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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전에는 옛말에서나 들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세계가 차츰 글로벌화되면서 좀이라도 컴퓨터를 다룰줄을 알면 모르던 세상일을 많이알수 있게되는것이 오늘의 실태다. 정보가 열리여 연줄이 사통발달했다. 보아하니 그래서 이 세상에 아마도 영원히 감춰질 비밀이란 있을것 같지 않다.
문화대혁명(1966년5월16일~1976년10월)이 끝난지도 어언 37년철이 되건만 그 후유증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고있다.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보거나 인터넷을 보면 그때를 회억하고 의론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내가보건대도 그것은 공연히 묵은장부를 뒤집고 되씹는 무료한 짓거리는 아닌것 것 같다. 그당시 광활한 중국땅 각처에서 불상사(不祥事)들이 너무도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바다. 한데 헤아릴 수 없는 그 많고많은 원안(怨案)들 중 여지껏 그 발생원인이 해명되지 않은것, 특히는 인명과 관계되는것들, 이를테면 자살(自殺)이든 타살(打殺)이든 멸족(滅族)이든 그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않될것들이 많고도 많은 것이다. 이게몇핸가? 문화혁명이 끝난지 오랬어도 꼭마치 뒤를 보고 씻을것을 씻지 않은것 처럼 뒷처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적잖은 문제가 의연히 생기여 꼬리를 물고있다. 하긴 력사의 장하에 비기면 물방울에 불과하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결코 등한히 지내버릴 일이 아닌것이다. 늦기는 해도 지금이라도 밝힐건 밝혀야한다.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는 아무때건 풀이되여야 개운한 것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란 순 유토피아를 꿈꿧던 로망한 독재자의 도용물(盜用物)이였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지? 그어떤 위대한 장거가 아니였다. 그것은 온 나라를 인위적으로 혼란에 빠뜨림으로 하여 하마터면 세상에 천년문명고국(千年文明古國)이라 자랑해온 강산을 망하게할번했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 조작자는 이제 아무 때던 력사의 심판을 철저히 받고말것이다!
장마비에 미친개날뛰는 격이였다. 그때는 자기야말로 위대한분에게 가장 충성하는 “보위자”인양, 무산계급의 철저한 “혁명자”인양 분장하여 나서서 보복적인 분풀에 혈안이 되여 날뛴 악한이 너무나많고도 많않았던 것이다. 뒤에서 철부지 “홍위병”들을 추기고...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어떤 학자는 지난때의 문화혁명을 “애들의 장난” “악한들의 보복놀음”였다고 총괄해 말하기까지 했다. 문자그로 문화적인 혁명이 되지 못하고 야만스런 놀음과 보복이 되고만 그것을 “전대미문의 생사람잡이 혁명”이였다고 평론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기 의도와 좀만 맞지 않아도 배척하면서 펀펀한 사람에게도 죄를 만들 씌워서는 전정대상으로 몰아 목에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 우롱하고 지어는 죽게까지 만들었다. 이 세상에 원귀(寃鬼)가 많아진건 바로 그때문이다.
보복자의 살기가 충천하면서 너울쳤던 그 세월에 어떤곳서는 지어 “사류분자”, “오류분자”하면 아예 멸족까지 시키는 잔인무도한 학살마저 주저없이 감행되였다는것은 이미 들어난 사실인데 온 세상사람이 다 알아야 한다.
한때 당장 공산주의로 돌입한다면서 야만의 짓을 했던 캄보쟈ㅡ 크메르루즈(紅色高棉)를 내놓고는 이 세상에 그런 야만이 더는없는줄로 알았었는데 지내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였다.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가 태여나 자란 여기 중국이였다! 협오가 괴여오른다.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하고 내내 불신을 하고 미심쩍어 했던것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해명이 되고있는 것이다. 나는 인민의 복지를 만든다는 사회주의제도하에서야 아무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야 발생했으랴 했는데 오늘에 이르어 알고보니 전혀 그런것이 아니였다. 아직껏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채 점철된 죄악의 사사건건들이 감춰진것이 너무도 많고많다는것을 근년들어서야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된 것이다. 앞에 쓴 에세이에 처럼 현대식인종으로 살아온 인간이 아직 얼마더있을지...
