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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용사ㅡ 김정국
험한 절벽에 수목이 우거지고
광풍폭우 몰아치는데
거친벌 물가에 전마가 호용하네
.......
일떠나 용감히 돌격하자
왜적을 몰아내고 동북을 찾자
동이 트면 찬연한 빛 솟아오르리
이것은 동북항일련군이 수빈일대의 소택지구에서 원정을 해야만했었던 극히 어려운 시기 리조린, 우천방, 진뢰가 함께지은 <<로영의 노래>>다.
그 나날에 얼마나 많은 항일투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보귀한 자기의 생명을 서슴없이 바쳐 싸웠던가! 그들의 이름가운데는 동북항일련군 제11군 정치부위원이였던 우리 조선족청년 김정국(金正國)의 이름도 들어있다.
김정국(金正國)은 원명이 김상주(金相珠)인데 1912년 3월 조선 함경북도의 례천군 호명면 산합동에서 태여났다. 그는 4살 때 부모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료녕성 관전현의 한 산골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부모들은 중국지주의 소작살이를 하다가 김정국(金正國)이 10살나던 해인 1922년에 다시 그곳을 떠나 북만으로 깊숙이 들어와 지금의 탕원현에 정착했다.
그때는 조선땅에서 3.1봉기가 있은 직후여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포계몽에 힘쓰는 한편 항일구국투쟁을 활발히 벌리고있었던 것이다.
나어린 김정국(金正國)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진적인 선생의 영향하에 항일구국의식이 움트게 되어 반일삐라를 뿌리거나 표어를 붙이는 등의 혁명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던것이다.
1929년, 소학교를 졸업하자 김정국(金正國)은 진보적인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직접 동포계몽에 진력코저 마을에서 교편을 잡았고 18살 어린나이임에도 용약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었다.
1930년도, 9.18사변이 일어나자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으로 인하여 일제는 불과 닷새도안되는 사이에 료녕, 길림 두성을 점령하여버렸다. 하여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지구도 그자들의 마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1932년 2월의 어느날, 중공탕원현위에서는 전체당원과 군중을 조직하여 항일구국에 떨쳐나서라는 만주성위의 지시를 관철집행하기위하여 학립진북쪽의 칠호툰(지금의 신화역전)에서 각 구위와 지부서기회의를 열고 항일구국선전과 무장투쟁을 조직할 문제를 연구했다. 그때 나이 20세였던 김정국은 탕원현위에 전근되여 당비서로 사업하고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발동하고 각계인사들을 조직하는 등 의 항일구국사업에 적극뛰여들었다.
이해의 여름에 이르러 반일동맹조직들이 여러곳에 세워졌다. 탕원현의 와구, 각금하, 태평천, 와단하와 라북의 압단하. 부금의 안방하. 통화의 통화구 등에는 비교적 튼튼한 항일조직들이 있게되였다.
1932년 쌍십절을 계기로 탕원현위는 반재하(지금의 보안촌)에서 베르단총 1자루, 새우총 1자루, 기관총 1정, 목갑권총 2자루와 토양포 2자루외에 칼과 창으로 유격대를 건립하였다. 대원은 40명. 모두가 끌끌한 조선족과 한족젊은이들이였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족녀성도 3명있었다. 그러나 이 유격돼는 경험부족으로 하여 불시에 달려든 토비들에게 무장을 전부 빼앗겨 심한 좌절을 받은것이다.
하지만 전반 탕원군중의 항일정서는 의연히 높아가고있었기에 반일동맹은 계속 발전하여 인원수가 어느덧 5,000여명에 달했고 항일투쟁에서 골간이 될 당원과 단원만도 1,000여명에 달했건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항일열화를 꺼버리려고 대량의 병력을 탕원에 집결시켜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간, 특무들의 발광적인 활동과 반역자의 밀고로 하여 현위서기 리녕을 비롯한 20여명의 우수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여 생매장을 당했다. 하여 탕원중심현위는 엄중히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이때 김정국(金正國)은 자기처럼 겨우 살아남은 당원들과 함께 탕원북산의 량자하에 땅굴 두 개를 파고 한동안 숨어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탕원의 항일투쟁이 극난에 처한 시기였다.
