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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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잡담73] 중국과 한국의 은원 그리고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5084  추천:53  2008-12-02
      어떤 수로 사람간에 존재하는 과거와 오늘의 은원을 초월하여 좋은 래일을 지향할수가 있을가?  또 어떤 수로 인군 사이의 력사적인 현실적인 은원을 초월하여 화목한 미래를 넘나볼수가 없을가?  그림같은 소원이지만 나에게는 정답이 없다. 정답을 가르치는 분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정답에 대한 열망은 간직하여야만 한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이웃사이에 력사적으로 사이좋게 보낸 사실은 적다. 지성학적 원인으로 리익충돌과 문화충돌은 이웃사이에 판가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별히 그 모순체의 통일면을 무시하고 대립면만을 강조하는 문화소유자는 력사적 은원을 옴니암니 챙기게 된다. 중국과 한국은 어떠한 력사적인 현실적인 은원이 존재하는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정리할수 있는 립장이라면 우리는 그 은원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다. 또 회피할수도 없다. 우리가 회피할수록 은원은 커가는 부스럼으로 될지도 모른다.   한국 유명시인 고은선생의 시 <황사 며칠>을 읽어보자.   겨우 우리 봄이 개나리꽃 진달래꽃슬픈 진달래꽃을 피우려 하는데무엇하러 청도(靑島) 장산(長山) 부황(浮黃)난 바다 건너우리에게까지 무더기 무더기 몰려오는가.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어떤 봄 어떤 아이들인지 아는가.한 되 술 차라리 마시지 않고 가슴팍에 퍼부어 울었느니라.가슴마다 가슴앓이 그믐달 넋을 묻어두고우리 봄의 애비 에미 바다에 뜬 아지랭이로 울었느니라.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하룻밤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도 모자랄 봄을 덮어버리는가.참담하구나. 너희들의 경기(京畿)땅 북경(北京) 천진(天津)이나 황하(黃河)벌판이나 덮어서석양머리 호적(胡笛)소래 틀어막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몰려오는가.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우리 계집들이 몸을 팔아서몇 만(萬)의 몸으로 얻어온 봄인 것을 아는가.우리 여말(麗末) 한말(韓末) 애비들의 철천(徹天)의 한(恨) 땅에 묻고우리 아이들이 그 땅에 쓰러져서 이룬 봄인 것을대륙(大陸)아. 너희들은 모르리라. 우리 개나리꽃 진달래꽃을 모르리라.아아 머리에 인 것은 황사(黃砂) 뿐! 창대비 쏘내기 맞아이 흉흉한 황사(黃砂)바람 다 씻어버려도우리 울음 우리 울음의 가슴팍 씻게 못하는 것을.또 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서우리 하늘 우리 땅우리들이 돌아오는 어둑 어둑한 모퉁이들을 다 덮어버리는가.      고은선생의 이 시작를 읽으면 먼 옛날 한무제의 4군설치로부터 당대의 항미원조전쟁과 근간의 협중증과 협한증들이 줄을 지어 눈앞에 떠오름을 어쩔수가 없다.       민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국과 한국은 현재 또 하나의 고비를 넘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행이 정부적인 차원에서는 량국 모두가 합상의 이미지를 다분하게 내보인다는 판단으로 심중의 우려를 줄여본다.        중국과 한국의 력사적 현실적 은원의 진행중에서 중국조선족은 가련상을 보이지않을수가 없다. 나도 얼굴을 보지도못한 외삼촌 한분이 항미원조에서 전사를 했고 또 아직도 무엇이 사회집단책임과 개인책임의 분리인줄을 전혀 모르는 수준으로서는, 또 중국조선족의 경제래원이 거의가 한국에 의존하는 현실과 우리가 떨칠수없는 망향과 향수의 감상중에서 중국조선족 거의가 지닌 모순적이고 자책적이고 무가내적이고 숙원적인 심리과정을 경력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힘으로는 은원속에 은둔하는 중한관계 현실을 개변함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다만 중국에서 흔히 말하는 민간외교관이라는 낱말에서 잠시의 안위감을 찾아본다. 중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든가 한국기업소에서 통역을 한다든가 현재 조선말로 밥벌이하는 중국조선족들의 존재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기도한다.  
70    [잡담72] 토지소유제 댓글:  조회:4950  추천:50  2008-11-23
 [잡담72]토지소유제허동식 인류는 정보시대에 이른 오늘날에도 물질재부획득은 그 대부분이 륙지에서 진행이 되여있다. 해양에서 물질생산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륙지생산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다. 따라서 토지소유제가 사회제도의 핵을 이루어왔으며 해양소유제도 토지소유제의 사유범식과 습관을 방습하고 있으며 남극주라든가 태공자원에 대해서도 소유문제가 리용과 분쟁의 모순점으로 존재한다. 인간과 인간사이에, 나라와 나라사이에, 종족과 종족사이에 공평하고 합리한 질서를 확립하려는것은 인류사회의 주요한 목표이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리상적인 질서가 가능할가? 아니면 신령의 힘을 빌어야할가? 그 실천이 바로 토지소유제를 비롯한 문명사의 기록이다. 중국사에 있어서 토지소유제는 줄곧 治水와 외적방침 그리고 사상一統보다도 우선을 보이는 지위를 보여왔다. 무역민족이 아닌 농경민족의 력사는 토지의 겸병과 토지탈취와 재분배가 그리고 그 주기적인 순환이 주축을 이루기 마련이였던 같다. 상식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가 토지공유를 주장하고 실천하는것으로 배워왔지만 사실은 토지공유를 주장한 사람이 조선력사에도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있듯이 토지공유제는 맑스주의의 발명창조가 아니다. 신중국은 건국후로부터 지금까지 헌법에 의하여 토지국유제를 실행하여왔다. 책에는 로씨야10월혁명성공이 토지국유제를 비롯한 사회주의제도를 중국에 이식하였다고 하지만 현재 많은 학자들은 중국의 생존단원의 특수성(인구는 많고 경작지는 적음)과 세계정치군사정세가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완전약세 처한 형편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을 꾀한 정영인물들은 재력과 물력 그리고 인력을 대집중하여 외세를 대처하고 중국사에 존재하는 흥망성쇠악순환을 소멸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제도를 채납했다는 말이다. 요새 중국에서는 토지개혁이 있다. 토지국유제는 보존하고 토지사용을 활성화하고 경작지를 보존하고 또 산업화와 도시화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농촌토지에 대한 개혁을 실행한다. 기자가 국가급 토지관리당담관원과 중국에서 토지의 사유화가 불가능한것은 이델레오기(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 문제인가고 문의하자 그 관원은 아주 확정적으로 이델레오기문제가 아니라 토지자원이 빈약한 반면에  인구基數가 13억인 중국국정문제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토지사유화를 한다면 토지겸병뒤에 따르는 수많은 평민들 생존고난과 사회혼란이 우려된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제도개혁은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과학실험하고는 달리 조금만 빈 구석이 나타지면 엄청난 사회대가가 지불된다. 때문에 開創적인  정치가란 말이 쉽지 그들이 받는 사회압력과 風險은 산수계산이 아니된다. 등소평할아버지가 진행한 개혁개방정책이 아주 위대한   開創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의 지긋한 애대를 받는것도, 박정희대통령이 엄정한 독재를 하였어도 많은 한국인들이 박정희대통령이 한국경제부상의 스다트를 만들어준 점을  잊지않는것도 모두가 만백성들이 정치가들의 고충을 충분하게 알고있음을 설명하여준다고 생각된다. 과거에 우리는 토지소유제를 이델레오기와 과격하게 근접시키는 과오를 범하였다. 사유제이든 공유제이든 모두가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으며 국정변화에 의하여 선택됨을  알아야한다. 현재 중국은 토지국유제라는 명목하에서 일부 사람들이 특권을 리용하여 부정을 감행하고 물질재부를 비법적으로 획득하는것이 큰 사회문제이며 또 국제환경 거의가 토지사유제임으로 하여 국제경제교류에서 받는 불신임이라 하겠다.
