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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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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57분  조회:6997  추천:0  작성자: 죽림

국화 옆에서
             - 서정주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菊花앞에서
       - 김종길 -


한 떨기 菊花 꽂이여
너 앞에 지금 나는 할말이 없다.

불붙던 쌀비아는 잿더미로 식어가고
플라타너스도 반 넘어 잎이 졌는데

서릿발 싸늘한 이 아침을 
홀로 늠름히 피어난 꽃이여
너 앞에 지금 나는 목이 메인다.

한 떨기 菊花 꽃이여
너를 아끼고 노래한 陶潛과 杜甫
秋史와 滄江과 그리고 아 우리의 芝薰

그들의 超俗과 憂愁와 靈感과 氣槪
그들이 사랑한 詩酒의 의미를 의젓이 묵시하는 꽃이여

내 또한 詩와 술을 사랑하고
不義와 庸劣을 미워 하건만 
내게는 돌아갈 田園도 流謫과 漂泊과 絶叫의 땅도 없어

다만 저 재로 사위어 가는 살비아 꽃밭과 
잎지는 플라타너스의 빈 校庭을 
온 아침 넋없이 바라보며

이 서릿발 속에서도 홀로 오히려 오만한 
한 떨기 菊花꽃 앞에
잠시 말을 잃고 목이 메일뿐


 

 


국경의 밤

        - 김동환 -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어 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 산재(山材)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이 났다고 실색(失色)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만은 강도 채 못건넌 채 얻어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빗탈을 쓰러 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 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어름짱 끄는 소리언만.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 모 윤 숙 -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과 가시숲을
      이순신(李瞬臣)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머나먼 적진까지 
      밀어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제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오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 물러가도 대한민국 군군아! 너만은 
      이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江)과 산(山)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국제열차(國際列車)는 타자기(打字機)처럼
                          - 김경린 -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 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 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정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 오리

 

 

 

국토서시 
              - 조 태 일 -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굳은 손으로

          - 성춘복 -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워하다가
  드디어 서러운 자만이 갖는
  그런 손으로 헤매어다니다가

  미진 돌개바람마저 발을 묶는
  그리 멀지 않은 곳,
  무릎 일으킬 힘도 없는 너겁으로
  나를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빈 손이고
  길은 먼 데 있어
  네가 내 곁이 아님을
  내가 아무 의미 아님을
  깨우치게 되어도

  꼭 닫아 건 창 밖으로
  마구 팔매질 해대는 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근심만 쫓던 너의 열어젖힘 앞
  난 또 신명을 다할 수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명으로 그리워 하다가
  이내 사그라질 검정의
  굳은 손으로나마
  너를 빌고 있으마

 

 


굽이 돌아 가는 길

       - 박노해 -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강물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 보다는

산따라 물따라 가는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 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 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것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구두

   - 송찬호 -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구리

    - 김백겸 -

 


  어느 산 어느 바위 틈에서 깨지 못할 꿈 깨다가
  곡괭이에 뼈혀 나왔는지
  용광로에 뼈와 살 녹여내고 마음만 남아
  휘저으면 티끌 하나 걸리지 않는 마음만 남아
  낙랑 공주 얼굴 비친 동경이 되었다가

  자명고 찢은 사랑도 무덤에 잠든 오늘은
  문고리가 되어 바람에 심장을 내맡겼구나
  햇빛에 달그락달그락거리는 고요 속
  검은 녹 사이사이로 빛나는 시간은
  명희,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는 조카의 눈망울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살아나는구나

  그것은 장인이 두드려 만든 기다림이었을까
  담금질에서 꺼내면 가난도 금이 되고
  한평생 칼날 한번 세우고자 벼르던
  상민의 집념이었을까
  임금을 베어 자신이 임금이 되는 대신
  형장 망나니 칼 끝에 목을 얹은 홍경래의 슬픔이었을까

  바람부는 오늘은 전신주 위에서 울고 있구나
  플라스틱 피복관 속에 갇혀 불과 물이 만든 힘 도시에 보내고
  역사에 다이알 돌려 수신인 찾는
  내 호출부호도 실어 보내면서
  수은등에 스윗치 누르면 파랗게 질린 얼굴 어둠 속에 켜는
  마음만 남아 울고 있구나

 

 

 

구룡폭포
            - 조운曺 雲  -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劫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江도 바다도 말고 玉流 水簾 眞珠潭과 萬瀑洞 다 고 
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맻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번 굴러보느냐

 

 

 

구름

     - 이탄 -

 

  관운장은 마량하고 바둑을 두고
  화타는 관운장의 팔에 스민
  독을 뽑는다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하고
  화타는 살을 헤쳐내고
  뼈를 본다 푸르딩딩한 뼈, 독이 번진 뼈
  화타는 독을 제거하고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한다
  아 이젠 팔이 가볍구나

  조조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피래미 등에도 묻어있고
  독전이 빗방울처럼
  추녀끝에서 떨어진다

  팔 또는 어깨
  심장
  위에 떠 있는 구름
  화타의 걸음

  헤르만 헤세의 구름도
  수염처럼 날린다.

 

 

 

구름

      - 김소월 -

 

저기 저 구름을 잡아 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카만 저 구름을

잡아 타고 내 몸은 저 멀리로

구만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 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 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 저녁 내 눈물을

 

 

 

구름

   - 이세일 -


  구름이 간다.
  안 보이는 것들이 따라가고 있다.
  천년 전의 시간이 따라가고
  잊혀진 고뇌가 따라가고 있다.
  내일은 일상 죽음인 것을
  찬란한 내일을 찾아가라던
  아, 엄청난 거짓말 때문에,
  거짓말 때문에,
  우리는 웃으면서 지치는 걸 배웠다.

  구름이 간다.
  예전에 살았던 저 마을에
  무엇을 잃었는지 기웃거린다.
  흘러오던 물소리냐.
  돌아가던 물소리냐.
  해 저문 날
  우리가 버린 사랑들이냐.
  슬퍼하라, 흙 위에다 뿌리고 온 것,
  그것은 울면서 싹이 트리니...

 

 

 

구름과 나

             - 박천 최정순 -

 

하늘이 제집이라서

바람결 주춤주춤 흘러와

계곡 어느 외딴집

지붕 위 잠시 머물다

장독대 항아리 속

간장에 헤엄치며 놀다

물수제비 뜨는 개구쟁이

눈속에 머문다.

 

내 마음도 구름 같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정처없이 흘러다니다가

어느 날 무심히 돌아선

당신의 그림자에 내려 앉는다.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 이경순 -

 

  우울한 날에
  내 홀로
  뒷산마루에 앉았노라면

  뻐꾸기는 산에서 살자고
  울음을 우는데
  구름은 하이얀 테이프를 던져 주고
  바다로 흘러간다.

  산에서 살자니
  구름의 손짓이요
  바다로 가지니
  뻐꾸기 울음을 어이하리?

  눈물로 기름진 밭이랑에다
  청춘의 씨앗을 묻어 놓고
  권태의 맨트가 휘날리는 거리에서
  우울한 츄잉검처럼 씹어 본다.

 

 

구성동

      - 정지용 -

 

골짝에는 흔히

유성이 묻힌다.

 

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싸이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九月頌 (구월송)

     - 김철수 -


모밀꽃 밭에 누어 
너를 부르랴 

九月이면 오가던 首香山 길에 
묻고 온 노래 부르면 
따라오는 가을 

'아이 나두나 단풍 들갔습네' 
'숨 가삐 나두나 단풍 들갔습네 

우워이 우워이 참새떼 몰다 
논 이랑 타고 넘던 
구월 首香山 

쫓기는 바람 속에 
너를 부르랴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 임 화(林和) -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구작 삼 편(舊作三篇)

              - 최남선 -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오,
칼이나 육혈포나.
그러나 무서움 없네.
철창 같은 형세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짐을 지고
큰 길을 걸어 가는 자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오.
비수나 화약이나.
그러나 두려움 없네.
면류관의 힘이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광이삼아
큰 길을 다스리는 자일세.

 

우리는 아무 것도 든 물건 없오.
돌이나 뭉둥이나.
그러나 겁 아니 나네.
세사 같은 재물로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 것 칼해 잡고
큰 것을 지켜 보는 자일세.

