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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허동식《잡담》
[잡담42]
상식이 진리가 아니다
허동식
아주 어릴적에 동네에 결혼식이 있으면 저녁에 어른들이 신랑집에 모여들어 오락주석을 하나 만들고 신랑 신부에게 노래와 춤을 하게 하고 부산을 피우고 닭도 잡아먹고 술도 먹고 하던 기억이 있다. 한족들의 闹洞房하고는 형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농경사회의 일종 오락문화방식으로서 한적하고 단일적이던 시골에 오락적인 교류적인 기분을 가져다 주었었다.
한번은 오락주석이 신랑에게 만일 홍수가 나타나 생모와 신부가 함께 물에 빠졌는데 한사람만 구해낼수없는 조건에서 누구를 구하면 좋겠는가 질문하고 신부더러 신랑 대신 답하라 하니 신부가 그래도 신랑의 립장에서 생모를 구하고 신부를 포기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그 리유를 엄마는 하나밖에 없고 신부는 즉 마누라는 조건만 있으면 다시 만들수 있다였다고 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그래서 좌중은 만족하고 다시 웃고 떠들고 신부의 효도관을 극찬하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유학사상이 주류로 되여있으면 그 표현식의 하나로 효도가 아주 중요시된다. 효도란 가정과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 인문사상의 중심내용의 하나이다. 우리는 잘 리해하고 잘 써먹기는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효도가 아무리 상식적으로 보급이 되여있다 하더러도 우리와는 다른 문화원초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은 그 진미를 리해하기 힘들고 효도를 최상으로 생각하지않을수도 있다. 신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권에서는 효도보다 앞서는것이 사람과 신 사이의 관계로서 人神관계를 초월한 효도는 나설 자리가 없다. 성실한 기독교자에게 효도가 아무것도 아닐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이 깨여진다.
족군의 형성에 있어서도 우리는 혈연성을 거의 관건적인 요소로 리해를 진행하고 상식으로 간주하지만 그 상식이 진리(완전하고 보편적인 사실)가 아닐수도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아니된다. 씨족에 관한 그리고 가정과 사유제의 발생에 대한 엥겔스의 론설을 하나의 旁증으로 우리가 아주 오래동안 족군과 혈연은 절대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사는 다 그런것은 아니다.
고대 희랍에서는 족군이란 혈연보다도 공동神을 둘러싼 합치성을 전제로 하여왔다. 말하자면 전혀 혈연이 없는 사람이 어느 어느 족군에 참석하려면 그 족군의 공동신에 반듯이 충성해야만 가능했다. 공동신을 모시면 그 족군의 혼인과 토지권을 향유할수 있었다. 누가 그 족군의 혈연을 지닌다 하더라도 공동신을 배반하면 그 족군으로부터 혈연성을 <박탈>당하고 추방을 받아야했던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정도는 리해하기 힘들고 달통이 아니될수도 있지만 엄연한 력사사실이다.
우리의 혈통론의 우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다만 우리의 보존되여온 생활방식일뿐 전 인류적인 생활방식은 아님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상식이 진리가 아님을 알려면 視點과 視域이 중요하다. 나의 시점에서만 출발함을 거절하고 나의 제한된 시역을 벗어남이 소위 지혜로운자의 길이다.
상식을 깨버리는 일이 학문의 길일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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