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고향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이 시는 두만강 건너 쓸쓸한 타국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와서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헌 짚신짝을 신고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타국 땅에 왔으나 왜 왔을까 후회가 되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이 있고 그 고향에는 화자의 내 어머니가 계신다. 고향집이 그립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향집>은 고향을 떠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곳이다.
이 시에서는 시대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의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시는 짧을 뿐이지 동시적인 요소는 없다.
‘헌 짚신짝 끄을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은
두만강을 건너 아무 것도 없는 몸으로 타국에 와서 사는 고단한 삶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는 화자의 경제적 처기가 몹시 어려운 상황임을 알려준다.
‘나 여기 왜 왔노’는 화자가 ‘두만강을 건너’ 타국땅에 와서 ‘쓸쓸’함을 느끼며 어렵게 사는 것을 후회하는 말이다. ’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는 화자가 어머니가 계신 곳인 ‘남쪽 하늘 저 밑에 /
따뜻한 내 고향’을 그리워 하는 내용이다. 화자가 자신의 고향을 ‘남쪽 하늘 저 밑’이라 한 것은 시인의 고향인 용정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화자가 살길을 찾아 만주로 와서 고생하는 유이민을 보고 그 감정을 시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뜻한 내 고향’은 살기 좋은 고향이라는 의미보다는 지금 있는 만주땅에 비하여 따뜻하다는 의미와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쓸쓸’하게 살고 있는 만주땅보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쓸쓸하지는 않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향이 살기 좋다면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와서 살려하진 않았을 것이다.///전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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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만주 간동성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최근 시인의 삶을 엮은 사진집 <사진으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윤동주100년 포럼)이 나왔습니다. 생가부터 학창시절, 육필원고, 장례식 모습을 담았습니다.
윤동주. 연희전문 입학 후 찍은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재옥은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
윤동주 생가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와 같은 집에서 태어나 명동중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 등을 함께 다닌 ‘청년 문사’ 송몽규. 윤동주의 장례식이 고향에서 치러진 것은 1945년 3월 6일. 하루 뒤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는 이종사촌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고종사촌이다.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송몽규, 문익환목사가 그의 은진중학교 동기이며, 강원룡 목사가 은진중학교 5년 후배다.
당시 은진중학교 건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아버지 윤영석은 윤동주가 의사가 되길 바랐다. 이 어려운 시대에 의학을 공부해야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의 조부와 외숙부가 아버지를 설득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연희 숲에서. 서 있는 사람 중 왼쪽 두번째가 윤동주/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 친구 강처중은 1945년 자신이 다니던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를 게재하며, 윤동주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렸다. 1941년 12월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자필 시고집 3부 만들었다. 한부는 자신이 갖고, 한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다른 한부는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줬다.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의 신변을 염려해 시집 출간을 보류하라고 권했고, 윤동주는 이를 받아들였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권도 가지지 못한 시인이다.
1945년 경향신문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2년 4월 일본 릿교대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학부 단발령’이 발령됐다. 이후 한 학기 만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시적 스승으로 삼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다. 공초 오상순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릿교대 재학시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와서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삭발한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은 시모가모 경찰서에 갇혀 있던 윤동주가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동주는 바닷물을 인체에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 정문/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1945년 3월 6일 윤동주의 용정 고향집 마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 집례는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맡았다. 장례식 때는 연희전문 <문우>에 실렸던 ‘우물 속의 자화상’ ‘새로운 길’ 등 윤동주의 시 두편이 낭독됐다.