 

 

 

 

구화(口話)

      - 이성복 -


          1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 
걸어가는 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工場이 
되었으면 날아가는 맷돌이 되었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도 짓궂은 배가 고프고 
끌려다니며 잠드는 그림자, 이맘때 먼 저 별에

술 한잔 따르고 싶더라 내 그리움으로 
별아, 네 미끄럼틀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2

나는 아침 이슬 李氏 노을에 걸린 참새가 
내 엄마 나는 껍질 벗긴 소나무 진물 
흘리며 꿈꾸고 있어 한없이 풀밭 위를 
달리는 몸뚱이 體位를 바꾸고 깊어 正敎會의 
돔을 세우고 싶어 體位를 바꾸고 싶어 
느낌표와 송곳이 따라와 노래의 그물에 
잡히기 전에 어디 숨고 싶어 體位를 바꾸고 
싶어 돋아나는 뾰루지 속에 병든 말이 
울고 있어 병든 말을 끌어안고 임신할가봐 
지금은 다만 體位를 바꾸고 싶어

          3

모든게 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電子時計 모든 게 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게 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4

그날 아침 내게는 돈이 있었고 햇빛도 
아버지도 있었는데 그날 아침 버드나무는 
늘어진 팔로 무언가 움켜잡지 못하고 
그 밤이 토해 낸 아침 나는 울고 있었다 
그날 아침 거미줄을 타고 大型 트럭이 
달려오고 큰 새들이 작은 새의 눈알을 
찍어 먹었다 그날 아침 언덕은 다른 언덕을 
뛰어넘고 다른 언덕은 또 다른 언덕을 뛰어넘고 
병든 말이 앞발을 모아 번쩍, 들었다 그날 
아침 배고픈 江이 지평선을 핥고 내 울음은 
동전처럼 떨어졌다

          5

먼 나라여 
地圖가 감춘 나라여 덧없음의 없음이여 
뒤집어진 車바퀴가 헛되이, 구르는 힘이여 
먼 나라여 
오래 보면 먼지나는 길에도 물결이 일고 
길 가던 사람이 풀빛으로 변하는, 먼 나라여

          6

여섯살도 채 안되어 개구리 헤엄을 배웠어 
자꾸만 물 속으로 가라앉았지 깨진 유리병이 
웃고 있었어 그래 나는 엄마를 불렀고 
물결이 나를 넘어뜨렸지 내 이름을 삼켰어 
배꼽이 우렁이처럼 열리고 내 팔을 깨물었어 
피리 소리가…… 밀밭에선 죽은 개가 울고 
여러 번 낫질해도 안 쓰러지던 그림자 나는 
宇宙보다 넓은 房에 갇혀 있었지 간혹 
비행기가 삐라를 뿌렸어 양귀비꽃이 食道를 
거슬러 올라왔어 입과 肛門 사이 사랑은 
交流로 흐르고 미치기 위해 나는 굶었지 
순박한 사람들이 날으는 나를 돌로 후려치고 
그래 나는 돌과 함께 떨어졌고 그래 나는 
汽車에 뛰어 올랐지 그래, 나는 故鄕을 떠났어

 

 

 

가객(歌客)

        - 신경림 -

 

내 앵금 영 넘어가는 산새소리
내 젓대 가시나무 사이 바람소리
내 피리 밤새워 우는 산골 물소리

무서리 깔린 과일전
가마니 속 철늦은 침시

푸른 달빛에 뒤척이던 풋장꾼도
이른 새벽 눈 비비고 나앉아

고목 끝의 한뎃가마에
시래기국은 끓고

무서리 마르기 전 봇짐 챙겨
돌아가리라 새파란 하늘
잔풀 깔린 성벽을 타고
여기 한 개 그림자만 남겼네

내 앵금 이승 떠나는 울음소리
내 젓대 동무해 가는 가는 벌레소리


 

 

 

가고파 -내 마음 가있는 그 벗에게
                  - 이은상(李殷相) -
 

내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물이눈에 보이네
꿈인들 잊으리오 그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물새들날으리가고파라 가고파.

어린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잊으리오 그뛰놀던고향동무
오늘은 다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왜 어이타가떠나살게 되었는고
온갖것 다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한데얼려 옛날같이살고지라
내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없던때를찾아가자찾아가.

 

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거이랑 달음질하고
물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그리워.

 

여기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몫엔 즐거움은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온 내 보금자기에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되고동자들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길이나뉘어이렇구나
잃어진 내기쁨의길이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단잠들어 죄없는몸이
그바다 물소리를밤낮에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따라나명들면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던지던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아침은오고거기석양은져도
찬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

 

 

가난의 골목에서는

                - 박재삼 -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건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막 덤불

        - 김소월 -

 

  산에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뿔 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간도 이민을 보고
                    - 이상화 -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아가도다
자갈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으면 단잠을 얽을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을 뺏어가거라!

아, 사노라, 사노라 취해사노라
자포(自暴) 속에 있는 서울과 시골로
멍든 목숨 행여 갈까, 취해 사노라
어둔 밤 말없는 돌을 안고서
피울음 울어도 설움은 풀릴 것을...
인간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취한 목숨, 죽여버려라!

 

 

가족 
     - 박목월 -

 
지상에는 /아홉 컬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컬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어름의 길을 걸어
그들 앞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것이/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족

                             - 김수영 -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이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한 소재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 뿐이냐     
                                     

                 

   
가족의 힘

     - 류근 -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가는 길
     - 김소월 -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가난의 골목에서는

              - 박재삼 -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건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가시

    - 이영춘 -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그 생채기 얼마나 쓰리고 아픈가를

피 멍울멍울 솟아나는 진통을

한 사람의 독기 어린 혓바닥이

우리들 가슴에 얼마나 많은 피를 솟게 하는가를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남의 가슴에 가시를 박았을 것인가를

 
한 치 혓바닥에서 묻어나는 그 독기

돌밭, 가시밭에 몸 박고 사는 엉겅퀴처럼 톡톡

불거진 가시가 얼마나 큰 암 덩어리였던가를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내 몸에 가시가 박혀 피 철철 흘리듯

남의 가슴에도 피 흘리게 하였을 것인가를

 

 

 

가을 
        - 함민복 -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바람이 당신을 뒤흔듭니다. 
환한 당신, 잠시 위태하게 깜박거리자 
자명종 같은 귀뚜라미 소리가 
내 곤한 잠을 깨웁니다. 
 
가을바람의 바다

 

 

가을

   - 김현승 -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 -송짓골 우화 6

             - 김사림 -

 

  해마다 여름 내내
  박꽃이 지붕을 타고 놀다가
  이맘 때쯤이면 주렁주렁 열리던
  보름달만한 박들.

  꽹과리 징을 두들대며
  풍년이 왔다고 흥청거리던 동네,
  그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이맘 때면 가슴을 앓는다.

  할머니는 가마타고
  할아버지는 나귀타고
  시집 장가 들던 시절.
  소나무 그늘로 쉬엄쉬엄 갔다는
  소나무가 많아서
  청솔 그늘이 푸르러서 송짓골이라는
  그런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는 많다.

  푸른 물줄기 낙동강이
  송짓골을 지키고
  동구밖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듯
  내 아버지의 내 아버지의 아버지쩍부터
  뿌리내려 사는
  경주 김씨 우리집.

  푸른 잎이 노랗게 되는 은행처럼
  노랗게 찌들은 얼굴을 하고
  도심지에서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
  푸른 소나무와 청솔 푸른 바람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송짓골 같은 고향을 품고 있는 나처럼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풍년가 울리는 이 무렵이면
  함께 가슴을 앓는다.

 

 

가을

   - 안초근 -


  떠나고 있는 바람을 따라
  산등성이 키 작은 잡초들 사이에
  올라
  빨간 능금
  살진 토끼
  아아 보석같은 햇살 다 두고
  하지 못한 말
  그냥 두고
  미류나무를 안아 보고
  들판을 어루만지며
  떠나고 있는 바람을 따라
  산등성이 갈빛 잡초들 사이에
  너와 올라.

 

 

 

   가을노래

       - 이해인 -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도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가을 노래

     - 송희철 -


  여름 내내
  더위에 시달려
  잃어 버렸던 영혼의 알맹이
  이제사
  빈 육신의 자루에 찾아 담는다,

  먼 하늘가
  바람에 떠밀리는
  계절의 어깨 위를 흰 구름이 가고,

  어느결엔가
  푸른 옷자락 끌며
  이제껏 때려 올린
  이 세상 모든 종소리의 여운같이
  다가서는 그대

  우러러 씻기운 푸른 하늘 향하여
  오늘도 흐느끼는
  노래 하나 불러 띄우느니,

  이 가을
  드높은 사랑 위함이라면
  가진 혼
  다 살라 태우리.

