 작은 가슴이 슬픔에 울렁거린다는 말이다. ‘눈이 오다 물이 되던 날 /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는 이별하는 암울한 상황을 나타내는 배경이다. ‘눈이 오다 물이 되던 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로 ‘눈오는 날’ 또는 ‘비오는 날’보다 더 춥고 힘들고 암울한 상황을 나타낸다. ‘또’는 ‘눈이 오다 물이 되던 날 / 잿빛 하늘’도 이별하는 여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데 거기에 다 ‘뿌연내’까지 퍼지면서 더욱더 잿빛이 짙어지는 것으로 헤어지는 사람의 암울한 마음을 더 암울하게 만든다.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어는 기차가 역을 떠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말한다. ‘조고만 가슴’은 작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역에 남은 대상이 여인이고 기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 남성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드는 단서이다. ‘조고만 가슴은 / 울렁거’리는 이유는 이별로 인한 슬픔과 앞날에 대한 불안한 마음 때문이다. 배경은 이 둘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음을 나타낸다. 떠나는 이는 ‘일터에서 만나자’(2연 3행)고 하지만 이 약속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이 시에서는 ‘일터’가 정해져서 가는 것인지, 아니면 무작정 일터를 찾아 떠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시의 배경과 여인의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볼 때에 일터를 찾아서 떠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터가 있는 곳은 도시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도시에서 제대로 된 일터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 / 사랑하는 사람을 / 일터에서 만나자하고 /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 / 기차는 꼬리를 산 굽으로 돌렸다’는 기차가 사랑하는 사람을 태우고 너무 빨리 가서 안타깝다는 말이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는 이유는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 기차는 꼬리를 산 굽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일터’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볼 때에 ‘일터’가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터에서 만나자하고’는 떠나는 이가 역에 남은 인물에게 자신이 일하는 일터로 올라오라는 약속과 당부의 말을 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인이 있는 곳은 직장을 잡고 가정을 이루기 어려운 경제적인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담긴 따스한 손의 온기와 이별하면서 슬픔에 흘린 눈물을 말한다. ‘기차는 꼬리를 산 굽으로 돌렸다’는 기차의 마지막 칸이 산굽이를 돌아가서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터를 찾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떠나는 모습이 이 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이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면 농촌이라면 이 시가 창작될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한성    ========================///   오늘은 제가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시인에 대하여 포스팅을 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가끔 누군가에게 큰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그런 전환점이 되어준 영화가 하나있는데요. 윤동주 시인과 독립운동가 송몽규 선생님의 인생을 담아낸 영화 ‘동주’는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입니다. 어둠의 시대를 살아갔던 천재시인 윤동주와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 독립운동가 송몽규. 그들의 삶과 시대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속에 소개된 윤동주의 시는 제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는데요.   앞서 ‘동주’라는 영화가 저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윤동주 시인은 저에게 그저 교과서에 소개되는 천재 민족시인이였습니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단순히 윤동주 시인의 시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분석하기 바빴기에 저에게 그 시들이 와닿을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감정과 고뇌, 시대정신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영화속에 놓여진 시들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느낄수 밖에 없었는데요. 시를 억지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 하나 하나 그대로를 그저 체감하는 것이였습니다. 시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는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자연스럽게 윤동주 시집을 바로 구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있던 그의 대표적인 시들 '자화상’ ‘서시’ ‘눈’ 등의 수많은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간과했던 그의 시들에게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시 한작품을 쓸때까지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까지도. 그의 시는 절대 짧은 시간에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 사람의 삶과 고뇌를 끊임없이 고찰했고 그것을 시에  담았습니다. 윤동주 시 속에 담긴 통찰과 표현이 위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죠.   윤동주 시인은 자연을 정말 사랑했던 시인인 것 같습니다.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시 속에 자연을 아름답게 접어넣었는데요. 그의 시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하나가 있는데 바로 ‘소년’이라는 시입니다.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그는 자연을 너무도 아름답게 해석하고 노래했습니다. 저는 시적표현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에게는 는 표현들이 와닿았을 뿐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시대에 저항한 민족시인입니다. 그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고 끝까지 조국과 함께했습니다. 그때 그의 시대정신은 자연스럽게 시에 녹아들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는데요. 윤동주는 살아생전 자신의 시집을 내고자 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그런 시대의 역경과 시인의 내적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시가 있습니다. 바로 ‘ 참회록’인데요.      참회록(懺悔錄)                                                        윤 동 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그의 내적 등과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은 많이 있지만 참회록은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파란녹이 낀 구리거울을 통한 자기반성의 표현을 적었다는 것이 저에겐 굉장히 인상깊었는데요. 라는 문장은 시인의 아픔과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슬프고 아련하기 까지하죠. 윤동주 시인은 총을 들고 싸웠던 독립투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서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로 걸어가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죠. 그래서 우리는 그의 내면적 갈등과 반성이 담긴 그의 시를, 어둠을 내몰고 빛을 되찾고자 했던 그의 시를 사랑합니다.  그는 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인이자, 너무도 아픈 시절을 살았던 청년이였습니다. 만일 윤동주시인이 오래도록 살아계셨더라면 한국 시문학은 또 어떻게 변했을 것이며 해방을 맞이한 후 써내려간 그의 시가 얼마나 찬란했을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없지만,그러나 언제나 존재함을.... 그의 시를 사랑하고 기억한 이들. 그들이 보고 있는 그 시속에 윤동주 시인은 언제나 늘 존재했음을... 전 언제나 기억하고 싶습니다.   영화 '동주' 中    
1228    김철호 /권력률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8-08-30
[비평] 시와 인간의 바른 삶과의 조망/권혁률 2018년 08월 30일  작성자: 김철호    *비평*   시와 인간의 바른 삶과의 조망   권혁률(문학박사, 길림대 외국어학원 교수)   1.   문학은 인간의 삶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환언한다면 문학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춘추시대의 공자는 흥관군원(興觀郡怨)()으로 문학이 우리에게 미적 감상뿐만 아니라 사상을 풍부히 하고 바른 삶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데서 가지는 의의를 천명했다. 문학과 인간의 삶에 관하여 한 나라의 왕충(王充)은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던 바 즉, "위세용자, 백편무해; 부위용자, 일장무보(爲世用者, 百篇無害; 不爲用者, 一章無補)"(라고 했다. 근대에 이르러 백화문으로 문학혁명을 주장하고 나섰던 신문학의 선구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열띤 관심을 보였다. 1917년 호적(胡適)은 에서 문학개량을 "8사(八事)"로부터 착수할 것을 주장했는데, 거기에 "언지유물(言之有物)"과 함께 "무병신음(無病呻吟)"에 대한 거절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문학이 인간과 그들의 삶에 본령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고금중외 문학에 관한 이론들을 일별하여 본다면 예외 없이 문학은 반드시 인간과 그들의 삶과 연관을 맺어야 비로소 존재의 가치와 생명력을 확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시의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 역시 '인간을 모방'한 창작이라고 했을 때 서사시는 인류발전사의 한 기록이 될 것이고, 서정시의 경우 인간 정서의 한 표현형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문학은 어떠한 시각에서든지 인간의 삶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때로는 적극적인 역할을, 때로는 소극적인 심지어 부정적인 역할을 일으키기도 하게 된다. 다시 말한다면 문학은 창작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작용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문학과 인간의 삶에 관한 이러한 연원들을 살펴보는 것은 시인 김철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보기 위한 예비 작업이 된다. 소설로 문단에 발들 들여놓고, 다시 시 창작으로 전환한 시인 김철호는 좀 특이한 케이스라고 해야겠다. 문인들 중 시로 등단하여 소설로 자신 창작세계의 최고 경지를 개척한 사례는 적지 않지만 시인 김철호는 그 정반대의 향방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에 대한 관심 또는 호기심의 기인(起因)은 자연 시인의 창작물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진단에서 찾아야 할 터이다.   2.   시인 김철호의 시작(詩作)은 겸손의 자세를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이는 시인 작품집의 이름이 와 같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진정 작품이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는 뉘앙스이다. 이는 동시에 정을 붙였던 시인에게 나타난  고유한 특성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인의 동시마저도 단지 동시로만 취급하기 어려운 점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어의 사용과 같은 형식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동시에서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관심, 즉 인간의 삶에 대한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 가능하다.   1) "작아도/저놈이 엄마새란다"() 2)"해종일 똑딱똑딱/구술땀 똑똑… 와ㅡ 돌속에/멋진 소년이/있었댔구나"() 3)"구름이며/바람이며/다 가졌던 하늘/눈이며/비며/다 차지했던 하늘…다ㅡ버리고/가장    높은 하늘 되였다.() 4) 이 나무의 이슬…/이 산의 이슬을…/이 세상의 이슬…/다-아 모아보면/호수만한/큰 이슬 될거야!()   위의 몇 편의 동시는 동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단지 동시에만 그치지 않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의 경우 소꿉놀이 장면을 상기시키는 시구인데 "엄마 새"가 "애기 새"를 먹여주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책임을 맡은 바이라면 모름지기 책임과 역할에 최선으로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2)의 경우는 "고생 끝에 낙"이라는 민족의 속담을 떠올리는 시구로서 오로지 진지한 노력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해독이 가능할 것이다. 3)의 경우 공리적인 욕심을 버리기만 하면 최고의 성공을 이룩할 수 있음을 예시하는 시구이다. 4)는 역시 또 하나의 속담 즉 "티끌모아 태산"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시구로서, 어느 때나 전통적인 미덕의 하나인 절약정신 또는 단결정신에 대한 시인의 동시적 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입수한 시인의 동시작품의 양적 제한으로 그 전모를 살펴볼 수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위의 동시의 편린들에 흐르고 있는 시인의 깊은 시적 고민은 여전히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시의 형식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은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의 즐겨 읽을 수 있는 시어, 문구라는 의미 외에도, 성인들에게까지 일정한 삶에 관한 계시를 전달해주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더구나 개미조차 "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는 1)의 "엄마새"와, "자신을 가장 낮춘 무리들이 모여서 가장 큰 힘 만든다"()는 모든 소유욕을 버리는 3)의 경우와 일맥상통하는 시인의 시적 상상의 세계로 귀납시켜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시인은 창작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던 동시에서 이미 보다 넓고 깊은 시적 상상의 세계에 대한 지향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환언한다면 동시의 세계가 시인 창작의 초심을 이끌어낸 수석(秀石)이고 창작세계의 터를 마련하는 주춧돌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시인의 성숙된 주옥의 작품세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3.   전술했던 바와 같이 시인의 작품에 대한 양적 입수의 제한 때문에 부과된 본고의 작업에는 일정한 애로가 없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감히 일엽지추(一葉知秋)의 판단이라도 서슴치 않으려는 본고는 진정 시인의 한정된 작품에 그만큼 깊은 감동을 얻었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둔다. 김철호 작품에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경외심이 유난히 돋보이고 있다. 앞에서 시인의 시작(詩作)은 겸손의 자세를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고 했던 바인데, 바로 동일한 맥락의 이해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세상이 얼마나 큰지 모르기에 무지막지한 떠벌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겸손은 타자의 존경심을 자아내고, 경외는 타자의 존경심을 불러온다. 시인 김철호는 이 두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생명의 모든 것을 존경시하면서 경외의 마음으로 생명의 모든 현상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시인의 초심이라고 할 정도이다.   작은 생명이래도 그건 하늘보다 더 큰 숨 …(중략)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 그 하늘아래선 하나의 태양이다 -의 일부분   저 큰 하늘보다 더 크게 눈빛 빼앗아 가는 노란 숨! -의 일부분    "개미"와 "나비"는 미물임에 틀림없다. 미물이지만 하나의 생명임에도 틀림없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미물적인 존재도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배려하고 존경심을 인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미 역시 "바다를 품"을 수 있고, "하늘을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모두 "숨"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우리 하나의 숨으로/살고 있다는 걸" 과연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로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다. 미물조차도 생명체로서 주목하고 배려하는 시인의 초심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존경과 경외심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지옥의 덮개인 흰구름 딛고 두개의 태양이 떴다   피안(彼岸)을 향한 걸음은 언제나 시작 설마 천당을 고별한다 할지라도 태양은 구을러간다   우리 이렇게 걸어왔다 우리 이렇게 하늘 떴다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 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 - 전문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 이 시구는 시인의 두 작품에서 그대로 두 번 반복 사용되고 있다. 시인은 바로 자연계의 미물인 '개미'를 앞세우는 수법으로 실제로 만물의 주재자로 군림하다시피 한 인류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미물에 월등한 인간의 생명은 "자음과 모음이 섞이여야" 비로소 완정한 "삶"이 되는 바, 그 '무서운 힘'은 '남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황홀한 궁전'에서 '대문을 닫아걸고' 은둔자로서 남자와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속에서 온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력에 대한 시적 탐구라고할 수 있는 시인의 발상인데, 시인의 특유의 수사법에 의해 은유적이지만 과감하고 기발하며 참신한 시인의 작품세계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생명의 존엄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모든 시적 상상력을 인간의 생명체 또는 삶과 연관을 짓고 있다.   수자를 처음 알았을 때,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초견()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경이로움의 소년, 전은 팬티속에 무서운 힘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의 일부분   위의 인용에서처럼 시인은 생명체의 원초적인 힘에 주목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니다, 생리가 시작되었다/붉은 피줄 일어선다"(); "바람이 눈을 뜬다/파도가 잠을 깬다"();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 등 삶의 현장의 특징적인 생명현상들에 대한 집요한 주목으로써 생명에 대한 더 없는 경외의 마음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도 시인의 작품세계에 흔하게 보이는 의인화 수법의 인용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한 시인의 배려와 경외심,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인간의 삶과 적극 연관시키려는 시적 상상력을 함께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4.   생명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었다. 시인 미당(未堂)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원동력을 일컬어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했다. 시인 김철호는 또 과연 생명에 대한 얼마나 커다란 고민을 갖고 있었기에 이토록 인간의 삶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삶에 대한 시인의 집착과 관심은 삶을 옹위하는 환경과 그 배경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상관물에서 일부 미물들에 대한 시인의 주목이 인간이란 지존의 생명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시적 상상의 전략이었다면, 생명체 삶의 환경에 관련된 자연 상관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불(大佛)은 때투성이야 수수백년 때 한번 씻지 않았으니 와우, 냄새가 지독하구나 (중략)   눈을 찔러대는 누런 파도는 페를 싹 좀먹이고 있어 -의 일부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바다, 인파로 넘실거리는 사람의 바다, 인간 생존환경 일각의 모습이다. 인정으로 넘친다고 할 수는 있어도 아직 현대문명 또는 현대지성이 닿지 못하는 황막한 곳이다. 유구한 역사적 자산일지라도 인간의 현실적 삶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지독한 냄새'만 풍겨 오염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현대적 문명이 미치지 못하는 사막은 그대로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삶의 환경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과 욕망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시에 보는 것은 "손을 뻗쳐 바다자락"을 잡아당기는 여인, 그러한 바다와 결투에서 결국 "바다가 찢어지면서 혈흔을"을 드러내도록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다.   네명 악사들의 현악합주가 들린다… 이날에는 다이야몬드목걸이도 하나의 돌맹이에 불과했다… 그 민족은 바다였다. …피가 모여 먹물이 된 바다… 자신을 가장 낮춘 무리들이 모여 가장 큰 힘 만든다. 영원한 생명되였다. -   영화 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한 장면이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며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악사들, 인간의 생명 앞에서는 하나의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 다이야몬드, 바로 이러한 생명지존, 생명의 가치를 최상의 재부로 삼고 있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기에, 바다는 "자연외의 것을 다 버린"() "금빛 찬란한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그래서 가장 순수미를 지닌 '민족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냄새가 섞인 바다/그래서 바다의 냄새를 냄새라고만 할수 없다", 그것은 정녕 "서서히 오는 탄생", "새로운 생명이 숨어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며 희망의 소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의 현장으로서의 현실은 상처투성이고 괴로움 투성이다. "탈선한 렬차", "각도가 비뚤어진 명(明), "살점을 뜯는 바람", 이는 모두 "탄생은 아픈것이다"()는 진리를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는 덜미를 쥔채 쓰러져 운다/웃는다"고 부르짖는다. 희비가 엇가리는 삶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덜미를 잡힌 시, 그래서 그 시는 정녕 "쉽게 씌어지는 시"(윤동주)가 아닌 것이다. "내장이 텅 빈 잉어"()를 만들어내는 이 현실 속에서 시인은 자신 나름의 끈질긴 노력으로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를 견인불발하게 써 나가고 있다. 왜냐, 바로 "하늘은 눈 뜨고 보고 있다"는 굳은 신념이 있기에,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의 가치, 시의 생명력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작품은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참된 삶과 시적 조망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5.   문단에서 바야흐로 활약상을 보이는 중견 작가에 대한 평가는 신중을 기한다. 그것도 한정된 시편에, 공감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부과된 소임을 행해야 하는 본고는 그야말로 누란(累卵)의 위기를 찾아가고 있는 작업인 듯하다. 텍스트에 대한 해독은 여러 가지 이론, 방법이 동원될 수 있다. 본고는 한 독자의 나름대로의 일가견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무병신음'을 멀리하고 '언지유물'을 위해 대담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서 맡은 바의 소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자는 목적을 이루었다. 시인 김철호는 인간의 삶에 입각한 시적 상상력에 근거한 견인불발한 창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소설의 내면화에 보다 더 필요한 시간적 요소 때문에 시 창작에 임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시종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에 주목하고, 인간의 삶에 관한 시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동원하고 있다. 원초적인 생명력의 시화(詩化), 삶에 대한 반동적인 요소들에 대한 비판에 더 비중을 증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시인은 삶의 과정을 시의 창작으로 간주하는 정도의 집념을 보이고 있다는 판단도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임에 틀림없으니, 보다 확장되고 여유 있는 시공간의 확보에 기대를 걸어야 할 터이다. 시인의 새로운 정진과 건투를 빌면서 맺음말을 대신한다.   (“도라지” 2018년 제2기) ======================= 흑백사진(외8수) 김철호   과거로 가는 길은 색갈을 지우는 일이다   분홍립스틱을 지우고 금빛 머리카락 지우면 검은 것과 흰 것만 남는다 50년 전, 100년 전이 탄생한다   두 가지 새갈만 있었던 세월 눈 감으면 검고 눈 뜨면 하얗던 세월 밤은 검기만 하고 낮은 하얗기만 하던 세월 흰 것과 검은 것 외엔 다른 색갈이 필요없었던 세월…   희고 먼 하늘, 검은 이파리의 떡갈나무, 검은 눈동자엔 흰 눈빛이 반짝인다 흰 미소가 입가에 배달려있고 검은 분노가 가슴에 엉켜있다…   그러나 눈 감고 색갈들을 살살 지우면 찬란히 환생하는 흑백의 세계, 거기서 우리의 과거가 웃고 있다 그 어떤 칼라로도 가리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가 검은 파도 흰 파도로 출렁인다     같은 맛   바다의 맛과 눈물의 맛은 같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때 바다가 흐르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아픔이래도 보잘 것 없는 슬픔이래도 바다다   눈물의 맛과 바다의 맛은 같다 그러니 바다가 출렁거릴 때 눈물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그것이 큰 파도래도 하늘 같은 통곡이래도 눈물이다     저고리   잔디를 다 덮고 하늘을 다 감싸 뿌리 깊은 나무 숨겨주고도 남는 품   욕심 많은 저 작은 가슴에서 뜬 별 얼마일가 새버린 해 달 얼마일가   노을 물 묻혀 쓴 천년의 이력서에는 꽃씨의 숨   고름줄을 쥐고 주춤거리는 짐승을 밀쳐라 흰 달덩이는 하늘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이 죽음 보고 말한다   넌 왜 이렇게 곁에 딱 붙어서서 떠날념 안하는거니? 조금만 한눈 팔면 앞에 나서려 하니 괘씸하구나   죽음이 대답한다   참 답답하다 우린 쌍둥이로 태여난 친형제란다 네가 딱 막아서서 앞에 나서지 못하지만 암 때건 너를 져쳐버릴 것이다   삶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쌍둥이로 낳은 하느님이 원통하구나 난 니가 정말 질색이다 싫어 못 살겠다 너를 피하느라 갖은 고생이다만 세월 갈 수록 네 힘에 밀리우는구나   죽음이 다시 말한다   네가 앞에 있대서 내가 없어지는게 아니구 내가 앞선대서 니가 없어지는게 아니다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다   삶이 돌아서며 죽음의 어깨를 잡자 죽음도 삶의 어깨를 잡으며 웃는다   그래, 우리는 친형제지! 그렇다, 우리는 한몸이다!     해골   눈동자가 없는 빈 눈집 코바루가 없는 빈 코집   아ㅡ사람의 입은 아궁이였구나   입술로 곁치례만 안했더면 한솥의 밥 단숨에 들어갈 굴 같은 아궁이였구나     섬   나비야, 넌 파란 하늘 작은 뭍 가닿을 수 없는 먼 눈빛 놓쳐버린 예쁜 자리   못난이는 자신의 둥지 항상 스스로 빼앗긴다   날아가는 나비를 쫓지 말어라 나비는 바람 따라 가는 숨 아니다   나무   나무는 참으로 먼 곳에서 오래 온 것 같다 한번 쉬기 시작하니 떠날 생각을 안한다 밟아본 기분인 듯 늘 하늘 한 자락 쓰고 있다 아무리 가는 바람이래도 나무에게 들키면 꼼짝 못하고 예쁜 심음(心音)을 보인다 동서남북상하를 향한 푸른 입들은 늘 벌려져 있고 별이며 달이며 구름이며 태양이며 이슬이며를 끝없이 탐식한다 하나의 커다란 날개를 만드느라 서서히 오래오래 머물며 꿈을 익히는 망(网), 자취 없는 나래질 소리를 념(念)하는 깊은 숨을 아무도 모른다   푸득! 나무는 오늘도 나래의 힘을 가늠해본다     뿌리   칼퀴손이 땅을 꽉 붙잡고 있다   날개 굳은 커다란 새 날기 위해 키워온 힘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날가말가, 날가말가 퍼덕인다   오늘도 동이 트는 하늘 빨간 불덩이 향해 윽벼르더니 어둠의 그물에 걸려 어깨 내린 새   태공을 날 꿈 잊지 않고 백년을 버티는 억센 갈퀴손 땅에 꽉 박고 떤다     차(茶) ㅡ물의 고백   당신을 맘껏 피워주기 위해 나 한껏 끓으리   당신의 몸에서 노란 향기 우러나 내 속에서 춤 출 때 한 모금 꿈으로 설레리   끓어, 팔팔 끓어 내가 통째로 당신으로 꽉 찰제 당신은 온통 나로 넘실거리려니 당신과 나는 드디어 한 몸 되여 하늘에 가 구름과 비의 만남을 보리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숨 속에 들어있는 당신은 차(茶), 나는 물!   (2018년 "도라지" 제2기) ======================= 하늘에 박힌 가시(외8수)   김철호   내가 아이 때 엄마는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이 “니 애빈 승얘(승냥이)네라, 승얘네라!” 친구들 모아놓고 북 대신 미닫이문 밀고당기면서 타닥탁탁… 둥둥둥둥… 달 떨어지는줄 해 돋아나는줄 모르고 술 마셔대고 담배 피워대며 애들 반찬까지 말끔히 먹어버리는 아버지가 승냥이같기도 하였겠지만 봉금날이면 과자봉지 사탕봉지 안고오는 아버지가 아버진 아버지여서 우린 많이 따랐는데 엄마 보다 애들을 더 고와하는 아버지가 엄마 눈에는 왜 승냥이로 보였을가? 때때로 방에서 흘러나오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임에도 엄마는 아버지가 승냥이라고 하는 일 무척 궁금하고 야릇했지만 바스락소리 하나 없이 귀 열고 잤었다 “니 애빈 승얘네라, 승얘네라!” 엄마에겐 아버지가 승냥이가 맞긴 맞길래 죽을 때 마지막 하는 말이 “절대 그것(아버지) 곁에 안 갈테니 그냥 태워서 날려보내달라” 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했다! 꺼먼 연기가 검은 가시처럼 하늘에 박히는 화장터의 굴뚝 바라보며 어떤 한이 있었길래 죽어 만나지 않겠다고 악을 쓰셨을가? 그런 한으로 우리 다섯 남매를 어떻게 배고 낳았을가? 엄마의 승냥이 울음소리는 진짜 승냥이 울음소리였단 말인가? 하늘에 박힌 저 가시가 과연 무얼가? 아아… 회석된 검은 연기처럼 이젠 영원히 알수 없는 하늘의 저 숨!     구절초    열여덟살, 입술로 뜯은 꽃이파리 그것이 왜 그렇게 따가왔을가 물리운 듯, 덴 듯 왜 또 아프기도 했을가   지금도 나를 흔들어주는 것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바람이라면 나 바람되여 달려가련만…   열여덟살, 그때 나를 흔들어준 바람은 톡 터지면 볼 빨간 봉선화도 아니였다 먼 바자굽서 수줍어 하던 철모를기꽃도 아니였다 시선을 잡고 놓지 않는 백일홍도 아니였다…   너무 흔해빠지고 향기롭지도 않아 귀한줄 몰랐던 아픈 꽃의 숨 한 모금 나의 년륜에 찍힌 고마운 흰 점 하나!     바위    바위를 옮겨다 시(詩)를 새기니 시비(詩碑)가 되였다 시비(詩碑)가 된 바위는 자기가 바위였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도고해졌다 새겨진 시(詩) 때문에 옷자락 여미는줄도 모르고 자기 앞에서 경건해지는 사람들 눈길을 업신 여기였다   어느날 시비(詩碑)앞에서 시비(是非)가 붙었다 시(詩)가 나쁜 시(詩)이니 지워야 한다느니 까부셔야 한다느니 시(詩)가 좋은 시(詩)이니 다치지 말아야 한다느니 영구보존해야 한다느니…   시비(是非) 끝에 시비(詩碑)를 잠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가슴이 철렁해난 바위는 식은땀을 한바탕 흘렸다 흉터가 나는 건 둘째치구 하마트면 풍지박살날번 했잖았구 뭔가!   무섭구나! 무섭구나!   바위는 자기 몸에 새겨진 시(詩)가 어떤 시(詩)인지 무척 알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볼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였다   시비(是非)가 있는 시비(詩碑) 시비(詩)碑에 있는 시비(是非)   바위는 산에 돌아가 친구 바위들과 어울리는 그냥 바위이고 싶었다     운명   쥔 것이 가시나무 가지일지라도 놓지 말아라 힘 줄 수록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더라도 놓지 말아라 놓는 순간, 순간을 잃어버릴 것이다 피로 꽃을 피워주는 가시, 가시 끝에 맺힌 꽃의 숨, 피는 물이 아니다! 찔림을 두려워 하고 아픔을 못 참으면서 뭘 얻으려고 말아라 널 깊이 찔러 네 피의 온기를 안 다음 영원한 한 몸으로 될 꿈 주는 아픈 사랑만이 사랑인줄을 찔려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랴! 찔리여라, 힘 꽉 줘라! 쿡쿡쿡… 한 손아귀에 가득 필 예쁜 피의 꽃을 위하여…     들국화   서리 내린 풀숲 네가 앉았던 자리 아침 볕 빨간 이슬이 맺혔다   너는 없고 갈꽃만 흔들먼들… 마가을 솔숲 청설모 약빠른 길 우에 숨어버린 예쁜 숨   어데 있나? 어데 있나? 눈 씻어도 없다   우연히 바라본 하늘 아ㅡ하 니들 모두가 하늘에 올라 있었구나     뿌리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밝고 예리한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마음 찌르는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빛을 이기는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그래서 어둠을 모르고 그래서 멈춤을 모르고 그래서 광음을 모른다   수십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수백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미로의 암흑속에서 숨을 찾아 뻗고 또 뻗는   뿌리에게는 피를 거르는 염통이 있다!     오늘   오늘, 오늘도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당신은 죽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오늘도 계속하여 오늘인 당신은 영원히 영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오늘의 숨이 오늘을 받쳐주어 한 그루의 나무로 한 송이의 구름으로 하나의 하늘로 별로 달로 태양으로 흙으로 돌로 이슬로 뿌리로 이파리로… 오늘을 만들어주고 있나니   오늘, 오늘이 있는 당신은 영원을 산겁니다 불사(不死)의 오늘에 안겨 당신 곁의 눈빛을 응시하면서 명암(明暗)을 나누는 이가 있기에 오늘도 오늘이 당신의 것 되였습니다   오늘, 오늘이 있는한 사랑하세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님을, 그러면 래일도 모레도 글피도 오늘이 될겁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별이 자는 밤, 손을 뻗어 허공을 만진다 검은 종이쪼각 빨깍빨깍 소리난다 한가닥 빛같은 오솔길로 예까지 걸어왔지 따라온 눈물자국들 새가 되여 날아갔지   나혼자, 나혼자, 나혼자… 남은 건 나혼자뿐, 내가 살아야 할 리유는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밤을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낮은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술을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 출발점과 종점은 나다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에게서 끝난다 내가 태양이다. 내가 우주이고 세상이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다 행성에 불과하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 지구의 핵이 없어지고 우주의 중심이 허물어질 것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나를 사랑한다     동그라미   엄지와 식지를 동그랗게 만든 후 나머지 손가락을 펴보이면 OK라는 뜻이 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동그란 눈동자로 보이는 이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둥근 지구가 우주를 굴러갈 때 둥근 달은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지구를 에돌면서 달리고, 메추리새끼가 동그란 알 속에서 부리로 딴딴한 껍질을 쪼을 때 생명의 진동소리는 우주를 흔든다. 정자가 동그란 란자를 만나는 순간 동그란 어머니 자궁은 생명의 집이 되여 우주를 낳을 준비를 한다. 흐르는 강, 넘쳐나는 바다, 쏟아지는 비, 수억의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저 물의 세계를 찬찬히 보라, 파도 되여 반공중에 뜰제 방울방울의 찬란한 동그라미들은 태여날 때의 모습으로 웃음 짓는다. 내가 쓰는 이 시에도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춤추고 있다. 가장 많은 동그러미, 그러나 똑똑히 그릴수 없는 동그라미를 동그랗게 그릴줄 알게 되는 그때 우리는 동그라미의 참뜻을 알 것이다. 동그라미가 동그랗기 때문에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면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칠 틈이 막혔기 때문이다. 당신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당신도 나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우리는 다 서로의 동그라미에 갇힌 동그라미가 될 것이다. 오늘도 당신을 향해 엄지와 식지를 꼭 붙인다. 좋아요! OK!   2018년 제6기.      
