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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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잡담32] 학술의 벽과 조선족대개조론 댓글:  조회:2570  추천:16  2008-04-06
        1   조글로에 박문희 선생님의 <학술의 벽…>>이라는 글이 올랐는데 읽어보고 싶지만 비밀글이라 읽지 못했다.(오늘 아침 읽어보았다) 맹랑한 김에 나도 학술의 <벽>을 생각해본다. 학술의 진미는 진실추구이다. 인류의 인식능력은 주객관원인의 제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객관진실과 동등한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탐색한 어떠한 진실이든지 객관진실에로의 무한대 접근이며 객관진실의 완전무결한 재현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술의 진실추구는 끝이 없다. 학술의 진실추구는 본질적으로 어떤 정치세력이든가 이델레오기와도 관계없이 또 어떤 민족도덕감정이라든가 공리성목적과도 관계없이 자아독존의 무한대라는 존재특점의 합리성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학술에는 학술 자아가 만들어놓은 <벽>이 있을수가 없다. 하지만 인류력사를 되돌려보면 학술에는 <벽>이 존재하여왔다. 그 <벽>을 뛰여넘기 위하여 진실추구를 최종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다. 교회의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고 哥白尼의 일심론을 선양하여 종교재판소의 화형을 당한  布鲁诺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찌하여 학술의 본의와는 다르게 <벽>이 생기는것인가? 인간과 인간사회는 다면체이고 복합체이다. 인류는 진실추구에 대한 황홀한 정신세계를 이루어온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물질성(물질세계에 대한 의뢰성과 무한대의 항락성) 을 버리지 못한다. 때문에 어느 학술이 누구의 물질리익과 사회상층건축과 이델레오기의 장애물로 되면 자연히 <벽>을 만나고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술의 <벽>이란 학술자아의 소생이 아니라 공리사회의 제한성이 가져오는 현상임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2   <조선족대개조론>이 학술의 <벽>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어떤 벽을 넘어섰을가?    나는 <<조선족대개조론>>만 읽어보았고 김문학선생의 다른 책들이라든가 문장을 읽지를 못했음으로  <조선족대개조론>만을 화제로 하고싶다. 첫째, <<조선족대개조론>>의 집필목적과 <벽> <조선족대개조론>의 첫머리와 맺음말에 씌여진 문자들을 읽어보면, 그리고 <조선족대개조론>이라는 글 제목으로부터 보면 김문학선생이 적극적인 사회목적을 두고 쓴 글이라 느껴진다. 소위 상아탑식 순수한 학술연구가 아니라 조선족사회를 진맥하려는 사회공리적인 본의가 적극적인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족대개조론>에 이러한 김문학선생 자신이 만든 <벽>이라 할수 있는 목적과 기준이 있다면, 김문학선생이 뛰여넘은 <벽>은  김문학선생이 자신에게 만들어준 <벽>이 아니며 당연히 누구 또는 사회가 <조선족대개조론>을 감금하려는 <벽>임에 틀림이 없다. 두번째,  <<조선족대개조론>>의 연구방법과 언술방식 그리고 <벽> 김문학선생이 조선족사회를 연구한 방법이 실증주의 방법은 아님은 명백하다. 확실한 사회연구조사와 통계자료수집을 통하여  론거를 받침으로 하는 론증과정이 없이 조선족사회현상들을(김문학선생은 전형적인 사회현상이라 생각했을수도 있겠다.) 라렬하면서 또 언술수법이 엄연한것이 아니라 演義식으로 되여있어 일반 독자들의 취미성을 만족시킬수 있는 반면에 과격적이고 정서적이고여서 전통적인 <학술문>과 거리를 둔 글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조선족대개조론>이 정확한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의 <벽>을 넘어섰음은 확실하게 보여진다. 때문에 김문학선생의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적이고 합리한 면을 지닌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이 <자유화>된 사회이다. 그 <자유화>에 비해서는 상술한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의 <벽>은 난쟁이에 불구하다.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의 <자유화>가 엄청난 원동력인 이상, 누구든지 김문학선생의 <조선족대개조론>의 학술방법과 언술방식을 비판하고 부정할수는 있지만 학술방법과 학술언술의 <벽>으로는 <조선족대개조론>을 감금할 능력은 없다. 새번째, 김문학의 개인사항과 <벽> 김문학선생이 어떤 출신이든, 현재 중국국적이든 국제인이든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연구한다는것은 공리적인 목적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학술자유에 속하며 그 학술성과가 어떤 집단이라든가 개인에게 리용당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일본이든지 한국이든지 중국이든지 어디에서든지 공개하는것도 김문학선생의 개인적인 학술자유에 속한다.  김문학선생이 중국조선족출신이므로 조선족사회의 부족점을 거론하지 말라 또는 <좋게> 거론하라는것은 <벽>이며 민족도덕과 민족감정 그리고 민족자존심이라는 <벽>이다. <조선족대개조론>에서 김문학선생이 상술한 민족도덕과 민족감정 그리고 민족자존심이라는 <벽>을 뒤여넘었는가? 나의 옹졸한 생각에는 상술한 <벽>을 완전히 뛰여넘지 못했다 판단한다. <조선족대개조론>의 언술이 아무리 졸렬하다 할지라도 어떠한 민족도 민족사회도 부족점이 없을수가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나 개인은 <조선족대개조론>의 언술을 객관적으로 읽어볼수있는 심리준비가 되여있다는 자아위안을 하고나면, <조선족대개조론>의 밑바닥에 애족감정이라는 정서가 흘렀음을 감지한 이상, 나는  <조선족대개조론>이 민족도덕과 민족감정 그리고 민족자존심이라는 <벽>을 완전히 뒤여넘지를 못했다 생각된다. 좀 빗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아침마다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닌 경우가 있고 날마다 제 조국을 욕하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인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반면에 <조선족대개조론>에서 김문학선생이 자신의 개인사항으로 말미암아 민족도덕적인 감정적인 자존적인 <벽>을 뒤여넘지 못했음임야말로 <조선족대개조론>이 학술성이 부족한 직접적인 주관원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네번째, <조선족대개조론>과 김문학선생의 매국배족 그리고 <벽> 畵蛇添足이기는 하지만 <조선족대개조론>과 김문학선생이 매국배족의 락인을 받았다는 <사실>(김문학선생의 근년의 저술과 구체적인 언행에 대한 전면적인 료해가 없이는, 구체적인 語境을 떠난 斷章取義에 가까운  분석만을 읽고, 어느 교수의 문장 하나를 두고 김문학선생에게 매국배족이라는 력사정치개념을 착용함은 나는 시기상조라 보여진다)의 련관성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조선족대개조론>의 내용과 형식에서는 김문학선생이 매국배족으로 전락할 직접적인 필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조선족사회를 비판했다고 하여서 필연적으로 매국배족으로 전변한다는 론리도 성립불가능이다. 시간의 순위로 보면 <조선족대개조론> 뒤에 김문학선생이 <매국배족의 언행>을 떠들고  있는데  그러한 後現象인 김문학선생의 <매국배족의 언행>으로 前현상인 <조선족대개조론>을 비판하고 전부 부정한다는것은 론리가 타당하지 않다. 김문학선생의 근년의 <매국배족언행>으로 오래전의 <조선족대개조론>을 해석하려는 현상이 있다면, 나는 그런 현상속에서 우리들이 직면한 주관주의라는 감성주의라는 <벽>을 느낀다.   다섯번째,  <조선족대개조론>의 홍보와 <벽> 조선족사회의 언론체계는 언론인들의 구성과 언론지들의 구성이 자아의 특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에서 경제 사회 문화의 언론을 주도하는 분들이 많이는 문학과 련관을 두고 있으며 언론거재물도 문예지와 많이 련관되여 있다.  <조선족대개조론>이 크게 고명한 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언젠가 흑룡강 김**?라는 분이 <청년생활>에 조선족사회 조사보고와 비슷한 좋은 글을 련재하였고 그 사회반응이 <조선족대개조론>보다 적었던 기억이 난다.-작자분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음만을 알고있음) 언론계(사실은 문학계)의 론의를 일으키고 <조선족대개조론>과 련관되는 홍보자 홍보지들마저 거의 사회민족정치의 변두리에 내몰고 있음은 어론계를 대변하려는 우리 문학계에 엄연한 <벽>이 크게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할뿐이다.    <칼도마>장사나 <밀고제>나 문학계에 존재하는 <벽>의 표현이다. 김문학선생이 지금 바다건너 일본에서 <조선족대개조론>을 두고 내가 이러쿵 저러쿵하는것을 알면 아직도 <벽>속에서 게임을 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우리들을 코웃음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30    [잡담31] 연변내기와 남도치 그리고 한국인 댓글:  조회:4223  추천:111  2008-04-01
