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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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잡담96] 문화학자의 언론으로부터 댓글:  조회:4033  추천:42  2009-03-26
     근간에 아주 읽어보고싶은 책이 있다. 중국근대의 문화거인으로서 중서문명에 대하여 관통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辜鸿铭의 책이다. 辜鸿铭은 말레시아에서 태여난 화교로서 영국류학과 독일류학을 경력하면서 영어와 프랑스어、독일어、라틴어、그리스어、말레시아어 등 9개의 언어와 문자에 능통하게 되였으며 1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고 뒤에는 중국의 고대경전에도 뛰여나게 능란했으며<론어>를 외국어로 번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고대경전을  서양세계에 알린 학자이다.그가 독일 류학시에 펴낸 책들이 이미 독일 어느 대학의 필독서로 지명되여 있어서 독일에 류학간 蔡元培와 林语堂도 크게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야말로 뜨르르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북경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단발이 시체화되였던 시기에도 청나라 머리태를 끝까지 고집하여 학생들에게 <나는 보이는 머리태가 있지만 너들은 마음속에 보이지않는 머리태를 지니고 있다>는 언론도 하고, 강의 중 제일 재미있고 관건적인 순간에는 뚝 말씀을 끊고 에험 이젠 관건 대목인데 너들이 선생님을 식당으로 한번 모셔야 배워줄테다 고 렵기적이고 우습깡스러운 이야기도 남긴 분이다. 최초에는 서양에서 학문을 시작하고 나중에는 중국에서 학문을 하고 가르치신 분이 종극에는 그 시기의 중국문화의 대표적인 보수파학자로 등장했고 서양문명을 비판하고 중국문명을 찬미했다는 사실, 나는 이 문화거장의 책을 참으로 읽어보고싶었다. 헌데 책 구하기는 진짜 힘들고 잡지책에서나     辜鸿铭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쪼박 글을 몇편 읽어본 정도이다. 그래서 궁금증이나 달래려고 백과사전을 검색하면서 辜鸿铭에 적힌 아래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본다. 중화문명은 深沉、博大 纯朴하고 또 灵敏하다 중국인과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을 비교할진때 미국인은 博大、纯朴하지만 深沉부족이고 영국인은 深沉、纯朴하지만 博大부족이고 독일인은 博大、深沉하지만 纯朴부족이고 프랑스인은 독일인들의 타고난 深沉이 없고 미국인들의 博大와 영국인들의 纯朴도 지니지 못했지만 이상 3개국인들이 지니지 못한 灵敏을 지니고 있다. 매개의 문화單元에 판단적인 언어표현을 주입한다는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어떤 언어도 필경은 표현의 제한성을 받는것은 물론이고, 부동한 문화에 존재하는 부동한 氣質성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는것은 일반인으로서 감히 엄두를 내지못할 일이다.( <국화와 칼>을 쓴 미국의 문화대학자도 형상적인 언어로 일본문화를 표현하였을 뿐이다). 헌데 辜鸿铭이 감히 이런 언론을 펴낸다는것은 리해가 아니되면서도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일로 생각된다. 深沉、博大 纯朴 灵敏은 중국어에서는 형상적인 언어이지만 서양에서는 그 구체적인 어원을 물론하고 종극에는 형이상학적인 용어일것이다. 또 우리 조선말로는 深沉、博大 纯朴 灵敏과 勇敢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가? 그리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화유인자에는 어떤 용어가 적합할가? 누군가 쉬운 말로 나의 의문에대답을 해주었으면 고맙겠다. 
90    [잡담95] 내가 생각해보는 로신선생 댓글:  조회:3516  추천:32  2009-03-23
세월이 흘러 <성서>로 분식되던 로신선생의 글들이 서점가에서 많은 젊은 친구들의 냉대를 받고 있는듯하다. 언제는 중학교 교과서로부터 대학교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문학연구소로부터 학술언론매체에 이르기 까지 로신선생이 드팀없는 연구대상으로 빼곡하게 지목되였었지만 요새는 그 현상들이 퍼그나 淡化 되였고 대신 수많은 박래품을 비롯한 代替품들이 서점가를 학술언론지를 들락날락한다. 중국에 있어서는 로신선생의 수많은 납함들은 <하느님이 죽었다>고 웨치어 기독교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니체의 글처럼 세기적인 반성이고 비판이고 웨침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비판성이 풍부하고 필봉이 날카롭고 문체는 야유적이면서도 심미성도 아주 훌륭했던 탓으로 중국근대문학사와 문화사에서 로신선생은 지나갈수 없는 풍경이다. 헌데 조금 불행한것은 로신선생의 작품과 로신선생의 인문사상이 로신이 서거한 뒤의 사회정치학에 지나치게 리용당한 점이다. 모택동이 로신선생에게 수두룩한 <위대한 家>를 선물했고 전 사회가 로신을 계급투쟁설의 <신령>으로 모셨던 력사사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로신선생과 그의 글들을 正讀하는데 반면적인 영향을 많이 남기고 있다. 로신선생의 정신세계는 철저한 투쟁성과 비타협성으로 분출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투쟁대상과 비타협대상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패한 북양정부라든가 국민정부라든가 또는 락오된 중국의 문화전통이 로신선생의 筆伐대상인듯하지만 사실은 력사적인 궤도에서 관찰되고 반성되고 비판되는 중국식관료주의가 로신선생의 진정한 敵이였음을 나날이 느끼게 된다. 로신선생이 바로 로신선생이였고 (鲁迅即鲁迅)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는 아직까지도 위대한 로신선생과 감히 신장을 비길만한 문화인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그 원인은 로신선생의 철저한 반관료주의 사상에 기인했다고 생각된다. 일개 문학가로서 력사적인 시각으로 문화적인 시각으로 현실사회를 해부하고 비판했다는 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도 보기드문 擧事가 아닐수가 없다. 로신선생의 진정한 정신세계와 인문리상을 알려면 로신선생의 생활경력과  생활시대를 알아야 하며 또 로신문집을 리용할 생각을 조금 버리고 우선 그속에 내재하는 진정한 내용을 터득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존재주의자로서 로신>이라는 글을 읽고 평소의 생각들을 모집해보니 나는 로신선생에게 <존재주의철학자로서 반관료주의가 무정부주의로 표현이 된> 문학가라고 家를 선물하고싶다. 로신선생의 꿈은  중국민중을 중국력사라는 관성적이고 관료적인 궤적에서 해방하여 참된 삶을 영위하게 하는것이였다. 로신선생은 방법론적으로 혁명성이 전혀 없은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체계는 본질적으로  보면 초계급적이고 초민족적인 반관료사상이 핵이였다고 생각해본다.( 민간에는 로신선생이 건국뒤에도 생전이였더라면 언녕 총살당했을거라는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一說이 있다)  
89    [잡담92] 중국의 내수_국내소비력 댓글:  조회:3679  추천:27  2009-03-19
[잡담92]공상업경제가 활발하지 못했던 과거,  <한족들은 돈이 있으면  낡은 신발속에 감춘다오> 하는 말들을 들은적이 있다. 돈을 은행에 저금하지않고 自行보존한다는 말로서 한족들이 돈벌기에는 뛰여났지만 돈 소비에는 깍쟁이라는  내용을 어느 정도로 내포한 말이다. 미국처럼 채무소비를 하기는커녕 돈 만 있으면 꽁꽁 챙겨두는 한족들-중국사람들의  저축의식과 저축능력은 세인들의 흠모심을 불러일으미기도 하였고 돈 씀씀이가 헤픈 한국인들더러 중국사람을 따라배우라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헌데 모든것은 하나가 둘로 나뉘여진다는 묘한 명구가 있다. 긍융위기 뒤에 중국은 수출산업이 엄청 수축되면서 내수로 경제발전을 촉구하는 책을 취하고 있다. 애국권을 발행하라는 제언도 있고 여행권을 발급하는 도시도 있듯이 국내소비력을 터치느라고, 국인들의 궤춤을 뒤지려고 벼라별 지랄발광을 다 하고있다. 중국의 국민경제도 소비형 경제여야 한다고 외국인들이 떠들고 중앙정부는 그래서 머리가 더 아프고 다음에는 지방관료들이 잘 보이느라고 한목 보느라고 되지도않을 쇼를 벌린다. 하지만 애국권도 여행권도 공짜는 아닌지라 깍쟁이 중국사람들은 무시해버린다. 몇년전부터 있은 백화점들의 <백원 사면 50원 반환>하는 활동에서 많이 당하던 경험들이 용을 친다. 사실은 금융위기전보다도 개인의 경제효익이 떨어졌으므로 소비를 줄이느라고 만백성은 많이는 끙끙 앓음소리만 낼 분이다. 중국사람들의 저축고에 조금 잉여는 있다. 헌데 그 잉여가 13억 인구에게 평균으로 나뉘여진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은 엄청 많고 없는 사람은 전혀 없다. 중국인들의 잉여구조가 어떠한가를 연구하는 학자도 기구도 있겠지만 중국사람은 별로 이여구조에 대해  말이 없는데 난데없는 외국인들이 중국은 독점항업의 리윤을 만백성에게 조금 반환하고 대형국유기업도 벌어들인 돈을 국민들에게 조그 빈환하여야만 진정한 소비경제로 전환된다고 지적을 한다. 근 십년간, 국민경제는 평균 10%의 성장을 보였고 국가수입은 20%의 성장을 보였지만 만백성들의 수입은 그것과는 큰 차지가 있는것이 바로 중국의 경제분배실정이다.  또 관료사회에서는 만백성들이 일상생활 비용을 내놓고도 보이지않는 비용도 엄청나게 지불해야 하니 수탈도  당해야 하니 ( 례를 들면 애를 좋은 학교에 보내느라, 령도자에게 잘 보이느라 설 세배도 하느라 골목시장에서 야채를 조금 팔아도 파출소에서 치안관리비를 내라 하니 ) 현재  중국의 돈을 쓰고싶은 사람들의 궤춤이 비여있는가 아니면  도대체 어느정도로 인민페가 곰펭이를 끼고 있는가 함은 경제학자들과 정부가 심사숙고할 문제이다. 그리고 나서 내수인지 국내소비력인지 하는 놈더러 높이 뛰기를 하라고  호소했으면 좋겠다.