122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고향집 댓글:  조회:5064  추천:0  2018-08-30
  윤동주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이 시는 두만강 건너 쓸쓸한 타국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와서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헌 짚신짝을 신고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타국 땅에 왔으나 왜 왔을까 후회가 되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이 있고 그 고향에는 화자의 내 어머니가 계신다. 고향집이 그립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고향을 떠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곳이다. 이 시에서는 시대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의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시는 짧을 뿐이지 동시적인 요소는 없다.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은 두만강을 건너 아무 것도 없는 몸으로 타국에 와서 사는 고단한 삶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는 화자의 경제적 처기가 몹시 어려운 상황임을 알려준다. ‘나 여기 왜 왔노’는 화자가 ‘두만강을 건너’ 타국땅에 와서 ‘쓸쓸’함을 느끼며 어렵게 사는 것을 후회하는 말이다. ’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는 화자가 어머니가 계신 곳인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내용이다. 화자가 자신의 고향을 ‘남쪽 하늘 저 밑’이라 한 것은 시인의 고향인 용정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화자가 살길을 찾아 만주로 와서 고생하는 유이민을 보고 그 감정을 시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한 내 고향’은 살기 좋은 고향이라는 의미보다는 지금 있는 만주땅에 비하여 따뜻하다는 의미와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쓸쓸’하게 살고 있는 만주땅보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쓸쓸하지는 않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향이 살기 좋다면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와서 살려하진 않았을 것이다.///전한성         =================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로 공유하기 구글플러스로 공유하기 다른 SNS로 공유하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만주 간동성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최근 시인의 삶을 엮은 사진집 (윤동주100년 포럼)이 나왔습니다. 생가부터 학창시절, 육필원고, 장례식 모습을 담았습니다.   윤동주. 연희전문 입학 후 찍은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은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   윤동주 생가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태어나 명동중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함께 다닌 ‘청년 문사’ 송몽규. 윤동주의 장례식이 고향에서 치러진 것은 1945년 3월 6일. 하루 뒤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에는 이종사촌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고종사촌이다.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송몽규, 문익환목사가 그의 은진중학교 동기이며, 강원룡 목사가 은진중학교 5년 후배다.   당시 은진중학교 건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아버지 윤영석은 윤동주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이 어려운 시대에 의학을 공부해야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의 조부와 외숙부가 아버지를 설득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연희 숲에서. 서 있는 사람 중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 친구 강처중은 1945년 자신이 다니던 에 ‘쉽게 씌어진 시’를 게재하며, 윤동주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렸다. 1941년 12월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자필 시고집 3부 만들었다. 한부는 자신이 갖고, 한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다른 한부는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줬다.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의 신변을 염려해 시집 출간을 보류하라고 권했고, 윤동주는 이를 받아들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권도 가지지 못한 시인이다.   1945년 경향신문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2년 4월 일본 릿교대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학부 단발령’이 발령됐다. 이후 한 학기 만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시적 스승으로 삼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다. 공초 오상순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릿교대 재학시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와서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삭발한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은 시모가모 경찰서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동주는 바닷물을 인체에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용정 고향집 마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 집례는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맡았다. 장례식 때는 연희전문 에 실렸던 ‘우물 속의 자화상’ ‘새로운 길’ 등 윤동주의 시 두편이 낭독됐다.   윤동주 장례식/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의 육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위), ‘쉽게 씌어진 시’(아래) 육필 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참회록’ 육필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곽희양 기자 ======================///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지난 1일 오후 3시, 마나기 미키코(馬男木美喜子, 53)씨와 나는 윤동주 시인이 죽어간 후쿠오카 형무소(현 구치소) 건물 뒤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로 이 노래를 불렀다. 번안곡인 이 노래는 윤동주 시인이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27살 조선청년 윤동주, 유학지였던 일본에서 금지된 언어인 한국어로 시를 쓴다는 이유 때문에 잡혀와 이곳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정다운 고향"을 그리며 죽어가야 했던 쓰라린 마음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마나기 미키코 씨도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마나기 미키코씨는 오랫동안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 · 尹東柱の詩を読む会)의 대표를 맡아온 사람이다. ▲ 후쿠오카 형무소터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대표 마나기 미키코 씨와 함께 윤동주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뒤 건물은 현재 구치소 자리로 옛 형무소 터다. ⓒ 이윤옥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자리는 이쪽에 보이는 사와라구청(早良區役所)과 버스터미널 자리부터 시작해서 12헥타르에 해당하는 넓이였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다 헐려버렸습니다."  마나기 미키코 씨는 나를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곳으로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후지사키역(藤崎驛)출구로 나오니 그곳이 곧바로 옛 형무소 자리였다. 윤동주 시인이 숨져간 후쿠오카 형무소는 1913년, 하카다만(博多湾) 가까운 곳에 12헥타르(3만6000평) 규모로 세워졌다. 당시 사진을 보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찍은 형무소 시설은 사각형의 높은 담장 속에 마름모꼴로 긴 지붕이 이어져 있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 후쿠오카 형무소 2 3만6000평에 이르는 면적의 옛 후쿠오카 형무소 전경,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은 스물일곱 나이로 순국했다. 현재 형무소 터에는 버스정류장, 구청, 아파트, 경찰서 등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이윤옥   "형무소 자리였던 곳을 한 바퀴 돌아보시지요." 유창한 한국말로 마나기 미키코씨는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현재 사와라구청과 버스터미널로 바뀌어버린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자 그리 크지 않은 가나구즈강(金屑川)이 나타났다. 겨울철이라 물이 거의 바닥을 들어낸 곳에는 왜가리들만 간간이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가나구즈강을 사이에 두고 강 이쪽편이 옛 형무소 자리였는데 강 하류는 하카다만(博多湾)과 이어지고 있었다. 강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나기 미키코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형무소 같아 보이는 건물(현 구치소) 뒤편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은 맞은편 아파트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모치니시공원(百道西公園)으로 형무소 담장을 끼고 직사각형으로 길게 조성돼 있었다.  ▲ 후쿠오카 형무소 3 옛 형무소(현, 구치소) 터 뒷편에서는 해마다 윤동주 시인의 추도회가 열린다.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윤동주 모임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으로 한국의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추도회에 함께 했다. 옛 형무소 터에서. ⓒ 이윤옥   "바로 여기서 우리들이 해마다 윤동주 추모회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한국의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함께 윤동주 시인 추모 행사를 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물론 노래도 불렀지요." 해마다 이곳에서는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회원들이 중심이 돼 윤동주의 순국일인 2월 17일을 전후로 그의 시를 읽으며 27세로 생을 마감한 조선청년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을 열고 있다. 마나기 미키코씨는 추모 행사를 하는 지점에 서서 윤동주의 을 낭송해주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뒷줄임)" ▲  마나기 미키코씨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낭송해주었다. ⓒ 이윤옥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이란 대목에서 나는 몇 해 전 찾았던 북간도 용정의 너른 뜰을 떠올렸다. 방학이면 선바위 모퉁이를 돌아 그리운 고향집으로 달려갔던 시인, 사랑하던 누이동생 혜원이와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 고향 친구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꿈엔들 생각이나 했을까? 마나기 미키코씨는 찬바람이 부는 쓸쓸한 공원 안, 추모회를 하던 장소에서 나를 위해 윤동주 시인의 을 한국어로 또박또박 낭송해줬다. 순간 어디선가 윤동주 시인이 우리를 향해 손뼉을 치는 듯한 환상이 느껴졌다. ▲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대표 마나기 미키코씨(왼쪽)와 기자. ⓒ 이윤옥   '자화상' 낭송을 마치고 다시 형무소의 시작점까지 함께 걸었다. 3만6000평에 달하는 형무소 터를 다 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바람이 제법 찼다. 우리는 사와라구청 안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추운 몸을 녹이며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20여 년간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고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마나기 미키코 씨의 삶은 시인의 주옥같은 시어처럼 이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윤동주의 고뇌하는 모습에서 큰 울림 받아" ▲  대담하는 마나기 미키코씨. ⓒ 이윤옥   -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언제 인가요?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인연인 것 같아요. 저는 윤동주 시인이 유학 온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을 졸업하고 한국의 연세대학교에 유학을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저와는 반대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샤대학으로 유학을 왔으니 말이에요.  저는 연세대 유학시절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만났습니다. 보통 일본의 시들이 난해한 게 많아 별로 시를 즐겨 읽지 않았으나 윤동주의 시는 달랐습니다. 이해가 쉬울 뿐더러 읽을수록 순수하면서도 숭고한 감정을 어딘가 모르게 느꼈으니까요. 윤동주 시를 읽으면서부터 시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 · 尹東柱の詩を読む会)을 소개한다면? "이 모임은 1995년 2월, 후쿠오카시에서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추모하는 한일 합동위령제를 계기로 탄생했습니다. 물론 니시오카 겐지 교수님이 94년 12월부터 물밑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때 위령제라는 1회성 행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시와 죽음을 정중하게 돌아보고 일본과 한국의 새로운 관계를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시를 읽는 모임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제가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은 1997년도니까 올해로 21년째가 되네요. 사실 연세대 유학시절 윤동주 시도 많이 읽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도 꽤 컸는데 귀국 후에 직장일로 바빠서 관심을 이어가진 못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니는 부서로 전근 온 지인이 윤동주 시 읽기 모임에 나가는 분인데 저에게 윤동주 시인을 아느냐고 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한 달에 한번 모여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전 시집' 가운데 한 편씩을 골라 그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메시지에 대한 의견을 나눕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자가 고른 시 1편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낭송 → 작품에 대한 소감이나 자기 나름의 해석을 발표 → 한국어 원시를 다시 살피고, 사진판 자필 원고집에서 퇴고 과정을 보면서 토론 →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날 읽은 작품을 다시 되새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윤동주의 시 세계가 점점 확장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왜 이러한 시를 쓰게 됐는지, 그가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는지, 한일관계의 아픈 역사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피부로 느끼면서 시인이 살다간 시대를 재인식하게 되기도 하지요. 시 모임을 통해 귀중한 배움과 나눔의 장을 펼치는 일은 매우 보람 있는 일입니다." ▲  한달에 한번 윤동주 시를 읽고 토론을 하는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모습. ⓒ 이윤옥   - 마나기 미키코씨에게 윤동주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윤동주 시인의 시를 통해 시 읽는 즐거움을 터득했으니 이 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윤동주 시인을 통해 역사, 예술, 인생관, 한일관계, 평화, 삶의 철학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된 점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갈등하는 모습, 자기 삶에 고뇌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큰 위안을 받습니다. 또한 삶의 고뇌를 바깥에서 찾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모습에 큰 울림도 느꼈고요. 이러한 좋은 시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을 이끌어왔습니다. 윤동주 시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이 이어진 것을 보면 그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마법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올해 펼치는 일은?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의 마음에 닿다'(尹東柱の詩の心にふれる)라는 주제로 후쿠오카에서 큰 행사를 엽니다. 12월 17일 일요일, 윤동주탄생100주년기념사업실행위원회, 큐슈대학윤동주연구회, 주 후쿠오카대한민국총영사관 공동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타고기치로 작가의 '생명의 시인 윤동주' 특강과 2부에서 윤동주 영화 상영도 마련돼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윤동주 시인이 추구했던 시 세계와 조국에 대한 애끓는 갈망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윤동주 모임 2 12월 17일 후쿠오카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과 영화 상영을 할 예정이다.ㅣ ⓒ 이윤옥       은 고향을 떠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곳입니다. 이 시에서는 시대적인 특성이 나타나지요.   일제강점기의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삶을 살려는 이방인들의 모습입니다.  
1226    [사진한쪼박] - 그리워라 땡 땡 땡 종소리... 댓글:  조회:2494  추천:0  2018-08-25
122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남쪽하늘 댓글:  조회:2878  추천:0  2018-08-24
남쪽 하늘 / 윤동주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시산한 가을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내리는 저녁- 어린 영(靈)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남쪽하늘에 떠돌 뿐_   1935. 10. 평양에서   어느 순간 착상을 하여 단편적 구성으로 형상화한 시이다. 첫 연에서 제비와 어머니의 대비에서 같은 그리움이 맺혀 있다. 고향을 떠나와 떠도는 나그네인 양 아마 학창 시절 억눌린 가슴을 펼 수 있는 따뜻한 남쪽나라가......,     ===========================///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나무는 백성·바람은 일제 강압 상징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성찰 담긴 시 하늘·바람·별 등 서정적 표현 많았던 시인의 고뇌 가득 차 참담·우울한 시대 아니었다면 연기를 노래한 게송 같은 시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보통사람 같으면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잠잠하면 나무가 자오”라고 읊었을텐데, 윤동주(1917~1945) 시인은 거꾸로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라고 하였다. 인과가 거꾸로 나타난 역인과의 관계이다. 물론 좋은 원인이 좋은 결과를 만들고, 또 좋은 결과가 새롭게 좋은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보통 인과관계가 하늘이 꾸물꾸물하여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 그러나 가랑비가 내리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한다. 이렇게 시인이나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고정관념이 타파되어 생각의 관점이 다르다. 중국 당나라 육조 혜능선사의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 공안 화두는 윤동주의 ‘나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무꾼 출신 혜능이 오조 홍인을 찾아가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고, 황매산을 떠나 남쪽 광동성 광주의 법성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을 설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서 당간(幢竿)의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말하자 다른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며 서로 다투었다. 이 모습을 보고 혜능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라고 말하자, 인종법사는 예절을 갖추어 혜능 스님을 맞은 일화가 있다. 마음은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마음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따라서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보고 느낀 대로 “나무가 흔들리면 바람이 분다”고 하였고, 혜능선사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무와 바람은 연기 관계이다. 나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로서 평생을 자신의 뿌리를 땅에 묻고 서서 살아간다. 다만 바람이 다가와서 흔들어 주고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있게 해 줘서 춤을 추기도 한다. 나무가 자라서 거대한 숲을 이루고 홍수도 막아주고, 사막화 되는 미세먼지도 걸러준다.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다”고 노래하였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집 서문을 대신하여 쓴 시 ‘서시’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하는 바람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괴로움이고, 별은 사랑과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나무’의 “바람이 잠잠하면 나무가 자오”에서 일제의 탄압이 잠잠해지면 조선의 백성은 비로소 편안히 잠을 잔다고 하는, 그래서 ‘나무’는 우리 민족의 백성을 상징하고 ‘바람’은 일제의 매서운 강압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윤동주의 시는 자연의 서정적인 표현을 하면서도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 성찰의식이 담겨 있다. 시인이 일제의 참담하고 우울한 시대만 살지 않았다면 ‘나무’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과 나무의 순수한 연기(緣起)의 사랑을 노래한 24자의 간명(簡明)한 게송 같은 선시(禪詩)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운수자연을 노래한 운수시(雲水詩)이다. 윤동주는 조국의 광복을 눈앞에 두고 1945년 2월에 27세의 젊은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 감옥에서 요절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그의 시를 마음에 새겨서 광복절을 맞아 다시 임에게 헌사한다. /김형중 동대부여중 교장·문학박사
122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못 자는 밤 댓글:  조회:2744  추천:0  2018-08-24
  윤동주 /못자는 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이 시는 잠을 못 이루어 숫자를 세면서 잠을 이루려고 하지만 아무리 수를 세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밤을 모두 헤아리면 잠이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를 세지만 잠이 계속 오지 않는 원인을 밤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 내용의 동시이다.///전한성   윤동주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보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보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세 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 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사--- 다섯 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받았을까요     이 동시는 공부하기 싫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이 잘 표현된 동시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돌이가 내일 시험을 앞두고 시험공부를 안 하고 놀고 싶어서 돌멩이 다섯 개로 전봇대를 맞추는 것으로 다음날 시험을 찍었을 때에 정답을 맞추는 비율과 동일시하는 생각으로 돌멩이를 다섯 개 던져서 3개를 맞추자 다음날 시험에 나오는 다섯 문제 중 세 문제를 맞추어 육십 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공을 차러 가는 상황을 화자가 보고 그 다음날 시험에서 만돌이가 전날 생각대로 육십 점을 받았을까? 아니면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냈을까를 궁금해 하는 문제의 답을 독자에게 묻는 내용이다.///전한성     윤동주 /둘 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이 시는 바다와 하늘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이 둘을 모욕해도 잠잠하거나 벙글 웃는 끝없이 넓은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동시이다.   제목 는 바다와 하늘이 둘 다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1, 2연은 바다와 하늘의 공통점이 ‘푸르고’ ‘끝없고’이다. 3연은 이러한 바다와 하늘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바다에 돌 던지고 / 하늘에 침 뱉고’에서 행위는 다르지만 대상을 모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바다는 벙글 / 하늘은 잠잠.’도 화자가 모욕한 행위에 대해서 약간의 차이를 가진 반응을 하지만 둘 다 화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바다’와 ‘하늘’이 ‘둘 다’ 아량이 끝없이 넓고 큰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전한성            
122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태초의 아침 댓글:  조회:3874  추천:0  2018-08-23
    윤동주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태초의 아침'은 우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간, 흔히 말하는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아닙니다. 계절을 뛰어넘어 최초의 시간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푸른 빛 사이에서 핀 빨간 꽃의 의지도 느껴지는데요. 시는 읽는 사람의 현재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   윤동주의 태초의 아침   태초(太初)의 아츰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츰도 아닌 아츰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이 시는 사랑과 죽음은 태초의 아침 전날 밤에 마련된 것이다는 내용이다.   화자는 세상이 창조된 ‘태초(太初)의 아츰’은 ‘봄날’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생기기 전의 아침이며 그날 아침은 ‘햇빛이 푸’르른 아침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침에 ‘하와’를 의미하는 아름답고 ‘어린 꽃’인‘빨-간 꽃이 피어났’고, ‘뱀’은 ‘어린 꽃’를 사랑하여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불륜을 저지른 존재이며, 이로 인해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독’은 ‘어린 꽃’인 하와로 인해서 생긴 것이나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날 밤에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고 바이블의 창세기 설화를 해석을 하였다.   ‘태초(太初)의 아츰’은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 맞이 하는 ‘아침’이다. 이 아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봄날 아츰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의 ‘아츰도 아닌 아츰’으로 우리는 모르는 아침이다.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는 도치된 문자이다. 화자가 생각는 ‘태초(太初)의 아츰’은 ‘햇빛이 푸’르게 빛나는 맑은 아침이다. ‘푸른데’의 ‘-데’는 사전에 ‘하게할 자리에 쓰여, 과거 어느 때에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된 사실을 현재의 말하는 장면에 그대로 옮겨 와서 말함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이다. 그러나 ‘-데’는 ‘-데’ 앞에 붙은 어간의 의미와 배치되는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을 풍긴다. 이 일이 ‘빨-간 꽃이 피어났네’이다. ‘빨-간’은 ‘빨간’을 강조하는 말이며, ‘푸른’과 색이 대비되어 ‘정열, 아름다움, 유혹’의 느낌을 주는 색이다. ‘푸른’이 주는 ‘차분함, 맑음, 이성’과 대비된다. ‘꽃’은 관습적 상징으로 ‘여자’를 의미한다.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는 연이 도치되었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에서 ‘뱀’은 바이블 ‘창세기’에 에 기록된 설화에 나오는 뱀이다. 이 설화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는데 뱀이 하와에게 신이 먹지 말라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하고 하와가 짝인 아담에게 이를 먹게 해서 신에게 죄를 짓게 했고 그 결과 죽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화자는 ‘뱀’이 ‘하와’에게 신이 먹지 말라한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한 행위를 ‘하와’를 사랑하여 유혹한 것으로 본 것이다. ‘뱀’의 ‘사랑’의 대상은 ‘빨-간 꽃’인 매우 아름답고 정열적이며 유혹적인 ‘하와’이다. ‘하와’는 짝이 있었으므로 지금의 윤리로 보면 ‘뱀’의 ‘사랑’은 불륜의 사랑이다. ‘독(毒)’은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성분’으로 중독(中毒)되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온 ‘뱀’의 ‘독’은 불륜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인간의 죽음이 온전히 ‘뱀’에게서만 온 것으로 보지 않고 ‘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 짝을 신에게 거역하게 한 ‘하와’에게서도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꽃’은 하와를 말하는데 여기서 ‘어린’은 하와의 정신적 성숙도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하와는 어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불륜인지 모르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뱀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죽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는 화자가 바이블을 해석하는 관점을 나타낸다. 신의 명령을 어기게 만든 뱀과의 불륜의 ‘사랑’을 한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독’이 ‘뱀’과 ‘하와’에서 온 것이라 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그 근원을 탐구하면 ‘태초(太初)의 아츰’이 오기 전인 ‘그 전(前)날 밤에’ 이미 신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기독교는 ‘뱀’을 신에 대항하는 적대 세력인 ‘사탄’으로 보고 인류가 영생하지 못하고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화자는 이 모든 죄와 죽음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마련된 신의 계획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를 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이라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인 윤동주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였고 기독교의 모티브를 차용하여 시를 썼으나 기독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이라 하는 항간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전한성     ======================///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1인칭’ 과 ‘너머’ 의 시인 ◇ 윤동주의 생애를 다시 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타계하였다.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처럼 이른바 요절 문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상(1910∼1937), 김유정(1908∼1937), 박인환(1926∼1956), 기형도(1960∼1989) 등이다. 모두 30년을 채 못 살았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한결같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비추는 당대의 별이자, 지금도 애독되는 고전적 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윤동주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윤동주는 마지막 생애 1년 7개월가량을 경찰서와 감옥에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피검되어 12월 6일 검사국으로 송국되었고, 1944년 2월 22일 송몽규와 함께 기소되었고,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고, 그 후 후쿠오카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죽어갔다. 그러니 그의 27년 1개월 남짓한 생애에서 1년 7개월의 공백이 생긴다. 계산하면 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호흡한 시간은 25년 6개월 15일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윤동주가 교토에서 살았던 동안의 기록들 역시 망실되어 지금 찾을 수 없다. 당시 도쿄(東京)에 있던 당숙 윤영춘이 서둘러 교토에 와 윤동주를 취조실에서 면회했을 때 윤동주가 자신이 쓴 조선어 글을 모두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술회한 것으로 미뤄,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글을 썼을 것이다. 윤영춘도 그 원고량이 상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가 우리에게 남긴 지상 최후의 기록은, 도쿄의 릿쿄(立敎)대를 다니던 1942년 6월 즈음에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편지와 동봉하여 보낸 시편들이다. 릿쿄대 편지지에 깨끗하게 정서한 그 작품들은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어진 시’ ‘봄’이다. 앞의 네 편에는 창작 일자가 남아 있고, 마지막 ‘봄’에만 날짜가 빠져 있다. ‘사랑스런 추억’과 ‘흐르는 거리’는 각각 5월 13일과 5월 12일의 창작 일자를 달고 있으니까 윤동주가 꼭 창작 순서대로 정서를 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봄’은 대략 ‘흰 그림자’를 쓴 4월 14일부터 ‘쉽게 씌어진 시’를 쓴 6월 3일까지 어름에 쓰였을 것이다. 늦게 잡아도 ‘봄’이라는 시상에 어울리려면 6월 안에는 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남긴 120여 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은 모두 1942년 6월 이전의 작품이 된다. 어림잡아 윤동주의 ‘기록자로서의 생애’는 24년 5개월 남짓이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윤동주의 발화는, 모두 20대 초반에 이뤄진 것들이다. 이는 앞에서 거론한 이상, 김유정, 박인환, 기형도 등의 대표작이 대부분 20대 후반에 쓰였다는 점과 유의미한 대조를 이룬다. 이상의 ‘날개’나 ‘권태’ ‘실화’ 등은 그의 말년에 쓰였고, 김유정의 ‘동백꽃’ 등도 마찬가지다. 박인환의 걸작 ‘세월이 가면’도 유작으로 쓰인 것이고, 기형도도 대부분 20대 후반에 절창들을 연쇄적으로 써나갔다. 그런데 윤동주는 20대 초반에 그의 모든 작품을 쓴 것이다. 이 점은 강조되어 마땅한데, 그만큼 윤동주가 과조숙한 사람이었으며, 또 그에게 20대 후반이 허락되었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윤동주는 진짜 ‘청년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일인칭’의 시인 윤동주 하지만 이러한 요절 자체가 윤동주에 대한 비상한 매혹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시를 다수 남긴 훌륭한 근대 시인이고, 어쩌면 한국문학사 전체를 조회해 보더라도 그 함량과 파생력에서 단연 일급에 속한다. 그렇다면 윤동주 시가 가지는 진짜 브랜드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부끄럼’을 키워드로 하는 성찰의 언어와 ‘저항’을 키워드로 하는 민족주의적 독법이 오래전부터 매개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윤동주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만의 독자적인 특장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한편으로는 ‘나’를 고백한 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너머’를 상상한 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토로하고 고백한 일종의 ‘자기 폭로’로서의 예술을 보여준 윤동주의 특성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서정시의 원리이니 새삼 크게 강조할 것도 못 된다. 하지만 윤동주가 시를 공부하고 노트에 써두고 또 자필 시고를 묶을 때의 한국 시의 맥락과 성취를 전제해 보면, 그 방향과 성취는 자못 돌올하다.  먼저 윤동주가 깊이 사숙하고 모방하고 또 비껴갔던 정지용의 경우, 그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고백 시편보다는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사물 시편을 많이 썼고, 아니면 주체를 지우면서 신성이나 풍경 속에 몰입하는 신앙 시편과 후기 ‘백록담’ 시편을 썼다.  윤동주는 그에게서 시어의 혁신, 이미지의 참신함, 조선어의 예술성 구현 등을 정성껏 배웠지만, 시 안에서 차분하게 일인칭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점에서는 스승의 시로부터의 역주행을 택했다. 사실 윤동주의 화자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의 발화와 가장 가까운 근사치이다. 이 점은 앞 시대의 소월이나 만해가 주로 배역 시편을 썼다거나, 임화나 이상이 실험적인 다양한 화법의 시를 썼다거나, 김기림이나 김광균 등이 묘사 시편을 썼다거나 하는 사실로부터 훌쩍 벗어난 윤동주만의 문학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에게는 시인과 화자 또는 내포적 화자와 현상적 화자 같은 개념이 미분화한 채, 시인 자신의 진솔한 고백에 시적 발화가 통합되어 있다. 물론 이는 백석의 후기 시편들과 구조적 동류항을 이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윤동주 시만의 ‘자기 폭로’ 방법을 독자들이 좋아했던 데 있다. 윤동주는 끊임없는 부끄럼과 고통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시 안에서 “괴로워했다”라고 쓰면 그것은 그대로 윤동주 자신의 괴로움이 되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라고 말하면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우리 근대 독자들은 서정시의 이러한 고백을 마음 열고 엿들으면서, 자기와의 동화와 투사를 감동 깊게 수행해간 것이다.  이때 시의 화자 ‘나’는 시의 독자 ‘나’와 순간적으로 통합되면서 일체감을 낳는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예언을 들으면서는 그 예언이 이뤄지지 않은 그의 불행한 생애를 불멸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나오는 ‘나’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였고, 우리는 그가 고백하는 ‘나’를 만나 “최초의 악수”(‘쉽게 씌어진 시’)를 한 셈이다. 윤동주가 우리에게 이렇게 보편성과 항구성을 띤 채 새롭게 읽히는 것은, 그가 그 당시에 매우 새롭게 채택한 일인칭 고백으로서의 시법에 원인이 있고, 그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흔치 않은 진정성을 보여준 데 더 큰 까닭이 있는 것이다. ◇‘너머’의 시인 윤동주 이렇게 ‘나’를 고백한 시 외에도, 윤동주에게는 그만이 가진 매우 중요한 지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우리는 ‘너머’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윤동주는 현상적인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들여다보면서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곳을 넘겨다본 시인이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난다.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 고향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전제한 발화이다. 