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http://www.zoglo.net/blog/jinsongzhu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소설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2013년 08월 30일 22시 42분  조회:3571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1959년, 기아가 사천성에 만연될 때 26세의 나이였던 주전삼(朱全森)은 원달현전구 비묘향 중심교교사 (原达县专区碑庙乡中心校教师)였는데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적인 자산계급우파분자였다. 수십년 후 그는 세권의《达州市志》편찬공작을 맡고 대약진 등 그 세월의 각골명심(刻骨铭心)의 정치운동에 대해서 실사구시적으로 밝혀냈다.  (来源:南方都市报)

 

아래것은 그가 쓴 <<약진이 지난후의 기황: 천동달주시3년“재해”실록>>의 부분적인 글이다.

주전삼은 말했다.

“3년재해기간에 달현전구에서는 볓십차례나 사람을 먹는 안건이 발생했는데 지금도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사람을 먹은것이 그 한곳뿐이 아니였다. 그런일이 재해지구에서는 거의다 발생했던 것이다.”

주전삼의 그 말들은 과연 틀리지 않는다. 전에는 탄압을 받을까봐 무서워 감히 말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하나하나 비밀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있다. 류소기부인 왕광미(王光美)와 류원(刘源) 등 사람이 쓴 <<당신이 모르고있는 류소기>>(河南人民出版社2000年版)에 보면 류소기는 “7천명대회”때 이미 모택동과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사람이 이같이 많이 굶어죽었으니 력사는 당신과 나를 기록해놓을것이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있는데 그래 고발이 올라오지 않을수있는가.”

 

《달주시지(达州市志)》는 1959년~1961년사이 달현전구에서 련속삼년간이나 가물이 들었다면서 그 가물이 1959년 6월 30일부터 시작해서 달현、선한 등지에 련속 49~67일이나 지속됐고 1960년에는 각현에 가뭄이 보편적으로 20일~47일이나 지속됐노라고 밝히였다. 1961년여름에는 중남부에 가뭄이 들었는데(54일간)그로인하여 련3년간 량식이 감산을 하게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전삼은 그것이 순전한 “인화(人祸)”였다고 밝히였다. 한편 그러고는 그래도 물은 있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이였더면 사람이 굶어죽을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것이라면서 원인은 촌마다 강철을 제련하는데 동원되다보니 곡식을 다 지어놓고서도 가을철에 그것을 제때에 걷어들이지 못해 밭에서 그저 썩어버리게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밝혀놓았다.

문제는 <<달주시지(达州市志)>>에 밝힌것과 같이 그것이 전적으로 1958년 5월에 중공8대 2차회의에서 “열의를 다내여 앞장서기에 힘쓰며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총로선을 내와서 “대약진”을 일으킨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총로선, 대약진에 뒤를 이은 인민공사화를 덛붙여 이른바의 세폭의 붉은기라했는데 그것은 아시당초 만들지도 높이들지도말았어야 했을 것이였다. 아무러한 경제적인 기초도 없이 경험도 없이 더구나 능력도 없이 공산주의에 빨리뛰여든다고 떠따고운것은 순전히 국가발전규률을 무시한 맹용(猛勇)에 불과한 무모한 짓이였던 것이다. 무슨필요가 있었던가? 그것은 그 어떠한 창조도 변혁도 력사적의의도 전혀없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중국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속심말도 감히하지 못했다. 대약진전에 ‘정풍운동’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기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중앙에서 하달하는 지시라면 옳건 그르건 무조건 집행해야했다. 그리하여 기층간부들은 어떻게 했으면좋을지 몰라서 쩔쩔맸다.”  

“세폭의 붉은기를 좋다고만해야지 나쁘다했다가는 끝장을 보고마는 것이다.”

이것은 주전삼(朱全森) 그 한사람만의 말이 아니였던 것이다.

민중에 대한 그같은 탄압과 통제는 오로지 상층의 무능한 폭압을 과시했을 뿐 그것을 그 이상의 어떤 유용한 명책(明策)이였다고 할수있는 근거라고는 지금까지 하나도 찾지 못한 것이다.

 

중앙의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아 증구량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엄한 책벌이 내렸다. 하여 그것이 무서워 아래에다 중앙의 지시를 그대로 내리먹인 자의 두손에는 많은 혈채가 묻게되였던 것이다.

그 집행자의 운명은 또 어떠했는가?

