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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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잡담52] 정신신앙과 속세사상(허동식) 댓글:  조회:4035  추천:76  2008-07-14
[잡담52]정신신앙과 속세사상허동식종교란 본질적으로 中性존재이다.인간과 신령사이의 존재형태관계를 표현하는 비리익적인 순수한 사유적인 의문이고 해답이다.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이 인간본질에 대한 인식이다>라는 말을 재삼 생각해보게 된다.      헌데 내가 사는 세상에서 종교는 필경은 속세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신앙사상이므로 속세에 리용되는 경우에는 중성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실례가 많다. 이런것들을 종교사상의 속세화에로의 회귀라고 일컫는다면 종교속세화는 종교조직 존재에서 집중표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속세화중에 종교사상과 종교조직이 또 많은 리익세력에게 리용되면서 칼 맑스의 <정신아편>이라는 평판도 받았다.      종교사상의 속세화가 정신신앙이 속세화되는 하나의 길이라 한다면 또 하나의 길은 속세사상의 정신신앙화이다. 속세사상이 인간의 정신신앙으로 된 력사사실은 많다.히틀러의 게르만민족주의가 거의 독일인들의 정신신앙으로 되였던 일,공산주의가 공산권의 정신신앙으로 되였던 일,중동의 민족종교주의가 일부 이슬람인들의 정신신앙으로 되여있는 일들이 전형사실로 보여진다.속세의 사상은 필경은 리익을 둘러싼 사상이므로 정신신앙으로 전변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리익사상이고 중성존재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정신신앙으로부터 속세사상으로의 길,속세사상으로부터의 정신신앙에로의 둔갑,이런 사회력사사실에 대하여 통일적인 가치판단을 내리기는 힘든 일이다.하지만 <굴러가는 력사의 수레바퀴>도 <밥을 먹고 할일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는듯하다.       英美문화의 특징이라 할수 있겠는지는 모르지만 영국청교도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 영미문화권형성중에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의 상대적인 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사회문화형태이다.그들은 인간의 정신신앙을 존중하는 한편 또 속세리익도 존중하며 그들의 린접을 견결히 반대하고 되도록이는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을 갈라놓는 작법을 취한다. <세계경찰> 미국과 옛날에는 미국의 <형님>이였던 영국의 행실들까지 살펴보고나면 그들의 <경찰행위>에는 실리적인 행위외에도 정신신앙의 자유를 보급하려는 의도와 흔적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그래서인지 과거와 현재 미국은 속세사상이 정신신앙으로 된 국가를 <때려잡기>를 좋아하고 정신자유가 결핍된 국가를 <때려잡기>를 좋아하는듯도 하다. 나는 <미국인들은 미국생활방식을 수출한다>는 말을 두고 정신신앙과 속세리익의 상대분리법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고싶다. 
50    [잡담51] 민족주의와 우리 댓글:  조회:3742  추천:87  2008-07-12
[잡담51]민족주의와 우리허동식민족주의는 世俗적인 리익적인 사상이고 실천이다. 민족주의는 情境적으로 정치리용적으로 또는 민족내환경적으로 신성한 가치면을 지니고 있을수도 있겠지만  필경은 언어와 지역과 종족의 계선을 초월한 普世적인 사상이라든가 종교와는 달리 그 신성함이 뚜렷한 국한성을 지닌다.      어느 종족의 민족주의도 그 자취를 살펴보면 력사情境이라는 구체조건의 지배를 받아왔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어느 종족의 민족주의도 아주 먼 옛날부터 있은 원초적인 사상과 주장이 아니라 특정된 력사환경의 산물로서 오늘까지 그 행적을 이어오고 있다.       민족각성이라는 낱말로 민족주의의 발원을 해석하는 경우가 있듯이 부동한 종족의 광범한 접촉교류가 시작되여서부터 각 종족사이에 존재한 정치경제문화의 사실적인 실력불균형과 불평등 그리고 민족갈등이 민족주의 사상을 대폭으로 분출시켰다. 그래서 인류의 발길과 눈길을 크게 넓혀준 신항로개척 시대가 민족주의폭팔의 전주곡으로 보여진다.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없는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도 먼 옛날부터 존재하여 온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주의란 전민족적인 민간적인 사상의 하나로 전변된것은 근대로부터의 현상이라 짐작된다.      근대로부터 현재까지 그 맥락이 선연하게 보여지는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좋은것인가 나쁜것인가 하는 가치판단을 한다는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이며 구체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필요하다.       특별히 단순한 민족적인 감정에만 머물어 민족주의에 <신성>이라는 옷만 입히는 부류가 존재하는 오늘날,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해 랭정한 생각을 해봄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격변시대에 거의 동화의 변두리에 있는 중국조선족은 인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보면 렬세족이다. 렬세일수록 민족심은 강력하게 편격적으로 로출을 보일수가 있다.그 마이너스 면은 다른 종족에 대한 배타성이라든가 자아망상증이라든가 자아반성결핍 등으로 보여질수가 있다. 사회공리성과 인류공리성을 떠난 실리적인 판단만 하여도 우리의 민족주의가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기 >쉬우므로 우리는 그런 맹목적인 비리성적인 민족주의는 삼가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민족주의에 대한 재정리는 과거 또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을수도 있는 다른 종족에 대한 맹배와 맹종을 비판해야함과 마찬가지로, 민족자비심을 비판해야함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과제가 아닐수가 없다.       나로서는 이제는 누군가 때로는 <민족을 위하여>하는 말을 내비치면 그 空泛성에 놀라 멍청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행위가 민족학교를 하나 만들고 조선어문을 가르치는 일보다도 너무 재미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49    [잡담50] 민족의 변천과 우리민족 댓글:  조회:3309  추천:71  2008-07-12
[잡담50] 민족의 변천과 우리민족허동식      중국은 력사문화적으로 수많은 종족이 융합되여 새로운 공동종족을 구성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 중요한 원인은 중원지역이 주변지역보다는 정치경제와 문화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해왔으며 또 비교적 봉페적인 생존환경단원과 련관이 된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중국에 사는 우리는 종족이란 단순하게 융합의 길만 걷는줄로만 리해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헌데 시각을 조금 넓게 열어보면 종족이란 분화의 길을 걷는 역행적인 력사사실도 있음을 알게 된다.       먼 옛날에는 유태인도 아랍인도 모두 아랍지역의 闪족이였지만 현재는 부동한 종족으로 존재하고 있고 인도인들은(인도인들은 혈연적으로 하나의 종족으로 볼수는 없지만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인도교와 이슬람교의 모순과 영국식민주의자들의 分治책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독립국가가 생겨날 정도로 부동한 종족으로 분화되였고 몇년전에 전유고슬라비아 波黑지역 주민들도 종교전쟁으로 부동한 종족으로 분화되였다.       겉으로 보건대는 종족분화는 종교와의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종교가 표현상이고 세계정치의 重新洗牌라는 리익분활이 내핵적인 인소로 작용하여왔다. 그러므로 실력이 있는 종족일수록 개방과 포용을 주장하면서 종족융합을 걷고 실력이 작고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종족일수록 분화의 길을 걸을수도 있다는 나의 망상을 해본다.       듣는 말에 의하며 미국은 <종족도가니>로서 어떤 종족도 언어와 피부색과 종교신앙을 물론하고 마꾸 끓여서 새로운 종족잡탕을 만드는 나라라고 한다. 헌데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먼 옛날에는 융합적이였던 조선인은 현재 남북분렬상태이고 그 원인을 따질 필요도 없이 거의 분화의 상태임을 알어야한다.다만 언어를 비롯한 동일한 문화상과 지역련접성 그리고 수천만 동포들의 心力에 의하여 종족분화가 저애력을 받고 있을뿐이다.      종족융합이 좋은가 종족분화가 좋은가 하는 가치판단은 내리기는 쉽다.하지만 종족융합도 좋고 종족분화도 좋고 피눈물이 얼룩진 결과가 아닐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력사책은 자신에게 유리한 일면만을 결과성적으로 과대포장하여 기록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력사책만을 믿어서는 아니된다.종족융합과 종족분화의 과정은 만고백성들에게는 큰 시대적인 대가를 요구함은 긍정적이다.