88    [잡담91] 중국의 농민-자작농 댓글:  조회:4026  추천:23  2009-03-18
계급투쟁사를 주맥으로 하는 력사책은 중국의 중세기를 다룸에 있어서 지주계급과 소작농계급의 모순을 아주 중요시하고, 또 민족모순도 웬간하면 계급투쟁설에 맏겨버리는 , 말하자면 지주계급 상층인물들의 탐욕과 야망에서 민족모순의 원인을 캐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폭팔되는 농민봉기는 지주계급의 토지겸병에 따르는 계급모순의 격화에 因한다는 , 농경족과 유목족의 대결도 지주계급과 유목부족 집정자들의 부패성 때문에 여차여차하였다는 력사책을 암기하느라고 나도 꽤나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다.           누구나 복잡한 력사를 간단하게 표현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듯도 하다 특별히 정치만을 위해 복무하는 력사책은 복잡한 력사를 어느 리론의 틀에 합격시키느라고, 현세의 리익에 일격화시키느라고 소위 硬傷을 많이 소유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다행이 되도록이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력사학자들도 있어 력사학의 존재가 돋보인다. 몇년전 중국의 어느 력사학자가 중국중세기의 력사에 지주계급과 소작농들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않은것은 아니지만, 황하이북은 다년간 자작농들이 소작농보다 많았다는 통계수자를 내보이면서, 또 력대의 중국 북방의 농민봉기 대부분은 자작농들이 관청의 수탈에 반항한 결과라고 주장한 글을 읽은적이 있다. 주류이델레오기와는 다르게 중국 중세기에 있어서 황하이북의 지주계급의 토지겸병은 험할 정도는 아니였고, 사회모순의 폭팔점은 관청이 자작농들에게 가져다 준 세금과 부역 등 가혹한 수탈이였다고 지적하여 글을 읽으면서 느낌이 퍼그나 새로웠다. 등소평할아버지의 도거리도 사실은 토지개혁이다. 집단농경으로부터 자작농경으로 전환이 생산력 발전에 적합한 농업책개혁이라는 말은 조금 어리벙벙한 얘기이고 해석이다. 어느 모로 보면 인성이 지닌 私에 알맞는 로동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농업책이라 평함이 더 합리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자작농경은 로동열정을 촉구하는데 좋은 수단이기는 하지만, 농업경제를 규모화함에 있어서는 대적이 아닐수가 없다. 테레비에서 중경에 적을 둔 어느 농민 근로자가 식구 네명이 농경지가 한畝밖에 없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도시로 진출할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였다. 畝의 량에 대해서는 중경의 수확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네명이 한무의 수확으로는 전혀 살어갈수 없다는 결론을 주는 장면이였다. 조금 극단적인 실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로 중국 자작농들의 경제생존 실정을 내보인다고 생각된다. 중국의 농민들은 과거나 건국후에나 관청의 강압적인 경제책의 첫번째 대상이였다. 듣기 나쁜 말로는 수탈이고 듣기 좋은 말은 공량이고 농업세고 물세고 등이였다. 다행이, 현재는 국력의 상승과 산업화에 따라 ,중국의 국가 력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농민들- 자작농들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장기간의 면세책을 향유하게 된듯이 사회변화가 있다 생각되면서 스스로 싱글벙글해진다. (옛날에도 가끔 休养生息을 취한 황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농민들이 조금 살어갈만한 정도이면 경제복구가 되면 관청의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던 사실이다.)  
87    [잡담90) 중국 조선족은 不歸의 길을 다시 걷는가 댓글:  조회:4219  추천:39  2009-03-02
       인간사에 있어서 인간의 공간이동이 불귀의 길로 되는 사례가 많다. 개인적인 사항으로 하여 개체가 불귀의 길을 걷는가 하면 사회사항으로 하여 群體가 불귀의 길을 걷는다.    19세기 말엽으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거의 절반에 가깝게 불귀의 삶을 지내였다. 한 고장에 머물러 살면서 3-4대를 넘기면 흔히 그 동네를 고향이라 한다. 언어로도 그렇게 표현하고 심중으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나이와 비슷한 동북에 사는 한족친구들과  너 고향이 어딘가 물으면 거의  백프로가 동북 어디 어디라고 한다. 적관을 거의 목숨처럼 여기는 중국인들도 관내의 산동이라든가 하북은 까맣게 잊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동북에 이주하기전의 고향은 하고 다시 물으면 절반 정도가 관내 어디어디라고 대답하고 할아버지 고향을 가보았나는 물음에 그들의 대답이 별로 시원치가 않아 내가 나는 너 할아버지 고향에 가보았어 하고 한마디 하면서 흠모에 가까운 눈길을 받은적이 몇번 있었다. 중국에는 <어느 고장의 황토가 사람을 묻어주지 않는가 > 하는 말이 있고 우리 말에는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농경사회의 향수를 달래는 말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런 말들이 거의 실존의미를 잃을 정도로 인구이동이 빈번해지고 규모화되여있다. 중국은 산업화과정에서 수많은 농사군들이 타향으로 도시로 불귀의 길을 메우고 있다.  금융위기로 하여 2000만에 이르는 농민근로자들이 시골고향에로의 귀로에 오르기는 했지만 잠시적인 현상일뿐이다. 농민근로자들에 대한 기능련마가 잘 실행이 되고 경제가 어느 정도 복구가 되면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거창한 물결속에서 우리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의 농민근로자들은 물을 거스르는 수영을 할 재간을 날마다 잃을것이며 또 물을 거스르는 수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질것이다. 한국이라든가 연해지역과 빠이빠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일을 하는것도 바람직한 일로 보이는듯도 하다.  그래서 농경지를 되찾자는 운동 비슷한 일들을 인터넷에서 읽어보면서 <조사연구가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는 모택동할아버지의 명구를 뒤전에 하고 나름의 생각을 굴려본다. 현존 농업생산력과 농산품시장가격을 전제로 할 때에는 고향의 농업은 반듯이 規模경제를 기반을 갖추어야한다. 금방 도거리를 할 때의 기억인데 논과 밭을 나누어서 식구 몇이서 두헥타르가 힘들었다. 현재 인구가 감소되여서 상황이 변하기는 하였겠지만 연변은 산간구릉지대라 인구에 비해서는 경작지가 풍족한 동네는 아니다. 물론 하남성 강소성 산동성 등 인구大省보다는 형편이 조금 좋을수도 있겠지만 기후상황과 수확고를 변수로 하여 생각한다면 연변의 경작지상황과 인구상황이 현재 규모경제를 할만한 조건을 갖추었을가 하는 우려심을 버리지못한다. 중국의 시책은 전중국을 상대로 하기에 국부지역의 특수성을 다 돌볼수가 없는 특점을 지니고있다. 현존 시책이 연변에 적합한가? 중국 조선족의 농업규모경제에 적합한가는 매체의 여론에 의해서 정해지는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부와 전문가들이 열심히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하고 대책을 세움을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대책이 있고 실행이 있으면, 그 다음에야 중국조선족이 걷는 길이 불귀의 길인가고 자문을 해볼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86    잡담89 문화대혁명중의 맹장과 일제시기 친일자 댓글:  조회:3825  추천:24  2009-03-02