엄동이 지나갔다. 3개월간이나 땅굴에서 숨어지낸 60명당원들은 다시 분연히 떨쳐나섯다. 그들은 학강동쪽 황하강(黃花岡)자위단의 무기를 지혜롭게 빼앗아 자신들을 무장했다.
1934년 김정국(金正國)은 부금현 안방구위서기 리춘만(李春萬) 등 3명의 동지들과 함께 각 촌의 지주들이 대지주 고대관에게 음력설세배를 하는 기회를 타서 고가네집에 들어가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려하였다. 그런데 예상밖에 고가네 호위대가 총을 쏘는바람에 쌍방은 맏불질을 하게되였는데 그 혼전가운데서 지주 셋을 쏴죽였으나 이쪽도 리춘만(李春萬)을 비롯하여 3명이 희생되고 김정국(金正國)만이 보총 한자루를 빼앗아 들고 담장을 뛰여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것이다.
1934년 겨울, 탕원현반일유격대는 탕원반일유격총대로 개명하고 대오를 200명으로 확대하였다. 현위서기는 유격대의 정치사업을 틀어쥐기 위하여 김정국(金正國)을 그 유격총대의 정치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1933년 여름, 화천현(지금은 화남현에 속함) 타요자금광의 나젊은 금점꾼 기치중(祁致中)이 일제의 압박에 반항하여 자기와 같은 신세의 금점군 6명과 함께 금광을 지키는 일본군의 총을 빼앗고 는 동북삼림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이 무장조직을 명산대(明山隊)라 명명했다. 명산대(明山隊)는 항일을 견지하면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굴곡적인 투쟁가운데서 기치중(祁致中)은 마침내 깨달음이 생겨 탕원현위를 찾아가 자신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자기의 대오를 개편하고 군사정치간부를 파견해줄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35년에 김정국은 현위의 파견을 받고 명산대(明山隊)에 가게 된 덧이다. 그는 명산대(明山隊)에 가자마자 싸움에 앞장섯거니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이 짊어지는 등의 실제적인 행동으로 여러사람의 신임을 얻게되였으며 그 속에서 300여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것이다. 기치중(祁致中)과 그의 령도하에 이 대오는 재빨리 화천현일대에서는 전투력이 제일강한 항일무장으로 성장했다.
1936년 5월 20일, 의란현 제 3구에서 상급당위는 명산대(明山隊)와 다른 몇 개의 삼림대를 합쳐서 동북항일련군독립사를 편성하고 기치중(祁致中)을 사장으로, 부진성을 정치부주임, 김정국(金正國)을 지도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김정국(金正國)은 정치부주임직을 담임하였다.
김정국(金正國)은 후방기지건설에 큰 중시를 돌리였다. 그는 화천현남부의 칠성라자산속에다 소형피복공장과 련패간부를 배양해내는 군정학교를 세웠으며 후에는 병기공장까지 앉히였다. 이 병기공장에는 총제조직장, 탄약직장, 무기수리소도 있었다. 그리하였기에 그들은 자체로 권총 100여자루를 생산해냈거니와 돌격총시험제작에도 성공했다. 하여 경제상 북만당조직의 부담을 크게 덜어줬거니와 본보기가 되여 상급의 표양까지 받은것이다.
한편 김정국은 1936년 가을에 려장인 장치국과 함께 100여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화천현 래재하에 있는 위대패대(僞大牌隊)를 습격하여 적 20여명을 격살하고 170명을 포로했으며 200여자루의 총과 많은 탄약을 로획했다. 그런후 1937년 가을, 김정국(金正國)은 또다시 부대를 거느리고 화천현 맹가강(孟家崗)뒤의 부라자산기슭에서 적 10명을 격살하고 4대의 황금운반차와 군수물자운반차를 중도에서 탈취하여 보총 100여자루와 황금 수백량을 얻은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그들은 맹가강에서 흑석부대 기병 700여명을 유인하여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격전을 벌리였는데 적 300여명을 섬멀하고 보총 200여자루와 기관총 10정을 로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1937년 11월, 그의 독립사는 항일련군 제11군으로 개편되였는데 기치중(祁致中)이 군장으로, 김정국이 정치부위원 겸 제1려 정치부주임을 맡게되였다. 당시 이 부대는 기병대까지 갖춘 1,500여명의 호호탕탕한 무력으로 발전하였는봐 그들의 주요활동지구는 화천, 부금, 동강일대였다.