48    [잡담49] 다시 합정과 합리 댓글:  조회:3465  추천:67  2008-07-09
 [잡담49]  다시 합정(合情)과 합리(合理) 허동식      참으로 문학상 명목이 많아졌다는 느낌이다. 거의 지나가는 바람처럼 문학상 명목이 많아졌다. 문학상이 많아졌다고 해서 우리의 문학작품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느낌은 받은적이 없다. 또 수많은 수상문학작품들 모두가 빼여졌다는 느낌은 받은적이 없다. 실말을 해서 문학상 명목에 비해서는 좋은 작품들이 얼마 안되고 좋은 수상작이 얼마 안된다는 느낌이 나날이 커가고 있다.       땅덩어리가 커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중국은 문학상이 즐비하다. 헌데 세월과 인간들 심미에 견디여낼만한 것들은 오히려 아무런 문학상도 받지못한 실례가 수두룩하니 문학상에 대해 의문부호를 내걸지않을수가 없다.        중국문단은 이렇고 우리문단, 바로 조선문으로 지탱되는 문단은 문학상을 둘러싸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큰 차이가 없다. 명목이 많아서 좋은것들이 많은것도 아니고 문학상을 받았다해서 세인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아닌 경우가 많다.        원인은 많겠지만 합정과 합리라는 시각으로 한번 들여다 볼수가 있겠다.          인맥을 둘러싸고 문학상을 주는 일은 참으로 적지는 않다. 누구누구는 하면서 줄서기를 한다든가 서로 주고받기를 한다든가가 현황임은 사실이다. 합정적이다. 인정세상이니 합정된 일을 해야한다. 허지만 그 합리성에 대하여서는 누가 책임을 질건가? 그 결과는 어떠할가? 어리석은 물음이다. 대답도 불필요하다.         작자를 평하지 말고 작품을 평하는 문학상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지않으면 그저 웃음 하나로 문학상을 지나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또 소위 무엇을 추구한다는 분들이 합정된 일보다도 합리된 일을 많이 촉구하시면 좋겠다.
47    [잡담48] 合情과 合理 댓글:  조회:3490  추천:70  2008-07-07
  합정합리란 중국어에서 많이 쓰이는 낱말이다. 다른 언어에 합정합리란 낱말이 있느지 있다면 또 어느 정도 사용되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합정합리란 낱말에는 중국의 과거와 오늘이 중밀도로 재현되다 생각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중국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린지가 2000여년이 되지만  민간사회는 물론 廟堂에 집정한 많은 어르신들마저도 현재까지 줄곧 血緣과 地緣을 출발점으로 하는 합정이라는 운행법칙을 지켜왔다. 그래서 혈연과 지연을 비롯하여 學緣이라든가 姻緣이라든가를 파생하고 력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합정緣을 종횡으로 표현하면서 감성세계가 지배하는 리익관계를 그야말로 합정적으로 구축하여왔다.       합정합리에서 합정이라는 낱말이 합리라는 낱말보다도 先을 차지하고 또 현실에서도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고 시비를 분별하고 일을 풀어가는 루루가 합리대신 합정이 살판치는 현상들을 일별하고나면 중국은 인정세계이고 합정세계이며 합리란 언제나 지각생임을 느껴본다.     남방빙설재와 문천대지진을 통해 우리는 또 한번 중앙집권의 강력성을 알게 되였다. 강력한 행정권력체계로 빠른 시일내에 여러가지 재난을 대처하는 방법은 먼 옛날부터 중국중앙집권이 사용한 상투수단이다. 남방빙설재와 문천지진중에 우리의 물력과 인력 그리고 재력에 대한 대집중능력은 소국인은 혀를 찰 정도였고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의회의 법안을 통과할 필요성도 없이 진행되엿으므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동족동국이라는 감성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재난을 대처하는 방법의 합정성은 누구나 수긍적으로 받아드린다. 하지만 그 방법의 합리성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람은 아주 적은듯하다.비상사태에 적응하고 재난을 이겨내는 機制가 단일적이고 너무나도 행정적이면 그 마이너스면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물력과 인력 그리고 재력에 대한 랑비가 크고 효률성이 제한되고 형식주의가 살판치고 그 난장판속에서도 무엇을 좀 건져보려는 각계의 인사들이 재난현장과 텔레비와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쇼를 벌리고 있음이 상술한 방법의 마이너스면이고 합정사회의 비과학성이고 부족점이라고 생각된다.           합리라는 낱말을 합정합리에서 단독으로 분리하면 언어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합정이라는 낱말의 대체품으로도 된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어떤 일을 두고 합리하다 평가를 판단을 한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합정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우리의 문화배경이다. 고장난 현금지출기에서 은행돈을 도덕질했다가 과분한 판결을 받은 어느 농민공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동정심을 보였고 또 법원의 판결내용과 量刑이 합리성이 결여되였다고 하는 사람들중에 소수의 법학자들을 내놓고는 대부분은 중국법률과 법行의 어떤 부분에 존재하는 허약처와 비과학성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현상을 살펴보면 또 한번 중국은 합리보다도 합정이 중요하고 일위적이고 패권적임을 느껴본다.          농경사회가 끝나고 이미 공상업시대가 시작되여있는 오늘날, 합리보다도 우선 합정에 목매인다면 많은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을 보고 도리머리를 저음이 리해가 되는듯도 하다.중국에 장사하러 왔는데 담판석이 아닌 술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는 그런 이야기는 이제는 웃으면 대할 일이 아니다.  합정이란 우리의 전통에 맞는 말이다. 얼마나 인정미가 넘치고 얼마나 미학적인 낱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 합정이라는 허울아래 합리를 부정하고 합리를 대신하고 온갖 비리를 미화하는 인간들을 밉게 생각한다. 그리고 합정이라는 미명하에 비합리라는 현상이 우글거리는 어떤 풍경이 나타날가봐 우려심을 보이기도 싶다.      
46    [잡담47] 인프레(허동식) 댓글:  조회:4175  추천:90  2008-07-01
[잡담47]인프레허동식인프레는 산호랑이다. 동물원 쇠창살속에 갇힌 호랑이도 아니고 <종이범>도 아니라 크게 으르릉거리는 호랑이다. 헌데 산에서 내려와 행악질을 하려는 산호랑이는 누구를 먼저 잡아먹을가? 실험방법으로는 그 답안을 얻을수가 없다. 고운 사람을 먼저 잡아먹을지 살찐 자를 먼저 잡아먹을지는 실험으로는 알 일이 아니다. 숫호랑이는 녀자를 잡아먹을거고 암호랑이는 남자를 잡아먹을거고 하는 말은 술상에서 친구들끼리 지껄이는 우스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튼 누군가 산호랑이 미식거리로 되여야 일은 풀린다. 산업경제가 빈약하고 농업이 뒤진 중국에서는 인프레가 오면  매번마다 농사군들이 제일 힘들다. 농업자료가격은 엄청나게 뛰여오르지만 농산물가격은 거의 앉은 자리에서 뱅뱅 돌림을 하고, 그렇다고 농사군들이 벌거벗고 살수는 없고 모든 생활소비를 농산물소비로 대체할수는 없고(례를 들면 알곡을 애들의 학비로 바치는 그런 일) 그저 그렇게 응응 하는 앓음소리를 내고는 이불짐을 들고 도시로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시골은 금방 건설하기 시작한 새농촌도 텅텅 비여야 한다. 농사군들이 시골에 들어온다고 도시사람과 동등하게 인프레의 성화를 받는것은 아니다. 작년인가 돼지고기가 갑자기 가격이 배로 오르면서 누구의 말을 들어보니 도시에서 돼지고기풍파에 제일 시달리는 사람들이 바로 <민공>이라 하였다. 도시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별로 즐기지않아 돼지고기풍파를 이길순 없어도 그럭저럭 피해다닐 여건은 되지만, 건춘장에서 고된 일을 하는 <민공>들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로 생활개선을 해야하므로 고향의 돼지고기보다 엄청 비싼  돼지고기를 마음대로 사먹지는 못하고 입만 쩝쩝 다시고 있다나? 경제학에 恩格尔系数라는 명사가 있다. 생활필수품소비가 소비중에 차지하는 비률을 해명하는 명사로서 먹고 입고 하는데 소비가 많을수록 그 계수가 높아진다. 경제가 락후할수록 경제능력이 없을수록 인간의 恩格尔系数가 높다. 또 인프레중에서도 생활소비재의 인프레가 산호랑이중의 왕이므로 우리의 매번의 생활소비재 인프레는 우선 누구를 잡아먹는지 이야기할 필요성이 없는듯하다. 거리로 나가면 시골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음을 느낀다. 구두 닦는 아저씨하고 물어보면 몇푼지기 땅을 부치기보다는 그래도 2원씩 하는 구두닦기가 벌이가 좋다고 한다. 헌데 구두 한쪽도 완전히 닦지를 못했는데 쪽걸상을 들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망을 한다. 그 구경을 몰라 < 그래도 구두 하나는 거의 완공이 됐으니 1원만 받으라 > 롱담 비슷한 소리를 지르는 중에 저쪽에 제복을 입고 푸르딩딩해서 오는 城管아저씨가 보여 구두닦던 아저씨가 부랴부랴 도망을 한 내막을 알고 하나는 번들거리고 하나는 어지러운 구두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혼자서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농사군들이 도시로 진입해서 무질서를 가져옴도 사실이다. 큰 거리든 골목이든 하고싶은 난전을 되는대로 벌리고 교통을 난잡하게 만들고 <문명도시건설>에 먹칠을 하고 <죄증>이 태산같다. 헌데 그들이 산호랑와 산업구조조절중에 제일 큰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이 들면 참으로 동정심을 죽일수가 없다. 