      문화대혁명시 우파 양친을 잃고 천신만고를 지낸 사람의 하소연에 비슷한 과거사를 듣게 되였다. 나중에 그는 인과보응인지는 몰라도 우리 단위에서 문화대혁명시 행악질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이 끝나서 중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하였다. 중국전통문화에서 민간사상의 빛발점의 하나로 보이는 인과보응은 용케도 오늘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새빨간 미신임을 알고 있지만은 민간인들이 아직도 인과보응를 즐기고 바라는 심리가 작간하는 탓일줄도 모른다. 사실 문화대혁명시 맹장들의 어떤 인생종극은 인과보응이 효력을 보인 결과가 아니라 , 수많은 맹장들이 자신들의 사회정치지위의 하락에 잇따르는 경제력 하락과, 새사회에 대한 불만과 울분 또는 마음속의 자책과 고충에 시달리여 중병에 걸려 죽었을지 모른다는 설이 더욱 설복력이 있지만은 중국민간은 그 공훈메달을 인과보응설에 달아주기를 즐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에서는 소위 림표 4인방의 잔여세력을 없애버리는 운동을 전개하지않은것은 아니다. 이 소멸운동의 규모와 효력에 대하여 아직은 정론이 없지만, 사실상으로 부추베기에 지나지않았다. 그처럼 싱싱하던 부추를 베어버리기는 하였지만 부추뿌리—붕당문화는 소멸하지 못했으므로 그 잔여가 오늘까지도 남아있음은 사실이다. 나는 사회변혁시의 부추베기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싶다. 부추는 필경 땅밑에 뿌리를 둔 식물로서 부추를 완전해제하려면 땅을 갈아번지고 부추뿌리를 건져내야 한다. 헌데 그렇게 하려면 필경은 땅을 갈아번져야 하므로 채마전과 사회부추밭은 다른 식물들도 엉망이 되도록 재앙을 받을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부추이든지 전문적인 부추밭에 사는 경우가 적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는 다른 식물 또는 야채들과 같이 생태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연고로 어떤 운동이나 변혁을 물론하고 부추베기는 필경은 부추베기로 표현이 되였고 부추뿌리소멸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대혁명은 소위 전민운동이였으므로 문화대혁명이 끝나서 맹장들에 대한 철저한 해결책을 하였다면 중국인구중의 많은 수자가 총살을 당했거나 옥살이를 해야 했을것이다. 특히 확대화가 문화특징으로 되여있는 중국에서는  그 적의 많은 중앙급간부들마저도 그런 봉면을 면치못했을것이다. 또 소위 맹장이란 인간이 평판척도를 내놓는 이상, 맹장이 아니였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맹장모자가 차려졌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시에 당하기만 했다는 아우성과  흉내를 내였지만 파금선생처럼 문화적으로 인성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생각한 사람은 참으로 적다. 문화대혁명중에 조금이라도 적극성을 보인 사람을 죄다 죄인으로 내몰았다면 그 시대를 살아온 성인들은 거의가 죄인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하여본다. 하지만 사회란 지속성을 지니게 되였음로 사실상 문화대혁명중에서 죄행을 감행한 사람들도 많이 남아있게 되였고 둔갑술을 사용한 이들도 있고 인과보응이 아닌 飞黄腾达을 이룬 사람도 적지않았다. 일제가 망하고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친일자는 거의 죄악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는듯도 하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조상이 독립군이라는 직접증거를 내놓을수 있는 사람은 무상영광이고 또 어떤 실리추구에 리용될수도 있는듯도 하다. 하지만 일제시기의 친일에 대하여 리성적인 생각을 굴리는 사람은 적다. 망국과 친일의 죄악을 조선왕조의 무능과  개별적인 력사임물에게만 맡겨버림은 어딘가 비극적인 일이다. 친일이란 술어를 산수처럼 확실하게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감성적인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일본식민지당국에 세금을 낸 일도 친일로 판정이 될수가 있다. 이 판정에 일리가 있다면 모든 조선반도인들이 죄다 친일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제점령시에 목숨으로 민족의 존엄과 생존을 지켜온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였음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런 부류의 中性자들을 친일자로 내몰지않은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만일 중성자들마저 친일자로 내몰고 총살했더라면 우리의 사람 종자는 몇이나 남았을가? 미군당국이 여차여하게 친일자를 반공에 리용했다는 점은 도리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인간사회 존재방식이 지속성을 떠날수가 없으므로 하여, 많은 중성자는 물론 친일자들이  권세가로도 된 력사를 만들어놓은듯도 하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사회변혁시의 부추베기는 부추뿌리캐기로 전변한 일도 있고 흐지부지한 전변을 보인 경우도 많다. 혁명성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도 2차대전뒤에 독일군인들과 살았던 녀인들을 까까머리를 하여 거리돌림이나 시켰고 贝当(1차대전시 프랑스민족영웅, 1940년 2차대전시에 독일에 투항한 프랑스총리)과 같은 개별인물들이 재판을 당했을뿐 친독자들에게 확대화책을 실행하지않았다. 독일의 많은 나치분자들도 2차대전뒤에 정부요직을 누린것이 사실이다. 유태인들도 친나치스자들을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하였다. 중국에서는 8년항일이 끝나고 백여만 괴뢰군들이 국민정부와 공산당무장이 서로 쟁취하는 대상으로 되기도 했다. 요즘 중국에서는 대한간 왕정위의 남경괴뢰정부건립의 진정한 심리동기와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재정리하는 사람도 있다. 력사사건들과 인물들이 현세리익과 정치세력분쟁에 리용되는 일은 중외에 날마다 발생되는 이야기지만 왕정위연구와도 같은 일은 다행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림표 4인방이라든가 리완용이라든가 리승만이라든가 하는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시각점을 보일 시대가 도래한듯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추뿌리캐기란 위대한 문화반성이고 력사반성이여야지 절때 새로운 부추베기운동의 출발점으로 되여서는 아니된다.    