69    [잡담71] 무조건애국주의 무차별애국주의 댓글:  조회:5030  추천:48  2008-11-21
 [잡담71] 무조건애국주의 무차별애국주의 허동식무조건애국주의 무차별애국주의 교육을 받아왔다. 헌데 무조건애국주의를 무차별애국주의를 선양한다고 애국주의자가 무조건 많아질가고 생각해본다. 전쟁을 하면 알건데, 우리 주위에 진정한 애국주의자가 얼마나 될지를 알건데 하고 애들처럼 허튼  생각을 굴리다가는 옛날을 기웃거려본다. 인터넷에서 한족들이 일제점령시기에 우리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강제징병을 당한 일을 거론하여 조선인들의 애국심과 민족심을 평하는 글을 읽었는데, 그 아래에 조선족으로 짐작되는 한분이 당신네들 한족들도 항일전쟁시에는 위군에 몇백만명이나 참가하였던 일을 잊었는가 대성호질에 비슷한 리플을 적어놓은것도 읽었다. 력사에 있어서 인간이란 필경은 인간이다. 조선인도 좋고 한족도 좋고 필경은 인간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범인으로서 애국주의는 버려도 생존욕을 쉽게 버릴수가 없었다. 우리말 <살아있는 강아지가 죽은 사람보다 좋다>는 신조를 지키는 사람이 많았고  중국어의 苟活라는 낱말을 아주 무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적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무조건애국주의 무차별애국주의가 성행하였을건데 어찌하여 일제의 음위하에서는 신성한 애국주의도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작용을 놀지를 못했을가? 물론 애국주의가 순수한 감정으로 존재하는 형태가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애국주의도 사실은 실리주의다. 말하자면 애국주의도 집단의 실리를 위한  한가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다. 애국주의가 실리주의의 일종이라면 실리를 가져오지못하는 애국주의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할수 있다는 론리가 성립이 될수도 있다. 집정자의 차원에서 무조건애국주의와 무차별애국주의를 거창하게 요구하면서 집정자의 실책과 행위가 사실적으로 민고의 리익을 대표하고 그것을 위한 노력이라면 애국주의는 좋은 효력과 보편적인 사회의의를 지니게 된다. 반면에 집정자들이 집단내 만백성을 생존을 전혀 무시한다면, 全力을 동원하여 신성한 애국주의를 보급한다하더라도 아름다운 애국주의도 애매한 대접을 받을수가 있는것이다. 일제침략하에서 추풍락엽으로 말려지던 조선말기와 청나라말기가 바로 그러한  기록이 아닐수가 없다. 때문에 나는 애국주의를 책에 씌여진것처럼 실행하려면 집정자가는 책에 씌여진것처럼 집단내 리익을 골고루 봐주거라고 한마디 하고싶다.
68    [잡담70] 또 한국문화와 중국조선족문화에 하나 둘 댓글:  조회:5841  추천:71  2008-11-17
[잡담70] 또 한국문화와 중국조선족문화에 하나 둘허동식  문화판단에 있어서 문화의 우렬이라든가 우렬세를 론함은 조금은 장난기가 섞인 일로 될수도 있다. 특히는 구체적인 시공을 떠나 문화에 대한 단순한 <천평놀이>를 한다는것은 현대인으로서 삼가하여야 할 喜好일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천평놀이>에서 문화전반에 대한 관찰과 연구가 없이 개별적인 현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게임을 진행함은 어딘가 게면쩍은 일이다. 허지만 상술한 이런 저런 도리를 아는척하는 내가 자꾸만 그 <천평놀이>에 집착됨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한국문화와 중국조선족문화를 놓고 보면 우렬세는 물론, 그 우렬도 선연하게 나타난다. 중국조선족방언을 배우는 한국인이 거의 없지만 한국말을 구사하려는 중국조선족들이 퍽 많아진것도, 료리법이라든가 회사운영방식이라든가 한국식이 성행하는것이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실상의 십중팔구를 이야하고 있다. 한국문화가 우리 중국조선족의 재래문화보다 우세적인 표현은 무엇일가? 一言으로 답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피부로 느끼고 아둔한 머리로 생각해왔던것을 내여놓고싶다. 抛砖引玉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렴치없는 말이고 일개 글장난으로만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1    한국인의 직업관: 우리는 대체로 직업을 생계를 만드는 수단으로만 생각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직업을 인생성취를 이루는 경로로 수단으로 생각한다. 직업적인 성공을 인생의 성공으로 보며 그러한 직업관이 분업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공상업사회에 있어서는 우리의 직업관보다는 훨씬 우수한 직업관이 아닐수가 없다. 2   한국인의 국가관: 우리는 나라돈이요 개인돈이요를 운운하지만, 한국인은 나라돈이자 국민의 돈이요, 국민의 돈이자 나라돈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소유하고 있으며 개인의 운명을 나라의 흥망성쇠를 정서면으로만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구체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다. 한국인들의 빈 소리가 나는 애국주의는 우리보다는 많이 적다. 3    한국인의 민주관: 당대에 있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서도 으뜸이라고 불리울 궤적과 기적을 보여왔다. 현존 한국인들의 민주사상수준은 우리의 스승으로 되기에는 추호의 손색이 없는듯하다. 반면에 우리는 민주에 대한 생각들이 소수와 다수라는 유치한 산수계산에 머물러있고 , 민주의 힘에 대해서는 거의 무식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인테리들마저도 흔히는 관료체제에 아부하고 관료체재에 진입할 욕심만을 부리고 있다. 4  한국인의 시공관: 한국의 수출산업과 문화수준의 상승에 따라 한국인의 공간시야와 발길은 크게 넓어졌으며 과거를 질문하는 력사의식도 획기적인 전변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의 말처럼 < 중국이면 연변인가 하고 외국이면 한국인가 하는> 공간의식수준이며 과거에 대한 질문은 知識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못하고 있다.         5       한국인의 개방기질: 한국인의 개방기질은 악착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에 비해서는 대범하고 전方位적이고 자신감에 넘쳐있다. 6    한국인의 종교상황: 종교이면 미신이라 하거나 교리를 알려하지도 않으면서 종교장소에 운집하는 우리와는 퍽 달리 한국인의 종교관은 다양하면서 활방상을 보여준다 . 마음가짐을 편안하게 하려는 한국인들의 정신몸부림은 우리가 배울바가 아닌가 생각한다. 7    한국인의 민족관: 한국인의 민족관은 혈통성만이 아니라 력사성과 공동리익성 그리고 미래성을 뒤받침한 민족심과 현실관에 집약된다.하지만 우리의 민족관은 아직은 과학적인 정리가 부족하고 공인점이 취약하다.  