 

 

 

 

가을레슨

          - 채희문 -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떠나 볼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나
  새삼 느껴 볼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같은 빗물로 만나
  한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가을비

     - 한기팔 -

 

  비 뿌려
  마음 고요해지는구나.
  고요한 마음이
  하느님 나라 빗소리를 몰고 오는구나.

  무덤가 하얀 모래밭,
  깃털 고운 물총새
  그의 발목이 연한 분홍빛이다.

  오오!
  누구라 말하랴.
  내 마음 그리 쓰임이
  빗소리로 말하고
  빗소리로 들리나니

  내가 사는 땅,
  잠 자는 이의 젖은 눈꺼풀 사이
  빗소리 알 수 없는 등불을 달고
  깊은 잠 깨우고.

 

 

 

가을비
             - 도종환 -
                                                      

어제 우리가 함게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가을 병실(病室)
            - 구상-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내 앓은 가슴 위에다
긴 그림자를 지으며
북으로 날아간다.
한 마리 한 마리 꼬리를 물 듯이
一直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팔락
내 가슴 空洞에 내려 앉는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마지막 한 마리는
내가 붙잡았다.

              팔딱
              팔딱
              팔딱
내 가슴이 뛴다.

              끼럭
              끼럭
              끼럭
내 가슴이 운다.

끼럭
끼럭
끼럭
하늘이 운다.

               끼럭
끼럭
나는 놓아 보낸다.

혼자 떨어져 날으는 뒷모습이
나 같다.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 날아간다.
나의 가슴에
平行線을 그으며 날아간다.

 

 

 

가을 서시

         - 이수익 -

 

  맑은 피의 소모가 아름다운
  이 가을에,
  나는 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푸른 풀꽃 어지러워 쓰러졌던 봄과
  사련으로 자욱했던 그 여름의 숲과 바다를
  지나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마다
  제 하나의 신비로 가슴 두근거리는 때.

  이 깨어나는 물상의 핏줄 속으로
  나는 한없이 설레이며
  스며들고 싶습니다.

  회복기의 밝은 병상에 비쳐드는
  한 자락 햇살처럼
  아, 단모음의 갈증으로 흔들리는 영혼 위에
  맺힌 이슬처럼.

 

 

 

 

가을의 기도
                 - 김현승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 낭승만 -

 

  뜨거운 여름날의 강물소리를 보내며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게 하십시오.

  아무 수확이이라곤 없는, 떨리는
  손바닥뿐입니다.

  그 주위로는 노을이 나리게 하여
  가늘은 벌레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지나간
  찬란한 가을비 소리를 잊게 하여 주십시오.

  이 조그만 영토에 그대로 애잔할
  한 가을 풀꽃의 뿌리밑을 흐를
  맑은 물소리로 죽어지고
  짙푸른 하늘 아래 나무가지마다 눈부신 과실의 빛으로 죽어져서
  당신에게 드리는 제단 앞에 목메어 쓰러지겠읍니다.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으로 부서져
  땅 속에 깊이 묻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흐느껴우는 겨울엔 두터운 지층 위를 강설하면
  죽어진 버레의 노래를 되살리며, 가슴 속으로
  마구 뜨거운, 파도치는 목숨의 피를 조양하는 것입니다.

  온화한 빛깔들로 취하게 하여...
  가을엔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으며
  미소짓게 하십시오.

  눈물나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 다시 살아날
  그들이 잠들어 누워있는 무덤 위에, 더 슬픈
  사랑을 주십시오.
  아침에는 눈뜨게 할 종소리를
  뜨거운 드거운 빛을 던지십시오.

 

 

 

 

가을의 노래

       - 유자효 -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녁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가을의 시

          - 장석주 -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가을에

     - 정한모 -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 이인구 -
             

구름 몇 점
입에 문 채로
푸른 하늘 등에 업고
바람처럼 시들거나
구겨지지 않는
노래 부르며

 

숲의 문 차례로 열어젖히고
끝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마음의 어둠
검은 밤처럼 던져 버리고

 

우수수
쏟아질 듯 열린
하늘벌 가득한 별들을
한 낫에 추수하여
아무도 갖지 못한
한 재산 일구어내는

 

 

 가을여행

           - 명기환 -


  미릿내 내리는 길목의
  낙엽은
  어디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흩어지며 나뭇잎들이
  어느 부두에서라도 얼굴을 부빌 때
  내 어린 가족들은 얼마큼
  키가 자라고 있고
  어디서 내 이륙의 숨소리를 듣고 있을까

  가을의 청소부는
  늙은 가을을 불지르고
  아기의 눈처럼
  하늘은 잠자고 있는데

  가을의 출구
  상해 버린 나의 얼굴 앞에서
  왜 모두들
  새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가을 저녁에

        - 박혜숙 -


  서녘 하늘에
  비둘기떼 울음소리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되어
  창문에 보석처럼 와 박힌다.

  황혼은 자꾸만
  여릿여릿 다가와
  어릴적 앞마당 멍석 위에 펼쳐 말리던
  빨간 고추에 묻어난 듯...
  휘파람 휙휙 불며
  저수지 방죽 위로 달려가도록 만들곤 하는 것이다.

  이제 가을이어니
  이끼 낀 그늘에서 뿌리 박고 자라던
  청댓닢 그늘에도
  계절을 아는 숨소리
  가을 운동회의 함성에 묻히고,
  빈 가지의 프라타너스
  바람에 춤을 추는데
  어디선가 하관하는 곡소리
  계절은 칼날같은 감성.

  이 저녁에 비둘기 울음소리
  구.구.구.

 

 

 

가을장례

    - 최준 -


  죽은 새를 땅에 묻고 돌아온다
  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나의 손은 따스하다
  마을 사람들은 읽던 역사를 덮고
  덕장에서 마른 물고기를 마저 거두어 들이고
  불 켜지 않은 주막에서 술을 마신다
  가을이라고
  한철 젊었던 바다와 고대의 여름을 넘나들던
  그들은 내게 죽은 새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새의 죽음을 상세히 말해 주었지만
  새의 무덤에 함께 넣은 풀씨 얘기는 감춘다
  가을 태양이 바다의 품으로 안겨들고
  수평선을 건너온 목선들로
  해안은 소란하다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 나오고
  나는 돌아온다 문 잠긴 저녁 마을을 향하여
  다친 햇살의 끝이 조심스럽게 기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말 부활하지 않을 것인가
  가을과 새의 죽음은
  아이들의 말소리나 분명치 않은 손짓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없음이란 때로 가을산의 나뭇잎을
  슬픔으로 물들인다 새가 사라진 지상에서
  홀로 아픈 누이는 내게
  마지막 눈물을 꺼내어 건네 준다
  마을이 황혼에 젖어들기 전의 일이다
  저물 무렵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지만 임종한
  새처럼 나는 문득 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아직도 하늘 어느 마을에선가
  채 떠나지 못한 새의 울음소리가
  저녁 황혼에 젖어 있을꺼라 생각하면서

 

 

 

가을 편지

      - 노향림 -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같은 한 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워놓았읍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날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은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라도 적시고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누워
있는지.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줄 우리 고통, 안녕!

 

 

 

가즈랑집

         - 백 석(白石) -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


 이를 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라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가족

    - 김유선 -

 


  싸우지 말아라
  남편은 우리에게 타이르고 나가지만
  나가서 그는 싸우고 있다

  한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들은 안다

  그가 옷을 털면
  열두 번도 더 넘어졌을 바람이
  뚝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싸우지 말아라
  아침이면 남편은 안스럽게
  우리를 떠나지만
  그는 모른다
  아이들의 가볍고 보드라운 입김이
  따라가는 것을

  그가 싸울 때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떨고 있는 것을

 

 


 가죽이 벗겨진 소
            - 프랑스 기유빅 -


이것은 피가 흐르던 고기이다.
기적적이며 불가사의한
체온이 떨리던 살코기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
눈 안쪽의 어렴풋한 빛.
여전히 이 옆구리를 쓰다듬을 수도,
여전히 여기에 머리를 기댈 수도
그리고 무서움을 쫓으려 나지막이 노래부를 수도 있겠지.