연변내기와 남도치 그리고 한국인허동식<내기>든지 <치>든지 꼬리말로서 야유의 의미를 내비친다.  연변내기 하면 연변깍쟁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여왔고 연변말로는 연변좁쌀로 표현된다. 연변사람이 남도치들로부터 이런 평판을 받아온것은 연변사람의 생존환경과 생활물질래원의 부족 그리고 생활소비구조의 특점과 집체화시대의 연변특징에서 인기된다. 연변은 송화강류역과 료하류역과는 달리 산이 많고 평원이 적어 인구에 비해서는 경작지가 적은 농경지역이다.따라서 농업생산도 생활도 조금은 精細적이다.옛날 설명절 같은 때면 안쪽의 남도치들은 돼지를 한마리 반마리 잡아놓고 한달 반달 먹지만 연변은 욕심뿐이지 그렇게 흥정망정할 능력을 지니지 못했었다.촌에서는 생산대를 단원으로 돼지를 잡고 돼지고기를 인구당으로 분배를 하면 근과 냥으로 세분했으니 남도치들은 연변사람들의 그러한 고초를 잘 모르고 연변사람을 연변깍쟁이 연변내기로 불렀다.또 연변사람들은 다 같은 유농족이기는 했지만은 안쪽사람들에 비해서는 정착성이 뚜렷하여 만날 이사하는 현상이 적었고 제한된 수입을 세분하여 입은 풀칠하지만은 주거에는 무난히도 신경을 쏟았다.그래서 안쪽사람들이 연변에 오면 잘 먹을수있는 대접은 못받았지만 촌락이 정연하고 깨끗함을 부러워 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연변이 나라의 말을  잘 듣는 붉은 지역이였고 그것이 연변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작용한것도 사실이다. 공량이란 경작지면적과 소출과 그리고 인구를 감안하여 定量하여야만 도리에 맞겠지만  집체화시대에 연변지역은 배를 곯으면서도 공량경색을 했으니 연변사람들 쌀독상황은 얼마나 막심했을가? 이러저런 연고로 연변인들은 연변내기로 연변깍쟁이로 불리울수밖에. 또 연변의 시골사람들 발길은 대부분이 연길구경이나 했을가 말았을가 하는 정도였고 화룡 룡정지역은 거의가 중국말이야 죽어라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로서 중국이면 연변이고 연변이면 중국인가 하는 공간인식수준을 내비치었으니 장춘 길림 할빈 심양 대도시도 둘러볼수 있었던 지역적우세를 지닌 안쪽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촌사람으로 보였던것이다. 나의 외삼촌과 이모는 연변출신이지만 흑룡강 길림 그리고 료녕을 줄곧 이사를 하면서 살어왔다. 좀 늦기는 했지만 대학 다닐 때, 외삼촌과 이모네 동네로 가본적도 있고 또 길림지역의 조선족촌락을 둘러보았고 동창생들중에 남도치들이 많아서 안쪽사람들의 생활상을 얼마 정도는 알고 있다 생각한다. 남도치들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지역에 살다보니 씀씀이가 대범하다.연변은 흉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들은 흉년에 대한 개념이 빈약했고 먹는데는 거의 돈을 아끼지 않았었다. 반면에 자칫하면 이사를 하는 습성 때문이여선지( 이사를 하면 집은 이전할수 없다.) 주거개선에 대한 투입이 적었었다. 연변사람들은 상술한 생활상을 보이는 안쪽사람들을 보면 촌락이 어지럽다 먹을줄밖에 모른다는 평판을 하였음도 자연스러운 일이다.또 랭전시기여서 북한만을 정통으로 생각한 연변사람들은 안쪽사람들의 남쪽말씨의 진미를 잘 모르면서도 또 중국말을 많이 섞어 사용하는 언어습관을 받아들일수가 없었기에 아빠야 밥 먹으라이 하는식을 비웃기도 했으며 그들을 남도치라고 불렀던것이다. 연변내기와 남도치, 연변사람들과 안쪽사람들이 서로 대방의 내실을 알고 살어간다면, 모두가 어느 정도의 풍족상을 지니는 날을 맞을수가 있다면 <내기>와 <치>는 재미있는 추억으로 될것이다.  한국에 가면 연변내기가 남도치보다도 좀 빼돌림을 받는다고 한다.연변사람이 좀 약고 신용성이 결여되고 의리가 약하다는 원인도 있겠지만도 연변내기들이 북조선과 비슷한 말씨를 쓰고 문화적으로도(특히는 음식문화) 북쪽에 치우고  또 6.25동란이 한국인들의 심성에 큰 상처를 남긴 사실과도 관련이 된다. 중국조선족은 보가위국이라는 중국당국의 호소만이 아니라 반도땅을 침략한 미국군을 조선반도로부터 몰아내기 위해서 지원군에 참가했다는 실상을 잘 아는 한국인이 별로 많지는않다. 6.25동란뒤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을 포함하여 반공책의 영향을 많이 받었기에 한국인들은 중국조선족도 6.25동란의 책임을 분담하여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헌데 우리는 언제 한번 정식적으로 사과를 한적도 없으니, 또 오늘날에도 핵이요 미싸일이요 뒤숭숭하니 북조선인에 대한 생각과 북조선과 문화적으로 조금 동일성을 보이는 연변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편차가 없을수가 없다.  
29    [잡담30] 학술과 학술쟁명의 기준에 대한 잡견 댓글:  조회:3008  추천:83  2008-03-31
잡담30  학술과 학술쟁명의 기준에 대한 잡견허동식학술이란 낱말에서 학과 술을 분리하여 學은 발견적이고 초창적이고 탐구적인 작업이지만 術은 學에 대한 보충이고 해석이며 學을 정리하는 작업이라는 설이 있다. 근년에 開創식사회구축을 두고 중국학술문화를 담론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으며 중국문화의 학의 결여와 술의 발달상태를 두고 반성하는 학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상술한 관점을 지닌 분들은 전중국에 모택동사상을 술적으로 연구하여 밥먹는 사람은 얼마얼마이고 <홍루몽>과 로신 덕분에 밥먹는 사람이 얼마얼마이고 하면서 또 중국근현당대의 걸출한 사상가인 모택동의 사상마저도 국외에서는 그의 군사리론만이 인지를 받는 현상을 一例하면서 중국인들의 초창적인 사유능력에 대해, 중국문화에 내재한 창조배태능력에 대하여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학과 술의 분리법이 중국인들의 문화반성의 세밀성을 보여준다 생각하면 또 중국인들이 문화반성 흐름이 아주 거창한 一面도 지닌다는 생각을 해본다.물론 사회정치환경의 돌변하에 정치인들과 형세를 만구한다는 명목에 의하여 중국의 문화반성이 기형적인 면을 보인적은 없는것은 아니지만 근현당대에 있어서의 중국문화반성은 기본상에서 자존성과 허위성을 초월한 全域적인 리성주의 특징도 보여주었다 생각된다.청나라말기에 있었던 보수파와 양무파 그리고 유신파들의 론쟁이라든가 신문화운동을 거쳐 신민주주의론의 융기 그리고 80년대중엽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여러가지 문화주장과 학설들의 활발상 자유상이 설명하여 준다.     또 중국문화반성은 세밀하고 거창한 문화반성이기는 하지만 정영인물들의 문화반성이 민중들의 문화반성에 同時성과 보편성을 가져다주지못하는 유감이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지목된다.       학과 술의 분리를 통한 중국문화반성의 一毛에 대한 리해를 적고나니 학술쟁명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적어본다. 우리는 누가 어떤 학술연구를 한다면 그런 학술연구를 진행하여 무엇을 할려고? 하는 공리적인 학술목적기준을 잘 사용하고 있다. 또 어떤 학술성과가 있다면 그 학술성과가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정서적인 도덕적인 시비적인 기준을 사용함도 비교적 보편화되여있다.  하지만 학술이란 학술쟁명이란 인간의 공리성을 초월한, 인간의 정서와 도덕이 내배인 인생관을 초월한 기준인 ,다만 인간의 진실과 진리에 대한 인식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준도 존재한다. 이런 기준을 학술의 실용성과 被리용성을 벗어나 인류가 자신의 인지능력을 무한대로 확대하려는 본성요구를 재현하는 기준이라 말할수 있겠다. 서양권에 공리적인 도덕적인 학술과 학술쟁명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동양에 비해서는 진실과 진리만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뚜렷하다.그 원인은 희랍정신의 진실과 진리에 대한 태도와 추구가 유전되였기 때문이 아닐가 생각해본다.서양권은 공리성과 도덕성을 전혀 버린 다만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대가를 낸 사례가 많지만 동양권은 누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값없는 죽음을 한다고 비웃음을 당하는게 상례이다. 진리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조금 익숙한 말이고 우리에게 <진리>와 <신앙>을 위하여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진리와 동등한 진실을 위하여 죽은 사람은 우리 주위에 몇이나 될가? 생각해본다 학술과 학술쟁명에 대한 공리적인 기준과 도덕적인 기준 그리고 진리적인 기준이 학술과 학술쟁명의 부동한 경지를 만들어줌을 알아야한다.  