67    [잡담69] 중국국가예산에 존재하는 문제점의 하나 댓글:  조회:4749  추천:66  2008-11-09
[잡담69]중국국가예산에 존재하는 문제점의 하나   허동식중국은 이미 세계3위의 태공대국으로 부상하였다. 2010년에는 달나라방문이 기획중이라고 한다. 태공사업과 련관도 회의도 있고 기념행사도 많아 중국인들의 자신심과 정열이 젖어있기도 하지만 나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 어딘가 허전하기도 하다. 텔레비에서 중국의 2彈1星에 유관되는 프로그램을 적어도 3번은 시청했던 기억이다. 과학가들과 군인들의 피타는 분발과 노력은 잘도 구현이 되였지만은 2彈1星을 하면서 재력을 얼마 소모했다는 말을 없었다. 그적에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허전하더니. 지주가 소작농을 착취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봉건국가에서 소작농들의 수확고에서 10% 를 조세로 뜯어갔다니 등등,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비판하는 자태에서 편찬된 력사교과서마다 이런 조목들이 씌여져있었다. 헌데 나하고는 전혀 련관이 없는 일이라 그런대로 놓아보냈지만 부모님들 과거와 우리 일상과 련관시켜보면 가난한 나라일수록 국가예산이야말로 만백성의 물질생활수준의 제일 큰 영향인소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2彈1星 프로그램을 보면 소시적에 째여지게 가난하던 시골 마을과 근들이 술 한잔 하시면서 기뻐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일모작에 경작술이 현재보다는 좀 뒤떨어진 그 시적에 생산대에서 공량을 하고나면 농사군들에게는 무슨 물질적인 여유가 있었을가? 중국의 2彈1星은 강력한 중앙집권하에서의 농사군들의 피땀이 재력으로 그 성공을 뒤받쳤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현재 진행중인 폭이 넓은 태공사업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과학가들의 심혈도 중요하지만 우리 중국국민들 모두가 참여한 물질재부 축적도 아주 중요하다. 헌데 나라에서는 국민의 돈을 소모하면서 어느 정도 소모했다는 말이나 한마디 있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가? 국민들의 감독수준도 높혀주고 참여의식을 높혀주고 국가예산의 투명화를 실현하는데 나쁜 점은 없는듯하다.   
66    [잡담68] 우리 편, 남의 편 댓글:  조회:5119  추천:62  2008-11-03
[잡담68] 우리 편, 남의 편허동식유년시절, 추운 엄동의 밤에도 시골 탈곡장과 운동장에서 순회방영대가 보여주는 영화를 많이 구경하였다. 영화내용에 대하여 리해를 잘 진행한적은 거의 없지만, 기억에 남은것은 영화화면에 새 인물이 출현되면 잘 생긴 인물은 정면인물이고 못 생긴 인물은 반면인물로 보편인정이 되여 판정이 되였지만 잘 생기지도 못하고 못나지도 않은 작자가 튕겨나오면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거의 한결같이 <저게 우리 편이요? 남의 편이요?>하고 의문을  내걸던 일들이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공유점보다도 인간과 인간사이의 리익구별점으로부터 출발되는 계급투쟁을 고리로 하던 시절, 탈곡장에서 볶은 콩알을 깨먹고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조무래기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군대놀이도 하던 아름다운 나의 기억속에는 우리 편, 남의 편을 통하여  진행하던 무단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지한 대뇌세척운동에 대한 분노가 슴배여 있다.  헌데 살면서 우리 편, 남의 편을 거절할수가 없는것도 현존의 사실이다. 어느 한국인이 나하고 < 만일 한국과 중국이 전쟁을 하면 총을 어디에 대고 쏘려는가> 물은적이 있다. 너무나도 무지한 물음으로 생각되고 나의 능력으로는 확실한 답복을 드릴수가 없는  물음이였다. <우리 편, 남의 편> 하는 문화에 지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고 중국조선족에게는 제일 민감한 신경구역을 건드리는 그 물음은 건방지고 몰상식한 자의 행실로 여겨졌다. 그 동안 거의 십년은 흘러갔다. 헌데 < 우리 편, 남의 편>하는 생각과 주의들이 얼마나 퇴색하여 있을가? 경제세계화의 시대에 문화국수주의가 부흥을 일으키기도 하는 시절,  또 나라와 나라사이만이 아니라, 한 나라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가속도화되고 그래서인지 <화홥사회>라는 슬로건도 배워야 하는 오늘날, < 우리 편,, 남의 편>은 존재의 사회기반을 죄다 잃은것은 아니다.    < 우리 편, 남의 편>을 어떤 주의라고 생각하면 나에게는 너무나도 복잡한 과제로 되지만 < 우리 편, 남의 편>이 우리의 종족인지에서 표현되는 현상들을 조금 생각해보고 싶다. 조선족이냐 한인교포이나 하는 쟁론의 막후에는 < 우리 편이냐 남의 편이냐>하는 생각들과 그 생각들에 대한 공포심이 꿈틀거리지 않을수가 없다. 조선이란 고조선명칭에 그 유래되고 리성계의 조선왕조와도 련관이 된다.  중국 명나라에 <조선과 和寧>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국호를 만들어달라라고 한것이 조선이 선택되였고 1910년 한일강제합병 뒤에는 조선이 일본제국의 한개 지방으로 전변한 력사도 존재하였으며 장기간 대결상태를 이룬 북한이 조선인민공화국이니 한국의 민간은 조선이라는 명칭과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거부감을 지니기 마련이다. 한국이란 삼국통일전 남쪽의 삼한 국가명에서 유래되고 조선말기의 대한제국명과도 관련이 되므로  한국인들은 민족자주권과 정통성을 에워싸고 조선보다도 韓을 좋아함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조선 아니면 한국이라는 명칭을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심리경향은 <우리 편, 남의 편>이라는 행위를 연역할가봐 두렵다. 총을 어디로 돌릴건가 물으시던 한국인도 그 심중에는 6.25동란의 그늘이 비끼여있고 < 우리편 , 남의 편> 을 잡담하는 나의 심중에도 그늘이 비끼여 있다
65    [잡담67] 조선족과 한국인의 문화충돌 댓글:  조회:6090  추천:76  2008-11-02
[잡담67] 문화충돌 시각으로 보여지는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허동식이질문화는 접촉과 교류과정에 서로 상대되는 문화의 인자에 대한 흡수와 배척의 현상을 내보이게 되여있다. 그것을  문화충돌이라고 문자적 표현을 할수가 있다면, 현존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사이에는 분명 문화충돌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충돌은 리익을 위한 공리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리익과는 큰 관련이 없이 다만 문화의 이질성에 따르는 가치취향이라든가 생활방식의 구별점에서 출발되는 경우도 있다.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의 리익은 현재 방향적으로 일치성을 보인다.   한국에서 취직하고있는 30여만명의 중국조선족들이 한국 어느 부류 사람들 일자리를 차지했다든가 그들의 임금수준 상승을 저애하고있다는 리유로는,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인보다는 임금이 적기에 한국자본가들에게 큰 착취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하한다는 리유로는 중국조선족과 전반 한국인 사이에 리익갈등이 존재한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상술한 경제현상은 한국사회의 경제실정과 경제책 그리고 경제규칙이 가져온 결과로서 중국조선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은 다른 제3세계의 렴가의 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중국조선족들이 참여되는 경제활동이 한국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주도면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취업한 중국조선족의 주류는 한국의 자유경제운영방식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중에 있다. 또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소에서 취직하고있는 중국조선족들과 한국기업소의 리익의 일치성은 더 말할나위가 없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소의 온정되고 지속적인 경제상승이야말로 한국기업소에 취직하고 있는 중국조선족들의 기본적인 장래이고 경제생활래원의 근본보장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소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기업소가 아닌 중국내기업소라든가 다른 나라 기업소에 취직을 한다는것은 소유하고있는 기능과 문화수준 등 요인으로부터 보면 한족들보다는 렬세취직이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에도 중국조선족과 한국인들이 동아시아정치경제발전,  중한관계 전망, 북조선정상화 등을 포함하여 방향적으로 일치된 객관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한국경제성장과 한반도통일과 민족대부흥을 크게 기대하고 있음도 부인할수가 없는 사실이다.