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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에낭아 사부로ㅡ그는
☹ 성명: "지난 력사를 몰라도 산다"는 무지한은 보지 않아도 됨.
언젠가 나는 인터넷에서 청람색나는 학생복을 정갈하게 입은 16~18살나이의 근 20여명에 달하는 녀자애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웃으면서 지하철까지 와서는 차가 오니 구령을 부르면서 함께 투신자살하는 끔찍스런 장면을 보고는 적이 놀랬거니와 일본사람의 성격은 변태적라고 한 불란서의 어느 사상가의 지적은 과연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되였다.
그 불란서 사상가는 구라파사람들의 눈에 일본사람은 종자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피비린내를 즐겨 남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악한민족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사람들은 거개가 고집불통이여 제멋대로 하니 몹시 우매하거니와 무지하기 또한 그지없다면서 상급앞에서는 비굴하게 "하이! 하이!" 하면서 허리를 꿈실거리지만 하급을 대함에는 그지없이 조폭하고 혹독하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더 보탰는데 그것인즉 일본사람은 쩍하면 남을 죽이거니와 자기가 남한테 모욕을 받은 것 같으면 밸을 못이겨 자살을 한다면서 제 목숨도 그렇게 귀하게 여길줄모르는 인간한테 무슨 자비심인들 있겠느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은 그야말로 보복과 살기가 너울치는 혼란스런 나라라는 것이였다.
그의 그러한 평가가 과연 옳은지는 몰라도 듣고보니 망탕소리는 아니였다. 하기에 일본에는 지어 "할복자살문화"까지 생겨나 그것을 선전하고 배워주기까지하는게 아닐까?!
불란서대통령이였던 드골역시 생전에 말하기를 "일본이란 이 음험하고도 교활하고 잔인한 민족은 피비린내를 즐긴다. 하기에 네가 만약 그들에게 약하게 뵈여 없신여김을 당하기 시작하면 중세기 때 구라파에서 흡혈귀로 소문났던 더쿠라모양으로 조금도 사정없이 너의 목주래를 물어뜯어 끈어놓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지어 어떤 사람은 일본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폄하를 한다.
첫째는 인간다운 말을 하지 않고,
둘째는 옳은소리를 할줄을 고르며,
셋째는 횡포하고 무지막지하여 헛소리를 잘치고,
넷째는 미국사람의 바줄에 억내여 지악스러운 개가 되었고,
다섯째는 싸우다가 질것같으면 독가스를 뿌리린다.
이러면서 일본에서는 아직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또오 히로부미나 도죠 히데끼같은 군국주의자들의 유렁이 살아서 너울치길래 국민은 모두가 년년이 넋을 기리고다는 것이다.
과연 심각히 사색하게 되는 일이다.
그나마 아직은 70~80대의 늙은이들이 살아있어서 우리 민족이 지난날 일제식민지하에 36년간 노예로 살아왔던 그 눈물겨운 수난의 근대사를 회고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아직은 고대사라부르기에는 이르는 4백여년전에 우리 민족이 입은 한차례의 심하고도 뼈아픈 참화에 대해서는 자라는 세대들이 전혀 깜깜인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의 어느 무지한 대항자(혹은 추종자일수도있고)가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나보고 또 "시궁창에 썩고 잇을지 모르는 오물"을 끄집어낸다고 비난하겠지만 여러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아마도 우리와 우리의 후대가 잊어서는 아니 될 한단락의 력사를 말해야겠다.
일본에는 지금도 세상에 유일무이의 커다란 코무덤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전라도 남원성 전투와 충청도 지역 전투에서 조선사람들의 코베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산 자든 죽은 자든, 병사든 일반인이든, 그런것을 모두 가리지 않고 녀성, 아이, 로인까지 마구닥치는 대로 코를 베여 수집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그먼저의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거점이였던 "전라도를 전멸시키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모든 다이묘가 자신의 전공의 증거로서 가신들에게 무차별 코베기를 명령한것이 원인이였던 것이다. 일본병사는 1인당 3개의 코를 할당받았다. 그들은 잘라낸 코를 소금, 식초, 석회 등으로 방부처리한 뒤 1,000여개씩 나무통에 넣어 군 감찰관에게 가져갔다. 군감찰관은 병사들이 잘라온 코의 수를 증명하기 위해 코령수증을 발행하였다. 현재남아있는 코령수증 수를 기준으로 해서 추측하면 10여만개이상이 될 것이다.