45    [잡담46] 시대의 아픔(허동식) 댓글:  조회:3806  추천:74  2008-07-01
[잡담46]시대의 아픔허동식아주 어릴적부터, 소위 코물을 빨아먹는 시절부터 시험지에 <네가지 현대화>란 무엇인가 답장을 쓰느라고  진땀을 흘려왔다. 향간에는 부모님과 <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한 다음에 나를 낳을실거지> 하는식의 해학어가 류행될 지경으로 모두가 <네가지 현대화>를 크게 동경하고있었다.쏘련의 향간에서 공산주의를 <소고기 감자볶음>으로 리해를 진행했다는 말이 진말이라면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못지않은 통속된 방식으로 <네가지 현대화>에 나름의 주석을 붙였던것이다. 례를 들면 시골에서는 아주 귀중품이던 자전거가 집집의 소유물로 될것은 물론일거고 멀리 있는 학교를 통학하는 애들은 통학차를 리용할수 있을거고 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수 있을거고 등등이 <네가지 현대화 실현>을 은근히 바라던 나의 심정 같은거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생산액을 살펴보든가 내 물질생활수준을 살펴보면 우리가 <네가지 현대화>를 이미 실현했다고 본다. 물론 도시와 시골의 물질소비재라든가 생활방식이 현저한 차지가 아직은 존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 어릴적의 <네가지 현대화>에 대한 표준과 비교할진대 <네가지 현대화>는 이미 <실현>되였다고 판단해본다.     헌데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면 잘 입고 잘 먹으면 사람의 진통이 적어지리라는 어릴적의 동경하고는 다른 현실을 날마다 면접해야 한다. 개인적인 진통이  집합되여서 나라적인 민족적인 시대적인 아픔을 이룬다고 한다면 목하 내가 사는 시대는 아픔이 없는것은 아니다. 많다. 7월 7일, 내가 사는 동네에서 올림픽성화봉송이 있는데 나도 길거리에 나가 구경하고싶다. 헌데 듣는 말에 의하면  시민들이 마음대로 구경하는 봉송이 아니라, 정부에서 조직하여 사전에 조직된 사람들만이 접근할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나로서는 진통을 느끼지않을수가 없다. 올림픽의 정치화는 국제적으로도 또 중국의 립장으로도 견결히 반대되는 일조인데 어찌하여 현실은 올림픽정신하고는 거리를 두고 이색적이 운행도 진행되고 있을가? 지방정부의 구체적인 고충은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티벳독립분자의 파괴활동을 방지하느라고?) 중국공민으로서 납세자로서 자원적으로 길가리에 나서 응원이라도 해본다는것이 금지된다면 어느 정도는 올림픽에 대한 못마땅한 리해이며 또 북경올림픽은 우선은 국민의 돈이 투자되여 진행되는 행사임을 모르고 하는 쇼라고 생각된다. 중국 어느 지역이나 모두가 이런식으로 성화봉송을 한다면 상술한 나의 진통이 바로 나라적인 아픔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인간사회란 책속에 씌여진것처럼 완전미결한 사회는 없다.사회진보는 있어도 월궁같은 환상의 인간세계는 도래할수가 없다. 인간이 어떻게 교묘하게 자연을 정복하든 리용하든,우리의 물질소비가 어떻게 풍부하든 , 인간으로서의 욕구본성과 인간과 인간사회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그 어느 시대마다 진통을 하지않는 시대는 없다. 소위 위대한 시대란 정치가들이나 력사가들이 인간세상의 개변이 집약되고 집중표현이 된 시대를 분식하는 과대평가하는 언어임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감성적으로 격정적으로만 보지말고 , 조금 더 리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그래야만이 더 좋은 시대를 만들 가능성이 있는것이 아닐가.  
44    [잡담45] 인간령성과 원초미의 추구 댓글:  조회:3659  추천:80  2008-06-27
[잡담45]인간령성과 원초미의 추구 허동식     스스로 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이고 인간의 때가 묻지않은 것들을  아름답다게 받아들이고 즐기는 인간이라 자처해왔다. 산을 바라보면 아무런 건축물도 없는 산이 좋았고 정교한 옥조각품보다도 징이 가지않은 옥돌 원석이 좋았고, 정원에 심은 나무가 원예사인지 리발사인지 하는 사람에게 미용수술을 당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그 원인은 내가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에 사람이 손을 대면 자연의 진면모가 회손이 되고 사람몸에 내재하는 어떤 독기가  어울릴수 있다는 미신에 가까운 우려심에서 찾아본다. 하여튼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심성이 대응물에 대한 심리감응이고 욕구라는 어느 리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인공되고 조잡화되고 사람 냄새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움은 아무리 걸작이라 할지라도 나의 눈에 들지않는다는 습관을 고집하고 있었다.      근간에 어쩌다가 가구시장에 들어가보았다. 물론 가구의 실용성과 판매가격을 살펴보고나서  가구장사군들의 과장되고 포장된 미사려구들을 전혀 무시해버렸다. 소위 새로운 재료로 조립된 멋지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좀 마음에 드는 가구가 없는것은 아니였지만 그 판매각격들이 <아이보다 배꼽이 클> 지경이므로 나의 힘들고 고된 가구시장행이 그만 아무런 결과도 이루지못했다.      나중에는 누구의 권고에 나는 나절로 가구재료를 사오고 좋은 목수를 청해다 가구를 짜는 소위 包工不包料라는 경제적이고 자유로운 방안을 택하게 되였다. 건축자재인지 장식자재인지 하는 도매시장에 가서 물건구입을 하고 강소성이 고향이라는 목수 한분을 청했다. 아주 어릴쩍에 고향에서 강소성목수들이 시골을 다니면서 단스(이불장)와 꼬디꾸이(高低柜)를 짜던 기억과 연변목수들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손재간을 기억하고있는터라 좀 희망을 품고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나더러 역시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현재 목수들의 공구는 아주 기계이고 톱이라든가 대패라든가가 전기용구였고 또 재료가 실목이 아닌 인공합성널판지여서 소위 짜여진 가구들이 조립된 립체판자였기 때문이였다.      실용성만 보이고 그 심미성은 전혀 운운하지못할 지경으로 기계의 냄새와 흔적인 진동하는 령성이 없는 가구들 , 나로서는 몇해 지나면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거라 판단이 되는 립체판자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고향에 있는 누나한테 " 누나 , 그  전번에 팔아버리겠다던 20년 넘는 단스 말이요, 절때 팔지마오, 그게 짠 가구돼서 앞으로 돈이 될거요" 라고 전화 한통을 했다.      조립된 립체판자가 목수의 손과 지혜와 그리고 령성이 너무 결여되고 다만 기계화시대의 건방진 냄새만 퍼붓기에 나는 참으로 싫어진다. 연변말로 "부스깨나 있으면 다 패서 태워버릴 것들"이 나의 시야를 흐트리고 정서를 흐트린다.      원초적인 미를 신앙하는 내가 가구를 대하며는 왜서 인간의 령성이 있는 미를 추구할가?  원초적인 미를 완전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집안에 원초적인 가구(례를 들면 통나무를 새끼로 묶어서 만든)를 놓아야 하는데 나는 왜서 명나라가구와도 비슷한 목수들의 재간이 스며있는 원목가구를 원할가?   나로서는 아직 리해를 풀이할수가 없다. 모순되는 심미정서가 아닐가?
