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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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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울적 댓글:  조회:3101  추천:0  2018-08-11
울적 / 윤동주 처음 피워본 담배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 간질 타.  어제 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대 피워보았더니.                   1937.6.        울적     처음 피워 본 담배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간질타. 어젯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 보았더니.  
1209    윤동주와 마지막으로 남은 석장 사진 댓글:  조회:3646  추천:0  2018-08-10
스파이더블록   [20170217] 윤동주와 마지막 세 장의 사진    스파이더 ・ 2017. 2. 17. 5:02 URL 복사              1945년 2월 16일. 6개월만 지나면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을 훌훌 털어내고 광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민족을 삼켜 버린 나라의 음침한 형무소에서 스물 일곱살 청년 시인 윤동주는 차디찬 마루바닥에 누운 채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오늘, 그를 다시 알아보자...    1. 1942년 8월 4일, 고향의 친지들과 함께 위 사진은 일본 도쿄 릿쿄대에 다니던 윤동주(뒷줄 오른쪽)가 1942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서 고종사촌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 친지들과 찍은 사진이다. 누가 표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진 속  윤동주의 얼굴 옆에는 ◯를, 송몽규의 얼굴 옆에는 △를 그려놓고 사진 오른쪽에 "◯2월 16일 △3월 10일 1945년 후쿠오카에서 영면"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보인다. 사진 아래쪽에는 42년 8월 4일(aug. 4th. 42.)이라는 서명이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 둘은 석 달 차이로 태어났고, 한 달 차이로 죽었고, 나란히 묻혀 있다. 눈매가 또렷했던 송몽규, 윤동주의 또 다른 꿈이자 영혼의 친구라 할 그도 시를 썼다. 밤 -송몽규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2. 1943년 6월 어느 날, 이국 땅 친구들과 함께 위 사진은 윤동주의 생전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사진으로 1943년 초여름, 윤동주의 귀국을 앞두고 열린 송별회에서 찍은 것이다. 교토(京都) 우지(宇治)강의 아마가세(天ケ瀨) 구름다리 위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도우시샤(同志社)대학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 태평양전쟁 중이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하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여학생 옆에서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남학생이 바로 윤동주다. 귀국하기로 결정한 윤동주를 위해 평소에 교류가 별로 없던 여학생들을 포함, 영문학 전공 일학년 전원이 모여 송별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윤동주가 주인공이라 가운데 선 모양이다. 이 사진은 윤동주 옆에서 사진을 찍은 여학생 키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의 자택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해방 50주년을 앞둔 지난 1994년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윤동주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 때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우리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미쓰이케이지(三津井慶二)군이 제안했죠.  “히라누마(平沼)군, 노래 한곡 불러주지 않겠어?”라고. "너와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라고 그가 덧붙였을 때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곧 바로, 그 노래를 불렀죠.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흘렀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죠. 좀 의외였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했던 그가 그렇게 용감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 키타지마 마리코(北島萬里子)의 증언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3. 1945년 3월 6일, 다시 가족의 품 안에서 위 사진은 윤동주의 고향 만주 용정에서 거행된 장례식 사진이다. 영정 속 학사모를 쓴 윤동주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다. 사진 위쪽 메모를 보면 왼편에 두 줄로, 윤동주군 장례식(尹東柱君 葬禮式) 강덕 12년 3월 6일(康德十二年三月六日), 그리고 오른편에 두 줄로, "강덕 12년 2월 16일 오전 2시 36분(康德十二年二月十六日午前二時三十六分) 후쿠오카시에서 별세, 이 때 나이 29세(在福岡市別世時年二十九歲)" 라고 적혀있다. '강덕(康德)'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서 당시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가 썼던 연호로 '강덕 12년'은 1945년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 2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년 뒤인 1945년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 달이 채 가기 전 송몽규도 같은 곳에서 친구의 뒤를 따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시는 1942년 6월 3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詩」이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또다른 나는, 오늘, 윤동주의 마음을, 그리워한다. - 2017.2.16. 황검
1208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장 댓글:  조회:2947  추천:0  2018-08-10
장(場) 윤동주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이른 아침 팔 물건을 들고 장에 모여드는 아낙네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 저마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아낙네들   왼 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온종일 장에서 일한 후에 날이 저물어 귀가하는 아낙네들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특징     - 각 연 끝에 '~오'를 반복하여 사용 - 운율 형성(각운)     -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 시어의 반복과 변주       (시들은 생활 - 가난한 생활 - 올망졸망한 생활 - 쓴 생활)     - 말줄임 표현속에서 대상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시적 상황 :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 ✦화자의 태도 :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그네들에 대한 연민의 정 ✦주제 : 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골 아낙네들의 고단한 삶     ■구성 • 1연 : 이른 아침 팔 물건을 들고 장에 모여드는 아낙네들 • 2연 : 저마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아낙네들 • 3연 : 온종일 장에서 일한 후에 날이 저물어 귀가하는 아낙네들     ■시어 연구 -이른 아침 : (시간적 배경) 1)아낙네들의 부지런한 삶의 모습 2) 고달픈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아낙네들 : (시적 대상)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시들은 생활 : '가난한 생활(2연), 올망졸망한 생활(3연)'과 함께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변주) -담아 이고 / 업고 이고, 안고 들고 : (유사한 시구의 반복-운율 형성) 아낙네들의 바쁘고 고된 삶의 모습 -장(場) : (공간적 배경) 아낙네들의 삶의 터전이며 고된 삶의 공간 -싸우오 : 생계 유지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애쓰는 모습)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 (유사한 시구의 반복)아낙네들의 바쁘고 고된 삶의 모습 -날이 저물어 : 고된 하루가 끝나는 시간 -쓴 생활과 바꾸어 : 하루종일 노력했으나 아낙네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음. -또 이고 돌아가오 :(1연의 '모여드오'와 호응)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고 있음.     ■ 이해와 감상 이 시의 이해와 감상의 포인트는 작품의 주요 공간이 ‘장’과 중심 시적 대상인 ‘아낙네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시를 보면 이른 아침부터 일찍이 아낙네들이 생계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시골 장터에 속속 모여드는 장면에 재하 ㄴ묘사로부터 시상을 출발시키고 있다. 아낙네들이 각자 준비해 장터 여기저기에 벌여 놓은 물건들(농산물)은 그대로 그네들의 ‘시들은 생활’과 ‘가난한 생활’과 ‘올망졸망한 생활’과 ‘쓴 생활’을 보여 주는 대상들인 셈이다. 이 작품은 온종일 (‘왼하로’) 자기네 물건들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귀가하는 고단하고 힘겨운 생활을 반복하는 아낙네들의 삶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아명은 해환(海煥).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     윤동주 장(場)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   왼 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이 시는 시골 장터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하여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당시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낙네들은 힘든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장에 나와서 팔고 산다. 이른 아침부터 아낙네들은 활기 없는 생활 속에서 생산한 생산물인 농산물과 옷감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온다. 어떤 아낙은 아이를 업고 짐을 지고 장으로 오고, 어떤 아낙은 짐을 안고 들고 장터에 온다. 시간이 갈수록 짐을 가지고 장에 모여 드는 아낙들이 많아진다. 장에 와서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팔기 위해 골목골목에 물건을 벌여 놓고 있다. 장에 온 사람들은 밀려가고 밀려온다. 저마다 생활하기 위하여 자기의 물건을 사라고 외치고 한 푼이라도 싸게 사고 비싸게 팔려고 싸운다. 하루 종일 서로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건을 되로 계량하고 저울로 무게를 달고 자로 길이를 재면서 사고판다. 시간은 흘러 날이 저물어 장은 끝나고 아낙네들은 가지고 온 것을 팔아 얼마 되지 않는 생활용품을 사가지고 또 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다. 이 곳의 모습을 통하여 서민들의 힘든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일제강점기에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 업고 지고...... / 안고 들고...... /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은 이른 아침부터 생산한 물건을 가지고 장에 모여드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시들은 생활’은 아낙네들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생활을 표현한 것으로 이들이 팔려고 가지고 온 것이 대부분 식물임을 말하면서 이들의 생활이 활기가 없고 기쁨이 적은 상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는 장에 모여드는 아낙네들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른 모습이므로 말줄임표로 나타낸 것이다. ‘업고 지고’에서 ‘업고’는 짐을 대상으로 쓰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업고’는 아이를 업고 장에 오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안고 들고’에서 ‘안고’도 아이를 안고 오는 모습으로 보아야한다. ‘업고 지고’와 ‘안고 들고’는 아이를 업거나 안고서 짐을 지거나 들고 오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 밀려가고 밀려오고...... /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는 장에 물건을 팔러온 아낙네들이 ‘이고’, ‘지고’, ‘들고’ 온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장터 외각에 공간이 있는 곳에 벌여 놓고 사고파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밀려가고 밀려오고......’는 장에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하여 왔다 갔다하는 모습을 말한다.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는 장에 와서 물건을 팔는 사람들이 벌여 놓은 물건이 저마다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고 이것들을 사는 사람들 또한 저마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려하므로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치오......싸우오.’는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하여 장에 온 사람들에게 사라고 외치는 모습을 말하고 이를 싸게 사려는 사람과 비싸게 팔려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것을 싸운다고 표현한 것이다.   ‘왼 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는 하루 종일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그 판 돈으로 물건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나 그들의 생활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왼 하로’는 하루 종일을 말한다. ‘올망졸망한 생활’은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부자가 아니고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는 물건을 계량하여 파고 사는 것을 말한다. ‘되질’은 양(量)을 재어 물건을 파는 것이고 ‘저울질’은 무게를 재어 물건을 파는 것이고 ‘자질’은 길이를 재어 물건을 파는 것이다. ‘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는 장이 끝나고 장에 올 때에 가지고 왔던 것을 팔고 생활에 필요한 다른 물품을 사거나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말한다. ‘쓴 생활’은 이렇게 사고팔고 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고팔고 해도 생활은 어려운 것이다. 서민들의 어려운 삶을 장의    모습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살아가는 민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20130703수후0125전한성맑음     ===============================///    < 내 용 연 구> -이른 아침 : (시간적 배경) 1)아낙네들의 부지런한 삶의 모습                                        2) 고달픈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아낙네들 : (시적 대상)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시들은 생활 : '가난한 생활(2연), 올망졸망한 생활(3연)'과 함께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변주) -담아 이고 / 업고 이고, 안고 들고 : (유사한 시구의 반복-운율 형성) 아낙네들의 바쁘고                       고된 삶의 모습 -장(場) : (공간적 배경) 아낙네들의 삶의 터전이며 고된 삶의 공간 -싸우오 : 생계 유지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애쓰는 모습)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 (유사한 시구의 반복)아낙네들의 바쁘고 고된 삶의 모습 -날이 저물어 : 고된 하루가 끝나는 시간 -쓴 생활과 바꾸어 : 하루종일 노력했으나 아낙네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음. -또 이고 돌아가오 :(1연의 '모여드오'와 호응)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고 있음.                                            < 특   징 > *구조    1연 : 이른 아침에 팔 물건을 들고 장에 모여드는 아낙네들    2연 : 저마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애쓰는 아낙네들    3연 : 온종일 장사를 하고 날이 저물어 귀가하는 아낙네들  *특징  1) 각 연 끝에  '~오'를 반복하여 사용 - 운율 형성(각운)  2)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3) 시어의 반복과 변주    (시들은 생활 - 가난한 생활 - 올망졸망한 생활 - 쓴 생활)  4) 말줄임 표현속에서 대상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시적 상황 :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 *시적 화자의 태도 :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그네들에 대한 연민의 정 *주제 :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골아낙네들의 고단한 삶   ========================/// 윤동주의‘장’ ◈ 전문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   왼 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 왼 하로 : 온종일. 하루 종일       ◈ 맥락으로 작품 읽기(해설)   1) 시적 화자 -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말하는 나(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음)   2) 시적 대상 -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아낙네들   3) 시적 상황 -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말하고 있음.   4) 시적 화자의 태도 - 은근히 연민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음   ◈ 해설 (1연) ① 이른 아침 ② 아낙네들은 ③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④ 담아 이고…… 업고 지고……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⑤ 장에 모여드오.   ① 이른 아침 : 작품의 시간적 배경입니다. 3연의 ‘날이 저물어’와 호응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방식을 보여 주고 있고, 이 작품이 아낙네들의 하루 일과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고려할 때 아낙네들의 부지런한 삶을 모습을 드러내고, 또한 고달픈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② 아낙네들 : 작품의 시적 대상입니다. 화자는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③ 시들은 생활 :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를 참고할 때 원관념은 아낙네들이 팔려고 가져온 물건들이라 할 수 있지요. 이같은 비유는 아낙네들의 가난으로 인한 고달픈 삶을 드러내고, 2연에서는 가난한 생활로, 3연에서는 올망졸망한 생활, 쓴 생활로 변주되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④ 담아 이고…… / 업고 지고……안고 들고 : 형태가 유사한 시어들을 반복하여 물건을 팔기 위해 장(場)으로 모여드는 아낙네들의 바쁘고 고된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⑤ 장 : 작품의 시적 공간으로 아낙네들의 생계 터전이자 고된 삶의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관련 작품 1) 신경림의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두 작품의 시적 공간인 ‘장(場)’은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의 생계의 터전이라 할 수 있고, 특히 신경림의 ‘파장’에서 ‘장(場)’은 시대 상황과 관련지을 때 도시화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농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농무’라는 시에서 ‘장거리’ 역시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박재삼의 ‘추억에서’ 中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生魚物廛)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2연)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싸우오.    : 아낙네들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물건을 파는 모습을 유사한 시어의 반복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3연) 왼 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①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①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② 쓴 생활과 바꾸어 ③ 또 이고 돌아가오.   ①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 : 유사한 형태의 시어를 반복하여 아낙네들의 고된 일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 날이 저물어 : 고달픈 하루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② 쓴 생활과 바꾸어 : ‘장(場)’에서 하루 종일 생계를 위해 노력했지만 아낙네들의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③ 또 이고 돌아가오. : 1연의 ‘모여드오’와 호응하는 구절로 ‘또’라는 표현을 통해 아낙네들의 고달픈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표현상의 특징 1) 각 연의 끝에 ‘~오’(=각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운율감을 형성하고 있다. 2)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방식 3) 시어의 반복과 변주 (시들은 생활→가난한 생활→올망졸망한 생활→쓴 생활) 4) 유사한 시어의 반복 (담아 이고-업고 지고-안고 들고, 외치오-싸우오, 되질-저울질-자질)   ◈ 관련 작품(사고 넓히기) - 여자들의 고달픈 삶을 형상화한 작품 1) 고은의 ‘선제리 아낙네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 두 작품 비교, 대조     윤동주의 ‘장’ 고은의 ‘선제리 아낙네들’ 시적 대상 아낙네들 시적 대상의 처지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삶아감 화자가  시적 대상에 초점을 두는 부분 가난하고 고달픈 삶 가난하고 고달픈 삶 + 서로 의지하고 위로가 되는 의좋은 삶의 모습 시간적 배경 이른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늦은 밤 공간적 배경 장 새터, 중뜸, 갈뫼 등 향토적 지명을 사용하여 토속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장터가 군산으로 보다 구체화돼 있음 시상전개방식 시간의 흐름 청각적 이미지→시각적 이미지 시끄러움→조용해짐 시적화자의 태도 말 줄임 표현 속에 대상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은근히 드러냄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란 표현을 통해 대상에 대한 긍정적 인식 (=주관적 태도)을 드러냄 표현상의  특징 반복(각운, 동일한 시어, 유사한 형태의 시어) 반어법     2) 고정희의 ‘우리 동네 구자명씨’ 맞벌이부부 우리동네 구자명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1207    윤동주와 강처중 "발문" 댓글:  조회:2466  추천:0  2018-08-09
跋  文     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房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東柱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東柱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散策을 請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散이든 들이든 江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黙黙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沈鬱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悲痛한 高喊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鬱憤을 주었다. “東柱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外套든 時計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外套나 時計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典當鋪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東柱도 친구들에게 굳이 拒否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東柱 자네 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應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詩를 誕生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詩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玉이다. 지나치게 그는 謙虛 溫順하였건만, 自己의 詩만은 讓步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女性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女性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告白하지 않았다. 그 女性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回答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苦憫도 하면서 希望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女性에 對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故鄕”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間島에서 나고 日本 福岡에서 죽었다. 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祖國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宋夢奎와 함께 “獨立運動”의 罪名으로 二年刑을 받아 監獄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惡刑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夢奎와 東柱가 延專을 마치고 京都에 가서 大學生 노릇하던 中途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東柱의 最後를 監視하던 日本人 看守가 그의 屍體를 찾으러 福岡 갔던 그 遺族에게 傳하여 준 말이다. 그 悲痛한 외마디 소리! 日本 看守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東柱 監獄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解放되던 해다. 夢奎도 그 며칠 뒤 따라 獄死하니 그도 才士였느니라. 그들의 遺骨은 지금 間島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東柱의 詩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傳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東柱 夢奎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東柱! 夢奎!                                                                       (강 처 중)          ========================///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모두 내 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묵하였다. 가금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편 시(詩)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詩)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 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詩)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후쿠오카)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연희전문)을 마치고 경도(쿄오토)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그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드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소리! 일본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소리로서 아조 가 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1948년 1월 30일 발행)   ===========================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                           강 처중 (당시 경향신문 기자)   동주(東柱)는 별로 발주변도 사귐성도 없었지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있나" 하고 찾으면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주는 것이 었다. "동주있나 좀 걸어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을 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을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렸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였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에 나들이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 주었을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츤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체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 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ㅡ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 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간체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延專)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데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이 없을 동주(東柱) 몽규(夢奎)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東柱) 몽규(夢奎)!                                                                          (강 처중)   ///윤동주 평전 (송우혜) ========================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작고(1945년)한 후 시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정음사'에서 라는 제목으로 간행함(1948년)     유고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작성하였고 발문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동료였던 강처중이 작성하였어.     ▲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윤동주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함 고인과 크게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닌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경향신문의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강처중 기자의 인연 덕이 크다고 함     영화 에도 강처중이 등장함   이 분!       다음은 강처중의 글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 꼮!꼭 읽어봐! 몽규와 동주 두 친구를 한번에 잃게 된 강처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영화를 보고, 또 글을 읽고 나서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넘나 궁금했어. 그런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는데, 왜 그런지 알게됐어       "(...) 강처중은 50년대 좌익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인물."     "(...) 강처중은 윤동주가 직접 묶었던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포함되지 않은 대표작들을 보관해 유족에게 전했고 48년 초간본 출판의 산파역을 했지만 그간 좌익이라는 이유로 시집에서는 '윤동주가 동경에서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한 벗' 정도로 익명화 되고 말았다. 42년 일본유학 길에 오르며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맡긴 시는 '참회록' '팔복' '간' '위로' 등. 또 유학시절 윤동주의 시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섯편의 작품은 모두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수록된 것이다.   강처중은 48년 윤동주의 연전후배 고 정병욱 교수가 보관했던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들에서 추린 시 31편으로 정음사에서 초간본을 발간하며 생전에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에게서 서문을 받아냈고 직접 발문을 썼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정지용이 납북되고 강처중마저 좌익으로 총살당해 이들의 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간본 이후 아예 삭제돼 버렸다. (...)"     .....   강처중은 경향신문의 창간 멤버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알려져있으나 사실 여부와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등은 밝혀지지 않음..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유고시집 발간의 주역 강처중은 그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어..   윤동주의 연전 후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 역시 강처중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131741141&code=960205, 경향신문)       ▲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 강처중.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그럼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일케 글을 쪘음..   영화 동주에서 강처중이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와서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여시들이 한번쯤 '강처중'을 초록창에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싶운데 그러한 점에서 영화 는 잊혀진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을 재발견한 고마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음!! 참 귀한 인물을 알게되어서 마음이 벅참 ☺       ++수정   방금 윤동주 평전을 찾아봤는데 강처중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더 자세히 적혀있어서 추가함     윤일주(현 성균관대 교수, 윤동주 동생)는 이 출간될 당시 강처중에 대해 기술하지 말아달 것을 요청했다고 함.  단순히 그가 좌익인사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었음.   이후 개정판에서 강처중이 좌익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라고 기술하였고 이를 본 강처중의 가족(부인,자녀)이 나타났음 가족들이 증언하길 "사형수로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맞지만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했을 때 형무소에서 나왔고 두달 남짓 집에서 요양하다가 9월 4일에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월북했다"는 것..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형 직전에 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하였다고 함
1206    윤동주와 정지용 "서문" 댓글:  조회:2610  추천:0  2018-08-09
  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精誠껏 몇 마디 써야만 할 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病 아닌 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才操도 蕩盡하고 勇氣도 傷失하고 8.15 以後에 나는 不當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一片의 精誠까지도 잃었느냐?” 叱咤한다면 少許 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氣力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詩人 尹東柱의 遺稿에 焚香하노라.           겨우 30餘篇 되는 遺詩 以外에 尹東柱와 그의 詩人됨에 關한 아무 目證한 바 材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虎死留皮”하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虎紋을 鑑定하여 “壽男”이라고 하랴? “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詩人 尹東柱를 몰랐기로서니 尹東柱의 詩가 바로 “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虎皮는 마침내 虎皮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 것이나, 그의 “詩”로써 그이 “詩人”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그의 遺詩 “病院”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一柱君과 나의 問答 —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 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예요—”   “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開拓하여 小地主 程度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會社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間島에 詩와 鄕愁와 같은 것이 醱酵하기 비롯한다면 尹東柱와 같은 世代에서부텀이었구나!” 나는 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의 일절.           다시 一柱君과 나와의 問答 —   “延專을 마치고 同志寺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吝嗇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冊이나 샤쓰나 거저 줍디다.”   “工夫는?”   “冊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願하면 時間까지도 아끼지 않습디다.”   “心術은?”   “順하디 順하였습니다.”   “몸은?”   “中學 때 蹴球選手였습니다.”   “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디다.”           ………………   코카사쓰 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肝”의 一節.           老子 五千言에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이라는 句가 있다.   靑年 尹東柱는 意志가 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抒情詩에 優秀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强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孤獨 속에서 죽었구나! 29歲가 되도록 詩도 發表하여 본 적도 없이!   日帝時代에 날뛰던 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無名 尹東柱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限이 없는 詩를 남기지 않았나?   詩와 詩人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十字架”의 一節.           日帝 憲兵은 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鯉魚와 같은 朝鮮 靑年詩人을 죽이고 제나라를 亡치었다.       뼈가 强한 罪로 죽은 尹東柱의 白骨은 이제 故土 間島에 누워 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또 다른 故鄕”           만일 尹東柱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詩가 어떻게 進展하겠느냐는 問題 —       그의 親友 金三不氏의 追悼辭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奮然 邁進할 것이다.                                1947年 12月 28日                                              지    용     //////////////////////////////////////////////////////////=== 서(序)―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精誠)것 몇 마디 써야만할 의무(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 쓰고 차라리 병(病)아닌 신음(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蕩盡)하고 용기(勇氣)도 상실(傷失)하고 8․15 이후(以後)에 나는 부당(不當)하게도 늙어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叱咤)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氣力)이 남었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詩人) 윤동주(尹東柱)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편 되는 유시(遺詩)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目證)한바 재료(材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虎皮)를 감정(勘定)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것이나, 그의 "시"로 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그의 유시 "病院"의 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  “형님이 살었으면 몇 살인고?”  “설흔 한살 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에요──”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開拓)하여 소지주(小地主)정도였읍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 간도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 부텀이었고나!” 나는 감상(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의 一節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戀愛)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읍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읍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順)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스 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 "肝"의 一節        노자(老子) 오천언(五天言)에,  "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라는 구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意地)가 약(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抒情詩)에 우수(優秀)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强)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孤獨)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發表)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十字架"의 一節  일제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시인을 죽이고 제나라를 망(亡)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進展)하겠느냐는 문제(問題)─  그의 친우 金三不氏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매진(奮然) 분연(邁進)할 것이다.  - 1947년 12월 28일 지 용  ─────       내가 무엇이고 정성( 精誠)것 몇마디 써야만할 의무(義務)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나는 천의를 뒤집어 쓰고 차라리 병(病)아니 신음(呻吟)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蕩盡)하고 용기(勇氣)도 상실(傷失)하고 8.15 이후(以後)에 나는 부당(不當)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精誠)까지도 잃었느냐?" 질타(叱咤)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끓으리라.      아직 무릎을 끓을만한 기력(氣力)이 남었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윤동주(詩人尹東柱)의 유고(遺稿)에 분향(焚香)하노라.      겨우 30여편(餘編)되는 유시이외(遺詩以外)에 윤동주(尹東柱)의 그의 시인(詩人)됨에 관(關)한 아무 목증(目證)한바 촌료(村料)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虎紋)을 감정(鑑定)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詩人)윤동주(尹東柱)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尹東柱)의 시(詩)가 바로 "시(詩)"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호피)는 마침내 호피(虎皮)에 지나지 못하고 말을것이나.그의 "시(詩)"로써 그의 "시인(詩人)"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나한테는 병(病)이없다고 한다.이 지나친 시련(試鍊),이 지나친 피로(疲勞),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그의 유시(遺詩) "병원(病院)"의 일절(一節).               그의 다음 동생 일주군(一柱君)과 나의 문답(問答)--        "형님이 살었으면 몇살인고?"        "설흔 한살 입니다"        "죽기는 스물 아홉해요-"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나시기는 어떤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開拓)하여 소지주정도(小地主程度)였읍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會社)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간도(間島)에 시(詩)와 애수(哀愁)와 같은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尹東柱)와 같은 세대(世代)에서 부텀이었고나!"나는 감상(感傷)하였다.              .......................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太初)의 아침"의 일절(一節).              다시 일주군(一柱君)과 나와의 문답(問答)--        "연전(延專)을 마추고 동지사(同志社)에 가기는 몇살이었던고?"        "스물 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戀愛)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것 못 보았읍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읍니다"        "인색(吝嗇)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冊)이나 싸스나 거저 줍데다"        "공부(工夫)는?"        "책(冊)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願)하면 시간(時間)까지도 아끼지 않읍데다"        "심술(心術)은?"        "순(順)하디 순(順)하였읍니다"        "몸은?"        "중학(中學)때 축구선수(蹴球選手)였읍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읍데다"              .............................        코카사쓰 산중(山中)에서 도앙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시름 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그러나        .............................."간(肝)의 일절(一節)             노자(老子)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靑年) 윤동주(尹東柱)는 의지(意志)가 약(弱)하였을 것이다.그렇기에 서정시(抒情詩)에 우수(優秀)한 것이겠고,그러나 뼈가 강(强)하였던것이리라,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孤獨)에서 죽었고나!29세(歲)가 되도록 시(詩)도 발표(發表)하여 본적도 없이!       일제시대(日帝時代)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무명(無名)윤동주(尹東柱)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限)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詩)와 (詩人)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십자가(十字架)의 일절(一節).             일제헌병(日帝憲兵)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어름 아래 다시 한마리 이어(鯉魚)와 같은 조선(朝鮮)청년시인(靑年詩人)을 죽이고 제나라를 망(亡)치었다.              뼈가 강(强)한 죄(罪)로 죽은 윤동주(尹東柱)의 백골(白骨)은 이제 고토(故土)간도(間島)에 누워 있다.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房)은 우주(宇宙)로 통(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퐁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 짓는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또 다른 고향(故鄕)"             만일 윤동주(尹東柱)가 이제 살어 있다고 하면 그의 시(詩)가 어떻게 진전(進展)하겠느냐는(問題)--       그의 친우(親友) 김삼불씨(金三不氏)의 추도사(追悼辭)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 다시 다른 길로 구연(舊然) 매진(邁進)할 것이다.                          1947年12月28日                                                                                                                                                                                                                   지 용 ================================== - /김묘순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지용과 윤동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과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이들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없이 문학의 세계로 침잠(沈潛)하고 있었다.  송우혜 소설가는 「윤동주 평론」에서 “중학 시절의 그의 서가에 꽂혔던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정지용 시집」”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윤동주는 1935년 10월에 발간한「정지용 시집」을 1936년 3월 평양에서 구입해 정독하며 문학수업에 정진했다. 이숭원(서울여대) 교수는 정지용시가 윤동주에 미친 영향」에서 “윤동주의 습작기에 써 놓은 상당히 많은 작품에 정지용 시의 영향이 남아 있다. 윤동주는 습작기에 정지용의 시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정지용의 시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문사에게 가장 모범적인 길잡이 역할을 했음을 반증한다”며 “윤동주 외에도 다수의 시인 지망생이 그런 시도를 했을 것이나 그러한 학습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윤동주뿐으로 청년 문사 윤동주의 순정을 드러내는 사례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사행 목사는 1939년 윤동주가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하고 있을 때, 북아현동 1의 64호였던 정지용의 기와집을 윤동주와 함께 방문하곤 했다. 그들은 정지용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라 목사는 기억한다. 1948년 1월에 출간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에 정지용은 서문(序文)을 쓴다. 강처중의 부탁으로 서문을 쓰게돼 정지용과 윤동주의 인연은 계속됐다. 1923년~1929년 정지용은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압천」, 「카페프란스」 등의 작품을 썼고, 그를 좋아했던 천상의 시인 윤동주는 1942년 동경 입교대학에서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입학하게 된다. 이들의 운명은 만나서 같은 공간에 머물러 오래 도란거리지는 못했지만 사뭇 ‘문학이라는 같은 원형질’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윤동주 연구논문이나 ‘동주’라는 영화에 그를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있다. 이는 정지용의 도덕주의자적 면모의 영향관계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영향 관계는 필수 불가결했던 것이리라. 정지용의 후기 산문은 시론(時論)형식이라 할 수 있다. 중기 산문에서 보여주던 인간과 자연에의 관심에서 거리를 둔 변주곡을 울린 셈이다. 그의 시론(時論)은 주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사회의식과 비판정신이 주로 드러나는 중수필적 요소를 비교적 잘 갖추고 내면적 자아의 혼란스러움을 그려놓고 있었다. 순박하고 소박한 자아의 세계관의 소유자 정지용은 좌우익의 이데올로 기가 확실히 정립되지 못한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시론(時論) 형식으로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후기 시론(時論) 작품으로 「여적」, 「오무백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싸움」, 「쌀」,「플라나간신부를 맞이하며」, 「동경대진재 여화」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정지용은 그의 후기 산문에서 순박한 도덕주의자로 표명되며 솔직한 모럴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지용의 후기 시론(時論)에 나타난 도덕주의자적 면모는 윤동주의 지식인의 끊임없는 고뇌를 자아성찰적 자세로 애잔하게 그려놓았던 그의 시에 영향을 끼쳤다. 세상에 닮고 싶은 사람이 꼭 한 명이라도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리라. 윤동주는 정지용을 바라보며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연변지용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심한 모양이다. 옥천군의 또는 대한민국의 정지용 시를 추진(推進)할 구심점이 약해서인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한 내외부의 불편함에서 오는 고뇌인가? 참담한 민족현실에 절규하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정지용과 윤동주. 이들을 놓고 혼란을 빚는 것은 마치 중요한 일을 버리고 바쁜 일부터 해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목숨만큼이나 소중했던 그들 삶의 깊은 흔적과 도덕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흘렸던 눈물의 방향을 지키자. 무게중심이 기울지 않는 굳센 노 하나쯤 흔들리지 않고 저어가는 우리가 되자. ///옥천향수신문 