28    [잡담29] 나도 도템시에 한마디 댓글:  조회:3472  추천:102  2008-03-20
잡담29  나도 <도템시>에 한마디       ----김관웅교수님의 <일언 님에게 답함>을 읽고  1 도템시 개념존재의 합리성에 대하여       남영전시인의 <도템시>에 다루어지는 시적대상이 도템의 범주를 초월한듯한 자연물(현상)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시 <물> )  도템이란 원시씨족 또는 원시부족들이 동물이라든가 자연물을 씨족과 부족의 혈연과 관련시키고  구체적인 동물과 자연물을 씨족 또는 부족의 표식물로 간주하고 숭배하는 미신을 일컫는다면 남영전시인의 <도템시>가 분명 도템만을 다룬것이 아니므로 <도템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를 대하면서 우선 도템시가 <시>임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시인이 자아명명한 <도템시> 개념이 과학적인가 합리한가보다도  <도템시>의 詩意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두고싶다. <도템시>라는 개념은 필경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고 詩적이고 개인적이고 随意적인 개념이므로. <도템시>라 해도 좋고 <도템문화시>라 해도 좋다.  어떻게 명명한다 하여도, 또  명명하는 목적과도 전혀 련관이 없이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는 종국에는 詩作으로 될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도템시>에 도템이 아닌 자연물이 다루어졌기에  < 도템시>라는 개념이 론쟁을 만들고는 있지만,  <도템시> 개념은 學理와 거리를 둔 詩理상에서의 성립과 존재의 합리성을 보여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대함에 있어서 학리적인 연구도 있어야 하지만 문학창작의 창조적本性인 文理와 藝理에 대한 수긍도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산천선생님의 <도템시>평론에도 비슷한 견해가 있음) 魔幻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등의 문학사조 개념을 두고 볼때에도 그 명명이 과학적인 학리적인 명명이 아닌 흔적이 보인다. 그 원인은 문학예술창작의 내재본질과 관련이 되며 또 번역과정(서방어로부터 중국어로의 전환)에서의 표현습관과 표현력과도 관련이 된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이고 학리적인 명명은 아니지만 문리적으로 藝理적으로 시리적으로는 합리성을 보이는 개념이고 또 중국어로부터 조선어로의 語境의 전환에서도 장애를 받은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2 조선족도템과 시집 <원융>     조선민족의 도템을 해명하려면 시간상에서는 조선민족이 통일민족(나라통일이 아님)으로 완전형성된 시기로부터 그 형성과정을 거슬러올라야한다. 조선민족이 통일민족으로의 완전형성시대가 삼국시대라는 조선시대라는 또는 다른 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설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우리 조선민족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이 부단히 융합된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 한다면 조선족을 구성해온 여러 씨족들과 부족들의 도템들을 조선족도템의 구성부분에 속한다고도 인정할수 있다.            또 살펴보면 어느 나라도 민족도 통일형성과정에 여러가지 도템에 대한 보존과 舍弃를 과정을 지니게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응집력을 만들고 민족내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민족내 어느 강대부족의 도템을 인위적수단으로(행정 문화 등) 전민족도템으로 모셨다던가  혹은  민족내 어느 부족과도 련관이 없는 새로운 도템을 구상해서 전민족적인 도템으로 만듬은 력사진전중에 사용되는 상투수단이다. 중국의 도템史도   바로 수많은 도템들이 龍도템으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단군신화도 통일민족완성이라는 리념을 앞두었다는 흔적이 보인다고 나는 억측해본다.   문헌자료결핍과 도템연구부족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과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조선족도템에 대한 진실한(고증을 거친) 결론을 내리기는 아주 어렵다.  인류에게 있어서 先史시대란 지금도 謎의 존재이고 도템이란 몽롱한 불확정적인 과거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남영전의 <도템시>를 조선족도템을 다룬 시가 아니다 론함은 남영전시인이 자신의 <도템시>에 다루어진 <도템>들이 조선족도템들이라고 언설함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불확실한 一言일뿐이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시>로 편성된 시집 <원융>은 시적대상의 단조로움과 詩意의 편애성으로 손상을 받았다는 평의(羅侃平 평)를 지닌 시집이다. 만일 남영전시인더러 확정된 조선족도템만 시적대상으로 하라 한다면 (물론 그런 요구는 읽어보지 못했다)  불정당한 요구일것이며 시인의 창작자유와 창작활보를 제한한다는 의심을 받을 언행일지도 모른다. 남영전시인이 조선족을 <두번> 대표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원융>은 시인 개인의 시집이고 그 다음에야 조선족시인의 시집임을 알아야한다. 3  민족정체성과 <도템시> 민족정체성에 대한 론의가 계속되고 있다.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의식이 <뿌리캐기>에 열중하는 주관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선반도의 장기적인 분렬상태와 우리와 한국과의 거래급증중에 발생하는 충돌과 위기 그리고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의 劣勢에로의 전환 등등이 사회객관원인으로 보여진다. 감정적으로는 조선반도인들이 반겨주든 싫어하든 우리는 조선반도와 혈연을 끊어버리는게 싫다 . 또 그들과 對等하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세계 어디 있는 배달의 족속과도 마찬가지이다 .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중국에서 버젓하게 살고싶다. 흩어지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인구감소도 없이 나날이 번창하게 살고싶다. 주관원인과 객관원인의 교차작용으로 하여 또  리상과 현실사이의 격차는 조선족사회더러 민족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거듭 진행하게 한다. 언론도 좋고 지성인들도 좋고 민족정체성에 론의를 모음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자각성을 높이는데 훌륭한 작용을 하여 왔다. 헌데 <도템시>와 민족정체성이 어떤 련관존재일가? 나는  42수의 <도템시>가 민족정체성을 혼동하게 한다는 설은 성립불가능이라 생각한다. 민족정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서, 우리의 인식수준하에서 불투명한 부분도 존재하지만은 누구의 생각이나 작품에 의하여 변하는 사물은 아니다. 민족정체성이란 기나긴 력사의 흐름으로 형성된 <진실된 모습과 본질>이다. 나는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배달족속들 모두가 우리의 민족정체성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인식수준의 차이를 보일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共認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혈연적인 문화적인 력사적인 정체성).  또한 주위에 사는 다른 민족들도 우리 배달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부인하려는 부인하는 사실은 없는듯하다.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자아인지와 타인인지를 받는 객관존재인 사실앞에서  <도템시>가 어떤 시일지라도 또 그 <홍보>가 여차여차 할지라도 배달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추호의 영향을 줄수가 없음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도템시>의 사회효력에 대한 과대억측은 나로서는 杞人忧天이라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에 대한 연구와 詩作은 조선족정체성의 기나긴 형성과정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고  서술이며 그것을 통하여 각 형제민족과 여러 나라의 화목과 공동번영을 기원했다는게 근본특징이다. 김관웅교수의 조선족도템에 대한 주장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주장은 조선족공동도템과 민족정체성형성의 종극적인 결과에 착안점을 둔 주장이고 해석이다. 그러므로 두분의 주장은 다만 민족력사과정과 민족력사결과에, 문화진행과정과 문화진행결과에  부동한 착안점을 두었다는 구별점을 지니게 된다.  4  나의 작은 항의  나도 자아비애에 걸린 사람인것 같다. 그래서 현재 나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불쌍한 상>을 보인다 생각된다. 조금은 먹고 입는 흉내는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현재가 비상시기가 아닐수가 없다. 이런 비상시기에 조성일회장님 김관웅교수님 남영전시인 등 지성인들이 민족을 위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돋보인다. 특별히 문학계 분들은 이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비상시기에 쟁론은 불가피적이다. 하지만 쟁론방식의 선택이 중요하다. < 문학동네> 라든가 <조선족발전추진회>는 개인이 운영하는 싸이트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거의 공용자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 화합이라는 낱말의 거력을 알고 있는 한 , 나는 누구든지 쟁론을 편격적이고 인격침입적이고 사인적인 면으로 돌리는데 견결한 항의를 표한다. 
27    [잡담28] 웃으며 지나갈 일일가? 댓글:  조회:3025  추천:76  2008-03-14
 163.com 보도에 의하면 21명의 연예계 정협위원들이 나라통일(대만과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해외중화계에서는 현재 漢繁字를 사용함)과 중화문화발전을 위하여 중국소학교에서도 漢繁字를 필수과목으로 해야 한다는 련명제안을 내놓았다 한다. 웃으운 일이다. 혹시 어느 精英인물들의 추종을 받았거나 민간조사연구를 하고 심사숙려적으로 진행된 행위일지도 모르지만은,  정협대표회란 그 누구나 暢談을 할 여건이 주어진 장소 또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언어학자들도 아니고 문화학자들도 아닌 연예계인사들이 이런 전문적인 제안을 했다는것은 나더러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한다. 漢繁字과를 소학교필수과목으로 하라는 제안은 아무리 목적성이 좋고 리상적이라할지라도  절때 애들의 장난은 아니다. 인구대국으로서 또 행정집권국가로서 중국에서의 어떤 문화시책의 실행도 막대한 본가總量을 지불하게 된다. 그 본가에 대하여 경제적으로는 환산은 가능하겠지만, 새로운 문화시책의 실행이 전국민과 전나라의 문화심리와 문화생태에 가져다주는 終局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과학적이고 세밀한 조사연구가 없이는 엄청난 언어문화학자라 하여도 감히 화제로 담지를 못하는 漢繁字사용이라는 전문적인 과제에 대하여 연예인들이 제안을 내놓는다는것은, 중국의 언어학자들을 비롯한 전문문화인들에 대한 목독에 가까운,  세인들을 놀래우는 一擧가  아닐수가 없다.       정협대회란 무슨 잔치집이 아니다. 명예욕을 실천하는 쇼 장소도 아니다. 또 提案성행이란 민주의 표징이고 결과이다 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정협대표로서 민고의 돈을 허비하지 말고 국민들의 시비판단능력을 깔보지 말었으면 좋겠다.
26    [잡담27] 한가지 리해되지 않는 일 댓글:  조회:2891  추천:71  2008-03-10
잡담 27  한가지 리해되지 않는 일         고중 1학년에 금방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嚴打를 해서 류망범들을 총살하는 날, 나도 그 觀客의 대렬에 참가했다. 그날치고 온 현성의 버스고 트럭이고 총동원하여 사형장으로 내려갔는데,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그래도 나젊은 사람이 많고 남자들이 많았다) 길거리에 나와 차를 잡아타고 마치도 큰 행사에 참석하는듯한 흥성흥섬함을 보여주었다. 현운동대회를 해도 그런 장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도대체 사형에 대한 흥미가 왜서 그렇게 도도했을가?           학교 문앞에서 사람을 만재한 트럭에 기여올라(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때는 날파람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질주하는 트럭를 따라잡아 키를 넘는 높이를 기여넘어서 사람을 빼곡하게 실은 트럭에 오른다는 일은 말이 쉽지 지금은 엄두를 못내겠다) 사형장에 도착하니 공안국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전혀 사형장에 접근도 못하게 했다. 멀리서 망원경도 없이 사람그림자나 바라보다가 탱하고 총소리가 울리는듯 하더니 사람들이 다시 차에 몰려서 귀로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보고 다시 공짜 트럭에 올라 학교로 돌아왔다. 심정은 맹랑했다. 아무것도 못보고 땀만 흘리고 고생만 하고.           이 사건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자아리해를 완성하지못했다. 호기심이라든가 隨从심리인가 관객심리인가 하는것도 있었겠지만 사형집행에 대한 드높은 흥미의 근원에 대하여 명철히 알지를 못하겟다. 사형당하는 류망범들을 그렇게 증오한것도 아니였고 또 사람은 누구나 제가 죽는것은 무서워한다는데 어째서 남이 사형당하는것은 구경하고싶어할가? 人之初 性本善이라고도 하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인성의 음영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던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조금 소름이 끼칠뿐 리해가 아니된다.  