85    [잡담88] 민주의 힘 댓글:  조회:3654  추천:26  2009-02-19
  국민소득이 얼마정도 되면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욕망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현재 중국의 국민소득이 민주주의 표준소득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중국은 아주 확연하게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으며 서서히 민주주의 입구를 향하여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이고 욕심이다. 민주주의란 입에 발린 사탕이 아니다. 또 의회제요 多黨제요 선거제도요 하는 표현방식만이 아니며 단순한 산수계산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전제하에서 신령도 말살하지못하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畸形적인 난점을 극복하려는 이델레오기이며 인간사회제도이며 또 사회실천이며 생활방식이며 사유방식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진행되는 태공탐색이 인류지혜의 산물이라 한다면 민주주의도 인류지혜의 또 하나의 걸작이 아닐수가 없다. 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수많은 고초를 겪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인류사회를 이끄는 주류의식으로 되여있으며 인류의 위하여 造福萬代의 지위를 이루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지만, 실행중에 리론과 현실의 격차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원인의 대부분은 민주주의 본신보다도 민주집행과정의 오류에서 찾아볼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아직은 인류에게 민주주의보다 더욱 리상적인 주의가 존재하지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 있어서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민주주의라 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반동으로 내몰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인간마다 사람답게 어울려 살아갈수 있는 길이라는 전제앞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어떤 정치주장도 또 어떤 정치리용과 정치포장도 창백하여진다. 중국이 민주주의로 진입하려면 국가자본주의가 아닌 시민사회의 진전이 필요하다. 우리는 바로 국가자본주의로부터 시민자본주의에로의 전환중에 있다. 민주의 득을 얼마 보지 못한 족속으로서 많은 중국인들은 민주에 의심을 품고있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2차대전시 일제의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였던 야마모도(미국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을 지냈고 미국사회와 경제를 비교적 아는 일본군인)가 일본해병들이 미국과 미국인을 깔보는 정서를 드러내자 <너들은 너무나도 민주의 힘을 모른다, 미국이 깨여나면 일본은 어림도 없어> 하는 내용과 비슷한 말로 훈계하던 그 장면을 다시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84    [잡담87] 仁禪規律 관계 존재 댓글:  조회:3604  추천:34  2009-02-18
      어느 자리에서 중국문화를 강의하시는 교수님하고 仁에 대해 문의하였더니 그 분은 정면 확답을 하시지않고  너는 무엇을 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였다. 옆에 있던 누군가 통계에 의하면 <론어>에는 인에 대한 해석이 열가지 이상이며 리상적인 인간간계 총합이라  한마디 참여하니 그 교수님은 틀렸어 하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는 인에 대한 해석도 없이 무엇이 禪인가 물으셨다. 내가 중국인의 타력(초자연적인 신)에 의존하는 인생초탈에 대한 불신임이며 현실사회에서의 自力에 의한 인생추구라고 말하자 교수분은 또 틀렸어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선에 대한 해석이 없이 객관사물의 규칙(規律)이란 무엇인가 물었다. 누구도 감히 대답이 없으니 교수님은 내가 읽어본 책중에서 레닌의 규칙이란 관계이다는 한마디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하고 한마디 하시였다. 그리고는 그럼 관계란 무엇인가 문의하셨다. 관계란 사물의 존재방식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자 교수님은 또 무엇이 존재인가 반문하시였다. 존재란 확실하게 철학적인 거창한 개념으로서 서양어에서 중국어로의 전환이 확실하지 못하고 중국어로는 표현이 힘들지도 모른다고 내가 답하자 교수님은 입가에 조금 웃음을 띄우고 그래 중국어에 不可言表가 있지? 이젠 술이나 먹자 하시였다. 고대 그리스(희랍)에는 소클라테스가 유명한 변론철학자였다. 소클라테스는 누구와 변론을 하면 상대방의 주장을 직접 반박함이 아니라 상대방에서 문제를 제출하여 상대방이 확실한 대답을 못하게 만들고 자아모순에 빠지게 한다음 껄껄 비웃는 변론방식을 취하였는데 그날 우리는 좀 배우려다가 소클라테스式 변론 , 즉 반문옹노에 걸려들어 골탕만을 먹었다.    
83    [잡담86] 군체적으로 표현되는 인간성중의 략탈성 댓글:  조회:3838  추천:31  2009-02-04
인간의 심령세계는 인성적으로 명암적인 구도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중성격으로 심리해석이 되고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종교해석으로도 되고 계급투쟁설을 포함한 사회현상발전설로도 해석이 되여있지만 아직은 좋은 해결책은 없다.        작게는 소인물로부터 위인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하나님의 총애를 독차지했다는 유태인으로부터 和문화를 종지로 한다는 중국인과 민주문화 선봉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인에 이르기까지. 야만시대의 인간이든지 문명시대의 인간이든지, 인간과 인간사회는 끊임없는 명상과 실천을 거듭하여 왔지만 自力과 自律로 인성의 명암성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성공을 보지못하고 있다.        인성의 暗性을 두고 말할진대, 군체적인 집중표현은 군체의 掠奪성이라 보여진다.        온가보총리가 유럽방문에서 중국和문화를 주장하고 중국의 세계패권 불가능과 不願설을 거론하는것은 서방세계에서 중국위협설과 《黄祸》이 륭성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협중성을 지니고 있음도 마찬가지로 력사의 陰影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고 중국의 對조선책을 반대함이 근본원인으로 보여진다. 또 수많은 중국인이나 한반도인이나 일본을 대함에 있어서의 어느 정도의 무작정 태도는 일본인들이 지닌 국화와 칼중에서의 칼이라는 략탈성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남이 베풀어줌은 좋아하지만 남이 략탈을 거행함은 싫어한다. 내가 배운 중국력사교과서는 반식민지시대에 있은 렬강들의 략탈은 엄청 기록했지만 49년에 공화국창건시에 있은 외국과의 채무와 불평등조약을 무조건 무효로 한다는 점은 당연하게 거의 一字로 기록이 되여있다. 조계지인지 무엇인지 하는것도 외국인들이 많든 적든 돈내고 사용한 땅임을 확실하지만 우리의 심중에는 외국인들이 강제로 공짜로 빼앗았다는 인상밖에 남겨주지 않았었다. 쓰달린이 아무리 맑스주의자로 자처했지만 북유럽과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극동에서 진행한 토지점령과 략탈행위가 서방세계가 견결한 반공책을 취한 주요원인의 하나임도 사실이다. 일본군국주의가 대동아공동경영을 울부짖었지만도 사실은 략탈을 목적으로 한 침략이였기에 그 후세들마저 대성호질과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숨 한번 내쉬기가 힘든것이다. 한국에 사는 어떤 화교들로부터 한국정부책에 의하여 략탈을 당한 과거를 호소함을 조금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문화권만 아니라  유교문화를 울부짖는 동양도 략탈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라고 판단이 된다.       공급과 수요, 또는 생산력수준과 인민들의 생활요구로의 불평형이 인간의 략탈성을 만들어낸다고 배워왔다. 헌데 묵가라든가 불교의 무욕설을 조금 읽고보면 인성의 략탈성이란 인간문명의 부작용품이 아닐가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82    [잡담85] 조선화교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4100  추천:45  2009-02-02
       90년대 어느 여름, 가욕관시 장성호텔 식당에서 식사중인데 식당 복무원이 와서 조선말을 할줄 아는가고 반색해서 묻는것이였다. 쳐다보니 얼굴이 조금 둥근 편이고 어딘가 조선족기질이 내보이는지라 나는 조선족녀자라고 판단했다. 헌데 알고보니 조선족은 아니고 북조선에서 돌아온 화교라고 하였다. 귀국해서 나라의 배정을 받았는데 부모는 강철회사에 출근하고 본인은 현지로동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등 형편을 알려주었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은 현재 조선에 살고있는 화교는 50년대의 5만명에서 5천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조선시책은 2년동안 조선에 살지않고 중국에 산 화교는 조선호적 자동취소로 대하고 있으며 중국은 옛날 정부에서 조선으로부터의 귀국화교에게 베풀어주던 우혜책을 버리고 일자리가 있고 경제수입이 가능한 사람에게만 신분증, 말하자면 정식귀국을 인정해주는 시책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광복뒤 조선에서 살던 화교들도 중국에 많이 돌아왔다. 그러다가 60-7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국적에도 참가하지않고 조선에 머물러 사는 화교들이 많지도 적지도 않게 5만명정도를 유지하였음은 그 주요원인이 조선의 복지가 중국의 복지보다 좋았고 량국의 사회정치환경이 모두가 <그럭저럭> 수준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화교이든 조교이든 교포이든 <물은 낮은데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곳으로 오른다>는 말을 거역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제이든 오늘이든 래일이든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이야기는 번창한 이야기일것이다. 헌데 번창한 이야기속에는 무가내와 비리성적인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생각같으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살고싶은 나라에 가서 살고싶지만 밀항이요 귀화요 국적가입이요 난민이요 하는것들이 인간들에게 시달림을 가져다준다. <고향으로 가는데 시험은 무슨 시험?><한국령사에게 편지를 쓰는> 등 행위사건들의 배후에는 어딘가 한국정부와 떼질이라도 하려는 심리가 작간하고 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또 많으나 적으나 떼질심리를 지니고 있는 중국조선족들을 상대하는 한국정부의 시책은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구는 많고 땅이 졻은 나라의 무가내와 小氣적인 운영심리가 조금 내보이는듯도 하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라면 똑 같이 만드실거지 왜서라고 분별하게 만들어서 인간을 고생시키노? 또 높은곳에 오르려면 노력해서 오를거지 왜서 자꾸만 하늘에서 호떡이 하락하기를 바라누 하는 한탄을 하고 싶다.