또한 그는 참회록을 써놓고도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쓰고자 한다. 날카로운 첨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또 다른 십자가를 상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그리스도의 희생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희생의 불가피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속성의 확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태초의 아침’을 넘어 ‘또 태초의 아침’을 노래하는 것 역시 차원이 전혀 다른 아침을 통해 신성과 세속이 벌이는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려는 의욕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에는 세 명의 ‘사나이’가 나온다. 가을밤에 논가 외딴 우물에 가서 윤동주는 ‘한 사나이’를 들여다본다.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도로 가 들여다본 것은 ‘그대로 있는 사나이’다. 다시 그가 미워져 돌아가다 생각하니 이제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 이제는 그 사나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그 우물 속에는 천체들의 이동과 함께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미움-연민-미움-그리움’의 감정 회로를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 성숙한 시선을 통한 자기 긍정에 이르는 이 감동적인 흐름 역시 ‘사나이’와 ‘또 다른 사나이’ 사이의 시간과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집 마지막 작품인 ‘별 헤는 밤’에서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 위에 자랑처럼 무성한 풀 역시 시인이 욕망하는 ‘또 다른 이름’의 형상일 것이다. 그렇게 윤동주는 현상 ‘너머’, 지금 ‘너머’, 이곳 ‘너머’를 오래도록 상상한 시인이다.   이 점은 재차 강조되어 마땅한데, 사실 이처럼 ‘또 다른’ 차원으로의 존재 전환에 대한 갈망과 희원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드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이원론적 사유라고 해도 좋고, 형이상학적 전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러한 입체적인 ‘치명적 도약’(옥타비오 파스)을 이뤄낸 시인으로서, 이는 소월이나 백석이나 김수영조차 가지지 못했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 비약과 전환의 욕망은 앞으로 더욱 세심하게 논구되어야 할 윤동주 득의의 브랜드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윤동주가 요절 때문에 작품 외적으로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 ‘저항시인’이라는 민족주의적 독법에 따라 시대적 후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 근대 시사에서 퍽 드문 영역인 ‘나’를 고백한 시, ‘너머’를 상상한 시로 남은 고전적 텍스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화일보 9월 12일자 25면 6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윤동주와 기독교  ◇윤동주와 기독교  마르틴 루터에 의한 근대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았다고 연일 매스컴에서 강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이란, 로마 가톨릭의 역사적 과오와 한계를 비판하면서 시작된 ‘저항 종교’로서의 프로테스탄트가 새로운 근대를 열면서 중세의 인적, 제도적 질서를 허문 사건이다. 우리가 윤동주를 생각할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발생론적 원천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를 둘러싸고 그가 수용한 지적, 정서적, 영적 경험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의 시가 북간도 기독교와 여러모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그간 윤동주 연구에서 누차 강조되어온 터였다. 특별히 복음주의적 전통이 깊이 착근된 서북 기독교와는 달리, 민족주의를 사상적으로 받아들인 채 전개된 북간도 기독교는 그의 사유와 경험 체계에 매우 중요한 개성과 전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따라서 북간도 기독교는 윤동주로 하여금 수난과 영광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영적 선지자들의 계보를 잇는 종교적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끔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를 기독교라는 원리나 역사의 선명한 번안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복합적인 내면과 언어와 전망은 기독교라는 원근법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워낙 강한 원심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검출되는 종교적 상상력이란 내적 성찰과 완성을 향하여 저류(底流)에서 흐르는 힘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그러한 지향이 잘 담겨 있는데, 그 점에서 이 시집은 식민지 시대에 쓰인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상력의 보고이기도 하다.  ◇윤동주의 종교적 작품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윤동주가 직접 자선하여 실은 종교적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이다. 이미 창작 노트에 훨씬 많은 작품을 써놓은 터에 그 가운데서 윤동주가 열여덟 편만을 뽑았다는 것은, 이 시집 원고가 1941년 11월 시점에서 윤동주 시의 정점이었음을 잘 알려준다. 그 점에서 이 시집 원고에 종교적 작품이 여섯 편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높은 비중이 아닐 수 없다. 시집에 실은 순서대로 보면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등이 그 목록을 차지한다. 먼저 ‘태초의 아침’에서 윤동주는 신의 창조 사역이 완전무결한 질서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모순으로 둘러싸인 세계로 나아갔다는 개성적 인식을 드러낸다. 가령 그는 ‘사랑’과 ‘뱀’, ‘독(毒)’과 ‘어린 꽃’이 갈등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를 노래한다. 이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를 동반하면서 선명하게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되어갈 세계를 예견하게끔 해준다. 이어지는 작품 ‘또 태초의 아침’ 역시 창조의 과정에서 계시와 함께 낙원 상실이 함께 왔음을, 그리고 원죄와 부끄럼과 노동과 해산이라는 인간적 고통의 목록들이 연이어 역사 안으로 개입해왔음을 증언한다.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는 마지막 행의 다짐은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함의하기도 하지만, 갈등의 시대에 자신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희생적 이미지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새벽이 올 때까지’는 이러한 창조와 희생의 이미지가 종말론적으로 반추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종말론이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예언 혹은 묵시적 가르침을 함의한다. 이는 신의 뜻에 의한 역사의 완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새벽이 되어 울려올 “나팔소리”는 죽음과 삶의 반영체인 ‘잠’과 ‘젖’을 하나로 묶어주면서, 결국 ‘죽어가다’와 ‘살아가다’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종말론이 운명적 비관론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심은 ‘무서운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는데, 이 작품에서 윤동주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것을 일종의 윤리적 의지로 탈바꿈시키려는 사명감을 함께 보여준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은 어쩌면 ‘사랑’과 ‘뱀’이 함께 창조된 그날 아침의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그다음에 실린 ‘십자가’는 윤동주 종교 시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윤동주는 희생과 속죄양 의식을 동시에 노래한다. 사실 ‘십자가’는 기독교 전통의 표상이자 고난의 상징이다. 시인은 첨탑 위의 십자가가 비록 구원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그것이 너무 높고 다다르기 힘든 대상임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그래서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면서 서성일 뿐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여기서 ‘또 다른 십자가’를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얻어간다. 그것은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했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높고 날카로운 천상의 십자가가 그리스도가 기꺼이 졌던 지상의 십자가로 몸을 바꾸는 순간이다. 이때 우리 시사의 한 절창이 이어진다. 그것은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이는 앞으로 시인 자신이 겪어야 할 수난과 희생의 장면을 뚜렷하게 암시하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불어’는 그러한 종교적 갈등을 벗고 십자가를 내면화한 채 나아가는 출사표와 같이 다가온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라는 구절에서의 ‘반석’과 ‘언덕’은 단연 신약성서의 키워드이다. 그것은 가혹한 수난과 굳건한 기초라는 함의를 한꺼번에 띠면서 윤동주가 비록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고백할지라도 앞으로 시대와 신앙을 결속하면서 움직여갈 것임을 암시해준다. 이처럼 시집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은 ‘창조-모순-갈등-희생-종말-십자가-반석’의 서사를 완성하면서 그가 원숙한 신앙적 단계를 경험하고 반추하고 또 귀납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여섯 편은 내용적으로도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실린 순서도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새로운 종교성을 향하여  그런가 하면 윤동주가 시집 원고를 마련한 후에 쓴 ‘간’이라는 작품은, 윤동주 시의 일반적 주제인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라는 문제를 설화를 빌려 파고들어 간 결실이다. 작품 안에는 두 개의 설화 곧 프로메테우스와 귀토 설화가 뒤섞여 있다. 이 둘은 간이라는 공통 소재를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토끼의 설화는 현실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꿈꾸지만 자신이 바라던 이상 세계는 갈등의 현세이며 지상이 소중한 낙원임을 깨닫는 인간의 자각을 담은 이야기이다. 토끼는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고 있으며 그 둘레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킨다. 이때 시인은 코카서스의 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묵묵히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로 상상을 이어간다. 여기서 간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로서 매일 쪼아 먹히면서도 새로 돋아나는 인간적 고통의 핵심이 된다. 토끼와 독수리는 인간의 양면 혹은 두 개의 자아를 표상한다. 곧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쪼아내며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내부의 예리한 의식이다. 곧 이것은 현실적 자아를 반성하는 도덕적 결백성의 반성적 자아이다. 화자는 이 고통을 통해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며, 용궁의 유혹을 벗어나 보겠다는 덧없는 환상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에 대한 환상도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자기 응시의 긴장을 항구적으로 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결연한 의지로 맞서는 비극적 인간 곧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으로서, ‘십자가’의 속죄양 의식과도 적극적으로 상통한다. 결국 이 작품은 윤동주 시에서 가장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상이 등장하는 시편이다. 설화를 상상적으로 변용하여 시인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을 설화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종교적 상상력은 설화적 차용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견인과 의지라는 표상을 역설적으로 제시해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윤동주에게 새로운 종교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단초가 되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융합적인 활달한 상상력은 그의 생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떠났고, 다섯 편의 도쿄(東京) 시편을 남겼을 뿐이다.  ▲  윤동주가 1942년 유학했던 일본 도쿄의 릿쿄대.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끔 해준 견인의 바탕  윤동주는 생애 내내 학생이었고 학교도 여럿 다녔다. 그 가운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 연희전문은 물론, 일본의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도 모두 개신교 계열의 미션스쿨이었다. 윤동주가 근대적 의미의 종교개혁이나 이스라엘 수난사로서의 성경 내러티브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의식 전면에 장착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윤동주에게 종교란 자신을 성찰하고 완성해가는 중요한 원천이자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슬픔과 연민, 죽음과 부활의 연쇄적 서사는 어떤 의미로든 그에게 “나한테 주어진 길”을 상상하게끔 했을 것이며, 성경 안에 자욱하게 펼쳐진 어둑한 묵시록이나 종말론은 모두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끔 해준 견인의 바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제재 차원의 배경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은총과 갈등을 함께 가능하게 한 광장이자 감옥으로서의 종교를 경험하고 상상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종교란, 경험적 구체성과 함께 한국 기독교 시의 역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장관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는 그를 척박한 근대 종교사에서 가장 우뚝한 시인으로 서게끔 해주는 핵심적 질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김현승, 박목월, 박두진 등의 종교 시편들과 함께 궁구되어야 할, 우리 근대시 역사 전체에서의 윤동주 득의의 성취일 것이다. (문화일보 10월 10일자 25면 7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유성호의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윤동주를 위하여 -끝-   단정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과 시가 일치했던 시인   韓 현대문학사 독특한 성취  자기고백과 성찰 기록한 시   먼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 아닌   지금 우리의 망각에 대한 각성  윤동주 탄생 100주년 맞아   ‘영원한 청춘’의 시인 재평가   세월 가로지른 감동으로 부활  ◇현대문학사에서의 윤동주 = 그동안 우리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를 따라, 윤동주를 찾아, 많은 길을 가로지르고 또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윤동주를, 길지 않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남다른 가치와 개성으로 숨 쉬고 있는 시인으로 기억하게 됐다. 그가 남긴 오롯한 시편들은 원초적으로 시와 삶의 분리 불가능성 속에서 발원하여 우리의 가장 깊은 실존의 심부에 와 닿는다. 어쩌면 그의 삶 못지않게 그의 죽음 역시 그 극적 성격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를 불멸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상황과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감동으로 살아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른 나이에 운명한 사람의 불가피한 미완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라도, 윤동주의 단정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시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탈환시키는 항구적 보고(寶庫)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윤동주의 시는 자전적 성격이 강하고, 그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는 윤동주 개인과 거의 일치한다. 그의 시가 비록 연륜을 쌓은 원숙함과는 다른 청년기의 속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성 중에 있는 청년의 이상과 그 아픔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빛나는 장면으로 어느새 몸을 바꾼다. 그래서 그가 노래한 ‘부끄럼’과 ‘성찰’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것이 되고, 그 실존적 치열함은 부끄럼 자체가 부끄럼의 대상이 되는 끝없는 극화의 성격을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의 연희전문학교 입학은 일종의 성년식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늙은 의사의 진단’(‘병원’)을 받았고, 일본의 릿쿄대학에서는 ‘늙은 교수의 강의’(‘쉽게 씌어진 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근대 학문이나 합리성의 체계에 자신의 실존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피로’와 ‘침전(沈澱)’을 택하였다. 이 또한 ‘자기 인식의 위기’(Identity crisis)를 스스로를 발견하는 계기로 삼은 그의 투명한 눈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윤동주의 삶과 시의 궤적은 자기 성찰보다는 자기 도취나 현시로 종종 기울어가는 현대인의 영혼을 깨우고 세상에 맞설 항체를 제공하는 자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윤동주만이 누리는 매우 중요한 권역이 아닐 수 없다.  ◇고백과 성찰의 기록 = 상식적으로 말해 시의 표면에 등장하는 화자는 실제 자연인인 ‘시인’과 같지 않다. 소월 시의 여성 화자라든가 정지용 초기 시에 나타나는 유년 화자 등이 그 시인과 같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시에는 시가 구현하려고 하는 주제 또는 내용에 따라 그에 걸맞은 일종의 ‘퍼스나(Persona)’가 방법적으로 설정된 것뿐이다. 그런데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시인 자체가 직접 화자가 돼버리는 속성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의 시의 특성은 강한 ‘자기 고백성’에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시를 하나의 발표 양식으로 생각하거나 전문적인 독자를 의식하고 창작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제일의적 독자가 돼 시를 썼기 때문에 나타난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들은 그러한 고백과 성찰의 기록이다. 윤동주의 이러한 자기 성찰의 힘은, 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원죄 의식, 낙원 상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럼, 고통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함(‘또 태초의 아침’)에 대한 지속적인 윤리적 준거로 작용한다. 그 윤리적 준거가 윤동주에게 ‘자기 희생’의 이미지라는 ‘자기 성찰’의 변용된 에너지를 선사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시가 그동안 ‘저항시’라는 문맥으로 통용돼온 것에 대한 강력한 조정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투명하고도 진정성 있는 자기 탐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윤동주를 민족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기획과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원의 기억 상실’을 극복하는 자료로 기억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의미한다.   ‘기원의 기억 상실’이란, 기억과 망각의 장(場)을 통해 바로 그 기원이 은폐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자연화한 기억은 성과 계급과 인종의 차별적 위계화를 지워감으로써 개인을 동질화한 집단으로 호명하는 기제를 말한다. 그것은 그래서 우리 민족의 식민 경험을 그야말로 ‘원경(遠景)’으로 처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윤동주는 ‘식민’과 ‘언어’에 대한 망각에 대해 저항하는, 기억의 정치학을 아름답게 보여줄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내면의 저항이라는 실존적 언어 행위가 극명하게 윤동주 시의 본래적 성격으로 조명돼갈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저항(抵抗)’은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모든 행동과 사유를 포괄한다. 거기에는 어떤 부정한 폭력에 대한 반작용이 그 본질적 속성으로 담겨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는 오도된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힘으로서 일종의 정당방위적 속성을 띠게 된다. 물론 이는 협의의 저항이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삼는 실천적 움직임을 말하는 데 대한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광의의 저항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윤동주의 생애와 시는, 가장 협의의 저항으로 그동안 유통되고 재생산된 측면이 있는 셈이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집단적 기억으로 소통돼온 것은, 윤동주를 그런 표상으로 기억함으로써 그와는 전혀 다른 욕망으로 움직여온 어떤 이들의 행태들에 대한 망각을 동반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윤동주를 제자리의 기억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윤동주라는 창(窓)을 통해, 식민지 시대 제국에 동화하려 했던 욕망들을 모두 은폐하려는 또 다른 욕망들과 힘겹게 싸워가야 한다.  ◇윤동주는 누구인가 = 내게는 귀중본이 얼마 있다. 오래전 출간된 초판본 시집이나 잡지 창간호 같은 것들, 귀중한 분들로부터 친필 사인을 직접 얹어 받은 책들, 그리고 각별하고도 유일한 기억이 얹혀 있는 책들이 그 목록을 차지한다. 서서히 낡아가는 종이의 속성 때문에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읽어내기조차 어렵게 된 이 책들은, 한사코 교환가치에 의해 값이 매겨지지 않는 자신만의 유일한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물론 정음사 판 초간본은 아니다. 1955년 2월 16일 그러니까 그의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펴낸 중간본이다. 초간본에 선명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정지용 서문과 강처중 발문이 빠졌고, 그 대신 동생 윤일주의 글 ‘선백(先伯)의 생애’와 정병욱이 쓴 후기가 말미에 붙어 있다. 오랜 세월을 훌쩍 넘어 종이들이 나풀대기까지 하는, 고서(古書)에 가까운 이 책을 나는 무슨 불멸의 기억처럼, 내 문학의 깊은 수원(水源)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윤동주는 나의 문학적 욕망 안에 거의 첫사랑의 흔적처럼 숨 쉬고 있는 시인이다. 대학 1학년 수업 한 장면에 나는 윤동주에 관한 발표를 했다. 그때 나는 무슨 고해성사처럼, 문청(文靑)으로서의 과장된 자기 다짐 같은 것을 윤동주와 관련하여 어색하게 엮어나갔던 것 같다. 그때 교수님은 발표자가 윤동주와 비슷한 성정을 가진 것 같다고 무슨 ‘화인(火印)’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부끄러웠고 용기 충천했었다. 그런데 졸업식 때, 한 동기가 “이제는 윤동주에서 벗어나야지?”라는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그렇게 내가 그에게 함몰됐던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대학원 과정 내내 윤동주를 찾지 않았다. 내 시선은 정지용으로, 백석으로, 임화로, 김수영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녔다. 윤동주 시가 가지고 있는 순결하고도 선명한 메시지를 피해, 이념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훨씬 복합성을 띠었던 근대시의 전범들을 읽고 외우고 공부하고 그들에 관한 글을 부지런히 썼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의 나이를 훌쩍 넘어, 나는 윤동주라는 불멸의 젊음이 가지는 기억으로 귀환했다. 여기 연재한 글은 모두 그러한 귀환의 흔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탄생 100주년을 넘어 = 또한 우리는 그동안 윤동주를 이렇게 아름다운 표상으로 남게 해준 이들의 공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윤동주의 시집을 보관하여 세상에 알린 정병욱 선생, 오빠의 친필 시작 노트를 소중하게 옆에 끼고 월남하여 일반에게 알려준 누이동생 윤혜원 여사, 형님을 증언하고 시집을 묶어낸 남동생 윤일주 선생, 불행하게 죽어간 조카를 마지막에 만나고 또 여러 기억의 문맥에서 윤동주를 섬세하게 살려낸 오촌당숙 윤영춘 선생, 그리고 아무런 증언도 없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지만 윤동주의 유고를 간직했다가 해방 후에 단아한 시집으로 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 선생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이분들은 모두 윤동주에게 우호적인 기억을 남겼다. 특별히 자기 정보를 산문을 통해 노출한 적이 거의 없는 윤동주를, 우리는 이분들의 공력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두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불멸의 청년 시인에게서 그가 느꼈던 ‘부끄럼’과는 또 다른 ‘부끄럼’을 느끼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윤동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부끄럼’을 끊임없이 복습시키는 항구적 원인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자만이 남을 부끄럽게 하니까 말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불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결정(結晶)인 아름다운 시편들을 남기고 그렇게 세월을 가로질러 ‘또 다른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시대와 상황을 넘어 크나큰 감동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시기적 분기점을 지나 그에 대한 실증적, 역사적, 미학적 해명과 담론적 축적을 더욱 정밀하고 세련되게 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의 실존적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소중한 지면을 주신 문화일보와, 이 글들을 따라와 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올린다.   (문화일보 11월 21일자 25면 9회 참조)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 “동주는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 한마디씩 하면 뜻밖의 소리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는 친구 유영의 증언처럼, 말수 적은 동주가 글을 남기지 않은 두 번의 침묵기가 있었다.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9, 10월경 몇 편 쓰고 9개월쯤 지나고, 2학년 1939년 9월에 ‘자화상’, ‘투루게네프의 언덕’ 등을 쓴다. 다시 긴 침묵으로 들어가 1940년 12월까지 1년 2, 3개월의 침묵 기간을 지낸다. 침묵을 끝내고 ‘팔복’ ‘위로’ ‘병원’을 쓴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팔복’)라는 말은 끝없는 절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팔복’은 냉소적인 풍자 혹은 절망시일까.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하는 이)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에 적극적으로 긍정한 시다.  ‘팔복’과 같은 시기인 1940년 12월에 쓴 ‘병원’을 보면 더 명확하다. ‘나도 모를 병’을 의사도 모른다 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식민지 공간의 은유일 수 있다. 3연 끝 문장을 보면 병원에서 영원히 슬플 행복을 살며시 언급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팔복’과 ‘병원’에 나오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다. 침묵기 이후 동주는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서울 종로구 누상동 하숙집에서 겪는다.  연희전문 입학하고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고 2학년 때 1939년에는 신촌, 북아현동과 서소문에서 하숙했고, 3학년 때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4학년 때인 1941년 5월 초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온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기숙사 식사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산문 ‘종시’에는 생활을 더 알기 위해 성문 안으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는 말이 나온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가다 전신주에 붙은 ‘하숙 있음’이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으로 윤동주보다 여덟 살 위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공연하려다가 중단당한, 당연히 피해야 할 기피 인물이건만 두 사람은 오히려 김송의 집을 하숙집으로 정한다.    성악가인 부인의 노래를 가끔 들을 수 있는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누렸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며 계곡물에 아무렇게나 세수하기도 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돌다리 기린교가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 그 근방일 것이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며 경성(서울) 생활을 즐겼다.  1941년 5월 그믐부터 9월, 불과 3개월만 지낸 이 집에서 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가다’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 등 9편의 시를 쓴다. 효자동 종점에서, 전차와 기차에서 동주는 식민지 경성 사람들의 내면을 본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새벽이 올 때까지’(1941년 5월)    ‘다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은 6개월 전 이런 모양새로 나왔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옷을 입고, 잠을 자며 쉬고, 서로 젖을 먹으며 힘을 내잔다.   윤동주는 스스로 죽어가는 존재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고,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또 다른 고향’)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1941년 5월 31일)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다. 다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이라는 문장은 11월경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쓰여 있다. 동주는 왜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라는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로 만들려고 일제는 모든 쇠붙이를 쓸어갔다. 1941년 10월경부터 조선 교회의 노회 보고서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교회 종(鐘)을 떼어 바치는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감리교단연맹은 1941년 10월 21일 이사회를 열고 제4항 ‘각 교회 소유의 철문과 철책 등을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아침예배 후 ‘영미응징승전기원’을 하고, 애국헌금도 하기로 결의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50전을 바치기도 했다. 당연히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끔찍한 상황이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 이후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동주는 알고 있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존재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거나, 징용되어 죽어가거나, 사라져가는 한글, 모든 슬픈 존재들이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치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주체가 된다. 그들과 슬퍼하는 것, 곁으로 가는 것이 삶이며 신앙이라는 깨달음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222    {자료} - 산문시와 이야기시 댓글:  조회:4222  추천:0  2018-08-22
산문시·이야기시란 무엇인가    /김영철 1. 산문시와 이야기시의 장르적 배경  1)장르사회학적 배경  산문시와 이야기시는 시의 하위장르이긴 하나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문시는 정형시, 자유시와 함께 시형식과 관련된 장르개념임에 비해 이야기시는 서경시, 서정시와 함께 시내용에 관련된 장르개념이다. 시에서 이야기를 담는 형식은 정형시일 수도 있고 산문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장르의 혼합현상 또는 탈장르 현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산문시는 산문과 시의 혼합장르이다. 시를 운문의 개념으로 확장해 볼 때 산문(prose)과 운문(verse)이라는 서로 상반된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또한 이야기시(narrative poem)도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는 서사양식과 시양식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르의 혼합 및 탈장르 현상은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원시종합예술에서 미분화 상태로 남아 있던 장르의 혼거현상이 다시 재현되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러한 장르의 혼거 및 상호침투현상은 분명 그 배경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현대의 사회변화 및 장르의 인식변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는 다양화, 다원화의 시대이다. 사회구조나 체제도 복잡해졌고 그 속에서의 삶의 방식과 사고 영역도 다양성을 띠고 있다. 특히 현대를 산문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구조변화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토의와 분석의 기능을 산문이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산문요소와 이야기 요소의 개입은 역기능과 순기능의 이원적 결과를 낳는다. 시를 언어의 경제학으로 일컫는 바 언어의 긴축과 조직의 긴밀함에 의해 정서의 응결과 인상의 집약적 표출을 얻는 것이 시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야기 요소의 개입과 산문화는 풀어짐과 흩어짐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시의 긴장미학에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시의 참장르를 서정시로 본다면 이 역기능은 더욱 뚜렷해진다.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주관적 경험이나 내적 세계를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장르이고 순간의 서정과 인상을 표출함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길이에 있어서 짧은 短詩(short poem)를 지향한다. 이에 비해 이야기시와 산문시는 화소의 개입과 산문화에 의해 장형화되기 일쑤이고 이야기시의 주장르인 서사시의 경우 과거의 객관적 체험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현함에 그 특징이 있다. 결국 시에서 話素의 개입과 산문화는 시의 서정적 본질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 예술이라는 성역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변화에 일정한 대응관계를 갖는 것이라면 시에서의 화소의 개입과 산문화 경향은 현대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복잡다단하게 전개되는 현대 사회변화를 내적 체험의 주관적 표출이나 언어의 긴축과 구조의 긴밀함만으로 수용해 내기가 힘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토의적 기능이나 분석적 기능이 요구될수록 시의 산문화나 서술화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현대시에서 산문시와 이야기시가 증폭되는 현상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돼야 한다.  한편 장르의 인식변화도 중요한 원인으로 보여지는데 많은 장르론자들이 지적하듯이 현대는 탈장르 및 초장르의 시대로 특징지워진다. 르네 웰렉은 현대에 와서 많은 장르상의 轉移가 일어나고, 따라서 장르 역사가 중단된 것처럼 느낄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자층의 급격한 확대와 다양화로 장르 역시 증가일로에 있으며 문학의 신속한 보급 체계로 장르도 수명이 짧아졌거나 훨씬 신속하게 변형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10년마다 새로운 문학세대가 생겨나고 장르의 교체도 그에 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1) 헤르나디는 이러한 장르의 교체 및 변동양상을 집약하는 개념으로 超장르(beyond genr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 결국 산문시와 이야기시는 현대에 들어 심화되는 이러한 장르의 교체 및 상호작용 현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2)장르類와 장르鍾  이야기시(narrative poem)는 서사시(epic), 담시(ballad),단편서사시 등의 하위종을 갖고 있고, 산문시는 자유시(free verse) 및 시적 산문(poetic prose)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시와 산문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하위장르와 인접장르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또한 우리의 산문시와 이야기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의 기본형(gattung)과 변형(art)의 개념, 그리고 역사적 장르(historical genre)개념이 전제돼야 한다. 슈타이거나 플레밍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장르원형을 기본형이라 했고, 개별언어권의 문화, 종족, 언어의 편차에 의해 파생되는 개별적 장르를 변형이라고 했다.3) 가령 우리의 향가나 시조, 가사나 판소리는 우리문학에만 존재했던 고유장르이고 변형장르이다. 또한 토도로프는 역사적 장르개념을 도입한 바 있는데 이는 그것이 주종을 이루었거나 이후 단절되었다 하더라도 당대에 엄연히 실존했던 장르를 지칭한다.4) 역사주의 입장에서 당대에 존재했던 장르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러한 변형장르와 역사적 장르개념의 수용은 우리문학의 장르형성과 변동 그리고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령 서사시의 경우 이러한 장르개념의 도입은 한국 서사시의 이해에 좀더 유연한 시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산문시의 장르적 특성  1)산문시의 장르 개념  산문시(prose poem)는 형식적 제약은 물론 운율의 배려없이 산문형식으로 제작된 시이다. 따라서 행연의 구분도 없고 운율적 요소도 없다. 파운드는 이를 “산문형식으로 표현된 시적 내용”이라고 정의 내렸다.5) 즉 형식은 산문이지만 표현된 내용은 시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산문시가 산문과 시의 복합어인 만큼 양자의 성격을 함께 가져야 할 것이므로 파운드는 이를 산문형식과 시적 내용의 결합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아무튼 산문시도 시인만큼 당연히 시로서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즉 시가 지닌 언어의 내적 특징인 은유, 상징, 이미저리 등의 표현기법이나 시적 언어(poetic diction)가 선택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언어 진술의 외적 특징이 불규칙적인 리듬과 산문적 형태로 되어 있는 시이다.  아으 밤이 오면 밤마다 별을 모두 불러 내려, 하나씩의 인간마다 하나씩의 별을, 하나의 짐승, 하나씩의 꽃, 하나씩의 벌레에도 하나씩의 별을 짝지워 서로 닮아 하나의 넋 오래이게, 슬픔도 쇠잔함도 죽음도 그만이게, 억울함도 분노도, 피흘림도 그만이게, 산이여 너 오래 지켜 마음 앓는 사람, 온 한 밤새워 잠못 이룬다.  ─ 박두진,   이 시는 산문적 형태와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상징과 은유, 그리고 시적 언어가 선택되어 있다. 이 시에서 별은 화해의 상징적 의미로 쓰이고 있고, 산을 의인화시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산문시는 시로서의 기본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2)산문시와 자유시  산문시가 자유시와 구분되는 점은 주로 형태의 운율적 내지 시각적인 밀도에 있다. 산문시는 자유시에 비해 운율성이 희박하고 시각적인 면에서도 정연성이 배제된다. 