1938년은 불온의 해였다. 이해에 적의 <<대토벌>>로 말미암아 전동북의 항일전쟁은 가혹한 시련을 겪게되였던 것이다. 송화강하류의 여러 항일련군은 적의 포위를 벗어나 새로운 항일유격지구를 개척해야했다. 이런때에 김정국(金正國)은 따로 200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천현의 래재하지구에서 단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봄, 일제는 기병 1,000명과 저들의 제4교도대의 병력 500여명을 집결하여 항일련군 11군을 <<포위토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적아쌍방의 력량대비가 현저했다. 이런 상황에 김정국(金正國)은 장치국과 함께 제1려를 지휘하여 화천현의 영평강으로부터 철퇴하여 대화갑산에 이르었으나 끝내 적의 포위에 들고말았다. 가렬처절한 싸움 끝에 려장 장치국을 비롯한 80여명 전사가 희생되였다. 이같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김정국(金正國)은 나머지 선사들과 함께 포위를 간신히 뚫고 칠성라자밀영에 이르었다.
항일은 끝지 말고 계속이어해야했다.
김정국(金正國)은 부대의 실력을 확장하려고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금 화천현 동부에 전이하여 그곳의 군중을 발동하였다. 무서운 타격과 좌절앞에서도 나젊은 그는 그야말로 굴할줄을 모르는 강철의 의지를 튼튼히 다지고있는 용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란 그야말로 예측키어려운것이였다.
1938년 5월상순의 어느날, 뜻하지 않은 액운이 떨어질줄이야 어찌알았으랴. 전쟁판도 아니였다. 이날 화천현의 리귀툰에서 군중을 발동하고있던 김정국(金正國)은 불행하게도 부대에 잠복해있은 반역자의 손에 살해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 무엇을 바라고 그는 그같이 청춘의 열혈(熱血)과 목숨을 다 바쳐 싸웠던가? 그 정신, 그 업적이 후세에 망각되여서는 아니될 일이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리고 따라배워야 옳을것이다.
相关资料
1937年冬, 十一军各部进行了英勇的游击活动, 给敌以重大打击, 我军也有相当损失. 11月初, 日伪军破坏了我七星砬子密营, 二旅旅长胡文权在战斗中牺牲. 在此期间, 十一军协同 五, 六, 八军等部队共同进行了破坏敌人"集团部落"的战斗. 1937年12月下旬, 金正国设计击毙了关东军司令部特务, 三江省协会特别工作部部长金东汉.
(常好礼 / 著: "东北抗联路军发展史略" 239页)
第十一军在明山队时期的后方基地在桦川县南部的大梨树沟, 并由此扩展到桦, 依边界一带. (同书 241页)
화천현(樺川縣)은 내가 근 50여년간을 산곳이요 그 남쪽의 따리수거우(大梨树沟)는 내가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잊지못할 고장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골안에는 명실공히 돌배나무가 많거니와 땅속에 금이 있어서 지금도 황금몽을 품고있는 금점꾼이 떠나지 않고 "복사씻기"를 하는 고장이다.
거기서 동쪽으로 장대 몇 개를 넘으면 영평강(永坪崗)인데 그곳은 1947년겨울 토비숙청을 다니던 나의 부친(金丙念)이 참모장 김해정을 따라 정찰임무를 맡고 나섯다가 반원전체와 함께 혈전 3여시간끝에 희생 한 곳이요, 그 저쪽으로 40여리 더가면 바로 기치중(祁致中)이 명산대(明山隊)를 조직하여갖고 항일을 나섯던 타요자(駝腰子)인 것이다. 그곳은 큰 금광구(金鑛區)다.
나의 어머님은 성명이 최정순. 8살에 쏘련에서 건왔다. 나의 부친을 알게되여 약혼을 했던 그해 나이 16살이였는데 쏘련제재봉침으로 하루에 철띠 70개씩 만들어 유격대에 보내면서 그들의 일을 힘껏 도왔다고 한다. 하건만 문화혁명이 오니 이 불초자 때문에 일호반점의 죄도없이 억울함만당하고.... 이 글은 어머님생전회억에 근거하여썻다. 다년간 력사를 추적하고 자료를 모아 증실하면서 쓴 것이기에 틀림이 없으며 다소나마 무마가 되라여겨져 원한을 못다풀고 돌아가신 나의 어머님의 령전에 드리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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