( 근간에 한국국내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우려심을 보이거나 력사와 유관되는 령토문제 그리고 중국의 대북조선책으로 인하여 중국배척주의가 어느 정도 성행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력사상식이 있고 명석한 두뇌를 지닌 사람이라면 중국의 경제성장이야말로 북으로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으로는 일본군국주의를 견제하여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이루는 좋은 길임을 알아야 한다. 동아시아 중세기부터 현재까지 매번의 세력균형이 파괴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건립이 될 때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듯이 제일 큰 대가를  지불한것은 소국이였으며 한반도가 으뜸으로 화를 당했다는 과거를 잊으면 아니된다. 물론 중국이  한국의 경쟁자로서 한국경제와 민족생존에 영향을 주는 주인소로 될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국민정서를 열화시키고 현실적인 아닌 해결책으로 유도?하는 방법은 취할바가 아니다. )      상술한 사실들을 빌어 나는 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문화충돌은 공리성을 배경으로 하는 문화충돌이 아니라는 판단을 해본다. 한다면 공리성을 벗어난 문화충돌은 자연히 문화의 이질성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문화충돌을 서서히 풀어가는 해결책을 찾아볼수도 있겠다.  중국조선족문화와 한국문화는 동질성을 지니면서도 이질성이 다분한 문화의 격차를 보인다. 어떻게 보면 동질성만 강조하고 이질성을 무시라여 온 서로의 행위가 오늘날의 민간에서 많이 무성해진 <원망>의 직접적인 근원일수도 있다. 중국조선족들이 한국문화에 대한 리해가 편면적이고 옅으며 한국인들도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한 리해가 편면적이고 옅음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실이다. 그 표현들로는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들의 한국사에 대한 無知와 기능의 저하수준, 일하는 태도, 생활습관 등에 대한 비판을 들수가 있다. 또 중국조선족들에 의하여 의론되는 한국인들의 <좁쌀>기질이라든가 외래문화수용과 등급질서에 기존되는 언어습관에 대한 불신임을 들수가 있겠다.  현존 우리는 서로가 상대방 문화의 이질성을 깊이 감지할 필요성이 존재하다. 중국조선족들이 한국과 한국인 문화에 대한 리해를 깊이 진행하는 묘책은 무엇일가? 한국정부와 한국민간에서는 이 방면에서는 구체적인 대책이 조금 부족한듯도 하다. 말할것없이 중국조선족들도 체계적이고 지속된 대책을 내놓지못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에게도 중국조선족 문화를 조금이라도 실속있게 알릴수가 있을가? 한국사람들은 혈통주의문화에서 출발하여 같은 종족이라는 리념을 내놓고는 중국조선족문화의 실질을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가? 중국조선족들은 혈통은 한반도이고 어떤 장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독립군의 후예인듯 자처하지만( 적어도 그런 욕구가 존재하고 대변인이 없는것은 아님) 대부분은 조선말기와 일제강점시기의 몰락농민의 후예임은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통문화에 대한 소화시스템 평균수준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보다 뒤떨어져 있음은 사실이다. 그 뿐만 안니라 중국에 정착하여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시기의 영향( 일제강점시기 일제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실행한 식민책과 객관생활환경도 부동함)과 중국전통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또 중국공산당과 북조선을 경과하여 장기적으로 우세적인 문화로 되였던 구쏘련 공산풍문화의 행정적인 사실적인 주입으로 하여 몇차례의 대뇌세척(洗腦)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 문화의 구성요인과 맥락이 복잡하고 봉페적인 특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중국조선족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조선족문화를 조금이라도 빨리 실상을 알리려면 우선 자신의 <거울비추기>를 해봄도 바람직하다.옳바른 <거울비추기>가 없이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남에게 알리는 과정에 과장법과 은둔법과 착오법이 나지기가 마련이다.  현존 중국조선족문화와 한국문화를 비교하면 중국조선족문화는 렬세문화임은 틀림이 없다. 인구와 경제상황 그리고 고대한국문화를 계승한는 면에서도 그 정통성의 부족으로 우리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렬세속에서 버득거리고 있다. 중국조선족문화를 렬세문화라고 한다면 반박을 촉구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민족정통성이라는 平臺와 세계시장경제라는 평대를 척도로 하면 우리는 사실 엄청난 후진이 아닐수가 없다. 사실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에 대하여 혈통인지와 인도주의 등 정서를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한국인들은 현재까지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기시를 보이고 있다. 그 흉수가 바로 한국문화의 우세이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렬세이다. 렬세문화를 우세문화앞에 사실적으로 내여놓는다는것이, 그 行路難이 우리가 직면한 문화충돌을 그복하고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가려는 길에 놓인 거대한 과제이다.  
64    [잡담66] 중화문명 하나 둘 댓글:  조회:4419  추천:68  2008-10-22
 [잡담66] 중화문명 하나 둘 허동식        고대 4대문명설에 이견을 지닌 사람이 없지는 않다. 4대문명설에서 문명이란 무엇인가는 문제가 파생되며 라틴어의 문명은 경작의 의미를 지녔고 중국어의 문명은 문자발명과 문자이용이 연관되며 현대문화학의  해설로부터 보면 문명이란 인간생존방식의 집중표현이라 하지만 사실 문명이란 쉽게 리해를 진행할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점에서도 인간으로서 아주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는 리해를 할수 있지만 간단하고 작은 문제일수록 언어로 문자로 리해를 완벽하게 표현할수 없는것은 현재까지 인간능력 불완전이라는 명제를  리해하는데도 도우이 된다.   고대 4대문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론쟁중에서 중화문명이 4대문명중에서 유일하게 오늘까지 존속된 문명이라는 설이 거의 정설로 되여있는듯도 하다. 여추위선생이 홍콩 봉황텔레비방송국에서 주최한 세계문명국순례활동에 참가하여 그 개인적인 기록과 감상을 모은 <千年一嘆> 이라는 책에서 시작되는 중화문명의 생명력에 대한 사고는 좋은 생각이기도 하지만 여러 문명중에서 중화문명만이 유일하게 오늘까지 완전지속이 되였다는 판단은 나로서는 어딘가 믿어지지 않는다.  중화문명이 오늘까지  완전지속이 되였다는 판단에 대한 의심은 그 근거로  1, 오늘날의 중화문명은 언어와 문자를 내여놓고는 중화문명을 이룬 요소중에서 외래문화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말할것이 없고 유럽대륙 리성문화의 일설로 되는 공산주의설이 러시아화되여 중국 현존사회문명에 주는 결정적인 영향력이 문명이란 정지상태가 아니라 동적인상태임을 알려주고 중화문명도 그 뿌리가 어느 정도 변이한 문명임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종족적인 구성으로부터 보아도 현재 중국인이 진시황 한무제시대의 중국인과 커다란 거리를 두고 있음은 의심할바가 없다.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몽고인종들만의 융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만 피부색이 변하지 않았을뿐이지 사실은, 중국인은 혈통적인 유전인자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유전인자도 기복적인 거대한 변화를 거치어 오늘날의 중국인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3. 중화문명에 대한 자신심과 숭고한 감정은 중국인으로서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또는 불필요한 일건이기도 하다. 입으로는 대천세계의 세계화를 부르짖고 속궁리는 나와 우리 하는 사유방식을 보존한다는것은 적어도 부동한 지역과 부동한 계통 문화를 존중하고 리해를 해야한다는 진리와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화문명이 완벽하게 보존된 유일한 문명이라는 말을 조금 삼가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중화문명에 대한 감성적인 욕구적인 판단이고 <꿀을 바른> 일담이기 때문이다.  