43    [잡담44] 악의 표현과 정신자유 댓글:  조회:3602  추천:89  2008-06-24
[잡담44] 악의 표현과 정신자유허동식악이란 무엇인지 나의 연약한 언어문자로서 진술할 능력이 없다. 흔히는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악에 대한 해설을 많이 진행하는 환경에 묻혀 살면서 때로는 그런 해설들이 조금은 슴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마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중국계 소설가 고행건의 소설을 두고 누구와 담론하던중에 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고행건의 노벨수상작이 중국당대문학에서는 으뜸이라(물론 나와 대화 상대방의 개인적인 결론)고 합의를 보고나서 인간의 악중에서 어떤 악이 최상일가 의논을 했다. 저는 잘 먹으면서 남더러 배불리 먹지못하게 하는것이 악이겠다. 저는 꼬까옷을 차려입으면서 남더러 헐벗게 하는것이 악이겠다. 등등의 악을 렬거하고나서 인간의 개변할수가 없는 천성을 자신은 극치로 향유하면서 남더러 전혀 향유하지 못하게 하는 사유와 행위를 악의 표현으로 귀결해보았다. 그리고나서 나는 스스로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고 박탈함이 악의 표현으로 되지않을고 생각해본다.    인간의 자유란 인신자유와 정신자유로 보여진다. 인신자유를 억누른는 장면은 우리는 현실과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체험해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자유에 대한 압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별로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유능력을 지닌 인간에게는 정신자유가 생존자유라든가 인신자유에 못지않은 개념이며 인생경험이다. 우리가 애들한테 배워주는 력사는 물질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정신의 상호의존관계를 대함에 있어서 정신세계의 거룩함과 독립성을 무시하기도 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의 신성함과 영원함을 인지하고 추구하는 인간과 족군이야말로 정신세례를 받은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해보니 어느 노벨문학수상작을 평한다든가 국외에서 발생한 어떤 사태를 평함에 있어서 과거에 정신자유의 속성을 전혀 모르고 읽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던데 , 또는 뭐라고 그렇게 지랄하노? 고 남의 제사상에 이걸 놓으라 저걸 놓으라 하던 자신의 언행을 비웃어본다.
42    [잡담43] 神에 대한 나름의 생각 댓글:  조회:3355  추천:64  2008-06-23
[잡담43] 神에 대한 나름의 생각허동식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神 實存의 구체적인 직접적인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못하고 있다. 반면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신 非存의 구체적인 직접적인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신론과 무신론이 거창하면서도 아웅다웅 하는 입싸움은 멈춘적이 없다. 과학이 신학과 철학을 초월하여 인류사회 패권자의 배역을 한것은 어느덧 백여년이 된다. 하지만 과학도 만능인것은 아니다. 과학주의  双刃剑이라 여겨지는 실험주의와 경험주의가 만능인것은 아니다. 과학실험과 직간접경험으로는 하나님의 존재 또는 비존을 아직 증명할수가 없다. 다윈의 생물진화론도 과학실험으로는 아직 증명할 가능성이 보이지않는다.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고싶은것은 과학이 인류사회의 물질복지사업에 대한 결정인소를 부정함이 아니라 신에 대한 과거의 <혁명적> 인 생각을 반성할 필요성을 좀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는지는 알바가 없지만 하나님의 인간창조설이 현재까지도 인류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만들고 있음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이런 전제조건으로 보여지는 력사현상으로부터 신이 인간사회에 주는 영향은 거대하며 과거 우리가 받은 신에 대한 교육과 기성관념을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느껴본다.     세상만물은 자아존재로서 존재할수도 있지만 참조물의 존재를 빌어 존재의 의미를 나타낼수도 있다. 흑인종은 존재하지만 백인종의 존재 또는 다른 종의 존재가 없으면 흑인종이라는 명칭방식으로 존재할수가 없다.    사람과 신의 존재도 그런 관계가 아닐가? 인간은 동물의 왕이라 자칭하고 있지만 제한된 동물임은 틀림이 없다. 그 제한성은 신의 존재를 빌어야만 인간에게 부여되여 뚜렷하게 표징으로 된다. 반면에 신의 존재도 제한성을 지닌 인간의 존재를 빌어야만 전지전능의 표현력을 지니게 된다.인간이라는 시점에서 보면 신과 인간은 상호의존일수도 있겠다.       인간의 자아공제능력은 무한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다스린다 하더라도 , 성인이 자아를 다스린다 하더라도 인성의 음영은 자주 표현되여왔다. 인성의 음영을 다스림에 있어서 인간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왔지만 리상적인 효력을 보지못하고 있다. 물질세계의 풍족도도 좋고 사회제도의 완비함도 좋고 인성교육도 좋지만 모든 인간을 완전개조하지는 못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와 신의 힘을 빌어 인간의 음영적인 인성을 제한하고 공제하고 개조하는데 좋은효력을 본  실례가 있는듯도 하다.        신과 종교에 대한 생각, 나로서는 아무튼 많은 공부와 립증이 필요하다.
