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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2005년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록신청을 했는데, 이에 대해 중국이 자기네 전통명절을 도둑질했다는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강릉단오제에 관해 살펴보기로 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로 이 날은 원래 위대한 애국 시인 굴원(屈原)을 기리는 날이었다. 굴원(기원전 340~278년)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 할 수 없고, 멸망해 가는 초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슬퍼하다 5월 5일에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뛰어 들었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배를 저어가 굴원의 시체를 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매년 이 날이 되면 강에서 용주(龍舟)를 저으며 그를 추모하고 쌀을 담은 죽통을 강에 던져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단오절에 쭝즈(粽子:대나무 잎으로 찹쌀을 싸서 찐 음식) 먹고, 용주경기를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중국은 굴원이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결한 일자가 음력 5월 5일인데서 단오절의 유래가 분명하지만 한반도의 단오절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반도의 단오절은 먼 옛날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행사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본래 한민족의 단오절은 농경문화와 관련된 제천의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영웅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유래가 깊은 전통 민속놀이인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가장 유명한 강릉단오제도 임진왜란시기에 공이 큰 범일국사를 기리는 행사에서 기인되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진행하는 것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강릉단오제는 부족국가였던 동예 때부터 오월제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강릉지에 대관령의 승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산신제의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 초기 남효온의 기록에서는 음주가무를 곁들인 3일간의 산신제가 확인된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의 허균의 시문집인《성소부부고》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에 강릉단오제의 대대적인 축제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와 기원제를 올리는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중기 허균의 기록에서이다. 임영지에 나타나 있는 단오제의 기록은 현재의 강릉단오제와 가장 유사하다. 강릉단오제는 설화적인 요소, 불교적인 요소, 유교적인 요소에 민중의 신앙적인 요소까지 포함된 적층문화로 발전되어 왔다.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는 김종군이다. 범일국사(泛日國師)가 죽어서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범일국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서낭당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낸다.
강릉단오제에 관해 오청(吳晴)의《조선의 연중행사》,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44집 <부락제>, <강릉지> 등 문헌들에서 기술한바가 있지만 그 기원에 관해선 언급이 없다. 다만 대관령성황신과 산신에 대한 여러 전설이 있는데 그 성황신과 산신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조차 일치하지 않다.
강릉 현지인들은 대체로 국사성황은 범일국사이고 산신은 김유신이라고 믿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천여 년 동안 숭배의 대상으로 되어왔지만 범일국사는 임진왜란시기의 사람이기에 기껏해야 4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사람들이 성황신으로 모시는 까닭은 아마 그가 당지의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범일국사는 4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2천 년 전의 예수처럼 신비한 탄생설화와 기적이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마을의 한 처녀가 있어, 아침에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나중에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그대로 마셔버렸다. 그런 후 처녀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달이 차서 남아를 분만했다. 처녀가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지라 마을 사람들의 지탄과 가족들의 꾸지람이 있었다. 그래서 산모는 그 아이를 뒷산에 있는 학바위 밑에 버렸다. 학바위는 마치 여러 바위를 포개놓은 동굴처럼 되어버렸다. 영아를 버린 산모는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이튿날 아침 일찍 모정을 못 이겨 아이를 버린 학바위를 찾아갔다. 영아인 까닭에 밤새 얼어 죽거나 산짐승이 물어갔을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어린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으며 학을 비롯한 산짐승과 날짐승들도 서로 다투어 아이를 감싸 따습게 해주고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누구도 감탄치 않는 이가 없었으며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짐작을 하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나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7세가 되니 비로소 입을 열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외조부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경주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경주에 간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국사가 되어 돌아왔으며 중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국사는 학바위에서 지팡이를 던져 꽃인 곳에 사찰을 지었으니 심복사(尋福寺)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이 났다. 국사는 대관령에 올라 술법을 쓰니 산천초목이 모두 군세로 변하여 왜군이 감히 접근치 못하고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나라에 공이 많고 향토를 보호하는데 공이 큰 국사는 죽어 대관령성황신이 되었다. 국사의 이름을 범일국사라 부르는 까닭은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마시고 낳은 데서 지어진 것이다.
대관령성황당에는 대관령국사성황과 대관령국사여성황의 이위(二位)를 사(祠)하고 있으니 국사성황이 배위(配位)인 여국사성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정씨 가에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성황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오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 아닌 성황을 사위 삼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느 날 정씨가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어 곱게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로서 그 소녀를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고 왔던 것이다.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딸은 잃은 정씨 가에서 큰 난리가 났으며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해 호랑이가 물어간 것을 알았다. 가족들이 대관령성황당에 찾아가 보매 소녀는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은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소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래서 4월 15일에 대관령국사성황을 제사하고 모셔다가 여성황사에 두 분을 함께 제사하게 되었다.
강릉단오제는 이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대형행사이다. 강릉단오제의 특징은 참여자 수가 수만에 달할 정도로 많고 행사일이 근 50일이나 될 정도로 길고 무당이 많이 동원되어왔다.
민속행사 치고 참여자가 수만이고 행사기일이 50일이면 규모가 엄청 커 국제적으로도 대형행사에 속한다.
단오제의 일정을 대략 적으면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수용 술을 빚는다.
4월 1일 초단오, 헌주와 무악
4월 8일 재단오 헌주와 무악
4월 14일 봉영(奉迎)
4월 15일 삼단오, 봉영, 대관령성황제 및 산신제
4월 27일 사단오, 무제
5월 1일 오단오, 괫대(花蓋), 관노가면극
5월 4일 육단오, 관노가면극, 무악, 농악, 그네뛰기, 씨름대회, 체육대회
5월 5일 칠단오, 동상
5월 6일 팔단오, 동상
5월 7일 소제(燒祭), 봉송
고대한반도에서 무릇 제사에 연관된 모든 행사에 무당이 관여치 않으면 되는 일이라곤 없었다. 강릉단오제는 더욱이 산신과 성황신을 제사하는 행사이므로 무속성(巫俗性)이 강해 제의 전체가 무당에 의해 거행된다. 무당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를 사람에게 전한다. 강릉단오제에 관여한 무당은 크게는 국태안민과 강릉 내의 무재를 빌고, 작게는 신도 개개인의 제화초복을 빌어준다.
이렇듯 본래 농경문화에서 기인되었던 한반도의 단오절은 그 원 모습을 잃고 영웅을 제사하는 행사로 변모되었고 아울러 ‘節’보다 ‘祭'에 무게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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