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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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大怨案)
2012년 12월 28일 01시 15분  조회:4420  추천:15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大怨案)

 

 

호풍문제(胡豊問題)는 지나간 몇십년간 중국지식분자들의 령혼에 영향이 크게 미쳣다. 그로 인하여 중국지식분자들에게 드리웠던 어두운 장막은 아직까지도 채 걷혀지지 않고있는 것이다. 가슴심처로부터 생겨난 불치의 그 진통이야말로 언제가면 다 멎을 수가 있을가?...


1955년~1956년사이 북경, 상해, 천진, 청도, 남경, 항주, 서안 등의 도시들에서는  근본 성립되지도 않는 호풍의 "죄"로 인하여 "호풍반혁명집단안"이라는 것이 생겨낫던 것이다.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전국적으로 2,100명이 넘는데 체포된 사람이 92명, 격리심사받은 사람이 62명, 직을 멈추고 반성한 사람이 73명이였다. 시인으로부터 소설가와 극작가, 중공중앙선전부의 일반간부로부터 지방선전부의 부장에 이르기까지, 호풍이 손수 부추겨준 학생으로부터 호풍과는 거래가 없었거니와 전혀 면목조차없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이르기까지 없는곳이 없었다. 그때 "문예론쟁이 정치심판"으로 확대됨으로 하여 이에 말려든 사람을 통털어 일률로 "호풍분자"라 했다. 

 

듣기만해도 소름끼치는 끔찍스러운 사건이였다. 그것이 전국의 지식분자들에게는 경종이 되어 여지껏 몇십년간을 떨게 만들었으니 모택동이 바라는대로 그 작용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게 아니다.  력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 수도 없어서 지천이 들어도 낯을 붉히고 대노할 그 대원안(大怨案)은 아직까도 멋을 모르는 백성들이 위대하다고 떠받들고 열애하면서 숭배하는 모택동이 손수조작한 것이였던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의 말을 믿을건가 믿지 않을건가, 그에 대해서는 독자자신에게 맏기면서 아래에 그 실태를 밝힌다.  

 

호풍은 1955년 5월 16일에 집에서 불려가서는 이틀만인 5월 18일 전국인대상위회(全國人大常委會) 제16차회의비준에 따라 "호풍반혁명집단"의 골간분자로 체포되여 심문에 넘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한때 일장의 전국적범위에서 호풍반혁명집단을 들춰내는 행동이 줄기차게 벌어지게되였던 것이다.

 

아래에 몇사람의 경우만 언급하련다.


1955년 5월, 남경의 발전창당위서기였던 구양장(毆陽庄)은 집을 떠나 북경에 가서 첵코전문가를 만나 그와 단위에 쓸 발전설비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그는 호풍을 알고 련계가 있다하여 체포된건데 10년을 옥살이하였다. 그리고도 그는 농촌에 하방하여 15년간 로동개조를 하였던 것이다.

구양장(毆陽庄)은 어떻게 되어 "호풍반혁명집단" 골간분자로 몰렸는가? 그는 북경에서 집에 돌아온 그날 회의를 한다하여 불려간건데 집을 나갈 때 예감이 좋지 않아 데릴러 온 사람과 혹시 호풍의 문제를 얘기하자고 하는건아닌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쪽은 자기는 모른다고했다. 구양장(毆陽庄)은 그래도 어쩐지 감각이 좋지 않은지라 호풍의 문제라면 당장 자료를 갖고갈테다, 그가 나한테 한 편지들이 다 있으니 갖고가겠노라했다. 저쪽은 필요없다고 했다. 구양장(毆陽庄)은 그때 문학을 애호하는 젊은이였는데 전에 <<개미집>>이라는 간물을 편집한적이 있었다. 한번은 로령(路翎)의 극을 보고 호감이 생겨 그와 가깝게된건데 그를 통해서 "7월파"문학쌀롱에 가담했고 거기서 문학을 하는 익방(翼滂), 화철(化鐵), 방연(方然)등을 알게되여 친구로 사귀였고 1947년에는 호풍(胡風)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바로 호풍(胡風)이  "30만자언서"를 썻을 때였는데 구양장(毆陽庄)은 북경에 갓던 그 걸음에 그 "30만자언서"를 토론하는 모임에 참가했던 것이다. "죄증"이란 그것이였다.