 

 


가 정
       - 박목월 -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  이 상  -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 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
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 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간(肝)

         - 윤동주(尹東柱) -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간이역

       - 김명이 -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십세기 메카니즘의 멀미를 함께 앓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잔의 인스턴트 커피에도 취하여 비틀거리며
  이 화려한 질주의 시대에 폐허를 꽃으로 달고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의 부활을 꿈꾸며
  포기하며, 게으른 시간의 양떼를 몰아 우리는
  회부의 땅 가나안으로 어쩌면 가고 있는 것일까

  가파른 사유의 안데스, 갠지즈를 모두 지나
  피 묻은 한점 사리의 날반, 그 날개 돋치는
  피안까지 우리는 어쩌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바이블을 옆구리에 낀 채
  생사의 현기증을 아프도록 베어 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간월암에서          

         - 博川 최정순 -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 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 문 올랐는데

몇 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 많은 응어리 풀어 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갇힌 뻐꾸기

      - 김규태 -

 

  이따금
  내 책상서랍에선
  뻐꾸기 소리가 난다.

  낡은 목재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새의 혼령이 남아 있었을까.

  경상북도 죽령부근의
  숲 속에서나 들릴
  뻐꾸기 소리.

  헐은 사무용
  책상 위엔
  핏발 잘 서던 날의
  내 벌건 손자국도 묻어 있다.

  내 절망을 소리내어 울던
  눈물 자국도 얼룩져 있다.

  속 쓰린
  내 추억의 반점들을 쪼아먹고
  대신 울어 주는 새

  무성했던 그 원형의 나무들에
  옮겨 다니며 살던
  옛날의 뻐꾸기 한 마리.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감각

    - 백준찬 -


  창문을 닦으며
  하늘의 마음을 만져본다.

  유리 속을
  뚫고 나간 마음

  우주로 향했던 직선 끝이 다시
  돌아와 내 피부 감각에 닿을 때

  나는 우주 둘레
  중심에 떠 있는 먼지만한 별

  산보다 높게 바다보다 넓게
  강물보다 맑게 마음의 깊이만치

  먼 영혼의 기억으로
  보고 있다 듣고 있다.

 

 

 

 

감나무

     - 박일규 -


  우리 집 뒤안에 있는 묵은 감나무는
  저승에 한번 다녀온 나무다.

  할아버지가 세상 버린 뒤에
  석양마다 노을을 태우며
  앙상하게 가지만 남더니...

  함박눈 오던 어느 겨울밤에는
  섭섭하게 살다가 가신 이들의
  곤한 꿈결에 서있던 나무.

  봄에는 꽃잎
  꽃잎 피우며
  떨어지는 꽃들로는 써놓았는가.

  --'오오, 이 내 새끼들아'

  감나무는
  저승을 더러는 다녀오는 나무다.

  이것 다 억지일지 모르지만

  오오, 거기
  그래야 할 나무야.


    

 

 

감옥 3

     - 김영석 -

 

  우리들의 감옥은 너무나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적막한 모래의 시간
  전화도 없고
  별빛처럼
  감옥의 불빛만 아슬히 멀다
  별 하나 감옥 하나
  별 둘 감옥 둘
  별 셋 감옥 셋
  ...

 

 

감처럼

     - 권달웅 -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 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 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 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강(江) 2

      - 박두진 -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죽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피무늬길 바다로 간다.

 

 

 

 

강 건너 얼굴

       - 이경남 -

 

  나의 시야를 가득히 채워 오는
  너에 대해서 나는 안다는 것은
  꽃의 의미를 모르는 거와 같다.

  --사금파리에 맺히는 이슬 방울
  --새벽창에 어리는 별의 속삭임.
  그리고, 강 건너 살을 꽂은 무지개의 호선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너의 동자와 너의 움성과 너의 미소가
  우물 가득히 찰찰 넘치는 하늘이 되어
  나의 시야를 덮쳐 오고 있다는
  이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실재뿐.

  아아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저 꽃들이, 저마다 피고 지는 의미를 모르듯이
  내가 나를 도무지 모르는 거와 같다.

 

 

 

강물
     - 오세영 -
 
무작정 
앞만보고 가지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강이 풀리면

           - 김동환 -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강강술래
       - 이동주 -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 송선영 -

 

  어쩔거나 만월일레 부푸는 앙가슴을
  어여삐 달맞이꽃 아니면 소소리래도...
  목뽑아 강강수월래 청자허리 이슬어져

  얼마나 오랜 날을 묵정밭에 묻혔던고.
  화창한 꽃밭이건 호젖한 구렁이건
  물오른 속엣말이야 다름없는 석류 알.

  솔밭엔 솔바람 소리 하늘이사 별이 총총
  큰 기침도 없으렷다 목이 붉은 선소리여.
  남도의 큰 아이들이 속엣말 푸는 잔치로고.

  돌아라 휘돌아라 메아리도 흥청댄다.
  옷고름 치맛자락 갑사 댕기 흩날려라.
  한가위 강강수월래 서산 마루 달이 기우네.

 

 

 

 

강강수월래

           - 나해철 -


  그날이 오면 우리가 추는 춤
  복된 춤은 네가 되리라 강강수월래
  손에 손을 맞잡고 가슴에 가슴을 이어
  동쪽의 너도 서쪽의 너도
  남과 북의 너도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뛰리라 강강수월래
  어둠에 눕거나 칼바람에 베이거나
  기다림에 눈먼 너와 나도
  빛이 터지는 자유의 하늘, 신새벽이 오면
  오랜 열망의 날들이 오면
  이 땅의 어디나 피는 봄꽃처럼 상기되어
  우리가 추리라 강강수월래

 

 

 

리스도 폴의 강(江) 60
                - 구상 -


봄이 무르익은 한낮
강물이 불길을 뿜고 있다.

무심하고 냉랭한 강이 
저렇듯 그 가슴속에 
푸르도록 맑은 불꽃을
품고 있었단 말인가?

만물의 근원이 불이(不二)임을 
나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 눈에 물속의 불이 보이기는
처음 되는 일이어서
두 눈을 부비고 또 부비며
푸른 불길의 강을
넋 잃고 바라본다.

 

 

강아지풀

          - 박용래 -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목은 싫어

삐걱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부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간다.

다 두고 이슬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 소리를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강정간다

       - 장정일 -


  알고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스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 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
  무얼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
  나는 기다린다. 짜증이 곰팡이 피는 오후 한때를
  그리하여 잉어비늘 같은 노을로 가득 처진 어깨를 지고
  장석 들그럭거리는 대문 앞에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몇 점 모래 털어 놓으며, 그저 그런 곳이더군 강정이란 데는
  그렇게 가봤자 별 수 없었다는 실망의 말을 나는 듣고 싶었고
  그러나 강정 깊은 물에 돌팔매 하자고 떠났거나
  여름날 그곳 모래치마에 하루를 누워 즐기고 오겠다던 사람들은
  안 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기다림으로 녹슬며 내가 불안한 커텐
  젖힐 때. 창가의 은행이 날마다 더 큰 가을우산을 만들어 쓰고
  너무 행복하여 출발점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강정떠난 사람처럼 편지 한 장 없다는 말이
  새롭게 지구 한 모퉁이를 풍미하기 시작하고
  한솥밥을 지으신 채 오늘은 어머니가, 얘야 우리도
  강정 가자꾸나. 그래도 나의 고집은 심드렁히
  좀 더 기다렸다. 외삼촌이 돌아오는 걸 보고서, 라고 우겼지만
  속으로는 강정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
  형과 함께 우리 세 식구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고
  골곡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 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강정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 따라 늘어선
  미류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 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 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간다

 

 

 

기다림

     - 모윤숙 -


천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지지 않으오리다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초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 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기도

    - 김남조 -

 

저의 기도는

아뢰이기전에 밝히 살피시는 바

과연 그대로 이옵니다.

기도 말의 처음은 침묵이니

나타내지 못할 찬미요

연이어 침묵이니 줄줄이 이 찬미옵나이다

기도 말의 끝 구절도 침묵이니

안개 밭에 엎드리는

어지럼이나이다 눈물이 나이다

밤 이슥히 아멘이라 맺으면

솟은 하늘 주의 보좌寶座에

명주실 한 오리의 바람 이우나이다.