다시 말해 자유시는 시각적으로 행연의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남에 비해서 산문시는 문장의 연결방식이 행연이 아닌 단락(paragraph)에 의존하고 있어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이 자유시와 산문시는 양자가 다 시적 성격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단지 문장연결 방식이 행과 연에 있느냐, 아니면 단락에 있느냐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시는 넓은 의미의 자유시에 포함된다.  특히 자유시에서 시행과 연의 변형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는 음수율, 음보율에서의 해방은 가져왔지만 행연상에서는 일정한 제약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칸에 의하면 시행이란 ‘사상과 형식의 동시적 정지’ 즉 “목소리의 정지와 의미의 정지로 나타날 때의 가장 짧은 조각”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한 시행 안에서의 律格休止가 어떠한 상호관계에 의존하는가 하는 문제로서 오늘날 자유시의 핵심적인 과제이기도 하다.6) 자유시에서는 율격휴지와 통사휴지가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시의 경우 그 양자의 일탈이 자유시의 특징으로 나타나 行間걸림(enjambment) 현상이 두드러진다. 행간걸림은 말들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통사론적으로 연관되는 뒤의 말과 유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7) 어찌했든 자유시에서는 이와 같은 시행처리상의 제약이 있다. 그러나 산문시는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난다. 의미전개가 시행이 아니라 단락에 의존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3)산문시와 시적 산문  플레밍거는 산문시 개념이 성경에서부터 포크너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무책임하게 사용되어 왔지만, 그것은 고도로 의식적인 어떤 형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산문시가 타장르와 구별되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길이가 비교적 짧고 요약적이라는 점에서 시적 산문과 다르다.  행구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다르다.  내재율(inner rhyme, metrical runs)과 이미지를 지닌다는 점에서 산문(prose passage)과 다르다.8)  이와 같이 그는 산문시를 시적 산문, 자유시, 산문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산문(poetic prose)은 시적 내용을 담고는 있어도 산문에 속하는 글의 형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시의 본질적 요소인 상징이나 이미지가 배제된다. 이효석의 이 이에 해당되는데, 특히 발단 부분의 메밀꽃밭의 밤풍경 묘사는 시적 정서와 분위기가 주조음을 이룬다. 그러나 은 어디까지나 소설 즉 산문인 것이다. 플레밍거는 산문시의 특성으로서 시행구분을 초월한 단락성, 상징과 이미지 등의 표현성을 강조하고 있다.9)  그런데 이러한 산문시 장르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엘리어트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는 산문시라는 용어 자체를 배척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와 산문 사이의 구별은 뚜렷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적 내용이란 통상적으로 운문으로 표현되는 종류의 것이니까 마땅히 운문으로 표현해야 할 종류의 것이거나 그 어느 쪽일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산문시는 배척된다. 또 전자라면 어떤 것은 산문으로도 운문으로도 표현할 수 있거나 또는 무엇이든지 산문으로나 운문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에 불과하다.10)  이와 같이 그는 시적 내용은 운문에 담으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산문에 담는 특별한 이유와 효용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나 효용도 없고 시와 산문과의 구별도 모호하므로 산문시의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분석적이고 토의적 기능이 강조되는 현대정신, 곧 산문정신이 시에 반영됨으로써 산문시는 오히려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4)산문시의 전개  시에서 산문체 양식의 도입은 낭만주의 시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낭만주의는 인습, 도덕, 규율에 대한 도전이었고 법칙, 규범, 통일,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를 반대하였다. 그대신 인간의 본능과 개성, 다양성을 긍정적인 가치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자발적 흐름이 강조되었고 서정이나 감정을 산문체를 통해서 자유분방하게 흘러 넘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산문시가 하나의 시장르로 인식된 것은 프랑스 상징주의에서였다. 그 첫 성과가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1869)이다. 보들레르는 포우의 영향을 받아 이 시집을 상재했고, 여기서 산문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말라르메, 랭보, 끌로델 등의 프랑스 상징파 시인과 러시아의 투르게네프 등에 의해서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동양에서는 소동파의 , 歐陽永叔의 , 도연명의 , 한무제의 , 굴원의 가 대표적인 것이다.  우리의 산문시는 1910년대 러시아 산문시와 프랑스 상징주의가 수용되면서 정착되었다. 산문시가 우리 문단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0년 8월 《소년》지에 실린 네모에프스키의 (홍명희 역)이었고, 그 후에 콜로렝코의 (《학지광》, 1914년 12월), 투르게네프의 (《학지광》, 1915년 2월) 등이 소개되었다. ‘산문시’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투르게네프의 에서였다. 창작시로는 김억의 (《학지광》, 1915년 2월)이 효시가 되었고 《학지광》 5월호 (1915년 5월)에 발표된 김억의 는 비교적 수준높은 산문시였다. 이러한 초기의 작업을 통해 1919년 주요한의 , 같은 산문시가 창작되었고 이후 산문시 창작은 꾸준히 지속되어 한용운의 , 이상의 , 정지용의 이 나왔고 1950년대에도 김구용 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3. 이야기시의 장르적 특성  1)이야기시의 장르 개념  이야기시(narrative poem)는 ‘이야기를 말하는 시’로서11) 敍述詩, 說話詩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그 하위 種으로서 敍事詩(epic)와 譚詩(ballad) 등을 포괄한다. 야콥슨이나 바흐친과 같은 구조언어학자나 기호론자들은 시를 근본적으로 談論구조로 보고 있다. 그들은 시적 화자를 통한 청자와의 말건냄이라는 담론구조 속에서 메시지의 전달과 의미의 형성, 창출과정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물론 내용에 해당되는 이야기와 전달방식으로서의 대화형식은 구분되는 것이지만 내면의 주관적 표출이라는 독백형식을 취하는 서정시의 본질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야기시는 어떤 구체적 사건이나 사실을 독자라고 하는 청중에게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는 점에서 독백형식에서 벗어난다. 아울러 전달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는 담론구조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야기시는 화자 ─ 메시지 ─ 청자라는 담론구조의 틀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있다. 파울러는 《현대비평용어 사전》에서 ‘서사체’(narrative)를 일련의 사실이나 사건을 차례로 열거하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나 사건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를 설정하는 양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다시 이 서사체를 내용의 문제와 수사의 문제로 나누어 전자를 소재의 적절한 결합 및 암시된 연관관계의 박진성과 연결시키고, 후자를 그 서사체가 어떠한 방식으로 청중(독자)에게 제시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짓고 있다.12) 다시 말해 서사체는 사건의 열거와 사건들 사이의 관계설정, 그리고 이들의 제시방법을 중시하는 양식이다. 이야기시는 바로 이 서사체 양식을 취하는 장르이다. 따라서 이야기시는 전달내용으로서의 이야기와 아울러 전달방법이나 태도로서의 이야기 방식도 함께 아우르는 장르 개념이다.  말리네는 이야기시를 스토리를 가진 시로 규정하고 그 중에서도 긴 내용의 이야기를 가진 시를 서사시라 하고, 짧고 간결한 내용의 이야기를 가진 시를 담시(ballad)라고 하였다. 결국 말리네는 길이의 길고 짧음에 의해 이야기시를 서사시와 담시로 나누고 있으나 서사시와 담시의 구분은 전달방식이나 태도 등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단징거는 담시를 서사시가 아니라 서정시의 하위 장르로 규정하고 있는데13) 서사시와 담시는 다같이 이야기시이긴 하지만 서사와 서정의 상이한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시는 서사체 양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서사시의 범주에 넣지만 사실 서정시도 이야기시에 포함될 수 있다. 오세영은 이야기시와 서사시의 장르개념에서 양자가 등가적 개념이 아니라 집합적 개념으로 구분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야기가 서사시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하고 서사시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을 따로 설정하고 있다.14) 따라서 모든 서사시는 이야기시지만 모든 이야기시는 서사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야기시에 서사시와 서정시를 포함시키고 다시 서정시 속에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서 담시와 송가(ode) 등을 들고 있다.15) 그러니까 결국 담시와 송가는 서정서술시가 되는 것이다.  2)장시와 단시의 장르 개념  이야기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드가 구분한 바 장시 (long poem)와 단시(short poem)의 개념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리드는 시를 장시와 단시로 나누고, 장시가 여러 개 혹은 다수의 정서를 기교에 의해 결합한, 복잡한 이야기를 포함하는 일련의 긴 시로 규정하였다. 또 단시는 단일하고 단순한 정서적 태도를 구현한 시로서 연속적인 영감이나 기분을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를 요약하여 장시는 개념이 형태를 통어하는 시이며, 단시는 거꾸로 형태가 개념을 통어하는 시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장시계열에 이야기시, 서사시, 담시, 송가, 철학시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16)  이야기시에서 장시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야기 요소의 개입으로 인해 이야기시가 장형화된다는 점에 있다. 리드도 장시의 핵심요소로서 이야기와 관념을 들고 있다. 서정시는 서정적 순간의 감정이나 파편적 체험을 표현한다. 한 순간의 재현이기에 서정시는 내적 경험의 순간적 통일성에 의존한다. 따라서 서정시에는 서사적 시간이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시는 시인의 확고한 주관과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 사회적 사건이 개입된다. 이로 인해 시의 길이가 구속 없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시는 장시라는 점에서 단형을 지향하는 순수서정시와는 일정한 거리를 갖는다. 결국 시의 산문화(산문시) 특히 서술화(이야기시)는 필연적으로 시의 장형화를 지향하게 된다.  그런데 장시는 그것이 단지 형식에서만 긴 것이 그 특징이 아니라 완결된 형식을 통해서 역사현실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드러낸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리드는 장시를 논하면서 그것이 그 시대의 어떤 열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장시화 현상은 문학이 현실의 전체성에 상응하는 통일성을 획득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17) 따라서 이야기시는 역사, 사회적 사건을 개입시키고 그것을 시인의 의도된 통일성 아래 재구성함으로써 현실의 전체성에 상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1930년대 시에서의 리얼리즘의 확보를 위해 시도된 단편 서사시 장르의 선택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3)서사시의 장르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의 양식적 특징을 성격과 행위를 모방한다는 점에 두고 있다. 성격과 행위의 모방은 서사시로 하여금 이야기시로서의 성격을 갖도록 조건지워진다. 성격과 행위는 의당 인물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인물이 펼치는 사건과 행동양식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시는 이야기시로서 주제와 플롯이 있고 이 플롯은 인물의 성격, 그리고 사건전개와 배경을 갖는 구성양식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서사시는 이야기시로되 원래 영웅시(heroic epic)라고 불릴 정도로 장중한 운문으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긴 이야기시(long narrative poem)였다. 본래의 서사시는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에서 보듯이 국가와 민족,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대한 인물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여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장시였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신화적인 영웅호걸이나 집단적 운명의 성쇠를 그리지 않아도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한 장시면 다 서사시라 부르게 되었다. 서사시는 원래의 기능을 근대에 들어 소설에 이양함으로써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지만 원래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저가 서사시와 소설을 구별하여 서사시가 장중한 톤으로 개인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 것도 서사시의 고유기능이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개성과 개인의 세계가 중시되는 추이에 따라 집단성의 가치관이 약화되고 이에 따라 서사시의 변화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서사시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갖는다. 첫째 강한 설화성 (narrativeness)이다. 역사와 신화, 그리고 영웅적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는 만큼 설화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서정시의 특질이 표현성 (expressiveness)에 있다면 서사시는 설화성에 있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도 서사시는 ‘말’이라는 의미를 갖는 희랍어 epos에서 온 것이었다. 서사시는 하나의 이야기, 즉 전체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둘째 서술대상의 방대성과 초월성이다. 서사시의 주인공은 민족적 또는 인류적으로 위대한 인물이거나 신이다. 또한 배경 역시 세계적이고 때로는 초현실적이다. 세째, 집단성과 역사성이다. 서사시는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한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대표적 영웅의 목소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이나 민중을 향한 외침이다. 역사성은 서사시가 다루는 주된 대상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나온다. 네째, 장엄한 문체와 숭고미의 지향이다. 서사시의 문체는 儀式的이면서 장엄하고 화려한 문체적 특징을 갖는다. 일상적인 말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영웅적 주제와 서사시적 구조의 장대함과 형식성에 비례하는 의식적인 문체로 서술된다. 다섯째, 뚜렷하고 견고한 원근법을 드러낸다. 이는 서사시가 역사와 인물에 대한 객관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18)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허드슨은 서사시를 객관시(objective poem)라고 부른 바 있다. 여섯째, 서정시의 시구가 독립될 수 없음에 비해 서사시의 시구는 독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사시는 많은 에피소드를 동원한 삽화적 구성(episodic plot)을 갖고 있다. 쉴러도 부분의 독립성은 서사시의 주된 특질이라고 했다. 부분적 작품이 모여 전체를 이루지만 그 부분이 독립될 수 있는 것이 서사시인 것이다. 그밖에 서사시의 장르적 특성으로서 장형성, 과거성, 그리고 내면적 자아보다 외부현실의 서술에 초점을 두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4)담시의 장르 개념  발라드는 음악적 측면과 문학적 측면으로 나누어 구분되는데 보통 전자는 민요로, 후자는 譚詩로 번역된다. 먼저 음악적 발라드는 이야기를 담아 구전되는 노래이다. 다시 말해 민요에서 서사적인 민요를 지칭하는 것이다. 플레밍거는 민요를 서술민요(narrative folk song)와 비서술민요(non-narrative folk song)로 나누고 전자에 서사민요(oral epic)와 발라드를 포함시키고, 후자에는 서정민요(lyric folk song), 노동요, 유희요, 동요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19) 이러한 민요가 설화체 시의 한 특수한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15세기경 영국에서 음유시인들이 등장하여 4행으로 간단하게 구성된 연 안에 고도로 잘 구성된 이야기를 담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간 발라드(folk ballad)에서 문학적 발라드(literay ballad)가 파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발라드는 대체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이야기를 다룬다. 또한 세태와 관련된 삽화로 시작해서 동작과 대화를 통하여 이야기를 발설하는데 자신의 개인적 태도나 감정은 배제함이 원칙이다. 또한 심리적 묘사가 거의 없으며 의미는 직접적으로 묘사된 행위를 통해, 또는 사건의 맥락에 대한 언급을 통해 파악된다.20) 이와 같이 담시는 전설, 구비 등을 민중적 가락으로 노래해온 전승배경을 갖고 있는 짧은 형식의 이야기시이다. 그런데 앞에서 논의한대로 단징거는 담시를 서정시 장르에 포함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담시는 서정서술시라는 것이다. 리치는 담시의 특징을 쩖 내용이나 문체가 민중의 감수성에 알맞음 쩗 단순한 사건에 촛점을 맞춤 쩘 대화와 행위로 사건이 진술되고 묘사는 생략됨 쩙 객관적 서술 쩚 비극적 사랑과 비교훈적 내용 쩛 극적 장면 및 극적 구성 쩞 강한 충격과 경탄의 표출 등을 들고 있다21). 이 중에서 쩚쩛쩞은 서정시적 요소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담시는 서정성이 강한 서술시인 것이다. 따라서 담시는 단형의 서정서술시로 규정할 수 있다.  5)단편 서사시  단편 서사시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프로문학 진영에서 시도한 실험적 장르이다. 임화가 창작에 처음 시도하고 김팔봉이 이론적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단편 서사시는 한국시단에 자생한 일종의 역사적 장르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NAPF에서도 논의된 바 있어 결코 독창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어도 임화를 비롯하여 박세영, 백철, 김해강, 박아지 등 일련의 프로시인들에 의해 본격화되었고 이후에 백석, 이용악 및 김상훈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김팔봉은 단편서사를 소설과 시양식의 혼합양식으로 보았다. 사건적 소재의 취재에서 소설 양식을 그리고 그것의 압축적, 인상적 표현에서 시양식을 끌어들인 것이다. 결국 시에 이야기를 끌어들이되 시적인 표현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단편서사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편서사시를 전체성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지향의 소설과, 개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시를 연결하는 중간 단계적 장르로 규정한 견해는 시사적이다.22) 특히 임화의 단편 서사시는 등장인물을 설정하여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담론구조를 구축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그 구성은 소설에서와 같은 플롯에 의존하기보다 전체적으로 고무와 찬양, 권고, 애원 등이 주조를 이루는 주관주의적 표현방식을 택함으로써 시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허구적 인물의 고백적 진술 역시 서정시의 특성에 부합된다.  단편서사시는 엄격히 말해서 서사시로 보기가 어렵다. 앞에서 논의한 바 서사시 조건에 부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태여 서사시로 본다면 프라이가 제시한 소서사시(epyllion)에 가깝다. 프라이는 서정시가 주제의 관심밀도가 높아져 소형의 서사시로 확대된 것을 소서사시라고 하였다.23) 그러나 단편서사시는 일종의 서술시로서 서정성이 강한 서정서술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단편서사시는 1930년대 한국시단에 풍미한 실험적 역사적 장르로서 시에서의 리얼리즘의 확보와 소설에로의 양식적 확산이라는 문학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1) Rene Wellek 《Theory of Literature》 (Penguin Books, 1968) pp.232``~235.  2) Paul Hernadi 《Beyond Genre》 (Cornell Univ. Press, 1972) p.8.  3) E.Staiger 《Grundbegriffe der Poetik》 (Zurich, 1963) W.Flemming 《Das Pwblem Von Dichtungsgattung und Art》 (Studium Generale XⅡ, 1959) pp38~60.  4) T. Todorov, 《Fantasic》 (Cornell Univ. Press, 1975) pp.13~15.5) T.S Eliot 《Literary Essays of Ezra Pound》 p.12.  6) J.Huret 《Enquete sur L'evolution Litteraire》 (Charpentier, 1891) pp.394~396.  7) 한계전, 《한국현대시론 연구》 pp.26~27.8) A.Preminger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p.664~665.  9) A.Preminger, 앞의 책 p.665.  10) T.S Eliot 《selected Essays 》 p.84.11) L.Maline, 《Prose & Poetry of English》 p.86.  12) R. Fowler, 《A Dictionary of Modern Critical Terms》(1973), 김윤식 역(일지사), p. 136.13) M.K Danzinger, 《An Introduction to Literary Criticism》(Boston, 1968) p.71  14) 오세영, 《문학연구방법론》(시와 시학사, 1993) p. 102. 그가 제시한 충분조건은 서사적 탐색, 민족적 율격, 영웅의 등장, 민족적 신화나 역사, 삽화적 구성, 공포와 연민의 정서, 세계의 객관적 대면 등이다.  15) 오세영, 같은 책, pp. 100~103.16) H.Read,《Collected Essays on Criticism》 (London, 1952) pp.57~60.  17) 장부일, 《근대 장시연구》(서울대 박사논문, 1992. 2) p.2.18) Emil Staiger, 《Grundbegriffe der Poetik》 p.110.  19) A.Preminger, 《Encyclopedia of Poetry and Poetics》 p. 283.20) R. Fowler, 《A Dictionary of Modern Critical Terms》 김윤식 역, p.136.  21) Maria Leach, 《Standard Dictionary of Folklore, Mythology and Legend》 vol 2(New York, 1950) p.97. 22) 정재찬, 《1920~30년대 한국 경향시의 서사지향성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1987) p.108.  23) N. Frye, 《Anatomy of Criticism》, 임철규 역 (한길사, 1988) p.461.    ========================/// 산문시와 쉬운시 / 김현  해방 직후의 시의 혼란은 내용과 형식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시인들 자신에 의해 초래된 혼란이다. 시에서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은 시의 형식에 대해서 운위하는 것을 사치스러운 문학 취향으로 치부해버리고, 시에서 형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은 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용은 무정부주의적 허무주의에 빠져버린다. 그때 남는 것은 정치적 구호나 저항의 제스처, 그리고 순수하다고 알려져 온 토속어들뿐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내용 편중이라고 할 때의 내용이나. 형식 위주라고 할 때의 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아니라, 소재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소재와 말을 결합하였을 때 생겨나는 조직체이다. 결국 내용 위주의 시와 형식 위주의 시는 시를 버리고 소재와 말만 찾아낸 셈이며, 그것은 한국시의 혼란을 크게 자극한다.  그 혼란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 창작면에서 극복되기 시작한 것은 김춘수와 김수영의 시적 탐구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그 두 시인의 대립된 탐구를 통해 시는 내용이나 형식의 어느 한편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형식을 위해 봉사하고 형식이 그 내용을 위해 사용되는 그런 조직체라는 것이 밝혀진다. 내용은 소재 이상의 것이며 형식은 말 이상의 것이다. 그 때 중요시될 것은 시인이 소재나 말을 대하는 태도이다. 시를 내용과 형식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인과 사물 - 대상과의 거리 관계에서 찾게 된 것은 그 두 시인의 큰 공헌이다.  김수영은 대상을 자신과 가능하면 가깝게 느끼도록 애를 씀으로써 시인을 시속에 크게 자리잡게 만들며 감춘수는 대상을 가능하면 자신에게서 떼어냄으로써 대상을 전면에 내세우려 한다.  여하튼 그 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시인과 대상과의 긴장 관계이다. 긴장은 대립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 대립은 그러나 절대적인 개념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대립의 양태가 그 시초에서 올바르게 들리지는 않다는 진술이다. 그 대립은 정직한 세계 인식이거나 허위적인 제스처다. 그것이 정직할 때 긴장은 고조되며 그것이 언어로 조직될 때 한 편의 뛰어난 시가 얻어진다. 그것이 허위일 때 시는 재치나 저항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게 된다.  70년대 들어서면서 갑작스럽게 유행되기 시작한 산문시는 그 대립을 정직하게 조립하려는 젊은 시인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대립을 정직하게 드러내려 할 때 상투적인 틀과 어휘들이 그대로 쓰일 수는 없다. 아주 짧은 시를 시도하는 젊은 시인들의 노력과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방향에서 이해되어야 할 산문시 시도는 상투적인 어휘 거부, 다시말해서 대립을 대립답게 드러내려는 노력의 정직성이라는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산문시는 산문이 아니라 시이다. 산문시가 시이어야 한다는 진술은 그것이 풀어 쓴 시가 아니라 산문으로 쓴 시라는 뜻이다. 산문시가 풀어 쓴 시가 되는 순간에 산문시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잃는다. 동시에 그것은 투르게네프의 것이 그러하듯 반드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적 향취를 풍기는(!) 콩트를 산문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산문시는 시의 해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시를 구제하는 시이다. 갑작스럽게 유행되기 시작하면서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산문시들 중에는 시의 운율 구조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 연후에 아무렇게나 씌어진 것들이 많다. 그러나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것이지만 산문시는 시를 해체하므로써 오히려 시를 구제한다. 운율 구조에 대한 정밀한 탐구 끝에 씌어지는 산문시와 애당초의 감상적인 줄거리로 콩트를 쓰겠다는 태도 밑에 제작되는 산문시와는 완전히 다르다.  산문시의 시도가 확실한 의미를 띨 수 있으려면, 시인과 대상과의 대립을 정직하게 그리고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 또 시의 운율 조직에 대한 탐구를 방기하지 않은 채 씌어지는 산문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산문시는 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씌어지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대상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견제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산문시에서처럼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의 안이성과 시와의 싸움의치열성 여부가 쉽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쉽게 쓴다는 것이 시의 목적이 된다면, 시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쉽고 이해가 빠른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 시를 배반할 것이다.       
1221    [詩소사전] - "산문시"란?... 댓글:  조회:2649  추천:0  2018-08-22
산문시의 뜻;= -산문시는 영어로 'prose poem', 프랑스어로 'Poeme en prose', 독일어로 'Gedicht in Prosa'로 산문체 형식을 지닌 서정시입니다.  -정형시와 같이 명확한 운율형식은 없고 자유시와 같은 뚜렷한 리듬이 없다. 리듬은 없어도 시의 형태상 압축과 응결에 의한 시정신을 필요 조건으로 해야 한다. 형식상으로는 산문의 요소를 지녔지만 내용은 시적 제반 요소를 갖추고 리듬의 단위를 시의 행에 두기 보다 문장의 한 문단에 둔다. 자유시는 행을 나누어 구분하지만 산문시는 행을 바꾸지 않아도 시 전체의 음절과 문장에 의해 통일적으로 구성한다. 자유시나 정형시는 행에 의한 구분으로 인하여 시를 읽기 위해서는 다소 호흡의 율동이 늦게 간격을 두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문시는 그 속도와 간격이 이어지기 때문에 거침없이 진행되어 호흡이 빠르거나 가빠질 수도 있다. -라풍텐(Jean de La Fontain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베르트랑(Louis Bertrand)은 근대 산문시의 선구자이며,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가 시집 『파리의 우울(La Spleen de Paris)』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란 명칭을 썼다. 시집 서문에서 이라고 특질을 말하고 있다. 출처(산문시:문학비평용어사전) ================///   - 시의 한 종류. 산문체의 서정시로 운(韻)이나 리듬 등을 갖지 않는다. 정형시처럼 외재율을 갖거나 혹은 자유시처럼 내재율을 현저히 형성하고 있지 않지만, 형식상으로는 거의 산문이고 내용으로는 시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자유시와의 구분은 불확실하지만, 산문시는 대략 행과 연(聯)의 구분 없이 줄글로 씌어진 데 그 형태상의 특성이 있다. 은유 · 상징을 중심으로 한 시적 조사법(poetic diction)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경우는 한용운(韓龍雲)의 작품에 이와 같은 예가 보이며 해외의 것으로는 보오들레에르(P. C. Baudelaire) · 투르게니에프(I. S. Turgenyev) · 타고르(R. Tagore) 등의 산문시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출처 : 지식백과 ===================///   산문시는 영어로 'prose poem', 프랑스어로 'Poeme en prose', 독일어로 'Gedicht in Prosa'로 산문체 형식을 지닌 서정시를 의미합니다   ㅡ정형시와 같이 명확한 운율형식은 없고 자유시와 같은 뚜렷한 리듬이 없으며 리듬은 없어도 시의 형태상 압축과 응결에 의한 시정신을 필요 조건으로 해야 한다.   형식상으로는 산문의 요소를 지녔지만 내용은 시적 제반 요소를 갖추고 리듬의 단위를 시의 행에 두기 보다 문장의 한 문단에 둔다.   ㅡ자유시는 행을 나누어 구분하지만 산문시는 행을 바꾸지 않아도 시 전체의 음절과 문장에 의해 통일적으로 구성한다. 자유시나 정형시는 행에 의한 구분으로 인하여 시를 읽기 위해서는 다소 호흡의 율동이 늦게 간격을 두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문시는 그 속도와 간격이 이어지기 때문에 거침없이 진행되어 호흡이 빠르거나 가빠질 수도 있다.   ㅡ라풍텐(Jean de La Fontaine), 루소(Jean-Jacques Rousseau), 베르트랑(Louis Bertrand)은 근대 산문시의 선구자이며,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가 시집 『파리의 우울(La Spleen de Paris)』을 발표한 이래 산문시란 명칭을 썼다.   ㅡ시집 서문에서 이라고 특질을 말하고 있다.   ㅡ이후 자코브(Max Jacob), 르베르디(Pierre Reverdy), 앙드레 지드(Andre Gide),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휘트먼(Walt Whitman)은 산문시인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김억이 번역한 투르게네프의 작품 「비렁뱅이」를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 게재한 것이 산문시로 처음이며, 이후에 한용운(韓龍雲)의 「임의 침묵」, 정지용의 「백록담(白鹿潭)」,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등이 있다.(조병무)   [네이버 지식백과] 산문시 [散文詩, Prose poetry]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1220    러시아 작가, 시인 - 투르게네프 산문시 7수 댓글:  조회:2729  추천:0  2018-08-22
러시아 작가, 소설가, 시인 ㅡ 투르게네프 산문시 7수 “나는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먼 길을 걷다 드디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곳이므로,  그리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여느 노인과 달리 어린 여자아이처럼 무덤 이외에 백합과 장미꽃을 보았다는 점이다.”     제목 : 바위   당신들은 화창한 봄날의 만조 때에 해변에서 오랜 세월 부대껴 온 잿빛 바위에 거친 풍랑이 사방팔방에서 들이치고 – 들이치고,  희롱하고, 어루만지고 - 이끼 낀 바위 정수리 위에 잘디잔 진주를 흩뿌려놓듯이,  빛나는 거품을 흩뿌리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바위는 언제나 변함없는 바위지만 -- 그 잿빛의 표면에는 선명한 색채가 나타난다. 그 색채는 녹아있던 화강암이 겨우 굳어지기 시작하여 빨간 불꽃으로 타고 있던 저 먼 태고(太古)를 이야기 한다. 이처럼 나는 요즘의 늙은 마음에도 젊은 여심(女心)의 물결이 부근에서 밀려와 그 부드러운 애무의 손에 나의 마음은 이미 오래동안 퇴색해 있던 색채, 옛날의 불의 추억을 떠올리고 붉어져 오는 것이었다. 파도는 멀어졌다. ……하지만, 그 색채는 아직 퇴색하지 않았다--지독하게 뼈를 에이는 것같은 바람이 설사 말라 있더라도.     제목 : 거지 나는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늙은 거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을 머금은 눈, 새파랗게 질린 입술, 지독한 누더기, 더러운 상처…… 아! 이 불행한 인간을, 빈궁은 어찌 이리도 추하게 먹어치웠단 말인가. 그는 빨갛게, 짓무른, 더러운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이, 울부짖듯이,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옷의 주머니를 남김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 조차 없다.  …무엇 하나 가지고 나온 것이 없다. 하지만, 거지는 아직 기다리고 있다. …뻗은 손은 아주 약하게 떨며, 전율하고 있었다. 그만 곤경에 빠져 초조해진 나는 그 더러운,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이보시오 노인장! 용서하시오. 나는 아무것도 지닌 게 없구려!" 거지는 나에게 핏발이 선 시선을 보내며 시퍼런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그쪽에서도 꽉 하니 내 차디찬 손을 잡아 주었다. "원, 천만의 말씀입니다." 거지는 나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손을 잡아주시다니, 이 또한 적선이십니다." 나도 또 이 형제로부터 베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제목 : 대화   -융풀라우도 핀스테럴혼도 지금 아직도 인적(人跡)이 머문 적이 없다-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 ……그저 이어지는 아아(峨峨)한 험준한 낭떠러지……. 산맥의 한 가운데. 산과 산의 위로 펼쳐진 연녹색의, 밝고, 말할 수 없는 하늘. 몸에 스며드는 매서운 추위. 찬란한 눈덩어리.  눈을 비집고 치솟은, 얼음에 갇힌,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지평선 양쪽 옆에 치솟은 두 개의 산 덩이. 두 사람의 거인, 융풀라우와 핀스테럴혼. 융풀라우는 옆사람에게 말한다. "뭔가 새로운 일이라도 있나요? 당신은 나보다는 잘 보이겠지요? 저 기슭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수천년이 지나가는 눈 깜짝할 순간에. 그러자 대답하는 핀스테럴혼의 굉음. "구름이 땅을 뒤덮고 있다……. 잠시 기다려라!" 또 수천년이 지나간다, 한순간에. "자, 이번에는?" 융풀라우가 묻는다. "이번에는 보인다. 아래 쪽은 아직, 본래 그대로다, 드문드문, 자잘하게. 물은 푸르고 숲은 거무틱틱하고,  수도 없이 많은 암석은 잿빛이다. 그들 주위에는 지금도 아직 무당벌레가 꿈틀대고 있다.  봐라, 저 아직, 너나 나를 더럽힐 수 없었던 이족(二足) 동물이." "그건 인간 말인가요?" "그래, 인간이다." 몇천년인가가 지나간다. 단숨에. "자, 이번에는?" 융풀라우가 묻는다. "무당벌레는 전보다는 조금밖에 안보이는 것같다." 핀스테럴혼은 큰소리로 울린다. "아래쪽은 확실해졌다. 물은 마르고, 숲은 드문드문해 졌다." 다시 또 수천년인가 지나간다. 삽시간에. "당신, 뭐가 보이나요?" 융풀라우가 말한다. "우리 주변은 깨끗해진 것같다." 핀스테럴혼이 대답한다. "하지만, 저 멀리에 있는 골짜기에는 역시 반점(斑點)이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 "자, 이번에는?"라고, 또 수천년이 단숨에 지나가자, 융풀라우가 묻는다. "이번에는 좋은데." 핀스테럴혼이 대답한다. "여기건 저기건, 상쾌해졌다. 어디를 보아도 하얗다……. 여기도 저기도 눈이다, 하나가득. 게다가 이 얼음이다…… 모조리 얼어붙었다. 지금은 좋다, 조용해서." "좋군요." 융풀라우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저씨, 당신과 꽤 잡담을 했군요. 한 잠 잘 시간이네요." "그렇군." 큰 산들은 잠자고 있다. 녹색의, 맑게 개인 하늘도, 영원히 입을 다문 채 대지 위에 잠자고 있다. ======================     개     방안에는 우리 둘, 개와 나.   밖에는 사나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개는 내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도 개의 얼굴을 바라본다.   개는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고 싶은 눈치다. 그는 벙어리같다. 말이 없다. 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 순간 그의 맘속에나 내 맘속엔 꼭 같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것, 우리 둘 사이엔 아무런  격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린 서로 꼭 같다. 우리 둘 모두의 가슴속엔 전율할 불길이 타오르고 불똥이 튀고 있다. 이윽고 죽음이 다가와 차갑고도 커다란 날개를 훨훨 치면서 그 불길과 불똥을 휩쓸어 버리리라.     그려면 끝장이다.   그러면 우리 둘 저마다의 가슴속에 불길이 타오르고 불똥이 튀던 모습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결코 짐승과 사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닌, 서로 함께 눈빛을 주고 받던 사이다.   둘의 똑 같은 눈들, 그 눈들은 서로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짐승과 인간, 이들의 눈에는, 서로 같은 생명이 공포 속에 서로 다가앉아서 의지하며 있다.    (1878년 2월)     멩이 생각 : 참 감동적인 글이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사람과 동물은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 이성은 이런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이 글에서처럼 존재의 신비한 공감 내지 우정을 느끼는 순간 내 삶도 변하리라 생각한다.     ==================== 노인  -투르게네프  어둡고 괴로운 날들이 다가왔다......  자기 자신의 병, 사랑하는 사람들의 질환, 노년의  추위와 어둠...... 그대가 사랑한 것, 그대가 기약 없이  내맡긴 모든 것은 시들어 부셔져갔다. 길은 이미 내리막길.  어떻게 할 것인가? 비통해할 것인가? 서러워할 것인가?  그렇다고 그대는 자기도 남도 구하지는 못하리라.  구부러지고 말라빠진 노목의 나뭇잎은 점점 작아지고  성기어간다-그러나 그 푸르름에는 변함이 없다.  그대도 몸을 오므리고 자기 자신 속으로 자기의 회상  속으로 기어드는 것이 좋다-그러면 저기, 깊이 깊이  가다듬은 마음속 맨 밑바닥에 그대의 옛 생활이, 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생활이 아직도 생생한 푸르름과 애무와  봄의 힘을 가지고 그대 앞을 비춰주리라.  그러나 조심하시오...... 가련한 노인이여, 희망을 가지지는 마십시오!      ======================== 서정적 마을에서 세상 엿보기  - 연구 /이대의 1. 들어가는 말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읽다보면, 이것을 산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산문시로 보아야할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 산문시라 하면 산문과 산문시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의 산문시에는 우리가 통상 시적 장치라고 하는 상징, 이미지, 아이러니 등은 물론 응축된 서술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산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문장들을 살펴  보면 마치 한 편의 수필과도 같은 혹은 꽁트와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글을 어떤 기법 혹은 어떤 의미로 해서 산문시로 보아야 하는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산문과 산문시의 뜻을 살펴보고 산문시로 판단해야할 근거는 어떤 것인지 파악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산문의 반대개념은 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산문시도 있고, 시적인 산문도 있으니 잘못된 생각이다.  