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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과 KIM
1990년대 초반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삼일 묵고 마포소재 가든호텔에 옮기게 된다는 소식을 한국 업무거래처 분들에게 알렸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리 한국도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 하여 한국 분들이 호텔카운터에 전화해서 나의 룸 번호를 체크하고 나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분들이 나의 성을 KIM라고 말하니 호텔 측에선 그런 손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긴 나의 성은 한국식으로는 KIM이지만 나는 분명히 중국공민이기에 중국식으로 JIN이기 때문에 KIM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날 느닷없이 그때 일을 들먹이는 이유는 JIN과 KIM을 갖고 우리조선족이 흔히 안고 있는 문제, 나는 누구냐? 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풀이를 하기 위함이다.
조선족은 분명히 'JIN'이지 ‘KIM’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을 동족이란 차원에서 ‘KIM’으로 인식하고 만약 한국이 중국과 축구경기를 하는데 중국을 응원한다면 몹시 서운해 한다. 관건문제는 한국인은 조선족을 재미 혹은 재일교포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왜 ‘KIM’이 아닌 ‘JIN’이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재미 혹은 재일교포와 질적으로 다르다. 재미 혹은 재일교포는 이미 달리고 있는 그 나라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슨 말이냐? 조선족은 만주시절부터 그 땅에 가서 토지를 개척하여 생계를 유지해왔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항일도 하고 국민당과도 싸우고 신중국 건설에 피와 땀을 이바지해 왔고 귀중한 목숨까지 바쳐왔다. 또 이런 맥락으로 항미원조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중국사회주의건립과 건설에 직접 자신의 몫을 해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민권을 얻고 주인의식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재일교포의 경우 수십 년 열도에서 살았어도 국적은 여전히 한반도이기 때문에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조선족에 비해 발바닥에도 못 미친다. 그들은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어 만약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할 경우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 이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서 40여 년 동안 냉전시대를 걸치면서 고국인 한국과의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 조선족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애정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양모가 잘 길러준 아이한테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 “너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질문자가 상식이 없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 사이 조선족의 문제는 이 사례와 같다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렇듯 ‘JIN’으로 무난하게 살아오던 조선족이 한국 문이 열리기 시작해서 ‘JIN’과 ‘KIM’ 사이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JIN’이냐? 아니면 ‘KIM’이냐? 예전에는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거의 백 프로 중국을 응원하던 데로부터 점차 한국을 응원하는 수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요즘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중국을 응원할 수도 있고 한국을 응원할 수도 있다. 헌데 이것은 조선족의 개개인의 취향문제만은 아니다. 조선족이 한국을 응원하면 중국이 서운해 하고 중국을 응원하면 한국이 서운해 한다.
어찌되었든 한 인간이 자기 소속된 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인간은 행복하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불행하다.
지난겨울 중국에 갔을 때 연변라디오 <이 밤을 함께 합니다>를 청취한 적이 있다. 한 여인의 사연이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 와서 수년간 열심히 노력해 연길에 번듯한 아파트를 마련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돈을 저금해놓았다. 천당 같던 가정생활이 남편의 잘못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남편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귀가 벌쭉해 연변에 온 한국인 00사장한테 동업한다는 명목으로 있는 돈을 몽땅 사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의 돈까지 빌려 밀어 넣어 빚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한데도 남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졸부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해 아내가 “나 어쩌면 좋아요?”라는 요지로 방송국에 사연을 신청했던 것이다.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울린다. “그 동무 아직도 과학발전관을 수립하지 못하고 ······” 나는 피씩 웃음이 나왔다. 한 개인이 사기당해도 과학발전관을 들먹이다니?
남아공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요즘 새삼스럽게 그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자꾸 나의 귀전을 맴돈다. 아울러 그 분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자신의 소속 공동체의 이념이든 사상이든 맘속으로 받들고 정신지주가 되어 그 흐름에 따라 희로애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 분에 비해 재한조선족의 경우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남아공월드컵 때 한국이 16강 진출이냐, 탈락이냐를 결정짓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새벽 3:30에 열렸다. 한국인은 밤잠을 자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고 함성을 질렀다. 8강 탈락이 결정되는 순간에는 선수와 함께 울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한국이 이기면 좋고 지면 기분이 좋지 않는 감정은 있으나 정작 한국인과 같은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울고 웃는 희로애락은 없었다. 조선족이 집결해 살고 있는 동네는 조용했고 한국인 속에 끼어 살고 있는 동네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물론 태극기를 보면 눈시울이 젖어나고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울먹거린다는 개별적인 열성한국사랑에 빠진 조선족을 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고 우리가 한족들처럼 진심으로 서운해 할까? 그렇다면 한국응원도 그저 흐지부지하고 중국응원도 내심으로 우러나는 감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냐? 는 것이다.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느 공동체에도 진심으로 귀속되지 못한 인간무리의 삶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참으로 불행하다. 마치 이젠 우리재한조선족의 삶도 어쩌면 돈벌이에만 신경을 도사리는 재일교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재일교포는 한국응원이라는 정신적인 삶이 있지만 우리재한조선족은 그러한 정신적인 삶마저 없으니 그들에 비해 더 비참하다고 말해도 어폐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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