25    [잡담26] 나도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 에 한마디 댓글:  조회:3209  추천:94  2008-03-10
잡담 26 나도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에 한마디  허동식 거의 매년 겨울마다 연변행을 하면 시골은 말할것없이 도시에서도 놀고 먹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물론 연변의 實業경제상황이 좋지않어서 취직이 힘든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한족들에 비해서는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경향이 두드러져있다. 하지만 나는 <<일하기 싫어함이>>이 조선족의 근성이라고는 느껴지지않는다. 력사의 퇴적물이고 특별시대 특별현상이다. 1 로동이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로동과 로동내재의 쾌락을 위하여 하는 로동으로 구분이 된다. 아주 오래동안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한 로동에만 종사해왔다. 로동과정중에서의 쾌감과 로동성취의 쾌감을 위하여서 하는 로동과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살어왔다. 집체로동에 따르는 <큰솥> 분배형식과 로동성취의 미소화(소위 원시자본축적이 불가능)가 조선족들의 로동을 다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수준에 머물게 했다. < 죽게 벌어도> 로동의 재미를 얻을수 없었던, 사회경제구조가(연변경제는 근본적으로 附價値가 저하인 농업경제이다) 조선족의 로동심리에 마이너스적인 그림자를 만들어주었다. 2 정체성의 혼란과  유농민의 근성도 문제이다. 중국이 작년에야 <물권법>을 통과했다. 헌법에서의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을 실용화시킨 법적인 사회적인 행동이 좀 늦은 편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조선족중에서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많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 나는 한반도 사람인가 대륙사람인가> 하는 심리적인 장애를 받았다. 부지런히 일해서 무엇인가 장만한다면 지니고 갈수 있을가 하는 의구심과 에라 모르겠다 우선 먹고 놀고 보자 하는 유농민들의 근성이 대폭팔을 이루면서 원시자본축적에 있어서의 고정재산투자가 비률이 낮은 <조선족식운영>을 어느 정도 보편화시켰다. 근년에 정체성의 혼란의식이 적어지고 중국의 사유재산보호가 좋아짐에 따라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등의 경제운영방식의 변화가 있지만 경제초창기의 비고정재산투자비률이 높은 탓으로 본 경제손실은 조선족이 한족보다 막대하다. 3 중국경제수준과 한국경제수준의 현차도 문제이다. 연변에서는 놀고 먹지만 한국에 나가면 엉뎅이 나가는줄 모르고 일한다. 원인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한국에서의 취직이 비교적 쉽고 한국 임금이 중국보다 엄청 높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은 우리의 경영술과 손재간으로는 중국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로동자가치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연변에서 만일 한달에 4-5천원정도 벌수 있다면 조선족들의 노무수출인원수가 많이 줄어들거라 생각된다.       4 사회풍기로 표현되는 사회결구가 리상적이 아니다. 한국에서 벼라별 고생을 하면서 묵돈을 쥐고 온 사람들도 연변에 돌아오면 눌러앉아 사는 <<똑똑>한 사람들 생활도 웬간한 수준이 아니고 심지어  사치할정도로 지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심리평형을 이룰수가 없다. 너들은 앉아놀면서도 먹고마시는데 에따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하는식으로 변해버린다.       한마디로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함은 혈연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회개혁의 침체와 생존환경 격변의 산물이다.
24    [잡담25] 평등과 자유란 무엇일가? 댓글:  조회:3011  추천:74  2008-03-09
잡담25  평등과 자유란 무엇일가?   평등과 자유는 자주 듣고 써먹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완벽한 리해를 진행하기 어렵다. 유럽문화권의 낱말이 漢文문화권의 낱말로 전변하는중에 語境의 장애를 받은것은 물론이고, 또 오래동안 평등 자유 하면 브르죠아 쓰레기사상이라는 감투를 쓰는것도 두려운 일이였고, 무엇이든 현실리익을 따지는 습성으로 하여 평등 자유를 알아서는 밥이 생기느냐? 하는 론리도 작간을 하였는지 여태껏 평등과 자유의 진미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굴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헌데 밥먹고 할짓이 없어 그런지 평등과 자유라는 낱말의 위대성을  頓悟하고싶은 욕구가 커진다.       평등과 자유, 어학적인 법률적인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느 중국학자의(이름은 까먹었음) 평등은 인간의 神性이고 자유는 인간의 人性이라는 해석에 대한 나의 옅은 리해를 기록하고하고싶다.       인간은 현실사회에서 절대적인 평등을 이루기 힘들다. 인간이 상호간에 인간을 참조물로 하였을 때에는, 인종 성별 년령 능력 등으로 표현되는 생리적인 사회적인 불균형을 만나게된다. 이런 불균형이 인간불평등의 자연상태이고 원인이다. 하지만 神이라는 참조물을 상대하여서는 절대적인 인간평등이 가능하다. 전지전능하신 신앞에서는 상기한 인간들 사이의 <<세소>>한 차이점과 그로서 형성되는 불평등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비록 불평등이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문화화로 응고될수있지만 神의 위대한 도덕성과 능력성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모든 인간 불평등은 존재의 의미가 연기처럼 날려버리고만다. 인간으서 인간의 국한성(시간적인 공간적인 능력과 인성의 비완벽성)을 알게 되면 심혼은 자연적으로 신의 세계에로 서서히 다가서는 경우가 많으며 인간의지를 신에게 의탁한다. 그러므로 평등이란 바로 인간자아판단이며 유심주의로 표현되는 일종 아름다운 경지에로의 행군이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를 떠날수가 없으므로 절대적인 자유를 얻을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인신적으로 심혼적으로 자유(인간능력의 절대화)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 욕구실현이 불가능하지만 또 불가능함도 잘 알지만은 자연과 사회를 초월하려는 , 자신을 초월하려는 심지어 신령을 초월하려는 심층적인 욕구가 바로 人性이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사람의 천성으로서 어떤 수단으로도 압제할수가 없다. 평등과 자유, 신성과 인성,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23    [잡담24] 대학교시절의 나의 공부 댓글:  조회:3107  추천:71  2008-03-09
잡담 24  대학교시절의 나의 공부       나는 대학에서 소위 공상행정관리학을 전공했는데 合同관리 市場관리 기업등록관리 상표관리 광고관리 등을 배우는척했다.  실말이지만 신물이 났다. 시장관리도 합동관리도 기업등록관리도 상표관리도 광고관리도 노예사회로부터 시작하여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 사회주의사회이라는 틀에 째인 순서로 배워야했는데, 이미 기초과목인 정치경제학이라든가 맑스주의철학이라든가 농공상업경제학에서도 그러한 사회발전순서들을 얼음판에 박 밀듯 암기하느라 진땀을 많이 흘렸으니, 하기싫은 사회발전사 공부때문에 나라돈(지금 생각하면 나라돈이 아니라 민고의 돈이다)과 부모 돈을 헛되게도 썼다. 졸업뒤에 언젠가 대학교 선생님 한분을 만나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노예사회로부터 사회주의 길을 다그칩니까? 고 분풀이를 했다.             지금까지 좋은 인상을 남긴것은 필수전업과가 아닌 선택과목인것 같다. 특별히 종교학이라든가 문화사라든가가 현재까지 기억에 좀 남는데 내가 그런 문사면을 좀  좋아한 원인도 있겠지만도 교과서도 없고 필기만 하는 상기 과목들 강연중에 선생님들이 간혹 모르는척하고(혹은 고의로?) 禁區를 벗어나 異說들을 소개하기도 했던 원인도 있다고 생각된다.      또 아주 인상이 깊은 일은 <자본론선독>을 배울 때다. 중국의 자본론은 독일어에서가 아니면 러시아어에서 번역한것이라 생각되는데 나 같은 서구어의 표현방식에 깜깜부지인 사람들은 天書읽기였다. 그런데다가 자본론을 강의하시는 선생님마저도 거의 강의중마다 오리무중에 빠져서 강의가 自圓其說커녕 학생들의 비웃음을 자아내는 정도여서 <자본론선독>은 사회발전순서를 암기하는 효력도 보지못했다.       그럭저럭 3년반을 허송하니 학교에서는 졸업론문을 준비하라고 했다. 론문명제는 선생님들이 내준것에서 학생들이 자아선택을 했는데 나는 제일 작은 명제를 선택하여는데 << 중국시장관리를 론함>이였다. 다른 명제들은 <중국>보다도 큰것들이 내비치어서 나는 엄두도 못냈고 또 은근히 시장관리는 <도적>할만한 자료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탓이였다. 그래서< 시장이란 상품교환을 진행하는 장소이다……시장관리는 국가권력기관이 국민경제를 령도하는 방식이다 > 하는 만장의 허튼소리를 베껴서 지도교수한테 바치고 또 굽신굽신도 하고 미남식미소도 던지고(지도교수는 師姐였음) 얼룽땅뚱 고비를 넘겨 급제를  했다. 그적에는 중국이 계획경제를 하느냐 시장경제를 하느냐 쟁론중에 우리 대학에서 한 학생이 졸업론문을 <중국은 시장경제를 하여야 한다>는 반동주장을 제안하여 졸업장을 못탄 사례가 있었기에 그 누구나 선생님 말씀대로 나라의 말슴대로 졸업론문을 쓰는게 아주 류행이였다.      나는 대학교란 우선 학생들의 독립사고능력과 독립판단능력 등을 키워주는 장소여야 한다고고 생각한다. 헌데 돌이켜보니 내가 다닌 대학교는 사실 독립성이 아닌 괴뢰성을 만들어주는 장소였길래 마음 어딘가가 쓰려진다.   