 

 

기다림의 시

          - 양성우 -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면의 밤, 떨어져 쌓인
  흰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기러기 남매

    - 박덕규 -


  먼 훗날
  먼 머언 훗날
  나는 이 별에서
  너는 또 다른 별에서

  날아가는 철새
  저 기러기떼 행로를 따라
  기러기발에 편지를 묶어

  먼 옛날처럼
  먼 머언 옛날처럼
  우리는 이 땅
  우리는 저 땅

  기러기떼 기러기발
  봄이 오면 하늘을 보면
  보았는가 아아 대답 없는가

 

 

 

 

기상도(氣象圖) 
  1세계의 아침 
           - 김기림 -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기억 속의 바다

         - 이해영 -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다.

  다리가 없는
  긴 바다는
  허리띠처럼 풀리어져
  누워 있었다.

  강물처럼
  댓님처럼
  드러누운 기억 속의
  바다.

  그 흐름 속에
  그대와 나는 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나눔이 없이
  오직 전생의 눈짓만 교차한
  그대와 나

  그 헛헛한 욕기를
  부채질하며

  바다는
  장강인 양
  다리도 없이 누워 있었다.

 

 

 

기원

     - 김용팔 -

 

  바람이 울 때마다 가랑잎이 전율하면
  나의 가난한 마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립니다.

  언젠가는 메아리도 없이 기화해 버린
  내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보면서

  머언 뒷날 어느 하늘 가에서
  아내와 만날 것을 믿어보는 건
  이 허전한 마음이 마지막 남는
  어쩔 수 없는 목숨의 소리입니다.

  투명한 달빛인데
  마음마저 얼어 붙은 밤이 옵니다.
  스스로를 달래보는 저 이승은
  목탁소리 코 골리며 조나 봅니다.

  어김없는 윤회 속에 내일은 올 것인데
  아 당신의 소리를 기다립니다.

 

 

기차 여행 
         - 김동리 -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향 같은 
마을이 내다뵌다


집집마다 감나무 대추나무 
잎새들 몹시 반짝거려 
동네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툇마루마다 반들반들 닦아져 있고 
방안엔 머리 감아 빗은 
달덩이 같은 처녀 꽃수틀 안고 있네


그 앞집 부엌에선 
떡시루 김 오르는 거 보이고, 또 
그 옆집 말끔히 쓸어진 뜰의 
뽀얀 흙 위엔 암탉 한 마리 졸고 
그 곁으로 어린애기 아장 걸어가고 있네

 
“아, 저기는 내 고향, 
내가 자라던 동네 
저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애기는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순간


기차는 새된 기적 소리를 지르며 
시커먼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기차역에서

       - 이신강 -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기차역 층계를 사람들이
  몰려 내려가고
  몰려 올라가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과
  보내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든 사람들과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
  역마다 사람은 넘치고
  지네같은 기차가 마술처럼
  사람을 토해내고
  사람을 들이 마시며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승차역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역에 내리기도 하고
  함께 탄 사람들이
  다른 역에 내리기도 하고
  종착역을 가려다가
  도중에 내리기도 하면서...
  멀리 갈수록 자리는 비어갔다.
  역마다 내린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버스나 택시를 갈아타고 혹은 걸어서
  얼마나 더 가 보았을까.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갔을까.
  모래바람 숨막히는 사막으로 갔을까.

  마지막 한 사람도 쓸쓸하게 종착역의 홈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이 빠져나간 종착역, 거기서부터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또 올라오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들었거나
  무거운 가방을 끌면서
  결국은 내리고야 말 승차를 시작하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비껴가고 있었다.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로 기웃기웃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기항지 1
     - 황동규 -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김기림 -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이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 김소월 -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定州) 곽산(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 장석남 -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환희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 윤동주(尹東柱) -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황영순 -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홀로 가고 있으면,

  두 마음
  품지 않고
  흠없이 가고 있으면,

  높고 맑게
  사는 법
  향기로 흩날릴까

  사랑이
  헛되지 않음 믿고서
  한없이 가고 있으면,

  사계절이 왔다 그대로 가듯
  서늘한 눈빛 하나
  소리없이 가고 있으면,

  푸른바람 칭칭 감고 봄이 오듯
  끝내 잴 수 없는 아름다움
  아픔의 뿌리는 깊고 깊어라

 

 

길손

   - 장만영 -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길잡이

     - 배인환 -


  바다건너
  신학대학을 나온 외아들이
  길잡이가  되었다.

  머리를 빗질하지 않은
  양녀들이 도망치고
  개마저 암캐를 따라간 후였다.

  눈이 밝은 그는
  일분도 쉴 수 없었다.
  부모는 골짜기를 헤매게 했다.

  희미한 빛이
  가늘게 떠는 밤, 건널목에서
  수척한 몸을 내던졌다.
  피는 쇠바퀴를 물들이고

  뇌수의 비밀을 햇빛 아래 드러냈다.
  기차는 멈추었다가
  말없이 지나갈 뿐

  분해하는 육신을 보며
  정신은 예수의 혼처럼 미소했을까?

  부모는 제지당했다.
  어둠을 볼 수 없었다.
  어둠을 모를 것이다.
  밝은 대낮도 어두웠으므로

  그들은 혼미에서
  어디론가 굴러가겠지
  둥근 공
  큰 공
  더 큰 공처럼

 

 

 

길처럼 
     - 박목월 -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길은 하난데

        - 김남석 -

 

  길은 하난데

  산산하는 발길들아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일지라도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듯
  너와 나의 심장은 걷고 있노라.

  몹시
  출출하고 허술함이
  낙화일지라도
  낙화일 수 없는
  너와 나의 성전보다 굳은 가슴
  어버이의 종을 울리며
  하늘이 흐리어 어두울지라도
  노을빛보다 귀중한
  저 능선의 아침으로

  아아,
  3월에 꽃핀
  길은 하난데
  옆집 외등 밑을 허우적대지 말고

  빈 주머니에 손을 박고
  흩어져 까는 밤아!
  고달픈 청춘아!

  꽃피는 소녀의 남루한 지도가
  하이힐에 찢기는 고층 골목은
  이렇게 춥고 시장한 시간일지라도
  빙하는 흐른다.

  얼어붙은 가슴 그대로라도
  흐른다.

  <빠고다 함성>처럼이나
  찢긴 심장에 검을 울리며
  북을 울리며 산산치 말고

  소녀의 울음 귀담아 안고
  구름에 가린 햇살 안고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도록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가
  3월의 제비되어지도록

  흐르지 않으려나
  해빙이 오는 피안으로
  아아,
  너와 나

  길은 하난데.

 

 

 

깃발
     - 유치환 -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을 내리자

            - 임화 -

노름꾼과 강도를 
잡든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廣木)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거대한 뿌리

              - 김수영 -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동안을 제철회사에서

 

 

 

거룩한 식사

         - 황지우 -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거미                                                       
           - 김수영 -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綠)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一八九三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는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官吏들 뿐이었다 그리고 
深夜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闊步하고 나선다고 이런 奇異한 慣習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天下를 호령한 閔妃는 한번도 장안外出을 하지 못했다고……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 
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모든 無數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울
          - 이상 -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을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져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 앞에서

           - 이효윤 -


  시냇물이 시냇물을 보고 싶으면
  시냇물을 따라 시냇가로 간다

  사슴이 사슴을 보고 싶으면
  사슴을 따라 사슴한테로 오듯이

  서리매가 서리매를 보고 싶으면
  서리매를 따라 서리매한테로 가고

  순이가 순이를 만나지 못해
  순이가 보고 싶어 순이를 그리워하며
  순이가 죽어가는 밤

  솔바람이 솔바람을 보고 싶으면
  솔바람을 따라 솔바람한테로 온다.

 

 


거인의 자리

        - 김삼환 -

 

   강물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 깊은 상처 아물어

   생살 돋을 때까지

   제 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지

 

   바위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으로 울음 울어

   불길 잡힐 때까지

   거인이 앉았던 자리에 가득한 고요 때문이지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걸어가는 아파트

         - 이복웅 -


  1
  제 땅도 없이 태어난
  두째놈은 주소만 남은 것이
  그리 좋은지
  번호달린 열쇠를 목에 걸고
  온종일 놀이터에서
  대낮으로 서 있다

  2
  이슬 묻은 아침을 잘라내고
  계리사를 닮은 아내는
  물가로 곤두서서
  매일같이
  씻나락 소리로 몸살을 앓는다

  3
  어제 만난 사람은
  날이 샐 때마다
  풍선으로 변해서
  현대가 잠수하는 세상에
  질식하여 살다가
  용케도 살아서 돌아온다

  4
  어둠을 나누어 물고
  손짓하며 헤어지는
  쭉정이 같은 아파트는
  노상 멀기만 하다

 

 

 

검은 강

      - 박인환(朴寅煥) -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最後)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驛前)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겨울

    - 임석래 -


  바람 앞에 바람
  바람이 맞붙었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엉키고 뒤엉켜 넘어지고

  쌓인 눈가루가 휘말려
  하늘로 솟구쳐 바람기둥이 되고

  나는 바람기둥에 기대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겨울 기침 한번 못하는
  재주도 재주씩이나 쳐주고 있는

  어금니 썩은 이빨로
  치과에 나가

  아-- 하고
  입 벌리고 있음

 

 

 

겨울 강가에서

     - 우미자 -


  이제는 마음 비우는 일
  하나로 살아간다.

