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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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7)
2014년 03월 04일 05시 41분  조회:2740  추천:1  작성자: 김송죽
 

7. 

 

며칠후 좌진은 어머니와 안해 그리고 동생동진이를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원체가 부족한 자식이라 항상 불효만 끼쳐드리는것 같아서 안되였습니다만 또 한가지 일을 해야겠습니다. 인제는 정부도 믿을것이 없고 거기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믿을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믿고 무슨일을 해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들으니 달포전에 일본은 한국주차군사령부라는것 까지 설치했다는군요. 그러니 이제 이 나라는 더 심하게 먹히우는 꼴이 되지 않았을가요. 통감이라는건 독거미와도 같은 놈임니다. 그놈의 지시하에 우리 나라 정부가 움직이고 또 그놈의 감독하에 못생긴 벼슬아치들은 제민족과 제 동포들을 후려넣으려고합니다.>>

그는 권리앞에서는 언제나 비굴하게 굽실거릴줄밖에 모르면서 먹고 사는것으로만 능사로 삼고 제집과 제가족의 영화라면 하늘이라도 팔아먹자고 드는 벼슬아치들은 구데기같다면서 그런자들을 믿고있다가는 큰일나겠다고했다. 그리곤 지금은 정말로 제 나라를 받들줄알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줄을 아는 참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을 키울 학교를 세울 생각이라 했다.

<<네가?!.... >>

어머니는 아들을 여겨보았다.

<<그렇습니다, 제가요. 량반만다니는 서당이 아니라 누구든지 배울수있는 학교를 세우렵니다. 저는 어서빨리 개화하고 신체도 든든한 청년을 길러내렵니다. 지금 나라는 그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수요되겠습니까. 난 지금 석범이같은 사람 백명만있어도 당장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서 왜놈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정부를 새로 뜯어고쳐놓겠습니다. 해내야 하겠습니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해내야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덧 아들의 격앙된 목소리에 정신이 빨려들어갔다.

좌진이는 이때를 놓지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 대사를 생각하면야 아까와할게 있습니까. 난 교사로는 우선 우리 집을 내놓으려는데 어머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사랑채만써도 되겠지만 학생수가 늘어나면 안채까지 써야할것이니 그땐 우리가 딴데 어디 작은 집을 구해 이사해야하고요.>>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가 나중에는 내가 아느냐 네가 료량해서 하려므나 하고 응낙을 표시했다.

좌진은 기뻐했다. 마음을 맞춰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그는 어머님은 물론 안해도 알라면서 학교운영에 드는 비용은 금년에 우선 자기네 몫으로 추수한 낟알 100석에서 얼마가량 팔아 쓰리라는것과 모자라는 부분은 석범이도 담당하게 되리란걸 말했다. 물론 선생질도 먼저 석범이와 자기가 하기로 했다.

 

1907년 3월. 따스한 햇볕아래 해토되여 동한(冬寒)에 묻혀 잠자던 모든 생명들이 꿈을 깨고 재생하는 고마운 때에 검은 먹글씨로 활달하게 <<湖明學校>>라고 쓴 간판을 내건 갈산 325번지 좌진의 집에서는 학생들이 글읽는 랑랑한 목소리가 담장너머에까지 울려퍼졌다. 김병학(金炳學)의 후원을 얻어 석범이와 함께 손잡고 낡은집을 개조하여 학교로 하고는 학생을 모아 개학한지 어느새 두달이 된것이다.

학생수는 이제 42명. 그나마 반수이상이 좌진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집의 자녀들과 석범이네 친척아이들이였다. 어머니는 15살먹은 동생 동진이를 장가보내려했지만 좌진은 그게 뭐 그리 급한가, 먼저 눈부터 틔여놓고봐야지 하면서 동생을 자기가 꾸리는 학교에 넣어 공부시켰다. 그리고 석범의 아들 영호와 전날 스승 김광호역시 막내아들을 일부러 광천에서 데려다 좌진의 집에 류숙시키면서 이 학교에서 신식공부를 하게했다.