산문의 반대는 운문, 즉 정형의 율격을 판독할 수 있도록 조직된 글이다. 비시적, 비문학적인 글을 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의 산문은 문학적, 시적 성질을 전혀 띠지 않은 산문을 말한다.  산문시는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또는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되 산문의 형태로 인쇄된 시라고 보면 좋다. 산문시가 리듬의 단위를 행에 두지 않고 한 문장, 나아가서는 한 문단에다 두고 있  음을 말한다. 자유시나 정형시는 행 단위의 리듬 구성으로 말미암아 읽기가 다소 늦어지나 산문시에서는 읽기가 거침없이 진행되어 다소 호흡이 가빠진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을 미루어, 그의 작품을 산문시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리듬의 단위가 행이나 전체 문단에다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특별한 독법 없이 거침없이 읽혀지고  '다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낀다. 또한 작품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응축된 주제나 상징이 떠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산문적 관념에 머물지 않으면서 그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지적인 사상이나 철학을 시적인 감동으로 전해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산문시 작품을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논의해 보겠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는 그의 인생관, 조국애, 인도주의, 철학적인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3)고 평가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산문시 작품세계를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2. 서정적 마을에서 풍경 그리기  시에 있어서 풍경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듯 아주 평범한 경치를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풍경을 감상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는가 하면, 그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거나 작품의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아픔 등을 대신 나타내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은 작품 속에서 적절하게 포착하여 그려  넣어서 작품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많이 사용한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는 그림을 그리는 듯한 풍경이 서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마치 산수화 같은 풍경이다. 집들은 잘 보이지 않고 설령 집들이 있다해도 전원풍의 작은 집들을 그렸다. 거기에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의식해서 그리는 경우가 아니고 단순히 작품 배경이 되는 풍경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어 살아가는 작품들이 많다.  유월의 마지막 날, 천리 사방은 러시아 -- 그리운 고향.  온통 파랗게 물든 하늘, 그 위에 외로이 떠 있는 구름 한 점, 흐르지도 않고 녹아내리지도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사로움 …… 대기는 갓 짜낸 우유만 같다!  종다리는 지저귀고 비둘기는 가슴을 불룩이며 구구 울고, 제비는 소리도 없이 유유히 날고, 말은 콧바람을 불며 풀을 씹고, 개는 서서 정답게 꼬리만 흔들 뿐 짖지도않는다.  - 중에서  유월의 마지막, 고향 마을풍경이 너무도 서정적이다. 파란 하늘과 구름 한 점 그리고 바람 이 모든것들이 '갓 짜낸 우유만 같다'. 종다리, 비둘기가 울고 제비가 날아다니고 말은 풀을 씹고, 개는 짖지도  않고 꼬리를 흔드는 평화롭고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주변 풍경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준다.  골짜기를 따라 한쪽에는 아담한 곳간과 문이 굳게 잠긴 조그만 헛간들이 늘어서고, 다른 한쪽에는 판자 지붕을 얹은 소나무 통나무집이 대여섯 채. 지붕마다 찌르레기의 새장이 달린 높다란 장대가 보이고 집집마다 문간 위에는 양철을 오려 만든 갈기를 곤두세운 작은 말이 서 있다. 면이 고르지 않은 유리창은 무지갯빛 반사를 던  지고 덧문에는 꽃다발이 담긴 화병이 그려져 있다.  - 중에서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카메라 앵글을 멀리에서 가까이 잡은 마을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골짜기 한쪽에 집들이 대여섯 채 있고 집집마다의 유리창에 햇빛이 비치는 풍경이 너무도 맑고 투명하다.  그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평화로우며 맑고 깨끗하다.  둥근 얼굴의 젊은 여인이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고는 젊은이들의 말 때문도 아니고건초 더미 속 애들의 장난 때문도 아닌 영문 모를 웃음을 짓고 있다.  또 다른 젊은 여인은 굳센 두 팔로 물에 젖은 커다란 두레박을 우물에서 끌어올리고 있다……두레박은 밧줄 끝에서 후들후들 떨리고 흔들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길다란 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내 앞에는 바둑 무늬 새 스커트에 새 가죽신을 신은 노파가 서있다.  - 중에서  젊은이들이 말을 풀어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젊은 여인은 창문에 서서 그 젊은이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우물가에는 또 다른 젊은 여인들이 물을 긷고 있다. 노파의 모습도  정 많은 이웃집 노인 같은 평온함이 배어 있다.  노파는 아직도 따스한 큰 빵 조각 하나를 왼손 손바닥 위에 얹어놓고 나에게 권한다. 「자, 어서 드시오, 길가는 손님, 몸을 위해서!」  별안간 수탉이 꼬꼬댁 울어대며 부산스럽게 날개를 퍼득이기 시작한다. 거기에 답하여 외양간의 송아지가 하고 길게 목청을 뺀다.  「야아, 정말 멋진 귀리군!」나의 마부 소리가 들린다.  오오, 자유로운 러시아 마을의 만족과 평온과 풍요함이여! 오오, 그 정적, 그 은총이여!  - 중에서  우리 유년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정경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듯 노파가 손님에게 빵한 조각을 건네고, 거기에 수탉이 부산스럽게 퍼득이고 거기에 답하여 송아지가 운다. '자유로운 러시  아 마을의 만족과 평온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마을의 풍경을 산수화 같이 그려주면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작품 곳곳에 나타나 있다.  알프스의 정상…… 기암절벽의 연봉(連峰)……첩첩 산중의 한복판.  태산 준령 위엔 맑게 갠 연록색의 말없는 하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응고된 눈. 그 눈을 뚫고 우뚝 솟은 얼음에 덮이고 비바람에 그을은 준엄한 암괴(巖塊).지평선 양쪽에 우뚝 마주 솟은 두 거봉, 두 거인 - 융프라우와 힌스테라아르호른.  - 중에서  영원 무궁한 알프스의 기암절벽과 두 거봉의 정경이 그대로 와 닿는다. 너무도 커서 인간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산들은 잠든다. 맑게 갠 푸른 하늘도 영원히 입을 다문 대지 위에 잠든다.'라고 하여 인간의 존재가 자연에 비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며 자연의 거대함을 나타내주고 있는가하면  당신은 바닷가에서 늙은 잿빛 바위를 본 적이 있는가? 화창한 봄 날 만조 때, 세찬 파도가 사방에서 밀려들며 그 바위를 때리는 것을 - 밀려와선 때리고 희롱하며, 반짝이는 포말을 진주알처럼 흩뿌리며 이끼 낀 바위를 씻어내리는 것을.  바위는 언제 보나 예전 그 바위 그대로 남아 있다 -  - 중에서  파도가 아무리 밀치고 때려도 바위는 변하지 않는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바위는 끄떡없다. 이러한 바위의 모습 혹은 풍경을 통해 흔들림 없는 삶을 나타내 주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은 보잘 것 없  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투르게네프의 시속에는 자연의 서정적 풍경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가 하면 자연의 거대함을 통해 인간의 존재가 보잘 것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3. 격동기 시대의 세상 엿보기  그의 유년기는 알렉산드르 1세 시대 말기에 해당하고, 그의 청년기는 러시아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의 시기였던 니콜라이 1세 시대였으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던 장년기는 개혁의 희망과 혁명의 불  안감이 공존하던 알렉산드르 2세대, 그리고 그의 말년은 강력한 반동 정책이 추진되던 알렉산드르 3세 시대에 해당한다. 결국 투르게네프는 유럽과 러시아의 격동기를 몸으로 겪으며 살았다. 그러한 삶  의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작품을 보면 시대적인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이 배어 있다.  개가 서서히 다가갔다. 그러자 별안간 가까운 나무에서 가슴 털이 검은 참새 한 마리가 개의 바로 콧등 앞에 돌멩이처럼 날아내렸다. 그러고는 온 몸의 털을 험악하게 곤두세우고 필사적이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울어대면서,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개의 입을 향해 두어 번 가량 깡충깡충 뛰어갔다.  어미새는 새끼를 구하기 위해 돌진하는 것이다……그러나 그 조그만 몸뚱이는 온통 공포에 떨고 있었고, 그 가냘픈 목소리는 거칠다 못해 쉬어버렸다. 드디어 어미새는 실신하고 말았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이다!  - 중에서  사냥하고 돌아와 길을 걷다가 목격한 장면을 쓴 글이다. 참새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개에게필사적으로 대항하다 실신해버린다. 그 가냘픈 몸뚱이로 거대하게 보이는 개에게 덤벼서 개가 뒷걸음질치게 만들어 새끼를 지켜내는 것을 통해 작가는 '사랑은 공포보다도 더 강하고, 바로 그 사랑에 의해서만 삶은 유지되고 영위되어 나가는 것이다.'고 정의해 버린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리듯 정의해 버려 시의 맛이 사라지긴 하지만 이 글 속에는 강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절대권력에 항거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윽고 새는 날개를 가다듬고, 매한테 쫓기는 비둘기처럼, 먼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 어디 푸르고 아늑한 은신처는 없을까? 잠시 동안이라도 좋으니, 어디 둥지를 틀 만한 곳은 없을까?  - 중에서  은신처가 없는 새는 은신처를 찾아 끝없이 날아간다. 사막을 넘어 바다를 넘어가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죽고 마는 새를 이야기하며 작가는 자신도 '나도 바다에 떨어질 때가 온 것 아닐까?' 두려워한다.  여기서 매는 권력자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자유를 그리워하는 민중들은 그 권력을 피해 둥지를 찾다  가 결국 죽음에 다다르는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시골 농사꾼의 늙은 과부 집에서, 마을에서도 첫째가는 일꾼인 스무 살 난 외아들이 죽었다.  그 마을의 여지주인 마나님은 노파의 슬픈 소식을 듣고 장례식 날에 과부의 집을 방문했다.  노파는 집에 있었다.  노파는 집 한복판 탁자 앞에 서서 오른손을 규칙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며(왼손은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연기에 그슬린 항아리 바닥으로부터 건더기 없는 양배춧국을 떠서는 한 술 두 술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노파의 얼굴은 핼쑥하게 여위고 까맣게 죽어 있었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나……몸만은 교회에 간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단정히 서 있었다.  「어쩌면!」하고 마나님은 생각했다.  「이 판국에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다니…… 저 사람들의 감정은 어쩌면 저렇게도 무딜까!」  - 중에서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과부가 '건더기도 없는 양배춧국을' 먹고 있는 모습이 가슴 저리게한다. 그 아픔이 '생매장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슬픔 속에서도 양배춧국을 먹는 것은 '그녀에게는 소금처럼 싼 것이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끝 부분에 설명을 빼고 상황만 전달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지만 이를 통해 당시의 경제적인 상황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매 맞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무법적인 사형을 허용해선 안 돼. 자, 도와주러 나가세」  「그러나 살인자를 때리고 있는 건 아니야」  「살인자가 아니라고? 그럼 도둑인가? 어쨌든 마찬가지야, 가서 말리도록 해야지」  「아니, 도둑도 아냐」  「도둑도 아니라고? 그럼 회계산가? 철도 종업원? 군납업자? 러시아의 문예 보호자? 변호사? 온건주의 편집자? 사회 봉사가 나으리?……어쨌든 가서 도와주도록 하세!」  「아니 그렇잖아…… 신문기자가 맞고 있군 그래」  「신문기자? 그럼 우선 차나 마시고 보지」  - 중에서  두 친구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일방적으로 매를 맞고 있고 있는 상황에서 '매 맞는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를 말려야 한다고 나가려 한다. 그가 도둑이건 살인자이건 혹은 회계사, 철도종  업원, 군납업자, 러시아의 문예보호자, 변호사, 온건주의 편집자, 사회봉사가 나으리 등 누구든 도와주러 나가려다가 신문기자라고 하자 '그럼 우선 차나 마시고 보지' 하고 나가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저널리즘에 대한 불만을 신문기자를 통해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너의 말도 역시 말이 안 되는 수수께끼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의 오이디푸스는 어디 있느냐?  아아! 전 러시아의 스핑크스여! 농군 모자를 쓴다고 러시아의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 중에서  '농민을 이해한답시고 곧잘 농민 복장을 하고 다닌 그 당시의 슬라브주의자들을 날카롭게 풍자한'작품이다. 이와 같이 위장된 관료나 혹은 지배자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러시아의 조국애를  나타내준 작품도 있다.  의혹의 날에도,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번민하던 날에도 - 그대 혼자만이 나의 지팡이요, 기둥이었노라. 오오, 위대하고도 힘차고 성실하고도 자유로운 러시아어여!  만일 그대가 없었다면, 지금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어찌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위대한 국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을 수는 없지 않을까!  - 전문  러시아어를 짧은 시로 잘 나타낸 작품이다. '그대 혼자만이 나의 지팡이요, 기둥이었노라'고 러시아어가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조국의 절망 속에서도 러시아어가 있  어 조국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와 같이 격동기 시대를 풍자하거나 그 시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주는 작품을 살펴보았다.  물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적 상황이나 나름대로의 시대적 정의를 작가가 끼어 들어 부연 설명해주는 것이 있어 시의 맛을 덜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냉소적인 요소가  있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서사적인 구조를 통해 한 시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4. 휴머니즘의 마을에서 사람과 함께 하기  투르게네프의 작품 (서정적이든 시대적 상황을 풍자하든) 속에 하나로 흐르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그는 사람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단편집에 실린 에 보면 '신기한 산이나, 바위, 폭포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거나 방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얼굴, 산 사람의 얼굴, 사람들의 이야기, 움직임, 웃음, 바로 이런 것들이 내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 있노라면, 나는 유달리 홀가분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라고 토로하고 있다. 작가의 간접적인 독백에서 알 수 있듯 자연보다도 사람을 더 좋아했던 그는 작품 속에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많고 또한 그에 따른 고독이 많이 나타난다.  「사랑하고 말고요. 나리. 벌써 아홉 달째가 되지만……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군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제 처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젊고 건강했는데!……콜레라가 하루만에 데려가고 만 겁니다」  「말씀 마세요. 나리!」불쌍한 젊은이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 중에서  마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하는 화자는 수심에 차 있는 젊은 마부의 썰매를 타고 가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부는 사랑하는 색시 마샤가 콜레라에 걸려 하루만에 죽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를 측은하게 여긴 화자는 썰매에서 내릴 때 15코페이카를 덤으로 더 주고 내린다. '그러고는 추운 정월의 잿빛 안개에 쌓인 텅 빈 눈길 위를 어슬렁어슬렁 말을 몰고 갔다.'는 장면을 보면 그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인다.  노파는 아직도 따스한 큰 빵 조각 하나를 왼손 손바닥 위에 얹어놓고 나에게 권한다. 「자, 어서 드시오, 가는 손님, 몸을 위해서!」  - 중에서  전원적인 마을에서 지나가는 손님을 위해 빵 한 조각을 건내는 노파의 마음이 있는가 하면그 시골 부부는 시고무친의 고아가 된 조카딸을 황폐한 자기 오막살이에 떠맡기로 했다.  「카치카를 떠맡게 되면」하고 농사꾼 마누라가 말했다. 「마지막 한 푼까지 모조리 그 애에게 들어가, 야채 수프에 넣을 소금도 살 수 없을 텐데요……」  「그럼…… 소금 없는 수프를 먹으면 돼잖아」하고 그녀의 남편은 대답했다.  로스차일드도 이 시골 농부를 따르려면 까마득한 것이다!  - 중에서  부자인 로스차일드가 많은 수입금 중 복지 사업에 희사하는 것에 감동을 하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시골 부부가 더 인도주의적임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아이를 맡아 기르면 수프에 소금 넣을 돈도 없으면서 '소금 없는 수프를 먹으면' 된다고 하는 부부의 인정을 통해 복지 사업은 어떠한 정신으로 해야하는 지 간접적으로 말해주기도 한다.  방안에는 우리 둘 - 개와 나, 밖에는 사방 폭풍이 무섭게 울부짖고 있다.  개는 내 앞에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개를 바라보고 있다.  개는 무슨 말인가를 나에게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개는 벙어리라 말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개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는 알고 있다 - 지금 이 순간, 개도 나도 똑같은 감정에 젖어 있다는 것을,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는 것을. 우리 둘은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 중에서  개와 방안에 둘이 앉아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되어 감정을 나누는 혹은 그만큼의 고독을 나타내 주는가 하면  인사를 하는 건지, 비난을 하는 건지 그것조차도 분명치가 않다. 그저 앙상한 앞가슴이 간신히 들먹이고 충혈된 두 눈이 오므라진 동자 위로 온몸을 다해 짜내는 고통스러운 눈물 두 방울이 흘러나왔을 뿐이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친구 옆 의자에 앉아서 - 너무나도 무섭고 처참한 그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며 역시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는 내 손을 잡은 것이 친구의 손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 중에서  옛 친구인 러시아의 민중시인 네크라소프와 작품을 가지고 논쟁을 하다가 결별하고 지내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만나 화해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불편했던 앙금도 죽음이 화해를 시켰다는 것으로 끝맺  음을 하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하나의 교훈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  란 미소가 스쳤다 -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하고 그는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 중에서  거리를 걷고 있다가 늙고 초라한 거지가 동냥을 청하여 도와 주려고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 거지의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는다. 거지는 자기 나름대로 손을 잡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이 불쌍한 거지와의 관계를 통해 본인도 적선을 받았다는 따스한 작품이다.  이와 같이 빈부격차나 계급과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마음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투르게네프 산문시를 살펴보았다. 그의 산문시는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정밀묘사를 함으로써 시의 의미전달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고, 또한 산문적인 요소가배어 있으며 말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철학 그리고 상황들을 지나치게 정의해줌으로써 시의 맛이 덜하  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서정적 풍경을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당시의 시대적인 삶보다는 평화롭고 고요한 아름다움만 그려주어 작품의 무게가 덜해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향기와 섬세한 감각 그리고 예리한 관찰력은 매우 뛰어나다.  시적 표현이 일반적 서술과 다른 점은 진실성의 문제와도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고 볼 때 그의 작품은 진실성이 돋보인다. 물론 당시의 삶을 풍자하고 시대적 상황을 묘사해 주는데는 냉소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진실성은 살아 있다고 본다.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휴머니즘은 당시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인도주의적 혹은 도덕적인 정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게 요소도 있다. 그러나 그 휴머니즘 조차도 시대의 복판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비켜간 서정의 마을에서 세상을 엿보고 있  는 듯한 인상이 든다.  그러한 작품의 배경 속에 있음에도 그의 산문시에는 말년의 그의 인생관이 담겨져 있고 격동기 시대를 비판하면서도 조국애가 담겨 있으며 어렵고 고된 삶 속에서도 그의 인도주의적 철학사상이 담겨  있다.  ======================   Корреспондент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신문기자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двое друзей сидят за столом и пьют чай. 두 친구가 책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внезапный шум поднялся на улице. Слышны жалобные стоны, ярые ругательства, взрывы злорадного смеха. 그 때, 갑자기 거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애처로운 신음소리, 심한 욕설, 그리고 악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Кого-то бьют, - заметил один из друзей, выглянув из окна. "누가 매를 맞고 있군" 한 친구가 창문을 내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Преступника? убийцу? - спросил другой. -Слушай, кто бы он ни был, нельзя допустить бессудную расправу. Пойдем заступимся  за него. "죄인이야? 아니면 살인자인가?" 다른 친구가 말했다. "저 사람이 누구든 정당한 재판도 없이 저렇게 사람을 맞게 둘 수는 없어. 도와주러 가자."   -Да это бьют не убийцу. "살인자를 때리고 있는 건 아니야."   -Не убийцу? так вора? Все равно, пойдем отнимем его у толпы. "살인자가 아니라고? 그럼 도둑이야? 아니, 어쨋든 저 무리에서 저 사람을 빼내주자."   -И не вора. "도둑도 아니야."   -Не вора? Так кассира, железнодорожника, военного поставщика, российского мецената, адвоката, благонамеренного редактора, общественного жертвователя?... Все-таки пойдем поможем ему! "도둑이 아니라구? 그럼 계산원이야? 철도청 직원? 군납업자? 러시아 문예 보호자? 변호사? 온건주의 편집자? 사회봉사자? 누구라도 좋으니 나가서 도와주자!"   -Нет... Это бьют корреспондента. "아니... 맞고 있는 사람은 신문기자야."   -Корреспондента? Ну, знаешь что : допьем сперва стакан чаю. "신문기자라구? 그러면.. 우선 차부터 다 마시고 생각하는게 좋겠어."   (Июль, 1878) (1878년 7월)     ㆍвнеза́пный : 갑작스러운, 돌연의 ㆍжа́лобный : 애처로운, 괴로워하는 ㆍстон : 신음 ㆍя́рый : 강렬한, 맹렬한, 타오르는 듯한 ㆍзлора́дный : 사악하게 즐거워하는 ㆍпресту́пник : 죄인 ㆍуби́йца : 살인자 ㆍдопуска́ть - допусти́ть : кого-что 허락하다, 허가하다 ㆍбессу́дный : 재판에 의하지 않은 ㆍзаступа́ться - заступи́ться : 편들다, 두둔하다 ㆍотнима́ть - отня́ть : 빼앗다, 가로채다 ㆍвор : 도둑 ㆍреда́ктор : 편집자 ㆍсперва́ : 우선, 먼저 ========================///     Два богача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두 부자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   Когда при мне превозносят богача Ротшильда, который их громадных своих доходов уделяет целые тысячи на воспитание детей, на лечение больных, на призрение старых - я хвалю и умиляюсь. 부호 로스차일드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아이들의 양육, 병자들의 치료, 늙은이들의 보살핌에 썼다고 칭찬한다면 나도 그에 감동받고 칭찬하게 된다.   но, и хваля и умиляясь, не могу я не вспомнить об одном убогом крестьянском семействе, принявшем сироту племянницу в свой разорённый домишко. 하지만 감명받고 칭찬하면서도 나는 고아가 된 조카딸을 자신의 집에서 키우기로 한 가난한 부부 농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Возьмём мы Катьку, - говорила баба, - последние наши гроши на неё пойду, - не на что будет соли добыть, похлёбку посолить... 카치카를 키우게 되면,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돈이 모두 그 애에게 들어갈 것이고 수프에 소금을 치지도 못하게 될 거에요 - 아내가 말했다   - А мы её... и не солёную, - ответил мужик, её муж.   Далеко Ротшильду до этого мужика! (Июль, 1878) 그럼 싱거운 수프를 먹으면 되겠지 -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이 가난한 농부에 비하면 로스차일드는 한참 멀었다! (1878년 6월)     ㆍбога́ч : 부자 ㆍпревозноси́ть - превознести́  : 높이 평가하다, 칭찬하다 ㆍгрома́дный : 거대한, 막대한 ㆍдохо́д : 수입, 이득  (чистый доход : 순이익) ㆍлече́ние : 치료 ㆍпризре́ние : 보살핌, 돌봄   (презрение는 냉소, 경멸, 하대의 느낌이지만 발음이 비슷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ㆍхвали́ть - похвали́ть : 칭찬하다 ㆍумиля́ться -  умили́ться : 감동하다, 감명받다 ㆍубо́гий : 가난한, 불쌍한 (бедный) ㆍсирота́ : 고아 ㆍразорённый : 멸망한, 폭삭 망한 ㆍбаба : 시골여성, 부인 ㆍгрош : 반코페이카, 1/100루블 ㆍпохлёбка - 수프, 죽 ㆍсоли́ть - посоли́ть : 소금을 치다, 간을 하다 ==========================/// 투르게네프의 사랑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중에서                            Иван Тургенев — Когда меня не будет                             언젠가 내가 없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해 부서져 내릴 적에, 나의 당신이여, 나의 유일한 친구여, 내가 그렇게 깊게 그렇게 곱게 사랑하였던 당신이여 당신은 아마도 나보다 더 오래 살겠죠. 그렇지만 내 무덤에 오진 마시오. 당신한테는 거기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나를 잊지는 마오...그렇지만 일상의 일, 만족, 걱정 속에서 나를 떠올리지도 마오. 나는 당신의 삶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요. 편안한 삶의 흐름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외로운 순간이 혹여 찾아오거든, 부끄럽고 이유 없는 슬픔이 당신을 찾아오거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흔히 그럴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사랑했던 책을 한 권 빼들고서, 그 페이지들을 찾아요. 그 구절, 그 단어들, 기억나나요? 우리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달고 말없는 눈물을 흘리던 그 구절들...   그 대목을 읽어요, 눈을 감고서... 그리고 내게 손을 뻗어요. 그 자리에 없는 친구에게 당신의 손을 뻗어요.   나는 내 손으로 당신을 쥘 수는 없을 겁니다. 내 손은 땅 밑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놓여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혹시 당신의 손에 가벼운 건드림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기쁩니다.   그리고, 내 모습이 당신 앞에 서겠지요. 그러면, 당신의 감은 쌍꺼풀 밑으로 눈물이 흐르겠죠. 아름다움에 취한 우리들이 언젠가 둘이서 흘렸던 그 눈물이... ​ 오, 당신, 나의 유일한 친구여!  내가 그렇게 깊게 그렇게 곱게 사랑하였던 당신!       Когда меня не будет, когда всё, что было мною, рассыплется прахом, — о ты, мой единственный друг, о ты, которую я любил так глубоко и так нежно, ты, которая наверно переживешь меня, — не ходи на мою могилу… Тебе там делать нечего.   Не забывай меня… но и не вспоминай обо мне среди ежедневных забот, удовольствий и нужд… Я не хочу мешать твоей жизни, не хочу затруднять ее спокойное течение.   Но в часы уединения, когда найдет на тебя та застенчивая и беспричинная грусть, столь знакомая добрым сердцам, возьми одну из наших любимых книг и отыщи в ней те страницы, те строки, те слова, от которых, бывало, — помнишь? — у нас обоих разом выступали сладкие и безмолвные слезы.   Прочти, закрой глаза и протяни мне руку… Отсутствующему другу протяни руку твою.   Я не буду в состоянии пожать ее моей рукой — она будет лежать неподвижно под землею… но мне теперь отрадно думать, что, быть может, ты на твоей руке почувствуешь легкое прикосновение.   И образ мой предстанет тебе — и из-под закрытых век твоих глаз польются слезы, подобные тем слезам, которые мы, умиленные Красотою, проливали некогда с тобою вдвоем, о ты, мой единственный друг, о ты, которую я любил так глубоко и так нежно! ​ ​ ​ ​ 이반 투르게네프는 1874년 파리 근교의 부지발에 러시아식의 작은 저택을 하나 샀다. 평생의 유일한 연인 빨리나 비아르도가 사는 빌라 맞은 편이었다. 임종의 고통 속에서 투르게네프는 발코니가 딸린 이 집의 이층 방에서 1883년 9월 3일 숨을 거두었다. 이 작은 집은 그의 유명한 여러 산문시를 탄생시킨 장소이다. ​ ​    
1219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투르게네프 댓글:  조회:3901  추천:0  2018-08-22
  출생 1818. 11. 9(구력 10. 28), 러시아 오룔 사망 1883. 9. 3(구력 8. 22), 파리 근처 부지발 국적 러시아 요약 투르게네프는 당시 유럽적 시각과 정서를 가진 유일한 러시아 작가였다. 대표작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을 남겼다. 에서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을 다루었고, 사랑 이야기와 인물에 대한 예리한 심리묘사를 통해 보편적인 호소력을 부여했다. 목차 개요 초기생애와 작품 전원생활 스케치 초기소설 고립과 명성 평가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1874년 투르게네프의 초상화 ⓒ Ilya Repin/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개요 대표작으로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1852)·〈루딘 Rudin〉(1856)·〈귀족의 보금자리 Home of the Gentry〉(1859)·〈전야 Nakanune〉(1860)·〈아버지와 아들 Otsi i deti〉(1862) 등을 남겼다. 1856년부터는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 살았다. 초기생애와 작품 투르게네프는 퇴역 기병장교인 아버지 세르게이 투르게네프와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어머니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34년에 죽어 어머니만큼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틋하게 되새기기도 했는데,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첫사랑 Pervaya lyubor〉(1860)에 나오는 아버지의 초상에서 가장 힘있게 구현되어 있다.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배했던 위압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주요소설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여주인공의 원형은 아니지만 하나의 보기를 제시했다. 전제적 기질을 지닌 어머니는 아들의 삶과 스파스코예 영지를 똑같이 마음내키는 대로 지배했다. 스파스코예는 어린 투르게네프에게 러시아의 시골 한가운데 떠 있는 젠트리 계층의 문명의 섬이자 노예나 다름 없는 농민들의 상황에 내재하는 불의의 상징이라는 2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 스파스코예는 전원성의 원천으로서 훗날 그의 주요작품의 맥락을 이루었으며 문명이란 인간의 정신과 같이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서 외부의 암흑으로부터 영원히 위협받는 어떤 것이라는 그의 문명관의 틀을 이루었다. 그는 사회제도에 대해 끊임 없는 적의를 품었는데, 이것이 그의 자유주의의 원천이었으며 민중성원으로서 인텔리겐치아가 조국의 사회적·정치적 개선을 위해 헌신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투르게네프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유럽적 시각과 정서를 가진 유일한 러시아 작가로 성장했다. 비록 그는 가정과 모스크바의 학교들, 그리고 모스크바대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교육은 1838~41년 베를린대학교에 다니며 '독일의 바다'에 빠져 있던 시기에 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또한 베를린에서 반(反)마르크스주의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을 비롯한 동시대의 지도적 인물을 만났다. 이들을 통해 혁명 사상의 발판인 G. W. F. 헤겔의 철학에 관심이 싹텄으며, 그 역시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과 재능을 바치리라는 이상에 불타게 되었다. 그는 서유럽의 우월성을 굳게 믿고 러시아는 서구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며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문체를 본뜬 시극(詩劇) 〈스테노 Steno〉(1834)와 파생적 운문을 썼으나 처음으로 비평가들의 관심을 끈 작품은 1843년 출판된 장시 〈파라샤 Parasha〉였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에서 사랑 이야기가 가장 흔하게 등장하고, 1843년 처음 만난 유명한 여가수 폴린 비아르도를 향한 사랑이 그의 전생애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비아르도 부인과의 관계는 유럽에 대한 그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정신적 사랑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몇몇 그의 편지는 종종 그의 여느 작품 못지않은 뛰어난 관찰력과 교묘한 표현으로 그 이상의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럼에도 이 편지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투르게네프는 상냥하고 헌신적인 숭배자였으며 이 역할에 만족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스파스코예 영지의 한 농부 아낙네와의 사이에서 1842년에 태어난 딸이 있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나중에 비아르도 부인에게 이 아이의 양육을 맡겼다. 1840년대에 투르게네프는 〈대화 Razgover〉·〈안드레이 Andrey〉·〈지주 Pomeshchik〉 등 좀더 긴 시와 몇 편의 비평을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교수 자리를 얻는 데 실패하고 관직도 포기한 뒤 짤막한 산문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이 그 세대의 전형인 '의지가 박약한 지식인'에 관한 연구이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잉여인간의 수기 The Diary of a Superfluous Man〉(1850)이다. 여기에서 그는 러시아 문학 전반과 또 그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의지가 약한 지식인 주인공들에게 '잉여인간'이라는 통칭을 붙여주었다. 동시에 그는 희곡 집필도 시작했는데 러시아의 대가인 니콜라이 고골리를 모방한 것이 분명한 〈가난한 신사 Bedny Dzhentlmen〉(1848) 등의 작품을 썼다. 이 가운데 〈독신 남자 Kholostoy〉(1849)만 당시에 상연된 단 1편의 작품이며 다른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은 실을 훌륭히 뽑아낼 수 있다 One May Spin a Thread Too Finely〉(1848) 같은 작품에서는 더욱 가까이에서 등장인물을 통찰하는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결국 걸작 드라마 〈시골에서의 1개월 Mesyats v derevne〉(1855)에서 섬세한 심리적 통찰력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1872년에 직업배우들에 의해 공연되었다. 1898년 안톤 체호프의 희곡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이후 러시아 극단에서는 전례 없이, 비평가와 관객들이 투르게네프의 이 작품이 더 큰 성공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1909년에 위대한 연출자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지휘로 바로 이 극장에서 공연됨으로써 러시아 희곡의 대표작 중 하나임이 증명되었다. 전원생활 스케치 투르게네프는 1847년 외국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문학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 편집실에 단편 습작 〈호르와 칼리니치 Khor i Kalinych〉 원고를 두고 떠났다. 오룔 지방에 사냥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두 농부의 이야기를 다룬 이 글은 〈사냥꾼의 수기 중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사냥꾼의 수기〉 연작이 탄생했고 1852년 출판되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작가의 체험을 기반으로 시골 영지 생활의 단편들, 농노를 소유한 러시아 젠트리 계층이 펼치는 일화와 다양한 지주의 초상을 묘사한다. 〈소브레멘니크〉에 여러 가지 제목으로 따로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사냥꾼의 수기〉로 한데 묶여 처음 출판되자 투르게네프는 체포당했고 1개월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억류되어 있다가 스파스코예로 강제 이송되어 18개월간 칩거했다. 이러한 조처의 명목상 이유는 그가 검열 규정을 어기고 고골리의 사망기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냥꾼의 수기〉에 나타난 농노제에 관한 그의 비판적 견해, 그것도 어떤 도덕적 규범에 의해 어조가 약화되어 단지 농민들에 대한 지주의 잔혹함을 다룰 때만 드러낸 견해만으로도 그의 예술이 이와 같이 일시적으로 고난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초기소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억류당한 기간동안 농노제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무무 Mumu〉 등의 작품을 썼으나 점차로 〈야코프 파신코프 Yakov Pasynkov〉(1855)처럼 집중적으로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파우스트 Faust〉나 〈편지 A Correspondence〉(1856) 등에서처럼 비뚤어진 사랑을 섬세하게 또는 염세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시대적·민족적인 문제가 그를 짓눌렀다. 