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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과학자의 죽음
북경의 팔보산공묘(八寶山公墓)에 가보면 죽은이의 골회는 없고 빈골회함만 간직하고있는 특별한 묘가 하나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인조위성의 아버지"라 일컫는 조구장(趙九章)의 묘인것이다. 그는 력사에 류례가 없는 대규모적인 광란의 시기였던 1968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국민당원로 대계도(戴系陶)의 외조카로서 젊었을적에 그의 기요비서노릇을 한적이 있다. 하여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거기를 내려서는 청화대학의 물리계에 붙어 공부를 하다가 공비로 독일에 가서 기상학을 전공했는데 3년만에 박사학위를 얻은 것이다. 학업을 뜻대로 이룬 그는 외국에 그냥있었더라면 호화로운 주택에 고급하이야를 타고 다니면서 얼마든 복을 누렸으련만 그는 그러지를 않고 빈궁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데 그의 그러한 선택이 결국은 어떤 결말을 보았던가?
“문화혁명”이 오니 그는 력사의 구렁텅이에 빠져 제아무리 발버둥이치고 몸부림쳤어도 헤여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구장(趙九章)은 매일 짐승모양으로 끌려다녔다. 목에 검은글씨로 “반동학술권위 조구장”이라 쓴 커다란 패쪽을 걸었다. 그를 력사반혁명이라 몰았던 것이다.
무계가 10근 넘어되는 패쪽이였는데 그것을 달아맨 철사가 살을 파고들어 목이 끈어지는것 같이 아팠다. 그랬어도 “홍위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매일 거리로 끌고나가 조리돌림했다. 그러고나서는 다시금 과학원에 끌고와 투쟁했는데 번마다 머리를 숙이게했거니와 두팔을 뒤로 올려 허리는 90°되게 굽혀 “분기식(噴氣式)비행기”를 태웠던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담뱃불로 허리를 지지였다. 어떤때는 담배불이 다 꺼질때까지 지지였다. 그는 그때 이미 늙은데다 허리병까지 있는 몸이였다. 하건만도.....
1968년 6월, 북경교구의 홍위대대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었던 조구장(趙九章)은 로켓트금속재료연구전문가 요동무(姚桐娬)가 두패거리싸움을 제지시켜보려다가 그들의 손에 매맞아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였다.
조구장(趙九章)에게있어서 요동무(姚桐娬)의 죽음은 커다란 타격이였거니와 운명에 대한 미묘한 암시면서 신호이기도했다. 하여 그는 절망하고말았던 것이다. 어느날 그는 마지막 “검사서”를 써 상우에 놓고나서는 치솔질을 하고 세수하고 발까지 깨끗이 씻은 후 자리에 누웠다. 그는 평시에 모아두었던 몇십알되는 안면약(安眠藥)을 전부 입안에 넣었던 것이다.....
조구장(趙九章)이 그같이 자살하자 국방과학위원회의 부주임이였던 라순초장군(羅舜初將軍)이 주은래에게 전화를 쳐 알리였다.
전화를 받은 주은래는 낯색이 굳어지면서 어두운구름장이 덮혔다.
그야말로 비참한 운명이였다. 제 조국이라 하여 희망품고 찾아왔던 조구장(趙九章)이 대우는 못받을지언정 왜서 그같이 세상을 떠나야만했던가? 도대체 왜서?.... 1968년, 바로 조구장(趙九章)이 죽은 그해에 그 중국과학원에서 자살한 1급 과학자 연구원만도 20명!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의 정당, 어느 정권이 제 나라의 과학자들을 그같이 혹독하게 대주었던가?
과연 통탄할 일이다! 이 역시 한번다시 숙고해 봐야 할 일이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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