비록 학생수는 적지만 개화(開化)를 목적해 꾸려진 신형의 학교였던만큼 여느 서당도 비할수없이 그 전망이 환히 내다보이면서 자못 생기가 끓어나고 있었다.

좌진은 자기 머리를 진작 석범이모양으로 고쳐버렸다.

<<개화를 할려면 이눔의 보기싫고 거치장스런 머리태부터 혁명해치워야한다.>>

좌진은 가위를 들고 먼저 이전의 머슴아이들의 머리부터 잘라버리였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지 않았다.

<<단발은 왜놈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게 아니였더냐?>>

반일감정이 있는 학부형들은 이러면서 호명학교의 취지를 의심했다. 그래서 학생수는 단번에 반수나 훌쩍 줄어들었다.

<<난화지맹이라더니... 거치장스런 머리 그냥두면 그게 반일이 될가, 참!>>

좌진은 속이 꼴리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리해는 될 일이였다. 수천년 내려온 봉건적 낡은 습관이 일조에 고쳐지긴 어려운것이다. 좌진은 하는수없이 석범이와 같이 집집을 방문하여 머리깎는 일은 학부형들 자신에게 맡길테니 자식들의 공부는 그냥 시키는게 옳지 않겠느냐 동원해서 다시모인것이 지금의 학생수다. 그래서 학생들중 태반이 아직도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늘인 아이거나 상투를 동그랗게 올린 청년들이였다.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애로가 있는건 사실이였다. 좌진은 학부형과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 한문과(漢文課)도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호명학교의 학과목은 한문, 언문, 산술, 력사, 지리, 체조 6가지로 설정되였다.

자기 나라의 력사도 모르고야 제 선조를 어떻게 알며 제 선조도 모르고야 어떻게 민족심이 생기며 조국애가 생기랴. 좌진은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조선력사를 잘 배울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일과 반봉건적인 새 도덕과 수양을 각별히 중시했는데 이에 대한 교육은 수신과(修身課)에 배치했다. (이것은 확과목으로는 밝혀놓지 않았다.)

구체적인 학과분담을 보면 력사와 지리와 언문과 한문은 석범이, 수신과와 산술과 체조는 좌진이 맡았다.

석범이는 대단한 열성가였다. 그런데 학교일에 전력하다보니 약국일은 부업같이 돼버렸다. 그통에 가정살림이 지장을 받아 어렵게 되어갔다. 이런 사정을 알고 좌진은 처음은 쌀섬이나 장작을 보내여 도와주다가 그것으로 부족함을 느낀 후로는 아예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다싶히 했다.

그랫지만 석범이네는 내놓고는 마을에 약방도 의원도 없으니 석범이는 교사노릇하면서 의연히 약방의생노릇도해야했다. 이같이 일신량역을 하다보니 석범이는 견디기어려운때가 많았다. 했지만 그는 좌진이가 자기집재산을 싹 털어내여 후대양성에 바치는 거룩한 행위에 감복되여 어렵다는 말을 입밖에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기력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다. 석범이가 축가는 것을 보아낸 좌진은 학교용품도 살겸 서울로 올라가 선생 한분을 더 구했다. 배재학당출신으로서 석범보다 몇해 후배인 박성태(朴性泰)라는 청년이였다.

좌진이 서울로 선생을 구하허 갔을 때 대종교(大倧敎)창시자 라철(羅哲ㅡ라인영)이 몇사람과 공모하여 을사5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금시 서울판에 쫙 퍼지고 있었다. 때는 1907년 3월이다.

<<과연 맹랑하구나! 어쩜 한놈도 없애지 못하고.... >>

좌진은 은연중 그만 감정을 발로해서 당석에 있던 사람들을 아연케했다. 넌 도대체 어디서 난 괴짠데 겁도 없이 이러느냐 하는 눈치였다.

<<젊은이! 입조심하라구.>>

콩밥먹을까봐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너무겁많으면 제 바지에 똥쌉니다.>>

충고가 고맙긴해도 뒤공론이나하면서 숨도 크게 못쉬는 사람들이 가증스럽고 민망해서 좌진은 허구푸게 웃고는 그만 돌아섯다.