81    [잡담84] 민족 국가 그리고 인간 댓글:  조회:3976  추천:43  2009-01-24
[잡담84] 민족 국가 그리고 인간허동식  인간으로 살아갈가? 소속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갈가? 아니면 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갈가? 만일 多元선택의 화합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꼭  一元을 선택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퍼그나 존재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쵸몰랑마를 쳐다보면서 쵸몰랑마가 티벳족이라든가 인도인들에게만 속하는 산봉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또 티벳족이든 인도인들이든 쵸몰랑마는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神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제발 빌었다. 민족국가형식이 세계의 주류로 되고있지만, 인간과 인간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무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질교환을 내놓고도 인간이 인간을 인간처럼 생각해주고 대해주는 정신적인 교류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서양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독교정신의 소유자이고 실행자이다. 물론 미국의 세계경찰패권도 현조하고 그들의 명예스럽지못한 식민지력사가 있기는 하지만, 현시점으로 보면 그들에게는 우리보다는 민족 대신, 국가 대신 인간을 최상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성이 뚜렷함은 사실이다.. 동아시아지역에 자리잡은 일본이든 한반도이든 중국이든 근대로부터의 정신초점은 민족생존에 두어왔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오늘도 그 지속성을 보인다. 일본의 國家神道이든 중국의 삼민주주의든 모택동주의든 조선의 주체사상이든 한국의 무엇이든 모두가 민족이라는 생존공동체의 리익을 최고리익으로 간주한 주의이고 실천이다. 이러한 주의와 실천에 대하여 손가락질할 자신은 없지만, 나는 적어도 의구심은 내보이고 싶다. 민족주의란, 특별히 협애한 민족주의란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 비극사를 많이 만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라든가 어느 개인의 정치야망에 리용되는 경우에는, 수많은 판단시비능력을 잃은 자들에게 접수되는 경우에는, 그 광기적인 他我 회손력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나라이든 민족이든 , 과거나 지금이나 바보는 없다. 제만 잘나체 접적거리려는 고심과 행위를 버려야 한다. 
80    [잡담83] 대만국회 육박전 댓글:  조회:4267  추천:34  2009-01-20
[잡담83]대만국회 육박전허동식TV에서 가끔 대만의 국회의원들이 침방울전쟁 대신 서로 때리고 패고 하는 육박장면을 보여준다. 저게 무슨 꼴이여? 우리의 인민대표대회라든가 정협회의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진행되는 박수치고 손들고 하는 질서정연한 모습과는 전혀 구별된다는, 난장판이라는 직감을 받을수가 있지만은, 나를 포함한 대륙인 대부분들이 대만 島情에 대해서 빗나가는 판단을 할수도 있는 일이다. 대만 국회의 지랄발광상 래력을 알려면은 대만이 대륙과 구별되는 사회운영을 한다는 점에 조금이라도 눈길을 돌려봄은 나쁜 점이 없는듯도 하다.   20세기 80년대 장경국에 의하여 진행된 대만의 민주화를 알려면 우선 손문선생에 의하여 창건된 중국국민당 과거를 돌이켜보기로 한다.   1905년, 일본에서 손문 등 인물들에 의하여 창립된 동맹회는 <驱除鞑虏,恢复中华,创立民国,平均地权”이라는 종지를 만들고 폭력수단으로 만청을 뒤엎고 민국을 건립하려는 민족적인 민주적인(삼권분리) 조직이였다. 동맹회는 중국에서 많은 무장봉기를 진행하였지만 종극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1911년 무창봉기(무창봉기가 동맹회가 지도한 봉기가 아니라는 관점도 있다) 뒤에는 내분렬되였다가 1912년에 송교인의 노력하에 여러 조직들과 합병되여 중국국민당으로 전변된다. 동맹회로부터 국민당으로의 전변은 단순한 조직명칭의 바꿈이 아니라 손문의 폭력혁명수단 대신 정당평화정치에로의 주장전변을 말해준다. 그래서 북양군벌인 원세개의 북양정부와 손문의 남경정부는 협상책으로 형식적으로나마 중국통일을 이루었고 국민당은 국회의 第一당으로 되고 원세개는 대통령으로 되였다. 헌데 원세개는 송교인을 암살하고 국민당을 해산하는 배은망덕과 황제로 되는 복벽추태극을 벌리였으며 국민당은 국회정치를 주장하는 정당으로부터 또다시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혁명당으로 복귀한다. 1913년, 제2차북벌전쟁뒤에 손문은 혁명이 승리하면 다당제를 기초로 하는 국회정치가 아니라 ,혁명당이 직접 권력을 잡으려는 일당정치체재 구상을 내놓았고 러시아10월혁명뒤에 국민당은 러시아를 배워 以党建国 以党治国를 절대적인 리념으로 하였다. 손문이 서거하고 국민당은 삼민주주의 명목하에 민국건립뒤에도 정개석은 국내정치를 온정시키고 다음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구실하에 정치 군사면에서  이당 특히는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그치지아니하였다. 가렬처저한 항전시기에마저도 중국공산당의 신4군을 점멸하고 팔로군과도 티격태격 하면서 시종일관적으로 청나라말기인물인 증국번 리홍장한테 배운 무력일위책을 실행하다가  종국에는 내전에서 패하고 대륙에서 쫓겨난다. 대만에서의 국민당은 장개석과 장경국에 의하여 아주 오래동안 일당체재를 전개하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잇따른 경제성장하에 서서히 민주화의 진전을 보인다. 대만 민주화진전에서 있어서 1970년 장경국이 미국방문 시에 재미대만민주운동파들의 총저격을 받은 사건과 유엔에서 탈퇴된 국제정세하에서 江南기자 암살사건이 촉매제로 되였다. 드디어 1987년 대만은 38년동안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党禁과 报禁을 해제하면서 다당제의 합법화와 언론자유의 합법화를 실행하였고 그 뒤에는 국민당이 야당으로 탈락하는 획기사건도 있게 되였다. 요즘에는 대만<대통령>마저 구류되어 판결을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대만민주화의 진전을 간접적으로 크게 느끼게 된다.다시는 대만국회의 육박전을 비웃을 생각이 없다. 그 육박전이 아무리 치사하고 더럽다 하더라도 <림표반당집단>을 소멸하고 <4인방>을 분쇄한 군사정변보다는 사회본가가 적고 광명정대하다고 생각한다. <림표반당집단>이든지 <4인방>이든지 모두가 고층분쟁으로서 만백성하고는 전혀의 관련이 없었지만 모든 죄를 그들한데 덮씌우고 10억인구 거의가 휘말려들어갔다는 일은 력사대비극이며 앞으로는 발생하지 말어야 할 일이다.
