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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시사론평
이젠 나이도 있거니와 어느때 갑자기 드러누울지도 모를일인지라 공비치료이전문제같아나 화천(樺川)에 갓다가 하루밤지내고는 어제 오전에 불낳게 돌아왔다. 그리한것도 걸린 일정이 4일간.
흑룡강의 성도(省都)ㅡ할빈에서 가목사까지 구간의 철도연선에 아직도 대약진때 생겻다는 낡은 흙집이 가담가담 눈에 띄여 가슴이 아렸으나 동방의 첫도시로 불리우는 가목사에 내리니 전에없던 고층건물들이 적잖게 일떠서서 시야를 막으니 그젯날의 도시가 아니였다.
내가 그곳을 떠난지 어언 20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했으니 그사이 두 번이나 변한셈이 되리라.
거기보다 더 몰라보게 변모를 한것은 동쪽 80여리지점에 있는 화천(樺川)현성 열래진(悅來鎭)이였다.
<<이거 내가 잘못온거아니냐?>> 할지경 나는 깜짝 놀랬다. 남에서 북으로 쭉ㅡ 저기 송화강변에 이르기까지 몇리를 뻣은 큰길량켠은 갖가지의 상점과 려인숙과 오락장들로 번영한데 랭운대가(冷云大街) 서쪽구역의 얼마를 내놓고는 고층아빠트들이 땅을 차고 빼곡히 일어선것이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제법 도시맛이 나는걸! 개혁개방이 좋기는 좋구나!>>
나는 혼자소리로 감탄했다.
현위생국의 당위서기와 공상국 국장은 다가 성이 왕가였다. 그리고 가목사역으로 마중나오고 떠나올 때도 나를 역전까지 바래다주면서 차에 태워놓고서야 시름을 놓은 그 중학교의 녀교사 역시. 그들은 우리집의 큰애와는 중학시절 동창이라는데 30년만에 만나는지라 서로 부등켜안으면서 기뻐야단이였거니와 접대역시 여간이 아니였다.
민족은 달라도 마음과 정은 끈끈이 이어진거다. 이는 왜서일가?
다른게아니다, 비록 조상이 다르고 민족은 다르지만 운명을 꼭같이 해야만 할 중화대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나는 새삼스레 지금 자라나고있는 일대는 결정코 거의가 모르고 지낼것 같은 력사의 한단락이 새삼스레 생각나면서 그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되여 이 문장을 쓰는것이다.
내가 근 50여년간을 줄창살아온 화천(樺川)은 합강지구(合江地區)에 속하는데 화남(樺南), 벌리(勃利)와 마찬가지로 위만때는 "일본개척단"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일본개척단”이란 대체 무엇일가? 그것의 정체를 알자면 부득블 흘러간 력사의 폐지를 번져야 할것이다.
1936년 5월, 일본관동군은 이른바 “만주농업이민 백만호 이주계획”이라는 것을 내와서 대량의 일본농업빈민을 중국의 동북땅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를 “일본개척단” 혹은 “만주개척단”이라 부르기도했다.
“만주이주농업이민 백만호계획”을 보면 20년간에 100만호, 인구 500만명이 목표였는데 1937년부터 시작하여 동북에 들여오는것이 5년에 한번씩 첫 번에는 10만호, 둘째 번에는 20만호, 세째 번에는 30만호, 네 번째번에는 40만호였다.
흑룡강성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한 전문가에 의하면 “일본개척단”은 “시점이민”, “무장이민”, “국책이민” 등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민수는 점점 많아져 “9.18사변”때로부터 일본이 전패하여 투항할 때까지 농업이민외에도 “정치이민”, “공업이민”, “상업이민”, “문화이민”해서 개척단이 모두 860여개, 10여년간에 동북땅에 이미 들어온 이민 총인원수가 1백만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하다면 일본이 만주개척단을 보낸 목적과 그 실질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침략”이였다. 첫째는 국내에서 남아도는 인구를 전이시킴으로써 인구와 토지, 자원, 환경의 모순을 완화시키켜보려는것이고 둘째는 동북의 풍부한 자원을 략탈하여 국내인구를 먹여살리자는 것이며, 셋째는 조선을 삼켜버리듯이 동북도 삼키어 중국본토를 침략하는 발판으로 삼아 “대동아공영권”을 만듬으로써 “월등한 대화민족이 세계를 통치하자!”는 저들의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어보자는 것이였다.
"만주개척단아버지"는 힝아시미야 테쯔오우라는 광열적인 군국주의자였다.