1205    윤동주와 마광수 댓글:  조회:2307  추천:0  2018-08-09
  서문 / 마광수 정지용의 서문이 붙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가 처음 간행된 것은 1948년이다.그러나 해방이 가져다준 감격의 소용돌이속에서 오 랫동안 잊혀져 왔던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재평가하고,그에게 정당한 위치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였다. 윤동주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그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용정 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애국정신이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개척사업과 교육사업에 공헌한 지도적 인사였고,아버지 또한 학교 교원으로 일했다고 돼 있어 지사적 기개가 넘친 집안임을 짐작케 한다.그리고 조부와 부친이 똑같 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성장배경에는 가정적 으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었다.1931년 명 동 소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관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 교에 전입했다.그러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고 일본 사람 손 에 접수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하였다. 그즈음부터 동시를 많이 써서 `카톨릭 소년'지에 `빗자루'(36년) `병아리'(36년) 등을 `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11월에 졸업한다. 이때 스스로 추려 뽑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비출판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단속을 걱정한 스승 이양하의 만류로 단념하고 후일 1942년초 `평 소동주'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동년 4월 일본 동경의 입교대학 영문과 에 입학했으나 가을에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던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 되어 고문섞인 취조를 받았다.결국 그는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운명하 고 만다. 그는 한.일합방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그가 시를 썼던 시대(1936년~1943년)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외면했던 때였다.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경보가 울리 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그리고 이나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이러한 시대상황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 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 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 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어찌 보면 군사독재시절 이한렬군이나 박종철군의 죽음과 견주어질 만한것으로서 시 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백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 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남에 대한 애정이 곧 자기자신에대한 자괴감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 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도 그는 스스 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시는 시인의 자기 통찰과 자기연민,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의 시인기질에 따른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시 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욕 구와 비애를 시창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으며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서 자아의 변증법적 발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등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내적 투쟁의 기록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 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부르짖거나' `가르치거나' `과장적으로 흐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물론 윤동주의 `발가벗기'는 다분 히 실존적 현학의 냄새나 종교적 형이상성의 냄새를 풍기는 발가벗기이다.그 래서 좀더 자신의 심층아래로 내려가 본능적 욕구를 발가벗기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퓨리터니즘'이라는 옷을 태어날 때부터 두텁게 입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적 정황이 본능보다는 관념에 치우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윤동주는 `발가벗기'정도만 가지고서도 우 리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문학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에서 한 발자욱 도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윤동주 시의 또 다른 장점은 그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라면 대부분의 시들이 정지용류의 감각적 서정주의나 카프식의 정치 적 이데올로기시,둘중 하나일 때였다. 또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도 전원주의적 회고주의가 고작이었고 윤동주처럼 자연을 내적 갈등의 상징으로 응용한 시인은 없었다.남들이 모더니즘이니 초 현실주의니 하고 외국의 유행사조에 민감해 있을 때 그는 다만 일기를 써나 가는 형식으로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심경을 담담히 고백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의 `힘'을 어찌됐든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정신중에서도 이성에 속하 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각 또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문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문학의 효력은 서 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 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 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 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 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 우리 문학 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마광수 저 [철학과현실사 발행] 중에서)             
1204    윤동주와 녀성 댓글:  조회:3410  추천:0  2018-08-09
윤동주시인의 시에는  아시지만, 여성이  등장하는 시가 세 편 있다.  윤동주 시  세 편에 나오는  여성은  모두    혹은 라는  이름이 나오는 시로서  그로서는 좀 특이한  이 사랑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  , 등 세 편이다.   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섭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水晶  눈을  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르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聖스런  촛대에  熱한  불이  거지기 前 順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前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ㅡ  전문. 1938. 6. 19.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바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ㅡ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ㅡ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ㅡ 전문.  1939.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훌훌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고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곷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ㅡ전문.  1941. 3. 12.       순이라는 이름을 두고 가슴 앓이 하는  모습이  선연하다. 이 부끄러움 많은 사나이는 사랑의 상처만  잔뜩  받은 모습이  선연하다. 세 편의  시마다 그렇다. 평전에 의하면  윤동주는  연희전문  다닐 때   이화여전  같은 졸업반  여학생을 흠모한 듯하고  그 결과의 시가  과  이고,  동경 유학시에  박춘혜라는  여성과  연정이 있었는데  이 여자는  여름 방학  중에  다른 남자와  약혼해   버린다.  그 상처로  쓰여진 듯한 시가  인 듯....    ===================================/// 인물연구 .   윤동주를 위한 29개의 키워드 7 /김혁   순이 -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서울예술단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중에 나오는 순이의 형상     윤동주의 시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다룬 시 몇수가 있다.      “사랑의 전당”(1938), “소년”(1939), “눈 오는 지도”(1941)등 세수의 시이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사랑을 노래한 시, 그렇기에 더욱 애절하고 시리고 아름다운 이 시 세 편에는 한결같이 “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윤동주의 애독자들은 “순이”가 누구인가 궁금해 질것이다. 혹여 실제 인물이 아닐가 하는… 이를 두고 "윤동주 연구자들은 한번쯤 연구해볼만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힌다.  (중략)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것이냐, 떠나기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혀 따라갈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 눈 오는 지도(地圖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중략)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초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하략) - “사랑의 전당”   …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소년”   수줍음의 대명사인, 그야말로 바른생활의 사나이 윤동주의 녀성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가?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의 절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씨의 회고에서 한 녀인과 윤동주의 일화가 나온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서울 신촌에서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인 지사(志士) 한 분이 있었다. 윤동주는 그분을 매우 존경했고 가끔 그 분 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이화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엿고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도 윤동주와 같이 다녔다고한다.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니“그 녀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것만은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고 정병욱은 회고했다.  그러나 정병욱씨의 이 회고는 그저 추측의 범주에 머물수밖에 없는것 같다.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이였던 이 녀학생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며 그가“눈 오는 지도”나 “사랑의 전당”의 “순이”인지 아닌지 전혀 알 길이 없는것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의 증언에서도 한 녀인이 나온다. 일본 류학중에 만난 박춘애 (혹은 박춘혜)라는 이름의 녀학생의 사진을 가져와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고 할아버지께서 좋다고 하셨다고한다. 목사의 딸이고 성악을 전공하는중이라고했다.  윤혜원의 남편 오형범은 윤동주의 사후에 박춘애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한다. 연변에서 서울로 가던중에 청진에서 잠시 머문적이 있는데 거기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는 박춘애를 만났다고한다. 그런데 알아보니 “윤동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을 뿐이고 프러포즈도 못했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사실 윤동주가 순이라는 이름을 맨 처음 접한것은 아마 명동학교 졸업시기가 아니였나고 생각된다.  1931년 3월20일 명동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치르면서 학교교지도 만들고 서울에서 아동잡지를 주문해 보며 문학에 심취되였던 윤동주와 송몽규, 김정우등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國境)의 밤”을 한권씩 선물했다.     이 서사시에서 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재가승(在家僧)의 딸인 순이는 마을의 선비청년과 래일을 기약한다. 허나 순이는 재가승의 정칙대로 재가승에게 출가를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다. 이러한 숙명적인 비련의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두만강지역 서민들의 생활상으로부터 민족의 설음과 슬픈 사랑을 보여준 서사시이다. 한글 최초의 장편서사시는 문학에 심취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을것이고 서사시에 나오는 비정한 현실의 주인공 순이에게서 윤동주는 처음으로 하나의 녀인상을 읽었을는지 모른다.    막연히 “순이”라는 이름에 호기심이 동해 추적해 보지만 결국 윤동주의 “한낱 벙어리같은” 피지 못한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웁게 한다.   미남형에 천부적으로 여린 감성과 다감한 성격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윤동주라 이성의 눈길을 끌기에는 족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앞서 읽은 “사랑의 전당”에서는 “우리들은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나오며 윤동주의 다른 한 시 “바람이 불어”에서는 "단 한 녀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윤동주의 사랑시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읊조림과 그로 인한 상흔으로만 남았다.  순이하면 어쩐지 순진하고 순정 많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고향의 이웃 녀동생의 이름 같은 첫사랑 그녀자의 이름같은, 그 이름- 순이다.  하지만 여기서 “순이”는 특정한 어느 녀인의 이름이기보다 그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설정한 하나의 보통명사인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던 마광수교수는 윤동주는 “’순이’라는 심상을 통해서 모든 우리 민족의 녀성, 또는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있는 리상적인 ‘님’, 모든 이웃과 동포를 함축적으로 상징하려했던것 같다”고 폭 넓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사랑에 눈 뜰 나이에 윤동주는 자신의 앞길과 문학,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의 흉흉함에 휩싸이게 된다. 풋풋하고 신선한 사랑의 분위기에 쌓일만큼 동주를 안온한 분위기로 이끌기에는 모든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일제의 철쇄에 수족이 동여 자유롭지못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캄캄한 민족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윤동주는 자신의 리상 실현이 쉽지 않음을 알고 고민한다. 이런 마당에 태평한 시절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할수 없음을 알고 더욱 락심해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윤동주의 사랑시들은 모두가 슬픔의 색갈로 점철되여 있다.  민족시인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는 개인의 안일만을 위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할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후에 민족을 위한 우환의식을 그 기저에 수납한 더 지고한 사랑으로 확산되여 그의 시편들에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윤동주의 사랑은 한낱 남녀의 치정이 아닌 종교적인 사랑, 범민족적인 사랑의 차원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봐야 무방할것이다.   "문화시대" 2012년 4월호     [출처] 순이- 윤동주가 사랑한 녀인(?) |작성자 김 혁  
1203    윤동주와 "머리" 댓글:  조회:2352  추천:0  2018-08-09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2002/9/12]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120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밤 댓글:  조회:3340  추천:0  2018-08-09
밤    /윤동주            외양간 당나귀 아앙 앙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        * 목연 생각 :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셔서 해방 공간의 여명에 불우하게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의 작품입니다.   시골 농가의 어느 날 밤풍경이 떠오르네요.. 당나귀가 배가 고팠나 보지요. 아니면 팔려가 새끼가 보고 싶어서 울음을 울었는 지도 모르고요. 그 소리에 아기도 함께 깨어나서 울고요.   아버지는 불을 밝히고 외양깐에 가서 나귀를 달래고 엄마는 애기에 젖을 먹이며 달래고 있습니다.   당나귀는 집안의 현재 재산이고, 아기는 집안의 미래 희망입니다.   정겨우면서도 왠지 안쓰러움이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합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지금의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세대가 되셨습니다. 이 시속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음으로 집안을 보살피며 우리를 키우고 계시고요.   우리도 자라면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키울 테고, 그 때도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들겠지요.   그러면서 때로는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윤동주 시인같이 채 피지 못하고 슬프게 시들 수도 있을 것이고요.             * 윤동주(1902~1934)  : 시인.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남.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재학 중   항일 운동을 했다는 혐으로 체포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함.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괴로운 시대를 살아아가면서   양심에 출실하고자 끊임없이 번민하는 젊은이의   순결한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 줌.   유고시집 ===================================///   출생 1917년 사망 194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거는 일이다. 창씨 개명과 국어 사용 금지, 강제 공출과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1) 시인이 있었다.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젠가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그가 바로 윤동주(尹東柱, 1917~1945)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2) 의 어둠 속에서 끝내 ‘아침’을 맞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응시한 시인 윤동주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인간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아를 응시하는 내면적인 인간형에 속한 사람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며 패 · 경 · 옥과 같은 예전에 알던 이국 소녀들, 비둘기 · 강아지 · 토끼 · 노새 · 노루와 같은 순한 동물들, 그리고 프랑시스 잠 ·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보던 다정 다감한 젊은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3) 던 시인 윤동주. 그는 사람들이 호구지책과 안락한 생활, 사유 재산에 집착할 때 고요한 내면에 병균처럼 파고든 시대의 어둠을 조용히 응시하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씌어지는 것”4) 조차 몹시 부끄러워한다.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이던 그는 해방을 불과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차디찬 이국의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윤동주의 육필 원고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명동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1899년 바로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기독교와 교육, 독립 운동의 중심지로 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원 교사를 지낸다. 윤동주는 명동촌의 큰 기와집에서 자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서른 그루쯤 되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있는 과원, 동쪽 쪽대문 밖에는 깊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그는 나중까지 잊지 않는다. 쪽대문 밖의 우물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면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5) 가 비치던 바로 그 우물이다. 그 사나이는 오똑하고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방울,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투명한 살결, 단정한 매무새를 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었으리라. 귀족적인 풍모에 깔끔하면서도 맵시있는 멋쟁이였던 윤동주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소학교 시절에 문학과 만난다.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그는 나중에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 하는 송몽규와 『어린이』 · 『아이생활』 같은 소년 잡지를 구독하고 연극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닦는다. 5학년 때는 송몽규와 함께 월간 잡지 『새명동』을 직접 등사판으로 펴내기도 한다. 이 등사판 잡지에 윤동주는 제가 쓴 동시와 동요 등을 싣는다. 당시 윤동주를 비롯한 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는데,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졸업 선물로 주었다는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20여 리 떨어진 중국인 마을에 있는 소학교에 편입한다. 이 곳의 학교에 1년쯤 다닌 추억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다음해인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용정 은진중학교 시절에 윤동주는 폭넓은 활동을 한다. 교내 잡지를 발간하느라 밤새 원고지와 씨름하는가 하면 축구와 농구, 웅변에도 소질을 보인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 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당시 간도 지방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도 부모를 설득해 1935년 9월에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 전학한 해에 그는 숭실중학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을 발표하고 여러 시집을 탐독한다. 1936년 1월에는 1백 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미처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내내 시집 전체를 베껴 쓰기도 한다. 1936년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이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온 그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더 밟는다. 윤동주가 다니던 용정의 은진중학교 나중에 대성중학교로 이름이 바뀐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37년의 일이다.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콩트 「숟가락」으로 당선된 바 있는 문인으로, 당시에는 꽤 알려진 이름이었다. 진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문학 공부를 하길 원하지만 아버지 윤영석이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한동안 갈등을 겪는다. 졸업반인 5학년 2학기부터 다음해인 1938년 초까지 몇 달 동안 부자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윤동주가 식음마저 전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자 할아버지 윤하현과 외숙부 김약연이 나서 아버지를 설득,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이 이루어진다. 일본 유학 시절의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해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통해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민족 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강의가 없으면 주로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정지용 · 김영랑 · 백석 · 이상 · 서정주 등의 시를 열심히 읽고, 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 앙드레 지드 · 발레리 · 보들레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프랑시스 잠 · 장 콕토 등에 빠져든다.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황량한 서강 들판과 인적 없는 창내벌(지금의 창천동)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혼자 걸으며 시를 구상한다. 윤동주를 알던 이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와 함께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 연희전문 2년 후배 정병욱의 회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우리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어.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어. 세수는 골짜기 아무 데서나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조반을 마친 다음에는 학교로 나갔지. 하학 후에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충무로 일대의 책방들을 순례했어.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丸善), 군서당과 같은 신간 서점과 구서점들을 돌고 나서 음악 다방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산 책들을 펴보곤 했지. 가끔은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기도 하고. 다시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 책방을 순례하고 돌아오면 이미 어둑해져 거리에 전기불이 환하게 밝혀졌지.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1941년 일제의 혹독한 식량 정책으로 기숙사에서 나오게 된 윤동주는 넉 달쯤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한다.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던 김송의 집에서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 · 「태초의 아침」 · 「십자가」 · 「또다른 고향」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그 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詩稿集) 세 부를 만든다. 그는 세 부 가운데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연희전문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그의 시고를 읽어본 이양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한다. 「십자가」 · 「슬픈 족속」 · 「또다른 고향」 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이양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에는 출판을 하지 않지만, 졸업 직후 용정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와 출판 문제를 의논하는 등 시집 출판에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 문제가 걸려서 출판 계획을 접게 된다. 결국 윤동주 생전에 시집 출판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뒤 윤동주와 이양하가 갖고 있던 시고는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된다. 나머지 정병욱에게 준 시고만 그의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싸서 마루 밑 깊숙한 곳의 항아리에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된다.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시가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육필 시고집을 그가 죽고 나서 해방 뒤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1948년에 나온 판본(왼쪽)과 1955년에 나온 판본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윽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앞두고 그는 집에 전보를 치는 등 귀향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특고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도 함께 잡혀 들어가는데, 이들의 죄명은 ‘치안 유지법’ 위반. 말하자면 독립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일본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송몽규는 한때 중국의 난징 쪽에서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적이 있고,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의 일본인 교수와 민족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긴 하다. 얼마 뒤 윤동주는 2년형, 송몽규는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일본으로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 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간도의 소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한 윤동주(앞줄 왼쪽)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얼마 전, 후쿠오카형무소에 들어간 윤영석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기 위해 시약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윤영석은 그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한다.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엽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죽지 않았나 싶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 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주검은 말끔한 편이었고, 장례는 3월 어느 눈보라치던 날에 용정 동산에서 치러진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 윤동주. 그의 시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는 부끄러움과 죄 의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식민지 피지배 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 세계 사이에서 그는 심각한 자기 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거울’은 바로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종족과 역사라는 큰 틀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기 응시와 자기 성찰의 매개적 상징물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참회록」 일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끊임없이 윤리적인 자기 완성을 꿈꾸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한 점의 욕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던 청년 시인은 이렇게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처럼 떠나고 만다. 선언(宣言)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 제군(諸君)! 진보적(進步的) 지식 계급(知識階級) 제군(諸君)! 아세아(亞細亞) 십억만(十億萬)의 착취(搾取) 압박(壓迫) 침략자(侵略者)로서 군림(君臨)해 오든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최후(最後)의 심판(審判)의 날은 왓다. 36년간(三十六年間) 전세계(全世界)에 가혹(苛酷)하기 그 예(例)가 없엇든 제국주의(帝國主義) 일본(日本)의 강제적(强制的) 지배(支配)와 노예적(奴隸的) 압정(壓政)에 신음(呻吟)하든 우리 조선 민중(朝鮮民衆)도 드듸어 자유(自由)와 해방(解放)의 날은 왓다. 그러나 제군(諸君)! 오늘 우리는 이 환희(歡喜)의 날을 마지하면서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절대 다수(絶對多數)인 노동자(勞動者) 농민(農民)의 완전(完全)한 해방(解放)을 목표(目標)로 한 과감(果敢)한 투쟁(鬪爭)이 남어 잇다는 것을 알어야 한다. 1935년(一九三五年)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야만적(野蠻的)인 강압(强壓)으로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藝術同盟)이 해산(解散)되자 혹(或)은 지하(地下)로 혹은 비협조적(非協調的) 태도(態度)로 우리들의 문학 활동(文學活動)은 일시(一時) 정돈(停頓)되고 오직 일부(一部) 개종(改宗)한 반동 분자(反動分子)만이 뿌르죠아 문학자(文學者)와 보조(步調)를 일치(一致)하여 왓다. 이리하야 과거(過去) 십년간(十年間) 조선(朝鮮)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은 자연(自然) 침체(沈滯)의 비경(悲境)에 잇엇든 것이다. 그러나 8월 15일(八月十五日)을 계기(契機)로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살인적(殺人的)인 무거운 철쇄(鐵鎖)는 끈어젓다. 이에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文學同盟)은 다시 결성(結成)되엇다. 우리는 일체(一切) 반동 문학 운동(反動文學運動)과의 투쟁(鬪爭)을 전개(展開)하며 비민주주의(非民主主義) 개량주의(改良主義) 봉건주의(封建主義) 국수주의(國粹主義) 예술 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문학(文學)을 배격(排擊)하는 동시(同時)에 프로레타리아 예술(藝術) 확립(確立)에 매진(邁進)하려 한다. 강령(綱領) 1. 우리는 프로레타리아 문학(文學) 건설(建設)을 기(期)함 1. 우리는 파씨즘 문학(文學) 뿌르죠아 문학(文學) 사회 개량주의(社會改良主義) 문학(文學) 등(等) 일체(一切) 반동적(反動的) 문학(文學)을 배격(排擊)함 1. 우리는 국제(國際) 프로레타리아 문학 운동(文學運動)의 촉진(促進)을 기(期)함 1945년 9월 17일(一九四五年九月十七日) 조선(朝鮮)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文學同盟) 중앙 집행 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 이기영(李箕永) 서기장(書記長) 윤기정(尹基鼎) 중앙 집행 위원(中央執行委員)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조중곤(趙重滾), 박승극(朴勝極), 권환(權煥), 김두용(金斗鎔), 이북명(李北鳴), 한효(韓曉), 박아지(朴芽枝), 홍구(洪九), 박세영(朴世永), 이동규(李東珪), 박석정(朴石丁), 송완순(宋完淳), 엄흥섭(嚴興燮), 안동수(安東洙), 조벽암(趙碧岩), 윤곤강(尹崑崗), 송영(宋影), 신고송(申鼓頌), 이주홍(李周洪), 정청산(鄭靑山), 김승구(金承久), 박팔양(朴八陽), 윤기정(尹基鼎) 외부 위원(外部委員) 소설(小說) =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엄흥섭(嚴興燮), 이동규(李東珪), 안동수(安東洙), 홍구(洪九) 시(詩) = 권환(權煥), 윤곤강(尹崑崗), 박세영(朴世永), 박아지(朴芽枝), 조벽암(趙碧岩) 희곡(戱曲), 씨나리오 = 송영(宋影), 김승구(金承久), 신고송(申鼓頌), 박영호(朴英鎬) 아동 문학(兒童文學) = 송완순(宋完淳), 이주홍(李周洪), 정청산(鄭靑山) 외국 문학(外國文學) = 이홍종(李洪鐘), 권환(權煥), 김장환(金章煥), 이기영(李箕榮) 평론(評論), 수필(隨筆) = 김두용(金斗鎔), 윤기정(尹基鼎), 한효(韓曉), 박석정(朴石丁), 박승극(朴勝極) 동맹원(同盟員) 김태준(金台俊), 김두용(金斗鎔), 김오성(金午星), 김창술(金昌述), 김해강(金海剛), 김태진(金兌鎭), 김승구(金承久), 김장환(金章煥), 김람인(金嵐人), 김병호(金炳昊), 김우철(金友哲), 김단미(金丹美), 김성봉(金性奉), 김대균(金大均), 구직회(具直會), 권환(權煥), 박승극(朴勝極), 박세영(朴世永), 박아지(朴芽枝), 박석정(朴石丁), 박노춘(朴魯春), 박팔양(朴八陽), 박태양(朴太陽), 박완식(朴完植), 박영준(朴榮濬), 박영호(朴英鎬), 서인식(徐寅植), 손풍산(孫楓山), 송영(宋影), 송완순(宋完淳), 신고송(申鼓頌), 안동수(安東洙), 안함광(安含光), 안용만(安龍灣), 엄흥섭(嚴興燮), 윤기정(尹基鼎), 윤곤강(尹崑崗), 윤세중(尹世重), 이기영(李箕永), 이동규(李東珪), 이주홍(李周洪), 이북명(李北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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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앞으로 계속 동주를 안고 갈 새세대들을 키워야"... 댓글:  조회:3103  추천:0  2018-08-08
  치바켄 카시와의 아늑한 커피솝에서 그녀와 만난 것은 올해  1월(2018년도) 중순쯤이였다.    네번째로 만난 사이지만 둘만의 자리가 처음이였다.   제일 첫번째 만남은 2017년 2월 때였고 두번째 만남은 그해 10월 그녀에게 끌리워 진보쵸(神保町) 에 있는 한국책방 ‘책거리’에 키치죠녀자고등학교(吉祥女子高等学校)의 국어교원인 하기와라 시게루(萩原 茂)씨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였고 세번째 만남은 같은 해 11월 릿쿄대에서 열린 때였다.   윤동주관련행사때마다 만나는 그녀였지만 한번도 편안한 자리가 아니였었다.   조금은 긴장되여 있는 나를 그녀의 다정하고 밝은 미소가 맞아 주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씨, 우리말로 풀면 ‘별하늘1917’로 된 그녀의 라인(LINE) 아이디를 받으면서 윤동주에 대한 그녀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다시금 느끼게 되였다.   1968년에 릿쿄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그녀,  “당시 윤동주를 알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어쩐지 아쉬움이 배겨 있었다.   사실 릿쿄대 은사님이 윤동주와 동급생이였음을 썩 후에야 알게 되였다면서 지금에 비해 더 많이 윤동주에 대해 알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였다.   그녀는 한국어에 능하다. 아들애가 소학교에 다닐때  일한야구친선경기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인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어를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빌려준 이바라기 노리코(茨城のり子)씨의 에세이를 통해 윤동주를 알게 된 그녀는 릿쿄대에 잠시나마 머물렀던 선배 윤동주의 시에 반하게 되고 그의 시집을 사게 되였다.   “윤동주의 무엇에 끌리웠나요?”   시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윤동주의 성실한 매력을 느꼈다는 그녀이다.    “젊어서 요절한 시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애달픔을 주는 시인입니다.  동주는 시와 생애가 일치한 시인이며 불굴의 리념과 깊은 사상을 가진 시인입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동주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려고 애쓴 시인이기때문에 그의 시는 현시대의 사상과 비숫한 면이 있다고 봐요.  때문에 그의 시는 70년이 지나도 사랑을 받을수 있고 민족이 서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사연을 안 후에는 더더욱 시에 빠져 들기 시작했고 점차적으로 일본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는 그녀이다.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의 사람들과 같이 연변을 방문하게 되였다. 윤동주생가를 방문하고 동주고향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는 야스코씨.    일본에 돌아 온 그녀는 연변에 가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간단한 강연 등을 했다.  릿쿄대학에서 뭔가 의미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계기가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당시 릿쿄대의 교목으로 있었던 유시경신부와 만났다.                             1999년 윤동주묘지앞에서                            1999년의   윤동주생가    마음이 통한 두사람의 힘으로 2008년 2월에 가 세워졌고 제1회 추모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이미 11번째를 맞는 이 행사는 야나기하라씨에게 있어서 년중 가장 중요한 스케쥴부분이다.  2010년부터는  윤동주장학금제도가 나오게 되였고 더욱 많은 젊은 세대들이 추모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2017년       창시인의 한사람인 그녀는 윤동주일본시절의 행적조사를 하는것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다.     릿쿄시대의 학적부에 적혀 있는 주소를 기본으로 윤동주가 잠시 짐을 풀었던 삼촌 윤영춘이 살던 곳(현재 재일한국 YMCA아세아청소년센터)외에  에 나오는  ‘六畳房은 남의 나라’에서의  六畳房의 행방을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다.   한국리얼리즘의 대표작가 황석영의 방북수기 에  북조선의 시인 ‘백인준이 윤동주와 같이 하숙했었다’는 정보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된 그녀는   「尹東柱評伝」의 작가인 송우혜씨를 통해 황석영작가의 련락처를 알게 되였고 그 문구의 여차여차 사정에 대해 문의하기도했다.   비록 윤동주의 당시행적에 대해서는 알아 낼수 없었지만 백인준시인이 릿쿄에 다녔고 당시 윤동주와 함께 주숙을 했었다는 그 한마디를 근거로 새로운 방향의 조사를 시작했다.   백인준시인의 릿쿄대시절의 학적부와  동급생들에게서  얻어 낸 당시  주숙지의 두가지 주소를  손에 쥔 그녀는 부지런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윤동주와 백인준씨의  당시거처지가 지금의 부근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였다.   동시에 그녀는 동주의 서적행방을 찾고 싶다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귀한 시기였기때문에 간단하게 책을 버릴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주가 소지했던 책들이 고서점들에 잠들어 있을겁니다.”   동주에게는 책에 자기이름과 구입날자를 적는 버릇이 있었다.  야스코씨는 그가 소지했던 책들을 찾을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고서점들을 찾아 다닌다.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나는 소박한 질문을 했다.   “실례인줄 압니다만  순수 일본인이세요? "   “네. 일본인입니다만…”   “근데 왜 그렇게까지…합니까?”   조심스럽지만 대담한 나…   “일본인들에게 정확한 일본의 력사를 알게 하고 싶습니다.  동주를 계기로 당시의 력사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영화 를 본 50대의 한 관중이 야나기하라씨를 찾아 왔었다.   “그 영화가 사실입니까? 진짜로 그렇게 혹독한 일을 일본사람들이 했서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고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기뻤다.   음악, 시, 영화 등 문화의 힘을 느꼈다.  문화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씩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하는것은 일본에도 리로운 일이라는 야나기하라씨.     “보통청년이였던 동주가 당시의 기분을 그대로 시로 적은 것이 어떻게 죄가 되냐”고 조용하면서도 강한 음조로 말하는 그녀는  ‘옥중에서의 동주의 마음에는 어떤 시가 있었을가’ 라는 의문에 늘 사로 잡히게 된다.   릿쿄대의 마크가 찍힌 편지지에 쓴 5수의 시를 연희전문학교때의 친구인  강처중에게 편지로 전한것을 마감으로 일본에서의 동주의 시는 남지 않았다.   친구 강처중이 필사적으로 지켜 온 시 ,  ,  ,  ,  (이상 제목은  육필원고 그대로임) 이 다섯수의 시외 일본에서 쓴 시는 몽땅 압수당했던것이다.   체포당시 윤동주가 창작노트를 갖고 있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노트에 적힌 시를  동주가 번역했다는데 자기의  시를 어떻게 번역했을가…   너무 궁금하다.   “야스코씨의 그 행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가요?”   “물론 윤동주의 매력에 끌려 계속하고 있어요.”   해마다 2월이면 윤동주 추모회를 조직하고 있고 또한 릿쿄대학 이문화커뮤니케이션 학부의 활동에 협력하고 있으며 릿쿄대학 윤동주국제교류장학금을 받는 학생과들의 교류,  타대학에서의 윤동주 관련 강연회, 영화  상영,  시의 토크와 시 랑송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씨는 일본으로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오는 분들에게 안내를 하는 활동도 등한시 않고 있다.   해마다 10월에는 릿쿄대학 홈커밍에서 졸업생들에게 윤동주 시인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그녀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기분만은 아직인데 저의 나이가 이미 70을 넘었어요.  그리구 동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미 95세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양성에 힘을 넣으려 합니다. 앞으로 계속 동주를 안고 갈 새세대들을 키워야 합니다.”   간절하게 들려 왔다.   세시간에 걸쳐 인터뷰는 끝났다.  너무나 감상적인 그녀와 함께 동주를 생각하고 아파하고 아쉬워 하는 소중한 시간이 감사했다.   “아, 한가지 가르쳐 주세요” 다음 만남의 약속을 정하면서 갑자기 그녀가 메모용필기장을 꺼냈다.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독특한 방언때문에 한국어로는 좀처럼 리해를 하지 못한다는 그녀. 그래서 거의 대부분 시를 일본어로 접하고 있다는 그녀이다.   그런 그녀가 시 ‘할아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다.   필자가 연변출신인것이 다행이라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잠시나마 기뻤다.   할아바지   왜떡이 씁은 데도 작고 달다고 하오   이 시에서의 ‘왜떡’의 ‘왜’가 ‘일본’을 말하는가? 아니면 ‘어째서’의 뜻인가라는 의문이였다.   나는 잠간 놀라기도 했다. 대부분 육필원고를 보면 띄어 쓰기가 안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의문을 가져 보지 못했던 부분이였다.   '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자는 민감한 부분일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시어로 보면  '왜떡'은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늘여서 구운 과자일것이고    ‘어째서’의 뜻으로 띄어 쓰기가 안된 것 일수도 있습니다.  구태여 문제를 설정하고 본다면 윤동주가 ‘왜놈’의 떡이라는 깊은 뜻을 담았을수도 있구요. 시인만이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가요?”     질책을 받을 무책임한 해석일수도 있는  나의 이른바의 '해석'에  그녀는 납득이 된듯 열심히 메모했다.   자리를 뜨면서 연변의 ‘감자밴새’가 그립다는 그녀한테서 레시피부탁을 받았다.   다음번 만남까지의 숙제인것이다. 올 2월 3일에 있은 2018 국제비교한국학회  국제학술회에서     [출처] 일본인으로서 무언가 하고 싶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씨|작성자 미래의 나를 사랑한다  