63    [잡담65] 도둑질에 대해서도 약간 댓글:  조회:4429  추천:69  2008-10-22
[잡담65]도둑질에 대해서도 약간허동식유태교 <10계>나 불교교리를 물론하고, 각 나라 윤리도덕과 법치상황의 어제와 오늘을 물론하고, 도둑질은 인간이 하지말어야 할 첫번째 행위로 보여진다. 헌데 유감스러운것은 도둑질이라는 불도덕행위가 법치 행정 등 여러가지 조치에 의하여 어느 정도로 극복되여 왔을가? 좀도적행위는 광채롭지 못하여 삼가되거나 감옥살이를 곁들어 어느 정도는 극복이 되였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또는 소규모도둑질이 < 임꺽정>이라든가 <수호지>에 의하여 의적이라는 낱말이 있을 정도로 성행하여 왔으며, 좀도적을 방치하는듯 하면서 저들이야말로 극악의 도둑질로 살판치던 관료사회의 무한대연장,  또 대규모적인 도둑질도 미화되여 당당한 력사기록으로 인류사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앞에서는 나는 갑자기 인간의 악상에 대하여 경악을 금할수가 없다.  물질재부를 위한 종족사이의 전쟁도 좋고 나라사이의 전쟁도 좋고 계급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봉기도 좋고 모두가 공리목적성이 뚜렷하였으며 여러가지 수단으로 도둑질을 공개화하고 합리화하는 습관은 인간사회의 상투수단이 아닐수가 없다.     그러한 상투수단이 오늘날에도 창궐하다는 판단을 하면서 언제이면 인간본성의 일면으로 보여지는 도둑질이 끝장을 볼건가고 의구심을 품어보고 그러한 도둑의욕이 철저한 참패를 당하기를 기도라도 해보고싶다.   2차대전시에 일본군국주의라든가 나치스의 도둑의욕이 민족과 국가생존을 위한다는 변명하에 진행이 되다가 참멸을 당하기는 했지만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인간의 집단적인 도둑욕망은 크게 꿈질거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의 예언에 의하면 물질재부의 생산이 완전한 충족도에 이르면 인간의 열악적인 본성면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그렇게 될가고 의구심을 품게 된다. 하물며 물질재부가 충족하지못한 오늘날에 있어서 집단적인 민족적인 국가적인 도둑욕망은 다만 전쟁이라는 극단이고 유일한 수단으로 압살해야 하는가고 자문하고싶다.     이웃이 좀 사는 흉내를 보이면 자꾸만 전쟁위협도 하고 또 중국말로 소위 <내부모순을 외부로 분출>시키려고 그러는지 늘 집작거리는 일들이 우리의 심성을 못살게 군다.   어느  <저작>으로도 그 도둑의욕을 감출수는 없다. 또 물질재부가 충족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인내와 양보만으로는 도둑의 본성을 고쳐주기도 힘든 일이다. 
62    [잡담64] 나 또는 우리의 공간意識 댓글:  조회:4676  추천:72  2008-10-05
[잡담64] 나 또는 우리의 공간意識허동식인간 또는 人群이 공간에 대한 리해와 활발된 상상력이 인간 또는 人群이 물젖은 문화의 요점이라는 느낌을 적어보고싶다. 세상이 크고 넓은것은 아리숭하게 알지만 도대체 얼마나 크고 넓은것인가는 념두에도 두지못했던 유년시절, 어른들의 옛말에서 서울과 동경(토오쿄)이 튀어나오고 유선방송에서 북경이 튀어나오고 시골에 배달되는 신문에서 쏘련과 미국 그리고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선을 보이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무렵에 소유했던 공간의식이 아주 유치했음을 아프게 생각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흑판에 쓴 문자를 필기하고 암송방법으로 시험을 보던 지리과를 배우면서 지구라는 星球는 지구의처럼 둥글다는 사실보다도 애들끼리 지부랄타르해협을 <쥐 불알 타래 >해협이라고 부르는 앙극(恶作剧)에 열중하던 아픈 기억만을 남기였다. 고중시절에는 대학교시험을 보기위해서는 문과를 배우는 애들이 지도를 기웃거리며  리과생의 비웃음을 자아내던 일들이 기억된다. 소위 리과를 배워내지못하는 남자애들이 녀성남쇠의 문과반에서 고학을 하면서 화학을 배우면 화학비료나 만들어 농산물수확고를 올릴수가 있지만 지리를 배워서는 어디에 써먹을가고 苦心한 일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지리상식도 전혀 모르는 동년기의 리과생들도 가련하기 짝이 없다. 요즘은 리해력이 빈약하지만도 영국과학자의 <時間簡史>를 억다짐으로 읽어본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공간의식이 허약하기 그지없고 우리 人群문화가  심어준 공간의식이 상상력커녕 울타리 만들기에만 열중했음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너무나도 직감적인 인군은 혜초스님과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하여도 필경은 全群적익 공간상상력양상에는 거의 도움이 없었고 우리들더러 아주 오래동안 공간탐구정신결핍증에 시달리게 하였다. 너무나도 실리적인 인군은 달나라 계수나무나 전설이나 전하는데만 열중하였을뿐, 고되고 메마르고 < 밥이 생길수가 없는 > 수학계산이라든가 우주공간을 자유로이 종횡무진하는 異論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을 표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고중시절 어느 친구가 하늘에 있는 뭇별이 얼마나 크다고 역설하길래 내가 뭇별이란 어느 별하나가 아니고 수많은 별을 가르키는 말이라 반박을 했다. 헌데 그 쟁론의 실용가치가 전혀 없어서인지 곁에 있던 친구들이 쓸모없는 화제는 그만하라고 못밖아주어서 우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공간의식이란 옳던 그르던, 크든 작든, 어느 인간이나 인군이나 소유하기는 하겠지만 다만 크다 넓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알기에는 너무나도 어림도 없다, 정밀하게 알아서는 밥이 생기느냐 하는 배짱에서 얼룽땅뚱 넘겨버림이 나 또는 내가 소속된 인군의 고질이 아닐가 하는 근심을 해본다.   나도 우리도 활발한 공간의식과 실천이 필요하다.
61    [잡담63] 대표인물들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3904  추천:89  2008-09-25
[잡담63]대표인물들에 대한 생각허동식언제부터이던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중에 소수인들이 중국조선족의 대표인물로 자처하고싶어한다든가 또는 그러한 평판을 받고싶어하는 경향성을 은밀하게 내보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현실사회에서의 대표란 선거를 거쳐야만이 , 무식하게 말해서 산수계산의 절차와 통계를 거쳐야만이 대표로 됨에도 불구하고, 또는 대표란 어느 개인의 사상과 행실이 력사로 된 뒤에 사회로부터 追認되는 명칭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표문화에 집착심을 보임은 그런 소수인들이 명욕과 리욕에 너무나도 눈과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대표란 사회의 보편성적인 인정과 희망요구 사항을 접수하고 그 희망요구사항을 실행해야만이 진정한 대표임을 알고있으면서도, 대표인척 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살판치고 있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필경은 투명정도가 불안정하고 대표문화에 대한 리해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상수준을 대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에 내재한 보편적인 의미에 비해서는 최상이란 시간에 맞물린 평가로서 대부분을 대표하지못할수도 있다. 누가 어느 령역에서 잠간 최상이라 차지한다 하더라도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최상으로 될수가 없으며 또 특정된 령역을 벗어나 전민적인 대표로 되기는 힘든 일이다. 무례한 말이지만 우리의 리익을 대표하는척 우리의 정서를 대표하는척 우리의 사상을 대표하는척 하는 자들의 꼬락서니가 참 보기가 싫어진다. 자아조립한 대표문화에 집착하는 소수인들이 밉다.