22    [잡담23] 나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한마디 댓글:  조회:3356  추천:74  2008-03-08
잡담 23 나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한마디 허동식 우리의 여러가지 <<렬근성>>에 대하여 <합리한 반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욕심을 두고 많은 조사연구와 깊은 생각을 벗어난 쪼박글들을 갈겨대기로기로 한다. 선배님들 제군들 미안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어는 거의 긍정적인(褒义) 말로가 아니라 부정적인(贬义) 말로 사용되는듯 하다. 그릇된 질투심을 두고, 그 질투심의 악질성에 대해서도 잘 알지만도 , <배가 아픈것은> 정당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는 포용의미도 다분하게 내포되여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종족이든 질투심을 면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우리 몸에서 질투심이 질벅하게 표현이 되는 한, 또 지금까지도 비도덕적으로 진행을 이루는 상황에서는 나도 그 질투심을 타매하고 싶은 의욕이 굴뚝같음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우선은 동북아지역이라는 생존單元의 농경생산방식과 가족운영을 축으로 하는 농경생활방식에 대한 검토해본다. 동북아지역은 력사적으로 큰 홍수의 피해를 본적은 없다고 생각된다. 비교적 리상적인 植被조건과 길이가 상대적으로 짜른 하천, 그리고 하천이 경유하는 남북위도차지가 작은 등등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하천범람이 적었고 관개업도 큰 발전을 이루지못했다. 관개업이 발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농경사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집단로동보다도 개인적인 가족적인 로동이 많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북아지역은 춥고 곡물의 생장기가 제한되였기에 주기적으로 농경에 있어서 집단로동을 진행하였음도 사실이다. 당대에 이르러서도 파종계절이라든가 수확계절이라든가에는  <고양이 손도 빌고싶은 때>에는, 그리고 집단로동효력이 개인로동효력을 초월하는 경우에는 집단로동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점은 동북아지역의 농경집단로동의 목적이 장기목적성을 꽤나 떠나, 코앞의 고개를 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림시로동조합에 있다. 림시로동조합이란 장기적인 고용관계도 존재하지않고 림시동일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인 의무와 책임도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림시로동조합에 존재하는 사람간의 합작은 림시적이고 현실적이다. 공동리익의 장원성결핍과 합작과정의 림시성은 집단로동과정에서의 인간관계를 가냘프게 만든다. 동북아지역에 장기간 존재한 상술한 림시집단생산방식은 로동력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드는데 아주 불리하다. 필요성이 있으면 로동력간에 림시합작으로 끝내고 갈라지면 상호간의 독립성을 보존하던, 지역특색이 다분한 생산방식이 협조심 대신 질투심을 만든 원흉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동북촌락에 가면 중국 중원지역과 강남지역의 촌락과 비교를 해본다. 동북은 촌락구성이 비교적 너르다. 물론 사람이 적고 땅이 넓은 원인도 있겠지만 어느 측면에서는 동북아지역의 가족과 가족사이의 상호의존도가 작다는 나름의 추측도 해보았다. 그리고 상호의존도가 완전히 령으로 하락한 상태가 아니므로 촌락을 이루기는 하는구나고 나름의 판단을 해보았다,      집단생산로동중에서의 인간상호관계상태가 상응한 문화심리를 만들어준다면 민간의 가족운영방식을 대표로 하는 생활방식도 문화심리형성에 큰 영향을 할지도 모른다. 동북아지역의 가족운영은 장남장손식이다. 아주 오래동안 잘 사는 가족이든 못사는 가족이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장남장손켠에 큰 경사도를 이루었기에 결국은 가족운영에 있어서도 질투심의 번창을 만든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유럽은 중세기에 분봉제를 채용했기에 딸자식도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거나 형제자매들과 나누어받는 현상이 존재했지만 동북아지역은 장남장손이 아닌이상 그런 평균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장남장손식 가족운영은 불공성을 내포하였기에 가정내부에서도 질투심을 만연시키는 내재적인 론리성을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문화적인 요인도 생각해보고싶다. 기독교권에서는 하느님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의식이 오래동안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래서 현세에서의 불평등이 많이 존재하여도 누구나 하느님앞에서는 죄인이고 다 같이 심판을 받으리라는 문화심리가 인간사이의 질투심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 하지만 동북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현세에서의 불평등을 합리화시키고 제도화시키고 문화화시키는 과정에 질투라는 악령을 유별나게 만들었을수도 있다.     전통농경사회의 흔적이 나날이 옅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한. 대규모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집단로동의 목적이 하루이틀이 아닌 장기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 또 사회분업의 필연성과 합리성이 전사회적 인지를 받고, 가족운영에 있어서의 불평등이 사라지고, 문화의식상에서의 정당한 진취심이 이루어지면, 우리도 언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를 옛말 듣듯이 대하고 또는 외국인들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할수도 있겠다.             
21    [잡담22] 나도 '냄비근성' 에 한마디 댓글:  조회:2921  추천:72  2008-03-08
잡담 22 나도 <<냄비근성>>에 한마디        소위 <<냄비근성>>을 문화심리이고 행위방식이라 점찍는다면 무엇이 <<냄비근성>>일가 생각해보고싶다. 빨리 비등하고 빨리 랭각되고 또는 침착하지 못하고 <<약삭바르게 >> 돌아치든가 지구력결핍 등등의 현상들로 라렬되는데 나는 사물에 대한 리지적 사고능력의 결핍증과 감성주의로 작법으로 귀결해보고싶다.        국민 또는 민족의 비교적 보편적이고 유전적인 습성으로까지 잠적하고 있다면 조금은 웃으면 대할 일이 아니다. 또 여차여차하게 마이너스면도 지니고 있으니 나도 나름의 <<반성>>을 해본다.       혹시 인종적인 원인이 작간을 하는것은 아닐가? 유물론사관을 지닌 사람들한테 욕먹을 의문이다. 물론 피의 내용이란 력사의 결과임을 나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혈연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人群이 동질성을 지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서 수천년 비좁게 살아왔다는 점은 나더러 눈길을 지역적생존환경의 지속성을 돌이켜보게한다.       일반적으로 북방수렵민족과 반도토착인들이 피를 섞어서 우리를 만들었다 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경작지의 결여), 곡물의 종류와 수확고가 높지를 않은데다가 또 비교적 추운 기온대에 견뎌내려는 暖房의 원가가 높아서 우리는 중세기는 물론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생활재부의 잉여를 축적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구체적인 통계수자는 잘 모르지만 책에서 읽어본 력사사건 하나를 나름의 근거로 대 보련다.        누루하치가 중원정복을 시작하니 중국명나라에서 대신들이 상책을 내놓느라 옥신각신 하는중에 누군가 조선과 협력하여 앞뒤로 공격을 합시다 하는 주장을 세웠다. 황제가 상기 주장이 거의 근사한 책략이라 생각하여 머리를 끄덕이자 다른 대신 하나가 각별한 반대를 하였다. 아뢰기를 누루하치는 명과 조선의 협공을 받는게 두려워서 중원진공전에 이미 조선토벌을 했나이다. 조선군 만여명이 전멸을 당했나이다. 페하께서 생각해보십시오. 만여명이 전멸을 했는데 조선이 무슨 힘(인력과 물력)으로 누루하치의 배후를 엄습할수 있겠나이까? 그 말에 명의 황제는 앞뒤공격 책략을 포기하고 .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중세기 전쟁에서 만여명이 전멸했다는것은 별로 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볼진대 만여명이 전멸당하고 다시는 명을 도울 인력과 물력 재력을 갖추지못했다는 사실이 그 시기 조선국력의 크기를 잘 말해줌이다. 국토가 작고 삼면으로 편하지 못한 항해능력으로는 개발엄두도 못내는 바다가 있고 , 북으로는 그적의 생산력으로는 운영가치가 크지않은 만주벌과 시베리아( 시베리아가 있는줄은 알았을가?) , 또 매냥 범처럼 도사려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엄청난 중화제국의 존재—이것이 바로 반도사회가 중세기로부터 거의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지성학적인 생존환경이다. 수동성을 만들게 하는 지역자연환경과 지성학적인 생존환경으로 하여 또 생산력의 열악성으로 하여 부득불 여러가지 습성들을 지니게 된것이 아닐가? 물론 어떤 습성은 아니 좋은줄을도 알았겠지만 객관조건의 미숙과 주관노력의 결핍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변화다단한 국내정세와 국제정세에 견디려면, 개인도 좋고 나라도 좋고 물질재부의 축적과 정신재부의 비약이 있어야 한다. 물질재부의 축적은 가능성을 만들어주고 정신재부의 비약은 자신심과 좋은 방책을 제공하여준다. 그렇지않는 상황에서는 ,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심사숙고할 겨를이 없이 빨리 돌아치고 약삭바르게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사물에 대한 리지적 사고능력의 결핍증과 감성주의로 작법이 살판을 치게된다.       2차대전뒤의 다원사회의 도래는 <<약자>>에게는 참으로 챤스이라고 생각된다. 또 지역적인 제한성을 어느 정도 수정해주는,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을 포함한 현대과학기술발전이 <<덩치를 크게 만드는>>중의 최대수단이다. 잘 서두르고 운이 좋으면  <<잉여>>를 축적할 가능성이 비교적 존재하는 이 시기를 잘 리용하여 어느날인가 사물에 대한 리지적 판단대신 무엇이든 행동으로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문화심리 또는 행위책이 빨리 개조되고 국민 또는 민족성원들 모두가 <<사색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여본다.
20    [잡담21] 일본 그리고 일본인을 잘 아는 중국학자 댓글:  조회:3894  추천:111  2008-03-05
잡담21 일본과 일본인을 잘 아는 중국학자허동식      알고 지내는 아무개가 일본려행을 다녀왔다. 마침 중학시절 반주임선생님이 남경려행을 마치고 돌아온터라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마련했으데 선생님의 일본이 어떻던가 하는 물음에 아주 좋더라 답하니 선생님은 대번에 검으락푸르락 변해지면서 하는 말씀이 내 금방 남경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샅샅이 뒤져보고 왔는데 어떻게 그런 종족들의 나라를 좋다고 하느냐? 그 노발대발하는 기세에 놀라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한다. 만행을 저지른 종족과 그 종족의 나라—필연적인 론리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중국인들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가? 우리가 알건대로는 일본인들중에는 중국통이 아주 많다. 먼 옛날 견당사가 중국을 방문하던 중세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중국인을 깔보든 우러르든  일본인은 중국과 중국인을 여러모로 통한 전문가들이 많다. 반면에 중국은 일본과 일본인을 아는 사람이 적다. 또 알려는 사람도 많지는 않다. 일반인으로서는 기껏해야 지리교과서에서 배운 토끼꼬리만큼한 일본개황, 그리고 스모우라든가 사무라이라든가 사쿠라라든가 또는 일본의 전자제품과 자동차, 좀 나아가서는 중국과 同族同文이라는 등등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거의 전부의 인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중국사회학과에서 사용된 어휘의 절반이상이 일본에서 수입한것이고 일본인은 탐욕스러울 정도로 외래문화를 배우고 소화하며, 심혼이 섬세하고 정력적라는 등등의 일본과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적다. 근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운무중의 꽃구경>>방식을 일본과 일본인을 상대하는 문화심리로 행위방책으로 사용하여왔다. 민간사회에서 지금도 일본 하면 <<小일본>>이고 일본인이면 <<鬼子>>라고 하는 현상들과 그 본질은, 중국과 일본의 지성학적인 내재관계와 경제리익관계를 리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원한을 지속시키려는 욕심이 없다는>> 경지에 오름에 있어서의 조화로운 징조는 아니다. 지나친 문화자부심을 버리고 력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상대함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중국인으로서 일본과 일본인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아왔던  중국학자들과 그들의 력작들이 학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1 黄遵宪(1848-1905) 청나라 말엽 외교가이고 저명한 애국시인으로서 청나라 일본주재 대사관 참잠을 지낸적이 있으며 <<일본국지>>라는 력작이 출간시에 <<몇년만 일찍 출판되였더면 갑오전쟁에서 중국이 참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 周作人 (1885~1967)근대 저명한 문학가, 1945년 매국죄로 징역살이,1949년 출옥뒤 문학편집으로서 문학작품번역에 정진. 주작인은 자신의 일본생활경력과 객관적인 독립사고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를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3 戴季陶 (1891~1949.2.11.), 중국국민당 우익사상가로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 <<일본론>>이라는 서적은 경전적인 력작으로 평가되고있다.  