1200    [자료] - 윤동주 동시와 그 세계를 론하다... 댓글:  조회:2480  추천:0  2018-08-08
  윤동주 동시와 그 세계       토론자 : 박 일(이하 ‘박’) 박혜자(이하 ‘혜’) 김춘남(이하 ‘김’) 남은우(이하 ‘남’) 김자미(이하 ‘미’) 강기화(이하 ‘강’) 하 빈(이하 ‘하’) 이서영(이하 ‘이’)       *윤동주(1917~1945)에 대해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면 명촌동에서 윤영석(파평 윤씨)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부가 기독교 장로인 집안으로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세례를 받았다. 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는 해환이었다. 그의 형제는 누이 윤해원, 동생 윤일주, 윤광주가 있다. 1925년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급우는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그리고 문익환 등. 1929년 송몽규 등과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했으며, 아동시를 발표.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 1932년 4월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였고, 축구선수로도 활약. 1934년「삶과 죽음」 「초 한 대」 그리고 「내일은 없다」 등 시를 발표하였다. 이후 그의 자작시에는 시를 쓴 날짜를 기록하였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그 때 시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와 동시 「조개껍질」을 발표.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유로 폐교되어,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카톨릭 소년』 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등을 발표. 1938년 2월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였고,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시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하였고, 12월 27일 졸업하였다.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행. 1942년 도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0월에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학.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송몽규(교토대학 재학)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7월 14일). 1944년 2월 22일 기소되었고, 3월 31일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월 26일 옥사하였다. 송몽규는 3월 10일 옥사. 1955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정음사)를 간행.       박- 애송시 한 편을 들라하면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구절이 내 교만과 자만을 다스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동시교실’은 주로 창작 위주의 활동을 했습니다만, 유명한 분의 작품세계도 건드리면서 토론도 해보면 우리들의 창작 세계도 한층 확대되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토론의 주제는 윤동주의 동시세계입니다. 윤동주는 이미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삶과 고뇌, 그리고 시세계는 많은 평론가들이 거론했기 때문에 그의 동시세계에 대한 접근은 또 다른 맛을 줄 것입니다. 윤동주의 동시는 약 35편입니다.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 것은 1934년 18세 때입니다. 동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1935년 「조개껍질」입니다. 1938년까지는 주로 동시를 발표하지요. 아마 윤동주 시의 원형은 동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토론의 범위를 좁히기 위하여 그의 동시에서 동심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 자연친화 또는 생명사상은 어떠했는지, 또한 애국 애족과 민족의식 등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리고 윤동주를 공부하면서 얻은 것이나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토론해볼까 합니다.     하- 윤동주 하면 저 역시 「서시」가 떠오릅니다. 「서시」란 말 그대로 책머리에 쓰는 시입니다. 따라서 서시에는 그 시인의 철학, 인생관, 가치관이 집약되어 있고, 윤동주의 「서시」에서 그 전범을 봅니다. 나아가 그 의미를 공감하는 자에게 가장 유효한 인용시가 되기도 합니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시」와 문익환 목사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는 평양 순안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부허가 없이 입북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쇼킹한 사건은 연일 매스컴을 달구었고 한동안 온 나라가 술렁거렸지요. 그때 문목사가 북한땅을 밟고 제일 먼저 입을 열어 한 일이 「서시」 낭송이었습니다. 그는 서시가 갖는 상징성을 인용하여 자신이 북한에 온 이유와 할 말을 대신 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남과 북의 위정자와 그 추종자들에게 나아가 온 겨레에게 그는 이 한 편의 시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고 그들의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남, 북 모두 일체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문익환의 고고하고, 지순하고, 처연한 절규도 그들에게는 한낱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을지 모르니까요. 문익환과 윤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 다시 용정 광명학원까지 같이 했습니다. 윤동주는 본래 동시인이 되어야할 성정이지 싶습니다. 그가 좋아한 별, 사슴, 토끼, 참새, 병아리 등은 모두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니까요. 정이 많고 따뜻하고 순정한 영혼을 가진 것도 동시인의 기본입니다. 윤동주가 동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1935년 10월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을 읽고부터였습니다. 정지용의 동시를 보고 동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때부터 동시를 썼지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짧은 기간(20세 전후의 약 2년여)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냈지요. 어린이들은 언제나 동시를 쓸 수 있습니다. 구태여 글로 쓰지 않아도 그들의 웃음, 행동, 말, 눈짓들이 바로 동시라 해도 좋을 것이지요. 그러나 어른은 다릅니다. 나의 경험으로는 어른은 행복할 때에만 동시를 쓸 수 있습니다. 행복한 때에만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윤동주는 적어도 이 동시들을 쓸 때까지는 행복했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의 동시세계는 행, 불행을 초월한 그리움의 원형을 노래한 것 같지만요. 그 그리움의 원형은 고향과 유년입니다.     미- 윤동주의 동심은 그리움이고, 그 원형은 고향이고, 유년이라는 말씀에 공감해요. 그의 전집에 실린 125편 중에 동시가 28편이고, 동요가 6편이 들어있는데, 작품 성격을 보면 1939년에 쓴 「자화상」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전기부분에는 동시, 동요를 비롯해서 일반 서정시가 많았고요. 후기에는 시대인식이 스며든 자제의 시를 섰다고 하죠. 동시를 쓴 시기를 하빈 선생님께서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셨는데,  물론 동시를 쓰는 순간은 행복했을 거예요.  그러나  동시를 쓸 그 당시에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리려 행복을 동경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동시를 쓸 당시 의도적으로 동시 형태를 선택했다고 하니까요.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고향 광명중학교로 돌아오게 되고, 이종사촌 송몽규가 만주에서 붙잡히게 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를 윤동주도 겪었을 거라 생각해요. 젊은이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성장 발전시키고, 자유롭게 표현하기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정지용 시집을 읽게 되었고, 강소천을 만나면서 서정적이고 동심적인 시를 쓰지 않았나 해요. 윤동주의 동시에는 동물에 관한 것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조개껍질, 병아리, 비둘기, 닭, 고양이, 참새, 개, 반딧불, 귀뚜라미….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가릉가릉, 아저씨, 해님, 애기바람, 엄마 닭 이런 것도 많이 썼어요. 이런 동시를 쓴 것은 김유정의 해학적소설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오줌싸개 지도」나 「할아버지」 「고향집」 「거짓부리」등등의 동시들에서는 결코 동심만으로 쓰지 않았다고 봐요. 하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그리움의 원형이 어쩌면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될 수도 있겠고, 나라를 뺏기지 않은 백성들의 행복한 모습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유년이고 고향이 아닐까 싶어요. 재미있는 것은 윤동주가 동시를 쓸 동안에는 윤동주의 동(東) 자를 아이 동(童) 자로 계속 썼다고 합니다. 이게 동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있고, 아니면 아직 자신이 어리다하는 겸손의 자세에서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 윤동주의 시와 함께 동시를 훑어봤습니다. 그러면서 시인 윤동주에게서는 고뇌와 쉼 없는 성찰을, 동시인 윤동주에게서는 동심으로 일관된 그의 동시 세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의 동시 중 「귀뚜라미와 나와」는 동심을 논할 때면 제가 으뜸으로 꼽는 애송시이기도 합니다. 시 속의 어린 화자(話者)가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귀뜰귀뜰/귀뜰귀뜰’이라고 하지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는 것, ‘귀뜰귀뜰’ 우는 귀뚜라미와의, 오직 둘만의 비밀스런 공간 ‘잔디밭에서’와 은밀한 시간 ‘달 밝은 밤에’를 등장시키며 최고조의 동심을 이끌어 내지요. 윤동주에게 이 공간은 고향 북간도 동주의 집 앞마당일 수도 있고, 중학시절 얼마간을 보낸 평양 숭실중학 기숙사의 한 뜰일 수도 있겠지요. 「산울림」이라는 동시도 시적형상화며 동심을 아련하게 끌어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냐, 시냐를 논하는 게 무색하리만치 시로서도 손색이 없지요. 시인의 외로움을 대역하는 까치와 그 까치를 관조적 입장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능청스러움이 울림을 더하고 있지요.   윤동주의 동시 대부분이 1936년에 창작되었던데, 앞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소천(강소천)의 영향(둘의 만남이 이뤄졌다면)도 한 몫을 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에 걸려 용정으로 중학교를 옮겨 다녔을 당시 소천도 1년 여 그의 외가가 있는 용정에 머물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더라고요. 1915년생 동요시를 쓰던 소천과 1917년생 동시를 쓰던 동주가 그것도 간도에서 만났다면 무엇을 논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짐작컨대 둘은 ‘동심’에 끊임없이 고심했을 것이고, 소천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닭」을  부를 때, 동주는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 잖나요//—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닭」)라면서, 응대하지 않았을까요.(웃음)   덧붙여 문익환 목사(莫逆之友)가 쓴 「동주형의 추억」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일월서각 펴냄, 문병란 엮음,『詩가 있는 명상 노우트』(윤동주편)에서 발췌를 해봤습니다. ‘동주 형은 참으로 멋진 사내였다. 그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모두 자연스러웠고 서로 어울려서 동주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지성은 모던이었다. 그러나, 그가 베적삼 베고의에 고무신을 끌고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은 수수한 아저씨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촌스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주형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양복은 언제나 구김살이 없었고 머리가 헝클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래도 다 동주다웠다. 그렇다. 동주다운 것— 그것이 그리 좋았고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멋”이 한국 민족의 자연스러운 풍모인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동주형은 소위 멋을 낸다는 청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멋! 그의 성품에서 풍겨나오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했지요.     이- 물론 시대상황을 봐서도 그렇겠지만 동시가 너무 재미있다든가, 너무 유쾌하다든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늘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동시들이 많은 거예요. 그 사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거죠. 그 사람이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고 명랑 쾌활한 분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늘 시대를 고민하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는 것이 동시에서 많이 나오고, 가끔 재미있는 말들이 들어 있어 아 이렇게도 썼구나하지만 시와 동시가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마음들이 동시에도 녹아있어서 그런 것들이 참 좋았습니다.     강- 저도 넓은 의미에서 윤동주의 시와 동시 사이에 큰 경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시의 뿌리에도 동심이 녹아있기 때문이겠지요. 최근 많은 시인들이 동시에 관심을 갖고 동시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이와 정 반대예요. 18세부터 20대 초반까지 열정적으로 동시를 쓰다가 자연스럽게 시로 옮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시를 먼저 썼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동시를 그리 일찍 만난 편은 아닌데 요즘도 동시 한 편 쓰기 위해 메말라가는 동심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애 쓸 때가 많거든요. 저와는 다르게 윤동주는 마치 저절로 우러나오는 동심으로 동시를 받아 모신 것 같았어요. 쉽지만 가볍지 않고 삶과 시가 동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후배 시인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크게 다가왔습니다.   앞에서 윤동주 동시를 너무 재미있거나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굉장히 세련되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어요. 아, 윤동주는 천재구나! 혼자 탄복하기도 하고. 「거짓부리」라든지, 「만돌이」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잖아요. 이런 작품들은 지금 공모전에 응모해도 손색이 없지요. 한마디로 전혀 올드하지 않다는 겁니다. 암울한 시대에 자신이 다니던 숭실 중학이 폐교되는 힘든 시간을 겪고도 동시가 이렇게 맑은 건 동심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도 시대를 뛰어넘는 동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동심의 승리라고 생각했어요. 윤동주가 동시에 열중한 것은 『정지용 시집』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제3부에 수록된 동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빗자루」처럼 익살스러운 동시나 「눈」처럼 감칠맛 나는 동시가 탄생한 데는 이런 좋은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미치지 않았을까요. 언젠가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에다 연필로 몇 줄 감상을 적었는데, 아마 정지용의 「말」이란 시였을 거예요. ‘꿈이 아닌 생활이 표현되었기에 좋은 작품’이라는 평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윤동주가 말한 꿈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망상 같은 것. 실제로 윤동주의 동시를 보면 대상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관찰하고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쓸 수 있다는 걸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어요. 한 줄 시를 대하는 모든 행위가 그의 동심에서 발로된 것이란 생각을 하면 윤동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김- 윤동주의 동심세계는 올곧고 천진난만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윤동주의 동심 양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동주가 동시에서 시로 나아간 것처럼, 박목월도 동시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성인시만 썼습니다. 동시를 쓸 때는 본명인 박영종을 썼답니다.『보랏빛소묘』라는 그의 자작시 해설서에 보면, 동시로서는 현실이 주는 시대적 억압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낼 수 없어서 성인시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동시가 주는 제한된 요소, 이른바 동심천사 같은 그런 아름다운 요소들만 가지고는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어려웠나봅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도 거의 비슷한 심경으로 동시에서 시로 시련을 극복하려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 그의 동심세계를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순수, 순진무구, 올곧음 그리고 천진난만 등. 저도 언젠가 윤동주 동시론을 쓴 바 있는데, ‘윤동주가 동시를 통하여 동심과 휴머니즘 지향의 순백한 시 세계를 확보’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아세례를 받았을 만큼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으며, 주일학교 선생님도 했다고 합니다. 성서에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 진리를 중히 여긴 것 같지요. 그의 동시 「눈」에서도 ‘지붕이랑/길이랑 밭이랑/추워한다고/덮어주는 이불’이라고 표현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동심은 이상과 동경을 지향하는 관념성보다는 생활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순수의 밀도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자연친화 또는 생명사상 등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김- 이사도라 던컨이 쓴 자서전에, 자기가 바닷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용가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술가에게는 출생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자연친화적 면에서, 윤동주가 태어난 ‘만주’라는 공간, 자라난 ‘용정’ 분위기 등이 마련해준 창작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거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동시며 시의 밑거름이었을 거고요. 윤동주 동시의 시공간도 자연친화와 생명사상과 관련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윤동주가「조개껍질」이라는 시부터 출발했다는 것도 좀 의미심장해보입니다. 윤동주의 아명(兒名)이 ‘바다’가 들어 있는 해환(海煥)이었고 두 동생은 달환, 별환이었다지요. 해와 달과 별...이처럼 이름 속에서도 어떤 운명적인 요소가 담겨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혜- 나도 윤동주처럼 오래오래 남는 동시를 쓰고 싶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가 동시도 썼나?” 하십니다. 윤동주하면 「서시」가 떠오르고, 「서시」하면 윤동주가 떠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윤동주는 시보다도 동시를 먼저 썼고, 윤동주의 시의 기본 바탕은 동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입니다. 2010년 연변에 윤동주의 동시비가 세워졌을 때에 저는 참 기뻤습니다. 시에 묻혀 있던 윤동주의 동시가 기지개를 켤 수 있겠구나 싶어서였습니다. 동시비에 적힌 「참새」를 보는데 우리 민족의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시대적인 아픔을 견디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도 느껴졌습니다. 윤동주의 시 세계는 밝고 맑은 동심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으로 갑니다. 글은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순하고 여리고 착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성적인 성품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암울과 아픔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글로 풀어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희망도 주지만 우선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주고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그 시대의 생활상까지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시는 「호주머니」인데요. 「호주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호주머니」 전문   입으로 동시를 읽는데 제 손이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제 온 몸이 반응을 했거든요. 그는 시를 통해서 외로움을 이겨내는 강인함과 일제치하의 고통과 아픔도 이겨내고자 하고 희망을 노래했지요. 이 토론을 좀 더 확장하는 의미에서 그의 동시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강- 박혜자 선생님 말씀처럼 시대적 아픔과 윤동주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자연과 윤동주 동시를 따로 떼서 생각할 수도 없을 거예요.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저는 윤동주 동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겨울이란 계절적 배경과 하얀 눈이 떠오릅니다. 「눈」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눈이 새하얗게 와서/눈이 새물새물 하오. -「눈」 전문   ‘새물새물’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입술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며 소리 없이 자꾸 웃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나옵니다. 하얗게 내린 눈을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눈이 감길 듯 말 듯 하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잖아요. 이 동시를 읽으면 누구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듯이 또렷한 풍경이 떠오를 거예요. 「개」라는 동시도 역시 눈 내린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개」 전문   시인은 개가 눈 위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꽃을 그리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연과 자연이 만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이 장면은 바로 그림이 되어 떠오를 만큼 시각적 이미지가 돋보입니다. 두 작품 모두 계절적 배경이 겨울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연결시키면 춥고 암울한 일제치하인데 중요한 건 그냥 겨울이 아니라 눈 내린 겨울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겨울이 춥기만 하고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윤동주에게 「눈」은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하지 말라고 덮어주는 이불일 수 있고, 개가 꽃을 그리는 도화지일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연을 통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작품들을 읽으며 이것이야말로 동심 세계가 지향하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문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흔히 시의 출발은 말장난에 있다고 합니다. ‘겨울’하면 저는 어감이 비슷한 ‘거울’을 연상합니다.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겨울 이미지는 겨울(거울)처럼 차고 맑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던 그의 염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미- 윤동주 시를 보면 하늘, 별, 바람, 구름, 나무, 햇빛, 등의 단어가 많이 등장을 하잖아요. 이런 자연적 현상들이 그의 동시에서 현실과는 좀 동떨어졌다고 생각지 않나요? 불안하고 고단한 시대에 산 윤동주의 마음과 눈이 가 닿는 곳은 하늘이나 별이나, 뿌리 깊은 나무나, 시원하게 해 주는 바람 같은 거였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때로 너무 힘들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아무 생각 없이 가만 쉬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눈을 감고 간다」를 보면 시대현실을 ‘밤’으로 그려내기도 했지요. 어쩌면 어두운 시대현실에도 불구하고 삶의 밝은 국면을 뜨겁게 동경하는 것이 자연친화적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것은 곧 생명사상과도 결부 시킬 수 있지 않겠어요?     김- 윤동주 산문이 몇 편 있는데, 그 중에는 ‘나는 인생관 세계관 이런 것 보다는 해, 달, 별 이런 식으로 자연과 노는 게 더 좋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의 시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기보다는 고단한 현실을 감내하기 위한 반어적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하- 35편 중에 21편이 자연을 소재로 해서 쓴 시라 합니다. 쭉 읽으면서 한 마디로 나이 들수록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동시를 썼음에도 만년에야 느낄 수 있는 짙은 유년에의 향수가 배어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것은 짧은 생의 대부분을 고향을 떠나 유랑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골짝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굴뚝」전문   선명한 묘사 속에 고향과 유년에의 그리움이 알알이 맺혀있습니다. 그리움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움은 사랑하는 것들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가족, 연인, 친구, 자연, 고향 등 자신의 시간 속에 같이 했던 모든 것들은 잃고 나면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요. 사랑하는 것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짙어지고요. 「굴뚝」 외 「귀뚜라미와 나와」「해바라기 얼굴」「겨울」「반딧불」「햇빛, 바람,」 「편지」「고향집」 등에서도 그리움의 속살을 만납니다. 하여 윤동주의 동시세계를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그리움의 그림창’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묘사는 선명한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그 풍경 속에는 그리움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연하면 위의 시들에서 유년의 그리움에 대한 직접적인 얘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를 읽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겐 작품 속에 묘사된 풍경들은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로 다가옵니다. 덧붙여 ‘달 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알고 보니 달조각은 반딧불이었습니다. ‘달조각 = 반딧불이’ 이만하면 훌륭한 낯설게하기였고요. 그의 동시는 현대적 잣대로 평가해도 아주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친화적이라는 말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 동시전반에 자연의 냄새가 훅 풍겨요. 기왓장을 등장시켰고 햇빛, 바람, 눈, 문풍지, 문풍지 자체도 닥나무라는 자연에서 데려온 소재지요. 굴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시대가 자연과 함께 하는 시대였기에 자연, 그의 동시들이 더 빛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성향 자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니까 성품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톡톡 튀는 재미있는 것은 없지만 자신이 조용히 관찰한 것, 즉 하늘에 침뱉고, 바다에 돌던지는 이런 대목에서 아이가 그렇게 해도 바다나 하늘이 다 받아준다는 것처럼요. 윤동주의 성향이 동시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김- 사람의 성향을 더러는 식물성과 동물성 인간으로 표현하잖아요. 아마도 윤동주는 정적인 심성으로 봐서 식물성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 자연을 숭상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은 삶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동시인들도 동심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자연친화적 기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윤동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하기 위하여 대구법과 반복법을 많이 이용했고요. 특히 식물적 이미지보다는 하늘, 바다, 달, 별, 그리고 봄과 같이 우주적이거나 계절적 이미지를 즐겨한 것 같습니다. 또한 「서시」에서처럼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생명사상도 그의 동시에 상당히 깔려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애국애족과 민족의식이 배어있는 작품에 대하여 토론하겠습니다.     이- 윤동주는 자기 자신이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부분들이 동시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왓장 내외」를 봤을 때에도 대궐이 아름답던 옛날을 생각하듯 일제강점기 이전에 존재하던 국가의 모습을 그리워하였고, 마지막 행에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본다 했는데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묻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에서는 ‘왜떡이 쓴 데도 달다’ 했는데 처음 봤을 때는 ‘왜떡’을 단순히 떡의 종류로만 봤거든요. 근데 이게 왜(倭) 떡인 거예요. 떡이 밀가루나 쌀가루가지고 만든 떡이니까 이렇게 쓴 맛이 날 이유가 없는데 쓰다고 한 것은 왜떡은 일본떡이니까 그렇죠. 맛은 단데 우리 민족에게 쓴 맛을 줄 거라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입에 달다고 자꾸 일본 것을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비애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 동시는 두 줄의 짧은 시인데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민족의식이나 애국심 이런 것들이 비록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작품에 깔려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김-  이경교 교수는 시 창작서 『즐거운 식사』에서 ‘시적인 인식의 조건이라는 게 시련과 절제에서 나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련에도 내적인 시련과 외부적인 시련이 있는데, 식물적인 천성은 외부보다는 내부적인 시련이 더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동시에서 향일성(向日性)이며, 자연과 천체에 대한 그리움이 담겼을 것입니다. 또한 내적인 시련은 존재의 성찰, 자기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대로 시련이 외부적으로 나타났을 때는 시에서 역사적 상황으로 표출됩니다. 민족의식, 애국심도 내적·외적인 요소로 나눠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하- ‘애국애족과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동주하면 민족시인, 저항정신 등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후반기에 집중된 몇몇 시들 때문입니다. 물론 동시를 쓸 시기나 그 이전의 시기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윤동주가 동시를 쓰기 전 남긴 시들에는 장래에 대한 불안, 자기성찰 등이지 본격적인 저항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나도 처음엔 윤동주의 동시 속에서 앞의 주제에 맞춰 의미를 천착해 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굳이 작정하면 애국애족, 민족의식을 유출해 낼 수 있음직한 시편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시를 두고 민족이니 저항이니 하는 전제를 설정해 놓고 유추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제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이를테면 윤동주의 충만한 동심을 느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셔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동이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끼요 꼬끼요/ 달걀 나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거짓부리」 전문   단순함 속에서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평화의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 같지요. 대부분의 동시들이 이런 패턴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20세 전후, 문득문득 현실의 참담함이 엄습했을지 몰라도 그의 동시는 천진하고 평화롭습니다. 어떤 전제를 가지고 그에 맞춰 뭔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순일 수도 있으니까요. 민족시인으로서의 면모는 그 동안 충분히 조명되어 왔으니 그의 동시 속에서는 상처받지 않고 얼룩지지 않은 그의 순수한 영혼만을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민족의식이 있다고 누구나 체 게바라가 되어 혁명의 최전선에 설 순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는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못자는 밤」이라든지 「내일은 없다」이런 동시들은 짧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못자는 밤」에서 ‘하나, 둘, 셋, 넷…… 밤은 많기도 하다’고 노래합니다. 말줄임표 속에 얼마나 많은 밤들이 담겨 있겠습니까? 「내일은 없다」에서 ‘밤을 자고 동틀 때’가 내일이라는데 아무리 잠을 자고 일어나도 내일이 오지 않습니다. 동이 트지 않으니 밤을 자도 또 밤을 맞을 수밖에 없는 기막힌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윤동주가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 하면서 민족시인이다 저항시인이다, 평가를 받지만 윤동주는 송몽규와도 다르고 의열단에 가입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이육사와도 다릅니다. 윤동주의 삶과 동시는 눈처럼 하얀 순수와 순결을 지향하고 있고, 저는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 자체를 혁명이자 민족정신이라고 봤습니다. 좋은 동시는 생명력을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데 윤동주의 동시는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 삶이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로 달라졌다고 하지요. 세월호 이전에 「못자는 밤」이나 「내일은 없다」를 읽었을 때와 세월호 이후에 이 동시들을 읽었을 때 느낌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선장이 없는 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들과 주권을 빼앗긴 백성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참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시에 비해서 그의 동시는 훨씬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서도 충분히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 윤동주 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푸른 책들) 후반부에 「서시」「자화상」「별 헤는 밤」등과 함께 「슬픈 족속」이 실려 있는데요. 이중섭의 ‘흰소’가 그림으로 우리의 민족혼을 대변했듯이, 「슬픈 족속」 이 한 편의 단시(短詩)만으로도 우리 한민족 전체의 혼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미- 앞서 「거짓부리」를 동심만으로 쓴 작품이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동시를 읽으면서 하빈 선생님처럼 ‘단순함 속에서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평화의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 같’지만은 않네요. ‘거짓부리’하는 검둥이나 암탉이 일제의 거짓부리로 읽히는 것은 아마도 윤동주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 그런 걸까요? 저는 작가가 살던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이 분명히 수용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간도로 간 우리 조상들이 민족의식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교육열만 봐도 그래요.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배우는 것만이 남의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죠. 몸에 베인 민족의식이 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고, 또 그게 현실이었으니까요. 「오줌싸개 지도」가 단순히 동생이 싸 놓은 오줌을 보고 별나라 지돈가? 만주 땅 지돈가? 했을까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집을 떠나 돈벌러 온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의 인상화」에서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사람다운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아이의 꿈이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강기화 선생님 말에 공감을 해요.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인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 놓은 것 같아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고 했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본래 예정 제목이 『병원』이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 이유가 병원을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으로 썼다하니, 그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을 나누고 아픔을 함께 할 수 그런 세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혜- 시대를 무시하고는 시를 읽을 수 없습니다. 요즘 상영중인 영화 도 시대의 아픔이나 동질감이 있었기에 히트작이 되지 않았을까요? 윤동주의 시도 시대상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만큼의 느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윤동주가 시 속에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그 정신을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 속에는 다른 계절보다도 겨울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용정이라는 추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춥고 힘든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당시의 슬픈 현실을 겨울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김- 평론가 유종호 선생이 쓴 책에 보면 ‘분명히 경험 했지만 자기만의 못난 경험이 아닌가 해서 멋쩍어 말도 안했던 것이 고스란히 재생되어 있음을 알고 반가움과 놀라움을 아울러 느끼게 된다. 그러한 것이 바로 공감의 공유라 경험의 교환이고, 이러한 것들이 정서로 충전되어 있는 게 하나의 작품이다’라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오줌싸개 지도」에는 못난 경험이 주는 공감의 공유가 있습니다.     박- 앞에서 거론한 「슬픈 족속」그리고 그의 시 「참회록」이나 「또 다른 고향」 등에서는 고난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빈 선생은 윤동주의 동시를 순수한 동심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만 문학이 시대의 반영이라면 민족의 아픔도 암시나 은유를 통하여 표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학평론가 최명표는 윤동주가 동시를 쓴 이유를 네 가지 들었습니다. 객지 생활이 주는 허전한 고독감, 숭실중학교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되면서 용정으로 귀향하는데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 관헌의 요시찰 인물이 되는 그런 일신상의 위험으로부터의 탈출, 1935년에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 등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시론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동시 창작을 후원하였고, 마지막으로 1935년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은 편제상 시와 동시를 동렬로 묶었는데, 이 시집이 윤동주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으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일제 관헌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동시를 쓰면서 근신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대신에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진하게 표현하면서 시대의 고통을 감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 동시를 쓰던 그가 어느 순간 절필하듯 동시에서 손을 떼고 일반시로 돌아섭니다. 짐작컨대 그것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적 배경이 그를 동시에 안주하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가 쓴 시의 주제는 죄, 부끄러움, 참회 따위입니다. 자기를 둘러 싼, 아니 온 겨레와 민족에 씌워진 거대한 굴욕을 보고만 있어야하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자신에 절망하며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쏟아 놓을 수 있기에는 동시로는 그 표현의 그릇이 작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동시인의 한사람으로서 이점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만약 그가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계속 동시만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주옥같은 동시 작품들을 탄생 시켰을까요. 그러나 그에게 그러한 시련과 절망과 분노가 있었기에 오늘 날 우리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불후의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심정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김- 윤동주 작품도 처음에 썼던 제목이나 내용이 다른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지난 밤에 소복이 내린 눈이 이불이 되어 덮어준다는 동시「눈」은 본래 제목이 「니불」인데 「눈」으로 바뀌었답니다. 틀린 부분도 나타납니다. 「빗자루」에도 보면 엉덩이를 때려서가 아니고, 원문은 볼기짝을 때려서로 되어 있습니다. 윤동주 사후에 시집을 펴냈는데 수록 과정에서 원본과 달라졌습니다. 독자들이 시를 읽고 평론가들이 평론을 하지만, 과연 제대로 된 원전을 읽고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많이 남습니다. 흔히 ‘시보다 시작메모가 좋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는 거지요. 윤동주 자신이 한 낙서가 있는데 그 속에 자신의 인생관, 문학관이 다 들어있어요. 낙서에 보면 ‘문학이란 뭐냐’ 해놓고 ‘나는 알지 못 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또 ‘문학’을 ‘생활, 생존’으로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것도 극복해내야 한다는 것이 낙서 ‘비애(悲哀) 금물(禁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이 ‘힘’이라고도 적혀 있습니다. 아마 문학이 그 힘이었을 겁니다.     강- 윤동주가 식물적 인간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식물은 겉으로는 수동적이고 나약해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고. 『식물의 사생활』 같은 책을 보면 식물이야말로 투사 같지요. 그러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자태는 윤동주와 꼭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토론에서 윤동주를 선택한 것은 결국 온고지신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만큼 「길」이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어버린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는 이 부분에서 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윤동주 자신에게 쓴 글이기도 하지만 후배 시인들, 좀 더 거리를 좁혀서 저에게 주는 선물이란 느낌이 들거든요. 제가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 그 속에는 동심의 여러 조각들도 포함 되겠지요. 그걸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게 바로 좋은 동시를 쓰는 일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동시라는 그릇이 이것저것 담기에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랑말랑한 동심으로 빚은 그릇이라면 무한대로 커질 수 있으니까요. 새해에는 좀 더 넓고 깊은 동심의 그릇을 빚어서 좋은 동시를 담고 싶습니다.     남- 시인이란 이름을 달고 나는,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의 현실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했는가? 윤동주의 동심이 뚝뚝 묻어나는 동시들을 접하면서, 제대로 된 동심을 담고는 있는가?  ‘시보다 동시가 쉽다’란 교만의 잣대로, 너무 안일한 동시창작을 해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시가 삶이요, 삶이 시인, 윤동주 시인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숭고한 삶, 십자가를 향한 그의 삶을 대하면서 같은 기독 시인으로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어렵겠지만 삶과 동시가 하나 되는 참시를 쓰도록 끊임없이 저를 단련해야겠습니다.     이- 시와 동시의 경계에 대해 차이가 난다고 생각 않거든요. 시를 읽든, 동시를 읽든, 그의 성품과 인격도 읽혀지니까요. 앞으로 저도 제 글에서 저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글을 써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동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시를 쓰면서 좀 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혜- 윤동주는 온순한 성격이라 행동으로 나서는 투쟁가는 아니었지만, 글로써 민족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저도 멋진 말로 남을 감동시키거나 행동으로 감동시키지는 못합니다. 성찰적 지향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시를 써야겠습니다.     미- 시든 동시든 억지스러우면 재미가 없잖아요. 현실을 바탕에 둔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요. 이오덕이나 임길택, 권정생 같은 분의 시가 윤동주 동시와 닮은꼴이잖아요. 미사여구나 어려운 말이 없고 쉬우면서 재미있고 감동을 줘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우리말에 대한 공부를 한 덕도 있겠지만 그것은 쉽지만 결코 쉽게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임을 동시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끼게 되는 부분입니다. 독자가 쉽게 읽고,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오랜 습작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끼적거리는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서가 아니라 내 몸으로서 일일이 헤아려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랄 수는 없습니다. 봄밤에 고민에 찌들고, 녹음에, 권태에 시들고, 가을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에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일 년은 이루어집니다.’라고 합니다. 시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 글자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동시를 너무 쉽게 쓰는 제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단순함 속에 깊이가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박- 현대 아동문학의 출발은 1920년대부터입니다. 1923년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아동지 『어린이』가 창간되고, 색동회의 창립 등으로 아동문화운동이 전개됩니다. 그 때는 동요문학이 주를 이룹니다. 주요작가로는 방정환, 한정동, 윤석중, 이원수, 강소천 그리고 서덕출 등입니다. 1933년에 간행된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는 동시시대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1937년 2월부터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은 우리 문학에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육사가 「절정」에서 표현한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를 ‘가혹한 시대의 순결한 영혼’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시는 널리 애송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의 원형은 동시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시세계를 올곧게 이해하려면 그의 동시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동시문학의 멋과 참 매력도 보여주는 기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토론 참여자(‘아름다운 동시교실’ 회원)   박 일: 1979년 『아동문예』 동시 등단. 동시집 『주름살 웃음』외 박혜자: 1999년 부산아동문학신인상 동화 당선. 2014년 제6회 목포문학상 동시 당선 김춘남: 2001년 신춘문예 동시, 2004년 시 당선. 동시집 『앗, 앗, 앗』 남은우: 2004년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제11회 푸른문학상 수상. 김자미: 2007년 부산아동문학신인상 동시 당선. 2013년 신춘문예 동시 당선 강기화: 2010년 제38회 창주문학상 동시 당선 하 빈: 2011년 『아동문예』 동시 등단. 동시집 『수업 끝』 외 이서영: 2013년 제5회 천강문학상 동시 당선                                                             - 2015. 봄호  