79    [잡담82] 절대적인 변과 상대적인 불변 그리고 인간 댓글:  조회:3665  추천:24  2009-01-20
[잡담]절대적인 변과 상대적인 불변 그리고 인간허동식 <론어 子罕편>에는 <子在川上,曰:‘逝者如斯夫! 不舍昼夜。> 라는 말이 기록되여있다. 이 말은 定義式 론리식 思辯式 표현이 아니라 情形서술식 표현으로서 감탄호마저(물론 후세 사람들이 달아준것이기는 하지만) 달린 감성적인 표현어로 판단될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사람마다의 립장과 리해력이 다르고 사용하는 경우에 따라서  <子在川上,曰:‘逝者如斯夫! 不舍昼夜。>는 부동한 해석과 부동한 진미를 내보여왔다. 감히 우리말로 나름의 문자적인 번역을 해본다. < 공자가 강하(황하)에서 이르기를: 가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공자의 이 한마디에 대해 錢穆과도 같은 大家들은 注解를 情形서술식으로 적었지만 공자는 분명 성인으로 받들리어 있으므로 본의와는 관련없이 철학적인 리해와 주해를 달아주는 사람도 많음은 사실이다. <가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라는 말에서 강하의 도도한 흐름으로부터 시작된 시간의 일직자 무한대흐름을 련상하는 해석도 있고 우주만물은 무궁한 변의 흐름속에 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여러가지 파생적인 론단과 쟁론이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 공자가 강하에서 이르기를: 가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를 두고 철학적해석을 함에 있어서 객관사물의 변증을 연역하는 사람이 많고 인륜의 변증을 연역하는 경우는 적다. 력사적으로 보면 공자의 학술이 유학으로 전변되여 무궁한 변화속에서도 불변의 인륜리상을 구축하려는데 사용되여 왔으므로 객관사물만 아니라 인륜을 포함한 인간사회도 변하고 仁도 변한다 주장한다면 공자사상의 功利성이 지장을 받을가봐 우려되여서 그럴가 아니면 인간과 인성 그리고 인간사회의 기본특성이 상대적인 불변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가고 억측을 해본다. 나는 < 공자가 강하에서 이르기를: 가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에서 변과 불변에 대한 깨닫음과 표현이 내포되였다 생각된다. 고대희랍의 철학자 赫拉克利特는 <사람은 같은 강에 두번 뛰여들수가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었다.  이 명언은 변에 대한 명언으로서 세상만물은 무궁한 변화속에 존재한다고 전해지고 가르쳐지고 있지만 나는 <사람은 같은 강에 두번 뛰여들지 못한다는 판단어보다도 < 공자가 강하에서 이르기를: 가는 자는 밤낮을 가리지않는구나>는 情形어를 더욱 즐긴다. 赫拉克利特 절대적인 변만 이야기했을뿐 상대적인 불변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지만 공자는 인간을 상대하였을 때의 변과 불변의 현상을 동시에 생각했고 늬우쳤고 표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상대해서는 우주만물 모두가  변 중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매 인간의 유한된 수명에 인한 유한된 자연생명 그리고 인류의 소위 몇천년이라는 문화력사시간을 상대로 하면 무궁한 변속에는 상대적인 불변의 사물도 엄청 존재함은 사실이다. 공자가 이른 강하는 흐르기는 하지만 , 흐름의 내용과 흐르는 공간과 흐르는 형식이 어떻게 변하든지 결국은 강하로만 정의된다. 강곬이 바뀌고 가물어서 마른다 하더라도 그 변속에는 강하라는---불변의 기본특징이 있다. 사람이 상대하는 인간과 인간사회도 천지개벽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사회의 기본특징 그리고 범주를 벗어날수가 없다. 우주가 수축이 되든 팽창이 되든 하나님에 의하여 운행이 되든 자아운행이 되든 인간을 상대해서는 우주는 영원히 우주이다. 이러한 변화속의 불변은 순수 개념식의 불변만이 아니라 객관존재로서의 불변이며 감촉할수 있고 사실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인간은 이러한 변과 불변속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무한한 周而不殆의 변을 상대해서는 무가내적인 소침에 빠질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우리는 매일 불변속에서의 아웅다웅 부르짖음도 하고 화합도 부르짖고 리익다툼과 체면다툼과 인식다툼을 그치지아니하고 있다.    
78    [잡담81]진시황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자아중심주의립장 댓글:  조회:5001  추천:31  2009-01-06
 [잡담81] 진시황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자아중심주의립장 허동식진시황의 업적을 론하는 세미나에서 누군가 허, 진시황이 뭐가 대단해? 진시황은 자전거 탈줄도 모르는 村人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린다면, 만장의 눈총을 받을것은  물론 정신병환자로 몰릴수도 있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두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셨음을 화제로 한다는것도 어리석을수밖에 없다. 허황하고 어리석은 일 내면에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인성이라는 시각에서는 ,누구나 자아중심주의립장을 철저하게 떨쳐버린다는것은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아중심주의를 고집함은 지금까까지도 우리의 虛점이라 느껴진다. 무엇을 고집하든 무엇을 진행하든 <나>라는 립장에서만 출발한다면 고집들이  <배부른 소리>로, 일성사는 <아불싸>로 전변할지도 모른다. 조선족농촌이 황페해지고 조선족기초교육이 망가진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농사군들더러 한국에 나가지말고 연해도시로 나가지말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하며 살라고 권고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농사군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그들이 우리보다 잘 알고 농사일의 고됨과 농경지의 다소와 농산품市價는 그들이 우리들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대신하여 수판알을 튕기고 그들의 삶을 훌륭하게 만들어드릴 자신감과 능력이 없는 한, 어서 고향 농촌에 돌아오세요 라는 이야기는 산업화시대의 웃음거리로 될수밖에 없다. 로무수출 한국어시험이 어느 정도 조선어교육을 받은 조선족을 상대해서는 <식은 죽 먹기>라 하더라도 한국어시험제도가 전중국인을 상대한 중한사이의 협상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라는 생각만으로 우리의 립장만을 고집한다면 중국정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난처해질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에게 불리한 일면으로 전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연변산업경제가 거의 엉망으로 전변된것은 동북3성의 국민경제가 중국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탈락과 동북아국제정세의 불확정된 혼란성과 갈라놓을수가 없다. 헌데 인력우세도 없고 교통우세도 없지만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런 불확정성에 중국인도 투자하기 싫어하는 동네에 외자를 받아들여 제조업수출업단지를 만들고 하염없이 기다린다는것도 자아중심주의립장의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 인간의 리성주의와 비교할진대 , 감성주의는 <过街老鼠>임을 잘 안다면, 이제는 리성주의 훈련을 할 시기가 된듯도 하다. 위대한 변증법의 이야기는 모든것이 변화한다고 역설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과 우리의 일상이 소위 <천지개벽>식 변화를 겪고 있지만 우리의 자아중심주의립장은  큰 개변을 보여주지못하고 있다. 자아중심주의립장을 버려야만이 현대사회에 걸맞는 실사구시가 있게 된다.  
77    [잡담80] 귀화라는 말이 싫다 댓글:  조회:9569  추천:54  2008-12-28
 [잡담80] 귀화라는 말이 싫다 허동식먼 옛날, 한반도에서 일본렬도로 거너간 사람들을 귀화인이라고 일본력사교과서가 적어두고 있다. 그 귀화라는 말을 배워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을, 한국국적을 취득한 중국조선족들을 귀화했다고 하나? 나는 귀화라는 말이 싫다. 歸化는 무슨 귀화? 이 세상에 피줄기를 따져오면, 인간사의 흐름을 따져보면 어느 누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무덤자리에서만 뱅뱅 돌아치며 사는 종족이나 사람이 있을가? 인간사의 변화란 어느 종족이 어느 인간이 마음대로 주물러서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다. 과거가 있고 진공상태가 아닌 이상, 서로가 접촉이 있고 교류가 있고 반목이 있고 섞임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내 품에 안기는것은 귀화요, 남의 품에 안기는것은 반역이요 하는 언어의 慣性은 제밖에 모르는 인성관습이요 심리이며 기시문화를 만들어주는 장본인의 하나이다. 한류가 아무리 드세다 하더라도, 귀화라는 낱말을 밥먹듯 사용하는 한, 한류가 지나가는 미풍으로 될수밖에 없을수도 있다. 일본제품이 아무리 좋다해도 오늘날에도 일본국적취득을 두고 귀화인이라는 모자를 덮어준다면, 종국에는 남들부터 격리감을 받을수밖에 없다. 인간사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보처럼 놀던 종족은 다 망하고 그래도 제노라 조금이라도 우쭐대던 무리들이 남아서 제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음은 사실이다. 어느 나라든, 어느 종족이든 남을 깔보지는 못한다. 이 세상에 이제는 운만 좋고 분발만 하면, 바보나라나 바보종족은 없다. 나는 中性표현이  적은 문화가 싫다. 그런 문화의 언어가 싫다. 귀화라는 말이 싫다.  