  강물은 흐를수록 깊어지고
  돌은 깎일일수록 고와진다.

  청천의 유월
  고란사 뒷그늘의 푸르던 사랑
  홀로 남은 나룻배 위에 앉아 있는데
  높고 낮은 가락을 고르며
  뜨거운 노래로
  흘러가는 강물.

  거스러지 않고 순하게 흘러
  바다에 닿는다.

  강안을 돌아가
  모든 이별이 손을 잡는
  생명의 합장.

  겨울 강을 보며
  한 포기 지란을
  기르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겨울 나그네

         - 박희호 -

 

실촉처럼 시린 그리움

무시로 자라

 

푸른 달빛에 초서체로 핀 눈발

가지마다 휠 때

무너진 상심 적설로 이고 앉아

 

결빙의 가슴앓이

그 무게를 덜어내고

숲은 비어 있다

 

묻지도 대답지도 않는

꿈도 지친 그림자 하나

  

아득히 별자리 짚어

봄을 향해 절룩이며 가는  

겨울 나그네

 

 

겨울 나무

         - 성낙희 -


  나무여,

  목숨에 이어진 건
  언제나 아픔이지만
  오늘은 걸친 것 하나 없이 평화로워라
  겨울 나무여

  뼛속 깊은 그리움과
  드러나지 않는 온갖 죄
  모두 창공에 풀어 헹구면

  육체는 떠나가고
  마침내 영혼만 울림하는 악기되는가

  지금
  빈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소리없는 음악,
  이 해일같은 고요가 황홀하거니

  목숨에 이어진 건
  갈수록 아픔이지만
  우러러 하늘 아래 홀로 서는 일
  아름다워라

  겨울 나무여,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
                           - 황지우 -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삼십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으로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겨울나무의 진실

             - 정대구 -

 

  겨울나무의 진실은
  남성적이다.
  여자야 어디 견디겠느냐.
  사내 대장부인 나의 참뜻을 알려거든
  설한풍에도 빳빳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아라.
  일체의 장식을 떨구어 버리고
  가슴팍을 가는 칼질 소리
  선명하게 드러내 놓고
  버티어 버티어서는 골격
  겨울나무의 진실을 보아라.
  절제를 보아라.
  그 이상 사나이가 무슨 가식이 필요한가.
  여자야, 견디겠느냐.
  최소한의 표현으로
  나는 너에게
  살 한 점 붙지 않은
  순 뼈로써 말할 뿐이다.

 

 

 

   겨울 명동

       - 석용원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땅 위는 때로 아름답지요.
  날이 날마다 좁아져 가는 한국의 서울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은 남산탑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는 없어도
  우리 명동은 은하를 이루고
  그 사이를 낮과 밤이 미끄러집니다.
  태양은 볼 수 없지만
  아직은 하늘 조각이 펄럭입니다.
  성당도 예스럽게 잘 있읍니다.
  밤이면 진짜 사람의 아들딸들이
  서로 비비고 부딪고 따뜻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청년이
  머리 길고 수염 긴 제자들을 거느리고
  밤이 밤마다 최후의 만찬을 베풀다가
  심각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예언하는
  참 좋고 참 행복한 사람들
  모두가 이 땅 위에 있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목마를 타고
  멋장이 시인 박 인환과 더불어
  한 잔의 술을 기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멋있읍니까.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겨울비

     - 박천 최정순 -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 속으로 파고 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쌉사롬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겨울 바다
           - 김남조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 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바다

    - 유화운 -


  밤내 울어버린
  겨울바다에
  발자욱을 내는 아침
  우린 서로가 같이 있어도 외로운
  가슴이 하이얀 갈매기

  서로의 이상처럼 높은
  파도가 시작하는 수평선엔
  오늘은 태양이 뜨지 않아
  흐린 잿빛

  잠을 못이뤄 밤새 뒤척인
  꿈이 없는 허한 아침을
  소금기 섞인 바람따라
  그렇게 생각들을 나부끼며 날으다
  세차게 세차게
  안아버린 서로의 고독
  서로의 절망

  이제 우린
  잉태한 알을 낳아야 하는 갈매기의 슬픔에
  파도소리보다 더 높은
  울음들을 울어야 한다
  금빛 모래알보다 더 내밀한
  가슴들을 적셔야 한다.

 

 

 

겨울밤

        - 박용래 -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겨울섬

        - 홍신선 -

 

  대교를 건넜다. 피나민 몇이 과거 버린 채 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동체뿐인 새우젖 배들
  빈 돛대 몇이 겨울 한기에 가까스로
  등받치고 기다리고

  물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버려진 마음들로 쌓아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나무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
  개흙으로 삭는 일
  더러 쓸리면
  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힘 힘 풀어놓고
  공판장 매표소 회집들로 선착장에 힘 풀어놓고
  두어걸음 비켜서서
  말채나무 오그라든 두 손에
  저보다 큰 겨울하늘 든 채 있다.
  사는 일이 사는 일로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겨울잠

     - 백준찬 -


  언덕 아래
  눈 덮인
  낙엽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발자욱마다
  메우고 간
  꽃잎들의 이야기는
  멀어져 갔지만.

  눈 녹은
  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을 버틴다.

  펑펑 쌓이는
  눈 속에서
  초록빛 손끝으로
  조금씩 봄을 벗기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나의 꿈을 깨우고
  깨우고 있었다.

  나는 철새들의 말대로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대문도 반쯤
  열어 놓았다.

 

 

 

 

겨울사랑 

   - 문정희 -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산은

      - 김 장 호 -


깨지는 자의 눈뜨는 소리 
허울 벗는 소리로 
한겨울 산속은 금가루를 날리며
이리도 소란한데,

챙겨 입느라
두텁게 매연까지 걸치고
소리를 죽이인 하계를 내다보며,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벗어나는 자는 누구며 
벗을 줄 아는 자는 누군가. 

모를 일 없는 아는 일 투성이로
외투를 껴입은 안다는 사람
벗는 적 없고,

속임수만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이 헛헛한 세월 속에서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벗고 벗은 끝에
마지막 육신까지 벗는 날에도 

이렇게 땀으로만 쳐다보게 되는걸까 
겨울산은,

 

 

      
겨울 아침 강가에서

         - 유화운 -


  밤새 허물어진 가슴을
  칼바람이 결을 내는 아침
  빗금으로 숨쉬는 나뭇가지엔 소금가루
  서리 꽃이 핀다

  윤이 오른 햇살에
  청둥오리들의 물살은 빨라지고
  견딜 수 없는 이 갈증
  목을 쳐박는다
  자꾸만 차가운 물 속에

  살갗이 닿은 모래알들
  잠이 덜 깬 트럭 위에 실려
  떠나들 가고
  수없이 파여져 나간
  생각들의 밑바닥엔
  끼다 만 살얼음 자국

  몰래 주머니 속에 돌멩일 넣고
  강물로 걸어들어가는 '울프'
  그녀를 찾기 위한
  발목만이 시리다.

 

 

 

겨울인사

           - 김기홍 -


  만나지 말세.
  만나지 말세.
  부러진 손 절뚝이는 다리로는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세.