119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할아버지 댓글:  조회:3459  추천:0  2018-08-07
  윤동주 /할아버지     왜떡이 씁은 데도 자꼬 달다고 하오.     이 시는 할아버지가 왜떡이 쓴 데도 자꾸 달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내용이다. 왜떡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를 ‘밀가루나 쌀가루를 짓이겨서 얇게 구운 과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떡이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마 유추하면 이는 ‘센베이’를 말하는 것같다. ‘센베이’는 ‘일본에서 온 건과자(乾菓子)의 하나. 밀가루나 찹쌀가루, 달걀, 우유 따위를 묽게 반죽하여 구워 만든다. 맛을 내기 위해 깨나 김, 파래 가루를 섞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아니면 ‘모찌떡’으로 떡 가운데에 단밭을 넣은 떡이다. 이 둘은 화자가 말하듯이 ‘씁는 데’가 아니라 오히려 달다. . ‘왜떡’을 ‘센베이’나 ‘모찌떡’으로 보면 이 시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는 가장 짧은 시가 된다. ‘왜떡’은 일본 떡으로 맛은 달지만 결국은 우리 민족에게 쓴 맛을 줄 것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왜 자꾸 입에 달다고 일본 것을 받아들이느냐는 내용의 시가 된다. ///전한성  
1198    다시 알아보는 "생명의 시인"- 윤동주 댓글:  조회:8011  추천:0  2018-08-07
                    사진   시인 윤동주    예수 진리 ・ 2018. 6. 14. 17:00 URL 복사  이웃추가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윤동주의 이 시집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고작을 모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서시"이다. 이 시에는 '1941년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고민하던 때로서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된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비록 짧지만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추구하여 마침내 도덕적 순결보다  더  위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자기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의 고뇌와 만날 수 있다.  시상의 전개상 1연은 1행-4행 / 5행-6행 / 7행-8행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시제로 쓰여진 첫 4행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  민족 정기가 나타나 있다.  1,2행의 표현은 의 '군자 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로 '우러러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의 인용이다. 바로 이런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한 점'의 잘못조차 허용하지 않고,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3행의 '잎새에 이는 바람'은 2행의 '한 점 부끄럼'을 비유하고 있는 시구로 '부끄럼'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화시켜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은 점. 티. 주름. 흠이 없기를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이러한 시인의 도덕적인 순결과 양심의 추구는 5,6행의 다짐과 7,8행의 강한 결의로 이어진다. 5,6행은 현재 시제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시인이 처한 현재에 대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별'의 심상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별'은 순수, 영원, 희망, 빛, 불변의 가치,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진리 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도덕적인 순결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 또는 '불변의 가치를 예찬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 사그라지는 생명'들을 밝히는 사랑의 등불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  영원한  사랑.  무한한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을 말이다. '십자가'에는 윤동주 시인의 신앙관과 역사관,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욕되고 부끄러운 자신을 인식하고 괴로워한다. 욕되지 않은 삶,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런 삶을 방해하는 세상 속에서 번민하는 자아(自我)의 목소리가 드러나 있다. 이는 윤동주 시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무기력하지만 진실한 자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십자가'는 자기희생으로 완전하게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 하는데, 그 십자가에 자기는 오를 수 없는 데 해는 다가가 있다. 휘파람이나 불면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마음으로만 괴로워하는 무기력한 자기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을 의미하는데, 자기도 예수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을 바치고, 피를 토하며 예수님처럼 영원히 행복한 길을 가기 원한다고 고백한다.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 시처럼. 윤동주는 27세 나이인 1943년 7월 일본 도시사 대학 재학 중 여름 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독립운동 했다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일본 형무소에서 13일 동안 독주사를 맞고 고통을 당하다 천국으로 갔다. 이 시는 예수가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하여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시인도 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어두운 시대의 속죄양이 되어 시대를 밝히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바로 "서시"의 '모든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이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적 사랑인 셈이다. 윤동주는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윤 장로가 주재하는 개신교적 가정생활 방식에 따라 가정 예배를 보았고 주일에는 교회 집회에 참석하였고 청소년 시절과 대학 시절에도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매주 몇 번씩의 기도회(채플)에 참석했다. 기독교적 생활 방식은 그에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저 높이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 교회당도 현실적 삶과 좀 떨어진 곳이지만 교회당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는 높아서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그리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으로서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의미한다. 민감한 청년 윤동주에게 그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부름이요, 사명이었다. 길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이 나타나 있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로 부유한 농부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 윤하현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신영은 송창희에게 시집갔는데, 그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할아버지 - 윤하현 가족 묘비 조모 남 씨 윤동주 부친 - 윤영석 명동학교 교사. 윤동주 어머니 김 용 - 김약연 목사님 동생 간도 대통령 김악연 목사님 - 윤동주 외삼촌   김약연 목사님 최후 사진 윤동주 당숙 - 가수 윤형주의 부친  윤동주(尹東柱;1917-1945)   시인의 당숙 윤영춘 장로.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明洞)에서 기독교 장로의 장손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해환(海煥).명동 소학교,은진 중학,평양 숭실 중학,용정(龍井)의 광명 중학 등에서 공부했고,연희 전문 학교 영문과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립교(立敎) 대학과 동지사(同志社)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43년 7월 여름 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그의 시는 소년다운 순결한 의식과 기독교적 참회의 정신을 시의식의 바탕에 깔고 있다.1948년 유고 시집가 나왔다. 숭실중학교  동문 -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0]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묘를 찾게 해준 친족사진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연희본관 앞에서 (앞줄 우측 2번째 윤동주)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2년여 뒤인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연희전문, 이화여전 성서연구반과 함께 (뒷줄 우측 1번째) 용정교회 대문 용정교회 용정교회 내부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린시절 - 윤동주 - 명동학교 시절. 윤동주의 장례식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위 - 일본 도쿄 릿쿄대에 다니던 윤동주(뒷줄 오른쪽)가 1942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 가족들과 찍은 사진.   일본에 도착한 윤영석과 윤영춘은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싸리나무처럼 여위어 있던 송몽규는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하소연하면서 옥에 갇힌 조선청년들과 윤동주도 주사를 맞았다고 알려주었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 지 23일 만에 옥사하였다. 아래 - 윤동주 장례식 사진.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1986년 발견 청년문사와 시인'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묘역에 안장된 두 분의 묘지. 이제는 용정 현지인들이 들러 참배도 하고 조선족 학생들도 더러 찾아온다. 묘지석도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왼쪽 송몽규의 묘지석에는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적혀있다. [출처] 시인 윤동주|  
1197    다시 알아보는 윤동주 가족 관계 댓글:  조회:6957  추천:0  2018-08-07
윤동주 가족 관계 조부 : 윤하현(尹夏鉉, 1875년 음력 2월 1일 ~ 1948년 9월 4일) 조모 : 강씨부인 아버지 : 윤영석(尹永錫, 1895년 8월 1일 ~ 1965년 4월 20일) 어머니 : 김용(金龍, 1891년 10월 1일 ~ 1948년 9월 26일, 본관은 전주(全州)) 누이 : 윤혜원(尹惠媛, 1924년 ~ 2011년 12월 11일) 매제 : 오형범(1924년 ~ 2015년 3월 11일) 조카 : 오철주 남동생 : 윤일주(尹一柱, 아명 윤달환,  1927년 11월 23일 ~ 1985년 11월 28일,前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 제수 : 정덕희(정병욱의 여동생) 조카 : 윤인석(尹仁石, 1956년 ~ 現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남동생 : 윤범환 (다른 이름은 별환, 요절) 남동생 : 윤광주(尹光柱, 아명 윤성주, 1933년 5월 15일 ~ 1962년 11월 30일, 시인) 외삼촌 : 김약연(金躍淵, 1868년 9월 12일 ~ 1942년 10월 29일), 한학자, 독립운동가 사돈 : 정병욱(鄭炳昱, 1922년 3월 25일 ~ 1982년 10월 12일, 국문학자) ============================================ 가족 관계 증조부 : 윤재옥(尹在玉, 1844 ~ 1906) 조부 : 윤하현(尹夏鉉, 1875 음력2.1 ~ 1948 9.4) 조모 : 강씨부인 고모 : 윤신영(尹信永) 고모부 : 송창희 고종사촌 : 독립운동가 송몽규 宋夢奎, 1917.9.28 ~ 1945.3.7) 내종조카 (송몽규의 조카) : 소설가 송우혜(宋友惠, 1947.12.5 ~ ) 부 : 윤영석(尹永錫, 1895 8.1 ~ 1965 4.20) 모 : 김용(金龍, 1891 10.1 ~ 1948 9.26) 누이 : (요절) 누이 : 윤혜원(尹惠媛, 1924 ~ 2011.12.11) 매제 : 오형범(1924 ~ 2015 3.11) 조카 : 오철주 남동생 : 윤일주(尹一柱, 아명 윤달환, 1927 11.23 ~ 1985 11.28 前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 제수 : 정덕희 조카 : 윤인석(尹仁石, 1956 ~ 現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남동생 : 윤범환 (요절) 남동생 : 윤광주 (尹光柱, 아명 윤성주, 1933.5.15 ~ 1962 11.30 시인) 외삼촌 :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 9.12 ~ 1942 10.29) 당숙 : 윤영춘(尹永春, 1912 12.12 ~ 1978 4.29) 재종형제(윤영춘의 아들) : 가수 윤형주(尹亨柱, 1947 11.19 ~ ) 사돈 : 정병욱(鄭炳昱, 1922 4.21 ~ 1982 국문학자)
119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호주머니 댓글:  조회:4381  추천:0  2018-08-06
호주머니            /윤동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 되면  주먹 두개  갑북 갑북  1936.12-1937.1(추정)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동명촌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 수학.  1943년 일경에서 잡혀 옥중생활을 하던 중 1945년에  29세로 옥사.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음.    한국의 시인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윤동주 시인이 스무 살때 쓴 시입니다.  윤동주시인을 일컬어 흔히 '별의 시인'이라고 하지요.  맑고 순수한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 시심의 바탕에  바로 동시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무엇 하나 넣어 둘 것 없는 '가난'한 일상을  오히려 운치 있게 '풍족하다'고 말한 역설이 빛납니다.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할 때의 앙증스러운 질량감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듯하지요.  윤동주시인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1938년)부터  더는 동시를 쓰지 않습니다.  별로 꿈꾸고 노래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지요.  자신에게서 동시를 빼앗은 세상 앞에서 그는 점점 고뇌에  가득한 얼굴이 되어 갔지요.  =====================   윤동주·윤일주 지음/조안빈 그림/창비/ 민들레 피리/윤동주·윤일주 지음/조안빈 그림/창비/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 들어/ 입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시인 윤동주(1917∼1945)의 탄생 100주년(2017년 12월)을 기리며 윤동주와 그의 동생 윤일주(1927∼1985)가 쓴 동시를 묶은 ‘민들레 피리’가 출간됐다. 시집에는 윤동주가 1935년부터 3년여간 쓴 동시 34편과 동생 윤일주가 쓴 동시 31편이 실렸다.  윤동주가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동문학계에서는 동심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들로 높이 평가한다. 가족의 가난하고 고된 삶까지도 끌어안는 윤동주의 낙천적인 동심과 아기자기한 운율이 두드러진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윤동주 ‘호주머니’) 동생 윤일주는 건축학자가 된 뒤에도 틈틈이 동시를 썼다. 작고한 뒤인 1987년 유고 동시집이 출간됐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됐다. 그는 가난한 이웃도 귀하게 여긴 윤동주의 정신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펼쳤다.  “햇빛 따스한 언니 무덤 옆에/ 민들레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한 줄기엔 노란 꽃/ 한 줄기엔 하얀 씨.// 꽃은 따 가슴에 꽂고/ 꽃씨는 입김으로 불어 봅니다./ 가벼이 가벼이/ 하늘로 사라지는 꽃씨.// 언니도 말없이 갔었지요.// 눈 감고 불어 보는 민들레 피리/ 언니 얼굴 환하게 떠오릅니다.// 날아간 꽃씨는/ 봄이면 넓은 들에/ 다시 피겠지.// 언니여, 그때엔 우리도 만나겠지요.” (윤일주 ‘민들레 피리’)  우리의 옛말에서 ‘언니’는 동성의 손위 형제를 부르는 말로 쓰였다. 윤일주는 이 시에 형 윤동주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시집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조안빈의 그림이 함께 실려 시의 정취를 더한다. /권구성 기자 ===============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936년 12월 또는 1937년 1월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윤동주 시인의 ‘호주머니’입니다. 읽고 나면 절로 웃음이 번지는 동시이지요. ‘자기 성찰의 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이런 동시를 썼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사실 윤동주는 서정시인일뿐만 아니라 동시작가로서도 많은 동시를 썼습니다. 그의 동시에서는 ‘호주머니’처럼 천진난만한 시선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꽤 있습니다. 학교교육에서 부각시킨 면과는 또 다른, 윤동주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쨌든 ‘호주머니’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세상만사 근심이 다 씻겨나가는 느낌입니다. 겨울이 되면 걱정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높은 곳에 사는 분들이야 걱정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어디 서민들은 그런가요. 겨울이 다가올수록 한숨도 깊어지지요. 하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걱정도 한숨도 ‘주먹 두 개 갑북갑북’의 긍정과 해학으로 녹여버리고 맙니다.    ‘넣을 것 없으면 뭐? 주먹 두 개 넣으면 되는걸. 그럼 호주머니도 갑북갑북 찬다구!’ 이 시에는 이렇게 웃음과 눈물이 함께 배어있습니다. 짧지만 읽는 이에게 ‘긍정의 힘’을 안겨주는 큰 동시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 시를 읽으면 ‘갑북갑북’이라는 말이 주는 앙증맞은 재미와 함께 긍정적인 생각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윤동주의 동시 중에는 ‘산울림’처럼 동요로 불리는 작품도 있어요. 아무쪼록 쉽고 짧으면서도 의미가 담긴 윤동주의 동시와 노래를 우리 아이들이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어릴 적 호주머니가 있는 옷은 좋은 옷이었다. 호주머니가 없는 옷도 많았다. 호주머니는 지금의 손 난로역할도 하고 가죽 장갑 역할도 하고 보자기 역할도 했다. 무엇이든 호주머니에 담는 습관이 있었다. 추운 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추렸던 추억도 있다. 불룩한 호주머니. 금새 호주머니 옆이 터지기도 했다. 바느질 실도 귀했던 그 시절의 호주머니는 대한히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 많던 호주머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호주머니」는 1936년 12월에서 1937년 1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시예요. 시에서 주인공이 호주머니예요. 호주머니는 걱정하고 있어요. 채울 것이 없으니까요. 돈 없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뭘 넣을 수 있겠어요. 어린 아이가 호주머니에 뭘 넣을 수 있겠어요. 다만 가장 추운 겨울에 오히려 뭔가 채워지는 거예요. 그게 글쎄 주먹 두 개랍니다. . ‘갑북’은 ‘가뜩’이라는 의미의 평안도 방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랐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추운 겨울입니다. 그런데 소년은 주먹 두 개만 넣어도 자신감이 있나봅니다. 갑북갑북이라 했으니 주먹 두 개로도 자긍심이 가득가득한 상태입니다. 넉넉하지 않은 일상을 주먹 두 개로 견뎌내는 자신감으로 시인은 독자를 위로합니다. 염려도 절망도 “주먹 두 개 갑북갑북”이라는 해학으로 녹여버립니다. 겨울철이면 주머니 두 개로 갑북갑북거린다는 그의 명랑성 덕분에 남루한 빈곤이 오히려 수군대는 듯이 보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살아보겠다는 당찬 다짐도 느껴집니다. 넣을 게 없으면 두 주먹이라도 넣는다는 자세, 작금의 현실에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       ===================/// 윤동주 시인(1917~1945)이 1936년 12월에서 1937년 1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시다. 윤동주는 생전에 많은 동시를 창작했는데, 이 짧은 동시의 행간을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어린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잘 압축하고 있다. 돈 없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뭘 넣을 수 있을까. 가장 추운 겨울에 채울만 한 게 주먹 두 개란다. ‘가득가득’이란 뜻의 평안도 방언인 부사 ‘갑북갑북’의 사용도 탁월하다. /안도현 ==================/// 1936년 3월 다시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4월 6일 5년제 일본학교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기독교계나 민족계가 아니지만 광명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착잡한 심경을 시 ‘이런 날’(1936년 6월 10일)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 오색기는 만주국 국기이고, 태양기는 일본 국기다. 윤동주에게는 서슴없는 능멸이었다. 모순을 모르고 ‘머리가 단순’하게 된 아이들을 깨우듯이, 1936년 8월 13일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했다.  이 시기에 윤동주는 여러 시인의 작품을 스크랩해 두곤 했다. 1935년 10월 27일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을 동주는 평양에서 1936년 3월 19일 구입해 내지에 서명해 둔다. 이미 읽어 왔겠지만 시집을 구입하고 더욱 깊이 읽었던 윤동주는 정지용 시 10여 편을 모방하며 습작해 본다.     윤동주 시 ‘오줌싸개 지도’의 육필원고. 유족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가톨릭 신자였던 정지용은 ‘가톨릭청년’을 편집했는데, 광명 시절 윤동주는 가톨릭 만주 옌지(延吉) 교구에서 낸 월간 어린이잡지 ‘가톨릭청년’에 다섯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동주는 ‘오줌싸개 지도’를 1936년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써 놓았고, 이후 1937년 1월호에 발표했다. 시 한 편 완성하는 데 1년 이상 걸린 것이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쏴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제목과 1연만 보면 재미있고 귀엽다. 엄마 아빠 모두 떠나고, 남은 두 아이의 이야기다. 2연을 보면 엄마는 별나라 갔고, 아빠는 돈 벌러 만주에 갔다.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을까. 윤동주가 보관하고 있던 발표본에는 수정한 흔적이 있다. 오줌 ‘싸서’니 ‘싸’가 아니라, 오줌 ‘쏴’라고 고친 흔적이 분명히 있다. 원고지에도 ‘쏴’라고 썼는데, 투고했을 때 잡지사 편집부에서 ‘싸서’로 고쳤다. 그것을 다시 동주는 왜 ‘쏴’라고 고쳤을까. ‘싸서’보다 ‘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부모 없는 아이가 밤이 무서워 참다 참다가 쏴버리는 오줌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김응교  
119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빨래 댓글:  조회:2705  추천:0  2018-08-06
빨 래  윤동주(1917-1945)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팽팽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1936.     윤동주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이 시는 고요한 7월의 오후에 빨랫줄에 널려 있는 흰 빨래들 중에 작은 빨래만 빨리 마른다는 내용이다.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는 오후의 시간을 묘사한 것으로 흰 빨래를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두 다리를 드리우고’는 땅을 향하하여 펼쳐져 있는 모습을 말하고 ‘귓속 이야기하는’은 고요한 상태임을 말한다.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는 고요한 상태에서 쨍쨍한 햇빛을 활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후에는 크기가 작은 아담한 빨래만 마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전한성 ====================/// 빨래 / 윤동주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빨래를 미루는 일은 어리석다. 빨래는 머리를 쓰지 않고, 자신 쇄신의 명랑함과 정신적 성숙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심신이 무료하면 빨래를 하고 마르기를 기다려 보라. 빨래가 마르는 오후, 비활성화된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사방은 고요하다. 수정 같은 고요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용을 키우며 홀연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난다. 빨래가 뽀송뽀송 마르는 오후가 주는 선물은 심심함 속에서 우리는 제가 나아갈 바를 혼자서 결정하고 생의 침묵들을 견뎌낸다. / 장석주 시인   =====================///   빨래 / 윤동주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 하는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시인의 한가한 오후 빨랫줄에 걸린 흰 빨래를 보고 직관으로 분위기 연출처럼 마음을 고요한 가운데 실바람이 지남에 평온한 분위기를 그린 단 시이다 시어의 간결 속에 시상을 맺는 아름다운 향기 서정시의 참맛이리라 산뜻하고 정갈한 맛을 준다.  
1194    윤동주와 윤혜원 댓글:  조회:2596  추천:0  2018-08-04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을 시키고 있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 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 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마지막 증인'으로 불렸던 여동생 혜원(88)씨가 지난 11일(2011년 12월), 오전1시30분쯤 시드니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3일 오후 1시 노던서버브공원묘지(Northern Suburbs Memorial Gardens Crematorium)에서 화장으로 치러진 장례예배에는 평소 고인이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의 신자들과 호주한인문인협회(회장 남공)와 재호주광복회(회장 황명하) 회원 등이 참석했다. 윤동주 시인은 3남 1녀의 장남으로 고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 시인의 일곱 살 아래 동생이 된다. 윤혜원씨는 4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마지막 피붙이였으며 2남 일주씨는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재임 중이던 50대에, 3남 광주씨는 30대 초반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국 길림성 용정(龍井)에서 태어난 둘째 혜원씨는 46년 결혼 후, 48년 12월 한국으로 오면서 고향 집에 남아있던 시인의 육필 원고와 습작노트를 가져와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사진도 챙겼지만 기차안에서 소련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자 창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고인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발간된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출간)가 발간 후 문단의 관심을 끌자 서울에 살던 동생 일주씨가 누나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유고시집에는 당시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작품 31편만이 실렸고, 현재 116편이 실린 증보판의 작품 중 85편이 혜원씨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혜원씨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봤고 1986년 호주로 이민왔다. 그동안 오빠 윤동주의 생애가 지나치게 극화되거나 신비화되는 것을 꺼려 언론 인터뷰 등을 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족은 부군 오형범씨와 2남 2녀이다. 유해는 한국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은형 기자  ///한호일보   =======================   12월 10일(2011년도),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영면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했다.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이 실렸을 뿐인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과 1999년에『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의 덕택이다.   뒤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시상비를 부담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이들 부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의 실천이었다.   2003년 묘소를 개수한 뒤부터, 2005년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가 국내외에 열린 이후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사실과 에피소드, 추억담과 소감 등을 종종 밝혀 왔다.   윤혜원 여사는 “오빠의 시 중에서「서시(序詩)」를 제일 좋아한다”라며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라고 전했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으로 안장할 예정이다. =====================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생명의 시인 윤동주'의 작가 다고 기치로가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찻집에서 열린 한국어판 출간기념회에서 유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한국어 번역을 맡은 이은정 씨,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인 윤혜원의 딸 오인경 씨, 다고 기치로, '윤동주 평전'을 쓴 송몽규의 누나 송우혜 작가, 오인경의 남편 강석찬 씨. ///2018.4.16 =================   저항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핏줄 여동생 윤혜원 여사 별세                                                                                                                              본지 자문위원 신길우 수필가                                                               [편집]본지 기자                육필원고 가지고 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12월 10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영면         [서울=동북아신문]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으로 안장할 예정이라 한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가 있고, 2남 2녀를 두었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한 윤 여사는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월남하면서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 왔다.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이 실렸을 뿐인데,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 3판에서는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과 1999년에『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서울로 지참해 온 자료들 덕택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면서 건축업에 종사하였다. 1970년에는 필리핀에 가서 사업을 하고,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았다.      또한 이들 부부는, 윤동주 시집을 읽고 감명을 받은 재미 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연변의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여 왔다.      뒤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여, 시상비를 부담하고, 해마다 수상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윤혜원 부부는 2003년에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와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묘소를 2개월여에 걸쳐 개수도 하였다.      윤동주는 3남 1녀의 장남이었다. 2남 윤일주(1927~1985)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로 근무했는데,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발표를 않다가 아들 윤인석(수원대) 교수가 엮어 1987년에『민들레 피리』로 정음사에서 발간했다. 3남 윤광주(1933~1962)는 시인으로 현재 24편이 알려져 있다. 윤혜원(1923년생)은 마지막 혈육으로 평생을 오빠 윤동주를 위한 여러 활동을 남편과 함께하며 살았다.      윤혜원 여사는 “내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오형범 장로의 공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계속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의 실천이었다.    2003년 묘소를 개수한 뒤부터, 2005년 '윤동주 시인 60주기 추모제'가  국내외에 열린 이후로는 윤동주와 관련된 사실과 에피소드 추억담과 소 감 등을 종종 밝혀 왔다.                                우리의 ‘아리랑’과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자주 불렀다는 윤동주,  "오빠의 시 중에서「서시(序詩)」를 제일 좋아한다.“는 윤혜원 여사는,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도 말했다.      
1193    윤동주와 "소금물" 댓글:  조회:3530  추천:0  2018-08-04
  1980년대 초반 월간 문예지 이었던  일본인 고오네 에이치(鴻農映二)씨는 1980년 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통해 윤동주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으며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후배인 정병욱 교수 등의 증언을 실었다    ▲ 2009년 8월15일 방영된 SBS 광복절 특별판  학창시절 축구 선수로 활약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사망했다. 사망을 전후한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그가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년 , 윤동주는 도지샤대학  영문과 동기들과 함께 교토의 한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찍은 사진  한 달 뒤인 7월 14일,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사촌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4일 전인 7월 10일에 붙잡혔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했다. 해방을 불과 반 년 앞두고 그는 스물일곱의 생애를 마쳤다.  1945년 2월. 윤동주의 고향집에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된다. ‘16일 동주 사망, 시신 가지로 오라.’      용정서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찾아가 시장례식인계받고, 현지에서 화장하여 다시 돌아와야 했다  윤동주 장례는 3월 6일 치러진다. 약 20일이 걸렸다.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의 주관으로 어릴 때 뛰놀던 마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 윤동주의 장례식   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1945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던 이는 그의 당숙 윤영춘(가수 윤형주의 부친.윤형주는 윤동주의 육촌 동생이 된다.).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감 중이던 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당시 송몽규가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전했다고 증언했다. 송몽규도 3주 후 옥사했다.  문제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의문의 주사다. 이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일본인 간수들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시체를 실험용으로 가져갔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시신 기증이 예정됐던 곳 역시 규슈제대였다.  생리식염수 대신 바닷물을 주입한 규슈제대의 실험을 감안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일 가능성이 크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확인한 결과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한다.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 명은 산 채로 해부된 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첫 시집 가 출판된 것은 해방 3년 후, 1948년이다. 31편의 시를 싣고 있었던 정음사판에 이어 1955년에 10주기에 93편의 작품을 담은 유고시집이 간행되었다.     규슈제국대학에서의 생체실험을 다룬 소설이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샤쿠(遠藤周作)의 이다.  규슈제대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끔찍한 생체실험은 집도 책임자였던 이시야마(石山)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종전 뒤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취조 받다가 자살해 버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실험의 전모는 묻혀 버렸다. 이때 기소된 30여 명의 관계자는 교수형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출처] 윤동주 시인 여동생 윤혜원 여사 생전 증언 "일본 생체실험 주사 주입이 우리 오빠 사망 원인"|작성자 몽드메  
1192    [작문써클선생님께] - "사과" 이야기 하나 해볼가요... 댓글:  조회:3956  추천:0  2018-08-04
★ "사과" 비밀 이야기 하나 ★ 새 왕비는 백설공주에게 사과 한 개를 주었어요. 공주는 일곱 난쟁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사과를 먹기 시작했어요. 일곱 난쟁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백설공주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리고 공주의 옆에는 먹다 남은 사과가 있었죠. 일곱 난쟁이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사실 새 왕비가 준 사과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어떤 마법이냐고요?  여러분에게만 살짝 알려 줄게요. 이, 이런. 백설공주가 욕심을 내다 그만...  일곱 난쟁이와 나누어 먹었다면 쓰러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사과가 있다면 누구와 나누어 먹고 싶은가요? 맛있는 사과를 나누어 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 과연 누구일까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 나를 아주아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119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사과 댓글:  조회:2530  추천:0  2018-08-04
                     詩人 윤동주           ※ 필명은..         동주(童舟, 童柱)입니다.          한자로는 두 가지입니다.         본명인 東柱는 '동쪽의 기둥' 이라는 의미이고,         필명인 童舟는 아이동 자에 배주 자를,         또 한 개인 童柱는 아이동 자에 기둥주 자를 썼습니다.          Mizmor S린.이 참말로 사랑하는 詩입니다.         여기에선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르지 않고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나의 習作期의 詩 아닌 詩'에 써진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詩人이 스무살되던 해(1936년), 12월 중의 기록으로 잡습니다.         앞서 기록된 詩 끝에 '一九三六. 十二月'이라고 끝맺음이 되어있고, 이어 기록되었거든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픕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시랍니다.         그대로 일상의 곤궁함이 뼈 속으로 아주~ 살며시,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게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슬프지만,          아름답게 보듬어지는 한 가족의 사랑이...         붉은 사과 한 개 속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비참했던 우리 민족의 삶이 생생히 묘사된 사실문학이라 한다면,         ... 어려운가요?         이 한 편의 시 속에 담긴  가족의 애틋한 사랑은 너무도 귀합니다.          마치 진흙 속의 진주 처럼 가족 간의 사랑이 매우 고결한 빛을 냅니다.          제 눈엔, 제 가슴엔 그렇게 보입니다.                                 "붉은 사과 한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채로 송치까지                        다ㅡ 나눠먹었소."                                                           /윤동주                                 이 시는 1930년대~40년대의 고통받는 민중의 사회상이며,          또 인간, 특히 가족 관계 속의 情(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시입니다.         단순히 개인주의적 낭만시, 서정시를 지나,          아이들을 위해 쉽고 예쁘게 씌어진 童詩를 지나,          이에서 더 나아가 민족의 歷史요, 人間事, 苦海 속 사랑의 의미를 또한 봅니다.          제도와 권력의 횡포가 낳은 불평등 사회의 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억압받는 약자 계층이 필연적으로 앓을 수 밖에 없었던 탈출구 없는 빈곤...         이러한 일이 어찌 오래 전, 일제 치하 뿐이겠습니다?          그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라면...         이젠 사과 한 개를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먹은 일가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때보다 더한 정서적 폭정과 학정 속에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서 우리의 영혼을 핍절하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일제가 아닙니다.           이 소중한 가족의 사랑을 빼앗고 입에 담지못할 온갖 패륜을 돌려주는 사회...          참 슬픈 세상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 사랑이 있다면 희망이 있을 것을...          과연 이 시대가 빼앗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처한 이 곤궁하고 괴로운 상황 속에서         소망하고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풍요가 아니라          나를 돌보며 너를 위하는 바로 이 '사랑'이겠습니다.         나만 먹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다~ 나눠 먹습니다.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단순히 참여적 측면에서 제 감상을 이해하진 말아주십시오.         혹이라도 시가 너무 맑고 아름다워서 그 맑은 물줄기 속에서         고통의 맥박을 듣지 못하실까 하여 편중하여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진실로 이 詩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은          고통스런 현실을 이기는'사랑의 힘'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동주의 詩, 사과'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     ===================     윤동주 빗자루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하나 나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ㅡ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속에 감췄드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이 시는 방바닥을 어지럽혀서 엄마에게 빗자루로 맞자 빗자루가 방바닥을 쓸기 싫어서 누나와 나의 엉덩이를 때렸다고 생각하고 벽장 속에 감춰두니 엄마가 이튿날 아침에 빗자루가 없다고 야단한다는 내용이다. 동시이지만 핑계를 빗자루에게 두는 관점을 달리하여 표현하는 솜씨가 있다. 누나와 나는 종이를 가위로 베어서 저고리를 만들고 총을 만들고 놀면서 방바닥을 어지럽히니 어머니가 빗자루로 누나와 나의 엉덩이를 때려서 어머니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빗자루를 벽장 속에 감추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빗자루로 청소를 하려다 빗자루가 보이지 않자 빗자루를 찾는 야단을 한 것을 동시로 표현한 것이다. 관점은 어린 아이다우나동시의 특성인 운율이나 대구 등은 보이지 않는다./전한성   윤동주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이 시는 고요한 7월의 오후에 빨랫줄에 널려 있는 흰 빨래들 중에 작은 빨래만 빨리 마른다는 내용이다.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는 오후의 시간을 묘사한 것으로 흰 빨래를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두 다리를 드리우고’는 땅을 향하하여 펼쳐저 있는 모습을 말하고 ‘귓속 이야기하는’은 고요한 상태임을 말한다.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는 고요한 상태에서 쨍쨍한 햇빛을 활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후에는 크기가 작은 아담한 빨래만 마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전한성     윤동주 사과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 채로 송치까지 다아 나눠 먹었소.   이 시는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네사람이 껍질 뿐만 아니라 송치(사과의 내부에 씨가 있는 곳)까지 알뜰하게 나누어서 먹었다는 내용이다. 가족이 공동체로 사과 한 개도 나누어 먹는 가족애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과가 몹시 귀한 것이어서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나누어 먹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껍질과 송치까지 먹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붉은 사과’가 당시에 관습적인 상징으로 쓰인 것인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전한성     ===================@@ 여기서 송치는 원래 옥수수 이삭의 속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 시에서는 사과 씨가 있는 딱딱한 부분을 뜻한다.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 강점기이다.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에 먹을 것이 많이 부족했던 때이다. 윤동주 시인의 사과라는 시는 그런 상황에서 사과 한 개를 껍질부터 속까지 남김없이 나누어 먹는 가난한 가족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게 하는 마음아픈 시이다.  