60    [잡담62] 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댓글:  조회:3915  추천:87  2008-08-13
[잡담62]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허동식<백두산을 독한 술이라고 하니 어떻게 산을 액체에 비유할수 있는가구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데.> 언젠가 최시인으로부터 지용문학상수상시집을 선물받으면서 최시인의 크게 억울해하던 얼굴표정을 길게 쳐다보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백두산은 산이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산을 초월하여 정신적인 심리적인 신볼로 존재하여 왔으므로 독한 술, 말하자면 아름답게 향기롭게 빚어지여 문화적인 민족적인 감성적인 리성적인 무한의 문화내용을 간직할수도 있는 존재로 볼수있다면,백두산을 독한 술에 비유함이 좋은 시어일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사실 백두산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독한 술이 아닐수가 없다.      많은 군체들이 자연물 아니면 인공물을 상징적인 정신之柱로 공유하기에 힘써왔다. 그 내속은 인간의 무가내속에서의 지혜이고 랑만이고 희망의 지속이다. 특별히 종교민족이 아닌 경우에는 군체 공동소유의 정신심리상징물에 대한 경건한 숭배심과 대대로 전해지는 의뢰심은 신화와같은 존재인듯도 하지만 사실 살아가는 응집력 등 힘의 래원으로 그 작용을 보인다.      만족도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간주한다. 일본인들도 후지산이 없으면 무조건 정신세계의 공허를 느낄것이라는 글귀를 읽은적이 있다. 곤륜산(상상중의 곤륜산)이 없으면 중화민족도 어딘가 망므속 한구석이 허전해질것이다.     륙지민족이든 해양민족이든 많은 종족들이 산에 대한 , 특별히 성산에 대한 애착심은 거의 비슷하게 표현을 이룬다.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고 민감한 말썽이 있기는 하지만 그 쟁론은 나에게는 큰 장애가 없다. 왜냐하면 백두산이라는 상징물이 나의 뇌리에 이미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깊은 밤 , 눈을 감고 나의 토끼꼬리만큼한 상상력과 미숙한 시정으로 나의 백두산을 한번 우러르자. 거창한 정서가 물결쳐온다.
59    [잡담61] 혈연과 族緣과 人緣 댓글:  조회:4154  추천:77  2008-08-11
 [잡담61] 혈연과 族緣과 人緣 허동식<피는 물보다 짙다> 라는 말에 대해 조금 생각해본다. 어딘가 혈연과 족연을 인연의 앞자리에 두는 문화습관이고 문화사유일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혈연을 비롯한 족연 등을 인연의 앞자리에 놓는다. 그러노라면 자연히 < 제 피줄도 모르는 놈이 남들을 생각해주면 잘 해주면 얼마나 진심이고 얼마나 잘 해줄가?>하는 말과 론리가 태여나게 된다. 또 < 제 민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이 다른 종족을 사랑할수가 있겠느냐?>는 의문과 론리가 성립될지도 모른다. <피는 물보다 짙다>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지당한 경지일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경우에 따라 속된 자사자리한 협애한 습관으로 사유로 전변할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가족과 가족사이의 은원을 대를 물려가면서 연의적인 이야기를 꾸미던 일이 많이 발생하던 시대도 있었다. 대대로  할아버지 원쑤를 갚느라면 서로 피비린 바람속에서 세월을 보낸 이야기가 도선관에서만 보관되여있음도 아니다. 순수한 리익만이 아니라 민족감정을 전제로 하는 민족전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며, 또 모든 이교도들을 짐승으로 보는 종교광인들에 의하여 종교전쟁도 있는 현실을 살펴보면서 나는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말에 대하여 스스로의 의구심을 표하지않을수가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 차라리 <물이라는 溶濟가  없으면 피가 없다>는 말이 좋은 말로 생각된다.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을 갖추지못했다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해도 그 효도가 인간의 건전한 효도일가? 제 민족을 크게 사랑한다 하더라도 다른 종족을 사랑할줄 모르는 인간의 민족애는 기형적인 민족애로 표현되지 않을가? 고 의심을 해본다.
58    [잡담60] 북경올림픽개최전 도적촬영 댓글:  조회:3765  추천:96  2008-08-01
[잡담60] 북경올림픽개최전 도적촬영허동식한국 어느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북경올림픽개최전 련습장면을 도적촬영하여 방송했다는 사실이 중국인들의 마음에 꽤나 큰 상처를 남겨놓은듯 하다. 도적촬영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촬영중에 촬영을 제지하는 중국인이 있었든 없었든, 련습장면이 텔레비에 방송된것은 부인할수가 없는 사실이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해석을 하든 거의 엎지른 물이다. 중국인들을 상대해서는 북경올림픽이란 무식한 말로 부모 생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날이 아닐가? 아주 오래동안 중국은 세계무대에서 소외된 배역을 하여왔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북경올림픽을 통하여 중국을 세계에 더욱 널리 알리고  진정한 세계일원으로서 인류활동에 동참하려는것이 진정한 심리동기로 보인다. 올림픽개최전을 위하여 중국은 거대한 심혈을 몰부어왔다. 세인들에게 중국인들에게 경이롭고 다채로운 명절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기대하는 마음> 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중에 한국 어느 텔레비방송국에서 국제관례를 타파하고 련습내용을 촬영해서 공공연히 방송했다는 일은 참으로 중국인들에게 미안한 ,례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질책을 받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한국국민들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약싹빠르게 한국인들에게 <선>을 보인듯하지만 사실은 한국의 이미지에 먹물을 발라놓은것이다. 도적촬영한 텔레비방송국이 한국을 대표하는것은 아니지만, 필경은 한국의 방송국이므로 일부의 중국인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와 립장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이웃나라로서 <비밀을 고수하여>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일인데 공공연히 <발가놓는다는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이다. 인간사이도 그렇고 나라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경우에는 력사적인 리익적인 은원을 벗어나 함께 기뻐할줄도 알고 슬퍼할줄도 아는 신사다운 면이 있어야한다. 남을 존중할줄 알아야 하고 남의 제일 <민감>한 구역을 회피하고 보호해줄 능력을 지니지를 못했다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 행위를 범할수가 있다.. 
57    [잡담59]부처님의 거룩함(허동식) 댓글:  조회:3756  추천:87  2008-07-31
[잡담59]부처님의 거룩함허동식사천성 어느 큰 티벳불교사원에서 몇해간 티벳불교를 배웠다는 조선족친구를 만났다. 좀 배우려고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친구는 티벳불교의 초자연적인 怪力을 많이 이야기했다. 나로서는 귀속에 마음에 담을수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였으므로 이 꼬라지에도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부처님의 敎義라고 할수있는, 여러 불경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내용과 수행법은  잘 모르지만은 불교를 알고싶다.하지만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속세에서 속세의 목적을 이루는, 례를 들면 경제조직으로도 활용되는 불교조직에 대해서는 조금 불신임이다. 왈가부갈 등등. 하지만 부처님은 거룩하기 그지없다.       2천여년전의 인간으로서 인간생명에 대하여 普世적인 天問적인 명상을 진행하셨고 그 명상실천을 위하여 일심으로 全力하셨다는 부처님의 이야기는 인간생명으로서의 장쾌한 행진과 랑만이 아닐수가 없다.  2천여년이 지나간 오늘날, 불교의 普適성에 대하여 비판하는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생명존재의 의의에 대한 무관심이 무성한 주위와 나의 일상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부처님께서 위대한 생명명상들을 하신 리유와는 관계없이 부처님의 거룩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여추위선생의 근간의 글 한편을 읽어보았다.중국불교사와 관련된 글이였는데 이족의 문화사상을 아주 깔보던 중국고전시기,중국인들의 문화 터는 공자라든가 로자라든가 장자라든가에 의하여 滿員이였던 상황에서도 사대부들과 황족들과 민간은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못하고(중국불교사는 멸불력사사건도 있지만 주맥은 부처님을  따름이다) 부처님 사상을 받아드린 원인의 하나가 불교 본신이 지닌  생명진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고 한다. 말하자면 먼 옛날, 실리를 즐기는 중국고인들도 생명의 진미를 사색하는 부처님 사상에 깜짝 놀라고 그 지혜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부처님의 거룩함, 나는 어느 사원이나 불상앞에서 부처님의 거룩함을 찾지는 못한다. 찾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거룩함을 즐기고싶다.
