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혁의 인물만필 시리즈 (2)
민족교육계몽의 타종(打鐘)꾼
- 김 약 연
… 땡. 땡. 땡.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는 부채살처럼 펼쳐져 명동의 벌판에 가득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소리에 외양간에서 소가 음메! 울었고 홰대우에 앉았던 닭들이 푸드득 깃을 쳤다.
모난 계명의 소리는 잠자는 마을을 깨우고 있었다.
규암 김약연은 교회 옆 느티나무에 얹은 종각아래에서 종을 치고 있다.
깊은 눈매에 형형한 눈빛, 하늘 향해 쳐들 린 카이저 콧수염, 하얗게 빛나며 휘날리는 두루마기…
종소리의 은은한 여운 속에 김약연은 독락(独乐)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고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
...
나의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북간도지역에 이주민들의 “리상촌”을 건설하고 민족교육계몽의 종소리를 높게 울린 이가 있으니 바로 규암(圭巖) 김약연이다. 명동촌과 명동학교를 말하기에 앞서 이주민들을 휘동하여 언땅에 개간의 보습을 박고 지탑을 잡은 김약연에 대해 말하지 않을수 없다.
1899년 2월 18일, 종성출신들인 성암 문병규 학자를 선두로 남평 문씨 가문의 40명, 규암 김약연 학자의 전주 김씨 가문 31명,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학자 가문 7명과 회령 출신인 소암 김하규 학자의 김해 김씨 가문의 63명— 도합 141명이 두만강을 넘고 있었다.
철판처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고향을 등진 자의 한숨처럼 늘 찬 오랑캐령을 넘어 그들이 다다른 곳은중국의 간도 화룡현 지신사 (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들어섰다.
인적 하나 없고 오직 외로운 비둘기떼의 구슬픈 소리만이 맞아주는 “부걸라자”에 이른 이들은 수백 정보의황무지를 사들이고 서둘러 개척의 날을 박았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다시 “명동”이라고지었다.
이렇게 드디어 바람 세찬 간도땅에도 명동이 일어 섰다. 서울의 명동처럼 화려하지 않은 황량한 벌판. 하지만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明東)는 그 이름대로 개척민들이 운집한 이곳에서 조선인들의 공동체인 명동촌은 명실공히 이주민들이 선망하는 “간도 제1촌”으로 되였다.
장대한 이주대오를 이끌고 낯설고 물 설은 고장에 이른 개척단의 선두주자로 는 당년 32세,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던 김약연이였다.
김약연은 1868년 10월 24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 동촌행관에서 태여났다.
김약연은 회령에서도 인끔높은 유가적 가풍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 유학 경전에 통달했다. 17세에 벌써 맹자를 만독하여 거유(巨儒)의 칭호를 얻은 유학자였다.
김약연,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이들 네 학자는 모두 고향땅인 종성과 회령일대에서 서재를 꾸리던 훈장들로 알려진다. 명동일대에 이주한 후 문병규, 남도천 두 학자는 환갑이 넘어 서재에서 손을 뗐으나 김하규는 대사동에 소암재를, 남도천의 아들 남위언은 중영촌에 함한재를 각기 서재를 설치하고 학동들을 받아들이였다.
김약연도1901년 4월에 장재촌에 "규암재”라 일컫는 서당을 꾸렸다. 자신의 호를 딴 서당이였다. 주로 한학을 전수하는 구식교육이었으나 이것이 북간도 한인들의 첫 배움터로서 교육사상 아주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김약연의 "규암재"뜨락에 모인 명동사람들
리상설의 "서전서숙"이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폐숙 (废塾)되자 김약연의 사촌동생인 김학연을 비롯한 "서전서숙" 출신의 일부 선생과 학생들이 명동에 오게 되였다. 김약연은 그들과 협상한 결과 작은 서당을 그만두고신학교육을 실시하는 새로운 서숙을 차리기로 했다.
김약연 등은 규암재를 토대로 몇 개 서재를 합쳐 사립 명동서숙을 세우고 페교 된 룡정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창립, 초대숙장으로는 김약연이 맡게 되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개창 되였다.
2010년 복원된 명동학교의 모습
1910년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것 역시 중국조선족 이주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김약연은 마을 학교의 교장직을 맡고있지만 사실상 마을의 터주대감격이였다. 그 인물됨이 아주 커서 마을사람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있었다. 관후장자의 풍모를 지닌 풍채가 당당했을뿐만아니라 매사에 너그러웠고 환했고 정이 넘쳤다. 김약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경모의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은 또 솔선수범하는 그의 삶 때문이였다. 그는 명동학교 교장일을 보면서도 친히 학교에서 교수를 담당하였고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학전(学田)의 밭갈이, 기음, 수확과 탈곡을 하였으며 교사의 수건 심지어 방구들을 고치고 까래를 결는 등 궂을 일도 가리지 않으면서 이신작칙의 본을 보였다.
그의 휘동하에 학교와 마을의 질서는 정연하고 옳바르게 잡혀나가게 되였다.