41    [잡담42] 상식이 진리가 아니다 댓글:  조회:3417  추천:82  2008-06-22
[잡담42]상식이 진리가 아니다허동식아주 어릴적에 동네에 결혼식이 있으면 저녁에 어른들이  신랑집에 모여들어 오락주석을 하나 만들고 신랑 신부에게 노래와 춤을 하게 하고 부산을 피우고 닭도 잡아먹고 술도 먹고 하던 기억이 있다. 한족들의 闹洞房하고는 형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농경사회의 일종 오락문화방식으로서 한적하고 단일적이던 시골에 오락적인 교류적인 기분을 가져다 주었었다. 한번은 오락주석이 신랑에게 만일 홍수가 나타나 생모와 신부가 함께 물에 빠졌는데  한사람만 구해낼수없는 조건에서 누구를 구하면 좋겠는가 질문하고 신부더러 신랑 대신 답하라 하니 신부가 그래도 신랑의 립장에서 생모를 구하고 신부를 포기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그 리유를 엄마는 하나밖에 없고 신부는 즉 마누라는 조건만 있으면 다시 만들수 있다였다고 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그래서 좌중은 만족하고 다시 웃고 떠들고 신부의 효도관을 극찬하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유학사상이 주류로 되여있으면 그 표현식의 하나로 효도가 아주 중요시된다. 효도란 가정과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 인문사상의 중심내용의 하나이다. 우리는 잘 리해하고 잘 써먹기는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효도가 아무리 상식적으로 보급이 되여있다 하더러도 우리와는 다른 문화원초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은 그 진미를 리해하기 힘들고 효도를 최상으로 생각하지않을수도 있다. 신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권에서는 효도보다 앞서는것이 사람과 신 사이의 관계로서 人神관계를 초월한 효도는 나설 자리가 없다. 성실한 기독교자에게 효도가 아무것도 아닐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이 깨여진다.  족군의 형성에 있어서도 우리는 혈연성을 거의 관건적인 요소로 리해를 진행하고 상식으로 간주하지만 그 상식이 진리(완전하고 보편적인 사실)가 아닐수도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아니된다. 씨족에 관한 그리고 가정과 사유제의 발생에 대한 엥겔스의 론설을 하나의 旁증으로  우리가 아주 오래동안 족군과 혈연은 절대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사는 다 그런것은 아니다. 고대 희랍에서는 족군이란 혈연보다도 공동神을 둘러싼 합치성을 전제로 하여왔다. 말하자면 전혀 혈연이 없는 사람이 어느 어느 족군에 참석하려면 그 족군의 공동신에 반듯이 충성해야만 가능했다. 공동신을 모시면 그 족군의 혼인과 토지권을 향유할수 있었다. 누가 그 족군의 혈연을 지닌다 하더라도 공동신을 배반하면 그 족군으로부터 혈연성을 <박탈>당하고 추방을 받아야했던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정도는 리해하기 힘들고 달통이 아니될수도 있지만 엄연한 력사사실이다. 우리의 혈통론의 우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다만 우리의 보존되여온 생활방식일뿐 전 인류적인 생활방식은 아님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상식이 진리가 아님을 알려면 視點과 視域이 중요하다.  나의 시점에서만 출발함을 거절하고 나의 제한된 시역을 벗어남이 소위 지혜로운자의 길이다.  상식을 깨버리는 일이 학문의 길일수도 있겠다  
40    [잡담41] 문화학範式의 접목 댓글:  조회:3559  추천:84  2008-06-17
 [잡담41]  문화학範式의 접목  허동식부동한 언어와 문자를 행하는 두 사람이 동일한 문제에 대해 소통을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부동한 문화학범식을 전제로 하는 두 사람이 사물에 대한 생각을 나누려면 같은 언어와 문자를 구사한다 할지라도 충돌을 이룰수도 있다.  <<중국은 봉건력사가 없다>>를 두고 재미있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쟁론이 발생하듯이 현재 우리는 문화범식의 접목이 아주 필요하다.  중국은 아주 오래동안 구쏘련에서 받아들인 문화학범식을 사용하고 있다.현재 세계적으로 보면 유럽과 미국의 문화범식이 거의 주류로 되여있고 보편화되여있다. 주류로 되여있고 보편화되였다 하여도 제일 좋은 문화학범식이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면 그 범식을 모르고는 리해하기 힘들다.그래서 난장판도 벌어지고 있다.  문화반성이 필요함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자아반성이 철두철미할 정도로 되려면 남들의 이야기도 들어볼 만하다. 그런데는 도량이 필요하고 접목이 필요하고 공리성을 전혀 떠난 쟁론이 령단묘약이다. 누가 그만 아차 실수로 무례한 언행을 인터넷에 내비친다 하더라도 그런거야 뭘 하고 웃으며 지나치는 풍기를 만드는 선배님들이 고맙다. 그런 분들의 존재로 하여 우리의 문화반성도 좋고 쟁론도 좋고 경지가 새로워지고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의 지혜를 좋게 만들어주리라 기도하고싶다.  사실 문화학범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부동한 사유방식이고 표달방식일 뿐이다. 문화범식이란 걸림돌에 걸리여 아이코만 부른다면 우리가 거창하게 외치는 세계화 일원이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원이 된다 하더라도 소외된 일원일것이다.  세상에 어렵고 마음아픈 일이 많고 많지만 내 경력으로는 어느 돈 없는 날 배고프던 일과 어느 처녀를 좋아했는데 그 처녀가 전혀 눈길을 주지않던 일과 그리고 문자로 내 생각을 피력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살면서 느낀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놓을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 조글로가 고맙다. 또 문화학범식의 접목과 여러가지 접목에서 조글로가 큰 기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39    [잡담40] 뢰봉을 따라 배우자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4515  추천:131  2008-06-17
 [잡담40]뢰봉을 따라 배우자 그리고 기타허동식 <<뢰봉을 따라 배우자>>는 나사못정신과 헌신정신 비슷한 정신이미지를 대중화적으로 보급하려는 의도가 안받침되였다고  생각된다.계급정치적인 인륜도덕적인 목적성이 다분한 모택동의 호소로서 특정시대 중국인이 아니면, 그 력사어경적인 배경을 잘 모르고는 리해하기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아주 어려운 말이다. 뢰봉시대를 모르는 個體문화배경을 지닌 외국인에게 뢰봉을 따라배우자를 해석하고 보급하려면 단순한 언어해석만도 세말은 될것이다. 뢰봉을 따라배우는데  뢰봉의 무엇을 따라배울건가? 뢰봉정신을 따라배우려면 뢰봉정신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뒤에는 또 수없는 뢰봉정신에 대한 具象적인 演義가 필요할것이고 아주 멀리로는 공자의 <<론어>>에 내비치는 중국인의 륜리도덕리상마저 해석이 필요함으로 그야말로  거대한 문화공정이 될수도 있겠다. 많은 사상가들의 언론을 읽고 받아들이고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그 언론의 시대적인 력사어경을 전혀 버리고 언론만 곱씹는 행위를 많이 진행하여 왔다. 전목의 <<론어신해>>속에는 <<론어>>를 알려면 <<론어>>의 시대배경을 어느 정도 전달해주는 <<춘추>>도 같이 읽어야 한다는 단락이 있는데 참으로 지당한 생각이라 생각된다. 공자가 생활한 시대를 모르고는 <<론어>>를 알수가 없으며 지어 오독을 할수도 있고 誤用을 할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시대정신을 아주 초월한 성인이라 할지라도,우주만물에 대한 종교적인 명상을 누리는 철학가라 하여도 필경은 인간이므로 인간의 제한성을 받지않을수가 없다. 인간은 만물의 령장으로 자처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아왔으며 살어갈것이다. 인간이 인간임은 인간곁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존재로 하여 철학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돌이 돌임은 물의 존재로 하여 돌이 물이 아니라 돌이라는 해석과정이 있듯이 우주의 신비를 깨칠수가 거의 불가능한 인간은 異類의 존재로 하여  자아해석을 진행할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뢰봉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이 뢰봉정신에 대한 제일 좋은 해석의 하나로 된다. 현재 <<뢰봉을 따라배우자>> 하면 뢰봉의 무엇을 따라배울건가 질문하는 중국인들도 있다.뢰봉시대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닌 그들의 질문에는 아래의 내용이 배포된것이 아닐가고 생각된다.1주위에는 인생관의 전변이 있으며 전통적인 집체의식과는 조금 다른 개체의식의 활발상이 싹트고 있다. 2 과거의 사상 망종행위에 대한 의심과 질문 그리고 비판이 싹트고 있다.  3 내용이 없는 정치구호라든가 내용이 모호한 정치사상에 대한 반발심도 존재한다 . 아무튼 주어진것만을 주는것만을 받아먹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