56    [잡담57]조선족학생의 대학입시 語種선택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4528  추천:109  2008-07-24
 [잡담57]조선족학생의 대학입시 語種선택 그리고 기타     허동식조선족이 대학입시에 조선어로 시험을 보는가 아니면 중국어로 보는가는 심각한 문제이다.  조선어를 대학입시를 보려면 조선족학생은 한족학생들보다 어학수업에 조선어문이라는 과목이 하나 추가되므로 공부에 요구되는 累計시간이 당연히 한족학생들보다 많아진다.또 중국어수준도 한족학생들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진다. (물론 순수 시간적인 원인으로만 이루어지는 중국어수준 저하현상은 아니지만) .결과 대학에 입학해서 중국어수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공부에서 후진으로 되는 현상이 있다. 필자는 중국어수준이 아주 저질이여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크게 힘들었다.古文은 한족학생들이 유치원 시절에 암기하는 《早辞白帝彩云间,千里江陵一日还。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이나 배운 주제에 중국고전문학 중국력사 등 사회학과를 배우는 흉내를 내느라고 아주 힘들었다. 수학과에서 나타나는 개념의 차별(조선어로 편찬된 수학교과서는 영어음역으로 표기된 개념이 많지만 중국어로 편찬된 수학교과서는 意譯이 많았던 기억이다)은 그럭저럭 극복할수는 있지만 근 2년동안 대뇌속에서 돌아가는 사유언어가가 조선어였으므로 선생님의 강의는 물론 ,중국어로 해야 할 습작 등 면에서 한족학생들의 발꿈치도 따라갈수가 없었다. 연변태생인 내가 이러했으며 <안쪽>에서 온 조선족학교를 졸업한 조선족학생들도 구두어면에서 연변조선족학생들보다  나은편이였을뿐 별로 큰 장점을 보여주지못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조선족학생은 보통 일본어를 배웠으므로 서구권리론에서 연역되는 여러가지 리론을 배울라면 서구언어의 표현식과 사유식을 리해하기도 아주 힘든 이중적인 장애를 받았다. 20여년전과 비교해서는 중국조선족사회가 중국어를 접할 폭과 수단이 넓어졌으리라고 생각해왔다. 헌데 서안에 가니 연변친구 하나가 중국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알아듣지못하여 북경 어느 학교를 그만두고 5년전부터 한국어가이드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個案으로 중국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수주을 판명함은 억다짐이기는 하지만 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수준이 어느만큼의 진전을 가져왔을가 의심을 해보고싶다. 독일사람들이 힘든 일을 두고 중국어를 배우는 일과 같다고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사실 중국어는 힘든 언어이고 문자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느 언어도 문자도 쉽지는 않다.그리고 조선어도 잘하고 중국어도 잘 하는 경우에도 사유語境의 전환도 힘든 고비이다. 상기한 어학과제를 전제로 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20여년전부터 우리의 중국어교육은 낮은 수준의 언어문자교육에만 머무르고(20여년전 대학입시 중국어에서 만점을 땄다 하더라도 그 실력이 한족학생들의 초등중학교 우수생의 실력이나 되였을가?) 중국어로 사유하는 훈련과 교육을 무시하고 있지않을가고 의심을 해본다. 지금 돌이켜보면 20여년전의 조선족학교의 중국어교육은 针对性과 과학성이 부족했음을 느껴본다.상형문자인 한문에 대한 깊은 리해를 지닌 선생님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조선족에게 적합한 중국어교육방법모색이 결여되여 있었다. 교재편찬으로부터 시작하여 강의법과 훈련법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중국고등학교 교육상황을 전제로 한 중국어교육이 아니였다고 판단을 해본다. 현재 상황은 많이 개변되였을지도 모르지만 정인갑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선족학생들의 중국어 공부는 큰 과제이며 조선족사회의 중시를 받아야한다고 생각된다.  조선족학생은 중국어를 실력적으로 배워야 하지만 또 조선어도 잘 배우면 좋은점이 수두룩하다.부동한 언어는 부동한 사유방식이라는 말처럼 조선족학생들이 부동한 사유방식을 하나 더 챙겼으므로 생존수단을 포함하여 매 개인에게 가져오는 실리와 의의는 말할 필요도 없다.또 민족동화문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 ,조선족학생들이 중국어로 대학입시를 본다면 그 결과는 학생들 대부분이 한족학교로 몰려들것이고 동화의 촉매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조선족학생이 조선어로 대학입시를 보는가 아니면 중국어로 대학입시를 보는가는 기술적인 문제로 대두되는듯하지만 실은 민족생존의 전략성적인 문제이다.길림성에서 내놓은 <중국어수준시험>제도는 중국조선족사회에게 유리한 점이 크지는 않다.대학입시에서 합격되였지만 중국어수준이 결여된 조선족학생은 예비과에 넣지못할 망정,대학정문을 들어서지 못하게한다는것은 중국의 소수민족어정책에 위반되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생존환경의 급변화속에서 조선족사회는 명석한 사유를 해야한다.중국조선족은 이중국적은 아니지만 이중신분임은 틀림이 없다.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조선어도 잘 배우고 중국어도 잘 배워야한다.조선어도 잘 배우고 중국어도 잘 배우는 방법과 제도화는 급선무이다, 전문기구의 설립이라든가 연구와 과학적인 실천이 아주 필요하다.
55    [잡담56]오늘을 살면서(허동식) 댓글:  조회:4171  추천:105  2008-07-22
잡담 56오늘을 살면서허동식미국을 다녀온 어느 친구로부터  < 미국은 참 좋더라,거리에 나서면 질서가 잡혀있어  성을 낼 필요도 없이 한생을 기분좋게 살수 있으니.> 하느 려행담을 들은적이 있다..   언제부터든가 나도 기분좋은 인생을 살려고 마음먹었다.어떤 일을 직면해도 어떤 사람을 상대해도 화기롭게 대하고 되도록이는 성을 내지 않고도 지나칠수있는 생활을 목적으로 하고싶었다. 헌데 오늘을 살면서 내 욕심은 잘 실현되지 않는다.  중국관방 집행문화는 우선 관리자의 편함을 우선으로 하고 피관리자의 편함을 뒤로 하는것이 통병으로 되여있다. 우리의 사회제도라든가 그 실행细则는 본의적으로는 광범한 인민대중의 장기리익을 도모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집행과정은 변형을 이루어 집행당담자들이 자신의 편리를 도모함을 우선으로 하기에 광범한 인민대중들은 제도의 진미를 향유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느 공직기관에 가서 일을 좀 보려해도 푸르뎅뎅뎅한 대접을 받어야하니 중국 납세자들은 어딘가 불쌍하기도 하다. 나는 사회와 회사를 제쳐놓더라도 적어도 거리에 나서면 질서가 잡힌 어떤 분위기속에서 살고싶다.하지만 현실은 거리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만나기가 많이 힘들다.        우리는 관방문화만이 아니라 민간문화도 흔히는 < 내> <우리>가 우선이고 <너> <당신들>은 뒤전이다. 공상업을 비롯한 사회경제면에서도 소비자의 편함보다도 생산자라든가 판매자라든가 운영자의 편함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국영경제운행자들이 이런 민간문화의 대표이다. 그래서 거리로 나가면 날마다 입싸움하는 장면을많이 구경하고 심지어 손찌검질하는 장면도 적지않게 만난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을 살면서 웃는 얼굴과 마음으로 살기가 참으로 힘들다. 우리가 심리수행에서 락제를 쩜?/SPAN> 탓도 있겠지만 그릇된 관방문화와 민간문화의 살판질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중국사람들은 <你不够厉害, 别人就欺负你 。네가 드세지못하면 남들이 업신여긴다> 는 말로 애들을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락오된 관방문화와 민간문화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다.
