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자(여자) / 윤동주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중심 어는 붉은 능금입니다.
상징은 그 여자입니다.
제목의 상징어이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붉은 능금을 보면서 가을날 여인을 생각한 아주 짧은 시이지만
어쩌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른 사람이 아니 손님이 데리고 간 것을
아무런 감정이입이 없이 시는 끝입니다.
하지만 윤동주의 기독교적인 관념에서 살펴본다면
이것이 원죄인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사랑한 적이 없다고 밝히지만
그 나이면 아마 짝사랑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시인의 양심을 존중할 밖에요.
내가 사실 거두어야함에도 시인은 손님으로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추측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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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Karl Marx)는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을 프롤레타리아라고 했고, 조르조 아감벤은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을 호모사케르(Homosacre)라고 했고, 가야트리 스피박은 스스로의 상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서벌턴(Subaltern)이라 했다. 이런 용어들은 연구자 자신의 시각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에 대한 정의일 뿐이다.
주변인(周邊人·The Marginal)이란 용어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신체적이거나 지역적이거나 정신적인 모든 문제를 포괄해, 한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해 공동체의 중심에 있지 않고 테두리에 있어 소속감이 아니라 소외돼 살아가는 인물들을 말한다.
윤동주가 사랑하는 대상은 대단히 넓다. 그가 말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라는 다짐은 너무도 넓은 대상을 포괄하고 있다. 그 시대에 죽어가는 것은 너무도 많았다. 윤동주는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했다. 그는 여성 노동자(《해바라기 얼굴》)와 복선철도 노동자(《종시》)라는 주변인뿐만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 같은 생태계도 사랑한다. 이렇듯 주변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슬픈 족속》에서도 볼 수 있다.
힌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힌 고무신이 거츤발에 걸리우다
힌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힌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 《슬픈 족속》(1938년 9월)
이 시는 당시 남성(1연)과 여성(2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 이 시를 지었다. 이제까지 주로 오줌싸개 아이들(《오줌싸개 지도》), 주머니에 넣을 것이 없는 사람들(《호주머니》) 등 개별적인 이웃의 모습을 그렸던 윤동주는 ‘족속(族屬)’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시 언어로 끌어들인다. 그 규모는 그 시대의 조선인 전체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동주는 조선인을 상징하는 흰색을 동질성으로 포착해,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를 통해 슬픈 조선인을 호명한다.
아낙네가 구르마를 끌고 가면 뒤에서 밀어주고, 일하다가 지쳐 있는 농부 아저씨와 자주 대화했던 그였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해바라기 얼굴》 《슬픈 족속》에서도 이미 그는 슬픔 곁에 있다.
윤동주의 시는 자기성찰 및 모든 이와 함께 슬퍼하려는 연대를 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팔복》)는 구절은 이미 온갖 슬픔을 명랑하게 노래해 온 그에게는 자연스럽다. 《팔복》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병원》을 보면 윤동주가 주변인의 슬픔을 함께하며 ‘영원히 슬플 것’이라는 태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 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1940년 12월) 2, 3연
이 시에서 ‘병원’은 그가 찾아갔던 공간일 수도 있으나 식민지 조선으로 읽힌다. 식민지의 젊은 청년은 자신의 병을 모른다. ‘성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식민지 통치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해선 안 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강요된 침묵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탄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시대의 극복 방식을 윤동주는 넌지시 밝힌다.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사라지는 모습은 절망과 질병의 상황에서 작은 회복을 암시하는 희망으로 읽힌다. 이어서 시적 화자는 여자와 자신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길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고통받는 주변인과 병을 모르는 또 다른 주변인이 회복하는 방식은 다른 곳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이 주변인 ‘곁으로’ 다가가는 실천에 있음을 암시하면서 시는 마무리된다. 작은 행동이지만 ‘곁으로’ 가는 실천은 ‘고통의 연대’를 통한 희망을 보여준다.
《팔복》 《병원》 《위로》(1940.12)를 쓰고 5개월 후에 쓴 《십자가》(1941.5)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슬픔과 함께 살아왔던 예수는 괴로웠지만 행복했다. 이어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내놓겠다고 한다. 모가지를 내놓는 태도야말로 ‘영원히 슬퍼하’겠다는 다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1941년 11월)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을 택한다. 그는 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쓰고, ‘그리고’라고 썼다. 산문이든 시든 접속사는 되도록 안 쓰는 게 좋다. 다만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만 써야 한다. 《서시》에서 ‘그리고’는 단순한 접속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그다음에’라는 뜻이다. 순서로 보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자기성찰을 한 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그 후에, 마지막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자기성찰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이후에 ‘그리고’ 나서 나한테 주어진 길,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단다. 내게 주어진 길을 가기 전에 먼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못 말릴 다짐이다. 함께 통곡하면 위로가 되고, 연대가 생기며, 힘이 솟는다. ‘영원히’ 함께 슬퍼하고 함께 웃는 삶이 행복하다며 그는 축하보다 애도 곁으로 가려 한다.