38    [잡담39] 문학도로서 모모시인을 보는 생각 댓글:  조회:4073  추천:87  2008-06-02
[잡담39] 문학도로서 모모시인을 보는 생각허동식     모모시인님은 내가 존중하고싶은 선배시인님이다. 이 글에서 모모시인님에 대한 생각을 사례로 든것이  큰 실례일수도 있다. 량해를 구하고싶다.       아주 어릴 때 라디오방송에서 모모시인님이 쓰신 장편서사시를 드문드문 시청하였다. 방송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없이 재미좋다는 생각도 없이, 다만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였다.     중학교시절에 조선어문에 실린 모모시인님의 시를 한수 배웠다.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고 선생님이 배워주는 그대로.     고중에 들어가면서 모모시인님의 시집 두권을 통독했다.시어의 현람함과 서정의 농후함에 감복을 했다.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모모시인님의 시를 별로 달갑게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그분의 시작이 <거짓말>이고 즐겨 읽던 두권의 시집도 (나로서는 시학의 입문서적일수도 있겠다) 언어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하였다.      나의 생각이 전변된 근본 원인은 시대가 변하고 사유가 개방되면서부터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다양해지였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인 모모시인님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나는 내 생각이 변한 구체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모모시인님에 대해서 객관적인 생각을  해보고싶지도 않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모모시인님에게 불손한 일을 한번 저질렀다. 한국에서 오신 소설가 한분이 중국조선족문단의 어마어마한 분들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야기로 모모시인님을 말에 내였는데 나는 소설가분의 행실이 너무 미운탓에 감히 < 당신같은 인간도 소설을 쓰는가?>라는 말은 못하고 대신 < 당신하고 친한다는 모모시인도 내 눈에 차지않으니 당신도 저리 비키오>하는 내용을 말하고 싶어 <모모시인은 어용문이지요> 하고 눈쌀을 치켜들었다. 모모시인이 어용문인인지는 지금까지도 나같은 인간이 평판할 문제가 아니며, 또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면 詩作들도 자연 우렬이 선명해진다 하더라도, 모모시인님의 시작에 대하여 흥미가 적어졌다 하더라도, 그 소설가의 꼬락서니를 아주 보기싫어했다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감생심 어용문인 따위를 입밖에 휘두른것이 나쁜 일이다. 후회된다.     또 몇해가 지나니 나의 생각이 다시 변했다. 최시인님과 모모시인님의 시적을 담론하면서 나는 <그분은 천재입니다. 언어적인 천재입니다. 만일 그분이 나처럼 사상개방 시대를 만났드라면 세계 유명한 시인이 되실건데 >하고 감복의 언어를 터뜨리고 말았다.       작년인가 또 리시인님으로부터 모모시인의 시 <***>은 해방초기 수백만 조선족의 심경을 그린 시작이여 하는 말씀을 듣고 나는 완전 동의를 하고 말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으로 말이다.     현재 나는 문학도로서 어느 문학인을 보는 시각을 되도록이는 작품에 머물리려는 욕심을 부린다. 또 어느 문학인도 시대적인 환경적인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인도 인간으로서 不食人间烟火는 아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인더러 성인이 되라는 요구는 실천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 어느 싸이트에서 김학철옹의 입을 빌어 모모시인님에게 구정물 비슷한것을 퍼붓는 글을 읽었다. 나로서는 좋은 글이 아니라 생각된다.     하여튼 모모시인님의 시작은 그처럼 처절한 환경에서도 좋은 시작을 내놓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내가 존경해야할 선배시인님이다.
[잡담38] 유태인과 독일인으부터 보는 인성의 음영 그리고 기타허동식유태교의 성경인 <구약>에는 유태인들의 인성이 적라라하게 문학언어로 기록되여있다. 인류의 신성한 도덕리상과는 아주 거리를 둔 탐욕과 질투 ,옹졸과 배신, 배타와 自大 등 인성의 음영, 바로 동물성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여있다. 2차대전시에 유태인들은 나치스의 피비린 멸종책속에서 수난을 받았다. 그 수난속에는 유태인들의 책임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유태인집거지역의 일부분 유태인지도자들이 나치스당국에 유태인들의 명단과 상관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나치스가 유태종족을 멸하는데 적극적인 협조를 해주었다. 유태인사상의 얼룩점이 아닐수가 없다. <구약>에 기록된 유태인성의 음영이 다시 발로되였다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저들의 반성에는 렬세이고 먼 남아메리카로 가서 어느 나치스 소위군관을 랍치하여 예루살렘에서 특대적인 판결을 하는데만 열중하였다. 이스라엘이 건국된뒤, 유태인들은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에게 만행을 많이 저질렀고 중동지역의 전쟁을 몇번이나 책동하였다. 먼 옛날에는 유태인이든 아랍이이든 모두가 闪족이였던 일은 모두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실적인 종교적인 리익을 쟁탈하느라 혈안이 되여있다. 현대판 인성의 음영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종족이든, 어느 사람이든 다른 종족의 다른 누구의 인성의 약점을 논할적에는 적극성을 크게 보이지만 자기 종족과 자신을 논할적에는 발뺌을 잘 하고 분식을 하기에 열중한다. 이 세상에는 어느 종족을 물론하고 어느  누구를 물론하고 수정같은 과거를 지닌 자가 있으랴? 내가 보건대 순수도덕적인 종족이 없고 성인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인공된 기록일뿐이다.    독일인들은 칸트라는 위대한 철학자를 배출하면서도 히틀러라는 악마를 배출하였다. 그래서 칸트를 론하면 칸트의 혈연성에 집약되고 히틀러를 론하면 히틀러의 사회성에 대하여 집약하는 징조가 다분하게 유전되고 있다.  2차대전 나중에 전쟁범들을 처리하면서 사회범죄와 개인범죄의 구별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히틀러추종자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법적책임을 회피했고 서독정부의 각 분야에서 활약을 했다. 2차대전시에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지르고도 히틀러와 나치당국의 명령을 부득불 집행하였다는 리유 하나로 法網을 새여나간 그 결과적인 사실에 대하여 지금도 사람들은 법리적으로 사회학리적으로 의문을 진행하고 있을뿐이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사유적인 행위적인 모순이 많다. 기독교에서는 조상의 잘못을 후대가 짊어지게 되여있지만 현대법리상에는 할아버지의 범행을 손자가 짊어질 리유와 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손자들더러 할아버지 범행결과를 감당하라는 사실과 추세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그것이 분명 잘못된 생각임은 잘 알지만  다른 종족과 다른 사람에게는 활용하려고 노력하는 현상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역시 인성의 음영이다.   친일파를 제거한다고 떠듬도 어떻게 보면 현실의 리익다툼에 지나지않는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의 과거를 두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웅다웅함도 또 서정주시인이 자신의 과거를 두고 <그거 뭐 지나간 일> 하고 얼버무리는것도 모두가 인성의 음영이고 약점이고 제한성이다.    한국의 어떤 네티즌들이 중국의 문천지진참사를 두고 잘코사니를 불렀는데 고위공직자들이 공개사과를 할 정도로 불화를 만들었고, 일본을 소일본이라고 하던 중국인들이 일본지진구조대가 잘 해주니 좋다고 야단을 부림도 그 속에는 인성의 음영이 유난히 표기된다. 소위 인문리성이란 다른 사람의 립장에서도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집행한다는 사상이라면 인성의 음영을 제거하는데는 그래도 인문리성이 바람직한 밀방이 아닐가?