우리 나라가 왜 그모양 그꼴이였던가? 생각하면 낯이 뜨거운일이라 시야를 돌려 국경너머를 보니 “식인종”의 행실이 결코 우리 중국에서만 생긴건 아니였다. 다른 어느 나라에건 거의 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이 생기게 된 원인과 그 정도는 판달랐고 포악과 잔인의 정도역시 다른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찾아낸 결론이라면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식인사건도 중국에 비하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2002년12월12일,독일의 <<도편보(图片报)>>에 “식인광대작면포권”이라는 모골이 송연한 참안을 보도한바있다. 46살에 나는 아민메이Weisi는 동성련애자였다. 경찰에서는 1997년에 그가 벌써 사람 하나를 먹은것을 알게되였다. 교외에 있는 그의 집 랭장고에서 살점과 사람의 뼈를 조사해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진에서 벌어진 그 “식인광”안건은 그당시 온 독일을 들썽케했다고 한다.
어느땐가 하버드대학에서 사람이 사삼의 고기를 먹는 안건을 놓고 공개적인 변론을 한적이 있는데 강사의 전달에 학생들의 반영은 대단해서 들끓었다고 한다.
안건은 이러했다.
호주를 떠난 “제미요”배가 항행중에 침몰하게 되였는데 선장 더들리, 항해사
스티븐, 선원 브룩스와 17살나는 웨이터 이렇게 넷이 요행살아났던 것이다.
바다에서 한주일이나 표류하다보니 먹을것이 다 떨어졌다. 웨이터는 다른사람의 권념도 듣지 않고 바닷물을 먹어 몸이 형편없이 허약해졌다.
이때 선장이 말하기를 한사람은 죽어야 남은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항해사 스티븐이 반대해나섯기에 결정짓지 못했다. 또 하루지났다. 선장은 항해사가 머리를 저쪽으로 돌려 정신을 딴곳에다 파는 사이 선원 부룩스에게 눈짓하여 웨이터를 죽이게 했다. 물론 선장은 사전에 웨이터를 위해서 기도를 올린 것이다. 항해사는 잔인한 살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살기위해서는 웨이터의 고기를 먹는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들 셋은 다행히 구원되여 마침내 영국으로 가게되였다. 그러나 그들 셋은 다가 체포되고말았다. 살인죄로 기소되였던 것이다.
그들의 변명은 사람하나를 죽였기에 세사람의 목숨은 살려낼 수 있은게 아니야였다. 하지만 법원측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원인이야 어떻던간에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은 모살죄임에 분명하다면서 겨우살아온 그들 셋을 다 사형에 언도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서 개인의 리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도덕론에 드는 하나의 안건을 례로 든 것이다. 내가 만약 피고라면? 내가만약 법관이라면?... 나는 어떤태도를 가질것인가?
미국력사에서 있었던, 사람이 사람을 먹은 안건을 하나 더 알아보다.
전세기 40년대, 미국에서는 서부로 금캐러가는 이민이 붐을 이룬적이 있다. 지점은 캘리포니아였다. 황금몽을 품은 사람들이 사면팔방에서 그리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가 행운의 시기라고 여겼다. 하여 “만족할 때”라 명명한 대오가 형성될 지경 캘리포니아로 진군하는 무리가 형성된건데 그들의 장거리 려정이 기실은 “사망의 길”이기도했던 것이다.
1846년 여름의 어느날, 그들먼저 여러패의 인마가 벌써 포드브릿지에 모여 캘리포니아를 바라고 출발했던 것이다. 한편 이쪽의 “만족할 때”무리에서는 대장 헤이스팅스가 우선 길을 알아봐야겠다며 홀로 먼저떠난건데 그는 지름길을 택했던 것이다.
“만족할 때”대오의 사람들이 포드브릿지에 도착하고보니 만나야 할 사람 헤이스팅스는 언녕가버리고 거기에 없었다. 향도자(向道者)를 만나지 못하게 된 그들은 부득불 자체로 달리 방법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분은 전부터알려진 길을 따라 가고 일부는 헤이스팅스가 택한 지름길로 가기로했다. 그들은 모두해서 87명뿐이였는데 마차 23대를 보유하고있었다. 새로 선거된 대장은 이름이 조지맥도널드라는 중년의 사나이였다.