1190    [바로 잡아야 합니다] - 윤동주 시 "편지"가 오도되고 있다!... 댓글:  조회:2876  추천:0  2018-08-04
평소에 늘 궁금하게 여기던 사안이었는데...  컴의 여러 카페, 블로그 속을 뒤지다보면 윤동주 의 " 편지" 란 시가 오도되여 띄워져 있습니다.  저두 그 노래의 원 詩가 윤동주가 지은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에는 그런 내용의 시가 결코 없습니다.  대신 동일한 제목인 "편지"가 있긴 하죠. 인터넷을 여기저기 다 뒤져봐두 모두 앨범에 실린 "편지"의 작가가 "윤동주"라고 나와있는데 만일 윤동주의 "편지"가 아니라면 다 바뀌어야 할 듯 싶습니다.  무슨 원인으로 왜곡되였는지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함을 대성질호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오도된, 왜곡된 시를 윤동주 시로 둔갑해가지고  배워주고 배우고 있다는 자체가 민족 시인, 저항 시인 윤동주에 대한 모독임을 절실히 반성해야 지당하다고 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실린 윤동주의 "편지" 입니다.  누구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계신 분 계시면 답글이나 꼬리말 부탁드릴게요. 아래에 윤동주 시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지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추정) ( 참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원문 그대로 수록 )    ====================/// @@ 오도되여 "류행"되고 있는 "편지"...   편지 /(김상규?) 詩 : 윤동주 / 作曲 : 고승하 / 노래 : 안치환 그립다고 써 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은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 만 쓰자 그립다고 써 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만 쓰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만 쓰자 ==============역시 ??? 편지                                        윤동주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낫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어   진정 못 잊는 다는 말은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은 말고   가다가 그리울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동주- =======================///@@     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1936.12.(추정)          
118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편지 댓글:  조회:4342  추천:0  2018-08-04
윤동주 -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 (추정).   윤동주 시인의 시 "편지"는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입니다.   윤동주에겐 사실 누나가 없는 걸로 저자는 알고 있습니다. 밑으로 여동생 "혜원"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꼭 이 詩에서 말하는 누나는 친누나가 아니라고 합시다...  물론 교과서 식으로 말한다면 누나는 "조국"이란 의미도 되겠지만..  저자는 "조국"을 제외한 상태에서이야기 하겠습니다...  (청년 윤동주에게도 애틋한 로맨스가 분명히 있었다는 아니면 어린시절 연민의 대상이 있었다는 가정하에) 이 詩의 소년의 누나는 분명 소년이 있는 곳을 떠나 있습니다  소년은 너무나도 그리운 누나에게... 보낼 편지로 누나가 좋아하던..  눈을 담아 보내고 싶습니다 "글씨도 쓰지 말고/우표도 붙이지 말고/말쑥하게 그대로/편지를 부칠까요 하지만 누나는 편지가 닿지 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운 이에게 ... 소년은 그렇게 편지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은 그의 나이 19세 무렵 쓰여졌다 하겠다 . 누이가 가신 나라에 눈이 오지 않아 그 누이 같이 희고 고운 눈을 보내고져 하는 시인의 동심적인 글. 군더더기 없는 하얀 눈처럼 덧 붙침 없이 말쑥하게 부칠까요? 하고 물어보는 시인이 누이에 대한 배려. 일방적인 자기 생각으로만 강요하는 세태에 비하면 얼마나 말쑥한가.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소망 하며 늘 시 마다 부끄러워 했다.   ============================///    
1188    다시 보는 윤동주 댓글:  조회:3702  추천:0  2018-08-04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파평 윤씨. 윤동주(尹東柱)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아명 윤해환(尹海煥) 출생 1917년 12월 30일 사망 1945년 2월 16일(향년 27세) 출신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북간도 명동촌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 시) 사망지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형무소 학력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중퇴 도시샤대학 문학부 제적 가족 윤영석(父), 김용(母)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소개2. 생애 2.1. 사망과 의혹 3. 사조4. 성격과 일화5. 작품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6. 중국의 자국 시인화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 7. 기타8. 참고 항목   1. 소개[편집] 동주야.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예수보다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 시인(詩人)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한 일제강점기의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6달이 지나서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윤동주의 막내 동생은 윤광주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지내다 1965년에 사망한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고작 김일성 회고록에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 정도로 매우 간단하게 쓰여진 게 전부이며 한국 학생들처럼 그의 시를 공부하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연구가 정체되어 있는 북한 국문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2017년 12월 30일,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2. 생애[편집]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는데,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1]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2]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 북간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이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3]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씨가 생존한 고희욱 씨를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뇌일혈로 병사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에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엔 당시 간수가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온 유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2.1. 사망과 의혹[편집]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고종사촌 형이자 친구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다가 1945년 3월 7일 급사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씨가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 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 수 년 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731부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은 파시즘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으므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이 설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다.바닷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혈관으로 들어가는 점은 엄연히 다르다. 위생상 두 방법 다 안 좋긴 마찬가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건 토하거나 나중에 배변으로 나올 수 있지만, 살균작업을 거치지 않은 무수한 세균이 득실거리는 바닷물이 영양실조 상태의 인간 혈관에 주사된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4][5]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그렇지만 윤동주가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기사 주요 골자는 생체실험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3. 사조[편집]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6], 자화상, 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기사1 기사2 4. 성격과 일화[편집]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7]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기독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8]에서 유학을 했었는데,[9]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10]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11]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12]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13], 일본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잊지 못할 윤동주를 여기서 볼 수 있다.http://felicityk.egloos.com/1260659   5. 작품[편집]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4] 서시(序詩) 자화상(윤동주)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윤동주)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윤동주)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15] 참회록 간(윤동주) 황혼이 바다가 되어 국어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16],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작가)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니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중 하나.[17]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18][19]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20]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듯.[21] 5.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편집]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2], 김소월의 , 필자불명의 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3] 등 특히 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6. 중국의 자국 시인화[편집]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24] 그러다 어느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25]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리고 조선족들은 그를 중국 조선족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태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명분이 섰다" 라고 운운하는데 주목하자.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 6.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편집]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은 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26]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 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27]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28] 6.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편집] 위와같은 기념이나 추모행태를 동북공정같은걸로 생각해서 윤동주를 중국인화하려 한다며 중국 정부를 성토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 관심 없다.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이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공동의 시인"으로서 접근해주길 바라겠지만,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우려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29] 조선족들의 입장도 사실 이해할 만한데,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된 중국 조선족은 대표적인 문학이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야 말로 자기 고장 출신의 거의 유일한 네임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남북한을 아우르는 전민족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어그로를 끌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중국조선족" 출신 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뿐. 사실 이런 문제는 천년이상 한반도에 자리잡고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우리에겐 생소해도 유럽엔 굉장히 흔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독일과 폴란드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쓴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 작가로 봐야하는지 체코 작가로 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작가라고 꿋꿋하게 우기고 있다. 7. 기타[편집]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19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30]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2014년 최근에는 EBS [31]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32]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33]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4]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35]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 하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6] 여하튼 일본인들조차 그 재능을 인정하는 천재. 위에서 언급했듯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는 한국인을 넘어 일본인들도 울려버린 명 구절이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37]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38]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 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영화)'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 등으로 유명한 이정명 소설가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 시인과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서브컬처계에서는 드물게 하이큐!!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니시노야 유가 치룬 기말고사 답안지에서 윤동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를 낭독한다.http://tvpot.daum.net/v/mP_g4nVZ4Yk$ 자막이 별헤는밤이라고 적어놨다 무한도전에서 개코, 황광희, 오혁이 윤동주 시인을 주제로 한 "당신의 밤" 노래를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8. 참고 항목[편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한자로 일(日)자와 왈(曰)자는 표기가 비슷하다. 왈자가 가로로 긴 모양.[2] 숭실중고등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자부심을 은근 강요한다.[3] 지금의 이과-문과의 이분법이 아닌 문학과를 의미한다.[4]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 무릎팍도사 문성근편에서 문성근이 일본군 징집문제로 장준하, 윤동주, 그리고 그의 아버지 문익환의 얘기를 했다. '문익환은 신학자로 절대로 입대할 수 없다는 의지로 신학교장과 담판을 지어 전학가게 되었고, 장준하는 입대 뒤 탈영해 독립군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윤동주는 일단 입대한 뒤 일본군이 약해질 때를 틈타 내부에서 난을 일으키자 했었으나 윤동주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생체실험을 받다 죽었다.'라고 한다.[6] '서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정본에 따르면 제목이 없다.[7] 이 당시에는 세로쓰기였다.[8] 일본성공회 소속 미션스쿨[9] 그러나 릿쿄대학은 윤동주가 처음부터 원해서 갔다기 보다는,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에서 다닐 수 있는 다른 대학을 찾던 중 차선책으로 가게된 것이다. 기독교계 대학이라는 것이 릿쿄대학을 선택할 때 고려된 한 요소가 되었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대학을 가고싶어서 릿쿄대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10]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반전(反戰)을 주장했던 기독교계 인물로서, 특히 윤동주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던 당시가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철저히 감시받던 때였다. 어쩌면 윤동주가 이 때부터 일본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1]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난의 느낌이 강하다. 일제강점기는 고사하고 60~70년대의 배움에 뜻이 있어도 형편때문에 이루지 못 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널렸음을 생각해보면 유학하는 부자 아들내미들보단 가난했겠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확실히 잘사는 집안이다.[12] 조선시대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 오성과 한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풍습을 지켜왔으면 현재처럼 존칭 때문에 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13] 윤동주의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이, 즉 친구인 문익환 목사나 육촌 동생인 윤형주 씨의 증언으로는 "확실히 그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도 잘생겼다." 라고 인정한다. 윤형주 씨는 본인도 1960년대 활동 당시에 미남 취급을 받았는데 그런 본인보다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걸 보면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다.윤형주 씨가 관련된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윤형주는 1947년생인데 윤동주는 1945년에 옥사하였으므로 윤동주의 실물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4]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19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15] 현대의 맞춤법에 따른 표기로는 '쉽게 쓰인 시'.[16] 어느 정도냐 하면, 윤동주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으면 무조건 '자기반성과 성찰'을 고르면 끝이다. 물론 윤동주가 지은 '오줌싸개 지도' 같은 동시 비슷한 녀석이 출제되면 그런 거 없겠지만 수능에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주제로 한 시가 출제된다.[17] 그러나 고등학교의 문턱을 넘어서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시인이기도 하다. 사실 그저 '저항의식'이라거나 '자기반성'이라고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가 전공 강의를 듣거나 시집을 사서 제대로 읽어보면 도저히 헤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시들이다. 앞서 이육사보다 난이도가 낮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니 고등학교 때 아는 시라고 훌쩍훌쩍 넘어가지 말고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보자..[18] 굳이 친일 행적으로 트집잡을 만한 것이 있다면, 창씨개명 하나 정도. 하지만 당시에 창씨개명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고, 윤동주의 경우도 하지 않을 시에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히라누마 도슈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시집 원고에는 언제나 윤동주로 표기했고, 외국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윤동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게다가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벌써 참회록을 써놓고 자책과 반성을 했다.[19] 그리고 애시당초 창씨개명했다는 도슈라는 이름은 윤동주의 동주(東柱)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일 뿐이다. 창씨개명 때 이름을 아예 일본식으로 갈아엎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20]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꽤 많다. 그들의 모임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21]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었고,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필사한 것을 소장하였다고 한다.[22] 원작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의 작품 인 것으로 확인되었다.[23] 필자는 알 수 없지만, 안치환의 노래 의 가사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고승하도 문방구 노트 표지에 인쇄된 시와 당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자퇴하려던 학생이 편지처럼 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 것. 노래가 완성된 시기가 1984년이니 꽤 오래전부터 오해가 시작된 듯하다.[24] 집안이 개신교였던 관계로 공산화된 지역에 있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아예 남으로 내려왔다.[25] 윤형주보다 나이가 많은 윤동주의 친척들은 이 시기에 이미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윤형주가 대표라 북간도에 갔다고 한다.[26]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재일 조선인과 다르게 대한민국과 북한 국적을 지니지 못한 상태이고 이국 국적 취득도 중국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하다.[27] 약칭 국호로써 대한제국은 대한과 한국을 동시에 사용하였다.[28]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대부분 1942년 일본 유학 이전 조선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29]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은 민주국가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0] 하나는 백윤식이 열연한 이상화 편, 다른 하나는 김흥기가 열연한 이육사 편이다. 이상화 편에서는 미니어처로 관동대지진이 재현되었다.[31] 회당 10분짜리 음성 드라마[32] 문성근의 부친으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은진중학-숭실중학-광명중학을 함께 다닌 친우다.(징집령에 대한 판단이 가른 운명).[33] 그 당시의 숭실중학에 재학하던 다수의 학생들이 이 문제로 자진 퇴학을 했다.[34] 1984년엔 의 완역본이 출간되기도 했으며, 1995년엔 일본 NHK와 KBS가 합작으로 그의 사망 5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다. 여기서 중국에 있는 그의 고향 및 일본에서 그가 유학 당시 지내던 곳, 지인들 인터뷰도 나왔으며 일본인 대학 동창생도 나와서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에서 일본인 동창생은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하며 항상 뭔가 글을 적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다큐멘터리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35] 윤동주의 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36] 가령 김소월의 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이라는 명구절조차 영어로 "쿠쿠 쿠쿠 나인 브라덜스 쿠쿠" 라는 괴이한 번역이 되기 쉬우므로.[37] 윤동주 시비 옆에는 역시 같은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윤동주 시인은 처음 일본에 오기 전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을 다니다가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그가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학 역시 릿쿄대학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미션스쿨이다.[38] 소설 필화 사건. 자세한 것은 마광수 참조.
1187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버선본 댓글:  조회:2676  추천:0  2018-08-03
              버선본      윤동주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 1936년 12월초.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   윤동주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이 시는 누나와 내가 버린 습자지와 몽당연필을 어머니는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내 버선 만드는 버선본을 만들고 버선 만드는데 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어머니가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버리지 않고 두는 것에 의문을 품고 무엇에 쓰려고 습자지를 버리지 않나 궁금해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습자지를 가지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습자지를 버선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오려 버선본 만드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누나가 버린 습자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뭣에 쓰는 줄도 알게 된다. 천 위에 버선본 놓고 몽당연필에 침 발라 버선의 모양을 천에 다가 점을 찍어서 내 버선을 만드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알뜰한 절약정신과 이를 알아간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전한성   윤동주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이 시는 그믐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부서진 달조각로 생각하고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러 반딧불을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믐밤 반딧불은 / 부서진 달조각’이라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믐달은 하늘에 남아있는 달조각이고 그 나머지 달조각은 부서져서 땅에 내려와서 반딧불의 모습으로 있다는 말이다.///전한성   ===================/// [한국대학신문 손현경 기자]  “윤동주(尹東柱)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간 청년 시인’”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이름 석자다. 벌써 그가 탄생한지 100주년(2017년도)이다.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투사도 아니다. 당시에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다. 그러나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민족투사 정신 못지않게 치열하고 장렬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1995년 2월 본지는 50여명의 추모 행사단을 꾸려 윤동주 시인의 옥사 현장인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를 답사하고 시비건립을 추진하며 대규모 추모제를 열었다. 당시 추모제에서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현립대 교수(현 명예교수)는 “우리가 윤동주를 죽였습니다”라며 뼈아픈 참회를 했다. 그 때 눈물까지 흘리며 감동한 일본인들이 만든 윤동주의 모임이 교토와 도쿄 등으로 확산돼 지금은 해마다 윤동주의 기일과 3.1절, 8.15에도 그를 기리며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고 있다. 참된 이념의 횃불은 한번 번지면 이렇게 이국땅에서도 20년이 넘도록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2015년 2월 8일 열린 윤동주 타계 70주기 행사에는 니시오카 겐지 교수 등 당시 20여 년 전 결성한 일본인들의 ‘윤동주 시를 읽는 회’가 함께 했다. ‘윤동주 시를 읽는 회’는 결성 이후 해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추모를 윤동주 탄생해 100년인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후 윤동주가 감옥에서 타계한 지 70년이 되는 2015년 2월 16일 후쿠오카에는 일본인의 손으로 윤동주 시비를 세우는 위원회가 발족했다.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발족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창립자인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 등 일본인 교수‧문인 10명이 발기인이다. 이들은 ‘지금 왜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려고 하는가’라는 취지문을 통해 “후쿠오카의 땅에서 희생된 윤동주를 위령하고자” 또한 “그를 한 상징적 인물로 삼아 나아가 당시 자신의 의사와 달리 힘든 조건에서의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분들, 평생 기억에서 지우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던 분들, 또한 불합리한 민족적 차별을 받거나 상처를 받고 목숨을 잃으신 분들, 그러한 아시아의 많은 분들에게 당연히 애도의 마음을 표현해야만 한다”며 시비의 의미를 전했다. 이어 타계 71주기에는 윤동주 기념 관련행사가 열리는 도쿄의 릭교대학(立敎大學)행사에 김우종 본지 주필이 관여하는 문예지의 대표 한 사람을 파견했다. 한편,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1186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가을밤 댓글:  조회:2512  추천:0  2018-08-03
    가을밤 / 윤동주   궂은비 내리는 가을밤   벌거숭이 그대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그리고 서서   아인 양하고   솨--- 오준을 쏘오. 1936.10.23. 밤.  
1185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무얼 먹고 사나 댓글:  조회:2988  추천:0  2018-08-02
  윤동주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이 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따라서 그 곳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을 먹고 사는데 별나라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궁금해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에 사는 사람은 산골 밭에서 기른 감자를 구어 먹고 사는데 별나라에 사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 하는 내용이다. 별나라 사람은 별을 먹고 사나 아니면? 유추의 방식으로 답을 생각하게 하는 동요이다.///전한성 =================     윤동주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이 시는 누나와 내가 버린 습자지와 몽당연필을 어머니는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내 버선 만드는 버선본을 만들고 버선 만드는데 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어머니가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버리지 않고 두는 것에 의문을 품고 무엇에 쓰려고 습자지를 버리지 않나 궁금해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습자지를 가지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습자지를 버선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오려 버선본 만드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누나가 버린 습자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뭣에 쓰는 줄도 알게 된다. 천 위에 버선본 놓고 몽당연필에 침 발라 버선의 모양을 천에 다가 점을 찍어서 내 버선을 만드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알뜰한 절약정신과 이를 알아간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전한성   윤동주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이 시는 그믐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부서진 달조각로 생각하고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러 반딧불을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믐밤 반딧불은 / 부서진 달조각’이라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믐달은 하늘에 남아있는 달조각이고 그 나머지 달조각은 부서져서 땅에 내려와서 반딧불의 모습으로 있다는 말이다.///전한성     ======================   소설가 송우혜가 전하는 '마음의 별로 남은 민족시인'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27년여의 짧은 삶. 그러나 울림은 컸다. 뭉클한 여운이 100년(2017년도)이라는 시간 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 살아생전에 별을 헤던 그는 세상을 떠나 마음의 별로 남았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송우혜(70) 씨가 그의 삶과 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동주 시비 앞에 선 송우혜 소설가 [사진/전수영 기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7월 18일 한낮.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윤동주기념관 주변의 숲이 매미 소리로 요란했다. 기념관은 윤동주 시인이 대학 1학년 때 생활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를 했던 기숙사였다. 바로 앞뜰에는 시인의 삶과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가 단아하게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서시(序詩)'다. 소설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 씨는 시비에서 기념관 쪽을 바라보며 사뭇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시'는 '참회록'과 더불어 가장 애송하는 시라고 했다. "석조건물인 저 옛 기숙사의 지붕밑방에서 시인은 운명적 절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꿈을 키웠어요. 거목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이 숲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해요. 수십 년 전에 시인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날 내가 이렇게 걷는구나 싶어서입니다."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주옥같은 시를 다수 남겼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민족 최대의 경축일인 광복절을 앞두고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감회가 새롭다. 송 씨는 "올해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면서 "남기신 시와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듯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윤동주 시인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200여 편의 시와 산문으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송 씨는 "'명예롭게 유지될 수 없는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멸망한 때가 그랬다"며 "어두운 재앙의 시기에 신은 우리에게 한 시인을 보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역저 '윤동주 평전'(서정시학)은 시인의 삶과 예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현대사의 한 줄기를 새롭게 재정리해 또 다른 울림을 안겨준다. ◇ 우연한 만남이 낳은 '윤동주 평전' 송 씨와 윤동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운명적 인연이랄까. 아버지의 삼종형인 송몽규(1917~1945)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친구 사이인 윤동주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서는 이른바 '윤동주 폄훼 현상'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평생 공부만 했던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겠느냐. 그의 시 또한 저항시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쳐 불우하게 옥사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요.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시인에 대한 평가를 오도한 것입니다." 평전이 출간되기까지 내적 우여곡절도 거쳐야 했다. 윤동주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사잡지에 글을 발표하자 한 출판사의 주간이 제대로 된 '윤동주 평전'을 하나 써달라고 간곡히 주문했다. 하지만 송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평전을 집필한다는 건 무리다 싶어서였다. 당시 그는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낮잠에 깜박 빠져들었는데 윤동주의 친구이자 인척인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의 모친(김신묵)이 금방 돌아가실 것처럼 자리에 누워 계시는 꿈을 꿨어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지요. 소설은 언제라도 쓸 수 있지만 저분이 돌아가시면 북간도 이야기 역시 영영 사라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송 씨는 곧바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고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 무렵. 당시 90세였던 문 목사의 모친은 북간도의 역사와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이켜주는 최대의 증언자가 됐고, 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과 남동생 윤일주도 큰 도움을 줬다. 모두 560여 쪽 분량의 '윤동주 평전'은 집필 4년 만인 1988년에 처음 출간됐다. 그리고 1998년 제1차 개정판에 이어 2004년 2차 개정판, 2014년 3차 개정판이 차례로 나왔다. "평전을 쓰는 동안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걸 목표로 정진했지요. 그 결과 '윤동주'라는 시인을 좀 더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내년이면 어느덧 출간 30주년이 되네요." 이와 함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윤동주 평전을 쓰겠노라고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송 씨의 평전을 읽고서는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가 쓴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잘 썼다. 나는 안 쓰겠다"며 대견해 하더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2월 전화를 걸어와 "내가 곧 북간도에 가려는데 평전 두 권만 다오. 그 책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문 목사가 평전을 들고 그해 3월 25일 도착한 곳은 중국 북간도가 아닌 북한의 평양이었다. 순안공항에 내린 그가 도착 일성으로 남북한 온 겨레 앞에 바쳐 낭송한 게 시인의 '서시'. 송 씨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후려쳤다"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 비운의 짧은 삶, 깊은 울림의 시 세계가 1차 대전의 아수라장에 빠져 있던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 학교촌에 있는 기와집에서는 준수하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렸다. 결혼 8년 만에 아이를 얻은 부모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민족시인 윤동주다. 특기할 사실은 윤동주가 태어나기 석 달 앞서 동갑내기 고종사촌이자 평생 운명을 함께한 송몽규가 탄생했다는 점. 윤동주의 할아버지 댁에서 잇달아 태어난 두 아기는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뒤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고,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돼 복역하다가 같은 해에 옥사한 운명적 동반자였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송몽규가 새로 장만한 부모의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두 아이는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일생을 두고 참으로 특이한 관계였지요.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무척 온순하고 재주 있는 아이였다. 송 씨는 "윤동주에게 명동은 맑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유년기 체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서 "하지만 횡행하는 마르크시즘에 환멸을 느낀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났고 윤동주 집안도 1931년 용정으로 이사했다"고 들려준다. 윤동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내면에는 이 같은 명동마을의 시대상이 있다는 것. 용정의 은진중학교 생활도 시대적 격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5년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잠입했고, 윤동주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의 송몽규 독립운동 경력이 훗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윤동주가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을 체감하고 이를 '부끄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계기는 바로 숭실중학교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시기인 이때 윤동주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이 바로 '부끄럼'임을 깨달은 것. '서시'는 이 같은 부끄럼 미학의 결정판으로, 수치 앞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신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축복이었다. 신사참배의 격랑 속에 문익환과 함께 숭실중을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두 해 동안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중 매우 감칠 맛 나는 작품으로 송 씨가 꼽은 게 동시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 앨범 사진   ◇ 유순하나 지조 높은 '외유내강' 시인 1938년 광명학원을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와 나란히 자신의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시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활짝 열게 된다. 민족의식이 시편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도 이때였다. 그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에서 '흰 수건을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라며 식민치하의 우리 민족을 의인화해냈다. '한민족'은 곧 '슬픈 족속'이라는 것이다. 송 씨는 "외유내강형이던 시인이 대인관계에서는 매우 유순하고 다정했지만 지조는 누구보다 굳고 강했다"고 들려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요 힘에 겨운 아들이며 따뜻한 오라버니요 형이었고 성실한 학생이자 다정한 동료였고 자상한 선배였던 그의 외형을 벗겨놓고 보면 광야에서 수도하는 고행승처럼 엄격하게 노력하는 시인이요, 동족의 고난 앞에서 신과 그 약속에 대해 감연히 반발한 당당한 반항가였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시절이 낳은 명시 중 하나가 바로 '별 헤는 밤'. 맑은 별빛 충만한 가을의 서정을 청신하게 묘사한 이 시에는 시인의 고운 심성과 기품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중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전 졸업 후 윤동주는 송몽규와 일본에 유학해 대학과정을 밟는다. 당시 가장 큰 장애는 '창씨개명'. 창씨개명이 되지 않으면 일본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항증명서'부터 뗄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연전 졸업 직후 북간도로 귀향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그의 새 이름은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참회록'은 창씨개명의 뼈아픔을 통회하는 일종의 저항시였다. 일제에 망한 '대한민국'이란 왕조의 후예로서, 바로 자신의 '얼굴'이 그 '왕조의 유물'임을 절감하면서 '이다지도 욕됨'을 절절하게 참회했다. 송 씨는 "그것은 동시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약하는 자기 다짐을 동반한 참회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중략)…밤마다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여 뒤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성하려던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돼 전격 체포·수감된다. 요시찰 인물 송몽규는 이보다 나흘 앞서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이듬해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각각 비극적으로 옥사하고 만다. "윤동주가 민족시인의 영예를 누리게 된 데는 연전 시절에 종로구 누상동에서 같이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강처중이 있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다섯 살 차이의 선후배였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긴밀한 사이였죠. 윤동주에게서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받은 정병욱은 이를 보관했다가 해방 후 월남한 유족들에게 전함으로써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지요.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를 지낸 강처중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의 원고를 보관했다가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구요. 현존하는 윤동주 유품 중에서 중학교 때의 시와 동시, 습작을 빼고는 모두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아 있어요."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정지용(1902~1950)이었다. 그가 관념적이고 어려운 시가 아닌,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게 된 데는 정지용의 영향이 컸다. 정지용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뒤인 1947년에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며 윤동주를 극찬한다. 송 씨는 "평전이 나오기 전까진 송몽규의 사망 시기와 무덤 소재지에 대해 중대한 착오들이 있었는데 책의 내용을 토대로 무덤을 찾아내고 사망 날짜도 바로잡혀 큰 보람을 느꼈다"면서 "이와 함께 '좌익 인사'였다는 이유로 유족조차 쉬쉬하던 강처중의 행적과 사상을 개정판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1968년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뒤 197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한 송 씨는 다시 이화여대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문단에 오른 송 씨는 장편소설 '저울과 칼' '하얀 새' 등을 발표했고 '스페인춤을 추는 남자' 등의 소설집과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라는 산문집도 펴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에 실린 글  
1184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굴뚝 댓글:  조회:2905  추천:0  2018-08-01
  윤동주 굴뚝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이 시는 산골짝에 오막살이의 굴뚝에 나는 연기는 총각애들이 감자 굽는 연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대낮에 끼니를 준비하는 때가 아닌 데 산골짝에 있는 오막살이의 낮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에서 나는 냄새로 소년들이 옛이야기를 하나씩 하면서 감자 하나씩을 먹는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 화자가 오막살이 안의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 추측하게 하는 소재이다.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는 화자가 산골짝에 있는 오막살이의 낮은 굴뚝에서 몽기몽기 나오는 연기를 보고 의문을 품는다는 내용이다. 대낮에 솟아나는 연기를 보고 ‘웨인연기’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당시에 대낮에는 점심을 간단하게 먹던가 아니면 먹지 않았나 보다. 1연에 대한 답은 3연에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라고 ‘감자 굽는’ 연기라고 나온다. 1연은 질문 3연은 대답으로 구성된 시이다.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는 화자가 추측한 오막살이 안의 모습이다. 화자는 소년들이 모여 앉아서 감자를 먹느라 입술이 꺼멓게 검은 재를 무치고 감자를 먹으면서 그냥 맹숭맹숭 먹지 않고 옛이야기 하나를 하면 감자 하나를 먹을 수 있게 놀이를 하면서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총각애’는 ‘총각’과 ‘애’를 합성한 것으로 오늘날은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 의미는 총각에 가까운 나이 먹은 소년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깜박깜박 검은 눈’은 글을 배우지 못하고 순진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감자를 먹고 싶어서 ‘깜박깜박’거리는 모습이 정겹다.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는 불에 구은 감자를 먹을 때 탄껍질에서 묻은 검댕이를 말하면서 벌써 감자를 먹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커리’는 ‘한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냥 감자를 먹으면 빨리 먹을 뿐만 아니라 서로 먹으려고 싸우거나 감자를 알뜰하게 먹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정규교육은 배우지 못한 ‘산골작이’에 사는 ‘총각애들이’ ‘오막살이’에 모여 나름대로 지혜를 짜내어 감자를 분배하는 놀이를 하는 모습을 화자는 상상하고 있다. 추측하건데 ‘총각애들이’ 구워 먹는 감자는 공동으로 서리를 해온 것일 것이다.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는 2연에서 화자가 추측한 근거가 냄새인 것을 알려준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에 감자 굽는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1연의 답인 것이다.///전한성     =========================///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겨울 대낮 솟아난 감자 굽는 연기에 북간도 총각들 독립군 이야기 솔솔 순국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동시를 많이 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오시샤(同志社)대학에 유학 중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순국하였다. 일제는 그의 생명을 생체실험으로 빼앗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 터전인 북간도 산골 총각들 모여 피운 이야기꽃엔 안중군·윤봉길 활약 곁들여져 시인 윤동주이기에 가능한 상상 윤동주의 시에는 어느 작품에나 일제에 저항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의 동시 한 편을 살펴보자.           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엔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거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신한국문학전집’의 ‘아동문학선집’ 어문각, 1975. 윤동주는 북간도 출신이다. 북간도는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시의 산골짜기는 북간도의 산골짜기요, 오막살이는 북간도의 오막살이이다. 일찍 찾아온 북간도의 겨울이다. 그 산골짜기, 그 오막살이 나지막한 굴뚝에서 대낮에 연기가 솟고 있다. 시인은 생각한다, ‘몽기몽기 웬 연기가 대낮에 솟나?’ 하고. 푹푹 솟는 연기라면 점심 끼니를 짓는 연기다. 몽기몽기 솟는 연기이므로 총각애들이 감자를 굽는 연기일 것으로 시인은 짐작한다. 시인의 생각은 틀림이 없었다. 눈이 까만 총각애들이 둘러앉아서 구운 감자를 나눠 먹으면서 감자 하나에 이야기 하나씩을 곁들인다. 이야기는 옛이야기라고 시에다 밝혀두었지만 정말 옛 얘기만 했을까? 용감한 독립군 이야기도 나누었을 법하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에게 육혈포를 쏘는 흉내, 청산리 싸움에서 “따다다다다다….” 총소리, 윤봉길 의사가 터뜨린 폭탄 얘기를 나지막한 소리로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시의 배경이 독립전쟁의 현장인 북간도요, 순국시인 윤동주의 시이고 보니 그러한 짐작이 가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이곳 북간도 은진(恩眞)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썼다. 연변에서 출간되던 어린이잡지 ‘가톨릭소년’에 발표된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병아리’ 등은 한국아동문학의 고전이 되고 있다.  광복 이후 그의 시를 모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출간되었는데 30편을 엮은 시집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유작이 발견되어 차츰 시집 부피가 늘어나고 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데에는 석 달 맏이 동갑인 윤동주의 고종사촌형 송몽규(宋夢奎, 1917~1945)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동갑에, 이웃 친척에, 북간도에서 같은 초·중학교를 나오고, 연희전문을 같이 마쳤다. 윤동주와 같이 일본 유학을 가서 같은 독립운동 혐의로, 같이 2년 형을 받고,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같은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윤동주보다 한 달 뒤인 1945년 3월에 순국한 윤동주 평생의 동지였다.  윤동주 학생과 송몽규 학생은, 북간도에서 초·중학교에 다니면서 서울에서 발행되는 어린이잡지 ‘어린이’와 ‘아이생활’을 사서 돌려 읽으며 글짓기 공부를 했다고 한다.  2010년, 윤동주의 출생지 북간도 연변에 윤동주의 동시 ‘참새’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모교인 연세대학에는 오래전에 세워진 윤동주 추모시비가 있다.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정부에서 순국시인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어졌다. 윤동주의 시정신을 기리는 윤동주 시문학상이 시상되고 있다. /신현득 아동문학가·시인 =====================///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 윤동주 시인의 생가 기와 [충청신문=천안] 장선화 기자 = 오는 23일(2017년 9월), 오후 3시 천안시 광덕에 소재한 ‘윤동주문학산촌’(촌장 박해환 시인)에서 민족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윤동주의 대표 시 서시, 슬픈족속 시비 제막식이 열린다. 조선시대 옛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과거길 천안시 광덕면 쌍령 언덕에 ‘윤동주문학산촌’을 개관하는 그 첫 번째 시비 제막을 통해 윤동주의 민족 사랑과 평화정신을 선양하는 일을 능수버들의 고장 천안에서 여는데 큰 의미가 있다. 충절의 고장 천안에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 혼을 부활시키고 시인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시인, 문학평론가 지역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식전 연주, 시비 제막식, 시 낭송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대표 박해환 시인)은 2005년 윤동주상을 제정 윤동주문학대상 민족상 평화상 예술상 해외동포문학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2009년 6월 서울시 종로구와 윤동주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한 협약을 맺고 인왕산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 조성과 '윤동주문학관'을 개관하여 수십 만 명이 다녀가는 윤동주문학 순례지를 만든 견인차 역할 한바 있다. 또한 2008년 8월 겨레의 옛 땅 용정 윤동주묘지에서 문인 80여 명이 묘지 흙을 한 줌씩 담아 와서 윤동주문학산촌에 모아 한미중일 4개 국어로 “윤동주 영혼의 터“라고 새겨 윤동주 문학적 정신문화의 맥을 잇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앞으로 천안 '윤동주문학산촌'에서는 윤동주상시상식, 윤동주시낭송대회, 백일장, 윤동주음악회, 천안호두 천안삼거리 시집 발간, 과거길걷기대회 등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 할 계획이다.  또한 '윤동주문학산촌' 개관의 서막을 알리는 '윤동주시비제막식'에서 그의 시 '자화상' 시작(詩作)의 소재가 되었던 윤동주 생가 우물목판, 굴뚝, 기와를 비롯, 모교 의자, 등사기 등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품과 윤동주 친필 원고 영인본 등 문학 자료를 공개 전시한다.  박해환 촌장은 "테마가 있는 윤동주문학산촌은 쉼과 힐링 문화의 숲 공간으로서 시민들의 사랑 받는 명소가 될 것이며 윤동주 시비 조성 후 천안시에 기부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충청신문 윤동주문학산촌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박해환 시인 제공]
118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가슴 3 댓글:  조회:3957  추천:0  2018-08-01
      가슴 3 /윤동주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한국여행 중   윤동주 문학관    후니 ・ 2018. 7. 26. 0:29 URL 복사  이웃추가            햇빛은 따갑고 온도는 매일 최고치를 갱신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시간을 집에서만 보낼 수가 없어서 윤동주문학관을 찾았습니다. 부암동 언덕길에 올라 네비게이션을 켜고 부암동 산등성이를 몇 번을 돌았지만 원래 주차를 하기로 했던 지인의 집을 찾지 못해 결국 문학관옆에 잠시... 주차금지장소임에도 차들이 쭉 일렬주차를  하고 있어서 그 틈에 주차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길게 문학관에 머무를 수가 없었어요. 다행인지- 주차시간때문에- 불행인지 - 좀 더 윤동주시인에 대해 알고싶은 마음이라면-문학관 규모가 작아서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주위에 합법적으로 주차할 장소가 전혀 없어서 아쉬웠어요.  보통 차를 세워놓은 갓길에 방문객에 한해 30분이라도 단기주차가 가능하게 하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전시실은 크지않은 방크기의 3개의 전시실로 나뉘는데 1실은 윤동주시인의 시를 볼 수 있었는데 1실에서는 사진 및 비디오 촬영이 안된다고 해서 아예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했는데 나중에 홈페이지를 보니 스마트폰으로 찍는 건 괜찮다고 되어있네요. 아무튼 저는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원고지에 쓴 시인의 친필 시들을 비롯 시인의 시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한자와 고어가 섞여있다보니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오랫동안 한자를 접하지 못하고 사는 저도 가물가물한 한자들이 있어서 옆에 한글이나 영어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2실은 아래 사진과 같이  그냥... 하늘이 뚫려있는 3실로 가는 통로정도였어요.   3실에선 윤동주 시인에 관한 비디오가 상영되었어요. 아무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 몰랐는데 나중에 홈페이지에 보니 비디오영상은 사진찍으면 안된다고 해서 분위기만 알 수 있는 사진 몇 장 올립니다. 옛날에는 물탱크였던 공간이라 위로 올라가는 벽면의 발디딤대를 따라 위로보면 하늘에서 비추는 빛이 보이는데 암흑같은 시대에 살 때는 저 빛이 바로 희망이요 고난을 견디게 해주는 빛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윤동주시인도 분명히 감옥안에서 저런 빛 줄기를 희망삼아 바라 보았을테지요... 그러나 생체실험을 당해 20대의 나이에 요절한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였어요.  비디오를 보고 나오는데 시인의 삶과 죽음을  지난 슬픈이야기로  끝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해주었어요. 문학관을 나와 건물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카페가 있다는데 문학관에서 파는 윤동주시집은 문학관이 아니라 저 위의 카페에만 있다고해서 잠시 올라가서 책만 사가지고 내려왔어요. 여기서 산 시집은 시가 현대어로 실려있어서 잘 읽을 수는 있으나 고어와 한자가 섞인 원본 본연의 맛은 또 빠진 것 같아요. 한 면은 원본 시로 다른 한 면은 현대어로 실어줬으면 읽고 감동받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비교해서 보기 위해 교보문고에 가서 윤동주시집을 또 샀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일이 하나하나 비교해보지는 않았지만, 실려있는 시가 같은 것같은 시집 3권을 묶음으로 팔아서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 중 한권은  1948년 1월 시인의 유고시 31편을 모아 발간되었던 같은 시집이었어요.      