  작업복을 챙겨 메고 오는 밤
  강 상류의 불빛은 모두 꺼지고
  눈발에 기억을 풀며
  흘러서 우리는 어디로 가랴

  미칠 수만 있다면
  생명 부지하고 미칠 수만 있다면
  미쳐서 날뛴 짐승 모조리 때려잡고
  역류하는 하수구에 누워
  무너져 간 세월을 풀피리에 흘려놓고
  과일 껍질 북데기도 비단보에 싸갈걸
  어허이 어허이 어야디야 넘자 어이하나

  추워. 겨울은 우리에게 너무 추워
  질척이는 발자욱이 얼어붙고
  헤진 옷 땀방울로
  넘어사제. 닭뼉다귀 끓여주는 한바 심사
  삼국지 묘수들을 십장 소장 넘어 뛸 때
  바람이 불어도 날릴 낙엽 없고
  구르는 몸뚱이 새파란 미나리 몸뚱이

  -- 맑은 물 콩나물보다는
  흙탕물 연꽃이 될래요--

  가소. 가소. 잘도 가소.
  정씨 유씨 오지 마소.
  9천 원 만 원 일당에
  가슴 맑은 마누라 청상과부 만들지마소.
  꽝꽝 언 공사판 길
  깡깡 마른 몸뚱이 
  철근 공구리 인장통에
  발 담그면 발 깨지고 손 담그면 손 깨지고
  코 대면 코 깨지네.

  삼월이면 물 오르겄제
  사월이면 꽃 피겄제
  작업복 담살이복 거센 물에 휙 던지고
  십만 원 공장에 가더라도
  내년엔 만나지 말세.

 

 

 

겨울 안개

           - 권오욱 -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떠오르는 태양빛을 차단한
  미명의 늪지

  얼음장 밑으로
  살아서 흘러가는 물소리 들리고

  상실한 살과 뼈의 기억으로
  강폭을 더듬어 일렁이는

  얼어붙을 한 방울 피도 없이
  얇은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쓸어안고 엎디어 부벼보아도
  얼어붙은 겨울강을 녹이지 못하는

  영롱한 순간의 반짝임도
  이제는 싫은

  잔존의 자욱한
  입자들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겨울 자연

         - 이근배 -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나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겨울이 간다

        - 원태희 -


  젖은 삭정이를 태우시는가
  자욱한 연기 뒤로 겨울의 그림자가
  언 손을 녹이며 지나가는데
  그대는 낮은 하늘가 서성이며 아직도
  추위를 타고 있네

  길손들이 겨울새들의 날개짓 따라
  쓸쓸하게 길을 따라 떠난 후
  얼음이 얼어
  소식도 주고 받을 수 없었던
  그 추웠던 날들 지나고
  무거운 발을 끌며 돌아온다는 그대,
  전갈받고 더욱
  문을 굳게 잠궜던 우리의 겨울이여

  무엇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대 아직도 언 땅에 있기에
  벽난로에 피울 장작더미 구하러
  우린 뒷문으로 일을 떠나서
  집 안엔 불씨가 없었기 때문.
  녹슨 삽과 곡괭이만 남아서
  지킨 집 안이여
  깨진 질그릇처럼 흩어져 달아난
  귀한 손님의 따뜻한 마중이여

  우린 겨울내내 불을 지피며
  마른 들판 위를 거닐 그댈 기다리거나
  그대에게 새로 입힐 솜옷을 만들거나
  먼지 쌓인 그대의 책들을 만져보거나
  겨울 깊도록 오지 않는
  그대를 미워했고 그대의 죽음을 떨며 기다려
  온 몸에 서릿발이 돋았음을 말하마

  쌓인 눈이 나뭇가지를 뚝뚝 분지러던
  어느날 저녁인가
  그대는 갑자기 문 안으로 걸어와
  진흙 묻은 구두를 꽝꽝 털고는
  '겨울이 간다' 하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얼어죽은 몸으로 맴돌 것인가
  된바람 아직 매운 우리들의 겨울을
  흔들흔들 흔들다가 가버릴건가

  젖은 삭정이를 태우시는가. 겨울은
  왜 우리는 눈물이 가끔 눈가에 맺혀도
  그대의 얼어죽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아직 겨울이 가지 않았다고
  누가 큰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는 늘 떨고 있는가. 크게 웃지도
  못하며 살 부비고 있는가. 우리는

 

 

겨울이 오면, 시여

         - 박일 -


  1
  흘러만 가고 있는가
  인사없이 헤어져간 너의 등너머
  순결의 의미도 모르는 채
  삶의 깃발은 나부끼고

  얼은 땅 위를 구른다
  풀잎 한 포기 꽃잎 하나 피우지 못한
  종소리

  너를 위하여 또는 나를 위하여 침묵은 언제나
  우리들 곁에 서 있고
  운명은 눈물 속에서 부재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던 것

  균열을 배우며 자라나는
  일상 위에 벽은 늘 높게 쳐져 있고
  아물지 못하는 상처 간직한 우리

  오늘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2
  눈이 내린다
  스스로 무너지는 길 걸어가는 시여
  외로움도 은근하게 묵은 피는 자꾸만 솟아나
  복종으로 길들여진 언어만 적시는가
  돌멩이와 몽둥이와 꽃불이 난무하는
  겨울 안개 속으로
  의미를 잃어버린 자유가 걸어가고
  우울만 흩날리는가
  우리의 영토에는

  3
  전설은 전설이어야 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는 전설은 전설이어야 한다
  하늘과 땅이, 바다와 육지가 뒤바뀌는
  이야기는 이야기여야 한다

  사실은 사실이어야 한다
  풀잎은 항상 땅 위에서 자라고 우리들은
  그 위에서 서로 푸르게 되는
  사랑은 사랑이어야 한다

  묵은 피를 닦아내고

  칼을 잡아라, 시여
  칼을 잡아라, 시여

  얼어붙은 우리들 언어에 반역을 품게 해다오

 

 

 

겨울의 첨단

         - 윤삼하 -

 

  한겨울 얼어붙는 가슴
  갈라놓는 날선 바람
  잔가지 잔뿌리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강바람이여
  빙판 위를 굴르던지
  거친 들판 질러서 가다오.

  잿빛 하늘도 쏟아지게
  흰 눈이나 펑펑 내려다오.
  처마밑에 쌓이는
  눈의 나랫소리
  새벽이 와도
  정갈한 눈의 마음.

  이 겨울의 첨단에서
  아둥그러진 노래들은 거두어다오.
  아직 얼음에 덮힌 개울가
  가시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은 까마득 보이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외로운 절기여

 

 


 겨울의 첫걸음
          - 채중석 -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이 졸업식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덩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 시간 거리의 직행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그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은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동안
코스모스 피는 가을도 슬쩍 찾아들고
5학년 1학기도 한 달을 더 끌다
끝났다. 자, 가야지 내일은 
경제학 학위를 받으러
성이 최씨로 바뀐 무거운 앨범도 찾고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겨울 숲을 바라보며

                  - 오규원 -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 -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결혼식장(結婚式場) 
               - 조병화 -
 

女子들이 모두 빨간 입술들을
긴 목 위에 앉혀 놓고
萬國旗 아래 상품들처럼 나열한다.

 

男子들은 모두 도야지 같은 입술들을 다물고
햇빛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목을 숙인 채 女子들을 마주 본다.

 

신부와 신랑은 婚夜의 예절을 생각하고
貴賓들은 祝辭를 길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크레오파트라보다 호사한 신부와
와이샤쓰가 커서 거북한 신랑을 위하여

 

빨간 입술들도
도야지 입술들도

 

금속제 훈장을 다는 가슴에
종이꽃들을 얌전히 달고

 

詩人이라는 사람이
소용이 없는 시를 읽는다.

 

이미 나에겐 그리운 것은 없지만
菓子를 흘리는 아이들에 끼어
萬國旗 속에
南美諸國의 消息을 듣고 싶어한다. 

 


경사傾斜저울

         - 송경애 -

 

중부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화장실

휴지걸이 바로 아래 숨죽이고 숨어 있는 말

 

“신장 1억5천에 삽니다

연락처 016-882-****“

 

온몸의 수만 세포들을 얼어붙게 한 말

매직펜으로 싹싹 지우고 싶었네

 

급전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린 이 땅의 가난한 아버지와

병든 홀아비의 청이 같은 딸이 볼까 밤늦도록

눈 못 붙이고 불 밝혔네

시퍼렇게 눈 뜬 사람의 장기와 돈 1억5천이 양팔저울 접시위에서

나란히 수평을 이루는 환영에 밤새 쫓기었네

팍팍한 삶의 낭떠러지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눈에

신장 하나쯤과 1억5천의 무게가 삶의 비탈길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네

가파른 비탈 끝에 겨우 서있는 사람들에게 경사저울처럼

그들의 신장과 저 돈이 수평을 이루는 무게가 되어질까

한없이 초라한 빈 가슴으로 동동거렸네. 