54    [잡담55] 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 댓글:  조회:3935  추천:115  2008-07-21
잡담55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허동식한여름 아침이나 점심을 조금 배불리 먹으면 졸리는 경험이 있다. 아무런 욕구도 없이 자고만 싶어진다.교실에 앉아있어도 선생님의 강의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를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친구의 아이가 식성이 좋아서 잘도 먹는다. 친구는 < 너무 먹으면 아둔하니 그만 먹으라 > 하여 애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받는다. 자연조건이 좋아 물산이 풍부한 동네는 사람들이 손발과 머리를 움직이기를 싫어할수 있다는 내용과 비슷한 글귀를 읽은적이 있다. 배가 너무 부르거나 , 상대적으로 쉽게 물질재부를 획득할수 있는 사람이나 동네나 또는 족속은 머리를 굴리기를 싫어하고 습관에 젖어 살아갈수 있겠다는 멍텅구리 생각을 해본다. 기득권일수록 향유에 젖어있고 퓽요로운 동네일수록 오락문화가 발달되여 있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부자는 3대를 못넘긴다>는 중국속어가 혹시 배부른 사람들이 손발과 머리를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사실결과를 은유하는게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헌데 배부른 사람만이 상기의 습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아주 배고픈 사람이나 동네나 족속도 손발 놀리기를 싫어하고 머리 굴리기를 싫어하는 경향성이 있음도 생각해본다. 배고프면 그 누구나 <窮者思變>을 이루는것은 아니다.  가난에 지지눌려서 허리도 펴지못하고 나중에는 유전적으로 손발도 머리도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그것이 습관화되고 문화화가 되면 큰 일일수도 있겠다. 아무튼 긴 세월을 대를 물려가면서 가난을 밥먹듯한다는것은 좋은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배가 너무 불러도, 물산이 너무 풍부해도 문제로 된다. 배가 너무 고파도, 물질재부획득조건이 너무 연약하여도  문제로 된다. 사람의 손발과 머리를 꽁꽁 묶어서 꼼짝달싹 못하게 할수가 있다. 그래서 배가 너무 부르지도 않게 , 너무 고프지도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가? 우리들더러 손발과 머리를 부지런하게 놀리는 빈부구조에 대한 산수적인 답안은 없을가? 배부른 타령과 배고픈 타령을 조화롭게 합주하는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 
53    [잡담54]大智若愚 그리고 지혜의 종류 댓글:  조회:3691  추천:84  2008-07-15
[잡담54]大智若愚 그리고 지혜의 종류허동식大智若愚란 중국고대경전인 <로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현재에도 일상에서 많이 사용된다. 물론 사용하는 자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된다. 하지만 그 순수한 문자의미가 우리말의 < 큰 지혜는 아둔하게 보인다.>고 번역이 될가?       지혜를 작은와 지혜 큰 지혜로 나눌수가 있다면 나는 순수 경험과 五感만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혜를 작은 지혜로 생각하고싶다. 반면에 인간의 인식상상력이 리용되고 오감만이 아니라 엄정한 사유론리를 거쳐 인간의 생리적인 국한성을 벗어나 만들어지는 지혜를 큰 지혜라고 생각하고 싶다.          보이는것만 만져지는건만 들리는건만 맛볼수있는것만 맡을수있는것만에 머무른다면 , 순수 직감적인 경험에만 머무른다면 오늘날의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될가? 지혜와 인간사유의 필연련관성에 미치고나니 문화란 부동한 사유방식이란 말이 다시 새삼스럽다. 직감적인 경험적인 지혜는 누구에게나 차려지는 챤스가 거의 균형적이라 볼수는 있지만 사유방식에 의해 배출되는 큰 지혜와 작은 지혜는 균형적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과 종족에 따라 불균형을 이루어왔다.     지혜를 또 속세의 지혜와 정신신앙의 지혜로 나눌수가 있다면 나는 모든 속세의 지혜를 작은 지혜, 정신신앙의 지혜를 큰 지혜로 보고싶다. 정신신앙의 지혜는 실용적인 면은 결여되여있지만 < 세상은 인간은 무엇인가? 본질은 무엇인가?>등등의 의문과 탐구를 진행할수가 있음이 바로 인간특대의 근본특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큰 지혜는커녕 작은 지혜마저 잘 배우지를 못했다. 학비가 부족한 탓일가 아니면 운이 나쁜 탓일가?   나를 두고 당신은 大智若愚라 평판해주는 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허허, 나에게 그런 안위를 해주시는 분에게 술 한잔 대접하리라.  
[잡담 53]<현대판라성교이야기>의 내막-기둥 하나로 집을 지으려는 일허동식건축은 전혀 모르지만 기둥 하나로 집을 지을수 있을가 생각해본다.기하상식으로는 삼각형이 제일 온건하고 실물로는 기둥 4개인 집이 많은데 기둥 하나로 버섯이나 우산과도 비슷한 집을 지을수가 있을가? 그리고 버섯형 또는 우산형 집이 얼마나 실용적일가 멋있을가?인간도 인간사회도 건축물로 볼수가 있으리라. 인간은 금방 태연나서는 인성이 텅 비여있는 空白물로서 可塑성이 큰걸로만 알고있었다. 말하자면 주위에 있는 사람과 사회가 마음대로 주물러서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수 있다는것이다. 인간이 可塑성이 크다면 인간사회도 可塑성이 큰걸로만 알고 있었다.어느 주의라든가 어느 정영인물의 욕구대로 인간사회는 주물러서 그 리상에 따라 만들수 있다는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인간과 인간사회라는 건축물에 기둥 몇개를 세울건가는 과제는 <과학>으로 둔갑한 주의와 정영인물들의 욕구로 해결된다고 믿어왔고 현재도 다소 그런 이미지속에 살고있다.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너무 간단하고 목가적인 판단을 진행하고 다면적이고 천성적이면서도 변화적인 복잡한 인성에 대하여, 또 그러한 인성과 관련이 되는 인간사회에 대해 <기둥 한개>의 주장을 하던 과거는 너무나도 고지식한 리상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판라성교이야기>의 내막은 <기둥 한개>로 집을 지으려는 사회리상이 인간사상과 사회와 이델레오기를 독점했던 과거에 대한 또 하나의 특색적인 회고로 보여진다. <현대판라성교이야기>는 과거의 인간건축법과 사회건축법에 질의를 표하고 거절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 질의와 거절이 조금은 은둔되고 애매한 불쌍한 라성교까지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적어도 과거를 되돌어보는 작법과 인성을 존중하고 인성자유를 존중하려는 생각은 내가 배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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