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는 성질 급한 봄맞이꾼들이 매견월(梅見月)에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다. 그렇다고 만개하기 직전의 초롱초롱한 매화 꽃망울 타령이나 벳푸 온천욕만으로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사의 상흔이 너무 쓰린 관광지다.
해마다 2월16일 윤동주 기일이면 후쿠오카 옛 형무소 부근 좁은 니시모모치공원(현 구치소 담장을 끼고 있음)에서는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대표 마나기 미기코) 회원들이 이 수려한 평화주의자 시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연다. 이 모임 창설자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대학 명예교수는 몇 년째 여기에다 윤동주 시비 건립을 위해 뛰고 있으나 당국은 허가를 않고 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일본인들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도 윤동주 추모 행사는 매년 열리고 있다. 평화를 기리는 시민들이 이토록 열망하는데도 고희를 맞는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는 휘청거리고, 아베 신조와 박근혜 두 정권은 역사 교과서로 궁합을 맞춰가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 전초전으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대란의 징조다.
이럴 때 규슈의 구마모토에 꼭 찾아봐야 할 고택이 하나 있다. 도쿠토미 소호·로카 형제가 성장기를 보낸 집이다. 형 소호(1863~1957)는 이광수와 부자지간의 연을 맺은 ‘일본의 괴벨스’로 식민지 조선 ‘언론문화계의 총독’이었고, 동생 로카(1868~1927)는 톨스토이를 숭앙한 기독교 신자로 <불여귀>(不如歸)를 쓴 반침략 평화주의 작가다.
소호가 세운 오에의숙의 터전이기도 한 이 집 정원에는 개오동나무가 우람차다. 그들의 스승이자 도시샤대학 창설자인 니지마 조가 준 기념수의 후예들이다.
공해병으로 악명 높았던 미나마타에서 태어난 이 형제는 구마모토로 이사(1870), 여기서 성장기를 보냈다.
다섯 살 아래인 동생 도쿠토미 로카는 형의 파시즘 선동을 용납할 수 없어서, “경세의 수단으로서 형은 제국주의를 취하고 (…) 나는 인도의 대의를 취했다”는 <고별의 말>(1903)을 공개했다. 형과의 변별성을 위해 아예 성을 갈아서 갓머리의 점을 없앤 ‘도미’(冨)로 표기해서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그대로 명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로카가 임종 때 형과 화해했다는 걸 부각시켜 동생의 인격이나 품성, 괴팍한 신앙심, 혹은 형에 대한 열등감이 불화의 원인이라며 동생의 평화주의를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인인 우치무라 간조와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기노시타 나오에 등은 로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제국주의자·평화주의자 형제
로카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다닌 윤동주 시인의 선배인데, 그의 글 중 감동의 절정을 이룬 건 산문 <모반론>(1911)이다.
1910년 5월, 일본은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등 진보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대역’ 조작 사건을 꾸며 레닌보다 16년이나 먼저 제국주의론(<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1901)을 낸 고토쿠 슈스이 외 26명을 추렸다. 대역죄는 3심제가 아닌 단심으로 사형 선고 일주일 뒤(대법 확정 18시간 만에 처형된 인혁당 사건을 연상) 12명을 처형한 것은 1911년 1월24~25일.
교수대의 밧줄이 미처 식기도 전인 2월1일, 명문 제1고교(구제 1고) 변론부가 주관한 특별강연에 로카가 초청됐다. 그는 국가란 모자처럼 “머리 위에 쓰지만 머리를 지나치게 누르지 않게 해야” 되는데, 머리를 무겁게 하면 모반할 수밖에 없다면서 사자후를 토했다.
“모반이란 반역이고 배반이다. 그럼 무엇을 배반하는가? 낡은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이 시대는 변하는 것이 아니던가.” “(…) 모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반인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것은 항상 모반이다.” “제군, 우리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대해서, 그리고 주위에 대해서.”
이 강연을 기획한 변론부 학생 가와카미 조타로는 나중에 사회당 위원장이 되는데, 그 감동은 2011년 로카 강연 100주년을 맞아 되살아났다.
서울에서도 이런 통쾌한 명연설을 들을 수는 없을까.
로카 저력의 뿌리는 반전·평화 사상의 톨스토이즘일 것이다. 1906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로카는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톨스토이와 함께 5일간 지내면서 평화사상을 체득했다. 1991년 고르바초프가 방일, 국회 연설에서 로카의 톨스토이 방문을 러일 친선의 예로 거론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귀국한 로카는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을 겨냥해 <승리의 비애>(12월)를 썼다. “그 승리도 사실은 러시아를 무릎 꿇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이라 했다.
“그대의 독립이 만약 10여 개 사단의 육군과 수십만 톤의 해군과 어떤 동맹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독립은 실로 가여운 독립이로다”(<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하라 아키라 지음, 김연옥 옮김, 살림 펴냄, 146쪽, 재인용)라고 로카는 말한다. 남의 나라 자원을 약탈해 얻은 이익까지 매도한 그는 “한발 잘못 디디면 그대가 거둔 전승은 망국으로 가는 시작”이 된다고도 경고했다. 투철한 반전·평화 사상이다.
로카의 저력, 톨스토이즘
역사학자 하라 아키라는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으로 불러야 옳다면서 그 이유를 오로지 조선 침략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서 찾는다. 지금 미·일·한 3국 동맹이 제3차 조선전쟁을 초래할 조짐임을 시사해준 대목이다. 소호와 로카 형제의 서로 다른 역사인식은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쟁이냐 평화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한다.
2월, 규슈에 가면 윤동주 시인이 감방에서 들었을 하카타의 해조음을 꼭 들어보시라. 그의 절규에도 귀 기울여보시라. 그래도 역시나 아베와 박근혜 정권은 로카가 아닌 소호의 손을 잡을 것만 같다. 아, 울적한 병신년 정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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