19    [잡담20]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서적을 읽으면 좋을가? 댓글:  조회:3124  추천:89  2008-02-27
잡담 20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서적을 읽으면 좋을가?       오늘 張遠山의 <<고전중국에로 진입하는 5부경전>>이라는 글을 다시 읽으면서 꽤 재미있어 그 내용을 간추려본다.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고전중국을 알려면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은가 묻지만 나는 그런 재간이 없어 줄곧 침묵을 지켜왔다. 근간에 그런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비록 부끄럽기는 하지만 수십년간 눈봉사가 코끼리를 더듬는 작업을 계속해온 경력으로 표층적인 리해력은 어느 정도 있겠다는 자아위안삼아 청년들의 참고로 5부의 경전을 추천해본다. << 홍루몽>>은 종법사회였던 중세기 중국의 가정에 대한 백과전서이다. 음울하고 인성을 압제하는 가정운영방식은 중국인의 성격에 비건건강성을 내비치게 하였고 생명이 극단적인 압제를 받으면 악성적인 파괴력과 회손력을 지니게 되는 과정을 쓴 글로서 고전중국으로 들어가는 입문서적이다.( 가보옥의 출가가 보복적인 파괴력의 로출이다.—나의 리해) << 수호전>>은 가정을 뛰쳐나와 사회로 입문하는 서적이다. 중국의 사회는 江湖(민간사회)로도 표현이 돼왔고, <<수호지>> 가 바로 고전중국의 관청과 마적이 결탁하고 피비린 수단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강호의 축영도이다. 민간사회에서 사회주류로 부상하면 종법사회의 틀과 질곡을 벗어나 당연히 가정의 지배자로 될수가 있다.( 례를 들면 형인 무대랑도 동생인 무송의 지배를 받고, 멸문을 당한 扈三娘도 애각호 왕영의 마누라로 되여야 한다—나의  리해). 피비린 강호을  상대하여서 음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정이 어느 정도는 따사로운 보금자리가 아닐가? << 삼국연의>>는 민간사회를 벗어나 중국정치사회로 입문하는 서적이다. 廟堂이란 최고권력중심지로서 가정통치권과 민간사회통치권을 초과한 국가통치권쟁탈장소이다. 때문에 <<삼국연의>>에서는 음울하지만 따사로운 가정도 없고, 피비리지만 의기로운 강호도 없다. 다만 모든 륜리도덕 리상을 팽개친 음모와 판가리뿐이다. 중국인의 지혜가 자연을 탐색하고 국민의 복지를 만드는데 잘 사용되지 못하는 유전적인 원인을 얼마간 알수가 있다. << 사기>>는 고전중국의 진정한 백과전서이다. 가정과 강호와 묘당의 갈래갈래를 비교적 진실하게 , 노예사회로부터 봉건사회에로 발전하는 맥락을 확연하게 묘사한 서적이다. << 장자>>는 고전중국에 있어서 문학의 취미성과 력사서적의 진실성을 벗어나 중국인 특유의 시적철학에로 진입하는 서적이다. 음울한 가정과 피비린 강호 그리고 음험하고 잔인한 정치를 초탈하여, 순수한 경지에로 이르려는 몸부림이 엿보인다.              여기까지 간추려보니 , 5부경전이 중국현대사회를 아는데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18    [잡담19] 생활의 미로 댓글:  조회:2959  추천:80  2008-02-27
잡담19   생활의 미로   곁에 있는 아무개가 앞으로는 시골에 내려가 토종돼지나 키우면서 한가롭게 살겠다는 의사표달을 했다. 그것도 좋지 하는 한마디로 수긍적인 답을 해놓고 나는 나의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대학교시절 연변 어느 시인의 시집을 읽고서 <<농경문화의 말로>>라는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오랜 농경과 소농경제에 젖으면 목가적인 향토애도 추하게 변모된다는 斷論적인 글이였는데 꽤나 옳은 말이였다고 줄곧 자아시인을 하여왔다.     거의 20년사이에 생활환경은 많이 변화였다. 물론 천지개벽식은 아니지만 중국식산업화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이화를, 물질세계의 종속감을  때로는 느끼기도 하는것이  나의 생활상 일부분이다. 그래서 농경문화를 <증오>하던 나도 앞으로 경제적인 허락이 되면 일년사시절 발이 가는대로 려행을 하고싶다 또는 여름에는 오대산에 살고 겨울에는 해남도 삼아시에 살련다는 욕망을 내비치기도 하고 시골에 가서 채마전이나 가꾸면서 한적한 독서생활을 하고싶다는 욕구표달을 하기도 한다.    구식농경에 대한 철저한 비판자로 자처하면서도 배운것이 없어 그런지 현대사회의 불화를 대하며는 또다시 향토의 귀화를 꾀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가?    말이 쉽지만 현재 내가 시골 내려가면 살아갈수가 있을가? 경제와 체력은 뒤전에 치더라도 배수설비가 없는 화장실과 온돌에(내 심중의 시골은 북방시골) 불을 지피면서 콜록콜록 기침도 해야 하고 또 술을 먹고싶으면 말이 오갈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하고 인터넷도 있어야 하고 간혹 시내로 다니려면 자가용도 있어야 할텐데! 이렇게 생각을 쓰담듬어보면 내가 바라는 시골꿈도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판단한다.    중국은 도시인들도 많이는 시골태생이다. 내 나이 또래에서 할아버지가 시골출신이 아닌 사람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인지 도시인들도 머리속에는 시골의 때가 많이 남아있고 농경의 전통적인 인륜에 미련을 지닌 사람이 많다. 헌데 근년의 산업화가 가속화화되면서 고독감이라든가 소외감이라든가 또는 실패감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전통적인 향토생활에 돌아가 안락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조금은  많아졌다는 무단적인 느낌이 든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런 상을 생활의 미로라 이름해본다. 생활의 미로는 성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당할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집단적이고 추세적이고 보편적인 일이라면 사회적인 근원이 있을것이다. 그 근원에 대한 연구와 대책은 사회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돌려주고 나는 다만 내 자신을 어떻게 하면 당금 생활의 미로에서 빼돌릴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외국류학을 생각해보았다. 미국에 가서 무슨 둥딴지같은 공부를 생각했지만 영어를 전혀 모르고 비자도 힘들고 돈도 없으니 꿈에 불과하다.    큰 부자가 될 생각을 해보았다. 실업적인 재능은 없으니 본전을 마련해서 주식을 하면 될가 했더니 요즘은 주식시장에 찬 바람이 쌩 하고 분다. 어느 사원에 가서 스님들의 시중이나 들어볼가? 헌데 좋은 사원에는 큰 돈을 시주해야 하고 <뒤문>도 잇어야 한다니. 그런 능력은 없고. 솔직한 말이지만 생활의 미로를 깨칠 방책이 주어져있지않다. 솔직한 생각이지만 중국식산업화속에서 농경의 그림자를 되돌어보는것도 바람직한 이야기는 아니다.    
17    [잡담18]《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댓글:  조회:3205  추천:79  2008-02-27
      < < 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문예지의 운영이 많이 힘들어졌다. 문예지를 대체하는 여러가지 문예형식의 활성화가 주요한 객관원인이다. 하지만 문예지의 자책적인 반성이 없이는 문예지의 정상적인 운영에로의 귀환도 불가능한듯하다.       <연변문학>이 독자들을 잃었다. 인구의 감소, 여러가지 문예형식의 활성화에 따라 취미적으로 오락적으로 <연변문학>을 읽던 독자들의 버림을 받은지가 꽤나 오래다. 그 다음은 문학인들을 잃었다. 문학인들이 꼭 챙겨야 했던 호황기가 끝나고 많은 문학인들마저 코웃음으로 대하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        < 얼음이 석자로 얼어든것은 하루아침 추위를 탓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연변문학>의 현황을 두고 현임운영진이라든가 현임작가협회만 대성호질하는 작법도 옳은 판단이 아니다. 아주 오래동안 <연변문학>이 문맥을 벗어나 관맥과 인맥에서 자맥질하여온 사실이 바로 <연변문학>이 오늘날을 지니게 된 주관원인이다.       지나친 官緣과 人緣을 취지로 하여 말만은 듣기좋은 순수문학지이고 거재된 작품과 평의된 수상작들이 저질화를 이루었다. 저질화를 만드는,독자들을 무시하고 문학인들을 무시하는 작법이 쌓이고 부패되여 세인들의 웃음을 자아낼만한 현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운영책에 있어서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잡지의 装帧은 비현실적인 한국화를 보이면서 구매자의 경제수준을 무시하는 본가를 만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장편이 많고 련재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快粲활용으로 사용되여야 할 문예지가 단행본 연회석에 가가운 잔치를 벌리니 독자들이 피곤하다. 원고료도 문제이다. 많든 적든 글쓰는 사람들의 자존심과 허용심을 무시해서는 아니된다. 어떤 문예지로 부상할가 하는 자아착상이 주요하다. 소위 중국어에서 말하는 定位로서 <장백산>과 <도라지>와 동등한 착상이 아닌 , 말하자면 취미성이 좋은 방향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엄정한 방향으로 갈것인가 또는 그 가운데를 갈건가 하는  자아착상을 구안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를 상대해서는 가격이 싸고 내용이 풍부한 문예지가 그래도 방침책이다.  