118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식권 댓글:  조회:2787  추천:0  2018-07-31
  윤동주는 숭실에서 3학년 2학기와 3학기를 공부했다. 이것이 그로서는 생전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한 경험이다. 북간도에서 평양까지의 교통은 아주 불편했다. 용정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상삼봉 · 회령 · 청진 · 원산을 거쳐 서울까지 간다. 서울에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평안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평양에 내리는 것이다. 숙식은 물론 학교 기숙사에서 했다. 기숙사 식당에선 밥을 주는데, 식권제도를 썼다. 그의 시 「식권(食券)」에 그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식권은 하루 세 끼를 준다. 식모는 젊은 아이들에게 한때 흰 그릇 셋을 준다. 大洞江 물로 끓인 국, 平安道 쌀로 지은 밥, 조선의 매운 고추장, 식권은 우리 배를 부르게 「식권(食券) 」/윤동주 (1936. 3. 20) 윤동주 詩人의 흔적 '연세대 핀슨홀'  백남우 tbsTV 영상콘텐츠부장l2018.07.19 0   [미디어파인=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연세대 핀슨홀]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언더우드관과 스팀슨관, 그리고 아펜젤러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이 세 건물 뒤로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영국 주택 양식의 기숙사 한 동이 있다. 1917년 이곳에 캠퍼스를 마련할 당시, 기부금 조성에 공이 컸던 미국 남 감리교 총무 핀슨 박사를 기념해 명명된 핀슨홀이 바로 그 건축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시인 윤동주가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던 곳이기도 하다. ▲ 기숙사 앞의 윤동주 시비 / 1968년 ▲ 1917년 설립 당시 연희전문학교 설계도에 나타난 핀슨홀 등 기숙사 예정 부지 핀슨홀이 준공된 것은 1922년. ▲ The Chosen Christian College(연세대 25주년 기념책자) 1940년 연세대학교 내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아펜젤러관은 학생들의 공부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학문의 위엄성을 나타내기 위해 좀 더 위계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앙에 탑 부가 들어간다든지, 베이윈도우(돌출창)가 양옆에 위치하고, 중앙 현관 부분에는 튜더아치(영국 후기 고딕의 아치 형식, 거의 각이 없는 곡선의 형태를 갖고 있다)를 사용하고 있다. 핀슨홀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기숙사로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에 주거건축의 형식을 많이 띄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튜더아치나 베이윈도우(돌출창)가 생략된 대신 도머창(지붕에 튀어나온 창) 역시 다락을 거주 공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필요했던 창이라고 볼 수 있다. ▲ 스팀슨관, 언더우드관, 아펜젤러관 양식의 영국식 튜더고딕 ▲ 처음부터 기숙사로 지어져 튜더아치, 베이 윈도우(돌출창)가 생략된 주택식 시인 윤동주가 머물렀던 3층 다락방 아래엔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작품과 함께 당시를 재연한 책상과 원고 등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윤동주 육필의 졸업기념으로 발간하고 싶었으나 검열 우려해 포기 ▲ 1948년 후배의 소장본으로 탄생한 초판본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시인의 절망과 그리움... 어렵게 태어난 시인의 유고집엔 기숙사 핀슨홀에서의 시간도 담겨 있었다.     창(窓)역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박은 휘양찬 달밤이 엿든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는 것보담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것이다. (중략)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박글 내다보니 가을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쩍고던 기     숙사도 절깐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 산문 / 1938년 10월 作 학문에 대한 열의로 떠났던 일본 유학. 그러나 유학 첫해 방학, 고향 용정을 찾은 것이 시인의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되고 말았다. ▲ 여름방학 북간도 용정에서 / 1942년 8월 4일 2016년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0년. 그리고 시인이 3년 가까이 머물며 고뇌하고 사색하며 시를 썼을 기숙사 핀슨홀. 학교는 핀슨홀 전체를 기념공간으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과 시인의 시간을 나누고 있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오늘 빛고을아트스페이스 소공연장 상영 ‘윤동주 달을쏘다’ 포스터 광주문화재단 ‘SAC on Screen’은 26일 오후 7시 30분 빛고을아트스페이스 소공연장에서 지난해 서울예술단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대표 레퍼토리 ‘윤동주, 달을 쏘다’를 영상으로 상영한다.  윤동주의 생애와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들로 채워진 서울예술단의 ‘윤동주, 달을 쏘다’ 무대는 문학·음악·춤·극이 어우러진 한국예술의 총 집합이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8편이 작품 안 고뇌하는 윤동주의 독백 속에,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대사 속에 녹아들어 긴 여운을 남긴다.  2012년 초연, 2013년 재공연 모두 93%가 넘는 객석점유율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2016년 다시 무대에 올라 객석점유율 100%에 이를 만큼 관객과 평단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2017년 네 번째 공연은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로 윤동주의 서정적인 시어(詩語)들을 통해 다시 한 번 객석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바 있다.  지난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로 문학계는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그의 시와 생애를 조망하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윤동주, 달을 쏘다’ 무대 또한 많은 감동을 선사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의 비극에 맞서 시를 통해 영혼을 쏘아올린 청년 윤동주, 그의 시집은 바랬지만 그가 남긴 시와 청춘의 순간은 100년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잉크처럼 관객들의 가슴에 선명한 자국을 남길 것이다. ...  /노정훈 기자 
118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기와장내외 댓글:  조회:2912  추천:0  2018-07-31
기와장내외                      윤동주 비오는날 저녁에 기와장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웁니다  대궐지붕 위에서 기와장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럼이 하늘만 쳐다봅니다.  ===================/// 이 시는 대궐 지붕 위에 기왓장을 보고 기왓장이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하거나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비오는 날 저녁에 대궐 지붕 위에 있는 암수기왓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늙은 내외가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서 꼬부라진 잔등을 서로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을 운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대궐 지붕 위에 있는 암수기왓장이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주름진 얼굴을 서로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본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는 동시로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성된 대궐 지붕에 얹힌 기와를 보고 의인화하여 표현한 시이다. 1연과 2연은 ‘오는 날 저녁’과 비오지 않는 날 낮으로 대구되어 있고 1행은 ‘기왓장 내외’, 2행은 ‘-ㄴ지’, 3행은 ‘어루만지며’, 4행은 ‘-ㅂ니다’로 운을 맞추고 있어 동시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는 비가 오는 저녁에 기왓장 골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을 보면서 늙은 내외가 잃어버린 외아들을 생각하면서 서로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서로위로하면 구슬피 울면서 흘리는 눈물을 생각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외아들’에서 ‘외아들’을 어떤 원인으로 ‘잃어버’렸는지는 이 시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2연에서 ‘아름답든 옛날’로 미루어 보면 일제강점기의 시대적인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는 비 내리는 소리인 ‘쭈룩쭈룩’을 노인 내외가 ‘구슬피 울음’ 우는 소리로 표현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선지 /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는 기왓장이 있는 곳이 일반집이 아닌 ‘대궐 지붕 위’이다. 이러한 점은 이 시를 역사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준다. ‘기왓장 내외’를 ‘주름잡힌 얼굴’이라 하여 노인으로 의인화하였다. 그리고 ‘아름답든 옛날이 그리워’는 존재로 ‘아름답든 옛날’은 일제에 강점 당하기 전의 때로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던 시절이다. 이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지금의 일제강점기가 독립된 국가로 존재하던 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는 스스로 행동할 힘이 없는 모습이다. 1,2연에서 ‘기왓장 내외’가 서로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화자의 따뜻한 마음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20130801목후0259전한성약간흐림       ======================   기왓장 내외   - 윤동주 作                   비 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윤동주가 북간도 용정에 살던 무렵인 19세 때 쓴 동시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30년대 후반 동시를 많이 발표한다. 윤동주의 동시는 80년 전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  이 시는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를 의인화해서 쓴 시다. 서로 포개어져 있는 두 기와가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은 참신하면서 흥미롭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흔한 사물에서 끌어낸 상상력의 수준이 놀랍다.  왕조의 몰락을 지켜봐서일까. 윤동주는 동시에서도 국권을 빼앗기기 전 `아름답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1180    시인 윤둥주를 사랑한 물리학자 댓글:  조회:3089  추천:0  2018-07-30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 물리학자[인터뷰]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 작곡가 안효은 이충건  2018.07.20  10월 11일 정부세종청사 대강당에서 초연되는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의 작곡가는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 재직하다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를 끝으로 세종시에 정착한 물리학자 안효은 박사다. [세종포스트 이충건 기자]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 물리학자 안효은(62). 그는 배재고 재학 시절부터 음악적 영감이 떠오르면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 주로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였고, 세종시 금강변 청벽마을에 정착한 지금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를 ‘세종의 시인’으로 받들 것을 선언하고,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를 추진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를 만나면서부터다. 물리학자 안효은. 유씨엘에이(UCLA) 물리학과에 이름이 헌액된 수재다. 역대 수석졸업자들을 기리는 이른바 ‘명예의 전당’이다. 예일대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하기 위해 뉴멕시코주의 생그레 드 크리스토 산중에 세운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국립연구소에서 일했다. ‘양성자저장 링(Proton Storage Ring)’의 업그레이드 설계를 맡은 3인 중 한 명이었다. 2006년부터 3년여간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를 지낸 것을 끝으로 세종시에 정착했다. 천생 물리학자인 그지만 음악가의 디엔에이(DNA)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누나 써니 안(Sunny Ahn)은 미국의 유명한 하프연주자이자 음대 교수였고, 막내아우 재균은 기타 솜씨가 최고였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학 간 초등학교 합주부에서 바이올린에 입문한 것. 입시 때문에 중단했지만, 중・고교 때는 독학으로 배운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일이 취미였다. 가족과 함께 도미한 그는 유씨엘에이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할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음악과 연극 등의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80년부터 대학생 연극단 ‘모임’에서, 이듬해에는 ‘극단 1981’에서 연극 공연에 사용되는 곡을 작곡했다. 1982년 MBC대학가요제 미주 예선에서는 그의 아우 안재균(당시 UCB 4년)과 이희경(당시 UCLA 4년)이 그가 작곡한 ‘사랑의 길’로 대상을 받았다. 한국 본선에서는 은상 곡이었다. 엘에이 한인사회에 청년문화를 심는 활동은 그가 동부 예일대학으로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1984년에는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부 ‘사랑의 길’은 포크송 유형의 노래들로 꾸몄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을 소개하는 무대였다. 특히 그는 윤동주에 심취했다. 유학 생활을 하며 고국을 그리워하는 시인과 자신의 처지에서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우리 것을 갈망하고 우리 것을 잊지 않고 살려는 몸부림이었다. 안효은 박사가 작곡한 윤동주 동시 악보. 10월 11일 정부세종청사 대강당에서 열리는 음악회 '세종에서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윤동주'에서 6편이 공개된다. 그는 시에 곡을 붙이면서 점점 윤동주에 빠져들었다. 그는 “윤동주 시에 대한 공진현상(共振現象)”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처녀’처럼 윤동주 연가곡집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2006년 귀국하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이화여대에 재직하면서 음대 대학원생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레슨을 받았다. 그렇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음미하면서 1981년 '별 헤는 밤'을 시작으로 세종시에 정착한 지금까지 한편 한편씩 곡을 완성해갔다. 그렇다고 그가 평생을 작곡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10년 정도는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기타를 놓고 있었다. 그러다 휴스턴대에서 한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밴을 끌고 3일을 운전해 휴스턴에 도착했다. 갑자기 자유로운 영혼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작곡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다. 그때 작곡한 곡이 ‘참회록’이다.   윤동주가 일본 도쿄에 있을 때 써서 연희전문학교 동기인 강처중에게 보낸 시들, 가령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흰 그림자’ 등은 귀국해서 작곡했다. 가장 쓰기 어려웠던 곡은 ‘서시’다. 고교 재학시절 통기타 버전으로 습작했다가 여러 차례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1948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한 윤동주 유고시집 초간본에 수록된 31편 중 그가 미처 작곡하지 못한 시가 있다. ‘위로’다. 그는 “시가 너무 비참해서 듣는 사람까지 우울감에 빠질 것 같아 아직 쓰지 못했다.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동시(童詩) 30여 편 중 10편은 자녀들이 어릴 때 완성했다.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 물리학자 안효은은 "윤동주라는 한 사람의 됨됨이, 그것 하나로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이라며 음악회 개최의 소감을 밝혔다. - 십자가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언젠가는 발표회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 몰랐습니다. 세종시 언론과 문화예술인들의 정열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윤동주라는 한 사람의 됨됨이, 그것 하나로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이 아닐까요.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윤동주가 아니고서야 어떤 일반인이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가 그 길을 가리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그런 예언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제물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지요. 대한민국이 해방된 것이 불과 6개월 전 시인의 희생 때문은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충건 
1179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흐르는 거리 댓글:  조회:2538  추천:0  2018-07-30
흐르는 거리  윤동주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 간다.  저 전차,자동차,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실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  몇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밤을 세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1178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간판 없는 거리 댓글:  조회:4884  추천:0  2018-07-29
  간판 없는 거리      ​          윤동주         정거장 플랫포옴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   낯선 도시에 도착한 그의 생소함이 담겨 있습니다. 간판이 없는 그곳에 '자애로운 헌 와사등'을 걸자고 한 것은 따뜻한 등불만이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시라는 것이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 시는 독립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메세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나라를 사랑하고, 독립을 원했던 그가 따뜻한 등불을 염원한 것은 아닐까요? =====================       윤동주 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이 시는 다들 어진 사람들이 손님으로 손님같이 자기 집이 없이 살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모습을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가 저녁에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에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손님들뿐이었다. 손님이 아니라면 손님같은 사람들뿐이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다. 장사를 하는 집이 없다. 내리는 사람이 손님이거나 손님같은 사람들이어서 이 거리에 머무는 사람이 없다.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그래서 집 찾을 근심이 없다.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로 이루어진 간판이 없다. 불은 모퉁이마다 켜진 흰 와사등뿐이다.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인데 집도 없고 살아갈 방도도 없다. 이런 상태로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로 돌아가고 있다. 세월이 가고 있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는 시인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에 삶의 방편이 없이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간판’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손님이 찾아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거리’에 그것도 교통의 요충지인 기차 ‘정거장’이 있는 곳에 ‘간판’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인 것이다. 이는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그 거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가게가 없는 것이다. 어떤 곳이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점이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기차 ‘정거장’ 앞에 상점이 없다는 것은 이곳에 살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없는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 다들 손님들뿐, / 손님같은 사람들뿐,’는 화자가 기차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에 정거장에 내리는 사람 중에는 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다들 손님들뿐’이거나 ‘손님같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이 거리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정거장 플랫폼에 / 내렸을 때’는 ‘흰 와사등에 / 불’ 켜 놓은 것으로 볼 때에 어두운 저녁이다. 이러한 시간적인 배경은 시에서는 암울한 상황 또는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다들 손님들뿐, / 손님같은 사람들뿐,’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나라라는 집을 잃은 우리 민족을 말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살던 집을 잃고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을 ‘손님들’이라 말하고 살 집은 있어 비교적 경제적으로 덜 어려우나 나라라는 집을 잃은 사람들을 ‘손님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 같다.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 집 찾을 근심이 없어’는 상업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거리는 기차가 서는 ‘정거장’이 있는 곳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므로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적인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간판이 없’다는 것은 상업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고 팔 사람들이 없다는 것으로 사고 팔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 찾을 근심이 없어’는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상황을 비꼬는 풍자적인 표현이다. 여기서의 집은 ‘상점’을 말한다. 상점이 하나도 없으니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기위해 상점을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삶의 경제적인 방편을 잃은 조선의 피폐되고 가난한 상황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빨갛게 / 파랗게 / 불 붙는 문자도 없이 //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 불을 혀놓고,’에서 ‘빨갛게 / 파랗게 / 불 붙는 문자’는 ‘간판’에 쓰인 글자를 말한다. 이것이 없다는 것은 ‘간판’이 없다는 것이고 ‘간판’이 없다는 것은 상점이 없다는 것이고 상점이 없다는 것은 경제가 몹시 피폐한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은 ‘와사등’을 의인화하여 쓴 것이고 ‘와사등’은 어둠을 밝혀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함이 없게 하는 것이기에 ‘자애’롭다고 표시한 것이다. ‘불을 혀놓고,’는 와사등을 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손님들’과 ‘손님같은 사람들’이 길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한 사람들로 아래 연에 나오는 ‘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퉁이마다’ 불을 켠 사람들이다. 이 부분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제강정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라를 잃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며 가야할 길을 희망을 가지고 가게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손목을 잡으면 /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 //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에서 ‘다들, 어진 사람들 /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 하여 ‘어진 사람들’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손님들’과 ‘손님같은 사람들’이라서 집에 들지 못하고 뿔뿔이 어둠 속으로 가지만 알고 보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살고 있는 우리 민족 구성원이 ‘불을 혀놓’는 사람이나 집이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불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순서로 돌아들고.’는 이렇게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일제강점기 아래서 손님 또는 손님처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세월이 멈추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전한성     ==============///   윤동주의 시 중에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가 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시인이 간판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겪게 되는 생소함을 노래한 시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가 알록달록한 간판 대신 ‘자애로운 헌 와사등’을 걸자고 제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사람들이 사는 거리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따뜻한 등불'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거리를 바꾸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윤동주가 제안한 ‘마음의 구심점’을 달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 갈 거리는, 윤동주가 말한 따뜻한 거리,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거리여야 한다. 간판을 바꾸어다는 일은 그 첫 걸음일 것이다. 내 것을 마음대로 치장하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주변 환경과 이웃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간판을 바꾸어 다는 일을 통해, 남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흐뭇한 연습이 아닐 수 없다. ==============///     이 시는 윤동주 선생이 1941년에 쓴 시입니다. 정차장 플렛홈에 내린 나그네에겐 모든 것이 낯 설다. 서로가 손님 같은 낯 선 사람들. 서먹서먹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서서 모퉁이에 불을 켜고 손을 잡아준다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고 모두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된다. 계절은 순서대로 돌아가는 평화스런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일제하의 낯설음과 침묵으로 일관해야했던 암울한 시대를 노래한 것입니다.   함께해봐문학 전문가  
1177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댓글:  조회:2272  추천:0  2018-07-29
  Bob Dylan-Blowing in the wind [가사번역)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Before they call him a man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봐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must a mountain exist 산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Before it is washed to the sea 씻겨서 바다로 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사람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진정한 자유를 얻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And pretend that he just don't see 모르는척할 수 있을까 ?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많이 올려다 보아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   밥 딜런(Bob Dylan) 시편(끝) / 서대경. 황유원 옮김      폭풍우 / 밥 딜런      창백한 달이 자신을 뽐내며 떠올랐어 저 서쪽 마을 위로 그녀는 아주 슬픈 얘길 들려줬네 침몰한 큰 배에 대한 이야기를   4월 11일이었지 파도를 헤치며 배는 나아갔어 내일을 향해 항해하며 예고된 황금시대를 향해   밤은 별빛으로 환했지 바다는 깨끗하고 맑았어 어둠을 뚫고 움직이며 약속의 시간은 가까워졌네   빛은 한결같이 비추고 있었지 거품이 이는 바다 위로 미끄러지면서 모든 귀족들과 숙녀들이 그들의 영원한 집으로 향하고 있었네   샹들리에가 흔들렸지 저 위쪽 난간에서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하고 있었네 희미해진 사랑의 노래들을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지 무도회장의 댄서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저 아래 저승으로   레오는 자신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어 종종 그리고픈 마음이 들었지 그는 두 눈을 감고 그림을 그렸네 자신의 마음속 풍경을   큐피트가 그의 가슴에 활을 쐈지 그러고는 그걸 뚝 분질러버렸네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여자 그녀에게로 그가 저절로 굴러들어왔다네   그는 크고 소란스러운 소릴 들었어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이 말했다네 여기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그는 선미 쪽 갑판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어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선미 쪽 갑판에 물이 벌써 3피트나 차올랐으니   굴뚝 옆으로 기울었네 무거운 발걸음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지 그는 난장판 속으로 걸어들어갔어 하늘이 온통 빙빙돌았네   배가 가라앉고 있었지 우주가 활짝 열렸어 저쪽에서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네 천사들은 옆으로 비켜섰지   복도의 불이 어두워졌어 흐릿하고 약하게 깜박거렸지 벌써부터 시체들이 둥둥 떠다녀 바닥이 이중으로 된 선체에서   그러고선 엔진이 폭발했네 추진기가 돌아가질 않고 보일러에 과부하가 걸렸지 뱃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네   승객들은 날아다녔지 뒤로, 앞으로, 저멀리, 빠르게 그들은 중얼거리고, 더듬거리고, 뒹굴었다네 또 한번 그럴 때마다 그전보다 더 지쳐갔지   베일은 갈가리 찢겨졌어 열두시와 한시 사이에 어떤 변화도, 어떤 갑작스러운 기적도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순 없었지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45도 기운 채로 그는 타이타닉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꿈을   웰링턴, 그는 잠들어 있었어 침대가 미끄러지기 시작했지 그의 용감한 가슴이 뛰고 있었어 그는 테이블들을 옆으로 밀쳤다네   박살난 크리스털 조각들이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 그는 자신의 권총 두 개를 전부 다 찼지 그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그의 부하들과 동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침묵 속에서 그는 기다렸지 개입할 적당한 때와 공간이 생길 때까지   복도는 좁았고 눈앞은 완전히 깜깜했지 그는 온갖 슬픔을 다 보았다네 어디서건 목소리들이 들려왔지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고 차오르는 물을 막아보려고 친구들과 연인들이 매달려 있었지 서로에게 나란히 기대어   어머니들과 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어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지 사랑과 연민의 기도를 전했네   부자 애스터는 그의 사랑하는 부인에게 키스했어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네 이게 인생에서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캘빈, 블레이크, 윌슨은 어둠 속에서 도박을 했어 그들 중 누구도 살아남아 배에서 내리진 못할 거야   형제들끼린 서로 들고 일어났어 사사건건 말이지 서로 싸우고 서로를 학살했다네 치명적인 춤을 추며   그들은 구명보트를 내렸어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배신자들이 있었지, 반역자들이 있었어 부러진 등과 부러진 목이 있었네   주교는 자신의 선실을 떠났지 그 모든 가난한 이들을 돕는답시고 자신의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어, "가난한 자들을 배불리 먹여주소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데이비는 밖으로 나와 자신의 여자들을 해고해버렸어 물이 더 깊어지는 모습을 봤지 자신의 세상이 변하고 있는 모습을 봤어   짐 댄디는 웃었어 그는 수영을 배운 적이 없었지 몸에 장애가 있는 소년을 봤다네 그리고 그애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줬지   그는 반짝이는 별빛을 보았네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별빛을 죽음은 미친듯이 날뛰었지만 그의 마음은 마침내 평온을 찾았네   그들은 승강구를 막았지 하지만 문은 버티지 못했어 그들은 계단 위에서 익사했다네 황동과 윤이 나는 금으로 된 계단 위에서   레오가 클레오에게 말했네 "나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진작에 정신을 잃었지 그 정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출입구를 막아보려 애썼어 모두를 피해 입지 않게 보호하려고 벌어진 상처에서 난 피가 그의 팔 아래로 흘러내렸네   꽃에서 꽃일들이 떨어져내렸지 꽃잎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길고 끔찍한 시간 동안 마법사의 저주는 계속됐다네   주인은 브랜디를 따르고 있었지 그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지 그의 차례는 맨 마지막이었네   또 다른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 이곳에서 영영 무명인 채로 그들은 예전에 바다를 항해해봤거나 집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이미 피해는 발생했지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하려 했어   선장은 간신히 숨을 쉬며 타륜(舵輪)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그의 위와 그의 아래로 오만 톤이나 되는 강철이 있었네   그는자신의 나침반을 살펴봤어 그리고 그 앞면을 응시했지 바늘은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네 그는 자신이 졌다는 걸 알았어   어두운 빛 속에서 그는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네 그는 계시록을 읽었지 그리고 자신의 잔을 눈물로 가득 채웠어   사신(死神)의 파업이 끝났을 때 천육백 명이 잠들어버렸네 선한 자, 악한 자, 돈 많은 자, 가난한 자 가장 사랑스러운 자와 가장 훌륭한 자들이   그들은 땅에 내리기만을 기다렸지 그리고 이해해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그런 건 없었네 신이 내린 심판에 대한 이해 말이야   전보로 소식이 전해졌어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줬지 사랑은 그 불길을 잃었고 모든 것들은 그 일생을 마쳐버렸지   경비원은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한 꿈을 그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꿈을 꾸었네 시퍼란 바다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얻은 대답 / 서대경     밥 딜런 시선집 3 는 밥 딜런 일생의 노랫말을 집대성한
1176    다시보는 음유시인, 가수 - 밥 딜런 댓글:  조회:6375  추천:0  2018-07-29
  출생 1941. 5. 24,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 국적 미국 요약 밥 딜런,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1960~70년대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가사와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포크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이자,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목차 개요 초기 생애 작품활동 ┗ 음악 ┗ 그 외 활동 수상경력 개요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화가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Zimmerman)’이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60년대 그의 노래들은 정치적인 주제를 담은 시적인 가사와 간결한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표적인 저항 음악으로 사랑받았다. 1962년부터 2016년까지 30개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초기 생애 밥 딜런은 미네소타 주의 덜루스와 철광 도시인 히빙 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살 때부터 시를 썼으며 십 대 시절 음악에 심취하여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를 치면서 로큰롤을 불렀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포크 음악에 빠져들었으며 자신을 ‘밥 딜런’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60년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포크송 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196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공연하는 밥 딜런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Wikimedia | Public Domain 작품활동 음악 밥 딜런은 뉴욕 시 그리니치빌리지의 여러 커피하우스에서 우디 거스리의 우울한 발라드풍의 노래와 자작곡들을 부르면서 직업적인 공연을 시작했다. 1962~64년에 잇달아 나온 음반으로 일약 유명해졌고, 그의 두 노래 〈블로윈 인 더 윈드 Blowin' in the Wind〉·〈더 타임스 데이 알 어 체인지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흑인 민권운동의 주제가가 되었다. 전통적인 포크 음악에 기반을 두면서 특히 단순한 멜로디를 사용한 딜런의 노래들은 이전의 미국 포크 음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적인 예술성과 상상력이 엿보이는 은유적이며 우화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1965년 딜런은 전기 앰프가 없는 어쿠스틱 악기를 쓰며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부르던 과거의 경향을 탈피해서 전자악기와 로큰롤 리듬을 채택했다. 이 획기적인 변화 이후에 나온 음반들이 〈하이웨이 식스티원 리비지티드 Highway 61 Revisited〉(1965)와 〈블론드 온 블론드 Blonde On Blonde〉(1966)인데, 이 음반들은 자기성찰적이고 애조 띤 가사와 블루스에서 따온 리듬 때문에 딜런을 단번에 록 음악계의 일인자로 인기절정에 오르게 만들었다. 1980년 토론토 공연 모습 ⓒ Jean-Luc Ourlin/Flickr | CC BY-SA 1966년 오토바이 사고를 겪고 은둔생활을 한 딜런은 또 하나의 음악적 변신을 거쳐 유명한 〈내슈빌 스카이라인 Nashville Skyline〉(1969)을 비롯한 음반들을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컨트리 앤드 웨스턴(country-and-western) 음악 요소를 가미하여 또다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1970~80년대에도 딜런은 연주활동과 영향력 있는 음반을 내놓았는데, 그 중 〈블러드 온 더 트랙스 Blood on the Tracks〉(1975)·〈디자이어 Desire〉(1975)·〈인피덜스 Infidels〉(1983)가 특히 유명하다. 2016년까지 30장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2006년 발매한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로 빌보드 1위에 올랐으며 2009년 〈투게더 스루 라이프 Together Through Life〉로 영국(UK) 앨범 차트와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은 2016년 발매한 〈폴른 엔젤스 Fallen Angels〉다. 그 외 활동 밥 딜런은 1994년 이후 드로잉과 회화를 담은 6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1970년대 발매한 〈자화상 Self-Portrait〉과 〈행성 파도 Planet Waves〉의 앨범 커버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1994년 작업한 그림을 담은 책을 처음 출판했으며 2007년에는 첫 공개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작업한 그림 중 일부는 덴마크 국립 미술관을 포함한 몇몇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1년에는 시와 소설을 결합한 실험적인 작품인 〈타란툴라 Tarantula〉를 발표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수상경력 데뷔 후 2016년까지 그래미상을 총 11번 수상했다. 1963년 이후 노미네이트 된 것만 40여 차례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는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같은 해 영화 〈원더 보이스〉의 OST인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주제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했다.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6년 음악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 팝 문화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 밥 딜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밥 딜런  Bob Dylan 2010년의 밥 딜런 기본 정보 본명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77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직업 ");"> 싱어송라이터 화가 작가 장르 ");"> 포크 블루스 록 컨트리 가스펠 악기 ");"> 보컬 기타 건반 하모니카 활동 시기 1959–현재[1] 배우자 사라 딜런 (1955년 11월 22일 ~ 1977년 6월 29일) 캐롤린 데니스 (1986년 6월 4일 ~ 1992년 10월) 레이블 ");"> 컬럼비아 어사일럼 관련 활동 ");"> 존 바에즈 더 밴드 조니 캐시 그레이트풀 데드 조지 해리슨 롤링 스톤스 마크 노플러 밴 모리슨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 트래블링 윌버리스 웹사이트 "); padding-right: 13px;">bobdylan.com 밥 딜런(Bob Dylan, /ˈdɪlən/; 본명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 1941년 5월 24일)은 미국의 작곡가, 가수, 화가, 작가다. 50년 넘도록 대중음악 및 예술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1960년대 창조된 것으로, 〈Blowin' in the Wind〉,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 곡은 그를 "세대의 목소리"[2]로 칭해지게 했으며, 또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의 앤섬으로 차용되게 된다. 미국 포크 음악 부흥을 뒤로한 채, 대중음악의 범위를 넓혀 6분 가량의 싱글 〈Like a Rolling Stone〉을 1965년 녹음한다. 딜런의 가사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정치, 사회, 철학, 문학의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현존한 대중음악의 관습에 저항하며 급성장하는 반문화에 호소했다. 초기 리틀 리처드의 공연과 우디 거스리,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의 작곡에 영향을 받은 빌런은 음악 장르를 증폭하고 자기 것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그의 음반 활동은 50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포크, 블루스, 컨트리에서 가스펠, 로큰롤과 로커빌리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크 음악까지를 포섭하면서 고전 미국 노래를 탐구했고, 심지어 재즈와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북까지 수용했다. 기타, 건반, 하모니카를 사용한 공연을 했다. 반주는 시시각각 바뀌는 라인업의 음악가가 제공하며 1980년대 말부터 건실히 수행한 순회공연은 네버 엔딩 투어로 불리고 있다. 녹음 아티스트 및 공연자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그의 경력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평가되는 것은 작곡·작사다. 1994년부터 시작해 일곱 권의 드로잉 및 그림 서적을 발간했고 그의 작업물은 주요 예술 화랑에 전시되고 있다. 