영원히 슬퍼하는 행복한 몰락에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 윤동주는 그냥 교과서에 실린 시, 혹은 팬시상품일 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 곁에서 영원히 슬퍼하는 길, 이 짐승스러운 시대에 긴급히 필요한 행복론이다. /김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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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앞 잔다리
윤동주가 산책했던 ‘잔다리 마을’은 서울 홍익대 앞 동·서교동의 옛 이름이다. 현재는 ‘잔다리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경의선 책거리 등 문화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최혁중 기자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흘,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異蹟)’(1938년 6월 19일)
윤동주는 ‘이적’ 육필 원고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단말마 같은 글귀를 남겼다.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보리이까’,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기도문이다. 아이 적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사진이 네 장 남아 있는 그의 시에는 성경에서 얻은 모티프가 많다.
‘이적(異蹟)’이라 하면 죽을병에서 낫거나, 복권이 당첨되는 기적을 떠올린다. 그가 생각했던 이적은 무엇일까.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듯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지저분하며 개운치 않고 군색한 것을 버리고 섰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물 앞에 서면 자신을 성찰하곤 했다. 물결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내면을 성찰하고(‘달을 쏘다’), 우물 안에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하고(‘자화상’), 냇가에 앉아 성찰하기도(‘산골 물’) 했다.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라는 구절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 이야기, 마태복음 14장의 패러디다. 바로 전에 예수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 예수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 서커스 같은 ‘이적’을 흉내 내고 싶었다.
윤동주는 베드로와 다르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는 ‘부르는 이 없다’는 말과 ‘불리워’ 왔다는 말은 서로 맞지 않는다. 부르는 이가 없는데도, 까닭 모를 이유로 불리어 왔다는 것은 ‘참말 이적’이라고 한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어도, 전혀 모를 황당한 미래 앞에 ‘불리워 온’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 이적’이라는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체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보다, 그저 ‘따순 햇살’ 아래 살아가며 운명에 부닥치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참말 이적’이라며 그는 감내한다. ‘내사’는 ‘나야말로’, ‘나 같은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란다.
이어서 ‘터분한 것’들이 나온다.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는데, 분노를 지우고 맨 앞에 ‘연정’을 써넣었다. 시를 교정할 때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분노보다 연정이었겠다. ‘이적’과 같은 날에 쓴 시 ‘사랑의 전당’에 그는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고 썼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그 여자’)에서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자기도취인 자홀(自惚)이나 쪼잔한 시기와 함께 터분한 욕구들이 오늘따라 ‘금(金)메달처럼 만져’진다. 바로 그 금메달 같은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물결에 씻어 보내’겠단다. 어설픈 너스레를 씻어버리며 ‘참말 이적’으로 살아가겠다니, 당연히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망망한 ‘호수 위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마무리한다. 퇴고 전에는 원고를 보면 ‘이 호수 위로/나를 불러내소서/걸으라 명령하소서!’였는데 ‘걸으라 명령하소서!’를 삭제했다. ‘걸으라 명령하소서!’라고 하면 특별계시가 된다. 이 문장을 지웠을 때 물 위를 걷지 않아도 시련을 당하겠다는 다짐이 돋아 보인다.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깨달음에는 운명에 당차게 단독자로서 나서는 키르케고르의 자세가 겹친다. 이상섭 교수는 이 시를 쓴 배경을 이렇게 추측한다.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 자세히 읽기’)
잔다리 연못가로 윤동주가 산보 갔다는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옛날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지금의 서교동 일대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고, 거기에는 많은 작은 다리가 놓여 마을 이름이 ‘잔다리 마을’로 불려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 세교리계, 현재 마포구 동교동의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 ‘잔다리’,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다.
자주 오랫동안 먼 길을 걷곤 했다는 윤동주, 들녘이었던 홍익대 앞 어디쯤을 거닐었을까. 1938년 그가 마주했던 호수는 그 무렵 그가 보았던 ‘해바라기 얼굴’의 여성 노동자나, ‘슬픈 족속’의 흰옷을 입은 한민족이라는 거대한 호수였을 수도 있겠다. 시 원본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어떤 굴욕적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적었을까. 이 메모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찌할 수 없는 자신과 민족의 운명 앞에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다짐은 서늘하다. 물이 흐르던 시내는 복개되어 찾을 수는 없으나, 홍익대 근처에 가면 낮고 고독한 고백이 가슴속에 우직하다. 나를 불러내소서.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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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ociate_pic](http://image.newsis.com/2016/01/28/NISI20160128_0011294947_web.jpg) |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
【서울=뉴시스】신진아 기자 = 영화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종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1917~1945)를 연기한 박정민(28)이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박정민은 28일 송몽규의 삶과 감정을 이해했느냐는 질문에 “일제시대를 살았던 그분들의 마음의 크기를 잘 모르겠다”며 “그냥 죄송할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는 ‘동주’ 촬영 이후의 변화도 전했다. “의식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자였다. 근데 송몽규를 연기한 이후 내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역사책도 뒤적이게 됐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찾게 된 느낌이다.”
