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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이 시는 나라를 잃고 가난하고 거칠고 슬픈 삶을 사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잃은 슬픈 족속(族屬)이 흰 수건를 검은 머리에 두르고 거친 발에 흰 고무신을 신고 흰 저고리 치마를 입고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연으로 된 시로 <슬픈 족속(族屬)>은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을 의미하고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에서 화자가 보는 대상은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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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족속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든 시입니다. |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학생에서 시인으로
윤동주는 민족, 저항, 종교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시인이다. 이는 각 수식어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
다고 할 수 있으며, 수식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윤동주의 삶과 시가 포용력 있음을 말해준다. 또
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음을 말미암아 한국대표 시인으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 단 한편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시집에
수록된 「슬픈 족속」은 윤동주가 민족 시인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흰 수건을 두르고’, ‘흰 고무신을 발
에 걸리우고’, ‘흰 저고리 치마로 몸을 가리고’, ‘흰 띠로 허리를 동이는’ 모습은 예부터 흰 옷을 즐겨 입
었던 백의민족(白衣民族)을 그려내고 있다.
짤막한 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단지 백의민족의 시각적 형상화에만 그친
것이 아닌 애한(哀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흰 옷을 통해 힘없고 슬픈 몸을 가림으로써 감정의 분출보
다는 삭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 시가 잘 써지는 것도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삶과 탄압적이었던 일
제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놓고 봤을 때 그를 민족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내재적 근거를
시 「슬픈 족속」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또한, 학생에서 시인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기 직전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에게 삶의 대부분은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가 남긴 습작품은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었으며, 자선
시집에 수록한 시와 그 이후의 시는 배움과 익힘의 결과물이다. 유족들의 증언과 시집을 읽어가며 남긴
메모를 통해 습작기 때 어떻게 시를 써내려갔는지 엿볼 수 있는데, 습작기 시를 살펴보면 특히 정지용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33년에 발표한 정지용의 「비로봉」과 1937년에 쓴 윤동주의
「비로봉」은 제목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형식과 절제를 통한 풍경묘사가 매우 유사한데, 이는 윤동주가 정
지용의 작품을 모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늘 우에 사는 사람
머리에다 띄를 띄고,
이땅우에 사는 사람
허리에다 띄를 띄고,
땅속나라 사는 사람
발목에다 띄를 띄네.”
-정지용, 「띄」 전문
「슬픈 족속」역시 정지용의 시 「띄」와 비교했을 때 형식적인 측면이나 신체의 각 부위를 ‘띄’로 두르
거나 ‘흰 옷’으로 가리는 모습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럼에도 「비로봉」은 습작품으로 남았고, 「슬픈 족
속」은 유일한 자선시집에 수록된다. 이는 시 전반적으로 정지용의 영향을 받았지만 모작을 넘어 ‘흰’
색체이미지와 슬픔의 정조를 결합하여 윤동주 자신만의 시를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시기에 따라 시적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시인은 많지만, 윤동주와 같이 습작기에서 자신만의 시세
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인은 드물다. 오늘날까지 윤동주의 시가 널리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삶과 시에서 나타나는 진정성뿐만 아니라 이를 담아내기 위한 시인의 부단한 과정 역시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훈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윤동주는 괴로운 자기탐색을 통해서 어디로 가려 했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회복(自己回復), 즉 재생을 겨냥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두 지점이 있었다. 그 하나는 조국과 동포에 대한 민족적 연대의식을 자각하는 지점이었다. 그의 시 <새벽이 올 때까지>, <슬픈 족속>, <아우의 인상화> 등에는 이 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슬픈 족속 (族屬)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 9.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2연 4행의 지극히 간결한 시다. 서정성이 넘치는 윤동주의 시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간결함 속에 의젓한 자세를 지닌 시이기도 하다.
흰색은 '백의민족'으로 불리던 한 민족이 가장 즐겨 입던 옷 빛깔로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 '흰'이란 말을 네 번이나 열거한으로써 암흑의 상황을 밀어내려는 백의민족의 의연한 저항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또 수건, 고무신, 저고리, 치마, 띠로 민족 전통의 여성 의상을 나타냄으로써 그 민족성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당시에 누구보다도 학대받던 여성을 한가운데 등장시킴으로써 슬픈 동족 전체를 대변시켜 놓은 듯하다. 이 여인네의 검은 머리, 거친발, 슬픈 몸집, 가는 허리는 가난하고 피로에 지친 민족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쓴 작품으로서, 그는 이미 암담한 식민지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겨레의 슬픈 모습을 예리하게, 그러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직시했던 것 같다. 이미 그는 '슬픈 족속'과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여, 민족적인 연대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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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터넷문학촌 글쓴이 : 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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