크림 전쟁(1854~56)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투르게네프의 세대, 즉 '40년대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 1850년대에 발표한 2편의 장편소설 〈루딘〉과 〈귀족의 보금자리〉는 이 10년 전 세대의 특징인 나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향수에 젖어 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다룬 연대기 작가로서 그의 객관성은 이 초기 소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크림 전쟁 후 대두한 급진적인 젊은 세대 사상의 일부 경향에 동조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들 신세대 남녀의 긍정적인 열망을 신중하고 솔직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이끈 급진적 비평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등은 그에 대해 대체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며 때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어느 정도 방종한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젊은 동시대인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공격했던 유형의 주인공들의 잘못을 강조하는 대신 단편소설 〈아샤 Asya〉(1858)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들의 젊은 혈기와 윤리의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들 속성은 투르게네프가 공감할 수 없는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의 자유주의는 점진적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으나 그보다 급진적인 어떤 것도 반대했으며 특히 농민봉기 사상을 거부했다. 장편소설 〈전야〉는 크림 전쟁 전야에 젊은 인텔리겐치아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1861년 농노해방이 선포되기 이전 러시아에 닥칠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그의 염세주의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비아르도 부인과 그 남편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나 그의 자신감의 결여로 더욱 심해진 것이 확실하다. 1859년 체르니셰프스키가 런던을 방문해 자유주의적 지도자이며 투르게네프의 친구인 알렉산드르 게르첸을 만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은 노골화되었다. 투르게네프 세대의 자유주의와 젊은 인텔리겐치아들의 혁명적 열망 사이에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투르게네프는 이러한 불화에 자신도 개인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연루 의식에서 나온 소설이 탁월한 균형감각과 깊이를 가지고 두 세대를 분열시킨 쟁점들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그의 최대 걸작 〈아버지와 아들〉이다. 주인공 바자로프는 투르게네프가 창조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연과학의 법칙을 제외한 모든 법칙을 부정하고 투박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허무주의자이지만 사랑에 쉽게 흔들리고 이때문에 불행해진다. 사회적·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주인공은 평민 출신의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투르게네프가 속한 젠트리 계층 인텔리겐치아에 대해 거두게 될 승리를 상징한다. 예술적 관점에서 바자로프는 객관적 인물묘사의 성공적인 보기인 동시에 강렬한 죽음을 통해 비극적 인물상에 접근했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의 기적은 투르게네프가 개인적으로 바자로프의 반(反)유미주의를 혐오했음에도 매우 능숙하게 주제를 다루었으며, 모든 등장인물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부여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자 급진적인 젊은 세대는 자신들에 대한 중상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했고 보수적인 세대들은 허무주의를 폭로하는 데 관대하다고 비난했다. 고립과 명성 자신의 문학적 명성에 대해 민감했던 투르게네프는 거의 한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비판의 소리에 상심하고 러시아를 떠났다. 그는 은퇴한 비아르도 부인이 휴양중인 남부 독일의 바덴바덴에 정착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와의 언쟁과 러시아 문단과의 전면적인 결별로 그는 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거부한 러시아에 대한 심정은 〈망령 Prizraki〉(1864)·〈이제 그만 Dovolno〉(1865) 같은 단편소설에서 엿볼 수 있다. 바덴바덴을 배경으로 이 시기에 쓴 유일한 장편소설 〈연기 Dym〉(1867)는 적의를 띤 어조로 좌익과 우익 인텔리겐치아들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하고 있다.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비아르도 부부는 바덴바덴을 떠나야 했고 투르게네프도 그들을 따라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갔다. 이와 함께 그의 관점에도 새로운 방향전환이 일어났다. 한때 열렬한 독일 예찬자였던 그가 한층 냉정해지고 비탄에 잠긴 것이다. 이제 그는 1870년대 파리에서 러시아의 명예 외교사절 몫을 하게 되었다. 조르주 상드, 귀스타브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그리고 젊은 에밀 졸라, 헨리 제임스 등 많은 문인들과 편지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했다. 그는 1878년 파리 국제문인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879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 명예학위를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연례 방문중에 환대를 받았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모은 이 마지막 시기의 작품들 중 〈광야의 리어 왕 Stepnoy Korol Lir〉(1870)·〈봄의 급류 Veshnie Vody〉(1872)·〈푸닌과 바부린 Punin i Baburin〉(1874) 등의 아름다운 단편에는 이 향수가 잘 나타나 있으며, 그뒤에 발표한 〈승리한 사랑의 노래 Pesn torzhestbuyroshchey lyubvi〉(1881)·〈클라라 밀리치 Klara Milich〉(1883)는 환상에 가까운 등장인물을 내세운 단편이다. 마지막 장편소설 〈처녀지 Nov〉(1877)는 자신의 문학적 명성을 되찾기 위해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은 러시아 농민이라는 처녀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를 바라는 희생적인 젊은 나로드니키의 헌신을 그리고자 한 것으로, 전쟁의 시사성을 다루려고 노력한 사실주의적 작품이지만 그의 장편소설 중 가장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후의 주요작품 〈산문시 Poems in Prose〉는 명상적 감성과 러시아어에 대한 유명한 송가가 주목할 만하다. 평가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정밀하게 계산된 과장의 억제, 균형,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려 등으로 동시대 가장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구분된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모두 시사적이며 의식이 있는 작품으로서 고상한 사랑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예리한 심리묘사 등으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 그 자신 역시 아주 매력적이고 재치있으며 정직한 문인이었다. 그의 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에 가려 덜 빛났을지는 모르지만 명석하고 도시적 세련미가 넘치는 인품, 그리고 삶 속의 아름다움을 매우 소중히 다루는 의식은 그의 작품에 변함 없는 호소력을 지닌 마력을 부여한다. ==========================   이반 투르게네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이반 투르게네프의 초상화 (1874년 제작) 출생 1818년 10월 28일  러시아 제국 오룔 사망 1883년 9월 3일 (64세) 프랑스 파리 직업 소설가 장르 사실주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러시아어: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문화어: 이완 쎄르게예비치 뚜르게네브, 1818년 11월 9일(율리우스력: 10월 28일) ~ 1883년 9월 3일(율리우스력: 8월 22일))는 러시아 소설가, 시인이다. 그는 러시아 중부 오룔 시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1818년 10월 2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으로 퇴직하고 스파스코예 마을로 이주함에 따라서 투르게네프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 대학 철학부,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러시아 고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생의 많은 세월을 서유럽에서 보냈고 서구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사상적 기반도 서구주의적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의 대자연과 시골 풍경이 섬세하고 수려한 필치로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휴머니즘이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1852년에 25편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출간된 《사냥꾼의 수기》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섬세한 서정적 필치로 심층 묘사하여 그에게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연대기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해준 장편소설들 《루딘》(1856년), 《귀족의 둥지》(1859년), 《아버지와 아들》(1862년), 《연기》(1869년), 《처녀지》(1877년)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1883년 8월 22일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러시아로 옮겨져 그 해 9월 27일에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일생[편집] 방탕과 도박으로 타락한 아버지와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전제 군주적 성격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6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838년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여 스탄케비치·바쿠닌 등 진보적 러시아 지식인과 사귀며, 헤겔 철학·역사·고전어를 연구하였다. 1841년 서유럽 자유 사상의 동경자가 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서구파'에 출입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고, 벨린스키·게르첸 등을 사귀었다. 1843년 내무성에 근무하면서 처녀작인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하였다. 계속하여 희곡과 중편 소설을 썼으며, 1847년 잡지 《동시대인》에 단편 스케치 〈호리와 카리누치〉를 발표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1852년 당시의 가장 큰 사회 문제인 농노 제도를 공격한 소설 《사냥꾼의 일기》를 발표하여 정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사냥꾼의 일기에서는 농노제를 지적한 소설 '비류크'도 담겨 있다. 그 후 고골리에 대한 추도문이 말썽을 일으켜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감금당하였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의 위치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루딘》, 《귀족의 집》, 《전날 밤》, 《첫사랑》을 발표하여 환영을 받았으나, 1862년 발표한 《아버지와 아들》은 구·신세대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 후 장편 소설 《연기》와 1876년 대표작 《처녀지》를 발표하였으며, 《사랑의 개가》, 《산문시》, 《죽음 뒤에 오는 것》 등을 계속 발표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서유럽까지 열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 프랑스에 있을 때에는 플로베르·졸라·모파상 등 프랑스 작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구적 색채가 짙은 작가로서, 1840-1870년대의 모든 사회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서정미에 넘친 아름답고 맑은 문체, 아름다운 자연 묘사, 정확한 작품 구성, 줄거리와 인물 배치상의 균형, 높은 양식과 교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명상적인 사색을 계속하다가, 1883년 파리 교외에서 일생을 마쳤다. =====================///   거지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나의 발 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쌍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풀은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습니다... ...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 마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1818. 11.9 ~1883. 9. 3)       러시아의 중부 오률시의 부유한 대지주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기병장교, 어머니는 6살연상의 대지주의 딸사이에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문학을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다.       64세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중요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 Tucker Collection / wikipedia | Public Domain  
1218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투르게네프의 언덕 댓글:  조회:4703  추천:0  2018-08-21
  윤동주 /투르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했다. 둘째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 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올 뿐-     이 시는 거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있을 것은 다 있었으나 아무런 도움을 못 준 자신의 행동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했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이었다. 나는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소년들을 삼킨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 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올 뿐이었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목 ‘투르게네프의 언덕’이 이 시를 시로 존재하게 한다. 내용은 시적인 면이 없다. 다만 제목에서 투르게네프가 지은 라는 시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와 자신의 태도를 비교하여 자신은 투르게네프처럼 진심으로 거지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고 이들을 도와줄 행동을 할 수 없는 소심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투르게네프가 지은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데 가난하여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를 입은 늙은 거지가 동냥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해서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미안하다 했다. 그런데 거지는 오히려 손을 잡아준 것도 적선이라고 하였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 첫째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했다. / 둘째아이도 그러하였다. / 셋째아이도 그러하였다. /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소년들을 삼키었느냐!’에서 나오는 거지는 거지가 아니다. 그들은 거지의 차림을 하고 있지만 거지가 아니였다. 스스로 폐물을 주어 팔아 사는 소년들이다. 화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선입관 또는 통념으로 이들을 거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다 있었다. /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 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에서는 투르게네프와는 다르게 세 아이에게 줄 것이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올 뿐- ’은 투르게네프와 달리 화자와 거지 사이에는 아무런 교감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냥 스쳐가는 사람과 이들에게 동정을 느낀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올 뿐-’은 화자의 마음 상태를 암시하는 배경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지 못하고 망설이던 자신에게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전한성   사족: 윤동주의 시 중에 담담한 시이다. 그렇지만 윤동주의 속임없는 마음이 잘 전달되는 시이다. 윤동주의 장점은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거지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행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풀은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습니다……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인터넷에서 옮김) ==============================///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는 투르게네프가 쓴 시 ‘거지’를 모티프로 하여 쓴 시이다. 작가는 화자와 세 명의 소년 거지 사이의 우연한 만남을 소재로 삼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괴리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과 번민을 형상화하고 있다.   투루게네프라는 철학가가 어느 겨울날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돈을 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투루게네프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그 걸인의 더럽고 터진 손을 잡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걸인은 밝은 얼굴로 아니라고 선생님은 오늘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적선을 했다고 말한다.   ▣ ‘투루게네프의 언덕’에 관한 배경 설명   윤동주는 투루게네프의 시 ‘거지’에 나오는 사이비 형제애,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하여 아무 손해도 없이 감사와 인심만 획득하는 투루게네프의 ‘거지’식의 자선이 지니는 자기 기만성과 부정직성을 폭로하는 작품을 써서 제목조차 ‘투루게네프의 언덕’이라 붙인 것이다. 특히 ‘투루게네프의 언덕’에서 굳이 ‘언덕’이라고 설정한 그 외조건이야말로 투루게네프가 그려 낸 값싼 온정 또는 자기도취가 그 미망을 벗어나서 극복해야 할 어떤 단계를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목적이 그러했기에 그는 작품 구도에서 신경을 썼다. 거지를 만났을 때도 다행히도 주머니에 ‘지갑, 시계, 손수건, ……’ 등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던’ 투루게네프 식의 상황 설정 대신에, 불행히도 ‘지갑, 시계, 손수건, ……’ 등 ‘있을 것은 죄다 있었던’ 상황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우리의 뿌리 깊은 가식과 헛된 이웃 사랑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풍자한 것이다. =================================/// 투르게네프 (Ivan S. Turgenev, 1818-1883)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부흥기를 이끌었습니다. 한국에는 1910-1920년대 초반에 투르게네프의 소설과 산문시가 집중적으로 소개됐는데, 해외시 번역에 앞장섰던 김억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김억은 일찍이 오산학교 시절 스승인 이광수로부터 러시아 농노제의 실상을 다룬 투르게네프의 소설집 『사냥꾼의 수기』를 소개받고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투르게네프의 모든 작품을 구해 읽었다고 할 정도로 투르게네프를 좋아한 그는 다수의 산문시를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산문시는 규칙적인 운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운문시와는 달리 번역 과정에서 비교적 손실이 적습니다. 게다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는 이해하기 쉬운 내용 속에 감동을 전하고 있어서 그만큼 애독되었습니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는 많은 독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일본 유학 중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이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바닷물을 주사했던 것입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은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에 쓴 것이며, 대표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암울한 시대에 순수한 삶을 노래한 시로 사후에 출판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투르게네프와 윤동주의 관계에 대하여 로쟈 선생님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휴머니즘과 섣부른 휴머니즘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투르게네프와 윤동주의 산문시  이현우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문학적 경력은 서정시로 시작해서 산문시로 마무리된다. 『루진』(1856)을 필두로 하여 마지막 장편 『처녀지』(1877)까지 여섯 편의 ‘사회 소설’을 쓴 투르게네프는 이후 생의 말년에는 80여 편의 산문시를 썼다. 산문시는 러시아 문학의 고유한 장르가 아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던 투르게네프가 보들레르의 산문시에 영향을 받아 시도한 것이 그의 산문시다.   투르게네프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문학 형성기에 가장 많이 읽히고 번역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그의 산문시는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처럼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범상치 않은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어서였다. 일본을 통해 투르게네프를 수용한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이 번역돼 읽혔던 산문시 ‘거지’를 읽어 보자.   시적 화자인 ‘나’는 거리를 걷다가 늙은 거지를 만난다.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화자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늙은 거지는 손을 내밀어 나에게 적선을 청하는데, 호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빈손으로 산책을 나온 것이다. 동냥을 청하는 거지의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다.”   당혹한 나는 하는 수 없이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쥐고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랬더니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늙은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그때 문득 ‘나’는 깨닫는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식민지 조선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만한 주제인데, 특히 윤동주도 이 ‘거지’에 반응한 독자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반응은 공감과 함께 위화감도 포함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거지’를 명백히 패러디해서 쓴 ‘투르게네프의 언덕’(1939)에서 시인은 ‘거지’의 기본 골격을 반복하지만 몇 가지 설정을 비튼다. 시적 화자가 걷는 길은 ‘고갯길’로 바뀌고 ‘늙은 거지’는 ‘세 소년 거지’로 대체된다.   나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는 넝마주이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이들의 행색은 투르게네프의 늙은 거지와 마찬가지로 비참하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나는 탄식한다.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는 건 인지상정이다. 투르게네프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호주머니를 뒤져 본다. 한데 투르게네프의 화자가 빈손이었던 것과는 달리 윤동주의 화자에게는 두툼한 지갑과 시계·손수건 등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이것이 윤동주 식 반전이다. 거지 아이들에게 동정심은 일지만 선뜻 자기 물건을 적선할 만한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더 바람직하련만, 나는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아이들을 부른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 역시 투르게네프의 늙은 거지와는 다르다. 세 아이가 모두 피곤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그렇게 아이들은 사라지고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거지’의 반복이지만 ‘차이 나는 반복’이고 변주다. 시의 의미는 이 차이에 의해 생산된다. 투르게네프의 시 ‘거지’의 주제는 한마디로 휴머니즘이다. 길에서 만난 늙은 거지에게 적선을 하고 싶었지만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었던 나는 되레 늙은 거지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투르게네프는 적선의 의미를 뒤집고 있는 것인데, 시에서 나보다 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오히려 더럽고 남루한 행색의 거지였다는 사실에 시적 화자는 물론 독자도 감동을 받는다.   반면 ‘투르게네프의 언덕’에서는 적선은커녕 교감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세 소년 거지’에게 잠시 동정의 마음이 일지만, 그것은 고작 일시적인 기분에서 머문다. 나의 동정심은 이기심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기 것을 내줄 만한 ‘용기’가 없는 나는 아이들과의 거리를 한 치도 좁히지 못한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는 섣부른 휴머니즘, 말뿐인 동정심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의 ‘나’가 시인 자신이라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가혹한 자기비판의 시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자주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초상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의 휴머니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두 편의 시를 거울로 삼아 비춰 봐도 좋겠다.  ================///     은 김기림의 이란 시처럼 단수필이 아닌가 할 정도로 수필에 가까운 산문시였다. 쉽게 읽혀질 뿐만 아니라, 단락마다 눈앞에 그림으로 펼쳐져 기억하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윤동주의 겸손된 마음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와 내 마음을 훈훈히 데워주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나는 윤동주시에 푹 빠져 살았다. 동족을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이국땅에서 죽어간 젊은 시인 윤동주! 누군들 그를 기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란 제목이 계속 낯설었다. 윤동주는 왜 이 시에 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디오게네스도 아니고, 거지 소년들을 본 것과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정말 아리송했다. 그러다가 투르게네프의 시 를 접하고서야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표절에 가까울 정도로 두 시가 비슷했다. 투르게네프의 시 가 결국은 윤동주의 에 연상작용을 불러일으켜 준 장본인이었다.   윤동주는 앞서 걸어가는 세 소년 거지를 보며 투르게네프의 를 떠올렸던 것이다.  등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투르게네프는 1000명이나 되는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의 아들이었으나 평생 농노제를 증오하고 맞서 싸울 정도로 인간에 대한 그것도 약자에 대한 연민이 남달랐던 작가다. 1818년생이니  거의 200년 전 사람이요, 척추암으로 1883년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가 떠난 지도 100여 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윤동주에 의해 살아나고 독자들에 의해 거듭 부활하고 있다.     라는 작품에서도 그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실화요, 시적 설정이 아님에 더욱 큰 감동을 자아낸다. 줄 것이 없어 거지 손을 덥석 잡아주며 용서를 청하는 대지주의 아들! 그리고 호주머니에 죄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지 소년들의 마음을 헤아려 선듯 건네지 못하고 있는 윤동주! 두 시인의 마음이 그들의 작품보다 앞서 내게 달려와 안긴다. 그들은 갔어도 그들은 시 속에 살아 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과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설득력. 그 속에서 시의 힘을 느낀다. =================///     감상   윤동주 시인의 시는 보통 분위기나 어조가 감성적이고 무언가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시는 뭔가 다르다. 화자는 찢어지는 가난함을 견디며 사는 어린 소년들의 모습을, 그저 건조하고 담담한 어조로 묘사할 뿐이다. 하지만 담담하기 때문에 이 시는 절절하고 슬프다. 원래 북받치는 감정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담담하게 말하는 게 더 절실해보이고 감동적인 법이다. 문득 노을이 지는 황량한 언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1217    문학은 "금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댓글:  조회:2490  추천:0  2018-08-21
딱해진 우리네 문학  작성자: 최균선                                                                   딱해진 우리네 문학                                                                               최 균 선       오늘 세상은 세월을 앞질러 가며 빠르게 변하고있다. 작가들도 그 급류에 실려 삶을 재조하기에 혼란을 겪을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치체계가 마구 흔들리는 현시대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가늠하며 시종 앞서가야 할 사명을 지닌 작가들이다. 전성기의 문학은 대의를 앞세우고 사회에 응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지금은  문학을 한다고 똑똑한 사람,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문학의 지위가 날로 변연에로 밀리면서 전지구적으로 엄중한 쇠퇴기에 들어섰다. 이 시점에서 혹자는 문학은 이미 현실을 반영하는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다고도 말한다. 신매체시대, 인성도 전대미문의 각종 고험기를 맞았다. 문학도 새로운 문제를 잉태하게 되였는바 작가들이 어떻게 문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젠 문제중에 문제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고도의 발전은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감정모식을 개변시켜 경전문학의 적극적 영향력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은 고독감을 해소하고 핸드폰은 거리감을 축소하였으며 량자우주리론은 시공관념을 새롭게 세우게 하고 인공지능은 인류의 본질과 자아의식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 인성도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고험에 직면하였다. 한마디로 신매체시대 문학에 대한 타격은 치명적인것이다.     다매체시대, 매체가 의식의 절대적인 주체로 군림하여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대에 문학은 더 이상 문화의 주체가 될수 있을지 불투명해진다. 불길하다. 불안해진다. 불과 20여년이 안되는 동안 인테넷과 전자매체의 폭발적인 발전은 문학의 생존공간을 대대적으로 축소시켰으며 문학이 더는 “금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낯선 기괴함이 환상의 코드와 결합해 새로운 문화를 이룩해가지만 이는 늘 이미지의 향유로 결판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미지의 시대에 문자는 사유를 압박하는 절대적인 주체가 아님은 물론 변두리문화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스마폰세대들은 물을것이다. 도대체 문학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고     텔레비죤이나 스마트폰에 스쳐가는 장면과 장면 사이는 불련속성이 지배하건만 이런 문화현상은 21세기 지구촌 촌민들을 지배하는 대전제로 되였을뿐만아니라 너 또는 나를 의식의 신기원으로 인도한다. 모든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사람들이 속도와 편리함에 도취되여있을 때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이미지가 환상과 결합해 새로운 리념을 건설하는 중이다.     문학이 찾아야 할 실용적인 미적부호는 과연 무엇인가? 환상세계속에 도취인가? 아니 환상 이외에는 더는 문학의 소재로 차용될수 없는 실물이 존재하지 않을듯도 하다. 실물에 대한 서사와 환상의 서사가 극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 21세기를 표현하는 의미의 진실이기는 되여지는것일가?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지 않을가? 아무튼 문학의 미래는 밝지 않다.     문학이 인공지능과 스마트폰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엄혹한 이 시대다. 작가가 사회량심으로, 지성의 대표자로 받들리던 때와는 다른 이 시대, 작가들의 고민이 깊어질수밖에 없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다시 길이 나타나고 바다가 펼쳐지고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자기 위로가 될것인가?     문학이 근대산업과 소비행태에 의한 불가항력의 파괴를 력사적모순, 시대발전의 필연이라  인정하더라도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고 읽어서 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글을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소일거리로 쓴다거니 하는 상업적 회색문학이 공공연히 만연되고 있어 문학의 비애란 화제가 나오는 것이다.     1967년 미국의 작가 존 바스가 발표한 “문학의 고갈”이 문학의 속근심을 드러냈다면 신매체시대에 들어와서 문학의 지위가 변연화되여진것은 문학의 “외환(外患)” 이라 할것이다. 무릇 고전주의든, 랑만주의든, 사실주의든, 현대주의 내지는 후현대주의든 휘황찬란하던 전성기도 기억의 언덕너머로 물러가다보니 문학은 전 지구적으로 엄중한 쇠퇴를 보여주고있다. 물론 문학이 변연에로 밀리였을뿐 문학이 존재리유와 의의를 상실했다고 말할수는 있다.     문학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인간학이라 했다. 우리 인간의 가능성 뿐만아니라 그 한계성조차 진지하게 모색하는것이 문학이였다. 현대문명인들에게 금전이 수요되듯 문학도 필수적이다. 이러한 문학이 무시되면 인간의 정체성과 진정성이 모호해지기 마련이므로 인간의 본질과 진정성을 확충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이 바로 문학이 해야 할 급선무였다. 문학은 상상력의 공간속에서 사물들을 재배열함으로써 이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문학은 언어문자로 인류의 생존상태를 표현하므로 인성을 들여다 보고 인심을 뒤흔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건만 독서위기가 도래하면서 존재의 리유와 근거가 미약해졌다.     문학은 리념이나 체제선전을 위해 존재한것이 아니였다, 본질적으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데 선도자가 되고 보탬이 되는것이 문학의 사명이였으나 독자라는 가죽이 엷어지고 작아지고 있으니 무성한 털인들 있을손가, 물질적재부를 창조하지 못했지만 물질재부를 창조하는 지혜롭고 재능있는 사람을 만든다던 문학이 마침내 상상 이외로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의 인쇄문학은 어디로 갈것인가? 하는 우문이 나오게 된다.     종이문화의 친인간적 효용은 날로 줄어들고있다. 고상한 정서생활, 정감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던 문학의 렬차는 이미 산굽이를 돌아갔다. 구체적인 인간 개체등를 기쁘게, 슬프게, 분노하게 하고 종국적으로 행복감을 안겨주던 문학의 진정한 가치, 효용성을 싣고…     그래서 억지로 자아위안을 불러본다. 아무리 전자통신망이 세계를 휩쓸고 인간을 지배하더라도 인간의 령혼마저 그것에 빨려 들어갈수는 없다고, 인터넷과 소셜네트 워크서비스(SNS)상에 숱한 말,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시간의 흐름에 씻기면 되찾기가 어려운 치명적 약점도 잉태하고 있으므로 일시적으로 사회를 흔드는 진동파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은 그래도 문학이 가질수밖에 없다고, 문학이 수백년간을 두고 쌓아온 무게와 질감때문이라고 강변해도 설득력을 잃고만다.     지금 젊은세대, 어린이세대들은 보편적으로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세기를 거듭하며 습관되였듯이 그냥 책을 읽으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세상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일들에 매료되여 정감세계의 생화를 가꾸어가지 않을수 없다고 절규하면 독서취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새 세대들은 코방귀도 뀌지 않을것이다.      누구나 돈만 내면 책을 출간할수 있는데 문학의 새로운 발전기회라고 말할수 있을가. 책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을뿐이다. 언어의 예술로서의 문학은 언어가 철저히 소실되고  사람들이 서로 심령의 감응으로 교류하지 못하는 한 소실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만 문학의 외재형태, 전파방식과 접수방식상 미증유의 극단적 변화들이 발생한 상황에서 딱해진 우리네 문학임은 틀림없다.                                                                       2018년 2월 17일  
1216    [문단소식] - 리상각 시인 "두루미"를 타고 하늘가로... 댓글:  조회:2682  추천:0  2018-08-21
저명한 조선족 대표시인 리상각 향년 81세로 타계 (ZOGLO) 2018년8월20일                  
121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슬픈 족속 댓글:  조회:5219  추천:0  2018-08-20