당시 명동학교의 학과목을 보면 소학부에 국어, 성경, 산수, 력사, 지리, 체조 등 13개 과목이고 중학부에 국어, 수신, 력사, 지지(地志), 신한독립사, 사범교육학 등 23개 과목이였다. 김약연은 학과목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는데 두고 학생들에게 민족자부심과 반일의식을 키워주기에 힘썼다. 후에 일제침략자들이 사립학교들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던 시기에도 김약연은 여전히 조선어와 조선국문, 조선력사와 조선지리, 조선노래를 의연히 가르치게 하였다.
김약연은 학교운영에 힘쓰는 한편 민중교육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명동학교를 둘러싸고 명동촌,장재촌, 신동촌 등 6개 마을에 야학을 꾸리고 문화를 널리 보급하며 반일계몽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규암이 조직한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은 연변 각지와 남북만, 조선,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륙속 모여 들었다. 명동학교는 일약 조선국내의 오산학교와 쌍벽을 이룬 독립지사 양성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명동학교 제17회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김약연, 가운데 줄 맨 오른쪽이 시인 윤동주)
1919년 3월 13일 룡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 각지에서3만여 명 조선인들이 운집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한 “해란강반의 봄 우뢰”로 불리는 만세시위운동이 일었다.
"3.13"시위는 일제와 일제의 사촉을 받아 출동한 만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였다. 탄압으로 희생된19명 시위자들 가운데는 3대독자이고 16세밖에 안되는 명동학교 중학부학생 김홍식도 들어있었다.
당시 “전러한족중앙총회(全露韩族中央总会. 그 뒤 국민의회로 개칭)”에 초청되여 갔던 김약연은 비보를 전해 듣고 로씨야에서 부랴부랴 귀로에 올랐다.
명동에 온뒤 김약연은 독립운동을 구체화 하기 위해 간도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발족시켰으며 리동휘, 구춘선, 황병길이 조직한 독립무장대오를 지원할 군자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20년 2월 김약연은 중국 민국관청에 체포되였다. 그후로 김약연은 국자가 감옥에서 2년동안 연금되여 지냈다 .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1920년 1월 3일 명동과 불과 10여리 리 떨어진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회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의거에는 명동학교 출신이거나 명동과 관련된 독립군 용사들이 적지 않았다.
명동촌은 당연히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제는 명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 북간도지역을 피바다로 만든 "경신년 대토벌"이 일제에 의해 일어났다. 당시 일제는 갑자기 명동에 덮쳐 들어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명동사람들이 터를 닦고 세운 명동학교를 재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1924년 갑자년 특대 흉년이 덮쳐왔다.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왕년의 생기를 잃어갔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지켜내려는 김약연의 노력은 외롭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중학부가 취소되고 중학부의 교원들과 일부 학생들이 룡정의 여러 중학교로 옮겨지자 명동학교도 교회에서 경영하는, 남녀공학학교로 바뀌었다.
1928년 환갑연의 김약연은 명동을 떠났다. 솔가하여 룡정으로 떠났다. 명동촌은 김약연이 퇴장하면서 일약 빛을 잃었다.
명동은 마을의 지탑을 잡고 향도의 종소리를 울리던 옛 주인을 잃었다. 하지만 그 주인이 창설한 명동학교는 력사의 갈피에 그 존재를 또렷이 적었다.
명동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중학부가 1925년에 페지 될 때까지 18년간 학교는 무려 1천명의 애국청년들을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그 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읊조렸던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명동학교 학생으로서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라운규,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김약연의 룡정자택 옛터를 확인한 필자
1938년 2월에 김약연은 다시 룡정으로 돌아왔다.
은진학교 리사장, 기독교 목사의 신분으로 룡정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던 규암 김약연은 1942년 10월 24일 병환으로 룡정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 75세였다. 선종(善終)하면서 애통해 울던 가족과 제자들이 유언을 부탁하자 이런 한 마디를 남기셨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이는 김약연이 숨을 거두며 하신 마지막 포효였다.
윤동주 생가 정원에 세워진 김약연 송덕비
룡정을 찾는 유람객들이면 의례 들려보는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그 생가와 불과 몇십보 떨어진 더기에 위치한 명동교회 바로 그 동쪽켠에 낮다란 4각정자를 씌운 “김약연 공덕비(金跃淵功德碑)”가 서있다. 1942년 그이가 안식에 든 후 간도조선인사회 유지들과 명동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공덕비는 윗머리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광복 후 토지개혁 당시 김약연 일가가 당지에서 지주로 치부되여 청산을 맞게 되면서 이 비석도 버려졌다. 비석은 한때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씌었다고 한다. 1980년 대 마을 사람들은 흙속에 묻힌 이 비석을 찾아서 원 자리에 복구를 했다.
김약연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생가와 “규암재”가 있던 장재촌의 뒤산기슭에 고이 모셔져 있다.
장채촌 뒤산의 김약연 묘소를 찾은 필자
당년 명동의 화신으로, 이름난 독립운동가, 교육가로서 북간도 조선인 사회를 밀고 나가는 수령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던 김약연, 그의 일생은 솔선수범하는 삶, 높은 인격, 남다른 지도력,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앞장서서 그 시대의 아픔을 건져 올려 치료하고 구제하려고 몸을 바쳐 온 일생이였다.
“중국민족” 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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