그날 좌진은 서울서 내려오면서 감나무묘목 300여주를 사서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부쳤다. 삼불산밑의 황무지를 개간해 학교실습지로 만들어 거기다 심을 계획이였다. 그는 학생들이 일하며 배우는 근공검학의 길을 모색했는데 그때의 형편에 이런것은 실로 새로운 창조였다.

좌진이 꾸리는 이 신형의 호명학교가 지난날의 서당과는 판다르게 생기였고 운영도 잘되여가는것을 보자 학생수가 날로 늘어나 그 전망은 락관적이였다. 호명학교는 홍성땅을 벗어나 차츰 널리 이름내게되였다. 이와 더불어 교장인 좌진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한성본부의 위촉을 받아 홍성지부장(洪城支部長)의 직책까지 맡게되였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6월의 어느 하루 광천에서 이제는 칠순이 넘는 김광호로인이 갈산으로 찾아왔다.

좌진은 정깊은 옛스승을 반겨맞았다.

광호로인은 류학하는 막내아들을 보러 왔노라면서 호명학교가 잘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하니 자기도 기쁘다면서 좌진이를 비롯한 세 선생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건 기실은 현대의식으로 개명했다고 인정되는 이네들과 한번 속심을 나누어 자기의 울적한 기분이나 풀어보자는데서였다.

<<자네들은 들었나, 완용이가 요새 방금 뭐로 벼슬이 올랐다누만?>>

<<신문에 나지 않았습니까, 총리대신으루됐답니다.>>

석범이가 로인의 말을 받았다.

<<그자는 사주팔자가 아마 제 나라팔아먹고 영달하는 놈인가봅니다.>>

성태도 한마디했다.

<<아무리 영달해도 개놈이지! 구데기같은 놈이 뼈까지 썩어버린 제 조상팔고 후세에까지 루끼칠 더러운짓만하고있어.>>

좌진은 이러면서 2천만백의동포앞에서 바닷물을 다 쓴다해도 씻지 못할 대죄를 지은 을사5적무리 의 주모자 리완용은 점점 철저히 왜놈의 상등개로 되어가노라했다.

<<저승간 면암옹(勉庵翁)이 이 일을 알면 대노해서 무덤을 차고 일어날거네. 충신은 죽어 원혼이 되고 역적은 살아 영달하니 기막히는 세상이지. 어떻게 살아가겠나. 후ㅡ >>

광호로인은 가슴꺼지도록 한숨을 쉬곤 배일거두 최익현의 죽음을 애탄했다.

최익현은 본래 서울에 올라가 궁궐앞에서 상소투쟁을 벌리려고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되지 않자 전해의 2월달에 전라북도 태인지방에 가 자기 제자인 림병찬과 함께 반일의병투쟁을 벌리였다. 이 반일의병대는 일본침략자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도시점령을 위한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사이 의병수도 급격히 늘어나 900여명에 달했다.

일본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은 이 의병대를 속한 시일내에 없애려고 무력적인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국왕의 이름을 빌어 회유문을 보내는 기만적인 수단을 썼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많은 무리들아, 빨리 마음을 고치고 뉘우쳐서 즉시로 마음을 돌려 더욱 학업에 힘쓸것이다.... 또 학교규정을 넓혀서 지방선비들로 하여금 나아갈 곳을 알게하고 때때로 장려하여 실지 사용에 이바지하게 할것이니 모두들 다 잘 알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동요함이 없이 투쟁을 계속 할 기세로 나왔다.

반일의병대의 공격에 의하여 일시 수세에 빠졌던 일본침략군은 태인, 순창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다시강점하려고 남원과 전주, 광주 등지에 있던 <<토벌대>>와 친일주구들이 거느리는 진위대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공격하였다.