36    [잡담37] 사천지진참사중의 교육공평성 댓글:  조회:3779  추천:53  2008-05-28
중국현대사회에 있어서 대부분 민중의 자녀들을 상대해서는 대학교란 바로 미래이다. 고등교육을 받으면 좋은 직업을 만들 챤스가 주어질것이고 장래의 경제수입도 높을것이고 살면서 덜 힘들거고 재미있을거고….. 등등이 바로 대학교입학의 직접적인 원동력이고 목적이다. 이런 현상의 좋고 나쁨은 다른 문제이지만 현실사회는 주류적으로 대학교육을 실리교육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공평성은 교육공평성에서 집중표현이 된다. 그 누구나 출신과 경제능력과 생활하고 있는 지역과도 큰 관련이 없이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한과 챤스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것은 현대사회운행의 이념이다.        중국은 상기 공평교육이념과 아직은 거리를 두고 있다.  해마다 진행되는 고시와 대학생모집은 성급 행정 구역에 따라 각 대학의 지표를 발급하고 각 성마다 그 지표에 따라 또 응시생들의 점수와 지원에 따라 대학입학통지서를 발급한다. 그 과정은 공평성이 많이 결여되여있다.       례를 들면 북경에 소재한 많은 대학들이 북경시에 내리는 지표가 북경인구가 전국인구에서 차지하는 비례수보다도 엄청 높은 비례수로 되여있고(어느 해인가 북경대학교장이 이 문제를 두고 북경대학은 북경시정부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는 말로 기자의 도전적인 물음에 우물우물한 답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다 기억된다.) 북경호적생이 북경대학에 입학해도 그 실력이 호적을 어느 지방성에 두었고 어느 지방대학에 입학한 학생보다 실력이 약할 가능성과 사실을 많이 만들고 있다. 또 편벽지역을 도와준다는 명의하에 티벳이라든가 청해성의 학생들은 일반대학에도 입학못할 실력이지만 중점대학에 입학되므로 해마다 교육수준이 높은 성에서(강소 산동 하남) 고시이민(高考移民)들이 편벽지역으로 호적을 옮기는 비법현상들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중국의 고시정책이 중국 각지역의 불균형적인 발전을 전제로 공평성을 베푸는듯한 내용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공평성을 위한 불공평을 배태함이 사실이다. 현재까지의 중국의 대학입시와 대학생모집은 어느 모로 보면 대학응시생의 실력을 기준으로 하되 또 정치적인 구역적인 지방적인 등등의 기준도 한몫을 차지한다.        오늘 인터넷에도 사천과 지진참사지역의 대학생모집지표를 증가한다는 소식이 실렸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공평성을 떠난 행위로 보여진다. 지진지역의 대학응시생들을 이런 방식으로 지원한다는것은 인도주의차원에서 출발하는 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비지진지역 대학응시생들에게는 불공평이 주어진다. 비상시의 인도주의와 어느 제한된 공평성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서 전역적인 불공평성을 진행한다는것은 제창할바가 못된다.               나로서는 참으로 리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화남리공대의 구체적인 조치는 좋은 조치이이지만 교육부의 조치는 쇼적인 일면을 지녔다 느껴진다.   四川1/5录取指标留给地震灾区高考生 2008-05-28 09:12:03 来源: 南方网(广州) 网友评论 0 条 点击查看 ·                                   核心提示:教育部已经下发了关于各高校增加对川招生计划的正式文件,当中规定今年在川招生的高校将增加2%的指标。同时,在招生录取过程中,对四川延考区(受灾区)与非延考区(非受灾区)的考生必须按照1:4的比例进行招生。  此外,不少广东高校也已对即将入学的灾区籍考生出台了一系列照顾政策。如华南理工大学就表示,今年四川灾区高考生一旦被华工录取,即可全免书费、免费提供生活用品,同时学校还将通过一系列有效措施切实帮助他们安心学习,健康成才。 (本文来源:南方日报 作者:谢苗枫 实习生 刘美华 程瑶)
35    [잡담36] 문천지진참사와 쌀독인심 댓글:  조회:4130  추천:82  2008-05-26
[잡담36] 문천지진참사와 쌀독인심허동식     사천성 문천은 거의 6년전이던가 내가 하루밤 투숙했던 동네이다. 한여름에도 저녁이면 크게 서늘하던 민강가의 오붓한 현성, 그 거리에서 기웃거리던 기억이 난다. 문천지진참사를 통하여 제노라고 우쭐거리는 인류가 천재지변앞에서는 아직도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대신 우리 국인들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문천지진참사에 사랑이 지긋한 손길을 뻗치고 있는 리유 하나로 쑥쓰러운 마음을 달래고싶다. 곁에 몇백원에서 몇천원에 이르는 돈액을 크게 서슴치않고 모금하는 사람들이 꽤나 살고있는 현상을 둘러보면 나는 국인들의 돈 씀씀이가 크게 전변되였음을 느낀다. 과거에 친구들 몇이 술 한잔 나누어도 결산시에는 너도 나도 눈치 살피기만 하던 깍쟁이 기질과 옹졸함이 많이 사라지고 대신 통이 크게 노는 양상을 보인다. 어느 사이엔가 국인들의 마음속에 련민과 사랑과 자존심이라는 심성이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련민과 사랑은 그 누구를 불문하고 지니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물질재부의 풍족도를 포함한 객관조건의 성숙이 사람의 좋은 심성을 가꾸어주는 관건적인 요인의 하나임을 알어야 한다. 중국은 민간적인 가난이 꽤나 오래 지속된 나라이다. 력사문화전통적으로 보면 국력을 이루는 인소인 물력과 재력을 대집중시키기 위하여 중앙집권제도에 알맞는 경제제도를 운행하여 왔으며 소위 조대가 바뀔 때마다 민간인들이 축적한 재부를 마구 겁탈한 력사실례가 많다. 또 의식적으로도 서방의 만백성이 부유하면 나라가 강력해진다는 신조와는 다른 나라가 부유하면 만백성이 부유해진다는 신조를 지켜왔다. 때문에 력사적으로 습관적으로 중국의 국가재부와 민간사회재부는 비례구조로부터 보면 국가가 민간사회보다 우선적이였던 우세적이였던 경향성을 보여왔다. 중국의 이러한 력사문화전통이 좋은 점도 있기는 하겠지만  마이너스적인 면이 없는것은 아니다. 국가와 민간사회의 물질재부 구조가 국가쪽에 너무 기울고 그 평형이 비합리적이여서 흔들리게 되는 경우에는 공무원의 탐오비리가 성행한다든가  국민의 국가귀속감이 적어지는 등 현상을 만들어 낼수 있음이 중국력사의 경험이고 교훈임을 알어야한다. 국가와 민간사회간의 재부분배구조와 방법은 구체적인 력사語境과 접속이 필요한 방대한 문제로서 나 따위가 조리정연하게 운운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현재 문천지진참사를 두고 진행되는 국인들의 자원적이고 적극적이고 열심적인 모금 현상은 개혁개방과 새로운 물질재부분배방식이 민간사회에 가져다준 물질실리가 서서히 이루어주는 구체적인 문화현상이라 판단하고 싶어진다. 중국어에 <<가난한 동네는 부랑배가 많다(穷山恶水出刁民)》는 속어가 있고 우리 말에는 <<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이 있다. 상기 속어와 속담이 우리들더러 국민들의 사상교육에만 열중하지말고 인성에 부합된 <<쌀독인심>>을 중요시해야 함을 알려준다고 생각된다.  
34    [잡담35] 문단의 병 댓글:  조회:4036  추천:83  2008-05-21
[잡담35]문단의 병허동식어떤 사회집단이든지 어느 경우에는 정신지도자를 선택하게 되여있다. 권력차원에서 출발한 강압적인 선택과정이 있는가 하면 민간차원에서 출발한 자원적인 선택과정이 있다. 중국조선족은 근년에 전통적이고 절대지배적이였던 관방문화의 정신지도성을 조금 벗어나 자원적으로 정신지도자를 선택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 김학철옹이 정신지도자에 가까운 이미지로 부상되였다고 생각된다. 김학철옹이 중국조선족의 정신지도자 류형으로 선택되는 과정에 문학계가 주도작용을 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관방사회와 민간사회의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승인을 받은것은 아니지만 김학철옹의 사회적인 민족적인 고귀인품과 렵기적이고 투쟁적인 인생경력에 인기되는 그 사회지위의 상징성은 부인하기가 사실 아직 어려운 일이다. 물론 김학철옹과 련관되는 문화정상설이 반발을 받은 일은 있지만 그것은 순수 문학적인 시각에서 판단된 일이며 아직은 김학철옹이 우리 심목에 심어놓은 정신지도자 역활과는 모순을 이루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김학철옹의 작품과 투쟁경력 그리고 사상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반면에 이상기후의 징조도 보이고 있다. 김학철옹이 돌아가신 뒤, 쩍 하면 김학철옹의 일언일행이 누구를 평판하고 누구를 끄집어내는데 리용되고 있음은 좋은 일이 아니다. 김학철옹도 인간으로서 시대적인 제한과 개인적인 제한을 받지않을수가 없다. 그러므로 김학철옹의 모든 언행이 과학적이고 정확하였다고는 리해할수는 없다. 특별히  누구든지 김학철옹의 언행을 단장취의하는 경우에는, 어느 구체적인 목적에 사용되는 경우에는 역효과를 내보일수도 있음을 알어야 한다.      식구들이 적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나도 작가의 개인적인 인품적인 면을 류의함은 오늘날 문단의 병일수도 있겠다. 또 김학철옹의 명의를 빌어 개인적인 작전을 진행함도 오늘날 문단의 병일수도 있겠다.