윤동주 장례식/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윤동주의 육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위), ‘쉽게 씌어진 시’(아래) 육필 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참회록’ 육필원고/윤동주100년 포럼 제공
/곽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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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지난 1일 오후 3시, 마나기 미키코(馬男木美喜子, 53)씨와 나는 윤동주 시인이 죽어간 후쿠오카 형무소(현 구치소) 건물 뒤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로 이 노래를 불렀다. 번안곡인 이 노래는 윤동주 시인이 평소 즐겨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27살 조선청년 윤동주, 유학지였던 일본에서 금지된 언어인 한국어로 시를 쓴다는 이유 때문에 잡혀와 이곳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정다운 고향"을 그리며 죽어가야 했던 쓰라린 마음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마나기 미키코 씨도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마나기 미키코씨는 오랫동안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 · 尹東柱の詩を読む会)의 대표를 맡아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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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형무소터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대표 마나기 미키코 씨와 함께 윤동주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뒤 건물은 현재 구치소 자리로 옛 형무소 터다.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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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후쿠오카 형무소 자리는 이쪽에 보이는 사와라구청(早良區役所)과 버스터미널 자리부터 시작해서 12헥타르에 해당하는 넓이였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다 헐려버렸습니다."
마나기 미키코 씨는 나를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곳으로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후지사키역(藤崎驛)출구로 나오니 그곳이 곧바로 옛 형무소 자리였다.
윤동주 시인이 숨져간 후쿠오카 형무소는 1913년, 하카다만(博多湾) 가까운 곳에 12헥타르(3만6000평) 규모로 세워졌다. 당시 사진을 보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찍은 형무소 시설은 사각형의 높은 담장 속에 마름모꼴로 긴 지붕이 이어져 있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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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형무소 2 3만6000평에 이르는 면적의 옛 후쿠오카 형무소 전경,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은 스물일곱 나이로 순국했다. 현재 형무소 터에는 버스정류장, 구청, 아파트, 경찰서 등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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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자리였던 곳을 한 바퀴 돌아보시지요." 유창한 한국말로 마나기 미키코씨는 나를 안내했다. 우리는 현재 사와라구청과 버스터미널로 바뀌어버린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자 그리 크지 않은 가나구즈강(金屑川)이 나타났다. 겨울철이라 물이 거의 바닥을 들어낸 곳에는 왜가리들만 간간이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가나구즈강을 사이에 두고 강 이쪽편이 옛 형무소 자리였는데 강 하류는 하카다만(博多湾)과 이어지고 있었다. 강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나기 미키코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형무소 같아 보이는 건물(현 구치소) 뒤편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은 맞은편 아파트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모치니시공원(百道西公園)으로 형무소 담장을 끼고 직사각형으로 길게 조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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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형무소 3 옛 형무소(현, 구치소) 터 뒷편에서는 해마다 윤동주 시인의 추도회가 열린다.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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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모임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으로 한국의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추도회에 함께 했다. 옛 형무소 터에서.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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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우리들이 해마다 윤동주 추모회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한국의 성신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함께 윤동주 시인 추모 행사를 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물론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도 불렀지요."
해마다 이곳에서는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회원들이 중심이 돼 윤동주의 순국일인 2월 17일을 전후로 그의 시를 읽으며 27세로 생을 마감한 조선청년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을 열고 있다. 마나기 미키코씨는 추모 행사를 하는 지점에 서서 윤동주의 <자화상>을 낭송해주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뒷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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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기 미키코씨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낭송해주었다.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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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이란 대목에서 나는 몇 해 전 찾았던 북간도 용정의 너른 뜰을 떠올렸다. 방학이면 선바위 모퉁이를 돌아 그리운 고향집으로 달려갔던 시인, 사랑하던 누이동생 혜원이와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 고향 친구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꿈엔들 생각이나 했을까?
마나기 미키코씨는 찬바람이 부는 쓸쓸한 공원 안, 추모회를 하던 장소에서 나를 위해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한국어로 또박또박 낭송해줬다. 순간 어디선가 윤동주 시인이 우리를 향해 손뼉을 치는 듯한 환상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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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대표 마나기 미키코씨(왼쪽)와 기자.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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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낭송을 마치고 다시 형무소의 시작점까지 함께 걸었다. 3만6000평에 달하는 형무소 터를 다 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바람이 제법 찼다. 우리는 사와라구청 안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추운 몸을 녹이며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20여 년간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고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마나기 미키코 씨의 삶은 시인의 주옥같은 시어처럼 이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윤동주의 고뇌하는 모습에서 큰 울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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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하는 마나기 미키코씨.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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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언제 인가요?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인연인 것 같아요. 저는 윤동주 시인이 유학 온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을 졸업하고 한국의 연세대학교에 유학을 했는데, 윤동주 시인은 저와는 반대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샤대학으로 유학을 왔으니 말이에요.