윤동주의 팬인 강하늘(26)은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내 무의식에 윤동주 시인은 거대하고 거창한 존재였다. 순결하고 고결한 이미지뿐이었다. 하지만 대본 속 윤동주는 20대의 나처럼 질투심을 느끼고 열등감, 패배감, 승리감도 느끼는 평범한 젊은이로 그려져 있었다. 인간적 면모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충격이었다.”
강하늘은 “예술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영화 중간중간 윤동주의 시가 동주의 심리변화에 맞춰 강하늘의 목소리로 나오는데, 이를 통해 시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게 한다.
‘왕의 남자’(2005) ‘사도’(2015)의 이준익(57) 감독이 연출했다. 이 감독은 두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로 “강하늘은 항상 마음에 뒀던 배우”라고 답했다. “내가 ‘평양성’(2010)을 연출할 때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시 스무살이던 강하늘을 데뷔시켰다. 직감적으로 느껴진 본성이 있다. 그 본성에서 동주를 봤다. 또 흑백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외모가 강하늘과 닮은 점도 영향을 끼쳤다.”
![associate_pic](http://image.newsis.com/2016/01/28/NISI20160128_0011294946_web.jpg) |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신촌좀비만화’(2014)를 보다가 점찍었다. ‘전설의 주먹’(2012)에서 황정민의 10대 시절을 연기한 그 배우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다가 황정민의 추천을 받고 출연을 제의했다.
박정민은 “제의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매니저에게 재차 확인했었다”면서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며 영광스러워했다.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와 송몽규의 짧고 비극적이라 더욱 찬란했던 삶을 그렸다. 이 감독은 “몇 년 전 일본 도지샤대학에서 윤동주 시인의 비석을 보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국영화사 최초로 윤동주를 스크린으로 옮긴 계기를 밝혔다.
“윤동주 한 사람 이야기로는 드라마가 잘 구성이 안 됐다. 그런데 3개월 먼저 태어나고 며칠 늦게 죽은 송몽규와 같이 하면 드라마가 되더라. 윤동주는 과정은 보잘 것 없으나 사후 시인으로 기억되는 결과가 좋은 사람이라면, 송몽규는 과정은 아름다웠지만 존재가 잊혀진 사람이다. 결과가 아름다웠던 동주를 통해 과정이 아름다웠던 송몽규를 기억하고 싶었다.”
흑백영화로 촬영한 이유는 흑백 사진 속 윤동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일제시대를 재현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제작비를 낮추다 보니 흑백이 필요했는데,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이었다.”
![associate_pic](http://image.newsis.com/2016/01/28/NISI20160128_0011294948_web.jpg) |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영화 '동주'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그리는 작품으로 오는 2월 18일 개봉한다. 2016.01.28. |
민족시인이자 한국인이 사랑하는 윤동주를 영화화한 데 따른 부담감은 “물론 있었다”고 인정했다. “겁나고 두렵고 잘못 찍으면 죽을 때까지 비난을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근데 내가 의외로 철이 없다. 깊이 생각 못한다. 단세포적으로 산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어서 힘 빼고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전체의 약 30%를 극화했다. “두 명의 여학생이 등장하는데, 윤동주 평전에는 없다. 하지만 ‘그 여자’라는 윤동주의 짧은 시가 있고 ‘별 헤는 밤’에도 여자가 나온다. 일본 유학시절 여학생과 소풍 간 사진도 있다.” 극중 윤동주의 시집을 내주려고 애쓰는 일본 여대생 구미는 가공의 인물이다. 하지만 구미를 보호해주는 문학교수는 실존인물이다.
이 감독은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1935년부터 두 청년이 별이 된 1945년까지를 그린다. 10년간 일어난 일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연표 고증을 알면서도 극적으로 무시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사실을 근거로 상상력을 펼쳤다.”
한편 이날 시사회에는 한 대학의 국문과 교수가 제자들과 참석해 “국문학과에서 교재용으로 많이 활용할 거 같다”며 “송몽규와 윤동주의 이야기를 함께 한 점과 윤동주의 미세한 심리변화, 그리고 마지막 일본 형무소 장면에서 두 사람의 판결문 해석이 잘 된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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