왜란당시 재상이였던 유성룡이 남긴 "정비록"에는 "적병은 무릇 우리 나라 사람을 붙잡기만하면 코를 베여 위세를 보였다"고 기록되였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 교넨(慶念)의 "조선일일기"에도 "력사상 이 전쟁처럼 슬픈것은 없다. 병사들이 가는곳마다 살육을 일삼고 불을 지르니 그 연기가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조선사람의 머리와 코를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가 가득했고 병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고 기록되여있다.
일본병사들은 이를 모아 오사카로 보냈고, 오사카에서는 큰 통에 코를 넣어 도요토미에게 보냈다. 이것은 교토지역의 주민들에게 전쟁에서 이기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로 응용되였다. 그뒤 도요토미는 모인 코를 묻어서 분묘를 만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하도록하였다.
이후 에도시대의 새로운 통치자인 도쿠카와 에이야스를 섬긴 유학자 하야시 라잔(羅山)이 코무덤(鼻塚)의 잔인한 인상에 고민하다가 코무덤이라 새겨진 비석을 없애고 귀무덤(耳塚)이라 불러 그 명칭이 전해지고있는 것이다.
나는 이같은 력사를 "한일공통력사인식의 견고한 초석이 되길바라서" 일본과 한국의 량심있는 교육자들이 손잡고 각고의 노력끝에 편찬해 낸 "조선통신사"를 읽고서야 알게되였던 것이다. 대단히 고마운일이다.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에 감사를 드린다.
한데 유감스러운 것은 일본이 너무나 허심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남경대도살"을 포함한 중국침략전반에 이르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승인하지 않거니와 반성을 하려하지 않고있다는 그것이다. 과연 너절하고 괘씸한 일이다.
13년전인 2,000년에 주용기(朱鎔基)가 일본에 갔다가 한차례 일본민중과 중요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당시 51세에 나는 히로시마(广岛)의 한 관중이 한 말인즉은 자기는 일본군이 전쟁때 행한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 몹시 가책을 느끼노라해놓고는 그런데 중국에서는 시종 우리보고 잘못을 빌라고 하는데 대체 어느때까지 빌라고 할건가고 질문했다. 그러자 주용기총리는 "내가 일깨워주지, 소유의 문건을 보면 일본이 중국인민앞에 제잘못을 승인하고 빈적은 하나도 없다. 1995년에 일본수상이 그저 롱통하게 아세아주인민들에게 잘못을 표시한다고 한마디했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때까지 빌어야할지는 일본이 알아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빌건 빌지 않건 그건 당신들이 할탓에 달린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이 일에 대해 심각히 교려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일본이 제잘못을 충분히 빌었냐 빌지 않았냐는 하는건 여론조사에서 다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전체국민의 20%가 잘못을 승인하고있다. 중국측은 어떤가? 겨우 2%정도의 국민이 일본은 빈걸로 알고있는 것이다.
대련(大連)에서 태여나 할빈(哈爾濱)에서 자라나서 오사까에 온 한 중년사나이가 지금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남경대도살"이란 근본 없는일이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고 주용기총리에게 물었다. 이에 주용기총리는 간단히 말했던 것이다.
"남경대도살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증거를 충분히 장악하고있다."
이에 당년 79세에 나는 일본의 요코야마( 橫山)교수(敎授)가 "주총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일본은 한번도 잘뭇을 빈적이 없습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대단한 용기였다고 하겠다.
일본은 지금도 거의 우파세력이 판을 치고있길래 솔직한 반성이 있기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이런 형세, 이런 환경속에서 일본사람으로서 과감히 국가에 도전하여 40여년간이나 맛서서 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인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그를 "제사(帝師)로부터 변절자(變節者)로 된 사람"이라 욕하고있다. 다시말해 "임금의 스승으로부터 변절자"로 되었길래 너는 이제는 임금의 스승도 아니고 일본사람도 아니라는 비난이다. 하지만 이에낭아 사부로는 굽어들지 않고 "매개 일본사람 다 죄가 있다"고 떳떳이 선포하고는 국가와 견결히 맛섯던 것이다.
근대건 현대건 중일(中日)량국은 력사가 긴밀히 련계되고 얽히였는바 서로의 모순이 맛물림으로하여 각기 력사관도 다르게 된 것이다. 허심하지 못해 본성을 개변할 수 없는 극우세력은 일본이 지난날에 저지른 천추에 용납못할 죄과들을 죽어도 승인하하려하지 않거니와 지어는 그것을 당연하고 옳은 것으로 미화하기까지 하고있는 것이다. 야마도민족이 세상사람들에게 의연히 악질로 락인되고있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여지껏 임금의 스승노릇을 해왔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의 반역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세끼에 투하된 원자탄과도 같이 온 일본을 진동시킨 것이다.