7월 31일,그들은 포드 브릿지를 떠나 머나먼 장도에 올랏다. 그런데 두주일되자 그 “만족할 때”의 대오는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들이 유타바사산에 이르러 보니 산비탈이 몹시 가파롭거니와 너무험해서 마차를 넘기기 과연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등골에 땀을 흘려가면서 모지름을 쓴끝에 6일만에 60Km되는 험지를 끝내넘고야말았다.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그들은 가고가서 9월 30일에는 마침내 네바다주에 이르었던 것이다. 거기는 전부터 알려진 길들의 교합처였다.
그곳을 떠난 그들은 11월1일에 터내기호(후에 “만족할 때 호수”로 고침)에 이르었다. 터내기호는 해발 1800m인지라 10월인데도 벌써 눈꽃이 날리였다. 그달말이면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판이다. 하여 길을 재촉한건데 그들이 높이가 2200m에 이르는 산어구에 닿고보니 때는 이미늦다. 그들은 그곳의 맹렬한 폭풍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별방법없이 기나긴 엄동을 터내기호수가에 되돌아와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보다 더 험악한것은 식량이 다 떨어져 기아를 이겨내기 어려운 그것이였다. 사실은 그들이 터내기호로 되돌아오기전에 벌써 사신(死神)이 덮쳐들기시작했으니 “만족할 때”의 대오는 멸망에 직면한 것이다.
8월 29일,루크하 Luolan이 죽었다. 그는 페염에 걸렸던 것이다.
10월 5일,제임스리드가 자위를 하느라 그만 존 스니드를 죽였다.
3일후,루이스 키스버그가 차를 타지 못한채 뒤에 떨어진 베른쿠퍼라는 로인을 찾자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로인을 찾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로인은 대오를 따라오지 못했다. 아마 홀로헤매다가 죽어버렸을 것이다.
10월 13일이 지난후의 어느날, 그들을 따라오던 두 독일이민이 돈을 빼앗느라 짜고서 저희들과 함께오던 다른 한 독일사람을 죽이였다.
10월 20일,윌리엄파커가 총을 닦던 삼촌이 오발하는통에 그만죽었다.
그밖에 4명의 성원이 먹을것을 구하느라 대오를 떠나 SAT 시험포트에 갓다. 그중에서 찰스 스탠이란 사람이 10월 19일에 돌아왔는데 그는 과연 먹을것을 가져왔거니와 인디안인 둘까지 데리고왔다. 그러고보니 원래의 87명에서 남은 79명에다 인디안인 둘을 더 합쳐져 호수가에서 엄동을 지내게되였던 것이다.
기한을 정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나머지량식마저 다 먹어버리니 극도의 아사지경에 이른것이다. 하여 그들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길러온 개를 잡아 먹었고 나중에는 수레를 끌는 말들을 하나하나 잡아먹기시작햇다. 그러다가 더 잡아먹을것이 없게되니 짐승가죽과 담요를 삶아 묵을 만들어 먹었다.
10월 16일,24살나는 발리 윌리엄이 먼저 굶어죽었다. 그러자 같은날, 성원들중에서 신체가 가장 든든하다는 사람 15명이 어떻게 하나 먹을것을 구해와야겠다면서 엄한을 무릅쓰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났다. 남자열가운데 넷은 식솔이 있었다. 그리고 다섯은 녀성이였는데 그중 셋은 아이를 남기고 떠나온 것이다.
그들이 호수가 캠프장(营地)을 떠나온지 6일만에 기진맥진한 스탠튼이 14명을 그냥 앞으로 가라해놓고는 자기는 떨어져 고스란히 죽음의 신을 맞았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다. 떠나온지 열아흐레되니 남은 14명은 자연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을 화제에 올리게되였다. 그결과 그들은 누가 죽으면 누구를 먹어버리기로 결의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별수없었던 것이다. 한데 숨도채 거두기기전에.... 23살의 홀몸인 앙투안이 비몽사몽간에 자기의 팔과 어째가 떨어져 불속에 들어가는것을 의식했던지 눈을 떳다감는것이였다. 그모양을 보면서도 누구도 그를 살리주려하지 않았다. 젊은 앙투안은 이렇게 죽고말았다. 이어서 프랭클린 Gelei푸, 그다음에는 패트릭고언, 그리고는 그를 이어서 르 사무엘머피... 산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살코기를 베여내여 불에 구워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제집사람과 친척만은 먹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시체를 그같이 다 먹어버린 후에는 낡은가죽신을 먹었다.