 

리가릉(李嘉陵)은 중선부(中宣部)의 선전간사였는데 "호풍반혁명집단"의 일반분자가 되어 1년반의 감금생활을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는 무슨 일이 있다해서 얼리워간건데 공안국에서 요구하는 수속이라면서 서명을 하라기에 했더니 그것이 "체포장"이 돼버렸다는 거다. 그는 문학청년이 아니거니와  호풍과 거래한적도 없었다. 그의 남편 호전(芦甸)이 문학을 사랑했기에 일찍 중경에 있을적에 그 둘은 혁명구(革命區)에 가서 호풍의 집을 방문한적이 있은것이다. 그때 호풍은 그들보고 해방구가 간고하니까 고생을 이겨낼 사상적인 준비를 하라고 친절히 일깨워줫던 것이다. 해방후에 호전(芦甸)이 천진에 있으면서 호풍(胡風)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처 리가릉(李嘉陵)역시 걸려든 것이다. 호풍(胡風)을 도와 그의 "30만자언서"를 베껴줫고 중선부(中宣部)의 간사신분으로 호풍(胡風)과 연통했으니 죄라는 것이였다.

한데 리가릉(李嘉陵)본인의 말을 들어보면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였다.

"그때 나는 중선부에 회의가 있으면 참가했을 뿐이지 중선부에 있지도 않았어요. 그당시 주양(周揚)이 '호풍은 마레주의옷을 입고 호주머니에는 자본주의를  넣고다닌다' 면서 '모자'를 씌우자고 들때였어요. 어느날 호전(芦甸)이 호풍이 쓴 글을 갖고와 나보고 호풍의 글을 늘 매지(梅志)가 베끼곤했는데 시간이 모자라  미처베끼지 못해서 갖고왔으니 대신 베껴주라면서 줫어요. 4천자가량되였는데 문예리론부분이였어요. 그때 나는 그것이 '30만자언'의 것이라는것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저 이랬어요."

 

천진의 림시(林希)는 그때 나이가 19살로서 제일어린 "호풍분자"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그는 고중3학년생으로서 대학갈 생각에 다른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원래의 성명은 후홍학(侯紅鶴)이다. 어느날 아는 사람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아유, 이 얼빠진 자식아. 너를 붙잡으라는 '통집령'까지 내렸는데도 넌 그걸 모르고있다니, 원!" 하고 놀란 소리를 해서 그는 스스로 공안국을 찾아가 자수를  한것이다. 그랬어도 감옥생활은 면하지 못하였다.   

이런모양으로 걸려들고 서로 련루되다보니 2,100명이 넘어되는 무고한 지식인들이 운명이 기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다면 지천이 공노할 이 대원안(大怨案)이 생기게 된 그 비밀을 깨놓고 보면 어떠한가?


이 일은 당시 중선부간부처부처장(中宣部幹部處部處長)이였던 왕강(王康)에 의하여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난 것이다. 호풍안건이 발생한 후 그는 중앙숙반령도십인소조(中央肅反領導十人小組)로 파견되여 갓거와 판공실의 부주임으로까지 임명되여 직접 호풍안건을 심사하였던 것이다. 심사중에 그는 호풍은 해방전에는 국민당에서 엄밀히 감시했던 좌파인사였다는 것과 이른바 호풍집단의 중요골간인 아용(阿垄)은 주은래 등이 중공지하공작인원이였다고 증명하였던 것이다. 하여 왕강(王康)은 1956년봄에 있은 숙반령도소조 반공회의때 호풍집단중에는 반동력사가 있는 사람이란 없으니 반혁명분자로 정하지 말아야할게 아니냐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라서경(羅瑞卿)이 비평하는 것이였다.