76    [잡담79] 독두부사건들 그리고 일중관계 댓글:  조회:9956  추천:50  2008-12-23
[잡담79] 독두부사건들  그리고 일중관계허동식근간에 일본 어느 민간조사에 50프로 이상의 일본인들이 중국에 호감을 지니지 않는다는 조사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많은 중국인들이 너들은 전쟁배상도 아니하고 수상들이 쩍하면 靖國신사를 참배하면서도 공연히 중국인들에게 호감이 없다고? 하는식의 정서를 드러내놓았다. 그런 중에서 중국인 누군가 많은 일본인들이 호감이 없다고 무서울것은 없다. 자강은 중국인의 필수이다. 자강에는 인간존엄을 지키자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의 대중호감부족에 대해 이야하던중에 중국의 식품업과 중국식품업이 일중관계에 가져오는,일본인들이 중국인에 대한 불신임감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중국교자사건으로부터, 중국의 삼록우유가루사건이 일본인들이 對中호감부족팽창의 촉매제로 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저 중국가람들은 국인들에게도 독약섞인 식품을 생산해 파는데 외국인과 가짜온천도 운영하는 우리 일본에 무엇을 아니팔가? 하는 생각을 많이 지니게 했다는 이야기다. 일본인들이 대중호감부족증에는 여러가지 복합된 원인이 있기는 하겠지만도, 반일정서를 지닌 중국인들에게는  靖國신사참배가 반일 또는 협일 촉매제로 되는것처럼 독두부사건들이 용한 촉매제로 됨은 사실인것 같기도 하다. 독술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식품업의 <악성사고>는 그치지않는듯하다. 환경오염과 독식품사용으로 앞으로 중국인들의 의료소비가 엄청 늘어날것을 예견하여 많은 외국상인들이 중국의 의료시장을 크게 노린다는 이야기를 풍문에 얻어듣고 나면 우리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중국독식품사건은 어느 공장이 하나 망가지고 법조목이 하나 생겨나고 어느 범죄자가 사형받는다고 해결될 사회문제는 아니듯하다.  
75    [잡담78] 혁명에 대해 약간 댓글:  조회:5685  추천:56  2008-12-11
  [잡담78] 혁명에 대해 약간허동식   일전에 상해 어느 대학교의 녀대학생 두명이 수업시간에 중국문화전통을 비판하고 현존 정부의 흉을 보는 교수를 반혁명분자로 밀고하였고, 파출소에서는 立案정찰, 말하자면 하나의 위법사건으로 취급했다는 소식으로 인터넷이 끓었다. 밀고의 무치함과 그 사회배경에 관한 의론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헌법으로 보장받는 언론자유의 실속성에 대하여, 대학교육의 向度에 대하여,중국관료문화의 본질과 관성에 대하여, 또 여러가지로 파생되는 의문과 토론과 생각들이 즐비하다. 무엇이 반혁명인가를 규명하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 그럼 학리적으로 해석되는 혁명은 무엇일가? 百度 백과사전란에는 혁명이란 <고대에 조대가 바뀌고 성씨가 다른 天帝가 나타남을 혁명이라 하였고 근대로부터는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사상의 심각한 질변을 혁명이라 한다. 古代以天子受天命称帝,故凡朝代更替,君主易姓,皆称为革命。近代则指自然界、社会界或思想界发展过程中产生的深刻质变> 는 泛내용적인 해석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란에는 혁명이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국체(國體) 또는 정체(政體)를 변혁하는 일>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자권에서의 혁명이란 사실 일본의 개창으로서. 현재 상용적인 사회학 의미에서는 폭력수단으로 진행되는 국체와 정치변혁을 가르킨다. 당대 중국사회사는 혁명람용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당대에 있어서 혁명이 지니는 내용이 복잡해지고 구체화되면서 정치인들의 리용지물로도 되였던 사실이다. 반당도 반혁명이고 반정부도 반혁명이고 보수적이여도 반혁명이고 락어족이여도 반혁명이고 하면서 혁명이 반혁명으로부터 연역되는 특색적인 중국현상을 이루어왔다. 그러면서 혁명은 어떤 정치목적과 사회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異己를 지옥에 몰아넣는 상투수단으로 최악의 수단으로 둔갑을 하였다. 교수를 반혁명으로 밀고하고 립안정찰이 사실이라라는것은 법에 반혁명죄라는 죄조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혁명죄목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간직하고싶다. 정말인지는 몰라도 모택동이 북경대학에서 도서관 관리일군으로 일하면서 대학수업을 방청하며 스승으로 모셨던 유명교수였고 중국의  全盤西化를 주장하던 호적이 1949년도에 싫어하는 국민당정부를 따라 대만에 건너간것도 중국의 어떤 조직과 부분인들의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한만을 심어주는 지나친 경향을 반대하였기때문이라는 一說이 있다. 말하자면 지나친 원한강조가 가져오는 폭력혁명을 동조하지않았다는 이야기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조직이 있고 사상이 있고, 또 반면에 폭력혁명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고 조직이 있고 사상이 있고 인도의 비항쟁독립운동과 같은 성공적인 사례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폭력혁명도 좋고 비폭력혁명도 모두가 제한성을 지닌 력사가 아닐수가 없다. 폭력혁명이 빠른 시일내에 압축적인 변혁을 가져올수는 있지만 생명과 물질재부의 손실이 엄청난것도 사실이며 비폭력혁명은 도덕적이고 비낭비적이기는 하지만 老牛慢車라는 타협적이라는것도 사실이다. 헌데 폭력혁명도 좋고 비폭력혁명도 좋고 그 선택은 개별인들의 욕심에 좌우지되지말고 민중들의 보편적인 의도에 따른 선택이였으면 좋다는 생각이 든다.
74    [잡담77] 문화대혁명과 중국당대문학 그리고 문화고행 댓글:  조회:5006  추천:52  2008-12-08
[잡담77]문화대혁명과 중국당대문학 그리고 문화고행허동식좋은 문학작품이란 때로는 인간이 인간본신과 인간고통의 정신극치에 대한 예술적인 기록으로 사색으로 반성으로 보여진다. 문화대혁명은 소위 <前例없는> 고난시대로 평판을 받지만 문화대혁명기간과 문화대혁명 뒤에 문화대혁명을 쓴 중국의 문학작품은 <전례없는> 작품이 아주 적다.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에는 진정한 문학작품이 없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 원인을 중국의 고압적 문화시책에만 귀결할수가 없다. 거의 동시기에 구쏘련이라든가 동유럽도 중국에 손색되지 않는 고압적 문화시책을 실행하였지만 <지하문학>이 융성되였고 위대한 문학인들이 추방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소위 서방세계에 의하여 <반체제문학>으로 불리우는 하나의 문학고봉을 이루었다. 반면에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분명 당대사회의 비합리성에 도전하는 문학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몽롱시>라는 말도 아니되는 엉뚱한 명칭을 붙힌 문학사조가 있었고 그 뒤에는 상처의 심층근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기록적이고 원망적인 <상처문학>과 중국인의 실존상황 개변과 령혼의 안위를 중국전통문화에서 찾아보려는 <뿌리찾기문학>이 목소리를 내는척하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모래속의 금빛이라면, 이 시기를 總結하는 진정한 령혼탈출기식 문학작품은 고행건의 작품과 王小波의 소설작품으로 보여진다. 이들의 령혼탈출은 어딘가 迷茫감과 허황함이 뒤섞여 있지만 중국인 정신생활의 현실에 부합되는 문학력작이다. 하다면 어찌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비옥한 땅에 문학이 진정한 꽃을 피우지못하고 말았을가? 심사숙고할 문제이다. 중국문인들도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골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반골사유>를 깊게 폭넓게 진행하는 문화유전인자는 많이 부족하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국고전문학은 고유된 중국문자놀이와 고대경전과 력사에 대한  주석에만 크게 머무르는 봉페문학이고 창조성이 허약한 문학이다. 명청시기에는 장회소설을 중심으로 서서히 근대문학의 특징을 지니기도 했지만 여전히 취미성과 可讀性이라는 기교에만 열중하고 중국인들의 정신생활을 외면하였다는 혐의를 떨칠수가 없다. 물론 <홍루몽>과 같은 력작도 있지만 중국고전문학을 人心向上적으로 인도하지는 못하였다. 중국고전문학의 사상개방결핍과 장시기의 문언문리용은 중국의 문학인들로 하여금 신문화와 외래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와 반항심을 지니게 했다. 력사적으로 보면 인도불교문화도 중국에서는 유교식으로 도교식으로 전변을 하였고 이슬람문화도 지역적인 종족적인 문화로서 중국사람들의 령혼을 세탁하여주지 못했으며 근대에는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포함한 서유럽문화에 대한 리해는 아주 오래동안 소화불량증으로 표현되여 왔다. 신문화운동시기에 진행된 중국의 맑스-레닌주의 도입도 압축된 도입과정으로서 목소리가 높았을뿐 진정한 민중적인 사고적인 리해적인 문화전래의 열매를 영글지 못하였다.  문화의 봉페성과 오랜 전통의 일맥상통은 자연히 문학인들의 자아망상증과 정신세계의 허약증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자아망상증과 정신허약증에 시달리는 중국문학인들이 시역의 제한성과 진리탐구정신결핍증으로 진지한 문학작품을 내놓기 힘듬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개혁 개방뒤에도 , 왕삭의 <건달문학>이라든가 후현대주의류파가 어느 정도의 반역정신을 찾는 노력은 하였지만, 생활방식개변에만 열중하였기에 좋은 효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중국은 아주 거창할 정도로 진행되였다고 생각되는 문화반성과 문화개조가 아직도  힘든 고행중에 있다. 중국문학은 바로 이 문화고행의 점오와 돈오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처럼 서방의 문예부흥의 위대함을 새삼스레 느끼기는 나로서는 처음이라 하겠다. 