    윤동주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나라를 잃고 가난하고 거칠고 슬픈 삶을 사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잃은 슬픈 족속(族屬)이 흰 수건를 검은 머리에 두르고 거친 발에 흰 고무신을 신고 흰 저고리 치마를 입고 흰 띠로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인 상복을 입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슬프지만 허리를 질끈 동여 매고 슬픔을 이겨나가려고 한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연으로 된 시로 은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을 의미하고 있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제목이 개인을 뜻하지 않는 ‘족속(族屬)’이라 하였고 시의 내용에서 이 족속이 흰 상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에서 화자가 보는 대상은 평소에 ‘흰 고무신’을 신고 있지 않고 맨발로 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거친 발’에서 알 수 있다. ‘걸리우다’는 ‘걸리다’의 피동형이고 ‘고무신’은 신는 것이지 거는 것이 아니므로 평소에는 신을 신지 않아서 어색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픈 족속’은 신도 신지 못하는 가난한 족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에서 ‘흰 저고리 치마’, ‘흰 띠’가 1연의 ‘흰 수건’, ‘흰 고무신’과 함께 ‘슬픈 족속’의 차림새가 상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슬픈 몸집’은 상(喪)을 당해 슬픈 상태를 이야기 하면서도 ‘가는 허리’로 볼 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처참하게 말라서 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할 정도의 몸집을 가진 것을 말한다. 나라를 잃고 거친 일을 하면서도 먹지 못해 깡마른 몸집을 상복으로 가리운 ‘슬픈 족속’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들이 슬픔에 머물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이다. ‘질끈’은 힘껏 힘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허리를 질끈 동이’는 것은 힘을 쓰기 전에 힘을 내기 위하여 취하는 동작이다. 이를 단순하게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게 치마를 동여매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나라를 잃은 슬픈 상황 속에서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힘을 내는 결심을 하는 모습인 것이다.///전한성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든 시입니다. 어두운 시기에 희망의 빛을 원했던 그는 '흰' 무언가를 계속 갈망하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슬픈 족속과 본인을 일체화시켜 민족의 슬픈 현실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거 같습니다. 시 안에서 등장하는 수건, 고무신, 저고리 치마, 띠 등은 전통적인 여성의 의상인데요. 민족성을 강하게 내세워 애국심이 표현되었습니다. 어두운 현실에서도 늘 밝은 나라를 꿈꿨던 그의 정신이 또 한 번 이 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학생에서 시인으로       윤동주는 민족, 저항, 종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시인이다. 이는 각 수식어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 다고 할 수 있으며, 수식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윤동주의 삶과 시가 포용력 있음을 말해준다. 또 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음을 말미암아 한국대표 시인으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 단 한편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시집에 수록된 「슬픈 족속」은 윤동주가 민족 시인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흰 수건을 두르고’, ‘흰 고무신을 발 에 걸리우고’, ‘흰 저고리 치마로 몸을 가리고’, ‘흰 띠로 허리를 동이는’ 모습은 예부터 흰 옷을 즐겨 입 었던 백의민족(白衣民族)을 그려내고 있다.   짤막한 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단지 백의민족의 시각적 형상화에만 그친 것이 아닌 애한(哀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흰 옷을 통해 힘없고 슬픈 몸을 가림으로써 감정의 분출보 다는 삭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 시가 잘 써지는 것도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삶과 탄압적이었던 일 제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놓고 봤을 때 그를 민족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내재적 근거를 시 「슬픈 족속」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또한, 학생에서 시인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기 직전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에게 삶의 대부분은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가 남긴 습작품은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었으며, 자선 시집에 수록한 시와 그 이후의 시는 배움과 익힘의 결과물이다. 유족들의 증언과 시집을 읽어가며 남긴 메모를 통해 습작기 때 어떻게 시를 써내려갔는지 엿볼 수 있는데, 습작기 시를 살펴보면 특히 정지용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33년에 발표한 정지용의 「비로봉」과 1937년에 쓴 윤동주의  「비로봉」은 제목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형식과 절제를 통한 풍경묘사가 매우 유사한데, 이는 윤동주가 정 지용의 작품을 모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늘 우에 사는 사람       머리에다 띄를 띄고,         이땅우에 사는 사람       허리에다 띄를 띄고,         땅속나라 사는 사람       발목에다 띄를 띄네.”                                                            -정지용, 「띄」 전문        「슬픈 족속」역시 정지용의 시 「띄」와 비교했을 때 형식적인 측면이나 신체의 각 부위를 ‘띄’로 두르 거나 ‘흰 옷’으로 가리는 모습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럼에도 「비로봉」은 습작품으로 남았고, 「슬픈 족 속」은 유일한 자선시집에 수록된다. 이는 시 전반적으로 정지용의 영향을 받았지만 모작을 넘어 ‘흰’ 색체이미지와 슬픔의 정조를 결합하여 윤동주 자신만의 시를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시기에 따라 시적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시인은 많지만, 윤동주와 같이 습작기에서 자신만의 시세 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인은 드물다. 오늘날까지 윤동주의 시가 널리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삶과 시에서 나타나는 진정성뿐만 아니라 이를 담아내기 위한 시인의 부단한 과정 역시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훈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는 모두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복식들이다. 특히 《흰 수건》과 《흰 고무신》은 남성들도 사용했던것이나 그것들을 포함하여 《흰 저고리》와 《흰 띠》는 대체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었다. 조선족으로서 자기 민족의 특징을 시에 담은것은 당연히 정체성의 확인차원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국땅에서 사는 립장에서 민족동질성의 상실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시인의 정서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런 차림의 사람을 시인은 《슬픈 족속》이라 했을까? 첫행은 그냥 현상의 진술이라 하겠지만 제2행에서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웠다고 했다. 《거친 발》은 일차적으로 항상 맨발바람에 전야작업을 해야 하는 농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시어로 정제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농민의 고단한 삶을 느낄수가 있다. 다음은 《슬픈 몸집》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슬플수는 없다. 그러니 그 몸집, 즉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인간의 몸집이 시인에게 슬픈 모습으로 보였다는 말이 된다. 다시 《가는 허리》 역시 슬픔의 한 이미지가 되겠고 동시에 동정을 유발하는 불쌍한 모습의 이미지라 하겠다. 그러니까 《거친 발》과 《슬픈 몸집》, 그리고 《가는 허리》는 제목에 나타난 《슬픈 족속》의 재해석 혹은 심화가 되겠다.  다시 말하면 이국땅에 사는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한 슬픔이 쌓이게 된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이주민으로서의 고난과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의 암흑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그냥 우리 민족의 모습, 삶의 현실을 슬프게만 보고 손을 놓고있은것은 아니다. 마지막 행에서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고있다고 했다. 허리를 질끈 동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일종의 자각이나 행동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삶이 고달프다고 해도 악착스레 생존해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과 투쟁하며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다. - 출처 : 윤동주 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 장춘식 ==================== 윤동주는 괴로운 자기탐색을 통해서 어디로 가려 했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회복(自己回復), 즉 재생을 겨냥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두 지점이 있었다. 그 하나는 조국과 동포에 대한 민족적 연대의식을 자각하는 지점이었다. 그의 시 , , 등에는 이 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슬픈 족속 (族屬)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2연 4행의 지극히 간결한 시다. 서정성이 넘치는 윤동주의 시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간결함 속에 의젓한 자세를 지닌 시이기도 하다.  흰색은 '백의민족'으로 불리던 한 민족이 가장 즐겨 입던 옷 빛깔로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 '흰'이란 말을 네 번이나 열거한으로써 암흑의 상황을 밀어내려는 백의민족의 의연한 저항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또 수건, 고무신, 저고리, 치마, 띠로 민족 전통의 여성 의상을 나타냄으로써 그 민족성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당시에 누구보다도 학대받던 여성을 한가운데 등장시킴으로써 슬픈 동족 전체를 대변시켜 놓은 듯하다. 이 여인네의 검은 머리, 거친발, 슬픈 몸집, 가는 허리는 가난하고 피로에 지친 민족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쓴 작품으로서, 그는 이미 암담한 식민지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겨레의 슬픈 모습을 예리하게, 그러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직시했던 것 같다. 이미 그는 '슬픈 족속'과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여, 민족적인 연대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고 본다. ================{자료}     윤동주 시에 나오는 '순이'는 누굴까? [해외리포트] 65(2010년도)주기 추도식이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이유 10.02.16   윤여문               ▲ 윤동주 시인을 회상하는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오형범 부부. ⓒ 윤여문   "오빠는 항상 27살 청년의 모습인데, 동생인 내가 이렇게 '함뿍' 늙어서 미안해요.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아팠더니 오빠의 기억도 가물거리고, 아무래도 곧 오빠 곁으로 갈 것 같네요. 그때 만나요, 오빠."   지난 2월 14일 오전,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열린 '윤동주 민족시인 순국 6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윤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86)가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면서 오빠에게 전한 안부다. 윤동주 시인의 정확한 순국날짜는 오늘(2월 16일)이지만 그날이 마침 설날이기도 해서 이틀 앞당겨서 추도식을 치렀다.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이민 3세'이다. 게다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쳤기 때문에 그가 모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평양 숭실학교 1년, 서울 연희전문 4년을 합해서 고작 5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서시'를 비롯한 대표작들을 모국에서 썼다.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말이다.   한편 윤동주의 생애를 증언해줄 수 있는 여동생 윤혜원은 20년 넘게 시드니에 살고 있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이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것. 어디 그뿐인가. 그의 무덤이 지린성(吉林城) 룽징(龍井)에 남아있어 혼백마저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오빠의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났다"   윤동주는 3남1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윤혜원은 7살 터울의 바로 밑 동생으로, 유난스레 명줄이 짧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마지막 피붙이다. 윤혜원 아래로는 성균관대 교수 재임 중 50대에 타계한 윤일주(시인, 건축가)와 해방정국의 와중에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았다가 30초반에 타계한 막내 윤광주(시인)가 있다.   이렇듯 3형제 모두 시인이었지만 동시로 등단한 윤일주 말고는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하거나 시집을 펴낸 일은 없다. 그래서일까. 윤혜원은 "동주오빠가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기 때문에 윤동주 문학은 스물다섯 살에 끝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윤동주 추모제가 전 세계에서 열리고 있으니 오빠는 시인으로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윤동주의 문학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그 나이에 본격적인 시세계를 구축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됐고, '서시' 또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로 꼽혔다. 25년의 짧은 생애에서 얻은 문학적 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동주 문학을 접해본 몇몇 호주 시인들도 '윤동주 신드롬'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다. 안나 비숍(크로아티아 출신 호주 시인)은 "1997년 시드니봄작가축제에서 윤동주 시편들을 접하고 나서 크게 감동받았다. 특히 '서시'와 '자화상'에 담긴 영혼은 너무 고와서 슬프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비숍은 영어로 번역된 '서시'를 원고 없이 외운다.      ▲ 지난 14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65주기 추도식 장면. ⓒ 윤여문   윤동주 문학 연구의 메카가 된 시드니   언제부턴가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한국인들이 사는 수많은 해외 도시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 관련 뉴스들이 시드니로 바로 건너온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2005년 '윤동주 60주기 추도식'에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고(詩稿) 원전연구를 해온 홍장학 선생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가졌다. 또한 2008년 9월에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를 초청해서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는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룽징에서 찾아낸 고마운 일본인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세대학교 김찬국 교수가 참석했던 48주기 추도식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윤동주 추도식을 겸한 시낭송회 등이 호주한인문인협회와 시드니우리교회 주관으로 거행됐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재호주광복회가 전면에 나섰다.   윤동주 시인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 꼿꼿한 기개를 지닌 시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다가 순국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내로라하는 단체들이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것도 광복회가 전면에 나선 이유로 보인다.      ▲ 윤동주 시인 6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시드니 교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윤여문   재호주광복회 주관으로 열린 윤동주 추도식   이번 65주기 추도식을 기획한 재호주광복회 황명하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은 독립유공자들에게 서훈하는 훈격(勳格) 7가지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독립장'을 수훈한 순국선열"이라면서 "광복회가 나서는 건 당연하고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재호주광복회의 뜻을 대한민국광복회 본부에 전했더니 광복회장의 추도사를 보내왔다. 광복회에서 처음으로 보내온 추도사"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보내온 김영일 광복회장의 추도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와 삶 속에는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일제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젊은이의 고뇌에 찬 진정성이 묻어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시에는 유년의 평화를 갈구하고, 자아성찰의 깊이를 더해가며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과거 어느 해보다도 올곧은 민족정기 발현이 필요한 해입니다. 시대를 통찰한 선생님의 명징한 시 정신을 본받아 경술국치 100년이 주는 준엄한 역사의 가르침을 하시라도 잊지 말고, 나라의 소중함과 주권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깨우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호주동포들은 윤동주 시인에게 독립장이 서훈됐을 뿐만 아니라 애국지사이자 순국선열로 모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윤동주 시에는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결여됐다"는 평가를 받는 게 의아스럽게 생각될 따름이었다.   중국 룽징-청진-원산-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윤동주 시인의 유족들은 왜 그 사실을 호주동포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그것뿐이 아니다.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생애가 드라마틱하게 극화되거나 신비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걸 단호하게 거부한다. 특히 윤동주의 생애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 언론인터뷰 등에는 손사래를 치기 일쑤다.   오죽하면 북간도에서 서울로 내려온 사람들이 부산-필리핀을 거쳐서 호주 시드니까지 와서 정착했을까? 시드니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윤동주의 유족이라는 걸 전혀 밝히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 홍길복 목사가 한국에서 건너온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윤동주 여동생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다.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은 1948년 12월, 중국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당사자다. 그 이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작품만 게재됐을 뿐이다.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에 의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공을 세웠지만 윤혜원은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결이 남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입을 꼭 다물고 살아왔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윤혜원 부부가 서울-부산-필리핀-호주로 계속 남하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 지난 2008년 시드니에서 열린 오오무라 교수가 문학세미나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윤여문   "시인은 시로서 말한다"면서 말을 아껴온 유족들   기자가 언젠가 대화 도중에 "윤동주의 민족의식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더니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변절한 문학인들, 특히 이광수의 얘기를 하면서 아주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걸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오오무라 교수가 전해준 재판기록 사본을 보니 1943년 7월 14일에 '조선독립운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았더군. 어린 동생들에게 민족 운운 할 수 없었을 터이니 그런 걸로 짐작할 수밖에 없지."   그런 다음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말을 어어 갔다. "오빠의 시를 읽으면 오빠가 그냥 보여. 신기할 정도로 오빠의 꼿꼿한 정신과 정갈한 삶이 시속에 담긴 거야. 어떤 평론가가 '윤동주는 시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일치한다'고 평했는데 그 말이 꼭 맞는다"고.   한편 2008년 9월에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 참석차 호주를 방문한 오오무라 교수는 기자한테도 '윤동주 재판기록 사본'을 건네주었다. 재판기록과 함께 가져온 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는 조선 민족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에 걸쳐 준엄한 민족적 저항정신과 기독교적 인간애로 가득 찬 서정시 124편을 남겼다. 그의 시는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청렬(淸冽)하고 우아한 혼을 지닌 동시에 민족의 운명 역시도 짊어지고 있었다."   윤동주 시 세 편에 등장하는 순이(順伊)는 누구?   65주기 추도식은 예배형식으로 진행됐다. 홍길복 목사는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이라면서 "살아서도 죽은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죽은 다음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설교했다.   김병일 시드니한인회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윤동주 선생이 윤혜원 여사께는 혈육이시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별과 같은 시인"이라면서 "특히 시드니에서 윤동주 선생의 추도식이 열린다는 사실이 한인동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복"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낭송 순서를 맡은 호주한인문인협회 이동일 부회장은 "윤동주 시인한테는 여자친구가 없었던 걸로 알려졌는데, 그의 시 세 편에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면서 "윤동주 연구자들이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은 이어서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1938), (1939), (1941)를 낭송했다. 한편 1941년에 쓴 시 에는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비록 시적화자(persona)의 고백이지만 그게 윤동주의 진짜 삶이었을 수도 있다.      ▲ '서시'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 ⓒ 오마이뉴스   성가대원 박춘애와 결혼할 뻔 했던 윤동주   윤동주의 생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혜원의 증언은 또 어떤가. "오빠는 여자친구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춘애라는 이름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여성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빠가 어른들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오형범도 비슷한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해방 후에,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옌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   윤동주 시인 65주기를 갈무리하면서 오형범 장로가 나와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했다. "시드니에서 윤동주 50주기와 60주기 추도식을 큰 규모로 치렀다. 그래서 보다 의미 깊은 70주기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윤혜원이 그때까지 살 것 같지 않아서 광복회의 65주기 추도식을 수용했다"고.   윤혜원은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상태이고 치매 치료까지 받고 있다. 남편 오형범도 건강이 나쁜 건 마찬가지. 뇌수술을 받았고 암 치료까지 받는 중이어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그래서였을까. 추도식 참가자들 모두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출처 :인터넷문학촌   글쓴이 : 송학
121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ㅅ뒤 댓글:  조회:2913  추천:0  2018-08-13
비 ㅅ 뒤                                                        윤동주   「어 ─ 얼마나 반가운비냐」 할아바지의 즐거움. 가믈들엇든 곡식 자라는소리 할아바지 담바 빠는 소라와같다. 비ㅅ뒤의 해ㅅ살은 풀닢에 아름답기도 하다.   ==============          소문은 자자하게 들었지만 공연 기간이 딱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못볼 것 같았던(그리고 표도 별로 없었던) 윤쏘달을 드디어 보고 왔다. 내가 본 공연이 세미막이라서 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테니 치이면 안되는데 싶었는데 걱정대로 치여서 왔음. 덕분에 후유증에 지금도 시름시름하고 있다. 저 시대를 다룬 작품(일제 강점기)은 마음이 아파서 오히려 피하기도 했었는데 용기내어 가기 잘했어, 라고 생각했음. 윤동주의 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많이 접했지만 그 시의 구절구절을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려보기는 또 처음 이었으니까. 넘버들도 다 좋아서 오슷 나왔으면 하고 바랐는데 현재 멜론을 뒤져보니 나와있는 곡은 세 곡밖에... ;ㅅ; 그게 아쉽다.     간신히 잡은 자리라서 내 자리는 3층의 제일 끝열. 이제까지 앉은 자리 중 극악이었지만 놀랍게도 꽤 잘 보였다. 오글의 힘을 빌린 것도 있었지만 뒤의 무대가 좀 잘린 것 외에는 만족하면서 봤음. 음향도 그렇게 나쁘지 않더라. 저번에 레베카를 예술의 전당에서 봤을 때는 음향이 너무 안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긴 오페라 하우스가 아니라 토월극장이라서 그런가? 대사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1막  플북을 사서 넘버는 다 알지만 넘버별로 평가하기보다는 내용을 적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음. 음, 윤동주 역의 박영수라는 배우님은 이 작품으로 처음 뵈었는데 윤동주 그 자체였다. 첫 장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라고 소개할 때부터 감정이 충만해져 계셨음. 감옥에 갇혀있는 윤동주를 심문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때 윤동주의 두 친구 송몽구와 강처중이 나타나서 '동주야~' 할 때부터 내 눈물샘은 오작동을 해서 울기 시작했다. 아, 근데 뭔가... 악기 소리라던가 분위기 같은 것에서부터 처연하고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ㅠㅜ    1막에서의 윤동주는 조금 나약한 면모를 보이는 청년이다. 난 비단 윤동주의 삶만을 그린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식민지 시대의 젊은 층을 다 통틀어서 '윤동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생각을 했다. 일제에 적극 대항하려는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부러워하고, 자신은 뒤에서 시를 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세심한 연기를 잘 해서 중간중간에 읊어져나오는 시구절이 특별하게 들렸던 것 같다.    경성, 하면서 나오는 잠깐의 발랄한 음악은 그래서 분위기 환기용으로 괜찮았던 것 같고, 여앙들의 춤도 볼 거리는 많았지만 사실 조금 너무 길었다는 느낌? 근데 남자 셋이 나, 처중! 나, 몽규! 나, 동주! 하는 건 너무 귀여워서 박제하고 싶었다. 그 노래 음원으로 나왔으면 좋겠음. 그리고 여주인공 선화-송문선 배우님-가 목소리가 되게 예쁘셔서 놀랐다.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투나 노래하시는 고운 목소리가 굉장히 내 취향이었는데 그 대사 중 '동주 씨가 시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 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남았음.    시위를 하다가 일본군에게 찍힌 처중이 동주의 고향으로 피신하느라 잠깐 헤어지면서 했던 대사, '동주야, 듣고 싶다, 네 시! ' 할 때도 주책맞게 울었고  윤동주가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타며 후배에게 자신의 시집을 넘겨주고 '하늘과 별과 바람의 시' 라는 제목을 붙이는 순간에도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어제 1막에서부터 정말 펑펑 많이 울었던 느낌. 냉정하게 따지자면 1막은 정말 막 엄청 훌륭하고 대단한 것 까지는 아니었는데 배우들의 연기와 그 시대에 대한 이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아픔 등에 몰입하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여주인공 선화의 비중이 좀 적다고 생각했었지만 배에 타기 전에 '제가 화 낼 자격이 되는지 말해주세요. 된다면 전 동주씨를 기다릴 거고, 아니라면 시집갈래요. '하는 대사는 당찬 여자처럼 보여서 좋았다. 무작정 남주에게 기대기만하는 여주에게는 좀 지쳐있었거든.    아, 그리고 중간 중간에 전차가 왔다갔다 한다던가 배가 나타난다던가 하는 무대 연출 엄청 좋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거나 비가 내리는 거, 달이 뜨는 것 등 배경도 엄청 효과적으로 잘 보여줬다는 느낌. 덕분에 서정적이고 잔잔한 분위기에 젖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윤동주가 일본에 문학을 배우러 가면서 친구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것도 마음 아팠다. 일본에 가려면 창씨 개명을 해야 했으니, 그 말을 막 일본군에 저항하고 온 친구에게 하는 게 부끄러웠겠지. 그런 친구가 '배울 수 있을 때 배워라. 우리에겐 앞으로 더 배움의 기회가 줄어들 거다. 그래도 조선에게도 배운 지도자가 필요해' 라고 하는 것에서 진정한 우정과 깊은 뜻이 느껴졌다. 친구 사이가 유달리 끈끈하고 좋아서 더 마음 아팠던 듯.   2막 그리고 2막은 약속된 눈물의 도가니. 일본에 유학을 간 동주와 몽규가 클럽에서 난장판을 피운 뒤 둘이서 서로에게 고맙다, 고맙다 하는 씬이 참 좋았다. 동주는 자신이 저항하고 있지 않다고,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거듭 말하지만 문집을 만들고 글을 써가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그 저항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에는 그도 '시인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결국 일본에게 수감되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다.    감옥에서 옆방에 있는 몽규에게 버텨라, 버텨라- 하며 울부짖는 노래 때 눈물 줄줄 흘렀는데 하필 그 다음이 생체 실험이라....아... 진짜..... 진짜 아.... 역사상에서 윤동주 시인에게 가해진 생체 실험은 피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걸 알면서 보니까 끙끙 앓으며 슬퍼하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친구들이 병사로 징집되는 환상을 보며 울부짖고, 연인 선화가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지도 못하는 것에 슬퍼하는 걸 보니까 정말 그 시대의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아무 생각도 못하고 줄줄 울기만 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 감옥이 거둬지며 홀로 노래할 때 달빛 조명이 관객석에 쏟아지는 연출이 참 좋았다. 그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달을 보여주는 느낌이었음. 아, 말솜씨가 딸린데다가 피곤해서 이 정도의 짧은 후기밖에 쓰지 못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좋은 극이었다. 다음에 올라온다면 또 보러가고 싶고, 박영수 라는 배우를 이 극을 통해 확실하게 각인하게 된 것 같다.  ==========================         교토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유서 깊은 강 가모가와(압천·鴨川). 천년 고도의 역사와 문화를 보듬고 흐르는 교토의 젖줄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강의 양쪽 옆구리로 늦은 단풍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진다. 이 강의 중상류 서쪽에 정지용과 윤동주가 유학한 도시샤(同志社)대학이 있다.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도 교내에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미시마 유키오 소설 《금각사》로 유명한 킨카쿠지(金閣寺)가 나온다. 강 동쪽에는 ‘하이쿠의 아버지’ 마쓰오 바쇼가 머물렀던 곤푸쿠지(金福寺)의 바쇼안(芭蕉庵)이 있다. 바쇼를 흠모했던 ‘하이쿠 3대 시인’ 요사 부손의 묘비도 이곳에 있다. 동네 아래로 내려오면 고즈넉한 ‘철학의 길’과 긴카쿠지(銀閣寺)가 이어진다. 모두가 문학의 향기로 가득한 곳이다. 고도의 강변서 음미하는 우리 시 도시샤대학은 19세기에 지은 서구식 건물의 기독교계 사립대. 고풍스런 캠퍼스가 한가롭다. 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보 교비 장학생으로 이곳에서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는 동안 강변에서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학기시험에 몰려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서 보기도’ 하며 시를 썼다. ‘압천(鴨川) 십리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로 시작하는 시 ‘압천’을 비롯해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등을 여기서 썼다. 동료들과 함께 밤비를 맞으며 찾아가던 카페 프란스의 흔적은 이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국종(異國種) 강아지’ 앞에서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라며 비애를 삭이던 그의 시혼은 강물 따라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의 시구처럼 강은 10리(4㎞) 넘게 도심을 적시며 남쪽으로 휘돌아나간다. ‘향수’에 나오는 고향 옥천의 실개천처럼. 윤동주도 이 강변에서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는 정지용보다 20년 뒤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선배 시인의 자취를 따라 도시샤로 옮겨왔다. 얼마 안 돼 사상범으로 체포된 뒤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다가 광복 6개월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떴으니 기구하기 짝이 없다. 두 사람의 시비는 대학 교정에 1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아 있다. ‘압천’과 ‘서시’가 새겨진 시비 앞의 꽃과 메모들이 한낮의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강변 동쪽으로 더 가면 그의 옛 하숙집이 있던 교토조형예술대가 나온다. 이곳에 또 다른 동주의 시비가 있다. 하이쿠 성인들의 절창도 곳곳에 곤푸쿠지의 바쇼안도 여기에서 지척이다.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정원 덕분에 일본인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한국 사람은 보기 어렵다. 바쇼가 쓴 하이쿠는 2000여편. 17자의 짧은 시에 생의 본질을 녹여낸 시성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놀라워라/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같은 절창은 영혼을 두들겨 깨운다. 그를 흠모해 이곳으로 온 요사 부손의 ‘비 내리네/ 옛사람의 밤 역시/ 나 같았으리’라는 시는 또 얼마나 눈부신가. 예전에는 2000개가 넘는 교토의 절과 신사, 황궁, 정원들에만 관심이 갔는데, 이 오랜 도시의 속살에 감춰진 미학의 이면이 조금씩 보인다. 교세라와 닌텐도, 월계관, MK택시 같은 교토기업들도 이런 문향을 머금고 컸다. 이젠 마음 맞는 사람들과 ‘교토 문학기행’을 자주 떠나고 싶다. ///한국경제 /고두현 논설위원 =======================/// 윤동주 유작에 대한 원전 연구의 성과 요약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 연구』에서 시도되고 있는 원전 연구는 방법론상 종전의 원전 연구 방식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과거의 원전 연구란 대개의 경우 서지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작품의 최초 발표 형태를 찾아낸 다음 이를 여러 이본(異本)에 수록된 형태와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는 교감(校勘)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단순한 연구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1차 자료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여기에 나타나는 숱한 현장어에 대해서는 옛말사전이나 방언사전에 수록된 어휘 목록을 뒤져 전거(典據)를 확보하고 일부 어휘에 대해서는 음운론적 분석을 곁들였다.   또한 텍스트의 미적 구조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여 여러 차례 행해진 퇴고의 이유를 추리해냄으로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편집 과정에서 일부 텍스트가 누락된 이유를 밝히고 해당 텍스트의 의의를 재평가하는 등 다각적 연구 방식을 동원하였다. - 이렇게 원전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사진판』의 1차 자료에 나타난 어휘에 덧붙인 교정(校訂), 해설만도 1700여 항목에 달한다. 필자가 거둔 연구 성과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 몇 가지다. 1) 필자는 1차 (사진)자료에 남겨진 수많은 퇴고 흔적 중 연필을 사용한 것(「초한대」 「봄」 등 11작품)의 경우 대부분 윤동주 자신이 행한 퇴고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1차 자료인 윤동주의 육필 시고 사진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퇴고 흔적은 대부분 잉크를 사용한 것으로 이는 필체 등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윤동주 자신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와는 달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판본부터 추가로 수록된 동시 중에는 그 원본에 연필로 퇴고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한데 필자는 이것이 고 정병욱 교수의 필체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필자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고 정병욱 교수가 타계하기 1년 전인 1981년에 남긴 육필 원고. 그런데 필자는 이 물리적 증거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연필로 수정된 문제의 시구(詩句)에 국어학적 분석 및 해석적 분석을 보태 자신의 주장을 다각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2) 그동안 윤동주 연구자들에게 사실상 원전으로 간주되어 온 정음사 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텍스트가 시 형태에 있어 1차 자료와 다르다는 점을 밝힌 부분. 가령 「자화상」의 경우 정음사 본의 텍스트는 이를 6연(2-2-2-2-2-3행)으로 된 가지런한 일반시의 형태로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산문시로 된 1차 자료(1-1-2-1-2-1행)의 형태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 서정시의 경우 연이나 행의 배치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텍스트 중 이렇듯 연과 행 배치에 있어 1차 자료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려 20편에 달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3) 필자의 연구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별 헤는 밤」의 경우. 필자는 여러 서지적 증거와 정황, 그리고 텍스트 해석을 통하여 이 작품은 9연으로 완결된 것이며 마지막 10연의 경우는 윤동주가 지기인 정병욱을 위해 남긴 개인적 메모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는 원전에서 배제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텍스트의 어휘 중 1차 자료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무려 570여 곳에 달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5) 1차 자료에는 있으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누락되어 온 작품은 「개」 「울적(鬱寂)」 「빗뒤」 등 모두 8편인데 필자는 이 중 판독 불능한 「가로수」를 제외하고 7편을 『정본 윤동주 전집』에 포함시켰다. 필자는 「개」 「울적(鬱寂)」 「빗뒤」 등 3편의 경우는 윤동주 문학을 연구하는 데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을 텍스트 해석 결과를 바탕으로 주장하고, 그럼에도 이 작품들이 그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누락되어 온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6) 필자의 연구 성과 중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산문 「종시(終始)」의 육필 초고의 퇴고 흔적 중 원고지째 예리하게 도려진 부분에 대한 부분(그림 4)에 대한 추적 내용. 필자는 텍스트의 분석 결과와 물리적 정황을 근거로 이 부분이 6·25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윤동주가 아닌 제3자가 잘라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은 정본, , 문학과지성사, 2004.의 출판사 서평입니다.  