"왕강! 너의 그 의견은 나쁜의견이다."

몇 년지나 왕강은 그 일로하여 "우경기회주의분자"로 몰나웠다.

 

기실은 라서경(羅瑞卿)역시 왕강(王康)과 같은 견해를 갖고있은 것이다. 어느 한번은 공안부의 라서경(羅瑞卿)과 고등검찰부의 량국무(梁國娬), 고급법원의 극림(克林) 등이 "3장회의(三長會議)"를 열고 호풍반혁명집단을 심판할 준비사업을  토론했는데 그때 라서경(羅瑞卿)이 말하기를 "호풍집단을  미국,장개석과 밀접한 련계가 있는 반혁명집단이라 하는건 억지스럽지만 이건 모주석이 친히 결정한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가?" 했다.

저쪽 두 사람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라서경(羅瑞卿)은

"그래도 모주석의 의견대로 처리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후 주양(周揚)역시 라서경을 찾아 그와 이 문제는 십인소조전체회의를 열고 토론해야할게 아닌가고했더니  라서경이 "호풍반혁명집단"이라는건 모주석이 정해놓은 성질인데 어떻게 토론한단말인가?"했다. 그랬거니와 라서경이 그후에는 공안부에서 경중에 따라 "호풍분자"를 평판하는게 좋지 않으냐고 올려보낸 의견마저 육정일과 같이 깔아버린것이다. 그 리유인즉 올려보내봤자 모택동이 비준하지도 않을것이며 그런다면 되려 그가 작성한 전국(全局)적인 부서(部署)를 헝클어놓는 것으로  되니까 어렵다는 것이였다.    

          (왕강(王康)의 회억록 <<我参加审查胡风案的经历>>)

            (<<同舟共进>> 2010年 第8期 <<"格君心之非"与"面刺寡人之过>>)

 

호풍안건이 30년후에는 세차례나 거듭 평판을 받았다.

1980년에 "반혁명집단안"이라는 것을 취소했고, 1986년에는 호풍이 세상뜨자 그에게 가해졌던 실존하지 않은 부당한 언사와 평론들을 거두었으며, 1988년 6월에는 호풍의 문예관은 학술문제에 속하는 것이기에 개인주의였는것과 유심주의였다는 등의 성립되지 않은 죄명들을 걷어버린것이다.

 

력사는 공정하다. 곡절 끝에 끝끝내 호풍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면서 그것이 있어서는 절대안될 억울하기 그지없는 대원안(大怨案)이였다는것이 뚜렸이 밝혀진 것이다. 무고한 자의 무고함, 성결한 자의 성결함이였다. 호풍에 대한 모택동의 그같은 착오적인 처리는 실제상 지식분자들을 상대하여 본때를 보인 가혹한 탄압이였다. 그렇기에 중국의 지식분자는 거의가 담이 콩알만해서 숨도 바로내쉬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이 그러했은즉 송가(頌歌)나 부를줄을 알았지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능력이란건 활발히 자랄 수도  없었거니와 품격같은건 더구나 거의 운운할 수도, 발휘할 수도 없을 지경네 이르었던 것이다.  그것은 독재자가 저의 통치를 공공히 하고자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철규(鐵規)였다. 그러했은즉 어찌 개인의 인격이나 그것의 자유적인 성장같은것을 운운이나 할 수 있었으랴?
모택동은 재능있는 전략가였다. 하지만 유감스례도 그같은 저략을 자기를 믿고 떠받는 신하ㅡ국민에게, 더욱히는 온순한 지식분자탄압에 써먹었으니 어찌 너그러운 군주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영원히 애대받을 맘속의 태양이라 할 수 있으랴? 공민의 자유적인 성장마저 공제하면서 진로(進路)를 막았으니 결국은 망국(亡國)의 길을 걸은것이다.

 

후세의 경종이 아닐수 없다!


 

 사진은 호풍선생의 생전모습

    
胡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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