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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치욕(恥辱)스런 문혁묘비(文革墓碑)
산의 도시로 불리우는 중경(重慶)에 가면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혁공동묘지"가 하나있다. 중경에는 본래 "문화혁명"때 벌어졌던 패거리싸움ㅡ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되었는데 국세(國勢)가 차츰 변함에 따라서 그것들을 옮기거나 파버리거나 아니면 굴토기로 밀어버리다보니 거진없어졌지만 그중 하나만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지속되였던 시비끝에 겨우남아서 오늘에 이른건데 그 본체의 모양을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다. 바로 중경시 사평공원(沙坪公園)내의 서남각에 있는, 콩크리트담을 높다랗게 빙둘러 쌓은 홍위병릉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갖고도 무던히 오랜 세월을 끌었다. 중경시에서는 2009년 12월 15일에야 비로서 그것을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니 문화혁명이 이미끝났어도 33년만이다.
내가 손중산선생이 모셔진 중산릉원을 보러 남경에 갔다가 장개석이 국무(國務)를 보았다는 미령궁과 손중산선생이 생전에 국무(國務)를 보았던 총통부까지 들려보고나니 머리가 돌아 아예 중경의 그곳까지 발길이 미친 것이니 이제는 20년이 넘는다.
중경의 그 홍위병릉원의 총면적은 대략 3000여 평방메터였는데 서남쪽으로 점점 높아진 지세다. 새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릉원안은 소름끼칠지경 정막했다. 높이가 두세키씩 되는 거머칙칙한 비석들이 무질서한 사이에 온통 도깨비바늘쑥과 잡풀들이 가득자라났는데 그런 사이로 오솔길 하나가 안쪽으로 깊숙히 올리뻗어 있었다. 거기에 있는 비석들은 첨단에다 오각별을 붙인것도있고 다른모양을 낸것도 있었다.
그리고 비석마다에 거의다 비문이 있었다.
"头可断, 血可流, 毛泽东思想不能丢",
"可挨打, 可挨斗, 誓死不低革命头"
“心向红太阳”
이러루한 혁명적인 구호로 꾸며진 비문이 많았는데 오랜세월 비바람에 지워지고 갈리여 알아보기 힘든것도 적지 않았다. 어떤 비석에다는 간단히 "紅衛兵烈士"라 새긴것도 있었다.
중경시 사평공원관리처(沙坪公園管理處)에 따르면 홍위병릉원내에 세워진 묘비(墓碑)는 모두 113개인데 531구의 시체를 파묻었다고 한다. 그중 404구의 시체가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이고 그 외는 厂矿企事业계통의 우도우(武斗)때 총에 맞아 죽거나 매를 맞아 죽은 공인쪼판파(工人造反派) 사람들이라했다. 사망자를 보면 60살되는것이 있지만 거의가 2,3십살나이의 젊은이들, 지어 는 11살짜리도 있다고 한다.
정지승(鄭志勝)이라는 사람은 중경의 우도우(武斗)사건 때 중경대학의 전기계졸업 본과생으로서 사업분배를 기다리는 중이였다. 그런데 상급으로부터 우도우(武斗)에서 죽은 홍위병의 시체를 처리하라는 "혁명적과업"을 맡게되여 시장(尸長)이 된건데 그의 손으로 운반되여 매장된 시체만도 300여구, 이 사평공원(沙坪公園)의 "홍위병릉원"에다 매장한것만도 200여구나 된다면서 거의가 합장모(合葬暮)라 알려주었다. 어떤 합장모에는 37구나 되는 시체가 매장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 때 중경의 우도우(武斗)는 처참하고도 격렬했다. 관방의 기재에 보면 1967년도 여름부터 이듬해인 1968년도 여름까지의 사이였다. 두패의 싸움이 붙은것이 31차였는데 총, 포를 쏘았거니와 땅크가 나오고 지어는 포를 건 배까지 출동할 지경이여서 645명의 무고한 사망자를 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경의 우도우(武斗)가 제일심한건 아니였다.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곳곳에 패가 갈리여 "혁명대상"을 서로 제가 가져다 투쟁하겠다면서 빼앗기싸움을 하거나 아니면 내가 모주석의 혁명로선에 견정히 선 진짜혁명파고 너는 보황파라느니, 아니다 네가 보황파고 내가 진정한 혁명파라느니 해서 서로 맛붙어 죽일내기를 하면서까지 싸운건데 무한(武漢), 정주(鄭州)같은데서는 몇만명이 서로 죽일내기를 해서 장강물에 떠다니는 시체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南方周末)
요즘 나는 인터넷에서 머리가 백발이 된 홀로사는 녀인이 기자의 취재를 받을 때 죽은 아들의 사진을 어루만지면서 "이 엄마가 아무 때건 너의 복수를 하고말리라" 하고는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우는것을 보았다. 중경의 어느 중학교 교장은 폭파물을 만들어 홍위병모를 폭파해버렸다. 학자 왕강(王康)은 그것이 바로 "복수"라했다.
모택동은 당시 우도우(武斗)를 벌린 그들 량파를 모두 지지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다. 그러니 결국보면 제편끼리 목숨을 내걸고 싸운것이다.
이건 중국에서나 생길 수 있었던 싸움이였으니 개를 웃길 수치인 것이다!
크게 혼란해야 크게 다스린다면서 문화혁명을 발동해놓고서는 뒷수습도 못한채 안식처를 찾아간 위대하고 영명하다는 그사람, "억만인민 맘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라하여 하늘높이 떠받들렸던 모택동이 세상을 떠난지 27일만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를 놀래우는 "중국의 시월혁명"이 일어나 모택동의 “유망인"은 체포되였고 그럼으로 하여 중국력사의 발걸음은 변화를 가져오게되였던 것이다. 그러한즉 1976년 9월 9일은 모택동시대에다 종지부를 찍은것이요 “사인방”이 타도된 1976년 10월 6일은 중국현대사를 개변시킨 리정비(里程碑)라 하겠다.
중국의 방방곳곳에 찾아볼 수 있는것이 렬사릉원이다. 그러나 중경(重慶)의 그 홍위병릉원만은 그같이 기념을 하자고 남기건 아니다. 기념할 가치라곤 전혀없는 것이다. 그 누구나 한번 가보면 알게된다. 가슴이 답답하게 무거워지면서 깨닫게되는바가 있는것이다. 무엇인가? 참관자는 지나간 세월을 다시금 돌이켜보노라면 자연히 사색이 깊어지는 것이다. 과연 왜 그런 비극이 생겼던가?....
결코 가볍게 스쳐버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남긴 목적은 그 시대를 지내본 사람들에게는 한번다시 자아를 깊이 반성해보게 하고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아 력사에 깜깜한 후대들에게는 그같이 값없고 무모한 죽음이 생기게 된 원인과 그런 비극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시대의 로망자(老妄者) 봉건군주의 공과 죄를 가려보라는 것일거요, 그같이 가릴줄을 알게 되면 혐오감이 생겨 맹목적인 숭배를 더는 하지 않고 종당에는 각오함으로써 그따위 력사비극이 이 땅에서는 다시재현되지 않게끔 노력하게 하자는것이 목적일 것이다. 나의 생각인데 아무튼 모든 국민에게는 교육이 되리라는 전망이다.
자기가 치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민족은 영원히 야만으로 되고 말 것이다.
아래에 문혁묘비예술사진 몇장과 기념사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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