이듬해의 1월 5일에 23살난 르 사무엘머피가 죽었다. 포스터부인은 그의 시체를 먹어버렸다. 이어서 정신이상에 걸린 포스터선생이 인디안인 둘을 잡아먹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15명이던것이 이제는 7명밖에 남지 않았다.
33일간 세찬 눈보라를 뚫고 나온 나나머지 그 일곱사람은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이르러 백인정착지에 닿고야말았다. 그리하여 이듬해의 1월 31일에 첫패의 구원소조가 “만족할 때 호수”로 갔고 뒷이어 세 개소조가 그리로 구원하러 떠나갔다.
한데 그먼저 두달반사이 훨씬많은 사람들이 사신을 막아내지 못해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2월말에 이르러 호수가 캠프장(营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3월 13일, 윌리엄 포스터가 13명의 구원대원을 이끌고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와보니 그사이 두아들은 키스 버그와 다른 사람 넷과 함께 다른데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어서 만나지도못했다. 하여 그는 게속 아들을 찾으러 떠났다.
한편 4월 17일,마지막구원조가 호수가 캠프장(营地)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는 숨이 붙어있는것이 키스버그 한사람뿐 그 외는 다가 말라버린 시체였다. 키스버그는 자기가 다른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견결히 부인했다. 결국 "만족할 때"는 성원 87명중에서 죽은것이 40명뿐, 반수이상이 어쨌든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여기서 끝맺고, 아래의 두편은 이미공개된 우리 중국의 사천달주3년재해실기(四川达州三年灾害纪实)중의 단락이다.
1). 포양공사 팔관구 삼대(蒲阳公社八管区三队) 반소화(潘素华) 녀인은 당년에 나이 41살. 가정성분 지주. 본남편은 1951년도 일찍죽었다. 반소화(潘素华)는 군중개조를 피하느라 1952년도에 빈농 당전무(唐前武)와 결혼했다. 하지만 부부감정은 좋지 않았다. .....3월 16일 밤, 남편 당전무(唐前武)가 물에빠져죽었는데 그녀는 이틑날에야 관리구에 와서 관을 만들어 그를 이미파묻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밤 반소화(潘素华)는 슬픈것처럼 울더니 밤중에 채칼을 갈아갖고 가 모를 파헤치고는 남편의 사지를 뜯어내고 살고기를 발라냈으며 내장은 꺼내갖고 집에 돌아와 먼저끓여먹었다. 그리고나서 살코기는 전부삶아 곰고기라 속혀 한근에 5원씩 11근 12냥을 팔았다.....식당사무장 황영태(黄荣太)가 이일을 눈치채고 그의 집을 수색한결과 손과 변비물, 뼈 등이.... 발견되였다. 반소화(潘素华)는 골수에 사무치는 계급한이 있었기에 계획적으로 그런짓을 한것이라 인정된다. 계급의 적을 힘있게 때려엎기위해서 법에 의하여 반소화(潘素华)를 체포했다.
2). 주옥광(周玉光), 녀, 부유중농. 숭의공사삼관구이대(崇义公社三管区二队)사람. 현녕 39세. 남편은 해방전에 군인몸으로 병사했음. 주옥광(周玉光)은 토지개혁시기 사업을 적극했기에 부녀대표로 되었다. 그러나 통구통소를 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이 부단히 신입되고 두갈래길간의 투쟁이 첨예하게 되자 그녀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거니와 자본주의사상이 농후하여 합작화의 길을 가지 않으려하다가 공사화후에야 입사했다....3월 16일오후경 그 대대의 두지전(杜之田)의 죽은지 2일되는 어린애(2살) 를 파내여 그의 머리를 떼내고 사지를 찍어냈고 내장은 강에 버리였다. 그리고는 시체를 집에가져다 삶아먹었다.
(四川灌县县委办公室关于“两起不正常死亡事件”给温江地委办公室的报告。
一九六O年三月二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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