저는 연세대 유학시절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만났습니다. 보통 일본의 시들이 난해한 게 많아 별로 시를 즐겨 읽지 않았으나 윤동주의 시는 달랐습니다. 이해가 쉬울 뿐더러 읽을수록 순수하면서도 숭고한 감정을 어딘가 모르게 느꼈으니까요. 윤동주 시를 읽으면서부터 시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 · 尹東柱の詩を読む会)을 소개한다면?
"이 모임은 1995년 2월, 후쿠오카시에서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추모하는 한일 합동위령제를 계기로 탄생했습니다. 물론 니시오카 겐지 교수님이 94년 12월부터 물밑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때 위령제라는 1회성 행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시와 죽음을 정중하게 돌아보고 일본과 한국의 새로운 관계를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시를 읽는 모임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제가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은 1997년도니까 올해로 21년째가 되네요.
사실 연세대 유학시절 윤동주 시도 많이 읽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도 꽤 컸는데 귀국 후에 직장일로 바빠서 관심을 이어가진 못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니는 부서로 전근 온 지인이 윤동주 시 읽기 모임에 나가는 분인데 저에게 윤동주 시인을 아느냐고 한 것이 계기가 돼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한 달에 한번 모여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전 시집' 가운데 한 편씩을 골라 그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메시지에 대한 의견을 나눕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자가 고른 시 1편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낭송 → 작품에 대한 소감이나 자기 나름의 해석을 발표 → 한국어 원시를 다시 살피고, 사진판 자필 원고집에서 퇴고 과정을 보면서 토론 →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날 읽은 작품을 다시 되새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윤동주의 시 세계가 점점 확장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왜 이러한 시를 쓰게 됐는지, 그가 살던 시대는 어떠한 시대였는지, 한일관계의 아픈 역사는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피부로 느끼면서 시인이 살다간 시대를 재인식하게 되기도 하지요. 시 모임을 통해 귀중한 배움과 나눔의 장을 펼치는 일은 매우 보람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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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달에 한번 윤동주 시를 읽고 토론을 하는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모습. |
ⓒ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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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기 미키코씨에게 윤동주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윤동주 시인의 시를 통해 시 읽는 즐거움을 터득했으니 이 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윤동주 시인을 통해 역사, 예술, 인생관, 한일관계, 평화, 삶의 철학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된 점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갈등하는 모습, 자기 삶에 고뇌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큰 위안을 받습니다. 또한 삶의 고뇌를 바깥에서 찾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모습에 큰 울림도 느꼈고요. 이러한 좋은 시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을 이끌어왔습니다.
윤동주 시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이 이어진 것을 보면 그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마법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후쿠오카 ·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올해 펼치는 일은?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의 마음에 닿다'(尹東柱の詩の心にふれる)라는 주제로 후쿠오카에서 큰 행사를 엽니다. 12월 17일 일요일, 윤동주탄생100주년기념사업실행위원회, 큐슈대학윤동주연구회, 주 후쿠오카대한민국총영사관 공동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타고기치로 작가의 '생명의 시인 윤동주' 특강과 2부에서 윤동주 영화 상영도 마련돼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윤동주 시인이 추구했던 시 세계와 조국에 대한 애끓는 갈망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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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모임 2 12월 17일 후쿠오카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과 영화 상영을 할 예정이다.ㅣ |
ⓒ 이윤옥 |
<고향집>은 고향을 떠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곳입니다.
이 시에서는 시대적인 특성이 나타나지요.
일제강점기의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삶을 살려는 이방인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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