일본정부는 그 먼저인 1928년에 벌써 조선사람중의 친일배들로 “만주개발대”라는것을 조직하여서는 매호마다에 총한자루씩 내주어 동북에 자리잡게했거니와 “개발대사무소”를 창설하여 동북의 토지를 헐갑으로 사들이게 했다. 그러면서 조선사람과 본토의 중국사람지간에 마찰이 생길시에는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무력적인 공격을 했는데 그들이 맨첫번째로 할빈에 보낸 조선인개발대 대장은 정립동(鄭立東)동이였다. (黑龍江督軍公署당안)
일본관동군은 항일련군을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비민구분(匪民區分)이라는 명목하에 산재호는 눈에 보이는 족족 말끔히 불을 질러 태워버렸거니와 12,000여개 넘는 집담부락을 만들어서는 중국사람의 농호와 조선농호들은 거기에다 몰아넣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토지를 빼앗다싶이 헐값으로 사들이였다가는 높은 세를 놓아 빌려주는 방법으로 강도식의 착취를 했던 것이다. 그통에 집도 땅도 다 잃어 류랑걸식을 하다가 굶어죽고 얼어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나면서 “일본개척단” 사람들은 저의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패전민의 귀향은 도주여서 그야말로 구사일생의 험난한 원정이였던 것이다.
얼마전 나는 90세를 훨씬넘긴, 벌리현 어느 집단부락에서 살았다는 한 생존 일본녀인의 눈물겨운 회고담을 들었는데 귀국중 그네들이 겪은 고초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였다. 저 남쪽에 있는 이도하자까지가는 도중 중국사람의 보복에 들가봐 온마을 수백명이 낮에는 숩속에 숨어지내다가 밤이 되면 어둠을 타서 모두 함께 밀행을 하는데 애기가 울음소리를 내면 들킨다고 입을 막아 죽여버리게했다고 한다. 중도에 굶고 지치고 병들어 죽은것이 수없이 많고.
저가끔 손에 총들고 와서는 남의 국토를 마구빼앗아 제것처럼 여기고 살았으니 침략자라 하겠지만 결국보면 그들 역시 전쟁에 혈안이 되어 날뛴 군국주의자들의 희생품이기도하니 가엽고 불쌍하기도했다. 바로 그러하다고 방정현(方正縣)에서는 전해에 50만원을 들여 “일본개척단민망자명록”과 “중국양부모서자명록”이라는 비석 두 개를 만들어세웠다.
뭐 중일량국의 우의를 돈독히 키우기 위해서라는가? 중국사람의 너그러움을 보여주자는거라는가? 외자를 유치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함이라는가?... 그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그것이 심한 여론을 일으켰다.
“아무렴 침략자에게 기념비를 세워주다니, 이럴수 없다.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는 와중에 서로 면목모르는 다섯청년이 분기탱천하였거니와 조급증도 나고 참아견딜 수 없서서 서로 련락을 하고는 어느날 함께 모여 준비를 갖추고는 그곳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들 다섯은 우선 그곳 현정부를 찾아가 질문을 하고는 항의하여 기념비를 마수어 못쓰게만들고말았던 것이다. 이에 많은 네지튼들이 동감하여 갈채를 보내면서 방정현정부를 힐책했거니와 호된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나는 이번걸음에 그 일을 생각하니 내가 전해에 혼자나서서 이미 한차례 론쟁을 겪은적이 있는 그 일 <<강경애 명예복구라니, 이럴수 없다.>>를 다시금 되새기게된다. 연변에서는 왜 아직도 비암산에 세워놓은, 그 독립군의 북로군정서사령 김좌진을 살해한 공범녀인 강경애의 문학비를 철거하지 않고 그냥 버젓이 세워놓고있는건가?
대체 어느때까지 뻣혀볼텐가? 리유가 그리도 당당하단말인가?
다른 또 하나,
청마 유치환의 문학은 한간문학임이 분명하여 한국에서는 감히 행하지 못하는 기념활동을 왜서 연변에서는 떳떳이 받아들이여 벌리는가? 목적이 무엇인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과연 몰라서 그러런단말인가?... 그렇게하는것이 결코 문인의 너그러움으로는 될수없다는것쯤야 알게아닌가? 한데도 왜서 그러는가? 우리 민족이 일제에 제 나라를 빼앗기여 학대받고 글과 이름마저 빼앗겨 서러웁게 지내온 그 기나긴 36년간노예의 신세를 한번다시 생각해보라. 민족적인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력사를 다시돌이켜보리라. 무엇이 굴욕이고 수치인지를 알아야 한다. 최저한도의 정중성이 있어도 그러지는 않을것이다. 나는 연변의 어떤 지성인들의 처사가 과연 리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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