"일본사람이 잘못된건 바로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한 것이다.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1913.9.3ㅡ2002.11.29)는 일본의 력사학가며 교육가였다. 그는 1937년에 도오꾜제국대학 문학부국사학과를 졸업하고는 도오꾜대학의 전신인 도오꾜고등사범학교에서 일본사상사를 교수했다. 그러다 그는 1948년에 <<上代倭繪全史>>와 <<上代倭繪年表>>을 써냄으로 하여 최고권위인 일본학사원(日本學士院)의 "은사상(恩賜賞)"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학술연구에 종사하는 이라면, 특히는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일본사람이면 누구나 다가 꿈에서마저 바라는 최고의 영예상인 것이다.
(일본학사원은 일본의 최고학술기구로서 중국과학원과 같음)
전쟁이 끝난지 얼마안되여 그는 거대한 정력을 몰부어서 <<태평양전쟁>>을 써냈는데 그것은 동류의 많은 책가운데서는 영향력이 가장 컷다. 하기에 경상적으로 연구자들에게 인용되고있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3성당(三省堂)의 고중용 <<新日本史>> 편찬사업을 맡아했었다. 관례대로 하면 교과서를 편찬하려면, 더욱히 력사교과서라면 다가 연구령역에서 부동한 전문가가 모이여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편찬하기로 돼있었지만 3성당(三省堂)만은 규례를 벗어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 그 한사람에게 도맡곁으니 이는 그가 온 일본치고 그 누구보다모 학술수평이 높았음을 의미하는게 아니겠는가!
일생을 저술사없에 헌신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력사교과서가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은것을 발견하기만하면 가차없이 지적했다. 1952년에 그는 일본고급력사교재인 <<新日本史>>를 편찬하면서 객관적인 각도에서 공정하게 일본력사를 기술하여 그를 광범하게 사용하게끔게했던 것이다.
그런데 1962년에 이르러서는 일본문부성(日本文部省)이 교재를 검열하는 과정에 "남경대도살"내용을 비롯한 오키나와전쟁(冲繩戰爭)의 기원에 들어가서 서술이 맞지 않는다면서 부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전쟁을 너무 암흑하게 여기고 국민이 죽을힘을 다해서 전쟁을 지지한 광휘로운 형상은 쓰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文部省은 그가 "민족애가 부족하다"면서 "애국주의를 주선률"로 해야하는게 아니냐, 한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거니와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가 교과서를 리용하여 학생들에게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주입하려한다면서 공격했던 것이다.
文部省이 그가 편찬한 력사교과서를 부결했지만 그는 완전히 상반대로 력사교과서는 사실이 되어야지 외곡되여서는 절대안된다고 자기의 주장을 지켰다. 그러니 文部省은 그와 좋게 타협하려했다. 허지만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력사를 고치면 외곡이 되길래 절대 그럴 수 없노라고 제 주장을 그냥 내 뻣히였던 것이다. 그러자 文部省은 그의 교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지었다. 하여 1965년 6월에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文部省의 교재검정은 위헌이며 학술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국가기구를 법에 기소했던 것이다. 결과 그는 패소했다. 하지만 그는 1970년에 다시걸었고 그것이 패소하자 그는 1984년도에 또다시 세 번째로 文部省을 법에 기소했던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가로서 국가에서 천황의 관리와 학자를 배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운 도오꾜교육대학(现筑波大学)의 교수를 지냈던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는 3만명에 이르는 "교과서소송 전국련락회"의 성원을 발전시켜놓고 2002년 11월 29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그가 사망한 이틑날 집식구와 친척들과 그의 생전지기 몇몇만 모이여 소리없이 간단히 치르었다. 력사진실을 주장하여 40여년간을 국가와 맛서 완강히 싸운 그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영광스럽거니와 그 정신은 그야말로 보귀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계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은 희망이 있을것이고 그러지를 않는다면 일본은 영원히 쑈를번꾸이즈(小日本鬼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벗어메치지 못한채 세인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나는 구천에 간 정직하고 솔직하고 용감한 이에낭아 사부로(家永三郞)의 명복을 빌면서 일본은 속히 개변이 있기를 바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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