6월 11일 치렬한 접전 끝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의병대는 전패, 의병장 최익현은 부하 림병찬과 함께 체포되였다. 6월 18일 서울에 압송, 온갖 회유책으로 굴복시키려다가 성공못하니 적들은 그를 재판에 넘겼다. 그리하여 최익현은 감금 3년, 림병찬에게는 감금 2년형이 내려 대마도로 류배갔다.

1906년 12월 31일, 71살인 최익현은 단식사(斷食死)를 하면서 이런 시구를 세상에 남기였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수 없어라

만번 죽어도 적국의 부귀를 탐할소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좌진이는 이 시를 무척 마음들어했다. 그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애탄을 표시하면서 책가울이 보풀이 인 병서(兵書)밑에서 접혀있는 신문 한 장 끄집어내여 보라고 건늬였다. 그것은 이해의 정월에 나온 <<대한매일신보>>였다. 거기에는 고종황제가 새해잡아 <<런던트리뷴>>지 기자 더클러스 스토리를 통하여 미국, 로씨야, 독일, 프랑스 4개국 수반들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친서에서 박제순이 조인한 <<을사5조약>>은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은 가짜문서일뿐만아니라 일본이 그것을 제멋대로 공포하는것도 반대하였다는것을 밝히고 자기는 독립국황제권을 타국에 추호도 양보한 일이 없고 외국인이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한 일도 없으며 애당초 통감이 조선에 오는것조차 불허하였다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황제님의 주장이 그같이 드팀없다면야 마음은 좀 놓이네만.... >>

광호로인은 뒤말을 채 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영 믿을바는 못된다는 그 말슴이지요? 그래요, 황제 한분만 믿어갖고는 되지도않을 일입니다. 왜놈의 총칼이 수풀같이 에워싼 궁궐안에 딱 같혀있는 분이 맥을 쓰면 어느만큼이나 쓰겟습니까. 직접적인 일이야 그래도 보다 자유적인 우리가 해내야지요. 저도 황제님이 변심하지 않고 계시니 고맙습니다. 하여간 나라님이 죽지 않았구나, 그러니 내 조선도 살아는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깐요.>>

좌진의 말에 광호로인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날 그는 젊은이들과 해지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서도 더 지내고싶어 좌진의 집에서 이틀을 묵고 돌아갔다.

 

삼불산밑 황무지에 마련된 10여두락의 학교밭에서는 감나무와 곡식들이 푸르싱싱 잘 자랐다. 호명학교는 실력과 평판이 상당해진터로 린근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와서 공부하는 학생수는 어느덧 몇백을 훨씬 넘겼다. 그래서 좌진은 학급증설을 위해 상촌(上村)에다 초가집을 한 채 짓고는 식솔들을 그리로 이사시켰다.

그런데 호명학교의 발전과는 반대로 국가의 운명은 나날이 더 험악해져 인제는 거의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에 빠지고있었다. 리완용의 승진이 말밥에 올라 씹히더니 7월잡아서는 월초부터 밤자고나면 범상찮은 사건들이 련달아꼬리물어서 온 나라가 비감과 분노와 절망과 흥분이 한데반죽되여 끓어번지는 소란스런 도가니로 되어갔다.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다.

   일본대신 하야시가왔다.

   황태자대리의 조서가 내렸다.

   시위대군이 일본군과 충돌이 생겼다.

   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였다.

   리완용의 집에 불이 났다.

   전 황제에게 태황제의 칭호를 줬다.

   그러더니 24일에는 도 무슨 <<힌일신협약(정미7조약)>>이라는것이 체결되였다. 그래서 며칠안되여 서울시민들은 반일폭동을 일으켰고 그뒤를 이어서 서울과 강화에서 군인폭동이 일어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강원도 원주에서도 군인들이 치렬한 반일투쟁이 벌어졌다.

중부조선일대는 어느덧 인민들의 반일투쟁기세가 고도로 앙양되였다.

   그 다음달도 국론(國論)은 비등(沸騰)했다.

   조선의 군대가 해산됐고

   참령(參領) 막성환이 자결했고

   시위련대와 일본군대가 충돌했고

   영친왕 은이 황태자에 책복봉됐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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