16    [잡담17]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도 필요하다 댓글:  조회:3350  추천:80  2008-02-16
       희랍문명의 성과는 인간의 정신건강과(본체론철학)과 몸건강(올림픽정신)에 대한 끈질긴 추구라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생명력은 제한되였고 인간의 생리적기능은 자연을 상대로 하였을 때 너무나도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대신 인간은 영원히 도달할수 없는 경지에로의 영원한 추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림픽을 대표로 하는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이 바로 그 실례의 하나이다. 우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스포츠문화정신은 아직은 반성할 여백이 많다. 여러가지 주객관원인으로 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스포츠문화정신은 스포츠를 떠나 실리라든가 종족주의라든가 협애한 애국주의라든가 정치라든가에 무던히도 리용된다. 중국이 올림픽을 주최한다는 일은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스포츠정신은 퍼그나 람루하다. 우리도 이제는 중국에 다녀온 외국스포츠대표단의 장끼를 감상할줄 알아야 하고 뜨거운 갈채를 보낼줄 알아야 한다.       얼마전 중국의 림단이 한국에서 진행된 바드민톤경기에서 재판에게 당하던 억울함과 같은 추태극을 절때 만들지 말어야한다. 위대한 올림픽과 스포츠문화정신에 미안한 일을 삼가하여야 한다. 과장한 이야기로 가령 래년에 혹시 중국 대표단이 금메달 하나를 따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해도 우리는 서운함을 신사숙녀식으로 감출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축하할줄도 나눌줄도 아는 기질도 지녔으면 좋겠다. 중국스포츠계는 어떤 나라와는 달리 선수선발법이 조금 <이채>롭다. 이채롭다 해서 해서 다 좋은것은 아니고 공평한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금메달을 위해서는 선수선발법을 포함하여 위대한 스포츠문화정신과는 거리를 둔 여러가지기 작법이 많이 존재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 얼핏 보기에는 가난하고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일수록 금메달과 금메달 뒤에 작각하는 민족자존심과 같은 은페물을 선호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나라의 봉페되고 포섭력이 빈약한 문화심리와 관련이 크다.     만일 당나가 중국스포츠계의 不成文규칙의 희생자이고 또 한국에서 확실하게 올림픽 참가선수권을 가질수가 있다면( 중국에서 하는 올림픽에서 본적이 중국인 선수를 내보내여 무슨 쇼라도 벌리려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래년 북경올림픽에 참가해도 전혀 무방하다. 당나가 중국을 이겨도 좋고 중국에 져도 좋다. 다만 좋은 경기를 해준다면 중국인 한국인을 물론하고 너그럽고 인류정신에 넘치는 시각으로 당나의 경기를 바라볼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만일 당나가 우승을 한다면 중국의 스포츠선수선발제도개혁의 좋은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당나를 두고  매국역적인가 무엇인가 거론함은 우리의 스포츠문화정신이 아직은 유아기에 맴돌고 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15    [잡담16] 남방 빙설재와 중국의 댓글:  조회:3059  추천:74  2008-02-06
      올해 음력설을 앞두고 중국 남방에는 보기드문 빙설재가 발생했다. 직접적인 경제손실과 간접적인 경제손실 그리고 사회적손실은 엄청나서 우리 중국인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것이다. 그 지역의 공공기초시설이 자연재해에 견디는 힘이 빈약하고 정부를 비롯한 여러분야의 돌발상태에 대처하는 능력이 큰 차지를 보여주고 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주강삼각주는 중국의 수출제조업이 제일 밀집된 지역이다. 때문에 렴가의 로동력-<농민공>들이 제일 많이 집중되여있다. 현재 귀향하여 음력설을 보내려던  1500만의 <농민공>들이 경광선등 통로의 불순통으로(현재는 통하고 있음) 1000여만명이 귀향을 포기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을 놓고말하면 음력설이란 시적 의미가 넘치는 명절이다. 특별히 전통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꼭 부모에게로 형제들에게로 자식들에게로 친지들에게로 달려가 단원의 꿈을 이루어야 하는 날이다. 중남지역과 북방지역 그리고 서남지역의 1600만명의 <농민공>들이 올해는 그 꿈을 불안과 초조속에서 꾸었다. 몇일전 광주역을 출발한 광주-무한 림시행 렬차 한대는 광주를 떠나 한번 회전운동을 한것이 19시만에 무한커녕 다시 광주동역에 도착했다는 뉴스도 읽었는데 그 렬차에 앉은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했고 불안했을가? <농민공>들의 신세가 가련하다. 돈이 없으니 항공편은 생각도 못하고, 기차를 타려니 평소에는 시간이 허락안되고, 귀향을 포기하려니 고향과 친지들이 그립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듯하다.     사실 나는 <농민공>이라는 명칭마저 싫다. 공인이면 공인이지 무슨 <농민공>? 공장에서 일하는데도,직업이 로동자인데도 농사군이라는 모자를 벗겨주지않는 그 기시책이 중국 특색일가?     중국은 산업화과정을 가고있는 나라이다.때문에 <3농-농촌 /농업/농민)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농촌이 황페해지고 농업이 불안정하고 농민들이 몰락하는 종극적인 원인에 대하여서는 산업화의 필연성, 호적제도의 락오성,농업세를 비롯한 농업운영성본의 고가성,농촌관료체제의 횡포 등에 귀결하고 있지만 <3농>문제는 장기간 존재할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관심을 보이고 여러가지 조치를 대기는 하지만 < 3농>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가 아주 힘들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보면 농민들더러 고향을 등에 두고 타향으로 떠나게 한다는 일은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의 산업화과정과 경제의 세계화중에서 중국도 수억을 헤아리는 농업인구가 반드시 산업인구로의 전변을 진행하여야 한다. 그 전변은 < 목가적인> 전변은 아니다. 눈물도 있을거고 피땀도 있을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적인 차원에서는 현재<3농>에 대한 해결책들이 근본책이 아닌 < 문예가 시골로 내려간다>든가 < 의료제도가 시골로 내려간다>든가  사람이 다 사라진 시골마을에 길을 포장해준다는 등에만 그친다. 중국의 <3농>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농지운영집약화문제 호적문제 농민공기능훈련문제 등이 관건임을 누구나 잘 알지만 어찌하여 해결진행은 겉층에만 쇼행위에만 머무르고 있을가?       주강삼각주 지역에 일하는 수천만 농민공들이 주강삼각지에 장기거주를 할 주객관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한, 해마다 음력설은 인파의 재난을 련속하리라 생각된다.           
14    [잡담15] 아주 위험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댓글:  조회:3504  추천:61  2008-01-28
잡담 15 아주 위험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작년 10월 어느 날, 장춘-연길행 장거리뻐스를 탔다. 어느 한국인과 동행하여 한참 지껄이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중년남자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그러다가 한마디 건네왔는데 알고보니 적은 연변이고 현재 절강에서 일을 본다는 조선족이였다. 어려서부터 한족학교를 다녀서인지 조선어보다 중국어가 숙달된 그 분이 동행한 한국인하고는 별로 소통이 아니되는지 나와 중국어로 열심히 얘기를 했다. 초면이라 얘기 꺼리가 없었고 한국에 대하여 한국인에 대하여 말이 많았다.정말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연변에서 거의 5백명을 조직하여 한국에 연수생으로 보냈는데 인천부두에 내리여 통관중에 어떤 원인으로 통관이 못되고 여차여차의 곡절을 거쳐 다시 연변에 돌아왔는데 로무를 조직한 기관산하의 회사에 가서 수백명이 행패를 부렸고 또 술을 먹고 연길거리에서 보이는 한국사람들과도 걸고들어 손찌검도 했다는 등등. 그 얘기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이 갔고 또 좋은 이야기가 아닌지라 나는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한국사람들이 나쁘다는 한마디로 이야기를 끝내는것이였다. 한다면 나의 한국인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내가 사는 동네에도 한국인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다. 랭정한 생각을 거친 판단은 아니지만 조선족들이 배우지 못했다고 경제형편이 좋지않다고 습성과 생각이 다르다고 우리를 깔보는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나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아주 싫어한다. 井水不犯河水라는 일조를 지킬뿐이다. 한국에서 <<당했거나>> 한국인에게 <<당했거나>> 그리고 그런 경력과도 련관된 사람들속에는 저주의 정서가 다분한 언행을 하는 사람도 있음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돈 벌고 온 사람들이거나 한국인과 거래를 하면서 돈 번 사람들은 은정의 정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착잡한 정서를 지닌 사람들도 적지않음을 느끼게 된다. 조선족사회가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하여 무감각적인 차거운 저주의 정서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또 언론매체까지 동원하여 << 붙는 불에 키질 한다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신호이다. 경제적손실도 빚어낼수도 있고 민족일치성을 둘러싼 감정도 파렬을 볼수가 있다. 중국에서 살 면목이 없다. 중국인들도 한국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염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음은 아니다.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아웅다웅한다면 우리는 어떤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 소위 세계화시대에 세계인으로 된다는 우리가 또 피줄을 크게 여긴다는 우리가 제 민족의 <<부족점>>도 너그럽게 받아드리지 못한다면, 객관적인 판명을 하지못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잘 어울릴 가능성이 얼마나 클가? 갈망지수가 크면 클수록 실망지수다 크다. 거의 20년 사이에 조선족사회가 한국경제에 대한 의뢰성이 너무나도 엄청 커지였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한구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갈망을 너무나도 불태우고 있다. 결과는 바람이 불면 풀잎이 자꾸 흩날린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생각,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실력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13    [잡담14] 통행증을 비롯한 여러가지 증에 대하여 댓글:  조회:3061  추천:83  2008-01-17