1213    윤동주 "새로 발굴된" 시 8수 댓글:  조회:2136  추천:0  2018-08-11
새로 발굴된 이 시들은 1934-1939년 즉 18세로부터 25세 사이에 룡정 은진학교와 광명학교, 평양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을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우며 썼던 문학습작기의 작품들로 추정됩니다. 많이 읽고 즐거운 시간 되길 바랍니다. 1. 창구멍 바람부는 새벽에 장터가시는 우리압바 뒷자취 보고싶어서 춤을 발려 뚫려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츰해 빛어옵니다 눈나리는 저녁에 나무 팔려간 우리압바 오시나 기다리다가 이끝으로 뚫려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2. 가슴 2 늦은 가을 스트램이 숲에 쌔워 공포에 떨고 우슴웃는 흰달생각이 도망가오 3. 개 이 개 더럽잔니 아-니 이웃집 덜정수개가 오날 어승렁어승렁 우리집으로 오더니 우리 집 바두기의 미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맛겠지 더러운줄도 모르고 보기숭해서 막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느냐 하는 상으로 뛰여가겠지요 나-참 4. 울적 처음 피워본 담배맛은 아츰까지 목안에서 간질간질 타 어제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보았더니 5. 야행 정각! 마음에 아픈데 있어 고약을 붙이고 시들은 다리를 끄을고 떠나는 현장 -기적이 들리잖게 운다 사랑스런 녀인이 타박타박 땅을 굴려 쫓기에 하도 무서워 상가교(上架橋)를 기여넘다. -이제로부터 등산철도 이윽고 사색의 포푸라텐넬로 들어간다 시라는 것을 반추하다 마땅히 반추하여야 한다. -저녁연기가 놀로 된 이후 휘파람 부는 해 귀뚤램이의 노래는 마디마디 끊어져 그믐달처럼 호젓하게 슬프다. 늬는 노래배울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나보다 -늬는 다리 가는 쬐꼬만 보헤미언 내사 보리밭동리에 어머니도  누나도 있다 그네는 노래부를줄 몰라 오늘밤도 그윽한 한숨으로 보내리니.... 6. 비ㅅ뒤 《어-얼마나 반가운 비냐》 할아버지의 즐거움 가물듯엇든 곡식 자라는 소리 할아버지 담바 빠는 소리와 같다 비ㅅ뒤의 해ㅅ살은  풀잎에 아름답기도 하다. 7. 어머니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여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혀 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살았나이까? 오늘도 한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랍인형도 쓰러진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우주군히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릿가?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여주시오 8. 가로수 가로수, 단촐한 그늘밑에 구두술같은 혀바닥으로 무심히 구두술을 핥는 시름 때는 오정 싸이렌 어데로 갈것이냐? ㅁㅁ그늘은 맴돌고 따라 사나이도 맴돌고     ========================///  윤동주 시 기호학적 고찰 / 김석환 1. 머리말   윤동주 시인이 시를 쓰던 때는 일제의 억압이 극악에 달한 1940년 전후다.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일제에 무릎을 꿇거나 절필을 하여 민족 문학이암흑기에 접어든 때다. 그러한 때 시로써 꺼져 가는 민족혼을 지키고 노래하다 순국한 윤동주의 시세계에 대한 고찰은 큰 의의를 갖는다. 본고는 기존 논의의 결과를 참고하되 보완하기 위하여 가능한 전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양의 동시를 연구의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윤동주 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동시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당위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리고 기호학적 방법을 원용함으로써 그의 시세계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다는 언어를 일차적 소재로 하는 시는 일상어의약호를 벗어나 새로운 약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는 기호체계의 일종이다. 따라서 기호학적 접근은 시의 문학성을 밝히는 일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을 찾고,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을 상실에 대한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어떻게 공간기호로 체계화하여 보여 주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로 일제의 억압이 극한에 달한 시기에 시를 쓰다 순국했다는 전기적 특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리고 공간기호체계를 살피는 이유는 일상어가 문학어로 전환되면서 언어의 선조성을 잃고 공간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시텍스트 전편에 내재된 내용들은 국권 상실이라는 민족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본 논문의 텍스트는 동시를 비롯하여 그 동안 발굴된 윤동주 시인의시들이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대부분 게재된 『윤동주 시집』(범우사. 1993)으로 하였다.     2. 동심의 상실과 회복   1) 동심과 고향   윤동주 시인은 1917년 이국 땅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1935년 그가 18세 때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하면서 조국 땅 한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나 살다 그곳에서 옥사를 했으니, 그는 모국 땅에서 불과 7년밖에 못 살았다. 짧은 생애를 주로 이국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불운은 조국 상실의 결과이며 민족의 아픔을 직접 체험케 하였다. 그리고 그가지키고자 한 동심을 유린하고 동심이 살아 있는 고향을 늘 그리게 하였다. 우선 그의 동시를 중심으로 동심의 원형과 그 동심의 구체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고찰하기로 한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위의 시는 1937년 『카톨릭 소년』지에 발표한 동시다. 우선 오줌을 싼 요가 ‘빨래줄’에 걸려 있는 풍경 자체가 해학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해학적 풍경의 이면에는 국권 상실의 아픔이 강하게 배어 있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가 그 부모를 그리는 꿈을 꾸던 상황은 바로 나라를잃고 그 회복을 꿈꾸던 민족의 현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오줌’은 꿈의 결과이자 꿈의 실체이며, 그것의 흔적은 꿈에 그리던 별나라와 만주 땅 지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요를 걸어 논 ‘빨래줄’은 그것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수평적 수직적 공간기호체계의 매개적 공간기호가 된다. 즉 ‘방 안/빨래줄/만주땅’으로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와, ‘방 안/빨래줄/별나라’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가 구축되면서 ‘빨래줄’에 걸린 요는 꿈의 세계와 현실을 잇는 매개적 기호로서 사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간기호체계가 수직과 수평 양축으로 동시에 구축됨으로써 그 꿈의 간절함을 더욱 강조하며 시인의 지향 의지가 지상과 천상으로 동시에 확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가 지상의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천상의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그의 부모때에 떠나온 평양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이요, 민족의 삶의 현장인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쓴 시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 자란 “만주 땅”을 아빠가 돈벌러 간 곳, 즉 유랑의 땅이요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음 시는 만주 땅을 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향 상실의 아픔과 향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 전문   화자는 두만강 건너 남쪽의 고향과 대립되는 북쪽의 타향에 위치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두만강을 경계로 대립하는 두 공간 ‘여기(타향)/고향(집)’은 수평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쓸쓸한/따뜻한, 어머니의 부재/존재’ 등의 대립은 고향 상실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한다. 특히 헌 짚신짝이 암시하는 유랑과 고통, ‘왜 왔노’라는 화자 스스로에 대한 반문은 타향에서의 아픔을 더욱 강화한다. 하늘, 고향,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하강과 점층적인 축소는 고향의 내밀성을 강화한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라는 진술은 고향의 안식성을더해 주며, 귀향 의지는 곧 귀소본능 및 모성회귀 본능과 동일함을 암시한다. 특히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이나 집은 빈번하게 어머니나 누이 등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고향이 생명의 탄생 공간으로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동주의 시에서 고향은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곳이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전문   위 시는 산골 외딴집의 정겨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적 공간 ‘산골작이 오막살이’의 폐쇄성과 협소성은 그 공간에 내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감자를 굽는 부엌으로 더욱 축소됨으로써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욱 가중된다. 집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우주 안에 인간이 건설해 놓은 유한하고 폐쇄된 공간이며, 그 폐쇄성이 커질수록 안락성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막살이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고체가 기체로 변화된 것이다. 유동적인 물질로 변화된 그 연기는 수직적으로 상승하고 수평적으로 확산되면서 감자를 굽는 총각애들의 꿈을 암시한다. 그리고그 연기는 ‘감자 굽는 내’이며 감자는 ‘옛이야기’와 유계관계를 맺음으로써 ‘총각애들’의 추억을 상징한다. 그리고 추억이 감자를 거쳐 냄새(내)로 변화됨으로써 무한한 하늘로 유동할 가능성을 갖는다. ‘총각애들’이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향해 꿈을 피워 올리는 오막살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고향의 원형이자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들은 주로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을 배경으로 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동심을 그리고 있다   (1)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 했다     ―「귀뜨라미와 나와」 5연   (2)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반딧불」 1연   (3)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햇비」 1연   시 (1)에서 밤의 어둠 속에 빛을 내는 천체인 달은 밝고 높은 가치의 상징이며, ‘귀뜨라미’는 자연의 신비함을 들려주는 매개물이다. 그런 달빛이 내리는 밤에 ‘귀뜨라미’와 교신을 나눈다는 건 곧 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고 화합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시 (2)에서 ‘반딧불’은 ‘달조각’과동일시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발광체다. 윤동주 시인은 그 ‘반딧불’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고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곧밝고 신비한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동심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시 (3)에서 ‘햇비’는 햇빛과 함께 내리는 비, 또는 햇빛처럼 내리는 비, 비처럼 내리는햇빛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서로 대조적인 이미지인 해와 비를 합성한 이 시어는 모호성과 다의성을 갖는데 그 물리적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해와 비가 모두 수직 하강성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화자는 옥수숫대처럼 자라 ‘햇비’를 맞음으로써 수직적 대립은 해체되고 하나로융합된다. 이는 곧 높고 밝은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동심을 암시한다.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보듯 그의 동시에서 수직적으로 밝고 높은 가치의 세계와, 수평적으로는 자연 및 인간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사는 동심을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보다 더욱 가치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성은 윤동주의 동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시정신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바로지고의 가치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고 공존하며 사는 곳이며 동심의 상징적 공간이며 그 원형이다.   2) 어두운 고향   윤동주 시인은 동심의 순수성과 그것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 고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비극 속에서 그것을 지키고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곧 시대의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것이며 우주적 질서 속에서 참다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기원이다. 어둠은 윤동주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지배하는 핵심적 이미지며 상실된 현실의 현실을 암시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동심이 추구하던 밝은 빛이 없는 상태로서 시야를 가리는 장막이며 장애물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고향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눈물지으며 ‘또 다른 고향’으로 가려는 꿈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또 다른 고향’은 화자가 있는 현실 공간인 고향과 대립되며, 2연에 나타난 우주 및 하늘과 같은 패러다임으로 의미상 등가치다. 따라서 두 공간 기호는 수평적(내/외) 또는 수직적(상/하)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한다. 화자가 있는 고향은 ‘눈물, 우는, 어둠, 풍화작용’ 등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정적 공간이며 그와 대립되는 곳은 ‘아름다운’긍정적 공간이다. 화자가 새로운 고향을 그리는 까닭은 고향에 돌아와 방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그 어둠 속에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어둠은 시야를 가려 우주로 통하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화자는 바람 소리를 들음으로써 방이 우주로 통하고 있음을 감지한다.바람은 하늘과 방의 대립을 해체하고 이어 주는 매개적 기호이며 백골을 풍화작용 시킨다. 그런데 백골은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 대립되는 현실적 자아의 상징이다.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던 화자는 새로운 방 밖의 세계에 눈뜨고 방 안과 고향의 어둠, 즉 부정적 현실을 감지한다. 화자가 눈물지으며 우는 것은 자신의 기대와 그러한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이다. 울음과 눈물은 바로 자아의 기대가 어긋남으로써 야기되는 감정의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울던 화자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은 ‘지조 높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개는 어두운 현실을 거부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거나 자신보다 지조 높은 타인을 상징한다. 그러한 개 짖는 소리를 듣던 화자는 이제 더욱 급박한 어조로 새로운 세계로 ‘가자’고 다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와 상반된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또 다른 고향을 향하고자 하는 것은 윤동주 시인이 어둠에 매몰당하지 않는 ‘아름다운 혼’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혼은 바로 앞에서 논한 밝고 평화를 사랑하는 동심과 같은 것이다. 그는 동심의 순수성이유린되는 고향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거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다른 고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시 「돌아와 보는 방」에서 화자는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는데, 그것은 실내와 실외의 차이를 없게 만들어 그 대립을 해체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또한 그것은 밝은 대낮과 차이를 만들어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화자는 이제 어둔 방에서 창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 역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오던 길도 비에 젖어 있다. 결국 낮과 밤, 실내와 실외는 모두 부정적이고 절망적일 뿐이다. 어둠은 시야의 모든 것을 가려 절망에 빠지게 하는장애물이며, 비에 의해 그러한 절망적 상황은 더욱 강조된다. 비는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 「쉽게 쓰여 진 시」에서 역시 창 밖엔 밤비가 내리는데, 그러한 실외를 지켜보는 화자는 자신의 방을 “남의 나라”로 여긴다. 밤비가 내리는 실외와 대조적으로 안락하고 익숙한 공간인 방을그렇게 느끼는 것은 밤비가 암시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크기 때문이다. 시 「눈 감고 간다」에서 시적 배경은 어두운 밤이며, 그것은 암울한 시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밤은 곧 태양이 뜨지 않아 공간이 어두운 시간이며 그 어둠은 태양과 별의 밝음과 대립된다. 화자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고 가거라”고 명령하는데 그것은 곧 아이들이나 그들이 대신하는 민족에게어둠을 초월하여 태양과 별을 향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윤동주 시인의 궁극적 지향의 대상이 지상적인 것보다 밝고 영원한 천상적인것임을 암시해 준다. 시 「거리에서」에서 화자는 앞의 시에서 방 안에 있던 것과는 달리 밤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를 수식하는 ‘괴롬, 재색빛, 밤’ 등은거리가 대신하는 시대의 아픔과 암울한 상황을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 시에서 공간적 배경엔 주로 어둠이 있으며 그것은 절망적이고 괴로운 현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자연히 밝은 낮보다 빛이 없는 밤이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배경 속에서 화자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자아를 성찰하고 밝은 세계로 초월을 시도한다. 특히 어두운 방은 바로 어두운 시대 속에 사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상징하는 구체적 공간이다.   3) 자아성찰과 동심의 회복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현실은 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둠에 매몰되거나 잠들지 않고 깨어 자아를 성찰한다. 그리고 어둠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그곳을 지향한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동심을 회복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일부   위의 시에서 ‘밤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암울한 현실을 암시하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그러한 밤비가 내리는 밤 화자는 남의 나라처럼 느껴지는 ‘육첩방’에서 부정적인 현실을 감지하고 ‘홀로 침전하는 것’이다. 어둠은 현실의 암울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주위를 모두 가려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각한 화자는 쉽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은 시는 어둠과 대립하고 거부하는 밝은 정신으로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쓰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자가 방 안에 등불을 밝힘으로써 창을 경계로 내/외공간은 밝음/어둠으로 대립되는데, 그러한 행위는 ‘어둠을 조곰 내몰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시인으로서 천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등불은 방 안밖에 밝힐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화자는 온 세상이 밝아질 아침을 기다린다. 눈물과 위안이 암시하는 양극적 감정으로 손을 잡는 것은 바로 그 한계성을 인식하고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감당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미래를 기다리는 자세는 윤동주 시인 시에 일관된어둠의 극복 방식이다. 다음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아성찰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6연   (2)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 3연   (3)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참회록」 4연   시에서 화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우물은 그 물질적 속성 때문에 거울이요, 지상/천상, 현실/비현실, 현재/과거를 잇는 창문 구실을 한다. 화자는 그 우물을 통하여 ‘하늘, 구름, 바람’ 등 천상적 이미지와 추억처럼 어려 있는 사나이를 본다. 특히 우물이 거울과 창문처럼 매개적 기호작용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산모퉁이 돌아 외딴 곳, 즉 현실 공간의 경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바로 현실을벗어난 공간에서 이상적인 공간인 하늘과 현실적 자아와 대립되는 이상적 자아의 구체적 형상인 사나이를 보는 것이다. 화자는 앞 연에서 “돌아가다생각하고 도로 가 들여다보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그렇게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사나이를 보며 화자가 미움과 가엾음을 느끼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상반성 때문이다. 시 (2)에서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홀로 있다. 그리고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눈을’ 감는다. 여기서 창과 어둠은 ‘방/세상’의 경계에 있는 매개적 공간기호로서 두 공간을 차단한다. 그리고 마음의 창인 눈을 감는 행위는 자아/세상을 차단하는 매개적 기호 행위다. 그리하여 화자는 폐쇄된 방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즉 자아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속에서 익어가는 사상을 발견한다. 시 (3)에서 밤에 거울을 닦는 행위 역시 잃었던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은세상으로 향하던 화자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거울은 ‘현실적 자아/이상적 자아’의 매개적 기호며, 거울을 닦는 것은 거울의 내/외의대립을 해체함으로써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분열된 두 자아를 하나로 화합시키려는 심리를 암시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거나, 밤이다. 또한 공간적 배경은 주로 현실을 벗어나고 차단된 곳으로 이상과 현실의 매개적 공간이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현실과 차단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응시하기에 적당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를 성찰하면서 시인은 슬픔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분열을 발견하거나 부정적 현실을 거부하거나 개선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학에서 비롯된다. 자아성찰을 끝낸 시인은 이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초월을 시도한다. 그것은 시 「새벽이 올 때까지」에서 보듯 “이제 새벽이 오면/나팔소리 들려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4.5연   위의 시에서 ‘하늘/십자가/(지상)’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인간’과 서로 대응된다. 따라서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지상, 하나님/인간의 매개적 기호로서 양극을 이어 주는 사다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를 지고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늘과 지상의 관계를 잇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는 곧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속죄양이 되어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고 밝히겠다는 지사적 결의다. 그것은 또한 밝음과 평화를 지향하는 동심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위와 같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암시하는 주된 약호다. 즉 수직축의 ‘상/하는 이상/현실, 밝음/어둠, 긍정/부정’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하방에서 상방을 향한 기호의 수직 상승은 현실에 반발하여 이상 세계를 향하는 그의 시정신을 암시한다. 다음 시들 역시 수직적 공간기호체계를 구축하며 수직 상승성으로 그러한 시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1)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헤는 밤」 9,10연   (2)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데로 을라가고 싶다     ―「산상」 4연 시 (1)에서 화자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슬퍼 우는 거라고 여긴다. 벌레는 바로 밤이 상징하는 어둔 현실 속에서 시인으로서 역할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걸 자책하는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부끄러움과 슬픔은 그런 자아성찰 끝에 느끼는 자책감에서비롯된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이 묻힌 언덕을 무덤과 동일시하며 봄이 오면 그 위에 풀이 무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그 이면엔 ‘흙 속(이름)/언덕 위(풀)/하늘(별)’이란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되며 이름은 풀의 씨앗이 되어 수직 성장해 그 수직적 대립은 해체된다. 즉 시인은 별이상징하는 밝은 세계를 향한 동경과 지향성을 수직적으로 성장하는 풀이라는 기호로 보여  준다. 따라 이름을 써서 흙으로 묻는 행위는 가입의례이며부활을 위한 죽음과 같다. 시 (2)에서 거리로부터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수직 상승의 욕구를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이 무너진 후의 부정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높은 가치의 세계로 초월하려는 의지를 암시 한다. 외에도 시 「肝간」에서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어 독수리에게 “와서 뜯어 먹어라”고 명령하는데, 그 배후엔 ‘바다 속(용궁)/바위 위/하늘’로 수직적 공간 기호체계가 구축된다. 그리고 시인은 날개가 있어 수직으로 상승적 운동을 할 수 있는 독수리로 초월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수직축의 하방으로부터 상방인 하늘로 상승하는 기호로 초월의지를 암시한다. 이는 하방보다 상방에 더욱 가치 있는 세계가존재한다고 여기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은 직립하는 인간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중력의 방향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윤동주 시에서는 수직적 상승에 의해서만 아니라 수평적 이동으로도 이상세계를 향한 지향성을 보여 준다. 그 지향성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시정신의 원형을 이루는 동심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시 「산골물」에서 “바다로 가자”, 시 「눈을 감고 간다」에서 “가진바 씨앗을/뿌리면서 가자” 등은 바로 그러한 예다. 그리고 기타의 시에서도 수평적 이동을 지시하는 ‘가다’가 빈번하게 등장하며 시인의 동심의 회복을 위한 초월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윤동주 시인의 동시에 나타난 동심의 원형과 동심의 상징적 공간인 고향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동심과 고향의 상실을 어떻게 그리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초월하는가를 고찰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일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에서 생활하거나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다. 즉 짧은 생애의 많은 기간을 이국에서 생활하며 고향을 그리는 여러 편의 동시를 썼다. 그의 동시에서 고향은 여성적 이미지와 유계관계를 맺으면서 평화롭고 안락한 모성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인정으로 어우러져 꿈을 키우는 공간이다. 즉 밝고 영원한 이상적 세계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화합하며 사는 동심의 구체적이고 상징적 공간이다. 또한 민족이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던 상실 이전의 모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인은 그러한 동심과 고향을 상실하고 그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상실한 고향의 모습은 늘 어두운 밤이 배경으로 되며 밝은 고향의모습과 대립된다. 그러한 어둠은 곧 암울한 시대와 슬픈 내면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러한 어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고향을 지향한다. 그것은 곧 동심과 고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 싶은 의지다. 그런데 그 동심과 고향의 회복 과정을 보면, 어둠 속에서자아를 성찰하며 부끄럽고 슬픈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한 시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어둠과 맞서 등불을 밝히며 밝은 미래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동심의 순수성을 지키고 상실한 고향과 모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다.(『문예운동』 2017년 겨울호에서 전재)        
1212    {자료} -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댓글:  조회:3032  추천:0  2018-08-11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1911년 일본의 조선 침략 비판한 의 도쿠토미 로카…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전평화사상             일본 규슈는 성질 급한 봄맞이꾼들이 매견월(梅見月)에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다. 그렇다고 만개하기 직전의 초롱초롱한 매화 꽃망울 타령이나 벳푸 온천욕만으로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사의 상흔이 너무 쓰린 관광지다. 해마다 2월16일 윤동주 기일이면 후쿠오카 옛 형무소 부근 좁은 니시모모치공원(현 구치소 담장을 끼고 있음)에서는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대표 마나기 미기코) 회원들이 이 수려한 평화주의자 시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연다. 이 모임 창설자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대학 명예교수는 몇 년째 여기에다 윤동주 시비 건립을 위해 뛰고 있으나 당국은 허가를 않고 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일본인들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도 윤동주 추모 행사는 매년 열리고 있다. 평화를 기리는 시민들이 이토록 열망하는데도 고희를 맞는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는 휘청거리고, 아베 신조와 박근혜 두 정권은 역사 교과서로 궁합을 맞춰가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 전초전으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대란의 징조다.     소호·로카 형제의 옛집과 로카의 초상. 임헌영, /갈무리 이럴 때 규슈의 구마모토에 꼭 찾아봐야 할 고택이 하나 있다. 도쿠토미 소호·로카 형제가 성장기를 보낸 집이다. 형 소호(1863~1957)는 이광수와 부자지간의 연을 맺은 ‘일본의 괴벨스’로 식민지 조선 ‘언론문화계의 총독’이었고, 동생 로카(1868~1927)는 톨스토이를 숭앙한 기독교 신자로 (不如歸)를 쓴 반침략 평화주의 작가다. 소호가 세운 오에의숙의 터전이기도 한 이 집 정원에는 개오동나무가 우람차다. 그들의 스승이자 도시샤대학 창설자인 니지마 조가 준 기념수의 후예들이다. 공해병으로 악명 높았던 미나마타에서 태어난 이 형제는 구마모토로 이사(1870), 여기서 성장기를 보냈다. 다섯 살 아래인 동생 도쿠토미 로카는 형의 파시즘 선동을 용납할 수 없어서, “경세의 수단으로서 형은 제국주의를 취하고 (…) 나는 인도의 대의를 취했다”는 (1903)을 공개했다. 형과의 변별성을 위해 아예 성을 갈아서 갓머리의 점을 없앤 ‘도미’(冨)로 표기해서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그대로 명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로카가 임종 때 형과 화해했다는 걸 부각시켜 동생의 인격이나 품성, 괴팍한 신앙심, 혹은 형에 대한 열등감이 불화의 원인이라며 동생의 평화주의를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인인 우치무라 간조와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기노시타 나오에 등은 로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제국주의자·평화주의자 형제 로카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다닌 윤동주 시인의 선배인데, 그의 글 중 감동의 절정을 이룬 건 산문 (1911)이다. 1910년 5월, 일본은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등 진보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대역’ 조작 사건을 꾸며 레닌보다 16년이나 먼저 제국주의론(·1901)을 낸 고토쿠 슈스이 외 26명을 추렸다. 대역죄는 3심제가 아닌 단심으로 사형 선고 일주일 뒤(대법 확정 18시간 만에 처형된 인혁당 사건을 연상) 12명을 처형한 것은 1911년 1월24~25일. 교수대의 밧줄이 미처 식기도 전인 2월1일, 명문 제1고교(구제 1고) 변론부가 주관한 특별강연에 로카가 초청됐다. 그는 국가란 모자처럼 “머리 위에 쓰지만 머리를 지나치게 누르지 않게 해야” 되는데, 머리를 무겁게 하면 모반할 수밖에 없다면서 사자후를 토했다. “모반이란 반역이고 배반이다. 그럼 무엇을 배반하는가? 낡은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이 시대는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 모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반인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것은 항상 모반이다.” “제군, 우리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대해서, 그리고 주위에 대해서.” 이 강연을 기획한 변론부 학생 가와카미 조타로는 나중에 사회당 위원장이 되는데, 그 감동은 2011년 로카 강연 100주년을 맞아 되살아났다. 서울에서도 이런 통쾌한 명연설을 들을 수는 없을까. 로카 저력의 뿌리는 반전·평화 사상의 톨스토이즘일 것이다. 1906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로카는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 함께 5일간 지내면서 평화사상을 체득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방일, 국회 연설에서 로카의 톨스토이 방문을 러일 친선의 예로 거론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귀국한 로카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을 겨냥해 (12월)를 썼다. “그 승리도 사실은 러시아를 무릎 꿇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이라 했다. “그대의 독립이 만약 10여 개 사단의 육군과 수십만 톤의 해군과 어떤 동맹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독립은 실로 가여운 독립이로다”(,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살림 펴냄, 146쪽, 재인용)라고 로카는 말한다. 남의 나라 자원을 약탈해 얻은 이익까지 매도한 그는 “한발 잘못 디디면 그대가 거둔 전승은 망국으로 가는 시작”이 된다고도 경고했다. 투철한 반전·평화 사상이다.     1967년 10월 도쿠토미 로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구마모토의 기쿠치공원에 건립된 문학비. 임헌영, /갈무리 로카의 저력, 톨스토이즘 역사학자 하라 아키라는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으로 불러야 옳다면서 그 이유를 오로지 조선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서 찾는다. 지금 미·일·한 3국 동맹이 제3차 조선전쟁을 초래할 조짐임을 시사해준 대목이다. 소호와 로카 형제의 서로 다른 역사인식은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쟁이냐 평화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한다. 2월, 규슈에 가면 윤동주 시인이 감방에서 들었을 하카타의 해조음을 꼭 들어보시라. 그의 절규에도 귀 기울여보시라. 그래도 역시나 아베와 박근혜 정권은 로카가 아닌 소호의 손을 잡을 것만 같다. 아, 울적한 병신년 정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1211    윤동주 시를 풀어서 산문으로 쓰다... 댓글:  조회:2676  추천:0  2018-08-11
시를 풀어서 산문으로 쓰기     맑은 가을 하늘엔 많은 별 들이 떠 있습니다. 나는 하나하나 별을 셀 준비를 합니다. 높은 하늘에 있는 많은 별을 셀 수 있을까요? 의문이 들지만 하나하나 셀 준비를 합니다. 하나하나 별을 가슴에 담으며 세어봅니다. 어서어서 세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아침이 올테고, 그러면 별은 태양의 빛 때문에 빛을 잃고 말겁니다. 그러나 내일 밤도 남아있으니까요. 내일 밤에도 별은 뜰 것이니까요. 그리고 아직 남은 인생동안 밤을 많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별을 셉니다. 별을 세면서... 하나하나 가슴에 담으며 생각합니다. 먼저 별 하나를 셌습니다. 눈을 감으니 지난 추억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별을 하나 더 세봅니다. 내 지난 사랑이 생각납니다. 별을 하나 더 세봅니다. 혼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때에 그 쓸쓸함이 생각납니다. 하나 더 세어봅니다. 그 동안 많이 뵙던, 그러나 이제는 뵐 수 없는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동경하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별을 하나 더 세어봅니다. 제가 좋아하던 감동적인 시들이 생각납니다. 마지막으로 별을 하너 더 세어봅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나는 별 하나마다 아름다운 말을 하나씩 붙여봅니다. 별을 세며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옆에 앉았던 여자아이들과 친했던 남자아이들... 선생님들... 좋아했던 동화책...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생김새, 좋아했던 동물들... 모든게 생각나지만 가장 그립고 그리운 것은... 어머니입니다. 멀리 멀리 북간도에 계신 우리 어머니... 볼 수 없어서 더욱 더 그리운 어머님. 어머님이 너무나 그립고 보고싶고 생각납니다. 별을 세는것도 어쩌면 어머니가 생각나서 일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제 이름을 땅바닥에 앉아 손가락으로 써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제 이름을 불러 주시는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재빨리 지워버렸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오고 여름이 지나 다시 가을이 와도, 어머님은 볼 수 없는것일까요. 다시 가을이 될 때까지 이 곳엔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어머님을 한번 더 생각하고 저는 발걸음을 돌립니다.     나는 생각했다. 여러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람이 도저히 할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지 생각했다. 나는 다짐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모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해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죽을 때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정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지. 그런 부도덕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부들부들 떨 것이고, 괜히 두려워하며 살 것이니까. 난 당당하게 다녀야지. 생각했음에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어쩌면 안 좋은 행동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에게도 못되게 굴었을지도 모르고, 학교 친구에게도, 아는 사람에게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나 모르는 사이 나는 못된 짓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여러사람 에게 해를 입혔을지 모른다... 괜히 매서운 바람이 분다. 마지막 남은 잎새가 흔들린다. 해를 입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괴로워진다. 난 다시 생각했다. 이제는 순결하게 살아야지. 남에게 해 입히지 않고 살아야지. 별을 노래하는 것처럼, 지나간 일은 반성하고 앞으로는 잘 해야지. 지나가버린 것들도 하나하나 사랑해주어야지. 살아있는 것도 죽어버린 것도, 나 자신도 남도, 다 사랑해주어야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면 길이 보이리라 생각했다. 남에게 해를 입히며 산 사람들과는 다른 길이 보이겠지. 그 길을 걸으면 된다. 그 길은 곧 내가 살면서 한 행동의 대가일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죽을 때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 것 이라고.     오랜만에 울적한 맘을 담아 산에 올라왔습니다. 산에 올라오니 맑은 공기와 푸른 나무들, 저마다 짹짹거리는 새들이 저를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걸으며 산을 올라오니 우물이 있었습니다. 목 좀 축이자는 생각으로 우물에 다가갔습니다. 다가간 우물에는 풍경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이 비춰지며 물결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비춰졌습니다. 제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생각해도 못마땅한 일을 한 제가 미워 우물 속에 돌을 던져 버렸습니다. 출렁이는 물을 보고 뒤를 돌아섰으나, 어쩐지 우울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반성하고 있는 제 얼굴이 제가 생각해도 가여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 우물에 얼굴을 비춰봅니다. 우울한 얼굴은 그대로입니다. 다시 제 얼굴을 보니 오늘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 다시 울적해 져, 다시 뒤를 돌아버리고 맙니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비춰보려 우물에 다가갑니다. 우물에 있는 내 얼굴이 너무나 부끄럽고 실망스럽습니다. 우물 속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남자가 비춰졌습니다. 몇 번을 해도 제 얼굴은 실망스럽겠지요. 다시는 오늘같이 실망스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후회를 해봅니다. 반성을 해봅니다. 여전히 우물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하늘과 실망스러운 제가 비춰지고 있습니다.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