음악가로서 딜런은 1억 장 넘게 음반을 팔아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아티스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일곱 번 그래미상, 한 번 골든 글로브상, 한 번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미네소타 음악 명예의 전당, 내슈빌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 퓰리처상 심사위원들은 딜런에게 "그의 가사 작품의 비범한 시적 힘이 아로새긴 대중음악 및 미국 문화에서의 깊은 영향"을 인정해 특별 표창을 했다. 2012년 5월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는다. 2016년 "위대한 미국의 전통 노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았다.[3] 목차 1생애 1.1유년기 1.21960년대 1.2.1일렉트릭으로의 전환 1.2.2모터사이클 사고와 은둔 1.31970년대 1.41980년대 1.51990년대 1.62000년대 2노벨 문학상 수상 3사생활 3.1연인 관계 3.1.1수즈 로토로 3.1.2존 바에즈 4영향 5음반 목록 6저서 7출연 작품 8각주 9외부 링크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미국 미네소타 주 히빙에 위치한 지머맨 가족의 집 밥 딜런은 1941년 5월 24일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중산층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히빙에서 자랐다.[4] 그의 부친은 전기 기술자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사실 밥 딜런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는 실명 외에 샤브타이 자이셀 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이 가지는 종교적인 이름으로서 그의 가정은 당시 그 도시에서는 드문 유대계 가문이었다. 그의 조부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이민 온 인물이었다.[5] 가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마을에서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왕따를 당했고,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삼촌 소유의 극장에서 영화 감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반항아 제임스 딘을 사모했다.[6] 그러다 음악적 재능을 발견해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들기 시작했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전공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퇴를 결정했다. 우디 거스리,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의 포크, 블루스, 컨트리 음악에 심취하면서 거리에서 자신의 음악을 노래하며 세상과 대화하는 청춘을 선택했다. 평소 동경하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을 차용해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붙여 활동했으며, 1961년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7] 이름은 웨일스 시인 '딜런 토마스'에서 스스로 개명하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서부극 《건스모크》의 등장인물 '마샬 맷 딜런'의 어간에서 차용하였다는 설도 있다.[8] 1960년대[편집]   1943년의 우디 거스리 1961년 대학을 중퇴한 딜런은 그가 숭배한 우디 거스리가 사는 뉴욕시로 가기로 결심했고, 스무 살의 딜런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도착했다. 딜런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한 시간 반 버스를 타고 자신을 음악의 길로 이끈 영웅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우디 거스리는 늙어서 신경퇴보증에 걸려 뉴저지주립병원의 병상에 누워 있었다. 수십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방에서 거스리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무서운 병마에 항복한 우디 거스리의 육체를 보면서 딜런은 기겁했으나 그는 기타를 치며 자신이 좋아한 우디 거스리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는 노인을 위로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노인에게 친필 서명을 받았다.[6] 처와 아들인 아론 거스리가 딜런의 방문에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5] 이후 딜런은 그리니치빌리지의 수많은 클럽과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레퍼토리는 주로 흑인 델타 블루스, 우디 거스리, 레드벨리와 같은 고전 포크 계열의 노래였다. 때때로 자작곡도 한두 곡씩 끼워넣었다. 딜런의 창법은 점점 더 우디 거스리와 닮아갔고, 외양적으로도 그와 흡사한 스타일(덥수룩한 헤어 스타일과, 낡은 플란넬 셔츠, 색이 바랜 블루진)을 추구했으며, 가사가 내포하는 사회의식 또한 견고해져 갔다.[5] 그러다 유명 음반 제작가 존 하몬드의 눈에 띄어 콜롬비아 레코드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6] 데뷔 음반 《Bob Dylan》(1962)은 전혀 팔리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우연히 이 음반을 듣게 된 한 사내가 딜런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는 바로 훗날 록계를 대표하는 거물 매니저로서 일세를 풍미하게 될 앨버트 그로스만이었다.   1963년 11월의 밥 딜런 이후 미대 지망생인 수즈 로토로를 떠나보낸 딜런은 괴로워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미친 듯 곡을 썼다.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Masters of War〉, 〈Positively 4th street〉, 〈Blowin' in the Wind〉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두 번째 음반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이 곡들이 수록되었다. 음반 재킷에는 눈이 내린 날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수즈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는 사진을 실었다. 자작곡 〈Blowin' in the Wind〉은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빌보트 차트 1위에 올라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소련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와 비교 평가하는 글을 실었다. 이 노래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히피들의 혁명가가 되었다.[6] 음반의 성공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사회적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며, 특히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닉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적인 가사는 대중음악에서의 가사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일렉트릭으로의 전환[편집] 자신이 의도치도 않았던 저항 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딜런은 언론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게 되며, 당시 비틀즈를 위시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일렉트릭 사운드에 자극을 받아 정통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사운드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패션 스타일 또한 당시 런던에서 유행하던 모즈룩의 영향을 받게 된다.[9] 1971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10] “ 그들(비틀즈)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코드는 정말 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하모니가 그것을 타당하게끔 했다. 그러나 맹세하건데 난 정말 그들에게 빠졌다. 모두들 그들이 어린 10대를 위한 광대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즈가 전부였다. ”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록 밴드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와 키보디스트 알 쿠퍼를 대동하고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인 사건은 수많은 대중과 포크 팬들의 야유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지만,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전환을 확고하게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영역을 창조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반으로는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가 있다. 1965년 11월 딜런은 25세의 전직 모델 사라 라운즈와 극비리에 혼인식을 치르고 이듬해 1966년 봄 호주와 유럽을 중심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딜런의 연주 여행에 동참하게 된 새로운 백업 밴드의 이름은 더 혹스(더 밴드의 전신). 전후반으로 나뉜 공연 프로그램에서 1부는 딜런 홀로 플레이하는 어쿠스틱 스테이지, 2부는 더 혹스를 대동한 로큰롤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9] 모터사이클 사고와 은둔[편집]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1966년 7월, 딜런은 자택인 우드스탁 근처의 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몰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해 기나긴 요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사고는 당시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와 달리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가 뮤직 비즈니스계에서 도피하기 위한 의도로 자의에 의해 부풀려진 부분이 크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후 몇 개 정도의 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외하곤 1974년까지 콘서트 활동을 일체 중단하기에 이른다.[9] 그는 우드스탁에 집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마치 은둔자와도 같은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 그와 마찬가지로 우드스탁에 정착한 더 밴드의 멤버들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다. 한때 로니 호킨스라는 블루스 록계의 보컬리스트의 백 밴드(당시는 더 혹스(the Hawks))로서 4년 가까이 투어 활동을 한 더 밴드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 베테랑 투어 밴드로 성장했다. 더 밴드의 멤버들은 빅 핑크라 이름 붙인 임대주택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곳 지하에는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스튜디오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한 딜런이 더 밴드의 멤버들과 즉흥적인 세션을 가지게 되었다. 주로 루츠록(Roots Rock) 장르의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때 녹음한 마스터 테이프가 어느샌가 해적판으로 나돌게 되며 그때까지 완전한 무명이었던 더 밴드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1975년 대망의 데뷔 음반 《Music From The Pink》을 발매하게 된다.[9] 더 밴드와의 세션 후, 활동을 재개한 딜런은 1967년 즈음 컨트리의 본고장인 내슈빌에서 새 음반 녹음에 착수한다.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전작 《Blond On Blond》(1966년) 또한 내슈빌에서 녹음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사이키델릭이라는 새로운 경향에 눈 돌릴 무렵, 굳이 보수적이고 한물간 음악으로 취급받고 있던 컨트리 뮤직을 선택한 것이었다. 서부 개척 시대 무법자의 이름에서 착안한 음반 《John Wesley Harding》은 같은 내슈빌에서 녹음을 했는데, 전작과 달리 성경의 내용을 하나의 테마로서 등장시킨 작품이다.[9] 1970년대[편집]   1974년 시카고에서의 공연 중인 더 밴드와 밥 딜런 그 후 1969년 《Nashville Skyline》(1969년), 《Self Portrait》과 《New Morning》(1970년),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1971년)를 연이어 발표한 뿐, 공연 일정도 없이 음반도 발표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계속된다. 딜런의 부활은 더 밴드와 함께 시작한 콘서트 투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이자 비틀즈의 전 멤버인 조지 해리슨이 1971년에 주최한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Concert For Bangladesh)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발매한 오랜만의 정규 음반 《Planet Waves》가 무려 전미 음반 차트 넘버원에 랭크되어 다시금 예전 활력을 되찾은 딜런은 1975년, 1976년 새 음반 《Blood On The Tracks》, 《Desire》를 각각 발표한다. 이 작품은 당시 이혼 직전 상태에 있던 사라 딜런과의 아내와의 불화와 이혼을 겪으며 태어났다.[9] 이듬해 발표한 음반 《Desire》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살인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흑인 프로 복서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석방을 기원하며 만든 노래 《Hurricane》은 딜런에게 있어 오랜만의 히트 싱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라이브 투어 롤링 썬더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롤링 썬더 리뷰는 콘서트 투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쇼였다. 주역은 물론 딜런이었지만, 로저 맥귄, 존 바에즈, T 본 버넷, 로니 브레이클리, 앨런 긴즈버그, 로버타 플랙, 조니 미첼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가 게스트로 대거 출연했다. 딜런은 훌륭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호평을 얻었으며, 투어를 배경으로 한 세미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투어는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점차 예전의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매회 네 시간에 걸친 기나긴 콘서트는 점차 멤버들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시켜 갔으며 멤버들 사이에 코카인이나 각성제 등의 약물 사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딜런 또한 오랜 친구였던 필 오크스의 자살과 아내 사라와의 이혼 문제로 인해 점차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9] 1970년대 말부터 밥 딜런은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작 《Slow Train Coming》은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가스펠을 노래하는 밥 딜런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작업이었다. 음반에 수록된 곡을 통해 그래미 최우수 남성 록 보컬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뒤이어 발표한 《Saved》 《Shot of Love》와 같은 음반은 음악가보다 전도사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던 밥 딜런의 초상을 담고 있었다. 사라와의 이혼 소송, 앨버트 그로스맨의 법정 투쟁은 모두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 자금은 로열티 수익만으론 도저히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 유일한 해결책이란 투어를 돌며 현금을 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 그는 대대적인 월드 투어에 나서게 된다.[9] 1980년대[편집]   1980년 4월 18일, 토론토에서의 딜런 월드 투어를 마친 그는 쉴 새 없이 음반 제작에 매진한다. 《Slow Train Coming》(1979년), 《Saved》(1980년), 《Short of love》(1981년), 《Infidels》(1983년), 《Empire Burlesque》(1984년), 그리고 무려 LP 다섯 장짜리의 대작이 된 미발표 곡을 포함한 베스트 음반 《Biograph》(1985년), 《Knock out loaded》(1986년), 《Down in the groove》(1988년), 《Dylan & The Dead》(1989년) 등 차례차례 음반을 발표했다. 개중에 높은 평가를 얻고, 만족할 만한 판매고를 올린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노래를 집대성한 작품인 《Biograph》와 예전의 동료들과 함께 놀이 감각으로 만든 프로젝트 음반 《Traveling Wilburys Vol. 2》(1988) 정도였다. 1985년, 마이클 잭슨이 주도한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이 그가 1980년대에 대중에게 남긴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이었다.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입성,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선정 역시도 밥 딜런의 음악적 평가를 완료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것이기도 했다.[7] 1988년, 조지 해리슨, 로이 오비슨, 제프 린, 톰 페티와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하였다. 아이디어 고갈로 고민하던 그는 수많은 용병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데뷔 당시 뉴웨이브계의 밥 딜런이라 불렸던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는 《Slow Train Coming》의 작업에 본격 투입되었고, 톰 페티 앤 더 핫브레이커스가 딜런의 투어 밴드로 참가했으며,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백 밴드 E 스트리트 밴드가 리코딩에 참가, 레게 뮤직계 최고의 리듬 콤비 슬라이 던바 앤 로비 셰익스피어가 리듬 파트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를로스 산타나와 함께 투어를 개최, 거기에 그레이트풀 데드가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딜런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1989년 발표된 음반 《Oh Mercy》는 다니엘 라노아를 프로듀서로 기용한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지만, 역시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다. 1990년에는 당시 주가를 높이던 워즈 형제가 프로듀서로 참가한 음반 《Under the red sky》를 발표하지만 이것 또한 전혀 판매고에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이후 7년간 음반 작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딜런은 그런 악재 속에서 네버 엔딩 투어라 명명한 투어를 시작한다. 이것은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 문제와 음악적인 영감 부족으로 고민하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도피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9] 1990년대[편집] 1990년대에도 밥 딜런의 위상은 간간이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는 원로 가수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그는 연간 통산 105회 공연을 실시했다. 3일에 한 번꼴로 세계 어딘가에서 노래하고 있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연간 100회에 가까운 속도로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97년 딜런은 《Oh Mercy》 이후 오랜만에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와 콤비를 짜고 마이애미의 밤 테리어 스튜디오에서 7년 만에 정규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이 음반 《Time out of mind》는 블루스 색채가 짙은 포크 록 스타일의 악곡에 과거의 걸작 《Blood on track》을 더욱 심화시킨 듯한 심오한 노랫말이 담겨 있으며, 거기에 다니엘 라노아의 프로듀스가 창출해낸 독특한 무드가 결합되어 따스하고 예스러우면서도 딜런 특유의 날 선 예리함과 진보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이 음반으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 또 한번 록 음악계의 정점에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그러한 성공의 기쁨에 도취할 새도 없이 즉시 투어를 재개한다. 음반 타이틀과 동명인 《Time out of mind》라 명명된 투어를 개시하며 1998년 연간 통상 103회에 이르는 공연을 가졌다. 1999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대[편집] 2000년에 스웨덴의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의 주인공이 되었고, 2004년 10월에 출판된 회고록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자서전》(Chronicles: Volume One)은 뉴욕 타임스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19주간 머물렀다.[11] 2000년에 영화 《원더 보이스》에 나온 그의 노래 "Things Have Changed"와 함께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에는 퓰리처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09년 4월 28일 딜런은 그의 33번째 정규 음반 《Together Through Life》을 발매하였다. 이 음반은 빌보드 차트와 '가장 많이 팔린 200개의 음반'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올랐으며, UK음반 차트에서는 발매된 지 1주 만에 1위에 올랐다. 2010년 3월 31일, 데뷔한지 48년 만에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2016년 10월 13일,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편집]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사라 다니우스 스웨덴 학술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 총장은 수상 발표 직후 한 인터뷰에서,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고 표현하였다. "밀턴과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 2천5백 년 전에 써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를 지금까지 읽고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상 배경을 밝혔다.[12][13] 사생활[편집] 연인 관계[편집] 수즈 로토로[편집] 클럽과 카페를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던 시절 딜런은 열일곱 살의 이탈리아계 수즈 로토로를 만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수즈 로토로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우연히 딜런의 연주를 보고 그에게 푹 빠진 수즈는 그가 출연하는 날마다 카페에 와 연주를 감상하곤 했다. 스물한 살의 딜런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귀여운 소녀와 열정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4번가 근처에 원룸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작은 방에서 유명한 화가와 유명한 록스타를 꿈꾸며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 아파트에 음악가들이 드나들었다. 피터, 폴 앤 메리, 데이브 반 론크 등이 싸구려 와인을 들고 와 서로 신곡을 보여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딜런은 수즈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수즈 어머니를 찾아갔다. 수즈의 어머니 메리는 “너희는 너무 어려서 결혼이 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질 수 없어. 게다가 딜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네.”라며 결혼을 반대했고, 메리는 수즈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6] 존 바에즈[편집]   1963년 8월 28일 시민권 운동인 '워싱턴 행진'에서의 바에즈와 딜런 1961년 4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존 바에즈를 처음 만난 그는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당시는 딜런이 무명 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등 자신의 여러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새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졌다.[14] 영향[편집] 미국 포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이다. 더 클랜시 브라더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존 바에즈와 피터, 폴 앤 메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밥 딜런이 지은 곡들 가운데 "Restless Farewell"은 더 클랜시 브라더스가 부른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파팅 글래스를, "Ramblin' Gamblin' Willie"는 브레넌 온 더 모어를, "Farewell"은 잉글랜드 고전 포크송 리빙 어브 리버풀을, "Pretty Paggy-O"는 메이드 어브 파이프-이-오를 패러디한 곡이다. 밥 딜런이 지은 반전평화 가요인 "Blowing in the Wind"는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 피터, 폴 앤 메리 등등도 불렀다. 한편 대한민국의 19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은 미국 포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김민기, 양희은등의 가수들은 모두 통기타를 사용하는데, 미국 포크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호너사의 하모니카 시그네춰가 있는 뮤지션이다. 음반 목록[편집] ");"> 《Bob Dylan》 (1962)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 《Another Side of Bob Dylan》 (1964)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 《Highway 61 Revisited》 (1965) 《Blonde on Blonde》 (1966) 《John Wesley Harding》 (1967) 《Nashville Skyline》 (1969) 《Self Portrait》 (1970) 《New Morning》 (1970) 《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 《Dylan》 (1973) 《Planet Waves》 (1974) 《Blood on the Tracks》 (1975) 《The Basement Tapes》 (1975) 《Desire》 (1976) 《Street Legal》 (1978) 《Slow Train Coming》 (1979) 《Saved》 (1980) 《Shot of Love》 (1981) 《Infidels》 (1983) 《Empire Burlesque》 (1985) 《Knocked Out Loaded》 (1986) 《Down in the Groove》 (1988) 《Oh Mercy》 (1989) 《Under the Red Sky》 (1990) 《Good as I Been to You》 (1992) 《World Gone Wrong》 (1993) 《Time Out of Mind》 (1997) 《Love and Theft》 (2001) 《Modern Times》 (2006) 《Together Through Life》 (2009) 《Christmas in the Heart》 (2009) 《Tempest》 (2012) 《Shadows in the Night》 (2015) 《Fallen Angels》 (2016) 《Triplicate》 (2017) 저서[편집] ");"> 타란툴라 (1971): 소설 바람만이 아는 대답 (2004): 회고록 출연 작품[편집] ");">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 각주[편집]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and Museum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Nobel laureate Bob Dylan: uneasy ‘voice of a generation’”. 《inquirer.net》. 2016년 10월 14일. 이동↑ “보관 된 사본” (PDF). 2017년 09월 20일에 보존된 문서 (PDF). 2017년 09월 20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보관 된 사본”. 2017년 09월 20일에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보존된 문서. 2017년 09월 20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차승우.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비틀즈마저 야코죽이던 본좌 중의 본좌”. 《YES24》.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라 마 한대수 (2016년 10월 24일).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한대수, 밥 딜런을 말하다”. 《주간조선》. ↑ 이동:가 나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20세기 대중음악사를 빛낸, 밥 딜런 - 하종욱의 20세기 클래식”. 《네이버》. 월간 객석. 2014년 11월 1일.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Weighing Dylan Thomas Tribute” (영어). rollingstone.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 이동: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승우.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천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YES24》. 2016년 1월 7일에 확인함. 이동↑ 임진모 (1997년 10월).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밥 딜런(Bob Dylan)”. 《이즘》.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Begins ‘Chronicles: Vol 2’” (영어). uncut.uk.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Bob Dylan wins Nobel prize in literature’” (영어). theguardian.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Poetry for the ear’: Bob Dylan wins Nobel Prize in literature” (영어). washingtonpost.com. 2016년 10월 14일에 확인함. 이동↑  "); background-position: right center; background-size: initial, initial; background-repeat: no-repeat, repeat;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initial; padding-right: 13px;">“연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서로 다른 길”. 《한겨레》. 2016년 10월 14일.     1960년대에 생겨난 많은 그룹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걸은 2명의 음악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격변의 시기에 팝과 록 음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바로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였다. 밥 딜런의 음악세계는 포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노래는 상당히 사회 참여적인 저항 가요풍이었다. 그 음악은 상상력이 풍부하여, 반항적이고 실천적인 1960년대 젊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딜런은 핵전쟁의 위협과 시민권, 인종주의에 대해, 나아가서는 군산복합체의 파워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사랑과 섹스 말고도 이 세상에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젊은 시절의 밥 딜런 ⓒ 시그마프레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의 저항가요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노예들은 저항의 노래를 발라드와 자장가로 가장해서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저항가요의 전통은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 피터 시거(Peter Seeger, 1919년생)로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작곡하고 노래하고 반주했다. 거스리와 시거는 미국 전통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몇몇 노래들을 만들었고 노동 조건과 시민권을 향한 투쟁과 평화와 반전 운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선봉에 섰다. 우디 거스리는 〈그랜드 쿨리 댐(Grand Coulee Dam)〉, 〈로벤 제임스(Reuben James)〉, 〈이 땅은 너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의 작곡가였다. 피터 시거는 〈그 많던 꽃들은 어디로(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나에게 해머가 있다면(If I Had a Hammer)〉, [민중가수 리 헤이즈(Lee Hays)와 함께] 〈턴, 턴, 턴(Turn, Turn, Turn)〉을 작곡했다. 인용문 나는 우디 거스리를 들었다. 내가 우디 거스리를 들었을 때, 정말 끝내줬다. 우디는 나의 신이다. 밥 딜런 1960년대에 밥 딜런은 그 집중력과 사회참여로 대중 음악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새롭고도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추구하면서 개성 있는 목소리로 한 세대를 노래했다. 특별히 〈마스터스 오브 워(Masters of War)〉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같이 반전적인 메시지를 담은 저항가요는 고통과 소외로 가득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아주 잘 포착해 냈다. 딜런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비음 섞인 창법과 거친 기타와 하모니 연주는 음악에 힘과 추진력을 더해 주었다. 초기 흑인 로커들의 음악처럼, 딜런의 음악은 대다수 청중들이 듣기에 너무 생경해서 오히려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 〈블로잉 인 더 윈드〉,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g)〉], 조안 바에즈[Joan Baez, 〈돈 씽크 투와이스, 잇츠 올 라이트(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잇츠 올 오버 나우, 베이비 블루(It’s All Over Now, Baby Blue)〉]와 버즈[Byrds,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가 커버 버전으로 발표했을 때, 제일 많이 팔렸다. 딜런은 지치지 않는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나의 스타일이 히트를 치면 그는 곧 다른 새로운 뭔가를 찾아 나섰다. 항상 팬들보다 앞서 나갔다. 그는 록 발라드에서 저항가요로, 전기적 록으로, 컨트리로 나아갔다. 밥 딜런은 초기 시절부터 여러 번 관심사를 바꿔나갔는데, 그때마다 그의 추종자들은 불평했다. 1960년대 그는 크리스마스 축가, 유대식 발라드, 선정적인 록과 발라드를 노래했다. 1960년대 이래 그의 노래들은 너무나도 독창적이어서 분류가 힘들 정도이다. 이 중에서 좋은 예는 화려하면서도 슬프고 씁쓰레한 〈새드 아이드 레이디 오브 더 로랜즈(Sad Eyed Lady of the Lowlands)〉(1966)이다. 다른 예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보내는 유언장인 〈사라(Sara)〉(1975)와 강렬한 인상을 주는 〈러브 삭(Love Sock)〉(1997)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작곡하고 연주하고 저항하고 음반을 발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실험을 그치지 않는다. 1997년 음반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숙한 반성을 담은 것으로 그의 최고의 음반이다. 반면 〈모던 타임즈(Modern Times)〉(2006)에서는 미국 대중 음악의 컨트리적 전통과 주제를 탐구한다. 2010년 〈오피셜 부트렉(Official Bootleg)〉 앨범 시리즈를 발매했는데, 그것은 매우 희귀한 곡들이나 미발표 곡들을 포함하고 있다. ========================   Knockin' On Heaven's Door    Ooh..   /  Ooh..  /  Ooh..   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어머니 저의 이 계급장을 떼어주세요. I can't use it anymore. 저는 더 이상 사용 할 수가 없어요. It's gettin' dark, too dark to see.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너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제가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리고,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어머니 저의 총을 땅에 묻어주세요. I can't shoot them anymore. 저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쏠 수가 없어요.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길고 어두운 구름이 다가오고 있고,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저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 반복 > [출처] 1029번. 밥 딜런 (Bob Dylan) / Knockin' On Heaven's Door |작성자 수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가수이자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포크록의 전설 밥 딜런이 2016년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당초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정통 문학가들을 제친 예상밖의 결과다. 스웨덴 한림원은 13일 오후 1시(현지시간)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 밥 딜런(75)이라고 밝혔다. 문학 작가보다 음악가로 더 유명한 인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밥 딜런은 1993년 소설가 토니 모리슨 수상 이후 24년 만의 미국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한림원 관계자인 사라 다니우스는 이날 “딜런의 작품에서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호머나 사포와의 유사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며 “영어로 작성된 위대한 시”라고 표현했다.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으로 1941년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0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딜런은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딜런’이라는 이름을 따 예명을 삼을 만큼 시적인 표현을 즐겼다. 1963년 앨범 ‘더 프리휠링 밥 딜런’을 성공시키며 저항가수로 이름을 알렸고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 등의 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딜런은 정치와 사회,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 깊이 있는 가사와 시를 써왔다. 항상 팬층이 두터워 노벨상의 단골 후보로 거론돼 왔었지만 전통적인 문학 작품들과 형식이 달라 전문가들은 유력한 후보로는 보지 않았었다. 국내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문학세계사)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이 발간된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롤링 스톤즈의 전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2013년 뉴욕타임스 오핀니언 란에 쓴 글을 인용하며 딜런의 수상을 축하하기도 했다. 당시 오핀니언란에서 와이먼은 “물론 딜런의 가사와 시들은 기존 문학 작품들의 관례에는 맞지 않지만 서정성이 매우 짙고 그가 저술한 주제들은 세월의 유행을 타지 않는다”며 “세상의 그 어떤 시인보다도 그의 작품들은 영향력이 크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노벨상 시상식은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1억원)다. 이번 수상으로 국내에서는 출판 뿐 아니라 음반 시장에서도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성광 예스24 문학 담당 MD는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뿐 아니라 음반 시장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 된다”며 “저서가 많이 없는 만큼 음악으로 밥 딜런을 이해하고자 하려는 대중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175    음유시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과 자신만의 "예술"을 하다 댓글:  조회:2563  추천:0  2018-07-29
27일 두번째 내한공연을 펼친 밥 딜런. 그는 이번 내한공연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니뮤직 제공 밥 딜런은 밥 딜런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과 음악세계를 고집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27일 저녁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펼친 두번째 내한공연에서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두 시간 동안 노래만 줄창 불렀다. 아니, 불렀다기보다는 툭툭 뱉어냈다. 편곡 또한 원곡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비틀고 꼬았다. 두번째 곡으로 부른 ‘돈트 싱크 트와이스, 잇츠 올 라이트’는 양병집과 김광석이 부른 번안곡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국내 관객에게 익숙한 노래인데도 원곡을 바로 떠올리는 이들이 얼마 없었을 정도였다. 8년 전 첫 내한공연 때도 그랬다. 당시 파격적인 무대를 접하고 실망한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밥 딜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예술’을 했다.   그게 밥 딜런이다. 그가 1965년 미국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불렀을 때 관객들은 야유했다. 포크를 배반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밥 딜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첫 곡 ‘올 얼롱 더 워치타워’를 부르는 순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의 그가 겹쳐 보였다.   무대는 소박하면서도 따스했다. 큰 공연장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대형 스크린도 없었고 화려한 조명도 없었다. 자줏빛 커튼을 배경으로 백열전구처럼 따스한 느낌을 주는 노란 조명만이 은은하게 무대를 비추었다. 기타를 치며 첫 두 곡을 부른 밥 딜런은 피아노 앞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또 말 없이 노래와 연주를 이어갔다. 음악가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음유시인답게 그는 시를 읊조리듯 노래했다. 가사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왠지 시적인 운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밥 딜런이 예전에 공연을 하는 모습. 그는 이번 내한공연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니뮤직 제공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피아노 앞에만 붙어있던 밥 딜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로커처럼 스탠딩 마이크를 삐딱하게 기울여 잡고선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다. 이브 몽땅이 부른 샹송 ’고엽’의 영어 버전 ‘오텀 리브스’의 선율은 이날 무대에서 가장 명징했다. 관객들은 유독 박수를 크게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세 곡을 더 부르더니 역시 아무 말 없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앙코르를 갈구하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에 화답한 건 우아한 바이올린의 선율이었다. 바이올린 전주 뒤로 “하우 매니 로즈~”로 시작하는 노래가 이어졌다. 밥 딜런의 최대 히트곡 ‘블로잉 인 더 윈드’였다. 1963년 처음 발표된 이래 얼마나 많이 불려졌는지는 바람만이 알고 있을 이 노래. 이날 불린 노래는 아름답고 우아한 버전의 또 다른 ‘블로잉 인 더 윈드’였다. 나온 지 반세기도 더 된 노래는 2018년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앞서 밥 딜런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은 늘 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밥 딜런을 따라잡았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는 또 다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밥 딜런을 모티브 삼아 만든 영화 제목처럼 “이봐, 난 거기 없다고” 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77살 거장의 내한공연 막이 내려지는 순간, 그 중얼거림이 환청처럼 들렸다.   /서정민 기자 27일 오후 8시 열린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 밥 딜런(77)의 내한 공연 '밥 딜런 & 히즈 밴드'는 국내 최대 규모 실내 공연장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공연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5인조 밴드의 연주와 어우러진 밥 딜런의 목소리가 현장을 찾은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할 만한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치타워(Watchtower)'와 '트와이스(Twice)'로 공연의 포문을 연 밥 딜런은 약 2시간 동안 쉼 없이 20여곡을 부르며 폭염을 뚫고 공연장을 찾은 이들을 자신만의 음악 세계로 초대했다. 관객을 향한 인사말은 없었다. 인사를 음악으로 대신한 밥 딜런은 그저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편곡은 원곡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는 밥 딜런은 시적인 가사를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하며 묘한 끌림을 느끼게 했다. 경쾌한 멜로디의 곡이 연주될 때 일부 관객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하모니카 연주 구간 때마다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쉼 없이 내달린 밥 딜런은 공연을 끝내고 쿨하게 무대 뒤로 사라졌다. 관객의 뜨거운 박수가 이어지자 다시 등장해 앙코르 무대를 꾸는 그는 대표곡 중 한 곡인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로 화답했다. 국내 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낙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는 끝내 부르지 않았다. 앙코르 무대까지 끝낸 이후에는 밴드 구성원들과 함께 무대 중앙에 모여 짧게 인사를 한 뒤 무대를 떠났다. 2010년 이후 8년만의 한국 공연을 마친 밥 딜런은 내달 29일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출연할 예정이며, 이후 대만, 홍콩, 싱가폴, 호주 등에서 투어를 이어간다. 
