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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러면 절대안되지!!
방금 "연변동북아연구원"에서 새해들어 "새해, 영광이 있으라"는 주제의 모임을 가졌다는 보도를 보았다. 보도는 "이 문화연구원의 최룡관원장에 따르면 2012년 한해만도 연구원에서는 '연변청마문학제' 및 '청마백일장'을 주최하고 대량의 촬영, 음악,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하면서 "문학부에서는 최룡관시인이 평론 '수'는 수작으로 한국에서 제5회 청마연구상을 수상했다고 알렸다.
나는 조글로에 오른 이런 글과 사진만을 보았을 뿐 연변에 있지 않으니 "연변동북아연구원"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것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국가의 인준을 받은 떳떳한 연구원인지 아니면 국가에서 설치하지 않고 몇몇이 모여 꾸리는 민간활동조직인지?...자못 혼란스럽다.
개혁개방이 되어서부터 국내질서가 문란한 틈을 타 딴심보를 품은 어떤 얼치기 문인들은 제가 지성인인양 양대가리를 내걸고 버젓이 개고기를 팔듯이 얼림수작으로 못된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나는 "연변동북아연구원"에서 새해에도 문화원의 주최로 제3회 '청마문학제'를 개최하게되리라니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나서 나서는 거다.
관동군사령 우에다 켄찌가 소화 11년 9월 18일에 내린 "만주제국협화회의 근본정신" 즉 1936년 그때 만주국전역에 내린 통고(通告)로부터 시작해서
"군사토벌과 치안숙정지일"이며
"관동군 853호명령"인 (<日>关叁一发第 739号文件)으로부터 련달아 "관동군사령부 소화11년도 제2기 관동군치안숙정요강에 관하여" 를 비롯한 여러 명령들인
(<日>关作命第119号),
(<日>关作命第853号),
(<日>关作命第965号),
(<日>关作命第995号),
(<日>关作命第995号附件),
(<日>关作命第1063号),
(<日>关作命第1063号附件)에는 다가 항일련군, 항일광복군을 비적(匪賊)이라했거니와 관동헌병사령관 후지 히토시 소장이 내린 "관동군헌병대명령"을 비롯한 여러 지시와 "강덕6년도 통화성 추동기숙정토벌계획"에도 마찬가지로 항일련국과 순조선사람으로 조직된 부대였던 항일광복군을 비적(匪賊)이라 그냥 규정면서 만주국의 "협화회원"으로 조직된 선무반(宣撫班)은 다가 토벌대에 배속되여 항일련군과 항일광복군의 귀순(歸順)을 담담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배치까지 있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표시하는가? 당시 만주협화 회원중 주로 지식분자로 조직되였던 선무반(宣撫班)의 사람들은 일제토벌대의 앞잡이가 되어 항일대오를 와해시키는 일역을 적극적으로 담당했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마 유치환이 선무반(宣撫班) 사람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가 협화회원(協和會員)이였음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협화회원은 무엇을 했는가?
"协和会主要从事 '策反' '招降', 搜集情报及其他反动活动"
(黑龙江沿革史讲稿 452页. 黑龙江省档案馆)
보다싶히 위만주국 때 협화회원이였던 청마 유치환은 환영받지 못할 신분의 지식분자였음은 틀림없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1939년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북만에 들어가 살다가 1945년 6월에 귀향했다. 그는 귀향전 북만주의 빈강성(賓江省ㅡ지금은 흑룡강성내) 연수현(延壽縣) 신구 (新區)에다 "가신흥농회"라는 자연이민촌농장을 경영하면서 1943년에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한 것이다. 그에 썩 앞어 1932년7월에 일본청년 셋이 조직한 협화당이 협화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중앙에 회장을 설립하고 중앙사무국을 두었는바 6개지방에다 사무국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바로 그 사무국에 들어가 사업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흑룡강성 경내에 있는 사무국이 본래는 하얼빈(哈爾濱)과 치치할(齊齊哈) 두곳뿐이였는데 후에 의란(依蘭)에다 사무국을 하나 더 세웠다. 그러면서 지방의 사무국아래에다는 판사처(辦事處)를 두었는데 하얼빈(哈爾濱) 지방사무국아래에다 할얼빈(哈爾濱), 일면파(一面坡), 녕안(寧安), 목릉(穆稜), 연수(延壽) 등 5개판사처(辦事處)를 세웠던 것이다. (흑룡강성당안관자료 455페지)
한즉 연수에 있었던 청마 유치환이 광복이 나기직전인 1943년에 하얼빈 협화회에 전근했다는건 그가 지방판사처에 있으면서 협화회의 일을 잘해서 중용되였다는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고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높이 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두눈은
먼 寒千(한천)에 모호의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
너의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였으리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熱(험열)함과 그 決意(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無賴(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不毛(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思慧(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연변의 최룡관이 궂이 수작(秀作)이라는 이 "수(首)"는 1942년 3월에 <<국민문학>>을 통해 발표했는데 보다싶히 분명 얼굴이 말라든 항일군의 머리를 조소하면서 보아라, 너희들도 시세(時勢)에 거역하면 저런꼴이될것이니 차라리 투항하고 "귀순"을 하라고 설교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런 시를 궂이 수작(秀作)이라는 자의 본의가 무엇인지야 불보듯 빤하지 않는가!.
아래에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에다 발표한 유치환의 다른 하나의 네단락으로 이루어진 짧은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보기로 하자.
"오늘 大東亞戰(대동아전)의 의의와 帝國(제국)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황국신민)된 우리는(중략).... 오늘 赫 赫(혁혁)한 일본의 指導的 地盤(지도적지반) 우에다 바빌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선일보는 1937년부터 만주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발행된 조.석간 일간신문으로서 1945년 광복이 날때까지 친일성경향이 강했다.
뚜렸한바 유치환은 일본이 발동한 침략전쟁을 이같이 공공연히 찬양하면서 춰올렸으니 본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낸게 아닌가? 그의 문학은 그의 신분과 같이 철두철미한 한간문학이였던 것이다!
그런 시인, 그런 인물을, 내놓고 떳떳이 기념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싶다. 기념 할 가치나있으면몰라도? 한국에서는 여러 지성인들의 심한 반발로 감히 행하지 못하는 행사를 왜서 연변에서는 받아들여 버젓이 벌리고있는가? 너무도 방자하게 논다.
연변은 대체 왜 이모양인가?
이 일을 연변자치주당위에서 알고있는지?
주정부는 이 일을 알고있는지?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다음글을 또 보라.
协和会是在东北的一些日本法西斯分子组织的伪国家团体,隶属于关东军。组织会员多是日伪军政要员及地方豪绅。该组织配合日伪政权镇压共产党和抗日武装力量。组织“排共特别委员会”,把“排共运动”做为“国民运动”。组织“青训指导委员会”,用各种形式向青年灌输反共思想。配合日伪政权抓国兵,把不合格者称为“国兵漏子”编入“勤劳奉仕队”,送到煤矿做苦役,很多人被折磨致死。1945年东北光复后此组织消亡。
사진을 보니 모인 사람이 꽤 되는데 나는 그들 다가 청마 유치환에 대해서 잘알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의 이 글을 보고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고 반발을 하겠거든 충분한 근거를 갖고 나오기를 바란다. 아마 시비를 가르는 철저한 대결이 있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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