 

 

 

  - 강인한 -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 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귀뚜라미

        - 주문돈 -

 

  어둠이 깃들면서 들리게 말게 숨죽여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가 어둠이 짙어져서는
드러내놓고 목청껏 울어 좁은 뜨락을 온통 울음으로 채우고 말았다. 새벽녘에는
뜨락에 가득한 제 울음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다급해져서야 이웃을 부르고 또
불렀으나 소식이 없자 게워놓았던 제 울음을 담장 밖으로 퍼내느라고 심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간이 눈흘기며 지나가 버린다

 

 

 

귀뚜라미 
        - 김동리 -
 

하늘에 하나 가득 
별 박힌 가을 밤

땅 위는 온통 귀뚜라미 
소리로 차 있다

하늘과 땅은 
어둠을 사이 한 가까운 이웃인데

귀뚜라미 소리로 별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귀촉도(歸蜀途)
     

           - 서정주 -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귀천 (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향

         - 고경희 -


  산 구비 돌면
  오리나무 숲
  하루 저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잎보다 많은 산새가 울었다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에
  남빛 달개비꽃
  보조개처럼 숨어 있고
  서울가서
  쌍가풀 수술 받았다던
  매자 언니네
  울 밑을 지나는
  오솔길에는
  감꽃이 융단같이 깔려 있었다.

  내 창에
  불 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던
  소년이
  은날개 반짝이는
  (비닐 하우스) 앞에서
  구리빛 중년으로 맞아 주던 날.
  먼 -- 거리를 돌아와
  뜨락에 선
  내 낯선 여인의 허울,

  이끼 낀
  뒷켠 바가지 우물에
  댓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떠, 있었다.

 

 


과목

    - 박성룡 -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과수원

     - 김원호 -

 

  1
  빈센트.반.고호의 ^6 236^과수원^356 3^을 아시는지요.
  도깨비도 무서워 할 고목뿐인 올리브 숲이었지요.
  불타다 남은 자리보다 더 쓸쓸한 곳이었지요.
  어쩌면 내가 이런 숲을 생각하는지
  나 자신 올리브숲의 도깨비가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2
  벌레 먹은 가지를 하나씩 따 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을 잊어버리고
  물 익은 과일이 달린 과수원의 나무가 되고
  나도 가지에 벌레 먹은 과수원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고독뿐인 이 숲이 도깨비보다 덜 무서워지는군요.

  3
  똑,똑, 가지꺾는 소리뿐
  이 과수원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혹시 이런 곳에서 몸에 배인 병이나 씻어 버리며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산골보다 더 조용한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4
  잔잔하고 푸른 먼 이오니아 바다처럼
  쓸쓸한 여름날 같은 하늘도 보입니다.
  조용한 원색 속에서 생활을 하며
  향기 푸른 과일밭에서 일을 하시면
  어느 새 병도 깨끗이 나으실 것입니다.

  5
  푸른 달밤에 과일이 익을 때
  과수원 옆에 초막을 짓고 지내시면
  단물 고인 과일나무가 되시겠읍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싶으실 땐 언제라도 돌아가시지요.
  그래도 우리 이 과수원에서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과일가게 앞에서

          - 박재삼 -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 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관법 4    - 전광옥 -
       --별에게


  1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인다

  깊이 모르게 넓은 어둠의 냄새에 젖어
  출렁이는 너는, 난파선의 돛대
  끝에 매달려 부서지는 수기^256^ 색 바랜
  어머니의 이마
  우표 없는 편지

  어디서부터 읽어내려가야 하나

  2
  아버지,
  만주로 떠나시던 새벽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던 이슬방울들 여전히
  아무것도 붙들지 못하고^256^ 나는
  떠나왔어요  유해처럼 돌아온
  육십평생 아버지의 세월 위로 터벅
  터벅 아버지를 마나기 위해^256^ 나는
  떠다녔어요, 그 터벅거리는 절망과 희망 사이로 흐르는 입만
  살아남은 흙먼지들이 튀기는 침 같은
  피의 강물 위에서 나는 수없이
  만났어요, 제가 어둠인 줄도 모르고
  그늘을 쓸면서 살고 있는 누이를^256^ 때도 없이
  가래 끓는 소리로 기우는 썰물의 가난한 등줄기를,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내는 바람 속에서^256^
  함께 밀리면서 나는 보았어요 취하여
  비틀거리는 골목의 끝에서 밀리고
  밀려서 이제는 더 밀려날 데 없는 사랑을^256^
  바닥이 없는 누이의 방을 돌아 나오며
  보았어요, 신학대학을 따라 둘러친 철조망을
  부끄러운 양심의 아랫도리를 지키는 정조대
  도난경보기가 달린 사랑의 치욕스러움을
  보았어요, 바람은 어디서나 불고 골목을 따라
  골목의 끝보다 더 깊이 내려앉은 하늘을

  봄이 보고 싶어요 오늘, 석간신문 위로
  죽은 황새가 흘러 지나가고 내 몸에서
  폐수 냄새가 나요  때아닌
  박쥐가 날아오르고 있어요 어디까지
  가야 하나^256^ 어둠이 날개 치는 소리를 지나
  --떠나올수록 갈 길은 멀어져요,아버지

  3
  피 토하며 사는 것이 어디
  네 가슴뿐이냐 까욱  누이 이마 위로
  깃 빠진 까마귀 울음
  몇 방울 지나가고^256^ 그 눈물방울을 따라가면
  어깨를 끼고도 낯선 사람들
  피를 토하며 살고 있더라 바람에
  밀리면서^256^ 혹은 버티면서, 오늘밤

  너의 편지를 답장으로
  다시 너에게 부친다  그러나
  (잊지 마라, 바람은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낸다)

 

 

 

광명리에서

       - 강형철 -


  명도소송을 집행한 집에서
  우리는 고스톱을 쳤다
  전세돈, 그 돈은 내 목숨이라며
  한 푼도 안 주느냐고 개인은 죽어도 좋으냐고
  핏발 서린 원망을 던지던 아줌마는
  곡괭이로 방 구들을 찍고 나갔지만
  똥통을 망가뜨리고 나갔지만
  우리는 전기난로를 설치하고
  유입물건 관리한다며 주질러 앉아
  메주와 흑싸리와 팔공산 십끗짜리를
  서로 따먹기 위해 눈을 붉힌다
  집달리는 매일 하는 일이라며
  눈 하나 끔뻑 않고 솥단지를 던지며
  대문에다 못질을 하고
  지방법원장 명의의 판결문을
  흔들고 있었지만
  돈을 뺏기고도 죄지은 사람처럼
  쫓겨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집에서 명도집행을 하는데
  똥바가지를 앵겨
  잽싸게 붙이고 나왔다며
  이 집은 양호한 편이라고 집달리는 웃고 있었지만
  함부로 던져진 솥단지는
  다시 어느 곳 부엌에 걸려
  식구들 밥그릇을 채울까
  방 구들 쪼개진 돌멩이는
  이제 어떻게 이어져
  끊어진 허리를 녹일 것인까
  우리는 묻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칠 수도 합세할 수도 없다
  캄캄한 여기는 광명 7동
  자본주의의 밤
  천민들의 밤


 

광복군행진곡(光復軍行進曲)

             - 리두산(李斗山) -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 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 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이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맘 한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광복 민주국가 세워보세

 

                  *이상 2曲 출처:김덕균(중국 연변대학 예술학원교수) 저 우리겨레의 抗日歌謠硏究

 

 

 

광야(廣野)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에 와서

      - 유치환 -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광화문

         - 서정주 -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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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 2015-07-18 0 4405
640 김소월과 에이츠 2015-07-17 0 4576
638 표절과 령혼 2015-07-15 0 4482
636 김억과 김소월 2015-07-14 0 5328
634 한국 최초의 자유시 2015-07-12 0 3817
631 <<死愛>> 2015-07-09 0 4840
623 다시 알아보는 시인 백석 2015-07-04 0 4323
619 다시 알아보는 시인 조기천 2015-07-03 0 4890
617 항상 취해 있으라... 2015-07-03 0 4418
616 <지렁이> 시모음 2015-07-01 0 4542
614 체 게바라 시모음 2015-06-28 0 4532
613 파블로 네루다 시모음 2015-06-28 0 4465
611 <夏至> 시모음 2015-06-22 0 4213
609 연변 작가계렬 취재 1 2015-06-22 0 4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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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 리임원 시집 출간 2015-06-21 0 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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