1174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ㅡ "윤동주 정신" 댓글:  조회:2275  추천:0  2018-07-27
다고 기치로 전 NHK PD '생명의 시인 윤동주' 출간 기념 방한   새'생명의 시인 윤동주' 출간한 다고 기치로 씨.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윤동주 시인은 사람이 어떻게 살면 되느냐 하는 근본적인 테마에서 출발해 시를 만든 사람입니다. 지금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 앞에서 길을 잃은 상태인데, 그렇게 미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윤동주는 틀림없는 지표를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오랫동안 PD로 일한 다고 기치로 씨는 저서 '생명의 시인 윤동주- 모든 죽어가는 것이 시가 되기까지'(한울) 한국 출간을 기념해 방한, 24일(2018년 4월),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PD로 일한 1995년 KBS와 공동으로 다큐멘터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을 제작하는 등 30여년간 윤동주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그 안에 담긴 시인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했다. 그 결과물을 집대성해 이 책을 낸 것. 그는 오래전부터 윤동주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해 현재 높은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한다. 이날 인터뷰 역시 한국어로 이뤄졌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윤동주 시 시계의 결정적 개념은 '생명'이다. "모든 사람이 한계가 있는 목숨을 살고 있죠. 죽을 목숨, 그걸 '모털'(mortal)이라고 합니다. '서시'에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있지요. 윤동주가 소장한 책 중 철학자 딜타이의 '근세 미학사'가 있는데, 직접 줄을 치고 특별히 체크한 부분이 "죽어야 하는 창조자, 시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걸 보면 '서시'는 모털한 자기 생명에 대한 각오라고 할 수 있죠."   다고 기치로 씨가 발굴한 윤동주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연합뉴스 자료사진]   '별헤는 밤'도 시인이 깊은 고민 끝에 마지막 부분을 추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처음에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끝내고 '1941년 11월 5일'이라고 날짜까지 썼다가 나중에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를 더했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원래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어요. 당시 사회 전체가 병에 걸린 상태였잖아요. 생명 경시, 파시즘이 가득차 있고 암흑기였죠. 그러다 약 2주 동안 깊이 생각했고, 상처와 고뇌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도약한 것입니다.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꾸고 '별 헤는 밤' 마지막 부분에 이모털(immortal)한 세계, 영원한 생명의 이야기를 넣은 것입니다. 이런 도약은 문학의 기적이랄까요." 다른 시 '못 자는 밤' 원고에도 시인이 남긴 특별한 메모가 있다고 설명한다. "미(美)를 인정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참여를 기꺼이 승인하고 생명에 참가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다. "미국 작가 월도 프랭크를 인용했어요. 시를 쓴 원고지에 일본어 그대로 인용해 메모를 남긴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 윤동주의 결정적 철학이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시인의 한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족시인, 저항시인인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 말기에 한국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는 역사의 암흑기에 모국어로 시를 쓰겠다 했죠. 그렇다고 해도 이면성, '더블 이미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 일본 도쿄를 거쳐 교토에서 돌아가신 분으로서 디아스포라, 국경을 넘는 경향을 지니면서 민족적인 부분과 국제적인 부분을 함께 추구했다고 봐야 합니다." 윤동주의 삶과 문학은 다고 기치로 씨의 개인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저는 NHK PD로서 일제 치하 한국사람들의 고통을 전달해야 한다, 알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시작했고 그 다큐 프로그램은 일찍이 끝났지만, 윤동주 시가 제 개인에게 보물이 된 겁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시인의 말이 저에게 '어떻게 살면 되느냐'라는 질문을 항상 했어요. 제게 윤동주는 아주 특별한 세계이고, 앞으로 무슨 글을 써도 그 바탕엔 '윤동주 정신'이 있을 겁니다."    
1173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길 댓글:  조회:5050  추천:0  2018-07-27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처 없이 그것을 찾으러 떠난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돌담길을 걷는다. 담은 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돌담길을 어슬렁거리다 시간만 흘러간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 돌담을 더듬어도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는 없다. 하늘을 쳐다보니 부끄럽기만 하고.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나’라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화자가 삶을 사는 이유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이다.     1 이 시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①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② 부재하는 대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를 보이고 있다. ③ 부정적인 현실과 대결하며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시도하고 있다. ④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안타까워하며 상황을 부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⑤ 세상과 단절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 이 시에 나타난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주머니’를 더듬는 행위로 볼 때, 화자가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자신이 지니고 있었거나 내면적인 성질을 띤 것일 거야. ②‘길’과 이어진 ‘돌담’은 화자로 하여금 좌절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어. ③‘하늘’은 화자의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존재이지만 의지를 북돋우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어. ④‘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화자가 꾸준히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적인 시간이야. ⑤‘담 저쪽’은 화자가 처한 현실과 대비되는 공간이며, 화자의 회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어. ➡ 화자의 회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화자가 지향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곳이다.     답은 2, 5       =====================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     시인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건 확실한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때의 안타까움은 누구나 한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시인은 지금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다.두 손으로 주머니를 자꾸 더듬는다. 무언가가 주머니에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을 길을 나선다. 집안에는 없으니 집밖으로 나가는 것일까?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이어진 돌담을 끼고 그는 계속 걷는다.돌담에는 쇠문이 있고, 그것은 굳게 닫혀 있다. 돌담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 시인은 그 주변을 서성이기만 한다. 저 돌담 너머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시인은 생각하는 것일까?   길 위에 돌담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무언가를 찾지 못했는데, 시간은 어느새 저물녘이 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시인은 머뭇거린다. 집으로 돌아가도 할 일이 없다. 마음속으로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할 테니 잠도 쉬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돌담 주변을 걷는 것도 의미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라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길에서 아침을 맞고, 길에서 저녁을 맞았다. 쉼 없이 돌아다녀도 잃은 것을 찾을 수 없어 시인은 돌담을 더듬다 눈물까지 짓는다.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고개를 드니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기만 하다. 무언가를 잃은 게 부끄럽고, 잃은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부끄럽고, 그것을 찾지 못해 또 부끄럽다.   그래도 시인은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변함없이 걷고 있다(걸으려고 한다). 시인을 정말로 부끄럽게 하는 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지 않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걸 시인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지금은 다만 쇠문을 열 열쇠가 없을 뿐이다. 열쇠를 찾으면 쇠문을 열고 돌담 안으로 들어가 잃어버린‘나’를 찾으면 된다. 요컨대 시인은 이제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아냈다.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를 시인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찾으려 한다. 그것이 그가 돌담을 계속해서 걷는 이유이고, 궁극적으로 그가 사는 이유이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는 이 시의 결구에 표현된바 그대로, 시인에게 담 저쪽에 있는 나를 찾는 일은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시인은 왜 이리 담 저쪽의 ‘나’를 찾는데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부끄럽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부끄러움의 미학은 사실 숭고미라는 윤리적 자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숭고라는 미적 범주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존재의 이상을 대변한다. 윤동주가 꿈꾼 이상을 ‘독립’이라는 사건에 맞출 필요는 없다. 위 시에 나타나는 대로 그는 하늘을 쳐다보는 자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자신(나)보다 더 나은 ‘나’를 찾기 위해‘이 길’을 걷고 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은 따라서 진정한 나와 만나려는 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다. 생명이 없는 길에서 펼쳐내는 부끄러움은 이렇게 시인으로 하여금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아는 시인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게 무어 그리 대단한 거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일은, 그래, 대단한 일이다. 식민지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은 한 존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제시하는 분명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참된 나를 찾기 위해 벌이는 시적 여정에서 시인은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다. 그러므로 그가 걷는 “이 길”은 자기 내면을 구성하는 또 다른 무의식을 만나는 길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의식을 죽음이라고 해도 상관없고, 순수라고 해도 상관없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이 길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걷고 있다. 그가 이 길을 걷는 것은 ‘시적 현재’이다. 시라는 세계에서 시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영원한 소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소년이 만든 생의 거울에 우리를 비춘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 거울에 나타날까? 두고두고 곱씹어 볼 질문이다.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을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핵심 정리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식인의 고민을 노래한 작품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탐색의 행위가 잘 드러나 있으며, 성찰의 시인 윤동주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상징적, 성찰적, 의지적 *제재 : 길 *주제 :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탐색과 결의. 자아 회복을 위한 진정한 노력 *특징 ① 고백적 어조를 통해 내면을 드러냄. ② 소박하고 일상적인 시어 구사 ③ ‘길’, ‘담’, ‘문’ 등의 보편적 상징을 활용하여 관념을 형상화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작품의 구성 [1연] 상실을 인식하고 하는 행동 [2연] 화자가 걸어가는 길의 모습 [3~4연] 상실한 대상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 [5연] 부끄러움을 통한 자아의 갈등과 각성 [6~7연] 참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결의와 의지 이해와 감상 1941년, 모든 것이 황폐화된 식민지 조선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아픔, 상실과 모색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으로서 작가는 자신이 찾아야 할 가치와 삶을 찾기 위해 ‘길’로 나섰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으로 표현된 황폐하고 삭막한 현실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진지한 물음을 통해 참된 자아의 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시인의 다른 작품들처럼 현실에서 오는 고통이나 좌절을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진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결의나 다짐의 태도를 이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화자가 찾으려 하는 것은 6연에 제시되어 있는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인데, 시적 화자는 돌담으로 인해 돌담 너머의 세계를 볼 수가 없고, 돌담이 길과 평행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세계에 도달할 수도 없다. 담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쇠문’은 굳게 닫혀 있어 절망적 상황을 느끼게 하고, ‘길 위에 긴 그림자’는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자아 성찰을 통해 자아 회복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5연의 ‘하늘’은 비본질적 자아를 일깨워 주는 존재로서 시적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있는 자신,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함이고, 이 어둡고 슬픈 현실 상황 속에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독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주)천재교육 | BY-NC-ND 작품 연구실 작품 속 시어 사전 *길 : 잃은 것을 찾는 과정,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공간 *돌담 :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를 단절시키는 장애물, 현실적 자아의 삶의 길에 놓인 암담한 현실의 상징물 ‘돌담’을 통해 나타난 자아의 분열 화자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돌담’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돌담은 길을 안과 밖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있는 화자는 결코 돌담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곳은 바로 화자가 상실한 참된 자아가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돌담이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화자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돌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쇠문으로 굳게 닫혀 있으며,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주)천재교육 | BY-NC-ND ‘하늘’의 의미와 역할 ‘돌담’으로 상징되는 장애물을 앞에 두고,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힘겹다고 느끼며 화자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화자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일깨워 주는 지고한 존재이며 순수한 존재로,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은 화자에게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의지를 북돋우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를 통해 화자는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참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백적 어조 윤동주의 시는 대체로 현재의 자기 모습을 현실의 어려움과 대조시키면서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관점에서 화자는 고백적 어조와 태도를 보이게 된다. ‘길’의 상징성 윤동주의 ‘길’은 식민지 현실에서 올바른 삶의 길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며 방황을 거듭하던 화자가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공간이다. 이때의 ‘길’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아 성찰과 탐색의 공간으로서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한다. ‘길’은 인생을 의미하기에 시련과 고통 등의 굴곡을 품고 있으며, 길과 더불어 놓여 있는 ‘돌담’은 끊임없이 추구하나 이르지 못할 이상적 세계(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는)와의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화자는 이러한 돌담의 존재와 더불어 ‘길’을 통해 최종의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 나가려는 것이다. 작가 소개 - 윤동주(尹東柱, 1917 ~ 1945) 시인. 북간도 출생.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 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이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1939), ‘또 다른 고향’(1948) 등이 있다. 함께 읽어보기 ‘거울’, 이상/본질적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 ‘거울’은 현실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의 분열을 상징화하고 있으며,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윤동주의 ‘길’과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길’이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반면, ‘거울’에서는 현실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 사이의 단절과 분열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외길(천양희)과 길(윤동주)의 작품 설명 [길' 속에 투영되어 있는 삶의 자세] 천양희의 ‘외길’과 윤동주의 '길' 모두에서 '길'이란 곧 삶 혹은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 '길'은 사람의 인생역정을 지칭하는 시어로 흔히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길'은 다양한 방향이 존재할 수 있고, 그 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자세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동주의 '길'과 천양희의 ‘외길’에 등장하는 '길'은 시적 화자가 지향하고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뿐만 아니라 두 작품의 시적 화자는 모두 이러한 길을 어떠한 외부적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외길(천양희)과 길(윤동주)의 핵심 정리   외길 길 갈래 서정시, 자유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실존적, 의지적, 관념적 상징적, 성찰적, 의지적 제재 외길 길 주제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길을 지켜 가고자 하는 의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탐색과 결의. 자아 회복을 위한 진정한 노력 특징 ① 경어체를 통해 화자의 의지를 드러냄. ② 자연물(새)을 통해 화자가 희망하는 삶의 자세를 효과적으로 표현함. ① 고백적 어조를 통해 내면을 드러냄. ② 소박하고 일상적인 시어 구사 ③ ‘길’, ‘담’, ‘문’ 등의 보편적 상징을 활용하여 관념을 형상화 외길(천양희)과 길(윤동주)의 이해와 감상 외길(천양희) 이 시는 '새'의 존재 방식과 같이, 자신이 선택한 오롯한 삶의 길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삶의 자세가 형상화된 작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복잡한 영향 관계를 물리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길을 고수하며 살아가려는 시인의 태도는 시인 자신의 실존적인 삶을 지켜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시인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새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열거하며 시상을 전개한다. 나열된 새들은 새의이름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저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삶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하고 독특한 삶의 습성은, 새를 실존케 하는 본질적 습성 앞에 모두 무력해진다. 다양한 삶의 습성에도 불구하고 '새'는 날아오름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숙명적인 삶의 방식이자 실존의 방법인 것이다. 한편 앞서 제시한 '새'의 존재 방식을 토대로 시인이 지닌 삶의 자세와 의지가 구체화된다. 특히 시인이 선택한 삶의 길을 '외길'로 지칭하며 그러한 삶의 길을 지켜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길(윤동주) 1941년, 모든 것이 황폐화된 식민지 조선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아픔, 상실과 모색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으로서 작가는 자신이 찾아야 할 가치와 삶을 찾기 위해 ‘길’로 나섰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으로 표현된 황폐하고 삭막한 현실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속되는 진지한 물음을 통해 참된 자아의 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시인의 다른 작품들처럼 현실에서 오는 고통이나 좌절을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진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결의나 다짐의 태도를 이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화자가 찾으려 하는 것은 6연에 제시되어 있는 ‘담 저쪽에 남아 있는 나’인데, 시적 화자는 돌담으로 인해 돌담 너머의 세계를 볼 수가 없고, 돌담이 길과 평행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세계에 도달할 수도 없다. 담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쇠문’은 굳게 닫혀 있어 절망적 상황을 느끼게 하고, ‘길 위에 긴 그림자’는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자아 성찰을 통해 자아 회복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5연의 ‘하늘’은 비본질적 자아를 일깨워 주는 존재로서 시적 화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있는 자신,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함이고, 이 어둡고 슬픈 현실 상황 속에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독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117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눈 감고 간다 댓글:  조회:3077  추천:0  2018-07-26
일러스트 정하 눈 감고 간다 /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은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왓작 떠라.           1941.5.31. 어두운 세상인데 눈을 감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양과 별을 사랑하는 순수한 아이들이 세상의 악, 어둠에 물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시 마지막에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눈을 감고 가다 시련이 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럴 때는 정신을 차리게 눈을 떠야 한다는 민족 저항 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눈감고 간다                                   윤동주        태양太陽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1941.5.31.              눈 감고 보면 더 선명해진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화자인 ‘바다’는 서구 신문물에 대한 비유로 보편적으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무의식에는 열강에 대한 압박감이나 저항감이 더 크게 자리했을 것이므로, 바다는 격동의 시대에도 자기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지식인의 초자아적 형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남 선은 바다의 목소리를 빌려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라며 자신을 닮은 소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스스로 바다임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육지의 한 구석에서 작은 돌 멩이가 되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채 근대의 언어로 덧칠된 안경을 자신의 맨눈으로 여기기로 한 것 이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소년배’는 선배가 잊어버린 바다의 음성을 어렴풋하게 기억 해냈다. 소년과 바다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신식 건물과 기관차와 순사들, 세련된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문명’을 겁내던 사람도, 매혹당한 사람도, 혹은 그것을 편리한 도구로 생각한 사람 도 자신 앞의 풍경들을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로 듣고 일본어로 기억했다. 그러나 소년의 무의식에서 바다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고, 그의 진정한 아버지는 소년이 자신의 사도가 되 어 주기를 바랐다. 윤동주가 그해 11월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등의 작품 과 함께 자필 자선시집에 수록한 「눈 감고 간다」는 바다를 향한 소년의 ‘담 크고 순진한’ 응답이었다.    바다는 ‘태양’과 ‘별’빛으로 소년을 부른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부르는 하느 님의 음성처럼 바다의 목소리는 소년의 꿈속에서 온화하게 떠오른다. 일제가 가져온 문명은 거짓 태양 이기에, 소년에게는 그 한낮이 밤이나 다름없었다. 탯줄처럼 자신에게 연결된 태양과 별의 목소리를 더 듬어 가며 소년은 자신의 유일한 자산인 씨앗들을 길에 뿌려 놓는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의 풍경을 바 라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으나 아직 태양과 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소년들을 위한 것이다. 후배에 게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던 선배, 누군가의 앞에 설 때 매번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한 복장을 했던 윤동주는 자신의 뒤를 따라올 소년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달란트’인 시어(詩語)들을 곱게 깔아 두었다. 그리고 변절한 이들의 문장들이 돌로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바짝 뜨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전체주의는 문명의 가면을 쓰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탯줄을 잘라 놓는다. 충만한 에너지를 지닌 야생 적 사고와 동물적 항상성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법칙으로 그들을 길들이고 교화하려 한다. 역사 이래 그들은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인간의 마음은 혁명, 신적폭력, 사회역사적 상상력 등 다양한 이름으 로 문명의 폭주를 막아섰다. 2016년 광화문 광장을 수놓았던 작고 촘촘한 불빛들도 아마 이 야생적 사 고의 계보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년 윤동주가 일제 식민지의 캄캄한 밤길에 깔아 놓은 빛나는 시어들과도 잘 이어져 있을 것이다.       /양진호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 이 시에서 아이들은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태양의 민족이고 하늘의 자손이지요.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우리의 고대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과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 태양의 민족 앞에 어두운 밤이 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기를 의미합니다. 민족의 주권이 빼앗겨서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런 어둠을 말하는 것이지요. 식민지의 우리나라를 어둠 속에 묻힌 것이라 보고, 그런 어둠을 걸어갈 때는 눈을 감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희망을 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ㅣ. 그래서 씨앗을 뿌리면서 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둠 속에 있지만 그것을 꿋꿋히 헤쳐나감과 동시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면서 가야합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처한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계속해서 식민지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두운 길을 갈지라도 씨앗을 뿌리면서 가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의 정기를 잃지 말고 그것을 굳건히 지키면서 가면 새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부리 같은 일본놈의 탄압이 있으면 눈을 번쩍떠서 그것을 똑바로 보고 처리하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돌부리 같은 일제의 탄압을 물리쳐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사후 남긴 단 한권의 시집   양심ㆍ자유ㆍ저항 등 실존적 고뇌   일제 강점기 후반 야만의 시대   더없이 드높았던 이상을 추구   윤동주는 양심의 수난자   강한 자기희생ㆍ굳은 결의 무장   사유와 실천, 삶과 예술이 일치   시 못지않게 깊은 감동 남긴 삶   닫힌 텍스트가 아닌 열린 세계   ‘밤이 어두워도 씨앗 뿌려라’처럼   망각해선 안될 기억을 소환하고   미래 준비하는 ‘삶의 용기’ 전달 일본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 두 번째) 송별회 사진.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별 헤는 밤 윤동주, 종두 지석영, 33인 손병희, 만세만세 유관순, 도산 안창호, 어린이날 방정환 (...) 날자꾸나 이상, 황소 그림 중섭. 역사는 흐른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부르곤 했던 동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마지막 구절이다. 20세기 전반의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오늘 다루려는 이는 맨 앞에 나오는 시인 윤동주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광복,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와 이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의 역사다. 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의 하나는 그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더욱 악랄해진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 전반은 시대의 어둠이 가장 깊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윤동주였다(‘쉽게 씌어진 시’). 어떤 이는 윤동주의 시가 뛰어난 게 사실이더라도 우리 100년의 지성사에서 크게 다룰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윤동주가 남긴 것은 그가 죽은 지 3년 후인 1948년에 출간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뿐이었다. 이러한 반문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성은 지식을 넘어선다. 지성에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정신의 다른 이름은 마음의 태도다. 우리가 율곡과 다산을 지성으로 기리는 까닭은 조선 중쇠기와 쇠퇴기라는 시대에 맞서 개혁의 방법과 마음의 태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윤동주는 야만의 시대에 맞서 민족적 양심과 실존적 고뇌라는 마음의 등불을 밝혔다. 더없이 드높았던 이상을 추구한 그의 마음이 존재해 있었기에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 전반 우리 지성사는 황량하지 않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2008년 한국방송공사(KBS)는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 프로그램 ‘시인 만세’에서 국민 애송시를 조사한 바 있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서시’와 ‘별 헤는 밤’을 쓴 윤동주가 꼽혔다. ‘진달래꽃’과 ‘초혼’의 시인 김소월은 2위를 차지했다. 국문학자 김응교는 전문가보다 시민들이 윤동주를 더 좋아한다고 분석했다. 1941년 윤동주가 자필로 써서 만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표지. 가운데를 접어서 오른쪽 절반이 앞표지, 왼쪽 절반이 뒷표지가 되도록 했다. 앞표지에 '病院(병원)’이라 썼다 지운 흔적이 있다. 원래 시집 제목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또 작가 이름을 童舟(동주)라 쓴 게 눈에 띈다. 정병욱에게 전해진 이 원고 뭉치가 해방 뒤 빛을 보면서 ‘시인 윤동주’는 부활했다.   우리 국민들이 윤동주 시를 특별히 사랑하는 까닭은 뭘까.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교과서의 힘이다. 우리가 시를 처음 접하는 것은 주로 교과서를 통해서다.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이육사와 함께 윤동주는 지난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소개돼 있다. 윤동주의 시는 우리 현대시 정전(正傳)의 반열에 올라 있는 셈이다. 둘째, 작품의 탁월성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필사본을 간직해 윤동주 시를 만날 수 있게 한 연희전문학교 후배 국문학자 정병욱은 말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던 동주의 시혼은 (...) 조국과 자유를 밤새워 지키는 ‘별’을 노래하였다.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기를 각오한 그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날에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남기고 ‘진정한 고향’을 찾아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고 했다.” 윤동주 시의 해석은 열려 있다. 민족적 양심과 저항, 실존적 고뇌와 성찰,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향에의 그리움은 그가 다뤘던 주제들이다. 예를 들어,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 내 이름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라는 구절(‘별 헤는 밤’)을 읽었을 때 느끼는 그리움과 공감의 자리는 우리 한국인이 갖고 있는 정서와 마음의 고향일 것이다. 셋째, 삶의 고결성이다. 윤동주의 삶에 대해 작가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발표한 바 있다. KBS 박진범ㆍ박병길 PD는 다큐멘터리 ‘불멸의 청년 윤동주’를,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를 만들었다.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평양으로, 서울로, 그리고 도쿄와 교토로 공부하러 갔다.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1944년 독립운동 죄목으로 수감됐다. 광복을 앞둔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오랜 벗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안타깝게도 절명했다. 1941년 18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만들면서 윤동주가 그 앞에다 새로 써서 붙인 시. 원래는 제목이 없지만, 지금은 '서시'라는 작품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고 끝에 시집을 묶은 뒤 새 시를 써 붙인 '1941년 11월 20일'이란 날짜가 선명하다.   이러한 윤동주의 삶은 그의 시 못지않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영문학자 김우창이 지적했듯, 윤동주는 ‘양심의 수난자’다. 그가 남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민족적·종교적·실존적 양심은 그의 삶을 이끌어간 힘이자 가치였다. 그의 삶은 시대를 증거했고 그 시대를 넘어서려 했다. 사유와 실천, 삶과 예술이 정확히 일치했던 이가 바로 윤동주였다.   열린 텍스트로서의 윤동주 시   윤동주의 시를 최초로 평가한 이는 시인 정지용이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해 본 적도 없이! (...)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 서문(1948)에서 정지용이 한 말이다. “윤동주는 이육사와 함께 식민지 후기의 저항시를 대표한다.” 국문학자 김윤식과 문학평론가 김현이 ‘한국문학사’(1973)에서 평가한 구절이다. 이들에 따르면, 윤동주의 강한 자기희생과 굳은 결의의 배경에는 선한 것이 결국 이긴다는 기독교적 확신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윤동주의 시 세계를 김윤식과 김현은 ‘순결한 젊음’이라 불렀다. 해방 뒤인 1948년 정음사에서 정식으로 출간된 윤동주의 시집.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동주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초판본 디자인을 고스란히 살려서 곧 발간될 예정인 윤동주 시집. 2016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 포스터. 윤동주는 여전히 매력적인 시인이다.   윤동주의 정체성은 저항 시인이자 민족 시인, 그리고 기독교 시인이다. 동시에 양심의 시인이자 자유의 시인, 그리고 성찰의 시인이다. 더불어 그는 우리 모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하는 시인이자, 우리 민족의 삶의 영토가 멀리 북간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시인이다. 윤동주의 시는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열린 세계다. 앞서 나는 지성에 내재된 마음의 태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 맞선 시인이라는 운명의 자각, 순결한 젊음, 양심의 수난 등은 윤동주가 가졌던 마음의 태도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독백과 결의는 윤동주가 품었던 마음의 태도를 생생히 웅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억의 미래   이 기획의 이름은 ‘100년에서 100년으로’다. 지나간 100년이 과거의 역사라면, 다가올 100년은 미래의 역사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탐구가 미래 전망의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일 터다. 릿교 대학 시절 윤동주(뒷줄 오른쪽). 송몽규(앞줄 가운데)도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렇다면 역사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억일 것이다. 기억이란 의식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경험과 사유다. 기억은 실존적 기억과 집합적 기억으로 나눠진다. 실존적 기억은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사랑과 미움의 기억, 성공과 좌절의 기억, 고독과 연대의 기억은 현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미래의 삶에 용기를 준다. 집합적 기억은 민족 또는 국민이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이다. 역사학자 육영수는 역사란 기억과 망각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망각해선 안될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은 지식인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실존적 기억처럼, 집합적 기억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더 나은 삶의 미래로 고양시킨다. 기억의 미래가 중요한 까닭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왓작 떠라.”(‘눈 감고 간다’ 전문) 딸아이가 어렸을 적 읽어준 윤동주 시다. 윤동주라는 이름과 밤이 어두워도 씨앗을 뿌리라는 그의 맑고 굳은 정신을 딸아이가 오랫동안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말처럼 역사가 삶의 스승이라면, 기억은 지나간 삶의 증거다. 그리고 다가올 삶의 용기다. 딸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그 아이가 다시 자신의 아이에게 윤동주 삶과 시의 기억을 전달하길, 그리하여 삶의 용기를 갖게 되길 바라는 작은 소망을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이 시는 어두운 밤에 미래의 준비를 하며 가다가 희망이 보이면 눈을 뜨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밝은 새상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워 아무 것도 안보이는데 차라리 눈감고 가거라. 가면서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여 눈에 별이 반짝이거든(희망이 보이거든) 감았던 눈을 활짝 떠라.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는 착상이 어린 아이와 같으면서 기발한 시이다. 이 시는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의 역사적인 배경은 일제강점기로 암울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시의 시간적인 배경을 암울한 상황을 의미하는 밤으로 설정한 것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에서 ‘태양’은 암울한 상황이 사라진 때를 의미한다. ‘별’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이 실현되는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아’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요로 보인다.   ‘밤이 어두웠는데 / 눈감고 가거라.’는 어두우면 눈을 뜨고 잘 보면서 가야하는데 오히려 눈을 감고 가라는 것은 ‘밤이 어두’운 상태가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이 어둡기 때문이다. 별도 보이지 않는 아주 암울한, 절망적인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가면 깜깜한 것이 눈을 감아서 깜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뜨기만 하면 어둡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속이면서 임시방편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가거라.’는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앞이 안 보여도 그냥 헤매지 말고 ‘가진 바’의 ‘씨앗을 / 뿌리면서 가’라는 것은 절망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태양’이 떴을 때에 가꾸고 꽃 피워야할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절망을 이기고 가라는 것이다. 이는 서시에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와 맥락이 통하는 구절이다.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는 희망이 보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서 그 희망을 보라는 것이다. 동시(童詩)적인 발상으로 ‘발부리에 돌이 채이’면 신경의 작용으로 눈에서 불빛이 번쩍한다. 무언가에 세게 부딪치면서 생기는 생리적인 현상이다. 이 번쩍하는 불빛을 만화에서는 별로 표현한다. 실제로 별과 비슷한 빛이 보이는 것이다. 그때에 ‘감았던 눈을 와짝 떠’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보라는 것이다. 진짜 희망을 나타내는 별은 아니지만 별 같은 것이 보이면 가짜 희망이라도 그것에 의지하여 상황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눈을 떴어도 여전히 어둠이면 다시 눈을 감고 자신들이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가’며 부정적인 현실의 상황을 임시방편으로 눈을 감아서 그렇다고 위로하고 눈을 뜨면 긍정적인 현실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짜든 진짜든 희망이 보이면 눈을 힘껏 크게 빨리 뜨고 현실의 상황을 보라는 것이다.///전한성  
117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또 태초의 아침 댓글:  조회:2899  추천:0  2018-07-25
《 태초의 아침 》                    윤동주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 또 태초의 아침 》                             윤동주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1941년 5월 31일 >   나라가 독립되는 그날, 태초의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기독교적 요소가 숨어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은 나라의 해방이었을 겁니다.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과를 먹어 벌을 받은 이야기는 알고 계시죠?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부끄럽게 사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부끄러움으로 그려진 것은 아닐까요? ===================== 또 태초의 아침 - 윤동주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게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짖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가 잎사귀로 브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겠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달로 있는 것이 아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윤동주의 시에 대하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序詩] 전문 * 윤동주(1917~1945) 시인의 [序詩]는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고 암송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시구는 윤동주 시인의 티없이 맑은 천성天性이 사실 그대로 잘 드러나고 있는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도덕은 아름다움의 결정체이고, 우리는 이 도덕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미화하고 성화시키게 된다.       산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 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 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 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自畵像] 전문 * 나는 사랑의 대상이면서도 미움의 대상이 된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가질 때 나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지 못할 때 나는 미움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대상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애증이 겹치는 존재가 윤동주 시인의 [自畵像]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함의 극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윤동주, [또 태초의 아침] 부분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존재론이고,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는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행복론이다. 모든 창조자는 신성모독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는 그 신성모독자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신성모독, 부처와 예수의 신성모독,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신성모독, 보들레르와 랭보의 신성모독 등은 이 범죄의 생산성과 그 아름다움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한국시문학사상 어느 누가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었던가? 윤동주 시인은 한국적인 정한의 세계를 벗어나서, 대쪽같은 장인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를 육화시킨 시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부분 *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것은 ‘사상’인데, 왜냐하면 사상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욕망마저도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것이 만인평등이든, 내세의 천국이든지간에, 그 주체자에게 분명한 목적을 제시해 주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마치, 자살특공대처럼 순교를 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은 순교자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예수의 순교, 부처의 순교, 이순신의 순교, 윤동주의 순교 등----. 당신은, 당신은, 과연 당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면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오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다른 고향] 부분 *우리 인간들의 고향은 영원한 이상적인 천국이며, 언제, 어느 때나 되돌아가 영원히 살고 싶은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고향은 마음 속의 고향일 뿐, 우리 인간들이 되돌아가 영원히 살아야 할 지상낙원이 될 수가 없다. 고향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고향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존재한다. 고향은 환영이며, 신기루이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다른 고향에 가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小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된다. 왜냐하면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들을 속이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정직해진다. 솔직해진다. 이 정직함과 솔직함이 시를 쓰게 한다. 시는 언어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 밤 하늘의 별이 된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윤동주, [참회록] 부분 * 부끄러움은 떳떳하지 못함이다. 부끄러움은 남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반성할 때, 그 떳떳하지 못함은 맑고 깨끗하게 씻겨진다. 참회는 씻어냄이며, 자기 정화운동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또다른 고향], [별 헤는 밤], [간 肝] 등은 이 참회가 피워낸 명시에 해당된다.       푸로메디어쓰 불쌍한 프로메디어쓰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디어쓰 ----윤동주, [간肝] 부분 *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을 창조한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었고, 우리 인간들에게 사유의 능력과 함께, 올림프스의 불을 가져다가 준 신이었다. 그 결과, 그는 카우카소스(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신조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먹혀야만 하는 천형의 형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문명과 문화의 수호신이었고, 윤동주 시인은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도拜火敎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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