33    [잡담34] 계란으로 돌 깨기 그리고 물방울이 돌에 구멍 내기 댓글:  조회:3797  추천:78  2008-04-28
잡담     <계란으로 돌 깨기> 그리고 <물방울이 돌에 구멍 내기>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비리가 폭등하고 있는 사회임음은 의심할바가 없다.사회의 어느 구석을 물론하고 리상적인 윤리도덕리상과 사회공리와는 현실은 거리를 두고 있다. 그 거리가 축소되고 있는 추세인지 확대되고 있는 추세인지는 내가 판단할바가 아니지만 우리가 가꾸어야 할 사회의 비리와 불공정성에 대하여 태도표명을 할라치면 가끔은 < 사회란 원래 그런거여, 너무 고지식하지말고 너무 잘난체하지말고 밥이나 얻어먹고 잠이나 자면서 절때 계란으로 돌 깨는 짓을 하지말라>는 충고를 받게 된다. 충고를 하게 된다.      나를 생각해서 또는 남을 생각해서 하는 충고이기는 하겠지만 마음 어딘가는 구역질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아주 오래동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무력한 계란의 존재로서 엄연한 사실존재인 돌을 깨려는 욕구마저 잃어버리고 있다. 계란으로 돌을 깨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러한 용기와 내재적인 원동력이 없이는 앞으로 몇백년이 흐른다 하더라도 개인과 기정사회의 타협만 영원히 지속될것이고 사회공리의 륭기는 전혀 구경하지 못할것으로 짐작된다.    80년대 중엽으로부터 말엽까지만 하여도 중국의 지식청년들은 유치하기는 하지만 사회정치리상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다. 헌데 89년 정치사건에 학생들이 말려든 일을 계기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부분 학생들과 지식청년들은 완전한 속세주의풍기에만 빠져있다.중국인 고유의 天問적인 기질과 행위를 버리고만 있다.  나도 89년에는 대학교 3학년이였는데 적어도 어느 정도의 사회관심성을 지녔었지만 또 중국지식인들의  사회관심성이 아닌 정치관심성에(너도 나도 관직 하나를 얻으려는) 현상에 많은 실망을 느끼고나서 거의 2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연한 타락상만 보이고 있다. 그래서 <계란으로 돌을 치지 말라>는 충언을  외우는 부류에 속하고있다.    헌데 가증스러운것은 아버지 엄마로 되였으니 자식의 공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고 (공부가 출세의 길이라 생각하므로) 또 그럴 때면 <물방울도 돌에 구멍을 낸다> < 돌도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 등등의 고귀한 말씀을 팔아먹고 있으니 내 생과 우리의 생은 슬픈 생이 ,위선자의 생이 아닐수가 없음을 느낀다.   
32    [잡담33] 고대사 연구법에 대한 잡견 댓글:  조회:3392  추천:59  2008-04-13
      고대사를 씹어넘기는 직업은 아니지만, 력사를 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고대사 연구법에 대하여 의논하고 싶다.         1 력사문헌연구법 . 문자가 나타나서 력사기록이 되여있는 시대는 보존된 문헌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고대사를 재현하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문자의 발전변화와 地名의 변화는 문헌연구법에 제한성과 誤점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리고 력사기록이란 그 대부분이 기록자의 주관적인 인소도 작용한 결과이므로 력사문헌의 진실성을 두고 정사인가 야사인가 진실인가 신화인가 쟁론이 지속되는 일도 있으며, 그만큼 력사문헌도 자아의 제한성을 지니고있다. 그래서 력사문헌연구법은 고대사 연구의 만능열쇠가 아닌듯하다. 특별히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의 인물과 사건은 口頭로 전해내려오던것을 문자가 나타난뒤에야 기록했음으로 문헌연구로 선사시대를 판단하는것은 힘든 일이 아닐수가 없다.         2 考古학연구법. 조상들이 지층에 남겨둔 흔적들을 뒤집어서 력사문헌들과 맞물리려는 작업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자연변화로 하여 조상들이 남긴 흔적들이 많이 회손되여있고  또 지역에 따라 부족에 따라 생활습성이 다르고 喪葬습성이 다르기에 조상흔적이 적은 동네는 고고학의 재미를 보지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고고학학자들이 피땀을 지불한 연구결과도 개인적인 시대적인 제한성을 받음으로 하여 결국은 진실된 력사와는 다소의 거리를 두지않을수가 없다 . 따라서 고고학연구법도 고대사의 진실을 재현하는 만능열쇠는  아님을 판단하게 된다.           3 생활풍습연구법(명절 喪葬 례의 등 민속습관을 포함하여 복식 음식 주거 등)과 어학연구법.  부동한 언어를 구사했던 부족들이 流動하면서 새로운 생활풍습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과거의 생활풍습 그리고 언어의 특징을 다소 보존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금까지 생활풍습 연구법과 어학연구법을 도입하여 부동한 생활풍습과 언어의 지역분포와 변화규칙을 해명하는 동시에 여러 부족의 공간이동의 맥을 그리려는 고대사 연구의 보조법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생활풍습연구법과 어학연구법은 고대사연구에 있어서 필경은 보조법에 속하며 만능열쇠는 아니다.. 좋은 실례는 아니지만 생활풍습연구법과 어학연구법(어원연구도 포함)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욕심에서  내가 겪은 두가지 일을 적고싶다. 나느 청해성에 살고있는 土族의 민속박물관에 구경갔다가 조선족의 색동저고리가 전시되여 있어 크게 놀란 일이 있다. 색동저고리라는 共點을 두고 나는 조선족과 토족의 련관성에 대하여 여러가지 환상을 진행하였고 나중에는 토족은 흥안령에 살던 수렵민족인 선비족이 서진해서 청해지역의 토번과 잡거한 뒤 나타난 민족으로 인정되여있음을 전제조건으로  색동저고리라는 共點의 우연일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색동저고리의 출생지는 대흥안령이구나 하는 나름의 생각과 추측만을 하였다. 실말로 토족의 민속박물관에 가서 그들의 색동저고리를 조선족의 색동저고리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너무 무단적이고 자아적인 생각임을 돌이켜본다. 또 감숙성에 유이그족이(裕固族)몇만명 살고 있는데 그 族源을 두고 돌궐어족에 속하지만 어원적으로는 고대몽고어에 속한다 하여 몽고족의 한갈래라는, 유이그족이 전해내려온 구두전설로 보면 西夏시기 黨項족의 후예라는, 생활습성으로 보면 吐蕃의 후예라는 여러가지 추측과 설이 있었는데 언젠가 유이그족어를 연구하던 중국학자가 웽그리아(항가리)를 방문하고 웽그리아아와 유이그족어에 많은 근사점이 존재함을 발견하고 유이그족을 흉노의 후예일수도 있다는 설을 하나 제기한적이 있다. 이 新說은 웽그리아인은 흉노가 서진해서 그 일부가 중유럽 항가리지역에 정착했다는 설과 일치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 확실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으며 유이그족의 족원문제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4         신체특징과 유전인자에 대한 연구. 유전인자연구전에는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신체특징을 조사하고 분류하여 부족과 종족의 흐름에 대하여 해석하려는 연구법도 있었다(례를 들면 비효통은 강소인과 조선인의 신체특징을 비교연구하여 동이족의 리산을 연구한적이 있음). 근년에 유전인자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유전인자조사로 신체특징연구를 대체하려는 경향이 보인다.(얼마전에 한국의 어느 교수가 유전인자조사를 하여 한국인의 40%가 중국중원지역 농경인들의 유전인자와 가깝다고 한적이 있음) . 신체특징과 유전인자에 대한 연구법은 비슷한 자연생태환경에서 비슷한 인종을 만들어낼수 있다는 진화론과 조금 빗나가는 점이 존재한다면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역시 만능열쇠일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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