73    [잡담76] 미국이란 도대체 어떤 나라일가? 댓글:  조회:4767  추천:44  2008-12-05
 [잡담76] 미국이란 도대체 어떤 나라일가?             허동식    내가 미국을 얼마나 알고있을가? 미국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자연상황과 사회상황을 책과 텔레비를 통해 구경하는 흉내나 하는듯 마는듯 하는 정도의 수준이면서도 미국을 알고싶어한다. 미국을 다녀온 분들과 미국행 감상을 문의하면 학문을 하시는 분은 미국은 나라기질이 개방적이고 대범하더라 (其国质开放且大方) , 나라분위기는 기세가 호매롭고 드넑고 깊더라 (其氛围大气且恢宏)는 답을 한다. 현대화건축만을 좋아하는듯한  분은 미국도 락후해서 아직은 수많은 시골이 있더라는 우스운 답을 한다. 茶를 좋아하고  담배를 즐기는 분은 미국은 차를 풀 뜨거운 물이 없고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는 장소가 적어서 불편하더라라는 답을 한다. 어느 돈있는, 노력하면 얼마든지 미국행을 할만한 한국분은 아니야, 비자내기가 힘들어 미국가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화외음으로 미국은 싫다는 답을 한다. 조금 경제에 민감한듯한 분은 미국은 잘도 살더라, 사회복지보장이 잘 되여있더라는 답을 한다.     중국말처럼 仁者见仁,智者见智인가? 헌데 百闻不如一见이라 하니 나는 미국에 가보고싶다. 헌데 내 생에 영어를 못배운 유감으로 하여, 호주머니사정으로 하여 미국려행은 나에게는 아직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다만 미국에 대한 궁금증과 경모의 심리경향을 간직하고 있을뿐이다.     미국은 서양의 3권분리사상과 인권사상이 서유럽이상으로 실행되는 나라이다. 물론 인디안인들에 대한 멸종책과 종족기시책,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무차별압박 , 패권주의 세계경찰책 등 오점을 떨칠수는 없지만 책에서 구경하는 미국은 우리와 구별되는 점이 많으며 배울바가 많은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제도의 우렬을 론한 어느 책에서 미국사회제도는 현존하는 사회제도중에서 제일 좋은 제도라는 글귀를 읽은적이 있다 . 말하자면 미국사회가 인류가 바라는 최상의 리상사회는 아니지만 현존까지의 현실적으로 실현된 리상사회라는 판단이다. 남의 판단을 무조건 따르는 부류는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에 대한 궁금증은 풀수가 없다.  
72    [잡담75] 방문취업제 한국어시험제에 대한 正視 댓글:  조회:5224  추천:50  2008-12-05
[잡담75] 방문취업제 한국어시험제에 대한 正視 허동식언제부터인지는  누구의 개창인지는 몰라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로 가서 무엇인가 좀 배울려면 부유한 나라의 언어문자를 배워서 등급시험에 합격되여야 한다는 제도가 실행되고 있다. 중국인으로서 영어권류학을 하려면 <퉈뿌>요 <야쓰>요가 넘기어려운 고비이고 쉽지않는 일본어등급시험도 있다 . 누구에게나 언어문자공부가 쉬운 일이 아니요, 한자권사람들이 印欧계 언어문자를 배운다는것은 <사둔의 팔촌에 걸리지도 않는 친구를 찾는 일이여서인지> 중국 향간에는 < 만일 중국이 잘 살게 되면 너희 미국놈들이 중국류학을 할 때는 너들더러 楚辭를 배우게 하고 구두어로는 대만가수 周杰倫의 중얼거림을 시험보게 할거다>고 핸드폰 메신저가 류행되던 일이 기억된다. 근년에 중국의 외국어등급시험에는 한국어도 등장하였다. 한족들과 기타 소수민족을 상대해서는 한국어등급수준시험제도가 중국에서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어의 체면을 챙기는 작용도 있어 좋은 일이기도 하겠지만 중국조선족의 최대경제래원인 한국로무수출에까지 한국어등급시험이 적용될줄은 중국조선족은 예상하지를 못했다. 중국공민의 일원이면서도 력사문화배경이 복잡한 중국조선족은 아직 방취제 한국어시험제를 개변할 현실적인 능력이 없다. 변화다단한 중한외교관계에 존재하는  중국정부와 한국정부의 난점, 그리고 국제관례 등 요인들이 소수인을 특혜할 제도를 만들어낼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운 한족들이 한국에 가서 류학을 한다든가  취업을 한다든가 중국조선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함은 비난할바가 아니다. 또 중국조선족 모두가 한국에 밀려가는 현상에 대하여 중국정부가 외화벌이는 좋아하고 반면에 여러가지 우려심을 지니게 됨은 정당하고 정상적인 일이다. 또 한국이 외국로동자고용에 있어서 되도록이는 해외교포를 돌봐주려는것도 사리에 맞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부로커들에게 거금을 사기당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과거에 비해서는  방취제 한국어시험제가 중국조선족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현존 방취제 한국어시험제에 중국조선족에게는 불리한고 비합리적인 일면이 많이 존재한다. 제도보다도 제도집행과정의 세부적인 문제에서 중국조선족이  유리한 점들을 요구할 필요성이 많이 존재한다. 1. 시험장소의 선택: 동북3성 정부와 연변정부를 비롯하여 중국조선족민간단체들이 동북에 거주하는 중국조선족들의 시험장소 就近원칙을 요구하여야 한다.이런 요구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면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성공을 보일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2. 시험자격 등록방법: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활용못하는 현실을 정시하여 일반적인 서면등록제도를 병행하여야 한다. 각 성의 상무청에서 로무수출을 주관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상무청의 동정심과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다. 3. 시험비용: 려행사들이 비싼 대리비?/SPAN> 받고 또 중국조선족사회가 中介업과 중개업리익획득에 대한 인지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물가국을 통한 물가정산감독도 필요하고 또한 정부가 주도하거나 민간에서 주도하는 한국어시험에 상관되는 무료봉사단체의 건립과 실행이 필요하다. 4.수험자의 년령문제: 수험자의 년령에 대한 규제는 한국인력시장요구 일면만을 강조한듯하다. 한국의 상관부문에서 중국조선족사회의 생존과 발전상황에 대해 사회학적인 리해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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