“1961년, 정책이 좀 돌아져 달현은 기층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체현된 것인데 그것인즉 곧바로 ‘군벌작풍반대운동’이였다. 하여 어떤 사람은 애써 사업하고도 나중에는 비판투쟁을 받은것이다.”라고 하면서 주전삼(朱全森)은 달현 안운공사 쌍하구촌지부서기 정도복(郑道福)의 죽음을 례로 들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였는데  투쟁맞고는 속을 끝내풀지 못해서 현초대소변소에서 목을 매 죽고말았다.”

 

다음것은 지난해 <<炎黃春秋>> 5기에 난 문장인데 그것을 쓴사람은 최민(崔敏)이고 문장제목은 <<귀주의 대기황년대>>라는 것이다.

핵심제시(核心提示)

“모택동이 내린 장편지시는 이러했다: 우경기회주의분자와 반당분자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주류가 무엇인지 전혀모른다. 그들은 하찮은 일(鸡毛蒜皮小事)을 쳐들고는 위대한 당과 위대한 인민의 사업을 창궐히 진공하니 대부등에 곁낫질하듯 가소롭기 짝없다. 요즘 우리는 많은 성, 시, 구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있는데 그것들은 다가 그릇된 기풍은 적어지고 정기가 오르고있다는 첩보다. 형세가 제일좋은데는 귀주다.”      

 

과연그렇단말인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때 벌써 기황은 광활한 중국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굶어죽는 현상이 가장엄중한 곳은 사천, 하남, 안휘, 감숙, 귀주, 청해, 하북, 산동, 호남, 광서 등 성과 구였는데 예로부터 곡창이라 불리웠던 강소, 절강, 광동 등 성들도 마찬가지로 적잖은 사람이 굶어죽은 것이다. 아사(餓死)현상이 그같이 엄중했건만도  모택동은 정신을 차릴념은 하지 않고 현실반영을 우파의 악의적인 공격으로만 치부했거니와 무자비한 탄압수단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게 그래 지모쏸피(鸡毛蒜皮小事)란 말인가?


“귀주성에 굶어죽은 사람이 제일많았다. 가장엄중한 시기는 1959부터 1960년 5월사이였다.... 미담현(湄潭縣)은 지형이 평탄하고 경치가 수려하거니와 귀주의 곡창이라 불렀다. 백성들이 전에는 풍의족식했다. 그러나 ‘대약진’이후부터 이곳의 백성들은 엄중한 재난에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위판공실책임자가 소개하는 것을 보면 1958년에 전현의 인구가 62만이던것이 1959년부터 1960년 5월사이 정상적인 사망 1만명외에 비정기적인 사망이 12.5만명이나되여 전현총인구의 20.16%에 달했다. 남은 사람이 49만인데 전현적으로 전멸된 가정이 3001호나 되고 5000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그 외에 외지로 도망친것이 5000명도 넘는다. 전현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지고있다.....정황을 료해하느라 안락공사(安洛公社) 안락대대에 갔다. 그 대대는 모두 29호에 인구가 150명이라는데 가보니 몽땅 굶어죽고 산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금사현(金沙縣)은 실지 8만명이나 굶어죽었건만 조광옥(趙廣玉)은 숫자를 썩 줄이여 4.7만명이 굶어죽었다고 말한것도 죄가 되어 붙들려가 판결받아 8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1961년 3월 12일에 그 사(社)에 와있었던 공작대가 철거하게되자 나는 다른 두사람과 함께 남아서 뒷처리를 했다. 3월 20일, 우리 셋은 현에서 개최하는 정풍에 참가하느라 남개공사(南開公社)를 지나게되였다. 도중 산을 넘고보니 목이 마른지라 물을 먹으려고 길가에 있는 한 농가에 갓더니 거기서 40대의 부녀가 마당에 앉아 채도자(菜刀子)로 어린애의 시체를 찍고 있는것이였다. 이미 팔과 다리각이 떨어졌고 잘라낸 머리는 한켠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각을 뜯고있었는데 보기끔찍했다. 내가 왜서 아이는 죽였는가고 물었더니 녀인은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죽인게아니요, 애가 아침에 굶어죽었어요. 온집사람 다 굶어죽는판인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했다. 그러면서 ‘저 독한 사람이 제새끼를 먹자구해요!’ 하면서 남편을 저주하는 것이였다.....그것말고도 이 마을에는 사람이 죽으면 먹어버리는 일이 벌써 여러번발생했다고 한다.....