홍콩과 마카오에 려행을 가려 하는데 통행증을 만들수 없을가고 곁에 사는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언제는 성공안청에서 발급하던 홍콩마카오 통행증을 현재는 시공안국에 만들어주니 신분증과 호구부를 가지고 어느 요일 아침 몇시에 여차여차하라고 일러주었다. 만일 수수료 몇십원이 아깝지않으면 려행사에 부탁하면 순조롭고 빠를지도 모르니  여차여차하라고도 일러주었다. 몇일뒤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크게 혼났다고 했다. 시공안에 가니 인터넷으로 호구사출을 하면서 당신은 處급이니 통행증을 할려면 반듯이 직을 두고있는 대학의 허가 도장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택시로 학교에 돌아와 소소된 學報의 도장을 받고 학교반공실에 가니 거기서는 당신은 국가간부인데 홍콩 마카오로 놀러가면 당신의 인신안전을 누구 책임지는가 하면서 도장을 박아주지 않아 내 돈으로 놀러가는데 당신들 무슨 상관인가 언쟁을 하여 겨우 도장을 받고 그 다음으로 인사처와 조직처의 면목을 아는 사람을 찾아 도장을 받고 마지막으로 교장사무실 도장을 받았지만은 교장이 회의중이라 교장의 싸인을 받지못하고 2시간 기다렸다가 교장을 만나 홍콩 마카오에서 돌아오면 술 한잔 사겠다는 우스개 답복을 하고서 싸인을 받았다나. 도장 다섯개과 싸인 하나를 받은 문서를 들고 시공안국에 가니 벌써 퇴근할 때라 오늘 화요일은 안되니 금요일에 오시요 하더란다. 내 동료들중에 려권이라든가 통행증이라든가를 대행해서 밥먹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말에는 시공안국 규정은 두주일이면 통행증이 나온다고 하지만 업무일권들과 <<익숙하지못하면>> 당연히 힘들고 때로는 기계가 고장이 났소 누가 오늘 출근을 못했소 등 구실하에 한달 정도 걸릴 때도 있어 대행료 벌기도 많이 힘들다 한다.   또 내가 겪은 일이다. 90년대 초엽에 심천이라든가 주해로 출장을 갈라면 경제특구로 가는 통행증 없이는 특구공항을 나서지도 못한다는 이야기에 겁먹고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굽신굽신하며 통행증을 만들어(당연히 工本비를 내고) 심천에 도착하니 통행증은 무슨 통행증? 다른 사람들은 신분증에 20원을 내고 현지에서 통행증을 제꺽 만들어서 무사히 통과를 받고있는것이 아닌가? 그 다음부터는 나도 그 작법을 착실하게 배워서 실행을 했지만 속으로는 중국인이 중국땅  밟는것도 힘들다는게 어딘가 분했고 잘 사는 경제특구에서 나라의 규정을 리용해서 돈을 버는게( 그적에 경제특구로 들락날락하는 인구류동이 얼마나 됐을가?) 괘씸하기도 했다.      그리고 홍콩 마카오 통행증과 려권을 만들면서 나도 많은 신고를 했다. 나라에 소속된 기업에 직을 두었다고 나는 공안국인 아닌 성외사반공실에 가서 받았는데 이놈의 무슨 통행증인지 려권인지 하는것은 유효기가 각각 2년과 4년이라고 쓰여있지만은 성외사사무실의 령도가 바뀌면 또 판본이 바뀌면 다시 만들라 하기에 돈도 들고 힘도 들고 웃음도 들고 신물나는 고생을 여러번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려권을 3개 만들어 보았고 홍코 마카오 통행증은 아마 5번 만들었던 기억이다. 그리고 신강 하나스호수에 가면서도 국방통행증을 만들었고 파미르로 가면서 국방통행증을 만들었고 티벳으로 가면서 통행증을 만들었고 어느 미개방지역으로 가면서도 통행증을 만들었고, 내 평화시기를 살면서 통행증을 엄청나게도 만들었다. 사용했다. 물론 나라에서는 정부에서는 여러가지 정당한 리유가 있겠다  생각하지만은 중국인으로서 납세인으로서  어디에 발길을 주려면 소위 여러가지 통행증을 만들기 위하여 관료기관에 시달려야 하고 힘들게 번 돈을 내야 하고, 또 앉은 자리에 살면서 바깥출입을 금물로 하면서 산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불필요한 증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현재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자연재해를 많이 받는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재해는 별로 대수롭지않게 여긴다는 느낌이다. 몇년전 싸스가 횡포를 부릴 때 처음 북경시에서는 아닌 보살하고 우린 싸쓰환자가 없다고 억다짐 거짓말을 하다가 나중에는 큰 골탕을 먹던 일이 그 실례의 하나가 아닐가? 하지만 人災는 좀 무서워한다. 그래서인지 인구류동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통제하고 또 통제과정에 돈도 벌고(현재도 주강삼각지지역에서는 외래인들의 림시거주정을 만들면서 엄청 남기고 있다.) 재미를 본다. 중국인으로서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살아가는데 힘들다는 사실은 나는 아직 리해를 진행하기가 힘들다. 분통하다.
12    [잡담13] '근면하지만 가난한 중국인'으로부터의 잡담 댓글:  조회:4198  추천:89  2008-01-01
           <근면하지만 가난한 중국인>으로부터의 잡담      인터넷에서 어느 경제학자?의 <근면하지만 가난한 중국인>이라는 글을 읽어보았다.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하여 근면하기 그지없지만 경제제도와 운영제도의 락오로 하여 국민생산액이 낮은 편이고 경제성장중에서 지불하는 사회경제원가 과대하다는 등등. 말하자면 남들은 1원짜리 연필 하나를 생산하는데 임금10전 기술10전 원자재가 10전 세금을 비롯한 경제제도 운영제도로 하여 10전 하면 원가가 40전인데 중국은 임금5전 기술10전 원자재가 10전 세금을 비롯한 경제제도와 운영제도로 하여 20전 하여 원가가 45전으로 되니 남보다도 5전 적게 번다는 이야기다. 경제란 간단하게 산수적으로 완전표달이 되는것은 아니지만 경제의 활성화가 경제제도와 사회제도와도 련관이 많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사람들이 근면함으로 하여 여직도 싼 임금을 리용하여 무진한 반복로동(시간지출이 다른 나라보다 길다)을 하여 좀 먹고 살아가기는 하지만 남보다는 잉여가 적다. 잉여가 적은 원인이 여러가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경제제도와 운영제도의 불합리화와 락오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좀 벌리려면 내 좋은 기분에 내 좋은 생각에 내 돈으로 한다 하여도 중국 어디로 가든지 상관부문과 인사들의 행악질에 남들보다 많은 재부의 지불과 시간의 피략탈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항업마다 <잠재규칙>이라는 말도 잘 사용되는데 중국의 경제활동은 어느 모로 보면  테불우에서가 아니라 테불 아래에서 진행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저러한 <잠재규칙>에 물젖은 사람이다. 생각밖에 <잠재규칙> 아닌 어느 방식으로 일이 순조로운 진행을 보인다면 당사자가 더욱 당혹해지고 결국 성사가 될가 하고 의구심을 보일 정도로 <잠재규칙>이 살판친다. 이러한 우리들이 중국에 진출한 어느 미국회사가 중국사람들에게 와이로를 주면서 일을 했다가 미국의 세금조사와 회계조사에 들통이 나서 벌금을 했다는 뉴스거나 해외로 진출한 중국회사가 와이로를 너무 쓰기에 인심을 잃는다는 뉴스를 접하면 참으로 리해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또 그리고 조금 화제와는 멀리 떨어져나가지만 근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엄복이 서구고찰을 하고 서구는 民이 먼저 부하고 다음에는 나라가 富하는데 중국의 먼저 나라가 부하고 다음에 민이 부하려는 길을 택함이 옳은가고 자문한적이 있다는 아리숭한 기억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지성학적인 원인인지는 몰라도 중국중세기는 중앙집권의 길을 걸었다.재부를 집중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서 북에서 내려오는 기마민족들을 대처하였다. 하지만 서구는 중세기에 분봉제의 길을 걸었다. 때문에 재부가 민간의 귀족들에게 나뉘여져있었고 토지도 왕의 공주가 시집가도 지참금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중국과 비교를 한다면 서구는 나라의 국토자원이 쪼각조각 나뉘여졌었고 어떤 귀족들 재부추적이 왕을 초과한 현상도 발생하였으니 중국과는 다른 력사상과 경제상을 보였었다.    근현대와 당대에 있어도 서구는 여전히 민간경제라는 길을 걸었다.물론 비상시기에 국가자본주의라든가 국가사회주의라든가는 경제형식을 도입한적은 있지만 그 주류는 민이 먼저 부하고 다음 나라가 부한다는 신조와 길이 그들의 집념이다. 하지만 중국은 근대에도 여전히 중앙집권식의 길을 택하였다. 청나라말기에 있는 양무운동도 국가가 주체한 경제개혁이였고 78년도에 시작된 개혁개방도 국가가 주체한 경제개혁의 길이다. 역시 중국식인 먼저 나라가 부하고 다음에 민이 부하자는 집념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집념을 사용하든지 력사적인 지리적인 현실적인 원인은 존재한다. 헌데 부동한 집념이 택한 경제성장의 길과 경제운영에 있어서의 사회경제원가도 아주 다름을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졸문 처음에 산수적인 례를 든것럼 현재 우리와 다른 이들의 경제를 비교하면 경제적인 원가가 사회적인 원가가 조금 큰 차지를 보이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바로 상술한 집념의 차지이고 집념이 택한 경제방식의 차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환경이 조금 좋아졌다. 구쏘련과의 변경에도 수백만의 군인을 수비시킬 필요성이 적어졌고 미국을 위수로 하는 나라들과의 랭전지수도 줄어들었으며 국력도 어느만큼은 성장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나라의 모든것은, 적어도 국민경제의 명맥은 나라에서 잡아야 한다던 집념이 약화되면서 중앙기업들도 한참 주식시장에 상장하고 있다.말하자면 경제의 민간화를 실행한다는 이야기다.        경제의 민간화가 순조로운 진행이 되고 민이 먼저 부하고 다음에 나라가 부하자는 적어도 민과 나라가 같이 부하자는 집념이 우리의 절대적인 집념이 되는 날이면 우리의 경제에 있어서 불필요한 경제제도와 사회제도로 하여 나타나는 원가차지가 사라지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사회경제원가를 향유할 좋은 날이 오리라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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