나는 1961년5월에 그곳을 떠났는데 전 수성현(水城縣)에 굶어죽은것이 8만명이나 된다.“

 

등자력(邓自力ㅡ1920—2010)은 사천광안(四川广安)사람인데 193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공작을 했다. 혁명전쟁년대에 그는 섬감녕변구 류수병탄사령부의 정치교원, 연안대학체육지도대지도원, 사회과학원연구실간사, 359려민운고고장, 2야전군민운과과장, 하남로남현현위위원, 사평현위부서기, 호북통성현현장을 지내다가 새중국이 건립되여서는 천남행서합강현위서기,사천성총공회부주석을 거쳐 성문화국국장, 당조서기 등 여러직무를 맡았었고 사천성정협과 인대부주임을 지내다가 3년전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3년재해기간에 사천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면서 자기는 사람고기를 먹은 사람을 제눈으로 직접보기까지했노라했다.

“ 기황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했다. 그래서 끝내는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고 그것을 파는 현상까지 발생한 것이다. 의빈시에서는 어린애를 얼려 제집에 데려다가는 죽여 삶아먹었거니와 그후부터는 죽여 삶아서는 토끼고기라 속혀 팔아먹기까지 했다. 사람고기를 먹으면 부증(浮症)을 고친다는 소문이 나돌아 그 병을 앓는 사람들은 사람고기를 찾느라헤맷다. 전국이 식량난에 몰려 아사지경에 이르었건만 그 누구나 감히 입밖에 말을 내지못했다.”

그가 한 말이다.  

 

서방의 어느 한 인사가 중국의 그시기의 력사진상을 언녕밝혀냈다. 그러니 관방에서는 서방의 그 인사는 고의적으로 중국을 모욕하느라 “중국에서는 재황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참상이 생겼다.”고 요언을 날조했다면서 질책했다. 그것이 어쩌면 날조였단말인가?   

“1961년3월,흐루쇼브는 우리 나라에 대해 태도를 표시했는데 그것인즉은 대부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에다 밀 100백만톤과 들여온 큐바사탕 50만톤을 공급해줄수있다는 것이였다. 당시 모택동은 제2선으로 물러나 사업을 하지 않고 광주에에 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대한 문제는 간섭했다. 주은래, 등소평, 팽진 등은 비행기를 타고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소리를 듣자 단마디로 량식은 싫다 사탕은 받을수 있다면서 남이 던져주는 턱찌끼는 받아먹지 않는다고했다.” (楊尙昆日記)

양상곤이 일기에 쓴것같이 모택동은 자력갱생의지가 과연 견강한것 같아보인다.

그런데 그따위배짱이 도대체 무슨소용이 있단말인가?

큐바사탕이 그래 중국의 아사(餓死)를 해결했던가?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할줄을 아는 부모래야 부모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000만이 넘는 백성의 생명으로 제 패기(覇氣)를 바꾼것밖에 뭐가있는가?! 3천만이나 굶어죽었는데도 그래 鸡毛蒜皮没小事이란말인가?.....봉건독재자의 랭혹하고도 잔인함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64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4 장편전기 설한 (8) 2014-03-05 1 3401
43 장편전기 설한 (7) 2014-03-04 1 2739
42 장편전기 설한 (6) 2014-03-03 1 3043
41 장편전기 설한 (5) 2014-03-02 1 3257
40 장편전기 설한 (4) 2014-03-01 1 2682
39 장편전기 설한 (3) 2014-02-27 1 3156
38 장편전기 설한 (2) 2014-02-26 1 3005
37 장편전기 설한(1) 2014-02-23 2 2951
36 장편전기 설한(雪恨) 2014-02-23 1 2373
35 장편전기 설한 2014-02-19 4 3133
34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5ㅡ8) 2013-11-22 3 3431
33 중편소설 망매의 무도장 (1ㅡ4) 2013-11-22 2 3460
32 우숩고도 잔인한 시합 2013-10-19 1 3027
31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5ㅡ7) 2013-09-15 1 3290
30 중편소설 일호동의 사랑(1ㅡ4) 2013-09-13 0 3862
29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2) 2013-08-30 1 3571
28 에세이 독재자의 배짱과 재난(1) 2013-08-30 0 3221
27 에세이 현대 식인종 2013-08-24 1 3970
26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2) 2013-08-21 0 4251
25 에세이 웃지도울지도못할 방귀사건(1) 2013-08-21 1 4125
‹처음  이전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